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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4.30 서울 서남쪽 끝자락에 깃든 상큼한 명소들, 푸른수목원~항동저수지~항동철길 1바퀴
  2. 2024.04.19 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봄꽃 나들이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3. 2024.04.08 정읍 봄맞이 나들이 <정읍피향정, 함벽루, 무성서원, 성황산, 한정, 송정, 동진강>

서울 서남쪽 끝자락에 깃든 상큼한 명소들, 푸른수목원~항동저수지~항동철길 1바퀴

구로구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가을 나들이



' 구로구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가을 나들이 '

푸른수목원 항동저수지

▲  푸른수목원 항동저수지

항동철길(오류선) 푸른수목원 장미원 분수대

▲  항동철길(오류선)

▲  장미원 분수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도 수목원이 있다. 바로 홍릉수목원과 서울 서
남쪽 변두리에 있는 푸른수목원이 그것이다.
구로구의 일원으로 서울의 서남쪽 끝을 잡고 있는 항동(航洞)에 자리한 푸른수목원은 이
미 2~3번 인연이 있으나 주마등(走馬燈)으로 둘러본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가을이 늦가
을로 숙성되어 가던 10월의 한복판에 겸사겸사 그곳을 찾았다.

비록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나 나는 서울의 동북쪽 끝, 푸른수목원은 서남쪽 끝
으로 완전 끝에서 끝이다. 거리만 해도 최소 34km가 넘는다. 우리 동네 전철역인 방학역
에서 1호선을 타고 70분을 달려 오류동역에서 하차, 여기서 서울시내버스 6614번(양천차
고지↔옥길지구)으로 환승하여 푸른수목원 후문에서 두 발을 내렸다.



 

♠  푸른수목원 입문 (항동저수지)

▲  활짝 열린 푸른수목원 후문

서울의 서남쪽 변두리인 항동 한복판에 서울 최초의 시립 수목원(樹木園)인 푸른수목원이 상
큼하게 누워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과 차량, 그리고 번잡한 시가지가 크게 연상
되는 서울에도 수목원이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짙은 숲으로 이루어진 국립산림과학
원 소속의 홍릉수목원과 오산(烏山)의 물향기수목원과 비슷한 푸른수목원을 가지고 있다.

푸른수목원 자리에는 지금도 건재한 항동저수지와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다. 저수지 동쪽에는
구로구(九老區)의 지붕인 천왕산(天王山, 144m)이 자리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도 그런
데로 띄고 있었다.
시골 향기 그윽했던 변두리로 조용히 묻혀있던 항동, 바로 그곳에 서울시는 수목원을 닦기로
하고 2004년 6월 30일에 수목원 기본계획용역을 실시해 같은 해 12월 30일, 수목원 실시설계
용역을 시행했다. 2005년 12월 15일 수목원 조성사업 실시계획 인가를 얻어 2006년 3월 8일까
지 토지 측량, 경계 측량, 분할 측량을 완료했으며, 4월 15일 실시계획 변경 인가를 받아 6월
16일 보상계획 공고를 하여 12월까지 수목원 토지 보상과 공사 시행을 완료했다.

2009년 10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1단계 조성 공사로 저수지 생태탐방로, 목재방틀을 설치했
으며, 2010년 9월 2단계 조성 공사에 들어갔으나 2011년 6월, 캠핑장 반영 변경 계획에 따른
시민들의 반대로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2012년 7월 17일 시민들의 제안을 받아들
여 정원 개념을 도입한 수목원으로 공원조성계획이 통과되어 2013년 3월, 3단계 조성 공사에
들어가 그해 6월 5일, 상큼한 모습으로 속세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18년 서울시 1호 공립
수목원으로 지정되었다.

수목원 면적은 103,354㎡로 2,400여 종 52만 주의 다양한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잔디마
당과 향기원, 초화원, 장미원, 암석원 등 20개의 테마공간과 북까페 등의 편의시설이 닦여져
있으며, 숲해설 등의 자연 교육 프로그램과 친환경관리의 중심인 '생태의 섬(Eco-island)'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도심 속에서 식물과 인간, 환경이 공존하고 3무(無, 농약과 무화학비료,
쓰레기 배출을 하지 않음) 운동을 실천하는 생태공간임을 내세우며 실천하고 있다.
수목원 동쪽에는 천왕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고, 북쪽은 주거지와 성공회대학교, 서쪽과 동쪽
은 들녘과 항동지구가 공존하고 있다. 수목원 남쪽에는 철길 관광지로 크게 인기를 누리고 있
는 항동철길(오류선)이 지나가며, 천왕산과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가 동쪽에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고 거닐 곳도 정말 많다. 하여 푸른수목원과 항동철길을 한 덩어리로 둘러보거나 천왕
산과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까지 보태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수목원이긴 하지만 나무가 빽빽한 그런 수목원이 아니라 정원 및 공원 같은 분위기로 정문과
후문, 2개의 쪽문(항동철길, 더불어숲길)을 통해 들어설 수 있으며, 나는 후문으로 들어가서
항동철길 쪽문으로 나왔다. 쉬는 날과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5시부터 22시까지로 이
땅의 수목원 중 이렇게 관람시간이 긴 곳은 여기 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도시와 도시 사람
들에게 최적화된 수목원이다.

* 푸른수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 81-1(연동로 240 ☎ 02-2686-3200)
* 푸른수목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장미원 ①

후문을 들어서면 바로 장미원(장미정원)이 마중을 한다. 수목원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붉은 장
미와 분홍 장미 등 천하의 온갖 장미 69종이 모여 아름다움을 견주고 있는데, 그들이 심어진
부지는 장미의 꽃잎과 푸른 잎의 모양을 따서 만들었으며, 분수대가 정원 한복판에 자리하여
경관을 크게 돕는다.


▲  장미원 ②
늦가을 장미의 향연이 한참 펼쳐져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  장미원 ③
수목원 너머로 항동지구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 도시 속의
장미공원을 보는 듯 하다.

▲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장미원 분수대

▲  더불어숲길 안내도

장미원 동쪽에는 천왕산으로 인도하는 더불어숲길 쪽문이 있다. 더불어숲길은 서울시와 구로
구청, 성공회대, 사단법인 더불어숲이 함께 조성한 짧은 숲길로 더불어숲길 쪽문에서 성공회
대 뒷쪽(천왕산 북쪽 자락) 언덕까지 이어지며 거기서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와 만난다.


▲  장미원 남쪽이자 조망원 주변 산책로

▲  항동저수지 수생식물원

항동저수지는 푸른수목원의 상큼한 거울이자 터줏대감이다. 근처의 궁동저수지(궁동저수지생
태공원)와 더불어 서울에 몇 없는 저수지로 경기도 농산물원종장의 농업용수를 위해 왜정(倭
政) 때 닦여졌다.
경기도 농산물원종장은 1917년 5월에 여기서 가까운 부천 역곡(벌응절리)에 세워진 경기도종
묘장에서 시작되었는데, 1932년 경기도 농사시험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49년에 경기도
농사기술원으로, 1957년에는 경기도농사원으로 이름이 갈렸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항동은 경기도 부천군(富川郡)에서 서울로 바뀌었으며, 서울의 지
나친 도시화로 1998년 폐지되면서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경기도 농업기술원에서 그 기능을 담
당하고 있다.

이 저수지는 농업용수 외에도 낚시터와 물놀이 장소로 바쁘게 살았는데, 겨울에는 썰매와 얼
음 낚시 명소로도 유명했다. 주변이 온통 경작지와 산이라 한때 존폐 위기까지 갔던 궁동저수
지와 달리 좋은 수질을 유지했으나 푸른수목원이 닦이면서 농업용수 제공은 중단되고 낚시와
썰매도 모두 금지되는 등, 그동안의 존재의 이유를 모두 빼앗기긴 했으나 대신 궁동저수지와
비슷한 수생식물원 및 생태저수지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저수지 동부에는 나무로 다진 생태탐방로를 닦았고 연꽃 등 수초(水草)들이 무성해 저수지의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저수지 주위로 산책로가 닦여져 있으며, 물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저수지 수중 식구들을 위해 접근을 삼가하기 바란다. 푸른수목원의 절반은 항동저수지
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곳에서 매우 비중이 크며, 그가 없는 푸른수목원은 정말 상상
할 수가 없다.


▲  저수지 위에 그물처럼 닦여진 수생식물원 생태탐방로

▲  푸르기 그지 없는 항동저수지
농업용수 제공과 낚시터, 피서지 바쁘게 살았던 그는 이제 인간의 손을
덜 받는 생태저수지로 새 삶을 누리고 있다.

▲  저수지 외곽에 삼삼하게 자라난 수초들
온갖 수초들이 저수지와 속세의 경계를 팽팽히 그으며 저수지 식구들을
지킨다.

