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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4.03.22 김포공항을 굽어보는 강서구의 대표 지붕,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둘레길, 개화산자락길, 개화산 봉수대, 미타사석불입상, 신선바위>
  4. 2024.03.11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진관동 나들이 <경천군이해룡 사패지송금비, 여기소터,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영산군 이전묘역, 숙용심씨묘표>
  5. 2024.02.17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구역, 후원 돌담길 겨울 나들이 <중앙고 본관, 창덕궁 후원 뒷길, 옥류정>
  6. 2024.01.14 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 용마산~아차산~망우산 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용마산1보루, 용마산5보루, 망우산1보루>
  7. 2023.12.17 북악산 북쪽 자락에 깃든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8. 2023.11.25 망우리공동묘지를 거닐다. 망우산~망우역사문화공원~구리둘레길 늦가을 나들이 (사색의길, 태허 유상규묘, 망우산3보루, 오세창묘, 방정환묘)
  9. 2023.11.06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늦가을 나들이 <정동 회화나무,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배재학당 동관>
  10. 2023.10.23 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1바퀴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 흔들바위>

서울 서남쪽 끝자락에 깃든 상큼한 명소들, 푸른수목원~항동저수지~항동철길 1바퀴

구로구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가을 나들이



' 구로구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가을 나들이 '

푸른수목원 항동저수지

▲  푸른수목원 항동저수지

항동철길(오류선) 푸른수목원 장미원 분수대

▲  항동철길(오류선)

▲  장미원 분수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도 수목원이 있다. 바로 홍릉수목원과 서울 서
남쪽 변두리에 있는 푸른수목원이 그것이다.
구로구의 일원으로 서울의 서남쪽 끝을 잡고 있는 항동(航洞)에 자리한 푸른수목원은 이
미 2~3번 인연이 있으나 주마등(走馬燈)으로 둘러본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가을이 늦가
을로 숙성되어 가던 10월의 한복판에 겸사겸사 그곳을 찾았다.

비록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나 나는 서울의 동북쪽 끝, 푸른수목원은 서남쪽 끝
으로 완전 끝에서 끝이다. 거리만 해도 최소 34km가 넘는다. 우리 동네 전철역인 방학역
에서 1호선을 타고 70분을 달려 오류동역에서 하차, 여기서 서울시내버스 6614번(양천차
고지↔옥길지구)으로 환승하여 푸른수목원 후문에서 두 발을 내렸다.



 

♠  푸른수목원 입문 (항동저수지)

▲  활짝 열린 푸른수목원 후문

서울의 서남쪽 변두리인 항동 한복판에 서울 최초의 시립 수목원(樹木園)인 푸른수목원이 상
큼하게 누워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과 차량, 그리고 번잡한 시가지가 크게 연상
되는 서울에도 수목원이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짙은 숲으로 이루어진 국립산림과학
원 소속의 홍릉수목원과 오산(烏山)의 물향기수목원과 비슷한 푸른수목원을 가지고 있다.

푸른수목원 자리에는 지금도 건재한 항동저수지와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다. 저수지 동쪽에는
구로구(九老區)의 지붕인 천왕산(天王山, 144m)이 자리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도 그런
데로 띄고 있었다.
시골 향기 그윽했던 변두리로 조용히 묻혀있던 항동, 바로 그곳에 서울시는 수목원을 닦기로
하고 2004년 6월 30일에 수목원 기본계획용역을 실시해 같은 해 12월 30일, 수목원 실시설계
용역을 시행했다. 2005년 12월 15일 수목원 조성사업 실시계획 인가를 얻어 2006년 3월 8일까
지 토지 측량, 경계 측량, 분할 측량을 완료했으며, 4월 15일 실시계획 변경 인가를 받아 6월
16일 보상계획 공고를 하여 12월까지 수목원 토지 보상과 공사 시행을 완료했다.

2009년 10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1단계 조성 공사로 저수지 생태탐방로, 목재방틀을 설치했
으며, 2010년 9월 2단계 조성 공사에 들어갔으나 2011년 6월, 캠핑장 반영 변경 계획에 따른
시민들의 반대로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2012년 7월 17일 시민들의 제안을 받아들
여 정원 개념을 도입한 수목원으로 공원조성계획이 통과되어 2013년 3월, 3단계 조성 공사에
들어가 그해 6월 5일, 상큼한 모습으로 속세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18년 서울시 1호 공립
수목원으로 지정되었다.

수목원 면적은 103,354㎡로 2,400여 종 52만 주의 다양한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잔디마
당과 향기원, 초화원, 장미원, 암석원 등 20개의 테마공간과 북까페 등의 편의시설이 닦여져
있으며, 숲해설 등의 자연 교육 프로그램과 친환경관리의 중심인 '생태의 섬(Eco-island)'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도심 속에서 식물과 인간, 환경이 공존하고 3무(無, 농약과 무화학비료,
쓰레기 배출을 하지 않음) 운동을 실천하는 생태공간임을 내세우며 실천하고 있다.
수목원 동쪽에는 천왕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고, 북쪽은 주거지와 성공회대학교, 서쪽과 동쪽
은 들녘과 항동지구가 공존하고 있다. 수목원 남쪽에는 철길 관광지로 크게 인기를 누리고 있
는 항동철길(오류선)이 지나가며, 천왕산과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가 동쪽에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고 거닐 곳도 정말 많다. 하여 푸른수목원과 항동철길을 한 덩어리로 둘러보거나 천왕
산과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까지 보태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수목원이긴 하지만 나무가 빽빽한 그런 수목원이 아니라 정원 및 공원 같은 분위기로 정문과
후문, 2개의 쪽문(항동철길, 더불어숲길)을 통해 들어설 수 있으며, 나는 후문으로 들어가서
항동철길 쪽문으로 나왔다. 쉬는 날과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5시부터 22시까지로 이
땅의 수목원 중 이렇게 관람시간이 긴 곳은 여기 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도시와 도시 사람
들에게 최적화된 수목원이다.

* 푸른수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 81-1(연동로 240 ☎ 02-2686-3200)
* 푸른수목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장미원 ①

후문을 들어서면 바로 장미원(장미정원)이 마중을 한다. 수목원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붉은 장
미와 분홍 장미 등 천하의 온갖 장미 69종이 모여 아름다움을 견주고 있는데, 그들이 심어진
부지는 장미의 꽃잎과 푸른 잎의 모양을 따서 만들었으며, 분수대가 정원 한복판에 자리하여
경관을 크게 돕는다.


▲  장미원 ②
늦가을 장미의 향연이 한참 펼쳐져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  장미원 ③
수목원 너머로 항동지구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 도시 속의
장미공원을 보는 듯 하다.

▲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장미원 분수대

▲  더불어숲길 안내도

장미원 동쪽에는 천왕산으로 인도하는 더불어숲길 쪽문이 있다. 더불어숲길은 서울시와 구로
구청, 성공회대, 사단법인 더불어숲이 함께 조성한 짧은 숲길로 더불어숲길 쪽문에서 성공회
대 뒷쪽(천왕산 북쪽 자락) 언덕까지 이어지며 거기서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와 만난다.


▲  장미원 남쪽이자 조망원 주변 산책로

▲  항동저수지 수생식물원

항동저수지는 푸른수목원의 상큼한 거울이자 터줏대감이다. 근처의 궁동저수지(궁동저수지생
태공원)와 더불어 서울에 몇 없는 저수지로 경기도 농산물원종장의 농업용수를 위해 왜정(倭
政) 때 닦여졌다.
경기도 농산물원종장은 1917년 5월에 여기서 가까운 부천 역곡(벌응절리)에 세워진 경기도종
묘장에서 시작되었는데, 1932년 경기도 농사시험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49년에 경기도
농사기술원으로, 1957년에는 경기도농사원으로 이름이 갈렸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항동은 경기도 부천군(富川郡)에서 서울로 바뀌었으며, 서울의 지
나친 도시화로 1998년 폐지되면서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경기도 농업기술원에서 그 기능을 담
당하고 있다.

이 저수지는 농업용수 외에도 낚시터와 물놀이 장소로 바쁘게 살았는데, 겨울에는 썰매와 얼
음 낚시 명소로도 유명했다. 주변이 온통 경작지와 산이라 한때 존폐 위기까지 갔던 궁동저수
지와 달리 좋은 수질을 유지했으나 푸른수목원이 닦이면서 농업용수 제공은 중단되고 낚시와
썰매도 모두 금지되는 등, 그동안의 존재의 이유를 모두 빼앗기긴 했으나 대신 궁동저수지와
비슷한 수생식물원 및 생태저수지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저수지 동부에는 나무로 다진 생태탐방로를 닦았고 연꽃 등 수초(水草)들이 무성해 저수지의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저수지 주위로 산책로가 닦여져 있으며, 물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저수지 수중 식구들을 위해 접근을 삼가하기 바란다. 푸른수목원의 절반은 항동저수지
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곳에서 매우 비중이 크며, 그가 없는 푸른수목원은 정말 상상
할 수가 없다.


▲  저수지 위에 그물처럼 닦여진 수생식물원 생태탐방로

▲  푸르기 그지 없는 항동저수지
농업용수 제공과 낚시터, 피서지 바쁘게 살았던 그는 이제 인간의 손을
덜 받는 생태저수지로 새 삶을 누리고 있다.

▲  저수지 외곽에 삼삼하게 자라난 수초들
온갖 수초들이 저수지와 속세의 경계를 팽팽히 그으며 저수지 식구들을
지킨다.

▲  항동저수지 서쪽 산책로

▲  평화로운 모습의 항동저수지와 천왕산
천왕산은 물론 주변 나무와 하늘, 구름, 햇님, 달님까지 저수지를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항동저수지와 가까이에 보이는 옥의 티들(항동지구)

푸른수목원이 닦여졌을 때는 주변은 산과 들판이 전부인 자연의 공간이었다. (집들이 여럿 있
었음)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농촌이었으나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들어와 춤을 추면서 수목원
주변으로 회색빛 아파트들이 마구 들어서 일명 항동지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곳은 서울의 영원한 시골로 남았으면 했는데, 이 변두리까지 가만두지를 않고 자꾸 성냥갑
아파트를 올려 난개발을 일삼은 것이다. 아직 시골 들판이 좀 남아있긴 하나 그마저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 서울의 인구는 미세하게나마 줄고 있고, 전국적으로 비어있는 아파트가 즐
비하다고 하는데, 자연이 잘 남아있는 이곳까지 공간을 낭비해야 했을까? 아파트보다는 자연
공간을 크게 조성하여 푸른수목원의 확장판으로 삼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수목원과 천왕
산 일대는 숲을 중심으로 한 자연공간으로, 수목원 서쪽과 남쪽은 수목원 수식용 자연 공간과
주말농장 등의 경작지로 손질해야 했음)

▲  북쪽에서 바라본 항동저수지

▲  저수지와 습지식물원 사이 산책로



 

♠  푸른수목원 둘러보기

▲  참여정원의 평화로운 풍경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가 싹 정화되는 기분이다.

▲  가을에 푹 잠긴 붉은 단풍나무
올해의 마지막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  습지식물들의 조그만 낙원, 습지식물원

이곳은 동그란 작은 웅덩이가 여러 개 모여 이루어진 습지대(濕地帶)로 다양한 수생식물과 수
서곤충(水棲昆蟲)이 살아가고 있다. 습지대는 생태공원의 필수 요소로 오염된 물을 정화시켜
주며, 조그만 생물들의 삶터와 먹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습지를 이룬 물은 항동저수지로 흘
러가 저수지를 살찌워준다.


▲  야생화원과 계류원 주변 산책로

▲  계류원에 차려진 하얀 천막(국화정원)

계류원은 수목원 이전부터 있던 물길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다양한 수생식물이 살아가고 있
다. 그 위에는 나무다리를 닦고 천막을 씌워 국화정원으로 삼아 아름답게 꾸며진 국화와 분재
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 내용은 매달 다를 수 있음)


▲  계류원 국화정원의 학 모양 분재
학 분재 1쌍이 서로를 각별히 바라보며 정을 속삭인다. 그 앞에는 다양한
피부색의 국화들이 서로 아름다움을 견준다.

▲  불꽃처럼 화사하게 돋은 노란
국화의 위엄 (국화정원)

▲  늦가을에 점차 물들어가는 활엽수원
(闊葉樹園)


▲  활엽수원 산책로
단풍나무와 참나무, 벚나무 등의 활엽수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늦가을에는 단풍의 고운 향연을 구경할 수 있다.

▲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수목원 동쪽 끝자락에는 KB숲교육센터라 불리는 유리온실이 있다. 하얀 피부를 지닌 이 온실
은 국민은행(KB)의 후원(기부채납)으로 2015년에 지어진 것으로 시민을 위한 친환경 휴식 공
간과 체험형 생태교육공간으로 조성되었으며, 초승달 모양을 지닌 정남향 온실(溫室)로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열대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조촐하게 실내 식물원 역할을 한다.
수목원 구성원 중 유일한 실내 공간(관리사무소와 까페는 제외)으로 안으로 들어가면 조금은
더울 수 있다. (겨울에는 따스해서 좋으나 여름에는 다소 더울 수 있음)

▲  2015년 KB숲교육센터 조성 기념으로
전 서울시장 박원순이 심은 소나무

▲  열대 밀림 같은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 ①


▲  열대 밀림 같은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 ①

▲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의 조그만 문

▲  '아라우카리아'라 불리는 열대식물

▲  스코파리움호주매화(마누카)
이름도 무지하게 어렵고 생김새도 요상한 나무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고향이다. 최대 3m까지 자란다고 하며, 잎과 가지에서 오일을 추출한다.

▲  만지면 꽤 아플 것 같은 선인장 무리들
저들은 생긴 것 자체가 단단한 무기이다.

▲  벌써 휴식기에 잠긴 무궁화원
130여 종의 무궁화가 향연을 펼치는 곳이나 계절 관계로 벌써부터
휴식에 들어가 잠잠한 모습이다.

▲  무궁화원 부근에 닦여진 돌탑

▲  영국정원과 가로수


▲  영국정원과 늘씬하게 솟은 가로수들
영국(잉글랜드) 양이(洋夷) 스타일의 자연풍경식 정원의 소박함과 아름다움을
수목원 구석에 구겨 넣었다. (바로 옆에 억새원이 있음)

▲  야생화원
이 땅에 자생하는 야생화를 잔뜩 머금은 공간으로 그중에서
구절초(九節草)가 제일 많이 아른거린다.

▲  구절초의 앳되고 청초한 미소가 깃든 야생화원

▲  야생화원의 풍경 하나 (커다란 돌과 식물, 꽃들)

▲  프랑스정원(오른쪽)과 억새원(왼쪽)
영국정원이 있으니 그에 대비되는 프랑스정원도 그 옆에 구겨 넣었다.

▲  향기원
이곳에는 오감을 흥분시키는 다양한 허브식물과 약용식물, 식용식물 등이
닦여져 있다. 이들은 자원봉사자들이 정성을 들여 조성했다.

▲  항동철길 쪽문 방향

후문을 통해 푸른수목원으로 들어와 수목원 내부를 고루고루 둘러보고 항동철길 쪽문으로 나
갔다. 일몰이 턱 밑이라 흐리게 나오거나 별로인 사진이 적지 않아 수목원의 ¼> 정도의 분량
은 본글에서 쿨하게 뺐다.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별도의 글에
서 채울 생각이다. (생각에서만 멈출 수도 있음)



 

♠  서울에서 유일한 철길 명소, 항동철길(오류선)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푸른수목원 바로 남쪽에는 철길이 지나고 있다. 속세에서는 그 철길을 항동철길이라 부르는데
, 정식 명칭은 오류선(梧柳線)으로 오류동역(1호선)에서 광명시 옥길동에 있던 경기화학을 이
어주던 4.5km의 화물열차 전용 단선 철로이다. ('경기화학선'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음)

경기화학주식회사는 이 땅 최초의 비료 공장으로 1954년 옥길동에 설립되었다. (그 시절 지명
은 '부천군 소래면 옥길리') 원료와 비료 운송을 위해 1957년 9월 26일 철길을 닦기 시작해
1959년 5월 30일에 완성을 보았는데, 경기화학 외에도 한때 오류동에 있던 삼천리연탄공장과
동부제강도 이 철로의 신세를 졌다.
경기화학은 울주 온산공장으로 통합, 이전되면서 광명 공장은 문을 닫았으며, 그로 인해 열차
가 다닐 일이 거의 없어지면서 완전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동부제강과 삼천리연탄공장도 다
른 곳으로 이전됨)
그렇게 열차의 기적소리도 사라지고 열차의 바퀴자국도 녹이 슬면서 철로에는 잡초가 덥수룩
하게 끼었으며, 무쓸모급 철길로 전락했지만 주변에 천왕산공원, 푸른수목원이 조성되면서 그
들을 수식하는 철길 명소로 덕을 보게 되었고, 2014년 이후 방송매체에서 이곳을 줄기차게 홍
보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항동철길은 오류동역에서 1호선 경인선에서 살짝 갈라져 나와 서해안로와 오리로가 만나는 광
덕4거리를 지난다. 여기서부터 뚜벅이들이 거닐 수 있다. (광덕4거리~오류동역 구간은 접근
금지) 오리로11길 골목길이 바로 남쪽에 붙어있으며, 금강수목원아파트와 맞닿은 철길 북쪽에
는 짧게 숲길을 닦아놓아 눈길을 부드럽게 배려했다.
철길은 주택가의 끝인 우창굿모닝아파트를 지나면 숲에 감싸인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난다. 천
왕산 산세가 움푹 낮아진 곳에 산의 살을 파서 생긴 틈으로 그 고개를 지나면 푸른수목원 항
동철길 쪽문과 천왕산 등산로가 나온다. 그들을 지나면 푸른수목원 정문이 나오며, 항동우남
퍼스트빌까지 이동할 수 있다. 허나 그 이상은 곤란하다.
 
철길에 잡초가 덥수룩하고 골목길과 바로 붙어있어 열차도 완전히 등을 돌린 철길처럼 보이지
만 가뭄에 콩 나듯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주택가와 뚜벅이길이 바로 옆에 붙어있어 폭주는 하
지 못하고 천천히 지나가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 된다. 그것만 유념한다면 철길 산책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또한 열차가 아주 드문드문 지나가므로 산책 중에 열차를 만난다면 꼭
복권을 사보기 바란다. 그만큼 열차를 보기 힘들다.
한때 이 철길을 두고 관광지로 두느냐 안전을 위해 접근 불가로 봉인하느냐를 두고 말이 많았
으나 이제는 관광지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이 땅에 철길 명소가 여럿 있지만 서울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옛 경춘선 철길과 옛 경의
선 철길은 폐선된 철로라 제외) 게다가 주거지와 골목길 속을 거리낌없이 지나가므로 매우 친
숙하게 다가온다. 철길 주변 풍경도 주택가와 자연(천왕산, 푸른수목원)이 어우러진 모습이라
가히 싫지는 않다. 특히 우창굿모닝아파트에서 푸른수목원으로 넘어가는 나무에 감싸인 그늘
진 고갯길은 이곳의 백미로 소박한 자연 풍경을 보여준다.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오류동 방향)

▲  항동철길의 유일한 간이역(簡易驛), 항동철길역

항동철길에도 간이역이 있었다. 바로 항동철길역이 그것이다. 간이역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곳
에 바퀴를 멈추는 열차는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무늬만 역이다. 항동철길이 관광지로 뜨고 바
로 옆에 푸른수목원이 들어서면서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장식물이기 때문이다.
요즘 인기가 높은 레일바이크(Rail bike) 명소로 삼아도 좋을 듯 싶으나 화물열차가 랜덤 수
준으로 지나다녀 그것도 여의치 않다.

역무원 모자를 쓴 귀여운 개모형 옆에는 하얀 피부로 된 조그만 역명 간판이 달려있는데, 동
쪽 역은 무려 개성(開城), 서쪽 역은 해남(海南)으로 나와있다. 여기서 개성과 해남이 그렇게
나 가까웠던가? 갑자기 나의 둔한 돌머리에 혼돈이 온다. 해남은 비록 철도는 들어가지 않으
나 시외직행버스와 승용차로 언제든 갈 수 있지만 개성은 분명 우리 영역임에도 이상하게 70
년 이상 금지된 땅으로 봉해져 전혀 갈 수가 없다. 거리는 해남보다 개성이 훨씬 가까움에도
말이다. (항동철길에서 해남까지 400여km, 개성은 체감 거리가 달나라보다 훨씬 멈)

* 항동철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2동, 항동


▲  아무것도 정차하지 않는 간이역, 항동철길역 주변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오류동 방향)
철길을 닦고자 산세가 낮은 이곳을 손질했다. (나쁘게 말하면 천왕산 북쪽
산줄기를 철길로 끊어버림) 철길 좌우로 뚜벅이길이 닦여져 있는데
뚜벅이길로 가던 철길로 가던 그건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된다.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푸른수목원 방향)
항동철길을 끝으로 늦가을 초입에 벌인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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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봄꽃 나들이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조선 최초의 능, 정릉



' 정릉 봄맞이 나들이 '

정릉
▲  정릉

정릉 금천교 정릉 숲길

▲  정릉 금천교

▲  정릉 숲길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어루만지던 4월의 한복판에 조선 최
초의 능인 정릉을 찾았다.
서울 장안에는 도봉산(道峯山)부터 호암산(虎巖山)에 이르기까지 봄꽃 명소들이 무지하
게 많지만 역사와 자연이 오지게 어우러진 조선시대 왕릉(정릉, 의릉, 태강릉, 선정릉,
헌인릉 등)도 봄꽃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다. 하여 간만에 왕릉 봄 산책이
나 즐길 겸, 적당한 곳을 찾다가 집에서 가까운 정릉으로 길을 잡았다. 정릉은 이미 3~
4번 인연을 지었으나 다들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  정릉(貞陵) 입문

▲  정릉 세계문화유산 표석 앞 갈림길

정릉과의 첫 인연은 중학생 시절인 1990년대 초반이다. 지금이야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인터
넷 지도가 아주 훌륭하여 지독한 길치가 아닌 이상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정릉 이정표가 있음) 그때는 이정표가 너무 부실하여 찾기가 어려웠
다.
하여 2번에 시도 끝에 정릉동 골짜기에서 태연하게 숨바꼭질을 즐기던 정릉을 찾아내 술래 신
세를 면하게 되었다. 그 시절 정릉은 지금처럼 입장료를 받던 공개 구역이었으나 인지도가 낮
아 탐방객은 별로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정릉의 존재감은 슬슬 커져갔고 탐방객도 정
비례로 늘어갔다.

정릉 정문에 이르니 매표소가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정릉이 성북구 영역이라
성북구 주민은 50%를 깎아주나 나는 도봉구 사람이라 그 혜택을 전혀 받을 수가 없어 입장료
전액을 지불하여 유료의 공간, 정릉으로 들어섰다. (도봉구는 1973년 7월 성북구에서 분리되
었음)


▲  정릉 재실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2호

정릉으로 들어서니 왼쪽(남쪽)으로 재실과 보호수로 지정된 큰 느티나무가 눈짓을 보낸다. 정
릉에는 서울의 다른 조선 왕릉에는 없는 2가지가 있어 눈길을 끄는데, 바로 보호수 나무와 약
수터이다. (약수터는 지금 사라지고 없음)
보호수는 2그루가 있는데, 재실 앞 느티나무는 나이 약 380년, 나무 둘레 360cm, 높이 21m로
정릉에 있는 나무 중 가장 크고 늙었다. 4~5월에 황록색 꽃이 핀다고 하나 봄 햇살이 정릉 구
석구석을 넓게 어루만지는 4월의 한복판임에도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꽃은커녕 잎
도 없다. 이미 다른 나무와 꽃들은 봄의 향연에 한참인데 말이다.


▲  정릉 재실(齋室)의 행랑 외곽 모습

재실은 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陵參奉)의 생활공간이자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 좌우로 창고와 하인 방, 마구간, 집사방(執事房)을 갖춘 행랑(行廊)이
나오고, 안쪽 기와문을 들어서면 제사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재실 본채가 있다.

정릉 재실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12년에 발굴조사를 벌여 2014년에
복원했다. 그러다 보니 고색은 채 여물지 못했다. 비록 복원은 되었으나 딱히 놀려두기도 뭐
하여 다례체험 등 여러 전통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대문과 다양한 공간이 있는 행랑

▲  재실과 제기고로 인도하는
안쪽 기와문

▲  2칸짜리 제기고(祭器庫)
제사도구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  재실 본채
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능을 지키는 능참봉의 거처이자
영(令)이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  관리사무소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7호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도 앞서 보호수처럼 벌거숭이 상태이다. 추정 나이 200
년, 높이 17m, 나무 둘레 320cm로 정릉에서 2번째로 크고 늙은 나무인데, 계절 감각이 둔해진
것인지 아니면 게을러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여 겨울에서 깨어나 봄의 향연에 동참했으면 좋
겠다. (느티나무는 5월 초까지도 벌거숭이인 경우가 있음)


▲  금천교(錦川橋)

정릉 중심부로 들어서려면 계곡에 걸린 금천교를 건너야 된다. (금천교가 아니더라고 계곡은
꼭 건너야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음)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聖域)의 경계 역할 및 능으로 인도하는 돌다리로 현종(재위 1659~1674)
시절 정릉을 손질하면서 지어졌다. 다리 좌우 끝에 석축을 다지고 그 사이에 묵직하게 돌기둥
을 세운 다음 길쭉한 통돌을 걸쳐 놓은 단출한 형태로 다리 피부에는 세월이 입혀놓은 고색의
때가 자욱하여 고풍스런 멋을 한층 올려준다.


▲  금천교 주변 계곡

조선 왕릉과 궁궐에는 금천의 역할을 하는 물줄기가 꼭 있기 마련이다. 정릉은 북악산길(북악
스카이웨이) 북쪽에서 발원한 계곡이 그 역할을 담당하여 정릉을 촉촉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정릉 중심부 북쪽을 거쳐 바깥으로 흐른다. 허나 정릉 동쪽에 빼곡히 들어찬 주택가로 능 정
문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한 채, 정릉천으로 흘러가며, 북한산(삼각산) 정릉계곡에서 나온 정
릉천 또한 정릉2동부터 어둠의 경로로 흐르다가 종암동(鍾岩洞)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정릉 계곡은 크기는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적당히 섞여있고 흙이 많아서 어린이들이 놀기에는
아주 좋다. 허나 문화유산인 정릉 내부이니 요란하게 노는 행위는 절대 삼가하기 바라며, 손
만 담구는 정도에서 멈춰야 될 것이다.

▲  붉은 피부의 홍살문

▲  홍살문 옆에 닦여진 배위(拜位)

금천교를 건너면 길은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인다. (정면 길로 가면 관리사무소) 그 길을 들어
서면 쌀쌀맞게 생긴 붉은색 홍살문이 나타나 나그네로 하여금 절대 엄숙을 강조한다. 그는 왕
릉과 관아, 향교, 왕족과 사대부의 사당과 묘역 등 권력과 관련된 곳에 세우는 비싼 존재로
그를 들어서면 비로소 정릉 중심부에 이르게 된다.

홍살문 옆에는 돌로 다져진 네모난 배위<판위(板位)>가 누워있다. 이곳은 정릉을 찾은 제왕이
능 주인에게 절을 하는 곳으로 보통 4번 절을 했으며, 이를 국궁사배(鞠躬四拜)라고 한다. 현
재는 정릉 제향일에만 반짝 쓰이고 있어 꽤 한가해졌다.

그럼 여기서 잠시 정릉과 이곳 주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정릉 정자각 주변 (수라간, 수복방 등)

정릉은 서울의 영원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으로 정릉2동 서쪽 골짜기에 넓
게 누워있다. 능역(陵域) 동쪽과 남쪽은 정릉2동 주택가와 맞닿아있고, 북쪽은 정릉의 원찰(
願刹)이었던 봉국사(奉國寺, ☞ 관련글 보기) 남쪽에 이르며, 서쪽은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
이)과 정릉3동에 닿는다.
주택가와 매우 가깝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깊은 산골로 짙은 숲을 지니고 있으며 조촐한 계곡
과 그림 같은 숲길, 그리고 늙은 보호수도 2그루를 지녔다.

정릉의 주인은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1396)이다. 고종(高宗)
이 1897년 황제 위에 오르면서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높여졌으며, 태조는 태조고황제(太
祖高皇后)로 올려졌다. (정릉 안내문에는 '신덕고황후'라 나와있음)

신덕왕후 강씨(이하 강씨)는 곡산강씨(또는 신천강씨) 집안으로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
康允成)의 딸이다. 강씨의 숙부인 강윤충(康允忠)은 이성계의 큰아버지인 이자흥(李子興)의
사위로 두 집안은 제법 가까웠는데, 드넓은 동북면(東北面, 함경도와 길림성, 연해주 지역)
지역을 장악했던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조정에 출사하면서 강씨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때 강씨는 이성계보다 약 20살 정도 연하였다고 한다. (에구 부러워라~~)

이성계와 강씨의 첫 만남 설화는 꽤 유명한데 내용은 이렇다.
어느 평화로운 날, 사냥에 나섰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아리따
운 여인이 있었는데(아마 빨래를 했던 모양임) 그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하니 여인이 바가지
에 물을 담아 버들잎 하나를 물 위에 띄워주었다. 이성계는 이상하여 이유를 물으니
'급하게 마시면 탈이 날까봐 천천히 드시라고 그랬습니다'
답을 했다.
그 말에 이성계는 무한 감동을 먹었고, 마침 여인의 미모도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던 터
라 그녀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이다.

허나 로맨틱한 설화와 달리 강윤성은 이성계의 미래를 크게 보고 딸과의 혼인을 적극 추진했
고, 이성계 또한 개경(開京)에 마땅한 기반이 없는 상태라 사돈관계에 있고 개경 귀족들과 두
루 가까웠던 강씨 일가의 힘이 필요했다. 즉 두 집안과의 결속 강화와 미래에 대한 투자 차원
에서 혼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계는 개경에 있을 때 강씨 집에 머물렀다. 그가 요동반도에 있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
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강씨는 포천 철현(鐵峴)에 있는 전장(田莊)에 머물렀고, 만약을
대비해 동북면과 가까운 이천(伊川)의 한충(韓忠)집으로 거처를 옮겨 상황을 지켜보았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 크게 다치자 정몽주(鄭夢周)는 이
때다 싶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강씨는 이방원(李芳遠)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
으로 오게 했으며, 이방원이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살해하자
이성계가 크게 노발대발한 것을 강씨가 무마시켰다. 이렇듯 강씨는 이성계를 힘껏 도와 조선
개국을 이끌어냈으며, 이성계의 첫 부인인 한씨가 조선 건국 1년을 앞두고 세상을 뜨자 조선
의 첫 왕후<현비(顯妃)>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  비각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陵寢)

강씨는 태조와의 사이에서 경순공주(敬順公主, ?~1407)와 무안대군 이방번(撫安大君 李芳蕃,
1381~1398), 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李芳碩, 1382~1398)을 두었다. 그녀는 권력욕이 너무
커서 태조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과 연합해 태조를 설득하여 장남도 아닌 막내 이방석을
왕세자(王世子)에 앉히게 했다.
이렇게 후처 소생의 차남을 세자로 책봉하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제대로 뚜껑이 열렸다. 하
여 그들은 이방원<정안대군(靖安大君)>을 중심으로 강씨와 정도전 세력과 팽팽히 대립하게 된
다.

1396년 음력 8월 13일 강씨는 40대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크게 애통하여 도성
한복판에 능을 쓰게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 존호(尊號)를 신덕이라 했으며, 개국공신들의
건의로 공신수능제(功臣守陵制)를 받아들여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능 지킴이를 맡겼다.
또한 정릉 곁에 원찰인 흥천사(興天寺)를 크게 지어 매일 같이 찾아가 명복을 빌었으며, 흥천
사의 아침 종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아침 수라를 들었다. 그때 정릉은 덕수궁(경운궁) 북쪽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지며, 정릉 때문에 정동(貞洞)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1398년 정도전이 크게 방심한 틈을 노려서 이방간(李芳幹)과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다. 궁궐을
접수한 그들은 이복 동생인 이방번, 이방석 형제와 경순공주의 남편을 처단했고, 형제의 맏이
인 이방과(李芳果, 정종)를 왕위에 올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1차 왕자의 난이다. (경순공
주는 이후 비구니가 되었음)
그리고 1400년 이방간의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이방원은 형 이방과의 왕위를 물려받아 꿈에
그리던 옥좌(玉座)를 차지하게 된다.

