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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25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2. 2020.11.14 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3. 2020.11.03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4. 2020.10.22 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2
  5. 2020.10.14 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6. 2020.10.03 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와 거닐기 좋은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개운산둘레길) 2
  7. 2020.09.22 부산에서 가까운 우리의 옛 땅, 대마도 북부 나들이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히타까츠항, 미우다해변, 한국전망대)
  8. 2020.09.15 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9. 2020.09.04 서울 도심에 이런 두멧골이?? 북악산 산주름 속에 깃든 백사실계곡, 부암동 능금마을, 평창동 소나무 (백사실약수터)
  10. 2020.08.16 제주도의 아름다운 서쪽 끝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수월봉 나들이 (차귀도, 산방산탄산온천)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晩秋)


 

늦가을이 그 절정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
한 자락길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길
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해 그리 힘들이지 않
고 이동할 수 있으며, 인왕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여럿 손짓해 언제든 정상 쪽으
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
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
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누릴 수 있다. 다만 오르락내리락 굴곡이 조금 있어
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완주가 가능하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인왕산자락길 (수성동 이남 구간, 택견수련터)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시원한 계곡 바람을 맞은 인왕산자락길은 다시 남쪽으로 각박한 오르막
길을 오른다. (북쪽 방향도 마찬가지임)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그렇다고 오르막길의 야성을
완전히 잠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거친 것을 조금 순하게 다듬었을 뿐이다.

그 길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인왕산길이고, 왼쪽 내리막길
이 인왕산자락길이다. 그러니 자락길을 놓치기 싫다면 무조건 왼쪽으로 붙자. 그 길을 내려가
면 서촌의 일원인 누상동(樓上洞) 주택가와 불과 몇 보 차이로 가까워지며 길은 다시 온순해
진다. 이후 이름 모를 계곡과 체육시설을 지나면 길은 다시 오르막을 보이나 그리 각박하지는
않으며, 그 길을 오르면 배드민턴장과 인왕산길이 모습을 비춘다.


▲  다시 오르막은 시작되고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방향)

▲  택견수련터로 인도하는 북쪽 계단길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남쪽에는 화장실을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있다. 청운공원 이후 가깝게 거
리를 두며 떨어져 있던 인왕산길과 인왕산자락길은 여기서 잠시 만났다가 이내 헤어진다.
쉼터 남쪽 언덕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길이 자락길로 그 계단을 오르면 자락길의 남쪽 종점
인 택견수련터가 마중을 한다.


▲  택견수련터 주변 체육시설
저 산길의 끝에 택견수련터가 깃들여져 있다.

▲  인왕산 택견수련터

황학정 뒷쪽 산자락에 자리한 택견수련터는 이름 그대로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옛날 사람들이 택견을 닦던 곳으로 알았으나 한때 끊어질 위기에 놓였던 우리 고유의
전통 무술인 택견을 지키고 널리 알렸던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 송덕기(宋德基, 1893~1987)가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송덕기는 조선의 마지막 한량이자 택견꾼으로 유명하다. 그는 1893년 1월 19일, 이곳과 가까
운 필운동(弼雲洞)에서 하급 관리인 송태희(宋泰熙)의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김씨는 잡화가게를 꾸리고 있어서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당시 필운동과 사직골, 누상동, 누하동 등 서촌(웃대) 지역은 택견의 성지로 택견을 갈고 닦
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장안 제일의 택견꾼으로 '인왕산 호랑이'라 불리던 임호(林
虎)도 있었다. 그는 지금의 배화여고 앞에 살고 있었으며, 송덕기는 12살부터 또래 동네 아이
들과 그에게 택견을 배웠다.

송덕기는 선천적으로 힘이 장사이고 운동과 무예에 소질이 상당했다. (나와 완전 반대임) 하
여 16살에 마을 택견꾼과 더불어 사직골 대표로 출전하여 유각골, 옥동, 애오개의 택견꾼과
싸워 이겼으며, 이때부터 '결련택견판(택견의 시합을 지칭하는 말)'에서 그 이름을 날리기 시
작했다. 그는 비록 체격은 작았지만 동작이 매우 날쌔어 적을 정확히 타격했으며, 특히 뛰어
오르며 쓰는 발차기는 매우 일품이라 당할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17세에 장가를 들었고, 곧 군대에 입대했으나 1주에 2~3번 정도만 출근하면 되었으므로 나머
지 시간에는 택견을 수련하여 종종 결련택견판에 나가 몸을 풀었다. 그리고 이때 이 땅에 막
소개된 축구에도 구미가 당겨 축구를 익혔다.

1910년 8월 이후, 왜정(倭政)은 우리의 상무정신이 깃든 결련택견과 온갖 택견 수련을 금지시
켜 그 맥을 끊으려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서도 계속 택견을 그만두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택견
수련도 눈치를 보고 해야될 지경이었다. 당시 그의 부모는 그가 자칫 싸움꾼이 될까봐 걱정되
어 택견 수련에 무조건 정색을 표했다고 전한다.
상황이 그러하니 택견 수련 딱 10년이 되는 22살에 잠시 택견을 접어두고 대신 활쏘기로 관심
을 돌려 황학정에서 국궁(國弓)을 닦았다. 그는 궁술(弓術)에도 꽤 소질을 보여 명궁으로 명
성을 날렸는데, 죽기 전까지 활쏘기를 즐겨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을 오래 쏜 사람이자 최초의
국궁심판으로 '한국인물도감(1982년)'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근대식 체조를 가르쳤고, '조선불교 축구단'에 선수로 스카웃되어
월급 80원을 받으며 축구 선수로 3년 동안 뛰기도 했다. 이때 매년 열리던 평양축구단과의 경
기에 참가해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축구를 그만둔 이후 30대 말까지 딱히 두드러지는 행적은 없으며, 40세 때 조선극장(인사동에
있었음)을 운영하던 매부를 도와 극장을 지키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극장 주변에서 설치던
건달들을 죄다 때려잡았고, 당시 주먹패 대장으로 유명했던 김두한(金斗漢)과도 맞짱을 뜬 적
이 있다고 한다.
이후 금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소득은 없었으며, 1951년 1.4후퇴 때 경남 밀양(密陽)으
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58년경. 경무대(청와대)의 이승구 경관이 찾아와 대통령에게 택견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
을 했다. 당시 택견은 일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맞서서 상대를 때려잡는 실전무
예라 혼자 시범을 보이기가 마땅치 않아 옛날 스승(임호) 밑에서 같이 배웠던 김성한(金成漢)
을 급히 불러 1달 정도 가르친 다음 그해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신 축하 경찰무도대회'
가 열렸던 소공동(小公洞) 유도회관에서 택견을 선보였다.
당시 권력층과 무도인들은 왜열도식 무술에 익숙해 있던 상태라 택견을 보더니 별로라며 고개
를 돌렸다. 하지만 택견에 관심이 있던 이승만은 우리 무술을 발전시켜야 된다며 당시 경무대
경호원을 가르치던 박철희에게 그를 소개해 택견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박철희는 육군사관학교 초대 태권도 교관을 지낸 사람으로 그를 자주 초청해 경호원들에게 택
견을 가르치도록 도움을 주었다.


▲  택견수련터 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에 선보
일 한국 문화로 택견을 선택했다. 그래서 제자 박철희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에서 택견 동작
을 사진 촬영했다. (당시 경복궁은 통제구역이었음)

박철희는 경무대 무도사범을 그만두고 '사단법인 택견무도원'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송덕기도
그를 전폭적으로 도왔으나 법인 설립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당시 영향력이 컸던 '수박도협회'
의 방해로 어려움에 빠졌다. 게다가 4.19와 5.16으로 나라가 계속 혼란 속에 잠겼고 법인 설
립도 계속 뜻대로 되지 않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박철희의 조교
이자 같은 사직골 토박이인 김병수가 송덕기의 1등 제자가 되었다.

김병수는 당수도의 고수로 경무대 부사범을 지냈으며, 외국어대학교에 '택견권법부'를 만들었
고, 1963년에는 효자동 오리온다방 3층에 택견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또한 영어에도 능통하여
1964년 '블랙벨트(Black Belt)'와 '가라데 일러스트레이트(Karate Illustrate)'라는 미국의
유명한 무술 잡지에 택견에 대한 기사를 기고한 적이 있다.
허나 그는 해외 진출에 더 무게를 두고 있어서 1968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고, 미국 휴
스턴에 정착해 '김수가라데'란 타이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자연무술류'라는 새로운 체계
의 과학적 무술을 창안해 동양무도인의 대표로 위엄을 날렸다.

1972년 '태권도 가을호'에 송덕기가 '살아있는 태권도인'으로 소개되면서 당시 태권도의 1인
자였던 임창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찾아가 배움을 받았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고 실생활에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금방 사람들이 나갔다.

그는 슬하에 자녀도 없고, 마땅한 제자도 없어서 이것저것 소일거리로 간신히 척박한 삶을 꾸
려나갔으나 1979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신한승이 택견을 바로 일으켜보고자 송덕기를 찾아와 택견을 배웠다. 그는 택
견이 살려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길 밖에는 없다고 여겨 문화재관리국을 수시로
찾아가 택견을 홍보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철밥통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냉대만 일삼
으며 보다 체계적인 자료를 가져오라고 소위 '갑'질을 벌였다. 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들
의 요구 양식에 맞추고 택견을 약간 변형시켜가며 해당 자료를 제출했다.
그렇게 하여 간신히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6호'의 지위를 얻으면서 택견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허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송덕기는 신한승의 그런 행동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서
로 갈라진 것이다.

송덕기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1982년부터 젊은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3년 그 역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를 기리고자 '택견계승회(현재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를 만들었다. 1984년 집 근처에 '박민태권도 도장'을 빌려 제자를
가르쳤고, 제자 중 부유했던 '최유근'의 지원으로 1986년 신촌에 '택견보존회'란 이름으로 본
격적인 택견전수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송덕기는 너무 기뻐서 매일 나와 제자를 가르쳤는데, 택견이란 존재를 매우 생소해하는 현대
인들의 무관심과 체육관을 운영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제자들의 운영 미숙으로 결국 1년도 안되
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제자들도 거의 군대에 들어가면서 죄다 흩어졌고, 1987년
에는 활까지 놓으면서 노인정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우연히 걸린 감기가 커지면서 그해 7월 22
일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9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1981년에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도예술제'에서 '무도대상(武道大賞)'을 타기도 했으며,
택견을 보존하고 전수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택견의 태반은 이미 사라졌
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택견수련터는 그가 택견을 닦았던 현장으로 그의 후학들(결련택견협
회)이 표석과 안내문을 세워 택견의 성지로 기리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체육시설이 닦
여져 있어 동네 사람들과 산꾼들이 몸을 풀고 간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몸을 푸는 수련터
의 역할은 거의 녹슬지 않은 것이다.


▲  수련터 옆 감투바위 암릉
주름진 바위가 황학정 옆구리까지 느긋하게 내리막을 이루며 펼쳐져 있고,
늦가을이 질러놓은 불(단풍)이 활활 타올라 바위 주변을 화사하게 돋군다.


수련터 옆에는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길게 누워있다. 이들 바위는 저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조촐하게 암릉을 이루며 황학정 동쪽까지 완만하게 내려간다. 그 암릉에 송덕기와 인연이
있는 감투바위가 숨겨져 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그 암릉에 두 발을 딛으면 바로 밑에 황학정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 서부와 남산이 훤히 시야
에 잡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인왕산자락길 개설로 수련터를 찾은 사람들은 늘었으나 정
작 바위의 존재감이 없어 지나치기 일쑤이다. 안내문이 없다보니 수련터 바로 옆에서 바위가
예사롭지 않은 눈짓을 보내고 있음에도 다들 지나치는 것이다.
하여 감투바위 암릉은 인적이 거의 없어 무척이나 한적해 천하 최대의 대도시인 서울 도심을
멍을 때리고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다.


▲  감투바위

사람들이 매우 좋아한다는 감투, 그 감투를 닮은 바위가 암릉 한복판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 속세에 알려지지 않은 인왕산의 비장의 바위로 송덕기가 택견 수련을 하거나 황학정에서 활
쏘기로 몸을 풀고 이곳에 걸터앉아 나라와 택견의 미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송덕기의 택견 수
련을 묵묵히 지켜봤을 그는 황학정과 사직단, 서울 도심을 늘 지켜보고 있다.


▲  감투바위의 뒷모습

바위 뒷통수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긁고 간 흔적들이 역력하다. 지금은 저런 모습이나 여
러 세대가 흘러간 이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대자연 형님의 성형(成形)
속도가 매우 느려서 그렇지 성형 실력만큼은 대자연을 따를 존재가 없다.

택견수련터 서쪽에는 인왕산길과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내려가면 윤동주문
학관부터 3.2km를 함께 한 인왕산자락길은 그 끝을 맺고 인왕산길에 합쳐진다. 소요시간은 사
진을 찍고 쉬는 시간을 합쳐서 넉넉잡아 1시간 반 정도. 경사가 좀 각박한 구간이 여럿 있지
만, 그것은 산이니까 어쩔 수 없다. 산은 산다워야 오르는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도로만 따라가는 인왕산길과 달리 상당수가 흙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득이한 구간은 나무데
크를 닦아 놓았다. 자락길을 둘러싼 숲은 무성하며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조그만 계곡들(청풍
계, 옥류동, 수성동 등)을 대부분 거쳐가면서 인왕산에도 계곡들이 꽤 숨바꼭질을 하고 있음
을 귀뜀해준다. 그 계곡들은 시내에 진입하면서 모두 강제 생매장을 당했으며, 2012년에 복원
된 수성동만 제대로 어깨를 피고 있다. (수성동 역시 조금 흐르다가 생매장 당함)
이처럼 인왕산자락길은 인왕산의 숨겨진 속살과 명소를 아낌없이 드러낸 도심 속의 보석이자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사각지대로 이번에 이렇게 인연을 지어 사각지대를 하나 지웠다.

* 인왕산자락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  옛 경희궁의 흔적이자 전통 국궁(國弓)의 성지, 황학정(黃鶴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호

▲  등과정(登科亭) 바위글씨

택견수련터에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사직단 방향)으로 내려가면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입구
(후문)가 나온다. 바로 그곳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위가 누워있는데 길 쪽에서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가면 그냥 의미없는 바위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황학정 쪽에서
보면 180도 달리 보일 것이다. 그는 옛 기록에나 남아있던 등과정의 아련한 흔적으로 황학정
방향 바위면에 '등과정' 바위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등과정은 서울 장안의 이름난 활터인 서촌5사정의 하나로 그 오사정이란 등과정과 옥동(玉洞)
등용정. 삼청동 운용정(雲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그리고 누상동 풍소정(風嘯亭)을 일
컫는다. 이중 삼청동(三淸洞)은 북촌의 일원인데, 어찌 서촌5사정에 꼽혔는지 모르겠다.
조선 때는 활쏘기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이 익혀야 될 교양의 일원으로 인식되어 오사정에는
늘 그들로 붐볐다. 무관 같은 경우는 직업상 여기서 활쏘기 연습으로 몸을 풀었고, 다른 이들
은 교양 및 수련의 일원으로 몸을 풀었던 것이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군대 무기에서 활이 제외하면서 이들 오사정은 싹 철
거되었고, 등과정만 유일하게 고종 때 새겨진 바위글씨를 흔적으로 남겨 그의 옛 자리를 귀뜀
해준다. 게다가 경희궁의 활터였던 황학정이 왜정 때 이곳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등과정을
계승하였다.


▲  황학정8경(八景) 바위글씨

황학정 후문(등과정 바위글씨)에서 황학정으로 내려가 그 뒷쪽 바위를 잘살펴보면 황학정8경
을 담은 바위글씨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위에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글씨들이 담겨져 있는데, 이들은 1928년 9월 금암 손완근(
錦巖 孫完根)이 쓴 것으로 황학정8경이란 제목을 내세웠지만 정작 황학정은 1개도 없고 모두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주변의 풍경을 다루고 있어 제목과 내용이 완전 따로 논다.
여기서 읊은 8경은 다음과 같으며, 이중 금천교와 경복궁 담장 옆 수양버들을 제외하고는 그
런데로 살아있다.

백악청운(白岳晴雲) - 구름이 맑게 갠 북악산(백악산)
자각추월(紫閣秋月) - 자하문(창의문) 문루 위에 가을 달
모암석조(帽巖夕照) - 인왕산 모자바위에 비치는 석양 빛
방산조휘(榜山朝暉) - 인왕산 바위 위의 아침 햇살
사단노송(社壇老松) - 사직단을 둘러싼 노송
어구수양(御溝垂楊) - 경복궁 담장 옆 배수로 둑의 수양버들
금교수성(禁橋水聲) - 금천교 밑을 흐르는 물소리
운대풍광(雲臺楓光) - 필운대의 단풍 광경


▲  사방이 뻥 뚫린 황학정
황학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밑에 부연을 두어 처마와
추녀의 곡선이 무척 시원스럽다. 정면 중앙에 걸린 황학정 현판은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이 쓴 것이다.


사직단 북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황학정은 이 땅에 몇 남지 않은 전통 활터이
다.
조선 말까지 서울 장안에는 서촌오사정 등 활쏘기를 닦던 사정(射亭)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대 무기에서 화살이 제외되자 서울과 전국의 많은 사정이 문을 닫았고
황학정 자리에 있던 등과정도 그 거친 흐름을 헤어나지 못해 바위글씨만 남긴 채 휩쓸려 사라
졌다.

활쏘기를 좋아했던 고종 황제는 백성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궁술(弓術)을 장려하기로 했다. 하
여 1898년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황학정을 지어 활터로 삼고 백성에게 개방하여 언제
든 활을 쏘도록 했다.
고종은 자주 황학정을 찾아 활쏘기를 했는데, 그가 사용했던 활 호미(虎尾)와 화살을 보관하
는 전통(箋筒)이 황학정에 전해 내려오다가 1993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천하에 어둠이 내리던 1910년 이후, 왜정은 망국의 황궁(皇宮)인 경희궁을 철저히 산산조각을
냈다. 1918년부터 궁궐을 밀어버리면서 주요 건물을 민간에 팔아먹었고, 1922년 황학정 자리
에 고의로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황학정까지 밀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국궁을 하
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왜정과 협상을 벌여 돈을 건네주고 그 건물을 현 자리로 가져왔다.
앞서 소개했던 택견꾼 송덕기 역시 황학정을 해체 이전했을 때 직접 참여하여 손수 건물을 해
체하고 건물 부재(部材)를 가져와 다시 재조립했다. 또한 황학정 지킴이가 되어 이곳에서 행
패를 부리거나 예의 없이 구는 사람을 혼내주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사직골 호랑이'라고 불
렀다.

1945년 이후 황학정은 전국 활터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나 6.25 때 건물이 파괴되면서 활
쏘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이후 황학정을 중수하고 한천각(閑天閣)과 국궁전시관 등 여
러 부속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전통 활터가 많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활터 기능을 수행하여 우리나라 전통 궁술의 성지
로 여전히 추앙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궁술 대회(매년 12월에 전국궁술경연대회를 개최함)와 관련 행사, 활쏘기 체험이
열리고 있으며, 평일은 물론 휴일에도 활 쏘는 이들을 자주 구경할 수 있다. 천하 제일의 신
궁(神弓)으로 추앙받는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조선 이성계(李成桂)를 꿈꾸는 궁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모습도 볼만하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궁술 체험 이벤트도 열고 있다. 아직 활
을 만져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생기면 명중률을 떠나서 쏴보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 같다.

* 황학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 (사직로9길 15-32 ☎ 02-732-1582)


▲  황학정 내부
천정에는 황학정의 내력 등이 적힌 현판 2개가 걸려 있고, 평방(平枋)에는 태극기와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이 나란히 자리한다. 황룡포를 입은 그의 어진이
여기에 걸린 이유는 황학정을 세운 그를 기리고자 함이다.

▲  이승만 전대통령이 쓴 황학정 현판의 위엄

▲  화살을 쏘는 동명성왕, 이성계의 후예들

마침 황학정 회원 4명이 활쏘기를 겨루고 있었다. 여기서 과녁까지는 약 130~150m. 평소에는
매우 가깝게 여겼던 그 거리가 여기서 보니 참 까마득하게 보인다. 남산(南山)보다 더 멀리
느껴질 정도. 보는 사람도 그러한데 활을 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들은 주황색 천을 허리에 묶었는데 이는 황학정 국궁 회원임을 뜻하는 모양이다. 정자 이름
이 누런색, 주황색 학을 뜻하기 때문이다. 과녁까지 거리도 멀고 눈도 침침하여 명중을 했는
지. 외곽에 맞췄는지. 아니면 과녁 밖으로 빗나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날라간 화살은 전
동식 미니 케이블카에 실려 황학정으로 옮겨진다.

▲  황학정으로 인도하는 길 (국궁전시관 옆)

▲  황학정 표석 (황학정 정문)


 

♠  단군성전과 행촌동 은행나무

▲  단군성전(檀君聖殿)

황학정에서 다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으로 가면 길 동쪽에 단군성전이 마중을 한다. 단군(檀
君)은 옛 조선을 세운 천하의 시조(始祖)로 그의 단군설화는 3살짜리도 모두 알 만큼 유명하
다. 허접스럽기 그지 없는 양이(洋夷)들의 그리스, 로마 설화를 능가하는 알찬 설화로 삼국유
사(三國遺事)에 그 설화가 실려 있으니 내용을 새삼스레 풀어보면 대략 이렇다.

옛날 천하를 다스리던 최고의 신,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부자가 있었다. 환웅이 하늘 아래
로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었는데,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지구를 살펴보니 삼위태
백산(三危太白山) 지역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하다 여겨져 천부인(天符印) 3개와 3,000명
의 무리를 주어 지구로 내려보냈다.
환웅은 태백산 마루 신단수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했으며, 바람과 구름, 비를 관
장하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등 신하를 거느리고 곡식과 인명(人命), 질병, 형벌, 선악(
善惡) 등 사람들의 360여 가지 일을 직접 다스렸다. 이때 굴 속에 함께 살던 호랑이와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청하니, 환웅은 쑥 1자루와 마늘 20개를 주며 이를 먹으면서 100
일 동안 햇빛을 안보면 사람이 되리라 했다.
그들은 굴에 들어가 수행을 했으나 호랑이는 이를 견디지 못해 뛰쳐나갔고, 곰은 21일을 버티
면서 여자 사람이 되니 이가 곧 웅녀(熊女)이다.

웅녀는 매일 신단수 밑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니 환웅이 잠시 남자로 변해 웅녀
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옛 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단군은 장성하여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여 옛 조선을 세우니 그때가 기원전 2,333년이
다. 우리 땅은 바로 그때를 단기(檀紀) 1년으로 삼아 지금에 이르니 무려 4,350여 년의 역사
를 지니고 있으며 단군은 무려 1,908년을 살았다고 전한다.

▲  단군성전 정문(외삼문)

▲  단군성전 뜨락 은행나무


▲  푸근한 인상의 단군왕검상 (오른쪽에 단군 영정)

※ 단군이 세운 옛 조선(고조선)
오로지 상상으로 제작된 단군상, 그리고 그의 영정,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
적이다. 단군은 옛 조선(고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하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강제로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
를 비롯하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
만주, 요서, 연해주, 산동반도를 포함한 화북(華北) 지역을 다스린 천하 대국이었다. (중원대
륙 상당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서안 등 산서성에는 옛 조선이 세운 거대한
무덤 유적이 많이 있다고 함)

조선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해 기원전 2333년 건국설도 솔직히 무리가 있다. 산
소도 아까운 식민사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
반도 북부와 요동, 남만주로 크게 축소시켰다.
옛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에 다시금 영향
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
)를 비롯한 2,000리 이상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
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쫓아내
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했다
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닐까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제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
해 사방으로 크게 영토를 넓히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리하고 그 자신감으로 섭하(涉河)를 사신으로 보내 조선을
협박했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조선의 마지막 제왕인 우거왕(右渠王)으로 한나라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
부하며 비왕(裨王, 제후왕)을 시켜 사신을 전송케 했다. 허나 섭하는 그 호의에 배은망덕하게
도 마부로 가장한 무사를 시켜 비왕을 죽이고 도망쳤다. 이에 한무제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옛
조선과 가까운 요동(지금의 요동이 아님)으로 보내 요동도위(都尉)로 삼았다.

비왕이 암살된 것에 적지 않게 뚜껑이 열린 조선은 섭하가 요동도위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
자 바로 한나라를 공격해 그 요동을 점령하고 섭하를 쳐죽었다. 그렇게 조선이 먼저 공격을
하자 한무제는 그것을 구실로 조선을 공격했다. 아마도 섭하를 떡밥으로 보내 조선을 건드리
려는 수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조선의 반격과 한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패했다. 하여 뚜껑이 단
단히 폭발한 한무제가 다시 군사를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나라군은 정비를 가다듬고 공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우거왕이 반
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하여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
선 사람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 등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여전히 말들이 많으나,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
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지역으로 보고 있다. 한사군의 하나로
유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는 낙랑군 외에 비슷한 이름에 낙랑국도 있었다고 하는데, 낙랑국
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이다.
만약 낙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
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
명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族)
으로 대표되는 조선(또는 은나라)에서 만들어 전파했다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륙에서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주변에서 일어난 홍산문명(紅山文明) 또한 조선의 찬란했던 흔
적으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
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그리고 비파형동검도 조선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 단군성전(백악전)의 역사
단군성전은 1968년 이숙봉(李淑峰) 여사의 3자매(이정봉, 이숙봉, 이희수)가 세웠다. 이후 사
단법인 현정회(顯正會)로 이관되었으며, 1973년 서울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에는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의 지원으로 성전을 개축했다.

전체 대지면적 약 800㎡, 성전 52.92㎡, 태극정문(太極旌門), 관리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건
물 색깔이 죄다 베이지색을 띄고 있는데, 이는 박정희 시절 그가 좋아하는 색으로 칠했기 때
문이다. 이곳 뿐 아니라 많은 사당과 문화유산이 그 시절 베이지색으로 색 변경을 당했다. 성
전 현판은 김응현, 홍익인간 글씨는 원중식, 내외삼문 간판은 이현종이 썼다.
또한 옛 조선이 열렸던 유서깊은 10월 3일 개천절<어천절(御天節)이라고도 함>에는 이곳에서
개천절대제전(開天節大祭典)이 성황리에 열린다. 전통제례와 전통공연, 온갖 체험행사(제례복
체험, 국궁체험 등) 등이 열리며, 일반인도 참여 가능하다.

* 단군성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28 (인왕산로 22, 현정회 ☎ 02-736-6375)


▲  단군성전 앞에 펼쳐진 늦가을 동화

단군성전 남문은 바로 사직공원(사직단)과 이어진다. 허나 평소에는 늘 닫혀있고 사직공원에
서 그곳을 이어주는 길 또한 봉쇄되어 있어 별 수 없이 인왕산길로 우회해 외삼문(外三門)으
로 들어서야 된다. 그 덕분에 사직공원~단군성전 지름길에 인적이 거의 끊기면서 사람의 발자
국 대신 노란 은행잎이 가득 쌓여 늦가을 정취를 아주 진국으로 끌어올린다.
벌써부터 겨울 제국의 보이지 않는 압박이 시작되면서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들은 나뭇잎을 하
나, 둘 땅바닥으로 털어낸다. 우리는 그 잎을 낙엽이라고 부른다. 늦가을에 어울리면서도 한
편으로는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그 이름 말이다. 은행잎이 금지된 길과 그 주변에 수북히 쌓여
이 일대는 그야말로 노란 세상을 이룬다. 마치 황금색 비단이 쫙 깔린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야 귀를 접고 누운 그들을 보면서 늦가을 분위기를 즐기지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
래하며 서서히 끝을 준비한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은행잎, 인간이 지은 건물이나 인생은 모
두 부질 없는 모양이다. 시작이야 어쨌든 그 종점은 다 같지 않던가.


▲  한양도성 밖 인왕산로1길 (인왕산, 무악동 방향)

▲  인왕산입구 한양도성 탐방로 (인왕산 방향)

단군성전 앞 교차로에서 서쪽 인왕산로1길로 들어섰다. 길 왼쪽(남쪽)은 사직동 주택가와 종
로문화체육센터가 있고, 오른쪽은 인왕산의 싱그러운 숲으로 그 산줄기는 경희궁(慶熙宮)까지
미치지만 숲은 여기서 뚝 끊기고 만다. 그러니 인왕산로1길이 속세와 자연의 팽팽한 경계선인
셈이다.
그 길을 4분 정도 가면 고색이 짙은 한양도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크게 5거리를 이루
는데, 성 밖 북쪽 길(인왕산로1길)은 무악동과 인왕산 쪽으로, 서쪽(사직로1가길)은 독립문
방면, 남쪽(송월1길)은 홍파동, 경희궁 쪽으로 이어지며, 5거리 동쪽(성곽 안쪽) 인왕산입구
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성곽길을 타면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송월1길과 한양도성 (홍파동, 경희궁 방향)

▲  사직동 한양도성 (5거리 서남쪽)
인왕산에서 내려온 한양도성은 여기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만다.
(사직동~월암근린공원 구간 성곽은 아직 복원되지 못함)

▲  은행잎의 마지막 삶터이자 정모 현장, 한양도성 여장
나무에게 버림받은 은행잎들이 딱딱한 여장 위에 모여 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여장 뿐 아니라 그 주변은 온통 황금색 은행잎의 세상이다.

▲  여장 위에 내려앉은 은행잎들

▲  행촌동(杏村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0호

사직터널 윗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의 끝을 잡은 행촌동은 조금은 빛바랜 산동네이다. 그렇
다고 옛날 달동네처럼 주황색 기와를 지닌 허름한 집들이 즐비한 그런 곳은 아니다. 온갖 빌
라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울의 흔한 동네로 그 주택가 속에 행촌동 은행나무와 권율장
군의 집터, 그리고 딜쿠샤란 명소가 숨겨져 있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약 420살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랜 터줏
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
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주택에 밀려 많이 좁아졌고,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있으나 건강은 아직 양호하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權慄)장군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
은 오래 전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들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
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
이 심은 것이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 성균관(문묘) 은
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격하게 내세우고 싶다.

▲  남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북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은행나무 그늘에 자리한 권율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
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
려주었는데 그 집이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럼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과 모악(). 시호는 충장()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시절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는 승문원정자()와 전적()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
랑(禮曹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고자 했는데, 권율은 주변
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하고 오로지 머릿수에 의지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렀으나 대부분이 칼과 창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오합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겨우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지
(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
감하고 신중하게 처신해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
순)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
진하게 된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
사(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 좀처럼 성 밖으로 나오질 않아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
수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
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
을 본 단순한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
로 그때를 이용해 유격전을 펼치며 타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바
로 서울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도망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죽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세마대 전투)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
幸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
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
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은 것이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리고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에서 왜군에게 깨진 명나라군을 도
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권율의 활약에 적지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우키타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서울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 외에 군사들을 도우러 성
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해 여러 번
위기가 있었으나 군사들은 일당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
으며,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의 새 무기도 크게 활약을 했다. 또한 밥할머
니의 행주치마 부대는 치마로 돌을 나르고 군사들의 밥을 나르는 등, 서로가 단결하니 왜군은
결국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사한 군사들의 시신을 모아 불태우고 줄행랑을 쳤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
도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
에 임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을 공격
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순천
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있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비리비리한 명나라군의 비협조
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그해 7월 인생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
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관들 때
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밥버러지 명나라군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그 외에는 모
두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이 전하고 있으며,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끄러우니 숙면이나 제대로 취하고 있
을지 모르겠다.