▲  항동저수지 서쪽 산책로

▲  평화로운 모습의 항동저수지와 천왕산
천왕산은 물론 주변 나무와 하늘, 구름, 햇님, 달님까지 저수지를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항동저수지와 가까이에 보이는 옥의 티들(항동지구)

푸른수목원이 닦여졌을 때는 주변은 산과 들판이 전부인 자연의 공간이었다. (집들이 여럿 있
었음)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농촌이었으나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들어와 춤을 추면서 수목원
주변으로 회색빛 아파트들이 마구 들어서 일명 항동지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곳은 서울의 영원한 시골로 남았으면 했는데, 이 변두리까지 가만두지를 않고 자꾸 성냥갑
아파트를 올려 난개발을 일삼은 것이다. 아직 시골 들판이 좀 남아있긴 하나 그마저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 서울의 인구는 미세하게나마 줄고 있고, 전국적으로 비어있는 아파트가 즐
비하다고 하는데, 자연이 잘 남아있는 이곳까지 공간을 낭비해야 했을까? 아파트보다는 자연
공간을 크게 조성하여 푸른수목원의 확장판으로 삼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수목원과 천왕
산 일대는 숲을 중심으로 한 자연공간으로, 수목원 서쪽과 남쪽은 수목원 수식용 자연 공간과
주말농장 등의 경작지로 손질해야 했음)

▲  북쪽에서 바라본 항동저수지

▲  저수지와 습지식물원 사이 산책로



 

♠  푸른수목원 둘러보기

▲  참여정원의 평화로운 풍경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가 싹 정화되는 기분이다.

▲  가을에 푹 잠긴 붉은 단풍나무
올해의 마지막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  습지식물들의 조그만 낙원, 습지식물원

이곳은 동그란 작은 웅덩이가 여러 개 모여 이루어진 습지대(濕地帶)로 다양한 수생식물과 수
서곤충(水棲昆蟲)이 살아가고 있다. 습지대는 생태공원의 필수 요소로 오염된 물을 정화시켜
주며, 조그만 생물들의 삶터와 먹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습지를 이룬 물은 항동저수지로 흘
러가 저수지를 살찌워준다.


▲  야생화원과 계류원 주변 산책로

▲  계류원에 차려진 하얀 천막(국화정원)

계류원은 수목원 이전부터 있던 물길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다양한 수생식물이 살아가고 있
다. 그 위에는 나무다리를 닦고 천막을 씌워 국화정원으로 삼아 아름답게 꾸며진 국화와 분재
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 내용은 매달 다를 수 있음)


▲  계류원 국화정원의 학 모양 분재
학 분재 1쌍이 서로를 각별히 바라보며 정을 속삭인다. 그 앞에는 다양한
피부색의 국화들이 서로 아름다움을 견준다.

▲  불꽃처럼 화사하게 돋은 노란
국화의 위엄 (국화정원)

▲  늦가을에 점차 물들어가는 활엽수원
(闊葉樹園)


▲  활엽수원 산책로
단풍나무와 참나무, 벚나무 등의 활엽수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늦가을에는 단풍의 고운 향연을 구경할 수 있다.

▲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수목원 동쪽 끝자락에는 KB숲교육센터라 불리는 유리온실이 있다. 하얀 피부를 지닌 이 온실
은 국민은행(KB)의 후원(기부채납)으로 2015년에 지어진 것으로 시민을 위한 친환경 휴식 공
간과 체험형 생태교육공간으로 조성되었으며, 초승달 모양을 지닌 정남향 온실(溫室)로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열대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조촐하게 실내 식물원 역할을 한다.
수목원 구성원 중 유일한 실내 공간(관리사무소와 까페는 제외)으로 안으로 들어가면 조금은
더울 수 있다. (겨울에는 따스해서 좋으나 여름에는 다소 더울 수 있음)

▲  2015년 KB숲교육센터 조성 기념으로
전 서울시장 박원순이 심은 소나무

▲  열대 밀림 같은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 ①


▲  열대 밀림 같은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 ①

▲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의 조그만 문

▲  '아라우카리아'라 불리는 열대식물

▲  스코파리움호주매화(마누카)
이름도 무지하게 어렵고 생김새도 요상한 나무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고향이다. 최대 3m까지 자란다고 하며, 잎과 가지에서 오일을 추출한다.

▲  만지면 꽤 아플 것 같은 선인장 무리들
저들은 생긴 것 자체가 단단한 무기이다.

▲  벌써 휴식기에 잠긴 무궁화원
130여 종의 무궁화가 향연을 펼치는 곳이나 계절 관계로 벌써부터
휴식에 들어가 잠잠한 모습이다.

▲  무궁화원 부근에 닦여진 돌탑

▲  영국정원과 가로수


▲  영국정원과 늘씬하게 솟은 가로수들
영국(잉글랜드) 양이(洋夷) 스타일의 자연풍경식 정원의 소박함과 아름다움을
수목원 구석에 구겨 넣었다. (바로 옆에 억새원이 있음)

▲  야생화원
이 땅에 자생하는 야생화를 잔뜩 머금은 공간으로 그중에서
구절초(九節草)가 제일 많이 아른거린다.

▲  구절초의 앳되고 청초한 미소가 깃든 야생화원

▲  야생화원의 풍경 하나 (커다란 돌과 식물, 꽃들)

▲  프랑스정원(오른쪽)과 억새원(왼쪽)
영국정원이 있으니 그에 대비되는 프랑스정원도 그 옆에 구겨 넣었다.

▲  향기원
이곳에는 오감을 흥분시키는 다양한 허브식물과 약용식물, 식용식물 등이
닦여져 있다. 이들은 자원봉사자들이 정성을 들여 조성했다.

▲  항동철길 쪽문 방향

후문을 통해 푸른수목원으로 들어와 수목원 내부를 고루고루 둘러보고 항동철길 쪽문으로 나
갔다. 일몰이 턱 밑이라 흐리게 나오거나 별로인 사진이 적지 않아 수목원의 ¼> 정도의 분량
은 본글에서 쿨하게 뺐다.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별도의 글에
서 채울 생각이다. (생각에서만 멈출 수도 있음)



 

♠  서울에서 유일한 철길 명소, 항동철길(오류선)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푸른수목원 바로 남쪽에는 철길이 지나고 있다. 속세에서는 그 철길을 항동철길이라 부르는데
, 정식 명칭은 오류선(梧柳線)으로 오류동역(1호선)에서 광명시 옥길동에 있던 경기화학을 이
어주던 4.5km의 화물열차 전용 단선 철로이다. ('경기화학선'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음)

경기화학주식회사는 이 땅 최초의 비료 공장으로 1954년 옥길동에 설립되었다. (그 시절 지명
은 '부천군 소래면 옥길리') 원료와 비료 운송을 위해 1957년 9월 26일 철길을 닦기 시작해
1959년 5월 30일에 완성을 보았는데, 경기화학 외에도 한때 오류동에 있던 삼천리연탄공장과
동부제강도 이 철로의 신세를 졌다.
경기화학은 울주 온산공장으로 통합, 이전되면서 광명 공장은 문을 닫았으며, 그로 인해 열차
가 다닐 일이 거의 없어지면서 완전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동부제강과 삼천리연탄공장도 다
른 곳으로 이전됨)
그렇게 열차의 기적소리도 사라지고 열차의 바퀴자국도 녹이 슬면서 철로에는 잡초가 덥수룩
하게 끼었으며, 무쓸모급 철길로 전락했지만 주변에 천왕산공원, 푸른수목원이 조성되면서 그
들을 수식하는 철길 명소로 덕을 보게 되었고, 2014년 이후 방송매체에서 이곳을 줄기차게 홍
보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항동철길은 오류동역에서 1호선 경인선에서 살짝 갈라져 나와 서해안로와 오리로가 만나는 광
덕4거리를 지난다. 여기서부터 뚜벅이들이 거닐 수 있다. (광덕4거리~오류동역 구간은 접근
금지) 오리로11길 골목길이 바로 남쪽에 붙어있으며, 금강수목원아파트와 맞닿은 철길 북쪽에
는 짧게 숲길을 닦아놓아 눈길을 부드럽게 배려했다.
철길은 주택가의 끝인 우창굿모닝아파트를 지나면 숲에 감싸인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난다. 천
왕산 산세가 움푹 낮아진 곳에 산의 살을 파서 생긴 틈으로 그 고개를 지나면 푸른수목원 항
동철길 쪽문과 천왕산 등산로가 나온다. 그들을 지나면 푸른수목원 정문이 나오며, 항동우남
퍼스트빌까지 이동할 수 있다. 허나 그 이상은 곤란하다.
 