이방원은 의붓어머니 강씨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태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크게
정릉을 건드리지 않았으나 1406년 정릉이 너무 넓다는 의견이 있어 정릉 100보 밖까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때 하륜(河崙) 등 권력가들이 너도나도 정릉 숲에서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니 그것이 정릉 수난의 시작이었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바로 이빨을 드러내며, 정릉 탄압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1409년 의정부(議政府)는 왕의 비위를 맞추고자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이 말이 안되며 명
나라 사신이 묵는 숙소와 가까워 도성 밖으로 옮겨야 된다고 하였다. 굳이 그런 것이 아니더
라도 도성 한복판에 능이 넓게 자리한 것도 솔직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태종은 의정부의 갸륵한 뜻을 받아들여 정릉을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곡으로 추방시켰고, 능
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지기 바쁜 광통교(廣通橋)를 돌다리로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동원했다. 이는 단순히 광통교 복구가 아닌 백성들이 정릉 석물을 밟고 지나가게 하
여 강씨를 길이길이 욕보이고자 함이었다. 또한 정자각과 일부 석물을 소환하여 태평관(太平
館, 명나라 사신의 숙소)을 짓는데 썼으며, 봉분을 깎아 무덤임을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석인
(石人)은 생매장시켰다.

능의 제례 또한 폐지되고 봄, 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으며, 서모(庶母)의 기신제(忌
晨祭)의 예에 따라 삼품관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한 후궁으로 격하시켜 후궁의 예로 제를
올리게 하였다. 강씨가 지하에서 크게 통곡을 했는지 능이 파괴되던 날, 폭우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전한다.


▲  수라간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과 소전대(燒錢臺, 밑에 보이는 석물)

태종 사후로도 정릉의 고통은 계속되었고 정릉의 존재는 속세의 뇌리 속에서 거의 잊혀져 갔
다. 겨우 후손들이 살짝살짝 제사를 챙겼을 뿐이다.
그러다가 1581년 강씨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이 선조(宣祖)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
가 엎드리면서
'소인은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國墓)에 봉사(奉
祀)하는 사람들의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 면제시켜 주십시요'
하소연했다. 즉 정릉을
지키고 있으니 군역 면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거의 잊혀졌던 정릉의 존재감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때 삼사(三司)에서는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 정릉을 회복하자는 의견을 올렸으나 수용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계
속 논의를 벌이다가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싹 마무리가 되었다.
송시열은 태종의 잘못된 조치로 정릉이 고통을 당했음을 바로 말하기가 애매해 그 시절 신하
들의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고 돌려 말하며,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있음을 지적하
여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현종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 1669년 태조의 왕후로 인정하여 종묘(宗廟)에 봉안했으며, 순원현
경(順元顯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능을 복구했다.
이때 정릉에서 강씨의 넋도 달랠 겸, 성대하게 제를 지냈는데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려서
사람들은 이를 두고 '강씨의 원한을 씻는 비'라고 하였다.

정릉 석물은 17세기 후반 것들이나 4각형 장명등(長明燈)과 혼유석(魂遊石)을 받치는 고석(鼓
石) 2개, 그리고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는 옛 정릉 것들이다. 즉 14세기 후반 것들로 조선 왕
릉에 설치된 석물 중 가장 늙은 존재들이 된다. 그리고 정자각과 비각 등은 모두 17세기 이후
것들이다.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을 이끌어냈던 강씨, 허나 지나친 권력욕으로 끝내 자식을 잃고, 남편
의 말로를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자신의 묘까지 태웠으니 인생무상, 권력무상이 따로 없
다. 왕후가 되면서 거기서 딱 절제를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게 안되었던 것이다. 물론 한씨
소생의 왕자(이방원, 이방과 등)들이 자신의 소생들을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방원 형제
들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나마 똘똘했던 막내를 세자로 세워 자식들의 불투명한 미래
를 지켜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궁궐은 그만큼 무서운 곳이니 말이다.
허나 강씨와 그의 친자식들은 결국 패배자가 되어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왔으니 역사의 패배자
가 어찌된다는 것을 아주 몸서리치게 보여준다.

정릉은 중구 정동의 지명 유래가 되기도 했지만 이곳 정릉동의 유래도 된다. 그래서 2개의 지
명이 정릉으로 인해 생겨났다.



 

♠  정릉 중심부

▲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박석이 입혀진 향로와 어로가 닦여져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참
도(參道)라고 하는데, 어로는 제왕이 걷는 길이며, 왼쪽에 조금 높은 향로<신도(神道)>는 제
향 때 향과 축문(祝文)을 들고 가는 길이다.
이곳 참도는 중간에서 'ㄱ'자로 90도 꺾이는데, 이는 지형 탓으로 정자각 정면에서 금천까지
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직선으로 홍살문을 두기에는 좀 비좁아 보인다. 하여 나름 융통성
을 발휘한 것이다.


▲  정자각(丁字閣)

참도의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정자각이 있다. 싹둑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丁'처럼 생겨서 정자각이란 쉬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자각은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제왕은 좌측 계단으로 올라가 제사를 치르고 반대쪽 우측 계
단으로 내려갔다. 건물 안에는 제향에 쓰이는 여러 상(床)들이 있는데, 거의 황색 피부를 지
니고 있다. 황색은 황제와 황후를 상징하는 색깔로 고종이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높이면서
제사상의 피부 색깔도 변하였다.

▲  신좌(神坐)
신, 즉 정릉의 주인이 제향 때 머무는
추상적인 자리이다.

▲  관세상(盥洗床)
제관이 손 씻을 물을 올려놓는 상이다.
여기서 관은 대야를 뜻한다.

▲  제물을 올려놓는 상
(정자각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  정자각 좌측 계단
왼쪽 계단은 정릉 주인의 혼과 참배를 온
제왕이, 그리고 오른쪽 계단은 신하와
아랫 사람들이 이용했다.


▲  수복방(守僕房)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측에 수복방과 비각이, 우측에는 수라간이 있다.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근무하는 건물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  정릉 비각
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의 거처이다.

▲  정릉 비석
'대한(大韓) 신덕고황후 정릉'이라 쓰여있다.

     ◀  수복방과 마주보고 있는 수라간
수복방과 비슷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제
향 때 제사 음식을 데우거나 손질하던 곳이다.
터만 아련하게 있던 것을 근래 복원하여 채워
넣었다.

능침 밑부분에 소전대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있다. 소전대란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오
로지 이곳 정릉과 태종의 헌릉(獻陵),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만 있는 희귀한 존재이다. 태
종 이후, 소전대가 사라지고 '예감'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정릉 소전대는 정릉이 이곳으로 추방되면서 같이 왔는데 오랫동안 정릉약수터 주변에 찌그러
져 있던 것을 정릉관리소 김용욱 소장이 발견하여 고증을 통해 이곳에 두었다. 정릉을 옮기는
과정에서 태종의 지시로 능 주변에 두지 않고 고의로 계곡에 처박아둔 것으로 여겨진다.
정릉의 한낱 석물에게까지 화풀이를 한 태종, 그만큼 의붓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컸던 것이며,
정릉이란 존재 자체도 그야말로 눈에 가시와 같았다.


▲  확대해서 바라본 정릉 능침

소나무숲에 감싸인 정릉 능침에는 커다란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 1기, 혼유석, 여러 석호와 석양이 배치되어 있다. 이중 장명등은 고려 양식을 이
은 14세기 후반 것이며,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 2개도 옛 정릉 출신이다.
예전에는 능 옆구리까지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통제구역으로 묶여 능침 자체를 올라갈 수
없다.


▲  정릉 북쪽 산책로에서 만난 넓적한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  봄이 깊어가는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의 젖줄인 계곡(금천)을 따라 그림 같은 산책로가 서쪽으로 이어져 있다. 이 길을 쫓아가
면 정릉 주변을 도는 2.5km의 숲길이 펼쳐지니 정릉 중심부만 살피지 말고 꼭 1바퀴 둘러보기
바란다. 즉 정릉 외곽을 도는 것으로 산책로 안팎이 모두 정릉 능역(陵域)이다.


▲  생태계가 살아있는 정릉 계곡(금천)

▲  봄 속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따뜻한 기운이 소리 없이 내리면서 푸른 잎과 온갖 꽃들이 기지개를 켠다.
그런 봄에 물들고 싶어서 저 속으로 나를 숨기러 간다.



 

♠  정릉 산책로 돌기

▲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 정자각 계곡 건너편)

정릉 숲길은 정릉 중심부와 맞닿은 북쪽 산책로만 평지이고 나머지는 모두 산길이다. 능이 첩
첩한 산골에 묻혀있기 때문에 숲길을 거닐다 보면 자연히 약간의 등산도 하게 된다. 허나 경
사가 그리 각박하지 않고 길이 잘 닦여져 있어서 두 다리만 멀쩡하면 어린이와 노인도 거뜬히
1바퀴 돈다.


▲  정릉 북쪽 산책로 (옛 정릉약수터 주변)

▲  이제는 과거가 되버린 정릉약수터(정심약수터)

정릉 서쪽에는 정릉약수터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약수터까지 갖
추고 있던 정릉에서 특별히 맛볼 수 있는 자연산 수분으로 물이 졸졸 알아서 나오는 약수가
아니라서 직접 챙겨 먹어야 된다. 능 제사에 쓰이는 물은 모두 여기서 가져왔으며, 정릉2동
사람들이 많이 물을 떠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음)


▲  서남쪽으로 꺾이는 정릉 산책로

▲  봄꽃의 마지막 물놀이 현장 (정릉 계곡)
4월 초를 짧게 주름잡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훔쳐갔던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계곡에서 생애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계곡은
저들의 인생을 정리하는 조그만 블랙홀인 모양이다.

▲  정릉 서쪽 숲길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전까지는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  지그재그 율동을 부리는 정릉 서쪽 숲길

▲  동그란 석축에 뿌리를 내린 벚꽃나무 (정릉 서남쪽 숲길)

▲  정릉 서남쪽 숲길 ①

▲  정릉 서남쪽 숲길 ②

정릉 서남쪽 끝에는 서울의 대표 지붕길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이 흐르고 있다. 정릉에
는 북악산길을 향해 2개의 소방문을 내고 있는데 이들은 업무와 비상용 문이라 관람객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하여 둘이 맞닿아 있음에도 철책을 사이에 두고 서로 금지된 땅 보듯 해야
된다. 현재 정릉은 정문으로만 통행이 가능하여 무조건 그곳으로 오가야 되는데, 북악산길도
서울의 주요 꿀명소인만큼 비상용문 하나를 따고 매표소를 두어 서로 왕래가 가능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정릉~북악산길~성북동(길상사, 삼청각, 간송미술관 등)/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부암동/북한산(삼각산)'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나들이/도보 코스가 만들어진다.

서울시청과 성북구청, 문화재청 철밥통들은 거지 같은 탁상행정으로 세금이나 빼먹지 말고 저
런 것들도 적극 검토해 추진해주었으면 좋겠다.


▲  북악산길(오른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을 지나는 차량들의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  북악산길(왼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②
북악산길을 코앞에 두고 입맛만 다셔야 되니 은근히 아쉽기만 하다.
서로를 잇는 것이 천하통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일까?

▲  정릉 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까지 올라온 숲길은 다시 내리막으로 변신한다.

▲  정릉 남쪽 숲길 ②

▲  정릉 남쪽 숲길 ③

▲  정릉 능침 바로 윗쪽 쉼터

정릉 남쪽 숲길은 중간에 3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서쪽)으로 가면 앞서 서쪽 숲길로 빠
지며,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정릉 정문, 그리고 직진(북쪽)하면 위와 같은 쉼터가 나온다.
허나 그 쉼터는 막다른 곳으로 다시 갈림길로 나와야 된다. 허나 쉼터 주변으로 철책이 없어
서 자칫 숲으로 막 내려갈 수도 있는데 여기서 북쪽 숲으로 내려가면 바로 정릉 능침이다. 능
침 주변은 금지된 구역이니 굶주린 공비들처럼 숲을 막 헤집고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냥 쉼터
에서 얌전히 쉬다가 갈림길로 그냥 사라져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정릉 남쪽 숲길에서 서쪽 숲길을 잇는 사잇길

갈림길에서 바로 정문으로 내려가기는 다소 아쉬워서 서쪽 숲길로 향하는 사잇길로 우회해서
갔다. 정릉 북쪽 산책로를 거쳐 정릉 정문을 나오면서 2시간에 걸쳐 아주 여유롭게 진행된 정
릉 봄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정릉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 87-16 (아리랑로 19길 116, ☎ 02-914-5133)
* 정릉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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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공항을 굽어보는 강서구의 대표 지붕,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둘레길, 개화산자락길, 개화산 봉수대, 미타사석불입상, 신선바위>

강서구 개화산(약사사, 개화산둘레길, 미타사)



'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나들이 '


▲  개화산둘레길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 숲길)

▲  약사사 석불입상

▲  미타사 석불입상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5월의 첫 무렵, 강서구(江西區)의 대표 지붕인 개화산(開花山)을
찾았다.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지만 나는 서울의 동북쪽 끝인 도봉산 그늘에 있고 개화산
은 서울의 서쪽 끝으머리인 개화동과 방화동에 있다. 서로 끝과 끝에 있어서 거리도 거
의 40km, 지하철로 가도 족히 1시간 반 이상이 걸려 그곳에 이르기 전에 거의 떡실신할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개화산을 비롯한 강서/양천 지역은 많이 가지 않는 편이다.

개화산은 즐겨찾기급 명소는 아니지만 매년 1번 정도는 가는 편이다. 자고로 좋은 곳은
1번이 아닌 두고두고 찾는 법, 이번 나들이는 방화역(5호선)에서 시작하여 약사사와 개
화산전망대, 개화산둘레길(강서둘레길1코스), 미타사, 하늘길전망대를 거쳐 방화근린공
원에서 끝을 맺었다.



 

♠  개화산 약사사(藥師寺)

▲  약사사로 인도하는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개화동(開花洞)과 방화동(傍花洞)에 걸쳐있는 뫼로 거의 평지로 이루
어진 강서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은 작고 야트막하지만 평지 속에 솟아있는 존재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일품이며,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무성하여 풍경도 아름답다. 산 동북쪽에
는 꿩고개라 불리는 치현산(雉峴山)이 이어져 있고, 북쪽에는 한강과 5호선 방화차량기지, 서
쪽은 김포평야(金浦平野), 남쪽에는 방화동과 김포국제공항이 있다.

개화산의 첫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어느 시절에 주룡(駐龍)이란 도인(
道人)이 살고 있었는데, 매년 9월 9일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
다. 이것을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 9월 9일마다 주룡산에서 술을 마심)'이라 불렀는데 그가
죽자 9월 9일마다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는 그가 죽은 자리
에서 꽃이 피어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우니 그곳이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이며, 개
화사가 있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으로 이름이 갈렸다고 전한다. 또한 주룡 설화 외에도 산 모
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는 뜻의 개화산(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산이 코끼리, 개화산과 마주보고 있는 한강 북쪽 행주산
(幸州山, 덕양산)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주고 서울에
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이라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겉모습은 작지만 속은 아주 알찬 개화산에는 많은 명소가 안겨져 있는데, 늙은 석탑과
석불을 간직한 약사사를 비롯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미타사 석불입상, 호국충혼위령비,
방화근린공원, 신선바위, 능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봉수대, 상사마을 은행나무 등이 있으며,
약수터도 많이 있었으나 그 수가 계속 줄어 이곳의 제일 가는 물이었던 약사사 약수터가 2013
년 봄에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또한 산 허리에는 강서둘레길1코스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 3.35km)이 닦여져 있는데, 조
망이 괜찮은 곳에 전망대(개화산, 아라뱃길, 신선바위)가 설치되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다만 군부대가 정상과 북쪽 자락에 있어 정상에는 발을 들일 수 없다.


▲  약사사 방면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

▲  약사사를 알리는 표석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로 들어서 약사사로 가다 보면 길 중간과 약사사 표석 전에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豊山沈氏 文靖公派 墓域,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7호)이 간만에 보고 가라
며 손짓을 보낸다. 허나 이번에는 그들에게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아서 오직 정면에 보이는 먹
이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고양이처럼 바로 약사사로 넘어갔다.

약사사 표석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봉화정과 개화산전망대로 이
어지고, 오른쪽은 약사사와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데 봉화정과 강서둘레길1코스 서쪽 구간
이 목적이라면 왼쪽 길로 가면 되고, 약사사를 거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약사사 경내

약사사 표석에서 2분 정도 들어가면 개화산의 오랜 상징인 약사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개화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이 절은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으나 앞서 언급했던 주룡선생과 관련
된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신라 때 개화산을 주름잡던 주룡이 세상을 떠나자 매년 9월 9일마다 그가 술을 마셨던 곳에서
이상한 꽃이 피었는데,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개화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설화와
1827년에 송숙옥(宋淑玉)이 쓴 '개화산약사암중건기',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를 통해
신라 때 창건된 것이라 내세우고는 있으나 신빙성이 있는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개화산약사암중건기'와 '양천읍지'는 약사사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다만
경내에 고려 때 석탑과 석불이 전하고 있어 적어도 고려 초/중기부터 법등을 켠 것으로 여겨
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는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에 개화사로 나와 예전 이름이 개화사였음을 알려준다.
절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37년 좌의정(左議政) 송인명(
宋寅明, 1689~1746)이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송씨 가문의 원찰(願刹)로 삼았는데, 그는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으나 개화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해 과거에 붙었다.
이후 재상에 오르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개화사의 덕이라며 절을 중수하고 절 밑에 불량답
(佛糧畓)을 보시했다. 또한 영조(英祖) 시절 그와 가깝게 지냈던 이병연(李秉淵)이 개화사와
송인명과의 끈끈한 사이를 '사천시초(槎川詩抄)'란 시로 표현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 가양동에 있었음)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조선 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이병연
의 시를 보고 개화사를 찾아가 그림을 남겼는데, 그는 1740년부터 5년 동안 양천현감(현령)으
로 있으면서 개화사와 소악루를 비롯한 양천의 명승지를 아낌없이 화폭에 담아 당시의 정취를
아련히 알려주고 있다.

1799년 송인명의 후손인 송백옥(宋伯玉)이 절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남겼으며 1827년 절이 퇴
락하자 처사 창선(昌善)과 청신녀(淸信女) 경자(京子)가 돈을 모아 기존 절터에서 몇 걸음 떨
어진 곳에 새롭게 자리를 파 절을 옮겼고 석불입상을 약사불로 삼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藥
師庵)으로 갈았다. <이후 약수사(藥水寺), 약사사 등으로 변경됨>

1911년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의 되었고, 1928년 주지 박원표(朴元杓)가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허나 6.25 때 개화산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그나마 세운 건물이 모두 무너졌으며
가건물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1984년 이후 대웅전과 감로당, 삼성각을 지어 지금에 이
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감로당, 삼성각, 범종각, 공양간 등 5~6동 정
도의 건물이 있으며, 크게 지어진 감로당은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주며, 석불
은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기도 수요가 제법 많다. 허나 경내에서 이들 외에는 고색의 향기는
전혀 없다.
또한 경내 밑에는 개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던 약수터가 있었는데 그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
다고 하여 중생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약수터 때문에 절의 이름이 한때 약수사가 된 적도 있
을 정도.. 허나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부적합 판정으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끝내 부
적합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3년 봄에 완전 폐쇄되고 말았다. 석불과 더불어 절의 든든한 양대
밥줄이자 아주 착했던 약수터의 퇴장은 개화산과 절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고, 이제는 추억
이나 사진에서나 끄집어 봐야 되는 흐릿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약사사는 숲에 둘러싸여 있어 산사의 향기도 그런데로 진하며, 절이 아담
하여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다. 또한 방화역에서 절까지 길이 잘 닦여있고 도보
20분 정도로 접근성도 괜찮으며, 차량으로 경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절을 둘러보고 개화산
봉화정과 강서구의 야심작인 강서둘레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을 곁드린다면 아주 영양가
만점의 나들이가 될 것이다.

* 약사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332-2 (금낭화로17길261 ☎ 02-2662-2551)
* 약사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있음)

절 정문을 들어서면 약사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3층석탑과 대웅전이 시
선을 주고 있으며, 왼쪽에 약사사 안내문과 매점, 범종각이, 오른쪽에는 주차장과 해우소, 감
로당이 자리한다.

▲  범종각(梵鍾閣)
1976년에 조성된 범종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전(佛殿)이긴 하
지만 겉모습은 거의 요사(寮舍)나 여염집 같은 분위기로 가운데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
조이다.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탱과 산신탱은 1960
년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그림이다. (삼성각 바로 옆에 공양간이 있음)


▲  감로당(甘露堂)

3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삼성각을 바라보고 선 감로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요사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甘露堂','開
花山 藥師寺' 현판은 승려 석정(石鼎)의 필체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
기에 좋으며, 벽면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혜능(慧能) 이야기, 백락천과 도림선사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다.


▲  약사사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호

대웅전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약사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창건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보물로 탑 높이는 4m이다. 땅에 바닥돌을
깔고 1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으며, 머리 장식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없어진 것을 근래에 새로 붙여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랫 부분과 전혀 다른 피부색을 보인다.

탑은 길쭉하고 홀쭉한 모습으로 기단이 1층으로 간략화 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의 밑면 받침
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어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로 서울에는 오래된 석탑이 많이 있지만 정작 토박이 옛 탑은 몇 되지
않는다. 토박이 고려 탑은 낙성대(落星垈) 3층석탑과 홍제동(弘濟洞) 5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에 있음), 그리고 이곳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왜정(倭政) 이후에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상경
한 것들이다.

▲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3층석탑
마치 하늘이 움푹 낮아진 듯, 자욱하게 낀 오색 연등이 탑의 머리와 하늘을
앗아가 버렸다. (이때가 석가탄신일 며칠 후였음)

▲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1988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을 청기와로 수를 놓아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내며 절의 왜소함을
능히 커버한다.


▲  대웅전의 붉은 닫집과 불단을 장식하는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 불단에는 1기의 석불과 7기의 불상/보살상이 있다. 그 뒤에는 조
그만 금동불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거의 3천불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금동(金
銅) 일색인 곳에 홀로 빛바랜 돌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의 큰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가 3층석탑 다음으로 경내에서 늙
은 존재로 이곳의 든든한 밥줄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석불, 나머지 금동불은 그를 위한 조
연이 된다.
비록 겉은 초라해 보일 지 몰라도 그의 가치는 그들보다 한참이나 높다. 다른 불상은 제쳐두
더라도 3층석탑과 그는 꼭 봐야만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석불 앞에는 아주 조그만 금동석가여래상이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앉아있고, 좌우
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그 옆에는 큼직한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 중생을
굽어본다. 금동불은 모두 1995년 이후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들이다.


▲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호

많은 후배급 불상/보살상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불입상은 머리에 쓴 돌갓 밑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해 고려 후기,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의 든든한 밥줄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에 일장미륵(一丈彌勒)으로 등장한다.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으나 가슴 앞에 댄 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세음보살로 여
겨지기도 하며, 불상의 투박한 모습을 통해 고려와 조선 때 온갖 모습으로 조성된 미륵불(彌
勒佛)의 일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그를 약사불(藥師佛)로 삼으면서 절 이
름을 약사암으로 갈았으며, 현재도 영험한 약사불로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 석불은 현재 위치 바로 옆에 있었던 건물에 있었는데, 밑도리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
다가 1974년 그 건물을 부시고 대웅전을 조성하면서 불상 밑에 기단석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
했다.
불상의 얼굴은 길고 넓적한데, 표정은 썩 별로이다. 경직된 인상에 두 눈은 너무 크기 때문이
다. 코는 세모로 오똑하나, 코 끝은 크게 닳아진 상태이고, 입은 그 모양만 확인이 가능하다.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의 고충을 듣기에는 별 지장은 없어 보이며, 머리에는
둥근 돌갓을 쓰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미륵불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가 얼굴에 비해 작고, 옷도 옷주름 몇 가닥이 표현된 것이 전부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꽃을 든 불상의 이미지를 주며, 밑도리는 바로 앞에 있는 금동석
가여래상과 불단에 가려져 확인이 어렵다.
썩 괜찮은 작품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존재로 소망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해 많
은 이들이 찾아와 소망과 고충을 털어놓는다. 약사사가 지금에 이른 것도 거의 그의 공이다.


▲  약사사 돌담길
약사사를 둘러보고 돌담길을 통해 개화산전망대로 이동했다.


 

♠  개화산전망대와 개화산둘레길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에서 느긋한 산길을 5~6분 오르면 개화산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전망대

개화산 북쪽 능선에 개화산전망대가 조촐히 터를 닦았다. 2011년 5월 근교산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한강과 방화대교를 비롯하여 난지도, 은평/서대문/마포구, 남산, 북
한산(삼각산), 가양동 지역이 두 눈에 바라보여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가성비가 높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①

겸재 정선은 1740년부터 5년 동안 천하에서 제일 작은 고을인 양천현(陽川縣)의 현령(縣令)을
지내면서 양천(서울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김포시 고촌읍)의 주요 명소를 그림으로 남겼
다. 이들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에 실려있어 무척이나 많
이 변해버린 양천 지역과 한강(염창동~행주산성 구간)의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있다.

개화사(약사사)는 벗인 이병연의 소개로 찾았다가 그곳 경관에 감탄하여 그림으로 남긴 것이
다. 하나는 한강에서 바라본 시점,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
다.
낙건정(樂建亭)은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별서(別墅,
별장)인 낙건정을 그린 것으로 한강 북쪽 덕양산(德陽山, 행주산) 자락에 있었다. 그리고 행
호관어(杏湖觀漁)는 행호<杏湖, 행주산 주변 한강> 주변을 담은 것으로 지금이야 그저 그런
곳이지만 그때는 양반, 귀족들의 별서/유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②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소악루(小岳樓)는 양천
고을의 중심지였던 가양동의 뒷산, 궁산(宮山) 동쪽에 있었는데, 왼쪽 하단에 소악루를 두고
탑산과 두미암, 선유봉, 와우산, 잠두봉(蠶頭峰) 등의 경강(京江) 서쪽 명소를 담았다. (현재
소악루는 궁산에 재현되어 있음)

금성평사(錦城平沙)는 양천(가양동)에서 바라본 난지도(蘭芝島)를 담은 것이다. 서울의 쓰레
기장이 되기 전에는 홍제천과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너른 저지대로 한강의 폭이
넓어져 경치가 꽤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쓰레기를 딛고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이란 거
대한 자연공원으로 거듭났다. 허나 그래봐야 순수 자연산이던 예전만은 못하다.

목멱조돈(木覓朝暾)은 목멱산(남산)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 모습을 담은 것으로 양천에서 바라
본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다. 남산 앞에는 만리동고개, 애오개(아현동), 노고산(老姑山) 등이
그려져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방화대교와 난지도, 고양시 화전 지역, 서울 서북부를 비롯해 멀리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개화산전망대 주변 너른 공터와 헬기장
공터 주변에 널린 군사시설은 군사 훈련 및 예비군 훈련지로 활용되고 있다.

▲  재현된 개화산 봉수대(烽燧臺)

조선은 총 5개의 봉수 노선<거로(炬路)라고 함>을 운영했다. 개화산봉수대는 전남 순천(順天)
에서 시작되어 서울 남산 제5봉수대에서 끝을 맺는 5번째 거로로 김포 북성산(北城山) 봉수대
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 제5봉수대로 넘겼다.

개화산봉수대는 개화산 정상에 있었다. 이곳 외에도 동북쪽 꿩고개산(치현산) 정상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를 개화산 제2봉수대라 부른다. 이들 봉수대는 1950년대까지 있었으나 6.25
전쟁 시절, 군부대가 정상 주변에 주둔하면서 싹 밀어버리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자리만 겨
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기와조각과 백자 파편, 도기 파편 등이 여럿 수습되었으며 1994년
11월에 개화산 봉수대터에 표석을 세웠다.

개화산은 한자만 달리하여 개화산(開火山)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봉수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행주산성(幸州山城), 양천고성(陽川古城, 가양동)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시절에 행주산성을 지원하던 역할을 했던 것으
로 보인다. 6.25때도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고 지금까지 군부대가 쭉 주둔하면서 그 역사를 계
속 이어간다.

강서구청에서 개화산 봉수대를 복원하고자 이
미 복원된 남산 봉수대와 안산(鞍山) 봉수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를 참조하여 2013년 11
월 재현을 했는데 원래 자리에 군부대가 들어
앉은 관계로 부득이 북쪽으로 250m 떨어진 봉
화정 맞은 편에 세웠다.
높이 2m, 둘레 4m 규모의 봉수대 2개를 지었는
데 옛날처럼 불을 피울 일도 없고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이라 딱히 볼품은 없다.

▲  봉수대 맞은편에 자리한 봉화정(烽火亭)


▲  봉화정에서 개화산숲길로 들어서다 (강서둘레길1코스)

도보길이 천하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강서구에서도 야심작을 내놓았다. 바로 강서둘레길이다.
산과 숲, 한강, 철새도래지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둘레길로 총 3코스가 있는데, 1코스는 개화
산숲길로 개화산을 1바퀴 도는 3.35km의 산길이다. 개화산 둘레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오르
락내리락이 다소 반복될 뿐, 딱히 힘든 구간은 없으며 가볍게 걸으면 60~70분 정도면 충분하
다. 중간에 여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조망의 기품을 누릴 수 있으며,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과 약사사 등의 늙은 문화유산도 만날 수 있다.
개화산숲길 외에도 '개화산자락길'도 별도로 준비되어 있다. (방원중학교~금낭화로17길~약사
사 표석~개화산전망대/하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


▲  나무데크로 이루어진 개화산숲길 (아라뱃길전망대 부근)

▲  아라뱃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라뱃길과 김포시(金浦市) 고촌읍 지역

서쪽을 향하고 있는 아라뱃길전망대는 이름 그대로 아라뱃길이나 바라보라고 만든 곳이다. 아
라뱃길은 서해바다와 한강을 잇는 운하로 2009년에 착공하여 2011년 완성을 보았는데, 여객선
과 유람선, 화물선을 서울까지 들어오게 해야 물류비용도 절감되고 관광객이 늘어난다는 바람
직하지 못한 개소리를 늘어뜨리며 억지로 만들었으나 그 기대치에 1%도 안되는 놀라운(?) 실
적을 보이며 서울과 인천의 아주 저주스러운 애물단지가 되었다.


▲  신선바위 윗쪽에서 바라본 천하
비행기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김포국제공항을 비롯해 김포평야와 부천 북부,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눈에 들어온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신선바위

개화산은 흙산이라 신선바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바위가 거의 없다. 서쪽을 향해 누워있는
이 바위는 개화산 산신(山神)이 호랑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위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산신이 과연 이곳을 거쳐갔는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다. 신선
도 결국 인간이 만든 가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이곳은 개화산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이를 두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천하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여 신선바위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호국충혼위령비(호국충혼비)와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

신선바위를 지나면 미타사로 내려가는 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 둘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 손
에 이끌려 3분 정도 내려가면 곱게 단장된 푸른 잔디밭 위에 서 있는 호국충혼위령비(이하 충
혼비)가 나타나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 충혼비는 천하에 매우 흔한 6.25 관련 기념물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한다. 6.25가 터지
자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6.25 이전에는 남한 영역이었음)을 지키던 1사단은 북한군을 감당
하지 못하고 김포를 거쳐 김포공항 부근까지 후퇴했다.
개화산에 진을 치고 김포비행장을 지키고자 장비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며 싸웠으나 설상가
상으로 탄약과 식량보급까지 끊겼다. 결국 북한군의 대량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1사단 12연
대 3대대 대대장 김무중 소령과 12연대,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해 1,100여 명이 전사하
고 말았다.
이후 호국(護國)의 신이 된 그들의 넋을 기리고자 미타사에서 1993년 12월에 충혼비를 세웠으
며, 매년 6월에 지역 주민들과 군부대 장병이 위령제를 지낸다. (11월 가을걷이 이후에도 지
낸다고 함) 바로 이 충혼비 밑이 미타사이다.



 

♠  서울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절집, 개화산 미타사(彌陀寺)

김포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 서쪽 자락에 살짝 둥지를 튼 미타사는 조그만 절이다. 서울
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절로 예전에는 약사사와 함께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내세우기도
했으나 경내에 있는 석불이 고려 말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계점과 삼국시대 창건설을 입
증할 존재가 전혀 없어 이제는 쏙 들어갔다.
또한 19세기에 '김대공'이란 사람이 석불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집안의 원
찰(願刹)로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역시나 구전에 불과하다.
그나마 확실한 것은 1924년 창건설로 절 밑에 있는 내촌마을 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집
을 지어줄 것을 청하므로 그해 4월 8일 미륵당(彌勒堂)을 세웠다는 것이다. 하여 그 이전에는
애당초 절이 없었고, 미륵불로 숭상을 받던 석불만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후 미륵당이 미타사로 발전했으나 6.25전쟁으로 모두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이후 자리
를 조금 달리하여 절을 재건했다. 1970년 승려 한지일(韓智壹)이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제자리를 떠났던 지장보살입상을 1993년에 다시 가져와 새 법당에 봉안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절 뒷쪽에 호국충혼위령비를 세워 6.25때 개화산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린다.
경내에는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과 2기의 노천 석불, 그리고 5층석탑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있다.

