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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5.09 설렁탕의 탄생지이자 선농대제의 오랜 현장, 제기동 선농단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역사문화관, 선농대제 설렁탕>
  2. 2019.08.25 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 서울연꽃축제의 성지,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3. 2019.02.15 세계 구석기시대 유적의 대표 성지,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 (전곡선사박물관,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4. 2018.10.23 군포 수리산, 반월호수에서 가을을 맞이하다 ~~~ (철쭉동산, 수리산산림욕장, 수리산둘레길, 수리사)
  5. 2018.05.23 서울의 대표음식인 설렁탕의 탄생지, 제기동 선농단 ~~~ (선농대제 축제, 선농단 역사문화관, 선농단 향나무, 따끈한 설렁탕 1그릇)
  6. 2017.10.27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거닐다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강감찬 생가터, 낙성대공원)
  7. 2017.05.24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원찰로 지었다고 전하는 회기동 연화사 ~~~ (월계동 기원사)
  8. 2016.10.19 황토길과 맨발축제의 영원한 성지, 대전 계족산 (장동산림욕장, 계족산황토길, 계족산맨발축제, 계족산성)
  9. 2016.08.12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대축제)
  10. 2016.07.06 교과서에도 나오는 서울 선사유적의 성지, 가족 나들이 추천 명소 ~~ 암사동 선사유적지 (움집, 선사전시관) 2

설렁탕의 탄생지이자 선농대제의 오랜 현장, 제기동 선농단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역사문화관, 선농대제 설렁탕>

제기동 선농단 선농대제



' 설렁탕의 고향, 제기동 선농단 (선농대제) '
선농단 선농대제
▲  선농단 선농대제
 


 

봄이 한참 절정에 이르는 4~5월이 되면 천하 곳곳에서 다양한 축제와 문화행사가 열린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서는 종묘대제(5월 1주 일요일)와 연등회(석가
탄신일 1주 전 토~일), 석가탄신일(음력 4월 8일), 선잠제향(5월 중), 선농대제(4월) 등
이 열리는데(그 외에도 더 있음) 이들 축제 중에서 무려 비싼 설렁탕을 무료로 제공하는
착한 축제가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제기동 선농단에서 열리는 선농대제(先農大祭)이다.
<3글자로 줄여 선농제(先農祭)라고도 함>


▲  제기동역에서 선농단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왕산로19길)
선농단입구인 함경면옥에서 선농단 방향으로 약 100m의 꿀 같은 숲길이
펼쳐져 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선농단 향나무
향나무가 있는 곳이 바로 선농대제의 뜨거운 현장인 선농단이다.


드디어 선농대제가 열리는 4월 말 토요일, 따사로운 오전 햇살의 응원을 받으며 도봉동(
道峰洞) 집을 나섰다.
1호선 전철을 타고 20여 분을 달려 제기동역에서 하차했는데 선농대제 관람과 잘 숙성된
설렁탕을 먹는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랜다.

선농단 입구에 이르니 선농대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시원한 봄바람에 펄럭이며 대제를 구
경하러 온 사람들을 인도한다. 현수막은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으
며, 이제 막 제왕의 어가행렬이 끝나고 제례를 봉행(奉行)할 시간이 되어 선농단 주변은
제관과 행사요원, 취재진, 나들이객, 동네 사람 등 수천 명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회색빛 대도시 속에 조용히 묻혀 지낸 선농단, 국가 지정문화재
란 굵직한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원래 임무인 제단에서 강제로 은퇴한 몸이라 꽤 적적한
신세이다. 그런 그에게도 천하가 미치도록 주목을 하는 때가 1년에 딱 하루가 있으니 바
로 선농대제일이다.



 

♠  설렁탕의 탄생지, 농사의 중요성을 알리고 풍년을 기원하던
조선의 주요 국가 제단, 선농단(先農壇) - 사적 436호

▲  선농단 (선농대제가 끝난 직후의 모습)

선농단은 종암초교 남쪽이자 제기동 주택가 한복판에 고즈넉하게 누워있다. 이곳은 1476년에
조성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관경대(觀耕臺)로 조선의 제왕들이 신하를 거느리고 농사의 소중
함을 알렸다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를 지내 풍년을 기원했다. 이 제사를
선농제(선농대제)라고 하며, 거기서 선농단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선농
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청동기시대부터 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은 그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제왕이 직접 제사를 챙기고 농사를 권장했다는 기록은 신라 초인 기원전 41년에 처음 나타난
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비와 함께 6부(六部)를 순행(巡行)하여 농사와 잠사(
蠶事)를 권장하고 감독했다고 하며, 매년 경칩(驚蟄)이 지나고 첫 해일(亥日)을 택하여 왕이
제를 지내고 적전을 갈거나 또는 관리를 보내 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나중에 경주 동쪽인 명활산성(明活山城) 남쪽 웅살곡(熊殺谷)에서 선농제를 지냈으
며, 입하(立夏) 뒤 첫 해일에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 선농제란 이름은 바로 신라 때 생겨
난 것이다.

고려 때는 983년 1월, 성종(成宗)이 원구단(園丘壇)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몸소 적전
을 갈아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냈다. 하여 이때부터 이 땅의 토속적인 농사 신(神) 대
신에 중원대륙에서 가져온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허나 고려는 제왕이 원구단에 나가 하늘에 제를 지낼 때, 풍년을 같이 기원했고, 매년 열리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에서도 일종의 기곡제(祈穀祭)를 지내 별도의 선농제는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던 선농제가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조선 초부터이다. 태조 때 적경공제지법(籍耕供
祭之法)을 제정하고 태종 때는 적전단(籍田壇)을 수축했으며, 1430년에는 박연(朴堧)의 건의
로 선농지악(先農之樂)에 쓰이는 토고(土鼓)를 대체하고자 가죽 테를 한 북을 만들어 사용했
다. 그러다가 1476년 성종의 왕명으로 관경대를 만드니 그것이 현재 선농단이며, 사직단(社稷
壇), 선잠단(先蠶壇), 영성단(靈星壇)과 더불어 국가의 주요 제단으로 큰 대접을 받았다.

선농제를 지낼 때는 제왕이 직접 신하를 거느리고 제를 지냈으며, 그것이 끝나면 동적전<제기
동과 전농동(典農洞) 일대>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적전을 관리하는 적전령(籍田令)이 푸른 보
자기에 감싸인 쟁기를 제왕에게 올리며, 그것을 받은 제왕은 직접 쟁기를 잡고 밭에 5번 쟁기
질을 하는 이른바 친경(親耕) 쇼를 벌였다.
쟁기가 끝나면 관경대로 올라가 백성 가운데 특별히 선발된 70세 이상 노인들을 위로하고 그
들이 밭을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농작물 씨앗이 얼어죽는 것을 막는 절차까지 마무리
되면 의식이 끝났음을 선포하고 궁궐로 돌아간다. 이렇듯 친경의례는 농사의 소중함을 제왕이
몸소 보여주고 비록 잠깐이지만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으로도 활용되었다.

허나 친경의례는 성종 이후 어쩌다 1회 벌일 정도로 거르는 경우가 많았으며(연산군 1회, 중
종 2회, 명종 1회, 선조 1회, 광해군 1회) 인조에서 현종까지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숙종(肅
宗)은 의식을 치루려고 단단히 준비까지 했으나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무산되었으며, 영조 시
절에 비로소 다시 치러지게 된다.

동적전이 있던 제기동과 전농동 지역은 지금은 완전 주택가라 썩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20세
기 초까지만 해도 너른 경작지였다. <제기동(祭基洞)은 제사를 지내는 터란 의미로 선농단에
서 비롯된 이름임>
왕실에서 관리하던 적전(籍田)은 2곳이 있었는데 선농단 근처에 동적전이 있었고, 개성(開城)
동쪽 전농동에 서적전(西籍田)이 있었다. 동적전은 제사용 곡식을 저장했는데, 선농단(관경대
)과 희우정(喜雨亭), 필분각(苾芬閣)이 있었고, 다수의 창고가 있었다. 반면 개성에 있는 서
적전에는 형향각(馨香閣)과 창고가 있었다.
동적전에서 나온 곡물은 종묘제례에 주로 썼으며, 서적전 곡물은 왕실에서 벌이는 온갖 제사
의식에 동원되었다. 이들 적전에서 쓰고 남은 곡물은 백성을 구휼할 때 쓰거나 의약청(議藥廳
), 산실청(産室廳) 및 제왕과 왕비의 예장(禮葬)에 사용했다.

▲  선농단 북쪽 홍살문

▲  선농단 향나무와 설렁탕 부뚜막

이렇듯 왕실의 주요 행사로 바쁘게 살았던 선농제는 1909년까지 잘 유지되었으나 1908년 이후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순종의 칙령(勅令)에 따라 국가 제단을 정리하면서 사직단에 통합
되었다. 허나 동적전 친경의례는 1910년 5월까지 이루어졌는데 그때 순종이 신하와 백성을 거
느리고 친경을 하는 장면이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다.

왜정(倭政) 때는 지역 사람들에 의해 선농제가 조촐히 진행되었으나 1940년대 왜정이 망국의
제단을 욕보이고자 선농단 주변에 청량대공원(청량대)을 닦으면서 제단을 아작내고 동적전이
있던 곳에는 전농공원을 만들었다. 이때 제단 북쪽 땅이 떨어져나가 보통학교(현재 종암초교,
1922년 개교)가 지어졌고, 1935년 제단 남쪽에 경성여자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가 들어
서면서 남쪽 땅까지 썰려나갔다. 또한 군수물자 징수란 명목으로 제사 도구까지 거의 뜯어가
제사도 중단되고 말았다.

어둠의 시절 이후에도 수난은 여전하여 1946년 이후 제단 주변에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30
년 이상 잠수 아닌 잠수를 타며 주택가에 묻혀있었다. 그러는 사이 선농단의 이름도, 존재감
도 모두 희미해져 세상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1979년 제기동에 뜻있는 이들이 '선농단친목회'를 결성하여 자비를 들여 1년에 1번
씩 치제(致祭)를 올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 세월의 저편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선
농단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그렇게 선농단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동대문구와 같이 제례를 지내다가 1988년 행
정기관장 최초로 동대문구청장이 선농제 초헌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1992년에는 '선
농대제 보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동대문구의 흔쾌한 지원과 폭풍 홍보에 힘입어 지역의 대
표 축제이자 문화행사로 제대로 거듭났다. 행사 규모도 비록 옛날만큼은 못해도 나날이 커져
갔다.
그러다가 선농단 복원 여론이 강하게 피어나면서 2013년 8월, 선농단 주변에 장막을 치고 복
원 공사에 들어갔고 2015년 4월 공사가 완료되어 옛 모습이 상당수 회복되었다. 그리고 선농
단 북쪽에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을 닦아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이해를 돕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선농단 일대는 선농단 역사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선농단의 구조는 단 주위로 크게 터를 다지고 그 한복판에 단을 두었다. 단이라고 해서 높이
구축된 것은 아니며 땅바닥에서 조금 솟은 정도이다. 제단 테두리는 돌로 잘 다지고 안쪽은
흙으로 다졌는데, 2015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부득이 하얀 피부의 석재가 다소 섞여있
다. 기존에 쓰였던 옛 석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여 늙은 돌과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 돌도 선배 돌을 닮아가며 고색의 기운을 머금을 것이
다.
제단 외곽에는 낮은 키의 토담을 쌓았고, 동쪽과 서/남/북쪽 테두리 중앙에 붉은 피부의 홍살
문을 세웠는데. 이들 문과 토담은 2015년에 복원된 것이다. 선농단 남쪽에 1단의 석축을 두었
으며, 단 서남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향나무가 영욕의 세월을 견딘 제단을 굽어보고 있다.

▲  선농대제의 한 모습

▲  선농단 동쪽 홍살문

선농대제는 처음에는 정월 길(吉) 해일(亥日)에 했으나 태종(太宗) 때 경칩이 지난 첫 해일로
변경되었다. 그때가 농사가 시작되는 3월이기 때문이다. 음력 2월 첫 신일(辛日)에도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1910년에는 양력 5월에 거행되었다. 그러다가 1979년 이후에는 4월 말~5월
초/중순 사이에 하다가 지금은 4월 하순 토요일에 한다. (2023년은 4월 22일에 했음)

제향(祭享)은 10변(籩) 10두(豆)의 중사(中祀)로 거행하고, 친림제향 때는 아헌관(亞獻官)은
왕세자(王世子)나 황태자(皇太子)가, 종헌관(終獻官)은 영의정이 맡았다. 집례(執禮)의 창홀
(唱笏)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고 육일무(六佾舞)를 추며, 제례 봉행 순서는
① 전폐례(奠幣禮) - 농업신에게 예물을 올리는 의식
② 천조례(薦俎禮) - 제신(祭神)에게 음식을 올리는 진찬(進饌)의식
③ 초헌례(初獻禮) - 초헌관이 1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④ 아헌례(亞獻禮) - 아헌관이 2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⑤ 종헌례(終獻禮) - 종헌관이 3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⑥ 음복례(飮福禮) - 제관이 제사를 마치고 신이 내린 제물을 먹는 의식
⑦ 망료례(望燎禮) - 폐백과 축문을 태워 땅에 묻는 의식
순으로 거행된다.

영신악(迎神樂)은 경안지악(景安之樂)을 연주하고 전폐례에는 숙안지악(肅安之樂). 진찬례에
는 옹안지악(雍安之樂), 초헌례에는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며 일무생들은 문무(文舞)를
춘다. 이어서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할 때는 일무생들은 무무(武舞)를 추기 시작하며, 아
헌례와 종헌례 때는 수안지악을 다시 연주하고 철변두(徹籩豆) 때는 옹안지악을, 송신할 때는
경안지악을 연주한다. (절차가 매우 복잡함)

제사 제물로는 소와 돼지, 양의 고기와 피, 쌀과 기장, 과일, 떡, 술 등을 썼으며, 모든 행사
가 끝나면 친경에 쓰인 소를 잡고, 제물로 쓰인 소고기를 넣어 탕을 끓였다. 그리고 제물로
쓰인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돼지고기는 편육으로 썰었는데, 탕에 밥을 말고 편육과 여러
반찬을 겯드려 행사에 참여한 신하와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제물에 김치가 없기 때문에 파를 씻어다 놓았고, 간장도 쓰지 않기 때문에 소금으로 탕의 간
을 맞추었다. 오늘날 설렁탕을 먹을 때 파와 소금을 겯드리는데, 그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
된 것이다. 또한 선농단에서 만든 탕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설농탕','설롱탕'이라 불렸
으며,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가운데 글자가 살짝 움직여 지금은 '설렁탕'으로 주로 불린다.
우리나라 대표 음식의 하나이자 서울의 토박이 음식 설렁탕은 이렇게 선농대제 뒷풀이 음식으
로 태어났다.

또한 설렁탕의 옛 이름 중 하나인 설농탕의 유래에 대해서 1940년에 홍선표가 쓴 '조선요리학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앞서 선농탕과는 약간 다른 것이라 햇갈림을 준다.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하던 때에 비가 심하게 내려서 촌보(寸步)를 옮기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신하들이 배가 고파서 견디기가 힘드니 왕이 친경에 쓰던 소를 잡아서 맹물에 넣고
끓이라 하였다. 고기 끓인 국물에 소금을 넣어 먹으니 이것이 설농탕이다'

그 외에 오랫동안 탕을 끓이면 국물이 흰빛을 띠어 '눈처럼 뽀얗다','눈과 같이 무르녹는다'
는 뜻에서 설롱탕이 되었고, 그것이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견해도 있다. 허나 보통은 선농탕
유래를 많이 따른다.

동대문구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거듭난 선농대제는 9시부터 시작된다. 왕산로에서 선농단까
지 짧게 어가행렬을 비롯한 제례 행렬을 선보이며 (예전에는 동대문구청에서 출발했음) 보통
10시 반부터 12시 전까지 제례를 봉행한다. (행사시간은 매년 조금씩 다를 수 있음)
제례를 치르는 동안 선농단 북쪽 종암초교에서 동대문구 공무원과 새마을단체 사람들이 점심
을 준비하며 보통 10시 반이나 11시부터 선농대제의 백미(白眉)이자 상징인 '전통 설렁탕 재
현 및 나누기' 시간을 갖는다. 설렁탕은 누구든 먹을 수 있으며, 밥과 김치, 깍두기, 떡, 생
수가 제공된다.
설렁탕은 넉넉히 준비하기 때문에(보통 2,000~3,000명 분을 준비함)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다만 초반에 가면 사람이 너무 미어터져 밥이 내 앞에 오기까지 상당한 인내를 요하니 사람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30~40분 이후에 먹기를 권한다. 음식은 각자가 알아서 챙기는 것이 아닌
새마을단체 사람들과 자원봉사 학생들이 알아서 갖다준다. 늦게 갔을 경우에는 밥을 먹을 의
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가급적 12시 안에 가야 안전함, 사람이 몰릴 경우 일
찍 떨어짐)

무료 설렁탕이지만 맛은 생각 외로 괜찮아 어지간한 설렁탕 전문점을 울게 할 정도이다. 시중
에서 거의 8,000원~10,000원대를 하는 설렁탕을 선농대제의 일환으로 무료로 먹을 수 있으니
정말 좋은 축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3시부터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에서 설렁탕 요리대회(설롱 요리대회)가 열리며 요리가
끝나면 시식 기회를 준다. (오후 행사는 매년마다 다를 수 있으며, 2023년에는 하지 않았음)

* 선농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선농단역사문화관 ☎
  02-3285-5560)
* 선농단역사문화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남쪽 홍살문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선농단과 선농대제 둘러보기

▲  서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에는 푸른색 시트 커버를 걸친 제사상 4개가 놓여져 있다. 이중 큰 상은 선농단 북쪽과
동쪽에 배열하니 이들은 농업신인 선농씨와 후직씨의 밥상이며, 다른 조그만 상 2개는 선농단
밑에 둔다.
제단에서 남쪽 홍살문까지 붉은 카페트를 깔고, 서쪽과 남쪽에도 붉은 카페트를 깔아 바로 남
쪽으로 향하게 했는데, 이들은 제왕을 비롯한 제관이 움직이는 동선이다. 제단 남쪽 정면 길
로 제단으로 들어가 의례를 치른 다음, 서쪽이나 동쪽 카페트를 따라 다시 남쪽 자리로 돌아
오는 것이다.

선농단 주위로 갑옷을 입거나 무관 복장을 갖춘 사람들이 삼엄하게 늘어서 있어 선농제의 엄
숙함을 한껏 고조시킨다. 1시간 반 가까이 저렇게 서 있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허나 옛날과 달리 그저 자리만 지키면 되며, 옆 사람과 수다를 떠는 모습도 쉽게 목격이 된다.
그것이 옛날과 오늘날 선농대제의 차이이다. 만약 옛날이었다면 바로 파직 또는 징계각이다.


▲  전통 방식으로 재현된 가마솥 설렁탕 부뚜막

선농단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부뚜막을 설치하여 정겨운 가마솥을 걸고 설렁탕을 끓이고 있다.
장작을 넣어 부뚜막을 계속 흥분시키며 탕을 숙성시키고 있는데, 선농대제가 무르익을수록 설
렁탕도 그만큼 익어간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대제

선농단 남쪽 밑에는 금관조복(金冠朝服)을 갖춘 제관들이 홀(忽)을 쥐어들며 3줄로 늘어서 있
다. 이들 상당수는 선농대제 보존위원회 위원들로 석전대제와 사직대제, 종묘대제 보존위원들
도 섞여있다. 제왕은 보통 동대문구청장이 담당하고 있는데, 대례복(大禮服)과 12면류관을 갖
춘 자못 제왕다운 모습으로 대제에 임하고 있다.
제관들은 노천에 멍석을 깔고 앉거나 절을 하지만 제왕은 그들 동쪽에 차려진 노란색 천막 안
에서 햇살을 피하며 대기한다. 그리고 의식을 행할 때는 옆에 자리한 내관이 붉은 일산(日傘)
을 받쳐들고 그를 따르니 역시나 제왕이나 우두머리 자리가 좋긴 좋다.

제관 자리 남쪽에는 하얀 천막이 쳐져 있고 의자가 넉넉히 놓여져 있어 행사 관계자들과 세금
이나 축내는 구의원과 국회의원, 고위 관리 잡것들과 지역 유지들, 관람객들이 앉아있으며 제
관들 서쪽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있는데 이들은 일무(佾舞)를 맡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 북쪽에는 제례악을 맡은 사람들이 각기 악기 1개 또는 2개씩 거느리
며 악기를 조정한다.


▲  선농대제에 임하고 있는 제관들
전통 행사로 진행되는 지금도 이러한데 옛날에는 정말 숨소리도 내기 힘들 정도로
정성과 엄숙을 다했다. 그때는 조금의 실수나 긴장 풀린 모습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만약 걸리면 파직이나 징계를 주었다.

▲  동쪽 홍살문 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대제
(노란 천막은 제왕이 대기하는 특별 공간)

▲  제례 봉행이 시작되면 제관들은 전폐례부터 망요례까지 무려 7개의
의식을 수행해야 된다. 그때마다 단으로 올라가 의식을 치루고
다시 내려와 대기하다가 다음 의식이 시작되면 또 올라간다.

▲  선농단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일무생들
사단법인 아악일무보존회 사람들로 모두 여자들이 맡는다. 앳된 20대부터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36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  문무(文舞) 율동을 선보이는 일무생들

▲  제례악을 맡은 사람들 (경기도립국악단)

▲  초헌례를 치르는 모습

▲  북서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음복례가 진행되고 있는 선농단
음복례는 제관이 제사를 마치고 제물로 올린 술을 마시는(음복) 의식이다.

▲  음복례도 거의 끝나가고

▲  대제의 마지막 단계, 망요례(望燎禮)

음복례가 끝나면 폐백과 축문을 태우고 선농단 북쪽에 마련된 공간에 묻는다. 망요례를 끝으
로 거의 1시간 반에 걸친 선농대제는 마무리가 되며, 원래대로라면 친경 의식도 해야 되나 부
근에 친경을 벌일 경작지가 없기 때문에 계속 생략되고 있다. 그러니 선농대제는 '설렁탕 나
누기'를 포함해 ⅔ 정도만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허나 어찌하겠는가? 아무리 전통 행사라고
해도 시대에 맞게 변형과 축소는 어쩔 수가 없다.


▲  망요례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제관들
다들 속으로 '이제 행사도 끝났으니 밥 묵으러 가자~~!' 이랬을 듯~~

▲  선농대제에서 몸을 푼 전통 악기들
궁중 의례나 종묘제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몸값 비싼 악기들이 주류를 이루어
선농대제의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대제가 끝나자 선농단 주변의 통금은 모두 풀렸다. 제관들과 행사 요원들, 높은 작자들은 기
념사진을 찍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 둘 밥 먹으러 사라지고, 제단 주변은 관리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어수선한 상황이 되었다. 대제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제단으로 들어와
초롱초롱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제삿상과 제물, 제기, 악기 등을 살펴보고 사진에 담느라 부산
하다. 그렇다고 제물과 제기를 가져가지는 말자~! 그냥 손으로 쓱쓱 어루만지고 끝내면 된다.


▲  선농대제 제삿상 <후직씨에게 올리는 제삿상, 2012년>

▲  금동 빛깔의 장엄스런 제기들
사극에서나 보던 고급 제기들이 속인들의 호기심을 건드린다. 백성들은 감히 쓰지도,
만지지도 못했을 저들을 직접 두 눈에 담으니 기분이 참 새롭다. 저들은 가격이
얼마나 하려나? 몇 개 장만하여 내 밥그릇으로 쓰고 싶다.

▲  제주(祭酒)를 담은 그릇과 의식 때마다
손을 씻는 정화수와 수건들

▲  창고로 퇴장하는 제기들
이제 1년 뒤에나 볼 수 있겠구나



 

♠  선농단 마무리 (향나무, 설렁탕, 선농단 역사문화관)

▲  선농단 향나무 - 천연기념물 240호

선농단 서쪽에는 나이도 지긋한 늙은 향나무가 넓게 그늘을 베풀고 있다. 그는 선농단의 오랜
상징이자 얼굴로 나이가 무려 500년 이상을 헤아린다. 20세기 후반에도 추정 나이가 500년이
었다고 하니 선농단과 나이가 그런데로 비슷할 듯 싶으며, 1476년 선농단을 닦을 때 성종이
기념으로 심거나 15세기 말에 선농대제 기념으로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천하에 널리고 널
린 나무 중에 유독 향나무를 심은 것은 제사 때 피울 향을 충당하고자 함이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세월이란 무한 양분과 국가 제단에 자리한 잇점으로 관리들과 왕족
들의 보살핌이 대단했다. 게다가 대제 때마다 곡차(穀茶)의 기운을 듬뿍 받으니 키 13.1m, 둘
레 2.28m에 어엿한 나무로 성장했다. 대제가 끝나면 막걸리를 비롯하여 제사에 쓰인 술은 이
나무에 모두 부었다고 하며, 어렸을 때부터 강제로 술에 길들여지다 보니 이제는 내성이 생겨
어지간한 술에도 눈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  선농단의 흑역사, 바닥에 눕혀진 청량대(淸凉臺) 표석

향나무 북쪽에는 '청량대' 3자가 쓰인 표석이 벌러덩 누워있다. 여기서 청량대는 고약한 왜정
이 선농단을 욕보이고자 제단 주변에 닦은 공원으로 '청량대공원'이라 불렸다. 공원 앞에 청
량대 표석을 세워 선농단의 이름을 억지로 대신했는데, 1945년 8.15이후 제기동과 용두동 주
민들이 왜정이 세운 청량대 표석을 때려눕혀 땅에 묻어버리면서 어둠의 시절에 대한 울분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그러다가 2013년 이후 선농단을 복원할 때 다시 꺼내 이곳에 눕혀놓았다. 90도로 세워놓으면
왜정 잔재에 기만 살려주는 꼴이 되니 이렇게 눕힌 것이다. 비록 왜정이 남긴 고약한 흔적이
지만 기왕 다시 햇살을 보게 된 거 이런 상태로 선농단 곁에 두어 후대에 경계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나 이 땅에는 아직도 때려눕혀야 될 왜정의 잔재가 너무나 많다. 그것들을 모두 잡는 그날,
이 땅에 진정한 광명이 올 것이나 그럴려면 아직도 까마득하니 그저 곡소리만 나올 뿐이다.


▲  선농대제는 끝났지만 숙성의 끝을 향해 부뚜막에 몸을 기대며
제 갈 길을 고집하는 가마솥 설렁탕


선농대제도 다 끝나고 사람들도 대부분 빠져나간 선농단에서 유일하게 펄펄 흥분을 내는 존재
가 있다. 바로 황토색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 설렁탕이다. 부뚜막에는 아직도 온기(溫氣)가 여
전해 뜨거운 입김을 불어대며 탕이 아주 사골이 되도록 펄펄 숙성시키고 있는데 탕 국물이 아
주 하얗게 변해 뽀얀 눈이 내려앉은 것 같다.
설렁탕 나누기 행사에서 이 가마솥 설렁탕을 쓸 것 같지만 절대로 쓰지 않는다. 동대문구에서
따로 조리하여 가져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이 설렁탕은 어디까지나 재현용이며 가마솥 안에
는 국물만 보일 뿐 고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허나 냄새만큼은 설렁탕 냄새 비슷하여 아
마도 소뼈 등을 넣고 푹 삶은 것 같다.


▲  선농단 북쪽 밑에 자리한 선농단 역사문화관

선농단 역사문화관은 선농단을 복원하면서 새로 닦은 것으로 2015년 4월에 문을 열었다. 이곳
에는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역사와 유물, 디오라마를 비롯하여 설렁탕의 유래, 농업의 역사와
농기구들을 다루고 있으며, 어린이를 위해 선농단 탁본 체험, 선농대제 의복 체험, 선농대제
사진 촬영 등의 여흥거리도 준비되어 있다.
지하 2층 규모로 지하 1층에는 선농단과 선농대제, 어가행렬, 제왕의 친경의례 등을 다루었고
, 지하 2층은 설렁탕과 농업 관련 유물과 서적 전시, 체험 코너, 청소년 쉼터와 배움터, 중정
(시간의 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정 같은 경우는 향나무 남쪽에 있었던 옛 선농단을 투
영한 곳으로 내,외부에 24절기를 표현하여 그 24절기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햇님의 운행에 따
라 시간과 계절, 날씨의 변화된 조건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려주는 공간이다.

선농단 후식거리로 1바퀴 둘러보며 선농단을 복습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면 적당하며, 특히 아
이들을 동반하여 왔다면 꼭 들려서 체험 코너에서 놀게 해주는 것도 좋다. 그리고 문화관 정
문에는 전통 찻집과 기념품점이 있어 잠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 선농단역사문화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 02-3295
  -5560)


▲  선농단과 동적전의 위치

▲  1739년에 작성된 친경의궤(親耕儀軌)

▲  동적전식례(東籍田式禮)
동적전에 관해 기록한 책으로 1824년부터 1853년까지 쓰였다.

▲  신농씨 제례상

▲  선농대제 뒷풀이로 먹은 설렁탕의 위엄

선농단과 선농대제를 둘러보고 그날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설렁탕을 먹으러 종암초교로
이동했다. 선농단 일대를 동분서주하다 보니 시장기가 무척 치솟아 뱃속이 아주 반란 직전이
다.

설렁탕은 동대문구청에서 마련하여 제공하는 것으로 행사 관계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무
료로 대접하고 있다. 그러니 누구든 와서 운동장에 설치된 천막에 앉으면 설렁탕과 김치, 깍
두기, 떡, 생수, 1회용 숟가락과 젓가락을 제공받는다. 직접 줄을 서서 음식을 받는 것이 아
닌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갖다주는 방식으로 초반에 가면 자리를 잡기도 힘들뿐 더러,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려 조금 늦게 가는 것이 낫다.
11시 30분 이후라 빈 자리들이 많아서 적당한 곳에 앉아 음식을 자원봉사자에게 1그릇 청하니
바로 잘 차려진 설렁탕을 가져다준다. 혹자(或者)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공짜 설렁
탕이니 맛도 별로고 고기도 별로일 것이다'
하지만 동대문구가 지역 이름과 선농단, 선농대제의 이름을 걸고 제공하는 설렁탕인지라 맛은
시중의 유명 설렁탕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안심하고 먹자. 파도 넉넉히 들어있고, 고
기도 그런데로 담겨져 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설렁탕 섭취를 마치고 나오니 시간은 어느덧 12시가 넘었다. 오랫만에 찾은
선농단에서 2시간 가까이를 머물며 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 역사문화관, 향나무, 거기에
설렁탕까지 남부럽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눈과 입, 코, 귀 등 5각(五覺)도 즐거웠다.

이렇게 하여 내년 선농대제와 설렁탕을 벌써부터 고대하며 '설렁탕의 고향, 선농단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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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 서울연꽃축제의 성지,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대웅전 뜨락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봉원사에서 열리는 '서울연꽃문화축제'이다. <조계사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벌써 1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연꽃축제로 2012년 이후 매년 인연을 짓고 있는데, 여름
이 왔으니 친(親) 여름파인 연꽃을 구경해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
을 것이다. 그만큼 여름 제국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연꽃 축제날이 다가왔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후배 여인네를 만나 서울
시내버스 272번(면목4동↔남가좌동)을 타고 이대부고(봉원동)에서 하차, 다시 7024번으로
환승하여 봉원사 종점에 두 발을 내렸다.
보기만해도 숨이 막히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변
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 마을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꼭 높은 빌딩과 번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거늘 서울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풍경과 완전 대
비되는 곳을 만나면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가?'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버스 종점으로 쓰이는 봉원사 주차장에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조금 가면 오른
쪽으로 승탑(僧塔)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전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석종형(石
鐘形)부터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들 7~8기와 비석 9기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다들 20세기 것들이라 때깔이 무지 곱다.
그런 부도전을 지나면 봉원사 밑에 자리한 마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사찰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 상당수는 봉원
사 승려의 거처로 대부분 처자 등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승려가 왜 부인과 자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 하겠지만 봉원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
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자신만의 가정을 눈치 없이 꾸릴 수가 있으며 그들
은 보통 자신이 일하는 절 밑에 집을 마련하여 절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니 이 마을은 봉
원사의 또다른 일원이자 확장판으로 봐도 무리는 없다.

