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23.10.03 대청호 하류에 닦여진 문화유산의 너른 보금자리,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문산리 돌다리, 문의 문산관, 문화유물전시관>
  2. 2022.08.16 충북의 한복판, 음성 겨울 나들이 (설성공원, 경호정, 미타사 지장대불, 가섭산 미타사의 설경)
  3. 2022.02.18 진천의 꿀명소를 거닐다 ~ 진천 농다리, 보련산 보탑사, 연곡리석비
  4. 2021.03.21 금강 상류에 숨겨진 아름다운 비경 ~~ 옥천 둔주봉, 한반도지형, 향수바람길 나들이 (독락정)
  5. 2020.12.31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6. 2020.06.05 보은 땅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선병우고가, 선병묵고가 한옥 나들이
  7. 2019.12.30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8. 2019.08.05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산과 숲,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옛길,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한반도지형, 앉은뱅이약수)
  9. 2018.03.16 소백산 자락에 작은 도시처럼 들어앉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 단양 구인사 (구인사 공양밥, 구봉팔문)
  10. 2017.08.28 대자연이 빚은 단양8경의 으뜸 명승지, 단양 사인암 ~~~ (북상리 시골, 청련암, 남조천)

대청호 하류에 닦여진 문화유산의 너른 보금자리,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문산리 돌다리, 문의 문산관, 문화유물전시관>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겨울 나들이 '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  전망대에서 바라본 문의문화재단지

문산리 돌다리 청주 관정리 고가

▲  문산리 돌다리

▲  청주 관정리 고가

 



 

차디찬 겨울 제국(帝國)이 속절없이 깊어가던 2월의 첫 무렵, 청주 문의면에 자리한 문의
문화재단지를 찾았다.
햇님이 출근하기가 무섭게 충북의 중심 도시인 청주(淸州)로 넘어가 청주시외터미널 부근
기사식당에서 일찌감치 점심을 섭취하고 청주시내버스 311번(비하동↔문의)을 타고 문의(
文義)로 이동했다.

대청호(大淸湖) 중류 부분에 자리한 문의는 청주시의 일원으로 문의면의 중심지는 미천리
이다. 오랫동안 독자적인 고을을 유지했던 지역으로 1895년 문의현(縣)에서 문의군(郡)으
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 청원군(淸原郡)의 일부로 통합되면서 청주의 일부로 완전히 묻히
고 말았다. (2014년 7월, 청원군이 청주시에 통합되면서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이 됨)
1983년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의 중심지인 문산리(文山里)가 수몰되자 양성산 밑인 미천리
(米川里)에 작은 도시를 지어 이전했으며, 문의의 산하가 적지 않게 대청호에 희생되면서
주민 절반이 정든 고향을 등지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180도 이상 성형된 문의면은
첩첩한 산주름과 너른 호수가 어우러진 그야말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의 고장이 되었으며,
1983년에 지어진 대통령의 별장인 청남대(淸南臺)가 문의면 남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청주의 새로운 꿀명소로 크게 애지중지되고 있다.

문의 종점(미천리)에서 문의문화재단지까지는 도보 10~15분 거리로 문의대교 방면으로 가
는 시내버스를 타면 편하지만 배차간격이 오지게 길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어차피 거리도 짧다.



 

♠  대청댐이 빚은 산물이자 옛 문의 고을의 소소한 재현,
문의문화재단지(文義文化財團地) 입문

▲  문의문화재단지 입구에 마련된 하트 포토존(Photo Zone)

문의문화재단지(이하 문화재단지) 북쪽 밑에는 주차장이 넓게 닦여져 있다. 주차장에서 문화
재단지까지 오르막길이 느긋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 시작점에 긍정의 아이콘인 하트 모양의
조형물이 마중을 나와 내 기분을 썩 좋게 해준다. 하트 모형 앞/뒤로 의자가 닦여져 있는데,
하트와 문화재단지 오르막길을 배경으로 하는 포토존(사진 찍기 장소)의 역할을 맡고 있다.

문화재단지에 대한 첫 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는 하트 모형을 지나 2분 남짓 오르면 그 길
의 끝에 성문(城門) 모양의 문화재단지 정문이 길을 막는다. 이곳의 뒷산인 양성산(養性山,
378m)의 이름을 따서 정문 이름을 양성문(養性門)이라 했는데, 그 좌우로 성곽을 짧게 펼쳐놓
아 마치 옛 문의고을 읍성(邑城)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허나 이들은 옛 것이 아닌 문화재단지
를 지키는 울타리로 1997년에 지어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채 여물지도 못했다.

양성문에는 매표소가 있으니 입장료가 무려 1,000원이나 한다. 허나 내게는 꿩 대신 닭을 고
를 권한 조차 없어서 그 돈을 지불하고 유료(有料)의 땅으로 들어섰다.


▲  문의문화재단지 정문인 양성문 (왼쪽 창구가 매표소)

대청호가 바라보이는 양성산 동쪽 자락에 문의문화재단지가 넓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대청
댐으로 인해 강제로 제자리를 잃은 문의 지역 문화유산과 청주 각지에서 기증을 받거나 개발
의 칼질로 보금자리를 잃은 문화유산을 수습해놓은 현장이다. 좋게 말하면 청주의 역사와 문
화유산을 모은 전통문화의 현장이고, 우울하게 말하면 집을 잃고 오갈 데가 없는 문화유산을
수습한 그들의 피난처이다.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의 적지 않은 곳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심지어 문의면 중심지인 문산리
까지 강제 잠수를 타게 되었으니 이곳의 심각한 상황을 알만하다. 그래서 수몰지에 있던 문화
유산을 문의면의 새 중심지인 미천리 일대로 수습했는데, 다들 서로 떨어져 있어 관리에 어려
움이 생기자 이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1997년 지금의 자리에 터를 닦기 시작해 1999년에 최종
완성을 보았다.

이렇게 댐 건설로 수몰 지역에서 가져온 문화유산을 모아놓은 곳으로 충주댐이 빚은 제천(提
川)의 청풍문화재단지, 안동댐이 빚은 안동(安東)의 안동민속촌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산업화를 위한 개발의 칼질이 빚어낸 산물로 전기 생산과 물 관리를 위해 댐을 만들면서 사람
과 문화유산 모두 제자리에서 발을 떼도록 만들었다.
수몰 지역 실향민과 마찬가지로 제자리를 잃은 비극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들을 한곳에 모아놓
아 일종의 문화재단지나 민속마을을 만드니 짧은 시간에 그 지역에 주요 문화유산과 역사를
둘러볼 수 있으며, 관리와 보존에도 용이하다. 그러니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는 것이다.

문의문화재단지는 금강(錦江)을 앞에 두고 양성산을 뒤에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로 수몰 지역에서 가져온 문화유산과 청주 각지에서 옮겨온 문화유산까지 흡수하여 청주
제일의 문화유산 집합지로 성장했다. 게다가 청주의 역사와 동산(動産) 문화유산을 담은 문화
유물전시관과 현대 미술을 다룬 대청호미술관까지 갖추고 있어 청주의 문화와 역사, 예술의
새로운 중심지이며, 산과 호수를 옆구리에 낀 하늘도 반한 명소로 이곳의 값어치를 크게 불리
고 있다.

문화재단지에는 옛 문의군의 객사인 문산관을 비롯해 문산리 돌다리, 노현리 고가, 부강리 고
가, 관정리 고가 등의 지방문화재와 고인돌, 옛 비석, 효자각, 충신각, 학소리 유적 등이 있
다. 그 외에 양반가, 주막집, 토담집, 성황당, 돌탑, 성문과 성곽 등을 재현했으며, 문화유물
전시관에는 청주의 선사시대와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유물과 역사를 담았다. 또한 애국지사
조형물과 조각공원, 대청호미술관 등이 아낌없이 닦여져 있어 볼거리가 그야말로 풍년을 이룬
다.

* 문의문화재단지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산리 산6-1 (대청호반로 721,
  ☎ 043-201-0915)
* 문의문화재단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돌탑 무리들
양성문을 지나 문화재단지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돌탑들이 마중을 한다.

▲  아들을 기원하던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상징물, 기자석(祈子石)
<실물이 아닌 재현된 것임>


▲  문의면의 산하를 적지 않게 집어 삼킨 하늘빛 대청호

문의면의 옛 중심지인 문산리 마을은 저 호수 속에 고이 잠겨 있다. 대청호에 터전을 빼앗긴
실향민들은 저 호수의 물을 모두 빼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라 고향에 대
한 향수 또한 호수의 수심만큼이나 깊을 것이다. 뻔히 바라보이는 저 호수 속에 고향을 묻었
으니 말이다.

▲  대청호를 바라보고 선 초정(草亭)

▲  서덕길 효자각(徐德吉 孝子閣)

서덕길 효자각은 문의 출신 효자(孝子)로 이름이 높은 서덕길(1599~1658)의 효행을 기리고자
그가 살았던 문의면 도원리 마장마을에 1706년 나라에서 지어준 1칸짜리 정려각(旌閭閣)이다.
그의 후손(이천서씨)들이 계속 관리하고 있었으나 1997년 이곳에 의탁되면서 문화재단지의 일
원이 되었다.


▲  청주 각지에서 수습된 고인돌(지석묘)들

서덕길 효자각 맞은편에는 3기의 고인돌이 바짝 엎드려 있다. 이들은 미원면 수산리와 내수읍
학평리, 문의면 가호리 아득이마을에서 가져온 것들로 이중 아득이마을 고인돌만 1997년 4월
수몰지에서 가져온 것이고, 학평리 고인돌은 1997년 5월에, 수산리 고인돌은 같은 해 7월 관
리상의 이유로 제자리를 떠나 이곳에 안착했다.
이들은 옛 조선이 천하에 크게 위엄을 날렸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지역 세력가의 무덤
으로 학평리 고인돌은 마을 사람들이 개석(蓋石, 뚜껑돌)을 제단(祭壇)으로 삼아 매년 정월대
보름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모두 개석만 남아있는 상태로 개석을 받치는 기둥과 석실(돌방
)은 없어졌다.


▲  청주 관정리 고가(官井里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38호

고인돌 무리 옆에는 초가 돌담을 두룬 고색의 초가집이 자리해 있다. 낭성면 관정리에 '신방
호'란 사람의 집으로 청주시(청원군)가 인수하여 1994년 이곳으로 가져왔는데, 전형적인 중부
지방 초가로 'ㅡ' 형태의 안채와 대문이 있는 광채로 이루어져 있다.
사주문(四柱門) 같은 경우에는 원래 담장 사이에 있었으나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광채와 함께
설치하여 약간의 변화를 주었으며, 안채 뒷쪽에는 장독대들이 놓여져 있고, 안채에는 전통 체
험이나 혼인식 때 쓰이는 가마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  무늬만 남은 관정리 고가 장독대들

▲  관정리 고가 안채에 들어앉은 가마


▲  초가 주막(酒幕)
1995년에 지어진 중부지방 스타일의 초가 주막이다. 예천(醴泉)의 삼강주막처럼
전통 주막으로 활용하면 좋을듯 싶은데, 음료수 자판기만 한쪽에
설치되어 있을 뿐, 그냥 묵혀두고 있다.

▲  1998년에 지어진 민화정(民和亭)

▲  민화정 현판의 위엄
옛날 문의 고을에 있었던 '민화루'에서 이름을
따왔다. <김수온(金守溫, 1409~1481)이
누각 이름을 지음>



 

♠  문화유물전시관 주변

▲  문의문화재단지 문화유물전시관

문화유물전시관(유물전시관)은 대청호로 제자리를 잃은 문의 지역의 문화유산과 청주 각지에
서 가져온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문화유산을 머금고 있다.
(전시관 유물은 일부만 사진에 담았으며, 그 일부만 본글에 꺼냈음)


▲  구석기 사람들의 두루봉동굴 생활 모습

청주에는 천하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구석기 유적이 있다. 바로 문의면 노현리에 있는 두루봉
동굴이다. 중고등학교 국사책은 물론 온갖 국사 관련 수험서, 참고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존재
로 그의 이름 5자만 외우고 있으면 선사시대 관련 문제 하나는 그냥 따놓은 것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그 시대에서 비중이 큰 존재이다. 특히 이 땅에서 유일하게 구석기 사람의 뼈가 발견
되었으며, 지금은 사라진 8종의 동물 뼈도 발견되는 등, 그 시절의 다양한 흔적과 유물이 쏟
아져 나와 머나먼 구석기시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나도 그의 존재를 익히 듣고 있던 터라 그의 안부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발굴 이후 개발의
칼질(석회석 광산)에 완전히 아작이 난 상태였다. 겨우 흔적 일부만 간신히 고개를 들고 있을
뿐으로 그들이 발견된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석회석 채석장이 계속 둥지를 틀며 동굴
주변의 살을 깎아내고 있었다.
다채로운 유물이 쏟아져 나온 구석기시대의 소중한 보고(寶庫)가 어찌하여 개발의 칼질에 난
도질을 당하도록 방치가 되었는지 심히 개탄스럽기 그지 없다. 하긴 우리 역사를 축소 왜곡하
느라 급급한 더러운 식민사관 쓰레기들이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니 오죽할까.
(두루봉동굴에서 나온 유물과 흥수아이의 해골, 복원된 전신상은 청주 충북대박물관에 있음)


▲  꽃을 사용했던 구석기 사람들의 장례 풍습

두루봉동굴 중에는 흥수동굴이란 가지 굴이 있다. 이곳에서는 약 40,000년 전 구석기 후반에
살았던 사람의 뼈가 나와 천하 고고학계를 잔뜩 흥분시켰는데, 그 해골을 검사한 결과, 어린
이로 파악이 되었다. 그래서 그 해골을 '흥수아이'로, 동굴을 '흥수동굴'이라 이름지었는데,
이는 그 동굴을 처음 발견한 석회석 광업소 현장소장인 '김흥수'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렇게 수만 년 묵은 해골이 미라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있던 것은 이곳이 알칼리(Alkali)성
석회암 지대라 그렇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 동굴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 동굴을 앞장서서 아작을 냈다는 것이다. 그
러니 지금이라도 그 동굴과 해골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파괴한 이들의 이름을
달아주는 것은 동굴과 구석기 해골에 대한 예의가 아닐터, 아주 쉽게 지역 이름(문의면 노현
리)을 따서 노현동굴, 노현아이라고 하면 어떨까.

흥수아이 해골이 발견된 곳에서는 매장 흔적이 나왔는데, 납작한 석회석 판자돌을 놓고 흙을
덮은 다음, 그 위에 시신을 두었다. 이를 통해 시신을 아무 데나 버리거나 방치한 것이 아닌
나름 형식을 갖추어 매장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해골 주변의 흙을 분석해보니 가슴뼈 부분에서 많은 양의 국화과 꽃가루가 나왔다. 이는
국화꽃을 죽은 이에게 바치며 애도했음을 보여주며, 국화가 만발했던 가을에 아이가 죽었음을
수만 년이 지난 우리에게 살짝 속삭여준다. 물론 구석기인의 장례 문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
견이 분분하나 흥수아이를 통해 그들도 매장 형식을 갖추고 꽃으로 애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꽃을 좋아하고 또한 그것으로 애도를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원초
적 본능인 모양이다.


▲  목이 사라진 오송읍 쌍청리 석불
쌍청리 봉도리마을 이상현씨 집 뒷쪽에 있던 석불로 199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높이 95cm, 어깨 폭 34cm으로 고려 때 석불로 여겨진다.

▲  옛 사람들의 낙서판, 주역석(周易石)

주역석은 선비나 사대부(士大夫)가 태극과 팔괘를 중심으로 자연의 생성원리를 밝히며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살겠다는 희망사항을 새긴 바위 낙서판이다. 그 내용이 주역(周易)과 일치하여
주역석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남이면 부용외천리에서 가져온 것으로 돌판 윗쪽과 사방
모서리에도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그야말로 돌판 전체를 주역의 내용으로 빼곡히 도배를 한
것인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대략 이렇다.
'오랜 세월 음(陰)은 세상을 열고, 양(陽)은 세상을 감싼다. 음과 양은 세상의 모든 원리를
내포하고 팔괘도(八卦圖)가 이들을 맑게 한다' (한문은 생략함)


▲  태함(胎函)
조선 왕족의 태를 머금은 석물로 낭성면 무성리 태봉산에 있던 영조(英祖)의
태함으로 여겨진다.

▲  옛 사람들의 큼직한 수저들 - 오늘날 숟가락보다 훨씬 크다.

▲  고려, 조선시대 기와들

▲  괴산 외사리에서 출토된 와당(瓦當)들

▲  백제 와당들

▲  어처구니를 잃은 늙은 맷돌

문화유물전시관에 전시된 기와(와당)는 모두 청주 지역 사람들이 기증한 것이다. <옥산면 출
신인 재단법인 간송문화재단의 고(故) 권태성, 부강면(원래 청원군이었으나 지금은 세종시 관
할)의 전상복, 문의면 괴곡리에 박승인 등>
멀리 백제부터 가까이는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기와들이 시대를 초월하며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데, 이중 괴산 외사리 와당은 그 유명한 산막이옛길(☞ 관련글 보기)
이 있는 외사리 절터에서 수습된 것이다.


▲  청주 문산리 돌다리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22호

유물전시관 앞에는 오래된 돌다리가 놓여져 있다. 그를 위해 작게 연못을 파고 다리를 두었는
데, 겨울 제국이 씌워놓은 두터운 얼음이 연못을 꽁꽁 봉해버렸다.

이 돌다리는 원래 문산리 문의초교 정문 남쪽에 있던 것으로 다리 양식으로 보아 고려 때 조
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리의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헌종(憲宗) 때 편찬된 '충청도읍지'
로 다리 상판은 2.5x0.3~0.9m 규모의 화강석과 청석 10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주(石柱)는
1.3m의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상판 장대석(長臺石)은 장축(長軸)을 남북으로 하여 2매씩 연
결하고 동서로 5매씩 연접해 마루식으로 만들었다. 남북 장축 중간에는 동서로 교각을 두었으
며, 석재는 일정한 크기가 아닌 거칠게 다듬었다.
다리의 구조는 하부에 석주를 세우지 않고 통돌을 사용해 교각의 역할을 하게 하였고, 멍에석
을 설치하고 상부에 넓은 석재를 덮었다. 교각에는 '乙卯二月(을묘이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어느 을묘년 2월에 다리가 조성되거나 보수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산리 일대가 대청호에 희생되자 1980년 문산관과 함께 미천리로 이전되었다가 2002년 3월에
이곳에 들어왔다. 그래도 돌다리인지라 그의 체면을 위해 연못까지 깔아주었으니 비록 그 길
이는 짧아도 다리의 역할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다리 통행 가능)


▲  아직도 튼실한 문산리 돌다리 (옆에서 바라본 모습)

▲  오창에서 이곳으로 밀려난 학소리 유적 (I유적 1호 집자리)

돌다리 남쪽에는 학소리 유적을 품은 보호각이 있다. 같은 청주 땅이긴 해도 이곳과는 완전히
반대편인 오창면 학소리 불당산(해발 246m) 동남쪽 자락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청동기시대 집
터 4기, 석관묘 7기, 토광묘(土壙墓) 19점, 석기류 10점, 청동류 14점, 철기류 40점, 옥석(玉
石)류 15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소중한 옛 흔적을 내비친 학소리 유적이 제자리를 두고 머나먼 이곳으로 내려온 이유
는 510번 지방도 우회도로가 바로 유적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개발이 우선인 이 땅의
현실에서 아무리 엄청 늙은 유물과 유적이 쏟아져 나와도 개발의 칼질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
한 존재라 신작로(新作路)에게 자리를 모두 내주고 겨우 I유적 1호 집자리만 이곳으로 넘어왔
다. (나머지는 모두 밀어버림) 그래도 두루봉동굴처럼 개발의 칼질에 완전히 아작나는 꼴은
면했으니 그것으로도 다행이라 하겠다.


▲  남쪽에서 바라본 오창 학소리 I유적 1호 집자리

▲  옛 문의 고을의 비석들

이들 비석은 문의 고을 현감(縣監)과 이곳을 다녀갔던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의 공덕비, 선정
비(善政碑)들로 문의 고을의 오랜 내력을 알려준다. 장대한 세월이 달아준 검은 주근깨와 얼
룩진 피부가 고색의 내음을 진하게 선사해주는데, 원래 문산리와 미천리 일대에 흩어져 있던
것을 대청댐 건설로 모두 미천리 일대로 집합시켰다가 1997년 4월 이곳으로 옮겼다.
저중에는 정말로 비석을 받을만한 사람도 있겠지만 마땅한 선정(善政)도 없음에도 억지로 챙
긴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 자신
의 배때기를 채우는 지방 관리가 적지 않았다.


▲  동그란 석조(石槽)로 이루어진 샘터
문의문화재단지를 닦으면서 만든 산사(山寺) 스타일의 석조 샘터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목을 무한리필로 아낌없이 축여준다. 석조 피부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어 잠시 고적한 산사의 샘터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김선복 충신각(金善復 忠臣閣)

샘터 옆에 자리한 김선복 충신각은 임진왜란 시절 중봉 조헌(重峯 趙憲)을 따라 왜군과 싸웠
던 김선복(1571~1592)의 충절을 기리고자 조선 후기에 문의면 동동리 정가울에 세운 것이다.

김선복은 조헌의 수하로 불과 21살 나이에 청주성 공격에 참전해 공을 세웠으나 그가 무리하
게 벌인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그때 불과 700여 명으로 왜군 15,000명과 무
작정 싸웠으니 딱히 계략을 쓰지 않는 이상은 그야말로 불가능했다.

충신각은 1칸짜리 팔작지붕 건물로 김선복의 후손(의성김씨)들이 관리하여 오다가 1997년 이
곳에 의탁했다.



 

♠  부강리 고가, 문산관 주변

▲  양반가옥

김선복 충신각 옆에는 잘 지어진 기와집(양반가옥)이 있다. 1994년 문화재단지 수식용으로 지
어진 것으로 중부지방 양반 한옥을 재현했는데,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가묘, 광채 등을 갖
추고 있으며, 집 안에 별도의 담장을 둘러 사랑채와 안채, 가묘를 두었다.

▲  양반가옥 안쪽에 자리한 사랑채와 안채

▲  집 주인의 생활공간인 사랑채

▲  3대 조상까지 제를 지내던 가묘(家廟)

▲  벽에 붙여진 부적


▲  부강리 고가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21호

문산관 밑에는 부강리(현재 세종시 부강면 부강리)에서 옮겨온 늙은 기와집이 있다. 집은 안
채와 광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채가 원래 집으로 1995년 집 주인이 청원군(청주시)에 집을
내놓으면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그 이후에 돌기와집 형태의 광채를 새로 덧붙여 지금의 모
습을 이루게 되었다.

▲  부강리 고가 안채

▲  안채 툇마루

제아무리 잘 만든 집이라 해도 사람이 살지 않
으면 금방 망가지기 마련이다. 집은 좋든 싫든
사람의 손때를 타야 별탈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문화재단지에서 노후를 보내게 되어 그
리 망가질 일은 없겠지만 그냥 저리 장식용으
로 두는 것보다는 전통 가옥 체험이나 민박용
으로 활용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호수가 바라
보이는 언덕에 그림처럼 자리한 늙은 한옥에서
의 하룻밤 체험도 괜찮아 보인다.

▲  뒷쪽에서 바라본 부강리 고가

 


▲  오호라 통제라.. 몸단장으로 몸을 가린 매정한
'문의 문산관(文山館)'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49호


문화재단지 가장 윗쪽에는 문의고을의 객사(客舍)였던 문산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가
장 존재감이 큰 건물이나 유감스럽게도 내가 갔을 때는 몸을 꽁꽁 가리며 한참 몸단장 중이었
다. (기와 교체 및 좌익사 보수공사) 그래서 그의 온전한 모습을 구경하지 못했지. 가는 날이
문 닫는 날이라고 진짜 날 하나는 기가 막히게 못 맞췄다.

나를 상심케 만든 문산관은 제왕의 전패(殿牌)를 봉안하여 지방 관리들이 매월 2회 예를 올리
는 공간이자 조정에서 출장을 나온 관리의 숙식을 제공하던 객사이다. 건물 구조는 가운데에
3칸짜리 정당(正堂)을 두고 그 좌측에 4칸, 우측에 3칸 건물을 날개처럼 덧붙이니 이것을 익
사(翼舍)라고 하여 좌익사, 우익사라 불렀다. 그래서 문산관은 정면이 10칸 규모가 된다. 정
당에는 전패가 담겨져 있는데, 벽돌로 바닥을 깔았으며, 숙소로 사용된 좌/우익사는 우물마루
를 깔았다.

이 건물은 1666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지붕 암막새 기와에 '擁正六年 戊申四月(옹정
6년 무신4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1728년 4월에 중건되었음을 살짝 알려준다. 허나 1910
년 이후 왜정(倭政)은 문의 고을의 관청 건물을 싹 밀어버리고 달랑 문산관만 생색내듯 남겨
두었는데, 그마저도 문의국민학교(문의초교) 건물로 변질시켜 망국(亡國) 관청의 건물을 욕보
였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 문의초교 건물로 쓰였으며, 대청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이전 비용(3,000만원)이 여의치 않아 이전 대책도 딱히 세우지 않으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 대책이 마련되어 1979년 문의향교 옆으로 이전되었으며, 이때 앞서 언급했던 문산리
돌다리를 문산관 앞에 놓았다. 이후 1997년 지금의 자리에 안착했다.

객사 건물은 전주 고을 객사인 풍패지관(豊沛之館)과 비슷한 모습으로 비록 규모와 양식면에
서는 그보다 떨어지지만 이 땅에 흔치 않은 객사 건물 형식으로 문의 고을의 위상을 보여준다.


▲  옆에서 바라본 문의 문산관
원래 공사기간은 20일 전까지였는데 무슨 영문인지 아직까지도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문산관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  흑백사진에 담긴 문산관의 흑역사
문산관을 가린 임시 담장에는 문산관의 현재와 과거 사진을 걸어두었다. 과거 사진
중에는 1978년 사진도 있는데, 오랫동안 초등학교 건물로 쓰이면서
원형을 많이 잃었던 흑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  문산관 보수 공사에 투입된 기와들
저들이 모두 지붕 위에 올라가야 끝나는데
아직도 저만큼이나 남아있었다.

▲  문화재단지 전망대로 인도하는 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  문화재단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전망대

문산관에서 박석이 입혀진 남쪽 오솔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전망대가 있다. 문산관과 더불
어 문화재단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현장으로 이곳에 오르면 문화재단지 일대와 대청호,
그 너머 산줄기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문의문화재단지
높은 곳에서 옛 문의 고을을 굽어보는 기분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문의문화재단지와 대청호

▲  전망대에서 바라본 노현리 고가(왼쪽 'ㄱ'자 집)와
옹기전수관 (오른쪽 기와집)

▲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청호미술관 주변과 대청호



 

♠  문의문화재단지 마무리

▲  여막(廬幕)

전망대와 양반가옥 사이에는 초가 지붕을 지닌 돌집이 있다. 옛날식 창고인가 싶어서 살펴보
니 여막이라 불리는 집이다. 여막이란 무덤 부근에 지어놓고 상주(喪主)가 상을 마칠 때까지
머물던 집을 일컫는다.
문화재단지가 제자리를 잃은 문화유산의 보금자리긴 하지만 민속촌의 역할도 겸하고 있어서
문화재단지를 닦으면서 초가, 기와집, 돌탑 등을 새로 지어놓아 이 여막도 그런 것인줄 알았
는데 알고 보니 나름 사연이 있는 집이었다.
강내면 연정리 한양조씨 집안인 조육형과 그의 아버지인 조병천이 20세기 한복판에 대를 이어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신문과 방송에 크게 대서특필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의 효행을
기리고자 그들이 사용했던 여막을 재현한 것이다. 물론 그 옆에 무덤도 그대로 재현했다.

조병천(趙炳天) 같은 경우는 1957년 그의 아버지가 별세하자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무려 3년
씩이나 생식(生食)을 하며 시묘살이를 했다. 그 이후 무덤 일대에 공단이 들어서자 부득이하
게 다른 곳으로 무덤을 옮겼는데, 이때 또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  조병천의 시묘생활 모습

▲  조병천의 아들인 조육형의 시묘생활 모습

▲  여막 안에 재현된 시묘살이 모습
3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그 3년 동안 저렇게 살았다고 한다.

▲  조병천이 시묘살이 때 신었던 짚신과
가죽가방

▲  여막 옆에 재현된 무덤


▲  노현리(蘆峴里) 고가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20호

여막 밑이자 옹기전시관 이웃에는 기와집과 초가를 모두 지닌 노현리 고가가 자리해 있다. 이
집은 원래 강릉김씨 김승지의 종가(宗家)로 나중에 연안이씨 집안인 괴정 이현승(槐庭 李顯承
)에게 넘어갔으며, 그의 손자인 이양훈이 1993년 문의문화재단지에 집을 넘겼다.
안채는 'ㄱ'자 구조의 기와집이며, 광과 사주문 측간(厠間)은 초가로 되어 있어 기와집과 초
가가 서로 어우러진 공간이 되었다.


▲  윗쪽에서 바라본 노현리 고가와 대청호

▲  초가로 이루어진 측간

▲  양반가의 기품이 느껴지는 안채

▲  옹기전수관 뒷쪽에 재현된 옹기 가마터

▲  옹기전수관 앞길


▲  애국지사 일곱 분의 상

대청호미술관 맞은편에 왜정 시절 독립운동을 벌였던 청주 지역 애국지사 7인의 상(像)이 봉
안되어 있다. 그 7명의 위인(偉人)은 신석구(申錫九, 1875~1950), 권병덕(權秉悳, 1867~1944
), 한봉수(韓鳳洙, 1883~1972),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신
규식(申圭植, 1880~1922), 신홍식(申洪植, 1872~1937)으로 이중 단채 신채호 선생(대전 어남
동 출생)을 제외하고 모두 청주 출신이다.
애국지사 7인은 모두 앉아있는 모습으로 나그네로 하여금 잠시 마음을 숙연케 한다. 이 땅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그들이지만 정작 이 나라는 아직도 친일매국노의 후손
과 친일 잡것들의 손에 감싸여 종잡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으니 저들도 지하에서 통곡을 하
고 있을 것이다.


▲  청주시립 대청호미술관 표석과 조각공원 표석

문화재단지 가장 남쪽에는 청주시립 대청호미술관이 자리해 있다. 2004년 10월 2일 문을 열었
으며, 충북 최초의 공립미술관으로 청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3개의 전시관과 야외조각공원
을 갖추고 있으며, 기와집을 얹힌 3층 꼭대기에는 라운지룸과 전망대가 있다. 부지 면적은
4,900㎡, 건물 연면적은 1,411㎡의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입장료는 문의문화재단지 관람
료에 포함되어 있으며, 관람시간 역시 문화재단지와 같다.