행촌동 은행나무를 끝으로 늦가을 한복판에 달달하게 벌였던 인왕산과 황학정, 행촌동 나들이
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딜쿠샤는 시간 관계로 사진에 담지 않고 통과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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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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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1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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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 주왕산 늦가을 나들이 '
(절골, 가메봉, 용연폭포, 용추폭포, 주왕계곡)

▲  대전사에서 바라본 주왕산

▲  용추폭포

▲  절골계곡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기 시작하던 10월의 한복판에 늦가을 단풍 성지로 격
하게 추앙받고 있는 청송(靑松) 주왕산을 찾았다.
주왕산은 대자연이 경북 한복판에 빚은 크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호남 내장산(內藏山)에 버
금가는 단풍의 대표 성지(聖地)이다. 서울에서 약 600리(옛 10리는 약 5km) 거리로 당일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좀 넉넉하게 무박 2일 코스로 다녀왔다.

토요일 저녁 10시, 신도림역(1,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준비된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주
왕산이 있는 동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늦가을 단풍의 화려한 향연과 아직까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주왕산에 대한 강한 설
레임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검은 도화지가 되버린 차창 밖만 열심히 바라보며 나름대
로 주왕산을 그려본다. 말로만 듣던 주왕산의 실물은 어떠할까?? 단풍은 제법 물이 올랐겠
지? 대전사까지 모두 볼 수 있을까? 등등...

서울을 출발하여 약 5시간 30분 만에 주왕산 남쪽 끝에 자리한 주산지 주차장(상이전마을)
에 이르렀다. 아직 새벽 어둠에 잠긴 주차장에는 천하 곳곳에서 산꾼과 나들이꾼을 바리바
리 싣고 온 관광버스로 가득한데,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주차장 모퉁이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먹었다.
밥과 반찬을 가져온 이들이 많았고, 취사 도구까지 가져와 라면과 찌개, 오뎅탕 등을 해먹
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렇게 갖은 먹거리들이 모두 모이니 그야말로 출장 뷔페가 따로 없
으며, 주차장 옆에는 식당을 겸한 가게가 환하게 불을 켜며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을 때우고 4시 30분에 다시 버스를 타고 서쪽에 자리한 절골교로 이동했다. 그
림 같은 비경을 자랑하는 주산지(注山池)도 봤으면 좋으련만 그곳은 일정에 없었기 때문에
공간의 여유가 있는 주산지 주차장에서 아침만 먹고 바로 철수한 것이다.
절골교에서 모두 버스에서 내려 절골탐방지원센터까지 12분 정도 걸었다. 여기서 주왕산의
빗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5시, 빗장이 열리기가 무섭게 주왕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주왕산 절골, 가메봉, 사창골

▲  주왕산 뒷쪽에 숨겨진 절골

절골(절골계곡)은 주왕산 동남쪽에 깃든 계곡으로 주왕산 뒷통수에 해당된다. 주산천(注山川)
의 상류로 골짜기가 꽤 깊고 숲이 울창하며,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골이라 불린다. 계
곡 길이는 8km로 주왕산 동쪽 대관령(731m)에서 발원한 갈전골(갈절골)과 신술골이 한데 모여
절골을 이룬다.
삼삼한 숲에 포근히 감싸여 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피해갈 정
도로 시원하다. 계곡은 물이 풍부하고 기암괴석과 반석, 간간히 나오는 조그만 폭포가 운치를
더해주며. 상류로 올라갈수록 풍경의 질이 높아지니 꼭 상류(대문다리)까지는 오르기 바란다.
  
절골코스는 절골탐방지원센터에서 계곡을 따라 펼쳐지는데 여러 차례 계곡을 건너야 된다. 반
듯한 다리 대신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으나 부실한 곳이 적지 않아 자칫 물에 빠지기 쉽다. 하
지만 수심이 얕아 그리 위험은 없으며, 계곡 트래킹 및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절골은 인근 주산지와 함께 '내주왕계곡'이라 불리며, 풍경이 고와 주왕계곡(周王溪谷) 못지
않다. 계곡을 옆에 끼고 상류로 올라가다가 대문다리를 지나서부터 계곡과 서서히 멀어지며,
산길 경사도 점차 각박해져 깔딱 직전까지 이른다. 그렇게 각박한 산길을 오르면 가메봉 동쪽
갈림길에 이르고, 여기서 서쪽 능선길로 가면 가메봉이다.

* 절골탐방지원센터 → 대문다리 → 가메봉 (3시간 20~30분 소요)


▲  고요함에 잠긴 절골 (절골 중류)
늦가을 향연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계곡을 거울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벼랑 사이를 흐르는 절골

▲  늦가을 채색이 짙은 절골 상류
너른 반석과 조촐한 폭포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돕는다.

▲  가메봉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바라본 주왕산 남쪽 줄기
산 아랫도리와 중간 도리는 단풍의 향연이 한참이나 해발 700m 이후로는 벌써부터
앙상한 분위기를 자아내 올해도 거의 저물었음을 실감케 한다.

▲  주왕산 가메봉(882m) 바위와 그 너머로 보이는 왕거암

가메봉은 주왕산 구역에서 두수람(923m), 왕거암(907m)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다. 주왕산 동
쪽에 자리한 가메봉은 넓직한 바위로 이루어져 동쪽과 남쪽, 서쪽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으
며, 하늘에서 가까운 봉우리이나 칼처럼 솟은 뫼에 꽁꽁 둘러싸여 있어 조망의 질은 그리 시
원치 못하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행동식을 섭취하고 주왕계곡으로 내려갔다. (일부는 칼등고개를 경유하
여 주왕산 정상으로 이동)


▲  가메봉에서 바라본 천하 (주왕산 남쪽)
가메봉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  가메봉에서 주왕계곡, 사창골로 내려가는 산길


 

♠  주왕산 사창골, 용연폭포

▲  사창골 상류

가메봉에서 울퉁불퉁한 산길을 20~30분 정도 내려가면 사창골이 슬쩍 모습을 비춘다. 가메봉
북쪽에서 발원하여 주왕계곡으로 흘러가는 사창골은 숲이 매우 삼삼하고 바위와 소(沼)가 많
아 절골 못지 않은 고운 매력을 드러내고 있으며, 후리메기3거리를 지나 40~50분 정도 내려가
면 주왕계곡이 모습을 비춘다.


▲  동그랗게 자리를 닦은 조그만 소(못)
해가 지고 밤이 되면 하늘에서 선녀 누님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지는 않을까? 그러고 보니 못의 사이즈도 선녀 누님에 걸맞게
아담하다.

▲  너른 반석과 조그만 폭포
계곡 주위로는 낙엽이란 쓸쓸한 꼬리표를 단 단풍들이 귀를 접고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있다.

▲  풍덩 스킨쉽을 하고 싶은 동그란 소
사창골 냇물은 여기서 숨 좀 고르다가 다시 종점 없는 길을 재촉한다.

▲  사창골 하류 산길
사창골 산길은 하류에 이르러 잠시 계곡과 멀어지고 벼랑길로 돌변한다.
벼랑 밑에는 사창골이 빚은 절구폭포가 있으며, 벼랑길을 지나면
주왕계곡에 이르게 된다.

▲  주왕계곡 용연폭포(龍淵瀑布, 제3폭포)

주왕계곡(주왕천계곡, 주방천계곡)은 주왕산(720m)의 중심 계곡으로 '내주왕계곡'이라 불리기
도 한다. 주왕산 동쪽에서 발원한 큰골에서 시작하여 주왕산 심장부를 구비구비 돌다가 대전
사를 지나서 주방천(周房川)이란 이름으로 속세로 흘러간다.
용연폭포와 용추폭포, 시루봉, 학소대, 급수대 등 대자연이 빚은 온갖 작품이 가득해 눈을 부
시게 하며, 특히 용추폭포 주변은 주왕산의 모든 것을 긁어모은 것처럼 대장관을 이룬다.
깊은 산골에 숲이 울창하고, 계곡 좌우는 높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협곡이 적지 않은데, 그런
계곡을 둘러싸고 600m가 넘는 많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그래서 주왕산을 석병
산(石屛山)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험한 지형을 지닌 탓에 예로부터 산적들이 많았고, 난리가
날 때마다 이곳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특히 바위 봉우리가 많아 설악산,
월출산(月出山)과 더불어 이 땅의 3대 암산(岩山)으로 격하게 꼽히기도 하며, 경북의 금강(金
剛)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신라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의 족자(簇子)이자 원성왕(元聖王)에게 밀린 김주원(金周
元)이 머물렀다고 해서 주방산(周房山)이라 불렸는데, 이후 그는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
졌다. 하여 그 연유로 주왕산으로 이름이 갈린 것으로 보이며, 고려 후기에 나옹화상이 그리
바꾸자고 해서 이름이 갈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다른 유래로는 당나라 사람인 주도(周鍍)가 8세기 후반,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을 칭하며
진나라 재건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당나라군에게 보기 좋게 털렸다. 그래서 요동을 거쳐
신라로 도망, 주왕산이 험하다는 풍문을 듣고 그곳에 들어가 주변을 약탈하며 후일을 도모하
다가 당나라의 토벌 요청을 받은 신라에게 털리고 자신은 잡혀 처단되었다. 그래서 주왕산이
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 전설은 마땅한 기록도 없고 역사적인 근거가 없으며, 조선 때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
대주의(事大主義)에 젖은 지역 유생들이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명나라가 있던 중원대륙과
청송의 명산인 주왕산을 연결시켜 지역의 자부심을 어떻게든 높이려고 머리를 싸맸던 유생들
의 그릇된 생각이 지어낸 산물인 것이다.

주왕계곡은 '청송 주왕산 주왕계곡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11호로 지정되었다.


▲  용연폭포의 위엄 (윗폭포)

주왕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연폭포는 제3폭포, 쌍폭, 용폭이라 불리기도 한다. 예전에는 간단
하게 제3폭포라 불렸으며, 2단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폭포가 위엄을 자랑하며 하얀 실타래 같
은 물줄기를 밑으로 뽑아낸다. 폭포 밑에는 푸른 못이 펼쳐져 있는데, 영덕 강구항 앞바다와
이어져 용이 머물렀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다. 그래서 용연폭포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
다.
윗폭포 옆에는 얕게 파인 3개의 동굴이 있어 폭포의 경관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주며, 물소리
가 우렁차 귀신도 도망을 칠 정도이다. 못 남쪽에는 탐방로와 조망대가 있는데, 사람들이 폭
포를 구경하느라 금방금방 빠지지를 않아 정체가 심하다. 그만큼 폭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제
대로 앗아간 것이다. 우리도 폭포를 구경하느라 한동안 발을 움직이지 못했지. 대자연의 기묘
한 작품 앞에 우리가 할 일이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촬영 뿐이다.

▲  용연폭포 옆에 패인 3개의 동굴

▲  푸르게 익은 용연폭포 못 (윗폭포)


▲  용연폭포 아랫폭포
아랫폭포도 윗폭포 못지 않은 장쾌함을 보여준다. 이곳은 못 바로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주왕계곡의 백미, 절구폭포~용추폭포

▲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사창골 협곡

용연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가면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협곡이 마중을 한다
. 앞서 사창골 산길의 아랫쪽으로 사창골의 하류이기도 한데, 그 협곡을 5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절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절구폭포 (제2폭포)

바위 너머 윗쪽에서 2단으로 쏟아지는 절구폭포는 제2폭포라 불리기도 한다. 응회암(凝灰巖)
에 주로 생성되는 절리(암석이 갈라진 틈)에 의해 생긴 폭포로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윗폭
포 밑에는 선녀탕(仙女湯)이 수줍은 듯 숨겨져 있으며, 아랫 폭포 밑에는 수심이 얕은 못이
형성되어 있어 물놀이 장소로 아주 그만이다.
이곳은 사창골 하류로 폭포 주변이 모두 벼랑으로 막혀 길이 없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나가야
된다. 전쟁 때 만약 이곳으로 몰린다면 정말 몰살을 각오해야 될 정도로 궁벽한 곳이나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물이 시리도록 맑아서 내 즐겨찾기 명소로 살짝 숨기고 싶다. 현재 선녀탕과
윗폭포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얌전히 아랫폭포 앞에서만 머물기 바란다.


▲  옆에서 바라본 절구폭포

▲  병풍바위

절구폭포를 둘러보고 주왕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주변 풍경이 서서히 흥분을 하면서 나도 모르
게 장대한 벼랑에 감싸이게 된다. 그 벼랑은 병풍바위로 계곡 양쪽으로 거의 직각으로 솟은
낭떠러지가 병풍처럼 둘러져 그야말로 하늘만 보이는데, 벼랑 밑에는 옥처럼 맑은 주왕계곡이
청정함을 자랑하며 힘차게 흐르고 있다.
발을 전혀 들일 수도 없을 이런 험지에 인간들은 산천유람 욕구를 위해 마구 탐방로를 내었는
데, 벼랑 밑부분에는 혹시나 모를 대자연의 테러(낙석)에 대비해 지붕까지 둘렀다. 주왕산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웅장한 멋을 지닌 병풍바위 밑에는 제1폭포라
불리는 용추폭포가 달려있는데, 이곳 풍경은 가히 압권이라 앞서 제2폭포, 제3폭포를 능가한
다.
대자연의 위대한 작품에 혼이 탈탈 털린 속인들은 사진을 찍고 풍경을 구경하느라 좁은 탐방
로는 늘 정체를 빚어 행렬이 다소 버벅거리는데, 풍경이 풍경인지라 정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게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들의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아무리 여름 제국이 무더위 갑질로 천하를 뜨겁게 달구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을 정도로
무더위를 잊게 한다. 벼랑에 감싸여 햇살도 마음 놓고 착륙을 못하고, 계곡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주니 땀이 붙어있을 재간이 없다.

용추폭포 윗쪽에는 선녀탕이 있고, 그 위에 구룡소(九龍沼)가 있으며, 탐방로 밑은 계곡과 벼
랑으로 되어있어 계곡과 폭포로의 접근은 통제되어 있다.


▲  대륙의 협곡 같은 병풍바위의 위엄
협곡 사이로 탐방로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다. 이렇게 보니 주왕산의 옛 이름인
석병산(石屛山)이란 이름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  용추폭포 구룡소
수심도 깊고 지형도 각박한 이곳에 9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  구룡소와 용추폭포 사이에 자리한 선녀탕
선녀 누님들이 들어가기에는 수심이 좀 깊다. 하늘나라 선녀들은
키가 나무만 했던 것일까?

▲  용추폭포(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와 달리 폭포의 정면 모습을 담을 수가 없다. 그만큼
이곳은 칼처럼 솟은 벼랑 밑에 무섭게 펼쳐진 첩첩한 협곡이다.
그나마 탐방로가 닦여져 있으니 이 정도로라도 보는 것이다.

▲  가까이에 있으나 그림의 떡처럼 보이는 용추폭포 밑 동그란 못

▲  벼랑 사이로 각박하게 이어진 병풍바위 협곡 (서쪽 부분)


 

♠  주왕산 마무리

▲  주름선이 인상적인 시루봉 ▲

병풍바위 협곡을 지나면 계곡을 건너는 학소교가 나온다. 다리 옆에는 홀로 솟은 날씬한 돌기
둥이 손짓을 하는데, 그 돌기둥이 시루봉이다.
시루봉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그 모습이 떡을 찌는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바위 피부에는 주름선이 많은데 옆에서 보면
어두운 표정을 지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여 신비감을 더한다. 완전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무장된 천험의 돌기둥이라 접근은 정말 어림도 없어 보이는데, 저 봉우리 위에는 주왕산 산신
이나 신선만의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의 숨겨진 보물이라도? 그러니까 대자연
이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게끔 저렇게 깎아 놓았을 것이다.

이런 절경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붙여놓은 전설이 하나씩은 꼭 있기 마련, 그 내용
은 대략 이렇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 한 도사가 바위 위에 올라가 열심히 도를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신선 2명이 하늘에서 내려와 도사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바위 밑에 불을 지폈는데,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며 봉우리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이게 끝임.


▲  시루봉 밑 주왕계곡


▲  학소대(鶴巢臺)

시루봉 맞은편에는 학소대라 불리는 커다란 낭
떠러지가 장대한 모습을 자랑하며 시루봉과 자
웅을 겨룬다.

계곡 바로 옆에 직각으로 높이 솟아있어 그 장
엄함에 주눅을 들게 만드는데, 시루봉 마냥 낭
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철옹성 마냥 범접하기
가 어려워 보인다.
절벽 꼭대기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 세상
을 굽어보고 있으며, 학소대의 덩치가 대단하
여 주변 계곡에 늘 그늘을 드리운다.
옛날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이 무리를 지
어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 불리며, 그 학소대
밑에 도승(道僧)이 절을 짓고 살았는데, 꿈에
신선이 나타나 빨리 피하라고 재촉하므로 밖으
로 나오니 위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져 절을 덮
쳤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온
다.


▲  인간이 만든 비루한 작품, 학소교 (학소대 밑)
대자연의 걸쭉한 작품을 쭉 보다가 인간이 만든 콘크리트 다리를 보니 정말로
못봐주겠다. 아무리 아치형으로 만들어도 거기서 거기임..

▲  급수대(汲水臺)

학소대를 지나면 육중한 바위 봉우리인 급수대가 모습을 비춘다. 그 역시 낭떠러지로 이루어
진 30여m의 주상절리(柱狀節理) 바위로 옛날 주왕의 군사들이 바위 위에 무자위를 설치해 계
곡 물을 위로 소환했다는 전설이 있어 급수대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주왕의 전설도
거짓이며 급수대의 전설 또한 거짓이다.


▲  주왕계곡 북쪽에 솟아난 벼랑 (이름은 모르겠음)

▲  자하성(紫霞城)터

급수대를 지나 계곡 하류(대전사)로 계속 길을 재촉하면 길 오른쪽에 자하성터가 초췌한 몰골
로 마중을 한다.
자하성은 주왕굴을 중심으로 하여 지형을 이용해 쌓은 산성(山城)으로 주방산성, 주왕산성이
라 불리기도 한다. 주왕이 신라군을 막고자 쌓았다고 하나 현실은 삼국시대 또는 고려 때 축
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곳을 거쳐 갔다는 신라 왕족 김주원이 자신에게 돌아올 왕위를
가로챈 김경신(원성왕)을 크게 원망하며, 여기서 잠시 딴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 싶다. 허나
그 마음도 부질 없음을 깨달았는지 강릉(명주)으로 내려가 거기에 둥지를 틀었다.

성 둘레는 12km에 이르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끊임없는 태클과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
다 무너지고 지금은 일부만 겨우 남아 있다. 그 모습도 돌무더기처럼 남아있어 자하성터 안내
문이 없었다면 그냥 자연산 돌무더기로 지나쳐도 이상할 것이 없다.


▲  주왕계곡의 흥미로운 존재, 아들바위

자하성터를 지나면 계곡 냇가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아들바위를 만나게 된다. 덩치가 큰 네
모난 바위가 다소 기운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겉모습은 딱히 유별난 것은 없으며, 그냥 계
곡에 놓인 커다란 바위 정도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신비한 존재로 각인되어 옛날부터 아들바위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의 오랜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아들 선호 사상이 빚은 산물이라고나 할까? 냇가 한복판
에 저런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돌을 던졌을 것이고, 바위 위에 얹혀지면
마치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것이 점차 확장되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이
야기까지 생겨난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바위와 달리 여기서는 그냥 던지면 안된다. 바위를 등지고 다리 가랑이 사이로
돌을 던져 바위에 골인을 해야 아들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냥 왼팔로 던져 골인을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새 수법이 바뀐 모양이다. 어쨌든 오랜 세월 사람들이 던질 돌이 바위
위에 수북히 쌓여 그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잠시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 (주왕계곡 하류와 주왕산 산줄기)

▲  주왕계곡 하류 (대전사 동쪽)

▲  주왕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대전사

주왕산에 들어서면서 시간이 되면 주왕굴과 대전사(大典寺)까지 말끔히 둘러보려고 했다. 주
왕산 상의주차장까지 13시까지 모이기로 해서 시간이 좀 넉넉할 줄 알았는데 벌써 12시 반이
넘어버렸다. 상의주차장까지는 앞으로도 30분을 더 가야 된다. 그러니 이들을 제대로 볼 시간
이 없는 것이다.
하여 산을 좀 타야 되는 주왕굴은 다음으로 미루고 상의주차장 직전 길목에 있는 대전사라도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이 절은 신라 후기에 창건된 오래된 절로 주왕산의 터줏대감격 존재인
데, 문화유산이 여럿 있어서 사진에 모두 담고 싶었다. 허나 시간 부족이란 현실 앞에 경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쳐야 했다.
그렇다고 무리를 해서 보는 것도 단체 활동에 대한 예의는 아니며, 너무 시간에 쫓기듯이 보
느니 쿨하게 다음으로 넘기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하지만 얼마나 아쉽던지 아무리 다음에
오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 다음이란 것이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이다. 서울에서 제
법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전사를 지나니 바로 주왕산의 대표 관문인 상의 매표소이다. 이곳은 대전사 때문에
문화재 관람료란 명목으로 입장료를 뜯고 있는데, 매표소 사람들의 눈빛에는 어느 누구도 그
냥 들여보내서는 안된다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다. 그 돈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주왕산 상의(대전사)매표소만 입장료를 징수함, 나머지(절골, 월외리 등)는 입장료 없음>

상의매표소를 지나니 다른 유명 산과 마찬가지로 먹거리촌이 징하게 펼쳐진다. 도토리묵과 파
전, 송이, 동동주, 산채비빔밥, 백숙 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서둘러 길을 재촉하려는 찰라 낯
익은 얼굴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적지 않은 일행들이 거기서 동동주 1잔에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늦을까봐 대전사 등 많은 것을 두고 왔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산행
뒤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럴줄 알았다면 대전사라도 제대로 보고 오는 건데
갑자기 기분이 허탈해진다.
상황이 뭐 그리 되었으니 다시 대전사로 가기는 틀렸고, 일행들과 어울려 주왕산의 명물인 송
이와 도토리묵, 동동주 1잔을 걸치며 같이 상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  상의주차장에서 바라본 주왕산과 주왕계곡

상의주차장에 도착하니 13시 20분, 늦게 오는 사람들이 속출하여 13시 40분이 되어서야 출발
을 했다. 주차장에는 산꾼과 나들이꾼을 태운 관광버스와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었고 그에 아
랑곳하지 않고 차량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어온다. 그러나보니 들어오는 길은 정체가 대단하여
많은 차량들이 마을 밑에 차를 대고 걸어오기도 했다.

주왕산을 벗어난 우리는 안동(安東)으로 넘어갔다. 안동댐 주변에 자리한 식당에 들어가 안동
의 토속 음식인 헛제사밥 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헛제사밥 정식은 일반적인 제삿상
음식과 비슷하다.
헛제사밥의 유래는 조선 때 유생들이 배가 고프거나 비싼 음식을 먹고 싶어서 성현(聖賢)들에
게 제사를 지낸다고 거짓말을 치고 노비와 주변 백성들을 닥달하여 만들게 한 음식상으로 '헛
'이란 접두어를 붙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음식상이 이제는 안동의 대표 밥상이 되
어 전국에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이곳 헛제사밥 정식은 나물이 버무려진 놋쇠 그릇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인데, 제사 때 쓰는 국
과 간고등어, 전, 떡, 잡채 등이 정식을 이룬다. 맛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 순식간에 밥과 반
찬을 비우고, 술도 여러 잔 마시니 졸음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식당 남쪽에 자리한 낙동강(落東江)과 월영교에서 잠시 소화 좀 시키다가
16시 30분에 출발했다. 아무리 목적지가 주왕산이라고 해도 마지막 종점은 결국 집이다. 서울
까지는 4시간 정도 걸렸으며, 피곤한 탓에 자다깨다를 무한으로 반복했다.

정말 번개처럼 날라가 재미나게 보냈던 무박 2일,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이들이 보고 싶
은 마음에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긴다. 다소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아쉬움은
다음이란 인연을 잡아 해결하면 될 것이다.

* 절골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주산지리
* 주왕계곡(용연폭포, 용추폭포 등)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의리
* 주왕산국립공원(☎ 054-870-5300)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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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 여름맞이 산사 나들이 ~ 논산 쌍계사, 송불암 '

▲  쌍계사 대웅전

▲  쌍계사의 자랑, 대웅전 꽃창살

▲  송불암 미륵불


 

여름이 봄을 몰아내고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첫 무렵, 오랜만에 충남 논산(論山)을
찾았다.
논산으로 멀리 발걸음을 한 것은 그곳 쌍계사의 꽃창살이 그렇게나 아름답고 유명하다 하
여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자 함이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겠지?
다행히 쌍계사입구까지는 시내버스가 1일 10여 회 오가고 있어 접근편도 벽지치고 양호하
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아 논산역으로 보냈다.
논산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버스 시간에 아직 여유가 있어 논산역 동쪽에 자리한
논산시내버스 종점(덕성여객)으로 이동해 차를 기다렸다. 논산시내버스는 일부 외곽 지선
을 제외하고 모두 여기서 출발한다. 
 
세월이 무지 빠르다고 하는데 정작 무엇을 기다리는 시간은 반대로 느린 것 같다. 잡생각
을 머리 속에 마구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억지로 시간을 죽이니 어느덧 출발시간이다.
그래서 타는 곳으로 나가니 쌍계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405번(논산역↔임화리)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잡아타고 논산시내를 가로질러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유명한 관촉사(灌燭寺),
사육신(死六臣)의 하나인 성삼문(成三問)묘소<이곳에는 그의 다리 한쪽이 묻혀있다고 함>
를 지나 쌍계사입구인 중산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부터 쌍계사까지 잘 닦여진 2차
선 도로(중산길)를 따라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된다.


▲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중산길


 

♠  쌍계사(雙磎寺) 입문

▲  강병흠과 평택임씨 정려비(旌閭碑)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은 인적도 거의 없는 고적한 길이다. 집도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
낼 뿐, 거의 산과 밭으로 이루어진 자연 지대로 살며시 스쳐가는 산바람 소리, 가끔씩 지나가
는 차량 소리가 이곳 소리의 전부이다. 그런 길을 혼자 유유자적 거니니 마치 그 길을 통째로
전세를 낸 듯한 즐거운 기분이 가득 들고 걷는 길도 그리 지루하지가 않다.

그런 길을 약 1km 정도 가면 길 왼쪽에 돌로 만든 특이한 비각(碑閣)과 그 안에 담긴 매끈한
피부의 비석이 잠깐 나좀 보고 가라며 하소연을 한다. 하여 잠시 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강병
흠(姜抦欽)과 평택임씨(平澤林氏) 부부의 정려비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강병흠은 진주강씨로 구한말과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첨지중
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를 지냈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대단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어느
한겨울에 부모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자 저수지의 두꺼운 얼음을 깨서 잉어를 잡
은 적이 있으며, 아버지가 병으로 드러눕자 밤낮으로 약을 달이며 병간호를 했는데, 꿈속에서
친할머니가 나타나 아버지의 병에는 산삼이 최고라며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하여 다음날 그
곳에 가보니 정말 산삼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으며, 결국 그가 사
망하자 무려 6년씩이나 시묘살이를 했는데, 불효에 대한 자책감으로 옷자락에 항상 돌을 담고
다녔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포석효자(包石孝子)라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강병흠의 부인인 평택임씨도 대단한 열녀(烈女)라 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했고, 남편이 죽자
자결을 했다. 그래서 그들 부부의 효행과 열행(烈行)
을 기리고자 1922년에 정려비를 세웠다.

처음에는 1칸짜리 기와 정려각을 씌웠으나 건물이 낡자 1993년에 지금의 석조물을 세우고 내
부에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김용제(金容濟)가 짓고, 이종성(李鍾聲)이 글씨를 썼으며, 비문
에는 '孝子僉知中樞府事 姜抦欽 閭配, 烈女 淑夫人 平澤林氏之閭(효자 첨지중추부사 강병흠
정려, 열녀 숙부인 평택임씨지여)'라 쓰여 있다.

           ◀  열녀 해주오씨 비석
강병흠 부부의 정려비에서 잠깐 옷깃을 여미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얼마 안가 고색의 때를 절
반 정도 탄 해주오씨 열녀비가 모습을 비춘다.
비석 주인공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비
석의 상태로 보아 19세기 인물로 여겨지며, 앞
서 평택임씨 못지 않은 열녀였던 모양이다.

           ◀  영명각(靈明閣) 입구
쌍계사 주차장을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늘씬한
숲길과 함께 영명각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한다.
영명각은 1975년에 농업진흥공사가 금강(錦江)
유역 300핵타르의 개답(開畓) 공사를 벌이면서
무연고 무덤 유골 3,000기를 수습해 봉안한 납
골당이다.
이후 건물을 확장하여 논산시민의 납골당(논산
시 공설봉안당)으로 바쁘게 살고 있다.


▲  쌍계사 밑에 자리한 그림 같은 호수, 절골소류지(沼溜地)

영명각입구 맞은편에는 너른 호수인 절골소류지가 있다. 작봉산(불명산)이 베푼 청정한 물이
쌍계사를 끼고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대장정을 준비하는데,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소류지의 자태는 정말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영명각 입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숲길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한 숲, 그 숲이 베푸는 숲내음과 그늘, 거기에 옆에
붙은 소류지까지, 이곳만큼은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비켜간다.

▲  쌍계사 부도(浮屠)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0호

길을 거닐다보면 왼쪽 언덕에 옹기종기 모인 부도(승탑)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 부도는 모
두 9기로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20세기 후반에 이곳으로 모두 집합시켰다.
고색의 내음을 깊게 내뿜고 있는 그들은 석종형(石鐘形) 6기, 옥개석(屋蓋石)을 갖춘 탑 3기
로 이루어져 있다. 석종형은 높이 150cm 내외로 4각 또는 6각의 바닥돌을 깔고 그 위의 기단
(基壇)과 석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바닥돌과 기단에는 연꽃무늬 장식을 새겨 맨돌
의 식상함을 덜어준다.
옥개석 부도는 높이 130cm 내외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대좌를 받치는 바닥돌은 4
각 또는 6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중/하대로 구분된 기단부(基壇部)에는 연꽃무늬 연주문과
화문(花紋)이 새겨져 있고, 탑 꼭대기에는 구슬 장식이
얹혀져 있다.