마을은 절 턱 밑까지 펼쳐져 있어 절과 마을이 붙어있으며 나무도 많아 산골마을 같은 분
위기이다. 여기가 이렇게 도심 속의 산골로 남게 된 것은 이곳 일대를 봉원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에도 묶여 있어 개발의 칼질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조금은 빛바랜 하얀 비석이 애타게 눈
길을 구걸한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는 '조낭자 희정 유애비'로 비석에 얽힌 사연은 대략 이러하다.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
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
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碑身)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
하고 자살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적지않게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자주 신세 한탄을 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부족했던 애정이 그녀
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서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
춧돌로 그 비각은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①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다보니 풍
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었다. 높
이는 18m, 둘레 4.3m로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단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②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에서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다. 하
여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는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와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을 판매한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연못 윗쪽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羅漢像)이 있다. 이들은 2001년 6월에 봉안된 것
으로 나한상 북쪽에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
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
이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승하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얌전히 절을 이전했다.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1764년에 영조의 후
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이 들어앉았다.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으로 이전되어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남아있음)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
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
으며,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그의 현판 2개가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
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들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대웅전과
몇몇 건물, 조선 후기 탱화들은 많이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
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와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
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0호), 반야
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그들 중 범종만 속
시원하게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
화재 50호
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
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9년을 기준으로 벌써 17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
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
꽃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매우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
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밀림을
이룬다. 천하의 연꽃을 싹 소환한 것일까? 수련(睡蓮)을 제외한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
을 견주며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달군다. 어여쁜 꽃잎을 펼쳐보인 연꽃들
은 정처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피며,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싹 정화시켜준다.


▲  삼삼하게 우거진 연꽃 밀림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활짝 미소를 머금은 홍련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홍련들

▲  붉게 물든 홍련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누님이 저 연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두근두근...


▲  대방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과 삼천불전

▲  하얀 피부와 연분홍 피부가 적절히 섞인 청초한 연꽃

▲  웃음 짓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연밥을 드러낸 홍련

▲  잘 익은 홍련의 요염함

▲  다양한 인상의 홍련들

▲  오늘도 방긋 웃는 연잎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① 연꽃 밀림 너머로 보이는 대방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②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③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④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⑤


▲  대웅전 우측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봉원사 주지였던 영월은 6.25 때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였는데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
놓았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형하여 대방으로
삼았다.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당
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
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
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 공간,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간
으로 두루 쓰인다. 범패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6.25때 심원사가 파괴되면서 그곳에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전국에 흩어졌는데 그때 업어온 것으로 보이며, 예로부터 영험이 있다
고 전해져 불상에 대한 기도 수요가 적지 않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쓴 현판을 비롯해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
에 있음) 등이 건물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의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를 일군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문
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
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석물이다.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과 삼천불전 주변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자리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
면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
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
은 화계사(華溪寺, ☞ 관련글 보러가기) 대웅전,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과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
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
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잿더미가 되었으니 6.25 시절의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컸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또 부질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지만 떠나간 지방문
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  봉원사 범종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찾기는 매우 쉬움) 그는 예산 덕산(德山)
에 있던 가야사(伽倻寺)의 것으로 1760년에 조성되었다. 여기서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의 명당(
明堂) 욕심으로 파괴된 그 절이다.
종 높이는 84.5cm, 입지름 61cm으로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동종 중의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색이 감돌고 있다. 또한 종형도 천판에서 시작된 외선(外線)이 종신(鐘
身) 2/4부분까지 완만한 곡선으로 올라가다가 3/4부분에서 종구까지 완만하게 떨어지고 있다.

편평한 천판(天板) 위에 음통을 갖추지 않는 2마리의 용의 용뉴를 표현했으며, 그 아래 종신
은 2줄의 횡선을 이용하여 종신을 크게 3부분으로 구획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단에만 다양한
도안을 장엄하였다.
천판 아래에는 내부에 '옴'자가 새겨지고 외곽에 돌기를 표현한 원권(原權)의 범자 8개가 부
조되었다. 그 아래에는 사다리꼴 형태인 연곽 4개가 있는데, 사선문으로 연곽대를 구획하고,
그 안에는 연뢰(蓮蕾) 9개를 표현했다. 그리고 연곽 사이에 빈 공간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
는 보살입상 2구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옆에 '준제진언(準提眞言)'을 간략하게 표기했다.

종 피부에는 종의 탄생시기와 봉안처 외에 덕산과 예산, 대전(회덕, 진잠), 천안, 결성, 옥천
지역 사람들의 후원을 받았고, 사장(私匠)인 이만돌(李萬乭), 신덕필(申德必), 최종취(崔宗就
) 등 3인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의 상태가 양호하고 경상도 이씨 일파의 대표적 장인인 이만돌이 만든 작품 양식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명문을 통해 종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 18세기 후분 동종의 양식과 사장
에 대한 계보, 활동을 연구하는제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지르고 그 자리에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했는데, 그 과
정에서 범종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 종은 서울로 올라와 봉원사에 안착하면서 서울살이를 하
고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말뚝을 박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43년 승려 안진호가 작성
한 '봉원사지' 제9절 제3항에 봉원사의 재산으로 기재되어있어 늦어도 20세기 초에 들어온 것
으로 여겨지며, 대원군이 왕실 원찰의 하나인 이곳에 넘겼을 가능성도 있으나 범종이 묵비권
을 행사하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고 그 휴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으니 명당의 치명
적인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산신탱
이 산신은 돈이 좀 있는지 앳된 동자와 동녀를 4명씩이나 거느리고 있고
호랑이는 귀여운 것이 토실토실하여 귀티가 넘쳐 보인다.
(다른 산신탱은 동자가 1~2명 정도임)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까지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
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
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  물이 졸졸 쏟아져 나오는 수각(水閣)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
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졌으며,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려 9년
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멀리 알래스카
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
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으
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돈을 받아 지은 원불(願佛)이다. 그 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
靈駕)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
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승정
(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
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
껏 뽐낸다.


▲  3층석탑에서 바라본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

삼천불전 앞에는 연꽃축제의 일원인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산사라고 늘 고적(적막)만
고집해야 될 이유는 없지, 1년에 며칠 정도(절 축제나 석가탄신일)는 산사음악회로 떠들썩하
게 즐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고 사찰 홍보와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
봉원사 산사음악회는 이곳의 자랑인 영산재와 범패, 그리고 다양한 전통공연과 퓨전음악, 서
양음악, 초청 가수 공연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보통 전통 공연을 처음에 내밀고, 초청 가수
(대부분 트로트) 공연을 제일 뒤에 내민다.

3층석탑 옆에는 떡과 전통차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는데, 18시 이전에 마감을 하여 서둘러 가
야 떡과 전통차를 먹을 수 있다. (무료로 제공하나 상황에 따라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
그리고 17시(또는 18시)부터 1시간 정도 삼천불전 지하층 공양간에서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연꽃축제 기간 외에도 평일과 일요일에도 제공하니 시간이 맞거든 한 숟가락 들며 이곳의 인
심을 확인해보자. (공양은 상황에 따라 제공되지 않을 수 있으며, 비빔밥 공양을 제공하는 경
우도 있음)
우리는 국수 1그릇과 떡, 전통차를 무한정 즐기고 산사음악회도 전부는 아니지만 1/3 정도 구
경을 했다. 이렇게 사찰 축제를 이용해 전통공연과 서양음악 공연 등 문화생활을 무료로 즐겨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얀 피부의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
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고색이 짙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
상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놀고 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인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
석을 세워 그날을 기리고 있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두툼한 맞배지붕 건물로 지
장보살과 저승의 10왕(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지장보살
상과 시왕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며, 10왕 끝에는 패기가 짙은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자리해 명부의 식구들을 지킨다.

명부전에 왔다면 지장보살과 시왕상도 좋지만 명부전 현판은 꼭 눈에 넣도록 하자. 조선 태조
때 삼봉(三峯)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맞다면 무려 620년을 묵은 경내
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하지만 내 눈으로 봐서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다. 비록
현판 구석에 '정도전 필(鄭道傳 筆)' 4글자가 아주 작게 쓰여있긴 하나 옛 사람들은 이름보다
는 '호'나 '자'를 우선적으로 썼던지라 역시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봉원사가 태조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고, 그의 어진까지 봉안했던 절이니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연 정도전도 봉원사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기념으로 한 글
자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현판이 세월을 너무 타자 필사(筆寫)를 해 새 것으로 교체
했는데, 그가 쓴 것을 강조하고자 실수로 이름만 덩그러니 썼던 모양이다.
그리고 원래 봉원사 것이 아닌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에 설치된 명부전의 현판이라
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정릉을 외곽으로 추방하면서 명부전을 때려부셨고, 그 현판이 여기
저기 떠돌다가 봉원사로 흘러들어와 이곳 명부전의 현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부전은 정도전의 글씨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꼭 있다고 기둥에 달
린 주련 4개는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명나라
(요동)를 정벌하여 보다 큰 나라를 꿈꾸었던 나라의 창업 공신과 그 조선을 말아먹고 왜정에
빌붙은 작자의 흔적이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단죄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점점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이 매국
노의 고약한 흔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
내 장작으로 쓰거나 내버리기 바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들이다.

▲  정도전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의 위엄
왼쪽 구석 위쪽에 '정도전 필' 4자가 쓰여 있다.

▲  명부전 옆구리에서 만난 아리따운 홍련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자리한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
습이다. 그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
아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며, 그 인등으로 인하여
인등각이라 불리기도 한다.
미륵전 앞에는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이 서 있는데 왜정(倭政)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
식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그 이상으
로 흘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한없이 밉기만
하다. 그렇게 나오기가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해야지. 꼭 56.7억년 후에 나타
나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 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직무유
기이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니다. 아미타불과 박정희 전대통령 내외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자
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나이는 150~200년 정
도 된 것으로 여겨지나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는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내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잠겨 있어 내부는 살피지 못
했다. (만월전은 올 때마다 문이 잠겨 있었음)


▲  삼천불전 앞 산사음악회 무대에서 펼쳐진 즉석 그림 전시회
봉원사 화승이 무대에서 즉석으로 그린 그림을 삼천불전 앞에 펼쳐보이고 있다.
그림에 담겨진 붉은 꽃은 이곳 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이다.


연꽃축제 현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부지런히 사진에 담느라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연
꽃이 그야말로 시간 도둑인 셈이다. 허나 그런 어여쁜 도둑은 봐줄 만하다.
그 사이 세상은 낮에서 밤으로 바뀌고 시커먼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지면서 여름 제국의 혹독
한 기운도 조금은 꺾였다. 햇님이 커튼을 치자 음악회가 열리는 삼천불전 앞은 그 어둠을 몰
아내고지 일제히 조명을 틀었고, 산사음악회는 점점 숙성이 되어 분위기는 더욱 솟아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음악회를 끝까지 관람하고 싶지만 저녁밥이 그리울 시간이라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음악회가 신명이 나도 그저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봉원사에서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연꽃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을 실컷 눈에 넣었으니 그리 아쉽지
는 않다. 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뒤로 하며 그곳을 나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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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구석기시대 유적의 대표 성지,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 (전곡선사박물관,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 천하 구석기 유적의 성지,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 축제)

▲  구석기 스타일의 눈사람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축제장)



선사시대(先史時代, Prehistory)란 문자가 없던 시대로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와 중석기
시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를 일컫는다. (청동기시대도 일부 포함됨)
선사시대는 그리 재미도 없고 관심도 별로 없는지라 이따금씩 관련 유적지나 박물관을 찾
는 것이 고작인데, 겨울의 한복판인 1월에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
축제'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축제의 대한 호기심도 채우고 미답지(未踏地)도 하
나 줄일 겸 친한 후배와 겸사겸사 그곳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복판에 머물던 13시, 집 부근 방학역에서 그를 만나 1호선 전철을 타고 수도
권 전철의 북쪽 끝인 소요산(逍遙山)역으로 이동했다. (소요산행 열차는 거의 30~40분 간
격으로 운행)
소요산역에서 호떡으로 허기를 좀 달래고, 경기도 최북단 고을인 연천(漣川) 땅으로 넘어
가는 의정부시내버스 39번을 타고 차디찬 삭풍(朔風)을 가르며 북쪽으로 더 올라갔다. 수
도권 북방을 가르는 한탄강(漢灘江)을 건너니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누워있는 언덕이 보이
기 시작하고, 그 밑에 둥지를 튼 전곡선사박물관에서 두 발을 내린다. 전곡리 선사유적지
답사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  밑에서 바라본 전곡선사박물관


 

♠  전곡리 선사유적지 입문

▲  은빛으로 이루어진 전곡선사박물관 지붕 (지붕에 산책로가 있음)

전곡리 선사유적지 남쪽에 자리한 전곡선사박물관은 구석기시대 유적의 영원한 성지(聖地)이
자 상징으로 전곡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구석기시대,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옛 인류의 진
화 과정을 집대성한 선사시대 전문 박물관이다.
박물관을 이루고 있는 건물이 마치 상상 속의 우주 기지를 보는 듯, 심플하게 은색으로 이루
어져 있어 구석기시대를 취급하는 박물관에는 썩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2004년 전곡리 선사유적지 종합정비 기본계획이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자 2005년 도립(道立)박
물관을 짓기로 결정했다. 하여 2006년 온 천하에 박물관 디자인 국제현상공모를 하였는데, 천
하 곳곳에서 앞다투어 응모해 아시아 131건, 아프리카 5건, 유럽 169건, 북미 17건, 남미 20
건, 오세아니아 4건 등 총 346건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그래서 이들을 심사한 결과 1등은 프랑스 양이(洋夷)가 먹었으며, 2등은 미국 양이, 3등은 미
국 양이와 왜인(倭人)이 수상했다. 이들 수상작 40건을 서울 인사동 학고재에서 그해 4월 17
일부터 4월 23일까지 전시회를 열었고, 박물관 부지의 발굴조사가 끝나자 2009년 3월 23일에
삽을 뜨기 시작해 2011년 4월 25일에 완성을 보았다.

원시 생명체의 아름다운 곡선을 모티브로 했다는 박물관 내부에는 전곡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를 주인공으로 하여 고고학체험실과 상설전시실, 체험 전시실 등을 두어 구석기시대와 무수한
세월을 겪으며 진화된 원시인의 변화 과정에 대해 소상히 다루고 있으며, 700만 년 전 투마이
부터 1만 년 전 만달인까지 14개체의 원시인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복원하여 전시했다. 그 외
에 도서실, 교육실, 야외체험장 등을 갖추고 있다.

박물관을 구경하고자 입장료를 살펴보니 성인은 무려 4,000원을 받는다. 1,000원 정도로 생각
을 했는데 생각보다 4배 이상이나 얹혀진 가격에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그 돈을 박
물관에 쥐어주면서까지 구경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리 땡기지도 않아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
로 쿨하게 넘겼다.
(박물관 입장료는 2017년 9월부터 무료로 바뀌었음, 이곳을 포함한 우리나라 박물관 대부분은
월요일과 1월1일, 설날, 추석 당일에 쉬므로 그날은 꼭 피해서 찾기 바람)

* 전곡선사박물관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178-7 (평화로 443번길 2, ☎ 031-
830-5600)
* 전곡선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전곡 선사박물관 야외에 재현된 구석기 사람들의 매머드 사냥 현장
오른쪽은 지금은 먹을 수도 없는 매머드 고기 육포를 말리는 모습

▲  겨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황야에 재현된 코뿔소로 보이는 동물상

▲  전곡 선사박물관에서 전곡리 선사유적지로 인도하는 계단
계단 앞에는 원숭이와 비슷하게 생긴 옛 인류의 모형이 멀뚱히 서 있다. 오늘날
인간의 과거형이 저런 모습이었다고?? 하지만 진화론도 흔쾌히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그저
궁금~ 궁금할 따름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전곡 선사박물관의 위엄

전곡선사박물관 지붕에는 서쪽 언덕과 동쪽 언덕을 잇는 지붕 산책로가 있다. 지붕에 오르면
한탄강 주변 남쪽 산하가 보이긴 하나 박물관 건물이 키가 좀 작기 때문에 보이는 범위는 그
뿐이다. 박물관 동쪽 언덕에는 산책로와 숲이 있고, 서쪽 언덕 너머에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있다.

선사박물관을 지나 야트막한 북쪽 언덕을 오르면 전곡리 선사유적지 후문이다. 선사유적지는
선사박물관과 별도로 소소하게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어른 1,000원 / 학생과 어린이 500원)
구석기 축제 기간이라 잠시 무료의 공간으로 해방되어 아주 기분 좋게 선사유적지 내부로 들
어섰다.
(단 구석기축제 행사장은 유료의 공간이며,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은 문을 닫아걸고 쉼)


 

♠  천하 구석기 유적의 소중한 꿀단지,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등장으로
구석기 역사를 새로 쓰게 하였던 전곡리 선사유적지 - 사적 268호

▲  전곡리 선사유적지 내부

한탄강이 'U'자로 크게 굽이쳐 흐르는 전곡읍 서남쪽 강변 언덕에 구석기 유적지의 성지로 추
앙받고 있는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넓게 누워있다.

인류의 본격적인 첫 시대라 할 수 있는 구석기시대는 약 300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를 일컫
는데 약간의 중석기시대를 거쳐 신석기시대로 발전하게 된다. 구석기 사람들은 강가나 동굴에
주로 살면서 과실을 따먹거나 동물을 사냥해 식량을 해결했으며, 여기까지는 다른 동물과 거
의 비슷해 보인다. 허나 그들은 일반 동물과 다르게 돌을 다듬어서 사냥 도구로 사용했다. 또
한 불을 지피는 방법을 터득하여 추위를 이겨내고 맹수들의 공격을 막았으며, 잡은 동물을 불
로 구워 먹었다. 이것이 동물과 사람의 큰 차이점이다. 

구석기 사람들은 자연석을 다듬거나 바위에서 돌을 떼어내 주먹도끼 등을 만들었는데, 주먹도
끼가 바로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역사/국사 교과서에 아주 지겹도록 등장한다. 이
도끼는 구석기 초기에 등장하며, 프랑스 생따슐(St. Acheul)에서 발견되어 지역 이름을 따서
아슐리안 주먹도끼라 불린다.
그 주먹도끼는 전곡리 유적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주로 유럽과 아프리카, 서남아 지역에서 많
이들 나왔으며, 1940년대 초, 미국 하버드대학의 모비우스(H.L. Movius) 교수가 그동안의 고
고학 자료를 근거로 내세우며 이상한 학설을 내뱉었다. 인도를 중심으로 그 서쪽 유럽과 아프
리카, 서남아를 아슐리안 주먹도끼 문화권으로, 인도 동쪽 아시아를 찍개 문화권으로 나눈 것
이다. 찍개 역시 돌로 다듬은 도구이나 주먹도끼보다는 다소 떨어진다.
그래서 그걸 두고 구석기시대부터 이미 서양이 동양보다 우월했고 아시아는 주먹도끼가 없으
므로 그때부터 정체되었다고 주장했다. 털만 많은 양놈들의 그런 삐뚤어진 생각을 보기 좋게
참교육시킨 현장이 바로 이곳 전곡리이다.
전곡리의 등장으로 그동안 서양 오랑캐들의 의해 그릇되게 작성된 구석기 역사는 새로 쓰여지
게 되었으며, 천하 굴지의 구석기 유적으로 꽤 무거운 존재가 되었다. 이곳을 통해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고, 전곡리를 시작으로 아시아 곳곳에서 주먹도끼가 쏟아
져 나왔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발견을 대서특필한 1978년 봄 신문기사들

한탄강변에 자리한 전곡리 선사유적 일대는 숲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속에는 억겁의
세월이 숙성된 보물이 잠들어 있었고, 이미 그 일대에 석기들이 적지 않게 노출되어 속세(俗
世)의 관심을 애타게 바랬건만 사람들은 단순 돌로만 생각했지 아무도 그들을 크게 여기지 않
았다. 허나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는 크게 드러난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일이 터지고 말
았다.

때는 1978년 3월 '그렉 보왠(Mr. Gred Bowen)'이란 주한 미군이 한탄강에 놀러왔다. 그는 인
디애나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자로 돈벌이를 위해 주한 미군에 들어왔다.
한탄강을 거닐던 그는 강 주변에 석기로 보이는 돌맹이가 많은 것에 크게 놀랬다. 자신의 짧
은 소견으로 볼 때 분명 선사시대 석기로 여겨져 석기 사진과 발견 경위를 작성하여 프랑스의
저명한 구석기 학자 보르드(Bordes) 교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르드는 그 사진을 보고 크게 놀랐다. 바로 아슐리안 주먹도끼였던 것이다. 허나 그 역시 전
형적인 양이라 그걸 쉽사리 믿지 않으며 '이 유물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면 아
슐리안 문화의 석기가 맞다. 내가 직접 가보고 싶을 정도로 중요한 발견이지만 그럴 수가 없
으니 우선 서울대학교 김원용 교수를 찾아가 자문을 얻으라'
답을 하였다.
그러자 보웬은 그 석기를 들고 서울대를 찾아가 김원용 교수를 만났는데 그 석기를 살펴본 김
원용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여 발굴단을 꾸려 전곡으로 달려갔고, 그해 5월 14일 전곡리
일대를 지표 조사하였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김원용 교수와 영남대 정영화 교수가 진단학보
에 '전곡리 아슐리안 양면핵석기 문화예보'를 발표하여 전곡리 유적은 서양 고고학자들의 염
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크게 이름을 드러낸다.


▲  오래 잠들어있던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깨우다.
1978년 5월 전곡리 유적 지표 조사 장면


1979년 3월 26일, 김원용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박물관 발굴단과 경희대와 영남대, 건국대가
연합해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후 전곡리 유적을 중심으로 전곡리 일대에서 30여
년 동안 17회의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약 8,500점의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인근 강에서 가져온 강자갈로 제작된 것으로 다소 거칠게 다듬은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잘 다
듬어진 찍개, 가로날도끼, 긁개, 소형 박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곡리의 명성을 듣고 다른 나라에서도 앞다투어 교수와 고고학자들이 찾아와 이곳을 조사했
으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30만 년 전으로 판단되고 있다. 참고로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은 평양(平壤) 부근에 있는 상원 검은모루동굴 유적으로 약 100만년
을 헤아린다.

전곡리 선사유적은 크게 5지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1지구는 처음으로 석기가 발견된 곳이고,
2지구는 1지구 남쪽 건너편으로 주먹도끼가 많이 나왔으며, 3지구는 발굴유구와 습지가 있고,
4지구는 제1차 발굴(1979년) 때 발견된 강 건너 고능리 지역이고, 5지구는 유적지의 동편 언
덕 일대이다.


▲  전곡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위엄
그의 등장으로 한참이나 잘못된 구석기 역사는 새로 쓰여지게 되었고, 뼛속까지
서양 우월주의로 물들었던 양이 고고학자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아시아에는 찍개만 있던 것이 아니라 이런 섬세한 주먹도끼도
일찌감치 있었던 것이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돌을 전체적으로 손질하여 끝부분이 뾰족
하고 몸체는 둥근 모습이며, 석기의 양측면에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용해 나
무를 벗기고나 동물 사냥, 가죽 벗기기 등에 사용했다. 그래서 만능석기라 불리기도 한다.

전곡리에서 나온 주먹도끼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주먹도끼와 달리 몸체가 두텁고, 자
연면이 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채석을 통해 규소 성분이 풍부한 양질의 석재를 이용
한 유럽, 아프리카와 달리 전곡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석영이나 규암 등으로 된 강자갈을 주
로 사용하여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측면날보다는 뾰족한
끝부분의 손질에 더 집중한 경향이 있어 자르는 도구로 주로 사용된 서양과 달리 대상을 찍거
나 땅을 파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  토층전시관에 전시된 전곡리 유적 발굴 이야기와 이곳을 발굴한
구석기시대 전문가 김원용의 빛바랜 수첩
김원용 교수는 1993년 세상을 뜨면서 전곡리 유적에 유해를 뿌려달라는 유언을 했다.
그만큼 이곳은 그에게 의미가 각별한 곳이자 그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켜준
소중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전곡리 유적의 지층 구조는 2001년에 조사된 E55S20 발굴피트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곳은 현
무암을 기반암으로 하여 그 위에 사질층, 실트층, 점토층이 쌓여 있는데, 퇴적층의 최상부에
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토양쇄기가 4~5차례 반복되며, 1번 째 토양쇄기면과 2번 째 토양
쇄기면 상부에서 왜열도에서 날라온 2개의 화산재와 AT(약 25,000년 전), K-Tz(약 95,000년
전)가 발견되었다. 이들 화산재는 분출된 연대가 대략 밝혀졌기 때문에 전곡리 유적의 장대
한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소중한 단서가 되었다.
퇴적층 하부의 사질층과 실트층은 하천 퇴적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상부의 붉은 색조의 점토
층에 대해서는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날라온 풍성퇴적물이라는 설과 강의 범람으로 쌓인 퇴적
물이라는 설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구석기 유물 상당수는 붉은 색조의 점토층에서 많이 발견
된다.


▲  전곡리 선사유적 외곽 산책로

홍적세 중기 무렵, 강원도 평강 오리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한탄강을 따라 흐르며 전곡을 비롯
한 강 주변을 용암대지(鎔巖臺地)로 칠해버렸다. 이후 수많은 물줄기가 용암대지를 적셔주었
고, 곳곳에 작은 습지와 호수가 만들어졌다. 또한 강에 떠내려온 퇴적물은 용암대지 위에 차
곡차곡 쌓이면서 숲이 우거지고 강에는 물고기들이 둥지를 틀었으며 온갖 동물들이 식량과 식
수 해결을 위해 모여들었다. 구석기 사람들 역시 이곳에 정착을 하였다. (전곡에 살았던 구석
기 사람들을 ''전곡리안'이라 부름) 그때가 약 30만 년 전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언제까지 살다가 사라졌는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그들이 떠난 이
후, 그들이 남긴 석기와 흔적은 자연의 거친 흐름 속에 죄다 묻히게 되었다. 그 흔적이 배인
퇴적층이 용암대지 위에 잘 보존되어 수천 년을 비밀리에 숨바꼭질을 하다가 1978년 이후 발
견된 것이다.

발굴조사가 마무리 되자 유물은 전곡선사박물관과 토층전시관, 여러 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졌고, 유적은 영구 보존을 위해 흙으로 빼곡히 덮고 그 위에 숲과 잔디를 깔았다. 그래서 겉
으로 다가오는 전곡리 선사유적지의 모습은 유적지가 아닌 그냥 공원 같은 분위기이다.

전곡리 유적은 숲과 잔디로 뒤덮힌 지역과 토층전시관, 선사체험마을 등이 있으며,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또한 매년 1월과 5월에는 '전곡리안의 숨소리'라는 태마로 구석기 축제를
열어 크게 호응을 얻고 있다. 5월에는 그냥 '연천 구석기축제'란 이름으로 열고 있으나 겨울
축제는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란 이름으로 열리고 있는데, 선사시대 체험 프로그램, 원
시 퍼포먼스, 공연 행사, 전문가의 강연과 선사시대 전시 행사 등이 열린다.
구석기시대를 완전히 익히고 싶다면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꼭 찾기 바란다. 그러면 누구든 구
석기 전문가가 될 수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515 (양연로 1510, ☎ 031-832-2570)
* 전곡리 선사유적지 홈페이지는 오른쪽 링크를 클릭하기 바라며 ☞ 전곡리 선사유적지
  겨울 축제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2019년 겨울여행축제는 1월 12일부터 2월 6일까지 열린다.


▲  인공눈이 깔린 전곡리 구석기축제장


 

♠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축제장 둘러보기

▲  전곡 구석기축제를 맞이하여 멀리 서유럽에서 온 신석기 사람의 미라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겨울 제국의 매서운 폭정에도 불구하고 구석기 축제로 뜨거웠다. 평일임
에도 어린이를 데리고 온 가족 나들이객들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축제
장 곳곳을 뛰어놀거나 썰매타기, 바베큐 체험 등. 온갖 체험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있
어 겨울 제국을 무색하게 만든다.

축제장 일부에는 인공눈을 깔아 조촐하게 하얀 설원을 자아냈는데 그곳에 썰매장과 얼음 조각
등을 두었으며, 그 서쪽에 여러 부스와 천막을 설치하여 먹거리 장터와 구석기 체험 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점심도 제대로 못먹은 시장기를 달래고자 간단
하게 어묵으로 배를 때웠다. 가격은 시중보다 2배 정도 비쌌으나,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이
여기서는 없는지라 그냥 사먹었다.

그렇게 요기를 마치고 옆 부스로 가니 멀리 서유럽에서 왔다는 뼈다귀 미라가 전시되어 있었
다. 이 미라는 1991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경계선인 외츠탈 알프스에서 발견된 것으로
온몸이 얼음 속에 묻혀있어서 미라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
서 이미 영혼이 빠져버린 그에게 '외찌'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아이스맨이란 별명도 지어주
었다.
그는 약 5,300년 전 사람으로 그때면 신석기시대 한복판이다. 그가 어찌하여 알프스 산맥에서
그 지경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곡리 구석기 축제를 맞이하여 수만 리나 떨어진 이곳까지
소환되어 휼륭한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설마 그가 나의 전생은 아니겠지?


▲  구석기 스타일로 지어진 눈사람
인공눈을 빚어서 두텁게 만든 눈사람으로 장소가 장소인 만큼 구석기 스타일로
만들었다. 귀여움이 묻어난 그는 눈, 코, 입, 머리까지 갖추고 있고
오른손에는 돌도끼까지 쥐어들고 있다.

▲  눈 속에 묻힌 돌 운반 체험장
무거운 돌을 끌어야 되는 일종의 3D 체험장이라 체험 수요가 없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어린이들의 인기를 먹고 자라는 눈썰매장 (유료임)
때가 겨울인지라 눈썰매장까지 갖추었다. 딱 30년만 어렸다면 한번 타보는 것인데
다 큰 장정이 눈썰매를 타는 것도 좀 그래서 그냥 구경만 했다.

▲  빙어잡이 삼매경에 빠진 어린이들 (빙어잡이 현장)
조그만 낚시 도구로 빙어를 탄압한다. 여기서 잡은 빙어는 비닐봉지에
담아서 가져가면 된다. 그 이후는 알아서...

▲  빙어잡이 현장 - 빙어의 마지막 몸부림 (죽어있는 빙어도 적지 않음)

▲  돼지고기 바비큐 체험 현장

제아무리 눈썰매와 빙어잡이가 인기가 대단하다 한들 돼지고기 바비큐 체험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구석기 축제의 백미(白眉)나 다름없는 바비큐 체험은 길다란 나무 꼬챙이에 돼지고기를 직접
구워 먹는 것으로 흙으로 다진 네모난 화로에 숯을 넣어 고기를 구우면 된다.
편하게 고기를 굽게끔 나무 의자도 설치되어 있으나 고기가 익는데 시간이 다소 걸린다. 또한
나무 꼬챙이를 들고 있어야 되기 때문에 팔도 아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적당하게 걸쳐놓고
딴짓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잘못하면 고기가 화로로 자빠지거나 검게 타버리는 경우도 발생
한다.
돼지고기 바비큐는 1꼬치에 3,000원(예전에는 2,000원)으로 잘만 구우면 유명 고깃집 못지 않
은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잘못하면 거의 타버리거나 흙, 숯에 묻혀 난감한 경우
도 생길 수 있다. 여기서는 그저 인내력과 근성, 요령이 있는 사람만이 맛있는 고기를 쟁취한
다. 나는 인내력을 발하며 고기 굽기에 매진한 결과 그런데로 잘 익어서 맛있게 고기 바비큐
를 섭취했다. 허나 후배는 잘못 구워서 반 정도를 버리고 말았지. 구석기 사람들은 이렇게 화
로 비슷한 것에 불을 지피고 사냥한 동물을 구워 먹었다고 한다. 바로 그 체험을 하는 것이다.
단 다른 것이 있다면 숯으로 불을 지핀다는 것과 고기를 돈주고 사먹는다는 것 정도. 구석기
축제에 왔다면 뱃속도 채울 겸 바비큐 체험을 꼭 해보기 바란다.


