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32건

  1. 2023.08.23 제주도 제주올레길18코스를 거닐다 <조천비석거리~연북정~죽도~닭머르~원당봉 불탑사, 불탑사5층석탑 구간>
  2. 2023.08.13 비봉능선 밑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승가사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3. 2023.08.02 천하의 땅끝을 거닐다. 해남 땅끝 (맴섬, 땅끝마을, 땅끝탑, 땅끝전망대, 갈두산)
  4. 2023.07.26 충신의 매운 얼이여, 용인 능골에 넓게 자리한 정몽주선생묘 <저헌 이석형묘, 충렬서원>
  5. 2023.07.14 벽오산 자락에 넓게 깃들여진 달달한 시민공원, 강북구 북서울꿈의숲 <창녕위궁재사, 월영지, 청운답원,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6. 2023.07.04 피서의 1급 성지를 찾아서, 의성 빙계계곡 <빙계군립공원, 풍혈, 빙혈, 빙산사지5층석탑>
  7. 2023.06.24 인왕산 그늘에 깃든 서울 도심의 꿀명소, 서촌~청운공원 나들이 <선희궁터, 옥류동 청휘각터, 백세청풍 바위글씨, 송강정철 집터> 2
  8. 2023.06.13 도심 속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동대문구 천장산 연화사~청량사 (연화사에서 먹은 초파일 절밥) 2
  9. 2023.06.07 도심 곁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창원 비음산 불곡사 (불곡사 일주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10. 2022.08.24 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축제)

제주도 제주올레길18코스를 거닐다 <조천비석거리~연북정~죽도~닭머르~원당봉 불탑사, 불탑사5층석탑 구간>

제주도 겨울 나들이 (연북정, 제주올레길18코스, 불탑사)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연북정, 제주올레길18코스, 불탑사)

조천 앞바다 (제주해협)

▲  조천 앞바다

제주올레길18코스 제주 불탑사5층석탑

▲  제주올레길18코스

▲  불탑사5층석탑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濟州島), 그곳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불과 1시간이면 닿
는 곳이나 2005년 여름 한라산(漢拏山) 이후, 이상하게도 오랜 세월 손과 마음이 가지를
않았다. 이러다가 제주도란 존재를 새카맣게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새해 벽두에 겨울 제
국의 핍박도 잠시 피해볼 겸, 사흘 일정으로 따뜻한 그곳에 나를 던져놓았다.

김포공항에서 이른 아침 비행기로 제주도(제주국제공항)로 넘어가 제주시내 서부에서 서
일주도로를 따라 여러 미답처(未踏處)를 흔쾌히 지워가며 서귀포 시내로 이동했다. 하루
를 꽉꽉 채우며 일정을 짜니 이 구간에서 이틀을 소비했는데, 마지막 날에는 천지연폭포
입구에 떠있는 새섬을 아침거리로 둘러보고 동일주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점심거리로 제주도의 시조인 3신인(三神人)의 혼인 설화가 깃든 온평리의 혼인지(婚姻池
관련글 보기)를 둘러보고 조천읍(朝天邑)으로 이동했는데, 본글은 바로 조천읍에서부
터 시작된다. (첫날과 둘째 날, 새섬과 혼인지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조천포구 둘러보기 (연북정, 조천진터)

▲  조천비석거리 - 제주도 지방기념물 31호

조천읍내 중심인 조천환승정류장에서 연북정으로 인도하는 조함해안로를 2~3분 정도 들어가면
검은 피부의 비석들이 우루루 나와 마중을 한다. 그들이 조천비석거리로 이름 그대로 비석이
늘어선 거리인데, 모두 9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7기가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나머지 2기는 20세기 이후 비석들)

비석의 주인공은 제주목사 김수익(金壽翼, 1600~1673)과 이원달(李源達, 1783~1857), 채동건
(蔡東健, 1809~1880), 백희수(白希洙, ?~?), 이의식(李宜植, 1848년에 재직함), 제주판관 김
응빈(金膺斌, 1846~1928) 등으로 이 땅에 흔한 관리들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이
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비석 뒷면이 다들 아작나면서 비석의 건립 연대는 알 수가
없으며, 비석 6기는 대머리 스타일, 나머지 3기는 지붕돌 머리로 지붕돌 비석은 빗돌 부분을
감실(龕室)처럼 만들고 그 안에 빗돌이 따스하게 안겨져 있다.