이들 부도 중 2기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翠峰堂 慧燦大師之屠(취봉당 혜천대사 부도)','梅
憲~~之塔(매현 ~~의 탑)' 정도의 글씨만 확인이 가능하다. 나머지 글씨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크게 흐트러져 알 수가 없으며, 부도의 조성시기는 조선 중~후기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부도

▲  쌍계사 중건비(重建碑)

부도의 보금자리 한쪽에는 중건비라 불리는 비석이 미운 오리새끼 마냥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는 1739년에 쌍계사를 중수하면서 세운 것으로 높이 156cm, 너비 78cm이며, 땅바닥에 자연석
을 깔아 비석을 세울 수 있도록 홈을 파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운 다음에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쌍계사의 내력을 머금은 절의 일기장으로 비석 앞면에 절의 내력을, 뒷면에는 시주자의 이름
이 새겨져 있으며, 김낙증(金樂曾)이 찬(撰)을 하고, 이화중(李華重)이 글씨를, 김낙조(金樂
祖)가 글을 새겼다.


▲  쌍계사 봉황루(鳳凰樓)

숲길을 지나면 주차장과 봉황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숲에 감싸인 주차장 좌우로 2개의 조그만
계곡이 소류지로 흘러가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쌍계사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즉 2개의 계곡
이 만나는 절이란 뜻이다.

주차장을 굽어보는 봉황루는 쌍계사의 정문이다. 이곳은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아직 장만
하지 못해서 소류지 숲길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속세(俗世)와 절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제
아무리 천하의 독종, 번뇌라 한들 삼삼한 숲과 소류지의 경계를 뚫고 절까지 침투하기는 힘들
것이다. 허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 또한 번뇌라 아무리 던져본들 그 자리를 맴돌아 결국
소류지 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이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봉황루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누각이다. 정문 외에 조
촐하게 강당(講堂) 역할까지 하고 있는데, 근래 손질을 했는지 딱히 고색의 내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1층에는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늘어뜨렸으며 그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마치 해
가 떠오르듯 솟아오른다.
2층에는 북과 '쌍계사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이란 시가 적힌 현판이 있는데, 이 시는 5
언율시(五言律詩)로 어느 노승(老僧)이 1779년에 이곳을 찾아 지은 것이다. 이를 통해 적어도
18세기에는 봉황루가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쌍계사의 내력을 짚어보도
록 하자.


▲  봉황루의 뒷모습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 - 1779년 어느 노승이 지음

고루에 나홀로 누워                  高樓我獨臥
마음은 하늘을 찾아 날아오르네       心適上飛天
산봉우리들 사이에 흰 구름이 머물고  衆峀雲留白
여러 시내에 달 그림자 비치네        群溪月影輝
석등은 불실을 밝게 비추고           夕燈明佛室
아침 비는 선문을 어둡게 하네        朝雨暗仙扉
날마다 금모래 연못을 감상하니       日賞金沙池
몸은 세속으로 돌아감을 잊네         身忘俗諦歸

▲  봉황루 2층에 있는 태극마크 북

▲  경내 북쪽 석축 위에 닦여진 돌탑들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논산 쌍계사는 작봉산(鵲峰山, 419m) 북쪽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동/서/남이 모두 작봉산 산줄기
에 막혀있고, 오로지 북쪽만 뚫려있기 때문이다.
쌍계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작봉산'으로 '불명산(佛明山)'이란 이름까지 지니고 있는데, 이
는 산의 옛 이름이 불명산이기 때문이다. 하여 쌍계사는 절에 어울리게 '불명산 쌍계사'를 칭
하고 있다.

쌍계사는 10세기 후반에 이곳에서 가까운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세운 혜명대사(慧命大師)가 창
건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믿을 바가 못되며, 창건자와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
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다. 다만 고려 후기 서화가였던 행촌 이암(杏村 李嵒, 1297~1364)이
발원하여 중건했다는 내용이 중건비에 적혀있어 이때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끝 무렵에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절의 연기(緣起)를 썼다고 전하며, 초창기 절 이름
은 백암사(白庵寺) 또는 백암(白庵)이었다.

왕년에는 500~600여 칸의 건물이 있을 정도로 호서(湖西) 제일의 대가람(大伽藍)을 자랑했는
데, 극락전을 비롯해 선원(禪院), 관음전, 동당(東堂), 서당(西堂), 명월당, 백설당, 장경각
등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허나 그렇게 잘나갔던 쌍계사는 조선시대를 거치면
서 크게 야위어 갔고, 여러 번의 화재로 1716년에 대웅전 등을 중창했으나 1736년 다시 화재
가 찾아와 1739년에 중건을 하고 중건비를 세웠다.
조선 후기와 왜정(倭政) 때는 그런데로 절을 유지했으며, 6.25 시절에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
가 별 피해는 없었다. 이후 별다른 큰 불사(佛事) 없이 지금에 이른다.

절은 지형을 이용해 넓게 터를 다졌는데, 북쪽과 서쪽, 동쪽에 석축과 돌담을 쌓고, 북쪽 가
운데에 봉황루를 내어 정문으로 삼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봉황루, 나
한전, 칠성각, 명부전, 요사 등 8~9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뜨락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
이다. 한때는 그 뜨락에도 건물이 가득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모두 사라지면서 수풀
만 무성하게 된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지방문화재인 부도
가 있으며, 계룡산 갑사(甲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머물고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 판각
이 원래 이곳에 있던 것으로 여기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쌍계사에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많이 서려 있다. 그 전설을 모두 다루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그중 일부만 끄집어 보도록 하겠다.

① 창건설화 - 먼 옛날, 하늘의 상제(上帝)가 이 땅에 절을 하나 짓고자 자신의 아들을 내려
보냈다. 아들은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천하에 진귀한 나무를 구해와서 주변 경치
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절을 세웠다.
② 하마비(下馬碑) 전설 - 때는 고려 후기 어느 날, 쌍계사 주지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승
려 1명이 나타나
'그곳에 쫓기는 승려가 찾아 올 것이니 잘 대접하시오. 허나 임금 왕(王) 자의 성을 가진 사
람이 말을 타고 들어오면 큰일이 날 것입니다!'
이후 세상이 더 혼란해지면서 많은 승려가 난을 피해 쌍계사로 들어오니 주지는 그들을 모두
맞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산을 뒤흔들 듯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탄 군사가 절을 향해 달
려오고 있던 것이다. 절에 있던 사람들이 불안에 떨자 주지는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기 시작
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 독경을 외웠는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절로 치닫던 말들이
절 앞에서 서로 뒤엉키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말을 탄 군사들은 말들의 때아닌 발작 증세
에 모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후에도 똑같은 일이 계속 생기자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절에 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또한
말이 때거지로 죽은 곳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웠는데, 세월이 지나자 엉뚱하게
도 죄 지은 사람의 죄를 풀어주는 영험이 있는 비석으로 둔갑되어 불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
다.

* 쌍계사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3 (중산길 192 ☎ 041-741-2251)


▲  봉황루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쌍계사 둘러보기

▲  쌍계사 연리근(連理根)

논산 쌍계사는 솔직히 대웅전만 알았지 나머지는 아는 것이 없었다. 절의 역사도 제법 오래되
고 보물로 지정된 장대한 대웅전도 있으니 절 규모도 어느 정도 될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정
작 경내로 들어서니 내 생각과는 완전 다른 허전한 모습의 쌍계사가 나를 맞이했다.

봉황루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대웅전이 보이는데,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
도 제법 떨어져 있다. 봉황루와 대웅전 사이에는 뜨락이 넓게 펼쳐져 있으나 그냥 뜨락만 있
을 뿐, 연리근 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옛날에는 그 자리에 건물이 가득 있었겠지만 다 사라
지고 빈 자리만 남은 것이다. 뜨락 서쪽에는 오래된 연리근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동쪽에
는 조그만 요사와 선방이 자리한다. 그리고 건물 상당수는 대웅전 좌우와 뒷쪽에 띄엄띄엄 떨
어져 있다.
이렇게 경내에 놀고 있는 땅이 많으니 요란하게 중창불사를 벌일 만도 한데 아직은 그럴 생각
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뜨락이 너무 허전하니 조촐하게 건물 몇 개라도 세워 그 공허함을
달랬으면 좋겠다. 세상에 이렇게나 넓은 법당(法堂) 뜨락도 처음 보고, 경내 중심에 이렇게
공터가 넓은 절도 처음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연리근

대웅전 뜨락 서쪽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연리근은 겉으로 보면 1그루 같지만 엄연한 2그루의
느티나무(괴목나무)이다. 이들은 서로 뿌리가 만나 이렇게 하나의 나무처럼 되었는데,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줄기가 서로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가 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른다.

이 연리근은 수백 년(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음) 묵은 장대한 나무로 쌍계사의 오랜 내력을 알
려주는 소중한 산증인이다. 나무의 덩치가 대단하여 그늘 또한 넓기 그지 없는데, 나무 밑에
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그늘의 질감과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으로 이곳만큼은 무더위를
잊어도 좋다.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오른쪽 맞배지붕 건물)
선방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그 앞에 조그만 건물은
찻집으로 전통차를 무료로 제공한다. (일부는 유료)

▲  동그란 석조(石槽)
작봉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것일까? 석조에는 그가 베푼 옥계수로 작은
바다를 이룬다. 목마름을 단죄하고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입에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하다며 쾌재를 외친다.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는 명부전과 나한전, 칠성각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명부전은 20세기 초에 지어
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
王), 도명존자(道明尊者),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
데, 보통 절 건물은 가운데 문은 닫고 좌/우측 문을 열어두어 통행하게 하나 여기는 그 반대
로 가운데 문을 이용토록 했다.


▲  명부전 중심에 앉아있는 온후한 표정의 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왼쪽), 도명존자(오른쪽)

▲  명부전 식구들
저승의 10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金剛力士), 동자(童子) 등


▲  나한전(羅漢殿)
20세기 초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나한전 석가여래상과 석가후불탱

▲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조그만
16나한(十六羅漢)들

  ◀  나한전의 젊은 버전, 칠성각(七星閣)
경내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칠성(七
星)을 비롯해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
자)이 봉안되어 있다.

▲  칠성각 내부 - 왼쪽부터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왼쪽 나무가 연리근, 오른쪽 건물이 요사)


▲  석조관세음보살상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최근에 장만한 관세음보살상이 자리를 폈다. 관세음보살의 얼굴이
풍만하고 복스러운 것이 마치 중년 비구니 같은데, 비가 내려도 얼굴 부분은 절대로 젖지 않
는다고 한다. 하여 절에서 신비한 관세음보살상이라며 크게 치켜세우고 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참 어려운 현상 같은데, 그게 계속 되는 것을 보면 단순한 석조보살상은 아닌 모양이다.

관세음보살상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얇아보이는 옷을 걸치며 가슴 주
위로 여러 장식을 둘렀는데, 앉아있는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가득하다.


▲  관세음보살상에서 바라본 쌍계사 경내

▲  쌍계사 대웅전 - 보물 408호

쌍계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 바로 이곳 법당인 대웅전이다. 바깥만 볼 것이 아니라 안에
도 말끔히 살펴보자. 그래야 저승에 가서도 염라대왕 형님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
만큼 쌍계사에서 대웅전의 비중은 막대하며 '대웅전은 곧 논산 쌍계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
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웅전은 법당에 걸맞게 경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솔직히 너무 일
방적으로 큼) 이상하리만큼 경내에 노는 공터가 많아 참 허전하기 그지 없는데, 그 허전함과
절의 조촐함을 대웅전이 제대로 커버를 해줄 만큼 든든한 모습이라 사진에 나오는 사람과 대
웅전을 비교하면 크게 실감이 날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살짝 치켜진 추녀마루의 선이 참 곱다. 마
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모습 같은데, 지붕이 건물 2층과 맞먹을 정도로 육중하기 그지 없
어 건물 밑도리가 그 큰 지붕을 어떻게 받쳐들까? 쓸데없는 걱정이 들 정도이다. 평방(平枋)
위에는 촘촘히 박힌 공포가 그 지붕을 받들고 있는데, 안쪽은 5출목(出目), 밖은 4출목이다.
이처럼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심어놓은 양식을 다포(多包)양식이라고 한다.

대웅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작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절이 세워진 고려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화재로 무너진 것을 1716년에 중창했고 화재로 또 전소된 것을 1739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 기둥은 굵고 희귀한 나무를 사용했는데, 그중 가운데 좌측 2번 째 기둥이 칡덩굴나무로
되어있다. 이 기둥은 윤달이 들은 해(4년에 1번, 2016년, 2020년, 2024년~)에 몸으로 안고 돌
면 죽을 때 고통을 면하게 된다고 한다.
1번을 안고 돌면 하루를 앓다가 가고, 2번을 안으면 2일, 3번 돌면 3일이라고 하는데, 유난히
3을 좋아하는 이 땅의 사람들의 습성상 3일은 앓고 가야 서운하지 않는다며 보통 3번을 안고
간다고 한다.
또한 염라대왕이 논산 쌍계사 출신인지 '자네 논산 쌍계사 다녀왔는가?' 물어본다고 한다. 그
러니 만약을 대비하여 쌍계사를 꼭 챙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대웅전 문짝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창살무늬

쌍계사하면 대웅전 꽃창살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을 다녀간 답사쟁이들은 하나 같이 꽃창살
을 쌍계사 제일로 찬양하기 때문이다. 나도 꽃창살의 풍문을 듣고 이곳에 온 것인데, 직접 그
들을 보니 그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꽃창살의 갑(甲)으로 칭송받는 부안 내소사(來蘇寺
) 대웅보전의 염통까지 제대로 쫄깃하게 할 정도로 말이다.
회오리 모양과 바람개비 모양의 꽃잎 문양이 문짝마다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꽃잎 사이로 나
뭇잎 문양까지 달려 있어 실제 꽃잎이 달려있는 듯하다. 물론 자연산 보다는 좀 못해도 진짜
꽃들도 시샘을 보낼 정도로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851호

대웅전 불단에는 장대한 모습의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이 각자 스타일에 맞는 후불탱을 뒤에 걸
치며 후덕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대웅전이 크니 집 주인인 석가여래와 그의 협시불(夾侍佛)
까지 덩달아 장대하여 대웅전과 꽃창살에 놀란 눈과 가슴을 더욱 놀라게 만든다.

이들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조각승 원오(元悟)가 수조각승을 맡아 신현(信玄)과
청허(淸虛), 신일(神釰), 희춘(希春) 등 4명과 함께 1605년에 조성했다. 그때 쌍계사는 무려
2층짜리 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 저들을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데, 석가여래 좌우로 약사여래(
藥師如來)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자리해 3불을 이루고 있다.
앙련(仰蓮)과 복련(앙련의 반대)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로 장엄하게 앉아있는데,
석가여래는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으며, 커다란 덩치
에 비해 손과 팔은 작아 보인다. 옷은 양쪽 어깨를 덮고 있지만 오른쪽이 더 진하며, 이를 변
형 편단우견(偏袒右肩)이라고 부른다. 가슴에는 수평의 승각기가 보이며, 법의(法衣) 자락도
규칙적인 간격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고, 좌우 불상도 크기만 약간 작을 뿐, 대체로 석가여
래를 따라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편삼을 입고 그 위에 법의를 걸쳤다는 것이다.

이들 뱃속에서는 아주 고맙게도 발원문(發願文) 등 복장유물 4점이 나왔는데, 발원문에 통해
1605년이라는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 제작에 참여한 승려 이름을 알게 되었다. 분명한 제작
시기와 함께 조각승 원오의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충남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5
년 3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대웅전 천정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대웅전에 발을 들였다면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기 바란다. 온갖 기묘한 조화로 이루어진 천정
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을 어느 정도 정화를 시켜줄 것이다.
천정에는 커다란 들보와 섬세하게 짜여진 공포, 용머리, 닫집, 25개의 네모로 이루어진 우물
천정(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불 천정에 우물천정 하나씩 있음),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
(迦陵頻伽)> 등이 정신없이 짜여져 있다. 들보와 공포에는 단청이 곱게 칠해져 있고, 용은 동
쪽 들보에 몸을 대고 불단을 굽어본다. 불상 위에는 붉은 기와집의 닫집과 천개(天蓋)가 있는
데, 마치 조그만 궁궐을 보는 듯 하며, 하얀 극락조가 날개를 퍼득이며 천정을 날고 있다. 그
야말로 휘황찬란이라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우물천정과 두툼한 들보, 그 들보에 몸을 기댄 용, 그리고
칠보궁(七寶宮)이란 현판을 내건 붉은 기와집의 닫집

▲  극락조가 날아다니는 천정 (들보와 닫집, 보개, 우물천정)
이곳이야말로 불국토(佛國土)의 축소판이 아닐까?

▲  대웅전 천정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을
빼곡히 담은 그림으로 법당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  대웅전 앞에 놓인 헝클어진 석재들
석탑의 일부로 여겨지는 연꽃무늬 석재와
맷돌의 일부가 나란히 놓여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었다.


▲  이렇게 큰 뜨락을 본 적이 있는가?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과 봉황루

박석이 깔린 길이 봉황루에서 대웅전 앞까지 정연하게 펼쳐져 있다. 지금은 이렇게 허전한 공
간으로 있지만 혹시 아는가? 나중에 조그만 도시처럼 번잡한 공간이 될지도? 허나 너무 복잡
한 모습보다는 이렇게 여백의 미가 넘치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인다.


▲  쌍계사를 뒤로하며 소류지에 버려둔 번뇌와 다시 만나다 ~~

겉모습은 작지만 대웅전 하나로도 알맹이가 큰 쌍계사를 1시간 30분 정도 둘러보았다. 대웅전
내부를 뚫어지라 살펴보았고, 이곳에 서린 문화유산은 불상의 복장유물을 제외하면 모두 눈에
넣었다. 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그곳에 정이 들었는지 속세로
나가는 길에도 여러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쌍계사에서 중산리로 나와 가게 문에 부착된 버스 시간을 보니 20분 뒤에 온다고 그런다. 딱
히 할 것도 없어서 정류장 주변을 서성이며 안그래도 빠른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시내
로 나가는 시내버스가 나타나 활짝 입을 연다. 하여 그 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논산역으로 나
왔다.

아직 일몰까지 여유가 넘쳐서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우리나라 서원의 주요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돈암서원(遁岩書院)을 가보기로 했다. 허나 서원은 격하게 땡기지는 않아서 다른
곳을 물색하다가 연산에 자리한 송불암 미륵불로 장소를 바꿨다. 서원보다는 절이 볼 것도 많
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논산시내에서 송불암이 있는 연산(連山)까지는 시내버스와 시외직행버스가 제법 다닌다. 대전
으로 가는 주요 길목인데다가 구한말까지는 충청도의 주요 고을(연산현)이었기 때문이다.

논산역에서 연산, 계룡시 방면으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03번을 타고 1번 국도를 신나게 달려
연산에 진입, 연산 남쪽인 연산구4거리에서 내렸다. 여기서 우회국도 개설로 많이 한가해진
옛 1번 국도 2차선 도로(황룡재로)를 따라 동쪽(계룡 방면)으로 6~7분 정도 가면 송불암 입구
이고, 거기서 송불암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송불암이 모습을 비
춘다.


 

♠  오래된 미륵불과 소나무를 간직한 조그만 절
~ 논산 송불암(松佛庵)

▲  송불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송불암은 옛 절터에 지어진 작은 비구니 절로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이곳에 서린 오래된 미
륵불을 보고자 함이다.

송불암에 있던 옛 절은 미륵불을 통해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보다 동쪽으로
50m 떨어진 산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절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미륵불과 주춧돌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1946년에 인근 신양리에 살던 동상태의 어머
니가 2칸짜리 집을 짓고 절로 삼아 미륵불을 관리했다. 이것이 현재 송불암의 시작이다.
이후 1970년에 승려 경연이 절을 물려받아 주지승이 되었는데, 미륵불 바로 옆에 소나무가 석
불과 조화를 이루며 지붕처럼 퍼져 있다고 하여 송불암이라 하였다.

송불암에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가 한토막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어느 날, 법력이 높은 노승(老僧)이 기도를 마치고 걸망을 짊어지며 천하를 돌아다
니다가 연산 고을 인근 황룡산에 올라 땅을 살펴보니 절을 지으면 크게 될만한 명당(明堂) 자
리였다. 하여 그곳을 점찍어두며 주변을 보니 광산김씨가 중심이 된 부자 마을이 있었고, 마
을 외딴 자리에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니 광산김씨 청년이 나와 무
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승은
'황룡산에 명당 자리가 있다기에 여기서 불법(佛法)을 전할까 하오'

답을 하니 청년은
'이곳은 유생이 많아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자 노승은
'그러면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풀막을 짓고 도를 깨우쳐 볼까 하오'
그러니 청년이
'그러면 무엇을 먹고 입으며 혼자 쓸쓸히 어떻게 살려고 하시오?'
물었다. 노승은
'원래 중은 풀뿌리, 나무열매로 양식을 삼고, 송락과 초목으로 의복을 대신하며, 법당이 없으
면 바위굴을 불당으로 삼소. 그러니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소?'
노승
의 시원스런 답에 청년은 감동을 먹고 오늘 날도 저물었으니 일단 하룻밤 자고 가라며 호
의를 베풀었다.

이렇게 청년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노승은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청년의
어머니를 보게 되었는데, 얼굴을 보니 3일 뒤에 죽을 상이 아닌가? 이걸 청년에게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궁리하다가 한숨을 쉬며 그에게 전해주었다.
'덕분에 잘 쉬었소. 대접에 대한 보답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하니 부디 화를 내지 마시오.
아까 당신의 아머니를 잠깐 뵈었는데, 3일 후 아침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실 것이오. 그러면
인근 범바위골에 묘를 쓰되 황금돌을 절대 건드리지 마시오. 그곳이 괜찮은 명당자리요'
그 말을 들은 청년은 갑자기 뚜껑이 뒤집혀
'뭐라고? 이 땡중이 미쳤나? 빨리 꺼져!!'
성을 내며 노승을 쫓아냈다.

그런데 과연 3일 후 아침, 청년의 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이에 청년은 크게 놀라 통곡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노승이 한 말을 상기시켜 보았다. 범바위골에 묻으라는 말이 생각나 그곳에 묘
자리를 정하고, 땅을 파니 황금돌이 나왔는데, 돌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까지는 기억이 안나서
그만 그 돌을 들어내고 말았다.
그러자 그 속에서 수많은 벌이 앵~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땅에 흔치 않던 벌명당이었
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벌들은 노승 때문에 보금자리를 빼앗기게 되었고, 벌의 우두
머리가
'그 땡중 때문에 우리 터전을 빼앗겼다. 빨리 그 작자를 단죄하러 가자~~!'
잔뜩 이를 갈고 무더기로 날라다니며 노승을 찾아 다니다가 인근을 지나던 그를 발견하고 집
중 폭격을 가해 말그대로 벌집을 만들어 죽였다.

이후 노승의 저주가 씌워진 탓인지 연산마을에는 10년 홍수, 10년 가뭄, 10년 전염병으로 완
전 몹쓸 땅이 되버렸다. 마을의 실세이던 광산김씨 집안에서 회의를 열어 상황이 이리 된 것
은 우리들 때문에 노승이 벌에 쏘여 죽은 것이라 규정하고 그의 넋을 위로할 겸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다. 그랬더니 재앙은 멈추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또한 미륵불 곁에 소나무 1그루가 홀연히 자라나 그를 향해 가지를 뻗으면서 위로 자라지 않
고 아래로만 자라니 사람들은 그 소나무가 노승의 후신이라 여기며 기도를 올렸고 소원을 성
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기서 출가하여 크게 된 승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전
한다.

물론 전설을 다 믿으면 이는 순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설을 통해 마을의 평안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절을 세웠음을 알 수 있으며, 딱히 뒷끝이 없는 다른 벌명당 전설과 달리 승려의 말
을 지키지 않다가 명당의 기운은 커녕 오히려 마을이 풍비박산이 나자 그 승려를 위로하고자
절을 세워 간신히 마을의 안녕을 되찾았다는 내용이 이채롭다. 일종의 승려 말을 들으면 자다
가도 떡이 나오니 승려와 절, 불상을 잘 대접하라는 옛 석불사의 뜻이 아닐까?

▲  개구리의 조촐한 운동장, 동그란 연못

▲  대웅전 앞 연꽃 석조

송불암은 대웅전과 요사, 선방 등 4~5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비구니 절이라 경내는 깔끔하
고 정갈하며, 경내 동쪽에 창건 설화에 나오는 소나무와 이곳의 후광이자 든든한 밥줄인 미륵
불이 자리해 있다.

▲  2000년에 새로 지어진 대웅전

▲  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요사


▲  미륵불과 소나무가 있는 경내 동쪽

▲  송불암 미륵불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3호

송불암 미륵불은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높이는 4.25m, 둘레 1m로 머리에는 네모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얼굴은 넉넉한 인상으로
눈과 눈썹, 코, 입이 모두 완연하게 남아있으며, 두 귀는 목까지 늘어져 있고, 목에는 삼도(
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통에는 법의(法衣)를 걸쳤는데, 얇은 새김으로 새겨진 옷주름선은 발목까지 내려왔으며, 왼
손은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몸 옆에 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것 같다. 그가 서 있는 대좌(臺座)에는 연화무늬가 있고, 옷자락 밑으로 석불의 발과 발가락
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석불 옆에는 창건설화에 나오는 소나무가 누워있다. 정말 노승의 넋이 담긴 것인지 하늘로 곧
게 자라지 못하고 석불을 향해 아래로만 자라나 끝내는 석불의 하늘을 가린 것이다. 그 모습
이 마치 석불의 불력(佛力)이나 매력에 끌린 듯 그를 덮고 있었는데, 소나무가 갈수록 오버(?
)를 하면서 석불이 마치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자 2000년에 지금의 자리로 석불을
옮기고 소나무를 싹둑 정리했다.


▲  송불암 소나무 - 논산시 보호수

미륵불과 더불어 송불암의 오랜 명물인 소나무는 미륵불 앞에 마치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을 하고 있다. 그의 미륵불에 대한 마음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석불에게 큰 부담을 주었던 존
재이기도 한데. 2000년에 미륵불을 현 자리로 옮기고 소나무를 크게 손질하여 얌전하게 만들
었다.
나무의 나이는 약 270년으로 그 적지 않은 나이에 비해 높이는 낮다. 다만 아랫쪽으로만 성장
을 하여 지금처럼 처진 소나무가 되버린 것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있는 석탑

소나무 그늘과 석불 주변에는 세월에 지쳐 쓰러진 주춧돌과 석탑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들은
미륵불과 더불어 옛 석불사의 유물로 석탑은 2기가 있는데, 윗 사진의 탑은 아랫도리만 간신
히 남아있으며, 그 주위에 버려진 주춧돌과 자잘한 돌들이 모여 있어 서로를 의지한다.


▲  석불 옆에 자리한 조그만 석탑
몇층인지는 모르겠으나 탑신의 일부와 옥개석이 이리저리 깨진 채 남아있다.
그 위로 동그란 돌이 마치 공기돌처럼 놓여있다.

▲  미륵불 주변에 흩어진 주춧돌들 ▲
이들은 미륵불을 보호하던 건물의 주춧돌로 거의 정사각형 모양의 보호각이
미륵불을 품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높이가 4m가 넘으니 그 건물
또한 장대했을 것이나 임진왜란 이후 사라지고 간신히 주춧돌만 남아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허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미륵불의 뒷모습과 소나무
미륵불 뒷모습은 딱히 손질을 하지 않아 울퉁불퉁하다.

▲  미륵불의 귀여운 발과 연꽃무늬 대좌
발가락이 상식 밖으로 지나치게 커서 그 모습이 마치 손에 낀 장갑이나
글러브 같다.

▲  송불암과 논산을 뒤로하며~~~

송불암을 30분 정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더 이상 갈 곳도, 마음을
줄 곳도 없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여름 맞이 논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 송불암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36-3 (황룡재로 92-18 ☎ 041-733-6518)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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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0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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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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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 강동구의 북쪽 지붕, 고덕산 나들이 '

▲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


 

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여름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5월의 끝 무렵, 강동구(江
東區) 암사동과 고덕동 지역을 찾았다.
선사시대 유적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암사동(岩寺洞) 선사유적지(☞ 관련글 보러
가기)을 먼저 둘러보고 양지마을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동했다.

양지마을(양지말)은 암사3동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약 90호 정도가 살고 있다. 마을 북쪽
은 고덕산과 이어져 있고 남쪽과 동쪽, 서쪽은 밭과 주말농장 등의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
며 암사동 시내와도 거의 200~3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마을 집들은 상당수 전원주택
스타일로 다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과 뜨락을 갖추고 있어 마을에 들어서면 마치 교
외로 나온 듯 즐거운 기분을 안겨준다. 


▲  아리수로에서 바라본 양지마을 주변 전원(田園) 풍경


 

♠  암사3동에서 고덕산까지

▲  도시인의 안구를 제대로 씻겨주는 암사3동 전원 풍경

▲  암사3동 밭두렁

양지마을을 벗어나 시내와 시골의 경계를 이루는 암사동 북쪽 도로(아리수로)를 따라 동쪽으
로 이동했다. 길 남쪽에는 밋밋하게 솟은 키다리 아파트들이 몰려있고, 북쪽은 녹색 물결이
파도를 치는 경작지와 농가들로 시골 풍경을 이루어 서로 180도의 대비를 보인다.


▲  암사정수센터교차로의 전설, 보리밭의 황금 물결 (2012년)

잘익은 보리가 여름 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움직인다. 보리밭 남쪽에는 원두막까지 두어 전원
풍경의 패기를 드높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구리암사대교 접속도로 공사로 한 토막의 전설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  고덕산 강동아름숲길에서 바라본 암사동 강동롯데캐슬퍼스트아파트

암사정수센터교차로 동북쪽에 고덕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고덕산(
高德山)은 해발 90m의 작고 낮은 뫼로 강동구의 북쪽 지붕을 이루고 있다. 응봉이라 부르기도
하며, 암사동 선사유적지 동쪽에서 고덕천 서쪽에 이르는 동서로 길쭉한 산줄기로 북쪽은 한
강에 이르고, 남쪽은 암사동과 고덕동 주거지를 보듬고 있다.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해도 오래된 사연은 꼭 있는 법, 이곳은 고려 말 충신인 석탄 이양중(
石灘 李養中)이 숨어 살던 곳이라 전한다. 그는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의 하나로 형조참의(
刑曹參議)까지 지냈으나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자 미련없이 벼슬을
내던지고 고덕동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태조는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거절을 당했으며, 친분이 있던 태종 이방원(李芳遠)까지
이곳까지 찾아와 설득을 했으나, 석탄은 평복 차림으로 직접 빚은 술을 대접하며 벼슬을 거절
했다. 하여 태종은 고려에 대해 지조를 지킨 그를 찬양하며 그 높은 덕을 기리고자 그가 살던
동네를 고덕리, 그가 살던 산을 고지봉(高志峰)이라 했다. 그 고지봉이 이후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의 고덕산이 된다. 이후 석탄은 죽어서 고덕동에 묻혔다고 하나 그의 무덤은 어느 귀신이
잡아갔는지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는 고덕산 자락에 묻혔는데, 그의 후손들이 주변에 덩달아 묻히
면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이루었다. 그 묘역의 일원이던 이시무는 고덕산 정상에
흙으로 단을 쌓고 국난평정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  강동아름숲길

아리수로와 맞닿은 암사정수사업소 동남쪽 숲을 강동아름숲이라 부른다. 이곳은 주민들이 가
꾸고 복원한 유서 깊은 숲으로 2010년 9월 광화문과 강남 등 서울 곳곳을 물바다로 만든 태풍
곤파스의 공격으로 이곳에 살던 1,000여 그루의 나무가 절단이 나는 사건이 있었다.
하여 강동구는 2012년 4월부터 숲 복원에 들어갔는데, 지역 주민 1,000여 명이 나무 심기에
참여하여 산벗나무 등 1,500그루를 심어 곤파스의 상처를 대부분 지워버렸다.