철길에 잡초가 덥수룩하고 골목길과 바로 붙어있어 열차도 완전히 등을 돌린 철길처럼 보이지
만 가뭄에 콩 나듯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주택가와 뚜벅이길이 바로 옆에 붙어있어 폭주는 하
지 못하고 천천히 지나가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 된다. 그것만 유념한다면 철길 산책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또한 열차가 아주 드문드문 지나가므로 산책 중에 열차를 만난다면 꼭
복권을 사보기 바란다. 그만큼 열차를 보기 힘들다.
한때 이 철길을 두고 관광지로 두느냐 안전을 위해 접근 불가로 봉인하느냐를 두고 말이 많았
으나 이제는 관광지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이 땅에 철길 명소가 여럿 있지만 서울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옛 경춘선 철길과 옛 경의
선 철길은 폐선된 철로라 제외) 게다가 주거지와 골목길 속을 거리낌없이 지나가므로 매우 친
숙하게 다가온다. 철길 주변 풍경도 주택가와 자연(천왕산, 푸른수목원)이 어우러진 모습이라
가히 싫지는 않다. 특히 우창굿모닝아파트에서 푸른수목원으로 넘어가는 나무에 감싸인 그늘
진 고갯길은 이곳의 백미로 소박한 자연 풍경을 보여준다.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오류동 방향)

▲  항동철길의 유일한 간이역(簡易驛), 항동철길역

항동철길에도 간이역이 있었다. 바로 항동철길역이 그것이다. 간이역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곳
에 바퀴를 멈추는 열차는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무늬만 역이다. 항동철길이 관광지로 뜨고 바
로 옆에 푸른수목원이 들어서면서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장식물이기 때문이다.
요즘 인기가 높은 레일바이크(Rail bike) 명소로 삼아도 좋을 듯 싶으나 화물열차가 랜덤 수
준으로 지나다녀 그것도 여의치 않다.

역무원 모자를 쓴 귀여운 개모형 옆에는 하얀 피부로 된 조그만 역명 간판이 달려있는데, 동
쪽 역은 무려 개성(開城), 서쪽 역은 해남(海南)으로 나와있다. 여기서 개성과 해남이 그렇게
나 가까웠던가? 갑자기 나의 둔한 돌머리에 혼돈이 온다. 해남은 비록 철도는 들어가지 않으
나 시외직행버스와 승용차로 언제든 갈 수 있지만 개성은 분명 우리 영역임에도 이상하게 70
년 이상 금지된 땅으로 봉해져 전혀 갈 수가 없다. 거리는 해남보다 개성이 훨씬 가까움에도
말이다. (항동철길에서 해남까지 400여km, 개성은 체감 거리가 달나라보다 훨씬 멈)

* 항동철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2동, 항동


▲  아무것도 정차하지 않는 간이역, 항동철길역 주변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오류동 방향)
철길을 닦고자 산세가 낮은 이곳을 손질했다. (나쁘게 말하면 천왕산 북쪽
산줄기를 철길로 끊어버림) 철길 좌우로 뚜벅이길이 닦여져 있는데
뚜벅이길로 가던 철길로 가던 그건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된다.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푸른수목원 방향)
항동철길을 끝으로 늦가을 초입에 벌인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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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봄꽃 나들이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조선 최초의 능, 정릉



' 정릉 봄맞이 나들이 '

정릉
▲  정릉

정릉 금천교 정릉 숲길

▲  정릉 금천교

▲  정릉 숲길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어루만지던 4월의 한복판에 조선 최
초의 능인 정릉을 찾았다.
서울 장안에는 도봉산(道峯山)부터 호암산(虎巖山)에 이르기까지 봄꽃 명소들이 무지하
게 많지만 역사와 자연이 오지게 어우러진 조선시대 왕릉(정릉, 의릉, 태강릉, 선정릉,
헌인릉 등)도 봄꽃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다. 하여 간만에 왕릉 봄 산책이
나 즐길 겸, 적당한 곳을 찾다가 집에서 가까운 정릉으로 길을 잡았다. 정릉은 이미 3~
4번 인연을 지었으나 다들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  정릉(貞陵) 입문

▲  정릉 세계문화유산 표석 앞 갈림길

정릉과의 첫 인연은 중학생 시절인 1990년대 초반이다. 지금이야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인터
넷 지도가 아주 훌륭하여 지독한 길치가 아닌 이상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정릉 이정표가 있음) 그때는 이정표가 너무 부실하여 찾기가 어려웠
다.
하여 2번에 시도 끝에 정릉동 골짜기에서 태연하게 숨바꼭질을 즐기던 정릉을 찾아내 술래 신
세를 면하게 되었다. 그 시절 정릉은 지금처럼 입장료를 받던 공개 구역이었으나 인지도가 낮
아 탐방객은 별로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정릉의 존재감은 슬슬 커져갔고 탐방객도 정
비례로 늘어갔다.

정릉 정문에 이르니 매표소가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정릉이 성북구 영역이라
성북구 주민은 50%를 깎아주나 나는 도봉구 사람이라 그 혜택을 전혀 받을 수가 없어 입장료
전액을 지불하여 유료의 공간, 정릉으로 들어섰다. (도봉구는 1973년 7월 성북구에서 분리되
었음)


▲  정릉 재실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2호

정릉으로 들어서니 왼쪽(남쪽)으로 재실과 보호수로 지정된 큰 느티나무가 눈짓을 보낸다. 정
릉에는 서울의 다른 조선 왕릉에는 없는 2가지가 있어 눈길을 끄는데, 바로 보호수 나무와 약
수터이다. (약수터는 지금 사라지고 없음)
보호수는 2그루가 있는데, 재실 앞 느티나무는 나이 약 380년, 나무 둘레 360cm, 높이 21m로
정릉에 있는 나무 중 가장 크고 늙었다. 4~5월에 황록색 꽃이 핀다고 하나 봄 햇살이 정릉 구
석구석을 넓게 어루만지는 4월의 한복판임에도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꽃은커녕 잎
도 없다. 이미 다른 나무와 꽃들은 봄의 향연에 한참인데 말이다.


▲  정릉 재실(齋室)의 행랑 외곽 모습

재실은 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陵參奉)의 생활공간이자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 좌우로 창고와 하인 방, 마구간, 집사방(執事房)을 갖춘 행랑(行廊)이
나오고, 안쪽 기와문을 들어서면 제사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재실 본채가 있다.

정릉 재실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12년에 발굴조사를 벌여 2014년에
복원했다. 그러다 보니 고색은 채 여물지 못했다. 비록 복원은 되었으나 딱히 놀려두기도 뭐
하여 다례체험 등 여러 전통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대문과 다양한 공간이 있는 행랑

▲  재실과 제기고로 인도하는
안쪽 기와문

▲  2칸짜리 제기고(祭器庫)
제사도구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  재실 본채
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능을 지키는 능참봉의 거처이자
영(令)이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  관리사무소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7호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도 앞서 보호수처럼 벌거숭이 상태이다. 추정 나이 200
년, 높이 17m, 나무 둘레 320cm로 정릉에서 2번째로 크고 늙은 나무인데, 계절 감각이 둔해진
것인지 아니면 게을러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여 겨울에서 깨어나 봄의 향연에 동참했으면 좋
겠다. (느티나무는 5월 초까지도 벌거숭이인 경우가 있음)


▲  금천교(錦川橋)

정릉 중심부로 들어서려면 계곡에 걸린 금천교를 건너야 된다. (금천교가 아니더라고 계곡은
꼭 건너야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음)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聖域)의 경계 역할 및 능으로 인도하는 돌다리로 현종(재위 1659~1674)
시절 정릉을 손질하면서 지어졌다. 다리 좌우 끝에 석축을 다지고 그 사이에 묵직하게 돌기둥
을 세운 다음 길쭉한 통돌을 걸쳐 놓은 단출한 형태로 다리 피부에는 세월이 입혀놓은 고색의
때가 자욱하여 고풍스런 멋을 한층 올려준다.


▲  금천교 주변 계곡

조선 왕릉과 궁궐에는 금천의 역할을 하는 물줄기가 꼭 있기 마련이다. 정릉은 북악산길(북악
스카이웨이) 북쪽에서 발원한 계곡이 그 역할을 담당하여 정릉을 촉촉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정릉 중심부 북쪽을 거쳐 바깥으로 흐른다. 허나 정릉 동쪽에 빼곡히 들어찬 주택가로 능 정
문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한 채, 정릉천으로 흘러가며, 북한산(삼각산) 정릉계곡에서 나온 정
릉천 또한 정릉2동부터 어둠의 경로로 흐르다가 종암동(鍾岩洞)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정릉 계곡은 크기는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적당히 섞여있고 흙이 많아서 어린이들이 놀기에는
아주 좋다. 허나 문화유산인 정릉 내부이니 요란하게 노는 행위는 절대 삼가하기 바라며, 손
만 담구는 정도에서 멈춰야 될 것이다.