절이 조촐하고 숲에 둘러싸여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선사하며, 시내와 가깝지만 적당히 거리
를 두고 있다. 김포공항을 수시로 드나드는 비거(飛車)들의 소음을 빼면 정말 고즈넉한 곳으
로 개화산숲길과도 가까워 개화산 나들이 때 이곳을 곁드리며 숲길을 1바퀴 돌면 나름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미타사란 이름을 지닌 오래된 절이 3곳 있음, 보문동 미타사(☞ 관련글 보
), 옥수동 미타사(☞ 관련글 보기), 그리고 이곳 개화동 미타사>

* 미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산81-24 (개화동로13길 56-33 ☎ 02-2662-4736)

▲  따사로운 봄볕을 즐기고 있는
여염집 스타일의 미타사 법당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서쪽을 굽어보는 석불좌상


전형적인 불전(佛殿) 스타일과 거리가 좀 있어 보이는 미타사 법당은 1970년대에 중건된 것이
다. 불단에는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석가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93년에 마련된 것으로 왜정 때 석고로 조성된 지장보살입
상도 있다. (그는 친견하지 못했음)
그 보살상은 경내에서 석불입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로 참으로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
는 원래 옛 법당에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절이 파괴되자 실종되었다. 이후 인근 군부대 장교
가 부대 우물에서 불에 그을린 채 망가진 그를 수습하여 군부대에서 가지고 있다가 경주의 어
느 사찰로 넘어간 것을 1993년에 다시 찾아와 봉안했으니 무려 40년 이상 타향살이의 고통을
겪은 것이다. 아마도 6.25시절에 개화산을 점거한 북한군이 불상에 화풀이를 하며 우물에 버
린 것으로 여겨진다.


▲  미타사에서 바라본 천하
김포국제공항과 김포평야,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돌탑과 날렵한 몸매의 5층석탑(왼쪽 탑)
석불입상 뒤쪽에 경내의 유일한 석탑인 5층석탑이 있다. 그는 198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의 단골 신도인 석물 판매업자가 1995년에 기증했는데,
그로 인해 힘들지 않게 탑을 소유하게 되었다.

▲  미타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9호

이 석불은 미타사에서 미륵불로 받들고 있는 존재로 고려 후기,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모습은 다른데서는 보기 힘든 이형적(異形的)인 모습으로 밑도리에는
세월의 고된 때가 자욱한 반면, 그 윗쪽 몸통의 3/4 이상은 완전 하얀 피부라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다. 그가 서 있는 대좌(臺座)만 근래 것이지 석
불 자체는 순수 오래된 불상이다.

미타사가 있기 전부터 이곳을 지켰던 노천 석불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여
러 번 땅속에 들어갔다가 빛을 보기를 반복했다. 1924년 내촌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서 그를
위한 집이 지어졌으니 그것이 미타사의 시초로 여겨지며 요사 자리에 미륵당이란 조그만 건물
을 지어 봉안했으나 근래에 요사를 새로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때 대좌를 새로
만들어 넣었고, 예전의 헌 대좌는 석불 윗쪽에 있는 바위 밑에 있다.

석불의 모습은 개화산 동쪽 약사사의 석불좌상과 좀 비슷하다. 그는 고려 말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머리에 동그란 갓돌을 쓰고 있고, 얼굴 표정은 좀 일그러져 있다. 아마도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서 그리 된 모양이다. 얼굴은 거의 동그란 모습이며, 눈과 눈썹, 입은 선으로
처리했고, 코는 매우 오똑하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은 긴 편으로 삼도(三道)는 보이질 않으며, 몸통은 매우 길쭉하다.
두 손은 가슴 앞에 서로 교차되게 모으고 있는데, 그만의 특이한 수인(手印)으로 손가락이 꽤
두껍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을 하고 있으며, 다리와 발 등의 밑도리는 옷에 가려져
생략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로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몸통이 길며, 특이한 신체 표현과 밑도리를
생략하는 센스, 갓돌 모양의 보관(寶冠) 등에서 고려시대 큰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오랜 세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음에도 피부가 하얗고 건강도 양호하며, 약사사 석불과 함께
서울에 몇 없는 고려 말 석불이란 점이 인정되어 2008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옆에서 바라본 석불입상과 그 주변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국제공항

미타사를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개화산둘레길(개화산숲길)로 다시 진입하여 남쪽으로 조
금 가니 '하늘길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서울의 하늘길을 책임지고 있는 김포국제공항이 아주 잘 바라보이는 곳이라 그런 이름
을 지니게 되었는데, 정말로 공항 내부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공항뿐 아니라 주변 김포평
야와 인천 동북부(계양구), 부천 지역이 덩달아 두 눈으로 달려오며 국내선과 국제선 비행기
가 5분이 멀다 하고 공항을 들락거려 김포공항의 위엄을 보여준다.


▲  솔내음이 그윽한 개화산둘레길 서쪽 구간

▲  짙은 숲속을 가르는 개화산둘레길 서쪽 구간

▲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하늘길전망대를 지나 무장애숲길 남쪽 기점에서 개화산자락길로 갈아탔다. 자락길 서쪽 구간
은 하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까지로 이중 개화산둘레길과 겹치지 않는 북까페 주변 숲
길이 무장애숲길로 이루어져 있어 천하에서 가장 편한 둘레길로 칭송 받는 안산(鞍山) 자락길
못지 않은 편안함과 느긋함을 보여준다.
이런 나무데크길은 통행편의도 있지만 인간의 발길로부터 나무와 흙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
다. 그러다 보니 나무의 피해를 최소화하여 길을 닦았고 부득이 길 복판에 자리하게 된 경우
는 그냥 그 자리에 둔 채로 길을 내었다. 물론 나무가 숨을 쉴 수 있게끔 공간을 내어 그를
배려했으며, 개화산둘레길 나무데크길도 같은 방법으로 길을 내었다.


▲  시원하게 뻗은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개화산자락길 무장애숲길을 모두 거닐고 약사사 표석에서 다시 개화산둘레길(개화산 숲길)로
갈아타 방화근린공원으로 내려갔다. 이때 시간은 거의 19시, 햇님도 슬슬 퇴근 준비를 서두르
고 있고 나 역시 피곤한 상태라 여기서 출사를 마치고 쿨하게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개화산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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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진관동 나들이 <경천군이해룡 사패지송금비, 여기소터,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영산군 이전묘역, 숙용심씨묘표>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산책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숙용심씨묘표

▲  마실길 돌탑

▲  숙용심씨묘표

 



 

봄이 한참 익어가던 4월의 끝 무렵, 천하 도보길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는 북한
산둘레길을 찾았다.
이번 둘레길 나들이는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해 내시묘역길 진관동(津寬洞) 구간과 마실
길을 거쳐 은평뉴타운 제각말아파트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천하 탐방밀도 1위(1㎢당 5만
여 명)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북한산(삼각산) 탐방객의 절반 정도가 둘레길 방문자라고
하니 그 인기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진관동 구간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 입구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서울에서 제일 작은 초등학교인 북한산초교가 있다.
(거의 시골학교 분위기임)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인 내시묘역길은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공설묘지에서 진관동 방패교육대
에 이르는 3.5km의 산길이다. 북한천(北漢川)에 걸린 둘레교를 사이로 북쪽은 고양시, 남쪽은
서울 영역으로 평지와 야트막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주이씨 서흥군파묘역과 경천군 송
금비, 경주이씨묘역, 여기소터, 백화사, 중골마을 느티나무 등의 늙은 명소가 있다.

백화사 뒤쪽 산자락에 천하 최대의 내시묘역이었던 이사문 공파(李似文 公派)의 묘역이 있었
다. 바로 그 묘역 때문에 '내시묘역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그 묘역의 규모는 8,800평
으로 45기의 조선 중~후기 무덤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묘는 자헌대
부(資憲大夫)로 승전관(承傳官)을 지낸 김충영(金忠英)의 무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한
곳이 있구나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묘역은 2012년 4월 귀신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후손들이 묘역을 정리해 조경개발업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백화사까
지 길이 뚫리면서 땅값이 많이 오르자 팔았다고 전하며 후손들은 땅값으로 4.8억원을 만졌다
고 한다. 유골은 화장하여 납골당 등에 두었고 무덤에서 나온 유물 또한 후손들이 가져갔으나
무덤에 배치된 문인석(文人石)과 상석(床石) 등의 무거운 석물은 버려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얼마나 비밀리에 콩 볶듯이 했는지 동네 사람들과 백화사 승려들도 묘역이 없어진 것을 뒤늦
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 땅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녔던 그곳은 그렇게 사라져 이제는 한낱 전
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었다. 진작에 국가 사적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이런 일은 막
을 수 있었을 것인데(후손들이 문화재 등급 지정을 신청하거나 동의해야 가능함) 많은 이들의
그릇된 생각과 내시묘역에 대한 저평가, 그리고 철밥통들의 직무유기가 낳은 비극이다.
(현재는 거의 숲이 들어섬)

이제 내시묘역도 없는 내시묘역길이 되었으니 그 이름도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이는 갈비탕
에 갈비가 빠졌음에도 갈비탕을 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적당하
다고 본다. 하지만 북한산국립공원 철밥통들은 이름 변경도 귀찮다며 계속 수수방관하고 있다.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에서 경천군 송금비 구간)
숲이 워낙 삼삼하여 햇살도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긴다.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내시묘역길
산길 주변은 경주이씨 경천군파 문중 땅이라 양쪽에 철책과 나무난간을 둘러
외지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 서울시 지방기념물 35호


한산초교입구에서 내시묘역길을 따라 자연에 묻힌 민가를 여럿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들어
서게 된다. 마치 자연휴양림에 들어온 듯,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이로운
기운을 아낌없이 베풀어 속세에서 오염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그 1폭의 수채화와 같은
오솔길을 가다 보면 조그만 늙은 비석이 활짝 마중을 나온다. 그 비석이 바로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이다. (줄여서 '경천군 송금비', '경천군 송금물침비'라 불림)

경천군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서예가 겸 역관(譯官)으로 이름은 이해룡(李海龍)이다. 본관
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으로 해서체(楷書體)를 꽤 잘 썼다고 하며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한호<韓濩, 한석봉(韓石峯)>에 필적하는 명필이라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어(倭語)에 능숙해 1588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사자관(寫字官)으로
왜열도에 갔다 왔으며 많은 글씨를 그곳에 뿌리고 왔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역관으로 왜군과의 협상테이블에 참여해 화평교섭에 힘썼으며, 1595년 중
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고 1602년에는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가 되었다. 선조(宣祖)
는 왜군과의 교섭에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치하하며 그를 경천군에 봉했으며, 지금의 백화사
북쪽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광해군(光海君)은 1614년 사패지(賜牌地, 제왕으로부터 받은 땅) 적당한 곳에 송금비를 세워
주었는데, 비문에는 큼지막하게 '慶川君 賜牌定界內 松禁勿侵碑' 13자가 쓰여 있다. 그 내용
은 경천군이 하사받은 땅에서 소나무를 벌목하거나 무단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으로 뒷면에
는 '만력(萬曆) 42년 갑인(甲寅) 10월'이라 쓰여 있어 1614년 10월에 세웠음을 알려준다.

▲  조성시기가 쓰여진 송금비 뒷면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비석에 쓰인 송금(松禁)은 나라에서 필요한 목재를 확보하고자 소나무가 많은 산을 선정해 보
호하는 것으로 고려 때 시행되었다. 이곳 송금비는 조선시대 임업정책의 하나인 송금 정책을
보여주는 산증인으로 400년이 넘은 나이에도 무탈하게 잘 남아있으며 조선 임업사에서 꽤 중
요한 유적이자 천하에서 딱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가치가 무지하게 높다. 그래서 2014년 뒤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받게 되었다. 이런 비가 2기가 있다고 하나 현재는 이
곳만 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숨바꼭질 중)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철책 사이로 잠겨진 문이 보일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숲으로 살
짝 몸을 숨기면 이곳의 주인인 이해룡의 묘역을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묘역은 경주이씨 묘역이
라 불린다.
고색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풍기는 비석 주위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 3개가 마
련되어 있다. 워낙 숲속이고 평일에는 인적도 별로 없어 바람의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가 이곳
을 이루는 소리의 거의 전부이다. 북한산둘레길이 닦이면서 비로소 그 존재를 속세에 내보인
존재로 만약 둘레길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둘레길이 많
은 숨겨진 명소를 속세로 꺼내주었음)

* 경천군 송금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  경천군 송금비에서 백화사로 이어지는 내시묘역길
중간에 의상봉과 용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손을 내민다.

▲  고품격 숲길을 자랑하는 내시묘역길 (백화사 직전)

▲  중골마을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0호

경천군 송금비에서 7~8분 정도 남쪽으로 가면 백화사(白華寺) 옆구리이다. 여기서부터 전원(
田園) 분위기를 지닌 중골마을(여기소마을)이 펼쳐지는데, 마을로 들어서면 늙은 느티나무가
바로 마중을 나온다.

이 나무는 높이 19m, 둘레 4.7m의 큰 나무로 추정 나이는 210년 정도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165년) 이곳은 이사문 내시 집안이 살던 곳으로 그 후손이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오늘도 시원한 그늘을 베풀어 자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  여기소(汝其沼)터 표석

백화사입구 정류장에서 백화사로 가는 길목 초입에 여기소터 표석이 있다. 여기소는 소(못)의
이름으로 지금은 실체는 없고, 이름만 남아있는데,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북한산(삼
각산)의 산바람을 타며 아련히 전한다.

조선 숙종(肅宗)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크게 증축했을 때 지방 관리로 있다가 공사 현
장에 파견된 관리가 있었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기생은 그를 보고자 먼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으나 공사 관계자
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너무 열받은 나머지 이곳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그런 사연으로 '너의 그 사람이 잠긴 못'이란 뜻에서 '여기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공사가 끝날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섣부른 행동을 했을까? 옛말에도 급하
면 돌아가라고 했거늘, 그 속담만 얌전히 지켰으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인데 말이다. 아마
도 꽤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북한산캠핑장 주변)
내시묘역길도 그렇고 북한산둘레길은 민가와 농장, 경작지, 개인 토지를 이리저리
피해가느라 우리네 인생처럼 굴곡이 좀 크다.

▲  쭉쭉 뻗은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  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

▲  마실길 북쪽 시작점

내시묘역이 없는 내시묘역길은 여기서 마실길로 간판을 바꾼다. 마실길은 방패교육대에서 진
관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으로 완전 평지 수준이며 북한산둘레길 구간 중 가장 짧
고 편한 길로 살랑살랑 거닐기에 아주 좋다. 하여 마실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코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숲길, 삼천사계곡, 진관사계곡, 숙용심씨묘표, 영산
군묘역, 화의군묘역, 진관동 느티나무 4형제 등의 명소가 있어 볼거리도 풍년이며 진관사(津
寬寺)와 삼천사(三千寺)도 가까워 자연과 산책을 겯드린 답사 코스로 아주 좋다.


▲  마실길 진관천 벼랑길

마실길을 들어서면 진관천 벼랑에 닦여진 나무데크길이 나온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
처럼 길을 낸 것으로 동쪽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벼랑이, 서쪽은 진관천이 삼
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물을 모두 머금으며 창릉천으로 흘러간다.


▲  수풀로 무성한 진관천(津寬川)과 벼랑길(마실길)
예전에는 이곳도 피서의 성지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요즘은 진관사계곡과
삼천사계곡 상류로 많이 넘어갔다.


진관천 벼랑을 통과한 마실길은 삼천사입구에 이른다.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늙은 마애불(
磨崖佛)을 지닌 절로 그곳이 당기면 잠시 둘레길을 놓아두고 갔다 와도 상관없다. (20~30분
정도 걸림)
삼천사입구에서 삼천사계곡 구간에는 농장과 식당이 여럿 있는데 식당 중간을 지나 삼천사계
곡을 건너야 다음 코스로 진행이 된다. 평일에는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맛있는 냄새가 아주 진
동을 하여 그 유혹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  마실길 돌탑 구간

삼천사계곡을 건너면 'S'자로 살짝 구부러진 길이 나오고 길 왼편으로 비슷하게 생긴 돌탑 4
형제가 마중을 한다. 이들 돌탑은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수식용으로 만든 것으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둘레길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준다.


▲  마실길의 오랜 터줏대감,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1호

돌탑을 지나면 울창한 모습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두 눈을 단단히 동여맨다. 그는 동
화 속 푸른 언덕이나 초원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나무로 나이는 약 170년에 이른다.
자꾸만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높이 18m, 둘레 4.2m에 큰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위치는 진관동 132-20번지로 북한산둘레길이 생기기 이전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삼천사와 진관사를 수없이 들락거린 나도
둘레길의 안내로 2012년 이후가 되어서야 그를 만났으니 앞서 경천군 송금비와 더불어 둘레길
이 캐준 소중한 보물이다.


▲  은행나무숲길 옆에 닦여진 돌탑들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숲과 돌탑이 나란히 있으니 마치 신성한 어딘가로
인도당하는 기분이다. 저곳을 지나면 신선이나 어느 영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북한산둘레길에 아름다운 풍경이 꽤 있지만 그중에서 5곳을 뽑는다면 이곳 은행나무숲길과 그
옆에 자리한 170년 묵은 느티나무를 강하게 꼽고 싶다.
이곳은 마실길의 백미(白眉)와 같은 곳으로 수목원이나 휴양림의 그림 같은 숲속길이나 산책
로를 거니는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든다. 느티나무 주변을 곱게 손질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
어 마실의 기분을 진하게 들게 했으며,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로 조촐하게 은행나무숲길을
내어 전남 담양(潭陽)의 명물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에 못지 않은 맵시를 자랑한다.

은행나무숲길은 북한산둘레길이 지나는 명소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홀린 곳으로 집으로 훔쳐
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보고 또 보고 누리고 싶다. 이런 곳에서는 정말 옛 사람들처럼 시 1수
흉내내야 운치가 나거늘, 시적(詩的) 감각이 떨어지고 인간의 하찮은 말과 언어로 자연의 아
름다움을 감히 표현하고 희롱한다는 것도 조금은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닐까 싶어 그냥 탄성만
질러본다.



 

♠ 마실길 끝에서 만난 문화유산들

▲  영산군 이전 묘역(寧山君 李恮 墓域) - 서울 지방기념물 26호

은행나무숲에서 진관사계곡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진관사로 인도하는 도로(진관길)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은 진관사로 이어지며, 서쪽은 은평한옥마을로 마실길은 바로 서쪽에 있는 3거리
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산자락을 가만히 살펴보면 무덤들
이 보일 것인데 그곳이 바로 영산군 묘역이다.

묘역에는 영산군 내외와 그의 아들인 장흥군 이상(長興君 李祥), 손자 이경의(李鏡義), 증손
자 이종(李琮) 등 4대가 묻혀있는데, 가장 위쪽이 묘역의 터줏대감인 영산군의 무덤이고, 제
일 밑이 이종의 무덤이다. 그 묘역으로 가려면 서쪽 3거리에서 마실길을 따라가다가 동쪽(오
른쪽)을 살펴보면 그곳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그 길을 오르면 된다.

묘역의 주인인 영산군 이전(1490~1538)은 조선 9대 군주인 성종(成宗)의 13번째 아들로 숙용
심씨(淑容沈氏)의 소생이자 연산군(燕山君)과 중종의 이복 동생이다. 그는 문무에 매우 능했
다고 하며 말을 매우 잘탔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 시절의 어느 날, 그는 연산군, 진성대군(晋城大君, 후에 중종)과 함께 도성(
都城) 밖 금표(禁標) 구역으로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다. 사냥을 마친 연산군은 무엇을 시험
하고자 함인지 진성대군에게
'나는 동대문으로 들어갈테니, 너는 남대문(南大門)으로 들어가라. 만약 나보다 늦게 도착하
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야!!' 이랬다.
그 말을 들은 진성대군은 크게 쫄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자, 영산군이 진성대군에게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제 말이 전하(殿下, 연산군)께서 타신 말보다 훨씬 빠르니 제
가 대신 하겠습니다'
말하면서 진성대군을 따라가니 말이 갑자기 나는 듯이 도망쳐버렸고, 도
성에 이르니 조금 후에 연산군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영산군이 나서준 덕에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끈 진성대군은 1506년 박원종(朴元宗)
과 성희안(成希顔), 홍경주(洪景舟) 등이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
에 올랐다. 후대 사람들은
'영산군은 중종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말했다고 하며 중종 자신도 연산군 시절 그에게 받
은 신세로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중종 시절 영산군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1538년 48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시호는 충
희공(忠僖公)으로 부인은 2명이 있었는데, 전처는 금릉군부인 청송심씨(金陵郡夫人 靑松沈氏)
이며, 후처는 교성군부인 경주정씨(交城郡夫人 慶州鄭氏)이다.

묘역은 북쪽과 서쪽 지형이 다소 바뀌고 신도비가 묘역 앞으로 이전된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은평뉴타운 개발의 삽질이 막 시작되던 2006년에 강제 이전될 처지에 놓였으나 다
행히 제자리를 지켰다.
16~17세기 왕족 묘역의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묘비(묘표)와 문인석, 상석(床石)의
상당수는 그 시절 것이라 가치가 상당해 2007년 2월에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
다. 또한 인근에 자리한 화의군 묘역과 달리 사당(祠堂)은 따로 없다.

▲  충희공 영산군 신도비(神道碑)
근래 마련된 신도비로 원래는 여기서
북서쪽에 있었다.

▲  이종(李琮) 내외묘와 묘비(墓碑)
영산군의 증손자인 이종의 합장묘로 근래
만든 묘비와 망주석을 지니고 있다.


▲  영산군의 손자인 이경의(李鏡義) 묘

이종 묘 바로 위에는 그의 부모이자 영산군의 손자인 이경의 내외의 무덤이 있다. 그는 창원
황씨 부인과 합장(合葬)되어 있으며 후처인 곡산노씨(谷山盧氏)는 옆에 따로 작은 무덤을 만
들었는데, 이종의 무덤과 달리 문인석도 1쌍 갖추고 있다.

▲  이경의 묘와 묘비

▲  복스러운 모습의 문인석(文人石)


▲  영산군의 아들인 장흥군 이상(長興君 李祥)의 묘

이경의 묘 바로 윗쪽에는 그의 부모이자 영산군의 아들인 이상 묘가 있다. 봉긋하게 솟아있는
왼쪽 봉분(封墳)에는 장흥군 이상, 오른쪽 봉분에는 죽산안씨 부인이 잠들어 있으며, 묘비는
근래 새롭게 만들었지만 상석과 혼유석은 16세기 모습 그대로로 고색의 때가 짙다.


▲  조촐한 모습의 영산군 묘

묘역 제일 위쪽의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하여 아들과 손자들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영산군 내
외의 무덤은 2기로 이루어져 있다. 묘비를 갖춘 왼쪽 묘는 영산군과 교성군부인 경주정씨(交
城郡夫人 慶州鄭氏)의 합장묘이고, 오른쪽은 금릉군부인(金陵郡夫人) 청송심씨의 묘이다.


▲  장대한 세월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3기의 비석

영산군묘 한쪽에는 3기의 비석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오른쪽의 작은 비석
이 초창기의 영산군묘 묘표(墓表)로 1538년에 지어졌다. 그 묘표가 노쇠하자 이수를 갖춘 비
석을 새로 장만하니 그것이 가운데에 있는 검은 피부의 비석이며, 그것 역시 세월을 예민하게
타자 지붕돌 비석을 새로 마련했다. 허나 그마저 지금 무덤 앞에 있는 비석에게 자리를 내주
고 현재 자리로 밀려나 한참이나 선배들인 비석들과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마치 3대가 나란히 기념촬영에 임하는 듯한 모습으로 오른쪽에 작은 묘표가 할아버지, 가운데
비석이 그의 아들, 그리고 지붕돌 비석이 손자 같다.


▲  영산군 옛 묘표의 이수(螭首) 부분
물결무늬 구름 사이로 이무기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장면이 담겨져 있다.

▲  영산군묘를 지키는 문인석

영산군묘는 호석(護石)이 없는 조촐한 봉분 앞에 상석과 묘표를 두고 그 앞에 장명등(長明燈)
과 문인석 1쌍을 두었다.. 홀(忽)을 쥐어들고 서로를 연모하듯 바라보는 문인석은 무려 480년
이 넘는 기나긴 세월에도 표정 하나 고치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무덤을 지킨다.

왼쪽 문인석(왼쪽 문인석 사진) 측면에는 3개의 구멍이 있다. 이들은 6.25시절에 구파발 지역
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흔적으로 북한군이 쏜 것으로 보이는 총탄 3개가 그의 몸을 가격해
저렇게 치유하지 못할 상처를 안게 되었다. 겉으로야 표정관리하며 태연하게 서 있지만 얼마
나 아팠겠는가.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될 그 전쟁은 이 땅의 사람 뿐만 아니라 말을 못하
는 저들에게도 무수한 비극을 안겼다.

* 영산군 이전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39


▲  숙용심씨묘표 주변

진관동 느티나무 3거리에서 진관사입구 교차로 방면(서쪽)으로 몇 걸음 가면 오른쪽에 '셋이
서문학관'이란 2층 한옥이 있다. 거기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낮은 철책이 둘러진 야트
막한 동산이 있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이 손을 내민다. 그 손에 이끌려 그 길을 오르
면 그 정상에 숙용심씨묘표와 제단이 있다.

숙용심씨(淑容沈氏, 1465~1515)는 성종(成宗)의 여러 후궁 중의 하나로 세조(世祖) 즉위에 큰
공을 세웠던 원종공신(原從功臣) 심말동(沈末同)의 딸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영산군을
비롯한 이성군(利城君), 경순옹주(慶順翁主), 숙혜옹주(淑惠翁主)등 2남 2녀를 두었으며, 내
명부(內命婦)의 4품인 숙원(淑媛)까지 올랐다. 1515년에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중
에 3품인 '숙용(淑容)'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심씨의 묘역은 분명 서울 근교 어딘가에 마련되었으나 그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잠겨있다.
조선시대 왕족의 무덤 중 거의 흔치 않게 무덤 위치가 날라간 것이다. 하여 산사태나 홍수 등
의 천재지변으로 갑자기 사라지거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실전(失傳)된 것으로 보이며, 그의
무덤 앞에 세웠던 묘표(묘비) 역시 500년 가까이 행방이 묘연했다.

이후 한참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 1999년 6월, 부산일보 동경지사장이자 한일역사공동연구학회
장으로 있던 최성규(崔性圭)가 우연히 왜열도 동경(東京) 미나토구(區)에 있는 '다카하시 고
레키요(高橋是淸) 기념공원'에서 이 묘비를 발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산군과 이성군파 후손들은 즉각 '묘비환원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왜국 정부
와 동경시에 묘비 반환을 요구했고, 주일(主日) 한국문화원과 한국대사관에서도 적극 그들을
도왔다. 그렇게 1년의 협상 끝에 동경시가 반환에 협조하여 2000년 6월 16일 비석이 있는 공
원에서 후손들과 미나토구청장이 반환 기념행사를 열었고, 7월 3일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허나 이 비석이 언제 어떤 경로로 왜열도로 넘어갔는지, 어찌하여 동경의 조그만 공원에 있게
되었는지는 전혀 전하는 것이 없다. 그 진실은 오직 비석만이 알 것이나 그 역시 묵비권을 행
사하고 있어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심씨의 묘역을 파괴한 왜군이 가져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비석을 되찾은 영산군과 이성군 후손들은 영산군 묘역 맞은편 북한산(삼각산)이 잘바
라보이는 언덕에 자리를 닦아 사라진 묘역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낼 제단(祭壇)을 쌓고 그 위
에 이 묘비를 안착시켰다.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 등 제사에 필요한 시설을 세워 매년 제사를
지내면서 늘 주변을 손질하는 등 각별하게 관리를 하고 있다.

심씨의 무덤은 거의 영구적으로 사라졌고 묘표에도 그 위치가 나와있지 않다. 그 묘표마저도
다른 나라로 넘어가 자칫 공원의 미아로 그렇게 썩을 뻔했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발견되어 고
국으로 돌아와 아들의 묘역을 마주보고 있는 곳에 둥지를 틀었으니 심씨도 이제 그 한을 풀고
지하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을 것이다.

숙용심씨묘표는 이런 우울한 사연으로 망향의 묘비란 별명을 지니고 있는데, 그와 함께 2005
년 겨울, 동경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서 우리나라를 통해 고향인 함경북도로 돌아간 정문
부(鄭文孚) 장군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도 다시 되찾기까지 그 과정은 가히 한 편의 영
화와 같았다. 다른 나라로 빼돌려진 문화유산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많
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야 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귀중한 유물이라 하겠다.
이들은 그래도 고국으로 돌아와 거의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이
다. 그런 케이스는 아직 흔치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의 수많은 문화유산이 고국을 꿈
꾸며 타국살이를 전전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될 것이며 언젠가는 그들을 싹 되찾아와야 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국력을 증강시켜
돈으로 밀어부치거나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되찾아오는 것이지만 우리 국력에 그것도 쉽지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구의 평화와 고토(故土) 수복을 위해 왜열도와 중원대륙, 만주를 공격하게 된
다면 그곳에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 외에 그들의 문화유산과 보물도 싹 긁어왔으면 좋겠다. 더
불어 지구 정화를 위해 오랑캐들도 싹 청소 좀 하고 말이다.


▲  유리막에 감싸인 숙용심씨묘표(서울 지방기념물 25호)
비석이 작고 이곳이 바깥이라 도난의 위험이 늘 도사린다. 하여 두껍게 유리막을
씌워 그를 보호하고 있다. 비석 입장에서는 좀 답답하겠지만 그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가 없으니 이런 걸 두고 필요악이라 하는 모양이다.


숙용심씨묘표는 비신(碑身)과 머릿돌(이수)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 비신에는 해서(
楷書)로 '숙용심씨지묘(淑容沈氏之墓)'라 쓰여 있는데, 글씨의 크기가 깨알같이 작아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보일 것이다.
비석이 꽂힌 비좌(碑座)는 특이하게 2단으로 이루어져 통비(通碑)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2단으로 된 비좌는 이 땅에서 이 묘표가 거의 유일하다. 그러니 그의 가치와 의미는 꽤 남다
른 것이다. 비좌 밑에는 연꽃잎이, 위로는 복련(覆蓮)이 새겨져 있으며 그 측면에는 안상(眼
象)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비석 뒷부분에는 앞면과 달리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다.


▲  숙용심씨묘표 이수 앞부분

이수에는 화려해 보이는 무늬들이 잔뜩 새겨져 속세에서 오염된 두 눈을 호강시킨다. 그 무늬
는 꽃잎이나 소용돌이처럼 생긴 구름무늬로 그 무늬 사이로 뿔과 수염이 달린 이무기(반룡)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얼핏 보면 좀 복잡해 보여서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살펴보면 하나, 둘 보일 것이다.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이무기의 모습이.

비석의 머릿돌(이수)에 구름무늬가 나타난 것은 조선 초부터로 이곳처럼 구름무늬와 용이 함
께 새겨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니 그만의 매력을 가진 개성이 넘치는 비석이다. 이건 지방
기념물에 둘 것이 아니라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보물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흔치
않은 사연에 2단으로 된 비좌, 그리고 구름무늬와 용이 같이 새겨진 이수까지, 겉은 조그만
비석이지만 대충 넘기기에는 그의 존재는 너무나 크다.

* 숙용심씨묘표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26


▲  구름무늬로 가득해 침침한 두 눈을 빙빙 돌게 만드는 이수의 뒷부분
구름무늬가 내소사(來蘇寺) 대웅전의 꽃창살과 많이 닮았다.

▲  2001년에 세워진 숙용심씨묘비 환원기념비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아주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허나 거의 한자 투성이에 문단 간격도
아주 각박하여 읽기가 좀 고통스럽다. (오늘도 고통받는 나의 두 망막)

이렇게 하여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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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구역, 후원 돌담길 겨울 나들이 <중앙고 본관, 창덕궁 후원 뒷길, 옥류정>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창덕궁 후원 뒷길



'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후원 뒷길
겨울 나들이 '

창덕궁 신선원전, 의효전

▲  창덕궁 신선원전, 의효전 구역

▲  중앙고등학교 (본관 주변)

▲  창덕궁 후원 돌담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끝 무렵, 북촌(北村)에 자리한 중앙고등학교와 창덕궁 후
원 뒷길을 찾았다.
북촌과 창덕궁 후원 뒷길은 내 즐겨찾기 명소로 매년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고 있다. 이
미 지겹도록 복습을 한 곳이지만 자꾸만 손과 발이 가니 그들에게 단단히 중독된 모양이
다.
마침 며칠 전 겨울 제국(帝國)이 서울에 눈폭탄을 투하했는데 그들의 설경(雪景)이 갑자
기 당겨 눈이 녹을새라 부랴부랴 사진기를 챙겨들고 북촌으로 달려갔다. (본글에서는 중
앙고와 창덕궁 신선원전, 창덕궁 후원 뒷길만 다루겠음)



 

♠  북촌의 한류 명소이자 늙은 근대 건축물을 여럿 간직한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

▲  교문 옆에 자라난 계동(桂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512호

창덕궁과 맞닿은 북촌의 동북쪽 끝자락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고등학교(중앙중고교)가
자리해 있다.
이곳은 100년 이상 숙성된 학교로 왜정(倭政) 시절과 1940~1970년대에 유명인사를 많이 배출
했던 현장이다. 또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을 3개나 간직하고 있고, 비록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문학박물관이란 박물관까지 보유했으며, 창덕궁의 금지된 구역인 신선원전(新璿
源殿) 구역을 유일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21세기 이후 전파를 타고 한류
관광지로 격하게 뜨면서 북촌의 필수 명소로 성장했다.

