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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3.10.23 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1바퀴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 흔들바위>
  4. 2023.10.15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서울 도심의 싱그러운 공간,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늦가을 나들이 <북악스카이웨이>
  5. 2023.05.26 금천구의 상큼한 뒷동산, 호암산 봄나들이 <호암산성, 석구상, 제2한우물, 신랑각시바위, 한우물, 불영암>
  6. 2023.02.06 서울 도심의 북현무를 거닐다. 북악산 한양도성 나들이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숙정문, 말바위>
  7. 2023.01.12 은평구의 작은 지붕들, 봉산 ~ 백련산 나들이 <봉산 봉수대, 서울둘레길7코스, 백련근린공원>
  8. 2022.10.19 성북동 북쪽 끝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삼각산 정법사 (복천암터, 산사길, 북악산길)
  9. 2022.07.30 서울의 동쪽 지붕이자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거닐기 (아차산둘레길, 긴고랑계곡, 아차산4보루, 서울둘레길2코스)
  10. 2022.04.13 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대구올레팔공산1코스, 시인 이상화고택 나들이

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봄꽃 나들이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조선 최초의 능, 정릉



' 정릉 봄맞이 나들이 '

정릉
▲  정릉

정릉 금천교 정릉 숲길

▲  정릉 금천교

▲  정릉 숲길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어루만지던 4월의 한복판에 조선 최
초의 능인 정릉을 찾았다.
서울 장안에는 도봉산(道峯山)부터 호암산(虎巖山)에 이르기까지 봄꽃 명소들이 무지하
게 많지만 역사와 자연이 오지게 어우러진 조선시대 왕릉(정릉, 의릉, 태강릉, 선정릉,
헌인릉 등)도 봄꽃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다. 하여 간만에 왕릉 봄 산책이
나 즐길 겸, 적당한 곳을 찾다가 집에서 가까운 정릉으로 길을 잡았다. 정릉은 이미 3~
4번 인연을 지었으나 다들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  정릉(貞陵) 입문

▲  정릉 세계문화유산 표석 앞 갈림길

정릉과의 첫 인연은 중학생 시절인 1990년대 초반이다. 지금이야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인터
넷 지도가 아주 훌륭하여 지독한 길치가 아닌 이상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정릉 이정표가 있음) 그때는 이정표가 너무 부실하여 찾기가 어려웠
다.
하여 2번에 시도 끝에 정릉동 골짜기에서 태연하게 숨바꼭질을 즐기던 정릉을 찾아내 술래 신
세를 면하게 되었다. 그 시절 정릉은 지금처럼 입장료를 받던 공개 구역이었으나 인지도가 낮
아 탐방객은 별로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정릉의 존재감은 슬슬 커져갔고 탐방객도 정
비례로 늘어갔다.

정릉 정문에 이르니 매표소가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정릉이 성북구 영역이라
성북구 주민은 50%를 깎아주나 나는 도봉구 사람이라 그 혜택을 전혀 받을 수가 없어 입장료
전액을 지불하여 유료의 공간, 정릉으로 들어섰다. (도봉구는 1973년 7월 성북구에서 분리되
었음)


▲  정릉 재실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2호

정릉으로 들어서니 왼쪽(남쪽)으로 재실과 보호수로 지정된 큰 느티나무가 눈짓을 보낸다. 정
릉에는 서울의 다른 조선 왕릉에는 없는 2가지가 있어 눈길을 끄는데, 바로 보호수 나무와 약
수터이다. (약수터는 지금 사라지고 없음)
보호수는 2그루가 있는데, 재실 앞 느티나무는 나이 약 380년, 나무 둘레 360cm, 높이 21m로
정릉에 있는 나무 중 가장 크고 늙었다. 4~5월에 황록색 꽃이 핀다고 하나 봄 햇살이 정릉 구
석구석을 넓게 어루만지는 4월의 한복판임에도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꽃은커녕 잎
도 없다. 이미 다른 나무와 꽃들은 봄의 향연에 한참인데 말이다.


▲  정릉 재실(齋室)의 행랑 외곽 모습

재실은 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陵參奉)의 생활공간이자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 좌우로 창고와 하인 방, 마구간, 집사방(執事房)을 갖춘 행랑(行廊)이
나오고, 안쪽 기와문을 들어서면 제사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재실 본채가 있다.

정릉 재실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12년에 발굴조사를 벌여 2014년에
복원했다. 그러다 보니 고색은 채 여물지 못했다. 비록 복원은 되었으나 딱히 놀려두기도 뭐
하여 다례체험 등 여러 전통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대문과 다양한 공간이 있는 행랑

▲  재실과 제기고로 인도하는
안쪽 기와문

▲  2칸짜리 제기고(祭器庫)
제사도구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  재실 본채
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능을 지키는 능참봉의 거처이자
영(令)이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  관리사무소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7호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도 앞서 보호수처럼 벌거숭이 상태이다. 추정 나이 200
년, 높이 17m, 나무 둘레 320cm로 정릉에서 2번째로 크고 늙은 나무인데, 계절 감각이 둔해진
것인지 아니면 게을러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여 겨울에서 깨어나 봄의 향연에 동참했으면 좋
겠다. (느티나무는 5월 초까지도 벌거숭이인 경우가 있음)


▲  금천교(錦川橋)

정릉 중심부로 들어서려면 계곡에 걸린 금천교를 건너야 된다. (금천교가 아니더라고 계곡은
꼭 건너야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음)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聖域)의 경계 역할 및 능으로 인도하는 돌다리로 현종(재위 1659~1674)
시절 정릉을 손질하면서 지어졌다. 다리 좌우 끝에 석축을 다지고 그 사이에 묵직하게 돌기둥
을 세운 다음 길쭉한 통돌을 걸쳐 놓은 단출한 형태로 다리 피부에는 세월이 입혀놓은 고색의
때가 자욱하여 고풍스런 멋을 한층 올려준다.


▲  금천교 주변 계곡

조선 왕릉과 궁궐에는 금천의 역할을 하는 물줄기가 꼭 있기 마련이다. 정릉은 북악산길(북악
스카이웨이) 북쪽에서 발원한 계곡이 그 역할을 담당하여 정릉을 촉촉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정릉 중심부 북쪽을 거쳐 바깥으로 흐른다. 허나 정릉 동쪽에 빼곡히 들어찬 주택가로 능 정
문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한 채, 정릉천으로 흘러가며, 북한산(삼각산) 정릉계곡에서 나온 정
릉천 또한 정릉2동부터 어둠의 경로로 흐르다가 종암동(鍾岩洞)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정릉 계곡은 크기는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적당히 섞여있고 흙이 많아서 어린이들이 놀기에는
아주 좋다. 허나 문화유산인 정릉 내부이니 요란하게 노는 행위는 절대 삼가하기 바라며, 손
만 담구는 정도에서 멈춰야 될 것이다.

▲  붉은 피부의 홍살문

▲  홍살문 옆에 닦여진 배위(拜位)

금천교를 건너면 길은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인다. (정면 길로 가면 관리사무소) 그 길을 들어
서면 쌀쌀맞게 생긴 붉은색 홍살문이 나타나 나그네로 하여금 절대 엄숙을 강조한다. 그는 왕
릉과 관아, 향교, 왕족과 사대부의 사당과 묘역 등 권력과 관련된 곳에 세우는 비싼 존재로
그를 들어서면 비로소 정릉 중심부에 이르게 된다.

홍살문 옆에는 돌로 다져진 네모난 배위<판위(板位)>가 누워있다. 이곳은 정릉을 찾은 제왕이
능 주인에게 절을 하는 곳으로 보통 4번 절을 했으며, 이를 국궁사배(鞠躬四拜)라고 한다. 현
재는 정릉 제향일에만 반짝 쓰이고 있어 꽤 한가해졌다.

그럼 여기서 잠시 정릉과 이곳 주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정릉 정자각 주변 (수라간, 수복방 등)

정릉은 서울의 영원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으로 정릉2동 서쪽 골짜기에 넓
게 누워있다. 능역(陵域) 동쪽과 남쪽은 정릉2동 주택가와 맞닿아있고, 북쪽은 정릉의 원찰(
願刹)이었던 봉국사(奉國寺, ☞ 관련글 보기) 남쪽에 이르며, 서쪽은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
이)과 정릉3동에 닿는다.
주택가와 매우 가깝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깊은 산골로 짙은 숲을 지니고 있으며 조촐한 계곡
과 그림 같은 숲길, 그리고 늙은 보호수도 2그루를 지녔다.

정릉의 주인은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1396)이다. 고종(高宗)
이 1897년 황제 위에 오르면서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높여졌으며, 태조는 태조고황제(太
祖高皇后)로 올려졌다. (정릉 안내문에는 '신덕고황후'라 나와있음)

신덕왕후 강씨(이하 강씨)는 곡산강씨(또는 신천강씨) 집안으로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
康允成)의 딸이다. 강씨의 숙부인 강윤충(康允忠)은 이성계의 큰아버지인 이자흥(李子興)의
사위로 두 집안은 제법 가까웠는데, 드넓은 동북면(東北面, 함경도와 길림성, 연해주 지역)
지역을 장악했던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조정에 출사하면서 강씨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때 강씨는 이성계보다 약 20살 정도 연하였다고 한다. (에구 부러워라~~)

이성계와 강씨의 첫 만남 설화는 꽤 유명한데 내용은 이렇다.
어느 평화로운 날, 사냥에 나섰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아리따
운 여인이 있었는데(아마 빨래를 했던 모양임) 그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하니 여인이 바가지
에 물을 담아 버들잎 하나를 물 위에 띄워주었다. 이성계는 이상하여 이유를 물으니
'급하게 마시면 탈이 날까봐 천천히 드시라고 그랬습니다'
답을 했다.
그 말에 이성계는 무한 감동을 먹었고, 마침 여인의 미모도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던 터
라 그녀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이다.

허나 로맨틱한 설화와 달리 강윤성은 이성계의 미래를 크게 보고 딸과의 혼인을 적극 추진했
고, 이성계 또한 개경(開京)에 마땅한 기반이 없는 상태라 사돈관계에 있고 개경 귀족들과 두
루 가까웠던 강씨 일가의 힘이 필요했다. 즉 두 집안과의 결속 강화와 미래에 대한 투자 차원
에서 혼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계는 개경에 있을 때 강씨 집에 머물렀다. 그가 요동반도에 있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
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강씨는 포천 철현(鐵峴)에 있는 전장(田莊)에 머물렀고, 만약을
대비해 동북면과 가까운 이천(伊川)의 한충(韓忠)집으로 거처를 옮겨 상황을 지켜보았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 크게 다치자 정몽주(鄭夢周)는 이
때다 싶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강씨는 이방원(李芳遠)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
으로 오게 했으며, 이방원이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살해하자
이성계가 크게 노발대발한 것을 강씨가 무마시켰다. 이렇듯 강씨는 이성계를 힘껏 도와 조선
개국을 이끌어냈으며, 이성계의 첫 부인인 한씨가 조선 건국 1년을 앞두고 세상을 뜨자 조선
의 첫 왕후<현비(顯妃)>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  비각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陵寢)

강씨는 태조와의 사이에서 경순공주(敬順公主, ?~1407)와 무안대군 이방번(撫安大君 李芳蕃,
1381~1398), 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李芳碩, 1382~1398)을 두었다. 그녀는 권력욕이 너무
커서 태조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과 연합해 태조를 설득하여 장남도 아닌 막내 이방석을
왕세자(王世子)에 앉히게 했다.
이렇게 후처 소생의 차남을 세자로 책봉하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제대로 뚜껑이 열렸다. 하
여 그들은 이방원<정안대군(靖安大君)>을 중심으로 강씨와 정도전 세력과 팽팽히 대립하게 된
다.

1396년 음력 8월 13일 강씨는 40대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크게 애통하여 도성
한복판에 능을 쓰게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 존호(尊號)를 신덕이라 했으며, 개국공신들의
건의로 공신수능제(功臣守陵制)를 받아들여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능 지킴이를 맡겼다.
또한 정릉 곁에 원찰인 흥천사(興天寺)를 크게 지어 매일 같이 찾아가 명복을 빌었으며, 흥천
사의 아침 종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아침 수라를 들었다. 그때 정릉은 덕수궁(경운궁) 북쪽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지며, 정릉 때문에 정동(貞洞)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1398년 정도전이 크게 방심한 틈을 노려서 이방간(李芳幹)과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다. 궁궐을
접수한 그들은 이복 동생인 이방번, 이방석 형제와 경순공주의 남편을 처단했고, 형제의 맏이
인 이방과(李芳果, 정종)를 왕위에 올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1차 왕자의 난이다. (경순공
주는 이후 비구니가 되었음)
그리고 1400년 이방간의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이방원은 형 이방과의 왕위를 물려받아 꿈에
그리던 옥좌(玉座)를 차지하게 된다.

이방원은 의붓어머니 강씨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태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크게
정릉을 건드리지 않았으나 1406년 정릉이 너무 넓다는 의견이 있어 정릉 100보 밖까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때 하륜(河崙) 등 권력가들이 너도나도 정릉 숲에서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니 그것이 정릉 수난의 시작이었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바로 이빨을 드러내며, 정릉 탄압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1409년 의정부(議政府)는 왕의 비위를 맞추고자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이 말이 안되며 명
나라 사신이 묵는 숙소와 가까워 도성 밖으로 옮겨야 된다고 하였다. 굳이 그런 것이 아니더
라도 도성 한복판에 능이 넓게 자리한 것도 솔직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태종은 의정부의 갸륵한 뜻을 받아들여 정릉을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곡으로 추방시켰고, 능
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지기 바쁜 광통교(廣通橋)를 돌다리로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동원했다. 이는 단순히 광통교 복구가 아닌 백성들이 정릉 석물을 밟고 지나가게 하
여 강씨를 길이길이 욕보이고자 함이었다. 또한 정자각과 일부 석물을 소환하여 태평관(太平
館, 명나라 사신의 숙소)을 짓는데 썼으며, 봉분을 깎아 무덤임을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석인
(石人)은 생매장시켰다.

능의 제례 또한 폐지되고 봄, 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으며, 서모(庶母)의 기신제(忌
晨祭)의 예에 따라 삼품관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한 후궁으로 격하시켜 후궁의 예로 제를
올리게 하였다. 강씨가 지하에서 크게 통곡을 했는지 능이 파괴되던 날, 폭우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전한다.


▲  수라간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과 소전대(燒錢臺, 밑에 보이는 석물)

태종 사후로도 정릉의 고통은 계속되었고 정릉의 존재는 속세의 뇌리 속에서 거의 잊혀져 갔
다. 겨우 후손들이 살짝살짝 제사를 챙겼을 뿐이다.
그러다가 1581년 강씨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이 선조(宣祖)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
가 엎드리면서
'소인은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國墓)에 봉사(奉
祀)하는 사람들의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 면제시켜 주십시요'
하소연했다. 즉 정릉을
지키고 있으니 군역 면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거의 잊혀졌던 정릉의 존재감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때 삼사(三司)에서는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 정릉을 회복하자는 의견을 올렸으나 수용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계
속 논의를 벌이다가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싹 마무리가 되었다.
송시열은 태종의 잘못된 조치로 정릉이 고통을 당했음을 바로 말하기가 애매해 그 시절 신하
들의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고 돌려 말하며,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있음을 지적하
여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현종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 1669년 태조의 왕후로 인정하여 종묘(宗廟)에 봉안했으며, 순원현
경(順元顯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능을 복구했다.
이때 정릉에서 강씨의 넋도 달랠 겸, 성대하게 제를 지냈는데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려서
사람들은 이를 두고 '강씨의 원한을 씻는 비'라고 하였다.

정릉 석물은 17세기 후반 것들이나 4각형 장명등(長明燈)과 혼유석(魂遊石)을 받치는 고석(鼓
石) 2개, 그리고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는 옛 정릉 것들이다. 즉 14세기 후반 것들로 조선 왕
릉에 설치된 석물 중 가장 늙은 존재들이 된다. 그리고 정자각과 비각 등은 모두 17세기 이후
것들이다.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을 이끌어냈던 강씨, 허나 지나친 권력욕으로 끝내 자식을 잃고, 남편
의 말로를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자신의 묘까지 태웠으니 인생무상, 권력무상이 따로 없
다. 왕후가 되면서 거기서 딱 절제를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게 안되었던 것이다. 물론 한씨
소생의 왕자(이방원, 이방과 등)들이 자신의 소생들을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방원 형제
들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나마 똘똘했던 막내를 세자로 세워 자식들의 불투명한 미래
를 지켜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궁궐은 그만큼 무서운 곳이니 말이다.
허나 강씨와 그의 친자식들은 결국 패배자가 되어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왔으니 역사의 패배자
가 어찌된다는 것을 아주 몸서리치게 보여준다.

정릉은 중구 정동의 지명 유래가 되기도 했지만 이곳 정릉동의 유래도 된다. 그래서 2개의 지
명이 정릉으로 인해 생겨났다.



 

♠  정릉 중심부

▲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박석이 입혀진 향로와 어로가 닦여져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참
도(參道)라고 하는데, 어로는 제왕이 걷는 길이며, 왼쪽에 조금 높은 향로<신도(神道)>는 제
향 때 향과 축문(祝文)을 들고 가는 길이다.
이곳 참도는 중간에서 'ㄱ'자로 90도 꺾이는데, 이는 지형 탓으로 정자각 정면에서 금천까지
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직선으로 홍살문을 두기에는 좀 비좁아 보인다. 하여 나름 융통성
을 발휘한 것이다.


▲  정자각(丁字閣)

참도의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정자각이 있다. 싹둑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丁'처럼 생겨서 정자각이란 쉬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자각은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제왕은 좌측 계단으로 올라가 제사를 치르고 반대쪽 우측 계
단으로 내려갔다. 건물 안에는 제향에 쓰이는 여러 상(床)들이 있는데, 거의 황색 피부를 지
니고 있다. 황색은 황제와 황후를 상징하는 색깔로 고종이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높이면서
제사상의 피부 색깔도 변하였다.

▲  신좌(神坐)
신, 즉 정릉의 주인이 제향 때 머무는
추상적인 자리이다.

▲  관세상(盥洗床)
제관이 손 씻을 물을 올려놓는 상이다.
여기서 관은 대야를 뜻한다.

▲  제물을 올려놓는 상
(정자각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  정자각 좌측 계단
왼쪽 계단은 정릉 주인의 혼과 참배를 온
제왕이, 그리고 오른쪽 계단은 신하와
아랫 사람들이 이용했다.


▲  수복방(守僕房)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측에 수복방과 비각이, 우측에는 수라간이 있다.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근무하는 건물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  정릉 비각
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의 거처이다.

▲  정릉 비석
'대한(大韓) 신덕고황후 정릉'이라 쓰여있다.

     ◀  수복방과 마주보고 있는 수라간
수복방과 비슷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제
향 때 제사 음식을 데우거나 손질하던 곳이다.
터만 아련하게 있던 것을 근래 복원하여 채워
넣었다.

능침 밑부분에 소전대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있다. 소전대란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오
로지 이곳 정릉과 태종의 헌릉(獻陵),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만 있는 희귀한 존재이다. 태
종 이후, 소전대가 사라지고 '예감'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정릉 소전대는 정릉이 이곳으로 추방되면서 같이 왔는데 오랫동안 정릉약수터 주변에 찌그러
져 있던 것을 정릉관리소 김용욱 소장이 발견하여 고증을 통해 이곳에 두었다. 정릉을 옮기는
과정에서 태종의 지시로 능 주변에 두지 않고 고의로 계곡에 처박아둔 것으로 여겨진다.
정릉의 한낱 석물에게까지 화풀이를 한 태종, 그만큼 의붓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컸던 것이며,
정릉이란 존재 자체도 그야말로 눈에 가시와 같았다.


▲  확대해서 바라본 정릉 능침

소나무숲에 감싸인 정릉 능침에는 커다란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 1기, 혼유석, 여러 석호와 석양이 배치되어 있다. 이중 장명등은 고려 양식을 이
은 14세기 후반 것이며,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 2개도 옛 정릉 출신이다.
예전에는 능 옆구리까지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통제구역으로 묶여 능침 자체를 올라갈 수
없다.


▲  정릉 북쪽 산책로에서 만난 넓적한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  봄이 깊어가는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의 젖줄인 계곡(금천)을 따라 그림 같은 산책로가 서쪽으로 이어져 있다. 이 길을 쫓아가
면 정릉 주변을 도는 2.5km의 숲길이 펼쳐지니 정릉 중심부만 살피지 말고 꼭 1바퀴 둘러보기
바란다. 즉 정릉 외곽을 도는 것으로 산책로 안팎이 모두 정릉 능역(陵域)이다.


▲  생태계가 살아있는 정릉 계곡(금천)

▲  봄 속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따뜻한 기운이 소리 없이 내리면서 푸른 잎과 온갖 꽃들이 기지개를 켠다.
그런 봄에 물들고 싶어서 저 속으로 나를 숨기러 간다.



 

♠  정릉 산책로 돌기

▲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 정자각 계곡 건너편)

정릉 숲길은 정릉 중심부와 맞닿은 북쪽 산책로만 평지이고 나머지는 모두 산길이다. 능이 첩
첩한 산골에 묻혀있기 때문에 숲길을 거닐다 보면 자연히 약간의 등산도 하게 된다. 허나 경
사가 그리 각박하지 않고 길이 잘 닦여져 있어서 두 다리만 멀쩡하면 어린이와 노인도 거뜬히
1바퀴 돈다.


▲  정릉 북쪽 산책로 (옛 정릉약수터 주변)

▲  이제는 과거가 되버린 정릉약수터(정심약수터)

정릉 서쪽에는 정릉약수터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약수터까지 갖
추고 있던 정릉에서 특별히 맛볼 수 있는 자연산 수분으로 물이 졸졸 알아서 나오는 약수가
아니라서 직접 챙겨 먹어야 된다. 능 제사에 쓰이는 물은 모두 여기서 가져왔으며, 정릉2동
사람들이 많이 물을 떠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음)


▲  서남쪽으로 꺾이는 정릉 산책로

▲  봄꽃의 마지막 물놀이 현장 (정릉 계곡)
4월 초를 짧게 주름잡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훔쳐갔던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계곡에서 생애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계곡은
저들의 인생을 정리하는 조그만 블랙홀인 모양이다.

▲  정릉 서쪽 숲길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전까지는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  지그재그 율동을 부리는 정릉 서쪽 숲길

▲  동그란 석축에 뿌리를 내린 벚꽃나무 (정릉 서남쪽 숲길)

▲  정릉 서남쪽 숲길 ①

▲  정릉 서남쪽 숲길 ②

정릉 서남쪽 끝에는 서울의 대표 지붕길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이 흐르고 있다. 정릉에
는 북악산길을 향해 2개의 소방문을 내고 있는데 이들은 업무와 비상용 문이라 관람객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하여 둘이 맞닿아 있음에도 철책을 사이에 두고 서로 금지된 땅 보듯 해야
된다. 현재 정릉은 정문으로만 통행이 가능하여 무조건 그곳으로 오가야 되는데, 북악산길도
서울의 주요 꿀명소인만큼 비상용문 하나를 따고 매표소를 두어 서로 왕래가 가능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정릉~북악산길~성북동(길상사, 삼청각, 간송미술관 등)/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부암동/북한산(삼각산)'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나들이/도보 코스가 만들어진다.

서울시청과 성북구청, 문화재청 철밥통들은 거지 같은 탁상행정으로 세금이나 빼먹지 말고 저
런 것들도 적극 검토해 추진해주었으면 좋겠다.


▲  북악산길(오른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을 지나는 차량들의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  북악산길(왼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②
북악산길을 코앞에 두고 입맛만 다셔야 되니 은근히 아쉽기만 하다.
서로를 잇는 것이 천하통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일까?

▲  정릉 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까지 올라온 숲길은 다시 내리막으로 변신한다.