관리들이 이곳을 통해 육지를 오가다 보니 여기에 그들의 비석을 세웠는데 (인근 화북포구도
비슷한 이유로 선정비가 많이 세워졌음;) 의미는 참 좋은 선정비이나 그 비석을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 저들에게 묻고 싶다. 아마도 상당수는 고개를 떨구겠지. 딱
히 공적도 없으면서 백성들을 들들 볶아 비석을 세우거나 돈 떼먹기용으로 비석을 남발한 관
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 조천비석거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3470 (조함해안로 26)


▲  평화로운 모습의 조천포구

조천비석거리 서쪽에는 제주해협을 향해 가슴을 연 조천포구(조천항)가 펼쳐져 있다. 지금이
야 조그만 어항(漁港)으로 머물러 있지만 화북(禾北)포구와 함께 대한제국 시절까지 제주도와
육지를 잇던 포구로 바쁘게 살았던 제주도의 대표 관문이다. 조정에서 보낸 관리와 육지 사람
들이 이곳과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도를 오갔으며, 제주도 사람들도 이 포구로 육지와 다른 세
상으로 나갔다.
조천이란 이름은 천자(天子)의 나라에 조회하러 간다는 뜻으로 그 천자란 제주도를 다스렸던
고려와 조선을 뜻한다. 조정에서 보낸 관리와 왕명(王命)이 이곳을 통해 제주도로 들어왔으며
, 그 중요한 현장에 조천진성과 나를 이곳으로 부른 연북정이 있다.


▲  조천진성(朝天鎭城) - 제주도 지방기념물 68호

조천진성(조천진)은 제주도의 특산물인 현무암으로 다져진 단단한 성곽으로 연북정을 품으며
제주해협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제주도에 설치된 9개 진성(鎭城) 중
하나인데, 포구 관리와 수비를 담당했다.
1374년에 조천관(朝天館)이 세워졌으며, 1590년 제주목사 이옥(李沃)이 중수하여 둘레 428척,
높이 9척, 성문 1개를 지닌 성곽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이후 초루(礁樓)와 객사(客舍), 청
사(廳舍), 군기고(軍器庫), 포사(砲舍) 등이 세워졌으며, 조방장(助防將) 1명을 중심으로 치
총(雉摠) 2명, 성정군(城丁軍) 92명, 유직군(留直軍) 103명, 서기(書記) 12명이 배치되었고,
사후선(伺候船) 1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 연북정을 제외한 시설물은 위치 확인도 어려울 정도로 모두 지워
져 연북정과 성곽만 겨우 남아있다. 성곽은 거의 잘 남아있으며, 성곽 동쪽에 동문터가 있고
북쪽은 북쪽은 바다와 접해있다.
현재 남아있는 성곽의 둘레는 128m, 외벽 높이 2.2~4.3m, 상부 폭 1.6~3.1m 정도이며, 2017~
2018년에 발굴조사를 벌이면서 성곽을 손질했다.

흔히 연북정만 알려져 있으나 그는 엄연한 조천진성의 망루이자 시설물이며, 조천진성과 연북
정은 하나의 몸이나 다름이 없다. 나도 연북정만 생각했지 조천진성의 존재는 생각도 못했다.


▲  조천진성 발굴 현장 (2018년)
이곳의 숨겨진 이야기를 캐내려는 굳은 집념으로 성곽 내부를 싹 뒤집어
조사를 벌이고 있다.

▲  연북정(戀北亭) - 제주도 지방유형문화재 3호

조천진성 성곽(城郭) 위에 기단을 다지고 높이 들어앉은 연북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정자이다. 정자 안에는 마루가 있으며, 사방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기둥의 배열과 건축
재료, 배열 방법은 제주도 주택과 비슷하다.
제주목사 이옥이 1590년 조천진성을 중수하면서 조천관을 중창해 쌍벽정(雙璧亭)이라 했으며,
그 쌍벽정이 1599년 중수되면서 연북정으로 이름이 갈렸다.

제주도는 조선 때 유배지<流配地, 귀양지>로 인기가 높았는데, 유배를 온 관리들이 연북정에
올라 육지에서 기쁜 소식(서울로 돌아오라는 제왕의 조서)이 날라 오기를 애타게 고대하며 북
쪽(서울)에 있는 임금을 그리워했다. (한편으로는 격하게 원망했을 듯) 그 연유로 연북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천진의 망루 역할을 했으며 평소에는 제주목사 등의 높은 관리와 지역 양반들이 유흥을 즐
기거나 유배자들이 바다 너머를 바라보며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제주도에 가면 이 연북정은 꼭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서 이렇게 들리게 되었는데, 조금은 각박
한 성곽 계단을 오르면 연북정에 이르게 된다. 정자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으며, 여기서 바라
보는 조망과 바닷바람 맛이 일품이다. 또한 제주올레길18코스가 연북정 옆구리를 지나가 예전
보다는 찾는 이가 좀 늘었다.