북촌의 주요 골목길인 계동길의 북쪽 끝인 중앙고 교문은 언덕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인왕산(
仁王山)을 가리고 선 높은 고개를 넘으면 북촌로로 이어지며, 그 중간에 가회동11번지로 이어
지는 조그만 골목길이 가늘게 손을 내밀고 있다. 동쪽에도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은 고개가
버티고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원서동(苑西洞)과 창덕궁길로 이어진다.

교문 바로 안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큼직한 은행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앙상한 가지
를 드러내며 나처럼 추운 시절을 원망하는 그는 높이 20m, 가슴둘레 3.1m의 훤칠한 나무로 오
랜 세월 계동 지역의 수호신으로 숭상을 받아왔다. 하여 매년 가을, 지역 사람들은 오곡백과(
五穀百果)를 차려 당제(堂祭)를 지냈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 개관을 기념하고자 이 나무
를 삼목이식을 하는 등, 나름 의미가 깊은 나무이다.
나무 옆에는 1941년에 지어진 수위실이 있으며, 언덕진 길을 오르면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수
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햇님처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교문을 들어서면 학교 건물 사이로 운동장이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운동장 대신 콘크리
트로 다진 너른 뜨락이 닦여져 있으며, 그 공간 복판에 넓고 동그랗게 자리를 다져 테두리에
얕게 난간석을 두르고 그 안에 잔디를 깔아 그 핵심부에 학교를 일으켜 세운 인촌 김성수(仁
村 金性洙)의 동상을 세웠다.
또한 본관의 모습이 고려대학교 본관과 많이도 닮았고, 본관 주변 풍경은 여기가 고등학교가
아닌 고려대나 서양의 명문 대학교에 들어선 기분을 진하게 들게 만든다. 기존에 생각하고 있
던 고등학교의 모습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겉모습이 이러하니 누가 여길 고등학교라
보겠는가? 그냥 사진만 보면 오래된 대학교나 서구의 명문 학교라고 봐도 이상할 것은 없다.

본관 서쪽에는 원파도서관이, 동쪽 높은 곳에는 강당이 있으며, 본관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고색이 깊은 서관과 동관이 나란히 나타나고 그 북쪽을 가린 신관(新館)을 지나면 비로
소 인조 잔디를 깐 축구장 겸 운동장이 나타난다. 운동장 북쪽에 보이는 건물은 중앙중학교이
며 운동장 동쪽 밑에 신선원전과 의효전이 뉘여져 있다.

* 중앙고등학교의 간략한 역사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6월 1일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세운 기호학교(畿湖學校)에서 비롯
되었다.
1910년 9월 흥사단(興士團)에서 운영하던 융희(隆熙)학교와 통합되었는데 그때 교장은 서유견
문(西遊見聞)으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이었다. 이후 기호학회는 호남, 교남, 서북 등 여러
학회와 통합해 중앙학회로 간판을 바꾸고 학교 이름 또한 중앙학교로 갈았으며, 1915년 4월에
김성수가 이를 인수했다.

1916년 이 땅 최초로 보트를 도입하여 수상스포츠인 조정부를 설치했으며, 1917년 웅원(雄遠,
높은 이상), 웅견(雄堅, 굳은 의지), 성신(誠信, 성실한 행동)을 학교의 3대 교훈(校訓)으로
삼고 교목(校牧)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무궁화꽃으로 삼았다.
1917년 12월 김성수의 큰아버지인 김기중(金祺中)이 교사(校舍)를 지으면서 현재 자리로 학교
를 이전했다. 원파 김기중은 김성수 이상이나 중앙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919년에는 교장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가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3.1운동을 계획
했으며 백두산을 상징하는 백산(白山)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왜정의 방해로 1921
년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보)로 개명했다.
1921년 4월 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본관과 서관, 동관을 세웠고, 1926년에는 6.10만세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1934년 12월 원인이 아리송한 화재로 본관이 무너지자 그 남쪽에 다시 본관을 만들어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으며 1941년에는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대강당을 지었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앙중학교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39년 왜정이 무궁화 모표를
폐지하라고 하자 월계관으로 임시로 모표를 바꾸기도 했다. 1940년에는 중앙고보 역사 교사인
최복현이 4학년 학생 5명과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을 목적으로 '5인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1941년 한 학생의 연락 편지가 왜경에 발각되어 최복현과 관련 학생 모두 함흥교도소로 끌려
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이라고 한다.
그때 최복현은 재판정에서
'내 수업을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나를 처벌하고 학생들은 풀어달라'

호소하여 학생들은 3달 뒤 풀려나고 최선생은 2년 후 석방되었다.

1946년 9월, 6년제 중학교로 변경되고, 1950년 4월 대한교육법으로 4년제로 변경되면서 3년제
고등학교를 병설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꾸리게 되었다. 1960년 4.19시절에는
학교 학생들이 4.19시위에 동참했으며, 1964년에는 고려중앙학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1966년 신관을 짓고 김성수의 동상을 세웠으며, 1973년 신선원전과 인접한 운동장 동쪽에 축
대를 쌓아 운동장을 넓혔다. 1981년 학교 본관과 동관, 서관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
유산을 보유한 학교가 되었으며 1986년 6월 7일 교우의 날을 정해 행사를 거행했다.

1992년 2월 원파기념관을 세웠고,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박물관을 개관하
면서 이 땅의 고등학교 중 최초로 박물관을 소유한 학교가 되기도 했다. 또한 주변 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전파를 타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북촌의
한류 관광지로 존재감을 크게 살찌웠다.
(예전에는 일요일과 공휴일에 학교를 개방했으나 2020년 이후에는 거의 개방하지 않음)
 
* 중앙고등학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1 (창덕궁길 164, ☎ 02-742-1321~2)
* 중앙고등학교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6.10만세 기념비 (뒤쪽 건물은 원파도서관)

본관 뜨락 서쪽에는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6.10만세 기념비가 3.1운동 책원비가 있는 동
쪽을 바라보고 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붕어(崩御)하자 중앙고보 학생
을 중심으로 격문(檄文) 3만장을 인쇄하여 주변 학교에 뿌렸다. 그리고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인 6월 10일, 황제의 대여(大輿)가 종로3가 단성사(團成社)를 지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매와 태극기를 군중에
게 뿌려 이른바 6.10만세 운동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 기념비는 6.10만세운동의 67주년이 되는 1983년 6월 10일 중앙고등학교 동우회와 동아일보
사가 합심하여 세웠다.


▲  중세시대 유럽 성처럼 생긴 원파도서관 (옛 인문학박물관)

본관 서쪽에는 서양식 건물인 원파도서관이 있다. '원파'는 학교를 크게 일으킨 김성수의 큰
아버지인 김기중의 호로 이곳에는 2008년 6월에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문을 열었던 인문학박
물관이 야심 차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는 이 땅에서 거의 유일하게 고등학교에 차려진 박물관으로 그 이름 그대로 인문학(人文學)
자료를 풍부하게 머금고 있었으며 북촌의 다른 민간 박물관과 달리 입장료도 저렴하여 참으로
착한 박물관이었다. (어른 입장료가 1,000원이었음) 허나 이 땅의 인문학이 몰락했음을 상징
하듯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창밖에 빗방울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2010년과 2011년에 2
번 관람을 했음)


▲  본관 주변에 세워진 계원 노백린(桂園 盧伯麟) 집터 표석

이곳에는 대한제국 고위 무관이자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했던 노백린(1875~1926) 장군의 집
이 있었다.
그는 문무(文武)에 출중했고 기개가 높았으며 공군의 중요성을 깨달아 미대륙에서 최초로 한
인(韓人) 비행학교를 세워 독립군 공군을 양성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넘어와서 국무총리,
참모총장 등을 지냈으며 특히 군사 부분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허나 1926년 1월 22일, 상해(上海) 프랑스 조계지(租界地)의 양옥 단칸방에서 조국의 독립을
누리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앙고를 일구었으나 친일파로 구린 모습을
보였던 김성수는 무려 64살씩이나 살았음)


▲  3.1운동 책원비(策源碑)

본관 뜨락 동쪽에도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3.1운동 책원비가 자리해 6.10만세 기념비가
있는 서쪽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

3.1운동 발생 2달 전인 1919년 1월 왜열도 동경(東京)에서 유학을 하던 송계백(宋繼白. 1896~
1920)이 중앙학교 숙직실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곳 교사인 현상윤(玄相允, 1893~1950)에게
사각모에 담긴 비단에 쓰여진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네며,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살
짝 알렸다.
현상윤은 그것을 교장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급히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들은 크게 감동을
먹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작성하고 3.1
운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바로 이를 기념하고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에서 세
웠다.


▲  창립30주년 기념관 (대강당)
본관 동쪽 높은 곳에 자리한 대강당은 1941년 11월 창립30주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  중앙고등학교 본관 - 사적 281호

고려대 본관과 많이도 닮은 중앙고 본관은 콘크리트 철근의 2층 석조 건물로 1935년에 삽을
떠서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원래는 동관과 서관 사이에 있었으나 1934년 화재로 무너지
자 현 위치에 더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었다.

왜정 때 건축가인 박동진이 서구 학교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설계하고 건축한 길다란 'H'형태
의 건축물로 지붕 부분을 포함하면 가히 3층 규모인데, 그 시절 이 땅의 사람들이 세운 큰 건
물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건물 중앙에는 4층의 중앙탑을 높이 세워 본관의 위엄을 드높였고, 벽면은 돌을 질서 있게 쌓
아올렸다. 그래서 그 모습이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서양 학교나 중세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거기에 담쟁이덩굴까지 걸치고 있으니 고색과 중후한 멋까지 마음껏 드러낸다.
학교가 이렇게 크고 잘 나갔으니 왜정 때 이곳을 다녔던 학생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했을 것
이다. 비록 왜정의 눈치를 보며 살던 우울한 시기이나 여기서만큼은 왜인들도 오히려 부러운
눈빛으로 학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현재 1층 중앙은 학교 행정공간으로, 나머지는
교실로 쓰이고 있으며, 근대 초기 양식으로 만
들어진 민족 교육의 현장이자 민간학교의 건물
로 유서가 깊다. 또한 20세기 중/후반 유명 인
사들이 많이 나온 현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널린 학교 건물보다 더욱 정감이
가며, 저 건물에 들어가면 절로 책을 펴고 공
부에 임할 정도로 면학 분위기도 진하게 나온
다. 나도 이곳에서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사
는 곳이 엉뚱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하긴 이곳
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워낙 타고난 돌머리
라 효과가 얼마나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  본관의 뒷모습
마치 중세시대 건축물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  본관 뒤쪽에 숨겨진 빛바랜 종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중앙고보 시절부터 수업시간과 점심시간, 수업 종료 시간마다 땡땡땡~~♬ 종소리를 내며 학생
과 교사들을 분주하게 했던 위엄 돋는 종이었으나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나 이곳의 옛 유물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왕년에는 몸을 흔들며 학교를 움직이는 큰 손이었건만 이제는 종소리를 울릴 일도 없으니 그
의 피부에는 그저 하얀 먼지만 가득할 뿐이며, 가끔 관광객들이 호기심 삼아 그를 흔들어 주
변의 적막을 살짝 깨뜨리곤 한다. (나도 몇 번 쳐봤음~) 그렇게 울려 퍼진 종소리는 예나 지
금이나 늘 비슷한 목소리이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치지는 말자!)


▲  왕년을 생각하며 우수에 잠긴 종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뒤로 나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허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저 장대한 세월에 잠깐씩 몸을 담굴 뿐이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천하만물의 운명이다.

▲  중앙고등학교 서관(西館) - 사적 282호

본관 뒤쪽에는 붉은 피부의 비슷한 모습을 지닌 서관과 동관이 있다. 서관은 1921년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2층 붉은 벽돌집으로 (지붕을 포함하면 3층) 'T'자형 구조이다. 본관과는 분위기
가 사뭇 다른데, 뾰족한 아치형 창틀, 가파른 고딕식 지붕, 그리고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엇
물려 지어 20세기 초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벽돌이 고색의 향기를 더욱 우려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조선소년군 창설과 6.10만세운동
,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는 교실로 살아간다.


▲  중앙고등학교 동관(東館) - 사적 283호

서관과 마주하고 있는 동관은 1923년 10월에 지어진 2층 붉은 벽돌 건물이다. (지붕을 포함하
면 3층) 건물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은 서관과 비슷하며 여전히 교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신관에서 바라본 동관

▲  동관의 뒷모습


▲  선비의 모습으로 지어진 원파 김기중(金祺中) 동상

동관과 서관 사이에는 원래 본관이 있었다. 허나 1934년 화재를 만나 건물이 주저앉으면서 남
쪽으로 자리를 옮겨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본관의 강제 이전으로 비게 된 공간에는 소나무를 심어 조촐히 정원을 닦았는데 그 복판에 원
파(圓坡) 김기중(1859~1933)의 동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김성수와 더불어 중앙학교를 일으킨
인물로 김성수의 바로 큰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양복스타일의 김성수 동상과 달리 전
형적인 선비 스타일로 동상을 지어 그를 기린다.

김기중은 1886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1904년 용담(龍潭, 전북 진안) 군수(郡守)를 지내기도
했다. 1906년 정3품에 올랐으나 멸망의 끝으로 달려가는 나라꼴에 한숨을 쉬며 민중계몽을 위
해 교육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여 1908년 재산을 털어 영신(永新)학교를 세웠으며 왜열도
로 건너가 그곳의 교육 제도를 직접 살폈고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 1921
년 다시 재산을 털어 지금의 자리에 교사를 만들면서 중앙학교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32년 아우 김경중(金暻中)과 보성전문(고려대)을 인수하고 민립대학을 꿈꾸던 조카(김성수)
에게 운영을 넘겼으며 그 이듬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허나 그때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10년을 더 살았다면 친일파로 노선을 바꾼 조카에게 크게 실망
하여 피가 꺼꾸로 솟았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결국 그 잘난 조카가 큰아버지의 민족교육 사업
에 적지 않게 똥칠을 했다.


▲  신관 앞에 뿌리를 내린 히말리야시다나무 (종로구 2013-43호)
본관을 조금 닮은 신관 앞에는 어려운 이름처럼 이색적으로 생긴 히말리야시다나무가
조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높이 13m, 둘레 190cm 정도로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아마도 왜정 때 학교 행사 기념으로 심은듯싶다.

▲  옛 숙직실터에 새로 지은 삼일기념관(三一記念館)

대강당 뒤쪽에는 삼일기념관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기와집이 있다. 네모나게 다져진 석축
위에 계단을 늘어뜨리며 들어앉은 이 건물은 김성수가 1917년에 지은 교장 사택 겸 숙직실(宿
直室)을 복원한 것으로 원래는 대강당 정문 앞에 있었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학교를 찾아와 이곳 숙직실에서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
윤에게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을 처음으로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했다,
즉 3.1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유서 깊은 현장인 것이다.

그 숙직실은 1941년 지금의 강당을 만들면서 철거되었는데 아마도 그런 사연을 알아챈 왜정의
강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73년 지금 자리에 다시 지어 3.1기념관으로 삼았다.
기념관 앞에는 어디서 업어온 문인석이 홀(忽)을 쥐어들고 서 있으며, 건물 뒤로 담장과 울창
한 수목이 보이는데 그곳이 동궐인 창덕궁이다.


▲  겨울에 푹 잠긴 중앙고 산책로 (신관, 동관 옆길)

▲  눈에 뒤덮힌 중앙중고교 운동장과 새 건물로 이루어진 중앙중학교
운동장을 경계로 남쪽은 중앙고등학교, 북쪽은 중앙중학교로 이루어져 있다.



 

♠  중앙고 운동장에서 바라본 창덕궁 신선원전(昌德宮 新璿源殿)
- 사적 122호


▲  비공개로 사람의 손때마저 희미해진 신선원전

중앙고에 왔다면 꼭 살펴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창덕궁의 숨겨진 속살인 신선원전이다.
그렇다고 신선원전이 중앙고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만약 그들이 교정에 있었다
면 중앙고가 지금의 자리에 속시원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중앙고를 둘러보고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축구장 골대가 있는 너른 운동장이 나온다. 운동
장 북쪽에는 중앙중학교가 있고, 그 뒤에 삼삼하게 우거진 산이 있는데, 이는 와룡산(臥龍山)
으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의 동쪽 끝자락이다. 운동장 서쪽은 가회동(嘉會洞) 주택가로 막
혀있고 동쪽은 철책이 높이 쳐져 있는데, 그 너머로 숲이 펼쳐져 있다.
중앙고 본관이 주는 착시현상을 간파하고 서관과 동관을 거쳐 이곳까지 용케 들어온 사람들도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 착시현상에 빠져 본관 앞만 맴돌다가 나가버림) 상당수 운동장만 보
고는 발걸음을 돌린다.
운동장 동쪽에 철책이 있고 마땅한 안내문도 없으니 비록 밑에 수상한 기와집들이 널려있어도
그냥 통과하는 것이다. 허나 그런 생각은 중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창덕
궁의 비공개 구역인 신선원전, 의효전이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중 유난히 통제구역이 많았던 창덕궁,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21세기 이후 후원(後苑) 상당수와 낙선재(樂善齋)를 공개하고 있지만 아직도 숨겨진 부분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신선원전과 의효전 구역은 여전히 대문을 굳게 잠그며 공개를 꺼리고 있
으며, 그런 사유로 이곳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후원 숲속에서 조용히 속살을 가린 채, 숨바꼭질을 즐기는 신선원전은 중앙고 운동장에서만큼
은 자존심을 곱게 접으며 그 속살을 일정 부분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운동장이 그곳보다 지
대(地臺)가 높기 때문이다. 다만 철책을 통해서 봐야 된다는 한계점이 있다.

중앙고는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중앙고가 창덕궁 궁역(宮域)보다 조금 지
대가 높긴 하지만 담장이 걸쳐진 곳<운동장 부분 제외>만큼은 교내보다 높으며 민가(民家)의
담장도 아닌 지체 높은 궁궐의 담장이라 감히 건드리기도 그렇다. 허나 운동장만큼은 사정이
달라 운동장이 신선원전과 궁궐 담장보다 더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있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1973년 운동장을 넓히고자 축대를 높이 다졌기 때문인데, 철조망을 높이 친 것은 자칫 월담을
하거나 운동 도중 공이 넘어가 그곳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을 막고자 함이다.

일개 학교의 운동장이 궁궐 사당보다 높이 떠있다는 것이 다소 신선하고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국제적인 호구 짓을 일삼다가 거하게 쪽박을 찬 옛 제국의 잔재물이라고 해도 이렇게
까지 해야 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허나 학교 입장에서는 여기 말고는 운동장을 다질 땅
이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  신선원전의 옆 모습

▲  신선원전의 두툼한 뒷모습

신선원전 자리에는 원래 대보단(大報壇)이 있었다. 조선은 명(明)의 충직한 제후국(諸侯國)이
라 명이 망하자 옛 명나라의 제왕을 기리고 그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아주 꼴사나는 이유로 숙
종(肅宗) 때 대보단을 만든 것이다.
대보단에는 고려와 조선을 지극히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과 식량을 과하게 보내주어 조선천자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신종(神宗), 그리고 명
나라를 완전히 끝장낸 마지막 군주, 의종(毅宗)의 위패를 봉안해 매년 국가 재정을 축내며 제
사를 지냈다.

창덕궁에 선원전(璿源殿)이 지어진 것은 1656년이다. 이때 경덕궁(敬德宮, 경희궁)에 있던 경
화당(景華堂)을 인정전(仁政殿) 서쪽으로 옮겨 제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선원전으로 삼
았는데<이를 구(舊)선원전이라고 부름> 1921년 왜정이 대보단을 때려부시고 덕수궁(경운궁)에
있던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구선원전과 덕수궁(경운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과 관련 유
물도 거의 옮겨와 신선원전이라 하였다. (이전의 선원전과 구분하고자 그리 이름을 지었음)

이곳에는 태조에서 순종에 이르기까지 제왕 12명의 어진 48본이 봉안되었으며, 어진을 걸어두
던 12개 감실(龕室)은 1900년대 의궤도설(儀軌圖說)과 일치해 왕실의 전통적인 법식을 충실히
따랐음을 보여준다.
어진은 6.25가 터지자 서둘러 부산(釜山)으로 옮겼지만 대부분 관리소홀로 화마(火魔)의 먹이
가 되었으며, 제례에 쓰였던 의장물 상당수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남아있던 노부(鹵簿, 제
왕이 나들이할 때 갖추던 의장물) 등 대부분의 유물은 2002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용상(龍床)과 오봉도(五峯圖), 모란이 그려진 병풍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들 유물은
19~20세기 궁중 미술의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감실과 당가(唐家), 용상 등 가구와 시설
물은 주칠(朱漆)이 아닌 황색(黃色)으로 칠했다.

신선원전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사당이란 점 때문에 여전히 비공개를 고집하고 있다. 하여 이
곳에서만큼은 거의 인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사람의 손때마저 보이질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고요하기만 한 신선원전, 이곳이 과연 시끌벅적한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
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거기에 사당이라 그런지 종묘(宗廟)에서 느낄 수 있는 엄숙함도 적지
않게 배여 나온다. 다행히 늦게나마 이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년 동안 조사하여 '최후의 진전(眞殿) 창덕궁 신선원전'이란 도록을 발간하기도 했다.

신선원전은 의효전(懿孝殿)과 재실(齋室), 수직사(守直舍), 몽답정(夢踏亭), 괘궁정(掛弓亭),
진설청(眞說廳) 등을 거느리고 있으며 이들은 신선원전 권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창덕궁 후원
에서 신선원전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으며, 원서동 빨래터에 있는 외삼문(外三門)은 이곳의 정
문이다.


▲  신선원전 남쪽에 자리한 의효전(懿孝殿)

신선원전 남쪽에 있는 의효전은 원래 덕수궁(경운궁)에 있었다. 1904년 순종의 왕비인 순명효
황후(純明孝皇后)의 혼전(魂殿)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1921년 덕수궁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
길 때 덩달아 따라왔다.

사진에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의효전 옆에는 몽답정(夢踏亭)과 몽답지(夢踏池)란 작은 연못
이 있다. 몽답정은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지냈던 김성응(金聖應, 1699~
1764)이 지은 것으로 영조(또는 숙종)가 꿈속에서 이 정자를 찾았다고 하여 꿈에서 발걸음을
했다는 뜻의 몽답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조도 몽답정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창덕
궁과 창경궁의 도면인 동궐도(東闕圖)에는 그의 존재가 나와있지 않아서 원래 이곳에 있던 것
은 아닌 듯싶다.


▲  중앙중고 운동장에서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괘궁정(掛弓亭)

신선원전 구역에서 그나마 제일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존재가 괘궁정이다. 이곳은 돌담이 운동
장 축대 밑으로 막 내려가는 비탈진 곳에 있으며, 중앙고 축구부 휴게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다.

괘궁정은 1849년에 지어진 것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 북영(北營)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
던 곳이라고 한다. 정자의 이름인 괘궁(掛弓)은 활을 걸어둔다는 뜻으로 왕실에서 종묘만큼이
나 애지중지했던 대보단 바로 옆에 활쏘기 연습을 하는 정자를 만든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게다가 정자의 모습을 보면 일반 병사들이 연습을 했다기보다는 훈련대장 등 상위 등
급의 무관들이 활 연습을 하거나 군영(軍營)을 바라보는 용도로 사용했을 듯 싶다.
북영의 군사들은 제왕의 호위를 담당하는데, 제왕이 궁궐을 옮기면 북영 본부도 같이 옮긴다.
제왕이 창덕궁에 머무는 경우에는 궁궐에서 다소 구석인 대보단 인근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괘궁정은 달랑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정자
를 지었다. 얼마나 인적이 없는지 수북히 깔린 눈에 사람 발자국은커녕 새 발자국도 없으며,
정자에 정적만 감도니 언제 사람이 들어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제 찾
아올지 모를 화마에 대비하여 소화기가 한쪽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운동장 철조망을 통해 신선원전 일대를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보듯 구경했지만 언
젠가는 쿨하게 해방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반드시 그래야 됨~) 그때가 되면 까치발처럼 힘들
게 구경해야 되는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 창덕궁 신선원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 (창덕궁5길 22-4)



 

♠  서울 도심 뒷통수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중앙중고 후문과 창덕궁 돌담

창덕궁 돌담이 이어진 중앙중학교 동쪽 길을 오르면 고려사이버대학교가 나온다. 이들은 중앙
중고와 함께 고려대학교 계열로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서쪽)은 북촌과 삼청동으
로 이어지며, 돌담이 펼쳐진 오른쪽(동쪽) 길이 바로 창덕궁 후원 뒷길이다. 사이버대학교 갈
림길이 중앙중고의 후문으로 정문과 달리 문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동쪽 길로 들어서면 길이 서서히 흥분을 하면서 경사를 이루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진 창
덕궁 돌담이 궁궐 돌담의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오른쪽으로 따라붙는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다. 또한 돌담 너머로 삼삼하게 우거진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면서 도심
의 속된 기운을 정화시킨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고려사이버대학 동쪽)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넘어가는 길이
과연 있을까??' 
주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길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
이다.


▲  눈을 뒤집어쓰며 층층이 이어진 창덕궁 후원 돌담 (수구문 주변)

창덕궁 후원을 속세로부터 열심히 가리고자 지형을 이용하여 높이 돌담을 둘렀다. 지형이 낮
은 곳은 돌담 너머로 후원의 속살이 일부 보이기도 하나 보이는 것은 그저 숲밖에 없다.


▲  북악산(백악산)의 수분을 받아들이는 후원 수구문(水口門)

창덕궁 후원에는 연못이 참 많다. 그 연못을 살찌우는 물은 바로 북악산이 베푼 것으로 그가
내린 물이 이 수구문을 거쳐 후원으로 들어가 후원 곳곳에 물을 공급한다. 가뭄이 극성일 때
는 수구문도 흐르는 물이 거의 없어 한가하지만, 비가 많이 내릴 때는 수구문 철창을 녹여버
릴 정도로 물이 들어온다.


▲  석양이 지는 수구문 주변 후원 돌담

▲  후원 뒷길의 전환점(너른 공터) - 여기서부터 좁은 산길로 변한다.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릴 수 있을 정도에 후원 뒷길은 옥류정 입구의 너른 공터에서 끝
이 난다. 여기서 길은 산길로 180도 돌변하며, 차량은 더 이상 바퀴를 들일 수 없다.
너른 공터를 지나면 근래 지은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길은 2개로 갈리는데, 오
른쪽은 후원 돌담을 따라 성균관대 내부로 이어지며, 왼쪽은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
점(종로구 마을버스 02번 종점)으로 이어진다.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은 북촌 권역에서 성균관대와 대학로를 빠르게 이어주는 도심
의 상큼한 뒷길로 아는 이가 별로 없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한적하고 고즈넉하다. 내가 좋
아하는 길의 일원이기도 한데, 다만 가로등 시설이 부족해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꽤 어둑어
둑해진다.


▲  옥류정으로 향하는 짧은 산길과 눈에 묻힌 계곡

옥류정으로 인도하는 짧은 산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그 옆에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눈에 묻혀있는데, 그는 북악산의 동쪽을 이루고 있는 와룡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적
지 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다소 옥의 티이다.


▲  옥류정에서 창덕궁 후원 뒷길로 내려가는 길
이렇게 보니 정말 첩첩한 산주름에 푹 묻힌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서울 도심 한복판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  북악산 와룡산 밑에 자리한 옥류정(玉流亭)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옥류정, 그 어여쁜 이름 마냥 후원 뒷쪽에 숨겨진 오래된 경승지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1956년에 지어진 8각형 모습의 현대식 정자(亭子)이다. 그래도 후원
뒤쪽에 자리한 위치상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래된 사연을 머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런 것은
일절 없었다. 위치와 정자의 이름이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설레게 만든 것이다.

이곳은 와룡산 밑으로 바로 동쪽 언덕에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 있으며, 북쪽 높은 곳에는
와룡공원길이 흘러간다. 와룡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옥류정에서 잠시 묻혔다가 남쪽 연못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정자 이름이 옥류정이 된 것은 북악산(백악산)의 맑은 계곡이 옆구
리에 흘러서 붙여진 이름 같기도 하고, 계곡이 후원 옥류천(玉流川)과도 살짝 이어져 있어 그
렇게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 정자 정면에는 푸른 피부로 쓰여진 옥류정 현판이 걸려있는데,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아주 명필급이다.

옥류정은 숲에 둘러싸인 구석이라 늘 그늘이 머물고 있으며, 주변 경치는 좋지만 와룡공원길
이 바로 뒷쪽이라 차량들의 굉음이 수시로 두 귀를 때린다. 그래도 숲바람과 산바람이 교차하
는 곳이라 한여름에는 더위를 잊기에 좋다.


▲  후원 뒷길 고개
여기서는 창덕궁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는데, 이곳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이다.


창덕궁 후원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고려사이버대학교)에서 후원 뒷쪽 돌담길을 따라 성균관대
로 이어지는 1리 남짓의 짧은 고갯길이다. 감사원에서 성북동을 이어주는 와룡공원길 밑부분
으로 서울 도심에서 그리 흔치 않은 조촐한 오솔길이다.
이곳은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걸쭉하게 그려진 수채화의 일부처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돌담 너머로 후원의 청정한 숲이 펼쳐져 있고 돌담길 주변 역시 나
무들이 가득하니 그 아름다움의 농도는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다.


▲  후원 뒷길 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창덕궁의 뒷통수인 후원 뒷길 고개는 돌담 바로 옆구리라 돌담을 만지면서 갈 수 있다. 그 고
개를 넘으면 급하게 펼쳐진 울퉁불퉁한 산길이 나오고, 돌담 너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
원이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바로 성균관대 건물이 보이는데, 그 산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른다.
서울에 있는 궁궐 돌담길 중 가장 호젓하고 담백한 길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을 격하게 추천하
고 싶다. 그만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길이다.


▲  잊혀진 제국의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며 흘러가는
창덕궁 후원 돌담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고 있는 후원 돌담은 새로 손질한 부분이 여기저기 있어 오
래된 것과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적지 않다. 허나 그것은 세월이 해결해줄 것이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은 창덕궁 관람료에 후원 관람료까지 얹혀야 들어갈 수 있는 비싼 공
간으로 성균관대 대운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장식하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보이며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도 시야에 들어온다.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지금까지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과 바위길이 밋밋한 시멘
트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담과 철책이 생기면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
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만 보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이렇게 하여 겨울 한복판에 찾아간 북촌~창덕궁 후원 뒷길 눈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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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 용마산~아차산~망우산 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용마산1보루, 용마산5보루, 망우산1보루>

용마산~망우산 나들이


'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 용마산~망우산 나들이 '
용마산1보루와 서울시내
▲  용마산1보루 봉우리와 서울 시내
 



 

용마산은 아차산(峨嵯山, 295m)의 일원으로 한강에서 중랑구 북쪽까지 이어진 아차산 산
줄기의 중간을 맡고 있다. (북쪽은 망우산이 맡고 있음)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용마봉(龍馬峰), 장군봉(將軍峯)이라 불리기도 하며, 봉우리가 커서 대봉(大峰
)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광진구와 중랑구(中浪區), 그리고 중랑구와 구리시(九里市)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
울 동부와 동북부, 동남부 지역과 구리, 남양주, 하남 지역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전략
적 요충지로 고구려(고구리)와 신라(新羅)가 보루를 주렁주렁 달며 애지중지 했다. 또한
아차산에서 시작된 아차산장성(長城)이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까지 이어지는데, 군데군데
장성의 흔적이 아련히 남아있다.

용마산에는 아기와 용마의 짧막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급 아이가
태어나면 이유 불문하고 그 가족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
럴까?) 그 시절 이곳에서 장사급 아기가 태어났는데, 집안 몰살을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
를 죽였다. 그러자 용마봉에서 아기가 타고 다닐 용마(龍馬)가 나타나 다른 곳으로 갔다
고 하며 (또는 죽었다고도 함) 그 연유로 용마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며,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어 무인(武人)을 차별했던 고려 중기나 조선 때 빚어진 전설이 아닐까 싶
다. 또한 용마산과 아차산 서쪽 자락에는 조선 왕실에서 운영하던 살곶이 말목장이 있었
는데, 용마급 말이 많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또는 용마가 나왔다고 해서;) 용마
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러니 후자가 맞을 것이다.

