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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20 한여름 산사 나들이, 남양주 불암산 불암사
  2. 2021.07.02 국립서울현충원 6월 나들이 ~~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 서달산 호국지장사, 현충원숲길
  3. 2021.06.21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정릉계곡 나들이 (형제봉, 보현봉, 청수천약수) 2
  4. 2021.06.10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영화사 느티나무, 영화사에서 먹은 공양밥)
  5. 2021.05.08 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
  6. 2021.03.12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정릉을 지키던 조선왕실 최초의 원찰인 돈암동 흥천사 (돈암동 느티나무)
  7. 2021.03.01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일원이자 화려한 늙은 윤장대로 유명한 예천 용문사 (용문사 성보박물관)
  8. 2020.12.31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9. 2020.11.03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10. 2020.10.03 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와 거닐기 좋은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개운산둘레길) 2

한여름 산사 나들이, 남양주 불암산 불암사

불암산 불암사



~~~~~  한여름 산사 나들이, 불암산 불암사
~~~~~
불암산 불암사
▲  평화로운 불암사 경내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속절없이 더해가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친한 후배와 정말
간만에 불암산(佛巖山) 불암사를 찾았다.
햇님이 한참 허공 복판에 머물던 15시에 석계역(1/6호선)에서 그를 만나 간단히 요기를 하
고 서울시내버스 1155번(석계역↔청학리)을 잡아타고 불암산의 남쪽 관문인 불암동(佛巖洞
)에서 두 발을 내렸다.



 

♠  불암사(佛巖寺) 입문

▲  불암사 일주문(一柱門)

불암산(508m)은 서울 근교의 주요 명산(名山)으로 등산/나들이 수요가 엄청나다. 불암산 밑도
리에 터를 닦은 불암동은 일찌기 불암사의 사하촌(寺下村)으로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산꾼과
나들이꾼, 군부대 면회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온갖 식당과 갈비집이 가득해 거의 먹거리촌
이 되었다.
절을 목전에 둔 속세(俗世)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식당의 진한 유혹으로 코가 아주 정
신을 못차린다. 간신히 그 유혹을 뿌리치며 길을 걸으니 불암사 일주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하고, 길을 따라 징하게 이어지던 식당의 행렬도 여기서 뚝 그친다.

1994년에 세워진 일주문의 현판에는 '천보산(天寶山) 불암사'라 쓰여있는데, 천보산은 불암산
의 다른 이름으로 조선 세조(世祖)가 산의 수려한 모습에 감동을 먹고 내린 이름이라고 한다.
불암산이란 이름은 산 정상을 이루는 바위가 마치 비구니의 모자를 쓴 부처의 모습이라 하여
유래된 것이니 산 이름이 그야말로 불교 스타일이다. 그리고 필암산(筆岩山)이란 별칭도 가지
고 있으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이름이다.


▲  불암사로 인도하는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깥보다 더욱 짙은 숲길이 펼쳐진다. 여름 제국의 기운을 먹고 자라 녹음
(綠陰)의 질감도 매우 깊은데, 잔잔한 산바람에 번뇌를 강제로 떠맡기며 계속 길을 가면 불암
사 경내가 슬슬 모습을 비춘다.


▲  물줄기가 춤추는 작은 연못 (사적비 옆)

▲  불암사의 빛바랜 일기장, 사적비(事蹟碑)

경내를 가리고 선 제월루 앞에 이르면 사적비와 수초(水草)를 머금은 아기자기한 연못이 마중
을 한다.
고색의 내음이 아낌없이 서린 사적비는 1731년에 세워진 것으로 왕실과 가까운 절의 위상을
보여주듯, 공조판서(工曹參判) 이덕수(李德壽)가 글을 짓고,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
인 조명교(曹命敎)가 썼다. 불암사의 창건과 중건을 다룬 사적(事蹟)을 비롯해 1728년에 거사
각신(覺信)과 정인(淨仁)이 맹세 발원하여 보시한 돈으로 근기(近畿, 수도권) 지역에 전토를
마련해 절이 피폐하지 않도록 하였음을 다룬 내용도 적혀있다.

비신(碑身)과 지붕돌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으로 지붕돌에는 세월이 달아준 검은 주근깨가
역력해 고색의 멋을 진하게 풍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불암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 근교 4대 명찰의 하나, 불암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불암사
불암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이다. 824년에 지증대
사(智證大師)가 창건했다고 하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연 지
선(智詵)이 창건했다고도 하나 관련 자료와 유물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거의 없다. 이후 9세
기 말에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중건했다고 하며, 조선 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수했다고
전한다.

세조(재위 1455~1468)는 서울 주변 동서남북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절을 하나씩 선정했는데,
서쪽에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 북쪽에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 남쪽에 삼
성산 삼막사(三幕寺), 그리고 동쪽에 불암사를 선택했다. 그로 인해 동불암(東佛巖)이라 불리
기도 했으며, 서울 근교 4대 명찰(名刹)의 하나로 널리 존재를 알렸다.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시절에 중건을 했고, 영조(英祖) 말년에 거의 망하기 직전에 이
른 것을 승려 명관(明瓘)이 크게 중수했다. 1731년에 왕실의 지원으로 사적비를 세워 불암사
의 내력을 기록했으며, 1782년 보광명전과 관음전을 중수하고 제월루를 세웠다.
1844년에 중수를 했고, 춘봉(春峯)이 향로전을 다시 지었으며, 1855년에 혜월(慧月) 등이 중
수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독성각과 산신각, 동축당(東竺堂)을 세웠다.

6.25때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 피해를 없었으며, 1959년에 만허(滿虛)가 칠성각을 중수하
고, 낡거나 협소한 건물을 죄다 다시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1989년 타이(태
국)와 스리랑카에서 부처의 사리를 기증받아 5층 진신사리탑을 세웠으며, 1991년에 화재로 관
음전이 무너지자 1992년에 다시 지었고, 1996년에 협소하던 동축당을 부시고 그 목재를 포천
보문사(普門寺)에 선물하여 그곳 대웅전 불사에 쓰게 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 약사전, 제월루, 지장전, 칠성각,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
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 591호로 지정된 석씨원류응화사적 목판(釋氏源流應化事蹟
木板)이 있으나<여기서 석씨(釋氏)는 석가모니를 뜻함> 현재는 연구와 보호를 위해 서울 불교
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된 '불암사 경판'이 전하고
있는데, 이 경판은 1635년부터 1795년까지 간행된 것으로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밖에 보물로 지정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1895년에 제작된 괘불도(掛佛圖, 경기도 지방유형
문화재 315호
), 석가삼존십육나한도, 목조석가여래좌상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사적비와
지장시왕탱, 칠성탱 등 오래된 비지정 문화유산이 있다.

속세와 가깝긴 하나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어 산사의 내음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고색
의 내음은 거의 말라버렸지만 사적비와 여러 늙은 문화유산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충분히
가늠케 해준다.

끝으로 불암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6.25시절에 활약했던 '호랑이' 유격
대이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육사 1,2기 생도들은 포천(抱川)과 서울 노원구 지역에서 북한군과 싸
웠으나 패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그중 육사 생도 13명(1기 10명, 2기 3명)은 후퇴하지
않고 국군 7명과 의기투합하여 불암산 정상과 석천암 주변 바위 동굴에 은신했다. 그들은 암
호명 '호랑이'란 유격대를 결성했는데, 불암사 주지승 윤응문과 석천암(石泉庵) 주지승 김한
구가 그들을 크게 도와주었다.

허나 호랑이 유격대는 겨우 20명이고 서울과 경기도 지역이 북한군에게 새카맣게 점령된 상태
이다. 하여 산에 은둔하여 치밀하게 기회를 노려 총 4차례에 기습전을 전개했는데, 7월 11일
불암산과 가까운 퇴계원 보급소를 습격해 적 30여 명을 죽이고 기름 50드럼을 폭파하면서 그
들의 첫 작품을 근사하게 치루었다.
7월 31일, 창동(倉洞) 수송부대를 습격해 6명을 죽이고, 보급차량 다수를 폭파했으며, 8월 15
일에는 북한군 훈련소를 기습해 50여 명을 사상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9월 21일에 북
한군에게 끌려가는 주민 100여 명을 남양주 내곡리에서 구출하고 적 수십 명을 죽였다. 하지
만 적들의 반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19명이 장렬히 전사했으며, 강원기 생도(육사 1기)는
중상을 입고 피신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며칠 안가서 결국 눈을 감고 만다.
딱 7일만 더 버텼다면 서울 수복의 기쁨을 누렸을텐데. 하늘도 참 야속했다. 그러고보면 이
땅의 하늘은 정의로운 사람에게만 화를 주고,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만 주로 복을 주니 참 하
늘값을 제대로 못한다. 그런 하늘은 우리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다.

* 불암사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797 (불암산로 190 ☎ 031-527-8345)
* 불암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동자승에게 둘러싸인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과 깨알 같은 불전함



 

♠  불암사 둘러보기 (대웅전 주변)

▲  불암사 제월루(霽月樓)

경내를 가리고 선 제월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짜리 집이다. 1782년에 지어졌다고 하나
현재 건물은 근래에 다시 지은 것이며, 정면에 걸린 불암사 현판은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이 70세 때 쓴 것이다.
1층은 종무소(宗務所)와 기념품 가게가 있고, 2층은 강당(講堂)으로 쓰이고 있는데, '차가람'
이란 현판을 내건 개방된 공간으로 누구든 들어와 잠시 두 발을 쉬거나 차 1잔, 독서의 여유
를 누릴 수 있다. 책장과 평상, 방석, 선풍기, 난로, 자판기 커피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여
름에는 산바람이 솔솔 기웃거려 시원하다.


▲  제월루 2층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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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뜨락과 제월루(왼쪽)

▲  툇마루를 갖춘 약사전(藥師殿)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의 거처로 가운데 3칸은 약사전,
좌우 1칸씩 2칸은 요사(寮舍)로 쓰이는 복합적인 건물이다.

▲  약사전을 마주보며 툇마루를 내민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 누님의 거처로 1991년에 불탄 것을 1992년에 다시 지었다.
정면 3칸은 관음전, 나머지 2칸은 종무소와 요사로 쓰인다.

▲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상(보물 2,003호)과 천수천안관음보살탱

관음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649년에 무염(無染), 성수, 심인, 상림, 경성 등 5명의
조각승이 합심하여 만들었다. 보살상의 뱃속에에서 아주 고맙게도 조성발원문과 중수발원문이
나와 그의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는데, 원래는 전북 대둔산(大芚山) 묘련암(妙蓮庵)에 봉
안하고자 제작되었다. 허나 1900년 무렵 불암사에서 만일회(萬日會)가 열리면서 살짝 이곳으
로 옮겨진 것으로 여겨지며, 1907년 개금 중수했다.

보살상의 높이는 67cm으로 연꽃과 불꽃문양이 장식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가사
는 2벌을 겹쳐서 입은 이중착의법으로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렸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적당하
고 신체의 자연스런 양감이 돋보이는데, 얼굴은 이마가 넓으며, 턱 부분은 좁아서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날렵하고 갸름하게 처리된 턱 선, 높게 돌출된 코, 자비로운 인상에 실
재감 있는 이목구비의 표현 등은 아담하고 현실적인 조형미를 추구했던 무염의 불상/보살상
스타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보살상은 2018년 10월에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는데, 그의 뱃속에서 나온
조성발원문 1점과 후령통 1점, 중수발원문 1점도 같이 지정되었다.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
상'이란 이름으로 지정됨) 그가 보물로 지정된 것은 그의 조성 시기와 조성 승려, 봉안처 등
을 알려주는 발원문 덕분이다.


▲  대웅전 뜨락에 세워진 3층석탑과 천진불(天眞佛)
그 주변(사진 오른쪽)에 포대자루를 맨 포대화상이 서 있다.

▲  3층석탑 옆에 핀 한 송이 백련(白蓮)
저 안에서 심청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잘익은 백련 앞에 내 마음은 콩닥콩닥~~♪

▲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불암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불단에는 석가3
존상을 봉안했는데, 그 뒤로 1907년에 보암긍법, 범화윤익, 법연 등이 그린 아미타후불탱이
걸려있다. 그리고 1982년에 그려진 천불탱과 2001년에 조성된 신중탱, 감로탱 등이 법당 내부
를 장엄하게 꾸며준다.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48호)과 석가3존상

대웅전 불단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조그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석가3존
상을 이루고 있다.

목조석가여래상은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1743년에 개금(改金)을 했다는 기
록이 전하고 있다. 그때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和平翁主)가 시주자로 참여하여 왕실과 크게
관련이 있는 불상임을 알려준다.
불상의 상체가 길고 무릎의 높이가 낮아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네모난 얼굴은 양쪽
볼이 두꺼우며, 반쯤 뜬 눈에 우뚝한 콧날과 작은 입술을 지녔다. 머리는 나발로 무견정상(無
見頂相, 육계)이 솟아있으며, 정수리와 이마 사이에 원통형과 반달 모양의 상투 매듭 구슬이
뚜렷하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취했고, 왼손
은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옷자락이 다소 두터워 신체의 양감이 드러나지 않는데, 옷자락은 몇 가닥의 깊은 골주름을 그
리며 좌우로 뻗었으며 그 끝자락은 대좌 위로 드리워져 물결 모양의 부채살처럼 마무리가 되
었다.

그의 좌우에 자리한 문수/보현보살은 근래 만들어 붙인 것이며, 그들 뒤에는 1907년에 그려진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는데,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
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유희좌(遊戱坐)로 앉아있다.

그들 좌우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든 지장보살과 화려한 보관(寶冠)을 쓴 관세음보살이 한 자
리씩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 뒤에는 붉은색과 하얀 색으로 이루어진 천불탱이 걸려있다.



 

♠  불암사 마무리

▲  한 지붕 다 가족을 이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칠성각은 1959년에 중수된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다. 특이
하게 각 칸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가운데는 칠성각, 그 좌우는 산신각(山神閣), 신통전(神通殿
) 현판을 내밀고 있는데, 그냥 속편하게 그들을 모두 아우른 삼성각(三聖閣)을 칭하면 될 것
을 괜히 복잡하게 현판만 주렁주렁 달고 있다.
칠성과 산신, 독성(獨聖, 나반존자) 외에 16나한과 지장시왕탱, 석가여래상도 봉안되어 있어
완전 한지붕 다가족을 이루고 있으며, 이중 칠성탱과 16나한도, 지장시왕탱은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다.


▲  석가삼존16나한도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16나한도는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을 담은 탱화이다. 그림 중앙에 석가여래가 있
고, 그 밑에 조그만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있으며, 그 주위로 16명의 나한(羅漢)이 각자
의 스타일을 드러내며 그려져 있는데. 특이한 점은 나한이 모두 독자적인 칸을 지니며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할 구도법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많이 나타
나는 불화 양식으로 한 화면에 이렇게 구획을 만들어 16나한을 모두 넣은 것은 불암사만의 독
창적 특징이다.

이 탱화는 1897년에 경선응석(慶船應釋), 명응환감(明應幻鑑), 보암긍법(普庵肯法), 범화윤익
(梵華潤益), 설암재오(雪庵在悟), 운조(雲祚) 등이 그린 것으로 고색의 기운을 제법 풍기고
있으며, 그 앞에는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다.


▲  유리막에 갇힌 독성상
동자승처럼 귀여운 조그만 독성상이 방석 위에 앉아있다. 다른 절과
달리 독성상만 있을 뿐, 독성탱은 없다.

▲  칠성각의 주인 자리를 차지한 석가3존상과 칠성탱(뒤에 있는 그림)

칠성각 중앙 불단에는 석가여래상이 문수/보현보살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그 뒤에는 칠성 가
족을 머금은 칠성탱이 석가여래의 후불탱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는 경내에서 가장 늙은 탱화
로 1855년에 퇴운주경(退雲周景), 창엽(瑲曄), 환익(幻益), 민수(旼修), 긍섭(肯攝), 법인(法
仁) 등이 그렸다.
그림 중앙 윗쪽에는 치성광여래가 하얀 사슴이 끄는 수레에 타고 있고, 그 밑에 황색 대의를
걸친 자미대제(紫微大帝)가 있다. 그 옆에는 칠성원군(七星元君)이, 그 뒤로는 일광보살(日光
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좌우보필성(左右輔弼星), 육성(六星)이 있다. 다시 그 주위로
남두칠성(南斗七星)과 칠성여래(七星如來)가 자리해 있고, 머리에 별을 이고 있는 28숙(宿)이
시립해 있다. 등장인물이 많아 좀 복잡하나 인물이 위로 가면서 작아지는 원근적인 표현을 하
고 있다.


▲  산신탱과 산신상
붉은 옷을 걸친 수염 지긋한 산신 할배가 중앙에 앉아있고, 그 옆에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앉아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첩첩하게 주름진 산줄기, 학 등이 탱화를 가득 채워준다.

▲  밝은 색채의 지장시왕탱

산신탱 옆에 자리한 지장시왕탱은 1890년에 완송종현(琓松宗顯), 혜조(慧照), 보암긍법(普庵
肯法), 등한(等閑) 등이 제작한 것이다.
연화좌(蓮花座)에 앉은 지장보살은 오른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고, 왼손은 결가부좌(結跏
趺坐)한 두 발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그 좌우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비롯한 시왕(十王)과 판관(判官), 사자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어두운 곳에 사는 존재들이지만 밝은 색채를 주로 사용하여 밝은 느낌을 크게 준다. 저승도
나름 살만한 곳이구나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  하얀 연등을 두룬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불암사의 보물인 석씨원류응화사적책
판과 경판을 머금던 장경각(藏經閣)이었다. 허나 석씨원류가 서울로 옮겨지고(현재는 불교중
앙박물관에 있음) 경판 또한 별도의 장소로 이전되면서 빈 공간이 되었다가 2004년에 내부를
손질하여 지장전으로 삼았다.
불단에는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로 이루어진 지장3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모두 금
동으로 되어 있다. 그 뒤에는 아미타후불탱이 자리하고 있고, 그 좌우 감실(龕室)에는 16명의
나한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앉아있다.


▲  마애3존불과 12지신상

경내 뒷쪽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여럿 있다. 이중 적당한 바위를 손질하여 마애3존불과 세존진
신사리탑을 세웠는데, 그중 사리탑을 세운 바위에 부처바위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경내에서 마애불로 인도하는 길목에는 돌로 만든 12지신상이 좌우로 6개씩 늘어서 있어 나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그들의 검문을 받으면 바위에 하얗게 새겨진 마애3존불 앞에 이
르게 된다.
이 마애불은 1973년에 조성된 것으로 마치 바위에서 그대로 현신한듯 자리해 있는데, 중앙에
는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나란히 취한 미륵불이 있고, 그 좌우에 정병(政柄)과 연꽃을 든 관세
음보살과 금강저(金剛杵)란 무기를 쥔 보살상이 있다.


▲  12지신상의 하나인 말상 (내가 말띠라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하얗고 매끈하다.

▲  바위에 선명하게 자국을 낸 마애3존불

▲  부처바위 위에 세워진 5층 세존진신사리탑(世尊眞身舍利塔)

마애3존불이 새겨진 바위 뒷쪽에 부처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부처의 사리를 머금은 5층석탑
이 장대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 석탑은 1989년 타이(태국)와 스리랑카에서 얻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자 세운 것으
로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을 얹히고, 보륜(寶輪) 등의 상륜부(相輪部)까지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2층 기단에는 팔부중(八部衆)을 새겼고, 1층 탑신에는 동쪽에 여래상을 조
각했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절도 거의 30년 만에 발걸음을 한 나
만큼이나 적지 않게 변해있었는데, 다시 안와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구석구석 경내를 살폈다.
이제 이곳을 나오면 언제 또 이곳에 오려나? 가깝지만 참 인연이 잘 닿지 않는다. 불암산은
가끔씩 찾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불암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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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 6월 나들이 ~~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 서달산 호국지장사, 현충원숲길

국립서울현충원 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 국립서울현충원 현충일 나들이 '
(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호국지장사 지장전
▲  호국지장사 지장전 (지장보살입상)

창빈안씨 신도비 호국지장사 팔상도

▲  창빈안씨 신도비

▲  호국지장사 팔상도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되면 진하게 생각나는 곳이 있다. 바로 호국(護國)의 신이 봉안
된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顯忠園)이다. 내가 애국심이 유별난 것도 아니요. 가족과 일
가 중에 그곳에 묻힌 이가 있는 것도 아니나 석가탄신일에 그날 본능에 따라 절 투어를
즐기듯 현충일에는 그날에 맞게 현충원을 찾아가 그곳에 깃든 늙은 문화유산과 숲길(동
작충효길)도 둘러볼 겸, 호국의 신을 기리며 그날의 분위기를 누리는 것 뿐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西達山,197m)> 자
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조성되어 천하에 흩어진 6.25 전쟁 전사자를 모아 안
장했는데, 처음에는 지역 이름을 따서 '동작동 국립묘지'라 했으나 2006년부터 '국립서
울현충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본글에서는 '국립현충원' 또는 '현충원'이라 표시함)
이곳은 특히 명당 자리로 명성이 아주 자자한데, 마치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세도 지니고 있어 좀 어려
운 말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라 부른다. 즉 동쪽인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를 보면
웅장한 산맥(山脈)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호위하는 형상이
고 서쪽인 우백호(右白虎)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
우로 솟은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는 것이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 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물소뿔 같으며 한
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려 공작봉을 감싸 흘러내
려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명당 중의 명당으
로 통한다.
이렇게 의미가 남다른 곳에 호국의 신을 봉안했으니 그들의 후손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마땅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효과가 시원치가 못하다. (친일매국노와 자격 미달자가 적지
않게 자리를 축내고 있음)

현충원 내에는 창빈안씨묘역과 부안군 이석수 묘역(扶安君 李碩壽墓域), 호국지장사(지
장사) 등의 문화유산이 있는데, 본글에서는 현충원 단골 명소인 창빈안씨묘역과 호국지
장사를 다루도록 하겠다.
(부안군 묘역은 철책이 꽁꽁 둘러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음~)


 

♠  국립서울현충원의 옛 주인, 허나 지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창빈안씨묘역(昌嬪安氏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호

국립현충원에 발을 들여 제일 먼저 현충원의 배꼽 부분인 창빈안씨묘역을 찾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 남쪽에 있음)
군인과 애국지사, 역대 대통령의 유택(幽宅)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곳에 뜬금없이 조선 왕족
의 늙은 무덤이 있으니 많은 이들이
'저건 뭐지?'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현충원이 들어서
기 훨씬 이전부터 창빈 묘역은 이곳의 오랜 주인으로 현충원 일대를 거느렸다.
그러다가 1954년 이후 국립묘지가 닦이면서 묘역에 딸린 토지 대부분이 호국신의 공간이 되었
으며, 1965년 묘역 북쪽에 이승만 묘역을, 2009년에는 바로 남쪽에 김대중 전대통령의 묘역이
닦이면서 묘역은 더 쪼그라들었다.
게다가 2010년 이전에는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도, 안내문도 전혀 없었다. 외진 곳도 아
니고 현충원 한복판에 있음에도 어떠한 안내문도 없었으니 그 앞을 지나쳐도 전혀 모른 것이
다. 다행히 2010년 이후, 묘역 북쪽에 묘역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졌고 현충원 안내도에도
그의 묘역이 표시되어 뒤늦게나마 약간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임에도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잉여로운 신세로 고통받고 있는 창빈묘
역, 그렇다면 묘역의 주인공, 창빈안씨는 누구인가?

창빈(1499~1549)은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후궁이다. 1499년 경기도 시흥(始興)에서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뛰어났다고 전한다.
집안이 어려워서 1507년에 궁녀로 들어갔으며, 20세에 중종의 사랑을 받아 22세에 상궁(尙宮)
으로 승급되었다. 그녀는 행동이 단정하고 정숙했으며,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하는 생활태
도로 덕망이 높았다. 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성종의 왕비)의 총애를 받
았으며, 시어미의 후원으로 31살에 숙원<淑媛, 내명부(內命婦) 종4품>이 되고 이어서 숙용<淑
容, 내명부 종3품>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영양군(永陽君), 덕흥군(德興君), 정신옹주(靜愼翁主) 등 2남1녀를 낳았는
데, 그중에서 덕흥군(1530~1559)은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아비로 조선 최초의 대원
군(大院君)으로 유명하다.

창빈은 1549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처음에는 양주 땅 장흥(현 양주시 장흥면)에
묘역을 썼으나 이듬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  500년 가까운 세월에도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은 우측 문인석

▲  눈을 가늘게 뜬 좌측 문인석(文人石)


조선의 수많은 후궁 묘역의 하나로 자칫 잊혀질 뻔했으나 덕흥군의 아들이자 그녀의 손자인
하성군(河城君, 선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잠시 호강을 받게 된다. 하성군은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때마침 적당한 인물이 없어 정말 운이 좋게도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에게
는 행운이었으나 조선과 이 땅에게는 불행이었음)
허나 선조는 적통이 아닌 서자(庶子)의 아들이란 이유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하여 자신
의 권위를 높이고자 아버지와 할머니를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그들을 높이는데 지나치게 공을
들인다. 하여 1577년 할머니에게 창빈이란 시호를 올렸으며, 무덤의 격을 능으로 높이고 묘역
을 현충원 일대로 확장시켰다. 능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동작진(銅雀鎭)의 이름을 따 동작
릉(銅雀陵)이라 했으며, 아비인 덕흥군의 묘역 또한 백성들의 입소문과 많은 돈을 이용해 잠
시나마 덕릉(德陵)으로 높이는데 성공했다. (덕흥대원군 묘역 ☞ 관련글 보러가기)

그릇도 작고 꽤나 쪼잔했던 선조가 1608년 골로 가자 동작릉은 창빈안씨묘역으로 격하되고 만
다. 허나 이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 뿐이다. 창빈의 성격상 동작릉이란 이름에 꽤 부담을
가지며 손자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1683년 왕명에 따라 묘역 북쪽에 신도비를 세웠
는데 비문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신정(申晸, 1628~1687)이 짓고 글씨는 돈령부지사(敦
寧府知事)를 지낸 왕족 출신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창빈의 아비인 안탄대는 성품이 매우 유순하고 겸손했다. 딸이 왕의 후궁이 되었음에도 부귀
영화와 출세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겸손이 너무 지나쳐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어린이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성
품을 알만하다.
그는 스스로 천인(賤人)이라 자처하고 계속 가난하게 살았으며, 벼슬은 종7품 유순부위(油順
府尉)가 전부이다.

안탄대가 세상을 뜨자 선조는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으며, 묘역은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  고된 세월의 때로 가득한 창빈안씨 묘표(墓表)

▲  구름과 용이 뒤엉킨 고품격 조각의 묘표 이수(螭首)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이 현란하게 조각되어 있다.
저기에 적당히 색만 입히면 3D영화처럼 실감이 클 것이다.


못난 손자에 의해 한때 능의 대접까지 받았지만 창빈묘역은 조촐하기 그지 없다. 전형적인 후
궁의 무덤 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부풀어오른 동그란 봉분(封墳) 앞에는 수려
한 조각의 이수를 지닌 묘표(묘비)와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좌우로 조그만
망주석(望柱石) 1쌍, 그 앞쪽에는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 1쌍이 무덤을 지킨다. 봉분 뒤쪽에
는 기와를 지닌 곡장이 둘러져 있다.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창빈안씨 신도비(神道碑)

묘역 북쪽 소나무숲에는 창빈안씨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1683년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는 3m
이며, 귀부(龜趺)와 이수를 갖춘 다른 신도비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네모난 바닥
돌에 하얀 피부의 기단석(基壇石)을 얹히고 그 위에 날씬한 몸매의 비신(碑身)을 심어 창빈의
일대기를 적었다. 비석 꼭대기는 지붕돌로 마무리했는데 귀퉁이 추녀가 얕게 들려져 소소하게
경쾌감을 선사한다.

* 창빈안씨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299-10


 

♠  국립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고 있는 서달산 호국지장사(西達山 護國地藏寺)

▲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입구

국립현충원의 꼬리 부분인 공작봉(서달산) 북쪽 자락에는 호국지장사(지장사)가 포근히 둥지
를 틀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원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위해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절로 여기고 거의 관
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겉보기와 달리 문화유산을 넉넉히 품은 오래된 절임
을 알게 되면서 구미가 확 올랐고 그 이후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끝 무렵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670년
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서로 시기가 틀려먹음)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은 북쪽으로 가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
(瑞氣)가 흘러나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여 그 서기를 추적하니 그 기운이 나오는 곳에
칡덩굴이 엉켜있고 약수가 나오고 있었다. 하여 자리를 살펴보니 아주 기가 막힌 명당인지라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장사에서 우기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 절이
다'
내용이 있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또는 창건>하고 화장암(華
藏庵)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덩달아 전해오고 있어 이르면 고려 후기, 늦어도 1577년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내력이 구체적으로 윤곽을 보이는 것은 16세기 말이다. 명종(明宗) 시절 창빈안씨묘역이
양주에서 절 부근으로 이장되었는데 1577년 선조가 친할머니인 창빈의 묘역을 동작릉으로 높
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을 지키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이 갈
렸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오랫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
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10대 시절 공부를 했던 곳으로도 전해진다.
1663년 절을 중수했으며, 영조 시절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가람고(伽藍考)'에 '동작리
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까지도 꾸준히 법등을 지키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에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
는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에는 경운(慶雲), 계향(戒香)이
불상을 개금하고 구품탱,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에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
탱, 감로탱, 신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에는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으며, 1920년에 대
방을 수리했고, 1936년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밑에 국립묘지가 들어서면서 자연히 호국신을 책임지는 사찰이 되었다. 하여
지장도량(地藏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1983년 주지 혜성(慧惺)은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
력으로 모두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줄여서 '지장사'>로 이름을 갈았
다. 그야말로 현충원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과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심우당, 청심당 등 10동 가
까운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등은 동남향(東南向)을 취하고 있다. 경내 남쪽에는 약
수가 나와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3,000좌의 조그만 지장보
살을 봉안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9품도, 독
성도, 약사불도 등 무려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한강에서 건져 올렸다는 철불
좌상과 석가여래삼존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탱화들이다. 그 외에 멀리 경주에서 왔
다는 신라 후기 3층석탑이 있는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서울 도심과 무척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감싸여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으며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보길 권한다. 또한 짙은
숲에 가려 보이는 범위는 적으나 현충원 일대와 한강, 용산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와 경치도
그런데로 괜찮다. 하여 이승만 전대통령도 꽤나 군침을 흘렸던 곳이기도 한데 그가 국립묘지
를 둘러보고 잠시 절에 들려 사람들에게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오~'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자리가 좋은
곳이다.

이곳은 절의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
을 일은 없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함께 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만약 현충
원이 없었다면 인근 상도동의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숲과 주거지의 경계가
되거나 주거지에 거의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석가탄신일과 현충일에는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공양밥이나 국수를 제공하는데, 맛이 제
법 괜찮다. (현충일에는 보통 13시 이전에 공양을 제공함)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현충로 210 ☎ 02-814-5257)
* 호국지장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지장사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국립현충원
현충원은 물론 그 너머로 용산구 지역과 남산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지장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0-5호

지장사 입구에서 절로 인도하는 길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다소 급하다. 그 길을 오르
면 커다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베풀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는 350년 정도<1985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15년> 묵은 나무로 높이
15m, 둘레 4.5m에 이른다. 오랜 세월 지장사의 이정표 및 정자나무의 역할을 해왔던 그는 아
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과 지장사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현충원에서
가장 장대하고 늙은 자연물이 되었다.
 
지장사에는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염불소리는 천근만
근 무겁다는 번뇌를 참교육시키며 마음 바깥으로 쫓아낸다. 하지만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
서 우두커니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니 성불이니 하는 것은 그
저 먼 세상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  지장사 경내로 인도하는 숲길

▲  석등을 한복판에 띄운 네모난 연못
연못에는 여러 물고기들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能仁寶殿)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한 지장전이, 오른쪽은 대웅전 구역, 왼쪽
에는 단출한 모습을 지닌 능인보전이 있다.
능인보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여기고 지
나칠 수 있다. 허나 그 안에 철불좌상과 신중탱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자리를 채우고 있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능인보전 불단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3층석탑 다음으
로 늙은 존재이다. 철불(鐵佛)이란 이름 그대로 철로 만든 불상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잠깐 등장을 하는데, 그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흔쾌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이곳에 들어온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
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의 꿈에 이 불상
이 나타나 제발 빛 좀 보게 해달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어부는 혹시나 싶어 그곳으
로 가 그물을 치니 녹슨 채로 버려진 그 불상이 걸려들었다. 하여 그를 가져와 깨끗하게 목욕
을 시키고 집에 봉안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
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기 마련인데, 불상이 좀 심성
이 고약한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화장사(지장사)에 넘겼다고
하며 그 이후부터 비로소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배 침몰 등으로 강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고향을 잃은 이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무
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 단련을 한 듯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
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불임을 알려
주고 있으며, 고려 초에 조성된 몇 안되는 철조약사여래불로 그 당시 약사여래 신앙에 중요한
자료로 판단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에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
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이나
어두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金銅佛)이 각자의 작은 공간을 지니며 빼곡히 들어앉아 철불을
받쳐주며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들은 중생들의 돈과 소망을 담아 만든 원불(
願佛)로 약 400기 정도 된다.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렸다. 그
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신중탱
의 대표적인 존재들이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고
탁한 색채 등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에 많이 나타난다.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들을 계
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다. 원
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된 광배와 도식(圖式)적인
천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 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으
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었다. (지장시왕도의 봉안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호국범종이 봉안된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은 1975년에 지어진 것으로 저 안에 같
은 해에 조성된 범종이 담겨져 있다. 국립현충
원과 절의 이름에 걸맞게 그 종을 호국범종이
라 부르며 애지중지한다.

