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17건

  1. 2024.03.01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산동반도 청도(칭따오) <절강로천주교당, 잔교와 회란각, 소어산공원, 칭따오맥주박물관>
  2. 2024.02.17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구역, 후원 돌담길 겨울 나들이 <중앙고 본관, 창덕궁 후원 뒷길, 옥류정>
  3. 2024.02.06 서라벌 경주의 꿀명소, 경주 남산 나들이 <염불사지, 봉화골, 칠불암, 칠불암 마애불상군>
  4. 2024.01.28 설악산 백담사, 수렴동계곡, 영시암 겨울 나들이
  5. 2024.01.14 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 용마산~아차산~망우산 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용마산1보루, 용마산5보루, 망우산1보루>
  6. 2024.01.05 우리나라 최초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당, 여수 충민사 <마래산 석천사>
  7. 2023.12.27 임진강을 건너 찾아간 통한의 땅, 파주 민통선(DMZ) 겨울 나들이 <임진각관광지, 자유의다리, 도라산역, 도라산전망대, 제3땅굴, 통일촌>
  8. 2023.12.17 북악산 북쪽 자락에 깃든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9. 2023.12.05 부산의 소금강, 금정산 금강공원 겨울 나들이 <동래온천 온정개건비,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10. 2023.11.25 망우리공동묘지를 거닐다. 망우산~망우역사문화공원~구리둘레길 늦가을 나들이 (사색의길, 태허 유상규묘, 망우산3보루, 오세창묘, 방정환묘)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산동반도 청도(칭따오) <절강로천주교당, 잔교와 회란각, 소어산공원, 칭따오맥주박물관>

산동반도 청도 (절강로천주교당, 잔교, 소어산공원, 칭따오맥주박물관)



' 산동반도 청도(칭따오) 여름 나들이 '

소어산공원 남조각에서 바라본 청도(칭따오) 시내
▲  소어산공원 남조각에서 바라본 청도(칭따오) 시내

절강로천주교당 잔교공원에서 바라본 잔교

▲  절강로천주교당

▲  청도 잔교

 



 

여름 제국의 위엄이 막바지에 이르던 8월의 끝 무렵, 서해바다 너머에 자리한 산동반도
<山東半島, 산동성(山東省)>를 찾았다.

중원대륙의 일원인 산동반도는 고조선(古朝鮮)과 백제(百濟),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李
正己)의 제(濟), 그리고 신라와 발해의 후손 및 여진족이 세운 금(金)이 다스렸던 우리
의 옛 영역으로 우리 귀에도 꽤 익은 동이족 출신에 공자와 맹자, 강태공(姜太公)이 활
동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또한 신라가 산동반도와 중원대륙에 많은 해안 지역을 장악하
여 큰 세력을 일구었다. <그 흔적이 신라방(新羅坊)> 그만큼 산동반도는 우리와 인연이
각별한 곳이다.
하지만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지금은 중국이라 불리는 중공(中共, 중화인민공화국
)이란 이상한 공산국가가 거저 차지하여 꿀을 빨고 있는데, 비록 남의 땅으로 전락하긴
했으나 언젠가는 반드시 되찾아 영유해야 될 땅이다.

이번 산동반도 나들이는 3박4일 일정으로 내 생애 첫 중원대륙 나들이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아침 일찍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로 이동, 일행들과 중공
국적의 산동항공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 정도를 비행해 산동성의 중심 도시인 제남(濟
南, 지난)에 도착했다.
제남 시내에서 표돌천과 대명호 등을 둘러보고 제녕(濟寧, 지닝)으로 이동하여 곡부(曲
阜, 취푸)의 공자(孔子) 유적(공묘, 공부, 공림), 추성(鄒城, 쩌우청)의 맹자(孟子) 유
적(맹묘, 맹부, 맹림)으로 둘째 날을 배불리 채우고 태안(泰安, 타이안)으로 넘어갔다.

태안에서는 중원대륙 오악(五嶽)의 중심 산인 태산(泰山, 타이산)과 대묘(岱廟, 다미먀
오)로 셋째 날 여로를 채우고 청도(靑島, 칭따오)로 이동했는데, 태산에서 청도 중심부
까지는 400km가 넘는 거리라 바로 넘어가지 않고 그 중간인 유방(潍坊, 웨이팡)시내 호
텔에서 1박을 했다. (제남과 곡부, 추성, 태산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음)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호텔 조식을 섭취하고 2시간을 더 달려 청도 시내의 중심부인 시
남구(市南區, 스난구)에 이르렀다. 바로 이곳이 이번 산동반도 나들이의 마지막 메뉴로
청도 시내에 대표적인 명소들은 상당수 시남구 지역에 몰려 있다.



 

♠  독일이 산동반도 통치 시기에 세운 20세기 초기 성당
절강로천주교당(浙江路天主教堂)

▲  절강로천주교당 입구 주변
성당으로 인도하는 길 좌우로 식당과 숙박업소,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산동반도 남쪽에 자리한 청도(칭따오)는 중공에서 4번째로 큰 항구 도시이다. 산동성의 대표
적인 항구 산업도시로 산동성 지방정부와 동등한 경제권을 지니고 있는데, 7개의 구와 5개의
시(市), 900만 정도의 인구를 지니고 있다.
역사가 나름 오래된 해안 도시로 옛 조선(고조선)과 백제, 신라, 금이 이곳을 다스렸으며, 백
제 때는 성양(城陽)이라 불렸는데, 백제 제왕이 성양태수(太守)를 임명해 파견했다는 기록이
여실히 전하고 있다. <청도시에 '성양구'가 있음> 금이 사라진 이후 작은 어촌으로 머물러 있
다가 1891년 여진족(만주족)의 청나라가 군사시설을 닦으면서 다시금 존재감을 드러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운이 좋게 승리한 왜(倭)는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으로 요동반도를 거
저 먹으려고 했으나 러시아와 독일, 영국이 태클을 건 이른바 삼국간섭(三國干涉, 1895년)으
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독일은 청나라를 도와준 대가로 1897년 청도 지역을 조차지(租
借地)로 얻게 된다.
독일은 청도를 극동 근거지로 삼이 크게 키웠고, 이곳을 발판으로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다.
청도 중심지에는 19세기 말~20세기 초반 서양식 건물이 많이 전하고 있어 일명 '중공 속의 유
럽'으로 통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독일이 이 지역을 잠깐 차지하면서 남긴 것들이다.


▲  하늘을 찌르는 절강로천주교당의 위엄

청도 중심부인 시남구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절강로(저장루)천주교당이다. 그는 절강로와
비성로가 만나는 곳 언덕에 자리한 아주 큰 성당으로 독일이 1932년에 짓기 시작해 1934년에
완성을 보았다.
그 시절 독일의 큰 자부심과 저력이 고스란히 깃든 곳으로 주황색 지붕을 지닌 쌍둥이 첨탑(
종탑)을 하늘 높이 내밀고 있는데, 강철과 벽돌의 혼합 골조로 외장은 황색 화강암으로 지었
다. 성당 면적은 2,470㎡, 본당 길이 80m, 본당 내부 천장 18m, 종탑까지 높이 56m, 탑 끝에
매달린 십자가는 4.5m로 총 높이는 60m에 이른다.
본당의 수용 인원은 1,000명으로 뒤쪽에 큰 제단이 2개 있고, 좌우 아래쪽에 대칭형으로 작은
제단 2개가 있으며, 위쪽 돔형 천장에는 아름다운 성화(聖畵)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종탑 종
루 안에는 4개의 큰 종이 있다.

중공의 천박한 개짓거리인 문화대혁명('문화대
학살'이라 읽는다) 시절에 상당 부분이 파괴되
는 고통을 겪었으며, 1980년 청도시에서 비용
을 지원하여 1981년에 복원되었다.
이때 문화대혁명(학살) 시절에 파괴된 십자가
를 찾아서 언덕에 묻었으며, 1982년 4월 부활
절에 속세에 정식 개방되어 자유의 공간이 되
었다.

▲  밑에서 바라본 절강로천주교당

 

주황색 지붕과 첨탑, 하얀색과 누런색 피부가 조화를 이루는 예술적인 성당으로 주변에 독일
이 심어놓은 서양식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하여 잠시나
마 유럽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성당 둘레로는 조약돌길이 닦여져 있으며, 청
도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봐야 되는 청도의
대표급 명소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다. 특히
신혼부부와 예비부부들이 결혼 사진을 찍는 명
소로 쓸데없이 유명한데, 우리가 갔을 때도 결
혼 사진을 찍는 중공 애들로 완전 난장판을 이
루었다.
자유의 공간인 바깥과 달리 펜스가 둘러진 성
당 안쪽과 내부는 유료의 공간이라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다. 입장료는 그리 각박한
편은 아니지만 딱히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
어서 이렇게 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성당 개방시간 8~17시, 일요일 9~17시)

◀  정면에서 바라본 절강로천주교당
성당이 얼마나 큰지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개미 떼로 만들어버린다.


▲  절강로천주교당 옆에 자리한 20세기 초기 독일 건물
천주교당 주변에는 독일이 심어놓은 건물이 즐비해 작은 유럽을 방불케 한다.



 

♠  청도의 오랜 상징물이자 19세기 근대 유적
잔교(棧橋, 짠치아오)

▲  바다를 향해 길게 팔을 뻗은 잔교

절강로천주교당을 둘러보고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중산로로 들어섰다. 이곳은 먹자골목이 크게
형성되어 있어 늘 북새통을 이루는데, 그런 인파를 비집고 10분 정도 가면 시원스런 서해바다
와 함께 청도의 오랜 상징물이자 필수 관광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잔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남구 앞바다인 회천만(匯泉灣)에 자리한 잔교는 1891년 청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면서 지어
졌다. 육지 쪽은 둑, 회란각 쪽은 다리 형태로 지어진 둑과 다리가 혼합된 형태로 1931년 해
군 전함을 정박시키고자 크게 증축되었는데, 잔교의 길이는 440m, 폭 10m로 다리 양쪽에는 난
간을 두르고 연꽃무늬 램프를 두었으며, 근처 부두에 원형 방파제가 있어 이 일대 파도를 막
아주는 역할을 했다.
청도시에서 1984년과 1998년에 전면 보수를 벌였으며, 이때 화강암을 사용해 견고하게 다지면
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둑과 다리의 폭을 넓히고 램프 12개를 설치했으며, 그
로 인해 원형을 크게 잃었다.

잔교 끝에는 황금색 유리기와를 눌러쓴 2층짜리 회란각(回瀾閣. 후이란거)이 있어 잔교의 상
큼한 장식물이 되어주고 있는데, 칭따오맥주를 보면 2층짜리 기와집이 그려져 있다. 그 기와
집이 바로 잔교 회란각이다.


▲  잔교의 어렸을 적 사진 (20세기 초/중기)

▲  잔교 해변에서 바라본 잔교와 회란각

▲  잔교 동쪽 해변(잔교공원)
잔교 주변에는 모래사장을 지닌 작은 해변이 펼쳐져 있다. 잔교를 포함한
해변 일대는 잔교공원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잔교 관광객과 해변
피서객들이 뒤엉켜 시장통을 이룬다.

▲  잔교 서쪽 해변(잔교공원)
해변 백사장은 피서삼매에 빠진 중공 애들로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오늘도 크게 고통받는 우리의 서해바다(황해바다).

▲  회란각 서쪽 둑에서 바라본 잔교

▲  회란각 동쪽 둑에서 바라본 잔교

잔교를 건너는 인파들로 잔교를 이루는 다리와 둑이 거의 무너질 지경이다. 사람이 그냥 많은
것이 아닌 너무 미치도록 많다.


▲  잔교에서 바라본 잔교공원 동쪽 해변

▲  잔교의 끝을 잡고 있는 회란각

잔교는 무료의 공간이나 정작 회란각 내부는 별도의 입장료를 뜯는다. 앞서 절강로천주교당도
그렇고 무료로 해방해도 충분한 곳을 금줄을 치고 돈을 받아먹으니 역시나 돈에 환장한 청도
시와 사이비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중공 정부답다. (회란각 내부는 딱히 볼거리도 없으며, 내
부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음)


▲  회란각 서쪽 둑

회란각 서쪽과 동쪽 둑에는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이들은 배를 정박하던 곳이나 이제
는 바다를 구경하거나 해조음을 듣는 곳으로 조용히 살아간다. 수심이 깊은 곳이나 내가 갔을
때는 수영복 차림에 지역 작자 하나가 홀로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있었다. 수영을 하
려면 잔교공원 백사장에서 하면 될 것을 굳이 이런 곳에서 요란법석을 떨어야 했는지 정말 의
문이다. 심지어 회란각 동쪽 둑에서는 살짝 소변을 보는 작자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역시나
중공 애들의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는다. (잔교 관리인도 제재를 하지 않았음)


▲  회란각 동쪽 둑

▲  회란각에서 바라본 서쪽 바다 (회천만) ①
회천만 해변에는 가지각색의 고층빌딩이 즐비하여 산동반도 제일의
항구, 산업, 해양관광도시로서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준다.

▲  회란각에서 바라본 서쪽 바다 (회천만) ②

▲  잔교 서남쪽 바다 (회천만)
바다 멀리 보이는 곳은 청도 지역의 서남쪽을 이루고 있는
황도구(黃島區, 황다오구) 지역이다.

▲  평화로운 모습의 잔교 동쪽 바다

▲  잔교공원 북쪽에서 만난 서양식 근대 건축물



 

♠  청도 중심부의 지붕이자 일품 조망 명소
소어산공원(小魚山公園, 샤오위산궁위엔)

▲  소어산공원 정문(북문)

사람들로 오지게 복잡한 잔교를 벗어나 전용버스를 타고 부근에 자리한 소어산공원으로 이동
했다.
소어산공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소어산은 해발 60m의 낮은 뫼로 청도 시남구의 대표 지붕이다.
청도 도심의 유명 명소로 늙은 명소나 특별한 볼거리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니나 청도 도심(시
남구 지역)과 앞바다(회천만)가 시원스럽게 바라보이는 일품 조망을 지니고 있다. 즉 청도 도
심과 앞바다 조망을 위해 준비된 곳이다.

남쪽으로 시남구 앞바다인 회천만(匯泉灣), 북쪽으로 팔관산(八關山)과 이어져 있으며, 예전
에는 아문산(衙門山)이라 불렸으나 1922년 산 주위로 '어산로(魚山路)'란 길이 닦이면서 작은
물고기를 뜻하는 소어산으로 이름이 갈렸다.
1984년 청도시에서 이곳에 공원을 씌워 소어산공원이라 했으며, 공원 정상에는 8각3층정자인
18m 높이의 남조각을 비롯해 벽파정, 옹취정 등의 정자가 닦여져 조촐하게 쉼터 역할을 한다.
조그만 뒷동산공원으로 조망 외에는 볼거리가 빈약하나 그럼에도 입장료를 뜯고 있으며, 관람
시간은 8시부터 17시까지이다. (관람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


▲  녹음이 깃든 소어산공원 산책로 (정문에서 남조각 방향)

▲  소어산공원에서 바라본 시남구 지역 (서쪽 방향)

중공 애들은 청도를 두고 '홍와녹수남천벽해(紅瓦綠樹藍天碧海)' 즉 붉은 지붕과 녹색 숲, 푸
른 하늘, 파란 바다의 도시라고 한다. 소어산공원에 올라서 청도 시내를 바라보면 그 말이 그
리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공원 주변으로 붉은 지붕을 지닌 집들과 푸른 숲이 꽤 포진해 있는데, 붉은 지붕의 건물 중에
는 20세기 초/중기 것도 많지만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지어진 것도 제법 된다. 이는 이곳만
의 독특한 풍경을 최대한 살리려는 청도시의 정책 때문이다.

▲  푸른 기와지붕을 눌러쓰며 천하를
굽어보는 벽파정(碧波亭)

▲  녹색 지붕을 지닌 옹취정(擁翠亭)과
'ㄷ'구조의 회랑

      ◀  하늘 높이 솟은 남조각(覽潮閣)
소어산 정상에 자리한 남조각은 3층8각의 기와
건물로 높이는 18m이다. 소어산공원의 상징적
인 존재로 3층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저곳에
서 바라보는 조망이 아주 일품이니 꼭 올라가
보자.


▲  남조각에서 바라본 회천만과 청도제1해수욕장
같은 서해바다임에도 우리 본토는 갯벌과 조석 간만의 차이가 커서 종잡을 수가
없지만 산동반도 해변은 우리의 동해/남해바다 같은 모습이다.

▲  확대해서 바라본 청도제1해수욕장 주변
부산 해운대나 광안리 해변의 축소판 같다.

▲  남조각 조망 중 가장 백미로 통하는 서쪽 방향 (잔교 방향)
붉은 지붕 집들로 가득한 언덕 너머로 회천만과 잔교, 시남구의
키다리 빌딩들이 앞다투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빨간 지붕의 물결, 남조각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팔관산 방향)

▲  남조각에서 바라본 동쪽 방향 (바로 밑에 보이는 정자는 옹취정)

▲  남조각에서 바라본 서남쪽 방향
회천만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황도구(황다오구) 지역이다.

◀  옹취정 벽에 새겨진 물고기 형상
소어산이란 작은 물고기를 뜻한다. 하여
산 이름에 걸맞게 물고기 2마리를
귀엽게 포장하여 새겼다.

▲  남조각에 걸린 그림 같은 사진
남조각에서 바라본 잔교와 회천만 주변
풍경이다.

▲  소어산공원을 마무리 짓다
(소어산공원 정문 안쪽)



 

♠  청따오맥주의 생산 현장이자 천하 제일의 맥주박물관
칭따오맥주박물관<비주박물관(啤酒博物館)>

▲  칭따오맥주박물관으로 살아가고 있는 옛 공장 건물

소어산공원을 둘러보고 시남구 북부에 자리한 칭따오맥주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원래는 팔대관
(八大關, 빠따관)을 가려고 했으나 기왕 칭따오맥주의 고장인 청도에 왔으니 칭따오맥주박물
관을 보자는 의견이 커서 그곳으로 변경했다.

천하 맥주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칭따오맥주는 맥주 전문가인 독일 애들이 만든 것으로 1903
년 청도에 붉은 피부의 맥주공장을 세워 독일식의 맥주를 내놓은 것이 그 시작이다. 독일은
그들의 맥주 제조기술을 이곳에 아낌없이 풀어놓았는데, 맥주 제조에 필요한 물은 청도 시내
동쪽에 있는 노산(崂山, 라오산)의 지하 100m에서 소환했다.
독일이 물러나면서 맥주공장은 중공이 거저 꿀꺽했으며 그들의 맥주 제조기술까지 꿀꺽해 단
단히 재미를 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중공은 땅부터 해서 거의 모든 것을 거저 꿀꺽했다. 그
러면서도 하는 짓거리는 완전 소인배보다 더하니 그 너른 땅덩어리가 아깝다.

2001년에 기존의 맥주공장을 손질해 칭따오맥주박물관을 열었는데, 청도의 대표 명소이자 천
하 맥주박물관의 대표 성지(聖地)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으며, 칭따오맥주의 100년 역사와 문
화, 생산공예, 다기능구역 등 3개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미니어처 등으로 맥주 제조
과정과 여러 제조 장비들, 세계 여러 나라의 맥주를 다루고 있다.

맥주박물관은 유료 공간으로 비싼 입장료를 뜯고 있으며, 관람객들에게는 칭따오맥주와 안주
를 무료로 제공하나 양은 매우 적다. 그리고 맥주를 빚으면서 만든 찌꺼기 같은 것도 주는데
맛이 좋다.
매년 8월 중순에는 2주 정도 칭따오 맥주축제가 열리는데, 이때 세계 20여 개 맥주회사가 참
여하며, 다양한 공연과 불꽃놀이, 맥주마시기 대회 등이 열린다.

그렇게 명성이 자자한 맥주이건만 2023년 가을, 공장 일꾼이 맥주 제조 현장에 수시로 소변을
갈긴 사실이 드러나 온 천하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로 인해 칭따오맥주는 소비량이
폭풍 감소했고, 이미지도 완전 개판에 똥판 수준이 되었다.
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 칭따오맥주도 가끔 찾는 편이었는데, 그 사건으로 칭따오맥주를
쓰레기 맥주로 간주해 내 데이터에서 완전히 지웠다. 아무리 맥주가 고프더라도 속세에 크게
실망감을 준 그런 맥주를 절대로 가깝게 대하면 안된다.

▲  칭따오맥주 공장 건물

▲  유럽식으로 산뜻하게 지어진
칭따오맥주 공장 본관

 ▲  맥주박물관 앞에 있는 재미난 조형물

▲  칭따오맥주박물관 현관에 걸린
청도비주(청도맥주) 간판


▲  1903을 강조한 옛 공장 건물 (1903은 칭따오맥주의 탄생 연도)

맥주박물관으로 살아가는 옛 공장 건물은 붉은 피부의 벽돌집으로 푸른 담쟁이덩굴을 걸치고
있어 고색의 내음을 크게 풍긴다. 박물관이긴 하나 맥주공장의 역할도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


▲  1930년대 맥주 제조 과정 (맥주박물관 내부)

▲  칭따오맥주병 제조 과정

▲  맥주박물관 전시실 내부


▲  지금도 한참 움직이고 있는 맥주박물관 내부 맥주병 가동 공간
여기서 생산된 맥주병은 소변 사건으로 얼룩진 칭따오맥주를 머금고
중원대륙은 물론 다른 나라로 팔려나간다.

▲  무수히 생산되는 칭따오맥주의 위엄 ①

▲  무수히 생산되는 칭따오맥주의 위엄 ②

▲  칭따오맥주박물관 쉼터

맥주박물관 관람의 마지막 공간은 술집 스타일의 쉼터이다. 이곳에 이르면 칭따오맥주와 안주
를 벼룩의 간 수준으로 제공하는데, 더 먹고 싶다면 돈을 건네고 사먹어야 된다. (칭따오맥주
병과 캔맥주를 판매하고 있음)
박물관 내부는 사람이 오지게 많고, 공간이 다소 어두웠으며, 관람시간을 너무 촉박하게 줘서
사진에 별로 담지 못했다. 그 점이 실로 안타까웠지만 나에게는 일정을 조정할 칼자루가 없었
다.

쉼터에서 맥주와 안주를 간단히 들고 콩 볶듯이 밖으로 나와 1시간 남짓 머문 칭따오맥주박물
관과 작별을 고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자 전용버스를 타고 시남구 동부에 있는 경복궁(景福宮
, 징후공)이란 한식당으로 이동했는데, 제남에 도착한 첫날부터 오늘까지 4일 동안 호텔뷔페
를 포함해 중원대륙 음식을 섭취했다. 음식의 절반 이상은 입맛에 맞아서 둘째 날까지는 열심
히 잘 먹었으나 셋째 날부터는 느끼하고 물려서 정말 먹기가 싫었다. 솔직히 냄새도 맡기 싫
을 정도였지. 하여 셋째 날 저녁과 넷째 날 호텔 조식은 거의 대충 먹었다.
그런 상태에서 경복궁에서 먹은 한식은 그야말로 빛과 소금이었다. 여기서는 김치찌개와 파전
을 먹었는데, 반찬도 우리가 흔히 먹는 것들이 나왔다. 중원대륙 음식에 제대로 지쳐있던 차
에 얼마나 입맛에 착착 맞았는지 밥을 무려 2그릇이나 비웠고, 반찬도 싹싹 긁어먹었다. 여기
서 먹은 한식으로 몸이 완전히 해독이 된 기분이다.


▲  한식당 경복궁에서 섭취한 칭따오맥주

즐겁게 점심을 먹고 시남구 시내를 가로질러 청도공항으로 이동했다. (중간에 공항 근처 상가
에 잠시 들려 쇼핑을 했음) 이제 청도 시내를 비롯한 3박4일에 걸친 산동반도 나들이는 그 종
점에 이른 것이다.
청도공항에 이르러 4일 동안 길잡이를 해준 조선족 가이드와 작별을 고하고 각자의 짐을 챙겨
공항청사로 들어가 출국수속을 거치고 우리 본토로 옮겨줄 비행기를 기다린다. 3박4일이 정말
찰라처럼 흘렀지만 이제는 산동반도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보다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 뿐이다. 다음날 바로 일상으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18시대에 인천공항으로 가는 산동항공 비행기를 예약했는데, 인천공항을 비롯한 수도
권에 태풍으로 인해 큰 비가 내려 비행기 운행에 비상이 생겼다. 내가 없는 사이에 남쪽에서
태풍이 올라와 비행기 길에 훼방을 놓았던 것이다. 하여 17시 이후부터 비행기는 제시간에 뜨
지 못하고 계속 지연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1~2시간이면 되겠지 싶었다. 허나 그 시간대를 넘
어 21시가 넘었고, 계속 delay된다는 안내방송만 연거푸 나온다. (청도공항 안내방송은 우리
본토 방향 비행기에 한해 중공말, 영어, 우리말 순으로 해주었음)
그런 상황에 산동항공 잡것들은 기다림에 지친 승객들에게 저녁밥도 제공하지 않는 등, 서비
스 개판으로 일관하자 승객들이 크게 항의하니 그제서야 저녁거리를 제공한다. 저녁은 느끼한
중원대륙 음식인데 먹기가 싫었다. 다행히 일행들이 컵라면을 구해와 그 컵라면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 저녁을 때웠고, 나머지는 쿨하게 버렸다.

그렇게 공항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며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만 애타게 기다리다가 자정이
넘어서 새벽 1시에 드디어 비행기가 준비되어 승객들을 태웠다. 무려 7시간이나 지연을 먹은
것이다.
승객을 태운 산동항공 비행기는 청도공항을 이륙, 서해바다를 가로질러 1시간 정도를 비행해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활주로에 바퀴를 내렸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으나 시간은 새벽 2
시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서울로 넘어가는 심야공항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시간이 거의 임박했다. 하여
그것을 타고자 일행들과 서둘러 작별하고 입국수속을 서둘러 마친 다음, 인천국제공항 제1터
미널로 나와 서울로 가는 서울공항버스 N6001번(인천국제공항↔서울역)을 타고 서해바다와 한
강을 건너 4일만에 서울 도심으로 진입, 서울역에 두 발을 내렸다. 앞서 비행기에서 밤참거리
로 기내식을 주었는데, 중원대륙 음식은 손도 대지 않고 가져왔다가 서울역 정류장에서 쓰레
기통에 버렸다.
서울역에서 서울N16번(도봉산↔온수동) 시내버스를 타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니 시간은 새벽
6시, 원래대로라면 자정 이전에 도착하여 꿀잠을 자고 있어야 했는데, 오지게도 늦었다.
이렇게 하여 산동반도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 그곳에 갈 때는 남의 땅
산동반도가 아닌 우리 땅 산동반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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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4년 2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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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구역, 후원 돌담길 겨울 나들이 <중앙고 본관, 창덕궁 후원 뒷길, 옥류정>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창덕궁 후원 뒷길



'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후원 뒷길
겨울 나들이 '

창덕궁 신선원전, 의효전

▲  창덕궁 신선원전, 의효전 구역

▲  중앙고등학교 (본관 주변)

▲  창덕궁 후원 돌담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끝 무렵, 북촌(北村)에 자리한 중앙고등학교와 창덕궁 후
원 뒷길을 찾았다.
북촌과 창덕궁 후원 뒷길은 내 즐겨찾기 명소로 매년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고 있다. 이
미 지겹도록 복습을 한 곳이지만 자꾸만 손과 발이 가니 그들에게 단단히 중독된 모양이
다.
마침 며칠 전 겨울 제국(帝國)이 서울에 눈폭탄을 투하했는데 그들의 설경(雪景)이 갑자
기 당겨 눈이 녹을새라 부랴부랴 사진기를 챙겨들고 북촌으로 달려갔다. (본글에서는 중
앙고와 창덕궁 신선원전, 창덕궁 후원 뒷길만 다루겠음)



 

♠  북촌의 한류 명소이자 늙은 근대 건축물을 여럿 간직한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

▲  교문 옆에 자라난 계동(桂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512호

창덕궁과 맞닿은 북촌의 동북쪽 끝자락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고등학교(중앙중고교)가
자리해 있다.
이곳은 100년 이상 숙성된 학교로 왜정(倭政) 시절과 1940~1970년대에 유명인사를 많이 배출
했던 현장이다. 또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을 3개나 간직하고 있고, 비록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문학박물관이란 박물관까지 보유했으며, 창덕궁의 금지된 구역인 신선원전(新璿
源殿) 구역을 유일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21세기 이후 전파를 타고 한류
관광지로 격하게 뜨면서 북촌의 필수 명소로 성장했다.

북촌의 주요 골목길인 계동길의 북쪽 끝인 중앙고 교문은 언덕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인왕산(
仁王山)을 가리고 선 높은 고개를 넘으면 북촌로로 이어지며, 그 중간에 가회동11번지로 이어
지는 조그만 골목길이 가늘게 손을 내밀고 있다. 동쪽에도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은 고개가
버티고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원서동(苑西洞)과 창덕궁길로 이어진다.

교문 바로 안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큼직한 은행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앙상한 가지
를 드러내며 나처럼 추운 시절을 원망하는 그는 높이 20m, 가슴둘레 3.1m의 훤칠한 나무로 오
랜 세월 계동 지역의 수호신으로 숭상을 받아왔다. 하여 매년 가을, 지역 사람들은 오곡백과(
五穀百果)를 차려 당제(堂祭)를 지냈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 개관을 기념하고자 이 나무
를 삼목이식을 하는 등, 나름 의미가 깊은 나무이다.
나무 옆에는 1941년에 지어진 수위실이 있으며, 언덕진 길을 오르면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수
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햇님처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교문을 들어서면 학교 건물 사이로 운동장이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운동장 대신 콘크리
트로 다진 너른 뜨락이 닦여져 있으며, 그 공간 복판에 넓고 동그랗게 자리를 다져 테두리에
얕게 난간석을 두르고 그 안에 잔디를 깔아 그 핵심부에 학교를 일으켜 세운 인촌 김성수(仁
村 金性洙)의 동상을 세웠다.
또한 본관의 모습이 고려대학교 본관과 많이도 닮았고, 본관 주변 풍경은 여기가 고등학교가
아닌 고려대나 서양의 명문 대학교에 들어선 기분을 진하게 들게 만든다. 기존에 생각하고 있
던 고등학교의 모습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겉모습이 이러하니 누가 여길 고등학교라
보겠는가? 그냥 사진만 보면 오래된 대학교나 서구의 명문 학교라고 봐도 이상할 것은 없다.

본관 서쪽에는 원파도서관이, 동쪽 높은 곳에는 강당이 있으며, 본관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고색이 깊은 서관과 동관이 나란히 나타나고 그 북쪽을 가린 신관(新館)을 지나면 비로
소 인조 잔디를 깐 축구장 겸 운동장이 나타난다. 운동장 북쪽에 보이는 건물은 중앙중학교이
며 운동장 동쪽 밑에 신선원전과 의효전이 뉘여져 있다.

* 중앙고등학교의 간략한 역사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6월 1일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세운 기호학교(畿湖學校)에서 비롯
되었다.
1910년 9월 흥사단(興士團)에서 운영하던 융희(隆熙)학교와 통합되었는데 그때 교장은 서유견
문(西遊見聞)으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이었다. 이후 기호학회는 호남, 교남, 서북 등 여러
학회와 통합해 중앙학회로 간판을 바꾸고 학교 이름 또한 중앙학교로 갈았으며, 1915년 4월에
김성수가 이를 인수했다.

1916년 이 땅 최초로 보트를 도입하여 수상스포츠인 조정부를 설치했으며, 1917년 웅원(雄遠,
높은 이상), 웅견(雄堅, 굳은 의지), 성신(誠信, 성실한 행동)을 학교의 3대 교훈(校訓)으로
삼고 교목(校牧)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무궁화꽃으로 삼았다.
1917년 12월 김성수의 큰아버지인 김기중(金祺中)이 교사(校舍)를 지으면서 현재 자리로 학교
를 이전했다. 원파 김기중은 김성수 이상이나 중앙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919년에는 교장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가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3.1운동을 계획
했으며 백두산을 상징하는 백산(白山)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왜정의 방해로 1921
년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보)로 개명했다.
1921년 4월 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본관과 서관, 동관을 세웠고, 1926년에는 6.10만세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1934년 12월 원인이 아리송한 화재로 본관이 무너지자 그 남쪽에 다시 본관을 만들어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으며 1941년에는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대강당을 지었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앙중학교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39년 왜정이 무궁화 모표를
폐지하라고 하자 월계관으로 임시로 모표를 바꾸기도 했다. 1940년에는 중앙고보 역사 교사인
최복현이 4학년 학생 5명과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을 목적으로 '5인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1941년 한 학생의 연락 편지가 왜경에 발각되어 최복현과 관련 학생 모두 함흥교도소로 끌려
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이라고 한다.
그때 최복현은 재판정에서
'내 수업을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나를 처벌하고 학생들은 풀어달라'

호소하여 학생들은 3달 뒤 풀려나고 최선생은 2년 후 석방되었다.

1946년 9월, 6년제 중학교로 변경되고, 1950년 4월 대한교육법으로 4년제로 변경되면서 3년제
고등학교를 병설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꾸리게 되었다. 1960년 4.19시절에는
학교 학생들이 4.19시위에 동참했으며, 1964년에는 고려중앙학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1966년 신관을 짓고 김성수의 동상을 세웠으며, 1973년 신선원전과 인접한 운동장 동쪽에 축
대를 쌓아 운동장을 넓혔다. 1981년 학교 본관과 동관, 서관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
유산을 보유한 학교가 되었으며 1986년 6월 7일 교우의 날을 정해 행사를 거행했다.