▲  노릇노릇 익어가는 돼지고기 바비큐

▲  구석기 생활상 복원존(Zone) ▼

축제장 동쪽에는 구석기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복원존이 있다. 사냥 모습을 위시하
여 잡은 동물을 손질하는 모습과 구석기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 석기 제작 모습 등이 있으며,
지금은 사라진 그 시절 동물의 모형 등도 담겨져 있다.

▲  말을 사냥하는 모습

▲  구석기 가족의 생활 모습


▲  지금은 사라진 넙적큰뿔사슴
지구 역사상 가장 큰 뿔을 가진 사슴과로 홍적세 중기~후기를 누볐던 동물이다.
구석기 사람들의 좋은 먹잇감으로 평양 상원 검은모루동굴에서 그의
뼈가 출토되기도 했다.

▲  역시나 화석만 남은 검치호랑이
오늘날 호랑이의 조상격으로 길이 18~20cm에 달하는 큰 송곳니를 가진 홍적세
시절 맹수이다. 아주 매섭게 재현되어 비록 모형이지만 오금을 지리게
하는데 동아시아에 살던 검치호랑이는 서양보다 검치의 크기가
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구석기 사람과의 기념촬영 코너
의자는 구석기 스타일에 걸맞게 동물 뼈와 가죽으로 이루어져 있다.
(뼈와 가죽은 가짜임)

▲  매머드 뼈로 지어진 뼈다귀 집

구석기시대 후반(1~2만년 전)에 구석기 사람들이 메머드를 때려잡아 그 뼈로 만든 집으로 이
때부터 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발견된 매머드뼈 집터를 복원한 것으로 그
안에 불을 피운 흔적이 발견되었다.


▲  사냥감을 들고 귀가하는 구석기 사람들
사슴 같은 것을 잡은 모양이다. 저 사람들은 그날 고기 회식을 했겠지.

▲  겨울 제국에게 영혼까지 싹 털린 연천자생식물원 (야생화단지)
전곡리 선사유적 동편에 야생화 등을 심어놓은 자생식물원을 닦아놓았다. 허나
그러면 뭐하랴? 겨울 제국에게 몽땅 털려 황량한 벌판이 되버린 것을..
이곳의 진면목을 보려면 봄과 여름, 가을에 오기 바란다.

▲  축제장 북쪽에 자리를 닦은 얼음숲 연천 (얼음조각품)
한겨울에 걸맞게 축제장 한쪽에 얼음 조각품을 배치하여 겨울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드높이고 있다. 이들을 한 덩어리로 '얼음숲 연천'이라 이름지었는데,
전곡리 선사유적지의 캐릭터인 고롱이와 미롱이, 매머드를 비롯하여
재인폭포, 움집, 연천의 특산물을 형상화 하였다.

▲  고롱이(왼쪽)와 다롱이(오른쪽) 얼음 조각품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린이 모습에 구석기 스타일을 입혀 이곳의
귀여운 캐릭터로 삼았다.

▲  얼음으로 재현된 매머드

▲  연천의 명물, 재인폭포(才人瀑布)를 겨울 버전으로 형상화하였다.

▲  얼음 미끄럼
바닥이 차갑기 때문에 포대자루 같은 것을 깔고 타면 된다. 타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그놈의 나이 때문에 그냥 구경만 했다. 얼음 미끄럼을 신나게 타고
내려오는 어린이들의 표정에 화창함이 가득하다.

▲  알록달록 소원지를 달아놓은 현장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소망을 하나씩 머금은 소원지가 차디찬 삭풍에
몸을 떨고 있다. 적당하게 소원지가 들어차면 불에 태워버린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마무리

▲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정면에 내세운 토층전시관

토층전시관은 발굴조사를 벌였던 땅 속 지층(토층) 구조와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그리고 다
른 나라에서 업어온 구석기 유물을 다루고 있다. 현관 윗쪽에는 전곡리 선사유적의 상징이자
인도 동쪽 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 황금색 모형을 달아놓았다.


▲  토층전시관 내부에 있는 지층(토층) 구조
저 밑에서 장대한 세월의 의해 봉인되어 있던 구석기 유물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  전곡리 유적에서 나온 구석기 유물들
그 시대 원시인들의 유물은 거의 대부분 돌이다. (동물뼈 일부) 얼핏 보면
그냥 일반 돌맹이처럼 보여 보통 사람들은 구분하기가 어렵다.

◀  아프리카 케냐에서 가져온 구석기 유물


▲  토층전시관 옆에 자리를 닦은 선사체험마을 (연천마당)
이곳은 선사시대 및 전통 체험 공간으로 쓰인다. 마당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초가집은 전통 체험 공간으로 그 남쪽에 선사 체험 공간이 있다. 이곳은
주로 어린이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선사시대 기술, 생활방식 등을 체험할 수 있다.

▲  겨울에 잠겨 한적한 연천마당 (선사체험마을 잔디밭)

▲  선사체험공간 한쪽에 자리한 귀여운 고롱이와 다롱이

▲  토층전시관 옆에 닦여진 움집과 원시인 모형 기념 촬영장
가운데 원시인 모형에 얼굴을 대고 기념촬영을 하면 된다. 그때만큼은
정말 구석기나 신석시기대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일 것이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산책로 (정문으로 나가는 길)

▲  유럽 양이 스타일의 성(城) 눈조각품

전곡리 유적 정문 남쪽에는 인공눈을 빚어 만든 눈조각품이 막바지 눈 호강을 시켜준다. 옛날
유럽 성을 비롯하여 피라미드와 동굴 등이 재현되어 있는데 눈조각품 주변에는 인공눈이 짙게
깔려 있어 설원을 거니는 기분을 들게 한다.


▲  피라미드, 스핑크스 눈조각품(오른쪽)과
호주 오페라하우스 눈조각품 (그 뒷쪽)

▲  거대한 하얀 언덕 눈조각품 - 저 안에 얼음 동굴이 있다.

▲  하얀 언덕에 새겨진 재미난 형상들
창을 든 원시인과 매머드, 현대인으로 보이는 형상, 그 형상이
내뱉은 수상한 연기(?)가 새겨져 있다.

▲  하얀 언덕 - 왼쪽과 오른쪽에 언덕 동굴로 인도하는 문이 있다.
동굴 내부는 무척 시원하여 여름에 가면 아주 극락이 따로 없겠으나
여름에는 날씨 관계로 눈조각품을 운영하지 않는다.

▲  역 이름이 구석기역(?)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유적지 외곽을 도는 관광 레일카를 운행하고 있다.
그 레일카는 구석기역에서 타면 되며, 속도가 너무 굼뱅이라
1바퀴 도는데 20분 정도 걸린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정문 주변에서 다시 만나는 고롱이와 미롱이
칼라버전 모형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정문
동굴처럼 생긴 정문 위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구석기 원시인의 얼굴상을
달아놓았다. 역시나 전곡리 스타일에 걸맞는 정문이다.


정문을 나섬으로써 2시간에 걸친 전곡리 선사유적지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시간도 벌써 16
시가 넘은 상태, 햇님도 고단한지 벌써부터 칼퇴근을 준비하면서 슬슬 땅꺼미가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껍데기만 남은 딱딱한 선사유적지를 탈피하여 선사시대 관련 다양한 체
험을 누릴 수 있는 현장으로 특히 돼지고기 바비큐 체험이 인상적이었다. 집안에 아이나 조카
들이 있다면 구석기 축제 기간에 맞춰 가족 나들이로 한번 가보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여 구석기시대로의 짧은 나들이, 전곡리 선사유적지 겨울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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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수리산, 반월호수에서 가을을 맞이하다 ~~~ (철쭉동산, 수리산산림욕장, 수리산둘레길, 수리사)

 