▲  붉은 피부의 홍살문

▲  홍살문 옆에 닦여진 배위(拜位)

금천교를 건너면 길은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인다. (정면 길로 가면 관리사무소) 그 길을 들어
서면 쌀쌀맞게 생긴 붉은색 홍살문이 나타나 나그네로 하여금 절대 엄숙을 강조한다. 그는 왕
릉과 관아, 향교, 왕족과 사대부의 사당과 묘역 등 권력과 관련된 곳에 세우는 비싼 존재로
그를 들어서면 비로소 정릉 중심부에 이르게 된다.

홍살문 옆에는 돌로 다져진 네모난 배위<판위(板位)>가 누워있다. 이곳은 정릉을 찾은 제왕이
능 주인에게 절을 하는 곳으로 보통 4번 절을 했으며, 이를 국궁사배(鞠躬四拜)라고 한다. 현
재는 정릉 제향일에만 반짝 쓰이고 있어 꽤 한가해졌다.

그럼 여기서 잠시 정릉과 이곳 주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정릉 정자각 주변 (수라간, 수복방 등)

정릉은 서울의 영원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으로 정릉2동 서쪽 골짜기에 넓
게 누워있다. 능역(陵域) 동쪽과 남쪽은 정릉2동 주택가와 맞닿아있고, 북쪽은 정릉의 원찰(
願刹)이었던 봉국사(奉國寺, ☞ 관련글 보기) 남쪽에 이르며, 서쪽은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
이)과 정릉3동에 닿는다.
주택가와 매우 가깝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깊은 산골로 짙은 숲을 지니고 있으며 조촐한 계곡
과 그림 같은 숲길, 그리고 늙은 보호수도 2그루를 지녔다.

정릉의 주인은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1396)이다. 고종(高宗)
이 1897년 황제 위에 오르면서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높여졌으며, 태조는 태조고황제(太
祖高皇后)로 올려졌다. (정릉 안내문에는 '신덕고황후'라 나와있음)

신덕왕후 강씨(이하 강씨)는 곡산강씨(또는 신천강씨) 집안으로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
康允成)의 딸이다. 강씨의 숙부인 강윤충(康允忠)은 이성계의 큰아버지인 이자흥(李子興)의
사위로 두 집안은 제법 가까웠는데, 드넓은 동북면(東北面, 함경도와 길림성, 연해주 지역)
지역을 장악했던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조정에 출사하면서 강씨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때 강씨는 이성계보다 약 20살 정도 연하였다고 한다. (에구 부러워라~~)

이성계와 강씨의 첫 만남 설화는 꽤 유명한데 내용은 이렇다.
어느 평화로운 날, 사냥에 나섰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아리따
운 여인이 있었는데(아마 빨래를 했던 모양임) 그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하니 여인이 바가지
에 물을 담아 버들잎 하나를 물 위에 띄워주었다. 이성계는 이상하여 이유를 물으니
'급하게 마시면 탈이 날까봐 천천히 드시라고 그랬습니다'
답을 했다.
그 말에 이성계는 무한 감동을 먹었고, 마침 여인의 미모도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던 터
라 그녀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이다.

허나 로맨틱한 설화와 달리 강윤성은 이성계의 미래를 크게 보고 딸과의 혼인을 적극 추진했
고, 이성계 또한 개경(開京)에 마땅한 기반이 없는 상태라 사돈관계에 있고 개경 귀족들과 두
루 가까웠던 강씨 일가의 힘이 필요했다. 즉 두 집안과의 결속 강화와 미래에 대한 투자 차원
에서 혼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계는 개경에 있을 때 강씨 집에 머물렀다. 그가 요동반도에 있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
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강씨는 포천 철현(鐵峴)에 있는 전장(田莊)에 머물렀고, 만약을
대비해 동북면과 가까운 이천(伊川)의 한충(韓忠)집으로 거처를 옮겨 상황을 지켜보았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 크게 다치자 정몽주(鄭夢周)는 이
때다 싶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강씨는 이방원(李芳遠)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
으로 오게 했으며, 이방원이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살해하자
이성계가 크게 노발대발한 것을 강씨가 무마시켰다. 이렇듯 강씨는 이성계를 힘껏 도와 조선
개국을 이끌어냈으며, 이성계의 첫 부인인 한씨가 조선 건국 1년을 앞두고 세상을 뜨자 조선
의 첫 왕후<현비(顯妃)>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  비각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陵寢)

강씨는 태조와의 사이에서 경순공주(敬順公主, ?~1407)와 무안대군 이방번(撫安大君 李芳蕃,
1381~1398), 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李芳碩, 1382~1398)을 두었다. 그녀는 권력욕이 너무
커서 태조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과 연합해 태조를 설득하여 장남도 아닌 막내 이방석을
왕세자(王世子)에 앉히게 했다.
이렇게 후처 소생의 차남을 세자로 책봉하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제대로 뚜껑이 열렸다. 하
여 그들은 이방원<정안대군(靖安大君)>을 중심으로 강씨와 정도전 세력과 팽팽히 대립하게 된
다.

1396년 음력 8월 13일 강씨는 40대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크게 애통하여 도성
한복판에 능을 쓰게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 존호(尊號)를 신덕이라 했으며, 개국공신들의
건의로 공신수능제(功臣守陵制)를 받아들여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능 지킴이를 맡겼다.
또한 정릉 곁에 원찰인 흥천사(興天寺)를 크게 지어 매일 같이 찾아가 명복을 빌었으며, 흥천
사의 아침 종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아침 수라를 들었다. 그때 정릉은 덕수궁(경운궁) 북쪽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지며, 정릉 때문에 정동(貞洞)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1398년 정도전이 크게 방심한 틈을 노려서 이방간(李芳幹)과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다. 궁궐을
접수한 그들은 이복 동생인 이방번, 이방석 형제와 경순공주의 남편을 처단했고, 형제의 맏이
인 이방과(李芳果, 정종)를 왕위에 올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1차 왕자의 난이다. (경순공
주는 이후 비구니가 되었음)
그리고 1400년 이방간의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이방원은 형 이방과의 왕위를 물려받아 꿈에
그리던 옥좌(玉座)를 차지하게 된다.

이방원은 의붓어머니 강씨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태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크게
정릉을 건드리지 않았으나 1406년 정릉이 너무 넓다는 의견이 있어 정릉 100보 밖까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때 하륜(河崙) 등 권력가들이 너도나도 정릉 숲에서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니 그것이 정릉 수난의 시작이었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바로 이빨을 드러내며, 정릉 탄압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1409년 의정부(議政府)는 왕의 비위를 맞추고자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이 말이 안되며 명
나라 사신이 묵는 숙소와 가까워 도성 밖으로 옮겨야 된다고 하였다. 굳이 그런 것이 아니더
라도 도성 한복판에 능이 넓게 자리한 것도 솔직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태종은 의정부의 갸륵한 뜻을 받아들여 정릉을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곡으로 추방시켰고, 능
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지기 바쁜 광통교(廣通橋)를 돌다리로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동원했다. 이는 단순히 광통교 복구가 아닌 백성들이 정릉 석물을 밟고 지나가게 하
여 강씨를 길이길이 욕보이고자 함이었다. 또한 정자각과 일부 석물을 소환하여 태평관(太平
館, 명나라 사신의 숙소)을 짓는데 썼으며, 봉분을 깎아 무덤임을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석인
(石人)은 생매장시켰다.

능의 제례 또한 폐지되고 봄, 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으며, 서모(庶母)의 기신제(忌
晨祭)의 예에 따라 삼품관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한 후궁으로 격하시켜 후궁의 예로 제를
올리게 하였다. 강씨가 지하에서 크게 통곡을 했는지 능이 파괴되던 날, 폭우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전한다.


▲  수라간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과 소전대(燒錢臺, 밑에 보이는 석물)

태종 사후로도 정릉의 고통은 계속되었고 정릉의 존재는 속세의 뇌리 속에서 거의 잊혀져 갔
다. 겨우 후손들이 살짝살짝 제사를 챙겼을 뿐이다.
그러다가 1581년 강씨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이 선조(宣祖)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
가 엎드리면서
'소인은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國墓)에 봉사(奉
祀)하는 사람들의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 면제시켜 주십시요'
하소연했다. 즉 정릉을
지키고 있으니 군역 면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거의 잊혀졌던 정릉의 존재감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때 삼사(三司)에서는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 정릉을 회복하자는 의견을 올렸으나 수용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계
속 논의를 벌이다가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싹 마무리가 되었다.
송시열은 태종의 잘못된 조치로 정릉이 고통을 당했음을 바로 말하기가 애매해 그 시절 신하
들의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고 돌려 말하며,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있음을 지적하
여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현종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 1669년 태조의 왕후로 인정하여 종묘(宗廟)에 봉안했으며, 순원현
경(順元顯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능을 복구했다.
이때 정릉에서 강씨의 넋도 달랠 겸, 성대하게 제를 지냈는데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려서
사람들은 이를 두고 '강씨의 원한을 씻는 비'라고 하였다.