1992년 2월 원파기념관을 세웠고,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박물관을 개관하
면서 이 땅의 고등학교 중 최초로 박물관을 소유한 학교가 되기도 했다. 또한 주변 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전파를 타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북촌의
한류 관광지로 존재감을 크게 살찌웠다.
(예전에는 일요일과 공휴일에 학교를 개방했으나 2020년 이후에는 거의 개방하지 않음)
 
* 중앙고등학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1 (창덕궁길 164, ☎ 02-742-1321~2)
* 중앙고등학교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6.10만세 기념비 (뒤쪽 건물은 원파도서관)

본관 뜨락 서쪽에는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6.10만세 기념비가 3.1운동 책원비가 있는 동
쪽을 바라보고 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붕어(崩御)하자 중앙고보 학생
을 중심으로 격문(檄文) 3만장을 인쇄하여 주변 학교에 뿌렸다. 그리고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인 6월 10일, 황제의 대여(大輿)가 종로3가 단성사(團成社)를 지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매와 태극기를 군중에
게 뿌려 이른바 6.10만세 운동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 기념비는 6.10만세운동의 67주년이 되는 1983년 6월 10일 중앙고등학교 동우회와 동아일보
사가 합심하여 세웠다.


▲  중세시대 유럽 성처럼 생긴 원파도서관 (옛 인문학박물관)

본관 서쪽에는 서양식 건물인 원파도서관이 있다. '원파'는 학교를 크게 일으킨 김성수의 큰
아버지인 김기중의 호로 이곳에는 2008년 6월에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문을 열었던 인문학박
물관이 야심 차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는 이 땅에서 거의 유일하게 고등학교에 차려진 박물관으로 그 이름 그대로 인문학(人文學)
자료를 풍부하게 머금고 있었으며 북촌의 다른 민간 박물관과 달리 입장료도 저렴하여 참으로
착한 박물관이었다. (어른 입장료가 1,000원이었음) 허나 이 땅의 인문학이 몰락했음을 상징
하듯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창밖에 빗방울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2010년과 2011년에 2
번 관람을 했음)


▲  본관 주변에 세워진 계원 노백린(桂園 盧伯麟) 집터 표석

이곳에는 대한제국 고위 무관이자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했던 노백린(1875~1926) 장군의 집
이 있었다.
그는 문무(文武)에 출중했고 기개가 높았으며 공군의 중요성을 깨달아 미대륙에서 최초로 한
인(韓人) 비행학교를 세워 독립군 공군을 양성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넘어와서 국무총리,
참모총장 등을 지냈으며 특히 군사 부분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허나 1926년 1월 22일, 상해(上海) 프랑스 조계지(租界地)의 양옥 단칸방에서 조국의 독립을
누리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앙고를 일구었으나 친일파로 구린 모습을
보였던 김성수는 무려 64살씩이나 살았음)


▲  3.1운동 책원비(策源碑)

본관 뜨락 동쪽에도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3.1운동 책원비가 자리해 6.10만세 기념비가
있는 서쪽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

3.1운동 발생 2달 전인 1919년 1월 왜열도 동경(東京)에서 유학을 하던 송계백(宋繼白. 1896~
1920)이 중앙학교 숙직실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곳 교사인 현상윤(玄相允, 1893~1950)에게
사각모에 담긴 비단에 쓰여진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네며,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살
짝 알렸다.
현상윤은 그것을 교장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급히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들은 크게 감동을
먹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작성하고 3.1
운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바로 이를 기념하고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에서 세
웠다.


▲  창립30주년 기념관 (대강당)
본관 동쪽 높은 곳에 자리한 대강당은 1941년 11월 창립30주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  중앙고등학교 본관 - 사적 281호

고려대 본관과 많이도 닮은 중앙고 본관은 콘크리트 철근의 2층 석조 건물로 1935년에 삽을
떠서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원래는 동관과 서관 사이에 있었으나 1934년 화재로 무너지
자 현 위치에 더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었다.

왜정 때 건축가인 박동진이 서구 학교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설계하고 건축한 길다란 'H'형태
의 건축물로 지붕 부분을 포함하면 가히 3층 규모인데, 그 시절 이 땅의 사람들이 세운 큰 건
물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건물 중앙에는 4층의 중앙탑을 높이 세워 본관의 위엄을 드높였고, 벽면은 돌을 질서 있게 쌓
아올렸다. 그래서 그 모습이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서양 학교나 중세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거기에 담쟁이덩굴까지 걸치고 있으니 고색과 중후한 멋까지 마음껏 드러낸다.
학교가 이렇게 크고 잘 나갔으니 왜정 때 이곳을 다녔던 학생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했을 것
이다. 비록 왜정의 눈치를 보며 살던 우울한 시기이나 여기서만큼은 왜인들도 오히려 부러운
눈빛으로 학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현재 1층 중앙은 학교 행정공간으로, 나머지는
교실로 쓰이고 있으며, 근대 초기 양식으로 만
들어진 민족 교육의 현장이자 민간학교의 건물
로 유서가 깊다. 또한 20세기 중/후반 유명 인
사들이 많이 나온 현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널린 학교 건물보다 더욱 정감이
가며, 저 건물에 들어가면 절로 책을 펴고 공
부에 임할 정도로 면학 분위기도 진하게 나온
다. 나도 이곳에서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사
는 곳이 엉뚱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하긴 이곳
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워낙 타고난 돌머리
라 효과가 얼마나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  본관의 뒷모습
마치 중세시대 건축물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  본관 뒤쪽에 숨겨진 빛바랜 종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중앙고보 시절부터 수업시간과 점심시간, 수업 종료 시간마다 땡땡땡~~♬ 종소리를 내며 학생
과 교사들을 분주하게 했던 위엄 돋는 종이었으나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나 이곳의 옛 유물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왕년에는 몸을 흔들며 학교를 움직이는 큰 손이었건만 이제는 종소리를 울릴 일도 없으니 그
의 피부에는 그저 하얀 먼지만 가득할 뿐이며, 가끔 관광객들이 호기심 삼아 그를 흔들어 주
변의 적막을 살짝 깨뜨리곤 한다. (나도 몇 번 쳐봤음~) 그렇게 울려 퍼진 종소리는 예나 지
금이나 늘 비슷한 목소리이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치지는 말자!)


▲  왕년을 생각하며 우수에 잠긴 종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뒤로 나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허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저 장대한 세월에 잠깐씩 몸을 담굴 뿐이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천하만물의 운명이다.

▲  중앙고등학교 서관(西館) - 사적 282호

본관 뒤쪽에는 붉은 피부의 비슷한 모습을 지닌 서관과 동관이 있다. 서관은 1921년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2층 붉은 벽돌집으로 (지붕을 포함하면 3층) 'T'자형 구조이다. 본관과는 분위기
가 사뭇 다른데, 뾰족한 아치형 창틀, 가파른 고딕식 지붕, 그리고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엇
물려 지어 20세기 초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벽돌이 고색의 향기를 더욱 우려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조선소년군 창설과 6.10만세운동
,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는 교실로 살아간다.


▲  중앙고등학교 동관(東館) - 사적 283호

서관과 마주하고 있는 동관은 1923년 10월에 지어진 2층 붉은 벽돌 건물이다. (지붕을 포함하
면 3층) 건물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은 서관과 비슷하며 여전히 교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신관에서 바라본 동관

▲  동관의 뒷모습


▲  선비의 모습으로 지어진 원파 김기중(金祺中) 동상

동관과 서관 사이에는 원래 본관이 있었다. 허나 1934년 화재를 만나 건물이 주저앉으면서 남
쪽으로 자리를 옮겨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본관의 강제 이전으로 비게 된 공간에는 소나무를 심어 조촐히 정원을 닦았는데 그 복판에 원
파(圓坡) 김기중(1859~1933)의 동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김성수와 더불어 중앙학교를 일으킨
인물로 김성수의 바로 큰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양복스타일의 김성수 동상과 달리 전
형적인 선비 스타일로 동상을 지어 그를 기린다.

김기중은 1886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1904년 용담(龍潭, 전북 진안) 군수(郡守)를 지내기도
했다. 1906년 정3품에 올랐으나 멸망의 끝으로 달려가는 나라꼴에 한숨을 쉬며 민중계몽을 위
해 교육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여 1908년 재산을 털어 영신(永新)학교를 세웠으며 왜열도
로 건너가 그곳의 교육 제도를 직접 살폈고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 1921
년 다시 재산을 털어 지금의 자리에 교사를 만들면서 중앙학교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32년 아우 김경중(金暻中)과 보성전문(고려대)을 인수하고 민립대학을 꿈꾸던 조카(김성수)
에게 운영을 넘겼으며 그 이듬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허나 그때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10년을 더 살았다면 친일파로 노선을 바꾼 조카에게 크게 실망
하여 피가 꺼꾸로 솟았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결국 그 잘난 조카가 큰아버지의 민족교육 사업
에 적지 않게 똥칠을 했다.


▲  신관 앞에 뿌리를 내린 히말리야시다나무 (종로구 2013-43호)
본관을 조금 닮은 신관 앞에는 어려운 이름처럼 이색적으로 생긴 히말리야시다나무가
조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높이 13m, 둘레 190cm 정도로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아마도 왜정 때 학교 행사 기념으로 심은듯싶다.

▲  옛 숙직실터에 새로 지은 삼일기념관(三一記念館)

대강당 뒤쪽에는 삼일기념관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기와집이 있다. 네모나게 다져진 석축
위에 계단을 늘어뜨리며 들어앉은 이 건물은 김성수가 1917년에 지은 교장 사택 겸 숙직실(宿
直室)을 복원한 것으로 원래는 대강당 정문 앞에 있었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학교를 찾아와 이곳 숙직실에서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
윤에게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을 처음으로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했다,
즉 3.1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유서 깊은 현장인 것이다.

그 숙직실은 1941년 지금의 강당을 만들면서 철거되었는데 아마도 그런 사연을 알아챈 왜정의
강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73년 지금 자리에 다시 지어 3.1기념관으로 삼았다.
기념관 앞에는 어디서 업어온 문인석이 홀(忽)을 쥐어들고 서 있으며, 건물 뒤로 담장과 울창
한 수목이 보이는데 그곳이 동궐인 창덕궁이다.


▲  겨울에 푹 잠긴 중앙고 산책로 (신관, 동관 옆길)

▲  눈에 뒤덮힌 중앙중고교 운동장과 새 건물로 이루어진 중앙중학교
운동장을 경계로 남쪽은 중앙고등학교, 북쪽은 중앙중학교로 이루어져 있다.



 

♠  중앙고 운동장에서 바라본 창덕궁 신선원전(昌德宮 新璿源殿)
- 사적 122호


▲  비공개로 사람의 손때마저 희미해진 신선원전

중앙고에 왔다면 꼭 살펴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창덕궁의 숨겨진 속살인 신선원전이다.
그렇다고 신선원전이 중앙고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만약 그들이 교정에 있었다
면 중앙고가 지금의 자리에 속시원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중앙고를 둘러보고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축구장 골대가 있는 너른 운동장이 나온다. 운동
장 북쪽에는 중앙중학교가 있고, 그 뒤에 삼삼하게 우거진 산이 있는데, 이는 와룡산(臥龍山)
으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의 동쪽 끝자락이다. 운동장 서쪽은 가회동(嘉會洞) 주택가로 막
혀있고 동쪽은 철책이 높이 쳐져 있는데, 그 너머로 숲이 펼쳐져 있다.
중앙고 본관이 주는 착시현상을 간파하고 서관과 동관을 거쳐 이곳까지 용케 들어온 사람들도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 착시현상에 빠져 본관 앞만 맴돌다가 나가버림) 상당수 운동장만 보
고는 발걸음을 돌린다.
운동장 동쪽에 철책이 있고 마땅한 안내문도 없으니 비록 밑에 수상한 기와집들이 널려있어도
그냥 통과하는 것이다. 허나 그런 생각은 중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창덕
궁의 비공개 구역인 신선원전, 의효전이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중 유난히 통제구역이 많았던 창덕궁,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21세기 이후 후원(後苑) 상당수와 낙선재(樂善齋)를 공개하고 있지만 아직도 숨겨진 부분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신선원전과 의효전 구역은 여전히 대문을 굳게 잠그며 공개를 꺼리고 있
으며, 그런 사유로 이곳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후원 숲속에서 조용히 속살을 가린 채, 숨바꼭질을 즐기는 신선원전은 중앙고 운동장에서만큼
은 자존심을 곱게 접으며 그 속살을 일정 부분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운동장이 그곳보다 지
대(地臺)가 높기 때문이다. 다만 철책을 통해서 봐야 된다는 한계점이 있다.

중앙고는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중앙고가 창덕궁 궁역(宮域)보다 조금 지
대가 높긴 하지만 담장이 걸쳐진 곳<운동장 부분 제외>만큼은 교내보다 높으며 민가(民家)의
담장도 아닌 지체 높은 궁궐의 담장이라 감히 건드리기도 그렇다. 허나 운동장만큼은 사정이
달라 운동장이 신선원전과 궁궐 담장보다 더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있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1973년 운동장을 넓히고자 축대를 높이 다졌기 때문인데, 철조망을 높이 친 것은 자칫 월담을
하거나 운동 도중 공이 넘어가 그곳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을 막고자 함이다.

일개 학교의 운동장이 궁궐 사당보다 높이 떠있다는 것이 다소 신선하고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국제적인 호구 짓을 일삼다가 거하게 쪽박을 찬 옛 제국의 잔재물이라고 해도 이렇게
까지 해야 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허나 학교 입장에서는 여기 말고는 운동장을 다질 땅
이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  신선원전의 옆 모습

▲  신선원전의 두툼한 뒷모습

신선원전 자리에는 원래 대보단(大報壇)이 있었다. 조선은 명(明)의 충직한 제후국(諸侯國)이
라 명이 망하자 옛 명나라의 제왕을 기리고 그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아주 꼴사나는 이유로 숙
종(肅宗) 때 대보단을 만든 것이다.
대보단에는 고려와 조선을 지극히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과 식량을 과하게 보내주어 조선천자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신종(神宗), 그리고 명
나라를 완전히 끝장낸 마지막 군주, 의종(毅宗)의 위패를 봉안해 매년 국가 재정을 축내며 제
사를 지냈다.

창덕궁에 선원전(璿源殿)이 지어진 것은 1656년이다. 이때 경덕궁(敬德宮, 경희궁)에 있던 경
화당(景華堂)을 인정전(仁政殿) 서쪽으로 옮겨 제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선원전으로 삼
았는데<이를 구(舊)선원전이라고 부름> 1921년 왜정이 대보단을 때려부시고 덕수궁(경운궁)에
있던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구선원전과 덕수궁(경운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과 관련 유
물도 거의 옮겨와 신선원전이라 하였다. (이전의 선원전과 구분하고자 그리 이름을 지었음)

이곳에는 태조에서 순종에 이르기까지 제왕 12명의 어진 48본이 봉안되었으며, 어진을 걸어두
던 12개 감실(龕室)은 1900년대 의궤도설(儀軌圖說)과 일치해 왕실의 전통적인 법식을 충실히
따랐음을 보여준다.
어진은 6.25가 터지자 서둘러 부산(釜山)으로 옮겼지만 대부분 관리소홀로 화마(火魔)의 먹이
가 되었으며, 제례에 쓰였던 의장물 상당수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남아있던 노부(鹵簿, 제
왕이 나들이할 때 갖추던 의장물) 등 대부분의 유물은 2002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용상(龍床)과 오봉도(五峯圖), 모란이 그려진 병풍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들 유물은
19~20세기 궁중 미술의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감실과 당가(唐家), 용상 등 가구와 시설
물은 주칠(朱漆)이 아닌 황색(黃色)으로 칠했다.

신선원전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사당이란 점 때문에 여전히 비공개를 고집하고 있다. 하여 이
곳에서만큼은 거의 인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사람의 손때마저 보이질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고요하기만 한 신선원전, 이곳이 과연 시끌벅적한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
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거기에 사당이라 그런지 종묘(宗廟)에서 느낄 수 있는 엄숙함도 적지
않게 배여 나온다. 다행히 늦게나마 이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년 동안 조사하여 '최후의 진전(眞殿) 창덕궁 신선원전'이란 도록을 발간하기도 했다.

신선원전은 의효전(懿孝殿)과 재실(齋室), 수직사(守直舍), 몽답정(夢踏亭), 괘궁정(掛弓亭),
진설청(眞說廳) 등을 거느리고 있으며 이들은 신선원전 권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창덕궁 후원
에서 신선원전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으며, 원서동 빨래터에 있는 외삼문(外三門)은 이곳의 정
문이다.


▲  신선원전 남쪽에 자리한 의효전(懿孝殿)

신선원전 남쪽에 있는 의효전은 원래 덕수궁(경운궁)에 있었다. 1904년 순종의 왕비인 순명효
황후(純明孝皇后)의 혼전(魂殿)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1921년 덕수궁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
길 때 덩달아 따라왔다.

사진에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의효전 옆에는 몽답정(夢踏亭)과 몽답지(夢踏池)란 작은 연못
이 있다. 몽답정은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지냈던 김성응(金聖應, 1699~
1764)이 지은 것으로 영조(또는 숙종)가 꿈속에서 이 정자를 찾았다고 하여 꿈에서 발걸음을
했다는 뜻의 몽답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조도 몽답정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창덕
궁과 창경궁의 도면인 동궐도(東闕圖)에는 그의 존재가 나와있지 않아서 원래 이곳에 있던 것
은 아닌 듯싶다.


▲  중앙중고 운동장에서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괘궁정(掛弓亭)

신선원전 구역에서 그나마 제일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존재가 괘궁정이다. 이곳은 돌담이 운동
장 축대 밑으로 막 내려가는 비탈진 곳에 있으며, 중앙고 축구부 휴게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다.

괘궁정은 1849년에 지어진 것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 북영(北營)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
던 곳이라고 한다. 정자의 이름인 괘궁(掛弓)은 활을 걸어둔다는 뜻으로 왕실에서 종묘만큼이
나 애지중지했던 대보단 바로 옆에 활쏘기 연습을 하는 정자를 만든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게다가 정자의 모습을 보면 일반 병사들이 연습을 했다기보다는 훈련대장 등 상위 등
급의 무관들이 활 연습을 하거나 군영(軍營)을 바라보는 용도로 사용했을 듯 싶다.
북영의 군사들은 제왕의 호위를 담당하는데, 제왕이 궁궐을 옮기면 북영 본부도 같이 옮긴다.
제왕이 창덕궁에 머무는 경우에는 궁궐에서 다소 구석인 대보단 인근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괘궁정은 달랑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정자
를 지었다. 얼마나 인적이 없는지 수북히 깔린 눈에 사람 발자국은커녕 새 발자국도 없으며,
정자에 정적만 감도니 언제 사람이 들어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제 찾
아올지 모를 화마에 대비하여 소화기가 한쪽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운동장 철조망을 통해 신선원전 일대를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보듯 구경했지만 언
젠가는 쿨하게 해방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반드시 그래야 됨~) 그때가 되면 까치발처럼 힘들
게 구경해야 되는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 창덕궁 신선원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 (창덕궁5길 22-4)



 

♠  서울 도심 뒷통수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중앙중고 후문과 창덕궁 돌담

창덕궁 돌담이 이어진 중앙중학교 동쪽 길을 오르면 고려사이버대학교가 나온다. 이들은 중앙
중고와 함께 고려대학교 계열로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서쪽)은 북촌과 삼청동으
로 이어지며, 돌담이 펼쳐진 오른쪽(동쪽) 길이 바로 창덕궁 후원 뒷길이다. 사이버대학교 갈
림길이 중앙중고의 후문으로 정문과 달리 문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동쪽 길로 들어서면 길이 서서히 흥분을 하면서 경사를 이루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진 창
덕궁 돌담이 궁궐 돌담의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오른쪽으로 따라붙는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다. 또한 돌담 너머로 삼삼하게 우거진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면서 도심
의 속된 기운을 정화시킨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고려사이버대학 동쪽)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넘어가는 길이
과연 있을까??' 
주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길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
이다.


▲  눈을 뒤집어쓰며 층층이 이어진 창덕궁 후원 돌담 (수구문 주변)

창덕궁 후원을 속세로부터 열심히 가리고자 지형을 이용하여 높이 돌담을 둘렀다. 지형이 낮
은 곳은 돌담 너머로 후원의 속살이 일부 보이기도 하나 보이는 것은 그저 숲밖에 없다.


▲  북악산(백악산)의 수분을 받아들이는 후원 수구문(水口門)

창덕궁 후원에는 연못이 참 많다. 그 연못을 살찌우는 물은 바로 북악산이 베푼 것으로 그가
내린 물이 이 수구문을 거쳐 후원으로 들어가 후원 곳곳에 물을 공급한다. 가뭄이 극성일 때
는 수구문도 흐르는 물이 거의 없어 한가하지만, 비가 많이 내릴 때는 수구문 철창을 녹여버
릴 정도로 물이 들어온다.


▲  석양이 지는 수구문 주변 후원 돌담

▲  후원 뒷길의 전환점(너른 공터) - 여기서부터 좁은 산길로 변한다.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릴 수 있을 정도에 후원 뒷길은 옥류정 입구의 너른 공터에서 끝
이 난다. 여기서 길은 산길로 180도 돌변하며, 차량은 더 이상 바퀴를 들일 수 없다.
너른 공터를 지나면 근래 지은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길은 2개로 갈리는데, 오
른쪽은 후원 돌담을 따라 성균관대 내부로 이어지며, 왼쪽은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
점(종로구 마을버스 02번 종점)으로 이어진다.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은 북촌 권역에서 성균관대와 대학로를 빠르게 이어주는 도심
의 상큼한 뒷길로 아는 이가 별로 없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한적하고 고즈넉하다. 내가 좋
아하는 길의 일원이기도 한데, 다만 가로등 시설이 부족해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꽤 어둑어
둑해진다.


▲  옥류정으로 향하는 짧은 산길과 눈에 묻힌 계곡

옥류정으로 인도하는 짧은 산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그 옆에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눈에 묻혀있는데, 그는 북악산의 동쪽을 이루고 있는 와룡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적
지 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다소 옥의 티이다.


▲  옥류정에서 창덕궁 후원 뒷길로 내려가는 길
이렇게 보니 정말 첩첩한 산주름에 푹 묻힌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서울 도심 한복판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  북악산 와룡산 밑에 자리한 옥류정(玉流亭)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옥류정, 그 어여쁜 이름 마냥 후원 뒷쪽에 숨겨진 오래된 경승지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1956년에 지어진 8각형 모습의 현대식 정자(亭子)이다. 그래도 후원
뒤쪽에 자리한 위치상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래된 사연을 머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런 것은
일절 없었다. 위치와 정자의 이름이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설레게 만든 것이다.

이곳은 와룡산 밑으로 바로 동쪽 언덕에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 있으며, 북쪽 높은 곳에는
와룡공원길이 흘러간다. 와룡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옥류정에서 잠시 묻혔다가 남쪽 연못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정자 이름이 옥류정이 된 것은 북악산(백악산)의 맑은 계곡이 옆구
리에 흘러서 붙여진 이름 같기도 하고, 계곡이 후원 옥류천(玉流川)과도 살짝 이어져 있어 그
렇게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 정자 정면에는 푸른 피부로 쓰여진 옥류정 현판이 걸려있는데,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아주 명필급이다.

옥류정은 숲에 둘러싸인 구석이라 늘 그늘이 머물고 있으며, 주변 경치는 좋지만 와룡공원길
이 바로 뒷쪽이라 차량들의 굉음이 수시로 두 귀를 때린다. 그래도 숲바람과 산바람이 교차하
는 곳이라 한여름에는 더위를 잊기에 좋다.


▲  후원 뒷길 고개
여기서는 창덕궁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는데, 이곳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이다.


창덕궁 후원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고려사이버대학교)에서 후원 뒷쪽 돌담길을 따라 성균관대
로 이어지는 1리 남짓의 짧은 고갯길이다. 감사원에서 성북동을 이어주는 와룡공원길 밑부분
으로 서울 도심에서 그리 흔치 않은 조촐한 오솔길이다.
이곳은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걸쭉하게 그려진 수채화의 일부처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돌담 너머로 후원의 청정한 숲이 펼쳐져 있고 돌담길 주변 역시 나
무들이 가득하니 그 아름다움의 농도는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다.


▲  후원 뒷길 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창덕궁의 뒷통수인 후원 뒷길 고개는 돌담 바로 옆구리라 돌담을 만지면서 갈 수 있다. 그 고
개를 넘으면 급하게 펼쳐진 울퉁불퉁한 산길이 나오고, 돌담 너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
원이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바로 성균관대 건물이 보이는데, 그 산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른다.
서울에 있는 궁궐 돌담길 중 가장 호젓하고 담백한 길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을 격하게 추천하
고 싶다. 그만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길이다.


▲  잊혀진 제국의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며 흘러가는
창덕궁 후원 돌담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고 있는 후원 돌담은 새로 손질한 부분이 여기저기 있어 오
래된 것과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적지 않다. 허나 그것은 세월이 해결해줄 것이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은 창덕궁 관람료에 후원 관람료까지 얹혀야 들어갈 수 있는 비싼 공
간으로 성균관대 대운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장식하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보이며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도 시야에 들어온다.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지금까지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과 바위길이 밋밋한 시멘
트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담과 철책이 생기면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
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만 보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이렇게 하여 겨울 한복판에 찾아간 북촌~창덕궁 후원 뒷길 눈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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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경주의 꿀명소, 경주 남산 나들이 <염불사지, 봉화골, 칠불암, 칠불암 마애불상군>

경주의 꿀단지, 남산 (염불사지, 칠불암 마애불상군)


    
' 서라벌 경주의 꿀단지, 남산 초여름 나들이 '


▲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남산(금오산) 산줄기

 



 

여름 제국이 봄의 하늘을 가로채며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6월의 첫 무렵, 신라(新羅)
의 향기가 지독하게 배여있는 경주 땅을 찾았다.

경주(慶州)는 거의 50번 이상 인연을 지은 곳으로 오랜 세월 구석구석 누비다 보니 이제
는 인지도가 거의 없거나 벽지에 박힌 명소들을 주로 찾고 있다. 허나 미답처(未踏處)들
이 여전히 적지 않아서 내 마음을 애태우게 하는데, 이번에는 칠불암과 신선암 등 남산(
南山)의 여러 미답처를 지우기로 했다.

경주시외터미널에서 경주좌석버스 11번(경주시외터미널~불국사~용강동)을 잡아타고 통일
전(統一殿)에서 두 발을 내렸는데, 여기서 칠불암, 신선암으로 가려면 남쪽 시골길(칠불
암길)로 들어서 남산동(南山洞)의 여러 마을(안마을, 탑마을, 안말)을 지나 1시간 10~20
분 정도 발품을 팔아야 된다.
너른 배반평야를 동쪽에, 남산을 서쪽에 둔 남산동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오늘도 평화
롭기 그지 없는데, 안마을에는 그 유명한 서출지(書出池)가, 탑마을에는 남산동삼층석탑
이 간만에 나좀 보고 가라며 손짓을 한다. 허나 그들은 이미 20대 시작점에 인연을 지은
터라 오로지 목표한 먹잇감을 향해 뛰어가는 맹수처럼 그들을 모두 흘려보냈다.


▲  옛 신라의 곡창지대, 배반평야 논두렁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양피제(讓避堤, 양기못)

양피제(양피저수지)는 배반평야에 수분을 제공하는 저수지로 연(蓮)들이 푸른 기운을 드
러내며, 곧 다가올 여름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양피제란 이름은 남산동삼층석탑 일대
로 여겨지는 양피사(讓避寺)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절이 있던 마을에 서출지가 있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이 있어 이 못을 서출지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  남산 입문 (염불사지)

▲  전(傳) 염불사(念佛寺)터

양피제에서 남쪽으로 7분 정도 가면 안말(안마을) 한복판에 누워있는 염불사터를 만나게 된다.
잘생긴 3층석탑 2기가 잔디가 입혀진 절터를 지키고 있는데, 그 북쪽에는 새로운 염불사가 둥
지를 틀며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사라진 염불사의 후예를 자처한다.

염불사는 신라 중기(8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절로 어떤 과정을 거치고 언제 어떻게
망했는지 전해오는 것이 전혀 없다. 남산 산신(山神)조차도 '염불사? 양피사? 그게 뭐임? 먹
는 거임?'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로 비밀에 감싸인 절로 남산동3층석탑 주변을 염불사터로
보는 설도 있어 현 자리도 100%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책임을 피하고자 염불사 이름 앞
에 막연히 전한다는 뜻의 전(傳)을 붙여 '전 염불사터'라 부른다.
다만 염불사 옆에 양피사가 있었다고 하므로 만약 남산동3층석탑이 염불사라 하면 이곳은 자
연히 양피사가 될 것이다.

염불사의 원래 이름은 피리사(避里寺)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피
이촌, 피리사촌)이 있는데, 그 마을에 '피리사'란 절이 있었다. 그 절에는 이상한 승려가 머
물고 있어 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우니 그 소리가 마을을 넘어 서라벌 일대에 쫘악 울려
퍼져 듣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소리가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그지 없어, 서라벌 사람들
은 그를 공경해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자 그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봉안했으며, 그가 머물던 피리사를 염
불사로 이름을 갈았다. 그랬던 염불사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의지처를 잃은 탑들의 삶도 그리 순탄치 못해 결국 앉은뱅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서로를 보듬으며 절터를 지켰지만 1973년 동탑이 강제로 불국동 구정광장으로 옮겨지
면서 서탑 홀로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러다가 2008년 동탑이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재회를
하게 되었고, 이때 탑 2기를 복원하고 절터를 손질하여 2009년 1월 15일 완료되었다.


▲  전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보물 2,193호)의 동탑

염불사터 동탑은 1973년 구정동 불국광장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그때 박정희 전대통령이 경주
를 살피러 온다는 소식에 경주 지역 관리들이 그에게 아부를 떨고자 무너진 동탑의 탑재와 인
근 도지동 이거사터(移車寺)에서 급히 소환한 3층석탑 1층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을 덧붙여
콩 볶듯이 복원하여 대통령의 순시 코스에 두었다. 그러다 보니 1층 옥개석이 2,3층 옥개석과
다소 어색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후 제자리로 옮겨야 된다는 여론이 퍼지면서 경주시는 2006년부터 이전 복원을 추진하여 염
불사터 사유지를 매입해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2008년 1월 탑을 해체하여 제자리에 다시 세웠
다.

이 탑은 커다란 바닥돌을 땅바닥에 깔고, 그 위에 2중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
힌 다음,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한 전형적인 신라 후기 탑으로 세월과 자연이 무심히 할퀴고
간 흔적들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정정함은 잃지 않고 있다. 서탑과 함께 8세기에 세워진 것으
로 여겨지며, 탑 높이는 5.85m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동탑

▲  북쪽에서 바라본 동탑


▲  염불사터 서탑

일찌감치 복원된 동탑과 달리 서탑은 옥개석을 중심으로 무거운 상처들이 적지 않다. 동탑보
다 좀 초라해 보이는 서탑, 허나 그는 사리장엄구를 봉안했던 사리공을 무려 2개씩이나 품었
던 특별한 존재였다. 보통 대부분의 탑은 사리공이 1개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 탑의 심
장이라 할 수 있는 사리공을 2개나 지녔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다.
혹시 염불사 설화에 나오는 그 승려 때문은 아닐까?

▲  북쪽에서 바라본 서탑

▲  절터에서 수습된 주춧돌과 늙은 석재들

동탑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한참 잡초를 토벌하고 있었다. 염불사터가 간만에 이발을 하는 날
인 모양이다.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석탑 형제, 한때 45년 동안 떨어져 사는 아픔이
있었으나 다시 만나 서로의 정을 속삭인다. 인간들이 무엇을 하든 자신들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런 것은 관심 밖이다.

절터 남쪽에는 이곳에서 수습된 건물 주춧돌과 석탑 부재(部材) 등 여러 석재가 놓여져 초여
름 햇살을 즐기고 있다. 그들은 한때 절 건물을 받쳐 들거나 석탑, 석등을 이루던 것들로 그
들이 입을 열면 이곳의 정체가 흔쾌히 드러날 것인데 자신들을 이 꼬락서니로 만든 인간과 세
상을 원망하듯,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 염불사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129-3


▲  남산 봉화골로 인도하는 숲길

염불사지에서 숲과 밭두렁이 적당히 섞인 시골길을 지나면 그 길의 끝에 봉화골 산길이 나온
다. 통일전 정류장에서 이곳까지는 도보 약 25분 거리로 여기서부터 온갖 불교문화유산으로
도배가 된 남산<금오산(金鰲山)>의 아늑한 품이 시작된다.

봉화골은 동남산 남쪽 끝에 자리한 깊은 골짜기로 봉화대(烽火臺)가 있어서 봉화골이란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 계곡이 깊고 소나무가 가득해 그림 같은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칠불암과
신선암 마애불 등 남산의 굴지 명소들이 깃들여져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왕래가 잦다. 현재
이 골짜기에는 절터 2곳, 불상 8기(칠불암과 신선암 마애불), 석탑 2기, 석등 4기, 비석(귀부
) 1기, 봉화대터가 전하고 있다.

산길 경사는 대체로 완만하나 일부 구간에서 흥분된 상태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이 될
정도는 아니며 자존심을 곱게 접어 묵묵히 산길에 임하면 칠불암 마애불이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와 마중을 할 것이다.


▲  소나무로 가득한 봉화골 산길 ①

▲  소나무로 가득한 봉화골 산길 ②

봉화골 계곡은 조그만 개울로 아기자기한 모습을 지녔다. 하지만 하늘이 비를 너무 짜게 내려
물이 거의 말라버린 맨바닥 상태였다. 처음에는 길인 줄 알고 다가섰더니 글쎄 가뭄에 녹초가
되버린 계곡이 아니던가.

산길을 한참 오르니 삼삼하게 우거진 대나무숲이 펼쳐진다. 이렇게 대나무숲이 있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절이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푹 숙인 대나무가 운치 있게 터널을 이룬 돌계단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칠불암이 자리해 있다.