     ◀  고색의 무게가 짙어보이는 돌판
대웅전 옆구리에는 고색이 자욱한 네모난 돌판
이 놓여져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그의 피부에는 한문 여러 자가 새겨져 있는데,
눈이 침침해 제대로 확인은 못했다. 건물 주춧
돌이나 상석(床石)으로 여겨지나 정체가 아리
송하며, 돌판에 화분이 여럿 놓여져 그의 허전
한 머리를 달래주고 있다.


▲  멀리 경주에서 왔다는 3층석탑

범종각 옆에 자리한 이 석탑은 멀리 경주 남산(南山)에서 가져온 신라 후기 석탑이라고 한다.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소환해 경상도를 상징하는 탑으로 삼았다고 하
는데,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버려진 것을 지장사에서 수습해 보수를 했다.
지장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라고는 하나 겉모습은 완전 20세기 석탑 같으며, 지붕돌과 석재 일
부에만 오래된 티가 보일 뿐, 머리장식과 탑신(塔身) 상당수는 지장사에서 새로 손질을 하여
늙은 돌과 새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이고 있다.

그는 현충일 기념으로 소원지를 가득 머금고 있는데, 그 앞 탁자에는 소원지와 볼펜, 조그만
불전함이 깨알처럼 놓여져 있다. 탑과 주변 줄에 달아놓은 소원지는 나중에 불에 태워버리는
데 그래야만 소원지에 쓰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  지장전(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독성, 칠성 등 삼성(三聖)의 공간으로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석가여래상

삼성각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여래상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동그랗게 표현된 풍만한
가슴과 가슴선이 제법 눈길을 부여잡는다.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살짝 깃들여져 있고
물레방아처럼 생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소중히 쥐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살은 팔정도
(八正道)를 나타내며, 동그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
고 한다.

그런 석가여래상 뒤에 자리한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
폭의 좌우대칭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 구조로 경직된 형태와 선, 탁
한 색채 등은 20세기 초 불화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와 독성상(獨聖像)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한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
로 앉아있는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이는데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
에는 혹 같은 것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독성상 뒤쪽에 깃든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에 기댄 채 동자(童子)의 공양을 받고 있는
독성 할배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전형적인 19세기 독성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자락의 묘사는 다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
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와 산신상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붉은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를 쓱쓱 쓰다듬고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한들 산신 앞에서는 그저 꼬랑지를 살
랑거리는 고양이에 불과하며, 산신 옆에 있는 동자는 무척 앳돼 보여 마치 할배와 손자처럼
다정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가 그렸다. 민화(民畵, 속화)풍의 나무
와 폭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 산신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인
당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위엄과 격이 담긴
산신의 얼굴 묘사도 제법 돋보인다고 한다.


 

♠  호국지장사 마무리 (지장전, 대웅전 등)

▲  밑에서 바라본 지장전(地藏殿)

지장사의 백미(白眉)이자 최대 명물은 경내 뒤쪽에 자리한 지장보살입상과 3,000좌에 달하는
조그만 지장보살상의 장대한 물결일 것이다.
절에서는 이곳을 지장전으로 삼아 각별히 챙기고 있는데, 비록 건물은 아니나 석불이나 마애
불을 두고 각(閣)이나 전(殿)을 칭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능인보전과 삼성각, 대웅전 등
에 깃든 문화유산도 중요하지만 지장사의 성격을 분명히 밝혀주는 존재가 바로 이곳 지장전이
다.

지장전은 1983년 주지 혜성이 현충원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
원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지장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육환장(六環杖)이란 긴 지팡이를 들며
온화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굽어보는 지장보살의 뒷통수에는 동그란 두광(頭光)이 그를 빛내주
는데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님 같다. 그 뒤에는 그를 멀리서 둘러싸듯, 거대한 석벽을
병풍처럼 만들고 조그만 지장보살을 가득 입혀놓아 장관을 이룬다.


▲  극락전에서 바라본 지장전의 위엄

▲  지장보살상 좌우에 있던 5층석탑들

연꽃이 새겨진 기단(基壇)을 지닌 이들은 고색의 때가 다소 묻어나 보이는데, 그들에 대한 정
보가 딱히 없다. 탑의 생김새로 봤을 때는 왜정(倭政) 때나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지며 좌측 탑의 1층 탑신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현재 능인보전 주변으로
옮겨짐)

  ◀  지장전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예전에는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었으나 근래에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새로 갈았다. 아미타
불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후불탱 등
이 봉안되어 있으며, 대웅전 목조여래좌상 뱃
속에서 나온 옷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  극락전에 있는 심초록 주 겹저고리

이 겹저고리는 2006년 5월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을 개금하던 중에 그의 뱃속에서 나왔다. 하여
문화재위원의 점검과 자문을 구해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존처리와 보관을 의뢰했다.
1630~1650년 사이에 지어진 옷으로 여겨지는데, 색상이 보존된 몇 안되는 옷으로 원형 훼손을
막고자 유물 보수를 생략하고 펼친 상태로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을 했으며,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을 맡기고 그 모조품을 극락전에 두었다. 가짜란 말에 설레던 마음이 90%는 날라가 버렸
으나 그래도 이번에 새로 인연을 지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  큼직한 맞배지붕을 지닌 대웅전(大雄殿)과 앞뜨락
대웅전 뜨락 주변에는 종무소(宗務所)와 심우당(尋牛堂)이 있고, 대웅전
뒤쪽에는 청심당과 공양간, 요사가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8호

지장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맞배지붕 집으로 보통은 정면이 더 크지만 이 건물은 반대로
측면이 더 넓다. 2016년에 건물과 지붕, 내부를 손질하여 조금 젊어졌으며, 근래에 또 손질을
했는데, 제법 너른 대웅전에는 목조여래3존상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이 여럿
걸려있다. <호국지장사는 지방문화재 탱화와 탑의 위치를 자주 옮김>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도는 인도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된 호법신(護
法神)의 무리를 여백도 허용치 않고 꾸역꾸역 집어넣은 탱화이다.
1893년 금호약효, 정련(定鍊) 등이 그린 것으로 위태천과 범천, 제석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이들을 담았는데, 좌우 대칭구도와 위태천과 제석 등이 이루는 역삼각형 구도가 다소 어수선
해 보인다. 특히 천녀(天女)들이 20여 종에 달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그림의 백미라
할만하다. 인체를 불균형하게 표현한 점과 과장된 안면의 묘사 등이 19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
이는 작품으로 비록 색이 좀 퇴색되긴 했으나 조화로운 색채 구성으로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26호)과 그 뒷쪽에
자리한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4호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가운데 금동불)은 좌우로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상과 화려한 보
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상을 거느리고 있다. 그는 지장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10여 점의
지방문화재 중 가장 최근(2018년 8월)에 지정된 것으로 2006년에 그의 뱃속에서 후령통과 저
고리 등이 나왔다.
후령통은 1639년에 조성된 예산 수덕사(修德寺)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뱃속에서 나온 은제(銀
製) 후령통과 많이 비슷해 1639년 전후 것으로 여겨지며, 불상 또한 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목조여래좌상 뒷쪽에 자리한 아미타불도는 1870년에 원명긍우(圓明肯祐), 경은계윤(慶隱戒允)
등 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구리에 그의 식구를 배치했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다. 5가지 색깔의 광배(光背)가 눈길을 끌며 옷의 묘
사가 도식화되어 있다. 적색과 녹색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 불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대웅전 식구이나 한때 능인보전에 가 있기도 했으며, 다시 대웅전으로 돌아왔다. 즉 목
조여래좌상이 탱화갈이를 한 것이다.


▲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6호

감로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3명의 화승이 그렸다. 그림은 상부에 아미타여래 일
행이 지옥에서 온 중생을 맞이하러 가는 장면을 그렸고 중앙에는 성반의식(聖盤儀式,
우란분
경에서 7월 15일 승려 및 십방제불에게 백미를 올리고 발원하는 의식)
을 하는 모습을, 그 주
변에는 아귀(餓鬼)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지옥과 현실의 모습을 그렸는데, 7여래
의 장엄하면서도 원만한 얼굴과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성반의식을 치르는 승려의 모습과
산수의 표현 등은 19세기 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나뭇잎 선의 처리와 산수의 음영처리 등
에서 19세기 말 불화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0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장면으로 그린 것으로 1893년 한곡돈법(漢谷頓法)이 그렸다.
이곳 팔상도는 부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으며 형식적인 형태와 탁한 색조는
19세기 말 불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5호

극락9품도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16관 중의 제14, 15, 16관에 해당되는 9품의 극락왕생
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1893년 금호약효 등 3명이 그린 것으로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인 염불암(
念佛庵)의 극락구품도와 같은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다. 등장 인물의 얼굴 이목구비를 섬약하
게 표현하여 조선 후기 극락구품도의 독특한 유형을 보여주며, 음영의 표현이나 적색과 녹색
의 대비, 화려한 꽃무늬 등은 19세기 불화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대웅전 앞에 차려진 아기부처상 세트

대웅전 앞에는 거하게 아기부처상 세트를 깔아놓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아기부처상과 석
조는 연못 부근 옛 샘터에 있던 것으로 대웅전을 손질하면서 그 앞으로 가져왔는데, 임시로
만든 것이 아닌 돌로 단단하게 다진 것들이다. 하여 1년에 대부분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지
내야 되는 다른 아기부처상과 달리 365일 햇살을 보고 있으며, 매일 관불의식이 가능하다.


▲  수풀 속에 묻힌 지장사 석조 안내문 (1972년 6월 작)

이 석조 안내문에서는 고려 공민왕 때 보인대사가 창건했다고 지장사(화장사) 스스로가 실토
하고 있다. 그러니 도선대사 창건설은 의미가 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어쩌다가 도선대사
창건설까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서기 연도(年度)를 쓰기가 참으로 싫었을까? 20세
기 한복판에 640여 년 전이라니, 게다가 강희 2년이니 동치(同治) 원년이니 하는 구닥다리 표
현까지 쓰고 있어 다시 한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  청심당(淸心堂)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 북쪽에 자리한 청심당은 2016년에 지어진 한옥으로 요사(寮舍)와 선방
(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앞에는 공양간으로 쓰이는 햐얀 피부의 건물이 있는데, 현충
일과 석가탄신일 공양은 여기서 섭취하면 된다. 

이번 나들이에서 현왕도(現王圖)와 괘불을 놓쳤는데, 현왕도는 공양간 건물에 종종 출현하니
그 건물을 살펴보면 된다. 단 괘불은 친견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존재라 어지간하면 마음을 비
우기 바란다. 석가탄신일 등 일부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기 때문이다. (나도 아직 친견하
지 못했음)


▲  청심당에 걸린 화장사 현판의 위엄

▲  지장사와 국립현충원을 뒤로하며 (상도출입문 방면 숲길)
이렇게 하여 현충일 기념 국립서울현충원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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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정릉계곡 나들이 (형제봉, 보현봉, 청수천약수)

북한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 북한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봄나들이 ~~~ '

북한산 일선사에서 바라본 서울
▲  일선사에서 바라본 형제봉능선과 서울시내

영취사 5층석탑

형제봉 능선에서 바라본 보현봉

▲  영취사 5층석탑

▲  형제봉능선과 보현봉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을 하루 앞둔 어느 평화로운 봄날, 북한산(삼
각산) 형제봉능선 밑에 깃든 영취사를 찾았다. 영취사는 북한산성 대성문에서 정릉으
로 내려오면서 여러 번 거쳐간 인연이 있는데, 그곳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늙은 5층
석탑이 있다. 허나 그를 제대로 사진에 담은 적이 없어 이렇게 출동한 것이다.

북한산(삼각산) 기점의 하나인 정릉(貞陵) 코스는 어렸을 때부터 익혀온 길이라 이쪽
은 아주 잘 안다고 자부를 했었는데, 시작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 아주 초보적인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날이 초파일 직전이라 절까지 연등이 대롱대롱 달려있기 마련인데,
내가 빠진 길(정릉계곡~신성천약수터 방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만 했을 뿐, '조금만 가면 영취사로 가는 길이 나오겠지' 싶은 안
일한 생각으로 계속 고집을 부리니 신성천약수터와 이상한 능선길이 나온다. 이거 왠
능선인가? 싶어 살펴보니 글쎄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던가. 길을 완전히
잘못 들어선 것이다.
허나 형제봉능선에서 영취사나 정릉계곡으로 바로 빠지는 길은 헝클어진 수준의 비법
정길 외에는 없어 일선사입구까지 강제 등산을 해야 된다. 거기까지는 가야 영취사로
가는 법정 탐방로가 나온다. 하여 일정에도 없던 일선사(해발 560m)까지 강제로 덤으
로 보고 영취사로 내려가 5층석탑을 친견한 다음 정릉으로 원점 회기했다. 간단히 영
취사만 보려고 출동한 것이 잠깐의 실수로 아주 파란만장한 북한산 등산이 되버린 것
이다.


▲  두 암벽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북한산 정릉계곡 하류
(정릉탐방지원센터 서쪽)



 

♠  뜻밖에 인연들, 형제봉능선을 거쳐 일선사까지

▲  정릉계곡 하류에서 형제봉능선으로 인도하는 숲길

정릉 코스는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주요 기점의 하나로 도심과 매우 가깝고 교통
편 또한 착하여 이곳을 이용하는 등산/나들이 수요가 상당하다. 정릉동 북한산국립공원 종점(
110, 143, 162, 1020, 1113번 종점)에서 4~5분 정도 가면 정릉탐방지원센터가 마중을 하는데,
여기서부터 풍경은 180도 바뀌어 대자연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정릉계곡을 옆에 끼고 5~6분을 더 들어가면 다리 직전에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다리를 건너
면 정릉계곡 상류와 북한산성 보국문, 영취사로  이어지며, 서쪽 길은 형제봉능선으로 빠진다
. 허나 오랜만에 정릉 코스를 찾은 탓일까? 아니면 1살을 먹은 휴유증 때문일까? 판단을 잘못
하여 그만 서쪽 길로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 더 들어가야 영취사로 가는 산길이
나옴)
아무리 아는 길이라도 돌다리를 꼭 두들겨 패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뒷탈이 없는데, 자만 때
문에 뜻하지 않은 강제 고행의 길을 밟게 되었다.


▲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숲길

▲  빨간줄이 그어진 신성천(新盛泉) 약수터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숲이 매우 짙다. 게다가 사람도 별로 없어 고적하기만 하다. 초
파일 연등이 걸려있지 않아 이상하게 여겼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길을 임하니 완전히 숲
속에 묻힌 신성천약수터가 마중한다.
내 데이터에는 전혀 없는 곳이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이라도 한 모금 축낼까 했더니 안내문
에 빨간색 줄 2개(부적합 판정)이 매정하게 그어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다. 게다
가 봄가뭄으로 인해 걸려있는 바가지들이 무색할 정도로 물까지 말라버려 목도 축이지 못하고
바로 길을 재촉했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보현봉(普賢峰)
보현봉 밑에 일선사가 자리해 있고 봉우리 너머에 북한산성이 숨어 있다.


신성천약수터에서 5~6분 정도 오르면 낯설은 능선길에 이른다. '여기는 도대체 뭔가?' 두리번
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니 뜻밖에도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니던가. 그 길을 20여 분 오
르면 형제봉 밑도리에 이르게 되고 그 북쪽(형제봉3거리)에서 형제봉능선에 합류하게 된다.

형제봉(兄弟峰)은 평창동(平倉洞) 동쪽에 우뚝 솟은 북한산(삼각산) 남쪽 봉우리로 큰 형제봉
463m)과 작은 형제봉(461m)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형제처럼 다정하게 보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형제봉능선이라 부른다. 이 능선은 종로
구와 성북구(城北區)의 경계선 역할도 하고 있으며, 동서로 조망이 펼쳐져 썩 괜찮은 산길로
추앙을 받는다. 그 조망의 끝판왕은 보현봉 밑에 자리한 일선사이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칼바위능선
사진 가운데에 바위가 짙게 깔린 곳이 칼바위로 북한산에서 이름난
바위 능선길이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산 밑에 정릉동과 길음동을 비롯하여 성북구, 강북구, 중랑구, 동대문구,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구리시 등이 바라보인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동대문구, 아차산 산줄기, 강동구,
구리 지역


형제봉 능선에서 나의 목적지인 영취사로 가려면 천상 일선사입구까지 가야된다. 중간에 동쪽
으로 내려가는 헝클어진 수준의 비법정 탐방로와 비밀 샛길이 일루 오라며 유혹을 건네나 그
길의 속내를 알 수가 없고 괜히 조금이라도 빨리 가겠다고 금지된 그 길로 발을 들였다가 길
이 더 꼬일 수 있다.

형제봉 능선길은 부드러움과 각박함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각박하다고 하여 그렇게 절망
적인 길은 아니며 이 땅에 흔한 초급 능선길이다. 형제봉 북쪽에서 잠시 내리막길이 이어지다
가 다시 오르막길이 몇 배 이상으로 펼쳐지며,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느긋한 수준이다.


▲  푸른 옷을 두텁게 두른 형제봉(463m)
형제봉 정상은 접근이 가능하다. 허나 시간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고 통과했다.

▲  계단을 이루고 있는 형제봉 북쪽 능선길
능선 북쪽에 일선사가 자리해 있어서 평창동(동령폭포) 갈림길 이후부터는
길이 괜찮게 닦여져 있다.

▲  숲터널을 이루며 넓게 닦여진 형제봉 북쪽 능선길
숲의 등등한 기세에 뜨거운 햇살도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  일선사 입구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발에 불이 나도록 속도를 내며 오르니 어느덧 일선사입구에 이
르렀다. 여기서 왼쪽 길은 일선사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대성문 방면으로 그 길을 조금 가면
바로 오른쪽에 영취사, 정릉으로 내려가는 정식 탐방로가 있다.
여기서 '일선사를 보고 가는가? 그냥 통과하는가?'를 두고 잠시 갈등을 하였다. 아무리 햇님
의 근무 시간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시간은 벌써 17시가 넘었고, 일선사는 막연히 선학원 소속
의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땡기지가 않았지. 허나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어
찌 생긴 절인지 잠깐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여기서 일선사까지는 200m 거리, 그 산길의 끝에는 일선사가 일품 조망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인공티가 너무 거슬리는 대성문 방면 산길 (일선사입구에서 대성문 방면)
산길의 야성을 순화시키고자 인공티를 너무 과하게 넣은 것 같다. 죽도록 힘든
 구간이 아닌 이상은 흙길로 그냥 두는 것이 진정한 산길이 아닐까 싶다.


▲  일선사입구에서 일선사로 인도하는 산길
오색연등만 따라가면 별탈 없이 일선사에 이른다.



 

♠  서울에 있는 사찰 가운데 가장 조망이 우수한 절집, 절은 작지만
대도시 서울을 앞뜰로 삼은 ~ 북한산 일선사(一禪寺)


▲  일선사 대웅전(大雄殿)

일선사는 보현봉(普賢峰) 동쪽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튼 고적한 산사(山寺)이다. 첩첩한 산
주름에 묻힌 진정한 산사로 시내와도 멀리 거리를 둔 산속이라 제아무리 찰거머리 번뇌라도
감히 따라오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평창동 평창공원지킴터에서도 1시간 이상을 올라
가야 되며 정릉동 종점에서도 비슷한 시간을 내던져야 이를 수 있으니 이곳에 궁벽한 위치를
알만하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일선사는 북쪽과 서쪽은 보현봉으로 막혀있어 가파른 벼랑을 이루
고 있고, 남쪽은 낭떠러지에 가까우며, 오로지 동쪽에 바깥 세상과 이어지는 외줄 산길이 있
다. 절은 위치상 도심이 보이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규모는 비록 작지만 조망(眺望) 하나
는 천하 일품이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자연히 앞뜰로 삼고 있어 뜨락
또한 기가 막히게 넓다.
특히 서울 사찰 중 조망 맛집 1위를 거머쥔 산사로 가까이에 평창동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을 비롯하여 종로구, 중구, 성북구, 동대문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강동/송파구, 강남/
서초구, 동작/관악구, 금천구, 영등포구, 마포구, 관악산~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산줄기, 남
한산성까지 아낌없이 시야에 잡힌다. 절과 방향이 다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은평구, 서
대문구, 강서구, 양천구 등을 제외하면 서울의 상당수가 일선사에 몸을 보이는 셈이다.
그럼 조망 맛집 2위 사찰은 어딜까? 그곳은 400m 고지에 자리한 도봉산 원통사(圓通寺)로 도
봉구, 강북구, 노원구,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아차산 산줄기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조
망 맛집 3위 사찰은 310m 고지에 자리한 호암산 불영암(佛影庵)으로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
구, 광명시, 인천 지역 등이 바라보인다. (1~3위는 그곳을 다녀간 경험을 바탕으로 순위를 매
김)

일선사는 조망도 좋은 만큼 구름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서울 사찰 중 3번째로 하늘과 가
깝다. 제일 하늘과 맞닿은 절은 북한산 문수사(文殊寺)로 해발 640m에 자리해 있지만 조망은
조망 1~3위 절보다는 못하며, 2위는 도봉산 관음암(觀音庵)으로 해발 560~570m 고지이다. 그
다음이 이곳 일선사가 되겠다. 해발고도와 조망 부분에서 가히 서울 사찰 으뜸의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일선사는 언제부터 법등(法燈)을 켰을까?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일선사는 그저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내 생각과 달리 나이
를 제법 먹은 절이라고 한다. 절에서 들려주는 창건 설화에 따르면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
詵國師)가 보현봉 밑 보현굴(다라니굴)에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니 그것이 일선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허나 관련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그저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
다.
창건 이후 탄연(坦然)이 절을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는 없으며, 태조 이성계(李成桂
)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면서 서울(한양)로 콩 볶듯이 도읍을 옮기자 무학대사(無學大
師)가 보현사를 두고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터로 격하게 띄워주면서 태조의 명으로 중수했다
고 한다.
서울이 조선의 도읍이 된 이후, 서울 주변에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절(호압사, 개운
사, 사자암 등)이 많이 생겨났는데, 일선사도 그때 지어진 절이 아닐까 짐작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옛날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1600년 이후 서울을 지키
는 외곽 수호사찰로 인정되어 왕명으로 중창했다고 하며, 이후로 300년 이상 뚜렷한 발자국이
전하지 않아 조그만 석굴 암자 규모로 터를 유지하거나 얼마 가지 않아서 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0년에 이르러 절의 화주(化主)인 김만신행이 원래 보현굴 자리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지금의 자리에 절을 옮기고 절 이름을 관음사(觀音寺)로 갈았는데, 이를 통해 왜정 때 작게나
마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1957년 시인 고은<高銀, 법명 일초(一超)>)이 이곳에 머물며 절 이름을 도선대사의 '선'. 자
신의 법명인 일초의 '일'을 따서 일선사(一詵寺)로 갈았으며, 1962년 재단법인 선학원의 일원
이 되면서 가운데 한자만 바꾸어 지금의 일선사(一禪寺)가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정덕(幀德)
이 주지로 들어와 30년 동안 불사(佛事)를 일으켜 지금의 일선사를 이룩했다.
그는 1994년에 옛 법당을 밀어버리고 대웅전과 약사전, 요사를 새로 짓거나 증축했다. 그리고
많은 탱화와 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했으며, 절로 이어지는 길을 정비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약사전, 요사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절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고는 하나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산산히 사라져 고색의 유물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망은 가히 일품이라 그것으로 절의 부족한 부분이 많이 커버된다. 특히 대웅전은 어느 절
법당(法堂)에 못지 않은 큰 규모라 내심 놀랬다.
원래 절 자리에는 보현굴(다라니굴)이란 석굴이 있는데, 조선 초에 활약했던 기화함허(己和涵
虛)를 비롯해 많은 승려가 그곳의 신세를 졌다고 한다. 현재 절 자리는 1940년 이후이니 일선
사의 과거를 들추려면 보현굴 주변을 뒤집는 수 밖에는 없다.


▲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상
초파일을 맞이하여 미리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광합성 작용을 받고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 앞이 협
소하여 그나마 조금 트인 측면(동쪽)에 대웅전 현판과 출입문을 내어 좁은 측면을 정면으로
삼고 있는데, 건물 내부에는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석가여래3존상을 위시하여 칠성탱과 중생
들의 소망을 머금은 조그만 원불(願佛)이 가득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칠성탱(七星幀)

▲  대웅전 뒷쪽에 자리한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약사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하얀 피부의 작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중심으로 풍만하게 생긴 금동관세음보살상,
산신(山神)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등이 들어있는데, 이들은 20세기 후반에 마련된 것으로 보
통 산사에는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등 삼성(三聖)의 보금자리를 따로 두기 마
련이나 일선사는 자리가 협소하여 약사전과 대웅전에 나누어 배치했다.

▲  약사전 약사여래불과 약사후불탱,
관세음보살상

▲  산신 가족의 단란한 가족 사진
산신탱(山神幀)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①
종로구,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성동구, 송파/강동구 등


요사(寮舍) 동쪽에는 물통과 의자 등이 있는 쉼터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이곳은 조망
이 아주 좋은 자리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이 나의 발 밑에 펼쳐져 올망졸
망 펼쳐져 있어 잠시나마 천하의 주인이 된 듯 즐거운 기분이 든다. 이런 것이 바로 산을 타
는 재미의 하나이지. 허나 현실은 저 너른 땅에서 내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땅은 나의
작은 집 외에는 단 한 뼘도 없다는 것. 그것이 뼈저린 함정이다.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②
사진 중앙에 보이는 산이 내가 거쳐갔던 형제봉이다. 그 너머 길쭉한 산줄기는
북악산(백악산)이며, 그 너머로 종로구, 중구, 남산, 성북구, 성동구,
강남/서초구, 대모산,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③
형제봉과 북악산을 중심으로 인왕산,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마포구,
강남/서초구, 동작/관악구, 관악산, 호암산이 바라보인다.


일선사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초파일 준비로 승려와 보살 아줌마들이 꽤 부산했다. 낼 중생들
에게 제공할 공양밥과 국을 큰 솥에 미리 만들고 있었는데, 이곳 공양밥 맛이 제법 좋다고 한
다. 초파일 외에 동짓날에는 팥죽을 제공하며, 일요일 점심 시간(12~13시)에도 공양을 제공한
다고 하니 그때 이곳을 지날 일이 있다면 잠시 들려서 한 그릇 들고 가는 것도 좋다.

일선사에서 보현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비법정으로 묶여서 금지된 산길이 되었다. 그래
서 이제는 완전 막다른 곳이 되어 천상 왔던 길로 돌아나가야 된다. 그렇다고 금지된 길을 무
리해서 가지는 말도록.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유명한 말도 있고, 괜한 모험에 인생을 거는 것
만큼 무모한 것은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산6-1 (평창6길 79-141 ☎ 02-379-8697)


▲  일선사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길 (일선사입구 방면)



 

♠  늙은 석탑을 지닌 깊은 산골의 절집, 북한산 영취사(靈鷲寺)

▲  영취사 5층석탑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0호

일선사에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입구로 내려갔다. 여기서 정릉 방면 산길로 접어들어 원
래 목적지인 영취사로 내려갔는데 그 길이 속세살이만큼이나 제법 각박한 경사였다. 다행히도
내려가는 길이라 덜 힘들지 만약 이 길로 올라왔다면 제대로 땀을 뺐을 것이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별로 남지 않았고 지나가는 산꾼도 없는 상태라 걸음을 몇 배로 재촉하여
미끄러지듯 10분을 내려가니 인기척 소리가 조금씩 들리면서 숲 사이로 영취사 지붕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듣는 인기척만큼 썩 반가운 것은 없지~! 그렇게 1굽이를 내려가니 영취
사에 이른다. 이 산길은 영취사 경내를 거쳐가기 때문에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절을
경유해야 된다.

경내에 이르니 이곳 역시 초파일 준비로 조금은 부산해 보였다. 사람들이 연등을 달거나 청소
를 하면서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침 18시가 넘은 상태라 밥 연기도 모락모락 피어올라 나
의 시장기를 자극시킨다. 영취사도 초파일과 동짓날, 그리고 일요일 점심에 산꾼과 중생들에
게 공양밥을 제공한다. 비빔밥 또는 국수를 주고 있는데, 혹여 저녁공양이라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새가슴 마냥 요사 주변을 기웃거려봤지만 결국 먹지는 못했다. 예전에는 공양
1그릇 먹고 가도 되냐고 막 들이밀고 그랬는데 나이를 먹으니 점점 소심해지는 것 같다.

해발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영취사는 '절간답다'는 말이 아주 어울릴 정도로 고적한 산사이
다. 경내 주변이 죄다 숲이라 여기서는 하늘 밖에 보이지 않으며, 남쪽이 확 트여 형제봉능선
에서도 능히 바라보이는 일선사와 달리 숲에 푹 묻혀있어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정도
로 심산유곡이다.
허나 일선사와 달리 등산로가 경내를 지나가 주말, 휴일에는 지나가는 이들이 많다. 등산로가
접한 경내 밑부분에는 쉼터와 5층석탑이 있고, 거기서 1단계 올라가면 요사가 있으며, 다시 1
단계 오르면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  우중층한 대석(臺石) 위에 자리한 영취사 5층석탑

내가 영취사를 간만에 찾은 것은 경내에 서린 늙은 5층석탑을 보고자 함이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 석탑은 울퉁불퉁하게 생긴 커다란 대석 위에 작게 서 있는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히고 그 위를 연꽃무늬 석재로 마무리를 했다. 여기서 2중 기단과 5층
탑만 원래 것이고 나머지는 탑의 초라함을 달래고자 20세기 중반 이후에 새로 덧붙인 것들로
탑 자체는 아주 작은 수준이며 어쩌면 천하에서 가장 작은 석탑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원래 요사 앞에 기단부가 묻힌 상태로 있었다고 전한다. 문병대 박사가 직접 찾아와 그
를 평가하니 무려 고려 후기~조선 초기 석탑으로 밝혀졌다. 마침 서울에 토박이 석탑이 별로
없고 고려 말~조선 초기 탑이 매우 희귀하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어 이곳의 듬직한 꿀단지
가 되었다.
이후 탑은 보다 넓은 지금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여러 장의 돌을 높이 쌓아 대석을
다진 다음 조그만 탑을 올려 키를 높였다. 탑의 왜소함을 극복하고자 대석을 쌓았지만 오히려
대석이 너무 지나치게 커서 탑이 더욱 작아 보인다.
기단은 2중으로 밑 기단은 조금 높으나 고된 세월의 상처가 남아있으며, 손상된 부분 사이에
는 잡석을 끼웠다. 윗 기단은 밑 기단에 비해 높이가 약간 낮으며, 그 위에 5층 탑신을 올렸
는데, 윗층 옥개석(屋蓋石)과 연꽃무늬 석재는 새로 만든 것이다. 탑신은 1층만 달랑 남아있
고 윗층 탑신은 납작하여 무늬만 남은 실정인데,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으며, 1층 탑신 중앙에 감실(龕室) 같은 것이 뚫려 있어 불상을 봉안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은 두툼하나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흔적이 적지 않으며 머리 장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사라졌고 근래 만든 연꽃무늬 석재만 달랑 놓여있다.

기단부와 탑신의 구성법, 간략화된 옥개석 층급(層級) 표현 등을 통해 고려 후기~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토박이 탑으로 가치가 인정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동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기단과 탑신)

▲  북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늙은 5층석탑을 지니고 있는 이곳 영취사는 1962년에 신정옥(申貞玉)이 세웠다. 그는 1928년
7월 14일 충남 예산군 신례원에서 독립운동가 신현상(申鉉商)의 딸로 태어났는데, 불명(佛名)
은 대지행(大智行), 호는 초일(草一)로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수양녀(收養女)이기도 했으며,
1947넌에 마곡사(麻谷寺)에서 칩거 수양을 했다.
1972년 영취사 법당을 중건하고 요사를 신축했으며, 계속 절을 살펴주어 경내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의 남편은 강성진으로 삼보증권회장 및 대한증권업협
회장을 지냈으며, 자녀 또한 모두 사회에서 듬직한 지위를 누렸다.


▲  정면에서 바라본 5층석탑 (기단과 탑신)
중생들이 갖다놓은 작은 불상과 동자상들이 석탑에 기대어 앉아 그들만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고 있다.