▲  연북정 현판의 위엄

하얀 피부 현판에 짙은 검은색으로 연북정 3자가 쓰여있다. 북(北)자는 마치 '터지(址)'처럼
보이며, 연(戀)은 가운데 '言'이 너무 격하게 솟아나 제자리로 속히 돌아가고 싶은 유배자들
의 마음과 자신들의 밥줄을 쥐고 있는 제왕에 대한 연모(한편으로는 원망)의 마음이 활활 타
오른 듯한 모습이다.

* 연북정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690


▲  연북정의 옆 모습

▲  연북정에서 바라본 조천포구와 원당봉

저 멀리 아른거리는 산이 원당봉(원당오름)이다. 조천에서 제주올레길을 따라 무려 저곳까지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다행히 일몰 직전에 도착해 원당봉에 깃든 불탑사5층석탑까지 싹
둘러보고 기분 좋게 나들이를 마무리 지었다.


▲  서쪽에서 바라본 조천진성
오른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연북정이다.

▲  두말치물

연북정 서쪽 해안에는 용천수가 치솟는 두말치물이라는 큰 샘터가 있다. 용천수란 빗물이 지
하로 스며들어 대수층(帶水層)을 따라 흐르다가 암석이나 지층의 틈새를 통해 바깥으로 나오
는 물로 그 틈새가 해안 지역에 많이 나타나 호랑이가 담배를 태우기 이전부터 그 주변에 마
을이 형성되었다. 제주도는 까칠한 현무암 피부라 비가 내리면 거의 지하로 내려가 물 문제가
늘 컸는데, 그 문제를 이런 샘터들이 해결해준 것이다.

두말치물은 물을 1번 뜨면 2말을 뜰 수 있다고 해서 유래된 것으로 그만큼 물이 풍부했다. 용
천수가 솟는 주위로 현무암으로 둑을 다져 바다와 경계를 그었는데, 지금도 물은 넉넉히 나오
고 있으나 상수도 시설에 밀려 거의 이용하지 않아 이제는 동네 명소나 옛날 유물 같은 신세
가 되어 버렸다. 사람도 그렇고 사물이나 건물이나 뒷전으로 밀려난 모습은 참으로 쓸쓸해 보
인다.


▲  두말치물에서 바라본 조천진성과 연북정



 

♠  제주올레길18코스 거닐기

▲  제주올레길18코스 조천리 해안 구간

제주올레길18코스는 조천만세동산에서 제주시내 간세라운지까지 이어지는 19.8km의 긴 올레길
이다. 이 코스에는 조천만세동산과 연북정, 닭머르, 불탑사, 사라봉 등의 명소가 있으며. 읍
내(조천읍)와 포구, 해안마을, 바다, 산, 들녘, 도시 한복판을 두루 거쳐 제주도의 다양한 모
습을 살펴볼 수 있다. 나는 18코스 구간 중 약 ⅓ 정도인 연북정~삼양해수욕장 구간만 거닐었
는데, 코스를 이리 짠 것은 연북정과 불탑사5층석탑을 모두 잡기 위함이다.
연북정에 이른 시간은 거의 15시, 일몰까지는 2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아 서둘기는 했으나 전
투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아닌 듯. 한편으로는 여유롭게 할 것은 다하면서 움직였다.


▲  조천리 황씨종손(黃氏宗孫) 가옥 - 제주도 민속문화재 4-5호

올레길에 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수상한 기와집이 살짝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에 이끌려
가보니 조천리 황씨종손 가옥을 알리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나를 이곳으로 부르기는 했으
나 사람이 사는 집이라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현무암으로 다진 제주도 스타일의 담장이
높이 둘러져 있어 아무리 까치발을 하여도 그 속살을 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월담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입을 봉한 대문과 담장만 둘러보고 바로 물러났다.

