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권 사진,답사기/서라벌 경주'에 해당되는 글 1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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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2.07.19 신라 왕릉 나들이, 경주 괘릉 (경주 원성왕릉)
  3. 2019.09.04 황량함과 재건의 공존, 경주 서라벌 절터 나들이 ~~~ (감산사, 연지암, 활성리석불입상, 숭복사)
  4. 2016.11.05 늦가을 경주 나들이 ~~~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벽도산,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5. 2015.10.24 경주 남산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석불, 보리사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리사 마애석불)
  6. 2015.01.01 서라벌 신라 왕릉 나들이 ~ 경주 성덕왕릉, 효소왕릉 2
  7. 2011.02.09 경주 법흥왕릉
  8. 2009.10.09 부처의 세계를 온몸에 담은 경주 남산 탑곡마애조상군 (불무사)
  9. 2009.07.22 경주에서 누린 신라의 고졸한 향기 ~ 남산 불곡석불좌상, 신문왕릉 2
  10. 2009.07.14 경주 성덕왕릉

서라벌 경주의 꿀명소, 경주 남산 나들이 <염불사지, 봉화골, 칠불암, 칠불암 마애불상군>

경주의 꿀단지, 남산 (염불사지, 칠불암 마애불상군)


    
' 서라벌 경주의 꿀단지, 남산 초여름 나들이 '


▲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남산(금오산) 산줄기

 



 

여름 제국이 봄의 하늘을 가로채며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6월의 첫 무렵, 신라(新羅)
의 향기가 지독하게 배여있는 경주 땅을 찾았다.

경주(慶州)는 거의 50번 이상 인연을 지은 곳으로 오랜 세월 구석구석 누비다 보니 이제
는 인지도가 거의 없거나 벽지에 박힌 명소들을 주로 찾고 있다. 허나 미답처(未踏處)들
이 여전히 적지 않아서 내 마음을 애태우게 하는데, 이번에는 칠불암과 신선암 등 남산(
南山)의 여러 미답처를 지우기로 했다.

경주시외터미널에서 경주좌석버스 11번(경주시외터미널~불국사~용강동)을 잡아타고 통일
전(統一殿)에서 두 발을 내렸는데, 여기서 칠불암, 신선암으로 가려면 남쪽 시골길(칠불
암길)로 들어서 남산동(南山洞)의 여러 마을(안마을, 탑마을, 안말)을 지나 1시간 10~20
분 정도 발품을 팔아야 된다.
너른 배반평야를 동쪽에, 남산을 서쪽에 둔 남산동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오늘도 평화
롭기 그지 없는데, 안마을에는 그 유명한 서출지(書出池)가, 탑마을에는 남산동삼층석탑
이 간만에 나좀 보고 가라며 손짓을 한다. 허나 그들은 이미 20대 시작점에 인연을 지은
터라 오로지 목표한 먹잇감을 향해 뛰어가는 맹수처럼 그들을 모두 흘려보냈다.


▲  옛 신라의 곡창지대, 배반평야 논두렁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양피제(讓避堤, 양기못)

양피제(양피저수지)는 배반평야에 수분을 제공하는 저수지로 연(蓮)들이 푸른 기운을 드
러내며, 곧 다가올 여름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양피제란 이름은 남산동삼층석탑 일대
로 여겨지는 양피사(讓避寺)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절이 있던 마을에 서출지가 있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이 있어 이 못을 서출지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  남산 입문 (염불사지)

▲  전(傳) 염불사(念佛寺)터

양피제에서 남쪽으로 7분 정도 가면 안말(안마을) 한복판에 누워있는 염불사터를 만나게 된다.
잘생긴 3층석탑 2기가 잔디가 입혀진 절터를 지키고 있는데, 그 북쪽에는 새로운 염불사가 둥
지를 틀며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사라진 염불사의 후예를 자처한다.

염불사는 신라 중기(8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절로 어떤 과정을 거치고 언제 어떻게
망했는지 전해오는 것이 전혀 없다. 남산 산신(山神)조차도 '염불사? 양피사? 그게 뭐임? 먹
는 거임?'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로 비밀에 감싸인 절로 남산동3층석탑 주변을 염불사터로
보는 설도 있어 현 자리도 100%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책임을 피하고자 염불사 이름 앞
에 막연히 전한다는 뜻의 전(傳)을 붙여 '전 염불사터'라 부른다.
다만 염불사 옆에 양피사가 있었다고 하므로 만약 남산동3층석탑이 염불사라 하면 이곳은 자
연히 양피사가 될 것이다.

염불사의 원래 이름은 피리사(避里寺)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피
이촌, 피리사촌)이 있는데, 그 마을에 '피리사'란 절이 있었다. 그 절에는 이상한 승려가 머
물고 있어 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우니 그 소리가 마을을 넘어 서라벌 일대에 쫘악 울려
퍼져 듣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소리가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그지 없어, 서라벌 사람들
은 그를 공경해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자 그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봉안했으며, 그가 머물던 피리사를 염
불사로 이름을 갈았다. 그랬던 염불사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의지처를 잃은 탑들의 삶도 그리 순탄치 못해 결국 앉은뱅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서로를 보듬으며 절터를 지켰지만 1973년 동탑이 강제로 불국동 구정광장으로 옮겨지
면서 서탑 홀로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러다가 2008년 동탑이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재회를
하게 되었고, 이때 탑 2기를 복원하고 절터를 손질하여 2009년 1월 15일 완료되었다.


▲  전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보물 2,193호)의 동탑

염불사터 동탑은 1973년 구정동 불국광장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그때 박정희 전대통령이 경주
를 살피러 온다는 소식에 경주 지역 관리들이 그에게 아부를 떨고자 무너진 동탑의 탑재와 인
근 도지동 이거사터(移車寺)에서 급히 소환한 3층석탑 1층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을 덧붙여
콩 볶듯이 복원하여 대통령의 순시 코스에 두었다. 그러다 보니 1층 옥개석이 2,3층 옥개석과
다소 어색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후 제자리로 옮겨야 된다는 여론이 퍼지면서 경주시는 2006년부터 이전 복원을 추진하여 염
불사터 사유지를 매입해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2008년 1월 탑을 해체하여 제자리에 다시 세웠
다.

이 탑은 커다란 바닥돌을 땅바닥에 깔고, 그 위에 2중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
힌 다음,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한 전형적인 신라 후기 탑으로 세월과 자연이 무심히 할퀴고
간 흔적들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정정함은 잃지 않고 있다. 서탑과 함께 8세기에 세워진 것으
로 여겨지며, 탑 높이는 5.85m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동탑

▲  북쪽에서 바라본 동탑


▲  염불사터 서탑

일찌감치 복원된 동탑과 달리 서탑은 옥개석을 중심으로 무거운 상처들이 적지 않다. 동탑보
다 좀 초라해 보이는 서탑, 허나 그는 사리장엄구를 봉안했던 사리공을 무려 2개씩이나 품었
던 특별한 존재였다. 보통 대부분의 탑은 사리공이 1개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 탑의 심
장이라 할 수 있는 사리공을 2개나 지녔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다.
혹시 염불사 설화에 나오는 그 승려 때문은 아닐까?

▲  북쪽에서 바라본 서탑

▲  절터에서 수습된 주춧돌과 늙은 석재들

동탑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한참 잡초를 토벌하고 있었다. 염불사터가 간만에 이발을 하는 날
인 모양이다.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석탑 형제, 한때 45년 동안 떨어져 사는 아픔이
있었으나 다시 만나 서로의 정을 속삭인다. 인간들이 무엇을 하든 자신들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런 것은 관심 밖이다.

절터 남쪽에는 이곳에서 수습된 건물 주춧돌과 석탑 부재(部材) 등 여러 석재가 놓여져 초여
름 햇살을 즐기고 있다. 그들은 한때 절 건물을 받쳐 들거나 석탑, 석등을 이루던 것들로 그
들이 입을 열면 이곳의 정체가 흔쾌히 드러날 것인데 자신들을 이 꼬락서니로 만든 인간과 세
상을 원망하듯,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 염불사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129-3


▲  남산 봉화골로 인도하는 숲길

염불사지에서 숲과 밭두렁이 적당히 섞인 시골길을 지나면 그 길의 끝에 봉화골 산길이 나온
다. 통일전 정류장에서 이곳까지는 도보 약 25분 거리로 여기서부터 온갖 불교문화유산으로
도배가 된 남산<금오산(金鰲山)>의 아늑한 품이 시작된다.

봉화골은 동남산 남쪽 끝에 자리한 깊은 골짜기로 봉화대(烽火臺)가 있어서 봉화골이란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 계곡이 깊고 소나무가 가득해 그림 같은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칠불암과
신선암 마애불 등 남산의 굴지 명소들이 깃들여져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왕래가 잦다. 현재
이 골짜기에는 절터 2곳, 불상 8기(칠불암과 신선암 마애불), 석탑 2기, 석등 4기, 비석(귀부
) 1기, 봉화대터가 전하고 있다.

산길 경사는 대체로 완만하나 일부 구간에서 흥분된 상태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이 될
정도는 아니며 자존심을 곱게 접어 묵묵히 산길에 임하면 칠불암 마애불이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와 마중을 할 것이다.


▲  소나무로 가득한 봉화골 산길 ①

▲  소나무로 가득한 봉화골 산길 ②

봉화골 계곡은 조그만 개울로 아기자기한 모습을 지녔다. 하지만 하늘이 비를 너무 짜게 내려
물이 거의 말라버린 맨바닥 상태였다. 처음에는 길인 줄 알고 다가섰더니 글쎄 가뭄에 녹초가
되버린 계곡이 아니던가.

산길을 한참 오르니 삼삼하게 우거진 대나무숲이 펼쳐진다. 이렇게 대나무숲이 있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절이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푹 숙인 대나무가 운치 있게 터널을 이룬 돌계단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칠불암이 자리해 있다.


▲  이보다 멋진 터널이 있을까? 대나무 숲길의 위엄

▲  대나무 숲길 한복판에 서다. (칠불암 직전)



 

♠  경주 남산에서 가장 덩치가 큰 불교 유적, 7개의 석불로 이루어진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마애불상군 - 국보 312호

경주 남산에는 옛 신라 사람들이 심어놓은 불교 유적이 지나치게 많이 서려있다. 절터만 무려
100곳이 넘으며 불상도 80개가 넘는다고 하니 천하에 이만한 불교 유적의 성지(聖地)는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되었겠는가.

남산에 깃든 불교 유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해발 360m 고지에 자리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다.
그는 부처골(불곡) 석불좌상(☞ 관련글 보기), 보리사(菩提寺, 미륵골) 석불좌상(☞ 관련글
보기
),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과 더불어 남산의 간판격 존재로 존재
감도 그 덩치만큼이나 커서 답사객과 산꾼의 왕래가 빈번하다.

이곳 마애불상군은 2개의 바위에 7기의 마애불(磨崖佛)을 나눠서 새긴 독특한 모습으로 동쪽
을 바라보며 병풍처럼 자리한 커다란 바위에 3존불이 깃들여져 있는데, 그 바위를 '병풍바위'
라고 부른다. 불상이 깃든 동쪽 면이 90도로 다듬어져 있고, 그 앞에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
m 정도의 석축을 쌓아 공간을 다진 다음, 4면불을 새긴 바위를 봉안했다. 보통은 바위 하나를
이용해 불상을 새기지만 이곳은 이렇게 바위 2개를 건드려 마애불상군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약 1.74m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지켜주고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3존불과 4방불

마애불 주변은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그 밑에서 그들을 바라봐
야 된다. 그러다 보니 3존불은 정면에서 온전히 마주 보기가 어려우며, (앞에 4방불이 시야를
좀 가림) 4방불 같은 경우 3존불을 바라보고 있는 서쪽 불상은 만나기가 어렵다. 허나 어찌하
랴? 국보(國寶)의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지체 높은 존재들이고 그들의 건강도 신경을 써야
되니 말이다. 그래도 보일 것은 거의 보이며, 그들을 세세히 보고 싶다면 칠불암에 협조를 구
해보기 바란다.

병풍바위에 돋음새김으로 진하게 깃들여진 3존불은 양감이 매우 풍부해 바위에서 방금 튀어나
온 듯한 모습이다. 가운데 본존불(本尊佛)은 높이 2.7m로 하늘을 향해 꽃잎을 세운 연꽃<앙련
(仰蓮)>과 밑으로 꽃잎을 내린 복련<(伏蓮)>이 새겨진 연화대좌에 위엄 있게 앉아있다. 석굴
암(石窟庵) 본존불과도 비슷한 모습으로 그 뒤쪽에는 광배(光背)가 본존불을 반짝 빛내주고
있으며, 머리는 소발(素髮)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거의 네모진 모습으로 볼살이 많으며,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나 자비로운 표정을 자아
내고 있다. 목에는 그 흔한 삼도가 없으며, 어깨는 넓고 당당하여 가는 허리와 함께 위엄 돋
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 끝이 땅을 향하게 하
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은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옷주름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본존불 오른쪽에 자리하여 본존불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협시보살(夾侍菩薩)은 연꽃이 새
겨진 연화대(蓮花臺) 위에 다소곳이 서 있다. 덩치는 본존불의 1/3 크기로 키는 약 2.1m인데,
아래로 내린 오른손에는 감로병(甘露柄)이 들어 있어 아마도 관세음보살인 모양이다. 왼손은
어깨 높이로 들고 있으며, 잘록한 허리선이 인상적으로 구슬목걸이를 두르고 있다.
본존불의 왼쪽 협시보살 역시 연화대 위에 서 있다. 오른손에 연꽃을 들고 왼손은 옷자락을
살며시 잡고 있는데, 오른쪽 협시보살과 비슷한 덩치로 코가 좀 할켜나간 것을 빼면 완전한
모습이다. 그는 아마도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3존불과 4방불(동쪽과 북쪽 상)

3존불 앞에 놓인 바위에는 4방불이 깃들여져 있다. 3존불이 주연이라면 4방불은 그들을 수식
하는 조연으로 큰 것은 높이 1.2m, 작은 것은 0.7~0.8m 정도로 3존불에 비해 규모도 작고 조
각 솜씨도 다소 떨어진다.
 
4방불 모두 보주형 두광(頭光)을 갖추며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는데, 동쪽 상은 3존불
본존불과 비슷한 모습으로 통견의(通絹衣)를 걸치고 있으며 신체 윤곽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왼손에 약합을 쥐어들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약사여래(藥師如來)로 여겨진다. 남쪽 상은 동
쪽 상과 거의 비슷하나 가슴에 표현된 띠매듭이 새로운 형식에 속하며 무릎 위 옷주름과 짧은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의 옷주름이 도식화(圖式化)되어 있다.

서쪽 불상은 동/남쪽 불상과 비슷하며 북쪽 불상은 앞서 불상과 달리 얼굴이 작다. 그들의 정
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동쪽은 약사여래, 서쪽은 아미타여래로 파악되고 있다.


▲  4방불의 동쪽 상 (약사여래상으로 여겨짐)

▲  4방불의 남쪽 상 (정체가 무엇일까?)

풍만한 얼굴과 양감이 풍부한 신체 표현, 협시보살들의 유연한 자세는 남산 삼릉골 석불좌상
과 석굴암 본존불, 굴불사(掘佛寺)터 석불과 비슷하여 8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참 올라가야 되는 깊숙한 산골에 이렇게 큰 마애불을 짓기가 참 어려웠을 것인데, 불교 앓
이와 남산 앓이가 유독 심했던 신라 서라벌 사람들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신라
의 아름다운 마애불을 편하게 느껴볼 수가 있다.
그리고 마애불이 깃든 병풍바위의 모습도 그리 예사롭지는 않아 보여 석불이 깃들기 이전에는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  칠불암 뜨락에 수습된 주춧돌들 (석등 대좌도 보임)

칠불암 뜨락에는 주춧돌과 석등 대좌(臺座), 석탑 석재들, 연꽃이 새겨진 배례석(拜禮石) 등
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마애불 남쪽에는 엉성하게 복원된 석탑과 옥개석으로 보이는 커다란
돌이 박혀있어 이를 통해 마애불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애불의 자리를 먼저 다진 다음 건물을 씌워 그들을 봉안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 건물이 법
당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의 정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다
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머물면서 대안(大安)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7세기 중/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8세기에 마애불을 구축하면서 전성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는 '봉화곡 제1사지(寺址)'란 임시 이름을 지니고 있다. (봉화골에 있는 1번째 절터
란 뜻) 비록 절집과 돌로 지어진 모든 것이 무심한 세월과 대자연에 의해 분해되고 그 일부만
아련히 남은 상태지만 마애불만은 거의 온전히 살아남아 그들이 가고 없는 빈 자리를 지킨다.


▲  장대한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칠불암 석탑

마애불과 칠불암 법당 사이에는 석탑의 옥개석으로 여겨지는 주름진 커다란 돌덩어리가 화석
처럼 박혀있다. 그 위에는 키 작은 석탑이 성치 못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신라 후기에 지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절이 사라진 이후, 세월의 거친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산산히 흩어진 것을 발견된 부재(部
材)를 되는대로 엮어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하여 다소 엉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큰 돌덩어리를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3층 탑신을 적당히 맞춰 올려 그런데로 3층석탑의 폼은
갖추었다.


▲  칠불암 인법당(因法堂)

마애불 곁에 자리한 칠불암은 1930년대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이다. 칠불암이란 이름은 3존불
과 4방불 등 7기의 석불을 간직하고 있어 칠불암이라 한 것인데, 옛 봉화곡 제1사지의 빈 자
리를 덮어주며 마애불상군을 지키고 있다.

칠불암은 법당(法堂)인 인법당과 1칸짜리 삼성각, 해우소가 전부로 인법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리가 협소하여 법당이 요사(寮舍)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의
역할까지 모두 담당하고 있는데, 내가 갔을 당시에는 서양에서 건너온 20대 비구니 양녀(洋女
)와 그를 도와주는 50대 보살(菩薩) 아줌마가 절을 지키고 있었다.

마애불을 둘러보고 법당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보살 아줌마가 구경 잘했냐며 매실차 1잔을 권
한다. 그런 것을 마다할 내가 아니라서 흔쾌히 1잔을 청했는데, 마침 날씨도 덥고 목구멍에서
도 갈증으로 불이 날 지경이라 달콤한 매실차로 더위와 갈증을 싹 진화했다. 거기에 산바람도
솔솔 불어와 더위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니 이런 것이 진정 극락(極樂)이 아닐까 싶다.
그 보살은 보통 오전에 올라와 양녀 비구니를 도우며 절을 지키거나 여러 먹거리를 만들어 준
다. 내가 갔던 날은 식혜를 만들어 절 냉장고를 채워주었다. 그렇게 절 볼일이 끝나면 오후에
속세로 내려간다. 그 외에 많은 시간은 양녀 비구니 혼자서 절을 지킨다.

그 양녀는 미국 아메리카 출신으로 이 땅에 들어온 지 이제 1~2개월 밖에 안된 초보 승려이다.
하필이면 첩첩한 산골인 이곳에 먼저 배치되어 시작부터 고적한 산사(山寺)의 삶을 익히느라
고생을 한다. 게다가 우리 말도 꽤 서툴러 꼬부랑 영어를 섞어주어야 겨우 알아듣는다. 왜 그
를 칠불암에 배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산에 양이(洋夷)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지라 그들을
상대하고자 고독한 산사살이도 미리 익히게 할 겸, 배치한 모양이다.
절에 머무는 승려는 그 혼자 뿐이라 그가 이 절의 임시 주지나 다름이 없었다. 절과 마애불을
지키고 청소하고, 기도하고, 수행하고, 우리 말 공부하고, 불교 공부하고, 빨래하고, (음식은
보살 아줌마가 거의 해줌) 양이 관광객들에게 마애불 설명도 해주고, 하는 일이 많은데, 아직
은 부족한 것이 많아 보살 아줌마와 스승 승려의 지도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그 스승은 매일
전화를 하여 영어로 이리저리 코치를 해주었다. 하지만 언어 소통에 거의 문제가 없을 정도로
우리 말을 익히게 한 다음 이곳으로 보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절과 마애불을 찾은 사람들에게 꼭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 인사성도 밝은데, 마침 미국에
서온 것으로 여겨지는 양이 2명이 그에게 칠불암 마애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시로 감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마애불에 대해 크게
찬양을 벌인 모양이다.
그는 6개월 정도 이곳에서 정진을 하다가 다른 절로 옮긴다고 하며, 아무쪼록 열심히 수행하
여 큰 비구니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  맞배지붕을 지닌 1칸짜리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에 봉안된 독성탱, 칠성탱,
산신탱


▲  칠불암에서 바라본 봉화골 남쪽 능선

▲  봉화골 정상부(신선암 뒤쪽)에서 바라본 봉화골 남쪽 능선과
배반평야, 토함산(吐含山)

▲  봉화골 정상부(신선암 뒤쪽)에서 바라본 남산동과 배반평야, 낭산(狼山)


칠불암에서 보살 아줌마, 양녀 비구니와 이야기꽃 좀 피우다가 잠시 잊었던 신선암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곳은 칠불암 바로 뒤쪽 절벽으로 아무리 지척간이라고 해도 홍길동이 아닌 이상
은 각박한 산길을 7~8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그렇게 해발 400m대인 봉화골 정상부에 이르면
남산 정상과 고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펼쳐지고, 조망의 질 또한 크게 상승되어 경주 동
남부와 배반평야, 토함산 등이 흔쾌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능선길로 접어들면 신선암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하는데, 그의 안내를 받아 가파
른 길을 내려가면 그 길의 끝에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신선암 마애불이 나타난다.

이후 내용(신선암, 고위봉, 열반골)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
서 흔쾌히 마무리 짓는다.

* 칠불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36-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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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릉 나들이, 경주 괘릉 (경주 원성왕릉)

경주 괘릉



' 경주 괘릉(원성왕릉)
'
경주 괘릉(원성왕릉)
 



 

여름이 한참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한복판에 서라벌의 옛 도읍, 경주(慶州)를 찾았
다.
경주는 그 유명한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부터 이름 없는 문화유적까지 무려 160곳 이상
을 답사했다. 하지만 그렇게 다녔음에도 아직도 미답지(未踏地)가 상당하여 내 마음을 여
전히 두근거리게 하면서도 두렵게 한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적당한 곳을 물색하다가 울산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괘릉
을 찾기로 했는데, 그곳은 이미 10여 년 전에 인연을 지은 곳으로 괘릉과 그 인근에 자리
한 미답지 절터 2곳도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기로 했다.



 

♠  신라 왕릉의 백미, 경주 원성왕릉<元聖王陵, 괘릉(掛陵)>
- 사적 26호

▲  도로에서 본 괘릉 능역

괘릉 서쪽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옆에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무는 관광안내소(이하 안내소)가
있다. 주차장은 평일이라 공간의 여유가 넘치며, 안내소에는 괘릉을 맡은 해설사가 답사객이
없는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인근 문화유적 관련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괘릉 주변으로 길게 담장을 둘렀고, 삼문(三門)을 통해 괘릉 능역(陵域)으
로 들어섰다. 관람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겨울은 17시)였으며, 관람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없었다. 허나 20년 가까운 세월이 무심히 흐르면서 괘릉을 지키던 담장은 사라지고, 담장 대
신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푸른 철책이 도로와 화표석 사이에 둘러져 있다. 해설사
에게 이유를 물으니 경주시청에서 관람 편의를 이유로 담장을 철거했다고 한다.