▲  정릉 남쪽 숲길 ②

▲  정릉 남쪽 숲길 ③

▲  정릉 능침 바로 윗쪽 쉼터

정릉 남쪽 숲길은 중간에 3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서쪽)으로 가면 앞서 서쪽 숲길로 빠
지며,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정릉 정문, 그리고 직진(북쪽)하면 위와 같은 쉼터가 나온다.
허나 그 쉼터는 막다른 곳으로 다시 갈림길로 나와야 된다. 허나 쉼터 주변으로 철책이 없어
서 자칫 숲으로 막 내려갈 수도 있는데 여기서 북쪽 숲으로 내려가면 바로 정릉 능침이다. 능
침 주변은 금지된 구역이니 굶주린 공비들처럼 숲을 막 헤집고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냥 쉼터
에서 얌전히 쉬다가 갈림길로 그냥 사라져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정릉 남쪽 숲길에서 서쪽 숲길을 잇는 사잇길

갈림길에서 바로 정문으로 내려가기는 다소 아쉬워서 서쪽 숲길로 향하는 사잇길로 우회해서
갔다. 정릉 북쪽 산책로를 거쳐 정릉 정문을 나오면서 2시간에 걸쳐 아주 여유롭게 진행된 정
릉 봄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정릉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 87-16 (아리랑로 19길 116, ☎ 02-914-5133)
* 정릉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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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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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소금강, 금정산 금강공원 겨울 나들이 <동래온천 온정개건비,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부산의 소금강, 금강공원


' 부산의 소금강을 거닐다. 금정산 금강공원 '
금강공원 소나무숲
▲  금강공원 소나무숲
 



 

새해를 코앞에 둔 12월 끝 무렵의 어느 덜 추운 날, 우리나라의 2번째 대도시이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인 부산(釜山)을 찾았다.

이번 부산 나들이는 운 좋게 얻은 수서고속전철(SRT) 무료 쿠폰을 이용해 아주 기분 좋
게 다녀왔는데, 새벽의 차디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 7시에 수서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고속전철(SRT)에 몸을 싣고 2시간 20여 분을 달려 경부선의 남쪽 종점인 부산역에
두 발을 내렸다.

부산은 북쪽으로 울산(蔚山) 울주군, 서쪽은 경남 창원(昌原)과 맞닿아 있으며, 동쪽은
동해바다에 접해 있고, 남쪽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이른다. 벌써 70번 넘게 인
연을 지은 곳이라 딱히 땡기는 미답처(未踏處)가 없어 아주 부질없는 추억팔이도 할 겸,
가슴을 시리게 했던 옛 추억이 아련히 깃든 몇 곳을 그날의 메뉴로 삼았다.

부산에 이르자 제일 먼저 서면(西面) 부근에 자리한 선암사(仙巖寺, ☞ 관련글 보기)를
둘러보고 즐거운 추억이 여러 겹이나 쌓여있는 해운대(海雲臺)로 넘어가 늦은 점심으로
소고기국밥 1그릇을 말았다.
그렇게 시장한 뱃속을 달래고 저 앞에 아른거리는 해운대 해변도 간만에 가볼까 했으나
해가 짧은 시기라 쿨하게 접고 해운대역(2호선)에서 부산시내버스 31번(송정↔모라주공
아파트)을 타고 동래(東萊)로 넘어가 온천장 뒤쪽에 있는 금강공원을 찾았다.

동래의 뜨거운 현장인 온천장(溫泉場, 동래온천지구)을 지나다가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 잠시 금강공원을 접어두고 온천장 거리를 배회하니 나를 여기로 부른 용각과 온정
개건비가 활짝 마중을 나온다.



 

♠  동래온천의 빛바랜 일기장과 온천 용왕신의 공간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와 용각(龍閣)


▲  온정개건비(부산 지방기념물 14호)와 욕탕으로 쓰였던
옛 석조(石槽)


천하 제일의 온천으로 오랫동안 명성이 높았던 동래온천(東萊溫泉)은 해운대온천과 더불어 부
산 지역의 대표적인 온천이다. 동래온천 일대를 흔히 온천장이라 부르고 있으며, 동래 지역의
뜨거운 혈맥이자 꿀단지 같은 존재이다. <온천은 온정(溫井), 탕천(湯泉)이라 불리기도 했음>

동래온천이 속세를 향해 언제부터 뜨거운 맛을 보여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신문왕(神
文王, 재위 681~692) 시절 재상을 지냈던 충원공(忠元公, 김충원)이 683년 장산국(萇山國) 온
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桐旨) 들판에서 쉬었다는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록이 있다. 여기서 장산국온천이 동래온천이라고 하니 적어도 신라 중기부터 온
천으로 쓰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온천물이 얼마나 좋은지 계란이 익을 정도로 물이 뜨겁고 병든 사람이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
다고 하며<온정개건비에 '탕에 들어가 목욕하면 모든 질병을 고친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있음
> 고려 후기 문신(文臣)인 정포(鄭誧, 1309~1345)가 이곳을 다녀가 온천에서 받은 감동을 시
로 남기기도 했다.

온천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와 욕실이 지금까지 남아있네
물줄기 오는 곳 멀지 않으니 욕조가 항상 따뜻하네
1년을 질병에 시달린 몸 반나절 목욕으로 씻은 듯하네


1617년에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중풍을 치료하고자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
은 적이 있었다. 그는 정포의 후손이기도 한데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지역 선비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30일이나 머물면서 온천욕을 41회나 했다. 그의 동래 나들이는 제자들이 세심
하게 정리하여 기록을 했으니 그것이 바로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이다. <여기서 봉산은 동
래의 별칭임>
그 기록에 따르면 동래온천에는 신라 제왕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돌로 된 욕조가 있었으며, 욕
조 하나는 5~6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욕조 윗부분 돌구멍에서 온천수가 나왔고 소문
대로 너무 뜨거워 손발을 급하게 담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온천 본전을 뽑고 그해 9월 4일 고향 칠곡(漆谷)으로 돌아왔는데, 안색과 기혈이 전보
다 좋아져 사람들이 목욕의 효과라고 찬양했다. 정구는 그의 조상인 정포처럼 동래온천의 덕
을 톡톡히 본 것이다.

1691년 온천의 옛 천원(泉源) 부근을 파서 새로운 천원을 발견해 돌로 다진 2개의 욕탕과 욕
사(浴舍)를 새로 지었다. 1730년과 1740년에 중수했으나 건물이 낡고 탕까지 막히자 1765년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 1713~1767)가 크게 손질하여 남탕과 여탕을 나눈 9칸짜리 건물을 지
으니 그 모습이 마치 상쾌하고 화려해 꿩이 나는 것과 같았다고 했다.
동래 지역의 큰 경사였던 그 중수를 영원히 기리고자 1766년 온정개건비를 세웠으며, 비문(碑
文)은 동래 유생인 송광적(宋光迪)이 작성했다.

비석의 몸매는 높이 1.47m, 폭 64cm, 두께 21cm로 10행x16자가 쓰여져 있으며, 그 앞에는 욕
조처럼 생긴 석조가 누워있으니 그가 바로 조선 후기에 쓰였던 욕조(浴槽)로 유일하게 1기만
남아있다. 거의 1인용 수준인 저 탕에 몸을 푹 끓이는 기분은 과연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온정개건비 자리에서 온천수를 뽑아 올렸으며, 이후 물 뽑는 자리가 바
뀌면서 지금은 동래온천의 과거를 보관하는 공간이 되었다.


▲  삼문으로 이루어진 용각의 정문, 온정용문(溫井龍門)

온정개건비와 옛 욕조는 용각 뜨락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용각은 온천수를 관리한
다는 용왕<龍王, 용왕신>이 봉안된 건물로 매년 음력 9월 9일에 온천수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용신제(龍神祭)를 지내며 착한 품질의 온천물이 계속 나오기를 염원한다.
온천장의 성역과 같은 곳이라 관리와 정성이 대단하며, 제삿날과 일부 날을 제외하고 용 문신
이 굵게 그려진 온정용문은 굳게 닫혀 있어 내부 진입은 거의 어렵다. 허나 붉은 피부로 이루
어진 키 작은 담장 너머로 온정개건비와 옛 욕조, 용각 모두 확인이 가능하니 굳이 무리를 하
면서까지 담을 넘을 필요는 없다.


▲  용왕이 봉안된 팔작지붕 용각

용각을 둘러보고 잠시 넣어두었던 금강공원으로 길을 향했다. 온천장을 벗어나 '금강공원로'
를 따라가던 중, 계속 뭔가 허전한 구석을 느꼈다. 골목에 꽉 차게 들어앉아 금강공원의 관문
역할을 했던 망미루(望美樓)가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이상하다 어디 갔지?' 싶어 고개를
몇 번이나 두리번거렸는데 알고 보니 2014년에 그의 제자리였던 동래부 동헌(東軒)으로 이전
되었다.

금강공원로 끝에는 금정산(金井山)의 동쪽 밑도리를 가르는 '우장춘로'가 있는데, 그 길로 접
어들면 금강공원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 온정개정비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135-26 (금강로124번길 23-17)



 

♠  부산의 작은 소금강(小金剛), 금강공원(金剛公園)

▲  금강공원 정문
정문 옆에 입장료를 징수했던 옛 매표소의 흔적이 남아있다.


금정산 동남쪽 자락에는 부산의 소금강이자 대표적인 공원으로 추앙을 받는 금강공원이 넓게
누워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기암괴석, 계곡이 어우러진 수려한 절경을 자랑해 마치 작은 금강산(金剛
山)과 같다 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렸는데, 1940년 왜정(倭政)에 의해 공원으로 개발되
어 금강원이라 불렸으며, 1972년 부산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공원 전체가 문화재 보호구역이
되었으나 1993년 지방기념물에서 정리되면서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해방되었다.
1973년 6월부터 입장료를 받으면서 31년간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쳐다보았으나 2004년
7월 무료로 바뀌었다.

공원의 면적은 2,220,372㎡로 금정산 540m 고지까지 빠르게 이어주는 금강케이블카가 있으며,
임진동래의총과 금정사,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 부산민속예술관, 이영도 시비(詩碑), 지석영
선생 공덕비, 허종배선생 기념비 등의 많은 명소를 품고 있다. 동래 중심지에서 강제로 이전
된 독진대아문과 이섭교비, 내주축성비 등도 잠시 이곳의 신세를 졌으나 모두 제자리로 돌아
가 지금은 임진동래의총만 남아있다.

마치 아무렇게나 놓여진 바위가 계곡과 어우러져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빚어내고 있으며, 거
미줄처럼 닦여진 산책로가 그 절경 사이를 가르고 있어 나들이를 심심치 않게 해준다. 금정산
까지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빠르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금강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되며, 공원
안쪽에는 소나무 숲을 지붕으로 삼은 둘레길이 펼쳐져 있다.

이 공원은 벌써 3번째 인연으로 상큼한 추억이 서린 현장이기도 하다. 그 현장을 이렇게 홀로
다시 찾으니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공원은 거의 그대로인데 예전의 추억은 흩어진 나날의 일
부가 되어 기억 조차 희미하고 '나'라는 존재도 그 사이 적지 않게 나이가 누적되면서 볼품이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 모든 것이 참 덧없기만 하다.

* 금강공원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1동 27-9 (우장춘로 155 ☎ 051-860-7880)
* 금강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종두법(種痘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 선생 공덕비

송촌(松村) 지석영(1855~1935)은 서울 출신으로 부산과도 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20대 초
반 부산 제생원(濟生院)에서 종두법(種痘法)을 익혀 이 땅에서 천연두를 완전히 뿌리뽑는데
공헌했으며, 1895년에는 동래부사로 부임해 선정(善政)을 베풀고, 왜인(倭人)의 밀수 무역을
때려잡기도 했다.


▲  거북바위 (금강케이블카 남쪽)
거북이 몸을 잔뜩 움츠린 듯한 모습이다.

▲  금강공원의 자랑, 소나무 숲길

▲  대자연의 돌 창고는 아니었을까? 돌과 바위로 가득한 금강공원
금강공원의 제일 큰 매력은 공원 곳곳에 널린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돌덩어리들이다. 왜정이 이곳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그들의 어설픈
조경(造景) 방식에 따라 배치한 바위도 있지만 상당수는
거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  제자리로 돌아간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터

독진대아문은 동래부 동헌의 바깥 대문으로 왜정 때 이곳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2014년 12월
망미루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그가 80여 년 동안 발을 붙였던 자리에 작게 표석을 세워
떠나간 그를 추억한다.

독진대아문 안쪽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강제로 옮겨진 이섭교비(利涉橋碑)와 내주축성비(來州
築 城碑)가 있었으나 2012년 9월 다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섭교비는 낙민치안센터 앞 둑,
내주축성비는 원래 자리(동래경찰서)가 어려워 동래읍성 북문으로 옮겨짐>


▲  빛바랜 동래금강원 표석(표지석)
독진대아문터를 지나면 왜정 때 세워진 동래금강원 표석이 모습을 비춘다.

▲  금강공원 연못
금정산이 베푼 물을 막아서 만든 그림 같은 연못으로 연못 한복판에
돌다리를 다져 풍경을 한껏 돋군다.

▲  북쪽에서 바라본 연못
물 색깔이 유난히 푸르다. 그 속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유유자적하며
그들의 삶터를 지킨다. (수심이 2~3m 정도 됨)

▲  서쪽에서 바라본 연못

▲  소나무숲을 가르며 흘러가는 금강공원 둘레길

예전 금강공원에 왔을 때는 딱 독진대아문 자리까지만 가고 길을 돌렸다. 그 이상은 딱히 볼
거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여 이번에는 그 선을 넘어 미답의 공간으로 남아있
던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 보았는데, 푸른 연못과 돌다리, 그리고 소나무숲과 둘레길까지 오히
려 독진대아문 밑보다 풍경이 훨씬 진국이었다. 나의 그릇된 생각이 공원의 진풍경을 만나지
못하게 시야를 가렸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금강케이블카를 타고 금정산성까지 훌쩍 올라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되지 않는
다는 이유로 공원 위쪽에서 길을 접고 북쪽 방향 둘레길로 들어섰다.
둘레길은 그윽하게 우거진 소나무들이 하늘을 훔치며 늘씬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들이
베푼 솔내음이 속세에서 오염된 오각과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중간에 계곡과 연못, 쉼
터가 있으며, 걷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  계곡과 만나는 금강공원 둘레길
수심이 얕은 조그만 소(沼)가 길 옆에 펼쳐져 있다.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①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②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③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④

▲  계곡을 막아서 다진 금강공원 북쪽 연못

금강공원 둘레길을 이 정도 거닐고 임진동래의총을 보고자 동쪽으로 내려갔다. 부산민속예술
관 옆을 지나 남쪽으로 빠지면 태극 문신을 지닌 기와집 문(외삼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들어
서면 그 길의 막다른 곳에 금강공원의 유일한 사적(史蹟)인 임진동래의총이 있다.



 

♠  금강공원의 문화유산들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  임진동래의총 정문인 외삼문(外三門)

외삼문은 오른쪽 문만 반 정도 열려 있었다. 태극마크가 요동치는 가운데 문과 왼쪽 문은 제
향이 있는 날에만 주로 열리므로 평소에는 굳게 입을 봉하고 있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20기의 늙은 비석들이 1열로 늘어서 조촐하게 비석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들 비석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들로 동래 시가지 정비로 이곳으로 강제 집합된 것
인데, 대부분 동래부사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이다.
지붕돌을 지닌 비석과 대머리처럼 허전한 비석, 푸른 피부의 비석까지 부산 인구만큼이나 다
양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저들 중 진정으로 선정비(불망비)를 받을 자격이 되는 목민관
(牧民官)이 얼마나 있을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비석들에게 묻고 싶다. 아마도 적지 않은 비석
들이 그와 상관없이 지어져 외람되게 선정비를 칭하고 있을 것이다.

▲  외삼문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비석들 (모두 20기임)

▲  임진동래의총으로 인도하는 길 ▲
외삼문에서 내삼문 구간 길바닥에는 박석이 꼼꼼히 입혀져 있다. 무덤 주위로
소나무가 삼삼하여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하며, 길 왼쪽
담장 너머는 금정사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임진동래의총 내삼문(內三門)
내삼문도 오른쪽 문만 반 정도 열려있다.

▲  임진동래의총 충혼각(忠魂閣)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동래의총이 이곳에 안착했던 1974년에
지어졌다. 충혼각 바로 뒤쪽 높은 곳에 임진동래의총이 있으며, 보통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무덤에 예를 표하고 왼쪽 계단으로 내려오면 된다.

▲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 부산 지방기념물 13호

임진동래의총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동래 사람들이 안
장되어 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진(釜山鎭)을 점령한 왜군은 동래부의 중심인 동래성을 공
격했는데, 성을 지키는 유리한 입장임에도 왜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 앞에 금방 털리고 만
다.
이때 전사하거나 살해된 동래성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은 대부분 남문 해자(垓子)와 그 부근에
버려졌는데,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동래읍성을 수축했을
때 옛 남문터에서 적지 않은 유골과 포환(砲丸),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하여 그 시신을 거두
어 삼성대(三姓臺) 서쪽 구릉지(내성중학교 부근)에 6개의 무덤을 만들어 안장하고 '임진전망
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란 비석을 세웠다. 그것이 이 무덤의 첫 이름이다.

조선 조정에서 제사 비용을 위해 제전(祭田)을 내리고 동래향교에 제사를 맡겨 매년 한가위에
제를 지내게 했으며, 순절일(4월 15일)에는 관에서 장사(壯士)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왜정은 토지개간을 이유로 무덤을 영보단(永報壇, 복천박물관 자리) 부근으로 강제 이장시켰
는데, 이후 비석도 그곳으로 추방시켰다. 그러다가 1974년 복천동 개발로 다시 짐을 싸고 지
금의 자리에 안착했으며, 그때 '임진동래의총'으로 이름을 갈았다. 즉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
서 순절한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이란 뜻으로 여기서 '총(塚)'이란 주인을 모르는 무덤에 붙
이는 이름이다.
제향은 동래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5일에 무덤 밑에 있는 충혼각에서 지내고 있으며, 동래구
청에서 직접 주관하고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임진동래의총

임진동래의총과 충혼각은 동래읍성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정에 의해 제자리를 떠났
던 망미루와 독진대아문, 이섭교비 등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쁨을 누렸지만 임진동래의
총은 제자리에 이미 건물이 들어찬 상태이다. 그렇다고 그 부근으로 옮기자니 무덤의 덩치도
크고 딸린 식솔(충혼각, 외삼문, 내삼문, 돌담)도 많아 그들을 수용할 자리가 여의치 않다.
하여 무덤만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곳에 눌러 살고 있다. 허나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이곳도 자리가 괜찮아 계속 머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무덤 앞에는 제물을 올릴 수 있는 상석(床石) 1기가 누워 있으며, 무덤 밑도리에는 호석을 둘
렀는데, 무덤 정면 밑에는 제를 지내는 충혼각이 있고, 뒤쪽에는 담장을 둘러 성역의 경계를
구분 지었다. 이 담장은 외삼문에서 임진동래의총까지 빙 둘러져 있다.

* 임진동래의총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산 17-7


▲  충혼각 옆구리에 있는 '임진전망유해지총' 비석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세운 것으로 비문은 그가 작성했다. 비석 높이는 103cm,
너비 45cm로 앞면에는 '임진전망유해지총' 8자를, 뒷면에는 10행 분량으로
무덤의 내력을 기록했다.

▲  금정사 보제루(金井寺 普濟樓)

임진동래의총을 둘러보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금정사로 넘어갔다. 비록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서로를 이어주는 문이 닫혀져 있어 외삼문으로 나가 보제루로 빙 돌아가야 된다.

금정사 자리는 원래 동래부 사형장으로 죄인들의 목을 가차없이 썰었던 으시시한 곳이다. 바
로 그 현장에 1954년 승려 금우가 그 원혼을 달랜다며 인적도 거의 없던 이곳에 절을 세웠다.
석주가 중건하여 선학원(禪學院)에 등록했으며, 현재 대웅전과 보제루, 칠성각, 요사 등 5동
정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이 있는데 바로 그를 보고자 간만에 금정사에 발을 들였다.

* 금정사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282 (우장춘로 157-59 ☎ 051-555-1208)


▲  소나무숲에 감싸인 고적한 금정사 경내 (정면 건물이 대웅전)

▲  보제루 부근에 자리한 5층석탑

▲  대웅전 옆구리에 있는 칠성각(七星閣)


▲  대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15호

금정사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멀리 전북 완주군(完州郡)에서 넘어온 것
이다.
1677년 혜희(慧熙)를 중심으로 한 7명이 제작하여 고산현(완주군 북부) 대둔산(大芚山) 용문
사(龍門寺)에 봉안했던 것으로 그 절이 사라지자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곳에 안착했다. 좌우
에 조그만 협시보살(夾侍菩薩)은 그의 허전한 옆구리를 채워주고자 근래 붙여놓은 것으로 서
로간의 덩치가 너무 차이가 나 마치 아비와 어린 자식들이 나란히 앉아 가족 사진을 찍는 것
같다.

머리는 나발(꼽슬)로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으며, 신체에 비해 머리와 얼
굴이 지나치게 크다. 고개는 앞으로 조금 내밀어 밑을 굽어보는 모습인데, 이는 조선 후기 불
상에서 많이 나타난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정면 밑을 바라보고 있으며,
코와 붉은 입술은 조그맣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몸통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수인(手
印)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무릎의 너비가 상반신보다 넓어 안정감이 있으
며, 법의가 발까지 모두 가리고 있다.

이 불상이 속세의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그의 뱃속에서 복장유물(腹臟遺物)이 나왔기 때문이
다.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7종 8점의 경전류, 목판으로 찍어낸 수백 매의 다라니가 쏟아져 나
왔는데, 조성발원문을 통해 그의 탄생시기와 고향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대웅전의 주인 역할
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석가여래상 옆을 지키던 협시상으로 다른 협시상은 전주(全州) 일출암
에 있다고 한다.
후령통에서는 조성발원문 외에 그 시절 흔치 않았던 동으로 만든 오보병(五寶甁)이 나왔고 경
전류에서는 당시 훈민정음(訓民正音) 표기법이 남아있어 국문학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어준
다. 게다가 판각 연대도 나와 있어 조선시대 만다라 연구에도 좋은 단서를 제공해준다. 바로
옛 사람들의 그런 배려가 불상의 과거는 물론 그 시절의 여러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고
그것들이 이 아미타불을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이다.
복장유물은 절에서 따로 관리하고 있어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나 그들을 오랫동안 품었던 아미
타여래좌상은 이렇게 대웅전에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금정사를 둘러보니 벌써 17시가 넘었다. 어둠의 기운이 스르륵 내려와 밝은 기운을 잡아먹으
니 햇님도 그 등쌀에 떠밀려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한다. 비록 낮은 짧지만 그날 목적한 정처(
定處)를 싹 둘러보니 은근히 배가 부르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고, 당일 일정으로
콩 볶듯 내려왔기 때문에 다시 나의 제자리로 돌아가야 된다. 아무리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속
열차가 2시간대로 연결해준다고 하지만 여전히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온천장 부근에서 저녁으로 순대국밥을 섭취하고 지하철로 구포역(龜浦驛)으로 이동하여 서울
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고된 몸을 실었다. 부산으로 올 때는 고속열차(무료 쿠폰 사용)로
왔으나 제자리로 돌아갈 때는 느림의 미학도 느낄 겸,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빈약한 내 지갑
의 사정도 고려할 겸, 빨간색 무궁화호를 이용했다.
열차표를 판매하는 구포역 역무원이 은근히 고속열차를 권하며(무궁화호를 타면 지하철 막차
못탑니다. 이런 식으로) 나의 지갑을 자꾸 흥분시키려고 했지만, 빨리 가나 느리게 가나 서울
만 가면 되고 서울의 교통과 지리는 지구에서 본인을 능가할 사람이 없으므로 흔쾌히 거절했
다. <역무원의 지하철 막차 설교에 속으로 몇 번을 웃었는지 모름>

서울역까지는 5시간이 걸려 자정 너머에 도착했으며,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나의 제자
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문득 깨어보니 난 내 방에 있었다. 부산에 갔다온 것이 아리송할 정도
로 말이다. 그렇게 그날은 흩어져 나의 기억력까지 햇갈리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벌처럼 날라가 개미처럼 올라왔던 부산 연말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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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1바퀴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 흔들바위>

서울 안산 (안산자락길, 무악동봉수대)



' 서울 도심의 서쪽 뒷동산, 안산 '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안산 남쪽 자락

▲  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안산 남쪽 자락

안산 잣나무숲길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길

▲  안산 잣나무숲길

▲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길

 



 

봄을 몰아낸 여름 제국(帝國)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6월의 끝 무렵, 서울 도심의 서
쪽 뒷동산인 안산(鞍山)을 찾았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 깃든 봉원사(奉元寺, ☞ 관련글 보기)에서 길을 시작하여 15분 정도
숲길을 오르니 무악정이란 2층 정자가 마중을 나온다. 무악정은 근래에 지어진 8각형 정
자로 여기서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내려가면 홍제1동과 연희동(延禧洞)
으로 이어지며, 동쪽 길을 10여 분 오르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이다. 그럼 여기
서 잠시 안산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녹음에 잠긴 안산 숲길 (봉원사에서 무악정으로 오르는 길)



 

♠  안산의 지붕, 무악산 동봉수대(毋岳山 東烽燧臺)

▲  정상 입구에 자리한 무악정(毋岳亭)

서울 도심 서쪽에 누워있는 안산은 해발 295.9m의 조촐한 산이다. 대륙을 향해 뻗어가는 의주
로(義州路)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338m)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홍제천(弘濟川)을 사이에 두고 백련산(白蓮山)과 이어진다.
산의 영역은 남쪽으로 천연동(天然洞)과 북아현동(北阿峴洞), 북쪽은 홍제동과 연희동, 동쪽
은 의주로, 서쪽은 서대문구청 뒷쪽과 연세대에 이르며, 남북으로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3km
내외이다.