이 가옥은 네모난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 자리한 안거리(안채), 북쪽의 밖거리, 서쪽의 모커
리가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동쪽에 대문을 지닌 문간거리(문간채)가 있다.
4칸 규모의 안거리는 16세기에 지어졌다고 전하며, 3m(약 10척)가 넘는 상방의 주칸은 제사를
지내는 종가(宗家)의 모습을 보여준다. 안뒤 공간과 연결된 2칸의 뒷낭간은 집안의 사적인 공
간이며, 3칸짜리 밖거리는 1940년에 지어졌다. 밖거리는 머릿방과 협문이 있는데, 이는 대한
제국 이후 제주도 상류 주택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집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제주도 상
류 기와집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조천리 황씨종손 가옥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373 (조천9길 7)

황씨종손가옥과 멀지 않은 올레길 주변에 수륙
물이란 용천수 샘터가 있다. 샘터 주변을 돌담
으로 둘러 동네 여인들의 목욕 공간으로 만들
었는데, 아들을 얻지 못한 여인들이 자식을 점
지해줄 것을 빌던 곳으로 그 연유로 수덕물이
라 불리기도 한다.
허나 지금은 식수는 커녕 목욕 장소로도 거의
쓰이지 않아 한가로운 모습이며, 사진 중앙에
움푹 들어간 곳에서 용천수가 쏟아져 나와 찾
는 사람 거의 없는 수륙물을 늘 채워준다.

▲  조천리 수륙물(수덕물)

▲  제주올레길18코스 죽도 동쪽 구간
(신촌리 방향)

▲  제주올레길18코스 죽도 동쪽 구간
(조천리 방향)

조천리 구간을 지나면 바다와 땅이 뒤엉킨 곳이 나온다. 그곳의 중심에는 '죽도'란 섬이 있는
데, 남북으로 500m 정도 되는 작은 섬으로 동과 서, 남쪽이 둑방길로 제주도와 단단하게 이어
져 있다. 제주올레길18코스가 그런 죽도의 한복판을 지나가며, 섬 남쪽에 집 몇 채가 있을 뿐
대부분이 경작지와 주름진 바위 해변이다.


▲  지그재그 이어진 제주올레길 18코스 죽도 동쪽 구간

▲  제주해협을 향해 작게 입을 벌린 신촌포구 방파제

▲  신촌리 앞바다
저 까마득한 수평선 너머로 육지가 있다. 그곳이 혹시 보일까 싶어서 눈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살펴보았으나 역시나 거리 때문에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솔직히 보일 수가 없음)

▲  닭머르 해변

신촌리 마을을 지나면 닭머르란 해안이 나온다. 닭이 흙을 파헤치고 그 안에 들어앉은 모습처
럼 생겼다고 해서 닭머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기암괴석이 쭉 늘어서 있고 물고기들이
많아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해변 정상에는 정자가 닦여져 있는데, 저곳까지 가는 것이 도
리가 되겠으나 원당봉까지 갈 길이 멀어 쿨하게 통과해버렸다.

이 날은 아침에는 날씨가 청명했는데 조천에 이른 직후부터 잔뜩 흐려졌다. 바다 또한 흥분기
를 보여 거친 파도로 해변을 마구 때려대고 제주도 특유의 바람까지 거세어 체감 날씨는 겨울
이상이었다. 제주도가 따스한 남쪽이라고 하나 바다 바람이 그 따스함을 크게 떨어트린다. 하
여 해변이나 한라산 나들이 때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만 뒷탈이 없다.


▲  닭머르 해변을 거세게 쪼아대는 바다

▲  서쪽에서 바라본 닭머르 해변과 정자

제주올레길18코스 구간 중 신촌리 어촌계 탈의장에서 닭머르입구 구간(1.8km)은 해안누리길의
일원인 '닭머르길'이란 간판도 지니고 있다.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재단에서 선정한 걷기 좋
은 해안길의 일원으로 여기서 '문서천'이란 개천을 따라 5~6분 들어가면 습지 형태의 남생이
못이 있는데, 닭머르에 왔다면 그 습지도 같이 둘러보면 여로(旅路)가 더욱 살찔 것이나 나는
일몰 시간의 압박으로 닭머르만 총알처럼 지나가 버려 남생이못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핑계이
긴 하지만 언제나 시간이 문제이다.


▲  닭머르 서쪽 해변

▲  점점 멀어지는 닭머르

▲  시비코지 주변 해변

▲  들판과 억새밭을 지나는 제주올레길18코스 (시비코지 남쪽)

조천부터 계속 바다를 따라 다녔던 제주올레길18코스는 시비코지 이후부터 잠시 바다를 버리
고 내륙으로 빠진다. 올레길 주변에는 현무암 돌담으로 구획된 밭들이 정겹게들 펼쳐져 있고
누렇게 뜬 억새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나를 반긴다.