담장 철거로 그 안에 가려진 괘릉은 그 속살을 시원히 드러냈으나 그래도 신라 후기 제왕(帝
王)의 능인데, 능을 보호하고, 능역과 속세를 가르는 담장이 필요하다 여겨진다. 특히 문화유
산 도난이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보물급의 지위를 간직한
괘릉의 석인(石人)과 석사자상, 화표석 같은 것은 아무리 무겁고 견고한 돌이라고 해도 방심
은 금물, 그들 또한 도난의 마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멋드러지게 우거진 송림(松林)에 둥지를 튼 괘릉은 북쪽에 능이 있고, 능이 바라보는 남쪽에
넓게 터를 닦아 좌우 2열로 석인 2쌍과 석사자 2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두어 서로 마주보
게 했다. 화표석 앞에는 도로가 굽이쳐 지나가는데, 이는 괘릉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키 작
은 철책을 둘러 경계로 삼았으며, 화표석과 도로 사이가 너무나 가까워 옥의 티를 진하게 풍
긴다.
도로를 길 남쪽 하천 너머로 밀어내고, 기존 도로에는 잔디와 소나무 등을 심어 능역을 확장
하고 담장을 두르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해설사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니 안그
래도 경주시에서 그럴 계획이 있다고 그런다. (계획만 있는 모양임)


▲  서쪽 석물들 (왼쪽부터 화표석, 석인들, 석사자들)

괘릉은 경주에 기러기처럼 널린 신라 고분의 하나이다. 그냥 커다란 봉분만 있던 신라왕릉이
무열왕릉(武烈王陵)에서 최초로 능비(陵碑)가 생기는데, 이는 당(唐)나라 능묘(陵墓) 양식에
군침을 흘리며 도입했기 때문이다.
신문왕릉(神文王陵)에 이르면 봉분 아랫도리에 호석(護石)을 두르면서 무덤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성덕왕릉(聖德王陵)에는 비어있던 호석 판석(板石)에 12지신상을 만들고, 무덤 주
변을 돌난간으로 두르며, 석상(石床)과 함께 석인 2쌍과 석사자 1쌍을 능 앞에 펼쳐놓는다.
거기서 더 발전한 모습이 바로 괘릉과 흥덕왕릉(興德王陵)이다. 그중에서도 괘릉이 신라 왕릉
의 백미(白眉)라 통할 정도로 완비된 능묘제도를 자랑하는데, 그래서 봉분만 달랑 있는 다른
왕릉과 달리 볼거리가 많다.

그런데 다른 왕릉은 '~~왕릉'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괘릉은 그런 이름 대신 괘릉이란 이
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여 유일하게 능호(陵號)를 가지고 있는 셈인데, 오래 전부터 흘러오
던 속설(俗說)에 따르면 무덤 자리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의 원형을 살리면서 제
왕의 관을 수면 위에 걸고, 흙을 쌓아 능을 닦았는데, 그런 연유로 걸어놓는다는 뜻의 괘릉이
되었다는 것이다.
괘릉은 신라가 망하면서 속세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누구의 능인지도 모른 채, 적당한
기록에 오르지도 못하고 버려진 것이다. 그러다가 1669년에 작성된 '동경잡기(東京雜記, 동경
은 고려 때 경주의 이름)'에 괘릉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경주부(慶州府) 동쪽 35리(당시 10리
는 5km)에 떨어진 주인을 모르는 능이라 나오면서 앞서 언급된 괘릉의 유래가 나와있다.

18세기에 이르면서 신라 왕실의 후예인 경주박씨와 경주김씨, 경주석씨들은 앞다투어 경주 땅
곳곳을 들쑤시며, 그들의 조상묘 찾기 프로젝트를 벌였다. 그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
유사(三國遺事)를 참조하여 묘를 찾았는데, 꼼꼼하게 살피지 않고 대충 기록에 나온 자리를
맞춰가면서 조상묘로 삼았다. 하여 그 시절에 이름 없던 신라 고분 20여 기가 졸지에 '~~왕릉
'이란 가면을 쓰게 된 것이다. (그중에 성덕왕릉, 흥덕왕릉, 무열왕릉 등은 99% 이상 맞음)

한편 경주김씨는 괘릉에 군침을 흘리며 신라 제왕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는 문무왕(文武王)의
능으로 삼는 어거지성을 발휘한다. 어느 기록에도 이곳이 문무왕릉이라 나오지도 않았는데 말
이다. 그들은 이곳이 문무왕릉의 허묘(墟墓)일 수 있다면서 비석을 세우고 매년 제를 올렸다
고 한다.
그렇게 문무왕릉이란 가면을 강제로 눌러 쓴 괘릉은 왜정(倭政) 때 이르러 정체성에 대한 중
대한 수정을 받게 된다. 1931년 입실소학교에서 인근 말방리 절터로 소풍을 갔는데, 거기서
깨진 비석 조각을 발견했다. 하여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달려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
總覽)'과 대조하여 비석 조각의 수수께끼를 풀었는데, 그 결과 그곳은 원성왕과 인연이 깊은
숭복사터로 밝혀졌다.
또한 비문에 괘릉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어 원성왕릉 설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허나 경주
김씨 측은 이를 끝까지 무시했으나 1968년 동해바다 대왕암이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으로
밝혀지고 언론사에서 크게 특집으로 다루면서 괘릉을 포기하게 된다.

그 이후 괘릉<전(傳) 원성왕릉>이라 불리다가 이제는 숭복사비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
록을 토대로 완전히 원성왕릉으로 99% 이상 굳어진 모양이다. 해설사도 이곳이 원성왕릉이 맞
다고 그런다. 예전에는 아리송하다는 뜻의 전(傳)을 붙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전'도 쏙 사
라져버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붕어(崩御)하자,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火葬)을 했다고 하며
, 삼국유사에는 능이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
(崇福寺)라고 한다. 마침 숭복사가 근처에 있었고, 주변에 마땅한 고분이 없으며, 최치원(崔
致遠)이 쓴 숭복사비에는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鵠寺=동곡사)가 괘릉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신하들은 원성왕에게 곡사 자리가 능 자리로 좋다고 추천했으나 왕은 거절했다. 허나 신하들
의 계속되는 설득에 곡사를 매입하여 능을 조성했으며, 절은 지금의 숭복사 자리로 옮겨져 헌
강왕(憲康王) 때 대숭복사(大崇福寺, 지금의 숭복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원성왕의 능자리 매입은 한국경제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영토 전체가 제왕의 땅
이라는 이른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돈을 주고 그 자리를 매입했기 때문
이다.
얼마의 돈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잠들 자리이고 그곳에 신라가 숭배하던 불교 사원
이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재정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괘릉의 주인인 원성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동쪽 석물들 (오른쪽부터 화표석, 석인들, 석사자들)

※ 독서삼품과로 유명한 신라 38대 군주, 원성왕<元聖王 ?~798 (재위 785~798)>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金敬信)으로 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아버지는 김효양(金孝讓)
으로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자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존했으며,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
人, 혹은 지오부인<知烏夫人>) 박씨로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올렸다. 부인은 숙정부인 김씨(
淑貞夫人 金氏)로 각간 김신술(金神述)의 딸이다.

780년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이찬 지정(志貞)의 난을 평정했으며, 그 과정에서 혜공
왕(惠恭王)이 살해되고 만다. 그래서 김양상에게 힘을 실어 재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신라
37대 군주인 선덕왕(宣德王)이다. 그 공로로 김경신은 상대등(上大等)에 올라 그 이름을 크게
떨친다.
한편 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은 세력과 덕망을 키우며 대권을 노리고 있었는데, 김
경신보다 서열도 높았고 세력 또한 컸다. 마침 선덕왕이 후사도 없이 붕어하자 중신(重臣)들
은 너도나도 김주원을 추대하기에 이르고, 김경신의 자리는 크게 위협을 받게 된다. 그와 관
련해서 재미있는 설화가 한토막 전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선덕왕 시절에 김경신은 묘한 꿈을 꿨다. 그는 일상적으로 쓰던 두건를 벗고 소립(素笠, 갓)
을 썼으며, 12줄 거문고를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그래서 점쟁이에
게 물어보니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을 잃는다는 뜻이며, 삿갓을 쓴 것은 목에 칼을 쓰는 것입니다. 12줄
거문고를 든 것은 포박되는 것이며,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영 좋지 못한 흉몽이라는 것이다. 그 말에 제대로 토라진 김경신은 종일 집에 틀어박혀있
었고. 그 와중에 그와 무척 가까운 여산(餘山)이 찾아왔다.

여산이 김경신의 주눅 든 모습에 이유를 물었다. 대답을 회피하던 김경신은 결국 꿈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그 이야기가 끝나자 갑자기 옷깃을 여미며 자신에게 큰 절을 올리는 것이다.
김경신은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여산이
'그 꿈은 공의 지위가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후일에 공이 출세하면 저를 잊지 마십시요!'
김경신이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건 무슨 소리요?'

'두건을 벗는 것은 윗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이며, 삿갓을 쓴 것은 왕관을 쓴다는 뜻입니다. 12
줄 거문고를 손에 쥔 것은 공이 왕의 12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공은 내물대왕
의 12세손이 아닙니까? 또한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물의 도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김경신은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며
'무열대왕의 6세손인 김주원이 떡 버티고 있는데, 나에게 그런 자리가 오겠소?'
'저와 공은 친분이 두텁습니다. 어찌 감히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믿어주십시요. 일단 물과 인
연을 두텁게 하기 위해 알천으로 나가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산의 권유에 따라 매일 알천(경주 시내 북쪽에 흐르는 하천)에 나가 기도를 했다. 말은 기
도이지만 아마도 중신과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고 친분을 두텁게 쌓는 작업이었을 것
이다.

785년이 되자 선덕왕이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귀족들은 서열이 제일 높고, 덕망
과 세력을 두루 갖춘 김주원을 제왕으로 추대했다. 그때 김주원은 알천 북쪽에 살고 있었고,
김경신은 남쪽에 있었다.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 왕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알천이 범람을 하
고 말았다. 중신들과 김주원은 비가 그치길 기다렸으나 폭우는 7일이나 계속 되었다. (폭우라
고 하지만 김경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그의 길을 알천에서 막은 것을 비유한 듯 싶다)
상황이 이러자 중신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늘만 쳐다보며 대책을 논의했는데
'하늘이 주원공을 원하지 않아 이런 홍수를 내린 것이 틀림없소! 상대등인 경신공은 선왕 폐
하의 아우로 덕망이 높고, 임금이 될 기상을 갖추고 있으니 그를 추대하는 것이 어떻소?'
이렇게 논의가 나오자 다시 중의를 거쳐 결국 김경신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어지럽게
내리던 큰 비는 뚝 멈추었고, 백성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반면 김주원은 알천을 건
너지도 못하고 김경신에게 왕위가 돌아갔다는 말에 격분해 강릉(江陵)으로 내려갔다.
이에 김경신은 그가 모반을 꾀할까 두려워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 달랬으나, 나중에 김
주원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이 부친의 한을 갚는다며 웅진(熊津, 공주) 일대에서 반란을 일
으켰다.

이렇게 중신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왕위에 오른 김경신은 바로 그해 아들 김인겸(金仁謙)을 태
자(太子)로 봉하고, 시조대왕<김알지(金閼智)인듯>, 태종무열왕, 문무왕, 조부(祖父)인 흥평
(興平)대왕, 부친 명덕대왕을 제사지내는 5묘를 세웠다. 또한 문무백관의 작위를 1급씩 올려
주고, 충렴(忠廉)을 상대등에, 이찬 제공(悌恭)을 시중(侍中)으로 삼았으며, 총관(摠管)이란
이름을 도독(都督)으로 바꿨다.

786년 4월, 동부 지역에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모두 상했으며, 김원전을 당나라에 보
내 조공(朝貢)을 건네자. 당나라 덕종(德宗)이 왕을 칭송하는 조서(詔書)와 함께 여러가지 선
물을 보냈다.
9월에는 도성에 기근이 심하자 곡식과 조 33,240석을 풀었으며, 10월에 33,000석을 더 풀었다
. 그리고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치자 굴압현령의 벼
슬을 내렸다.

787년 2월, 도성(都城)에 지진이 생기자 왕은 신궁(神宮)에 제를 지내고 죄수를 방면했다. 7
월에 황재(蝗災)가 들어 농사를 망쳤다.

788년 봄, 그 유명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시행했다. 독서삼품과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
傳)과 예기(禮記), 문선(文選)에 정통하며, 논어(論語), 효경(孝經)까지 두루 섭렵한 자를 상
품(上品)으로 삼고, 곡예와 논어, 효경에 밝은 자를 중품(中品), 곡예, 효경만 읽은 자를 하
품(下品)으로 삼았다. 그리고 오경(五經)과 삼사,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모두 외운 사람은
특별히 등급을 초월하여 썼다. 그 이전에는 활과 무예로 인재를 뽑았는데, 그것이 확 변한 것이다.
가을에 서쪽 지방에 한재와 황재가 들고 도적이 들끓자 사람을 보내 백성을 위무했다.

789년 1월, 한산주(漢山州)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생하자 조와 곡식을 보냈으며,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또 상했다. 9월에 자옥(子玉)을 양근현(경기도 양평) 소수(小守)로 삼자, 사람들
이 그는 문적(文籍) 출신이 아니라며 반대했으나 시중(侍中)이 그는 당나라에서 공부를 한 사
람이니 괜찮다고 권하자 왕은 그대로 시행했다.

790년 정월, 종기를 시중에 명하고,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고자 전주(全州)를 비롯한 7주의
백성을 징발해 공사에 들어갔다. 웅천주(熊川州, 공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으며, 3월에
일길찬(一吉粲) 백어를 발해(渤海)에 사신으로 보냈다. 5월에 곡식을 풀어 한산주와 웅천주
백성을 구제했다.

791년 태자 김인겸이 죽자 시호를 혜충태자(惠忠太子)라 했으며, 이찬 제공이 불만을 품고 반
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처단했다.
10월에 폭설이 도성에 내려 얼어죽는 사람이 있었으며, 시중 종기를 면직시키고 혜충태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김준옹<金俊邕, 이후 소성왕(昭聖王)>을 시중으로 삼았다. 손자를 시
중에 삼을 정도라면 원성왕도 제법 나이가 있었다는 소리이다.

792년 7월, 당나라 제왕에게 미녀를 보냈다. 8월에는 왕자 김의영(金義英)을 태자로 봉했으며
,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世强)을 상대등에 삼았다. 그리고 시중 김준옹이 병으로 면
직되자 이찬 숭빈을 시중에 삼았다.

793년 8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벼가 쓰러졌다.

794년 2월, 지진이 생겼고, 태자 김의영이 죽자 시호를 헌평태지(憲平太子)라 했다. 시중을
숭빈에서 언승으로 교체했으며, 7월에 봉은사(奉恩寺)를 창건했다. 한산주에서 하얀 까마귀를
진상했으며, 궁궐 서쪽에 망덕루(望德樓)를 지었다.

795년 정월, 손자 김준옹을 태자로 봉했다. 4월 한재가 들자 죄수를 친히 살폈으며, 8월에 서
리가 내려 곡식이 상했다.

796년 봄, 도성에 기근이 심하고 전염병이 생기자 창고의 양곡을 풀어 구제했다. 4월에 동생
인 김언승(金彦昇, 나중에 헌덕왕)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이찬 지원을 시중으로 삼았다.

797년 9월, 도성 동쪽에 황충(蝗蟲)으로 농사를 망쳤고, 홍수로 산이 무너졌다. 시중을 김삼
조로 갈았다.

798년 3월, 궁궐 남쪽 누교가 화재를 입었고,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이 부딪쳤다. 6월 한재
가 있었고, 굴자군(屈自郡, 경남 창원) 대사(大舍) 석남오(石南烏)의 아내가 3남 1녀의 쌍둥
이를 낳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29일 왕이 붕어하니 시호(諡號)를 원성(元
聖)이라 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 삼국유사에는 토함산 서
쪽 동곡사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원성왕은 신라의 마지막 성군(聖君)이자 막바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왕이다. 비록 홍수와 한재
, 서리 등의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나 농사를 망치긴 했지만 수시로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
했으며, 벽골제 등의 수리시설을 증축하여 농사의 편의를 도모했다.
그는 자식들의 명이 짧아 태자로 삼은 두 아들이 몇 년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끝내는 손자
를 태자로 삼아 후계를 잇게 했다. 게다가 아들과 손자, 동생 등 가족과 근친 가족을 주요 요
직에 앉혀 자신의 왕권강화에 주력했다. 그래서 그 덕에 신라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는 괘
릉을 만들어 편히 발 뻗고 눕게 된 것이니 그의 권력과 지지 기반이 그만큼 튼튼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당나라에 조공을 보내고, 심지어 미녀까지 보내면서 당나라에 아부를 떨었으나, 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살던 신라의 호국용(護國龍)을 몰래 물고기 3마리로 둔
갑시켜 자기네 나라로 빼돌리려 한 것을 그들을 족쳐 빼앗아왔다는 설화가 있어 당나라와 적
지 않은 충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호국용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나라
에서 무척 탐을 내거나 부담을 가진 존재가 아닐까 싶으며, 그 이후로 당에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이 없다.
또한 주목할 것은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다. <단순히 북국(北國, 발해)에 사신을 보냈
다고 했을 뿐, 자세한 건 모름>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화엄종(華嚴宗) 승려 묘정(妙正)을 내전(內殿)에 두어 늘 곁에 부렸다
고 하며, 봉은사 등의 절을 창건했다.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는지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다고 하는데,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허나 내용이
전하지 않으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자식들로는 태자로 임명되었다가 죽은 두 아들 외에 대룡부인(大龍夫人)과 소룡부인(小龍夫人
) 등 두 딸이 있었다.


▲  귀여움이 돋보이는 석사자상



 

♠  무덤치고는 볼거리가 풍부한 괘릉 ①
석인, 석사자 둘러보기 - 보물 1,427호

▲  동쪽 석물들 (오른쪽부터 화표석, 석인들, 석사자들)

괘릉 앞이라고 하지만 봉분(封墳)과는 다소 거리를 두어 화표주 1쌍과 석인 2쌍, 석사자 2쌍
이 2열로 서로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이들은 왕릉을 지키며 수식하는 석물들로 그 가치가
매우 상당하여 2009년 괘릉에서 분리하여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일괄(一括)'이란 이름으로
따로 국가 보물 1427호로 삼았다. 괘릉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 존재들로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괘릉의 존재는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  무뚝뚝하게 서 있는 동쪽 화표석

괘릉 석물 중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화표석(華表石)이라 불리는 8각형의 돌기둥이다. 무
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망주석(望柱石)이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처음에는 왕릉에서만 주로
쓰다가 점차 지배층과 민간으로 확산되었다. 그의 역할은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것으로 그의
기원은 인도 아소카왕의 석주(石柱)라고 한다.
이후 중원대륙(서토)으로 넘어가 왕릉의 화표석으로 절찬리에 세워지게 되는데, 보통 2개를
세웠다. 이후 당나라 따라하기에 분주하던 신라가 이를 가져와 괘릉에 처음으로 만들었다.
화표석을 갖춘 신라왕릉은 괘릉 외에 흥덕왕릉에도 있으며, 고려 태조(太祖)의 현릉(顯陵)에
도 등장한다.

화표석 위쪽에 얇게 솟은 부분이 있는데, 다른 조각이 있었던 듯 싶으며, 달리 두드러진 조각
이나 새김은 없다.


▲  서쪽 서역(西域) 석인

▲  동쪽 서역 석인

화표석 옆에는 이국적이면서도 조금은 무섭게 생긴 석인(石人)이 바닥돌 위에 서 있다. 서쪽
석인은 좀 덜하지만 동쪽 석인은 정말 우락부락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들은 예전에는 무
인석(武人石)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그냥 석인이라 한다.
그의 얼굴을 보면 이 땅에 흔한 얼굴은 아니며, 서역 사람을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
로 서역 무역상이나 서역 출신 무인(武人) 또는 관리로 보고 있다. 근래에는 아랍인이나 위구
르인, 소그드인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으며, 이들 석인을 내세워 신라와 서역, 아랍과의 활
발한 교류를 증명하는 존재로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처용(處容)의 예처럼 신라로 넘어와 관
리가 된 서역, 아랍인들이 많다고 함>

신라 왕릉에 석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성덕왕릉이다. 그 다음이 바로 괘릉인데, 괘릉 석인의
포즈를 가만히 보면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좀 비슷해 보인다. 오른손은 거의 가슴 앞에 대고
싸움을 뜰 기세를 취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길다란 무엇인가를 쥐고 있는데, 그곳은 몽둥이라
고 한다. 머리에는 아랍인들이 많이 쓰는 듯한 터번을 쓰고 있으며, 허리에는 복주머니가 달
려 있는데, 산낭으로 보기도 한다.


▲  서쪽 석인의 얼굴
커다란 눈과 코, 다물어진 입은 약간 구부러져 있다. 턱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는데, 마치 털을 보는 듯 하다.


서역인 옆에는 문인석(文人石)을 닮은 석인이 서 있다. 처음에는 문인석이라 불렸으나 칼과
갑옷을 착용하고 있어서 지금은 그냥 '석인'이라 부른다. 즉 문무인(文武人)을 같이 표현한
것이다. 서쪽 석인은 제법 날카로운 맵시를 지닌 위엄 돋는 인상으로 웃음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표정이나 오른쪽 석인은 다소 멀뚱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들은 앞에는 관복을 입고 뒤에는 양당개란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있다. 머리는 관을 쓰고
있는데, 벌이 새겨져 있으며, 벌은 용감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얼굴과 수염이 조금은 이국적
이라 이를 두고 위구르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서쪽 문인석의 매서운 얼굴

▲  동쪽 석사자

석인을 지나 왕릉과 좀 더 가까워지면 석사자 2쌍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정말 귀엽게도 앉아
있는데, 봉분 주변에 있던 것을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자하면 호랑이와 더불어 용맹의
대명사이지만 여기서만큼은 그것도 통하지 않는다. 얼굴하며, 앉아있는 모습하며, 꼬랑지까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게다가 석인처럼 크지도 않고 조그만하니 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  동쪽 석사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표정이 완전 '씨익~'이다.



 

♠  무덤치고는 볼거리가 풍부한 괘릉 ②
왕릉 봉분과 12지신상(十二支神像)

▲  난간석 주변에 놓여진 저 돌의 정체는 무엇일까?

괘릉 능역 가장 뒤쪽에 원성왕이 잠들어 있는 괘릉 봉분이 주변 소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두툼
히 솟아 있다. 훍으로 만든 둥근 모양의 봉토분(封土墳)으로 봉분 주위로 난간석이 둘러져 있
는데, 봉분 호석(護石)에는 12지신상이 각 방향 별로 새겨져 있다. 신라가 당나라 왕릉을 적
지 않게 참조를 했지만 12지신상 만큼은 신라의 독창적인 양식으로 12지신상을 갖춘 다른 신
라 무덤(경덕왕릉, 헌덕왕릉, 진덕여왕릉, 성덕왕릉, 김유신묘, 구정동 방형분 등)과 달리 조
각 수법이 매우 수려하고 건강상태도 좋다. 이들은 왕릉을 수호하고 꾸미는 역할을 하며, 각
자의 연장과 갑옷을 갖추고 있다.

