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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삼각산) 삼천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북한산(삼각산) 삼천사 '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끝 무렵, 겨울이 투하한 막대한 눈폭탄으로 천하는 그
야말로 대혼란에 빠졌다.
창밖에 두툼히 깔려 천하만물을 깔고 앉은 하얀 눈을 보니 문득 산사의 설경(雪景)이 몸살
이 나도록 그리워진다. 하여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북한산(삼각산) 서쪽 자락에 묻힌
삼천사에 크게 목마름이 생겼다. 그곳은 즐겨찾기 명소까지는 아니디낭 1년에 최소 1회 정
도는 찾는 곳으로 서울에서도 제법 깊숙한 산주름 속에 있으며, 내가 있는 도봉동(道峰洞)
에서도 최소 1시간 반 이상을 가야 된다.


♠  삼천사 입문

▲  겨울에 잠긴 삼천사 가는 길(연서로54길)

진관사, 삼천사입구 정류장(701, 709, 7211, 7723번 시내버스 경유)에서 연서로를 따라 북쪽
으로 조금 가면 삼천리골입구 교차로이다. 여기서 오른쪽(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삼천교를 건
너면 삼천사로 인도하는 숲길(연서로54길)이 모습을 비춘다. 봄이나 가을에 왔더라면 호젓한
숲길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인데, 겨울 제국에게 잎은 물론 영혼까지 싹 털린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초췌해진 몰골로 나를 맞이한다.


▲  눈에 묻힌 너른 공터, 이곳은 절터였다. (삼천리골사지1)

숲길을 들어서면 식당을 옆에 낀 너른 공터가 나온다. 나무가 여럿 심어져 있는 이곳은 식당
에 딸린 공터로 족구장이나 야유회 장소로 널리 쓰이고 있는데, 예전에는 사슴농장이 있었다.
사슴의 숙성된 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시절이 참 엊그제 같은데, 그들은 죄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진다. 겉으로 보면 그냥 산이나 계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이나 농장의 쉼터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곳에 절터의 흔적(삼천리골사지1)이 아련하게 묻
혀있다.

이 절터는 공터를 중심으로 주변 식당들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발굴조사를 받
지 못해 절의 정체를 알 수 없다. 다만 진관사(津寬寺)가 근처에 있어 그의 전신(前身)이라는
신혈사(神穴寺)터로 보기도 하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이곳을 편의상 '삼천리골사지(寺址)1
'로 분류했다. (삼천리골사지2는 삼천사 위쪽에 있음)
여기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 청자파편 등이 나왔는데, 행락지로 먹고 사는 사유지라 절터에
대한 보존은커녕 훼손이 심각한 실정이라 하루 속히 발굴조사와 보존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혹시 아는가? 이곳이 진정한 신혈사거나 북한산 자락 어딘가에 있었다는 신라 10대 화엄사찰
의 하나인 청담사(淸潭寺)였을지도..?


▲  삼천리골(삼천사계곡) 하류

삼천리골사지1을 지나면 산꾼과 나들이꾼을 상대로 먹거리 장사를 하는 식당들이 줄지어 나타
나는데, 그 와중에 삼천탐방지원센터로 변신한 옛 매표소가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내야했으나 2007년 국립공원 입장료가 흔쾌히 폐지되면서 더 이상 매
표소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삼천탐방지원센터에서 2분 정도 가면 고개가 나타난다. 고개 앞에는 삼천사를 알리는 표석이
멀뚱히 서 있는데, 여기서 고갯길과 계곡길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던 삼천사는 나오게 되어
있지만 시멘트길인 고갯길은 다소 각박하고 돌아가는 편이며, 차량의 왕래가 잦다. 반면 계곡
길은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계곡 주변에 식당들이 여럿 모여 있어 절을 목전에 둔 속세
의 마지막 유혹을 펼친다.