▲  들판 사이를 지나는 제주올레길18코스 (시비코지 남쪽)



 

♠  이 땅에서 유일한 늙은 현무암 탑을 지닌 곳
원당봉 불탑사(元堂峰 佛塔寺)

▲  맞배지붕을 지닌 불탑사 사천왕문(四天王門)

들판을 달리던 제주올레길18코스는 원당봉(171m) 자락으로 들어가 불탑사 앞으로 나를 인도한
다.
삼양동 동쪽에 낮게 솟은 원당봉(원당오름)은 겉으로 보면 꽤 평화로운 모습이나 그는 측화산
(側火山) 출신이다. 즉 용암을 내뿜던 무시무시한 화산이었다. 그는 7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뫼로 왕년에는 용암과 화산재를 요란하게 내뱉었으나 몸이 노화되면서 한라산처럼 죽은 화산
이 되었다. 정상부에 있던 분화구는 물이 고여 습지가 되었으며, 이 습지를 '거북못'이라 불
렀는데, 근래에 연못으로 바뀌어 이곳이 먼 옛날 화산의 입이었음을 살짝 귀띔한다.
원당봉이란 이름은 몽골(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가 세운 원당사란 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
선 때는 원당악(元堂岳)이라 불렸으며, 정상부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어 이를 원당봉수라 하
였다.

원래 이번 나들이에서 불탑사와 원당봉을 제일 처음 찾아가 그 정상까지 가려고 했으나 코스
가 반대로 바뀌면서 마지막 답사지가 되었다. 또한 일몰 직전에 도착하여 원당봉 정상부는 가
지도 못하고 불탑사만 둘러보고 빠져 나와 다소 아쉽다. 허나 인연이 그것 밖에 안되는 것을
어찌하리요. 나머지 부분은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쿨하게 넘겼다.


▲  불탑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불탑사의 중심 건물(법당)이다.


원당봉 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불탑사는 14세기 중반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창건설
화에 따르면 몽골(원나라)의 제왕인 순제(順帝)가 아들이 없어 무척 애태우던 중, 꿈 속에서
승려가 나타나
'북두의 명맥이 비친 삼첩칠봉(三疊七峰)의 터를 찾아 절과 탑을 세워 기도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하여 신하들을 닥달하여 천하를 수소문해 제주도 동북 해변에서 그 삼첩칠봉을 찾았고, 그곳
에 탑과 절을 세워 사람을 보내 기도를 하니 마침내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순제의 2번째 황후가 그 유명한 기황후로 이 양반이 행주기씨 집안이자 친원(親元) 패거리의
핵심인 기철(奇轍)의 여동생이다. 몽골에 공녀(貢女)로 들어갔으나 고려 출신 환관이자 기황
후와 같은 지역 사람인 박불화(朴不花, ?~1364)의 도움으로 궁궐로 들어갔고, 순제의 총애까
지 받게 되어 아들까지 낳게 된다. 그 기세를 몰아 순제를 현혹시켜 기존 황후(皇后)를 내쫓
고 자신이 황후에 올랐으며, 권력까지 손에 쥐어 몽골을 통치했다.
순제가 아들을 얻고자 제주도 원당봉에 절을 세운 것은 기황후의 득남을 기원하고자 그리 한
것으로 여겨진다. 순제는 이미 건장한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기황후의 모함을
받아 크게 고통을 받았음) 어쨌든 아들을 얻자 기황후가 원당사를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절 제주도는 몽골이 설치한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원당사는 현재 불탑사와 맞은편 원당사 자리까지 아우른 규모로 법화사(法華寺), 수정사(水精
寺)와 함께 제주도의 대표적인 절이었다. 조선 중기까지 무탈하게 있었으나 숙종(肅宗) 시절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제주도에 있던 절과 당집을 대거 정리하면서 파괴되고 만다. 그
시절 제주도에는 당(堂) 오백, 절 오백이 있었다고 전해 그만큼 무속신앙과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유교와 성리학(性理學) 사상이 뼛속까지 파고든 이형상의 눈에 곱게 보일 턱
이 없었다.
조선 후기에 재건되었으나 3번이나 불을 만나 쓰러졌으며, 1914년에 비구니 안봉려관(安蓬廬
觀)이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불탑사로 갈았다. 이후 1949년 4.3사건 때 파괴되었다가 1950년
대에 승려 이경호가 재건했고, 승려 양일현이 중창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심우당, 사천왕문 등 5~6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그 흔한 일주문
(一柱門)을 아직 갖추지 못해 사천왕문이 절의 정문 역할을 도맡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현무암 피부의 5층석탑이 있으며, 발굴조사로 발견된 옛 원당사 시절의 금당터
와 요사터가 있다. 절 남쪽에는 불탑사의 옛 이름을 취한 원당사가 있으며, 제주올레길18코스
가 절 앞을 지나간다.