 

~~~~~  가을맞이 수리산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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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둘레길

▲  수리산 수리사

 


이 땅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추석) 연휴 끝 무렵에 친한 후배와 군포 수리산(修理山)을
찾았다. 수리산에 대한 사람들의 찬양이 대단하여 얼마나 괜찮은 산인지 직접 확인하고
자 간 것이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 무렵, 금정역에서 그를 만나 서울 5623번 버스(군포공
영차고지↔여의도)를 타고 둔전초교에서 군포마을버스 3-1번으로 환승하여 수리산 입구
인 중앙도서관에서 두 발을 내렸다. 수리산 나들이는 여기서부터 막을 연다.


 

♠  수리산(수리산 도립공원) 입문

▲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은 인구 30만을 지닌 군포시(軍浦市)의 듬직한 진산(鎭山)으로 군포 북서쪽과 안양시(
安養市)의 서남쪽, 안산시(安山市) 동쪽에 넓게 누워있다. 삼성산(三聖山, 480m), 관악산(冠
岳山, 629m)과 더불어 안양권의 이름난 명산(名山)으로 등산/나들이 수요가 상당하며 2009년
에 경기도의 3번째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수리산이란 이름 3자를 들으면 대입 수능시험의 수리영역이나 '수리수리 마수리' 주문이 생각
이 난다. 허나 산 이름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전해오
는데, 산 바위가 마치 독수리처럼 생겨서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고(수암봉 정상에 독수리
의 일종인 검둥수리가 앉아있는 듯한 바위가 있음), 산 남쪽 자락에 안긴 수리사에서 유래되
었다는 설, 그리고 조선시대 때 왕손(이씨)이 수도했다고 하여 수리산(修李山)이라 했다는 설
이 그것이다. 그래서 '修理山'이란 한자 대신 '修李山'이라 하기도 하며, '修理山'으로 바뀐
것은 20세기 중반 때라고 한다.

수리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봉우리는 태을봉(489.2m)이며, 슬기봉(469m)과 관모봉(426m),
수암봉(395m) 등이 수리산을 이루고 있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산세가 완만하고 숲이 짙
으며 수리사계곡과 창박골(병목안) 등의 계곡이 흘러 조촐한 피서지를 선사한다.
수리산 동남쪽 자락인 군포 수리동 일대에는 산림욕장이 닦여져 있고, 산 주위로 수리산둘레
길과 수리산임도길 등의 둘레길이 닦여져 수리산의 멋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수리사와 철쭉
동산, 2016년에 문을 연 초막골 생태공원 등의 명소가 있다. 특히 철쭉동산은 군포시의 야심
작으로 산자락에 넓게 철쭉밭을 닦아놓았는데 매년 5월 군포철쭉축제가 거하게 열려 사방을
온통 연분홍 천지로 만든다. 서울 근교에 이렇게 너른 철쭉의 공간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  윗쪽에서 바라본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층층히 이어진 수리산 철쭉동산의 위엄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등산은 수리산역(4호선)이나 철쭉동산, 군포시 중앙도서관, 태을초교, 수리약수터, 명
학역 등에서 시작하면 되며 군포시가 수리산 일대에 걸쳐놓은 둘레길은 총 4코스로 다음과 같
다.
① 수리산둘레길(군포수릿길 1코스) : 산본역~태을초교~노랑바위~임도5거리~감투봉~밤바위~시
민체육공원~산본역 (16km, 5시간 30분 소요)
② 수리산임도길 구름산책길(군포수릿길 2코스) : 중앙도서관~임도5거리~덕고개~행복쉼터~속
달동 마을길  (4.8km, 1시간 40분 소요)
③ 수리산임도길 풍경소리길(군포수릿길 3코스) : 수리산역~철쭉동산~중앙도서관~임도5거리~
수리사 (5km, 1시간 20분 소요)
④ 수리산임도길 바람고개길(군포수릿길 4코스) : 납덕골주차장~수리사방향~임도입구~바람고
개~에덴기도원~납덕골주차장 (5.6km, 1시간 50분 소요)

끝으로 수리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6.25전쟁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이 부분은
거의 모르고 지나치는 실정인데, 6.25 시절인 1951년 1월, 북한에게 서울을 빼앗기자(1.4후퇴
) 서울을 수복하고자 국군 1사단과 미군 25사단, 터키 여단 1개 대대가 수리산 일대에서 북한
군과 머릿수만 무식하게 많은 중공군 수만 명을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는 그
해 2월 10일 서울 재탈환에 큰 역할을 했으며, 지형적인 불리함과 막대한 인명피해를 극복하
고 강력한 화력과 항공기 지원, 군사들의 투지에 힘입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2007년부터 산 일대를 조사하여 국군 유해 4구와 유품 600여 점을 수습, 뒤늦게 국립현
충원에 봉안했다.


▲  수리산의 자랑, 숲길 (수리산 임도길)

수리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수리산 산림욕장은 군포시가 1993년부터 조금씩 조금씩 닦
아놓은 것으로 면적은 159.4ha이다.
상수리나무와 때죽나무 등 활엽수림이 주류를 이루며, 리기다소나무 등 침엽수(針葉樹)가 산
중턱을 장식한다. 군포시내(산본, 수리동)와 바짝 붙어있어 접근성 하나는 매우 착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산림욕에는 아주 좋다. 또한 피크닉장과 자연학습장도 갖추고 있어 가족 나들이
와 소풍지로도 손색이 없다.

우리는 산림욕장 내부까지 들어가진 않고 항아리 겉돌 듯 입구 주변만 살펴보고 바로 수리산
둘레길에 임했다.
산림욕장 남쪽에서 성불사를 거쳐 임도5거리로 인도하는 수리산둘레길은 차량들이 다녀도 충
분할 정도로 폭이 넓다. 순 흙길로 이루어져 있고 햇살이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숲이 무성하
여 이곳만큼은 무더위와 자외선을 잊어도 좋다. 나무가 베푼 숲내음이 속세에서 오염된 심신
을 어루만져 주며, 산바람이 이따끔 불어와 번뇌와 땀을 단죄한다.

집으로 살짝 훔쳐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로 성불사 직전 구간을 제외하면 경
사는 거의 느긋하며, 뱀처럼 구불구불한 고개를 넘으면 임도5거리에 이른다.


▲  수리산 임도5거리

임도5거리는 수리산 남쪽 요충지로 숲길이 5갈래로 갈리는 곳이라 하여 속편하게 임도(林道)5
거리를 칭하고 있다. 우리의 목적지인 수리사는 여기서 북서쪽 길을 이용하면 되며, 남쪽 큰
길로 내려가면 덕고개와 갈치저수지 방면으로 이어진다. 5거리에는 쉼터와 조그만 정자가 있
고, 소나무와 온갖 나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베풀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임도5거리에서 수리사로 가는 숲길 (수리산임도길 풍경소리길)

임도5거리에서 수리사입구까지는 앞서 길보다는 좁지만 흙길이 진하게 닦여져 있다. 깊은 산
주름 속에 묻힌 산중이라 완전 산과 푸른 숲, 하늘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정녕 수도
권의 주요 도시인 군포시가 맞는지 절로 고개라 갸우뚱할 정도로 마치 강원도 산골로 순간이
동을 당한 기분이다.

자연의 소리가 전부인 숲길로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으며 경사도 꽤 느긋하다. 우리네 인생이
이런 산길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길을 25분 내려가면 수리사입구에 이른다.


▲  수리산이 베푼 조그만 샘터
빨간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늦더위로 타들어가는 몸 속을 진화한다.

▲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 (1)

수리사입구에서 수리사까지는 각박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임도5거리에서 여기
까지 내려온 높이 만큼 말이다. 절까지는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며, 길 옆에는 수리사계곡이 수줍은 모습으로 졸졸졸~~♪ 화음을 선보이며 반월저수지(반
월호수)로 흘러간다. 울창한 숲이 길과 계곡의 지붕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있으며 바로 그 길
의 끝에 수리사가 자리해 있다.

▲  가늘게 흘러가는 수리사계곡

▲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 (2)


▲  수리사계곡에서 만난 조그만 자연산 폭포
계곡은 작지만 수리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갖은 바위와 조그만 폭포들이
아기자기한 풍경을 자아낸다.

▲  드디어 도착한 수리사의 정문, 일주문(一柱門)


 

♠  수리산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오래된 절집
~ 수리사(修理寺)

수리사는 수리산 서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산사(山寺)로 군포에서 가장 산골 벽지이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제대로 묻힌 비구니 절로 화성시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인데 6세기
중반인 신라 진흥왕(眞興王) 시절에 신라 왕족인 운산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부처를
친견해 반드시 부처가 된다는 기별(記別)을 받고서 여기서 부처를 만났다고 하며, 그 연유로
산 이름을 견불산<見佛山, 또는 불견산(佛見山)>, 절 이름은 수리사라 했다고 한다.
허나 진흥왕 시절 안양/군포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 지역으로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신라
가 동맹국인 백제의 뒷통수를 치며 한참 한강 유역과 경기도 지역을 점령하던 시절이다. 게다
가 신라의 불교가 법흥왕(法興王) 때 공인되었다고 하지만 문무왕(文武王) 시절까지 절은 대
부분 왕경(王京, 경주)에만 지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변경이나 다름없는 이곳까지 와서 위험
을 무릅쓰고 절을 지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만 경내에 오래된 석불 등이 있어 절이 우후죽
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대웅전 등 건물 36동과 12개의 암자(庵子)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다고 한
다. 허나 이 역시 자료와 유물이 부족해 신빙성은 떨어지며, 절 주변 산세를 보면 그만한 건
물을 짓기에도 벅차 보인다. 비록 그 정도는 아니지만 왕년에는 시흥(始興) 지역(그때는 시흥
고을이었음)에서 그런데로 잘나갔던 모양이며,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경남 지역에서 크게 활약을 했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가 쓰러진 절을 재건하고 이곳에서 수도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허나 그는 근거지인 현풍
(玄風)과 의령(宜寧)에서 벼슬을 멀리하고 후학을 길렀던 사람이다. 수리사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그를 왜 이곳 중창주로 등장을 시켰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를 흠모하던 이곳
승려가 장대한 세월에 산산히 흩어진 수리사 내력을 손질하면서 그를 살짝 넣은 것은 아닐까?
20세기에 들어서 경허(鏡虛)가 이곳에 주석하여 머물렀으며, 대선사(大禪師)인 금오(金烏)가
이곳에서 출가했다. 6.25 전쟁으로 절이 파괴된 것을 1955년 청운(靑雲)이 중건했으며, 계속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산신각, 나한전, 요사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죄다 20세
기 중/후반에 지어진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말라버렸다. 소장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오래
된 석불이 하나 전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간신히 귀뜀해준다.

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부터 수리사 경내로 문을 들어서던 우
회길을 이용하던 그건 각자 마음이다. 여기서 주차장까지는 경사가 좀 가파르며 그 경사를 오
르면 수리사 표석과 차량들이 평화롭게 쉬는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1단 더 올라가면 요사
(寮舍)이며, 1단 더 오르면 경내의 중심 구역으로 대웅전과 나한전(羅漢殿), 범종각, 약수터
등이 있다.

▲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

▲  석가불과 500나한이 봉안된 나한전

▲  나한전 석가3존불
(석가불과 문수,보현보살)

▲  가지각색의 나한전 오백나한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편강약수 ~ 약수는 어디가고 물통만 있나?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리사 역시 그 예외는
아니라서 대웅전 옆구리에 샘터를 두고 이름도 좋은 편강약수라 하였다. 하지만 샘터가 어디
아픈지 물은 막혔고, 대신 철덩어리 물통을 두어 샘터의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샘터에 놓인
바가지들이 어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속히 샘터와 물줄기를 복구하여 약수터를 되찾기 바란
다.


▲  수리사 대웅전(大雄殿)

이곳의 법당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으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
물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위엄 있게 들어앉아 남쪽을 굽어보고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
3존불과 여러 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3존불 위로 황금색 닫집이 장엄하게 자리한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닫집

▲  단촐한 모습의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뒷쪽 언덕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정
면과 측면이 달랑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과 독성(나반존자), 칠성
(치성광여래)이 봉안되어 있다.


▲  산신(山神) 가족이 담긴 산신탱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대웅전과 요사 뒷통수가 보이고, 수해(樹海)를 이루는 수리산
남쪽 줄기 너머로 인구 120만을 지닌 경기도의 중심 도시,
수원(水原)이 시야에 들어온다.

▲  수리사의 숙성된 흔적, 파괴된 석불과 석탑 잔재들

삼성각 옆에는 완전하지 못한 석재들이 고색의 때를 가득 머금으며 옹기종기 모여있다. 넓적
한 돌판에는 주름이 여러 겹 그어진 큰 돌이 있는데, 딱 보니 석불의 흔적으로 보인다. 석불
의 얼굴과 아랫도리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졌고 옷을 걸친 몸통
부분만 남은 것이다. 그 앞에는 석탑의 잔재로 보이는 돌이 놓여져 있으며, 예전 수리사에 5
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므로 그 탑의 잔재나 옛 건물의 주춧돌로 보인다.
다들 왕년에는 한 가닥 하던 존재들이나 지금은 초췌한 몰골로 지나간 세월을 원망하니 역시
나 인생은 부질 없는 모양이다. 수리사의 오래된 숙성의 흔적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절을 중
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수습한 것이다.

※ 수리산 수리사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산본역(2, 3번 출구)에서 군포마을버스 2, 3-1번을 타고 중앙도서관 하차 →
  중앙도서관 정류장에서 수리산임도길(수리산로)을 따라 도보 50~60분
* 지하철 1,4호선 금정역(6번 출구)에서 안양시내버스 15번을 타고 중앙도서관 하차
*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1번 출구)에서 군포 100-1번<60~80분 간격>, 군포마을버스 1-2번<60
  분 간격>을 타고 납덕골 하차 → 수리사까지 도보 25분
* 지하철 1호선 의왕역 2번 출구 건너편 정류장에서 군포 100-1번 이용
* 승용차 (경내 밑에 주차장 있음)
  ① 군포 → 대야미역 → 갈치저수지 → 덕고개 → 납덕골 → 수리사 
  ② 수원/안산 → 반월동 → 반월호수 → 납덕골 → 수리사
*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329 (속달로 347-181, ☎ 031-438-1823)


 

♠  수리산 마무리 (대야동 시골길, 반월호수)

▲  수리산을 뒤로하며 (수리사입구 남쪽)

수리사를 둘러보고 임도5거리로 다시 나가려고 했으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반월호수로 길
을 잡았다. 수리사입구에서 임도5거리 방면 동쪽 산길 대신 남쪽 길을 쭉 내려가면 되는데 수
리사에서 호수까지 무려 4km를 걸어야 된다.

반월호수 방면 도로(속달로, 둔대로)는 잘 포장되어 있어 걷기는 좋다. 군포시가 서울과 안양
의 배후 도시로 20여 년 동안 크게 성장하여 시가지가 나날이 확장되고 있는데, 이로 인해 겉
으로 보이는 군포는 완전 시가지와 아파트만 있는 도시로 보인다. 허나 시내 서남부에는 산과
논, 밭, 숲이 전부인 시골도 여실히 남아있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군포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대야동과 속달동 지역으로 이들이 군포의 시골로 남게 된 것은 수리산과 반월호수 덕분
이다. 그들이 이곳을 지킨 든든한 방패인 것이다.


▲  속달동 마을에서 바라본 수리산과 바다처럼 너른 하늘

▲  속달동 시골길(둔대로)

납덕골에서 이르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속달로'를 계속 고집하여 동남쪽으로 가면 갈치저
수지, 덕고개, 대야미 쪽으로 이어지며, 서남쪽 '둔대로'로 가면 반월호수로 이어진다. 둔대
로는 2차선 길에서 이내 조그만 시골길로 변신하여 우리를 인도한다.

가로수인 듯, 아닌 듯, 길가에 자리한 나무들은 슬슬 가을옷을 꺼내들고 있고, 길 주변에 펼
쳐진 논은 푸르게 익어 올해도 변함없이 풍년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고로 이런 시골길과 숲길
은 도시인들에게 청량제이자 꿀 같은 존재로 속세에서 상처받고 오염된 안구와 마음을 정화해
주기에 아주 좋다.


▲  벼들이 푸르게 익어가는 속달동 평야

▲  반월호수 북쪽 개울(반월천)

그림 같은 시골길(둔대로)을 걷느라 시간도, 지루함도 잠시 잊고 있으려니 다리 하나가 나온
다. 다리 밑 반월천에는 나들이객들이 개울 주변에 자리를 피고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어린
이들은 아직까지도 덤벼들고 있는 여름 제국(帝國)의 기운에 맞서고자 개울에 들어가 애궂은
물고기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물놀이를 즐긴다. 그런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계속 가다보면
영동고속도로가 나오고 그 밑도리를 지나면 반월호수가 펼쳐진다.


▲  서쪽에서 바라본 반월호수(半月湖水, 반월저수지)

▲  북쪽에서 바라본 반월호수

반월저수지는 반월호수라고도 불린다. 안양/안산권의 이름난 호수 관광지로 1957년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조성된 오래된 호수이다. 총 저수량은 118.7만㎥로 만수 면적은 37ha에 이르며, 수리산(집예골, 샘골, 지방바위골)이 베푼 물을 먹고 자라 아주 단단히 물이 올랐다. 수리사
계곡도 바로 이곳으로 내려와 잠시 머문 다음 큰 세상으로 흘러간다.

호수는 농어촌공사 화성,수원지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호수가 산에 빙 둘러싸여 있어 주변
풍경이 제법 아름답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관광지로 손질되어 산책로와 공원이 닦였으며, 식
당과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가 많이 들어서 이제는 수리산 못지 않은 군포시의 꿀단지가 되었
다.
호수 주변은 추석 연휴의 끝을 잡은 나들이 수요와 그들이 끌고 온 차량들로 완전히 시장통을
이루었다. 가족 단위 나들이객과 수리산에서 내려온 산꾼,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꾼들, 이곳으
로 밥이나 차, 커피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몰려들어 호수의 몸값을 더욱
높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호수는 특히 저녁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반월낙조(半月落照)라 하여 2004년에 군포
3경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한 다른 호수도 마찬가지겠지만 새벽 물빛에 슬금 피어오르는 물
안개가 아주 장관이다.

▲  오늘도 평화로운 반월호수

▲  호수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는 산

◀  푸른 하늘과 구름도 잠시 길을 멈춘
반월호수


▲  호수 곁을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고속전철

호수 바로 서쪽에는 경부고속전철 고속선이 닦여있다. 그러다보니 수시로 고속열차(KTX)가 빛
을 가르며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징하던지 호수가 쩌렁쩌렁 울리고, 귀신까
자빠트릴 정도이다. 호수를 거울로 삼은 존재들이 하늘과 구름, 산, 나무, 꽃에다가 고속전철
까지 참 다양하다.
이곳을 지나는 고속전철은 위로는 서울, 용산, 행신역, 아래로는 대전, 동대구, 포항, 부산,
마산, 진주, 익산, 광주송정, 목포, 여수까지 운행하며, 하루에 수백 차례 지나간다.


▲  호수에서 만난 서양 모화사상의 잔재, 풍차

호수 북쪽에는 산책로와 공원이 닦여져 있다. 그 산책로를 거닐다보면 천천히 바람개비를 돌리
고 있는 이색 정취의 풍차를 만나게 된다. 나무로 축소해서 만든 것으로 나름 어울리는 풍물시
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양 모화사상의 잔재이기도 하여 좀 씁쓸하기도 하다. 이 땅의 민중
과 18세기부터 함께한 물레방아를 두었으면 더 정감이 컸을텐데 말이다.

반월호수는 다 돌지는 못하고 1/4 정도만 돌았다. 시간도 이미 17시가 넘은 상태이고 배도 고
프기 때문이다. 호수는 이 정도면 충분히 본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미련을 버리고 군포마을
버스 1-2번을 타고 대야미로 이동, 대야미역에서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늘의 일정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가을맞이 수리산, 반월호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반월호수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 1번 출구 밖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군포마을버스 1-2, 6-1번을 타고
  반월호수(둔터) 하차 <6-1번은 산본역 2,3번 출구 밖 정류장에서도 이용 가능>
* 승용차 (호수 주변에 주차장 있음)
① 안양,군포 → 대야미역 → 둔대초교 → 반월호수
② 안산,화성 → 반월 → 팔곡2교차로 → 반월호수
*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둔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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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대표음식인 설렁탕의 탄생지, 제기동 선농단 ~~~ (선농대제 축제, 선농단 역사문화관, 선농단 향나무, 따끈한 설렁탕 1그릇)



' 설렁탕의 탄생지, 제기동 선농단 (선농대제) '


▲  선농단 선농대제 제례상 (2012년)


 

 

봄이 한참 절정에 이르는 4~5월이 되면 천하 방방곳곳에서 다양한 축제와 문화행사가 열
려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서는 종묘대제(5월 1주 일요일)와 연등회(석가
탄신일 1주 전 토~일), 석가탄신일(음력 4월 8일), 선잠제향(5월 중), 선농대제(4월) 등
이 열리는데(그 외에도 더 있음) 이들 축제 중에서 비싼 설렁탕을 무려 공짜로 제공하는
착한 축제가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제기동 선농단에서 열리는 선농대제(先農大祭)이다.
< 3글자로 줄여서 선농제(先農祭)라고도 함>


▲  제기동역에서 선농단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왕산로19길)
선농단 입구인 함경면옥에서 선농단 방향으로 약 110m의 꿀 같은 숲길이
펼쳐져 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선농단 향나무
향나무가 있는 곳이 바로 선농대제의 뜨거운 현장인 선농단이다.


드디어 선농대제가 열리는 4월 말 토요일, 따사로운 오전 햇살의 응원을 받으며 도봉동(
道峰洞) 집을 나섰다.
1호선 전철을 타고 20여 분을 달려 제기동역에서 하차했는데 선농대제 관람과 잘 숙성된
설렁탕을 먹는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랜다. 그렇다고 설렁탕 때문에 온 것은 절
대로 아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고유 전통 행사인 선농대제를 참관하러 온 것이다. (참
관하러 간 것임~~~ 강조!! 근데 왜 발이 저리지..??)

선농단 입구에 이르니 선농대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시원한 봄바람에 펄럭이며 대제를 구
경하러 온 사람들을 인도한다. 현수막은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으
며, 이제 막 제왕(帝王)의 제례 행렬이 끝나고 제례를 봉행(奉行)할 시간(10:30~12시)이
되어 선농단 주변은 제관(祭官)과 행사요원, 취재진, 나들이객, 동네 사람 등 수천 명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회색빛 도시 속에 조용히 묻혀지내는 망국의 제단 선농단, 국가
지정문화재라는 굵직한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원래 임무인 제단에서 강제 은퇴한 몸이라
꽤 적적한 신세이다. 그런 그에게도 천하가 미치도록 주목을 하는 때가 1년에 딱 하루가
있으니 바로 선농대제일이다.


 

♠  설렁탕의 탄생지, 농사의 중요성을 알리고 풍년을 기원하던
조선의 주요 국가 제단, 선농단(先農壇) - 사적 436호

▲  선농단 (선농대제가 끝난 직후의 모습)

선농단은 종암초교 남쪽이자 제기동 주택가 한복판에 고즈넉하게 누워있다. 이곳은 1476년에
조성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관경대(觀耕臺)로 조선의 제왕들이 신하를 거느리고 농사의 소중
함을 알렸다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를 지내 풍년을 기원했다. 이 제사를
선농제(선농대제)라고 하며, 거기서 선농단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선농
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청동기시대부터 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은 그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제왕이 직접 제사를 챙기고 농사를 권장했다는 기록은 신라 초인 기원전 41년에 처음으로 나
타난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비와 함께 6부(六部)를 순행(巡行)하여 농사와 잠사(
蠶事)를 권장하고 감독했다고 하며, 매년 경칩(驚蟄)이 지나고 첫 해일(亥日)을 택하여 왕이
제를 지내고 적전을 갈거나 또는 관리를 보내 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나중에 경주 동쪽인 명활산성(明活山城) 남쪽 웅살곡(熊殺谷)에서 선농제를 지냈으
며, 입하(立夏) 뒤 첫 해일에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 선농제란 이름은 바로 신라 때 생겨
난 것이다.

고려 때는 983년 1월, 성종(成宗)이 원구단(園丘壇)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몸소 적전
을 갈아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냈다. 하여 이때부터 이 땅의 토속적인 농사 신(神) 대
신에 중원대륙에서 가져온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성종은 송
나라와 교류를 하며 중원(中原) 문화에 깊이 심취해 그곳의 문화와 제도를 마구잡이로 가져온
군주이기 때문이다.
허나 고려는 황제(皇帝)가 원구단에 나가 하늘에 제를 지낼 때, 풍년을 같이 기원했고, 매년
열리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에서도 일종의 기곡제(祈穀祭)를 지내 별도의 선농제
는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던 선농제가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조선 초부터이다. 태조 때 적경공제지법(籍耕供
祭之法)을 제정하고 태종 때는 적전단(籍田壇)을 수축했으며, 1430년에는 박연(朴堧)의 건의
로 선농지악(先農之樂)에 쓰이는 토고(土鼓)를 대체하고자 가죽 테를 한 북을 만들어 사용하
였다. 그러다가 1476년 성종의 왕명으로 관경대를 만드니 그것이 지금의 선농단이며, 사직단(
社稷壇), 선잠단(先蠶壇), 영성단(靈星壇)과 더불어 국가의 주요 제단으로 큰 대접을 받았다.

선농제를 지낼 때는 제왕이 직접 신하를 거느리고 제를 지냈으며, 그것이 끝나면 동적전<제기
동과 전농동(典農洞) 일대>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적전을 관리하는 적전령(籍田令)이 푸른 보
자기에 감싸인 쟁기를 제왕에게 올리며, 그것을 받은 제왕은 직접 쟁기를 잡고 밭에 5번 쟁기
질을 하는 이른바 친경(親耕) 쇼를 벌였다.
쟁기가 끝나면 관경대로 올라가 백성 가운데 특별히 선발된 70세 이상 노인들을 위로하고 그
들이 밭을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런 다음 농작물 씨앗이 얼어죽는 것을 막는 절차까지 마
무리 되면 의식이 끝났음을 선포하고 궁궐로 돌아간다. 이렇듯 친경의례는 농사의 소중함을
제왕이 몸소 보여주고 비록 잠깐이지만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으로도 활용되었
다.
허나 친경의례는 성종 이후 어쩌다 1번 벌일 정도로 거르는 경우가 많았으며(연산군 1회, 중
종 2회, 명종 1회, 선조 1회, 광해군 1회~) 인조에서 현종까지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숙종(
肅宗)은 의식을 치루려고 단단히 준비까지 했으나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무산되었으며, 영조
시절에 비로소 다시 치러지게 된다.

동적전이 있던 제기동과 전농동 지역은 지금은 완전 주택가라 썩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20세
기 초까지만 해도 너른 경작지였다. <제기동(祭基洞)은 제사를 지내는 터란 의미로 선농단에
서 비롯된 이름임>
왕실에서 관리하던 적전(籍田)은 2곳이 있었는데 선농단 근처에 동적전이 있었고, 개성(開城)
동쪽 전농동에 서적전(西籍田)이 있었다. 동적전은 제사용 곡식을 저장했는데, 선농단(관경대
)과 희우정(喜雨亭), 필분각(苾芬閣)이 있었고, 다수의 창고가 있었다. 반면 개성에 있는 서
적전에는 형향각(馨香閣)과 창고가 있었다.
동적전에서 나온 곡물은 종묘제례에 주로 썼으며, 서적전 곡물은 왕실에서 벌이는 온갖 제사
의식에 동원되었다. 이들 적전에서 쓰고 남은 곡물은 백성을 구휼할 때 쓰거나 의약청(議藥廳
), 산실청(産室廳) 및 제왕과 왕비의 예장(禮葬)에 사용했다.

▲  청량대 표석

▲  선농단 북쪽 홍살문

이렇듯 왕실의 주요 행사로 바쁘게 살았던 선농제는 1909년까지 잘 유지되었으나, 1908년 이
후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순종의 칙령(勅令)에 따라 국가 제단을 정리하면서 사직단에
통합되었다. 허나 동적전 친경의례는 1910년 5월까지 이루어졌는데 그때 순종이 신하와 백성
을 거느리고 친경을 하는 장
면이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다.

왜정(倭政) 때는 지역 사람들에 의해 선농제가 조촐히 진행되었으나 1940년대 왜정이 망국의
제단을 욕보이고자 선농단 주변에 청량대공원(청량대)을 닦으며 제단을 아작내고 동적전이 있
던 곳에는 전농공원을 닦았다. 이때 제단 북쪽 땅이 떨어져나가 보통학교(현 종암초교, 1922
년 개교)가 지어졌고, 1935년에 제단 남쪽에 경성여자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가 들어서
면서 남쪽 땅까지 썰려나갔다. 또한 군수물자 징수란 명목으로 제사 도구를 거의 뜯어가 제사
도 중단되고 말았다.
어둠의 시절 이후에도 수난은 여전하여 1946년 이후 제단 주변에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30
년 이상 잠수 아닌 잠수를 타며 주택가에 묻혀있었다. 그러는 사이 선농단의 이름도, 존재감
도 모두 희미해져 세상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1979년 제기동에 뜻있는 이들이 '선농단친목회'를 결성하여 자비를 들여 1년에 1번
씩 치제(致祭)를 올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 세월의 저편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선
농단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그렇게 선농단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동대문구와 같이 제례를 지내다가 1988년 행
정기관장 최초로 동대문구청장이 선농제 초헌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1992년에는 '선
농대제 보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동대문구의 흔쾌한 지원과 폭풍 홍보에 힘입어 지역의 대
표 축제이자 문화행사로 제대로 거듭났다. 행사 규모도 비록 옛날만큼은 못해도 나날이 커져
갔다.
그러다가 선농단 복원 여론이 강하게 피어나면서 2013년 8월, 선농단 주변에 장막을 치고 복
원 공사에 들어갔고 2015년 4월 공사가 완료되어 다시금 세상에 위엄을 드러냈다. 옛 선농단
의 모습이 상당수 회복된 것이다. 또한 선농단 북쪽에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을 닦아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이해를 돕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선농단의 구조는 단 주위로 크게 터를 다지고 그 한복판에 단을 두었다. 단이라고 해서 높이
구축된 것은 아니며 땅바닥에서 조금 솟은 정도이다. 제단 테두리는 돌로 잘 다지고 안쪽은
흙으로 다졌는데, 2015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부득이 하얀 피부의 석재가 다소 섞여있
다. 기존에 쓰였던 옛 석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여 오래된 돌과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
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 돌도 선배 돌을 닮아가며 고색의 기운을 머금을 것
이다.
제단 외곽에는 낮은 키의 토담을 쌓았고, 동쪽과 서/남/북쪽 테두리 중앙에 붉은 피부의 홍살
문을 세웠는데. 이들 문과 토담은 2015년에 복원된 것이다. 선농단 남쪽에 1단의 석축을 두었
으며, 단 서남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향나무가 영욕의 세월을 견딘 제단을 굽어보고 있다.

▲  선농대제의 한 모습

▲  펄펄 끓는 가마솥 설렁탕

선농대제는 처음에는 정월 길(吉) 해일(亥日)에 했으나 태종(太宗) 때 경칩이 지난 첫 해일로
변경되었다. 그때가 농사가 시작되는 3월이기 때문이다. 음력 2월 첫 신일(辛日)에도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1910년에는 양력 5월에 거행되었다. 그러다가 1979년 이후에는 4월 말~5월
초/중순 사이에 하다가 지금은 4월 하순 토요일에 하고 있다.


제향(祭享)은 10변(籩) 10두(豆)의 중사(中祀)로 거행하고, 친림제향 때는 아헌관(亞獻官)은
왕세자(王世子)나 황태자(皇太子)가, 종헌관(終獻官)은 영의정이 맡았다. 집례(執禮)의 창홀
(唱笏)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고 육일무(六佾舞)를 추며, 제례 봉행 순서는
① 전폐례<奠幣禮, 농업신에게 예물을 올리는 의식> → ② 천조례<薦俎禮, 제신(祭神)에게 음
식을 올리는 진찬(進饌)의식> → ③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1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
는 의식> → ④ 아헌례<亞獻禮, 아헌관이 2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 ⑤ 종헌
례<終獻禮, 종헌관이 3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 ⑥ 음복례<飮福禮, 제관이 제
사를 마치고 신이 내린 제물을 먹는 의식> → ⑦ 망료례<望燎禮, 폐백과 축문을 태워 땅에 묻
는 의식> 순으로 거행된다.

영신악(迎神樂)은 경안지악(景安之樂)을 연주하고 전폐례에는 숙안지악(肅安之樂). 진찬례에
는 옹안지악(雍安之樂), 초헌례에는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며 일무생들은 문무(文舞)를
춘다. 이어서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할 때는 일무생들은 무무(武舞)를 추기 시작하며, 아
헌례와 종헌례 때는 수안지악을 다시 연주하고 철변두(徹籩豆)할 때는 옹안지악을, 송신할 때
는 경안지악을 연주한다. (절차가 매우 복잡함)

제사 제물로는 소와 돼지, 양의 고기와 피, 쌀과 기장, 과일, 떡, 술 등을 올렸으며, 모든 행
사가 끝나면 친경에 쓰인 소를 잡고, 제물로 쓰인 소고기를 넣어 탕을 끓였다. 그리고 제물로
쓰인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돼지고기는 편육으로 썰었는데, 탕에 밥을 말고 편육과 여러
반찬을 겯드려 행사에 참여한 신하와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제물에 김치가 없기 때문에 파를 씻어다 놓았고, 간장도 쓰지 않기 때문에 소금으로 탕의 간
을 맞추었다. 오늘날 설렁탕을 먹을 때 파와 소금을 겯드리는데, 그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선농단에서 끓인 탕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설농탕','설롱탕'이라 불렸
으며,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가운데 글자가 살짝 움직여 지금은 '설렁탕'으로 주로 불린다.
우리나라 대표 음식의 하나이자 서울의 토박이 음식 설렁탕은 이렇게 선농대제 뒷풀이 음식으
로 태어난 것이다.

또한 설렁탕의 옛 이름 중 하나인 설농탕의 유래에 대해서 1940년에 홍선표가 쓴 '조선요리학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앞서 선농탕과는 약간 다른 것이라 햇갈림을 준다.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하던 때에 비가 심하게 내려서 촌보(寸步)를 옮기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신하들이 배가 고파서 견디기가 힘드니 왕이 친경에 쓰던 소를 잡아서 맹물에 넣고
끓이라 하였다. 고기 끓인 국물에 소금을 넣어 먹으니 이것이 설농탕이다'

그 외에 오랫동안 탕을 끓이면 국물이 흰빛을 띠어 '눈처럼 뽀얗다','눈과 같이 무르녹는다'
는 뜻에서 설롱탕이 되었고, 그것이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견해도 있다. 허나 보통은 선농탕
유래를 많이 신뢰한다.

동대문구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거듭난 선농대제는 보통 10시부터 시작된다. 왕산로에서 선
농단까지 짧게 어가행렬을 비롯한 제례행렬을 선보이며, (예전에는 동대문구청에서 출발했음)
10시 20분 정도에 개회식을 갖고 10시 30분부터 12시까지 제례를 봉행한다.
제례를 치르는 동안 선농단 북쪽 종암초교에서 동대문구 공무원과 새마을단체 사람들이 점심
을 준비하며 12시부터(보통 11시 30분 이후부터 배식함) 선농대제의 백미(白眉)이자 상징인 '
전통
설렁탕 재현 및 나누기' 시간을 갖는다. 설렁탕은 누구든 먹을 수 있으며, 전통에 따라
탕에 밥이
말아져 나온다. 반찬으로는 설렁탕의 단짝인 김치와 깍두기를 비롯해 떡과 생수가
제공된다.
설렁탕은 넉넉히 준비하기 때문에(보통 2,000~3,000명 분을 준비함~)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
다. 초반에 가면 사람이 너무 미어터져 밥이 오기까지 상당한 인내를 요하니 차라리 사람이
많이 빠져나간 12시 30분 이후에 먹기를 권한다. 음식은 각자가 알아서 챙겨먹는 것이 아닌
새마을단체 사람들과 자원봉사 학생들이 알아서 갖다준다. 늦게 갔을 경우에는 밥을 먹을 의
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으며, 가급적 13시 이전에 가는 것이 좋다. (떡과 김치 깍
두기 등이 빨리 떨어
짐)

공짜 설렁탕이지만 맛은 생각 외로 괜찮아 왠만한 설렁탕 전문점을 울게 할 정도이다. 시중에
서 거의 7,000~9,000원 하는 설렁탕을 선농대제의 일환으로 공짜로 먹을 수 있으니 정말 좋은
축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3시부터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에서 설렁탕 요리대회(설롱 요리대회)가 열리며 요리가
끝나면 시식 기회를 제공한다. (대회 참가 자격은 동대문구 관내 식당이나 학교, 단체에 한함
) 음식을 맛보고 괜찮은 음식에게 점수를 주면 되며 그것을 토대로 요리대회 승부를 결정한다.

※ 선농단, 선농단역사문화관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1번 출구를 나가면 바로 선농단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의 지시
  에 따라 오른쪽으로 나무가 우거진 가로수길을 5분 들어가면 선농단이 나온다. 선농단 역사
  문화관은 그 북쪽 3거리(종암초교 정문 동쪽)에 자리한다.
* 지하철 6호선 안암역(3번 출구)에서 성북구 마을버스 04번을 타고 종암초교에서 하차, 여기
  서 길 반대쪽으로 건너면 종암초교로 인도하는 골목길(무학로44길)이 있는데 그 길로 도보
  3분
* 선농단 관람 시간 : 10시 ~ 18시까지 (11~2월은 17시까지)
* 선농대제는 4월 하순 토요일에 열린다. (4월 중순 쯤에 선농단 역사문화관에 전화문의를 해
  보는 것이 제일 좋음)
* 선농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선농단역사문화관 ☎
  02-355-7990)
* 선농단역사문화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남쪽 홍살문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선농단과 선농대제 둘러보기

▲  서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에는 푸른색 시트 커버를 걸친 제사상 4개가 놓여져 있다. 이중 큰 상은 선농단 북쪽과
동쪽에 배열하니 이들은 농업신인 선농씨와 후직씨의 밥상이며, 다른 조그만 상 2개는 선농단
밑에 둔다.
제단에서 남쪽 홍살문까지 붉은 카페트를 쫘악 깔고, 서쪽과 남쪽에도 붉은 카페트를 깔아 바
로 남쪽으로 향하게 했는데, 이들은 제왕을 비롯한 제관이 움직이는 동선이다. 제단 남쪽 정
면 길로 제단으로 들어가 의례를 치른 다음, 서쪽이나 동쪽 카페트를 따라 다시 남쪽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선농단 주위로 갑옷을 입거나 무관 복장을 갖춘 무관(武官)들이 삼엄하게 늘어서 있어 선농대
제의 엄숙함을 한껏 고조시킨다. 1시간 반 가까이 저렇게 서 있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허나 옛날과 달리 그저 자리만 지키면 되며, 옆 사람과 수다를 떠는 모습도 쉽게 목
격이 된다. 그것이 옛날과 오늘날 선농대제의 차이이다. 만약 옛날에 그렇게 산만하게 행동했
다면 바로 파직감이다. 그만큼 까다로움을 요구했던 국가의 제례의식이었기 때문이다.


▲  전통 방식으로 재현된 가마솥 설렁탕 부뚜막

선농단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부뚜막을 설치하여 정겨운 가마솥을 걸고 설렁탕을 끓이고 있다.
장작을 넣어 부뚜막을 계속 흥분시키면서 탕을 숙성시키고 있는데, 선농대제가 무르익을 수록
설렁탕도 그만큼 익어간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대제

선농단 남쪽 밑에는 금관조복(金冠朝服)을 갖춘 제관들이 홀(忽)을 쥐어들며 3줄로 늘어서 있
다. 이들 상당수는 선농대제 보존위원회 위원들로 석전대제와 사직대제, 종묘대제 보존위원들
도 섞여있다. 제왕은 보통 동대문구청장이 담당하고 있는데, 대례복(大禮服)과 12면류관을 갖
춘 자못 제왕다운 모습으로 대제에 임하고 있다.
제관들은 노천에 멍석을 깔고 앉거나 절을 하지만 제왕은 그들 동쪽에 차려진 노란색 천막 안
에서 햇살을 피하며 대기한다. 그리고 의식을 행할 때는 옆에 자리한 내관이 붉은 일산(日傘)
을 받쳐들고 그를 따르니 역시나 제왕이나 우두머리 자리가 좋긴 좋다.

제관 자리 남쪽에는 하얀 천막이 쳐져 있고 의자가 넉넉히 놓여져 있어 행사 관계자들과 세금
이나 축내는 구의원과 국회의원 밥버러지들, 지역 유지들, 관람객들이 앉아있으며 제관들 서
쪽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있는데 이들은 일무(佾舞)를 맡은 사람들이
다. 그리고 그들 북쪽에는 제례악을 맡은 사람들이 각기 악기 1개 또는 2개씩 거느리며 악기
를 조정한다.


▲  선농대제에 임하고 있는 제관들
전통 행사로 진행되는 지금도 이러한데 옛날에는 정말 숨소리도 내기 힘들 정도로
정성과 엄숙을 다했다. 그때는 조금의 실수나 긴장 풀린 모습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만약 걸리면 파직을 시키거나 징계를 주었다.

▲  동쪽 홍살문 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대제
(노란 천막은 제왕이 대기하는 특별 공간)

▲  제례 봉행이 시작되면 제관들은 전폐례부터 망요례까지 무려 7개의 의식을
수행해야 된다. 그때마다 단으로 올라가 의식을 치루고 다시 내려와
대기하다가 다음 의식이 시작되면 또 올라간다.

▲  선농단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일무생들
사단법인 아악일무보존회 사람들로 모두 여자들이 맡는다. 앳된 20대부터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36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  문무(文舞) 율동을 선보이는 일무생들

▲  제례악을 맡은 사람들 (경기도립국악단)

▲  서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북서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음복례가 진행되고 있는 선농단
음복례는 제관이 제사를 마치고 제물로 올린 술을 마시는(음복) 의식이다.

▲  음복례도 거의 끝나가고

▲  대제의 마지막 단계, 망요례

음복례가 끝나면 폐백과 축문을 태우고 선농단 북쪽에 마련된 공간에 묻는다. 망요례를 끝으
로 1시간 반에 걸친 선농대제는 마무리가 되며, 원래대로라면 친경 의식도 해야 되나 부근에
친경을 벌일 경작지가 없기 때문에 계속 생략되고 있다. 그러니 선농대제는 '설렁탕 나누기'
를 포함해 2/3 정도만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허나 어찌하겠는가? 아무리 전통 행사라고 해도
시대에 맞게 변형과 축소는 어쩔 수가 없다.