따스한 미술관 내부로 들어서 3개의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죄다 추상 미술 일색이었는데, 무
슨 내용인지는 봐도 모르겠다. 옛날 미술은 다소 흥미가 가는데 현대 미술은 그리 정도 가지
않고 내 체질에도 맞지 않다. 하여 주마등(走馬燈)처럼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야외조각공원(
대청호조각공원)을 간단히 살펴보고 자리를 떴다.

* 청주시립 대청호미술관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산리 산6-1 (대청호반로 721,
  ☎ 043-201-0910~14)


▲  대청호미술관에서 양성문으로 바로 이어지는 산책로

▲  양성문에서 바라본 대청호
호수에 떠있는 존재는 인공수초 재배섬이다.

▲  문의문화재단지를 뒤로 하며

작지만 볼거리가 많았던 문화재단지를 2시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비록 문산관
이 몸을 가리며 몸단장 중이라 그의 모습을 살피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 외에 어지간한
것들은 죄다 살펴보았으니 그것으로도 배가 부르다.

햇님의 퇴근까지 시간이 넉넉하여 문화재단지 뒷산인 양성산과 그곳에 깃든 양성산성을 보고
자 했으나 산을 타기가 귀찮아서 몇 발자국 만에 그만두었다. 그들은 모두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미루고 문의(미천리) 중심지로 나와 동네마트에서 과자, 음료수를 사먹으며 허기진
배를 달래다가 문의 중심지 뒷쪽(서쪽)에 자리한 문의향교(文義鄕校,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94
)를 찾았다.
향교는 늘 그렇듯이 모든 문이 굳게 봉해져 있어 낮은 돌담 너머로 향교의 구성원인 대성전(
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 등을 구경했다. 게다가 사진도 별로라 여기서는 빼도록 하겠다.

이렇게 하여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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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한복판, 음성 겨울 나들이 (설성공원, 경호정, 미타사 지장대불, 가섭산 미타사의 설경)

음성 겨울 나들이 (경호정, 읍내리모전5층석탑, 미타사)



' 충북 음성 겨울 나들이 '

  음성 설성공원 경호정  
음성 읍내리 5층모전석탑

▲ 설성공원 경호정
◀ 음성 읍내리 5층모전석탑
▶ 미타사 지장대불
▼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미타사 지장대불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겨울 제국(帝國)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충북 음성(陰城)을 찾았다. 내 마음도
모르고 수북하게 쌓여만 가는 미답처(未踏處)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수도권과 가까운 적
당한 메뉴를 물색하다가 충북 음성에서 격하게 반응을 보여 그곳으로 길을 정했다.
충북 한복판에 자리한 음성군은 오래전에 1번 지나간 것이 전부일 정도로 지지리도 인연이
없던 곳이다. 하여 고려시대 마애불을 간직한 미타사를 비롯한 음성의 여러 소소한 명소를
둘러보며 그동안의 부족한 인연을 조금 채워보기로 했다.

햇님이 아직 등청하지 않은 이른 아침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로 달려갔
다. 거기서 음성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1시간 40분 정도를 달려 음성읍의 관문인 음성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음성에 이르니 새벽까지 눈이 왔는지 천하가 온통 은빛세계였다.

음성터미널에서 미타사가 있는 비산리(碑山里) 방면 군내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무려 1시간
20분 뒤에 차가 있다. (시외직행버스도 비산리에 정차하나 그것까지는 미처 몰랐음;) 그래
서 시간이나 때울 겸 터미널과 가까운 설성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미타사 후식용으로 보려
고 했던 곳인데, 버스 시간 관계로 후식을 먼저 맛보게 되었다.


 

♠  음성읍내의 소중한 휴식처, 경호정과 3층석탑 등을 간직한
음성 설성공원(雪城公園)

▲  설성공원의 중심인 경호정

음성터미널과 가까운 음성읍내 한복판에 설성공원이 자리해 있다. 이 공원은 음성읍민의 포근
한 휴식처이자 설성문화제, 음성품바축제 등이 열리는 지역 축제의 장으로 공원의 꽃인 경호
정을 비롯하여 3층석탑, 독립기념비, 이무영(李無影)문학비, 야외음악당, 음성청소년문화의집
,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등을 갖추고 있다.

공원 이름인 설성(雪城)은 음성의 다른 이름으로 고려 때 잠시 쓰였다. 지역 축제도 그 이름
을 따서 설성문화제라 했으며, 음성을 상징하는 옛 이름으로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다. 
공원 북부에는 테니스장과 게이트볼장, 야외음악당 등이 자리해 있는데, 매년 5월에는 이 음
악당에서 음성품바축제가 열린다. 그리고 공원 남부에는 동그란 연못과 경호정, 읍내리3층석
탑, 음성청소년문화의집,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공원 면적은 27,669㎡(8,370평)로 공원 동쪽에 음성천이 음성의 산하를 촉촉이 어루만지고 있
으며, 공원 내에 쉼터와 의자가 넉넉히 깔려있고, 경호정과 읍내리3층석탑, 읍내리5층모전석
탑 등 볼거리도 풍부해 음성 나들이 때 꼭 들려볼 만하다. 겉보기에는 시내에 흔한 공원처럼
보여 발길이 잘 가지 않겠지만 속은 제법 알찬 것이다.


▲  경호정과 얼어붙은 연못

설성공원의 갑(甲)은 뭐니뭐니해도 경호정이다. 공원 남쪽에 1,500평의 연못을 파고, 그 중심
에 200평 정도의 섬을 띄웠는데, 그 섬에 경호정과 읍내리3층석탑, 독립기념비를 두었다. 비
록 자연산은 아니지만 섬을 구경하기 힘든 음성 땅의 거의 유일한 섬으로 경호정과 어우러져
상큼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으며, 섬 서쪽과 동쪽에 속세와 섬을 잇는 돌다리를 놓아 운치를
더욱 우려낸다. 거기에 공원의 이름값을 하는 듯, 눈까지 깔려있으니 정말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  경호정(景湖亭) -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9호

돌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서면 경호정이 반갑게 마중을 한다. 경호정은 정면과 측면이 2칸인
팔작지붕 정자로 1934년에 지어졌다. 당시 이름은 인풍정(仁風亭)으로 1955년에 음성군수 민
찬식이 중건해 경호정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199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했다. 그리고 그
해 4월 중건기(重建記)를 작성하여 정자 내부에 걸었다.

경호정은 정확히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연못 중간 섬에 자리해 있고, 사방이 개방된 형
태라 늘 시원한 바람이 앞다투어 머문다.

▲  경호정 동쪽 돌다리

▲  경호정 서쪽 돌다리


▲  독립기념비와 음성 읍내리3층석탑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29호

경호정 맞은편에는 독립기념비와 음성 읍내리3층석탑이 경호정을 바라보며 서 있다. 독립기념
비는 1945년 8월 해방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지어진 지 80년도 되지 않은 젊은 비석이나 비
석 머리 부분에 검은 때가 가득하여 마치 몇백 년 묵은 비석처럼 고색의 멋을 풍긴다.

그런 독립기념비 옆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읍내리3층석탑이 있다. 그는 높이 2.4m로 읍내
부근 평곡리 절터에 있던 것을 1934년에 현재 자리로 가져와 경호정의 장식물로 삼았다.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힌 형태로 지붕돌은 밑면에 3단 받침을 두었고, 지
붕돌 귀퉁이는 아주 살짝 들려져 있으며, 3층 위에는 연꽃 모양의 머리장식을 두었는데,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적지 않은 나이를 지녔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손상이 없이
무탈한 모습을 보인다.


▲  음성 읍내리 5층모전석탑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9호

경호정에서 남쪽으로 가면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이 나오는데, 그 옆구리에 음성에서 가
장 늙은 탑인 읍내리5층모전석탑이 자리해 있다.
모전탑(模塼塔)이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은 것으로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과 조
금 비슷하다. 돌을 다듬어서 만든 석탑은 매우 흔하나 전탑과 모전탑은 거의 흔치 않은 존재
로 전탑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경북 안동(安東)과 영양(英陽), 의성(義城), 경주(慶州)
지역에 간간히 남아있을 뿐이다.

이 모전탑은 원래 음성향교 부근 교동(校洞) 절터<'읍내리 사지(寺址)'라고도 함>에 있던 것
으로 1946년 수봉초교 교장인 이철세가 학교 교내로 옮긴 것을 1995년 현재 자리에 안착시켰
다. 탑이 있던 교동 절터는 고려 중기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탑의 구조를 보면 땅에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1층 기단과 5층 탑신을 차례대로 올렸
는데, 2층과 5층 탑신의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며, 1층 탑신 4면에는 얇게 감실(龕室)을 팠다.
지붕돌은 위와 아랫면 모두 전탑처럼 층단을 이루고 있고, 네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
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탑의 조성시기는 고려 초~중기로 여겨지며, 안동 지역 모전탑의 영향
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탑 옆에는 비석의 아랫도리인 비좌(碑座)가 누워있는데, 대머리처럼 허전한 모습으로
오래전에 가출한 비신(碑身)을 애타게 기다린다.


▲  읍내리 5층모전석탑과 성문처럼 생긴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5층모전석탑 옆에 자리한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은 음성 군립(郡立) 박물관으로 1994년 4
월에 문을 열었다. 소장 유물은 950점 정도로 음성의 역사와 문화, 생활, 민속을 아낌없이 담
고 있지만 아직까진 인지도가 낮아 관람객은 별로 없다. 내가 들어선 시간은 주말 낮 11시였
는데, 관람객은 나홀로 뿐이었다.

전시관 1층(향토역사실)은 음성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테마로 관련 자료와 사진, 디오라마 등
을 전시하고 있으며, 음성 지역의 지정문화재와 향토문화재를 축소 재현한 것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2층(민속유물실)은 음성의 풍습과 민속, 농민문학가 이무영을 테마로 관련 자료와 사
진, 이무영의 작품과 유품 등을 두었으며, 전시관에 대한 내용은 이쯤에서 선을 긋는다.

* 설성공원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 향토자료전시관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817-12 (설성공원길 10-7 ☎ 043-
  871-5931)


 

♠  가섭산 미타사(迦葉山 彌陀寺) 아랫 구역
(느티나무, 지장대불, 마애여래입상)

▲  미타사로 인도하는 소이로61번길
저 멀리 금동 피부의 지장대불이 보인다


설성공원을 둘러보고 음성터미널로 돌아오니 비산리를 경유하여 후미리로 가는 음성군내버스
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일요일 낮시간이라 승객은 노인 2명 뿐, 그 상태로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터미널에 남기
며 육중한 바퀴를 움직인다. 음성읍내를 돌아 음성향교 고개를 넘어 10분 정도 가니 왼쪽 창
밖으로 미치도록 거대한 불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것은 바로 미타사 금동지장대불로 천하에
서 가장 큰 지장보살상(높이 41m)이라 멀리서도 제법 크게 보인다.

버스는 비산1리 정류장을 지나 비산4거리에 이르렀는데, 운전사에게 미타사 길을 문의하니 여
기서 내리라고 그런다. 하여 버스에서 내려 충청대로를 건너 미타사로 인도하는 소이로61번길
로 들어섰다.


▲  미타사입구에 자리한 비선거리 느티나무 - 음성군 보호수 3-14호

비산리 미타사입구에서 미타사로 걸음을 재촉하면 제일 먼저 늙은 느티나무가 발길을 붙잡는
다.
이 나무는 2004년에 음성군 보호수로 지정된 것으로 그때 추정 나이가 약 2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20년 가량이 보태져 대략 220년 정도 된다. 높이는 10m, 둘레 130cm로 미타사에서 관
리하고 있으며, 겨울 제국에게 몽땅 털린 초췌한 모습으로 간절하게 봄의 해방군을 염원한다.

나무 그늘에는 구름무늬 이수(螭首)를 갖춘 오래된 비석 2기가 멀뚱히 서 있는데, 이들은 조
선 후기에 음성 고을을 다스렸던 음성목사(牧使, 현재 군수나 시장) 엄씨와 이씨의 송덕비(頌
德碑)이다. 이들 비석 때문에 이곳을 이 땅에 흔한 지명의 하나인 '비석거리'라 불리게 되었
으며, 그것이 1글자 와전되어 지금은 '비선거리'라 불린다.


▲  후평소류지(구룡연)와 구생범종루(사진 왼쪽 누각)
하얀 눈옷을 걸친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 삼아 겨울에 지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느티나무를 지나면 미타사에서 운영하는 밝은언덕노인요양원과 추모공원(가족납골공원)을 관
리하는 건물이 나온다. 미타사 길은 여기서 동쪽으로 크게 구부러지며 그 옆에 후평소류지(비
산소류지)라 불리는 저수지가 그림 같은 풍경을 드리운다. 미타사에서는 그를 구룡연(九龍淵)
이라 부르고 있는데, 원래는 농지로 이곳에 큰 샘터가 있었다.
이후 1970년대에 농사를 위해 버들골을 막아서 소류지(沼溜地)를 만들었으며, 지금의 절이 있
도록 도와준 비산1리 마을 사람들을 위해 미타사에서 공사 비용을 많이 내주었다.

후평소류지 북쪽에는 2층 규모의 팔작지붕 누각이 있다. 그는 범종(梵鍾)을 품고 있는데, 그
냥 범종루(梵鍾樓)도 아닌 무려 중생을 구한다는 뜻의 '구생(求生)범종루'를 칭하고 있다. 범
종루에 안긴 범종은 2001년에 주지 명안(明岸)이 미타사를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장성지
로 다지는 차원에서 마련한 것으로 범종의 높이는 3.3m, 두께 20cm, 지름 2.1m, 무게 18톤에
청동범종이다.

2006년에 명안이 입적하자 2007년 그의 열반일에 맞춰 범종루를 완성시키며 그를 기리는 회향
(回向) 타종식을 가졌다.


▲  천하 최대의 지장보살상으로 명성이 높은 지장대불(地藏大佛)

구생범종루 북쪽에는 지장대불을 중심으로 한 추모공원이 넓게 닦여져 있다. 이곳은 2001년에
주지 명안이 진공당 탄성(眞空堂 呑性)과 쌍계사(雙磎寺)의 조실(祖室)인 고산(高山)의 도움
으로 만든 것으로 이 일대에 있던 밭과 평평한 모습의 마당바위를 밀어버리고 자리를 닦았다.

공원 북부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지장대불이 육환장(六環杖)을 쥐어들고 장엄한 모습으로 납골
당 영가(靈駕)들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의 높이는 불교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척(41m)으로
1998년 4월에 짓기 시작하여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보았으며, 천하에서 가장 큰 지장보살상으
로 미타사의 자부심이 담긴 큰 보살상이자 듬직한 후광(後光)이다.
그가 어찌나 크던지 멀리 충청대로에서도 시야에 보이며, 그 앞에 서면 정말 주눅이 잔뜩 들
정도이다. 특히 거구의 지장보살이 서 있는 연화대(蓮花臺)도 그 덩치에 못지 않게 상당하여
높이가 3m에 이르며, 그 밑의 기단석에는 사천왕(四天王)과 팔부중(八部衆) 등의 여러 호법신
(護法神)들이 새겨져 영가들을 보살피는데 정신이 없는 지장보살을 지킨다.

참고로 이 자리는 백룡이 여의주를 품은 최고의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뒤에는 가섭산의 오
색비단 장막이, 동에는 좌청룡, 서에는 우백호가 지켜주고 탁트인 남쪽에는 여의주가 뚜렷하
다는 것이다.

▲  동쪽에서 바라본 지장대불

▲  지장대불의 연화대와 기단부


▲  그윽한 설경에 미타사 숲길 (미타사 마애불 남쪽)

▲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30호

지장대불을 지나면 설경에 잠긴 오르막 숲길이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선사한다. 푸른 나뭇잎
대신 하얀 눈꽃을 가득 머금으며 순백의 아름다움이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그 숲길을 조금 오
르면 미타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옛 미타사의 오롯한 흔적인 마애여래입상이 보호각의 보
호를 받으며 중생을 맞이한다.

미타사 마애불은 마치 현신하듯 바위에 진하게 새겨져 있다. 높이는 405cm로 머리에는 무견정
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으며, 머리 스타일은 민머리이다. 눈은 지워진 듯 보이지 않고,
코는 형태만 남아있으며, 입도 그 형태만 있다. 볼살은 두터워 보이고, 얼굴 양쪽에 달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청력 하나는 정말 대단할 것 같다.
어깨는 유연하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스쳐를 취했다. 옷은 왼
쪽 어깨를 시작으로 발까지 덮고 있고, 주름은 사선으로 흐르고 있으며, 형식화된 신체 표현,
직선적인 윤곽,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과 옷자락에서 신라 후기 불상 양식을 따른 고
려 중기 마애불로 여겨진다.

마애불의 보호를 위해 2002년에 맞배지붕 보호각을 씌워 눈과 비를 막아주고 있으며, 보호각
이 사방으로 뚫린 오픈식이라 답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상 앞에는 예를 올리는 공간이 있는
데, 하얀 눈이 가득 입혀져 있어 예를 표하지는 못했다.


▲  멀리서 바라본 미타사 마애여래입상과 그의 조촐한 거처

▲  표정을 잃어버린 듯한 마애여래입상
눈과 눈썹은 거의 지워졌고, 코와 입, 귀만 형식적으로 남아있다.


 

♠  미타사 경내


▲  미타사 경내 직전 (돌담길)

마애불에서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한 굽이 오르면 가섭산(해발 710m) 동남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미타사는 이 땅에 아주 흔한 절 이름의 하나로 서울에만 보문동(普門洞), 옥수동(玉水洞), 개
화동(開花洞)에 오래된 미타사가 있다. 미타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뜻하며, 아미타불의 절
이 바로 미타사가 된다.

음성 미타사는 옛 절터에 지어진 것으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의 비구니 수행도량이다. 미타사
란 이름은 1964년 창건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옛 이름은 유룡사(有龍寺)라고 하나 확실한 것
은 없다.
63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신빙성은 없으며, 876년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1370
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하지만
경내에 고려 후기 석불이, 경내 밑에 고려 중기 마애불이 있고, 절터에서 고려 때 기와조각과
분청사기, 백자 파편, 금동불상 등이 출토되고 있어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연 것은 확
실하다.

1584년에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절을 중건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36년 병자
호란 때 각성(覺性)이 의병 3천으로 청나라군을 물리친 공로로 그의 소망에 따라 절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허나 1724년(또는 1723년) 화재로 파괴되면서 오랫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이후 마애불만 속세에 드러낸 채, 간신히 터만 남아있다가 19세기에 비산리에 살던 만석꾼 경
주최씨가 '나를 좀 꺼내줘' 외치는 불상 꿈을 꾸고 땅을 파서 석불을 발견했다. 그것이 인연
이 되어 경주최씨는 아들을 얻었고, 그 소문이 퍼지면서 석불은 동네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다.
허나 불상의 적당한 거처를 만들진 못하고 김치광처럼 앞가림을 하거나 토굴을 만들어 봉안했
으며, 경주최씨 일가에서 계속 불상을 관리했다.

1964년 인근 충주에 사는 어느 무당이 석불을 가져가려고 인부를 동원했으나 불상이 이상하게
도 너무 무거워서 하루 동안 겨우 지장대불 밑에 있는 비산소류지 밖에 가지 못했다. 그 소식
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죄다 몰려가 무당을 쫓아내고 불상을 되찾았는데, 이상하게도 불상이
가벼워져 금방 제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예산 수덕사(修德寺)에 있던 비구니 명안은 음성에 왔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이
곳 절터의 존재와 무당 사건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안내로 절터를 답사하게 되었는데, 석
불 관리인인 경주최씨 일가 최봉락은 그에게 석불을 모시며 이곳에 머물러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일단 땅 주인이 절터에 지은 원두막을 대충 손질하여 머물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명안에게 머물 곳과 먹을 거리를 지원해주었고, 같이 절을 짓기로 의견을 모았
다. 하여 명안과 마을 사람들은 '미타사 창건 기성회'를 조직하여 가가호호 돈을 모으고, 일
일이 공사 자재를 짊어지며 집을 지어 1965년 4월, 8칸의 법당과 산신각이 지어졌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미타사의 시작으로 다른 절과 달리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 절을 지은 점
이 특이하다. 이는 마을 사람들이 석불을 수호신으로 무척 애지중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
당이 석불을 몰래 빼돌리려는 사건까지 터졌으니 더욱 그렇다. 하여 이곳에 온 명안에게 석불
봉안을 부탁하고 절까지 지어준 것이며, 석불과 운 덕분에 수덕사 비구니의 일원이었던 명안
은 자기 이름으로 절을 운영하게 되었다.

1965년 절 창건 당시 고려시대 기와조각과 분청사기, 백자 조각 등이 출토되었으며, 1973년에
는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이 나왔고, 1976년에는 대형 맷돌이 나오기도 하
여 옛 절의 위엄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준다.
1979년에는 법당인 극락전과 삼성각을 세웠고, 1980년에 선방과 3층석탑을 세웠으며, 납골당
사업에도 손을 뻗쳐 2001년에 추모공원과 지장대불, 구생범종루 등을 만드는 등, 나날이 사세
를 확장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절을 꾸리게 된 명안 이정화(李貞和)는 2006년에 입적했는데, 다비식
(茶毘式)을 하자 연꽃 봉오리 모양의 사리가 나왔다. 현재는 그의 제자인 희원이 주지로 있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약사전, 선방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절
입구에 지장대불과 관련 건물, 복지시설인 밝은언덕노인요양원 등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
는 지방문화재인 마애여래입상을 비롯해 지금의 절을 있게 해준 석조여래좌상, 대형 맷돌 등
이 전하고 있으며, 고색의 내음은 채 익지도 못했지만 첩첩한 산자락에 묻힌 산사(山寺)로 경
내가 정갈하고 깔끔하다.


▲  미타사 경내 (대광명세존진신 사리탑과 극락전)

돌담길을 지나면 경내의 중심인 극락전(極樂殿)이 나온다. 극락전 뜨락에는 특이하게도 6각형
을 띈 날씬한 모습의 3층석탑이 서 있는데, 탑의 이름이 무려 '대광명세존진신사리탑'으로 그
이름 그대로 부처의 사리를 머금고 있다.
탑에 봉안된 사리는 인도의 네루 수상이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찾아온 것으로 미얀마 만다래힐
사원에 전달했다. 만다래힐 주지승은 이중 3과를 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인 일타에게
주었고, 일타는 다시 미타사에 기증했다. 이에 미타사는 1992년 사리를 봉안할 탑을 만들어
봉안함으로서 부처의 사리를 보유한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탑의 구조는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중의 기단을 얹혔으며, 4기의 석사자를 모서리에 두어 3
층 탑신을 지탱한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는 보륜(寶輪) 등을 갖추며 탑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부가 하얗고 탱탱하지만 100~200년에 시간이 지나면 20세기 후반
을 대표하는 석탑의 하나로 크게 다뤄질지도 모른다.


▲  미타사의 법당인 극락전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9년에 새로 지었다. 지붕이 건물의 무려
⅔를 차지할 정도로 너무 육중한 탓에 건물이 꽤 커 보이며, 내부에는 1965년에 조성된 석가
여래상과 아미타여래좌상,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절의 창건주인 명안(이정화)의 영정이 봉
안되어 있다.

극락전 자리에는 원래 오래된 돌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무를 베려고
연장질을 하면 사람들이 계속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통에 나무에 귀신이 있는 것으로 여겨 아
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미타사 주지 명안은 우리가 나무를 처리할테니 연장을
빌려달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청했으나 빌려주는 사람까지 해를 입을까봐 아무도 호응하지 않
았다.
하여 명안은 나무에 제를 지내 절을 지키는 옹호신장이 되어줄 것을 청했고, 연장을 빌려 나
무를 건드리니 글쎄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20세기 한복판에 옛날에나 있을 법한 일이 있
었다니 정말 고개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  극락전 아미타3존상

▲  미타사의 창건주 명안의 진영

▲  청기와를 눌러쓴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지하에는
공양간이 있다.

▲  눈이 잔잔히 입혀진 얼어붙은 샘터
겨울에게 털린 물지갑을 쥐어든 동자상의
뻘쭘함은 언제쯤이나 끌날까?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극락전 뒷쪽 좌측에는 삼성각이 높이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79년 기존의 산신각을 부시고 새로 만들었으며, 칠성탱을 중심으로
산신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  등장 인물로 빼곡한 칠성탱

▲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그려진 산신탱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천태산이
그려진 독성탱

  극락전 옆구리에 자리한
약사전(藥師殿)


▲  약사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보금자리
로 절터에서 나온 석불을 약사여래로 삼아 봉안하고 있다.

1724년(1723년) 절이 화재로 붕괴되자 그 충격으로 머리와 양손을 잃은 채, 지옥보다 더 어두
컴컴한 땅속에 갇혀 기나긴 외로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비산리에 사는 경주최
씨의 꿈속에 나타나 꺼내달라고 애원하면서 그의 의해 비로소 다시 속세로 나오게 된다.
당시 경주최씨는 마을의 부호(富戶)였으나 불상을 관리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냥 노천
에 김치광처럼 덮개를 씌우거나 토굴을 파서 봉안을 했고, 그 후손인 최봉락이 비구니 명안에
게 이 절터와 석불을 보여주면서 석불을 모시고 살 것을 권해 지금의 미타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라진 양손과 머리는 1964년에 새로 만들어 끼었으며, 왼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점이 약
사여래로 여겨져 약사전을 짓고 그 건물의 주인으로 삼았다. 석불 높이는 90cm, 어깨폭 50cm
이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로 여겨져 절 밑에 있는 마애여래입상 다음으로 오래된
존재이다.

석불의 머리와 손은 새로 했기 때문에 세월의 고된 때로 자욱한 기존 부분과 확연히 색깔 차
이가 난다. 하얀 얼굴에는 미소가 환하게 번져 있고, 몸에 걸친 통견(通肩)은 마치 겨울에 조
성된 듯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리고 아랫도리는 너무 작게 표현되어 윗도리와 아랫도리의 균
형이 지나치게 떨어진다.

이렇게 미타사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솔직히 경내 밑에 자리한 마애불이
땡겨서 이곳에 온 것이지 미타사 자체에 반응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다. 아무리 늙은 절터에
다시 세웠다 한들, 지금의 미타사는 분명 새 절이기 때문이다.
마애불의 인도로 찾아온 미타사. 거기에 겨울 제국이 폭풍처럼 선사한 눈이 천하를 순백으로
채색하면서 산사의 그윽한 설경까지 이리 챙기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음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미타사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소이로61번길164 ☎ 043-872-0522)
* 미타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미타사를 뒤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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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7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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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의 꿀명소를 거닐다 ~ 진천 농다리, 보련산 보탑사, 연곡리석비

진천 농다리, 보탑사



' 진천 농다리, 보탑사 봄맞이 나들이 '

진천 농다리
▲  진천 농다리

보탑사 3층목탑

보탑사 금동와불

▲  보탑사 3층목탑

▲  보탑사 금동와불

 



 

반년 가까이 천하를 주름잡던 겨울 제국과 그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이 마
지막 자웅을 겨루던 3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충북 진천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엄청난 출근 차량의 버벅거림을 간신히 뚫고 진천(鎭川) 땅
에 들어섰는데, 그동안 진천은 그저 지나가기만 했지 제대로 둘러본 적은 없었다. 하여
제일 먼저 진천을 찾아 그곳에 깃든 미답처(未踏處)를 몇 개라도 지워보기로 했다.

오전 10시 경, 문백면에 자리한 농다리에 도착했다. 아직은 아침에 가까운 시간이고 농
다리가 발을 담군 미호천에서 물연기도 살포시 피어올라 이른 아침의 청명한 기운이 고
스란히 남아있었다.



 

♠  천하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 - 진천 농다리(籠橋)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8호

▲  서쪽에서 바라본 농다리

진천 구산동리에는 천하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로 추앙을 받는 농다리(농교)가 미호천(세금천)
에 발을 담구며 정정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농다리는 약 94m 길이의 돌다리로 28개의 마디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마디는 다리 교
각과 같은 존재로 길쭉한 마디 사이에 길이 1m 정도의 통돌을 1~2개 정도 얹혀 다리로 삼았는
데, 각 마디마다 통돌이 일직선으로 놓여있지 않고 아주 약간 구부러진 'S'자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크고 작은 돌<자석(紫石)이 많이 사용됨>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은 다음, 지네
모양처럼 길게 만들었는데, 석회 등을 바르지 않고 오로지 순 100% 돌로만 쌓았다.
교각 마디를 굵게 지었고 지역 사람들이 꾸준히 다리를 보살펴 다리가 크게 무너지는 등의 피
해는 없었다고 하며, 지금도 무난히 다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농다리를 시기하던 대자연
이 1,000년 이상 비와 눈, 바람을 억수로 퍼부으며 다리를 헝클어뜨리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까지 28칸의 마디 중 3칸을 지우고, 하천의 수심을 얕게 만들어 원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워
진 정도가 전부이다. (예전에는 어른이 서서 다리 밑을 통과할 정도였으나 지금은 수심이 많
이 얕아짐;) 그 정도의 피해를 제외하면 거의 양호한 수준이며, 다리가 떠내려가거나 붕괴된
적은 없었다.
그저 자연석으로 구축된 아주 단순해 보이는 돌다리임에도 수십 년을 견디지 못하고 앉은뱅이
가 되버리는 요즘 건축물보다 더 단단하니 옛 사람들의 건축 실력과 농다리의 근성이 신기롭
고 두려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 다리는 언제 지어졌을까? 진천의 향토사를 다룬 상산지(常山誌)와 왜정(倭政) 때
이병연(李秉延)이 쓴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따르면 '고려 초 임장군(林將軍)이 축조
했다고'고 쓰여있다. 여기서 임장군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천 지역의 유력한 세력가로
보이며 통행 편의를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1,000년 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리 이름이 농다리가 된 것은 단순히 길다는 뜻에 농(long)이 아니라 교각 마디마다 돌을 쌓
으면서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 당기는 돌이 있어서 농다리라 불리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 땅
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이자 다른 돌다리와 완전히 구별되는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건
강도 양호하여 고려 초 다리 건축을 연구하는데 아주 착한 자료가 되어준다.
특히 고려 후기 이전 돌다리가 거의 없는 실정에서 매우 희소가치가 높다. 허나 그럼에도 불
구하고 아직까지 지방문화재의 지위에 머물러 있으니 그 이유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국가 지
정 보물이나 사적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데 말이다.

시골 구석의 늙은 돌다리로 조용히 묻혀 지내던 농다리는 2,000년대 이후 진천군에서 격하게
띄워주면서 이제는 진천 제일의 명소이자 꿀단지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장대한 세월이
훔쳐간 마디 3칸을 복원하여 예전처럼 28칸으로 회복했으며, 다리 주변에 주차장과 쉼터, 미
르숲을 닦았다.
하여 주말과 휴일만 되면 농다리의 위엄을 보고자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며, 매년 5
월에는 농다리 일대에서 진천의 주요 축제인 '생거진천농다리축제'가 열린다.