▲  미타교 직전 고갯길 (삼천사 300m 이전 지점)

▲  미타교(彌陀橋)

계곡길을 5~6분 오르면 고갯길과 다시 만나면서 약간 경사가 진 고개가 나타난다. 그 고개를
넘으면 북한산(삼각산)에서 제법 깨끗하고 아름다운 계곡으로 칭송을 받는 삼천사계곡 중류가
나타난다.
이곳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초소에 출입신고를 하고 신분증을 맡겨야만 들어갈 수 있던 금지
된 구역이었다. 물론 삼천사 승려와 신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92년 통행제한이 쿨
하게 풀리면서 삼천사와 삼천사계곡을 통해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비봉능선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계곡 주변에는 군사시설과 철조망 등이 일부 옥의 티처럼 남아있고 삼천사와 미
타교 사이 계곡은 상수원과 군사시설 보호를 위해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삼천사로 가려면 계곡을 1번 건너야 되는데, 예전에는 높이가 낮은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2011
년 이후 높이와 폭을 크게 높여 미타교란 하얀 피부의 돌다리를 새롭게 닦았다. 다리를 업그
레이드시킨 것까지는 좋으나 문제는 삼천사에서 미관과 환경을 고려치 않고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크게 들쑤시며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곡 다리에서 삼천사로 오르는 길목의 계곡 풍경
은 내가 무지하게 좋아했던 풍경의 하나였는데, 다리를 놓으면서 잘생긴 바위와 반석(盤石)을
깨뜨려 다소 좋지 않게 변한 것이다. 겨울 제국도 망가진 계곡 풍경이 싫었던지 눈으로 그 현
장을 가려버렸다.


▲  눈에 깔려 소쩍새의 울음소리만 기다리는 미타교 주변 삼천사계곡

▲  삼천사를 향한 마지막 시련 (경내 직전의 각박한 오르막길)

미타교를 건너면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중생을 주눅들게 만든다. 그 길을 3~4분 오르면
우람한 석등 1쌍이 힘들게 올라온 중생들을 맞이하니 여기서부터 산사의 향기와 늙은 마애불
의 인자함이 깃들여진 곳, 삼천사 경내가 아낌없이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삼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각박한 오르막에 자리한 '삼각산 적멸보궁 삼천사' 비석과 석등 1쌍

북한산(삼각산) 서쪽 삼천리골(삼천사계곡) 상류에 둥지를 튼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을 품은 절이자 도심에서도 멀리 떨어진 첩첩한 산골의 산사이다. 1992년까지만 해도
사찰 출입의 제한이 많았으나 1992년 이후, 여기서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가 활짝 개방되면서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삼천사는 삼국시대가 한참 정리되고 있던 661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자료나 유물도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 당시 신라의 정세도 한가롭게 절
이나 세울 상황이 아니었다. 불교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었던 신라(新羅)도 그 시절에는 도읍
인 서라벌 왕경(王京)을 중심으로 절이 세워지고 있었으며, 원효대사도 그 당시 매우 바쁘게
움직였던 시기이므로 절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무열왕(武烈王)과
의 친분으로 그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어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되었고, 전쟁으
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자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던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면서 당시 신라
불교계의 1인자이던 자장율사(慈藏律師)를 변방 산골짜기로 밀어내고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
라 불교의 지존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삼천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661년,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 군주 고종(高宗)은 '그 강하던
백제(百濟)도 무너뜨렸으니 이제 오랜 숙적인 고구려(고구리)를 쳐도 별무리는 없을 것이다'
싶은 심히 위험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 전쟁에서는 당나라의 맹장
으로 손꼽히는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하여 10만의 대군을 보냈는데, 방효태는 천
하장사로 손가락질 받던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 죄다 데리고 나와 고구려 정벌에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나라군은 요하<遼河, 현재 요하가 아님, 산서성이나 그 이남에 있던 강줄기>를 건너 고구려
의 주요 지역인 요동<遼東, 태행산맥 동쪽 지역 또는 하북성>을 용케도 통과하여 압록수(鴨綠
水, 하북성에 있던 강, 현재 압록강이 아님)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퇴하는 위엄을 보인다.
그 기세를 타고 평양성(平壤城, 현재 북경으로 여겨짐) 부근인 사수(蛇水)까지 들어왔으나 연
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아 10만 대군은 거의 전멸을 당했다. 그리고 고구려를
꼭 무너뜨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방효태와 그의 아들은 모두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와 머리
고기 신세가 되었다.