▲  이보다 멋진 터널이 있을까? 대나무 숲길의 위엄

▲  대나무 숲길 한복판에 서다. (칠불암 직전)



 

♠  경주 남산에서 가장 덩치가 큰 불교 유적, 7개의 석불로 이루어진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마애불상군 - 국보 312호

경주 남산에는 옛 신라 사람들이 심어놓은 불교 유적이 지나치게 많이 서려있다. 절터만 무려
100곳이 넘으며 불상도 80개가 넘는다고 하니 천하에 이만한 불교 유적의 성지(聖地)는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되었겠는가.

남산에 깃든 불교 유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해발 360m 고지에 자리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다.
그는 부처골(불곡) 석불좌상(☞ 관련글 보기), 보리사(菩提寺, 미륵골) 석불좌상(☞ 관련글
보기
),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과 더불어 남산의 간판격 존재로 존재
감도 그 덩치만큼이나 커서 답사객과 산꾼의 왕래가 빈번하다.

이곳 마애불상군은 2개의 바위에 7기의 마애불(磨崖佛)을 나눠서 새긴 독특한 모습으로 동쪽
을 바라보며 병풍처럼 자리한 커다란 바위에 3존불이 깃들여져 있는데, 그 바위를 '병풍바위'
라고 부른다. 불상이 깃든 동쪽 면이 90도로 다듬어져 있고, 그 앞에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
m 정도의 석축을 쌓아 공간을 다진 다음, 4면불을 새긴 바위를 봉안했다. 보통은 바위 하나를
이용해 불상을 새기지만 이곳은 이렇게 바위 2개를 건드려 마애불상군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약 1.74m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지켜주고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3존불과 4방불

마애불 주변은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그 밑에서 그들을 바라봐
야 된다. 그러다 보니 3존불은 정면에서 온전히 마주 보기가 어려우며, (앞에 4방불이 시야를
좀 가림) 4방불 같은 경우 3존불을 바라보고 있는 서쪽 불상은 만나기가 어렵다. 허나 어찌하
랴? 국보(國寶)의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지체 높은 존재들이고 그들의 건강도 신경을 써야
되니 말이다. 그래도 보일 것은 거의 보이며, 그들을 세세히 보고 싶다면 칠불암에 협조를 구
해보기 바란다.

병풍바위에 돋음새김으로 진하게 깃들여진 3존불은 양감이 매우 풍부해 바위에서 방금 튀어나
온 듯한 모습이다. 가운데 본존불(本尊佛)은 높이 2.7m로 하늘을 향해 꽃잎을 세운 연꽃<앙련
(仰蓮)>과 밑으로 꽃잎을 내린 복련<(伏蓮)>이 새겨진 연화대좌에 위엄 있게 앉아있다. 석굴
암(石窟庵) 본존불과도 비슷한 모습으로 그 뒤쪽에는 광배(光背)가 본존불을 반짝 빛내주고
있으며, 머리는 소발(素髮)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거의 네모진 모습으로 볼살이 많으며,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나 자비로운 표정을 자아
내고 있다. 목에는 그 흔한 삼도가 없으며, 어깨는 넓고 당당하여 가는 허리와 함께 위엄 돋
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 끝이 땅을 향하게 하
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은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옷주름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본존불 오른쪽에 자리하여 본존불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협시보살(夾侍菩薩)은 연꽃이 새
겨진 연화대(蓮花臺) 위에 다소곳이 서 있다. 덩치는 본존불의 1/3 크기로 키는 약 2.1m인데,
아래로 내린 오른손에는 감로병(甘露柄)이 들어 있어 아마도 관세음보살인 모양이다. 왼손은
어깨 높이로 들고 있으며, 잘록한 허리선이 인상적으로 구슬목걸이를 두르고 있다.
본존불의 왼쪽 협시보살 역시 연화대 위에 서 있다. 오른손에 연꽃을 들고 왼손은 옷자락을
살며시 잡고 있는데, 오른쪽 협시보살과 비슷한 덩치로 코가 좀 할켜나간 것을 빼면 완전한
모습이다. 그는 아마도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3존불과 4방불(동쪽과 북쪽 상)

3존불 앞에 놓인 바위에는 4방불이 깃들여져 있다. 3존불이 주연이라면 4방불은 그들을 수식
하는 조연으로 큰 것은 높이 1.2m, 작은 것은 0.7~0.8m 정도로 3존불에 비해 규모도 작고 조
각 솜씨도 다소 떨어진다.
 
4방불 모두 보주형 두광(頭光)을 갖추며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는데, 동쪽 상은 3존불
본존불과 비슷한 모습으로 통견의(通絹衣)를 걸치고 있으며 신체 윤곽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왼손에 약합을 쥐어들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약사여래(藥師如來)로 여겨진다. 남쪽 상은 동
쪽 상과 거의 비슷하나 가슴에 표현된 띠매듭이 새로운 형식에 속하며 무릎 위 옷주름과 짧은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의 옷주름이 도식화(圖式化)되어 있다.

서쪽 불상은 동/남쪽 불상과 비슷하며 북쪽 불상은 앞서 불상과 달리 얼굴이 작다. 그들의 정
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동쪽은 약사여래, 서쪽은 아미타여래로 파악되고 있다.


▲  4방불의 동쪽 상 (약사여래상으로 여겨짐)

▲  4방불의 남쪽 상 (정체가 무엇일까?)

풍만한 얼굴과 양감이 풍부한 신체 표현, 협시보살들의 유연한 자세는 남산 삼릉골 석불좌상
과 석굴암 본존불, 굴불사(掘佛寺)터 석불과 비슷하여 8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참 올라가야 되는 깊숙한 산골에 이렇게 큰 마애불을 짓기가 참 어려웠을 것인데, 불교 앓
이와 남산 앓이가 유독 심했던 신라 서라벌 사람들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신라
의 아름다운 마애불을 편하게 느껴볼 수가 있다.
그리고 마애불이 깃든 병풍바위의 모습도 그리 예사롭지는 않아 보여 석불이 깃들기 이전에는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  칠불암 뜨락에 수습된 주춧돌들 (석등 대좌도 보임)

칠불암 뜨락에는 주춧돌과 석등 대좌(臺座), 석탑 석재들, 연꽃이 새겨진 배례석(拜禮石) 등
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마애불 남쪽에는 엉성하게 복원된 석탑과 옥개석으로 보이는 커다란
돌이 박혀있어 이를 통해 마애불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애불의 자리를 먼저 다진 다음 건물을 씌워 그들을 봉안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 건물이 법
당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의 정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다
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머물면서 대안(大安)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7세기 중/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8세기에 마애불을 구축하면서 전성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는 '봉화곡 제1사지(寺址)'란 임시 이름을 지니고 있다. (봉화골에 있는 1번째 절터
란 뜻) 비록 절집과 돌로 지어진 모든 것이 무심한 세월과 대자연에 의해 분해되고 그 일부만
아련히 남은 상태지만 마애불만은 거의 온전히 살아남아 그들이 가고 없는 빈 자리를 지킨다.


▲  장대한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칠불암 석탑

마애불과 칠불암 법당 사이에는 석탑의 옥개석으로 여겨지는 주름진 커다란 돌덩어리가 화석
처럼 박혀있다. 그 위에는 키 작은 석탑이 성치 못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신라 후기에 지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절이 사라진 이후, 세월의 거친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산산히 흩어진 것을 발견된 부재(部
材)를 되는대로 엮어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하여 다소 엉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큰 돌덩어리를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3층 탑신을 적당히 맞춰 올려 그런데로 3층석탑의 폼은
갖추었다.


▲  칠불암 인법당(因法堂)

마애불 곁에 자리한 칠불암은 1930년대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이다. 칠불암이란 이름은 3존불
과 4방불 등 7기의 석불을 간직하고 있어 칠불암이라 한 것인데, 옛 봉화곡 제1사지의 빈 자
리를 덮어주며 마애불상군을 지키고 있다.

칠불암은 법당(法堂)인 인법당과 1칸짜리 삼성각, 해우소가 전부로 인법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리가 협소하여 법당이 요사(寮舍)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의
역할까지 모두 담당하고 있는데, 내가 갔을 당시에는 서양에서 건너온 20대 비구니 양녀(洋女
)와 그를 도와주는 50대 보살(菩薩) 아줌마가 절을 지키고 있었다.

마애불을 둘러보고 법당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보살 아줌마가 구경 잘했냐며 매실차 1잔을 권
한다. 그런 것을 마다할 내가 아니라서 흔쾌히 1잔을 청했는데, 마침 날씨도 덥고 목구멍에서
도 갈증으로 불이 날 지경이라 달콤한 매실차로 더위와 갈증을 싹 진화했다. 거기에 산바람도
솔솔 불어와 더위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니 이런 것이 진정 극락(極樂)이 아닐까 싶다.
그 보살은 보통 오전에 올라와 양녀 비구니를 도우며 절을 지키거나 여러 먹거리를 만들어 준
다. 내가 갔던 날은 식혜를 만들어 절 냉장고를 채워주었다. 그렇게 절 볼일이 끝나면 오후에
속세로 내려간다. 그 외에 많은 시간은 양녀 비구니 혼자서 절을 지킨다.

그 양녀는 미국 아메리카 출신으로 이 땅에 들어온 지 이제 1~2개월 밖에 안된 초보 승려이다.
하필이면 첩첩한 산골인 이곳에 먼저 배치되어 시작부터 고적한 산사(山寺)의 삶을 익히느라
고생을 한다. 게다가 우리 말도 꽤 서툴러 꼬부랑 영어를 섞어주어야 겨우 알아듣는다. 왜 그
를 칠불암에 배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산에 양이(洋夷)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지라 그들을
상대하고자 고독한 산사살이도 미리 익히게 할 겸, 배치한 모양이다.
절에 머무는 승려는 그 혼자 뿐이라 그가 이 절의 임시 주지나 다름이 없었다. 절과 마애불을
지키고 청소하고, 기도하고, 수행하고, 우리 말 공부하고, 불교 공부하고, 빨래하고, (음식은
보살 아줌마가 거의 해줌) 양이 관광객들에게 마애불 설명도 해주고, 하는 일이 많은데, 아직
은 부족한 것이 많아 보살 아줌마와 스승 승려의 지도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그 스승은 매일
전화를 하여 영어로 이리저리 코치를 해주었다. 하지만 언어 소통에 거의 문제가 없을 정도로
우리 말을 익히게 한 다음 이곳으로 보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절과 마애불을 찾은 사람들에게 꼭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 인사성도 밝은데, 마침 미국에
서온 것으로 여겨지는 양이 2명이 그에게 칠불암 마애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시로 감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마애불에 대해 크게
찬양을 벌인 모양이다.
그는 6개월 정도 이곳에서 정진을 하다가 다른 절로 옮긴다고 하며, 아무쪼록 열심히 수행하
여 큰 비구니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  맞배지붕을 지닌 1칸짜리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에 봉안된 독성탱, 칠성탱,
산신탱


▲  칠불암에서 바라본 봉화골 남쪽 능선

▲  봉화골 정상부(신선암 뒤쪽)에서 바라본 봉화골 남쪽 능선과
배반평야, 토함산(吐含山)

▲  봉화골 정상부(신선암 뒤쪽)에서 바라본 남산동과 배반평야, 낭산(狼山)


칠불암에서 보살 아줌마, 양녀 비구니와 이야기꽃 좀 피우다가 잠시 잊었던 신선암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곳은 칠불암 바로 뒤쪽 절벽으로 아무리 지척간이라고 해도 홍길동이 아닌 이상
은 각박한 산길을 7~8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그렇게 해발 400m대인 봉화골 정상부에 이르면
남산 정상과 고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펼쳐지고, 조망의 질 또한 크게 상승되어 경주 동
남부와 배반평야, 토함산 등이 흔쾌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능선길로 접어들면 신선암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하는데, 그의 안내를 받아 가파
른 길을 내려가면 그 길의 끝에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신선암 마애불이 나타난다.

이후 내용(신선암, 고위봉, 열반골)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
서 흔쾌히 마무리 짓는다.

* 칠불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36-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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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백담사, 수렴동계곡, 영시암 겨울 나들이

설악산 백담사, 영시암, 수렴동계곡



' 설악산 겨울 나들이 (백담사, 영시암) '

백담사 백담계곡 돌탑들

▲  백담사 백담계곡 돌탑들

설악산 백담사 설악산 수렴동계곡

▲  설악산 백담사

▲  수렴동계곡


 



 

차디찬 겨울 제국의 한복판인 1월의 어느 적적한 날, 세계적인 명산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
는 설악산(雪嶽山)을 찾았다.
설악산은 거의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그의 품이 몸살이 나게 그리워지면서 이전부터 가고
싶었던 내설악(內雪岳)의 백담사로 출동했다. 허나 백담사만 보기에는 50% 허전하고 내 성
미에도 맞지 않아 영시암까지 가보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봉정암과 대청봉까지 싹 인연
을 짓고 싶었으나 산에서 지나친 욕심은 금물이다.

아침 일찍, 동서울터미널로 이동하여 백담사를 거쳐 속초(束草)로 가는 시외직행버스에 나
를 담았다. 동해바다를 향해 총알처럼 내달려 2시간여 만에 백담사입구에 도착했는데 평일
이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백담사입구에서 외가평교를 건너 12분 정도 가면 백담사 주차장과 마을버스 승차장이 마중
한다. 백담사는 길이 영 좋지 못해 일반 차량과 버스는 접근이 금지되어 있어 여기서 무조
건 차를 세우고 도보 또는 마을버스를 타야 된다.
용대리 사람들이 돈을 투자해 운영하는 이 마을버스는 백담사 주차장에서 백담사까지 운행
하는 백담사 셔틀버스로 중간에 정차하는 곳은 1도 없다. 겨울에는 보통 9시부터 17시까지
거의 20~30분 간격으로 다니며 휴일에는 증회한다. (여름에는 7시~19시까지 운행) 단 눈과
비가 내리거나 얼음이 얼면 바퀴를 접고 쉬므로 날씨를 잘 살피고 가야 뒷탈이 없으며, 강
추위가 기승일 때는 버스가 아예 안뜬다고 보면 된다.
또한 버스비가 무려 2,500원(성인 기준)이나 하여 이 땅에서 가장 비싼 마을버스에 속한다.
완전 독점 운행에 길까지 좋지가 못하니 비싸게 받는 것인데, 버스가 아니면 꼬박 2시간을
걸어야 되니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는 애시당초 주어지지 않는다. 백담사 권역을 찾는 사
람들 대부분은 마을버스를 이용하므로 설악산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그야말로 마르지 않
는 꿀샘이다.

마을버스 승차장에서 버스표를 구입하고(카드 결제 가능) 타는 곳으로 가니 버스가 바퀴를
접고 대기를 하고 있다. 만석 직전이라 서둘러 승차하니 운전사가 일일이 버스표를 수거하
고 시동을 걸어 백담사로 출발한다.
백담사로 인도하는 백담로는 백담계곡(百潭溪谷)을 따라 거의 1차선 수준으로 이어져 있는
데,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구불구불의 극치를 보여준다. 비포장 구간과 벼랑길도 상
당수 존재하여 생각 이하로 길 상태가 영 좋지 못하며, 차량 교행은 운전사들이 서로 연락
하여 적당한 곳에서 한다. 단순히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이라 쉽게 봤더만 그게 아니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백담계곡과 꼬부랑길의 정석을 보여주는 백담로에 한참 넋
이 나가 있으니 어느덧 백담사 정류장에 도착해 바퀴를 멈춰선다. 여기까지 소요시간은 15
분 정도, 거리는 7km 남짓이다.



 

♠  내설악의 중심 사찰, 백담사(百潭寺)

▲  백담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백담사 외경

백담사 정류장에서 백담계곡에 걸린 하얀 피부의 수심교(修心橋)를 건너면 바로 백담사 경내
이다. 절은 백담계곡 옆구리에 자리하여 뒤로는 내설악의 험준한 산줄기를 병풍으로 삼고 앞
에는 계곡을 방패로 삼아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 있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계곡가에 석
축을 다지고 돌담까지 둘렀다. 오랫동안 화마(火魔)로 고통받은 절이라 이렇게 2중으로 벽을
친 모양이다.


▲  속세와 백담사를 이어주는 수심교 (잠수교에서 바라본 모습)

절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은 수심교 동쪽에 있으나 백담사 정류장에서 백담사를 잇는 동선
에서 다소 비껴있어 지나치기 쉽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깜박하고 지나치
는 형편으로 그를 직접 지나는 것은 백담사 차량과 외지 차량 정도이다. 나는 일주문을 보긴
했으나 그의 아랫도리를 지나지 않았으며 사진에 담는 것도 깜박했다.

수심교를 건너면 맞배지붕을 지닌 금강문(金剛門)이 중생을 검문한다. 다소 소외된 일주문과
달리 경내로 들어서려면 꼭 거쳐야 되는 문이라 이곳의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좌우로 돌담을 둘러 혹시 모를 좋지 않은 기운을 경계한다.
금강문은 금강역사(金剛力士)의 공간으로 그 검문을 통과하면 바로 불이문(不二門)이 등장하
여 마지막으로 중생을 검문한다.

불이문을 지나면 사물(四物)의 공간인 2층짜리 범종루가 나오고, 이어서 서로 비슷하게 생긴
화엄실(華嚴室)과 법화실(法華室)이 나란히 나타난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은 종무소(
宗務所)로 여기서 화엄실은 전두환 전대통령이 1995년에 귀양살이 비슷한 은거(隱居) 생활을
했던 그 유명한 현장이다.
일명 29만원으로 악명이 높은 전두환이 이곳에 들어오게 되자 인제군 의원들은
'여기는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머물던 곳이지 죄인의 은둔지가 아니다. 그러니 나가라!
'
요구했으며, 그가 이곳에 머물 때는 절 옆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팔자 좋
게 불교와 자신을 주제로 요란하게 떠들기도 했다.
그가 잠시 서식했던 화엄실 방에는 그의 옷과 그때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맑은 물 가득한 백담사에서 유일하게 물이 흐린 곳 같다'
며 그의 흔적을 까기도 했다. 비록
노태우의 정치쇼긴 하나 과거의 잘못 좀 뉘우치라며 벽지 산사에 귀양을 보냈건만 그 보람도
없이 자신의 죄를 반성하지 않고 개짓을 일삼다 지옥으로 갔으니 실로 개탄스럽기 그지 없다.

화엄실과 법화실을 지나면 3층석탑이 나오면서 이곳의 법당인 극락보전 앞에 이르게 된다. 그
럼 여기서 잠시 백담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길쭉한 만해교육관
정면 9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백담사
에서 가장 큰 집이다. 현재 템플스테이 공간으
로 바쁘게 살고 있다.

            ◀  야광(夜光)나무
5월에 하얀 꽃을 내놓는 백담사의 상큼한 명물
로 그 꽃들이 밤에 주위를 환하게 비춰주어 야
광나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그 광경을 보려면 5월 이후에 와야 되나 엉뚱
하게도 겨울 한복판에 와서 화사한 꽃불은커녕
그 불에 몽땅 타버린 듯한 앙상한 모습만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설악산의 첩첩한 산주름 속인 백담계곡 깊숙한 곳에 그 이름도 유명한 백담사가 포근히 둥지
를 틀고 있다.
내설악의 대표 고찰이며 관문인 이곳은 647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는 여기서 한참 남쪽인 한계령(寒溪嶺) 부근 한계리에 절을 지어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하고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했다고 하는데, 자장의 창건설은 솔직히 신빙성이 없다.
690년 화재로 무너진 것을 719년에 다시 세웠는데 '심원사 사적기(尋源寺 事蹟記)'에 따르면
낭천현(狼川縣, 강원도 화천으로 여겨짐)에 있던 비금사(琵琴寺)를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그와 관련된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하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비금사 주변은 산짐승들이 많아 사냥꾼들의 발길이 잦았고, 그들로 인해 산수가 다소 더러워
졌다. 허나 비금사 승려들은 절 바깥에서 일어나는 산짐승 사냥은 전혀 모른 채, 열심히 샘물
을 길러 부처 공양에 여념이 없었다. 그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신통력을 부려 하룻밤 사
이에 대승폭포 밑 옛 한계사터로 절을 옮겨버렸다.
그 사실을 모르던 비금사 승려와 길손들은 다음날 아침 깨어보니 절은 분명 비금사이나 주변
풍경이 확 달라진 것에 크게 놀랐다. 전날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멋진 기암괴석은 물론 폭
포까지 있던 것이다. 이에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에게 관음청조(觀音靑鳥)가 날라와 '낭천의 비
금사를 옛 한계사터로 옮겼소~~!'
알려주었다.
산신령이 절을 강제로 옮기는 과정에서 절구가 떨어졌는데, 그 떨어진 곳이 춘천 부근 절구골
이라고 하며, 한계리 청동골에는 청동화로가 떨어졌다고 한다. 물론 전설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되겠으나 한계사를 중건했을 때 비금사를 옮겨 세운 것은 분명하다. 그걸 그럴싸하게 설화로
빚은 것이다.

785년 화재로 절이 파괴되었으며, 790년에 종연, 광학, 설흡 등이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에
절을 짓고 운흥사(雲興寺)라 했다. 하지만 984년에 또 불을 만나 쓰러지자 987년에 동훈, 준
희 등이 운흥사에서 북쪽으로 60리쯤 되는 곳에 절을 중건하고 심원사(深源寺)로 이름을 갈았
다.
이후 450여 년 동안 딱히 별탈이 없어 절은 비로소 기지개를 제대로 켰다. 이때 법당, 극락전
, 벽운루, 선승당. 동상실 등의 건물을 무수히 달았으며, 오세암, 봉정암, 백련암, 원명암 등
의 부속 암자를 거느렸고, 많은 고승이 찾아와 수도를 했다.

▲  교육 공간으로 쓰이는 만해당(卍海堂)

▲  화엄실(왼쪽)과 법화실(오른쪽)

1432년 오랫동안 뜸했던 화마가 다시 다녀가면서 잿더미가 되었으며, 1434년에 30리 밑에 절
을 중건하고 선구사(旋龜寺)라 했다. 이때 의준, 해성 등이 법당과 극락전, 요사채 2동을 세
웠다.
허나 1443년 화재로 또 무너지면서 1447년 한계사터에서 서쪽으로 10리(또는 1리) 정도 떨어
진 곳에 절을 세우고 영취사(靈鷲寺)라 했으며, 1455년 화재로 다시 파괴되자 1457년에 재익,
재화, 신열 등이 옛 절터 상류 20리 지점에 절을 짓고 백담사로 이름을 갈았다. 여기서 '담(
潭)'은 물이 모인 못을 뜻하는데, 그 덕분에 화마가 움찔하여 한동안 오지 않다가 1772년에
다시 찾아와 장난을 쳤다.
이때 놀란 승려들은 죄다 흩어지고 최붕(最鵬) 홀로 절터를 지키다가 1775년 태현(太賢), 태
수(太守) 등과 절을 일으켜 세우면서 옛날 이름인 심원사로 갈았다. 이후 6년 동안 법당, 향
각(香閣) 등을 세웠으며, 1783년에 현재 이름인 백담사로 이름을 바꾸게 되니 그 사연은 이렇
다.

절에 화마가 다녀갈 때마다 주지승 꿈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사람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
기이하게도 절 근처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듯한 바위가 있다. 계속되는 화재로 고통받던 주
지승은 절 이름을 바꾸려고 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大靑峯)에서
절까지 웅덩이(담) 수를 세어보라고 했다. 하여 이튿날 세어보니 딱 100개이다. 그래서 100개
의 담이란 뜻에 백담사로 이름을 갈고 현재 자리로 절을 옮기니 당분간은 평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름의 효과도 잠시, 1915년 겨울밤에 화마가 기습하여 불상과 탱화 20여 위를 제외한
건물 70여 칸(또는 160여 칸)과 경전, 범종을 모조리 날렸다.
하여 주지 인공(印空)은 오세암(五歲庵)으로 자리를 옮겼고, 강원도 일대를 돌아 1,786원 30
전을 마련하여 1919년 4월 법당 20칸과 화엄실 20칸을 마련했다. 그리고 1921년 봄에 응향각
과 사무실 등 30칸을 마련하고 종과 북까지 주조해 낙성법회를 열었다.
허나 6.25 때 총탄에 의해 절 태반이 다시 화마의 덧없는 먹이가 되고 만다. 이후 1957년 중
건했으며, 계속 불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백담사의 역사는 창건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화마와의 싸움, 화마의 희롱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 화마로 인해 잃은 것이 너무 많다. 정말 백담사는 불과 무슨 원한이 있는지 절을 완전히 날
려버린 화재만 무려 8번에 이른다. 오죽하면 절의 이름도 불과 상극인 '백담'이라 했겠는가.

▲  극락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상과 지장탱

▲  백담사의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만해 한용운은 백담사와 오세암에 머물며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십현담주해(十玄
談註解)','님의 침묵' 등을 집필했으며, 그가 남긴 서적과 유품이 만해기념관에 일부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딴 만해당, 만해교육관이 있고,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용대리에
만해마을이 있는 등, 만해와 백담사, 설악산과의 끈끈한 인연을 보여준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나한전, 만해당, 금강문, 관음전, 산령각, 무문관(無門關
)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절이 비록 오래되었다고 하나 툭하면 화마로 모두 날라가 고
색의 기운도 싹 날라갔다. 그러다 보니 소장문화유산도 국가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
상 및 복장유물이 전부이며, 오래된 3층석탑이 극락보전 뜨락에 있다.
또한 만해기념관에는 만해와 백담사 승려들의 서적과 유물이 있고 절 주변 백담계곡에는 돌탑
이 무수히 닦여져 이곳 풍경의 백미로 꼽힌다. 게다가 교통도 불편한 첩첩한 산골에 묻혀 있
어 산사의 내음이 아주 진해 속세(俗世)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머물고 싶은 충동을 일
으킨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음)

* 백담사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산62 (백담로 746 ☎ 033-462-6969)
* 백담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백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보물 1,182호

백담사에 왔다면 극락보전에 깃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꼭 친견하기 바란다. 그는 이곳의 유
일한 국가 문화유산이자 오래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백담사 법당이 그 흔한 대웅전(大雄殿) 대신 극락보전을 칭한 것은 바로 아미타여래좌상의 공
간이기 때문으로 그 좌우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고운 모습으로 자
리해 있는데, 저들은 아미타불이 적적할까봐 근래에 붙여놓은 협시보살들이다.

이곳 아미타불은 1748년에 조성된 것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였고, 머리
꼭대기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았다. 얼굴은 둥글며, 가는 눈과 작은 입,
오똑 솟은 코를 지녔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넓은 가슴과 어깨를 지니고 있으
며,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꺼운 편으로 옷주름이 곡선(曲線)으로 처리되었다. 가슴에는 'U'
자형의 중복된 주름을 보이는데 이런 주름은 조선 초기 특징을 이은 것이다.

18세기 초기 불상 중 뛰어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의 뱃속에는 고맙게도 조성 연대
를 알려주는 발원문 여러 장과 저고리 1점, 유리와 수정 등의 파편 등이 나와 안그래도 빈약
한 백담사의 문화유산을 조금 늘려주었다. 이들 유물은 아쉽게도 공개하지 않으며 오로지 아
미타불만 관람이 가능하다.


▲  백담사3층석탑
바닥돌과 기단(基壇), 3층 탑신, 약간의 머리장식을 지닌 조촐한 모습으로
조선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  만해기념관에 전시된 영환지략(瀛環志略) (전 10권)

영환지략은 1904년에 백담사 승려로 만해의 스승인 김연곡(金連谷)이 건봉사(乾鳳寺) 유학승
들로부터 얻은 세계지리서이다. 그는 이 책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계획해 먼 길을 떠났는데,
우리의 옛 땅인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친일 패거리인 일진회(一進會) 회원으로 오인을
받아 자칫 골로 갈 뻔했다.


▲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왜정(倭政) 시절 금서(禁書)의 하나로 월남(베트남)의 망국 과정을 담았다.
만해는 이 책을 애독하면서 월남의 망국과 조선의 망국을 비교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강조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의 하나인 황단삼회장 저고리 복제품

비공개인줄 알았던 복장유물의 일원인 저고리가 만해기념관에 들어있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고운 빛깔의 그를 대하니 글쎄 복제품이란 3글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3글자에 얼
마나 허탈하던지;; 복장유물 진품은 공개를 하지 않으며, 만해기념관에 있는 것들도 크게 땡
기는 것이 없어 이 정도로 마무리를 짓는다.


▲  백담사 잠수교 (백담사에서 바라본 모습)

백담사와 속세를 잇는 다리로 수심교와 잠수교 2개가 있다. 백담계곡에 높이 걸려있는 수심교
는 뚜벅이들 전용 다리이고 키가 낮은 잠수교는 차량 통행용으로 뚜벅이들도 이용이 가능하다
. 계곡이 얌전할 때는 건너가도 상관은 없으나 폭우로 계곡이 크게 흥분한 경우에는 다리가
침수되어 이름 그대로 잠수교가 된다. 그때는 무조건 수심교로 건너가야 된다.


▲  백담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잠수교와 백담사

▲  백담계곡 돌탑의 장대한 물결

백담사에 왔다면 목조아미타여래좌상도 중요하지만 백담계곡에 장엄하게 펼쳐진 돌탑의 무리
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백담사를 대표하는 풍경(백담사를 소개하는 자료나 사진에 메인으로
등장함)으로 경내 밑에서 계곡 상류 약간까지 계곡 돌밭에 수만 개가 넘는 조그만 돌탑이 닦
여져 있다.
눈과 얼음에 꽁꽁 봉해진 계곡 물줄기와 울창한 산림과 어우러진 이곳 돌탑은 중생들이 쌓은
것도 있고, 백담사에서 쌓은 것도 있는데, 그들이 쌓은 돌탑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돌탑의
거대한 공간이 되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여름이나 초가을에 폭우로 계곡이 단단히
흥분을 하면 돌탑 상당수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가기도 하나 계곡이 흥분을 가라앉기가 무섭게
돌탑이 마구 뿌리를 내리며 이전 모습을 되찾아 그야말로 '솟을 돌탑'이다.


▲  사람들의 소망을 먹고 자란 백담계곡 돌탑들

▲  돌탑과 자연석이 뒤섞인 계곡 돌밭과 얼어붙은 백담계곡
(백담사 방향)

▲  겨울 햇살이 살포시 어루만지는 백담계곡 돌탑들 (수렴동계곡 방향)



 

♠  백담사와 영시암을 이어주는 수렴동계곡(水簾洞溪谷)

▲  수렴동계곡 하류 숲길

보통 백담계곡은 영실천 물줄기 중 백담사입구에서 백담사 주변까지, 그리고 수렴동계곡은 백
담사에서 수렴동대피소 구간 물줄기를 일컫는다. 수많은 소(못)와 담, 기암괴석,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계곡으로 외설악(外雪嶽)의 천불동계곡(千佛洞溪谷)과 함께 설악산의 대표 계곡으로
추앙을 받는다.

나는 백담사 후식용으로 영시암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백담사에서 그곳까지는 약 3.5km 거리
로 1시간~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나는 걸음을 서둘러 1시간에 갔는데, 오로지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이다. 오르락 내리락이 여럿 반복되고 평탄한 길도, 나무데크 길도 이어지며, 아슬아
슬한 벼랑길도 나타나는 등,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허나 영시암~오세암, 영시암~봉정
암~대청봉 구간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  얼어붙은 수렴동계곡 하류

조선 때는 백담계곡과 수렴동계곡을 통틀어 곡연(曲淵)이라 불렀다. ('백담계곡'만 지칭하기
도 함) 설악산에 퐁당퐁당 빠졌던 옛 사람 중의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있는데, 그는
곡연을 다녀가 '곡연기(曲淵記)'를 남겼다.
그 기록에는 곡연의 길이는 수십 리에 이르며, 사방이 막혀있어 사람이 통하지 못하나 안으로
들어가면 지세가 평탄하고 넓으며 토지가 비옥해 밭을 일구어 살만하다고 했다. 또한 수석의
뛰어남은 이곳이 제일이라 치켜세웠으며, 옛 집터가 하나 있는데, 그 집은 김시습(金時習)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20세기 말까지 화전민(火田民)들이 설악산 골짜기 도처에 살았고, 백담~수렴동계곡에도 살았
으나 공원을 정비하면서 이제는 가늠하기도 어려운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  얼어붙은 계곡과 끝없이 펼쳐진 계곡 돌밭 (수렴동계곡 하류)

▲  겨울에 깊히 잠긴 수렴동계곡 산길
그윽하면서도 조금은 차가운 산바람이 나의 두 귀를 흥분시킨다. 겨울에
깊은 산골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시원하고 상큼한 산바람 소리.

▲  수렴동계곡에서 만난 설담당부도(雪潭堂浮屠)

적막한 수렴동계곡을 한참 거닐고 있으니 난데없이 늙은 승탑(부도) 하나가 발길을 붙잡는다.
이런 고적한 곳에 왠 부도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18세기 승려인 설담당의 승탑(僧塔)이다. 계
곡 길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묻혀있으나 길에서도 훤히 보이므로 정신줄을 크게 놓지 않는
이상은 지나칠 우려는 없다.
설담당은 신계 재익(新溪 載益)을 스승으로 삼아 출가한 승려로 법호는 태활(泰闊)이다. 용암
(龍岩)의 법통을 이었고 정월 지순(淨月 知淳)에게 그 법통을 전수했으며, 1781년 경상도에서
설악산 심원사를 찾아와 수행했고, 최붕을 도와 대웅전과 향각을 지었다. (1783년에 절 이름
이 백담사로 변경됨)
이후 그의 행적은 설악산 산신도 모를 정도로 묘연하며, 승탑이 있는 곳이 심원사 옛터 부근
이라 백담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보인다.

숲속에 외롭게 자리한 설담당부도는 18세기 말에 조성된 석종형(石鐘形) 탑으로 돌로 다진 네
모난 바닥돌 위에 탑을 올린 조촐한 형태이다. 엄연한 백담사의 유물로 백담사와 영시암 중간
정도에 자리해 있어 자연이 가득한 곳에 약간의 고색 기운을 선사한다.