▲  동쪽에서 바라본 농다리

농다리가 튼튼하긴 하나 돌로 닦여진 다리라 길이 꽤 울퉁불퉁하다. 게다가 마디(교각) 사이
에 통행을 위한 통돌을 1~2개 붙여놓은 것이 고작이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과 마주친다면
괜히 다리를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지 말고 먼저 쿨하게 양보하기 바란다.
그렇게 돌다리를 건너면 진천군청이 현대모비스와 자연환경국민신탁 등과 닦은 미르숲에 이른
다. 미르숲은 농다리 수식용으로 지어진 공원으로 천년정과 농암정, 인공폭포, 징검다리, 쉼
터, 야외음악당, 산길, 미르전망대 등이 닦여져 있으며, 여기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진
천의 대표적인 호수로 명성이 자자한 초평저수지(미호지)가 모습을 비춰 시간이 넉넉하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기를 권한다. 다만 초평저수지는 덩치가 꽤 크기 때문에 전체를 둘러보
는 것은 좀 무리가 있으며, 농다리와 이웃한 서쪽 부분과 하늘다리만 둘러보면 충분하다.

▲  마디(교각) 사이에 걸린 2개의 통돌

▲  마디를 이어주는 좁은 통돌

▲  서로 비슷한 모습을 지닌 2개의 통돌

▲  농다리의 단잠을 깨우는 중부고속도로

농다리 서쪽에는 중부고속도로가 흐르고 있다. 통행 수요가 겁나게 많은 도로라 차량들의 질
주 본능 소리로 귀가 따가울 지경인데, 고속도로와 바로 이웃하고 있어 서울 방향(상행선)으
로 이동할 때, 잠시 오른쪽을 살펴보면 농다리가 눈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렇다고 갓길에 아
예 바퀴를 접고 구경하지는 말자. 갓길은 긴급시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  미호천의 물살이 혼돈을 이루고 있는 농다리 (천년정에서 바라본 모습)

▲  지네가 징그럽게 기어가는 듯한 모습의 농다리
(동쪽 윗쪽에서 바라본 모습)

▲  농다리를 쌓은 이들의 아련한 흔적, 임장수와 말의 발자국

농다리 동쪽에는 바위들이 주름선을 이루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있다. 그 계곡에 붉은 피부의
화살표가 밑을 가르키고 있는데, 그곳에 임장수와 말의 발자국이라고 전하는 흔적이 서려있어
다음과 같은 전설을 살짝 귀띔해준다.

때는 고려 초 어느 날, 임장군이 농다리를 만들고자 큰 바위를 짊어지고 말을 탄 채, 용고개(
살고개)를 내려오고 있었다. 농다리에 거의 다 와 갈 무렵, 말이 바위 무게에 너무 지친 나머
지 잠깐 주춤하더니 그때 발을 디딘 바위가 움푹 들어가 말의 발자국이 생겼다. 하여 말이 움
직일 수 없게 되자 임장군이 바위를 든 채, 말에서 뛰어내리니 그가 발을 디딘 곳에도 장군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생겨났다고 한다.
물론 이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다. 하지만 임장군을 바위도 거뜬히 드는 괴력의 사나이로 꾸
밀 정도면 그에 대한 지역 사람들에 높은 추앙을 엿볼 수 있으며, 말이 지쳐 발자국이 생겼다
는 전설은 다리 축조가 그만큼 고단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이들 흔적은 다리를 만드
는 과정(석재를 캐던 현장 정도)에서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  농다리의 신선한 양념, 1칸짜리 천년정(千年亭)
정자의 이름이 천년이 된 것은 별 이유 없다. 농다리가 1,000년 이상 숙성된
늙은 돌다리라 그를 기리고자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  미호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농다리와 중부고속도로

▲  미호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북쪽 징검다리

농다리에서 미호천을 따라 북쪽으로 산책로가 닦여져 있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징
검다리에 이르게 되는데, 보통 농다리를 찾으면 농다리를 건너 징검다리로 원점회귀하는 코스
로 많이 둘러본다. 시간이 넉넉하면 여로(旅路)도 좀 살찌울 겸, 바로 이웃에 자리한 초평저
수지로 잠깐 넘어가도 되겠지만  우리는 진천부터 경북까지 둘러볼 곳을 많이 잡은 관계로 그
냥 징검다리로 돌아왔다.


▲  농다리와 징검다리를 이어주는 미호천 동쪽 산책로

▲  미호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농다리와 중부고속도로

▲  21세기판 농다리? 농다리 북쪽에 닦여진 징검다리

징검다리는 미호천에 촘촘히 박힌 큰 돌로 이루어져 있다. 농다리 주변을 꾸미면서 닦은 다리
로 한참이나 선배인 농다리와 서로 경쟁하는 듯 하다. 허나 농다리의 위엄 앞에 이제 10~20년
이 갓 넘었을 징검다리가 어디 감히 이름과 위엄을 내밀겠는가. 그저 묵묵히 농다리를 보조하
는 역할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농다리와 미호천

▲  서쪽에서 바라본 징검다리


* 농다리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산동리 601-32



 

♠  폐허에 옛 절터에 연꽃처럼 피어난 현대 사찰
~ 진천 보련산 보탑사(寶蓮山 寶塔寺)

농다리를 둘러보고 다리 서쪽에 자리한 농다리전시관도 살펴보려고 했으나 귀차니즘에 휩싸여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고 진천읍내로 나왔다.
원래는 바로 보은(報恩) 땅으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문득 보탑사 3자가 스치듯 생각이 나 그곳
을 그날의 2번째 메뉴로 흔쾌히 정했다. 솔직히 농다리 하나만 보고 진천을 떠나기에는 다소
허전했지. 마치 50%가 부족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보탑사로 나머지 50%를 채우기로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에 따라 진첩읍내에서 뼈다귀해장국으로 점
심을 때우고 보탑사로 들어갔다. 읍내에서 그곳까지는 약 13km, 진천 지역에서도 매우 첩첩한
산골이자 벽지인 연곡리 골짜기를 굽이굽이 들어가 김유신(金庾信)장군 탄생지와 연곡저수지
(연곡제)를 거쳐 그 길(김유신길)의 끝에 자리한 보탑사에 도착했다.


▲  보탑사 느티나무 - 진천군 보호수 4호

보탑사에 이르니 제일 먼저 늙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자 봄의 해방
군이 지척에 왔건만 나무는 여전히 겨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봄이 더 분발하여
겨울로부터 천하를 속히 해방시켜야 되지만 겨울 제국 또한 만만치 않은 상대라 아직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보탑사 느티나무는 나이가 약 370년 정도(1982년 11월 보호수로 지정될 때 추정 나이가 327년
)로 높이 18m, 둘레 5.3m의 덩치를 지녔다.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과 비립동 마을(보
탑사 밑에 자리한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어엿하게 성장했는데, 그의 그늘을 지나면
보탑사의 정문인 천왕문이 두툼한 덩치를 내밀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탑사
의 짧은 내력을 살펴보자.


▲  보탑사 천왕문(天王門)
천왕문 현판 대신 절 이름이 담긴 현판을 내걸었다.

▲  비파를 연주하는 흰 수염의 다문천왕
(多聞天王)과 칼을 다듬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

▲  작은 용을 쥐어든 증장천왕(增長天王)과
보탑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廣目天王)


▲  경내 바깥 주차장에서 바라본 보탑사의 위엄
왼쪽 2층 건물이 수련원, 오른쪽 석축 위에 자리한 건물이 범종각,
그리고 그들 사이로 3층 목탑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진천의 명산인 만뢰산(萬賴山, 611m) 남쪽 자락에는 20세기 말 현대 사찰인 보탑사가 우람하
게 둥지를 틀고 있다. 보탑사는 만뢰산을 보련산(寶蓮山)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절을 둘러
싼 도덕봉과 약수봉, 옥녀봉 등 만뢰산의 남쪽 9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그것이
마치 1송이 연꽃이 피어난 모습처럼 아름답다 하여 유래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연꽃
의 골짜기란 뜻의 연곡리(蓮谷里)가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보탑사 자리에는 오래된 절터가 아련히 전해오고 있었다. 그 절은 백비로 유명한 연곡리
석비와 석탑을 남긴 채,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절의 이
름과 정보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것이 없어 안따까움을 더한다. 그러다가 1988년 보탑사 창건
주인 지광(智光), 삼선포교원 주지인 묘순(妙純), 보탑사 주지가 된 능현(能現) 등 3명의 비
구니가 그 터를 매입해 보탑사를 세워 기백(幾百)년 이상 끊어진 이곳의 법등(法燈)을 다시
켰다.

보탑사란 이름은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온 것으로 석가여래의 법문을 다보여래(多寶如來)가
증명하고자 칠보탑(七寶塔)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비록 그것에 미치지는 못해도
보배탑(3층 목탑)을 세움으로써 모든 이들의 마음에 부처의 가르침을 심어주고 자비심으로 가
득 채워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지었다.
또한 그냥 절만 으리으리하게 닦으면 다소 식상할 수 있으니 통일 기원 도량임을 강조하여 나
름의 절의 성격과 존재의 이유를 부여했다. 이는 부근에 신라 무열왕(武烈王)과 문무왕(文武
王)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당나라까지 토벌한 김유신장군의 탄생지가 있기 때문이다.

1991년 우람한 규모의 3층 목탑을 세우고자 당시 이름난 한옥 전문가들로 구성된 고건축 문화
재팀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들이 현장을 살피고 건물 설계를 마친 다음 1992년 5월 공사에 들
어가 1996년 8월 완성을 보았으며, 이후 지장전과 영산전 등 여러 건물을 줄줄이 지어올려 절
의 빈 공간을 채워나갔고, 2014년에 불사가 최종 마무리되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옛 절터에 지었다고 하나 엄연한 현대 사찰로 법등이 켜진지는 이제 30여 년에 불과하다.
현대 사찰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내가 보탑사를 몸소 찾은 것은 그곳이 어떻게 생긴 곳인가 궁
금하기도 했고, 국가 보물로 지정된 연곡리석비도 서려있어 그것도 같이 보고자 함이다.

넓게 자리한 경내(부지 규모는 약 13,223㎡)에는 이곳의 법당이자 자랑인 40m가 넘는 3층 목
탑을 비롯해 산신각, 삼소실, 지장전, 해행당, 영산전, 수련원, 천왕문 등 10여 동의 크고 작
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연곡리 석비와 비지정문화재인 늙은 석탑 하나가 전
하고 있다.
또한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꽤 산뜻하고 정갈하며, 꽃과 나무를 많이 심어 왠만한 고급 정원
부럽지가 않다. 또한 금낭화와 앵초, 영산홍 등을 화단과 대형 화분에 심어놓아 4~5월에는 그
들의 봄꽃 향연이 펼쳐지며, 여름에는 연꽃의 향연도 펼쳐져 볼거리도 넉넉하다.
 
보탑사에서 눈여겨 볼 존재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연곡리석비와 오래된 석탑을 위시
해 3층 목탑과 목탑 내부(3층까지 관람 가능), 적조전에 봉안된 금빛 와불, 특이한 모양의 지
장전과 산신각, 영산전 정도이며, 봄에 왔다면 야생화를, 여름에 왔다면 연꽃의 향연을 구경
하고, 겨울 동짓날에 왔다면 팥죽과 7개월 묵은 수박을 꼭 먹어보자.

* 보탑사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김유신길 641, ☎ 043-533-6865)


▲  와불이 봉안된 적조전(寂照殿)

적조전에는 부처가 열반에 들 때 반쯤 누운 모습을 재현한 금빛 와불(臥佛)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앞에는 동그란 존재가 놓여져 있는데, 그것은 부처의 발자국을 표현했다는 불족석(佛足
石)으로 비가 내릴 때 발자국 안에 물이 고이고 그 위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면 안에 새겨진
물고기가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허나 나는 그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
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  적조전에 누워있는 와불의 위엄
와불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 대신 푸른 초원이 담긴 그림을 걸어두었다.

▲  연꽃 보개(寶蓋) 밑에서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그 유명한 백제의 반가사유상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다소곳하게 앉은 그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고 있을까?

▲  보탑사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그 흔한 기와집 대신 너와지붕을 얹힌 귀틀집 모양을 하고 있다. 귀틀집이 산악지방
에서 많이 지어진 집이라 산을 근거지로 삼은 산신(山神)의 보금자리인 산신각도 그렇게 지은
모양이다.


▲  산신각 산신탱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를 중심으로 동자, 호랑이, 소나무, 산, 폭포 등이
담겨져 있다.

▲  보탑사의 조촐한 여흥거리, 야생화 화단과 화분들
아직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이라 꽃들은 아직 피지도 못했다.

▲  삼소실(三笑室)
승려들의 생활, 참선 공간이다.

▲  양반가 모습의 해행당(解行堂)
주지를 비롯한 선임 승려들의 생활공간이다.


♠  보탑사 마무리 (연곡리석비, 영산전, 3층목탑)

▲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앞쪽에 3칸짜리 맞배지붕 기와집을 배치하고 뒷쪽은 돌로 다져 석굴(石窟)처럼 꾸민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건물은 고구려 제20대 태왕(太王)으로 북경(北京)을 비롯한 하북(河北) 지역과 내몽골(지
두우), 경상북도까지 너른 영토를 닦았던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능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단순히 남북통일 뿐 아니라 북방의 옛 땅까지 모두 아우르는 대통일을 염원하고자 그리
만든 듯 싶다.


▲  동그란 지붕 밑에 자리한 보탑사 석조(샘터)
보련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석조에는 늘 물이 가득하다.

▲  고된 세월에 완전 떡이 되버린 옛 연곡리절터 석탑

석조 뒷쪽에는 옛 연곡리절터의 흔적인 석탑이 헝클어진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2중의 기단(
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얹힌 형태로 지금은 2층만 남아있는 상태이나 원래는 3층이나 5층
탑으로 여겨진다.
윗 기단은 석재가 떨어져 나간 것을 붙였으며, 1층과 2층 탑신은 그런데로 남아있으나 그 윗
쪽에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산산이 부셔진 머리장식의 잔재가 얹혀져 있어 그의 삶이
순탄치 못했음을 보여준다.
고려 때 탑으로 보이며, 현재 높이는 2.5m 정도로 그나마 보탑사가 수습해주었으니 망정이지
그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  연곡리석비 보호각

▲  하얀 백지로 남아있는 연곡리석비(石碑) - 보물 404호

보탑사 경내 서쪽에는 이곳의 가장 늙은 보물인 연곡리석비가 보호각에 두텁게 감싸인 채 자
리하고 있다.

이 비석은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이른바 백비(白碑)로 유명하다. 무슨 글자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비신(碑身, 빗돌)을 아무리 뚫어지라 바라봤지만 글씨는 커녕 세월이 그어놓은 주름선만
보일 뿐. 글씨 같은 것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백지로 있는 것일까? 아쉽게도 세
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보다 더 불가사의하게도 그 이유는 밝혀진 것이 없다. 처음부터 백
지로 세웠다는 설과 중간에 지워졌다는 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비석 조각 기법이 우수한
것으로 보아 애당초 백지용으로 세웠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비석을 세울 당시, 귀부와 이수가 완성되고 글씨를 새기려는 찰라 절이 불의의 이유(전
쟁이나 천재지변, 민란)로 파괴되면서 그 작업이 중단된 채, 버려졌을 가능성도 있고 글씨는
있었으나 절을 파괴한 자들이 그 글씨를 빡빡 밀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허나 어느 것이 정
답인지는 석비만 알 뿐이나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비석 제일 밑바닥에는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머리에 귀갑(龜甲)을 갖춘 귀부(龜趺)를 두었는
데, 귀부 머리는 거북이 아닌 말 머리와 비슷해 보인다. 비석 머리에는 9마리 용이 새겨진 이
수(螭首)가 달려 있으며, 조각 기법이 매우 우수하다. 비신 높이는 2.13m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비신의 윗부분과 용과 구름무늬가 새겨진 이수

▲  8각형을 이루고 있는 영산전(靈山殿)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 제자인 500나한의 거처이다. 이들 500나한은 신도들이
기증한 것으로 각자 다른 얼굴과 옷, 포즈를 취하며 바위처럼 새겨진
자리에 빼곡히 앉아있다.

▲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한 영산전 내부

▲  석가여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들, 500나한의 위엄

▲  정면에서 바라본 3층 목탑의 위엄

나보다 나이가 어린 보탑사가 짧은 시간에 진천 제일의 명소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3층
목탑 때문이다.
보탑사의 야심작이자 자존심이며, 소중한 꿀단지인 3층 목탑은 1991년 이름난 한옥 전문가들
로 구성된 고건축 문화재팀에 의해 설계되어 1992년 5월에 공사를 시작, 1996년 8월에 완성을
본 20세기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 목탑 높이는 42.73m, 꼭대기 상륜부(相輪部)의 높이는 9.99
m로 총 높이는 52.72m에 달한다.

강원도에서 소나무를 가져와 못 1개도 쓰지 않은 전통 방식으로 지어졌으며, 무늬만 3층이 아
닌 실제 3층이다. 1층은 법당(금당)으로 석가여래와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을 봉안했
고, 2층은 법보전(法寶殿)으로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머금은 8만대장경 번역본과 윤장대, 한글
법화경을 새긴 돌판을 봉안하고 있으며, 3층은 미륵전(彌勒殿)으로 미륵불이 기거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 지붕 아래 3개의 성격을 지닌 건물을 담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이 땅에 전해온 목탑 비슷한 건물<법주사 5층 팔상전(八相殿)이나 1983년 불에 타버
린 쌍봉사 3층 대웅전 등>은 무늬만 증충이지 속은 하나의 층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보탑사 목
탑은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3층을 지녔다. (층 중간에 2개의 숨겨진 층이 있음, 일종의
다락방 같은 것)
목탑의 정식 이름은 '보탑사 통일대탑'으로 너무 으리하고 화려하다는 눈총을 조금이나마 피
할 겸, 부근에 있는 김유신 탄생지에서 힌트를 얻어 통일 기원 목탑으로의 성격을 갖추고 있
다.

목탑 자리는 연꽃의 한 가운데 꽃술에 해당하는 지점이라고 하며, 당시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
은 경주 황룡사(皇龍寺) 목탑과 경주 남산 탑곡마애불상군(☞ 관련글 보기)을 참고하여 제작
했다고 한다. 2층과 3층에는 바깥에 마루 난간을 두었으나 위험 때문에 평소에는 문을 닫아
출입을 금하고 있다.

이곳에는 2가지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석가탄신일 전후하여 1층 약사불 앞에 사람들이
수박을 올린다. 그런데 그 수박을 며칠 사이에 처리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가 12월 동짓날, 팥
죽을 먹을 때 수박을 깨서 나눠먹는다. 그 기간이 최소 7개월이고, 수박을 따로 저장고에 둔
것도 아닌데도 수박은 전혀 상하지 않고 신선함 상태를 유지한다고 한다. 거짓말 같아 보이지
만 사실이다. 이미 여러 번 언론을 타 화제가 된 적이 있으며, 동짓날에 절을 찾은 이들에게
실제로 나눠준다.
또한 절 앞에 자리한 370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바람개비처럼 부속 건물의 지
붕을 타고 북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만들어 목탑 지붕에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실
제로 목탑에는 눈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지어진 지 이제 20여 년 밖에 안된 어린 목탑이 벌
써부터 끼를 보이고 있으니 80~90년 정도 지나면 20세기 후반 흥미로운 건축물이라 하여 국사
나 한국미술사 서적에 절찬리에 실릴 것이다.

3층 꼭대기 부분에는 능엄경과 법화경 등 불교 경전과 절의 사적기(事蹟記)를 보관한 일종의
타임캡슐이 있는데, 불기(佛紀) 3,000년이 되는 서기 2,456년에 개봉한다고 한다. (내 생애에
는 어림도 없다는 소리;;) 또한 목탑 머리 부분에는 동자승 4명이 천상에서 줄을 매고 목탑으
로 내려오는 장면을 연출했다.

▲  1층 아미타불(阿彌陀佛)
그 좌우로 문수,보현보살이 시립해 있다.

▲  1층 석가여래3존상
그 좌우로 지장,관세음보살이 서 있다.

▲  1층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  1층 비로자나불

▲  1층에서 2,3층으로 올라가는 통로
실내화를 신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며
계단은 2개가 있다.

▲  1999년 5월에 봉안된
석가여래후불탱


▲  2층 법보전 중앙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는 불경이나 불교 관련 서적을 넣어두던 책장이다. 그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다고 홍보를 했는데, 이는 티벳불교의 경통과 비슷하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영업을 하고자 윤장대를 적극 활용한
것이다.

▲  원(願) 성취대라 불리는 윤장대

▲  2층 법보전 내부

▲  3층 미륵전 미륵3존불

▲  뒷쪽에서 바라본 3층 목탑

목탑 내부는 햇살이 별로 들어오지 않아 은근히 시원했다. 하여 한여름에 왔다면 정말 조촐한
피서지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50분 가량 보탑사 경내를 둘러보고 다음 답사지로 길을 향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쿨하게 선을 긋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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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상류에 숨겨진 아름다운 비경 ~~ 옥천 둔주봉, 한반도지형, 향수바람길 나들이 (독락정)

옥천 둔주봉, 한반도지형(향수바람길)


' 금강 상류에 숨겨진 비경,
옥천 둔주봉(한반도지형)~향수바람길 '
옥천 한반도지형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옥천 한반도지형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대전 옆에 자리한 충북 옥천(沃川)을
찾았다. 옥천 땅에 한반도 비슷하게 생긴 지형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어 그를 찾고자 추
위를 무릅쓰고 출동한 것이다.

햇님이 아직 등청하지 않은 이른 아침, 한강 건너 영등포역에서 경부선(京釜線) 무궁화
호 열차에 나를 담았다. 열차는 2시간을 내달려 옥천역에 이르렀는데, 금강산도 식후경
(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명언에 따라 옥천역 부근에서 따끈하게 순대국 1그릇 말고
둔주봉에서 먹을 김밥 2줄을 구입하여(옥천버스 종점에 가격이 저렴한 괜찮은 김밥집이
있음) 안남으로 가는 옥천군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옥천읍에서 둔주봉이 있는 안남면 중심지<연주리(蓮舟里)>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중
간에 장계에서 금강을 건너가는데, 그는 내가 찾아갈 둔주봉과 한반도지형 옆구리도 지
나간다. 그래서 오늘은 하루 종일 금강을 지켜봐야 된다.

안남(연주리) 종점에서 남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안남초교로 그 직전에 한반도지형을 굽
어보는 둔주봉으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경사도 거의 완만한 그 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둔주봉의 북쪽 입구인 비들목재(점촌재)로 여기서 왼쪽(남쪽)으로 틀어 둔
주봉의 품으로 들어섰다. (길을 그대로 직진하면 피실나루터로 이어짐)


▲  서서히 솟구치는 비들목재(점촌재) 고갯길


▲  비들목재를 넘으면서 바라본 안남면 연주리 지역

▲  둔주봉 능선길과 만나는 비들목재 갈림길 (둔주봉 북쪽 입구)
여기서 직진하면 금강이 있는 피실나루터로 이어진다.



 

  ♠  둔주봉 한반도지형 (둔주봉정)

▲  둔주봉정 북쪽 소나무숲길

둔주봉(屯駐峰, 384m)은 안남면 연주리의 듬직한 뒷산으로 등주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동/서/
남 3면이 금강(錦江)에 접해있고 북쪽만 육지로 이어져 있는데 이 일대는 뫼가 첩첩히 둘러진
산악지대라 강이 곧게 흐르지 못하고 구불구불 굴곡미를 보이며 흘러간다. 그러다보니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속칭 반도(半島)식 지형이 많다.
둔주봉 역시 그런 지형의 하나로 동남쪽 금강 건너에도 비슷한 지형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둔
주봉의 상큼한 양념인 한반도지형이다. 한반도지형의 대명사로 추앙받는 강원도 영월(寧越)의
한반도지형을 시작으로 천하 곳곳에서 그런 비슷한 지형이 발견되고 있는데 옥천에서도 하나
발견되어 괴산 산막이옛길의 한반도지형(☞ 관련글 보기)과 함께 충북 속의 조그만 한반도를
이루고 있다.

이곳도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만 살짝 찾던 숨겨진 곳이었으나 다녀간 사람들의 글과 사진, 입
소문을 통해 찾는 이가 늘자 옥천군청이 2007년 7월부터 9월까지 한반도지형이 잘 바라보이는
둔주봉 2번째 봉우리에 전망대(둔주봉정)를 닦고 산길을 정비했으며 이후로도 계속 정성을 들
여 옥천 제일의 꿀단지로 키우고 있다. 한반도 비슷하게 생긴 지형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나
찾던 동네 뒷산이 전국적 수준의 뒷산으로 성장한 것이다.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그리 높지는
않음)

둔주봉 유래에 대해서는 연주리 일대가 풍수지리적으로 장군대좌형(將軍大座形)의 자리로 일
컬어져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한국지명총람'에 '둔주봉'으로 나와있어 꽤 오래된
이름임을 알려주고 있다. 산봉우리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하며, 정상부에는 삼국시대 유적
인 둔주봉산성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  한반도지형을 굽어보는 둔주봉정 (한반도지형 전망대)

둔주봉 나들이는 접근성도 좋고 오르기도 편한 비들목재(점촌재)에서 시작하면 편하다. 거기
서 산길을 따라가면 둔주봉정(0.8km), 둔주봉 정상(1.6km)과 무리없이 이어지며 정상에서 다
시 비들목재로 나오거나 고성(1코스), 금정골(2코스), 피실(3코스)로 내려가도 된다. 그 3곳
으로 내려가면 둔주봉을 3면으로 포위하여 흐르는 금강과 만난다. <반대로 고성, 금정골, 피
실에서 올라가도 되나 경사가 각박하여 조금 힘듬>

고성이 둔주봉의 제일 남쪽 끝으로 비들목재에서 3.5km 거리이며 둔주봉과 금강 경계에는 좁
은 비포장길이 펼쳐져 있어 산골 벽지의 운치를 더해준다. 이 길은 피실에서 금정골, 고성을
거쳐 연주리 남쪽의 독락정마을까지 이어진다.

▲  둔주봉정 현판의 위엄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동쪽(연주리 지역)

비들목재에서 느긋하게 펼쳐진 능선 숲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조촐하게 생긴 둔주봉정이 마중
을 한다. 이곳이 둔주봉의 2번째 봉우리로 금강 건너에 펼쳐진 한반도지형을 속시원하게 바라
볼 수 있는 현장이다. 하여 2007년 여름, 옥천군청에서 둔주봉정과 전망데크를 닦아 한반도지
형 전망대로 세상에 내놓았다.
여기서는 한반도지형과 그 지형을 감싸며 구비쳐 흐르는 금강, 둔주봉 남쪽 능선이 시야에 쏙
들어오며 동쪽(연주리 방향)도 바라보이기는 하나 수목이 적지 않게 시야를 가려 조망은 별로
이다. (북쪽과 서쪽은 산으로 거의 막힘) 그러니 이곳은 오로지 한반도지형을 위한 곳이다.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옥천 한반도지형

옥천 한반도지형은 대자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아주 기가 막힌 작품으로 금강과 주
변 산들이 조화를 이루며 아주 걸쭉한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속세(俗世)의 때가 거의 느껴
지지 않는 이곳 풍경에 세상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눈과 마음이 제대로 위로가 된다.
허나 그가 아무리 한반도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도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나의 침침한 두 눈에는
양말이나 버선처럼 보인다. 하여 나 같은 사람의 그런 시각을 잡아주고자 둔주봉정 안에 동그
란 볼록거울을 설치했으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그 거울로 보면 맨눈으로 보는 것과 완전 반
대로 다가와 한반도 비슷하게 바라보인다. 인간의 눈과 특수 효과를 넣은 거울의 미묘한 차이
라고나 할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렌즈의 장난일 뿐이다.


▲  볼록거울의 시각 농간, 둔주봉정 볼록거울로 바라본 한반도지형
이렇게 보니 정말 한반도 비슷하게 바라보인다.


▲  얼어붙은 금강에 감싸인 한반도지형의 위엄

한반도지형에는 경작지를 비롯하여 백사장과 숲, 산이 있다. 지형 남쪽에는 뫼들이 칼처럼 솟
아있고 그 좁은 산골에 집들이 여럿 깃들여져 있으며, 지형 북쪽에는 백사장이 펼쳐져 금강의
푸른 물줄기와 스킨쉽을 즐긴다.
동/서/북 3면이 금강에 막혀있고 남쪽 또한 높은 산에 막혀있으니 영월의 청령포(淸泠浦)처럼
육지 속의 외로운 섬이자 하늘의 감옥 같은 곳이다. 동이면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으나 길이
험해 보통 연주리 독락정마을이나 고성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 그게 훨씬 접근성이 편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겨울의 한복판이라 강이 얼어붙어 나룻배 또한 강제 휴업에 들어간 상태이
다. 그러니 저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사실상 막힌 셈이다. 얼어붙은 강을 두 발로 건너가는 방
법이 있지만 설익거나 틈을 보인 얼음이 적지 않아 그건 무모하다. 그러니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둔주봉정 밑에서 바라본 한반도지형

현재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가 전부이다. (그마저도 2개로 형편없이 쪼개
져 있음ㅠ) 그러다보니 이 땅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한반도를 닮은 지형에 집착을 보이는
경향이 다소 있는 것 같다. (특히 지방자치단체가 더한 거 같음~) 그래서 그런 지형을 찾거나
일부로 만들어 하나 같이 관광지로 요란하게 키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 한반도보다 더 넓은 영역을 누비고 살던 사람들이다. 만주와 요동(遼東),
요서(遼西), 하북(북경), 산동반도, 대마도, 왜열도, 연해주 등이 싹 우리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를 너무 한반도로 국한해서 보거나 그 좁은 땅으로 만족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반드시 주변 오랑캐들을 때려잡고 그동안 잃어버린 땅의 그 몇 배를 회복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야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북한을 흡수하고 옛 땅을 되찾는 그날이 찾아오면 케케묵은 한반도지형
은 싹 내다 버리고 그에 걸맞은 지형을 찾아 키워야 될 것이다.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둔주봉 산줄기
오른쪽에 높이 솟은 봉우리가 정상, 왼쪽에 하얀 존재는 얼어붙은 금강


둔주봉정에 올라 한반도지형과 그림 같은 주변 풍경에 한참을 심취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둔주봉정 관리아저씨가 살짝 다가와 잘 구경했냐며 말을 건넨다. 그는 9시부터 17~18시(
한겨울에는 일몰 직전까지)까지 이곳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으로 둔주봉정 서쪽에 그가 일을
보는 조그만 초소가 있다.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한반도지형이 양말, 버선 같다고 하니 빙그레 웃으며 둔주봉정 안에 있
는 볼록거울로 한번 보라고 그런다. 하여 그 거울을 바라보니 과연 한반도 비슷하게 바라보인
다. 나 같은 사람에 대비해서 볼록거울까지 설치하여 어떻게든 한반도지형처럼 보이게 하려는
옥천군청의 치밀함에 정말 혀를 내둘렀다.