안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습이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싣고자 걸치는 길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된 것으로 길마재라고도 부른다. <안(鞍)은 안장을 뜻함> 모래내, 추모련, 무악산이란 이
름도 지니고 있으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서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안산에 대한
속세의 관심이 지대했다는 뜻이다.
서울의 남주작(南朱雀)인 남산(南山, 목멱산)보다는 조금 높으나 인왕산과 서울의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보다는 조금 낮으며, 이들 산과 비슷하게 덩치도 고만고만해
아무리 산행을 길게 잡아도 2시간 내외면 충분하다. 또한 바위와 벼랑이 많은 동쪽 정상부를
제외하면 산세가 완만하고 산길이 잘 닦여져 있어 누구든 부담 없이 안길 수 있으며, 조망도
일품이고 수맥도 풍부하여 20여 개의 약수터가 나그네의 목마름을 어루만진다.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인왕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서북쪽으로 둘러싼 형태로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주요 요충지이다. 하여 산을 둘러싼 다툼도 여럿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1623년에 일어났던 이괄(李适)의 난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의 주역이던 이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
으켜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
祖)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충청도 공주(公州)로 급하게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인조의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쳤는데,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
췄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사람들이 대체로 하얀 옷을 즐겨입다
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면서 도성을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까지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이때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후금(後金)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청태종(淸太
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래서 그 푸닥거리로 일
어난 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청나라군이 안산과 무악재의 눈치를 보며 서울로 진격
했고, 1950년 9월에는 인천(仁川)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고자 북한군과 격전
을 벌였다.

안산의 품으로 들어서려면 서대문구청이나 홍제천 인공폭포(연희숲속쉼터). 봉원사, 천연동,
독립문파크빌, 무악재역, 홍제1동, 한성과학고 등지에서 접근하면 된다. 또한 서대문구청에서
안산자락길이라 불리는 둘레길(7km)을 야심차게 닦아놓았는데,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
행길 10선'에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격하게 칭송을 받고 있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 지역의 주요 고찰(古刹)이자 영산재(靈山齋)의 성지(聖地)인 봉원
사가 있고, 산 동쪽 정상에는 무악산 동봉수대가 있으며, 연희숲속쉼터와 안산자락길, 메타세
콰이어숲길, 잣나무숲길 등의 명소가 준비되어 있어 지루할 틈이 거의 없다.


▲  안산 동쪽 정상 밑에 자리한 헬기장
(서쪽 정상과 동쪽 정상 사이)

▲  안산 동쪽 정상에 씌워진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지방기념물 13호

하늘과 맞닿은 안산의 지붕에는 2개의 봉우리가 봉긋 솟아있다. 이중 서쪽 봉우리가 안산 정
상으로 안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그곳에는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이 100% 통제되어 있다. 하
여 자유로운 공간인 동쪽 봉우리(동쪽 정상)가 실질적인 정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 서쪽 봉우
리보다 약간 낮을 뿐, 높이는 거의 비슷하며 바로 그 봉우리에 무악산 동봉수대(문화재청 지
정 명칭은 '무악산 동봉수대터')가 천하를 굽어보며 요새처럼 자리해 있다.

봉수대는 불을 피워 연기와 불빛을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서울로 빠르게 전달하던 것으로 주
로 산 정상에 자리를 닦았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 봉수대의 역할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고 그 봉수대를 이용한 봉수체제가 그나마 제일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비와 눈이 내려 연기가 여의치 못할 때는 봉수지기가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조선시대 봉수제(烽燧制)는 1438년에 확립되었는데, 그때 무악산(안산) 정상에 봉수대가 만들
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악산은 안산의 다른 이름으로 안산과 인왕산 경계에 자리한 무악재에
서 비롯됨)
지금은 동봉수대 1개 밖에 없지만 원래는 2개로 동,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봉수대는 조선의
제3봉수로(烽燧路)의 경유지로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시작하여 황해도(黃海道)와 파주, 고양
해포나루, 무악산 동봉수대를 거쳐 남산 훈도방(남산 목멱산 봉수대)에서 그 끝을 맺는다. 이
노선은 직봉 78곳,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그리고 서봉수대는 제4봉수로의 경유지로 황해도에
서 시작하여 경기도 해안을 따라 고양시 고봉, 무악산 서봉수대를 거쳐 남산 명래방으로 연결
되며, 직봉 71처,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이들 봉수대는 1894년 이후 봉수제가 폐지되면서 귀신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며, 그 터만 아
련히 남아 전하던 것을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동쪽 정상에 있던
동봉수대만 복원되었다. 허나 서쪽 정상에 있던 서봉수대터는 군부대가 있는 관계로 복원되지
못했다.

비록 동봉수대가 복원되긴 했으나 주위가 문화유산과 어울리지 않고 추락사고의 위험이 있다
는 문제점이 2008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하여 그때부터 2011년까지 서울시 문화재위원들
이 현장실사와 고증을 통해 화강석 성곽으로 재현하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봉수대를 부시고 2
단의 석축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봉수대를 얹혔다.
허나 이번에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이 떨어진다고 민원이 들어와 지금의 모습으로 어
색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모습이 아닌 그저 사람들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변질을
시킨 꼴이다. 굳이 좋게 포장한다면 융통성이 있고 시대에 맞게 재현된 것이 되겠지.
그러다보니 봉수대를 받치고 있는 석축과 불을 피우던 봉수대, 봉수대 주변 테두리의 돌 피부
가 확연히 차이가 나서 어색하기 그지 없다. 봉수대 석축을 이루는 돌은 고색의 기운이 약간
돌지만 봉수대와 테두리에 쓰인 돌은 하얀 피부로 파리가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맨질맨질하다.


▲  천하를 굽어보며 왕년의 향수를 달래는 봉수대
연기를 모락모락 풍기며 불빛을 날리던 왕년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안산 정상을 수식하는 장식용이자 전망대 그 이상도 아니게 되었다.

    ◀  때깔이 고운 하얀 피부의 봉수대
봉수대 가운데에 있는 네모난 창을 통해 불과
연기를 피웠는데, 그 연기는 봉수대 꼭대기를
통해 하늘로 솟구쳤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동봉수대

▲  새롭게 둘러진 봉수대 테두리

봉수대를 모자처럼 눌러쓴 안산 동쪽 정상, 그 동쪽은 바위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고,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다소 각박해 봉수대 복원 이후 추락사고의 위험이 늘 제기되었다. 하여 2011년
이후 봉수대를 새로 갈면서 주변에 하얀 피부의 테두리를 성곽처럼 두른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봉수대 모습을 다소 잃게 되었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무악재
그날따라 안개가 말썽이라 시야는 다소 흐릿했다. 이렇게 보면 인왕산이
좀 낮아보일 수 있지만 저곳이 이곳보다 무려 40m 이상 높다.
그래도 서울을 지키는 당당한 우백호가 아니던가~~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①
홍제동과 홍은동, 녹번동,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서남부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②
바로 밑으로 옛 서대문형무소를 간직한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부와 남산이 바라보인다. 안개만 아니었다면
시야가 더욱 나래를 펼쳤을 것인데 하늘의 심술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③
안산 남쪽 자락과 서울 도심부, 아현동 지역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④
안산 남쪽 자락과 봉원사, 신촌, 서대문구 지역


안산 정상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아주 휼륭하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장
안을 발 아래 두며 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뫼에 오르는 이유의 큰 하나는 바로 이런 조망
맛을 누리고자 함으로 이때만큼은 제왕도, 옥황상제도, 청와대 주인도 부럽지가 않다.
정상에서 보이는 범위는 가까이로 인왕산과 무악재, 독립문, 서울 도심부, 홍제동, 신촌, 북
한산(삼각산), 북악산(백악산)을 비롯해 멀리 서울 동부, 불암산, 아차산, 여의도, 서울 서남
부, 동작구, 강남구, 관악산과 호암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래서 왜 이곳에 봉수대를 세우고 이괄의 난(1623년)과
6.25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군사적인 요충지로 절찬리에 쓰이고 있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 무악산 동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안산에 녹아들다 (잣나무숲, 메타세콰이어숲길)

▲  가파른 벼랑을 이루고 있는 안산 북쪽 자락

안산 동쪽 정상에서 시원스러운 산바람과 조망을 누리며 20분 정도 머물렀다. 비록 하늘의 비
협조로 시야는 썩 좋지 못했으나 마치 학의 등에 올라탄 개미처럼 흐릿한 천하를 굽어보니 기
분은 즐겁다.
이곳은 예전에도 가끔씩 찾았던 곳이고 땅꺼미가 자욱한 저녁에도 침침한 두 망막을 무릅쓰고
올라가 도심 야경을 즐기며 일행들과 곡차(穀茶) 1잔 걸치기도 하였다. 지금도 1년에 서너 번
정도 찾으며 안산에 대한 나의 변치 않는 마음을 비춘다.

동쪽 정상에서 다시 무악정 방면으로 내려가면 헬기장이 있다. 여기서 길은 3갈래로 갈리는데
, 서쪽은 무악정으로, 남쪽은 안산 남쪽 능선, 그리고 북쪽은 홍제동으로 이어진다. 그중 북
쪽 길은 아직 미답(未踏)의 상태라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북쪽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각박한 경사로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바로 동쪽이 무악재와 접한 벼랑이라 각별한 주의
가 필요하다. (길 중간중간에 바위들이 있음)


▲  안산 정상 북쪽 밑에 자리한 안천약수터 주변

정상 헬기장에서 북쪽 길을 6~7분 정도 내려 가면 안천약수터가 모습을 비춘다. 안산에서 가
장 높은 곳에 자리한 약수터로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으니 물맛도 좀 특별할 것이라 여겨지
나 내가 갔을 때는 여름 가뭄으로 물은 완전히 말라버렸고, 여러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이 검
출되어 '음용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은 상태였다.
하긴 이곳만의 일이랴. 안산을 비롯해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의 많은 약수터도 비슷
한 곤란을 겪고 있어 서울 도심에서 깨끗한 자연산 물을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줄고 있다.
그만큼 서울의 건강이 나쁘게 변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샘터 주변에는 간단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이 닦여져 있으며, 동쪽에는 주름진 바위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다.

▲  깔끔하게 정비된 보람도 없이 부적합
판정을 받은 안천약수터

▲  샘터 동쪽에는 주름진 바위와 간단한
운동시설이 모여있다.


▲  안천약수터에서 바라본 무악재와 인왕산

▲  안산 북쪽 자락 숲길
인적도 없는 호젓한 산길을 혼자 거닐으니 마치 아비규환의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해탈감이라고나 할까?
비록 잠시뿐이지만..


▲  안산 메타세콰이어 북쪽 숲 직전 숲길

안천약수터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안산자락길과 홍
제동으로 바로 이어지고, 왼쪽(서쪽)으로 가면 메타세콰이어숲이 싱그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안산에는 북쪽 자락과 서쪽 자락(숲속무대 주변)에 메타세콰이어숲을 닦았는데, 이들은 안산
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아름다운 얼굴이다. 북쪽 숲은 서쪽 숲에 비해 덩치가 매우 작아
정말 순식간에 숲길이 끝나 조금은 섭섭하다. 허나 늘씬하게 솟아나 하늘을 찌르는 모습이 시
원시원하니 그것이 발음도 어려운 외래종 메타세콰이어의 매력이라 하겠다. 안산자락길은 북
쪽 숲 밑을 지나가며 서쪽 숲 한복판을 가로질러 안산을 1바퀴 휘감는다.


▲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숲길
군살 없이 쭉쭉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하늘을 가리며 우수한 그늘을 베푼다.


▲  한낮에도 거의 어두운 메타세콰이어숲의 위엄
해가 긴 여름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낮의 길이를 감소시킨다.

▲  북쪽 메타세콰이어숲에서 잣나무숲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숲길

▲  드디어 이른 안산자락길 (잣나무숲길)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에서 서쪽 산길을 고집하면 무장애길로 이루어진 안산자락길이 마중을
한다.
안산 허리를 따라 이어진 안산자락길은 이 땅에 흔한 둘레길의 하나로 '둘레길' 대신 '자락
길'을 칭하고 있는 점이 이채로운데, 총 길이는 7km로 2010년 10월부터 3단계 과정을 거쳐
2013년 12월 완성을 보았다.
총 사업비는 48억(서울시 지원 33억, 서대문구 15억)으로 노약자와 장애인, 휠체어나 유모차
의 편의를 위하여 전 구간을 무장애자락길(나무데크길, 마사토 포장길)로 싹 닦았다. 그래서
2016년 4월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의 하나로 꼽
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널리 칭송을 받기도 했다.
허나 너무 편리를 강조하다 보니 산길의 진미인 흙길이 거의 없는 것이 단점이다. 하여 흙길
을 원한다면 다른 산길을 이용하거나 자락길 안쪽에 닦여진 초록숲길을 이용해야 되며, 자락
길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시내에서 접근하려면 어느 정도 오르막길과 산길을 겪어야 만날
수 있다.

안산자락길은 연희숲속쉼터 윗쪽, 자락길전망대, 천연마당쉼터, 안산천약수터, 숲속무대, 메
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을 두루 거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순환형으로 봉원사나 천연동
뜨란채아파트, 독립문파크빌아파트, 무악재역, 기원정사, 연희숲속쉼터, 서대문구청에서 접근
하면 된다.


▲  잣내음으로 그윽한 잣나무숲길

안산자락길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잣나무숲이 진한 잣내음을 들이밀며 나타난다. 이곳은 연희
숲속쉼터와 메타세콰이어 서쪽 숲 사이에 자리해 있는데, 숲 한복판에 안산자락길이 흘러가
그림 같은 잣나무숲길을 빚어내고 있으며, 숲길의 길이는 0.3km로 메타세콰이어숲과 함께 안
산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잣내음이 가득해 상쾌한 느낌을 안겨주며, 잣나무가 베푼 산바람이 비록 약하긴 하지만 속세
의 기운과 여름의 기세를 꾸준히 털어간다. 이 숲을 지나면 바로 메타세콰이어 서쪽 숲길이
펼쳐지나 그곳은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터라 길을 접고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안산
자락길 북쪽 구간으로 방향을 돌렸다.


▲  저 자락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원스럽게 뻗어가는 잣나무숲길의 위엄

▲  잣나무숲길 남쪽 구간

서울에 대표적인 잣나무숲으로는 이곳 외에도 동작충효길 고구동산 잣나무숲과 호암산(虎巖山
) 잣나무숲이 있다. 이들이 시골에 있었다면 감흥이 덜했겠지만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 한복
판에 고스란히 박혀 있으니 그 감흥은 클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자연은 인간에게 소중하다.



 

♠  안산자락길 마무리

▲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

잣나무숲에서 잠시 자락길을 버리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넓게 잘 닦여진 안산 산책로(연희로32
길)가 나온다. 그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올라온 길로 안산자락길이 이 길의 신세를 잠시
지며 동북쪽으로 흘러가는데 그 길의 끝에서 폭이 확 줄어들면서 북쪽 전망대가 고개를 내민
다.

북쪽 전망대는 안산의 가장 북쪽 끝(모래내로 이북은 제외)으로 비록 조망의 질은 정상보다
엷어도 홍제동과 홍은동, 무악재, 탕춘대능선, 북한산(삼각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앞서 잣나무숲에서 내려온 자락길과 연희로32길이 합쳐지는 곳에서 북쪽 전망대까지 1890년대
부터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까지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100여 인의 정보가 담긴 안내문이
차례대로 걸려 있어 잠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자락길 전망대에도 일부가 있음)
이들의 안내문을 설치한 것은 안산 동남쪽 밑에 서대문독립공원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자락
길을 거닐면서 이 땅의 광명을 위해 숭고하고 거룩한 삶을 살다간 그들을 생각하고 기려보자.
그것이 안산이 우리에게 준 의무이자 숙제이다.

북쪽 전망대에서 무악재를 거쳐 독립문파크빌까지 나무로 다진 무장애데크길이 펼쳐지며, 홍
제동과 무악재에서 안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만 있었을 뿐, 무악재 옆을 가로질러 남북으
로 이어지는 산길은 원래 없었다. 그러다가 자락길이 닦이면서 발길이 어려웠던 안산 무악재
구간 접근이 가능해졌다.


▲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홍제동과 홍은동을 위시하여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자락길 북쪽 구간과 무악재 구간이 만나는 곳
길 경계에 계수기(計數機)를 설치하여 안산자락길을 이용하는
사람 수를 조용히 체크한다.

▲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북쪽 전망대에서 무악재 방면)

▲  서울에도 흔들바위가?? 귀엽게도 들어앉은 안산 흔들바위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에서 자락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가면 흔들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마
중을 한다.
커다란 암반에 바짝 붙어있는 돌덩어리가 흔들바위로 흔들바위의 대명사인 설악산 흔들바위보
다는 볼품과 위엄이 많이 떨어진다. 허나 손으로 밀면 아주 조금은 흔들거려 흔들바위의 자격
은 그런데로 갖추고 있다. 허나 대부분 사람들이 지나칠 뿐, 그를 밀어 흔들바위의 이름값을
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어 속세의 관심이 시급하다.

이 바위는 안산자락길 조성으로 발견된 것으로 암반 위에 철썩 붙은 것이 충주 미륵리절터의
공기돌바위와 비슷한 폼이다.
안산은 돌이 많은 산이라 동쪽 정상 주변과 동쪽 자락을 중심으로 바위와 벼랑이 즐비하니 이
바위 역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이 안산에 살포시 얹혀놓은 소소한 작품이다. 그 동쪽에도 잘
생긴 바위 하나가 이름도 없이 자리해 있는데, 동쪽에서 보면 거북이가 바위에 웅크리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다.

▲  흔들바위 동쪽에 있는 이름 없는 바위

▲  너와집쉼터 입구

흔들바위를 지나 무악재 쪽으로 움직이면 너와집쉼터 이정표가 마중한다. 그 이정표의 안내를
받으며 서쪽 산길을 오르면 숲속에 묻힌 너와집이 진하게 모습을 비춘다. 서울 도심에서 너와
집이라니? 흔들바위만큼이나 신선하기 그지 없는데 그는 서대문구청에서 안산자락길을 다지면
서 조촐한 여흥거리로 마련한 것으로 경상북도 산골의 너와집을 현대식으로 조금 손질하여 지
은 것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살림집은 아니라고 하며, 관리하는 사람이 매주 여러 번 찾아와 관리를 하거
나 잠깐씩 머문다. 서울에 거의 유일한 너와집으로 너와집 체험 겸 전통찻집으로 활용하는 것
이 좋을 듯 싶은데, 그냥 눈요깃감으로만 두고 있는 것이 조금 아쉽다.

집 옆에는 하얀 피부의 위성방송 안테나가 귀를 열고 있어 이런 산골까지 TV가 들어오나 놀라
울 따름이다. 허나 생각해보니 여긴 엄연한 서울 한복판이다. 지리산이나 태백산맥, 개마고원
산골이 아니다.
집 앞에는 안산이 베푼 조그만 개울이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데, 그 개울에는 나무다리가 있으
며, 집 주변에는 장독대와 너와집쉼터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안산 산골에 숨겨진 너와집
이렇게 보면 강원도나 경북의 첩첩한 산골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엄연한
서울 한복판이다. (서울 4대문이 바로 지척임)

▲  너와집 옆에 자리한 너와집쉼터

▲  너와집 샘터

▲  시원스럽게 뻗은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  무악재 서쪽 벼랑에 닦여진
자락길전망대


자락길전망대는 무악재 서쪽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닦여져 있다. 이곳은 자락길을 닦으면서 달
아놓은 공간으로 필체가 돋보이는 '자락길전망대' 현판이 인상적인데, 이 글씨는 2012년 10월
에 작성된 것으로 글씨 좌우에 도장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투구처럼 생긴 바위와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의자가 여럿 설치되어 있고, 바로 밑에
자리한 홍제동을 비롯해 홍은동과 무악재, 인왕산,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잡히나 보이
는 범위는 좁다.


▲  자락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회색빛으로 물든 홍제동과 홍은동 지역을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자락과
인왕산 일부가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자락길전망대 바위 (투구바위)
바위 이름은 아직 없으나 일부가 투구처럼 생겨서 투구바위라 불러도 손색은
없어 보인다. 자락길전망대 개설로 바위 아랫도리가 가려져서 그렇지
저 바위 자체가 장대한 바위 벼랑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자락길전망대

▲  잠깐 포장길로 안면을 바꾼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무악재 남쪽)

▲  숲속에 자리한 조그만 야외 독서실, 자락길 북까페(Book cafe)

자락길 전망대에서 무악재 구간을 넘으면 조그만 책장을 지닌 북까페가 마중한다. 이곳은 책
장과 기와 정자, 그리고 동그란 탁자와 의자 세트가 여럿 놓여져 있는데, 책은 대부분 기증받
은 것으로 누구든 기증과 독서가 가능하다. 허나 그렇다고 책을 소장용으로 가져가지는 말자.
이곳이 공용 북까페의 성격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  북까페에서 바라본 안산 정상 (가운데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

나는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 봉우리 정상(무악산 동봉수대)에 서 있었다. 허나 눈을 떠보니
나는 그 한참 밑 북까페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정상에 있던 것은 혹여 꿈속은 아닐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축지법이나 순간이동을 쓴
것일까? 산과 자락길은 그대로인데 나란 존재는 계속 바뀌니 말이다. 이렇게 보니 정말 안산
을 휘감듯 돌아다녔다.


▲  한성과학고 뒷쪽 안산자락길

▲  한성과학고 뒷쪽 안산자락길에서 바라본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

▲  안산자락길 현저동 구간

무악재를 넘은 안산자락길은 현저동(峴底洞) 구간으로 들어서면서 한성과학고와 독립문파크빌
아파트의 뒤쪽을 지나간다. 이 구간은 벼랑 일색이라 잔도(棧道)처럼 나무데크길을 길게 내었
으며, 벼랑길을 지나면 포장길이 펼쳐진다.


▲  벼랑 밑을 지나는 안산자락길 현저동 구간

안산자락길이 너무 안(安)스럽게 닦여진 탓에 움직이는 길이 정말 순식간이다. 북까페에서 한
성과학고 뒷쪽을 지나 어느덧 독립문파크빌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무데크길은 끝나고
포장길이 펼쳐져 안산 남부까지 이어지는데, 제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19시가 넘어간 상태라
햇님은 꼴딱꼴딱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뺀다. 그 사이를 비집고 어두운 땅꺼미가 자리를 피
며 천하에 어두운 물감을 물들인다.

독립문파크빌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 독립문삼호아파트 뒷쪽에서 안산자락길과 인연을 정리
하고 시내로 내려왔다. 이렇게 하여 안산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신촌동, 연희동, 홍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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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0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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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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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서울 도심의 싱그러운 공간,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늦가을 나들이 <북악스카이웨이>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늦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0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들과 북악산(백악산) 북악하늘길을 찾았
다. 이곳은 김신조루트로 속세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2010년에 처음 발을 들인 이래 가끔 발
걸음을 한다.

오후 2시에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서울다원학교(한용운활동터)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로 일
컬어지는 성북동(城北洞)은 내 즐겨찾기 명소의 일원으로 대부분의 명소를 지겹도록 가봤건만
갔다 오면 또 가고 싶고, 자꾸만 안기고 싶은 곳이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우정의 공원(公園)'을 지나 삼청각으로 가는 조
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의 심장부가 바로 지척이건만 그런 도심을 비웃듯 숲과 계곡이 어우
러진 전원 풍경이 도시에서 오염된 안구를 어루만진다. 길 옆에는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부
르며 흘러가는데, 이 물줄기는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간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와 약간의 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그 산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  북악산(백악산) 북악하늘길 입문

▲  도심과 성북동을 바짝 이어주는 삼청터널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도심 북쪽인 삼청동(三淸洞)을 이어주는 2차선 땅굴이다. 이곳은 성북동
의 가장 막다른 구석으로 한양도성이 흐르는 북악산(백악산)의 주능선과 북쪽 능선(북악산길)
이 갈라지는 곳이며, 산세도 칼처럼 솟은 편이라 오르기가 좀 각박한 편이다. 그런 구석에서
다른 곳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한줄기 희망을 선사한 것이 바로 삼청터널이다.