▲  수렴동계곡 중류 산길
설담당부도를 뒤로 하며 잠시 잊었던 영시암으로 길을 재촉한다.

▲  수렴동계곡 벼랑길

▲  수목이 울창한 수렴동계곡

▲  얼음에 꽁꽁 봉해진 수렴동계곡 (영시암 직전)



 

♠  수렴동계곡 깊숙한 곳에 고적하게 자리한
설악산 영시암(永矢庵)


▲  뒷쪽에서 바라본 영시암 경내와 설악산의 깊은 산주름

머리 세었으나 마음은 한층 활기차고 몸은 말랐으되 도(道)는 더욱 살찌네
안위(安危)는 산 밖의 일이니 영원히 영시암 문 열지 않으리

'김창흡이 지은 영시암 춘첩(春帖)'

내 삶 괴로워 즐거움이 없으니 속세의 모든 일 견디기 어려워
늙어서 설악에 투신하려고 여기에 영시암을 지었네
자연을 진실로 사랑하니 바위와 연못 마음에 맞어
마음대로 해도 마땅하니 쓸쓸함도 달게 여기네

'김창흡이 지은 '암자를 얻고서'


백담사에서 1시간을 들어가니 영시암이 슬슬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 앞으로 다가선다. 나를 이
첩첩한 산골까지 부른 영시암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이 지은 집에서 그 역사
가 시작된다.
안동김씨 집안인 김창흡은 김수항(金壽恒)의 3째 아들로 성리학과 시문(詩文)에 능했다. 그는
벼슬에는 관심이 거의 없어 팔자 좋게 산수(山水)를 즐겼는데,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己
巳換局)으로 부친 김수항이 처단되고, 모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세상에 대한 염증이 심해
졌다.
하여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설악산으로 들어갔고, 백담계곡 하류에 집을 지어 3년의 공사 끝
에 1707년 완성을 보았다. 그는 그 집을 벽운정사(碧雲精舍)라 부르며 속세에 지친 몸을 기댔
으나 1708년 화재로 날려먹고 만다.
그렇게 다시 염증을 느낀 그는 더 깊숙한 곳으로 발길을 재촉, 현재 영시암 자리에 퐁당퐁당
빠져 암자를 짓고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란 뜻의 영시암이라 했다. 즉 속세를 영원히 떠나 은
거하겠다는 자신의 굳은 의지를 이름에 담은 것이다. <사대부의 집이나 별서에 '암(庵)'이란
이름을 많이 썼음>

그 시절 영시암의 모습은 김창흡이 쓴 포음집(圃陰集)의 동유기(東遊記)에 잘 나와있다. 집은
북향을 한 판자집으로 위치한 곳이 꽤 높으며, 남쪽은 복실이고 북쪽은 작은 다락이라 시원함
과 따뜻함을 갖추었다. 집에서 서남쪽 위로 200보 거리에 무청정(茂淸亭)이란 정자를 세웠는
데, 한유(韓愈)의 반곡서(盤谷序)에 나온 말에서 따왔다. 나무를 다듬지 않아 예스러운 모습
이다.

그는 거사 최춘금(崔春金)과 같이 살았는데, 1714년 10월 그가 볼일을 보러 속세로 나갔다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만다. 이에 다시 실의에 빠졌고 그의 장례를 치루고는 다시는 오
지 않을 기세를 보이며 영시암과 설악산을 떠났다.
허나 설악산을 잊지 못해 금방 다시 찾았고, 백담계곡 하류에 갈역정사(葛驛精舍)를 짓고 머
물렀다. 거기서 수렴동계곡과 영시암은 가까운 거리이나 다시는 찾지 못했으며, 그렇게 인생
을 마감하게 된다. 또한 그가 세운 영시암도, 갈역정사도 주인을 따라 모두 사라지고 만다.

1749년 인제현감 이광구(李廣矩)가 오랫동안 버려진 영시암의 자취를 찾았고, 그 자리에 유허
비(遺墟碑)를 세워 그 자리를 추억했다. 이후 승려 설정(雪淨)이 이곳에 반해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1760년 현재 영시암을 짓게 된다. 영시암은 그렇게 사대부의 거처에서 불교 사찰로
바뀌게 된 것이다. 1925년에 중건을 했으며, 근래에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비로전, 삼성각,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어 절이 갖출 건
물은 거의 지니고 있다. 오래된 문화유산은 전하지 않으나 절 앞에 수렴동계곡이 흐르고 주변
풍경이 고와 인간 세상의 풍경 같지가 않다.

이곳은 백담사에서 봉정암, 오세암, 대청봉으로 가는 길목이라 지나가는 수요가 많다. 게다가
인심도 후해 나그네들에게 믹스 커피와 뜨거운 물, 사탕 등의 간식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쉼
터를 갖추고 있어 잠시 휴식 겸 망중한에 잠기기에 좋다.

* 영시암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1720 (백담로 1125 ☎ 033-462-6677)

▲  범종 등의 사물을 지닌 2층 크기의
범종루(梵鍾樓)

▲  근래 장만한 비로자나불의 거처
비로전(毘盧殿)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건물로
칠성(치성광여래)과 독성(나반존자),
산신의 공간이다.

▲  삼성각에 봉안된 산신과 칠성, 독성

▲  팔작지붕을 지닌 선방(禪房)


▲  영시암 현판을 내건 법당(대웅전)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영시암의 중심 건물이다.

▲  금동 피부를 자랑하는 대웅전 석가여래삼존상과 지장보살상
설악산의 좋은 기운을 늘 누리고 살아서일까? 다들 표정들이 맑고 명랑하다.

▲  영시암의 넉넉한 마음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해 뜨거운 물과 커피믹스, 사탕 등을 흔쾌히 제공하고 있다.
바로 앞에는 의자와 탁자를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영시암을 둘러보고 아쉽지만 여기서 길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봉정암, 오세암, 그리고 대
청봉까지 쭉쭉 올라가고 싶었지만 시간도 문제이고 거기까지 올라갈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특히 봉정암과 대청봉은 1박을 해야 무리가 없을 것이다.
봉정암과 오세암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왜 이렇게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지 '저기만 더 올라가
면 봉정암인데, 오세암인데' 너무나 아쉽다. 허나 이번 인연은 여기까지라 여기서 쿨하게 길
을 접고 영시암 이후 구간은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며 백담사로 내려왔다.


▲  빽빽하게 우거진 수렴동계곡 산길
겨울이라 그렇지 봄이나 여름, 가을에 왔으면 하늘을 보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  박석이 입혀진 수렴동계곡 산길

▲  계곡 바위에 심어진 산악신앙의 소박한 현장, 돌탑들

▲  돌탑의 거대한 세상, 백담사 옆 백담계곡

백담사로 내려왔으나 벌써 철수하기에는 50% 아쉬워 다시 백담사로 들어갔다. 마침 불교용품
파는 곳에서 절을 찾은 사람들에게 새해 기념으로 '백담사 법요집(法要集)'을 나눠주고 있어
서 기념으로 하나 챙겨왔다. (가져오긴 했으나 거의 읽지도 않은 것은 함정)

절을 나오니 속세로 나가는 마을버스가 바퀴를 접고 승객을 태우고 있다. 매표소에서 버스표
를 구입하여 버스에 탑승했고, 버스는 2/3 정도를 채우고 구불구불한 길을 10여 분 달려 백담
사 주차장에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중간에 2~3명이 탔는데 그들은 설악산국립공원 직원이었
음)
여기서 백담사입구로 나와 수도권으로 가는 시외직행버스를 타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은 설악산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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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 용마산~아차산~망우산 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용마산1보루, 용마산5보루, 망우산1보루>

용마산~망우산 나들이


'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 용마산~망우산 나들이 '
용마산1보루와 서울시내
▲  용마산1보루 봉우리와 서울 시내
 



 

용마산은 아차산(峨嵯山, 295m)의 일원으로 한강에서 중랑구 북쪽까지 이어진 아차산 산
줄기의 중간을 맡고 있다. (북쪽은 망우산이 맡고 있음)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용마봉(龍馬峰), 장군봉(將軍峯)이라 불리기도 하며, 봉우리가 커서 대봉(大峰
)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광진구와 중랑구(中浪區), 그리고 중랑구와 구리시(九里市)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
울 동부와 동북부, 동남부 지역과 구리, 남양주, 하남 지역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전략
적 요충지로 고구려(고구리)와 신라(新羅)가 보루를 주렁주렁 달며 애지중지 했다. 또한
아차산에서 시작된 아차산장성(長城)이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까지 이어지는데, 군데군데
장성의 흔적이 아련히 남아있다.

용마산에는 아기와 용마의 짧막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급 아이가
태어나면 이유 불문하고 그 가족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
럴까?) 그 시절 이곳에서 장사급 아기가 태어났는데, 집안 몰살을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
를 죽였다. 그러자 용마봉에서 아기가 타고 다닐 용마(龍馬)가 나타나 다른 곳으로 갔다
고 하며 (또는 죽었다고도 함) 그 연유로 용마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며,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어 무인(武人)을 차별했던 고려 중기나 조선 때 빚어진 전설이 아닐까 싶
다. 또한 용마산과 아차산 서쪽 자락에는 조선 왕실에서 운영하던 살곶이 말목장이 있었
는데, 용마급 말이 많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또는 용마가 나왔다고 해서;) 용마
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러니 후자가 맞을 것이다.

용마산은 아차산과 더불어 나의 진심 어린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지금까지 200번 넘게
그의 품을 찾았다. 그렇게 오지게 안겼음에도 질리기는커녕 매년 꾸준히 나의 마음을 비
추고 있는데, 늦가을이 깊어가던 11월 첫 무렵에 용마산의 여러 보루를 복습하고자 다시
발걸음을 했다.


▲  긴고랑공원



 

♠  용마산1보루와 2보루(堡壘)

▲  용마산 남쪽 능선길

이번 용마산 나들이는 중곡4동 긴고랑에서 시작했다. 긴고랑은 아차산과 용마산 사이에 자리
한 골짜기로 골이 길어서 긴골, 진골이라 불리다가 긴고랑으로 이름이 갈렸는데, 아차산과 용
마산이 베푼 물이 긴고랑계곡을 이루며 중랑천과 한강으로 흘러간다.
아차산 일원(아차~용마~망우산)에서 가장 크고 상태도 좋은 계곡으로 물도 많고 바위와 너른
반석이 즐비하며, 풍경도 괜찮아서 도심 속 피서의 성지(聖地)이자 쉼터로 바쁘게 살고 있다.
(계곡 상류~중류에 괜찮은 곳이 많음)

계곡 하류에 닦여진 긴고랑공원 서쪽에 용마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남쪽 능선길이 있다. 바로
그 길로 가야 용마산1/2보루를 만날 수 있는데, 간만에 긴고랑에 왔지만 마음은 이미 보루에
가 올라가 있어 바로 능선길로 들어섰다.
용마산 남쪽 능선길은 시작부터 속세살이만큼이나 각박한 경사가 펼쳐져 숨을 제대로 가쁘게
만든다. 흥분한 경사를 순화시키고자 계단길을 적지 않게 깔았으나 그래도 힘든 것은 마찬가
지이다. 이런 길은 그저 자존심을 곱게 접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좋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
오르면 경사가 조금씩 순해지며 닿지 않을 것 같던 용마산1보루터가 활짝 마중을 나온다.


▲  용마산 남쪽 능선(용마산1보루 남쪽)에서 바라본 아차산의
부드러운 산줄기

▲  용마산 남쪽 능선(용마산1보루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광진구 중곡동과 중랑구 남부 지역을 비롯해 동대문구와 성북구,
멀리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용마산1보루터 남쪽 외곽

▲  용마산1보루터 - 사적 455호

용마산1보루는 용마산 남쪽 능선 183m 봉우리에 살짝 깃들여져 있다. 용마산 보루 중 가장 남
쪽으로 돌로 다진 석축 부분은 거의 노출되어 있지 않으나 30~40cm 정도의 할석이 곳곳에 튀
어나와 햇살을 받고 있다. 비교적 평탄한 석축 안쪽에는 흙이 쌓여있는데, 그 남쪽 부분 퇴적
토(堆積土)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가 다진 보루임을 강하게 어필한다.

1보루의 규모는 직경 5m, 길이 16m 정도로 파악되고 있으며, 조그만 군사시설이나 초소로 한
강과 중랑천에서 용마산 정상, 아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다. 하여 바로 위에 있는 2/3보루
를 보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루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흔적 일부가 수풀과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뒤
늦게 발견되어 대륙을 꿈꾸는 우리로 하여금 고구려를 다시 기억하게 해준다.


▲  자연의 일부로 녹아든 용마산1보루

이 보루가 용마산1보루, 즉 넘버원 보루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것은 없다. 물론 고구려가 만
든 그 자체로도 아주 특별한 존재이나 이곳이 1보루가 된 것은 용마산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보루이기 때문이다. 6개의 보루가 나온 아차산도 발견된 순서대로 1보루~6보루로 매겼고, 망
우산도 그렇다. (망우산은 3보루까지 확인됨)

현재 용마산에는 보루터 7곳이 있으나 그게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아직까지 숨바꼭질을 하
고 있는 보루터가 더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차산과 망우산도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이곳을 비롯한 용마산 보루 7형제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용마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밑에 긴고랑과 중곡동, 구의동(九宜洞)을 비롯해 송파구, 강동구,
강남 지역, 남한산, 대모산 산줄기가 두 눈에 들어온다.

▲  용마산1보루~2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세상을 향해 고개를 쳐든 정면 봉우리에 용마산1보루가 있다. 그 너머로
광진구, 성동구, 송파구, 강남구, 우면산, 관악산 등이 두 망막에
잡힌다.

▲  용마산2보루 남쪽 오르막길

▲  용마산2보루터 - 사적 455호

용마산1보루에서 북쪽으로 250m 정도 떨어진 해발 225~230m 능선에 용마산2보루터가 있다. 면
적 약 379㎡, 둘레 약 60~79m, 폭 8m로 1보루보다 훨씬 덩치가 큰데, 윗 부분이 평탄하게 닦
여졌고 그 주위로 석축이 둘러져 있다. 보루 동쪽 중간 경사진 곳에 무덤 1기가 있고 무덤 옆
에는 소토층이 노출되어 있는데, 거기서 흑갈색과 황갈색 피부의 고구려 토기편이 여럿 발견
되어 고구려가 다졌음을 살짝 귀띔해 준다.

이곳은 한강과 중랑천에서 용마산 정상, 아차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밑으로 1보루를 관리하고
위로는 3보루를 보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1보루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우수하
며 여기서 천하를 굽어봤을 2보루의 모습에 대해서는 딱히 정답은 없으나 강화도에 널려있는
조그만 돈대(墩臺)를 생각하면 될 듯 싶다.


▲  용마산2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왼쪽은 아차산이고, 아차산과 용마산 사이로 움푹 들어간 곳이 긴고랑이다.

▲  용마산2보루 북쪽에서 바라본 천하
용마산 서쪽 능선과 중랑구, 동대문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등

▲  용마산 명품소나무 제1호

용마산2보루에서 남쪽 능선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서울 시내를 굽어보는 용마산전망대에 이른
다. 그 전망대 남쪽에 좌우로 넉넉하게 퍼진 소나무가 있는데, 그가 용마산 명품소나무 1호이
다.
광진구(廣津區)는 용마산 능선부에서 잘생긴 소나무를 선별해 2009년에 명품소나무의 지위를
주었는데, 처진소나무처럼 좌우로 넉넉하게 퍼져 상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용마산전망대

천하를 향해 고개를 쳐든 용마산전망대는 용마산 정상 서남쪽에 닦여져 있다. 서/남/북이 확
트인 곳에 자리해 있어 용마산 구역에서 가장 조망 맛이 좋은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
가 높은 서울 시내가 저 밑에 납작하게 펼쳐져 마치 천하가 내 것처럼 즐거운 기분이 모락모
락 피어오른다. 산을 오르는 재미가 바로 이런 맛 때문이지.

여기서는 서울 동부와 동북부(도봉구, 강북구), 동남부(송파구, 강동구), 강남권(강남구, 서
초구), 서울 도심부(중구, 종로구), 도봉산, 북한산(삼각산), 북악산(백악산), 남산, 관악산,
대모산, 남한산, 한강 등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특히 야경(夜景) 맛이 좋다.


▲  용마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두껍게 다가오는 아차산 산줄기 너머로 강동구와 송파구, 강남구, 성남시,
남한산, 대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용마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긴고랑과 용마산1보루, 광진구, 성동구, 송파구, 강남구, 관악산 등

▲  용마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중랑구와 동대문구, 성북구, 강북구, 서울 도심부,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등



 

♠  용마산3보루, 4보루, 망우산

▲  용마산 정상(348m)

용마산 정상은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남쪽과 동쪽, 서쪽은 조금 가파르고 북
쪽은 약간 완만하다. 아차산 주능선과 망우산, 긴고랑에서 접근했을 때는 정상 동남쪽 체육시
설에서 계단길로 정상으로 올라가면 되며, 용마폭포공원 주변에서 올랐을 때는 북쪽 계단길을
통해 정상으로 들어서게 된다.
바위로 이루어진 용마산 정상부에는 정상 인증 모델로 인기가 높은 살짝 둥근 얼굴의 용마산
표석과 삼각점(三角點, 대삼각본점). 태극기가 펄럭이는 게양대가 있으며, 인공이 가해진 듯
한 돌들의 무리가 정상부와 정상 남쪽 경사면, 정상 북쪽 곳곳에서 눈에 띄는데, 그들은 용마
산3보루의 흔적들이다.

이곳 보루는 정상부에 씌워진 것으로 3보루터 흔적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얼핏 보면 봉우리
전체가 인공으로 다진 언덕처럼 보이나 봉우리는 순수 자연산이 맞다. 정상부에 헬기장(지금
은 없음)을 닦으면서 보루 상당수가 파괴되고 헝클어졌는데, 평탄하게 깎여진 부분과 산길 주
변에서 흑회색과 황갈색, 홍갈색 피부의 토기를 중심으로 다량의 토기 파편들이 햇살을 보았
다.
이들은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라 고구려가 다진 보루임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데, 신라가 만
들었다는 의견도 있어 고구려가 먼저 3보루를 닦고 신라가 수리해서 쓴 것으로 여겨진다. 그
리고 옛 헬기장 서쪽 부분에 적갈색의 소토층이 있다.

* 용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7동, 광진구 중곡4동


▲  정상 인증 모델로 인기가 높은 용마산 정상 표석의 위엄
평일 오후라 한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주말과 휴일, 평일 저녁에는
정상 인증을 하려는 사람들로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용마산 동쪽 능선(용마산 정상~아차산 주능선)에서 바라본
아차산 산줄기 ①

▲  용마산 동쪽 능선(용마산 정상~아차산 주능선)에서 바라본
아차산 산줄기 ②


▲  용마산 동쪽 능선길(용마산 정상~아차산 주능선)

용마산 정상과 아차산 주능선을 이어주는 용마산 동쪽 능선길은 쑥 내려갔다가 바위가 펼쳐진
중간에서 다시 올라갔다가 서서히 내려가는 구조이다. 오르락 내리락을 2번을 해서 그렇지 대
체로 완만한 능선길로 남쪽으로 아차산 주능선과 광진구, 송파구, 한강 등이 바라보이며, 북
쪽으로 중랑구와 망우산 등이 늘 시야에 따라붙어 두 눈을 즐겁게 한다.


▲  용마산4보루터 - 사적 455호

용마산 정상에서 동쪽 능선을 가다 보면 아차산 주능선을 만나기 직전에 'H'마크가 새겨진 헬
기장이 있다. 바로 그곳에 고구려가 심은 조그만 점 용마산4보루가 살짝 깃들여져 있다.

용마산4보루는 용마산3보루와 아차산 주능선 보루를 연결하는 곳으로 보루 둘레는 약 228m이
다. 동쪽 무덤 주변에서 회흑색 연질토기와 대형 항아리 조각, 대상파수편이 나왔고, 북서쪽
에서는 철제 화살촉 1개가 발견되었는데, 보루터 동쪽 지상에서는 석축 구조물이 일부 노출되
어 있으며, 동쪽과 서쪽 중간 지점 저지대는 집수(集水)시설로 여겨진다.
1994년에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했을 때는 동쪽과 서쪽을 별개 보루로 여겼으나, 2003년에 서울
시에서 다시 조사를 벌여 하나의 보루임을 확인했다. 아직 전체적인 발굴조사는 받지 못했으
나 하루 속히 주변을 뒤집어 이곳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 보따리가 싹 풀렸으면 좋겠다.


▲  동쪽에서 바라본 용마산4보루터

▲  아차산~망우산 주능선길 (용마산 동북쪽 능선)

용마산4보루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아차산~망우산 주능선과 만난다. 이 능선은 아차산생태
공원에서 아차산성, 아차산 정상, 아차산4보루, 용마산5보루을 거쳐 망우산으로 이어지는 능
선길로 대자연이 내린 서울의 거대한 동쪽 벽이다.
아차산과 용마산 일부 구간에서 조금 각박한 경사를 보이나 거의 완만한 편이며, 동/서/남/북
으로 일품 조망이 펼쳐져 환상적인 지붕길을 보여준다. 또한 천하 둘레길의 성지로 추앙을 받
는 서울둘레길2코스(용마~아차산 코스)도 이 주능선의 신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간다.


▲  용마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망우산 주능선으로 들어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헬기장이 나오면서 용마산5보루터를 알
리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용마산5보루는 아차~망우산 주능선 해발 316m 고지에 자리해 있다. 아차~용마~망우산 보루 식
구 중 용마산3보루 다음으로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성벽 둘레 약 132m. 내부 면적은 약 936㎡
정도로 파악되고 있는데, 보루 북동쪽 비탈면에 성벽으로 여겨지는 석축 일부가 약간 드러나
있을 뿐, 대자연에 제대로 녹아들어 흔적은 희미하다.
보루 북쪽에서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회흑색 연질토기)가 깨진 채로 출토되었고, 물미
로 추정되는 철제품도 발견되어 고구려가 닦은 보루임이 분명해졌다. 석축과 상층부에 보루
건물터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아차산3보루와 4보루처럼 헬기장이 닦이면서 상당수가 파괴되
었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하여 고구려 보루임을 확인했고, 2000년에 서울대박물관에서 조사
를 했으며, 2003년 서울시에서 측량 조사를 했다. 허나 이곳도 완전한 발굴 조사를 받지 않은
상태라 언젠가 이 일대를 싹 뒤집고 조사를 해야 될 것이다.

이곳은 동/서가 뻥 뚫려있는 곳으로 서쪽으로 중랑천과 서울 동부, 동북부 지역이, 동쪽으로
는 한강과 구리시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그러니 여기에 보루를 닦아
아차산과 용마산에서 망우산, 봉화산, 수락산을 잇는 요충지로 사용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이
처럼 아차~용마~망우산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은 것은 오랜 라이벌이자 숙적인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고 한강 유역을 수비하고자 함이다.
이후 신라가 서울 지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가 다진 보루 일부를 손질해 요새로 삼았고 신라
말 이후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면서 보루들이 모두 버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 용마산5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산1-2


▲  아차산~망우산 주능선길 (용마산 동북쪽 능선길)

▲  아차산~망우산 주능선(용마산 동북쪽 능선길)에서 바라본
한강과 구리시, 강동구, 하남시 지역


용마산5보루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하염없이 펼쳐진다. 나무로 다져진 나무데크길이 잘 닦여져
있으나 경사가 좀 각박하고 계단이 많아 이곳으로 오를 경우 숨이 제대로 찰 것이다.
그 산길을 쑥 내려가면 용마산 북쪽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면목동 사
가정공원, 동쪽으로 가면 구리시 아치울마을과 시루봉, 북쪽 산길을 오르면 망우산이다. 여기
서 바로 내려갈까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망우산을 조금 복습하
기로 했다.


▲  망우산(忘憂山)

아차산과 용마산 북쪽에 넓게 솟은 망우산(忘憂山, 281m)은 아차산 식구의 일원으로 그 유명
한 망우리공동묘지를 품고 있다. 현재는 묘지란 이름 대신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세탁되었는
데, 고구려가 심은 보루 유적 3곳이 발견되어 망우산1보루와 2보루, 3보루란 이름으로 살아가
고 있다. 허나 1보루만 간신히 남아있으며, 나머지는 완전 중환자 이상의 상태이다. 그래서 1
보루만 아차산일대 보루군 식구로 들어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어둠에 잠긴 망우산1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 북쪽 갈림길에서 10분 정도를 오르면 망우산 남쪽 봉우리(해발 280.3m)에 깃든 망우산
1보루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1994년 지표 조사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 보루로 여겨지며, 보루로 밝
혀지기 훨씬 이전부터 헬기장과 군부대 시설, 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철저히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가 근래에 헬기장과 참호를 없애고 보루가 있던 자리를 정리하여 보루터 티를 조금이나
마 내게 했다.
안내문이 없다면 그냥 지나쳐도 용서가 될 정도로 보루터 흔적은 딱히 없으며, 여기서 더 북
쪽으로 향하면 2보루와 3보루가 나오는데, 마음 같아서는 그곳까지 가고 싶었으나 아직 여유
가 있을 것 같던 땅꺼미가 그새 짙어지면서 그곳을 향한 내 마음을 완전히 접고 철수했다. 산
은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는 것이 상책이다. (아차산과 용마산은 야간 등산으로 많이 올랐지
만 정작 망우산은 야간 경험이 없음)

이렇게 하여 용마산, 망우산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망우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3,8동


▲  망우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와 일몰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산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이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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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당, 여수 충민사 <마래산 석천사>

