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권 사진,답사기/북한산(서울 구역)'에 해당되는 글 35건

  1. 2024.03.11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진관동 나들이 <경천군이해룡 사패지송금비, 여기소터,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영산군 이전묘역, 숙용심씨묘표>
  2. 2023.08.13 비봉능선 밑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승가사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3. 2022.06.02 아름다운 숲길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정릉동 북한산 경국사 (경국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경국사 공양밥)
  4. 2021.12.27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우이동 윗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도선사 (붙임바위, 우이동계곡)
  5. 2021.06.21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정릉계곡 나들이 (형제봉, 보현봉, 청수천약수) 2
  6. 2020.06.01 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2
  7. 2019.06.24 북한산둘레길2코스 순례길, 구천계곡 여름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선생묘, 가인 김병로묘, 단주 유림묘)
  8. 2019.05.22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9. 2018.09.15 둘레길의 정석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백화사, 마실길 느티나무, 화의군 이영묘역, 폭포동계곡)
  10. 2018.06.29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국제적인 선찰로 명성이 높은 북한산 화계사 ~~~ (화계사의 석가탄신일 야경)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진관동 나들이 <경천군이해룡 사패지송금비, 여기소터,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영산군 이전묘역, 숙용심씨묘표>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산책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숙용심씨묘표

▲  마실길 돌탑

▲  숙용심씨묘표

 



 

봄이 한참 익어가던 4월의 끝 무렵, 천하 도보길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는 북한
산둘레길을 찾았다.
이번 둘레길 나들이는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해 내시묘역길 진관동(津寬洞) 구간과 마실
길을 거쳐 은평뉴타운 제각말아파트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천하 탐방밀도 1위(1㎢당 5만
여 명)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북한산(삼각산) 탐방객의 절반 정도가 둘레길 방문자라고
하니 그 인기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진관동 구간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 입구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서울에서 제일 작은 초등학교인 북한산초교가 있다.
(거의 시골학교 분위기임)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인 내시묘역길은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공설묘지에서 진관동 방패교육대
에 이르는 3.5km의 산길이다. 북한천(北漢川)에 걸린 둘레교를 사이로 북쪽은 고양시, 남쪽은
서울 영역으로 평지와 야트막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주이씨 서흥군파묘역과 경천군 송
금비, 경주이씨묘역, 여기소터, 백화사, 중골마을 느티나무 등의 늙은 명소가 있다.

백화사 뒤쪽 산자락에 천하 최대의 내시묘역이었던 이사문 공파(李似文 公派)의 묘역이 있었
다. 바로 그 묘역 때문에 '내시묘역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그 묘역의 규모는 8,800평
으로 45기의 조선 중~후기 무덤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묘는 자헌대
부(資憲大夫)로 승전관(承傳官)을 지낸 김충영(金忠英)의 무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한
곳이 있구나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묘역은 2012년 4월 귀신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후손들이 묘역을 정리해 조경개발업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백화사까
지 길이 뚫리면서 땅값이 많이 오르자 팔았다고 전하며 후손들은 땅값으로 4.8억원을 만졌다
고 한다. 유골은 화장하여 납골당 등에 두었고 무덤에서 나온 유물 또한 후손들이 가져갔으나
무덤에 배치된 문인석(文人石)과 상석(床石) 등의 무거운 석물은 버려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얼마나 비밀리에 콩 볶듯이 했는지 동네 사람들과 백화사 승려들도 묘역이 없어진 것을 뒤늦
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 땅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녔던 그곳은 그렇게 사라져 이제는 한낱 전
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었다. 진작에 국가 사적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이런 일은 막
을 수 있었을 것인데(후손들이 문화재 등급 지정을 신청하거나 동의해야 가능함) 많은 이들의
그릇된 생각과 내시묘역에 대한 저평가, 그리고 철밥통들의 직무유기가 낳은 비극이다.
(현재는 거의 숲이 들어섬)

이제 내시묘역도 없는 내시묘역길이 되었으니 그 이름도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이는 갈비탕
에 갈비가 빠졌음에도 갈비탕을 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적당하
다고 본다. 하지만 북한산국립공원 철밥통들은 이름 변경도 귀찮다며 계속 수수방관하고 있다.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에서 경천군 송금비 구간)
숲이 워낙 삼삼하여 햇살도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긴다.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내시묘역길
산길 주변은 경주이씨 경천군파 문중 땅이라 양쪽에 철책과 나무난간을 둘러
외지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 서울시 지방기념물 35호


한산초교입구에서 내시묘역길을 따라 자연에 묻힌 민가를 여럿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들어
서게 된다. 마치 자연휴양림에 들어온 듯,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이로운
기운을 아낌없이 베풀어 속세에서 오염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그 1폭의 수채화와 같은
오솔길을 가다 보면 조그만 늙은 비석이 활짝 마중을 나온다. 그 비석이 바로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이다. (줄여서 '경천군 송금비', '경천군 송금물침비'라 불림)

경천군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서예가 겸 역관(譯官)으로 이름은 이해룡(李海龍)이다. 본관
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으로 해서체(楷書體)를 꽤 잘 썼다고 하며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한호<韓濩, 한석봉(韓石峯)>에 필적하는 명필이라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어(倭語)에 능숙해 1588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사자관(寫字官)으로
왜열도에 갔다 왔으며 많은 글씨를 그곳에 뿌리고 왔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역관으로 왜군과의 협상테이블에 참여해 화평교섭에 힘썼으며, 1595년 중
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고 1602년에는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가 되었다. 선조(宣祖)
는 왜군과의 교섭에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치하하며 그를 경천군에 봉했으며, 지금의 백화사
북쪽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광해군(光海君)은 1614년 사패지(賜牌地, 제왕으로부터 받은 땅) 적당한 곳에 송금비를 세워
주었는데, 비문에는 큼지막하게 '慶川君 賜牌定界內 松禁勿侵碑' 13자가 쓰여 있다. 그 내용
은 경천군이 하사받은 땅에서 소나무를 벌목하거나 무단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으로 뒷면에
는 '만력(萬曆) 42년 갑인(甲寅) 10월'이라 쓰여 있어 1614년 10월에 세웠음을 알려준다.

▲  조성시기가 쓰여진 송금비 뒷면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비석에 쓰인 송금(松禁)은 나라에서 필요한 목재를 확보하고자 소나무가 많은 산을 선정해 보
호하는 것으로 고려 때 시행되었다. 이곳 송금비는 조선시대 임업정책의 하나인 송금 정책을
보여주는 산증인으로 400년이 넘은 나이에도 무탈하게 잘 남아있으며 조선 임업사에서 꽤 중
요한 유적이자 천하에서 딱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가치가 무지하게 높다. 그래서 2014년 뒤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받게 되었다. 이런 비가 2기가 있다고 하나 현재는 이
곳만 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숨바꼭질 중)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철책 사이로 잠겨진 문이 보일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숲으로 살
짝 몸을 숨기면 이곳의 주인인 이해룡의 묘역을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묘역은 경주이씨 묘역이
라 불린다.
고색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풍기는 비석 주위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 3개가 마
련되어 있다. 워낙 숲속이고 평일에는 인적도 별로 없어 바람의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가 이곳
을 이루는 소리의 거의 전부이다. 북한산둘레길이 닦이면서 비로소 그 존재를 속세에 내보인
존재로 만약 둘레길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둘레길이 많
은 숨겨진 명소를 속세로 꺼내주었음)

* 경천군 송금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  경천군 송금비에서 백화사로 이어지는 내시묘역길
중간에 의상봉과 용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손을 내민다.

▲  고품격 숲길을 자랑하는 내시묘역길 (백화사 직전)

▲  중골마을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0호

경천군 송금비에서 7~8분 정도 남쪽으로 가면 백화사(白華寺) 옆구리이다. 여기서부터 전원(
田園) 분위기를 지닌 중골마을(여기소마을)이 펼쳐지는데, 마을로 들어서면 늙은 느티나무가
바로 마중을 나온다.

이 나무는 높이 19m, 둘레 4.7m의 큰 나무로 추정 나이는 210년 정도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165년) 이곳은 이사문 내시 집안이 살던 곳으로 그 후손이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오늘도 시원한 그늘을 베풀어 자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  여기소(汝其沼)터 표석

백화사입구 정류장에서 백화사로 가는 길목 초입에 여기소터 표석이 있다. 여기소는 소(못)의
이름으로 지금은 실체는 없고, 이름만 남아있는데,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북한산(삼
각산)의 산바람을 타며 아련히 전한다.

조선 숙종(肅宗)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크게 증축했을 때 지방 관리로 있다가 공사 현
장에 파견된 관리가 있었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기생은 그를 보고자 먼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으나 공사 관계자
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너무 열받은 나머지 이곳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그런 사연으로 '너의 그 사람이 잠긴 못'이란 뜻에서 '여기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공사가 끝날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섣부른 행동을 했을까? 옛말에도 급하
면 돌아가라고 했거늘, 그 속담만 얌전히 지켰으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인데 말이다. 아마
도 꽤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북한산캠핑장 주변)
내시묘역길도 그렇고 북한산둘레길은 민가와 농장, 경작지, 개인 토지를 이리저리
피해가느라 우리네 인생처럼 굴곡이 좀 크다.

▲  쭉쭉 뻗은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  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

▲  마실길 북쪽 시작점

내시묘역이 없는 내시묘역길은 여기서 마실길로 간판을 바꾼다. 마실길은 방패교육대에서 진
관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으로 완전 평지 수준이며 북한산둘레길 구간 중 가장 짧
고 편한 길로 살랑살랑 거닐기에 아주 좋다. 하여 마실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코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숲길, 삼천사계곡, 진관사계곡, 숙용심씨묘표, 영산
군묘역, 화의군묘역, 진관동 느티나무 4형제 등의 명소가 있어 볼거리도 풍년이며 진관사(津
寬寺)와 삼천사(三千寺)도 가까워 자연과 산책을 겯드린 답사 코스로 아주 좋다.


▲  마실길 진관천 벼랑길

마실길을 들어서면 진관천 벼랑에 닦여진 나무데크길이 나온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
처럼 길을 낸 것으로 동쪽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벼랑이, 서쪽은 진관천이 삼
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물을 모두 머금으며 창릉천으로 흘러간다.


▲  수풀로 무성한 진관천(津寬川)과 벼랑길(마실길)
예전에는 이곳도 피서의 성지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요즘은 진관사계곡과
삼천사계곡 상류로 많이 넘어갔다.


진관천 벼랑을 통과한 마실길은 삼천사입구에 이른다.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늙은 마애불(
磨崖佛)을 지닌 절로 그곳이 당기면 잠시 둘레길을 놓아두고 갔다 와도 상관없다. (20~30분
정도 걸림)
삼천사입구에서 삼천사계곡 구간에는 농장과 식당이 여럿 있는데 식당 중간을 지나 삼천사계
곡을 건너야 다음 코스로 진행이 된다. 평일에는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맛있는 냄새가 아주 진
동을 하여 그 유혹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  마실길 돌탑 구간

삼천사계곡을 건너면 'S'자로 살짝 구부러진 길이 나오고 길 왼편으로 비슷하게 생긴 돌탑 4
형제가 마중을 한다. 이들 돌탑은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수식용으로 만든 것으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둘레길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준다.


▲  마실길의 오랜 터줏대감,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1호

돌탑을 지나면 울창한 모습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두 눈을 단단히 동여맨다. 그는 동
화 속 푸른 언덕이나 초원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나무로 나이는 약 170년에 이른다.
자꾸만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높이 18m, 둘레 4.2m에 큰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위치는 진관동 132-20번지로 북한산둘레길이 생기기 이전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삼천사와 진관사를 수없이 들락거린 나도
둘레길의 안내로 2012년 이후가 되어서야 그를 만났으니 앞서 경천군 송금비와 더불어 둘레길
이 캐준 소중한 보물이다.


▲  은행나무숲길 옆에 닦여진 돌탑들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숲과 돌탑이 나란히 있으니 마치 신성한 어딘가로
인도당하는 기분이다. 저곳을 지나면 신선이나 어느 영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북한산둘레길에 아름다운 풍경이 꽤 있지만 그중에서 5곳을 뽑는다면 이곳 은행나무숲길과 그
옆에 자리한 170년 묵은 느티나무를 강하게 꼽고 싶다.
이곳은 마실길의 백미(白眉)와 같은 곳으로 수목원이나 휴양림의 그림 같은 숲속길이나 산책
로를 거니는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든다. 느티나무 주변을 곱게 손질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
어 마실의 기분을 진하게 들게 했으며,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로 조촐하게 은행나무숲길을
내어 전남 담양(潭陽)의 명물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에 못지 않은 맵시를 자랑한다.

은행나무숲길은 북한산둘레길이 지나는 명소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홀린 곳으로 집으로 훔쳐
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보고 또 보고 누리고 싶다. 이런 곳에서는 정말 옛 사람들처럼 시 1수
흉내내야 운치가 나거늘, 시적(詩的) 감각이 떨어지고 인간의 하찮은 말과 언어로 자연의 아
름다움을 감히 표현하고 희롱한다는 것도 조금은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닐까 싶어 그냥 탄성만
질러본다.



 

♠ 마실길 끝에서 만난 문화유산들

▲  영산군 이전 묘역(寧山君 李恮 墓域) - 서울 지방기념물 26호

은행나무숲에서 진관사계곡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진관사로 인도하는 도로(진관길)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은 진관사로 이어지며, 서쪽은 은평한옥마을로 마실길은 바로 서쪽에 있는 3거리
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산자락을 가만히 살펴보면 무덤들
이 보일 것인데 그곳이 바로 영산군 묘역이다.

묘역에는 영산군 내외와 그의 아들인 장흥군 이상(長興君 李祥), 손자 이경의(李鏡義), 증손
자 이종(李琮) 등 4대가 묻혀있는데, 가장 위쪽이 묘역의 터줏대감인 영산군의 무덤이고, 제
일 밑이 이종의 무덤이다. 그 묘역으로 가려면 서쪽 3거리에서 마실길을 따라가다가 동쪽(오
른쪽)을 살펴보면 그곳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그 길을 오르면 된다.

묘역의 주인인 영산군 이전(1490~1538)은 조선 9대 군주인 성종(成宗)의 13번째 아들로 숙용
심씨(淑容沈氏)의 소생이자 연산군(燕山君)과 중종의 이복 동생이다. 그는 문무에 매우 능했
다고 하며 말을 매우 잘탔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 시절의 어느 날, 그는 연산군, 진성대군(晋城大君, 후에 중종)과 함께 도성(
都城) 밖 금표(禁標) 구역으로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다. 사냥을 마친 연산군은 무엇을 시험
하고자 함인지 진성대군에게
'나는 동대문으로 들어갈테니, 너는 남대문(南大門)으로 들어가라. 만약 나보다 늦게 도착하
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야!!' 이랬다.
그 말을 들은 진성대군은 크게 쫄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자, 영산군이 진성대군에게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제 말이 전하(殿下, 연산군)께서 타신 말보다 훨씬 빠르니 제
가 대신 하겠습니다'
말하면서 진성대군을 따라가니 말이 갑자기 나는 듯이 도망쳐버렸고, 도
성에 이르니 조금 후에 연산군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영산군이 나서준 덕에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끈 진성대군은 1506년 박원종(朴元宗)
과 성희안(成希顔), 홍경주(洪景舟) 등이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
에 올랐다. 후대 사람들은
'영산군은 중종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말했다고 하며 중종 자신도 연산군 시절 그에게 받
은 신세로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중종 시절 영산군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1538년 48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시호는 충
희공(忠僖公)으로 부인은 2명이 있었는데, 전처는 금릉군부인 청송심씨(金陵郡夫人 靑松沈氏)
이며, 후처는 교성군부인 경주정씨(交城郡夫人 慶州鄭氏)이다.

묘역은 북쪽과 서쪽 지형이 다소 바뀌고 신도비가 묘역 앞으로 이전된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은평뉴타운 개발의 삽질이 막 시작되던 2006년에 강제 이전될 처지에 놓였으나 다
행히 제자리를 지켰다.
16~17세기 왕족 묘역의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묘비(묘표)와 문인석, 상석(床石)의
상당수는 그 시절 것이라 가치가 상당해 2007년 2월에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
다. 또한 인근에 자리한 화의군 묘역과 달리 사당(祠堂)은 따로 없다.

▲  충희공 영산군 신도비(神道碑)
근래 마련된 신도비로 원래는 여기서
북서쪽에 있었다.

▲  이종(李琮) 내외묘와 묘비(墓碑)
영산군의 증손자인 이종의 합장묘로 근래
만든 묘비와 망주석을 지니고 있다.


▲  영산군의 손자인 이경의(李鏡義) 묘

이종 묘 바로 위에는 그의 부모이자 영산군의 손자인 이경의 내외의 무덤이 있다. 그는 창원
황씨 부인과 합장(合葬)되어 있으며 후처인 곡산노씨(谷山盧氏)는 옆에 따로 작은 무덤을 만
들었는데, 이종의 무덤과 달리 문인석도 1쌍 갖추고 있다.

▲  이경의 묘와 묘비

▲  복스러운 모습의 문인석(文人石)


▲  영산군의 아들인 장흥군 이상(長興君 李祥)의 묘

이경의 묘 바로 윗쪽에는 그의 부모이자 영산군의 아들인 이상 묘가 있다. 봉긋하게 솟아있는
왼쪽 봉분(封墳)에는 장흥군 이상, 오른쪽 봉분에는 죽산안씨 부인이 잠들어 있으며, 묘비는
근래 새롭게 만들었지만 상석과 혼유석은 16세기 모습 그대로로 고색의 때가 짙다.


▲  조촐한 모습의 영산군 묘

묘역 제일 위쪽의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하여 아들과 손자들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영산군 내
외의 무덤은 2기로 이루어져 있다. 묘비를 갖춘 왼쪽 묘는 영산군과 교성군부인 경주정씨(交
城郡夫人 慶州鄭氏)의 합장묘이고, 오른쪽은 금릉군부인(金陵郡夫人) 청송심씨의 묘이다.


▲  장대한 세월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3기의 비석

영산군묘 한쪽에는 3기의 비석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오른쪽의 작은 비석
이 초창기의 영산군묘 묘표(墓表)로 1538년에 지어졌다. 그 묘표가 노쇠하자 이수를 갖춘 비
석을 새로 장만하니 그것이 가운데에 있는 검은 피부의 비석이며, 그것 역시 세월을 예민하게
타자 지붕돌 비석을 새로 마련했다. 허나 그마저 지금 무덤 앞에 있는 비석에게 자리를 내주
고 현재 자리로 밀려나 한참이나 선배들인 비석들과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마치 3대가 나란히 기념촬영에 임하는 듯한 모습으로 오른쪽에 작은 묘표가 할아버지, 가운데
비석이 그의 아들, 그리고 지붕돌 비석이 손자 같다.


▲  영산군 옛 묘표의 이수(螭首) 부분
물결무늬 구름 사이로 이무기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장면이 담겨져 있다.

▲  영산군묘를 지키는 문인석

영산군묘는 호석(護石)이 없는 조촐한 봉분 앞에 상석과 묘표를 두고 그 앞에 장명등(長明燈)
과 문인석 1쌍을 두었다.. 홀(忽)을 쥐어들고 서로를 연모하듯 바라보는 문인석은 무려 480년
이 넘는 기나긴 세월에도 표정 하나 고치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무덤을 지킨다.

왼쪽 문인석(왼쪽 문인석 사진) 측면에는 3개의 구멍이 있다. 이들은 6.25시절에 구파발 지역
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흔적으로 북한군이 쏜 것으로 보이는 총탄 3개가 그의 몸을 가격해
저렇게 치유하지 못할 상처를 안게 되었다. 겉으로야 표정관리하며 태연하게 서 있지만 얼마
나 아팠겠는가.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될 그 전쟁은 이 땅의 사람 뿐만 아니라 말을 못하
는 저들에게도 무수한 비극을 안겼다.

* 영산군 이전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39


▲  숙용심씨묘표 주변

진관동 느티나무 3거리에서 진관사입구 교차로 방면(서쪽)으로 몇 걸음 가면 오른쪽에 '셋이
서문학관'이란 2층 한옥이 있다. 거기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낮은 철책이 둘러진 야트
막한 동산이 있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이 손을 내민다. 그 손에 이끌려 그 길을 오르
면 그 정상에 숙용심씨묘표와 제단이 있다.

숙용심씨(淑容沈氏, 1465~1515)는 성종(成宗)의 여러 후궁 중의 하나로 세조(世祖) 즉위에 큰
공을 세웠던 원종공신(原從功臣) 심말동(沈末同)의 딸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영산군을
비롯한 이성군(利城君), 경순옹주(慶順翁主), 숙혜옹주(淑惠翁主)등 2남 2녀를 두었으며, 내
명부(內命婦)의 4품인 숙원(淑媛)까지 올랐다. 1515년에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중
에 3품인 '숙용(淑容)'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심씨의 묘역은 분명 서울 근교 어딘가에 마련되었으나 그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잠겨있다.
조선시대 왕족의 무덤 중 거의 흔치 않게 무덤 위치가 날라간 것이다. 하여 산사태나 홍수 등
의 천재지변으로 갑자기 사라지거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실전(失傳)된 것으로 보이며, 그의
무덤 앞에 세웠던 묘표(묘비) 역시 500년 가까이 행방이 묘연했다.

이후 한참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 1999년 6월, 부산일보 동경지사장이자 한일역사공동연구학회
장으로 있던 최성규(崔性圭)가 우연히 왜열도 동경(東京) 미나토구(區)에 있는 '다카하시 고
레키요(高橋是淸) 기념공원'에서 이 묘비를 발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산군과 이성군파 후손들은 즉각 '묘비환원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왜국 정부
와 동경시에 묘비 반환을 요구했고, 주일(主日) 한국문화원과 한국대사관에서도 적극 그들을
도왔다. 그렇게 1년의 협상 끝에 동경시가 반환에 협조하여 2000년 6월 16일 비석이 있는 공
원에서 후손들과 미나토구청장이 반환 기념행사를 열었고, 7월 3일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허나 이 비석이 언제 어떤 경로로 왜열도로 넘어갔는지, 어찌하여 동경의 조그만 공원에 있게
되었는지는 전혀 전하는 것이 없다. 그 진실은 오직 비석만이 알 것이나 그 역시 묵비권을 행
사하고 있어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심씨의 묘역을 파괴한 왜군이 가져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비석을 되찾은 영산군과 이성군 후손들은 영산군 묘역 맞은편 북한산(삼각산)이 잘바
라보이는 언덕에 자리를 닦아 사라진 묘역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낼 제단(祭壇)을 쌓고 그 위
에 이 묘비를 안착시켰다.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 등 제사에 필요한 시설을 세워 매년 제사를
지내면서 늘 주변을 손질하는 등 각별하게 관리를 하고 있다.

심씨의 무덤은 거의 영구적으로 사라졌고 묘표에도 그 위치가 나와있지 않다. 그 묘표마저도
다른 나라로 넘어가 자칫 공원의 미아로 그렇게 썩을 뻔했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발견되어 고
국으로 돌아와 아들의 묘역을 마주보고 있는 곳에 둥지를 틀었으니 심씨도 이제 그 한을 풀고
지하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을 것이다.

숙용심씨묘표는 이런 우울한 사연으로 망향의 묘비란 별명을 지니고 있는데, 그와 함께 2005
년 겨울, 동경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서 우리나라를 통해 고향인 함경북도로 돌아간 정문
부(鄭文孚) 장군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도 다시 되찾기까지 그 과정은 가히 한 편의 영
화와 같았다. 다른 나라로 빼돌려진 문화유산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많
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야 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귀중한 유물이라 하겠다.
이들은 그래도 고국으로 돌아와 거의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이
다. 그런 케이스는 아직 흔치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의 수많은 문화유산이 고국을 꿈
꾸며 타국살이를 전전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될 것이며 언젠가는 그들을 싹 되찾아와야 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국력을 증강시켜
돈으로 밀어부치거나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되찾아오는 것이지만 우리 국력에 그것도 쉽지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구의 평화와 고토(故土) 수복을 위해 왜열도와 중원대륙, 만주를 공격하게 된
다면 그곳에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 외에 그들의 문화유산과 보물도 싹 긁어왔으면 좋겠다. 더
불어 지구 정화를 위해 오랑캐들도 싹 청소 좀 하고 말이다.


▲  유리막에 감싸인 숙용심씨묘표(서울 지방기념물 25호)
비석이 작고 이곳이 바깥이라 도난의 위험이 늘 도사린다. 하여 두껍게 유리막을
씌워 그를 보호하고 있다. 비석 입장에서는 좀 답답하겠지만 그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가 없으니 이런 걸 두고 필요악이라 하는 모양이다.


숙용심씨묘표는 비신(碑身)과 머릿돌(이수)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 비신에는 해서(
楷書)로 '숙용심씨지묘(淑容沈氏之墓)'라 쓰여 있는데, 글씨의 크기가 깨알같이 작아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보일 것이다.
비석이 꽂힌 비좌(碑座)는 특이하게 2단으로 이루어져 통비(通碑)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2단으로 된 비좌는 이 땅에서 이 묘표가 거의 유일하다. 그러니 그의 가치와 의미는 꽤 남다
른 것이다. 비좌 밑에는 연꽃잎이, 위로는 복련(覆蓮)이 새겨져 있으며 그 측면에는 안상(眼
象)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비석 뒷부분에는 앞면과 달리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다.


▲  숙용심씨묘표 이수 앞부분

이수에는 화려해 보이는 무늬들이 잔뜩 새겨져 속세에서 오염된 두 눈을 호강시킨다. 그 무늬
는 꽃잎이나 소용돌이처럼 생긴 구름무늬로 그 무늬 사이로 뿔과 수염이 달린 이무기(반룡)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얼핏 보면 좀 복잡해 보여서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살펴보면 하나, 둘 보일 것이다.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이무기의 모습이.

비석의 머릿돌(이수)에 구름무늬가 나타난 것은 조선 초부터로 이곳처럼 구름무늬와 용이 함
께 새겨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니 그만의 매력을 가진 개성이 넘치는 비석이다. 이건 지방
기념물에 둘 것이 아니라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보물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흔치
않은 사연에 2단으로 된 비좌, 그리고 구름무늬와 용이 같이 새겨진 이수까지, 겉은 조그만
비석이지만 대충 넘기기에는 그의 존재는 너무나 크다.

* 숙용심씨묘표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26


▲  구름무늬로 가득해 침침한 두 눈을 빙빙 돌게 만드는 이수의 뒷부분
구름무늬가 내소사(來蘇寺) 대웅전의 꽃창살과 많이 닮았다.

▲  2001년에 세워진 숙용심씨묘비 환원기념비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아주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허나 거의 한자 투성이에 문단 간격도
아주 각박하여 읽기가 좀 고통스럽다. (오늘도 고통받는 나의 두 망막)

이렇게 하여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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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능선 밑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승가사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 북한산 승가사 5월 나들이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  승가사 경내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북한산(삼각산) 승가사를
찾았다.
간만에 승가사를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그곳에 깃든 늙은 마애불과 승가대사상이 문득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집에서 2시간대면 충분
히 접근이 가능하다.

햇님이 중천에 머물던 14시, 승가사 아랫 동네인 구기동(舊基洞)에 도착했다. 보통 승가
사에 갈 때는 구기동계곡을 경유했으나 이번에는 지름길인 비봉4길을 이용했는데 지름길
인 대신 경사가 좀 각박하다.
비봉4길은 러시아대사관저와 건덕빌라를 지나면서 숲길로 바뀌는데, 차량 접근을 위해서
길 포장을 해놓았으나 자연과 세월이 할퀴고 간 흔적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노면 상태
는 영 좋지가 못하다. 그런 길을 건덕빌라 기준으로 30~40분 정도 오르면 승가사 갈림길
이 나오면서 일주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승가사까지 걸어가기 귀찮거나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러시아대사관저 앞에서 출발하
는 승가사 셔틀 봉고를 타면 된다. (봉고 운행시간은 승가사에 문의 요망) 길 상태가 좋
지 않아 차가 다소 흔들리는 단점이 있으나 그것을 타면 승가사 경내 밑(호국보탑 밑)까
지 태워준다. (차비는 1천원 정도 받음)


▲  소나무가 무성한 승가산림초소 숲길 (비봉4길)



 

♠  승가사 입문

▲  청기와를 눌러쓴 승가사 일주문(一柱門)

승가사 갈림길에서 승가사로 인도하는 길은 2개인데, 그중 왼쪽(북쪽) 계단길을 오르면 승가
사의 내력과 가람 배치도가 담긴 안내문과 함께 청기와로 머리를 장식한 일주문이 마중을 한
다.
이 문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승가사 일대가 국립공원 건축제한구역이라 여러 번 강제 철
거를 당하기도 했다. 간신히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해 지금의 문을 마련했으며 그로 인해
북한산(삼각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절 일주문이 되었다. 평방(平枋)에는 원담(圓潭)
이 쓴 '三角山 僧伽寺'란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청운교 계단길

일주문을 지나면 경내까지 숨 가쁜 경사길의 연속이다. 중간인 호국보탑까지는 경사의 패기를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청운교(靑雲橋)란 계단길을 닦았는데, 계단이 장대하여 기를 질리게 한
다. 계단 앞 좌우에는 용조각이 입을 벌리며 혹시 모를 바람직하지 않은 기운을 경계하고 있
고, 계단 중간 오른쪽에는 승가사의 내력이 담긴 사적비가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 승가사의
새로운 명물인 호국보탑이 자리해 있다.

▲  청운교 표석

▲  삼각산 승가사 사적비(事蹟碑)


▲  청운교 계단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백악산) 산줄기와 서울 도심, 강남 지역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승가사의 자랑, 호국보탑(護國寶塔)

끝없이 펼쳐진 계단에 기가 질린 중생은 그 계단의 끝에 장대하게 자리한 호국보탑 앞에 다시
한번 주눅에 잠긴다.
인도나 동남아의 불탑(佛塔)처럼 생긴 호국보탑은 승가사가 예로부터 호국기도 도량임을 천하
에 내세우며 조국 통일을 염원하고 동시에 절의 위세도 강조할 겸 많은 돈을 들여서 장만했다.
그러다보니 호국보탑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가 세워짐으로서 탑이 없던 허
전함을 제대로 극복하게 되었다. (정식 이름은 '민족통일 호국보탑')

장엄한 모습의 이 탑은 절 밑의 바위와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지반을 다져 만든 것으로 1987
년에 짓기 시작해 1994년에 완성을 본 승가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탑의 높이는 무려 25m로
9층석탑이며, 탑신(塔身) 밑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조금 재현했다.
감실에는 석굴암처럼 본존불(本尊佛)과 11면(面) 관세음보살상, 10대 제자상을 돋음새김으로
배치하고 연꽃장식 덮개를 씌웠으며, 바깥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을 배치해 본존불과 탑을 지
키도록 했다. 사방으로 놓인 계단을 통해 감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으나 다소 좁으며,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된다.
탑 주위로는 문수동자상과 보현동자상,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빼곡히 배치했으며, 탑신 뱃
속에는 인도 정부에서 기증을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靑玉臥佛) 1좌, 나한(羅
漢)의 사리 2과, 패엽경(貝葉經)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철제구층탑 99기, 화엄경
(華嚴經) 9질을 봉안했다.

조그만 감실 불당까지 갖춘 매우 이형적(異型的)인 탑으로 지금이야 과시용이다 뭐다 해서 이
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100년 이후에는 한국미술사 20세기 석탑 부분에서 크게 이름을 날릴
유명 인사로 등극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미래의 문화유산에게 미리 눈도장을 찍어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온갖 조각들로 정신이 없는
호국보탑 감실

▲  호국보탑 감실에 봉안된
석가여래 본존불


호국보탑에서 경내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다. 왼쪽 계단길로 가는 길은 호국보탑을 만들면서
새롭게 닦은 길이고, 오른쪽에 조금 가파르게 형성된 길이 기존 길이다. 그럼 여기서 승가사
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의 주요 봉우리인 비봉(碑峰, 560m) 동쪽 430m 고지에 자리한 승가사는 756년
에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당나라 고종(高宗) 시절 중생들로부터 생불(生佛)
로 칭송을 받던 승가대사(僧伽大師)의 행적에 크게 감동을 먹고 그를 기리는 뜻에서 절 이름
을 승가사라 했는데, 동문선(東文選)에는 1107년에 이예(李預)가 쓴 중수기가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옛날 낭적사(狼跡寺) 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리를 정해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
리나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
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1024년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했고, 1090년에는 구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
)이 선종(宣宗)의 명을 받아 중수했다. 1099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숙종(肅
宗)과 함께 남경(南京, 서울 도심부로 여겨지나 확실하지 않음)을 찾아 인근 장의사(藏義寺)
와 승가사에 들렸는데, 이때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1422년 세종(世宗)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2개로 나누자 선종에 줄
을 섰으며, 그 시절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함허(涵虛)가 여기서 수행을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이곳까지 기
어들어온 청나라군에게 다시 파괴되고 만다. 이후 중건했으나 숙종(肅宗) 시절, 인현왕후(仁
顯王后) 복귀로 궁지에 몰린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이곳에 관련 죄인을 숨겼는데, 그것이 발
각되자 절은 다시 쑥대밭이 되었다.


▲  동정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승가사 남쪽 산줄기와 북악산(백악산) 너머로 서울 도심과 강남,
강동, 성남시 지역까지 흔쾌히 바라보인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임금은 1782년에 그렇게나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다. 바로 의빈성
씨(宜嬪成氏) 소생인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이다.
1784년 7월 불과 2살에 불과한 그를 세자로 봉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는 경축의 뜻을 보내며 세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자 미얀마에서 보낸 옥불(玉佛)을 특별히
선물로 보내주었다.
정조는 그 옥불의 거처를 두고 고심하다가 왕실의 원찰이던 승가사를 중건해 그곳에 두었다.
절 중건은 당시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선사(城月禪師)가 맡았으며, 옥불은 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불상이라 하여 장수불(長壽佛)이라 하였고, 그 불상이 담긴 건물은 장수전(
長壽殿)이라 불렸다.