봉분은 지름 23m, 높이 6m로 봉분을 받치는 호석은 바닥돌 위에 판석(板石)으로 된 면석(面石
)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우주석을 배치했으며, 2칸 간격으로 12지신상을 조각했는데, 성덕
왕릉은 12지신상 상당수가 훼손되었으나 이곳은 거의 멀쩡하다.
호석 밖에는 길이 110㎝, 너비 40㎝의 부채꼴 판석(板石)을 정연하게 깔아 회랑(廻廊)으로 만
들었으며, 회랑 둘레에 높이 1.7m의 돌기둥을 세워 돌난간을 둘렀다. 돌기둥은 25개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에 상하 2단으로 원공(圓孔)을 뚫어 끼웠던 관석(貫石)은 거의 유실
되었다.


▲  12지신상 ①

▲  12지신상 ②

▲  12지신상 ③

▲  12지신상 ④

▲  12지신상 ⑤

▲  12지신상 ⑥

▲  12지신상 ⑦

▲  12지신상 ⑧

▲  왕릉 앞에서 바라본 능역
몇몇 소나무들은 하늘로 곧게 솟지 못하고, 구부러지게 자라났다. 이들은
혹시 원성왕을 좌우에서 모시던 신하들의 화신(化身)은 아닐까?


괘릉을 정신없이 둘러보고 해설사가 있는 안내소로 갔다. 거기서 괘릉에 대해 이것저것 문의
하여 궁금증에 적지 않은 단비를 뿌렸는데, 그 사이 시간은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무리 햇
님의 근무시간이 가장 긴 6월이라고 하지만 괘릉 후식거리로 2곳의 절터 유적(감산사, 숭복사
)도 준비되어 있어 그들도 오늘 모두 봐야만 된다. 게다가 그들은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며
, 오로지 두 발로 찾아가야 한다.
하여 해설사에게 궁금증 해소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괘릉을 뒤로 하고 괘릉의 후식거리를
찾으러 다시 길을 떠났다.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지으며. 이후 감산사와 숭복사 관련 부분은 별도에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경주 감산사, 숭복사 관련글 보기)

* 원성왕릉(괘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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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7월 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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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함과 재건의 공존, 경주 서라벌 절터 나들이 ~~~ (감산사, 연지암, 활성리석불입상, 숭복사)

 

 

' 여름맞이 서라벌 경주 나들이 '
(감산사, 숭복사)

▲  감산사지 3층석탑


 

여름 제국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한복판에 신라의 향기가 지독하게 서린 서라벌 경주
(慶州)를 찾았다.
신라 왕릉의 백미(白眉)로 손꼽히는 괘릉(掛陵)을 둘러보고 그 후식거리로 감산사와 숭복
사를 둘러보고자 괘릉안내소 문화유산해설사(이하 해설사)에게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감
산사는 약 20분, 숭복사는 더 들어가야 된다고 그런다. 하여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미
답처(未踏處)에 대한 설레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다시 길을 떠났다.

괘릉을 지나면 바로 3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은 감산사, 오른쪽은 숭복사로 이어진다. 3거
리에 감산사 이정표가 있지만 숭복사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은 없다. 나는 감산사를 먼
저 둘러보고 숭복사를 거쳐 속세(俗世)로 나갈 생각이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괘릉초등학교를 지나 멀리 남월산<南月山, 토함산 남쪽 산>의 관찰을 받으며 한적한 시골
길을 거닌다. 오르막도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고, 드넓은 논두렁과 밭두렁이 펼쳐진 그야
말로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의 연속이라 가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20분
을 가니 산 밑에 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입구에는 절의 정체를 알리는 표석이 자리
해 있는데, 그의 피부에는 감산사 3자가 쓰여 있다.


▲  감산사 표석과 2층 요사

표석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ㄱ'자 모양의 기와집이 나온다. 이 집은 승려
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거의 한옥 민박이나 펜션 같은 모습이다. 

요사를 지나면 경내로 인도하는 길이 2갈래가 펼쳐진다. 어느 길로 가던 목적지는 같지만
연못을 끼고 가는 길이 더 아기자기하다. 돌과 흙으로 축대(築臺)를 쌓고 그 위에 마련된
연못은 네모난 모습으로 연꽃들이 막바지 와신상담(臥薪嘗膽) 중이라 소소한 연잎들만 가
득하다. 이제 보름 정도 지나면 연꽃의 향기가 눈과 코를 제대로 마비시킬 것이다.

연못에서 들꽃들이 손짓하는 계단을 오르면 대적광전이 있는 감산사 중심에 이른다.


▲  감산사 연못

▲  감산사의 중심지로 인도하는 돌계단
옛 감산사의 주춧돌로 만든 계단 너머로 법당인 대적광전이 슬쩍 머리를 내민다.


 

♠  감산사(甘山寺) 둘러보기

▲  감산사의 법당(法堂)인 대적광전(大寂光殿)

감산사는 토함산의 남쪽 줄기인 남월산 서쪽 자락에 안긴 절이다. 겉으로 보면 근래에 창건된
절처럼 보이지만 겉보기와 달리 매우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 절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시절에 김지성(金志誠, 652~?)이 부모와 가족들,
아내의 명복을 빌고 제왕(帝王)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가산을 털어서 지은 절이다. 이때 감산
(甘山)에 있던 자신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그 연유로 감산사라 불
리게 되었다.
절을 세운 김지성은 문신(文臣)으로 아버지는 일길찬(一吉粲) 김인장(金仁章), 어머니는 관초
리(觀肖里)부인이다. 그의 어린 시절과 중년 시절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67세란 적지 않은
나이에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에서 물러났는데, 나름대로 정치 개혁을 꿈꾸다가 지략(智
略)이 얕아 실패하고 자칫 형벌을 받을 뻔했다고 한다. 아마도 형벌 대신 은퇴를 권유받아 시
랑에서 물러난 듯 싶다.
어쨌든 벼슬에서 물러나 719년 2월 자신의 사유지에 감산사를 짓고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에 가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과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을 봉안했다. 미륵
보살 광배(光背) 뒤에 창건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감산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이것 마저 없었다면 감산사의 존재 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그 명문은 신라
의 대학자 설총(薛聰)이 썼다고 전한다.

또한 은퇴 이후, 미륵보살의 유가론(瑜伽論)을 연구하고 당(唐)나라에서 건너온 노장사상(老
莊思想)에 크게 빠져들었다. 특히 5천 언에 이르는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늘 펼쳐 읽었다고
하니 그의 사례를 통해 신라 귀족들 사이에서 노장사상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김지성이 애지중지 가꾸던 감산사는 김지성 일가의 원찰(願刹) 노릇을 하며 후손들이
정성껏 관리했으나 마땅한 사적(事蹟)은 전해오지 않으며, 고려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가 조
선 중기 때 완전히 망했다고 한다.
이후 절터만 황량하게 남게 되었으며, 김지성이 봉안한 석불들은 절이 망하는 과정에서 죄다
땅속에 묻혀 어둠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3층석탑과 석등 대석 등은 비록 생매장은 면했으나
이리저리 뒹구는 신세가 되었으며, 절터는 논밭으로 변해 감산사의 존재는 말끔히 잊혀져 갔
다.

그러다가 1915년경 왜인(倭人)들이 우연히 절터 논밭에서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캐내면서 역사
속에 사라진 감산사의 존재가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허나 이들 불상은 서울로 강
제로 옮겨지고 절터는 다시 방치된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비구니들이 들어와 옛터 위에 조그
만 건물을 지어 감산사를 칭했으며, 지금은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극락전 등 여러 건물이
경내를 이루면서 제법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으며, 왜정(倭
政) 때 발견되어 서울로 소환된 석불 2개는 국보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절이 산 밑에 있을 뿐, 괘릉리의 너른 전답을 바라보고 있는 평지 절로 경내 건물에서 고색(
古色)의 내음은 맡아볼 수 없으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3층석탑 등 옛 석조물에서는 고색의
향기가 진동한다. 게다가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깔끔하며 아기자기하다.


▲  현란한 색채의 극치, 대적광전 내부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18호

협시불(夾侍佛)도 없이 혼자 불단(佛壇)을 지키고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화강암으로 만든 신
라 후기 불상이다. 전체 높이는 약 1m로 얼굴은 딱히 표정은 없어 보인다. 눈과 코, 입, 머리
,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제대로 남아있으며, 머리는 깨져있던 것을 복원했고, 광배(光
背)와 대좌(臺座)는 새로 만들어 붙였는데, 고색의 때가 가득 입혀진 석불과는 달리 너무 대
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깨는 듬직해 보이고, 두 손은 비로자나불이 좋아하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는데, 이
는 근래에 보수한 것이다.
이 땅에 남아있는 비로자나불 중 거의 초창기 불상이며, 등에 조각된 띠매듭은 석불의 옷주름
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불 앞에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려 함일까? 그의 1/15도 안되는 조그만 석불을 갖다두어 마
치 어미와 새끼를 보는 듯 하다. 그의 뒤에는 고운 빛깔로 채색된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
)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

▲  꽃창살이 아름다운 극락전(極樂殿)

▲  대적광전 뒷뜨락

대적광전 뒤쪽에는 잔디가 입혀진 넓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감산사터의 일부분으로 3층석
탑과 석등 대석, 옛 주춧돌이 자리를 지키며 까마득한 왕년의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만큼 감
산사의 전성기와 신라란 나라는 우리와 엄청 멀리 떨어진 시대이다.

3층석탑 북쪽 가장자리에는 특이하게도 네모난 원두막을 두어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그냥
빈터만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는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저런 것이라도 만들어 약간의 자리를
채워넣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  감산사지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5호

절터 동쪽에 자리한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
라 후기 석탑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6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는데, 1층 탑신은 약간의 상처가 있는 것 외에는 그런데로 온전하나 2층과 3층 탑신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완전히 사라져 세월 앞에 장사가 없음을 실감케 한다. 기백(幾百)이
넘는 세월 동안 폐허로 있던 절터에서 저 정도라도 건진 것도 그나마 다행이다.

탑 옥개석(屋蓋石)은 4단 받침이며, 추녀 부분이 위로 살짝 올려져 작은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이 남아 있다.


▲  주인을 잃어버린 석등대석(石燈臺石)

3층석탑 인근에 화석(化石)처럼 박힌 석등대석, 꽃잎이 아래로 쳐진 연꽃 무늬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사실적인 모습을 자랑한다. 저기에 그럴싸하게 색깔만 입히면 정말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비록 옛 사람들이 조각한 연꽃 무늬지만 그에 대한 시샘 때문일까? 주변에는 꽃
들이 거의 없었다.
저 수려한 대석에 뿌리를 내린 석등(石燈)은 과연 어떠했을까? 석등의 모습이 거의 거기서 거
기지만 저 석등만큼은 왠지 특별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오래 전에 가출한 석등을 애타
게 기다리며 화려한 연꽃잎을 펼쳐 보인다.


▲  바닥에 바짝 엎드린 석등대석과 주춧돌

▲  수습된 주춧돌들 (1)

▲  수습된 주춧돌들 (2)
저들이 받쳐들던 감산사의 옛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터에 맞게 고스란히
남아있었더라면 짧은 상상력이라도 발휘해볼 수 있었을텐데, 한쪽에 수습해
놓아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  감산사 감로수(甘露水)
감로수란 말에 단단히 각인된 것일까? 물맛이 제법 달콤한 것 같다. 물을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마름에 잠긴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르짖는다.

▲  붉은 장미 옷을 걸친 초가 형태의 불연정(佛緣亭)

감산사는 원두막과 불연정 등의 초가를 갖추고 있다. 불연정은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벽 바깥
에는 장미꽃이 가득하여 마치 장미 옷을 걸친 듯, 운치를 가득 돋군다. 땅바닥에는 힘없이 떨
어진 장미꽃잎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데, 장미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
도 그 역시 잠깐일 뿐.. 세월과 자연은 그 존재조차 희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래서 세월이란
존재가 무섭다.

* 감산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6-2 (앞등길 117-20 ☎ 054-746-7096)


▲  바위 위에 자리를 편 조그만 석불
몸에 가득 피어난 세월의 때를 보니 제법 오래된 석불 같다. 이 석불은 근래
수습되어 없어진 머리를 새로 만들고 부분부분 손질하였다.


감산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숭복사로 가고자 왔던 길로 괘릉으로 나왔다. 날씨도 허벌나
게 덥고 지치기도 해서 다시 괘릉안내소에 얼굴을 들이미니 해설사(50대 후반 아줌마)가 반가
운 표정으로 벌써 2곳을 다 둘러봤냐고 그런다. 하여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이제 감산사 하
나 보고 왔다고 그러니 힘들겠다면서 잠깐 들어와 쉬었다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안내소에 들어가 앉으니 참외와 사과, 시원한 매실차를 권한다. 마침 시장도 하고 해
서 고마움을 표하며 흔쾌히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다과시간을 가지며 해설사와 괘릉과 감산
사, 숭복사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고, 화제(話題)는 점차 경주와 신라(新羅), 개인적인 이야기
까지 확대되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보니 2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갈 준비를 했지만 귀차니즘 발동으로 발길이 쉽사리 떠지질 않는다. 해설
사와의 이야기도 재미있던 터라 그런 마음은 더했다. 허나 그날 내 자신에게 내린 임무도 있
고 시간도 제법 흘러간 터라 이제 떠나야 된다. 해설사가 날씨가 덥다며 시원한 물을 제공하
니 그 물을 모두 마시고 아쉽지만 작별을 고했다. 그는 잘 보고 가라며 숭복사 가는 길을 알
려주었다.

괘릉을 나와 3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숭복사로 통한다. 중간에 햇갈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
만 그 길(신계입실길)을 따라 한없이 가다보면 숭복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리를 대
충 헤아려보니 거의 2.3km 정도 된다. 이동 도중에 활성리마을에서 생각치도 못했던 연지암과
활성리석불입상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애타게 손짓을 하여 숭복사는 잠시 넣어두고 그 손짓
에 이끌려 연지암으로 들어갔다.


 

♠  신라 후기 석불을 간직한 조그만 암자, 연지암(蓮池庵)

▲  활성리석불입상의 거처, 연지암 대웅전(大雄殿)

감산사와 숭복사 중간에 자리한 연지암은 팔작지붕 대웅전과 2채의 요사(寮舍)가 전부인 그야
말로 손바닥만한 작은 절이다. 불국사(佛國寺)의 말사(末寺)로 이곳에는 신라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절터가 있었다. 물론 절의 자세한 정보는 전하는 것이 없다.

왜정 시절의 어느 날 김연지화(金蓮池花) 보살이 밭 가운데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 꿈을 꾸었
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기며 그 밭을 찾아 직접 파보니 석불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이 바로
연지암의 보물인 활성리석불입상이다. 연지화는 그 불상을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
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연지암이라 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왜경(倭警)이 무슨 심보인지 불상의 출처를 대라며 연지화를 괴롭혔는데, 갑
자기 왜경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꺼꾸러졌다고 한다.

어쨌든 활성리석불의 난데없는 등장으로 태어난 연지암은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아 꾸준히 법
등(法燈)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조촐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절 남쪽에는 나무가 약간
우거져 있고, 주변에는 경작지가 펼쳐진 평지 절이다.

* 연지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활성리 378 (활성길 120-5, ☎ 054-744-7314)


▲  연지암 대웅전 내부

▲  대웅전 내 서쪽에 있는 활성리석불입상(活城里石佛立像)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6호

연지암의 법당인 대웅전은 1987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안에 이곳의 보물인 활성리 석불입
상이 깃들여져 있는데, 마땅히 중심 불단에 있을 줄 알았더만 불단에는 엉뚱하게도 금동(金銅
)으로 다져진 석가3존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정작 당사자는 서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 것
이다. 지금의 연지암을 있게 해준 존재이건만 한참 후배들에게 밀려나 구석에 있는 것이다.
다소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나름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 석불은 신라 후기 불상으로 주형광배()를 갖추고 있다. 불상 높이는 153cm, 광배
높이는 190cm에 이르며, 광배에는 머리 주변의 두광()과 몸 뒤쪽의 신광()을 새기고
그 바깥쪽에 화염(火焰) 무늬를 새겼다. 얼굴은 다소 훼손되어 지워져 있으며, 귀가 유난히
길어 어깨에 닿는다. 왼손에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데, 약합(藥盒)인듯 싶으며, 그게 맞다면
그는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된다. 오른손에도 뭔가가 쥐어져 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머리 꼭대기의 무견정상은 꽤나 두꺼워 보이며,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다. 얼
굴이 좀 지워진 것 외에는 대체로 건강상태는 양호하다.

이렇게 연지암을 덤으로 둘러보고 숭복사로 길을 재촉했다. 숭복사입구에서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왼쪽(동쪽)에 조그만 농로로 한없이 들어서니 넓은 절터와 함께 그 위에 자리한 숭복사
가 모습을 비춘다. 감산사는 그나마 길이 쉽지만 숭복사는 괘릉 해설사와 이정표의 안내가 없
었으면 결코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다.


 

♠  숭복사(崇福寺)터 둘러보기

▲  숭복사터
절터 가운데에 나무가 솟아나 얇게나마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저 나무는
이곳이 절터(금당터)인지도 모르고 대책도 없이 뿌리를 내렸으니 자연도
망각할 정도로 숭복사란 존재가 오랫동안 잊혀졌다는 뜻이다.


괘릉에서 도보로 거의 30분 이상 떨어진 말방리 구석에 자리한 숭복사는 괘릉과도 무척 인연
이 깊다.
괘릉의 주인을 속시원하게 밝혀준 이곳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 이전에 파진찬(波珍
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곡사<鵠寺, 또는 동곡사(洞鵠寺)>였다.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시절에 왕이 능자리를 물색하자 신하들이 곡사 자리가 좋다며
추천했다. 이에 왕은 어찌 절에다 능을 쓰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폐하(陛下),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를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어
재앙의 터를 능히 복된 마당으로 만들어 한없는 세월 동안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하는 것입니
다. 무덤이란 아래로는 지맥(地脈)을 가리고 위로는 천심(天心)을 헤아려 반드시 무덤에 사상
(四象)을 포괄함으로서 천대만대 후손에 미칠 경사를 보전하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
다. 불법(佛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예(禮)에는 이루는 때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자리함
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 됩니다.
다만 청오자(靑烏子)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이 헐리는 것을 슬퍼하겠습니
까? 또한 이 절을 조사해보니 본래 폐하의 인척에게 속해 있던 것인바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 데로 나아가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릉으로 하여금
나라의 웅려(雄麗)한 곳에 자리잡도록 하고 절로 하여금 경치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하면 우
리 왕실의 복이 산처럼 높이 솟을 것이요. 저 후문(侯門)의 덕이 바다같이 순탄하게 흐를 것
입니다.
이는 알고는 하지 않음이 없고 각각 그 자리를 얻는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정(鄭)나라 자산
(子産)의 작은 은혜와 한(漢)나라 노공왕(魯恭王)이 도중에 그만둔 것과 더불어 견주어 옳고
그름을 따지겠습니까?. 마땅히 점괘에 들어맞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용신(龍神)이 기뻐함을 보
게 되실 것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원성왕은 곡사를 매입하여 능을 조성했으며, 절은 지금의 자리로 옮
겼다. 원성왕의 능자리 매입은
한국경제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영토 전체가 제
왕의 땅이라는 이른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돈을 주고 그 자리를 매입했
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돈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잠들 자리이고, 그곳에 신라가 숭배하던 불교사원
이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재정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이후 경문왕(景文王)이 꿈에서 원성왕을 친견하여 곡사를 크게 중건하며 괘릉 수호와 원성왕
의 명복을 빌었으며, 헌강왕(憲康王) 시절에 대숭복사(大崇福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상은 최
치원(崔致遠)이 숭복사비에 남겼다는 비문(碑文)의 내용이다.

신라가 망한 이후, 마땅한 사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조선시대까지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한 듯
싶으며, 조선의 배불(排佛) 정책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문을 닫고 소리없이 사라진 것으로 보
인다.

이후 이곳은 속세의 뇌리 속에 완전히 잊혀지면서 숭복사란 고유의 이름을 잃은 채, 그저 지
명 이름을 따서 '말방리(末方里)절터'란 이름으로 흘러내려왔다. 그러다가 1931년 입실소학교
에서 이곳으로 소풍을 왔는데, 그때 깨진 비편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있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과 대조한 결과 이곳이 숭복사터임이 밝혀졌다. 그제서야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은 것이다. 또한 비석은 최치원이 쓴 숭복사비로 밝혀졌고, 비
석의 내용을 통해 경주김씨들이 문무왕릉(文武王陵)이라고 그렇게나 우기던 괘릉이 원성왕릉
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숭복사비는 2마리의 거북이 조성된 쌍귀부(雙龜趺)로 절터에서 수습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비석 조각은 13개가 발견되어 1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그 외에 기와조각과 주
춧돌 등이 다량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2기를 비롯해 금당터과 여러 석재(石材), 주춧돌
등이 남아있으며, '國寺大雄(국사대웅)'과 '蓋瓦大雄(개와대웅)'이 새겨진 평와(平瓦)와 금동
제 금구(金口)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근래에 승려들이 절터 옆에 건물을 짓고 숭복사를 칭하
며 아주 옛날에 끊긴 숭복사의 뒤를 잇고 있다. 지금은 건물 4~5동 정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많이 떨어지는 건물이다. 그나마 저것도 힘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냥 절터만 덩그러니 있어 도난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것보다는 절터도 지키고 석탑도 지킬
겸, 조그만 절집이라도 곁에 있는 것이 숭복사터에게도 좋을 듯 싶다. 다만 욕심과 불사(佛事
)에 너무 눈이 멀어 절터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  숭복사터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4호

금당(金堂)터 남쪽에는 옛 숭복사의 영화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3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서로가 닮은 쌍탑(雙塔)으로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형태인데, 감산사3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후기 탑이다. 게다가 1금당 2탑 형식의 신라 후기 가람배치하고도 맞아떨어
진다.

동쪽 탑은 2층과 3층 탑신, 3층 옥개석이 없어졌고, 서쪽 탑은 2층 탑신이 온데간데 없다. 기
단은 이리저리 깨지고 닳아 그 틈을 이용하여 자연이 심어놓은 잡초가 둥지를 틀었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것이 위대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언제 사라질지 모를 모래성에 불과하다. 다
행히 탑이 자연의 일부가 되버리기 전에 절터를 수습하여 이렇게나마 숨을 쉬게 된 것이다.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수호하는 존재인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새겨져 있는데, 세월의 때
가 가득 끼었지만 알아보는데 별로 어려움은 없다. 1층 탑신에 문(門)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
며, 옥개석은 4단의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  숭복사터 동3층석탑
세월이란 꺼지지 않는 불에 형편없이 녹아내린 듯한 모습이다.