▲  5층석탑 앞에 마련된 관불의식의 현장

5층석탑이 영취사의 유일한 보물이자 듬직한 꿀단지라 그 앞에 관불의식의 현장을 정성스럽게
닦아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은 초파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꽃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의식
의 현장에 주인공인 아기부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1년 만에 외출을 할 생각에 그도 마음이
너무 설레서 긴장이 된 모양이다. 

▲  영취사 요사 (선방, 공양간)

▲  대웅전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아주 조촐한 모습의 용왕각(龍王閣)

▲  용왕각에 봉안된 용왕탱

5층석탑에서 대웅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오른쪽에는 선방(禪房)과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
을 도맡고 있는 요사가 있고, 왼쪽에는 장난감 집처럼 아주 조그만 용왕각이 있다. 바다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이런 첩첩한 산골에 바다 용왕(龍王)의 거처인 용왕각이라...? 옛날에 이곳
이 바다였을까?
허나 용왕이라고 꼭 바다만 관리하라는 법은 없다. 그는 바다를 비롯해 천하의 모든 물을 관
리하는 존재라 물이 늘 풍족히 나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의 거처를 만들어 봉안한 것이다.
용왕각 옆에는 샘터가 있으나 물이 거의 없었고, 대신 요사 밑에 따로 샘터를 만들어 물을 제
공하고 있다.

▲  대웅전 - 기존 맞배지붕 건물에
1칸을 덧붙인 구조이다.

▲  삼성각(三聖閣) - 산신과 칠성,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서울
이곳도 결코 낮은 곳은 아니지만 삼삼한 숲의 방해로 겨우 일부만
시야에 들어온다.

▲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경내 (바로 밑 지붕이 요사)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3존상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3존상을 이루고 있다. 후불탱이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으며, 그 좌우로 신중탱 등 온갖 탱화들이
대웅전 내부를 환하게 비쳐준다.


경내 높은 곳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건물이 다들 조그만 수준으로 1974년 이후
에 중건을 하여 아직 고색의 때는 익지 못했는데, 대웅전 불단에는 벌써부터 갖다놓은 온갖
공양물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영취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1 (☎ 02-911-0005)


▲  대지행 신정옥 영취사 창건 공덕비
창건주 신정옥을 기리고자 절에서 정성을 다해 지은 공덕비이다.



 

♠  북한산(삼각산) 마무리

▲  한데 뭉쳐진 커다란 바위들 (영취사 남쪽)
바위의 모습이 썩 예사롭지가 않아 보여 예로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절찬리에 쓰였던 듯 싶다. 대자연이 그어놓은 주름선들도 멋지고 말이다.


영취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벌써 18시 반이 넘었다. 나날이 길어지는 연장 근무에 입이 한참이
나 삐죽 나왔을 햇님 덕에 아직까지 환한 낮을 유지하고 있지만 산속이 도시보다 밤이 일찍
온다. 그래도 그날의 목적을 모두 이루었고, 거기에 일선사라는 강제 보너스도 받았으니 보람
찬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영취사를 뒤로 하고 정릉계곡을 따라 정릉 기점으로 내려갔다. 이제는 오로지 내려가기만 하
면 되는지라 힘든 것은 없으며, 영취사에서 조금 내려가면 삼봉사 입구가 나온다. 이곳은 딱
히 끌리는 것이 전혀 없는 현대 사찰이라 그냥 통과했다.


▲  속세로 인도하는 정릉계곡 산길 (삼봉사 입구 부근)

▲  계곡과 나란히 이어지는 산길 (삼봉사 입구 남쪽)

▲  가늘게 실타래를 풀어내는 작은 폭포 (폭포 이름은 없음)

▲  푸른 숲터널을 이루는 정릉계곡 산길

▲  마이산(馬耳山) 탑사 돌탑의 후예일까? 거대한 돌탑의 위엄
이곳을 오간 수많은 사람들이 소망 하나를 깃들여 돌을 얹혔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세모 모양의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소망을 향한
중생들의 집념이 오랜 세월을 두고 그려놓은 탑이다.

▲  청수천약수<淸水川藥水, 청수천샘터, 청수약천(淸水藥泉)>

정릉계곡 중류 쯤에 이르면 북한산(삼각산)의 유명 약수의 하나라는 청수천샘터가 마중한다.
샘터의 이름인 '청수'는 정릉계곡의 별칭으로 '청수골','청수계곡'이라 불리기도 하며 계곡
하류에 있었던 유명한 고급 요리집 청수장(淸水莊)의 이름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청수천샘터는 2개의 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쪽은 계곡 암반에서 나오고, 오른쪽은 바위
밑에서 나온다. 어느 것을 마셔도 상관없으며 그건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나는 물 욕심
이 많아서 양쪽 물을 모두 마셔보았는데 딱히 특별한 맛은 없는 자연의 물맛 그대로이다.
이곳은 물이 풍부하여 물이 마를 날이 거의 없을 정도이며 관리도 썩 잘되어 있는 편이다. 샘
터 앞에는 의자, 정자 등의 쉼터가 베풀어져 있으며, 샘터 옆구리를 흐르는 계곡 풍경이 바위
와 어우러져 걸쭉한 멋을 자아내고 있다. 계곡 물도 티 하나 없이 맑고 수심도 얕아서 성하(
盛夏)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쿨하게 풍덩하고 싶지만 상수원 보호와 계곡 보호를 위해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여기서 계곡 종점(정릉 기점)까지 계속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있으니 괜히 발도 들이지 말기
바라며, 계곡에 정 들어가고 싶다면 청수천샘터 윗쪽으로 가야 된다. 그곳은 해방된 공간이나
계곡 풍경은 다소 별로이다.

▲  청수천약수 왼쪽 샘 (계곡 옆)

▲  보호각을 갖춘 청수천약수 오른쪽 샘


▲  청수천약수 곁을 흐르는 정릉계곡
청수천약수를 빚은 정릉계곡은 청정한 빛을 띄우며 속세로 흘러간다.
여기서부터는 접근이 금지된 계곡이니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자~~!

▲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청수천샘터 옆 계곡 (수심이 1자도 안됨)

▲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비추는 정릉계곡 산길 (청수천샘터 남쪽)

▲  정릉계곡 하류 산길 (보국문 갈림길 직전)

▲  암반들이 층층이 주름진 정릉계곡 하류
조그만 폭포들이 주름진 바위를 타고 속세로 신나게 흘러간다. 산행을 시작했던
정릉으로 다시 내려오니 시간은 19시. 이렇게 하여 초파일 전날
북한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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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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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5월 3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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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영화사 느티나무, 영화사에서 먹은 공양밥)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
연등으로 가득한 영화사 대웅전 뜨락
▲  하늘을 훔친 영화사 연등의 위엄 (대웅전 뜨락)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
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나 초파일 앓이가 대단하여 그날에 대한 설레감이 다른 날보
다 매우 크다. 하여 매년 거르지 않고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서울 지역의 오래된 절과 문
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순례/답사를 내세운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소에도 많은 절을 찾고 있지만 그래도 1년에 오직 하루 뿐인 날이라 심쿵거리는(심장
이 쿵쿵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적당한 절을 찾아보았으나 이제 서울에 남
아있는 미답(未踏) 고찰(古刹)은 완전히 씨가 마른 상태, 하여 수도권으로 눈을 돌려보
았으나 멀리 나가기도 귀찮아 예전에 갔던 시내 절 중에서 사진에 담지 않은 곳을 골라
보니 아차산 영화사 등 여러 곳이 걸려들었다. 하여 그들을 이번 초파일의 주메뉴로 선
정하고 제일 먼저 아차산 영화사를 찾았다.



 

♠  아차산 영화사(永華寺) 입문

▲  영화사 일주문(一柱門)

아차산(峨嵯山) 남쪽 끝에 넓게 둥지를 튼 영화사는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지역에서 가장 큰
절이다. 날이 날인지라 사람들로 아주 북새통을 이루어 천하 사람들이 거의 절에 모여든 기분
인데 영화사의 정문인 일주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인 영화사 경내가 펼쳐진다.
경내 또한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지경으로 허공에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초파일 분위기
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으며, 선불장 주변에서는 공양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밥
부터 먹고 싶었지만 우선 절을 둘러보고 먹기로 했다. 원래 핵심이 되는 것은 끝에 하는 법이
라고 하지 않던가? 초파일 절 투어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영화사의 내력
을 간단히 살펴보자.

영화사는 672년에 그 유명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용마봉(龍馬峰,
용마산) 밑에 절을 짓고 화양사(華陽寺)라 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자료
는 전혀 없다. 게다가 그 시절 의상은 부석사(浮石寺)와 옥천사(玉泉寺, 경남 고성) 등 자신
이 키우던 화엄종(華嚴宗) 소속의 절 10개-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를 짓고 관리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영화사는 그의 화엄십찰이 아님)
그러니 의상의 창건설은 한낱 부질없는 메아리이자 영화사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며 경내에 조
선 초에 조성된 미륵석불이 있어 고려 중기나 조선 초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용마산에 있던 시절, 절 등불이 무려 8km 이상 떨어진 한양도성까지 비쳤다고 한다. 그 정도
면 절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 등불이 궁성(宮城, 도성)까지 비추
는 것에 영 기분이 좋지 않던 조선 태조(이성계)는 명을 내려 1395년 절을 군자동(君子洞) 어
딘가로 강제 이전시켰다.
이후 중곡동(中谷洞) 산자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07년 현 자리로 이전되어 영화사로 이름
을 갈았다. 1909년 도암(道庵)이 산신각과 독성각을 세웠으며 1992년 월주(月珠)가 중창하면
서 대웅전을 중수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미륵전, 선불장, 요사채, 유치원 등 7~8동의 건
물이 있으며, 400년 묵은 느티나무와 하얀 피부의 늙은 미륵석불입상이 있다. 느티나무는 영
화사가 이곳에 둥지를 틀기 이전부터 있던 것이고 미륵석불입상은 중곡동에서 이곳으로 절을
옮길 때 힘들게 옮겨온 것이다.
그 외에 20세기 초에 조성된 독성탱과 산신탱이 전하며, 1909년에 지어진 삼성각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다. 허나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를 제외하면 아직 이렇다할 지정
문화재는 없는 실정이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넓어 안정적인 느낌을 주며 학생들의 법회활동이 매우 활발해 제법 젊
은 절이다. 아차산 밑에 있기는 하나 아차산과 이어지는 산길은 절에서 모두 끊어버렸다. 하
여 절을 둘러보고 아차산으로 오르고 싶다면 일주문으로 다시 나와서 절 서쪽이나 동의초교
동쪽에서 산길을 이용해야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9 (영화사로 107, ☎ 02-444-4321)


▲  영화사 선불장(選佛場)
대웅전에 못지 않은 우람한 규모로 선방 및 요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장대한 규모의 영화사 대웅전(大雄殿)
1992년에 중건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붉은 기와지붕이 켜켜이 이루어진 닫집

▲  오색연등이 새로운 하늘을 이루고 있는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색 연등을 가득 달아놓아 마치 하늘이 움푹 낮
아진 기분이다. 옛날 이야기를 보면 태초(太初)에는 하늘과 땅이 붙어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저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밑에 초파일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닦여
져 있고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를 누리려는 사람들로 꽤나 정신이 없다.


▲  오색연등이 영롱하게 허공을 뒤덮은 대웅전 뜨락
연등 구름 밑은 밤처럼 어둡고, 연등 위는 구름 위의 세상처럼 무척 환하다.

▲  아기부처의 관불(관정)의식 현장

대웅전 계단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아기 부처가 연분홍 연꽃대좌를 갖춘 코끼리를 타고 1
년 만에 외출을 나왔다. 그 긴 시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무료하게 지냈던 터라 간만의 화색
이 돈 표정인데 중생들은 그의 머리에 물을 껴얹는 이른바 관불(灌佛)의식을 행하며 그의 생
일을 축하한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정면에서 담지는 못하고 이렇게 측면에서 어설프게 사
진에 담았다.
아기부처 앞에는 불전함이 덩그러니 놓여져 애타게 중생들의 호주머니를 쳐다본다. 마치 오늘
날 돈으로 얼룩진 종교의 한 단면을 보여주듯이... 초파일 특수에 불전함은 거의 터져나갈 지
경이다. (반대로 내 주머니는 나날이 얇아지고 있음 ㅠ)


▲  영화사에서 제일 늙은 집,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옆에는 산신과 독성(나반존자), 칠성의 거처인 삼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09년에 도암이 지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집인데, 현판은 물론 겉모습까지
고색의 흔적이 자욱하여 이제 110여 년 되었건만 그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지방문화재의 자
격이 충분하여 서울시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면 100% 통과될 듯 싶은데 절에서는 아직 그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  매우 젊은 칠성탱

▲  20세기 초에 조성된 늙은 독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산신탱은 독성탱과 비슷한 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산신을 중심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
이와 어린 비서인 동자(童子), 그리고 산신(山神)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이곳이 아
차산 자락이니 저 산신은 자연히 아차산 산신이 될 것이다.
거의 고양이처럼 그려진 호랑이는 산신 뒤에 자리해 있는데 얼굴은 산신의 왼쪽, 꼬랑지는 오
른쪽에서 살랑살랑거린다. 탱화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간식과 음식, 과일, 술들이 상다리가
절단이 날 정도로 가득하여 초파일 특수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


▲  하얀 연등이 하늘을 훔친 삼성각 뜨락

죽은 영가(靈駕)들을 위한 하얀 연등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푸른 하늘을 흑백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우울한 느낌이다. 반면 대웅전
뜨락에는 오색 연등이 펄럭이고 있어 활력도 넘치고 보기에도 좋다. (역시 색이 있어야 보기
에도 좋음)



 

♠  영화사 마무리 (미륵석불입상, 느티나무, 공양밥)

▲  경내에서 미륵전으로 인도하는 숲길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제일 구석진 동쪽 산자락에 미륵석불의 거처인 미륵전이
있다. 오색연등이 대롱대롱 엮어진 숲길을 2분 정도 오르면 미륵전이 활짝 모습을 비추는데,
느긋한 경사의 계단길로 이루어져 누구든 오르기 쉽다.
다만 길 양쪽 수풀에 지네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있고 난간줄도 쳐져 있어 적지 않게
긴장감을 준다.


▲  숲속에 묻혀있는 미륵석불의 거처, 미륵전(彌勒殿)

영화사에 왔다면 대웅전 주변만 살피지 말고 미륵전에 깃든 미륵석불입상도 꼭 친견하기 바란
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영험하다고 소문난 석불이기 때문이다.
경내에서 홀로 떨어진 미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의 팔작지붕 건물로 미륵석불 덩치에
맞게 짜여졌다. 석불의 키가 3.5m라 건물 높이는 5m 정도 되며 건물의 겉모습에서 고색이 제
법 느껴져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미륵전 앞에는 가건물을 길쭉하게 다져 예불
공간으로 삼았는데 새벽부터 19~20시까지 개방해 그를 친견할 수 있게 했다.

미륵전 현판은 불교학자이자 친일매국노로 더러운 모습을 보였던 권상로(權相老, 1879~1965)
가 쓴 것이다. 영화사도 생각이 있다면 그 현판을 떼어내 장작으로 땠으면 좋겠는데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보여주듯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까지 친일매국노의 흔적이 더럽게 깔려있
어 천하의 정의구현을 소망하는 중생들의 마음을 적지않게 희롱한다.


▲  하얀 피부를 지닌 미륵전의 주인, 미륵석불입상

영화사의 보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미륵석불은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에 대한 정성이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하얗게 떡칠을 하는 통에 원래 모습을 다소 잃었고
그로 인해 구체적인 나이를 측정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조각 수법도 그저 그런 수준이
라 늙은 석불임에도 그 흔한 지방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
그래도 서울 땅에 몇 남지 않은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로 그의 몸에 짙게 깔린 하얀 때를 싹
제거하여 인근 광나루에 있는 상부암(上浮庵) 석보살입상(☞ 관련글 보기)처럼 제대로 된 재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불교에 관심이 지대했던 세조(世祖)가 그를 찾
아와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중곡동에
서 여기로 절을 옮길 때 워낙 키다리에 거구로
콧대가 높은 그를 옮기고자 여러 대의 우마차
를 동원해 며칠 동안 낑낑대며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경내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그의 거처를 두었으니 여기까지 옮기느라 고생
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석불의 머리는 지나치게 큰 편으로 머리부터
눈, 코, 입, 귀, 검은 수염, 삼도가 그어진 목
까지 표현되어 있으며, 몸통에는 가슴 앞부분
을 드러낸 법의(法衣)를 걸쳤다.
왼손은 바닥을 보이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린
여원인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다.
현재 절에서는 그를 미륵불(彌勒佛)로 애지중
지하고 있으나 원래부터 미륵불은 아니었던 듯
싶다.

▲  옆에서 본 미륵석불입상


▲  미륵전 주변 숲길
미륵전 뒤쪽이 바로 아차산이나 그곳으로 가는 길은 철조망으로 무심히 끊겨있어
이곳은 사실상 영화사의 막다른 곳이 되었다. 여기서 아차산둘레길이 뻔히
보이나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처럼 바라봐야 된다.

▲  무엇에 쓰던 물건인고? 미륵전 옆에 놓인 돌덩어리

미륵전 옆 바위에 인공이 가해진 동그란 돌덩어리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생김새를 보아하
니 석불의 모자(갓) 같은 기분인데, 이곳 미륵석불의 것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형편없이 작다.
이 돌덩어리에 대한 정보가 좀처럼 걸려들지 않아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고색의 때가 별로
끼지 않은 것으로 봐서 영화사가 이곳에 안착된 이후의 것으로 여겨진다.
장대한 세월에게 저것을 지녔을 본체를 빼앗겨 저거만 겨우 남아있으며 정체성까지 상실되어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섭고 한심
한 일은 없다.


▲  푸르게 익은 영화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5-2호

시간도 벌써 13시가 넘었고 경내를 이리저리 뛰다보니 시장기가 아주 극에 달했다. 경내를 다
둘러보았으니 이제 초파일 절 투어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공양을 할 시간.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공양을 하려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삼성각 앞까지 줄이 길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공양을 제공하는 곳은 선불장 느티나무 앞으로 줄의 길이는 대략 200m는
넘어보였는데, 내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는 없어 할 수 없이 그 줄에 동참했다.
200m는 짧은 거리가 분명하나 그날의 200m는 거의 20km처럼 장대해보였다. 그렇게 30분 가까
이 기다리니 느티나무 앞까지 이르렀고 여기서 10분 정도를 더 소비하여 그제서야 공양밥과
미역냉채국을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공양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느티나무는 높이 19.5m, 둘레 4.1m의 덩치로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1982년 10월) 추정 나이가 약 37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년이 덧없이 얹혀져 410살 이상이
된다. 절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이전부터 있던 존재로 늘 좋은 질감의 그늘을 드리워 대자
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햇살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기다리는 줄이
꽤 고달팠을 것이다.


▲  영화사에서 힘들게 먹은 공양밥의 위엄

힘들게 공양밥을 받았으나 경내의 어지간한 자리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겨우
미륵전 숲길 입구에 자리를 잡고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이곳 공양밥은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비빔밥 스타일이다. 하얀 쌀밥에 콩나물과 고사리, 시금
치 등 나물에 빨간 고추장을 넣어 잘 비벼먹으면 된다. 어떻게 비비느냐에 따라 맛도 천지 차
이, 게다가 고추장이 위장에도 좋다고 하니 듬뿍 넣어 비벼먹는 것도 좋다. 비빔밥에 딸려 나
온 미역냉채국은 시원하고 개운해 비빔밥의 느끼한 맛을 싹 가시게 해준다. (후식거리는 제공
되지 않았음)

그렇게 점심 공양을 마치고 시장통처럼 번잡한 영화사를 뒤로 하며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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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5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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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

성북동 길상사



' 도심 속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 '

▲  길상사를 키운 법정의 사진과 유품들


봄이 막바지 절정에 치닫던 5월 중순의 어느 평화로운 날, 후배 여인네와 성북동(城北洞)
길상사를 찾았다.
내가 늙은 절을 좋아하다보니 법등(法燈)의 끈이 짧은 절은 문화유산이 없는 이상은 별로
찾지 않는 편인데, 길상사는 예외로 내 즐겨찾기의 일원이 되어 이미 50번이 넘게 인연을
지었다. 이는 이곳이 지닌 상큼한 풍경과 포근하고 편한 분위기가 서로 어우러져 나를 이
곳의 충성 단골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길상사는 성북동 북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데 성북초교 직전 선잠단(先蠶壇)터에서 선잠
로를 따라 12분 정도 들어가면 절이 모습을 비춘다. 그 짧은 구간은 부자들의 으리으리한
금입택(金入宅)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현장으로 우리 같은 서민들은 보기만 해도 주눅
이 잔뜩 들고 편한 마음마저 사라지는 기분이다. 
이 땅에서 나날이 커져만 가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듯 담장은 요새 같으며, 대문은 충차(衝
車, 공성무기의 하나)로도 어림 없을 정도로 견고하다. 또한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는지 방범장치를 겹겹이 설치하여 지나가는 나그네를 항시 응시한다.
저택과 고급빌라 뜨락에는 담장 밖으로 손과 얼굴을 내민 나무들로 가득하며 도심과 가까
움에도 분위기도 차분하여 산책 코스로도 아주 좋다. 하여 나는 서울에서 가을이 가장 아
름다운 곳으로 성북동을 1순위로 꼽는다. 비록 서민들에게는 기분이 영 그런 곳이긴 하지
만 그렇다고 졸부들의 하찮은 위엄 앞에 지나치게 꼬리를 내릴 필요는 없다. 괜히 기죽지
말고 당당히 가슴을 피며 나들이객의 입장으로 산책을 즐기면 그만이다.
또한 성북동은 예로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 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성북동
에 우리나라의 0.1%가 산다고 할 정도로 졸부들이 몰려든 것도 바로 명당(明堂)의 기운을
누리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당의 기운을 졸부나 상류층 따위가 다 누리도록 두지 말고 성
북동을 거닐면서 그 기운을 조금이나마 챙겨가기 바란다.


♠  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산사,
북한산 길상사(吉詳寺)

▲  길상사 극락전(極樂殿) 주변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山寺)인 길상사는 저택과 고급 빌라가 쓸데없이 홍수
를 이루는 성북동 북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삼
각산)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
를 가로질러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절
풍경도 제법 아름답고 도심에 있음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경내는 포근하고 아늑해 중생의 마
음을 다독거려주고,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이채로운 볼거리가 두 눈을 호강시킨다.

길상사는 늙은 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화유산을 품은 절도 아니다. 역사는 겨우 20여 년, 나
보다 한참이나 어리다. 이곳이 법등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명세를 크게 탄 것은 군사정권 시
절 권력실세들이 들락거리던 고급요정에서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절로 거듭난 전대미문의 현
장이며, 무소유(無所有)의 저자이자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급요정을 기증한 김영한(길상화)의 이야기도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곳을 키운 법정은 2010년 3월 11일 13시 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다음
날 순천 송광사(松廣寺)로 운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길상사의 과거
길상사는 원래 성북동 서쪽에 자리한 삼청각(三淸閣)과 함께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떨쳤던 대
원각(大元閣)이다. 군사정권의 실력자들과 대기업 고위간부들, 부유층들이 찾아와 기생을 끼
고 놀던 요정(料亭)으로 이곳을 세운 사람은 김영한<법명 길상화(吉詳花)>이다.

김영한은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일찍이 풍비박산이 났다. 그래서 16세에 궁중아악과
가무(歌舞)를 가르치던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로 들어가 진향(眞香)이란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그는 바다 건너 왜열도를 여행하다가 문학가로 유명한 백석(白石, 1912~1995)
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 당시 그는 조선일보 기자로 그녀를 자야(子夜)라 불렀다. 그들
은 혼인을 약속했으나 백석의 부모가 쌍수를 들고 반대하여 결국 이별하고 만다.

오기가 생긴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벌고 공부에 전념하여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
으며, 몇 편의 수필과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썼다. 또한 예전 기생을 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고급 식당을 차리고자 서울 주변을 물색하다가 계곡이 흐르는 지금의 길상사
자리에 좋은 예감을 얻어 이 일대를 사들여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냈다. <성북동에 서
린 완사명월형의 명당 기운을 받으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잠시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기도 했다가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을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
으며, 군사정권 시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삼청
각, 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고급 요정으로 우뚝 선다.

대원각 단골들이 정/재계에서 죄다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삽도 모자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
담을 정도로 대박 수입을 자랑했던 김영한, 허나 그는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를 위해 악착같이 살았던 그였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
달았고 그 와중에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만나 여러 법문을 들었고, 결국 모든 것을 내놓기로 결심, 1987년 법정에게 절집
으로 써달라며 대원각을 통채로 기증했다. 허나 갑자기 뜬금없는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펄펄 뛰며 거절을 했다. 당시 대원각의 면적은 7천여 평, 시가는 무려 1,000억원을 헤아렸다.

김영한은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1995년 법정은 그곳을 받아 순천 송광
사(松廣寺)에 넘겼다.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고치고 송광사의 말사(末
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인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고 바로 그해 12월 14일 개
원법회를 열었다.
법회에는 천주교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구름
처럼 참석했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길상화(吉祥花)란 법명(法名)과 함께 염
주(念珠)를 받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
다.

이후 불교에 귀의하여 말년을 보내다가 1999년 11월 14일, 83세의 나이로 외로운 삶을 마감했
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
막 밤을 보냈으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

중생의 애도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되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을
하얗게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며,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게 장학금을 지원
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이
땅의 상당수 졸부들과 상류층과 달리 그 모든 것을 속세에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는 자손도 없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의 눈물 어린 사
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들
여져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감동의 싹과 눈물을 틔우게 한다.

▲  김영한(길상화)이 숨을 거둔 길상헌

▲  길상화 공덕비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 등 일부를 제외하고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
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등 2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다 보니 딱히 문화유산은 없
고, 다만 200년 정도를 헤아리는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 매년 5월에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다. 법회
때는 고(故)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길
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들
을 위해 쓴다고 한다.

휴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주는데,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봉은
사(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다음급 정도는 될 것이다. (조계사가 방문객 수
는 단연 1등일 듯, 그 다음은 봉은사 정도)

* 길상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선잠로5길68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아래 법정 진영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의 진영(眞影)


♠  길상사 일주문, 설법전 주변

▲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길상사로 들어서려면 '三角山 吉詳寺' 현판을 내민 일주문을 들어서야 된다. 이 문은 2000년
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을 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길상사 경내가 1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게 펼쳐진다.


▲  늦가을이 잔잔히 깃든 경내
늦가을이 길상사와 이곳을 빛낸 인물들을 깊이 흠모했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봉숭아물처럼 곱게 채색을 들였다.

▲  관세음보살과 성모 마리아를 섞은 길상사 관세음보살상

정문에서 설법전으로 가면 늘씬한 자태의 특이
한 석상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맨다. 바로 관세
음보살상이다.
그런데 그 흔한 관세음보살처럼 생기지 않아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하는데,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어루만지는 어진 성모(聖母)와 같은 존
재라 아름답게 꾸며지는 경향이 강하지만 대부
분은 거기서 거기이다. 허나 이곳은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대좌(臺座)로 삼고 그 위에 소박
하고 날씬한 모습으로 곧게 서 있는데, 천주교
의 성모 마리아와 비슷한 이미지로 지어졌다.

이 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
계의 거장인 최종태씨가 만든 것으로 관세음보
살을 보살이 아닌 불모(佛母)로 삼아 만들면서
세상에 화제가 되었다. 2000년 4월 28일에 봉
안되었으며, 높이는 1.8m이다. 비록 보살상의
면모는 떨어지나 불교와 천주교가 서로 돕고
교류하여 이루어진 상징물로 그 가치는 크다.

머리에는 관세음보살이 필수로 쓰는 보관(寶冠)을 썼지만 그 모습은 서양식 왕관과 비슷하다.
머리결은 목 뒤쪽까지 내려갔으며, 얼굴은 자애로운 성모의 얼굴이다.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
인(施無畏印)을 취했으며, 왼손에는 감로수가 든 정병(政柄)을 들고 있다. 그리고 손 아래쪽
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대좌에는 다음의 메세지가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
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범종각 밑에 자리한 샘터

절을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터로 가뭄과 겨울을 제외하고 늘 물로 가득
하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한모금 들이키니 몸과 마음에 낀 때와 번뇌가 싹
씻겨 내려간 듯, 속이 시원하다.


▲  길상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길상사에는 2그루의 늙은 느티나무가 있는데, 윗 사진의 느티나무는 관세음보살 부근에 자리
한 것으로 오랜 세월을 양분으로 먹고 자라 제법 모습을 갖추었다. 경내에 선선한 그늘을 드
리우며 여름 제국도 나무의 기세 앞에 고개를 숙인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65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거의 20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는 12m, 둘레 2.5m이다.


▲  관세음보살 옆에 자리한 일그러진 표정의 마애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추상화 같은 선각마애상(線刻磨崖像)이 꽤 이채롭다.

▲  샘터 위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이름 그대로 범종(梵鍾)의 보금자리로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2009년 9월에 새 종을 만들어 달았다.

▲  설법전(說法殿)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설법전이 자리해 있다. 설법전은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
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불전(佛殿)의 이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
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2000년 8월에 조성된 금동석
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  옆에서 바라본 설법전

▲  설법전 내부


▲  저보다 밝은 표정이 있을까? 미소를 한가득 품은 금동석가여래좌상

볼살이 푸짐한 그의 표정은 너무 환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리며 그 모든 것이 금동으로
장엄되어 그 금빛에 두 눈이 멀 지경이다. 석가여래 주변에는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
백 개의 작은 옥불(玉佛)이 석가여래를 석굴처럼 에워싸 대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  길상사 유일의 석탑인 길상보탑(吉祥寶塔)

설법전 남쪽에는 2012년 11월에 장만한 길상보탑이 길상사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고 있다. 4마
리의 석사자가 7층 탑신(塔身)을 받치고 선 이른바 4사자 7층석탑으로 그가 세워지기 이전에
는 길상사에 그 흔한 석탑도 없었다.
탑이 없는 허전함을 계속 간직하고 있다가 2012년 영안모자 회장이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
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의 교류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탑
을 기증하였고 탑 안에 복장봉안품을 넣었다. 이후 2013년 8월 동남아 미얀마에서 1,600년 묵
은 늙은 탑을 해체하면서 나온 석가여래의 오색정골사리와 옹혈사리, 나한사리를 입수하여 탑
에 넣어두었다.
 
탑이 있는 이 자리는 '바람 속 향기' 쉼터가 있던 곳으로 자판기 길다방과 음료수, 조촐한 평
상이 있었는데, 탑에게 밀려나 2012년 10월 정랑 서쪽으로 거처를 옮겼다. 탑은 보통 법당 앞
에 세우기 마련인데, 이곳은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을 내주어 탑을 세웠다. 그렇
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것도 결코 아닌데, 아마도 다른 탑을 염두에 두고 그러는 것은 아닌
지 모르겠다.


♠  길상사 극락전, 지장전

▲  극락전(極樂殿)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
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있고, 우측 칸에
는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좌측 칸은 중생들
이 예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좌측 칸에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시 잊으며 쉬어가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 미닫이
씩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면 정말 집 주인이나 마님이 된 기분이다.


▲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상

극락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상은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년 11월에 조성되
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존재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으로 중
생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의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
이 있으며, 왼쪽에는 보관을 쓴 관세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상을 이룬다.
두 협시불(夾侍佛)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으며, 그들 뒤로 비슷한 시기에 제
작된 금니(金泥)후불탱화가 있다.


▲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볼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  극락전 느티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호
60~70년 정도 묵은 느티나무로 대원각 초창기나 그 이전에 싹을 틔운 것으로 보인다.
계림황엽(鷄林黃葉)처럼 누렇게 뜬 낙엽을 하나, 둘 떨어뜨리며, 허전한
극락전 뜨락을 덮어준다.

▲  코스모스의 마지막 물놀이 현장
그들 생애의 마지막 물놀이지만 그들의 표정은 명랑하기만 하다. 마지막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으로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마치 길상화 공덕주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듯 하다.

▲  길상사의 또 다른 늙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5호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인 느티나무가 둥지를 틀었다. 보호수로 지
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7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300~31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는 12m, 둘레
3.2m 규모이다.


▲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과 지장전이 있다. 설법전과 극락전이 기존 요정 건물
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로 장만한 것으로 2004년 10월 17일, 상량식(上樑式)을
가져 2005년 5월 8일에 완성을 보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
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놓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  지장전 지장보살상

지장전 불단에는 고창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만든 지장보살상이
밝은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협시하
고 있으며, 붉은 색의 지장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후광(後光)이 되어준다.