둔주봉정에서 고성까지 소요시간을 물으니 족히 2시간은 걸린다고 그런다. 원래는 둔주봉 정
상을 찍고 고성으로 내려가 금강 강변길을 따라 연주리로 나오려고 했는데 그 말에 경로를 바
꾸어 정상에서 바로 독락정으로 내려가는 빠른 길을 문의했다. 그러니 정상에선 길이 없고 한
반도지형전망대 남쪽에 그곳으로 내려가는 샛길이 있다고 그런다. 하여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
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  둔주봉의 지붕을 거닐다. (둔주봉 정상)

▲  솔내음이 그윽한 둔주봉 북쪽 능선길 (둔주봉정 남쪽)

둔주봉정에서 뻔히 바라보이는 둔주봉 정상까지는 약 0.8km이다. 허나 체감거리는 거의 2배가
넘으니 이정표의 농간에 속지 말자~~!
한반도지형전망대를 나오면 바로 내리막길이 펼쳐지는데 그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왼쪽(동쪽)
으로 내려가는 길이 살짝 눈에 들어온다. (이정표는 없음) 그 길이 둔주봉정 관리원이 알려준
샛길이다. 일단 그 샛길은 접어두고 능선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했다.

하늘과 한층 가까워졌는지 지금까지 거의 보이지 않던 눈이 크게 존재감을 보이며 하얗게 길
을 덮는다. 게다가 산길도 흥분기를 보이며 낭떠러지 비슷한 곳까지 내놓으면서 긴장과 함께
체감거리를 증가시킨다. 다행히 아이젠을 챙겨와 신발에 씌우고 조심조심 다리를 움직였다.


▲  둔주봉 정상으로 인도하는 북쪽 능선길

▲  겨울 제국이 깔아놓은 하얀 카페트 길을 거닐다~!
눈이 쌓인 둔주봉 북쪽 능선길


▲  둔주봉 정상 밑에 자리한 둔주봉산성 표석

둔주봉 정상 직전에 이르니 '둔주봉산성'을 알리는 조그만 표석이 마중을 한다. 거의 한반도
지형만 생각하고 온 터라 '이런 곳도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 이곳에도 비록 희미하
지만 옛 사람들이 씌워놓은 흔적이 있었다.

뜻밖의 만남이었던 둔주봉산성은 정상 주변에 다져진 약 150m 규모의 토성(土城)이다. 삼국시
대에 조성되었다고 하지만 위치상 백제(百濟)로 여겨지며, 지금은 그 윤곽만 흐릿하게 남아있
다. 바로 뒤에 있는 정상에 오르면 주변이 훤히 바라보여 큰 산성(山城)이나 요새는 아니어도
조그만 보루(堡壘)를 둘만한 군사적 요충지의 자격이 충분함을 느끼게 한다.

이곳을 지켰던 옛 백제 군사들도 금강 동쪽 건너편의 한반도지형을 봤을 것이다. 허나 그 시
절 한반도지형은 천하 사람들을 홀릴만한 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저 금강이 굴곡을 보이며 빚
은 지형의 하나였을 뿐이다. 또한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몇 배의 영토를 지니고 있었다면 결코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며 이렇게 옥천의 꿀단지로 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나
명승지나 시대와 장소를 잘 만나야 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훤칠한 존재라도 결코 뜨지
못한다.


▲  둔주봉 정상에 둘러진 둔주봉산성의 흐릿한 흔적
토성의 흔적이 봉우리의 일부로 녹아든 채 얇게 남아있다.

▲  드디어 도착한 둔주봉 정상 (384m)

둔주봉 정상은 정상을 알리는 표석 외에는 완전한 대자연의 공간이다. 여기서는 둔주봉의 존
재를 천하에 일깨워준 한반도지형은 보이지 않으나 북쪽과 서쪽의 산하가 훤히 보여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특히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금강과 그를 둘러싼 뫼들이 생생히 다가와 마치
하나의 파노라마 같으며 그 서쪽 산하 너머로 멀리 대전 외곽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둔주봉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 ①
구불구불 흐르는 금강과 옥천군 동이면, 안남면 지역 (멀리 대전 외곽의 산들까지)

▲  둔주봉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 ②

▲  둔주봉 정상에서 바라본 북쪽 (옥천 안남면, 안내면 지역)

정상에서 10분 정도를 머물며 아무도 없는 자연의 한복판을 마음껏 누렸다. 마음 같아서는 아
비규환의 세상에서 잠시 나를 지우며 이곳에 더 묻히고 싶었지만 내가 있어야 될 곳이 아닌지
라 그러지를 못한다. 하여 아쉽지만 자리를 정리하고 둔주봉정 방향으로 이동하여 한반도지형
전망대 남쪽에 숨겨진 독락정 방향 샛길로 들어섰다.

둔주봉 안내도에도 투명 취급을 받는 샛길이라 사람들 왕래가 적어 잡초가 좀 많았고 경사 또
한 급하여 거의 달리다시피 하여 내려왔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가니 산 밑에 아득하게만
보였던 독락정마을이 진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270m 고지에서 순식간에 아랫 세상(해발 100m)
으로 내려왔으니 마치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안남천과 금강이 만나는 곳 (독락정마을 앞)



 

♠  금강 거닐기 (독락정, 향수바람길)

▲  금강과 안남천이 만나는 곳에 섬이 빚어져 있다.

독락정마을은 금강과 안남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해 있다. 연주리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지어
진 독락정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경작지로 쓰이는 섬이 있
으며 한반도지형으로 넘어가는 나루터가 있다.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독락정(獨樂亭)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23호

독락정마을의 유래가 된 독락정은 마을 남쪽 언덕에 자리해 있다. 금강과 안남천이 하나가 되
는 현장을 묵묵히 굽어보고 있는 이곳은 둔주봉 주변에서 둔주봉산성터 다음으로 오래된 명소
로 절충장군 중추부사(折衝將軍 中樞府事)를 지냈던 주몽득(周夢得)이 1607년(또는 1630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주몽득은 이곳에 정착하여 만년을 지냈으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書堂)으로 쓰이기
도 했다. 또한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역 선비와 관리들이 많이 찾아와 풍류를 즐겼다. 1668
년 옥천군수 심후(沈候)가 방문 기념으로 '독락정' 현판을 남겼으며 대청에는 송근수(宋近洙)
가 쓴 율시기문(律時記文) 등 10개 정도의 현판이 어지럽게 걸려있다.
1772년 정자를 중수했고, 1888년과 1923년 다시 수리를 했으며, 1965년 주몽득의 후손인 초계
주씨 문중에서 다시 고쳐지어 지금에 이른다.

독락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금강을 바라보고자 약간 비스듬하게 동남향
을 취하고 있다. 지형을 이용해 석축을 쌓아 자리를 닦고 그 복판에 네모난 기단을 다져 정자
를 올렸으며, 정자 양쪽 측면은 툇마루를 설치하고자 내부를 4칸으로 지었다. 동,서,북 3면은
돌담을 둘렀고 동쪽에 출입문을 냈으며, 남쪽은 금강을 보는데 지장이 없게끔 담장을 두지 않
고 앞을 완전히 트이게 했다. 대신 서서히 낮아지는 지형을 이용해 석축을 2m 정도로 다져 담
장을 대신했다.


▲  단출한 모습의 독락정
정자의 이름처럼 자연을 벗삼아 혼자 놀기에 딱 적당한 크기이다.


▲  초계주씨의 시조인 한림학사(翰林學士) 주황(周璜)의 위령비(慰靈碑)와
영모각(永慕閣, 뒤에 보이는 기와집)


독락정은 초계주씨의 조그만 성역(聖域)과 같은 곳이다. 독락정 북쪽에 후손들이 사는 영모각
과 주몽득에게 제를 지내는 영모사(永慕祠)가 있으며, 주몽득을 시작으로 이곳에 정착한 것을
기리고자 초계주씨세거비(世居碑)도 한쪽에 세워두었다.
또한 이곳과는 인연이 없지만 초계주씨의 시조인 주황의 위령비까지 세워 시조를 기리고 있다.
주황은 당나라 사람으로 후삼국시대인 907년에 신라로 넘어와 합천 초계(草溪) 지역에 둥지를
틀었다고 전한다.

▲  정겨운 모습의 독락정 동쪽 돌담과
맞배지붕 대문

▲  1668년 옥천군수 심후가 썼다는
독락정 현판의 위엄

▲  독락정의 역사를 머금은 독락정 추모기

▲  붉은 피부의 현판, 송근수가 썼다는
'율시기문'일까? 잘 모르겠다.


▲  독락정에서 바라본 둔주봉 정상
방금까지 나는 저 정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문득 눈을 떠보니 독락정
툇마루에서 정상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을 보면
세월도 그렇고 인생도 정말 무상한 모양이다.

▲  독락정마을에서 바라본 금강과 한반도지형

독락정을 지나면 금강과 둔주봉의 경계를 따라 비포장 흙길이 정겹게 펼쳐진다. 얼어붙은 금
강 너머로 보이는 곳이 둔주봉정에서 바라봤던 한반도지형 바로 그것이다. 위에서 보는 것과
달리 강변에서 보니 그냥 숲이 우거진 언덕처럼 평범하게 보인다.

굽이굽이 요동치는 금강과 거의 절벽 수준의 둔주봉 사이에 놓인 비포장길(금강 강변길)은 1
차선 크기로 고성을 지나 피실까지 이어진다. 둘레길과 도보길이 천하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옥천군청도 거기에 숟가락을 얹혀 '향수바람길'이란 도보길을 내놓았는데, 그 이름은 옥천이
낳은 현대시인 정지용(鄭芝溶)의 대표 작품 '향수'에서 따온 것으로 그 코스 중 전설바닷길(
4.5km, 피실나루터~독락정)이 바로 이곳의 신세를 진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금강과 산, 숲, 흙길이 어우러진 두멧골의 진수를 보여주는 아주 아
름다운 길로 바다를 지나지도 않는데 왜 '전설바닷길'로 간판을 달았는지 의문이다. 차라리 '
전설의 강변길'이나 '한반도지형길','둔주봉길'이 낫지 않았을까? 이름이야 어쨌든 둔주봉정
에서 한반도지형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꼭 금강 강변길도 거닐어보기 바란다. 나는
한반도지형보다는 이 길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  비포장 흙길의 진수를 보여주는 금강 강변길 (전설바닷길)
가끔 차량들이 오갈 뿐 인적도 매우 드물다. (휴일에는 좀 있는 편) 산바람과
강바람 소리가 전부인 고적한 길로 처음에는 조금만 가려고 했으나 주변
풍경이 너무 고와 그 풍경에 취한 나머지 그만 고성까지 가버렸다.

▲  독락정과 한반도지형을 갈라놓은 얼어붙은 금강
얼핏 보면 얼음이 단단해 보이지만 중간에 설익거나 비리비리한 부분이 있으니
괜히 온몸을 던져 건널 생각은 하지 말자.

▲  한반도지형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나룻배 (독락정 나루터)
이곳에서 배를 타고 옥천 속의 섬, 한반도지형으로 들어갈 수 있다.
허나 겨울 제국이 얼음을 꽁꽁 씌워놓으면서 배는 강제로
겨울 휴가에 들어간 상태이다.

▲  강 건너로 보이는 한반도지형과 백사장

▲  한반도지형(왼쪽)과 금강, 그리고 둔주봉(오른쪽) ▼


 
▲  한반도지형의 잘생긴 서쪽 옆구리

▲  독락정마을과는 저만큼 멀어지고..

▲  시야에서 사라진 독락정마을
햇님이 둔주봉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한반도지형과 맞닿은 동쪽 강변길은
벌써부터 어둠에 잠겼다. 강변길이 거의 벼랑처럼 펼쳐진 둔주봉의
바로 동쪽 밑이라 바깥보다 일찍 컴컴해지는 것이다.

▲  고성나루터 직전 (강 건너는 여전히 한반도지형)

▲  둔주봉의 남쪽 끝이자 한반도지형 남쪽을 이어주는 고성나루터

고성은 둔주봉 남쪽 끝이자 독락정에서 피실로 이어지는 길 중간이다. 한반도지형 남쪽을 이
어주는 나루터가 이곳에 있는데, 겨울 제국에게 완전히 굴복당한 독락정 나루터와 달리 고성
나루터는 사람들이 얼음에서 강을 해방시켜 뱃길을 내고자 강 건너편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얼
음을 깨뜨린 흔적이 있다. 저 정도로는 제대로 건너가기도 어렵겠지만 겨울 제국에게 조금이
나마 단죄를 하였으니 겨울도 조금은 긴장을 했을 것이다.

고성을 지나면 강변길은 둔주봉 서쪽으로 넘어가게 되며, 둔주봉이 있는 지형도 한반도지형과
비슷한 반도형 지형으로 그 남쪽 끝이 바로 고성이다. 마음 같아서는 피실까지 가서 점촌고개
를 통해 연주리로 원점회귀하고 싶었지만 그 거리가 길고 일몰이 코앞이라 여기서 그만 발걸
음을 접고 독락정마을로 돌아갔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천근만근처럼 무겁고 섭하던지 몇 번
이나 뒤를 돌아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  다시 가까워진 독락정마을

금강 강변길이 길이 좋다보니 고성까지 갈 때도 그렇고 다시 연주리로 나올 때도 그 적지 않
은 거리(3km)가 매우 짧게 느껴졌다.
연주리 중심지(안남면사무소 주변)에 이르러 읍내에서 사온 김밥으로 출출함을 잠시 달래고
17시에 옥천읍내로 나가는 옥천군내버스에 고된 몸을 실었다. 나가는 길에 장계국민관광지에
있다는 청석교를 잠시 보고자 했으나 달님이 햇님을 쪼아대며 일몰을 재촉하니 불투명한 다음
으로 흔쾌히 미루고 옥천읍내로 나왔다.

이리하여 늦겨울에 찾아간 옥천 한반도지형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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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2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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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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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영동 백화산 반야사 '

반야사3층석탑
▲  반야사3층석탑과 배롱나무

▲  영천과 망경대

▲  반야사계곡(석천계곡)

 


 

♠  백화산(白華山)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반야사(般若寺) - 영동군 향토유적 9호

▲  반야사 경내
경내 뒷쪽으로 꼬랑지를 든 호랑이를 닮았다는 돌너덜(반야산 호랑이)이 보인다.


영동 고을의 동부를 맡고 있는 황간(黃澗), 그 황간 북쪽 우매리에서 석천계곡(반야사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 반야사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반겨준다.

백두대간의 일원이기도 한 백화산이 베푼 석천계곡이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
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그곳 한복판에 둥지를 닦은 반야사는 백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절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매우 곱고 절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영동(永同) 지역 경승지이자 피서의 성지로 오랜 세월 찬양을 받고 있
다.

경관 하나는 아주 일품인 반야사는 신라 말에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가 황간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심묘사(深妙寺)에 주석하고 있었을 때, 현재 절 자리에 있던
연못에 나쁜 악룡(惡龍)이 머물며 갖은 민폐를 부리자 사미승(沙彌僧) 순인(純仁)을 보내 그
들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닦으니 그것이 반야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용(龍)이 진짜로 있을 리는 없을 터이니 아마도 백화산에서 설치던 산적을 교화하
거나 때려잡고 그들의 본거지에 절을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비록 무염이 창건했는지는 의문
이나 대웅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불상이 있어 9~10세기에 창건된 것은 확실한 것 같
다.
무염의 창건설 외에도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원효(元曉)가 세웠다는 설과 의상(義湘)의 10
대 제자 중 하나인 상원(相源)이 세웠다는 설도 덩달아 전하고 있으나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
은 이 땅에 많은 절에서 사골이 되도록 우려먹는 흔한 소재이다. 반야사도 예전에는 그들이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요즘은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부분을 생략하고 신라 후기에 크게 활약했
던 무염을 창건주로 내세우고 있다.
절 주변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 했으며 산
이름을 지장산에서 백화산으로 바꾸어 문수도량임을 내세웠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352년에 중건되었다고 하며, 1464년 신미
(信眉)가 세조(世祖)의 허락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세조는 법주사(法住寺)를 방문했다
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에 들려 새로 지은 대웅전에 참배하고 '반야'란 현판을 내렸다고
하며 그때부터 절 이름이 '반야사'가 되었다고 한다. ('반야'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뜻함)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잠수를 탔다가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
히 불사를 벌여나갔고 1993년에 새 대웅전과 요사를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산신각, 지장전, 심검당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서 다소 떨어진 망경대 벼랑 위에는 이곳의 상징인 문수전이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닦았다.
절이 들어앉은 특성상 대웅전과 극락전 등 주요 건물들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문수전은 북
쪽을 향하고 있다, (경내에서 계곡 건너 서쪽에 전답과 관세음보살상이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유일한 국가 지정문화재인 3층석탑을 비롯해 영동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대웅전 불상, 조선 후기 부도 2기가 있으며, 그 외에 500년 묵은 배롱나무 2그루와 신
중탱이 전하고 있다.
또한 절 뒷쪽 계곡 너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파쇄석이 모인 돌너덜이 있는데,
마치 꼬랑지를 세운 호랑이 모습이라 절에서는 그를 '반야사 호랑이'로 삼으며 호랑이로 화현
(化現)한 산신(山神)으로 내세우고 있다. 경내에서도 그 돌너덜이 보이며, 그 너덜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닦은 모양이다.

반야사는 풍경도 좋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교통편이 영 좋지 못한 것이 큰 흠이라 대중교통으
로 오려면 여간 힘들지가 않다. 허나 그만큼 첩첩한 산속으로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
거나 마음을 싹둑 다듬고 싶을 때 안기면 아주 좋은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템플스테이도 운
영하고 있으니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고적한 산사에 묻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1 (백화산로 652 ☎ 043-742-4199, 7722)
* 반야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주차장 남쪽에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문수도량과 산신기도 도량까지 내세우는 이곳에는 재미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 2
가지를 우선 꺼내보겠다. (다른 1가지는 영천 부분에서)

①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시절 글재주가 좋은 황도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간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했는데, 웃기는 것은 아주 쉬운 한자인 '수(
水)'와 '산(山)' 2자를 몰라서 백일장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크게 발끈한 황도령은 바로 반야사로 달려가 그곳에 있던 일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일우
는 학식이 뛰어난 승려로 그에게 많은 학문을 전해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황도령의 얼굴색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어 얼굴을 살펴보니 글쎄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 아닌가? 그냥 방치하다
가는 황도령이 골로 갈 수 있기에 그의 옷을 벗겨 온몸에 금강경(金剛經) 5,149자를 빼곡히
적어넣고 옷을 입혔다.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은 도령 몸에 쓰인 금강경을 보고는 크게 발작했다. 금강
경의 위엄에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줄행랑을 쳤는데 이는 일우가 금
강경을 쓸 때 귀 부분을 실수로 빼놓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도령은 귀는 잃었지만 스승 덕
분에 살아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출가를 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이법사(無耳法師)라
했다. 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② 불교 탄압이 극성이던 조선 성종~연산군(燕山君) 시절, 벽계선사(碧溪禪師)는 그 소나기를
피하고자 머리를 기르고 속인(俗人)으로 가장하여 살았다. 그는 과부를 맞아들여 같이 살았는
데 어디까지나 위장 혼인일 뿐, 3년을 살아도 여전히 남남처럼 살았다. 부부의 재미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에 완전히 뿔이 난 과부는 어느 날 '야~ 나 갈꺼야~~!!'
선사 왈 '왜?'
과부 '이름만 부부지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 살겠냐?'
선사 '그러면 말리지 않겠다. 그래도 3년 동안 밥해주느라 고생했는데 수고비로 이거나 가져
가셔~!'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주었다.

과부는 표주박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와 동구 밖 샘물가에서 그것으로 물을 떠마시며 팔자 한
탄을 간드러지게 하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있던 표주박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자 그만 포기하고 3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재혼처를 물
색했으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벽계선사를 다시 찾아갔다.
선사는 '내 다시 올 줄 알았다'
그 말에 과부는 '어찌 알았누?'
선사 '그 이유가 궁금함? 그런데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따 팔아먹었노?'
과부 '아 그거... 마을 동구 밖 샘터에서 잃어버렸어. 쩝'
선사 '그 자리에 다시 가봐라. 아직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과부가 놀라서 '어째서?'
선사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중이 되기를 500번이나 했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
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것이라 이
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지~~!'

과부는 웃기고 있네~~! 표정을 지으며 그 샘터로 가보니 과연 그 표주박이 3년 전 모습 그대
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과부는 다시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며 선사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잘살았다고 한다.

▲  반야사 심검당(尋劍堂)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  반야사 용머리 연꽃 석조
백화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그의 넉넉한 마음을 비춘다.

▲  반야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大雄殿)
1993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극락전이 대웅전 행세를 하였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불단과 붉은 닫집, 그리고 석가3존상
(대웅전 불상 - 영동군 향토유적 12호)


대웅전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이루어진 조그만 석
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경주 옥석(玉石)으로 조성되어 산뜻하게 도금을 입힌 것으
로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여래상은 검은 머리칼을 드러내고 있고
좌우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눌러쓰며 석가여래 좌우를 받쳐준다. 그들 뒤로는 검은 바탕으
로 이루어진 석가후불탱이 든든하게 후광이 되어준다.

▲  대웅전 신중탱
대웅전을 지키는 온갖 호법신의 무리가
그려진 것으로 석가후불탱과 비슷한
스타일로 조성되었다.

▲  산신각(山神閣)
2단으로 다져진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  반야사3층석탑 - 보물 1371호

극락전 앞에는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지금이야 반야사의 일원
으로 완전히 묻혀있어 이곳의 오랜 유물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는 원래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석천계곡 탑벌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50년에 주지 성학(性學)이 수습
하여 일으킨 것이다. 그 덕분에 반야사에 오래된 존재가 하나 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다음 머리장식
으로 마무리를 한 형태로 밑에서 머리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높이는 335cm이다. 바
닥돌은 모두 6매의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바닥돌 윗면 네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돌출
되어 있고, 중심부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 기단면석이 꼽히도록 하였다.
기단부는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가 모각되었다. 갑석 윗
면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했으며, 중앙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서 1층 탑신을 꼽도록 조
성했다. 그리고 갑석의 네 모퉁이에도 합각선이 돌출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를 새겼으며, 남/북쪽 면석은 새
로 끼워 넣었다. 2,3층 탑신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2층 탑신에 모각된 우주에서는 엔
타시스 수법을 볼 수 있다. 3층 탑신은 현상으로 보아 새로 끼운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屋蓋石)은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층 옥개석의 낙수면은 길이
가 짧고 경사가 급해 보이며, 옥개석 받침은 1층 5단, 2/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추녀는 비
교적 두껍게 조성되었는데, 직선화되는 보편적인 수법과는 달리 둥글게 표현되어 전각의 반전
은 예리한 편이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찰주(刹柱)가 관통된 노반(露盤)과 복발 등의 머리장식
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보기도 함) 1층 탑신의 결구 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 면석과
1층 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백제계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제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탑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건강 상태도 좋으며, 반야사의 보물로 묵묵히 살
아가고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배롱나무
, 극락전

▲  범종을 비롯한 4물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배롱나무 - 영동군 보호수 13호

극락전과 3층석탑 사이에는 오래된 배롱나무 형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들은 추정 나이가 약
530년(1994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년) 정도로 높이는 각각 8m, 7m, 나무 둘
레는 각각 0.8m, 0.6m이다.
경내에서 대웅전 불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3층석탑은 제외)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자신이
가지고 댕기던 주장자(柱杖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갈라져 쌍배롱나무로 자랐다는 믿거나 말
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한여름(7~8월)에 왔더라면 배롱나무(백일홍)의 아름다운 붉은 향연을 제대로 누릴수 있을텐데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에 오다 보니 그 아름답다는 나무도 다른 나무와 비슷하게 그저 알
몸만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걸치는 옷을 빼버리면 다 똑같거늘 왜 그리도 욕심을 부리고 계
급을 나누는지 모르겠다.


▲  배롱나무의 여름 모습 (반야사 홈페이지 참조)
배롱이의 향연은 기껏해야 2달 정도이다. 6~7개월 정도는 푸른 옷을 걸치고 있으나
나머지 5~6개월은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한 채, 알몸으로 살아간다.


▲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 반야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이곳의 대웅전이었으나 1993년 바로 옆에 새 대웅전이 지어지면서 법당에서
물러나 아미타불의 거처인 극락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석천계곡(반야사계곡)과 반야사의 상징, 문수전

▲  석천계곡 (반야사계곡)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이제 다봤구나~!' 싶어서 발길을 돌리려고 하니 문수전을 알리는 이
정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발길을 붙잡는다. 문수전이라?? 반야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나
싶어서 살펴보니 그곳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경내 뒷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왕 온 것이니 다
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말끔히 둘러봐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산길은 석천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계곡 풍경이 반야사 이전보다 더욱
장관이었다. 물은 깊고 청명하며, 바위와 벼랑이 적당히 나타나 여흥거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누런 갈대가 바람에 펄럭이며 나그네의 마음을 간지럽히고, 소나무 등 나무도 삼삼해 이런 곳
이야말도 진정한 신선(神仙)의 세계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신선의 세계는 인간계보다 시간이 빛의 속도만큼 빠르다고 한다. 신선의 장기를 구경하는 동
안 몇 대(代)가 흘러갔다는 난가(爛柯)의 전설도 있을 정도이니 괜히 이 계곡에 발을 들였다
가 기백 년 뒤에나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돌너덜 (반야사 호랑이)

반야사의 명물 중에는 '반야사 호랑이'라 불리는 돌너덜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꼬
랑지를 치켜든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들은 순 자연산으로 수 만년
동안 흘러내린 파쇄석이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쌓이고 쌓여 높이 80여m, 길이 300여m에 이르는
돌너덜을 이루게 되었다. 근데 하필이면 호랑이 모습을 이루고 있어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
솜씨에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반야사는 그를 산신의 화현으로 삼고 있으며, 산신각 산신탱에
그려진 호랑이 모습과도 비슷하다.


▲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

▲  망경대(문수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튼 문수전(文殊殿)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은 아주 느긋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착했던 길은 영천을 앞
에 두고 갑자기 180도 흥분하여 아주 각박한 오르막길로 돌변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맞배지붕 건물 하나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들어앉은 건물처럼 장엄하게 보이는데, 그것이
반야사의 상징인 문수전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벼랑 옆에 닦여진 가파른 길을 올라가
야 되는데, 경내에서도 다소 떨어져 있고, 길도 각박하여 문수전을 건너뛰는 사람도 있다.
허나 이는 갈비탕에서 고기를 빼먹는 거와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문수보살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주변 풍경이 가히 일품이니 조금은 힘들더라도 발품을 팔만하다.


▲  망경대 밑에 자리한 석천계곡 영천(靈川)

문수전을 강제로 머리에 이고 있는 망경대(문수바위) 밑 계곡을 영천이라 부른다. 이곳은 세
조와 문수보살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세조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를 방문하니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 세조
가 예를 차리자 그는 왕을 영천으로 인도하여 몸을 씻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는
'왕이 불심(佛心)이 갸륵하니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오'

한 마디 남기고는 사자를 타고 망경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사라졌다.

왕이 목욕을 마치고 계곡 밖으로 나오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며, 병을 낫게 해준 문수
보살을 기리고자 절 이름을 반야사로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화는 가만보면 오대산 상원
사(上院寺)에 서린 세조와 문수동자 전설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아무래도 거기 설화를 가져와
서 반야사 스타일로 다듬은 듯 싶다.
세조가 과연 여기서 목욕을 했는지는 의문이나 그만큼 왕실의 인연과 지원이 각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절 부근 경치 좋은 곳에 이런 전설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그 전설로 인해 영천
옆 벼랑을 문수바위 또는 망경대(望京臺)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망경대는 서울을 바라본다
는 뜻이니 절을 중창시켜준 세조와 왕실의 은혜를 두고두고 기리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  망경대 꼭대기에 자리한 문수전의 위엄

문수전은 세조와 문수보살의 설화가 깃든 망경대 벼랑 위 250m 고지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
해 있다. 건물을 짓기에는 다소 척박한 곳이지만 그 현장에 문수보살을 위한 건물을 지어야
문수도량의 뽀대가 나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건물을 지어올렸다.
문수전에 오르면 백화산 남쪽 자락과 석천계곡, 호랑이 돌너덜 등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오
나 주변이 칼처럼 솟은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어 보이는 범위는 그것이 전부이다.


▲  문수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상과 문수동자상

문수전은 북쪽을 향해 문이 나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늠름한 모습의 문수보살상이 파란 피
부의 목각사자상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푸근한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는다. 그 좌우에
는 붉은 옷을 걸친 문수동자와 녹색 옷을 입은 문수동자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문수'의 세상이다.
문수보살과 동자상은 근래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여물지도 못했지만 목각사자상은 조
선 후기 것이라고 하며. 그 좌우에 중생들의 시주를 받아 봉안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어두운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  문수전에서 바라본 반야사 호랑이(돌너덜)

▲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북쪽과 백화산 산줄기
다음에 오면 저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나의 존재를 잠시 지우고 싶다.

▲  백화산의 첩첩한 산줄기 (백화산 정상 방면)

▲  망경대 바로 밑에 펼쳐진 영천
영천 주변에 흙과 자갈이 넓게 깔려 있어 여름 피서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혹시 아는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면 세조 임금처럼 병이 싹 나을지도~~?

▲  문수전에서 경내로 내려가는 산길

반야사 경내에서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길은 2개가 있다. 우리가 이용한 계곡 길을 거쳐서 가
는 것과 경내 동쪽 산길로 오르는 길이 그것인데, 보통 계곡 길로 올라가서 문수전을 찍고 경
내 동쪽 산길로 내려오며 절에서도 그렇게 가기를 적극 권하고 있다. 이유는 계곡 길에서 망
경대 벼랑으로 오르는 길이 좁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도 상관은 없음)
계곡 길은 완만하게 가다가 망경대에서 아주 화끈하게 흥분을 하지만, 동쪽 산길은 서서히 오
르는 형태로 덜 가파르다. 그 길을 내려오면 잠시 떨어졌던 경내가 이내 모습을 드러내며, 주
차장 쪽으로 떨어진다.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  반야사 부도(浮屠) - 영동군 향토유적 10호, 11호

주차장 남쪽 산자락에 고색이 짙은 부도 2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은 주차장 부근에 있
어 찾기는 쉽지만 구석진 곳에 있어 자칫 놓치기가 쉬우니 꼭 등잔 밑을 살펴보기 바란다.

반야사 부도는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 1호 부도(향토유적 10호)는 검은 주
근깨(이끼)가 가득 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대추알처럼 생긴 탑신을 얹히고 네모난 지붕돌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오른쪽 2호 부도(향토유적 11호)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8각의 대석(臺
石)과 석종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지붕돌과 정체가 아리송한 기둥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누구의 승탑(僧塔)인지는 귀신
도 모른다.