장수전을 얼마나 화려하게 지었던지 몇백 척 높이의 층층대 위에 우뚝 솟아있으며, 단청은 너
무 화려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을 지경이었다. 내부에는 천정에 황금구슬을 아로새겼고 한
쌍의 침향등과 술 장식을 드리웠으며, 건륭제가 준 시가 적혀있었다. 그 밑 유리상자 안에 옥
불이 안치되어 있었다.
건물도 으리으리하고 게다가 보기 힘든 미얀마산 불상까지 머금고 있으니 이를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절은 그야말로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하였다. 일반 백성들부터 사대부, 왕족까
지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드니 절은 자연히 예전의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

허나 옥불의 바램과 달리 문효세자는 겨우 4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죽었으니 장수불
과 장수전의 존재 이유는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고, 이후 장수전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장수불 또한 행방이 묘연하니 아마도 정조가 화가 나서 슬쩍 없앤 모양이다. (조선의 청나라
에 대한 불편한 감정도 그들이 없어지는데 적지 않게 영향을 줬을 것임)

▲  승가사 승가굴(약사전)

▲  파괴된 비석의 아랫도리(비좌)

19세기 이후에는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후원을 받아 절을 중수했으며, 1941년에 도공(道空)이
중수를 했다. 이후 비구니 도원(道圓)이 절을 꾸렸으나 6.25 때 절이 싹 파괴되는 비운을 겪
는다.
1957년 도명(道明)이 산신각과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를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971년에는 상륜(相侖)이 주지로 부임, 마애여래좌상으로 오르는 108계단을 대리석으로 업그
레이드하고 절 진입로를 확장하는 한편, 전기를 가설했다.
1976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동정각에 봉안했고, 1994년에 호국보탑을 지어올려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각박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정신없이 건물을 닦았으며, 법
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과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
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큰 전쟁 때마다 파괴되는 고통을 겪으면서 겉으로 보이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말랐으나 구기
동 마애여래좌상과 석조승가대사좌상 등 국가 보물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성월선사의 탑과
탑비, 옛 석탑의 부재(部材)와 비좌 등이 남아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북한산(삼각산) 제일의 선원(禪院)을 칭하고 있으며, 경관이 빼어나
고 국보급 조망을 지니고 있어 예로부터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다. 조선 때는 서쪽의 진관사(
津寬寺), 남쪽의 삼막사(三幕寺), 동쪽의 불암사(佛巖寺)와 더불어 서울 근교의 명승 사찰로
꼽혔는데, 승가사는 그 북쪽으로 그들 가운데 단연 갑(甲)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많
은 문인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 고종(高宗)의 스승이던 유원순(兪
元淳)도 이곳에 안겨 다음의 걸쭉한 시를 남겼다.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 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구름도 능히 잡힐 듯한 높은 산중에 묻혀 있어 제아무리 무거운 번뇌라도 감히 따라오기 힘들
다. (번뇌는 절 밑에서 얌체처럼 기다리고 있음, 결국 해탈은 꿈임)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며,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해 공기도 청정하다. 게다가
서울 도심과도 가까워 멀리 갈 것도 없이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가
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와서 안기고 싶은 곳이다.

* 승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비봉4길 213, ☎ 02-379-2996)



 

♠  승가사 둘러보기 (대웅전 주변, 성월선사 승탑과 탑비)

▲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운 대웅전(大雄殿) 뜨락

동정각의 아랫도리를 들어서면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이다. 대웅전 뜨락을 중심으로 서쪽
에는 서래당, 동쪽에는 적묵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승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7년에 짓기 시작
하여 1980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좌우벽과 뒷쪽에는 부처의 생애를 머금은 전생도와 심우
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림 옆에 해석을 달아놓아 이해를 돕게 했다.

뜨락 서쪽에 자리한 서래당(西來堂)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86년 중창되
었다.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뜨락에 노출된 부분은 종무소(宗務所)와 주지실
로 쓰이며 호국대탑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목인 아랫층에는 공양간이 있다. 공양간은 장작으로
땐 밥과 국을 공양으로 제공하는데, 일요일과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에는 산꾼과 답사꾼도
공양이 가능하다. (절 사정으로 공양을 주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음)
서래당 맞은편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선방(禪房
)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85년에 중창되어 매년 100여 명의 비구니가 수행 안거(安居)를 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소조여래좌상 1구와 1966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

대웅전 내부는 황금색으로 개금(改金)된 목각탱(木刻幀)들로 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불단에
자리한 석가여래상은 꽤나 단련을 했는지 어깨가 쩍 벌어져 있으며, 두터운 얼굴은 다소 경직
된 표정을 머금고 있다. 그의 좌우로 그 흔한 협시(夾侍)보살은 없지만 대신 뒷쪽에는 호화로
운 금동후불탱을 배치해 그를 든든히 받쳐준다.
후불탱(後佛幀)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며
8대 보살과 아난(阿難), 가섭(迦葉)이 그를 에워싸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다. 붉은 지붕
의 닫집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으며, 극락조(極樂鳥)와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  대웅전 계단 우측에 누운 석조(石槽)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통이지만 첩첩한 산골이
라 물 사정이 너그럽지 못해 거의 항상 비워둔
다. 하여 물을 마시려면 꼭지를 틀어 바가지에
받아 마시면 된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전 뜨락과
그 끝에 자리한 동정각(動靜閣)


대웅전 맞은편에는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동정각이 마치 천상(天上) 세계의 누각처럼 높다
랗게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동정각은 2층 규모로 아래층은 경내와 속세를 이어주는 통로
이고, 윗층은 범종의 거처로 기존 범종각과는 다른 6각형 정자(亭子)식 건물이다.

동정각에 고이 간직된 범종은 1976년에 봉안된 것인데 그 종을 운반할 때 15명이 꼬박 매달려
무려 1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때는 차들이 감히 올라올 수도 없었던 산속이라 종 밑에 나무
토막을 깔고 밀어올리는 옛 방식으로 종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아침 4시와 저녁 6시가 되면 잠든 종을 살짝 깨우며 종소리를 속세로 흘려보내는데, 그 종소
리가 매우 은은하다.


▲  동정각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승가사 남쪽 산줄기, 북악산,
서울 도심과 강남, 강동 지역 등)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1년에 중창되었다. 석가3존상을 비롯하여
석가후불탱, 16나한탱, 신중탱 등이 들어있는데, 대웅전의 탱화들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모조리
금색을 입혀 등장인물이 다른 것 빼고는 거기서 거기 같고, 너무 찬란함에 치중한 나머지 거
부감과 식상함마저 적지 않게 들게 한다. (지나친 화려함은 오히려 소박함보다 못함) 이들 탱
화는 1987년에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조성했다.


▲  산신각(山神閣)

영산전 좌측 높은 벼랑 위에 산신의 거처인 산신각이 있다.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조촐한 건
물로 화재로 무너진 것을 1984년에 다시 지었는데, 그때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건물을 남향(
南向)으로 조정했다. 내부에는 1986년에 김광한/김광열 형제가 만든 산신탱이 있으며, 역시
금칠로 도배를 해놓았다. (불교에서 제일 좋아하는 색이 황금색이라고 함)


▲  산신과 호랑이, 동자 2명, 나무 등이 묘사된 산신탱

▲  철책 너머로 바라본 성월선사의 승탑(僧塔, 부도)과 탑비

영산전 동쪽은 통제구역으로 중생들의 발길을 막고 있는데, 그곳에 성월선사의 탑이 있어 살
짝 문을 열고 들어가보았다.

통제구역으로 들어서면 계곡이 나오는데, 그 건너에 푸른 철책이 쳐져 있고 바로 그 안에 성
월대사의 승탑과 비석이 마치 철창 안에 갇힌 양 고적하게 자리해 있다. 그곳을 가려면 철책
문을 지나야 되나 갑자기 새가슴이 되어 그곳까지는 가지 않고 계곡 너머에서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했다.
성월선사의 탑과 탑비는 1802년 8월에 조성된 것으로 비석에 '朝鮮國 正憲大夫 城月堂 碑銘竝
序(조선국 정헌대부 성월당 비명병서)','嘉慶 七年 壬戌 八月日立(가경 7년 임술 8월일입)'이
라 쓰여 있어 탑의 주인과 조성시기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승려임에도 정헌대부의 지위
를 받은 것이 이채로운데, 서울에 흔치 않은 19세기 승탑이고 조성 관련 내용을 머금은 비석
까지 지니고 있어 지방문화재의 자격은 충분해 보인다.

▲  명부전(冥府殿)

▲  명부전 지장탱

대웅전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약사전과 마애불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1단계 오
르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명부전이 마중을 한다.

대웅전과 약사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72년 착공
해 1975년에 완성을 보았다. 1년 정도면 능히 만들고도 남을 규모지만 궁색한 산중이라 공사
가 더뎌 3년이나 걸린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특이하게도 지장보살상 등의 독립적인 불상/보살상은 없고 지장보살과 명부(冥
府, 저승)의 식구를 싹 몰아 넣은 지장탱이 전부이다. 이 탱화는 1983년에 김원각, 김석담이
조성한 것으로 다른 건물의 탱화와 마찬가지로 금칠로 도배를 했다. 다만 다른 것은 지장보살
의 머리만 푸른 색을 입혀 약간의 차별화를 두었다.


▲  약사전 앞에 놓인 옛 석탑의 흔적

명부전에서 1단계 더 올라서면 승가굴(약사전)이 나온다. 약사전 앞에는 늙은 석탑의 흔적이
우수에 잠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과 탑신이 한 덩이씩만 남았다.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이 땅에 흔한 3층석탑이 아닐까 싶은데, 임
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같이 비극을 맞았을 것이다.
이후 일부만 남은 채, 버려진 것을 비좌와 함께 수습하여 약사전 앞에 두었으며, 탑의 사라진
부분이 많아서 복원까진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승가사의 옛 유물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좌(碑座)

향로각 앞에는 비석을 받치던 비좌가 초췌하게 누워있다. 고색의 때로 가득한 이 비좌는 화강
암으로 다진 것으로 3단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넓직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무슨 비석의 아랫도리인지는 북한산(삼각산)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승가사에 고려 중기 승
려인 탄연(坦然, 1070~1159)이 쓴 승가굴 중수비(重修碑)가 있었다고 하니 그 비석의 아랫도
리가 아닐까 의심된다.
조선 중기 이후 전쟁으로 여러 번 절이 파괴되면서 비석 윗도리가 몽땅 날라가 그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비좌 자신도 그때의 충격으로 기억조차 상실했다.

사라진 비신과 이수(螭首)는 경내와 그 주변을 싹 뒤집으면 일부라도 나올 듯 싶은데, 그 작
업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  승가사의 오랜 보물들 (승가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자연산 석굴인 승가굴에 터를 닦은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큰 바위 밑도리에 있는 자연산 석굴이다. 승가사를 세웠다는 수태가 바위를 뚫어 굴
을 만들고 돌을 쪼아 승가대사상을 새겼다는 창건 설화가 깃든 늙은 굴로 승가굴(僧伽窟)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 중기에는 탄연이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정체가 아리송한 승가굴 중수비를 남겼으며, 조선
세종 때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쾌유를 빈 인연으로 약사전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1960년대 이후 석굴을 크게 손질하여 안과 바깥에 돌로 벽을 쌓고, 승가대사상의 불단과 연화
대를 만들었으며, 그 앞에 기도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등(引燈)을 대사상 좌측에 배치해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석굴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굴의 본능상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
는 따스하다.


▲  석조승가대사좌상(石造僧伽大師坐像) - 보물 1000호

약사전에는 승가대사상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역할과 직무를 대
신 하고 있는 그는 인도 출신 승려로 당나라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의 덕이 대단했던지 관세
음보살의 화신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인기가 신라까지 전해져 승가사를 세운 수
태가 그의 상까지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이 석상은 전설과 달리 신라 후기가 아닌 1024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 등이 조각을 했다. 조성 관련 내용은 광배 뒤쪽에 새겨져 있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확실
한 조각품으로 당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으며, 석상 높이는 76cm, 광배 높이 130cm로 호분(
胡粉)을 입혀 몸 전체가 하얀 천사처럼 되었으나 근래 호분을 벗겨내어 순백(純白)에서 벗어
났다.


▲  인등의 강렬한 빛을 즐기고 있는 석조승가대사좌상
(호분을 벗기기 전, 2012년 어느 날)


승가대사상은 하얀 피부의 석상으로 나이가 어느 정도 든 후에 호분을 입힌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어 지장보살의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손자나 손녀를 맞는 할머니와
같이 포근하고도 정이 넘치는 인상이라 그에게 다가서면 '세상 살기 힘들지?' 그러면서 손으
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려줄 것 같다.

그의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살짝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
고 입술은 무척 붉으며, 볼살이 많고 광대뼈가 나왔다. 두 귀는 두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
고, 몸에 걸친 옷은 목 부분을 빼고는 노출된 부분이 없는데 부처나 보살의 복장과 비슷하다.
그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연꽃 대좌는 근래 만들어진 것으로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의 4사자3층석탑 석상과도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상
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고려 초에 유행했던 철불(鐵佛)과도 비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의 뒷쪽에 달린 광배(光背)도 꽤나 명품이다. 커다란 배의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거신광배
(舟形擧身光背)로 신광(身光)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머리 뒤쪽인 두광(頭光)은 신광
과 일부 교집합을 이루면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을 무늬로 두르
고 그 바깥쪽을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로 치장했다. 또한 광배 외곽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정
교하고 실감나게 새겨 광배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천하에 흔치 않은 늙은 승려상으로 1,000년의 지긋한 나이와 오랜 세월 어두컴컴한 석굴에서
광합성 작용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건강과 피부만큼은 젊은 불상이나 석상 못지
않게 양호하여 방부제 외모를 자랑한다. 조선 중기와 현대에 일어난 3차례에 큰 전란으로 절
은 사라지기 바뻤지만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온전하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고 이렇게 승가사
의 늙은 보물이지 꿀단지로 변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석상은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2호였으나 나중에 재평가를 받아 국가 보물로 승진
되었다. 그런데 지정 번호가 우연히도 딱 1,000호이다. 매우 흔한 숫자이지만 결코 쉽게 꿰찰
수 없는 번호를 차지한 것이다. 외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숫자이니 이런 우연이 참 어디에 있을까 싶다.


▲  가양심신(可養心神) 바위글씨

승가굴을 지나면 향로각(香爐閣)이란 돌로 다진 동그란 건물이 있다. 그 직전에 바위가 누워
있는데 그의 피부에 마치 뱀이 기어간 흔적 같은 꼬부랑 바위글씨가 깃들여져 있다.
그는 '가양심신' 바위글씨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비봉에 있는 진흥왕순수비를 손수 탁본하
고 승가사에 잠시 들렸을 때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 4자는 마음을 수양하기 좋은 길지라는
뜻으로 승가사가 정신 수양과 독서를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란 의미로 그렇게 한 글자 남기고
간 모양이다.


▲  마애불로 인도하는 108계단의 위엄 ①

향로각을 지나면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이 나타나 중생들을 다시금 주눅을 들게 하는데, 그 계
단은 불교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계단으로 그 계단의 끝에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연화교(蓮花橋)란 약간 볼록 튀어나온 조그만 다리를 건너 108계단에 임하면 되는데, 그렇게
까지 각박한 경사도는 아니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속세의 부질없는 삶처럼 서두르지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천천히 한 계단씩 임하면 까마득하게 보이던 마애불이 마치 해
가 떠오르듯 크고 웅장하게 솟아오르며, 그 계단의 끝에 이르면 마애불의 거대한 위엄이 다시
한번 눈과 마음을 놀라게 만든다.


▲  마애불로 인도하는 108계단의 위엄 ②

▲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보물 215호

승가사 북쪽에 자리한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하 마애불)은 경내와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비봉능선의 일원인 사모바위의 바로 남쪽
밑이다.
승가사에서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나 지정 명칭은 '승가사 마애여래
좌상'이 아닌 지역 이름을 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다. 보통은 그 불상을 소유하거나 관리
하는 절의 이름을 앞에 붙이기 마련인데, 경내와 약간 거리가 있고 승가사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지역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문화재 지정 명칭은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
애여래좌상')

이 마애불은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왜정(倭政) 시절에 왜열도 학
자들이 고려 때 것이라며 지들 멋대로 평가를 했는데, 월북미술가인 김용준이 1947년 12월 14
일자 경향신문 칼럼에
'눈썹과 눈으로부터 코 입술이 모두 예쁘고 시원스런 표현이라든지 신라 석조의 특색인 턱 아
래 한 곡선을 그어 아래턱을 만든 솜씨며, 얼굴 모양의 턱이 꽉 받치고 원만후덕하고 복스러
운 맛이라든지 의복과 가부좌의 자세며 8각형으로 된 천개(天蓋)를 반쯤 돌을 파고 넣은 것과
연좌(蓮座)의 유려한 선'
등을 들어 신라 것이라 평가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인 삼천사지(三千寺址) 마애여래입상도 신라 말~고려 초기 것으
로 여겨지고 있어 이 둘은 서로 나이가 비슷하다.

직각을 이루며 솟은 거대한 바위의 남쪽 피부에 얇게 홈을 파고 돋음새김으로 도드라지게 결
가부좌로 앉은 불상을 새겼는데, 그의 건강을 위해 전실(前室, 보호각)을 만들고 머리 위에 8
각의 머릿돌(천개)을 끼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러다보니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피부도 얼굴
일부를 빼고는 하얀 편이다.
허나 그렇다고 그의 상태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1968년 김신조의 공비패거리가 서울에 침
투했을 때, 이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게 총상을 입었던 것이다. 하여 마애불의 생애
최초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갑옷과 같던 보호각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사라지고 보호각을 끼던 구멍 4개
만 윗쪽과 중간에 아련히 남아있다. 아마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자연재
해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  옆에서 바라본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양쪽에 보이는 구멍 4개는 보호각의 흔적들)


마애불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의 승가대사상과 달리 조금 경직되고 근엄한 표정 같다. 이마 중
간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진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러져 있으며, 두 눈은 감겨 있어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입술은 두꺼우며,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는지
빨간 기운이 조금 남아있다.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볼살이 좀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껍게 솟아 있는데, 바로 위에 머릿돌을 끼워 넣어 앞
으로 크게 돌출시켜 그의 모자로 삼았다. 모자가 큰 덕분에 얼굴에는 세월이 훈장처럼 달아준
검은 여드름이 여럿 있는 것 외에는 멀쩡하며 피부도 하얗다. 그리고 모자 밑부분에는 연꽃무
늬가 새겨져 있다.
몸통과 머리를 잇고 있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어깨는 꽤나 단련을 했는지 당당
하고 듬직한 모습이다.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 어깨와 가슴, 젖꼭지를 속시
원히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 스타일을 하고 있는
데, 우견편단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단연 으뜸으로 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난다.
몸에 걸친 옷은 얇은 편으로 왼쪽 어깨와 배, 두 다리를 가리고 있으며, 왼팔에 묘사된 옷주
름은 세로로 그어져 있어 기하학적인 추상성(抽象性)을 드러내고 있다.


▲  마애불의 가슴과 아랫부분, 그리고 연꽃이 활짝 열린 연화대

가슴을 비롯한 상반신은 아주 묵직한 모습으로 거대한 마애불의 위엄을 더욱 드높인다. 허리
는 밑부분이 쏙 들어가 괜찮은 몸매를 보이고 있으며 팔은 강철처럼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
리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배꼽 밑에 두어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스쳐
를 취했다. 또한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는데, 발바닥을 훤히 드러낸 불상이 천하에
그리 흔치가 않다.

불상이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는 꽃잎이 하늘을 향해 빵빵 열려있는 앙련(仰蓮)이 윗쪽
에, 반대로 꽃잎이 땅을 향한 복련(伏蓮)이 밑에 있는데, 연꽃무늬가 2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꽃잎도 너무 화사하기 그지 없어, 적당하게 색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기존 전통의 불상 양식에서 추상성을 조금 보태어 웅장하게 만든 마애불로 신라 말~고려 초의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준수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인정받아 북한산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는 1980년대에 지정됨> 게다가 상태도 양호하고 선각(線刻)도 선명하여 조성된 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석불 같다.

신라 말에서 고려 중기까지는 전국적으로 큰 마애불과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게다가 비슷
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다른 색을 보여 개성도 강하다. 구기동 마애불은 자세한 기록은 없
으나 당시 지방 세력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승가사가 고려 황실과도 인연이 깊
은 절이라 제왕과 황실의 지원으로 수준 높은 석공들을 투입해 조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마애불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장비와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
다고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 좋게 드러누워있던 것도 아니다. 줄을 매달고 올라가 일일이 정을
대고 쪼아야 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거의 몇 년에서 10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
이며,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그 당시 석공(石工)의 뛰어난 능력과 정
성, 그들이 공사에 전념하게끔 뒤를 받쳐준 지원 세력이 합작으로 이루어낸 대작품이라 할 것
이며 이런 명품급 마애불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마애불이 있는 바위 밑에는 근래에 돌로 벽을 쌓았고, 그 앞에 향로와 용이 휘감고 있는 돌기
둥을 만들어 단(壇)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앞을 돌출시켜 양쪽으로 계단을 내었으며, 기도는
그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하면 된다. 그리고 바위 주변은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출입이 통
제되어 있으니 괜히 바위를 오르거나 마애불을 만지는 등의 짓은 하지 않도록 한다. 또한 매
일 10시부터 11시(시간은 변경 가능)까지는 승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관계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1


▲  구기동 마애불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쌀가마니를 축내는 쥐새끼들 (경내에서 호국보탑으로 내려가는 길)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나라도 가만 보면 고양이보다는 쥐가 더 살기 좋은 세상 같다.
(이 땅에서 권력도 잡고 돈도 많이 챙기려면 쥐처럼 살아야 됨)

▲  승가사를 뒤로하며 다시 제자리로

마애불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승가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해질녘까지는 시간이 넉넉하게
있지만 이곳은 막다른 곳이라 다른 곳을 가려면 승가사 갈림길로 한참이나 내려가야 된다. 경
내에서 바로 위쪽 사모바위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었다면 그곳을 거뜬히 찍고 내려갔을 것인데,
그 점이 참 아쉽다.
이렇게 하여 5월 승가사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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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숲길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정릉동 북한산 경국사 (경국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경국사 공양밥)

정릉동 경국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동 경국사 '
경국사 숲길
▲  경국사 숲길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이 찾아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1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절을 대상으로 그날의 메뉴를 물색했
으나 서울에서 미답(未踏)으로 남은 늙은 절은 이제 씨가 마른 상태이다.
그래서 서울 밖으로 나갈까도 했으나 멀리 나가는 것도 귀찮고 해서 가본 절에서 적당한
곳을 골라 재활용하기로 했다. 하여 경국사를 시작으로 여러 오래된 절을 돌기로 했는데,
경국사는 이상하게도 이번을 포함하여 석가탄신일에만 무려 5번이나 인연을 지은 석가탄
신일 인연 사찰로 거의 4년 만에 방문이다.

도봉동(道峰洞) 집에서 정릉동(貞陵洞) 경국사까지는 버스로 40~50분 정도 걸린다. 12시
에 집을 나서 경국사 정류장에 두 발을 내리니 그날 같이 움직이기로 한 친한 후배가 대
기를 하고 있었다. 원래 혼자 석가탄신일 절 투어를 하려고 했으나 그가 그날 쉰다고 새
벽에 연통을 보내서 같이 가게 되었다.

경국사는 석가탄신일 대목이라 정류장부터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정릉천에 걸린 극
락교를 건너니 일주문이 중생 맞이에 여념들이 없고, 절로 인도하는 길 좌우에는 오색영
롱한 연등이 길게 이어져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  경국사 옆을 흐르는 정릉천(貞陵川)
정릉천은 북한산(삼각산) 정릉계곡에서 발원한 하천으로 경국사 옆구리를
살짝 지나간다. 그 하천에 무게가 백두산만한 나의 번뇌를 내던지고
경국사 경내로 들어선다.



 

♠  경국사(慶國寺) 입문

▲  경국사 일주문(一柱門)

극락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향하면 바로 눈앞에 일주문이 크게 아른거린다. 문이 바로 앞에서
나를 뚫어지라 굽어보니 안그래도 큰 문이 더욱 장대하게 보여 제대로 주눅을 들게 한다. 돌
로 만든 굵직한 기둥에는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새겨져 있어 문의 위엄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지붕 밑에는 '삼각산 경국사'라 쓰인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국사의 싱그러운 보물, 경국사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숲내음이 진동하는 푸른 숲길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경국사의
첫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속세(俗世)에서 오염된 망막에 한줄기 감동을 선사하는 이
숲길은 300년 묵은 소나무까지 100m 정도 곧게 펼쳐져 있는데, 거기서 서쪽으로 꺾여 경내로
이어진다. 숲길의 길바닥은 다행히 콘크리트로 닦지 않고 박석(薄石)을 깔아 숲길의 운치를
전혀 해치지 않았다. (흙길이었으면 더욱 좋았겠지;;)

하늘로 늘씬하게 솟아 하늘과 햇님을 가리고 선 나무들이 저마다의 빼어난 자태를 뽐내며 앞
다투어 갖은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머리와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경국사가 이렇게 경
내를 앞에 두고 숲길을 내민 것은 극락교와 일주문에서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번뇌와 속세
의 기운을 자연의 힘에 의지해 싹 털고 경내에 임하라는 뜻이다.


▲  정처 없는 내 마음을 제대로 뒤흔든 경국사 숲길
집으로 몰래 가져와 나 혼자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허나 조물주가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하니 사진으로 대신 품으련다. 이 숲길은 봄도 아름답지만
처절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늦가을도 단연 백미(白眉)이다.

▲  300년 묵은 소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11호

숲길이 서쪽으로 100도 구부러지는 곳에 숲길의 최고 어른인 소나무가 있다. 나이가 무려 300
년이 넘었다는 늙은 나무로 몸매도 매우 준수해 키가 무려 20m를 넘는다. 
하늘을 떠받들며 숲길을 다스리는 이 나무는 매우 지극한 나이임에도 그 흔한 '서울시 보호수
' 등급이 아닌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있다.
인간들이 제멋대로 정한 등급이 뭐 그리 중요하냐 싶겠지만 서울에서는 100살이 넘는 나무 중
에 지방기념물 이상의 지위를 얻지 못한 나무들은 상당수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러니 300살이면 99% 보호수로 지정되고도 남을 연세인데 그에 상응하는 등급을 줘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소나무 그늘에는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다.

소나무 북쪽에는 부도탑(승탑) 2기와 비석(碑石) 3기로 이루어진 너른 공간이 있다. 다들 고
색의 때가 얇은 존재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이들 부도탑은 이
땅의 현대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승려 2명의 사리탑으로 경국사에서도 매우 비중이 큰 인
물들이다. 그러니 한번 더듬고 가길 권한다.
비석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는 큰 존재가 경국사의 내력을 머금은 사적비(事蹟碑)로 1995년에
지관이 세웠다.


▲  자운대율사 계주원명사리탑(戒珠圓明舍利塔)

네모난 기단 위에 마치 범종(梵鍾)이 그대로 돌로 굳은 듯한 모습의 석종형 승탑은 자운대율
사(慈雲大律師, 1911~1992)의 사리탑으로 탑 이름은 계주원명사리탑이다.

자운대율사는 왜정(倭政) 이후 계율을 무시하고 대놓고 혼인하여 가정을 꾸리고 심지어 고기
까지 처묵처묵하는 등, 불교가 타락의 극치를 보이자 이에 발끈하여 불교 중흥과 율풍(律風)
진작에 팔을 걷어부쳤다.
그는 1940년부터 서울 도심에 있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며 율장과 관련 자료를 찾고자 매일
도시락을 싸들며 국립중앙도서관을 들락거렸다. 그래서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수록된 오부율
장(五部律藏)과 그 주소(註疏)를 모두 필사해 연구했으며, 1948년에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처음으로 보살계(菩薩戒) 수계법회를 열었다.

1949년에는 천화율원 감로계단(千華律院 甘露戒壇)을 설치해 대각사에서 범망경(梵網經), 사
미율의(沙彌律儀),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비구계본(比丘戒本) 등의 간행을 준비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모두 분실하고 만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부산에서 다시 율문(律文)을 준비
하여 한문본(漢文本) 25,000권을 포함해 총 48,000권을 간행하여 불교의 법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에 추대되어 1991년까지 많은
승려에게 계를 주었으며, 1992년 2월 7일, 해인사(海印寺)의 부속암자인 홍제암(弘濟庵)에서
바쁘게 살아온 삶을 마무리 지었다.
자운이 세상을 뜨자 그와 인연이 있던 경국사에서 그의 승탑을 만들었는데, 2년 동안 공을 들
여 2005년에 완성을 보았다. 승탑은 그의 명성과 업적에 걸맞도록 특별하게 계단형(戒壇形)으
로 만들어 두고두고 그의 업적을 기린다.

자운대율사 사리탑 뒤쪽에 자리한 고운 맵시의 승탑은 보경보현대종사(寶鏡普賢大宗師)의 사
리탑으로 충주 정토사지(淨土寺址)에 있던 고려시대 승탑인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
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승탑 바로 옆에 자리한 보경의 행적비는 1991년 지관이 찬
(撰)을 하고 세운 것으로 그의 일대기가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보경은 1916년 이곳 주지가 되어 60여 년 동안 경국사를 꾸린 인물로 교학(敎學)과 선지(禪智
)를 두루 익혔고, 계율에도 무지 철저해 승가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탱화를 잘 그려 화승(畵
僧)으로도 널리 활동을 했는데, 경국사의 탱화 상당수는 그의 손길에서 탄생했다.


▲  펼쳐진 책 모양의 불교대사림(佛敎大辭林) 편찬발원문

불교대사림(불교대사전)은 지관이 오랫동안 추진한 편찬 사업으로 10여 권을 편찬했다. 이 발
원문은 지관이 정성을 들여 작성한 것인데 그 내용에서 그의 지성이 제대로 우러나온다.


▲  경국사 샘터 위에 자리한 조그만 석불들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조그만 저들도 과일과 떡, 돈으로 초파일 특수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 나보다 저들이 훨씬 돈이 많으니 내가 저 자리에서
석불 흉내를 내며 대신 하고 싶을 정도이다.

▲  공양삼매경에 빠진 경내 앞 (관음성전 공양간 앞)

주차장에서 서쪽으로 휘어진 오르막길을 오르면 숲속에 숨겨진 경국사가 모습을 비춘다. 경내
앞에는 너른 공터가 펼쳐져 있고, 공양 수요를 위해 돗자리가 넉넉히 깔려 있는데, 공양 수요
가 워낙 많아 돗자리는 물론 공터 주변에 앉을 만한 자리는 싹 사람들로 넘쳐난다. 공양은 천
막 뒷쪽 관음성전 밑에 있는 공양간에서 제공하고 있는데, 공양 줄이 길게 이어져 있다. 금강
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줄도 길고 해서 우선 경국사의 보물을
살펴보고 공양에 임하기로 했다.

공양간 앞 천막에서는 믹스커피와 티백 녹차를 제공하고 있는데 무려 500원씩이나 받는다. 그
외에 연등 만들기 체험, 기와 시주, 불교용품 판매로 짭짤하게 초파일 특수를 누린다. 그럼
여기서 잠시 경국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에 제일 남쪽, 정릉천을 낀 숲속에 둥지를 튼 경국사는 1325년에 자정율사(慈
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이 북한산 청봉(靑峰) 밑에 있어서 절 이름을 청암사(靑岩寺)라 했다고 하며, 1330년에 무
기(無奇)가 이곳에 머물러 천태종(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떨치었고, 1331년에 채홍철(蔡洪哲,
1262~1340)이 절을 증축해 승려들의 수행을 도왔다고 한다.
1349년 보우대사<원증국사(圓證國師)>가 이곳에 머물다가 공민왕(恭愍王)이 내린 금란가사(金
襴袈裟)와 주장자(柱杖子)를 받고 국사(國師)가 되었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서서히 망해가다가 결국 중종(中宗) 시절에
완전 망하여 터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545년 왕실의 도움으로 절을 다시 일으켜 세
웠고, 1546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지원으로 크게 중창을 벌였다. 이때 문정왕후에게 잘보이
고자 부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慶國寺)로 이름을 갈았
다고 전한다.

1669년 속세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
인 정릉(貞陵)이 복원되자 근처에 있던 봉국사(奉國寺), 흥천사(興天寺)와 함께 정릉을 지키
는 원찰(願刹)이 되었다. 이때 경국사로 이름을 갈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정릉의 원찰이
되어 망할 일은 없게 된 경국사는 이후 탄탄대로를 누비게 된다.

1698년 연화승성(蓮華昇城)이 절을 중수하고 천태성전(天台聖殿)을 세웠다. 천태성전은 독성
각의 다른 이름으로 당시의 상량문이 남아있다. 1737년에는 낙암의눌(洛巖義訥)이 주지로 부
임하여 절을 손질했고, 1793년에는 천봉태흘(天峰泰屹)이 크게 중수했다.
1855년 예봉평신(禮峰平信)이 법당을 다시 세웠고, 1864년 고종(高宗)의 즉위를 축하하는 재
를 열어 왕실에 더욱 굽신거렸다. 그리고 1868년에 칠성각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호국대법회
를 열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범종(梵鍾)을 하사했으며, 1870년에 큰방을 수리했다.

1878년에는 함홍치능(涵弘致能)이 고종의 지원으로 요사를 중수하고,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
(哲仁王后) 김씨의 49재를 지냈으며, 1887년에는 석찬(碩讚) 등이 팔상도(八相圖)와 지장시왕
도, 신중도, 현왕도, 감로도 등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1914년 기송석찰(其松錫察)이 극락보전을 다시 세웠고, 1917년에 정릉천에 반야교(般若橋)를
놓았다. 1921년부터는 보경(寶鏡)이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크게 일으켜 세웠는데, 그는 직접
건물에 단청을 입히고 큰방에 아미타후불탱과 구품탱 등을 그렸으며, 1930년에는 영산전과 산
신각, 큰방을 중수하고, 1936년에는 영산전에 석가모니후불탱과 신중탱, 18나한탱 4폭, 범종
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삼성보전에 약사탱, 칠성탱을 봉안했다.

6.25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에 들렸는데, 보경의 인격에 크게 감동을 먹어 참
다운 승가(僧伽)의 모범이 이곳에 있다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인연으로 경국사의 단
골이 되어 여러 차례 보경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1953년 11월 닉슨 미국 부통령이 서울을
방문하자 이승만이 한국 문화의 참모습이 경국사에 있으니 한번 가자며 그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이때 닉슨은 경국사에서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 방문 일정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히며 경국사를 크게 찬양했다.