나무에는 그를 심거나 기증한 시민의 이름과 사연이 깃든 목걸이가 걸려있으며, 조성된지 얼
마되지 않아서 나무들 대부분은 작고 어리다. 허나 100년의 시간이 지나면 삼삼한 숲으로 변
화하여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것이다. 강동아름숲은 이곳 외에도 부근 샘터근린
공원에도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 역시 곤파스로 피해를 본 것을 시민들 참여로 복원되었다.


▲  쉬지않고 이어지는 고덕산 서쪽 숲길

2000년 이후 도보길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천하 곳곳에 둘레길 같은 도보길이 닦여지고 있다.
강동구도 그 시류에 합류하여 2011년부터 도보길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도보길의 이
름은 바로 강동그린웨이(Green Way), 즉 녹색 길이다.
그런데 순수한 우리 말도 많건만 왜 굳이 꼬부랑 영어로 기분 나쁘게 이름을 삼았는지 모르겠
다. 도보길을 만들어 지역 사람들의 마실을 크게 배려한 것은 좋으나 영어로 이름을 삼은 점
에서 적지 않은 옥의 티를 선사하니 역시 철밥통들의 한계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강동그린웨이는 크게 2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1단계는 고덕산에서 시작해 샘터근린공원, 방
죽공원, 명일공원, 일자산, 둔굴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교차로까지 이어지며, 2단계는 서하
남나들목입구교차로에서 강동대로, 서울아산병원, 한강, 암사동유적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어
진다. 특히 고덕산에서 일자산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까지는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
3코스(고덕,일자산 코스)와도 겹친다.


▲  암사정수사업소 철조망과 나란히 이어진 고덕산 서쪽 숲길
철조망을 따라 걸으니 군작전지역이나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이 된 기분이다.


 

♠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李克培)와 그의 후손들이 묻힌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廣州李氏 廣陵府院君派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0호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극배 묘역

고덕산 서쪽 숲길을 거닐다보면 나무 사이로 무덤들이 복병처럼 모습을 비출 것이다. 암사정
수사업소가 보이는 서쪽에는 큰 비석을 머금은 비각도 있는데, 이들은 이극배를 중심으로 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이다.
무덤은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묘역의 중심인 이극배 묘 앞에는 암사정수사업소가 철
조망을 치고 있어 마치 휴전선을 앞에 둔 무덤처럼 보인다. 그의 무덤 남쪽에는 고위 관료의
무덤만 지닐 수 있던 신도비와 비각이 있는데, 그 앞에 지나치게 짧은 간격으로 철조망이 쳐
져있어 앞 공간이 좁아 보인다.

※ 이극배(李克培, 1422~1495)는 누구인가?

묘역의 주인공, 이극배는 조선 초기 문신으로 광주이씨이다.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
峰)으로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어머니는 노신(盧
信)의 딸이다.

144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었고, 바로 그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
해 5등인 정과(正科)로 급제했다. 그렇게 관직에 진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
었고, 이어 감찰(監察)이 되었으며, 검찰관(檢察官)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는
데, 직무를 잘 수행한 공로로 병조(兵曹) 겸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
다.
1455년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는데 힘을 보탠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錄勳
)되었으며, 1457년 예조참의(禮曹參議)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가선대부(嘉善
大夫)에 직과 광릉군(廣陵君)에 작위까지 받았다.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내다가 1460년 두
만강 북쪽에서 세력을 꾸리던 모련위(毛燐衛)의 우량하(兀良哈)를 정벌하고자 신숙주(申叔舟)
의 종사로 출전해 큰 공을 세웠다.
이 전쟁을 경진년에 벌인 북정(北征)이라 하여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 하는데, 우량하의 우
두머리인 아비차(阿比車)가 조선에게 처단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두만강 유역을 공격했
다. 이에 뚜껑이 열린 세조는 신숙주를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로 임명해 8,000명의
군사를 주어 시비를 건 우량하 세력을 때려잡도록 했다.

조선군은 회령(會寧)과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으로 진출, 2차에 걸친 정벌 끝에 우량하 세력
의 고위급 인물 90여 명을 죽이고, 군인과 백성 430명을 포로로 잡거나 처단했다. 그리고 900
여 채의 집을 불태우며 정벌을 기분 좋게 마무리 지었다. 이때 간도(間島) 지역을 완전히 접
수하여 12세기 초반, 윤관(尹瓘)장군이 일구었던 동북9성의 옛 땅을 차지했으면 좋으련만 땅
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고 그저 성리학 몰빵에 평화만 추구하던 조선에게 그런 기대는 무리였
다.
물론 조선이 상국(上國)으로 받들던 명나라의 눈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의 영역은
동으로 요동(遼東)이 고작이었고, 압록강 중류 이북부터 두만강 이북까지는 여진족의 땅이었
으므로 여진족 소탕을 구실로 의지만 강했다면 충분히 간도 개척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선에게 단단히 깨진 우랑하는 살려달라고 빌면서 조공을 바치며 조선의 그늘에 들어왔고 이
를 계기로 조선의 북쪽 변경은 약간이나마 확대되었다. 이때 두만강 안쪽에 있었으나 여진족
의 땅으로 남아있던 무산군(茂山郡) 지역을 점령해 조선의 땅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그곳을
개척하고자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했다.

북정을 마치고 돌아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462년 호조(戶曹)와 공조(工
曹)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또한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어 평안도의
인심을 살폈으며,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등급이 올라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리고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479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승진했고, 1481년부터
2년 동안 큰 기근이 일어나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백성을 살폈다. 1485년에는 우의정(右議
政)에 오르고 1493년 최고직인 영의정(領議政)을 제수받았으나 노병을 구실로 거절했다. 이후
광릉부원군에 봉해져 최고의 관작을 누리다가 1495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
자 연산군은 익평(翼平)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도량이 크고 뜻과 생각이 확고했다. 그리고 경학(經學)을 근본을 삼아 도덕 정치를 실천
했고, 관리로써 필요한 지식과 능력, 처신에 뛰어나 약 50년 간 벼슬을 지내면서 영의정을 제
외한 왠만한 고위직은 두루 거쳤다. 게다가 세종부터 연산군(燕山君)까지 7명의 제왕을 섬겼
으니 그 기록은 황희(黃喜)를 능가한다. 또한 사사로이 손님을 맞거나 선물을 받지 않는 공정
함을 지녔고, 가무(歌舞)는 좋지 않다고 하여 멀리 했으며,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는 대체적
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극배 신도비를 품고 있는 맞배지붕 비각(碑閣)


▲  이극배 신도비(神道碑)

이극배 묘역 서쪽에 자리한 신도비는 1496년에
세워진 것으로 명필로 명성이 자자했던 예조판
서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신종호(申從濩,
1456~1497)가 글을 썼다.
장대한 세월이 무심하게 달아놓은 검은 주근깨
가 자욱한 비석 피부에는 그의 일대기가 깨알
같이 적혀있고, 이수(螭首)에 새겨진 구름무늬
와 그 속에서 놀고 있는 용이 매우 정교하게
새겨져 두 눈에 적지 않은 자극을 준다. 거기
에 비문(碑文)의 서체와 정교한 석공기술은 15
세기 후반 비석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여러
가지로 가치가 높다.

원래는 비석만 덩그러니 있었으나 2009년 이후
든든하게 비각을 씌워 그를 지키고 있다.


▲  뱀이 이리저리 또아리를 튼 듯, 섬세하고 복잡한 신도비 이수의 위엄

▲  신도비에서 이극배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이극배 묘역

이극배 묘역은 1495년에 조성되었다. 부인인 경주 최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으며, 무덤
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를 비롯해 상석(上席),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1쌍과 무인석
(武人石) 1쌍이 묘역을 지킨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체격이 우람하며, 묘비는 특이하게 이극배
의 봉분(封墳) 앞에만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묘역 뒷쪽에는 소나무들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어 묘역의 분위기를 크게 북돋는다.


▲  묘역 좌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  묘역 우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묘역을 장엄하게 꾸미는 문인석과 무인석들은 다른 사대부의 석인보다 큰 편으로 이극배의 오
랜 명성을 가늠케 한다. 조선 초기 석인(石人)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이들은 문인석과 무
인석으로 구별은 되고 있지만 둘 다 복장이나 자세가 비슷하여 문인석 2쌍을 배열한 것 같다.
묘역과 가까운 석인은 500년의 장대한 세월에 지쳤는지 표정이 어둡고, 그 옆에 석인은 눈이
크게 충혈되어 재밌는 표정을 보인다. 세월의 검은 때가 점점이 입혀진 것을 빼면 대체로 피
부는 햐얗다.


▲  석인들의 뒷모습

▲  묘역 동쪽에 자리한 후손들의 묘역 (이수겸, 이세충, 이시무 등)

광릉부원군파 묘역 동쪽을 이루고 있는 이극배 후손들의 무덤은 9기 정도 된다. 가장 앞에 선
무덤은 이극배의 아들인 이수겸(李守謙)과 청주한씨 내외의 묘역으로 그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을 지냈으나 공적이 즐비한 아비와 달리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다.

▲  이수겸 묘역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  이세충 묘의 문인석

이수겸과 이세충 형제의 무덤 문인석은 이극배 묘역의 장대한 문인석과 달리 덩치가 매우 작
다. 문인석의 표정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데 이수겸 묘 문인석은 관모(官帽)의 윗부분이 부러
졌다.


▲  이수겸 묘역 뒷쪽에 자리한 이세충(李世忠)의 묘
이세충은 이극배의 아들로 크게 벼슬은 못했으며, 나중에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  이시무(李時茂)와 이정립(李廷立) 묘역

이시무(?~1593)는 이극배의 현손으로 이건(李乾)의 아들이다. 자는 군우(君遇)로 1576년 별시
(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1593년에 병사했
다.

이정립(1556~1595)은 이시무의 아들이자 이수겸의 증손으로 어머니는 왕족인 의원정(義原正)
이억(李億)의 딸이다.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으로 157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1582년 이이의 추천을 받아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강의해 속칭 3학사의 하나로 칭송을 받았으며, 바로 그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
조좌랑과 정언(正言)을 지냈다. 1583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했
다.
이조좌랑 시절에는 호남어사(湖南御使)가 되어 백성을 구휼했고, 1589년에는 기축옥사(己丑獄
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어 선조(宣祖) 임금을 호종하다가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사직(宗廟社稷
)의 위판(位版, 위패) 등이 개성(開城)에 남아있음을 알고 서둘러 선조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조는 크게 발작하여 빨리 그것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이정립은 서둘러 개성으로 달려갔으나, 피난민들은 이미 왜군이 개성을 접수했으니 가봐야 소
용없다고 말렸다. 허나 이를 듣지 않고 개성으로 홀연단신으로 들어가 위판을 찾아 평양으로
가져오는 기염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1593년 부친 이시무가 죽자 부친상을 이유로 관직을 잠시 떠났고, 1594년 한성부좌윤(漢城府
佐尹)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여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95년 세상을 뜨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산12-4외


▲  광릉부원군파 묘역 사이를 지나는 고덕산 산길
이극배묘역 남쪽에 광릉약수터가 있어 지나는 길손의 목을 축여준다.


 

♠  고덕산 마무리

▲  고덕산 서쪽 봉우리 밑 (계단 너머가 봉우리)

광릉부원군파묘역에서 산길을 마저 오르면 'T'자형으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인데, 운동시설이 여럿 있어 이곳까지 올라온 나
그네를 심심치 않게 해준다. 허나 더 이상 길이 없는 막다른 곳으로 북쪽은 한강과 강변도로
가 바로 밑에 보이는 천길낭떠러지이다.


▲  태극기가 펄럭이는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

▲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바라본 천하 (명당의 욕심은 이곳까지..?)

고덕산에서 그나마 하늘과 가까운 곳이긴 하지만 나무의 방해로 겨우 북쪽만 속시원히 바라보
인다. 차량들의 질주 소리로 정신이 없는 올림픽대로가 바로 밑에 보이며, 한강과 암사대교,
강일동 지역. 구리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고덕산 능선길

고덕산은 광주이씨와 양천허씨 등의 문중 묘역과 사유지가 많다. 게다가 군사구역도 섞여 있
다보니 본의 아니게 속인들의 발길을 주저하게 하는 철조망이 많다. 광릉부원군파 묘역에서
서쪽 봉우리로 오르는 길도 대부분 사유지라 길의 통행을 두고 한때 말썽이 있었으나 광주이
씨 문중은 이극배의 후손답게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흔쾌히 개방하고 묘역 사이를 가로지르는
산길까지 열어두어 고덕산이 지역 사람들의 포근한 뒷동산이 되도록 배려했다.


▲  가재울에서 한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원 풍경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능선길을 따라 동쪽으로 15분 정도 가면 높이가 좀 낮아지면서 4거리
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능선길을 따라 고덕산 동쪽과 고덕천으로 이어지며, 오른쪽(남쪽
)은 가재울마을과 고덕동 시내로 나가는 길이다.
그리고 왼쪽은 올림픽대로로 이어지는데, 그 길로 접어들어 1굽이를 넘으니 온갖 채소들이 무
럭무럭 자라고 있는 밭두렁이 진하게 전원풍경을 드러내어 안구를 놀라게 한다. 밭두렁 한쪽
에는 농가도 하나 있는데, 그 주변에 농민 2~3명이 한참 밭을 메고 있었다.

그 밭두렁을 지나 작은 1굽이를 추가로 넘으면 바로 올림픽대로이다. 도로 너머로 한강과 산
책로가 보이나 그곳으로 인도해주는 지하도나 구름다리는 없다. 그러니 뚜벅이로 왔다면 미련
없이 왔던 길로 다시 돌아나가야 되며, 한강이 보고 싶다고 1분에 수백 대씩 지나가는 올림픽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것은 완전 미친 짓이다.

발길을 돌려 나오다가 길 서쪽에 양천허씨묘역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를 손짓한다. 안내문 옆
에 나있는 작은 산길로 들어가면 묘역이 있다고 하는데, 오래된 묘역이긴 하지만 비지정문화
재라 그냥 지나칠까 했으나 고덕산이 준 보너스라 여기고 그 산길을 잡았다. 산길을 50m 정도
들어서니 양천허씨묘역이 나타난다.


▲  양천허씨(陽川許氏)묘역

고덕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양천허씨 묘역은 상우당 허종(尙友堂 許琮, 1434~1494)의 손자인
허순(許淳) 3대의 묘역이다. 묘역이 제법 명당(明堂)자리인 듯 싶은데, 한강이 흐르는 북쪽을
애타게 향하고 있으나 나무들은 그들의 뜻도 모른 채, 앞은 물론이고 묘역 주변을 꽁꽁 둘러
싸 숲 너머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양천허씨는 후삼국시대에 서울 가양동(加陽洞) 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허선문
(許宣文)을 시조
로 한 집안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적극 도운 공으로 고을 이름인 양천<그 당시는 공암(孔巖)
>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이 집안에서는 허종을 비롯하여 허균(許筠), 허준(許浚) 등 삼척동
자도 알만한 유명 인물이 많이 나왔다.


▲  묘역 제일 밑에 자리한 허운(許雲)과 영천이씨 부인의 합장묘(合葬墓)

허순의 아들인 허운의 묘가 묘역 제일 말단에 자리해 있다. 허운은 결성현감(結城縣監, 충남
홍성군 결성면)을 지낸 평범한 인물로 부인 영천이씨와 같이 묻혀 있는데, 무덤 밑에는 근래
에 만든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고, 16세기에 조성된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묘비와 문인석이
묘역을 지킨다.

▲  표정이 밝아보이는 좌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


▲  장대한 세월에 의해 검게 타버린 허운 묘비(묘표)

▲  허순의 정부인이자 전처인 한산이씨의 묘
허순 묘와 허운 묘 사이에 자리한 무덤으로 묘비는 봉분 정면이 아닌 정면에서
다소 우측에 치우쳐져 있다. 부인묘라 그런지 묘비와 상석 외에
다른 석물은 없다. (호석은 근래에 두룬 것임)

▲  허순의 무덤 (제일 앞쪽, 바로 뒤에 무덤이 청송심씨 묘)

허순(許淳, 1485~1546)은 허종의 손자이자 허광(許曠, 1468~1534)의 아들이다. 그의 무덤 뒷
쪽에는 후처인 청송심씨의 무덤을 두었고, 앞에는 전처인 한산이씨의 무덤을 만들어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양천허씨 제양군공파의 시조인 허순은 정주목사(定州牧使)를 비롯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
事)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副摠管)을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제양군(
齊陽君)에 봉해졌다. 묘역의 주인답게 묘역 중앙에 자리해 있으며, 검은 피부의 묘비와 문인
석이 오랜 세월을 말해준다.

▲  약간 인상을 지은 듯한 우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과 많이 닮아 보이는
좌측 문인석


▲  묘역 윗쪽에 자리한 허흔(許昕)과 부인 영월엄씨의 묘

허흔(1543~1622)의 묘는 허순 묘역에서 제일 윗쪽에 자리해 있다. 그는 허순의 손자이자 허운
의 아들로 어머니는 이구정(李龜楨)의 딸이다.

1579년 생원(生員)이 되고 1583년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감찰과 형조좌랑, 성균
관직강(成均館直講),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지냈다. 경상도도사(都使) 시절에는 의령
현감(宜寧縣監)인 정인홍(鄭仁弘)이 영송(迎送)에 무례하게 구므로 그 아전을 벌주니 백성들
의 칭송이 대단했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여립(鄭汝立) 일당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감옥에 갇혔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으며,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도사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절도사(節度使)
가 되어 왕실의 신주(神主)를 지켰다. 이후 정주목사가 되었고, 1615년 죽주부사(竹州府使,
안성 죽산)를 제수받았으나 나이가 칠순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바로 넘어갔다.

광해군(光海君)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조정의 여론을 휩쓸자 크게 상심하여 벼슬을
버렸으며, 1622년 7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었다가
인조반정 때 공신 명단에서 떨려나기도 했다.

▲  허흔묘 상석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동자석(童子石)
다른 무덤과 달리 문인석 대신 작은 동자석 1쌍을 두었다. 고된
세월에 많이도 지쳤는지 그들 표정에 주름이 묻어난다.

▲  허종과 허광 숭모비(崇慕碑)

묘역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허종과 허광(許曠)의 숭모비가 자손들의 무덤을 바라보
고 있다.
허종과 허광의 묘는 휴전선 북쪽인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대강면 우근리에 있는데, 남한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성묘길이 막혀 가지를 못하자 상의 끝에 그들의 자손이 묻힌 이곳에 2005
년 숭모비를 세웠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빚어낸 안타까운 현실로 이곳은 양천허씨 제양군공파
를 비롯한 허종의 후손들이 애지중지하는 그들의 조촐한 성지가 되었다.

숭모비 정면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1쌍을 두었는데, 우측 것은 두툼하게 생긴 세호로 보이
는 동물이 새겨져 있고, 좌측 것은 기둥을 휘감은 용을 새겨 선조에 대한 자긍심과 정성을 보
였다. 허나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라 쉽사리 적응이 가려 하질 않는다.

허순 3대의 묘역은 호석과 비석을 새로 한 것 외에는 16~17세기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
고 있어 광릉부원군 묘역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 마땅히 지방문화재로 삼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 지는데, 문제는 서울에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는 사대부(士
大夫)와 왕족의 묘역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경쟁이 생겨 어지간해서는 지정
문화재의 명함도 못내밀 정도이다. 게다가 문화재 지정을 환영하지 않는 후손들도 많다고 한
다. (묘역 소유자나 후손 문중, 지역에서 문화재 지정을 신청해야 됨)

* 양천허씨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산93-2


▲  가재울 마을

양천허씨묘역을 둘러보고 고덕산 등산로와 만나는 고개를 지나면 전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재울 마을이 나타난다.
가재울(가재골)은 가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가재는 커녕 그들이 머물 시냇물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비록 푸른 숲과 밭두렁, 농장 등이 펼쳐져 있어도 시냇물은 고덕지구
개발로 말라버려 그것만은 제대로 재현을 못하고 있다.

가재울을 지나 고덕동 시내로 나와 이른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고자 편의점에서 커피 음료를
사서 원샷으로 들이키니 그나마 좀 몸이 시원해진다. 마음 같아서는 고덕산에 둘러진 서울둘
레길을 따라 더 걷고 싶으나 이미 18시가 넘은 상태라 욕심을 곱게 버리고 나의 제자리로 돌
아갔다.

이렇게 하여 5월에 벌린 강동구 암사동/고덕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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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

▲  인왕산 (가운데 봉우리가 정상)


 

♠  인왕산(仁王山) 입문

▲  인왕산 만수천약수터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내 즐
겨찾기 뫼의 하나인 인왕산을 찾았다.
인왕산은 10대 시절 선바위 답사를 시작으로 50번 넘게 인연을 지었는데, 낮 뿐만 아니라 야
간(19시 이후)에도 적지 않게 올라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특히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서울 도심 야경(夜景)은 아주 일품으로 꼽힌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인왕산길로 들어서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방면으로 가다보면
인왕천약수터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짓을 한다. 이 코스는 인왕산에서 가장 잘나가는 약수
로 추앙을 받던 인왕천약수터를 거쳐 인왕산 능선(한양도성)으로 이어지는데 길이 좀 각박하
다. 하여 그 코스는 쿨하게 통과하고 다음에 나오는 석굴암입구(수성동계곡 상류)에서 인왕산
의 깊은 품으로 들어섰다.

석굴암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조촐한 모습의 정자가 나오면서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이름도 꽤 낯이 익은 석굴암(石窟庵)이란 석굴 암자가 나온다. 허나 그곳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사실상 막혀있어 정자 옆 북쪽 산길로 올라가야 된다. (석굴암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길
이 있긴 하나 통행 금지임)
석굴암입구 정자에서 북쪽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160m 고지에 자리한 만수천약수터가 마중
을 한다. 인왕산에 무수히 널린 약수터의 하나로 부적합 빨간줄과 양호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어 앞날이 좀 어려워 보인다. 물론 샘터 주변을 계속 관리해주고 비도 적당량 내려주면 청
색 신호가 뜨는 것은 시간문제이나 날씨 변덕도 심하고 서울 도심이 바로 코앞이라 인왕산 지
하수에도 비상이 걸렸다.

약수터 주변은 나무가 삼삼하여 하늘이란 단어를 거의 잊게 할 정도로 덩치가 큰 바위들이 주
변에 여럿 포진해 있어 약수터의 잔잔한 장식물이 되어주고 있으며, 간단한 체육시설과 의자
등이 놓여져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어가도록 배려했다.


▲  만수천약수터 주변 풍경

큰 바위 밑에는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다.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씌웠지만 예전에
는 기도나 굿 장소로 쓰였다. 인왕산이 잘생긴 바위가 많고 기가 센 산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
배 맛을 알던 시절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자 굿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굴 앞을
지나니 동굴이 내뱉은 약간 시원한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  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과 경복궁, 종로)

만수천약수터에서 갑자기 흥분한 산길을 7~8분 정도 오르면 능선(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
이른다. 이제부터는 숲속에 가려진 산길이 아닌 천하를 굽어보며 걷는 능선길이 시작되는 것
이다. 그 길을 10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이 흐르는 성곽길(인왕산 주능선)과 만나게 된다.

성곽길과 만나는 갈림길에서 오른쪽(동쪽)으로 내려가면 창의문과 부암동(付岩洞)으로 이어지
며, 왼쪽(서쪽)은 인왕산 정상이다. 우리야 정상이 목적이니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성곽길은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경사가 슬금슬금 각박해져 호흡마저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
길을 10여 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성밖 계단을 내려가면 기차바위 능선이며, 성
곽길을 고수하면 정상이다. 이미 인왕산의 어깨까지 올라탄 상태라 서울 시내가 고루고루 내
려다보여 마치 하늘을 배회하는 큰 새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올라간다.


▲  인왕산의 허리를 따라 흘러가는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  인왕산 북쪽 능선 성곽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콧대가 높은 천하 굴지의 대도시 서울이 내 발 밑에 펼쳐져 있다. 마치 이 도시가
나의 세상이 된 듯 거만한 착각이 피어올라 잠시나마 기분이 즐거워진다.
허나 현실은 마음 편히 드러누울 땅도 제대로 없다는 것.

▲  정상 북쪽 성곽길 - 저 바위 꼭대기가 인왕산 정상이다.

기차바위로 인도하는 갈림길에서 성곽길은 잠시 진정을 되찾으나 정상을 코 앞에 두고 다시금
격한 흥분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묵묵히 길을 임하면 좀처럼 닿
지 않을 것 같던 인왕산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어둠의 역사를 안고 있는 인왕산 치마바위

인왕산 정상 동쪽에 붙어있는 커다란 바위는 인왕산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치마바위이다. 병
풍처럼 넓어서 병풍바위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바위에는 중종과 단경왕후 신씨의 슬픈 사연
이 깃들여져 있다. 그 사연은 서울 장안에서 꽤 알려진 이야기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첫 부인은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의 딸인 단경왕후(端敬
王后) 신씨(1487~1557)이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 홍경주(洪景舟) 등이 반란을 일으켜 연산군(燕山君
)을 폐위시키고 그의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을 익선관(翼善冠)을 씌운 채로 급히 왕위에 올리
니 그가 곧 중종이다. <이 사건을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름>
단경왕후의 아비인 신수근은 반란파에 협조하지 않아 그 형제가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그들
에 의해 얼떨결에 왕이 된 중종은 부인을 지키고자 재빨리 왕후로 봉했으나 반란파들은 역적
의 딸을 그냥 둘 수 없다며 당장 내쫓을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왕후나 그 소
생 왕자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종은 그들을 달래고자 반정 때 몰수한 연산군 측근과 반란 비협조 인물들의 재산을 나눠주
고 기녀(妓女) 300여 명을 주며 회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유자광(柳子光)은 중종의
생모이자 대비(大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를 찾아가
'중전 신씨를 쫓아내지 않으면 임금을 내쫓겠습니다!!'

협박을 하기도 했다. 이미 반란으로 왕을 한번 갈아치웠으니 그들에게는 그런 것은 일도 아니
었다.
상황이 점점 고통스럽게 변해가자 신씨는 울면서
'소첩이 전하(殿下)를 위해 나가겠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전하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으로 인
왕산 바위에 치마를 걸어두겠사오니. 상황이 좋아지면 꼭 찾아오세요 ㅠㅠ'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경복궁을 나가 옛날에 살았던 인왕산 동쪽 본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는 매일마다 인왕산에 올라 중종과 같이 살던 시절, 자주 입었던 붉은 치마를 바위에 널었다.
그 소식을 들은 중종은 수시로 경회루(慶會樓)에 올라 치마바위를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생각
에 눈시울을 붉혔다.
반란파들은 그 꼴이 보기 싫어 서둘러 새 왕비를 맞을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장경왕후(章敬
王后) 윤씨가 새 왕비로 들어오게 된다. 또한 10여 명의 후궁까지 맞아들이면서 신씨에 대한
추억과 그녀의 존재감은 완전히 흐릿해진다.

신씨는 왕이 사직단(社稷壇)에 사직대제(社稷大祭)를 지내러 올 때를 기다려 말죽을 쑤어 사
직단 정문에서 기다렸다. 그래서 왕의 말에게 직접 먹이는 등 남편에 대한 애정을 표했지만
결국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1557년 70세의 나이로 소생도 없이 한 많은 삶을 마감
하고 만다. (중종은 1544년 56세의 나이로 승하함)
신씨가 죽자 세상에서는 치마를 널었던 병풍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으며, 소년왕 단종(端宗)
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더불어 왕실 여인들의 '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 토
막으로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치마바위 밑에는 20세기에 조성된 미륵마애불이 숨겨져 있으며, 바위 피부에는 옥의 티로 황
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와 왜왕 만세 등의 바위글씨가 요란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들 글씨
는 1939년 가을 '대일본청년단대회'가 열린 것을 기념하고자 왜정과 친일 패거리들이 지원하
여 새겨진 것으로 서울 장안 어디에서든 다 보이는 바위라 하여 이곳에 새겼다고 한다. 글씨
는 해방 이후에 죄다 쪼아 지웠으나 그 흔적은 조금씩 남아 어둠의 시절의 쓰라린 한 단면을
보여준다.


 

♠  인왕산 정상부

▲  정상 동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북쪽 자락과 북악산(백악산)
왼쪽에 보이는 바위 능선이 기차바위이다.

▲  인왕산 정상 남쪽
인왕산 정상은 오로지 남쪽으로만 진입이 가능하다. 서쪽은 성곽 바깥이고
동쪽과 북쪽은 꽤 각박한 낭떠러지기 때문이다.


인왕산은 해발 338m(또는 340m)의 바위 봉우리로 북악산(342m)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을 안쪽으로 둘러싼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개를 경계로 북악산(백악산)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통해 북한산(삼각산)과 이
어진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이란 명칭이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
제왕이 정전(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
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
롯되었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 웃대)과 사직동,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
워있으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꽤 가파르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가 작아
서 금방이면 올라갈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착시현상을 노린 인왕산의 속임수이다. 그의 품에
들어가보면 보기와 달리 넓고 장대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사직공원(사직단)과 독립문역에서 인왕산 정상까지 40~50분 정도 걸리며, 정상을 찍고 홍제동
환희사(歡喜寺)나 개미마을, 홍지문,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 보통 2시간 내외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돌산으로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와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
한 경관을 돕고 있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해 우백호
에 걸맞는 위엄을 드러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
)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해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담아
인왕산을 극찬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약수터가 제법 많아 곳곳에서 나그네의 목을 축여준
다. 하지만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급하여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
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사라져 수성동(水聲洞)계곡과 큰절골(환희사계곡)만 그나마 좀 남
아있고 청풍계(淸風溪)와 청계동천(淸溪洞天), 백운동천(白雲洞天) 등은 일부만 살아있다.