여수 충민사



~~~ 여수 겨울 나들이 ~~~
(충민사, 석천사)

여수 충민사, 석천사
▲  여수 충민사, 석천사 모형도 (충민사 유물전시관)
 



 

겨울의 차디찬 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하던 1월의 끝 무렵, 겨울 제국의 핍박에서 잠
시 벗어나고자 일행들과 따뜻한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햇님이 막 출근을 하던 이른 아침에 서울을 떠나 충북과 충남, 전북의 여러 곳을 두루 거
쳐 21시가 넘어서 여수(麗水) 땅에 들어섰다. 여수는 원래 계획에 없었으나 광양(光陽)에
서 저녁으로 광양불고기를 섭취할 때, 그곳 이야기가 나와 즉흥적으로 가게 되었다.

동광양에서 환상적인 야경을 자랑하는 이순신대교를 건너 여천공단을 가로질러 여수 시내
로 진입, 돌산대교와 가까운 봉산동에 여장을 풀고 과식에 가까운 여로(旅路)에 오지게도
고생한 몸을 뉘였다. 베게에 머리를 대기가 무섭게 잠이 들어 한 9시간 정도 달달하게 숙
면을 취했다.
여수는 향일암(向日庵)을 보러 4번이나 인연을 지은 아련하고도 달달한 추억이 있다. (향
일암을 4번이나 갔음) 그때(파릇파릇했던 20대 중~후반 시절)는 심야 무궁화호 열차를 5~
6시간이나 타고 내려갔었지. 허나 여수에서 하룻밤을 머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여수까지 즉흥적으로 오긴 했으나 정작 정처(定處)를 정하는데 많은 갈등이 생겼다. 딱히
땡기는 메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존재가 있어 그를 찾으니 바로 충
민사와 석천사였다.



 

♠  천하 최초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당, 여수 충민사(忠愍祠)
- 사적 381호

▲  충민사의 정문인 숭모문(崇慕門)

전라선의 남쪽 종점인 여수, 의식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격하게 떠오르는 존재가 하나 있
을 것이다. 바로 남해바다의 영원한 해신(海神)인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장군이다.
그는 1591년 여수에 설치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좌수사(左水使)로 부임하여 왜군이 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당시 여론을 과감히 무시하며 수군을 육성했다. 그 결과 전라좌수영
수군은 천하를 모두 씹어먹을 정도의 최강의 해군이 되어 임진왜란 때 거침없는 활약을 펼친
다.
특히 그 시절에 매우 흔했던 백병전(白兵戰) 대신 원거리 화포 공격을 중심으로 전쟁을 펼쳐
근대 해전의 효시로 격하게 추앙 받고 있으며, 그의 수군이 처리한 왜선은 800척 이상, 물고
기 밥으로 만든 왜군은 10만이 넘는다. 임진~정유란 때 조선에 투입된 왜군이 30만이 넘으니
1/3 가까이를 처리한 셈이다. 반면 이순신 수군의 피해는 아주 경미하다. (손상된 배는 없음,
전사자는 1,000명 이하, 그 유명한 한산도대첩 때 아군 사상자가 119명)

하늘도 놀라고 귀신도 울고 갈 전략으로 모든 해전에서 일방적에 가까운 연승을 거두어 왜군
은 그의 이름 3자에 오줌을 지리며 줄행랑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에 대한 왜인들의 두려움
이 얼마나 컸던지 이순신이 번개를 내리쳐 왜장을 죽이고 왜 수군을 격파했다고 했을 정도이
다.
이순신은 1598년 11월, 여수에서 가까운 남해 노량(露梁)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인 노량해전(
露梁海戰)을 일구고 남해의 영원한 해신이 되었다.

그의 사당하면 아산 현충사(顯忠祠)가 대표적이다. 수학여행의 필수 답사지인 그곳 외에도 남
해 충렬사(忠烈祠), 고금도 충무사(忠武祠), 통영 충렬사 등 남해바다에 그의 사당이 여럿 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사당 중 제일 먼저 지어진 곳은 어디일까? 그 해답은 바로 여수 충
민사이다. 충민사는 현충사, 충렬사(통영, 남해)에 비해 인지도는 다소 떨어지나 충무공의 제
1호 사당으로 그 가치는 백두산에 붙어있을 정도로 크다.

체찰사(體察使)인 오성 이항복(李恒福)은 1601년 선조(宣祖)에게 충무공 사당 건립을 청했다.
그렇게 왕의 허락을 맡아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된 이시언(
李時言, ?~1624)을 시켜 사당을 세우니 그것이 충민사의 시작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인 김상
용(金尙容)이 왕에게 청해 '충민사'란 사액을 받으면서 국가 공인 충무공 사당 제1호가 되었
다.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통영 충렬사보다 62년이나 빨리 세워졌음)
충무공 외에도 의민공(毅愍公) 이억기(李億祺)와 충현공(忠顯公) 안홍국(安弘國)도 봉안했으
며, 나중에 충민공 이봉상(李鳳祥)을 추가해 별도 신묘(新廟)에 봉안하고 석천재(石泉齋)를
세웠다.

1732년에 중수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 때 충민단(忠愍壇)만 남기고 모두
철거되었으며, 1873년 지역 유림들의 건의로 다시 사당을 세웠다. 이때 판서(判書) 윤용술이
충민사 현판을 작성해 사당에 내걸었다.

1919년 고약한 왜정(倭政)이 충민사를 철거하면서 그 옆구리에 자리한 석천사가 충민사의 역
할을 도맡았으며 1947년 지역 주민들이 2칸 기와집을 지어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5년 정화사
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춘기 석채례(釋菜禮)를 지내고, 음력 9월 10일에 추기 석채례를, 양력
4월 28일에는 충무공 탄신제를 지낸다.


▲  겨울 햇살이 잔잔히 내려앉은 충민사 외곽 공원

충민사는 사당 본전과 석천사, 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 앞에는 공원이 닦여져 있어 평
화로운 풍경을 선사하며, 정문 동쪽에는 유물전시관이 있다. 그리고 사당 뒤에는 마래산(馬來
山, 386m)이 넓게 나래를 펼치며 여수 시내와 한려수도(閑麗水道)를 굽어본다.

▲  익살스럽게 생긴 연등동 벅수 모조품

정문 안쪽에는 연등동 벅수의 모조품 1쌍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지킨다. 벅수는
이 땅에 흔한 돌장승으로 여수 지역에서는 벅수라고 부른다.
연등동 벅수는 1788년에 지어진 것으로 좌수영 서문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여 좌수영과 마을
을 지키는 수호신 및 이정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좌수영과도 관련이 조금 있어 전라
좌수영을 천하 제일의 해군기지로 키웠던 이순신 장군의 사당, 충민사에 그 모조품을 세워 사
당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  충민사 홍살문
다소 차갑게 생긴 홍살문이 이곳이 성역임을 알리며 엄숙함을 요구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충민사 정도면 홍살문의 당부를 100% 지켜야 된다.

▲  충민사 약수터
내가 갔을 때는 부적합 딱지를 받은 상태였다. 부적합 판정에도 불구하고 마래산은
속세를 향해 아낌없이 물을 베푼다. 오염 정도는 낮아 보여 약수터 주변을 잘
정화하고 비도 적당히 와준다면 언제든 회생이 가능하다.

▲  충민사 정화사적비
박정희 정권이 1975년 충민사를 정화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  경내를 가리며 계단을 길게 늘어뜨린 충민사 외삼문(外三門)

▲  충민사의 심장을 머금고 있는 내삼문(內三門)

▲  충민사 본전(本殿)
내삼문 안에 자리한 충민사 본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그만 팔작지붕 집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이억기, 안홍국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건물은 1975년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 못했다.

▲  충민사의 중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亂中日記)나 시문 등, 글씨는 많이 남겼으나 정작 그의 생전에 모습
은 남기지 못했다. 하여 그의 영정은 오로지 100% 상상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 영정에는 아
주 개 같은 진실이 숨겨져 있어 심히 암 유발을 유도하고 있으니 바로 친일파 화가인 김은호
(金殷鎬)가 그렸다.
이 나라가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더러운 친일파 화가가 거룩
한 해신의 영정까지 그려넣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인데, 물론 김은호는 조선 황실의 어진화가
로 활동했을 정도로 능력은 대단하나 문제는 왜정에 적극 빌붙었다는 것이다.

친일매국노의 후손과 그 추종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행정, 역사, 교육, 문학 등 참
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말기 암 환자의 암세포처럼 몸살 나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 이 나라를
크게 좀먹고 있다. 그들을 모두 청산하고 처단해야만 나라가 바로 서거늘 시간이 흐를수록 점
점 산으로 가고 있는 것이 실로 한탄스럽다.


▲  충민사 본전 좌측에 자리한 의민공 이억기의 영정

이억기의 영정 역시 상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장군 뒤로 푸른 하
늘과 구름까지 묘사되어 있어 마치 상반신 사진을 찍어 그림처럼 표현한 것 같다.

이억기(1561~1597)는 왕족 출신으로 자는 경수(景受)이다. 수영과 무예에 능했으며, 17살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번호(蕃胡)가 압록강을 침범하자 경
흥부사(慶興府使)가 되어 그들을 때려잡았으며,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우도 수사(水使)가 되
었다.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의 협조 요청을 받아 전라우도 소속의 함선과 수군을 이끌고 공동작전을
펼쳐 5년 넘게 왜 수군을 때려잡았으며, 이순신과도 매우 사이가 돈독했다.

1597년 이순신이 원균(元均)에게 참소를 당해 하옥되자 이항복,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이순
신의 무죄를 변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원균이 통제사가 되어 무리하게 왜군 토벌에
나서자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랐다.
허나 칠천량에서 방심하고 쉬는 동안, 이순신의 수군에게 5년 넘게 탈탈 털렸던 왜 수군은 작
심하고 파상적인 공세를 펼쳤고 방심한 조선 수군은 우왕좌왕하며 크게 참패를 당했다. 이때
이억기는 분전했으나 힘이 다해 물에 빠져 전사했으며, 원균 또한 이순신이 힘들게 길러놓은
수군을 거하게 말아먹고 지옥으로 떨어졌다.

이후 이억기는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지고 충민사(忠愍
祠)에 봉안되었다.


▲  충민사 본전 우측에 자리한 충현공 안홍국 영정

안홍국(1555~1597)은 순흥안씨 집안으로 자는 신경(藎卿)이다. 1583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
진왜란이 터지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했다.
영흥(永興)에 있는 임해군(臨海君)에게 왕명을 전했고, 삼남 지역의 여러 진과 전쟁터를 돌며
왕명을 전하는 역할을 맡다가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온갖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보성군수로 있던 중,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원균으로 주인이 바뀐 통제영(統制營)으로
달려가 그 중군이 되었다. 안골포(安骨浦) 해전에서 승리했으나 가덕도 해전에서 패해 전사했
으며, 이때 원균은 칠천량으로 후퇴했다.
이후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었고 여수 충민사와 보성 정충사(旌忠祠)에 배향되었다. 안홍국
역시 이억기처럼 암균이라 손가락질 받는 원균의 어리석은 전략으로 허무하게 전사했다.

이곳에 봉안된 안홍국의 영정을 보니 얼굴이 충무공 이순신과 비슷하다. 옷과 포즈만 다를 뿐
서로 비슷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영정도 김은호가 그린 듯싶다. 문화재청과 충민사는 생각
이란 것이 있다면 친일파가 그린 영정은 내다 버리고 옛 무인에 어울리게 새 영정을 만들어
봉안해야 될 것이다. 해신이 된 충무공과 충현공(안홍국)도 그걸 간절히 원하고 있을 것이다.

* 충민사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산114-12 (충민사길 52-23, ☎ 061-666-5738)

▲  귀부와 비신(碑身), 이수를 갖춘
충민사 사적비(事蹟碑)

▲  충민사 뜨락에 배치된 커다란 돌들
돌의 생김새를 봐서는 옛 충민사의
주춧돌로 여겨진다.


 

♠  충민사 마무리, 석천사와 유물전시관

▲  석천사(石泉寺) 경내

충민사 서쪽에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석천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충민사와 늘 한몸처럼
지낸 단짝으로 지금도 서로 바짝 붙어 둘의 깊은 인연을 과시한다.

석천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화엄사(華嚴寺)의 말사(末寺)이다. 여수 지역에서 흥국사
(興國寺) 다음으로 명성이 있는 절로 신도 규모는 여수 지역 사찰 중 제일이라고 한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창건설과 1601년 창건설이 있는데, 1195년에 보조국사가
인근 흥국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거의 없으며, 1601년에 옥형(玉炯)과 자운(
慈雲)이 창건한 것으로 크게 무게를 두고 있다. (절 안내문에도 1601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와
있음)

자운과 옥형은 승장(僧將)으로 300여 명의 승군(僧軍)을 이끌고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
갔다. 자운은 충무공이 지휘하는 배에 승선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옥형은 군량미를 조달하며
충무공의 식사와 차를 직접 챙겼다.
충무공이 전사하자 자운은 백미 600석을 마련하여 노량에서 수륙재(水陸齋)를 열었고,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충민사에 제를 올렸다. 옥형도 충무공을 따라다니며 큰 신임을 받았으며 그 은
혜를 조금이나마 갚고자 충민사 옆에 작은 초당을 짓고 그의 인품과 충절을 추앙하며 매일 사
당을 쓸고 닦고 제사도 직접 챙겼다. 바로 그 초당에서 석천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향교 교리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했던 박대복(朴大福)은 혼자서라도 충무공
에게 제향을 올리고 싶어서 충무공이 운동 삼아 물을 마셨던 마래산 자락 석간수(석천) 주변
에 두어 칸의 사당을 지었으며, 옥형이 그 옆에 작은 초당을 지어 충무공의 영정과 일생을 같
이 했다고 전한다.

석천사란 이름은 충민사 뒤쪽 큰 바위 밑에 있던 석간수에서 비롯되었으며, 왜정 때 충민사가
파괴되자 충민사의 역할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충민사를 손질하는 과정에서 일주문(一柱門)이 철거되고 대웅전과 요사(寮
舍)의 위치도 강제로 바뀌어 본래 모습을 많이 잃었으며, 경내 건물도 1980년대 이후 것들이
라 고색의 내음은 모두 말라버렸다.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의승당(義僧堂), 종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400년을 묵
은 절임에도 소장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다.

* 석천사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830 (충민사길 52-21, ☎ 061-662-1607)
* 석천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하얀 피부의 석조관세음보살입상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부를 지닌 고운 보살상으로
근래 장만했다.

▲  석천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  대웅전 앞에 놓인 석조(샘터)
마래산이 베푼 물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와 나그네의 갈증을 아낌없이
해소해 준다.

▲  경내 앞에 무성하게 자라난 동백나무
동백은 친 겨울파의 꽃이라 한겨울에도 푸른 녹음(綠陰)을 자랑한다.

▲  충민사 유물전시관

충민사 공원 동쪽에는 유물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전라좌수영과 충민사의 역사, 충무공 이
순신 관련 자료와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주로 복제품이 주류를 이룬다. 허나 충민사 유
허비 등 일부를 제외하고 딱히 두드러지는 전시물은 없어 일부만 본글에 소개한다.
(9시부터 18시까지 운영함, 겨울에는 17시까지, 입장료 없음)


▲  유물전시관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존재
충민사 성격에 걸맞게 제일 앞에 칼을 높이 든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승병,
군사, 의병, 화포, 거북선 등이 담겨져 있다.

▲  왼쪽부터 계사일기(1593년), 갑오일기(1594년), 병신일기(1596년),
정유일기(1597년) 2권, 무술일기(1598년)
저 일기 중 정유일기만 진품이고 나머지는 복제품이다.

▲  수군절도사가 사용했던 귀도(鬼刀)와 참도(斬刀)
저들도 모두 복제품임

▲  충민사 유허비(遺墟碑)

충민사 유허비는 진품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10세손(이름 부분은 마멸되어 확인 불가)이 병술
년(丙戌年, 1826년인듯?) 9월에 세운 것으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으로 충민사
가 문을 닫자 유허비도 손상을 당했다.
여수향교에서 이 비석을 수습해 66년간 품으면서 단비제(斷碑祭)를 지냈으며, 왜정 때 충민사
가 다시 파괴의 고통을 입자 왜정이 이 비석까지 괴롭힐까 우려하여 충민사 앞뜰에 몰래 묻어
버렸다.
이후 1975년 충민사를 손질했을 때 화단에서 분리된 채, 발견되었으며, 복원과정을 거쳐 유물
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비석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나중에 충민사 뜨락으로 옮길 계
획이라고 하며, 비석의 높이는 124cm, 폭 57.5cm, 두께 11.5cm이다.

충민사와 석천사를 간만에 둘러보고 여수와의 인연을 싹둑 정리하며, 보성(寶城), 고흥(高興)
지역으로 서둘러 넘어갔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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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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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 찾아간 통한의 땅, 파주 민통선(DMZ) 겨울 나들이 <임진각관광지, 자유의다리, 도라산역, 도라산전망대, 제3땅굴, 통일촌>

파주 민통선(DMZ) 나들이


' 파주 민통선(DMZ) 겨울 나들이 '
(임진각, 도라산역, 도라산전망대, 제3땅굴)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휴전선과 개성 지역)

▲  장단역 증기기관차

▲  경의선 도라산역

 



 

겨울 제국(帝國)이 무심히 깊어가던 연말 한복판에 파주(坡州) 민통선(DMZ)을 찾았다. 늦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천하를 지배하면서 연말(年末)과 나이 1살 누적이란 우울한 선물을
뿌려대니 이때만큼은 참 기분이 꿀꿀하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곳은 천하에서 제일 예민
한 곳이자 민족의 통한이 깃든 남북의 경계선, 휴전선과 민통선 구역일 것이다.

민통선은 휴전선 주변에 그어진 금지된 땅으로 이들 지역에 주민들이 살고 있으나 외지인
의 출입은 아주 까다롭다. 그나마 신분증이 있으면 상당수 통과할 수 있지만 파주 임진강
이북(군내면, 진동면, 장단면)과 철원 북부, 화천 풍산리 이북 등은 신분증으로도 어림도
없다. 다만 파주 민통선 관광지는 제한적으로 개방되어 있어 임진각에서 DMZ관광이용권을
구입해 셔틀버스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단체 관광도 가능)



 

♠  남북분단이 빚은 안보관광지의 성지(聖地), 임진강(臨津閣)

▲  임진각

2001년 9월, 문산역에서 50년 가까이 끊겼던 남측 경의선이 임진강역까지 아주 살짝 연장되었
다. 임진강역은 임진각 바로 동쪽으로 연장 기념으로 발행된 기념승차권을 아는 경로를 통해
여러 장 입수하여 임진강역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임진각을 찾은 이후, 한참의 시간이 흐
르고 다시 그곳과 인연을 지었다.

간만에 찾은 임진각은 파주시 문산읍 임진강(臨津江)변에 자리해 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을 사이에 두고 금지된 땅, 민통선과 마주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안보관광지이자
민통선을 코앞에 둔 서울과 매우 가까운 북쪽 한계선으로 1972년 안보관광지로 야심차게 조성
되었다.
임진각은 윗 사진에 나온 건물 이름이지만 그 주변을 한 덩어리로 묶어 임진각(임진각 관광지
)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임진각 국민관광지','임진각 관광지','임진각 평화누리'로 많이 불
리지만 '임진각'이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곳은 태생부터가 남북분단의 비애를 상징하는 안보 관광지라 그에 걸맞는 볼거리를 갖추었
다. 초창기에는 500만 이산가족을 위해 지은 망배단과 자유의다리, 경의선 철도중단점 표석,
종군기자비 등의 여러 조형물, 2000년에 조성된 평화의 종 등 오로지 분단의 매정한 현실을
생각하고 이산가족들의 한을 달래던 안보관광지의 역할만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더 이상 관광
객을 유혹하기가 어려웠다.
하여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3만 평의 대형 잔디 언덕을 닦고 평화누리와 바람개비를
잔뜩 심은 바람의언덕, 음악의언덕 등을 지어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했다. 기존의 남북분단의
한이 깃든 우울한 이미지에서 조금이나마 화사한 이미지로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또한 매년
9월에는 세계평화축전(DMZ평화음악회)을 개최하는데, 이제는 인기가 상당하여 이때만 되면 사
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며, 2020년 9월에는 임진강 허공을 가로질러 금지된 땅으로 아주 살짝
들어가는 임진각평화곤돌라가 개통되었다.

임진각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한식당과 빵집, 커피집, 패스트푸드점, 편의점, 기
념품점, 옥상 전망대를 지니고 있다.

* 임진각관광지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1325-2 일대 (☎ 031-953-4744)


▲  자유의다리에서 바라본 임진각

▲  임진각 옥상 무료전망대 (옥상 전망대)

임진각 옥상 전망대는 무료임을 강조하고 있다. 허나 고작 3층 높이에 불과해 보이는 범위는
그리 넓지는 못하다. 이런 전망대로 감히 돈을 받는다면 이건 염치가 없는 것이지. 그러니 '
무료' 2글자는 좀 뺐으면 좋겠다.

이곳은 초창기부터 전망대로 쓰였는데, 임진각 관광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현장이라 임진
각 일대를 훤히 조망하기에 좋다. 또한 맨눈으로 보는 조망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하고자
망원경을 넉넉히 깔아놓았는데, 그들은 오로지 500원짜리 동전만 밝히는지라 그것을 넣어야만
비로소 못생긴 눈을 뜬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두들겨 패도 깨어나지 않는다. 민통선 방향
인 북쪽과 서쪽에 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금지된 땅인 임진강 너머의 안부를
매우 궁금해 하기 때문이다.
허나 임진강 너머는 모두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겨우 강과 북쪽 땅을 가리고 앉은 산줄
기만 조망할 수 있다. 강 너머 산줄기는 비록 민통선이긴 하지만 엄연한 이 나라의 영토이니
괜히 이북 땅으로 오해하여 설레지 않도록 한다.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쪽 천하 ①
2002년에 개통된 경의선 임진강 철교와 6.25때 끊긴 옛 임진강 철교,
그들 너머로 민통선에 묶인 파주시 군내면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자유의다리와 복원된 장단역 증기기관차 주변, 임진강, 경의선 철교,
파주시 군내면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서남쪽 방향
망배단과 임진강, 그리고 무늬만 남은 파주시 장단면 지역(임진강 너머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임진강 물을 먹고 자라는 마정리 평야 (임진각 동남쪽)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⑤ 북쪽 방향
임진각 주차장과 바람의 언덕, 그리고 저 멀리 통일대교까지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⑥ 동북쪽 방향
평화랜드, 평화누리, 음악의언덕, 자유인터체인지(통일대교 남쪽) 등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⑦ 동쪽 방향
임진강역과 철도중단점 등

▲  이산가족의 한을 먹고 자란 망배단(望拜壇)

임진각 서쪽에는 이산가족의 한과 눈물을 어루만지느라 여념이 없는 망배단이 있다. 임진각이
조성된 이후 500만이 넘는 실향민들은 이곳을 찾아와 잃어버린 땅 북녘에 둔 가족과 부모를
그리워하거나 제사를 지냈다. 특히 설과 한가위(추석)에는 그들을 위해 합동 제단(祭壇)이 설
치되어 수백 명이 단체로 차례를 지냈는데, 설에 지내는 것을 연시제(年始祭), 추석에 지내는
것을 망향제(望鄕祭)라 불렀다.

이렇게 실향민들의 넋두리 현장이 된 이후, 임시 제단이 아닌 완전한 제단을 설치해줄 것을
염원하는 이들이 늘자 파주군과 내무부, 이북5도청이 5억의 돈을 들여 1985년 9월 26일 지금
의 망배단을 닦았다.
120평 대지에 제단과 향로를 두고, 중앙에 망배탑을 세웠으며, 그 좌우에 7개의 화강석 병풍
을 두어 병풍의 역할을 맡겼다. 이 병풍석에는 북쪽의 여러 문화유산과 풍물, 산천의 특징을
복합적으로 표현해 실향민의 상념을 달래주고자 배려했다.

허나 망배단 역시 남북분단이 빚은 통한의 산물이다. 그의 역할과 기능이 계속 이어질수록 이
산가족과 이 땅의 사람들의 한은 더욱 깊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속히 이 땅이 통일되어 망
배단의 역할이 완전히 끝나게 되기를 고대해본다. 그의 생명이 쓸데없이 늘어날수록 한은 정
비례로 늘고 그 생명이 끝날수록 그 한은 반비례가 된다. 하지만 빠른 통일은 힘들 것 같다.
남과 북의 위정자들이 죄다 썩어문드러졌고, 주변 오랑캐들도 우리의 통일을 반기지 않기 때
문이다. 그러니 망배단은 더욱 고개를 들 것이다.


▲  동쪽에서 바라본 자유의다리 - 경기도 지방기념물 162호

망배단 뒷쪽에는 임진각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자유의다리가 있다. 연못에 발을 담군 이 다
리는 임진각과 임진강 사이의 낮은 곳에 세워져 있는데, 원래 임진강 경의선 철교에 임시로
놓인 것을 임진각 관광지 조성 이후, 연못을 닦고 이곳으로 옮겼다.

서울과 신의주(新義州)를 잇던 경의선은 경부선(京釜線)과 더불어 2개의 철길로 이루어진 복
선(複線) 철도이다. 그러다 보니 임진강에 상행, 하행 2개의 철교가 있었으나 6.25때 폭격으
로 파괴되어 다리 기둥만 멀뚱히 남아있었다. 그렇게 다리가 파괴된 1951년 이후 경의선은 완
전 두 동강이 나버리게 된다.
이후 국군이 이곳을 탈환하면서 하행선 철교를 사람과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다리로 보수했
으며, 1953년 남한과 북한이 서로 포로를 교환할 때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나무와 철제를 혼합하여 임시 다리인 지금의 자유의 다리를 놓았다. 다리 부근 노상리 쪽자연
마을의 이름을 따서 '독개다리'라 불렀으나 북한에 잡혀간 포로 1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서
귀환했기 때문에 자유를 찾았다는 의미로 '자유의다리'라 불리게 되었다. 그 시절 포로들은
차량으로 철교까지 와서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넜다.

판문점(板門店)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더불어 6.25의 비극을 상징하는 다리로 썩 유
쾌하지 않은 역할과 의미를 지녔다. 허나 어찌하랴. 시대를 잘못 탔으니 말이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회담 대표들이 이 다리를 건너 왕래를 했으며, 이후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고, 기존 철교는 육중한 다리 기둥만 남아있다.


▲  상판이 나무로 이루어진 자유의다리

자유의다리 길이는 83m, 폭 4.5m, 높이 8m 내외로 나무를 짜맞추어 만들었는데, 힘을 많이 받
는 부분은 철재를 섞어서 사용했다. 임시로 가설된 다리라 솔직히 작품성이나 개성은 없으나
6.25시절 '자유로의 귀환'이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현장으로 그 시절을 나타내는 산증인이
다. 그래서 지방기념물의 적당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임진각에 왔다면 꼭 거닐어야 되는 다리로 임진강과 접한 서쪽은 막혀있다. 하여 다시 제자리
로 돌아와야 되며, 막힌 곳을 넘어가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그 너머는 민통선 구역이기 때문
이다. 막힌 곳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이 땅의 사람들이 달아놓은 온갖 종이와 천, 태극기 등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통일 염원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보여준다. 허나 열기가 아직은 빈약한지
휴전선을 녹이지는 못하고 있다.


▲  자유의다리의 막다른 곳 (임진강 방향)

다리는 물줄기로 끊어진 양쪽을 이어주는 존재이다. 허나 이곳은 한쪽만 열려있고, 다른 한쪽
은 막혀 있어 다리의 기능을 온전히 하지 못한다. 마치 분단된 이 땅의 현실을 상징하듯 말이
다.
다리를 건넌 이들은 여기서 강제로 발길을 돌려야 되니 그 아쉬움을 종이와 천에 담아 봉쇄된
벽에 걸어두었다. 저 막힌 곳을 뚫고 북쪽으로 뻗어 나가야 되거늘 이렇게 70년 이상 묶여있
으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  자유의다리 (막다른 곳에서 바라본 모습)

▲  장단역에서 가져온 낡은 철로

자유의 다리 북쪽에는 낡은 철로가 짧게 재현되어 있다. 이들은 민통선에 갇힌 옛 장단역(長
湍驛) 부근에 버려져 있던 레일과 침목을 가져와서 재활용한 것으로 침목 위에는 경의선의 민
통선 이북 철도역 28개(임진역, 개성역, 사리원역, 평양역, 신의주역 등)의 이름과 임진강역
부터의 운행 거리가 적혀 있어 분단의 아픔과 미답지 경의선 이북(以北) 구간에 대한 호기심
을 크게 자극시킨다.

▲  완전 고철이 되어버린 레일 변경 레버

▲  장단역 부근에서 가져온 레일과 못


▲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재현된 역 플랫폼

정말 오래간만에 발을 들인 임진각에는 눈에 익지 않은 낯설은 존재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중
에는 분단의 지독한 현실과 남북의 해묵은 악감정만큼이나 낡고 빛바랜 존재가 아른거리고 있
었으니 바로 민통선에서 가져온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앞서 언급한 철로였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 - 국가 등록문화재 78호

임진각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한 장단역 증기기관차는 자유의다리와 더불어 임진각의 6.25전쟁
상징물이다.
이 기관차는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최고 속도는 80km, 기관차 길이 15m, 폭 3.5
m, 높이는 4m이다. 산악 지형에 최적화된 화물운송용으로 국군이 38선을 넘어 신나게 북진을
하던 1950년 늦가을 한복판에 군수물자를 바리바리 싣고 개성에서 평양으로 칙칙폭폭 달리던
중, 중공 개잡것들이 북한을 돕고자 전쟁에 불법 개입하면서 황해도 평산군 한포역에서 눈물
을 머금고 바퀴를 돌렸다.
남쪽으로 후진하던 열차는 장단역에 멈춰섰는데, 북한과 중공 잡것들이 개성 부근까지 내려온
상태라 국군과 연합군은 이 열차가 그것들에게 쓰일 것이 우려되어 군수물자만 서둘러 챙기고
폭파시켰다. (당시 이 열차 기관사는 한준기) 이때 증기기관차 1량만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1953년 휴전까지 장단, 파주 지역에서 치열하게 격전이 벌어지면서 다시금 무거운 상처를 입
었다. 그렇게 하여 그의 몸에는 1,020여 개의 총탄 자국이 박혔으며, 바퀴까지 휘어져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2006년 경기도는 이 열차를 주목하고 수풀을 뒤집어 쓴 채 웅크리던 증기기관차와 파편 292점
, 레일 관련 파편 132점을 수습해 화물차를 통해 임진각 보존센터로 옮겼다. 화통에서 자라던
뽕나무도 같이 가져와 그 곁에 심었으며, 녹슨 열차를 복원하고자 포스코에 의뢰하여 철제 문
화재 보존처리 기술과 재정지원을 받아 2년 동안 정밀조사, 구조보강, 녹 제거, 보호코팅제
도포 등을 거쳐 2008년 12월 보존처리가 마무리 되었다.
이후 자유의다리 북쪽에 기관차가 머물 자리를 닦아서 2009년 6월 25일 이곳으로 옮겨 천하에
공개했으며, 이때 장단역 부근에서 가져온 레일도 일부 복원했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 구제 과정을 담은 사진
버려진 기관차를 감싸던 수풀을 모두 제거해 화물차에 싣고 통일대교를 통해
임진각으로 가져오는 과정이 담겨져 있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뒷모습
그의 이름이 '장단역 증기기관차'가 된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바로 장단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경의선의 주요 역이자 장단군(長湍郡)의 관문이던 장단역,
허나 남북분단 앞에 '장단군'이란 고을은 아작나서 사라지고
지도에서도 자취를 감추었다. (파주시에 통합됨)

▲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앞 모습
기관차 옆에 역 플랫폼을 설치하여 '임진각역'으로 삼았다. 물론 무늬만 역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기관차의 보호를 위해 일종의 지붕을 설치하여
비와 바람, 햇살로부터 그를 지킨다.

▲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임진각역 표시판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거처로 지어진 임진각역, 여기서 고려의 옛 도읍인 개성(開城)까지는 불
과 22km, 서울역에서도 겨우 75km로 천안보다도 가까운 거리이다. 허나 남북분단의 현실이 여
기서 개성까지의 체감 거리를 22억km 이상으로 늘려놓아 차라리 지구에서 떨어진 달나라로 가
는 것이 더 속이 편할 정도이다. 그만큼 개성은 우리에게 그림의 떡 같은 존재가 되었다.


▲  세월이 증기기관차 화통에 달아준 훈장, 뽕나무

50년 이상 버려졌던 증기기관차 화통에는 장대한 세월이 심어놓은 뽕나무가 감쪽같이 뿌리를
내렸다. 그 많은 자리 중에 왜 하필이면 연기가 나오는 화통에 둥지를 틀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증기기관차의 애환을 먹으며 어엿한 나무로 자라났다.

2006년 증기기관차를 수습하면서 같이 임진각으로 갖고 나와 이곳에 심었는데, 만약 열차 주
변에 뿌리를 내렸다면 이런 대접까지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제자리에 그냥 두었거나
열차 수습 과정에서 밀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증기기관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화통에 자
리를 닦은 탓에 이렇게 임진각에서 존재감도 드러내고 대우도 받는 것이다. 사람이든 무엇이
든 자리를 잘 잡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자리 하나에 팔자가 싹 바뀌니 말이다.


▲  증기기관차 주변에서 가져온 철길 레일과 파괴된 열차의 파편

▲  장단역 증기기관차 주변에서 바라본 임진강 경의선 철교

▲  통일을 꿈꾸는 평화의 종

장단역 증기기관차 북쪽에는 평화의 종을 머금은 커다란 종각(鐘閣)이 있다. 이 땅의 평화통
일을 염원하는 장소에 어울리게 '평화의 종'을 하나 장만하여 북쪽을 향해 은은한 종소리를
날려보내는데, 1999년에 조성하여 2000년 1월 1일 0시 첫 타종식을 치뤘다.
21세기 첫 날에 선보이는 종에 걸맞게 무게는 21톤이며, 높이 3.4m, 지름 2.2m로 그를 품고
있는 종각은 면적 21평, 높이 12.2m이다.

이 종은 누구든 칠 수 있으나 1회 타종에 10,000원의 돈을 줘야 된다. 타종 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며, 임진각 관리사무소(☎ 031-954-0025)에 신청하면 된다.



 

♠  임진강을 건너 금지된 땅(민통선)에 들어서다. (도라산역)

▲  경의선 남측에 최북단 역, 도라산역(都羅山驛)

임진각에 발을 들이자 제일 먼저 임진각DMZ매표소를 찾았다. 거기서 민통선 관광 신청을 받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면 되는데, 가격은 12,200원(제3땅굴 모노레일 포함, 미
포함시 9,200원)이다.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 요망)
DMZ관광코스는 제3땅굴과 도라산전망대, 통일촌직판장을 둘러보는 코스만 운영되고 있다. (평
일은 1일 10회, 주말 휴일에는 1일 12회 운행 / 매주 월요일과 주중 공휴일, 설날과 추석 당
일에는 운행하지 않음) 예전에는 도라산역도 필수로 경유했으나 지금은 가지 않으며, 허준(許
浚)묘와 해마루촌을 둘러보는 코스도 있으나 현재는 내놓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시간이 넉넉해 앞서 다뤘던 자유의다리와 장단역 증기기관차를 둘러보고 시간에
맞춰 돌아가니 민통선 내부로 우리를 안내해줄 셔틀버스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버스에는 20여 명의 관광객이 탔는데, 양이(洋夷) 여인네 2두와 중공 잡것들 여러 두 등 외국
애들도 여럿 탑승했다. 우리를 비롯한 이 땅의 사람들도 그렇고, 외국 애들도 그렇고 다들 미
지의 땅으로 탐험가는 기분 마냥 들떠있었다. 분명 대한민국 영토가 맞고, 지구의 일부긴 하
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금지된 곳을 가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자 버스는 드디어 출발했다. 임진각 북쪽 자유인터체인지에서 1번 국도(통일로)로
진입하여 임진강에 발을 담군 통일대교로 들어섰다. 다리 북쪽 끝에 이르자 검문소가 민통선
으로 들어가는 차량들을 막으며 삼엄하게 검문을 하고 있었는데, 그 검문의 정도가 대충 보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철저하게 개미새끼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살피는지라 검문 시간
이 꽤 걸렸다.
드디어 우리의 셔틀버스가 검문 받을 차례가 되자 헌병 아저씨가 차에 올라 일일히 신분증을
확인했다. 외국 애들은 여권을 보여주면 된다. 만약 신분을 증명할 어떠한 증서도 없다면 여
기서 강제 하차를 당하거나 강제 회차를 당한다.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참고로 통일대교를 건널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다리 이북에 사는 주민들과 학생, 거
기서 근무하는 군인이나 기타 근무자들, 개성공단 직원과 관계자 밖에 없으며, 차량 역시 신
고된 차량만 통행이 가능하다. 현지 주민이나 군인, 근로자 외에는 임진각에서 민통선 관광을
신청하여 셔틀버스로 이동하는 신분이 확실한 사람, 사전에 수속 절차를 밟은 단체 관광객을
태운 관광버스, 해마루촌이나 통일촌 사람들의 보증을 받은 민박이나 나들이, 업무 손님들은
그때에 한해서만 1회 출입이 가능하다.
그 외에 문산읍내(문산역)에서 대성동과 해마루촌으로 들어가는 파주시내버스 93번 시리즈를
타는 방법도 있으나 이 역시 현지 주민과 군인, 근로자가 아닌 사람은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통일대교 검문소에서 무조건 강제 하차를 당한다. 이 버스는 이 땅의 시내버스 중 민통선을
가장 깊숙히 들어간다. (판문점 직전 대성동까지 운행함)

검문이 끝나자 드디어 검문소를 통과했다. 검문소 주변은 혹시나 모를 북한의 침공에 대비해
그 넓은 도로에 장애물을 잔뜩 깔아놓아 잠시 지그재그로 움직여야 되는데, 그 구간을 지나면
통일대교 북단이다. 이제 임진강을 건너 미지의 땅, 민통선(민북선)에 완전히 들어선 것이다.
여기도 분명 우리나라가 맞는데, 왜 이렇게 낯설기만 한지. 잠시 다른 나라로 순간 이동을 당
한 기분이다. 창 밖 풍경도 이 땅에 흔한 풍경인데 말이다.

다리를 건넌 버스는 통일촌4거리를 지나 북쪽으로 1km 떨어진 3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희망로'
로 들어선다. 이 길로 들어서면 도라산역과 도라산전망대, 개성공단으로 이어지며, 쿨하게 직
진하면 대성동과 판문점으로 이어지나 아쉽게도 그곳은 가지 않는다. 관광 코스에는 없기 때
문이다.
넓게 닦여진 도로(6차선)에 비해 지나가는 차량도 별로 없어 무척 한산한데, 개성공단 검문소
직전에서 좌회전하여 도라산역 주차장에서 바퀴를 멈춘다. 운전사는 여기서 20분을 줄테니 시
간을 맞추라고 그런다. (외국어 방송 서비스나 가는 곳에 대한 설명은 일절 없음)

▲  도라산역과 통일아트 스페이스 현수막

▲  2008년 9월에 개방된 도라산평화공원
안내도

▲  한산한 도라산역 내부 (측면)

▲  도라산역 남북출입사무소

도라산역은 경의선 남측에 북쪽 종점이다. 원래는 개성을 지나 사리원, 평양, 안주, 신의주,
그리고 우리의 옛 땅인 요동반도와 요서, 하북성, 중원대륙까지 달려야 될 철로이지만 남북분
단으로 인해 문산~개성 구간이 끊겨 남과 북이 서로 다른 경의선을 가지게 되었다. 하여 경의
선 남측의 북쪽 종점은 부득불 문산역이 되었고, 임진각에 철도중단점을 설치해 고자가 되버
린 경의선을 위로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끊어진 구간에 드디어 희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문산~도라산
역 구간 복원 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2001년 문산~임진강역 구간이 개통되었고, 2002
년 2월 도라산역까지 완성되면서 경의선은 50여 년 만에 임진강을 넘어 개성 코앞까지 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 개성과도 이어지면서 반백 년 만에 경의선은 하나가 되었다.

이곳 이름이 도라산이 된 것은 부근에 도라산전망대를 품은 도라산이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마지막 제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이 고려에 항복하고 개경(開京)에 입조(入朝)를
했는데, 그는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경주) 방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고 한다. 그래서 도라(都羅)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도라산역은 어지간한 시,군 철도역에 버금가는 규모로 산뜻하게 지어졌는데, 예민한 위치에
자리한 탓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편이며, 그 큰 규모가 무색하게 무지 썰렁하다. 한때 서울
역에서 이곳까지 새마을호 열차가 운행하기도 했고, 서울~도라산, 문산~도라산 통근형 열차도
들어왔었으며, 그들을 대신해 DMZ관광열차도 들어왔다. 심지어 경의중앙선 전철 전동차도 DMZ
관광열차 대신 잠시나마 이곳까지 바퀴를 들인 적이 있었다.
허나 지금은 북한의 태클과 관광열차의 노후화 등으로 열차의 기적소리가 사라진 상태라 무늬
만 남은 철도역 신세가 되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오랫동안 끊어진 경의선을 하나로 이어 장차 통일과 대륙 진출에 대비하며
민통선 안에 근사한 역을 지은 것에 그 의미를 둔 현장이다.

* 도라산역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노상리 556


▲  도라산역 내부 (정면)

▲  통일의 피아노 - 분단의 상징으로 통일을 노래하다.
장소가 장소인만큼 그에 걸맞는 이름을 지닌 피아노. 그는 특이하게 철조망을
개조하여 피아노 현을 엮었다. 그러다 보니 소리는 일반 피아노보다 조금
못한데, 이는 현재 남북의 온전치 못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  통일을 염원하는 온갖 포스터들
우리는 잃어버린 땅이 오지게도 많다. 당장에 북한도 그렇고, 대마도(對馬島)도
그렇고, 만주와 요동, 연해주, 산동반도, 화북 일대, 그리고 왜열도까지
어느 세월에 다 찾지??

▲  도라산역 기공식 때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기념 서명이 담긴 침목

▲  침목에 쓰인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서명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시여'
도라산역 기공식이 열린 역사적인 2000년 9월 18일,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이곳을 찾아 소감을 밝히고 침목에 이렇게 서명을 남겼다.

▲  미국 부시 대통령의 기념 서명이 담긴 침목

2002년 2월 20일 미국 부시가 도라산역을 방문하여 침목에 기념 서명을 남겼다. 한글로 써야
마땅하지만 건방지게도 꼬부랑 알파벳으로 휘갈겨 썼는데, 내용은 '이 철도가 한민족을 이어