◀  아미타불 염불이 잔잔히 울려퍼지는 지장
전의 숨겨진 복도 (영가들의 공간)

지장보살 불단과 그 앞에 펼쳐진 공간이 지장
전의 전부는 아니다. 불단 좌우로 보이는 문을
들어서면 불단 뒤쪽에 숨겨진 복도가 마치 보
물이 묻힌 비밀의 석실(石室)처럼 모습을 드러
낸다.
이곳은 죽은 이들, 즉 영가(靈駕)들의 공간으
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물론 이들도 돈을 받고 해준 것이다.
동쪽 벽에는 고운 색채로 치장된 석가3존상 벽
화가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폭이 조금 좁다보
니 꽤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의 심금을 자극시키며 잔잔히 흘러 나오는 아
미타불 염불(念佛)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도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지장전 영가들의 공간에 그려진 벽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는 벽화에 석가여래와 아리따운 모습의 관세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월출
산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나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의 후불관음탱화, 세계 최고
의 불화로 손꼽히는 고려불화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나누는 기쁨' 찻집

지장전 좌측에 자리한 '나누는 기쁨' 찻집은 녹차와 매실차, 국화차 등 두 귀에 익은 전통차
를 팔고 있다. 길상사 찻집으로도 불리며 보통 16~17시까지 운영하는데, 차의 가격은 인사동
이나 삼청동의 절반 정도 수준이다. 예전에는 리필이 가능했으나 요즘에는 거의 안해주는 편
이며, 가격도 괜찮은 수준이니 잠시 발길을 멈추고 차 1잔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괜찮다.


▲  계곡 건너 숲속에 묻힌 길상헌(吉詳軒)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다.
김영한이 마지막 밤을 지내며 인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며, 건물 주위를
돌담으로 둘러싸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임을 귀뜀해준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꽤 높다. 나무들
이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북한산(삼각산) 남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길상사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러간다. 나무로 우거진 언덕에는 조그
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요정 시절 손님 접대 공간으로 지금은 승려 참선 및 처소로 쓰인
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3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어른 승려가 머
무는 길상헌이, 그 다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가 있다. 그 다음 다리는 나무그늘과
조그만 집들로 이어진다. 경내 북부에는 법정을 기리는 진영각과 승려의 생활공간이 있으며,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유마선방 등이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길상사 마무리

▲  창건주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예전 모습)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웠다. 비석을 칭하고 있
지만 앞서 관세음보살상처럼 이형(異形)적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년 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골을 뿌렸다. 

나도 나중에 졸부들 못지 않은 대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인생 말년에 모든 것
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은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보
다는 우선 돈좀 왕창 벌어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 그렇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이가 절단나는
법이다.


▲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貞陵)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
을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동천(吉詳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을 매입해 대원각을 지었다고 전한다.

계곡 바위는 신선(神仙) 세계에서 몰래 슬쩍한 듯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한다. 조그만 폭포도
2개 정도 있는데, 물줄기가 실타래처럼 가늘어 속세의 삶처럼 너무 답답하기만 하다.


▲  경내 북서쪽 언덕에 터를 닦은 집들 -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  경내 북쪽 산책로

경내 북서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
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
길, 내소사(來蘇寺) 전나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
는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  길상사 진영각(眞影閣)

경내 북쪽 구석이자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의 유품이 전시되어있다.
이 집은 원래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행지실(行持室)이라 불렸는데, 2012년 7월부터 법정
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손질하여 11월에 마무리를 보았다. 그가 살았던 강원도의 오두막(수류
산방)에서 쓰던 유품을 비롯해 신도들이 기증한 저서와 서적을 모았고, 개방을 하지 않고 보
류하다가 그의 3주기인 2013년 3월 7일(음력 1월 26일)에 진영 봉안식을 봉행하면서 비로소
속세에 문을 열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법정을 기리는 공간은 필요로 했다. 그의 손에서 자란 길상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겠지. 그러고 보면 이 절을 탄생시킨 길상화를 위한 건물도 하
나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길이길이 기렸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법정이 이 절을 키워도 길상화가 아니었다면 길상사 자체는 없었다.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에 못지 않게 1:1 비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그게 길상사의 마
땅한 도리이다.


▲  진영각에 봉안된 법정의 진영

법정 진영은 김호선 화백이 2011년 3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정성을 다해 그린 것이다. 전 문
화재청장이던 유홍준이 이 그림을 보고 스님이 그림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 같다고 평
가를 했는데, 서예가로 유명한 여초 김응현의 제자인 승려 기현(奇玄)이 진영의 글씨와 진영
각 현판을 썼다.


▲  법정의 사진과 유품, 온갖 서적들

▲  법정의 승려증과 건강보험증 (주민번호도 나와 있음)

▲  법정 관련 서적과 그가 쓰던 다기(茶器)들

▲  법정의 유품들 (불상과 그림, 모자 등)

▲  법정의 유품들 (승복, 염주, 법계증)

▲  법정의 법계증(法階證)


▲  법정의 유골이 뿌려진 곳

무소유의 소유자답게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참 조촐하기만 하다. 제자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 흔한 승탑(僧塔, 부도탑)도 두지 않고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의 일부로 돌아갔기 때
문이다. 조그만 안내문과 돌탑, 그리고 그의 넋을 먹고 자란 꽃과 풀이 그의 영혼터임을 알려
준다.


▲  길상선원(吉祥禪院) 앞길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  길상선원 부근에서 만난 법정의 어록

▲  여염집 분위기 같은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 작업 등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간판을 갈았다.

▲  적묵당 앞 동그란 연못 (가을)
물이 태산처럼 고인 연못에는 한 세상 진하게 살다간 연들이
쓸쓸히 잎을 접고 있다.

▲  길상선원에서 설법전으로 가는 길 - 동네 골목길 같다.

▲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시
부터 17시(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인원이 찼
을 경우는 방이 빠질 때까지 목이 빠져라 기다려야 된다.

길상화의 숭고한 뜻과 법정의 무소유 정신, 중생구제를 향해 고행도 서슴치 않았던 석가여래
와 관세음보살 누님, 지장보살 형님의 고귀한 뜻에 따라 세상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로
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세속과 겉멋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불교 도량이자 도심 속의 극락,
길상사로 남기를 고대하며 본글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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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정릉을 지키던 조선왕실 최초의 원찰인 돈암동 흥천사 (돈암동 느티나무)

돈암동 흥천사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돈암동 흥천사 '
돈암동 흥천사
▲  흥천사 전경



 

흥겨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을 며칠 앞둔 어느 평화로운 봄날, 돈암동
(敦岩洞) 흥천사를 찾았다.

돈암동 산자락에 깃든 흥천사는 내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로 이미 20번 이상 발을 들였다.
첫 인연이었던 1990년대 초에는 소장 지정문화재가 2개(극락보전, 명부전)에 불과했으나
조선 중/후기 탱화와 불상, 보살상을 많이 지니고 있다보니 나날이 지정문화재가 늘어나
이제는 국가 보물 1점, 등록문화재 1점을 포함해 무려 20점 이상을 간직하게 되었다.
하여 지정문화재가 새로 생겼다는 풍문을 전해 들을 때마다 그것을 확인하러 왔고, 석가
탄신일에도 여러 번 찾아가 그곳의 후한 초파일 인심(공양밥, 떡 공양)을 누리기도 했다.
게다가 내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악산길 동쪽 기점에 자리해 있고, 우리집과도 20리 거리
로 가까워 둘 중에 하나가 사라질 때까지는 인연이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  흥천사 입문

▲  봄내음이 진하게 서린 돈암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4호

흥천사입구(돈암2동 주민센터)에 이르니 장대하게 솟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내밀며 반
갑게 마중을 한다.
그는 높이 10m, 둘레 2.4m로 약 380년 정도 묵었다. (1988년 7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50년) 나무 주변에는 흥천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마을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준 존재로 왕년에는 나무 그늘에 장승과 돌탑도 있었다고 전한다.
허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거친 칼질이 흥천사 주변을 적지 않게 갈아엎으면서 나무 밑
에 있던 장승과 돌탑도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싹 사라져버렸다. 나무 역시 개발의 칼날을
잘못 맞아 골로 가기 직전인 것을 동네 주민과 흥천사 승려가 합심해 정성스럽게 보살피면서
다행히 생기를 되찾았다.

2014년 정자나무 가꾸기 사업으로 주변이 산뜻하게 정비되었으며, 흥천사를 알리는 오랜 이정
표이자 동네 사람들의 정자나무로 그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  느티나무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옛 일주문 자리)

느티나무를 지나면 잘 닦여진 길이 나타난다. 도로 차단봉이 설치된 지점 쯤에 흥천사의 정문
인 일주문(一柱門)이 있었는데, 2014년에 경내를 정비하면서 밀어버렸다. 일주문은 절의 거의
필수 요소임에도 있던 일주문을 밀어버려 일주문이란 존재 자체를 지운 것이다.

느티나무에서 흥천사 경내로 향하는 길 북쪽 언덕에는 숲이 우거져 있다. 숲 서쪽 7층석탑 주
변과 삼각선원 주변에는 속인(俗人)들의 집이 즐비했으나 2011년 이후, 흥천사에서 매입해 말
끔하게 정리했다. 그때 이곳에 살던 사람들(거주자 22가구, 세입자 60여 세대)에게 이사 비용
과 생활비까지 보태어 이주를 시켰다고 하니 인심도 넉넉히 베푼 모양이다. 하긴 절이 중생에
게 야박하게 굴면 못쓰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바로 종교와 절의 역할이 아니던가? 그
역할을 외면하면 그건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  주차장 북쪽에서 바라본 흥천사 대방
대방이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어서 보이는 것은 별로 없다. 그 뒤로 높이 솟은
한신한진아파트가 묵묵히 절을 굽어보고 있다.

▲  오색 연등을 두룬 7층석탑
탑신(塔身)이 위로 올라갈 수록 일정하게 줄어드는 균형 잡힌 맵시를 자랑한다.


주차장에서 정릉(貞陵)으로 넘어가는 길목 오른쪽 숲속에 잘생긴 7층석탑이 있다. 파리도 미
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부를 지닌 그는 관음전 옆에 있었으나 2014년에 그 자리에
요사(寮舍)와 선원을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밀려났다.
흥천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원래 탑은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인데, 법당(극락보전) 앞 자리가
협소해 경내 밖까지 나온 것이다.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을 위해 오색 연등으로 몸을 치장한 석탑 옆에 서면 흥천사 경내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흥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7층석탑 주변에서 바라본 흥천사

서울 시내 한복판인 돈암동 산자락에 둥지를 튼 흥천사는 '삼각산(북한산) 흥천사'를 칭하고
있다. 여기서 북한산은 다소 떨어져 보여 고개가 갸우뚱거릴 수 있지만 성북동(城北洞)과 돈
암동 산자락도 엄연히 북한산 남쪽 끝자락에 해당되어 삼각산 흥천사를 칭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1. 조선 왕실 최초의 원찰(願刹) 흥천사의 탄생
1396년 태조(太祖)의 왕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가 세상을 뜨자 태조 이성계는 도성(都
城) 밖도 아닌 경복궁(景福宮) 근처 황화방(皇華坊, 정동 미국대사관과 러시아공사관터 일대)
에 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을 조성했다.
그리고 정릉 동쪽 취현방 북쪽 언덕(덕수초교와 서울시의회 일대로 여겨짐)에 정릉의 원찰을
세우니 그것이 조선 최초의 원찰, 흥천사이다. 흥천사는 1397년 1월 공사에 들어가 그해 9월
170칸 규모로 완성을 보았는데, 공사 감독은 건축 경력이 상당했던 김사행(金師幸)과 김주(金
湊)가 맡았으며, 태조는 공사기간에 수시로 현장을 찾아 일꾼들을 격려하고 돈과 식량을 두둑
히 내리는 등 많은 신경을 썼다.

절이 완성되자 초대 흥천사 주지로 상총(尙聰)을 임명했으며, 조계종(曹溪宗)의 본산(本山)으
로 삼았다. 그리고 밭
250결을 내려 절 유지비에 쓰도록 했으며, 절 전각 기둥과 서까래까지
모두 금단청을 입혀 그야말로 금빛 찬란했다고 전한다.
태조는 신덕왕후를 얼마나 그리워했던지 매일 아침 흥천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어야 비
로소 밥숟가락을 들었다고 한다.

2. 억불숭유(抑佛崇儒) 속에서도 번영을 누린 흥천사
1398년 6월, 태조는 흥천사에 3층석탑을 세워 통도사(通度寺)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했다. 그리고 그 탑의 집으로 8각형의 사리전
(舍利殿)을 장엄하게 지었는데 건물이 완성
되자 태조를 우란분재(盂蘭盆齋)와 신덕왕후의 수륙재(水陸齋)를 성대하게 열었다. 사리전이
얼마나 화려하고 대단했던지 그 시절 서울의 대표 명소로 인기가 대단했으며, 그것을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고 전한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은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계모(季母)의 정
릉에 스트레스를 풀었다. 하여 정릉 석물을 동원해 광통교(廣通橋) 공사와 태평관(太平館) 보
수에 썼으며, 1409년 능을 정릉동으로 추방시켜 사람들의 뇌리에게 잠시 잊혀지게 만들었다.
허나 흥천사는 절을 잘 지켜달라는 부왕의 유언으로 정릉의 원찰 자격을 거두고 절의 노비와
밭의 면적을 줄이는 선에서 끝냈다. 허나 태평관을 철거하면서 남게된 밭과 노비를 흥천사로
넘기면서 오히려 밭과 노비수가 증가했으며 1410년 절을 수리하고 1411년 사리각을 중수했다.

세종 때는 1424년 각 종파를 통합 정리하여 흥천사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삼았으며, 전
답을 두둑히 내리면서 승려 120명이 머무는 큰 절로 성장했다. 1435년과 1437년 절을 수리했
으며, 1440년에는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했다.

1441년 3월, 절 중수공사가 끝나자 5일 동안 경찬회(慶讚會)를 열었으며, 1447년 세종은 3번
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시켜 사리각에 불골(佛骨)을 봉안하게 했다. 그리고 1449년
가뭄이 심하게 들자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며칠 뒤 비가 내려 전국을 적시면서 세종
은 너무 기뻐 절 승려 140명에게 상을 내렸다.
불교를 신봉했던 세조(世祖)는 큰 동종을 만들어 하사했으며, 1469년 명나라 황제가 불번(佛
幡)을 보내오자 이를 흥천사에 봉안했다. 그리고 1480년 절을 크게 중수했다.

흥천사는 도성 안에 자리한 잇점으로 많은 사대부와 선비들이 찾아와 공부를 했는데 황희(黃
喜)의 아들인 황수신(黃守身, 1407~1467)도 여기서 공부하다가 나중에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
(忠 寧大君)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충녕은 막힘없이 글을 외우는 황수신에게 퐁당퐁당 반해
나중에 왕위에 오르자 그를 불러 종7품 종묘서부승직을 내리기도 했다.


3. 흥천사의 비참한 최후

세조 이후 왕실의 지원이 감소하면서 잘나가던 흥천사에 서서히 적신호가 켜지게 된다. 연산
군(燕山君)은 1503년 궁궐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흥천사의 건축자재 일
부와 불상을 양주 회암사(檜巖寺)로 옮겼다. 그리고 절에 궁궐의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司僕
寺) 관아를 설치하여 절의 적지 않은 고통을 주었다.

1504년 화재로 사리전을 제외한 건물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으나 복구하지 못했으며, 1510년
3월, 4부학당 유생들이 불교 배척을 외치며 야음을 틈타 불을 지르면서 남아있던 사리전까지
모두 아작내었다. 왕실의 원찰임에도 그 지경이 된 것을 보면 왕실의 무관심이 대단했던 모양
이며, 절 자리는 집 없는 사대부에게 고루 분배되면서 흥천사는 잠시 말끔히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최후를 맞은 흥천사는 세조 때 조성된 동종(銅鍾, 보물 1460호)만 살아남았고. 그마저
도 제자리를 잃고 동대문과 광화문을 방황하다가 덕수궁(경운궁) 광명문(光明門)에서 남은 여
생을 보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쓴 흥천사 현판

▲  흥선대원군이 쓴 흥천사 현판

▲  흥천사 극락보전

4. 신흥사에서 다시 태어난 흥천사, 다시 정릉과 이웃이 되다.
1569년 정릉 인근 함취정(含翠亭)터에 정릉을 지키고 제를 지내는 조그만 절이 왕명으로 지어
졌다. 절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1669년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정릉을 중수하고 능역(陵域
)을 넓히면서 절을 석문 밖으로 옮기고 절 이름을 신흥사(新興寺)라 하여 옛 흥천사의 뒤를
잇게 했다. 1738년 불전을 새로 조성했으며, 이후 절이 퇴락하게 되자 성민(聖敏)과 경신(敬
信)이 정릉을 지키는 능참봉(陵參奉)에게 건의하여 전국에 권선문(勸善文)을 돌려 협찬받은
돈과 폐사된 은석사의 목재로 1794년에 현 자리로 이전해 절을 크게 중창했다.
1846년 구봉(九峰)이 칠성각을 세웠으며, 1849년에 성혜(性慧)가 절 서쪽에 적조암(지금은 분
리됨)을 세웠다. 또한 1853년 극락보전을 중수했으며, 1855년 명부전을 지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지원으로 전국 8도에서 시주를 받아 크게 중창했다. 대원군
은 신흥사와 정릉이 이웃한 점을 들어 중종 때 없어진 '흥천사' 이름을 다시 쓰게 했는데, 이
로써 흥천사 이름 3자는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이때 이름 변경 기념으로 대원군은 친히 '흥
천사' 편액을 내렸다. (1794년 지금의 자리로 절을 이전하면서 새로운 흥천사란 뜻에서 신흥
사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흥천사로 거듭난 이후 왕족과 사대부, 궁궐 상궁의 발길이 늘었으며, 1891년 42수 관음보살상
을 봉안했다.


5
. 조선의 마지막 황후가 머물던 왕실의 원찰, 그리고 현재
1933년 독성각이 불타자 이듬해 재건했다. 그리고 1942년 종각을 새로 지었는데, 이때 오세창
(吳世昌)이 종각 현판을 선물했다.
6.25 때는 격전지인 미아리고개가 지척임에도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화를 면했으며, 순종(純
宗)의 황후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 윤씨가 여기서 힘
겨운 피난 생활을 하였다. 그때 윤씨는 양식 1홉으로 하루를 지냈는데, 그 1홉에서 매일 1줌
씩을 떼어 향과 초를 사들고 기도를 올렸다고 전한다.

왜정(倭政) 때는 혼인한 승려와 그 가족들이 절 주변에 거주하면서 주변이 산만해지기 시작했
는데, 6.25 이후 경내 옆까지 민가가 밀려들어왔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추진한 불교정화운
동부터 조계종과 사찰 관리를 두고 오랫동안 갈등을 빚으면서 오랫동안 방황을 겪는다. 그러
다가 2011년 흥천사 주지로 들어온 금곡 정념이 스승인 무산오현의 뜻을 따라 많은 돈을 들여
22가구와 세입자 60여 세대를 이주시키면서 경내를 온전히 보전했다.
민가가 떠난 자리에는 2014년에 삼각선원을 크게 지었고, 극락보전과 대방을 중수했으며, 경
내를 꾸준히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명부전, 대방(만세루), 용화전, 독성각, 용화전, 삼각선
원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절은 서남쪽으로 산을 등지고 있어 대방과 극락보전은 동
북쪽을, 명부전은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인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과 국가 등록문화재인 대방을 비롯해
극락보전, 명부전,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판(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板.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379호
), 도량장엄번(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2호), 약사불도(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6호),
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4호) 등 지방문화재 20여 점을 지니고 있어
절의 풍부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이곳은 산사이긴 하나 턱밑과 머리 윗쪽까지 밀려온 개발의 칼질 앞에 고즈넉한 산사의 농도
가 다소 떨어졌다. 심지어 아파트들이 절 윗쪽까지 들어서 절을 굽어보고 있는 실정이며, 절
을 둘러싼 숲도 예전 같지가 않다.
흥천사는 조선 최초의 원찰로 의미가 깊으며, 비록 100여 년의 공백기가 있으나 조선 왕실의
지원으로 자라난 절의 하나이다. 또한 번잡한 도심 속에 박혀 있지만 정작 절로 들어서면 겉
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차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윽하며, 흥천사의 영원한 단짝인 정
릉과도 가깝고 이정표도 잘 정비되어 있어 같이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게다가 절 뒷쪽에 도심의 하늘길, 북악산길이 흐르고 있으니 여기서 북악산길 트래킹을 시작
하는 것도 괜찮다. 또한 10월 중순에는
흥천사 느티나무 광장과 주차장 일대에서 돈암동 느
티나무 축제가 열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2동 595 (흥천사길 29 ☎ 02-929-6611~12)


 

♠  흥천사 대방과 명부전

▲  흥천사 대방(大房) - 등록문화재 583호

내 핵심부를 가리며 동북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방은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특이하게 'H'
구조를 취하고 있다.
대방이란 왕실 원찰에서 주로 지니고 있는 특별한 건물로 왕족과 귀족들의 예불과 숙식 편의
를 위해 지어졌다. 숙식을 하는 방과 예불 공간, 부엌, 누(樓) 등을 갖추고 있으며, 높은 것
들의 편의 외에도 신도와 승려들의 숙식, 예불 공간의 역할도 하였다. 또한 법당(극락보전)
앞에 자리하여 경내가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가리는 역할도 했다.

이 건물은 1865년에 지어진 것으로 만세루
(萬歲樓)라 불리기도 하는데, 흥선대원군이 남긴 흥
천사 현판이 있으며, 대방 가운데에는 너른 방이 있고, 그 좌우로 여러 방들이 있어 대방이란
이름을 무색하지 않게 한다.
2016년에 해체 복원에 들어가 2019년에 마무리를 지었으나 시멘트를 이용하고 부실하게 손질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해 복원이 되었음에도 오랫동안 비워두다가 2020년 석가탄신일부터 부
분 공개를 하고 있다. 이곳에는 많은 불상과 보살상, 탱화가 있었으나 공사로 인해 관음전과
극락보전 등 주변 건물로 모두 흩어졌다.

▲  대방 정면에 걸린 흥천사 현판

▲  대방 우측의 옥정루(玉井樓)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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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방 좌측의 서선실(西禪室) 현판

▲  대방의 다른 이름, 만세루 현판
1926년(병인년) 악질 친일파 송병준의
아들인 송종헌(宋鍾憲)이 쓴 것이다.


▲  흥선대원군이 쓴 흥천사 현판의 위엄
1865년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흥천사로 갈게 하면서 그 기념으로 남긴 현판이다.
대원군의 체취가 서린 필체로 글씨가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다.

▲  대방의 듬직한 뒷모습

▲  종각(鐘閣)
1942년에 지어진 것으로 범종의 거처이다.

▲  오세창 선생이 남긴 종각 현판
현판 글씨가 마치 사람 모습 같다.


▲  흥천사 명부전(冥府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7호

대방 서쪽에는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동남쪽을 향하고 있는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1855년에 승려 순기(舜猉)가 세운 것을 1894년에 중수했다.
건물 좌우로 풍판을 달았으며, 평방(平枋) 윗쪽에는 공포를 촘촘히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으
로 기둥 위에는 밖으로 용머리를, 안쪽에 용꼬리를 새겨 건물의 품격을 높였다. 그리고 건물
내부에는 판형(版型)으로 운봉(雲峰)을 장식했다.

조선 후기 사찰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서울에 몇 없는 오래된 불교 건물로 명부
전의 현판이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점이 매우 이채로운데, 보통 현판의 색깔인 검은색 바
탕이 아닌 붉은색 바탕에 글씨가 쓰여 있어 마치 중원대륙 양식의 건물을 보는 듯 하다.


▲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5호

명부전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석조
지장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이름 그대로 돌로 만들어 도금과 색을 입힌 것으로 그 좌우로 시
왕상(十王像), 귀왕(鬼王) 2구, 사자(使者) 2구, 판관(判官) 2구, 금강역사(金剛力士) 2구,
동자상 6구 등 27구가 명부전 식구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흥천사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이란 기나긴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명부전의 주인인 지장보살상은 84.5cm의 보살상으로 푸른 민머리를 지니고 있다. 몸통과 같이
조각된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에 둥근 보주(寶珠)를 들고 있으며, 왼손은 편
상태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손의 형태는 조선 후기 석불상과 석조보살상에서 많이 등
장한다. 푸짐한 인상의 각진 얼굴에는 가늘게 뜬 눈과 살짝 구부러진 눈썹, 미소를 머금은 입
, 길쭉한 귀를 지니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대의(大衣) 안쪽에 편삼(扁衫)을 걸쳤고, 대의 자락이 오른쪽 어깨를 덮고 팔꿈치와 배를 지
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있으며, 왼쪽 어깨의 대의 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배에서 편삼과
겹쳐져 있다. 아랫도리를 덮은 옷자락은 배에서 앞으로 한 가닥의 옷주름이 늘어져 있고, 그
옆으로 낮은 옷자락이 펼쳐져 있다.
대의 안쪽에 가슴을 가린 승각기(僧脚崎)는 상단이 수평이고, 내부에 대각선으로 간략하게 접
혀 있다. 보살상의 뒷면은 목 주위에 대의를 두르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 자락이
늘어져 있다.

지장보살 좌우에 자리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은 자리가 낮아서 그렇지 지장보살과 덩치가
비슷하다.
그들 좌우로 왼쪽에 시왕 중 홀수 대왕 5명을,
오른쪽에 짝수 대왕 5명을 배치하여 시왕상을
이루고 있으며, 시왕상 사이로 동자상을 두고,
그 앞에는 귀왕과 판관을 배치했다. 그리고
문 앞에는 무기를 든 사자와 금강역사가 자리
해 명부전 식구들을 지킨다.

▲  사자상과 금강역사상, 사자도

▲  명부전 시왕상과 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23호)

시왕을 머금은 시왕상은 패널에 오려 붙인 형식으로 1/3왕과 5/7/9왕, 2/4왕, 6/8/10왕이 한
세트를 이루고 있다. 5/7/9왕, 6/8/10왕이 그려진 화기(畵記) 일부가 사라졌으나 '유(酉)'가
남아있어 1885년 을유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화기를 통해 상궁이 시주하여 흥천사에 봉
안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19세기 말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시왕도 양식으로 봉국사(奉國寺) 시왕도(1872)와 화
계사(華溪寺) 시왕도(1878) 등이 비슷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림 상단에는 시왕을 중심
으로 심판 장면이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지옥 장면이 펼쳐져 있다.

상단에는 병풍을 배경으로 시왕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크게 표현되어 있으며, 시왕 주위
난간과 계단 밑에 권속들이 서 있다. 옥졸(獄卒)은 창과 같은 무기류를 들고 있으며, 판관은
복두를 쓰고 우산이나 부채를, 동자는 벼루와 두루마리, 책을, 천녀는 부채를 들고 있다. 하
단에는 지옥의 형벌 장면이 가득 채워져 보는 이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다. 즉 착하게 살라는 흥천사와 시왕도의 뜻이다.


▲  명부전 윗쪽에 걸린 괘불함(掛佛函)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2호

명부전 가운데 칸 문 위쪽에는 시커먼 피부의 길쭉한 나무 상자가 걸려있으니 그가 비로자나
삼신괘불도의 보금자리인 괘불함이다. 이곳 괘불은 서울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1832년
작(作)으로 예전 석가탄신일에 친견한 추억이 있다.
괘불은 만나기가 꽤 어려운 까칠한 존재로 그를 보고 싶다면 석가탄신일(가급적 15시 이전까
지)을 이용하기 바란다. 그날은 날이 날인지라 95% 이상 외출을 나온다. 만약 평일이나 일반
휴일에 외출을 나온 그를 봤다면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반드시 복권을 구입하기 바란다.

흥천사 괘불과 괘불함은 '흥천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 및 괘불함'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372호
로 지정되어 있다.


▲  명부전 뒷통수에 깃든 벽화 5점
반야용선을 이끄는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하늘을 나는 천녀(天女),
호랑이를 타고 질주하는 승려 등이 그려져 있다.

▲  극락보전 서쪽 바위에 깃든 관세음보살상과 산신상(왼쪽 감실)

극락보전 서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있는 바위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의 끝에 구멍
이 여럿 패인 바위가 있고, 그곳에 하얀 피부를 지닌 맵시가 고운 관세음보살과 조그만 산신
상이 둥지를 틀고 있다.
자애로운 표정을 지닌 관세음보살은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데, 그 옆 바위에 감실(龕室)을 파
서 산신과 호랑이를 두었으며, 유리로 그 감실을 봉해버려 답답하게 갇혀 있는 모습이다. 그
들을 품은 바위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절이 있기 전에는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흥천사의 보물 창고, 극락보전(極樂寶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6호

대방 뒷쪽에는 흥천사의 법당인 극락보전(극락전)이 대방의 뒷꽁무니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
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1853년에 구봉계장(九峰啓壯)이
지었는데, 경내에서 가장 늙은 집으로 처음에는 대웅전(大雄殿)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극락보전으로 이름이 갈렸는데, 흥천사는 창건 초부터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을 중심 불상으로 삼았다고 전하며, 극락보전이란 그 아미타불의 거처를 일컫는다.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밑에서 보면 제법 장엄하게 보이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
이에 촘촘히 박힌 다포 양식으로 건물 좌/우/뒷면은 판벽(板壁)으로 사천왕(四天王)을 비롯한
여러 벽화가 그려져 있다. 건물 정면 3칸에는 마치 그림 판화를 긁어놓은 듯, 온갖 꽃과 나무
무늬(꽃살 창호)가 색채감 가득히 새겨져 있으며, 가운데 두 기둥 위에는 용머리 장식을 두어
건물을 수식한다.

앞서 명부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사찰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화려한 장식과 그 시
절 뛰어난 건축 기술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서울에 얼마 없는 조선 후기 사찰 건축
물로 그 가치가 높아 일찌감치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벽화가 그려진 극락보전의 뒷모습
건물 좌/우/뒷쪽 외벽에는 여러 벽화를 담아 법당을 곱게 수식하고 있다.

▲  극락보전의 빛바랜 일기장 '흥천사 대웅전 불량대시주(佛糧大施主)' 현판
1899년에 쓰여진 것으로 극락보전의 옛 이름이 대웅전이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  1972년에 제작된 흥천사 개금불사시주기

▲  망국의 황자(皇子), 영친왕이 5살 때 흥천사에 남긴 현판

영친왕<英親王, 영왕(英王) 1897~1970>은 고종의 7번 째 아들로 1901년에 흥천사를 방문해 글
씨 하나를 남겼다. 물론 수행원과 승려의 간청에 의해 그리 했을 것이다. 현판에는 '王孝 天
地玄黃金雨孝王海史. 英親王殿下五歲書, 大韓光武五年'이라 쓰여 있으며, 저 글씨 중 '王孝天
地玄黃金雨孝王海史'만 영친왕의 필적이다.
지체 높은 왕자의 친필인지라 특별히 법당 천정에 걸어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아무리 황제의
아들이 쓴 글씨라고 해도 4살 어린이가 쓴 글씨답게 천진난만함이 가득 묻어 나온다. 글씨가
다소 흐트러져 보이긴 하나 그 나이에 저 정도의 글씨를 썼을 정도면 어린 시절 총기가 조금
있었던 모양이다. 허나 현실은 망국의 황족...


▲  극락보전의 화려한 붉은 닫집과 보물들이 가득한 불단

극락보전 내부는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불단에는 목조여래좌상(아미타여래)
과 목조보살좌상, 천수관음보살좌상이 있으며, 그 뒤로 아미타불도, 그 위로 붉은 기와의 닫
집이 호화롭게 지어져 있다.
불단 좌우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온갖 탱화들이 가득 깃들여져 있으며, 천정에도 고운 색
채의 벽화가 넉넉히 깃들여져 있어 극락보전은 그야말로 흥천사의 보물 창고이자 불교미술박
물관이다. 그러니 흥천사에 왔다면 극락보전 내부는 꼭 둘러봐고 또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흥천사의 얼굴과 같은 존재이며, 흥천사의 지
정문화재 40% 정도가 이곳에 들어있다.


▲  왼쪽 목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4호)
가운데 목조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3호)
오른쪽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보물 1891호)
후불탱화인 아미타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7호)


극락보전 불단 중심에 자리한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은 입힌 아미타여래(阿彌陀
如來像)이다.
좌우 협시로 자리한 목조보살좌상과 금동천수관음보살보다 덩치가 많이 밀려 그가 과연 중심
불상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들보다 앉아있는 대좌(臺座)를 더 높였으나 그래도 많
이 밀려 다 큰 어른들 사이에 아이가 앉아있는 것 같다.

목조여래좌상은 56.3cm 높이의 불상으로 허리가 유난히 길고 어깨가 넓은데, 이는 조선 초기
불상에서 많이 나오는 특징이다. 얼굴은 약간 내밀어 밑을 보는 자세이고, 덩치에 비해 얼굴
이 너무 작으며, 머리의 측면 폭은 또 넓다.
무견정상(육계)은 낮게 솟아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콧날은 오똑 솟아있고 입술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가사를 2벌 겹쳐 입었는데, 오른족 어깨에 부견의(覆肩衣)를 걸치고, 대의 자락이 왼쪽 어깨
뒤로 넘겨져 늘어졌다. 앞가슴은 U자형으로 열려있고 안에 입은 승각기(내의)가 접혀저 사선
의 주름을 이루고 있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두 다리를 덮은 옷자락은 오른발을 반쯤 덮
고 무릎 아래로 흘러내렸다.
수인(手印)은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으며, 불상 뒷면에는 네모난 복장유물 공간이 있는
데, 여기서 지본묵서 다라니경 2건과 발원자명이 쓰인 목판이 나왔다.