한편 바다를 통해 평양성 부근까지 기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대군이 완전 절단났
다는 소식을 듣고 그야말로 큰 충격에 빠졌다. 날씨는 춥지. 식량은 부족하지. 언제 고구려군
이 들이닥쳐 자신들의 목을 댕강 잘라갈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소정방은
쫄깃해진 간을 부여잡고 신라에 서둘러 사자를 보내 식량과 원군을 요청했다.
신라는 나중에 고구려를 칠 때 당나라를 요긴하게 이용하고자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김유신(
金庾信)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케 했다. 이때 분황사(芬皇寺)에 있던 원효가 그를 종군(從軍
)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군은 그들을 때려
잡기 위해 매복을 했는데, 소정방이 이를 알아내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보냈다. 그
암호문을 바로 원효가 해독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유신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무사히 군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 원효대사의 행적이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언제 북
한산(삼각산)까지 들어와 삼천사를 세웠겠는가? 이것으로 이미 원효 창건설은 끝이 났다. 그
렇다면 절은 언제 지어졌을까?
경내에 있는 늙은 마애불과 옛 절터의 유물을 통해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조
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에 간행된 북한지(北漢誌)에는 최대
 3,000명이 머물 정도로 번창했다고 쓰여 있다.

고려 초에는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이 주지
로 있었으며, 고려 황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큰 절로 성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서산
대사(西山大師)의 지휘 아래 승병(僧兵)의 주요 집결지가 되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은 지금보다 1.5km 안쪽 산속에 있었으며, 절 이름은 음은 같지만
한자가 1글자 틀린 삼천사(三川寺)였다.
그 이후 진영화상이 삼천사의 암자가 있던 현재 자리에 절을 중건하여 3,000명을 뜻하는 삼천
사(三千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6.25때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0년에 중건했다.

1970년대에 성운(聖雲)화상이 주지로 들어와 경내에 있는 마애불이 오래된 불상임을 밝혀냈고
, 20년 동안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1994년에 사회복지법인
인덕원을 설립해 복지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산령각, 천태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또한 옛 삼천사터에는 대지국사탑비와 절터 주춧돌이 어지럽게
남아있는데, 오랫동안 주목도 받지 못하며 방치되어 오다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2년 동안 발굴조사를 벌여 500여 점의 유물을 건졌다.
2009년 이후에도 발굴을 벌였으나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지도에 표시도 없는 유령 구역으로 묶
여 있었으며(지금은 다음카카오와 네이버 지도에 절터가 나오고 있음) 북한산에서 가장 큰 편
에 속하는 절터 유적임에도 그에 합당하는 지정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
(2018년에 대지국사탑비가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음, 절터는 원래 서울 땅이었으나 행
정구역 조정으로 경기도 고양시 땅으로 변경됨)

삼천사의 위치가 서울 시내와 제법 멀리 떨어져 있고 버스에서 내려 30분 이상을 걸어 들어가
야 되는 산골에 묻혀있어 번뇌도 감히 추적하지 못한다. (하긴 굳이 추적할 필요가 있겠는가.
절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 것을) 게다가 계곡을 경내에 끼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며,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하여 산사의 그윽한 멋과 향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이다.

* 삼천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25-2 (연서로54길 127 ☎ 02-353-3004)
* 삼천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삼천사 종형사리탑과 마애여래입상


♠  삼천사 5층석탑, 대웅보전 주변

▲  나한사리를 머금은 5층석탑

삼천사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4마리의 석사자가 탑신(塔身)을 받들고 있는 5층석탑을 만
나게 된다. 1988년 삼천사 주지인 성운화상이 미얀마의 마하시사사나 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
곳 대승정(大僧正)인 아판디타에게 부처 사리 3과와 나한사리를 선물로 받았는데, 부처사리는
마애불 앞에 종형사리탑을 만들어 봉안하고 나한사리는 일주문 앞에 이 탑을 조성해 봉안했다.