정릉 석물은 17세기 후반 것들이나 4각형 장명등(長明燈)과 혼유석(魂遊石)을 받치는 고석(鼓
石) 2개, 그리고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는 옛 정릉 것들이다. 즉 14세기 후반 것들로 조선 왕
릉에 설치된 석물 중 가장 늙은 존재들이 된다. 그리고 정자각과 비각 등은 모두 17세기 이후
것들이다.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을 이끌어냈던 강씨, 허나 지나친 권력욕으로 끝내 자식을 잃고, 남편
의 말로를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자신의 묘까지 태웠으니 인생무상, 권력무상이 따로 없
다. 왕후가 되면서 거기서 딱 절제를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게 안되었던 것이다. 물론 한씨
소생의 왕자(이방원, 이방과 등)들이 자신의 소생들을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방원 형제
들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나마 똘똘했던 막내를 세자로 세워 자식들의 불투명한 미래
를 지켜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궁궐은 그만큼 무서운 곳이니 말이다.
허나 강씨와 그의 친자식들은 결국 패배자가 되어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왔으니 역사의 패배자
가 어찌된다는 것을 아주 몸서리치게 보여준다.

정릉은 중구 정동의 지명 유래가 되기도 했지만 이곳 정릉동의 유래도 된다. 그래서 2개의 지
명이 정릉으로 인해 생겨났다.



 

♠  정릉 중심부

▲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박석이 입혀진 향로와 어로가 닦여져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참
도(參道)라고 하는데, 어로는 제왕이 걷는 길이며, 왼쪽에 조금 높은 향로<신도(神道)>는 제
향 때 향과 축문(祝文)을 들고 가는 길이다.
이곳 참도는 중간에서 'ㄱ'자로 90도 꺾이는데, 이는 지형 탓으로 정자각 정면에서 금천까지
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직선으로 홍살문을 두기에는 좀 비좁아 보인다. 하여 나름 융통성
을 발휘한 것이다.


▲  정자각(丁字閣)

참도의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정자각이 있다. 싹둑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丁'처럼 생겨서 정자각이란 쉬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자각은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제왕은 좌측 계단으로 올라가 제사를 치르고 반대쪽 우측 계
단으로 내려갔다. 건물 안에는 제향에 쓰이는 여러 상(床)들이 있는데, 거의 황색 피부를 지
니고 있다. 황색은 황제와 황후를 상징하는 색깔로 고종이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높이면서
제사상의 피부 색깔도 변하였다.

▲  신좌(神坐)
신, 즉 정릉의 주인이 제향 때 머무는
추상적인 자리이다.

▲  관세상(盥洗床)
제관이 손 씻을 물을 올려놓는 상이다.
여기서 관은 대야를 뜻한다.

▲  제물을 올려놓는 상
(정자각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  정자각 좌측 계단
왼쪽 계단은 정릉 주인의 혼과 참배를 온
제왕이, 그리고 오른쪽 계단은 신하와
아랫 사람들이 이용했다.


▲  수복방(守僕房)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측에 수복방과 비각이, 우측에는 수라간이 있다.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근무하는 건물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  정릉 비각
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의 거처이다.

▲  정릉 비석
'대한(大韓) 신덕고황후 정릉'이라 쓰여있다.

     ◀  수복방과 마주보고 있는 수라간
수복방과 비슷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제
향 때 제사 음식을 데우거나 손질하던 곳이다.
터만 아련하게 있던 것을 근래 복원하여 채워
넣었다.

능침 밑부분에 소전대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있다. 소전대란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오
로지 이곳 정릉과 태종의 헌릉(獻陵),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만 있는 희귀한 존재이다. 태
종 이후, 소전대가 사라지고 '예감'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정릉 소전대는 정릉이 이곳으로 추방되면서 같이 왔는데 오랫동안 정릉약수터 주변에 찌그러
져 있던 것을 정릉관리소 김용욱 소장이 발견하여 고증을 통해 이곳에 두었다. 정릉을 옮기는
과정에서 태종의 지시로 능 주변에 두지 않고 고의로 계곡에 처박아둔 것으로 여겨진다.
정릉의 한낱 석물에게까지 화풀이를 한 태종, 그만큼 의붓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컸던 것이며,
정릉이란 존재 자체도 그야말로 눈에 가시와 같았다.


▲  확대해서 바라본 정릉 능침

소나무숲에 감싸인 정릉 능침에는 커다란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 1기, 혼유석, 여러 석호와 석양이 배치되어 있다. 이중 장명등은 고려 양식을 이
은 14세기 후반 것이며,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 2개도 옛 정릉 출신이다.
예전에는 능 옆구리까지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통제구역으로 묶여 능침 자체를 올라갈 수
없다.


▲  정릉 북쪽 산책로에서 만난 넓적한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  봄이 깊어가는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의 젖줄인 계곡(금천)을 따라 그림 같은 산책로가 서쪽으로 이어져 있다. 이 길을 쫓아가
면 정릉 주변을 도는 2.5km의 숲길이 펼쳐지니 정릉 중심부만 살피지 말고 꼭 1바퀴 둘러보기
바란다. 즉 정릉 외곽을 도는 것으로 산책로 안팎이 모두 정릉 능역(陵域)이다.


▲  생태계가 살아있는 정릉 계곡(금천)

▲  봄 속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따뜻한 기운이 소리 없이 내리면서 푸른 잎과 온갖 꽃들이 기지개를 켠다.
그런 봄에 물들고 싶어서 저 속으로 나를 숨기러 간다.



 

♠  정릉 산책로 돌기

▲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 정자각 계곡 건너편)

정릉 숲길은 정릉 중심부와 맞닿은 북쪽 산책로만 평지이고 나머지는 모두 산길이다. 능이 첩
첩한 산골에 묻혀있기 때문에 숲길을 거닐다 보면 자연히 약간의 등산도 하게 된다. 허나 경
사가 그리 각박하지 않고 길이 잘 닦여져 있어서 두 다리만 멀쩡하면 어린이와 노인도 거뜬히
1바퀴 돈다.


▲  정릉 북쪽 산책로 (옛 정릉약수터 주변)

▲  이제는 과거가 되버린 정릉약수터(정심약수터)

정릉 서쪽에는 정릉약수터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약수터까지 갖
추고 있던 정릉에서 특별히 맛볼 수 있는 자연산 수분으로 물이 졸졸 알아서 나오는 약수가
아니라서 직접 챙겨 먹어야 된다. 능 제사에 쓰이는 물은 모두 여기서 가져왔으며, 정릉2동
사람들이 많이 물을 떠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음)


▲  서남쪽으로 꺾이는 정릉 산책로

▲  봄꽃의 마지막 물놀이 현장 (정릉 계곡)
4월 초를 짧게 주름잡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훔쳐갔던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계곡에서 생애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계곡은
저들의 인생을 정리하는 조그만 블랙홀인 모양이다.

▲  정릉 서쪽 숲길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전까지는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  지그재그 율동을 부리는 정릉 서쪽 숲길

▲  동그란 석축에 뿌리를 내린 벚꽃나무 (정릉 서남쪽 숲길)

▲  정릉 서남쪽 숲길 ①

▲  정릉 서남쪽 숲길 ②

정릉 서남쪽 끝에는 서울의 대표 지붕길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이 흐르고 있다. 정릉에
는 북악산길을 향해 2개의 소방문을 내고 있는데 이들은 업무와 비상용 문이라 관람객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하여 둘이 맞닿아 있음에도 철책을 사이에 두고 서로 금지된 땅 보듯 해야
된다. 현재 정릉은 정문으로만 통행이 가능하여 무조건 그곳으로 오가야 되는데, 북악산길도
서울의 주요 꿀명소인만큼 비상용문 하나를 따고 매표소를 두어 서로 왕래가 가능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정릉~북악산길~성북동(길상사, 삼청각, 간송미술관 등)/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부암동/북한산(삼각산)'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나들이/도보 코스가 만들어진다.

서울시청과 성북구청, 문화재청 철밥통들은 거지 같은 탁상행정으로 세금이나 빼먹지 말고 저
런 것들도 적극 검토해 추진해주었으면 좋겠다.