불상의 이런 스타일은 1606년에 조성된 공주 동학사(東鶴寺)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비슷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동학사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 석준
(釋俊)
각민(覺敏) 등이 조성하거나 그 계열에서 만든 것을 19세기 중기 이후에 흥천사로 흘러들
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 옆에 연꽃을 든 화려한 보관(寶冠)의 목조보살상은 앉은 키 101.5cm 크기로 보관에는 정면
을 향해 날개짓을 하는 봉황 2마리가 좌우대칭을 이루며, 꽃무늬와 연화문(蓮花紋) 장식이 붙
어있고 상단에 5개의 화염문과 측면 좌우로 관대(冠帶)가 매달려있다. 그리고 보관 겉면에 여
러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있어 장식 일부가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무견정상이 솟아있고, 보관 밑 이마에 머리카락이 단정히 처리되어 있으며, 머리카
락이 어깨 위까지 내려와 3가닥으로 늘어져 있다. 머리는 어깨에 비해 크나 상반신이 지나치
게 길고, 하반신은 넓으며, 명상이나 졸음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의 눈꼬리가 많이 올라가
있고, 코는 뾰족하고 콧등은 짧다. 그리고 이마에는 큰 백호가 찍혀져 있다.
두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무릎에 놓인 오른손과 어깨까지 치켜든 왼손에 연꽃이
달린 줄기를 들고 있다. 대의 안쪽에 편삼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 자락이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끝자락이 엉덩이까지 늘어져 있다. 내의(승각기)는 상단이 자연스
롭게 접혀 있다.

그의 조성 관련 기록은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으나 그의 스타일을 볼 때, 15~17세기에 조성된
불/보살상과 많이 비슷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19세기 중기 이
후에 흥천사로 흘러들어와 극락보전 식구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단 식구들 뒤에 조용히 깃든 아미타불도는 1867년에 그려진 것으로 경상도 화승(畵僧)들이
여럿 참여해 19세기 말 경상도 화풍이 만힝 반영되어 있다. 왕실 상궁인 조씨와 안씨, 천씨
등이 고종(高宗) 내외의 안녕과 무강을 빌고자 돈을 대어 만든 것으로 19세기 말 서울 지역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왕실과 절과의 후원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  확대해서 바라본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보물 1891호)의 위엄

극락보전 보물 중 가장 백미(白眉)는 복잡하게 생긴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이 아닐까 싶다. 연
꽃을 든 목조보살좌상보다 덩치는 작으나 무수한 손과 팔의 무리가 관세음보살상 덩치만해 비
록 키는 딸려도 덩치는 목조보살좌상과 비슷해 보인다.

이 보살좌상은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42수 천수관세음보살(千手觀世音菩薩)로 1894년에 작성
된 '삼각산 흥천사 42수(手) 관세음보살 불량시주(佛糧施主)' 현판 기록을 통해 19세기부터
흥천사에 있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성 시기는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우나 얼굴 모습이나 잘록
한 허리 등의 형식을 통해 고려에서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천수관세음은 많은 손과 다양한 지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며 호국적 성격까지 지닌 보살상으
로 신라 중/후기부터 널리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관련 관세음보살상은 거의 없는 실정
이며, 그림 또한 매우 희귀하다. 이 땅에 몇 없는 존재가 흥천사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흥천
사가 잘나갔음을 뜻하는데,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며, 19세기 중/후반 흥천사가 급
성장을 거듭하고 있을 때 왕실에서 내린 것으로 보인다. 즉 그의 제자리는 그의 닫힌 입처럼
알 수가 없다.

앞에 두 손으로 합장인을 선보이고 있고, 나머지 손은 각자의 방향에서 제각각 춤을 추고 있
다. 저렇게 손이 많으니 일을 하거나 물건을 들 때는 편하겠으나 손과 팔 동작, 관리는 쉽지
않을 듯 싶다. 그냥 두 손, 두 팔만 있어도 충분하다. 어쨌든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존재가
흥천사에 있고 늘 이렇게 친견할 수 있으나 마치 유명한 위인을 만난 듯 마음이 뿌듯하다.


▲  흥천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8호

지장시왕도는 1867년에 의운자우(義雲慈雨)가 그렸다. 푸른 두광(頭光)과 연두색 신광(身光)
을 지닌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로 시왕과 명부(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19세기 후반 서울 지역 지장시왕도의 새로운 형식을 연 그림으로 지장보살이 두 손으로 보주
를 들고 있는 점, 그 밑에 선악동자(善惡童子) 2명이 지장보살의 석장(錫杖)을 대신 들고 있
는 점이 기존의 지장시왕도와 다르다. 개운사(開運寺) 지장시왕도(1870년)와 봉국사(奉國寺)
지장시왕도(1885년) 등이 이것을 참조해서 그렸으며, 점차 확대되어 19세기 후반 서울, 경기,
경상도에서 널리 유행했다.
안정된 구도와 홍색을 기반으로 녹색과 청색이 대비를 이루는 색채의 구사력, 세부 문양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표현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80호

현왕도는 덥수룩한 검은 수염을 휘날리는 제왕 모습의 염라대왕(현왕)이 그의 부하들을 거느
리고 죽은 자를 심판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1867년에 조성되었다.
화기는 아쉽게도 없으나 18세기 말~19세기 초에 경북 사불산파 화승인 신겸(愼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19세기 밀 서울과 경기도, 경북 지역에서 유행한 현왕도의 형식을 따르
고 있어 당시 서울 경기 지역과 경북 화승들 간의 교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  극락보전 신중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7호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를 정신없이 담은 법당 지킴이용 탱화이다. 그림 상단에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일/월대신(日/月大臣), 일궁천자(日宮天子), 월궁천자(月宮天
子) 등 천부세계(天部世界)를 표현하고, 하단에는 위태천(韋太天)과 조왕신(竈王神) 등 여러
무기를 지닌 천룡부(天龍部)를 표현했다.

채색은 적색과 녹색을 중심으로 하여 하늘색 계열의 밝은 청색이 사용되었으며, 위태천의 투
구 및 갑옷. 삼지창, 검과 각종 기물 등에 고분법을 적용하고 금색을 칠했다.
그림 밑에 화기가 있는데 글씨가 조금 떨어져 나가긴 했으나 대허체훈(大虛體訓)과 혜산축연
(惠山竺衍), 학허석운(鶴虛石雲)가 1885년에 조성되었고, 상궁 김씨와 홍씨가 대표 시주자로
나와있어 고종 내외 등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왕실발원 탱화로 여겨진다.


▲  극락보전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5호

극락9품도는 화면을 9개로 나누어 극락세계의 구품(九品)을 그린 것으로 고양시 흥국사(興國
寺)의 극락구품도와 같은 모본(模本)을 사용했다. 대허체훈과 혜산축연, 학허석운 등이 그린
것으로 그들이 1885년에 극락보전 신중도도 제작했으므로 같은 해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천룡도(天龍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8호

천룡도는 신중도의 축소형 탱화로 위태천과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담겨져 있다. 1898년 용담
(蓉潭)이 초본을 제작했는데, 다른 천룡도와 달리 위태천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하단의 산
신과 조왕산, 기타 신중이 부각되는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의복과 기물 등에 금박(金箔)을
사용했다.
인물 묘사에는 섬세한 바림질과 세칠의 묘사로 입체감과 사실성이 돋보이며, 간략히 표현된
옷주름에도 활달한 필력이 엿보인다. 신중도의 일원이나 천룡도 형식은 거의 없으며, 서울에
서는 거의 이곳이 유일하여 19세기 말 서울, 경기 지역의 천룡도 양식을 보여주는 희귀한 존
재이다.

이렇게 극락보전에 지킴이용 탱화가 신중도 외에 천룡도까지 있으니 그들의 협동심으로 극락
보전이 이렇게 무탈했던 모양이다.


▲  극락보전 도량신도(道場神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6호

이름도 생소한 도량신도는 삼보(三寶)의 도량을 지키는 도량신을 머금은 그림이다. 도량신은
화엄경 략찬게(略纂偈)에 나오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의 일원으로 도량신과 신장(神將) 5명이
각이 진 흰색을 배경으로 정면을 향해 앉아들 있다.
도량신 뒤쪽 좌우에는 산개(傘蓋)와 당번(幢幡)을 든 동자가 있으며, 정면 좌우에는 신장 2명
이 칼과 동그란 지물을 들고 가운데를 향해 서있다. 인상을 잔뜩 쓴 붉은 얼굴의 도량신은 단
령의 붉은 관복을 입고 가슴과 허리에 각각 각대(角帶)를 차고 있으며, 관복에는 주름을 표현
한 먹선을 따라 바람질로 채색하고 입체감을 표현했다.

향우측 신장은 앙발(仰髮)의 귀졸(鬼卒) 모습으로 이마에 검은 띠를 둘렀고, 오른손은 허리춤
에 대고 왼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둥근 지물을 들고 맨발로 서있다. 향좌측 신장도 앙발의 귀
졸 모습으로 머리에 청색 두건을 쓰고 두 다리를 약간 벌리며 오른손에 긴 칼을 들고 서있다.

이 그림은 대허체훈과 학허석운 등이 그렸는데, 1885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연화대감로도(蓮花大甘露圖)
1939년에 그려진 것으로 극락보전 탱화 식구 중 가장 막내이다. 고색이 제대로
여물지 못하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는데, 그 시절의 우울했던
생활상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 등 현대식 전쟁 장면까지
들어있어 기존의 감로도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  극락보전 천정에 깃든 벽화 (노승과 천녀인 듯)
극락보전에 발을 들였다면 고개를 들어 천정을 꼭 살펴보자. 여러 벽화와 문양,
용머리 장식 등이 눈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이들은 극락보전이 지어진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건물의 품격과 아름다움을 드높인다.

▲  극락보전 천정에 그려진 벽화 (천녀와 동자인 듯)


 

♠  흥천사 마무리

▲  흥천사 용화전(龍華殿)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용화전은 막연히 56.7억년 후에나 온다는 미륵불(미륵보살)의 거처이
다. 1967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현판이 있는 가운데 칸만 있었으나 나중에 좌우로 1칸씩
넓혀 지금의 특이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  용화전 식구들
하얀 피부를 지닌 미륵불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에 금동 피부의
관세음보살상을, 왼쪽에 여래연지내영도를 두었다.

▲  여래연지내영도(如來蓮池來迎圖)
미륵불 왼쪽에는 마치 추상화처럼 생긴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여래(미륵불)가
연꽃이 핀 연지에 왔음을 표현한 것으로 그 자비로움의 향기가 천하에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근래 제작됨)

▲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간만에 마실을 나온 장엄등(莊嚴燈)들

장엄등은 큰 연등으로 저녁이 되면 스스로를 불사르며 몸을 환하게 밝힌다. 그것이 연등과 장
엄등, 유등의 매력이다. 흥천사 장엄등은 귀엽게 표현된 부처상과 코끼리, 청룡상 등이 있으
며, 서울연등회 제등행렬에도 참여한다.


▲  임시로 지어진 관음전(觀音殿) <2020년 가을 이전>

대방 서쪽에는 갈색 피부를 지닌 관음전이 있다. 대방 정도의 큰 집으로 일반적인 사찰 기와
집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이형적(異形的)인 모습이라 다소 쌩뚱 맞기는 하지만 대방 중수로 인
해 2017년에 임시로 마련한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 대체용 건물이 생기면 이 집은 사라지게
되며 저것이 생전에 마지막 사진이 될 수도 있다.
(관음전은 2020년 10월에 북쪽으로 이전되었으며, 윗 사진의 건물은 철거되었음)

대방에 있던 종무소(宗務所)가 이곳에 들어와 일을 보고 있으며, 강당의 역할도 도맡고 있는
데, 특히 대방에 들어있던 지방문화재 목조관음보살상과 탱화 일부가 이곳에 신세를 지고 있
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목조관음보살상을 봉안하여 건물 이름이 관음전을 칭하게 되었다.


▲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6호)
아미타불회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9호)


관음전의 주인인 목조관음보살상과 그 뒤쪽에 든든하게 걸린 아미타불회도는 대방에서 넘어왔
다. 대방에도 저들은 한 세트로 있었는데 여기서도 늘 같이 있어 서로의 진한 정을 드러낸다.
꽃이 화려하게 치장된 불단에 장엄하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원래 용왕과 선재동자를 거느린
관음3존상이나 이곳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좌우 협시상은 다른 곳으로 넘어가고 관세음보살
누님 혼자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보살상은 고맙게도 뱃속에 조성발원문을 품고 있어 조성시기 등 여러 정보를 속삭이고 있
는데, 1701년 전북 임실(任實) 사자산 적조암(寂照庵)에서 조성되었다. 그것이 19세기 중/후
반 이후에 이곳까지 들어와 안그래도 보물로 넘치는 흥천사의 곳간을 더욱 채워준 것이다.

용왕과 선재동자를 협시로 둔 관세음보살은 조각의 경우 법주사(法住寺)와 남해 보리암 정도
를 빼면 거의 없어 매우 가치가 있으며, 근래 그의 뱃속에서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묵서다라
니, 여러 불서(佛書) 등 9건 633점의 복장(腹臟)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여 '흥천사 만세루
목조관음보살삼존상 및 복장유물
'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6호의 지위를 부여받
았다. 현재는 관세음보살상만 친견이 가능하다. (만세루는 대방의 다른 이름)

관세음보살 뒤에 걸린 아미타불도(阿彌陀佛會圖)는 상궁들의 시주로 1890년에 조성된 것으로
수화승 긍조(亘照)와 만파정익(萬波定翼), 보암긍법(普庵肯法), 혜산축연 등이 조성했다. 화
기에 조성연대는 누락되어 있으나 같은 대방에 있던 신중도를 1890년에 긍조가 제작하여 같은
해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 중앙에 연화대좌 위에 앉은 아미타불이 두광과 신광을 드러내고 있고, 그 좌우로 연꽃을
든 8위의 보살과 사천왕이 자리해 일제시 아미타불을 바라보고 있다. 특히 비싼 금이 재료로
쓰인 것이 돋보이는데, 그림에 등장하는 이들의 지물에는 금박을, 천의 등 옷 문양에는 금니
(金泥)로 그렸으며, 아미타불 신광에도 금색을 사용해 빛이 반짝반짝 비추는 것 같다.


▲  만세루 신중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0호

만세루 신중도는 관음전의 신세를 지켜 그곳을 지키고 있는데, 제석천과 범천, 위태천 등 온
갖 호법신들이 정신없이 담겨져 있다.
채색은 어두운 암록색과 조금 탁해진 적색을 사용했는데, 삼지창과 검 등 무기와 기물, 관대,
의복에 부분적으로 금을 사용해 그리거나 문양을 넣어 그림이 부분부분 밝아보인다. 극락보전
신중도와 하늘 공간 처리와 색채에서 조금 차이점이 있을 뿐, 도상은 거의 일치하며, 그것을
참조하여 그린 것으로 여겨져 1885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만세루 제석천도(帝釋天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1호

제석천도 역시 대방에서 넘어온 것으로 제석천이 중심이 된 신중도의 간단 버전이다. 제석천
을 중심으로 천부중(天部衆) 8위와 천녀 등이 빙 둘러져 있는데, 제석천은 두광과 신광을 지
니고 있으며, 정면을 향해 합장인을 선보고 있다.

천부중은 4위가 원유관(遠遊冠) 형식의 관모를 쓰고 있고, 나머지가 방형(方形)과 반월형(半
月形) 일월관(日月冠)을 눌러쓰고 있는데 일월관을 쓴 이는 일궁천자와 월궁천자로 여겨진다.
상단 천부중 옆에는 당번(幢幡)을 들고 과일은 받쳐 든 천녀가 있으며, 제석천 머리 위쪽에는
당과 부채를 든 동녀 2명이 있다.
의복과 관, 광배는 탁한 적색과 암록색이 주조를 이루며, 피부색은 거의 흰색을, 하늘 공간과
관, 의복에는 밝은 청색을 사용했다. 천부중이 들고 있는 홀과 관모에 부분적으로 금이 사용
되었고, 옷 위에 그려진 문양 일부에도 금을 썼다.
1890년에 청신녀(淸信女) 조묘법월(趙妙法月)과 원씨의 시주로 받아 도편수 긍조 등이 조성했
으며 신중도의 축소판으로 등장 인물이 단촐한 천룡도와 제석천도가 특별하게도 흥천사에 모
두 들어있으니 흥천사가 범상치 않은 절임을 알려준다. 하긴 시작부터가 범상치 않았고 조선
후기에도 잘나갔으니 오죽하겠는가.


▲  독성각, 북극전으로 인도하는 길

명부전 뒷쪽 언덕에는 독성각과 북극전이 있다. 이들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경내 중심(극락보전, 대방)과 조금 떨어져 있고, 숲에 진하게 묻혀 있어 경내 중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구석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으니 지나치기도 쉽다.

명부전 뒷쪽에 독성각, 북극전으로 오르는 길이 닦여져 있다.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안내하고
있는데, 북극전과 독성각 주변에서 길은 끊긴다. 적조사와 북악산길로 나가는 길을 펜스로 모
두 막았기 때문이다.

▲  비닐막을 씌운 북극전(北極殿)

▲  북극전의 주인, 칠성탱

북극전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칠성(七星)의 보금자리로 귀에 많이 익은 칠성각(七星閣)
의 다른 이름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59년에 지어져 칠성각이라 했다가 북극전으로 이름
을 갈았으며, 기도 수요가 많아서 정면에 비닐막을 씌워 기도 공간을 늘렸다. 건물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산신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산신은 이미 극락보전 옆 바위에 봉안되어 있음
에도 북극전에도 별도로 둔 것을 보면 산신을 크게 대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칠성탱 옆에 자리한 산신탱과 산신상

▲  독성각(獨聖閣)

북극전과 나란히 자리한 독성각도 앞에 비닐막을 씌워 기도 공간을 늘렸다.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북극전보다 덩치는 작지만 서로 비슷한 모습인데, 1933년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홀로 건물을 지킨다.

▲  색채가 선명한 독성상과 독성탱

▲  흥천사에서 적조사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삼각선원)


공개를 꺼리는 지방문화재 몇 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정문화재와 공개된 건물은 싹 둘러보았
다. 간만에 왔지만 지정문화재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들 낯이 익지만 오랜 지기처럼 언제 봐도
반갑다.
이렇게 하여 흥천사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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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일원이자 화려한 늙은 윤장대로 유명한 예천 용문사 (용문사 성보박물관)

예천 용문사


'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예천 용문사 '
우측 윤장대좌측 윤장대
▲  용문사의 자랑, 윤장대

용문사에 다시 오니 산이 깊어 세속의 소란함이 끊어졌네
상방(上方)에는 중의 평상이 고요하고 옛 벽에는 부처의 등불이 환하다.
한 줄기 샘물 소리는 가늘고 일천 봉우리 달빛이 나뉜다
고요히 깊은 반성에 잠겨지니 다시 이미 나의 가졌던 것까지 잃어버린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이 용문사에서 지은 시


 

♠  용문사(龍門寺) 입문

▲  회전문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증장천왕(增長天王)

▲  회전문을 지키는 사천왕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


늦가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겨울이 제국의 기틀을 닦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일행들과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예천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용문사를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찾았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
고 경내로 들어서니 일주문(一柱門)이 제일 먼저 마중을 나온다. 
 
용문사 일주문은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따르면 1608년에 시작된 대대적인 중창의 마
지막 불사로 81년 뒤인 1689년에 세울 예정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80여 년의 장대한 계획
을 세우고 중창에 임한 듯 싶다. 당시의 계획대로 81년 뒤에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공포의 조
각 수법이나 장식이 18세기 후반 양식이 강해서 1767년 대장전 중창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1938년에 보수를 했다.
문 현판에는 '소백산(小白山) 용문사'라 쓰여있어 이곳의 이름을 밝혀주며, 용문사를 직접 품
고 있는 용문산(龍門山)보다는 거리가 조금 있는 소백산을 칭하고 있으니 이는 소백산이 훨씬
명성이 높고 웅장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소백산의 영역을 좀 늘려보면 용문산도 그 범주에 들
어가기는 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삼삼한 숲길이 중생을 맞는다. 늦가을의 절정을 누렸던 나무들은 마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낸 중생 마냥 벌거숭이가 되어 겨울 제국(帝國)의 눈치를 받는다. '올해도 다
저물었구나. 이제 곧 강제로 나이 1살이 얹혀지겠군'
싶은 생각이 거친 파도처럼 몰려와 나그
네들을 잠시 우울쟁이로 만들어버린다. 숲이 아무리 청량한 바람을 불어 속세에서 꾸리고 온
번뇌를 싹 단죄한다고 해도 그런 우울한 생각까지 악성바이러스처럼 심어놓으니 심기가 별로
이다. 간신히 번뇌를 일주문 부근에 내던지고 경내로 발길을 향한다.

그렇게 길을 재촉하다보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든 용문사에는 이르나 두 발로
가는 경우에는 산사의 정취에 어울리게 오른쪽 돌계단으로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절을 다
둘러보고 나올 때는 경내 서쪽 주차장(제3주차장)을 거쳐 잘 닦여진 찻길로 내려오면 된다.

돌계단을 오르면 경내로 인도하는 2번째 관문인 회전문(回轉門)이 마중을 한다. 그는 석가여
래의 경호원인 사천왕의 보금자리로 흔히 천왕문(天王門)이라 불린다. 여기서 그들의 간단한
검문을 받고 경내로 들어서면 되는데, 사천왕의 표정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다기보다는
느긋하고 친숙한 표정 같다.


▲  용문사 해운루(海雲樓)

회전문을 지나면 바로 조급한 게단이 숨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펼쳐진다. 다행히 계단은 짧
은데, 그 계단의 끝에는 해운루가 수미산(須彌山)에 높이 선 누각 마냥 물끄러미 천왕문을 통
과한 중생을 굽어본다.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인 해운루는 경내로 향하는 3번째 관문으로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경내
를 가리고 있다. 1984년 대화재 때 불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이 누각을 지나면 대장전과 보
광명전이 정면에 나타나면서 비로소 경내에 이르게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용문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해우소에서 바라본 용문사 외경

예천군 용문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문사는 양평(楊平) 용문사, 남해(南海) 용문
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하나로 꼽힌다. 다들 쟁쟁한 역사와 보물을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한번 가려보라면 바로 예천 용문사가
단연 갑(甲)이 아닐까 싶다.
양평 용문사는 이 땅 최대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로 유명하나 6.25때 죄다 파괴되어 고
색의 깊이가 얕고, 남해 용문사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지만 고색이 깊고 문화유산이 많다.
허나 예천 용문사는 그곳의 상징이자 천하에서 거의 유일하다는 오래된 윤장대를 간직하고 있
고, 조선 중기 건물인 대장전을 비롯해 무수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성보박물관까지 따
로 장만할 정도이다. 1984년 불의의 큰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대단했을 것인데,
천하의 시샘 때문인지 화재로 많은 것을 잃었다.

예천의 대표급 관광지로 몸값을 올린 용문사는 870년에 두운선사(杜雲禪師)가 당나라에서 귀
국하여 지은 조그만 암자인 두운암(杜雲庵)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 초막을 짓고 머물고 있었는데, 920~930년경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경상도를 정벌하러 하늘재를 넘어 예천 땅을 지나다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그를 보러 찾아갔다.
허나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헤매고 있다가 어디선가 청룡(靑龍) 2마리가 바위 위에 나타나 길
을 인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용문산이라 했다고 하며, 두운을 위해 용문사를 창건
했다고 한다. 이때 절을 짓는데, 나무 둥치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이 나와 공사비로 썼
다고 전한다.
전설에 나오는 청룡은 진짜 용은 아닐테고 아마도 지역 사람들이나 지방 세력의 격한 환영을
받거나 도움을 받은 것을 과대포장하여 그렇게 표현한 듯 싶으며, 은병 16냥은 예천의 지방
세력이나 백성들의 지원을 뜻하는 것 같다.

태조는 이곳에 머물며 장차 천하를 평정하면 큰 절로 지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936
년 오랜 숙원인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자 약속대로 그해에 칙명(勅命)을 내려 절을 크게 중
건하고 매년 150석의 쌀을 내렸다. 그 쌀은 지역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충당했다.

1165년에 의종(毅宗)의 칙명으로 중수했으며, 1171년에 명종(明宗)의 태자(太子)의 태를 절의
왼쪽 봉우리에 묻으면서 창기사()로 이름을 바꾸고 축성수법회()를 열어 낮
에는 금광명경(金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의식을 항규()로 삼았다.
그 법회가 끝나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승려 500명을 불러 50일 동안 담선회()를 열었
으며, 그때 산청 단속사(斷俗寺)의 승려인 효돈()이 전등록(傳錄), 인악집(仁集), 설
두집
(雪集) 등을 강의했다.
그리고
1173년 무신정권에 대항하는 김보당(金甫當)의 난이 일어나자 3만 승재()를 여는
한편 1180∼1182년에 대법회를 열었다.

▲  용문사 보광명전

▲  용문사 명부전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많은 절들의 법등(法燈)이 간당간당하던 조선 때도 용문사는 승
승장구하여 세조(世祖)가 이곳 승려의 잡역(雜役)을 감하거나 면제하라는 교지(敎旨)를 내렸
으며, 1478년에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실을 봉안하고 1480년에 세조의 왕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중수하여 성불산(成佛山) 용문사라 했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왜군은 절 입구인 초간정(草澗亭)에서 돌아갔다
고 한다. 그 기나긴 왜란 동안 용문사에서 짚신을 짜서 전국 승군(僧軍)들에게 보급하는 한편,
승병을 훈련시켰다.
1783년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갈았으며, 1835년
에 불이 나자 열파(), 상민(), 부열() 등이 힘을 모아 1840년대에 공사를 마쳤다.

6.25때도 별 피해를 입지 않는 등, 전화(戰禍)도 피해가는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을 날렸으
나, 1984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보광명전과 해운루, 강원, 요사 등 대부분의 건물을 날리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허나 다행히도 화마(火魔)는 대장전과 윤장대, 자운루 등은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으며,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벌여 주변의 나무를 베어내고 뜨락을 넓게
다졌다.
또한 용문사와 인근 사찰의 문화유산 관리를 위해 경내 우측에 성보박물관을 세웠으며, 구식
해우소를 폐쇄하고 샤워장을 갖춘 신식 해우소를 갖추어 중생과 승려의 편의를 고려했다.


용문사에는 3가지의 믿거나 말거나 이적(異蹟)이 있는데, 하나는 태조 왕건이 두운을 찾았을
때 용이 나와 영접한 일이고, 둘째는 절을 지을 때 은병이 나와 공사비로 충당한 일이며, 3째
는 절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 지금은 없음)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할 때 4층 위로 오색구
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경내에는 오랜 내력과 명성에 걸맞게 법당(法堂)인 보광명전을 비롯해 대장전, 극락보전, 명
부전, 자운루, 원통전, 산신각, 해운루, 성보박물관 등 20동의 건물이 경내를 한가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대표 보물인 대장전과 윤장대를 위시해 세조의 감역교지,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영산회괘불탱, 천불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 국가 국보 1점과 국
가 보물 7점, 중수용문사기비 등의 약간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  영남제일강원(嶺南第一講院)

▲  성보박물관에 있는 독성상과 지장보살좌상

깊숙한 산자락에 묻혀 있어 아무리 질긴 번뇌라도 쫓아오다 제풀에 졸도하며, 절을 감싼 숲이
삼삼하여 서거정의 시처럼 속인들의 마음을 정화해 준다. 거기에 고색이 깊은 경내에 발을 들
이면 나도 모르게 속세를 잊고 잠시나마 번뇌가 끊어지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로부터 4계절이 아름다운 경승지라 선비와 문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
와 문장으로 남겼으며, 20세기에는 출세를 위해 공부하러 절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행정, 법조계, 경찰 쪽으로 크게 출세한 이들이 많아 공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다.

대장전과 자운루를 제외하고는 1984년 이후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 부분에 따라 고색의 질감이
다르다. 허나 윤장대를 비롯하여 이곳의 깊은 내력을 가늠케 해주는 늙은 유물이 많아 경북
북부권에서 영주 부석사(浮石寺) 다음 급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예전에 이곳 승려인 청
안이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란 광고 문구로 유명한 모 핸드폰 통
신사 TV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 용문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391 (용문사길 285-30 ☎ 054-655-1010)
* 용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용문사 대장전과 그 주변



 

♠  용문사 경내 둘러보기

▲  보광명전(普光明殿)과 3층석탑

해운루를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입혀진 너른 뜨락과 함께 석탑 2기를 거느린 보광명전이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중생을 맞는다.

보광명전은 대장전 다음급의 건물로 1984년 대화재로 쓰러진 것을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철조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봉안했으며, 앞뜨락에는 하얀 피부
의 맨들맨들한 석탑 2기가 나란히 솟아 있는데, 우측 탑은 5층, 좌측 탑은 3층으로 층수를 달
리했다. 둘은 높이가 조금 차이가 날 뿐, 모습이 비슷하여 층수를 같게 하고 높이를 맞췄으면
보기에도 자연스러웠을텐데, 그 점이 좀 아쉽다.


▲  성보박물관에서 바라본 보광명전 뜨락

▲  보광명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광명전 불단(佛壇)에는 이곳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이 그만의 특허 제스쳐인 지권인(智拳印)
을 선보이고 있다. 얼굴이 너무 부어있어 통통한 인상을 주는데, 그의 좌우에는 소조(塑造)
로 만든 석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이 협시(夾侍)로 자리를 지킨다. 허나 주불(主佛)보다 덩치
가 지나치게 작아 마치 어른과 아이가 앉아있는 듯 하다. 그런 불단을 둘러싸고 중생들의 소
망이 한아름 담긴 연분홍 연등이 천정을 가리며 허공을 가득 메운다.


▲  보광명전 좌측에 있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똥배하면 속인들은 만병의 근원이라며 다들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하여 똥배를 출렁이고
다니는 모습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기도 한다. 허나 포대화상만큼은 예외이다. 다 같은 똥
배인데도 말이다. 역시나 사람은 출세하거나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면 속인들이 흔히 안좋게
보는 것도 모두 좋게 보는 모양이다.
똥배는 그의 상징으로 사람들은 소원을 빌고 그의 배를 문지른다. 무척이나 두꺼운 얼굴과 축
쳐진 가슴은 그의 비만이 꽤 심각함을 여실히 보여주나 그걸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
려 두꺼우면 두꺼울 수록 그의 인기가 올라간다.


▲  진영당(眞影堂)

대장전 좌측에 자리한 진영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681년에 희인대사(希
仁大師)가 세웠다고 전한다.
진영당은 이름 그대로 용문사를 거쳐간 조사(祖師)들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건물로 1934년과
1935년에 주지 이광하가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곳에 깃든 진영들은 모두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무늬뿐인 건물의 이름과 달리 주지승의 집무실 및 종무소(宗務所)로 쓰이
고 있다.

주지승 집무실에는 목각탱화처럼 무늬가 복잡하고 현란한 의자들이 놓여있는데, 마치 부유층
집안의 거실이나 대기업 회장 사무실, 고위관료 접대실 같은 분위기라 조금은 이질감이 든다.
절에 어울리게 소박한 의자를 두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진영당 주지승 집무실

▲  용문사 명부전(冥府殿)

진영당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
낸다.
이 건물은 1682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며, 불단에는 지장보살
(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
며 양쪽에 서 있다. 그 좌우에는 시왕상(十王像)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앉아 중생을 굽어보
고 있는데, 이들은 명부전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실적(實籍)과 신경(神鏡) 등이 만
들었다고 전한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명부(저승) 식구들

▲  용문사 자운루(慈雲樓)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476호

영남제일강원 남쪽에 맞배지붕 누각인 자운루가 속세를 바라보고 있다. 이 건물은 1166년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1561년과 1621년에 중수를 했고, 1979년에 보수를 하여 지금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쓸 짚신을 만들어 보급하던 의미 깊은 현장으로 조선 중/후기 건축 기
법을 지니고 있으며, 절에서 큰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행사장이나 공양 장소로 쓰인다.

자운루 옆구리를 통해 경내를 벗어나면 바로 2층 규모의 옛 해우소가 나온다. 재래식 화장실
로 신식 해우소가 세워지면서 지금은 문을 닫아 걸고 한가로운 노후를 보낸다.


▲  용문사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영남제일강원 뒤쪽에는 보기만 해도 장맛을 돋구는 장독대들이 5열로 늘어서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저 안에는 온갖 전통 먹거리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으며 햇볕을 볼 그날을 꿈꾼다.

▲  원통전(왼쪽)과 산신각(오른쪽)

경내의 중심인 대장전과 보광명전 뒤쪽 높은 곳에 원통전(圓通殿)과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는데, 문이 가운데
칸에만 달려있다. 그 뒤쪽 높은 곳에는 1칸짜리 산신각이 원통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있는
데,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로 산령각(山靈閣)이라 불리기도 한다.