주기를 염원합니다' 이런 뜻이다. 허나 현실은 미국 양이(洋夷)나 러시아 양이, 중공 개잡것
들, 왜열도 원숭이들이 합심해서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


▲  미국 부시가 남긴 친필 서명



 

♠  북쪽을 향한 몸부림, 도라산전망대와 제3땅굴

▲  군부대 스타일로 지어진 도라산전망대(도라전망대)

도라산역은 역사(驛舍) 내부만 둘러봤다. 열차를 타는 플랫폼은 문이 잠겨있었고, 주어진 시
간도 20분에 불과해 역 북쪽에 닦여진 도라산 평화공원은 어림도 없었다.

우리의 조급한 셔틀버스는 도라산전망대로 길을 잡았다. 잠깐 희망로를 타다가 서쪽으로 난
조그만 길로 들어서 꼬불꼬불한 언덕 길을 오른다. 길 좌우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해골 마
크가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지뢰가 매설된 곳이다. 이곳 외에도 희망로 서쪽 상당수의 숲과
산도 해골마크가 염통을 건드리는 지뢰 천국이다. 특히 도라산전망대로 올라가는 고갯길 좌우
는 완전 지뢰밭이며, 전망대 주변 숲도 상당수 지뢰밭이다.
그러니 여기서 바퀴를 잘못 놀리는 날에는 완전 지뢰 밥이 되고 마니 완전 공포 특집이 따로
없다. 은근히 쫄깃해지는 염통을 부여잡고 있으니 버스는 무사히 도라산전망대 주차장에 바퀴
를 접으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비록 해발은 낮지만 'S'라인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갯길이라 만약의 실
수를 대비해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쌓인 날에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관람시간을 30분 정도 주었다. 아무래도 북쪽 땅이 바라보이는 곳이라 넉넉히 주
는 모양이다. 주차장에서 내리니 바로 군부대 스타일로 지어진 얼룩무늬의 도라산전망대(도라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은 도라산(156m) 정상부로 전망대 건물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며,
일반 관광객은 그 서쪽에 닦여진 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된다.

도라산전망대는 휴전선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최북단에 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민통선 전
망대로 기존 송악산OP(관측소)가 폐쇄되면서 1986년 이곳에 북한을 바라보는 전망대를 닦아
1987년 1월 속세에 공개되었다.
고려에 항복한 신라의 마지막 군주, 경순왕이 개경에 입조하여 늘 이곳에 올라 고향, 경주를
바라보며 눈물 짓던 곳으로 오늘날 우리들은 여기서 금지된 땅 북한을 바라본다. 아마도 경순
왕이나 우리나 바라보는 마음은 조금은 비슷할 것이다. 그리워하는 마음만큼은 같기 때문이다.

전망대의 규모는 803.31㎡로 관람석 500석, VIP실, 상황실, 주차장(30~40대) 등을 갖추고 있
으며, 이곳이 개성을 비롯한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현장이라 개성공단과 북한의 선전용 마을
인 기정동, 거대한 규모의 김일성 동상, 개성 동부와 송악산(松嶽山) 등이 바라보인다고 한다.
허나 우리가 갔을 때는 날씨도 조금 흐렸고 거기에 중공산 미세먼지까지 요란하게 점을 찍으
면서 겨우 개성 동부 지역만 확인했다.
사람들의 시력 한계를 극복하고자 망원경 34대도 깔려있는데, 임진각 옥상 전망대처럼 500원
을 요구한다. (일부는 무료임)
 
* 도라산전망대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 390-2 (제3땅굴로 308)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개성 동부 지역과 개성공단 방향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개성 동부 지역과 개성공단 방향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개성 남부 지역과 개성공단 방향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파주 장단면과 개성 남부 지역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⑤ 파주 장단면 지역 (남측 민통선)
개성공단 남북출입사무소(검문소)에서 개성공단, 개성으로 이어지는 도로(희망로)가
바라보인다. 예전에는 판문점을 거쳐 북으로 갔으나 개성공단 개발로 인해
새로운 길이 생긴 것이다. 허나 아무나 갈 수 없는 콧대 높은 도로이니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도로에 불과하다.

▲  도라산전망대 앞 휴전선 구역

도라산전망대는 2018년 10월에 기존 전망대(군부대 스타일로 지어진 건물)에서 약간 북쪽으로
신축 이전되었다.

허나 우리에게는 이런 콘크리트 전망대는 필요 없다. 그까짓 기정동과 개성 일부 지역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서로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이런 것에 경쟁하지 말고 속히 통일이 되어
서로를 완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이런 소모적인 것들에 치중해야 되
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북쪽 땅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닌 '한때 우리에게도 이런 우울한 시절이
있었구나' 추억에만 머무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  DMZ마크를 내민 제3땅굴 입구

보면 볼수록 한숨만 나오는 북쪽 땅을 20여 분 바라보고 다시 셔틀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크
게 긴장을 하며 마치 뱀 허리에 올라탄 듯 도라산을 조심조심 내려와 북쪽에 자리한 제3땅굴
로 이동했다.
제3땅굴은 땅굴 파기 전문인 북한이 남침용으로 뚫은 4개의 땅굴 중 하나이다. 3번째로 발견
되어 제3땅굴이란 단순한 이름을 달게 되었는데, 문산에서 12km, 서울에서 불과 52km로 서울
에서 가장 가까운 남침용 땅굴이다. 만약 발견되지 못했다면 자칫 상당히 예민한 상황을 맞았
을지도 모르겠다.

땅굴이 발견된 경위는 대략 이러하다. 1974년 북한에서 남침 땅굴 측량기사로 일했던 김부성
이 귀순을 했다. 그는 판문점 근처에 땅굴이 있음을 알려 주어 1975년부터 주변을 샅샅이 뒤
졌으나 3년이 넘게 발견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8년 6월 10일, 시추공 중 1개가 폭발하면서 역갱도 굴착 공사를 벌여 10월 17일
에 판문점 남쪽 4km 지점에서 땅굴을 발견했다. 땅굴 폭은 2m, 높이 2m, 깊이 73m, 총길이는
1,635m로 휴전선에서 무려 435m나 남쪽으로 들어왔으며, 임진각에서 4km, 통일촌 민가에서 겨
우 3.5km로 1시간에 최대 3만의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

땅굴이 발견되면서 휴전선 남쪽 170m 지점을 철저하게 틀어막았는데, 북한은 엉뚱하게도 남한
이 판 땅굴이라 주장하며 소심하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허나 땅굴을 뚫을 때 폭파 흔적이 남
쪽을 향해 있어 그들의 오리발을 무색하며 만들었다.
이후 땅굴 내부를 손질하여 2002년 5월 31일 민통선 관광지의 하나로 세상에 내놓았으며, 미
니열차인 평화호(모노레일)를 바깥에서 땅굴 내부까지 깔았다. 허나 수용 인원에 한계가 있어
서 2004년 지름 3m의 도보 관람로를 따로 닦았다. 또한 DMZ영상관과 상징조형물, 기념품과 간
식거리를 파는 판매장을 설치해 땅굴을 보조한다.

북한이 우리에게 던진 불쾌한 선물인 제3땅굴, 허나 이제는 DMZ명소의 백미이자 파주시의 꿀
단지로 부상하여 파주시와 국방부의 애지중지가 대단하다. 매일 수백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니
말이다. 불쾌한 땅굴이 돈을 부르는 황금 땅굴이 된 것이다.

* 제3땅굴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 1082-1 (제3땅굴로 210-358)


▲  휴전선을 435m나 돌파한 제3땅굴의 위엄

▲  제3땅굴 지하로 인도하는 평화호 모노레일

제3땅굴에서는 무려 1시간에 관람시간을 주었다. 아무래도 파주 DMZ관광지의 갑(甲)과 같은
존재이고 땅굴 내부까지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이 있어서 넉넉히 준 것이다.

이곳은 모노레일 평화호를 타고 땅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 이전에 부근에 마련된 사물함
에 속세에서 가져온 가방과 카메라 등의 소지품을 반드시 넣어두고 가야 된다. 신분증과 지갑
, 핸드폰 정도만 지참이 가능하여 부득이 모든 것을 그곳에 털어넣고 열쇠로 잠구었다. (열쇠
는 비치되어 있음) 그런 다음 별도로 마련된 안전모를 쓰고 평화호에 탑승한다.
안전모 같은 경우는 땅굴 높이가 2m라고 하지만 북쪽 인간들이 오로지 남침에 눈이 어두워 콩
을 볶듯이 판 것이기 때문에 불규칙한 높이가 많다. 하여 땅굴 내부를 거닐다 보면 여러 차례
땅굴 천정과 부딪친다. 그러니 소중한 머리를 위해서 안전모 착용은 필수이다.
또한 땅굴 내부는 사진 촬영이 통제되어 있으며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다. 그만큼 예민한 곳이
며, 휴전선 코 앞까지 들어간다.

땅굴에 대한 호기심을 품은 사람들을 가득 태운 평화호는 슬슬 기지개를 켜며 지하를 향해 느
릿느릿 이동했다. 속도는 사람 걸음과 비슷하거나 조금 느린 정도로 평화호가 들어가는 터널
은 동굴을 관광지로 닦으면서 남측에서 판 것이다. 그렇게 몇 분을 들어가면 드디어 제3땅굴
승강장에 이르고 여기서 땅굴에 임하면 된다.

속세에 개방된 땅굴 구간은 265m로 휴전선을 불과 170m 앞둔 곳까지 들어갈 수 있다. 더 들어
가고 싶지만 그곳은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고 그 너머는 세상도 눈을 돌린 공간이라 눈물을 머
금고 발길을 돌려야 된다. 땅굴 높이가 다소 들쭉날쭉하여 심심치 않게 안전모와 천장이 부딪
치는 소리가 났으며, 동굴 통로는 2명이 지나다닐 정도의 폭이라 천정만 조금 조심하면 별무
리는 없다.
그렇게 휴전선 앞까지 갔다가 돌아나오는데, 여기서 많은 이들이 아쉬워한다. 말로만 듣던 휴
전선이 코 앞이라니 저기만 넘으면 북한인데, 왜 우리는 가지를 못할까? 한숨은 커져간다. 외
국 잡것들이야 남의 나라 이야기라 상관없는 표정이지만 이 땅의 민중들의 표정은 그렇지가
않다.
땅굴 내부는 지하라 시원하며, 딱히 볼거리는 없다. 다만 평화호 타는 곳 부근에 샘터가 있는
데, 수질은 괜찮은 편이라 1모금 마셔보았다. 민통선 땅굴에서 섭취한 물 맛은 속세에서 마시
는 약수 맛과 비슷한 것 같으니 바깥 세상과 이곳이 같은 나라 땅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땅굴에서 나올 때는 걸어나올까 했으나 마침 평화호가 들어와 관광객을 쏟아내고 있어서 다시
그의 신세를 지며 바깥으로 나왔다. 다시 햇살을 보니 눈이 부시면서도 지옥에서 급히 나온
듯 너무 반가웠다. 아직 20분 정도의 시간이 있어서 땅굴 수식용으로 지어진 DMZ영상관을 둘
러보았다.
시간 관계상 영상물은 시청하지 않았고, 그곳에 전시된 제3땅굴과 휴전선 관련 전시유물, 디
오라마, 사진, 안내문만 둘러보고 나왔다. 그러니 시간이 거의 딱 맞는다.


▲  제3땅굴을 파는 북한 군인 디오라마 - 역시 땅굴의 귀재들

▲  파괴된 장단면사무소 건물에서 가져온 타일들

장단군(長湍郡)에 속해있던 장단면사무소는 6.25를 겪으면서 건물이 모두 파괴되어 겨우 지붕
만 남아있다. 그 자리 또한 민통선에 철저히 묶이면서 세상 뇌리 속에 잊혀진지 오래이다. 장
단군, 장단면이란 지명까지 더불어...


▲  판문점 모형도

6.25시절 여기서 남북이 휴전 협정을 맺었고, 이후로도 쭉 남북의 대화 창구로써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땅이 통일되는 그 순간까지 판문점의 존재는 미치도록 이 땅의 한을 키울 것이다.
제발 모형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면서..


▲  1968년 1.21사태 때 체포된 김신조
31명으로 이루어진 공비 패거리 중, 유일하게 체포되었다. (29명 사살, 1명 도망)

▲  옛 경의선 측량기준석 (2003년 7월에 발견됨)

▲  옛 경의선의 흔적들 (볼트, 레일, 스파이크판, 석탄 등)
2002~2003년에 수습된 옛 경의선의 아련한 흔적들이다. (석탄은 장단역에서 수습됨)

▲  통일 염원 조형물
쪼개진 2개의 덩어리를 하나로 합치고자 하는
염원이 깃들여져 있다. 아직도 저 염원과
시도는 현재진행형~~

▲  제3땅굴을 수식하는 DMZ영상관


제3땅굴과 DMZ영상관을 둘러보고 아직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서 기념품 판매점으로 넘어가
과자와 음료수를 섭취했다. 그렇게 파주시 재정에 약간 도움을 준 다음, 시간에 맞춰 셔틀버
스에 올랐다.

우리의 버스는 도라산과 제3땅굴을 모두 뒤로 한 채,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대성동과 해마루
촌까지 모조리 둘러보고 싶지만 현실은 그러지를 못한다. 언제쯤이나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
을까? 그렇다고 버스에서 몰래 이탈하여 개인 행동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곳은 민통선이라
인원 점검이 철저하며 만약 이탈했을 경우 군인들의 수색 표적이 된다. 또한 월북 시도는 하
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땅의 현실도 시궁창이지만 저 북쪽은 더 시궁창이다. 게다가 곳곳에
지뢰밭이 도사리고 있으니 산 속을 잘못 헤매다가는 정말 큰일 난다.

버스는 통일촌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마지막 행선지인 통일촌 직판장 앞에서 그 육중한 바퀴
를 멈춰선다. 이곳은 백련리로 군내면 장단출장소 북쪽이다. 직판장 주변에는 백련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직판장이란 이름 그대로 민통선 주민들이 생산한 장단콩과 온갖 채소 등을
판매하고 있으며, 기타 간식류와 음식(콩요리 중심)도 팔고 있다. 버스가 이곳에 들른 것은
여기서 지역 특산품이나 간식 등의 소비 행위를 하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주어진 시간은 10분 정도라 마을 구경을 할 시간도 없다. 마치 다른 나라의 마을 같
은 그러나 이 땅의 흔한 시골 풍경을 지닌 백련리와 장단출장소까지 둘러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마을을 아주 조금 둘러보긴 했으나 시간 제약이 발목을 잡고 외지인이 함부로 돌아댕
기면 안되는 곳이라 새가슴처럼 바로 돌아와 음료수 하나 사먹고 차에 오른다.

참고로 파주 민통선 지역에 지역 주민들이 살고 있다. 집과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데, 나라의
예민한 곳에 살고 있어 제약은 많다. 허나 그만큼 혜택도 적지 않다. 또한 일정한 인구 수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전입이 불가능하며, 전출하는 가구가 있어야 그 수만큼 전입
이 가능하다. 그러니 은근히 특별한 동네이다. 허나 휴전선이 코 앞이니 늘 북한의 도발이라
는 폭탄을 안고 살아야 된다.

통일촌직판장을 끝으로 파주 DMZ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통일대교를 건널 때는 별 다른 검
문 절차 없이 통과시켜 주었고 다시 임진각으로 돌아왔다. 마치 오후 낮잠에서 꿈을 꾼 듯 끝
이 난 것이다.

임진각으로 돌아와 앞서 살피지 못한 바람의 언덕을 가고자 했으나 후배가 힘들다며 반대 의
사를 내세워 별 수 없이 주변만 둘러보고 임진강역으로 나왔다. 경의중앙선의 문산~임진강역
셔틀 전철을 탈까 했으나 평일은 2회, 휴일은 4회 밖에 다니지 않아서 역 앞에 있는 버스 정
류장에서 파주마을버스 058번을 타고 문산읍으로 나왔다.

058번은 노선 특성상 운천리와 장산리 일대를 정신 없이 강제투어를 시켜주고 문산읍내에 우
리를 내려놓는다. 이렇게 하여 연말 파주 민통선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임진각에 있는 경의선 철도 중단점과 증기기관차

임진각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경의선 철도 중단점을 세웠다. 허나 2001년까지 경의선 남측 종
점은 문산역으로 여기보다 더 남쪽이며, 2001년 이곳까지 개통되면서 실질적인 중단점이 되었
으나 2002년 이후 임진강 너머로 이어지면서 중단점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허나 열차를 타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곳의 북쪽 중단점이 이곳(임진강역)이니 그 의미로 질긴 목숨을 이어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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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2월 1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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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북쪽 자락에 깃든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늦가을 나들이 '

백석동천 별서터
백사실 백사폭포 백석동천 별서 사랑채터

 



 

늦가을이 무심히 익어가던 11월 첫 무렵, 나의 오랜 즐겨찾기 명소인 부암동 백석동천(백
사실계곡)을 찾았다.
두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곳의 늦가을 풍경이 몸살 나게 그리워 간만에 찾은 것으
로 이번에는 흔하게 가는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들어가지 않고 그 동쪽인 평창동 화정박
물관에서 접근했다.
박물관 옆 골목길(평창8길)을 3분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서쪽)으로 오솔길이 손을 내미는
데, 그 길은 평창동(平倉洞)에서 백사실계곡을 빠르게 이어주는 지름길이다. 자연이 완전
히 묻힌 싱그러운 숲길로 길도 흙길이고 주변에 밭두렁까지 펼쳐져 있어 이곳이 서울임을
잠시 잊게 한다.

길 중간부터는 남쪽에 3~4m 높이의 석축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그 안에 배드민턴장과 보
호수로 지정된 늙은 소나무가 있다. 간만에 소나무를 보고 갈까 했으나 석축 밑에서도 어
느 정도는 보이므로 그것으로 퉁치고 길을 계속 이어가니 그 길의 끝에 백사실 동쪽 능선
이 소나무 숲길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솔내음이 그윽한 백사실 동쪽 능선에 올라타 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의 중심인 별서(別墅
)터로 내려가는 산길이 나오며, 평창동 조망점으로 이어지는 북쪽 길로 가서 서쪽으로 내
려가면 현통사와 백사폭포로 이어진다. (본글은 편의상 백사폭포부터 다루도록 하겠음)


▲  소나무가 무성한 백사실 동쪽 능선길



 

♠  백사실계곡(백석동천) 입문

▲  현통사 앞에 자리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일주문) 밑에
는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 피부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작은 폭포로 웅장하거나 수려한 멋은 딱히 없다. 그저 수수하게
생긴 폭포로 하얀 반석과 잘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나그네로 하여금 백사실계
곡에 대한 첫 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그곳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돋군다.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라 그 희소성이 높은데, 그가 만약 설악산이나 금
강산, 주왕산(周王山) 등 일품 폭포가 즐비한 곳에 있었다면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
러니 사람이나 폭포나 때와 자리를 잘 잡아야 덕을 본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실계곡(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옛날 이름이 동령폭
포란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폭포는 자신의 이름까지
저 멀리 흘려보내고 만 것이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서 폭포수가 실보다 가늘고 누런 낙엽까지 짙게 깔려있지만 비가 많이
오면 폭포수도 제법 패기를 보인다. 여름 제국 시절에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
되며,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고 잠시 쉬어가는 등,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자 꿀피서지로 인기
가 높다.


▲  백사폭포와 하얀 반석


▲  가을과 낙엽을 속세로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나무들이 속절없이 털어낸 낙엽들은 폭포 주변에 수북
히 쌓여있다. 이들 낙엽은 폭포 밑에 모여 이곳에서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며, 올해도 변함
없이 도래한 겨울을 원망한다. 몇몇 낙엽은 한이 맺혔는지 폭포 중간에 철썩 같이 달라 붙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자연은 그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아래로 흘러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니 그
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실계곡 냇물은 넓은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소(沼, 못)에서 큰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기 힘들 그리운 고
향, 북악산(백악산)의 그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
랫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서 신나게 바위를 타고 내려가 홍제천, 한강을 거쳐 서해바다로 종점
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
심히 매무새를 다듬는다. 저들의 처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잔
잔한 수면에는 귀를 접은 낙엽들이 둥실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실에 머문
늦가을도 낙엽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실계곡 밑에 둥지를 트며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는 20세기 이후에 지어진 조그만 산
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였던 일붕(一鵬)이 머물렀
던 절로 백사실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겨우 2~3번이
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실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
한 풍경소리가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있다.


▲  늦가을이 진하게 깃든 백사실계곡 숲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에 물들게 한다.

▲  운치가 진한 백사실계곡 숲길 (백사폭포~백석동천 별서터 구간)

간만에 백사실계곡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실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
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실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 나는 감히 언어로 이곳을 희롱하지 않고 그저 탄
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실계곡을 거닌다.
 
숲에 깃든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숲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실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도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줄어들고 서울에서는 이곳을 비롯한 일부 계곡에만 겨우 살아가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  별서터 돌다리에서 바라본 백사실계곡

▲  별서터 돌다리 직전 계곡에 누워있는 바위들
크고 견고하게 생긴 바위들 피부에는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닦을 때 필요한 돌을 떼던 흔적들이다.


계곡에 누워있는 바위들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사실계곡은 백석동천, 백사실, 백사골 등이라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별로 상관은 없
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표현
한 이름이다. 그리고 백석동천은 이곳에 반한 선비와 양반들이 붙인 칭호이자 백사실의 다른
이름이다.


▲  별서터 옆을 지나는 백사실계곡 (별서터 징검다리 주변)

백사실계곡 안내도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정겹게 펼쳐진 계곡 징
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
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닦은 둑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 별서 주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별서터에서 바라본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앞에 두고 별서터 맞은편인 서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
덕 정상에 큰 바위 하나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월암은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발이 닿기 어려운 궁색한 곳에 자리해 있다. 별서터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짙은 숲에 가려져 있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99% 이상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11월 중순 이후나 겨
울에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다 보면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파고 그 안에 월암(月巖) 2자를
새겼는데, 18세기에 백석동천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
정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 중의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실계곡은 나무가 울창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1잔 걸치러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
광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 바위에 달바위(월암)란 이름을 붙여
주고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벗어나면 여
기가 서울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경치가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
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안긴 분지
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
로 지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산 속에 자리한 탓도 있겠지만 나라
의 예민한 곳이 동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크게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서(별장) 및
휴식 장소로 인기가 대단했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
武溪精舍)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그 외에 세검정(洗劍亭), 탕춘대(
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백악산) 북서쪽 백사실계곡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
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해서 백사실이라 불리고 있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백사실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비
롯되었으나 계곡에 하얀 돌이 많고 경치가 고와 굳이 북악산이 아니더라도 백석동천의 이름
자격은 충분하다. 여기서 동천(洞天)이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경승지의 명예로운
칭호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연못 정자터

▲  사랑채터

백석동천과 관련된 첫 기록은 18세기 인물인 월암 이광여(1720~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있다. 그 책에는
'비가 온 뒤 북한산(삼각산)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폭포수를 보았다. 세검정으로 빠지
는 계곡 위쪽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폭포(백사폭포)가 있는데
그 위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다. 그곳의 편액은 간정료(看鼎寮)였다'
여기서 간정료는 '솥을 보는 집'이란 뜻으로 차를 끓이는 다조(茶俎)를 말한다. 허씨의 초가
정자가 일찌감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여기서 허씨는 허필(許佖)로 여겨진다. 그는 시
문과 그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손가락으로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를 잘했다. 1737년 '북
한산 남쪽 백석 별업(別業)에서 정윤, 강세황(姜世晃)과 함께 짓다'
는 제목의 시를 지으니 그
때 이미 '백석(백석동천)'이란 지명이 있었음을 살짝 밝혀주고 있다.

개화파로 유명한 박규수(朴珪壽)도 14살이던 1820년에 외할아버지를 따라 한양도성 북쪽의 여
러 명소를 거닐었는데, 그때 백석동천에도 들려 시문을 남겼다. 그는 석경루 위쪽에 백석정의
옛 터가 있는데 허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살던 곳이라 하였고, 백석정은 허도사가 단약(
丹藥)을 달이던 곳이라 언급하며 백석정은 이미 사라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허씨(허도
사)는 허필로 보이며, 백석정은 간정료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2012년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백석동천에 손을 댄 기록이 발견되었다. 김정희
는 금헌(今軒)이란 친구와 읊은 시에서
'하찮은 문자에도 정령이 배었으니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쪽 별서
는 백석정의 옛터에 있다'
는 문구가 나온 것이다. 김정희가 백석동천을 북쪽 별서<북서(北墅)
>라 한 것은 이미 한양도성 동남쪽 금호동(金湖洞)과 경기도 과천(果川)에 별서가 있었기 때
문이며,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에는 백석동천 별서를 산루(山樓)라고 표현했다.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가 1960년대에 낸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에는 이곳 별서가 1830년
대에 지어진 것으로 나와있는데 추사가 그때 이곳을 사들여 정자를 짓고 600평 규모의 별서를
지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허나 추사가 계속 소유하고 있지는 않은 듯 싶으며, 이후 이곳
관련 기록에는 주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尹致昊)는 1926년 11월, 이곳을 유람했는데, 그의 '윤치호일기'에 '
백석실'이라 나와있어 백석동천(백사실)의 다른 명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1930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에는 '북악8경'의 하나인 '백석곡 팔각정'이 나왔는데, 백석곡은 백석동천의
별칭으로 그 신문에 정자의 사진이 나왔다. 그것이 백석동천 별서터의 유일한 생전의 사진이
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 별서를 둘러싸던
담장이 있었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는데,
안채는 1917년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6.25때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은 기능을 잃었다.
사랑채와 안채는 1970년대까지 살아는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감당치 못
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사랑채터와 안채터, 동그란 연못, 정자터, 담장터, 돌다
리, 돌계단, '백석동천'과 '월암' 바위글씨 2개가 남아 이곳의 정취를 아련히 전한다.

옛날에는 그래도 마음 놓고 발을 들일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으나 북한이 저지른 1968년 1.21
사태(김신조 공비사건)로 북악산 일대와 백사실계곡이 금지된 곳(청와대 경호구역)으로 꽁꽁
묶이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거의 끊기게 된다. 이후 동네 사람들이나 오갈 정도로 비밀의 공간
으로 숨겨져 있다가 2004년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통제구역에서 해방되었고, 그 시절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임을 인정해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명승 36
로 변경되었다.

2010년과 2011년에 별서터 일대를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
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백석동천 바위글씨

서울 도심 속의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와
여름의 녹음과 피서삼매, 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고루고루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여름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
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실계곡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
나, 침침한 두 눈을 비비며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의 성지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고 싶었던 옛 사람(주로 지
배층들)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
으로 들어가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쭉
남았으면 좋겠다. 찾는 이가 늘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까지 섞여 들어와 사랑채터 주춧
돌에 낙서를 하고 계곡을 괴롭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9년 이후 관리인을 두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또한 2013년에 종로구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이곳을 들쑤실 생각까지 했었는데, 괜히 복
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기 바란다. 비록 폐허가 되었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운
치가 강하며, 옛 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다. 그리고 백사실계곡은 서울시에
서 지정한 도룡뇽 보호구역이니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않기 바란다.


* 백석동천(백사실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부암동 산25일대


▲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

백사실계곡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
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이어주는 돌계단이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돌계단이 좀 헝클어진 했으나 경사가 완만해 오르락 내리락에는 별로 어려움은
없다. 다만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 높이가 고르
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가 있었다. 허나 아쉽게도 생전
의 사진이나 그림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무너져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 남아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정
비되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서 별서 주
인은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를 대접
하여 1잔씩 걸쳤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채 동쪽 부분에는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
있다.


▲  석축 위에 닦여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누마루가 사라지면서 주춧돌은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우물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우물(또는 작은 연못)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공터로 남아있는 안채터
안채가 가고 없는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에
는 엉뚱하게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적지 않게 파괴되고 생매장을 당
했다.
그렇게 별서터를 깔고 앉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
대를 발굴하면서 없앴으며, 땅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건
졌다. 그리고 2011년 3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고이 묻고 그 위를 풀로 덮
어 완전히 가렸으며,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수습된 주춧돌 등의 돌덩어리들은 안채터 서쪽 구
석에 일부 모아두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
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사랑채 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
과 별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에 잠겼을 별서 주인을 머릿속에 그리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사랑채터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이곳의 운치를 크게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담장터

사랑채터와 안채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담장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되며, 석축 윗쪽에는 별서와 속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던 담
장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거진 무너지고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
지 담장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

▲  흔적만 남은 사랑채 뒷쪽 담장터



 

♠  백석동천 별서터의 중심,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살며시 떠있는 그런 흔한 연못이 아닌
나무들이 털어놓은 낙엽, 그리고 잡초로 가득한 모습을 보인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은
연못의 성격과 구성원까지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정자터 옆에 배수로를 만들어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둥그런 연못을 채웠으며 연못을
채운 물은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돌다리 밑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빼면서 계속 연못은 물갈
이가 되었다.
허나 이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6.25전쟁 때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
되고 연못 또한 손상을 입어 배수가 불가능하게 되면서 무늬만 연못이 되어버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비가 많이 오면 비록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그
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가득한 연못의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늦가을에는 낙엽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주변은 나무들로 삼삼하여 두텁게 시원한 그늘이 펼쳐진다. 거
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은 나
그네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여기가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은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六茅亭)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궜던 정자는 윗도리와 중심부는
모두 사라지고 6개의 돌기둥과 돌계단만 남아
있다. 정자터 옆구리에는 계곡물을 끌어들이던
배수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6.25전쟁으로 그
것이 손상되면서 더 이상 물을 소환할 수 없게
되었다.
백석동천 별서터 식구 증 유일하게 생전의 모
습을 남긴 운이 좋은 존재로 1930년 7월 19일
자 동아일보에 백석곡 팔각정으로 등장했다.

▲  옆에서 바라본 정자터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
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했을 것이다.
비록 터만 남아있으나 지금의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으며 괜히 복원한다고 난리를 치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둬야 이곳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15~20m에 이르는 커다란 물푸레나무가 연못과 그 주변에 그늘을 드리
우고 있다. 나이는 약 150~200년 정도로 여겨져 추사 김정희가 심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
데, 나무 밑에는 커다란 바위가 누워 있어 별서를 닦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두었으니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이나 별서를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  별서터에서 수습된 돌로 이루어진 소박한 쉼터 (정자터 옆)

별서터 일대에서 수습된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들을 이곳에 모아두었다. 이들은 아마도 사랑채
와 안채, 정자에 쓰인 석재로 보이는데, 시커먼 피부를 지닌 큰 돌을 가운데 두고, 그보다 작
은 돌덩어리 2개를 좌우에 두어 마치 탁자와 의자와 같은 모습이 되어 조촐하게 이곳의 쉼터
역할을 한다.
나도 둘이나 여럿이서 이곳을 찾았을 때 여기서 앉아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섭취하
고는 했는데, 저곳에 앉은 횟수는 최소 50회는 넘을 것이다. 저 돌덩어리들과 별서터 유적은
거의 그대로이거늘 나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계속 늙어가고 변해가니 정말 인상무상이로다.


▲  통돌 2개로 이루어진 작은 돌다리