이 터널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절정을 누리던 1969년에 삽을 떠서 1970년 12월 30일 완성을 보
았다. 공사비는 총 2억 4,900만원(민자 1억 9,900만원, 시비 5,000만원)으로 당시 성북동에는
차지철을 비롯한 군사정권의 실세들이 여럿 살았는데 그들의 청와대 접근 편의와 땅값 상승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그 시절 성북동과 삼청동은 한적한 동네로 두 동네를
이을 터널의 필요성은 그다지 없었다.

터널이 뚫리자 안그래도 졸부들로 가득한 성북동의 땅값이 더욱 하늘 높이 치솟아 금싸라기
땅이 되었고, 성북동과 청와대, 서울 도심간의 접근이 편해지면서 대원각, 삼청각 등의 고급
요정과 식당이 생겨났다. 이들은 썩은내와 돈냄새가 풍기는 지배층과 부유층의 공간으로 돈을
포크레인으로 쓸어 담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산간 지방의 조촐한 터널 같은 삼청터널은 길이 302m, 폭 8.5m(2차선)로 오로지 차량만 들락
거릴 수 있다. 예전에는 권력층과 돈 많은 작자들이 주로 이용하던 터널이었지만 시대가 여러
번씩 바뀌고 성북동이 도심 속 명소로 각광을 받으면서 나들이와 드라이브 수요도 크게 늘었
다. 허나 터널도 그렇고 도로도 그렇고 확장은커녕 여전히 2차선을 고수하고 있어 휴일에는
꼬리에 꼬리를 잡고 굼벵이 속도로 버벅거리는 차량의 행렬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삼청동과 북촌(北村)으로 이어지지만 걷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억지
로 터널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한다. (벌금을 내야됨) 차라리 쿨하게 택시를 타고 넘어가던가
숙정문안내소에서 숙정문이나 말바위, 와룡공원을 넘어 북촌으로 넘어가길 바란다.


▲  삼청각(三淸閣) 정문

성북동의 가장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자리해 있
다. 이곳은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이 갈라지는 150m 고지로 도심이 바로 지척임
에도 이곳을 감싸고 흐르는 공기부터가 무척 산뜻하고 청정하다.

삼청각은 겉모습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사정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
청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는데, 1972년 7월 4일에 벌어
진 7.4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이 만찬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권력실세들의 공
간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도심
속의 전통문화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한다.

한때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고 전통문화를 즐
기며, 식사와 차 1잔, 혼인, 돌잔치 등을 가질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현장으로
이는 길상사(☞ 관련글 보기)란 절집으로 변신한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이곳은 오래된 문화유산도 아니고 비록 속세에 개방되었다고 해도 비싼 이미지는 여전히 깃들
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의 착하지 못한 음식/차 가격과 행사 비용은 서민들에게는 그리 호
락호락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서울의 허파인 북악산(백악산) 품에 포근히 안긴 곳
으로 20세기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삼청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30-115 (대사관로 3, ☎ 02-765-3000)
* 삼청각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조림 표석 - 숙정문 안내소 부근

▲  늦가을의 처절한 향연이 펼쳐진 북악산(백악산) 등산로
(홍련사와 숙정문안내소 중간)

▲  숙정문안내소

홍련사와 삼청터널 사이로 난 산길을 오르면 북악산 전면개방 조림(造林)을 기념하는 커다란
표석이 나그네를 맞는다. 그 표석을 지나면 북악산 주능선(한양도성 능선)의 주요 관문인 숙
정문안내소(☎ 02-747-2152)가 모습을 비추는데,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린다.
안내소를 지나 직진하면 숙정문(肅靖門)과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북악산 정상(342m)으로 이
어지며, 안내소 직전 왼쪽(남쪽) 길은 한양도성 북쪽 산길로 말바위와 와룡공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오른쪽(북쪽) 길이 김신조루트로 통하는 북악하늘길이다.


▲  숙정문안내소 주변 북악산(백악산) 산림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은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러다가 1968
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공비 패거리 31명이 북한산(삼각산)을 넘어 창의문을 거쳐
시내로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침투 소식을 접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
)은 경찰을 청와대 길목에 배치하고 직접 현장을 지휘했다.
드디어 공비패거리가 청와대 서쪽 청운동(淸雲洞)에 나타나자 최서장은 그들이 공비임을 눈치
채고 검문을 한다며 길을 막았다. 이에 공비들은 크게 발작하여 외투 속에 숨긴 기관단총을
꺼내 이판사판으로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총격적이 발생했고, 최서장은 불행히도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당해 쓰러지면서
'끝까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마지막 명령을 내리며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의 반격으로 공비들은 거의 벌집이 되었고 살아남은
것들은 인왕산(仁王山)과 북악산으로 도주했다. 이후 14일 동안 수색을 벌여 북악산 북쪽 능
선을 끝으로 토벌을 완료했으며, 생포된 김신조와 도주 1명을 뺀 29명을 처단했다.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뚜껑이 단단히 폭발한 박정희 전대통령은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을 완
전히 통제하여 백성들의 출입을 막고 군사 지역으로 삼았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허리에 군작
전 및 관광을 겸한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길)를 급하게 만들게 했다.

금지된 곳으로 묶인 북악산 북쪽은 41년이 지난 2009년부터 삼청각에서 말바위, 성북동과 정
릉, 평창동에서 북악스카이웨이를 잇는 산길이 속속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2010년 2월 27일
에 삼청각에서 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을 손질해 '북악하늘길'이란 간판을 걸어 속
세에 개방했다. 그중 제2산책로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루트라 하여 김신조루트란 이름으로
인기를 더하고 있으며, 북악하늘길의 백미이자 안보관광지로 가장 볼거리가 많은 산길이다.
(실제로 김신조는 이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함)

이곳이 주능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24시간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팔
팔한 시절에 공개되어 이렇게 발을 들이니 기쁘기 그지 없다. 북한이나 휴전선처럼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무려 40여 년 동안 통제되어 속인들의 발길을 금지한 탓에 북악산 북쪽의 자연은 군부대로 인
한 약간의 훼손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잘 보존되고 있다. 그리하여 생태적인 가치가 높고, 자
연경관이 우수하며, 서울 도심을 비웃듯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어 '서울 속의 비무장
지대','도심 속의 허파','도심 속의 신세계'란 별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또한 키다리 빌딩이
즐비한 서울 도심 속의 이색 장소로 한나절 나들이 코스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대부분은 통제 시절 군인들이 오가던 산길로
군사 시설과 그 당시 지어진 계단길이 줄지어 있으며, 제2산책로는 경사가 매우 각박하여 탐
방객의 편의를 위해 나무데크식 등산로를 곳곳에 만들었다.
이렇게 북악산 북쪽 능선을 개방하면서 조성된 등산로 3개는 다음과 같다.

①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 말바위쉼터 ~ 한양도성 북쪽 산길 ~ 숙정문안내소 ~ 성북천발원지
   ~ 북악팔각정 (1.4km)
② 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호경암 ~ 하늘
   전망대 ~ 북까페 ~ 하늘교 ~ 하늘마루 (2km)
③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 북까페 ~ 동마루 ~ 숲속다리 (640m)



 

♠  북악하늘길(김신조투르) 둘러보기 ①
삼청각쉼터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삼청각쉼터

숙정문안내소에서 북악하늘길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높다란 계단길이 나그네의 기를 제대로
주눅 들게 만든다. 시작부터 각박한 계단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신조루트는 이렇게 첫 이미지
에서 보이듯 계단길이 유별나게 많아 숨을 적지 않게 차게 하는데, 이건 맛보기 버전이다. 여
기서부터 지친다면 김신조루트 산책은 어렵다. 자존심을 곱게 버리고 악으로 깡으로 올라간다
면 김신조루트는 자신의 속살을 하나씩 벗겨주며 그대를 반겨줄 것이다.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삼청각쉼터가 마중을 한다. 이곳은 삼청각의 서쪽이자 뒷통수로 소
나무의 산인 북악산답게 소나무 1그루가 쉼터 중간에서 운치를 그윽하게 불어주며 솔내음과
선선한 그늘을 드리운다. 여기서 잠시 삼청각을 비롯한 좁은 천하를 굽어보고 더 올라가면 제
1산책로와 제2산책로가 갈리는 성북천발원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청각쉼터에서 바라본 천하 (삼청각과 성북동, 성북구 지역)
이제 시작 단계라 조망 범위는 매우 좁다. 허나 산길을 오르면서 하늘과
보다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높아진다.

▲  늦가을의 물감이 야드르르 번진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북악산 북쪽 능선 (삼청각쉼터와 성북천발원지 중간)

▲  성북천발원지에 자리한 수고해(水鼓蟹)다리 (가운데에 보이는 다리)

▲  성북천(城北川) 발원지

성북천은 북악산 동북쪽 자락에서 발원하여 성북동과 삼선교, 보문동, 제기동(祭基洞)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7.7km의 지방 2급 하천이다. 조그만 하천의 발원지라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儉龍沼)나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黃池)처럼 뭔가 특별하거나 요란한 것은 없으며,
계곡 수심은 매우 얕고 주변에는 하얀 피부의 바위들이 벌러덩 누워 있는 그야말로 평화로운
풍경이다.

성북구청에서 이곳을 생물 서식처로 가꾸고자 여러 식물을 심고 수질에 특별히 신경을 쓴 결
과 가재를 비롯한 여러 조그만 수중 동물들이 좀 늘어났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고자 성북천발
원지 남쪽에 있는 다리 이름을 가재가 물에서 물장구를 치는 다리란 뜻에 수고해(水鼓蟹)다리
라 하였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기존의 제1산책로로 북악팔각정과 빠르게 이어
지며, 오른쪽은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제2산책로로 호경암을 거쳐 하늘교까지 이어지는 2km의
산길이다. 이 산길은 중간중간 조망(眺望)이 괜찮은 곳에 '~~마루'와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를 닦아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  성북천발원지에서 바라본 삼청각 편운정(片雲亭)과 유하정
편운정에서 계곡을 따라 북악하늘길로 바로 접근할 수 있으나, 이 구간은
통제구간으로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길이 헝클어져 있어
조금은 거칠다.

▲  김신조루트 서마루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까지는 속절없는 세상살이처럼 고통스런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나무
데크로 지어진 서마루에 오르면 삼청각쉼터보다 1단계 높아진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의자가
넉넉히 베풀어져 있어 잠시 숨을 고르며 천하를 굽어보기에 좋다.
이곳에선 북악팔각정이 가까이에 보이며, 여기서 길은 동쪽을 향해 급하게 내리막길로 돌변한
다. 그래서 처음 온 이들은
'벌써 다 올라왔나? 이거 정말 싱거운데!' 생각을 하며 방심을 하지만 이는 북악산이 내린 일
종의 속임수이니 속지말자. 북악산이 북한산(삼각산)이나 관악산(冠岳山), 수락산(水落山) 등
서울 주변의 쟁쟁한 산들에 비해 키는 낮지만 그래도 악(岳)이 들어가는 서울의 오랜 북현무(
北玄武)이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①
소나무 너머로 성북동과 성북구, 도심 동부 지역,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강동구, 송파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악산(백악산)의 두터운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바라보인다.

▲  이름도 시원한 솔바람교

서마루에서 솔바람교까지 220m 구간은 각박한 경사의 내리막이다. 다 올라왔구나 싶겠지만 솔
바람교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흥분하여 무지막지한 오르막길로 나그네의 기를 죽인다. 내리
막길은 고난 앞에서 잠시 즐기는 여유라고나 할까..? 한라산(漢拏山)도 관음사(觀音寺) 방면
으로 한참 내려갈 때 중간에 오르막길이 나와 속인들을 좌절하게 만드는데 바로 그 이치이다.
남마루까지는 가파른 길이 계속 이어지니 방심의 늪에 빠지지 말자~~

솔바람교는 계곡 위에 걸린 나무다리로 그 이름이 순 우리말이라 정감이 참 깊다. 주변은 소
나무를 비롯해 온갖 수목이 삼삼하여 그 이름 그대로 솔바람이 나를 날려보낼 것 같다. 계곡
이라고 하지만 워낙 생긴 것이 부실하고 돌만 가득해 이곳에 올 때마다 늘 황량한 모습을 보
여주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다리를 내려오면 쉼터가 있으며 다리 북쪽 구석으로 가면 약수터가 있는데, 이곳이 김신조루
트의 유일한 샘터이다. 산에서의 약수터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라 갈증이 없어도 꼭 물
은 섭취하기 마련인데, 무심한 가을 가뭄 때문인지 수분은 이미 실종되었다. 약수터 주변은
숲이 바다를 이루고 있어 햇살이 쉽게 손을 뻗치지 못하며, 북악하늘길에서 가장 궁벽한 곳으
로 북쪽과 서쪽, 동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쪽만 가늘게 뚫려있는 고적한 곳이다.


▲  솔바람교 밑에 자리한 약수터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약수터이다.

▲  솔바람교 쉼터
이곳은 김신조루트의 중간 정도로 속세에서 간식거리를 가져왔다면 여기서
잠시 요기를 하며 쉬었다 가는 것도 괜찮다.



 

♠  북악하늘길(김신조투르) 둘러보기 ②
솔바람교 ~ 남마루 ~ 호경암

▲  솔바람교 쉼터에서 남마루로 올라가는 계단길
보기만 해도 회의가 느껴진다.


솔바람교에서 남마루까지는 다시 지독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그 거리는 약 600m 정도로 여
기가 김신조루트에게 가장 인생의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곳이다. 하긴 공비 패거리가 살아 돌
아가려는 일념으로 넘었던 곳인데 오죽 험하겠는가. 게다가 이곳은 산길도 없던 구간으로 각
박한 산세를 극복해 나무데크 계단길을 닦았으며, 적당하게 간격을 두며 쉼터를 만들어 턱까
지 밀려오는 숨을 잠시나마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그렇게 잔뜩 흥분한 산길을 오르면 남마루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은 앞서 서마루보
다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더 휼륭한 조망을 선물로 준다. 이곳 이후 흥분했던 산길은 다소
진정을 되찾으며 호젓한 산길의 기품을 서서히 회복한다.


▲  지옥 끝에 나온 극락, 남마루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성북동과 성북구, 낙산, 도심 동부 지역, 동대문구, 중랑구, 성동구,
광진구, 송파구, 강동구 지역

▲  서서히 진정되고 있는 산길 (남마루와 호경암 사이)

▲  호경암으로 오르는 계단길

▲  김신조루트의 상징물, 호경암(虎京岩)

남마루에서 360m 오르면 길 왼쪽에 상처를 가득 입은 큼직한 바위가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심을 바라보고 선 이 바위가 바로 김신조루트의 상징인 호경암으로 그가 이곳의 유명
바위가 된 것은 김신조 공비 패거리와 격전을 벌였던 남북분단의 서글픈 현장이기 때문이다.

청운동에서 우리 경찰에게 털린 김신조 패거리는 북악산을 넘어 성북동 뒷산(북악산 북쪽 능
선)으로 줄행랑을 치며 몸을 숨겼다. 39대대 2중대는 호경암 주변을 수색하던 중, 등을 보이
고 도망치는 공비 3명을 발견, 호경암에서 교전을 벌이다가 인근 구진봉 주변에서 모조리 사
살했다.
그렇게 처리된 김신조 패거리 29명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군묘지(敵軍
墓地)에 묻어주었다. 적군묘지는 6.25 때 남한 땅에서 처단된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묻은
곳으로 김신조 사건과 동해 잠수함 침투 때 처리한 공비, 그리고 1987년 KAL기를 폭파시킨 폭
파범까지 이곳에 묻혀 있다.


▲  남북분단의 비극이 안겨준 선물 아닌 선물
총탄 자국으로 가득한 호경암


북악산(백악산)이 서울 근교 경승지로 조선시대부터 왕족과 사대부들의 별장과 기와집, 바위
글씨가 즐비했던 탓에 호경암도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허나 막상 확인해보니 1968
년 때 서울을 지키던 맹호부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의 손길은 북악
산 주능선과 서쪽(부암동, 청운동), 남쪽(삼청동)에 치우쳐져 있을 뿐, 김신조루트와 북쪽 능
선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아마도 금표(禁標) 구역으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묶인 탓이 아
닐까 싶다.

바위 밑에는 이곳이 격전지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는데, 1998년 1월 호경암 주변에서 복무하
는 군장병들의 애국심과 경각심을 돋게 하려고 안내문을 설치했다고 하며, 바위 피부에는 당
시 총격전으로 생긴 50여 발의 탄흔이 진하게 남아 그 시절 긴장되고 숨막히던 상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그런 악연으로 북악산의 이름 없는 바위는 김신조 사건의 격전지로 이들을 격퇴한 부대 이름
을 따서 호경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고, 이곳이 개방되면서 북악산의 새로운 명물이자 이
땅의 비극적인 현실을 담고 있는 산증인으로 몸값과 이름을 크게 올리고 있다. 좋은 쪽으로
이름을 높여야지 영 좋지 않은 쪽으로 높이고 있으니 바위 자신도 어이가 없을 것이다. 바위
를 보면 표정이 조금은 굳어져 있는데, 이 땅이 통일이 되면 그의 표정도 씨익~ 펴지지는 않
을까.


▲  이 땅의 비극은 저렇게 깊었다 - 바위에 박힌 탄흔

▲  호경암 표석
표석이 박힌 호경암 정상에 올라서면 지금까지의 조망을 훨씬 뛰어넘는
국보급의 조망이 발 밑에 펼쳐진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①
북악산 일대와 성북동, 서울 도심, 남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성북동과 정릉동, 성북구, 강북구, 중랑구, 성동구, 광진구 등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③
평창동과 구기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형제봉 등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호경암에서 하늘전망대로 내려가는 길
호경암을 지나면 더 이상 오르막길은 나오질 않는다. 늦가을에 물들어가는
잔잔한 숲길만이 조용히 사색을 도울 뿐~



 

♠  북악하늘길(김신조투르) 마무리

▲  김신조루트 북쪽에 자리한 하늘전망대

호경암에서 4~5분 정도 가면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지금까지 나온 '~~마루'
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조망도 괜찮은 편으로 전망대 이름은 북악하늘길에서 따왔지만 그만큼
하늘과도 가까운 곳이다 보니 이름이 그런데로 잘 어울린다.

서마루부터 호경암까는 성북동과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서울 도심, 남산 등의 남쪽과 성북
구와 중랑구, 동대문구, 광진구 등 동쪽이 주로 보였다. 허나 호경암을 경계로 능선 남부에서
북부로 넘어왔기 때문에 하늘전망대부터는 그와는 반대인 북쪽으로 파노라마가 바뀌면서 평창
동과 구기동, 정릉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를 위시해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의 대표 졸부 동네인 평창동을 비롯해 부암동과 구기동, 탕춘대능선,
북한산 서부가 거침없이 시야에 박힌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정릉동과 길음동, 성북구, 강북구 일대는 물론 멀리 도봉구와 노원구,
수락산~불암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성북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구리시 지역 등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산줄기와 형제봉

▲  솔내음이 그윽한 북까페

하늘전망대에서 북쪽으로 110m 가면 북까페라 불리는 소나무숲이 마중을 한다. 이곳에는 책장
과 의자가 있어 자연을 벗삼아 책을 읽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북한산과 북악산의 산바람
이 교차하는 곳이라 독서도 무지 잘될 것 같다. 그런데 북까페보다는 '독서마당'이나 '소나무
책방','솔내음책방','사색의 공간'으로 이름을 지었으면 훨씬 부드럽지 않을까 싶다. 다른 곳
은 '~~마루(마루는 정상을 뜻하는 순 우리말)'나 '하늘전망대' 등의 우리말을 쓰면서 왜 이곳
만큼은 두 귀에 거북한 영어로 지었을까?

북까페 책장은 달랑 하나로 책은 많이 담겨져 있으나 상당수는 어린이와 청소년 책이거나 소
설이다. 집에 버려둔 책이 있다면 썩혀두지 말고 이곳에 기증하는 것도 공익 차원에서 괜찮을
것이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까페를 등지고 북쪽으로 직진하면 하늘교가 나오고, 북
까페를 가로지르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가 시작된다.


▲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동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정릉동과 길음동을 위시해 성북구와 강북구, 도봉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북까페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이다. 이 구간은 북악산길 남쪽으로
중간에 호경암으로 가는 샛길이 있으며, 오르락 내리락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숲속다리를 지
난 체육공원에서 그 막을 내리는 1리 정도의 짧은 산길이다.

산길 중간에 동마루라 불리는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
남쪽 자락을 비롯해 정릉동과 길음동, 성북구와 강북구, 도봉구 등이 훤히 바라보이며, 대자
연이 여기저기 채색한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를 놓으며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  체육공원에서 마무리를 짓는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동쪽 종점

동마루에서 북악산길에 걸린 숲속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넘어가면 체육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동네 주민과 산꾼들이 간단히 몸을 풀 수 있게끔 다양한 운동 기구가 닦여져 있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인 하늘마루와 하늘교가 나오며, 그 직전에 형제봉과
북한산둘레길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그리고 하늘마루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북악팔각정과
부암동, 창의문,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반면 동쪽으로 가면 북악정과 성북구민회관, 아리랑고개, 정릉동 방면으로 통하며, 중간에 국
민대나 배밭골, 길상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우리는 북악산길을 옆구리에 끼며 해가 뜨는
동쪽으로 가다가 북악정에서 성북동으로 진입하여 길상사를 거쳐 속세로 내려왔다.


▲  북악스카이웨이4교
여기서 직진하면 아리랑고개, 성북구민회관으로 이어지며, 아래로 내려가
북쪽으로 가면 국민대와 정릉, 남쪽은 성북동과 길상사으로 연결된다.
이들 모두 2차선 길이지만 보기와 달리 차량의 왕래가 제법 잦다.


41년 만에 속세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과 김신조루트, 비록 남북분단의 상처가 서린 서글픈 현
장이지만 서울 도심 속의 허파이자 달달한 명소로 자연이 잘 보존되고 경관도 아름다운 보석
같은 곳이다. 이곳은 마치 미지의 땅에 들어온 듯한 신선한 기분이었고, 서울 땅에서 안가본
곳이 거의 없는 나에게도 꽤 서름한 곳이라 길을 거닐면서도 무엇이 나올까? 늘 마음이 두근
거렸다.
이렇게 하여 도심 속의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정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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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9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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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의 상큼한 뒷동산, 호암산 봄나들이 <호암산성, 석구상, 제2한우물, 신랑각시바위,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 둘러보기 (호암산성, 석구상, 한우물, 신랑각시바위, 칼바위 등)



' 금천구 호암산 봄나들이 '

호암산

▲  호암산

호암산 신랑각시바위 제2한우물터

▲  호암산 신랑각시바위

▲  호암산 제2한우물터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끝 무렵, 서울 서남쪽에 누워있는 호암산(虎巖山, 393m)을
찾았다.

호암산은 나의 오랜 즐겨찾기 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아 나의 마음을 꾸준하게
비추고 있다. 20대의 한복판이던 2002년 가을에 첫 인연을 지은 이후, 무려 100회 이상을
오갔으나 뒤를 돌아서기가 무섭게 그가 간절해진다.
나의 마음을 오랫동안 들었다 놓은 호암산은 서울 금천구(衿川區)와 관악구, 경기도 안양
시에 걸쳐있는 뫼로 산세(또는 산에 있는 바위)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이
름을 지니게 되었다. 금천구 시흥동(始興洞) 지역을 중심지로 삼았던 옛 금천<衿川, 시흥
(始興)> 고을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주산(主山)으로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뫼이나 풍수지리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더
불어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오랫동안 인식되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그들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호암산 밑에 절(호압사)을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
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호암산에는 신라 중기에 조성된 호암산성을 비롯하여 한우물과 제2한우물터, 석구상 등의
늙은 문화유산과 호압사(虎壓寺), 약수사, 불영암 등의 오래된 절, 서울에 대표적인 천주
교 성지로 꼽히는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가 있으며, 호암산폭포와 시흥계곡, 호암산잣나
무산림욕장 등의 싱그러운 자연 명소를 품고 있다.
또한 호랑이를 닮은 바위 뫼에 걸맞게 정상부와 서남쪽 능선, 돌산 능선에 잘생긴 바위들
이 잔뜩 포진해 있어 바위 구경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조망도 일품이라 서울의 상당수 지
역과 북한산(삼각산), 안양, 광명, 부천, 인천, 서해바다, 심지어 멀리 파주와 개성 지역
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호암산 정상부와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잠시 각박할 뿐, 그 잠깐의 고생만 감내하면 부드
러운 능선길과 국보급 조망이 두 망막과 마음, 다리를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 서울둘레길
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가 호암산 자락을 가로질러 흘러가며, 잣나무산림욕장을 중
심으로 호암늘솔길이 싱그럽게 닦여져 있어 산은 비록 작지만 매우 알찬 팔방미인 뫼이다.
이러니 내가 호암산에게 단단히 퐁당퐁당 빠진 것이다.