▲  보광명전, 대장전 뒤쪽 산책로

▲  극락보전(極樂寶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극락보전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건물로 1984년 이후 경내를 크게 정비할 때 장만했는데, 원래는 천불전(千佛殿)이었으나
근래에 극락보전(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아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삼았다.
허나 예전 천불전의 성격은 여전하여 하얀 피부의 조그만 불상 1,000개가 아미타3존불을 빼곡
히 둘러싸며 장관을 이룬다.


▲  극락보전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아미타3존불과 조그만 천불의 물결

▲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경내 (정면에 보광명전의 뒷통수가 보임)

▲  성보박물관 좌측에 자리한 샘터
용문산에 베푼 물이 나무로 만든 수로를 타고 석조(石槽)로 내려간다.


 

♠  용문사의 상징, 대장전(大藏殿) - 국보 328호

대장전은 용문사의 으뜸 건물이자 대표 보물이다. 만약 그와 윤장대가 없었다면 용문사를 찾
는 이는 지금보다 적었을 것이고, 명성도 다른 용문사에 비해 낮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용
문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크다. 작게는 절의 보물이나 크게는 나라의 귀한 보물로 절
에서도 그들을 특별히 옆구리에 두어 온갖 정성을 들인다. 화마(火魔)가 한바탕 할퀴고 지나
간 1984년에도 대장전은 띠끌의 피해도 없이 살아 남았으며, 그 이후 화재방지를 위해 보존처
리를 가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그만 맞배지붕 집으로 얕은 석축에 막돌 주초를 놓고 민흘
림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안과 밖을 모두 2출목(出目)으로 짜고 기둥 사이마다 공간포(空間
包)를 두었으며, 주심도리가 대들보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 지붕이 높아진 만큼 기둥이 짧아
보인다. 단청은 금단청(錦丹靑)을 입혀 내부를 화려하게 치장했으며, 천정의 반자틀에도 화려
하게 단청을 입히고 대들보와 종보 사이의 화반(花盤)에 풀무늬를, 대들보 위의 용은 물고기
를 몰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천정 곳곳을 화려하게 수식해 건물의 품격을 드높였다.

이렇게 화려한 대장전은 1173년에 자엄대사(資嚴大師)가 세웠다고 한다. 허나 그때 세워진 대
장전이 지금의 건물은 아니다. 자엄은 인도의 고승인 구담(瞿曇)이 대장경(大藏經)을 용궁(龍
宮)에 소장했다는 옛 이야기에 따라 용이 나타났다고 하는 용문사에 나라의 호국(護國)을 기
원하고자 대장경을 보관하고 건물 이름을 대장전이라 했으며, 나중에 그런 연유를 잘 상징하
고자 천정에 용과 물고기 장식을 만든 것이다.

그 이후 1467년과 1534년, 1597년, 1665년(또는 1670년)에 중수했으며, 1684년에 아미타3존불
과 목각탱화를 만들어 봉안했다. 그리고 1767년에 중수를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
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해체수리를 하면서 19세기에도 보수가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기단 공
사를 위해 간이시굴조사를 벌이던 중, 현재 기단 속에서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이 모습을 드러
냈는데, 이는 대장전의 창건 당시의 흔적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중앙 뒷쪽에 불단을 두고 그 좌우에 윤장대를 1개씩을 설치
해 서적을 두었다. 내부 구조 양식은 조선 중기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으나, 외부는 고려
건축양식을 띄고 있는데, 가까운 안동의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과도 좀 비슷해 보이
기도 한다.

▲  우측에서 본 대장전

▲  좌측에서 본 대장전


▲  붉은 무늬 현판에 쓰여진 대장전 3글자의 위엄

▲  온갖 무늬가 그려진 대장전 우물천정

▲  대장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 보물 989-1호
뒤에 보이는 후불탱화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 보물 989-2호


용문사 대장전하면 다들 윤장대가 생각날 것이다. 허나 윤장대보다 명성과 시대가 조금 떨어
지지만 불단을 지키고 앉은 목조아미타3존상과 그 뒤에 걸린 아미타후불탱화도 그에 못지 않
은 귀중한 보물이다.

두툼한 붉은 방석에 앉아 중생을 위로하는 아미타3존상은 나무로 만들어 금색 피부를 입힌 것
으로 아미타불이 자비로운 인상으로 가운데에 앉아있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
菩薩)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그 좌우를 지킨다. 뒤에 있는 후불탱화와 더불어 17세
기 후반 숙종(肅宗) 시절에 조성된 것이다.

그들 뒤로 목각아미타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는데, 그는 1684년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나
라에 널린 목각후불탱 가운데 가장 늙은 것이다. 후불탱화가 너무 화려해 가히 눈이 부실 지
경으로 기본 구조는 상하가 긴 직사각형이지만 더듬이처럼 생긴 하얀색의 구름무늬 광선을 표
현하여 금색과 흰색의 어색한 조화를 이루며 탱화의 수려함을 더욱 돋게 만든다.

탱화 중앙에 본존불은 얼굴을 앞으로 숙여 속세를 살피고 있으며,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
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
을 구분했다.

본존불을 둘러싼 나머지 불상은 상,중,하 3줄로 배치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
좌(臺座) 좌우로 2구씩 1렬로 서 있으며,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각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었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인 아난(阿難
)과 가섭(迦葉)을 배치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본존불과 보살상 사이
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하여 여백을 빼곡히 채웠는데, 너무 빼곡하여 솔직히 눈이 어지럽
다. 또한 탱화를 지탱하고 있는 양쪽 나무 기둥에는 용무늬 같은 것이 새겨져 장엄함을 드러
낸다.

▲  용문사 윤장대(輪藏臺) - 국보 328호

용문사에 왔다면 대장전에 깃든 윤장대는 꼭 한번 만져봐야 된다. 예전에는 돌리는 것도 가능
했으나 이제는 연로한 탓에 돌릴 수는 없고, 대신 성보박물관에 마련된 윤장대를 돌리면 된다.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1개씩 배치되어 있는데, 이 땅의 수많은 고찰 가운데 유일하게 있는
늙은 윤장대로 그 명성이 저승에까지 전해졌는지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꾸중을 듣는다
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도 있다.

윤장대는 원래 서적이나 장경판(藏經板)을 넣어두던 일종의 장경각(藏經閣)이다. 장경각은 쉽
게 말하면 책장이다. 법회 때는 경전을 넣고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염불을 했는데, 옛날에는
일반 백성들 상당수가 까막눈이었고, 설령 한자(漢字)를 알아도 불교 경전이 좀체 어려운 것
이 아니다. 하여 '윤장대를 1번 돌리면 경전을 1번 읽은 것과 같다 /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
다 / 소망이 이루어진다 /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혼난다'
는 식으로 속인들에게 영업을
했던 것이다.

이들 윤장대는 높이 4.2m, 둘레 3.37m 크기로 양쪽에는 손잡이가 있어 그를 잡고 돌리면 되며,
기둥을 마루 밑에 있는 문둔테에 박아 회전식으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8각원당형의 굴도리식
모양의 책장을 만들었다. 책장을 여닫는 문은 8개로 우측 윤장대의 문창살은 가지각색의 문양
으로 아름다움을 더하며, 좌측 윤장대는 그냥 소박한 빗살로 서로 대조를 이루는데, 이는 음
양의 조화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또한 문 위쪽에는 연꽃과 보살 등이 그려져 있어 안그래도
포식하는 두 눈을 더욱 배부르게 만든다.

윤장대의 조성시기는 1190년이라고 하며, 두운이 절을 세울 때 용궁에 보관된 대장경을 보관
하고자 대장전에 윤장대를 만들고 7일 동안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윤장대 때문
에 그를 간직한 건물 이름이 대장전이 된 것이다.


▲  좌측 윤장대 윗부분

▲  우측 윤장대 윗부분

지붕과 촘촘하게 짜여진 공포덩어리는 그가 그냥 책장이 아닌 법당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던
져주며 좌측 윤장대의 처마와 공포는 금을 칠한 듯, 너무나 화사하다. 이렇듯 윤장대는 세밀
하고 뛰어난 조각품으로 우리나라 불교 미술의 또 다른 정화이다.

      ◀  책이 담긴 윤장대 가운데 부분
대장전 윤장대는 돌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그걸 무시하고 억지로 돌리려고 해도, 밑에 단
단하게 고정을 시켜버려 돌려지지도 않는다.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내 책장으로 삼고 싶
은 윤장대, 나중에 윤장대 모양의 책장을 하나
만들어 대리만족으로 옆에 두고 싶다.

(대장전은 원래 국가 보물 145호, 윤장대는
가 보물 684호
였으나 2019년 12월 '용문사 대
장전과 윤장대'란 이름으로 국보 328호로 특진
되었음)


 

♠  용문사의 보물을 간직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경내 서쪽에는 용문사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성보박물관이 넓게 터를 닦았다. 2010년에 문
을 연 이곳은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용문사의 보물을 비롯해 주변 사찰에서 맡긴 문화유
산 등 315점이 전시/보관되고 있다. 내부 촬영은 상업성이 아니라면 가능하며, 대장전과 더불
어 필수로 봐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는 윤장대를 돌리는 코너도 있으니 꼭 살펴
보길 권한다.
마음 같아서는 박물관의 유물을 모두 다루고 싶으나 내용이 너무 길어질 수 있어 일부 중요한
유물만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른 유물은 직접 가서 눈에 담기 바란다.
 
* 성보박물관(☎ 054-655-8695) 관람시간은 9:30~17:30 (11~2월에는 10시부터 17시까지) 매주
  월요일과 설날, 추석연휴는 문을 닫아걸고 쉰다.

       ◀  영산회괘불탱 - 보물 1445호
괘불은 석가탄신일이나 주요 법회 때만 잠깐씩
등장하는 비싼 존재이다. 이 괘불은 1705년에
승려 92명과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조성되었는
데, 석가여래가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
華經)을 설법하는 영산회를 표현했다.
초록색 두광(頭光)을 갖춘 석가여래 좌우에 붉
두광을 두룬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리해
있으며, 그 위에 석가여래의 제자인 아난과 가
섭이 합장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림 하단에는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고, 테두리
하단부에 그림과 관련된 화기(畵記)가 있다.
이 괘불의 특징이라면 그림 상단에 하늘색 바
탕으로 하늘을 표현한 점과 석가여래가 연꽃가
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다른 괘불과는 다른 새
로운 모습이다.


▲  용문사 천불도(千佛圖) - 보물 1644호

이곳 성보박물관의 탱화 중 크게 두드러지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천불도가 아닐까 싶다. 천
불을 봉안한 천불전이란 건물은 많이 있지만 정작 천불을 그린 늙은 그림은 천하에 딱 2개 밖
에 없는 희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탱화는 1709년에 화승(畵僧) 도문(道文)과 설잠(雪岑), 계순(戒淳), 해영(海英) 등이 제작
한 것으로 붉은 바탕에 조그만 1,000개의 불상을 질서정연하게 그려넣었다. 이 땅에 전해오는
천불도는 1754년에 그려진 선운사(禪雲寺) 천불도 5폭과 이곳 용문사가 전부로 18세기 초기
천불신앙(千佛信仰)과 당시의 불화 양식을 잘보여준다고 하여 국가 보물로 대접받고 있다.


▲  극락암 지장시왕탱 (1812년 제작)
용문사의 부속 암자인 극락암에서 가져온 그림으로 중앙에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명부(저승)의 시왕(十王)과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극락암 지장시왕탱 복장 발원문(發願文)과 복장유물

▲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동자입상(童子立像)과 사자입상(使者立像)

동자입상은 용문사 명부전에 있던 것으로 시왕의 심부름을 하는 비서이다. 원래 동자상 10개
가 각각 시왕(十王) 곁에 있었으나 관리소홀로 지금은 달랑 1개만 남아 성보박물관으로 옮겼
다.
오른쪽 눈에 안타깝게도 크게 금이 가서 애꾸눈처럼 되었지만 동자에 걸맞게 그의 표정에는
귀여운 티가 배여 있으며 양손에는 시왕의 물건을 들고 있는데, 물건을 숨기며 장난을 칠 것
같은 천진난만함이 묻어나온다.

동자입상 옆에는 응진전에서 가져온 사자상(使者像)이 나란히 서 있는데, 동자상과 달리 머리
에 모자를 쓰고 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조그만 독성좌상(獨聖坐像)

독성이 그려진 독성도(獨聖圖)는 많이 봐왔지만 늙은 독성상은 흔치 않다. 이 독성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塑造像)으로 원래 응진전 내부 정방형 감실(龕室)에 홀로 봉안되어 있었다.
왼손에는 게이트볼에서 공을 칠 때 쓰는 것과 비스므리하게 생긴 긴 장대를 들고 있는데, 조
선 후기에 신경대사가 시왕상과 금당의 판불(板佛)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여 승려들이 축수
전(祝壽殿) 서쪽에 별도로 감실(龕室)을 만들어 신경대사의 진영을 안치했다는 기록이 '속용
문사적기'에 나와있어 그의 상이라는 의견도 있다.


▲  너그러운 표정의 지장보살좌상

독성상 옆에 자리한 지장보살좌상은 원래 강원(講院)에 있었다. 15~16세기에 나무로 만든 목
불(木佛)로 도금을 입혔으며,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지그시 눈을 감은 둥근 얼굴에는 온화함
이 물씬 배여나와 중생들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목에는 화려한 목걸이가 있는데, 두건과 수인
(手印)이 아니라면 관세음보살 누님으로 착각하고도 남을 모습이다.

강원 불단에 있던 그는 1984년 대화재로 강원이 불타면서 응진전으로 옮겨졌으며, 화재로 인
해 어깨 부분과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에 그을음이 생겨 당시의 참담함을 증언한다. 다행
히도 재빨리 구조한 탓에 이렇게 살아있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  봉인사(奉印寺) 부도암(浮屠庵) 신중탱 복장낭(腹臟囊, 복장주머니)과
복장물

봉인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사릉(思陵) 인근에 있는 절로 광해군(光海君) 시절부터 왕실의 원
찰(願刹)로 지원을 받았다. 1867년 상궁의 시주로 신중탱과 복장물을 만들었는데, 1887년 봉
인사가 불에 타면서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 용문사에 안착하
게 되었다.
복장주머니에는 한글로 쓰인 발원문이 있으며, 이 주머니에서 각종 다라니경과 약초, 금과 은
이 나오기도 했다.


▲  전패(殿牌)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전패로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으나 경내에 1884년 6월에 궁궐 상궁(尙
宮)의 지원으로 만든 탱화가 있어 그 시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패 중앙의 붉은 부분에는 '황실삼전하수만세(皇室三殿下壽萬歲)'라 쓰여 있어 제왕(帝王)의
장수를 기원하는 전패임을 보여주며, 여기서 삼전하는 당시 제왕인 고종과 명성황후, 세자 순
종(純宗)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돋보이는 것은 왕실이 아닌 황실로 썼다는 것이다. 하여 고종
이 황제를 칭한 1897년 이후에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제왕을 폐하(陛下)가 아닌 전하로
칭하고 있어 앞뒤가 맞지를 않는다.

이 전패는 8각형의 높은 대좌(臺座) 위에 패를 올렸으며, 발원 내용을 적은 가운데 부분에는
연화좌(蓮花座) 위에 화려한 꽃장식을 채웠다. 머리 부분에는 2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채
색은 좀 희미해졌지만 용과 꽃무늬 장식을 갖춘 화려한 모습으로 왕실을 위한 전패임을 알려
준다. 그리고 조선 때 만들어진 전패나 위패(位牌), 불패(佛牌)는 많지만 이렇게 대좌부터 머
리까지 완벽하게 남은 것은 흔치 않다.

             ◀  업경대(業鏡臺)
조선 후기에 나무로 만들어 채색을 입힌 것으
로 저승의 염라대왕이 심판할 때 쓰는 거울이
라고 한다. 거울을 보면 생전의 죄업이 싹 비
친다고 하며, 그 경량에 따라 지옥으로 갈지,
극락으로 갈지가 정해진다고 한다.
이 업경대는 원래 명부전에 있었는데, 아랫부
분을 수미산(須彌山) 형태로 조각했다. 이는
죄업(罪業)을 쌓지 않고 깨달음을 통해 극락으
로 갈 수 있다는 업경(業鏡)의 상징성을 강조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죄업을 비추는 거울
인 업경은 불꽃 형태로 조각된 원형의 놋쇠로
만들었다.
나도 만약 저세상에 가서 업경대를 본다면 과
연 어떻게 나올까? 궁금함보다는 왠지 두려움
이 앞선다.


▲  화엄칠조탱(華嚴七祖幀) - 19세기 탱화

화엄7조탱은 화엄종(華嚴宗)의 정통을 계승한 7명의 승려를 담은 탱화이다. 다들 열심히 화엄
경책을 보고 있는데, 모두 머리에 초록색 두광(頭光)을 지니고 있어 그들을 높이고 있다.
화엄7조는 인도의 마명(馬鳴, 50~150)부터 시작하여 용수(龍樹, 150~250), 중원대륙의 법순두
순(法順杜順. 557~640), 지상지엄(至相智儼, 602~668),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청량징
관(淸凉澄觀. 738~839),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로 그들을 순서에 따라 배치했다.

상단 중앙에는 마명이, 그 좌측에는 용수가 앉아있고, 우측에는 두순을 앉혀 3명이 기나긴 세
월을 뛰어넘어 같은 경상에 앉아있다. 그 옆에 지엄과 현수가 있으며, 하단 좌우에 막내인 청
량과 종밀이 따로 앉아있다. 용수와 마명은 후대에 보살로 격이 높아져, 보살의 얼굴처럼 표
현되었으며, 다른 조사들은 거의 비슷비슷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킨다. 조사 옆에는 그들의 법
호(法號)와 생애를 함축한 글이 적혀있으며, 각자의 저서가 놓여져 있다.
그래서 마명이 앉은 경상에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있고, 종밀의 경상에는 '대방광불
원각경(大方廣佛圓覺經)'이 놓여 있다. 또한 마명 앞에는 앞발을 들어 힘차게 달려가는 말이
그려져 눈길을 끈다.

이 탱화는 원래 진영각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화엄종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7조탱이 제작되어
봉안된 것은 용문사가 유일하다. 또한 19세기 화엄사상을 중시했던 용문사의 노선이 잘 반영
되어 있다.


▲  묘법연화경 변상도(妙法蓮華經 變相圖) - 조선 후기

▲  묘법연화경 권제1
1635년에 인쇄된 것으로 용문사에는 묘법연화경 27책이 전하고 있다.

▲  대장전기일록(大藏殿忌日錄)
대장전에서 사용한 서적으로 용문사 승려들이 그들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  문수사리설마가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說摩訶般若波羅密經)과
백유경(百喩經) 1,2,3,4권
기나긴 이름부터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반야바라밀경과 백유경은
고려 고종 때 간행된 8만대장경에 수록된 경전의 하나로 여기의 것은
조선 후기에 간행되었다.

▲  고색의 때가 자욱한 감역교지(減役敎旨) - 보물 729호

감역교지(면역사패교지)는 1457년 8월 14일에 세조가 용문사에 내린 교지이다. 큰아버지인 효
령대군(孝寧大君, 세종의 둘째 형)과 함께 불교를 믿었던 세조는 용문사를 비롯하여 여러 절
에 교지를 내려 승려의 잡역을 면제시켜주는 한편,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교지에

'경상도 예천 용문사를 경상도 감사와 예천 수령에게 이미 알린데로 더욱 살펴 한층 완호(完
護)하고 잡역을 영구히 면제해줄 것'
이란 내용과 함께 국왕의 친필 수결(手決)이 있으며, 교
지를 담던 봉투에는 '교지함(敎旨函)','어압(御押)'이라 적혀 있다. 그리고 천안 광덕사(廣德
寺)와 화순 쌍봉사(雙峯寺)에도 비슷한 시기에 교지를 내렸는데, 용문사보다 4일 전에 내린
것이다. 허나 대상 사찰명과 발급일자만 틀릴 뿐, 문장과 체제는 똑같다.


▲  용문사를 빛낸 고승들의 진영(眞影)
절을 창건했다는 두운선사를 비롯해 고승 16명의 진영이 걸려있다. 이들은
원래 진영각에 있던 것으로 보관을 위해 성보박물관 지하로 옮겨졌다.

▲  경내에서 제3주차장으로 인도하는 돌담길
(밑에서 본 모습,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성보박물관)


성보박물관을 끝으로 2시간에 걸친 용문사 관람은 정말 배부르게 마무리가 되었다. 경내에서
속세로 나갈 때는 돌계단이 있는 회전문 대신 제3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담장(토담)길과 숲길을
거쳐 일주문 옆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담장길에는 아무렇게나 생긴 큼직한 박석이 깔려 토
담과 함께 한줄기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근처에서 우두커니 있던 번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다시 절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들을 강제로 껴앉고 나의 제자리로 향했다. 이래서
정말 해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리하여 윤장대로 빛나는 고찰, 용문사 관람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예천 용문사를 끝으로
우리나라 3대 용문사는 모두 인연을 지은 셈인데, 이들 용문사 중 가장 작성하기 힘들었던 곳
이 예천 용문사가 아닐까 싶다. (작성하기 쉬운 곳은 양평 용문사)
(양평 용문사 ☞ 보러 가기  / 남해 용문사 ☞ 보러 가기)


▲  일주문으로 내려가는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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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2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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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영동 백화산 반야사 '

반야사3층석탑
▲  반야사3층석탑과 배롱나무

▲  영천과 망경대

▲  반야사계곡(석천계곡)

 


 

♠  백화산(白華山)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반야사(般若寺) - 영동군 향토유적 9호

▲  반야사 경내
경내 뒷쪽으로 꼬랑지를 든 호랑이를 닮았다는 돌너덜(반야산 호랑이)이 보인다.


영동 고을의 동부를 맡고 있는 황간(黃澗), 그 황간 북쪽 우매리에서 석천계곡(반야사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 반야사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반겨준다.

백두대간의 일원이기도 한 백화산이 베푼 석천계곡이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
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그곳 한복판에 둥지를 닦은 반야사는 백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절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매우 곱고 절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영동(永同) 지역 경승지이자 피서의 성지로 오랜 세월 찬양을 받고 있
다.

경관 하나는 아주 일품인 반야사는 신라 말에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가 황간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심묘사(深妙寺)에 주석하고 있었을 때, 현재 절 자리에 있던
연못에 나쁜 악룡(惡龍)이 머물며 갖은 민폐를 부리자 사미승(沙彌僧) 순인(純仁)을 보내 그
들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닦으니 그것이 반야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용(龍)이 진짜로 있을 리는 없을 터이니 아마도 백화산에서 설치던 산적을 교화하
거나 때려잡고 그들의 본거지에 절을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비록 무염이 창건했는지는 의문
이나 대웅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불상이 있어 9~10세기에 창건된 것은 확실한 것 같
다.
무염의 창건설 외에도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원효(元曉)가 세웠다는 설과 의상(義湘)의 10
대 제자 중 하나인 상원(相源)이 세웠다는 설도 덩달아 전하고 있으나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
은 이 땅에 많은 절에서 사골이 되도록 우려먹는 흔한 소재이다. 반야사도 예전에는 그들이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요즘은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부분을 생략하고 신라 후기에 크게 활약했
던 무염을 창건주로 내세우고 있다.
절 주변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 했으며 산
이름을 지장산에서 백화산으로 바꾸어 문수도량임을 내세웠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352년에 중건되었다고 하며, 1464년 신미
(信眉)가 세조(世祖)의 허락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세조는 법주사(法住寺)를 방문했다
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에 들려 새로 지은 대웅전에 참배하고 '반야'란 현판을 내렸다고
하며 그때부터 절 이름이 '반야사'가 되었다고 한다. ('반야'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뜻함)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잠수를 탔다가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
히 불사를 벌여나갔고 1993년에 새 대웅전과 요사를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산신각, 지장전, 심검당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서 다소 떨어진 망경대 벼랑 위에는 이곳의 상징인 문수전이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닦았다.
절이 들어앉은 특성상 대웅전과 극락전 등 주요 건물들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문수전은 북
쪽을 향하고 있다, (경내에서 계곡 건너 서쪽에 전답과 관세음보살상이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유일한 국가 지정문화재인 3층석탑을 비롯해 영동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대웅전 불상, 조선 후기 부도 2기가 있으며, 그 외에 500년 묵은 배롱나무 2그루와 신
중탱이 전하고 있다.
또한 절 뒷쪽 계곡 너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파쇄석이 모인 돌너덜이 있는데,
마치 꼬랑지를 세운 호랑이 모습이라 절에서는 그를 '반야사 호랑이'로 삼으며 호랑이로 화현
(化現)한 산신(山神)으로 내세우고 있다. 경내에서도 그 돌너덜이 보이며, 그 너덜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닦은 모양이다.

반야사는 풍경도 좋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교통편이 영 좋지 못한 것이 큰 흠이라 대중교통으
로 오려면 여간 힘들지가 않다. 허나 그만큼 첩첩한 산속으로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
거나 마음을 싹둑 다듬고 싶을 때 안기면 아주 좋은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템플스테이도 운
영하고 있으니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고적한 산사에 묻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1 (백화산로 652 ☎ 043-742-4199, 7722)
* 반야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주차장 남쪽에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문수도량과 산신기도 도량까지 내세우는 이곳에는 재미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 2
가지를 우선 꺼내보겠다. (다른 1가지는 영천 부분에서)

①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시절 글재주가 좋은 황도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간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했는데, 웃기는 것은 아주 쉬운 한자인 '수(
水)'와 '산(山)' 2자를 몰라서 백일장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크게 발끈한 황도령은 바로 반야사로 달려가 그곳에 있던 일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일우
는 학식이 뛰어난 승려로 그에게 많은 학문을 전해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황도령의 얼굴색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어 얼굴을 살펴보니 글쎄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 아닌가? 그냥 방치하다
가는 황도령이 골로 갈 수 있기에 그의 옷을 벗겨 온몸에 금강경(金剛經) 5,149자를 빼곡히
적어넣고 옷을 입혔다.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은 도령 몸에 쓰인 금강경을 보고는 크게 발작했다. 금강
경의 위엄에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줄행랑을 쳤는데 이는 일우가 금
강경을 쓸 때 귀 부분을 실수로 빼놓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도령은 귀는 잃었지만 스승 덕
분에 살아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출가를 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이법사(無耳法師)라
했다. 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② 불교 탄압이 극성이던 조선 성종~연산군(燕山君) 시절, 벽계선사(碧溪禪師)는 그 소나기를
피하고자 머리를 기르고 속인(俗人)으로 가장하여 살았다. 그는 과부를 맞아들여 같이 살았는
데 어디까지나 위장 혼인일 뿐, 3년을 살아도 여전히 남남처럼 살았다. 부부의 재미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에 완전히 뿔이 난 과부는 어느 날 '야~ 나 갈꺼야~~!!'
선사 왈 '왜?'
과부 '이름만 부부지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 살겠냐?'
선사 '그러면 말리지 않겠다. 그래도 3년 동안 밥해주느라 고생했는데 수고비로 이거나 가져
가셔~!'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주었다.

과부는 표주박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와 동구 밖 샘물가에서 그것으로 물을 떠마시며 팔자 한
탄을 간드러지게 하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있던 표주박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자 그만 포기하고 3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재혼처를 물
색했으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벽계선사를 다시 찾아갔다.
선사는 '내 다시 올 줄 알았다'
그 말에 과부는 '어찌 알았누?'
선사 '그 이유가 궁금함? 그런데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따 팔아먹었노?'
과부 '아 그거... 마을 동구 밖 샘터에서 잃어버렸어. 쩝'
선사 '그 자리에 다시 가봐라. 아직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과부가 놀라서 '어째서?'
선사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중이 되기를 500번이나 했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
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것이라 이
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지~~!'

과부는 웃기고 있네~~! 표정을 지으며 그 샘터로 가보니 과연 그 표주박이 3년 전 모습 그대
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과부는 다시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며 선사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잘살았다고 한다.

▲  반야사 심검당(尋劍堂)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  반야사 용머리 연꽃 석조
백화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그의 넉넉한 마음을 비춘다.

▲  반야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大雄殿)
1993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극락전이 대웅전 행세를 하였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불단과 붉은 닫집, 그리고 석가3존상
(대웅전 불상 - 영동군 향토유적 12호)


대웅전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이루어진 조그만 석
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경주 옥석(玉石)으로 조성되어 산뜻하게 도금을 입힌 것으
로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여래상은 검은 머리칼을 드러내고 있고
좌우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눌러쓰며 석가여래 좌우를 받쳐준다. 그들 뒤로는 검은 바탕으
로 이루어진 석가후불탱이 든든하게 후광이 되어준다.

▲  대웅전 신중탱
대웅전을 지키는 온갖 호법신의 무리가
그려진 것으로 석가후불탱과 비슷한
스타일로 조성되었다.

▲  산신각(山神閣)
2단으로 다져진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  반야사3층석탑 - 보물 1371호

극락전 앞에는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지금이야 반야사의 일원
으로 완전히 묻혀있어 이곳의 오랜 유물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는 원래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석천계곡 탑벌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50년에 주지 성학(性學)이 수습
하여 일으킨 것이다. 그 덕분에 반야사에 오래된 존재가 하나 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다음 머리장식
으로 마무리를 한 형태로 밑에서 머리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높이는 335cm이다. 바
닥돌은 모두 6매의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바닥돌 윗면 네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돌출
되어 있고, 중심부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 기단면석이 꼽히도록 하였다.
기단부는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가 모각되었다. 갑석 윗
면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했으며, 중앙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서 1층 탑신을 꼽도록 조
성했다. 그리고 갑석의 네 모퉁이에도 합각선이 돌출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를 새겼으며, 남/북쪽 면석은 새
로 끼워 넣었다. 2,3층 탑신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2층 탑신에 모각된 우주에서는 엔
타시스 수법을 볼 수 있다. 3층 탑신은 현상으로 보아 새로 끼운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屋蓋石)은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층 옥개석의 낙수면은 길이
가 짧고 경사가 급해 보이며, 옥개석 받침은 1층 5단, 2/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추녀는 비
교적 두껍게 조성되었는데, 직선화되는 보편적인 수법과는 달리 둥글게 표현되어 전각의 반전
은 예리한 편이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찰주(刹柱)가 관통된 노반(露盤)과 복발 등의 머리장식
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보기도 함) 1층 탑신의 결구 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 면석과
1층 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백제계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제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탑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건강 상태도 좋으며, 반야사의 보물로 묵묵히 살
아가고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배롱나무
, 극락전

▲  범종을 비롯한 4물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배롱나무 - 영동군 보호수 13호

극락전과 3층석탑 사이에는 오래된 배롱나무 형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들은 추정 나이가 약
530년(1994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년) 정도로 높이는 각각 8m, 7m, 나무 둘
레는 각각 0.8m, 0.6m이다.
경내에서 대웅전 불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3층석탑은 제외)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자신이
가지고 댕기던 주장자(柱杖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갈라져 쌍배롱나무로 자랐다는 믿거나 말
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한여름(7~8월)에 왔더라면 배롱나무(백일홍)의 아름다운 붉은 향연을 제대로 누릴수 있을텐데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에 오다 보니 그 아름답다는 나무도 다른 나무와 비슷하게 그저 알
몸만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걸치는 옷을 빼버리면 다 똑같거늘 왜 그리도 욕심을 부리고 계
급을 나누는지 모르겠다.


▲  배롱나무의 여름 모습 (반야사 홈페이지 참조)
배롱이의 향연은 기껏해야 2달 정도이다. 6~7개월 정도는 푸른 옷을 걸치고 있으나
나머지 5~6개월은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한 채, 알몸으로 살아간다.


▲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 반야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이곳의 대웅전이었으나 1993년 바로 옆에 새 대웅전이 지어지면서 법당에서
물러나 아미타불의 거처인 극락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석천계곡(반야사계곡)과 반야사의 상징, 문수전

▲  석천계곡 (반야사계곡)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이제 다봤구나~!' 싶어서 발길을 돌리려고 하니 문수전을 알리는 이
정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발길을 붙잡는다. 문수전이라?? 반야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나
싶어서 살펴보니 그곳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경내 뒷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왕 온 것이니 다
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말끔히 둘러봐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산길은 석천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계곡 풍경이 반야사 이전보다 더욱
장관이었다. 물은 깊고 청명하며, 바위와 벼랑이 적당히 나타나 여흥거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누런 갈대가 바람에 펄럭이며 나그네의 마음을 간지럽히고, 소나무 등 나무도 삼삼해 이런 곳
이야말도 진정한 신선(神仙)의 세계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신선의 세계는 인간계보다 시간이 빛의 속도만큼 빠르다고 한다. 신선의 장기를 구경하는 동
안 몇 대(代)가 흘러갔다는 난가(爛柯)의 전설도 있을 정도이니 괜히 이 계곡에 발을 들였다
가 기백 년 뒤에나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돌너덜 (반야사 호랑이)

반야사의 명물 중에는 '반야사 호랑이'라 불리는 돌너덜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꼬
랑지를 치켜든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들은 순 자연산으로 수 만년
동안 흘러내린 파쇄석이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쌓이고 쌓여 높이 80여m, 길이 300여m에 이르는
돌너덜을 이루게 되었다. 근데 하필이면 호랑이 모습을 이루고 있어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
솜씨에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반야사는 그를 산신의 화현으로 삼고 있으며, 산신각 산신탱에
그려진 호랑이 모습과도 비슷하다.