정자터 옆에 있던 배수구를 통해 옆에 흐르는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연못을 채우고 채워진
물은 돌다리(윗 사진)가 있는 작은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내보내 고인물을 경계했다.
이곳 돌다리는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관련글 보기)의 기린교처럼 길쭉한 통돌 2
개로 이루어진 단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은근히 정감을 가게 한다. 별서가 조성되던 1830년
에 수로, 연못과 함께 닦여진 것으로 보이며, 수로에는 더 이상 물이 나갈 일이 없어 낙엽만
가득하다.


▲  연못을 중심으로 한 백석동천 별서터 전경

▲  늦가을이 고스란히 담긴 연못 둘레길 (연못 동쪽)

▲  연못 동쪽 산비탈에 둘러진 석축의 흔적



 

♠  백석동천 마무리

▲  별서터에서 백사실 상류로 인도하는 산길

백사실계곡은 별서터 옆에서 백사실약수터 입구까지의 황금 구간을 도룡뇽과 맹꽁이 등의 수
중 동물 보호를 위해 금줄을 둘러 접근을 금하고 있다. 하여 별서터에서 계곡 상류로 가려면
별서터를 등지고 계곡을 건너 솟대 돌탑과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입구로 나와야 된다.
하지만 통제의 줄이 느슨해 금줄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가는 사람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
히 여름에는 피서객들의 칩입이 빈번하여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는 2012년에 마련한 산불방제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이 있는데, 솟대 돌탑
은 백석동천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냥 백석동천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돌탑을 지나
면 소나무숲과 늦가을에 잠긴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동쪽)으로
가면 백사실 상류와 능금마을,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로 이어지고,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의 늦가을 경관을 한몫 거들고 있는 짧은 은행나무숲길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남쪽) 길로 가면 서쪽을 향해 95~100도 정도 약간 고개를 숙인 큰 바
위가 직각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피부에 '白石洞天' 바위글씨가 아주 또렷하게 깃들여져
있다. 여기서 '백석'은 북악산(백악산)을 뜻한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북악산(백악산) 산신
도 모른다. 아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지는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조선 때 선비와 양반 등 지배층들은 경관이 수려한 곳에 저렇게 낙서를 남기는 습
성이 있었는데, 백석동천 역시 그들의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
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일 것이다.


▲  백사실계곡의 그림 같은 숲길 (능금마을 방향)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할 것이다. 비록 짧은 거리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백사실계곡의 그림 같은 숲길 (백석동천 별서터 방향)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이어지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실계곡 상
류가 나타난다.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부터 이끼 옷을 걸친 바위들까지 줄줄이 이어져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과 금강산, 백두산, 주왕산, 지리산 등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
도 서울 도심 지척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때묻지 않은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는데, 이렇게 순수함을 지닌
백사실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한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 현장이 되고, 시민들의 소풍/나들이 장소로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
터 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  외나무다리 직전 백사실계곡 상류

▲  백사실계곡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실계곡 상류의 너른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
도 달달한 풍경을 자아낸다. 길쭉한 목재 2개를 엮어서 닦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
도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어찌해야 될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
요는 없다.
사람 많고, 차량 많고, 키다리 건물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게 보이는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기할 따름이다.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
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백사폭
포에서 시작된 백석동천은 이 외나무다리에서 사실상 끝이 나며, 백사실계곡은 능금마을 안쪽
까지 이어진다.


▲  백사실계곡 상류와 능금마을 밭두렁 (능금마을 방면)

외나무다리를 지나면 산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줄어든다. 계곡 건너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심히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
을 지나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종로구가 맞거늘 이런 두멧골이 있었나. 마음을 설레게 하니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
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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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소금강, 금정산 금강공원 겨울 나들이 <동래온천 온정개건비,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부산의 소금강, 금강공원


' 부산의 소금강을 거닐다. 금정산 금강공원 '
금강공원 소나무숲
▲  금강공원 소나무숲
 



 

새해를 코앞에 둔 12월 끝 무렵의 어느 덜 추운 날, 우리나라의 2번째 대도시이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인 부산(釜山)을 찾았다.

이번 부산 나들이는 운 좋게 얻은 수서고속전철(SRT) 무료 쿠폰을 이용해 아주 기분 좋
게 다녀왔는데, 새벽의 차디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 7시에 수서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고속전철(SRT)에 몸을 싣고 2시간 20여 분을 달려 경부선의 남쪽 종점인 부산역에
두 발을 내렸다.

부산은 북쪽으로 울산(蔚山) 울주군, 서쪽은 경남 창원(昌原)과 맞닿아 있으며, 동쪽은
동해바다에 접해 있고, 남쪽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이른다. 벌써 70번 넘게 인
연을 지은 곳이라 딱히 땡기는 미답처(未踏處)가 없어 아주 부질없는 추억팔이도 할 겸,
가슴을 시리게 했던 옛 추억이 아련히 깃든 몇 곳을 그날의 메뉴로 삼았다.

부산에 이르자 제일 먼저 서면(西面) 부근에 자리한 선암사(仙巖寺, ☞ 관련글 보기)를
둘러보고 즐거운 추억이 여러 겹이나 쌓여있는 해운대(海雲臺)로 넘어가 늦은 점심으로
소고기국밥 1그릇을 말았다.
그렇게 시장한 뱃속을 달래고 저 앞에 아른거리는 해운대 해변도 간만에 가볼까 했으나
해가 짧은 시기라 쿨하게 접고 해운대역(2호선)에서 부산시내버스 31번(송정↔모라주공
아파트)을 타고 동래(東萊)로 넘어가 온천장 뒤쪽에 있는 금강공원을 찾았다.

동래의 뜨거운 현장인 온천장(溫泉場, 동래온천지구)을 지나다가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 잠시 금강공원을 접어두고 온천장 거리를 배회하니 나를 여기로 부른 용각과 온정
개건비가 활짝 마중을 나온다.



 

♠  동래온천의 빛바랜 일기장과 온천 용왕신의 공간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와 용각(龍閣)


▲  온정개건비(부산 지방기념물 14호)와 욕탕으로 쓰였던
옛 석조(石槽)


천하 제일의 온천으로 오랫동안 명성이 높았던 동래온천(東萊溫泉)은 해운대온천과 더불어 부
산 지역의 대표적인 온천이다. 동래온천 일대를 흔히 온천장이라 부르고 있으며, 동래 지역의
뜨거운 혈맥이자 꿀단지 같은 존재이다. <온천은 온정(溫井), 탕천(湯泉)이라 불리기도 했음>

동래온천이 속세를 향해 언제부터 뜨거운 맛을 보여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신문왕(神
文王, 재위 681~692) 시절 재상을 지냈던 충원공(忠元公, 김충원)이 683년 장산국(萇山國) 온
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桐旨) 들판에서 쉬었다는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록이 있다. 여기서 장산국온천이 동래온천이라고 하니 적어도 신라 중기부터 온
천으로 쓰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온천물이 얼마나 좋은지 계란이 익을 정도로 물이 뜨겁고 병든 사람이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
다고 하며<온정개건비에 '탕에 들어가 목욕하면 모든 질병을 고친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있음
> 고려 후기 문신(文臣)인 정포(鄭誧, 1309~1345)가 이곳을 다녀가 온천에서 받은 감동을 시
로 남기기도 했다.

온천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와 욕실이 지금까지 남아있네
물줄기 오는 곳 멀지 않으니 욕조가 항상 따뜻하네
1년을 질병에 시달린 몸 반나절 목욕으로 씻은 듯하네


1617년에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중풍을 치료하고자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
은 적이 있었다. 그는 정포의 후손이기도 한데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지역 선비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30일이나 머물면서 온천욕을 41회나 했다. 그의 동래 나들이는 제자들이 세심
하게 정리하여 기록을 했으니 그것이 바로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이다. <여기서 봉산은 동
래의 별칭임>
그 기록에 따르면 동래온천에는 신라 제왕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돌로 된 욕조가 있었으며, 욕
조 하나는 5~6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욕조 윗부분 돌구멍에서 온천수가 나왔고 소문
대로 너무 뜨거워 손발을 급하게 담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온천 본전을 뽑고 그해 9월 4일 고향 칠곡(漆谷)으로 돌아왔는데, 안색과 기혈이 전보
다 좋아져 사람들이 목욕의 효과라고 찬양했다. 정구는 그의 조상인 정포처럼 동래온천의 덕
을 톡톡히 본 것이다.

1691년 온천의 옛 천원(泉源) 부근을 파서 새로운 천원을 발견해 돌로 다진 2개의 욕탕과 욕
사(浴舍)를 새로 지었다. 1730년과 1740년에 중수했으나 건물이 낡고 탕까지 막히자 1765년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 1713~1767)가 크게 손질하여 남탕과 여탕을 나눈 9칸짜리 건물을 지
으니 그 모습이 마치 상쾌하고 화려해 꿩이 나는 것과 같았다고 했다.
동래 지역의 큰 경사였던 그 중수를 영원히 기리고자 1766년 온정개건비를 세웠으며, 비문(碑
文)은 동래 유생인 송광적(宋光迪)이 작성했다.

비석의 몸매는 높이 1.47m, 폭 64cm, 두께 21cm로 10행x16자가 쓰여져 있으며, 그 앞에는 욕
조처럼 생긴 석조가 누워있으니 그가 바로 조선 후기에 쓰였던 욕조(浴槽)로 유일하게 1기만
남아있다. 거의 1인용 수준인 저 탕에 몸을 푹 끓이는 기분은 과연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온정개건비 자리에서 온천수를 뽑아 올렸으며, 이후 물 뽑는 자리가 바
뀌면서 지금은 동래온천의 과거를 보관하는 공간이 되었다.


▲  삼문으로 이루어진 용각의 정문, 온정용문(溫井龍門)

온정개건비와 옛 욕조는 용각 뜨락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용각은 온천수를 관리한
다는 용왕<龍王, 용왕신>이 봉안된 건물로 매년 음력 9월 9일에 온천수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용신제(龍神祭)를 지내며 착한 품질의 온천물이 계속 나오기를 염원한다.
온천장의 성역과 같은 곳이라 관리와 정성이 대단하며, 제삿날과 일부 날을 제외하고 용 문신
이 굵게 그려진 온정용문은 굳게 닫혀 있어 내부 진입은 거의 어렵다. 허나 붉은 피부로 이루
어진 키 작은 담장 너머로 온정개건비와 옛 욕조, 용각 모두 확인이 가능하니 굳이 무리를 하
면서까지 담을 넘을 필요는 없다.


▲  용왕이 봉안된 팔작지붕 용각

용각을 둘러보고 잠시 넣어두었던 금강공원으로 길을 향했다. 온천장을 벗어나 '금강공원로'
를 따라가던 중, 계속 뭔가 허전한 구석을 느꼈다. 골목에 꽉 차게 들어앉아 금강공원의 관문
역할을 했던 망미루(望美樓)가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이상하다 어디 갔지?' 싶어 고개를
몇 번이나 두리번거렸는데 알고 보니 2014년에 그의 제자리였던 동래부 동헌(東軒)으로 이전
되었다.

금강공원로 끝에는 금정산(金井山)의 동쪽 밑도리를 가르는 '우장춘로'가 있는데, 그 길로 접
어들면 금강공원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 온정개정비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135-26 (금강로124번길 23-17)



 

♠  부산의 작은 소금강(小金剛), 금강공원(金剛公園)

▲  금강공원 정문
정문 옆에 입장료를 징수했던 옛 매표소의 흔적이 남아있다.


금정산 동남쪽 자락에는 부산의 소금강이자 대표적인 공원으로 추앙을 받는 금강공원이 넓게
누워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기암괴석, 계곡이 어우러진 수려한 절경을 자랑해 마치 작은 금강산(金剛
山)과 같다 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렸는데, 1940년 왜정(倭政)에 의해 공원으로 개발되
어 금강원이라 불렸으며, 1972년 부산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공원 전체가 문화재 보호구역이
되었으나 1993년 지방기념물에서 정리되면서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해방되었다.
1973년 6월부터 입장료를 받으면서 31년간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쳐다보았으나 2004년
7월 무료로 바뀌었다.

공원의 면적은 2,220,372㎡로 금정산 540m 고지까지 빠르게 이어주는 금강케이블카가 있으며,
임진동래의총과 금정사,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 부산민속예술관, 이영도 시비(詩碑), 지석영
선생 공덕비, 허종배선생 기념비 등의 많은 명소를 품고 있다. 동래 중심지에서 강제로 이전
된 독진대아문과 이섭교비, 내주축성비 등도 잠시 이곳의 신세를 졌으나 모두 제자리로 돌아
가 지금은 임진동래의총만 남아있다.

마치 아무렇게나 놓여진 바위가 계곡과 어우러져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빚어내고 있으며, 거
미줄처럼 닦여진 산책로가 그 절경 사이를 가르고 있어 나들이를 심심치 않게 해준다. 금정산
까지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빠르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금강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되며, 공원
안쪽에는 소나무 숲을 지붕으로 삼은 둘레길이 펼쳐져 있다.

이 공원은 벌써 3번째 인연으로 상큼한 추억이 서린 현장이기도 하다. 그 현장을 이렇게 홀로
다시 찾으니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공원은 거의 그대로인데 예전의 추억은 흩어진 나날의 일
부가 되어 기억 조차 희미하고 '나'라는 존재도 그 사이 적지 않게 나이가 누적되면서 볼품이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 모든 것이 참 덧없기만 하다.

* 금강공원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1동 27-9 (우장춘로 155 ☎ 051-860-7880)
* 금강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종두법(種痘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 선생 공덕비

송촌(松村) 지석영(1855~1935)은 서울 출신으로 부산과도 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20대 초
반 부산 제생원(濟生院)에서 종두법(種痘法)을 익혀 이 땅에서 천연두를 완전히 뿌리뽑는데
공헌했으며, 1895년에는 동래부사로 부임해 선정(善政)을 베풀고, 왜인(倭人)의 밀수 무역을
때려잡기도 했다.


▲  거북바위 (금강케이블카 남쪽)
거북이 몸을 잔뜩 움츠린 듯한 모습이다.

▲  금강공원의 자랑, 소나무 숲길

▲  대자연의 돌 창고는 아니었을까? 돌과 바위로 가득한 금강공원
금강공원의 제일 큰 매력은 공원 곳곳에 널린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돌덩어리들이다. 왜정이 이곳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그들의 어설픈
조경(造景) 방식에 따라 배치한 바위도 있지만 상당수는
거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  제자리로 돌아간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터

독진대아문은 동래부 동헌의 바깥 대문으로 왜정 때 이곳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2014년 12월
망미루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그가 80여 년 동안 발을 붙였던 자리에 작게 표석을 세워
떠나간 그를 추억한다.

독진대아문 안쪽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강제로 옮겨진 이섭교비(利涉橋碑)와 내주축성비(來州
築 城碑)가 있었으나 2012년 9월 다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섭교비는 낙민치안센터 앞 둑,
내주축성비는 원래 자리(동래경찰서)가 어려워 동래읍성 북문으로 옮겨짐>


▲  빛바랜 동래금강원 표석(표지석)
독진대아문터를 지나면 왜정 때 세워진 동래금강원 표석이 모습을 비춘다.

▲  금강공원 연못
금정산이 베푼 물을 막아서 만든 그림 같은 연못으로 연못 한복판에
돌다리를 다져 풍경을 한껏 돋군다.

▲  북쪽에서 바라본 연못
물 색깔이 유난히 푸르다. 그 속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유유자적하며
그들의 삶터를 지킨다. (수심이 2~3m 정도 됨)

▲  서쪽에서 바라본 연못

▲  소나무숲을 가르며 흘러가는 금강공원 둘레길

예전 금강공원에 왔을 때는 딱 독진대아문 자리까지만 가고 길을 돌렸다. 그 이상은 딱히 볼
거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여 이번에는 그 선을 넘어 미답의 공간으로 남아있
던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 보았는데, 푸른 연못과 돌다리, 그리고 소나무숲과 둘레길까지 오히
려 독진대아문 밑보다 풍경이 훨씬 진국이었다. 나의 그릇된 생각이 공원의 진풍경을 만나지
못하게 시야를 가렸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금강케이블카를 타고 금정산성까지 훌쩍 올라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되지 않는
다는 이유로 공원 위쪽에서 길을 접고 북쪽 방향 둘레길로 들어섰다.
둘레길은 그윽하게 우거진 소나무들이 하늘을 훔치며 늘씬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들이
베푼 솔내음이 속세에서 오염된 오각과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중간에 계곡과 연못, 쉼
터가 있으며, 걷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  계곡과 만나는 금강공원 둘레길
수심이 얕은 조그만 소(沼)가 길 옆에 펼쳐져 있다.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①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②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③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④

▲  계곡을 막아서 다진 금강공원 북쪽 연못

금강공원 둘레길을 이 정도 거닐고 임진동래의총을 보고자 동쪽으로 내려갔다. 부산민속예술
관 옆을 지나 남쪽으로 빠지면 태극 문신을 지닌 기와집 문(외삼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들어
서면 그 길의 막다른 곳에 금강공원의 유일한 사적(史蹟)인 임진동래의총이 있다.



 

♠  금강공원의 문화유산들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  임진동래의총 정문인 외삼문(外三門)

외삼문은 오른쪽 문만 반 정도 열려 있었다. 태극마크가 요동치는 가운데 문과 왼쪽 문은 제
향이 있는 날에만 주로 열리므로 평소에는 굳게 입을 봉하고 있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20기의 늙은 비석들이 1열로 늘어서 조촐하게 비석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들 비석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들로 동래 시가지 정비로 이곳으로 강제 집합된 것
인데, 대부분 동래부사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이다.
지붕돌을 지닌 비석과 대머리처럼 허전한 비석, 푸른 피부의 비석까지 부산 인구만큼이나 다
양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저들 중 진정으로 선정비(불망비)를 받을 자격이 되는 목민관
(牧民官)이 얼마나 있을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비석들에게 묻고 싶다. 아마도 적지 않은 비석
들이 그와 상관없이 지어져 외람되게 선정비를 칭하고 있을 것이다.

▲  외삼문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비석들 (모두 20기임)

▲  임진동래의총으로 인도하는 길 ▲
외삼문에서 내삼문 구간 길바닥에는 박석이 꼼꼼히 입혀져 있다. 무덤 주위로
소나무가 삼삼하여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하며, 길 왼쪽
담장 너머는 금정사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임진동래의총 내삼문(內三門)
내삼문도 오른쪽 문만 반 정도 열려있다.

▲  임진동래의총 충혼각(忠魂閣)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동래의총이 이곳에 안착했던 1974년에
지어졌다. 충혼각 바로 뒤쪽 높은 곳에 임진동래의총이 있으며, 보통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무덤에 예를 표하고 왼쪽 계단으로 내려오면 된다.

▲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 부산 지방기념물 13호

임진동래의총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동래 사람들이 안
장되어 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진(釜山鎭)을 점령한 왜군은 동래부의 중심인 동래성을 공
격했는데, 성을 지키는 유리한 입장임에도 왜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 앞에 금방 털리고 만
다.
이때 전사하거나 살해된 동래성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은 대부분 남문 해자(垓子)와 그 부근에
버려졌는데,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동래읍성을 수축했을
때 옛 남문터에서 적지 않은 유골과 포환(砲丸),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하여 그 시신을 거두
어 삼성대(三姓臺) 서쪽 구릉지(내성중학교 부근)에 6개의 무덤을 만들어 안장하고 '임진전망
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란 비석을 세웠다. 그것이 이 무덤의 첫 이름이다.

조선 조정에서 제사 비용을 위해 제전(祭田)을 내리고 동래향교에 제사를 맡겨 매년 한가위에
제를 지내게 했으며, 순절일(4월 15일)에는 관에서 장사(壯士)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왜정은 토지개간을 이유로 무덤을 영보단(永報壇, 복천박물관 자리) 부근으로 강제 이장시켰
는데, 이후 비석도 그곳으로 추방시켰다. 그러다가 1974년 복천동 개발로 다시 짐을 싸고 지
금의 자리에 안착했으며, 그때 '임진동래의총'으로 이름을 갈았다. 즉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
서 순절한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이란 뜻으로 여기서 '총(塚)'이란 주인을 모르는 무덤에 붙
이는 이름이다.
제향은 동래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5일에 무덤 밑에 있는 충혼각에서 지내고 있으며, 동래구
청에서 직접 주관하고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임진동래의총

임진동래의총과 충혼각은 동래읍성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정에 의해 제자리를 떠났
던 망미루와 독진대아문, 이섭교비 등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쁨을 누렸지만 임진동래의
총은 제자리에 이미 건물이 들어찬 상태이다. 그렇다고 그 부근으로 옮기자니 무덤의 덩치도
크고 딸린 식솔(충혼각, 외삼문, 내삼문, 돌담)도 많아 그들을 수용할 자리가 여의치 않다.
하여 무덤만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곳에 눌러 살고 있다. 허나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이곳도 자리가 괜찮아 계속 머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무덤 앞에는 제물을 올릴 수 있는 상석(床石) 1기가 누워 있으며, 무덤 밑도리에는 호석을 둘
렀는데, 무덤 정면 밑에는 제를 지내는 충혼각이 있고, 뒤쪽에는 담장을 둘러 성역의 경계를
구분 지었다. 이 담장은 외삼문에서 임진동래의총까지 빙 둘러져 있다.

* 임진동래의총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산 17-7


▲  충혼각 옆구리에 있는 '임진전망유해지총' 비석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세운 것으로 비문은 그가 작성했다. 비석 높이는 103cm,
너비 45cm로 앞면에는 '임진전망유해지총' 8자를, 뒷면에는 10행 분량으로
무덤의 내력을 기록했다.

▲  금정사 보제루(金井寺 普濟樓)

임진동래의총을 둘러보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금정사로 넘어갔다. 비록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서로를 이어주는 문이 닫혀져 있어 외삼문으로 나가 보제루로 빙 돌아가야 된다.

금정사 자리는 원래 동래부 사형장으로 죄인들의 목을 가차없이 썰었던 으시시한 곳이다. 바
로 그 현장에 1954년 승려 금우가 그 원혼을 달랜다며 인적도 거의 없던 이곳에 절을 세웠다.
석주가 중건하여 선학원(禪學院)에 등록했으며, 현재 대웅전과 보제루, 칠성각, 요사 등 5동
정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이 있는데 바로 그를 보고자 간만에 금정사에 발을 들였다.

* 금정사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282 (우장춘로 157-59 ☎ 051-555-1208)


▲  소나무숲에 감싸인 고적한 금정사 경내 (정면 건물이 대웅전)

▲  보제루 부근에 자리한 5층석탑

▲  대웅전 옆구리에 있는 칠성각(七星閣)


▲  대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15호

금정사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멀리 전북 완주군(完州郡)에서 넘어온 것
이다.
1677년 혜희(慧熙)를 중심으로 한 7명이 제작하여 고산현(완주군 북부) 대둔산(大芚山) 용문
사(龍門寺)에 봉안했던 것으로 그 절이 사라지자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곳에 안착했다. 좌우
에 조그만 협시보살(夾侍菩薩)은 그의 허전한 옆구리를 채워주고자 근래 붙여놓은 것으로 서
로간의 덩치가 너무 차이가 나 마치 아비와 어린 자식들이 나란히 앉아 가족 사진을 찍는 것
같다.

머리는 나발(꼽슬)로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으며, 신체에 비해 머리와 얼
굴이 지나치게 크다. 고개는 앞으로 조금 내밀어 밑을 굽어보는 모습인데, 이는 조선 후기 불
상에서 많이 나타난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정면 밑을 바라보고 있으며,
코와 붉은 입술은 조그맣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몸통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수인(手
印)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무릎의 너비가 상반신보다 넓어 안정감이 있으
며, 법의가 발까지 모두 가리고 있다.

이 불상이 속세의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그의 뱃속에서 복장유물(腹臟遺物)이 나왔기 때문이
다.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7종 8점의 경전류, 목판으로 찍어낸 수백 매의 다라니가 쏟아져 나
왔는데, 조성발원문을 통해 그의 탄생시기와 고향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대웅전의 주인 역할
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석가여래상 옆을 지키던 협시상으로 다른 협시상은 전주(全州) 일출암
에 있다고 한다.
후령통에서는 조성발원문 외에 그 시절 흔치 않았던 동으로 만든 오보병(五寶甁)이 나왔고 경
전류에서는 당시 훈민정음(訓民正音) 표기법이 남아있어 국문학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어준
다. 게다가 판각 연대도 나와 있어 조선시대 만다라 연구에도 좋은 단서를 제공해준다. 바로
옛 사람들의 그런 배려가 불상의 과거는 물론 그 시절의 여러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고
그것들이 이 아미타불을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이다.
복장유물은 절에서 따로 관리하고 있어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나 그들을 오랫동안 품었던 아미
타여래좌상은 이렇게 대웅전에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금정사를 둘러보니 벌써 17시가 넘었다. 어둠의 기운이 스르륵 내려와 밝은 기운을 잡아먹으
니 햇님도 그 등쌀에 떠밀려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한다. 비록 낮은 짧지만 그날 목적한 정처(
定處)를 싹 둘러보니 은근히 배가 부르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고, 당일 일정으로
콩 볶듯 내려왔기 때문에 다시 나의 제자리로 돌아가야 된다. 아무리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속
열차가 2시간대로 연결해준다고 하지만 여전히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온천장 부근에서 저녁으로 순대국밥을 섭취하고 지하철로 구포역(龜浦驛)으로 이동하여 서울
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고된 몸을 실었다. 부산으로 올 때는 고속열차(무료 쿠폰 사용)로
왔으나 제자리로 돌아갈 때는 느림의 미학도 느낄 겸,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빈약한 내 지갑
의 사정도 고려할 겸, 빨간색 무궁화호를 이용했다.
열차표를 판매하는 구포역 역무원이 은근히 고속열차를 권하며(무궁화호를 타면 지하철 막차
못탑니다. 이런 식으로) 나의 지갑을 자꾸 흥분시키려고 했지만, 빨리 가나 느리게 가나 서울
만 가면 되고 서울의 교통과 지리는 지구에서 본인을 능가할 사람이 없으므로 흔쾌히 거절했
다. <역무원의 지하철 막차 설교에 속으로 몇 번을 웃었는지 모름>

서울역까지는 5시간이 걸려 자정 너머에 도착했으며,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나의 제자
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문득 깨어보니 난 내 방에 있었다. 부산에 갔다온 것이 아리송할 정도
로 말이다. 그렇게 그날은 흩어져 나의 기억력까지 햇갈리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벌처럼 날라가 개미처럼 올라왔던 부산 연말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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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동묘지를 거닐다. 망우산~망우역사문화공원~구리둘레길 늦가을 나들이 (사색의길, 태허 유상규묘, 망우산3보루, 오세창묘, 방정환묘)

망우산, 망우역사문화공원 늦가을 나들이



' 망우산, 망우역사문화공원 늦가을 나들이 '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길 동쪽 구간
▲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길

송촌 지석영묘와 지성주묘

죽산 조봉암묘

▲  지석영 선생묘와 지성주묘

▲  죽산 조봉암 선생묘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동쪽 지붕인 아차산(峨嵯山) 산줄기
는 남쪽은 아차산(295.7m), 중간은 용마산(龍馬山, 348m), 북쪽은 망우산(忘憂山, 281m
)으로 이루어진 남북으로 길쭉한 산맥이다. <옛날에는 중랑구 북부에 자리한 봉화산(烽
火山)까지 아차산의 일원이었음>

아차산과 용마산은 나의 즐겨찾기 뫼로 아침부터 저녁(야간 등산)까지 고루고루 찾아가
안긴 횟수만 무려 300회가 넘는다. 허나 망우산은 이상하게도 몸과 마음이 그리 가지를
않아 찾은 횟수는 거의 손에 꼽는다. 그렇다고 망우산이 매력과 볼거리가 부실한가. 그
것도 전혀 아니다. 고구려가 남긴 보루 유적이 4곳(시루봉보루 포함)이 전하고 있으며,
망우산에 상당수를 차지하는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20세기 초/중기 유명 인물의 무덤이
많이 깃들여져 있다. 그것으로도 망우산의 매력은 차고 넘친다.
하여 그동안 소홀했던 망우산을 제대로 익히고 그곳의 미답처(未踏處)도 많이 정리하고
자 늦가을이 절정을 이루던 11월 한복판에 그의 품을 찾았다.


▲  망우저류조공원에서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인도하는 숲길



 

♠  망우역사문화공원(망우리묘지) 입문

▲  무덤들이 수북히 쌓인 망우저류조공원 동쪽 (망우역사문화공원)

이번 망우산 나들이는 망우리고개 서쪽에 자리한 망우저류조공원에서 시작했다. 그 공원에서
무덤들이 즐비한 동쪽 숲길을 4~5분 오르면 망우리고갯길(망우로)에서 올라온 2차선 길이 나
오는데, 그 길로 들어서 남쪽으로 조금 가면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가벽이 나온다.


▲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가벽 직전 (사색의길 북쪽 시작점)

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인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을 맡고 있는 망우산은 서울 중랑구와 경기
도 구리시(九里市)에 걸쳐있는 뒷동산 같은 뫼이다.
남북으로 길쭉한 그의 품에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이 넓게 둥지를 틀고 있는데, 그는 832,800㎡
에 덩치를 지닌 큰 공원이다. 지금은 달달한 뒷동산 공원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그의 정체는
이름만 들어도 염통이 후덜덜한 망우리공동묘지(망우리묘지)이다. 서울의 유일한 공동묘지로
망우리고개부터 망우산 남쪽 자락까지 7,400여 기의 무덤을 지니고 있는데, 망우리묘지가 생
겨난 사연과 내력은 대략 이렇다.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 서울 주변에는 경성부(京城府, 서울시)가 관리하는 이태원(梨泰院
) 공동묘지와 미아동(彌阿洞, 미아리) 공동묘지가 있었다. 왜정은 미아리묘지 과부하에 대비
하고 이태원묘지 일대에 주택을 조성하고자 1933년 2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땅인 망우산
일대 임야 75만 평을 확보했는데, 그중 52만 평에 묘역을 닦기로 하고 그해 5월 27일 문을 여
니 이것이 망우리묘지의 시작이다.

37,000여 기를 지닌 이태원묘지는 1935년부터 미아리와 망우리로 분산 이장되었는데, 연고자
가 있는 무덤은 망우리로, 연고자가 없는 28,000여 기는 은평구 신사동(新寺洞)으로 보내 화
장 처리하고 망우리묘지 북쪽에 합장하여 위령비를 세웠다. 그리고 1938년에는 신촌 노고산(
老姑山)에 있던 노고산공동묘지까지 이곳으로 옮기면서 망우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
었다.
왜정이 망우산에 공동묘지를 닦은 것은 서울 시민들의 무덤 수요를 해결하고자 함이지만 망우
리고개 동북쪽에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인 동구릉(東九陵)의 기운을 유린하려는 사악한 의
도도 짙게 깔려있었다.

1971년 8월 7일 건설교통부고시 제465호로 공원 결정고시가 떨어졌으며, 1973년 3월 분묘 한
계치인 28,500여 기(봉분 47,754기)에 이르자 그해 5월부터 무덤 쓰는 것을 금했다. 이후 이
장과 납골을 적극 장려해 지금은 7,400여 기가 남았으며, 지금도 방을 빼는 무덤들이 꾸준하
여 계속 빈 자리가 늘고 있다.

1977년 4월 도시계획시설 공원으로 지정되어 망우묘지공원(망우공원)으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98년 8월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망우리공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고 그해 공원 산책로
인 사색의길(4.7km)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다.
2005년 12월 27일 서울시고시 제2005-403호로 망우묘지공원 조성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2013
년에 망우리묘지를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2015년에서 2016년까지 망우리공원 인문학길
을 조성했으며, 2020년 7월에는 공원 관리권이 서울시에서 중랑구로 넘어갔다. 그리고 2022년
4월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을 새롭게 갈아 지금에 이른다.


▲  사색의길 북쪽 시작점(인물가벽)에서 바라본 망우산
가운데에 봉긋 솟은 뫼가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온몸으로 품고 있는
망우산 정상이다.


비록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과 성격이 세탁되었으나 공동묘지의 기능과 성격은 여전하다.
하여 산 도처에서 무덤들이 아주 쉽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숲이 매우 삼삼하여 무덤을 포
근히 감싸고 있으며, 사색의길 등 상큼한 숲길이 많고, 풍경도 고와서 거닐기에 아주 좋다.
그러다 보니 무덤은 시각과 마음에 부담이 되는 존재가 아닌 대자연의 수채화에 살짝 녹아든
존재처럼 다가와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두 귀가 쫑긋 반응을 보일 정도로 명성이 높은 20세기 초/중기 애국지사와 문학가, 정
치인들의 무덤이 30여 기가 전하고 있고, 그중 9기가 국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너른 대륙을 경영했던 고구려가 남긴 보루 유적 4곳(시루봉보루 포함)이 전하고 있어
오래된 볼거리도 넉넉하다.

또한 서울둘레길2코스가 사색의길 서쪽 길을 타고 남북으로 흘러가며, 중랑둘레길, 구리둘레
길, 용마산자락길 등 다양한 숲길이 앞다투어 닦여져 있다. 산세도 거의 완만하고 조망도 일
품이며, 볼거리도 풍부해 걷는 길이 썩 지루하지가 않다. 아니 지루할 틈도 주지 않는다.

* 망우역사문화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 02-2094-
  6800~6803)
* 망우역사문화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에 잠긴 사색의길 동쪽 구간

사색의길 북쪽 시작점에는 이곳에 묻힌 유명 인사를 소개한 '인물가벽'이 있다. 여기서 길은
동/서로 갈라지는데, 이들 길은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대표 숲길인 사색의길(망우순환로, 4.7km
)로 순환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삼한 숲에 묻힌 느긋한 숲길로 이름 그대로 온갖 사색에 잠
겨 거닐기에 아주 좋으며, 유명 인사들의 무덤 대부분이 사색의길 주변에 머물고 있어 이 길
을 중심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면 된다.
나는 망우산2/3보루를 첫 메뉴로 정해서 그곳으로 접근하기 쉬운 사색의길 동쪽 길로 들어섰
다.


▲  은행나무 밑을 지나는 사색의길 동쪽 구간

▲  그윽하게 펼쳐진 사색의길 동쪽 구간

▲  송촌 지석영(松村 池錫永)묘와 지성주(池成周)묘

사색의길 동쪽 구간으로 들어서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나면 망우산2/3보루를 알리는 이정표가
손짓을 한다. 그 길은 망우산2/3보루와 정상으로 이어지는 망우산 능선길로 산길 주변으로 무
덤들이 즐비한데, 안내문을 지닌 무덤이 툭하면 나타나 내 취향을 저격한다. 그중 처음 등장
한 무덤이 종두법으로 유명한 송촌 지석영선생 묘이다.

지석영(1855~1935)은 충주지씨로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 태원(太原)이다. 종두법(種痘
法)으로 워낙 유명하여 의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는 벼슬을 지냈던 문신(文臣)이었으며,
국문학자로도 크게 활동했던 팔방미인의 인물이다.

10대 시절에는 개화사상가인 강위(姜瑋) 밑에서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공부했으며, 그때 청
나라에서 건너온 서양의학 번역서를 많이 익혔는데, 특히 E. 제너가 발견한 우두접종법(牛痘
接種法)에 큰 관심을 가지며 천연두 박멸을 위한 기초를 닦는다.
1876년 수신사(修信使)의 수행원으로 왜열도에 간 박영선(朴永善)이 종두법을 배우고 '종두귀
감(種痘龜鑑)'이란 서적을 입수하여 돌아오자 그에게 이를 전수 받았으며, 1879년 10월 부산
으로 내려가 제생의원(濟生醫院) 원장인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에
게 종두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해 12월 말, 두묘(痘苗)와 종두침(種痘針)을 얻어 서울로 오다가 처가 고향인 충주
덕산면에 들려 2살 애기였던 처남에게 종두를 처음으로 실시해 성공을 했다. 하여 처가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도 접수해 그 동네는 천연두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1880년 조선 조정이 왜열도로 2차 수신사를 파견하자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따라갔으
며, 왜국 내무성 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인 기쿠치(菊池康庵)에게 두묘의 제조와
저장법, 독우(犢牛. 송아지)로부터의 채장법(採漿法), 독우사양법(犢牛飼養法) 등을 배우고
두묘까지 얻어 귀국했다.
귀국 후 왜국공사관 의사와 접촉하며 우두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 터지자 왜인(倭人)으로부터 의술을 배웠다는 죄로 체포령이 떨어져 급히 피신했다. 하지
만 그가 설치했던 종두장은 성난 군사들에게 파괴되고 말았다.
그해 10월 개화(開化)를 주장하는 국내외 인사들의 서적을 수집하여 간행하고 각 지방에서 추
천된 사람들에게 각종 문물을 익히게 할 것을 역설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83년 전라도암행
어사로 내려갔던 박영교(朴泳敎)의 요청으로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
두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충청우도암행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으로 공주에도 우두국을 설