 

♠  석구상과 호암산성(虎巖山城) 북문터 주변

▲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

이번 호암산 나들이는 호암산 북쪽 자락에 안긴 약수사(藥水寺)에서 시작했다. 약수사를 둘러
보고 서울둘레길5코스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에서 남쪽 산길을 통해
민주동산(깃대봉)과 호암산 정상으로 이동했다. (약수사와 호암산 정상은 별도의 글에서)

호암산 정상에 올라 발 아래 펼쳐진 서울과 주변 지역을 굽어보며 일품 조망을 배불리 누리다
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넘어갔다. 호암산에 오면 꼭 남쪽 봉우리는 들리는 편으로 그곳에는
한우물과 석구상, 호암산성 등의 늙은 명소가 깃들여져 있고, 불영암 등의 절과 신랑각시바위
, 칼바위, 호암산폭포 등의 자연 명소도 듬뿍 들어있어 그야말로 호암산의 보물창고 같은 곳
이다.

호암산 정상부에서 남쪽 봉우리까지는 부드럽게 이어진 서남쪽 능선길의 연속으로 그 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산길 곳곳에는 이름 없는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안양시와 수리산(修理山)
호암산과 삼성산, 수리산 사이에 극락정토를 뜻하는 안양시(安養市)가
포근히 뉘어져 있다.

▲  부드럽게 펼쳐진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

▲  호암산성 북문터 (북쪽 모습)

호암산 서남쪽 능선을 더듬어 남쪽 봉우리로 올라서면 금줄이 둘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석구상 북쪽으로 근래 이곳이 호암산성 북문(北門)터로 확인되면서 북문터 보존을 위해 금줄
을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그 서쪽에 계단식 우회길을 내었다.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들어서면 꼭 거치던 곳이었는데, 그동안 밟고 지나갔던 그곳이 북문터
였다니 새삼 놀라고 말았다.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모습)

호암산 남쪽 봉우리(347m) 정상부에 호암산성의 흔적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성(石城)으로
조성되었는데, 축성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안쪽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
)을 사용했다.
예전에는 산성 둘레를 약 1,250m, 남아있는 길이는 300m로 보았으나 2018년 이후 새로운 곳이
발견되어 산성 관련 자료가 크게 업데이트되면서 산성 둘레는 약 1,547m, 남아있는 것은 약
1,016m, 산성 면적 133,790㎡로 확장되었다.

1990년 봄, 호암산성과 한우물 일대를 조사하면서 우물터 2곳과 건물터 4곳이 발견되었고, 무
려 6,500여 점에 이르는 토기와 다양한 유물(청동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이 쏟
아져 나왔는데, 특히 신라 중기 것이 많이 나왔다. 하여 신라 중기인 6세기 말~7세기 초에 군
사기지 및 행정 치소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672년에 쌓았다는 설
도 있다. 그 시절 신라는 당나라를 때려잡으며, 옛 고구려(高句麗, 고구리) 땅의 일원인 요동
(遼東)과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산성 서쪽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바라보이고, 북쪽으로 한강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잡
힌다. 그래서 서해바다와 한강, 내륙을 잇는 요충지로 중요시되었으며, 양천고성(陽川古城,
서울 가양동)과 행주산성(幸州山城), 오두산성(파주시)를 잇는 거점 성곽으로 보고 있다.

고려 때는 한강과 서해바다를 살피는 요충지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그
런데로 밥값을 했다. 특히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
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에서 왜군을 때려잡은 권율(權慄)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자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을 쳤는데,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면서 서울 수복 작전을 펼쳤다. 호암산은 서
울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로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
름이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현재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
성은 관리 소홀과 대자연의 무심한 장난, 덧없는 세월의 무게까지 더해져 서서히 녹아내렸고,
산꾼들의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산성 내에 늙은 존재로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 건물터, 석구상이 있으며, 불영암
이란 작은 절이 있다. 성곽은 동벽이 그나마 잘 남아있고, 북문터 주변과 서문터 주변, 남문
터 주변에 조금씩 남아있다.
특히 2018년 이후 발굴조사에서 석구상 주변에서 북문터, 석수역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능선에
서 남문터, 불영암 남쪽 가파른 곳에서 서문터가 새롭게 확인되어 3개의 성문(城門)이 있었음
을 알려주고 있으며, 대자연에 묻힌 채, 강제로 숨바꼭질을 하던 성벽 흔적을 많이 건져내었
다. 이들 성문터와 성벽 흔적은 예전부터 수없이 지나쳤던 곳인데 그곳이 산성의 흩어진 흔적
이자 살점이었던 것이다.

호암산성은 석구상과 한우물, 제2한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서울 호암산성터'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343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호암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8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높은 곳에는 호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는 석구상이 있다. 사방을 난간
으로 두룬 기단 위에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엽게도 앉아있는데, 지금은 석구상으로 통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광화문(光化門)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와 호암산 기
운으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
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
南七里)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석구상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석구상의 위엄

석구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해태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해태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
습 같기도 하나 양과도 비슷해 보이며,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한다. 하여 보면 볼수
록 답이 없는 기이한 석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는 길
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랑지와 비슷해 손으
로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후기로 보인다. 그는 정확
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으며, 그를 만든 이유도 속시원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산꾼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성 터져 나오며,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적지 않게 웃음을 준다.


▲  석구상의 귀여운 뒷부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  석구상 남쪽 호암산성 동벽

석구상을 지나면 인공티가 팍팍 느껴지는 약간 부풀어오른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이 바로 호암
산성의 동벽(東壁) 흔적이다. 예전에는 수풀에 감싸여 있었으나 성곽을 무수히 깔고 앉던 수
풀을 싹 쳐내고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으며, 석구상 바로 남쪽 성곽에는 나무데크길을 씌워
놓아 헝클어진 성곽을 보호한다. 그리고 성곽 서쪽에는 제2한우물과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산
길이 넓게 자리한다.

크고 견고했던 성곽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2m 내외로 움푹 낮아졌고, 산길로 변해버린
산성 동벽에는 성돌이 이리저리 박혀 단단한 성곽을 이루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숲 그늘에 자리한 호암산성 동벽
고된 세월에 많이 초췌해진 산성 동벽이 그런데로 산성의 모습을
풍기며, 건물터 부근까지 이어진다.

▲  호암산성 동벽 (남쪽 방향)

앉은뱅이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1.5km 구간 중 석구상에서 건물터 동북쪽 벼랑에 이르는 동벽
이 그나마 상태가 좋다. 비록 산성은 헝클어진 상태이나 성곽 밑은 크게 각이 진 벼랑급이라
성곽길을 음미하면서 걸을 경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안전시설도 전혀 없음)


▲  호암산성 동북쪽 벼랑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호암산성 건물터 동북쪽에는 일품 조망을 지닌 큼직한 바위들이 여럿 있다. 이곳은 호암산성
동벽 구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바위 너머로 호암산 동남쪽 능선과 장군봉, 삼성산
(三聖山), 관악산(冠岳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은 정말 예술이다.
허나 장미꽃의 가시처럼 바위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보기만 해도 염통을 제대로 쫄
깃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산성을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하늘의 요새 같은 낭떠러지라 그 존재
자체로도 인공적인 성곽보다 훨씬 든든하다.



 

♠  제2한우물터에서 호암산성 남문터까지

▲  호암산 제2한우물터

석구상, 북문터에서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서남쪽 능선길을 3~4분 정도 가면 제2한우물터와 건
물터가 황량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호암산성 동벽 산길로 가도 나옴)

제2한우물터는 남북 18.5m, 동서 10m 이상, 추정 깊이 2m에 이르는 커다란 사각형 우물 유적
이다. 길이 50cm, 너비 35cm, 높이 25cm 크기의 화강암을 '臣'자 모양으로 10단(높이 1.75m)
까지 쌓았는데, 2번에 걸쳐 15cm 정도 물려 쌓은 형태가 확인되었다.
우물 바닥과 석축 쌓기 방식, 석재의 크기와 모양, 전체적인 모양새 등은 북서쪽 밑에 있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비슷하며, 여기서는 신라 중/후기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제 숟가락이 햇
살을 보았는데, 숟가락에는 정말 고맙게도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내용은 '仍伐內力 只來(잉
벌내역 지래)..'로 여기서 잉벌내(仍伐內)는 고구려 시절 금천 지역의 지명으로 여겨지는 잉
벌노(仍伐奴)와 비슷해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6세기 이후에도 그 이름은 유지했던 것으로 보
인다.


▲  상큼하게 봄옷을 입은 제2한우물터 (남쪽에서 본 모습)

산꼭대기에 커다란 우물이 1개도 아닌 2개씩이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이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큰
우물을 2개나 둘 정도로 물이 풍부했음을 알려준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장난으로 제대로 헝클어져 땅
속에 잠겨있던 것을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 꺼내놓았는데, 복원된 제1한우물과 달리 복원은
하지 않고 잡초가 무성한 자연 상태로 두고 있어 조금은 우울한 모습이다. 우물터 곳곳에는
우물을 구성하던 돌이 널려있으며, 복원 계획은 예전부터 나오고는 있으나 구체적인 것은 없
다. 허나 제1한우물이 복원되었으니 제2한우물은 어설프게 복원하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진리라고 본다. 대자연의 일부로 녹아내린 현재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으며 현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  옆에서 바라본 제2한우물터
돌로 다진 석축이 없었다면 자연산 늪지대로
봐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만큼
이곳은 대자연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  제2한우물터에 모여있는 수분들
비록 흔적만 남은 늙은 우물이나 비가 내린 이
후에는 약간씩 물이 고여 이곳의 본분을 조금
이나마 회복한다.
하지만 우물터는 제대로 흩어진 상태라 식수는
곤란하며, 우물터 주변 수풀들이 이 물에 의지
해 살아가 늪지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  호암산성 건물터

제2한우물터 동쪽에는 건물터가 수풀을 뒤집어 쓰며 조용히 누워있다. 여기서는 시기가 다른
건물터들이 중복되어 확인되었는데, 제일 처음에는 기단(基壇)을 지닌 건물이 자리했다. 이
건물은 신라 중/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세월에게 잡혀간 이후, 23x27m 범위에
서 기존 건물터의 초석을 옮기고 평지를 닦은 다음, 새로운 건물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신라 후기 기와편과 글씨가 새겨진 기와 등, 많은 기와들이 햇살을 보았으며, 축조
시기가 아리송한 문비석(門扉石)과 네모꼴의 석렬, 외곽의 자취가 확인되었으나 이곳에 깃든
흔적들이 워낙 복잡하여 건물터의 정확한 규모와 형태,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다만 이곳이 호암산성 내부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산성을 관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장
수와 군사들의 숙소로 여겨진다.


▲  호암산성 건물터 주춧돌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건물터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오랫동안 상실한 채,
윗도리가 묵직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호암산 신랑각시바위(사랑바위)

제2한우물터에서 석수역 방향 서남쪽 능선길을 6~7분 내려가면 호암산성 남문터가 나온다. 이
곳 직전 서쪽에 천하를 굽어보는 조망대가 있는데, 남문터는 잠시 접어두고 그 조망대로 내려
가보자. 한참 내려갈 것도 없이 성벽터 경사에 닦여진 계단만 내려가면 끝으로 거기서 오른쪽
(북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신랑각시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반갑게 눈인사를 건넬 것이다.

호암산은 호랑이를 닮은 바위 뫼에 걸맞게 잘
생긴 바위와 벼랑이 많다. 신랑각시바위도 호
암산을 수식하는 명품 바위의 하나로 사람 손
과 발이 닿기 어려운 벼랑에 우뚝 솟아 금천구
를 비롯한 천하를 굽어본다.
그는 오랫동안 사랑과 혼인, 심지어 아들까지
얻게 해준다는 특별한 바위로 지역에서 명성이
자자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아련히 전하
고 있다.

▲  신랑각시바위 조망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익히기 전인 한참 옛날, 금천 고을(시흥동)에 잘생긴 총각과 아리따운 낭
자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집안은 대대로 원수
관계라 부모가 쌍수를 들고 교제를 반대했다. 하여 서로 불이 난 자식들을 떼어놓고자 다른
곳에 혼인을 시키려 했고, 이에 뚜껑이 뒤집힌 낭자는 깊은 밤에 가출하여 호암산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

이를 늦게 안 총각은 낭자를 찾으러 서둘러 호암산으로 올라갔는데, 이미 날은 어두워진 상태
였다. 허나 다행히도 산중턱 절벽 위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낭자를 발견, 그녀에게 달려가 서
로 격하게 껴안으며 하염없이 눈물즙을 짰다.
그들은 달님에게 세상 끝까지 함께 하겠다며 기도를 올리고 밤을 지샜는데, 이를 엿들은 달님
은 신통력을 부려 서로 마주보며 우뚝 선 바위로 만들어버렸다. 달의 친절한(?) 배려 덕에 영
원히 같이 있게는 되었으나 문제는 돌이라는 것. 혼인은 커녕 움직일 수도 없고, 숨도 못쉬며
, 아주 중요한 예민한(?) 짓도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해피엔딩인지 그 반대인지 솔직히 판단
이 서질 않는다.

어쨌든 그 전설로 인해 이 바위는 사랑바위, 신랑각시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호암산
그늘에 사는 선남선녀들이 이곳을 찾아 손을 맞잡고 사랑을 고백하면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한
다. 또한 혼인을 하여 여기서 기도를 하면 옥동자까지 얻을 수 있었다고 하며, 늙어 죽을 때
까지 백년해로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물론 전설의 내용처럼 그들이 바위로 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집을 뛰
쳐나와 여기서 사랑을 굳게 다짐하고 인근 산속이나 머나먼 곳에서 살림을 차려 잘 먹고 잘
살았거나 아니면 현실을 비관해 같이 벼랑 아래로 뛰어내린 것으로 보이며, 그 사연이 바위에
씌워져 사랑과 관련된 바위로 포장되었을 것이다.


▲  확대해서 바라본 신랑각시바위의 위엄
호암산 서남쪽 능선 서쪽 벼랑에 자리해 있어 서쪽과 북서쪽이 확 트여있다.
하여 일품 바위와 함께 일품 조망까지 덩달아 누릴 수 있다.

▲  신랑각시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동과 독산동, 가산동 등 금천구 지역과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시 지역이 흔쾌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호암산성 남문터 주변 서쪽 남벽(南壁)터

신랑각시바위 동남쪽에는 호암산성 남문터가 있다. 신랑각시바위 관람용으로 지어진 조망대도
산성 성벽터에 닦여진 것으로 이곳은 석수역에서 호암산, 삼성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산꾼
들의 발길이 무척 잦다.
나도 이 코스를 여러 번 탔었으나 산성의 흔적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근래 발굴조사에
서 교묘하게 숨바꼭질을 벌이던 남문터와 주변 성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그들을 보존하
고자 기존 산길에는 금줄을 치고 서쪽에 나무데크 계단길을 내었으며(남문터 동쪽에도 오르는
길이 있음) 호암산성 안내문과 안내도를 설치했다.

▲  일부만 남아있는 호암산성 남벽

▲  남문터 서쪽 남벽터

푸르게 우거진 나무와 황토색 흙 사이로 고된 세월에 지친 남벽 성돌이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며 이곳이 옛 산성이었음을 애써 속삭인다.

▲  호암산성 남문터
인공티가 느껴지는 돌들의 무리가 여기저기 모여있으니 그들이 호암산성과
남문을 이루던 성곽의 흔적들이다. 뒤늦게 세상에 잡힌 그들의 보존을
위해 기존 산길에 금줄을 치고 옆에 우회길을 내었다.

▲  경사를 따라 층층이 주름진 남문터

이곳은 오랫동안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로 바쁘게 살았다. 커다란 바위와 인공티가 다소 느껴
지는 층층이 둘러진 둘들은 이곳이 예사로운 장소가 아니었음을 오랜 세월 동안 눈치를 보냈
으나 나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무더기로 여기고 무심히 지나쳤다.
허나 그들이 글쎄 호암산성의 숨겨진 흔적들이었다.
그냥 돌무더기가 아닌 늙은 호암산성의 흔적이라니 그들이 정말 180도 달라 보인다. 사람에게
는 옷이 날개이듯, 돌에게는 문화유산 경력이 날개인 모양이다.


▲  호암산성 서남쪽 성곽터

남문터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아직 확인을 하지 못한 서남쪽 성곽길을 쫓아갔다. 이 성
곽길은 서남쪽 능선 서쪽 벼랑을 따라 이어지며 서서히 능선길과 멀어진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숨겨진 길이나 성곽터가 얇게 이어져 있고, 사람들의 발길도 이미 적지 않게 들어간 상
태라 그런데로 길 티를 낸다.
벼랑 구간이 많으나 괜찮은 조망지가 많아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지역이 늘 시야에 따라와
두 망막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며 그 길을 계속 따라 가면 서문터 뒤쪽으로 이어진다.


▲  호암산성 서남쪽 성곽터에서 바라본 천하
금천구 지역과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지역

▲  산성 안쪽에서 바라본 호암산성 서문터 (추정 서문터)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산길에 서문터가 있다. 허나 아직까지는 확
신이 부족하여 '추정' 2자를 붙여 회피 조건을 붙이고 있는데, 주변 지세를 보면 이곳이 성문
터는 맞는 듯 싶다. 성문이라고 해서 문루(門樓)까지 달아서 크게 지을 필요는 없으며, 조그
만 암문(暗門) 형태로도 충분하다.
산성 밑으로 난간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그 길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불영암~시흥동 산
길이며, 희미하게 남아있는 산성 흔적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바로 불영암 뒷쪽으로 이어진다.
남문터에서 서남쪽 성곽과 서문터 안쪽을 거쳐 불영암을 바로 잇는 길을 새로 개척하여 호암
산 정보력과 경험치를 크게 살찌웠으니 이번 호암산 복습 산행의 성과가 실로 크다.



 

♠  호암산 한우물, 불영암(佛影庵)

▲  북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호암산성 북문터에서 서남쪽 길로 내려가면 한우물과 불영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우물은 석
구상과 더불어 호암산의 오랜 명물로 한우물이란 큰 우물을 뜻한다. 하여 천정(天井), 용복,
용초 등에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고, 마땅한 수원(水源)이 없음에도
물은 늘 넉넉하게 나온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해 신비로움을 준다.

이 우물은 신라가 호암산성을 닦던 7~8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물 자리 밑
에서 7~8세기 우물(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못의 규모는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였다. 이후 조선 때 서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겨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
의 장방형 못(우물)을 구축했다.
허나 조선 후기 이후, 호암산성과 함께 버려져 제대로 망가진 것을 1991년 2차 보수 정비공사
때 신라 우물터와 조선 우물터를 혼합하여 복원했다. 하여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은 신라 때 우
물 자리이며, 수풀이 자라는 남쪽 부분은 조선 때 우물 자리이다. 또한 동쪽 산정에도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우물 유적이 있는데, 그를 제2한우물, 불영암 옆에 있는 이곳을 제1한우물이
라 부르기도 한다.
 
1990년 봄, 한우물 2개를 발굴하면서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
서 '仍伐內力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제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
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 때 유물이 많이 나왔다.


▲  윗쪽에서 바라본 한우물의 위엄

임진왜란 시절인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썼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있어 일찍
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상시와 전쟁 때는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려준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득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여기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나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딱히 손은 대지 않는다. 우
물에 가득 모인 수분은 식수가 아닌 우물을 채워 연못 분위기를 내는 원초적인 역할을 할 뿐
이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 등의 수풀이 둥지를 틀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우물 주위로 돌난간과 철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호암산 한우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한우물의 깊은 속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우물을 거울로 삼으며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한우물과 불영암은 서쪽과 북쪽이 확 트인 벼랑에 자리해 있어 천하를 조망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하여 여기서는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강서구, 양천구, 한강 이북에 서울 서북
부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광명시, 부천시, 인천 지역은 물론 대기가 좋으면 서해바다와 고
양시, 파주시, 심지어 개성(開城) 지역까지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한다.
그리고 한우물 주변과 한우물조망대에는 의자가 여럿 있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을 굽어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독산동, 가산동 등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지역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②
호암산 북쪽인 목골산과 금천구,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한강 너머의
서울 서북부 지역,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 밑이자 한우물 옆에는 불영암이란 작은 암자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한우물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
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인데, 가파른 벼랑에 자리해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
고 있어 호압사나 시흥동 벽산아파트,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띈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
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여기서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그런 것을 보면 오랫동안 승려의 기도 수행처로 쓰였던 듯 싶으며, 호암산성 서벽에 위
치해 있고, 조망도 우수하여 산성을 지키며 속세를 살피던 망대(望臺)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100년 이상 묵은 절들은 자신들의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내걸지만 이곳은 그런
것이 일절 없어 20세기 중반 이후 지금의 절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무지 짧은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물이 전부이
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하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
게 불리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가 않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어 물 수급은 어렵지 않으며,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우물과 천하를 향한 일품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서 절을 세웠을 것이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조촐한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
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늙은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두어 볼거리를 잠시 늘
리기도 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음)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
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가 봉안되어 있어 이곳의 새로운 명물을 꿈
꾼다.

*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02-809-3754)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남쪽 방향)

    ◀  간단하게 이루어진 불영암 범종각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의 보
금자리이다. 매일 6시와 18시가 되면 잠든 범
종을 흔들어 깨우는데, 그 종소리가 호압사는
물론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까지 널리 울려퍼
진다.

▲  돌탑과 오색연등이 늘어선 불영암 앞길
(한우물 방향)

▲  산신 할배의 공간인 산신각

            ◀  산신각 산신상
대웅전 뒤쪽 벼랑에는 산신 식구를 머금은 산
신각이 달려있다. 불영암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곳으로 벼랑에 목재로 대를 쌓고 그곳에
1칸짜리 산신각을 닦았는데, 보통 산신 가족은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이 전부이나 이곳
은 특이하게 사슴까지 겯드려 놓았다.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는 2009년에 마련된 석불이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
에 커다란 머리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머리 주
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을 주나 세월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
치 불상에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 듯하며, 석불 머리 옆에는 산신각이 달려있다.


▲  불영암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밑에 불영암 경내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시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두 망막을 제대로 흥분시킨다.
한우물과 불영암 구역에서 제일 높은 곳이자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니 한우물에 왔다면 이곳
에 꼭 들려 국보급 조망을 덤으로 누리기 바란다.


▲  호암산성 서문터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 방향 산길을 조금 내려가면 앞서 지났던 서문터가 다시 마중을 한
다.
앞서에는 산성 안쪽에서 서문터와 불영암~시흥동 산길을 내려다봤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가 되
어 산성 바깥에서 이렇게 올려다보는 입장이 되었는데, 호암산에 오면 거의 이 코스로 내려가
는 편이었다. 예전에는 호암산성이 여기까지 팔을 뻗을 줄은 생각도 못 하였고, 아직 추정이
긴 하나 이곳에 성문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안했는데, 여기서 성곽과 성문터가 버젓이
나온 것이다.


▲  호암산성 서문터와 돌탑 하나

서문터는 각박한 경사지에 자리해 있고, 좌우로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감히 기웃거릴
수 없는 천험(天險)의 자리이다. 남문은 여기보다 지형이 약간 좋으나 역시 공격에 불리하며,
북문도 능선에 자리하나 적들이 호암산 정상부를 점령하고 치고 들어올 경우 수비가 약간 힘
들 수 있다.

서문터를 둘러보고 칼바위와 호암산폭포를 거쳐 시흥동 벽산아파트로 내려갔다. 이번 호암산
나들이는 약간씩 남아있던 미답 공간과 새로 발견된 호암산성의 숨겨진 부분을 크게 들추는
성과를 거두며 기분 좋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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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북현무를 거닐다. 북악산 한양도성 나들이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숙정문, 말바위>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도심 북악산 청운대

▲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북악산 청운대

 



 

가을이 늦가을로 한참 숙성되어 가던 11월의 첫 무렵, 서울 도심의 북현무(北玄武)인 북
<北岳山, 백악산(白岳山)>을 찾았다.