* 불탑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1동 696 (원당로16길 41, ☎ 064-755-9283)


▲  불탑사 5층석탑 - 보물 1187호

대웅전 뜨락에는 불탑사의 꿀단지이자 상징물인 5층석탑이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딱 하나
밖에 없는 오래된 현무암 탑이자 제주도에서 가장 늙은 탑으로 불탑사란 이름은 바로 이 탑에
서 비롯되었다.
제주도에 걸맞게 현무암으로 닦여진 시커먼 피부의 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과 5층 탑신(塔身
), 머리장식을 지니고 있는데, 기단은 뒷면을 뺀 3면에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으며, 무늬의
바닥선이 꽃무늬처럼 솟아나도록 조각했다. 1층 탑신 남쪽 면에는 감실(龕室)을 두었고, 지붕
돌은 윗면의 경사가 크지는 않으나 네 귀퉁이가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으며, 꼭대기에 올려
진 머리장식은 아래의 돌과 그 재료가 달라서 후대에 별도로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인 탑 모습이 조형성이 적고 무겁게 보인다고 하여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
며, 불탑사 창건설화에 탑이 등장하는데 그 탑이 이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시대가 비슷하므
로 그런데로 맞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천하의 유일한 늙은 현무암 탑으로 제주도 지방유형문
화재 1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나 1993년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  검은 피부가 매력적인 불탑사 5층석탑 (정면에서 본 모습)

▲  옛 원당사의 요사(寮舍)터

불탑사 경내를 싹 뒤집어 발굴조사를 했을 때, 여기서 건물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독립 기초
가 나왔다. 이곳은 요사(요사채)터로 여겨지며, 기단석과 주춧돌을 수습해 저 밑에 고이 묻고
그 위에 곱게 잔디를 입혔다.


▲  옛 원당사의 금당(金堂, 법당)터
건물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독립 기초와 요사채터와 연결된 계단이 발굴되었다.
이곳 역시 주춧돌을 묻고 그 위에 잔디를 입혔다.

▲  서쪽에서 바라본 옛 원당사의 금당터

불탑사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이곳을 끝으로 제주도 나들이는 모두 마무리가 되
었으며, 계획한 답사지는 3곳을 제외하고 모두 발자국을 남겼다. 알차고 보람차게 여로를 마
무리 지으니 마음이 뿌듯했으나 한편으로는 '벌써 제자리로 돌아가야 되나?' 싶어 아쉬운 마
음도 실로 컸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를 더 머물고 싶었으나 이번 나들이는 계획대로 여기서
쿨하게 정리했다. 제주도는 바다를 건너거나 하늘을 넘어야 되는 부담감이 있어서 그렇지 언
제든 찾을 수 있는 곳이니 다음 인연을 기다리면 된다.

제주올레길18코스를 마저 타고 삼양동 시내로 내려왔으나 너무 아쉬운 마음에 삼양해수욕장을
저녁거리로 둘러볼까 했다. 허나 바닷바람도 차고 몸도 지쳐서 시내버스를 타고 제주국제공항
으로 넘어갔다.
공항에 들어서니 서울이나 부산, 광주 등 육지로 가려는 사람들과 외국 방면 사람들로 북새통
을 이룬다. 예약한 비행기표를 발권받아 탑승 수속을 밟고 비행기 기다리는 곳에서 제주도 감
귤 초콜렛 2상자를 기념품으로 구입했다.
시간이 되자 김포공항으로 가는 티웨이(T-Way)항공 비행기에 나를 담았는데, 비행기가 탑승동
에 몸을 대지 않고 활주로에서 대기하고 있어서 그곳으로 인도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2~3분 정
도를 가서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예정시간보다 30분 늦게 제주공항을 출발했고, 50분 정도를 날다가 서울의 하늘 관
문인 김포공항에 가뿐하게 착륙했다. 사흘 만에 서울 공기를 다시 맡으니 확실히 차긴 차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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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능선 밑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승가사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 북한산 승가사 5월 나들이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  승가사 경내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북한산(삼각산) 승가사를
찾았다.
간만에 승가사를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그곳에 깃든 늙은 마애불과 승가대사상이 문득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집에서 2시간대면 충분
히 접근이 가능하다.