▲  인왕산 정상 바위
저 바위가 인왕산의 실질적인 정상으로 높이는 1.5m 정도 된다. 바위의 남쪽과
북쪽 피부에는 움푹 패여 하얗게 서린 곳이 많은데, 이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오가면서 생긴 상처이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이 폐쇄
되면서 선바위와 환희사 주변, 인왕산길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겨우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
다가 김영삼 정권 때 다시 속세에 개방되었다. 허나 서울 도심을 지키는 요충지라 군부대 시
설이 성곽 능선과 산자락 곳곳에 남아있어 금지된 땅이 다소 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또한 매주 월요일은 인왕산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인왕산 주능선)은 입산이 통제되며, 월요
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다음 날 통제된다. 다만 성곽 능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제한이 없
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國師堂), 치마바위,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
던 수성동계곡, 벽화로 유명해진 홍제동(弘濟洞) 개미마을,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
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
속(巫俗), 불교가 어우러진 이색 현장으로 서울 지역 무속신앙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
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
과 남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정도전(鄭道傳)은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꺾이고 만다.
이에 발끈한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
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터져 백성이 어
육이 될 것이다'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정확히는 6대) 만에 세조(世祖)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
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사대부의 억불숭유 정
책을 신랄하게 까고자 불교 쪽에서 그럴싸하게 지은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  성곽과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있는 정상 북쪽 성곽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
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인조는 서인 패거리를 이끌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로 줄
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치고자 인왕산 서쪽 안산
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말하며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다. 그리고 군사<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
들을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하니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
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다. 그 시절 백성들은 하얀 옷을 많이 입었는데, 산을 가득 메운 그
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하여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걸어잠구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다. 허나 부하에게 살해되어 결국
목없는 귀신이 되었고,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
後金)으로 도망가 청태종(淸太宗)에게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
(丁卯胡亂)이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
에 수시로 나타나 난리를 치기 일쑤였고, 심지어 종묘(宗廟)까지 침입했다. 백성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
왔으니 인왕산은 그야말로 조선 호랑이의 성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고양이만 종종 보일 뿐이다.
또한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
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
과 같은 재미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
현(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고 우는데,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린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가 지례 겁을 먹으

'엥 수진궁 귀신..? 이건 말도 안돼'
꼬리를 접고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과 인왕산 북쪽 능선

인왕산 정상에 올라서면 서울 도심과 서촌(웃대)를 비롯하여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 여의
도, 영등포구, 강서 지역, 동작구, 강남 지역, 동대문구, 성북구, 광진구, 강동 지역, 국립현
충원, 관악산, 삼성산, 호암산, 우면산, 아차산 등 많은 존재들이 고루고루 시야에 들어온다.
높이는 338m(340m)에 불과하나 조망만큼은 한라산과 백두산이 부럽지 않다.
또한 사방이 모두 트여있어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진국이며, 남산(南山)과 함께 서울 도심의
새해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다. 또한 도심이 바로 밑이라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야경 맛이 아
주 좋다. (서울 도심 야경은 인왕산을 제일로 쳐줌)

* 인왕산 정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부암동, 서대문구 홍제동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서울의 장대함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와 남산(가운데 솟은 산)
저 멀리 관악산과 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남한산까지 싹 시야에 잡힌다.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안산과 서대문구, 마포구, 여의도,
영등포, 강서 지역


 

♠  인왕산 기차바위

▲  기차바위 능선

인왕산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기차바위 갈림길로 다시 내려와 성곽길을 버리고 기차바위로
방향을 잡았다. 철계단을 타고 성 밖으로 내려가 북쪽으로 가면 인왕산의 으뜸 바위로 추앙을
받는 기차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  인왕산의 북쪽 하늘길, 기차바위 능선 (북쪽 방향)

인왕산 바위의 갑(甲)으로 칭송을 받는 기차바위는 기차처럼 길쭉한 바위 능선이다. 그렇다고
기차처럼 생기지는 않았으며, 그저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이런 구절이 있다.
그만큼 기차는 길쭉한 존재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기차바위 능선은 약 300m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닐면 실감이 덜하겠지만
세검정초교에서 북악산 백사실(백사골)로 올라가는 길이나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에서 바라
보면 꽤 두툼한 바위 능선임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조망은 1급이나 단 양쪽이 일
체의 자비도 없는 낭떠러지이니 난간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차바위 능선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시내

가까이로 북악산(백악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울 도심부부터 멀리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산줄기, 강동구 지역, 남양주와 하남, 성남 지역 산줄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와 눈 속에
서 아주 살살 녹는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남쪽 산줄기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로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부암
동과 신영동, 평창동(平倉洞),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 남쪽 산줄기가 장쾌하게 시야에 들
어온다. 이렇게 보니 서울의 한복판이 아닌 산악 지방의 소도시를 보는 기분인데, 뫼를 오르
는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조망 맛을 보기 위함이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왼쪽)과 안산(鞍山)

▲  기차바위에서 홍제동,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기차바위 능선을 지나 북쪽 갈림길에서 홍제동으로 인도하는 서쪽 길로 내려갔다. 중간에 다
시 왼쪽으로 빠져 환희사 방면으로 내려가다가 옥동약수터를 만났는데, 물이 실타래보다 적게
나오고 수질 또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은 상태라 손을 대지 않았다. 마침 약수터에 있던 노
인이
'약수터 주변 정비를 안해서 그렇지, 마셔도 괜찮다. 난 이 물을 20년 동안 마셨다'
며 괜찮다고 그런다. 허나 부적합이란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려 끝내 마시지는 않았다.

노인의 말로는 이곳을 관리하는 동네 노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다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거나 생명이 다해 거의 해체되어 관리하는 이들이 없다고 한다. 왕년에는 인왕산의 제일 가는
약수임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많이 초췌해졌다면서 서대문구청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었지만
철밥통에 걸맞게 앵무새처럼 알겠다고만 할 뿐, 약수터 관리에 그리 신경을 안쓴다고 한다.


▲  옥동약수터 주변 동굴

옥동약수터에서 잠시 두 발을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가다보니 또 다른 약수터를 만났
는데, 그 약수터는 아예 물이 말라버렸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들이 있고 그들
뒤로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는데, 그곳도 기도와 무속 행위로 말썽이 많자 아예 철조망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굴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산산이 불어와 몸을 꼬질꼬질하게 뒤덮던 땀방울을
제대로 단죄한다.

동굴을 뒤로하고 5분 남짓 내려가니 인왕산 서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비구니 산사, 환희사(歡
喜寺)가 모습을 비춘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 2개를 간직한 20세기 현대사찰로 오랜만에
발을 들일까 했으나 이미 18시가 넘어서 쿨하게 통과했다. 환희사는 18시 정도가 되면 대문을
걸어잠군다.
속세애서 절까지는 차량이 마음껏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있는데, 그 길을 5분 정도 내
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홍제원현대아파트와 인왕산현대아파트가 나온다. 이제
완전히 속세로 내려온 것이다. 두 아파트 사이를 가르는 통일로34길을 내려가니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義州路)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인왕산 나들이는 다음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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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9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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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와 거닐기 좋은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개운산둘레길)

 


' 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그리고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나들이 '


▲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유희좌 불상,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개운산둘레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따사로운 날, 고려대 뒷쪽에 자리한 안암동
(安岩洞) 보타사를 찾았다.
보타사는 10회 이상 인연을 지은 절로 즐겨찾기 급까지는 아니나 집에서도 가깝고 진귀
한 문화유산을 둘이나 간직하고 있어 매년 1~2회 정도 복습하러 간다. 올해도 변함없이
보타사 보물들의 안부가 격하게 궁금하여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오후 한복판에 부랴부
랴 카메라와 지갑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보타사 서쪽에 자리한 개운사(開運寺)를 먼저 둘러보았으나 마음은 벌써 보타사에서 나
를 재촉하고 있어
개운사를 콩 볶듯이 살펴보고 동쪽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 길
의 끝에는 조그만 산사 보타사가 산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활짝 열린 보타사, 대원암 정문


 

♠  보타사(普陀寺) 입문 (대원암)

▲  안암동 대원암(大圓庵)

보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양반가 기와집처럼 생긴 한옥이 제일 먼저 마중을 한다. 이곳이 초행
이라면 이것이 보타사인가 싶어 마음이 설레겠지만 그것은 함정이며, 그는 개운사의 부속암자
인 대원암이다.
보타사를 제대로 가리고 앉은 대원암은 기와집 1동이 전부인 조그만 암자로 1845년 지봉선사(
智峰禪師)가 창건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법명(法名)은 우기(祐祈)인데, 북한
산(삼각산) 도선사(道詵寺)에서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에게 사사하여 그의 법을 이어갔으
며, 효성이 깊고 인품이 넉넉했다. 또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친분이 있어 그에게 판
서(判書)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연유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지봉판서라 불렀다.

왜정(倭政) 때는 현대불교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1870~1948), 법명
은 정호, 영호>
이 이곳에 머물며 불교 교육에 나섰으며 1960년대에는 탄허(呑虛, 1913~1983)
가 역경사업을 벌였던 유서 깊은 현장이기도 하다.


▲  숲속에 자리한 보타사 주차장

대원암을 지나면 녹음이 깃든 숲이 조촐하게 펼쳐진다. 숲은 작으나 나무들의 강인한 협동심
으로 햇살도 우걱우걱 씹어먹을 정도로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마치 깊은 산중의 암자에
들어선 기분이다. 개운사에서 아주 잠깐 이동했을 뿐인데 풍경화는 이렇게나 180도 달라진 것
이다.

햇살도 거의 들어오기 힘든 그곳에 차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고 그 너머로 석축을
쌓고 터를 다진 보타사가 마치 별장 같은 모습으로 들어앉아 있다. 연등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정녕 절집인지 고개 조차 갸우뚱했을 것이다.
주차장 옆에는 키도 제각각인 중창(重創) 송덕비와 사적비(事蹟碑) 등 비석 4기가 있고 그 옆
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반원(半圓) 모양의 조그만 연못이 장차 다가올 연꽃의 향연을 숨죽여
준비한다.

▲  보타사 송덕비와 사적비

▲  반원 모양의 작은 연못

주차장에서 보타사로 인도하는 계단을 오르면 보타사 현판을 머금은 일주문(一柱門)이 중생들
을 맞는다. 일주문이라고 하나 그냥 일반 주택 대문에 기와 지붕을 얹힌 모습이다.


▲  보타사 일주문

▲  보타사 대웅전(大雄殿)

개운사 동쪽 그늘진 곳에 비구니 절인 보타사가 살포시 자리해 있다. 대원암과 더불어 개운사
의 부속 사찰로 경내가 숲에 완전히 감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나무들이 무
성해 속세의 온갖 기운과 소음을 거의 털어버린다. 그래서 도심 속에 박혀있음에도 늘 번잡한
안암동 대학가가 지척임에도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山寺)의 분위기가 진하다. 그야말로 '절간
답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보타사는 개운산<開運山, 안암산(安岩山)>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서쪽을 제외하면 모두
가 막힌 궁색한 곳으로 경내 동쪽과 남쪽은 고려대로 막혀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
있으며, 그 벼랑 윗쪽에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북악산길이 흘러가 차량의 굉음이 조금
씩 전해진다. 그리고 서쪽은 고려대 안암학사와 개운사로 나가는 길이 있다.

이곳은 원래 20세기 중반 불교전문강원과 중앙승가대학의 기숙사로 출발했다. 허나 1911년 2
월 경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마애보살좌상 옆에 맞배지붕 건물이 보인다. 그런 것을 보면 개
운사나 대원암에서 마애불 관리를 위해 닦은 조그만 건물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기숙사 건물을 손질해 칠성암(七星庵)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1980년대에 보타사로 이
름을 갈아 마애불과 금동보살좌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절을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조용히 묻혀 지냈고, 마애불 또한 주변 사람만 찾아올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결국 세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내게 된다.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가 서울에 숨겨진 문화유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이
마애불이 발견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늙은 존재로만 주변에 전해졌는데, 조사를
해보니 무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여 바로 이듬해에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2014년에 국가 보물로 승진하기
에 이른다. 또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유희좌 스타일로 그 역시 지방문화재로
있다가 2014년 3월에 보물로 승진되어 같은 해에 무려 보물급 문화재를 2개나 지니는 위엄을
보였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관음전, 선방 등 4~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2018년 이후 관음전
을 새로 짓는 등, 크게 중창불사를 벌였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상
등의 값비싼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숲에 묻힌 벼랑 밑부분이라 깊은 산중에 들어선 기
분을 물씬 들게 만들어 이곳이 서울 한복판임을 순간 잊게 한다.


▲  대웅전 내부 (석가여래상과 영산회상도, 신중도)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마애불과 벼랑이 있고, 오른쪽에는 선방(禪房), 왼쪽에는 대웅전과
관음전이 자리해 있다.

보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이다. 불단(佛壇)에는 금색 찬란한 석가여래상이 들어앉아 있는데, 근래에 조성되어 피
부가 아주 탱탱하며, 변색된 부분이 없는 100% 금동 피부로 그의 광배(光背)는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습 같다.
볼살이 많아 보이는 그의 온후한 표정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데,
그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을 두지 않고 환하게 창문을 내어 마애보살좌상이 보이게끔 하였다.
그러니까 마애불이 일종의 후불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불상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과일과 꽃, 쌀로 상에 금이 갈 지경이며, 건물 좌측 벽에는 석가
여래의 설법 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와 법당 수호용인 신중도(神衆圖)가 걸려있
다. 이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않았다.


 

♠  보타사의 보물들 (마애보살좌상, 금동보살좌상)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 - 보물 1828호

대웅전 뒷쪽 벼랑에는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마애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마애불
이 고된 몸을 기댄 화강암 벼랑은 거의 80~85도 각도로 불상 윗쪽에는 암벽이 눈썹바위 마냥
앞으로 길게 튀어나와 자연산 모자나 보개(寶蓋)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윗쪽에는 개운
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2차선 북악산로가 있어 차량 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이 마애불은 오랫동안 안암산의 은자(隱者)로 이곳에 살짝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어떤 자료에는 발굴했다고도 나온다. 허나 그는 바깥에
노출된 상태였으므로 발견이 맞다. 서울의 대표적인 고찰(古刹)의 하나인 개운사가 바로 지척
이고 개운사 그늘에 자리한 곳에 조그만 것도 아닌 커다란 마애불이 수백 년이나 숨어왔으니
그의 숨바꼭질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 가치를 인정받아 발견된 이듬해(1993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89호
로 지정되었고, 2014년 3월 경내에 있는 금동보살좌상이 국가 보물로 지정되자 그 여세를 몰
아 그해 7월 보물로 승진되었다.

마애불의 높이는 대략 5m, 폭은 4.3m로 조사 결과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을 너
무나 닮았다. 보관(寶冠)은 좀 틀리지만 얼굴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 옥천암의
그것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옥천암 마애불 역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같은 사람이 조성하거나 모방하여 만
든 것으로 여겨지며, 고려 후기 서울 변두리에서 아주 잠깐 나타났던 마애불 형식으로 진정한
서울 스타일의 고려 마애불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마애불은 천하에서 서울에 딱 2곳뿐이라는
것이다.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전경

마애불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보관을 눌러쓰고 있는데, 좌우로 관대(冠帶)가 나와있고
그 밑에 보관 장식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관대 밑에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장식
이 눈에 띈다. 하얀 얼굴은 약간 볼살이 있어 보이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그 눈썹
사이에 백호가 찍혀 있으며, 검은 두 눈은 지그시 뜨고 있다. 코와 입은 좀 작은 편이며, 입
술은 붉은색이나 빛이 좀 바래있고, 귀는 보관 장식에 가려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가슴을 가로지르
는 스카프 형태의 천의(天衣)가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표현되어 있다. 왼쪽 팔은 몸에 비해 지
나치게 크고 길게 표현되어 괴물 팔처럼 보이는데, 팔찌를 낀 왼손은 무릎 밑까지 내려와 있
으며, 엄지와 3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 엄지와 2번째 손
가락을 맞대고 있다.
옷의 주름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고, 두 다리는 포개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다. 그리
고 두 발은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마애보살좌상 옆에 새겨진 네모난 원패(圓牌)

마애불 어깨쪽 좌우에는 네모나게 구멍이 파여 있다. 이는 자연산 구멍이 아니라 마애불을 지
켜주던 목조 건물이나 보호각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마애불에 대한 기
록이 전혀 없어 언제 지어지고 어떤 모습을 취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마애불은 보호각을
갑옷으로 삼아 온전하게 살아남았고, 그를 살린 보호각은 장대한 역사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
없이 녹아 없어져 이렇게 상처 만이 남게 되었다.

마애불 왼손 쪽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공간이 있는데, 이를 원패라고 부른다. 이 원
패는 제작 당시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南無金剛會上佛菩薩(나무금강회상불보살)'이라 쓰
여 있다. 원패란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적어 불단 앞에 놓는 것으로 마애불 옆에 새겨진 점이
꽤 이채롭다.


▲  마애보살좌상의 얼굴과 자연이 그에게 씌워준 자연산 돌모자
어깨 양쪽에 파인 홈은 옛날에 사라진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들이다.

▲  바로 밑에서 바라본 마애보살좌상의 위엄
오른쪽 발은 발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했으며, 왼쪽 발은 오른쪽 발에 가려져 있다.
 

현재 마애불은 하얀 피부의 백불이지만 원래부터 백불은 아니었다. 하얗게 호분(胡粉, 여자들
이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하던 것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듬)을 칠한 것은 20세기에 들어
와서이며, 그로 인해 몇몇 부분은 확인이 어렵게 되었다. 참고로 그와 친척뻘인 옥천암 마애
보살좌상은 19세기에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가 호분을 칠했다고 전
한다.


▲  관음전(觀音殿)

대웅전 옆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관음전이 있다. 지금 집은 2018년 이후에 새롭게 지은 것으로
원래는 여염집 모습의 기와집이 있었는데, 중앙승가대학 숙소로 쓰였던 것을 요사(寮舍)와 종
무소(宗務所), 금동보살좌상의 거처까지 담당하던 복합 공간으로 쓰이다가 새 건물을 장만하
면서 모두 분리가 되었다.
관음전이란 이름 그대로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금동보살좌상의 거처이다. 중창불사로
잠시 대원암으로 거처를 옮겼고,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새 관음전에 안착을 했다.

▲  보타사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 - 보물 1818호

관음전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한 불상이나 보살 스타일이 아니다. 오른쪽 다리
는 연화좌에 올려 무릎을 세웠고 왼쪽 다리는 밑으로 내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딱 보면 아줌
마 스타일의 착석 방법과도 비슷한데, 이런 포즈를 유희좌(遊戱座)라고 한다.

유희좌는 9세기 이후 북송(北宋) 시절부터 생겨났는데, 이 땅에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중
기에 가뭄에 콩 나듯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매우 귀한 실정이라 그 가치는 대단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현대사찰 보타사에 버젓히 서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보살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제자리가 어디었는지는 귀신
도 모르는 실정이며, 보살상 또한 굳게 입을 다물며 진술을 거절한다. 아마도 이리저리 떠돌
다가 중앙승가대학으로 흘러들어와 기숙사 불단에 봉안되었고, 기숙사 건물이 보타사로 변신
하면서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앞서 마애보살좌상이 좀 남성적이라면 이 보살상은 여성적이다. 고품격과 미색(美色)이 느껴
지는 그의 정체는 딱 봐도 관세음보살 누님인데, 덩치는 조그만하고 머리에는 황제의 금관을
털어버릴 정도로 장엄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칼이 조금 나와있다. 얼
굴은 아리따운 여인네처럼 곱기 그지 없어 은근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카메라도 그를 보고
잔뜩 흥분을 했는지 셔터가 마구마구 눌러진다.
불상과 보살상은 보통 당시 왕족이나 귀족, 특정 인물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경우가 적
지 않아서 아마도 이쁘장하게 생긴 젊은 귀족이나 중년층 여인을 모델로 삼은 듯 싶다.

그의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두 눈은 지그시 떠 있으며 코는 작고, 입술은 작지만 어여
쁜 모습이다. 볼에는 살이 조금 있어 보이며, 가슴에는 온갖 장식물을 달고 있다.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고 그 한 자락을 수직으로 늘어뜨렸는데, 이는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조금 등장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가 앉아있는 연화좌(蓮花座)는 보타사에서 마련한 것으
로 오래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보살상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과 조그만 불상/보살상이 많이 등장하는 조선 초기 금동상 중에
서 그나마 규모가 큰 점으로 보아 조선 초에 왕실이나 귀족에서 발원하여 특별히 제작된 것으
로 보인다.
비록 고향은 잃었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조선 초기 귀족적인 보살상의 형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이자 조선시대 보살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6년에 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216호
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3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이처럼 귀한 몸이니 보타사에서 유리막을 설치해 그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끔 했는데, 어찌보
면 유리 감옥에 갇혀있는 듯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허나 어찌하랴?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
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걸 두고 바로 필요악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보타사 승려들은 별 거부감 없이 그를 쿨하게 공개하고 있고, 사진 촬영에도 호의적이
라 그것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 보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7 (개운사길 60-46 ☎ 02-928-2074)


▲  고적한 보타사를 뒤로하며~~~

숲속의 절집 보타사를 둘러보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 해가 한참이나 남아있어 보너스
시간을 받은 기분인데, 어디로 가야 널리 칭찬을 받을까 궁리를 하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
다. 개운사와 보타사는 여러 번 인연을 지었지만 정작 그들을 품은 개운산은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다. 즉 자식만 살펴봤지 그 어미는 살펴보지 않은 꼴이다. 게다가 개운산은 서울 장안
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踏處)이기도 하다.
하여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비록 보타사가 개운산 자락에 있
다고 해도 개발의 칼질로 서로를 바로 이어주는 길은 진작에 끊겼다. 그나마 빠르게 개운산으
로 가려면 고려대 안암학사를 가로질러 정문으로 올라가 북악산길로 나가야 된다.

북악산길은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에서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과 미아리고개, 개운산 남
부를 거쳐 종암동 개운산입구 교차로까지 이어지는 서울에 대표적인 산악도로이다. 아리랑고
개까지만 북악산길로 알고 있었는데 개운산 산복도로까지 그 일원으로 있었다.
개운산을 넘어 종암동(鍾岩洞)까지 발을 뻗치고 있는 북악산길의 위엄에 새삼 놀라며 안암학
사 정문에서 3분 정도 그 길을 거닐면 성북구의회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개운산 산책을
벌였다.


▲  잠깐 거쳐간 북악산길 (안암학사에서 성북구의회 입구 방면)

▲  성북구의회 입구에서 바라본 북악산길 (종암동 방향)


 

♠  성북구 한복판에 누워있는 도심 속의 포근한 뒷동산
개운산<開運山, 안암산(安岩山)>

▲  편안한 둘레길의 정석,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도심 속에 자리한 개운산(134m)은 성북구 안암동과 종암동, 돈암동(敦岩洞)에 걸쳐있는 조촐
한 뫼이다. 개운산이란 이름은 산 남쪽에 자리한 개운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안암동에 있다고
해서 '안암산', 종암1동에 진씨(陳氏)의 채석장이 있어서 '진석산'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산 서쪽에는 그 유명한 미아리고개가 있으며, 그 고개를 통해 아리랑고개와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와 이어진다. 산 남쪽과 동쪽은 평지이며, 북쪽은 야트막한 산지로 북
한산과 이어진다.
허나 개발의 무분별한 칼춤으로 인해 산 주위로 아파트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산의 목을
조르고 있으며, 그로 인해 도시에 완전히 고립된 외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1982
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더 이상의 험한 꼴은 면했으나 겨우 높은 지대(거의 70~75m 이상)
만 자연의 공간으로 살아남았을 뿐이다.

개운산은 1936년 경성부(京城府, 서울의 왜정 시절 이름)에 편입되면서 그 주변이 신흥 주택
가로 주목을 받아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1940년 공원 지역으로 고시되
었으나 해방 이후 북쪽에서 많은 월남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었고, 특히 도심과 가까운 안암산
자락에 마구 집을 닦아 머물면서 수목들이 상당히 희생되었다. 게다가 6.25전쟁으로 미아리고
개~개운산~종암동을 잇는 서울의 최후 방어 저지선을 지키고자 치열한 전쟁이 벌어져 산은 완
전 민둥산 신세가 되어버렸다.
196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다시 숱이 늘어났으나 산 주위로 주택가 확
대와 대학교들의 몸집 불리기로 계속 위협을 당하던 중, 1982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산
을 향한 개발의 칼질은 크게 줄었다.
2000년 이후 둘레길이 크게 유행을 타자 성북구가 3.4km의 개운산둘레길을 닦았고, 산책로와
산길 정비, 운동시설 확충, 울창한 숲속에 야외도서관과 유아숲체험장 등을 닦아놓아 조그만
산에 정말 없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알차게도 다듬었다. 게다가 숲이 짙어 조촐하게 산림
욕장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개운산은 덩치가 작으니 산행이 아닌 산책이란 말이 어울릴 것이다. 성북구의회에서 나들이를
시작하여 둘레길을 따라 산을 1바퀴 돌아도 되고, 성북구의회에서 북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마로니에마당으로 이동해도 된다. 마로니에마당은 개운산 정상(134m)으로 산의 몸집에 비해
정상이 너무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산으로 인도하는 길은 성북구의회, 북악산길 개운산 구간(중간중간에 산길이 있음), 종암아이
파크2차아파트 남쪽 길(종암로9가길), 종암동 죽림정사,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돈암동 새소리
어린이공원, 돈암풍림아파트 등이 있으니 각자 취향에 따라 골라가기 바란다.
아직은 동네 사람들이 주로 찾는 동네 명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가볍게 오를만한 도
심 속의 아늑한 뒷동산이고, 둘레길도 일품급이니 점차 서울의 주요 명소로 크게 거듭나리라
믿는다. 그럼 지금부터 개운산을 1바퀴 둘러보도록 하자.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종암동, 돈암동


▲  지그재그로 닦여진 개운산둘레길 계단길 (명상의 길)

성북구의회 입구에서 2분 정도 들어가면 좌우로 갈라지는 막다른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
쪽(북쪽)으로 가면 의회, 개운산 정상 방면이고, 오른쪽(남쪽)은 군부대 쪽인데,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이내 개운산둘레길이 동아줄 같은 길을 살짝 내려놓는다.
여기서 둘레길로 들어서니 시멘트길 대신 정겨운 흙길이 펼쳐져 개운산도 엄연한 산임을 짙게
내비춘다. 아무래도 산이 작아서 사람들이 뒷동산, 언덕이라고 낮춰서 대하니 산도 발끈하여
이런 길을 꺼내든 모양이다. (둘레길은 상당수 흙길이며, 북쪽은 지형상 나무로 닦은 데크길
이 많음)

개운산둘레길은 3.4km로 명상의 길, 연인의 길, 산마루길, 사색의 길, 건강의 길 등 5개 코스
로 이루어져 있다. 허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름일 뿐이며, 산이라 약간의 오르락내
리락이 있을 뿐, 길도 느긋하고 잘 닦여져 있다.
개운산 남쪽 봉우리에는 군부대가 닦여져 있어서 둘레길은 이들의 눈치를 보며 다소 남쪽으로
피해가며, 크게 1굽이를 돌면 종암동 구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  푸른 숲터널,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  개운산둘레길(명상의 길)에서 바라본 천하
숲 사이로 종암동과 청량리, 천장산(天藏山, 홍릉수목원 뒷산), 중랑구 지역,
아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비록 하늘로 조금 솟은 뫼이나 조망은 낮은
높이치고는 썩 괜찮은 편이다.

▲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  개운산둘레길 종암동 구간에서 만난 바위들 (명상의 길)
세상이 바위에게 달아준 이름은 아직 없다. 바위들이 병풍처럼 들어선 모습이
그리 예사롭지는 않아 보여 옛날에 산악신앙이나 치성 장소로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  개운산둘레길 종암동 구간에서 만난 운치 깊은 소나무 (명상의 길)
소나무를 해치지 않고 그 양 옆으로 길을 내어 그를 조금이나마 배려해주었다.

▲  녹음 속에 펼쳐진 개운산둘레길 (연인의 길)

▲  개운산둘레길(연인의 길)에서 윗쪽으로 오르는 계단길
저 계단의 끝에는 개운산 산책을 시작했던 성북구의회 남쪽과 이어진다.
결국 원점으로 다시 돌아간 셈이다.

▲  개운산스포츠센터 뒷쪽(동쪽) 숲길

▲  솔내음이 두텁게 막을 이루고 있는 담소정 서쪽 소나무숲
이곳 평상에 누워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잠이 따로 없을 것 같다. 사진에는
짤렸지만 책장이 있는 야외도서관도 있으니 솔내음의 가피 아래 독서의
즐거움도 누려보자~~! (책은 반드시 제자리에 꽂아둘 것)

▲  푸른 기와를 지닌 6각형 모습의 담소정(談笑亭)
정자 이름이 참 인간적이다.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우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인데, 좋은 사람들과 즐기는 이야기꽃만큼
아름다운 꽃도 없지~~!

▲  담소정에서 개운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앞서 잠시 떨어졌던 개운산둘레길은 담소정에서 다시 만나 정상(마로니에마당)까지 함께 한다
. 담소정~정상 구간을 산마루길이라 하는데, 이 구간이 개운산의 지붕 길이자 중심 길로 쿠션
이 느껴질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어 발도 아주 호강을 누린다.


▲  담소정에서 성북구의회 방면 산책로

▲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① (개운산 정상 방면)

▲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② (성북구의회 방면)

▲  일품 그늘을 지닌 네모난 초가 정자 (산마루길 옆)

▲  아직은 썰렁한 개운산 자연학습장 (산마루길 서쪽)

▲  드디어 개운산 정상 직전 (저 길의 끝에 마로니에마당이 있음)

▲  개운산 정상, 마로니에마당

개운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마로니에마당은 평평한 너른 공간이다. 이곳의 절반 정도는
푸른 잔디가 잔잔하게 입혀져 있으며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과 화목정이란 정자를 비롯해
쉼터와 운동시설이 넉넉히 깔려 있어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하다.
정상이라고 하지만 주변에 나무가 빼곡하여 조망은 별로이며, 북쪽으로 둘레길을 따라 내려가
면 길음역과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방면, 동쪽은 종암동 죽림정사로 이어진다.

▲  남쪽에서 바라본 마로니에마당

▲  북쪽에서 바라본 마로니에마당과 헬기장

▲  푸른 기와를 지닌 화목정(和睦亭)

▲  개운산 정상 북쪽 밑에서 바라본
종암동과 개운산 남쪽 부분


▲  개운산 정상에서 길음역 방면으로 내려가는 나무계단길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구간)


개운산 북쪽은 산세가 조금 패기가 있다. 그렇다고 아주 험한 것까지는 아닌데, 정상 바로 밑
이다 보니 경사가 다소 흥분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무로 계단을 닦고 길을 내었는데, 둘레길
은 그 계단과 나무테크길을 따라 미아리고개 동쪽인 돈암삼성아파트 뒷쪽으로 이어진다.


▲  개운산 북쪽 자락을 흐르는 나무데크길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산길을 편하게 닦아놓아 거닐기도 좋고, 숲도 삼삼하여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사색에 잠기기에 좋다. 하여 생각 좀 하고 살라는 뜻에서 길 이름을
사색의 길이라 지은 모양이다.