▲  왼쪽 1호 부도

▲  머리장식이 특이한 오른쪽 2호 부도

▲  주차장에서 부도로 인도하는 돌계단

▲  주차장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  봄을 기다리는 석천계곡
백화산 등산을 하려면 저 다리를 건너면 된다. (관세음보살상도 저 다리를 건너면 됨)


부도를 끝으로 그림 같은 절, 반야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기분 같아서는 계곡 다
리를 건너서 관세음보살상까지도 가보고 싶고, 계곡길을 따라 일주문(주차장에서 우매리로 나
가면 중간에 있음)까지 걸어가며 계곡을 느끼고 싶지만 다음 답사지(경북 어느 지역)로 빨리
넘어가자는 일행의 독촉에 그 좋은 후식거리를 모두 포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쉽긴 했지
만 반야사에 깃든 보물과 문수전, 영천과 망경대 등 볼만한 것은 거의 다 보았으니 별로 후회
는 없다.

시간은 어느덧 16시. 해가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조금씩 어둠의 기운이 피어나 세상을 훔치려
들고 우리는 고적한 산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우리는 반야사란 절을 기억하겠지만 반야사는 잠깐 스치고 지나간 나를 기억이나 할련지 모르
겠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여름에 인연을 잡고 싶음) 계곡도 말끔히 둘러보고 세조가
몸을 씻었다는 영천에도 풍덩해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반야사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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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땅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선병우고가, 선병묵고가 한옥 나들이

 


' 새해맞이 충북 보은 나들이 '

▲  보은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사랑채


 

온갖 아쉬움 속에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밝았다. 올해는 제발 좋은 일이 많기를
애타게 소망하며 날씨가 최적화된 날을 택해 서울에서 고속/시외버스나 철도로 2시간 내
외 범위에서 새해 첫 답사지를 물색. 고르고 고른 끝에 보은(報恩)의 우당고택이 선정되
었다. 그곳이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명당(明堂)이라 하여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
문이다.

차디찬 기운이 가득한 이른 아침,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하여 청주시내와 미원을 거쳐
보은읍에 이르렀다. 보은 읍내는 마침 5일장이라 장을 보러온 노인들로 활기를 띠었는데
읍내 한복판 중앙4거리에서 관기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15분을 달려 장안3거리
에 두 발을 내린다.

장안3거리<개안리(開安里)>에서 북쪽으로 가면 장안면행정복지센터가 나오는데, 그 맞은
편에 우당고택으로 인도하는 하개교가 있다. 삼가천 위에 걸린 그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선병우고가와 선병묵고가가 있는 개안리 마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우당고택
이다.


▲  겨울에 잠긴 삼가천 (하개교 주변)
누렇게 뜬 갈대가 겨울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며 소쩍새가 울 그날을 기다린다.
(왼쪽이 우당고택이 있는 섬, 오른쪽이 장안로와 장안면행정복지센터)


 

♠  20세기 초에 지어진 고래등 기와집, 우당고택<愚堂古宅,
선병국가옥(宣炳國家屋)> - 국가민속문화재 134호

▲  우당고택 사주문(四柱門, 정문)과 돌담길

화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우당고택 주차장이다. 주차장 한쪽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
무는 조그만 집이 있는데, 거기서 안내 자료를 쥐어들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우당고택으로 이
동했다.

고택에 이르니 제일 먼저 북쪽 대문인 사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에는 대문이 남북으로 2개
가 있는데, 바깥에서 들어올 때는 무조건 사주문을 거쳐야 된다. 명문 부잣집의 대문답게 문
의 덩치도 크고 품격도 제법 깃들여져 있으며, 이미 세상에 공개된 집이라 낮에는 대문이 늘
열려있어 나들이객과 답사객, 사진꾼, 이곳에서 공부하는 고시생과 그들을 보러온 가족 등등
사람들이 마를 날이 거의 없다.

대문 옆에는 황토와 돌, 기와로 지어진 돌담이 고색의 내음을 물씬 풍기며, 조촐하게 돌담길
을 이룬다. 서쪽 돌담길로 가면 효열각과 고택의 남문인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며, 대문을 들어
서면 고래등 기와집으로 유명한 우당고택 내부가 장대하게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우당고택의 역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

▲  정면에서 바라본 북쪽 대문(사주문)

속리산(俗離山)에서 발원한 삼가천(三街川)이 금강으로 흘러가면서 개안리에 조그만 삼각주(
三角洲) 섬을 빚어놓았는데, 바로 그 섬에 20세기 초기 대표적인 근대 한옥으로 손꼽히는 우
당고택(선병국가옥)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보은 땅의 거의 유일한 자연산 섬으로 이 부근은 조선 때 나라에서 운영하던 마장(馬
場)이 있었다. 그래서 마장 안쪽 동네라 하여 '장안','장내'라 불렸으며, 지금도 그 지명은
유효하다.

우당고택을 지은 이는 보성선씨 집안인 우당 선영홍(愚堂 宣永鴻, 1861~1924)과 그의 큰아들
인 남헌 선정훈(南軒 宣政薰)이다. 이들은 원래 전남 고흥(高興) 출신으로 고흥 지역의 제일
가는 부자였다. 풍요로운 재산만큼이나 인심도 후하여 소작농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눠주고 적
은 소작료를 받았으며, 어려운 사람들의 세금을 대신 처리해주는 등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인
심을 베풀었다.

선영홍은 아들이 4명 있었는데, 모두 끝이 훈(薰)자 돌림이다. (정훈, 남훈, 준훈, 동훈) 그
는 아들과 손자, 자손의 번창을 위해 천하에 제일가는 명당으로 터전을 옮기고자 이름난 지관
을 섭외하여 명당 자리를 물색했다. 그는 섬에 집을 지어야만 집안이 흥한다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에 걸맞는 자리를 찾은 끝에 서울 여의도와 충남 천안, 보은 개안리가 후보 장소로
꼽혔고, 지관인 심씨의 추천과 속리산과 가까운 개안리의 지형에 단단히 반해 1903년 이곳에
터를 닦았다.
이곳 지형은 삼가천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육지 속의 섬으로 그 모습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이라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불린다. 이런 자리는 꽤 좋은 명
당으로 꼽힌다.

1919년 아들 선정훈과 함께 그 섬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자신과 후손들이 길이길이 살 명당
자리라 천하에서 제일 이상적인 집을 짓기로 했는데, 선정훈이 공사를 주도했으며, 그 시절
잘나가던 목공과 기술자를 비롯해 일꾼들까지 후하게 대접했다. 공사 자재에도 돈을 아끼지
않아 질이 좋은 목재와 재료를 사용했으며, 이때 도편수로 참여한 사람이 궁궐 목수로 이름난
'방대문'이었다.
섬의 지형이 모래로 되어있어 따로 배수시설은 닦지 않았으며, 왜식과 서양식이 섞인 개량형
한옥이 한참 주류를 이루던 때라 너무 전통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시류에 흔쾌히 동참했다.
이렇게 큰 정성을 들여 5년 만인 1924년 집이 완성되니 집의 전체 면적은 3,900평. 집 크기는
99칸을 자랑했으며, 사랑채와 안채, 사당 3구역으로 구성되어 각각 담장을 둘렀다. 특이한 것
은 사랑채와 안채가 '工'구조로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옛날 집에서는 극히 꺼리던 형태
였다. (부수는 것을 뜻한다고 함)
그럼에도 집의 중요한 공간을 '工' 구조로 한 것은 집터가 길하지 않아서 흉택의 평면인 '工'
구조를 택하면 70~80년 이후부터 길하게 된다는 지관의 해석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즉 후손
대에 반전을 노린 것이다.

선정훈은 아버지와 별도로 대동상사(大東商社)를 운영했는데, 고흥의 토산물인 우뭇가사리를
왜열도와 중원대륙에 수출해 큰 돈을 벌었다. 그의 곳간만해도 무려 33칸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재산의 정도를 알만하다.
그들은 오늘날 이 땅에 썩어빠진 위정자와 상류층과 달리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
던 인물이다. 선영홍은 고흥에 대흥사(大興司)란 서숙(書塾)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으며, 보은
에도 집 남쪽에 관선정이란 33칸짜리 서당을 세워 한학(漢學)을 교육시키고 우수한 학자를 초
빙해 수백 명의 후학을 길렀다. 또한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 서숙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지역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덕행을 베풀었다.

6.25시절 폭격으로 대문 좌우 바깥행랑채와 주변 부속 건물이 파괴되어 사라졌다. 허나 그 외
에 건물은 별탈 없이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덕에 20세기 초에 지어진 전통 개량한옥
으로 학술 가치가 대단히 높다. 또한 6.25 때 군부대가 집 동쪽에 주둔을 했는데, 시간이 지
나면서 아예 그곳에 눌러앉았고, 동쪽 토지 2만 평은 그렇게 군부대 땅이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집을 끼고 흐르는 하천 동쪽 물길을 막아 농토를 개간했으나 1980년
과 1998년 집중호우로 집이 물에 잠겨 돌각담들이 여럿 무너졌고, 집을 지키고자 안산(安山)
의 역할로 심은 소나무 숲까지 쑥대밭이 되는 피해를 입었다. 하여 현재 집 주인인 선민혁이
지역 사람들의 동의를 구해 하천을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수해를 입지
않았으며, 소나무 숲도 다시 복원해 옛날의 운치를 되찾았다.

선정훈은 집만 물려주면 된다면서 많은 돈을 썼으나 워낙 돈이 많아 결국 아들에게 많이 상속
되었다. (아 부러워라ㅠㅠ) 현재는 선병국의 아들인 선민혁이 집을 지키고 있으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선병국가옥'이었으나 근래에 선정훈의 호를 따서 우당고택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0년대에 안채에 있는 곳간채를 손질하여 고시원을 열었는데, 최소의 비용만 받고 고시생들
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교육에 아낌없이 돈을 던진 할아버지(선정훈)와 증조부(선
영홍)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다. 또한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문의 별미인 씨간장이 있
는데, 무려 350년 이상 되었다고 전하며, 간장 보존을 위해 특별히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구는 햇간장을 부어 보존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
전'에 출품, 1리터가 500만 원에 팔리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래서 우당고택(선병국가옥)이 천
하에 크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김정옥 종부(宗婦)가 '선씨 종가 아당골'이란 이름으
로 간장을 판매하고 있으며, 집 안팎에 700여 개의 장독을 두어 씨간장을 숙성/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전통 한옥과 간장으로 이곳이 크게 떠오르자 보은군에게 2007년에 고택 북쪽에 주차장
을 닦고 대문 앞 소나무숲 주변에 잔디를 입히며 의자와 이정표를 지어주었다. 이곳이 보은의
새로운 꿀로 부상하자 그 꿀에 서둘러 그럴싸하게 단지를 입힌 것이다.

현재 고택 내부는 사랑채와 사주문에서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는 통로만 개방되고 있으며, 안채
와 사당, 그밖에 건물은 개방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개방 공간은 변경될 수 있음~~) 고택
바깥에 있는 효열각과 비석, 복원된 관선정은 관람이 가능하며, 안채 곳간채에는 고시생들이
머물고 있는데, 이곳을 거쳐간 고시생이 1,000여명, 사법고시 합격자만 50명을 넘는다고 한다.
시내와 멀리 떨어진 외지이고 적막한 곳이라 고시생의 인기가 대단했으나 최근 관광객의 발길
이 증가하면서 고시생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  행랑채 북쪽에 자리한 장독대의 물결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사당을 품은 담장이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고택 내부로 인
도하는 너른 길이 나오는데, 그 왼쪽에 낮게 돌담을 두르고 키 작은 나무와 조촐한 텃밭, 씨
간장을 품은 장독대들의 공간이 있어 정겨운 분위기를 우려낸다. 그 장독대 너머로 행랑채와
안채가 있다.


▲  사주문에서 안채, 사랑채로 인도하는 너른 길
집 내부에 이렇게 넓은 길이 있다니? 집이 정말 넓기는 넓다. 조선과 왜정 때
지어진 어지간한 큰 기와집을 능가하는 규모로 완전 조그만 궁궐 같다.


▲  사당(祠堂)

양반가는 보통 집 내부에 가묘(家廟)라 불리는 사당을 갖추고 있는데,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
다.
이곳 사당은 3칸 규모의 사당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재실<齋室, 제수(祭需)채라고도 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당과 재실이 복도채로 연결되어 완전 한 몸처럼 되어 있어 자연히 'ㄱ'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제수채와 복도채를 둔 사당은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복도 폭은 1.1m이며, 사당 각
칸 앞에는 시멘트몰탈로 이루어진 디딤돌이 있는데, 이는 건립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사당을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그 시절 새로운 건축 재료가 시도되었다.
 
사당 주위는 돌담으로 꽁꽁 둘렀으며, 사당으로 인도하는 솟을삼문은 굳게 잠겨져 있는데, 선
씨 집안의 선조를 봉안한 공간이라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는다.

▲  사당의 솟을삼문(三門)

▲  'ㄷ'자로 이루어진 행랑채


▲  안채 북쪽

사당 남쪽에는 안채와 행랑채가 있다. 돌담으로 주변을 빙 둘러 눈으로 하얗게 바래진 지붕과
집 윗도리만 보일 따름인데, 이곳은 선씨 일가의 생활 공간으로 내부 관람은 통제되어 있다.
그러니 그들의 사생활과 재산 보호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안채는 사랑채 동쪽에 자리하여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랑채와 모습과 구조, 규모가 똑같
다. 그러니 괜히 안채를 기웃거려 안좋은 소리 듣지 말고 그냥 사랑채를 보면 된다. 집 모습
은 '工' 구조로 이 땅의 한옥 안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안채를 받치고 있는 기
단(基壇)은 사랑채보다 1단 낮은 2단짜리 석축으로 가운데 4칸짜리 대청을 끼고 왼쪽이 안방,
오른쪽이 건너방이다. 건물 중앙에 마루가 있고, 무려 9개의 온돌방을 갖추고 있으며, 부엌은
큰살림에 걸맞게 상당히 크고 위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앞뒤에 달린 툇마루가 복도
역할을 하여 모든 방과 부엌으로 이동할 수 있다.
안채 옆에는 'ㄷ'모양의 중행랑채를 두어 안채를 가리고 있는데, 그 사이로 조그만 안마당을
만들었고, 행랑채 남쪽 끝에 안대문을 두었다. 안대문 밖에는 담이 가로질러 있어서 바깥 대
문에서 안채로 가려면 'ㄹ'자로 꺾어 들어가야 했다.
행랑채 옆에는 쌀과 재물을 보관하던 곳간채가 있는데, 1칸 또는 1칸 반, 2칸 간격으로 있었
다.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더 이상 쌀과 재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게 되자 이들을 손질하여 고
시생들의 숙식 공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곳이 세상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관광/답사 수요가
늘면서 고시생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도 속세의 때를 크게 탄 모양이다.


▲  반쯤 열린 사랑채 중문

▲  우당고택의 백미, 사랑채

안채 서쪽에는 고택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사랑채가 있다. 안채와 같은 '工' 구조로 주위를
돌담으로 둘렀는데, 동쪽과 남쪽, 북쪽에 바깥과 사랑채를 이어주는 문을 냈으며, 남쪽에는
넓게 뜨락을 닦았다. 그리고 서쪽과 서남쪽, 동쪽, 북쪽 공터에는 소나무와 갖은 화초를 심어
사랑채 주변을 아름답게 꾸몄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2고주 5량가로 3단으로 싹둑 다듬
어진 석축 위에 큼직한 집을 세우고 8각으로 다듬은 화강암 주춧돌로 둥근 바깥 기둥을 받쳐
들고 있다. 집 구조는 안채와 같으며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그 좌우로 온돌방 8개, 창고,
부엌을 두었는데, 앞뒤로 툇마루(퇴칸마루)를 두어 일종의 통로를 두었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는데, 난간의 모양이 섬세하며, 대청에는 사분합문(四分閤門)을 설치했다.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서까래가 길다. 그리고 합작지붕의 박공면과 마루 밑은 붉은 벽돌로 쌓았는데,
이들은 나중에 손을 댄 것이다.

이곳은 일반에 공개된 공간으로 찻집과 전통체험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평일이라 사람이 없
다보니 거의 닫혀있다. (주말에는 북적댄다고 함) 그래서 굳이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고 소심
하게 바깥만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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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치 있게 자라난 사랑채 소나무

▲  이제 무늬만 남은 사랑채 서쪽 우물

▲  사랑채 동쪽 부분

▲  사랑채 뒷쪽(북쪽)


▲  사랑채 정면에 걸린 '위선최락(僞善最樂)' 현판의 위엄

사랑채 정면에는 파란 글씨로 쓰여진 '위선최락'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
을 부리듯 필체의 힘이 대단한데 '위선최락'이란 '선을 베푸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란 뜻
으로 선영홍/선정훈 부자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 좌우명을 말로만 끝내지 않고 평생 실천하고 살았다. 지역 사람들과 전통 유학을
배우고 지키려는 인재들을 위해 많은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송덕비와 시
혜비(施惠碑)까지 세워 그들을 기리겠는가?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위인이자 성인군자라 할만
하다.
이런 상류층이 많아야 이 땅도 정말 희망이 있을 것인데 이 땅의 상류층과 권력층들은 어찌된
것이 하나같이 치졸하고 욕심들이 과한지 모르겠다. (특히 친일매국노의 후손들과 친일 패거
리들, 20세기 중/후반 독재정권 패거리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등쳐먹고, 백성
들 등골 빼먹고, 공기업과 도시, 나라까지 말아먹는 걸 예사로 여기니 말이다.
허나 그 치졸한 작자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선정훈 부자가 '위선최락'을 실천하고자 많
은 돈을 썼다. 그렇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했을까? 전혀 그
렇지가 않다. 소작농은 소작농대로, 선정훈이 세운 대동상사 사람들은 역시 그들대로 열심히
살며 그를 도왔고, 지역 사람들도 그들 일가에게 호의적이었다. 또한 그들의 지원을 받아 공
부한 인재들은 사회 곳곳에 진출했으니 그들로 인해 선정훈 일가의 이름은 더욱 크게 빛을 발
하는 것이다. 그러니 크게 보면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간 것이다. 선정훈 부자도 그들의 도
움을 크게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계속 집안이 번영을 하고 있고, 그들의 덕을 받은 사람들도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반면 이 땅 대부분의 상류/권력층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뜯어먹기만 하
지 상부상조할 줄을 모른다. 그러니 대다수의 백성들은 빈곤해지고, 상류/권력층의 배때기는
더욱 짙어만 간다. 그들에게 있어 '위선최락'은 '그게 뭐임? 먹는 거임? 그런 건 빨갱이들이
나 하는 거야!!' 하며 현판을 깨부실 것이다.

사랑채에는 '위선최락' 현판 외에도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도 있었다. 이것은 해남 대흥
사(大興寺)에 있던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 현판을 6.25 이후에 모각한 것으로 사랑채에 당당
히 걸려있었다. 허나 우당고택이 천하에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 찾는 이가 부쩍 늘었고
그 속에 불온한 무리까지 섞여서 들어오면서 2008년 2월 13일과 14일 사이 도난을 당하고 말
았다. 아직까지 현판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그의 빈자리는 여전하다.


▲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사랑채 외곽 (담장과 중문, 사랑채)
사랑채 너머로 이곳의 든든한 후광이자 주산(主山)인 옥녀봉(玉女峯)이 바라보인다.

▲  가옥의 남쪽 대문인 솟을대문
사대부 기와집 대문의 품격이 느껴진다. 대문 바깥에는 너른 공터와 텃밭이
있으며, 서남쪽 소나무 숲에는 효열각과 3기의 비석이 서 있다. 대문
주변에는 바깥행랑채와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6.25 전쟁 때
파괴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대문과 돌담만 남아있다.


 

♠  우당고택 바깥쪽

▲  솟을대문 남쪽에 자리한 3기의 비석들

솟을대문 서남쪽에는 시대를 달리한 비석 3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가장 왼쪽에 있는 비석
은 '전승지성공 정훈공덕비(前承旨惺公 政薰功德碑)'로 20세기 중반에 선정훈을 기리고자 세
워진 것이며, 그 비석을 크게 업데이트한 것이 오른쪽 끝에 자리한 큰 비석 '남헌 선정훈 선
생 송덕비(頌德碑)'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까지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선정훈은 매년 보릿고개가 되면 우리의 북방 영토인 만주에서 좁쌀을 수입해 보은 지역 빈민
들에게 나눠주었고, 지역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생활고로 고생하면 직접 해결해주곤
했다. 광복 이후, 공산당 세력인 남로당에 가입한 주민들이 많았는데, 국군이 그들을 잡아들
여 이유불문 모두 총살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선정훈이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고, 돈이 필요해 명의를 빌려주고 서명을 한 것 뿐이다!'
라며 주
민 구제에 나섰고 보은군수와 지역 유지, 국군을 설득하여 주민들을 모두 구제했다.
그렇게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공덕을 베푸니 그 은혜에 감동한 지역민들이 송덕비를 세운 것
이다. 처음에는 보은읍내에 있는 동헌(東軒)에 있었으나 근래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비문에
는 그의 덕행을 한자 16자로 표현했는데,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학군을 일으키고 가난을 구제하니, 대대로 내려온 덕행이다. 각박한 인심을 순화시키고 경각
심을 일으키니 길이길이 감명되어 마멸되지 않으리라'


▲  관선정 기적비(觀善亭 記蹟碑)

비석 3형제 가운데에 있는 지붕돌 비석은 '관선정 기적비'이다. 남헌 선정훈은 1926년 집 동
쪽에 '착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복을 받는다'는 뜻에 관선정을 지었다. 규모는 33칸으로 이곳
을 서당으로 삼아 왜정에 의해 시들해진 이 땅의 한문학과 유학을 배우고 닦는 공간으로 삼았
는데, 그는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도 서숙을 설치해주어 당시 유명한 유학자인 홍치유(洪
致裕)를 초빙해 관선정과 보은향교에서 젊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가르치는 선생과 후학들의 숙식은 물론 생활비까지 두둑히 지원해주니 배우고는 싶으나 가난
앞에서 붓을 꺾어야 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와 시험으로 그들을 가려뽑았다. 무작정 다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곳을 거쳐간 학생 수는 무려 수백 명이 넘었으며, 그 많은 이들
을 선정훈이 다 책임졌다.
이렇게 관선정은 왜정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이 땅의 전통유학을 교육시켜 민족정신 함양
은 물론 한문학과 전통문화계승 발전에 크게 공헌했는데, 이에 속이 뒤틀린 왜정이 1944년 강
제로 폐쇄시키고 건물까지 부셔버렸다.

관선정에서 수학한 사람들은 1960~70년대 우리나라 한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청명 임창순
(靑溟 任昌淳, 1914~1999)이 그 대표적이다. 그는 14살에 이곳에 들어와 6년 동안 한문학을
배웠다.
이들 관선정 학생들은 1951년 '관선정학우회'를 세워 매년마다 선정훈을 기리는 행사를 가지
고 있으며, 1973년 뜻을 모아 관선정기적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왕희지(王羲之)의 필체를
집자(集字)했다.

왜정에 의해 철거된 관선정은 1945년 경북 상주에 다시 지어졌으며, 상주 화북면으로 옮겨져
계속 후학을 기르다가 1951년에 철거되었다.


▲  옛 관선정의 모습과 평면도
관선정은 2개의 공부방, 선생방, 2개의 대청, 부엌, 고지기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선영홍 시혜비)

비석 3형제 부근에는 철로 이루어진 철비(鐵碑)가 있다. 철비는 이 땅에서 그리 흔치 않은 비
석 스타일로 우당고택에서 전혀 생각치도 못한 그를 만나니 생소하면서도 무척 반가웠다.

이 철비는 선영홍을 기리는 시혜비로 시혜비란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세운
비석을 뜻한다. 선영홍이 전남 고흥에 살던 시절 자신의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골고루 나눠주
고 소작료도 깎아주었다. 또한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이 굶지 않도록 도왔고, 세금을 대신 내
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하여 그의 덕을 입은 고흥 두원, 점암, 남양, 남면 지역 소작
농은 그의 은덕에 감사를 표하고자 십시일반 돈을 모아 1922년 시혜비를 세웠다. 그러니 거의
100년 정도 묵은 소중한 은혜의 증표인 것이다.
왜정 말기에 고약한 왜정이 전쟁 물자로 쓰고자 몰래 빼돌렸으나 다행히도 여수에서 선영홍의
종손인 선민혁이 주민들의 도움으로 발견해 원래 자리로 옮겼다. 허나 도로 확장 사업으로 제
자리를 떠나야될 상황에 이르자 철비를 만든 사람들의 후손들과 협의해 2004년 이곳으로 옮겼
다.

부자가 많은 선행을 베풀어 그 선행에 감동한 지역 사람들이 손수 지은 비석으로 의미가 정말
남다르다. 정말 인간적인 미와 정이 넘치는 비석인 것이다.


▲  비석의 모습을 취한 선공영홍시혜비

▲  돌담에 둘러싸인 선처흠 효열각(宣處欽 孝烈閣)

시혜비 옆에는 돌담을 두룬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선처흠 효열각이 담겨져 있다. 이 효열각
은 선영홍의 부모인 선처흠과 경주김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1892년에 명정(命旌)하여 지어진
것으로 편액 우측에는 '효자증조 산대부동몽교관 선처흠지문(孝子贈朝 散大夫童蒙敎官 宣處欽
之門)', 좌측에는 '열녀 선처흠 처금인 경주김씨지문(烈女 宣處欽悽今人 慶州金氏之門)'이라
쓰여 있다.

선처흠(?~1921)은 그의 아버지가 심한 안질로 고생하자 의원을 찾아가 침과 약으로 계속 안질
을 다스렸다. 허나 딱히 차도가 없자 의원이 매고기가 명약이라고 귀뜀을 해주었다. 하여 매
를 잡고자 영마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니 마침 1쌍의 매가 날아와 알아서 잡혀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 부친에게 먹이니 차도가 있었고, 추운 겨울 눈보라를 무릅쓰고 산에 올라
단을 쌓고 7일 동안 기도를 하니 또 다시 매가 알아서 잡혀주어 끝내 안질이 완쾌되었다고 한
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픽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건으로 선처흠의 효행은 서울까지 알려
졌다.
선처흠의 부인인 경주김씨도 효성이 지극하고 남편을 잘 따랐는데, 남편이 위독하자 넙적다리
를 베어 먹이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였다고 한다. 이후 남편의 병이 낫자 열녀(烈女)로 명
성이 높아졌다.

그들 부부의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들을 효자와 열녀로 명정하여 효열각을 지어주었으며, 원
래 선처흠이 살던 전남 보성에 있었으나 자손들이 모두 보은으로 들어오면서 192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효열각 역시 전혀 생각치도 못한 존재라 앞서 시혜비와 함께 우당고택이 나에게 덤
으로 얹혀준 선물이다.

▲  키가 작은 효열각 정문

▲  1칸 크기로 단촐한 효열각


▲  효열각 내부에 걸린 현판
오른쪽은 효자 선처흠, 왼쪽은 열녀 경주김씨의 정려문(旌閭文)이다.

▲  관선정과 간장의 숙성 공간, 장독대

효열각은 우당고택에서 가장 남쪽이다. 여기서 서쪽과 남쪽은 삼가천으로 막혀있으며, 동쪽은
고택의 텃밭이 있어 다시 고택으로 들어오던가 아니면 고택 서쪽 돌담길로 나와야 된다.
돌담길로 들어서면 근래 복원된 관선정과 기와 돌담에 둘러싸인 거대한 장독대의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관선정은 앞서 관선정기적비에서 소상히 다루었는데, 옛날과 달리 새로 지어진
지금은 강당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복원된 의미 정도로 머물러 있다.

관선정 앞에는 장독대들이 넓게 포진해 있는데, 이들은 이곳의 오랜 자랑인 씨간장과 그 간장
을 혼합한 햇간장을 보관하고 있다. 즉 우당고택의 듬직한 꿀단지들인 것이다. 350년째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근 햇간장을 부어 간장을 생산하고 있는데, 콩 80kg
가마로 만든 메주에 간장이 10L밖에 나오지 않는다. 2009년부터는 문화재청이 밀어주는 '전통
한옥 관광자원 활성화사업'에 일환으로 '전통 장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내놓아 호응을 얻
고 있는데, 바로 전통 간장 덕분에 이곳이 크게 뜬 것이다.

장독대는 각 지역 스타일로 조성하여 지역 별로 모아 두었는데,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 경
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장독대를 재현했으며, 그들은 모두 간장을 품
으며 숙성시키고 있다.

▲  황해도 장독대

▲  평안도 장독대

▲  제주도 장독대

▲  충청도 장독대

▲  관선정 옆 돌담길

▲  관선정 옆 송림에 묻힌 1칸짜리 정자


▲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과 돌담에 그려진 자연의 벽화
대자연이 그린 멋드러진 벽화가 황토 돌담의 품격을 드높인다. 그려진 폼을 보니
아마도 그만의 추상화 듯 싶은데, 아무리 천재화가가 모방해본들 자연이
그린 벽화만은 못하다.


서쪽 돌담길을 타고 고택의 시작인 사주문으로 나왔다. 고래등 기와집을 그런데로 1바퀴 둘러
본 셈이다. (통제 구역은 제외)
주차장에 있는 문화유산해설사 사무실을 바라보니 그 안에서 쉬고 있던 해설사 아저씨가 구경
잘 했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답을 하고 몇 가지를 물어보니 날도 추운데, 안으로 들어와 커
피 1잔 하라고 그런다. 내가 그런걸 마다할 이유가 없어 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한 커피 1잔을
제공해준다.
해설사 아저씨는 정년퇴직을 하고 해설사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주말에는 관람객이 많
지만 평일은 썰렁하고 해설 요청 수요도 주말 평일 가리지 않고 거의 없다며 거의 대충 보고
간다고 그런다. 그렇게 그와 오랜 시간 세상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 어느덧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해 왔다.
날이 겨울인지라 햇님도 동절기 근무로 일찍 퇴근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갈 곳이 몇 곳 남았
는데, 더 이상 꾸물거려서는 안될 듯 싶어 그에게 선병우/선병묵고가, 상현서원에 대해 물어
보고 작별을 고했다.