햇님이 중천에 머물던 14시, 승가사 아랫 동네인 구기동(舊基洞)에 도착했다. 보통 승가
사에 갈 때는 구기동계곡을 경유했으나 이번에는 지름길인 비봉4길을 이용했는데 지름길
인 대신 경사가 좀 각박하다.
비봉4길은 러시아대사관저와 건덕빌라를 지나면서 숲길로 바뀌는데, 차량 접근을 위해서
길 포장을 해놓았으나 자연과 세월이 할퀴고 간 흔적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노면 상태
는 영 좋지가 못하다. 그런 길을 건덕빌라 기준으로 30~40분 정도 오르면 승가사 갈림길
이 나오면서 일주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승가사까지 걸어가기 귀찮거나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러시아대사관저 앞에서 출발하
는 승가사 셔틀 봉고를 타면 된다. (봉고 운행시간은 승가사에 문의 요망) 길 상태가 좋
지 않아 차가 다소 흔들리는 단점이 있으나 그것을 타면 승가사 경내 밑(호국보탑 밑)까
지 태워준다. (차비는 1천원 정도 받음)


▲  소나무가 무성한 승가산림초소 숲길 (비봉4길)



 

♠  승가사 입문

▲  청기와를 눌러쓴 승가사 일주문(一柱門)

승가사 갈림길에서 승가사로 인도하는 길은 2개인데, 그중 왼쪽(북쪽) 계단길을 오르면 승가
사의 내력과 가람 배치도가 담긴 안내문과 함께 청기와로 머리를 장식한 일주문이 마중을 한
다.
이 문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승가사 일대가 국립공원 건축제한구역이라 여러 번 강제 철
거를 당하기도 했다. 간신히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해 지금의 문을 마련했으며 그로 인해
북한산(삼각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절 일주문이 되었다. 평방(平枋)에는 원담(圓潭)
이 쓴 '三角山 僧伽寺'란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청운교 계단길

일주문을 지나면 경내까지 숨 가쁜 경사길의 연속이다. 중간인 호국보탑까지는 경사의 패기를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청운교(靑雲橋)란 계단길을 닦았는데, 계단이 장대하여 기를 질리게 한
다. 계단 앞 좌우에는 용조각이 입을 벌리며 혹시 모를 바람직하지 않은 기운을 경계하고 있
고, 계단 중간 오른쪽에는 승가사의 내력이 담긴 사적비가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 승가사의
새로운 명물인 호국보탑이 자리해 있다.

▲  청운교 표석

▲  삼각산 승가사 사적비(事蹟碑)


▲  청운교 계단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백악산) 산줄기와 서울 도심, 강남 지역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승가사의 자랑, 호국보탑(護國寶塔)

끝없이 펼쳐진 계단에 기가 질린 중생은 그 계단의 끝에 장대하게 자리한 호국보탑 앞에 다시
한번 주눅에 잠긴다.
인도나 동남아의 불탑(佛塔)처럼 생긴 호국보탑은 승가사가 예로부터 호국기도 도량임을 천하
에 내세우며 조국 통일을 염원하고 동시에 절의 위세도 강조할 겸 많은 돈을 들여서 장만했다.
그러다보니 호국보탑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가 세워짐으로서 탑이 없던 허
전함을 제대로 극복하게 되었다. (정식 이름은 '민족통일 호국보탑')

장엄한 모습의 이 탑은 절 밑의 바위와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지반을 다져 만든 것으로 1987
년에 짓기 시작해 1994년에 완성을 본 승가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탑의 높이는 무려 25m로
9층석탑이며, 탑신(塔身) 밑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조금 재현했다.
감실에는 석굴암처럼 본존불(本尊佛)과 11면(面) 관세음보살상, 10대 제자상을 돋음새김으로
배치하고 연꽃장식 덮개를 씌웠으며, 바깥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을 배치해 본존불과 탑을 지
키도록 했다. 사방으로 놓인 계단을 통해 감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으나 다소 좁으며,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된다.
탑 주위로는 문수동자상과 보현동자상,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빼곡히 배치했으며, 탑신 뱃
속에는 인도 정부에서 기증을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靑玉臥佛) 1좌, 나한(羅
漢)의 사리 2과, 패엽경(貝葉經)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철제구층탑 99기, 화엄경
(華嚴經) 9질을 봉안했다.