이 석탑은 바닥돌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여러 단으로 된 기단부(基壇部)를 둔 다음, 석사자 4
마리의 5층 탑신,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갖춘 형태로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제천 빈신사지(頻
迅寺址) 4사자 석탑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  세존진신사리 불탑(佛塔)

5층석탑을 지나면 바로 9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당(法堂) 앞도 아닌 경내 외곽에 서로
다른 탑을 2개씩이나 지어 올린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삼천사는 법당(대웅보전) 앞에
탑을 둘 공간이 여의치가 않아서 공간이 넉넉한 이곳에 탑을 심은 것이다.

9층석탑 자리는 원래 주차장의 일부로 미얀마 대승정에게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하
고자 또 탑을 짓기로 결정, 2012년 초에 자리를 닦아 그해 5월 완성을 보았다. 앞서 5층석탑
처럼 높게 기단부를 쌓고 그 위에 탑을 올렸는데, 탑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
을 그대로 재현했으며,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는 4두의 금빛 사자상은 인도의 사르나트
아쇼카 석주(石柱)의 사자상을 따라한 것이다.
금빛 사자상은 8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 담긴 법륜(法輪)에 안치되었고, 인도반도를 최초로
통일한 군주로 평화와 생명존중을 천명했다는 아쇼카(인도 마가다왕조의 3대 군주)의 '담마
왕령' 정신을 새기고자 아쇼카의 상징인 4두 사자상을 꼭대기에 올렸다. 그리고 9류 중생의
안녕과 화엄 10지에 이른 후 정토세계의 9품 연대에 오르기를 발원하는 보리심(菩提心)을 9층
탑으로 묘사했다.

탑이 완성되자 진신사리 7과를 비롯해 조그만 금동석가여래상과 지장보살상, 관세음보살상,
대장경(大藏經) 1질, 600명의 신도들이 손수 제작한 금강경(金剛經) 600부, 신도들이 기증한
온갖 귀중품(순금 108염주, 은, 칠보, 다이아몬드 결혼 반지 등)을 탑에 복장(腹臟) 유물로
넣었다. 탑에게 주어진 첫 이름은 '세존진신 다보9층대탑(世尊眞身 多寶九層大塔)'이었으나
이름이 무지하게 길어서 '세존진신사리 불탑'으로 이름이 짧아졌다. 탑이 얼마나 큰지 사람들
이 거의 개미로 보이며, 탑의 모습이 삼천사의 탄탄한 재정과 세를 제대로 과시하는 듯 하다.


▲  삼천사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

9층석탑을 지나면 오른쪽 높은 곳에 화강암 통돌로 조성된 지장보살입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9층석탑과 5층석탑은 물론 절 서쪽에 있는 34사단 유격훈련장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
연은 다음과 같다.

34사단 장병들이 이곳에서 로프를 타고 훈련을 하는데, 해마다 사고가 일어났다. 이를 안타깝
게 여긴 삼천사 주지승이 장병들의 덧없는 희생을 막고 더 이상의 살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발
원하는 뜻에서 유격훈련장이 보이는 곳에 지장보살입상을 세웠는데, 신기하게도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어진 어미의 모습처럼 자리한 보살상은 8각의 기단을 밑에 깔고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
에 여의주를 오른손에 들고 서 있으며, 8각 대좌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와 도명존자(道明尊
者), 시왕상 등이 새겨져 있다.


▲  태극마크가 새겨진 법고(法鼓)와 평화대범종(平和大梵鍾)
지장보살상 옆에 1칸짜리 조그만 기와집을 짓고 평화와 번영의 발원을
담은 평화대범종과 법고를 달았다.