용마산은 아차산과 더불어 나의 진심 어린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지금까지 200번 넘게
그의 품을 찾았다. 그렇게 오지게 안겼음에도 질리기는커녕 매년 꾸준히 나의 마음을 비
추고 있는데, 늦가을이 깊어가던 11월 첫 무렵에 용마산의 여러 보루를 복습하고자 다시
발걸음을 했다.


▲  긴고랑공원



 

♠  용마산1보루와 2보루(堡壘)

▲  용마산 남쪽 능선길

이번 용마산 나들이는 중곡4동 긴고랑에서 시작했다. 긴고랑은 아차산과 용마산 사이에 자리
한 골짜기로 골이 길어서 긴골, 진골이라 불리다가 긴고랑으로 이름이 갈렸는데, 아차산과 용
마산이 베푼 물이 긴고랑계곡을 이루며 중랑천과 한강으로 흘러간다.
아차산 일원(아차~용마~망우산)에서 가장 크고 상태도 좋은 계곡으로 물도 많고 바위와 너른
반석이 즐비하며, 풍경도 괜찮아서 도심 속 피서의 성지(聖地)이자 쉼터로 바쁘게 살고 있다.
(계곡 상류~중류에 괜찮은 곳이 많음)

계곡 하류에 닦여진 긴고랑공원 서쪽에 용마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남쪽 능선길이 있다. 바로
그 길로 가야 용마산1/2보루를 만날 수 있는데, 간만에 긴고랑에 왔지만 마음은 이미 보루에
가 올라가 있어 바로 능선길로 들어섰다.
용마산 남쪽 능선길은 시작부터 속세살이만큼이나 각박한 경사가 펼쳐져 숨을 제대로 가쁘게
만든다. 흥분한 경사를 순화시키고자 계단길을 적지 않게 깔았으나 그래도 힘든 것은 마찬가
지이다. 이런 길은 그저 자존심을 곱게 접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좋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
오르면 경사가 조금씩 순해지며 닿지 않을 것 같던 용마산1보루터가 활짝 마중을 나온다.


▲  용마산 남쪽 능선(용마산1보루 남쪽)에서 바라본 아차산의
부드러운 산줄기

▲  용마산 남쪽 능선(용마산1보루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광진구 중곡동과 중랑구 남부 지역을 비롯해 동대문구와 성북구,
멀리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용마산1보루터 남쪽 외곽

▲  용마산1보루터 - 사적 455호

용마산1보루는 용마산 남쪽 능선 183m 봉우리에 살짝 깃들여져 있다. 용마산 보루 중 가장 남
쪽으로 돌로 다진 석축 부분은 거의 노출되어 있지 않으나 30~40cm 정도의 할석이 곳곳에 튀
어나와 햇살을 받고 있다. 비교적 평탄한 석축 안쪽에는 흙이 쌓여있는데, 그 남쪽 부분 퇴적
토(堆積土)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가 다진 보루임을 강하게 어필한다.

1보루의 규모는 직경 5m, 길이 16m 정도로 파악되고 있으며, 조그만 군사시설이나 초소로 한
강과 중랑천에서 용마산 정상, 아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다. 하여 바로 위에 있는 2/3보루
를 보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루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흔적 일부가 수풀과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뒤
늦게 발견되어 대륙을 꿈꾸는 우리로 하여금 고구려를 다시 기억하게 해준다.


▲  자연의 일부로 녹아든 용마산1보루

이 보루가 용마산1보루, 즉 넘버원 보루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것은 없다. 물론 고구려가 만
든 그 자체로도 아주 특별한 존재이나 이곳이 1보루가 된 것은 용마산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보루이기 때문이다. 6개의 보루가 나온 아차산도 발견된 순서대로 1보루~6보루로 매겼고, 망
우산도 그렇다. (망우산은 3보루까지 확인됨)

현재 용마산에는 보루터 7곳이 있으나 그게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아직까지 숨바꼭질을 하
고 있는 보루터가 더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차산과 망우산도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이곳을 비롯한 용마산 보루 7형제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용마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밑에 긴고랑과 중곡동, 구의동(九宜洞)을 비롯해 송파구, 강동구,
강남 지역, 남한산, 대모산 산줄기가 두 눈에 들어온다.

▲  용마산1보루~2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세상을 향해 고개를 쳐든 정면 봉우리에 용마산1보루가 있다. 그 너머로
광진구, 성동구, 송파구, 강남구, 우면산, 관악산 등이 두 망막에
잡힌다.

▲  용마산2보루 남쪽 오르막길

▲  용마산2보루터 - 사적 455호

용마산1보루에서 북쪽으로 250m 정도 떨어진 해발 225~230m 능선에 용마산2보루터가 있다. 면
적 약 379㎡, 둘레 약 60~79m, 폭 8m로 1보루보다 훨씬 덩치가 큰데, 윗 부분이 평탄하게 닦
여졌고 그 주위로 석축이 둘러져 있다. 보루 동쪽 중간 경사진 곳에 무덤 1기가 있고 무덤 옆
에는 소토층이 노출되어 있는데, 거기서 흑갈색과 황갈색 피부의 고구려 토기편이 여럿 발견
되어 고구려가 다졌음을 살짝 귀띔해 준다.

이곳은 한강과 중랑천에서 용마산 정상, 아차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밑으로 1보루를 관리하고
위로는 3보루를 보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1보루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우수하
며 여기서 천하를 굽어봤을 2보루의 모습에 대해서는 딱히 정답은 없으나 강화도에 널려있는
조그만 돈대(墩臺)를 생각하면 될 듯 싶다.


▲  용마산2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왼쪽은 아차산이고, 아차산과 용마산 사이로 움푹 들어간 곳이 긴고랑이다.

▲  용마산2보루 북쪽에서 바라본 천하
용마산 서쪽 능선과 중랑구, 동대문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등

▲  용마산 명품소나무 제1호

용마산2보루에서 남쪽 능선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서울 시내를 굽어보는 용마산전망대에 이른
다. 그 전망대 남쪽에 좌우로 넉넉하게 퍼진 소나무가 있는데, 그가 용마산 명품소나무 1호이
다.
광진구(廣津區)는 용마산 능선부에서 잘생긴 소나무를 선별해 2009년에 명품소나무의 지위를
주었는데, 처진소나무처럼 좌우로 넉넉하게 퍼져 상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용마산전망대

천하를 향해 고개를 쳐든 용마산전망대는 용마산 정상 서남쪽에 닦여져 있다. 서/남/북이 확
트인 곳에 자리해 있어 용마산 구역에서 가장 조망 맛이 좋은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
가 높은 서울 시내가 저 밑에 납작하게 펼쳐져 마치 천하가 내 것처럼 즐거운 기분이 모락모
락 피어오른다. 산을 오르는 재미가 바로 이런 맛 때문이지.

여기서는 서울 동부와 동북부(도봉구, 강북구), 동남부(송파구, 강동구), 강남권(강남구, 서
초구), 서울 도심부(중구, 종로구), 도봉산, 북한산(삼각산), 북악산(백악산), 남산, 관악산,
대모산, 남한산, 한강 등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특히 야경(夜景) 맛이 좋다.


▲  용마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두껍게 다가오는 아차산 산줄기 너머로 강동구와 송파구, 강남구, 성남시,
남한산, 대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용마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긴고랑과 용마산1보루, 광진구, 성동구, 송파구, 강남구, 관악산 등

▲  용마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중랑구와 동대문구, 성북구, 강북구, 서울 도심부,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등



 

♠  용마산3보루, 4보루, 망우산

▲  용마산 정상(348m)

용마산 정상은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남쪽과 동쪽, 서쪽은 조금 가파르고 북
쪽은 약간 완만하다. 아차산 주능선과 망우산, 긴고랑에서 접근했을 때는 정상 동남쪽 체육시
설에서 계단길로 정상으로 올라가면 되며, 용마폭포공원 주변에서 올랐을 때는 북쪽 계단길을
통해 정상으로 들어서게 된다.
바위로 이루어진 용마산 정상부에는 정상 인증 모델로 인기가 높은 살짝 둥근 얼굴의 용마산
표석과 삼각점(三角點, 대삼각본점). 태극기가 펄럭이는 게양대가 있으며, 인공이 가해진 듯
한 돌들의 무리가 정상부와 정상 남쪽 경사면, 정상 북쪽 곳곳에서 눈에 띄는데, 그들은 용마
산3보루의 흔적들이다.

이곳 보루는 정상부에 씌워진 것으로 3보루터 흔적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얼핏 보면 봉우리
전체가 인공으로 다진 언덕처럼 보이나 봉우리는 순수 자연산이 맞다. 정상부에 헬기장(지금
은 없음)을 닦으면서 보루 상당수가 파괴되고 헝클어졌는데, 평탄하게 깎여진 부분과 산길 주
변에서 흑회색과 황갈색, 홍갈색 피부의 토기를 중심으로 다량의 토기 파편들이 햇살을 보았
다.
이들은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라 고구려가 다진 보루임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데, 신라가 만
들었다는 의견도 있어 고구려가 먼저 3보루를 닦고 신라가 수리해서 쓴 것으로 여겨진다. 그
리고 옛 헬기장 서쪽 부분에 적갈색의 소토층이 있다.

* 용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7동, 광진구 중곡4동


▲  정상 인증 모델로 인기가 높은 용마산 정상 표석의 위엄
평일 오후라 한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주말과 휴일, 평일 저녁에는
정상 인증을 하려는 사람들로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용마산 동쪽 능선(용마산 정상~아차산 주능선)에서 바라본
아차산 산줄기 ①

▲  용마산 동쪽 능선(용마산 정상~아차산 주능선)에서 바라본
아차산 산줄기 ②


▲  용마산 동쪽 능선길(용마산 정상~아차산 주능선)

용마산 정상과 아차산 주능선을 이어주는 용마산 동쪽 능선길은 쑥 내려갔다가 바위가 펼쳐진
중간에서 다시 올라갔다가 서서히 내려가는 구조이다. 오르락 내리락을 2번을 해서 그렇지 대
체로 완만한 능선길로 남쪽으로 아차산 주능선과 광진구, 송파구, 한강 등이 바라보이며, 북
쪽으로 중랑구와 망우산 등이 늘 시야에 따라붙어 두 눈을 즐겁게 한다.


▲  용마산4보루터 - 사적 455호

용마산 정상에서 동쪽 능선을 가다 보면 아차산 주능선을 만나기 직전에 'H'마크가 새겨진 헬
기장이 있다. 바로 그곳에 고구려가 심은 조그만 점 용마산4보루가 살짝 깃들여져 있다.

용마산4보루는 용마산3보루와 아차산 주능선 보루를 연결하는 곳으로 보루 둘레는 약 228m이
다. 동쪽 무덤 주변에서 회흑색 연질토기와 대형 항아리 조각, 대상파수편이 나왔고, 북서쪽
에서는 철제 화살촉 1개가 발견되었는데, 보루터 동쪽 지상에서는 석축 구조물이 일부 노출되
어 있으며, 동쪽과 서쪽 중간 지점 저지대는 집수(集水)시설로 여겨진다.
1994년에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했을 때는 동쪽과 서쪽을 별개 보루로 여겼으나, 2003년에 서울
시에서 다시 조사를 벌여 하나의 보루임을 확인했다. 아직 전체적인 발굴조사는 받지 못했으
나 하루 속히 주변을 뒤집어 이곳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 보따리가 싹 풀렸으면 좋겠다.


▲  동쪽에서 바라본 용마산4보루터

▲  아차산~망우산 주능선길 (용마산 동북쪽 능선)

용마산4보루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아차산~망우산 주능선과 만난다. 이 능선은 아차산생태
공원에서 아차산성, 아차산 정상, 아차산4보루, 용마산5보루을 거쳐 망우산으로 이어지는 능
선길로 대자연이 내린 서울의 거대한 동쪽 벽이다.
아차산과 용마산 일부 구간에서 조금 각박한 경사를 보이나 거의 완만한 편이며, 동/서/남/북
으로 일품 조망이 펼쳐져 환상적인 지붕길을 보여준다. 또한 천하 둘레길의 성지로 추앙을 받
는 서울둘레길2코스(용마~아차산 코스)도 이 주능선의 신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간다.


▲  용마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망우산 주능선으로 들어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헬기장이 나오면서 용마산5보루터를 알
리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용마산5보루는 아차~망우산 주능선 해발 316m 고지에 자리해 있다. 아차~용마~망우산 보루 식
구 중 용마산3보루 다음으로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성벽 둘레 약 132m. 내부 면적은 약 936㎡
정도로 파악되고 있는데, 보루 북동쪽 비탈면에 성벽으로 여겨지는 석축 일부가 약간 드러나
있을 뿐, 대자연에 제대로 녹아들어 흔적은 희미하다.
보루 북쪽에서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회흑색 연질토기)가 깨진 채로 출토되었고, 물미
로 추정되는 철제품도 발견되어 고구려가 닦은 보루임이 분명해졌다. 석축과 상층부에 보루
건물터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아차산3보루와 4보루처럼 헬기장이 닦이면서 상당수가 파괴되
었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하여 고구려 보루임을 확인했고, 2000년에 서울대박물관에서 조사
를 했으며, 2003년 서울시에서 측량 조사를 했다. 허나 이곳도 완전한 발굴 조사를 받지 않은
상태라 언젠가 이 일대를 싹 뒤집고 조사를 해야 될 것이다.

이곳은 동/서가 뻥 뚫려있는 곳으로 서쪽으로 중랑천과 서울 동부, 동북부 지역이, 동쪽으로
는 한강과 구리시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그러니 여기에 보루를 닦아
아차산과 용마산에서 망우산, 봉화산, 수락산을 잇는 요충지로 사용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이
처럼 아차~용마~망우산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은 것은 오랜 라이벌이자 숙적인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고 한강 유역을 수비하고자 함이다.
이후 신라가 서울 지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가 다진 보루 일부를 손질해 요새로 삼았고 신라
말 이후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면서 보루들이 모두 버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 용마산5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산1-2


▲  아차산~망우산 주능선길 (용마산 동북쪽 능선길)

▲  아차산~망우산 주능선(용마산 동북쪽 능선길)에서 바라본
한강과 구리시, 강동구, 하남시 지역


용마산5보루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하염없이 펼쳐진다. 나무로 다져진 나무데크길이 잘 닦여져
있으나 경사가 좀 각박하고 계단이 많아 이곳으로 오를 경우 숨이 제대로 찰 것이다.
그 산길을 쑥 내려가면 용마산 북쪽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면목동 사
가정공원, 동쪽으로 가면 구리시 아치울마을과 시루봉, 북쪽 산길을 오르면 망우산이다. 여기
서 바로 내려갈까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망우산을 조금 복습하
기로 했다.


▲  망우산(忘憂山)

아차산과 용마산 북쪽에 넓게 솟은 망우산(忘憂山, 281m)은 아차산 식구의 일원으로 그 유명
한 망우리공동묘지를 품고 있다. 현재는 묘지란 이름 대신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세탁되었는
데, 고구려가 심은 보루 유적 3곳이 발견되어 망우산1보루와 2보루, 3보루란 이름으로 살아가
고 있다. 허나 1보루만 간신히 남아있으며, 나머지는 완전 중환자 이상의 상태이다. 그래서 1
보루만 아차산일대 보루군 식구로 들어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어둠에 잠긴 망우산1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 북쪽 갈림길에서 10분 정도를 오르면 망우산 남쪽 봉우리(해발 280.3m)에 깃든 망우산
1보루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1994년 지표 조사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 보루로 여겨지며, 보루로 밝
혀지기 훨씬 이전부터 헬기장과 군부대 시설, 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철저히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가 근래에 헬기장과 참호를 없애고 보루가 있던 자리를 정리하여 보루터 티를 조금이나
마 내게 했다.
안내문이 없다면 그냥 지나쳐도 용서가 될 정도로 보루터 흔적은 딱히 없으며, 여기서 더 북
쪽으로 향하면 2보루와 3보루가 나오는데, 마음 같아서는 그곳까지 가고 싶었으나 아직 여유
가 있을 것 같던 땅꺼미가 그새 짙어지면서 그곳을 향한 내 마음을 완전히 접고 철수했다. 산
은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는 것이 상책이다. (아차산과 용마산은 야간 등산으로 많이 올랐지
만 정작 망우산은 야간 경험이 없음)

이렇게 하여 용마산, 망우산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망우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3,8동


▲  망우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와 일몰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산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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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북쪽 자락에 깃든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늦가을 나들이 '

백석동천 별서터
백사실 백사폭포 백석동천 별서 사랑채터

 



 

늦가을이 무심히 익어가던 11월 첫 무렵, 나의 오랜 즐겨찾기 명소인 부암동 백석동천(백
사실계곡)을 찾았다.
두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곳의 늦가을 풍경이 몸살 나게 그리워 간만에 찾은 것으
로 이번에는 흔하게 가는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들어가지 않고 그 동쪽인 평창동 화정박
물관에서 접근했다.
박물관 옆 골목길(평창8길)을 3분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서쪽)으로 오솔길이 손을 내미는
데, 그 길은 평창동(平倉洞)에서 백사실계곡을 빠르게 이어주는 지름길이다. 자연이 완전
히 묻힌 싱그러운 숲길로 길도 흙길이고 주변에 밭두렁까지 펼쳐져 있어 이곳이 서울임을
잠시 잊게 한다.

길 중간부터는 남쪽에 3~4m 높이의 석축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그 안에 배드민턴장과 보
호수로 지정된 늙은 소나무가 있다. 간만에 소나무를 보고 갈까 했으나 석축 밑에서도 어
느 정도는 보이므로 그것으로 퉁치고 길을 계속 이어가니 그 길의 끝에 백사실 동쪽 능선
이 소나무 숲길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솔내음이 그윽한 백사실 동쪽 능선에 올라타 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의 중심인 별서(別墅
)터로 내려가는 산길이 나오며, 평창동 조망점으로 이어지는 북쪽 길로 가서 서쪽으로 내
려가면 현통사와 백사폭포로 이어진다. (본글은 편의상 백사폭포부터 다루도록 하겠음)


▲  소나무가 무성한 백사실 동쪽 능선길



 

♠  백사실계곡(백석동천) 입문

▲  현통사 앞에 자리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일주문) 밑에
는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 피부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작은 폭포로 웅장하거나 수려한 멋은 딱히 없다. 그저 수수하게
생긴 폭포로 하얀 반석과 잘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나그네로 하여금 백사실계
곡에 대한 첫 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그곳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돋군다.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라 그 희소성이 높은데, 그가 만약 설악산이나 금
강산, 주왕산(周王山) 등 일품 폭포가 즐비한 곳에 있었다면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
러니 사람이나 폭포나 때와 자리를 잘 잡아야 덕을 본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실계곡(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옛날 이름이 동령폭
포란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폭포는 자신의 이름까지
저 멀리 흘려보내고 만 것이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서 폭포수가 실보다 가늘고 누런 낙엽까지 짙게 깔려있지만 비가 많이
오면 폭포수도 제법 패기를 보인다. 여름 제국 시절에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
되며,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고 잠시 쉬어가는 등,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자 꿀피서지로 인기
가 높다.


▲  백사폭포와 하얀 반석


▲  가을과 낙엽을 속세로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나무들이 속절없이 털어낸 낙엽들은 폭포 주변에 수북
히 쌓여있다. 이들 낙엽은 폭포 밑에 모여 이곳에서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며, 올해도 변함
없이 도래한 겨울을 원망한다. 몇몇 낙엽은 한이 맺혔는지 폭포 중간에 철썩 같이 달라 붙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자연은 그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아래로 흘러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니 그
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실계곡 냇물은 넓은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소(沼, 못)에서 큰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기 힘들 그리운 고
향, 북악산(백악산)의 그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
랫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서 신나게 바위를 타고 내려가 홍제천, 한강을 거쳐 서해바다로 종점
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
심히 매무새를 다듬는다. 저들의 처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잔
잔한 수면에는 귀를 접은 낙엽들이 둥실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실에 머문
늦가을도 낙엽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실계곡 밑에 둥지를 트며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는 20세기 이후에 지어진 조그만 산
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였던 일붕(一鵬)이 머물렀
던 절로 백사실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겨우 2~3번이
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실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
한 풍경소리가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있다.


▲  늦가을이 진하게 깃든 백사실계곡 숲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에 물들게 한다.

▲  운치가 진한 백사실계곡 숲길 (백사폭포~백석동천 별서터 구간)

간만에 백사실계곡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실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
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실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 나는 감히 언어로 이곳을 희롱하지 않고 그저 탄
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실계곡을 거닌다.
 
숲에 깃든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숲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실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도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줄어들고 서울에서는 이곳을 비롯한 일부 계곡에만 겨우 살아가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  별서터 돌다리에서 바라본 백사실계곡

▲  별서터 돌다리 직전 계곡에 누워있는 바위들
크고 견고하게 생긴 바위들 피부에는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닦을 때 필요한 돌을 떼던 흔적들이다.


계곡에 누워있는 바위들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사실계곡은 백석동천, 백사실, 백사골 등이라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별로 상관은 없
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표현
한 이름이다. 그리고 백석동천은 이곳에 반한 선비와 양반들이 붙인 칭호이자 백사실의 다른
이름이다.


▲  별서터 옆을 지나는 백사실계곡 (별서터 징검다리 주변)

백사실계곡 안내도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정겹게 펼쳐진 계곡 징
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
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닦은 둑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 별서 주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별서터에서 바라본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앞에 두고 별서터 맞은편인 서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
덕 정상에 큰 바위 하나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월암은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발이 닿기 어려운 궁색한 곳에 자리해 있다. 별서터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짙은 숲에 가려져 있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99% 이상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11월 중순 이후나 겨
울에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다 보면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파고 그 안에 월암(月巖) 2자를
새겼는데, 18세기에 백석동천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
정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 중의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실계곡은 나무가 울창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1잔 걸치러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
광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 바위에 달바위(월암)란 이름을 붙여
주고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벗어나면 여
기가 서울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경치가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
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안긴 분지
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
로 지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산 속에 자리한 탓도 있겠지만 나라
의 예민한 곳이 동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크게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서(별장) 및
휴식 장소로 인기가 대단했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
武溪精舍)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그 외에 세검정(洗劍亭), 탕춘대(
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백악산) 북서쪽 백사실계곡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
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해서 백사실이라 불리고 있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백사실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비
롯되었으나 계곡에 하얀 돌이 많고 경치가 고와 굳이 북악산이 아니더라도 백석동천의 이름
자격은 충분하다. 여기서 동천(洞天)이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경승지의 명예로운
칭호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연못 정자터

▲  사랑채터

백석동천과 관련된 첫 기록은 18세기 인물인 월암 이광여(1720~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있다. 그 책에는
'비가 온 뒤 북한산(삼각산)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폭포수를 보았다. 세검정으로 빠지
는 계곡 위쪽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폭포(백사폭포)가 있는데
그 위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다. 그곳의 편액은 간정료(看鼎寮)였다'
여기서 간정료는 '솥을 보는 집'이란 뜻으로 차를 끓이는 다조(茶俎)를 말한다. 허씨의 초가
정자가 일찌감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여기서 허씨는 허필(許佖)로 여겨진다. 그는 시
문과 그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손가락으로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를 잘했다. 1737년 '북
한산 남쪽 백석 별업(別業)에서 정윤, 강세황(姜世晃)과 함께 짓다'
는 제목의 시를 지으니 그
때 이미 '백석(백석동천)'이란 지명이 있었음을 살짝 밝혀주고 있다.

개화파로 유명한 박규수(朴珪壽)도 14살이던 1820년에 외할아버지를 따라 한양도성 북쪽의 여
러 명소를 거닐었는데, 그때 백석동천에도 들려 시문을 남겼다. 그는 석경루 위쪽에 백석정의
옛 터가 있는데 허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살던 곳이라 하였고, 백석정은 허도사가 단약(
丹藥)을 달이던 곳이라 언급하며 백석정은 이미 사라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허씨(허도
사)는 허필로 보이며, 백석정은 간정료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2012년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백석동천에 손을 댄 기록이 발견되었다. 김정희
는 금헌(今軒)이란 친구와 읊은 시에서
'하찮은 문자에도 정령이 배었으니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쪽 별서
는 백석정의 옛터에 있다'
는 문구가 나온 것이다. 김정희가 백석동천을 북쪽 별서<북서(北墅)
>라 한 것은 이미 한양도성 동남쪽 금호동(金湖洞)과 경기도 과천(果川)에 별서가 있었기 때
문이며,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에는 백석동천 별서를 산루(山樓)라고 표현했다.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가 1960년대에 낸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에는 이곳 별서가 1830년
대에 지어진 것으로 나와있는데 추사가 그때 이곳을 사들여 정자를 짓고 600평 규모의 별서를
지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허나 추사가 계속 소유하고 있지는 않은 듯 싶으며, 이후 이곳
관련 기록에는 주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尹致昊)는 1926년 11월, 이곳을 유람했는데, 그의 '윤치호일기'에 '
백석실'이라 나와있어 백석동천(백사실)의 다른 명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1930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에는 '북악8경'의 하나인 '백석곡 팔각정'이 나왔는데, 백석곡은 백석동천의
별칭으로 그 신문에 정자의 사진이 나왔다. 그것이 백석동천 별서터의 유일한 생전의 사진이
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 별서를 둘러싸던
담장이 있었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는데,
안채는 1917년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6.25때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은 기능을 잃었다.
사랑채와 안채는 1970년대까지 살아는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감당치 못
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사랑채터와 안채터, 동그란 연못, 정자터, 담장터, 돌다
리, 돌계단, '백석동천'과 '월암' 바위글씨 2개가 남아 이곳의 정취를 아련히 전한다.

옛날에는 그래도 마음 놓고 발을 들일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으나 북한이 저지른 1968년 1.21
사태(김신조 공비사건)로 북악산 일대와 백사실계곡이 금지된 곳(청와대 경호구역)으로 꽁꽁
묶이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거의 끊기게 된다. 이후 동네 사람들이나 오갈 정도로 비밀의 공간
으로 숨겨져 있다가 2004년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통제구역에서 해방되었고, 그 시절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임을 인정해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명승 36
로 변경되었다.

2010년과 2011년에 별서터 일대를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
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백석동천 바위글씨

서울 도심 속의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와
여름의 녹음과 피서삼매, 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고루고루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여름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
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실계곡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
나, 침침한 두 눈을 비비며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의 성지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고 싶었던 옛 사람(주로 지
배층들)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
으로 들어가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쭉
남았으면 좋겠다. 찾는 이가 늘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까지 섞여 들어와 사랑채터 주춧
돌에 낙서를 하고 계곡을 괴롭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9년 이후 관리인을 두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또한 2013년에 종로구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이곳을 들쑤실 생각까지 했었는데, 괜히 복
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기 바란다. 비록 폐허가 되었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운
치가 강하며, 옛 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다. 그리고 백사실계곡은 서울시에
서 지정한 도룡뇽 보호구역이니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않기 바란다.


* 백석동천(백사실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부암동 산25일대


▲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

백사실계곡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
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이어주는 돌계단이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돌계단이 좀 헝클어진 했으나 경사가 완만해 오르락 내리락에는 별로 어려움은
없다. 다만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 높이가 고르
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가 있었다. 허나 아쉽게도 생전
의 사진이나 그림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무너져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 남아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정
비되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서 별서 주
인은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를 대접
하여 1잔씩 걸쳤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채 동쪽 부분에는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
있다.


▲  석축 위에 닦여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누마루가 사라지면서 주춧돌은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우물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우물(또는 작은 연못)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공터로 남아있는 안채터
안채가 가고 없는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에
는 엉뚱하게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적지 않게 파괴되고 생매장을 당
했다.
그렇게 별서터를 깔고 앉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
대를 발굴하면서 없앴으며, 땅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건
졌다. 그리고 2011년 3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고이 묻고 그 위를 풀로 덮
어 완전히 가렸으며,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수습된 주춧돌 등의 돌덩어리들은 안채터 서쪽 구
석에 일부 모아두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
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사랑채 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
과 별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에 잠겼을 별서 주인을 머릿속에 그리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사랑채터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이곳의 운치를 크게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담장터

사랑채터와 안채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담장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되며, 석축 윗쪽에는 별서와 속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던 담
장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거진 무너지고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
지 담장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

▲  흔적만 남은 사랑채 뒷쪽 담장터



 

♠  백석동천 별서터의 중심,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살며시 떠있는 그런 흔한 연못이 아닌
나무들이 털어놓은 낙엽, 그리고 잡초로 가득한 모습을 보인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은
연못의 성격과 구성원까지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정자터 옆에 배수로를 만들어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둥그런 연못을 채웠으며 연못을
채운 물은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돌다리 밑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빼면서 계속 연못은 물갈
이가 되었다.
허나 이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6.25전쟁 때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
되고 연못 또한 손상을 입어 배수가 불가능하게 되면서 무늬만 연못이 되어버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비가 많이 오면 비록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그
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가득한 연못의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늦가을에는 낙엽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주변은 나무들로 삼삼하여 두텁게 시원한 그늘이 펼쳐진다. 거
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은 나
그네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여기가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은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六茅亭)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궜던 정자는 윗도리와 중심부는
모두 사라지고 6개의 돌기둥과 돌계단만 남아
있다. 정자터 옆구리에는 계곡물을 끌어들이던
배수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6.25전쟁으로 그
것이 손상되면서 더 이상 물을 소환할 수 없게
되었다.
백석동천 별서터 식구 증 유일하게 생전의 모
습을 남긴 운이 좋은 존재로 1930년 7월 19일
자 동아일보에 백석곡 팔각정으로 등장했다.

▲  옆에서 바라본 정자터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
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했을 것이다.
비록 터만 남아있으나 지금의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으며 괜히 복원한다고 난리를 치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둬야 이곳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15~20m에 이르는 커다란 물푸레나무가 연못과 그 주변에 그늘을 드리
우고 있다. 나이는 약 150~200년 정도로 여겨져 추사 김정희가 심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
데, 나무 밑에는 커다란 바위가 누워 있어 별서를 닦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두었으니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이나 별서를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  별서터에서 수습된 돌로 이루어진 소박한 쉼터 (정자터 옆)

별서터 일대에서 수습된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들을 이곳에 모아두었다. 이들은 아마도 사랑채
와 안채, 정자에 쓰인 석재로 보이는데, 시커먼 피부를 지닌 큰 돌을 가운데 두고, 그보다 작
은 돌덩어리 2개를 좌우에 두어 마치 탁자와 의자와 같은 모습이 되어 조촐하게 이곳의 쉼터
역할을 한다.
나도 둘이나 여럿이서 이곳을 찾았을 때 여기서 앉아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섭취하
고는 했는데, 저곳에 앉은 횟수는 최소 50회는 넘을 것이다. 저 돌덩어리들과 별서터 유적은
거의 그대로이거늘 나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계속 늙어가고 변해가니 정말 인상무상이로다.


▲  통돌 2개로 이루어진 작은 돌다리

정자터 옆에 있던 배수구를 통해 옆에 흐르는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연못을 채우고 채워진
물은 돌다리(윗 사진)가 있는 작은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내보내 고인물을 경계했다.
이곳 돌다리는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관련글 보기)의 기린교처럼 길쭉한 통돌 2
개로 이루어진 단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은근히 정감을 가게 한다. 별서가 조성되던 1830년
에 수로, 연못과 함께 닦여진 것으로 보이며, 수로에는 더 이상 물이 나갈 일이 없어 낙엽만
가득하다.


▲  연못을 중심으로 한 백석동천 별서터 전경

▲  늦가을이 고스란히 담긴 연못 둘레길 (연못 동쪽)

▲  연못 동쪽 산비탈에 둘러진 석축의 흔적



 

♠  백석동천 마무리

▲  별서터에서 백사실 상류로 인도하는 산길

백사실계곡은 별서터 옆에서 백사실약수터 입구까지의 황금 구간을 도룡뇽과 맹꽁이 등의 수
중 동물 보호를 위해 금줄을 둘러 접근을 금하고 있다. 하여 별서터에서 계곡 상류로 가려면
별서터를 등지고 계곡을 건너 솟대 돌탑과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입구로 나와야 된다.
하지만 통제의 줄이 느슨해 금줄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가는 사람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
히 여름에는 피서객들의 칩입이 빈번하여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는 2012년에 마련한 산불방제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이 있는데, 솟대 돌탑
은 백석동천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냥 백석동천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돌탑을 지나
면 소나무숲과 늦가을에 잠긴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동쪽)으로
가면 백사실 상류와 능금마을,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로 이어지고,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의 늦가을 경관을 한몫 거들고 있는 짧은 은행나무숲길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남쪽) 길로 가면 서쪽을 향해 95~100도 정도 약간 고개를 숙인 큰 바
위가 직각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피부에 '白石洞天' 바위글씨가 아주 또렷하게 깃들여져
있다. 여기서 '백석'은 북악산(백악산)을 뜻한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북악산(백악산) 산신
도 모른다. 아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지는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조선 때 선비와 양반 등 지배층들은 경관이 수려한 곳에 저렇게 낙서를 남기는 습
성이 있었는데, 백석동천 역시 그들의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
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일 것이다.