보경이 사라진 이후, 현대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지관(智冠)이 주지로 머물며 관음전과 삼성
보전, 영산전, 산신각, 환희당 등 대부분의 건물을 중수하여 경국사를 반석 위에 올렸다. 또
한 1989년에는 극락보전을 크게 넓혔으며, 1991년에 보경의 행적비를 세웠다. 이후 사적비를
세우고, 삼성보전과 관음성전을 새로 지었으며, 자운의 부도인 계주원명사리탑을 세웠다. 그
지관이 2012년 1월 입적하면서 그의 사리를 공개했는데, 이때 많은 중생이 몰려와 그를 애도
하며 사리를 친견했다.

북한산(삼각산)에 안겨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주택가에 빙 둘러싸인 형태로 다행히 절 주변
이 수목들로 삼삼해 심산유곡의 산사에 파묻힌 기분이다. 또한 정릉천이 바로 앞에 흘러 속세
와 적당히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처럼 포근하고 그윽하기만 하다.

청정한 승가의 본가임을 자처하는 이곳에는 극락보전과 관음성전, 삼성보전, 무우정사, 명부
전, 영산전, 산신각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을 비롯해 팔상도,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4호
)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괘불도는 관람이 어려움) 그 외에 이곳에서 가
장 늙은 보물인 철조관음보살좌상과 보경이 그린 여러 불화 등이 전한다.
건물들은 죄다 근래에 손질되어 고색의 멋은 별로 없지만 그 속에는 많은 문화유산이 고색의
기운을 피우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준다.

* 경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753 (보국문로 113-10 ☎ 02-914-5447)



 

♠  경국사 둘러보기 (관음성전, 극락보전 주변)

▲  관음성전(觀音聖殿)의 뒷모습

공양간 윗쪽에는 육중한 덩치의 관음성전이 자리하여 경내를 가리고 있다. 이 건물은 그 흔한
관음전(觀音殿)으로 경국사는 유난히 '성(聖)'과 '보(寶)' 돌림을 좋아하는지 그 글자가 첨가
된 건물이 많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관음성전은 옛 무량수각(無量壽閣) 자리에 2000년대에 새로 지은 'ㄷ'모
양의 집으로 관세음보살의 거처이다. 건물이 워낙 넓어 서큰방이라 불리기도 하며, 법회와 강
의 장소로 쓰인다. 그리고 바로 밑에 넓게 자리를 파고 공양간을 닦으면서 졸지에 2층집이 되
버렸다.

관음성전 정면에는 불당에서 흔치 않은 툇마루가 있으며, 건물 안에는 목관음보살좌상과 감로
도 등 여러 탱화와 중생들의 돈을 받아 만들어진 무수한 원불(願佛)이 일제히 금빛 물결을 이
루며 내부를 장엄한다. 또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화엄회(華嚴會)','
법화회(法華會)' 현판과 이승만이 남긴 '경국사' 현판이 걸려있다.


▲  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8호

관음성전 중심에는 이 건물의 주인장인 관세음보살좌상이 자리해 있다. 어린 동자승이 관세음
보살 누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보관(寶冠)과 복장, 장식물을 슬쩍 착용한 것일까
. 아니면 잠시 관세음보살 체험을 해보는 것일까. 표정이 어린 아이처럼 해맑고 천진난만하다
. 게다가 덩치도 쥐방울만하여 귀여움도 가득 묻어나 나도 모르게 쓱쓱 쓰다듬고 싶다.

이 보살상은 원래 경국사 것이 아니었다. 1703년 전남 영암군 도갑사(道岬寺)에서 조성된 것
으로 도갑사의 부속암자인 견성암(見性庵)에 있었다. 청신(淸信)이 화주가 되어 만든 것으로
어찌어찌하여 서울까지 흘러들어왔는데,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덕분에 경국사의 늙은 문화
유산이 하나 더 늘었으니 경국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 그가 경국사에 들어온 이후에는 한
동안 극락보전 불단 우측에 있던 것을 관음성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살상의 높이는 60cm로 그의 뱃속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에 따르면 색난(色難)을 수조각
승(首彫刻僧), 순경(順瓊)을 부조각승으로 하여 행원(幸垣), 대원(碓遠), 일기(一機), 대유(
大裕) 등이 같이 조성했다. 색난은 조선 후기에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불상 전문 승려이다.

앳된 표정이 묻어난 얼굴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으며, 눈은
살짝 뜨고 있는 것 같다. 코는 끝이 오똑하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려하면
서도 신라 금관(金冠)처럼 무거워 보이는 보관을 썼는데, 귀 옆까지 관대자락이 내려와 보관
의 수려함을 더욱 드높인다. 그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삐죽 나와있는데, 이마 중간
에는 백호가 찍혀 있으며, 볼살은 두툼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신체는 나름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작은 어깨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목 뒷부분이
약간 접혀있고, 법의의 왼쪽은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
에 놓인 왼손을 손목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다. 그리고 법의 오른쪽은 어깨를 덮은 뒤 오른
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이런 착의법은 넓게 트인 가슴과 수평 혹은 연꽃형의 군의 표현과 함께 조선 후기 불상의 가
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첫째 손가락과 3째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 대고
그의 필수품인 정병(政柄)을 살짝 쥐고 있다.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오른쪽 발이
훤히 드러나 있으며, 무릎 앞쪽으로는 옷자락이 물결치듯이 좌우로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조선 후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 드러낸 보살상으로 나무로 빚어 도금을 입혔으며, 그의 뒤
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중심이 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한다. 이 후불탱은 1924
년에 보경이 그렸다.


▲  경국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1호

관음성전 우측 벽에는 매우 복잡하게 생긴 탱화가 있다. 이 탱화는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염
원하고자 만든 감로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크게 유행한 감로왕도(甘露王
圖)의 하나이다.
그림을 보면 밑부분은 극락왕생을 못해 방황하는 영가(靈駕, 죽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중
간에는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윗쪽에는 극락으로 들어간 영가
의 환희가 담겨져 있다.

무수히 많은 인물의 표현과 생동감있는 자세 연출로 조금의 공백도 허용치 않고 알차게 채우
고 있으며, 서울/경기와 강원도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인 축연과 철유가 상궁(尙宮)들의 시
주로 1887년경에 그린 것으로 왕실의 불화 발원 사례를 잘 보여준다. 조선이 비록 대내외적으
로는 불교를 배척했지만 속으로는 적지 않게 불교를 옆구리에 낀 것이다. 특히 19세기부터 20
세기 초까지 상궁은 물론 왕비와 후궁의 시주로 그려진 불화가 서울과 경기도 사찰에 상당히
존재한다.


▲  경국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경국사의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관음성전의 뒷통수
를 바라보고 있다. 관음성전과 더불어 동쪽을 바라보고 선 그는 뜨락보다 한 3m 높은 기단(基
壇) 위에 자리해 있어 자못 웅대해 보이는데, 198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된 것이며, 한때
는 건물 앞쪽에 1칸 정도 보태어 공간을 넓혔으나 나중에 철거했다.

건물 내에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과 신중도, 팔상도 등의 문화유산이 있는데, 경국사에서 소
장하고 있는 지정문화유산 7점 중 3점이 이곳에 깃들여져 있으니 꼭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 보물 748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하 목각탱)과 조그만 아미타3존상이 봉안되어 있
다. 아미타3존상은 근래에 달아놓은 것이지만 그 뒤에 든든히 자리한 목각탱은 경국사에서 특
별히 애지중지하는 보물로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조선 후기 후불목각탱이다.

이 목각탱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을 입힌 것으로 겉으로 보면 꽤 복잡해 보이지만 잘 살펴보
면 구조는 단순하다.
목각탱 중앙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가 두손을 무릎에 댄 이른바 설법인
(說法印)을 취하고 있는데, 앙련(仰蓮)이 새겨진 여러 층으로 된 대좌(臺座)에 앉아있다. 그
런데 목각탱의 주인공임에도 그를 둘러싼 인물들보다 덩치가 작아 귀여운 인상을 풍긴다. 그
래도 그들과 달리 주형광배(舟形光背)를 달아주어 그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고, 광배의 위, 아
래가 비슷한 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양식이다. 또한 광배 안에는 연꽃을 새기고
일정한 너비의 주연(周緣), 밖으로는 화염(火焰) 무늬를 생겼는데, 그 무늬는 위로 솟구치고
있고, 그 안쪽에 조그만 불상이 4구 정도 있다.
 
아미타여래의 옷무늬는 통식(通式)으로 조선시대 양식이며, 그 좌우에는 아미타8대보살을 각
각 4명씩 배치했다. 그들 가운데 지장보살을 제외히고 모두 가지각색의 보관(寶冠)을 쓰고 연
꽃을 들고 있으며, 앙련 위에 앉아있다. 그 밑의 좌우 끝에는 사천왕(四天王)의 하나인 증장
천왕(增長天王)과 지국천왕(持國天王)을 배치해 아미타불의 호위를 부탁했고, 보살들 바깥 좌
우에는 나한상(羅漢像)을 1구씩 두었다.

목각탱의 양식으로 보아 18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몇 없는 조선 후기 목
각탱이자 서울에 거의 유일한 늙은 목각탱화로 그 가치는 대단하다. 그런 목각탱을 간직하고
있으니 경국사는 예사로운 절은 아닌 것 같다.


▲  경국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3호

극락보전 좌측 벽에는 호법신장(護法神將)이 빼곡히 담겨진 신중도가 있다. 이 탱화는 1887년
상궁들의 시주로 혜산 축연(惠山 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과 제
석천(帝釋天), 범천(梵天)이 있고, 그 좌우에 명왕(明王)와 신장(神將)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인도의 토속신으로 범천은 무려 힌두교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 이들을 모두 영입하여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신장으로 꾸몄다. 특이한 것은 산신(山神)과 조왕신(竈王神) 등 우리나
라의 토속신이 위태천(韋太天)의 협시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  경국사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2호

신중도 주변에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그림으로 표현한 팔상도가 있다. 이 탱화는 1887년에
상궁들의 시주로 보암 긍법(普庵 亘法)과 금운 순민(錦雲 洵玟), 봉규(奉奎), 종현(宗現) 등
이 그린 것으로 전체적으로 구성이 안정되어 있고 청색 사용을 자제했다.
19세기 말 서울/경기 지역 화승의 새로운 도상과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곳 팔상도는 다
른 절과 달리 그림 4개를 하나로 하여 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 사진의 4폭은 큰 네모 안에
가로가 조금 긴 직사각형을 두고 그 안에 4폭을 담았으며, 아랫 사진의 4폭은 가로가 매우 길
쭉한 것이 특징이다.


▲  삼성보전(三聖寶殿)

극락보전 좌측에는 삼성보전이 자리하여 나란히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원래는 왼쪽 1칸만 삼성보전이고, 오른쪽 2칸은 범종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으
로 쓰였으나 범종(梵鐘)을 내보내면서 3칸 모두 완전한 삼성보전이 되었다.
이곳 삼성보전은 산신과 독성, 칠성의 거처인 삼성각(三聖閣)의 다른 명칭이나 현실은 엉뚱하
게도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칠성(치성광여래)를 협시로 배치한 약사3존
상의 공간이다. 물론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나 산신각과 천태성전을 별도로 두면서
산신과 독성을 그곳으로 빼고 그 빈 자리에 약사여래와 미륵보살을 투입하면서 그렇게 된 것
이다.


▲  하얀 피부의 삼성보전 약사여래상과 약사회탱

달랑 1칸에 비좁게 살았던 약사여래와 미륵보살, 칠성 3형제는 범종을 밀어내고 집을 넓히면
서 각각 1칸씩 공간을 누리게 되었다. 약사회탱, 미륵탱, 칠성탱은 1939년에 보경이 그린 것
으로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온갖 과일과 음식들로 불단이 무너질 지경이다.


▲  삼성보전 미륵보살과 미륵탱
하얀 피부의 조그만 미륵보살 뒤로 보경이 1939년에 조성한 미륵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석가탄신일 행사가 펼쳐지고 있는 극락보전 뜨락
행사 무대 옆에는 아기부처에게 관불(灌佛)을 행하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닦여져
있다. 오색 연등이 무리를 지으며 행사장 허공을 낮게 드리우고 있어
하늘이 움푹 낮아진 기분이다.



 

♠  경국사 명부전, 영산전

▲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뜨락에서 초파일 행사가 열리고 있어 일제히 앞쪽으로 쏠린 시선이 부담스러워 극락
보전 뒷쪽으로 해서 명부전으로 넘어갔다.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상과 시왕(
十王), 판관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시왕도와 사자탱, 시왕탱 등
이 걸려있고. 좌측에는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의 철조관음보살좌상이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과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0호)

푸른 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나
란히 서 있다. 이들은 보경이 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으로 그들 뒤에 자리한 탱화가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이다.

이 탱화는 1870년에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있는 지장시왕도를 참고하여 혜산 축연(惠山 竺
演)이 그린 것이다. 혜산은 구한말에 강원도와 서울/경기에서 활동했던 화승으로 서울에는 흥
천사와 경국사를 비롯해 그의 불화 20여 점이 전한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수화사(首畵師
)로 활동하면서 불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림을 보면 선악동자를 함께 그린 전형적인 지장시왕도 형식으로 유난히 가늘고 긴 눈과 아
주 작은 입 등 얼굴 한 가운데로 몰려있는 이목구비, 좁은 미간, 눈 주위와 코/뺨 부분에 음
영을 표현해 얼굴의 골격을 강조한 점은 다른 지역의 불화와 구별되는 서울,경기 지역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이다.


▲  명부전 우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  명부전 좌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철조관음보살좌상

지장보살상 좌우에는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시왕)이 각각 5왕씩 앉아있다. 복장은
거의 비슷하지만 손짓이나 얼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서로 다르다. 그들 뒤에는 시왕탱이
있는데, 역시 1왕당 1폭씩 배치하여 총 10폭을 이룬다.

명부전 좌측 벽에는 시커먼 피부를 지닌 철불(鐵佛)이 사람처럼 앉아있다. 여기서는 그를 철
조관음보살좌상이라 부르는데, 파리도 쑥 미끄러질 것 같은 탱탱한 피부와 달리 경내에서 가
장 늙은 존재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11세기 경에 요(遼)나라에서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요나라는 옛 조선(고조선)과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자 동이족의 일원인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비록 200년도 버티지 못했지만 요서(遼西)와 만주, 화북 지역을 차지하며 크게 위엄을 떨쳤다.
이 보살상이 과연 요의 것인지 이불의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고려와 조선의 불상, 보살상과
는 확연히 차이를 보이고 있어 물 건너 온 것은 확실하며, 언제 무슨 일로 여기까지 들어왔는
지는 그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 알 도리가 없다.

의자에 앉아있는 그는 성인 남자 키 정도 되는데 얼굴은 그냥 무표정에 가까워 보인다. 두 손
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손가락에는 특이하게 반지가 끼여져 있다. 적의(翟衣) 형태의 옷
에는 용과 새, 사자 등이 새겨져 있고 보관에는 모란꽃무늬를 매우 정교하게 나타냈다. 그리
고 정병(政柄)까지 새겨져 있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지나 정병은 근래에 손질한 것
이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허나 경국사에서는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절부터 관세음보살로 받들고 있어 한때 관
음전에 있기도 했으며,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임에도 많은 것이 아리송한 상태라 아직 지정
문화재 등급을 얻지 못했다.


▲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영산전(靈山殿)

명부전에서 서쪽으로 난 계단길을 오르면 부처와 그의 열성제자인 나한(羅漢)들의 공간, 영산
전이 모습을 비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말에 지어진 것을 1930년에
보경이 중수했다. 어칸 위에 달린 영산전 현판은 해강 김규진이 쓴 것으로 필체가 무척 돋보
인다.


▲  영산전 석가3존상과 석가모니후불탱

현란한 보관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거느린 석가여래의 표정이
꽤 후덕해 보인다. 이들 3존상은 보경이 만든 것으로 뒤에 있는 석가모니후불탱도 1935년에
그가 그렸다. 분업 정신이 투철한 불교계에서 주지승이 직접 불상과 보살상을 만들고 불화까
지 그리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림과 조형에 능한 보경이 주지로 있으면서 불상을
조성하고 그림까지 그리니 제작 비용은 크게 절약되었을 것이다.

▲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탱

석가3존상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상과 나한탱이 배열되어 있다. 하얀 피부의 나한
상은 좌우에 각각 9개씩 18나한을 이루고 있는데, 16나한은 지겹도록 봤지만 18나한은 생소하
다. 경국사를 찾은 중생처럼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그들 뒤에는 나한탱이 2폭씩, 4폭이 자
리해 있는데, 나한과 동자가 어울려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보경이 만든 것으로 왼쪽에 1폭은 1966년에 다시 그렸고, 우측 벽 구석의 신중탱
은 1966년에 제작되었다.


▲  경국사 산신각(山神閣)
극락보전 뒷쪽 언덕에서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산신각은 산신의 공간으로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건물이다.

▲  산신각 산신탱

소나무와 산을 배경으로 한 산신탱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진하게 우러나온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그곳에 꿀단지나 아리따운
처자라도 있는 것일까.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 그림은 1980년에 덕문(德文)이 조성
한 것으로 그 앞에 산신의 탈을 쓴 애기 같은 산신상은 근래에 봉안된 것이다.


▲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 천태성전(天台聖殿)

산신각, 영산전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천태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건물로 보통은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제일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이곳은 천태
성전이 그 자리를 누리고 있다. 건물 이름이 좀 낯설긴 하지만 천태(天台)란 이름에서 이미
답은 나왔다. 바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독성의 거처는 독성각(獨聖閣)이란 흔한 이름을 쓰지만 북한산(삼각사) 진관사(津寬寺)의 독
성전(獨聖殿)이나 삼천사(三千寺)의 천태각처럼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하며, 경국사는 그의 거
처를 크게 높여 천태성전이라 부른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담장을 두르고 있어 특별한 이미지를 선사하지만 담장 안에 담긴 천
태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건물이다.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탱은 1980년에 덕문이 조성한 것으로 그 앞에 있는 독성상은
그 이후에 장만했다.

▲  무우정사(無憂精舍)와 3층석탑

종무소에서 해우소(解憂所)로 가다보면 종무소 바로 뒷쪽에 무우정사가 있다. 그 뜨락에는 극
락보전 앞에도 없는 3층석탑이 서 있는데, 그 탑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무우정사가, 탑 좌우로
승려들이 생활하는 요사가 좁은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다소 고급 분위기가 느껴지는 무우정사는 주지승이 거주하는 집으로 가운데 칸이 약간 앞뒤로
삐죽나와 '十' 모양의 구조를 이룬다. 지관이 설계하고 지은 것으로 현관에는 금강반야대(金
剛般若臺)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뜨락에 자리한 3층석탑은 석가탑(釋迦塔)을 그대로 모
방하여 맵시가 고운데, 경국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왜 법당인 극락보전을 놔두고 이곳에 두었
는지는 모르겠다. (극락보전 뜨락이 조금 좁기는 하지만 무우정사 앞보다는 넓음)
무우정사 일대를 문수원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중생들의 출입을 통제했으나 이때 가
보니 활짝 열려 있었다.

참고로 무우정사의 무우는 무우수(無憂樹)에서 유래된 말로 아수가수(阿輸迦樹)를 한자로 번
역한 이름이다. 부처는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밑에서 태어났고 과거 1불인 비바시불도 이 나
무 아래에서 성도(成道)했다고 하며, 보리수와 더불어 불교에서 꽤 애지중지하는 나무이다.


▲  경국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경국사 경내를 깔끔하게 복습하고 공양간으로 갔다. 보통은 '금강산도 식후경' 원칙을 지키는
편이나 이번에는 초파일 여로(旅路)와 사진기 데이터를 먼저 살찌우고 그 다음에 뱃속을 찌우
기로 했다.
절을 둘러보는 동안 공양밥을 기다리는 줄은 90% 이상 감소하여 줄에 동참한지 3분 만에 밥그
릇을 손에 쥐었다. 이곳 공양밥은 다른 절과 비슷한 비빔밥으로 밥과 콩나물 등의 여러 나물,
고추장이 담겨져 있다. 밥과 함께 오이냉국과 절편이 옵션으로 제공되었는데, 오이냉국은 물
대신 마시면 되고 절편은 후식거리로 먹으면 된다.
이곳 초파일 공양밥은 보통 14~15시까지 제공하나 수요가 너무 많을 경우 일찍 마감된다. 그
러니 가급적 14시 이전까지는 가야 안전하게 공양밥을 받을 수가 있다. (이는 다른 절도 비슷
함)

우리는 돗자리에 앉아 공양밥을 들었는데, 절을 1바퀴 둘러보고 먹는 밥이라 그런지 맛이 좋
았다. 거기에 절편까지 모두 섭취하니 뱃속은 만땅이 되고 졸음이 슬슬 다가와 한숨 자라며
나를 희롱한다. 커피를 마실까 했으나 믹스커피를 무려 500원에 팔고 있어 바깥에서 캔커피를
사먹기로 하고 졸음의 희롱을 박차며 경국사를 나왔다. 그곳에 머문 시간은 공양시간을 포함
해 1시간 30분 정도.
우리가 나갈 때도 경국사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파도처럼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만큼
속세로 빠져나가 경내는 크게 혼잡하지는 않았다. (조금 혼잡한 편)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 경국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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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사 나들이 ~ 우이동 윗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도선사 (붙임바위, 우이동계곡)

북한산(삼각산) 도선사



' 늦가을 산사 나들이, 북한산(삼각산) 도선사 '

도선사 18나한상, 포대화상
▲  도선사 18나한상과 포대화상

도선사 마애불입상

도선사 붙임바위

▲  도선사 마애불입상

▲  붙임바위

 



 

늦가을이 한참 깊어가던 10월 끝 무렵의 어느 평화로운 날, 집에서 가까운 북한산(삼각
산) 도선사를 찾았다.
도선사는 지금까지 10회 남짓 인연을 지었던 절로 그곳의 늦가을 풍경과 늙은 마애불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곳을 찾은 것인데,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도봉동(道峰洞
) 집을 나서 방학4거리에서 노원구 마을버스 15번(월계동 청백1단지↔덕성여대)을 타고
우이동 도선사입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우이동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이에 자리한 동네로 이들 산을 찾는 산꾼
과 나들이꾼들로 늘 북새통을 이룬다.

우이동(牛耳洞) 109번 시내버스 종점 맞은편에는 도선사행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다. 도
선사까지 걸어가기에는 다소 거리(약 2.3km)가 있고, 이날은 도선사가 목적이라 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에 흔쾌히 동참했다. 하여 10분 정도 기다리니 셔틀버스가 기지개를 켜고
내 앞에 나타나 활짝 입을 벌린다.
이 노선은 우이동(109번 종점 맞은편)에서 도선광장까지 운행하는데, 평일에는 3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휴일에는 증차 운행한다. (석가탄신일은 거의 10분 내외 간격, 입석은
안됨) 차비는 무료이나 굳이 내고 싶다면 승차장에 있는 돈통에 알아서 넣으면 되며 신
도와 절에 볼일 또는 예불을 보러 가는 사람만 가려서 받는다. (산꾼들은 거의 받지 않
음)
버스는 각박한 오르막의 연속인 도선사 길(삼양로173길)을 5~6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다
가 도선광장에 이르러 바퀴를 멈추었다. 우이동에서 도선사를 잇는 신작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닦아준 것으로 그 길로 인해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도선사는 서울 동북부를 대
표하는 고찰(古刹)로 크게 흥하게 된다.

도선광장(마음의 광장)에는 우리나라 최대급의 옥외(屋外) 석불좌상으로 꼽히는 미소석
가불이 이름 그대로 미소를 흩날리고 있다. 그를 중심으로 그 옆에 셔틀 정류장과 주차
장이 있고, 북쪽에는 백운대탐방지원센터와 백운대로 가는 산길이 있으며, 서쪽에는 안
양암과 도선다원이 있고, 그 남쪽에 도선사로 가는 길이 있다.
도선광장에서 도선사 경내까지는 도보 5분 거리로 길은 느긋한 수준이며 천왕문이 제일
먼저 마중을 나와 중생을 검문한다.



 

♠  도선사(道詵寺) 입문

▲  천왕문(天王門)의 뒷모습

맞배지붕을 지닌 천왕문(사천왕문)은 도선사의 정문으로 1987년 11월에 지어졌다. 봉황문(鳳
凰門)이라 불리기도 하며,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 다문천왕,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의 보금자리로 그들은 이곳을 지나는 중생들을 검문하느라 여념들이 없다. 그들의
수고로움이 있기에 오늘도 도선사와 북한산(삼각산)은 평화롭다.


▲  천왕문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해발 300m)
정면에 보이는 진달래능선 너머로 강북구와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지역과
불암산, 아차산, 멀리 남양주 지역의 뫼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왜열도에서 건너온 검은 피부의 청동지장보살상

천왕문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청동지장보살상이 모습을 비춘다. 그는 도선사와 자매결연을 맺
은 왜열도 진언종(眞言宗)의 본사, 고야산 안양원(高野 山 安養院)에서 1983년 11월 15일 청담
대종사 열반재 때 증정한 것인데, 주변 나라와 분쟁이나 일삼으며 툭하면 평화를 깨려고 드는
왜열도 원숭이들의 시커먼 마음을 보여주듯 피부가 아주 검다.


▲  가을 단풍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도선사 경내

경내 직전에 이르면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직진하면 주차장과 도선사 경내로 바
로 이어지며, 오른쪽은 종각과 청담대사비, 청담대종사 사리탑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왼쪽은
북한산(삼각산) 산길로 여기서 해발 260m 정도 오르면 북한산성(北漢山城) 용암문에 이른다.
나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 청담대종사 사리탑을 둘러하고 경내로 들어섰다.


▲  시원스런 추녀 곡선을 지닌 종각(鐘閣, 범종각)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아리를 머금은 사물<범종(梵鐘)과 목어(木魚),
법고(法鼓), 운판(雲版)>의 보금자리로 여기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청담대종사의 사리탑과 그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  수수한 모습의 청담대종사 석상

▲  귀부가 꽤 인상적인 청담대사비


▲  화려한 수작(秀作)을 자랑하는 청담대종사(靑潭大宗師) 사리탑과
그의 뒤를 받쳐주는 조그만 삼천(三千)지장보살상


도선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20세기 큰 승려의 하나로 추앙받는 청담대종사<1902~
1971, 청담당 순호대종사(靑潭堂 淳浩大宗師)>이다.

그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이름은 이순호(李淳浩)이다. 3.1운동에도 참여했으며 금강산 마하연
에서 수행했던 승려 박포명을 만나 불교와 강렬한 인연을 맺게 된다.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의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법문이 청담을 불교의 세계로 고스란히 인도한 것이다.

1924년 왜열도로 건너가 송운사(松雲寺)에서 행자생활을 했으나 왜열도 불교의 좋지 않은 점<
승려가 마누라를 두고 가정을 꾸림>에 크게 경악하여 바로 본토로 돌아와 고성 옥천사(玉泉寺
)에서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 개운사(開運寺)
불교전수상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고, 바로 만공(滿空)의 문하에 들어가 수행을 했다.
1928년 조선불교학인대회를 통해 왜정(倭政)에 저항하는 불교에 앞장섰고, 1947년 봉암사(鳳
巖寺) 결사를 통해 왜정의 농간으로 망가진 이 땅의 불교를 정화하고 철저히 계율을 지키며
오로지 참선에 정진하자는 불교정화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허나 청담의 개혁에 발끈한 승려들(대부분 대처승)의 태클도 만만치 않아 그 길은 순탄치 않
았다. 다행히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帶妻僧)에 대해 절에서 나가라며 불교의 개혁을 지지했
고 성철(性徹), 자운 등 깨어있는 승려들도 앞다투어 그의 개혁에 동참했다.

1960년 11월 대법원이 비구승(比丘僧)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상한 판결을 내리자 청담은 비
밀리에 6명의 비구로 이루어진 순교단을 결성, 판결 다음날 대법원청사에서 할복을 감행했다.
이 행위는 여론을 비구승 쪽으로 돌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61년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
어서자 '불교 정화는 비구와 대처승 간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사상 개조 운동'이라며 군부를
설득해 1962년 4월 비구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통합종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1966년 11월 초대 종정(宗正)인 효봉(曉峰)의 뒤를 이어서 청담이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불교 근대화의 발판을 위해 내세운 역경(譯經), 도제양성, 포교 등 3대 지표를 포함하여
의식의 현대화, 군승제(軍僧制) 촉구, 신도 조직 강화, 석가탄신일 공휴일 제정, 불교회관 건
립 등 6개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또한 포교의 활성화를 위해 절에서 매주 1회씩 정기법회를
개최하는 것과 불교방송국 및 승가대학 설립을 목표로 세웠다.
그 목표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1971년 11월 15일, 69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그의 다비
식(茶毘式)에는 무려 20,000여 명의 사부대중이 모여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으며, 1972년
도선사 경내 동쪽 산자락에 자리를 닦고 그의 사리탑과 비석, 석상을 세웠다.

청담의 사리탑은 20세기 후반 제일의 승탑<부도(浮屠)>이라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
주 찬란하고 장엄한 모습이며, 승탑 뒤로 무려 3,000기의 조그만 지장보살을 갖춘 커다란 벽
을 둘러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청담대사를 향한 도선사와 후학들의 지극정성이 대
단하다. <청담대사의 승탑은 고성 옥천사(☞ 관련글 보러가기)에도 있음>
사리탑 구역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밑에 청담의 석상을 두었고, 중간에는 청담대
사비, 윗쪽에는 사리탑을 두었다. 바로 이 구역을 닦으면서 오래된 청동범종과 청동숟가락 5
점, 청동젓가락 1짝, 청동국자 2점, 왜열도에서 건너온 동경(銅鏡, 봉래문경), 상평통보 등
고려 말과 조선 중기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들 유물을 통해 절 건물이 이 자리에 오래 눌러앉았음을 보여주며, 그들 모두 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259호
('도선사 청동종 및 일괄유물')로 지정되어 청담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종각에서 경내로 이어지는 호젓한 길

▲  도선사 호국참회원(護國懺悔院)

청담대종사 사리탑을 둘러보고 경내로 들어서니 호국참회원이라 불리는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
이 마중을 한다.
호국참회원은 지상 3층, 지하 1층의 1,000평 규모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968년 11월
청담대종사가 우리나라 불교의 중흥과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은 호국참회불교를 제창하며 지은
것으로 1977년 증축을 했으며 단양 구인사(救仁寺)의 건물 스타일과 많이 비슷하다. 아무래도
이곳이 첩첩한 산중이고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라 추가로 건물을 올리기 어려워 이런 식의 건
물을 다진 것이다.
1층에는 공양간이 들어있고, 2층은 어린이회, 학생회, 도서실, 수련원 등이 있으며, 3층은 대
법당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이 깃들여져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도선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자 북한산 3대 봉우리의 하나인 만경대(萬景臺) 밑에 자리한 도선
사는 862년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이곳 산세가 1,000년 뒤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佛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 예견하
고 절을 지은 뒤, 큰 암석을 주장자(柱杖子)로 갈라 마애불을 새겼다고 한다. 그 연유로 사찰
이름을 도선사라 했다는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
이며, 그 마애불 조차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이미 판명이 났다.
다만 청담대종사 사리탑 자리에서 고려 말과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적어도 고려 한복판부
터 절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그곳이 경내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오랫동안 일기장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숙종(肅宗) 시절 북한
산성을 수리했을 때 승병(僧兵)들이 이 절에서 보초 임무를 선 기록이 있다. 1863년 안동김씨
의 실세인 김좌근(金左根)이 돈을 대어 칠성각을 지었고, 1887년 동호 임준(東湖 任準)이 7층
석탑을 세우고 그 안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1903년 혜명(慧明)이 고종의 명으로 대웅전을 중건하고 신중도와 지장도 등 14점의 탱화를 봉
안했으며(이때 불상 2기를 개금하고 1기를 개채함) 1904년 국가기원도량으로 지정을 받았다.
1961년 청담이 주지로 주석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절을 크게 불려나갔
으며, 1963년 도선암을 도선사로 격을 높였고, 1968년에 절과 속세를 이어주는 도로가 닦여지
면서 접근성이 한층 좋아졌다.
2001년 청담대종사를 기리고자 청담기념관을 세웠고, 2002년 그 안에 유물관을 두어 청담대종
사의 유물과 절의 문화유산을 전시/보관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호국참회원, 명부전, 삼성각, 적묵당, 천불전, 요사채 등 10여 동
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마애불입상과 목아미타불 대세지보살상, 석독성상, '청동종 및
일괄 유물(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9호)',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396호
) 등 지방문화재 5점을 품고 있다.
그 외에 오래된 보리수와 19세기 말에 조성된 지장시왕도, 괘불도, 묘법연화경, 7층석탑, 마
애사리탑 등의 비지정 문화유산도 여럿 지니고 있으며, 청담대종사 사리탑과 청담대사비, 18
나한상과 포대화상, 진신사리탑 등의 조촐한 볼거리도 간직하고 있다.
절의 부설 기구로는 금천구 시흥동(始興洞)에 있는 혜명보육원과 실달학원, 청담종합중고교
등이 있으며, '도선법보'등의 정기 간행물을 내놓고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제대로 박힌 고즈넉한 산사로 신작로가 경내까지 뚫려있어 실감이 덜하겠
지만 북한산(삼각산) 서울 구역에 자리한 고찰(古刹) 중 문수사(文殊寺), 일선사(一禪寺) 다
음으로 높은 320~330m 지점에 자리해 있다. 그만큼 이곳은 깊은 산골이다.
만경대와 인수봉(仁壽峯) 그늘에 자리하여 위치도 좋으며,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왕래도 빈번하다. 또한 마애불입상이 영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기도 수요
도 상당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264 (삼양로173길504, ☎ 02-993-3161~63)
* 도선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도선사의 오랜 자랑, 마애불입상



 

♠  도선사 둘러보기 (호국참회원, 삼성각 등)

▲  도선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주 아름다운 말이 있다. 호국참회원 1층 공양간이 마침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밥과 국 냄새가 나의 후각을 어지럽히니 이곳 공양(供養) 인심이나 확인할
겸, 1그릇 들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급한 것도 없다.
도선사 공양밥은 다른 절과 비슷한 비빔밥 스타일로 하얀 밥과 김치 등의 나물, 고추장을 먹
을 만큼 담고 별도의 그릇에 미역국을 담아 즐겁게 공양에 임하면 된다. 누구든 무료로 공양
을 할 수 있으며 보통 17시까지 밥을 제공한다. (시간은 상황에 따라 변경 가능) 미역국은 비
록 고기나 해산물은 들어있지 않으나 국물이 진국이다.