▲  숭복사터 서3층석탑
동탑보다는 낫지만 여기저기 상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  3층석탑 기단에 깃든 팔부신장들 ▼


▲  숭복사 금당터

탑 북쪽에는 두툼하게 솟은 금당터가 있다.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죄다 휩쓸려 가고 터만 황
량하게 남은 금당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잡초에 쌓여 간신히 주춧돌을
내밀고 있으니 세상살이는 그야말로 무상한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감산사와 숭복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숭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68-2 (개곡말방길 1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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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경주 나들이 ~~~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벽도산,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 늦가을 경주 나들이 '

▲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하늘 아래 세상을 평정한 가을이 천하를 곱게 물들이며 한참 전성기를 일구던 10월 막바지
에 신라 서라벌의 향기가 지독하게도 배여있는 경주(慶州)를 찾았다.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아침 일찍 동서울종합터미널을 찾았으나 경주 관광객 폭주로
9시 이후에나 승차가 가능하다고 그런다. (첫차는 7시)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구미(龜尾)행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경주로 갈 때 자리가 여의치 않으면 보통
구미를 거쳐 간다. 비록 갈아타야되는 번거로움은 있으나 구미행은 휴일에도 자리가 꽤 널
널한 편이고 경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환승 장소로도 제격이다.
구미에 이르자 바로 포항행 직행버스로 환승, 다시 1시간 30분을 달린 끝에 12시에 경주터
미널에 도착했다.

경주에 이르니 벌써부터 나들이 손님들로 터미널 주변은 북새통을 이룬다. 허나 그들이 가
는 곳은 거의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불국사나 석굴암, 대릉원, 분황사지 등 경주
의 기본적인 곳은 거의 질리도록 가본 터라 속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을 주로 찾는 편
이다.
그렇게 경주에 수많은 문화유적과 명승지에 발자국(헤아려보니 대략 120곳이 넘음)을 남겼
지만 '신라(新羅)', 그 조그만 나라가 무려 1천 년씩이나 쓸데없이 오래 있다보니 그 중심
지였던 경주에는 아직도 갈 곳들이 차고 넘쳐난다. 정말 한 골목, 한 굽이를 돌 때마다 볼
거리가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오는 곳이 바로 경주인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볼거리와 찬란한 역사가 깃들여진 경주는 굳이 나쁘게 이르자면 내게는 꽤
부담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볼거리가 지나치게 많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보려면 적지 않은
지식을 필요로 하니 차라리 눈을 감고 지나가고 싶을 정도이다.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은 시내 서쪽인 효현동(孝峴洞)이란 변두리 동네로 그곳에 안긴 3층
석탑과 법흥왕릉, 그리고 남쪽 벽도산에 있는 율동(두대리) 마애불이 이번 목적지이다. 이
들은 거의 인지도가 없어 찾는 이도 뜸하다.
경주고속터미널에서 아화로 가는 경주좌석버스 300-1번을 타고 태종무열왕릉과 효현고개를
넘어 효현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대천<大川, 고현천> 옆으로 난 조그만 농로(외외
길)로 들어섰다.
갈대가 살랑살랑 춤을 추는 대천, 늦가을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효현동 들판이 속세(俗世)
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를 흔쾌히 정화시켜준다. 4발 차량이 이따금 지나칠 뿐, 사람
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그런 시골길을 15분 정도 가면 효현동3층석탑을 알리는 갈
색 이정표가 마중하고, 그의 안내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외외마을이 나오는데, 탑은 마을
서남쪽에 자리해 있다.


▲ 경주의 서쪽 산하를 차례차례 적시며 형산강(兄山江)으로
흘러가는 대천(고현천)


▲ 효현동 시골길(외외길)
인적도 없는 호젓한 시골길을 거닐으니 마치 아비규환의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해탈감이라고나 할까? 비록 잠시뿐이지만...


▲ 늦가을에 슬며시 물들어 가는 효현동 시골길(외외길)
이런 시골까지 문명의 이기(利器)를 전해주는 전봇대 너머로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는 산은 남산(南山, 금오산)이다.


 

♠ 소나무를 우산으로 삼으며 옛터를 홀로 지키는
효현동3층석탑 - 보물 67호

효현동 외외마을 서남쪽 멋드러진 소나무 밑에 자리한 효현동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라 후기 석탑이다. 기단 사방(四方)에는 기둥 모양의 조
각을 두었고, 탑신은 각 층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새겼으며, 지붕돌 네 귀퉁이는 살
짝 치켜진 것이 마치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4단으로 되어있고, 각 부
분의 조각이 가늘게나마 있어 9세기 정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탑이 있는 자리는 법흥왕이 불도를 닦았다는 애공사(哀公寺)의 옛터로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
증할 절터의 흔적은 나오지 않아 그마저도 희박하며, 절의 위치와 관련된 기록도 없는 실정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애공사터로 포장된 것은 조선 후기에 경주김씨에서 현재 법흥왕
릉을 그들 조상의 하나인 법흥왕의 능으로 삼으면서 탑이 있던 자리를 애공사터라 우겼기 때문
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나왔는데, 마침
탑도 있고, 비록 북쪽은 아니지만 서쪽에 이름 모를 고분이 있으니 적당히 끼워 맞춘 것이다.

▲ 효현동3층석탑의 앞부분

▲ 효현동3층석탑의 뒷부분


▲ 효현동3층석탑과 이웃한 우사(牛舍)

이 탑은 기둥 조각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밋밋한 모습으로 두 눈에 넣어 보기에
도 별 부담이 없다. 오히려 화려함에 찌든 비슷한 시대의 탑들보다도 더 정감이 가는 것 같다.

마땅한 절터도 아닌 잡초 위에 뿌리를 내린 그는 자신의 내력과 정체를 꽁꽁 숨긴 채, 좀처럼
해답을 주려고 하질 않는다. 그의 속사정을 모르는 속인(俗人)들은 동네 이름을 따서 효현동(
효현리)3층석탑이란 이름을 주었으며, 경주김씨는 그를 애공사탑으로 삼아 조상묘를 찾았다는
뿌듯함에 빠져있다.

탑 옆에는 우공(牛公)들이 사는 우사가 있다. 그들의 음매~♪ 소리로 주변이 좀 시끄럽긴 해도
아무 것도 없는 공터에 홀로 외롭게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을 것이다. 우사 주인이나 우공들
이 탑에 해꼬지를 하지 않는 이상 서로 어우러 사는 모습도 괜찮아 보인다.

* 효현동3층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419-1


▲ 효현동 시골길 (법흥왕릉 가는 길)

▲ 가을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내년 풍년을 위해
기나긴 휴가에 들어간 효현동 들판

▲ 법흥왕릉 입구
갈색 이정표가 있기 전에는 키 작은 표석이 이정표의 역할을 대신했다.
표석에는 한자로 '법흥왕릉 입구'라 쓰여있다.

▲ 법흥왕릉으로 인도하는 숲길에서 바라본 효현동 들판과
벽도산(율동 마애불을 간직한 산)


 

♠ 법흥왕의 능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라 중기 고분
신라 법흥왕릉(法興王陵) - 사적 176호

효현동 서쪽 산자락에 법흥왕릉이라 불리는 오래된 신라 무덤이 말없이 누워있다. 능의 높이는
2m, 지름 14m로 신라 왕릉 중에서 작은 편에 속하는데, 봉분 앞에는 근래 지어진 상석(床石)이
하나 놓여져 무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능의 주인이라는 신라 법흥왕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부터 중,고등학교 국사책, 온갖 수험서에
이르기까지 지겹도록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인물로 불교를 공인하고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을
정벌했으며, 연호를 쓰는 등, 신라에서 제법 업적이 있는 군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업적에 비해 능의 규모가 상당히 초라하여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
우뚱하기 마련이다. 물론 신문왕릉(神文王陵, 신문왕릉 또한 주인이 정확하지 않음) 이전에는
딱히 석물을 두지 않았고, 비석도 무열왕릉(武烈王陵)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장식이 없는 건 당
연하다 하겠으나 봉분의 크기가 인간적으로 너무 작다. (왕릉의 보호 구역은 72,816㎡)
봉분 주변에는 드문드문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어 무열왕릉처럼 봉토 밑에 호석(護石)을 둔 것
으로 여겨지며, 능 주변으로 소나무 숲이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특히 기이한 모습의
소나무가 여럿 있어 신비로움을 안겨준다.

일단 이 무덤은 신라 중기 고분이다. 법흥왕릉이란 이름으로 살고는 있지만 이는 조선 후기부
터이다. 그 이전에는 경주 땅에 널리고 널린 신라 고분의 하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법흥왕의 능이란 증거가 있는가? 딱히 적당한 증거도 없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
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고 나오는데, 애공사가 어딘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18세기 이후, 신라 왕가의 후손인 경주김씨와 경주석씨, 경주박씨들이 한참 조상묘 찾기
사업을 벌이면서 어디에 있다는 짧은 기록에 의지해 경주 땅을 들쑤셨는데, 대충 그럴싸한 곳
을 조상묘로 때려 삼았다. 법흥왕릉 역시 그중의 하나이다.

법흥왕릉을 찾아 나선 후손들은 효현동3층석탑을 발견했고, 덩달아 서쪽 숲속에 잠긴 이 무덤
을 발견하게 된다. 석탑은 이곳에 절이 있었으니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북쪽도 아니지만 서
쪽에 옛 무덤이 있으니 탑 자리를 애공사라 여기면 법흥왕릉이라 우겨도 될 듯 싶었다. 또한
주변에 다른 고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여 3층석탑 자리를 애공사터로 때려 삼고 이 무덤을
법흥왕릉으로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이름 없는 옛 무덤은 '법흥왕릉'이란 엉뚱한 이름표를 달
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예전에는 이름 앞에 막연히 전하고 있다는 뜻에 '전(傳)'을 붙여 '전 법
흥왕릉'이라 했으나 요즘은 아예 '경주 법흥왕릉(문화재청 지정 명칭)'이라 부른다. 진짜 법흥
왕릉이 나타날 때까지는 법흥왕릉이란 이름으로 꼼짝없이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왕릉이 시내에서도 좀 떨어진 외진 곳이라 찾는 이도 적다. 법흥왕이란 인물은 워낙 유명하지
만 그의 능은 반비례로 인지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신변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어
1966년과 1968년에 도굴을 당한 적이 있으며, 2005년에도 도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금의
봉분은 1968년 도굴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법흥왕릉

▲ 동쪽에서 바라본 법흥왕릉

▲ 서쪽에서 바라본 법흥왕릉


▲ 손으로 더듬거리고 싶은 법흥왕릉의 뒷태


※ 불교를 공인하고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법흥왕(法興王. ?~540 / 재위 514~540)

법흥왕의 이름은 김원종(金)으로 지증왕(智證王, 437~514 / 재위 500~514)의 아들이다. 키
가 7척(1척은 22~33cm)에 이르며, 성품이 온후해 주변 사람을 아꼈다. 그의 모후(母后)는 연제
부인() 박씨이며, 부인은 보도부인() 박씨이다.

514년 가을, 지증왕이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 뒤를 이어 신라 23대 군주로 즉위했다.
부왕에게 '지증(智證)'이란 시호(諡號)를 올리니 신라의 시호는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516년 정월, 내을신궁(奈乙神宮)에 제를 지냈는데, 용이 양산 우물에 나타났다.

517년 4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고 518년 2월 주산성(主山城)을 쌓았다.

520년 정월, 신라 최초로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의 관복(官服)
을 주색(朱色), 자색(紫色) 순으로 제정했다.

521년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522년 3월 가락국<금관가야, 金官伽倻>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다. 그래서 이찬 비조부
()의 누이동생을 보내 혼인에 응했다.

524년 9월, 왕이 남부지역 개척지를 순행(巡行)했는데, 가락국 왕이 찾아와 회견을 했다.

528년, 양나라에서 수입한 불교가 널리 백성들에게 퍼지자 불교를 공인하려 했다. 허나 귀족들
이 반대하여 난항에 부딪치자 이차돈(異次頓)과 짜고 그 유명한 이차돈 순교 사건을 일으켜 귀
족들을 단단히 겁에 질리게 만들고 불교 공인을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왕권은 한층 강화된다.

529년, 살생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531년 3월, 제방을 보수했고, 상대등(上大等) 벼슬을 만들어 국사를 총리(總理)하게 했다.

532년, 가락국이 신라에서 시집 보낸 비조부의 누이에게 가야옷을 입혔다는 엉뚱한 구실을 내
세워 사다함(斯多含)을 보내 가락국을 멸망시켰다. 신라의 파상적인 공격 앞에 가락국의 마지
막 왕 구해왕(仇亥王)이 나라의 국고(國庫)와 보물을 바치고 항복하니 이들을 예우로 맞이하고
상등(上等)의 작위를 내려 본국(김해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내렸다. 그의 3번째 아들 김무력
(金武力)에게는 각간(角干)이란 벼슬을 내렸는데, 그의 손자가 바로 김유신(金庾信)이다.
<가락국 땅에는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함>

535년, 건원(建元)이란 연호(年號)를 쓰니 이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이다.

536년 정월, 관리들이 외직(外職)에 나갈 때 가족을 대동하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

540년 7월, 왕이 승하하자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

법흥왕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하며, 애공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에게는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어 그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신라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진흥왕(眞興王)이다.
김입종은 조카인 법흥왕의 딸과 혼인하여 진흥왕을 낳았으니 왕족들의 족내혼(族內婚)이 성행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신라 최초로 율령을 반포했으며, 이차돈을 통해 불교를 공인했다. 그리고 가락국을 정벌
해 낙동강 하류로 진출했고, 외직에 나가는 관리에게 가족 동행을 허가하였으니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으로 왕권이 한층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보통 가족은 인질로 왕경(王京)에 두고
가야했음>


▲ 법흥왕릉의 앞모습

▲ 왕릉 부근에서 발견된 돌
그냥 이곳에 널부러진 돌은 아닌 듯 하며, 무열왕릉처럼 봉토 밑에
호석 시설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법흥왕릉과 속세를 이어주는 소나무 숲길
왕릉은 작지만 그곳으로 통하는 숲길은 왕릉의 품격과 옛 무덤의
신비로움까지 품을 수 있도록 잘 가꾸어져 있다.


※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① 경주까지 버스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버스가 5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성남, 부천, 수원, 춘천, 청주, 세종시에서 경주행 직행/고속버스 이용
* 대구(북부, 서부, 동부, 동대구), 부산(노포동, 사상), 울산, 포항, 창원(마산), 전주, 광주
, 진주, 순천, 강릉, 동해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철도 이용
* 서울역과 광명역, 천안아산역, 오송역, 대전역에서 신경주역 경유 부산행 고속전철 이용
* 청량리역, 원주역, 영주역, 동대구역, 부전역, 태화강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③ 현지교통
* 경주고속터미널(경주시외터미널에서 도보 2분)과 경주역(성동시장)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
, 300-1, 304번을 타고 효현교 하차. 효현동 방면 외외길을 따라 들어간다. 효현동3층석탑까
지는 도보 20분, 법흥왕릉은 도보 25분
* 신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번을 타고 효현다리 하차
④ 승용차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까지 접근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건천읍에서 경주방면 4번 국도 → 광명3거
리에서 경주대 방면 → 와상교를 건너 외외길로 우회전 → 효현동(법흥왕릉, 3층석탑)

★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주차장은 따로 없으므로 길가나 빈 공간에 알아서 주차
* 법흥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63


 


법흥왕릉을 끝으로 효현동에 대한 볼일은 끝났다. 왕릉 주변 잔디밭에 앉아 속세에서 사온 간
단한 먹거리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율동(두대리) 마애불로 길을 재촉
했다. 그곳은 이미 오래 전에 가본 기억이 있지만 너무 빛바랜 옛날이라 여기까지 온 김에 오
랜만에 친견하기로 했다.
여기서 율동(栗洞) 마애불로 갈려면 우선 효현교로 다시 나가야 된다. 효현교를 건너 8분 정도
가면 율동인데,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옛 율동역이 있던 중앙선(서울↔경주) 철로와 경부고속
도로의 아랫도리, 그리고 두대마을을 차례로 지나 벽도산의 품으로 20분 정도 파고 들면 깊은
산골에 박힌 율동 마애불이 모습을 비춘다. 마애불까지는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길도 잘 닦여
져 있어 방황할 염려는 없다.


▲ 옛 율동역을 지나는 중앙선 철로 (경주 방면)
경주와 건천 사이에 있던 율동역(栗洞驛)은 오래 전에 녹아 없어지고 그 흔적만 아련히
남아있다. 서울 청량리역을 비롯하여 포항과 동대구, 부전, 강릉으로 가는 열차가
외마디 기적소리를 남기며 이곳을 스쳐간다.
(중앙선 옆으로 보이는 차량들의 행렬은 국가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 옛 율동역을 지나는 중앙선 철로 (영천 방면)

▲ 녹음이 우거진 율동 마애불 가는 길
마애불 아래까지 길이 닦이고 주차장이 깔려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배려했다.


마애불 주차장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율동 마애불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근래에 터를
닦은 성주암(聖主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나온다. 산신각(山神閣)과 심우실이라 불리는 기와집
이 전부로 산신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인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 심우실(尋牛室)이라 불리는 성주암의 중심 건물
심우실은 'ㄱ'모양의 기와집으로 법당(法堂) 겸 요사(寮舍)의 역할을 한다.
허나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여염집 분위기로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 절 뒤쪽에 자리한 율동 마애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다


 

♠ 신라 후기에 조성된 수려한 마애불(磨崖佛)이자 벽도산의 오랜 은인(隱人)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두대리 마애석불)
- 물 122호

▲ 율동 마애불 - 마치 환영(幻影)처럼 그 모습을 은은하게 비춘다.

경주 벽도산(碧桃山, 424m) 동쪽 자락에는 벽도산의 은인(隱人),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이하
율동 마애불)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마애불은 소금강산(小金剛山)에 안긴 굴불사지(掘佛寺址) 4면석불(보물 121호)의 양식을 그
대로 계승한 신라 후기 석불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에 세
우고, 좌우에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협시(夾侍)로 세웠다.

가운데에 자리한 아미타불은 높이 2.5m로 머리가 상당히 커 보인다. 다른 부분은 얕음새김으로
처리했지만 머리는 돋음새김으로 크게 돋게 새겼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육계<무견정상(無見頂
相)>가 두툼히 솟아 있는데, 이는 굴불사지 석불과 비슷하다. 얼굴은 볼이 풍만하게 돋았고 미
소가 은연히 드리워져 있으며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어 그의 정체가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다. 발은 앞으로 내밀지 않고 옆으로 반듯하게
벌리고 있으며, 어깨는 당당한 편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덮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다.

◀ 측면에서 바라본 율동 마애불

아미타불 왼쪽의 관음보살은 아미타불보다 덩치가 작다. 2m 남짓의 키로 움푹 들어간 허리선과
풍만하게 튀어나온 엉덩이가 눈길을 끄는 날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다. 몸매의 굴곡이 진하게
드러나 있으며, 발은 옆으로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위로 올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에는 정병<政柄, 혹은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그가 관음보살 누님임을 알 수 있
다. 게다가 몸매도 영락없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조그
만 얼굴은 두 눈이 형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상태는 별로 안좋다.

아미타불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경례를 하는 듯한 모습이며, 전체적인
형태는 관음보살과 비슷하다. 키는 2m 남짓으로 얼굴 부분이 다소 마멸된 것 외에는 건강 상태
는 괜찮다. 이들 불상은 머리 뒤로 두툼하게 표현된 동그란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으며, 두광
에 표현된 당초(唐草)무늬 등이 지긋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섬세하게 남아있다. 몸 뒤에는 신
광(身光)이 얇게 표현되어 그들을 빛나게 한다.

이들은 굴불사지 석불과 기본적으로 같지만, 풍만함이나 발의 모양, 옷주름 모양 등이 달라 조
성시기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 도드라지게 새겨진 아미타불의 얼굴

율동 마애불 부근에는 '벽도산석불입상'과 '천창산(天倉山)선각마애불' 등이 있어 율동 마애불
을 중심으로 벽도산 일대도 조촐하게 불국토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인근 능선에서 벽도산 석불입상을 본 듯 한데 기억이 벌써부터 희미하다. 율동 마애불은
인지도가 낮아 속인들의 발길은 적지만 경주 답사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이들은 왠만큼은 아
는 곳이다.

마애불 앞에 3배의 예를 올리며 살짝 약소하게나마 소망을 들이밀어 본다. 신라 석공(石工)들
의 체취가 담긴, 비록 그들은 사라지고 윤회(輪廻) 사상에 따라 지금은 다른 존재로 살고들 있
겠지만 석불 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며 중생을 맞는다. 불상 주변에는
푸른 이끼가 피어 있지만 마애불의 위엄 앞에 더는 어쩌지 못하고 적정한 간격으로 그들과 동
거를 한다.
바위가 서쪽을 향하고 있고, 불상을 둘러싼 광배(光背)가 바위에 일정한 홈을 파준 탓에 장대
한 세월이 흐르고 자연의 집요한 괴롭힘 앞에서도 당당하게 건강을 누리며 살고 있음이 참 다
행이라 하겠다.

율동 마애불을 끝으로 소소하게 즐긴 늦가을 경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경주고속터미널(경주시외터미널에서 도보 2분)과 경주역(성동시장)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
, 300-1, 304번을 타고 율동 두대마을입구에서 하차.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두대길을 따라 도
보 25분
* 신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번을 타고 율동 두대마을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마애불까지 접근 가능)
① 경부고속도로 → 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건천읍에서 경주방면 4번 국도 → 광명3거
리에서 직진 → 율동에서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 → 율동 마애불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율동 산60-1 (두대안길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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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석불, 보리사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리사 마애석불)

 


경주 남산 나들이 (동남산 미륵곡, 보리사)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신라(新羅)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땅 경주(慶州), 그 두 자를 들으면 나도 모
르게 가슴이 시려온다. 경주는 밤하늘에 흐르는 별만큼이나 온갖 문화유산이 반짝이고, 융
단처럼 부드러운 잔디의 잎파리만큼이나 깃들여진 신화와 전설이 속삭이는 마음의 고향 같
은 곳이다.

경주는 늘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이며, 나에게 늘 정신적으로나 지적으로 아낌없는 포
만감을 안겨주는 풍요로운 곳이다. 하지만 그만큼 부담이 큰 곳 또한 경주이다. 그곳에 서
린 문화유산을 개미목보다 짧은 지식과 하찮은 작문 솜씨로 감히 다룬다는 것이 은근히 두
렵고 떨려 주저한 적도 적지 않았다. 허나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그만큼 많이 찾은 곳이
또한 경주이다.

경주 땅 한복판에는 이름도 친근한 남산(南山, 468m)이 길게 누워있다. 바로 옛 금오산(金
鰲山)으로 경주는 물론 신라에서도 꽤 비중이 높아 '남산에 오르지 않고선 경주를 봤다고
우기지 마라~!'
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을 정도로 경주의 필수 답사 코스로 꼽힌다.

신라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장(나정, 서출지, 포석정)을 넉넉히 품고 있으
며, 신라의 많은 제왕(박혁거세, 일성왕, 정강왕 등)이 그의 품에 앞다투어 잠들어 있다.
게다가 골짜기가 깊고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는 등, 자연미도 풍부하며, 남산을 불국토
(佛國土)로 여긴 신라 사람들이 여기저기 빚어놓은 불교 문화유산이 아낌없이 함축되어 있
는 그야말로 보물의 산이다.
남산에는 40여 곳의 크고 작은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에 깃들여진 절터만 100곳이 넘으
며, 80여 개의 불상, 70여 개의 석탑 등이 살아 숨쉬고 있어 그야말로 거대한 야외 박물관
을 이룬다. 그러다보니 남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처럼 뫼 전체가 통
째로 사적으로 지정된 예는 오로지 이곳이 유일하다. (낭산 등의 조그만 산은 제외)
남산은 위치상 통일전과 보리사가 있는 동남산, 포석정과 배리삼존불, 삼릉이 있는 서남산
(西南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은 동남산(東南山) 구역 보리사이다.