▲  눈 지붕을 이룬 삼천사 일주문(一柱門)

9층석탑을 지나면 문짝을 단 큰 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일주문이라 부른다. 보통 일주문은
절 입구나 길목에 세우기 마련으로 미타교와 5층석탑 사이에 일주문을 둘 자리가 넉넉하나 삼
천사는 그 자리를 모두 내버리고 특이하게 대웅보전 앞에 갖다 놓았다.
세로로 걸린 현판에는 '三角山 三千寺'라 쓰여 있는데, 쓰여진 글씨가 꽤 걸출하여 마치 하늘
로 날라갈 것만 같다.


▲  삼천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일주문을 들어서면 종무소(宗務所)와 법당인 대웅보전(대웅전)이 나온다. 예전에는 적멸보궁
(寂滅寶宮)이라 불렸는데, 건물이 얼마나 크던지 가히 절 이름값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붕
용마루 양쪽에는 치미가 날카롭게 솟아 북한산(삼각산) 봉우리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고,
건물 내부에는 석가여래삼존상을 비롯해 지장보살상, 신중탱화, 16나한, 500나한상 등이 빼곡
히 자리를 채운다.


▲  찬란함이 묻어난 석가여래삼존상과 후불목각탱

석가여래상이 조그만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석가여래
삼존상을 이룬다. 그들 뒤에는 호화롭고 복잡해 보이는 후불목각탱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이들은 삼세불화(三世佛畵)를 표현한 것으로 가운데에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배치하고 왼
쪽에 약사회도(藥師會圖), 오른쪽에 극락회도(極樂會圖)를 배치했다. 그러다 보니 후불탱화가
무지하게 번잡한 모습이 된 것이다.


▲  빼곡한 모습의 신중탱(神衆幀)
호법신들의 무리로 모두 104위가 담겨져 있다.


♠  서울에서 가장 늙은 마애불이자 삼천리골의 영원한 은둔자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국가 보물

▲  마애여래입상과 그에게 흔쾌히 보금자리를 내준 눈썹바위

대웅보전을 지나면 계곡 왼쪽에 범상치 않은 모습의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내
가 좋아하는 마애불(磨崖佛) 하나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으니 그가 바로 서울에
서 제일 늙은 마애불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이다.

불상 앞에는 그에게 예불을 올리는 석조 공간이 넓게 닦여져 있는데 그 공간 밑에는 삼천사계
곡이 일조권을 빼앗긴 채 숨죽여 흘러간다. 학창시절이던 1992년 이곳에 처음 흘러들어왔을
때는 이렇게 넓은 공간이 없었고, 계곡을 건너면 마애불 앞에 조그만 공간이 있던 정도였다. 

서울에 전하는 4개의 고려시대 마애불<승가사(僧伽寺) 마애여래좌상(☞ 관련글 보기), 옥천암
(玉泉庵) 마애보살좌상(☞ 관련글 보기), 보타사(寶唾寺) 마애보살좌상(☞ 관련글 보기), 삼
천사 마애여래좌상>의 일원으로 고려 초기 또는 신라 후기로 조성된 선각(線刻)마애불이다.
불상 대부분은 선을 그어 처리했지만, 일부는 약간 튀어나온 얕음새김으로 전체 높이는 3m,
불상의 높이는 2.6m이다.

이 마애불은 윤곽을 따라 금분이 칠해져 있었으나 2000년 이후에 사라졌고, 불상의 왼쪽(불상
이 바라보는 방향 기준) 부분에는 약간 붉은 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는 불상에 채색을 했던
옛 흔적이다. 마애불에 색을 입힌 예는 이곳과 경북 칠곡군(漆谷郡)에 있는 노석리 마애불상
군 등이 대표적으로 그 예가 매우 드물다.


▲  마애불 양쪽에는 네모난 구멍이 2개가 있으니 저들은 마애불을 보호했던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이다. 보호각이 감싸주던 부분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유난히도 밝고 하얀데 마치 광배(光背)에서 나온 빛이
그의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 같다.