▲  망요례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제관들
다들 속으로 '이제 행사도 끝났으니 밥 묵으러 가자~~!' 이랬을 듯~~

▲  선농대제에서 활약한 전통 악기들
궁중 의례나 종묘제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몸값 비싼 악기들이 주류를 이루어
선농대제의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대제가 끝나자 선농단 주변의 통금은 모두 풀렸다. 제관들과 행사 요원들, 높은 작자들은 기
념사진을 찍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 둘 밥 먹으러 사라지고, 제단 주변은 관리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어수선한 상황이 되었다. 대제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제단으로 들어와
초롱초롱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제삿상과 제물, 제기, 악기 등을 살펴보고 사진에 담느라 부산
하다. 그렇다고 제물과 제기를 가져가지는 말자~! 그냥 손으로 쓱쓱 어루만지고 끝내면 된다.


▲  선농대제 제삿상 <후직씨에게 올리는 제삿상, 2012년>

▲  금동 빛깔의 장엄스런 제기들
사극에서나 보던 고급 제기들이 속인들의 호기심을 건드린다. 백성들은 감히 쓰지도,
만지지도 못했을 저들을 직접 두 눈에 담으니 기분이 참 새롭다. 저들은 가격이
얼마나 하려나? 몇 개 장만하여 내 밥그릇으로 쓰고 싶다.

▲  제주(祭酒)을 담은 그릇과 의식 때마다
손을 씻는 정화수와 수건들

▲  창고로 퇴장하는 제기들
이제 1년 뒤에나 볼 수 있겠구나...


▲  가벼운 태풍이 지나간 듯 어수선한 선농단 (대제 직후의 모습)

제관과 행사요원들이 밥 먹으러 가고 선농대제로 잠시 긴장을 탔을 선농단은 제사 소품이 어
지럽게 깔린 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저 소품들은 점심 이후에 모두 정리되어 창고로 옮겨지며, 제단 주변을 깨끗히 손질하여 언제
시끌벅적한 대제를 지냈냐는 듯 원래의 적막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무리 점심시간이
라고 하지만 제단 위에 저렇게 소품을 방치하는 것은 좀 결례가 아닐까 싶다. 선농단이 마치
제례용품 창고가 되버린 듯한 씁쓸한 현장처럼 보여 적어도 제단 밖으로 모두 옮겨놓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다.


 

♠  선농단 마무리 (향나무, 설렁탕, 선농단 역사문화관)

▲  선농단 향나무 - 천연기념물 240호

선농단 서쪽에는 나이도 지긋한 오래된 향나무가 넓게 그늘을 베풀고 있다. 그는 선농단의 오
랜 상징이자 얼굴로 나이가 무려 500년 이상을 헤아린다. 20세기 후반에도 추정 나이가 500년
이었다고 하니 선농단과 나이가 그런데로 비슷할 듯 싶으며, 1476년 선농단을 닦을 때 성종이
기념으로 심거나 15세기 후반 선농대제 기념으로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천하에 널리고 널
린 나무 중에 유독 향나무를 심은 것은 제사 때 피울 향을 충당하고자 함이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세월이란 무한 양분과 국가 제단에 자리한 잇점으로 관리들과 귀족
들의 보살핌이 대단했다. 게다가 대제 때마다 곡차(穀茶)의 기운을 듬뿍 받으니 키가 13.1m,
둘레 2.28m에 어엿한 나무로 성장했다. 대제가 끝나면 막걸리를 비롯하여 제사에 쓰인 술은
이 나무에 모두 부었다고 하며, 어렸을 때부터 강제로 술에 길들여지다보니 이제는 내성이 생
겨 어지간한 술에도 눈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  선농단의 흑역사, 바닥에 눕혀진 청량대(淸凉臺) 표석

향나무 북쪽에는 '청량대' 3자가 쓰인 표석이 표석이 벌러덩 누워있다. 여기서 청량대는 왜정
이 선농단을 욕보이고자 제단 주변에 닦은 공원으로 '청량대공원'이라 불렸다. 공원 앞에 청
량대 표석을 세워 선농단의 이름을 억지로 대신했는데, 1945년 8.15이후 제기동과 용두동 주
민들이 몰려와 왜정이 세운 청량대 표석을 때려 눕혀 땅에 묻어버리면서 어둠의 시절에 대한
울분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그러다가 2013년 이후 선농단을 복원할 때 다시 꺼내서 이곳에 눕혀놓았다. 90도로 세워놓으
면 왜정 잔재에 기만 살려주는 꼴이 되니 이렇게 눕힌 것이다. 비록 왜정이 남긴 고약한 흔적
이지만 기왕 다시 햇살을 보게 된 거 이런 상태로 선농단 곁에 두어 후대에 경계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나 이 땅에는 아직도 때려눕힐 왜정의 잔재가 너무 많다. 그것들을 모두 잡는
그날, 이 땅에 진정한 광명이 올 것이나 그럴려면 아직도 까마득하니 그저 곡소리만 나올 뿐
이다.


▲  선농대제는 끝났지만 숙성의 끝을 향해 부뚜막에 몸을 기대며
제 갈 길을 고집하는 가마솥 설렁탕


선농대제도 다 끝나고 사람들도 대부분 빠져나간 선농단에서 유일하게 펄펄 흥분을 내는 존재
가 있다. 바로 황토색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 설렁탕이다. 부뚜막에는 아직도 온기(溫氣)가 여
전해 뜨거운 입김을 불어대며 탕이 아주 사골이 되도록 펄펄 숙성시키고 있는데 탕 국물이 아
주 하얗게 변해 뽀얀 눈이 내려앉은 것 같다.
설렁탕 나누기 행사에서 이 가마솥 설렁탕을 쓸 것 같지만 절대로 쓰지 않는다. 동대문구에서
따로 조리하여 가져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이 설렁탕은 어디까지나 재현용이며 가마솥 안에
는 국물만 보일 뿐 고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허나 냄새만큼은 설렁탕 냄새 비슷하여 아
마도 소뼈 등을 넣고 삶은 듯 싶다.


▲  선농단 북쪽 밑에 자리한 선농단 역사문화관

선농단 역사문화관은 선농단을 복원하면서 새로 닦은 것으로 2015년 4월에 문을 열었다. 이곳
에는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역사와 유물, 디오라마를 비롯하여 설렁탕의 깊은 유래, 농업의 역
사와 농기구들을 다루고 있으며, 어린이를 위해 선농단 탁본 체험, 선농대제 의복 체험, 선농
대제 사진 촬영 등의 여흥거리도 준비되어 있다.
지하 2층 규모로 지하 1층에는 선농단과 선농대제, 어가행렬, 제왕의 친경의례 등을 다루었고,
지하 2층은 설렁탕과 농업 관련 유물과 서적 전시, 체험 코너, 청소년 쉼터와 배움터, 중정(
시간의 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정 같은 경우는 향나무 남쪽에 있었던 옛 선농단을 투영
한 곳으로 내,외부에 24절기를 표현하여 그 24절기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햇님의 운행에 따라
시간과 계절, 날씨의 변화된 조건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려주는 공간이다.

허나 다른 박물관, 전시관과 비교해서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이나 매력은 별로 없으며, (체험
코너나 중정 정도~) 전시 유물도 좀 빈약한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관련 해설과 사진, 디오라
마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선농단 후식거리로 1바퀴 둘러보며 선농단을 복습하는 공간으로 활
용하면 될 것이다. 특히 아이들을 동반하여 왔다면 꼭 들려서 체험 코너에서 놀게 해주는 것
도 좋다. (선농대제 의복 체험, 사진 촬영 등)


문화관 정문에는 전통 찻집과 기념품점이 있어 잠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마침 정문 앞에서 설렁탕 요리 대회(설롱 요리대회)가 열리고 있어서 분위기가 가마솥 설렁탕
처럼 아주 뜨거웠다.

★ 선농단 역사문화관 관람정보 (2018년 5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18시 (겨울 11~2월에는 17시 30분까지)
* 관람료 : 무료 (매주 월요일과 법정공휴일은 휴관)
* 상설 전시 해설 : 1일 6회 (10~16시까지 매시 정각, 12시는 없음)
* 단체 전시 해설은 10~20명 단체에 한하며 관람 5일 전까지 전화로 신청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 02-355-7990)


▲  선농단과 동적전의 위치

▲  1739년에 작성된 친경의궤(親耕儀軌)

▲  동적전식례(東籍田式禮)
동적전에 관해 기록한 책으로 1824년부터 1853년까지 쓰였다.

▲  신농씨 제례상

▲  선농대제에서 먹은 설렁탕의 위엄

선농단과 선농대제를 둘러보고 그날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설렁탕을 먹으러 종암초교로
이동했다. 선농단 일대를 동분서주하다 보니 시장기가 무척 치솟아 뱃속이 아주 반란 직전이
다.

설렁탕은 동대문구청에서 마련하여 제공하는 것으로 행사 관계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무
료로 대접하고 있다. 그러니 누구든 와서 운동장에 설치된 천막에 앉으면 설렁탕과 김치, 깍
두기, 떡, 생수, 1회용 숟가락과 젓가락을 제공받는다. 직접 줄을 서서 음식을 받는 것이 아
닌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갖다주는 방식으로 초반에 가면 자리를 잡기도 힘들뿐 더러,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려 차라리 좀 늦게 가는 것이 낫다.
12시 30분 이후에는 빈 자리가 많아서 적당한 곳에 앉아 음식을 나르고 치우느라 바쁜 그들에
게 1그릇 청하니 바로 잘차려진 설렁탕을 가져다준다. 혹자(或者)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
다. '공짜 설렁탕이니 맛도 별로고 고기도 별로일 것이다'
하지만 동대문구가 지역 이름과 선농단, 선농대제의 이름을 걸고 제공하는 설렁탕인지라 맛은
시중의 유명 설렁탕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안심하고 먹자. 파도 넉넉히 들어있고, 고
기도 그런데로 담겨져 있으며, 김치와 깍두기도 맛이 괜찮다. (예전에는 밥과 탕을 따로 주었
으나 이제는 탕에 말아서 제공함)

설렁탕의 양은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나한테는 좀 적었다. 뱃속도 1그릇을 더 조공으로 보내라
고 극성인지라 1그릇을 더 청하여 2그릇을 비웠다. 어차피 늦게 가면 초반과 달리 음식 여유
가 있기 때문에 1그릇을 더 먹고 반찬을 더 축내도 상관은 없다. 그날 배식이 어여 끝나야 설
렁탕 나누기 행사도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분 좋게 설렁탕 섭취를 마치고 나오니 시간은 어느덧 13시 20분이 되었다. 선농단에
3시간 가까이를 머물며 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 역사문화관, 향나무, 거기에 설렁탕까지
정말 남부럽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눈과 입, 코, 귀 등 5각(五覺)이 즐거웠던 답사였다.
이렇게 하여 내년 선농대제와 설렁탕을 벌써부터 고대하며 '설렁탕의 고향, 선농단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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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거닐다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강감찬 생가터, 낙성대공원)



'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찾아서~~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  낙성대 3층석탑

▲  낙성대 안국사

▲  신림동 굴참나무



봄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며 천하만물을 곱게 물들이던 5월의 첫 주말에 일행들과 낙성대를
찾았다.
이제 5월의 시작임에도 철모르고 찾아온 따스함을 넘어선 더운 기운에 여름이 벌써 근처까
지 진군한 모양이다. 이번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더울 거라고 구라청으로 유명한 기상청에서
입을 모으고 있으니 여름 제국의 시련을 어떻게 견딜지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오후 3시에 낙성대역(2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부근 마트에서 간단하게 음료수와 김밥을 사
들고 낙성대(안국사)로 향했다. 그곳으로 갈 때는 낙성대입구에서 서울대 후문으로 통하는
낙성대로를 따라가면 손을 뒤집듯 쉽게 갈 수 있지만 그렇게 가지 않고 낙성대동 주택가로
조금 돌아갔다. 그 이유는 밀림 같은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던 유서 깊은 현장, 허나 지금은 주택가 속의
외로운 공원이 된 옛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생가터>
-
서울 지방기념물 3

▲  옛 낙성대 (강감찬 생가터)

봉천동 218번지(낙성대동)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가 묻혀 있다. 이곳은 관악구 출신이자 귀주
대첩의 영웅인 강감찬 장군(948~1031)이 태어난 곳으로 흔히 낙성대하면 여기서 남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안국사(安國祠) 일대를 일컫지만 원래 낙성대는 이곳이다. 낙성대란 이름은 별이
떨어진 터란 뜻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
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낙성대는 절대로 이상한 대학교의 이름이 아님~~!!>

948년 어느 날 밤, 중원대륙 사신(使臣)으로 표현된 인물(그냥 사신으로 나오기도 함)이 근처
를 지나다가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광경에 입이 떡 벌어진 그
는 별이 떨어진 집을 찾아가니 그 집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자 금주(衿州, 서울 관악
, 금천구 지역)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집이었는데 마침 그의 부인이 아들을 낳으
니 그가 바로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이후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그를 만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곡성(文曲星)을 못
본지 오래되었는데 여기서 지금 뵈옵습니다'
하며 꾸벅 절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곡성은 도
(道家)에서 말하는 9개의 별 가운데 4번째 별로 학문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떨어진 별이 문곡성이라고 하나 강감찬의 학문이 매우 뛰어나 문곡성을 빌려 표현했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중원(中原)의 후한(後漢), 진나라 등과 교류를 했는데 고려와 중원의 사신, 무역
상인들은 개경(開京) 인근 벽란도(碧瀾渡, 예성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오갔다. <
중간에 흑산도나 가거도를 경유하기도 함> 그러니 굳이 내륙인 서울<당시 남경(南京)>로 돌아
갈 이유는 없다.
이곳을 거쳐가지도 않았을 사신을 애써 끌어들인 것은 온갖 문화가 혼합된 중원의 문화를 좋아
하고 중원대륙을 동경하던 옛 사람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며 앞서 문곡성의 예를
통해 문곡성의 화신(化身)으로 여기고 그의 탄생일에 맞춰 그 별이 떨어진 것으로 탄생설화를
꾸민 듯 하다. 그리고 송나라 사신이 그에게 문곡성이라 존칭하며 굽신거렸으니 그에 맞게 중
원대륙 사신을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별은 나라를 세운 시조(始祖)나 영웅의 탄생설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들이 태어났을 때 흔히 별이 떨어졌다 하늘이 기뻐서 별을 내렸다는 식으로 탄생을 추켜세우는
것으로 설화처럼 정말로 별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로 떨어졌다면 강감찬 집은 물론
이고 그 주변은 정말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우스개 소리로 딸 수 있을
정도로 작아보이나 그게 코 앞에 다가왔을 때는 꽤나 난감한 상태가 됨>

이곳에 있었다는 강감찬 생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의
집안이 후삼국시대부터 금주 지역을 다스리던 세력가였으니 집은 제법 컸을 것이다. 허나 세월
의 장대한 흐름 속에 집이 녹아내리면서 생전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강감찬이 세상을
뜬 이후, 그를 흠모하던 사람들은 이곳이 별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낙성대라 불렀다.
13세기 경,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그의 공덕과 그의 탄생지를 길이 알리고자 생가터에 3층석
탑을 세우니 그것이 낙성대3층석탑이며, 탑의 영향으로 이곳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다.

이후 3층석탑 홀로 이 자리를 지키다가 1974년 이곳 남쪽에 사당인 안국사를 세우면서 탑을 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대신 유허비를 세우고 나무와 꽃을 심어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다.
안국사가 조성되면서 그곳이 새 낙성대가 되었으며, 기존의 낙성대는 옛 낙성대가 되어 '낙성
대유지(遺址)'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근래에 '강감찬생가터(낙성대)'로 명칭
이 갈렸다.

현재 이곳에는 낙성대유허비와 옛 강감찬 향나무의 뒤를 이은 160년 묵은 향나무가 있으며,
무와 꽃이 가득하여 조촐하게 소공원의 역할을 한다. 강감찬생가터라고 하지만 생가와 관련된
어떠한 흔적도 전해오지 않으나 땅을 파보면 건물 주춧돌이나 당시 유물이 고개를 들고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이 주변을 재개발하거나 싹 밀어버릴 기회가 있을 때 꼭 발굴조사를 벌였
으면 좋겠다.

강감찬생가터(옛 낙성대)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50m 정도 가면 왼쪽으로 낙성대역길이 나온다,
  길을 3분 정도 가면 오르막이 나오면서 길이 왼쪽(동쪽)으로 꺾이는데 그 꺾인 길로 2번째
  골목길인 낙성대역4길로 2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긴 옛 낙성대가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낙성대동) 218-14


▲  수목으로 우거진 옛 낙성대

▲  낙성대유허비(落星垈遺墟碑)

옛 낙성대 한복판에 자리한 유허비는 낙성대의 상징이던 3층석탑이 새 낙성대로 옮겨짐에 따라
허전한 옛 자리를 지키고자 1974년에 세워진 것이다. 안국사 안에 세워진 강감찬사적비를 모델
로 하여 똑같이 만들었는데, 고개를 높이 쳐들며 엉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거북 머리 귀부(龜趺
)를 밑에 깔고 그 등에 비좌(碑座)를 만들어 '강감찬장군 낙성대유허비'라 쓰인 비신(碑身)
세웠으며 그 위에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비석 높이는 2m 정도로 안국사의 강감찬사적비보다 키가 작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나
1997년에 다시 손질했다.


▲  강감찬 향나무

옛 낙성대의 명물로는 제자리를 떠난 3층석탑과 함께 오랜 숙성을 자랑하는 나이 지긋한 향나
무가 있었다. 향나무는 강감찬과 더불어 자랐다고 전해져 일명 '강감찬나무'라 불리는데 그것
이 맞다면 나이가 무려 1,100살이 된다. 허나 실제 나이는 그 정도까지 미치지 못하며 조선시
대에 강감찬을 흠모하던 지역 사람들이나 후손이 심은 것으로 보인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강감찬과 연관된 나무로 묶여진 것이다.
이 나무 외에도 인근 난곡에 그가 심었다고 전하는 굴참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도 강감찬나무란
별명을 지니고 있다. (본글 끝 부분에 있음)

낙성대 향나무는 낙성대와 강감찬을 상징하는 자연 명물로 1968 서울시 보호수 1-23로 지
정되었으나 1987년 무심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줄을 놓고 말았다. 그래서 그
에게 부여된 보호수 등급은 해제되었고 죽은 몸뚱이도 문드러져 전설 속의 나무가 되었다.
이후 1996년 관악구에서 옛 낙성대를 확장/정비하면서 향나무의 빈자리를 채울 계획을 세웠고
적당한 나무를 물색하다가 그해 11월 경기도 고양시(高陽市)에서 150년 묵은 향나무를 구입해
비록 씨는 다르지만 강감찬나무의 후예로 삼있다. (나무 앞에 그와 관련된 유래를 머금은 표석
이 누워있음)


 

♠  낙성대공원과 낙성대3층석탑

▲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는 낙성대공원

옛 낙성대를 둘러보고 안국사가 있는 새 낙성대로 이동했다. 낙성대역에서 서울대후문으로 가
는 길목에 자리한 이곳은 19746월에 조성되었는데 크게 안국사와 낙성대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 공원에는 팔작지붕 기와집 매점이 전부였으나 그새 빨간 피부의 도서관과 야외놀이
마당, 전통혼례식장 등을 새로 그려넣어 그때보다 더 활력이 넘쳐보인다.

봄이 내려앉은 공원에는 산책,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거의 시장통을 이루었고, 공원 북쪽에 자
리한 전통혼례식장에서는 혼례가 열리고 있어 하객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우리는 그런 풍경의
일부가 되어 의자에 앉아 바깥에서 가져온 음료수와 김밥을 먹으며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  빨간 카페트가 깔린 관악예절원 전통혼례장

▲  안국사로 인도하는 그림 같은 숲길
오랜만에 찾은 새 낙성대에 이런 숲길이 있었다니 결코 낯선 곳이 아님에도
처음 만난 듯 신선하기만 하다. 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이다.


낙성대공원에서 안국사로 가는 길은 크게 2개이다. 하나는 숲길(윗 사진)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국사 정면으로 난 홍살문으로 가는 것인데 우리는 숲길로 들어가 홍살문으로 나오기
로 했다.
숲길 좌우에는 나무들이 봄이 안겨준 좋은 세상에 심취하며 한참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그 풍경이 고와 벌써부터 눈이 호강을 누릴 지경인데 늦가을이면 그 화사함에 두 눈이
멀지도 모르겠다.


▲  안국사의 정문인 안국문(安國門)

숲길을 들어서니 안국사 관리사무소가 나오고, 그 옆으로 안국사의 외삼문(外三門)인 안국문이
윤기가 흐르는 청기와 맞배지붕을 드러내며 위엄을 뽐낸다. 사당은 안국문부터 내삼문을 거쳐
본전까지 모두 서북향(西北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지형상에 이유도 있겠지만 강감찬이 고려
때 인물이므로 옛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바라보게끔 서북향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
까 싶다. 개경(개성)은 여기서 서북향이다.

안국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만 왕래하는 특별한 문으로 제
향 외에는 닫아둔다. 속인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가면 된다. 안국문 앞 계
단은 약 3m 높이로 문의 위엄을 수식하고 있으며, 계단 남쪽에는 낙성대 안내문과 낙성대 바위
글씨가 있다.


▲  커다란 돌에 새겨진 낙성대 바위글씨

낙성대 안내문 옆에 자리한 낙성대 바위글씨는 낙성대가 완성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남긴 낙
성대 3글자를 자연산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74년 청와대와 서울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 그를 통해 백성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충효의
지를 높이고자 그의 사당을 짓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옛날에 잘나갔던 장군의 사당이 하나
도 없던 상황. 그런 상황에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은 정말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유적인 낙성대는 3층석탑과 향나무만 있었을 뿐, 제를 지내는 어떠한 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자리가 넓은 관악산 북쪽 자락에 넓게 터를 다져 사당을 지었는데 그해 411일 상량
식을 가졌고 불과 2달 만인 610일에 뚝딱 완성을 보았다. 45천이 들었으며 강감찬이 국
내외적으로 크게 불안정했던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 나라가 평안해진 것처럼 나라의 평안을 염
원하는 뜻에서 사당 이름을 안국사라 하였다.

바위글씨 앞 표석에는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셨다는 식으로 아주 재미없게 쓰여 있어 독재시대의
우울했던 단면을 보여준다. <사당을 지어 영웅을 기리는 것은 좋으나 그 사당을 지은 이를 너
무 높인 것이 옥의 티임>


▲  안국문과 내삼문 중간 (안국문에서 바라본 모습)

안국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내삼문이 보이고, 좌우로 3층석탑과 강감찬장군사적비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울의 유일한 옛 시대 장군의 국립 사당이라 <민간신앙으로 지어진 원효로 남
(南怡) 장군 사당, 보광동 김유신장군 사당은 제외> 경내가 꽤 깔끔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  3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는 강감찬장군 사적비(事蹟碑)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옛 낙성대에 있는 유허비와 같은 모습이다.

▲  낙성대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

강감찬사적비 맞은편에는 낙성대의 오랜 상징인 낙성대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왜 이곳에 뜬금없이 절탑이 있지~?','인근 절이나 절터에서 가져온 것인가~?'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그는 겉모습만 그렇지 불교와는 관련이 없는 석탑이다.

이 탑은 고색의 기운이 없는 낙성대 안국사에서 유일하게 고색의 내음을 뿌려주는 존재로 13
,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강감찬의 공덕을 기리고자 그의 생가터에 세운 것이다. 공덕을 기
린다고 하면 흔히 비석을 세우기 마련이나 불교 국가인 고려답게 불탑(佛塔) 모양의 탑을 세워
강감찬을 큰 존재로 추앙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옛 금천 지역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이 얼
마나 지극했는지를 가늠케 하며 지금은 금지된 도시가 되버린 개성(開城)에도 그를 위해 세운
석탑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서 석탑을 불탑도 아닌 영웅을 기리고자 세운 경우는 강감찬 외에도 경남 남해(南海)
정지(鄭地) 장군 석탑이 있다. 그는 14세기에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격퇴해 남해 백
성을 구했는데 지역 백성들이 그의 전승을 기리고자 세웠다.

탑이 영락없는 불탑이라 다른 절에 있던 탑을 가져와 낙성대의 상징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여
기는 경우도 있지만 낙성대 주변에서 마땅한 절 흔적이 없다. 오로지 강감찬을 찬양하고자 세
운 탑이라고 봐야된다. 조성시기가 13세기인 것을 보면 그 당시 무척이나 징그러웠던 몽고(
나라)와의 전쟁에서 거란족(요나라) 토벌의 영웅, 강감찬을 그리며 그의 혼령이 몽고를 속시원
히 때려잡아주기를 바라는 뜻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탑의 높이는 4.5m로 순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밑에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길쭉한 기단부(
壇部)를 세운 다음, 3층 탑신(塔身)을 얹혔다. 1층 탑신에는 '강감찬 낙성대'라 쓰여 있어 이
탑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머리장식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다. 거의 800년을 묵은 탑이지
만 아직 정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강감찬의 왕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탑은 옛 낙성대에 있었으나 1974년 제자리를 떠나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낙성대의 오랜 상징
으로 이곳에 왔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3층석탑이 없는 낙성대
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안국사도 그가 있기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  1층 탑신에 희미하게 새겨진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

▲  서쪽에서 바라본 낙성대3층석탑

▲  남쪽에서 바라본 낙성대3층석탑

       ◀  푸르게 익은 낙성대 은행나무
1974년 안국사가 완공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그 기념으로 보낸 나무이다. 나무 앞에 관련
내용이 적힌 표석이 누워있는데 '~~각하께서 ~
~하사하시었다'는 식으로 적혀있어 그 표현에
다소 거부감을 들게 한다.
그래도 역사의 산물이니 어찌하랴. 좋은 뜻에
서 안국사를 세운 것은 분명하니 이런 시대도
있었음을 알리는 뜻에서 그냥 두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본전을 가리고 선 내삼문(內三門)
저 문을 들어서면 안국사의 본전이 나온다.


 

♠  낙성대 안국사(安國祠)

▲  안국사 본전(本殿)

안국사 가장 안쪽에 자리한 본전은 말그대로 이곳의 중심 건물로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
어 있다. 가운데 칸에 그의 영정이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그의 생애의 주요 장면(탄생, 조정
출사, 귀주대첩, 영파역에서 현종을 알현하는 모습 등)을 머금은 기록화가 걸려있는데 오직 상
상으로 그려진 것이라 그 당시와는 다소 떨어지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3중으로 된 기단 위에 높이 들어앉아 서북쪽을 바라보는 이 건물은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청기와를 입혔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건축물인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
殿)을 본따서 지었는데 무량수전 기둥을 따라서 배흘림기둥을 취했다. (기둥 가운데가 볼록함)


▲  옆에서 본 안국사 본전의 위엄

▲  닫집 안에 봉안된 강감찬 장군의 영정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이 없으며 평소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다녀 많은 사
람들이 그를 몰라봤다고 전한다. 허나 거란() 토벌의 대영웅을 그렇게 수수하게 그리는 것은
좀 아닌 듯 싶어 매우 늠름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표현했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1974년에 그린 것이다. 강감찬 생전의 모습
을 담은 그림이 전혀 없고 달랑 키가 작고 외모가 별로라는 내용만 있으니 나름 상상을 발휘하
여 그린 것이다. 그러니 실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월전이 그린 강감찬 영정이 그의 표준 영
정이 되어 그와 관련된 사당에는 그의 그림이 사당 중앙을 장식하고 있다.
게다가 월전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이자 친일 화가로 추잡한 경력을 남긴 김은호(
殷鎬)의 제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화풍을 좀 닮은 것 같다.

이곳 영정은 1998111일에서 12일 사이에 그만 도난을 당했는데 관리인의 신고를 받은 관
악구청은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고 몰래 월전을 찾아가 새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허나 고령
의 나이를 이유로 거절당하자, 급하게 신림동에 사는 금광복이란 화가에게 영정과 똑같이 그려
줄 것을 의뢰하며 160만원을 건네 주었다.
그가 그림을 그려 표구점에 맡기자 구청에서 그 몰래 영정을 가져왔으며, 새로 영정을 봉안할
때 제를 지내 예를 갖춰야 함에도 그런 절차도 없이 3월에 그냥 봉안해 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영정 도난 사건은 냄새를 킁킁 맡은 언론사의 취재로 7월에서야 드러나 관악구청은 두고두고
욕을 먹었는데 당시 사건을 맡은 관악경찰서도 무명 화가의 그림이라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
하여 수사를 일찍 종결시킨 것이 드러나 둘 다 쌍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이에 관악구청 철밥통
관계자는 좀 무안했는지 무속인이 가져간 것으로 둘러댔으나 영정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도 진짜 영정이 아닌 상상으로 그려진 영정이라 망정이지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진품이
었다면 정말 관악구청과 관악경찰서는 분노한 대중들에게 제대로 테러를 당했을 것이다.


▲  강감찬과 고려 군사들이 일군 대작품, 귀주대첩도(龜州大捷圖)

▲  거란군을 토벌하고 개선한 강감찬 장군과 고려군을 현종이
영파역(迎破驛)에서 직접 맞이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

▲  본전 뒤쪽 풍경 - 나무들도 강감찬을 존경하는지 저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본전에 그늘을 드리운다.

▲  차가운 이미지의 상징, 안국사 홍살문 - 그 앞에 어린이들이
정신없이 뛰어놀고 있어 근엄한 홍살문의 역할을 무색하게 만든다.

▲  강감찬 장군 동상

낙성대공원 서쪽에 자리한 강감찬 장군의 동상은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장군의 모습을 하
고 있다. 청동(靑銅)으로 다져진 이 동상은 199710월에 세워진 것으로 1990년대부터 관악구
의회와 관악문화원에서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나 돈이 딸려서 계속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서울시의 흔쾌한 지원으로 기존의 동상과는 다르게 갖은 요소를 넣어 제법 큰
규모로 건립해 낙성대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강감찬(姜邯贊) 장군(948~1031)의 생애

강감찬은 금천강씨<금주(衿州)강씨)로 금천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이다. 금천강
씨는 진주강씨에서 분파되었는데 그 시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 말에 금천 지역으로 넘어와
터전을 일구었으며 그 4세손이 바로 강궁진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이 되었다.

고려 초기 명장(名將)으로 김유신(金庾信)과 최영(崔瑩), 남이(南怡), 이순신(李舜臣) 등과 더
불어 이 땅의 민중들에게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그
들을 통해 크게 부풀려져 신화처럼 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앞서 그의 탄생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강궁진이 휼륭한 아들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부인에게 가는 도중 여우 부인
을 만나 그와 인연을 맺어 낳은 것이 강감찬이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탄생 설화와 여우부인
이야기는 흔히 시조나 위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설화라 100% 믿으면 곤란하다.

강감찬의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관악구에 '은천로'란 도로가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은천동'이란 행정동명(봉천본동과 봉천9동을 통합한 동네)도 있다. 또한 그의 시호인 인헌(
)을 딴 '인헌동'이란 행정동명과 학교들이 부지기수며, 그와 관련된 명소도 적지 않아 관악
구가 완전 강감찬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30대까지 금천에서 대부분을 지냈으며 종종 관악산에 올라가 심신을 단련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야인 생활을 하던 그는 35살이던 성종(成宗, 재위 981~997) 시절에 과거에 응
, 갑과(甲科)로 급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임명되었는데, 흔히 그
를 장군이라 하여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문과(文科)로 들어온 문인(文人)이었다. 허나 거란과
의 싸움에 출전했고 귀주대첩을 이뤄낼 정도로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동북9성 여진정벌의 영웅
인 윤관(尹瓘)과 더불어 문무를 두루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문인으로 출사한 것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 지방 세력을 때려잡고 왕권을 강화하
는 과정에서 무인들이 대거 털렸기 때문이다. 지방 세력 태반은 병사를 소유한 무인들로 그들
을 털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고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도입해
인재를 발탁했는데 조선과 달리 문과만 치루었다. 그러다보니 문과를 거쳐야만 출세가 쉬웠다.
강감찬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찌할 도리 없이 문과에 응시해야 했다.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하여 여러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오는데 그 일부를 살펴보면
그가 어느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부임을 했다. 그 고을의 관속(官屬)들은 그가 나이가 어
리다고 무시했는데 강감찬은 그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으라고 했다.
그들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자 강감찬 왈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나를 너희들 소매 속에 넣으려고 하나?'
호통을 치니 관속들이
그제서야 잘못했다고 빌었다. 허나 강감찬이 35살 이후에 벼슬살이를 했으므로 나이가 크게 맞
지가 않는다.

그가 강원도 원주(原州)로 출장을 가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객사(客舍) 옆 연못에는 개구리
들이 많아 늘 시끄럽게 울었다. 원주 수령은 강감찬이 편히 잠을 자게끔 하인을 배치해 개구리
의 입을 막게 했는데 아무리 돌팔매질에 나무로 연못 수면을 때려도 오히려 더 크게 우는 것이
. 이를 본 강감찬은 미소를 지으며 부적을 쓰고 연못에 몰래 넣으니 개구리 울음소리는 뚝
그쳤다.
이후 개구리 울음 소리는 커녕 개구리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
당 연못 설화)

그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가 충북 옥천(沃川)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곳은 모기가
징그럽게 극성이라 백성들이 찾아와 귀주대첩 때 거란군을 쓸어버린 것처럼 모기 좀 어떻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그가 하천으로 나와 모기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백
성을 괴롭히는 행위는 용서하지 못한다. 씨가 마르기 싫거든 당장 떠나라'
호통을 치니 모기들
이 크게 쫄아 다음날 모두 사라졌다. 그곳은 지금도 모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옥천 청석교
설화)

그가 남경(南京, 서울)을 다스리고 있을 때,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에 호랑이가 득실거
려 호환(虎患) 피해가 극성이었다. 이에 부하를 산으로 보내 승려를 데려오게 하여 그를 크게
꾸짖으니 승려가 호랑이로 변신하여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며 부하 호랑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또는 강감찬이 호랑이들에게 새끼도 평생 1번 낳게 하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
고 함)

1009년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하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현종(顯宗)>
옹립한 이른바 강조의 난이 일어났다. 고려가 강동6(江東六州)를 점거하고 주지 않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낸 거란<요나라()> 성종(聖宗)은 강조의 난을 구실로 30만 대군을 이끌고 친히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검차(檢車)를 이용하여 그들을 여유롭게 때려잡았으나 그만 방심하
여 오히려 역전을 당하고 만다. 강조가 패하자 고려 조정은 벌통이 여러 개나 뒤집힌 듯 큰 혼
란에 빠졌고 염통이 쫄깃해진 많은 신하들이 항복을 주청했으나 강감찬과 하공진(河拱辰)은 강
력히 반대했다.
결국 개경이 함락되었고 현종은 멀리 나주(羅州)까지 힘에 겨운 몽진을 했으나 양규(楊規),
숙흥(金叔興),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은 크게 피해를 입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서북면행
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등을 지냈으며,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로 임명한다는 현종의
조서(詔書)에는 '경술년(1010) 오랑캐(거란)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숙히 쳐들어
온 전란이 있었다. 그때 강공(강감찬)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을 뻔
했다'
적혀있어 그의 공이 실로 엄청났음을 가늠케 한다.

1018년 거란 성종은 강동6주와 고려 굴복시키기에 대한 미련을 다시 드러냈다. 오랫동안 옛 조
선과 고구려, 발해의 지배를 받아오던 거란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으킨 큰 나라, 요나라
10~11세기에 천하 강국으로 위엄을 날렸지만 고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와의 계속되는 전투로
상황이 넉넉치 못했다. 그래서 간신히 10만 명을 정예병이라고 쥐어짜 소배압(蕭排押)을 총대
장으로 삼아 고려로 보냈다.
참 지긋지긋한 거란의 3번째 침공을 맞이하여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208
천의 군사를 주어 거란을 막게 했다. 그때 강감찬의 나이는 칠순이었다. 남들 같으면 이미 꺾
이고도 남을 나이에도 총대장이 되어 말을 타고 종횡무진하니 그의 건강과 무예가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오자 강감찬은 재미없는 수성전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12천을 뽑아 압록강 하류 흥화진(興化鎭) 동쪽에 매복시켰는데, 거란군은 꼭 거치던 흥화
진을 그냥 놔두고 고려군이 매복된 곳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때 강감찬은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
게하고 거란군이 그 강을 건너자 쇠가죽으로 다진 둑을 터뜨려 그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
으면서 매복시킨 기병으로 호되게 후려쳤다.
여기서 2만 정도를 잃은 소배압은 자(慈州)에서 강감찬의 부장인 강민첨(姜民瞻, ?~1021)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개경만 점령하면 게임 끝이라는 무모한 생각에 무작정 개경으로
달려갔다. 이에 강감찬은 추격과 매복을 골고루 구사했고, 개경 점령에 눈이 뒤집힌 소배압은
개경과 가까운 신은(新恩)까지 진출했으나 식량도 부족하고 피해가 막대한 아군의 상황을 간신
히 깨닫고는 길을 돌려 열심히 줄행랑을 쳤다.

허나 그 길목에는 이미 고려군이 쫘악 깔려 열심히 그들을 사냥했고, 거란군이 귀주(龜州)까지
후퇴하자 강감찬은 성을 나와 귀주 벌판에 진을 치며 그들을 기다리니 이윽고 소배압의 거란군
은 병든 닭새끼처럼 귀주에 나타났다. 벌판에 진을 친 고려군을 보고 소배압은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와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의 우수한 기마병의 힘을 보여주마. 각오해라!' 다짐
하며 고려군과 진검 승부를 걸었다.
이에 강감찬은 그들을 크게 포위해서 잡는 작전을 펼쳤다. 기마병을 선두로 하여 보병과 사수(
射手)를 적절히 배치해 그들을 맹렬히 공격했으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의 군사
도 때마침 합세하여 안그래도 힘이 딸리는 거란군은 더욱 밀려 거의 전멸을 당하고 소배압은
간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불과 수천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거란에게는 개망신에 가까운 패배였으며 이 대승을 두고 고려사에서는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
와 같이 심함이 없었다'
고 기록을 했다.

거란 성종은 부하를 죄다 잃고 돌아온 소배압을 보자 크게 발작하여 '너가 적지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짐을 보려고 하는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
여야 되나 내가 참는다'
질책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강감찬은 귀주대첩이란 대작품을 일구고 부하 장졸과 함께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들고 개경
으로 개선하자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친히 도성 밖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연회를 베풀었다.
현종은 친히 금으로 만든 8가지의 꽃을 그의 머리에 꽂아준 뒤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오른
손으로 축배를 들어 위로하고 찬양하니 강감찬은 '폐하의 분에 넘치는 황은(皇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의를 표했다.

현종은 그에게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책봉(
)했다. 1030년에는 현종에게 개경 주변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건의, 둘레 23km에 이르는