북악산은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구석구석 찾고 있는데, 이
번에는 한양도성이 흐르는 주능선(창의문~말바위)을 복습하기로 했다. 이미 지겹도록 복
습한 곳이지만 돌아서면 또 생각나고 몸살 나게 그리워지니 내 전생이 아마도 북악산 고
양이나 산짐승이었던 모양이다.


 

♠  북악산 창의문~백악마루 구간

▲  창의문(彰義門) - 보물 1,881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의 서쪽 관문이자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경계에 자리한 창의문은 자
하문고개를 오랫동안 지켜온 성문이다.
성밖 부암동(付岩洞)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서울 도심을
둘러싼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이다. 여기
서 4소문이란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과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
小門, 광희문(光熙門)>, 그리고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렸으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北小門)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닦으면서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했다. 또한 문 북쪽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에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별서와 그들이 즐겨 찾던 경승지가 즐비하여 그들의 은밀한 통행로
로 쓰이기도 했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
監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
문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늙었을 뿐, 문루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58년에
중수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의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은 끝
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  창의문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
(혹은 닭)과 구름무늬


1960년대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았는데, 그 과정에서 문 서쪽 50m 남짓 성
곽이 끊어지게 되었다. 하여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
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곽이 견우와 직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
간은 도로 위에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앞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봐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의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해서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
림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고,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
황의 모습 같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늦가을에 잠긴 창의문 안쪽(남쪽) 숲길

창의문을 둘러보고 마치 국경 검문소 같은 창의문안내소를 들어서면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시작되어 방심하기 쉽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성곽길은 점차 각박한 모
습을 보인다. 하여 쉬엄쉬엄 가라며 돌고래쉼터와 백악쉼터 등 2곳의 쉼터를 두었다. 가쁜 숨
을 내쉬며 발을 움직여야 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 거리도 그리 길지가 않다.


▲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돌고래쉼터 구간 (백악마루 방향)

▲  돌고래쉼터와 돌고래바위

성곽길이 슬슬 흥분기를 보일 쯤에 돌고래쉼터가 모습을 비춘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악산 주능선을 개방하고 이곳에 쉼터를 닦으면서 붙인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며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
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으로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바라보인다.


▲  힘차게 흘러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 방향)
성 안쪽은 종로구 청운동(淸雲洞), 바깥은 부암동 지역이다.

▲  정상을 향해 숨가쁘게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

▲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 북악산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비봉능선, 문수봉 등


눈이 시리도록 맑은 푸른 하늘 밑으로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북악산과 북한산(삼
각산)을 빚었고,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은 그 틈에 평창동
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부암동 같은 동네를 닦았다.
사진 왼쪽 동네가 홍지동(弘智洞)과 부암동, 신영동이며, 중앙과 오른쪽은 이 땅에 0.1%가 산
다는 평창동(平倉洞)으로 졸부들의 고래등 저택과 고급 빌라가 즐비해 보는 눈이 썩 즐겁지가
않다.


▲  백악마루입구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부암동과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과 북악산 북쪽 자락,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창의문에서 백악마루입구 구간 중에서 '돌고래쉼터~백악마루입구' 구간이 가장 경사가 각박하
다. 안그래도 힘든 가파른 길이 여기서 크게 흥분기를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백악마루에
서 창의문 구간 산세가 거의 급경사를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 산에 대한 자존심을 곱게 접고
천천히 한 발자국씩 딛다 보면 나올 것 같지 않던 백악마루가 알아서 모습을 드러낸다.


▲  북악산 정상 바위 (백악마루)

창의문안내소에서 20여 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342m)에 이르게 된
다. 여기서 마루는 순수 우리말로 정상, 산꼭대기를 뜻하는데,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현장으로 정상 한복판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 사람 키보다 2배 남짓 높은 크고 견고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
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그러니 정상 인증을 하려면 무조건 바위에 올라가기 바란다.

정상 남쪽에는 소나무와 진달래가 우거져 있으며, 정상 바위와 난간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숨겨진 산길이 있으나 아주 비싼 길이라 출입을 통제
하고 있으며, 난간 너머는 나라의 예민한 구역이니 애써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북쪽으로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
쪽은 부암동과 인왕산,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산, 멀리 관악산(冠岳山)과 호암산까지 두 눈
에 들어와 조망도 일품이다.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으로 서
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고 오랜 세월 서울을 지켜온 북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북악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27

▲  백악산 정상 표석

▲  북악산 정상부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白岳山)> - 국가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은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다. 이들을 내사산
(內四山)이라 부르는데, 그들 중 북악산이 맏형이며, 낙산은 막내 동생이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구축했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따라
북악산을 북현무(北玄武)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산으로 서울 도심(종로구, 중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바라보이는데,
오랫동안 서울을 상징하는 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닦고, 그
북쪽(현재 청와대)에는 넓게 경복궁 후원을 두었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북문인 숙정문
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자하문)이 고색의 모습으로 고개 중
턱을 지킨다.
북악산 남쪽 자락인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성
했으며, 북악산이 베푼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
堂)계곡 등이 있었고, 풍경이 아름다워 조선 초기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숙정문 남쪽 주변은 사대부 여인들의 봄꽃놀이 명소로 바쁘게 살았다.
한양도성과 법흥사(法興寺)터, 대은암계곡 바위글씨, 만세동방성수남극 바위글씨 등 여러 문
화유적이 있으며, 북악산 북쪽 자락 백사실계곡에는 백석동천이란 별서(別墅) 유적이 전하고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짙어서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
났다. 그들은 툭하면 궁궐 후원과 북촌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
가 호랑이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북악산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은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進宮)
귀신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하여 인왕산과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
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당임)

1968년 1.21사태 이후 굳게 닫힌 북악산은 북악산길과 주택가와 접한 일부 산자락만 겨우 출
입이 가능했으나 2000년대 초반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이 개방되었고, 2006년 4월 1일 홍련사
에서 숙정문, 촛대바위 구간이 해방되면서 굳게 잠겼던 북악산 주능선의 자물쇠가 드디어 열
리기 시작했다.
하여 2007년 4월 5일 말바위에서 창의문까지 주능선 구간(4.3km)이 싹 해방되었으며, 2009년
에 북쪽 능선의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열렸고, 삼청공원~말바위 구간 등이 해방되었다가
2020년 11월 '북악산길~청운대쉼터','북악산길~곡장' 구간이 추가로 열렸다. 그리고 2022년
봄에 '삼청공원~청운대쉼터','삼청공원~법흥사터~숙정문','칠궁/춘추관~백악정' 등이 더 열려
지금에 이른다.
이렇듯 북악산의 금지된 속살이 많이 열렸지만 그렇다고 이곳의 예민한 성격까지 가라앉은 것
은 아니다. 하여 여전히 금지 구역은 적지 않으며, 북악산 주능선과 주능선으로 인도하는 길,
청와대 주변 길(칠궁/춘추관~백악정)은 탐방시간에 제한이 있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주로 남아있다. 또한 오랫동
안 금지된 곳으로 엄격히 묶여있던 탓에 나무와 식물들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려 숲이 원시림
마냥 울창해 서울 도심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
고 있어 새들이 많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아차산, 관악산 등과 더불어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
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쭉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으니 개발의 칼질 또한 그 눈치로 마음껏 칼질을 할 수는 없
다.

북악산(백악산)은 '서울 백악산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된 면
적은 3,598,127㎡에 이른다.

* 북악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부암동, 삼청동, 명륜동 / 성북구 성북동 (창
  의문안내소 ☎ 02-730-9924,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 말바위안내소 ☎ 02-765-0297)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관악산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 동쪽 자락과 성북동,
성북구, 동대문구, 서울 동부 및 동북부 지역


 

♠  북악산 청운대~말바위 구간

▲  청운대(靑雲臺) 표석의 위엄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청운대(293m)가 마중을 한다. 난쟁
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키의 청운대 표석이 이곳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는데, 공간이 넓
고 의자가 넉넉히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특히 말바위나 숙정문, 삼청공원, 북악산길
에서 올라왔다면 여기서 코앞에 보이는 백악마루에 입맛을 다시며 잠시 두 다리를 쉬기 마련
이다.
여기서는 성북동과 북한산(삼각산),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울 도심, 남산 등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아주 일품이다.


▲  청운대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 주능선과 동쪽 자락, 성북동, 성북구, 강북구 등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등이 흔쾌히 시야에 잡힌다.

▲  시원스럽게 뻗은 한양도성 청운대~곡장입구 구간 (동쪽 방향)

성곽 바깥 길 북쪽에는 철책이 꽁꽁 둘러져 마치 휴전선이나 국경선을
거니는 쫄깃한 기분이다.

▲  청운대쉼터
북악산 주능선에서 가장 너른 쉼터로 군부대 운동장을 개조해 나그네들의
쉼터로 삼았다.

▲  한양도성 촛대바위~곡장입구 구간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 소나무의 푸른 물결과 향긋한 솔내음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숙정문 서쪽에는 촛대바위가 있다. (숙정문과 곡장입구 사이에 있음)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듯 싶은데, 바위 남쪽 밑에서 봐도 그다지 촛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바위 남쪽 밑 탐방로는 2022년 봄에 해방되었으며, 바위 정상부는 여전히 금지구역임)

천하가 북악산 촛대바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왜정이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무식하게 쇠말
뚝을 박았던 추악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에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는데,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의
정수리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의 머리 부분을 아작 내어 이 땅을 영원히 뜯어먹겠다는 의
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으나 말뚝의 휴유증 때문일까? 이 땅은 아직
도 혼돈에 잠겨있다. 친일매국노와 그런 것을 추종하는 잡것들이 권력과 부를 챙기고 이 땅을
이간질시켜 나라의 기본부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촛대바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까?
그때가 되면 주름진 나라 사정도 좀 펴지겠지.
(왜정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측량용이란 말도 있으나 설령 측량용이라고 해도 그건 일부에 불
과함. 대부분은 추악한 의도로 꽂은 것들임)


▲  숙정문 서쪽에서 바라본 성북동(城北洞)
산자락에 포근히 감싸인 동네가 평창동과 더불어 이 땅에 0.1%가
산다고 하는 성북동이다.

▲  한양도성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 앞은 바로 각박한 산비탈이라 성문을 지키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북쪽을 향해 입을 연 숙정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으로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과 함께 도성 4대문의 일원이다. 하
여 북문, 북대문(北大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고 규모가 작아 도
성의 대문이라기 보다 산성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진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가운데 1자만 다른 숙청문(
肅淸門)이었다. 1396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 풍수학자인 최양선이 태
종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해 이들 문을 꽁꽁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 연유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이는 예
민한 위치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설령 이 성문을 나와도 이어지는 곳은 숲이 무성한 북악산 북쪽 능선과 북한산, 성북동이 고
작이었다. <성북동은 동소문(東小門)을 통해서 갈 수도 있음>
그리고 평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고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에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서 북쪽은 음
(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의 존재
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훨씬 컸던 것이다.

1504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이름이 갈렸
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한다. 숙정문 외에도 북정문(北靖門)
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언제부턴가 숙정문으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이 금지된 구역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
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문루를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성북동 일대가 바라보이며, 높은 곳에 자리한 것
은 분명하지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고, 북쪽도 겨우 성북동과 삼청각
, 북악산 북쪽 능선이 전부라 조망은 생각보다 별로이다.
매년 봄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전하는 것은 없다.

* 숙정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5-22


▲  한양도성 숙정문~말바위 구간

▲  북악산 말바위

말바위안내소를 나와 동쪽으로 조금 가면 성 밖으로 넘어가는 계단길이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을 부시고 길을 낼 수가 없어 부득이 성곽 위로 높게 나무다리를 내어 성밖으로 통
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전망대를 설치해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을 비롯해 성북구, 종로구 동부,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 성동구, 수락산~불암산, 아차산~용마산 등이 훤히 망막에 들어와 조망도 진국이다. 특히 여
기서는 성북동 대부분이 시야에 들어와 성북동전망대라 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서 성곽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말바위란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가 마중을 한다. 그
는 북악산(백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 때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詩文)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쉬었다고 한다. 하여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
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북악산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한다. 즉 말처럼 생겼다고 해
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39
년에 시간이 흐른 2007년 4월에 다시 공개가 되었고 관람 통제가 심한 북악산 주능선 구간과
달리 이곳은 아침과 저녁에도 접근이 가능하다.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말바위에서 성곽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오른쪽(남쪽)으로 길이 90도 꺾인다. 성곽과 더 함께
하고 싶어도 군사시설로 길이 완전히 막혀 별수 없이 남쪽 길로 내려가야 되는데, 소나무가
무성한 그 길을 내려가면 북악산 남쪽 자락에 넓게 깃든 삼청공원(三淸公園)이다.

삼청공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나와 취운정(翠雲亭)터 표석이 있는 감사원교차로에서 왼쪽(북
쪽) 길로 가면 성북동과 성대후문으로 인도하는 와룡공원 고갯길(와룡고개)이 펼쳐진다. 이곳
은 도심과 성북동을 바로 이어주는 지름길로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지그재그로 굴곡의
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숲도 삼삼하고 경치도 아름다우며, 특히 벚꽃이 살랑거리는 봄과 단풍
의 향연이 우울한 마음을 부여잡는 늦가을 풍경은 이곳의 갑(甲)으로 꼽힌다.
게다가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조망과 야경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걸작이다. 길 밑에
는 도심에 숨겨진 뒷길인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너른 숲
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서울의 동궐(東闕)인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이다.

이렇게 하여 북악산(백악산) 나들이는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와룡공원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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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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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의 작은 지붕들, 봉산 ~ 백련산 나들이 <봉산 봉수대, 서울둘레길7코스, 백련근린공원>

서울 봉산, 백련산



' 은평구의 작은 지붕들을 거닐다 (봉산, 백련산) '

봉산 봉수대

▲  봉산 봉수대 (봉산 정상)

백련산에서 바라본 은평구 지역 백련산 능선길

▲  백련산에서 바라본 은평구 지역

▲  백련산 능선길

 



 

♠  봉산(烽山) 둘러보기

▲  수국사에서 봉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길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5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봉산을 찾았다. 둥근 해가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구산동(龜山洞) 버스 종점에서 그를 만나 떡볶이와 순대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황금사
원으로 유명한 수국사에 발을 들였다. (☞ 수국사 둘러보기)
이미 여러 차례 인연을 지었던 수국사는 코 앞으로 다가온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준비에
아주 분주했는데 그런 경내를 20분 정도 둘러보고 서쪽 산길을 통해 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수국사에서 완만하게 이어진 산길을 10여 분 정도 오르면 봉산 능선길에 이르는데 여기서 북
쪽으로 가면 벌고개, 앵봉산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5~6분 정도 가면 봉산 정상이다.


▲  수국사 서남쪽 산자락에 닦인 체육시설과 쉼터

봉산 능선은 수색에서 벌고개까지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북쪽으로 바로 이어진 앵봉산
과 더불어 은평구의 서쪽 벽으로 천하 제일의 둘레길로 콧대가 높은 서울둘레길이 그들의 신
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가는데, 봉산 능선을 거쳐가는 서울둘레길 7코스<봉산~앵봉산 코스,
가양역↔구파발역 16.4km> 덕분에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면서 외지 탐방객들이 많이 늘었다.


▲  녹음이 익어가는 봉산 능선길 (서울둘레길7코스, 정상 방향)

▲  봉산 정상 직전 능선길 (서울둘레길7코스)

▲  봉산 정상에 세워진 봉화정(烽火亭)

봉산(207.8m)은 서울 은평구와 고양시(高陽市)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약간 작은 산이다. 폭은
좁지만 대신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수풀이 걸쳐진 커다란 벽 같다.
봉화대(烽火臺)가 있던 산이라 하여 단순하게 '봉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산 정상에
서 좌우로 뻗은 산줄기가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평화롭게 앉아있는 형상이라 하여 봉령산(
鳳嶺山)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으며, 수국사에서는 '태화산(太華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봉산 북쪽은 벌고개를 경계로 하여 앵봉산과 살을 대고 있고, 남쪽은 경의선 철로를 넘어 하
늘공원과 매봉산으로 이어지는데 정상 동북쪽에 봉산의 대표 명소인 수국사가 안겨져 있으며
정상에는 2011년에 지어진 봉수대와 봉화정이 있어 약소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또한 예로부터 봉산 무지개가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여름에 소나기가 온 이후, 봉산
과 백련산(응암동) 사이로 일곱 색깔 무지개가 종종 나타났다고 한다. 그 빛깔이 선명하고 고
와 천하 무지개 중 최고였다고 하며, 무지개가 나타나면 동네 아이들은 그것을 타고 선녀 누
님이 내려온다고 하여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허나 인간의 이기적인 개발의 칼질과 산업화로 선녀도 등을 돌리면서 그 무지개도 거의 자취
를 감추었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에는 무지개를 종종 만났지만 다 커서는 자연산 무지개를
제대로 구경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분수대나 인공폭포에서 생기는 무지개는 제외)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구산동, 갈현동 주민
들이 정상에 모여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
를 외쳤던 유서 깊은 현장이기도 하며, 2011년
에 은평구에서 정상에 '봉산 해맞이공원'을 닦
으면서 봉화대와 봉화정, 조망데크를 설치했다.
또한 산길을 정비하여 벌고개와 수국사, 구산
동, 신사동(新寺洞), 수색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서울둘레길7코스가 봉산을 지나가면서
산의 명성도 적지 않게 상승했다.

▲  봉산 정상 남쪽 능선길
(신사동, 수색 방향)


▲  봉화정에서 바라본 봉산 봉수대

▲  봉수대 옆에 지어진 조망데크

▲  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고양시 향동동, 망월산


▲  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구산동과 갈현동, 연신내, 북한산(삼각산) 서부


봉산은 동쪽과 동북쪽, 서쪽이 훤히 트여있어 조망이 매우 일품이며, 해돋이와 일몰 구경에도
정말 최적화되어 있다.
여기서는 은평구의 대부분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서쪽 산줄기, 백련산, 서대문구 일부, 고양
시 향동동과 용두동, 망월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오는데, 봄에 종종 지독하게 침범하는
중공 잡것들의 미세먼지 패거리가 푸른 하늘을 앗아가면서 마치 하늘이 주저앉은 듯, 시야가
뿌옇다. 구름 밑 세상은 그런데로 보이나 하늘이 미세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두 눈도 편
치 못하고, 코와 입도 괴롭다.


▲  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오늘도 중공 잡것들의 미세먼지로 고통 받는 서울의 하늘 (응암동과 신사동,
녹번동, 수색, 백련산, 북가좌동 지역)

▲  봉산 봉수대(烽燧臺)
비록 장식물로 지어지긴 했지만 저들을 다시 세움으로써 봉산이란
이름값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봉산 정상의 상큼한 장식물인 봉수대는 동그랗게 다져진 공간 복판에 자리해 있다. 봉수 2기
가 쌍둥이꼴로 바짝 붙어서 천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꽤 돈독해 보이는데, 그 뒤쪽에 조
망데크가 있고 그 앞에 너른 공터와 봉화정이 있다.

봉산 봉수대는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전한다. '봉현(峰峴) 봉수'라 주로 불렸으며,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에는 '영서역(迎曙驛) 서산(西山) 봉화'라 나와있다. <영서역은 불광동 지역>
압록강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봉수 제4거(炬)의 경유지로 고양시 고봉산(高峯山) 봉화에서 신
호를 받아 안산(鞍山, 무악산) 봉수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18세기 이후, 인근 해포봉
수(고양시 강매동)로 봉수대가 옮겨지면서 봉산 봉수대는 문을 닫게 된다.

2011년에 은평구에서 봉산 정상에 '봉산 해맞이공원'을 닦으면서 고려 말~조선 초 양식을 참
조해 약 300년 만에 다시 봉수대를 심어 산의 이름값을 다시 하게 했다. 허나 어디까지나 장
식용이라 옛날처럼 모락모락 봉화를 피울 수 없다. 게다가 고색이 아직 여물지 못했고 마치
타일을 붙인 듯한 모습이라 다소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모습도 점점
익숙해질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약인 모양이다.


▲  봉산을 내려오다 (수국사 서남쪽 산자락 쉼터와 운동시설)

봉산 정상에서 미세먼지를 무릅쓰고 20분 정도 정상의 자리를 누렸다.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탐을 내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적당히 있다가 내려오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허나 사
람은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50% 모자란 존재들이라 그 기본적인
것을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봉산 남쪽 능선을 타고 수색 쪽으로 넘어가고 싶으나 시간도 그렇고 날씨도 그
렇고 해서 나머지 구간은 다음으로 미루고 도돌이표처럼 다시 수국사로 내려왔다.

* 봉산(봉산 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산136-13일대



 

♠  은평구와 서대문구의 공동 지붕, 백련산(白蓮山)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①
홍은동과 홍제동 지역, 인왕산(왼쪽 산), 안산(오른쪽 산)


여름 제국과 가을의 팽팽한 경계선인 9월의 첫 무렵, 은평구의 동남쪽 지붕이자 서대문구(西
大門區)의 북쪽 지붕인 백련산을 찾았다.
통일로와 세검정로, 연희로가 만나는 홍은4거리에서 서쪽(연희동 방향)으로 100여m 정도 가면
오른쪽(북쪽)으로 골목이 하나 있는데, 그 골목에 백련산으로 인도하는 나무계단길이 숨어있
다. (백련산 동남쪽 기점임) 시작부터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좀 각박하나 계단길을 적당히 닦
아놓아 그 급한 성질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런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바위에 심어진 조그만 네모난 정자가 마중을 한다. 이곳에 올라
서면 동쪽으로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산줄기부터 홍은동, 홍제동, 인왕산(仁王山), 안산, 연
희동이 좁게나마 시야에 들어온다. 백련산은 통일로와 맞닿은 동쪽 부분(산골고개, 녹번동)에
는 바위와 벼랑이 많으며 응암동과 백련사와 맞닿은 서쪽과 남쪽 부분은 거의 흙산이다.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푸른 하늘 밑으로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산줄기와 탕춘대능선, 홍은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홍은동(弘恩洞)과 홍제동(弘濟洞) 지역, 그리고 인왕산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홍은동과 홍제동, 연희동, 안산(왼쪽 산), 백련산 남쪽 부분(오른쪽 산줄기)

▲  바위에 걸터앉아 시내를 굽어보는 쉼터 정자
정자는 작고 보잘것은 없지만 위치와 조망만큼은 정말 기가 막힌다. 바로 밑으로
시내가 펼쳐져 있어 마치 세상의 주인이 된 기분인데 이곳에 걸터앉아 시내
야경을 바라보며 곡차 1잔 겯드리는 재미도 꽤 쏠쏠할 것 같다.

▲  솔내음이 율동을 부리는 백련산 동쪽 능선길

바위 정자를 지나서부터 백련산의 하늘길(능선길)이 시작된다. 능선을 따라 백련근린공원, 백
련산 정상(은평정), 백련산근린공원까지 이어지며 대부분 짙은 숲길이라 그늘의 질감도 좋다. 게다가 산길 경사도 거의 느긋하고 은평정과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1급 조망까지 누
릴 수 있어 걸어가는 길이 썩 지루하지가 않다.


▲  대통령이 기념 촬영을 했다는 백련근린공원 동쪽 능선 바위
2017년 5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백련근린공원 부근(홍은2동)에 거주했음>

▲  대통령이 기념촬영을 했던 백련근린공원 동쪽 능선 바위의 앞 모습
(바위 이름은 없음)

▲  백련산의 동북쪽 끝을 잡고 있는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

백련근린공원 동쪽 조망대는 백련산의 동북쪽 끝이다. 앞이 확 트여있어 백련산에서 2등으로
일품 조망을 자랑하고 있는데 동북쪽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탕춘대능선과 족두리봉, 비봉능
선 등이 보이고 바로 밑에 녹번동을 비롯한 은평구 북부 지역, 봉산~앵봉산 산줄기, 인왕산,
북악산(백악산)까지 싹 시야에 잡힌다.

전망대 주변이 벼랑 일색이라 안전을 위해 난간을 둘렀으며, 전망대 옆으로 내려가는 계단길
이 있는데, 그 길은 통일로와 통일로 허공에 닦여진 산골고개 생태다리로 이어진다. (산골고
개 생태다리를 통해 북한산, 탕춘대능선으로 넘어갈 수 있음)


▲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은평구 북부 지역 (녹번동, 불광동, 구산동, 갈현동, 연신내, 진관동)

▲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산줄기 (족두리봉, 비봉능선, 탕춘대능선 등)

▲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홍은동과 인왕산, 북악산(왼쪽 산줄기)

▲  백련근린공원 북쪽 능선길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능선길은 서남쪽으로 크게 꺾인다. 생태공원처럼 꾸며진 백련
근린공원을 지나면 숲이 매우 삼삼한 능선길이 펼쳐지는데, 정상 주변에서 경사가 좀 흥분기
를 보일 뿐, 거의 느긋하여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다. 그런 길을 20분 정도 가면 백련산 정
상에 이른다.