어찌하다보니 그릇이 터질 정도로 밥과 나물을 담았는데 이것을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걱
정이 들었다. 허나 그것은 기우였다. 순간 시장기가 강림하여 거뜬하게 빈 그릇으로 만든 것
이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옆 칸으로 넘어가 내가 먹은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하고 물 1모금 섭취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도선사 관람은 이제부터이다.

◀ 청담심지(靑潭心地)
청담대종사가 머물렀던 백운정사 옆에
있던 것으로 2002년에 현 자리로
옮겼다.

◀  돌로 다진 천불전(千佛殿)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건물로 이름 그대로 조그만 천불이
봉안되어 있다.


▲  배불뚝이 포대화상(布袋和尙)
그의 배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하여 그의 배는 좀처럼 마를 날이 없다.
사람들이 얼마나 문질렀는지 배가 아주 검은 피부가 다 되었으며, 그의
허공에는 조그만 등이 대롱대롱 달려 가을 바람을 즐긴다.

          ◀  도선사 보리수(菩提樹)
명부전 앞에는 불교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나
무인 보리수가 있다. 부처가 보리수 밑에서 깨
달음을 얻었다는 사연 때문이다.
이 나무는 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어느 승려
가 멀리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과연 그
럴까?) 보리수는 염주나무, 각수(覺樹), 성수(
聖樹)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사진이 너무
흐릿하게 나온 것이 다소 아쉽다. (내 역량이
그것 밖에 안되니 어쩔 수 없음...)


▲  청기와를 눌러쓴 명부전(冥府殿)

보리수 그늘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
王), 저승의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지금은 명부전이 자리
를 잡고 있으나 이곳은 원래 청담대종사가 머물렀던 백운정사(白雲精舍) 자리이다.

▲  온화한 표정의 금동지장보살상과
19세기에 그려진 지장시왕탱

▲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과
시왕탱 (지장보살상 좌측)

▲  저승의 10왕과 시왕탱 (지장보살상 우측)

▲  명부전 앞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  도선사 대웅전(大雄殿)과 국화전시장

청기와를 지닌 대웅전은 도선사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이다. 절 초창기 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나 신뢰도는 떨어지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대웅전이라 석가여래상이 중심으로 있어야 되지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거느려 아미타3존상을 이루고 있다. 또한 대웅전
현판은 강창회(姜昶會, 1789~?)가 12살에 썼다고 전한다.

내가 갔을 당시 대웅전 뜨락에는 노란 국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뜨락 허공에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국화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경내를 둘러싼 단풍과 더불어 늦가을의 멋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이곳은 매년 11월 경내에서 이렇게 가을 국화전시를 하고 있으며, 석가탄신
일에는 이곳에서 산사음악회와 공연, 법회가 열리는 경내의 광장과 같은 곳이다.


▲  금빛찬란한 대웅전 아미타3존상과 금동후불탱
대웅전 천정에는 하얀 연등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보랏빛 색깔을
연출해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대웅전 앞을 곱게 수식하고 있는
노란 국화들

▲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삼성각에서 바라본 모습)


▲  호국참회원 대법당에 봉안된 목아미타불, 대세지보살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91호


호국참회원 3층에 자리한 대법당에는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아미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아
미타불을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가지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그렇다고 도선사가 아미타불
도량을 칭하지도 않는다. (도선사는 '호국참회도량'을 칭하고 있음)

대법당 불단에 들어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미타3존상은 크기가 아주 조그만하여 동자승
처럼 귀엽기 그지 없다. 이들 중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
으며, 관세음보살은 근래 새로 지은 것이다.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 뱃속에서는 고맙게도 그들의 조성시기가 적힌 발원문(發願文)이 나
왔는데, 1740년에 여기서 가까운 도봉산 원통암(圓通庵, 원통사)에서 조성하여 북한산 진관암
(津寬庵, 진관사)에 봉안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여 18세기 서울 지역 보살상과 아미타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주며 그 발원문 덕에 지방문화재의 감투까지 받게 되었다. 그리고 아
미타불 이름 앞에 '목(木)'이 붙은 것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이후 개금을 하여 현재 모
습이 되었다.

북한산(삼각산) 반대편에 있던 이들이 어찌하여 도선사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다. 다만 1933년 도선사에서 만든 사찰재산대장에 아미타불, 약사불, 관세음보살이 등
장하는데, 그들이 아미타3존상인지는 불투명하며(관세음보살은 입상으로 나와있음) 1960년대
에 촬영된 사진에는 아미타불 옆에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그 역시 진관사에서 넘어왔다고 한
다.
이후 그의 보관(寶冠)이 일부 손상되어 새 관세음보살을 만들어 붙였으며, 기존 관세음보살은
청담기념관 수장고에 넣어버렸다. (그 관세음보살상이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6호인 석조관음
보살좌상임)
아미타3존상 뒤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후불탱과 닫집이 듬직하게 자리하여 그들을 반짝반짝 윤
기를 내준다.


▲  연병장처럼 넓은 호국참회원 대법당
중생들의 지원을 받아 달아놓은 조그만 금동원불이 벽을 가득 도배하고 있다.
이곳은 공간이 넓어서 강당 및 행사장의 역할도 도맡고 있다.

▲  대웅전 옆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석 독성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92호

대웅전 뜨락에서 마애불입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 독성상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체격 또한 단단해 아주 늠름해보이는 이 독성상은 돌로 빚은 것으로 지장
보살처럼 푸른 대머리를 지니고 있다. 시선은 약간 아래로 하고 있으며 무슨 걱정이 있는지
표정이 썩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몸에 걸친 붉은 가사(袈裟)를 묶은 고리매듭이 왼쪽 어깨에
있으며, 오른손은 바닥에 대고 왼손을 왼쪽 다리를 세운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아줌마 자세처
럼 앉아있다.

그는 원래 마애불입상 주변에 있던 독성각(獨聖閣)에 있었으나 이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
며, 1962년에 청담이 불교정화운동으로 도선사에 있던 산신각과 칠성각, 용왕당 등 토속신앙
적인 건물을 모두 부시면서 그 건물에 봉안된 산신과 칠성을 모두 독성각에 집어넣고 삼성각
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2년 독성상의 몸을 새롭게 채색을 했는데, 이때 그의 뱃속에서 1876년에 개분(改紛)했음을
알려주는 '독성나반존자 개분 봉안축원문'이 튀어나왔다. 하여 빠르면 18세기에 조성된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흔치 않은 돌로 만든 독성상이자 그 시절 독성상 연구에 좋은 자료
로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의 독성상은 나무로 만들었음)

▲  삼성각 산신탱과 산신상

▲  삼성각 칠성탱과 석가3존상

▲  삼성각 밑에 자리한 반야굴(般若窟)
쌍용그룹을 세운 김성곤이 돈을 대어 지은
것으로 11면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  반야굴을 장식하고 있는 보살들
가운데가 11면 관세음보살, 좌우가
문수보살, 보현보살



 

♠  도선사 마무리

▲  도선사 마애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호

경내 뒤쪽이자 도선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높이 20m 정도 되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로 그곳에 도선사의 오랜 명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마애불입상이 짙게 깃들여져 있다. 도선
사에서는 도선대사가 직접 새겼다고 홍보를 하고 있으나(도선이 손으로 바위를 갈라서 만들었
다고 함;) 조사 결과 고려 때 유행했던 마애불 계통을 이어받은 조선 중기 석불로 크게 보고
있다.

돋음새김으로 짜여진 이 석불은 높이 8.43m(머리 부분 2.15m, 어깨 너비 2.88m)의 장대한 규
모로 오랫동안 산골 구석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19세기 후반, 안동김씨의 후원으로 나라의 기
도도량으로 지정되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이후 도선사가 '영험한 마애불'로 적극 홍
보하면서 찾는 수요가 나날이 늘어났고, 365일 사람들의 발길이 마를 날이 없다. 완전 서울판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가 된 것이다.

이 마애불은 얼굴도 몸통도 모두 두툼하다. 그를 보호하고자 검은 피부의 청동 보호각을 씌워
놓았는데, 그로 인해 얼굴 부분은 거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머리 위에 간단하게 비와 눈을
막을 수 있는 덮개 정도만 설치했으면 좋았을 것을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의 보호각을 씌워놓
아 마치 갇힌 듯한 답답한 모습을 만들어버린 것이 다소 아쉽다.

마애불의 머리는 소발(素髮)로 낮게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있다. 가늘게 뜬 두 눈
은 음각으로 처리해 눈과 주변 살이 두꺼워 보이며, 코는 넓직하고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큰 얼굴에 비해 입은 작으며 수염이 살짝 표현되어 있고, 얼굴과 몸통이 딱 붙어있어
목은 아예 없는 것 같다.
몸통에는 옷주름이 이리저리 그어져 율동을 보이고 있으며, 그의 정체는 관세음보살 누님으로
여겨진다. 그 앞에는 넓게 공간을 닦아 예불 공간으로 삼았고, 주변에 1887년에 동호 임준이
지은 7층석탑이 날씬한 모습으로 자리해 뜨거운 예불 현장을 지켜본다.

도선사에서는 마애불 자체를 석불전(石佛殿)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적지
않은 수입을 거둬들이고 있다. 비록 팔공산(八公山) 갓바위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일 들어오는
재물이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오늘도 중생들의 소망을 접수하랴. 도선사 곳간을 채워주랴.
마애불의 고생이 참으로 크다. 부디 그렇게 벌어들인 돈, 관세음보살 누님의 뜻에 따라 어려
운 중생을 위해, 속세를 위해 모두 내놓기를 바란다. (자고로 종교는 돈과 정치에 너무 욕심
을 부리면 안됨)


▲  평화의 진신보탑(眞身寶塔) (9층석탑)

마애불을 둘러보고 밑으로 내려가면 평화의 진신보탑과 일심광명각 등이 있는 공간이 나온다.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닮은 평화의 진신석탑이 이곳의 중심 역할을 하
고 있는데,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파리와 개미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
를 자랑하고 있어 월정사8각9층석탑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 하다.


▲  일심광명각(一心光明閣)
반야굴 위에 무지개로 화현(化現)했다는 청담대종사를 위해 만든 공간이다.

▲  일심광명각 내부

▲  평화의 불과 괘불(掛佛)

도선사가 호국참회도량을 칭하다보니 평화를 강조하는 석탑과 불까지 갖추고 있다. 짜투리 공
간을 활용하여 경내의 눈요깃감도 조금 늘릴 겸, 평화를 염원하는 도선사의 마음을 살짝 담은
것인데, 평화의 불 뒤에는 근래 장만한 괘불이 걸려있어 활활 타오르는 불을 지켜보고 있다.


▲  포대화상과 18나한상, 그리고 그들을 보듬은 늦가을 풍경

경내 제일 뒤쪽(진신보탑 뒤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18나한상과 포대화상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일심광명각과 비슷한 사연으로 조성된 것으로 돌 하나에 나한 1명씩 배치해 다
소 여유로운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다들 자유롭고 제각각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포대화상이 그의 치명적인 매력인 똥배를 쑥 내밀고 돈통을 쥐어들며 해
맑은 표정으로 서있어 마치 18나한의 두목 같다.

평화로운 그들 뒤로 늦가을 누님이 질러놓은 고운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속세(俗世)에서 오
염되고 상처 받은 두 안구를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붉게 물든 단풍잎부터 연두색, 녹색, 노란
잎까지 대자연이 물들인 색채들이 너무 곱다. 하여 제아무리 천재 화가라 한들 대자연의 색채
를 감히 흉내내지는 못할 것이다.

▲  윗쪽에 자리한 나한상들

▲  밑쪽에 자리한 나한상들

18나한상까지 모두 둘러보고 잠시 잊었던 청담기념관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호국참회원 밑에
자리해 있는데, 문은 이미 굳게 닫힌 상태였다. 알고보니 개방시간은 16시까지이다. (그때가
17시가 넘었음)
이럴줄 알았으면 미리 그곳을 살펴보고 경내를 둘러보는 것인데 그만 방심을 하고 말았다. 이
렇게 중요한 것을 놓쳐버려 다음에 또 와야 되는 구실을 만들고 말았으나 다행히도 집에서 가
까운 곳이라 언제든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이후 청담기념관도 모두 둘러보았음)


▲  늦가을이 산에 불을 놓았다. 알록달록 타오르는 늦가을 풍경
(도선사 주변)

마음 같아서는 북한산성 용암문까지 훌쩍 올라가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더 이상의 욕
심을 부리지 않고 우이동으로 얌전히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금지된 곳으로 묶은 우이동계곡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셔틀버스에 의지하지 않고
걸어서 내려갔는데, 도선광장에서 조금 내려가니 커다란 바위가 잠시 보고 가라며 발목을 붙
잡는다. 바로 붙임바위이다.


▲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든 붙임바위

도선사까지 신작로가 닦이기 전에는 사람들이 붙임바위에서 많이들 쉬어갔다. 물론 지금도 쉼
터의 역할은 녹슬지 않았다. 산꾼들과 문명의 이기(利器)를 거부하며 두 다리로 오가는 사람
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바위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바위에 조그만 돌을 붙이고 소망을 들
이밀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여 바위의 배는 물론 옆구리와 주름선 등 돌
이 안착하기 좋은 자리에는 마구 돌을 갖다 붙였다. 심지어는 그의 피부에 상처를 내고 돌을
얹는 사람도 있었다. 하여 돌을 붙이는 바위란 뜻의 '붙임바위'라 불리게 되었고, 이곳 고개
는 '배바위고개'가 되었다.

바위를 딱 봐도 크고 준수하게 생겼으며, 도선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보니 자연스레 주목을 받
은 것이며, 저런 바위는 굳이 절이 아니더라도 산악신앙(山岳信仰)의 대상으로 늘 추앙을 받
기 마련이다. 하여 사람들의 부질없는 소원풀이 도구가 되었고, 옆구리에 신작로가 뚫리면서
5분이 멀다하고 차량들이 소음과 매연을 쏟아붓고 지나가니 그의 고통이 말이 아닐 것이다.
허나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처럼 딱히 싫은 내색 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도선사의 이정표 역할
을 한다.
지금도 그의 주름과 피부 곳곳에는 사람들이 붙여놓은 돌이 적지 않다. 그만큼 사람들이 속세
의 팍팍한 삶을 그에게 푸는 것이다.


▲  늦가을에 잠긴 도선사 길 (붙임바위 주변)

▲  금지된 계곡, 우이동계곡 (청담폭포, 적취병 주변)

도선사 신작로(청담로, 삼양로173길) 옆에는 우이동계곡(도선사계곡)이 졸졸 흐르고 있다. 북
한산(삼각산) 동부 지역의 이름난 계곡의 하나로 도선사 윗쪽에서 발원하여 속세를 향해 흘러
가는데, 백운천(白雲川)이라 불리기도 하며, 우이동으로 내려가 우이천으로 간판을 갈고 도봉
구와 강북구, 노원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며 중랑천(中浪川)으로 내려간다.

조선 초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격하게 찬양을 받았던 우이동계곡은 양반사대부의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하여 수재정(水哉亭)과 재간정(在澗亭), 겸산루(兼山樓) 등 그들이 지은 정자
와 별장이 계곡 주변에 즐비했으며, (지금은 다 사라짐) 그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여럿 전하고
있다.
이곳을 즐겨찾던 사람 중 이계 홍양호(耳溪 洪良浩, 1724~1802)가 있는데, 그는 여기서 9곳의
괜찮은 명소를 뽑아 '우이동구곡(九曲)'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식구들은 대략 이렇다. <그의
'우이동구곡기(牛耳洞九曲記)'에 실려있음>
제1곡은 '만경폭(萬景瀑)'이란 폭포로 도선사 밑에 있다. 조현명(趙顯命, 1690~1752)과 이주
진(李周鎭, 1692~1749), 그의 아들인 이은(李殷, 1722~1781) 등이 남긴 바위글씨가 전하고 있
으며, 제2곡은 적취병(積翠屛), 제3곡은 찬운봉(瓚雲峯), 제4곡은 커다란 바위인 진의강(振衣
岡), 제5곡은 옥경대(玉鏡臺), 제6곡은 월영담(月影潭), 제7곡은 회영암(淮纓巖), 제8곡은 명
옥탄(鳴玉灘), 그리고 제9곡은 재간정(在澗亭)이다.

왜정 때는 서울 근교 벚꽃 명소로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봄꽃놀이를 하러 왔다. 이때만 되
면 경성역(서울역)에서 임시 관광열차를 편성하여 우이동 부근인 창동역(倉洞驛)까지 운행했
는데, 창동역부터 여기까지는 걸어서 이동했다.
이처럼 서울 사람들과 귀족들의 눈과 마음을 시리게 해주었던 우이동계곡은 1970년대 이후 상
수원 보호구역이 되면서 계곡 전체가 금지된 계곡으로 꽁꽁 묶여 있다. 하여 우이동9곡 식구
들 상당수는 접근이 통제되어 제대로 더듬기가 어렵게 되었고, 그저 계곡 옆 신작로에서 바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2021년에 9곡 명소와 가까운 곳에 관련 안내문과 조망대를 설치
했으나 만경폭과 적취병 등은 너무 거리가 있어서 제대로 보기가 힘듬)
비록 사람들에게는 다소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 덕에 인간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렇게 청정하고 때 묻지 않은 구석을 자랑하게 되었다. 선녀 누님도 놀러올 것 같은 계곡이
저 밑에 간드러지게 유혹을 하지만 괜시리 잘못 발을 들였다가 벌금형의 고통을 받을 수 있다.

붙임바위 주변 계곡에는 청담폭포와 적취병이 있는데,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벼랑
과 바위들이 늦가을 단풍과 어우러져 일품 수채화를 자아내고 있었다.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보듯 해야 되는 아쉬움이 있으나 굳이 접근 통제의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대자연의
작품에 옥의 티가 되고 싶지는 않다.

붙임바위를 끝으로 도선사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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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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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정릉계곡 나들이 (형제봉, 보현봉, 청수천약수)

북한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 북한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봄나들이 ~~~ '

북한산 일선사에서 바라본 서울
▲  일선사에서 바라본 형제봉능선과 서울시내

영취사 5층석탑

형제봉 능선에서 바라본 보현봉

▲  영취사 5층석탑

▲  형제봉능선과 보현봉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을 하루 앞둔 어느 평화로운 봄날, 북한산(삼
각산) 형제봉능선 밑에 깃든 영취사를 찾았다. 영취사는 북한산성 대성문에서 정릉으
로 내려오면서 여러 번 거쳐간 인연이 있는데, 그곳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늙은 5층
석탑이 있다. 허나 그를 제대로 사진에 담은 적이 없어 이렇게 출동한 것이다.

북한산(삼각산) 기점의 하나인 정릉(貞陵) 코스는 어렸을 때부터 익혀온 길이라 이쪽
은 아주 잘 안다고 자부를 했었는데, 시작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 아주 초보적인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날이 초파일 직전이라 절까지 연등이 대롱대롱 달려있기 마련인데,
내가 빠진 길(정릉계곡~신성천약수터 방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만 했을 뿐, '조금만 가면 영취사로 가는 길이 나오겠지' 싶은 안
일한 생각으로 계속 고집을 부리니 신성천약수터와 이상한 능선길이 나온다. 이거 왠
능선인가? 싶어 살펴보니 글쎄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던가. 길을 완전히
잘못 들어선 것이다.
허나 형제봉능선에서 영취사나 정릉계곡으로 바로 빠지는 길은 헝클어진 수준의 비법
정길 외에는 없어 일선사입구까지 강제 등산을 해야 된다. 거기까지는 가야 영취사로
가는 법정 탐방로가 나온다. 하여 일정에도 없던 일선사(해발 560m)까지 강제로 덤으
로 보고 영취사로 내려가 5층석탑을 친견한 다음 정릉으로 원점 회기했다. 간단히 영
취사만 보려고 출동한 것이 잠깐의 실수로 아주 파란만장한 북한산 등산이 되버린 것
이다.


▲  두 암벽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북한산 정릉계곡 하류
(정릉탐방지원센터 서쪽)



 

♠  뜻밖에 인연들, 형제봉능선을 거쳐 일선사까지

▲  정릉계곡 하류에서 형제봉능선으로 인도하는 숲길

정릉 코스는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주요 기점의 하나로 도심과 매우 가깝고 교통
편 또한 착하여 이곳을 이용하는 등산/나들이 수요가 상당하다. 정릉동 북한산국립공원 종점(
110, 143, 162, 1020, 1113번 종점)에서 4~5분 정도 가면 정릉탐방지원센터가 마중을 하는데,
여기서부터 풍경은 180도 바뀌어 대자연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정릉계곡을 옆에 끼고 5~6분을 더 들어가면 다리 직전에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다리를 건너
면 정릉계곡 상류와 북한산성 보국문, 영취사로  이어지며, 서쪽 길은 형제봉능선으로 빠진다
. 허나 오랜만에 정릉 코스를 찾은 탓일까? 아니면 1살을 먹은 휴유증 때문일까? 판단을 잘못
하여 그만 서쪽 길로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 더 들어가야 영취사로 가는 산길이
나옴)
아무리 아는 길이라도 돌다리를 꼭 두들겨 패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뒷탈이 없는데, 자만 때
문에 뜻하지 않은 강제 고행의 길을 밟게 되었다.


▲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숲길

▲  빨간줄이 그어진 신성천(新盛泉) 약수터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숲이 매우 짙다. 게다가 사람도 별로 없어 고적하기만 하다. 초
파일 연등이 걸려있지 않아 이상하게 여겼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길을 임하니 완전히 숲
속에 묻힌 신성천약수터가 마중한다.
내 데이터에는 전혀 없는 곳이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이라도 한 모금 축낼까 했더니 안내문
에 빨간색 줄 2개(부적합 판정)이 매정하게 그어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다. 게다
가 봄가뭄으로 인해 걸려있는 바가지들이 무색할 정도로 물까지 말라버려 목도 축이지 못하고
바로 길을 재촉했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보현봉(普賢峰)
보현봉 밑에 일선사가 자리해 있고 봉우리 너머에 북한산성이 숨어 있다.


신성천약수터에서 5~6분 정도 오르면 낯설은 능선길에 이른다. '여기는 도대체 뭔가?' 두리번
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니 뜻밖에도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니던가. 그 길을 20여 분 오
르면 형제봉 밑도리에 이르게 되고 그 북쪽(형제봉3거리)에서 형제봉능선에 합류하게 된다.

형제봉(兄弟峰)은 평창동(平倉洞) 동쪽에 우뚝 솟은 북한산(삼각산) 남쪽 봉우리로 큰 형제봉
463m)과 작은 형제봉(461m)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형제처럼 다정하게 보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형제봉능선이라 부른다. 이 능선은 종로
구와 성북구(城北區)의 경계선 역할도 하고 있으며, 동서로 조망이 펼쳐져 썩 괜찮은 산길로
추앙을 받는다. 그 조망의 끝판왕은 보현봉 밑에 자리한 일선사이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칼바위능선
사진 가운데에 바위가 짙게 깔린 곳이 칼바위로 북한산에서 이름난
바위 능선길이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산 밑에 정릉동과 길음동을 비롯하여 성북구, 강북구, 중랑구, 동대문구,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구리시 등이 바라보인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동대문구, 아차산 산줄기, 강동구,
구리 지역


형제봉 능선에서 나의 목적지인 영취사로 가려면 천상 일선사입구까지 가야된다. 중간에 동쪽
으로 내려가는 헝클어진 수준의 비법정 탐방로와 비밀 샛길이 일루 오라며 유혹을 건네나 그
길의 속내를 알 수가 없고 괜히 조금이라도 빨리 가겠다고 금지된 그 길로 발을 들였다가 길
이 더 꼬일 수 있다.

형제봉 능선길은 부드러움과 각박함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각박하다고 하여 그렇게 절망
적인 길은 아니며 이 땅에 흔한 초급 능선길이다. 형제봉 북쪽에서 잠시 내리막길이 이어지다
가 다시 오르막길이 몇 배 이상으로 펼쳐지며,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느긋한 수준이다.


▲  푸른 옷을 두텁게 두른 형제봉(463m)
형제봉 정상은 접근이 가능하다. 허나 시간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고 통과했다.

▲  계단을 이루고 있는 형제봉 북쪽 능선길
능선 북쪽에 일선사가 자리해 있어서 평창동(동령폭포) 갈림길 이후부터는
길이 괜찮게 닦여져 있다.

▲  숲터널을 이루며 넓게 닦여진 형제봉 북쪽 능선길
숲의 등등한 기세에 뜨거운 햇살도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  일선사 입구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발에 불이 나도록 속도를 내며 오르니 어느덧 일선사입구에 이
르렀다. 여기서 왼쪽 길은 일선사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대성문 방면으로 그 길을 조금 가면
바로 오른쪽에 영취사, 정릉으로 내려가는 정식 탐방로가 있다.
여기서 '일선사를 보고 가는가? 그냥 통과하는가?'를 두고 잠시 갈등을 하였다. 아무리 햇님
의 근무 시간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시간은 벌써 17시가 넘었고, 일선사는 막연히 선학원 소속
의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땡기지가 않았지. 허나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어
찌 생긴 절인지 잠깐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여기서 일선사까지는 200m 거리, 그 산길의 끝에는 일선사가 일품 조망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인공티가 너무 거슬리는 대성문 방면 산길 (일선사입구에서 대성문 방면)
산길의 야성을 순화시키고자 인공티를 너무 과하게 넣은 것 같다. 죽도록 힘든
 구간이 아닌 이상은 흙길로 그냥 두는 것이 진정한 산길이 아닐까 싶다.


▲  일선사입구에서 일선사로 인도하는 산길
오색연등만 따라가면 별탈 없이 일선사에 이른다.



 

♠  서울에 있는 사찰 가운데 가장 조망이 우수한 절집, 절은 작지만
대도시 서울을 앞뜰로 삼은 ~ 북한산 일선사(一禪寺)


▲  일선사 대웅전(大雄殿)

일선사는 보현봉(普賢峰) 동쪽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튼 고적한 산사(山寺)이다. 첩첩한 산
주름에 묻힌 진정한 산사로 시내와도 멀리 거리를 둔 산속이라 제아무리 찰거머리 번뇌라도
감히 따라오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평창동 평창공원지킴터에서도 1시간 이상을 올라
가야 되며 정릉동 종점에서도 비슷한 시간을 내던져야 이를 수 있으니 이곳에 궁벽한 위치를
알만하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일선사는 북쪽과 서쪽은 보현봉으로 막혀있어 가파른 벼랑을 이루
고 있고, 남쪽은 낭떠러지에 가까우며, 오로지 동쪽에 바깥 세상과 이어지는 외줄 산길이 있
다. 절은 위치상 도심이 보이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규모는 비록 작지만 조망(眺望) 하나
는 천하 일품이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자연히 앞뜰로 삼고 있어 뜨락
또한 기가 막히게 넓다.
특히 서울 사찰 중 조망 맛집 1위를 거머쥔 산사로 가까이에 평창동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을 비롯하여 종로구, 중구, 성북구, 동대문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강동/송파구, 강남/
서초구, 동작/관악구, 금천구, 영등포구, 마포구, 관악산~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산줄기, 남
한산성까지 아낌없이 시야에 잡힌다. 절과 방향이 다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은평구, 서
대문구, 강서구, 양천구 등을 제외하면 서울의 상당수가 일선사에 몸을 보이는 셈이다.
그럼 조망 맛집 2위 사찰은 어딜까? 그곳은 400m 고지에 자리한 도봉산 원통사(圓通寺)로 도
봉구, 강북구, 노원구,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아차산 산줄기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조
망 맛집 3위 사찰은 310m 고지에 자리한 호암산 불영암(佛影庵)으로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
구, 광명시, 인천 지역 등이 바라보인다. (1~3위는 그곳을 다녀간 경험을 바탕으로 순위를 매
김)

일선사는 조망도 좋은 만큼 구름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서울 사찰 중 3번째로 하늘과 가
깝다. 제일 하늘과 맞닿은 절은 북한산 문수사(文殊寺)로 해발 640m에 자리해 있지만 조망은
조망 1~3위 절보다는 못하며, 2위는 도봉산 관음암(觀音庵)으로 해발 560~570m 고지이다. 그
다음이 이곳 일선사가 되겠다. 해발고도와 조망 부분에서 가히 서울 사찰 으뜸의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일선사는 언제부터 법등(法燈)을 켰을까?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일선사는 그저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내 생각과 달리 나이
를 제법 먹은 절이라고 한다. 절에서 들려주는 창건 설화에 따르면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
詵國師)가 보현봉 밑 보현굴(다라니굴)에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니 그것이 일선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허나 관련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그저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
다.
창건 이후 탄연(坦然)이 절을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는 없으며, 태조 이성계(李成桂
)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면서 서울(한양)로 콩 볶듯이 도읍을 옮기자 무학대사(無學大
師)가 보현사를 두고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터로 격하게 띄워주면서 태조의 명으로 중수했다
고 한다.
서울이 조선의 도읍이 된 이후, 서울 주변에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절(호압사, 개운
사, 사자암 등)이 많이 생겨났는데, 일선사도 그때 지어진 절이 아닐까 짐작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옛날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1600년 이후 서울을 지키
는 외곽 수호사찰로 인정되어 왕명으로 중창했다고 하며, 이후로 300년 이상 뚜렷한 발자국이
전하지 않아 조그만 석굴 암자 규모로 터를 유지하거나 얼마 가지 않아서 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0년에 이르러 절의 화주(化主)인 김만신행이 원래 보현굴 자리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지금의 자리에 절을 옮기고 절 이름을 관음사(觀音寺)로 갈았는데, 이를 통해 왜정 때 작게나
마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1957년 시인 고은<高銀, 법명 일초(一超)>)이 이곳에 머물며 절 이름을 도선대사의 '선'. 자
신의 법명인 일초의 '일'을 따서 일선사(一詵寺)로 갈았으며, 1962년 재단법인 선학원의 일원
이 되면서 가운데 한자만 바꾸어 지금의 일선사(一禪寺)가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정덕(幀德)
이 주지로 들어와 30년 동안 불사(佛事)를 일으켜 지금의 일선사를 이룩했다.
그는 1994년에 옛 법당을 밀어버리고 대웅전과 약사전, 요사를 새로 짓거나 증축했다. 그리고
많은 탱화와 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했으며, 절로 이어지는 길을 정비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약사전, 요사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절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고는 하나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산산히 사라져 고색의 유물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망은 가히 일품이라 그것으로 절의 부족한 부분이 많이 커버된다. 특히 대웅전은 어느 절
법당(法堂)에 못지 않은 큰 규모라 내심 놀랬다.
원래 절 자리에는 보현굴(다라니굴)이란 석굴이 있는데, 조선 초에 활약했던 기화함허(己和涵
虛)를 비롯해 많은 승려가 그곳의 신세를 졌다고 한다. 현재 절 자리는 1940년 이후이니 일선
사의 과거를 들추려면 보현굴 주변을 뒤집는 수 밖에는 없다.


▲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상
초파일을 맞이하여 미리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광합성 작용을 받고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 앞이 협
소하여 그나마 조금 트인 측면(동쪽)에 대웅전 현판과 출입문을 내어 좁은 측면을 정면으로
삼고 있는데, 건물 내부에는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석가여래3존상을 위시하여 칠성탱과 중생
들의 소망을 머금은 조그만 원불(願佛)이 가득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칠성탱(七星幀)

▲  대웅전 뒷쪽에 자리한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약사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하얀 피부의 작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중심으로 풍만하게 생긴 금동관세음보살상,
산신(山神)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등이 들어있는데, 이들은 20세기 후반에 마련된 것으로 보
통 산사에는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등 삼성(三聖)의 보금자리를 따로 두기 마
련이나 일선사는 자리가 협소하여 약사전과 대웅전에 나누어 배치했다.

▲  약사전 약사여래불과 약사후불탱,
관세음보살상

▲  산신 가족의 단란한 가족 사진
산신탱(山神幀)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①
종로구,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성동구, 송파/강동구 등


요사(寮舍) 동쪽에는 물통과 의자 등이 있는 쉼터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이곳은 조망
이 아주 좋은 자리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이 나의 발 밑에 펼쳐져 올망졸
망 펼쳐져 있어 잠시나마 천하의 주인이 된 듯 즐거운 기분이 든다. 이런 것이 바로 산을 타
는 재미의 하나이지. 허나 현실은 저 너른 땅에서 내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땅은 나의
작은 집 외에는 단 한 뼘도 없다는 것. 그것이 뼈저린 함정이다.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②
사진 중앙에 보이는 산이 내가 거쳐갔던 형제봉이다. 그 너머 길쭉한 산줄기는
북악산(백악산)이며, 그 너머로 종로구, 중구, 남산, 성북구, 성동구,
강남/서초구, 대모산,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③
형제봉과 북악산을 중심으로 인왕산,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마포구,
강남/서초구, 동작/관악구, 관악산, 호암산이 바라보인다.


일선사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초파일 준비로 승려와 보살 아줌마들이 꽤 부산했다. 낼 중생들
에게 제공할 공양밥과 국을 큰 솥에 미리 만들고 있었는데, 이곳 공양밥 맛이 제법 좋다고 한
다. 초파일 외에 동짓날에는 팥죽을 제공하며, 일요일 점심 시간(12~13시)에도 공양을 제공한
다고 하니 그때 이곳을 지날 일이 있다면 잠시 들려서 한 그릇 들고 가는 것도 좋다.

일선사에서 보현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비법정으로 묶여서 금지된 산길이 되었다. 그래
서 이제는 완전 막다른 곳이 되어 천상 왔던 길로 돌아나가야 된다. 그렇다고 금지된 길을 무
리해서 가지는 말도록.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유명한 말도 있고, 괜한 모험에 인생을 거는 것
만큼 무모한 것은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산6-1 (평창6길 79-141 ☎ 02-379-8697)


▲  일선사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길 (일선사입구 방면)



 

♠  늙은 석탑을 지닌 깊은 산골의 절집, 북한산 영취사(靈鷲寺)

▲  영취사 5층석탑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0호

일선사에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입구로 내려갔다. 여기서 정릉 방면 산길로 접어들어 원
래 목적지인 영취사로 내려갔는데 그 길이 속세살이만큼이나 제법 각박한 경사였다. 다행히도
내려가는 길이라 덜 힘들지 만약 이 길로 올라왔다면 제대로 땀을 뺐을 것이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별로 남지 않았고 지나가는 산꾼도 없는 상태라 걸음을 몇 배로 재촉하여
미끄러지듯 10분을 내려가니 인기척 소리가 조금씩 들리면서 숲 사이로 영취사 지붕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듣는 인기척만큼 썩 반가운 것은 없지~! 그렇게 1굽이를 내려가니 영취
사에 이른다. 이 산길은 영취사 경내를 거쳐가기 때문에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절을
경유해야 된다.