* 우당고택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 (개안길 10-2, ☎ 043-543-7177)


 

♠  개안리에 있는 선씨 일가의 다른 한옥 둘러보기

▲  보은 선병우 고가(宣炳禹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5호

개안리에는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외에 선병우, 선병묵고가 등 3채의 오래된 한옥이 있다. 이
는 서울 북촌(北村), 전주한옥마을,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등 한옥 밀집 지역과 오래
된 전통 마을을 제외하고는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이들 모두 선정훈 형제가 세운 것이다.
가장 먼저 선영홍/선정훈이 이곳에 자리를 닦았고 1940년대에 선정훈의 형제들도 본거지인 고
흥을 버리고 이곳으로 올라와 선정훈집(우당고택) 북쪽 삼가천 너머에 집을 지은 것이다. 이
들은 20세기 중반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선병우고가는 선정훈의 동생인 선준훈(宣俊薰)이 세운 것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중문 등
을 갖춘 당당한 한옥이다. (선병우는 선준훈의 아들) 집주인이 남쪽에서 올라온 탓인지 집의
구조는 남부 지방 가옥 배치와 유사하며, 간실을 넓게 잡은 것이 특징이다. 건축양식은 우당
고택과 너무 비슷한데, 이는 선정훈이 좋은 목수를 보내주어 도와준 탓이다.
비록 우당고택보다는 작아도 커다란 한옥은 분명한지라 집 상당수를 식당으로 쓰고 있다. 식
당 이름은 '복해가든'으로 닭백숙과 돼지고기, 버섯찌개 등을 내놓고 있는데, 집 관람은 딱히
제한은 없으나 개인 집이기 때문에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고 대문 밖에만 잠깐 기웃거리고
선병묵고가로 이동했다.

* 선병우고가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142-1 (개안길 15-9, ☎ 043-543-0606)


▲  선병우고가 앞에 자리한 3기의 비석과 넓게 퍼진 큰 소나무

선병우고가 앞에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의 처
진소나무처럼 좌우로 넓게 퍼진 큰 소나무가
운치를 지어내고 있다. 그 앞에는 3기의 비석
이 나란히 자리해 있는데, 그들 중 가운데에
자리한 늙은 비석이 이 집을 세운 '국당(菊堂
) 선준훈 추모비'이다.
194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나이에 비해 비석
이 너무 낡자 근래에 기존 비석을 업그레이드
시킨 새로운 비석을 옆에 지어놓았다. 그래서
기존 비석에 비해 때깔이 무지 고우며, 비석
형태는 앞서 '남헌 선정훈 선생 송덕비'와 유
사하다.

▲  소나무 앞에 자리한 3기의 비석들


▲  보은 선병묵 고가(宣炳默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4호

선병우고가에서 동쪽으로 5분 정도 들어가면 뫼로 막힌 막다른 곳에 선병묵고가가 짧은 고색
의 기운을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이 집은 선정훈의 동생인 선남훈(또는 선동훈)이 1940년대에 지은 것으로 그의 아들인 선병묵
이 소유하고 있다. 집 주위를 황토색 돌담으로 빙 두르고 그 안에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창
고로 쓰이는 초가 등을 두었는데, 남쪽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에 사랑채가 있고, 중
문을 지나야 안채가 나오는 분산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담장 서쪽 길에서 바로 사랑마
당과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서쪽 대문을 따로 내었는데,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변형으
로 보면 된다.

현재는 우당고택(선병국가옥)처럼 집 일부를 고시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속세에 너무 알려
진 우당고택보다 찾는 이도 훨씬 적고 다소 외진 곳이며, 바로 옆에 산이 있어 공부는 정말
잘 될 것 같다.
이곳도 내부는 그런데로 공개되어 있으나(상황에 따라 비공개할 수도 있음) 개인 집이라 깊숙
하게 들어가지는 않고 사랑채까지만 보고 살짝 나왔다.

* 선병묵고가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면 개안리 96 (개안길 60)

▲  선병묵 고가 남쪽 대문
대문은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다.

▲  고가 내부 (남쪽 대문 안쪽)
집 내부에 조촐하게 텃밭을 두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사랑채

▲  겨울 제국의 의해 꽁꽁 봉해진 연못


▲  삼가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선병묵고가
검은 피부의 기와집, 하얀 피부의 기와집, 그리고 누런 피부의 초가까지
다양한 집이 망라되어 있다.

▲  삼가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개안리와 옥녀봉

▲  눈에 젖은 삼가천 둑방길

선병묵고가를 둘러보고 아직 햇님 퇴근까지는 시간이 있어 북쪽 서원리에 있는 상현서원(象賢
書院)까지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선병국가옥 입구인 하개교에서 장안로를 따라 1.7km 정도 가면 상현서원인데, 차량의 눈치를
피하고자 장안로 동쪽 건너편, 그러니까 삼가천 둑방길로 걸어갔다. 서원에 다다르면 하천을
건너는 징검다리라도 있을 듯 싶어서였다. 둑방길은 거의 응달이라 눈이 좀 쌓여있었고, 주변
경작지와 삼가천 갈대는 죄다 누렇게 뜬 모습으로 겨울 제국이 속히 지나가기를 염원한다.

한참 둑방길이 잘 이어져 있다가 삼가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에서 길이 끊기고 말았다. 하천
으로 내려가는 조그만 길은 있지만 눈과 얼음 투성이라 접근이 어려웠고, 괜히 내려가다가 큰
일 날듯 싶어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되돌아나왔다. 괜히 차량의 눈치를 피한답시고 꾀를 부리
다가 오히려 그 꾀에 당한 셈이다. 그 사이 햇님은 더욱 기울어지고 첩첩한 산속이라 날씨까
지 다시 추워진다.

장안3거리로 다시 나와 군내버스를 타고 보은읍내로 들어서 후식거리로 보은동헌이라도 볼까
했으나 길을 헤매어 결국 우당고택 등 선씨 고택 3채를 보는 선에서 올해 첫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허나 날이 이날 뿐이랴..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은 언제든 보은 땅에 찾아
올 수 있다. 그러니 그리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부디 선영홍/선정훈 부자 같은 대인배 부유/상류층이 많이 나오기를 염원하며 대단
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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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동천, 반계 윤웅렬별장

201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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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종로구

한양도성,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난파가옥
, 월암근린공원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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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금천구

호암산 (삼성산성지, 호압사, 호암산 정상)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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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서대문구

안산, 무악동봉수대 (안산자락길, 무악정)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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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종로구

중앙고등학교(본관, 서관, 동관), 창덕궁 신선원전

2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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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성북구

보문동 보문사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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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광진구

홍련봉 보루,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5/6보루, 고구려정

201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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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동대문구
노원구

회기동 연화사
월계동 기원사

20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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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성북구

개운산 보타사 20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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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동작구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201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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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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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종로구

삼청공원, 북악산 말바위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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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삼천사계곡)

201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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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관악구

강감찬생가터, 낙성대(안국사), 난곡로 느티나무,
신림동 굴참나무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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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종로구
성북구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자지동천,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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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종로구

서촌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 옛 윤덕영 집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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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종로구
은평구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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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강서구

양천향교, 궁산, 소악루, 양천고성터, 관산성황당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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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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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종로구

장면 가옥, 흥덕사터, 북묘 하마비, 송시열집터

201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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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강서구

능말 은행나무/느티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개화산 약사사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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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종로구
서대문구

세검정, 석파정 별당(석파랑), 홍지문과 탕춘대성
옥천암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01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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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동대문구

선농단(선농대제),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역사문화관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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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성북구

안암동 개운사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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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종로구

낙산 청룡사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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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강북구

북한산 화계사

201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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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은평구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구름정원길,
경천군 송금비, 백화사, 화의군묘역

201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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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노원구

수락산 벽운동계곡, 염불사, 영원암, 귀임봉

201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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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구로구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구로올레길,
지양산

201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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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종로구

윤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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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김신조루트)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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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광진구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20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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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성북구

성북동 최순우옛집, 수연산방(상허 이태준 가옥)

20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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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종로구
서대문구

박종화가옥, 보현산신각, 홍지문, 산모퉁이까페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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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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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중랑구

숙선옹주묘역, 봉화산(아차산봉수대터),
봉화산둘레길, 충익공 신경진 묘역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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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중계본동 느티나무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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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강북구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묘, 김병로묘,
유림묘,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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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도봉구

무수골, 무수골느티나무,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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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서대문구

봉원사(서울연꽃문화축제)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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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노원구

수락산 노원골, 수락산보루, 동막골, 도선사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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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김형태가옥, 이준구가옥,
북촌 가회동 일대

201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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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도봉구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능원사, 도봉사, 윗무수골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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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종로구

월암근린공원(한양도성), 홍난파가옥, 딜쿠샤,
행촌동 은행나무, 황학정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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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관악구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관악산 사당능선,
선유천국기봉, 관음사국기봉, 관음사

201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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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종로구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
(이빨바위, 가온다리, 산들수목원약수터)
수성동계곡

201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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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금천구

호압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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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인천 - 4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글 링크

1

부천

야인시대촬영장, 루미나리에축제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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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양 북한산성(대서문, 중흥사터, 북한산행궁터)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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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양 북한산성(태고사, 산영루터, 북한산성계곡)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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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남 망경암, 봉국사 (사월초파일)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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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산
수원

오산 물향기수목원 / 수원 팔달문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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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

2008, 3 ☞ 블로그글 보기
7 남양주

덕릉마을 산신각, 덕흥대원군 묘역

2008, 5 ☞ 블로그글 보기

8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08, 10 ☞ 블로그글 보기
9

안양

안양사, 석수동마애종, 석수동석실고분 2009, 3 ☞ 블로그글 보기
10

안성

서운산 석남사 (사월초파일)

2009, 5 ☞ 블로그글 보기
11

하남

춘궁동동사지(동사지3/5층석탑), 광주향교

2010, 2 ☞ 블로그글 보기
12

안양

삼성산 염불암, 중초사지당간지주, 안양예술공원

2010, 12 ☞ 블로그글 보기
13

양평

용문산 사나사, 사나사계곡

2011, 5 ☞ 블로그글 보기
14

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5

고양

북한산성 중성문, 노적사, 중흥사터, 봉성암,
산영루터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6

포천

반월성, 청성공원, 포천향교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17

하남

선법사(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2011, 11 ☞ 블로그글 보기
18

고양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9

고양

중남미문화원, 벽제관터

2012, 5 ☞ 블로그글 보기
20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장정리5층석탑, 고려궁터,
김상용 순절비

2012, 8 ☞ 블로그글 보기
21

이천

관고리 석불입상, 설봉공원(설봉저수지),
설봉서원, 설봉산 영월암

2012, 10 ☞ 블로그글 보기
22

양평

용문산 용문사,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23

파주

고령산 보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24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 2014, 3 ☞ 블로그글 보기
25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26

의정부

도봉산 회룡사, 석굴암, 회룡골 2015, 7 ☞ 블로그글 보기
27

고양,
서울
종로구

북한산 북한산성계곡, 태고사, 행궁터,
금위영이건기비, 금위영유영지, 경리청상창터,
대남문, 문수사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28

의왕

청계산 청계사

2016, 2 ☞ 블로그글 보기
29

강화

외포리, 석모도 보문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0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1

양주
서울

우이령길(교현리~우이동), 우이동유원지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32

인천

소래철교, 소래포구(소래어시장), 장도포대지
(댕구산), 논현포대

2017, 2 ☞ 블로그글 보기

33

수원

서호(서호공원), 항미정 2017, 6 ☞ 블로그글 보기

34

광명

광명동굴, 가학산 2017, 7 ☞ 블로그글 보기

35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2017, 11 ☞ 블로그글 보기

36

안양

안양예술공원, 안양사지,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2018, 1 ☞ 블로그글 보기

37

강화

월곶돈대, 연미정, 강화평화전망대

2018, 6 ☞ 블로그글 보기

38

과천

관악산 문원계곡,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2018, 7 ☞ 블로그글 보기

39

군포

수리산(철쭉동산,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
둘레길), 수리사, 반월호수

2018, 9 ☞ 블로그글 보기

40

인천

양주성금속비, 용궁사, 영종도 백운산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41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2019, 1 ☞ 블로그글 보기

42

강화

교동도 (교동읍성, 교동향교, 화개사, 화개산)

2019, 6 ☞ 블로그글 보기

43

화성

봉림사, 구봉산 당성

2019, 10 ☞ 블로그글 보기

 

강원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양양

낙산사, 홍련암, 오색약수, 성국사, 설악산 주전골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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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릉 객사문, 오죽헌, 경포대, 굴산사터, 신복사터 200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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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창 대관령 양떼목장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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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릉
동해

경포대해수욕장, 등명낙가사, 묵호항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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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해 감추사, 감추해변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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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태백 구문소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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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양구

양구 선사박물관 20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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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천

토고미마을(산천어축제), 딴산 2011, 1 ☞ 블로그글 보기
9

화천,양구
춘천

화천 평화의댐, 세계평화의종공원,
춘천 윗샘밭

2011, 2 ☞ 블로그글 보기
10

평창

남산공원, 송학루, 노산성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1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2, 6 ☞ 블로그글 보기
12

정선

정선5일장, 봉양리뽕나무, 아우라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3

영월

보덕사, 금몽암, 낙화암, 금강정, 금강공원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4

태백

태백산 (당골, 석탄박물관, 석장승, 눈꽃축제장,
단군성전)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5

동해

추암(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 해암정,
추암조각공원, 북평5일장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6

화천

화천 산천어축제(화천읍내, 북한강) 2015, 1 ☞ 블로그글 보기
17

정선,태백

함백산, 만항재 2015, 9 ☞ 블로그글 보기
18

정선

아라리촌, 아우라지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19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0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21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2017, 6 ☞ 블로그글 보기
22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고인돌

2018, 2 ☞ 블로그글 보기
23

원주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계곡, 학곡리 황장금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충청북도 - 1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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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은
대전

보은 삼년산성
대전 동춘당 / 송애당 / 법동 석장승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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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동 영동향토민속자료전시관, 가학루, 황간향교 20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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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주

단호사, 사문리당산나무숲, 미륵리사터,
하늘재, 충주호

20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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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양

사인암, 청련암, 중선암, 북상리 시골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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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괴산

각연사 (각연사계곡)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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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홍범식고가, 개심사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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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옥천

정지용 생가(정지용문학관), 육영수생가,
죽향리초교 구교사, 죽향리사지3층석탑, 옥천성당

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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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주

낙가산 보살사, 명암약수터, 명암저수지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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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단양

북상리 시골, 사인암, 청련암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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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단양

구인사 (구봉팔문)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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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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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청남도, 세종 - 16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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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안 태화산 광덕사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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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진
태안

행담도, 꽃지해수욕장, 방포항,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암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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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전

식장산 고산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4 공주

계룡산 동학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5 공주

계룡산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용문폭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6 공주

계룡산 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7 태안

신진도(안흥외항), 마도, 안흥항, 안흥성(태국사)

2013, 8 ☞ 블로그글 보기
8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산자연휴양림)

2014, 6 ☞ 블로그글 보기

9

당진
아산

장고항, 삽교호관광지, 외암리민속마을

2015, 11 ☞ 블로그글 보기

10

예산

금오산 향천사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1

대전

계족산(계족산성, 계족산 황톳길), 장동산림욕장

2016, 10 ☞ 블로그글 보기

12

보령

성주사지, 성주천 가로수길

2017, 2 ☞ 블로그글 보기

13

서산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

2017, 12 ☞ 블로그글 보기

14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2018, 7 ☞ 블로그글 보기

15

천안

태조산 각원사, 성불사 2019, 1 ☞ 블로그글 보기

16

세종

비암사, 도깨비도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전라북도 - 15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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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안 상록해수욕장, 내소사, 곰소항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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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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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주
장수

한풍루, 무주향교
의암송, 장수향교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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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이목대), 한벽당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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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등학교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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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산

응항, 선유도, 고군산군도 일주

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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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순창

강천산(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강천사, 삼인대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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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망루, 오수리석불, 해월암

201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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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20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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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안 변산 내소사 20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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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무주 적상산(적상호, 적상산성, 적상산사고), 안국사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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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무주

무주머루와인동굴, 덕유산무주리조트(곤도라),
덕유산 설천봉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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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제 모악산 귀신사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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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완주 종남산 송광사 201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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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완주 모악산 대원사, 수왕사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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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라남도 - 14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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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성
담양
나주

장성 방울샘,
담양 관방제림 / 담양읍 5층석탑 / 석당간
나주 남고문 / 정수루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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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광 내산서원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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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주
광주

정수루, 금성관
광주 풍영정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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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천 금전산 금둔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5

순천 개운산 동화사 2010, 1 ☞ 블로그글 보기

6

순천 조계산 천자암 2010, 2 ☞ 블로그글 보기

7

장성 백암산 백양사 2011, 9 ☞ 블로그글 보기

8

광주 무등산 원효사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9

구례 지리산 천은사(천은제) 2012, 4 ☞ 블로그글 보기

10

곡성 동리산 태안사(태안사계곡) 2013, 5 ☞ 블로그글 보기

11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운암사)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2

목포

노적봉, 유달산(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갓바위

2017, 9 ☞ 블로그글 보기

13

나주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14

영광

불갑산 불갑사(꽃무릇군락지)

2019, 9 ☞ 블로그글 보기

 

대구, 경상북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경주

반월성, 석빙고, 남산 서쪽(용장사터, 천룡사터)

20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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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경 문경새재(여궁폭포, 혜국사, 주흘산, 주흘관) 20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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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달성 비슬산(유가사 / 암괴류), 현풍석빙고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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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미 의구총, 낙산리고분군, 낙산리3층석탑 200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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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천
상주

개심사지5층석탑
용화사(증촌리석불좌상/입상), 전고령가야왕릉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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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신문왕릉 2009, 7 ☞ 블로그글 보기
7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불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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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덕
울진

고래불해수욕장, 후포항, 월송정, 월송해변 2011, 6 ☞ 블로그글 보기
9

달성

다람재, 도동서원, 이노정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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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남산 낙대폭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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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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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회룡포, 비룡산 2014, 7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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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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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효소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귀부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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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파계사, 대비암, 성전암 2016, 4 ☞ 블로그글 보기
18

경주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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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문익점면작기념비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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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석조여래입상과
3층석탑, 초간정(초간정 원림)

2018, 3 ☞ 블로그글 보기
21

상주

장각폭포, 오송폭포(성불사), 옥양폭포

2018, 6 ☞ 블로그글 보기
22

영주
봉화

휴천동 지석 및 입석
오전약수,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2019, 6 ☞ 블로그글 보기
23

경주

감산사, 연지암, 숭복사(숭복사터)

2019, 8 ☞ 블로그글 보기

 

부산 - 1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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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

광안리해수욕장, 가덕도(외양포, 대항, 세바지)

200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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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
서구

망상도/유주암, 송도해변, 송도해수욕장

2008, 9 ☞ 블로그글 보기
3

기장군

불광산 (장안사. 장안사계곡) 2009, 1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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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불광산 (척판암, 백련암) 2009, 1 ☞ 블로그글 보기

5

서구
북구

내원정사, 만덕사(만덕사 당간지주), 알터유적 2009, 9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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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구

금정산(금정산성, 국청사) 2011, 1 ☞ 블로그글 보기

7

금정구

금정산 미륵사, 금성동 2011, 1 ☞ 블로그글 보기

8

강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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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상구
강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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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구

몰운대, 다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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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남구

백운포, 오륙도 (오륙도등대, 등대섬) 2014, 1 ☞ 블로그글 보기

12

사하구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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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금정구

금정산(고당봉, 금샘), 원효암, 금정산성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4

해운대구

해운대 동백섬, 해운대해수욕장, 미포,
달맞이길, 문텐로드, 청사포, 구덕포, 송정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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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연제구

배산, 배산성터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6

기장군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황학대, 두호포구,
기장성당, 월전포구

2017, 4 ☞ 블로그글 보기

17

기장군

월전~대변 해안가, 대변항, 죽도, 연하리 해변,
오랑대, 해동용궁사

2017, 7 ☞ 블로그글 보기

 

울산, 경상남도 - 2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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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
부산

처용암
옥련선원 / 정묘사(배롱나무)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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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원 무학산(관해정), 가포해변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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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해

김해 수로왕릉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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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주
사천

진주 금선암
사천읍성(산성공원), 대방진굴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5

함안
창원

함안박물관, 말산리/도항리고분군
진해 우체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6

창원

불모산 성흥사, 대장동계곡

2008, 9 ☞ 블로그글 보기
7

밀양

밀양 표충비, 무안리 향나무(홍제사) 2009, 1 ☞ 블로그글 보기
8

양산

천성산 홍룡사(홍룡폭포), 원효암 2009, 6 ☞ 블로그글 보기

9

울산 일산해수욕장, 대왕암공원 2009, 7 ☞ 블로그글 보기

10

창녕

창녕석빙고, 송현동석불좌상, 송현동고분군,
진흥왕척경비, 만옥정공원, 남지철교

2010, 5 ☞ 블로그글 보기

11

거창

수승대(귀연서원, 요수정)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2

울주
밀양

서생 나사리해변,
밀양 얼음골(천황사)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3

함양

상림공원, 한남군묘역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4

산청

목면시배유지, 배산서원, 덕천서원, 남명조식유적

2012, 9 ☞ 블로그글 보기

15

남해

호구산 용문사, 남해자생식물단지, 미국마을,
용소리/금평해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16

통영

통영 달아공원

2013, 3 ☞ 블로그글 보기

17

울주

가지산 석남사 (석남사계곡)

2013, 9 ☞ 블로그글 보기

18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9

창원

불모산 성주사 (성주사계곡)

2014, 10 ☞ 블로그글 보기

20

울주

서생포왜성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1

산청

덕양전, 전 구형왕릉, 왕산(유의태약수터,
왕산사지)

2018, 10 ☞ 블로그글 보기

 

제주도 -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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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외도 월대, 수산봉, 수산리곰솔, 납읍리
납읍 금산공원(납읍리 난대림)

2019, 3 ☞ 블로그글 보기


 

기타 지역 - 1개

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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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열도

동경 지역(긴자, 록뽕키, 우에노, 도쿄도청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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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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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하에 공개된 글 중에서 하자가 없는 글만 선정해서 지역별로 모았습니다.
2. 2003년 4월 이전 글은 모두 제외했습니다.
3. 답사기 내용과 사진을 전체 혹은 일부라도 퍼갈 경우, 반드시 출처와 원작자(박융) 이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사진이 일부 뜨지 않는 글들이 약간 있습니다. 이 점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5. 공개된 글 중, 추후 업데이트 판이 나올 경우, 이전 판은 모음집에서 삭제 될 수 있으며 2개 이상의 시리즈로
   작성된 글 중 추후 본인 필요에 따라 1개나 2개로 통폐합 정리될 수 있습니다.
6. 지역 별로 분류했으나 지역이 2개 이상 겹치는 글은 먼저 간 곳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7. 최종 업데이트 2019년 12월 30일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산과 숲,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옛길,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한반도지형, 앉은뱅이약수)

 


' 괴산 산막이옛길 봄나들이 '

▲  등잔봉에서 바라본 신비로운 운해

▲  괴산호

▲  산막이옛길


 

봄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4월의 한복판에 괴산(槐山) 지역 제일의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
는 산막이옛길을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산막이로 가는 그날은 공교롭게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전
날까지는 마음이 싹 정화될 정도로 화창한 날씨였는데, 불과 하루만에 날씨가 안면을 바
꾼 것이다. 하여 비의 대한 불안감을 약간 품은 채,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집결지인 신도
림역(1,2호선)으로 이동했다. 물론 우산은 챙겼다.
신도림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관광버스 2대에 나눠 타고 동남쪽으로 길을 향했다. 구름이
당장이라도 비를 투하할 기세로 나를 쫓아왔는데, 안성(安城)을 지날 무렵, 비가 쏟아지
기 시작했다. 버스는 빗속을 가르며 열심히 육중한 바퀴를 굴렸고 서울 출발 2시간 만에
산막이옛길 주차장에 이르렀다.

비가 조금 내리고 있어 우산을 펼치고 산막이옛길 우중(雨中) 산책에 들어갔다. 비는 조
금 내리다가 잠시 그치면서 '이제 날씨가 개인 모양이다' 희망을 주더니만 얼마 가지 않
아서 다시 비가 내린다. 그러기를 수 차례~! 하늘은 그야말로 우리를 희망고문을 시켰다.
나들이와 답사, 등산에서 비가 오는 것만큼 싫은 것도 없다.


 

♠  산막이옛길 입문

▲  산막이옛길의 마스코트
옛날 복장을 한 할머니와 손자 도령, 선비 복장을 한 할아버지와 손녀가 나란히
자리한다. 지팡이를 들고 삿갓을 쓴 할아버지 옆에는 경찰청 마스코트인
포돌이, 포순이 형상이 있다. (사진에는 짤림)


괴산의 새로운 꿀단지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산막이옛길은 괴산호(槐山湖)와 어우러진 아름다
운 경승지이다.
이곳은 원래 연하9곡(煙霞九曲)이라 불리던 명소로 계곡(달천 상류)을 따라 10리 정도의 산길
이 산막이마을까지 이어졌다. 허나 1957년 우리 기술로 지은 최초의 댐, 괴산댐이 마을 북쪽
사은리에 지어지면서 계곡 일대가 강제 수몰되었다. 그래서 산중턱에 새로 길을 내었으니 그
것이 바로 산막이옛길이다. 옛길이란 명칭은 수몰된 산길 윗쪽에 다시 길을 닦았다는 의미에
서 붙여진 것이다.

산막이옛길(이하 옛길)은 3.9km로 괴산호 서쪽에 자리해 있다. 원래는 흙길이었으나 2011년에
천하에 개방되면서 나무데크길을 내었다. 숲과 호수, 산이 어우러진 빼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진 사람들이 늘면서 그 존재감이 미치도록 커졌고, 이제는 괴산 제일의 명소로 우뚝 섰다.
호수를 따라 이어진 옛길에는 소나무동산, 노루샘, 호랑이굴, 앉은뱅이약수, 얼음바위골, 괴
산바위, 진달래동산 등의 조촐한 볼거리가 있으며, 유람선이 옛길의 시작점인 차돌바위 나루
터에서 환벽정나루를 거쳐 산막이나루까지 운항한다.

옛길의 종착지인 산막이마을에는 노수신(盧守愼)이 유배 생활을 하였던 적소(謫所)가 있으며,
그곳에는 그의 후손인 노성도(盧性度, 1819~1893)가 세운 수월정(水月亭)이 있다. 그리고 괴
산호가 자연스럽게 빚은 한반도지형에는 환벽정이란 정자가 둥지를 틀었다.

옛길 서쪽에는 국사봉(477m)과 등잔봉, 천장봉, 삼성봉(550m)이 산막이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데, 옛길에서 등잔봉과 한반도전망대, 진달래능선, 진달래동산을 거쳐 옛길로 내려가도 되고,
(출발점→등잔봉→한반도전망대→산막이마을, 2.9km) 한반도전망대에서 더 욕심을 부려서 천
장봉, 삼성봉을 찍고 '신령참나무'와 '시련과 고난의 소나무'를 거쳐 산막이마을로 내려가도
된다. (출발점→등잔봉→천장봉→산막이마을, 4.4km) 그리고 산을 타기가 귀찮다면 호수를 따
라 이어진 옛길을 이용하면 되며, 그것도 귀찮다면 돈 몇푼 주고 배를 타면 된다.

싱그러운 나무와 풀의 향기, 산에서 낭랑하게 불어오는 산바람과 괴산호에서 불어오는 강바람
에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즐거운 곳으로 시간이 넉넉하다면 옛길만 살피지 말고, 등잔봉과
천장봉 등의 산도 같이 겯드리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둘러봐도 길어봐
야 4시간 이내(천장봉을 경유할 경우 5시간 이내)면 충분하다.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일대


▲  세모로 솟은 산막이옛길 표석

▲  산막이옛길로 들어서다

궂은 날씨임에도 산막이를 찾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다행히 비가 크게 내리지 않아서 우산
이나 우의, 모자만 걸쳐도 별탈 없이 움직일 수가 있다.
주차장을 출발해 밤, 옥수수 등의 자연산 간식과 지역 특산물을 파는 가게촌을 지나면 본격적
인 산막이옛길 나들이가 시작된다. 소나무가 무성한 소나무동산이 곧 모습을 드러내고 유람선
을 타는 차돌바위 나루터가 걷기의 귀차니즘과 문명의 혜택을 바라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
것을 타면 산막이까지 10분 정도면 간다. (옛길로 걸어갈 경우 1시간 소요) 하지만 우리는 등
잔봉과 천장봉, 삼성봉을 찍고 산막이마을로 내려가 옛길로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그야말
로 산막이옛길 본전 코스로 돌기로 했다.


▲  괴산호 유람선을 타는 차돌바위 나루터
적정인원이 차면 바로 배가 출발한다. (따로 시간표는 없음)

▲  고인돌쉼터
고인돌처럼 생긴 바위가 여럿 널려 있다. 이곳은 옛 사오랑 서당에서
한여름에 야외 학당으로 이용했던 곳이다.

▲  가파르게 이어지는 소나무동산 옛길

▲  솔내음이 코와 마음을 찌르는 소나무동산
40년 묵은 소나무가 넓게 군락(약 1만 평)을 이루고 있다.

▲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산막이옛길의 자연산 거울, 괴산호
나무와 꽃, 산, 구름이 호수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이 없다.
산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안긴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소나무 출렁다리를 타고자 기다리는 사람들

▲  소나무 출렁다리 (1)

소나무동산 남쪽에는 산막이의 명물인 소나무 출렁다리가 있다. 이름 그대로 출렁이고 흔들거
리는 다리로 다리 밑판의 간격이 성인 발 크기 정도로 벌어져 있어 좌우 난간을 잘 붙잡고 밑
판도 잘 챙기며 움직여야 별탈이 없다. 자칫 방심하여 그 틈으로 발이 빠지면 영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반복되고, 지그재그 형태로 여타 관광지의 그저 그런 흔들다리
와 완전히 차원이 틀린 거의 훈련/유격용 흔들다리 버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
니 다리가 짧은 사람이나 어린이, 알콜이 좀 들어간 사람은 출렁다리를 피하기 바란다. 보기
와 달리 다소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어 체감 거리를 더욱 늘려준다.


▲  소나무 출렁다리 (2)

▲  소나무 출렁다리 (3)

▲  변덕스런 하늘과 대조적으로 고요함에 잠긴 괴산호


 

♠  산막이옛길의 지붕을 거닐다 (등잔봉, 한반도전망대)

▲  등잔봉으로 올라가는 길

소나무출렁다리를 지나면 오른쪽에 등잔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이 나온다. 호수 옛길만 거
닐면 싱거울 수가 있으니 산막이의 지붕인 등잔봉~천장봉 능선을 거니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
다.