동남산 밑에는 갯마을이란 시골 마을이 있다. 그 옛날에 형산강(兄山江) 나룻배가 여기까
지 들어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 입구에는 보리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고, 마을
남쪽에는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이 넓게 자리를 닦고 있어 동네가 온통 푸르다. 토함산(
吐含山)에서 발원한 남천(南川)은 동남산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돌며 '배반평야'라 부르는
너른 평야를 촉촉히 어루만진다.

걷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조용함이 깃든 갯마을을 벗어나면 대나무로 창창한 오르막길이
나온다. 그 길의 끝에는 미륵곡 석불의 거처인 보리사가 자리해 있다. 절까지 걸어서 12분
정도 걸리는데, 보리사를 중심으로 남천으로 흐르는 계곡을 미륵골(彌勒谷)이라 부른다.


▲  대나무숲이 터널을 이루는 보리사, 미륵곡 가는 길
남산이 베푼 산바람이 이곳을 스치면서 대나무의 향연이 그윽히 울려 펴진다.

▲  보리사 밑에 자리한 부도와 때깔이 고운 비석들


♠  소나무 숲에 터를 돋군 조그만 산사, 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불
미륵곡 석불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 남산 보리사(菩提寺)

남산에 100곳이 넘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온전하게 법등(法燈)을 이어온 절은 하나도 없는 실정
이다. 지금 절들은 근래 옛터에 다시 지은 것들이며 내가 찾은 보리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남산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보리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불국사(
佛國寺)의 말사(末寺)이며, 남산에 있는 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절의 창건시기와 구체적인 사적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장대한 세월에 묻히
고 역사는 산산이 흩어져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
라 헌강왕(49대, 憲康王)과 정강왕(50대, 定康王)의 능이 보리사 동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경내에 석조여래좌상과 복원된 3층석탑이 있어 신라 때 절임을 가늠케 할 뿐이다. 허나 정강왕
릉과 헌강왕릉의 위치도 확실한 것이 아니라서 이곳이 신라 때 보리사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
五里霧中)이다.

현재 보리사는 1911년 포항 보경사(寶鏡寺)에서 온 박덕염(朴德念) 비구니가 세운 것으로 절단
되어있던 미륵곡 석불의 머리와 광배를 이어 붙였으며, 1932년에는 남법명(南法明) 비구니가 중
수했다. 1977년 추묘운(秋妙雲)이 주지로 머물면서 3~4년에 걸친 불사 끝에 현재의 면모를 지니
게 되었다. 원래는 지금보다 약간 위쪽인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주변이 경내 중심이었으나 1981
년 지금의 자리로 약간 내려왔다.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신각, 범종각, 육화당 등 6~7동의 건물을 지녔으며, 비구니 사찰이
라 경내는 깔끔하고 단아하다. 대웅전 앞뜰에는 잔디를 곱게 입혔고 그 사이로 돌을 심어 각 건
물을 이어주는 돌길을 내었다. 자투리공간에는 온갖 화초를 심었으며, 여승의 보살핌을 받은 꽃
들은 한참 꽃망울을 피워 그들의 은혜에 화답한다.


▲  솔내음이 깃든 경내 뒤쪽 부분 (사진 중앙 석불이 미륵골 석조여래좌상)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남산에서 가장 우수한 명품 석불로 꼽히는 석조여래좌상이 있으며, 경내에
서 조금 떨어진 남쪽 바위에 마애석불이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곳에 오르면 배반평야와 낭산(狼山), 토함산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
록 높이는 낮지만, 꽤 높은 곳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절을 에워싼 싱그러운 소나무의 솔내음과 아늑하고 조용한 산사 분위기, 그리고 미륵곡 석불의
인자함과 우아함이 배여 있는 보리사, 속세에 찌든 마음의 여유를 찾기에 이만한 곳도 없을 것
이다.


▲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에 바라본 보리사 경내

※ 남산 보리사 찾아가기 (2015년 10월 기준)
① 경주까지
* 서울역, 광명역, 천안아산역, 대전역에서 부산행 경부선 고속전철 이용 (신경주역 하차)
* 청량리역,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경주, 부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1일 2회 운행)
* 동대구역, 부전역, 해운대역, 태화강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부천, 성남, 수원, 춘천, 원주, 청주, 전주, 구미, 안동, 창원, 대구(동
  부, 서부), 부산, 울산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경주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경주우체국)에서 11번 시내/좌석버스
  를 타고 갯마을 하차, 도보 12분
* 신경주역에서 50, 51, 60, 61, 70, 700번 시내버스를 타고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경주역
  (경주우체국)에서 11번 버스로 환승
* 보문관광단지와 불국사, 불국사역에서 10번 시내버스를 타고 갯마을 하차
② 승용차 (경내까지 진입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고운교 직전에서 문천길로 우회전 → 화랑교
  직전, 갯마을에서 우회전 → 보리사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7 (갯마을길 41-30 ☎ 054-748-0794)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보리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1981년에 지어진 것이다. 불단(佛壇)에는 금동석가3존불과 후
불탱화가 있으며 그들이 발하는 금빛에 가히 눈이 멀 지경이다. 석가3존불 우측에는 육환장(六
環杖)을 든 지장보살의 보금자리가 있으며, 좌측벽에는 신중도(神衆圖)도 걸려있다.

아무도 없는 대웅전의 고요함을 살짝 깨뜨리며
안으로 발을 들여 향을 피우고 석가3존불에게
예불을 올린다. 예불이라고는 하지만 개인적인
소망도 살짝 넣어 그에게 내밀었다. 소망이 과
연 접수가 될련지는 미지수이지만 예불을 한 것
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진다.

석가3존불 우측에는 나의 시선을 붙잡아 맨 귀
여운 존재가 있었다. 바로 연꽃을 든 동자상이
다. <거의 동녀(童女)처럼 보임>
그는 자신의 키에 2배나 높은 연분홍 연꽃을 들
고 있는데,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 조그만 코끼
리가 그 곁에 자리해 소소하게 동심을 자아낸다.
 

◀  연꽃을 든 동자상과 코끼리상


▲  보리사 3층석탑

대웅전 뜨락 우측에는 누렇게 바랜 3층석탑이 서 있다. 보통 법당 정면에 탑을 세우지만 보리사
는 다소 우측으로 치우쳐진 특이한 배치를 취했다.
이 탑은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끼워맞쳐 복원한 것이다. 없는 부분은 
새롭게 때웠는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을 얹힌 전형적인 신라 후기 탑으로 하얀 빛
의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 오랜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제법 고색의 기운을 드러낸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자비롭고 우아한 표정에 가슴을 설레게 하는
신라시대 명품 불상,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보물 136호


보리사 경내 뒤쪽, 담을 두르고 있는 한층 높은 곳에 보리사에 든든한 밥줄, 미륵곡 석조여래좌
상(석불좌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동남산을 대표하는 석불로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1,300년이란 나이가 정말 무색할 정도로 정정한 모습을 지녀 보는 이로 하여
금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 장대한 세월 동안 그를 괴롭힌 존재가 한둘이 아닐진데 어찌 저리 멀
쩡할 수가 있을까?
그의 건강비결이 사뭇 궁금해진다. 물론 그에게도 적지 않은 시련은 있었다. 그를 관리하던 절
보리사로 단정지울 순 없음―
은 거친 세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현재 보리사가 터를 닦기 전에
는 불상의 머리와 광배가 몸통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품이 있는 신라의 귀족 여인을 모델로 한 것을 아닐까? 우아한 기품과 인자함이 서린 그의 표
정은 보기만 해도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기분 같아서는 그를 보쌈하여 우리집에 갖다놓고 싶지
만 그를 업다가는 자칫 내가 그에게 깔려 골로 갈 상황이니 감히 그러지도 못한다.

신라의 미소로 손색이 없으며, 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으로 내세워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
는 미륵곡 석불은 신라 불상의 백미(白眉)라 일컬어지는 토함산 석굴암(石窟庵) 본존불과 크게
대비된다. 석굴암 본존불은 미소라기보단 나 같은 범인(凡人)들은 차마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위엄이 서려있다. 그 앞에서는 차마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기 바쁠 것이다. 그에 반해 미륵곡 석
불은 그 누구라도 기꺼이 안아주고 보듬어 줄 것 같은 대인적인 느낌이 강하게 밀려온다.

그가 앉은 연화대좌(蓮花臺座)도 그를 닮아서인지 돌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아름답다. 마치 살
아있는 연꽃이 하늘로 향해 꽃봉오리를 펼쳐보이는 모습은 진짜 연꽃도 시샘할 정도이다. 대좌
높이는 약 1.35m로 그 밑부분에는 땅을 향해 꽃잎을 펼친 연꽃이 묘사되어 있다. 석불이 잠시
마실을 나간 사이에 살짝 앉아보고 싶지만 그가 좀처럼 일어날줄 모르니,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는 그는 앉은키 높이가 2.4m로 그의 머리는 나발(螺髮)
이다. 부처가 인도 사람이다보니 인도 사람의 머리스타일을 취한 것이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
가 큼지막하게 솟아 있다.
내면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만면에 가득한 그의 얼굴을 살펴보면 가늘고 긴 눈썹 아래로 지그시
뜬 두 눈이 속세를 바라본다. 넓직한 이마 가운데로 둥그런 백호가 있으며, 코는 오목하고 적당
한 크기이다. 미소가 서린 입은 정말 단아한 모습으로 정말 훔치고 싶은 입술이다. 볼은 두툼하
고, 다소 두터워 보이는 목에는 삼도가 획 그어져 있으며, 그의 몸을 걸친 법의(法衣)는 주름이
섬세히 표현되어 있다. 다리 위에 사뿐히 놓은 그의 왼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상징한다.

석불이 기대고 있는 광배(光背)는 높이 2.7m, 폭 1.9m로 석불과는 다른 돌이다. 광배 역시 화려
함의 극치로 당초(唐草)무늬와 보상화문(寶相華紋), 화불 등이 마치 살아있는 줄기를 보듯 유려
(流麗)하게 묘사되어 눈길을 강하게 잡아 맨다.

미륵곡 석불에는 또 다른 불상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 분명 겉으로 봐서는 하나의 석불인데, 또
어디에 불상이 있는 것일까? 바로 광배 뒤에 새
겨진 마애불(磨崖佛)이 그 답이다. 자세히 보면
선으로 처리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두 불상이 등을 맞대며 동거동락하는 신선한 형
태로 광배 뒤쪽에도 불상이 있는 경우는 이 땅
에서는 그 예가 거의 없어 매우 신선하게 다가
온다.
광배에 깃들여진 마애불은 약사여래(藥師如來)
로 그의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다. 그런 이
유로 광배 앞에 있는 석불을 서방정토(西方淨土
)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보기도 한다.

얼굴 부분은 마모가 심해 확인하기 어려우며 전
체 높이는 1.3m다. 미륵곡 석불과 마찬가지로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있다. 중생들의
병을 치료할 약이 담겨져 있을 약합을 소중히
간직한 약사불은 동방세계의 주인이다.

석불 부근에는 옛 보리사의 흔적으로 보이는 탑재 일부와 돌덩어리가 놓여져 있으며, 석불 주변
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인 소나무는 솔내음으로 불상 주변을 깨끗히 정화해
주며 그에 대한 흠모의 뜻을 표한다.


♠  보리사의 숨겨진 신라 후기 마애불
보리사 마애석불(磨崖石佛)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193호

▲  바위에 살짝 깃들여진 보리사 마애석불

보리사 경내를 둘러보고 부근에 숨겨진 마애석불을 보고자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마애불을
온몸으로 알리는 이정표의 안내로 청명한 기운이 서린 대나무 숲길을 지나 4~5분 정도 가면 이
정표가 없는 갈림길이 나그네의 마음을 혼돈으로 밀어넣는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마애불이 나
올까? 지나가는 사람도 없으니 순전히 나의 판단에 의지해야 된다. 나름 직감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조금씩 늙어감에 따라 그 직감도 종종 헛탕을 칠 때가 있다.
여기서 확률은 반반. 길의 상태를 보니 오른쪽 길은 가파르고 폭도 가늘어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니 정답은 아닐 듯 싶다. 그에 반해 직선 길은 오른쪽 길보다 폭도 굵고 사람
들의 왕래도 조금은 있어 보였다. 하여 직선 길에 모든 것을 걸고 그만 직진을 해버렸다. 허나
그게 함정이었다.


▲  마애석불로 가는 대나무 숲길

마애불을 만난다는 생각에 기대를 잔뜩 품으며 열심히 길을 재촉했으나 아무리 가도 나올 생각
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깊이 들어설 수록 길의 상태도 우울해진다. 그런데 어디선가 까마귀 1
마리가 나타나 요란하게 까악까악~~!을 외치며 내 허공을 심상치 않게 맴도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내 머리 위에서 계속 맴돌며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이 수상하다. 내가
그의 영역을 침범하여 뚜껑이 열려 경고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뜻일까?
인적도 없는 궁벽한 산길에서 홀로 까마귀의 난데없는 태클을 받으니 오싹한 기분이 나를 엄습
하고 순간 염통이 쫄깃해진 나는 심상치 않다 여겨 서둘러 길을 돌렸다.

발걸음을 빨리 하여 다시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마애불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여 비탈진
왼쪽(진행 방향 기준) 오르막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방금 전만 해도 내 상공을
맴돌던 까마귀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어쨌든 까마귀의 압박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
며, 산길을 오르니 그 길의 끝에 보리사 마애석불이 잔잔한 미소를 드리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아까 그 까마귀는 혹여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서자 이를 알리고자 목을 터지라 소리를 질렀던 것
은 아닐까? 그는 사람 말을 할 줄 모르고, 나는 까마귀 말을 모르니 엉뚱한 길로 빠진 나를 깨
우치고자 까악~ 소리를 높여 갔고, 다시 길을 돌려 맞는 길로 들어서니 그제서야 소리를 접고
사라진 것이다. 물론 그의 영역을 침범하여 나를 쫓아내고자 그리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목적
이야 어찌되었든 까마귀의 경고로 마애불을 찾았으니 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설마 마애불이
전설처럼 까마귀로 현신하여 길을 알려준 것은 아니겠지? 허나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면 그런
전설이 나돌지도 모르겠다.

보리사에서 남쪽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가파른
산자락에 절벽을 이룬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 바로 결가부좌를 튼 마애석불이 아늑히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오르기도 쉽지 않은 비탈진 곳에 숨은 이 불상
은 미륵곡 석불보다 나중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
는 신라 후기 석불로 바위벽을 얕게 파서 불상
의 광배로 삼은 다음 1.1m 정도의 작은 불상을
돋음새김으로 새겼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가 두툼히 솟아있고, 머리
칼은 꼽슬인 나발이다.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
진 눈썹 아래로 지그시 뜬 눈이 있으며, 다물어
진 입술에는 그만의 미소가 잔잔히 새어 나온다.
길쭉한 두 뒤는 어깨에 닿으며, 목에는 삼도가
굵직하게 그어져 있다. 법의(法衣)는 그의 몸을
덮고 있으며, 옷주름의 선이 부드럽다. 전체적
으로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선의 굵기가
희미해지고 있으며 아랫도리는 선명도가 좀 낮
다.

그가 앉아있는 대좌는 하늘을 향해 잎을 벌린 앙련(仰蓮)이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불상 앞
은 조금의 평지도 허락치 않는 급경사로 절을 하거나 예불을 올리기가 심히 마땅치 않다. 

불상 앞에 이르면 남쪽으로 배반평야가, 동쪽으로 낭산이 두 눈에 박힐 정도로 조망이 좋다. 마
애불의 존재를 아는 이가 적어 여기까지 기를 쓰고 올라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보리사 경
내에 있는 미륵곡 석불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석불의 미소에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 보리사, 그의 건강과 단아한 미소가 미륵불이 온다는 56.7
억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를 소망하며 본글을 마무리 짓는다.


▲  마애석불에서 바라본 배반평야와 경주 남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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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신라 왕릉 나들이 ~ 경주 성덕왕릉, 효소왕릉

 

♠ 경주 신라 왕릉 나들이 ~ 효소왕릉, 성덕왕릉 ♠

경주 성덕왕릉

▲  경주 성덕왕릉

성덕왕릉 석사자 경주 효소왕릉

▲  성덕왕릉 석사자

▲  경주 효소왕릉

 


여름의 제국이 슬슬 맹위를 드러내던 6월 초, 부산(釜山)에서 포항(浦項)으로 올라가다가 그
길목에 자리한 경주에 잠시 발을 들였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못지나친다고 경주를 그냥 지
나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거의 40여 회 가까이 발걸음을 한 경주 땅, 허나 여전히 미답지
가 즐비하고, 적지 않은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부담감이 좀 크다.
이번에 경주에서 문을 두드린 곳은 조양동(朝陽洞)에 자리한 신라시대 왕릉 2기이다. 조양동
은 시내와 불국사역 사이에 자리한 시골로 7번 국도가 지나가 교통 하나는 일품이다. 게다가
왕릉도 국도와 가까워 찾기도 쉽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인 모화(毛火)에서 경주좌석버스 600번(모화↔경주시외터미널)을 타고 한
국광고영상박물관에서 내리니 한자로 성덕왕릉입구를 알리는 표석과 성덕/효소왕릉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를 마중한다.

그들의 안내로 국도를 버리고 동쪽으로 들어가면 농가 뒤로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철길(부
산↔포항)이 나온다. 그 철길을 건너면 바로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성덕왕릉과 효소왕릉에 이
르게 되는데 철길 앞에 '선로통행을 금하며 어길 경우 벌금에 처한다'는 무거운 내용의 경고
문이 서있어 나의 걸음을 잠시 얼어붙게 한다.


▲  성덕/효소왕릉으로 넘어가는 철길 건널목
철길을 건널 시 철도법 위반으로 몰아넣는다는 경고문이 나그네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  경주를 가르는 동해남부선
서울 청량리, 강릉, 포항, 동대구, 태화강, 부전 방면 열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이곳을 스쳐간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왕릉 바로 옆에 철로가 깔린 것일까?
이는 왜정(倭政)이 신라 왕릉을 욕보이고 왕릉으로 통하는 맥을 끊고자
고의로 그렇게 닦은 것이다.


철길을 넘으면 바로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이다. 하지만 통행을 금한다는 경고문 앞에 나의 발
걸음은 자석처럼 붙어버렸다. 솔직히 그런 것을 잘 지키는 편도 아닌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안내문의 경고에 단단히 염통이 얼어붙은 듯 싶다. 하여 건널목 대신 한국광고영상박물관 뒤
쪽으로 이어진 농로로 길을 잡았다. 비록 조금은 돌아가더라도 그게 마음이 좀 편할 것 같고,
돌아가는 정도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농로를 100m 정도 진입하니 농가에서 노공(老公) 1명이 나온다. 그래서 그에게 이 길로 가면
성덕왕릉이 나오냐고 물으니 철길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며 동네 사람 모두 철길로 건너다닌
다고 그런다. 그래서 다시 원위치하여 철길을 건너니 오솔길이 성덕왕릉까지 놓여 있었고 왼
쪽으로 효소왕릉이 선명한 모습으로 눈짓을 보낸다.


♠  신라 효소왕의 능으로 막연히 전해오는 동그란 옛 무덤,
성덕왕릉과 나란히 자리한 경주 효소왕릉(孝昭王陵) - 사적 184호

조양동(한국광고영상박물관)에서 성덕왕릉 이정표를 따라 동해남부선 철길을 건너면 소나무 사
이로 동그란 봉토분(封土墳)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효소왕릉이라 전해오는 신라 고분이다. 높
이 4.3m, 지름 10.3m, 둘레는 57.5m로 능 주변에는 여름과 가을에 흔히 볼 수 있는 여린 꽃잎,
나무쑥갓(마가렛)이 가득하여 마치 소금이 흐드러지게 뿌려진 듯하다.

봉분(封墳)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약 1m 높이로 쌓아 호석(護石)을 둘렀으나 현재는 대부분 묻혀
있으며, 능 앞에 상석(床石)처럼 생긴 조그만 혼유석(魂遊石)이 있을 뿐 별다른 장식물이 없어
허전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봉분도 다른 신라 왕릉과 고분보다 작은 편이니 이곳이 과연 왕릉일
까? 고개마저 갸우뚱하게 한다.

경주 땅에 전하는 신라 왕릉은 오릉(五陵)과 무열왕릉(武烈王陵), 성덕왕릉, 흥덕왕릉, 괘릉(掛
陵, 원성왕릉)을 제외하고는 주인이 명확하지 않다. 한참 조상 찾기에 혈안이 된 조선 후기(18~
19세기), 신라 왕족의 후손인 경주박씨와 석씨, 김씨가 옛 기록을 멋대로 해석하여 그럴싸한 옛
무덤을 그들의 조상 묘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능 이름 앞에 전(傳)을 많이 붙었
다. 그렇다면 효소왕릉의 진위(眞僞)는 어떨까?
이곳 역시 그의 능으로 보기에는 100%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02년에 왕이
붕어(崩御)하자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의 효소왕릉은 망덕
사에서 동남쪽으로 5km나 떨어져 있어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래서 망덕사터 동쪽에 있는
신문왕릉(神文王陵)을 효소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무덤에 효소왕릉이란 굴레가 강제로 씌워진 것일까? 무덤 동쪽에는 성덕왕
릉이 자리해 있는데, 그 성덕왕과 효소왕은 친형제로 모두 신문왕(神文王)의 아들이다. 성덕왕
릉은 기록과 비석을 통해 능의 주인이 확실한 몇 안되는 신라왕릉으로 마침 그 옆에 이름없는
옛 무덤이 하나 있던 것이다. 그래서 경주김씨 사람들은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
의 기록을 흔쾌히 무시하고 그 무덤을 성덕왕의 친형인 효소왕릉으로 삼아 이곳을 효소/성덕왕
형제의 능역(陵域)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효소왕릉이란 간판을 단 것은 1730년임)

효소왕릉은 1929년 4월 왜인들에게 도굴을 당했고, 1969년 11월에 또다시 도굴되는 아픔을 겪었
는데, 도굴범들은 그들이 쓰던 도구를 현장에 버리고 갔으며, 도굴로 인해 무덤 석실(石室)이
바깥에 노출되었다. 이때 확인된 석실의 규모는 길이 3m, 너비 150cm, 높이 150cm 크기로 왕릉
치고는 매우 작았으며, 부장품은 발견된 것이 없었다.


▲  효소왕릉 가는 길


※ 신라 32대 군주 효소왕(孝昭王 687~702 <재위 692~702>)
효소왕은 신문왕(재위 681~692)의 큰아들로 어머니는 김흠운(金欽運)의 딸인 신목왕후(神穆王后
) 김씨이다. 휘(諱, 제왕의 이름)는 김이홍<(金理洪) 또는 김이공(金理恭)>이고 687년 2월에 태
어났는데, 그날은 날씨가 음침하고 어두웠으며 뇌성벽력이 심했다고 한다.
691년 3월 1일 태자(太子)로 책봉되었고, 692년 7월 부왕(신문왕)이 붕어하자 불과 5살의 나이
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당나라 여제(女帝)인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가 사신을 보내 신문
왕의 붕어를 애도하며 제사를 지내고 태자를 신라왕으로 인정했다.