경내에 이르니 이곳 역시 초파일 준비로 조금은 부산해 보였다. 사람들이 연등을 달거나 청소
를 하면서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침 18시가 넘은 상태라 밥 연기도 모락모락 피어올라 나
의 시장기를 자극시킨다. 영취사도 초파일과 동짓날, 그리고 일요일 점심에 산꾼과 중생들에
게 공양밥을 제공한다. 비빔밥 또는 국수를 주고 있는데, 혹여 저녁공양이라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새가슴 마냥 요사 주변을 기웃거려봤지만 결국 먹지는 못했다. 예전에는 공양
1그릇 먹고 가도 되냐고 막 들이밀고 그랬는데 나이를 먹으니 점점 소심해지는 것 같다.

해발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영취사는 '절간답다'는 말이 아주 어울릴 정도로 고적한 산사이
다. 경내 주변이 죄다 숲이라 여기서는 하늘 밖에 보이지 않으며, 남쪽이 확 트여 형제봉능선
에서도 능히 바라보이는 일선사와 달리 숲에 푹 묻혀있어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정도
로 심산유곡이다.
허나 일선사와 달리 등산로가 경내를 지나가 주말, 휴일에는 지나가는 이들이 많다. 등산로가
접한 경내 밑부분에는 쉼터와 5층석탑이 있고, 거기서 1단계 올라가면 요사가 있으며, 다시 1
단계 오르면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  우중층한 대석(臺石) 위에 자리한 영취사 5층석탑

내가 영취사를 간만에 찾은 것은 경내에 서린 늙은 5층석탑을 보고자 함이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 석탑은 울퉁불퉁하게 생긴 커다란 대석 위에 작게 서 있는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히고 그 위를 연꽃무늬 석재로 마무리를 했다. 여기서 2중 기단과 5층
탑만 원래 것이고 나머지는 탑의 초라함을 달래고자 20세기 중반 이후에 새로 덧붙인 것들로
탑 자체는 아주 작은 수준이며 어쩌면 천하에서 가장 작은 석탑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원래 요사 앞에 기단부가 묻힌 상태로 있었다고 전한다. 문병대 박사가 직접 찾아와 그
를 평가하니 무려 고려 후기~조선 초기 석탑으로 밝혀졌다. 마침 서울에 토박이 석탑이 별로
없고 고려 말~조선 초기 탑이 매우 희귀하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어 이곳의 듬직한 꿀단지
가 되었다.
이후 탑은 보다 넓은 지금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여러 장의 돌을 높이 쌓아 대석을
다진 다음 조그만 탑을 올려 키를 높였다. 탑의 왜소함을 극복하고자 대석을 쌓았지만 오히려
대석이 너무 지나치게 커서 탑이 더욱 작아 보인다.
기단은 2중으로 밑 기단은 조금 높으나 고된 세월의 상처가 남아있으며, 손상된 부분 사이에
는 잡석을 끼웠다. 윗 기단은 밑 기단에 비해 높이가 약간 낮으며, 그 위에 5층 탑신을 올렸
는데, 윗층 옥개석(屋蓋石)과 연꽃무늬 석재는 새로 만든 것이다. 탑신은 1층만 달랑 남아있
고 윗층 탑신은 납작하여 무늬만 남은 실정인데,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으며, 1층 탑신 중앙에 감실(龕室) 같은 것이 뚫려 있어 불상을 봉안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은 두툼하나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흔적이 적지 않으며 머리 장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사라졌고 근래 만든 연꽃무늬 석재만 달랑 놓여있다.

기단부와 탑신의 구성법, 간략화된 옥개석 층급(層級) 표현 등을 통해 고려 후기~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토박이 탑으로 가치가 인정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동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기단과 탑신)

▲  북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늙은 5층석탑을 지니고 있는 이곳 영취사는 1962년에 신정옥(申貞玉)이 세웠다. 그는 1928년
7월 14일 충남 예산군 신례원에서 독립운동가 신현상(申鉉商)의 딸로 태어났는데, 불명(佛名)
은 대지행(大智行), 호는 초일(草一)로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수양녀(收養女)이기도 했으며,
1947넌에 마곡사(麻谷寺)에서 칩거 수양을 했다.
1972년 영취사 법당을 중건하고 요사를 신축했으며, 계속 절을 살펴주어 경내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의 남편은 강성진으로 삼보증권회장 및 대한증권업협
회장을 지냈으며, 자녀 또한 모두 사회에서 듬직한 지위를 누렸다.


▲  정면에서 바라본 5층석탑 (기단과 탑신)
중생들이 갖다놓은 작은 불상과 동자상들이 석탑에 기대어 앉아 그들만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고 있다.

▲  5층석탑 앞에 마련된 관불의식의 현장

5층석탑이 영취사의 유일한 보물이자 듬직한 꿀단지라 그 앞에 관불의식의 현장을 정성스럽게
닦아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은 초파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꽃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의식
의 현장에 주인공인 아기부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1년 만에 외출을 할 생각에 그도 마음이
너무 설레서 긴장이 된 모양이다. 

▲  영취사 요사 (선방, 공양간)

▲  대웅전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아주 조촐한 모습의 용왕각(龍王閣)

▲  용왕각에 봉안된 용왕탱

5층석탑에서 대웅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오른쪽에는 선방(禪房)과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
을 도맡고 있는 요사가 있고, 왼쪽에는 장난감 집처럼 아주 조그만 용왕각이 있다. 바다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이런 첩첩한 산골에 바다 용왕(龍王)의 거처인 용왕각이라...? 옛날에 이곳
이 바다였을까?
허나 용왕이라고 꼭 바다만 관리하라는 법은 없다. 그는 바다를 비롯해 천하의 모든 물을 관
리하는 존재라 물이 늘 풍족히 나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의 거처를 만들어 봉안한 것이다.
용왕각 옆에는 샘터가 있으나 물이 거의 없었고, 대신 요사 밑에 따로 샘터를 만들어 물을 제
공하고 있다.

▲  대웅전 - 기존 맞배지붕 건물에
1칸을 덧붙인 구조이다.

▲  삼성각(三聖閣) - 산신과 칠성,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서울
이곳도 결코 낮은 곳은 아니지만 삼삼한 숲의 방해로 겨우 일부만
시야에 들어온다.

▲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경내 (바로 밑 지붕이 요사)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3존상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3존상을 이루고 있다. 후불탱이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으며, 그 좌우로 신중탱 등 온갖 탱화들이
대웅전 내부를 환하게 비쳐준다.


경내 높은 곳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건물이 다들 조그만 수준으로 1974년 이후
에 중건을 하여 아직 고색의 때는 익지 못했는데, 대웅전 불단에는 벌써부터 갖다놓은 온갖
공양물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영취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1 (☎ 02-911-0005)


▲  대지행 신정옥 영취사 창건 공덕비
창건주 신정옥을 기리고자 절에서 정성을 다해 지은 공덕비이다.



 

♠  북한산(삼각산) 마무리

▲  한데 뭉쳐진 커다란 바위들 (영취사 남쪽)
바위의 모습이 썩 예사롭지가 않아 보여 예로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절찬리에 쓰였던 듯 싶다. 대자연이 그어놓은 주름선들도 멋지고 말이다.


영취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벌써 18시 반이 넘었다. 나날이 길어지는 연장 근무에 입이 한참이
나 삐죽 나왔을 햇님 덕에 아직까지 환한 낮을 유지하고 있지만 산속이 도시보다 밤이 일찍
온다. 그래도 그날의 목적을 모두 이루었고, 거기에 일선사라는 강제 보너스도 받았으니 보람
찬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영취사를 뒤로 하고 정릉계곡을 따라 정릉 기점으로 내려갔다. 이제는 오로지 내려가기만 하
면 되는지라 힘든 것은 없으며, 영취사에서 조금 내려가면 삼봉사 입구가 나온다. 이곳은 딱
히 끌리는 것이 전혀 없는 현대 사찰이라 그냥 통과했다.


▲  속세로 인도하는 정릉계곡 산길 (삼봉사 입구 부근)

▲  계곡과 나란히 이어지는 산길 (삼봉사 입구 남쪽)

▲  가늘게 실타래를 풀어내는 작은 폭포 (폭포 이름은 없음)

▲  푸른 숲터널을 이루는 정릉계곡 산길

▲  마이산(馬耳山) 탑사 돌탑의 후예일까? 거대한 돌탑의 위엄
이곳을 오간 수많은 사람들이 소망 하나를 깃들여 돌을 얹혔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세모 모양의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소망을 향한
중생들의 집념이 오랜 세월을 두고 그려놓은 탑이다.

▲  청수천약수<淸水川藥水, 청수천샘터, 청수약천(淸水藥泉)>

정릉계곡 중류 쯤에 이르면 북한산(삼각산)의 유명 약수의 하나라는 청수천샘터가 마중한다.
샘터의 이름인 '청수'는 정릉계곡의 별칭으로 '청수골','청수계곡'이라 불리기도 하며 계곡
하류에 있었던 유명한 고급 요리집 청수장(淸水莊)의 이름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청수천샘터는 2개의 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쪽은 계곡 암반에서 나오고, 오른쪽은 바위
밑에서 나온다. 어느 것을 마셔도 상관없으며 그건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나는 물 욕심
이 많아서 양쪽 물을 모두 마셔보았는데 딱히 특별한 맛은 없는 자연의 물맛 그대로이다.
이곳은 물이 풍부하여 물이 마를 날이 거의 없을 정도이며 관리도 썩 잘되어 있는 편이다. 샘
터 앞에는 의자, 정자 등의 쉼터가 베풀어져 있으며, 샘터 옆구리를 흐르는 계곡 풍경이 바위
와 어우러져 걸쭉한 멋을 자아내고 있다. 계곡 물도 티 하나 없이 맑고 수심도 얕아서 성하(
盛夏)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쿨하게 풍덩하고 싶지만 상수원 보호와 계곡 보호를 위해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여기서 계곡 종점(정릉 기점)까지 계속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있으니 괜히 발도 들이지 말기
바라며, 계곡에 정 들어가고 싶다면 청수천샘터 윗쪽으로 가야 된다. 그곳은 해방된 공간이나
계곡 풍경은 다소 별로이다.

▲  청수천약수 왼쪽 샘 (계곡 옆)

▲  보호각을 갖춘 청수천약수 오른쪽 샘


▲  청수천약수 곁을 흐르는 정릉계곡
청수천약수를 빚은 정릉계곡은 청정한 빛을 띄우며 속세로 흘러간다.
여기서부터는 접근이 금지된 계곡이니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자~~!

▲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청수천샘터 옆 계곡 (수심이 1자도 안됨)

▲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비추는 정릉계곡 산길 (청수천샘터 남쪽)

▲  정릉계곡 하류 산길 (보국문 갈림길 직전)

▲  암반들이 층층이 주름진 정릉계곡 하류
조그만 폭포들이 주름진 바위를 타고 속세로 신나게 흘러간다. 산행을 시작했던
정릉으로 다시 내려오니 시간은 19시. 이렇게 하여 초파일 전날
북한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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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 북한산 늦봄 나들이 (빨래골, 삼성암, 흰구름길) '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

▲  삼성암(삼성사)

▲  빨래골 숲길


 

북한산(삼각산, 836m)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으
로 나의 오랜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그의 품을
드나들면서 그가 품고 있는 수많은 명소를 섭렵했지만, 아직도 미답처(未踏處)가 무수히
남아있어 나를 무척 애를 태우게 한다.
미답처 식구 중에는 북한산 동쪽 자락(수유/우이지구)에 안긴 삼성암과 빨래골도 포함되
어 있는데, 이들을 뼛속 깊이 새겨두었다가 5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길을 나섰다.

빨래골은 도봉동 집에서도 무척 가까운 곳이라 여유롭게 15시에 길을 나섰다. 수유역(수
유리)으로 이동하여 강북구 마을버스 03번(빨래골↔수유역)에 나를 담아 수유1동 구석에
자리한 빨래골 종점으로 보냈다.


▲  북한산(삼각산)의 싱그러운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 빨래골공원지킴터
여기서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과 만난다.


 

♠  북한산 빨래골

▲  봄가뭄으로 부실한 모습을 비추는 빨래골 (수유리 빨래터)

빨래골은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묻힌 조그만 골짜기이다. 작은 냇가 같은 모습으로 딱
히 유별난 구석은 없으며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을 거닐 때 아주 잠깐 스쳤을 뿐, 제대로 살
펴본 적은 없었다. 그저 골짜기 이름을 통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동네 아낙네
들이 빨래를 하던 곳으로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곳이 왜 빨래골이 되었을까?

북한산 동쪽 밑에 자리한 수유동(水踰洞)은 북한산 계곡 물이 많아 '무너미'라 불렸다. 무너
미란 저수지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한쪽 둑을 조금 낮추어 물이 넘치면 자연히
흐르게끔 만든 것으로 물이 풍부하다보니 일찌감치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마을이 이제는 서
울 동북부 부도심이자 강북구(江北區)의 중심지로 어엿하게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유동(
수유리) 아낙들이 여기서 빨래를 해서 빨래골이 된 것일까? 물론 그들도 빨래를 하긴 했으나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다.

조선 왕궁에는 궁궐의 허드렛일을 처리하던 무수리들이 많았다. 그들은 제왕(帝王) 내외와 왕
족들,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내시)과 상궁(尙宮), 궁녀, 군사의 옷을 개천(청계천)이나 인근
산골에서 빨았는데, 궁궐 식구들이 많다보니 하루에 나오는 빨래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들 빨
래 중에는 속옷 등의 예민한 옷이나 특별히 다뤄야 되는 빨랫감도 많아 청계천에서 같이 처리
하기가 그랬다. 하여 그런 것들은 특별히 이곳 빨래골에서 처리를 했다. 그래서 '빨래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지역 이름을 따서 '수유리 빨래터'라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그나마 가까운 궁궐인 창경궁(昌慶宮)까지는 약 7km 거리인데, 계곡 물이 풍부하고 매
우 구석진 한적한 곳이라 이곳을 고른 것 같다. 어쨌든 무수리들은 무거운 빨랫감을 짊어지고
동소문(東小門, 혜화문)을 나와 단장의 미아리고개(또는 아리랑고개)를 넘어 여기까지 낑낑대
고 올라왔다.
그들은 빨래를 마치면 잠시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궁궐에서 누리기 힘든 자유를 만끽했고, 한
여름에는 조촐히 물놀이도 즐겼을 것이다. 비록 궁궐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고단하지만 휴
양도 누릴 수 있으니 일종의 휴가나 마찬가지라 무수리들의 선호도 대단했을 것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의 휴식시설도 있었다고 전하며, 환궁(還宮)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인근 화계사(華溪寺)에서 숙박 신세를 지기도 했다.

* 빨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일대


▲  윗쪽에서 바라본 빨래골

▲  2004년에 심어진 빨래골 표석
이곳 빨래골은 궁궐 무수리 뿐 아니라 지역 아낙들의 즐겨찾기 빨래터였다.

▲  녹음(綠陰)이 짙은 삼성암 숲길
속세의 번뇌와 먼지를 털기에는 좋은 길이다.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람에 번뇌를
실어 멀리 날려보내고 싶으나 그 번뇌가 너무 무거워 결국 내가 내려가는
길목에 매복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성암 일주문(一柱門)

빨래골 숲길을 오르면 삼성암으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경사는 그리 각박
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더위로 인해 조금은 지친다.
자존심을 곱게 접고 그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삼성암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한다. 오르막길
에서 봐서 그런지 한층 웅장해보이는데,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는 일주문 현판에는 '삼각산 삼
성암'이 아닌 '삼각산 삼성사'라 쓰여있다. 근래 암(庵)에서 사(寺)로 격을 높이면서 삼성사
를 칭하고는 있으나 속세에서도, 절에서도 삼성암이란 이름을 많이 쓴다. (심지어 삼성암 홈
페이지에도 삼성암이라 나옴)


▲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만월당 현종종사탑(滿月堂 玄宗宗師塔)

일주문을 지나 한 굽이 오르면 숲속에 때깔이 고운 부도<浮屠, 승탑(僧塔)> 2기와 비석이 뜨
겁게 눈길을 보낸다. 그들 중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맵시가 고운 탑은 '만월당 현종종사'의 사
리가 담긴 승탑으로 만월당은 20세기 후반, 삼성암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이
다. 그러다보니 그의 제자와 신도들이 크게 정성을 기울여 아름다운 승탑을 지었다.

◀  보광당 중현대선사비(寶光堂 重玄大禪師碑)
중현대선사(박중현)는 왜정 후기에 삼성암
대방을 지은 승려이다.

◀  본공당 성학대선사탑(本空堂 性學大禪師塔)
본공당은 1961년 이후 만월당을 도와
여러 건물을 지은 승려이다.


▲  활짝 열린 삼성암 정문


 

♠  북한산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는
삼성암(三聖庵, 삼성사)

▲  삼성암 외경

삼성암은 빨래골 상류 숲속에 묻힌 조그만 산사로 1872년에 고상진(高商鎭) 거사가 창건했다
고 전한다. 원래 삼성암 자리에는 천태굴이란 조그만 굴이 있었는데, 북한산(삼각산)에 숨겨
진 기도처로 많은 승려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천태굴이란 이름은 삼성암이 독성도량을 칭
한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임)

19세기 후반, 서울에 살던 박선묵은 16세에 불교에 귀의했다. 그는 1870년 봄, 고상진, 유성
종 등 7명과 이곳 천태굴에 들어와 3일 동안 독성기도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이곳의 지세가
절을 지으면 딱 좋은 터요!'
절을 지을 것을 제안, 2년 동안 준비하여 1872년 봄, 여러 칸의
건물을 짓고 작은 절이란 뜻에 '소난야(小蘭若)'라 하였다. 이후 주변 산지를 조금씩 매입했
고 1881년에 독성각을 장만해 절 이름을 삼성암으로 갈면서 본격적으로 독성도량을 칭했다.

1936년 봄, 한동운(韓東雲)이 신도 김용태의 지원으로 칠성각을 다시 짓고, 돌다리와 계단을
닦았으며, 요사를 수리하고 기와를 바꾸는 등 절의 규모가 한층 커졌다. 허나 1942년 7월 폭
우의 희롱에 잔뜩 흥분한 뒷산이 산사태를 일으켜 절을 덮치면서 그만 폐허가 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계사 주지 박회경(朴會鏡)이 중창의 뜻을 밝혔고, 삼성암 승려 박중현
(보광당), 김성섭 등과 함께 쓰러진 절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 김용태가 목재를 지원했고, 인
근의 여러 절이 흔쾌히 도움을 주어 1943년 3월 대방 등 12칸을 세웠으며, 그 기념으로 승려
김태흡(金泰洽)이 '화계사삼성암중건기'를 지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독성각을 다시 세웠다.
현재의 가람은 1961년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본공당, 세민(世敏), 현종(만월당) 등이 계속해
서 규모를 불렸다. 세민은 주지가 되자 대웅전을 고치고 범종루를 지었으며, 현종이 그 마무
리를 지어 지금의 삼성암을 이루게 되었다. 근래에 '사(寺)'로 격을 높였으나 여전히 삼성암
으로 많이 불린다.

삼성암은 초창기부터 독성도량을 칭했다. 그래서 중부 지역의 이름난 독성 기도도량을 자처하
고 있고 그 명성을 누리고 있는데, 독성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 독성기도를 하러 많은 이들
이 온다. 아직 절의 내력도 짧고 문화유산도 빈약하니 독성도량을 내세워 절의 존재를 천하에
홍보하는 것이다. 나 역시 삼성암의 이름 3자만 아련히 듣고 있었을 뿐, 관심도 보이지 않다
가 그런데로 묵은 절임을 알고 뒤늦게 살짝 찾아온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독성각, 명부전, 칠성각, 요사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
으며, 겉보기와 달리 건물도 제법 있고, 면적도 넓다. 소장 문화유산은 아직 없으나 1908년에
조성된 산신탱과 철원(鐵原) 심원사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 그리고 상궁윤씨의 헌답기
념비 등이 절의 100년 내력을 살짝 귀뜀해준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숲속에 짙게 감싸여 있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기분이며, 사람
들의 발길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고적한 산사의 멋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바람에 잠을
깬 풍경물고기의 풍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산164-5 (인수봉로23길 235 ☎ 02-988-9300, 1996)
* 삼성암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청기와를 눌러쓴 삼성암 명부전(冥府殿)

활짝 열린 정문을 들어서 온갖 봄꽃이 미소 짓는 오르막 길을 오르면 청기와를 지닌 2층 명부
전이 나온다. 2층이긴 하지만 1층은 종무소(宗務所) 등으로 쓰이고 있어 2층이 진짜 명부전인
데, 원래 이름은 지장전(地藏殿)이었다. 그 뒷쪽에는 요사, 선방(禪房) 등이 자리해 있고, 옆
에는 범종각이 있다.


▲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이 담겨져 있다.

▲  북한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샘터

▲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영월각(소법당)


▲  탐스럽게 익은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약간은 통통해 보이는 관세음보살 누님이 어진 표정으로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  청기와로 단장된 대웅전(大雄殿)

명부전에서 1단 더 오르면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나온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머리에 푸른 청기와를 입혀 고급지게 꾸몄으며,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과 철원 심원사(深
源寺)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그곳 천불전(千佛殿)에 봉안된 천불(千
佛)의 하나였으나 6.25전쟁으로 심원사가 파괴되자 승려들이 부랴부랴 그것을 챙기고 이곳으
로 넘어왔고, 그 불상을 아미타불로 삼아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 서울에
는 심원사에서 넘어왔다는 불상과 보살상이 여럿 있어 심원사가 왕년에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허나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온 나는 그만 대웅전 내부를 살피지 않고 지나쳤다. 모두 근래
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불상과 불화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남쪽에는 삼성암의 자랑
인 독성각이 있고, 북쪽에는 칠성각과 관세음보살상, 헌답기념비 등이 있다.


▲  오색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일찌감치 오색 연등으로 대웅전 뜨락을 곱게
수놓았다. 하늘을 훔친 연등의 위엄으로 대웅전 머리는 가려져 마치
자욱한 하얀 안개로 산 윗부분이 가려진 것 같다.


▲  바위 위에 자리한 '상궁 청신녀(淸信女) 윤씨 실상행(實相行)
헌답기념비(獻畓紀念碑)'
약간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조그만 비석으로 구한말에 상궁 윤씨가 전답을
시주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그 전답은 삼성암의 살을
찌우는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좌측 안쪽에는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의 보금자리로 '칠성각' 현판
외에 주원영 거사가 쓴 '영모각(靈母閣)' 현판도 내밀고 있는데, 여기서 '영모(靈母)'는 산신
할매의 다른 표현 같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지니고 있는데, 19세기 말
에 지어진 것으로 1936년에 수리한 것을 근래에 산뜻하게 청기와를 입혔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벼랑이 바짝 붙어있어 산사태에 다소 취약해 보이는데, 1984년 여름 장마
의 희롱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적지 않은 흙과 물이 거세게 칠성각을 향해 밀려왔다. 붕괴 직
전에 놓였으나 뿌리채 뽑혀 떠내려오던 소나무 1그루가 마치 문어가 감싸듯 그 줄기와 뿌리가
칠성각을 감싸 무너지지 않게 지켜준 이변이 발생했다. 우연인지 칠성/산신의 가호인지는 모
르겠으나 어쨌든 산신각은 위기를 모면했고, 절에서는 그 소나무를 치우고 3일 동안 산신 기
도를 올렸다.


▲  등장 인물이 많은 칠성탱 (왜정 때 그려짐)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고색이 느껴지는 산신탱은 1908년 석옹 철유(石翁 喆裕)가 출초(出草, 초안을 그림)하고 두흠
(斗欽)과 윤오(允旿) 등이 참여해 구산동 수국사(守國寺)에서 그린 것으로 나중에 삼성암으로
넘어왔다.
붉은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산신은 호랑이에 기대 앉아있는데, 꼬랑지를 살랑살랑
거리는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하다. 산신의 왼손에는 잘생긴 부채가 있고, 그들 뒤에
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심원사에서 넘어온 아미타불을 제외하면 경내에서 가
장 늙은 보물로 아직 그 흔한 지정문화재 등급은 얻지 못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독성각(獨聖閣)

대웅전 우측 벼랑 위에는 삼성암의 얼굴이자 후광(後光)인 독성각이 걸려 있다. 보통 절에서
산신각이나 산신이 봉안된 삼성각(三聖閣)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마련이나 삼성각
은 독성도량답게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거처인 독성각을 가장 하늘 가까이에 두어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독성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쓰고 있
다. 1881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전하며, 1942년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7월에 다시 지었
다. 현재 건물은 근래 손질된 것으로 지형적인 탓에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정면에 유리창을
내어 비록 좁지만 경내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들어앉은 위치가 경사가 각박하고 자리가 협
소해 지그재그로 돌계단을 내었는데,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계단이 우중층하니 주의가 좀 필
요하다.


▲  독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옆구리

▲  목각으로 이루어진 독성탱

독성각에는 나무로 조각되어 곱게 채색을 입힌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그림 가운데에 두광(
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가 서 있으며, 독성 좌우에는 늙은 큰 소나
무가 있고, 뒷쪽에는 독성의 활동 무대인 천태산(天台山)이 주름진 선을 이루고 있다.

독성각이 19세기 후반부터 있던 것으로 보아 그와 연배가 비슷한 독성탱이 있었을 것이나 지
금 독성탱은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 못했다. 삼성암은 독성을 주
인으로 삼아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으며, 중부 지방 제일의 독성 도량을 자처하고 있지만 역시
나 아는 사람만 찾을 뿐이다. 나도 이곳에 오기 얼마 전에야 겨우 그 사실을 접했다.

독성탱 앞에는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조그만 원등(願燈)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이 강인한 협동심으로 몸을 불사르며 독성각 내부를 환히 밝힌다.


▲  마치 자수를 놓은 듯, 꽃잎과 새 등이 그려진 독성각 우물천정

▲  삼성암을 뒤로하며... (일주문 부근)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  삼성암 일주문 밑에 자리한 세심천 약수터

그날의 목적지인 삼성암을 둘러보고 뿌듯한 마음을 품으며 절을 나왔다. 다음 인연이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때가 되면 이번에 놓친 대웅전의 조그만 아미타불을 꼭 친견하고
싶다. 
절을 뒤로 하며 일주문에 이르니 부근에 세심천약수터가 있다. 산에 왔다면 뫼가 베푼 약수는
꼭 마셔봐야 그 산의 맛과 마음을 아는 법,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들이킨다. 허
나 봄가뭄으로 물이 답답하게 나와 조그만 바가지를 채우는데 꽤 인내를 요했다. 삼성암은 그
래도 물이 넉넉했는데, 이곳은 그렇지가 못하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오랫동안 동네 사람들의 몸
풀기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약수터를 나와 빨래골로 내려가지 않고 화계사로 질러가는 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숲에 묻힌
그 길을 정신없이 내려가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이 모
습을 비춘다.
북한산둘레길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패산(賜牌山)의 밑도리를 지나는 21개
구간, 71.5km의 장대한 산길인데, 삼성암 입구와 빨래골을 지나는 길은 그 둘레길의 일원인
흰구름길이다. 이름도 참 어여쁜 흰구름길(북한산둘레길 3구간)은 이준열사묘역입구에서 북한
산(삼각산)과 속세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북한산생태숲(성북생태체험관)에 이르는 4.1km의 산
길로 구름을 만날 것 같은 길 이름과는 달리 현실은 해발 100~150m를 왔다갔다하는 구름도 만
질 수 없는 얕은 높이이다. 그러니 괜히 이름에 속지 말자~~!

흰구름길은 북쪽으로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 서남쪽으로는 솔샘길(둘레길 4구간)과 이
어지며, 그리 각박한 경사가 없는 정말 착한 산길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코스라 마실 삼아
가다보면 길게 잡아도 1시간 20분 내외면 완주할 수 있는데, 이 구간에는 화계사(☞ 관련글
보기)와 본원정사(☞ 관련글 보기), 삼성암 등의 오래된 절과 냉골, 빨래골 등의 계곡, 조병
옥(趙炳玉, 1894~1960)박사묘, 구름전망대 등의 명소가 있어 무작정 앞사람의 뒷통수만 보며
산길만 걸을 것이 아니라 이들을 여럿 겯드려서 거닐면 정말 영양가 높은 둘레길 산책이 될
것이다.

흰구름길 구간에는 냉골(화계사와 본원정사 중간)이란 깊은 골짜기가 있다. 도로가 냉골 윗쪽
에 자리한 영락교회기도원까지 닦여져 있어 차량들도 마음 편히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냉골
공원 지킴터에서 칼바위능선으로 조금 오르면 현대사의 주요 인물인 유석(維石) 조병옥박사의
묘소가 있다.

또한 화계사 남쪽 산자락에는 속세를 향해 고
개를 든 3층짜리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둘레길의 이름을 따서 구름전망
대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구름까지 닿는 높이
는 아니다. 전망대 꼭대기까지는 계단이 빙글
빙글 늘어져 있으며, 20m 내외의 높이인 전망
대 꼭대기에 올라서면 강북구와 도봉구, 성북
구, 노원구를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동쪽의
주요 봉우리와 도봉산, 수락산(水落山), 불암
산(佛巖山) 등이 거침없이 들어와 조망이 제
법 일품이다.


◀  나무로 지어진 구름전망대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오른쪽 산줄기)

녹색 물결이 일렁이는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 그 너머로 이 산의 대표 봉우리인 백운대(
白雲臺, 북한산 꼭대기)와 인수봉(仁壽峯)을 비롯해 북한산 동쪽 봉우리 능선이 흔쾌히 시야
에 들어온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우이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 왼쪽에 보이는 산이 도봉산,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쌍문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 그 오른쪽이 불암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미아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미아동, 길음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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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닦여진 흰구름길 (화계사 남쪽)

▲  화계사 직전 (흰구름길과 만나는 구간)

간만에 찾은 흰구름길은 화계사까지만 거닐었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슬슬 임박했고 종종 왔
던 곳이라 그렇게까지 무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멀리 가고 요란하게 간다 한
들 그 일정의 끝은 언제나 집이다.
이렇게 하여 삼성암을 겯드린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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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2코스 순례길, 구천계곡 여름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선생묘, 가인 김병로묘, 단주 유림묘)

 


' 북한산 구천계곡, 순례길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신익희 선생묘 주변)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  신익희 선생묘

▲  유림 선생묘


 

♠  북한산 구천계곡에 숨겨진 옛 분청사기 가마터
수유동(水踰洞) 분청사기 가마터 - 서울 지방기념물 36호

▲  밑에서 바라본 분청사기(粉靑沙器) 가마터

1년의 절반이 허무하게 저물고 나머지 절반이 막 시작되던 7월 첫 무렵, 북한산(삼각산) 구
천계곡 주변에 숨겨진 여러 명소와 숨바꼭질을 하였다.
북한산(北漢山)은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지금까지 수백 번 이상을 안겼으나 아직도 미
답처(未踏處)들이 적지 않다. 하여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신익희 선생묘 서쪽 숲에
숨겨진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를 찾은 것인데, 그거 하나만 보기에는 무척 허전할 것 같아
서 주변에 있는 애국지사의 묘역 여럿을 후식으로 둘러보았다.

북한산 수유동과 우이동 산자락에는 20세기 초/중기에 활약했던 애국지사의 묘역이 많이 있
으나 정작 가본 곳은 손병희(孫秉熙) 선생묘 뿐이다. 암덩어리 같은 근/현대사에 관심이 거
의 없다보니 소중한 백신 같은 그들에게도 딱히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카데미하우스 종점(강북구 마을버스 01번 종점)에서 신익희 선생묘로 이어지는 길(4.19로
32길)을 가다가 그 묘역 입구에서 오른쪽(북쪽) 숲길로 조금 들어서 왼쪽(서쪽) 산길을 넘으
면 근래 천하에 공개된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가 활짝 마중을 한다. (이정표가 잘되어있어
찾기는 쉬움)


▲  윗쪽에서 바라본 분청사기 가마터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는 북한산(삼각산) 동남쪽 자락으로 구천계곡 바로 북쪽이다. 구천계
곡과 도선사(道詵寺) 밑인 우이동계곡 주변에 조선시대 가마터가 많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들
중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고 이렇게 정비까지 받아 천하에 개방된 존재는 오로지 이곳이 유
일하다. 나머지는 세월을 원망하며 죄다 숲속에 묻혀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찾기도 어렵다.

이곳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잠깐 등장했던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가마터이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중기에 짧게 운영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서울(한양)과 아주 가까워 왕족과 귀
족들의 분청사기 수요를 충당하느라 가마터 굴뚝의 연기는 마를 날이 없었다. 이후 분청사기
의 인기가 하락하고 주변에 괜찮은 가마터들이 생겨나면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15.6도의 경사를 지닌 무계단식 단실요<單室窯, 아궁이의 열이 경사지를 옆으로 지나면서 그
릇을 익힌 후,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로 길이 19.8m, 최대 너비가 1.5m에 이르는 커다란
가마이다. 가마는 벽과 천장을 돌과 점토로 쌓아 다졌는데 가마 입구인 회구부(灰丘部)와 아
궁이, 연소실(燃燒室), 소성실(燒成室), 폐기장, 온돌 등이 확인되었다.
가마는 앞부분은 잘 남아있으나 뒷부분은 상당수 손상되어 붉게 탄 바닥만 확인되었다. 아궁
이는 타원형으로 길이 1.6m, 내폭 1.3~1.6m, 깊이 0.9m 크기이며,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에는
높은 불턱이 있다. 소성실은 가늘고 길쭉한 모습으로 여러 자기편이 나왔으며 폐기장은 아궁
이 우측에서 1.5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온돌도 발견되었는데 길이 3.2m, 폭 2m
정도로 자연석을 이용해 조성되었으며, 가마가 문을 닫은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옆에서 바라본 분청사기 가마터

이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도기와 자기, 흑유자, 도침,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도기류는 접시
와 발이 제일 많이 나왔고 잔, 배, 호, 매병 등도 조금씩 나왔으며 주요 유물로는 도기방상
씨편(도깨비 문양 비슷한 것), 청자상감용문매병편, '上'과 '德'이 새겨진 자기편, 동전 등
이 있다.
상감청자(象嵌靑瓷)에서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도자생산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평
가되어 2011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했으며 2014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손질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가마터는 보존을 위해 겉면에 산뜻하게 풀을 씌워놓았다. 하여 가마터 흔적은 저 안에 고스
란히 묻혀있다. 가마터 동쪽에는 조촐하게 쉼터를 닦아 쉴 구석을 마련해주었는데, 이곳의
존재감이 아직은 미약하여 인적은 드물다. 하여 조촐하게 사색을 즐기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가마터 남쪽으로도 산길이 나있으며 그 길은 자연관찰로로 구천계곡을 거쳐 아카데미하우스
로 이어진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127-1


▲  신익희 선생묘 입구
저 숲길의 끝에 해공 신익희 선생의 유택(幽宅)이 둥지를 틀었다.