개경도성(都城)이 구축되었으며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문하시중이 되자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현종은 절대로 안된다며 3일에 1번씩 입궐
토록 했으며 이듬해(1031) 6월이 되어서야 겨우 사직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해 1031, 83세에 나이로 장대했던 삶을 마감하니 덕종(德宗)3일 동안 조회를 멈
추고 그를 애도했으며 인헌(仁憲)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특지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國
)를 추증(追增)했다. 이후 수태사 겸 중서령(中書令)까지 더하여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되었다.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도 별볼일 없었으나 학문을 매우 좋아하고 무예와 지략, 기개가 뛰어
났다. 그리고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하여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평시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녀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일반 백성으로 오인하기 일쑤였다. 또한 엄
숙한 태도로 국사를 처리하고 국책을 결정할 때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 그 역할을 다했으며,
백성들도 잘 보살펴 그들은 나라가 평온한 것이 강감찬의 공으로 여기고 추앙했다.

그는 고려가 한참 거란과의 싸움으로 안정되지 못한 11세기 초반, 안으로는 내정을 살피고 지
지기반이 부실한 현종을 도왔으며, 밖으로는 거란을 토벌해 국내외적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고
려를 작지만 강한 나라로 우뚝 서게 했다. 고려와의 3차례 전투에서 모두 깨지고 거기에 귀주
대첩에서 완전히 게임이 끝나니 거란도 이제 힘이 딸려 더 이상 강동6주 반환과 고려 제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려의 침공을 걱정해야될 판이었다. 고려 역시 오랜 전
쟁으로 지쳐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고 12세기 초까지 압록강 가교 사건 등을 제외하고
는 양국은 별무리 없이 평화로운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국가가 장차 화패(禍敗)가 올 때 반드시 명현을 내시어 이를
구하시는구나. 목종(穆宗) 말년과 현종 원년에 역신(逆臣)이 난을 일으키고 거란이 내습해 안
으로는 내홍, 밖으로는 환란이 있어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공(姜公)이 없었
더라면 장차 나라가 어찌 됐을지 알 수가 없다'
는 내용이 있어 그의 존재감과 공이 얼마나 두
터웠는지 보여준다. 그의 찬란한 이름은 현재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3척동자도 '강감찬하면 귀
주대첩~!'을 떠올릴 정도로 이 땅의 대표적인 위인의 하나로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녹아내리
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는 않아 무슨 내용
의 책인지는 알 수 없으며 그의 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데 오랫동안 무
덤의 위치를 몰라 애태우던 것을 1963년 후손들이 지석(誌石)을 발견하여 무덤을 복원했다.

낙성대 안국사(낙성대공원)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50m 정도 가면 낙성대역길이 나오고 그 길로 접어
  들어 왼쪽(남쪽)으로 가면 관악구 마을버스 02번 정류장이 있다. (버스가 늘 대기하고 있음)
  그 버스를 타고 낙성대공원(영어마을) 하차
*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3~4분 직진하면 낙성대입구 교차로이다. 거기서 왼쪽(남쪽) '
  성대로'로 진입하여 도보 12(낙성대역에서 도보 15)
* 매년 103째 주에는 낙성대공원에서 관악 강감찬축제가 열린다. 원래는 '낙성대 인헌제'
  1988년 추석(920) 때 처음 시작되었으며, 나중에 관악구의 주요 축제인 '관악산 철쭉제
  '와 통합하여 관악 강감찬축제로 이름을 갈았다.
  강감찬 추모제향을 시작으로 강감찬을 주제로 별페스티벌, 출병식과 전승행렬 거리 퍼레
  이드, 주민화합 한마당, 고려촌 테마부스, 작은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와 볼거리가 열리며
  올해(2017)1020~21일에 열린다. (문의 관악구 문화체육과 ☎ 02-879-5605)
* 안국사 관람시간 : 9~18(겨울은 17시까지, 낙성대공원은 24시간 개방,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 (낙성대로 77 ☎ 02-877-6896)


 

♠  난곡(蘭谷)에서 만난 오래된 나무들

▲  난곡로 느티나무공원에 자리한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1-1

낙성대를 둘러보고 아직 햇님 퇴근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또다른 강감찬 나무를 찾고자 관악
구 서남쪽 끝으머리에 박힌 난곡으로 이동했다.
난곡은 서쪽으로 금천구 독산동, 남쪽은 금천구 시흥동(始興洞)과 맞닿아 있으며 예전에는 신
림동(新林洞)의 일원으로 그 기치 아래 똘똘 뭉쳐있었으나 신림1~10동이 모두 별도의 이름을
칭하게 되면서 신림7동이던 난곡은 난곡동과 난향동으로 분리되었다.

서울 달동네(산동네)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현장으로 달동네 스타일의 분홍색 기와집과 판자
집이 가득했으나 1999년 이후 10년이 넘게 재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몸을 풀면서 동네 상당수
가 성냥갑 아파트와 단독주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음지에는 아직도 달동네의 흔적이 남아있
으며 재개발의 과정에서 많은 가난한 서민들이 강제로 터전을 떠나야 했다. 개발의 칼질은 늘
있는 것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일반 백성들에게는 지나치게 포악하다.

난곡이란 이름은 난초 골짜기란 뜻으로 달동네 이름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이곳이 난곡이
라 불리게 된 것은 정정공(貞靖公) 강사상(姜士尙)의 손자인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이 이
곳에서 말년을 보낼 때 난초를 많이 길러 유래되었다는 설과 원래 이름은 낭곡(狼谷)이었는데
강사상의 아들인 강서(姜緖)가 동네 이름이 별로라고 하여 난곡으로 바꾸고 자신의 호도 그리
했다는 설이 있다. 강홍립은 난곡 위쪽에 자리한 조부(祖父), 강사상의 묘역에 묻혀 있다.

난곡에 이르러 난우중학교 정류장에서 내리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나온다. 그 주위로 '
난곡로 느티나무공원'이 조촐히 터를 이루고 있는데 공원에는 운동시설 여럿이 닦여져 있다.
그 나무의 정체가 궁금해 안내문을 살피니 무려 410살을 먹은 나무로 1972년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때 추정 나이가 약 370)
마르기는 커녕 오히려 넘쳐나는 세월의 샘을 양분으로 삼아 키 17m, 둘레 496cm로 어엿한 노거
수로 성장했는데 나무 주위로 속인들의 주택과 건물이 뿌리를 내려 그를 위협한다, 그래도 그
들에 굴하지 않고 정정함을 과시하며 오늘도 공원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난곡로 느티나무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5번 출구)에서 506, 5522(B), 5523번 시내버스를 타고 난우중학교 입구
  에서 하차하면 바로 보인다.
*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2번 출구 남쪽 80m 지점)에서 5522(B), 5524번 시내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난곡동 697-40


▲  건영2차아파트 남쪽 주차장에서 바라본 굴참나무

곡로 느티나무를 둘러보고 난곡의 명물인 신림동 굴참나무를 보고자 건영2차아파트로 이동했
. 거리는 1km 남짓, 햇님은 퇴근 본능이 발동해 자꾸만 꽁무니를 숨기려고 한다. 날이 어두
워지면 디카도 흥분하지 못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길은 바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잠시 마트에 들려 음료수로 불만에 잠긴 목을 좀 축이고
미로 같은 골목길을 뚫으며 난곡초교 방면으로 가니 서쪽으로 건영2차아파트가 보인다. 그 아
파트로 다가서면 나를 이곳으로 부른 거대한 굴참나무가 마중을 한다.

이 굴참나무는 키 17m, 가슴 높이 둘레 2.5m, 나무 밑부분 둘레가 2.9m로 나이가 무려 1,000
을 헤아린다고 전한다. 강감찬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랐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연유로 '강감찬나무'란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1018년 거란군을 공격하러 출정할 때
이 나무를 심고 무사 귀환을 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과연 강감찬과 관련이 있는 나무인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관악구 지역은 그의 고향으로
그가 남긴 유적과 전설이 허다하며 백성들이 그를 기리고자 붙인 전설도 여럿 있다.
 
나무의 나이가 1,000년이 맞다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된다. 아파트 주민들도 강감찬
의 지팡이가 자란 나무로 여기고 있는데 그 장대한 세월에 비해 덩치가 작아 고개를 좀 갸우뚱
하게 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원래 나무는 옛날에 죽고 그의 후손이 자라나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추정 나이는 250년 정도로 여겨지나 이 역시 정확한 것은 아
니다. (사람은 나이가 적으면 좋지만 문화유산은 오히려 많아야 빛을 보는 법임)

굴참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落葉喬木)으로 세포벽(細胞壁)은 물에 젖지 않아 방수
, 방음, 방열 효과가 있어 이 나무로 코르크(cork)를 생산하며 이 나무 껍질로 지붕을 얹힌 집
이 강원도에서 옛날에 많이 보였던 너와집이다.
나무 인근에는 강감찬 장군의 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을 딴 은천사(殷川
)란 조그만 절이 나무를 지키고 있으며, 매년 2회 음력 71일과 101일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제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지냈다고 함)

이 나무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림동 굴참나무'이다. 이는 이곳이 신림동 관할이기 때문인
데 이제는 신림동이 아닌 난곡동이라 불리고 있으니 명칭을 변경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난곡
동 굴참나무'로 말이다. 물론 그렇게 부르던 저렇게 부르던 그에게는 관심 밖일 것이다. 자신
은 그저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가만 두지를 않으니 말이다.

나무의 높이는 앞서 느티나무와 비슷하고, 둘레는 거의 60% 수준으로 얇으나 대신 가지가 좌우
로 넓게 퍼져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느티나무를 압도한다. 게다가 강감찬과 관련도 있고 나이도
오래되다보니 그런 것들이 이들 나무의 팔자를 바꿔놓은 것이다. 느티나무는 겨우 보호수 등급
, 굴참나무는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의 귀한 존재로 말이다.

예전에는 이곳이 동네의 높은 곳으로 아랫 동네를 굽어보고 있었으나 철이 없는 개발의 칼질은
나무 주위로 높게 석축을 쌓고 그곳에 터를 다져 건방지게 아파트와 주차장을 올렸다. 아파트
주차장이 나무의 허리 높이 정도 되는데, 나무 밑에서 보면 그런데로 나무가 커 보이지만 주차
장에서 보면 나무가 몇십 년 밖에 숙성되지 않은 그저 그런 나무로 보인다.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1982, 건영2차아파트는 그보다 훨씬 이후에 들어섰다.
무리 개발의 칼질이 개념을 밥말아 먹어도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지닌 굴참나무의 위엄을 건드
리지 말았어야 했거늘, 나무 바로 옆에 아파트를 두게 했으니 참 딱할 따름이다. 나무 동쪽에
있는 집들은 그렇다쳐도 아파트는 좀 가혹했다.
철학과 역사의식이 빈약한 이 땅의 자본주의의 폐해라고나 할까?


▲  동쪽 주택가에서 바라본 굴참나무
태극마크가 새겨진 파란 피부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면 바로 나무 앞이다.

▲  굴참나무의 밑도리
예전에는 이보다 더 너른 땅을 누리고 살았건만 개발의 칼질은 그의 영역을
빼앗아 구석살이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보니 나무 자리가 정말
답답해 보인다. 마치 맹수를 좁은 우리에 가둬놓은 기분..

▲  아파트 주차장에서 바라본 굴참나무의 밑도리

▲  나무 북쪽에 어이없게도 쓰레기통과 분리수거통을 두어 나무에게
제대로 민폐를 부린다. 쓰레기 악취가 그의 건강에
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  주렁주렁 매달린 굴참나무 꽃
신림동 굴참나무를 끝으로 관악구에서 즐긴 강감찬 장군의 흔적 더듬기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신림동 굴참나무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5번 출구)에서 506, 5522(B), 5523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강중입구 하차
*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2번 출구 남쪽 80m 지점)에서 5522(B), 5524번 시내버스 이용
* 난곡(난향동) 종점 방향 남강중입구 정류장에서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으로 가
  면 난곡로35길이 나온다. 그 골목길을 계속 들어가면 건영2차아파트가 나오는데, 아파트단지
  로 들어서 쭉 들어가면 나무가 나오며, 아파트 대신 난곡로35번길을 계속 고집하면 난곡초교
  석축으로 막다른 곳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도 나무가 나온다. 남강중입구
  정류장에서 도보 7~8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721-2 (난곡로352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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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10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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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원찰로 지었다고 전하는 회기동 연화사 ~~~ (월계동 기원사)

 


' 석가탄신일에 즐긴 사찰 나들이 ~ 서울 연화사, 기원사 '

▲  연화사 대웅보전

▲  연화사 천수관음도

▲  기원사 대웅전

 


 

평소에도 답사와 출사, 산책 등으로 많은 절집을 들락거리고 있지만 석가탄신일(사월 초파
일, 이하 초파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찰 투어를 벌인다. 그날 하루를 온전히 절
투어에 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도는 아니다. (나는 무교임)
그럼에도 초파일을 챙기는 것은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
양밥과 과일, 떡 등 갖은 먹거리까지 풍성하여 그 흥겨움을 더해주며, 특히 평소에는 개방
을 꺼리거나 외지인에게 배타적으로 대해 답사쟁이의 카메라를 무력화시키는 절<주로 문화
유산을 간직한 인지도가 별로인 현대 사찰과 오래된 절들~>도 이날만큼은 대부분 경계심을
푼다. 하여 이때를 이용해 그런 절을 찾아가 문화유산을 아낌없이 친견하고 사진에 담는다.

초파일이 코앞에 아른거리자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아직 발자국을 남기
지 못한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대상으로 정처(定處)를 물색하였다. 초
파일에는 굳이 멀리 나가지 않고 마음 편히 집에서 가까운 서울 시내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몇 배 이상으로 서울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기 때문에 그런 미답지(未踏地
) 사찰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몇 남지 않은 미답지 사찰을 열심히 쥐어짜니 적당한 절 두 곳이 걸려들었다. 바로
경희대 옆에 자리한 연화사와 월계동의 기원사이다.
연화사는 연산군 시절에 세워진 절로 그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오래된 볼거리가 없는 절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곳에 있는 탱화 여러 점이 2013년에 무더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
되면서 관심도 없던 그곳에 슬슬 구미가 오른 것이다.
또한 월계동 기원사는 1980년에 창건된 사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가 2점이나 있다.
하여 이들을 먼저 살펴보고 예전에 갔던 오래된 절 여러 곳을 추가로 둘러보기로 했다.


 

♠  경희대 그늘에 자리한 오래된 절집,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 회기동 천장산 연화사(天藏山 蓮華寺)

▲  활짝 열린 연화사의 정문, 일주문(一柱門)

경희대학교 병원 바로 서쪽에는 연화사란 조그만 절이 자리해 있다. 바로 옆에 큰 덩치를 자랑
하는 경희대 병원 건물이 있다보니 절 건물은 거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인데, 마치 큰 바위에
붙은 조그만 들꽃 같은 모습이다.

지금은 경희대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공간이 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곳은 소나무
가 무성한 한적한 숲속이었다. 그때는 청량리(淸凉里) 북쪽 영휘원<永徽園, 고종의 후궁인 엄
비의 묘역>에서 오솔길을 따라 절로 들어섰으며, 절 북쪽에는 천장산(141m)이 자리해 연화사와
의릉<懿陵, 조선 20대 군주인 경종의 능>을 감쌌다. 그래서 연화사는 자연히 '천장산 연화사'
를 칭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55년 종로1가에 있던 경희대(옛 신흥대학)가 이곳으로 오면서 절 바로 옆에 학교 건
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덩달아 주거지까지 조성되면서 절 주변 풍경화는 강제로 180도 달라지
게 되었다. 게다가 연화사를 품었던 천장산은 경희대로 인해 서로 끊어졌고, 절 사방으로 경희
대(경희여중고, 경희대병원)에 완전히 감싸여 외부에서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조계종(曹溪宗) 소속인 이 절은 1499년 폐비윤씨의 묘역인 회묘(懷墓)의 원찰(願刹)로 창건되
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폐비윤씨는 바로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로 그 이름을 아주 요란하게
남긴 여인이다.
회묘는 원래 경희대 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어미를 위해 연산군은 1504년 회묘
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석물을 심고 회묘를 지키는 절을 세웠다. 허나 아쉽게도 연화사의 시
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원찰의 이름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 (절이 매우 작았던 모양임)

어미를 향한 연산군의 사무친 마음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덧없이 아작이 나버렸고,
연산군 자신은 강화 교동도(喬桐島)로 추방되어 바로 그해 겨울,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어 방치되었고, 연화사 역시 이때 풍비박산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반
정파들은 연산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깔아뭉개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능인 의릉이 인근 석관동(石串洞)
에 터를 닦으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조(英祖)가 1725년 절을 지어 의릉의 원찰로 삼
은 것이다. 허나 그 원찰의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1870년대에 이르러 승려 묘련(妙蓮)이 절을 중수했는데 그는 성품이 좋아 인기가 대단했다. 그
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절을 묘련사(妙蓮寺, 또는 묘련암)라 부르니 이때부터 절의 이
름이 역사에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파괴된 것을 1883년에 승려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虛)의 도움
으로
다시 일으켰으며, 이때 궁인(宮人) 박씨와 상궁(尙宮) 최씨, 김씨 등이 시주하여 여러 불
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중건이 마무리 되자 1884년 10월 '천장산 묘련사 중건기(重建記)'를 남
겼다.
이후 절은 연화사로 이름이 갈렸는데, 그 시기가 정확하지 않다. 다만 1993년 자음(慈音)이 지
은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 상량문(上樑文)'에는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
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
아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고 적고 있어 연화장 세계에서 절 이름을 따왔음을 귀띔해준다.

1950년대까지 절 주변은 자연에 묻힌 싱그러운 곳이었으나 경희대가 절 옆에 터를 닦으면서 도
심 속의 절이 되어버렸으며, 연화사의 첫 후광(後光)이던 회묘는 1969년 경희대에 밀려 서삼릉
(西三陵)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1990년대까지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미륵전(彌勒殿), 대방(大房), 종각 등의 기와집 건
물이 경내를 이루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뜨락이 닦여있었고, 경내 뒤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운
치를 이루었다. 허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1993년부터 크게 중수를 벌여 기존의 건물을 부시
고 집약적인 공간인 2층짜리 대웅보전과 삼성각 등을 새로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전 상
량문'과 '묘련암 중수기(1875년)'가 발견되어 절의 숨겨진 역사 일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무애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2013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 천수관음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산신도, 아미
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2호) 등이 있다.
이중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는 1901년 10월 28일에 제작해 다음달 11월 20일에 점안된 것
으로 대은 돈희(
大恩 頓喜)를 중심으로 계은 봉법(啓恩 奉法), 한봉 응작(漢峰 應作), 보암 긍
법(普庵 亘法) 등이 참여해 조성했다. 아미타3존불을 비롯해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자와 코끼
리를 탄 문수/보현동자상까지 등장시켰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괘불 양식이다. 날이 날인지라 괘불(掛佛)의 화려한 외출을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1880년에 제작된 독성도가 있으며, 지방문화재 불화들은 괘불을 제외하고 상당수 삼성
각과 대웅보전 1층에 포진해 있다.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경내로 인도하는 짧은 숲길
봄이 푸르게 붓질을 한 숲길에 고운 빛깔의 연등이 허공을 메우며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훤칠하게 솟은 일주문을 들어서 찰라와 같이 짧은 숲길을 들어서면 바로 대웅보전 앞이다. 오
색찬란한 연등이 연화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메우며 초파일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연화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좁게 경내를 이루고 있는데 그 동쪽에 삼성각과 무애당이 있고
서쪽에는 불교용품과 전통차 등을 파는 건물이 있다. 초파일 분위기를 즐기러 나온 수많은 사
람들로 좁은 경내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절은 초파일 특수로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  대웅보전 뜨락에서 펼쳐진 초파일 오후 법회

▲  시장통을 이루고 있는 대웅보전 뜨락

대웅보전 뜨락에는 행사용 천막을 가득 지어 전통차 시음과 다도(茶道) 체험, 연등 만들기, 불
교용품 판매, 간식과 음료수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좁은 터에 사람까지 많
은데 천막까지 주렁주렁 지었으니 마치 콩나무시루의 버스나 교실을 보는 듯, 공간이 좀 답답
하다.
전통차는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데 조그만 청자 찻잔에 차를 따라준다. 무슨 차였는지는 벌써

터 기억이 가물가물하나 1잔 들이키니 속이 좀 맑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팝콘은 공짜로 제공
하고 있어 그 기나긴 줄에 동참하여 1봉지를 챙겼다. 그 외에 연등만들기와 다른 간식류는 돈
을 받고 있었다.

▲  무애당(無礙堂)
종무소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1993년에 새로 지어진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칠성(치성광여래), 독성(나반존자)>

대웅보전 뒷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친숙
한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콘크리트로 다져진 언덕이 있는데
경희대 건물이 높이 자리해 절을 대놓고 엿본다.

삼성각에는 산신과 독성, 칠성을 담은 3개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도와 산신도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허나 독성도는 그들보다 나이가 더 많음에도 아직 지정문화
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그렇다고 독성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도 아니다.


▲  삼성각 석가불과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3호)

삼성각 중앙에는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석가불과 고색이 역력한 칠성도가 자리해 있다. 내
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고색(古色)의 향기이니 내가 그 향기에 이끌려 이제서야 이곳 연화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
(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칠성
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복잡
하게 담겨져 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신앙으로 머
물러 있었는데, 조선 때 불교의 일원으로 쿨하게 흡수되면서 그를 봉안하지 않은 절이 거의 없
을 정도이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칠성도의 주인, 치성광여래는 금륜(金輪)
을 들고 있는데, 양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에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그리고 머리에 쓴 관
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하얀 원이 그려져 있고, 치성광여래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된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향해 있으며, 칠원성군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
장한 채 치성광여래를 향해 서 있다.

이 그림은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한곡 돈법(漢谷 頓法)을 중심으로 한명 환조(
漢明 幻照), 두삼(斗三), 태호(太湖), 창호(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때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관음도가 같이 제작되었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6호

칠성도 우측에는 산신(山神)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도가 자리해 있다. 칠
성도만큼이나 고색이 끼어있으나 그와 달리 등장 인물이 단촐해서 보기는 좋다. 언제 제작되었
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문성(文性)이 산신각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
어 이르면 1880년대 후반, 적어도 칠성도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중앙에 붉은 옷을 걸친 산신 할배가 크게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 모자 모양
의 두건을 쓰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둥근 넓적하며 포근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왼
손에는 깃털로 된 부채를 들고 있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산신 오른쪽에는 그의 비서인 동자 2명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기물을 들고 서 있으며, 왼쪽에
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민화(속화)풍으로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중에 돌고 있는 어느 유명한 민화(民畵)의 호랑이와도 많이 닮아있어 혹 그를 참조하여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호환(虎患)이라 하여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고양이
처럼 친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산신 뒤에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있는데, 노송과 길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려 심산유곡(深山
幽谷)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칠성도 좌측의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를 담은 그
림으로 아줌마 자세로 편하게 앉은 백발의 독성 할배와 그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으로 1880년에 제작되었으며, 삼성각에 깃든 3개의 탱화 중 가장 오래되
었다.


 

♠  연화사의 심장부, 대웅보전(大雄寶殿)

▲  연등을 두룬 대웅보전

연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은 1993년에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하
는 선방(禪房)과 공양간, 2층은 대웅보전, 1층은 강당(講堂)으로 작은 절에 걸맞게 집약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를 보고 싶다면 1층을 기웃거리면 되며 시장기
가 있다면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  대웅보전(2층) 내부

석가불이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좌우로 대동하며 자리해 있고, 영산회상
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한 후불탱 3점이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준다.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떡과 과일 등 온갖 음식들로 상다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음식을 쳐다보며 입맛만 다실 뿐, 먹
을 수도 손을 댈 수도 없다. 그러니 음식 모두 승려와 신도의 뱃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하
여 때만 잘맞으면 저 음식들을 얻어먹을 수 있다.
허나 이번에는 그런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승려와 절에서 일하는 신도의 허락 없이
마구 집어먹지는 말자~~! 그건 제사음식을 마구 집어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연등이 알록달록 그늘을 드리운 대웅보전(2층) 앞부분
대웅보전 가운데 칸 앞에서는 아기부처에게 물을 끼얹는 관불(灌佛)의식이
열리고 있었다.

▲  관불의식을 기다리는 사람들

대웅보전 2층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
정대(灌頂臺)에 우뚝 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관정대 옆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관정을 도와주고 있는데 날도 날인지라 한
번 관정을 해봐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하여 기나긴 관불의식 행렬에 동참하여 아기부처를 시
원하게 냉수마찰을 시켜주었다. 물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빙그레 환해진 듯 싶었는데 햇님
이 퇴근하고나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내년 초파일까지 기나긴 잠을 자야된다. 그
러니 오늘 실컷 냉수마찰을 받아야 여한이 없을 것이다.

다른 절에서도 관불의식을 많이 해봤지만 이곳
은 의식을 거행한 사람들에게 손수건을 하나씩
나눠주는 미덕을 보여주었다. 수건에는 연화사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빨간 바탕과 파란 바탕
2가지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적지않은 절(성당과 교회도 그렇고)들이
사세 확장과 돈 벌기에 지나치게 혈안이 되어
있어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데, 절이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속세를 위해 모든 것을 베푸는
존재가 되야 한다. 더러운 속세를 정화시키는
한 송이 연꽃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초파일
주인의 뜻이며 절의 이름값을 하는 것이다.

 ◀  꽃밭에 선 아기부처, 관불의식의 현장
하얀 코끼리 위에 홍련(紅蓮) 모양의 관정대를
얹히고 그 위에 오른손을 치켜든 아기부처를
세웠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보전 앞뜨락

▲  대웅보전 1층 금동석가3존불과 금동후불목각탱
금동으로 지어진 닫집 안에 금동 피부를 한 석가불이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대동하여 앉아 있고, 그 뒤로 금동으로 도배된 후불목각탱이 자리해 있는데
너무 화사한 나머지 두 눈이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  연화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대웅보전 1층은 강당으로 쓰이고 있다. 중앙에는 금동(金銅)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후불목각
탱이 자리해 있고, 그 우측 벽에 연화사의 주요 보물인 신중도와 천수관음도, 지장시왕도가 액
자 안에 나란히 담겨져 있다.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과다해 정신을 쏙 빼놓는다.
주로 법당을 지키는 용도로 신중도(신중탱)를 많이 거는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위
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좌우측에 대칭으로 자리한 제석천과 범천은 동그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뒤에 두루
며 머리에 보관(寶冠)을 쓴 채, 두 손으로 꽃을 들고 있으며, 그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
로 칼로 무장한 팔부중(八部衆)이 있고, 제석천과 범천 주위로 일월대신(日月大神) 등의 천신(
天神)과 산개(傘蓋) 등을 받쳐든 천동(天童),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天女) 등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01년에 수화원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비롯해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
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亘法), 재겸(在謙) 등 12명의 화승(畵僧)이
그린 것으로 이중 계은 봉법, 보암 긍법, 돈법(頓法), 두삼(斗三) 등은 20세기 초 경기도 지역
에서 활약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과 교류를 가진 화승들이다.
그림의 구도와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세부묘사가 정교해 19세기 중반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준다.


▲  연화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6호

신중도 옆에 자리한 지장시왕도는 가운데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
道明尊者),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중도 만큼이나 정신없
어 보이는 이 그림은 언제 그려졌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연화사 불화가 대거 조성되던 1901년에
슬쩍 제작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지장보살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결가부좌로 앉아있으며, 투
명한 흑색두건을 쓰고 오른손에 보주(寶珠), 왼손에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고, 지장보살의 신광(身光)
좌우로는 온갖 모습의 시왕이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는데 시왕 뒤에는 8곡병(曲屛)이 들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이렇게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한 수법은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그림의
인물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의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이다. 이 음영법 역시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보인다.

이 그림은 1867년에 경선당 응석이 그린 낙산 보문사(普門寺, ☞ 관련글 보기)의 지장시왕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서울 청룡사(靑龍寺) 지장시왕도와 유사하며,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
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채색 및 인물 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
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불화유파(佛畵流派)의 사승(師僧)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연화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4호

대웅보전 1층에서 특히 눈여겨볼 그림은 바로 천수관음도이다. 지금이야 천수관음을 담은 그림
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정작 오래된 천수관음도는 이 땅에 매우 드물게 남아있다. 그 희귀한
그림이 무려 연화사에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한봉 응작, 보산 복주, 청암 운조(淸菴 雲照) 등이 1901년에 그린 것으로 바다 중앙
에 봉긋 솟은 연화좌 위에 천수관음이 붉은 색 바탕의 옷을 걸치며 앉아있다. 그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경책(經冊)을 받쳐든 4비(臂)를 비롯해 40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의 커다란 광배
안에는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려놓아 관음보살의 위엄을 한층 드높였다. 신중도와 달리
등장인물은 달랑 1명이지만 그의 찬란한 광배로 인해 이 그림 또한 혼을 다 빼놓는다.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수월
관음도(水月觀音圖)의 도상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5년에 제작된 대산사 천수관음
도가 연화사 천수관음도에서 계승을 받으니 그 가치는 꽤 크다. 특히 관음보살의 얼굴은 살이
많고 이목구비가 단정해 경선당 응석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옆에서 바라본 천수관음도의 위엄

▲  대웅보전 1층 천정을 가득 수놓은 조그만 연등의 앙증맞은 물결

▲  연화사 공양밥의 위엄

연화사는 절이 조그만하여 정말 5분이면 다 보고도 남겠지만 이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신이 나
는 초파일 분위기에 너무 취해있다 보니 1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다시는 안와도 될 정도로 경
내를 살폈지만 만나기가 꽤 까칠한 괘불을 친견하지 못했으니 그를 보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또
인연을 지어야 될 것 같다. 그래도 그를 제외하면 계획한 바를 모두 누렸으니 오늘은 이 정도
로 충분하다.

초파일에 절에 왔다면 공양밥은 반드시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지금까지 눈과 마음을 지겹게 호강시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된다. 시간
도 점심 시간을 지난 상태라 뱃속에선 밥달라며 난리를 친다. 그래서 공양(供養)을 먹고자 공
양간이 있는 대웅보전 지하로 내려갔다.
방에는 이미 사람들로 거의 만원, 연화사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한 공양밥 1그릇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이곳 공양밥은 호박과 김치, 무생채 등 갖은 나물을 밥에 넣
고 고추장으로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다. 딱히 개성은 없으나 절을 열심히 둘
러보고 먹는 밥이라 정말 꿀맛이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잠시나마 정든 연화사를 나왔다. 나에게는 그날 연화사가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 회기동 연화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경의중앙선 회기역(1번 출구)에서 동대문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의료원입구
  4거리 하차<거리가 가까워 도보로 가도 상관없음, 도보 9분>  길 맞은편(서쪽) '경희대로3길
  '로 들어서 쭉 가다가 CU경희스타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연화사이다.
* 서울시내버스 201, 273번을 타고 경희대입구 하차, 도보 7분 (경희대병원 서쪽에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 (경희대로3길 56 ☎ 02-962-6186)


 

♠  법등의 역사는 매우 짧으나 오래된 보물 2점을 간직한
조그만 절집 ~ 월계동 영축산 기원사(祈願寺)


▲  기원사 정문

연화사를 둘러보고 젊은 층으로 번잡한 경희대 주변을 벗어나 회기시장으로 나왔다. 여기서 광
운대역(옛 성북역) 부근에 있는 기원사를 가고자 서울시내버스 261번(석관동↔여의도)을 타고
월계3거리에서 하차, 월계동(月溪洞) 주택가를 가로질러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 길(광운로17길)
의 끝에 기원사가 문을 활짝 열며 중생을 맞는다.

기원사는 일주문을 두지 않고,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기와 담장에 정문을 내어 마치 교외
에 자리한 별장이나 커다란 한식당에 들어선 기분이다.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창고와 해우
소를 갖춘 기와집이 있고, 정면에 뜨락과 팔작지붕을 지닌 2층 기와집이 있다. 그 건물은 요사
와 선방, 종무소, 공양간을 갖춘 복합 공간으로 그 앞에서 오른쪽(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보이
지 않던 대웅전이 고개를 내민다.
대웅전 뒷쪽으로 가면 수풀이 우거진 쉼터와 석굴 모양의 삼성각이 있는데, 여기가 경내의 끝
이다. 절의 규모는 꽤 조촐하나 앞서 연화사보다 터가 좀 너르며, 건물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고 주변이 확 트여있어 체감상 더 넓게 보인다. 반면 연화사는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주
변이 경희대 건물에 포위되어 있어 좀 답답한 구조이다.


▲  기원사에서 바라본 월계동 지역

월계동 주택가 뒷쪽이자 영축산(靈鷲山)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기원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비
구니 절집이다. 이 땅에 흔한 현대 사찰의 하나로 없는 것이 없다는 인터넷 조차도 고개를 갸