그는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모후(母后)인 신목왕후가 섭정(攝政)을 했을 것이다. 왕이 아
무리 어려서부터 총기가 대단하다 한들 5살짜리가 국정을 살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선
대왕(문무왕, 신문왕)들이 왕권을 단단히 다져놓았고, 모후와 선왕의 충성스런 대신들이 어린
왕을 잘 보좌하며 국정을 돌봤기 때문에 재위 초반에는 별무리가 없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 관부(官府)의 하나인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의 이름이 좌/우의방부(左/
右議方府)로 바뀌었다. 이는 관청의 이름에 왕의 이름인 '이(理)'가 있었기 때문으로 백성과 신
하, 관청은 제왕의 이름을 무조건 피해서 써야했다.
즉위 다음 달(692년 8월)에는 대아찬(大阿湌) 원선(元宣)을 중시(中侍)로 삼았으며, 고승 도증(
道證)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천문도(天文圖)를 바쳤다. 또한 이때 이후 의학(醫學)을 세우고 의
학박사 2명을 두었으며, 본초경(本草經)과 갑을경(甲乙經), 소문경(素問經), 침경(針經), 맥경(
脈經), 명당경(明堂經), 난경(難經) 등을 교육시켰다.

693년에는 문무왕(文武王) 시절에 세워진 장창당(長槍幢)을 비금서당(緋衿誓幢)으로 이름을 바
꾸었다.

694년 정월, 내을신궁(奈乙神宮, 신라의 시조를 모신 신궁)에 제를 올리고 죄수를 방면했고, 백
제와 고구려 정벌에 공이 큰 김문영(金文穎)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한편 당나라에 머물던 왕의
작은할아버지인 김인문(金仁問, 무열왕의 2번째 아들)이 66세의 나이로 죽자, 측천무후는 그의
시신을 신라로 보냈다. 이에 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하고 695년에 무열왕릉 인
근 서악(西岳)에 장사를 지냈다.
겨울에는 서북쪽 변방인 송악(松岳, 경기도 개성)과 우잠(牛岑, 황해도 금천)에 성을 쌓았고,
신라의 동북쪽 끝인 비열주(比列州, 강원도 안변)에 1,180보 크기의 성을 쌓았다.

695년, 자월(子月)을 정월로 삼았으며, 김개원(金愷元)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서울
(이후 서울은 모두 신라의 수도인 경주임)에 지진이 났으며, 중시 김원선(金元宣)이 늙어서 관
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서울에 서시(西市)와 동시(東市), 2개의 시장을 설치해 상업을 장려하고,
이를 감독할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설치해 감(監) 2명, 대사(大舍) 2명을 두었다.

696년 정월, 이찬 김당원(金幢元)을 중시로 삼았으며, 4월에 서쪽 지방(전라도, 충청도 등)에
가뭄이 들었다.

697년 7월,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는데, 다른 밭고랑에서 난
이삭이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이었다. 9월에는 임해전(臨海殿)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698년 정월, 이찬 체원(體元)을 우두주(牛頭州, 강원도 춘천)총관으로 삼았다. 2월에는 서울에
지진이 나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렸으며, 중시 김당원이 늙어 퇴직하자 대아찬 순원(
順元)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는 왜국(倭國)의 사신이 내조(來朝)하자 왕이 숭례전(崇禮殿)에서
그들의 하례를 받았으며, 7월 서울에 홍수가 났다.

699년 2월,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고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
였고, 7월에 동해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5일 만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바닷물이 정말 핏빛
으로 변할리는 없을테니 아마도 왕을 노리는 커다란 역모가 있었음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9월
에는 동해바다 밑에서 지진이 났는데 그 소리가 서울까지 들렸고, 병기고(兵器庫)에서 북과 뿔
피리가 저절로 소리를 내었다고 하니 반란군들이 서울까지 침범했고, 서울에서 그들을 내응하는
세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후 신촌(新村) 사람 미힐(美肹)이 무게 100푼인 황금 한 덩이를 얻었는데, 그걸 왕에게 바쳤
다. 하여 왕은 그에게 남변제일(南邊第一)의 지위를 주고 벼 100섬을 내려주었다. 아마도 미힐
이 역모를 고변하거나 반란군 토벌에 큰 공을 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700년, 다시 인월(寅月)을 정월로 삼았다. 5월에 이찬 경영(慶永)이 모반을 꾀하다가 처단되었
으며, 중시 순원이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모반 이유는 그동안 왕권에 눌려 지내던 진골 귀족들
이 어린 왕을 만만히보고 일을 벌인 것으로 여겨지며, 6월에 모후인 신목왕후가 죽었다. 바로
그달 세성(歲星)이 달을 침범하였다.

701년 2월, 혜성이 달을 범했으며, 5월에는 영암군(靈巖郡, 전남 영암) 태수 일길찬 제일(諸逸)
이 공사를 저버리고 사사로운 이익을 꾀했으므로, 곤장 100대를 치고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

702년 7월, 왕이 15세의 나이로 붕어(병으로 죽은 듯 함)하니 시호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
(望德寺)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는 아들과 왕후(기록이 없음)가 없어 친동생인 김융기(金隆
基, 성덕왕)가 뒤를 이었다.
왕이 승하하자 측천무후는 크게 애통해하며 2일간 정사(政事)를 폐하고 사신을 보내 조의를 표
했다.

* 효소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산8
* 관람시간 제한없음


♠  12지신상과 석인, 석수를 모두 갖춘 신라 최초의 왕릉,
신라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룬 경주 성덕왕릉(聖德王陵) - 사적 28호

▲  성덕왕릉 정면

효소왕릉 동쪽 소나무 숲 사이로 제법 품격을 갖춘 왕릉 하나가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바로 효
소왕의 아우인 성덕왕의 능이다. 그 앞 들판에는 그의 능비(陵碑)로 전해지는 귀부가 조용히 웅
크리고 있으며, 효소왕릉에서 성덕왕릉으로 가는 길은 솔내음이 깃든 소나무 숲길로 고향의 오
솔길처럼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  성덕왕릉 좌측

성덕왕릉은 동그란 봉토분(封土墳)으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석인(石人), 석수(石獸, 돌로
만든 동물상)를 모두 갖춘 이 땅 최초의 무덤이자 신라 최초의 왕릉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주인
이 명확하지 않은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과 김유신(金庾信) 묘를 제외하면 어쩌면 12지신상을
처음으로 두룬 신라 왕릉일 수도 있겠으며, 석인과 석수 역시 성덕왕릉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신라의 무덤은 별장식도 없는 동그란 흙무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무열왕 시절 당나라
에 아부하며 대륙 문물에 크게 호기심을 보였는데, 무덤 양식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 무열왕릉
부터 당나라의 묘제(墓制)를 적용하게 된다. 그렇게 신라의 무덤 양식은 기존 양식에 당나라 양
식을 더해 서서히 변해갔고 그 양식이 완성기에 이른 것이 바로 성덕왕릉과 흥덕왕릉, 괘릉이다.

▲  성덕왕릉의 아랫도리 (능 아래를 두룬 호석과 능 주변을 빙빙 휘감은 회랑과 돌난간)

봉분의 높이는 4.5m, 지름은 14.65m에 이르며 무덤의 내부는 석실과 현도(玄道)를 갖춘 굴식돌
방무덤이다. 능 아래를 두룬 호석은 신문왕릉의 호석 구조에서 좀 더 발전한 형식으로 높이 90
㎝ 정도의 판석(板石)을 면석(面石)으로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甲石)을 올렸다.
그리고 면석(面石) 사이로 탱주(撑柱)라 불리는 기둥을 세워 고정시켰고, 바깥쪽에 3각형의 돌
을 세워 능을 지탱하게 하였다. 호석 밖에는 판석을 깔아 회랑(廻廊, 왕릉과 돌난간 사이 부분)
을 설치하고 회랑 밖으로 돌기둥을 세워 2중으로 돌난간을 둘렀으며, 33개에 이르는 난간의 석
주에는 상하 2개소에 관석(貫石)을 끼우는 원공(圓孔)이 있으나 관석은 남아있지 않다.

▲▼  성덕왕릉을 지키는 12지신상의 위엄

호석의 3각형 받침돌 사이로 왕릉을 지키는 12지신상이 자리해 있다. 12지신상을 갖춘 다른 신
라 왕릉과 달리 호석에 새기지 있지 않고 별도의 조각으로 배치된 점이 큰 특징인데, 네모난 돌
위에 서 있는 그들은 신라 무장(武將)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것으로 칼 등의 무기를 차고 갑옷까
지 갖추며 왕릉으로서의 엄숙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하지만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도굴꾼
의 마수로 1개를 빼고는 모조리 목이 달아나고 없으며, 훼손이 심해 12지신의 방위(方位)를 계
산하지 않고선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힘들다.


▲  왕릉 앞에 놓인 거대한 석상(石床)

왕릉 앞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진 커다란 석상이 놓여져 있다. 이 석상은 제를 지낼 때 제물을
올리거나 향을 피우는 용도로 사용되며 석상 밑에 판석이 방석처럼 깔려 있다.


▲  왕릉 좌측의 무인석(武人石)과 석사자

푸른 잔디가 수북히 입혀진 왕릉 앞쪽에는 무인석과 상반신만 남은 석인, 그리고 석사자가 배치
되어 있다. 석사자는 능역(陵域) 네 모서리에 1기씩 4기가 있어 능을 에워싸고 있으며, 석인은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이 서로 마주보며 각각 1쌍씩 서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2개만 전
한다. 이들은 왕릉을 수호하고 능의 품격을 높이고자 만든 것으로 당나라 묘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왕릉 좌측에 자리한 무인석은 1,270년의 세월을 살았음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하게 남아있
어 신라 무인의 복장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소 무서운 표정을 지은 그는 네모난 기단(基壇) 위
에 의장용 갑옷인 양당개를 입고 양손으로 칼을 짚고 있으며, 그의 왼쪽에는 강아지처럼 귀여움
이 묻어난 석사자가 앉아있는데 세월과 자연의 집요한 괴롭힘 속에 훼손이 좀 있긴 해도 눈과
코, 입은 식별이 가능하다.


▲  왕릉 우측의 머리와 어깨만 남은 석인과 석사자

왕릉 우측에는 상체만 남은 석인과 온전한 모습의 석사자가 네모난 기단 위에 자리해 있다. 석
사자는 좌측의 그것보다 상태가 좋으며, 입을 다물고 있는 그의 표정에선 무서움보다는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싶은 모습인데, 앉아있는 자세는 꼬리를 살랑거리는 고양이나 강아지를 보는 듯
하다. 석인은 세월의 고속 질주 속에 형편없이 녹아내려 상반신만 간신히 남아있다. 하여 그가
무인석인지 문인석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며, 얼굴도 목부분과 머리, 귀를 제외하고는 형체를 확
인하기도 어렵다.


▲  성덕왕릉 귀부의 원경(遠景)

그럼 성덕왕릉의 진위는 어떨까? 과연 그의 능이 맞을까? 삼국사기에는 왕이 붕어하자 이거사(
移車寺)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럼 이거사는 어디에 있을까? 성덕왕릉 북쪽에 쓰러진
탑이 있는 절터가 있는데, 그곳을 이거사로 비정하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
地勝覽)과 동경잡기(東京雜記)에서는 경주 동쪽 도지곡리(都只谷里)에 능이 있다고 하는데, 도
지곡리는 지금의 도지리로 왕릉 서쪽에 있는 동네이다. 그러니까 역사기록과 지금의 왕릉은 그
런데로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왕릉 앞에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도 전해오는데, 마침 능 앞에 비
석의 흔적인 귀부가 남아있어 이곳이 성덕왕릉임을 그런데로 드러낸다.



▲  성덕왕릉 귀부(龜趺)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96호

성덕왕릉 앞 들판에는 그의 비석이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육중한 귀부가 여기저기 무거운 상처
를 가득 안은 채 땅바닥에 웅크리고 있다. 귀부 위에는 왕의 생애와 치적이 가득 담겼을 비신(
碑身)이, 그 위에는 이무기 2마리가 여의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다룬 이수(螭首)가
있었을 것이다. 허나 어느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 앞에 형체도 없이 휩쓸려
사라지고 성한 구석이 거의 없는 귀부 만이 남아 흘러간 세월을 원망하며 장엄했을 옛 모습을
그리워한다.
신라 왕릉에서 비석을 갖춘 능은 무열왕릉과 성덕왕릉 뿐으로 이 역시 당나라의 무덤 양식을 반
영한 것이다. 무열왕릉과 더불어 비석까지 갖출 정도면 성덕왕의 공덕이 무열왕과 거의 비슷한
수준임을 보여주며, 귀부 주변에서 깨진 비석 조각을 여럿 수습했으나 대부분 무늬가 없고, 판
독된 글씨는 '武'와 '跡(적)' 2자 뿐이다.


▲  비석이 심어져 있던 네모난 비좌(碑座)

귀부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네모난 석축 위에 있는데 귀부의 머리인 귀두(龜頭)는 절단되어 없
어지고 부러진 목 아랫부분만 쓰라리게 남아있다. 지금이라도 엉금엉금 움직일 것 같은 앞발에
는 5개의 발톱이, 뒷발에는 1개가 적은 4개의 발톱이 있으며, 귀부의 등에는 6각형의 등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등 중앙에는 비석을 심었던 네모난 비좌(碑座)가 허전하게 자리를 지키
고 있다.
등무늬와 당초문(唐草紋)이 새겨진 8세기 중엽 신라시대 비석으로 비록 건강이 많이 안좋긴 하
지만 그 시절 귀부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보물이다.

※ 신라 33대 군주. 성덕왕(聖德王 ?~737 <재위 702~737>)
성덕왕은 신문왕과 신목왕후 김씨의 아들로 효소왕의 친아우이다. 원래 이름은 김융기(金隆基)
였으나 당나라 현종(玄宗)과 이름이 같아서 나중에 흥광(興光)으로 이름을 갈았다. <또는 김지
성(金志誠)이었다고 함>
702년 7월 효소왕이 붕어하자 진골 귀족들이 화백(和白)회의를 열어 그를 왕위에 세웠다. 그의
나이는 불과 10대 초반(많으면 14살)이었다.

702년 9월, 민심 수습과 신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리들의 관작
을 1단계씩 올려주었으며, 여러 지역의 조세를 1년간 면제했다. 또한 아찬 원훈(元訓)을 중시로
삼았으며, 10월에는 삽량주(歃良州, 경남 양산)에서 도토리가 밤으로 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703년 정월, 신궁(神宮)에 제를 지냈으며,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선물했다. 7월에 영
묘사(靈廟寺)에 불이 나고 서울에 홍수가 나서 죽은 이가 속출했다. 중시 원훈이 관직에서 물
러나자 아찬 원문(元文)을 중시로 삼았다. 또한 왜국에서 204명에 이르는 사신단을 파견했으며,
아찬 김사양(金思讓)을 당나라에 보냈다.

704년 정월, 웅천주(충남 공주)에서 금빛 영지를 바쳤고, 3월에 당나라에 갔던 김사양이 돌아와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바쳤다. 5월에는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왕비(성정왕후)로
삼았다.

705년 정월, 중시 원문이 사망하여 아찬 신정(信貞)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으며, 5월에 가뭄이 들었다. 8월에는 노인들에게 술과 밥을 내렸고, 9월에 살생을
금하는 조서를 내렸다. 10월에 동쪽 지방에 흉년이 들자 왕은 사람을 보내 백성을 구제했다.

706년 정월, 이찬 인품(仁品)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나라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
제했고, 3월에 뭇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8월에 중시 신정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면서 대아찬
김문량(金文良)을 중시로 삼았다. 8월과 10월 당나라에 조공을 했고, 12월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707년 정월, 전년 흉년으로 백성들이 많이 굶어죽자 1명당 하루 좁쌀 3되씩을 7월까지 나눠주었
으며, 2월 대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달랬다. 또한 백성들에게 5곡 종자를 어려운 정도에 따라 차
등있게 나눠주었다.

708년 정월, 사벌주(경북 상주)에서 상서로운 식물(금잔디)을 바쳤다. 2월에는 지진이 났으며,
4월 진성(鎭星, 토성)이 달을 범하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709년 3월, 청주(菁州)에서 흰 매를 바쳤다. 5월에 가뭄이 들었고, 8월에 죄인들을 사면했다.

710년 정월, 천구성(天狗星)이 삼랑사(三郞寺) 북쪽에 떨어졌다. 지진이 나자 죄인을 사면했다.

711년 3월, 봄인데도 눈이 많이 내렸다. 5월에 짐승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금했으며, 10월에 왕
이 직접 남쪽 지방을 시찰했는데, 이때 중시 김문량이 죽었다. 11월에는 친히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군신에게 보였다. 백관잠의 내용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으나 신하들이 지켜야 될 덕목들을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712년 3월, 이찬
위문(魏文)을 중시로 삼았다. 당나라 현종이 노원민(盧元敏)을 사신으로 보내
왕의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 이유는 당 현종의 이름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중으로 이
름을 갈았다. 4월에 온천에 행차했으며, 8월에 김유신의 처를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
식 1천 석을 주었다.

713년 2월,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했다. 당나라에 김정종(金貞宗)을 사신으로 보내 조공을 했는
데, 당 현종이 문루까지 나와 사신을 맞이했다. 10월 중시 위문이 나이가 많아 퇴직을 청하자
승낙했으며, 12월에 죄수를 사면하고 개성(開城)을 쌓았다.

714년 정월, 이찬 효정(孝貞)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상문사(詳文師)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
쳐 표문(表文)을 쓰는 일을 맡게 했으며, 왕자 김수충(金守忠)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니, 당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어 크게 관심을 보이며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급찬 박유(朴裕)를 당나라에 보내 새해 인사까지 하니 현종은 기분이 좋아 조산대부(朝
散大夫) 원외봉어(員外奉御)의 관작을 주어 돌려보냈다.
여름에 가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으며, 가을에 삽량주에서 도토리가 또 밤으로 변했다. 10월에
당 현종이 내전(內殿)에서 재상과 4품 이상급의 신라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715년 4월, 청주에서 흰 참새를 바쳤으며, 5월에 죄수를 사면했다. 6월에 크게 가뭄이 들자 왕
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에 살고 있는 거사(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연못가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했더니,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9월에 태백(太白, 금성)이 서자성(庶子星)을 가렸고, 10월에 유성이 자미(紫微)성좌를 침범하였
다. 12월에는 유성이 천창(天倉)으로부터 태미(太微)성좌로 들어갔고, 이때 죄인들을 사면하면
서 왕자 중경(重慶)을 태자로 책봉했다.

716년 정월, 유성이 달을 범해 달빛이 없어졌으며, 3월 성정왕후를 궁밖으로 내보냈다. 전년 하
반기에 일어났던 여러 번의 천문 현상을 통해 외척 세력과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외척의 세력을 꺾을 요량으로 태자의 생모를 폐위하고 내쫓은 것이다. 그래도 12년을 같
이 산 부인인지라 채색 비단 500필, 밭 200결, 벼 10,000섬과 강신공(康申公)의 옛 집을 구입하
여 하사했다. 얼마 뒤 커다란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라갔으며, 숭례전(崇禮殿)이
무너졌다. 아마도 외척들이 모반을 꾀하면서 숭례전이 손상된 것이 아닐까 싶다.
6월 가뭄이 들자, 거사 이효를 다시 불러 기우제를 지내니 곧 비가 왔으며, 죄인들을 사면했다.

717년 2월,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筭博士)를 각각 1명씩 두었다. 3월에 새로 궁궐을 지었으
며, 4월에 지진이 났다. 6월에는 태자 중경이 어린 나이에 죽자 시호를 효상(孝殤)이라 하였다.
9월에 당나라에서 왕자 김수충이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공자)과 10철(十哲), 72제자의 초상화
를 바쳤다. 그래서 그것들을 대학(大學)에 안치하여 유학을 더욱 장려했다.

718년 정월, 중시 효정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파진찬 사공(思恭)을 중시로 삼았다. 2월에 왕이
직접 서쪽 지방을 시찰했는데, 나이 많은 사람과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노인들을 몸
소 위로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물건을 차등있게 하사했다.
6월에 황룡사(皇龍寺) 탑에 벼락이 떨어졌으며,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를 만들었다. 10월
에 유성이 묘(昴)성좌에서 규(奎)성좌로 들어가고,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뒤따랐으며, 천구성(
天狗星)이 동북방에 떨어졌다. 그리고 한산주(漢山州) 관내에 여러 성을 쌓았다.

719년 9월, 금마군(金馬郡, 전북 익산) 미륵사(彌勒寺)에 벼락이 떨어졌다.

720년 정월, 지진이 났다. 상대등 인품이 죽자 대아찬 배부(裵賦)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3월
에 이찬 김순원(金順元)의 딸을 왕비(소덕왕후)로 맞이했다. (그해 6월 왕후로 봉함)
4월에 큰 비가 내려 산 13곳이 무너졌고, 우박까지 떨어져 볏모가 상했다. 5월에 해골을 땅에
묻게 했으며, 완산주와 웅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가을에 메뚜기들이 창궐하여 곡식을 해치
자 중시 사공이 그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니 파진찬 문림(文林)을 중시로 삼았다.

721년 7월, 하슬라(何瑟羅, 강원도 강릉 지역) 지방의 장정 2,000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장
성(長城)을 쌓았다. 발해의 칩입에 대비하고자 그런 듯 싶다.

722년 정월, 중시 문림이 죽자 이찬 선종(宣宗)을 중시로 삼았다. 2월에 서울에 지진이 났으며,
8월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다. (우리나라 사회경제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부분으로
정전은 나라가 백성에게 토지를 직접 지급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에 대해 나
라가 인정한 것을 뜻함) 10월에 모벌군성(毛伐群城, 경주시 외동읍)을 축성했다.

723년 3월, 당나라에 더욱 잘보이고자 미녀 2명을 선물로 보냈다. 이들은 나마(奈麻) 김천승(金
天承)의 딸인 포정(抱貞)과 김충훈(金忠訓)의 딸인 정완(貞菀)으로 모두 왕의 고종사촌인데, 의
복과 그릇, 노비, 수레, 말 등을 딸려 보내 예를 보이니 당 현종이 무안해하며 후하게 선물까지
딸려 돌려보냈다. 허나 정완의 비석에는 742년<천보(天寶) 원년>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고 나와있
으니 어느 것이 옳은 지는 모르겠다.
4월에는 당나라에 과하마(果下馬) 1필과 우황, 인삼, 머리 장식, 조하주(朝霞紬), 어아주(魚牙
紬), 매를 아로새긴 방울, 바다표범 가죽, 금, 은을 조공으로 보내며 간지나게 아부를 떨었다.
이때 당나라로 국서를 보내
'우리 신라는 바다 구석진 곳 먼 귀퉁이에 있어서 본래부터 천주(泉州) 상인의 진귀한 보배도
없고 남만인(南蠻人)의 귀한 재화도 없어서 감히 우리 토산물로 당 황제의 관청을 더럽히고 노
둔한 말로 황제의 마구간을 더럽히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동에서 흰 돼지를 바친 일과
같고, 초나라의 닭과 비슷하니 참으로 부끄럽고 떨리며 진땀이 흐를 뿐이다'

724년 봄, 왕자 승경을 태자로 삼고 죄수를 사면했다. 웅천주에서 상서로운 식물을 바쳤다. 2월
에 김무훈(金武勳)을 당에 보내 조공을 했는데, 당 현종이 기뻐하며 온갖 비단 2,000필을 답례
로 보냈다. 12월에는 소덕왕후(炤德王后)가 죽었다. (이후 왕은 왕후도 없이 혼자서 지냄)

725년 정월, 일곱 색깔 무지개도 아닌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늦봄인 3월에 난데없이 눈이 내렸
고, 4월에 우박이 떨어졌다. 이에 중시 선종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이찬 윤충(允忠)을 중시로
삼았다. 10월에는 지진이 발생했다.