불상의 머리 뒷쪽에 2겹으로 된 둥근 두광(頭光)이 그를 밝히고 있고, 소발(素髮)한 머리 위
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작고 갸름한 편으로 눈은 지긋이 감아
명상에 잠긴 모습이며, 코의 끝부분은 오똑하다. 입은 살짝 오무려 약간의 미소를 선보이고
있고, 눈썹 사이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박혀있다.
불상의 키는 얼굴에 비해 꽤 긴 편으로, 조금은 두꺼워 보이는 법의(法衣)를 걸치며 두 어깨
를 가렸고, 발 밑에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있으며, 몸 뒤에는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광배(
光背)가 있다.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신체적인 균형이 맞으며, 몸매는 단정하고 단아한 인상을 풍긴다. 오른
손은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배 앞에 받쳐든 모습인데, 이는 부처의 성도(成道)를 상징한다고
한다.

불상 어깨 좌우와 윗부분에는 네모 모양의 구멍이 파여져 있는데, 이는 자연현상이 아닌 마애
불을 보호하던 목조 가구(架構)를 씌우던 흔적이다. 그 가구는 어느 세월이 뜯어갔는지 사라
졌으며, 그가 사라진 이후에는 불상 위쪽에 있는 눈썹바위의 보호를 받으며 눈과 비를 피했다.
게다가 깊숙한 계곡 바위에 자리한 탓에 태풍과 거센 바람의 공격을 피할 수 있어서 무려 천
년의 세월을 살았음에도 바위에 진하게 현신한 듯 건강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또한 오랜 세월
을 삼천리골(삼천사계곡)의 은자로 조용히 묻혀산 것도 그의 건강비결 중 하나일 것이다.

솔직히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 불상은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통제구역에 묶여
출입도 부자유스러우니 아는 사람만 조금 찾는 정도였다. 허나 2000년 이후 삼천사의 존재와
함께 마애불의 이름도 약간이나마 알려지면서 찾는 이가 제법 늘었고, 북한산으로 오르는 주
요 등산로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주말에는 산꾼들의 발길이 잦다.


▲  바위에 현신한 듯 두드러진 모습의 마애불 윗부분
불상을 수식하고 있는 두광과 신광은 마치 몸에 빛이 발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도록 그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준다.


▲  마애불의 아랫부분
연꽃으로 치장된 연화대좌 위에 불상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을 걸친
법의 밑으로 그의 발이 나와 있는데, 발가락이 다소 두꺼워 보인다.


내가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1992년, 처음에는 진관사 부근 야산에 숨어있는 줄 알고 부근
야산을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미지의 신세계나 다름이 없던 삼천사까지 들어왔다. 당시 적멸보
궁이던 대웅보전 뒷쪽에서 나를 숨바꼭질시킨 마애불을 발견하고 그 어린 나이에
'서울에도 이렇게 휼륭한 마애불이 있었다니!!' 감탄을 연발하면서 그에게 은근슬쩍 빠져들고
말았지. 그리고 어언 30번 넘게 그를 찾았다.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점점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비록 인간이 만든 조각품이긴 하나 여
전히 정정함을 잃지 않으며 오늘도 삶에 지친 중생들을 맞아 들인다.

지금은 삼천사 경내이지만 예전에는 옛 삼천사로 가던 길목으로 조그만 암자와 계곡, 바위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마애불 주변에 삼천사를 세우면서 지금처럼 경내 한복판이 되었고,
지금의 삼천사를 일군 성운의 노력으로 오래된 마애불임을 입증받아 1979년 국가 보물의 지위
를 누리게 되었다.
또한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기로 소문이 자자해 많은 중생들이 그의 덕을 보고자 많이들 찾아
온다.


▲  마애불 좌측에 새겨진 '일붕선사좌선대(一鵬禪師坐禪坮)' 바위글씨
현대에 큰 승려인 일붕(一鵬) 서경보 선사가 이곳에서 좌선한 것을
기리고자 새긴 것이다.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종형사리탑(鐘形舍利塔)

마애불 앞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심은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이 있다. 이 탑은 1988년에 성운
화상이 미얀마 마하시사사나 사원의 아판디타 대승정에게서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머금
고 있는데, 그 연유로 서울에서 처음으로 적멸보궁을 마련했다.