▲  백사실계곡의 그림 같은 숲길 (능금마을 방향)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할 것이다. 비록 짧은 거리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백사실계곡의 그림 같은 숲길 (백석동천 별서터 방향)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이어지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실계곡 상
류가 나타난다.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부터 이끼 옷을 걸친 바위들까지 줄줄이 이어져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과 금강산, 백두산, 주왕산, 지리산 등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
도 서울 도심 지척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때묻지 않은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는데, 이렇게 순수함을 지닌
백사실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한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 현장이 되고, 시민들의 소풍/나들이 장소로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
터 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  외나무다리 직전 백사실계곡 상류

▲  백사실계곡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실계곡 상류의 너른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
도 달달한 풍경을 자아낸다. 길쭉한 목재 2개를 엮어서 닦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
도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어찌해야 될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
요는 없다.
사람 많고, 차량 많고, 키다리 건물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게 보이는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기할 따름이다.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
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백사폭
포에서 시작된 백석동천은 이 외나무다리에서 사실상 끝이 나며, 백사실계곡은 능금마을 안쪽
까지 이어진다.


▲  백사실계곡 상류와 능금마을 밭두렁 (능금마을 방면)

외나무다리를 지나면 산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줄어든다. 계곡 건너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심히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
을 지나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종로구가 맞거늘 이런 두멧골이 있었나. 마음을 설레게 하니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
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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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산, 망우역사문화공원 늦가을 나들이



' 망우산, 망우역사문화공원 늦가을 나들이 '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길 동쪽 구간
▲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길

송촌 지석영묘와 지성주묘

죽산 조봉암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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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 조봉암 선생묘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동쪽 지붕인 아차산(峨嵯山) 산줄기
는 남쪽은 아차산(295.7m), 중간은 용마산(龍馬山, 348m), 북쪽은 망우산(忘憂山, 281m
)으로 이루어진 남북으로 길쭉한 산맥이다. <옛날에는 중랑구 북부에 자리한 봉화산(烽
火山)까지 아차산의 일원이었음>

아차산과 용마산은 나의 즐겨찾기 뫼로 아침부터 저녁(야간 등산)까지 고루고루 찾아가
안긴 횟수만 무려 300회가 넘는다. 허나 망우산은 이상하게도 몸과 마음이 그리 가지를
않아 찾은 횟수는 거의 손에 꼽는다. 그렇다고 망우산이 매력과 볼거리가 부실한가. 그
것도 전혀 아니다. 고구려가 남긴 보루 유적이 4곳(시루봉보루 포함)이 전하고 있으며,
망우산에 상당수를 차지하는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20세기 초/중기 유명 인물의 무덤이
많이 깃들여져 있다. 그것으로도 망우산의 매력은 차고 넘친다.
하여 그동안 소홀했던 망우산을 제대로 익히고 그곳의 미답처(未踏處)도 많이 정리하고
자 늦가을이 절정을 이루던 11월 한복판에 그의 품을 찾았다.


▲  망우저류조공원에서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인도하는 숲길



 

♠  망우역사문화공원(망우리묘지) 입문

▲  무덤들이 수북히 쌓인 망우저류조공원 동쪽 (망우역사문화공원)

이번 망우산 나들이는 망우리고개 서쪽에 자리한 망우저류조공원에서 시작했다. 그 공원에서
무덤들이 즐비한 동쪽 숲길을 4~5분 오르면 망우리고갯길(망우로)에서 올라온 2차선 길이 나
오는데, 그 길로 들어서 남쪽으로 조금 가면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가벽이 나온다.


▲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가벽 직전 (사색의길 북쪽 시작점)

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인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을 맡고 있는 망우산은 서울 중랑구와 경기
도 구리시(九里市)에 걸쳐있는 뒷동산 같은 뫼이다.
남북으로 길쭉한 그의 품에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이 넓게 둥지를 틀고 있는데, 그는 832,800㎡
에 덩치를 지닌 큰 공원이다. 지금은 달달한 뒷동산 공원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그의 정체는
이름만 들어도 염통이 후덜덜한 망우리공동묘지(망우리묘지)이다. 서울의 유일한 공동묘지로
망우리고개부터 망우산 남쪽 자락까지 7,400여 기의 무덤을 지니고 있는데, 망우리묘지가 생
겨난 사연과 내력은 대략 이렇다.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 서울 주변에는 경성부(京城府, 서울시)가 관리하는 이태원(梨泰院
) 공동묘지와 미아동(彌阿洞, 미아리) 공동묘지가 있었다. 왜정은 미아리묘지 과부하에 대비
하고 이태원묘지 일대에 주택을 조성하고자 1933년 2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땅인 망우산
일대 임야 75만 평을 확보했는데, 그중 52만 평에 묘역을 닦기로 하고 그해 5월 27일 문을 여
니 이것이 망우리묘지의 시작이다.

37,000여 기를 지닌 이태원묘지는 1935년부터 미아리와 망우리로 분산 이장되었는데, 연고자
가 있는 무덤은 망우리로, 연고자가 없는 28,000여 기는 은평구 신사동(新寺洞)으로 보내 화
장 처리하고 망우리묘지 북쪽에 합장하여 위령비를 세웠다. 그리고 1938년에는 신촌 노고산(
老姑山)에 있던 노고산공동묘지까지 이곳으로 옮기면서 망우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
었다.
왜정이 망우산에 공동묘지를 닦은 것은 서울 시민들의 무덤 수요를 해결하고자 함이지만 망우
리고개 동북쪽에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인 동구릉(東九陵)의 기운을 유린하려는 사악한 의
도도 짙게 깔려있었다.

1971년 8월 7일 건설교통부고시 제465호로 공원 결정고시가 떨어졌으며, 1973년 3월 분묘 한
계치인 28,500여 기(봉분 47,754기)에 이르자 그해 5월부터 무덤 쓰는 것을 금했다. 이후 이
장과 납골을 적극 장려해 지금은 7,400여 기가 남았으며, 지금도 방을 빼는 무덤들이 꾸준하
여 계속 빈 자리가 늘고 있다.

1977년 4월 도시계획시설 공원으로 지정되어 망우묘지공원(망우공원)으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98년 8월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망우리공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고 그해 공원 산책로
인 사색의길(4.7km)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다.
2005년 12월 27일 서울시고시 제2005-403호로 망우묘지공원 조성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2013
년에 망우리묘지를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2015년에서 2016년까지 망우리공원 인문학길
을 조성했으며, 2020년 7월에는 공원 관리권이 서울시에서 중랑구로 넘어갔다. 그리고 2022년
4월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을 새롭게 갈아 지금에 이른다.


▲  사색의길 북쪽 시작점(인물가벽)에서 바라본 망우산
가운데에 봉긋 솟은 뫼가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온몸으로 품고 있는
망우산 정상이다.


비록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과 성격이 세탁되었으나 공동묘지의 기능과 성격은 여전하다.
하여 산 도처에서 무덤들이 아주 쉽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숲이 매우 삼삼하여 무덤을 포
근히 감싸고 있으며, 사색의길 등 상큼한 숲길이 많고, 풍경도 고와서 거닐기에 아주 좋다.
그러다 보니 무덤은 시각과 마음에 부담이 되는 존재가 아닌 대자연의 수채화에 살짝 녹아든
존재처럼 다가와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두 귀가 쫑긋 반응을 보일 정도로 명성이 높은 20세기 초/중기 애국지사와 문학가, 정
치인들의 무덤이 30여 기가 전하고 있고, 그중 9기가 국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너른 대륙을 경영했던 고구려가 남긴 보루 유적 4곳(시루봉보루 포함)이 전하고 있어
오래된 볼거리도 넉넉하다.

또한 서울둘레길2코스가 사색의길 서쪽 길을 타고 남북으로 흘러가며, 중랑둘레길, 구리둘레
길, 용마산자락길 등 다양한 숲길이 앞다투어 닦여져 있다. 산세도 거의 완만하고 조망도 일
품이며, 볼거리도 풍부해 걷는 길이 썩 지루하지가 않다. 아니 지루할 틈도 주지 않는다.

* 망우역사문화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 02-2094-
  6800~6803)
* 망우역사문화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에 잠긴 사색의길 동쪽 구간

사색의길 북쪽 시작점에는 이곳에 묻힌 유명 인사를 소개한 '인물가벽'이 있다. 여기서 길은
동/서로 갈라지는데, 이들 길은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대표 숲길인 사색의길(망우순환로, 4.7km
)로 순환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삼한 숲에 묻힌 느긋한 숲길로 이름 그대로 온갖 사색에 잠
겨 거닐기에 아주 좋으며, 유명 인사들의 무덤 대부분이 사색의길 주변에 머물고 있어 이 길
을 중심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면 된다.
나는 망우산2/3보루를 첫 메뉴로 정해서 그곳으로 접근하기 쉬운 사색의길 동쪽 길로 들어섰
다.


▲  은행나무 밑을 지나는 사색의길 동쪽 구간

▲  그윽하게 펼쳐진 사색의길 동쪽 구간

▲  송촌 지석영(松村 池錫永)묘와 지성주(池成周)묘

사색의길 동쪽 구간으로 들어서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나면 망우산2/3보루를 알리는 이정표가
손짓을 한다. 그 길은 망우산2/3보루와 정상으로 이어지는 망우산 능선길로 산길 주변으로 무
덤들이 즐비한데, 안내문을 지닌 무덤이 툭하면 나타나 내 취향을 저격한다. 그중 처음 등장
한 무덤이 종두법으로 유명한 송촌 지석영선생 묘이다.

지석영(1855~1935)은 충주지씨로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 태원(太原)이다. 종두법(種痘
法)으로 워낙 유명하여 의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는 벼슬을 지냈던 문신(文臣)이었으며,
국문학자로도 크게 활동했던 팔방미인의 인물이다.

10대 시절에는 개화사상가인 강위(姜瑋) 밑에서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공부했으며, 그때 청
나라에서 건너온 서양의학 번역서를 많이 익혔는데, 특히 E. 제너가 발견한 우두접종법(牛痘
接種法)에 큰 관심을 가지며 천연두 박멸을 위한 기초를 닦는다.
1876년 수신사(修信使)의 수행원으로 왜열도에 간 박영선(朴永善)이 종두법을 배우고 '종두귀
감(種痘龜鑑)'이란 서적을 입수하여 돌아오자 그에게 이를 전수 받았으며, 1879년 10월 부산
으로 내려가 제생의원(濟生醫院) 원장인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에
게 종두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해 12월 말, 두묘(痘苗)와 종두침(種痘針)을 얻어 서울로 오다가 처가 고향인 충주
덕산면에 들려 2살 애기였던 처남에게 종두를 처음으로 실시해 성공을 했다. 하여 처가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도 접수해 그 동네는 천연두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1880년 조선 조정이 왜열도로 2차 수신사를 파견하자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따라갔으
며, 왜국 내무성 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인 기쿠치(菊池康庵)에게 두묘의 제조와
저장법, 독우(犢牛. 송아지)로부터의 채장법(採漿法), 독우사양법(犢牛飼養法) 등을 배우고
두묘까지 얻어 귀국했다.
귀국 후 왜국공사관 의사와 접촉하며 우두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 터지자 왜인(倭人)으로부터 의술을 배웠다는 죄로 체포령이 떨어져 급히 피신했다. 하지
만 그가 설치했던 종두장은 성난 군사들에게 파괴되고 말았다.
그해 10월 개화(開化)를 주장하는 국내외 인사들의 서적을 수집하여 간행하고 각 지방에서 추
천된 사람들에게 각종 문물을 익히게 할 것을 역설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83년 전라도암행
어사로 내려갔던 박영교(朴泳敎)의 요청으로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
두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충청우도암행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으로 공주에도 우두국을 설
치했다.


▲  정면에서 바라본 지석영(왼쪽)묘와 묘비, 그리고 지성주(오른쪽)묘

1883년 3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
으며, 1885년에 그동안 쌓은 경험을 토대로 이 땅 최초의 우두 관련 서적이자 서양의학서인 '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다.
1887년 개화당 인사들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신지도(薪智島, 전남 완도)로 유배되자 그곳에서
'중맥설(重麥說)'.'신학신설'을 저술했으며, 1892년 서울로 돌아와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
堂)을 설립하고 접종을 실시했다.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내무아문(內務衙門)
내에 위생국이 설치되자 종두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후 형조참의(刑曹參議)와 우부승지(右副承旨), 대구판관, 동래부사, 동래부관찰사 등을 역
임했고, 1897년 중추원(中樞院) 2등의관이 되었으나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이유로 이듬해 황해도 풍천으로 유배되었다.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이 되어 교육에 힘썼으며, 종두 및 전염병 예방과 관련된
각종 관제와 규칙을 공포하도록 힘썼다. 그리고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의원의육부(大
韓醫院醫育部)로 개편되자 교장직에서 물러나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스승 강위의 영향으로 한글(국문)에도 꽤 지식이 깊었다. 하여 국문학교(國文學校) 설립
에 크게 기여했으며, 의학교 학생 모집 때도 국문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했다. 1905년 '신정국
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하여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고 그 연구위원이 되었
으며, 1909년에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했다.
그리고 그해 4월 통감부(統監府)가 의학교육을 왜어(倭語)로 할 것을 요구하자 즉각 의견서를
제출하여 반대했으며, 국채보상연합회(國債報償聯合會) 부소장,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평의
원,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부회장 등으로 활발하게 애국 관련 사회활동을 벌였다. 하여 고
종(高宗)은 그의 공을 인정해 태극장(太極章)과 팔괘장(八卦章) 등을 수여했다.

1910년 8월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왜정을 등지며 집에서 독서 등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935
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작은 봉분과 1962년에 세운 묘비가 전부인 소박한 모습으로 그 옆에는 아들인 지
성주의 묘가 있는데, 비슷한 크기의 봉분과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을 지녔다.

지성주는 경성의전을 나와 내과의사로 활동했으며, 손자인 지홍창은 서울의대 출신으로 박정
희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냈다. 증손자 또한 내과를 경영해 한의사였던 지석영의 부친부터 무려
5대가 의사로 활동한 뼈대있는 의사 집안이다.


▲  망우산 능선길 (지석영 선생묘~망우산3보루 구간)

▲  망우산 역사의 전망대

지석영선생묘를 지나 망우산 능선길을 더듬으면 조망이 좋은 곳에 '역사의 전망대'란 전망대
가 마중을 한다.
아차산~용마산~망우산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닿아놓은 보루 유적과 백제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
는 아차산성(阿且山城), 영화사와 범굴사(대성암) 등의 늙은 절, 아차산3층석탑과 온달샘석탑
등의 소소한 늙은 존재들, 그리고 근현대 인물이 많이 묻힌 망우리묘지도 품고 있다. 하여 아
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오랫동안 켜켜히 쌓인 역사의 상징성을 기리고자 '역사의 전망대'란
근사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  역사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구리시 남부 지역과 한강, 강동구, 하남시, 남양주 와부읍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망우산 능선길 (망우산2,3보루)

▲  화가 이인성(李仁星) 묘

역사의 전망대를 지나면 이인성묘가 모습을 비춘다. 이인성(1912~1950)은 대구(大邱) 출신 화
가로 16세 때 방정환 등의 색동회가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나가 '촌락의 풍경'이란 그
림으로 특선에 뽑혀 화가로 진출했다.
왜열도 유학 시절이던 19살에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 '여름의 어느날'로 입선했으며, 23
살 때 조선미술박람회에서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37
년 제16회 선전에서 최연소 추천작가가 되었다.

1945년 이후 이화여중과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쳤으며, 1949년 가을 국전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나 1950년 38세의 한참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월간미술 1998년 2월호에는 그를 근대
유화가 1위로 꼽았으며, '경주의 산곡에서','가을 어느 날'을 각각 공동 1위와 7위로 선정해
그를 기렸다.

그의 무덤에는 호석이 둘러진 봉분과 상석, 검은 피부의 묘비, 후학들이 세운 '근대 화단의
귀재'라 쓰인 표석이 있어 외롭지는 않은 모습이다.


▲  애국지사 김봉성(金鳳性) 묘터

김봉성(1900~1943)은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조카사위(도산의 형인 안치호의 사위)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평북 선천군(宣川郡)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해 옥고를 치루었으며, 출옥 후
왜열도로 건너가 1922년 주오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넘어가 1927년 남캘
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를 수학했으며, 1930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해 활동했다.

1933년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가 되었고, 1934년 3월에 안치호의 딸인 안맥결(安脈潔, 1901~
1976)과 혼인하여 부부가 안창호가 세운 점진학교의 교사로 일했다. 1938년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1943년 12월 18일 불의의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딸 김자영과 정
말 허무하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도산과의 인연으로 그의 묘 오른쪽에 안장되었으며, 2005년에 이르러 늦게나마 건국포장을 추
서받았다. 그리고 2016년 4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면서 낙엽이 뒤덮힌 묘터와 비
석만 허전하게 남아 옛 무덤 자리를 지킨다.

김봉성의 부인인 안맥결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관으로 숙부인 도산의 뜻을 따라 평생 나라
를 위해 살았으며, 이 땅 최초의 여성경찰서장으로 위엄을 날리기도 했다.


▲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묘터와 묘비 (2022년 이전)

김봉성 묘터 옆에는 안창호의 묘비와 묘터가 있다. 그의 무덤 또한 이곳을 떠난 상태로 지금
은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 머물고 있다.

이름도 꽤 익은 안창호(1878~1938)는 평남 강서(江西) 출신으로 1894년 상경하여 구세학당에
서 공부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발전함에 따라 평양에
서 관서지부를 세우고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백성들에게 자각(自覺)을 호
소했다.
1899년 강서군 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황무지 개간사업도 병행해서 추진했으며,
1902년에 미대륙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
출되었다. 1905년에 한인친목회를 발전시킨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
으며, '상부상조 조국광복'을 협회의 목적으로 삼고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했다.
1907년 귀국하여 양기탁(梁起鐸), 안태국(安泰國), 이승훈(李昇蕓)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
民會)를 조직하여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세웠으며, 주요 도시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차려 다양한 방법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세워 청년운동을 전개했는데, 안중근(安重根) 의거에 관련
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용산헌병대에 수개월 수감되기도 헸으며, 1910년 통감부의 도산내
각(島山內閣) 조직 권유를 거절하고 거국가(去國歌)를 남긴 후, 청나라로 망명했다.
1911년 북만주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미대륙으로 넘어갔으
며,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중앙총회를 조직하
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흥사단 조직에 착수하여 무실역행(務實力行), 건전인격(健
全人格), 단결훈련, 국민개업(國民皆業) 등 정신개조를 목표로 한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
, 공립신문을 신한민보(新韓民報)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9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국민회(國民會) 대표를 파
견할 계획을 추진했으나 고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그를 초청하자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가 된다.
그는 연통제(聯通制) 실시, 독립신문 발간 등을 지도했으며, 그해 7월 2일에 임시사료편찬회
를 구성하고 그 총재가 되어 한일관계사료 전4권을 편찬 발행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후원회를 조직하여 외국 교포들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았으며, 1920년에
는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설치하고 '대(對)미국의원시찰단준비위원장'이 되어 북
경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그해 8월에는 지방선전총판(地方宣傳總瓣)이 되어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격문을 만주 등지
에 배포했으며, 임시정부의 세력 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국무위원을
인책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했다.
1921년 서울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평양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설립했으며, 나중
에 이들 단체를 통합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라 했다.

1923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그는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허나 임시정부에
서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가 대립하자 이에 염증을 느끼고 북만주에 독립운동기지
인 이상촌(理想村) 건립을 추진했으며, 1924년 남경(南京)에서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해
실력배양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군자금 확보를 위해 다시 미대륙으로 건너갔다가 1926년에 돌아와 만주 일대를 둘러보며 이상
촌 후보지를 물색하고 민족유일당 조직과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 발기 등을 추진했으나 여러
가지로 영 좋지 못한 일(독립군 간부 체포, 김좌진 암살, 만주사변 등)로 이상촌 건설은 실현
되지 못했다. 이후 상해로 돌아와 1930년 협동상조, 소비합작, 신용생산(信用生産) 등으로 생
활역량을 넓히고자 동인호조사(同人互助社)를 조직해 상해 지역 한인의 합심 협력을 계획했다.

1931년 1월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를 주재하여 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흥사단보(興士團報
)를 발행했다. 그리고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가 흥사단의 취지에 따라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우자 설립목적이 동일한 동인호조사와 합병하여 공평사(公平社)로 개칭하고, 그 이사장에
취임해 생활 역량을 증강시키고자 소비, 신용, 생산 등의 합작운동(合作運動)을 추진했다.

바로 그해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한국 사람과 중원대륙 애들간의 충돌이 생기자 병인의용
대(丙寅義勇隊)와 노병회(勞兵會), 교민단(僑民團), 학우회(學友會), 여자청년동맹, 애국부인
회, 청년동맹 등의 한인 단체들이 연합해 상해한인단체연합회(上海韓人團體聯合會)를 조직했
다. 이에 안창호는 흥사단 대표로 참가해 중원대륙 애들을 설득하여 그들과 함께 왜군 토벌에
주력했다.

1931년 10월 이시영(李始榮), 김사집(金思潗), 김철(金澈)과 함께 교민단 심판원(僑民團 審判
員)으로 활동했으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뚜껑이 뒤집힌
왜경은 프랑스 조계 경찰의 협조를 받아 독립운동가 검거를 실시했다.
도산은 이런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상해 하비로(霞飛路)에 있
는 이유필(李裕弼) 집을 찾았다가 잠복했던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며, 바로 서울로 압송되어 그
해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1935년 2월 대전감옥에서 출옥하여 왜경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지방을 돌며 계몽 강연을 하였
으며, 평남 대보산(大寶山)에 은거하여 이상촌 건설을 계획했으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관
계로 다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중병이 들어 그해 12월 보석으로 나왔다. 허나 건강은
악화되어 1938년 3월 세상을 떴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아들처럼 아끼던 유상규묘 옆에 무덤
을 썼다.

1962년 정부에서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으며, 1973년 강남구 한복판에 도산
공원을 닦으면서 도산의 무덤과 1955년에 세운 묘비는 그곳으로 이장되었다.
2005년 도산 묘 앞에 새 비석을 세우자 이전 비석을 서울시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도산기념
사업회가 협의하여 2016년 3월 1일 제자리인 이곳으로 가져왔으며, 2022년에 봉분을 새로 만
들어 지금은 가묘(假墓) 봉분과 지붕돌 묘비가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  태허 유상규(太虛 劉相奎)묘 - 국가 등록문화재 691-8호

유상규(1897~1936)는 평북 강계(江界) 출생이다. 경신중학를 거쳐 1916년 경성의전 1기로 입
학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 경성의전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넘어가 도산 안창호의 비서관으로 활동했으며, 이때 흥사단에 가입했다.
도산의 권고로 귀국하여 1925년에 경성의전에 복학, 1927년 졸업하여 경성의전 강사 및 부속
병원 외과의사로 근무했으며,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꾸준히 연사로 참석했다. 그리
고 잡지와 신문에 많은 글을 실어 민중의 의학적 계몽활동에 나섰고, 1930년에 조선의사협회
창설을 주도했다.
허나 1938년 중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안타깝게 단독에 감염되어 불과 39세의 나이로 병사
하고 만다.

그는 도산과 거의 부자(父子) 사이처럼 각별했는데, 자신의 아들 이름에 도산의 필명인 산옹
(山翁)의 '옹'을 넣어 '유옹섭'이라 했다. 태허의 사망 소식에 도산은 크게 통곡하면서 그의
장례를 직접 주관했으며, 2년 후 그의 무덤 오른쪽 위에 묻히면서 죽어서도 서로의 끈끈한 정
을 보였다. 그러다가 1973년 도산 묘가 강남구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서로 떨어지게 된다.

유옹섭은 부친 묘와 도산 묘를 같이 돌보았는데, 2007년 보훈처로부터 부친 묘의 국립현충원
이장 허가를 받았으나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위원장이던 김영식의 권유와 부친의 도산
선생에 대한 마음을 헤아려 이장하지 않고 도산 묘터 복원에 힘쓰다가 2014년 사망했다.

무덤은 봉분과 상석, 향로석, 지붕돌 묘비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으로 '망우 독립유공자 묘
역 - 유상규묘소'란 이름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태허 유상규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망우산3보루터

유상규묘를 지나면 망우산3보루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
대에서 늙은 보루터가 20곳 이상 발견되었고, 망우산에서 3개(시루봉보루를 포함하면 4개)가
나왔는데, 망우산 보루 3형제 중, 상태가 조금 나은 1보루만 국가 사적('아차산일대 보루군'
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455호로 지정됨)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2보루와 3보루는 상태가 너
무 우울하여 아직까지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망우산3보루는 망우리묘지를 닦는 과정에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그로 인해 원래 형태와 규
모를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보루터 남쪽 비탈면에 무너진 석축 일부가 있고, 돌을 다
듬은 기법과 주변에서 고구려 토기 조각과 민무늬토기 조각이 나와 고구려가 조성한 것은 확
실하다.
이처럼 중요한 유적이 무덤에 자리를 내주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고, 1973년 이후 무덤들이 적
지 않게 빠져나가면서 자연 공간으로 많이 풀렸으나 아직도 무덤이 여럿 있어 그들이 모두 옮
겨진 이후에나 제대로 된 조사를 받을 수 있다. 하여 빠르면 내 다음 세대에서나 가능할 것이
다.

▲  숲과 산길, 무덤에 묻혀버린 망우산3보루터

▲  망우산2보루터

망우산 정상부 북쪽에는 망우산2보루가 폐허의 상태로 살짝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망우리묘
지에게 철저히 희생되어 원래의 형태와 규모는 알 수가 없는 실정인데, 무덤 조성 때 쓰였던
보루터 석재와 주변에서 나온 고구려 토기 조각을 통해 고구려 보루로 여기고 있다.
보루터는 능선길과 그 주변에 희미하게 남아있는데, 무덤들이 적지 않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
어서 그들을 모두 옮기고 이곳을 싹 뒤집어야 이곳의 구체적인 정체를 캘 수 있을 것이다.


▲  망우전망대 (망우산 정상)

망우산2보루터 남쪽이 망우산의 정상(281m)이다. 이곳은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 지붕으로 2층
규모의 전망대가 닦여져 있는데, 여기서는 서울 동부와 북부 지역,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불암산, 구리시, 하남시, 강동구, 한강이 그윽하게 두 눈에 들어온다.

* 망우산 정상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  망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중랑구와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지역과 도봉산, 북한산(삼각산),
불암산, 봉화산 등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망막이 제대로 위로를 받는다.

▲  망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과 아차산 산줄기를 비롯해 강동구, 하남시, 남한산성, 검단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망우산 정상에 작게 박힌
국가기준점(삼각점)



 

♠  망우산 마무리 (사색의길 동쪽 구간)

▲  다시 안긴 사색의길 동쪽 구간

망우산 정상에서 남쪽 능선길을 7~8분 내려가면 동락정 쉼터가 나온다. 이곳은 망우산 능선길
과 사색의길 동쪽 구간. 용마산과 시루봉 방향 산길이 만나는 요충지로 포장길로 닦여진 길이
사색의길이다. 마음 같아서는 시루봉과 사색의길 서쪽 길까지 범위를 넓히고 싶었으나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하여 욕심을 버리고 아까 거닐다가 말았던 사색의길 동쪽 구간으로 빠져 북쪽
으로 내려갔다. (산은 도시보다 일찍 해가 짐)

사색의길 동쪽 구간에는 많은 무덤이 둥지를 틀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 안내문을 지닌 인사들
의 무덤이 섞여있다. 특히 만해 한용운과 조봉암, 오세창, 방정환 등 귀가 쫑긋 반응을 보일
정도로 유명한 인물도 많아 나들이의 재미를 더해준다. 하여 일몰까지 최대한 살피면서 망우
산의 여로(旅路)를 풍부히 살찌웠다.


▲  왜인 사이토 오토사쿠묘

망우리묘지에는 왜인들도 약간 자리를 축내고 있는데, 그중에는 사이토 오토사쿠(1866~1936)
란 자도 있다. 그는 이곳에 묻힌 왜인 중 가장 높은 벼슬을 했던 자로 왜정 칙임관(勅任官)
이상 관료 중 유일하게 이 땅에 묻힌 왜인이기도 하다.

사이토는 야마나시현 출신으로 동경대 임학과를 나와 농상무성 산림국에 취직, 대만과 야마나
시현을 거쳐 부해도 임정과장을 거쳤으며, 1909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농공상부 기사로 들
어왔다. 그 이듬해 왜정 초대 산림과장이 되었으며, 식목일을 만들고 미루나무와 아까시나무
를 이 땅에 도입했다.
1915년 영림창장을 거쳐 1918년에 퇴직했으나 조선에 계속 남아 사이토임업사무소를 세워 산
림위탁경영사업을 통해 녹화사업을 펼치며 배때기를 불렸다. 그에 대해서는 임업 근대화에 기
여했다는 평가와 산림 수탈에 앞장선 자라는 비난이 존재하나 후자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 진
리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왜정 중심으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36년에 사망했는데, 왜열도로 가지 않고 망우리묘지에 묻혔으며, 지금도 여전히 자리
를 축내고 있다.

이 무덤은 뚱뚱해 보이는 비석이 전부로 비석 밑에 화장된 유골을 묻은 전형적인 왜열도 무덤
스타일이다. 왜정 고위 관리의 무덤이라 해방 이후 적지 않게 고통을 당해 비석에 쓰인 글씨
까지 뜯겨져 나갔는데, 이는 왜정 시절 그들이 이 땅에 저지른 개짓거리에 대한 당연한 보복
이라 할 것이다.
비록 무덤 주인은 그 정도가 약했다고 하나 그건 사후에도 이 땅에 남은 그의 팔자이며, 비석
옆에는 꽃이 담긴 돌통(다른 인사의 무덤에도 모두 돌통이 있음)이 있는데, 이곳까지 온 기념
으로 돌통을 발로 뻥 넘어트리고 하얀 액체의 침을 여러 번 투하하며 자리를 떴다.


▲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巖)묘

이름도 꽤 익은 조봉암(1898~1959)은 강화도 출신이다. 1911년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청 고원(雇員)으로 근무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1년간 옥고의 고통
을 겪었다.
이후 출옥하여 YMCA 중학부에 입학했으며, 왜열도로 건너가 세이쏘꾸(正則) 영어학교에서 영
어를 익혔다. 중앙대학(中央大學) 정경학부에서 공부를 하다가 동경 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
주의~무정부주의계열의 흑도회(黑濤會)에 들어갔는데, 그로 인해 그의 한때 본업이었던 공산
주의에 푹 빠지게 된다.

흑도회가 해산되자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항일단체인 조선노동총동맹 문화부책을 맡아 노
동운동을 했다. 1922년 소련령 웨르흐네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합동회의에 국내파 대표로
참가하여 공산당 파벌 통일에 노력했으나 실패했으며, 이후 통합대회 결렬 사유를 모스크바
코민테른대회에 보고했다.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주의지도자 양성기관인 모스크바 동방지도자공산대학 단기과정
을 이수했으며, 그 뒤 귀국하여 신사상연구회, 북풍회 등 사회주의단체에서 활동했다. 이 두
단체는 화요회(火曜會)로 통합되었는데, 그 창설 주역으로 활동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여했으며, 조선공산당 1차당 창당을 주도했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을 수습 조직하고 5월에 만주로 넘어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
하고 그 책임비서가 되었으며,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해로 넘어가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의
조선대표도 겸직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으로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왜경에 의해 해체되자 제3차당인 ML당조직
에 참여했으나 국내당과 마찰을 빚어 지도 기능을 잃었다. 그 뒤 코민테른의 결정으로 1국1당
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들어갔다.

1932년 상해에서 왜국 영사경찰에 붙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왜정에게
요시찰인물로 찍혀 1945년까지 대외활동을 못했다. 하여 이때 고향에서 김조이(金祚伊)와 혼
인하여 인천에서 조용히 은거했다. 그러다가 1945년 2월 왜경에 검거되어 수감되었다가 광복
으로 풀려난다.

광복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 들어갔다가 1946년 사회주의계열인 민족전선에서 활동
했으며, 그해 5월 박헌영(朴憲永)의 공산주의노선을 공개서한을 보내 비판했다. 그리고 그 다
음 달(6월)에 '민족 전체의 자유생활보장'을 내걸고 노동계급의 독재, 자본계급의 전제를 다
같이 반대하는 중도통합노선을 주장하고는 조선공산당과 영원히 결별했다. 즉 공산당 노선에
서 자유민주주의로 갈아탄 것이다.
그해 8월부터 미군정의 좌우파합작을 지지하고 협력했으며, 1948년 5.30선거 때 인천에서 제
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직도 맡았다. 이승만 정권이 수립되자 초대 농
림부장관이 되었는데, 농지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허나 1949년 농림부장관 관사 수리비
를 농림부 예산으로 때운 것이 걸려서 그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임되었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나갔다가 이승만에게 밀려 낙선했으며, 1956년 11월 책임 있
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사회민주주의 정당
인 진보당(進步黨)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 박기출(朴己出)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자신은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또 낙선했다.
1957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58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 지역구 후보
를 내세워 원내에 진출했다. 허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그를 북한 간첩
으로 내몰아 1958년 1월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으며, 1959년 11월에 서둘러
처형시키고 말았다.