우뚱거릴 정도로 정보도 거의 없고 인지도도 낮다. 서울을 거의 꿰고 산다는 나도 기원사의 존
재를 안 것은 채 몇 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 절을 내가 이렇게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 2점을 보기 위함이다.
그들의 소환(?)을 받아 발을 들인 기원사는 그런데로 절집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뒤에 월계근린공원으로 포장된 영축산이 있어 산사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 풍기고 있다. 주택가
와 영축산 숲이 경계를 이룬 곳에 절이 둥지를 튼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사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인터넷에 관련 정보가 좀처럼 걸려들지를 않아 나중에
기원사를 다시 찾아 창건송덕비를 살펴보았다. 그것이 바로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절은 1980년에 함경남도 성천군(成川郡) 출신인 한혜숙(당시 60대)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지었다. 그러니 그가 기원사의 창건주(創建主)가 된다. 절이 세워지자 승려 지연(知淵)이 주지
승이 되어 절을 꾸렸으며, 오래된 독성도와 산신도를 입수하여 절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
았다.
현재 법당인 대웅전을 위시해 요사, 삼성각 등 4~5동의 건물이 경내를 채우고 있으며, 비구니
절이다보니 경내가 정갈하고 깔끔하다.

기원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영축산이다. 해발 96m의 조그만 동네 뒷산으로 월계동 한복판에 벌
러덩 누워있는데, 그 이름이 공교롭게도 불교에서 매우 좋아하는 산 이름이다. 부처가 설법을
했던 산이 바로 영축산(영취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름의 산에는 절이 꼭 있기 마련이라<통
도사(通度寺)를 품은 산 이름도 영축산> 혹시 기원사가 이름이 전하지 않는 옛 절터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오래된 절도 없는 산이 왜 영축산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원사가 들어선 이
후 절에서 그 산을 '영축산'으로 부르면서 그것이 자연히 퍼져 얼떨결에 산의 이름으로 정착된
것이 아닐까 싶다.


▲  남쪽을 바라보는 기원사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그 주변을 돌난간으로 둘렀다. 겉으
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밑층을 반지하 형태로 먼저 깔고 그 위를 돌로 덮어 대웅전
을 올렸다. 밑층에는 신도들의 공간과 창고가 있다.

▲  영축산 기원사 창건 송덕비(頌德碑)
창건주 한혜숙을 기리는 송덕비이다.

▲  대웅전 뒷쪽에 마련된 그늘진 쉼터
자연에 둘러싸인 포근한 공간이다.


▲  대웅전 계단 옆에 마련된 관불의식의 현장

불교의 큰 대목인 초파일임에도 경내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보니 관불의식 현장도 꽤
나 한산했는데 다른 절들은 그 의식의 현장을 하나만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계단 좌우로 2개나
배치했다.
꽃에 감싸인 아기부처는 물기가 마를 정도로 따분한 시간을 보내며 아까운 초파일 시간을 부질
없이 죽이고 있지만 천진난만한 미소만큼은 잃지 않았으며, 그의 곁에는 하얀 피부의 보시함이
놓여져 애타게 돈을 원한다.


▲  대웅전 석가불과 붉은 색채의 석가후불탱
붉은 닫집 밑으로 이글거리는 모습의 광배(光背)를 두룬 석가불이 홀로 앉아
미소를 머금으며 중생들이 헌상한 음식을 바라본다.

▲  하늘에 칠해진 4가지의 색깔, 대웅전 뜨락을 가득 채운 네모난 연등
다른 절들은 보통 동그란 연등을 매달지만 이곳은 네모난 연등으로
절의 하늘을 훔쳤다. (정문과 요사 주변은 동그란 연등을 달았음)

▲  연등이 주렁주렁 매달린 대웅전 옆구리 돌담길
돌담 너머는 영축산 숲으로 경내에서 산으로 넘어가는 길은 없다.

대웅전 뒷쪽에 숨겨진 삼성각은 2004년에 지어
졌다. 지형을 이용하여 다진 석굴(石窟) 모양
의 돌집으로 건물 내부와 천정, 문은 나무로
손질했으며 문 앞에는 머리를 2갈래로 묶은 조
그만 문수동자상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삼성각
을 지킨다.

건물 내부 중심에는 산신이, 방 좌우에는 독성
과 칠성이 한 자리씩 차지하며 중생들의 인사
를 받고 있는데, 산신의 공간이 유독 넓고 그
위로 높게 동그란 천정을 내어 산신이 사실상
삼성각의 주인임을 알려준다. 바로 이 건물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산신도와 독성도가 있으
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  삼성각과 귀여운 문수동자상


▲  기원사 독성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2호

독성도는 천태산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을 담은 그림이다. 소나무 밑에 앉은 독성은
시선을 오른쪽(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향해 있는데 오른손은 무릎에 놓았으며, 그의
허전한 머리 뒤에는 하얀 광배가 그를 비춘다.
그는 빨간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법의(法衣)를 입었는데, 옷 끝단에는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으
며, 그의 오른쪽에는 나무 밑둥치가 있고 바로 그 위에 세발향로가 얹혀져 있다. 소나무 그늘
위로 하얀 구름이 흘러가며 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붉은 햇님이 살짝 모습을 비춘다.

그림 우측 하단에 화기(畵記)가 있지만 푸른 안료로 덧칠을 하는 통에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었
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조성되었는지는 오리무중(五里霧中)에 감싸인 상태로 '供養(공양)','
圓(원)' 등 몇 자만 겨우 확인이 가능하다. 허나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로 하얀색과 청색을 같
이 사용하는 색채감과 구도는 19세기 중반 이후 불화에서 많이 나타나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되었음을 귀띔해주고 있으며, 제자리를 잃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20세기 후반에 기원사에 안착
하여 이곳의 듬직한 후광이 되었다.


▲  기원사 산신도와 석조 산신상

▲  기원사 산신도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5호

독성과 칠성은 그림만 걸려있지만 산신은 그림 외에 돌로 만든 산신상까지 갖추고 있어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어흥~! 거리는 호랑이를 옆에 끼고 앉은 석조 산신상 뒤에는 독성도와 더불
어 이곳의 오랜 보물인 산신각이 걸려있다.

그림 중앙에는 붉은 도포와 푸른 두건을 걸친 산신이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다. 머리는 좌우
만 조금 남은 대머리로 수염이 무성하며,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자와 여인이 주전자와 찻
잔을 들며 서 있다. 보통 산신도에는 동자만 나오기 마련인데, 산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여자까
지 등장을 시켰다. 호랑이는 산신 맞은편에서 산신을 바라보며 어흥~! 거리고 있는데, 아마도
산신이 제때 밥을 주지 않아 항의하는 모양이다. 보통 호랑이가 산신 뒤나 옆에 있기 마련이지
만 여기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산신 옆에는 소나무가 있고 구름과 해가 소나무를 감싸고 있는데, 굵은 줄기에 태점을 찍고 옅
은 수묵을 사용하여 줄기를 표현해 오래된 노송의 질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명도가 높은 청
색을 사용하고 손발에 음영법이 쓰이는 등 19세기 말 이후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독성도와 달리 그림 밑부분 좌측에 화기가 남아있어 그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화기에 따르면 을유년(1885년) 5월 1일에 조성되어 전라남도 나한산 사태암(어딘지 모르겠음)
에 봉안되었다. 그런데 전라남도란 명칭은 1896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니 아마도 화기를 그 이
후에 작성하거나 수정한 것 같다. 1885년에는 전북, 전남, 제주도가 모두 전라도였기 때문이다.
금어 우곡(雨谷)과 수산 근혜(守山謹惠) 등이 그림을 그렸고, 시주는 식성(湜惺) 등이 했으며,
어찌된 영문인지 제자리를 잃고 천하를 방황하다가 기원사에 흘러들어와 안착을 하였다.

◀  나이가 한참 어린 칠성도
독성도와 산신도에만 한참 눈이 가있다 보니
칠성도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  기원사 공양밥의 위엄

열심히 경내를 둘러보니 다시 시장기가 엄습한다. 부지런히 일을 마쳤으니 공양 1그릇 들고 가
야 되겠지. 하여 이곳의 인심도 확인할 겸, 요사 공양간을 찾았다. 시간이 15시가 넘었지만 밥
은 아직 제공되고 있었다.
밥그릇에는 갖은 나물이 버무려져 있었는데, 밥주걱이 부러지도록 밥을 담고 고추장을 푼 다음
오뎅국이 든 그릇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절에서 차려준 공양 자리는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자리가 여의치 않았으나 비구니의 배려로 요사 1층에 들어가 다시금 즐거운 공양
시간을 가진다.

이곳 공양밥도 연화사와 마찬가지로 비빔밥이다. 밥과 콩나물, 무생채, 고사리 등 온갖 나물에
고추장을 넣어 빨갛게 해먹으면서 되는데, 특이하게 무와 오뎅, 미역이 든 오뎅국도 제공해 주
었다. 그렇데 공양을 마치고 그릇을 반납하니 뜨락에서 음료수와 솜사탕, 얼음 슬러시를 제공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러시 1컵 받아 먹으며 후식까지 채웠다.
이렇게 기원사의 훈훈한 인심을 체험하고 잠시나마 정든 그곳을 뒤로 한 채, 유독 짧아보이는
초파일의 낮을 원망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콩 볶듯 길을 움직였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 월계동 기원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광운대역(1,2번 출구)에서 광운대 방면으로 가면 월계3거리이다. 3거리를 건너
  서 광운대 쪽으로 직진하면 기원사를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를 따라 들어
  가다가 광운로17길로 진입하여 직진하면 그 길의 끝에 기원사가 있다. 단 길이 조금 복잡해
  초행인 경우 햇갈릴 수 있으니 감이 잡히지 않으면 주민들에게 문의한다.
* 서울시내버스 261, 1017, 1137, 1140번 시내버스를 타고 월계3거리 하차, 도보 6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1동 392-106 (광운로17길 48-47, ☎ 02-918-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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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5월 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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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길과 맨발축제의 영원한 성지, 대전 계족산 (장동산림욕장, 계족산황토길, 계족산맨발축제, 계족산성)




' 대전 계족산 가을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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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족산의 자랑, 황톳길


 

가을 형님이 한참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10월 한복판에 대전(大田) 제일의 명소
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는 계족산(鷄足山)을 찾았다.

아침 해가 뜨기가 무섭게 대문을 나서 동네 전철역인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탔다. 너무
일찍 집을 나선 탓에 시간이 무척 여유로워 새벽 기운으로 약간은 쌀쌀한 전철에 의지하여
수도권 최남단인 평택까지 쭉 내려갔다. 그런 다음 남쪽 어딘가로 향하는 무궁화호 열차로
갈아타고 대전의 북쪽 관문인 신탄진(新灘津)역에 두 발을 내렸다.

신탄진역에서 대전 도심으로 들어가는 대전시내버스 2번(급행, 봉산동↔옥계동)를 타고 신
대주공아파트(회덕동)에서 하차, 길 건너편에서 장동으로 들어가는 대전시내버스 74번으로
환승했다.
그 버스를 타고 마치 뱀 허리에 올라탄 듯, 구불구불한 장동고개를 넘으니 논과 밭이 펼쳐
진 장동(長洞)이 수줍은 듯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장동은 계족산에 꽁꽁 감싸인 분지(盆地)
로 속세로 나가는 길은 오로지 장동고개가 유일한데, 대전 도심이 멀리도 아니고 바로 코
앞이건만 도심 지척에 이런 산골마을이 숨겨져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곳이 만
약 서울에 있었다면 그 놀라움은 그야말로 핵폭탄급이었을 것이다.

장동1구를 지나 장동산림욕장에 이르니 승객들 모두 버스에서 내린다. 산림욕장 입구는 겨
우 2차선 도로로 관광객들의 차량이 도로 양쪽과 산림욕장 입구(이하 입구) 주차장을 이미
만땅으로 채운 상태였다. 하여 행사장 주차요원들은 차량들을 장동2구나 장동1구로 보내고
있었고, 관광버스는 공간이 조금 있는 장동2구 쪽으로 유도를 했다. 산림욕장 방향은 오로
지 행사 관련 차량들만 출입을 시켰다.

나와 같이 계족산을 거닐 남쪽 사람들은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아 입구에서 1시간 정도 멍하
게 기다렸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던지 체감상 며칠은 기다린 기분이다.
계족산과 그곳의 대표 축제인 맨발축제, 둘레길(황톳길) 때문에 1분이 멀다하고 천하 각지
에서 차량들이 몰려들고 사람들도 성난 파도처럼 꾸역꾸역 밀려들어와 이곳의 인기를 가히
실감케 한다.
드디어 남쪽에서 일행을 담은 관광버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버스를 보니 얼마나 반갑던
지, 그제서야 나는 혼자를 면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계족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계족산 맨발축제의 현장 장동산림욕장

▲ 장동산림욕장 정문

대전 도심의 대표적인 산림 휴양지인 장동산림욕장은 계족산성 서쪽 산자락에 자리해 있다. 계
족산의 너른 숲 148ha를 산림욕장으로 꾸며 1995년 6월에 문을 열었는데, 자연휴양림과 비슷하
긴 하나 숙박시설을 갖추지 않아 그냥 산림욕장을 내세우고 있다.
도심과 가까운 잇점으로 당일치기 나들이/휴식 장소로 널리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천하 명소로
격하게 떠오르고 있는 계족산 황톳길을 비롯해 체육/모험시설과 임간(林間)교실, 숲속의 문고,
잔디광장, 야외무대, 운동기구, 야생화단지, 물놀이장(매년 7~8월에 개장함) 등의 다양한 볼거
리와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청정한 계곡물이 산림욕장 한가운데를 가르며 금강(錦江
)으로 유유자적 흘러간다.

산림욕장 정문에서 20분 정도 들어가면 계족산 둘레길인 황톳길이 나타나며, 거기서 다시 30분
정도 발품을 팔면 대전 제일의 산성(山城) 유적인 계족산성이 모습을 비춘다. 반면 계족산 정
상(423m)은 여기서 거리가 좀 되며, 정상을 목표로 한다면 장동2구에서 들어가거나 법동(읍내
동)에서 접근해야 된다.
장동산림욕장과 계족산성은 따로 입장/퇴장 시간은 없으나 취사는 안되며, 도시락이나 간식을
싸오거나 산림욕장 입구에 있는 식당을 이용하면 된다.

산에 꽁꽁 감싸여 녹지가 풍부한 대전에는 이곳 외에도 만인산(萬仞山)자연휴양림, 장태산(長
泰山) 자연휴양림 등의 걸출한 휴양림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서 장동산림욕장이 가장 도심
과 가깝다.
특히 매년 5월(또는 10월)에 열리는 맨발축제는 이곳의 백미(白眉)로 대전 향토기업인 맥키스
컴퍼니(옛 선양, O2린 소주 회사임)에서 주최하고 있다. 그곳 회장인 조웅래가 직접 질이 좋은
황토를 구입하여 장동산림욕장과 계족산 둘레길에 넓게 황톳길을 다진 탓에 다른 흙길과 달리
황토색이 매우 진하다. 또한 계족산 맨발축제와 대전맨몸마라톤, 계족산 숲속음악회, 찾아가는
힐링음악회 등을 기획하여 선보이고 있고, 2014년부터 시작된 계족산 코스모스축제에도 후원을
하는 등 자신의 기업을 키워준 대전 시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있다.
오로지 돈과 회사키우기에만 눈이 어두워 노동력 착취와 온갖 비리만 일삼는 대기업들이 즐비
한 이 땅의 현실에서 그런데로 개념적인 회사라 할 수 있는데, 그 향토 기업의 적극적인 후원
으로 장동산림욕장과 계족산이 이만큼 성장한 거라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사진/서예전시로 분주한 장동산림욕장 산책로

▲ 계곡 건너 숲속에 자리한 임간학교

계족산 맨발축제(Barefoot Festa)는 2006년에 시작되어 매년 5월(또는 10월)에 2일 정도 열린
다. 이 축제는 크게 맨발 걷기대회, 문화예술제(숲속문화체험), 에코힐링 마사이마라톤(13km)
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숲속문화체험은 장동산림욕장 메인행사장에서 토우 만들기, 염색 체험,
연잎밥 만들기 등 각종 체험과 서예/사진전시회 등을 다루며, 숲속음악회 공연장에서는 연극과
악기 공연, 본 음악회의 중심인 뻔뻔(fun fun)한 클래식 공연이 열린다.
축제와 체험 이벤트는 따로 참여비는 없으며(에코힐링 마사이마라톤은 참가비가 있음) 그냥 가
서 즐기면 된다.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풍부하여 그것을 푸짐한 디저트로 삼아 계족산 황톳길과
계족산성 나들이를 즐기면 제법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숲속에 잠긴 호수 - 계곡을 막아서 만든 조그만 호수로 늦가을에
잠긴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하늘을 가린 아름드리 나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운 산책로

▲ 온갖 체험과 볼거리로 분주한 맨발축제 메인행사장
계족산 황톳길과 계족산성에 단단히 눈이 먼 나머지 메인행사장은 그냥 통과했다.

▲ 계족산을 찾은 속인(俗人)들의 황토빛 발자국 화석들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양말로부터 해방된 두 발을 황토에 묻혀 하얀 종이에 찍어 줄에 걸어놓은
것이다.발 크기가 좀 차이가 날 뿐이지 모습은 거의 비슷비슷해 발의 모습만큼은 서로가 평등
을 이루고 있다. 나도 한 줄기 발자국을 남길까하다가 신발을 벗기 귀찮아서 그냥 구경만 했다.


▲ 유난히 누런 계족산 황톳길

숲속음악회 야외무대를 지나 넓은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대전
의 꿀단지인 계족산 황톳길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장동산림욕장에서 이곳까지도 황토가 깔린
황톳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맛보기 버전이다.

계족산 황톳길은 2006년 맥키스컴퍼니 조웅래 회장이 깔아놓은 것으로 바로 그해 지인들과 이
곳을 오르던 중, 하이힐을 신고 오르고 있는 여성을 발견했다. 하여 자신의 신발을 그에게 빌
려주고 자신은 맨발로 흙길을 걸었는데, 그날 밤 귀가하여 아주 꿀밤을 잤다. 그 맨발의 첫 경
험이 너무 상큼하여 '이 좋은 것을 혼자 누리기가 아깝다' 생각해 바로 전국에 질 좋은 황토를
사들여 깐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황톳길은 계족산성을 품은 계족산 북쪽 봉우리를 둘러싼 순환형 둘레길로 14.5
km에 이른다. 길이 거의 느긋하고 폭이 넓으며, 황토가 두툼하게 입혀져있어 조금은 푹신하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땅의 기운을 느끼며 걷는 사람도 많다. 굳이 맨발축제가 아니더라
도 봄,여름,가을 언제나 맨발 산책이 가능하다. 맨발로 다니라고 황토를 입힌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차량의 접근은 불가하지만 길이 넓어 산악자전거의 출입도 가능하다.

황톳길 1바퀴를 도는데 4~5시간 정도 걸리며,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경치에 취해 사람에 취해
몽롱하게 걷다보면 그 길도 정말 짧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황톳길 중간에는 장동2구, 계족
산 정상, 절고개, 이현동, 대청호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는데, 절고개 갈림길에 이르면 대청호
가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 임도3거리 방면 계족산 황톳길

임도3거리 방면으로 황톳길을 따라가다보면 중간에 계족산성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한다. 산
성으로 오르는 길은 느긋한 황톳길과는 달리 속세살이처럼 무척이나 각박해 진땀을 빼게 한다.
처음이야 만만하게 시작해도 산성과 가까워질수록 본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길에
돌이 많아 이곳만큼은 맨발로 오르는 모험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산길을 10~15분
정도 오르면 나올 것 같지 않던 계족산성이 밑도리를 시작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 삼국시대에 조성된 대전 제일의 고성(古城)
계족산성(鷄足山城) - 사적 355호

계족산 북쪽 봉우리(해발 420m) 정상부에 자리한 계족산성은 길이 1,037m의 테뫼식 산성이다.
예로부터 백제(百濟)가 쌓은 성으로 전해졌으나 1998~1999년 발굴조사 때 백제 유물은 소수로
나오고 신라 유물이 무더기로 나와 신라가 쌓은 것으로 크게 보고 있다.

축성 방식은 충북 보은(報恩)에 있는 삼년산성(三年山城)과 비슷했으며,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 6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신라 토기라 적어도 6세기에 축성되었음을 가늠케 하는
데 문제는 위치이다. 하여 아직까지 논란이 많은 편인데,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백제의 도읍
인 공주(公州), 부여(扶餘)와 매우 가까운 곳인데다가 금강 서쪽이다. 비록 대전 동쪽인 옥천
관산성(管山城)까지 신라가 진출했으나 대전까지는 다소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으며, 백제가 작
게 쌓은 성을 신라가 6세기 중반 관산성 대승(554년)을 계기로 진출하여 크게 증축한 것을 백
제가 다시 탈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축성 주체가 아리송하니 그 논란을 살짝 피하고자
단순히 삼국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표시하기도 한다.

산성의 높이는 7~10m로 높은 편이고, 성문은 동문과 서문, 남문을 두었다. 우리가 들어온 곳은
서문터이다. 성내(城內)에는 남문터 부근에 봉수대(烽燧臺)터가 있고, 동벽 낮은 곳에는 백제
나 신라 때 것으로 여겨지는 우물터와 저수지터가 있다. 또한 장대(將臺)터를 비롯해 10여 곳
의 건물터가 나왔으며, 여기서는 고려시대 기와조각과 조선시대 자기파편이 나와 조선시대까지
그런데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천하 (1)
첩첩한 산주름 너머로 신탄진과 대덕테크노밸리, 전민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천하 (2)
산 밑에 잘익은 논이 바라보이는 곳이 장동2구, 그 산너머 구름 아래로
전민동과 유성(儒城)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천하 (3)
숲 너머로 대청호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백제가 망한 이후 백제부흥군이 활동하던 옹산성(甕山城)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조선 후기 이
후 버려져 단단히 헝클어진 것을 2000년 이후 서쪽과 남쪽, 동쪽 성벽 일부를 복원했다. 비록
먼저 쌓은 주체가 아리송하긴 하지만 삼국시대 후반에 축성된 성으로 대전의 전략적 중요성을
온몸으로 잘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지 대전 외곽에는 유난히 삼국시대 산성 유적이 많다.

계족산성이 정상부에 있다보니 조망 하나는 정말 일품이다. 서쪽과 북쪽에는 신탄진, 유성, 장
동 일대가, 동쪽으로는 대청호가 시야에 들어와 왜 이곳에 힘들여 성을 쌓았는지 십분이해가
된다. 게다가 지형도 험준하여 요새 자리로는 아주 그만이다.

대전에서 제법 하늘과 가깝고 동,서로 확트인 지형이다보니 해돋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어 대전
의 신년 해돋이 명소로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해돋이는 물론이고 일몰 풍경도 아름다워 일
출과 일몰을 같이 누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계족산성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85일대


▲ 계족산성 서문터
신탄진 방향을 바라보며 위엄을 뽐냈을 서문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없이 녹아내리고 지금은 흔적만 아련히 남아있다.

▲ 잡초가 듬성듬성 돋아난 계족산성 성곽길
성곽의 높이가 꽤 되므로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기 바란다.

▲ 계족산성 남문터 주변

▲ 대자연이 성벽에 남긴 소소한 작품

▲ 평평한 계족산성 내부 (서문터 안쪽)

계족산성 내부(서문터 안쪽)는 가파른 외부와 달리 평탄하다. 푸른 잡초가 피어난 너른 공간에
산꾼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간식 시간을 갖고 있는데, 뜨거운 가을 햇살을 피해 다들 나무
그늘에 진을 치고 있다.
우리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피고 속세에서 가져온 도시락과 김밥, 과일 등으로 즐거운 점심 시
간을 누렸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거진 꿀맛이다. 그렇게 가져온 음식들을 정
신없이 처리하고 잠시 쉬었다가 산성과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했다. 마음 같아서는 산성을 1바
퀴 돌아보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다음을 기약하며 서문터를 거쳐 황톳길로 내려갔다.


 

♠ 계족산 황톳길과 숲속음악회

▲ 계족산 황톳길

계족산성으로 잠시나마 떨어진 황톳길로 다시 되돌아와 남쪽을 향해 걸었다. 길이 평탄하고 숲
이 터널을 이루어 몸과 마음이 즐거우며 길이 그렇게 힘들지도 않다. 게다가 맨발로 길을 더듬
을 경우 촉감 또한 일품이다.
기분 같아서는 황톳길 1바퀴 본전을 뽑고 싶지만 우리 일정이 그렇게 넉넉치가 못해(숲속음악
회를 봐야됨) 임도3거리에서 발길을 돌렸다.

임도3거리에서 막걸리를 파는 행상이 있어서 일행들과 막걸리를 들이키고 안주로 제공되는 반
찬(이름이 생각이 안남)을 잔뜩 집어 먹었다. 다시 돌아나오는 길에는 나도 맨발족에 가세하여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황톳길에 임했다. 맨발 도보의 성지(聖地)에
왔으니 맨발로도 한번 움직여줘야 되겠지. 가끔 맨발로 이런 곳도 다녀줘야 두 발도 흥분하여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하여 임도3거리에서 산림욕장까지 잠시나마 맨발의 청춘을 누렸다.


▲ 황톳길에서 만난 돌탑

▲ 하얀 천에 그려진 2글자 '좋다' - 황톳길이 정말 좋다.

▲ 황톳길에서 바라본 장동2구 평야와 건너편 산줄기

▲ 살짝 구부러진 황톳길

▲ 쉼터와 운동기구가 있는 임도3거리

▲ 황토머드체험장

계족산성 입구와 임도3거리 중간에는 황톳길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황토머드체험장이 있다. 맨
발로 진흙 체험장에 들어가 빨래한 이불을 푹푹 밟듯이 황토를 밟는 것인데, 그 느낌이 매우
시원하고 좋다. 그래서 자꾸 발이 가는 통에 길이 10m 남짓의 머드체험장을 몇 바퀴나 돌았는
지 모른다.
머드체험장에서 누렇게 뜬 발과 다리는 임도3거리 방면에 있는 약수터에서 씻어도 되고, 장동
산림욕장 숲속음악회 부근에 마련된 발씻는 곳에서 씻으면 된다.


▲ 숲속음악회 뻔뻔(fun fun)한 클래식 공연

계족산 황톳길을 일부만 돌고 장동산림욕장으로 내려온 것은 오후 4시부터 진행되는 숲속음악
회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나들이의 백미는 숲속음악회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했는데, 음악회가 4시부터 한다고 하여 그 시간에 맞춰 3시 반 정도에 숲속음악회 공연장
으로 내려왔다.
아직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부근 발씻는 곳에서 황토에 취한 발을 씻고 공연장으로 넘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시간이 되자 막이 열리면서 무대 바로 뒷쪽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남자
성악가 4명(테너, 바리톤), 여자 성악가 1명(소프라노), 여자 피아니스트 1명 등, 8명으로 이
루어진 맥키스오페라 단원들이 나타나 공연을 시작했다.

공연 이름인 '뻔뻔'은 뻔뻔하다가 아니라 재밌다는 뜻의 영어 fun이다. 이름은 진짜 기가 차게
잘 지었다. 이 공연은 2007년 조웅래 회장이 계족산 맨발걷기 후식용으로 고안하여 시작된 것으
로 매월 1회 무료공연으로 시작되었다가 2012년부터 4~10월까지 매주 토/일요일에 절찬리에 열
리고 있다. 미모가 돋보이는 여자 소프라노가 맥키스오페라 단장(단장은 바뀔 수 있음)으로 평
소에 접하기 힘든 클래식을 위트와 유머, 대화를 통한 연극의 요소와 소리와 율동을 통한 뮤지
컬 요소까지 더한 일종의 멀티콘서트 방식으로 1시간 동안 열린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드는 자연 공간에서 이렇게 음악회를 접하는 것도 참 신선한다. 공연에서는
우리나라 가극과 민요, 서양의 클래식과 노래를 선보여 흥을 돋군다. 공연이 재밌어서 앵콜 요
청이 빈번하며 그래서 지정 시간보다 노래를 1~2곡 더 부르기도 한다. 공연이 끝나면 기념촬영
시간까지 있는데, 서로 같이 찍으려고 아주 난리가 아니다. 우리 일행도 단체 사진을 같이 찍
었다.


▲ 홀로 나와 노래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 성악가

▲ 뻔뻔한 클래식 공연 ▼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소프라노가 단연 돋보인다. 시선도 남자들보다는
여자에게만 집중. 내가 남자라서 그런가?


▲ 기념촬영 시간 - 웃음을 놓지 않는 에코페라 단원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숲속음악회를 끝으로 11시부터 시작된 계족산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6시간 정도
머문 셈이다. 음악회가 끝나자 잠시나마 마음을 빼앗긴 계족산을 뒤로하며 산림욕장 입구로 나
왔다.
6시가 되자 남쪽에서 온 일행들은 관광버스를 타고 그들의 본거지로 떠났다. 그들이 그렇게 간
이후 나는 관광객들로 가축 수송을 이룬 74번 시내버스에 짐짝처럼 낑겨타 간신히 바깥으로 나
왔고, 이후 파란만장한 상경길을 거쳐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계족산 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 계족산 장동산림욕장(계족산성, 황톳길) 찾아가기 (2016년 10월 기준)
* 대전역(1호선 대전역 3번 출구)에서 급행 2번, 611번, 711번 시내버스를 타고 와동현대아파
트 하차 (512번을 탔을 경우 '회덕동주민센터'나 '대한통운'에서 74번으로 환승)
* 대전복합터미널 건너편에서 급행 2번, 611, 701번 시내버스를 타고 와동현대아파트 하차
* 신탄진역에서 급행 2번, 703번 시내버스를 타고 신대주공아파트 하차
* 와동현대아파트(신대주공아파트의 반대편 정류장)에서 74번 시내버스(장동2구↔대한통운, 읍
내동 현대아파트)를 타고 장동지구산림욕장 하차 (40분 간격으로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산림욕장 입구에 주차장 있음, 산림욕장 진입은 불가)
① 경부고속도로 → 신탄진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덤바위3거리에서 우회전 → 회덕역에서 유
턴하여 가변으로 빠져 장동로로 진입 → 장동산림욕장(계족산)

★ 계족산 장동산림욕장(계족산성) 관람정보 (2016년 10월 기준)
* 입장료와 축제 체험비, 주차비는 없음 (에코힐링 마사이마라톤은 참가비 있음)
* 매년 5월(또는 10월)에는 계족산 맨발축제가 열린다. 축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밑에 있는
사진을 클릭한다. (맨발축제 문의 ☎ 042-530-1836)
* 매년 10월 초에는 장동만남공원에서 계족산 코스모스축제가 있다. 코스모스꽃길 승마체험을
비롯하여 장원급제 체험, 전통공예품 만들기, 드론 날리기 체험, 전통/연극 공연, 코스모스
와 함께하는 가을 음악회, 산디마을 캠핑 1박2일 민박 등의 이벤트가 열린다.
* 장동산림욕장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63일원
(☎ 042-623-9909)


▲ 장동산림욕장을 나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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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대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

▲  봉원사 대웅전 뜨락


 

여름의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
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으니 바
로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하고 있는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그것이다. <그냥 축제도 아니
고 무려 대축제.. 이곳 외에도 조계사(曹溪寺)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벌써 10년이 넘게 축제가 열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신통치 않아 서울 사람들도
많이 모르는 실정이다. 주말에는 답사꾼, 사진꾼, 산꾼 등이 좀 몰리긴 하지만 평일은 피
서철임에도 한산한 편이라 보다 적극적인 홍보가 절실해 보인다.

7월 한복판에 봉원사 연꽃 축제 소식을 접하고 연꽃에 대해 입맛을 다시며 흔쾌히 축제를
기다렸다. 그 축제는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적이 있지만 여름이 왔으니 친(親)여름파
인 연꽃의 향연을 1번은 꼭 봐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
큼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축제일이 다가오자 후배 여인네와 함께 그곳의 문을 두드렸다. 서대문역
(5호선)에서 봉원사 턱 밑까지 올라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8분 정도를 달려 봉원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보기만해도 숨통이 질리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
변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 마을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꼭 높은 빌딩과 번잡한 시가지
, 꼬리를 무는 차량들의 정체와 사람들의 엄청난 물결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거늘 서울
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풍경과 대비되는 곳을 만나면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가?'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버스가 육중한 바퀴를 접고 쉬는 곳은 봉원사 주차장으로 그 북쪽에 숲속한방랜드 숯가마
찜질방이 있다. 여기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조금 가면 오른쪽에 승탑(僧塔)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전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이곳에는 석종형(石鐘形)부터 8
각원당형(八角圓堂形)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 7~8기가 비석 9기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있
는데, 다들 20세기 것들이라 때깔이 무지 곱다.
그런 부도전을 지나면 봉원사 밑에 자리한 마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사찰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 상당수는 봉원
사 승려의 거처로 대부분 처자 등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승려가 왜 부인과 자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 하겠지만 봉원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
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자신만의 가정을 눈치 없이 꾸릴 수가 있으며 그들
은 보통 자신이 일하는 절 밑에 집을 마련하여 절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니 이 마을은 봉
원사의 또다른 일원이자 확장판으로 봐도 상관은 없다.
마을은 절 바로 밑까지 펼쳐져 있어 절과 마을이 거의 붙어있으며 나무도 제법 많아 마치
벽지 산골 같은 분위기이다. 이곳이 이렇게 도심 속의 산골로 남게 된 것은 이 일대를 봉
원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에도 묶여 있어 개발의 칼질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
문이다.


▲  봉원사 종점에서 봉원사로 인도하는 길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유애비, 보호수 느티나무)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하얀 피부의 조그만 비석이 애타게 눈길
을 보낸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
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왠 비석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비신(碑身)에 쓰인 내용 그대로 조낭자 희정 유애비이다. '조낭
자 희정~~'이란 문구를 통해 '조희정'이란 여인을 기리는 비석임을 알 수 있는데, 보통 행적이
나 절에 시주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아닌 슬픔을 남긴다는 뜻의 유애비(遺哀碑)를 칭하는 것을
보니 뭔가 애처로운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과연 이 비석에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
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
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
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고 한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
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
신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
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신세 한탄
을 자주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지극히 부족했던 관심과 애정이 그녀를 죽음
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자리해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춧돌로 비각은 오래 전에(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함) 녹아 없어졌다.


▲  봉원사 회화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7호
봉원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5그루가 있는데, 가장 먼저 마중하는 것이
바로 이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도 구석에 있어 진짜 지나치기가 쉽다.
나무의 높이는 18m, 둘레는 3m이며, 2000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80년이라고 한다. (지금은 190여 년)


▲  봉원사 느티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와 회화나무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
다보니 풍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
었다. 높이는 18m, 둘레 4.3m로 뒤에 있는 느티나무보다 늘씬하고 키가 크며 주변에 넓게 그늘
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잠재운다.


▲  봉원사 느티나무 (2)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 나무에서도 완
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
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 장안에서 규모가 제법 있는 절이지만 아직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
했다. 그러니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가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를 팔고 있으며,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
도 판매한다.

               ◀  봉원사 연못
네모난 연못에 동그란 섬을 심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
하는 것 같다. 연못에 홀로 떠 있는 섬에는 조
그만 소나무가 운치를 가득 우려낸다.

       ◀  연못 옆에 자리한 비각(碑閣)
봉원사에 크게 재정을 지원했던 전성기(全星基)
의 송덕비(頌德碑)가 담겨져 있다.
비석도 모자른지 대웅전 옆에 그의 제사까지 지
내는 전씨영각까지 두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지원이 꽤 상당했던 모양이다.


 

♠  봉원사 16나한상, 범종각 주변

▲  하얀 연꽃의 수수한 자태

연못 윗쪽 라인에는 연꽃을 심은 수조를 배치해 연꽃의 조촐한 향연을 선보인다. 붉은색과 흰
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연분홍 연꽃부터 한참 물이 오른 홍련(紅蓮)과 백련(白蓮)까지 늦
여름에 나타나는 수련(睡蓮)을 빼고는 거의 다 모여 있다. 어여쁜 잎을 펼쳐보이며 부처와 대
자연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연꽃들은 정처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핀다.


▲  무슨 근심이 있는지 입을 오므린 홍련
저 홍련에서 심청(沈淸) 누님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  16나한상 동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1967년에 목수인 이광규가 세웠다. 건물 이름
그대로 범종이 담겨져 있으며. 종 밑에는 단지
를 묻었는데, 이는 소리의 공명정도를 길게 하
고자 함이라 한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16나한상은 부처의 열성제자인 16명의 나한(羅漢)으로 2001년 6월에 봉안했다. 나한상 북쪽에
는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
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서울 연꽃축제의 성지 ~~ 봉원사(奉元寺)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의 하나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
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고,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
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국사 창건설은 거의 신뢰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
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
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을 멀리했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태조 4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붕어(崩
御)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하니 그 기념으로 영조가 친히 '봉원사'
란 친필 현판을 하사했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 수경원(綏慶園)을 1764년에 조성했다.
이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전되어 지금은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제자
리를 지키고 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
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1856
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
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어 창립총회를 열리기도 했다.

▲  봉원사 염불당(대방)

▲  봉원사 대웅전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가람(伽藍)을 넓혔다.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9월 말, 무심한 총탄과 폭탄이 무수히 날라와 광복
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물들의 유물까지 덩달아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대웅전과 몇몇 건물만 간신히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임
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1994년 쓰러진 대웅전을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을 보
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고, 2011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
),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
방유형문화재 370호
), 반야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이들은 2014년 여름 이후에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