▲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

▲  망경대(문수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튼 문수전(文殊殿)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은 아주 느긋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착했던 길은 영천을 앞
에 두고 갑자기 180도 흥분하여 아주 각박한 오르막길로 돌변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맞배지붕 건물 하나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들어앉은 건물처럼 장엄하게 보이는데, 그것이
반야사의 상징인 문수전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벼랑 옆에 닦여진 가파른 길을 올라가
야 되는데, 경내에서도 다소 떨어져 있고, 길도 각박하여 문수전을 건너뛰는 사람도 있다.
허나 이는 갈비탕에서 고기를 빼먹는 거와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문수보살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주변 풍경이 가히 일품이니 조금은 힘들더라도 발품을 팔만하다.


▲  망경대 밑에 자리한 석천계곡 영천(靈川)

문수전을 강제로 머리에 이고 있는 망경대(문수바위) 밑 계곡을 영천이라 부른다. 이곳은 세
조와 문수보살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세조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를 방문하니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 세조
가 예를 차리자 그는 왕을 영천으로 인도하여 몸을 씻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는
'왕이 불심(佛心)이 갸륵하니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오'

한 마디 남기고는 사자를 타고 망경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사라졌다.

왕이 목욕을 마치고 계곡 밖으로 나오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며, 병을 낫게 해준 문수
보살을 기리고자 절 이름을 반야사로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화는 가만보면 오대산 상원
사(上院寺)에 서린 세조와 문수동자 전설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아무래도 거기 설화를 가져와
서 반야사 스타일로 다듬은 듯 싶다.
세조가 과연 여기서 목욕을 했는지는 의문이나 그만큼 왕실의 인연과 지원이 각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절 부근 경치 좋은 곳에 이런 전설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그 전설로 인해 영천
옆 벼랑을 문수바위 또는 망경대(望京臺)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망경대는 서울을 바라본다
는 뜻이니 절을 중창시켜준 세조와 왕실의 은혜를 두고두고 기리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  망경대 꼭대기에 자리한 문수전의 위엄

문수전은 세조와 문수보살의 설화가 깃든 망경대 벼랑 위 250m 고지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
해 있다. 건물을 짓기에는 다소 척박한 곳이지만 그 현장에 문수보살을 위한 건물을 지어야
문수도량의 뽀대가 나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건물을 지어올렸다.
문수전에 오르면 백화산 남쪽 자락과 석천계곡, 호랑이 돌너덜 등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오
나 주변이 칼처럼 솟은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어 보이는 범위는 그것이 전부이다.


▲  문수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상과 문수동자상

문수전은 북쪽을 향해 문이 나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늠름한 모습의 문수보살상이 파란 피
부의 목각사자상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푸근한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는다. 그 좌우에
는 붉은 옷을 걸친 문수동자와 녹색 옷을 입은 문수동자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문수'의 세상이다.
문수보살과 동자상은 근래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여물지도 못했지만 목각사자상은 조
선 후기 것이라고 하며. 그 좌우에 중생들의 시주를 받아 봉안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어두운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  문수전에서 바라본 반야사 호랑이(돌너덜)

▲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북쪽과 백화산 산줄기
다음에 오면 저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나의 존재를 잠시 지우고 싶다.

▲  백화산의 첩첩한 산줄기 (백화산 정상 방면)

▲  망경대 바로 밑에 펼쳐진 영천
영천 주변에 흙과 자갈이 넓게 깔려 있어 여름 피서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혹시 아는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면 세조 임금처럼 병이 싹 나을지도~~?

▲  문수전에서 경내로 내려가는 산길

반야사 경내에서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길은 2개가 있다. 우리가 이용한 계곡 길을 거쳐서 가
는 것과 경내 동쪽 산길로 오르는 길이 그것인데, 보통 계곡 길로 올라가서 문수전을 찍고 경
내 동쪽 산길로 내려오며 절에서도 그렇게 가기를 적극 권하고 있다. 이유는 계곡 길에서 망
경대 벼랑으로 오르는 길이 좁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도 상관은 없음)
계곡 길은 완만하게 가다가 망경대에서 아주 화끈하게 흥분을 하지만, 동쪽 산길은 서서히 오
르는 형태로 덜 가파르다. 그 길을 내려오면 잠시 떨어졌던 경내가 이내 모습을 드러내며, 주
차장 쪽으로 떨어진다.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  반야사 부도(浮屠) - 영동군 향토유적 10호, 11호

주차장 남쪽 산자락에 고색이 짙은 부도 2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은 주차장 부근에 있
어 찾기는 쉽지만 구석진 곳에 있어 자칫 놓치기가 쉬우니 꼭 등잔 밑을 살펴보기 바란다.

반야사 부도는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 1호 부도(향토유적 10호)는 검은 주
근깨(이끼)가 가득 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대추알처럼 생긴 탑신을 얹히고 네모난 지붕돌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오른쪽 2호 부도(향토유적 11호)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8각의 대석(臺
石)과 석종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지붕돌과 정체가 아리송한 기둥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누구의 승탑(僧塔)인지는 귀신
도 모른다.

▲  왼쪽 1호 부도

▲  머리장식이 특이한 오른쪽 2호 부도

▲  주차장에서 부도로 인도하는 돌계단

▲  주차장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  봄을 기다리는 석천계곡
백화산 등산을 하려면 저 다리를 건너면 된다. (관세음보살상도 저 다리를 건너면 됨)


부도를 끝으로 그림 같은 절, 반야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기분 같아서는 계곡 다
리를 건너서 관세음보살상까지도 가보고 싶고, 계곡길을 따라 일주문(주차장에서 우매리로 나
가면 중간에 있음)까지 걸어가며 계곡을 느끼고 싶지만 다음 답사지(경북 어느 지역)로 빨리
넘어가자는 일행의 독촉에 그 좋은 후식거리를 모두 포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쉽긴 했지
만 반야사에 깃든 보물과 문수전, 영천과 망경대 등 볼만한 것은 거의 다 보았으니 별로 후회
는 없다.

시간은 어느덧 16시. 해가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조금씩 어둠의 기운이 피어나 세상을 훔치려
들고 우리는 고적한 산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우리는 반야사란 절을 기억하겠지만 반야사는 잠깐 스치고 지나간 나를 기억이나 할련지 모르
겠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여름에 인연을 잡고 싶음) 계곡도 말끔히 둘러보고 세조가
몸을 씻었다는 영천에도 풍덩해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반야사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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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 여름맞이 산사 나들이 ~ 논산 쌍계사, 송불암 '

▲  쌍계사 대웅전

▲  쌍계사의 자랑, 대웅전 꽃창살

▲  송불암 미륵불


 

여름이 봄을 몰아내고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첫 무렵, 오랜만에 충남 논산(論山)을
찾았다.
논산으로 멀리 발걸음을 한 것은 그곳 쌍계사의 꽃창살이 그렇게나 아름답고 유명하다 하
여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자 함이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겠지?
다행히 쌍계사입구까지는 시내버스가 1일 10여 회 오가고 있어 접근편도 벽지치고 양호하
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아 논산역으로 보냈다.
논산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버스 시간에 아직 여유가 있어 논산역 동쪽에 자리한
논산시내버스 종점(덕성여객)으로 이동해 차를 기다렸다. 논산시내버스는 일부 외곽 지선
을 제외하고 모두 여기서 출발한다. 
 
세월이 무지 빠르다고 하는데 정작 무엇을 기다리는 시간은 반대로 느린 것 같다. 잡생각
을 머리 속에 마구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억지로 시간을 죽이니 어느덧 출발시간이다.
그래서 타는 곳으로 나가니 쌍계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405번(논산역↔임화리)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잡아타고 논산시내를 가로질러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유명한 관촉사(灌燭寺),
사육신(死六臣)의 하나인 성삼문(成三問)묘소<이곳에는 그의 다리 한쪽이 묻혀있다고 함>
를 지나 쌍계사입구인 중산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부터 쌍계사까지 잘 닦여진 2차
선 도로(중산길)를 따라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된다.


▲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중산길


 

♠  쌍계사(雙磎寺) 입문

▲  강병흠과 평택임씨 정려비(旌閭碑)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은 인적도 거의 없는 고적한 길이다. 집도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
낼 뿐, 거의 산과 밭으로 이루어진 자연 지대로 살며시 스쳐가는 산바람 소리, 가끔씩 지나가
는 차량 소리가 이곳 소리의 전부이다. 그런 길을 혼자 유유자적 거니니 마치 그 길을 통째로
전세를 낸 듯한 즐거운 기분이 가득 들고 걷는 길도 그리 지루하지가 않다.

그런 길을 약 1km 정도 가면 길 왼쪽에 돌로 만든 특이한 비각(碑閣)과 그 안에 담긴 매끈한
피부의 비석이 잠깐 나좀 보고 가라며 하소연을 한다. 하여 잠시 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강병
흠(姜抦欽)과 평택임씨(平澤林氏) 부부의 정려비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강병흠은 진주강씨로 구한말과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첨지중
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를 지냈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대단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어느
한겨울에 부모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자 저수지의 두꺼운 얼음을 깨서 잉어를 잡
은 적이 있으며, 아버지가 병으로 드러눕자 밤낮으로 약을 달이며 병간호를 했는데, 꿈속에서
친할머니가 나타나 아버지의 병에는 산삼이 최고라며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하여 다음날 그
곳에 가보니 정말 산삼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으며, 결국 그가 사
망하자 무려 6년씩이나 시묘살이를 했는데, 불효에 대한 자책감으로 옷자락에 항상 돌을 담고
다녔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포석효자(包石孝子)라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강병흠의 부인인 평택임씨도 대단한 열녀(烈女)라 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했고, 남편이 죽자
자결을 했다. 그래서 그들 부부의 효행과 열행(烈行)
을 기리고자 1922년에 정려비를 세웠다.

처음에는 1칸짜리 기와 정려각을 씌웠으나 건물이 낡자 1993년에 지금의 석조물을 세우고 내
부에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김용제(金容濟)가 짓고, 이종성(李鍾聲)이 글씨를 썼으며, 비문
에는 '孝子僉知中樞府事 姜抦欽 閭配, 烈女 淑夫人 平澤林氏之閭(효자 첨지중추부사 강병흠
정려, 열녀 숙부인 평택임씨지여)'라 쓰여 있다.

           ◀  열녀 해주오씨 비석
강병흠 부부의 정려비에서 잠깐 옷깃을 여미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얼마 안가 고색의 때를 절
반 정도 탄 해주오씨 열녀비가 모습을 비춘다.
비석 주인공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비
석의 상태로 보아 19세기 인물로 여겨지며, 앞
서 평택임씨 못지 않은 열녀였던 모양이다.

           ◀  영명각(靈明閣) 입구
쌍계사 주차장을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늘씬한
숲길과 함께 영명각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한다.
영명각은 1975년에 농업진흥공사가 금강(錦江)
유역 300핵타르의 개답(開畓) 공사를 벌이면서
무연고 무덤 유골 3,000기를 수습해 봉안한 납
골당이다.
이후 건물을 확장하여 논산시민의 납골당(논산
시 공설봉안당)으로 바쁘게 살고 있다.


▲  쌍계사 밑에 자리한 그림 같은 호수, 절골소류지(沼溜地)

영명각입구 맞은편에는 너른 호수인 절골소류지가 있다. 작봉산(불명산)이 베푼 청정한 물이
쌍계사를 끼고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대장정을 준비하는데,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소류지의 자태는 정말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영명각 입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숲길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한 숲, 그 숲이 베푸는 숲내음과 그늘, 거기에 옆에
붙은 소류지까지, 이곳만큼은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비켜간다.

▲  쌍계사 부도(浮屠)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0호

길을 거닐다보면 왼쪽 언덕에 옹기종기 모인 부도(승탑)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 부도는 모
두 9기로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20세기 후반에 이곳으로 모두 집합시켰다.
고색의 내음을 깊게 내뿜고 있는 그들은 석종형(石鐘形) 6기, 옥개석(屋蓋石)을 갖춘 탑 3기
로 이루어져 있다. 석종형은 높이 150cm 내외로 4각 또는 6각의 바닥돌을 깔고 그 위의 기단
(基壇)과 석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바닥돌과 기단에는 연꽃무늬 장식을 새겨 맨돌
의 식상함을 덜어준다.
옥개석 부도는 높이 130cm 내외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대좌를 받치는 바닥돌은 4
각 또는 6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중/하대로 구분된 기단부(基壇部)에는 연꽃무늬 연주문과
화문(花紋)이 새겨져 있고, 탑 꼭대기에는 구슬 장식이
얹혀져 있다.

이들 부도 중 2기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翠峰堂 慧燦大師之屠(취봉당 혜천대사 부도)','梅
憲~~之塔(매현 ~~의 탑)' 정도의 글씨만 확인이 가능하다. 나머지 글씨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크게 흐트러져 알 수가 없으며, 부도의 조성시기는 조선 중~후기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부도

▲  쌍계사 중건비(重建碑)

부도의 보금자리 한쪽에는 중건비라 불리는 비석이 미운 오리새끼 마냥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는 1739년에 쌍계사를 중수하면서 세운 것으로 높이 156cm, 너비 78cm이며, 땅바닥에 자연석
을 깔아 비석을 세울 수 있도록 홈을 파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운 다음에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쌍계사의 내력을 머금은 절의 일기장으로 비석 앞면에 절의 내력을, 뒷면에는 시주자의 이름
이 새겨져 있으며, 김낙증(金樂曾)이 찬(撰)을 하고, 이화중(李華重)이 글씨를, 김낙조(金樂
祖)가 글을 새겼다.


▲  쌍계사 봉황루(鳳凰樓)

숲길을 지나면 주차장과 봉황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숲에 감싸인 주차장 좌우로 2개의 조그만
계곡이 소류지로 흘러가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쌍계사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즉 2개의 계곡
이 만나는 절이란 뜻이다.

주차장을 굽어보는 봉황루는 쌍계사의 정문이다. 이곳은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아직 장만
하지 못해서 소류지 숲길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속세(俗世)와 절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제
아무리 천하의 독종, 번뇌라 한들 삼삼한 숲과 소류지의 경계를 뚫고 절까지 침투하기는 힘들
것이다. 허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 또한 번뇌라 아무리 던져본들 그 자리를 맴돌아 결국
소류지 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이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봉황루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누각이다. 정문 외에 조
촐하게 강당(講堂) 역할까지 하고 있는데, 근래 손질을 했는지 딱히 고색의 내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1층에는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늘어뜨렸으며 그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마치 해
가 떠오르듯 솟아오른다.
2층에는 북과 '쌍계사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이란 시가 적힌 현판이 있는데, 이 시는 5
언율시(五言律詩)로 어느 노승(老僧)이 1779년에 이곳을 찾아 지은 것이다. 이를 통해 적어도
18세기에는 봉황루가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쌍계사의 내력을 짚어보도
록 하자.


▲  봉황루의 뒷모습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 - 1779년 어느 노승이 지음

고루에 나홀로 누워                  高樓我獨臥
마음은 하늘을 찾아 날아오르네       心適上飛天
산봉우리들 사이에 흰 구름이 머물고  衆峀雲留白
여러 시내에 달 그림자 비치네        群溪月影輝
석등은 불실을 밝게 비추고           夕燈明佛室
아침 비는 선문을 어둡게 하네        朝雨暗仙扉
날마다 금모래 연못을 감상하니       日賞金沙池
몸은 세속으로 돌아감을 잊네         身忘俗諦歸

▲  봉황루 2층에 있는 태극마크 북

▲  경내 북쪽 석축 위에 닦여진 돌탑들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논산 쌍계사는 작봉산(鵲峰山, 419m) 북쪽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동/서/남이 모두 작봉산 산줄기
에 막혀있고, 오로지 북쪽만 뚫려있기 때문이다.
쌍계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작봉산'으로 '불명산(佛明山)'이란 이름까지 지니고 있는데, 이
는 산의 옛 이름이 불명산이기 때문이다. 하여 쌍계사는 절에 어울리게 '불명산 쌍계사'를 칭
하고 있다.

쌍계사는 10세기 후반에 이곳에서 가까운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세운 혜명대사(慧命大師)가 창
건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믿을 바가 못되며, 창건자와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
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다. 다만 고려 후기 서화가였던 행촌 이암(杏村 李嵒, 1297~1364)이
발원하여 중건했다는 내용이 중건비에 적혀있어 이때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끝 무렵에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절의 연기(緣起)를 썼다고 전하며, 초창기 절 이름
은 백암사(白庵寺) 또는 백암(白庵)이었다.

왕년에는 500~600여 칸의 건물이 있을 정도로 호서(湖西) 제일의 대가람(大伽藍)을 자랑했는
데, 극락전을 비롯해 선원(禪院), 관음전, 동당(東堂), 서당(西堂), 명월당, 백설당, 장경각
등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허나 그렇게 잘나갔던 쌍계사는 조선시대를 거치면
서 크게 야위어 갔고, 여러 번의 화재로 1716년에 대웅전 등을 중창했으나 1736년 다시 화재
가 찾아와 1739년에 중건을 하고 중건비를 세웠다.
조선 후기와 왜정(倭政) 때는 그런데로 절을 유지했으며, 6.25 시절에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
가 별 피해는 없었다. 이후 별다른 큰 불사(佛事) 없이 지금에 이른다.

절은 지형을 이용해 넓게 터를 다졌는데, 북쪽과 서쪽, 동쪽에 석축과 돌담을 쌓고, 북쪽 가
운데에 봉황루를 내어 정문으로 삼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봉황루, 나
한전, 칠성각, 명부전, 요사 등 8~9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뜨락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
이다. 한때는 그 뜨락에도 건물이 가득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모두 사라지면서 수풀
만 무성하게 된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지방문화재인 부도
가 있으며, 계룡산 갑사(甲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머물고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 판각
이 원래 이곳에 있던 것으로 여기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쌍계사에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많이 서려 있다. 그 전설을 모두 다루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그중 일부만 끄집어 보도록 하겠다.

① 창건설화 - 먼 옛날, 하늘의 상제(上帝)가 이 땅에 절을 하나 짓고자 자신의 아들을 내려
보냈다. 아들은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천하에 진귀한 나무를 구해와서 주변 경치
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절을 세웠다.
② 하마비(下馬碑) 전설 - 때는 고려 후기 어느 날, 쌍계사 주지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승
려 1명이 나타나
'그곳에 쫓기는 승려가 찾아 올 것이니 잘 대접하시오. 허나 임금 왕(王) 자의 성을 가진 사
람이 말을 타고 들어오면 큰일이 날 것입니다!'
이후 세상이 더 혼란해지면서 많은 승려가 난을 피해 쌍계사로 들어오니 주지는 그들을 모두
맞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산을 뒤흔들 듯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탄 군사가 절을 향해 달
려오고 있던 것이다. 절에 있던 사람들이 불안에 떨자 주지는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기 시작
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 독경을 외웠는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절로 치닫던 말들이
절 앞에서 서로 뒤엉키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말을 탄 군사들은 말들의 때아닌 발작 증세
에 모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후에도 똑같은 일이 계속 생기자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절에 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또한
말이 때거지로 죽은 곳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웠는데, 세월이 지나자 엉뚱하게
도 죄 지은 사람의 죄를 풀어주는 영험이 있는 비석으로 둔갑되어 불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
다.

* 쌍계사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3 (중산길 192 ☎ 041-741-2251)


▲  봉황루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쌍계사 둘러보기

▲  쌍계사 연리근(連理根)

논산 쌍계사는 솔직히 대웅전만 알았지 나머지는 아는 것이 없었다. 절의 역사도 제법 오래되
고 보물로 지정된 장대한 대웅전도 있으니 절 규모도 어느 정도 될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정
작 경내로 들어서니 내 생각과는 완전 다른 허전한 모습의 쌍계사가 나를 맞이했다.

봉황루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대웅전이 보이는데,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
도 제법 떨어져 있다. 봉황루와 대웅전 사이에는 뜨락이 넓게 펼쳐져 있으나 그냥 뜨락만 있
을 뿐, 연리근 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옛날에는 그 자리에 건물이 가득 있었겠지만 다 사라
지고 빈 자리만 남은 것이다. 뜨락 서쪽에는 오래된 연리근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동쪽에
는 조그만 요사와 선방이 자리한다. 그리고 건물 상당수는 대웅전 좌우와 뒷쪽에 띄엄띄엄 떨
어져 있다.
이렇게 경내에 놀고 있는 땅이 많으니 요란하게 중창불사를 벌일 만도 한데 아직은 그럴 생각
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뜨락이 너무 허전하니 조촐하게 건물 몇 개라도 세워 그 공허함을
달랬으면 좋겠다. 세상에 이렇게나 넓은 법당(法堂) 뜨락도 처음 보고, 경내 중심에 이렇게
공터가 넓은 절도 처음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연리근

대웅전 뜨락 서쪽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연리근은 겉으로 보면 1그루 같지만 엄연한 2그루의
느티나무(괴목나무)이다. 이들은 서로 뿌리가 만나 이렇게 하나의 나무처럼 되었는데,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줄기가 서로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가 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른다.

이 연리근은 수백 년(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음) 묵은 장대한 나무로 쌍계사의 오랜 내력을 알
려주는 소중한 산증인이다. 나무의 덩치가 대단하여 그늘 또한 넓기 그지 없는데, 나무 밑에
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그늘의 질감과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으로 이곳만큼은 무더위를
잊어도 좋다.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오른쪽 맞배지붕 건물)
선방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그 앞에 조그만 건물은
찻집으로 전통차를 무료로 제공한다. (일부는 유료)

▲  동그란 석조(石槽)
작봉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것일까? 석조에는 그가 베푼 옥계수로 작은
바다를 이룬다. 목마름을 단죄하고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입에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하다며 쾌재를 외친다.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는 명부전과 나한전, 칠성각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명부전은 20세기 초에 지어
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
王), 도명존자(道明尊者),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
데, 보통 절 건물은 가운데 문은 닫고 좌/우측 문을 열어두어 통행하게 하나 여기는 그 반대
로 가운데 문을 이용토록 했다.


▲  명부전 중심에 앉아있는 온후한 표정의 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왼쪽), 도명존자(오른쪽)

▲  명부전 식구들
저승의 10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金剛力士), 동자(童子) 등


▲  나한전(羅漢殿)
20세기 초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나한전 석가여래상과 석가후불탱

▲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조그만
16나한(十六羅漢)들

  ◀  나한전의 젊은 버전, 칠성각(七星閣)
경내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칠성(七
星)을 비롯해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
자)이 봉안되어 있다.

▲  칠성각 내부 - 왼쪽부터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왼쪽 나무가 연리근, 오른쪽 건물이 요사)


▲  석조관세음보살상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최근에 장만한 관세음보살상이 자리를 폈다. 관세음보살의 얼굴이
풍만하고 복스러운 것이 마치 중년 비구니 같은데, 비가 내려도 얼굴 부분은 절대로 젖지 않
는다고 한다. 하여 절에서 신비한 관세음보살상이라며 크게 치켜세우고 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참 어려운 현상 같은데, 그게 계속 되는 것을 보면 단순한 석조보살상은 아닌 모양이다.

관세음보살상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얇아보이는 옷을 걸치며 가슴 주
위로 여러 장식을 둘렀는데, 앉아있는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가득하다.


▲  관세음보살상에서 바라본 쌍계사 경내

▲  쌍계사 대웅전 - 보물 408호

쌍계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 바로 이곳 법당인 대웅전이다. 바깥만 볼 것이 아니라 안에
도 말끔히 살펴보자. 그래야 저승에 가서도 염라대왕 형님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
만큼 쌍계사에서 대웅전의 비중은 막대하며 '대웅전은 곧 논산 쌍계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
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웅전은 법당에 걸맞게 경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솔직히 너무 일
방적으로 큼) 이상하리만큼 경내에 노는 공터가 많아 참 허전하기 그지 없는데, 그 허전함과
절의 조촐함을 대웅전이 제대로 커버를 해줄 만큼 든든한 모습이라 사진에 나오는 사람과 대
웅전을 비교하면 크게 실감이 날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살짝 치켜진 추녀마루의 선이 참 곱다. 마
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모습 같은데, 지붕이 건물 2층과 맞먹을 정도로 육중하기 그지 없
어 건물 밑도리가 그 큰 지붕을 어떻게 받쳐들까? 쓸데없는 걱정이 들 정도이다. 평방(平枋)
위에는 촘촘히 박힌 공포가 그 지붕을 받들고 있는데, 안쪽은 5출목(出目), 밖은 4출목이다.
이처럼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심어놓은 양식을 다포(多包)양식이라고 한다.

대웅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작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절이 세워진 고려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화재로 무너진 것을 1716년에 중창했고 화재로 또 전소된 것을 1739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 기둥은 굵고 희귀한 나무를 사용했는데, 그중 가운데 좌측 2번 째 기둥이 칡덩굴나무로
되어있다. 이 기둥은 윤달이 들은 해(4년에 1번, 2016년, 2020년, 2024년~)에 몸으로 안고 돌
면 죽을 때 고통을 면하게 된다고 한다.
1번을 안고 돌면 하루를 앓다가 가고, 2번을 안으면 2일, 3번 돌면 3일이라고 하는데, 유난히
3을 좋아하는 이 땅의 사람들의 습성상 3일은 앓고 가야 서운하지 않는다며 보통 3번을 안고
간다고 한다.
또한 염라대왕이 논산 쌍계사 출신인지 '자네 논산 쌍계사 다녀왔는가?' 물어본다고 한다. 그
러니 만약을 대비하여 쌍계사를 꼭 챙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대웅전 문짝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창살무늬

쌍계사하면 대웅전 꽃창살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을 다녀간 답사쟁이들은 하나 같이 꽃창살
을 쌍계사 제일로 찬양하기 때문이다. 나도 꽃창살의 풍문을 듣고 이곳에 온 것인데, 직접 그
들을 보니 그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꽃창살의 갑(甲)으로 칭송받는 부안 내소사(來蘇寺
) 대웅보전의 염통까지 제대로 쫄깃하게 할 정도로 말이다.
회오리 모양과 바람개비 모양의 꽃잎 문양이 문짝마다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꽃잎 사이로 나
뭇잎 문양까지 달려 있어 실제 꽃잎이 달려있는 듯하다. 물론 자연산 보다는 좀 못해도 진짜
꽃들도 시샘을 보낼 정도로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851호

대웅전 불단에는 장대한 모습의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이 각자 스타일에 맞는 후불탱을 뒤에 걸
치며 후덕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대웅전이 크니 집 주인인 석가여래와 그의 협시불(夾侍佛)
까지 덩달아 장대하여 대웅전과 꽃창살에 놀란 눈과 가슴을 더욱 놀라게 만든다.

이들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조각승 원오(元悟)가 수조각승을 맡아 신현(信玄)과
청허(淸虛), 신일(神釰), 희춘(希春) 등 4명과 함께 1605년에 조성했다. 그때 쌍계사는 무려
2층짜리 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 저들을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데, 석가여래 좌우로 약사여래(
藥師如來)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자리해 3불을 이루고 있다.
앙련(仰蓮)과 복련(앙련의 반대)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로 장엄하게 앉아있는데,
석가여래는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으며, 커다란 덩치
에 비해 손과 팔은 작아 보인다. 옷은 양쪽 어깨를 덮고 있지만 오른쪽이 더 진하며, 이를 변
형 편단우견(偏袒右肩)이라고 부른다. 가슴에는 수평의 승각기가 보이며, 법의(法衣) 자락도
규칙적인 간격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고, 좌우 불상도 크기만 약간 작을 뿐, 대체로 석가여
래를 따라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편삼을 입고 그 위에 법의를 걸쳤다는 것이다.

이들 뱃속에서는 아주 고맙게도 발원문(發願文) 등 복장유물 4점이 나왔는데, 발원문에 통해
1605년이라는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 제작에 참여한 승려 이름을 알게 되었다. 분명한 제작
시기와 함께 조각승 원오의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충남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5
년 3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대웅전 천정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대웅전에 발을 들였다면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기 바란다. 온갖 기묘한 조화로 이루어진 천정
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을 어느 정도 정화를 시켜줄 것이다.
천정에는 커다란 들보와 섬세하게 짜여진 공포, 용머리, 닫집, 25개의 네모로 이루어진 우물
천정(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불 천정에 우물천정 하나씩 있음),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
(迦陵頻伽)> 등이 정신없이 짜여져 있다. 들보와 공포에는 단청이 곱게 칠해져 있고, 용은 동
쪽 들보에 몸을 대고 불단을 굽어본다. 불상 위에는 붉은 기와집의 닫집과 천개(天蓋)가 있는
데, 마치 조그만 궁궐을 보는 듯 하며, 하얀 극락조가 날개를 퍼득이며 천정을 날고 있다. 그
야말로 휘황찬란이라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우물천정과 두툼한 들보, 그 들보에 몸을 기댄 용, 그리고
칠보궁(七寶宮)이란 현판을 내건 붉은 기와집의 닫집

▲  극락조가 날아다니는 천정 (들보와 닫집, 보개, 우물천정)
이곳이야말로 불국토(佛國土)의 축소판이 아닐까?

▲  대웅전 천정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을
빼곡히 담은 그림으로 법당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  대웅전 앞에 놓인 헝클어진 석재들
석탑의 일부로 여겨지는 연꽃무늬 석재와
맷돌의 일부가 나란히 놓여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었다.


▲  이렇게 큰 뜨락을 본 적이 있는가?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과 봉황루

박석이 깔린 길이 봉황루에서 대웅전 앞까지 정연하게 펼쳐져 있다. 지금은 이렇게 허전한 공
간으로 있지만 혹시 아는가? 나중에 조그만 도시처럼 번잡한 공간이 될지도? 허나 너무 복잡
한 모습보다는 이렇게 여백의 미가 넘치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인다.


▲  쌍계사를 뒤로하며 소류지에 버려둔 번뇌와 다시 만나다 ~~

겉모습은 작지만 대웅전 하나로도 알맹이가 큰 쌍계사를 1시간 30분 정도 둘러보았다. 대웅전
내부를 뚫어지라 살펴보았고, 이곳에 서린 문화유산은 불상의 복장유물을 제외하면 모두 눈에
넣었다. 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그곳에 정이 들었는지 속세로
나가는 길에도 여러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쌍계사에서 중산리로 나와 가게 문에 부착된 버스 시간을 보니 20분 뒤에 온다고 그런다. 딱
히 할 것도 없어서 정류장 주변을 서성이며 안그래도 빠른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시내
로 나가는 시내버스가 나타나 활짝 입을 연다. 하여 그 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논산역으로 나
왔다.

아직 일몰까지 여유가 넘쳐서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우리나라 서원의 주요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돈암서원(遁岩書院)을 가보기로 했다. 허나 서원은 격하게 땡기지는 않아서 다른
곳을 물색하다가 연산에 자리한 송불암 미륵불로 장소를 바꿨다. 서원보다는 절이 볼 것도 많
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논산시내에서 송불암이 있는 연산(連山)까지는 시내버스와 시외직행버스가 제법 다닌다. 대전
으로 가는 주요 길목인데다가 구한말까지는 충청도의 주요 고을(연산현)이었기 때문이다.

논산역에서 연산, 계룡시 방면으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03번을 타고 1번 국도를 신나게 달려
연산에 진입, 연산 남쪽인 연산구4거리에서 내렸다. 여기서 우회국도 개설로 많이 한가해진
옛 1번 국도 2차선 도로(황룡재로)를 따라 동쪽(계룡 방면)으로 6~7분 정도 가면 송불암 입구
이고, 거기서 송불암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송불암이 모습을 비
춘다.


 

♠  오래된 미륵불과 소나무를 간직한 조그만 절
~ 논산 송불암(松佛庵)

▲  송불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송불암은 옛 절터에 지어진 작은 비구니 절로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이곳에 서린 오래된 미
륵불을 보고자 함이다.

송불암에 있던 옛 절은 미륵불을 통해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보다 동쪽으로
50m 떨어진 산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절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미륵불과 주춧돌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1946년에 인근 신양리에 살던 동상태의 어머
니가 2칸짜리 집을 짓고 절로 삼아 미륵불을 관리했다. 이것이 현재 송불암의 시작이다.
이후 1970년에 승려 경연이 절을 물려받아 주지승이 되었는데, 미륵불 바로 옆에 소나무가 석
불과 조화를 이루며 지붕처럼 퍼져 있다고 하여 송불암이라 하였다.