▲  북악산길(오른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을 지나는 차량들의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  북악산길(왼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②
북악산길을 코앞에 두고 입맛만 다셔야 되니 은근히 아쉽기만 하다.
서로를 잇는 것이 천하통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일까?

▲  정릉 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까지 올라온 숲길은 다시 내리막으로 변신한다.

▲  정릉 남쪽 숲길 ②

▲  정릉 남쪽 숲길 ③

▲  정릉 능침 바로 윗쪽 쉼터

정릉 남쪽 숲길은 중간에 3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서쪽)으로 가면 앞서 서쪽 숲길로 빠
지며,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정릉 정문, 그리고 직진(북쪽)하면 위와 같은 쉼터가 나온다.
허나 그 쉼터는 막다른 곳으로 다시 갈림길로 나와야 된다. 허나 쉼터 주변으로 철책이 없어
서 자칫 숲으로 막 내려갈 수도 있는데 여기서 북쪽 숲으로 내려가면 바로 정릉 능침이다. 능
침 주변은 금지된 구역이니 굶주린 공비들처럼 숲을 막 헤집고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냥 쉼터
에서 얌전히 쉬다가 갈림길로 그냥 사라져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정릉 남쪽 숲길에서 서쪽 숲길을 잇는 사잇길

갈림길에서 바로 정문으로 내려가기는 다소 아쉬워서 서쪽 숲길로 향하는 사잇길로 우회해서
갔다. 정릉 북쪽 산책로를 거쳐 정릉 정문을 나오면서 2시간에 걸쳐 아주 여유롭게 진행된 정
릉 봄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정릉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 87-16 (아리랑로 19길 116, ☎ 02-914-5133)
* 정릉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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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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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봄맞이 나들이 <정읍피향정, 함벽루, 무성서원, 성황산, 한정, 송정, 동진강>

정읍 피향정, 무성서원


 
' 정읍 봄맞이 나들이 (피향정, 무성서원) '

피향정 하연지

▲  피향정 하연지

무성서원 태산사 칠보 성황산 숲길

▲  무성서원 태산사

▲  칠보 성황산 숲길

 


 

차디찬 겨울 제국과 봄의 마지막 경계선인 3월의 한복판에 간만에 전북 정읍(井邑)을 찾
았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정읍으로 가는 일
반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정읍까지 들어가지 않고 그 이전인 태인(泰仁)에서 내렸다.
태인면과 칠보면의 여러 미답처를 그날의 메뉴로 정했는데, 태인터미널 뒤쪽으로 이동하
니 피향정이 하연지란 너른 못을 내밀며 마중을 나온다.
(서울에서 태인 경유 정읍으로 가는 일반고속버스가 1일 3회 운행함)



 

♠  호남 제일의 정자로 오랫동안 칭송을 받았던
피향정(披香亭) - 보물 289호

▲  서쪽에서 바라본 피향정

태인면 중심지(태창리)에 위치한 태인터미널 뒤쪽에는 아침 햇살을 머금은 피향정과 하연지(
태창지)가 나란히 자리해 단아하고 고즈넉한 모습을 풍기고 있다.
예로부터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으로 명성이 높았던 피향정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
붕 정자이다. 신라 말에 그 유명한 최치원(崔致遠)이 세웠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는 헌안왕(
憲安王) 때 태산군수(泰山郡守, 태산은 태인의 옛 이름이라고 함)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넉
넉히 베풀었다. 허나 그가 세운 것도 확실치가 않으며,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조선 광해군(光海君) 시절, 태인현감인 이지굉(李志宏)이 중건했으며, 현종 때 현감 박숭고(
朴崇古)가 증축했고, 1716년 현감 유근(柳近)이 전라감사와 호조(戶曹)의 도움을 받아 변산(
邊山)에서 나무를 베어와 현재의 규모로 중건했다. 그래서 작은 정자였던 피향정이 누각 수준
으로 커진 것이다. 허나 그에 걸맞게 루(樓)를 칭하지 않고 계속 정(亭)을 고집하고 있어 칭
호와 겉모습이 완전 따로 논다. (1974년에 단청을 새로 했음)

땅바닥에 낮게 석축을 다지고 1.42m 높이의 화강암 돌기둥 28개를 세운 다음, 그 위에 누마루
건물을 올렸는데, 정면과 뒷면 가운데 칸에 통행 편의를 위해 돌계단을 늘어뜨렸으며, 누각에
어울리도록 건물 4면이 모두 뚫려있다. 난간은 짧은 기둥으로 촘촘히 둘렀고, 건물 천장은 지
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나 천장 일부를 가리고자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 천장으로
꾸몄으며, 이곳에 퐁당퐁당 빠진 현감과 관리, 선비들이 남긴 글을 머금은 현판이 가득 걸려
있어 호남제일의 정자, 피향정의 오랜 명성을 귀띔해준다.

조선 중기 목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누각 앞뒤로 연꽃이 심어진 상연지(上蓮池)
와 하연지(下蓮池)가 있어 피향정을 아름답게 수식했으나 왜정 때 상연지가 강제 매립되면서
하연지만 남아있다. 연못에 연꽃이 그윽하게 피어나면 그 향기가 주위에 가득했는데, 거기서
피향정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 피향정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2-2 (태산로 2951)


▲  동쪽에서 바라본 피향정과 돌계단

▲  누각 바깥에 걸린 피향정 현판의 위엄

▲  누각 내부에 숨어있는 또 다른
피향정 현판

▲  누각 기능에 충실하게 지어진
피향정 내부

▲  검은 피부의 피향정 중수기


▲  피향정 동쪽에 길게 늘어선 비석들

이들 비석은 옛 태인 고을 현감과 전라도관찰사의 선정비(善政碑) 및 불망비(不忘碑)로 주변
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집합시켰다. 모두 19기로 지붕돌을 지닌 비석과 대머리 비석,
그리고 장대한 세월에게 정통으로 맞아 몸통이 날라간 가련한 비석들까지 다양한 모습과 사연
들을 간직하고 있는데, 선정비를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저 비석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아마도 상당수 비석들은 고개를 떨구겠지.


▲  피향정 서쪽에 닦여진 하연지(태창지)
하연지는 피향정의 상큼한 꿀단지로 연꽃의 보금자리이다. 연못 복판에
동그란 섬을 띄워놓아 운치를 극대화시켰다.

▲  육지와 하연지 섬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돌다리와
섬의 주인장인 함벽루(涵碧樓)


피향정 서쪽에는 누렇게 뜬 잡초 같은 것으로 가득한 너른 공간이 있다. 바로 하연지(태창지)
이다. 누런 잡초들은 모두 연꽃으로 지금은 비록 우울한 모습들을 하고 있지만 여름이 되면
연못 수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통 연꽃밭이 되어버린다. 원래 상연지와 하연지 2개의 연
못이 있어 피향정을 앞다투어 수식했으나 고약한 감성의 왜정이 상연지를 밀어버리면서 하연
지만 남게 되었다.

하연지 복판(정확히는 연못 북부)에는 동그란 작은 섬을 띄워놓았는데, 바로 그 섬에 함벽루
가 둥지를 틀어 섬의 주인 노릇을 한다. 그는 20세기에 지어진 6각형 정자로 1971년에 중수했
으며, 생김새는 완전한 정자(亭子)임에도 그 모습과 다르게 누각을 칭하고 있다. 하여 함벽루
보다는 '함벽정'이 맞다고 본다. 피향정은 나중에 증축되어 누각처럼 되었으나 여전히 '정'을
고집하고 있고, 함벽루는 정자 스타일임에도 누각을 칭하고 있으니 이곳만큼은 모든 것을 반
대로 보는 모양이다.
육지와 함벽루가 있는 섬은 돌다리가 짧게 이어져 있으며, 함벽루 내부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연꽃이 한참인 한여름에 와야 하연지의 진풍경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인데, 엉뚱하게도 3
월에 인연을 지어 연못 풍경이 참 황량하기가 그지 없다. 피향정에서 즐기는 연꽃의 향연은
정읍9경 중 제6경으로 꼽히며, 전주(全州) 덕진공원과 더불어 전북 제일로 찬양을 받는다.


▲  지붕돌을 지닌 함벽루 중수기념비(오른쪽 비석)

1971년에 함벽루를 중수한 기념으로 그해 8월에 장만한 비석이다. 그들 좌우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훨씬 작은 석인(石人, 동자석으로 여겨짐) 2기가 홀(忽)을 들고 서 있는데, 세월
을 너무 좋지 않게 탔는지 머리를 비롯한 윗도리가 완전히 아작이 나버렸다. 저들은 부근에서
수습된 것으로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  6각형 정자 모습의 함벽루
'함벽루'라 쓰고 '함벽정'이라 읽으면 딱 맞는다.