◀  종형사리탑 옆에 있는 세존진신사리비
미얀마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이곳에 봉안한
과정과 이유가 빼곡히 담겨져 있다.


♠  삼천사 마무리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산령각(山靈閣)

마애불이 의지하고 있는 눈썹바위 옆구리에는 2층 규모의 산령각이 자리해 있다. 산령각은 절
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산신각(山神閣)의 다른 이름으로 삼천사는 그 흔한 이름 대신 천태각
이나 산령각처럼 조금은 생소한 이름을 선택해 중생들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산
신각이긴 하지만 독성(獨聖)과 칠성(七星)까지 봉안하고 있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한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은 2층으로 내부 중앙에는 금칠을 한 거대한 산신탱이
걸려있다. 예전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은 나무로 돋음새김으로 새기고 나머지는
그림으로 상큼하게 처리했으나 죄다 도금을 하여 금색 옷으로 갈아입혔다.
이렇게 금색으로 도배가 된 산신탱은 여기서 처음 봤는데, 화려하게 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산
신의 수염과 동자의 머리를 빼고는 죄다 색이 같아서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벌이듯 분간이 조
금은 쉽지 않아 침침한 두 망막만 아프다.

이렇게 산신탱은 삼천사에서 마애여래입상, 세존진신사리탑 다음으로 자랑하는 보물로 비록
고색의 기운은 없지만 다른 절과 달리 산신을 크게 내세운 산신도량으로 절을 키우면서 '북한
산(삼각산) 산신이 보좌를 튼 절'임을 강조하고 있다.


 금색 산신탱과 막대한 양의 공양미들

 독성(나반존자)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칠성들의 회합 현장, 칠성탱


 산령각에서 굽어본 종형사리탑 주변과 대웅보전의 뒷모습

 삼천사에만 있는 독특한 불전 ~ 천태각(天台閣)

산령각 동쪽에는 천태각이라 불리는 벽돌 건물이 있다. 천태각은 16나한의 하나로 천태산(天
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독성각(獨聖閣)과 비슷하다.
삼천사는 독성각이란 보편적인 이름을 취하지 않고 그가 일어난 천태산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
이라 했으며, 산령각에 독성탱이 있음에도 별도로 그만의 건물까지 두어 크게 대우한다.

이 건물은 199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108개의 인등(引燈)이 내뿜는 열기와 기름
냄새로 가득해 더울 때 오면 정말 한증막이 따로 없다. 인등은 기름을 담고 심지를 넣어 불을
켠 것으로 하루 종일 불을 밝힌다. 그래서 건물 내부가 더운 것이다.
건물 지붕에는 열을 외부로 빼고 공기를 통하게 하여 내부 온도를 유지시키는 통풍구가 있으
며, 다른 건물과 달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2개로 바깥 문인 여닫이문은 활짝 열려 있는 경
우가 많으나 안쪽 문인 미닫이문은 인등을 지키고자 항시 닫혀져 있다. 하여 문을 들락거릴
때는 반드시 문을 닫아야 인등의 건강에 지장이 없다.


 천태각의 주인, 독성상과 자연석으로 간단하게 손질한 16나한들

천태각 독성은 대머리의 둥근널쩍한 얼굴, 길다란 귀, 약간 두꺼워 보이는 옷, 배 앞에 두손
을 가지런히 모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한 여유로운 모습이다. 그런 독성상 좌우에는 조
그만 16나한상이 포진해 있는데, 표정이 우리나라 인구만큼이나 제각각이다. 이들은 전국 각
지에서 가져온 자연석으로 정성스레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나의 제자리로 무거운 발걸음을 떼다~~
이렇게 하여 겨울의 한복판에 찾아간 북한산 삼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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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5년 2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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