송불암에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가 한토막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어느 날, 법력이 높은 노승(老僧)이 기도를 마치고 걸망을 짊어지며 천하를 돌아다
니다가 연산 고을 인근 황룡산에 올라 땅을 살펴보니 절을 지으면 크게 될만한 명당(明堂) 자
리였다. 하여 그곳을 점찍어두며 주변을 보니 광산김씨가 중심이 된 부자 마을이 있었고, 마
을 외딴 자리에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니 광산김씨 청년이 나와 무
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승은
'황룡산에 명당 자리가 있다기에 여기서 불법(佛法)을 전할까 하오'

답을 하니 청년은
'이곳은 유생이 많아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자 노승은
'그러면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풀막을 짓고 도를 깨우쳐 볼까 하오'
그러니 청년이
'그러면 무엇을 먹고 입으며 혼자 쓸쓸히 어떻게 살려고 하시오?'
물었다. 노승은
'원래 중은 풀뿌리, 나무열매로 양식을 삼고, 송락과 초목으로 의복을 대신하며, 법당이 없으
면 바위굴을 불당으로 삼소. 그러니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소?'
노승
의 시원스런 답에 청년은 감동을 먹고 오늘 날도 저물었으니 일단 하룻밤 자고 가라며 호
의를 베풀었다.

이렇게 청년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노승은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청년의
어머니를 보게 되었는데, 얼굴을 보니 3일 뒤에 죽을 상이 아닌가? 이걸 청년에게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궁리하다가 한숨을 쉬며 그에게 전해주었다.
'덕분에 잘 쉬었소. 대접에 대한 보답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하니 부디 화를 내지 마시오.
아까 당신의 아머니를 잠깐 뵈었는데, 3일 후 아침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실 것이오. 그러면
인근 범바위골에 묘를 쓰되 황금돌을 절대 건드리지 마시오. 그곳이 괜찮은 명당자리요'
그 말을 들은 청년은 갑자기 뚜껑이 뒤집혀
'뭐라고? 이 땡중이 미쳤나? 빨리 꺼져!!'
성을 내며 노승을 쫓아냈다.

그런데 과연 3일 후 아침, 청년의 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이에 청년은 크게 놀라 통곡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노승이 한 말을 상기시켜 보았다. 범바위골에 묻으라는 말이 생각나 그곳에 묘
자리를 정하고, 땅을 파니 황금돌이 나왔는데, 돌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까지는 기억이 안나서
그만 그 돌을 들어내고 말았다.
그러자 그 속에서 수많은 벌이 앵~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땅에 흔치 않던 벌명당이었
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벌들은 노승 때문에 보금자리를 빼앗기게 되었고, 벌의 우두
머리가
'그 땡중 때문에 우리 터전을 빼앗겼다. 빨리 그 작자를 단죄하러 가자~~!'
잔뜩 이를 갈고 무더기로 날라다니며 노승을 찾아 다니다가 인근을 지나던 그를 발견하고 집
중 폭격을 가해 말그대로 벌집을 만들어 죽였다.

이후 노승의 저주가 씌워진 탓인지 연산마을에는 10년 홍수, 10년 가뭄, 10년 전염병으로 완
전 몹쓸 땅이 되버렸다. 마을의 실세이던 광산김씨 집안에서 회의를 열어 상황이 이리 된 것
은 우리들 때문에 노승이 벌에 쏘여 죽은 것이라 규정하고 그의 넋을 위로할 겸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다. 그랬더니 재앙은 멈추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또한 미륵불 곁에 소나무 1그루가 홀연히 자라나 그를 향해 가지를 뻗으면서 위로 자라지 않
고 아래로만 자라니 사람들은 그 소나무가 노승의 후신이라 여기며 기도를 올렸고 소원을 성
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기서 출가하여 크게 된 승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전
한다.

물론 전설을 다 믿으면 이는 순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설을 통해 마을의 평안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절을 세웠음을 알 수 있으며, 딱히 뒷끝이 없는 다른 벌명당 전설과 달리 승려의 말
을 지키지 않다가 명당의 기운은 커녕 오히려 마을이 풍비박산이 나자 그 승려를 위로하고자
절을 세워 간신히 마을의 안녕을 되찾았다는 내용이 이채롭다. 일종의 승려 말을 들으면 자다
가도 떡이 나오니 승려와 절, 불상을 잘 대접하라는 옛 석불사의 뜻이 아닐까?

▲  개구리의 조촐한 운동장, 동그란 연못

▲  대웅전 앞 연꽃 석조

송불암은 대웅전과 요사, 선방 등 4~5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비구니 절이라 경내는 깔끔하
고 정갈하며, 경내 동쪽에 창건 설화에 나오는 소나무와 이곳의 후광이자 든든한 밥줄인 미륵
불이 자리해 있다.

▲  2000년에 새로 지어진 대웅전

▲  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요사


▲  미륵불과 소나무가 있는 경내 동쪽

▲  송불암 미륵불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3호

송불암 미륵불은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높이는 4.25m, 둘레 1m로 머리에는 네모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얼굴은 넉넉한 인상으로
눈과 눈썹, 코, 입이 모두 완연하게 남아있으며, 두 귀는 목까지 늘어져 있고, 목에는 삼도(
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통에는 법의(法衣)를 걸쳤는데, 얇은 새김으로 새겨진 옷주름선은 발목까지 내려왔으며, 왼
손은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몸 옆에 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것 같다. 그가 서 있는 대좌(臺座)에는 연화무늬가 있고, 옷자락 밑으로 석불의 발과 발가락
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석불 옆에는 창건설화에 나오는 소나무가 누워있다. 정말 노승의 넋이 담긴 것인지 하늘로 곧
게 자라지 못하고 석불을 향해 아래로만 자라나 끝내는 석불의 하늘을 가린 것이다. 그 모습
이 마치 석불의 불력(佛力)이나 매력에 끌린 듯 그를 덮고 있었는데, 소나무가 갈수록 오버(?
)를 하면서 석불이 마치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자 2000년에 지금의 자리로 석불을
옮기고 소나무를 싹둑 정리했다.


▲  송불암 소나무 - 논산시 보호수

미륵불과 더불어 송불암의 오랜 명물인 소나무는 미륵불 앞에 마치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을 하고 있다. 그의 미륵불에 대한 마음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석불에게 큰 부담을 주었던 존
재이기도 한데. 2000년에 미륵불을 현 자리로 옮기고 소나무를 크게 손질하여 얌전하게 만들
었다.
나무의 나이는 약 270년으로 그 적지 않은 나이에 비해 높이는 낮다. 다만 아랫쪽으로만 성장
을 하여 지금처럼 처진 소나무가 되버린 것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있는 석탑

소나무 그늘과 석불 주변에는 세월에 지쳐 쓰러진 주춧돌과 석탑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들은
미륵불과 더불어 옛 석불사의 유물로 석탑은 2기가 있는데, 윗 사진의 탑은 아랫도리만 간신
히 남아있으며, 그 주위에 버려진 주춧돌과 자잘한 돌들이 모여 있어 서로를 의지한다.


▲  석불 옆에 자리한 조그만 석탑
몇층인지는 모르겠으나 탑신의 일부와 옥개석이 이리저리 깨진 채 남아있다.
그 위로 동그란 돌이 마치 공기돌처럼 놓여있다.

▲  미륵불 주변에 흩어진 주춧돌들 ▲
이들은 미륵불을 보호하던 건물의 주춧돌로 거의 정사각형 모양의 보호각이
미륵불을 품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높이가 4m가 넘으니 그 건물
또한 장대했을 것이나 임진왜란 이후 사라지고 간신히 주춧돌만 남아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허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미륵불의 뒷모습과 소나무
미륵불 뒷모습은 딱히 손질을 하지 않아 울퉁불퉁하다.

▲  미륵불의 귀여운 발과 연꽃무늬 대좌
발가락이 상식 밖으로 지나치게 커서 그 모습이 마치 손에 낀 장갑이나
글러브 같다.

▲  송불암과 논산을 뒤로하며~~~

송불암을 30분 정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더 이상 갈 곳도, 마음을
줄 곳도 없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여름 맞이 논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 송불암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36-3 (황룡재로 92-18 ☎ 041-733-6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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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0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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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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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와 거닐기 좋은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개운산둘레길)

 


' 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그리고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나들이 '


▲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유희좌 불상,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개운산둘레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따사로운 날, 고려대 뒷쪽에 자리한 안암동
(安岩洞) 보타사를 찾았다.
보타사는 10회 이상 인연을 지은 절로 즐겨찾기 급까지는 아니나 집에서도 가깝고 진귀
한 문화유산을 둘이나 간직하고 있어 매년 1~2회 정도 복습하러 간다. 올해도 변함없이
보타사 보물들의 안부가 격하게 궁금하여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오후 한복판에 부랴부
랴 카메라와 지갑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보타사 서쪽에 자리한 개운사(開運寺)를 먼저 둘러보았으나 마음은 벌써 보타사에서 나
를 재촉하고 있어
개운사를 콩 볶듯이 살펴보고 동쪽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 길
의 끝에는 조그만 산사 보타사가 산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활짝 열린 보타사, 대원암 정문


 

♠  보타사(普陀寺) 입문 (대원암)

▲  안암동 대원암(大圓庵)

보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양반가 기와집처럼 생긴 한옥이 제일 먼저 마중을 한다. 이곳이 초행
이라면 이것이 보타사인가 싶어 마음이 설레겠지만 그것은 함정이며, 그는 개운사의 부속암자
인 대원암이다.
보타사를 제대로 가리고 앉은 대원암은 기와집 1동이 전부인 조그만 암자로 1845년 지봉선사(
智峰禪師)가 창건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법명(法名)은 우기(祐祈)인데, 북한
산(삼각산) 도선사(道詵寺)에서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에게 사사하여 그의 법을 이어갔으
며, 효성이 깊고 인품이 넉넉했다. 또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친분이 있어 그에게 판
서(判書)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연유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지봉판서라 불렀다.

왜정(倭政) 때는 현대불교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1870~1948), 법명
은 정호, 영호>
이 이곳에 머물며 불교 교육에 나섰으며 1960년대에는 탄허(呑虛, 1913~1983)
가 역경사업을 벌였던 유서 깊은 현장이기도 하다.


▲  숲속에 자리한 보타사 주차장

대원암을 지나면 녹음이 깃든 숲이 조촐하게 펼쳐진다. 숲은 작으나 나무들의 강인한 협동심
으로 햇살도 우걱우걱 씹어먹을 정도로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마치 깊은 산중의 암자에
들어선 기분이다. 개운사에서 아주 잠깐 이동했을 뿐인데 풍경화는 이렇게나 180도 달라진 것
이다.

햇살도 거의 들어오기 힘든 그곳에 차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고 그 너머로 석축을
쌓고 터를 다진 보타사가 마치 별장 같은 모습으로 들어앉아 있다. 연등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정녕 절집인지 고개 조차 갸우뚱했을 것이다.
주차장 옆에는 키도 제각각인 중창(重創) 송덕비와 사적비(事蹟碑) 등 비석 4기가 있고 그 옆
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반원(半圓) 모양의 조그만 연못이 장차 다가올 연꽃의 향연을 숨죽여
준비한다.

▲  보타사 송덕비와 사적비

▲  반원 모양의 작은 연못

주차장에서 보타사로 인도하는 계단을 오르면 보타사 현판을 머금은 일주문(一柱門)이 중생들
을 맞는다. 일주문이라고 하나 그냥 일반 주택 대문에 기와 지붕을 얹힌 모습이다.


▲  보타사 일주문

▲  보타사 대웅전(大雄殿)

개운사 동쪽 그늘진 곳에 비구니 절인 보타사가 살포시 자리해 있다. 대원암과 더불어 개운사
의 부속 사찰로 경내가 숲에 완전히 감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나무들이 무
성해 속세의 온갖 기운과 소음을 거의 털어버린다. 그래서 도심 속에 박혀있음에도 늘 번잡한
안암동 대학가가 지척임에도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山寺)의 분위기가 진하다. 그야말로 '절간
답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보타사는 개운산<開運山, 안암산(安岩山)>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서쪽을 제외하면 모두
가 막힌 궁색한 곳으로 경내 동쪽과 남쪽은 고려대로 막혀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
있으며, 그 벼랑 윗쪽에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북악산길이 흘러가 차량의 굉음이 조금
씩 전해진다. 그리고 서쪽은 고려대 안암학사와 개운사로 나가는 길이 있다.

이곳은 원래 20세기 중반 불교전문강원과 중앙승가대학의 기숙사로 출발했다. 허나 1911년 2
월 경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마애보살좌상 옆에 맞배지붕 건물이 보인다. 그런 것을 보면 개
운사나 대원암에서 마애불 관리를 위해 닦은 조그만 건물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기숙사 건물을 손질해 칠성암(七星庵)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1980년대에 보타사로 이
름을 갈아 마애불과 금동보살좌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절을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조용히 묻혀 지냈고, 마애불 또한 주변 사람만 찾아올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결국 세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내게 된다.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가 서울에 숨겨진 문화유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이
마애불이 발견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늙은 존재로만 주변에 전해졌는데, 조사를
해보니 무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여 바로 이듬해에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2014년에 국가 보물로 승진하기
에 이른다. 또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유희좌 스타일로 그 역시 지방문화재로
있다가 2014년 3월에 보물로 승진되어 같은 해에 무려 보물급 문화재를 2개나 지니는 위엄을
보였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관음전, 선방 등 4~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2018년 이후 관음전
을 새로 짓는 등, 크게 중창불사를 벌였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상
등의 값비싼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숲에 묻힌 벼랑 밑부분이라 깊은 산중에 들어선 기
분을 물씬 들게 만들어 이곳이 서울 한복판임을 순간 잊게 한다.


▲  대웅전 내부 (석가여래상과 영산회상도, 신중도)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마애불과 벼랑이 있고, 오른쪽에는 선방(禪房), 왼쪽에는 대웅전과
관음전이 자리해 있다.

보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이다. 불단(佛壇)에는 금색 찬란한 석가여래상이 들어앉아 있는데, 근래에 조성되어 피
부가 아주 탱탱하며, 변색된 부분이 없는 100% 금동 피부로 그의 광배(光背)는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습 같다.
볼살이 많아 보이는 그의 온후한 표정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데,
그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을 두지 않고 환하게 창문을 내어 마애보살좌상이 보이게끔 하였다.
그러니까 마애불이 일종의 후불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불상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과일과 꽃, 쌀로 상에 금이 갈 지경이며, 건물 좌측 벽에는 석가
여래의 설법 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와 법당 수호용인 신중도(神衆圖)가 걸려있
다. 이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않았다.


 

♠  보타사의 보물들 (마애보살좌상, 금동보살좌상)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 - 보물 1828호

대웅전 뒷쪽 벼랑에는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마애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마애불
이 고된 몸을 기댄 화강암 벼랑은 거의 80~85도 각도로 불상 윗쪽에는 암벽이 눈썹바위 마냥
앞으로 길게 튀어나와 자연산 모자나 보개(寶蓋)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윗쪽에는 개운
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2차선 북악산로가 있어 차량 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이 마애불은 오랫동안 안암산의 은자(隱者)로 이곳에 살짝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어떤 자료에는 발굴했다고도 나온다. 허나 그는 바깥에
노출된 상태였으므로 발견이 맞다. 서울의 대표적인 고찰(古刹)의 하나인 개운사가 바로 지척
이고 개운사 그늘에 자리한 곳에 조그만 것도 아닌 커다란 마애불이 수백 년이나 숨어왔으니
그의 숨바꼭질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 가치를 인정받아 발견된 이듬해(1993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89호
로 지정되었고, 2014년 3월 경내에 있는 금동보살좌상이 국가 보물로 지정되자 그 여세를 몰
아 그해 7월 보물로 승진되었다.

마애불의 높이는 대략 5m, 폭은 4.3m로 조사 결과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을 너
무나 닮았다. 보관(寶冠)은 좀 틀리지만 얼굴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 옥천암의
그것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옥천암 마애불 역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같은 사람이 조성하거나 모방하여 만
든 것으로 여겨지며, 고려 후기 서울 변두리에서 아주 잠깐 나타났던 마애불 형식으로 진정한
서울 스타일의 고려 마애불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마애불은 천하에서 서울에 딱 2곳뿐이라는
것이다.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전경

마애불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보관을 눌러쓰고 있는데, 좌우로 관대(冠帶)가 나와있고
그 밑에 보관 장식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관대 밑에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장식
이 눈에 띈다. 하얀 얼굴은 약간 볼살이 있어 보이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그 눈썹
사이에 백호가 찍혀 있으며, 검은 두 눈은 지그시 뜨고 있다. 코와 입은 좀 작은 편이며, 입
술은 붉은색이나 빛이 좀 바래있고, 귀는 보관 장식에 가려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가슴을 가로지르
는 스카프 형태의 천의(天衣)가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표현되어 있다. 왼쪽 팔은 몸에 비해 지
나치게 크고 길게 표현되어 괴물 팔처럼 보이는데, 팔찌를 낀 왼손은 무릎 밑까지 내려와 있
으며, 엄지와 3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 엄지와 2번째 손
가락을 맞대고 있다.
옷의 주름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고, 두 다리는 포개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다. 그리
고 두 발은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마애보살좌상 옆에 새겨진 네모난 원패(圓牌)

마애불 어깨쪽 좌우에는 네모나게 구멍이 파여 있다. 이는 자연산 구멍이 아니라 마애불을 지
켜주던 목조 건물이나 보호각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마애불에 대한 기
록이 전혀 없어 언제 지어지고 어떤 모습을 취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마애불은 보호각을
갑옷으로 삼아 온전하게 살아남았고, 그를 살린 보호각은 장대한 역사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
없이 녹아 없어져 이렇게 상처 만이 남게 되었다.

마애불 왼손 쪽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공간이 있는데, 이를 원패라고 부른다. 이 원
패는 제작 당시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南無金剛會上佛菩薩(나무금강회상불보살)'이라 쓰
여 있다. 원패란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적어 불단 앞에 놓는 것으로 마애불 옆에 새겨진 점이
꽤 이채롭다.


▲  마애보살좌상의 얼굴과 자연이 그에게 씌워준 자연산 돌모자
어깨 양쪽에 파인 홈은 옛날에 사라진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들이다.

▲  바로 밑에서 바라본 마애보살좌상의 위엄
오른쪽 발은 발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했으며, 왼쪽 발은 오른쪽 발에 가려져 있다.
 

현재 마애불은 하얀 피부의 백불이지만 원래부터 백불은 아니었다. 하얗게 호분(胡粉, 여자들
이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하던 것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듬)을 칠한 것은 20세기에 들어
와서이며, 그로 인해 몇몇 부분은 확인이 어렵게 되었다. 참고로 그와 친척뻘인 옥천암 마애
보살좌상은 19세기에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가 호분을 칠했다고 전
한다.


▲  관음전(觀音殿)

대웅전 옆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관음전이 있다. 지금 집은 2018년 이후에 새롭게 지은 것으로
원래는 여염집 모습의 기와집이 있었는데, 중앙승가대학 숙소로 쓰였던 것을 요사(寮舍)와 종
무소(宗務所), 금동보살좌상의 거처까지 담당하던 복합 공간으로 쓰이다가 새 건물을 장만하
면서 모두 분리가 되었다.
관음전이란 이름 그대로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금동보살좌상의 거처이다. 중창불사로
잠시 대원암으로 거처를 옮겼고,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새 관음전에 안착을 했다.

▲  보타사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 - 보물 1818호

관음전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한 불상이나 보살 스타일이 아니다. 오른쪽 다리
는 연화좌에 올려 무릎을 세웠고 왼쪽 다리는 밑으로 내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딱 보면 아줌
마 스타일의 착석 방법과도 비슷한데, 이런 포즈를 유희좌(遊戱座)라고 한다.

유희좌는 9세기 이후 북송(北宋) 시절부터 생겨났는데, 이 땅에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중
기에 가뭄에 콩 나듯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매우 귀한 실정이라 그 가치는 대단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현대사찰 보타사에 버젓히 서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보살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제자리가 어디었는지는 귀신
도 모르는 실정이며, 보살상 또한 굳게 입을 다물며 진술을 거절한다. 아마도 이리저리 떠돌
다가 중앙승가대학으로 흘러들어와 기숙사 불단에 봉안되었고, 기숙사 건물이 보타사로 변신
하면서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앞서 마애보살좌상이 좀 남성적이라면 이 보살상은 여성적이다. 고품격과 미색(美色)이 느껴
지는 그의 정체는 딱 봐도 관세음보살 누님인데, 덩치는 조그만하고 머리에는 황제의 금관을
털어버릴 정도로 장엄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칼이 조금 나와있다. 얼
굴은 아리따운 여인네처럼 곱기 그지 없어 은근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카메라도 그를 보고
잔뜩 흥분을 했는지 셔터가 마구마구 눌러진다.
불상과 보살상은 보통 당시 왕족이나 귀족, 특정 인물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경우가 적
지 않아서 아마도 이쁘장하게 생긴 젊은 귀족이나 중년층 여인을 모델로 삼은 듯 싶다.

그의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두 눈은 지그시 떠 있으며 코는 작고, 입술은 작지만 어여
쁜 모습이다. 볼에는 살이 조금 있어 보이며, 가슴에는 온갖 장식물을 달고 있다.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고 그 한 자락을 수직으로 늘어뜨렸는데, 이는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조금 등장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가 앉아있는 연화좌(蓮花座)는 보타사에서 마련한 것으
로 오래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보살상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과 조그만 불상/보살상이 많이 등장하는 조선 초기 금동상 중에
서 그나마 규모가 큰 점으로 보아 조선 초에 왕실이나 귀족에서 발원하여 특별히 제작된 것으
로 보인다.
비록 고향은 잃었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조선 초기 귀족적인 보살상의 형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이자 조선시대 보살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6년에 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216호
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3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이처럼 귀한 몸이니 보타사에서 유리막을 설치해 그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끔 했는데, 어찌보
면 유리 감옥에 갇혀있는 듯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허나 어찌하랴?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
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걸 두고 바로 필요악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보타사 승려들은 별 거부감 없이 그를 쿨하게 공개하고 있고, 사진 촬영에도 호의적이
라 그것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 보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7 (개운사길 60-46 ☎ 02-928-2074)


▲  고적한 보타사를 뒤로하며~~~

숲속의 절집 보타사를 둘러보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 해가 한참이나 남아있어 보너스
시간을 받은 기분인데, 어디로 가야 널리 칭찬을 받을까 궁리를 하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
다. 개운사와 보타사는 여러 번 인연을 지었지만 정작 그들을 품은 개운산은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다. 즉 자식만 살펴봤지 그 어미는 살펴보지 않은 꼴이다. 게다가 개운산은 서울 장안
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踏處)이기도 하다.
하여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비록 보타사가 개운산 자락에 있
다고 해도 개발의 칼질로 서로를 바로 이어주는 길은 진작에 끊겼다. 그나마 빠르게 개운산으
로 가려면 고려대 안암학사를 가로질러 정문으로 올라가 북악산길로 나가야 된다.

북악산길은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에서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과 미아리고개, 개운산 남
부를 거쳐 종암동 개운산입구 교차로까지 이어지는 서울에 대표적인 산악도로이다. 아리랑고
개까지만 북악산길로 알고 있었는데 개운산 산복도로까지 그 일원으로 있었다.
개운산을 넘어 종암동(鍾岩洞)까지 발을 뻗치고 있는 북악산길의 위엄에 새삼 놀라며 안암학
사 정문에서 3분 정도 그 길을 거닐면 성북구의회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개운산 산책을
벌였다.


▲  잠깐 거쳐간 북악산길 (안암학사에서 성북구의회 입구 방면)

▲  성북구의회 입구에서 바라본 북악산길 (종암동 방향)


 

♠  성북구 한복판에 누워있는 도심 속의 포근한 뒷동산
개운산<開運山, 안암산(安岩山)>

▲  편안한 둘레길의 정석,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도심 속에 자리한 개운산(134m)은 성북구 안암동과 종암동, 돈암동(敦岩洞)에 걸쳐있는 조촐
한 뫼이다. 개운산이란 이름은 산 남쪽에 자리한 개운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안암동에 있다고
해서 '안암산', 종암1동에 진씨(陳氏)의 채석장이 있어서 '진석산'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산 서쪽에는 그 유명한 미아리고개가 있으며, 그 고개를 통해 아리랑고개와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와 이어진다. 산 남쪽과 동쪽은 평지이며, 북쪽은 야트막한 산지로 북
한산과 이어진다.
허나 개발의 무분별한 칼춤으로 인해 산 주위로 아파트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산의 목을
조르고 있으며, 그로 인해 도시에 완전히 고립된 외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1982
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더 이상의 험한 꼴은 면했으나 겨우 높은 지대(거의 70~75m 이상)
만 자연의 공간으로 살아남았을 뿐이다.

개운산은 1936년 경성부(京城府, 서울의 왜정 시절 이름)에 편입되면서 그 주변이 신흥 주택
가로 주목을 받아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1940년 공원 지역으로 고시되
었으나 해방 이후 북쪽에서 많은 월남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었고, 특히 도심과 가까운 안암산
자락에 마구 집을 닦아 머물면서 수목들이 상당히 희생되었다. 게다가 6.25전쟁으로 미아리고
개~개운산~종암동을 잇는 서울의 최후 방어 저지선을 지키고자 치열한 전쟁이 벌어져 산은 완
전 민둥산 신세가 되어버렸다.
196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다시 숱이 늘어났으나 산 주위로 주택가 확
대와 대학교들의 몸집 불리기로 계속 위협을 당하던 중, 1982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산
을 향한 개발의 칼질은 크게 줄었다.
2000년 이후 둘레길이 크게 유행을 타자 성북구가 3.4km의 개운산둘레길을 닦았고, 산책로와
산길 정비, 운동시설 확충, 울창한 숲속에 야외도서관과 유아숲체험장 등을 닦아놓아 조그만
산에 정말 없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알차게도 다듬었다. 게다가 숲이 짙어 조촐하게 산림
욕장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개운산은 덩치가 작으니 산행이 아닌 산책이란 말이 어울릴 것이다. 성북구의회에서 나들이를
시작하여 둘레길을 따라 산을 1바퀴 돌아도 되고, 성북구의회에서 북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마로니에마당으로 이동해도 된다. 마로니에마당은 개운산 정상(134m)으로 산의 몸집에 비해
정상이 너무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산으로 인도하는 길은 성북구의회, 북악산길 개운산 구간(중간중간에 산길이 있음), 종암아이
파크2차아파트 남쪽 길(종암로9가길), 종암동 죽림정사,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돈암동 새소리
어린이공원, 돈암풍림아파트 등이 있으니 각자 취향에 따라 골라가기 바란다.
아직은 동네 사람들이 주로 찾는 동네 명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가볍게 오를만한 도
심 속의 아늑한 뒷동산이고, 둘레길도 일품급이니 점차 서울의 주요 명소로 크게 거듭나리라
믿는다. 그럼 지금부터 개운산을 1바퀴 둘러보도록 하자.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종암동, 돈암동


▲  지그재그로 닦여진 개운산둘레길 계단길 (명상의 길)

성북구의회 입구에서 2분 정도 들어가면 좌우로 갈라지는 막다른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
쪽(북쪽)으로 가면 의회, 개운산 정상 방면이고, 오른쪽(남쪽)은 군부대 쪽인데,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이내 개운산둘레길이 동아줄 같은 길을 살짝 내려놓는다.
여기서 둘레길로 들어서니 시멘트길 대신 정겨운 흙길이 펼쳐져 개운산도 엄연한 산임을 짙게
내비춘다. 아무래도 산이 작아서 사람들이 뒷동산, 언덕이라고 낮춰서 대하니 산도 발끈하여
이런 길을 꺼내든 모양이다. (둘레길은 상당수 흙길이며, 북쪽은 지형상 나무로 닦은 데크길
이 많음)

개운산둘레길은 3.4km로 명상의 길, 연인의 길, 산마루길, 사색의 길, 건강의 길 등 5개 코스
로 이루어져 있다. 허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름일 뿐이며, 산이라 약간의 오르락내
리락이 있을 뿐, 길도 느긋하고 잘 닦여져 있다.
개운산 남쪽 봉우리에는 군부대가 닦여져 있어서 둘레길은 이들의 눈치를 보며 다소 남쪽으로
피해가며, 크게 1굽이를 돌면 종암동 구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  푸른 숲터널,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  개운산둘레길(명상의 길)에서 바라본 천하
숲 사이로 종암동과 청량리, 천장산(天藏山, 홍릉수목원 뒷산), 중랑구 지역,
아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비록 하늘로 조금 솟은 뫼이나 조망은 낮은
높이치고는 썩 괜찮은 편이다.

▲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  개운산둘레길 종암동 구간에서 만난 바위들 (명상의 길)
세상이 바위에게 달아준 이름은 아직 없다. 바위들이 병풍처럼 들어선 모습이
그리 예사롭지는 않아 보여 옛날에 산악신앙이나 치성 장소로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  개운산둘레길 종암동 구간에서 만난 운치 깊은 소나무 (명상의 길)
소나무를 해치지 않고 그 양 옆으로 길을 내어 그를 조금이나마 배려해주었다.

▲  녹음 속에 펼쳐진 개운산둘레길 (연인의 길)

▲  개운산둘레길(연인의 길)에서 윗쪽으로 오르는 계단길
저 계단의 끝에는 개운산 산책을 시작했던 성북구의회 남쪽과 이어진다.
결국 원점으로 다시 돌아간 셈이다.

▲  개운산스포츠센터 뒷쪽(동쪽) 숲길

▲  솔내음이 두텁게 막을 이루고 있는 담소정 서쪽 소나무숲
이곳 평상에 누워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잠이 따로 없을 것 같다. 사진에는
짤렸지만 책장이 있는 야외도서관도 있으니 솔내음의 가피 아래 독서의
즐거움도 누려보자~~! (책은 반드시 제자리에 꽂아둘 것)

▲  푸른 기와를 지닌 6각형 모습의 담소정(談笑亭)
정자 이름이 참 인간적이다.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우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인데, 좋은 사람들과 즐기는 이야기꽃만큼
아름다운 꽃도 없지~~!

▲  담소정에서 개운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앞서 잠시 떨어졌던 개운산둘레길은 담소정에서 다시 만나 정상(마로니에마당)까지 함께 한다
. 담소정~정상 구간을 산마루길이라 하는데, 이 구간이 개운산의 지붕 길이자 중심 길로 쿠션
이 느껴질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어 발도 아주 호강을 누린다.


▲  담소정에서 성북구의회 방면 산책로

▲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① (개운산 정상 방면)

▲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② (성북구의회 방면)

▲  일품 그늘을 지닌 네모난 초가 정자 (산마루길 옆)

▲  아직은 썰렁한 개운산 자연학습장 (산마루길 서쪽)

▲  드디어 개운산 정상 직전 (저 길의 끝에 마로니에마당이 있음)

▲  개운산 정상, 마로니에마당

개운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마로니에마당은 평평한 너른 공간이다. 이곳의 절반 정도는
푸른 잔디가 잔잔하게 입혀져 있으며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과 화목정이란 정자를 비롯해
쉼터와 운동시설이 넉넉히 깔려 있어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하다.
정상이라고 하지만 주변에 나무가 빼곡하여 조망은 별로이며, 북쪽으로 둘레길을 따라 내려가
면 길음역과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방면, 동쪽은 종암동 죽림정사로 이어진다.

▲  남쪽에서 바라본 마로니에마당

▲  북쪽에서 바라본 마로니에마당과 헬기장

▲  푸른 기와를 지닌 화목정(和睦亭)

▲  개운산 정상 북쪽 밑에서 바라본
종암동과 개운산 남쪽 부분


▲  개운산 정상에서 길음역 방면으로 내려가는 나무계단길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구간)


개운산 북쪽은 산세가 조금 패기가 있다. 그렇다고 아주 험한 것까지는 아닌데, 정상 바로 밑
이다 보니 경사가 다소 흥분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무로 계단을 닦고 길을 내었는데, 둘레길
은 그 계단과 나무테크길을 따라 미아리고개 동쪽인 돈암삼성아파트 뒷쪽으로 이어진다.


▲  개운산 북쪽 자락을 흐르는 나무데크길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산길을 편하게 닦아놓아 거닐기도 좋고, 숲도 삼삼하여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사색에 잠기기에 좋다. 하여 생각 좀 하고 살라는 뜻에서 길 이름을
사색의 길이라 지은 모양이다.

▲  개운산 북쪽 자락 나무데크길(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에서 바라본
길음동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뒷쪽 산자락을 지나는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  개운산 나들이의 종점, 돈암1동 새소리어린이공원

개운산둘레길을 완전히 1바퀴 돌고 싶었으나 시간도 그렇고, 더 이상 땡기지도 않아서 (여기
서 더 가면 다시 성북구의회임) 둘레길을 버리고 새소리어린이공원으로 내려왔다. 이 공원은
개운산의 북쪽 관문 중 하나로 길음역(4호선) 2,3번 출구에서 도보 5분 거리라 접근성도 아주
좋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30분.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개운사와 보타사에 깃든 보물들, 그리고
개운산까지 많은 곳을 둘러보니 정말 배가 부르다. 특히 오랜 미답처였던 개운산은 거의 상당
부분을 둘러보았으니 그와의 첫 인연치고는 성과는 좋다.
욕심은 과하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여기서 쿨하게 길을 접으며 개운산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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