727년 정월, 죄인을 사면했으며, 4월에 일길찬(一吉粲) 위원(魏元)을 대아찬으로 삼고 급찬 대
양(大讓)을 사찬으로 삼았다. 12월에 영창궁(永昌宮)을 수리했으며, 상대등 배부가 늙어 물러나
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궤장(机杖)을 하사했다.

728년 7월, 왕의 아우인 김사종(金嗣宗)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신라 귀족들의 자제를 당나
라 국학(國學)에 입학시켜줄 것을 청하니, 당 현종이 이를 허락하면서 김사종에게 과의(果毅)의
관작을 주어 당나라에서 숙위(宿衛)케 했다. 상대등 배부가 다시 물러나기를 청하자 이를 허락
하고 이찬 사공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730년 2월, 왕족 김지만(金志滿)을 당나라에 보내 작은 말 5필, 개 1마리, 금 2,000냥, 머리카
락 80냥,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조공했다. 이에 당현종이 김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의 관작을
주고 명주 100필, 자줏빛 두루마기, 비단 띠를 주며 숙위하게 하였다.

731년 2월, 김지량(金志良)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당현종이 채색비단 500필, 무늬없는 비
단 2,500필을 답례로 보냈다. 4월에 죄수를 사면하고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또한 왜
국이 수군 300척을 보내 동해바다를 공격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9월에는 백관들을 적문
(的門)에 모이게 하여 수레에 달린 쇠뇌를 테스트했다. 신라는 활과 쇠뇌
를 잘만들었는데, 아마도 새로운 형태의 쇠뇌를 개발한 모양이다.

732년
12월, 각간 사공과 이찬 정종(貞宗), 윤충, 사인(思仁)을 각각 장군으로 삼았다.

733년 7월, 발해(渤海) 2대 군주인 무왕(武王)은 당나라를 위협하고자 장문휴(張文休)를 장군으
로 삼아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등주(登州)를 공격했다. 발해군은 등주를 쑥대밭으
로 만들고 등주자사 위준을 죽였는데, 이에 뚜껑이 뒤집힌 당 현종은 급히 군사를 보냈으나 발
해군은 그들이 오기 전에 유유히 바다를 건너 회군했다.
발해에게 완전히 농락당한 당 현종은 당나라에 머물던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
을 급히 신라로 보내 발해의 남쪽을 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왕은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金
允中)을 대장으로 삼아 발해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큰 눈이 한 길이 넘게 내려 산길이 막히고 강
추위로 죽는 병사가 속출하여 별다른 소득도 없이 철수했다. 아마도 함경남도 개마고원(蓋馬高
原)까지 진군했다가 후퇴한 듯 싶다.
12월에 왕이 조카 김지렴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했다. 이에 앞서 당현종이 흰 앵무새 암수 1
쌍과 자주색 비단에 수를 놓은 두루마기와 금은으로 세공한 그릇, 상서로운 무늬의 비단, 오색
으로 물들인 비단 300여 단을 보내주었는데, 그 답례로 당 현종을 격하게 찬양하고 아부하는 내
용의 국서를 보낸 것이다. 그 국서를 받은 현종은 기분이 좋아 김지렴을 내전에서 대접하고 비
단을 내렸다.


734년 정월,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 경우 직접 대궐 북문으로 들어와 진
언하도록 했다.

735년 정월, 형혹(熒惑, 화성)이 달을 범하였다. 김의충(金義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했는
데, 당현종은 앞서 신라가 발해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땅으로 인정했다. 허나 신라는 이미 패강과 원산 지역까지 점유하고 있던 상태였고, 그
이북은 발해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당나라가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 땅으로 공식 인정하자(삼국사기에는 땅을 주었다고 나
옴) 왕은 무한 감동을 받으며 736년 6월 당 현종에게 국서를 보내 뼈가 부서지고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다며 심히 역겨운 아부를 떨었다.

736년 11월, 왕의 종제(從弟)인 대아찬 김상(金相)을 당나라에 보냈는데,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에 당 현종이 매우 슬퍼하여 그에게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이찬 윤충과 사인
영술(英述)을 북쪽 변경으로 보내 평양(平壤)과 우두(牛頭州, 강원도 춘천)의 지형를 조사하게
했으며, 난데없이 개가 궁성 누각에 올라가 3일간을 짖었다.

737년 2월, 사찬 김포질(金抱質)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했으며, 바로 그달 왕은 붕어했다. 이
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성덕왕 시절은 정치/경제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였다. 그는 적극적
인 위민정책(爲民政策)으로 백성을 보살폈으며, 자주 순행을 나가 민생을 살피고 어려운 백성들
에게 곡식과 생필품을 하사했다. 또한 죄인에 대한 사면령도 수시로 단행을 했는데, 신라의 역
대 제왕 가운데 가장 많았다. 그리고 백성들이 마음껏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당나라의 균전제(
均田制)를 본받아 정전제를 실시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이를 통해 신라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루던 시기로 널리 칭송받고 있다.

성덕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회의의 대표인 상대등의 영향력을 줄여 상징적인 존재로 축소시
키고 대신 집사부(執事部)의 중시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중시는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
에 따라 편의에 따라 교체가 가능하여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유교를 장려하고자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와 10대 제자상 등을 국학에 봉안했고, 721년에
내성 기구 속에 소내학생(所內學生)을 두어 장차 문한계통에서 일할 인재들을 양성했다. 그리고
불교에도 크게 관심을 두어 '전광대왕(典光大王)'이란 불교식 왕명까지 지녔으며, 무열왕을 기
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봉덕사(奉德寺) 등의 성전사원(成典寺院)을 건립했다.


또한 문무왕 이후, 많이 소홀해진 당나라에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펼쳐 35년의 재위기간 동안 무
려 46회나 사신을 보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와 백제의 속방이자 별채였던 왜국
등 주변 나라와도 사이가 좋지 못해 부득이 당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는데, 당 역시 무섭게
팽창하는 발해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신라가 필요해 두 나라는 다시 호감적인 사이가 되었다.
당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유학생을 파견해 당나라 국학에서 공부하게 했고, 당의 선진문물과 정
책을 적극적으로 수입했던 것이다. 허나 지나치면 모자른 것만 못하다고 그의 친당정책은 너무
아부적인 감이 커 당에 과하게 조공을 하는 풍조가 심해지고 심지어 왕실 여인을 당 현종에게
진상하려고까지 했다. 그것이 바로 당시 천하에서 가장 작은 나라, 신라의 어쩔 수 없는 한계점
이었다.

발해는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733년 발해 남쪽을 공격한 것 외에는 딱히 없으며, 왜국과는 서로
사신을 보내는 등의 교류가 있었으나 왜국 입장에서는 그들의 모국(母國)인 백제를 멸망시킨 원
수다보니 그렇게 시원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왜는 731년 수군 300척으로 신라 동해바다를
공격했으나 크게 깨졌고, 이에 자신만만해진 신라가 735년 왜로 사신을 보내
'신라는 어제의 신라가 아니다. 이름도 왕성국(王城國)으로 고쳤다'며 왜를 위협하니 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하여 737년 2월에는 신라를 공격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상황이 좋지 못
해 실현되진 못했다.


※ 경주 성덕왕릉, 효소왕릉 찾아가기 (2014년 12월 기준)
① 경주까지
* 서울역, 광명역, 천안아산역, 오송역, 대전역, 부산역에서 경부선 고속전철을 타고 신경주역
  하차
* 서울 청량리역, 원주역, 제천역, 강릉역, 철암역, 영주역, 동대구역, 포항역, 부전역, 태화강
  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버스
  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부천, 수원, 안산, 성남, 하남, 춘천, 강릉, 천안, 대전(복합), 전주, 광주, 구
  미, 대구(서부, 북부, 동부, 동대구), 울산, 부산, 창원(마산), 진주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
  스 이용
② 현지교통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경주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 건너편(경주우체국 앞)에서 11, 600
  번 계열 시내/좌석버스를 타고 한국광고영상박물관 하차, 길 건너편(박물관 방면)으로 건너가
  서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효소/성덕왕릉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 신경주역에서 갈 경우에는 경주시내로 나가는 50, 51, 60, 61, 70, 203, 700번 시내버스를 타
  고 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 경주우체국 앞에서 11, 600번 계열 시
  내버스로 환승한다.
③ 승용차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배반4거리에서 우회전 → 한국광고영상박물관
  앞 교차로에서 박물관 주차장으로 좌회전 (주차는 영상박물관이나 주변 공터 이용)

* 성덕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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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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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12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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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법흥왕릉














부처의 세계를 온몸에 담은 경주 남산 탑곡마애조상군 (불무사)


♠부처의 세계를 온몸에 담은 바위 ~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 (부처바위) ♠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
▲ 부처바위에 깃들여진 탑곡 마애조상군


살아있는 거대한 야외박물관이자 신라 불교문화의 보고(寶庫)인 경주 남산(南山, 468m)은
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경주국립공원의 일원이다.
남산은 크게 동과 서로 나눌 수 있는데, 통일전(統一殿)과 보리사, 부처골이 있는 동북쪽
일대를 동남산(東南山)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불교풍 이름을 지닌 미륵골과 탑골, 부처골
등의 골짜기가 안겨져 있으며,각 골짝마다 신라인의 걸작품이 하나씩은 숨겨져 있어 경주
에 목말라하는 속인(俗人)들을 유혹한다.

미륵골에는 남산에서 가장 큰 절인 보리사(菩提寺)가 있으며, 고운 자태의 미륵곡 석불좌
상(보물 136호)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부처골(불곡)에는 남산에서 제일 오래된 불상으로
꼽히는 석불좌상(보물 198호)이 바위에 얇게 굴을 파고 은거하고 있으며, 이번에 찾은 탑
골에는 부처의 세계를 담은 커다란 부처바위가 있다.

보리사 입구인 갯마을에서 남천(南川) 둑방길을 따라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탑골 아
래에 터를 닦은 조그만 마을, 탑골마을이 나그네를 반긴다. 발자국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적막이 깃든 마을을 벗어나 계곡을 10분 가량 들어가면 부처바위를 품은 불무사가 모습을
비춘다.

탑골은 그리 잘생긴 계곡은 아니지만 숲이 울창하고 남산에서는 별로 없는 조그만 폭포와
넓은 소(沼)도 갖추어져 있어 한여름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 불무사(옥룡암) 가는 길
개울을 옆에 끼고 펼쳐진 저 산길의 끝에는 불무사와 탑골의 오랜 주인 부처바위가 있다.
속세와 산속의 외딴 절을 이어주는 길로 인적이 별로 없어 사색의 공간으로 그만이다.
속세의 번뇌를 숲과 개울에 말끔히 털어버리며 불무사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 계곡에 걸쳐진 안양교(安養橋) ~ 다리를 건너면 바로 불무사이다.

▲ 불무사 앞에 조그만 폭포와 소(沼)

남산이 베푼 계곡물은 이곳에서 잠시 숨을 돌리다가 넓은 세상을 향한 끝없는 여정에 들어간다.
평소에는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물을 품고 있을 이곳은 여름제국의 무차별 공습으로
마치 인간의 세상을 상징하듯, 흙탕물로 변해버렸다.


♠ 옛 신인사(神印寺)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그만 산사, 부처바위를
든든한 후광으로 법등을 이어가는 남산 불무사<佛無寺 = 옥룡암(玉龍庵)>


▲ 여염집 같은 불무사 종무소(宗務所)


탑골 깊숙한 곳에 둥지를 튼 불무사(옥룡암)는 정토종(淨土宗) 소속으로 1924년에 지어진 조촐한
절이다. 은은한 풍경소리와 산새의 지저귐이 전부인 조용하고 아늑한 산사로 왜정(倭政) 시절에
신인사(神印寺)라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신라 때 절인 신인사의 옛터로 드러났다. 법당(法堂)
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칠성각, 종무소(宗務所), 관음전 등 7~8동의 건물을 지녔으며 경내 뒤쪽에
는 절의 든든한 밥줄인 부처바위(탑곡마애조상군)가 병풍처럼 자리한다.

계곡 위에 걸린 안양교를 건너 경내로 발을 들이니 제일 먼저 툇마루를 갖춘 'ㄱ'자 모습의 종무
소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절집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옥형
태로 여염집 분위기를 진하게 선사한다. 그 주변으로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기와집 2~3채
가 있는데, 이들 모두 속세의 여염집과 비슷한 모습이다.


▲ 세월의 짓궂은 장난에 만신창이가 된 불무사 석탑


대웅전으로 오르는 길목의 오른쪽 수풀 사이로 형편없이 깨지고 닳아버린 신라 석탑 1기가 자리
해 있다. 2중에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얹힌 이 탑은 지금은 2층석탑으로 우중층하게 서
있지만 원래는 신라 탑의 주류를 이루던 3층석탑이다. 1층 탑신은 그나마 온전하지만 2층은 아예
없어졌고, 3층은 옥개석(屋蓋石)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 위로 복발로 보이는 동그란 부분이 있
다. 탑 구석구석에는 장대한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들로 거의 성한 데가 없을 지경으로 보는 이
의 마음을 안쓰럽게 한다.


▲ 물끄러미 아래를 굽어보는 불무사 대웅전(大雄殿)

▲ 대웅전 내부

종무소보다 한층 높은 곳에 놓여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지어
진 것이라 고색의 멋은 찾아볼 수 없다. 내부에는 문수, 보현보살을 대동한 석가여래 3존불이 금
빛찬란한 모습으로 앉아 있으며 좌측으로 중생들의 소망이 담겨져 있을 수백 개의 촛불이 불빛을
진하게 드러내어 황홀한 풍경을 연출한다. 좌측 벽에는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은 신중도(神衆
圖)가 걸려있으며 3존불 뒤로 후발탱화가 든든히 자리한다.


▲ 칠성각(七星閣)


▲ 대웅전 좌측 건물로 선방으로 여겨진다.


대웅전 좌측에는 선방으로 쓰이는 툇마루를 갖춘 건물이 있고 우측에는 칠성각(七星閣)이 있다.
칠성각은 칠성신(七星神)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건물의 모습은 절집
이 아닌 거의 당집 분위기이다. 칠성각이란 현판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마을의 안녕이나 산신에게
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오인했을 것이다.


▲ 칠성각에 봉안된 빛바랜 칠성도(七星圖)
제법 묵은 티가 풍겨 대략 70~80년 이상은 되어 보인다.


대웅전 주변에 머무는 사이 갑자기 하늘에서 큼지막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안그래도 하
늘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있었는데, 탑곡 마애조상군으로 넘어가려는 찰라에 여름제국의 공습
이 시작된 것이다. 다행히 절집에서 공습을 받아 다행이다. 피할 곳이 넉넉하기 때문이다. 만약
절로 한참 오르던 도중에 비벼락을 맞았다면 이건 정말 대책이 없다. 불무사의 적막함을 한순간
에 깨뜨린 여름 제국의 공습, 빗방울은 그렇게 절과 남산, 경주 땅을 강하게 적셔댄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소나기라 여기고 대웅전 좌측 건물로 비를 피했다. 허나 공습은 그치기는 커
녕 점점 세차진다. 이러다 탑골이 범람하고 부처바위와 절이 떠내려가는 것은 아닐까? 아직 갈
길은 많은데 우산은 없고 그렇다고 공습을 곧이곧대로 맞으며 다닐 용기까지는 더더욱 없다. 기
왕 이렇게 된 거 절에 잠시 몸을 의탁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속히 그치길 바랬으나 시간이 지나
면서 '오늘 안에는 그치겠지 마음대로 쏟아져라' 체념해버린다.

가방을 베게 삼아 툇마루에 벌러덩 누워 촉촉히 비가 내려앉은 산사의 고즈넉한 풍경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운치 가득한 비 내리는 산사의 풍경은 나의 눈을 한없이 감동시키며 비의 합창소리는
나의 귀를 한량없이 기쁘게 한다. 세상 모든 근심 빗물에 떠내려 보내며 누워있던 1시간은 정말
로 극락이 따로 없었다. 빗방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졸음의 희롱까지 즐겼던 것이다. 얼마나 꿈
나라를 헤맸을까? 귓전이 허전해 눈이 뜨이니 제국의 공습은 그새 끝나고, 비가 그친 산사의 풍
경이 고스란히 나를 맞이한다. 남산에 낀 먼지가 싹 씻겨 내려간 듯, 신선하고 상쾌한 기운이 나
를 엄습하면서 나의 기분도 개운해진다.

지붕에 고인 빗물이 낙화(落花)처럼 떨어지던 대웅전을 벗어나 절 뒤쪽에 자리한 부처바위로 다
가선다. 내가 탑골에 들어온 것은 그를 보기 위함이지 불무사 때문이 아니다. 길 중간에 담장에
둘러싸인 관음전(觀音殿)이 있는데, 역시 툇마루를 갖추고 있다. 관음전이라고는 하지만 그 모습
이 서원(書院)이나 양반가의 서재(書齋)와 너무 비슷하여 다소 어색할 따름이다. 솔직히 불무사
의 사우(寺宇)은 대웅전을 제외하고는 불전의 품격과는 이상하리만큼 거리가 멀다.


▲ 불무사 관음전


♠ 거대한 바위에 함축된 부처의 세계 ~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塔谷 磨崖彫像群) -
보물 201호


▲ 부처바위의 남쪽 면


불무사 뒤쪽에는 높이 9m, 둘레 30m 정도의 범상치 않은 큼직한 바위가 있다. 바위 사방에는 불
상을 비롯한 탑과 비천상(飛天像), 승려 등 34점의 조각이 빼곡히 새겨져 가히 장관을 이루는데,
그 연유로 부처바위란 좋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바위에 새겨진 것들이 바로 탑곡마애조상
군이다.

신라 사람들이 그렇게나 열망하던 부처의 세계를 하나의 바위에 압축해 놓은 우리나라에서 그 유
례가 없는 것으로 남면과 동면, 서면의 삼면(三面)을 이루고 있으며 북면은 언덕의 정상이다. 바
위가 그늘진 곳에 자리해 있어 한여름에는 시원하나 이끼 등이 군데군데 기생하여 바위를 위협한
다. 게다가 오랜 풍상으로 마멸이 심해지고 바위에 금이 가는 등 적절한 건강대책이 요구된다.

바위의 남면은 부처바위의 중심으로 부처가 보살과 나한(羅漢)에게 설법(說法)을 하는 영산정토(
靈山淨土)를 표현하고 있다.

그럼 남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선 바위 가운데로 마애석불좌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흐드러지
게 핀 연꽃을 대좌(臺座)로 삼아 앉아있는데, 머리 뒤로 연꽃으로 된 동그란 두광(頭光)이 그를
신비롭게 꾸민다. 머리 위로는 사진상으로는 잘 보이진 않지만 천개(天蓋)가 떠 있다. 천개란 귀
족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양산으로 천개 위로는 아름다운 천녀(天女) 2명이 묘사되어 부처의 세상
을 칭송한다.

석불 우측에는 어디선가 낯이 익은 듯한 탑(왼쪽 사진)이 하나 있다. 모양새를 보니 석탑보다는
나무로 만든 목탑(木塔)임을 짐작케 해주는데, 2중 기단 위에 탑을 올린 형태는 신라 탑의 전형
적인 양식이다. 게다가 탑의 층수를 세어보니 딱 9층이다. 9층목탑하면 딱 떠오르는 것은?? 그렇
다 바로 신화 속으로 사라진 황룡사(皇龍寺)의 9층목탑이다. 황룡사 목탑은 진흥왕(眞興王)부터
선덕여왕 시절까지 무려 93년(553~646년)을 낑낑대며 만든 높이 224척(약 74m)의 장대한 탑이다.
주변 9개의 나라(당나라 등의 중원왕조, 왜국, 말갈..)를 부처의 힘으로 누르고 싶었던 약소국
신라의 의지와 그들의 천하관(天下觀)이 고스란히 담긴 이 탑은 유감스럽게도 1238년 고려를 침
범한 몽고 애들이 말끔히 불질러 버려 지금은 터만 쓸쓸히 전한다. 비록 800년 전에 한 줌의 재
로 사라졌지만 부처바위 한 쪽에 그의 축소판으로 보이는 목탑이 진하게 남아 그의 왕년을 헤아
리게 해주며, 지금 한참 구상중인 황룡사 목탑 복원프로젝트(오늘날 기술로는 어림도 없다고 함)
에 커다란 단서를 제공한다. 또한 지금은 이 땅에서 사라진 신라 목탑의 형태를 알려주는 소중한
열쇠이기도 하다. 탑 꼭대기에는 온전한 모습의 상륜부(相輪部)가 있으며 탑신의 추녀 부분에는
풍경까지 달려있어 바람이 부는 날에는 풍경소리가 잔잔히 울려퍼질 것만 같다.

석불 좌측에도 또 다른 7층목탑(오른쪽 사진)이 있다. 탑의 모양은 우측 9층탑의 축소판 마냥 비
슷하며 2중의 기단 위에 탑을 얹힌 형태이다.

두 탑 아래로는 천마총(天馬塚)에 그려진 천마(天馬)와 닮은 듯한 사자<혹은 용마(龍馬)> 2마리
가 새겨져 있다. 이들은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존재로 9층탑 밑의 사자는 털이 없어서 암사자로
여겨지며 꼬리가 무려 3갈래에 이른다. 7층탑 밑의 사자는 꼬리가 복잡하고 머리 부분이 대관령
양떼목장의 양처럼 털이 복스러워 숫사자로 여겨진다.


▲ 부처바위의 서쪽 면
보리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어떤 자료에는 반야나무와 망고나무라고 함) 밑에서
조용히 선정(禪定)에 든 부처(혹은 승려)의 모습이다.


부처바위의 서쪽 면은 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에 자리해 있다. 이곳에는 삼존불과 승려상, 비
천상 6구 등이 바위면을 가득 메운다.

서쪽 면 가운데에 자리잡은 2개의 불상(왼쪽사진
)
은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3존불로 왼쪽에 큰
두광을 가진 이가 아미타불이다. 품위를 갖춘 신
라 귀부인을 모델로 한 듯, 기품과 자애로움이
돋보이는 그의 모습에선 좀처럼 눈길이 떼어지질
않는다. 머리 뒤의 두광(頭光)은 햇살같은 연꽃
이 피어있어 그의 웃음이 온면에 흐드러지는 듯
하다.
그의 좌측에는 관음보살이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이고 있으며 얼굴은 아미타불을 향해 있다.
3존불이니 당연히 우측에도 불상
(아미타3존불이
니 아마도 대세지보살일 듯)
이 있어야 되나 장
대한 세월의 거친 소용돌이에 희생되어 지금은
연꽃대좌와 옷자락 일부만 희미하게 전한다.