▲  백련산 서쪽 능선길 (백련근린공원~은평정 구간)

▲  백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정상 직전)

백련산(215m)은 은평구 녹번동과 응암동, 서대문구 홍은동에 걸쳐있는 조촐한 뫼이다. 산 남
쪽 자락에 오래된 절인 백련사(白蓮寺, ☞ 관련글 보기)가 안겨져 있어 백련산이란 이름을 지
니게 되었는데, 조선 때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이 매를 날리며 사냥을 했던 매바위가 산자락에
있어 '응봉(鷹峯)'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매바위는 부암동의 붙임바위, 인왕산 선바위 등과 함께 서울의 이름난 바위로 1970년대까
지 있었으나 개발에 눈이 뒤집힌 동네 사람들이 무식하게 폭파시키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백련산은 동쪽 자락을 빼면 산세가 거의 완만하며 흥은4거리에서 백련근린공원, 은평정을 거
쳐 백련산근린공원까지 환상적인 능선길이 이어져 있다. 산 동쪽은 산골고개를 통해 북한산(
삼각산)과 이어지나 나머지는 거의 평지이며, 동남쪽은 홍제천을 사이에 두고 안산과 만난다.

산에 안긴 늙은 명소로는 백련사가 있으며, 산 동북쪽 자락에 백련근린공원이, 그리고 산 남
쪽 자락에는 백련산근린공원이 닦여져 있고, 산 정상에는 은평정이 자리하고 있다.


▲  백련산 정상에 자리한 은평정(恩平亭)

은평정은 한옥 양식과 콘크리트 건축 양식이 조잡하게 섞인 2층짜리 정자로 1989년에 은평구
에서 지었다.
백련산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며, 앞서 봉산처럼 해돋이와 일몰 구경에 최적화된 곳으로
여기서는 은평구 대부분 지역과 마포구, 서대문구, 고양시 동부, 한강 너머로 강서구와 양천
구,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인천 지역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은평구 남부와 마포구 서부, 하늘공원, 한강,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인천 계양산 등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응암동, 구산동, 역촌동, 갈현동 지역, 봉산~앵봉산 산줄기,
봉산 너머로 고양시 지역과 고봉산까지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은평구 북부(녹번동, 갈현동, 불광동, 연신내, 진관동 지역) 지역과
앵봉산, 노고산(老姑山) 등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녹번동과 진관동, 북한산 서남쪽 산줄기(족두리봉, 비봉능선)

▲  은평정 2층에 걸린 창정기(創亭記)
은평정의 창건 이유가 소상히 적혀있다.

▲  숲터널 속으로 빠져들다 ~ 백련산 남쪽 능선길 (백련사 방향)

▲  내리막의 연속인 백련산 남쪽 능선길 (백련사 방향)

▲  백련산 남쪽 능선길에서 만난 돌탑
백련산을 찾은 중생들이 작은 소망을 담아 쌓은 돌이 쌓이고 쌓여
자유분방한 모습의 돌탑으로 성장했다.


백련산 정상에서 10분 정도 정상의 기분을 누리다가 남쪽 능선길로 내려갔다. 숲터널과 다름
이 없는 그 길을 10분 정도 가면 백련사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하면 백련산근린공원
과 홍연초교로 이어지며 오른쪽(서남쪽)으로 내려가면 백련사이다.
여기서 백련사로 내려가면 얼마 안가서 백련사 주차장이 마중을 하며,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백련사, 동쪽은 백련사 마을버스 종점이다. 백련사는 자주는 아니지만 수국사처럼 아주 가끔
씩 찾는 절이라 이번에는 통과하고 백련사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 홍연초교 쪽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백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백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 녹번동 / 서대문구 홍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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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북쪽 끝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삼각산 정법사 (복천암터, 산사길, 북악산길)

성북동 정법사, 북악산길


' 성북동 정법사, 북악산길 5월 나들이 '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와 내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성북동(城北洞)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를 만나 최순우(崔淳雨) 옛집
과 길상사(吉祥寺) 등 성북동의 여러 단골 명소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저녁
을 먹기에는 시간도 이르고 입과 위가 섭취 준비가 덜 되어있어서 잠깐 눈요깃감을 생각
하니 번쩍 '정법사'가 뇌리 속에 스친다. 그곳은 길상사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절로
성북동을 100회 이상 들락거렸음에도 아직까지 내 손과 발이 미치지 못한 미답처였다.

정법사가 미답처(未踏處)로 버젓이 남아있던 것은 나를 흥분시킬 요소가 전혀 없는 현대
사찰로 보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에 창건된 것으로 알고 있었음) 하지만 그곳도 성
북동에 안긴 명소의 일원이라 서울 장안의 미답지를 1개라도 더 지울 겸 그곳을 찾았다.


▲  정법사 입구에 세워진 정법사 표석
표석 옆으로 놓인 계단길을 오르면 바로 정법사 경내이다. 계단길 옆에는
경사진 포장길이 있어 취향에 따라 골라가면 된다.



 

♠  성북동 꼭대기에 들어앉은 고즈넉한 산사, 조선 후기에
지어진 복천암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정법사(正法寺)

▲  정법사 대웅전과 그 주변

길상사에서 북쪽 오르막길을 7분 정도 오르면 골목(대사관로13길)이 서쪽으로 크게 구부러진
곳에 정법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성북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제일 북쪽 구석으로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
선 자락에 있으나 넓게 보면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에도 해당되어 '삼각산 정법사'를 칭
하고 있다. 18세기에 호암 체정(虎巖 體淨, 1687~1748)이 창건한 복천암(福泉庵)에서 비롯되
었다고 하는데,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비는 원찰(願刹)의 역할도 했다고 전한다.
허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감쪽같이 사라져 터만 남은 것을 1959년 건봉사(乾鳳寺) 만일
염불회(萬日念佛會)의 회주(會主)인 보광(葆光)과 석산(石山)이 가회동(嘉會洞)에 있던 건봉
사의 포교당인 정법원(正法院)을 이곳으로 옮겨와 절 이름을 정법사라 짓고 오래전에 끊긴
복천암의 뒤를 잇게 했다.
만일염불회의 고명한 염불승(念佛僧)이었던 석산이 주석하면서 염불수행의 새로운 일가를 이
루었으며, 조금씩 절을 키워나가 지금에 이른다.

아담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강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비록 옛 복천암을 계승
했다고 하나 엄연히 20세기 중반 이후에 중창된 절이라 고색의 내음은 여물지 못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비록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조선 후기에 조성된 관세음보살상과 복천암터 주
춧돌, 왜정 때 조성된 산신탱 등을 지니고 있다.

절 바로 서쪽에는 '우리옛돌박물관'이란 이색 박물관이 있는데 서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
고 있으며, 매년 5월과 9~10월에는 성북동 명소를 중심으로 성북동 야행(夜行) 축제가 성황
리에 열린다. 성북동에 있는 문화유산과 여러 명소들, 미술관, 식당, 찻집, 까페들이 거기에
동참하여 달이 기울도록 흥겨운 분위기를 이어가는데, 정법사도 거기에 동참하여 소소하게
음악회를 열거나 전통차 1잔의 여유를 선사한다.

▲  우수에 잠긴 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옛 복천암 주춧돌들 ▲

대웅전 뜨락 구석에는 옛 복천암의 주춧돌 여럿이 우두커니 서 있다. 저들은 어느 건물을 받
쳐들던 주춧돌이었을까? 크기를 봐서는 법당으로 여겨지나 저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니 그저
허공에 내뱉는 나의 부질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지금은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크지만 무
게가 없는 하늘을 막연히 이고 있다.

▲  조촐하게 꾸며진 연못과 옛 복천암의
길쭉한 주춧돌들

▲  대웅전 뜨락에 세워진 서쪽 5층석탑
(20세기 중반에 세워짐)


▲  정법사 대웅전(大雄殿)

정법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 앞에
는 뜨락이 닦여져 있고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5층석탑 2기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동쪽
탑은 벌써부터 피부가 까무잡잡하여 젊은 나이임에도 다소 늙어 보인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
보이면 그리 좋지는 않지만 문화유산과 탑, 석불은 오히려 나이가 들어 보어야 더 보기가 좋
다.
대웅전 맞은편에는 2층짜리 강당이 있어 1금당(법당) 2탑, 강당 형태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으며, 법당 안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금동관세음보살좌상과 석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  동쪽 5층석탑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탔는지 벌써부터
검은 때가 가득 끼었다.

▲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2층 강당(선방)
사진에 보이는 부분이 2층으로 1층에는
종무소와 찻집 등이 들어있다.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
성북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가까이로 성북동과
와룡공원을 비롯해 멀리 잠실, 강남 지역과 남한산성을 품은 남한산(청량산),
대모산(大母山) 산줄기까지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상 (오른쪽이 관세음보살상, 왼쪽은 지장보살상)

서로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가3존상, 그들 가운데 보관(寶冠)을 눌러
쓴 관세음보살상이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그렇다고 옛 복천암의 유물은 아니며 정법원
시절에 다른 곳에서 업어왔다고 한다. (고향은 알지 못함) 그들 뒤에는 조그만 금동 원불(願
佛)이 빼곡히 자리해 일제히 금빛을 쏘아대고 있는데 그 눈부심에 나의 침침한 두 망막이 멀
어질 지경이다.

▲  속세를 걱정하듯 바라보는 하얀 피부의
미륵불입상 (대웅전 옆)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  산신각 산신탱(山神幀)
산신각에는 산신과 독성이 봉안되어 있다. 산신탱은 1940년에 조성된 것으로
하얀 부채를 든 붉은 옷의 산신 할배와 그의 심부름꾼인 동자, 호랑이 등
산신의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산과 폭포도 그려짐)

▲  산신각 독성탱(獨聖幀)
독성 할배(나반존자)와 동자, 그의 집인 천태산(天台山)이 그려져 있다. 그림이
다소 늙어 보여 산신탱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듯싶다.

▲  주렁주렁 이어진 석조(石槽)
산사에 왔다면 목구멍도 달랠 겸, 물 1모금 마셔줘야 된다. 늦봄 가뭄에도
물이 졸졸 나와 바가지를 금세 채웠고 목구멍에 투하하니 몸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마음이 시원해진다. 역시 무더위 갈증에 들이키는
물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

▲  정법사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 부뚜막과 검은 가마솥

정법사는 부뚜막에 검은 피부의 가마솥을 두어 밥과 국을 처리하고 있었다. 저기서 숙성된
하얀 쌀밥과 국의 맛은 어떠할까? 몰래 그 뚜껑을 열어 살짝 훔쳐 먹고 싶다. 지금은 전설이
되버린 나의 단양(丹陽) 외가집에도 저런 풍경이 분명 있었는데 이제는 흔적도 없다. 오로지
지우는 것을 좋아하는 세월의 본능 앞에 그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지고 사라진 것이다.


▲  산사길에서 바라본 정법사 경내와 대웅전의 두툼한 뒷통수

* 정법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30 (대사관로13길 44, ☎ 02-762-0774)
* 정법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산사길, 북악산길(북악산로) 거닐기

▲  정법사 뒷쪽 산사길 ①

정법사 서쪽에는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절 옆구리를 지나는 산길이라 그에 어울
리게 '산사길'이란 정겨운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나는 정법사만 알고 있었지 그 길의 존재는
전혀 몰랐다. 정법사가 준 뜻밖의 선물에 무척 놀라며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질까?'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그 미지의 산사길로 발을 들였다.

정법사 옆은 나무데크길이 닦여져 있으며, 정법사 경내가 바라보이는 쉼터를 지나면 철조망
과 철책문이 나온다. 문은 탐방객을 위해 늘 열려있으나 어두울 정도로 숲이 무성하고 군사
시설이 여럿 있으며 밤에는 유해동물이 가끔씩 출현하는 경우가 있어 가급적 햇님 근무시간
에 들어가기 바란다.

철책문 이후부터 경사가 잠시 각박해진다. 게다가 나무가 삼삼해 햇살을 느끼기가 어렵다.
허나 북악산길 밑부분이라 차량 소리가 심심치 않게 두 귀를 때려대 '속세가 지척이구나~'
안도감을 준다.


▲  정법사 뒷쪽 산사길 ②

▲  산사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성북동과 도심 동부, 멀리 관악산까지)

▲  숲속다리 갈림길

정법사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길 직전인 숲속다리 갈림길에 이른다. 여기서 길은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데, 북악산길 위에 걸쳐진 숲속다리를 건너면 다모정, 북악산길 산책로와 이
어지며, 서쪽 숲길은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640m)로 그 길의 끝인 북까페에서 북악하늘길 제
2산책로(김신조루트)와 만난다. 그리고 서남쪽 숲길은 경사가 다소 있는데 그 역시 북악하늘
길 제2산책로와 이어지며 그 산책로의 정상 부분인 호경암으로 연결된다.

▲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위에
유연하게 걸쳐진 숲속다리

▲  숲속다리 남쪽 (산사길 방향)


▲  서울의 대표 하늘길이자 드라이브 코스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이 달리는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지금은 그저 평화로운 산책
드라이브 코스로 크게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의 탄생 배경은 그리 곱지 못했다. 바로 1968년
1월에 터진 1.21사태(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 패거리의 불법 침투 사건)로 뚜껑이 폭
발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서울 수비 강화를 위해 닦여졌기 때문이다.
1968년 2월, 수도 방어를 겸한 관광도로 '스카이웨이(Sky way)'계획을 발표하여 콩 볶듯이
공사에 들어가 그해 9월 28일 완성을 보았다.

북악산길은 돈암동 아리랑고개에서 북악산(백악산) 북쪽 산허리를 지나 자하문고개, 인왕산(
仁王山) 동쪽 허리를 거쳐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지는 10km의 길로 서울에 흔치 않은 산
악도로이자 천하 제일로 꼽히는 드라이브 코스이다. 자하문(창의문)을 경계로 북악산 쪽은
북악산길, 인왕산쪽은 인왕산길로 구분하기도 하며 오랫동안 차량을 위한 길로 뚜벅이들은
접근 조차 불가능했으나 둘레길, 도보길 유행에 따라 길 옆으로 산책로를 닦으면서 마음 편
히 두 다리로 거닐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길은 달랑 1번이 아니라 두고두고 걸어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
중을 듣지 않는다. 다행히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어서 내 즐겨찾기 명소로 삼아 꾸준
히 재탕하고 있으며 북악산길과 인왕산길 모두 완주했다. 이번에도 계획에는 없었지만 정법
사 옆 산사길에 홀려 그만 여기까지 오고 말았는데, 우리네 인생에는 늘 변수가 있기 마련이
다.


▲  북악산길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의 위엄
(북악산길과 정릉로10길, 대사관로가 만나는 곳 서쪽 쉼터에서 바라본 모습)

▲  북악산길에서 바라본 정릉동과 성북구, 강북구 지역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옴)

▲  찻길과 뚜벅이길이 공존하는 북악산길
지형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이렇게 나무데크길을 깔아 통행 편의를 배려했다.
뚜벅이길은 폭이 딱 2인용이며 찻길 또한 2차선이다.

▲  숲속을 가르는 북악산길

▲  동쪽으로 흘러가는 북악산길 (정릉 뒤쪽)

숲속다리에서 시작된 북악산길(북악산로) 산책은 성북구민회관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시간도
늦었고(19시가 넘었음) 뱃속도 배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이럴 때는 그저 본능에 따라 조용히
길을 접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여 성북동, 북악산길 산책은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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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동쪽 지붕이자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거닐기 (아차산둘레길, 긴고랑계곡, 아차산4보루,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 긴고랑계곡 봄나들이



' 아차산, 긴고랑계곡 봄나들이 '

아차산둘레길과 용마산

▲  아차산둘레길과 용마산

긴고랑계곡 벚꽃나무길 아차산4보루

▲  긴고랑계곡 벚꽃나무길

▲  아차산4보루



 


아차산(峨嵯山, 295.7m)은 수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커
다란 동쪽 지붕으로 용마산(龍馬山, 348m)과 망우산(忘憂山, 282m), 시루봉, 홍련봉을 식
구로 거느리고 있다.
아차산 식구들은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매년 적지 않게 재활용을 하여 어느덧 200회
가 넘게 안겼는데, 그렇게 안겼음에도 갈 때마다 늘 마음이 설레고 새롭다.

기나긴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자 아차산의 봄 풍경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야심 차게 추진된 이번 나들이는 아차산 기점의 하나인
구의동(九宜洞) 기원정사에서 시작했다.



 

♠  아차산둘레길 (기원정사~긴고랑 구간)

▲  기원정사에서 아차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기원정사 방향)

아차산역(5호선) 1번 출구에서 바로 나오는 골목길(천호대로 129길, 영화사로11길)을 10분 정
도 쭉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기원정사(祇園精舍)란 조그만 현대 사찰이 있다. 천호대로129길
구간에는 온갖 식당들이 즐비해 후각과 미각, 식욕을 마구 들쑤시는데, 아차산을 타고 기원정
사나 영화사(永華寺)로 내려오면 이 골목길에서 많이 저녁 뒷풀이를 한다.

기원정사 옆구리에는 아차산으로 끌어주는 나무데크 계단길이 손을 내밀고 있다. 하얀 피부의
벚꽃과 노란 피부의 개나리가 마중하는 그 계단을 오르면 이내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직
진하면 아차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좌/우 길은 아차산둘레길이다. 나는 긴고랑 방향인 왼쪽
길로 접어들어서 긴고랑계곡으로 이동했다.


▲  아차산둘레길 나무데크길

아차산 남쪽과 서남쪽, 서쪽 허리에 둘러진 아차산둘레길은 고구려정 밑 평강교에서 시작하여
용마산 너머 중곡지구까지 이어지는 3.8km의 달달한 숲길이다.
아차산에는 이미 주능선을 따라가는 서울둘레길2코스(용마, 아차산코스)와 아차산 주능선과
아차산 동쪽 자락을 도는 구리둘레길이 있으나 아차산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다보니 광진구(廣
津區)도 아차산 광진구 구역에 둘레길을 그어 아차산둘레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평강교(친수계곡)에서 기원정사 윗쪽까지는 나무데크길이 깔려있어 안산자락길 못지 않은 편
한 둘레길의 정석을 보여주며, 기원정사 윗쪽에서 긴고랑 구간은 나무데크길과 흙길, 바위길,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고루고루 섞여있어 걷는 재미를 더해준다. 일부 구간에 경사가 조금 있
을 뿐, 그 외에는 착한 수준이며, 긴고랑에서 중곡지구까지는 용마산의 각박한 산길을 넘어야
되는데, 이 구간에는 용마산1보루와 2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기원정사 윗쪽~긴고랑 구간에는 유난히도 진달래가 많이 피어나 봄의 완연한 기운을 전해주며
개나리와 벚꽃도 이따금씩 나와 지나가는 나그네를 격려한다.


▲  연분홍 진달래가 화사하게 마중하는 아차산둘레길 (긴고랑 방향)

▲  부드럽게 이어지는 아차산둘레길

▲  아차산둘레길에서 바라본 작은 천하 (구의동과 중곡동 지역)
사진 가운데로 큰 기와집 같은 것이 보이는데 그곳이 내가 출발했던
기원정사 그 절이다.

▲  아차산둘레길에서 바라본 중곡동과 군자동, 광진구, 동대문구 지역

바로 밑에 보이는 동네가 중곡동(中谷洞) 긴고랑이다. 둘레길을 1굽이 지날 때마다 조망의 질
과 보이는 범위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이렇게 보니 서울이 정말 빽빽하긴 빽빽하다. 사진 가운
데로 어렴풋이 보이는 뫼는 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인 남산(南山)이다.


▲  아차산둘레길에서 바라본 용마산 산줄기의 위엄

▲  슬슬 가까워지는 긴고랑계곡과 용마산

▲  아차산둘레길에서 만난 주름진 바위 벼랑

첩첩한 주름선을 휘날리는 바위 벼랑이 까칠한 경사를 보이고 있다. 아차산의 산세가 대체로
부드러운 편이나 저런 벼랑과 바위도 곳곳에 포진해 있어 아차산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아차산 석실고분이 있는 너럭바위가 아주 일품임) 둘레길 조성으로 보호 난간이 둘러
져 있어 저 난간을 넘지 않는다면 별일은 없을 것이다.


▲  벼랑을 타고 긴고랑으로 급하게 내려가는 조그만 폭포
아차산이 빚은 물이 켜켜이 주름진 벼랑을 타고 속세로 흘러간다.


▲  개나리와 소나무 사이를 지나는 아차산둘레길

▲  긴고랑 직전 아차산둘레길 나무데크길
길이 각박한 곳은 나무데크를 깔아 각박함을 크게 순화시켰다.

▲  바위 벼랑 밑을 지나는 아차산둘레길 (긴고랑 직전)

▲  벚꽃들이 반갑게 마중하는 긴고랑길
길 좌우로 벚꽃들이 길게 늘어서 이곳에 온 것을 격하게 환영한다.



 

♠  아차산의 일품 계곡, 긴고랑(긴고랑계곡)

▲  긴고랑에서 만난 벚꽃의 향연
벚꽃들이 상큼하게 봄의 향연을 뿌려댄다.


기원정사 윗쪽에서 둘레길을 따라 20분 정도 가면 긴고랑계곡에 이른다. 이곳은 아차산과 용
마산 사이에 깊게 들어간 골짜기로 그 계곡이 길어서 긴골, 진골이라 불렸으며, 점차 긴고랑
으로 변화되었다. (긴 골짜기란 뜻이나 실제로는 별로 길지 않음)
아차산의 대표적인 계곡이자 몇 없는 자연산 계곡으로 계곡 하류에 제방이 다소 닦여져 옥의
티가 적지 않으나 자연산 풍경도 그런데로 남아있다. 게다가 계곡도 어느 정도 크기가 있는
편이며, 지나친 가뭄이 아닌 이상은 수량도 풍부하여 여름 제국 시절에는 도심 속 피서지로
북새통을 이룬다. (계곡 물놀이도 가능함)

* 긴고랑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143-146


▲  개나리와 진달래가 손짓하는 긴고랑계곡 하류
평화롭게 흐르던 긴고랑계곡은 계곡 주차장에서 강제로 생매장을 당해
어둠의 경로를 통해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이곳과 중랑천 사이에는
주택가가 빽빽하게 들어찼기 때문이다.

▲  인공 조미료가 과하게 들어간 긴고랑계곡 하류 제방

▲  긴고랑의 따사로운 봄 풍경

▲  개나리들이 무성한 긴고랑계곡

인공이 다소 가해진 계곡 주변으로 개나리의 노란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계곡 하류에 인공이
크게 씌워진 것은 심히 안타까우나 상류와 중류는 자연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  아차산 주능선으로 인도하는 긴고랑계곡 산길

긴고랑에서 아차산 주능선까지는 20~3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주능선 직전을 제외하면 세상
에서 가장 편한 오르막길 수준으로 계곡이 중간 정도까지 따라가주며, 온갖 봄꽃과 나무들로
무성하다. 초봄이라 그렇지 5월 이후에서 늦가을까지는 거의 숲터널 수준이다.


▲  긴고랑계곡 중류
물놀이나 아이들을 동반한 피서지로 적당한 곳이다. 긴고랑계곡은 딱히 통제구역이
없어 적당한 곳에 들어가 쉬거나 피서에 임하면 된다. 단 계곡을 더럽히거나
다녀간 흔적은 남기지 않도록 한다.

▲  졸졸졸~♪ 흘러가는 긴고랑계곡과 그 옆에 닦여진 나무데크길

▲  진달래와 소나무, 주름진 벼랑이 어우러진 긴고랑계곡 상류

▲  긴고랑계곡 상류
계곡 상류는 다른 계곡과 마찬가지로 물이 별로 없다. 봄의 해방군에 크게
들뜬 밑과 달리 하늘과 가까질수록 봄과 겨울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나무들이 많이 늘어난다.