등잔봉으로 오르는 길은 세상살이만큼이나 다소 각박하다. 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하지만 하늘
과 가까워질수록 점차 각박하게 이어져 숨을 제대로 가쁘게 만든다. 그 각박한 산길은 등잔봉
북쪽까지 이어지는데, 그냥 오르는 것도 힘든 마당에 봄비의 희롱으로 산길이 흥분하여 진흙
탕이 되버렸으니 은근히 질퍽이고 미끄럽다. 게다가 산길 밑 경사는 60도 이상으로 아찔하여
더욱 조심을 기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  등잔봉으로 오르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괴산호와 산막이옛길 주변

▲  등잔봉으로 오르는 길

▲  조그만 등잔봉 정상 표석 (해발 450m)

등잔봉은 국사봉과 더불어 산막이의 북쪽 지붕이다. 이곳에 오르면 남쪽으로 천장봉과 삼성봉
이, 동쪽으로는 산막이옛길과 괴산호가 바라보이는데, 비를 가득 품은 비구름이 그 풍경을 모
조리 앗아가버려 보이는 것은 그저 하얀 구름 뿐이다.
궂은 날씨로 인해 내가 기대했던 환하게 펼쳐진 풍경은 아니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구름이 진
하게 그것도 발 밑으로 가득 깔려 있어 고작 해발 450m를 올라왔을 뿐인데, 마치 1,500m이상
봉우리에 올라선 기분이다. 그야말로 3배 이상의 효과라고나 할까? 게다가 천상(天上) 세계의
신선이나 그의 식구가 된 기분까지 교차하니 화창한 날 풍경에 못지 않은 기분이 나를 즐겁게
한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雲海) ①
하늘 세계도 세력 확장을 하는 모양이다. 구름이 해발 400m까지 쑥 내려왔다.
이러다 밑 세상까지 하늘의 침범을 받는 것은 아닐까? 구름이 거대한
하얀 도화지를 이루며 밑 세상을 모두 가져가버렸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②
저 하얀 구름을 거닐고 싶다. 물론 신선이나 손오공이 아닌 이상은
위험하겠지..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③
운해 너머로 구름에 감싸인 산이 있다. 그 자태가 마치 신선이나 천상 세계의
지체 높은 존재만 접근이 허락되는 신비로운 산처럼 보인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④
대자연이 그린 장대한 수묵담채화, 아무리 천재 화가라고 해도 저 그림을
100% 그대로 담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천장봉(437m)
엷은 구름을 걸친 모습이 자못 신비로워보인다. 혹 선녀 누님이
구름을 타고 내려온 것은 아닐까?

▲  한반도전망대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한반도지형

등잔봉과 천장봉 사이에는 한반도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가 있다. 이곳은 바로 밑에 아득히
바라보이는 괴산호의 걸출한 작품, 한반도지형을 굽어보는 현장으로 괴산호가 빚은 작품이다.
허나 아무리 걸출하면 무엇하나? 자연이 단단히 시샘을 했는지 비구름과 안개로 싹 가려버렸
으니 말이다. 다행히 구름이 조금 틈을 보여 그 사이로 한반도지형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한반도지형이란 말그대로 우리나라가 담겨진 한반도를 닮은 지형으로 영월(寧越)의 한반도지
형이 대표적이다. 그것도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천하에 많은 한반도지형이
발굴되어 하나 같이 관광지로 키워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아주 조그만 축소판
이라 그렇다.
허나 우리는 그 조그만 한반도에서 안주하면 안된다. 그 옛날 선조들이 다스렸던 수많은 실지
(失地, 만주와 요동, 요서, 연해주, 대마도, 왜열도 등)을 되찾아 과거의 광영을 되찾아야 될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가 오면 한반도지형은 과감히 버리고 그에 걸맞는 지형을 키웠
으면 좋겠다.


 

♠  산막이옛길 마무리

▲  나무 사이로 보이는 괴산호 (고공전망대 주변)

한반도전망대에서 남쪽으로 1굽이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그대로 직진하면 천장봉, 왼
쪽으로 가면 진달래능선인데, 비가 계속 내리고 있고, 산길 상태도 좋지 못해 천장봉과 삼성
봉을 빼고 바로 진달래능선으로 내려가 원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쉽기는 하나 날씨가 계
속 심술을 부리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럴 때는 욕심을 쿨하게 부리고 코스를 좀 줄이
는 것이 좋지.

진달래능선은 천장봉 북쪽에서 옛길로 내려가는 길로 경사가 조금 패기가 있다. 진달래가 무
리를 이루고 있어 진달래능선이라 불리는데, 진흙이 되버린 산길을 정신없이 내려오니 괴산호
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진달래동산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 잠시 떨어졌던 옛길과 만났다.

진달래능선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은 괴산호를 따라 출발점으로, 남쪽은 가까이에
보이는 산막이마을로 이어진다. 이곳에 왔으니 산막이마을도 봐야 당연한 도리이지만 코스 단
축에 따라 주어진 시간도 줄어들어 거기를 경유하기에는 상당히 촉박했다. (마을에서 배를 타
고 돌아가면 충분하나 배까지는 생각을 안했음)
개인적으로 왔다면 모두 보고 가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단체로 온 것이니 시간을 어길 수는 없
다. 게다가 일행들이 가져온 행동식과 간식을 먹느라 중간중간 눌러 앉은 시간이 너무 많아서
정작 필요한 것을 보는 시간이 많이 줄어버렸다. 하여 노수신적소가 있는 산막이마을을 저 앞
에 두고 단장의 마음으로 길을 돌아서야 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오라는 산
막이의 지극한 뜻이 아닐까? 그래도 너무 아쉽다.


▲  산막이옛길의 잔잔한 거울, 괴산호

▲  물결을 가르며 달리는 괴산호 유람선
산막이마을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발이다. 마을까지 빠르게 이동하는
교통수단으로 15~20분 정도 걸리며, 인원이 차면 출발한다.

▲  나무데크길로 무장한 산막이옛길

▲  얼음바람골

호수전망대를 지나면 얼음바람골이라 불리는 조촐한 계곡이 나온다. 돌 피부에 푸른 이끼가
가득하여 이곳이 청정한 곳임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이곳은 한여름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한기를 느낄 정도라고 하여 얼음바람골이라 불린다.
그래서일까?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밀양(密陽) 얼음골의 바람처럼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여름 제국도 염통을 부여잡고 슬금슬금 피해가는 피서의 성지인 셈이다.


▲  산막이옛길의 유일한 샘터, 앉은뱅이약수

옛날에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이 물을 마셨는데 물의 효험을 받아 무려 걸어서 나갔다고 한
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몸에 좋은 무언가가 깃든 물로 명성이 자자
했으며, 수질도 양호하고 1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괴산호의 물을 채워주는
수원(水源)의 하나이기도 하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받아 마시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다. 내 마음
이 마치 앉은뱅이에서 정상 다리로 된 기분..


▲  귀여운 호랑이 형상이 있는 호랑이굴

호랑이굴은 바위에 뚫린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1968년까지 호랑이(표범)이 살았던 굴이라 전
한다. 그 이후 주인 없는 굴이 되었으며, 호랑이가 살던 것을 기리고자 그 앞에 색채가 진한
모형 호랑이상을 두었으나 예전 호랑이의 매서운 기운은 커녕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엽
기만 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나오며, 옛길에는 이곳 외에도 여우비바위굴도 있
는데, 그곳은 산막이를 오가던 사람들이 여우비(여름 소나기)와 한낮 더위를 피하던 곳이다.


▲  연화담(蓮花潭)
이곳에는 예전에 벼를 키우던 논이 있었다. 높은 곳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의존해 모를 심었는데, 옛길을 조성하면서 그 자리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연화담으로 삼았다.


촉박해진 집결시간 때문에 옛길의 많은 명소를 사진에 싹 담지 못하고 겨우 일부만 담는데 그
쳤다.
진달래동산에서 연화담 사이에는 다래숲동굴, 마흔고개, 고공전망대, 괴음정, 괴산바위, 호수
전망대, 얼음바람골, 앉은뱅이약수, 풀과나무의 사랑, 옷벗은 미녀참나무, 여우비바위굴, 매
바위, 호랑이굴, 노루샘 등의 명소가 있는데, 이중 얼음바람골과 앉은뱅이약수, 연화담만 사
진에 담은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둘러보긴 했으나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쳤다.

어쨌든 주차장으로 돌아와 부근 식당에서 버섯소고기전골로 두둑히 배를 채우고, 곡차(穀茶)
도 다수 겯드리며 뒷풀이를 하다가 오후 4시에 잠시나마 정든 산막이옛길을 뒤로하며 다시 서
울로 돌아갔다.
분명 보긴 했으나 많은 것을 놓쳤던 산막이옛길과의 첫 만남, 그야말로 벌처럼 날라가고 돌아
왔던 단체 등산 나들이로 놓친 것이 많은 만큼 아쉬움도 크다. 허나 나중에 다시 인연이 된다
면 그 아쉬움을 모두 풀 것이다. 둘러보지 못한 곳은 잠시 미래에 맡겨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산막이옛길 봄비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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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자락에 작은 도시처럼 들어앉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 단양 구인사 (구인사 공양밥, 구봉팔문)



' 늦겨울 산사 나들이, 단양 구인사 '

▲  대조사전 광장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겨울 제국의 쌀쌀한 위엄 앞에 천하만물이 꽁꽁 몸을 사리던 2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
와 단양 구인사를 찾았다.
구인사는 이미 10여 년 전 연말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같은 겨울이지만 연
초에 가게 되었다. 그럼 왜 그곳을 다시 찾았을까?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땡겨서이다.

서울의 동쪽 관문, 청량리역에서 8시대에 출발하는 영동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영월(寧
越)에서 군내버스로 구인사로 진입하려고 했으나 여인네가 크게 지각을 하는 바람에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열차를 타면 영월읍내에서 구인사행 버스와 30분 이내로 시
간이 맞음) 그래서 별수 없이 9시대 열차를 타고 제천(提川)으로 이동하여 거기서 구인사
로 접근하기로 했다.

열차에서 시내에서 사온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우며 스마트폰으로 제천에서 구인사행 직행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제천역 도착시간을 기준으로 거의 10여 분 뒤에 있다. 하여 제천역
에 두 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이동하여 간신히 구인사행 직행버스를
잡아탔다. (그거 놓치면 꼼짝없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됨)
제천터미널에서 쌍용. 별방, 사지원, 영춘, 온달관광지(온달산성, 온달동굴), 구인사입구
를 경유하여 50분 만에 구인사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은 구인사 건물의 주류를 이루는
3층 기와집으로 1층에 쉼터를 겸한 매표소가 있다.

구인사입구에 이르니 다들 어디서들 왔는지 사람과 차량의 물결이 대도시 못지 않게 쏟아
져 나와 도로가 막힐 지경이다. 그날 구인사에서 본 사람의 수만 어림잡아 수천이 넘으니
하루로 따지만 수만이다. 거의 단양군(丹陽郡) 인구보다 많은 것이다. 구인사가 단양에서
차지하는 땅은 좁쌀 수준이지만 그곳을 찾는 1일 사람 수와 수입은 단양군을 훨씬 능가하
니 이건 완전 단양 속의 조그만 도시나 다름이 없다.


 

♠  구인사 입문

▲  구인사 일주문(一柱門)

구인사터미널에서 거센 물결처럼 밀려오는 인파를 뚫고 2분 정도 오르면 구인사의 정문인 일
주문이 마중한다.
구인사 일주문은 이 땅의 일주문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것으로 문을 지나는 사람과 문의 크
기를 비교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실감이 날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서 장차 장
엄하게 펼쳐질 구인사의 맛보기 버전이라고나 할까..?
일주문의 높이는 대략 10m에 이르며, 문을 들어서면 바로 4층짜리 기와집인 관성당(觀性堂)이
다시 한번 위압감을 선사해 속인(俗人)의 기를 제대로 주눅들게 만든다. 구인사는 이런 식으
로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 혹여나 잠입할 번뇌를 단죄하는 모양이다.

▲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자리한 관성당

▲  구인사 천왕문(天王門)

구인사의 2번째 관문인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이다. 이곳 천왕
문은 특이하게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밑층은 경내로 통하는 3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윗층 문루에 바로 사천왕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천왕문은 보통 윗층을 일컫는다. 다른 절의
천왕문은 사천왕상 사이를 무조건 지나가게 하여 그들의 검문을 강제로 받아야 되지만 여기서
는 2층으로 가지 않는 이상은 그들을 마주칠 필요가 없다.

살짝 들려진 천왕문의 추녀를 보면 잡상(雜像)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모두 7개의 잡상이 추
녀마루에 붙어있는데 이들은 보통 궁궐이나 왕릉, 성문 등 지체높은 곳에서 많이 달았다. 지
금이야 그런 것을 지킬 필요가 없지만 절에서는 보통 잡상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허나 구
인사는 저렇게 천왕문에 그들을 달았다. 그 이유는 잡상의 본 목적인 장식용과 수호용도 있겠
지만 우리나라 현대불교 및 천태종의 성지로 우뚝 선 구인사의 끝없는 자부심과 권위를 진하
게 상징하려는 의도가 더 클 것이다.

▲  용을 쥐어든 광목천왕(廣目天王)과
탑을 든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위엄

▲  천왕문에서 바라본 인광당(仁光堂)
구인사 경내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3층 진신사리탑

천왕문을 거쳐 인광당과 총무원을 차례로 지나면 길 왼쪽에 부처의 사리가 담긴 3층석탑이 있
다.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 코끼리가 그를 받치고 있는데, 1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
塔身)을 올리고 바로 그 위에 금색의 보륜(寶輪)으로 치장된 상륜(相輪)을 두었다.

이 탑은 1983년 구인사 2대 대종사(大宗師)인 남대충이 인도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방문했
을 때 그곳 주지승이 선물한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자 만든 것으로 그때 기원정사 주지
승이 '인연이 있는 분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가 봉안해주십시요' 말했다.
탑의 모습은 동국대 전임 총장인 조명기 박사가 직접 설계했으며 코끼리 기단은 남대충 대종
사가 창안한 것이다. 1층 탑신에는 돌문을 두었는데 그 돌문을 열면 부처의 사리를 생생하게
친견할 수 있다. (1층 탑신까지는 사람 키와 손이 닿지 않아 아무나 열 수 없음~) 탑 주위로
돌난간을 둘렀고, 난간 기둥 위에는 12지신상(支神像)을 세웠는데, 사람들의 손길이 계속 누
적어 그들 피부가 완전 맨들맨들해졌다.


▲  구인사 삼보당(三寶堂)

3층석탑을 지나 경내를 계속 파고들면 관음전과 삼보당이 나온다. 삼보당은 구인사를 세운 천
태종 1대 종정(宗正)인 상월원각조사의 금동존상과 진영, 그리고 2대 남대충 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상월을 금동으로 장엄한 것은 구인사에서 현세에 부처로 극진히 떠받들고 있
기 때문이다. 건물 이름인 3보도 바로 상월과 남대충, 그리고 현재 천태종 종정인 김도용 대
종사를 일컬으며 만약 현 종정이 입적하고 새로운 이가 그 자리를 이어받으면 사보당(四寶堂)
으로 간판을 갈게 될 것이다.

이곳은 신도와 신참 승려들이 고참 승려에게 인사를 하는 곳이기도 하여 종단 승려들이 고참
승려를 상석에 앉혀 회의나 승려 안거(安居)를 주재하기도 한다. 그리고 삼보당 동쪽에는 조
실(祖室)이 있는데 그곳은 구인사와 천태종의 지배자가 머무는 곳이다. 지금은 3대 종정인 김
도용이 살고 있으며, 하루에 1번씩 삼보당으로 나와 신참 승려와 신도들에게 설법을 한다.
참고로 이곳에서는 대종사에게 예하(猊下)라는 존칭어를 사용한다. 제왕에게 폐하(陛下)라 부
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구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심지, 산속에 숨겨진 조그만 도시 같은 구인사(救仁寺)
소백산(小白山) 북쪽 자락에 꽉차게 들어앉은 구인사는 우리나라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지이
자 20세기 현대불교의 성지(聖地)이다. 이곳의 역사는 이제 70년여 년으로 1945년 초에 상월
원각조사(上月圓覺祖師)가 창건했다.

상월원각조사는 1911년 음력 11월 28일, 강원도 삼척시 상마읍리 봉촌마을의 밀양박씨 집안에
서 태어났다. 이름은 박준동(朴準東), 법명은 상월(上月)이며, 15세에 나름 큰 뜻을 품고 출
가하여 여러 선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워낙 총명하여 금방 배웠다고 한다.
1940년에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수도했다고 전하는 굴에서 도를 닦
으며 솔잎과 쑥으로 2년을 버티다가 1942년 가을, 깨달음을 얻어 현재 구인사 5층 대법당 자
리에 있던 연화지(蓮花池)를 찾았다. 거기서 만개한 백련(白蓮) 사이로 살짝 모습을 비친 관
음보살 누님을 친견했다고 전한다.
하여 그해 겨울 관음성지를 순례하고자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주산열도에 있는 천태산 수선사
(修禪寺)와 대륙 천태종의 중심지인 국청사(國淸寺)를 찾았고 그때 천태종을 접하게 되었다.

천태종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는 조국에서 반드시 크게 일으켜 다시 천태산(天台山)을 찾겠
노라 다짐하고 예전 관음보살을 친견했던 소백산 연화지로 돌아와 나무와 풀로 초암(草庵)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구인사의 시초이다. 절의 이름은 '억조창생 구제중생 구인사'라 지었으나
이름이 길어서 보통 구인사라고 부른다.

6.25 전쟁 때 이곳까지 들어온 북한군에 의해 절이 파괴되어 1952년 다시 지었으며 상월은 여
기서 속세와 왕래를 끊고 오로지 수행에 전념해 1962년 '한 마음 움직이지 않으면 만법(萬法)
이 일여(一如)하다'
는 경지와 '모든 법이 본래 무상(無常), 무생(無生)하다'는 무상대도(無上
大道)를 깨닫고 다음의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山色古今外  산색은 고금 밖이요,
水聲有無中  물소리는 있고 없고 중간이로다.
一見破萬劫  한번 보는 것이 만겁을 깨뜨리니,
性空是佛母  성품 공한 것이 부처의 어머니로다.


천태종과 구인사가 크게 흥하게 된 계기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이다. 박정희가 월남
전을 두고 고심하고 있을 때, 한 측근이 상월이 신통력이 있다며 만나보라고 권하자 즉시 그
를 청와대로 소환했다.
박정희의 고충을 들은 상월은 참전하면 국부(國富)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참전을 적극 권했
다. 대통령 자신도 월남(베트남) 정벌을 원하고 있었으나 반대 여론이 많아 전전긍긍하던 참
이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10년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은 듯, 너무나 기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월에게 뭐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머무는 소백산 골짜기에 불사(佛事)를 하
고 싶다고 답을 했고, 박정희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구인사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듯, 크
게 흥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군사정권의 도움이 구인사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 기세를 타고 상월은 천태종 초대 종정이 되어 '참된 자아의 개현','참된 생활의 구현','참
된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대중불교의 구현, 생활불교의 실천, 애국불교의 건립이라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했으며, 1971년 5월 1일에는 교화의 기본과 지침이 되는 법어(法語)를 발표했
다. 그리고 그해 10월 천태종이 나아갈 방향과 종지(宗旨), 종통에 관한 교시문을 발표한다.

1974년 상월원각조사(시호는 상월원각대조사)가 입적하자 그의 후계자인 남대충(南大忠)이 구
인사 주지 및 천태종 2대 종정이 되었다.
남대충은 1925년 음력 12월 5일 구인사 부근 여의생마을의 영양남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름
은 남익순(南益淳)으로 21살에 구인사에 들어와 상월의 가르침을 받았고, 1960년에 큰 깨달음
을 얻자 상월에게서 후계자의 인증을 받았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들고 공경했으며, 박정희 정권과 중생들의 시주를 발판 삼아
절을 더욱 크게 일으켰다. 또한 절 주변 야산에 잣나무 등 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숲을 일
구었고 수해 등으로 망가진 단양 관내의 도로 복구 공사에도 참여하는 등 아주 바쁘게 움직였
다. 하여 1980년 4월 사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았고 1987년에는 새마을훈장 자
조장을 받기도 했다.

1993년 9월 3일, 남대충이 6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그의 수제자인 김도용(金道勇)이 그 뒤를
이어 구인사와 천태종의 3대 종정이 되었다.
김도용은 1943년 10월 경북 울진군 평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김영춘(金永春)이다. 1977년
출가하여 남대충의 가르침을 받았고 출가 이후, 단 1번도 드러누운 적이 없다고 한다. 피곤하
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거늘 그는 그 본능을 일찌기 탈피한 것이
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저 신기할 따름.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신도와 승려가
많다.

▲  구인사 어른 승려가 머무는 조실

▲  구인사 대조사전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구인사는 그 형세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황금닭이 알을 품
고 있는 형세의 아주 대단한 명당(明堂) 자리라고 한다. (또는 독수리가 알을 품은 지세라고
도 함) 과연 그래서일까? 구인사의 사세는 끝을 모르고 나날이 번창하여 4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비좁은 산 사이로 길게 들어서 조그만 도시를 이루고 있으며, 승려 수 300여 명, 최대
수용 인원 1만여 명, 거느린 말사(末寺)만 300여 개, 신도 수는 무려 170만을 헤아리는 천하
굴지의 대 사찰(寺刹)이 되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아주 굵직한 절로 성장한 예는 그리 흔
치가 않으니 예사롭지 않은 명당은 분명하다.

구인사는 영춘면 일대에 상당한 논과 밭,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거기서 자체적으로 경작하
여 쌀과 채소 상당수를 충당한다. 신도가 많다보니 수입도 상상을 초월하여 포크레인으로 돈
을 쓸어 담아도 넘쳐날 지경인데 수입과 절을 찾는 신도 수는 전국 절집 가운데 1위가 아닐까
싶다. 오죽하면 단양군의 1년 수입보다 많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있으니 말이다. 제 아무리 팔
만대장경으로 유명한 해인사(海印寺)도, 소원은 다 들어준다며 과대 광고까지 일삼는 팔공산(
八公山)의 갓바위도,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인 서울 조계사(曹溪寺)도 구인사 앞에서는 감히
불전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그 천문학 이상의 재정을 바탕으로 구인사와 천태종은 끝없이 팽창을 한 것이며, 단양에서 구
인사로 이어지는 도로 공사 비용까지 구인사가 전액 부담했다고 한다.

허나 구인사가 들어앉은 지형상 절이 커질수록 자연히 소백산의 피부를 깎아야 되는 문제점이
있다. 구인사의 화려한 발전 뒤에는 소백산의 말없는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대조사전
을 끝으로 더 이상 큰 건물은 지어올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명당이라도 단점은 있게
마련으로 금계포란형 같은 지형에는 무거운 것을 세우면 안된다고 한다. 허나 구인사는 죄다
무거운 것 투성이라 너무 과욕을 부리다가 알이 와장창 깨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흥하기
는 힘들지만 망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다.
또한 구인사를 세우고 천태종을 크게 일으킨 상월원각조사를 기리고 찬양하는 것까지는 좋으
나 그게 너무 지나쳐 부처 이상의 존재로 떠받들고 있고, 경내 남쪽 산자락에는 승려에 걸맞
지 않게 상류층 수준의 그의 무덤(무려 석물까지 갖추고 있음)까지 있어 조금 이질감을 주기
도 한다. 그 무덤을 여기서는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삼아 경내 성지로 애지중지하고 있고,
경내의 가장 높은 곳에는 호화로운 대조사전을 지어 금으로 만든 그의 존상까지 봉안하고 있
어 불교 사찰인지 상월을 중심으로 한 다른 종교의 절인지 햇갈리게 만든다. (삼보당에도 그
의 금동존상이 있음)
게다가 절을 이루는 건물이나 모든 형상이 하나 같이 커서 썩 정감이 가지 않는다. 허나 절이
좁은 산골에 자리해 있고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그들을 수용하고 다양한 공간을 담을 건
물이 여럿 필요하다. 그래서 구인사 스타일의 다층 콘크리트 기와집이 빌딩처럼 들어선 것이
다.

법등(法燈)의 역사가 아직 짧다보니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물이나 불상은 없지만 꽤 많은 불
교문화유산을 수집하여 가지고 있다.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국보 257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74(국보 279호), 묘법연화경(보물 960호), 대방광원각약소주경 권상
의2(보물 1016호), 불설아미타경<언해, 보물 1050호> 등 국가 지정문화재 20여 점과 금동9층
소탑(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09호), 청자발우(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11호), 사경영험(四經靈驗,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10호) 등 지방문화재 30여 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몽골과 중원대륙, 티
벳, 네팔, 인도,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문화유산도 꽤 된다. 이들은 모두 구인사입구에 지어진
불교천태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 불교천태중앙박물관 관람 정보 :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추석과 설날 연휴는 휴관 / 관람비
없음 / 관람시간 9~17시 (평일은 10시부터) /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은 일부
만 전시 공개됨, 전화 043-423-9103>

그 외에 '삼회향(三廻向)놀이'라고 영산재(靈山齋)의 뒷풀이로 행해지는 축제가 있는데 땅설
법이라고 부른다. 이 축제는 충북 지방무형문화재 25호로 불교의식에 우리 민속이 더해진 불
교 행사이다.

깊은 산골에 묻혀있지만 거의 소도시 같은 곳이라 조촐한 산사의 내음과 고즈넉함을 기대하고
왔다면 적지 않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절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둘러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또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사찰이자 단양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주요 관광지로 이곳에 대한 역사와 미술사학적 평가는 후세가 알아서 해줄 것
이다.

※ 구인사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①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제천시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제천역에서 구인사행 제천시내버스 260
  번이 1일 4회 떠난다.
* 단양시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50~60분 간격, 터미널 밖 정류장에서 구인사행 군
  내버스가 1일 8회 다닌다. (군내버스가 시외직행버스보다 버스비가 60% 이상 저렴함)
* 영월읍내(세경대학, 영월터미널, 영월역 서쪽 덕포 정류장)에서 구인사행 군내버스가 1일 5
  회 다닌다.
* 구인사터미널에서 3분 정도 걸으면 관성당을 시작으로 구인사 경내가 펼쳐진다.
②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창원3거리에서 우회전 → 군
  간교3거리에서 좌회전 → 영춘교를 건너 우회전 → 구인사입구 주차장
* 구인사입구 주차장에서 구인사 총무원까지 무료셔틀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총무원까지
  걸어갈 경우 20분 정도 걸림)
* 구인사는 일반인도 며칠 동안 수행/기도가 가능하다. 4박5일을 기본으로 하며, 접수는 구인
  사 총무원 1층에서 한다. (소정의 참가비 있음) 4박5일 기도를 끝낸 사람에 한해 기도실 담
  당 승려의 허락으로 1회(4박 5일) 연장할 수 있다. 또한 교무부 담당 승려의 승인하에 최대
  2~3회 연장이 가능하다.
* 수행/기도 참여자는 간단히 덮을 것과 깔고 앉을 것, 세면도구를 가져와야 되며, 공양시간
  과 기도시간, 휴식시간을 최대한 지켜야 된다.
* 구인사는 휴식형과 체험형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1박에 무려 5만원이며 홍보체험관
  에서 단주와 연꽃, 지화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문의 ☎ 043-420-7397)
*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132-1 (구인사길 73 ☎ 043-423-7100)
* 천태종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보당 옆에서 바라본 관음전, 향적당 주변


 

♠  구인사의 핵심 둘러보기

▲  구인사 관음전(觀音殿)

구인사는 일주문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700m에 이르는 지극히 큰 절이다. (대신 좌우 폭은 짧
음) 일주문에서 향적당까지 이어지는 큰 길을 중심으로 갖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향적당에서 길이 2~3갈래로 갈리다가 광명전에서 모두 합쳐진다.

경내를 걷다보면 완전 한옥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거니는 기분이다. 마치 산속에 숨겨진 비밀
의 도시 같은 기분이랄까? 건물 상당수가 왠만한 단양읍내 건물보다 크고 좁은 산자락에 건물
들이 대량으로 몰려있으며, 매일 수천 명이 절에 머무니 구인사 일대를 따로 읍(邑)으로 삼아
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명칭은 '구인읍'이 좋을 듯, 대신 세금은 넉넉히 낼 것)

삼보당을 바라보고 선 관음전은 3층 규모로 그 3층이 관음전이다. 이름 그대로 청동으로 조성
된 관음보살 누님이 봉안된 건물로 그 규모는 5층 대법당보다는 현저히 작지만 그것보다 작을
뿐이지 다른 절의 법당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덩치가 크다.


▲  구인사 5층 대법당 옥상에 자리한 설법보전(說法寶殿)

관음전 북쪽에는 구인사의 법당(法堂)인 5층대법당이 자리해 있다. 천하에서 가장 큰 법당으
로 최대 5천명까지 수용 가능하며, 그 건물 정상에 실질적인 법당인 설법보전이 자리해 천하
를 굽어본다.
이 건물은 상월원각조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전하는 연화지가 있던 곳으로 1945년 이곳
에 3간 초암(草庵)을 지어 절을 세웠다. 그 초암은 6.25 때 파괴되어 1952년에 재건되었으며
1980년 4월, 그 역사적인 초암을 멀어버리고 지금의 대법당을 지었다. (초암은 자리를 옮겨서
라도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음)
건물이 하도 으리으리하여 5층 전체를 사진 1장에 담기도 벅차며, 설법보전 내부에는 석가불
을 중심으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관음보살이 협시한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설법보전 내부는 경내를 모두 둘러보고 내려가는 중에 잠시 들렸는데 마침 오후 법회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고참 승려와 신참 승려들이 여러 전통 악기를 가져와 30분 동안 승무(僧舞)
와 범패(梵唄)를 노련하게 선보이는데, 천하에 300곳이 넘는 절을 다녔지만 승무와 범패는 이
때 처음 구경했다. 꼬깔을 쓰고 동그란 바라를 치며 신들린 듯, 춤에 열중하는 승려의 모습에
는 정말 박수가 나올 정도로 사진과 동영상으로 담지 못한 것이 참 아쉽기만 하다. 허나 설법
보전 내부는 촬영을 금하고 있어 대놓고 찍기도 힘들다. (49재 행사도 여기서 주로 지냄)


▲  설법보전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관음전과 삼보당 사이에는 일종의 광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광장 남쪽에 향적당(香積堂)이
란 3층짜리 건물이 있다.