▲  서쪽에서 바라본 하연지와 함벽루 (비수기에 잠긴 하연지)

▲  태인이로비(泰仁移路碑)

하연지 서쪽 끝에는 '태인이로비'란 키다리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871년 태인현감 김인근(
金寅根)이 길을 이곳으로 이설하고 세운 것으로 높이 210cm, 두께 45cm인데, 길을 옮긴 것을
기리고자 세운 옛 비석은 여기서 처음 본다.


▲  남쪽에서 바라본 하연지와 함벽루 섬 (오른쪽에 돌다리가 있음)

피향정은 이미 대학생 시절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다. 그때는 겨울이 시작되던 11월 말이었지.
이번에는 겨울과 봄의 마지막 경계선에 왔으나 황량한 풍경은 11월 말과 비슷하다. 어쩌면 그
때와 비슷한 상황에 왔을까? 다음에 또 이곳과 인연을 짓는다면 무조건 여름에 찾고 싶다. 그
래야 피향정의 자랑인 연꽃의 향연을 제대로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피향정 다음 답사지는 칠보(七寶)에 있는 무성서원이다. 태인에서 칠보까지는 약 8km 거리로
가까운 편이나 정작 시내버스는 하루에 7~8회가 고작이다. 게다가 시간도 맞지 않아서 1시간
이나 기다려야 했지. 하여 그 시간을 때우고자 달이 지구 주위를 돌 듯 하연지를 2바퀴나 돌
았다. (하연지 둘레가 약 480m 정도임)
그렇게 돌고도 시간이 남아 터미널에서 억지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정읍시내버스 91번(신태
인터미널↔칠보) 소형 차량(카운티)이 나타나 반갑게 입을 벌린다.
버스는 겨우 나 하나만을 담고 칠보로 이동했는데, 칠보면 중심지(시산리)까지 15분 정도 걸
렸다. 신태인에서 태인, 칠보 구간은 이동 수요가 좀 있는 줄 알았더만 평일 학생 수요를 빼
면 지지리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소형 차량으로 가뭄에 콩나는 수준으로 다니는 것이다.

전북의 서남부를 이루고 있는 정읍시는 태인면과 북면까지는 평지(평야)이고 동부 지역인 칠
보, 산외, 산내 지역은 첩첩한 산골이다. 즉 태인을 경계로 정읍은 평지와 산악 지대,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  최치원을 기리는 오래된 서원, 무성서원(武城書院)
- 사적 166호

▲  무성서원의 외경 (왼쪽 2층 누각이 현가루)

칠보면 중심지(시산리)에서 바로 남쪽에 흐르는 동진강(東津江)을 건너면 무성리이다. 무성리
를 이루고 있는 마을 중 무성서원을 간직한 곳이 바로 원촌(원촌마을)으로 그곳은 무성서원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오래된 마을이다. 하여 양반과 선비들이 지어놓은 정자(10개가 있음)와
한옥, 제각(祭閣) 등이 많이 전하고 있으며, 서원도 무성서원 외에 용계서원도 지니고 있다.
게다가 향토문화사료관 등의 문화공간도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며,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歌
詞)로 유명한 상춘곡(賞春曲)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유서가 깊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내 침침한 두 눈에는 오로지 무성서원 밖에는 보이지
않아 무성서원과 서원 뒷산인 성황산에 몇몇 명소만 둘러보고 철수했다.

원촌마을 안쪽에 자리한 무성서원은 전북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신라 후기에 최치원이
태산군수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는데, 이에 감동을 먹은 지역 사람들이 그의 생사당(生祠堂)
을 세워 태산사(泰山祠)라 했다. 생사당이란 살아있는 사람에게 제를 지내는 사당으로 그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최치원이 태수로 거쳐갔던 태산고을이 과연 이곳
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음)

그렇게 시작된 태산사는 고려 말에 철거되어 사라졌으며, 1483년에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
학당(鄕學堂)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그곳이 현재 무성서원 자리이다.
1549년 신잠(申潛)의 생사당을 경내에 추가했으며, 1630년에는 정극인, 안세림(安世琳), 정언
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이 추가되었고, 1675년에는 김관(金灌)이 추가되어 총 7명의 사당
이 되었다. 최치원의 생사당으로 시작된 태산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에 유명 인사들까지
기리는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1696년 태산사와 신잠의 사당을 통합했고, 조정에 상주하여 '무성(武城)'이란 사액을 받아 무
성서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의 서슬 퍼런 서원 정리 사업 때도 살아남았으며, 면
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이 1906년 6월 토왜(討倭)를 외치며 의병을 조직했던 병오창의(丙午倡
義)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원을 이루고 있는 건물은 사당(태산사)과 현가루, 명륜당(강당), 동재(강수재), 비각 등이
있으며, 1486년 이후 제작된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院規) 등의 귀중한 서원 자료가 보
존되어 있다.

* 무성서원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원촌1길 44-12)


▲  뾰족한 붉은 살을 지닌 무성서원 홍살문
차디찬 인상의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 관리사무소와 주차장이 나오고 바로
서원 정문인 현가루가 마중을 한다.


▲  맞배지붕 비각과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 오른쪽 비석)

무성서원하면 대표적인 사건이 '병오창의'가 아닐까 싶다.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에 분
개한 최익현은 1906년(병오년) 2월 제자인 임병찬(林秉瓚)과 정읍으로 넘어와 창의를 준비했
다. 하여 그해 6월 4일 이곳 무성서원에서 유생들에게 강회(講會)를 펼치며 토왜(討倭)에 동
참할 것을 호소하여 의병을 조직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병오창의이다.
그 소식을 들은 왜군은 조선인 진위대를 파견해 시비를 걸자 최익현은 동족간의 싸움은 절대
로 안됀다며 의병을 해산했고 핵심 인물 13명이 너무 쉽게 오라를 받으면서 그의 창의는 허무
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최익현의 병오창의를 기리고자 정읍 지역 유림들이 1992년 12월 10일 병오창의기적비를
세웠다.


▲  강수재(講修齋)

병오창의기적비를 바라보고 있는 강수재는 무성서원의 동재(東齋)로 유생들의 기숙 공간이다.
원래 고사(庫舍)였던 것을 무성서원 간판을 내건 이후, 강수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서재(西
齋)인 흥학재(興學齋)도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다.
현 건물은 1887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온돌방과 마루를 갖추고 있다.


▲  서원의 정문인 현가루(絃歌樓)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정문 역할 외에도 시를 짓고
음악 등의 여흥을 즐기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누각의 이름인 '현가'는
거문고 등의 악기와 노래를 뜻함)

◀  무성서원의 역사를 더욱 살찌우고
있는 현가루 앞 비석들

          ◀  신용희(申瑢熙) 불망비
통정대부(通政大夫) 신용희의 공적을 기리고자
1925년에 세웠다. (서원 중수에 공적이 있음)
무성서원에는 맞배지붕 비각 4개, 비석 15기가
전하고 있어 서원의 내력을 풍성하게 돕고 있
는데, 이들 대부분은 서원 중수를 돕거나 서원
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태인현감 등의 관리와
양반사대부의 공덕비이다. (불망비도 공덕비의
일원임)


▲  무성서원 강당<명륜당(明倫堂)>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으로 공부를 하거나 시국을 논의하던 학업
공간이다. 1825년 화재를 만나 1828년에 중건했으며, 마루가 3칸, 방이 2칸 규모로 더울 때는
마루에서 교육을 했고, 추울 때는 마루 좌우에 있는 온돌방에서 교육을 했다.


▲  비각에 갇혀있는 서호순(徐灝淳) 불망비
강당(명륜당) 재건을 도운 태인현감 서호순의 공을 기리고자 1849년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23m, 폭 0.36m이다.

▲  서원 뒷쪽에 높이 자라나 1급 그늘을 선사하는 늙은 나무들
(오른쪽에 보이는 지붕은 태산사)

▲  태산사로 인도하는 내삼문(內三門)
태극마크가 그려진 가운데 문은 제향일에만 열린다. (제왕 등의 아주 높은
사람이나 사당 주인공의 혼령만 이용할 수 있는 특별한 문)

▲  무성서원의 모태이자 상징, 태산사(泰山祠)

무성서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태산사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맞배지
붕 집으로 최치원과 신잠을 비롯한 7명이 봉안되어 있는데, 기존 태산사가 고려 말에 파괴되
자 1483년 현 자리에 중건했다. 현 건물은 1844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문에는 태극마크가 문짝 하나당 2개씩 앙증맞게 그려져 있는데, 제향일을 제외하면 늘 굳게
닫혀있어 내부 관람은 어렵다. 제향은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과 8월 중정일 등 1년에 2번
열렸으나 지금은 2월 중정일에만 지낸다.