치했다.


▲  정면에서 바라본 지석영(왼쪽)묘와 묘비, 그리고 지성주(오른쪽)묘

1883년 3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
으며, 1885년에 그동안 쌓은 경험을 토대로 이 땅 최초의 우두 관련 서적이자 서양의학서인 '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다.
1887년 개화당 인사들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신지도(薪智島, 전남 완도)로 유배되자 그곳에서
'중맥설(重麥說)'.'신학신설'을 저술했으며, 1892년 서울로 돌아와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
堂)을 설립하고 접종을 실시했다.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내무아문(內務衙門)
내에 위생국이 설치되자 종두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후 형조참의(刑曹參議)와 우부승지(右副承旨), 대구판관, 동래부사, 동래부관찰사 등을 역
임했고, 1897년 중추원(中樞院) 2등의관이 되었으나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이유로 이듬해 황해도 풍천으로 유배되었다.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이 되어 교육에 힘썼으며, 종두 및 전염병 예방과 관련된
각종 관제와 규칙을 공포하도록 힘썼다. 그리고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의원의육부(大
韓醫院醫育部)로 개편되자 교장직에서 물러나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스승 강위의 영향으로 한글(국문)에도 꽤 지식이 깊었다. 하여 국문학교(國文學校) 설립
에 크게 기여했으며, 의학교 학생 모집 때도 국문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했다. 1905년 '신정국
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하여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고 그 연구위원이 되었
으며, 1909년에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했다.
그리고 그해 4월 통감부(統監府)가 의학교육을 왜어(倭語)로 할 것을 요구하자 즉각 의견서를
제출하여 반대했으며, 국채보상연합회(國債報償聯合會) 부소장,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평의
원,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부회장 등으로 활발하게 애국 관련 사회활동을 벌였다. 하여 고
종(高宗)은 그의 공을 인정해 태극장(太極章)과 팔괘장(八卦章) 등을 수여했다.

1910년 8월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왜정을 등지며 집에서 독서 등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935
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작은 봉분과 1962년에 세운 묘비가 전부인 소박한 모습으로 그 옆에는 아들인 지
성주의 묘가 있는데, 비슷한 크기의 봉분과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을 지녔다.

지성주는 경성의전을 나와 내과의사로 활동했으며, 손자인 지홍창은 서울의대 출신으로 박정
희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냈다. 증손자 또한 내과를 경영해 한의사였던 지석영의 부친부터 무려
5대가 의사로 활동한 뼈대있는 의사 집안이다.


▲  망우산 능선길 (지석영 선생묘~망우산3보루 구간)

▲  망우산 역사의 전망대

지석영선생묘를 지나 망우산 능선길을 더듬으면 조망이 좋은 곳에 '역사의 전망대'란 전망대
가 마중을 한다.
아차산~용마산~망우산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닿아놓은 보루 유적과 백제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
는 아차산성(阿且山城), 영화사와 범굴사(대성암) 등의 늙은 절, 아차산3층석탑과 온달샘석탑
등의 소소한 늙은 존재들, 그리고 근현대 인물이 많이 묻힌 망우리묘지도 품고 있다. 하여 아
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오랫동안 켜켜히 쌓인 역사의 상징성을 기리고자 '역사의 전망대'란
근사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  역사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구리시 남부 지역과 한강, 강동구, 하남시, 남양주 와부읍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망우산 능선길 (망우산2,3보루)

▲  화가 이인성(李仁星) 묘

역사의 전망대를 지나면 이인성묘가 모습을 비춘다. 이인성(1912~1950)은 대구(大邱) 출신 화
가로 16세 때 방정환 등의 색동회가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나가 '촌락의 풍경'이란 그
림으로 특선에 뽑혀 화가로 진출했다.
왜열도 유학 시절이던 19살에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 '여름의 어느날'로 입선했으며, 23
살 때 조선미술박람회에서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37
년 제16회 선전에서 최연소 추천작가가 되었다.

1945년 이후 이화여중과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쳤으며, 1949년 가을 국전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나 1950년 38세의 한참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월간미술 1998년 2월호에는 그를 근대
유화가 1위로 꼽았으며, '경주의 산곡에서','가을 어느 날'을 각각 공동 1위와 7위로 선정해
그를 기렸다.

그의 무덤에는 호석이 둘러진 봉분과 상석, 검은 피부의 묘비, 후학들이 세운 '근대 화단의
귀재'라 쓰인 표석이 있어 외롭지는 않은 모습이다.


▲  애국지사 김봉성(金鳳性) 묘터

김봉성(1900~1943)은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조카사위(도산의 형인 안치호의 사위)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평북 선천군(宣川郡)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해 옥고를 치루었으며, 출옥 후
왜열도로 건너가 1922년 주오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넘어가 1927년 남캘
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를 수학했으며, 1930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해 활동했다.

1933년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가 되었고, 1934년 3월에 안치호의 딸인 안맥결(安脈潔, 1901~
1976)과 혼인하여 부부가 안창호가 세운 점진학교의 교사로 일했다. 1938년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1943년 12월 18일 불의의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딸 김자영과 정
말 허무하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도산과의 인연으로 그의 묘 오른쪽에 안장되었으며, 2005년에 이르러 늦게나마 건국포장을 추
서받았다. 그리고 2016년 4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면서 낙엽이 뒤덮힌 묘터와 비
석만 허전하게 남아 옛 무덤 자리를 지킨다.

김봉성의 부인인 안맥결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관으로 숙부인 도산의 뜻을 따라 평생 나라
를 위해 살았으며, 이 땅 최초의 여성경찰서장으로 위엄을 날리기도 했다.


▲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묘터와 묘비 (2022년 이전)

김봉성 묘터 옆에는 안창호의 묘비와 묘터가 있다. 그의 무덤 또한 이곳을 떠난 상태로 지금
은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 머물고 있다.

이름도 꽤 익은 안창호(1878~1938)는 평남 강서(江西) 출신으로 1894년 상경하여 구세학당에
서 공부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발전함에 따라 평양에
서 관서지부를 세우고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백성들에게 자각(自覺)을 호
소했다.
1899년 강서군 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황무지 개간사업도 병행해서 추진했으며,
1902년에 미대륙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
출되었다. 1905년에 한인친목회를 발전시킨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
으며, '상부상조 조국광복'을 협회의 목적으로 삼고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했다.
1907년 귀국하여 양기탁(梁起鐸), 안태국(安泰國), 이승훈(李昇蕓)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
民會)를 조직하여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세웠으며, 주요 도시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차려 다양한 방법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세워 청년운동을 전개했는데, 안중근(安重根) 의거에 관련
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용산헌병대에 수개월 수감되기도 헸으며, 1910년 통감부의 도산내
각(島山內閣) 조직 권유를 거절하고 거국가(去國歌)를 남긴 후, 청나라로 망명했다.
1911년 북만주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미대륙으로 넘어갔으
며,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중앙총회를 조직하
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흥사단 조직에 착수하여 무실역행(務實力行), 건전인격(健
全人格), 단결훈련, 국민개업(國民皆業) 등 정신개조를 목표로 한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
, 공립신문을 신한민보(新韓民報)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9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국민회(國民會) 대표를 파
견할 계획을 추진했으나 고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그를 초청하자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가 된다.
그는 연통제(聯通制) 실시, 독립신문 발간 등을 지도했으며, 그해 7월 2일에 임시사료편찬회
를 구성하고 그 총재가 되어 한일관계사료 전4권을 편찬 발행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후원회를 조직하여 외국 교포들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았으며, 1920년에
는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설치하고 '대(對)미국의원시찰단준비위원장'이 되어 북
경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그해 8월에는 지방선전총판(地方宣傳總瓣)이 되어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격문을 만주 등지
에 배포했으며, 임시정부의 세력 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국무위원을
인책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했다.
1921년 서울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평양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설립했으며, 나중
에 이들 단체를 통합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라 했다.

1923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그는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허나 임시정부에
서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가 대립하자 이에 염증을 느끼고 북만주에 독립운동기지
인 이상촌(理想村) 건립을 추진했으며, 1924년 남경(南京)에서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해
실력배양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군자금 확보를 위해 다시 미대륙으로 건너갔다가 1926년에 돌아와 만주 일대를 둘러보며 이상
촌 후보지를 물색하고 민족유일당 조직과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 발기 등을 추진했으나 여러
가지로 영 좋지 못한 일(독립군 간부 체포, 김좌진 암살, 만주사변 등)로 이상촌 건설은 실현
되지 못했다. 이후 상해로 돌아와 1930년 협동상조, 소비합작, 신용생산(信用生産) 등으로 생
활역량을 넓히고자 동인호조사(同人互助社)를 조직해 상해 지역 한인의 합심 협력을 계획했다.

1931년 1월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를 주재하여 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흥사단보(興士團報
)를 발행했다. 그리고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가 흥사단의 취지에 따라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우자 설립목적이 동일한 동인호조사와 합병하여 공평사(公平社)로 개칭하고, 그 이사장에
취임해 생활 역량을 증강시키고자 소비, 신용, 생산 등의 합작운동(合作運動)을 추진했다.

바로 그해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한국 사람과 중원대륙 애들간의 충돌이 생기자 병인의용
대(丙寅義勇隊)와 노병회(勞兵會), 교민단(僑民團), 학우회(學友會), 여자청년동맹, 애국부인
회, 청년동맹 등의 한인 단체들이 연합해 상해한인단체연합회(上海韓人團體聯合會)를 조직했
다. 이에 안창호는 흥사단 대표로 참가해 중원대륙 애들을 설득하여 그들과 함께 왜군 토벌에
주력했다.

1931년 10월 이시영(李始榮), 김사집(金思潗), 김철(金澈)과 함께 교민단 심판원(僑民團 審判
員)으로 활동했으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뚜껑이 뒤집힌
왜경은 프랑스 조계 경찰의 협조를 받아 독립운동가 검거를 실시했다.
도산은 이런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상해 하비로(霞飛路)에 있
는 이유필(李裕弼) 집을 찾았다가 잠복했던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며, 바로 서울로 압송되어 그
해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1935년 2월 대전감옥에서 출옥하여 왜경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지방을 돌며 계몽 강연을 하였
으며, 평남 대보산(大寶山)에 은거하여 이상촌 건설을 계획했으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관
계로 다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중병이 들어 그해 12월 보석으로 나왔다. 허나 건강은
악화되어 1938년 3월 세상을 떴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아들처럼 아끼던 유상규묘 옆에 무덤
을 썼다.

1962년 정부에서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으며, 1973년 강남구 한복판에 도산
공원을 닦으면서 도산의 무덤과 1955년에 세운 묘비는 그곳으로 이장되었다.
2005년 도산 묘 앞에 새 비석을 세우자 이전 비석을 서울시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도산기념
사업회가 협의하여 2016년 3월 1일 제자리인 이곳으로 가져왔으며, 2022년에 봉분을 새로 만
들어 지금은 가묘(假墓) 봉분과 지붕돌 묘비가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  태허 유상규(太虛 劉相奎)묘 - 국가 등록문화재 691-8호

유상규(1897~1936)는 평북 강계(江界) 출생이다. 경신중학를 거쳐 1916년 경성의전 1기로 입
학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 경성의전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넘어가 도산 안창호의 비서관으로 활동했으며, 이때 흥사단에 가입했다.
도산의 권고로 귀국하여 1925년에 경성의전에 복학, 1927년 졸업하여 경성의전 강사 및 부속
병원 외과의사로 근무했으며,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꾸준히 연사로 참석했다. 그리
고 잡지와 신문에 많은 글을 실어 민중의 의학적 계몽활동에 나섰고, 1930년에 조선의사협회
창설을 주도했다.
허나 1938년 중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안타깝게 단독에 감염되어 불과 39세의 나이로 병사
하고 만다.

그는 도산과 거의 부자(父子) 사이처럼 각별했는데, 자신의 아들 이름에 도산의 필명인 산옹
(山翁)의 '옹'을 넣어 '유옹섭'이라 했다. 태허의 사망 소식에 도산은 크게 통곡하면서 그의
장례를 직접 주관했으며, 2년 후 그의 무덤 오른쪽 위에 묻히면서 죽어서도 서로의 끈끈한 정
을 보였다. 그러다가 1973년 도산 묘가 강남구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서로 떨어지게 된다.

유옹섭은 부친 묘와 도산 묘를 같이 돌보았는데, 2007년 보훈처로부터 부친 묘의 국립현충원
이장 허가를 받았으나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위원장이던 김영식의 권유와 부친의 도산
선생에 대한 마음을 헤아려 이장하지 않고 도산 묘터 복원에 힘쓰다가 2014년 사망했다.

무덤은 봉분과 상석, 향로석, 지붕돌 묘비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으로 '망우 독립유공자 묘
역 - 유상규묘소'란 이름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태허 유상규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망우산3보루터

유상규묘를 지나면 망우산3보루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
대에서 늙은 보루터가 20곳 이상 발견되었고, 망우산에서 3개(시루봉보루를 포함하면 4개)가
나왔는데, 망우산 보루 3형제 중, 상태가 조금 나은 1보루만 국가 사적('아차산일대 보루군'
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455호로 지정됨)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2보루와 3보루는 상태가 너
무 우울하여 아직까지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망우산3보루는 망우리묘지를 닦는 과정에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그로 인해 원래 형태와 규
모를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보루터 남쪽 비탈면에 무너진 석축 일부가 있고, 돌을 다
듬은 기법과 주변에서 고구려 토기 조각과 민무늬토기 조각이 나와 고구려가 조성한 것은 확
실하다.
이처럼 중요한 유적이 무덤에 자리를 내주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고, 1973년 이후 무덤들이 적
지 않게 빠져나가면서 자연 공간으로 많이 풀렸으나 아직도 무덤이 여럿 있어 그들이 모두 옮
겨진 이후에나 제대로 된 조사를 받을 수 있다. 하여 빠르면 내 다음 세대에서나 가능할 것이
다.

▲  숲과 산길, 무덤에 묻혀버린 망우산3보루터

▲  망우산2보루터

망우산 정상부 북쪽에는 망우산2보루가 폐허의 상태로 살짝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망우리묘
지에게 철저히 희생되어 원래의 형태와 규모는 알 수가 없는 실정인데, 무덤 조성 때 쓰였던
보루터 석재와 주변에서 나온 고구려 토기 조각을 통해 고구려 보루로 여기고 있다.
보루터는 능선길과 그 주변에 희미하게 남아있는데, 무덤들이 적지 않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
어서 그들을 모두 옮기고 이곳을 싹 뒤집어야 이곳의 구체적인 정체를 캘 수 있을 것이다.


▲  망우전망대 (망우산 정상)

망우산2보루터 남쪽이 망우산의 정상(281m)이다. 이곳은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 지붕으로 2층
규모의 전망대가 닦여져 있는데, 여기서는 서울 동부와 북부 지역,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불암산, 구리시, 하남시, 강동구, 한강이 그윽하게 두 눈에 들어온다.

* 망우산 정상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  망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중랑구와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지역과 도봉산, 북한산(삼각산),
불암산, 봉화산 등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망막이 제대로 위로를 받는다.

▲  망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과 아차산 산줄기를 비롯해 강동구, 하남시, 남한산성, 검단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망우산 정상에 작게 박힌
국가기준점(삼각점)



 

♠  망우산 마무리 (사색의길 동쪽 구간)

▲  다시 안긴 사색의길 동쪽 구간

망우산 정상에서 남쪽 능선길을 7~8분 내려가면 동락정 쉼터가 나온다. 이곳은 망우산 능선길
과 사색의길 동쪽 구간. 용마산과 시루봉 방향 산길이 만나는 요충지로 포장길로 닦여진 길이
사색의길이다. 마음 같아서는 시루봉과 사색의길 서쪽 길까지 범위를 넓히고 싶었으나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하여 욕심을 버리고 아까 거닐다가 말았던 사색의길 동쪽 구간으로 빠져 북쪽
으로 내려갔다. (산은 도시보다 일찍 해가 짐)

사색의길 동쪽 구간에는 많은 무덤이 둥지를 틀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 안내문을 지닌 인사들
의 무덤이 섞여있다. 특히 만해 한용운과 조봉암, 오세창, 방정환 등 귀가 쫑긋 반응을 보일
정도로 유명한 인물도 많아 나들이의 재미를 더해준다. 하여 일몰까지 최대한 살피면서 망우
산의 여로(旅路)를 풍부히 살찌웠다.


▲  왜인 사이토 오토사쿠묘

망우리묘지에는 왜인들도 약간 자리를 축내고 있는데, 그중에는 사이토 오토사쿠(1866~1936)
란 자도 있다. 그는 이곳에 묻힌 왜인 중 가장 높은 벼슬을 했던 자로 왜정 칙임관(勅任官)
이상 관료 중 유일하게 이 땅에 묻힌 왜인이기도 하다.

사이토는 야마나시현 출신으로 동경대 임학과를 나와 농상무성 산림국에 취직, 대만과 야마나
시현을 거쳐 부해도 임정과장을 거쳤으며, 1909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농공상부 기사로 들
어왔다. 그 이듬해 왜정 초대 산림과장이 되었으며, 식목일을 만들고 미루나무와 아까시나무
를 이 땅에 도입했다.
1915년 영림창장을 거쳐 1918년에 퇴직했으나 조선에 계속 남아 사이토임업사무소를 세워 산
림위탁경영사업을 통해 녹화사업을 펼치며 배때기를 불렸다. 그에 대해서는 임업 근대화에 기
여했다는 평가와 산림 수탈에 앞장선 자라는 비난이 존재하나 후자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 진
리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왜정 중심으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36년에 사망했는데, 왜열도로 가지 않고 망우리묘지에 묻혔으며, 지금도 여전히 자리
를 축내고 있다.

이 무덤은 뚱뚱해 보이는 비석이 전부로 비석 밑에 화장된 유골을 묻은 전형적인 왜열도 무덤
스타일이다. 왜정 고위 관리의 무덤이라 해방 이후 적지 않게 고통을 당해 비석에 쓰인 글씨
까지 뜯겨져 나갔는데, 이는 왜정 시절 그들이 이 땅에 저지른 개짓거리에 대한 당연한 보복
이라 할 것이다.
비록 무덤 주인은 그 정도가 약했다고 하나 그건 사후에도 이 땅에 남은 그의 팔자이며, 비석
옆에는 꽃이 담긴 돌통(다른 인사의 무덤에도 모두 돌통이 있음)이 있는데, 이곳까지 온 기념
으로 돌통을 발로 뻥 넘어트리고 하얀 액체의 침을 여러 번 투하하며 자리를 떴다.


▲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巖)묘

이름도 꽤 익은 조봉암(1898~1959)은 강화도 출신이다. 1911년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청 고원(雇員)으로 근무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1년간 옥고의 고통
을 겪었다.
이후 출옥하여 YMCA 중학부에 입학했으며, 왜열도로 건너가 세이쏘꾸(正則) 영어학교에서 영
어를 익혔다. 중앙대학(中央大學) 정경학부에서 공부를 하다가 동경 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
주의~무정부주의계열의 흑도회(黑濤會)에 들어갔는데, 그로 인해 그의 한때 본업이었던 공산
주의에 푹 빠지게 된다.

흑도회가 해산되자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항일단체인 조선노동총동맹 문화부책을 맡아 노
동운동을 했다. 1922년 소련령 웨르흐네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합동회의에 국내파 대표로
참가하여 공산당 파벌 통일에 노력했으나 실패했으며, 이후 통합대회 결렬 사유를 모스크바
코민테른대회에 보고했다.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주의지도자 양성기관인 모스크바 동방지도자공산대학 단기과정
을 이수했으며, 그 뒤 귀국하여 신사상연구회, 북풍회 등 사회주의단체에서 활동했다. 이 두
단체는 화요회(火曜會)로 통합되었는데, 그 창설 주역으로 활동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여했으며, 조선공산당 1차당 창당을 주도했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을 수습 조직하고 5월에 만주로 넘어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
하고 그 책임비서가 되었으며,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해로 넘어가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의
조선대표도 겸직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으로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왜경에 의해 해체되자 제3차당인 ML당조직
에 참여했으나 국내당과 마찰을 빚어 지도 기능을 잃었다. 그 뒤 코민테른의 결정으로 1국1당
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들어갔다.

1932년 상해에서 왜국 영사경찰에 붙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왜정에게
요시찰인물로 찍혀 1945년까지 대외활동을 못했다. 하여 이때 고향에서 김조이(金祚伊)와 혼
인하여 인천에서 조용히 은거했다. 그러다가 1945년 2월 왜경에 검거되어 수감되었다가 광복
으로 풀려난다.

광복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 들어갔다가 1946년 사회주의계열인 민족전선에서 활동
했으며, 그해 5월 박헌영(朴憲永)의 공산주의노선을 공개서한을 보내 비판했다. 그리고 그 다
음 달(6월)에 '민족 전체의 자유생활보장'을 내걸고 노동계급의 독재, 자본계급의 전제를 다
같이 반대하는 중도통합노선을 주장하고는 조선공산당과 영원히 결별했다. 즉 공산당 노선에
서 자유민주주의로 갈아탄 것이다.
그해 8월부터 미군정의 좌우파합작을 지지하고 협력했으며, 1948년 5.30선거 때 인천에서 제
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직도 맡았다. 이승만 정권이 수립되자 초대 농
림부장관이 되었는데, 농지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허나 1949년 농림부장관 관사 수리비
를 농림부 예산으로 때운 것이 걸려서 그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임되었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나갔다가 이승만에게 밀려 낙선했으며, 1956년 11월 책임 있
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사회민주주의 정당
인 진보당(進步黨)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 박기출(朴己出)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자신은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또 낙선했다.
1957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58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 지역구 후보
를 내세워 원내에 진출했다. 허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그를 북한 간첩
으로 내몰아 1958년 1월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으며, 1959년 11월에 서둘러
처형시키고 말았다.

이후 1992년 10월 여야 국회의원 86명이 서명한 조봉암의 사면 복권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되
었으며, 2007년 9월 27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그가 연루된 진보당 사건이
이승만 정권의 반인권적 정치탄압이라 결론을 내리고, 국가에게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
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했다. 그리고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를 선고 받으면서 간첩으로 몰려 오랫동안 고통 받은 그의 명예가 다소 회복되었다.

그의 무덤은 호석이 높이 둘러진 봉분과 지붕돌 묘비, 망주석, 장명등, 상석, 혼유석을 지니
고 있으며, 묘비에는 특이하게도 글씨가 없어 오랫동안 그의 누명을 침묵의 소리로 항변하고
있다.


▲  죽산 조봉암의 어록을 머금은 견고한 돌덩어리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허냐'

▲  만해 한용운(
萬海 韓龍雲) 묘 - 국가 등록문화재 519호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남 홍성(洪城) 출생으로 본명은 유천(裕天, 어렸을 때 쓴 이름),
정옥(貞玉, 장성해서 쓴 이름)이며, 호는 만해이다.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4세에 혼인을 했으나 1896년 홀연히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
암(五歲庵)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절의 허드렛일을 돌보다가 출가해 승려가 되었으며,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홀로 여행하다가 1905년 다시 설악산에 들어와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
을 스승으로 삼아 득도에 나섰다. <'만해'란 이름은 스승 만화(萬化)가 지어줌>

1908년에는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1명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
립하고 왜열도를 시찰하고 왔으며,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3년에 귀국, 불교학원
선생이 되었다. 바로 그해에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
)에 입각해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1916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했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독립선
언서(獨立宣言書)에 앞장 서서 서명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다.
1926년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님의 침묵(沈默)'을 출간해 왜에 저항하는 저항문학에 앞장섰
으며, 1927년 신간회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이 되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해 청년운동을 강화했으
며, 같은 해에 여러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했다. 이후 많은 논
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37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
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이후 왜정에 배타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불교 개혁과 문학활
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겨우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쓸쓸히
눈을 감는다.

이곳에는 부인이 같이 묻혀있는데, 2기의 봉분과 지붕돌 묘비, 상석, 혼유석을 지니고 있으며
, 묘비에는 '부인유씨재우'라 쓰여 있으니 이는 부인이 만해 오른쪽에 묻혀있다는 뜻이다. 여
기서 오른쪽은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만해가 머리를 북으로 하고 누운 상태에서의 오른쪽을
뜻한다고 한다. ('구리 한용운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음)

* 만해 한용운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박희도(朴熙道)묘

박희도(1889~1951)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종교인, 교육가이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에서 활동하다가 3.1운동 때 기독교계 대표 영입과 학생들의 참여에 크게 힘을 썼고 독립선언
33인 중 최연소자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복역하고 최초의 사회주의계 잡지 '신생활'을 발간해 독립운동에 진력
했으나 러시아혁명 기념 필화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2년간 징역살이를 했다. 1928년 중앙보
육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지내는 등 기독교 교육계의 지도층으로 활동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자치론의 길을 걸었다.
1949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며, 육군정훈학교 출강 외에는 활
동을 하지 않다가 왜정 시절 옥고 휴유증으로 1951년에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봉분과 하얀 피부의 묘비, 상석, 혼유석을 지니고 있으며, 옆에 부인 묘가 있고
윗쪽에 부모 묘가 있다.
참고로 그의 동생인 박희성(1896~1937)은 연희전문(연세대) 출신으로 광복군 비행장교 1호로
미국에서 훈련을 받다가 안타깝게 순직했으며, 2010년 대전현충원에 안정되었다.


▲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묘 - 국가 등록문화재 691-1호

오세창(1864~1953)은 서화가이자 언론인으로 서울 출생이다. 부친 오경석(吳慶錫)은 청나라에
서 많은 서적을 가져와 개화에 앞장섰던 역관으로 오세창도 그런 부친의 영향으로 20세에 역
관이 되었다.
1888년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있으면서 이 땅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자를 겸
임했으며, 우정국 통신국장 등을 거쳐 1897년에 1년간 왜열도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
사로 일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1892년 왜열도로 넘어갔으며, 거기서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들
어가 의암 손병희의 참모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대표로 독
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1922년에 손병희가 죽고 천도교 내부 갈등이 심해지자 그는 왜정에
비타협적인 보수파 노선을 지켰다. 그리고 왜의 감시를 피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수시로 교류를
했다.
1945년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1946년 8월 15일에 민족대표로 왜국으로
부터 대한제국의 국세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1949년 백범 김구의 장의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서화가이자 서예가로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있는 노고산천골취장비과 방정환묘비,
설태회 묘비에 글씨를 남겼으며,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스승으로 그에게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주었다.

무덤은 호석을 두룬 봉분과 지붕돌 묘비, 상석을 지니고 있으며,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오
세창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위창 오세창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명온공주(明溫公主)와 김현근(金賢根)묘

망우역사문화공원에 깃든 7,400여 기의 무덤 중에서 제일 계급이 높은 무덤, 그리고 가장 늙
은 무덤은 무엇일까? 그 정답은 바로 명온공주(1810~1832)와 김현근(1810~1868)의 묘이다.

명온공주는 순조(純祖)의 딸이고 동갑내기 남편인 김현근은 안동김씨 집안으로 김상용(金尙容
)의 8대손이다. 김현근은 어려서부터 말과 글이 똑똑했다고 하는데, 순조가 명온공주의 남편
을 물색하고자 1824년에 12~15세 남성을 대상으로 간택령(揀擇令)을 내렸다. 그래서 그해 5월
22일 17명 후보 중에서 8명을 추렸고, 5월 25일에 다시 3명으로 줄였으며, 6월 2일 3번째 간
택에서 진사 김한순의 아들인 김현근이 최종 합격되어 동년위로 봉하고 그해 7월 17일 혼인을
했다.

명온공주는 일찍 병을 얻어 22세 때 사망하면
서 김현근은 20대의 한참 나이에 홀아비가 되
는 비운을 겪는다.
그는 청나라 사신 업무, 판의금부사(判義禁府
事) 등을 지내다가 58세에 사망했는데, 고종은
명온공주의 오라비인 효명세자<추존 익종(翼宗
)>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명온공
주와 김현근은 그의 고모와 고모부가 된다.
명온공주 묘는 합장분으로 이루어진 봉분 1기
와 지붕돌 묘비, 장명등, 상석을 지닌 조촐한
규모로 원래 종암동(鍾岩洞) 고려대 앞쪽에 있
었으나 1936년 이곳으로 이장되어 서민들 묘역
속에 들어앉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덤의 사
이즈가 많이 왜소해졌다.
6.25 시절 망우리고개 일대가 격전지가 되면서
무심한 총탄에 장명등과 묘표의 지붕돌이 깨지
고 심지어 장명등은 통구이가 되는 등 크게 고
통을 당했으며, 상석 위에 꼬부랑 알파벳이 쓰
여 있는데, 이는 이곳 전투에 참여했던 어느
철딱서니 없는 양이(洋夷) 군사가 남긴 낙서이
다.

▲  명온공주와 김현근 묘표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있는 묘비 중
가장 늙은 존재이다.

▲  상석에 흉하게 새겨진 영문 낙서
세상에 낙서할 곳이 없어서 남의 무덤
상석에다가 저런 짓을 했단 말인가.

▲  지붕돌이 시커먼 장명등
6.25 때 지붕돌이 총탄으로 불에 탔고
추녀 귀퉁이도 크게 깨졌다.


▲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묘 - 국가 등록문화재 691-3호

명온공주묘 북쪽에는 어린이날로 유명한 소파 방정환(1899~1931)의 묘가 있다. 그는 서울 당
주동(唐珠洞) 출신으로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으나 2년 뒤 중퇴했으며 1917년에 비밀
결사로서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천도교에 들어가 손병희의 3째 딸인 손용화와 혼인했으며,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신
청년','신여자','녹성' 등의 잡지 편집을 맡았다. 3.1운동 때는 손병희 밑에서 천도교 청년회
의 회원으로 3.1운동 준비에 나섰고, 오일철과 함께 집에서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배포하던
중 왜경에 붙잡혔으나 석방되었다.
3.1운동 이후 왜열도로 건너가 동양대학 문학과에 진학하여 아동문학을 중심으로 공부했으며,
1921년 여름방학 때 잠시 귀국하여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어린이에 대한 존대말쓰기 운동
을 벌였다. 그리고 1922년에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간행했다.

1923년에 어린이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그해 3월 20일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고
한승(高漢承)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날을 만들어 5월 1일을 그날로 삼았다.
1924년 전국 소년지도자 대회를 개최하여 어린이단체의 단합을 추진했으며, 잡지 '별건곤(別
乾坤)'과 '신여성'을 발간하고, 동화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회를 조
직했고, 1927년에 조선소년총연맹의 발족으로 소년운동의 방향이 달라지자 일선에서 은퇴하여
강연회와 동화대회, 라디오 방송 등에서 주로 활동했다.
1928년 10월 2일부터 1주간 서울에서 세계아동 미술전람회를 개최했으며, 1931년에 새로운 월
간잡지인 '혜성'을 발간했으나 지나친 과로로 그만 큰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만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벗들에게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네' 유언을 남겼고, '여보게 밖
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란 마지막 말을 남기며 32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지금 많이 사용하는 '어린이'란 이름은 소파가 만든 것으로 그가 활동하던 시절까지 어린 아
이를 지칭하는 좋은 표현의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어린이날을 제정해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큰 선물을 주었으며, 그 짧은 인생을 어린이를 위해 모두 쏟아부을 정도로 어린이에 대한 사
랑과 관심은 실로 대단했다. 이후 한참의 세월이 흐른 1990년,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고
자 늦게나마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소파의 유골은 홍제동(弘濟洞)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그곳에 있었으나 1936년 후배 최신복(崔
信福, 1906~1945) 등이 모금 운동에 나서 현 자리에 무덤을 마련해 안착했다. 최신복은 소파
와 함께 개벽사에서 어린이 잡지를 만든 인물로 수원에 집안 묘역이 있음에도 자신의 부모 무
덤을 소파 묘 밑 왼쪽에 썼으며, 자신도 부인과 함께 그 밑에 묻혀 죽어서도 그와의 인연을
끈끈히 이어가고 있다.

무덤은 흙 봉분 대신 특이하게 쑥돌을 표석처럼 세워 해관 오긍선(海觀 吳兢善) 묘와 더불어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개성파 무덤으로 꼽힌다. 비석 글씨는 위창 오세창이 썼으며, 표석 앞
에는 묘비와 상석을 두었는데, 다른 무덤에 비해 헌화된 꽃도 많은 편이라 그의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소파의 무덤은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방정환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
었음)

* 소파 방정환 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방정환묘를 둘러보니 햇님은 완전히 퇴근하고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져 세상은 검은색 도화지
가 되었다. 이것 외에도 유명 인사의 무덤을 여러 기 더 둘러보았으나 일몰 직전이라 사진이
나의 침침한 두 망막처럼 흐리멍텅하게 나와서 여기서는 생략했다.

이렇게 하여 망우산 늦가을 나들이는 나름 큰 성과를 거두며 기분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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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1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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