향적당은 여러가지 좋은 향기가 담겨있다는 의미로 그 향기란 바로 음식이다. 그러니까 음식
을 먹는 장소, 공양간인 셈이다. 절에서는 부엌을 향적대(香積台)라 부르는데, 1층은 음식을
짓는 부엌이고, 2층은 공양간으로 최대 1,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공양(供養)은 아침과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먹을 수 있는데, 점심 공양은 보통 11
시 반부터 13시까지 제공되며 상황에 따라 30분~1시간 정도 연장 제공되기도 한다. 아침공양
은 6시 반~7시 반, 저녁은 17시 반~22시까지로 구인사에서 재배한 쌀과 채소로 지어진 밥(보
리밥이 나오기도 함)과 국, 김치 등의 나물과 직접 숙성시킨 고추장을 주며 이들 고추장과 나
물을 밥에 비벼서 먹거나 그냥 먹어도 된다.
나름 맛이 있는지라(김치와 국이 괜찮음) 뚝딱 1그릇을 비우고 식기를 반납하여 밖으로 나오
면 길다방 자판기가 여러 대 대기해 커피 1잔의 여유을 권한다. 그들은 공짜가 아닌 300~400
원을 먹여줘야 커피나 코코아를 제공하는데 정 돈을 받아야겠다면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절에
걸맞게 100원만 받아도 충분할 것이다. 절은 중생과 속세를 위해 헌신하는 곳이지 돈을 버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황색 지붕를 지닌 천태종역대조사전(天台宗歷代祖師殿)

지관당(止觀堂) 부근에 '천태종역대조사전'이라는 절 건물 치고는 이름도 무지 긴 2층 건물이
있다.
이 집은 그 이름 그대로 천태종의 역대 고승(高僧)의 진영(眞影)과 존상이 봉안된 곳으로 천
태종 시조인 용수존자(龍樹尊者, 남인도 비달바국 출신)를 비롯해 고려 승려로 송나라로 건너
가 대륙의 천태종을 크게 발전시킨 제관법사(諦觀法師), 우리나라 천태종의 상징이자 고려 문
종(文宗)의 4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중원대륙 천태종의 초조(初祖)인 북제
존자 혜문(北齊尊者 慧門), 중원대륙 천태종의 실질적 개창자인 지자대사(智者大師), 백련결
사 운동을 전개했던 고려 중기 승려인 원묘국사(圓妙國師)와 진정국사(眞靜國師) 등 우리나라
천태종 승려 18명(모두 고려 승려)과 중원대륙 승려 18명 등 36명이 봉안되어 있다.

이 조사전은 2003년 5월에 기공하여 2008년 4월 22일 완공되었는데, 그때 존상 봉안식을 거행
했으며, 건물 면적은 206평, 2층은 조사전, 1층은 승려들의 교육 공간인 강원(講院)으로 쓰인
다.
참고로 중원대륙은 1993년에 대륙 천태종의 총본산인 국청사에 중원대륙 천태종의 개창자, 지
자대사와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 그리고 구인사를 세운 상월원각조사의 존상을
봉안한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中韓天台宗祖師記念堂)을 세웠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간의 천
태종 교류가 활발해지자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심지인 구인사에도 중원처럼 천태종 고승을 기
릴 건물을 세울 필요성이 대두되어 구인사의 위엄을 다시 한번 떨칠 겸, 이렇게 장엄하게 천
태종역대조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곳에 봉안된 36명 중 생전의 모습을 남기지 못한 승려가 꽤 되는지라 그들은 오로지 상상에
맡겨 진영과 존상을 조성했다. (건물 내부는 촬영 금지)


▲  구인사 광명전(光明殿)

대조사전 광장 바로 밑에는 경내에서 가장 큰 광명전이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구인사
의 위엄에 걸맞게 매우 우람한 규모를 자랑하는데 가파른 벼랑을 손질하여 지은 6층짜리 건물
로 내부 면적도 꽤 상당하다. 건물의 밑부분은 불전(佛殿)이라기보다는 회관(會館) 같은 분위
기가 진하며 그나마 윗부분의 겹으로 이루어진 기와지붕이 이 건물도 엄연한 불전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건물이 크다보니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2대나 갖추고 있으며, 절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기는 구
인사가 처음이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지.

광명전은 강당 및 단체 예불 공간으로 몰려드는 수행 신자를 수용하고자 세웠다. 그래서 기도
/수행 신자들이 강당 일대에 많이 머물며 이불 등을 깔고 잠을 청하거나 휴식을 취한다. 또한
그들을 위해 난방을 두둑하게 틀면서 봄날 마냥 따스해 졸음이 스르륵 몰려든다.
(대조사전으로 갈 때는 광명전 엘레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 제일 편함)


▲  광명전 강당 (강당 윗층과 밑층 모두 수행 신자들로 가득함)

▲  광명전 꼭대기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하늘과 한발자국 더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높아진다.

▲  광명전 꼭대기에 자리한 대조사전과 광장

광명전 정상에는 대조사전 광장이 넓게 닦여져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하
늘의 광장 같은 분위기를 진하게 풍기는데 상월원각조사와 남대충 대종사의 탄생 기념 법회와
열반 법회, 대각국사 의천의 탄생 기념 법회 등 구인사의 여러 행사와 축제가 여기서 성대하
게 열린다.


▲  대조사전 광장

▲  대조사전(大祖師殿)의 위엄~~!!

대조사전은 두루마기 옷을 입은 상월원각대조사의 금동존상이 봉안된 곳이다. 구인사에서 그
를 기리는 공간을 세우고자 1985년에 대조사전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단순히 조사전
의 성격에서 벗어나 천태종 부흥의 상징적 역할 및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겠다는 포부까지
듬뿍 넣어 1992년 착공을 시작해 2000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의 총건평 167평, 높이 27m로 이 땅의 목조 건물 중 가장 높다. 구인사의 건물이 모두 콘
크리트 기와집인데 반해 이 건물은 유일하게 나무로만 지어진 것으로 300년 이상 묵은 태백산
춘양목(春陽木) 50만 재를 벌채하여 일체 쇠못을 쓰지 않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었다. 또한 건
물 주춧돌 석재는 이 땅 최고의 돌이라는 강화 애석을 썼으며, 기와는 모두 황금색 기와로 덮
어 장엄함을 높였다. 이들 기와는 1,300도에서 구워 금빛을 영구 보존처리했으며, 단청에 들
어간 순금은 무려 2,700돈, 총 공사비는 자그만치 100억이나 소요되었다.
건물 건립에는 국가무형문화재 74호인 대목장 신응수씨가 도편수를 맡았는데, 그는 궁궐 건축
의 1인자로 광화문(光化門)과 숭례문(남대문) 복원공사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대조사전은 천태종 부흥의 상징적 역할과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빼면 단순히
상월을 위한 건물로 불교의 중심인 석가불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 온갖 보살(菩薩)들이 봉
안된 건물보다 더욱 크고 화려하다. 오래된 절들은 보통 그 절을 세우거나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를 기리는 조사전<祖師殿, 또는 진영각(眞影閣)>을 두기 마련이다. 그 규모는 대체로 법
당보다는 작은 편으로 그들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이 있지, 존상은 없다.
허나 구인사는 그냥 조사전도 아닌 대조사전을 칭하고 있고, 상월의 사진이나 진영도 아닌 금
으로 휘황찬란한 족히 20m는 될 듯한 거대한 존상을 두어 상월을 중심으로 한 다른 종교의 사
원에 들어선 기분이다. 게다가 단청에 엄청난 금을 발랐고, 무려 100억을 들인 건물이라고 하
니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호화로움과 웅장함이 넘치고 흐른다.


 

♠  구인사 마무리

▲  소백산이 빚은 장쾌한 산줄기 구봉팔문(九峰八門)

대조사전 서쪽에는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그곳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나는
처음에는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곳인줄 알았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사리가 담긴 곳이고 그러
다보니 따로 불상을 두지 않는다는 절대진리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 연말에 구인사에
왔을 때 그곳까지 간 기억이 없기에 이번에 몸소 가보기로 했다.

산길 입구에는 산길을 오를 때 쓰라며 나무 지팡이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그냥 오를까 하다
가 손이 허전해 지팡이(나무를 적당히 깎은 것임)를 하나 쥐어들고 산길에 임했다.
처음에는 길이 완만하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각박하게 돌변한다. 산자락에 눈이 많
이 쌓여있으나 성지로 가는 길이다보니 길만큼은 눈에서 해방되어 통행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
으며, 신도들의 발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남쪽을 향해 급하게 펼쳐진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상관은 없으나 보통 왼쪽 길로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는 것이 편하다. 여기서 다시 10
분 정도 더 다리를 부리면 비로소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이른다.
적멸보궁에 닿고 보니 그 흔한 적멸보궁이 아닌 것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적멸보궁의 주인공
은 다름아닌 상월원각조사로 그곳에는 그의 무덤이 자리해 있었다. 무덤은 봉분(封墳)과 양석
(羊石), 상석(床石) 등 여러 석물로 이루어진 제법 비싼 모습인데, 그곳이 구인사의 적멸보궁
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부처의 진신사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인사 창건주의 승탑(僧塔)도 아
니고 제법 잘 꾸며진 무덤이 적멸보궁이라니?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긴 곳을 적멸보궁이라 부
르는 불가(佛家)의 진리도 여기서는 예외인가 보다. 하긴 구인사에서 상월을 부처로 숭상하는
데 그럴만도 하겠지. 참고로 상월은 바로 여기서 인생의 마지막 숨을 쉬며 열반에 들었다고
전한다.

무덤과 적당히 거리를 둔 북쪽에 예불을 올리는 공간을 두었는데, 절을 올리는 신도들로 자리
가 없다. 그리고 그 북쪽에 무덤을 관리하는 건물을 두었고 건물과 예불 장소 옆은 엄청난 각
도의 내리막이라 주의를 요한다.
무덤 일대는 촬영이 통제되어 있어 굳이 담지는 않았다. 무덤 주위로 사람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끔 철조망과 줄을 쳐놓았으며 이곳 역시 기가 막힌 명당이라고 한다. 이렇게 상월의 무
덤이 있으니 당연히 남대충의 무덤도 있다.
그의 무덤은 경내에서 북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남한강 건너(영춘교 서남쪽) 산자락에 자리
해 있는데 그 무덤도 상류층 무덤 수준이다. 이곳은 구인사에서 거리가 좀 있으므로 매일 몇
회 정도 그곳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이곳은 예전에 가봤음)

구인사에서 수행/기도로 머무는 경우 5층대법당과 삼보당, 대조사전, 상월원각조사의 묘역은
매일 둘러봐야 된다고 그런다. (남대충 묘역은 선택 옵션임~) 매일 이들을 둘러보면 다리 하
나는 정말 단단해질 듯.


▲  구봉팔문 전망대

적멸보궁 남쪽에는 구봉팔문전망대가 있다. 묘역 옆으로 난 산길을 3분 정도 가면 그 끝에 전
망대가 달려있는데 전망대라고 해서 무슨 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구봉팔문이 잘 보이
는 언덕배기일뿐, 어떠한 인공시설도 없는 자연산 전망대이다.

구봉팔문은 구인사 남쪽 산줄기를 일컫는다. 영춘면 남천리에서 가곡면까지 5개 리에 걸친 소
백산의 북쪽 지맥이 9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그 사이로 8개의 골짜기가 형성되었는데 그 골짜
기를 봉우리로 인도하는 문으로 비유하여 9봉8문이라 부른다. 그 이름 외에도 옛날에 어떤 승
려가 이곳을 법문(法門)으로 오인해 오르려고 애를 쓰던 곳이라고 하여 법월팔문(法月八門)이
라 불리기도 하며, 상월도 이들 봉우리에 올라 정진에 힘썼다고 전한다.

9봉의 이름은 제1봉부터 아곡문봉, 밤실문봉, 여의생문봉. 뒤시랭이문봉, 덕평문봉. 곰절문봉
, 배골문봉, 귀기문봉, 새발문봉이며, 8문의 이름은 1문부터 아골문안골, 밤실문안골, 여의생
문안골, 덕가락문안골, 곰절문안골, 배골문안골, 귀기문안골, 새발문안골이라 부른다. 이들은
영춘면 남천리와 백자리에서 시작해 국망봉 계곡에서 끝을 맺으며, 곰절문봉을 중심으로 '八'
자 모양을 이룬다. 경관이 매우 뛰어나 제2단양8경의 일원으로 꼽히고 있으나 사람들의 발길
도 쉽지 않은 벽지라 아직은 청정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곳 전망대는 길이 막혀있어 더 이상 가지는 못한다. 그냥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
보듯 구봉팔문을 바라보고 다시 되돌아 나가야 된다. 이곳에 올라서면 정말 바람의 소리가 전
부인 고적한 곳으로 대기도 청정해 속세에 찌든 몸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거 같다. 구인사에
왔다면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이곳 전망대에 올라 소백산의 장대한 기운과 도시에서는 맛
보기 힘든 자연의 멋과 담백한 산정의 기운을 꼭 누리고 가기 바란다.


▲  적멸보궁에서 구인사 경내로 인도하는 산길

▲  구인사 온실 식물원 - 무궁무진한 햇살을 에너지로 삼아 식물원의
식구들을 먹여살린다.


이렇게 적멸보궁 일대를 둘러보고 다시 경내로 내려왔다.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와 달리 길이
쉬워서 금세 대조사전 옆구리에 이르렀다. 잠시나마 함께한 지팡이를 놓아주고 밑으로 내려갔
는데 중간에 5층대법당 설법보전에 들려 오후 법회와 승무, 범패를 구경했다.

설법보전을 끝으로 구인사와의 인연을 싹둑 정리하고 속세로 내려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다되어 가지만 경내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새통이었고, 빠지는 인원만큼 계속해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으니 구인사의 명성과 위엄이 새삼 대단함을 느낀다. 갓바위보다 돈을 더 많이 버
는 절이니 그 수입을 중생과 속세를 위해 과감히 쓰면 좋으련만, 너무 바람직하지 않게 쓰이
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 종교들이 돈을 너무 밝히고 외양 꾸미기에 지나치게 몰두함)

구인사 정류장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곧 동서울로 가는 직행버스와 제천역으로 가는 제천
시내버스가 올 시간이다. 일요일 늦은 오후라 버스를 타면 영동고속도로가 100% 막힐 것이니
제천에서 열차로 상경하기로 하고 제천역으로 가는 제천시내버스 260번에 몸을 실었다.

구인사에서 거의 1시간을 달려 제천역에 도착, 여기서 청량리(淸凉里)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
에 몸을 싣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과거완료형이 되버린 연초의 구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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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이 빚은 단양8경의 으뜸 명승지, 단양 사인암 ~~~ (북상리 시골, 청련암, 남조천)



' 단양 사인암 나들이 '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며 오랜 추위에 지친 천하를 진정시키던 3월 끝 무렵, 친한 후배
와 오랜만에 1박2일 장거리 여행을 나섰다.
렌트카를 이용하여 토요일 아침 8시에 서울을 출발, 백두대간 골짜기에 숨겨진 홍천(洪川
)의 삼봉약수(三峰藥水, ☞ 관련글 보러가기)를 찾아가 몸에 좋다는 탄산약수를 배터지게
섭취했다. 그런 다음 영월(寧越)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저녁 늦게 단양(丹陽)으로 넘어
갔다.

단양은 충북 동쪽 끝에 뉘어진 산간 고을로 나의 외가 동네(단성면 북하리)이다. 서울 다
음으로 오래 머문 곳으로<다 합쳐봐야 1년도 안됨> 지금은 다들 서울과 인천, 경기도, 원
주 등지로 나가고 모친의 작은아버지(나에게는 삼촌뻘~) 가족만 북하리 남쪽인 북상리(北
上里)에 머물며 터전을 지키고 있다. 바로 그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영월읍에서 제천(提川)을 거쳐 가라는 네비양의 안내를 쿨하게 무시하고 남한강을 따라서
고씨동굴, 영춘면, 향산리, 단양읍을 거쳐 저녁 10시가 넘어서 북상리 친척집에 도착했다.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삼겹살로 늦은 저녁을 들고 새벽 4시까지 코가 비뚤어지도록 곡차(
穀茶, 술)를 기울이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곡차의 기운이 몸 속에 진하게 퍼져 이거 아침에 일어날 수나 있겠나 걱정이 들었지만 아
침 9시가 되자 스르륵 잠이 깼다. 천근만근 무거운 두 눈을 비비며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든 다음 10시쯤 그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그곳에 머문 시간은 고작 12시간 남짓, 간
만에 온 것치고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허나 같이 간 후배 때문에 더 머물기도 그랬고 그날 경북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올라가야
되서 다음 인연을 격하게 고대하며 단양 친척집을 떠났다.

단양에서 경북으로 가려면 손쉽게 죽령터널(중앙고속도로)을 통하거나 아니면 사인암, 방
곡리를 거쳐 문경으로 넘어가야 된다. 우리는 쉬운 길 대신 미답로인 문경 방면 고갯길을
택했는데 그 길목에 단양8경의 으뜸인 사인암이 요염하게 버티고 있다.
사인암은 예전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었고 이번에는 경북 지역에 크게 비중을 두었으므로
단양은 하룻밤 머무는 선에서 딱 선을 그으려고 했다. 허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
지나친다고 창밖에서 자꾸 손짓하는 사인암을 애써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나 잘생긴
사인암을 훌쩍 지나치는 것도 마음에 좀 걸리고 요즘 같은 난세(?)에 다음을 흔쾌히 기약
할 수가 없어 그곳에서 잠시 바퀴를 멈추고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  단양8경의 으뜸이자 운선9곡(雲仙九曲)의 아름다운 입술
사인암(舍人岩) -
명승 47호

단양8경(丹陽八景)이란 단양의 이름난 경승지 8곳을 일컫는다. 조선 명종(明宗) 시절, 퇴계 이
황(退溪 李滉)이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는 단양의 명승지 8곳을 뽑아서
단양8경으로 묶으면서 명나라의 소상8경(瀟湘八景)보다 더 아름답다고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했다. 그 단양8경을 이루고 있는 식구로는 도담삼봉(島潭三峯)과 석문(石門), 구담봉(龜潭峯),
옥순봉(玉荀峯),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 등으로 그중 도담3봉과 석문을 제외하고 모
두 옛 단양의 중심지였던 단성(丹城) 주변에 몰려있다. (8곳 중, 5곳만 가봤음)

사인암은 단양8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현장으로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70m 높이의 기암절벽(奇
巖絶壁)이 사인암의 핵심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절벽에 상하 좌우로 균형 있게 줄이 그어
져 있어 마치 천연의 바둑판을 보는 듯 한데 하늘나라의 신선 형님들이 인간들이 자고 있을 때
살포시 내려와 이 절벽을 바로 눕혀 내기바둑을 한판 두고, 하늘로 올라갈 때는 인간들이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끔 하늘을 향해 세워두고 가는 모양이다.
절벽 꼭대기에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닮은 노송(老松)들이 사인암의 운치를 가득 수식하는데,
어찌 저런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혹 바둑판이 비와 눈에
젖을까봐 신선이 심어둔 작은 우산은 아닐까?

이곳은 단양 출신인 고려 후기 대학자, 역동 우탁(易東 禹倬, 1263~1342)이 사인(舍人) 벼슬에
있었을 때 휴양했던 곳이라 전한다. 우탁은 단양우씨 집안으로 원나라에서 들어온 정주학(程朱
學) 서적을 처음으로 터득한 인물인데,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 임제광(林齊光)이 우탁이 머무
른 것을 기리고자 그의 벼슬 이름을 따서 사인암이라 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인 김홍도(金弘道)도 이곳을 다녀가 멋지게 그림으로 남겼고, 많은 시인묵
객들이 찾아와 시문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며 이곳의 절경을 즐겼다.

사인암은 남조천(南造川)을 따라 이어진 운선9곡의 하나로 유리처럼 맑은 남조천의 물이 이곳
을 굽이쳐 흘러 안그래도 절경인 경치에 더욱 윤기를 북돋는다. 사인암 옆에는 고려 때 지어졌
다는 청련암(靑蓮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터를 닦았으며, 사인암 입구에는 1977년 6월 지방 유
림에서 세운 역동우탁기적비(易東禹倬紀績碑)가 서 있다.

예전에는 상선암, 중선암 등에 밀려 좀 한적했으나 서서히 단양의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주변에
음식점과 민박, 펜션 등이 많이 생겨났으며, 시골 북하리와 10여 리 거리로 가까워 외가 친척
들도 자주 놀러왔던 곳이다. 시골과도 꽤 가까운 곳이 분명하건만 시골을 자주 찾았던 어렸을
적에는 이상하게도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고 (상선암과 중선암, 하선암도 못가봤음) 다 장성
한 이후에야 겨우 인연이 닿아 이렇게 2번 인연을 지었다.


▲  사인암 앞을 굽이쳐 흐르는 남조천
남한강을 향해 격하게 흐르던 남조천의 물줄기도 이곳만큼은 서행하여
사인암의 절경을 즐긴다.

▲  남조천에 조성된 타원형 모양의 섬
사인암과 조금 떨어진 남조천 한쪽에 흙과 돌로 대(臺)을 쌓고 역동우탁기적비와
운치가 깊은 소나무3그루를 심었다. 남조천 물줄기 틈에 자리해 있어
사인암 속의 조그만 섬을 이루고 있다.

▲  역동우탁기적비 주변에서 바라본 남조천과 사인암

▲  남조천에 사뿐히 걸린 구름다리

▲  우탁의 시를 머금은 커다란 표석

▶ 춘산에 눈 녹인 바람 ◀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듸 업다
져근 덧 비러다가 마리 우희 불니고져
귀 밋태 해묵은 셔리랄 녹여볼가 하노라

☞ 봄 산에 쌓인 눈을 녹인 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가 간 곳이 없다.
잠시 동안 (그 봄바람을)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봄 바람을 이용해 자신의 젊음을 되찾고 싶은 우탁 할배의 부질없는 꿈을 담은 시,
나이를 먹는 것 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래서 노인들이 좋아하는 폭포가
'미대륙에 있는 나이아가라'폭포라고??)

▲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사인암
그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사인암의 모습도 조금씩 달리 보인다.

▲  바로 건너편에서 바라본 사인암의 위엄

예전 사인암을 찾았을 때(친척들과 같이 갔음)는 정작 사인암 건너편은 가지 않았다. 그 건너
편에서 바로 정면으로 그를 대하니 정말 대자연 형님의 위대한 작품성이 느껴진다. 마치 바둑
판을 하늘로 향해 곧게 세운 듯한 모습, 절벽 꼭대기에 소나무들이 운치를 뽐내며 절벽의 우산
이 되어주는 모습 등 그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선보이며 1폭의 그림 같은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대단하다 설친들 저런 작품은 감히 흉내내지 못할 것이다.


▲  사인암 건너편에서 바라본 청련암


 

♠  사인암에 안긴 조그만 절집, 보기와 달리 깊은 역사를 지닌
청련암(靑蓮庵)


▲  사립문이 활짝 열린 청련암

사인암 옆구리에는 청련암이란 조그만 절집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런 곳에 왠 절이 있나? 싶
을 정도로 좀 쌩뚱맞기도 한데 얼핏보면 근래 지어진 절로 생각하기 쉬우나 현실은 제법 오래
된 절이다.

청련암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의 말사(末寺)로 1373년(공민왕 22년)에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허나 신빙성은 그리 없어 보이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710년에 중창하
여 청련암이라 했다고 한다.
원래는 여기서 가까운 대강면 황정리 산28번지에 있었는데, 그 부근에 있었다는 대흥사(大興寺
)의 말사로 있었다. 허나 그 대흥사는 19세기 후반 의병(義兵)과 왜군과의 싸움에서 파괴되었
고, 1954년 소백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황정리 일대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지자 청련암도 부
득이 방을 빼야 되서 절의 대들보와 기둥을 들고 사인암 옆에 새롭게 터를 닦았다.

청련암은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는 조촐한 암자로 법당인 극락전과 옛 법당, 삼성각, 요
사 등이 전부이다. 2013년 4월 새 극락전을 만들어 법당으로 삼았으며, 옛날의 유물로는 18세
기에 조성된 목조보살좌상이 있다.
사인암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있어 사인암에 온 사람들은 무조건 절에 발을 들이기 마
련이다. 절을 거쳐야만 사인암의 뒷통수로 올라갈 수 있으며, 사인암과 청련암이 완전히 한 덩
어리가 되어 생사고락을 같이한다. 사인암 방문객이 늘면 자연히 절을 찾는 발길도 정비례할
수 밖에 없으니 정말 자리 하나는 잘 잡았다. (당시 주지승의 혜안이 참 놀라울 따름!) 사인암
이 건재하는 동안은 청련암은 결코 법등(法燈)이 마를 날이 없을 테니 말이다.


▲  청련암 경내와 사인암의 옆구리

▲  청련암 극락보전(極樂寶殿)

경내로 들어서면 옛 법당 직전에 극락보전이 산듯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2013년 4월에 지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새 건물
로 경내 제일의 보물인 목조보살좌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건물 내부를 살피지 않고 그냥 지나
쳐버려 목조보살좌상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냥 옛 법당에 계속 있는 줄 알았음


▲  예전에 담은 청련암 목조보살좌상(木彫菩薩坐像)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09호

청련암 목조보살좌상은 원래 청련암 법당에 봉안되었던 아미타3존불의 구성원인 대세지보살상
(大勢至菩薩像)이다. 1954년 이곳으로 절을 옮기는 과정에서 그만 본존불(本尊佛)을 잃어버렸
으며,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은 엉뚱하게 제천 원각사로 넘어가고 대세지보살상만 간신히 수
습하여 가져왔다. 그래서 협시불이 본존불로 출세하여 불단 중앙에 홀로 봉안된 것이다. 또한
그의 뱃속에서는 여러 복장(腹臟)유물이 나왔으나 근래 도난당하고 말았다.
불상에 입혀진 도금을 벗기고 새로 개금(改金)을 했을 때 목불(木佛)의 형태를 확인했으며 은
행나무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청련암의 옛 유물로 1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절 충청도 지역 불상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보살상의 모습을 보면 마치 어린 동자가 관음보살의 탈을 쓰고 대신 앉아있는 것 같다. 동자와
같은 귀여움과 해맑은 미소가 진하게 드리워진 그의 표정은 너무 밝아 보는 이의 눈을 눈부시
게 하니 사인암과 청련암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도 그의 표정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냥 돌아갈 것이다.


▲  석불좌상과 옛 법당

극락전으로 쓰인 옛 법당은 법당의 품격과는 좀 거리가 있는 여염집 모습으로 새로운 극락보전
이 지어지자 법당에서 물러나 평범한 신세가 되었다. 현재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목조
보살좌상은 새 극락보전으로 옮겨 청련암 중심 불상의 업무를 계속 수행한다. (이들 불상의 위
치는 절의 사정상 바뀔 수도 있음)
옛 법당 앞에는 조그만 석불좌상이 자리해 있는데, 원래 새 극락보전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옛 법당에 봉안된 석가3존불

▲  옛 법당에서 바라본 청련암 경내


▲  물이 넘치는 연꽃무늬 석조(石槽)
사인암이 중생들에게 베푼 소중한 옥계수로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몸과 마음이 시원해진다.

▲  우탁의 탄로가(嘆老歌)를 머금은 표석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은 늙음을 탄식하는 시를 여럿 남겼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탄로가이다. 아무리 발버
둥을 치며 피부와 건강에 힘써도 세월은 자꾸만 흐르고 자신도 강제로 늙어만 가니 정말 무서
운 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30대의 끝 무렵을 달리고 있지만 탄로가의 시 앞에 무책임하게 나이나 처묵처묵하고 있는
내 모습에 정말 열불이 난다. 물론 나이는 강제로 먹는 것이니 거절을 해도 소용은 없다. 아직
까지는 젊다고 자부를 하지만 빛의 속도로 내달리는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신선 세계의
하루는 인간 세상의 몇십~몇백년이라고 하는데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 같다.


▲  탄로가 표석에서 바라본 남조천과 구름다리
단양은 소백산맥에 묻힌 산골이라 봄과 여름은 늦게 오고 겨울은 일찍 온다.
날은 조금씩 따스함이 더해지고 있으나 비록 힘은 잃었지만 아직까지는
겨울 제국의 세력이 적지 않게 남아있어 아직까지 제국의 눈치를 본다.
허나 곧 소쩍새가 울 때면 지긋지긋한 겨울을 완전히 떨쳐내며
다들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사인암의 뒷통수로 오르는 계단길

어떻게 경사도 꽤 각박한 사인암 뒷통수에 감히 건물을 올릴 생각을 했을까? 청련암 주지승의
기발한 생각<사인암 입장에서는 좀 고달프겠지만>으로 궁색한 자리를 극복하여 좁게나마 터를
다지고 삼성각을 지어 속세를 향해 계단을 늘어뜨렸다. 이로 인해 사인암이 삼성각을 업고 있
는 모습이 되었다.
삼성각으로 인도하는 계단은 보기와 달리 상당히 거칠고 고르지가 못해 오르락내리락 할 때 주
의가 필요하다. 예전에는 삼성각 뒤쪽을 통해 사인암 정상으로 오를 수 있었으나 사인암의 건
강과 안전 문제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애써 오르지 않도록 하며 사인암에 왔다면 삼성각에
꼭 올라가보도록 하자. 이곳을 지나쳤다면 사인암의 거의 절반을 놓친거나 다름이 없다.


▲  사인암 뒤쪽 바위 틈에 둥지를 튼 푸른 머리의 삼성각(三聖閣)
이 건물은 예전 칠성각(七星閣)으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이 봉안되어 있다.

▲  삼성각 중앙에 자리한 칠성탱과 석가불

▲  삼성각 독성탱

◀  삼성각 산신탱


▲  삼성각 우측 바위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바위글씨 '퇴장(退藏)'

사인암의 명성이 멀리 우주 밖까지 전해진 것일까? 너무 유별나게 휘갈겨진 글씨가 바위 피부
에 새겨져 있어 그 정체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허나 그는 외계인의 글씨가 아닌 한
자의 일종인 전서체(篆書體)로 쓰인 '退藏(퇴장, 스스로 물러나 숨는다)'이란 글씨로 조선 전
기에 판교종사<判敎宗師, 불교 교종(敎宗)의 우두머리>를 지낸 운수의 낙관으로 추정될 뿐 확
실한 것은 없다.


▲  삼성각 맞은편 낭떠러지 위에 중생들이 쌓아올린 조그만 돌탑들이
그들의 소망을 머금으며 조촐하게 보금자리를 이룬다. 이곳은
막다른 바위로 바로 밑이 벼랑이니 조심하기 바란다.


▲  삼성각 북쪽 벼랑

▲  삼성각에서 바라본 계단 밑부분과 청련암

이렇게 1시간 동안 사인암과 청련암 세트를 둘러보고 정든 단양 땅에서 퇴장하여 경북 문경 땅
으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예천 명봉사(鳴鳳寺)에 가려고 했으나 전날부터 여러 곳의 절을 들린
상태라 후배는 다른 데로 가자고 정색을 한다. (절을 좋아하는 후배임)
그래서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천하의 마지막 주막으로 명성이 높은 예천 삼강주막(三江酒幕)
을 둘러보고 속리산 동쪽 자락에 안긴 여러 폭포를 탐방하기로 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흔쾌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 단양 사인암 찾아가기 (2017년 8월 기준)

① 단양까지
* 동서울터미널에서 단양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청량리역에서 단양행 열차가 1일 8~9회 떠난다. (양평, 원주 경유)
* 안산, 원주, 청주, 영주, 안동, 대구(북부)에서 단양행 직행버스 이용
* 부산 부전역, 태화강역, 경주역, 영천역,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 이용
* 대전역, 오송역, 청주역에서 영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1일 2회 운행)

② 현지 교통

* 단양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부근 고수대교 종점, 단양역 입구(단양역3거리 북쪽)에서 사인암
  방면 군내버스 이용 (1일 14회 운행, 대강 경유)

③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중앙고속도로 → 단양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장림4거리에서 좌회전 → 사인암(청련암)


* 사인암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산27 (청련암 ☎ 043-422-1330)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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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8월 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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