▲  서쪽에서 바라본 태산사



 

♠  성황산(城隍山)에서 만난 소소한 명소들

▲  필양사(泌陽祠)

무성서원은 오랜 명성에 비해 조촐한 규모라 관람이 생각 외로 일찍 마무리가 되었다. 피향정
에 비해 대단한 시간 도둑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은 약 13시, 무성서원 이후의 정처(定處)를 딱히 정해두지 않아서 어디를 갈까 궁리
하며 원촌마을을 거닐고 있으니 맞배지붕 사당이 잠깐 보고 가라며 애타게 손짓을 보낸다. 고
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무슨 물건인가 살펴보니 춘우정 김영상(春雨亭 金
永相, 1836~1911)의 사당인 필양사이다.

김영상은 도강김씨 집안으로 정읍시 정우면 산북리에서 태어났다. 16살에 선조들이 살던 이곳
원촌으로 이사를 했으며, 유학을 익히고 지역의 여러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 터지자 의병활동에 참여했고 최익현의 병오창의에도 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1910년 이후 왜정은 이 땅의 선비와 사대부(士大夫)를 회유하고자 돈과 작위(爵位)를 마구 뿌
렸는데, 그에게도 돈의 유혹이 뿌려졌다. 허나 그는 이를 거절하며 왜정이 내민 사령서(辭令
書)에 적힌 자신의 이름 3자까지 찢어버렸다. 이에 뚜껑이 뒤집힌 속 좁은 왜군은 불경죄(不
敬罪)를 물어 군산감옥으로 잡아갔다.
군산으로 이송 도중, 만경강(萬頃江) 사챙이 나루터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을 시도했으나
눈치 없는 왜군이 이를 구출해 실패했으며, 군산감옥에 투옥되자 단식에 들어가 겨우 8일만인
1911년 5월 9일 10시경, 7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그에게 독립유공 대통령 포상을 올려 그의 충절을 기렸으며, 1991년 8
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가로 추서되었다.
필양사는 지역 유림들이 1945년에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국가
보훈부 현충시설(관리번호 51-1-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3년 5월에 수해로 지붕이 무너
지자 복구했다. 그리고 2010년 김영상 순절 100주년을 맞이해 필양사 앞에 '애국지사 춘우정
김영상 선생 순국추모비'를 세웠으며, 사당 뒷쪽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여 경건한 분위기를 자
아낸다.

필양사를 보고 다시 길을 재촉하니 원촌마을의 뒷동산인 성황산(城隍山)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마을과 맞닿은 산 동쪽 자락에는 원촌마을 선비와 양반들이 조선 후기
와 20세기에 뿌려놓은 정자와 제각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시간도 아직 널널하고 딱히 정처도
정하지 못해 그 유혹에 푹 빠져보기로 했다.
기왕 산에 두 발을 들였으니 비록 높이는 낮지만 그 정상에 올라 천하를 한번 굽어봐야 되겠
지. 하여 정상으로 발을 움직였으나 대자연의 괴롭힘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나무들이
계속해서 길을 막는다. 몇 번을 넘었으나 이제는 더 큰 나무가 드러누워 길을 가로막는다. 얼
핏 보면 큰 태풍이 얼마 전에 다녀간 듯 보이나 이때는 태풍과 관련이 없는 3월이다. 아무래
도 작년 여름부터 쓰러진 나무들을 정읍시청 철밥통들이 제대로 치우지 않고 방치한 듯 싶다.
쓰러진 나무로 길이 엉망진창이라 계속 오르는 것은 무리가 있고 올라갈 기분도 급 저하되어
정상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산자락에 깃든 여러 정자와 기와집을 둘러보았다.


▲  한정(閒亭) - 정읍시 향토유적 1호

이름이 달랑 1자인 한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조선 중종(中宗) 시절 한
정 김약회(閒亭 金若晦)가 사화(士禍)로 시끄러운 조정이 싫어서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것으
로 자신의 호를 따서 '한정'이라 했다. 여기서 한(閒)은 한가함과 고요함을 뜻하는데, 그 이
름 그대로 주변이 고요 속에 잠겨있어 내 발자국 소리, 사진 소리가 미안할 정도이다.

김약회가 세상을 떠난 이후 전라도 유림들이 모여 학문을 나누던 현장으로 쓰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파괴되어 사라졌으며, 320여 년이 지난 1920년에 후손 김환정이 재건했다. 그러
니까 현재 한정은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1칸씩 딸려있으며, 전면과 좌우로 툇마루를 갖춘 전형적인 누정
(樓亭) 건축물이다. 


▲  시산사로 인도하는 계단길

▲  시산사(侍山祠)

이곳은 무성서원에서 병오창의를 일으킨 최익현의 사당으로 1907년에 세워졌다. 첫 이름은 태
산사(台山祠)로 왜정의 태클로 철거되었으며, 1975년에 다시 세워 시산사라 하였다. 이때 국
헌 김기술(菊軒 金箕述, 1849~1929)과 화개헌 김직술(和介軒 金直述)이 추가로 배향되었는데,
김직술은 최익현과 함께 병오창의를 일으킨 인물이다.


▲  송정(松亭)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33호

소나무 정자를 뜻하는 송정은 앞서 '한정'처럼 이름이 달랑 1글자이다. 1글자의 이름을 지닌
정자나 누각이 이 땅에 흔치가 않은데, 이곳 성황산에는 무려 2개 이상이나 있다. 아마도 이
곳에는 단순하면서도 무언가 강렬한 의미의 1글자를 선호했던 양반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곳은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 사건을 비롯하여 광해군의 정치에 쓸데없이 불만을 품은 지
역 선비들이 낙향하여 시를 읊으며 팔자 좋게 놀던 곳이다. 세상에서는 그들을 7광(狂)과 10
현(賢)이라 불렀는데, 7광은 김대림(金大林), 김응빈(金應賓), 김감(金勘), 송치중(宋致中),
송민고(宋民古), 이상형(李尙馨), 이탁(李鐸)이며, 10현은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
탁을 포함해 김관(金灌), 김정(金鼎), 김급(金汲), 김우직(金友直), 양몽우(梁夢禹)이다.

정자는 한복판에 온돌방이 있고, 마루가 방을 둘러싼 구조로 부근 숲속에 10현이 봉안된 영모
당(永慕堂)이 있다. 영모당은 1898년에 지어진 것으로 송정영당(影堂)이라 불리기도 한다.

* 송정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310 (원촌1길 12-3)

▲  파란 현판에 도도하게 쓰인
송정 두 글자의 위엄

▲  산 밑에 있는 후송정(後松亭)


후송정은 송정 밑 바위에 자리해 있다. 화개헌 김직술이 쓰러지기 직전인 송정을 대신하고자
10현의 후손 42명의 지원을 받아 1899년에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송정의 10현을 추모하는 뜻
에서 십송정(十松亭)이라 했으나 1985년 현재의 정자를 지으면서 후송정으로 이름을 갈았다.

정자의 이름인 후송은 논어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짐을 안다)'의 의미로 절개가 높은 선비의 고결한 뜻을 뜻한
다. 예전에는 정자 밑으로 개울이 흘렀으나 지금은 길이 들어서 예전과 풍경이 다소 달라졌다.


▲  산외면과 칠보면, 태인면의 산하를 두루 적시며 서해로
흘러가는 동진강


후송정을 끝으로 무성서원 후식용으로 둘러본 성황산 더듬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들 외에도
안가본 제각과 정자가 여럿 있으나 썩 내키지가 않아 적당히 둘러보고 나왔다. 그래도 한정,
시산사, 필양사, 송정, 후송정, 영모당(사진은 없음)을 둘러봤으나 거의 70% 이상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원촌마을을 뒤로 하며 서해를 향해 흘러가는 동진강을 건너 칠보면 중심지(시산리)로 나왔다.
여기서 정읍시내버스 91번을 타고 신태인읍으로 나와서 신태인역으로 이동하니 11시 이후부터
잔뜩 인상을 쓰던 하늘이 기어코 빗방울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오후 늦게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우산을 준비해 갔으나 비가 생각 외로 꽤 길게 내렸다. (저녁 늦게까지) 시간도 이제
15시 정도인데 벌써 날씨가 이러하니 어디로 가야되나 그야말로 갈팡질팡에 빠져버렸다.

신태인역에 이르니 마침 서울 용산행 무궁화호 열차가 막 기적소리를 울리며 들어온다. 콩을
볶듯 급히 표를 사들고 열차에 올랐는데, 좌석이 모두 매진되어 오랜만에 입석으로 갔다. 그
를 타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을 하면서 비가 그치길 염원했으나 비는 나를 졸래졸래 따라와 가
는 곳마다 비를 뿌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  내장산(內藏山)에서 발원하여 칠보에서 동진강과
합쳐지는 칠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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