이후 1992년 10월 여야 국회의원 86명이 서명한 조봉암의 사면 복권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되
었으며, 2007년 9월 27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그가 연루된 진보당 사건이
이승만 정권의 반인권적 정치탄압이라 결론을 내리고, 국가에게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
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했다. 그리고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를 선고 받으면서 간첩으로 몰려 오랫동안 고통 받은 그의 명예가 다소 회복되었다.

그의 무덤은 호석이 높이 둘러진 봉분과 지붕돌 묘비, 망주석, 장명등, 상석, 혼유석을 지니
고 있으며, 묘비에는 특이하게도 글씨가 없어 오랫동안 그의 누명을 침묵의 소리로 항변하고
있다.


▲  죽산 조봉암의 어록을 머금은 견고한 돌덩어리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허냐'

▲  만해 한용운(
萬海 韓龍雲) 묘 - 국가 등록문화재 519호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남 홍성(洪城) 출생으로 본명은 유천(裕天, 어렸을 때 쓴 이름),
정옥(貞玉, 장성해서 쓴 이름)이며, 호는 만해이다.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4세에 혼인을 했으나 1896년 홀연히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
암(五歲庵)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절의 허드렛일을 돌보다가 출가해 승려가 되었으며,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홀로 여행하다가 1905년 다시 설악산에 들어와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
을 스승으로 삼아 득도에 나섰다. <'만해'란 이름은 스승 만화(萬化)가 지어줌>

1908년에는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1명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
립하고 왜열도를 시찰하고 왔으며,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3년에 귀국, 불교학원
선생이 되었다. 바로 그해에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
)에 입각해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1916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했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독립선
언서(獨立宣言書)에 앞장 서서 서명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다.
1926년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님의 침묵(沈默)'을 출간해 왜에 저항하는 저항문학에 앞장섰
으며, 1927년 신간회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이 되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해 청년운동을 강화했으
며, 같은 해에 여러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했다. 이후 많은 논
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37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
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이후 왜정에 배타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불교 개혁과 문학활
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겨우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쓸쓸히
눈을 감는다.

이곳에는 부인이 같이 묻혀있는데, 2기의 봉분과 지붕돌 묘비, 상석, 혼유석을 지니고 있으며
, 묘비에는 '부인유씨재우'라 쓰여 있으니 이는 부인이 만해 오른쪽에 묻혀있다는 뜻이다. 여
기서 오른쪽은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만해가 머리를 북으로 하고 누운 상태에서의 오른쪽을
뜻한다고 한다. ('구리 한용운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음)

* 만해 한용운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박희도(朴熙道)묘

박희도(1889~1951)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종교인, 교육가이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에서 활동하다가 3.1운동 때 기독교계 대표 영입과 학생들의 참여에 크게 힘을 썼고 독립선언
33인 중 최연소자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복역하고 최초의 사회주의계 잡지 '신생활'을 발간해 독립운동에 진력
했으나 러시아혁명 기념 필화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2년간 징역살이를 했다. 1928년 중앙보
육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지내는 등 기독교 교육계의 지도층으로 활동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자치론의 길을 걸었다.
1949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며, 육군정훈학교 출강 외에는 활
동을 하지 않다가 왜정 시절 옥고 휴유증으로 1951년에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봉분과 하얀 피부의 묘비, 상석, 혼유석을 지니고 있으며, 옆에 부인 묘가 있고
윗쪽에 부모 묘가 있다.
참고로 그의 동생인 박희성(1896~1937)은 연희전문(연세대) 출신으로 광복군 비행장교 1호로
미국에서 훈련을 받다가 안타깝게 순직했으며, 2010년 대전현충원에 안정되었다.


▲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묘 - 국가 등록문화재 691-1호

오세창(1864~1953)은 서화가이자 언론인으로 서울 출생이다. 부친 오경석(吳慶錫)은 청나라에
서 많은 서적을 가져와 개화에 앞장섰던 역관으로 오세창도 그런 부친의 영향으로 20세에 역
관이 되었다.
1888년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있으면서 이 땅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자를 겸
임했으며, 우정국 통신국장 등을 거쳐 1897년에 1년간 왜열도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
사로 일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1892년 왜열도로 넘어갔으며, 거기서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들
어가 의암 손병희의 참모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대표로 독
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1922년에 손병희가 죽고 천도교 내부 갈등이 심해지자 그는 왜정에
비타협적인 보수파 노선을 지켰다. 그리고 왜의 감시를 피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수시로 교류를
했다.
1945년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1946년 8월 15일에 민족대표로 왜국으로
부터 대한제국의 국세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1949년 백범 김구의 장의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서화가이자 서예가로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있는 노고산천골취장비과 방정환묘비,
설태회 묘비에 글씨를 남겼으며,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스승으로 그에게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주었다.

무덤은 호석을 두룬 봉분과 지붕돌 묘비, 상석을 지니고 있으며,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오
세창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위창 오세창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명온공주(明溫公主)와 김현근(金賢根)묘

망우역사문화공원에 깃든 7,400여 기의 무덤 중에서 제일 계급이 높은 무덤, 그리고 가장 늙
은 무덤은 무엇일까? 그 정답은 바로 명온공주(1810~1832)와 김현근(1810~1868)의 묘이다.

명온공주는 순조(純祖)의 딸이고 동갑내기 남편인 김현근은 안동김씨 집안으로 김상용(金尙容
)의 8대손이다. 김현근은 어려서부터 말과 글이 똑똑했다고 하는데, 순조가 명온공주의 남편
을 물색하고자 1824년에 12~15세 남성을 대상으로 간택령(揀擇令)을 내렸다. 그래서 그해 5월
22일 17명 후보 중에서 8명을 추렸고, 5월 25일에 다시 3명으로 줄였으며, 6월 2일 3번째 간
택에서 진사 김한순의 아들인 김현근이 최종 합격되어 동년위로 봉하고 그해 7월 17일 혼인을
했다.

명온공주는 일찍 병을 얻어 22세 때 사망하면
서 김현근은 20대의 한참 나이에 홀아비가 되
는 비운을 겪는다.
그는 청나라 사신 업무, 판의금부사(判義禁府
事) 등을 지내다가 58세에 사망했는데, 고종은
명온공주의 오라비인 효명세자<추존 익종(翼宗
)>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명온공
주와 김현근은 그의 고모와 고모부가 된다.
명온공주 묘는 합장분으로 이루어진 봉분 1기
와 지붕돌 묘비, 장명등, 상석을 지닌 조촐한
규모로 원래 종암동(鍾岩洞) 고려대 앞쪽에 있
었으나 1936년 이곳으로 이장되어 서민들 묘역
속에 들어앉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덤의 사
이즈가 많이 왜소해졌다.
6.25 시절 망우리고개 일대가 격전지가 되면서
무심한 총탄에 장명등과 묘표의 지붕돌이 깨지
고 심지어 장명등은 통구이가 되는 등 크게 고
통을 당했으며, 상석 위에 꼬부랑 알파벳이 쓰
여 있는데, 이는 이곳 전투에 참여했던 어느
철딱서니 없는 양이(洋夷) 군사가 남긴 낙서이
다.

▲  명온공주와 김현근 묘표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있는 묘비 중
가장 늙은 존재이다.

▲  상석에 흉하게 새겨진 영문 낙서
세상에 낙서할 곳이 없어서 남의 무덤
상석에다가 저런 짓을 했단 말인가.

▲  지붕돌이 시커먼 장명등
6.25 때 지붕돌이 총탄으로 불에 탔고
추녀 귀퉁이도 크게 깨졌다.


▲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묘 - 국가 등록문화재 691-3호

명온공주묘 북쪽에는 어린이날로 유명한 소파 방정환(1899~1931)의 묘가 있다. 그는 서울 당
주동(唐珠洞) 출신으로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으나 2년 뒤 중퇴했으며 1917년에 비밀
결사로서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천도교에 들어가 손병희의 3째 딸인 손용화와 혼인했으며,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신
청년','신여자','녹성' 등의 잡지 편집을 맡았다. 3.1운동 때는 손병희 밑에서 천도교 청년회
의 회원으로 3.1운동 준비에 나섰고, 오일철과 함께 집에서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배포하던
중 왜경에 붙잡혔으나 석방되었다.
3.1운동 이후 왜열도로 건너가 동양대학 문학과에 진학하여 아동문학을 중심으로 공부했으며,
1921년 여름방학 때 잠시 귀국하여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어린이에 대한 존대말쓰기 운동
을 벌였다. 그리고 1922년에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간행했다.

1923년에 어린이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그해 3월 20일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고
한승(高漢承)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날을 만들어 5월 1일을 그날로 삼았다.
1924년 전국 소년지도자 대회를 개최하여 어린이단체의 단합을 추진했으며, 잡지 '별건곤(別
乾坤)'과 '신여성'을 발간하고, 동화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회를 조
직했고, 1927년에 조선소년총연맹의 발족으로 소년운동의 방향이 달라지자 일선에서 은퇴하여
강연회와 동화대회, 라디오 방송 등에서 주로 활동했다.
1928년 10월 2일부터 1주간 서울에서 세계아동 미술전람회를 개최했으며, 1931년에 새로운 월
간잡지인 '혜성'을 발간했으나 지나친 과로로 그만 큰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만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벗들에게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네' 유언을 남겼고, '여보게 밖
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란 마지막 말을 남기며 32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지금 많이 사용하는 '어린이'란 이름은 소파가 만든 것으로 그가 활동하던 시절까지 어린 아
이를 지칭하는 좋은 표현의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어린이날을 제정해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큰 선물을 주었으며, 그 짧은 인생을 어린이를 위해 모두 쏟아부을 정도로 어린이에 대한 사
랑과 관심은 실로 대단했다. 이후 한참의 세월이 흐른 1990년,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고
자 늦게나마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소파의 유골은 홍제동(弘濟洞)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그곳에 있었으나 1936년 후배 최신복(崔
信福, 1906~1945) 등이 모금 운동에 나서 현 자리에 무덤을 마련해 안착했다. 최신복은 소파
와 함께 개벽사에서 어린이 잡지를 만든 인물로 수원에 집안 묘역이 있음에도 자신의 부모 무
덤을 소파 묘 밑 왼쪽에 썼으며, 자신도 부인과 함께 그 밑에 묻혀 죽어서도 그와의 인연을
끈끈히 이어가고 있다.

무덤은 흙 봉분 대신 특이하게 쑥돌을 표석처럼 세워 해관 오긍선(海觀 吳兢善) 묘와 더불어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개성파 무덤으로 꼽힌다. 비석 글씨는 위창 오세창이 썼으며, 표석 앞
에는 묘비와 상석을 두었는데, 다른 무덤에 비해 헌화된 꽃도 많은 편이라 그의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소파의 무덤은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방정환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
었음)

* 소파 방정환 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방정환묘를 둘러보니 햇님은 완전히 퇴근하고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져 세상은 검은색 도화지
가 되었다. 이것 외에도 유명 인사의 무덤을 여러 기 더 둘러보았으나 일몰 직전이라 사진이
나의 침침한 두 망막처럼 흐리멍텅하게 나와서 여기서는 생략했다.

이렇게 하여 망우산 늦가을 나들이는 나름 큰 성과를 거두며 기분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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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늦가을 나들이 <정동 회화나무,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배재학당 동관>

서울 정동~덕수궁돌담길 산책



'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나들이 '

▲  덕수궁 돌담길 (서울특별시청 서소문청사 앞길)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정동(貞洞)이란 고즈넉한 동
네가 뉘어져 있다.
정동은 서울 도심의 주요 명소이자 서울 근대문화유산의 대표 성지(聖地)로 덕수궁 돌담
길과 정동길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데, 꽤 번잡한 서울 도심의 한복판이지만 나무를 머
금은 공간이 많아서 오히려 아늑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게다가 조선부터 현대까지 600년
이상의 장대한 시간이 녹아든 현장으로 역사, 문화의 향기도 정말 그윽하다. 바로 그 매
력 때문에 오랫동안 천하 사람들의 나들이, 답사 명소로 격한 사랑을 받아왔으며, 나 또
한 이곳에 퐁당퐁당 빠져 종종 발걸음을 하고 있다.



 

♠  정동 회화나무,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유관순 우물

▲  정동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3호

늦가을이 익어가던 11월의 첫 무렵, 오랫만에 정동을 찾았다. 이번에는 정동4거리(5호선 서대
문역과 서울역사박물관 중간)에서 정동길로 접근했는데, 그 길을 3~4분 정도 들어가면 야무지
게 자라난 회화나무 1그루가 마중을 나온다. 그가 정동의 오랜 터줏대감인 정동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는 정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570년 정도 묵었다. (1976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
정 나이가 520년) 서울 도심부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나무로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대자연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17m, 둘레 5.16m의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
했는데, 그 기세는 정동길을 뒤덮을 정도이다. 하지만 고된 세월에 지쳤을까? 아니면 하늘이
두려운 것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다소 구부러진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나무가 워낙 나이가 많고 수시로 오가는 차량들이 내뱉은 고약한 기운에 매일 시달리면서 한
때 수세가 많이 기울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3년 캐나다가 대사관(大使館) 건물을 신축했는
데, 그 대사관이 자칫 나무를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었으나 캐나다 양이(洋夷)들이 기특하게도
나무를 배려하여 건축 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깨어있는 모
습을 보여주면서 나무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  정동 회화나무와 캐나다대사관(왼쪽 건물)
정동의 이름 유래가 된 정릉(貞陵)부터 많은 것들이 창밖에 이슬처럼 정동을
스쳐갔지만 오직 회화나무만이 그 장대한 세월을 극복하며
정동을 지켰다.

▲  정동 회화나무 주변 정동길
회화나무의 그늘 맛을 먹고 자란 정동길, 정동길의 늦가을 풍경은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기로 명성이 높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 국가 등록문화재 3호


정동 회화나무를 지나면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두룬 이화여고가 모습을 비춘다. 정문 옆에는 붉
은 피부를 지닌 늙은 3층 건물이 눈길을 끄는데 그것이 이화학당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심
슨기념관이다.

심슨기념관은 191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3층, 건평 129.5평의 벽돌 건축물로 언더우드
가 세웠던 '예수교학당' 자리이다. 이화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근대 건축물로 조선에 머
물던 미국 사람 심슨(Sarah J. Simpson)이 사망하자 그가 남긴 재산으로 지었는데, 그를 기리
고자 그의 이름을 따서 심슨기념관(씸손기념관)이라 했다.
건물 동쪽에는 '씸손기념관'이라 쓰인 동판이 있으며 1961년과 2006년에 보수했다. 이후 내부
를 손질해 이화학당백주년 기념관으로 삼았다가 이화학당(이화여중고)의 역사를 집대성한 '이
화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화~토요일 10~17시, 월요일과 휴일은 휴관)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 5월,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 여사(Mrs. Marry F. Scranton)가 세
운 이 땅 최초의 여자학교이다. 그는 조선에 여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
교사와 현 이화여고 본관 뒷편 언덕에 올라 적당한 자리를 살피다가 그해 10월 배밭 6,120평
을 구입했다. <현재 정동 32번지 일대>
그 안에 있던 집을 모두 부시고 새로운 한옥을 착공하려고 하니 마침 선교부로부터 예산 지원
이 어렵다는 통보가 날라왔다. 하여 미국 각지에 원조를 요청하여 겨우 3,700달러의 기부금을
모아 건물을 완성했다. 처음 학교 건물은 'ㄷ'자 모양의 195.5칸에 큰 한옥으로 7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당시 서울 사람들은 그 건물을 양국관(洋國館)이라 불렀다.

그 시절 조선은 여자들 교육에는 매우 인색했다. 그래서 스크랜톤은 조선의 그런 현실을 생각
해 6명을 생각했으나 겨우 1명이 지원하는데 그쳤다. 그 1명으로 교육을 시작하면서 이화학당
의 서막은 열리게 된다.
초창기 학당에 들어온 여학생들은 이름이 없어 영어로 편의상 '1st', '2nd', '3rd' 등으로 불
렀는데, 학생이 점차 증가하면서 서수(序數)로는 적당치가 않아 '수산나','델리아' 등의 세례
명을 붙여주었다.

▲  이화여고 뜨락에 세워진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표석

▲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톤 여사의
흉상


1887년 고종은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에서 '이화학당'이
란 이름을 내렸다. '이화'란 이름은 부근에 있던 이화정(梨花亭)이란 정자에서 따왔다는 설과
이곳이 원래 배밭이었으므로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1897년 학생수가 40명을 넘자 페인(J.O Paine) 학당장(學堂長)은 기존 한옥을 부시고 2층짜리
양관인 메인홀(Main Hall)을 지어 1900년 11월 완성을 보았다. 메인홀은 'T'자형으로 900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었다.
바로 이웃에 자리한 배재학당의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메인홀을 두고 '서울 장안에서 가장 전
망이 좋은 집'이라며 찬양을 했는데, 그 건물은 6.25시절에 파괴되어 사라졌다. 하여 1970년
그 뒤쪽에 이화여고 본관을 세웠으며, 메인홀터에는 '한국 여성 신문화의 발상지'란 표석과
스크랜톤 부인의 흉상을 세웠다.

1899년 5월 학당에서 여학생을 이끌고 창의문(彰義門) 밖 세검정(洗劍亭)으로 소풍을 갔었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생 소풍이라고 한다. 그 당시 그들의 소풍은 500년에 처음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


▲  굳게 닫힌 유관순우물

이화학당하면 유관순(柳寬順) 누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했
는데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고등과 학생 5명과 몰래 기숙사 뒷담을 넘어 만세운동에 참
여했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고향인 천안 병
천으로 내려가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관했으나 왜경에 체포되어 1920년 서대문형
무소에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獄舍)하고 만다.

심슨기념관 뒤쪽에는 굳게 입을 닫은 동그란 조선 후기 우물이 있다. 학교에서는 그 우물을 '
유관순우물'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는데, 원래는 정동 사람들이 쓰던 우물이었으나 이화학당
이 들어서면서 학당 소유가 되었다. 댕기머리 여학생들이 여기서 물을 길어 식수용으로 쓰거
나 빨래를 했으며, 유관순 누님 역시 이곳에서 빨래를 했을 것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상
징적인 인물이라 그의 이름을 따서 '유관순우물'이라 했다.

지금은 죽은 우물로 뚜껑이 닫혀져 있어 물이 콸콸 치솟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유관순우물과 은행나무
한참 녹음(綠陰)에 젖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우관순우물에 그늘을 드리우며 수채화처럼 고
운 풍경을 자아낸다. 나무의 나이는 약 100년
정도로 여겨진다.


▲  늦가을에 의해 노란 머리가 되버린 이화학당 사주문(四住門)과
하마비(下馬碑)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며 지나다녔을 기와집 사주문, 지금은 문 옆에 넓은 교문이 닦
여져 있어 후문으로 물러나 있다.
사주문은 이화학당의 옛 정문으로 1923년에 전통 한옥의 사주문 형태로 지어졌다. 지금의 자
리로 이전되면서 왜식(倭式)으로 변형된 것을 1954년에 졸업생들의 흔쾌한 후원금으로 팔작지
붕 기와문으로 교체했다. 그러다가 1999년 8월 원래의 대들보와 상도리, 망와 등 일부를 사용
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문 좌우로 기와를 머리에 인 돌담이 정겹게 펼쳐져 있고 문 옆에는 조그만 비석이 세워져 있
는데, 그 비석은 아무나 세울 수 없었던 콧대 높은 하마비이다.

하마비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란 뜻이다. 조선시대 국립중등교육 기관인 향교(鄕校) 앞에 하마비가 있는
것은 보았어도 신식 학교에 그것이 있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아마도 제왕이 친히 이름을 내리
며 관심을 보인 여학교라 학교 주변 단속도 할 겸, 비석을 내린 모양이다. 이화학당은 제왕이
이름도 내려주고 하마비까지 달아준 정말로 특별한 여학교였던 것이다.

* 심슨기념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2-1 (정동길 26, ☎ 02-2175-1964)
* 이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이화학당 교문 안쪽에 누워있는 손탁호텔터 표석

이화학당 부근에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호텔(Sontag Hotel)이 있었다. 이 호텔은
러시아 사람인 손탁(孫澤, Miss Sontag)이 세웠는데, 그가 32살이던 1885년 동생의 남편인 초
대 러시아공사 베베르(Waeber. K)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1895년 친러파를 중심으로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가 결성되었는데, 그들은 손탁 집에 모여서
고종을 경복궁(景福宮)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데려오는 계획을 논의했다. 손탁과 베베르는 그
들을 적극적으로 도와 고종의 아관파천을 이끌어냈고, 그 공으로 손탁은 고종으로부터 왕실의
부속건물인 기포드(D.L. Gifford) 선교사의 한옥을 하사 받게 된다.
손탁은 자신이 쓰던 건물을 클럽으로 개조하여 외교관들의 사교장으로 만들었으며 정동구락부
의 호스티스(여주인)가 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에는 외국인을 위한 호텔이 없는지라 조정에서 1902년 2층 규모의 양관을 만들어
고종의 이쁨을 얻은 손탁에게 경영권을 주었다. 그 양관이 바로 손탁호텔<손탁빈관(孫澤賓館)
>로 내부를 서양풍으로 꾸몄다.
조선 정치가와 사업가, 서양 애들, 청나라 애들, 왜국 애들 등 다양한 사람이 이용했으며, 그
들의 숙식 및 모임 장소로 크게 호황을 누렸다. 러일전쟁 때는 영국 수상으로 유명한 처칠이
하룻밤을 묵었고, 1905년 11월에는 이토히로부미가 머물며 을사조약 체결을 위한 행동을 전개
하기도 했다.

손탁호텔은 2층은 국빈용 객실로 쓰였고, 1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과 주방, 식당, 커피샵을 갖
추고 있었는데, 특히 커피샵과 서양요리 식당은 이 땅 최초로 의미가 깊으며 외교관들을 모아
놓고 서양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여 이 땅에 처음으로 서양 영화를 소개한 현장으로 보는 견해
도 있다.

손탁은 러시아말과 조선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에도 능통해 고종 황제의 통역관으로 활동하
기도 했으며, 조선에서 24년을 머물다가 1909년 조선에서 번 막대한 재산을 싸들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의 나라인 러시아가 망했기 때문이다.
왜인 기구찌가 쓴 '한말에 등장한 여성'에서 손탁이 조선에 왔을 때는 선망 받는 30세의 꽃같
은 미모였는데, 떠날 때는 아름답던 얼굴이 파란과 비통으로 시들어 볼품이 없다고 적었다.

러시아로 돌아간 손탁은 별장을 지어 재산을 관리하려고 했는데, 동생의 권유로 재산 대부분
을 러시아은행에 예금하고 나머지는 러시아 기업에 투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
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고, 소련공산정권은 손탁의 돈을 모두 몰수해버렸다. 하여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은 손탁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을 뼈저리게 느끼며, 1925년 71세의 나이로 혼인
도 하지 못한 노처녀 상태로 사망하고 말았다.

손탁이 떠난 이후 손탁호텔은 미국인이 관리하다가 그 자리에 감리교학교가 들어섰으며, 1917
년 이화학당이 미국감리교회에서 모금한 23,060달러로 손탁호텔을 인수해 기숙사로 사용했다.
허나 1922년 호텔을 철거하여 그 자리에 프라이홀(Frey Hall)을 세움으로써 손탁호텔의 역사
는 끊기고 만다.



 

♠  구 러시아공사관터, 정동교회

▲  구 러시아공사관 - 사적 253호
(정동공원에서 바라본 3층 전망탑)


이화학당 교문 맞은편 길로 조금 들어서면 그 길의 끝 언덕 위에 하얀 피부의 날씬한 건물이
자리해 있다. 그가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우울한 현장, 러시아공사관터 3층 전망탑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두만강을 사이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일찍이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프랑스를 이용해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방법으로 러시아를 막아
볼 생각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1884년 러시아와 수교를 맺었는데, 그때 조선
측 대표는 김병시(金炳始), 러시아측 대표는 베베르(K. Waeber)였다.

조선은 1888년 덕수궁(경운궁)의 후원인 상림원(上林園) 일대를 공사관 자리로 제공했다. 러
시아는 그곳을 밀어버리고 공사관과 정교회<正敎會, 동방교회(東方敎會), 1900년에 지어짐>를
세워 서울 속에 조그만 러시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공사관은 1888년 공사에 들어가 1890년 8월 완성을 보았는데, 스위스계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
(Sabatine)이 설계했다. 르네상스식 벽돌조 건물로 공사관 본관은 'H'자형 평면으로 지어졌는
데, 남/동/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3면 모두 정면성을 지니고 있었고 각
각 면에 출입문을 내었으며, 북쪽 끝 모서리에 3층 전망탑을 두었다. 그리고 공사관 초입에 4
면이 아치로 된 개선문 형태의 정문을 두었다.

러시아공사관은 간단히 줄여 아관(俄館)이라고 하는데, 러시아를 가차자(假借字) 표현으로 아
라사(俄羅斯)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전망탑(탑)을 비롯해 공사관에 딸린 건물이 여럿 있었으나 왜정(倭政) 때 상당수 파괴되었으
며, 6.25 때 탑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이 모두 박살이 났다. 탑 역시 그때 무거운 상처를 입어
기우뚱거린 것을 1973년에 복원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의 면적은 65.2평으로 1981년 탑 동북쪽에서 지하실과 20.3m의 비밀통로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과 이웃한 미국공사관으로 속히 줄행랑을 치
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덕수궁이 황궁이 된 1897년 이후, 그 주변에 흩어진 여러 나
라 공사관과 영사관을 잇는 작은 통로를 닦아놓아 유사시에 대비했다. 그 통로는 1945년 무렵
까지 대부분 남아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모두 끊어진 상태이다.


▲  뒤쪽(북쪽)에서 바라본 러시아공사관 전망탑

우리가 보잘것없는 이 하얀 탑에 주목을 해야 되는 이유는 바로 1896년에 일어났던 아관파천
의 우울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1895년 왜가 저지른 을미사변(乙未事變) 사건으로 고종은 왜를 극히 불신하며 경복궁에서 불
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친러파였던 이범진(李範晉)과 이완용(李完用), 이윤용(
李允用) 등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신임공사 스페이어, 손탁과 함께 고종의 파천계획을 모의
하게 된다.
그들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귀비(嚴貴妃)를 통해 왕에게 접근, 친일패거리들이 왕의 폐위를
꾸미고 있으니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고종이 흔쾌히 승낙
하며 베베르와 스페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베르는 1896년 2월 공사관 수비를 이유로 인천에 머물던 러시아군함에서 포 1문과 군사 120
명을 소환하여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 준비가 끝나자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왕태자(
순종)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살짝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불이 나게
도망쳤다. 이 사건을 바로 4글자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그렇게 러시아공사관에 샛방을 튼 고종은 왜와 친했던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을 단죄했다.
그래서 김홍집, 어윤중(魚允中)을 처단하고, 김윤식(金允植)을 제주도로 귀양보내니 이에 염
통이 쫄깃해진 유길준(兪吉濬) 등 10여 명의 고위관리들은 왜열도로 줄행랑을 쳤다.
친일내각을 도려내자 친러패거리인 이범진, 박정양(朴定陽),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된 친러내각
이 들어섰다. 그들은 친일파를 역적으로 간주, 단발령(斷髮令)을 보류하고 갑오개혁과 을미개
혁(乙未改革)을 폐지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을 머물렀는데, 가까운 서대문(西大門)은 임시로 폐
쇄되었고, 정동 일대는 백성들의 통행을 일절 금했다.

▲  옆(서쪽)에서 바라본 전망탑

▲  러시아공사관터 북쪽 부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얹혀사는 동안 어전회의는 무도실에서 했으며, 대신들은 공사관 대회
의실에서 병풍으로 칸막이를 삼아 일을 보았는데 부서별로 회의를 할 때마다 병풍을 이리저리
옮겼다.
고종은 2층 만찬실을 거처로 삼았는데, 만찬실 벽에는 꽃무늬 융단이 걸려있고 천정 가운데에
7가지 촛불로 이루어진 샹들리에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동쪽 벽에는 소파 모양의 용상(龍
床)이 있었고 그 앞에는 호피(虎皮) 1장이 깔려 있었으며, 거실 서쪽 벽에는 왕의 침대가 있
고, 남쪽 벽에는 소파 세트가 있었다.
만찬실 주변 측실(側室)에는 상궁(尙宮)과 궁녀가 거처하여 왕의 시중을 들었는데, 궁녀들은
방이 따로 없어 공사관 복도에서 칸을 설치하여 지냈다.

만찬실 창 밖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대포 1문이 장착되어 있었고, 정문에서 현
관에 이르는 길에는 러시아군 100명이 수비했다. 그리고 정문 밖에는 칼을 찬 조선군이 길목
을 지켰다.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는 고종이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했으며, 명성황후의 제단까
지 마련해주는 등 왕의 가려운 부분을 알아서 긁어주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에 더욱 친밀을
보이면서 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퍼주게 되며, 그로 인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커지
게 된다.


▲  러시아공사관터 동쪽 부분
주름진 공사관터 동쪽 끝에 지하 비밀통로가 있다. 이 통로는 미국공사관
(현 미국대사관저)과 이어져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형편없이 깨지자 승리한 왜는 러시아공사관을 접수하여 러시아
공사(公使)와 러시아군 80명, 공사 직원을 죄다 러시아로 추방했으며, 인근 프랑스공사관에서
잠시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왜와 러시아가 국교를 다시 맺으면서 러시아영사관으로 쓰였으며, 1945년 이후 소련
영사관이 되었다. 허나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니콜라이 영사가 북한으로 추방되면
서 다시 빈집이 되고 만다.
이후 6.25전쟁으로 전망탑을 빼고 싹 파괴되었고, 1973년 전망탑을 복원하면서 암울했던 근대
사를 나무로 덮으려는 듯, 수양버들 등의 나무를 잔뜩 심어 정동공원을 조성했다. 이후 2009
년 독특한 모습의 하얀 피부의 정자를 공원 한복판에 닦아 지금에 이른다. (정동야행 축제 때
는 음악회 장소로 많이 쓰임)

러시아와 재수교 이후 그것들은 이곳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요구는 보기 좋
게 묵살되었다. 전망탑에서 남쪽으로 1리 남짓 떨어진 정동교회 뒤쪽에 러시아대사관이 이미
자리해 있어 그 땅을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80년 가까이 홀로 제자리를 지키고 선 하얀 피부의 3층 전망탑, 근대사의 거센 소용돌이의 현
장으로 지금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만 바로 동쪽 옆으로 높이 담장을 두룬 미국대사관
(대사관저)이 들어앉아 있고 그곳을 지키고자 전/의경들이 항시 주둔해 있어 마치 1896년 그
현장이 재현이라도 된 듯, 그리 유쾌하지가 못하다.

* 구 러시아공사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5-3


▲  정동교회(貞洞敎會) - 사적 256호

이화학당 교문에서 덕수궁 방면으로 3분 정도 가면 고색이 창연한 붉은 피부의 교회가 마중을
한다. 그가 이 땅에서 가장 늙은 교회인 정동교회(정동제일교회)이다.

정동교회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1898년에 세운 것
으로 1887년 10월 지금의 한국은행본점 부근에 마련된 배재학당 학생들의 성경 공부방에서 비
롯되었다.
이후 교인 수가 200명이 넘어서자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을 추진하게 되었
는데, (그 시절에는 남녀가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봤음) 아펜젤러는 500명 규모의 큰
서양식 예배당을 제안, 이를 실현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모금을 했다. 또한 교인들도 자체적
으로 돈을 걷어 8,000달러의 거금을 마련했다.