바위 중심에 아미타불이 있으니 동쪽 면은 당연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상징한다. 아미타불 위로
는 극락을 찬미하는 6명의 비천상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 부처바위의 북쪽 면


부처바위의 북쪽은 바위의 정상이다. 이곳에는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좌상(三尊佛坐像)과 얇은 감
실(龕室)에 자리한 여래상, 얼굴이 파열된 여래입상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 앞에는 제멋
대로 생긴 커다란 돌이 뒹굴고 있고, 그 앞에 돈을 넣는 복전함과 기도처가 있다.

바위에 얇게 새겨진 삼존불좌상은 한 가족이 나란히 기념촬영에 임하는 것 같아 무척 단란해 보
인다. 비록 마멸이 심하긴 하나 천진스러운 표정은 잃지 않았다. 그들 모두 두광을 갖추고 있는
데 마치 두꺼운 겨울잠바에 딸린 모자를 뒤집어 쓴 듯 하다. 가운데 불상은 커다란 연꽃대좌 위
에 앉아 있으며 양쪽 보살도 연꽃대좌에 앉아 합장인을 선보이며 가운데 불상을 주시한다. 그들
왼쪽으로 나무로 보이는 조각이 있는데 이들은 능수버들이라고 한다.

3존불과 별도로 우측에 서 있는 2.2m의 여래입상(왼쪽 사진)은 얼굴이 절반 가까이 파열되었으나
풍성하고 둥근 인상을 느낄 수 있다. 목에는 삼도가 그어져 있고, 허리는 잘록하고 가슴 부분은
풍만하여 아름다운 여인네를 보듯 그를 보는 눈이 시리도록 즐겁다.

그의 몸을 덮은 옷의 주름은 다리 아래까지 늘어져 있으며 왼손은 배꼽에 대고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로 내려뜨려 여원인(與願印)의 일종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네모의 대석(臺石) 위에 서 있
으며 옷 밖으로 두 발이 나와있다. 그의 뒤로는 승려상 하나가 그를 연모하듯 새겨져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정면 높다란 곳에는 4.5m의 날렵한 맵시의 3층석탑(오른쪽 사진)이 있다. 이 탑
은 2중의 기단 위에 탑을 얹힌 신라 후기 탑으로 옥개석(屋蓋石) 받침이 3단이고 추녀 부분이 두
툼하여 여타 신라 탑과는 다른 모습이다. 추녀마루에는 못구멍이 1개씩 있는데 아마도 풍경물고
기를 달아놓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세월의 태클에 쓰러져 잇던 것을 1977년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
였다.

부처바위의 동쪽 면은 불상과 비천상 1기, 몇 가
지 장식물이 전부로 다른 면과 달리 매우 썰렁하
다. 그도 그럴 것이 새길 수 있는 공간이 무척
좁기 때문이다.

대나무와 능수버로 보이는 나무 사이로 불상 하
나가 연꽃을 자리삼아 앉아 있는데 그는 약사여
래(藥師如來)로 여겨진다. 그가 만약 약사불이
맞다면 이쪽은 동방정토(東方淨土)가 된다.

그의 머리 뒤에 있는 두광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아 야밤에도 환할 것 같으며, 그 위쪽에는 비
천상 하나가 피리를 불며 허공을 맴돈다.


◀ 부처바위의 동쪽 면

이렇게 하여 불무사를 겯드린 탑곡마애조상군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부처바위는 그 모습이 준
수(俊秀)하여 부처의 세계로 둔갑되기 전에는 치성을 드리는 민간신앙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사람들의 지나치다 싶은 신앙심은 멀뚱한 바위를 그야말로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
시켰던 것이다.


※ 탑곡마애조상군(불무사) 찾아가기 (2009년 10월 기준)
① 대중교통

* 서울강남고속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종합터미널, 동대구고속터미널, 대구동부정류장, 울산, 포항에서 경주행 버스가 수시로 떠
난다.
* 서울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대전역에서 경주행 열차가 1일 7회(새마을호 6회, 무궁화호 1회)
떠나며, 청량리역에서 심야 무궁화호 열차가 매일 21시에 떠난다.
* 동대구역에서 경주, 서경주행(포항행 열차만 정차) 열차가 각각 1일 10여 회 운행하며, 울산역
과 부전역에서 경주행 열차가 1일 10여 회 다닌다.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11번을 타고 갯마을에서
내린다.
* 불국사나 보문단지에서 갈 경우는 경주시내버스 10번을 이용하면 된다.
* 갯마을에서 남천둑방길을 따라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옥룡암(불무사), 탑골마애조상군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것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불무사가 나오며 경내를 지나면 바로
부처바위(탑곡마애조상군)이다.
② 승용차 (절까지 진입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배반4거리에서 불국사역 방면 우회전 → 사천왕
사터에서 통일전 방면 → 화랑교를 건너 남천둑방길로 우회전 → 불무사(옥룡암입구)에서 좌회
전 → 불무사(탑곡마애조상군)
* 울산 → 경주 방면 7번 국도 → 통일전입구 3거리에서 좌회전 → 통일전에서 우회전 → 화랑교
못미쳐에서 남천둑방길로 좌회전 → 불무사입구에서 좌회전 → 불무사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9번지 (불무사 ☎ 054-748-0688)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은 2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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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09년 10월 7일부터


Copyright (C) 2009 by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경주에서 누린 신라의 고졸한 향기 ~ 남산 불곡석불좌상, 신문왕릉

♠ 경주 남산에서 제일 오래된 불상 ~ 불곡(부처골) 석불좌



보리사 입구인 갯마을에서 2차선으로 포장된 남천(南川) 둑방길을 따라 북쪽(경주시내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탑곡마애조상군을 간직한 불무사(옥룡암)입구가 나온다.여기서 다시 7분을 더
가면 불곡석불좌상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그네를 맞는다. 여기서 남산으로 접어들어 부처골(
불곡) 개울을 10분 가량 거슬러 오르면 부처골의 은인(隱人), 불곡석불좌상 앞에 이른다.

부처골에는 2개의 절터가 있으나 주춧돌과 깨진 기왓장만이 어지럽게 뒹굴 뿐, 별다른 것은 없다.
계곡은 작지만 숲이 무성하고 인적이 별로 없어 개울에 발을 담구며 조용히 쉬어가기에 제격이다.
또한 부처골 석불 아래로 대나무 밭이 무성하여 청명한 기운이 석불을 찾은 중생을 엄습한다.


▲ 부처골 입구

▲ 대나무 사이로 친환경적인 터널을 뚫어 산길을 내었다.

◀ 불곡석불좌상을 알리는 도깨비 기와
이정표


딱히 조명시설도 없는 이곳을 밤에 찾아온다면
저 도깨비에 기겁하여 줄행랑을 칠 것 같다.
허나 가까이서 보면 무섭다기보단 미소가 만면
에 흐드러져 손으로 쓱쓱 어루만지고 싶은귀
여운 표정이다. 부처골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도 그를 보고는 자신의 소임도 잊고
되돌아 갈 것이다.


♠ 부처골의 은인(隱人), 남산에서 제일 오래된 고졸한 불상 ~
불곡 석불좌상(佛谷 石佛坐像 = 부처골 석불좌상) -
보물 198호

불곡석불좌상은 삼국시대가 그 끝을 맺던 7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이다. 남산에 뿌리를 내린 불상
중 가장 연세가 지긋한 것으로 전해지며, 남산에서 불곡석불처럼 676년 이전, 이른바 고신라(高
新羅) 시대에 지어진 불상으로 배리(排里)3존석불과 삼화령 애기부처 등이 있다. (배리3존석불이
불곡석불보다 연세가 더 많다는 의견도 있음)


높이 3m, 폭 4m 정도 되는 바위에 높이 1.7m, 폭 1.2m, 깊이 0.6cm 정도의 감실(龕室)을 파고 그
안에 돋음새김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석불의 높이는 1.4m로 바위에 새겨진 것이니 마애불(磨崖佛
)로 봐도 지장은 없다. 바위 안에 다소곳이 들어앉아 흐르는 세월을 즐기는 석불은 거의 석굴(石
窟)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신라 석굴사원의 옛 양식을 보여준다.

바위에 굴을 파고 들어앉은 탓에 비바람과 세월의 거친 흐름을 피할 수 있었으며, 1,400년에 세
월에도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상처라고 해봐야 오른쪽 어깨와 왼쪽 무릎에 조금 깨진
상처가 전부이니 그의 건강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약간 고개를 숙인 둥그런 얼굴에는 수줍은 듯 그만의 특유한 미소가 엿보인다. 홍예처럼 구부러
진 눈썹 밑으로 지그시 감겨진 두 눈이 있으며 코는 오목하다. 머리 위로는 육계(= 무견정상)가
두툼하게 솟아 있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두 무릎과 다리를 덮고 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어 앉아있는 모습은 인자함이 깃든 할머니
의 모습처럼 편안하게 다가와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에게 다가서면 멀리서 왔다며 떡이
나 밥, 노잣돈을 두둑히 안겨주지는 않을까? 무릎은 상체에 비해 조금 낮고 오른쪽 발은 지나치
게 크게 표현되어 약간의 옥의 티를 선사한다. 그가 앉아있는 자리는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
로 여겨진다.

불상 앞에는 제물을 올리는 네모난 돌이 있는데 누가 바쳤는지 노란 참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참외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석불, 저걸 어떻게 먹을까? 언제 먹을까? 궁리하는 것 같아 나
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이곳은 남산을 오르는 길목으로 등산객과 답사객이 드문드문 지나가며 치성을 드리러 오는 부녀
자들만 간혹 발걸음을 할 뿐 인적이 드물다. 예전에는 그를 관리하는 절이 주변에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홀로 남아 부처골(불곡)석불좌상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부처골이란 이름은 이 불
상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 불곡석불좌상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
신라 32대 군주인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 5년(697년) 어느 날, 왕은 남산에 있는 어느 절
의 축성식에 참석하여 공양을 올렸다. 그때 허름한 차림의 승려가 제식에 참여시켜 달라고 간청
을 하였다. 왕은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탐탁치 않은 얼굴로 제일 끝에 서도록 허락했다. 의식을
올린 왕은 그 승려를 불러 "그대는 어디에 사는가?"
그러자 승려가 "소승은 남산 비파암에 있습니다"
왕은 조소를 띄우며 "돌아가거든 짐(朕)이 임석한 제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승려가 답하길
"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폐하께서도 환궁하시거든 진신석가를 공양했다는 말씀
은 하지 마시옵소서~~!!"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승려의 몸에서 금빛이 나며 등뒤로 광배(光背)마냥 광채가 발하는 것이
다. 그러더니 땅 위에서 스며 오르는 구름을 타고 비파암 쪽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왕은 몹
시 당황해하며 급히 사람을 보냈으나, 그의 뒤를 간신히 따라잡았을 때는 비파암 언저리에서 지
팡이와 가사(袈裟)를 버리고 바위 속으로 숨어버린 뒤였다. 왕은 깊히 뉘우치며 바위 부근에 절
을 짓고 불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불상이 불곡석불좌상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니까 ~~

※ 불곡석불좌상 찾아가기 (2009년 7월 기준 / 서울 기준)
① 대중교통

* 서울강남고속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종합터미널), 대구(동대구고속터미널, 동부정류장), 울산, 포항에서 경주행 버스가 자주
다닌다.
* 서울역과 영등포역, 대전역에서 경주행 열차가 1일 7회 떠나며 청량리역에서 심야열차가 매일
21시에 떠난다.
* 동대구역과 부전역, 울산역에서 경주행 열차가 10여 회 운행한다.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에서 경주시내/좌석버스 11번을 타고 갯마
을에서 내린다.
* 불국사나 보문단지에서 갈 경우는 경주시내/좌석버스 10번을 타면 된다.
* 갯마을에서 남천둑방길을 따라 시내 방면으로 15분 정도 걸으면 불곡석불좌상을 알리는 이정표
가 나온다. 그것을 따라 10분 정도 들어간다.

② 승용차 (부처골 입구에 주차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상서장을 지나 고운교 직전에서 우회전 → 부처
골 입구
* 울산 → 경주 방면 7번 국도 → 통일전입구 3거리에서 좌회전 → 통일전 앞에서 우회전 → 화
랑교 못미쳐에서 남천둑방길로 좌회전 → 부처골 입구

★ 불곡석불좌상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에 제한은 없음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산56


▲ 부처골 계곡에 잠시 내려놓은 나의 짐들

부처골 석불을 친견하고 내려오는 길에 대나무숲
너머 계곡에서 여름제국의 핍박도 벗어날 겸 잠
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즐겼다.

장맛비가 내린 탓에 날씨가 무척이나 찐다. 등산
로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이라 인적도 없어 과
감하게 웃통도 벗어 던지며 냉수마찰도 하고 발
을 담궈 책도 읽고, 자연과 대화(?)도 하면서 나
만의 극락세계를 연출했다. 하긴 별게 극락인가?
이런 것이 바로 극락이지..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나만의 공간에서 내 의지대
로 머문 1시간의 시간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
었다.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 정말 이런 것인가
보다. 기분 같아서는 더 머물고 싶었지만 속세에
벌려 놓은 일(?)이 많아서 이만 자리를 접고 나
와야 했다.


부처골(불곡) 석불좌상을 끝으로 동남산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동남산을 이루는 골짜기는 부
처골과 탑골, 미륵곡 외에도 왕정골, 장창골, 식혜골 등이 있으며 이들은 나중에 인연이 된다면
모두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

다시 갯마을로 나와 망덕사(望德寺)터로 가기 위해 남천을 건너 흙길의 둑방길을 따라 남쪽으로
걷는다.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남산의 동쪽을 부드럽게 돌아 형산강(兄山江)을 거쳐 동대해(東大
海)로 흘러가는 남천, 옛날에는 갯마을까지 배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삐쩍 말라버려 정말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다.

드넓은 배반평야를 옆에 끼며 온갖 수풀과 들꽃이 손짓하는 남천(南川) 뚝방길은 나를 망덕사터
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인도했다. 물론 평야 너머로 보이는 높다란 언덕배기에 망덕사터 당간지
주(幢竿支柱)가 보이긴 했으나, 평야를 가로지르는 길이 나타나질 않아 계속 뚝방길만 따라가다
보니어느덧 7번 국도와 능마을이 나타난다. 수레의 왕래가 잦은 국도 너머로 육중한 덩치의 신
문왕릉이 강하게 시선을 던진다. 그래서 망덕사터는 제쳐놓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여름이 머무는 남천 둑방길
가까이에 보이는 산이 바로 남산의 동쪽, 동남산이다.


♠ 삼국시대를 마무리하고 후기 신라로 접어들면서 국내외의 혼란을 잠재우고
전제왕권 강화로 신라의 막바지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신문왕의
왕릉으로 전하는 고분, 전 신문왕릉(傳 神文王陵) -
사적 181호

경주시내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불국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사천왕사(四天王寺)터를 지나 길 왼쪽
에 숲동산을 이룬 커다란 능, 신문왕릉이 보일 것이다. 왕릉은 동그란 모습에 흙을 쌓아 만든 원
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높이는 7.6m에 이르며, 지름은 29.3m, 둘레는 대략 70m 정도 된다. 능
을 받치는 석축(石築)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았고 그 위에 갑석을 둘렀으며 그
런 석축을 지탱하기 위해 44개의 튼튼한 호석을 주변에 둘렀다.

신문왕 이전 신라 무덤은 원형봉토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2지신상을 두른 진덕여왕릉(眞
德女王陵)과 김유신(金庾信) 묘가 있긴 하나 그들의 능인지도 확실치가 않다>
그러다가 신문왕릉
부터 능의 밑부분에 석축을 쌓고 호석을 두르는 형태가 나타났으며 2대 이후인 성덕왕릉(聖德王
陵)부터는 호석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기고 난간석을 두룬 형태로 업그레이드 된다. 즉 신
문왕릉은 동그란 흙무덤에서 12지신상을 갖춘 신라 후기 무덤 양식으로 넘어가는 중간단계로 그
의미가 크다.


▲ 신문왕릉의 정문 ~ 홍례문(弘禮門)

▲ 왕릉 앞에 펼쳐진 소나무의 향연 ~ 멋드러진 소나무 3그루


왕릉으로 들어서려면 홍례문이라 쓰인 삼문(三門)을 지나야 된다. 가운데 문은 제사 외에는 열릴
일이 없고, 보통은 우측문만 열려 있다. 홍례문 앞에는 주차장이 있고 허름한 가게가 하나 있을
뿐이다.

홍례문을 지나면 운치가 서린 소나무 3그루가 답사객을 맞이한다. 소나무의 모습은 능 주인의 혼
령이 깃들여서일까? 그 모습이 결코 예사롭지가 않다. 문과 가까운 소나무는 무려 3갈래로 가지
를 뻗어 자라났으며 제왕에 대한 예를 표하듯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푹 고개를 숙인
형태로 신비로움을 가득 자아낸다.

드넓은 묘역에는 잘 가꾸어진 잔디밭이 시원스런 느낌을 선사해 주며 석축을 두른 거대한 왕릉은
전제왕권과 죽어서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지키려고 했던 망자(亡者)의 부질함이 고스란히 담
겨져 있다. 저 무덤을 만들고자 얼마나 많은 신라 백성들의 피와 땀을 필요로 했을까? 아무리 제
왕이라고는 하지만 1명의 사후 공간 치고는 너무 넓은 것 같다.

능 앞에는 제사를 지내는 거대한 석상(石床)이 있는데 성덕왕릉의 석상에 비해 얕고 석재가 고르
지 못해 원래의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갖다놓은 것인지 의심스럽다.


▲ 왕릉 앞에 차려진 커다란 석상


능 주변을 가득 메운 44개의 호석은 덩치가 나보다 크다. 무덤이 크니 호석도 자연 클 수 밖에는
없는데 호석에는 세월의 때가 가득 끼어 있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다. 다만 신문왕 이후부터는
12지신상이 그 허전함을 메워주기 시작한다. 거대한 언덕이나 다름없는 왕릉에는 풀과 들꽃의 세
상이 펼쳐져 있다. 여름에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꽃송이의 마가렛(나무쑥갓)이 가득하여 마치 눈
송이가 아른거리는 듯 하다.


▲ 신문왕릉 호석

신라의 왕릉은 5릉과 무열왕릉, 성덕왕릉, 흥덕
왕릉, 경순왕릉 등을 제외하고는 무덤의 주인이
아리송하다. 이는 조선 후기에 신라 왕족의 후
손인 경주 김씨와 박씨, 석씨 집안에서 옛 기록
을 멋대로 해석하여 그럴싸한 옛 무덤을 그들의
조상 묘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능 이름 앞
에 보통 전(傳)을 붙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문왕이 붕어하자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했다. 허나 지
금의 신문왕릉은 낭산 남쪽에 있어 기록과는 전
혀 틀리다.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에는 효소왕(孝昭王)의 능이 망덕사 동쪽에 있다
고 하는데 그 위치가 딱 이곳에 해당된다. 그래
서 이곳을 효소왕릉으로, 낭산 동쪽 황복사지(皇
福寺址) 부근의 십이지석(十二支石)을 지닌 폐왕
릉(廢王陵)을 신문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답답하기는 매 마찬
가지다.


※ 신문왕(神文王 ? ~ 692 <재위 681 ~ 692>)

신문왕은 신라 31대 군주로 휘(諱, 제왕의 이름)는 김정명<金政明, 혹은 김명지(金明之)>, 자는
일초
(怊)이다. 문무왕의 큰 아들로 어머니는 자의태후() 김씨이며, 문무왕 4년(665년)
태자(太子)로 책봉되어 681년 7월 제위에 올랐다.

제위에 오른 그 다음달, 장인 김흠돌()이 불만을 품고 모반을 일으키자 장인을 비롯한 반
역 가담자를 모두 처단하고 왕비 김씨를 쫓아냈다. 이를 토대로 왕권은 한층 강화된다. 모반을
평정하자 보덕국(報德國, 전북 익산) 왕 안승(安勝, 고구려 왕족)은 사신을 보내 머리를 조아리
며 평정을 경하했다.

682년 정월, 내을신궁(奈乙神宮, 신라의 시조를 모신 신궁)에 제사하고 사면령(赦免令)을 내려
죄수를 방면했다. 여름에는 위화부령() 2명을 두어 선거() 사무를 맡게 했으며 6월
에 국립학교인 국학(國學)을 세워 학문을 장려했다.

683년 5월 김흠운()의 작은 딸을 맞아들여 왕비<신목왕후(新穆王后)>로 삼았으며, 10월 보
덕국왕 안승을 소판(蘇判, 3등급의 고위 관직)으로 삼아 경주에 머물게 하고 김씨 성을 내렸다.

684년 11월, 안승의 족자() 대문()이 금마저(渚, 전북 익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때려잡고 그 땅을 금마군()으로 삼아 그 지역 백성들을 남쪽으로 이주시켰다.

685년 봄,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와 서원경(西京, 충북 청주)을 설치했으며, 봉성사(

)와 망덕사()가 완성되었다.

686년 당나라에 예기와 문장을 청하니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관련서적 50권을 보내주었다.

689년 정월, 관리들에게 주던 녹읍()을 폐하고 해마다 조곡(穀)를 녹봉으로 주기로 했다.
(우리나라 사회경제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 9월에는 서원경(청주)에 성을 쌓고 달구
벌(達句伐, 대구)로 서울을 옮기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691년 3월 왕자 이홍(理洪)을 태자로 봉했으며, 사화주(沙火州, 경북 상주)에서 흰기러기를 진상
했다.

692년 당나라 중종이 사신을 보내 무열왕(武烈王, 신문왕의 친할아버지)의 묘호(廟號)를 왜 태종
(太宗)이라 했는지를 따졌다. 그 이유는 당나라 2대 황제 이세민(李世民)의 묘호가 태종인데 신
라가 마음대로 남의 묘호를 따붙였다는 것이다. 이에 신문왕은
'무열왕의 공과 덕이 커 태종이란
묘호가 충분하다'
답을 하니 당나라는 더 이상 항의하지 못했다. 그해 7월 왕이 붕어하자 시호(
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 태자 이홍이 그 뒤를 이으니 바로 효소왕
이다.

신문왕 시절의 신라는 당나라와 왜국(倭國)과 빈번하게 교류를 하였고 설총(薛聰)과 강수(强首)
등의 대학자가 등장하여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 신문왕릉 찾아가기 (2009년 7월 기준)
① 대중교통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에서 입실, 모화 방면 600번 계열 시내버스
를 타고 능마을 하차 (길가에서 바로 보임)

② 승용차 (왕릉 앞에 조그만 주차장 있음)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배반4거리에서 불국사, 울산 방면으로 우회전
→ 사천왕사터를 지나 3거리에서 옛 국도로 좌회전 → 신문왕릉

★ 신문왕릉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9시에서 18시까지 (겨울은 17시)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453-1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는 3주까지며,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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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1달까지임>
* 본 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동호회)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작게 처리된 사진은 마우스로 꾹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글을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공개일 - 2009년 7월 21일부터

Copyright (C) 2009 by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경주 성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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