 

♠  구천계곡 주변에서 만난 독립 애국지사의 묘역들

▲  신익희 선생 묘 직전 계단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왔던 길로 돌아나가 신익희 선생의 묘역을 찾았다. 우리 귀에 너무나도
숙한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 그는 누구일까?

신익희는 평산신씨 가문으로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6남 중 막내
로 자는 여구(汝耉), 호는 해공이며, 중원대륙에서 사용했던 이명(異名)은 왕해공(王海公).
왕방오(王邦午)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익히고,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한 뒤 동경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들어갔다. 유학 시절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여 총무, 회장 등
을 역임했으며 학지광(學之光)이란 잡지의 발간을 담당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고향 광주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열었으며, 중
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부터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으며, 1919년에는 해
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지도자와의 연락을 담당하여 만주, 북경, 상해 등을 오갔다. 그러
던 중 문창범(文昌範), 홍범도(洪範圖)와 연락을 취하고자 만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
고 돌아오던 중, 평양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와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래서 제자인 강기덕(康基德),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해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하니 그것이 제2차 독립만세시위이다. 이 시위는 3.1운동의 지방 확산에 크
게 기여했으나 그로 인해 왜정의 수배를 받게 되자 급히 상해로 망명했다.


▲  신익희 선생 묘 - 등록문화재 520호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헌정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했으며 내무
차장, 외무차장, 국무원비서장, 외무총장 대리, 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중원대륙 세
력과 합작해 왜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중국국민당에 가담하여 중장(中將)이 되었으며, 조
선과 중원의 청년 500명을 모아 유격대인 분용대(奮勇隊)를 조직, 군사훈련을 시키며 본토
진입을 꾀했으나 신익희를 돕던 호경익(胡景翼)이 1924년 사망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하여 장개석(蔣介石)을 찾아가 한,만 국경에 왜군을 토벌해야 된다며 협조를 요청했으나 뜻
을 이루지 못했다.
1929년 한국혁명당을 창당하고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해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했으며 '우리
의 길'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중원대륙에 살던 동포들에게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심어주었
다.

그는 단일정당으로 민족의 힘을 모아 왜를 때려잡아야 된다고 역설하며 1932년에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의열단(義烈團), 한국광복동지회 대표와 협의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
對日戰線統一同盟)이란 동맹 단체를 탄생시켰다. 거기서 그는 김규식(金奎植), 박건웅(朴建
雄)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자신의 한국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을 합쳐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했으며, 1935
년 7월, 남경 금릉(金陵)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신한독립당(윤기섭), 의열단<김
원봉(金元鳳)>, 조선혁명당(최동오), 한국독립당<조소앙(趙素昻)>, 대한독립당(김규식) 등 5
당 통합을 이끌어내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허나 1937년 1월 제2차 전당대회로 비(非) 의
열단 계열의 인사들이 탈당하면서 세력이 위축되고 말았다.

1937년 여름, 왜가 중원대륙 침공을 본격화한 이른바 중일전쟁이 터지자 그는 조선민족전선
연맹 결성에 참여했고, 중원대륙 곳곳을 돌면서 대일항전을 지도했다. 그리고 1938년 9월에
조선청년전위동맹에 가담했으며, 1939년 8월 27일 김구와 김원봉의 주도로 사천성(四川省)
기강에서 광복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7당 통합회의가 열리자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허나 그 7당 통합도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의용대 병력이 있는 낙양(洛陽)으로 가서 김성숙(金星淑)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
합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이들을 지도하면서 1941년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1943년 4월, 대한민국 잠행관제에 의해 설치된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 엄항섭, 유
림(柳林) 등과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전계획의 수립과 실행에 나섰으며, 1944년 5월 임시
정부 연립내각 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중경(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신익희 선생 묘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의 제2차 환국(還國) 때 서울로 돌아왔으며 모스크바 3상 회
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金九)를 도와 반탁운동에 나섰다. 허나 그와는 정치 노
선이 달라 정치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해 이승만에 접근했다.

1946년 경복궁 서쪽에 국민대(현재 정릉동에 있음)를 설립했고 자유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자
주성을 고취시켰다. 미군정 시절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지냈고 1948년 정부수립으로
제헌국회에 들어갔으며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했다. 그리고 이후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
혔다.
3선 국회의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나날이 개판을 치며 심지어 그 유
명한 사사오입(四捨五入) 사건까지 일으키자 자유당 타도를 외치며 1955년 장면(張勉), 조병
옥(趙炳玉)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

1956년 대선 때 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정권교체를 노렸다. 이미 민심도 그에게 돌아선
상태라 승산은 넘치도록 충분했으나 5월 5일 유세차 열차를 타고 전주로 가던 중, 이리(익산
) 정도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선거 유세로 너무 과로했던 것이 화근이 된 것
이다. 하여 모두가 그리던 정권교체는 물거품이 되었으며, 대신 장면이 이기붕을 누르고 부
통령에 당선되었다.
허나 4년 뒤, 1960년 대선에 조병옥 박사가 출마했으나 그마저 유세 중에 위암으로 사망하여
정권교체의 기회를 또 잃고 말았다. <하여간 이 나라는 오래 살아야 될 사람이 빨리 죽고,
빨리 없어져야 될 것들이 오래 삼, 그래서 발전이 안됨>
1956년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져 북한산(삼각산) 자락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
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천하 제일의 싸움꾼으로 널리 알려진 시라소니(이성순)가 그의
경호를 맡았다. 그가 허무하게 죽자 장면 박사의 경호를 맡았는데, 그가 경호하는 동안에는
자유당의 끄나풀인 이정재의 동대문 패거리들이 감히 접근을 못했다.

▲  신익희묘 봉분과 하얀 피부의 상석,
향로석, 장명등

▲  망주석(望柱石)에 새겨진 세호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신익희 묘역은 호석을 두룬 커다란 봉분과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 문인석(文人石) 1쌍, 장명등, 묘비(묘표)로 이루어져 있으며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 끝
에는 호랑이상 1쌍을 배치하여 악의 기운을 경계한다. 무덤을 지키는 석물들은 파리가 미끄
러질 정도로 매끄럽고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으며 고색은 아직 여물지 못했으나 장차 20세
기 중반 무덤 양식의 하나로 교과서에 절찬리에 소개될 것이다.

그는 1945년 12월 귀국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쓸만한 집이 1칸 없다고 집 1채를 마
련하라고 (주변 사람들이) 권고하나 내가 망명 때 항일독립이 평생의 소원이었고 이제 반 조
각이나마 독립된 조국에서 국사를 맡게 되었으니 더 바랄게 있겠는가'

* 신익희 선생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산 74-3


▲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호랑이상
저 패기 돋는 이빨로 친일매국노와 그 쓰레기 같은 후손들, 그리고 이 나라의
적폐들을 싹 물어뜯어주렴.

▲  평산 신하균(平山 申河均) 선생묘

신익희 선생묘 북쪽에는 그의 장남인 신하균(1918~1975) 선생묘가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그는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일찌감치 중원대륙으로 넘어가 상해(상하이) 광화대학 상
과를 졸업했다. 이후 중국국민정부에서 감찰원위임관과 국민정부군의 소교복무원(소령급 문
관), 중앙은행 과원조장, 중앙신탁국조장 등을 지냈으며,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입대해 전지공작, 초모공작 훈련 등 독립운동을 진행하여
정위(正尉)가 되었다.

해방 이후, 늦게 귀국하여 한국연건기업 사장을 지내다가 1955년에는 한국외대 강사를 하기
도 했으며 아버지가 대통령선거 유세 중, 사망하자 정계로 시선을 돌려 경기도 광주 보궐 선
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도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4.19이후 민주당의 구파(舊派)인 신민당에 들어갔으며,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민
정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3선의원이 되었다.

그는 서예에도 뛰어나 1958년 귀국기념서예전에서 이 땅 최초로 중원대륙 고대의 해서체(楷
書體)인 학보자비체(學寶子碑體)를 소개했으며, 여러 차례의 서예전을 열었다.
1950년대 중반 종로구 인사동의 민주당 중앙당사 간판을 신익희가 썼는데 1960년대 중반 관
훈동(寬訓洞)의 민중당 중앙당사 간판은 그 아들인 신하균이 썼으니 이는 보통 인연이 아니
다.

1977년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아비도 그렇고 그 아들도 그렇
고 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공을 세우고 해방 이후 정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으니 가히 애국
자의 집안이라 할만하다. 처음에는 신익희의 독립운동 경력이 크게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
나 그의 묘역을 거쳐간 이후 조사해보니 생각 외로 경력이 화려했다.
더러운 친일매국노들로 악취가 심했던 그 시절(지금도 크게 다를 것은 없음 ㅠ), 이런 인물
이 있었던 것이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으며, 만약 그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이승만과 자
유당을 단죄하고 이 나라를 크게 부흥시켰을 것이다. 허나 그 기회를 하늘이 앗아가 버렸고
그 휴유증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니 과연 하늘에게 정의와 양심이 있는지 묻고 싶다.

신하균 묘역은 화려한 그의 아비 무덤과 달리 네모나게 호석이 둘러진 작은 봉분과 상석, 향
로석, 묘비가 전부인 단출한 모습이다.


▲  김병로 선생묘로 인도하는 산길
신익희선생묘에서 운가사, 진달래능선 쪽으로 4~5분 정도 오르면
김병로 선생묘가 쓱 모습을 비춘다.

▲  김병로 선생묘 밑에 자리한 묘비
귀부와 이수(螭首)를 갖춘 당당한 모습으로 묘역 동남쪽에 자리해 있어
신도비(神道碑)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선생묘

대쪽 판사로 유명한 가인 김병로(1887~1964)는 전북 순창에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
낸 김상희(金相熙)의 1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으나 할머니가 집안에 독서당(讀書堂)을 만들어 한문 공부
를 시켰으며, 1899년에 불과 12세에 나이로 4살 연상인 연일정씨 정교원의 딸에게 장가를 들
었다. 그가 외아들이고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일찍 혼인을 시킨 것이다.

1902년 당대 거유(巨儒)였던 전우(田愚)의 문하가 되었다가 1904년에 처음 신학문을 접했다.
하여 친구 4~5명과 일신학교(日新學校)란 임시 학교를 세웠는데 직접 강사를 초청하여 영어,
산수, 세계사를 익혔다.
1906년 순창을 찾은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을 듣고 크게 감동을 먹어 5~6명의 포수(砲
手)와 함께 그의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허나 최익현이 의병을 해산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왔으며, 광양의 백낙구, 담양의 기우만, 정읍의 유화숙 등과 의병투쟁을 모의하다가 채상순
과 함께 김동신의 의병부대에 합류,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淳昌)의 왜인 관청을 공격
하기도 했다.
허나 왜가 '호남 대토벌작전'을 펼쳐 의병을 때려잡자 무력 투쟁을 그만두고 고정주가 설립
한 창흥의숙(昌興義塾)에 들어가 다시 신학문을 접했으며, 1910년 왜열도 동경으로 유학을
가 일본대학 전문부 법과 청강생이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법조인으로 길을 잡게 된다.

허나 생활고로 공부가 어려웠고 때마침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보까지 전해듣자 충격이 너
무 커 서둘러 귀국했다. 폐결핵으로 1년 동안 쉬다가 1911년 가을, 다시 동경으로 유학을 갔
으며, 명치대학 법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13년 졸업했다.
귀국하여 가산을 정리해 다시 유학길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명치대학과 중앙대학에서 공동운
영하는 법률고등연구과에서 공부를 했다. 이때 '재동경 조선인유학생 학우회' 간사부장과 '
금연회' 운영을 맡기도 했으며 1914년 창간된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스승인 야마우치(山內)의 권유로 왜열도 변호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왜인(倭人) 외에는 응시
할 수 없다는 내각회의 결정으로 결국 응시하지 못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가인 김병로 선생묘

1915년 법률고등연구과 수료증을 받고 귀국하여 경성전수학교 조교수로 일했으며 1919년 부
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 서대문 자택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 관련자들을 위한 무료 변호에 많이 나섰다. 1923년 이인(李仁), 허헌 등
과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했으며 일반 형사사건에서 나온 수임료로 애국지사의 무료변
론은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챙겨주었다.
그가 맡은 애국지사들의 사건만 보합단 사건(1921년), 김상옥(金相玉) 의거와 제2차 의열단(
義烈團) 사건(1923년), 1926년 6.10만세운동,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고려혁명당 사건, 정
의부(正義府) 사건(1927년),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제3차 간도공산당 사건(1931년), 수
양동우회 사건(1937년) 등 실로 방대하다. 또한 안재홍(安在鴻), 안창호(安昌浩) 등의 민족
지도자들의 변호도 맡아 왜정의 온갖 악법으로부터 그들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농민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주어 1928년 전북 옥구군(沃溝郡)에서 소작쟁의
를 벌인 농민들과 1929년 집단파업을 한 함경남도 원산부두 노동자들과 형평사(衡平社) 조합
원들을 변호했다. 또한 1929년 함경남도 갑산에서 일어난 화전민 박해사건과 1930년 함경남
도 단천에서 농민 살상사건이 터졌을 때 직접 현장을 찾아 조사를 벌여 대책을 강구했다.

또한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1920년에 조선교육협회 창립 발기인, 1922년 보성전문학
교 상임이사, 1924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산하 고등보통학교 기성회 발기인을 맡았으
며 김성수와 함께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회금보관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4년 동아일보사 간부들이 친일파들의 협박을 받은 '식도원' 사건이 터지자 이를 규탄하는
민중대회 발기준비위원을 맡았으며, 1927년 전조선변호사대회에서 신문지법과 출판법 제정을
촉구하는 등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 또한 1923년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고, 1931
년 충무공유적보존운동기금 관리위원을 맡았으며, 신간회(新幹會)에도 가입해 중앙집행위원
장을 맡았다.
그러다보니 왜정의 훼방이 적지 않아 그가 연사로 나서는 집회가 금지되기도 했고 1931년에
는 6개월간 변호사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하여 잠시 소나기를 피하고자 1934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넘어가 잠시 운둔생활을 하였다.
1945년 왜정이 민족지도자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괴소문이 돌자 급히 가평(加平)으로 피신했
고 거기서 해방을 맞이했다.


▲  김병로 선생묘의 동그란 봉분과 상석, 향로석

해방이 되자 원세훈, 백관수와 고려민주당을 세우고 이를 확대해 조선민족당을 창당했다. 여
운형(呂運亨)의 건준을 찾아가 좌우합작을 제의하기도 했고, 미군정 아놀드 군정장관이 건준
과 조선인민공화국을 매도하자 이를 비판하는 논평을 내는 등, 좌우세력을 모두 포용하는 자
세를 보였다.
1946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학생들을 직접 변호해주었으며,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 기초위원회 위원과 사법부장 등을 하다가, 1947년 사법부 내 6인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
로 활동하며 이 땅의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법
원장이 되었으며,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 법조협회 회장을 맡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친일매국노 단죄에 굳은 의지
를 보였다. 친일파에 호의적이던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요청했으나 이를 거부하며
친일파 처벌을 추진했으나 결국 이승만 패거리의 농간으로 무산되고 만다.
1950년 골수염 치료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으며, 1957년 12월, 70세의 나이로
대법원장에서 정년퇴임했다.

은퇴한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계속되는 불의와 독재를 비판했고 동아일보에 '부정선거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며 이승만에게 경고하기도 했다. 1960년 대선에 출마한 조병옥이 위
암으로 사망하자 장면 부통령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기자회견을 통해 호소했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재야 정치인들과 사태수습을 위하여 대정부건의안을 발표했고, 이승만
이 물러나자 과도정부의 개편을 요구했다. 또한 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역설해 부정부패를 때려잡을 것을 촉구했다.
1960년 민의원선거로 고향인 순창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년 5.16이 터지자 박정희
(朴正熙)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고 군정의 종식을 촉구했다.

1963년 윤보선(尹潽善), 이인 등과 단일야당 결성을 추진하다가 여의치 않자 직접 민정당(民
正黨)을 창당해 최고위원을 맡았다. 이후에도 야권통합을 계속 추진했으나 그리 순탄치 못했
으며 민정당과 국민의당 대표최고의원에서 물러났다.
바로 그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1월 13일, 인현동 자택에서 77세의 나이
로 별세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루어 북한산 자락에 고이 안장되었다.

대쪽 같은 성품과 지조를 평생 지키고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인물로 천하 법조인의 귀감
으로 추앙을 받는다. 허나 오늘날 그와 같은 법조인이 거의 없다싶이하니 그도 지하에서 통
곡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묘역은 호석을 두룬 봉분과 상석, 향로석, 장명등 2기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다. 신
익희 묘역보다 외진 곳이라 찾는 이는 별로 없으나 워낙 짙은 숲속에 감싸여있어 잠시 속세(
俗世)를 잊기에는 좋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86-1


▲  단주 유림묘 입구에 세워진 묘비와 호랑이석

김병로 선생묘에서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로 나와 우이동 방향
으로 조금 가면 왼쪽 구천계곡 건너에 훤칠한 비석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가 유림 묘비로
묘비 밑에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호랑이상 2기가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경계하고 있다.
이 땅은 이상하게도 선한 기운보다 악한 기운이 더 판을 치니 저들의 양 어깨가 꽤 무거울
것이다.
그들의 검문을 거쳐 왼쪽 산길로 들어서면 단주 유림 선생 묘가 모습을 드러낸다.


▲  유림묘 입구 (순례길에서 바라본 모습)

유림(柳林, 1894~1961)은 경북 안동 예안면에서 중소 지주인 유이흠(柳頤欽)의 3남으로 태어
났다. <어머니는 김성옥(金性玉)> 전주유씨 집안으로 호는 단주(旦洲), 월파(月波)이며, 본
명은 유화영(柳華永), 중원대륙에서 사용한 이름은 유림, 고상진(高尙眞)이다.

앞서 신익희, 김병로와 마찬가지로 제일 먼저 한학을 배우다가 경상북도 최초의 신식 중등학
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그는 거기서 인생의 스승이 되는 김동삼(金
東三), 유인식을 만나게 된다.
1910년 어둠의 시절이 오자 겨우 16세의 나이로 손을 깨물어 거기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
로 '충군애국(忠君愛國)' 4자의 혈서(血書)를 쓰며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하여 대구와 안동
을 오가며 계몽운동과 비밀결사 조직 활동을 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안동 임동면
편항 장터에서 열린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협동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이끔)

하지만 3.1운동이 왜정의 고약한 탄압으로 더 이상 효과가 없자 가산을 정리한 뒤 가족을 데
리고 만주로 넘어갔다. 우선 만주 봉천성 요중현에 머물 곳을 마련해 가족들을 그곳에 안착
시키고 홀로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로 이동해 미리 와있던 김동삼과 이상룡, 이회영(李會榮)
등이 닦아놓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합류했다. 이때 군자금 마련을 위해 고향에 남아있
던 나머지 재산도 싹 처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1920년 8월 상해로 이동하여 거기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멤버로 활동하다가 1921년 북경
으로 가서 신채호(申菜浩), 김창숙(金昌淑) 등을 만났다. 그때 신채호가 주관하던 잡지 '천
고(天鼓)'의 발행을 도왔으며 거기서 그의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을
접하고 아나키스트로 노선을 잡는다.


▲  단주 유림 선생묘
'나의 이상은 강제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하에서 다같이 노동하고 다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 (1945년 12월 귀국직후 기자회견에서)
 

외국어 수학을 위해 1922년 성도(成都)로 이동하여 성도사범대학에 들어갔다. 허나 학비 해
결이 큰 문제라 중원대륙 정부의 관비생(官費生)이 되고자 이름을 '고상진'으로 바꾸며 중원
사람 행세를 했다. 다행히 그게 잘 통하여 별무리 없이 영문과를 마쳤으며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자 프랑스어도 수강하는 등, 상상 이상의 다양한 외국어를 익혔다. 심지어 '에스페란토'
까지 익혔다고 하니 그야말로 외국어의 신이 따로 없다.

1926년 학교를 졸업하고 간도 길림(吉林)으로 이동하여 김종진과 이을규를 만났다. 그들은
중동선(中東線) 해림역으로 이동하여 김좌진 장군를 만났는데, 그는 김좌진과 민족주의와 공
산주의 사상을 두고 여러 번 격론을 벌이며 양 사상의 갈등을 해결해보고자 했으나 워낙 팽
팽하여 설득을 포기하고 길림 화전현으로 돌아왔다.
이후 본토(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던 중, 1929년 11월 평양에서 '전
조선 흑색사회주의 운동자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최갑룡, 임중학
등과 함께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허나 왜정의 탄압으로 대회는 무산되었
고 그는 왜군에 체포되었다. 허나 딱히 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봉천으로 추방되었다.

1929년 가산을 털어 의성학원(義誠學院, 봉천중학)을 세웠다. 중원대륙 각급 학교 입학을 위
한 예과 과정으로 400명의 학생을 수용했으며 학생들의 중원대륙 학교 입학을 알선했고 직접
영어도 가르치면서 평화롭게 지냈다. 허나 그는 1931년 10월 왜군에게 '조선공산무정부주의
연맹'을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는 '원산흑색사건'이란 명목으로 최갑룡, 조중복 등과 함께 함흥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
으며, 1933년 3월 24일, 5년형을 받았다. 그들은 이에 모두 항소를 했고 서울로 이송되어 경
성복심법원과 경성고등법원을 거쳤으나 별 변화없이 원심대로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
고를 치루고 1937년 10월 8일 출옥했다.

이후 만주로 넘어가 재기를 노렸으나 뜻대로 안되자 북경과 천진에서 한중 항일연합군 조직
에 진력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2년 10월,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을 찾았고 임시정부가 치
룬 경상도구 의원선거회에 나서 김원봉, 김상덕 등 6명이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임시정부를 다시 찾은 것은 '독립을 달성하고 이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면 우선
민족을 대표할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된다'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외교위원회 연구위원, 선전위원회 선전위원, 건국강령수개위원회 위원 등
을 지냈으며,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의 대표로 주석단의 1명으로 추대되어 활동했다. 또한
미국와 영국이 한국을 국제 보호 밑에 두기로 했다는 보도를 듣고 중경에서 대회를 열어 한
국의 완전한 독립과 외국의 내정 간섭 반대를 외쳤다.


▲  유림묘 봉분과 상석, 향로석
봉분에 무궁화 무늬들이 꽂혀있는데 처음에는 진짜 꽃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서 보니 그냥 문양이었다. 애국지사 묘역에 걸맞게
무궁화 무늬를 심은 센스가 돋보인다.


해방이 되자 1945년 12월 주한 미군사령부가 보낸 비행기를 타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귀국했
다. 허나 날씨가 좋지 못하여 서울비행장(여의도)에 착륙하지 못하고 군산에 착륙해 거기서
육로편으로 상경했다.
1946년 임시정부의 법통기관인 비상국민회의 부의장이 되었으며, 세계 아나키즘 최초의 아나
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동당(獨立勞農黨)을 창당해 당수로 취임했다. 그리고 노농신문을 발
간하여 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 보호에 힘썼다.
1948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렸는데, 유림은 한국 대표로 초청
을 받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했다.

대한국민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국민의회 기능 상실로 다시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
성하고 대표간사가 되었으며, 1952년 7월 임시수도인 부산(釜山)에서 일어난 '발췌개헌안'에
항의하여 신익희, 장면 등과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세웠다.
국회의원 선거에 여러 번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년 4월 1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
났다. 그해 4월 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루어졌으며 그때 장례위원장인
성균관대 초대총장인 김창숙은 '그대 있어 이 나라가 무겁더니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
구나'
추도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무덤은 호석을 갖춘 동그란 봉분과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1쌍으로 이루어져 있
다. 특이한 것은 봉분에 무궁화 무늬가 잔뜩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곳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9시 직전에 이르렀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가 길어졌다고 해
도 그건 어디까지나 햇님의 퇴근시간이 늦춰졌을 뿐이다. 달의 사제인 땅꺼미가 모락모락 피
어올라 햇님의 세상을 훔치려고 들고, 무더위에 적지 않게 돌아다녔더니 피로감과 시장기가
달덩이만큼이나 크게 솟아오른다. 이럴 때는 욕심을 부리고 속세로 내려가 저녁을 먹는 것이
진리이다.

이렇게 하여 오후에 짧게 누린 북한산 미답지 나들이는 4곳의 미답처를 싹 지우는 큰 성과를
누리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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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 봄맞이 산사 나들이, 북한산 금선사 '

▲  금선사 목정굴 수월관음보살좌상


 

♠  금선사(金仙寺) 입문 (목정굴)

▲  목정굴 입구

봄이 한참 익어가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금선사를 찾았다. 비봉과
사모바위를 간직한 비봉능선을 오르면서 그 길목에 자리한 금선사를 오랜만에 들리게 되었는
데, 비봉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목정굴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금선사로 이어지나 나는 목정굴 코스를 선호
한다. 그만큼 목정굴은 금선사의 상징으로 그가 없는 금선사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다름이
없다. (비봉능선으로 바로 가고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됨)


▲  문짝이 없는 무당문(無堂門)

목정굴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잠시 내리막길이 나타나면서 봄가뭄에 영혼까지 털린 말라버린
계곡이 나온다. 계곡에 액체가 좀 있어야 무거운 번뇌를 잠시나마 흘려보낼 수 있을텐데, 그
럴 물도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 계곡을 건너면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지면서 문짝
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무당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문은 2008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 이름은 무무문(無無門)이다. '무무'란 불법(佛法)의 깊
은 진리를 깨닫는데 한계가 없다는 뜻으로 일주문이 없던 시절에는 나름 일주문의 역할도 하
였으며, 대자연의 넓은 마음이 담긴 듯, 문짝도 담장도 없는 그냥 문의 형태만 취하고 있다.


▲  커다란 바위에 조성된 목정굴

목정굴로 인도하는 계단의 끝에 이르면 3면이 바위로 막힌 막다른 곳이 나온다. 만약 전쟁에
서 이런 곳으로 내몰려 적의 공격을 받으면 그야말로 아작나기 좋은 지형으로 정면에 보이는
바위에 목정굴이란 석굴(石窟)이 깃들여져 있다.

목정굴은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오랫동안 기도처로 이용된 도심의 숨겨진 굴이다. 태조 이성
계의 국사(國師)이자 금선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
하며, 조선 23대 군주인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석굴 내부는 원래 공터였으나 1996년 동굴을 대폭 손질하면서 수월관세음보살상(수월관음보살
)과 예불공간 등을 만들고 보살상 우측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을 뚫었으며, 수월관세음보살
을 봉안하면서 금선사는 대내외적으로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정굴에는 숨겨진 볼거리가 여럿 있는데, 요란하게 비가 내릴 때는 목정굴 앞에 임시
로 폭포가 형성되어 힘차게 물을 쏟아내며, 석굴 앞 우측 바위를 잘 살펴보면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삼매부처상이 있으니 술래의 심정으로 잘 찾아보기 바란다. (난 찾지 못했
음)


▲  목정굴의 주인, 수월관세음보살(水月觀世音菩薩)

목정굴 안에는 수월관세음보살 누님이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석굴 내부는 무척 시원
하여 이른 무더위를 단죄하고 있으며, 겨울에는 수월관음의 따뜻한 마음이 동굴 내부에 가득
서린 듯 추운 몸을 녹이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동굴 천정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고
석굴 구석으로 흐르는 물과 그들이 내는 졸졸졸~♪ 음악 소리가 경쾌하기 그지 없다.

앙련(仰蓮)으로 뒤덮힌 대좌(臺座) 위에 여인들도 시샘할 정도로 어여쁘게 앉아있는 수월관음
은 왼손에 감로수(甘露水)가 담긴 정병(淨甁)을 쥐어들고 있는데, 병의 크기가 다른 관세음보
살상의 정병보다 조금 커보인다. 그의 정병을 보니
왜 자꾸 동동주나 막걸리 술병 생각이 나
는 걸까? 정말 저게 술병은 아닐까?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관세음보살 누님이 왜 술을 마시
겠는가? 하지만 그의 하얀 얼굴은 술에 약간 취한 듯, 졸린 표정처럼 보이기도 하니 혹 고적
한 석굴에서 건전하게 몰래 마신 것은 아닐까?

수월관음 앞에는 예불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불단에는 꽃 등이 놓여져 있어 중생들의 높인 인
기를 실감케 한다. 그의 우측에는 금선사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는데, 높이가 낮고 물이 흐르
고 있어 조심해서 오르기 바란다. 잘못하면 암벽에 머리가 쾅 부딪칠 수 있어 암벽을 아프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수월관세음보살상

▲  경내로 인도하는 비좁은 계단

목정굴에는 금선사의 대표 설화인 순조 탄생 설화가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22대 군주인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첫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잃고 서른
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해 늘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8년경,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승려인 용파(龍波)가 상경하여 정조를 알현하면서
불교계의 폐단과 승려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탄원했는데, 정조는 불교 개혁을 약속하면서 대
신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아들을 얻지 못하니 이참에 부
처의 힘을 빌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었던 용파는 왕의 어려운
숙제를 기꺼이 수용하며 금선사에 머물던 농산(聾山)을 찾아가 같이 기도에 들어갔다. 그들은
같은 곳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농산은 목정굴에서, 용파는 수락산 동쪽 내원암(內院庵)에서
따로 300일 이상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용파는 선정(禪定)에 들어 천하를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
어날 사람이 농산 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여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번 기회에
금수저로 태어나 팔자를 필 것을 권하니 농산은 흔쾌히 수락했다. 왕자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
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꿈에 나타나 왕자로 환생
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기도를 마치고 열반(숨을 거둠)에 들었다고 한다.

이때 왕실에 무기명 서찰 하나가 올라왔는데 그 서찰에는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
子誕降)'이라 적혀 있었다고 하며 바로 그날 순조가 태어났다.
순조가 태어나던 날, 도성(都城)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瑞氣)가 궁궐에 닿아 수빈박
씨의 산실(産室)을 휘감았다. 정조는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그 서기의 출처를 찾아보니 바
로 목정굴이었다고 하며, 굴 안을 살피니 좌선을 한 채, 정수리에서 서기를 발산하고 있는 농
산의 시신을 발견했다.
농산이 죽어서 자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을 알게 된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승려를 차별하
던 폐습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을 내려 금선사를 크게 중창케 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
까지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지내고 있다.

이 설화대로 농산이 정말 순조로 환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경지가 깊은 승려라고 해
도 그건 사람의 능력 밖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대구 파계사에도 한 토막 전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용이 거의 똑같다. 거기서는 숙종(肅宗)이 왕자<영조(英祖)>의 탄생을
부탁하는데, 그 부탁을 받은 승려가 파계사 부근 성전암(聖殿庵)의 현응(玄應)이다. 이 현응
의 법명은 용피<龍被, 또는 용파(龍波)>로 금선사의 용파와 이름까지 같다. 그러니 파계사의
영조 탄생 설화를 금선사에서 등장 인물만 조금 바꾸는 선에서 그대로 모방한 듯 싶다.

설화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지만 용파로 상징되는 파계사 승려와 농산으로 상징
되는 금선사 승려가 왕자의 탄생을 위해 기도를 올린 듯 싶으며, 그들 기도가 효과를 봤거나
아니면 기도 도중 농산이 사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을 파계사 전설을 가져와 '농산이 왕
자로 환생했다'는 식의 그럴싸한 전설로 포장한 것이다. 어쨌든 순조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았고, 수락산 내원암 사적기(史蹟記)에는 농산, 용파 두 승려가 주고
받은 서신의 내용이 남아있다고 한다.


▲  목정굴 바위 정상

▲  목정굴 정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수월관세음보살 우측에 뚫린 좁고 어두운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목정굴 정상이 나오면서
다시금 찬란한 햇살을 보게 된다. 정상에서는 목정굴 밑 계곡을 비롯해 숲 너머로 탕춘대 능
선과 인왕산(仁王山)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여기서 목정굴 입구에서 갈라진 오른쪽 산길과
다시 하나가 되어 경내로 이어진다.
경내로 향하면 절을 가리고 선 2층짜리 설선당이 나타나고 그 앞에 금선사 발전에 크게 기여
한 민영택 여사를 비롯한 공덕비(功德碑) 3기와 대원각의 승탑이 있어 그들의 이름 3자를 영
원히 기린다.

▲  민영택을 비롯한 공덕비 3형제

▲  절을 크게 일으킨 대원각의 승탑(僧塔)


▲  2층 규모의 설선당(設禪堂)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 설선당은 근래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에는 밥을 먹는 공양간이 있으며, 1층과 2층은 종무소와 선방(禪房), 템
플스테이 장소로 쓰인다. 휴일 점심에는 산꾼과 답사꾼에게 흔쾌히 공양밥을 제공하는데 맛이
제법 괜찮다. (주로 비빔밥을 제공함)


▲  연등의 고운 물결, 설선당과 반야전 뜨락

설선당 밑도리에 난 문을 들어서면 숲에 감싸인 금선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설선당 옆
에는 청기와로 치장된 2층짜리 반야전이 있는데, 그는 2006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그 좌
측 소나무 앞에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석가3존불과 신중도를 머금고 있었으나 2005년 후반에
부셔버리고 옆 공터에 크게 반야전을 지었다. 건물 윗층에는 대웅전에 있던 석가3존불을 가져
와 예전 대웅전의 역할을 담당하게 했고, 아랫층은 별도로 해행당(解行堂)이란 이름으로 요사
(寮舍)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금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층으로 이루어진 반야전(般若殿)

북한산(삼각산) 서남부의 대표적인 능선인 비봉능선 남쪽 밑에 금선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종로1가에 있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인데, 예로부터
여러 가지 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는 기도처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목정굴에서 소개
한 순조 탄생 설화이다.
       