▲  아차산 주능선으로 끌어주는 긴고랑 산길

▲  아차산 주능선 직전

긴고랑계곡 하류에서 20여 분을 오르면 주능선 갈림길에 이른다. 여기서 북쪽으로 오르면 용
마산과 망우산, 시루봉으로 이어지며, 남쪽은 아차산4보루와 아차산 정상, 그리고 동쪽 내리
막길은 구리시 아천동으로 통한다. 나는 남쪽 길로 들어서 아차산4보루로 이동했는데, 아차산
에 왔다면 4보루와 정상은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와 동남쪽 성곽

아차산4보루는 용마산과 망우산을 제외한 아차산 보루 식구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잃
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고구려 성곽 유적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아주 남다른 곳인데,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보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다소 남아있었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는 높이가 0.8m를 넘지 못했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들여쌓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4보루 남쪽 2중치

구리시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움을 받아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를 확인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닦여진 보루임이 명백해졌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에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4보루 한복판으로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선이 지나가 절
반은 서울시, 나머지 절반은 구리시 영역인데, 구리사가 2008년부터 복원을 적극 추진하여 2
년의 공사 끝에 2010년 12월 24일에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
원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늙은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적어서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쩔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
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땅으로 덮었다.
그리고 보루 중앙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에 보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축소 재현하여 마치 역사 왜곡의 현장 같은 아쉬움을 준다. 지형의 경사면을 이
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
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치성(치)은 성곽 방어를 위해 앞쪽으로 다소 튀어나온 성벽으로 고구려표 축성 양식의 하나이
다. 그 양식은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은 물론 왜열도와 서토(중원대륙)까지 전해져 절찬리
에 쓰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를 지닌 특이한 치가 남쪽으로 길게 나와있다. 그는 전체 길이 13.2m
로 중간에 목책(木柵)이 둘러진 2.5m 정도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로 무자비하게 사라
진 구의동보루에서도 일부 확인이 되고 있으나 사실상 아차산4보루가 유일하며, 고구려 보루
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닦여져 안정감을 준다.


▲  4보루 서남쪽 치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 일
대 병참기지로 추정된다.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
고, 방어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님의 꾸준한 괴롭
힘 앞에 모두 사라지고 터만 황량이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는 숙제
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4보루의 7개 건물터 중 남쪽에 있는 1호 건물터가 가장 높다. 여기서는 온돌 유구 2기와 주춧
돌이 나왔으며,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투구 등이 나와 4보루를 관
리하던 높은 장수나 지휘관의 숙소로 여겨진다.
1호 건물터 주변에는 6호 건물터와 7호 건물터, 2호 건물터 등이 있으며, 3호 건물터 밑에서
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는데, 층위(層位)로 보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
혀져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닦았던 것이다.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탐방로 좌우로 잔디와 흙이 두툼히 덮여진 건물터와 저수시설 유적이 있고, 키가 작은 금줄을
둘러놓아 고구려의 거룩한 흔적을 지키고 있다. 금줄의 의미처럼 줄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지키는 사람이 딱히 없어서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펴고 쉬거나 음식을 처묵처묵하는 골 빈 작
자들이 적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4보루 저수시설

4보루에서는 물을 저장하는 2개의 저수조(貯水槽) 흔적이 나왔다. 이들은 깊이 3.5m 정도 수
직으로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입자가 고운 회색 뻘흙을 발라 물이 새지 않도록 방수
처리를 한 것으로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350x310x깊이240cm'이다.


▲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남양주, 하남, 강동구 지역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한강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4보루 동북쪽 치

4보루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아주 예술이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종로구, 중구, 송파구, 강동구, 한강은 물론 하남시와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까지 시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해돋이 수요와 일몰 수요,
야간 등산 수요가 많다. (1월 1일에는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완전히 미어터짐)
게다가 아차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주능선의 목구멍 같은
곳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큰 보루를 쌓아 무척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4보루 동북쪽 치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남한산성 등

▲  아차산4보루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아차산 주능선과 용마산)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서쪽 성곽

▲  4보루 북쪽 치

4보루 바깥에는 우회 산길이 있다. 4보루의 속살로 들어가기 싫다면 그 우회길을 이용하면 되
는데, 아차산에 왔다면 4보루는 무조건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그러다보
니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많으며,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는 이들도 적지 않
다. (특히 저녁에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단체로 먹거리를 섭취하는 등산 동호회 사람들이 많
음) 휴식과 음식 섭취는 좋으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금줄을 넘어가는 행위는 하지 말자.

아차산4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보루 6식구, 용마산 보루 7식구, 망우산1보루, 홍련봉 보루 2식
구, 시루봉보루는 한 덩어리로 묶어 '아차산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5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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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대구올레팔공산1코스, 시인 이상화고택 나들이

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이상화 고택



' 대구 겨울 나들이 '
(팔공산 북지장사, 시인 이상화 고택)

팔공산1코스 북지장사 가는 길

▲  팔공산1코스 북지장사 가는 길

북지장사 지장전 대구 이상화고택

▲  북지장사 지장전

▲  이상화 고택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오랜만에 대구(大邱) 땅을 찾았다. 올해도 변
함없이 미답처 지우기에 열을 올리며 어디로 갈까 궁리하던 중, 대구에서 적당한 미답
처가 감지되었다. 바로 팔공산에 있는 북지장사와 근래 무섭게 뜨고 있는 중구의 근대
문화유산들이다. 그래서 북지장사를 먼저 들렸다가 대구 도심으로 나와서 햇님이 떨어
질 때까지 중구의 근대문화유산을 최대한 챙겨보기로 했다.

햇님이 등청하기가 무섭게 서울을 출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를
달려 대구의 대표 관문인 동대구역에 두 발을 내렸다.
사람들로 늘 북새통인 동대구역을 서둘러 벗어나 동대구역 지하도 정류장에서 대구 급
행좌석 1번(동화사↔다사,매곡리)을 타고 북쪽으로 30분 정도를 올라가 동화사로 넘어
가기 직전인 방짜유기박물관에서 하차했다.



 

♠  팔공산 북지장사(北地藏寺) 둘러보기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①

북지장사는 방짜유기박물관 정류장에서 도장길을 따라 40분 정도 들어가야 된다. 전국적인 도
보길 유행에 따라 대구시는 북지장사 길을 '대구올레 팔공산1코스(북지장사 가는 길)'로 포장
하여 세상에 내놓았는데 거리는 2.5km(방짜유기박물관 입구↔북지장사)로 느긋한 길의 연속이
라 걷는 마음도 가볍다.
북지장사 길을 그대로 둘레길로 삼은 탓에 전 구간이 포장길로 박물관입구에서 약 0.9km 정도
는 보행길을 갖춘 2차선 길이나 그 이후부터는 굽이굽이 이어진 1차선 시골길이다. 그 모습이
정겹기 그지 없어 무리하게 길을 넓히지 말고 이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더군다나 길 중간에
두툼함 소나무 숲도 있으니 더욱 그렇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②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③

북지장사 길 중간에는 짙게 우거진 소나무 숲길이 있다. 소나무들이 얼마나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던지 하늘이 거의 보이질 않아 어두울 정도인데 그들이 베푼 솔내음이 속세의 번뇌를 거
의 털어주어 나의 돌머리와 어지러운 마음에 한 줄기 평화를 준다. 시작부터 이런 명품급 숲
길을 내밀며 중생을 맞이하니 북지장사에 대한 첫 인상과 기대감을 적지 않게 높여준다.


▲  북지장사 숲길과 겨울 가뭄으로 고통받는 계곡(숲길 왼쪽)

▲  드디어 도착한 북지장사 용호문(龍虎門)

도장길(북지장사 가는 길) 끝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북지장사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주
차장을 지나면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용호문과 그 좌우에 딸린 기와집이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데 절에 따로 일주문(一柱門)이 없기 때문에 용호문이 일주문(정문)의 역할을 도
맡고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경내의 중심인 지장전이 나타나고 그 뒤쪽에 대웅전이, 동쪽에는 오래된 3
층석탑이 있다. 그럼 여기서 북지장사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팔공산 동남쪽 끝자락이자 노족봉(老足峰, 600m)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북지장사는 팔공산에
무수히 널린 늙은 절의 하나이다. 같은 팔공산(八公山) 식구인 동화사(桐華寺), 파계사(把溪
寺, ☞ 관련글 보기), 갓바위(선본사, ☞ 관련글 보기)의 명성에 크게 가려져 있고 규모도 작
지만 그들 못지 않게 유구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오롯하게 지니고 있으며 산 속에 고적하게 자
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꽤 깊다.
북지장사란 이름은 '북쪽에 있는 지장사'란 뜻이다. 원래 이름은 '지장사'이나 대구의 동남쪽
끝인 가창면 우록리에도 오래된 지장사가 있어 그들을 구분하고자 팔공산 것은 북지장사, 우
록리 것은 남지장사(南地藏寺)를 칭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두 절이 특별한 사이도 아님)

북지장사는 485년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흔쾌히 밝혀줄 사료
(史料)와 유물은 없으며 그 시절 대구 지역을 다스렸던 신라의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은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고구려에서 전해준 불교를 때려잡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
니 팔공산(八公山)에 절이 세워질 근거가 전혀 없다.
1040년 최제안(崔齊顔)이 쓴 경주 천룡사(天龍寺) 중창 관련문서에는 북지장사의 밭이 200결
이나 된다고 쓰여있어 고려 초에도 제법 잘 잘나갔음을 알려준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공산(公山) 지장사'로 나와있고 신라 후기에 지어진 석조지장보살좌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
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동화사의 말사(末寺)로
조용히 있지만 왕년에는 오히려 동화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1192년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이 중창했다고 하며 지장전(옛 대웅전) 기와 중 1623년
과 1665년에 만들어진 것이 있어 17세기에 여러 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 부속 암자
를 여럿 거느리고 있었으나 동화사와 파계사 등 쟁쟁한 절에 밀려 19세기 초에 동화사의 그늘
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지장도량으로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지장전, 요사, 산령각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지장전을 비롯해 3층석탑과
석조지장보살좌상(대구 지방유형문화재 15호), 아미타삼존불좌상(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1호),
금고(金鼓,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5호) 등이 있다. 허나 정보 부족으로 아미타3존불과 금고는
만나지 못했으며, 조선 후기 지장탱(지장보살도)과 지장사유공인 영세불망비, 옛 석재(石材)
와 주춧돌 등이 전하고 있다.


▲  북지장사 지장전(地藏殿) - 보물 805호

단출하고 날씬하게 생긴 지장전은 북지장사의 상징 같은 존재이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겹
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과 뒷면에 사잇기둥을 세워 3칸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그 3칸을 다
합쳐봐야 겨우 일반 기와집 1칸 정도 크기이다. 홀쭉해 보이는 건물에 비해 지붕이 육중하게
보여 이를 받치고자 추녀가 있는 네 모서리에 붉은 피부의 기둥을 세웠는데, 그 기둥을 활주
(活柱)라고 한다.

건물 정면에는 꽃살창호를 달고 옆면과 뒷면에 띠살창호를 달았는데 기단(基壇)은 2단으로 다
지고 그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닦은 다음 건물을 올렸다. 기둥 윗쪽에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그 위에 공포를 안팎 4출목(出目)으로 촘촘히 짜서 다포(多包) 양식을 취했다.
공포의 세부 처리는 조선 중기 스타일이나 용봉(龍鳳) 머리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수법이다.
내부는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아 불단을 마련했고 가구(架構)는 도리칸이 1칸으로 대들보는 사
용하지 않고 사각귀틀맞춤으로 짠 다음, 둘레는 빗천장으로, 가운데는 우물천장으로 했다. 이
런 기법은 정자(亭子)에서 많이 쓰이는 것으로 사찰 건물로써는 흔치가 않아 처음에는 목탑으
로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건물 지붕에서 1623년과 1665년에 만들었음을 알리는 글씨가 깃든 기와가 발견되어 1623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2011년 해체보수 때 1761년에 지장전으로 상량(上樑)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원래부터 지장전으로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대웅전이 화마(火魔)의 장난으
로 쓰러지자 그 앞에 있던 지장전이 그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대웅전과 극락전으로 간판을 바
꾸기도 했으며, 대웅전이 새로 지어지자 그에게 법당(法堂)의 역할을 넘기고 지장전으로 돌아
왔다.

▲  방향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는 지장전

지장전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조선 후기 지장탱이 들어있다. 그
들을 모두 친견했으나 지장전 내부를 찍지 말라는 절 관계자의 당부로 굳이 사진에 담지 않고
나의 침침한 자연산 망각에 살짝 담고 나왔다.

나의 촬영을 거부했던 석조지장보살좌상은 대웅전 뒤쪽 땅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그의 정체는
아리송하긴 하나 머리의 형태나 손에 든 보주(寶珠) 등으로 보아 지장보살(地藏菩薩)로 여겨
진다. 단정한 모습과 온화한 인상으로 신라 말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로 북지장사의 불투명한 창건 시기를 최대 신라 후기까지 끌어올려준다.


▲  지장사유공인 영세불망비(地藏寺有功人 永世不忘碑)

지장전 바로 앞에는 약간 빛이 바랜 조그만 비석 하나가 멀뚱히 서 있다. 그는 운암당 옥준대
사(雲巖堂 玉峻大師)의 공적을 기리고자 1731년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
다.
17~18세기 지장사 승려들은 세금으로 종이를 만들어 관아에 바쳤는데 그 수고로움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운암당이 조금 해소해주자 이를 감사하게 여겨 비석까지 세웠고 나중에는
지장전 앞에까지 두어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기린다.
비석이 심어진 비좌(碑座)는 높이 30cm, 92x60cm 규모이며, 빗돌은 높이 101.5cm, 상부 폭 50
cm, 하부 폭 47cm로 빗돌 윗부분이 둥글게 처리되었다.

▲  지장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설선당(設禪堂)

▲  아직도 연꽃무늬가 생생한 옛 석재
(석등의 일부로 여겨짐)


▲  지장전 뒷통수에 자리한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마련했다. 예전 대웅전이 화재로 맥
없이 쓰러지자 지장전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으나 그가 다시 지어짐으로써 법당의 자격을 다
시 찾아왔다. 허나 북지장사에서 지장전의 존재감이 거의 독보적인 수준이라 대웅전이 절의
중심 건물임에도 지장전의 보조 건물 정도로 작게만 보인다. 게다가 지장전의 뒤쪽에 있으니
그런 기분에 더욱 부채질을 한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대웅전 뒷통수에 있는 산령각은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꽤 친숙한 산신의 공간이다.

▲  북지장사 3층석탑(동탑)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6호

지장전 뜨락 동쪽에는 고색이 깊게 묻어난 3층석탑 형제가 있다. 이들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히고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은 것으로 높이는 모두 3.8m이며 옥개석과 탑
신이 같은 돌로 지어졌다.
신라 후기 또는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1981년 5월 해체복원을 했는데 이때 땅 속에 묻혀있
거나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의 살을 갖다붙였다. 아무리 복원을 했다고 해도 고된 세월의 흔
적까진 어쩌질 못하여 군데군데 장대한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들이 역력하다.

▲  정면에서 바라본 3층석탑 동탑

▲  3층석탑 서탑


▲  북지장사를 뒤로하며

생각보다 꽤 작고 아담했던 북지장사를 30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사전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간 탓에 금고와 아미타삼존불좌상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 다시 와야될 구실
을 빚고 말았으나 아직도 이 땅에는 나의 발이 닿지 않은 미답지들이 우주의 별만큼이나 즐비
하여 이곳과의 재 인연은 솔직히 장담할 수가 없다.

북지장사를 나오다가 이 땅의 유일한 방짜유기 전문 박물관인 대구방짜유기박물관에 잠시 발
을 들였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8:22 비율로 녹여서 만든 유기의 일종으로 징과 꽹과
리 등은 오로지 방짜기법으로 만들어진다. <박물관 내부는 사진에 담지 않아서 이 정도 언급
으로 쿨하게 선을 긋겠음, 방짜유기박물관 ☎ 053-606-6171~4, ☞ 홈페이지 보기>
그곳을 둘러보고 백안3거리로 나와 뜨끈한 순두부찌개로 늦은 점심을 섭취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시간임에도 손님들이 제법 되었고 후식으로 커피 외에 식혜도 준비되어 있어 후식 인
심도 넉넉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중구(中區) 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을 보고자 대구시내버스 401번(갓바위↔
범물동)을 잡아타고 대구 도심 한복판인 반월당(半月堂)으로 나왔다.
허나 햇님이 적지 않게 기운 상태라 근대문화유산을 얼마나 잡을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가
없다. 햇님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고 싶지만 인간 주제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길을 서둘렀다.

* 북지장사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6225 (도장길 243, ☎ 053-985-5217)



 

♠  빼앗긴 들에서 민족혼을 일깨운 대구의 대표적인 민족시인
상화 이상화(尙火 李相和) 고택

▲  시인 이상화 고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에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쁜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반월당역(반월당교차로)에서 달구벌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500m 정도 가면 계산5거리이다. 여
기서 오른쪽(북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시인 이상화 고택과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서
상돈(徐相燉) 선생의 고택이 나란히 마중을 나온다.
이들은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대표 성지(聖地)로 원래 그들을 볼 계획은 없었다. (존재
조차 몰랐음) 그저 청라언덕과 계산동성당만 생각을 했었지. 그러다가 생각치도 못한 그들의
깜짝 등장에 두 다리가 얼어붙으면서 그들을 덤으로 둘러보게 되었다.


▲  주인이 가고 없는 이상화 고택 안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아주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는 1901년 4월 5일,
여기서 가까운 서문로2가 11번지에서 이시우(李時雨)와 김신자(金愼子)의 4남 중 2남으로 태
어났다.

그의 아호는 무량(無量)이며, 호는 상화(尙火, 想華), 백아(白啞)이다. 1908년 아버지를 잃자
14살까지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훈도(訓導)를 받으며 한문을 익혔다. 1915년 서울로 올
라가 경성중앙학교(중앙중고등학교)에 입학, 1918년 3학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 때 대구 지역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서울로 급히
피신, 박태원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머물렀으며, 그해 10월 서순애(徐順愛)와 혼인을 했다.

1922년 현진건(玄鎭健)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 나도향(羅稻香) 등
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말세의 희탄','단조','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해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보다 넓은 문학의 세계를 익히고자 바로 그해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아테네프랑세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1923년 3월 아테네프랑세를 수료하여 프랑스 유학을 추진하던 중, 그해 9월 동경을 중심으로
관동대지진이 터졌다. 그때 관동 지역에 살던 조선 사람들이 왜열도 원숭이들에게 잔인하게
탄압을 당하는 꼴을 보고 크게 분노해 프랑스를 포기, 1924년 3월 서울로 건너와 가회동(嘉會
洞)에 있는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며 그 유명한 '나의 침실로'를 '백조' 3호에 발표했다.

1925년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파스큘라(Paskyula)란 문학연구단체에 가담했으며, 그해 8
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26년에는 '개벽' 70호에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는데 그 시에 발작한 왜정(倭政)이 태클을 걸어
'개벽'은 판매 금지 처분을 당했다.

1928년에는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 출판간사로 있었는데, 자신의 집 사랑방을 담교장(淡交
莊)이라 칭하며 많은 항일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그러다가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1930년 '대구행진곡'을 '별건곤(別乾坤)' 10월호에 냈으며 1933년 교남학교에 들어갔으나 이
내 사임하고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 총국을 경영하다가 실패했다. 1935년 시 '역천'을 '시
원' 2호에, '나는 해를 먹다'를 '조광' 2호에 발표했다.

1936년 큰 형인 이상정(李相定)을 만나고자 중원대륙(서토)으로 건너가 남경과 북경, 상해 등
을 3개월 동안 여행했으며 1937년 3월 귀국하자 왜경에게 바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그해
11월 석방되었다.
이후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3년 동안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했으며, 1939년 6월 계산
동(桂山洞)2가 84번지(현 자리)로 집을 옮겼다. 허나 교가(校歌) 가사 문제로 왜정에게 가택
수색을 당하면서 시 원고와 고월 유고까지 압수를 당했으며, 그 충격으로 1941년 학교를 그만
두었다.

이후 시 '서러운 해조'를 '문장' 폐간호에 발표했고 '춘향전'을 영역했으며, 국문학사와 불란
서시정석 등을 시도했으나 완성을 하지 못한 채, 1943년 4월 25일 아침 8시 45분 경, 위암으
로 계산동 집에서 안타깝게 숨을 거두고 만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42살이었다.

가만히 보면 정의롭게 살아온 문학인들은 거의 명줄이 짧고<이상화, 김영랑, 윤동주, 정지용,
이육사 등> 불의(不義)와 어울리며 자신의 배때기를 채우느라 여념들이 없던 작자들<서정주,
이광수 등>은 너무 쓸데없이 오래 산다. 언능 가야될 잡것들은 늦게 가고 정작 오래 살아야
될 사람들은 일찍 죽으니 그래서 이 나라의 정의가 제대로 안서는 모양이다.

1948년 달성공원에 그의 시비가 최초로 건립되었고, 1985년 죽순문학회가 '상화시인상'을 제
정하여 '2009기념사업회 설립'에 따라 시인상을 승계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  이상화 고택 안채 마루 (뒤주와 이상화의 흉상)

이상화 고택은 왜정 때 지어진 개량한옥으로 사랑채와 안채 등 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
고 마당에는 감나무가 자라고 있어 감나무 마당이라 불렸다.

이상화가 저 세상의 별로 홀연히 사라진 이후, 비록 주인도 바뀌고 모습도 조금 변화를 겪었
지만 집은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허나 이곳이 대구 도심 한복판의 금싸라기 땅이다보니 천
박한 개발의 칼질이 군침을 흘리며 집을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2001년 대구 중구청이 고택이
있는 계산동2가 84번지 일대 도로계획을 추진하면서 개념없이 집을 밀어버리려고 하였다.
이에 고택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방송국에 제보를 하여 2002년 1월, 대구MBC, 매일신문, 영남
일보, 한겨례신문 등에서 이를 보도했고, 윤순영(분도예술대표), 이상규(경북대 교수), 공재
성(대구MBC) 등 3명이 앞장서 고택보존운동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중구청 철밥통들을 참교육
시키면서 그 마수를 부려뜨렸다.
허나 2003년 5월, 이번에는 (주)L&G에서 32층 주상복합 건물을 짓고자 다시 고택을 괴롭히자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에서 대구시를 설득, 상화고택 보존을 조건부로 신축을
허가했다. 이에 (주)L&G는 상화고택과 인근 부지 1필지를 매입해 착공 전에 대구에 기부채납
하겠다며 대구시에 공증을 제출했다.

2004년 6월 (주)L&G와 상화고택 소유자간의 고택 매매계약이 체결되었고, 7월에 군인공제조합
이 그 신축건물 공사를 맡게 되자 상화고택 기부채납 기본 협약을 다시 체결, 2005년 6월 상
화고택과 인근 부지 1필지를 대구에 기부채납하였다.
그렇게 해서 고택이 완전히 살아남게 되자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는 해산되었고
그동안 모은 이상화 시집 1,729권과 모금액 8,600만원을 대구시에 기증했다. 또한 이상화의
후손들과 그를 흠모하는 문인들이 그의 유품과 자료를 흔쾌히 기증하여 이상화 고택을 아낌없
이 꾸며주었다.

2007년 5월 상화고택 보수공사에 들어가 11월 완성을 보았으며, 2008년에도 3달간 내부 공사
를 벌여 2008년 8월 12일, 속세에 개방되었다. 이후 대구 중구의 대표적인 근대 명소이자 문
학의 성지로 뜨겁게 추앙을 받으며 대구 도심 투어의 필수 명소로 자리매김하였다.


▲  책상과 의자가 놓인 안채 방 ①
사랑채에는 이상화의 시집과 유품, 사진, 그의 작품과 일생을 다룬 안내문을
배치하여 그의 조그만 전시관을 이루고 있다.

▲  이상화의 여러 문서와 유품이 담긴 안채 방 ②

▲  이상화의 여러 문서와 유품이 담긴 안채 방 ③

▲  무늬만 남은 부엌
이상화의 문학 작품은 바로 이곳에서 지어진 음식의 힘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2007년 이후 고택을 손질하면서 부엌이 조금 변형되었으며, 부뚜막은 더 이상
연기를 피울 일이 없어 그저 먼지만 가득하다.

▲  감나무 그늘에서 한가로운 인생을 보내는 장독대
왕년에는 다양한 음식들을 숙성시키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지금은 빈 껍데기이다.

▲  이상화 고택 서쪽에 자리한 계산예가(桂山禮家)
계산예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구 계산동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
근대문학 등을 사진과 자료, 영상물 등으로 엮어낸 근대문화체험관이다.
(기념스탬프 코너도 있음)

▲  계산예가 옆 골목길 (계산동성당 방향)

시민과 문학인들이 개발의 칼질과 중구청 철밥통들을 참교육시키며 지켜낸 이상화 고택을 둘
러보고 바로 이웃에 자리한 서상돈 고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흔쾌히 휘장을 걷는다.


* 이상화고택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84 (서성로 6-1, ☎ 053-256-3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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