▲  개운산 북쪽 자락 나무데크길(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에서 바라본
길음동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뒷쪽 산자락을 지나는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  개운산 나들이의 종점, 돈암1동 새소리어린이공원

개운산둘레길을 완전히 1바퀴 돌고 싶었으나 시간도 그렇고, 더 이상 땡기지도 않아서 (여기
서 더 가면 다시 성북구의회임) 둘레길을 버리고 새소리어린이공원으로 내려왔다. 이 공원은
개운산의 북쪽 관문 중 하나로 길음역(4호선) 2,3번 출구에서 도보 5분 거리라 접근성도 아주
좋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30분.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개운사와 보타사에 깃든 보물들, 그리고
개운산까지 많은 곳을 둘러보니 정말 배가 부르다. 특히 오랜 미답처였던 개운산은 거의 상당
부분을 둘러보았으니 그와의 첫 인연치고는 성과는 좋다.
욕심은 과하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여기서 쿨하게 길을 접으며 개운산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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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가까운 우리의 옛 땅, 대마도 북부 나들이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히타까츠항, 미우다해변, 한국전망대)

 


' 부산 대마도 나들이 '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미우다해수욕장, 한국전망대)


▲  대마도 미우다해수욕장

대마도 한국전망대

▲  한국전망대

▲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킨의 장수 은행나무)


* 대마도의 본토는 대한민국(우리나라)이다. <본글에 나오는 본토는 우리나라를 뜻함>
* 2020년 이후 부산과 대마도를 잇는 뱃편은 1도 없으며 찾는 이도 없다.
* 본글은 2019년 이전에 간 것임을 밝힌다.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대한해협에 길쭉하게 떠있는 대마도를 찾
았다.
대마도(對馬島)는 2004년부터 계속 인연을 노렸으나 그때마다 태풍이 초를 치면서 가지
를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5월에 이르러 1박2일로 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보우하사 100% 상륙 확정이다.

부산과 구주(규슈, 九州) 사이에 자리한 대마도<왜어(倭語)로 쓰시마, 쯔시마(つしま)>
는 708㎢의 덩치로 유인도 5개, 무인도 102개 등 총 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
북으로 길쭉하다보니 제법 큰 섬으로 다가오며(남북이 82km, 동서 18km) 우리가 잃어버
린 옛 땅의 일원으로 조선 후기까지 조선의 동남쪽 끝을 담당하고 있었다. 우리의 동남
쪽 끝이자, 왜국(일본)의 서북쪽 끝으로 그 예민하고 외로운 위치 때문에 '국경(國境)
의 섬'이라 불린다.
우리 본토에서도 매우 가까워(부산에서 49~50km) 저렴한 금액과 극히 짧은 시간으로 해
외여행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잇점이 있으며, 그 매력으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상당했
다. (2018년에 무려 40만 명이 찾았음) 허나 분명한 것은 대마도는 우리가 반드시 회복
해야될 땅이라는 것이다. (대마도의 역사와 지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아침 일찍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대마도로 가는 오션플라워호(대아고속해운)에 나
를 담고 2시간 20여 분을 항해하여 대마도의 중심지, 이즈하라<엄원(嚴原)>에 도착했다.
다행히 바다가 순하게 굴어 뱃길은 매우 순탄했는데 바다가 종종 격하게 흥분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그때는 배멀미 등의 고통을 각오해야 된다. (대마도 2번째 방문 때는 3m가
넘는 파도로 완전 지옥을 맛보았음;;)
처음으로 발을 들인 대마도의 첫 느낌은 뭐랄까. 본토의 어느 섬에 들어온 듯한 무척이
나 낯익은 모습이다. (완전 '부산광역시 대마군' 같은 기분) 그 즐거운 흥을 마치 회충
이나 세균처럼 생긴 못생긴 왜열도 글자(가나)가 건방지게 깨뜨리려 든다.

첫날은 도보로 이즈하라 시내를 돌아다녔다. 오후 6시까지 여로(旅路)를 듬뿍 살찌우다
가 바다가 바라보이는 이즈하라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아호텔에 여장을 풀면서 첫 날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이즈하라에서 둘러본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함)

다음 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간의 기별도 안될 정도로 적게 나온 왜식 정식을 먹고 둘
째 날을 시작했다. (밥은 리필이 되지만 반찬은 안됨)
이 날은 전용버스로 히타까쯔까지 여러 명소를 겯드리며 이동하는 일정으로 대마도를 2
개의 섬으로 나눠버린 만관교(만제키바시), 에보시다케 전망대, 와타즈미신사를 둘러보
고 대마도 북섬의 동쪽 도로인 39번 지방도(도요타마마치~사가~긴~슈시~히타까츠)를 따
라 북쪽으로 향했다.

대마도 39번 지방도는 겨우 구색만 맞춘 좁은 2차선 길로 거의 산악길 일색이라 구불구
불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굴곡을 순화하고자 일부 구간에는 터널과 다리가 닦여졌으나
아직까지도 많이 부족하여 운전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북섬 서쪽 도로인 382번 국
도(가미아카타마치 경유)도 있으나 이즈하라~히타까츠를 잇는 길은 39번 지방도가 조금
지름길이다.
하여 본토 사람을 태운 관광버스는 39번 지방도를 주로 이용을 하고 있는데, 이 구간에
는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슈시강 단풍길, 나루타키폭포 등의 명소가 있다. 이들은 대마
도 여행상품에서 많이 취급하는 것들로 우리는 그중에서 장송사 백제은행나무를 들리기
로 했다. (이즈하라~히타까츠를 왕래하는 시내버스와 투어버스는 382번 국도를 이용함)


 

  대마도 및 왜국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백제 사람이 심었다고 전하는
장송사(長松寺) 백제은행나무 <긴의 장수은행나무>

▲  동쪽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대마도의 북쪽 끝을 이루고 있는 상대마정(上對馬町, 가미쓰시마마치)의 남쪽 구석에는 '긴(
琴)'이란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름도 달랑 1글자인 그 마을에는 장송사란 작은 절이 있는데,
바로 그 뜨락에 대마도에서 가장 늙은 은행나무가 푸른빛 장대한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 높이
솟아있다.

이 은행나무는 추정 나이가 약 1,500년으로 대마도 및 왜국(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대마도가 본토의 그늘에 묻혀있던 시절부터 대마도의 부모 나무라 불렸으며, 둘레가 63.6m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상은 높이 23m, 둘레 12.5m이다.
백제(百濟) 사람이 심었다고 전해져 예로부터 백제은행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왜열도의
은행나무는 백제가 속방(屬邦)인 왜에 불교를 내리면서 함께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여
이곳 나무 역시 그 과정에서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지금은 '긴'이 작고 하찮은 마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는 대마도 북부의 관문으로 바쁘게 살았다. <신숙주(申叔舟)가 1471년에 쓴 '해동제국기(海東
諸國記)'에는 40여 호의 집이 있다고 나와있음>
장송사에 있는 나무라 하여 '장송사 백제은행나무'라 하며, 지역 이름을 따서 '긴의 장수은행
나무','긴의 대은행(銀杏木)', 왜어로는 '킨노오이쵸'라 부른다.

1798년 낙뢰를 맞아 가지가 부러지고 나무 속살이 탄 적이 있으며, 1809년에 작성된 대마기사
(對馬記事)에는 '바다에서 보면 울창하여 산과 같다'고 나와있어 낙뢰의 상처에도 그 위엄을
크게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50년 태풍 29호로 기둥나무가 아작나기도 했으나 옆에서 조그만 나무가 자라나 크게 가지를
넓히고 새 잎이 피어났다. 1990년에 열린 '국제 꽃과 초록의 박람회' 때 기획된 '신일본 명목
(名木) 100선'에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조금씩 성장을 보이고 있어 생명력만큼은 젊은
나무 못지 않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백제은행나무', 그리고 백제에서 전래되었음을 안내문에 표시했으
나 역사 왜곡의 달인, 왜국이 대마도와 우리 본토의 끈끈한 인연을 자르고자 백제 두 글자를
지워버렸다. 하여 요즘에는 '긴의 장수은행나무'로 명칭을 고정시키고 그 이름을 강요하고 있
다. (왜는 대마도가 가야와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의 영역으로 오랫동안 그들의 지배와 영향
을 받은 흔적과 기록을 왜곡하거나 지우고 있음)


▲  사람을 작은 개미로 만들어버리는 백제은행나무의 위엄

▲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을 1,500년 이상이나
꾸역꾸역 섭취한 백제은행나무의 단단한 아랫도리

▲  은행나무 그늘에 묻힌 조그만 신사와 붉은 도리이
본토의 마을 서낭당과 같은 존재로 대마도가 왜화(倭化)가 되면서 저런
신사(神社)로 변질되었다. (매년 신사에서 제사를 지냄)


대마도 뿐 아니라 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고 추앙하고 있으나 정작 국가 천연기념물이 아
닌 장기현(나가사키) 지방 천연기념물 등급에 머물러있다. (1961년에 지정되었음) 본토 같았
으면 진작에 국가 천연기념물로 삼아 크게 애지중지되었을텐데, 그보다 낮은 지방문화재 등급
에 둔 것을 보면 무슨 사연이 있는 듯 싶다. (본토와 관련된 나무이고, 대마도가 원래 본토
땅이라 문화유산 지정 등급을 일부러 낮게 매긴 모양임)


▲  장송사 법당(法堂)

백제은행나무의 후광(後光)과 그늘을 아낌없이 받고만 있는 장송사는 조동종(曹洞宗) 소속으
로 법당과 요사(寮舍)가 전부인 조그만 절이다. 겉으로 보면 20세기 사찰로 여기고 지나칠 수
있으나 무려 조선 때부터 있어온 절로 고려 현종(顯宗) 때 조성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의
인쇄 목판을 소리없이 간직하고 있다. (인쇄본은 11세기 이후에 많이 인쇄되어 보급되었으나
지금은 상당수가 왜열도에 있음)
대마도에서도 다소 외진 이런 구석탱이에 그런 존재가 숨어있다는 것이 다소 의아스러울 따름
인데, 왜구가 약탈한 것으로 보기도 하나 고려 말에 고려 조정이 왜구의 공격을 불력(佛力)으
로 막고자 왜열도와 가까운 대마도에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이 장송사로 흘러들어와 이
곳의 듬직한 보물이 된 것이다. (대장경 인쇄본은 관람 불가)

본토 관광객들이 은행나무를 보러 많이 찾고 있으나 정작 절 승려나 동네 사람들은 거의 콧배
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단순히 백제은행나무를 보러 오는 곳이라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흥분시킬 건덕지가 없다. 그냥 조용한 절과 마을이 전부이다.

▲  '일본일수령 긴의 대은행(一樹齡
琴の大銀杏)' 나무판

▲  법당에 걸린 왜열도 스타일의
조그만 종


▲  히타까츠항 (항구 서쪽)

백제은행나무를 둘러보고 가을 단풍길로 유명한 주지(舟志, 슈시)와 나루타키폭포 입구를 지
나 히타까츠(히타까쓰, 比田勝)로 이동했다.

히타까츠는 상대마정(가미쓰시마마치)의 중심 마을로 대마도 북부의 중심지이자 북쪽 관문이
다. 대마도에서 2번째로 큰 동네로 동서로 길쭉한 어촌 마을이며, 그 앞바다가 북/서/남 3면
이 육지와 접해있고 그 3면이 동쪽에서 들어온 바다를 감싸고 있어 항구로 아주 적합하다. 대
마도가 지형이 꽤 거칠다보니 항구로 크게 부릴만한 곳이 이곳과 이즈하라 정도로 외지를 잇
는 여객선은 오로지 이 두 곳에서만 뜬다.
히타까츠에서는 부산과 하카타를 잇는 여객선이 오가고 있는데, 부산까지는 1시간 10~30분 정
도 걸린다. 그러니 대마도에 일찍 상륙하고 싶다면 히타까츠를 이용하면 된다. (이즈하라는 2
시간 20분 이상 걸림)


▲  오늘도 평화로운 히타까츠항
잔잔한 파도가 이곳의 적막을 살짝 건드리고 있고 바다 속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거닐고 있다.

▲  단조로운 모습의 히타까츠항 건너편 (히타까츠항 남쪽)

▲  히타카츠 마을 (시내라고 하기에는 동네가 작음)

히타까츠 마을은 마치 한물 간 영화세트장처럼 한적하기 그지 없다. 본토에서 배가 들어오거
나 남쪽이나 한국전망대 쪽에서 본토 사람들을 실은 관광버스가 오면 히타카츠 여객터미널을
중심으로 잠깐씩 활기를 되찾다가 그들이 빠져나가면 다시 끝없는 고요 속으로 잠긴다.

이곳에는 본토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숙박업소가 여럿 있다. 게다가 본토 말을 구가하는
지역 사람들도 많아서 언어 소통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


▲  히토쓰바타고에서 먹은 왜식 우동과 유부초밥의 초라한 위엄

우리는 히타까츠 여객터미널 부근에 있는 '히토쓰바타고'란 왜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발
음도 어려운 히토쓰바타고는 왜어(倭語, 일본어)로 이팝나무를 뜻한다. 즉 이팝나무식당이다.
히타까츠에서 이름난 식당으로 우동, 회, 왜식 정식 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대마도 여행 상품
중의 히타까츠에서 점심을 먹는 일정이 있으면 이곳과 본토 사람이 하는 식당으로 많이 간다.

여기서는 우동과 유부초밥 2개, 왜식 김밥 2개, 그리고 약간의 고등어회가 차려졌다. 우동은
간의 기별도 안될 정도로 양이 적었고, 고등어회 역시 여러 명이 같이 누리기에는 양이 빈약
하여 1인당 1~2개씩 집어먹으니 이내 빈 그릇이 되었다. 반찬은 단무지와 오랜지가 전부로 저
것을 다 섭취해도 왠만한 성인 남자들은 배가 차지 않는다. 그야말로 왜열도 애들의 좁쌀 같
은 마음처럼 나온 것이다. 하긴 외딴 섬에 물가도 비싸고 이윤도 많이 남겨야되니 그렇게 좁
쌀처럼 굴어야 돈이 남을 것이다.


▲  몇 조각 나오지 않은 고등어회

대마도 주변은 고등어와 방어가 많이 잡힌다. 이곳 밥상에 올라온 저 고등어 역시 대마도 산
일 것이다. 허나 정신줄 놓은 왜국(일본) 정부가 후쿠시마(福島) 해역에서 잡은 물고기를 전
국에 저렴하게 유통시키고 있어 조금은 꺼림칙하다. 수산물 뿐 아니라 육류, 채소, 쌀, 심지
어 맥주(아사히맥주)까지 후쿠시마산을 대놓고 퍼트리고 있어 왜열도에서 음식을 섭취할 때
꼭 주의가 필요하다. (가급적이면 왜열도에 안가는 것이 좋음)


 

♠  대마도 제일의 아름다운 해변, 미우다(三字田)해수욕장

점심 후식거리로 찾아간 미우다 해변은 히타까츠에서 차로 5분 거리이다. 해변 주차장에서 확
트인 동쪽으로 가면 이국적 분위기의 미우다 해변이 쓱 나타나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을 무
심히 뒤흔든다.

미우다 해변은 미우다하마(三字田濱)라 불리기도 한다. 대마도의 이름난 해변으로 왜국 해수
욕장 100선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리 넓은 해변은 아니나 하얀색 고운 모래와 에메
랄드빛 같은 푸르른 바다, 해변을 둘러싼 산, 바로 앞에 떠있는 바위섬까지 서로 어우러져 아
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또한 히타까츠항처럼 북/서/남이 산과 접해있고, 그 3면이 동
쪽에서 들어오는 바다를 깊이 둘러싸 자연산 방파제가 되어주고 있으며, 수심도 얕아 어린이
를 동반한 물놀이 장소로 아주 좋다.
이곳은 대마도의 필수 여행지로 대마도 여행 상품에서 90% 이상 취급하고 있다. 2018년에 40
만 명이 대마도에 발을 들였다고 하니 그중 30만 이상은 이곳에 발자국을 남겼을 것이다. 게
다가 히타까츠항에서도 매우 가까워 본토 사람들이 캠핑, 피서, 낚시로 많이 찾아온다.

▲  미우다해변의 명성을 알려주는
일본100선 해수욕장 표석

▲  미우다 해변 남쪽 부분과 청초한
빛깔의 바다 ①


▲  미우다 해변 남쪽 부분과 청초한 빛깔의 바다 ②

▲  나그네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바다
여름 제국 시절에 왔다면 그 유혹에 흥분하여 무조건 풍덩했을지도 모른다.

▲  미우다 해변과 이곳의 상큼한 장식물, 바위섬
해변 바로 앞에는 작은 바위섬이 두둥실 떠있다.

▲  바위섬을 점거한 사람들

▲  대자연이 미우다에 내린 보물, 바위섬
바위섬의 이름은 아직 없다. 만약 저 섬이 없었다면 해변의 운치도 50% 이상
떨어졌을 것이며, 해변과 섬 사이에 수심도 안정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  미우다해변 북쪽 부분

▲  미우다해변의 평화로운 풍경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바다 너머로 길쭉하게 목을 내민 저곳은?

바다 너머로 길쭉하게 보이는 곳은 도노사키(전기, 殿崎)로 저곳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왜국이 자화자찬용으로 닦아놓은 '일러우호의 언덕'이 있다.

왜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그 강하다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마도에서 요행으로 때려잡
았다. 그때 영혼까지 썩 털려 방황하는 러시아군을 대마도 사람들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집으
로 데리고 와 그들을 재워주고 밥을 제공했으며 씻을 수 있게 뜨거운 물도 마련해주었다는 것
이다. 하여 왜는 그것을 엄청 강조하며 러일 우호 및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현장이라고 빡빡
우겨대고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에게는 다소 얄밉고도 씁쓸한 현장으로 몇몇 여행상품에
서는 저곳을 트래킹 명소로 들리고 있다.


 

♠  대마도 북쪽 끝에 자리한 본토 바라기
한국전망대(韓國展望臺)

▲  한국전망대(한국전망소)

미우다해변을 둘러보고 이번 대마도 나들이의 마지막 답사지인 한국전망대로 이동했다. 상대
마정 북부순환로(히타까츠~미우다~도요~와니우라~오우라~히타카츠)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가
면 한국전망대 입구가 마중을 나오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가파른 1차선 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한국전망대가 있다.

와니우라 해안 언덕 정상에 자리한 한국전망대는 대마도의 최북단(부속 섬은 제외)으로 이름
그대로 대마도의 주인인 우리나라(한국)를 바라보는 전망대이다. 1997년 5월에 세워진 것으로
그 성격에 걸맞게 본토식으로 지어졌는데, 본토의 한옥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 서울 탑골공
원에 있는 팔각정(八角亭)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으며, 건축자재도 모두 본토에서 가져왔다.

오로지 본토 바라기로 지어진 곳으로 여기서는 본토의 부산이 바라보인다. 거리는 약 50km로
날씨가 좋으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나 우리가 갔을 때는 바다 구름이 조금 낀 상태라 부산
은 커녕 영도(影島)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 날씨를 잘 맞춰서 가야 된다. 날씨에 따라 '한국
전망대'가 되느냐 단순히 '대한해협 전망대'가 되느냐 갈리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바라보는 부산의 야경(夜景)은 천하일품이라 그 야경을 찍으러 사진쟁이들의 발
걸음이 잦다. 낮에는 비록 부산이 두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밤에는 아주 지독한 흐린 날씨만
아니라면 90% 이상 부산 야경 구경이 가능하다. 여기서 부산 앞바다까지 어둠을 몰아내려는
어떠한 빛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매년 10월 말에 광안리 해변에서 열리는 부산불꽃축
제까지 여기서 구경을 할 수 있다. (밤에는 오로지 부산 지역만 야경이 환함)

▲  정면에서 바라본 한국전망대

▲  동쪽에서 바라본 한국전망대

이곳에 전망대를 세운 것은 단순히 부산이 바라보여서가 아니다. 왜정 때 대마도에 징용 등으
로 온 본토 사람들이 설과 추석에 바다 너머로 희미하게 다가오는 본토를 바라보며 망향의 한
을 달래던 곳이기 때문이다.

1997년 이곳이 지어졌을 때는 부산과 대마도가 뻔히 보임에도 서로를 잇는 뱃편이 없어 본토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한국전망대는 다소 한가했다. 그러다가 1999년 뱃편이
생겼고, 본토가 바라보이는 그 잇점 하나로 본토 사람들의 발걸음이 크게 늘면서 대마도의 필
수 관광지로 성장했다.
이곳 외에도 여기서 가까운 가미아카타마치의 좌호만(佐護灣, 사고만) 해안에도 부산을 바라
보는 조망대가 닦여져 있다. 그곳 이름은 '이국이 보이는 언덕전망대(異國の見える丘展望臺)'
로 날씨가 좋으면 능히 부산이 바라보인다. 허나 한국전망대의 위엄에 눌려 본토 사람들의 발
길은 적으며, 대마도 여행상품에서도 거의 취급을 하지 않는다.


▲  한국전망대 밑에 펼쳐진 와니우라 포구
이곳은 대마도에서 가장 북쪽 마을이다.


전망대는 2층 규모로 2층에 대마도 관련 여러 정보와 여기서 담은 부산 사진이 여럿 전시되어
있다. 허나 특별한 것은 없으며,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곳은 오로지 본토 바라기용 명소이다.
본토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부산과 대마도가 정말 가깝구나','대마도는 우리 땅','본토와 이
리 가까운데 어찌하여 원숭이들 땅이 되었나?','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해방시키자' 이런 생각
들을 많이 할 것이다.
반면 왜인들은 '한국 땅이 참 가깝다','한국을 반드시 점령하자~' 이런 생각들을 하겠지. 말
로는 대마도와 가까운 부산을 바라보는 단순한 전망대라고 하지만 속뜻은 모른다. 이래서 이
중성이 심한 왜열도 원숭이들을 늘 경계해야되며 반드시 때려잡아야된다.


▲  한국전망대에서 바라본 대한해협 (부산 방향)
저 흐릿한 수평선 너머로 부산이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오늘은
바다 구름이 너무 짙어서 조망의 품질은 이것이 전부이다.

▲  한국전망대에서 바라본 와니우라 앞바다와 해율도(海栗島, 우니지마)

앞바다에 길쭉하게 떠있는 섬은 해율도(우니지마)이다. 저곳이 대마도와 왜국에서 가장 우리
나라와 가까운 최전방으로 해상자위대 군부대를 두어 매의 눈으로 북쪽을 감시하고 있다. 나
중에 우리가 대마도를 무력으로 해방시킨다면 제일 먼저 저곳을 초토화시켜야 된다.


▲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朝鮮國 譯官使 殉難之碑)
(윗쪽 비석이 순난지비, 밑의 검은 피부의 표석이 2003년 3월 7일에 세운 것)


한국전망대 앞에는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가 있다. 돌로 크게 2중의 석단(石壇)을 쌓고 그
위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비석을 올렸는데, 비석의 이름 그대로 역관사의 순난(殉難)을 기억하
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1703년 2월 5일(양력 3월 7일) 조선 역관사 108명과 대마도 선원 4명을 태운 배가 부산포(釜
山浦)를 출발해 대마도로 향했다. 허나 대마도 코 앞인 와니아루 앞바다에서 격한 파도를 극
복하지 못하고 침몰했고, 배에 탄 112명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역관사는 오늘날 공무직 통역사로 대마도와 왜국에서는 그 108명이 모두 대마도 21대 도주(島
主)인 종의진 조문 및 새 도주가 된 종의방 취임 축하를 위해 왔다고 그런다. 허나 한 나라의
왕도 아니고 조선에 속한 변방 섬 도주 따위에 조문과 취임식에 그 많은 인원을 보낼 이유가
전혀 없다.
그때 왜열도는 지방 세력(번주)들이 중앙(에도막부)과 따로 놀던 시절이었다. 하여 규슈와 혼
슈의 많은 지방 세력들은 조선에 조공(朝貢)을 보내거나 정치적, 경제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
다. 마침 대마도주 조문과 취임 축하를 위해 역관사를 보낼 일이 있어서 그 배에 에도막부와
지역 세력들에게 파견하는 역관들까지 싹 태워서 보낸 것이다. 아무리 조선의 항해술이 우수
하다고 해도 거친 바다를 뚫고 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지라 한꺼번에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마도 직전에서 침몰하여 그 아까운 외교 인재들이 싹 변을 당한 것이다.

이후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1991년에 112개의 영석(靈石)으로 순난지비를 세웠으나 그들의
이름은 모두 애석하게도 전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가문가사료(宗家文庫史料)'에서 그들
의 이름을 머금은 묵서소책자(墨書小冊子)가 발견되었고, 그들의 300주기가 되는 2003년 3월
7일 기존 순난비 앞에 그들의 명단을 적은 표석을 세웠다.
그때 역관사의 대표는 정역(正譯)인 한천석(韓天錫)이며, 부역(副譯)은 박세량(朴世亮) 등 20
여 명, 50여 명의 중관(中官), 20여 명의 하관(下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존재는 대마
도에서 이렇게나마 남게된 것이다.

부산에서 대마도는 거리는 무척 가까우나 바다가 종종 흥분기를 보여 선박 침몰 사고가 많이
있었다. 특히 한국전망대 앞 와니우라 앞바다와 해율도 주변이 가장 말썽으로 1459년 통신사
(通信使)를 태운 배 2척이 침몰해 1명을 빼고 모두 사망한 일이 있었으며,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대마도로 적지 않게 표류해와 대마도주는 그들을 표민옥(漂民屋)에 수용하여 고향으
로 보냈다. (대마도주는 표류민들의 표민옥 숙박비를 조선 조정에 청구했음)


▲  한국전망대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산책로

한국전망대는 주변 조망까지 포함해서 20~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는 히타까츠 뱃시간 때
문에 20분 남짓 머물다 떠났지만 시간이 널널하다면 주차장 동쪽에 있는 풍포대(豊砲臺)유적
과 주차장 서쪽 언덕에 있는 조그만 신사도 같이 보기 바란다. 신사는 와니우라 마을의 서낭
당 같은 존재로 근래 지어진 작은 건물이나 대마도 해안 마을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
으며, 풍포대는 왜정 때 대마도 보호를 위해 닦여진 요새의 하나이다.


▲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우리를 옮겨줄 대아고속해운 오션플라워호

한국전망대를 끝으로 대마도 답사는 아쉽게도 마무리가 되었다. 부산행 마지막 뱃시간 때문에
미우다해변과 한국전망대에서 머문 시간이 다소 짧지만 그건 어쩔 도리가 없다. 보통 봄과 여
름, 가을에는 부산행 마지막 배가 16시대에 있고, 겨울과 초봄에는 15시대에 있는데, 그 시간
에 따라 히타카츠 주변 일정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다시 히타카츠 마을로 돌아와 여객터미널 부근에 있는 면세점(免稅店)에 들렸다. 대마도가 우
리의 옛 땅이나 지금은 외세가 불법 점거하고 있는 상태라 해외로 분류되고 있다. 해외여행에
서 면세점 방문은 필수라 이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건강식품과 화장품, 빵과 초
콜렛 등의 간식류, 기념 장식용, 담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여 대마도를 찾는 본토
사람 중에는 오로지 면세점 쇼핑 때문에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행들은 담배와 화장품, 왜식 된장인 나토 등의 건강식품을 많이 샀으나 나는 돈도 없고 딱
히 땡기는 것이 없어서 아주 저렴한 고양이 장식물을 샀다. 이른바 오른발을 들고 복을 부른
다는 고양이상이다. 가격은 400엔 정도로 기억한다.
그렇게 면세점의 호주머니를 넉넉히 채워주고 히타카츠 여객터미널로 넘어갔다. 한산한 히타
까츠 마을 거리와 달리 여객터미널은 본토로 돌아가는 본토 사람들과 부산을 찾는 대마도 애
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기서 30분 정도 대기하다가 16시 넘어서 부산으로 가는 대아고속해운의 오션플라워(Ocean
flower)호에 몸을 싣는다. 이 배는 전날 부산에서 이즈하라로 내려왔을 때 탄 배로 하루만에
다시 신세를 진다.

시간이 되자 배는 입을 모두 봉하고 미끄러지듯 대한해협으로 나간다. 다행히 파도는 잔잔했
고 여로를 너무 살찌우다보니 몸이 고단하여 40분 이상 꿈나라를 방황했다. 그렇게 1시간 10
여 분을 달려 부산항국제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다. 전날 아침에 이곳을 출발해 다음날 오후
늦게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정말 1박2일 짧기는 짧다. 하긴 인생도 짧다고 하는데 그까짓
1박2일은 정말 티끌만도 못하지.

여기서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나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2004년부터 벼르고 별러서
이제서야 건너간 대마도, 옛날 가야와 신라, 백제가 왜열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대마도와 대
한해협을 지겹도록 건너갔고 660년 이후, 백제가 망하자 수만 명의 백제 사람들이 대한해협을
거쳐 백제의 속방이자 별채인 왜로 넘어갔다.
신라는 종종 군사를 보내 대마도와 왜를 쳤고, 신라 후기에는 신라해적이라 표현된 신라 수군
과 지방 세력의 수군이 대한해협과 대마도를 오랫동안 휘젓고 다니며 크게 위엄을 과시했다.
(894년 대마도를 공격한 신라해적은 후백제 수군으로 여겨짐) 고려 현종(顯宗) 때는 발해(渤
海) 후손의 일원인 여진족 수군이 대마도와 규슈를 초토화시켰으며, 1274년과 1281년 고려와
원(몽골) 연합군 역시 대마도와 규슈를 아작냈다.
조선통신사는 왜열도와 대마도 단속을 위해 이 거친 바다를 건너갔으며, 20세기 이후에는 많
은 본토 사람들이 이 바닷길을 건너 대마도와 왜열도로 건너갔다.

다음에 대마도를 찾을 때는 꼭 여권 없이 갈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2년 뒤 방문에도 여권은
여전히 필요했다. 그만큼 대마도는 우리에게 애증의 땅이다. 휴전선 이북 회복도 급하지만 툭
하면 독도(獨島)가 지네 땅이라 개소리나 일삼는 왜국의 헛소리 대응용으로 대마도는 꼭 걸고
넘어가 반드시 우리 영역으로 해방시키기를 꿈꿔본다.
대마도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어여 우리를 왜열도 원숭이들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솔직히 왜
국도 대마도를 변두리 섬으로 여겨 크게 관심도 없고 완전 외면 수준이다. 심지어 왜열도 애
들은 대마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들도 수두룩 하다고 한다. 만약 본토 부산에 편입되면
대마도는 지금보다 훨씬 환경이 좋아지고 찾는 이가 100% 이상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 대마도
가 살려면 예전 주인에게 오는 것이 맞다. (물론 지나친 난개발은 안됨)

이렇게 하여 대마도 첫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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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 단종애사의 현장, 영월 청령포 '

▲  서강 너머에서 바라본 청령포


 

 

봄이 천하만물의 격한 지지를 받으며 겨울 토벌에 여념이 없던 3월의 끝 무렵에 친한 후배
와 강원도 내륙 지역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홍천(洪川)의 여러 벽지 명소를 찍고 평창(平昌)을 거쳐 영월(
寧越) 땅으로 들어섰다. 이날 최종 목적지는 충북 단양(丹陽)으로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일
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치고 오랜만에 들어온 곳이라 그냥 지나치기는 섭하다. 하여 읍내
직전에 있는 선돌을 보려고 했으나 실수로 놓쳐버려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었던 청령포를
복습하기로 했다.