이 절은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부탁으로 새 왕조의 도읍지를 정하고자 북한산(삼각산) 일
대를 살펴보던 중, 지금의 절 자리에 북한산의 강인한 정기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부처
가 여기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여기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금선(金仙)은 부처의
별칭으로 창건 설화의 진위여부는 장담하기 어려우나 조선 초나 중기에 산문을 연 것은 분명
해 보인다.

이후 서울 근교 기도도량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많은 왕족과 양반, 상궁(尙宮)들이 자주 찾았
다고 하며, 순조의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허나 왜
정(倭政) 때 절은 폐허가 되었으며, 1949년 승려 도공(道空)이 중건했다.
1996년 목정굴을 손질해 수월관세음보살을 봉안했고, 2008년에 반야전을 지었으며, 계속해서
설선당과 범종루, 일주문 등을 달아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절의 초창기 영역은 목정굴과 반야전 일대였으나 계곡을 따라 윗쪽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대적
광전과 삼성각을 지었고, 그 중간에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으면서 건물이 한데 몰려있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비좁게 자리한 탓에 경내가 길고 가늘게 이어진 것이
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반야전, 설선당, 삼성각, 연화당, 적묵당, 범종루 등 10
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가 있으나 오래된
유물도 그게 전부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금선사의 모든 것이 좌초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기도처로 유명한 목정굴이 경내 밑에 자리해 있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10리도 안되는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고적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릴
수 있으며, 풍경도 아름답다. 또한 최근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단
단히 재미를 보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들의 수요가 많은 편이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구기동 196-2 (비봉길 137 ☎ 02-395-9911)
* 금선사 홈페이지는 밑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략하게 담은 반야전 벽화
왼쪽은 용파가 정조를 알현하며 그에게 어려운 숙제를 받는 장면, 중간은
금선사에서 기도에 들어간 용파, 오른쪽은 승려의 육신을 버리고
왕자로 다시 태어난 농산


 

♠  금선사 둘러보기

▲  옛 대웅전터와 오래된 소나무

반야전을 지나면 옛 대웅전이 있던 터와 소나무가 있다. 대웅전은 2005년에 사라졌으나 그 곁
을 지키던 소나무만이 무성하게 솔잎을 피우고 있는데, 나이는 약 2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경내에서 목정굴 다음으로 오래된 자연물로 아직 그 흔한 보호수(保護樹) 등급도 얻지 못했지
만 금선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몇 안되는 존재라 그가 마음껏 몸을 풀 수 있도록 넓게 공
간을 제공하였다.


▲  옆에서 본 소나무

이 소나무는 장대한 나이에 비해 키는 작다. 하늘로 향하지 못하고 대신 옆으로 몸집을 무한
정 불려 처진소나무처럼 된 것이다. 절에 있는 나이 지긋한 소나무 중에 이런 나무가 적지않
아 참으로 신기할 따름인데, 절에서 주장하는데로 나무에게도 과연 불심(佛心)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자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팔자인 것일까? 궁금하다.

▲  대적광전으로 인도하는 해탈문
(解脫門)과 108계단

▲  윗층과 아랫층의 이름과 용도가
서로 다른 연화당(蓮華堂)


소나무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왼쪽 해탈문은 대적광전으로 바로 이어지는 108계단길로 근
래에 닦여졌다. 그리고 오른쪽 길은 계곡을 따라 연화당, 적묵당, 삼성각을 거쳐 대적광전으
로 이어지는데, 대적광전까지 빨리 가고 싶다면 약간 각박하긴 하지만 108계단길을 이용하면
되고 느긋하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계곡길을 이용하면 된다.

계곡길을 따라가면 계곡 건너에 나무 다리를 늘어뜨린 2층짜리 연화당을 만나게 된다. 이 건
물은 1층과 2층이 이름과 성격이 서로 틀린데, 1층은 연화당이라 불리는 납골당(納骨堂)으로
영가(靈駕)를 위한 공간이며, 그 중심에 지장보살좌상이 들어앉아 그들의 극락왕생을 챙겨준
다. 금선사의 든든한 밥줄로 약 600여 기의 유골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2층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미타전(彌陀殿)으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
로 한 아미타3존불과 2004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화당 앞에 놓인 나무 다리와 갈증에 빠진 계곡
봄가뭄으로 계곡이 바짝 타들어가면서 물방울도 보이지를 않는다.
계곡 위에 걸린 다리가 무색할 지경..

▲  소나무 뒤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연화당 맞은편 석축 위에는 적묵당이 터를 닦았다. 이 집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저리보면 1
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3층이니 겉모습에 속지 말자. 팔작지붕을 짊어진 3층은 주지승의 거
처이며 그 밑에 가려진 1층과 2층은 일반 승려의 거처이다.


▲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걸린 홍예다리

▲  경내 윗쪽에 자리한 큰 바위와 약수터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나면 계곡 위에 걸린 홍예다리가 나온다. 근래 마련된 돌다리로 비록 고
색의 내음은 익지도 못했지만 여인의 눈썹처럼 선이 아름답다. 거기에 오색영롱한 연등을 잔
뜩 머금고 있으니 더욱 화사해 보인다.
그 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으로 이어지며,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길을 좀 들
어가면 그 길의 끝에 커다란 바위가 웅크리고 있다. 바위 위에는 비봉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여기서는 올라가는 정식 길은 없으며, 바위 밑은 안쪽으로 쑥 들어가 조촐하게 그늘진
공간이 있는데, 비와 눈을 피하기에 아주 좋은 터로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물이 용솟음치는
약수터가 수줍은 듯 자리한다.
금선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의 절반은 이곳에서 시작되어 흐르며, 그 옆에는 봄가뭄에 말
라비틀어진 조그만 폭포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바위에게 주어진 이름은 딱히 없으며, 바위의 준수하고
거대한 용모를 보니 절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바위 밑에 자리한 샘터 (물은 안마셨음)

▲  연등의 조촐한 향연이 펼쳐진 홍예다리


▲  삼성각(三聖閣)

홍예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
래는 그들이 각각 별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나 2005년에 현 건물을 증축하면서 이곳에 싹
모아두었다.


▲  봄 햇살이 내려앉은 대적광전(大寂光殿)

삼성각과 이웃한 대적광전은 금선사의 공식 법당으로 높직한 곳에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2005년에 지어졌는데, 옛 대웅전에 있던 불상과 신중도, 그리고 2005년
에 마련된 금고(金鼓)를 가지고 있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3존불

대적광전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이 지권인(智拳印)의 제스처를 보이며 앉아있고, 그 좌우로 노
사나불(盧舍那佛), 석가불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중생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들 뒤로
든든히 자리잡은 후불탱은 2005년에 제작된 것으로 색채가 무지 곱다.

       ◀  금선사 신중도(神衆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1호

대적광전 좌측 벽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목정굴과 느티나무 등의 자연물 제외)인
신중도가 액자 속에 소중히 깃들어져 있다.
주위에는 비로사나후불탱과 새로 만든 신중도
등의 번쩍이는 그림이 있으나 고색이 자욱한
신중도에만 오로지 눈길이 쏠린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그려진 불화이
다. 이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이었으나 불교
의 일원으로 흡수되었으며, 지금은 그들의 뜻
과 다르게 부처와 경전을 수호하는 호법신(護
法神)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
르면서 그 수호의 범위가 확대되어 나라를 지
키거나 사람들의 재앙을 막는 역할까지 떠맡게
되어 업무량이 과중하게 늘었다.

이 신중도는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그림 밑부분에 딸린 화기(畵記)에 따르면 김지(金地)가
책임 화원, 경순과 채준이 각각 출초(出草)와 편수(片手)를 담당했다. 또한' 신중탱(神衆幀)
'이란 명문이 쓰여 있어 그림의 성격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중탱이
아닌 '신중도')

그림 윗부분에는 연꽃가지를 비껴들고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홀을 들고 선 일월자
천(日月自天), 공양물을 든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으며, 밑부분에는 위태천(
韋太天)과 팔부중(八部衆), 산신 등이 빼곡히 자리해 있다.
오래되고 괜찮은 신중도로 평가를 받아서 2002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장대한 내력에 비해 오래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금선사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
다.


▲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대적광전의 새 신중도
대적광전에는 신중도가 무려 2개씩이나 걸려있다. 신중도는 법당을 지키는
그림으로 1개도 아닌 2개나 있으니 제법 든든할 것이다.

▲  반야전에서 대적광전을 이어주는 108계단
누런 털을 걸친 묘공(猫公)이 묵묵히 계단을 오르며 자연을 음미하고 있다. 처음에는
숲으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내 옆을 유유히 지나쳐 대적광전으로 향했다.
그는 금선사에서 기르는 묘공으로 이 시간대에 늘 경내를 순찰하는 모양이다.

▲  대적광전으로 향하는 묘공의 위엄
대적광전 주변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경계나 인사는 커녕 마치 무인지경으로 내 옆을 지나간다.

▲  속세를 향해 종소리를 울려라~~!
범종각(梵鍾閣)

▲  현판 글씨가 일품인 일주문(一柱門)


10년이 아니라 단지 몇 년만으로도 거뜬히 강산이 변하는 21세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금선사
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없던 건물이 마구 솟아나 절을 달리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중도와 대적광전, 소나무 등 기본적인 존재들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
니 마치 옛 지기와 오랜만에 상봉한 기분이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금선사와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 지으며 비봉능선으로 발길을 재촉했
다. 앞서 절에 들어왔을 때는 목정굴로 왔지만 이번에는 목정굴 동쪽 산길로 갔는데, 근래에
지어진 2층 범종각과 일주문이 잘가라며 차례대로 배웅을 한다.
범종각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시지를 머금은 범종과 목어, 운판, 법고의 보금자리로 1
층은 통로, 2층은 범종각으로 쓰인다. 그 범종각을 지나면 바로 일주문이 나오는데, 그가 있
기 전에는 금선사에 그 흔한 일주문도 없었다.

명필을 자랑하는 일주문 현판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이 쓴 것으로 '金仙寺'가 아닌 '金
僊寺(금선사)'로 쓰여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비록 음은 같지만 중간 한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허나 그 금선(金仙)이나 이 금선(金僊)이나 서로 같은 뜻이며, 다른 말로 대선(大
仙)이라 불리기도 한다.


▲  길목에 자리한 동자석(童子石)

일주문에서 한굽이 내려가면 동자석과 아리송하게 생긴 돌 하나가 내 발길을 붙잡는다. 동자
석은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들고 있어 문인석(文人石)의 냄새도 풍기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정
보는 없지만 생김새와 몸에 낀 고색의 때를 봐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키는 말그대로 어린이 키와 비슷한데, 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귀족들의 묘역에만 사용할
수 있는 동자석이 절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서 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인근에 헝
클어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사대부(士大夫)의 묘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정작 금
선사 부근과 구기동, 평창동에는 사대부의 묘가 전하지 않는다. (한양도성 밖 10리 이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음)
그러니 절의 수호 의미나 이정표의 역할로 절의 단골 귀족(왕족, 사대부)이 세워준 것으로 여
겨진다. 그렇다고 절 자체적으로 감히 세울 리는 없을테고 말이다. 어쨌든 뭔가 특별한 의미
가 담겨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그로 인해 금선사의 격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  이 돌의 정체는 무엇인고?

동자석 건너편에는 정체가 아리송한 돌덩어리가 서 있다. 동자석처럼 날씬하게 서 있지만 아
무런 조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낸들 알 도리는 없지만 무언가를 만드려다가
만 것 같은 99% 부족한 모습으로 자세히 바라보면 남근석(男根石)과도 비슷해 보인다.


▲  동자석과 정체가 묘연한 돌상의 뒷모습

▲  금선사를 뒤로하며~~~ (동자석과 목정굴 입구 중간)
본글은 여기서 끝. 금선사 이후 내용은 생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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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의 정석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백화사, 마실길 느티나무, 화의군 이영묘역, 폭포동계곡)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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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실길에서 만난 은행나무숲길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  마실길 느티나무

 


여름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첫 무렵,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을 찾았다.
이번 둘레길 산책은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하여 내시묘역길, 마실길, 화의군묘역, 구름
정원길 북쪽 구간을 거쳐 불광2동에서 그 끝을 맺었다.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
지만 내 마음을 적지 않게 앗아간 곳 중 하나라 그 마음을 찾으러 다시 그들을 찾은 것
이다. 탐방밀도 1위(1㎢당 5만여 명)로 세계 기네스북에도 당당히 올라있는 북한산(삼각
산) 탐방객의 절반 정도가 둘레길 방문자라고 하니 그의 인기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진관동 구간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 입구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초등학교인 북한산초교가 있다.
(거의 시골학교 분위기임)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인 내시묘역길은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공설묘지에서 진관동 방패교육대
에 이르는 3.5km의 산길이다. 북한천(北漢川)에 걸린 둘레교를 사이로 북쪽은 고양시, 남쪽은
서울 영역으로 평지와 야트막한 산길이 전부인 아주 착한 길이다. 전주이씨 서흥군파묘역, 경
천군 송금비, 경주이씨묘역, 여기소터, 백화사, 중골마을 느티나무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으
며, 백화사 뒤쪽 산자락에는 천하 최대의 내시묘역이었던 이사문 공파(李似文 公派)의 묘역이
있었다. 바로 그 묘역 때문에 '내시묘역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그 묘역의 규모는 약 8,800평으로 45기의 조선 중~후기 무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묘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전관(承傳官)을 지낸 김충영(金忠英)의 무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한 곳이 있구나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묘역은 2012년 4월 귀신같이 사
라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내시의 후손임을 껄끄럽게 여긴 후손들이 묘역을 파서 유골과 부장물을
챙기고 그 일대를 조경개발업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백화사까지 포장길이 뚫리면서 땅값이
많이 오르자 팔았다고 전하며 후손들은 땅값으로 4억 8천만원을 만졌다고 한다. 유골은 화장
하여 납골당 등에 두었고 유물 또한 후손이 가져갔으나 무덤에 배치된 문인석 등의 무거운 석
물은 버려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얼마나 비밀리에 콩 볶듯이 했는지 동네 사람들과 백화사 승
려들도 묘역이 없어진 것을 뒤늦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 땅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녔던 그곳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이제는
한낱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었다. 진작에 국가 지정 사적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이런 무덤 대학살(?)은 막을 수 있었을텐데 후손들의 그릇된 생각과 문화재청과 서울시 철밥
통의 직무유기, 그리고 내시묘역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과 저평가가 낳은 비극이다.
이제 내시묘역도 없는 내시묘역길이 되었으니 그 이름도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이는 갈비탕
에 갈비가 빠졌음에도 갈비탕을 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적당하
다고 본다. 하지만 늘 그렇듯 북한산국립공원 철밥통들은 이름 변경도 귀찮다며 계속 수수방
관하고 있다.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에서 백화사 구간)
숲이 워낙 삼삼하여 햇살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긴다.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내시묘역길
길 주변은 경주이씨 경천군파 문중 땅이라 양쪽에 철책과 나무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 서울시 지방기념물 35호

한산초교입구에서 내시묘역길을 따라 자연에 묻힌 민가를 여럿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들어
서게 된다. 마치 자연휴양림에 들어선 듯,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이로운
기운을 아낌없이 베풀어 속세에서 오염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오솔길을 거닐다보면 조그만 오래된 비석이 활짝 마중을 나오니 그가 바로 경천군 이해룡 사
패지 송금비이다. (줄여서 '경천군 송금비', '경천군 송금물침비'라 불림)

경천군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서예가 겸 역관(譯官)으로 이름은 이해룡(李海龍)이다. 본관
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으로 해서체(楷書體)를 잘 썼다고 하며 비
슷한 시대를 살았던 한호<韓濩, 한석봉(韓石峯)>에 필적하는 명필로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어(倭語)에 능숙해 1588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사자관(寫字官)으로
왜열도에 갔다왔으며 많은 글씨를 그곳에 뿌리고 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역관으로 왜군과의 협상테이블에 참여해 화평교섭을 위해 노력했으
며 1595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었고 1602년에 사섬시주부(簿)가 되었다.
선조(宣祖)는 왜군과의 교섭에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치하해 경천군에 봉했으며 지금의 백화
사 동쪽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광해군(光海君)은 1614년 사패지(賜牌地, 제왕
이 하사한 땅) 적당한 곳에 송금비를 세워주었
는데, 비문에는 큼지막하게 '慶川君 賜牌定界
內 松禁勿侵碑' 13자가 쓰여 있다. 그 내용은
경천군이 하사받은 땅에서 소나무를 벌목하거
나 무단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으로 뒷면에는
'만력(萬曆) 42년 갑인(甲寅) 10월'이라 쓰여
있어 1614년 10월에 세워졌음을 귀뜀해준다.

비석에 쓰여있는 송금(松禁)은 나라에서 필요
한 목재를 확보하고자 소나무가 많은 산을 선
정해 보호하는 것으로 고려 때 시행되었다.
이곳 송금비는 조선시대 임업 정책인 송금 정
책을 보여주는 산증인으로 400년이 넘는 나이
에도 무탈하게 잘 남아있으며 조선 임업사에서
꽤 중요한 유적이자 천하에서 딱 하나 밖에 없
는 존재로 가치가 높다.
이런 비가 2기가 있다고 하나 현재는 이곳만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숨바꼭질
중)

▲  조성시기가 쓰여진 송금비 뒷면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철책 사이로 잠겨진 문이 보일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숲으로 살
짝 몸을 숨기면 이곳의 주인인 이해룡의 묘역을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묘역은 경주이씨 묘역이
라 불린다. (문이 늘 잠겨있으나 느슨한 경우가 종종 있어 순수한 의도로 살짝 들어가 살펴보
는 것도 괜찮을 듯 싶음)

고색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풍기는 비석 주위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들이 마련
되어 있다. 워낙 숲속이고 평일에는 인적도 드물어 바람의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가 이곳을 이
루는 소리의 전부이다. 둘레길이 닦이면서 비로소 그 존재를 속세에 내보인 존재로 둘레길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북한산둘레길이 산자락에 숨겨진 많
은 명소를 속세로 꺼내주었음)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과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 34번 시내버스를 타고 백화사 하차, 백화사 방면 둘레길을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4번 출구) 롯데몰 정류장에서 704번, 건너편 2번 출구 정류장에서
  34, 8772번(토요일과 휴일에만 운행)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  경천군 송금비 주변

▲  경천군 송금비에서 백화사로 이어지는 내시묘역길
중간에 의상봉, 용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  내시묘역길 중간에 자리한 백화사(白華寺)

경천군 송금비에서 6~7분 정도 가면 백화사란 조그만 절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중골마을의
동쪽 끝으로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못지나친다고 잠깐 살펴보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다.

백화사는 1930년경에 지어진 비구니 절로 자세한 내력은 딱히 모르겠다. 조촐한 경내에는 종
무소(宗務所)의 역할을 겸하는 요사(寮舍)와 대웅전(大雄殿), 삼성각(三聖閣) 등 5~6동 정도
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옆에는 아주 도드라지게 새겨진 잘생긴 마애3존불이 있다.


▲  백화사 마애3존불

백화사 마애3존불은 바위 윗부분을 싹둑 다듬고 석가불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문수보살(文
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배치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196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로 그 조각수법이 뛰어나고 돋음새김으로 사실감있게 다
듬어 그들이 마치 내 앞에 나타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비록 숙성 기간이 적어 고색의 때
는 끼지도 못했지만 50년 이상 지나면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거뜬히 따
낼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연꽃대좌(臺座)에 앉은 석가불은 선정인(禪定印)을 선보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있는데 꽤나 몸을 단련한듯, 어깨와 가슴이 매우 당당하다. 좌우 협시불은 시무외인으로 그
들 나름대로의 제스쳐를 취하고 있고, 3존불 모두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어 그들의 광명(光
明)을 표현한다.

* 백화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18-2 (의상봉길 70-7, ☎ 02-381-9103)


▲  백화사 삼성각(三聖閣)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창건 초기부터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이곳에 큼직한 대웅전이
들어앉아있고 삼성각은 마애불 뒤쪽으로 자리가 옮겨졌다.

▲  경내 남쪽에 자리한 돌탑
경주 첨성대(瞻星臺)와 비슷한 모습으로 가지각색의 돌이 협동심을 보이며
어엿한 돌탑을 이루었다.

▲  중골마을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0호

백화사를 지닌 중골마을은 산에 감싸인 산골마을로 여기소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잡고 있는데 높이 19m, 둘레 4.7m로 추정 나이
는 210년 정도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치가 165년~) 이 일대는 이사문 내시
집안이 살던 곳으로 그 후손이 심은 것으로 보이며 오늘도 마을에 시원한 그늘을 베풀어 자연
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  여기소(汝其沼)터 표석

백화사 정류장에서 백화사로 가는 길목 초입에 여기소터 표석이 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아련히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숙종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크게 증축했을 때 지방 관리로 있다가 공사 현장에 파
견된 관리가 있었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기생은 그를 보고자 먼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으나 공사 관계자
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하여 너무 열받은 나머지 이곳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며 '너의 그 사람이 잠긴 못'이란 뜻에서 '여기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공사가 끝날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섣부른 행동을 했을까? 옛말에도 급하면
돌아가라고 했거늘, 그 속담만 얌전히 지켰으면 해피 엔딩으로 끝났을텐데 말이다. 아마도 꽤
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이후 기생의 한이 서린 연못은 매립되었고 그 자리에 표석을 두어 여기소의 흔적과 교훈을 아
련히 일깨운다.


▲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북한산 글램핑장 주변)
내시묘역길도 그렇고 북한산둘레길은 민가와 농장, 경작지, 개인 토지를
이리저리 피해가느라 우리네 인생처럼 굴곡이 좀 크다.

▲  내시묘역길의 남쪽 끝을 잡다 (방패교육대 직전)


 

♠  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

▲  마실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다~

내시묘역이 없는 내시묘역길은 여기서 마실길로 간판을 바꾸어 달린다. 방패교육대에서 진관
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으로 완전 평지 수준이고 북한산둘레길 구간 중 가장 짧고
편한 길로 살랑살랑 거닐기에 아주 좋다. 하여 마실길이라 불린다.
이 코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숲길, 삼천사계곡, 진관사계곡, 숙용심씨묘표, 영산
군묘역, 화의군묘역, 진관동 느티나무 등의 명소가 있어 짧은 거리에 비해 볼거리가 아주 풍
부하며 진관사(津寬寺)와 삼천사(三千寺)도 아주 가까워 답사 코스로 아주 안성맞춤이다.


▲  진관천 옆구리를 지나는 벼랑길 (마실길)

마실길을 들어서면 진관천 벼랑에 닦여진 나무데크길이 나온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
처럼 길을 낸 것으로 동쪽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벼랑이, 서쪽은 진관천이 삼
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물을 모두 머금으며 창릉천으로 흘러간다.
예전에는 피서의 성지로 여름마다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서쪽에 연서로가 닦이면서 풍경이 조
금 깎여지고 지나는 차량의 소음도 적지 않아 요즘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중/상류로
많이 넘어갔다.


▲  삐죽 고개를 내민 바위로 약간 구부러진 계곡 벼랑길

▲  식당을 지나 삼천사계곡을 건너는 마실길

진관천 벼랑을 통과한 마실길은 삼천사입구에 이른다.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
(磨崖佛)을 지닌 오래된 절로 그곳이 땡기면 잠시 둘레길을 놓아두고 갔다와도 상관없다. (20
분 정도 걸림)
삼천사입구에서 삼천사계곡 구간에는 농장과 식당이 여럿 있는데 그들을 지나 삼천사계곡을 건
너야 다음 코스로 진행이 된다. 평일에는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맛있는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
여 그 유혹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어찌 식당 앞도 아니고 한복판을 지나가게 했는지는 모르지
만 주변에 마땅한 길이 없어 기존 길을 활용한 모양이다.


▲  마실길 돌탑 구간

삼천사계곡을 건너면 'S'자로 살짝 구부러진 길이 나오고 길 왼편으로 비슷하게 생긴 돌탑 4
형제가 마중을 한다. 이들 돌탑은 둘레길을 닦으면서 수식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둘레길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준다.


▲  나란히 자리한 돌탑 4형제

▲  마실길의 오랜 터줏대감,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1호

돌탑을 지나면 울창한 모습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두 눈을 단단히 동여맨다. 동화 속
푸른 언덕이나 초원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나무로 나이가 약 170년에 이른다.
자꾸만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높이 18m, 둘레 4.2m에 큰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위치는 진관동 132-20번지로 북한산둘레길이 생기기 이전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삼천사와 진관사를 수없이 들락거린 나 조
차도 둘레길의 안내로 2012년 이후에나 그를 만났으니 앞서 경천군 송금비와 더불어 둘레길이
캐준 소중한 보물이다.


▲  느티나무 주변 풍경

▲  은행나무숲길 옆에 닦여진 돌탑들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숲과 돌탑이 나란히 있으니 마치 신성한 어딘가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은행나무숲길 (왼쪽은 늦봄, 오른쪽은 여름)

마실길에서 가장 으뜸인 곳이자 북한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바로 170
년 묵은 느티나무와 그 옆에 자리한 은행나무숲길을 꼽고 싶다. (솔직히 둘레길 주변에서 이
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별로 없었음)
수목원이나 휴양림의 그림 같은 숲속길이나 산책로를 거니는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드는 곳으로
느티나무 주변을 곱게 손질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어 마실의 기분을 진하게 들게 했다. 게
다가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로 조촐하게 은행나무숲길을 내면서 전남 담양의 명물, 메타세콰
이어 가로수길에 못지 않은 맵시를 자랑한다. 
산책로 주변에는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여럿 있다. 굳이 의자가 아니더라도 돗자리를 가져와
은행나무 그늘이나 주변에 깔고 간식을 먹으며 수다 몇 송이를 피우면 정말 소풍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은행나무숲길은 북한산둘레길이 지나는 명소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홀린 곳으로 집으로 훔쳐
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보고 또 보고 누리고 싶다. 이런 곳에서는 정말 옛 사람들처럼 시 1수
읊어줘야 운치가 나거늘, 시적(詩的) 감각이 떨어지고 인간의 하찮은 말과 언어로 자연의 아
름다움을 표현하고 희롱한다는 것이 실례가 되는 일인듯 싶어 그저 탄성만 질렀다.


▲  봄과 여름, 가을이 앞다투어 머물다 가는 은행나무숲의 위엄
겨울은 그 시샘이 더 높아 아예 은행나무의 옷을 다 벗겨가 버린다.


 

♠  화의군 이영 묘역과 구름정원길

▲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4호

은행나무숲에서 진관사계곡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진관사로 인도하는 도로(진관길)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은 진관사로, 서쪽은 은평한옥마을로 이어지며 마실길은 바로 서쪽에 있는 3거리
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3거리 서남쪽에 오래된 느티나무 4형제가 있음) 그리고 바로 정
면에 있는 산자락에 무덤들이 여럿 눈에 보일 것인데 그들은 영산군 이전(寧山君 李恮) 묘역
이다. (영산군 묘역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함)

서쪽 3거리에서 은평한옥마을 동부를 가르는 마실길(연서로48길)을 따라가 진관생태다리를 지
나서 동쪽 산자락에 홍살문과 사당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무덤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화
의군 묘역이다.

화의군(和義君, 1425~?)은 세종의 9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영(李瓔), 자는 양지(良之)이며 생
모는 영빈 강씨(令嬪 姜氏)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매우 좋아해 매일 책에 파묻혀 살았다고 하며, 초서(草書)와 예서(禮
書)에 쓸데없이 능했다. 또한 이미 6살에 한시(漢詩)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人生斯世 忠孝爲大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충효가 크다 하니
忠能保國 孝能匡世 
 충성으로 나라를 보전할 수 있고 효도로써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

1433년에 화의군에 봉해졌고 1436년 11살의 어린 나이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했다. 1441년
에는 사춘기 시절의 호기심 때문인지 이복형인 임영대군(
臨瀛大君)과 함께 여염집 여자를 남
장을 시켜 궁 안으로 납치해 온 적이 있었는데 그만 부왕(父王)인 세종에게 들켜 된통 혼이
났다. 그 벌로 그에게 주어진 화의군의 직첩(職牒)과 과전(科田)이 몰수되었다.
허나 1447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 남의 기첩(妓妾)을 가로챈 일로 직첩이 또
몰수되었다. 그러다가 맏형(문종)이 재위에 오른 1450년에 다시 환원되었다.

화의군은 누이동생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더불어 훈민정음에 제법 조예가 깊었는데 정음청
(正音廳)에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프로젝트에 참
여하였고, 평소 친분이 있던 박팽년의 매부 박중손(朴仲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세 아들을
두었다.
1455년 2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를 밀어내고 재위에 오른 이후, 4째 형인 금성대
군(錦城大君)을 비롯한 60여 명의 무인과 활쏘기 사냥을 나갔다가 대간(臺諫)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변경으로 귀양 갔다가 그 이듬해 풀려났다. 그리고 성삼문과 박팽년, 유응부(兪應孚) 등
이 단종(端宗) 복위를 꾀하다 걸려들자, 세조는 화의군에게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물었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잘못하면 자신까지 화를 당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1457년, 순흥(順興,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귀양간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를 몰래 꾀하였고
영월로 유배간 단종이 결국 사사(賜死)되자 복위에 가담한 죄로 충청도 금산(錦山)으로 유배
되었다. 이때 그에게 주어진 모든 관직과 왕족의 특권, 재산이 싹 몰수되었으며, 그의 이름과
자손들의 이름은 왕실 종친록(宗親錄)에서 제명되는 치욕을 맞는다.
그가 금산으로 유배된 이후,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① 1460년 단종 복위 사건으로 사사(賜死)되었다는 것, (화의군 묘역 안내문, 화의군파 족보,
   은평문화원에서 편찬한 '은평구의 문화유산')
② 거의 60~70세까지 유배지에서 살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 했다는 것. (조선왕조실록..)

화의군이 죽은 이후, 그의 세 아들과 자손들은 죄인의 신분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오다가 성종
시절에 들어와 세조의 부인이자 화의군의 형수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지시로 도성(都
城) 밖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중종 시절에는 화의군의 손자 이윤(李允)의 상언(上言)에 따라
복관(復官)되면서 신분이 회복되는 한편, 종친록에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552년에는 금산에 있던 화의군의 묘소를 현재 위치인 양주(楊州) 땅 신혈리(新穴里, 현 서울
진관동)로 이장했으며, 1736년 영조(英祖)는 그에게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에 영월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 때 단종에 대한 충절이 인정되어 그 제단
에 배향되었다.
 
화의군 묘역에는 그의 차자(次子)인
'여성군 번(驪城君 轓)', 3자인 '금난수 식(金蘭守 軾)',
증손자인 '태산군 황(泰山君 凰)'의 묘가 있으며, 묘역 밑에 충경사
(忠景祠)란 사당을 세워
화의군 부부와 그의 생모의 신위(神位)를 봉안했다. 또한 그 주변에는 화의군의 후손들이 살
고 있었는데 은평뉴타운 개발의 칼질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묘역 주변에는 충경사 사당
과 재실(齋室)만 남게 되었다.

화의군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조선 왕족의 하나로 단종 복위운동에도 참여했었고 훈
민정음 프로젝트에도 크게 활약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인물이다. 물론 여자를 너무
밝혀 남의 여자를 마구 건드렸던 진상은 좀 있었지만...
그의 우울했던 인생 만큼이나 그의 묘역 또한 긴 세월을 비지정문화재의 영욕을 간직하며 지
내오다가 2005년 말에서야 뒤늦게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팔자가 조금은 펴졌다.

▲  묘역 서쪽에 자리한 화의군 신도비
(神道碑)

▲  화의군 사당인 충경사와 붉은 피부의
홍살문


충경사 앞에는 성역(聖域)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차가운 인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홍살문
과 충경사의 배치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조금은 북쪽으로 삐뚤어져 있다. 둘의 방향이
일치해야 좀 안정감있게 보이는데 말이다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충경사와 홍살문은 1970년 이후에 지어졌으며 사당 남쪽 언덕에 화의군
의 묘역이 자리해 있다.


▲  화의군 묘역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묘역 주변은 잘 익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운치를 자아낸다. 묘역 주변은 묘역 보호를 위
해 사람 키보다 높게 철책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묘역으로 인도하는 문은 충경사
뒤쪽에 있는데 늘 굳게 잠겨져 있어 철책 너머로 보던가, 중간중간 보이는 허술한 곳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던가 해야된다. 허나 철책 밖에서도 보일 만큼 보이니 괜히 무리는 하지 말자.


▲  서북쪽을 바라보고 선 화의군 묘역

▲  곡장을 병풍처럼 두른 화의군 묘와 그의 아들인 금난수 식의 무덤

화의군묘는 일반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처럼 조촐한 크기로 곡장을 봉분(封墳) 뒤쪽에 병풍처
럼 둘러 무덤의 품격을 조금 높였다. 무덤 앞에는 상석(床石)과 묘표, 장명등이 있고 그 양쪽
으로 문인석 1쌍과 근래에 지은 무인석(武人石) 1쌍이 나란히 무덤을 지킨다. 게다가 근래에
봉분 밑도리에 엉뚱하게도 12지신상을 두룬 호석(護石)을 둘러 서로가 너무 어색한 조화를 보
인다.
봉분에 비해 호석을 너무 크게 둘러 근래에 지어진 무덤처럼 요상한 모습이 되었으며, 12지신
상의 모습도 지금 당장이라도 산으로 뛰어갈 것 같은 생동감 있는 모습이라 다들 산만해 보여
오히려 없는 것보다 못한 것 같다. 물론 무덤에 대한 후손들의 지극정성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 정성이 너무 지나쳐 조선 초기 무덤을 20세기 무덤으로 품격을 떨어뜨렸다.
문화재로 지정된 무덤은 크게 망가지지 않은 이상은 초창기의 모습을 지켜주는 것이 무덤 주
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무덤을 너무 기존의 모습과 다르게 치장해버리면 무덤 주인이
잠시 마실갔다가 자신의 무덤도 찾지 못하고 헤매지 않겠는가?