새 교회는 선교사 스크랜튼의 시약소(施藥所) 병원 자리의 한옥을 헐고 1895년 9월 9일 정초
식(定礎式)을 했는데, 이때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이 축사를 했다. 교회 설계는 왜인 요시
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했으며, 심의섭(沈宜燮)이 시공을 했다. 1896년 12월에 지붕을
올리고 1897년 12월 26일 교회 봉헌식을 가졌으나 최종 완공은 1898년 12월 26일에 이루어졌
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이 교회는 정동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서울 장안의 명물로 구경꾼
들로 가득했으며, 이 땅 최초의 교회란 뜻에서 'high church'라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독립협회운동과 인권운동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서재
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이승만(李承晩) 등 이름만 들어도 귀에 부쩍 익은 사람들이 이
곳의 교인으로 활동하며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을 풀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정동교회

▲  정동교회의 뒷모습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동교회를 경운궁에 집어넣고자 매입대금 34,000원 가운데 계약금 1
만원을 지불했다. 허나 나머지를 내놓지 않자 이에 뿔이 난 미국공사 알렌이 1901년 5월 나머
지 금액을 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편입 작업이 무산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115평 규모의 십자형(十字形) 건물이었으나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하지 못해 1926년
에 양쪽 날개 부분을 확장하여 삼랑식(三廊式)으로 개축하면서 175평으로 넓어졌으며, 건물의
모양도 직사각형을 이루게 되었다. 1918년에는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使)가 미국에서 구입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6.25 때 교회 건물 절반이 박살이 났으며, 파이프오르간도 이때 파괴되었다. 서울 수복 이후
바로 '예배당중수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950년 11월 23일에 복원했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
벽돌이 풍화되고 문짝이 망가지면서 교회를 새로 지어야 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오면서 철거
위기에 놓이게 된다. 허나 교단의 내분으로 차일피일 시일만 보내다가 197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뜨락에 세워진 감리교회 조선 선교(宣敎) 50주년 기념비

정동교회는 다갈색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곳곳에 아치형 창문을 두어 고딕 양식의 단순화된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돌을 다듬어서 반듯하게 쌓은 기단에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
의 솜씨가 다소 배여있다.
마치 서구의 어느 늙은 교회로 뚝 떨어진 듯한 분위기로 하루가 멀다 하고 솟아나는 으리으리
한 교회나 성당과 달리 소박한 모습에 아늑하고 정겨운 느낌이며, 비록 나와는 전혀 맞지 않
은 종교의 중심 현장이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저 안에 들어가 잠시 묵상에 잠겨보고 싶은
곳이다. 평일 낮과 토요일, 휴일에는 내부 관람이 가능하며,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가 열
린다.

* 정동제일교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3 (정동길 46, ☎ 02-753-0001)



 

  배재학당 동관(培材學堂 東館) - 서울 지방기념물 16호

▲  정면에서 바라본 배재학당 동관

정동교회에서 서소문 쪽으로 넘어가면 고개 정상부(서울시립미술관 서쪽)에 붉은 피부로 이루
어진 옛 배재학당 동관이 마중을 한다.
이 건물은 1916년에 지어진 것으로 100년의 적지 않은 나이를 지녔음에도 키다리 빌딩 속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 옆에는 배재학원 소속의 배재정동빌딩이 높이 솟아있음)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발상지이자 이 땅 최초로 벽돌로 지어진 학교 건물로 배재중
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대전)의 전신이다. 1885년 7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서울에 들어와 스크랜턴의 집을 사들여 1885년 8월, 학생 2명을 모아 가르치면서 배재학당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고종은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으로 '배재학당'
이란 이름을 하사했으며 그해 본관(1887년)이 지어졌다.

아펜젤러는 학당의 설립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
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그는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이라 쓴 학당훈(訓)을 내걸며 일반적인 교육 외
에 연설회, 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교육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
된 인쇄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인쇄시설이다.

학생수가 계속 늘자 1916년 동관을 지었고, 1923년에 서관을, 1933년 대강당을 차례대로 지어
올려 제법 면모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들 건물은 조선인 건축가 심의석이 지었다.
1984년 한참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던 강동구 고덕동(高德洞)으로 중고등학교 모두를 옮겼으며
동관만 제자리에 두어 옛 자리를 추억하는 용도로 삼았다. 서관은 고덕동으로 가져왔으나 대
강당과 본관 등은 모두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배재공원을 닦았다.


▲  배재학당 동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의 뒷모습

동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교실로 주로 이용되었다. 정면 현관과 양 측면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남아있고, 외장 및 치장 쌓기 벽돌구조도 뛰어나며 건물의 형태도 휼륭해
이 땅의 근대건축의 주요 지표로 삼을 정도이다.

학교가 강 건너로 가버린 이후, 빈 채로 두었다가 내부를 손질하여 2008년 7월 24일 배재학당
의 역사를 집대성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삼았다. 지하 1층에 사무실을 겸한 학예연구실
을 두었고, 1층에는 체험교실과 상설전시실1, 특별전시실을, 2층에는 상설전시실2, 기획전시
실을, 그리고 3층에는 세미나실과 회의실을 두었다. 이중 1,2층만 관람이 가능하며 1930년대
배재학당 교실을 재현하여 배재학당의 140년 역사를 유감없이 뿜어내고 있다.

배재정동빌딩 주변에는 1896년에 세워진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옛터를 알리는 표석과 신
교육(新敎育) 발상지를 강조하는 표석이 있으며 배재 학생들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졸업사진의
단골 촬영지로도 활약했던 늙은 향나무가 옛 교정을 지킨다.


▲  오랜 세월 배재학당을 지켜왔던 향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호

배재학당 향나무는 약 580년 숙성된 나무로 앞서 정동 회화나무보다 10년 정도 늙었다. <1972
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525년> 높이는 16.5m로 동관과 키가 비슷하며
둘레는 2.25m로 높이에 비해 날씬하다.
왜정 때 활약했던 시인 김소월(金素月)이 좋아했던 나무라고 전하는데, 미국 하버드대 매캔교
수가 1960년대 평화봉사단원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우연히 접한 소월의 주옥 같은 시에 완전
히 퐁당퐁당 빠져들었다. 하여 그의 시를 통해 한국 문학을 공부했으며 소월과 인연이 깊다는
이 향나무의 사연을 전해 듣고 그가 죽지 않도록 보살폈다.

또한 믿거나 말거나 전설도 한 토막 전해오고 있는데, 나무 상부에 박힌 못은 임진왜란 시절
에 서울을 점령한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말을 묶고자 박았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가 훤칠
하지만 그때(1592년)는 기껏해야 140살 정도의 키도 작았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겠다. 허나
이 역시 부질없는 전설일 뿐이다. (고약한 왜정이 배재학당의 기운을 누르고자 향나무에 그런
말도 안되는 전설을 붙인 것으로 여겨짐)


▲  옛 배재학당의 본관 벽돌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1887년 배재학당 본관을 지을 때 투입된 붉은 벽돌이다. 본관을 밀어버리면서
벽돌 일부를 남겨 이렇게 박물관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마침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의 빗장이 활짝 열려 있어 안으로 흔쾌히 들어가보았다. 금지된 구
역을 제외한 개방된 구역을 모두 기웃거려 보았는데, 촬영금지를 알리는 딱딱한 문구가 도처
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어 새가슴 마냥 극히 일부만 사진에 담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담고
싶지만 지나친 욕심은 늘 탈이 생기는 법이다. 그러니 가끔씩 새가슴이 되는 것도 괜찮다.


▲  고종이 1887년에 내린 배재학당 현판의 위엄
명필로 유명했던 정학교(丁學敎)가 고종의 어명을 받아 쓴 것으로 김윤식(金允植)이
학교에 전달했다. 아펜젤러는 이를 매우 감사하게 여기며
자랑스럽게 학교 간판으로 삼았다.

▲  1963년 광복절에 박정희 정권이 이 땅의 근대교육에 크게 기여한
아펜젤러에게 내린 문화훈장증(文化勳章證)

▲  1963년 광복절에 박정희 정권이 아펜젤러에게 내린
문화훈장 국민장 훈장증과 훈장

▲  배재학당 옛터의 싱그러운 변신, 배재공원

배재학당 동관과 러시아대사관 사이에는 배재공원이 달달하게 자리해 있다. 이곳은 옛 배재학
당 자리로 학교가 강동으로 이전되자 본관 등을 밀어버리고 동관 북쪽에 아담하게 공원을 닦
아 옛 정동 시절을 아련히 추억하고 있다.
공원의 동서 폭은 100m 정도로 조촐한 규모이나 회색빛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로 주변 직
장인들이 많이 의지하러 오며, 늦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정동은 도심 한복판에 박혀있지만 배재공원, 정동공원 등의 공원이 있고 덕수궁(경운궁)과 미
국대사관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게다가 정동 회화나무, 배재학당 향나무 등 500년 이상 묵
은 나무를 중심으로 가로수도 많이 심어져 있어 비록 높은 빌딩이 주변에 즐비해 도심 분위기
는 어쩔 수 없지만 번잡한 분위기는 그리 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한제국 시절과 현대, 그리고
자연이 적절히 섞인 조그만 도시나 별천지라고나 할까? 그것이 정동의 강한 매력이다.

* 배재학당 동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5 (서소문로11길 19, ☎ 02-319-5578)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배재공원

▲  늦가을 누님이 살짝 다녀간 서울시립미술관 진입로

정동교회 앞 분수대 교차로에서 박석이 입혀진 숲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옛 대법원(大法院
) 건물에 둥지를 튼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한참 때는 특별전 초청권이나 공짜표를 어디선가
구하여 여인네들과 자주 찾곤 하였는데 이제는 언제 시립미술관을 스쳤는지 기억 조차 희미하
다.

이렇게 하여 정동 늦가을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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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1바퀴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 흔들바위>

서울 안산 (안산자락길, 무악동봉수대)



' 서울 도심의 서쪽 뒷동산, 안산 '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안산 남쪽 자락

▲  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안산 남쪽 자락

안산 잣나무숲길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길

▲  안산 잣나무숲길

▲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길

 



 

봄을 몰아낸 여름 제국(帝國)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6월의 끝 무렵, 서울 도심의 서
쪽 뒷동산인 안산(鞍山)을 찾았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 깃든 봉원사(奉元寺, ☞ 관련글 보기)에서 길을 시작하여 15분 정도
숲길을 오르니 무악정이란 2층 정자가 마중을 나온다. 무악정은 근래에 지어진 8각형 정
자로 여기서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내려가면 홍제1동과 연희동(延禧洞)
으로 이어지며, 동쪽 길을 10여 분 오르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이다. 그럼 여기
서 잠시 안산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녹음에 잠긴 안산 숲길 (봉원사에서 무악정으로 오르는 길)



 

♠  안산의 지붕, 무악산 동봉수대(毋岳山 東烽燧臺)

▲  정상 입구에 자리한 무악정(毋岳亭)

서울 도심 서쪽에 누워있는 안산은 해발 295.9m의 조촐한 산이다. 대륙을 향해 뻗어가는 의주
로(義州路)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338m)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홍제천(弘濟川)을 사이에 두고 백련산(白蓮山)과 이어진다.
산의 영역은 남쪽으로 천연동(天然洞)과 북아현동(北阿峴洞), 북쪽은 홍제동과 연희동, 동쪽
은 의주로, 서쪽은 서대문구청 뒷쪽과 연세대에 이르며, 남북으로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3km
내외이다.

안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습이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싣고자 걸치는 길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된 것으로 길마재라고도 부른다. <안(鞍)은 안장을 뜻함> 모래내, 추모련, 무악산이란 이
름도 지니고 있으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서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안산에 대한
속세의 관심이 지대했다는 뜻이다.
서울의 남주작(南朱雀)인 남산(南山, 목멱산)보다는 조금 높으나 인왕산과 서울의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보다는 조금 낮으며, 이들 산과 비슷하게 덩치도 고만고만해
아무리 산행을 길게 잡아도 2시간 내외면 충분하다. 또한 바위와 벼랑이 많은 동쪽 정상부를
제외하면 산세가 완만하고 산길이 잘 닦여져 있어 누구든 부담 없이 안길 수 있으며, 조망도
일품이고 수맥도 풍부하여 20여 개의 약수터가 나그네의 목마름을 어루만진다.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인왕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서북쪽으로 둘러싼 형태로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주요 요충지이다. 하여 산을 둘러싼 다툼도 여럿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1623년에 일어났던 이괄(李适)의 난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의 주역이던 이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
으켜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
祖)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충청도 공주(公州)로 급하게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인조의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쳤는데,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
췄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사람들이 대체로 하얀 옷을 즐겨입다
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면서 도성을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까지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이때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후금(後金)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청태종(淸太
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래서 그 푸닥거리로 일
어난 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청나라군이 안산과 무악재의 눈치를 보며 서울로 진격
했고, 1950년 9월에는 인천(仁川)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고자 북한군과 격전
을 벌였다.

안산의 품으로 들어서려면 서대문구청이나 홍제천 인공폭포(연희숲속쉼터). 봉원사, 천연동,
독립문파크빌, 무악재역, 홍제1동, 한성과학고 등지에서 접근하면 된다. 또한 서대문구청에서
안산자락길이라 불리는 둘레길(7km)을 야심차게 닦아놓았는데,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
행길 10선'에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격하게 칭송을 받고 있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 지역의 주요 고찰(古刹)이자 영산재(靈山齋)의 성지(聖地)인 봉원
사가 있고, 산 동쪽 정상에는 무악산 동봉수대가 있으며, 연희숲속쉼터와 안산자락길, 메타세
콰이어숲길, 잣나무숲길 등의 명소가 준비되어 있어 지루할 틈이 거의 없다.


▲  안산 동쪽 정상 밑에 자리한 헬기장
(서쪽 정상과 동쪽 정상 사이)

▲  안산 동쪽 정상에 씌워진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지방기념물 13호

하늘과 맞닿은 안산의 지붕에는 2개의 봉우리가 봉긋 솟아있다. 이중 서쪽 봉우리가 안산 정
상으로 안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그곳에는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이 100% 통제되어 있다. 하
여 자유로운 공간인 동쪽 봉우리(동쪽 정상)가 실질적인 정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 서쪽 봉우
리보다 약간 낮을 뿐, 높이는 거의 비슷하며 바로 그 봉우리에 무악산 동봉수대(문화재청 지
정 명칭은 '무악산 동봉수대터')가 천하를 굽어보며 요새처럼 자리해 있다.

봉수대는 불을 피워 연기와 불빛을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서울로 빠르게 전달하던 것으로 주
로 산 정상에 자리를 닦았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 봉수대의 역할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고 그 봉수대를 이용한 봉수체제가 그나마 제일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비와 눈이 내려 연기가 여의치 못할 때는 봉수지기가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조선시대 봉수제(烽燧制)는 1438년에 확립되었는데, 그때 무악산(안산) 정상에 봉수대가 만들
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악산은 안산의 다른 이름으로 안산과 인왕산 경계에 자리한 무악재에
서 비롯됨)
지금은 동봉수대 1개 밖에 없지만 원래는 2개로 동,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봉수대는 조선의
제3봉수로(烽燧路)의 경유지로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시작하여 황해도(黃海道)와 파주, 고양
해포나루, 무악산 동봉수대를 거쳐 남산 훈도방(남산 목멱산 봉수대)에서 그 끝을 맺는다. 이
노선은 직봉 78곳,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그리고 서봉수대는 제4봉수로의 경유지로 황해도에
서 시작하여 경기도 해안을 따라 고양시 고봉, 무악산 서봉수대를 거쳐 남산 명래방으로 연결
되며, 직봉 71처,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이들 봉수대는 1894년 이후 봉수제가 폐지되면서 귀신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며, 그 터만 아
련히 남아 전하던 것을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동쪽 정상에 있던
동봉수대만 복원되었다. 허나 서쪽 정상에 있던 서봉수대터는 군부대가 있는 관계로 복원되지
못했다.

비록 동봉수대가 복원되긴 했으나 주위가 문화유산과 어울리지 않고 추락사고의 위험이 있다
는 문제점이 2008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하여 그때부터 2011년까지 서울시 문화재위원들
이 현장실사와 고증을 통해 화강석 성곽으로 재현하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봉수대를 부시고 2
단의 석축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봉수대를 얹혔다.
허나 이번에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이 떨어진다고 민원이 들어와 지금의 모습으로 어
색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모습이 아닌 그저 사람들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변질을
시킨 꼴이다. 굳이 좋게 포장한다면 융통성이 있고 시대에 맞게 재현된 것이 되겠지.
그러다보니 봉수대를 받치고 있는 석축과 불을 피우던 봉수대, 봉수대 주변 테두리의 돌 피부
가 확연히 차이가 나서 어색하기 그지 없다. 봉수대 석축을 이루는 돌은 고색의 기운이 약간
돌지만 봉수대와 테두리에 쓰인 돌은 하얀 피부로 파리가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맨질맨질하다.


▲  천하를 굽어보며 왕년의 향수를 달래는 봉수대
연기를 모락모락 풍기며 불빛을 날리던 왕년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안산 정상을 수식하는 장식용이자 전망대 그 이상도 아니게 되었다.

    ◀  때깔이 고운 하얀 피부의 봉수대
봉수대 가운데에 있는 네모난 창을 통해 불과
연기를 피웠는데, 그 연기는 봉수대 꼭대기를
통해 하늘로 솟구쳤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동봉수대

▲  새롭게 둘러진 봉수대 테두리

봉수대를 모자처럼 눌러쓴 안산 동쪽 정상, 그 동쪽은 바위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고,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다소 각박해 봉수대 복원 이후 추락사고의 위험이 늘 제기되었다. 하여 2011년
이후 봉수대를 새로 갈면서 주변에 하얀 피부의 테두리를 성곽처럼 두른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봉수대 모습을 다소 잃게 되었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무악재
그날따라 안개가 말썽이라 시야는 다소 흐릿했다. 이렇게 보면 인왕산이
좀 낮아보일 수 있지만 저곳이 이곳보다 무려 40m 이상 높다.
그래도 서울을 지키는 당당한 우백호가 아니던가~~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①
홍제동과 홍은동, 녹번동,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서남부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②
바로 밑으로 옛 서대문형무소를 간직한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부와 남산이 바라보인다. 안개만 아니었다면
시야가 더욱 나래를 펼쳤을 것인데 하늘의 심술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③
안산 남쪽 자락과 서울 도심부, 아현동 지역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④
안산 남쪽 자락과 봉원사, 신촌, 서대문구 지역


안산 정상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아주 휼륭하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장
안을 발 아래 두며 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뫼에 오르는 이유의 큰 하나는 바로 이런 조망
맛을 누리고자 함으로 이때만큼은 제왕도, 옥황상제도, 청와대 주인도 부럽지가 않다.
정상에서 보이는 범위는 가까이로 인왕산과 무악재, 독립문, 서울 도심부, 홍제동, 신촌, 북
한산(삼각산), 북악산(백악산)을 비롯해 멀리 서울 동부, 불암산, 아차산, 여의도, 서울 서남
부, 동작구, 강남구, 관악산과 호암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래서 왜 이곳에 봉수대를 세우고 이괄의 난(1623년)과
6.25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군사적인 요충지로 절찬리에 쓰이고 있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 무악산 동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안산에 녹아들다 (잣나무숲, 메타세콰이어숲길)

▲  가파른 벼랑을 이루고 있는 안산 북쪽 자락

안산 동쪽 정상에서 시원스러운 산바람과 조망을 누리며 20분 정도 머물렀다. 비록 하늘의 비
협조로 시야는 썩 좋지 못했으나 마치 학의 등에 올라탄 개미처럼 흐릿한 천하를 굽어보니 기
분은 즐겁다.
이곳은 예전에도 가끔씩 찾았던 곳이고 땅꺼미가 자욱한 저녁에도 침침한 두 망막을 무릅쓰고
올라가 도심 야경을 즐기며 일행들과 곡차(穀茶) 1잔 걸치기도 하였다. 지금도 1년에 서너 번
정도 찾으며 안산에 대한 나의 변치 않는 마음을 비춘다.

동쪽 정상에서 다시 무악정 방면으로 내려가면 헬기장이 있다. 여기서 길은 3갈래로 갈리는데
, 서쪽은 무악정으로, 남쪽은 안산 남쪽 능선, 그리고 북쪽은 홍제동으로 이어진다. 그중 북
쪽 길은 아직 미답(未踏)의 상태라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북쪽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각박한 경사로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바로 동쪽이 무악재와 접한 벼랑이라 각별한 주의
가 필요하다. (길 중간중간에 바위들이 있음)


▲  안산 정상 북쪽 밑에 자리한 안천약수터 주변

정상 헬기장에서 북쪽 길을 6~7분 정도 내려 가면 안천약수터가 모습을 비춘다. 안산에서 가
장 높은 곳에 자리한 약수터로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으니 물맛도 좀 특별할 것이라 여겨지
나 내가 갔을 때는 여름 가뭄으로 물은 완전히 말라버렸고, 여러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이 검
출되어 '음용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은 상태였다.
하긴 이곳만의 일이랴. 안산을 비롯해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의 많은 약수터도 비슷
한 곤란을 겪고 있어 서울 도심에서 깨끗한 자연산 물을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줄고 있다.
그만큼 서울의 건강이 나쁘게 변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샘터 주변에는 간단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이 닦여져 있으며, 동쪽에는 주름진 바위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다.

▲  깔끔하게 정비된 보람도 없이 부적합
판정을 받은 안천약수터

▲  샘터 동쪽에는 주름진 바위와 간단한
운동시설이 모여있다.


▲  안천약수터에서 바라본 무악재와 인왕산

▲  안산 북쪽 자락 숲길
인적도 없는 호젓한 산길을 혼자 거닐으니 마치 아비규환의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해탈감이라고나 할까?
비록 잠시뿐이지만..


▲  안산 메타세콰이어 북쪽 숲 직전 숲길

안천약수터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안산자락길과 홍
제동으로 바로 이어지고, 왼쪽(서쪽)으로 가면 메타세콰이어숲이 싱그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안산에는 북쪽 자락과 서쪽 자락(숲속무대 주변)에 메타세콰이어숲을 닦았는데, 이들은 안산
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아름다운 얼굴이다. 북쪽 숲은 서쪽 숲에 비해 덩치가 매우 작아
정말 순식간에 숲길이 끝나 조금은 섭섭하다. 허나 늘씬하게 솟아나 하늘을 찌르는 모습이 시
원시원하니 그것이 발음도 어려운 외래종 메타세콰이어의 매력이라 하겠다. 안산자락길은 북
쪽 숲 밑을 지나가며 서쪽 숲 한복판을 가로질러 안산을 1바퀴 휘감는다.


▲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숲길
군살 없이 쭉쭉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하늘을 가리며 우수한 그늘을 베푼다.


▲  한낮에도 거의 어두운 메타세콰이어숲의 위엄
해가 긴 여름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낮의 길이를 감소시킨다.

▲  북쪽 메타세콰이어숲에서 잣나무숲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숲길

▲  드디어 이른 안산자락길 (잣나무숲길)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에서 서쪽 산길을 고집하면 무장애길로 이루어진 안산자락길이 마중을
한다.
안산 허리를 따라 이어진 안산자락길은 이 땅에 흔한 둘레길의 하나로 '둘레길' 대신 '자락
길'을 칭하고 있는 점이 이채로운데, 총 길이는 7km로 2010년 10월부터 3단계 과정을 거쳐
2013년 12월 완성을 보았다.
총 사업비는 48억(서울시 지원 33억, 서대문구 15억)으로 노약자와 장애인, 휠체어나 유모차
의 편의를 위하여 전 구간을 무장애자락길(나무데크길, 마사토 포장길)로 싹 닦았다. 그래서
2016년 4월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의 하나로 꼽
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널리 칭송을 받기도 했다.
허나 너무 편리를 강조하다 보니 산길의 진미인 흙길이 거의 없는 것이 단점이다. 하여 흙길
을 원한다면 다른 산길을 이용하거나 자락길 안쪽에 닦여진 초록숲길을 이용해야 되며, 자락
길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시내에서 접근하려면 어느 정도 오르막길과 산길을 겪어야 만날
수 있다.

안산자락길은 연희숲속쉼터 윗쪽, 자락길전망대, 천연마당쉼터, 안산천약수터, 숲속무대, 메
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을 두루 거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순환형으로 봉원사나 천연동
뜨란채아파트, 독립문파크빌아파트, 무악재역, 기원정사, 연희숲속쉼터, 서대문구청에서 접근
하면 된다.


▲  잣내음으로 그윽한 잣나무숲길

안산자락길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잣나무숲이 진한 잣내음을 들이밀며 나타난다. 이곳은 연희
숲속쉼터와 메타세콰이어 서쪽 숲 사이에 자리해 있는데, 숲 한복판에 안산자락길이 흘러가
그림 같은 잣나무숲길을 빚어내고 있으며, 숲길의 길이는 0.3km로 메타세콰이어숲과 함께 안
산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잣내음이 가득해 상쾌한 느낌을 안겨주며, 잣나무가 베푼 산바람이 비록 약하긴 하지만 속세
의 기운과 여름의 기세를 꾸준히 털어간다. 이 숲을 지나면 바로 메타세콰이어 서쪽 숲길이
펼쳐지나 그곳은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터라 길을 접고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안산
자락길 북쪽 구간으로 방향을 돌렸다.


▲  저 자락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원스럽게 뻗어가는 잣나무숲길의 위엄

▲  잣나무숲길 남쪽 구간

서울에 대표적인 잣나무숲으로는 이곳 외에도 동작충효길 고구동산 잣나무숲과 호암산(虎巖山
) 잣나무숲이 있다. 이들이 시골에 있었다면 감흥이 덜했겠지만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 한복
판에 고스란히 박혀 있으니 그 감흥은 클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자연은 인간에게 소중하다.



 

♠  안산자락길 마무리

▲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

잣나무숲에서 잠시 자락길을 버리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넓게 잘 닦여진 안산 산책로(연희로32
길)가 나온다. 그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올라온 길로 안산자락길이 이 길의 신세를 잠시
지며 동북쪽으로 흘러가는데 그 길의 끝에서 폭이 확 줄어들면서 북쪽 전망대가 고개를 내민
다.

북쪽 전망대는 안산의 가장 북쪽 끝(모래내로 이북은 제외)으로 비록 조망의 질은 정상보다
엷어도 홍제동과 홍은동, 무악재, 탕춘대능선, 북한산(삼각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앞서 잣나무숲에서 내려온 자락길과 연희로32길이 합쳐지는 곳에서 북쪽 전망대까지 1890년대
부터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까지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100여 인의 정보가 담긴 안내문이
차례대로 걸려 있어 잠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자락길 전망대에도 일부가 있음)
이들의 안내문을 설치한 것은 안산 동남쪽 밑에 서대문독립공원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자락
길을 거닐면서 이 땅의 광명을 위해 숭고하고 거룩한 삶을 살다간 그들을 생각하고 기려보자.
그것이 안산이 우리에게 준 의무이자 숙제이다.

북쪽 전망대에서 무악재를 거쳐 독립문파크빌까지 나무로 다진 무장애데크길이 펼쳐지며, 홍
제동과 무악재에서 안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만 있었을 뿐, 무악재 옆을 가로질러 남북으
로 이어지는 산길은 원래 없었다. 그러다가 자락길이 닦이면서 발길이 어려웠던 안산 무악재
구간 접근이 가능해졌다.


▲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홍제동과 홍은동을 위시하여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자락길 북쪽 구간과 무악재 구간이 만나는 곳
길 경계에 계수기(計數機)를 설치하여 안산자락길을 이용하는
사람 수를 조용히 체크한다.

▲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북쪽 전망대에서 무악재 방면)

▲  서울에도 흔들바위가?? 귀엽게도 들어앉은 안산 흔들바위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에서 자락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가면 흔들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마
중을 한다.
커다란 암반에 바짝 붙어있는 돌덩어리가 흔들바위로 흔들바위의 대명사인 설악산 흔들바위보
다는 볼품과 위엄이 많이 떨어진다. 허나 손으로 밀면 아주 조금은 흔들거려 흔들바위의 자격
은 그런데로 갖추고 있다. 허나 대부분 사람들이 지나칠 뿐, 그를 밀어 흔들바위의 이름값을
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어 속세의 관심이 시급하다.

이 바위는 안산자락길 조성으로 발견된 것으로 암반 위에 철썩 붙은 것이 충주 미륵리절터의
공기돌바위와 비슷한 폼이다.
안산은 돌이 많은 산이라 동쪽 정상 주변과 동쪽 자락을 중심으로 바위와 벼랑이 즐비하니 이
바위 역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이 안산에 살포시 얹혀놓은 소소한 작품이다. 그 동쪽에도 잘
생긴 바위 하나가 이름도 없이 자리해 있는데, 동쪽에서 보면 거북이가 바위에 웅크리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다.

▲  흔들바위 동쪽에 있는 이름 없는 바위

▲  너와집쉼터 입구

흔들바위를 지나 무악재 쪽으로 움직이면 너와집쉼터 이정표가 마중한다. 그 이정표의 안내를
받으며 서쪽 산길을 오르면 숲속에 묻힌 너와집이 진하게 모습을 비춘다. 서울 도심에서 너와
집이라니? 흔들바위만큼이나 신선하기 그지 없는데 그는 서대문구청에서 안산자락길을 다지면
서 조촐한 여흥거리로 마련한 것으로 경상북도 산골의 너와집을 현대식으로 조금 손질하여 지
은 것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살림집은 아니라고 하며, 관리하는 사람이 매주 여러 번 찾아와 관리를 하거
나 잠깐씩 머문다. 서울에 거의 유일한 너와집으로 너와집 체험 겸 전통찻집으로 활용하는 것
이 좋을 듯 싶은데, 그냥 눈요깃감으로만 두고 있는 것이 조금 아쉽다.

집 옆에는 하얀 피부의 위성방송 안테나가 귀를 열고 있어 이런 산골까지 TV가 들어오나 놀라
울 따름이다. 허나 생각해보니 여긴 엄연한 서울 한복판이다. 지리산이나 태백산맥, 개마고원
산골이 아니다.
집 앞에는 안산이 베푼 조그만 개울이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데, 그 개울에는 나무다리가 있으
며, 집 주변에는 장독대와 너와집쉼터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안산 산골에 숨겨진 너와집
이렇게 보면 강원도나 경북의 첩첩한 산골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엄연한
서울 한복판이다. (서울 4대문이 바로 지척임)

▲  너와집 옆에 자리한 너와집쉼터

▲  너와집 샘터

▲  시원스럽게 뻗은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  무악재 서쪽 벼랑에 닦여진
자락길전망대


자락길전망대는 무악재 서쪽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닦여져 있다. 이곳은 자락길을 닦으면서 달
아놓은 공간으로 필체가 돋보이는 '자락길전망대' 현판이 인상적인데, 이 글씨는 2012년 10월
에 작성된 것으로 글씨 좌우에 도장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투구처럼 생긴 바위와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의자가 여럿 설치되어 있고, 바로 밑에
자리한 홍제동을 비롯해 홍은동과 무악재, 인왕산,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잡히나 보이
는 범위는 좁다.


▲  자락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회색빛으로 물든 홍제동과 홍은동 지역을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자락과
인왕산 일부가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자락길전망대 바위 (투구바위)
바위 이름은 아직 없으나 일부가 투구처럼 생겨서 투구바위라 불러도 손색은
없어 보인다. 자락길전망대 개설로 바위 아랫도리가 가려져서 그렇지
저 바위 자체가 장대한 바위 벼랑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자락길전망대

▲  잠깐 포장길로 안면을 바꾼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무악재 남쪽)

▲  숲속에 자리한 조그만 야외 독서실, 자락길 북까페(Book cafe)

자락길 전망대에서 무악재 구간을 넘으면 조그만 책장을 지닌 북까페가 마중한다. 이곳은 책
장과 기와 정자, 그리고 동그란 탁자와 의자 세트가 여럿 놓여져 있는데, 책은 대부분 기증받
은 것으로 누구든 기증과 독서가 가능하다. 허나 그렇다고 책을 소장용으로 가져가지는 말자.
이곳이 공용 북까페의 성격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  북까페에서 바라본 안산 정상 (가운데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

나는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 봉우리 정상(무악산 동봉수대)에 서 있었다. 허나 눈을 떠보니
나는 그 한참 밑 북까페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정상에 있던 것은 혹여 꿈속은 아닐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축지법이나 순간이동을 쓴
것일까? 산과 자락길은 그대로인데 나란 존재는 계속 바뀌니 말이다. 이렇게 보니 정말 안산
을 휘감듯 돌아다녔다.


▲  한성과학고 뒷쪽 안산자락길

▲  한성과학고 뒷쪽 안산자락길에서 바라본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

▲  안산자락길 현저동 구간

무악재를 넘은 안산자락길은 현저동(峴底洞) 구간으로 들어서면서 한성과학고와 독립문파크빌
아파트의 뒤쪽을 지나간다. 이 구간은 벼랑 일색이라 잔도(棧道)처럼 나무데크길을 길게 내었
으며, 벼랑길을 지나면 포장길이 펼쳐진다.


▲  벼랑 밑을 지나는 안산자락길 현저동 구간

안산자락길이 너무 안(安)스럽게 닦여진 탓에 움직이는 길이 정말 순식간이다. 북까페에서 한
성과학고 뒷쪽을 지나 어느덧 독립문파크빌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무데크길은 끝나고
포장길이 펼쳐져 안산 남부까지 이어지는데, 제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19시가 넘어간 상태라
햇님은 꼴딱꼴딱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뺀다. 그 사이를 비집고 어두운 땅꺼미가 자리를 피
며 천하에 어두운 물감을 물들인다.

독립문파크빌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 독립문삼호아파트 뒷쪽에서 안산자락길과 인연을 정리
하고 시내로 내려왔다. 이렇게 하여 안산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신촌동, 연희동, 홍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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