청령포는 영월읍내와 무척 가까운 곳으로 주차장에 이르니 16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주차장
은 거의 만땅이다. 간신히 자리를 잡아 차량을 잠재우고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해 유료
(有料)의 땅, 청령포로 들어선다.


 

♠  하늘이 빚은 천연 감옥, 청령포(淸泠浦, 명승 50호)

▲  청령포 나룻터와 서강 너머로 보이는 청령포

입장료를 내고 서강(西江) 강변으로 내려가면 청령포 나룻터(선착장)가 나온다. 청령포는 창
살도 필요 없는 궁벽한 곳이라 섬이 아닌 육지임에도 무조건 배를 타고 건너야 된다. 나룻배
는 2척이 다니고 있는데, 평일은 보통 1척, 주말과 휴일은 2척을 굴리며, 정해진 출발 시간이
없이 사람이 어느 정도 차면 시동을 걸고 느릿느릿 청령포로 이동한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 배를 돌리기가 무섭게 맞은편 강변에 닿는다. 소요시간은 길게 늘려봐
야 3~4분 정도로 배멀미가 나올 틈도 없으며, 수면이 잔잔하고 중간 부분을 제외하면 수심도
얕다. 허나 온갖 어이없는 재해와 재난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라 너무 방
심은 하지 말자.


▲  청령포와 속세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 청령포 나룻배

▲  나룻배에서 바라본 청령포 나룻터(선착장)

청령포에 대한 설래임을 간직한 나그네를 태운 배는 180도 돌리기가 무섭게 청령포 강변에 닿
는다. 청령포 강변은 인공(人工)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산 강변으로 돌이 무지 많으며, 배를
타고 내리는 시설도 따로 없어 그냥 강변 모래벌에서 타거나 내리면 된다.


▲  별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 놓아둔 청령포 강변

▲  소나무숲에 묻힌 청령포
청령포의 핵심이자 상징인 단종 유배처가 저 송림에 묻혀있다.


청령포 강변에는 돌이 무지 많다. 그런 돌밭을 지나면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 숲속에 단종
애사의 쓰라린 현장, 단종 유배처가 깃들여져 있다.
강변에는 탐방로가 따로 닦여져 있지 않으며, 울퉁불퉁한 돌밭을 알아서 통과해 소나무숲에
안기도록 되어있다. 대신 소나무숲에는 단종어소와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까지 나무데크 탐
방로를 닦아두었다.

청령포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이곳이 솔내음이 그윽한 공간이 된 것은 단종이 유배된 인연으
로 오랫동안 금표(禁標) 구역에 묶였기 때문이다. 금표란 왕릉이나 왕족 묘역, 제왕(帝王)이
내린 땅, 나무 보호와 국가 시설 보호를 위한 금지된 땅으로 이곳에는 허가된 사람 외에는 함
부로 출입할 수 없었고, 나무 벌채도 일절 금지된다.

청령포 소나무숲은 이곳에서 가장 늙은 나무인 관음송을 시작으로 점차 숲을 이룬 것으로 여
겨지며 수십 년에서 100~400년 묵은 소나무들이 삼삼하게 우거져 하늘을 가리고 단종의 유배
처를 소중하게 품고 있다. 그럼 여기서 청령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소나무숲에 감싸인 단종어소

청령포는 단종애사(哀史)의 주요 현장이자 장릉(莊陵)과 더불어 영월에 왔다면 꼭 들려야 되
는 영월의 대표 명소이다. 이곳이 크게 유명세를 탄 것은 소년왕 단종의 유배지란 점과 하늘
의 감옥 같은 척박한 지형, 그리고 270도나 크게 굽이쳐 흐르는 서강의 환상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서강은 형제인 동강(東江)과 속히 합세해 한강을 따라 보다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만 칼처
럼 솟은 산의 낙원인 강원도의 지형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장대한 세월 동안 오로지 굴곡 노
선 직선화를 위해 청령포 뒷쪽을 열심히 쪼아댔지만 지형이 단단하여 아직까지 성과가 없다.
하지만 직선화를 향한 굳은 집념은 여전하여 지금도 직선화 프로젝트를 놓지 않고 있다.

청령포의 주인공인 단종은 조선 6대 군주로 1441년 7월 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
后) 권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휘(諱, 제왕의 이름)는 홍위(弘暐)로 1448년에 왕세손(王
世孫)에 책봉되었으며,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윤상(尹祥)에게 학문을 배웠다.
1450년 세종(世宗)이 승하하고 그의 첫 아들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은 자연히 왕세자(
王世子)가 되었으며, 문종이 늘 병을 달고 살다가 재위 2년 만인 1452년 5월 18일, 승하하자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철부지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왕을 둘러싼 권력 구도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초반
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이 단종을 보필하며 주도
권을 잡았는데,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 일부가 능력도 좋고 야망이 크니 은근히 위협이
되었다. 그중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문무(文武)가 뛰어나고 다재다능했는데, 김종서와 뜻
이 통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견제하며, 의정부(議政府)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를 추진했다.
그들의 견제에 위기를 느낀 수양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弘達孫) 등을 수하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1453년 10월, 불시에 김종서 집을 습격해 김종서를 죽이고, 왕명을 빙
자해 신하들을 모두 소환해 황보인과 조극관(趙克寬) 등을 때려죽였다. 이 사건이 그 이름 돋
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정권과 병권을 움켜쥐었고, 정인지(
鄭麟趾)와 한확(韓確) 등 자신의 측근을 정승에 앉혔다. 또한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해 왕의 이름으로 받기도 했다.
그렇게 수양의 위세가 강해지며 어린 왕 단종을 은근히 정신적으로 압박하자 의지할 데도 없
고 정신적 두려움에 염통이 쪼그라들던 단종은 결국 1455년 6일 11일, 큰숙부 수양에게 양위
의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넘겼다. 이렇게 해서라도 숙부의 칼날을 피하고 목숨을 부
지하고자 함이었다. 하여 수양은 조선 제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되었고, 단종은 상왕(上王)
으로 물러앉아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가만두질 않는다고 했던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잔뜩 반감
을 품은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 김문기(金文起) 등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은 세조
와 그의 측근을 몰아내고 단종 복위를 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다가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이 오자 세조는 그들에게 연회를 베풀기로 했는데, 그때 칼
을 들고 제왕 뒤에 서서 호위하는 운검(雲劍)의 역할을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이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세조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다. 허나 뭔가 찜찜했던 세조는 운검을 세우지
않으면서 그 좋은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이후 적당한 기회는 오지 않았고, 단종 복위에 가담한 김질(金質)은 초조하다 못해 염통이 검
게 타들어가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밀고를 해버렸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그 유명한 사
육신(死六臣) 사건이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등의 단종 복위 추진에 뚜껑이 제대로 뒤집힌 세조는 그들을
고문하고 용산 새남터로 보내 사지를 절단 내어 죽였다. 그리고 단종은 사육신 등과 밀모를
했다고 여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처를 꼼꼼히 물색하다가 육지 속의 작은 섬과도
같은 이곳 청령포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하여 1457년 6월 22일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은 강제로 유배길에 올랐고 영도교(永渡橋, 청
계7가와 청계8가 사이)까지 따라온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단장의 이별을 나누었다.
이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어득해(魚得海)가 50명의 군사를 대동해 노산군을 호종했으
며, 영월까지는 6일이 걸려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했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머물 기와집이 급하게 마련되었다. 그는 그 집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노산
대에 올라 서울과 왕비를 그리워했으며, 관음송 가지에 걸터앉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하늘이
내린 자연산 감옥, 청령포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다가 그해 가을 홍수로 청령포 상당수가 물에
잠기게 되자 영월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청령포 생활은 끝을 맺
는다.
허나 순흥(順興, 영주시 순흥면)으로 유배된 그의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부
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된통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세조는 다
시 한번 뚜껑이 열리게 된다. '노산군을 저리 두면 계속 역모가 생길 것이다' 생각한 세조는
결국 후환을 제거하고자 조카에게 사약을 보내는 비정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숙부가 보낸 쓰디쓴 사약을 들이키고 진한
피를 토하며 힘없이 쓰러지니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다.

청령포는 북과 동, 남쪽 등 전체의 ¾이 서강에 감싸여 있고, 북쪽은 급하게 솟아나 낭떠러지
를 이룬다. 서쪽은 비록 땅과 붙어있긴 하나 육육봉(六六峰)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에 막혀
있어 어지간한 독종이 아닌 이상은 넘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다. 자연히 외부와 단절된 상태
로 고적하게 살아야 했으며, 첩첩한 산주름 속에 단단히 묻힌 외로운 곳이다보니 온갖 산짐승
들이 가득해 해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을 정도였다.

그가 청령포에 있을 때,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거의 밤마다 몰래 찾아와 단종을 위로했
고,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원호(元昊)는 청령포와 가까운 제천시 송학면에 관
란정(觀瀾亭)을 짓고 매일같이 단종에게 진상할 음식과 서신을 표주박에 담아 서강에 띄워보
냈다. 그것을 청령포에 있던 단종이 받아보았고, 단종이 다시 떠내려보내면 이상하게도 강을
역류하여 관란정으로 갔다고 전한다.

때묻지 않은 강과 칼처럼 솟은 산,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 거기에 역사까지 어우러진 아름
다운 명소로 수십~수백 년 묵은 소나무 덕에 4계절 내내 솔내음이 가득하며, 비록 단종에게
청령포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겠지만 오늘날 나그네들에게는 잠시나마 정처 없는 마음을 내던
지고 싶은 아름다운 명소이다. 이런 곳에 오면 사진기도 흥분하여 작품들이 마구 나오며, 영
월의 대표 꿀단지이자 단종을 상징하는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청령포 일대는 국가 명승 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월10경 중 제2경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 68 (청령포로 133, ☎ 033-374-1317)


 

♠  청령포 둘러보기

▲  단종어소(端宗御所) 기와집

청령포 소나무숲에 들어서면 왼쪽(남쪽)에 돌담에 둘러싸인 단종어소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공간으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단종이 머물던 팔작지붕 기와집
이 있고, 동쪽에 궁녀와 시녀가 살던 초가 1동(행랑채)이 있다.
단종이 사라지자 화마(火魔)도 크게 뚜껑이 열렸는지 슬그머니 태워먹으면서 아련하게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00년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참고하여 그럴싸하게 재현했다.

기와집과 행랑채 초가에는 단종과 궁녀, 시녀, 아전을 재현한 밀납인형이 있으며, 가구와 책
장, 이불, 장독대 등을 갖다놓아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묻어나게 했다.


▲  방 3개, 부엌, 창고로 이루어진 5칸짜리 초가 행랑채
시녀와 궁녀들은 여기서 생활했는데, 한 방에 2명씩 6명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 옆에는 부뚜막 연기가 슬쩍 피어오를 것 같은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음식물과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광)가 있다.

▲  초가 행랑채와 돌담, 그리고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숲

▲  깨끗하게 정리된 시녀의 작은 방

▲  속 빈 강정처럼 놓여진 장독대

▲  바느질하는 침모(針母)의 모습
단종을 위해 침침한 눈을 극복하며
옷 수선에 여념이 없다.

▲  부뚜막으로 이루어진 부엌
나이든 시녀가 단종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단종이 비록 강원도 산골로 쫓겨났지만 전직 제왕에다가 왕족이니 그의 생활공간은 관청 건물
못지 않은 규모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 바로 그의 공간인 것이다.

단종은 햇살이 잘들어오는 남쪽 방에 푸른 도포를 입고 책을 읽는 잘생긴 도련님처럼 재현되
었는데, 바로 옆방에는 어소를 관리하고 단종의 시중을 드는 아전이 바짝 엎드려 단종에게 인
사를 올리고 있고 그 곁에는 다기(茶器)를 머금은 조그만 상이 있다.


▲  기와집 내부, 단종의 방

▲  책을 보며 시름을 달래는 단종

▲  시녀가 생활하던 기와집 방


▲  단종이 지은 어제시(御製詩)
단종의 한과 상처 받은 어린 마음이 잘 나타나 있어 나그네의 옷깃을 잠시
여미게 한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해매니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물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

어소 기와집 옆에는 비석을 품은 1칸짜리 비각(碑閣)이 있다. 그 안에는 1763년에 영조(英祖)
의 명으로 세운 유지비가 있는데, 이는 터만 아련하게 남은 단종어소의 위치를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62cm이다.
하얀 피부의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그 앞면에
비석의 이름이 된 '단묘재본부시유지비'라 쓰여있고, 뒷면에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
秋 涕敬書令原營竪石 地名 淸泠浦'라 쓰여있어 조성 시기와 이곳 지명을 알려준다.
여기서 황명(皇明)은 조선이 쓸개까지 내주며 엄청나게 굽신거리고 떠받들던 명나라이고, 숭
정은 명나라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숭정 무진은 1628년이다. 그때를 기준으로
계미(癸未)년이 3번이 지난 해의 가을에 세우니 그때가 1763년 가을이다. (조선의 군주와 위
정자, 선비 상당수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명에 대한 아주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일삼으며
명을 그리워하고 나라의 국력을 개판으로 만듬)
'涕敬書令原營竪石'은 원주감영에 영을 내려 슬픔과 공경으로 세웠다는 뜻이며, '지명 청령포
'는 말 그대로 이곳의 지명이 청령포임을 뜻한다.

오랫동안 홀로 단종어소터를 지키며 소나무 그늘에 있다가 2000년에 비석 주변에 어소가 복원
되면서 어소 뜨락에 있게 되었다. 물론 비석의 위치는 그대로이다.


▲  비각에 소중히 담긴 단묘재본부시유지비

▲  햇님도 맥을 못출 정도로 무성함을 자랑하는 청령포 소나무숲
아직 대낮임에도 숲속은 벌써부터 어두컴컴하다.

청령포 한복판에는 관음송이라 불리는 장대한
소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는 청령포 소
나무의 시조로 다른 소나무들보다 하늘과 더욱
맞닿아있어 그의 위치와 위엄을 실감케 한다.

관음송의 높이는 30m, 가슴높이 둘레 5.19m로
1.6m 높이에서 줄기가 2갈래로 갈린다. 다른
소나무에 비해 줄기 피부가 유난히 붉고 줄기
중간에 잔가지가 없이 매끈하게 자란 제법 아
름다운 소나무로 단종이 이 나무 줄기에 걸터
앉아 시름을 달랬다고 전한다.
지금이야 아주 큰 나무가 되어 오를 엄두도 솟
지 않지만 당시 관음송의 나이를 60~80년 정도
로 추정하고 있으니 줄기가 갈라지는 곳까지는
능히 올랐을 것이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여 살로 보고 있으며, 그
의 이름은 관세음보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고 해서
관(觀), 그의 슬픈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음(
音)을 붙여 관음송이라 했다고 한다. 이 이름
은 후대에 단종을 섬기던 영월 주민들이 지어
낸 것으로 보인다.

▲  청령포 관음송(觀音松)
- 천연기념물 349호

나라에 큰 일이 터질 때마다 나무의 피부가 검게 변해 나라의 변고를 알려주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어쩌면 단종의 혼이 깃든 나무로 여기고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  단종의 손때가 담긴 망향탑(望鄕塔)

관음송에서 북쪽 벼랑으로 가는 길이 2갈래 있다. 왼쪽으로 가면 망향탑, 오른쪽은 노산대로
북쪽 벼랑은 한 줄기로 이어져 있어 어느 곳을 먼저 오르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곳에 천연의 감옥인 청령포가 빚어져 있고 3면이 죄다 강에 막혀
있는데 그중 북쪽은 각박하게 벼랑이 형성되어 있어 나름 절경을 자아내며,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 맛이 아주 일품이다. 물론 단종에게는 이 모든 것이 지옥처럼 보였겠지만 우리 같은 나
그네들에게는 하루 머물고 싶은 천연의 명소이다.

노산대와 육육봉 사이 벼랑 위에 돌로 쌓여진 조그만 돌탑이 있다. 세상에서는 그를 망향탑이
라 부르는데, 단종이 청령포 생활을 했을 때, 궁궐과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이곳에 오를 때마
다 여기저기 흩어진 잡석을 주워 쌓았다고 한다. 청령포에서 대략 1달 가량 머물렀고 딱히 할
것도 없는 처지이니 이곳을 찾는 횟수가 꽤 많았음을 망향탑이 보여준다. 돌탑을 이루는 돌
가운데, 묵은 때가 담긴 돌은 단종의 손길이 닿았던 것으로 보이며, 하얀 피부의 돌은 근래에
얹혀진 것이다.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 철책을 둘러 탑을 보호하고 있다.

과연 단종이 직접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청령포에 남긴 유일한 흔적으로 그의 착잡한
마음을 가늠케 한다.


▲  망향탑과 노산대(소나무가 우거진 벼랑), 그리고 서강

▲  망향탑 서쪽 막다른 곳

망향탑 서쪽은 길이 막혀있다. 아주 가늘게 육육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통행이 금지
되어 있고, 양쪽이 거의 벼랑이라 오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산길 북쪽은 서강이 오랜 세월
을 두고 깎은 거의 수직 각도의 벼랑이며, 남쪽은 수직 정도는 아니지만 각박하긴 마찬가지이
다.

이곳에 전설을 남긴 단종도 이 가느다란 산길을 보며 도망칠 생각이 굴뚝 같았을 것이다. 허
나 그게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있고, 군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으며,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편하게 자란 그가 이런 산을 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렵다.


▲  망향탑에서 바라본 서강
단종의 구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서강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청령포 곁을 보듬으며 유유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 하긴 서강이 그의
사연을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부질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노산대(魯山臺)

▲  금표비에서 바라본 노산대(魯山臺)

망향탑 동쪽에 각박하게 생긴 층암절벽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노산대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저녁 노을이 질 때나 마음이 갑갑할 때 친히 올라 시름을 달래던 곳이라 전하
며, 그 연유로 노산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망향탑 못지 않게 각박한 벼랑 위에 자리해 있는데, 지금이야 탐방로가 잘 닦여져 있어 접근
하기가 쉽지만 탐방로가 없다면 결코 쉽게 오르지 못할 언덕이다. 관음송과 금표비 북쪽에 자
리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서강과 주변 풍경이 제법 일품이다.


▲  금표비와 관음송 주변 소나무숲

▲  청령포 금표비(禁標碑)

노산대를 내려와서 나룻터로 가다보면 소나무숲 그늘에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난 금표비를 만
나게 된다.
이 비석은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에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나무 벌채를 금하고자 1726년에 세
운 것으로 앞면에는 한문으로 '청령포 금표'라 쓰여 있고, 뒤면에 '동서 300척, 남북으로 490
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 또한 금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단종 시
절에도 그런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측면에 '숭정(崇禎) 99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1726년임을 알게 해준다.
비석은 30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세월의 거친 손때로 피부가 잔뜩 헝클어져 있다. 혹 단종의
사연에 비석이 크게 운 것은 아닐까?

청령포 산책은 '나룻터 → 단종어소 → 관음송 → 망향탑 → 노산대 → 금표비 → 나룻터' 순
으로 했는데, 그 반대로 해도 무관하며, 이들은 청령포의 주요 구성원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
란다.


▲  금표비 주변 소나무숲

▲  배를 타고 다시 속세로 나오다 (청령포 강변)

금표비를 둘러보고 강변으로 나오니 어느덧 17시 반이 되었다. 청령포의 빼어난 경치에 잠시
눈 호강을 누린 관광객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대기하고 있는 배에 올라탄다. 이 배가 오늘의
마지막 배는 아니며, 관람시간이 18시까지라 청령포에 단 1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운행한다.

배를 타고 잠시만에 청령포 나룻터에 도착, 졸고 있는 차량을 깨워 영월의 이웃 고을인 충북
단양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하여 청령포 나들이는 막을 고하며, 끝으로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했던 금부도사(禁府
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지은 시를 소개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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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8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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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이런 두멧골이?? 북악산 산주름 속에 깃든 백사실계곡, 부암동 능금마을, 평창동 소나무 (백사실약수터)

 


'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을 거닐다 '
(부암동 능금마을, 백사실계곡, 북악산 북쪽 자락)


▲  부암동 능금마을(뒷골마을)

▲  은덕사에서 바라본 부암동

▲  평창동 소나무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
을 찾았다.
북악산 북쪽 자락(부암동, 평창동 지역)에는 나의 오랜 즐겨찾기 명소인 백석동천(白石洞
天, 백사실계곡)을 비롯해 능금마을(뒷골마을), 평창동(平倉洞) 소나무 등의 명소가 깃들
여져 있는데 여름 제국의 핍박도 피할 겸, 간만에 그들을 복습할 생각으로 북악산의 품을
찾은 것이다.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弘濟川)을 건너 백석동천의 북쪽 관문인 현통사(玄通寺)와
백사폭포로 접근했다. 그곳을 지나면 백사골(백사실)의 속살로 들어서게 되는데 백사폭포
와 계곡 곳곳에 자리를 피고 피서 삼매에 빠진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숲속에 진하게 묻힌 백석동천 중심부에 이르면 이곳의 상징인 별서(別墅)터가 있고, 그곳
을 지나 은행나무와 소나무숲을 지나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여기
서 동쪽 산길로 들어서면 잘생긴 반석과 바위들이 늘어선 백사골 상류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은 백사골, 백사실, 백사실계곡 등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데, 정식 이름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표현한 이름이다.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엄
연한 일부로 백사폭포에서 백석동천 바위글씨와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직전까지를 주로
일컫는다.


 

♠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로 가는 산길)

▲  백석동천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너른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길쭉한 통나무 2개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
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서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
는 없을 것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외나무다리

사람도 많고, 차량도 많고, 빌딩도 많고, 돌아다니는 돈도 많고, 그저 복잡하고 각박하게 보
이는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기할 따름이다. 백사골은 그 존
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
계 같다.
백사폭포에서 시작된 백석동천은 이 외나무다리에서 사실상 끝이 나며 백사골은 능금마을 안
쪽까지 이어진다.


▲  백사골 상류의 평화로운 풍경
푸른 옷을 걸친 큰 나무가 하늘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겸손함 때문인지
곧게 자라나지 않고 허리를 푹 숙이고 있다.

▲  백사골 냇물이 잠시 쉬어가는 조그만 못

백사골에는 푸른 이끼 옷을 입은 바위들이 참 많다. 이끼가 마음 놓고 자라고 있다는 것은 여
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지, 백사골의 이런 청정함과 순수함이 앞으로도 영원했으면 좋겠다.


▲  온갖 채소와 과일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백사골 밭두렁

▲  남쪽에서 본 백사골 밭두렁

백사골 밭두렁은 여러 채소와 과일이 자라나고 있다. 비닐하우스와 밭을 지키는 원두막 같은
것도 있어 마치 산간지방의 깊은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라 백석동천에서 여러 번 놀
란 가슴을 또 놀라게 만든다.


▲  백사골 산길에서 만난 연분홍 코스모스의 위엄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마구 들쑤시는 코스모스들~ 코스모스가 가을
꽃의 상징이다 보니 6~8월에 왠 코스모스가 피나 싶겠지만, 성질 급한 코스모스는 이미 6월부
터 꽃망울을 피운다. 그러니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  완전 시골 둑방길을 거니는 기분 ~ 능금마을 백사골 둑방길

계곡 너머로 2012년에 지어진 커다란 농원용 비닐하우스가 있다. 도심에 있는 잇점을 살려서
요즘 잘나가는 허브 식물이나 과일 농장, 채소 농장, 농사 체험 현장 등으로 꾸리면 괜찮을
듯 싶다. 아무리 도심 속이라고 해도 이곳이 농촌인 것은 변함이 없다.


▲  능금마을에서 백석동천으로 내려가는 둑방길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두메산골마을
부암동 능금마을(뒷골마을)


▲  능금마을

부암동(付岩洞) 능금마을(뒷골마을)은 백사골 상류이자 북악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두멧골
이다. 행정구역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으로 주소는 분명 서울 종로구가 맞는데 분위기는
번잡한 도심을 제대로 비웃듯 첩첩한 산주름 속에 박힌 외딴 산골마을이라 그야말로 서울 도
심 속의 산골마을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능금나무가 많아 능금나무골, 능금마을이라 불렸는데, 뒷골마을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뒷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북악산 앞쪽인 청
와대 일대를 앞골이라 불렀다. 예전에는 뒷골마을로 많이 불려 나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부르
고 있으나 요즘에는 능금마을로 크게 부르고 있으며, 마을에는 약 10여 가구에 50~60명 정도
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의 지형은 백사골이 흐르는 북쪽은 내리막이고, 서쪽과 남쪽, 동쪽은 모두 산으로 막혀있
다. 창의문(자하문)에서 넘어오는 유일한 포장길인 남쪽 골목길(백석동2길)은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지형이 이렇다보니 시내보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며, 아랫
세상보다는 조금은 춥다.

마을 중앙부에는 창의문으로 나가는 골목길(백석동2길)의 종점이 있다. 그 종점이 마을 사람
들의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으로 여기서 더 이상 차량은 들어갈 수 없다. 게다가
궁벽한 곳이다보니 쓰레기도 1주에 이틀 정도만 수거하러 온다.
주차장 북쪽에는 슬레이트 지붕 여러 채와 2층짜리 빌라 1동, 비닐하우스가 여럿 있으며, 동
쪽으로 백사골을 따라 여러 가옥과 밭,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북악산이 베푼 백사골은 마을
을 동쪽에서 북쪽으로 가로지르며 백석동천과 홍제천으로 흘러간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려면 백사골을 거치거나 창의문(자하문)에서 북악산 허리에 둘러진 부
암동 산복길(백석동길)을 이용해야 된다. 세검정초교에서 접근할 경우는 마을까지 30여 분 걸
리며, 창의문에서 갈 때는 산복길(백석동길)을 따라 20여 분 걸어야 되는데 중간에 고개를 하
나 넘어야 된다. 차량으로 갈 경우에는 창의문에서 부암동 산복길을 타거나 북악산길로 접근
하면 되며, 그 흔한 대중교통의 혜택도 미치지 않는 시내 속 벽지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농사를 짓거나 시내로 출퇴근을 한다. 서울에서 공기가 1등급으로 맑고
청정한 계곡물이 흐르니 조촐하게 밭농사나 과수원을 하기에 적당하다. 백사골의 깨끗한 물을
먹고 자란 농작물(오이나 배추, 상추 등)은 밭과 비닐하우스에서 주민들의 갖은 정성을 거쳐
시내로 팔려 나간다.

이곳이 인구 1,000만을 지닌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 도심에 있음에도 개발의 칼질을 굴복시
키며 두메산골로 남을 수 있던 것은 푸른 기와집과 국무총리공관, 수방사 군부대를 비롯한 국
가의 예민한 장소를 품은 북악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북악산 주변은 개발제한구역
및 군사보호구역으로 상당수 묶여있다. 게다가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조선시대부터 서울을
지키는 전략적인 곳으로 군부대가 주변에 있으며, 북악산(백악산) 한양도성 능선을 따라 철책
과 초소가 줄지어 있다. 상황이 이러니 천박한 개발의 칼질도 무릎을 끓은 것이다.
북악산 북쪽 자락에 안긴 부암동과 성북동(城北洞)에 키다리 건물이 없는 것도, 녹지 비율이
두드러지게 높은 것도, 전원(田園) 분위기를 물씬 간직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북
악산과 인왕산의 성격이 180도 확 달라지거나 예민한 국가 시설들을 다른 데로 이전하지 않는
이상은 능금마을은 서울 도심 속의 두멧골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쭉 그리 되기를 염원해 본
다.
물론 마을 사람들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집 보수나 신축 등은 어느 정도 보장해줘야 될 것
이며, 북악산 나들이나 답사/출사를 이유로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은 삼가해야 될 것이
다. 어차피 도심 속의 두멧골이란 상징성 외에는 명소라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냥 지방 시골
에 널린 시골마을과 비슷하며 백석동천과 부암동 답사의 후식용으로 삼으면 적당하다.


▲  능금마을 북쪽 구역 (빌라 뒷쪽)

능금마을은 여러 번 와봤지만 딱히 명승지까지는 아니라서 제대로 둘러본 적은 없다. 하여 이
번에 제대로 마을의 속살을 살펴보기로 했다. 숨겨진 속살을 발견하고 보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다.

주차장에서 빌라가 보이는 북쪽 골목길을 오르면 조금은 낡아보이는 산동네 기와집과 번듯하
게 지은 2층 빌라가 나란히 나타나 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대변하는 듯 하다. 작지만 빌라까지
들어섰고 근래에 새로 몸단장을 한 주택이 여럿 있을 정도면 개발 제한도 어느 정도 풀린 모
양이다.
빌라의 옆구리를 지나면 그나마 포장된 길은 끝나고 흙길로 변신하는데, 마치 백두대간 깊숙
한 곳에 숨겨진 화전민(火田民) 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며 밭두렁과 수풀이 우거진 그 길의 끝
에는 전원주택처럼 생긴 아담한 집이 있다.

다시 주차장으로 나와서 백사골을 따라 이어진 동쪽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 길도 좁다보니 자
전거나 오토바이 등만 겨우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동쪽 골목길은 세월을 먹은 집들이 여럿
있으며, 밭과 과수원이 제법 펼쳐져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는 전원주택 스타일의 정원 넓은 집이 있다.

동쪽 골목길 중간에는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다. 따로 이정표는 없지만 조금은 가파
르게 동쪽으로 이어진 길이 바로 그 길이다.

* 능금마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산50~69


▲  경작물이 무성하게 익어가는 동쪽 골목길

▲  백사골과 나란히 한 능금마을 동쪽 골목길
문명의 혜택이 전혀 들어오지 못할 것 같은 이 산골에도 전기와 전화는
모두 들어온다.

▲  능금마을 동쪽 골목길 밭두렁

▲  경작물이 익어가는 동쪽 골목길


▲  부암동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각박한 고갯길
길의 경사가 각박해 내려가기는 쉬워도 오르는 건 조금 힘들다. (그래도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음)


 

♠  백사실약수터와 여러 돌탑들

▲  외나무다리 주변에 펼쳐진 하얀 피부의 반석
저 반석을 내려가면 계곡 오른쪽으로 백사실약수터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온다.


능금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백석동천으로 내려가 외나무다리를 지나면 윗 사진의 넓은 반석이
나온다. 반석(磐石)을 지나면 바로 계곡 건너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곳을 건너면 백사
실약수터를 알리는 조그만 이정표가 조용히 손짓한다.
백석동천(백사실)을 15년 넘게 들락거렸지만 백사실약수터는 한참의 세월이 흐른 이후에야 인
연을 지은 곳이다. 별서터와 바위글씨들, 능금마을이 전부인줄 알고 등잔 밑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으로 무슨 일이든 방심은 정말 금물이다.