※ 화의군 이영 묘역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가변차로 정류장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에서 하차 (701, 7211번을 타
  는 것이 더 빠름) 정류장 남쪽에 자리한 제각말아파트교차로에서 동쪽 길(연서로48길)을 3
  분 정도 가면 오른쪽(남쪽)에 화의군 묘역이 있다.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1, 704번(구파발역 경유), 가변
  차로 정류장에서 7211번을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44 (연서로48길 22)


▲  화의군묘역 인근 구름정원길에서 만난 주인 잃은 비좌(碑座)

화의군 묘역 남쪽에 북한산(삼각산)과 조선시대 최대의 공동묘지였던 이말산(莉茉山)을 이어
주는 진관생태다리가 있다. (밑에 터널을 두고 그 위에 산줄기를 만듬) 여기서부터 잠시나마
정들었던 마실길은 막을 내리고 북한산둘레길 8구간인 구름정원길로 이름이 갈린다.

구름정원길은 진관생태다리에서 북한산생태공원 상단까지 4.9km 거리이다. 옛 기자촌터 뒤쪽
으로 구름정원이란 이름이 참 어여쁜데 그 이름 그대로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구름과 조금
이나마 가까워지는 구간으로 평지 일색의 마실길과는 완전 차원이 틀려 마실길에 적응된 몸이
조금 괴로워함을 느낄 것이다.

진관생태다리에서 10분 이상 올라야 비로소 옛 기자촌 뒷쪽 산능선에 이르는데, 길 중간에 주
인을 잃은 비좌와 동자석 등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허나 대부분 속인들은 둘레길에 눈이 멀어
그들을 지나치고 만다. 이곳을 비롯하여 이말산과 내시묘역길 주변에는 왕족과 사대부, 상궁,
내시들의 무덤이 즐비하며 이 비좌와 동자석도 그들 무덤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러다가 자연재해로 묘가 사라지고 비석 또한 파괴되어 이렇게 비석의 아랫도리인 비좌만 간
신히 남아 햇볕을 보고 있다. 이 비좌의 주인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분명 주변을 싹 뒤
집어 엎으면 유력한 단서가 나올 듯 싶은데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이상 비좌와 동자석의 주
인을 찾는 시도는 없을 듯 싶다.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향로봉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북한산 서쪽 줄기와 은평구 동부 지역

기자촌지킴터에 이르면 동쪽으로 북한산(삼각산) 향로봉, 남쪽으로 은평구 동부 지역, 서쪽으
로는 개발의 칼질로 거의 허허벌판이 된 옛 기자촌이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기자들의 생활
터전으로 제공했다고 하는 기자촌(記者村)은 서울 지역 달동네의 상징으로 쇠락된 것을 2008
년 이후 모조리 갈아엎었다.
이곳도 은평뉴타운 개발지의 일부로 현재는 근린공원이 닦여져 있다. 기왕 이렇게 밀어버린거
후회가 없게끔 잘 다듬었으면 좋겠고, 진관동 일대에 대한 개발의 난도질도 이곳에서 그만 멈
췄으면 좋겠다.


▲  구름정원길 중간인 폭포동 선림사 주변 계곡

기자촌지킴터에서 약 15분 정도 가면 기자촌 남쪽인 폭포동 선림사(禪林寺)에 이른다. 폭포동
(瀑布洞)이란 이름은 금지된 구역으로 묶인 산 위쪽 바위에 있는 폭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
소에는 보기 힘들며 비가 많이 온 날과 그 이후에만 잠깐씩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폭포이다. 

이곳은 숲이 삼삼하고 계곡은 작으나 맑은 물이 흐르고 반석과 바위가 많아 피서를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다. 여기서 아파트가 보이는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바로 은평뉴타운의 동남쪽 끝
인 폭포동 힐스테이트아파트이다. 이 아파트는 완전 산속에 묻힌 아파트단지로 교통이 썩 좋
지는 못해 버스를 타려면 도보 10분 거리인 은평경찰서까지 걸어나가야 된다.


▲  하얀 피부의 반석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는 폭포동 계곡

▲  폭포동 계곡에서 만난 어느 문인석과 망주석(望柱石)

이들은 인근 산자락에 있다가 사라진 사대부묘에서 수습된 것으로 여겨진다.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은 근심이 있는 표정으로 눈을 살짝 감으며 상념에 잠겨 있고, 오른쪽 망주석에는 꼬랑
지가 긴 세호(혹은 다람쥐)로 보이는 동물이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다.


▲  폭포동에서 불광2동으로 넘어가는 구름정원길 (선림사 뒷쪽)

▲  선림사 남쪽 구름정원길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된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선림사 남쪽 불광2동에서 쿨하게 마무리 지
었다.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했고 이른 무더위와 장거리 도보로 적지않게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다 살펴보았으니 나름 뿌듯하며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자주는 아니어도 이렇게 종종 찾을 수 있어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둘레길 산책은 흔쾌히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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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국제적인 선찰로 명성이 높은 북한산 화계사 ~~~ (화계사의 석가탄신일 야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북한산 화계사의 야경 '


▲  화계사 대웅전과 초파일 연등의 향연


 

올해도 변함없이 내가 좋아하는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초파
일만 되면 어김없이 내가 서식하는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이나 비록 역사는 짧지만 문화
유산을 간직한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초파일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허나
이번에는 전날 과음으로 인해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고 14시가 넘어서야 겨우
천근만근 같은 두 눈이 떠졌다. 그래서 15시가 넘어서 겨우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자꾸 기울어만 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열심히 걸음을 재촉해 숭인동에 있는 낙산 청룡사(
靑龍寺, ☞ 관련글 보러가기), 삼선동 정각사(正覺寺)를 둘러보고 삼선교(한성대입구역)
로 나오니 벌써 18시를 가르킨다.
3시간 가까이 바쁘게 움직였더만 몸도 좀 피곤하여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철수하려고
했으나 화계사로 가는 151번 시내버스(우이동↔흑석동)를 보는 순간 마음이 변덕을 부려
계획에도 없던 화계사(華溪寺)로 길을 향했다.
아직 해가 조금은 남아있어 벌써 발길을 돌리기에는 다소 아쉬웠고, 연등의 향연이 펼쳐
지는 초파일 야경은 꼭 봐줘야 된다. 게다가 1년에 딱 하루 밖에 없는 날이니 제대로 즐
겨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화계사에 이르니 저녁 시간임에도 절을 찾는 수요가 엄청났다. 많은 사람들이 절에서 나
오고 또 그만큼 들어가기를 반복하여 화계사입구(한신대교차로)는 사람과 차량으로 북새
통을 이루었다. 하긴 서울 동북부 지역(도봉/강북/노원구)에서 도선사(道詵寺) 다음으로
크고 유명한 절집이니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것은 당연하다. 썰물처럼 밀물처럼 들어가고
나오는 인파 속을 헤엄치며 간신히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섰다.

경내를 코 앞에 둔 장소에서 신도 아줌마들이 백설기라 불리는 두툼한 떡을 나눠주고 있
었는데 그 떡을 1개 챙기며 초파일 야경에 잠긴 화계사 경내로 들어섰다. 햇님도 뉘엿뉘
엿 저물어 그만의 비밀 공간으로 숨어들고, 그 틈을 타 달님이 어둠을 내리니 조용히 웅
크리던 연등은 일제히 몸을 불살라 어둠을 몰아낸다. 바로 초파일 풍경의 백미(白眉)인
연등의 향연이 두근두근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화계사의 내력에 대해 간단
히 살펴보도록 하자.


▲  서서히 초파일 저녁 향연을 준비하는 화계사 연등
(대적광전에서 바라본 모습)


 

♠  화계사 입문 (범종각 주변)

▲  화계사 일주문 장엄등의 위엄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화계사는 1522년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창건했
다고 전한다.
신월은 서평군 이공(西平君 李公)의 도움을 받았는데, 나무를 벌채를 하지 않고 인근 부허동(
浮虛洞)에 있었다고 전하는 보덕암(普德庵) 건물(법당과 요사 50칸)을 가져와 절을 세웠다. 아
마도 서평군이 그곳을 접수하여 절 건립에 제공했던 모양이다.
화계사 건립에 희생된 보덕암은 고려 광종(光宗) 때 법인대사(法印大師) 탄문(坦文)이 창건했
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보덕암 건물을 단순히 옮겨왔다는 이유로 화계사의 창건시기를
고려 초로 우기기도 했으나 이는 단순히 건물만 가져왔을 뿐, 절의 이름과 성격은 다르므로 엄
연한 별개로 봐야 된다. 그래서 1522년을 창건 시기로 크게 삼고 있으며, 대적광전 앞에 450년
묵은 느티나무가 있어 절의 창건시기를 그런데로 받쳐준다.

1618년 9월 불의의 화재를 만나 절이 싹 잿더미가 되었다. 이때 도월(道月)이 덕흥대원군(德興
大院君) 집안의 지원을 받아 중창 불사를 벌여 1619년 3월 완성을 보았다.
이후 절이 크게 쇠퇴했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
夫人閔氏)와의 인연 덕분에 다시금 흥한 기운을 얻게 된다. 당시 화계사는 민씨 외가의 원찰(
願刹)로 민씨는 자주 이곳을 찾아 불공을 올렸는데 그러다보니 대원군도 부인 손에 이끌려 이
곳을 찾았다.
당시 대원군과 화계사와의 끈끈한 인연, 그리고 대원군의 야망을 엿보게 하는 설화 한 토막이
세월의 바람을 타며 은은히 전해온다.


▲  반야용선(般若龍船) 장엄등
석가탄신일 1주 전 토요일에 열리는 서울 연등회(燃燈會) 제등행렬에
단골로 참여하는 장엄등이다.


때는 바야흐로 안동김씨 세력이 신나게 나라를 말아먹던 시절의 어느 여름날<헌종(憲宗) 때로
여겨짐>, 대원군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다. 무더운 여름이라 참을 수 없는 갈증으
로 꽤 지친 상태였는데 절 앞 느티나무에 이르니 왠 동자승(童子僧)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꿀
물이 든 사발을 내밀었다.
대원군은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듯, 사발을 신나게 들이키고 물을 준 이유를 물었다. 동자승이
괜히 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동자 왈 '만인(萬印) 스님께서 이러이러한 손님이 오실
것이니 꿀물을 드리고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대원군은 자신이 올 것을 짐작했던 만인의 예지력에 크게 감탄하며 동자승의 안내로 만인의 방
으로 들어갔다.

대원군과 만인, 이들은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지 이번이 초면인지는 모르겠으나 금세 심금
을 터놓고 판이 큰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몰아내고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자신의 야망을 드러냈다. 허나 만인은 그의 야망은 물론이고 장차 나라를
좌지우지할 인물이 될 것을 예견하고 있던 터라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래도 시치미를 한번 뚝 떼며, '이것도 다 인연의 도리인데, 소승이 어찌하겠습니까? 흔쾌히
알려 드리지요'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냐? 충청도 덕산(德山,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帝王)이 태어날 명당(明堂)이니 연천(漣川)에 있는 남연군(南延君,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그곳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장차 제왕이 될 왕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명당 자리를 알려주는 것은 좋으나 그 자리에 이미 절이 있다. 절에 몸 담은 승려로써 참으로
몹쓸 말을 한 꼴이 된다. 허나 그렇게 흥선대원군이란 든든한 후광(後光)을 얻게 됨으로써 가
야사에게는 미안하지만 화계사는 이전보다 더 흥하게 된다. 그게 바로 만인이 노린 것이다.

대원군은 돈을 마련하여 가야사를 찾아가 그곳 주지승과 흥정했다. 돈에 함빡 넘어간 주지승은
자기 절에 불을 지르며 탑을 부셨고, 대원군은 남연군 묘를 그곳으로 이전했다. 이후 아들 이
재황(李載晃)이 태어났고, 1863년 조대비(趙大妃)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종(高
宗)이다. 이렇게 대원군의 꿈은 그런데로 이루어진다. 동시에 만인의 꿈도 실현된다. 허나 그
러면 무엇하랴? 3대도 못가서 나라를 보기 좋게 말아먹었거늘...

▲  대적광전(大寂光殿)

▲  보화루<寶華樓, 화장루(華藏樓)>

고종 이후, 화계사는 날개를 겹겹히 달게 되는데, 1866년 대원군의 두둑한 지원으로 절을 중수
했으며 이때 지어진 것이 대웅전과 보화루(화장루)이다. 1870년에는 용선(龍船)과 초암(草庵)
이 대웅전을 중수했고, 1875년 화산재근(華山在根)이 대웅전의 아미타후불탱을, 성암승의(性庵
勝宜)가 신중탱과 현왕탱, 지장탱 등을 조성했다.

1876년에는 초암이 전년에 궁궐에서 받은 자수(刺繡)로 만든 관음상(觀音像)을 봉안하고자 관
음전을 고쳐지었다. 이 관음상은 1874년 2월 훗날 순종(純宗)이 되는 왕자가 태어나자 그의 수
명장수를 기원하고자 모후(母后)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조대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헌
종의 왕후로 홍대비)의 발원으로 궁녀들이 수를 놓아 만든 것이다. 기존 관음전이 1칸 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이라 상궁들이 돈을 내었고, 넉넉한 재정 지원에 장인들도 앞을 다투어 건립에
참여해 건물을 짓고 단청하는데 불과 며칠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1877년에는 왕명으로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에 있던 강서사(江西寺)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가져와 화계사에 주었고, 이들을 봉안하고자 1878년 시왕전을 고쳐지었다. 또한 1880년 조대비
가 명부전에 불량답(佛糧畓)을 내렸으며, 1883년 금산(錦山)이 조대비와 홍대비의 지원으로 관
음전의 불량계(佛粮契)를 세웠으며 1885년 산신각을 중수했다.
1897년에는 큰 종을 영주 희방사(喜方寺)에서 가져왔으며 중종(中鐘)은 경도에서 구입하고, 운
판은 멀리 해남 미황사(美黃寺)에서 가져왔다. 이렇게 고종과 순종 시절에는 왕비와 대비, 상
궁의 발길이 빈번해 속세에서는 이곳을 궁(宮)절이라 불렀다. 그만큼 왕실과의 끈이 두터웠던
것이다.

1910년 12월, 월명(越溟)이 임종할 때 강원도 양양에 있던 논 276두락(斗落)을 절에 헌납하면
서 만일염불회가 세워졌으며, 1911년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奉恩寺)의 수반말사로 편입되
었다.
1921년 3월 현하(玄荷)와 동화(東化) 두 화주가 김창환, 민준기 등의 시주로 관음전과 시왕전
을 중수 단청했고, 이듬해에 대웅전 개금불사를 벌였다. 1925년에는 주지 한찬우(韓讚雨)가 김
종하, 오정근의 지원으로 법당 및 대방 앞뒤 축대를 쌓아 이듬해 7월 완성했으며, 1933년 7월
한글학회 주관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 마련을 위한 모임이 이곳에서 열렸다. 그때 논의된 통일
안은 그해 10월 세상에 발표되었다.
1937년에는 종식(鍾植)이 낡은 건물을 정비했고,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올라가는 길목 바위
에 마애관음상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승려 안진호가 '삼각산화계사약지(三角山華溪寺
略誌)'를 편찬했다.

6.25전쟁 때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 피해는 없었으며, 1964년 최기남 거사의 가족이 기증
한 최기남의 오백나한을 봉안하고자 천불오백성전을 세웠고, 1972년에 진암(眞菴)이 범종각을
지었다. 1973년에는 대웅전 삼존불을 조성했으나 이듬해 관음전이 불에 타면서 소실되었으며,
1975년 진암화상이 퇴락한 산신각을 증축해 삼성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1년 4층 규모의 대적광전을 세웠고, 1992년 국제선원을 개원해 외국인 승려의 필수 수행처
로 자리매김했다. 2001년에는 명부전을 보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했고, 2005년에 대웅전을
보수해 지금에 이른다.

▲  대웅전을 바라보는 명부전(冥府殿)

▲  천불오백성전

화계사가 외국인 승려의 성지가 된 것은 숭산행원의 오랜 노력 덕분이다. 그는 1970년대에 미
국으로 건너가 서양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국 불교를 포교했다.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방
황하던 그들은 숭산의 포교와 설법에 적지 않게 감명을 받았고, 그가 해외에 머무는 동안 5만
명이 넘는 서양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숭산이 해외에 세운 선원은 30개 나라에 120곳이 넘으며, 미국에서 처음 세운 '프로비던스 선
원(禪院)'에서는 1982년 천하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평화회의를 열기도 했다. 그의 열성
적인 해외 포교로 화계사를 찾는 외국인 승려와 승려 희망자가 늘자 계룡산(鷄龍山) 무상사에
제2의 국제선원을 닦아 이들을 수용해 가르치고 있다.

화계사 국제선원 출신 외국인 승려 중에 그 유명한 미국인 현각이 있다. 그는 카톨릭교 집안에
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우연히 숭산의 설법을 듣고는 크게 감명을 받아
불교로 갈아탔고 화계사를 찾아 승려가 되었다. 꽤 열심히 활동하여 현정사(現靜寺, 경북 영주
부석면)의 주지를 지내기도 했으며, 화계사 국제선원의 선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렇듯 국제적인 수행처로 명성을 날리면서 경내에서 외국인 승려를 보는 것은 이제 일상 생활
이 되었다.

화계사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삼성각, 보화루, 대적광전, 조실당, 천불오
백성전, 교육관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이중 대적광전이 단연 규모가
크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사인비구 제작 동종과 목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등 국가 보
물 2점과 대웅전,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아미타괘불도 및 오래여도, 탑다라니판, 천
수천안관음변상판 등 지방문화재 9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 3그루가 서울
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보호수 나무는 이번에 담지 않았음)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고 교통편 또한 착하여 접근성도 우수하며, 주택가가 바로 지척이지
만 삼삼한 숲에 포근히 감싸여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을 누리기에는 그리 부족함이 없다. 국
제적인 사찰이라 어색한 한국말을 구사하며 인사를 건네는 외국 승려와 수행자의 모습에서 우리
나라 불교의 높은 위상과 인기를 새삼 느끼게 한다.

※ 화계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 지하철 우이신설선 화계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2분
* 지하철 4호선 미아삼거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1번, 1165번 시내버스를 타고 화계사입구
  , 한신대대학원 하차, 도보 10분
* 지하철 4호선 미아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1번 시내버스 이용

* 화계사에서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하고 있다. 체험형은 매주 토/일요일에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되며 참가비는 5만원이다. (1박 2일 기준) 자유롭게 머물다 가는 휴식형은 화~
  금요일에 운영하며 예불과 식사시간만 지키면 된다. (1박 2일에 5만원) 자세한 정보는 화계
  사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487 (화계사길 117 ☎ 02-902-2663, 02-903-3361)
* 화계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천하를 향해 연등을 늘어뜨린 범종각(梵鍾閣)

대적광전 옆에 자리한 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4물(四物)이
라 불리는 범종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의 보금자리이다.
범종각은 원래 대적광전 서남쪽에 있던 것으로 2층으로 이루어진 6각형 건물이었다. 1972년 진
암(眞菴)이 대방(보화루)에 얹혀살던 영주 희방사(喜方寺) 출신 동종과 대웅전 처마 밑에 매달
려 거의 썩기 직전이던 법고를 위해 지은 것으로 기존 건물을 부시고 지금 자리에 번듯하게 새
범종각을 지었다.

온갖 연등과 장엄등으로 몸을 치장한 범종각에
는 특이하게 종이 2개씩이나 달려있다. 큰 종은
1978년에 진암이 만든 것이며, 그 옆에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작은 종은 1683년에 제
작된 것으로 1898년 희방사에서 올라왔다. 무게
는 300근 정도 된다.
이 동종은 17세기에 활약했던 사인(思印) 비구
가 만든 8개의 종 가운데 하나이다. 사인은 손
재주가 좋은 승려로 종을 매우 잘만들었는데,
그가 만든 종이 이곳과 강화도, 안성 청룡사(靑
龍寺), 의왕 청계사(淸溪寺), 홍천 수타사(壽陀
寺), 문경 김룡사(金龍寺), 포항 보경사(寶鏡寺
),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전하고 있다.

▲  화계사 동종 - 보물 11-5호

이들 종은 모두 보물 11호 계열의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으나 원래는 강화도 동종만 11호였다.
그러다가 2000년에 사인이 만든 종을 죄다 보물로 삼으면서 화계사 동종도 그 혜택을 받게 되
었다. (그 이전에는 비지정이었음) 그만큼 사인이 만든 종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우수 종으
로 전통적인 신라 범종 양식을 지키면서 거기의 자신만의 독창성을 집어넣었다.

경내에서 2번째로 오래된 보물로 종 윗부분 용뉴에 쌍용(雙龍)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상대(
上帶)에는 범자(梵字)를 2줄로 배치했고, 그 밑에 조선 후기 양식을 지닌 유곽(遊廓) 4좌를 두
었다. 유곽대는 도식화된 식물무늬로 채우고, 유곽 안에 있는 9개의 유두는 여섯 잎으로 된 꽃
받침 위에 둥근 꽃잎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유곽 사이에는 '종면경석(宗面磬石)','혜일장명(
惠日長明)','법주사계(法周沙界)'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안성 청룡사 동종에서 같은 내용이
있다. 종 밑도리에는 가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띠 안에 연꽃을 새겨놓았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며, 종 조성과 관련된 명문(銘文) 200자 정도가 새겨져 있
어 종의 탄생 정보를 알려준다.

이 종이 제자리(희방사)를 떠나 이곳으로 온 것은 왕실의 화계사 사랑이 뜨겁기 때문이다. 덕
분에 화계사의 보물은 그만큼 늘어났으며 이곳의 범종 역할을 하면서 하루에 2번 종소리를 날
렸다. 그러다가 1978년 그 곁에 새 범종을 매달면서 그 역할을 후배에게 물려줬고, 국가 지정
보물이란 큰 명예직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종소리를 울리지 않았다.
그의 나이는 이제 340년 남짓, 아직은 한참 몸을 풀 무탈할 나이이나 절에서 그의 몸을 무척
아끼면서 이제는 거의 무늬만 종이 되었다. 종은 종의 역할을 해야 종다운 것이지, 저렇게 그
림의 떡처럼 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만 종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예외)


▲  연등으로 활활 타오르는 범종각과 그 주변

▲  범종각에 걸린 붉은 연등과 네모 연등, 6각형 연등

시대가 바뀌면 연등과 장엄등에도 변화를 줘야 된다. 그래서 기존의 연등 모습을 탈피하여 네
모, 6각형, 8각형, 온갖 모습의 등까지 다양하게 등장했다. 그런 연등에 그려놓는 그림이나 등
의 형상도 불교 외에도 다채롭게 담고 있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데 왼쪽 네모 등에는 코끼리
를 탄 두광(頭光)을 두룬 관음보살 누님이 귀엽게 깃들여져 있고, 오른쪽 6각형 연등에는 함박
웃음을 짓고 있는 토끼가 그려져 있어 웃음바이러스를 살짝 건네준다.


▲  기도하는 동자승을 담은 네모난 등(왼쪽)과 카톡 이모티콘
무지(muzi)를 담은 8각형 등

▲  8각형 등에 깃든 카톡 캐릭터 프로도의 위엄
연등에는 현재 유행하는 캐릭터나 온갖 군상(群像)의 존재를 담고 있어
21세기를 살아가는 변형 연등의 살아가는 정석을 보여준다.

▲  카톡 캐릭터 악동복숭아(어피치, apeach)를 담은 장엄등

▲  연꽃과 달이 그려진 연등

▲  카톡 이모티콘 네오를 담은 8각형 연등


▲  부엉이 부부와 흩날리는 봄꽃이 담긴 6각형 연등

▲  대적광전과 보화루 사이의 허공을 장악한 연등
하늘이 갑자기 건물 높이만큼 확 내려앉은 기분이다.

▲  보화루에 걸린 '삼각산 제일선원(第一禪院)' 현판

대웅전과 대적광전 사이에는 보화루가 자리해 있다. 화장루라 불리기도 하는데 1866년에 지어
진 건물로 대방(大房), 큰방이라 불리기도 한다.
대방은 조선 후기에 왕실의 지원을 두둑히 받던 서울 근교 절에서 많이 나타나는 건물로 이곳
을 비롯해 돈암동 흥천사(興天寺),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고양 흥국사, 파주 보광사(普光寺)
등에 남아있다. 대방의 역할은 승려의 숙식 및 예불의 목적도 있지만 서울에서 온 왕족과 사대
부들의 숙식 편의를 제공하고 그들만의 별도 예불처를 두어 법당에서 백성들과 함께 예불을 보
는 번거로움을 덜어주려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러니까 왕족과 귀족을 위한 조금은 아니꼬운 특
별 서비스 공간인 셈이다. 그들이 주요 밥줄이나 다름이 없으니 절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해
야 절도 꾸리고 속칭 소고기도 사묵을 수 있다.

보화루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인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가 쓴 것이며, 화계사
현판은 1866년 대원군이 절 중수 자금과 함께 보내준 친필 현판이다. 이 현판에는 '대원군장(
大院君章)','석파(石坡)'가 쓰여 있는데, 예서체와 해서를 혼합해서 쓴 명필이다.
1933년에는 이희승(李熙昇), 최현배(崔鉉培) 등 한글학회 소속 국문학자 9명이 보화루에 머물
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했던 유서 깊은 현장으로 그해 10월 그 통일안이 발표되었다.

현재 보화루는 큰방과 종무소로 쓰이고 있으며, 1974년 불에 탄 관음전에 있었던 관음보살상을
봉안해 관음전(觀音殿)의 역할도 겸한다. 그리고 건물을 받치는 석축 높이 때문에 누(樓) 비슷
한 성격을 지녔으나 대적광전을 지으면서 계단을 없애고 평평하게 다졌으며, 예전에는 보화루
가 외부에서 경내를 감싸서 가리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대적광전이 그 역할을 몇배 이상으로
휼륭히 해내고 있다.


 

♠  화계사 대웅전 주변

▲  윤장대(輪藏臺) 장엄등

보화루 옆에는 윤장대를 흉내낸 장엄등이 중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윤장
대는 여럿 봤지만 장엄등으로 된 그것은 처음인데 윤장대란 서적이나 장경판(藏經板)을 넣어
두던 일종의 장경각(藏經閣)이다.
법회 때 경전을 안에 넣고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염불을 했는데 옛날에는 일반 백성들 상당수
가 까막눈이었고 설령 한자를 알아도 불교 경전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여 '윤장대
를 1번 돌리면 경전을 1번 읽은 것과 같다 /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다 / 소망이 이루어진다 /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혼난다'는 식으로 중생들에게 영업을 했다.
비록 장엄등이지만 그 성격에 맞추어 손잡이까지 두어 돌려보도록 했다.


▲  대웅전 옆구리를 가득 메운 연등

▲  화계사 대웅전(大雄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5호

좌우로 명부전과 삼성각을 거느리며 동쪽을 굽어보고 있는 대웅전은 화계사의 법당(금당)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66년 대원군의 지원으로 지어졌으며, 1870년에 중건
했다. 당시 환공야조(幻空冶兆)가 쓴 '화계사 대웅보전 중건기문(華溪寺大雄寶殿重建記文)'에
따르면 석수(石手) 30명, 목공(木工) 100명이 불과 수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건물 정면에는 각 칸마다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이 설치되어 있어 문짝을 위로 올릴 수 있
다. 그래서 초파일이나 한여름에 가면 보통 문이 위로 들려져 있다. 대웅전 현판은 조선 후기
명필인 몽인 정학교(夢人 丁學敎)의 것으로 여겨지며, 주련(柱聯)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으로 내용은 이렇다.

비로해장전무적(毘盧海藏全無跡) - 비로자나의 법해에는 완전한 자취가 없고
적광묘사역무종(寂光妙士亦無蹤) - 적광묘사 또한 아무런 흔적이 없네.
겁화동연호말진(劫火洞然毫末盡) - 겁화가 훨훨 타서 털끝마저 다해도
청산의구백운중(靑山依舊白雲中) - 푸른 산은 옛과 같이 흰구름 속에 솟았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아미타후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89호)

초파일 순례객들로 정신이 없는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금동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1873년에 조성된 것으로 포근하고 후덕한 표정으로 초파일 생일 인사를 받고들 있는데
그들 뒤로 1875년에 화산당 재근(華山堂 在根)이 그린 아미타후불도가 고색의 향기를 풍기며
든든히 자리해 있으며, 불단 우측에는 법당의 필수 그림으로 1969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幀)
이 자리를 지킨다.


▲  연등 위에 하늘이 있고, 그 밑에 인간과 세상이 있다.
연등 밑의 세상, 대웅전에서 바라본 모습

▲  영가(靈駕, 죽은 사람)를 위한 하얀 연등의 엄숙한 향연
대웅전 앞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오색 연등의 화려한 향연이 펼쳐지고 있고
뒷쪽에는 죽은 이들을 위한 하얀 연등의 엄숙하면서도 조금은 오싹한 향연이
펼쳐져 잠시 마음을 숙연케 한다.

▲  삼성각(三聖閣)에서 바라본 연등의 향연

▲  1975년에 조성된 삼성각 칠성탱(七星幀)

천불오백성전 뒤쪽이자 대웅전 우측 높은 곳에는 삼성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
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1885년에 중수된 산신각(山神閣
)이 있었다. 허나 나이를 먹을수록 퇴락하여 볼품이 없어지자 1975년 주지 진암이 기존의 산
신각을 부시고 새로 지으면서 삼성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내부에는 산신과 독성, 칠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을 다시 지은 탓에 고색의 내음은 싹 말
라버렸다.


▲  명부전 목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 - 보물 1822호
그 뒷쪽에 자리한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0호)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878년 초암이 조대비
의 지원을 받아 지었다.
2001년에 건물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개금하거나 개채(改彩)했으며, 명부전 현
판과 주련 글씨는 대원군의 친필로 전해진다.

불단에는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
奈翁和尙)이 만든 것으로 전해졌으나 불상 뱃속에서 나온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1649년에 황
해도 배천군 강서사(江西寺)에서 승려 영철(靈哲), 인명(印明), 상원(尙元), 운혜(云惠) 등이
조성했음이 밝혀졌다.
대적광전 주변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를 제외하고 화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지만 이들
은 원래부터 화계사 것이 아니었다. 배천군 강서사에서 만들어 광조사(廣照寺)에 봉안했던 것
으로 이들이 이곳에 온 사연은 대략 이렇다.

부모를 따라서 화계사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금수저 고종은 그곳에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없
음을 알았다. 그도 그것이 절의 필수 요소임을 알았던 모양이다. 하여 화계사에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선사하고자 천하를 수소문하니 광조사의 것이 좋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래서 광조사에 의견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877년 왕명으로 화계사로 가져왔는데 불상 운
송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설화가 아련히 전해온다.

화계사 승려 봉흔(奉欣)과 위운(威雲), 봉림(奉林)은 광조사를 찾아가 왕명을 전달하고 그곳
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일체를 접수했다. 허나 물가에 이르니 준비되어야 될 배가 없었다.
그들은 당황하여 어찌해야 되나 궁리를 하던 중, 마침 배 1척이 나타났다. 그들은 배를 세우
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뱃사공이 흔쾌히 승낙하며 '나도 당신들을 찾은 모양이오! 어젯밤 꿈
에 할아버님이 나타나 내일 날이 밝기 전에 배를 이끌고 강서사로 급히 가라고 하셨는데 아마
도 부처가 지휘했던 모양이오!'
말하면서 흔쾌히 불상을 싣고 서울로 향했다.
보통 배천군에서 서울까지는 뱃길이 2~3일 정도 걸리는데 그날은 유난히도 바람이 잘 맞아 불
과 반나절도 안되어 뚝섬에 도착했다. 불상을 화계사로 모두 옮기고 사공에게 배삯을 후하게
주었는데 사공은 쿨하게 돈을 거절하며 '할아버님의 현몽과 강바람의 순풍으로 보아 부처의
도움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어찌 배삯을 받겠소? 그 돈으로 차라리 시왕전의 내 장등(張燈)이
나 하나 해주시오'
부탁을 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시왕전에 그의 장등을 밝혔다고 전한다.

▲  우측 시왕상과 시왕탱

▲  좌측 시왕상과 시왕탱

푸른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상은 후덕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을 맞이한다. 몸의 신체 비례가 잘
맞아떨어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표현이 부드러워 귀족적인 기풍을 드러낸다. 몸에 걸친 법
의(法衣)는 두께가 상당한데 옷의 주름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좌우에 서 있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도 주인을 따라 황해도에서 이
곳으로 강제로 따라왔다. 주인과 마찬가지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그들 좌우에 늘어선 저승
의 시왕상과 판관(判官), 동자, 사자, 장군상 역시 그곳 출신으로 꽤 준수한 모습이다. 조선
중기 불상과 시왕상을 대표할 만한 존재로 뱃속에서 복장 유물까지 나와 그들의 가치를 더욱
돋구어 주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2014년 3월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지정 보물로 특진되었
으니 불상을 만든 옛 사람들의 조그만 배려가 그들의 몸값을 비싸게 만들어준 것이다.

지장보살상 뒤에 걸린 지장시왕도와 시왕상 뒤쪽에 걸린 시왕도와 사자도는 1878년 화산재근(
華山在根)과 혜과봉간(慧果奉侃) 등이 상궁들의 시주를 받아 그린 것으로 이들은 순수 화계사
의 불화이다. <'화계사 명부전 시왕도 및 사자도(使者圖)'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2
로 지정됨>


▲  한참 물이 오른 보화루 뜨락 연등
아까보다 빛이 더욱 짙어져 아쉽게 저물어가는 초파일의 밤을 붙잡는다.

▲  마애3존불을 담은 장엄등

▲  계단에 두광(頭光)처럼 떠있는 연등

▲  화계사 초파일의 밤은 그렇게 깊어져만 간다.

화계사는 많이 발걸음을 했던 절이라 이번에는 연등과 장엄등이 중심이 된 초파일 야경을 구
경하는데 거의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들과 대적광전, 천불오백성전, 일
주문, 삼성각 내부(칠성탱 제외) 등은 아예 담지도 않았다. 오로지 연등이 주인공이 된 야경
을 주로 담았다. 왜냐 오늘은 초파일(석가탄신일)이니까..

연등의 향연에 취해 거의 2시간 가까이 경내에 머물렀다. 21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사
람들은 꾸역꾸역 들어오고 경내는 여전히 부산하다. 연등은 더욱 농도를 높이며 절에서 어둠
을 몰아낸다.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 나들이는 내년 초파일을 애타게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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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6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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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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