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
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
된 탱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운다.

봉원사는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곳으로 숲속에 묻힌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이다. 서울
4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고찰이기도 하며, 접근성과 교통도 그런데로 착한 편이라 속세에서 잠
시 나를 지우고 싶으나 멀리 가기가 힘들 때 언제든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이다.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온 듯한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며 공기 또한 맑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6년을 기준으로 벌써 14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대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꽃밭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기간 동안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도 전통차 시음,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절에서 안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봉원사의 숨은 명물인 관음바위가 있고, 안산 정상까지 올라
가면 동쪽 정상부에 서울 지방기념물 13호로 지정된 무악산 동봉수대(東烽燧臺)가 있다. 봉수
대는 근래에 복원된 것으로 정상에서 홍제동, 독립문 방면으로 내려가면 되며, 안산 둘레에는
도심의 아름다운 숲길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안산자락길(7.4km)이 아주 편안하게 닦여져 둘레
길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 봉원사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서울역버스환승센터(1,4호선 9-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2호선 신촌역(4번 출
  구)에서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원사 하차
* 경복궁역(3호선) 1번 출구를 나와서 사직동주민센터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
  고(봉원동)에서 하차, 봉원사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GS25시 앞에서 7024번 버스로
  환승한다.
* 매년 여름(7월 말~8월 초)에는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열린다. 영산재를 비롯해 산사음악회와
  각종 공연, 불화 전시 등의 이벤트가 열린다. (2016년에는 7월 30일 딱 하루만 축제를 했음)
* 봉원사 승려는 거의 출퇴근을 한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일몰 직후에 퇴근을 하는데, 퇴근
  이후에는 모든 건물을 잠궈두며 경비인이 절을 지킨다. (연꽃축제 기간에는 대웅전은 늦게까
  지 문을 열어둠)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서울연꽃문화대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숲을 이
룬다. 천하의 연꽃을 모두 소환한 것일까?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과 맵시를 견주며 물결
을 이루니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만든다.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
은 안구와 마음이라도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보면 금세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활짝 미소를 머금은 홍련들

▲  출렁이는 연꽃 밀림 너머로 보이는 대방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홍련을 희롱하는 잠자리
연꽃 봉오리 속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진 것은 아닐까?
 

▲  방긋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홍련들

▲  수조에 몸을 담군 연꽃 무리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대방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과 삼천불전

▲  두툼하게 살이 오른 홍련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연밥을 드러내 보인 백련

▲  대웅전 우측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孔德洞) 동도공고
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당시 봉원사 주지인 영월이 6.25로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던 중,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놓
았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형하여 세우고 대방
으로 삼았다. 그래도 명세기 대원군의 별장 건물인데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
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
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
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들의 숙식,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
간으로 범패(梵唄)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깃들여져 있다고
전한다.

건물 내부는 딱히 방을 가르는 벽이 없어 하나의 거대한 방을 이르고 있으며, 추사 김정희(金
正喜)가 쓴 현판을 비롯하여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의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의 주인공인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
문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
씨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
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과 삼천불전 주변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조
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
사(華溪寺)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
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
로 홀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재가 되었으니 6.25 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
다 할 것이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그렇게 또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건물이 쓰러지자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
지만 떠나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인간문화재인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이는 흥선대원군이 부질없는 명당(明堂) 욕심에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
(伽倻寺)로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할 때 그 절을 강제로 불을 질렀는데, 그때 타
지 않고 남아서 이곳에 가져온 거라고 한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었으니 명당의 숨겨진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금빛찬란한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자리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을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앞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운수각(雲水閣)과 영안각(靈晏閣)

▲  영안각과 전씨영각(靈閣)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
각으로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이며, 그 옆에 조금은 낡아보이는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혼백
을 봉안하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겉 나이는
거의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좌측에 있는 1칸짜리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넘긴 전성기 부
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기일(忌日)마다 절에서 제사를 지내주고 있는데, 이렇게 사
당까지 지어 제삿밥까지 직접 챙겨줄 정도면 시주한 재산이 꽤 되었던 모양이다. 절이나 속세
나 돈 앞에서는 역시나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절에서는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
유까지 하며 찬양을 하니 말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음보살이
용선을 타고 있다.

▲  9마리의 용조각
수각(샘터) 옆 바위에 놓인 특이한 조각품으로
9마리의 용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는 것 같다
.


▲  봉원사 수각(水閣, 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石槽)는 늘 마를 날이 없다.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연꽃보다 샘터가 더 반갑지.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니 말이다.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지금의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
려 9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미국 알래
스카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
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
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
생의 돈을 받아 만든 원불(願佛)이다. 그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駕
)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다.


▲  삼천불전의 주인장인 비로사나불과 좌우에 가득 널린
조그만 3천불의 위엄

▲  삼천불전 좌측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를 돌리면 불교 경전을 다 이해하고
더불어 소원까지 성취된다고 한다.

▲  저보다 정신이 없는 그림이 또 있을까?
100명이 넘는 호법신들이 빼곡히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  화려하기 그지없는 삼천불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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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금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
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
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
승정(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진신사리 보유 사찰
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된 것이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
천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
음껏 뽐낸다.

▲  삼천불전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좁게나마 신촌과 서대문구,
마포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
저 수인(手印)은 무슨 제스쳐일까?


▲  삼천불전 서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3) - 서울시 보호수 13-2호
봉원사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로 높이 21.5m, 둘레는 4.4m이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1972년) 추정 나이가 430년이라고 하니 그 사이 40년이 얹혀져
470여 년의 장대한 나이를 지니게 되었다.

▲  삼천불전 주변에서 만난 연분홍 연꽃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건물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
(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얗게 피부를 다듬은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
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고색이 짙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상
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제작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
상도(八相圖)와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山神)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논다.

▲  칠성각 우측 - 산신탱과 팔상도 4폭이
걸려있다.

▲  칠성각 좌측 - 신중탱과 팔상도의
나머지 4폭이 자리해 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
석을 세워 그날을 기린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 뒷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정도전이 친히 쓴 것이라고 하는데, 현판을 보니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게 맞는다면 거의 620년을 묵은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
래된 보물이 된다.

명부전은 정도전의 현판으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고 기둥에 달린 주련 4
개가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라고 한다. 1945년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척결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나날이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매국노의 흔
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내 장작으로 쓰기
바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름 가
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10왕 끝에는 당찬 패기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서 있어 명부(저승)
식구들을 지킨다.


▲  명부전 옆구리에 둥지를 튼 연꽃 무리들 (거의 연잎만 있음)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있는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습이
다. 건물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서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
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
라 불리기도 한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그 이상으
로 흘러가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彌勒佛)이 그저 밉기만 하
다. 그렇게 나오기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꼭 56.7억년 후에 나타나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직무유기이다.

◀  미륵전 앞에 세워진 날씬한 7층석탑
왜정 이후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으로 언제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닌데, 건물 우측에는 자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
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는 150~200년 정도 된 것으로 여겨지며,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문수,보현보살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는 살
피지 못했다.


▲  내려가는 길에 만난 아리따운 홍련

▲  삼천불전의 숨겨진 부분 - 절 주차장

봉원사에 조촐히 닦여진 연꽃 세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향기에 취해 1시간 30분 정도 머물렀다.
연꽃이 완전 시간 도둑인 셈이다.
연꽃이 앗아간 나의 마음을 간신히 되찾아 절을 나올 때는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삼천불
전 서쪽으로 내려갔다. 경내에서 볼 때는 1층(아래 공양간을 합치면 2층)이지만 그 밑에 숨바
꼭질을 하는 공간이 있어 삼천불전은 거의 4층 규모이다. 물론 지형을 이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저런 모습이 나온 것이다.

삼천불전 서쪽에는 주차장이 있는데, 이곳도 봉원사 주차장이다. 그 주차장을 지나니 봉원사의
숨겨진 나머지 보호수 1그루(느티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  봉원사 느티나무 (4) - 서울시 보호수 13-5호

이 느티나무는 민가 옆에 비스듬히 자리해 있다. 하늘을 향한 높이는 23m, 둘레는 3m로 보호수
로 지정된 1981년 당시 추정 나이가 1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80여 년으로 보면 된다. 나무가
특이하게 절을 향해 45도 정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절을 향한 일편단심을 보여준다.

이 나무를 끝으로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다음에 또 이곳과 인연을 짓
는다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아미타괘불도와 반야암(봉원사의 부속 암자)에 깃든 지방문화재
불상들을 꼭 두 눈에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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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도 나오는 서울 선사유적의 성지, 가족 나들이 추천 명소 ~~ 암사동 선사유적지 (움집, 선사전시관)

 

 

' 서울에서 즐기는 선사시대로의 여행, 암사동 선사유적지 '

▲  암사동 유적 움집들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인 5월이 저물고 여름의 초기 부분이라 할 수 있는 6월이 밝았다.
이제 6월 한복판임에도 여름 제국은 벌써부터 철통같은 무더위를 드러내며 천하의 숨통을
조인다.
아무리 여름이 시작부터 꽤 당차게 나와도 즐길 것은 즐기고 살아야 된다. 특히 여행이나
나들이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서울 장안을 대상으로 간단하게 어디로 갈까? 눈동자를 굴
리다가 서울 지역 선사 유적의 오랜 성지(聖地)이자 신석기 유적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
는 암사동(岩寺洞) 선사유적지를 찾았다.
이곳은 유년 시절인 1990년대 초반에 2번 정도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선사시대가 썩 재
미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구석기(舊石器)와 중석기(中石器), 신석기, 청동기 관련 유
적은 덜 가는 편이다. 가봐야 하품만 나오니 말이다. 그러다가 그날 따라 무슨 바람이 났
는지 그곳 생각이 간절하여 20여 년 만에 다시 인연을 지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에 도봉동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천호역(5,8호선)에서
서울시내버스 3411번으로 환승, 선사4거리 남쪽인 삼성광나루아파트(암사동 유적) 정류장
에서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4거리를 건너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북쪽(서원마을)으로 8분 정도 가면 암사
동 유적 정문이 나온다. 정문 동북쪽에는 썩 달갑지 않은 매표소가 있어 사람들의 호주머
니를 간절하게 바라보는데 입장료가 무려 500원이나 한다. (옛날에는 무료였는데 ㅠㅠ)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리는 애당초 없는지라 입장권을 구입하고 단촐하게 생겨먹
은 정문을 들어서니 여름 녹음에 잠긴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펼쳐진다. 정문은 2개의 나무
기둥을 양쪽에 두고 그 위에 길쭉한 목재를 얹혀 마치 선사시대(先史時代) 마을의 정문처
럼 꾸몄는데 이곳과 하루가 멀다하고 변해가는 바깥 세상과의 경계를 가르는 담장은 모두
나무로 목책 비슷하게 둘렀다. 


▲  수천 년 전, 신석기시대로 인도하는 타임머신, 암사동 유적 정문

▲  신석기시대의 상징,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확대되어 재현된 빗살무늬토기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있음)


 

♠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유적의 성지, 움집으로 유명한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유적) -
사적 267호

▲  나무가 무성한 암사동 선사유적지 (정문 주변)

서울 동쪽 암사동 한강변에 자리한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선사주거지, 암사동 유적)는 신
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초/중/고등학교 사회/국사책과 국사 관련 교양서적, 공무원 수
험서에 눈과 귀가 질릴 정도로 등장하는 유명 명소이다. 신석기 이전인 구석기시대 하면 공주
석장리와 연천 전곡리, 상원 검은모루동굴, 웅기 굴포리가 대표적이고 신석기시대 하면 암사동
이 딱 떠올릴 정도로 신석기 유적의 성지 같은 곳이다.

이곳은 억겁의 세월 동안 땅 속에 강제로 묻혀있다가 1925년 그 악명 높은 을축년(乙丑年) 대
홍수로 한강 주변이 죄다 떠내려갔을 때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며 수천 년 만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고대 유적이 쏟아져 나오자 흥분한 왜정(倭政)은 학자 요꼬야마(橫山將三朗)와 후지타
등을 보내 땅을 뒤집게 했는데, 많은 양의 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어 천하를 놀라게 했으며,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주거유적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발굴 범위가 좁았고 그 이후 별다른 조
사를 벌이지 않고 방치하면서 다시 경작지가 되고 만다.

논밭이 되버린 암사동 유적을 다시 깨운 것은 1957년으로 경희대가 조사팀을 보내 조촐히 발굴
을 벌였고, 1967년 서울대와 경희대 등이 대학연합발굴단을 조직하여 합동발굴을 하였다. 그러
다가 1968년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정식으로 발굴을 하면서 주변을 모두 뒤집기 시작했고, 국립
중앙박물관까지 가세하여 1971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동안 발굴조사를 토대로 하여 1979년 7월 국가 지정 사적의 지위를 받게 되엇으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1981년부터 1988년까지 7년 동안 발굴조사를 벌이면서 유적을 정화하고 이곳
의 명물인 움집을 복원하여 1988년 8월 30일 속세에 개방했다.

1997년 1월 20일에는 '97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성화를 이곳에서 채화(採火)했고, 1998년에는
제2전시관을 만들고자 주변을 발굴하여 많은 유물을 건져냈다. 2000년 1월 제2전시관이 완공되
고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유적지 일대를 정비하여 나무를 심었으며, 2010년 9월 선사체험마을
을 조성하여 살아있는 선사시대 체험의 장으로 변화를 꾀했다.
(2011년 7월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암사동 유적'으로 변경됨)

▲  복원된 움집

▲  재현된 신석기 사람들의 생활모습

암사동 유적은 우리나라에 흔하게 널린 신석기유적 가운데 가장 큰 마을 단위 유적으로 그 이
름과 가치를 크게 드높였다. 방사성탄소(放射性炭素) 측정 결과 약 6,400년부터 3,500년 전에
걸쳐 조성되었음이 드러나 멀리 잡아도 약 7,000년 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음을 귀
띔해준다.
이곳 땅 속에서는 3개의 문화층(文化層)이 발견되었는데, 신석기시대의 상징물인 빗살무늬토기
가 발견된 신석기 문화층이 발굴 지역 전역에서 확인되었으며, 민무늬토기와 청동촉 등이 나온
청동기 문화층, 그리고 백제(百濟) 초기 이음식 독널무덤과 승석문(繩席紋)목단지, 쇠토끼 등
이 나온 백제 문화층도 조금이나마 나와 신석기시대부터 백제 중기(한성백제시대)까지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았음을 알려준다.

이곳은 크게 나무가 울창한 남쪽 구역과 움집과 제1,2전시관이 있는 중앙 구역, 그리고 체험마
을과 체험교실이 있는 북쪽 구역 등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남쪽 구역은 숲이 삼삼하여
돗자리를 피고 간식을 먹으며 주말 오후를 보내는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많으며, 전시관과 움
집이 있는 중앙 구역은 이곳의 핵심이다. 북쪽 구역은 짜투리 땅을 닦아서 만든 선사체험마을
로 딱딱하고 재미가 떨어지는 선사시대 나들이에 약간의 감칠맛을 더한다.

▲  선사박물관 전시관

▲  선사체험마을 움집군락

암사동 유적의 명칭은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선사주거지'로 많이 불리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암사동 유적'이다. 허나 명칭이 무슨 대수랴,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선사유적지로 비록
복원하고 재현한 것이긴 하지만 문명(文明)시대 이전의 향기가 담겨져 있으며, 서울에서 유일
하게 목숨을 건진 선사유적지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암사동 외에도 면목동(面牧洞) 구석기유적, 도곡동(道谷洞) 청동기 유적, 고
덕동(高德洞) 고인돌, 원지동(院趾洞) 고인돌, 우면동(牛眠洞) 고인돌 등의 선사유적이 있으나
제대로 우리 곁에 남은 것은 암사동이 유일하다. (원지동과 우면동, 고덕동 고인돌은 살아있긴
하나 상태가 고르지 못함)

그럼 지금부터 암사동에 서린 선사시대로의 여행을 흔쾌히 떠나 보자. 참고로 선사시대는 글자
가 생기기 이전 시대를 일컫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대가 선사시대인데...!!)

▲  덧무늬토기들

▲  암사동 선사유적지 산책로

※ 암사동 선사유적지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 지하철 8호선 암사역(1번 출구)에서 강동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암사동 유적 하차
* 지하철 8호선 암사역(2번 출구)이나 5,8호선 천호역(3번 출구)에서 340, 3318, 3411번 시내버
  스를 타고 삼성광나루아파트(암사동 유적) 하차, 도보 10분

★ 암사동 선사유적지 관람정보 (2016년 6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500원 (30인 이상 단체 400원) / 어린이와 중고생 300원 (단체 200원)
* 7세 이하와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등은 무료
* 관람시간 : 9:30~18:00 (입장은 17:30분까지 / 1월 1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
* 동네 주민들을 위한 아침 운동시간 무료개방시간 : 5:30~9시까지 (10~3월은 6시부터임)
* 주차비 : 경차 1,000원 / 소형차 2,000원 / 대형차 4,000원 (이용시간 9:30~18시)
* 매년 10월 상반기에 금,토,일 3일 일정으로 선사문화축제가 열린다. 원시생활 체험과 소망등
  달기와 강동 락페스티벌과 길놀이 등 다채로운 공연 강동구 지역의 오랜 민속놀이인 '바위절
  마을 호상놀이(서울 지방무형문화재 10호), 원시퍼포먼스, 그림 그리기 대회, 직거래 장터
  등이 열린다.
* 초등학생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여러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움집만들기, 토기만들기, 선
  사인의 겨울나기, 수렵체험, 원시인 여름 즐기기, 채집체험, 어로체험, 어린이발굴체험 등이
  있으며, 운영기간은 프로그램마다 모두 다르다. (자세한 정보는 암사동 유적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139-2 (올림픽로 875) <☎ 02-3425-6520)
* 암사동 유적 홈페이지는 아래 빗살무늬토기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암사동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의 위엄


 

♠  암사동 유적의 꽃, 움집 주변

▲  정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3거리와 함께 짙게 우거진 수목이 더위를 잠시
잊게 해준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숲 산책로이고 오른쪽으로 가야
움집과 전시관, 선사체험마을로 이어진다.

▲  신석기시대에 신석기 사람들과 경쟁하며 살았던 동물들의 모형

노루와 맷돼지, 말 등 지금 동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허나 몇몇 사람들은 왜 공룡이 없지?
의아해한다. 선사시대하면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공룡과 신석기 원시인의 공존, 허나 공룡은
여기에 없다. 왜냐? 그들은 공존하지 않아 서로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선사인들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공룡은 빙하기로 죄다 씨가 말랐다.


▲  움집터 입구

▲  움집터 입구 옆에 자리한 커다란 소와
선사시대 어린이의 귀여운 모형

▲  태풍으로 날라간 남쪽 움집


▲  암사동 유적의 꽃, 움집들

움집터 일대에서는 30기의 집터와 돌무지시설 등이 발견되었다. 집터는 동그란 모양과 네 모서
리를 약간 줄인 구조<어려운 말로 말각방형(抹角方形)>로 모래땅에서 50~100cm 정도 움을 파고
그 위에 짚 등을 엮어서 거의 길쭉한 세모 모양으로 만든 형태이다. 집터 중앙에는 강돌을 둘
러 만든 화덕시설이 있고, 집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주로 남쪽에 두었다.
기둥 구멍은 한 집에서 여러 개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주 기둥과 보조기둥 혹은 이전의 기
둥을 갈 때 새로 난 자리가 섞여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집터 밖에는 야외노지(野外爐址)와
음식을 저장하던 저장구덩이, 돌무지시설 등이 있으며, 이들은 불의 기운을 받은 흔적이 역력
하다. 그리고 돌무지 밑에는 불에 탄 흙과 부식토와 함께 목탄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돌무지
사이에는 많은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어 토기를 굽던 가마터 또는 마을 공동의 화덕시설로 보
인다.

토기는 바닥이 뽀족한 것과 바탕흙에 활석이나 석면을 섞은 것, 그리고 무늬가 있는 것들이 주
류를 이루며 나왔다. 그리고 돌도끼와 그물추 등의 석기류도 같이 나왔는데, 뗀석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고 간석기로는 돌끌이나 창, 화살촉 등이 있으며, 갈돌과 갈판, 괭이, 보습, 돌낫 등
도 있다. 그외에 새뼈와 도토리 등이 조금 출토되었다.

집터에는 고증하여 복원했다는 움집 10기가 있는데, 이들은 기존 집터에서 2m 정도 흙을 엎고
그 위에 만든 것이다. 동쪽에 있는 체험용 움집을 빼고는 내부 출입을 막고 있다.


▲  움집들도 비가 마구 새는지 땜질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  더운 여름에 하루나 이틀 정도 원시인이 되어 머물고 싶은 움집
원시인처럼 옷은 중요한 곳만 걸치고 움집에서 며칠 지내보면 어떨까? 물론 취사는
현대식 도구로 해우소나 간단한 세면은 정문이나 전시관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고 말이다. 아무리 선사체험이라고 해도 현대의 이기에 단단히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있어 완벽한 원시인 생활은 불가능하다.

▲  수수한 모습의 움집

한반도와 요동에 살던 구석기 사람들은 빙하기로 거의 다 사라지고 빙하기를 이겨낸 일부 사람
들이 새롭게 신석기시대를 열었다. 그들은 강가와 언덕에 움집을 짓고 마을 단위로 살았으며,
현대 사회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빈부격차와 신분제도가 없었다고 한다.
마을마다 지역마다 집을 짓는 기술과 집의 모습이 조금 차이가 있었을 뿐, 대부분 저런 집을
짓고 수수하게 살던 평등한 사회였다. (물론 가족간의 서열은 있었다)

그랬던 사회가 이른바 청동시기대에 접어들면서 돌로 모든 것을 때우던 시기는 그 막을 내렸으
며, 청동을 비롯한 광물의 등장으로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었다. 또한 신석기시대에 일부 이루
어지던 농경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자연히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되었고, 인간들은 점차 신분제
의 굴레 속에 갇히게 되었다.


▲  유일하게 공개된 동쪽 움집 (움집 생활 체험장)

암사동 10기의 움집 가운데 유일하게 속살이 공개된 동쪽 움집은 기존 움집 규격의 1.5배 정도
를 더해서 만든 것으로 움집 높이 4.5m, 가로 8.5m, 세로 12m에 이른다. 내부에는 4명의 원시
인 가족을 배치했고, 석기 등의 생활용품은 실물 크기로 재현하여 당시의 생활상에 대해 약간
이나마 이해를 돕게 만들었으니 한번 둘러보자.


▲  속세를 향해 문을 연 동쪽 움집 대문

▲  동쪽 움집에 재현된 원시인 가족 4인

동물 가죽 옷을 입은 원시인 가족들이 화덕 주위에 오손도손 둘러앉아 각자 일에 여념들이 없
다.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일어선 이는 이 집의 주인이자 가장인 아버지로 사냥을 할 창을 손
질하고 있고 그 옆에 아줌마 자세로 앉은 사람은 어머니로 돌판 위에 고기를 놓고 썰고 있다.
아들은 물고기를 굽고 있으며, (어머니나 아들이나 겉모습이 비슷하게 생김) 제일 덩치가 작은
꼬마는 막내딸로 어미와 오라비가 해준 음식을 한참 섭취하고 있다.
움집 중앙에 자리한 화덕은 불을 피우던 공간으로 음식을 조리하고 난방을 때워 안을 따스하게
유지하고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는 기능을 했다. 또한 화덕의 연기가 잘 빠져나가도록 천정에
구멍을 냈다.

재현된 모습이긴 하지만 그들의 작업에 방해가 될까봐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내부를 살폈다.


 

♠  암사동 유적 전시관

▲  제1,2전시관 (왼쪽 현관이 1전시관, 오른쪽이 2전시관)

암사동 유적 전시관은 모두 2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전시관은 1988년에 문을 열었
는데, 유적 발굴터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생활과 문화, 유물 등
을 머금고 있다.
제2전시관은 기존 전시관을 크게 확장할 필요가 있어 1999년에 그 옆에 이어서 만든 것으로 기
존 전시관의 내용을 바탕으로 암사동 유적의 발굴과 선사시대 개관, 서울과 경기도 지역 신석
기 유적 및 초기 청동기시대 문화를 다루었다. 그리고 2곳의 체험코너와 정보검색코너, 영상실
을 갖추어 전시관의 유물과 신석기시대의 이해를 최대한 돕게 했다.

유물들이 모두 선사시대 것이다 보니 화려함과는 극히 거리가 멀어 식상할 수도 있다. 죄다 토
기와 석기 투성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 시대를 발판으로 삼아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鐵器時代
)가 싹틀 수 있었고, 인간은 너무 쓸데없이 진화를 거듭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의 옛 원초적인 모습도 한번 살펴줘야 된다. 그 토기와 석기가 우리가 쓰는 물건들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소장 유물은 408개로 유감스럽게도 절반 이상이 복제품(169점)이거나 다른 데서 빌려온 것(167
점)이며, 순수 암사동 산은 고작 72점에 지나지 않는다. 태반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이곳 발굴
에 나선 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복제품은 그만 치우고 그곳에 있는 유물을 건네 받아
암사동 유물과 서울에서 출토된 선사시대 유물로 꽉 채웠으면 좋겠다.


▲  움집터 발굴 현장 - 움집터 8기와 저장공간 1기를 그대로 경화처리하여
보존한 것으로 이곳 전시관의 백미라 할 만하다.

▲  가지무늬토기와 붉은 그릇, 민무늬토기들

▲  빗살무늬토기와 동물의 뼈로 만든 골각기(骨角器)들

▲  빗살무늬토기 - 즐문토기(櫛文土器)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아마도 학창시절 때 귀가 따갑도록 들어봤을 것
이다. 이 토기는 신석기 사람들이 고기와 과실, 채소를 담거나 저장할 때 사용했다고 하며 구
덩이를 파고 500~600도의 온도에서 따끈하게 구워서 붉은 색이나 누런 색을 띄게 되었다. 토기
피부에는 빗살무늬(빗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무늬를 내기 위해 생선과 동물 뼈를 주로 사
용했으며, 이들 토기를 어려운 말로는 즐문토기라고 한다.
지금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토기이지만 원시 수준의 인간이 저 정도의 잘 생긴 토기를 만들기
까지는 무려 100만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  빗살무늬토기와 돌도끼, 돌살촉

▲  청동기시대 유물인 청동검과 마제석촉 - 이들은 부여 송국리와
화순 대곡리, 창원대에서 빌려온 것이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인간들은 비로소 광물을 다루게 되었다.

▲  전국 곳곳에서 집합시킨 빗살무늬토기와 온갖 토기들

▲  물고기 잡이에 쓰던 어망추와 낚시추바늘

겉으로 보면 주위에 흔한 자연석처럼 보여 눈길이 잘 가지 않는 존재들이지만 저런 돌 하나하
나에 원시인들의 사연과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판별하기 어려운 저들을 밝히는데 많은 역사,고고학 교수/학자들의 노고가 참 컸다.


▲  타제석기(打製石器)들

▲  돌망치로 쓰인 돌맹이들

▲  제2전시관 한복판에 재현된 움집

▲  세월의 태클에 조각이 나버린 빗살무늬토기 파편들

▲  불에 탄 도토리(가운데)와 갈판과 갈돌, 석기들
탄화된 곡식과 과실 등은 절대로 분해자의 먹이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지금 사람들도 도토리로 만든 묵을 즐겨먹는데,
신석기 사람들도 도토리를 채취해서 양식으로 썼던 모양이다.

▲  신석기 사람들의 무덤

신석기 사람들의 수명은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이야 평균 수명이 너무 길어서 문제지만 그때는
너무 짧아 기껏 길어봐야 40~50 정도였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에는 고인돌이라 불리는 돌무덤들
이 많이 있지만 신석기시대에는 적당한 무덤 유적이 거의 없다. 다만 근래에 남해안 지역에서
조개더미유적과 함께 무덤이 발견되어 조금씩 정답을 풀어주고 있다.
신석기시대 무덤은 죽은 이의 키 정도 길이로 얕게 땅을 파고 관곽(棺槨)도 없이 시신을 안치
했다. 시신은 대부분 곧게 안치했으나 쭈그린 상태로 묻힌 경우도 일부 발견되었다. 시신 위에
는 작은 돌을 덮어 봉분으로 삼았으며 아주 드물게 동굴이나 바위 틈의 구덩이를 파고 묻은 경
우도 있었다. 죽은 이는 목걸이와 팔찌 등의 꾸미개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부디 저
세상에 가서 쓰라며 토기와 석기,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재료 등을 두어 사후세계 관념을 가지
고 있었음을 귀띔해준다.

신석기 유적의 성지로 추앙받는 암사동에서는 아직 그들의 무덤이 발견되지 못해 약간은 허전
한 감을 준다. 무덤도 발견되면 아주 완벽한 성지감이 되는데 말이다.


▲  돌살촉과 석기들

▲  암사동 주거지 모형도


 

♠  암사동 유적 마무리 ~~ 선사체험마을

▲  선사체험마을 정문과 시간의 집

선사유적지 전시관 북쪽에는 2010년 9월에 조성된 선사체험마을이 있다. 선사체험마을을 알리
는 나무로 만든 문을 지나 조그만 또랑을 건너면 선사체험마을 구역인데, 시간의 집을 시작으
로 기억의 물길과 어로체험장, 움집마을, 수렵체험장, 발굴체험장, 선사체험교실 등이 있으며,
가장 북쪽에는 발굴체험장과 백제주거지 표석이 있다.
다른 선사유적지나 박물관과 달리 선사시대 체험장을 매우 넓게 닦아서 어린이와 학생들을 대
상으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 여흥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굳이 체험이 아니더라도
당시를 재현한 여러 볼거리를 비롯하여 온갖 들꽃과 수풀이 무성한 산책로와 언덕, 여름 제국
의 기운을 약화시켜주는 개울까지 갖추고 잇어 전시관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쥐가 난 머리
를 잠시 식히기에는 아주 좋다. 단 그늘이 시간의 집과 개울 건너편 외에는 별로 없어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강렬한 햇빛으로 조금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  시간의 집

시간의 집은 동굴 형태로 구성된 공간으로 밖에서 보면 마치 길고 굵직한 뱀처럼 보인다. 이곳
은 신석기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 자료를 곳곳에 설치
된 모니터를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동굴의 길이는 약 60~70m 정도 된다. 이 동굴을 벗어나면
바로 움집군락으로 이어진다.


▲  시간의 집과 그 옆으로 나 있는 산책로와 개울(기억의 물길)

▲  움집군락에 재현된 움집들 - 이제는 움집도 지겨워진다.
그만큼 암사동 유적에서 차지하는 움집의 비율이 크다는 소리다.

▲  맷돼지 통구이 현장 - 저기서 불만
붙이면 바로 100% 통구이 재현이다.

▲  돌무더기 위에 놓인 빗살무늬토기 모형 -
집으로 가져와서 그릇으로 쓰면 안될까..?

▲  바쁘게 살아가는 신석기 사람들

▲  신석기 사람들의 취락 모습


▲  기억의 물길이라 불리는 서쪽 개울
장대하지만 무심하기도 한 세월이 물처럼 꾸준히 흐른다는 것을 상징하고자
기억의 물길로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  움집군락 서쪽 산책로

▲  수렵체험장 - 맷돼지와 사슴 모형이 체험을 준비한다.

▲  사슴 1마리 월척하고 당당히 집으로 돌아가는 원시인의 위엄
모든 것이 꺼꾸로 보일 사슴이 좀 가련해 보인다.
나의 전생이 혹 저 사슴은 아니었을까..?

▲  발굴체험장

어린이 2명이 한참 흙을 파헤치며 오래된 보물을 꿈꾼다. 하지만 저기서 나오는 것은 흙 밖에
없으니 괜한 헛된 망상은 버리도록~~ 정식 발굴체험을 하는 경우 저 안에 토기와 석기 모형을
여럿 묻는다고 한다. 흙을 파다가 그것들을 발견하면 정말 보물이라도 찾은 듯, 그 기분이 정
말 환희(歡喜) 그 자체일 것이다.


▲  발굴체험장 동쪽에 있는 백제주거지터 표석

2003년과 2008년 11월에 6각형 모양의 백제 집터 1기와 여러 유물이 출토된 곳으로 이곳이 신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뿐만 아니라 백제 중기까지 주거지로 쓰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이곳 일대는 한성백제 시절 강동/송파구로 여겨지는 도읍(위례성) 북쪽으로 농사를 짓거나 한
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백성들이 살았다. 귀족들은 이곳과 명일동, 고덕동 일대에 큰 농장을
소유하여 굴렸을 것이 분명하니 그와 관련된 유적(창고나 귀족 저택)일 가능성도 크다.


▲  백제주거터 인근에서 수줍게 미소짓고 있는 개망초의 위엄

▲  선사체험교실

▲  야외공연장으로 쓰이는 체험마당

▲  선사의 숲 사이로 난 산책로 - 선사의 숲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

▲  전시관 맞은 편에 마련된 농촌 체험 현장

답사 본능에 충실하며 1시간 반 동안 이루어진 '선사시대로의 짧은 여행'은 끝이 났다. 학창
시절에 만났던 옛날의 암사동 유적만을 생각하고 왔는데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나처럼 많이도
변해있어 조금은 놀랬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명소나 관광지나 적당히 변하지 않으면 살기가
힘든 것이 속세의 생리인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암사동 선사유적지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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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6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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