▲  백사골 돌탑

백사실약수터로 인도하는 산길을 30초 정도 가면 산등성이에 수북하게 쌓인 돌탑이 마중을 한
다. 이곳을 지나던 중생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은 돌탑으로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악신
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백석동천 별서터가 지배층의 산물이라면 이 탑은 백성들의 한 줄기 희망과 애환이 만들어낸
산물로 별서터는 터만 남은 채, 성장이 멈추었지만 이 탑은 지금도 지나가는 이들에 의해 조
금씩 성장하고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돌탑 가족들 (얼핏 보면 3기처럼 보이나 4기임)

▲  옆에서 본 돌탑 가족

백석동천에서 백사실약수터로 오르는 산길에는 돌탑이 유난히도 많다. 앞 돌탑에서 3분 정도
가면 돌탑 4기를 만나게 되는데, (조금 후미진 곳에 있음) 이중 1기는 나머지 3기를 다 합쳐
도 한참이나 모자를 정도로 유별나게 크다.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으나 앞 돌탑과
달리 규칙적인 모습이고 그리 묵은 티가 보이지 않아 근래에 백사실 수식용으로 닦여진 것으
로 보인다.

돌탑을 만들려면 서로 비슷한 덩치로 만들 것이지 하나만 지나치게 크고 나머지는 완전 쥐꼬
리만한 크기라 마치 어미와 꼬마 3형제를 보는 듯 하다. 꼬마 탑도 어엿한 돌탑을 이루는 어
미탑처럼 장차 큰 탑으로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  백사실약수터로 오르는 적막한 산길

▲  소나무 산길 (백사실약수터 방향)
길을 가다가 뜬금없이 산신이나 신선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선녀 누님이
갑자기 나타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첩첩한 산주름의 산길이다.

▲  백사실약수터와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산길

백사실약수터는 백사골의 거의 유일한 약수터이자 백사골의 오랜 은자(隱者)로 능금마을 뒷쪽
(북쪽)에 숨겨져 있다. 북악산이 속세에 베푼 소중한 샘터로 백사골의 청정한 기운을 머금은
탓인지 수질도 청정하고 맛도 좀 달콤한 기분이다.
벽돌을 다진 약수터 주변은 산뜻하게 정비되어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의자와 간단한 운동시설
이 닦여져 있다. 약수터 뒷쪽에는 나무 기둥 난간이 둘러진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여러 식
물이 담겨져 있어 마치 신선의 묘약(妙藥)이나 신선초(神仙草)가 자라는 듯한 기분이다. 그리
고 약수터 동남쪽으로 산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길이 마중을 한다.


▲  백사실약수터 인근 바위에 심어진 조촐한 돌탑
이 돌탑도 앞에 돌탑 가족과 마찬가지로 근래에 조성된 것 같다. 그 모습이
산이나 계곡에 널린 일반적인 산악신앙의 돌탑이 아닌 조그만
봉수대(烽燧臺)처럼 보인다.


 

♠  북악산 백사실 동쪽 능선

▲  백사실 동쪽 능선길

백사실 동쪽 능선은 북악산길에서 시작되어 백사실약수터, 은덕사를 지나 북쪽으로 KT기지국,
평창동조망점까지 내려가듯 이어진다. 백사실의 동쪽 지붕으로 중간중간에 현통사와 백사골(
백석동천), 평창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을 늘어뜨렸으며, 소나무를 비롯한 갖은 나무들이 삼삼
하게 우거져 있다.
백사골에 왔다면 별서터와 계곡만 살피지 말고 백사실약수터와 1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백사
골 동쪽 능선도 한번 거닐기 바란다.


▲  소나무가 우거진 동쪽 능선에 걸터앉은 은덕사(恩德寺)

백사실 동쪽 능선을 걷다 보면 왼쪽에 건물 하나가 손짓한다. 소나무숲을 병풍으로 삼아 서쪽
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은덕사란 조그만 절로 건물 1동이 전부이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건물
에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까지 싹 담겨져 있는데, 절집에 흔한 기와집이 아
닌 별장이나 전원주택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법당 앞에는 잔디가 입혀진 뜨락이 있으며, 이곳에서 가꾸는 여러 농작물이 한참 숙성의 과정
을 밟고 있다. 또한 절 앞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는 꼭 가보도록 하자. 여기서 보는 조망
맛이 그런데로 일품이다.


▲  은덕사 앞 바위에서 굽어본 부암동

은덕사 앞 바위에 올라서면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 북부와 홍지동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다
만 자하문터널과 하림각이 있는 부암동 남부는 백사실 서쪽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저 너머에 멋드러진 바위를 여럿 품고 있는 산은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우리나라
호랑이의 성지(聖地)였던 인왕산으로 나와 비슷한 위치에서 바라보인다. 그리고 바로 밑에 보
이는 기와집들은 백사폭포 위에 자리한 현통사로 백사폭포의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두 귀를 멍하게 한다. 은덕사 바위에서 현통사로 바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는데, 경사가
다소 각박하므로 조심해야 된다.


▲  솔내음이 진동하는 백사실 동쪽 능선길

▲  평창동 조망점 바위

백사실 동쪽 능선의 북쪽 끝에는 KT기지국이 있다. 그곳에 이르기 전에 오른쪽으로 산길이 하
나 나있는데, 바위가 그 길의 끝을 장식하고 있다. (더 이상 내려가는 길도 없음)
이 바위는 딱히 이름은 없으나 백사골에 있는 안내도에는 단순히 조망점이라고 나온다. 북쪽
을 바라보고 선 이 바위에 올라서면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남쪽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오는
데 본글에서는 평창동이 보이는 곳이란 뜻에서 평창동 조망점이라 칭하도록 하겠다.


▲  평창동 조망점에서 바라본 천하 - 왜 이리 옥의 때가 많은지..?

평창동 조망점에서 훤히 바라보이는 평창동은 성북동(城北洞)과 한남동(漢南洞), 장충동(奬忠
洞)과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부자 동네이다. 강남이 부자라고는 하지만 이들 동네 앞에서는
감히 이름도 꺼내지 못하는 그들의 후배에 불과하다.
평창동은 북한산과 북악산 사이에 자리한 산악 지대로 나름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하
다. 게다가 경관도 수려하여 해방 이후 돈 꽤나 만지던 이들이 조금씩 들어와 살더니만 이제
는 완전 졸부들의 씁쓸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물론 서민들도 적지 않게 살고 있음)

성북동이 우리나라의 0.1% 부자들이 산다고 하지만 평창동도 그에 못지 않다. 완전 산동네로
차량이 없으면 왕래도 힘든 곳이지만 명당의 기운과 수려한 경승지의 덕을 보고자 졸부들이
가득 밀려와 북한산을 건방지게 압박했다. 그래서 산자락 곳곳에 무식하게 큰 저택과 빌라를
짓고 자연을 훼손하면서 북한산 남쪽 경관은 적지않게 손상되고 말았다. 다행히 평창동 윗쪽
이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으로 꽁꽁 묶여있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북한산성 밑까지 졸부
들이 싹 밀어버릴 뻔했다.

조망점에서 보이는 천하는 정말 1폭의 그림이 분명한데, 옥의 티가 너무 많다. 내게 저 장면
을 손질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졸부들의 집을 지우개로 다 지우고 그들로 파괴된 숲과 계곡
을 그려 자연의 모습으로 채색하고 싶다.


 

♠  평창동에 숨겨진 오래된 소나무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평창동 방향)

평창동 조망점에서 다시 은덕사 쪽으로 나오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 있다. 여기서 직진(남
쪽)하면 백사실 동쪽 능선을 쭉 타게 되고, 오른쪽(서쪽)은 현통사, 왼쪽(동쪽)은 평창동으로
이어진다. 나는 평창동 소나무를 보고자 평창동 방향을 택했다.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2분 정도 내려가면 평탄한 곳이 나타나면서 1차선 크기의 비포장 오솔길
이 펼쳐진다. 이 길은 묘각사 입구까지 이어지는데, 햇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삼삼한 숲속
에 포장도 씌우지 않은 흙길이라 그냥 지나치기 아쉬울 정도로 매우 정겹기만 하다. 그 길 오
른쪽에는 3~4m 높이로 닦인 석축이 길게 이어져 있어 옛 산성(山城)이나 건물터 유적이 아닐
까 싶은 기대감을 안긴다. 허나 그 석축은 산성도 아니고 옛 건물터 등의 문화유적도 아니다.
자세한 사연까지는 모르겠지만 군부대나 체육 시설을 만들면서 넓게 땅을 다지고 석축을 쌓은
것으로 지금은 배드민턴장과 쉼터가 있어 동네 주민들의 조촐한 쉼터 역할을 한다. 바로 저곳
에 오래된 소나무가 깃들여져 있다.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백사실 능선, 은덕사 방향)

평창동 소나무를 보고자 석축 서쪽 끝에서 접근을 시도했으나 철책의 위엄 앞에 돌아서고 말
았다. 석축 밑 오솔길을 거닐면 중간에 그 소나무가 보이나 주변 나무들이 시선을 방해해 제
대로 사진에 담을 수가 없다.
석축 윗부분이 사유지라 출입이 통제된 것이라 여겨 살짝 들어갈 길을 찾던 중, 석축 동쪽 끝
에서 그곳으로 인도하는 길이 슬쩍 손을 내민다. 서쪽 끝과 달리 방해물도 없어 그 길을 오르
니 숲에 둘러싸인 제법 너른 터가 나온다. 


▲  석축 윗쪽에 넓게 닦여진 배드민턴장

▲  평창동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7호

북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평창동 소나무는 280년 정도 묵은 늙은 나무이다. 그의 신상이 적
힌 안내문에는 보호수 지정일 기준으로 230년이라고 나와있는데, 그가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1968년 7월 3일이다. 그 이후 50여 년이 무심하게 흘렀으니 약 280~290년 정도로 보면 된다.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세월을 든든한 양분으로 삼아 높이 13m, 둘레 2.24m의 어엿하고 기품 넘
치는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생김새가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정2품송(正二品松)과 좀 비슷
하여 그리 낯설지는 않은 모습이다.

서울에서 100년 이상 묵은 나무 중, 소나무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보호수나 문화재로 지정
된 것은 이곳과 여기서 가까운 석파정(石坡亭) 소나무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평창동 소나무가
나이가 제일 많아 서울에서 가장 늙은 소나무라 봐도 무리는 없다.
이 나무를 누가 심었고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전해오는 것은 없지만 백사실로 가는 길목에 자
리해 있어 그곳을 찾거나 백사실에 머물던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평창동 소나무의 위엄

하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까?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40도 정도 고개를 숙였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이 나무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고개를 꺾은 모양이다. 그만큼 숙성될
수록 겸손을 차리라는 대자연 형님의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은 아닐까 싶다. 자연물은 그 뜻을
받들고 잘 지키는데,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며 온갖 민폐를 아끼지
않는 인간들은 왜 단순한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인간은 신이 아닌 늘 애매한 존
재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고개를 수그린 소나무의 자태가 곧게 서있는 모습보다는 기품과 운치가 더 진해
보이는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낮추며 겸손을
보이는 사람이 더 값어치가 있어 보인다.
평창동 소나무를 끝으로 한여름 북악산 북쪽 자락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평창동 소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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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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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20년 8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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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아름다운 서쪽 끝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수월봉 나들이 (차귀도, 산방산탄산온천)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제주올레길12코스, 고산리유적, 수월봉)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앞쪽)와 차귀도(뒷쪽)

제주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  제주 고산리유적

▲  엉알해안


 

겨울 제국의 추위 갑질이 한참이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
濟州島)를 찾았다.

햇님보다 훨씬 일찍 김포국제공항으로 달려가 제주도로 가는 6시대 비행기에 나를 담고
1시간 정도를 움직여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늘 비행시간 50분, 활주로 방황시간
10여 분)
제주도에서 정처(定處)는 이미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제주도에
발을 딛자마자 서쪽으로 길을 잡아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15시 경, 한림읍 용수리에 이
르렀다.
용수리에서 절부암(節婦岩)을 먼저 둘러보고 그날의 주메뉴인 제주올레길12코스(용수리
~무릉리, 17.5km)에 발을 들인다. 12코스의 ⅓ 정도 되는 해안길을 따라 수월봉까지 이
동하기로 했으나 햇님의 칼퇴근 본능으로 일몰 전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물
론 가기야 하겠지만 해가 떨어지면 사진 출사도 거의 불가능해지고 속세와도 떨어진 외
진 곳이라 무서움까지 발생할 수 있다. (외딴 산길이나 제주올레길은 가급적 일몰 전에
마치는 것이 좋음) 하여 일단 수월봉 북쪽인 고산리유적을 1차 목적지로 삼고 12코스에
나를 던져놓았다.
12코스를 따라 용수마을 방사탑 2호와 생이기정 등의 조촐한 명소를 둘러보고 올레길을
1굽이 지날 때마다 포즈를 조금씩 달리하는 차귀도와 와도(누운섬)를 옆구리에 끼며 가
다보니 어느덧 당산봉에 이르렀다. 본글은 바로 당산봉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산봉 이전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부분은 ☞ 이곳을 클릭한다)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 유적)

▲  바로 밑으로 바라보이는 와도와 차귀도(遮歸島)

차귀도와 고산리, 남해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당산봉(堂山峰)은 해발 148m의 낮은 뫼이다. 지
금이야 이 땅에 흔한 뒷동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어 실감은 나지 않겠지만 수억 년 전, 화산이
내뿜은 마그마나 용암이 바닷물과 만나 격하게 이루어진 수성화산체이다.
용암이 물을 만나면 용암은 급히 식고 물은 펄펄 끓는다. 이런 냉각과 가열반응은 격렬히 일
어나 수증기를 포함한 큰 폭발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수성화산활동이라 한다. 작은 알갱이
와 수증기로 이루어진 분출은 제법 패기가 있어 이들 화산쇄설물(火山碎屑物)은 멀리까지 날
라가 퇴적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오름을 응회구(凝灰邱)나 응회환이라고 한다. 응회
구는 성산일출봉(城山日出峯)이 대표적으로 높이가 꽤 되며 응회환은 그 다음 수준으로 수월
봉, 당산봉, 송악산이 이에 해당된다.

당산봉은 산방산, 용머리와 더불어 제주도에서 제일 오래된 화산체이다. 예전 이름은 당오름
으로 산기슭에 뱀을 신으로 봉안한 차귀당이 있었는데 그 신을 '사귀(蛇鬼, 뱀신)'라고 했다.
바로 그 당집 때문에 당오름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그 사귀가 와전되어 '차귀'가
되었고, 봉우리 이름도 잠시 '차귀오름'으로 갈렸다고 전하며, 현재 이름인 당산봉은 당오름
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봉우리 정상에 넓적한 바위가 있는데 마치 닭벼슬처럼 보여 계관산(鷄冠山)이라 했다는 이야
기도 덧붙여 전해오며, 당산봉 서쪽 꼭대기에는 봉수대가 있었는데 북쪽으로 판포봉수, 남동
쪽으로 모슬봉수와 연락을 했다.

올레길12코스는 당산봉 서쪽 기슭을 지나갈 뿐, 꼭대기는 거치지 않는다. 대신 꼭대기와 당산
봉 주위를 도는 둘레길이 별도로 있어 그 길을 이용하면 완벽한 당산봉 투어가 가능하다. 시
간이 되면 당산봉도 보너스로 거닐고 싶었으나 일몰 시간을 구실로 바로 고산리 유적으로 넘
어갔다. 그때 나에게는 그저 수월봉만 보일 뿐, 당산봉 자체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당산봉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고산리


▲  오르락 내리락이 반복되는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구간

▲  드디어 시야에 들어온 수월봉과 고산리유적
바다를 향해 길쭉하게 고개를 내민 해안 언덕이 바로 수월봉이다. 사진 가운데
벌판은 고산리 유적으로 일몰은 코앞인데 아직도 길이 저만치나 남아있어
발걸음의 고삐를 더욱 조이게 한다.


당산봉을 내려가면 고산리 벌판과 함께 2차선 노을해안로가 나타난다. 제주올레길12코스는 그
길의 신세를 지며 차귀도포구(고산포구)로 이어지는데 그 포구와 엉알해안을 거쳐 수월봉으로
달려간다. 12코스를 정석대로 거쳐야 엉알해안까지 둘러볼 수 있으나 시간도 그렇고 수월봉에
너무 정신이 팔려 올레길12코스를 잠시 내버리고 고산리유적으로 바로 질러가는 편법(?)을 썼
다. 난 그때까지 수월봉 밑도리가 엉알해안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수월봉 북쪽 해안이 엉알
해안)


▲  동쪽에서 본 고산리 유적 (억새 너머 벌판이 고산리 유적임)

▲  제주 고산리(高山里) 유적 - 사적 412호

수월봉과 당산봉 사이 벌판에 고산리 유적이 넓게 누워있다. 유적의 면적은 약 98,465㎡로 풀
이 뒤덮힌 들판 수준이라 이곳이 무슨 유적인가 물음표를 던지겠지만 유적은 보존을 위해 그
밑에 고이 묻어두었으며, 유적 변두리에는 개인 경작지가 존재하고 있다.

이곳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유적으로 제주도의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적지이다. 1987년 5
월, 고산리 주민들이 흙을 채취하고자 땅을 파다가 석창과 긁개를 발견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제주대학교는 그것이 발견된 곳을 답사하여 찌르개, 긁개, 돌도끼 1점을 발견하면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고산리유적이 슬슬 깨어나게 된다.
1988년 1월, 영남대학교 대학원생인 강창화가 수월봉에서 북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서 융기
문토기 1점을 수습했다. 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 이전에 쓰이던 것으로 그때는 기원전 4,000
년 이전 것으로 파악했으나 지금은 기원전 6,000년으로 보고 있다.

1991년과 1992년 겨울,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정밀 지표조사를 벌였다. 그때 자구내포구에서
하천변을 따라 수월봉에 이르는 유물산포지를 확인했고 지번별로 약 6,000여 점의 유물을 건
졌다.
1994년 신창~무릉간 해안도로가 신설되면서 고산리 유적을 관통하게 되자 그해 6월부터 8월까
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발굴 범위는 수월봉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서 포구에 이르
는 약 200m, 폭 12m 구간으로 출토 유물은 석기와 토기 등 3,000여 점이며, 고산리식 토기라
불리는 섬유질토기의 파편이 확인되는 등 성과가 대단했다. 하여 국제학술세미나를 통해 구석
기시대 후기에서 신석기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유적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허나 유물의 절대연대자료가 부족하고 유적의 층위 분석도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경작으로 유
적과 그곳에 깃든 유물이 계속 파괴되고 고통을 받자 1997년 다시 발굴조사를 하였다. 이때는
17,000여 점의 석기와 1,900여 점의 토기를 끄집어내는 성과를 거둔다.

1998년 11월부터 1999년 2월까지 다시 조사를 벌여 170여 점의 타제석기와 토기를 발굴했으며
, 사적으로 지정될 구역 외 지역에 대한 조사를 벌여 유적의 범위를 파악했다. 그리고 이듬해
국가 사적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2012년 1구역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벌여 원형움집터 26동, 수혈유구 295기, 야외 불피던 곳
10기, 구상유구 2기, 토기류 87점, 석기류 278점을 발견했는데, 1만년 이전 것으로 파악이 되
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특히 석촉과 한쪽을 뚫은
옥귀고리 1점은 그 재료가 제주도에는 없는 것들이라 궁금증을 증폭시켰는데, 2013년 1구역을
다시 조사하여(2차 발굴조사) 주거지 7동, 수혈유구 227기, 야외 불피던 곳 3기, 구상유구 1
기, 유물 215점을 건졌고, 석촉 등의 석기가 남해안 일대 암석으로 확인되면서 전남, 경남 지
역 남해안과 교류가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4년 1구역 3차 발굴조사로 주거지 4동, 수혈유구 78기, 소토(燒土)유구 3기, 구상유구 2기
가 추가로 나왔으며, 2구역 조사에서 문화층의 잔존 범위와 지상식 주거지를 확인했다. 특히
남부지방 신석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토기인 영선동식 토기가 나왔으며, 고산리유적 거주기
간이 2,000년 이상으로 늘어났다.
2015년 1구역 4차 발굴조사로 주거지 1동, 수혈유구 19기, 소토유구 1기를 건졌으며, 화덕시
설로 추정되는 돌무지 시설을 중심으로 거의 원형으로 기둥 구멍들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나왔다. 그리고 2구역 2차 발굴조사에서도 여러 석기들이 나왔다.
이후로도 계속 조사를 벌여 지금까지 고산리유적이 쏟아낸 유물은 성형 석기 5,000여 점, 박
편 94,000여 점 등 석기 99,000여 점과 토기조각 1,000여 점 등 도합 10만여 점에 이른다.
또한 구석기 후기와 신석기 초기를 연결하는 유적이 없어 무척 애를 태웠는데 그 고통을 바로
고산리가 속시워하게 풀어준 것이다. 기원전 12,000~10,000년경 눌러떼기 수법으로 지어진 석
기와 섬유질 토기가 다량으로 나와 이 땅에서 구석기시대가 신석기시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갔
음이 드러난 것이다.
하여 시베리아와 연해주, 만주 등 우리의 옛 땅과 우리나라 등 동북아시아 신석기 초기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며, 우리나라 신석기 초기 문화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이곳이 신석기를 비롯한 옛 사람들의 터전이 된 것은 바로 옆 수월봉에서 나온 화산재가 이곳
에 덮히면서 기름지고 평평한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땅에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 여기서 터전을 일구던 신석기 사람들은 구석기 후기 시절에 수렵과 채집 집단의 석기 제
작 전통을 이어나갔고, 초보적인 형태의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나온
석기는 석재를 기초 원석으로 직접 타격하여 박편(薄片)을 만든 다음, 간접 타격 또는 눌러떼
기로 2차 가공해 제작했다.
토기는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 조각과 덧무늬토기 조각 등이 나왔고, 특히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는 제주도 스타일의 유일한 토기 형식으로 '고산리식 토기'라 불린다.
덧무늬토기는 양양 오산리 신석기시대 유적과 부산 동삼동 패총(貝塚) 등에서 나온 기하학적
태선 덧무늬토기 형식으로 옆면이 굴곡이 있는 선으로 표현되었다.

* 고산리 유적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3628,3650-1 등 (고산리유적안
  내센터 ☎ 064-772-0041)
* 고산리 유적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너른 들판 같은 고산리 유적

▲  고산리 유적에서 바라본 당산봉
내가 용수리에서 저 당산봉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유적 일대는 거의 들판으로 고산리유적안내센터와 안내문이 전부이다. 유적도 그 보존을 위해
모두 흙으로 덮어놓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유적 남부를 가로질러 가면 2차선의 신창~고산 해안도로(노을해안로)가 나온다. 그 도로는 차
귀도포구에서 나온 길로 그 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가면 수월봉입구가 마중을 한다.


 

♠  제주도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수월봉(水月峰)

▲  영산(靈山) 수월봉 표석의 위엄

수월봉입구에서 길은 5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한경면의 중심지인 고산리로 그
곳에 있는 고산6거리(고산리 중심부)까지 1.1km 거리이다. 대중교통으로 수월봉을 찾을 경우
102, 202번 등 제주도 서일주 노선을 타고 고산환승정류장(고산6거리)에서 내려 도보로 접근
하는 것이 편하다.
북쪽 길은 차귀도포구와 고산리 유적으로, 남쪽 길은 고산리 서남부, 서북쪽은 엉알해안, 서
남쪽은 수월봉이다. 당산봉을 내려와서 잠시 버려둔 제주올레길12코스를 여기서 다시 만나서
수월봉으로 같이 가게 되는데, 설마설마했던 수월봉에 일몰 바로 직전에 도착을 한 것이다.


▲  수월봉 북쪽 엉알해안 (수월봉 화산쇄설층 - 천연기념물 513호)

엉알해안 산책로는 차귀도포구 서남쪽 고산출장소에서 수월봉입구까지 이어지는 1.1km 정도의
해안 벼랑 길이다. 여기서 '엉알'이란 바닷가 언덕 밑을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로 그 이름 그
대로 벼랑 밑을 지나는 것인데, 이 벼랑이 수월봉의 백미(白眉)이다. 수월봉에 왔다면 수월봉
도 좋지만 이 벼랑길도 꼭 거닐어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엉알해안 벼랑은 제주도 화산들이 한참 몸을 풀던 시절에 당산봉과 수월봉이 수성화산활동(水
性火山活動)으로 빚어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수월봉과 당산봉은 느긋한 봉우리이나 그 밑 벼
랑은 직각에 가까운 가파른 모습이다. 특히 수월봉은 화쇄난류(火碎亂流, pyroclastic surge)
라 불리는 독특한 화산재 운반작용으로 닦여진 화산체로 화쇄난류층 종류에서 세계 최고의 수
준을 자랑한다. 하여 그와 관련된 논문과 보고서들이 수두룩하게 나와있다.

엉알해안은 수월봉 밑도리까지로 그곳까지는 산책로를 닦지 못하고 수월봉 북쪽 밑까지만 길
을 내었다. 이 산책로도 살펴봐야 했으나 일몰 압박과 코스 혼돈의 무지(無知)로 인해 가지
못하고 이렇게 수월봉 북쪽 입구만 기웃거리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  바다를 향해 고개를 내민 수월봉

▲  수월봉으로 인도하는 길 (제주올레길 12코스)

수월봉은 제주도 본토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해발 77m의 해안 언덕이다. (제주도의 서쪽 끝
은 차귀도) 북쪽과 서쪽은 절벽이고 동쪽과 남쪽은 부드러운 산세로 이루어져 있는데, 옛 사
람들이 붙여놓은 수월과 녹고 남매의 슬픈 전설이 속세에서 오염된 두 눈에 이슬을 맺히게 한
다. 수월봉이란 이름은 바로 '수월'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전설은 정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
으나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조선 중기에 수월과 녹고 남매가 홀어미를 모시고 수월봉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갑자기 중병에 걸리자 온갖 약을 구해보았으나 좀처럼 차도가 없어 애 태우던 중, 집 앞을 지
나던 승려가 그 사연을 듣고 100가지 약초를 알려주었다.
하여 수월 남매는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99가지를 구했으나 나머지 하나인 오갈피를 찾
지 못해 마을 앞 수월봉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봉우리
벼랑에서 오갈피가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오갈피에 난데없는 등장에 그들은 너무 기뻤으나
문제는 절벽 중간쯤에 있다는 것. 그래도 그것을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수월은 남동생인 녹고
의 손을 잡고 벼랑으로 내려가 그것을 뜯어 녹고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은 녹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탄성을 지르다가 그만 실수로 수월이의 손을 놓고 말았다. (또는 수월이가 벼랑을 기
어올라 오갈피를 구했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함)

수월은 그대로 벼랑 밑으로 떨어져 죽었고, 녹고는 넋을 잃고 17일 동안 누이를 부르며 울었
다. 그 눈물이 바위 틈을 거쳐 엉알해안 벼랑으로 떨어지니 세상은 그 물을 '녹고의 눈물'이
라 불렀다. (현실은 해안 절벽의 화산재 지층을 통과한 빗물이 화산재 지층 밑에 진흙으로 된
불투수성 지층인 고산층을 통과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것임) 그 사연으로 봉우리 이름이 수
월봉이 되었다고 한다.

전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성이 나름 있는 일이라 아마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짓기 좋아하는 지역 선비들이 효도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그럴싸하게 각색하여 수월
봉 전설로 내놓았을 것이다. 허나 병든 어미 때문에 아리따웠을 것으로 여겨지는 딸이 꽃도
피지 못하고 비명횡사를 했고 남동생은 누이를 죽게 했다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힘든 삶을
살았으니 그들의 팔자도 나처럼 참 박복하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차귀도(왼쪽)와 와도(오른쪽)
저들은 용수리 절부암부터 이곳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어
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주었다.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과 비슷했던 와도는
여기서 보니 그저 그런 모습으로 보인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와도(왼쪽 섬)와 엉알해안, 당산봉

▲  수월봉 지붕에 자리한 수월정(수월봉 전망대)

수월봉 정상에는 8각형 모습의 수월정과 고산기상대가 자리해 있다. 수월정 서쪽은 벼랑으로
안전펜스가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가 제주도 본토에서 중원대륙과 가까운 곳이다. 우리가 장
차 점유하고 누려야될 중원대륙이 혹여 보일까 싶어 이마에 주름선이 간드러질 정도로 두 눈
을 부릅뜨고 서쪽을 노려봤으나 대륙은 보이지 않았다. 가깝다고는 하지만 실제 거리는 엄청
나다.
바닷바람은 일몰 후광에 힘입어 얼마나 매서운지 내가 날라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
이다.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수월봉 구간을 일몰 바로 전에 도착하니 마치 수월봉을 모두 가지게
된 듯 무척 기뻤다. 허나 엉알해안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실수를 범했으니 하나를 얻고 하나
를 잃은 셈이 된다. 하여 나중에 또 와야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허나 이런 곳은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또 오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다. 


▲  수월봉 지붕 남쪽에 자리한 고산기상대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고산리 서남부와 신도리(대정읍) 지역
수월봉은 당산봉을 제외하고 주변이 온통 바다와 들판이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품격은 우수하다.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차귀도와 와도, 주름선을 진하게
보이며 뭍과 섬을 세차게 때려대는 남해바다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와도와 엉알해안, 당산봉

수월봉을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둘러보아 마음이 참 뿌듯하다. 수월
봉입구로 나오면서 앞서 지나쳤던 엉알해안을 잠시 거닐까도 했으나 땅꺼미가 자욱하여 언제
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고 고산리로 움직였다.
바람의 섬인 제주도에 걸맞게 바다 바람이 얼마나 춥고 징한지 바람을 맞은 스마트폰 밧데리
가 순식간에 70%에서 0%로 떨어져 폰이 급 기절하는 참사까지 발생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
라 다소 당황했으나 이내 진정을 되찾고 길을 재촉했다.

고산리에서 제주도 급행버스 102번을 타고 모슬포(대정)로 나가 유명한 밀면집에서 저녁으로
시원한 밀면 1그릇을 섭취했다. 거기서 폰 충전을 꾀하니 잠시 혼절했던 폰이 다시 깨어난다.
이래서 먼 길을 갈 때는 무조건 폰 충전 케이블을 가지고 간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산방산(山房山) 서북쪽에 자리한 산방산탄산온
천을 찾았다.
요즘 숙박시설의 하나인 게스트하우스(게하)가 인기라 체험이나 해볼 겸 탄산온천에 딸린 게
하에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말로만 듣던 8인용 도미토리 방에서 잠을 잤다. 숙박비도 모텔에
비해 많이 저렴했고 이곳 같은 경우는 온천 이용권 2장을 서비스로 주어 저녁과 아침에 뜨끈
한 온천물에 들어가 몸을 푹 끓이며 편하게 씻을 수 있는 잇점이 있다. 허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잔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다음날에는 돈 더 주고 마음 편하게
모텔에서 잤음)
내 듣기에는 같은 방에 자는 사람들끼리 술도 1잔 하고, 게하에서 자체적으로 저녁에 파티도
한다고 하나 파티 같은 경우 별도의 돈을 내야 되고, 몸도 완전 방전된 상태라 땡기지도 않는
다. 다행히 내가 잔 방은 딱 절반만 차서 번잡함은 별로 없었고, 다들 자는 분위기라 22시 넘
어서 잠을 청했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 첫날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별도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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