조그만 감실 불당까지 갖춘 매우 이형적(異型的)인 탑으로 지금이야 과시용이다 뭐다 해서 이
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100년 이후에는 한국미술사 20세기 석탑 부분에서 크게 이름을 날릴
유명 인사로 등극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미래의 문화유산에게 미리 눈도장을 찍어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온갖 조각들로 정신이 없는
호국보탑 감실

▲  호국보탑 감실에 봉안된
석가여래 본존불


호국보탑에서 경내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다. 왼쪽 계단길로 가는 길은 호국보탑을 만들면서
새롭게 닦은 길이고, 오른쪽에 조금 가파르게 형성된 길이 기존 길이다. 그럼 여기서 승가사
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의 주요 봉우리인 비봉(碑峰, 560m) 동쪽 430m 고지에 자리한 승가사는 756년
에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당나라 고종(高宗) 시절 중생들로부터 생불(生佛)
로 칭송을 받던 승가대사(僧伽大師)의 행적에 크게 감동을 먹고 그를 기리는 뜻에서 절 이름
을 승가사라 했는데, 동문선(東文選)에는 1107년에 이예(李預)가 쓴 중수기가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옛날 낭적사(狼跡寺) 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리를 정해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
리나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
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1024년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했고, 1090년에는 구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
)이 선종(宣宗)의 명을 받아 중수했다. 1099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숙종(肅
宗)과 함께 남경(南京, 서울 도심부로 여겨지나 확실하지 않음)을 찾아 인근 장의사(藏義寺)
와 승가사에 들렸는데, 이때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1422년 세종(世宗)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2개로 나누자 선종에 줄
을 섰으며, 그 시절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함허(涵虛)가 여기서 수행을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이곳까지 기
어들어온 청나라군에게 다시 파괴되고 만다. 이후 중건했으나 숙종(肅宗) 시절, 인현왕후(仁
顯王后) 복귀로 궁지에 몰린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이곳에 관련 죄인을 숨겼는데, 그것이 발
각되자 절은 다시 쑥대밭이 되었다.


▲  동정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승가사 남쪽 산줄기와 북악산(백악산) 너머로 서울 도심과 강남,
강동, 성남시 지역까지 흔쾌히 바라보인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임금은 1782년에 그렇게나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다. 바로 의빈성
씨(宜嬪成氏) 소생인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이다.
1784년 7월 불과 2살에 불과한 그를 세자로 봉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는 경축의 뜻을 보내며 세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자 미얀마에서 보낸 옥불(玉佛)을 특별히
선물로 보내주었다.
정조는 그 옥불의 거처를 두고 고심하다가 왕실의 원찰이던 승가사를 중건해 그곳에 두었다.
절 중건은 당시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선사(城月禪師)가 맡았으며, 옥불은 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불상이라 하여 장수불(長壽佛)이라 하였고, 그 불상이 담긴 건물은 장수전(
長壽殿)이라 불렸다.

장수전을 얼마나 화려하게 지었던지 몇백 척 높이의 층층대 위에 우뚝 솟아있으며, 단청은 너
무 화려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을 지경이었다. 내부에는 천정에 황금구슬을 아로새겼고 한
쌍의 침향등과 술 장식을 드리웠으며, 건륭제가 준 시가 적혀있었다. 그 밑 유리상자 안에 옥
불이 안치되어 있었다.
건물도 으리으리하고 게다가 보기 힘든 미얀마산 불상까지 머금고 있으니 이를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절은 그야말로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하였다. 일반 백성들부터 사대부, 왕족까
지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드니 절은 자연히 예전의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

허나 옥불의 바램과 달리 문효세자는 겨우 4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죽었으니 장수불
과 장수전의 존재 이유는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고, 이후 장수전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장수불 또한 행방이 묘연하니 아마도 정조가 화가 나서 슬쩍 없앤 모양이다. (조선의 청나라
에 대한 불편한 감정도 그들이 없어지는데 적지 않게 영향을 줬을 것임)

▲  승가사 승가굴(약사전)

▲  파괴된 비석의 아랫도리(비좌)

19세기 이후에는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후원을 받아 절을 중수했으며, 1941년에 도공(道空)이
중수를 했다. 이후 비구니 도원(道圓)이 절을 꾸렸으나 6.25 때 절이 싹 파괴되는 비운을 겪
는다.
1957년 도명(道明)이 산신각과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를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971년에는 상륜(相侖)이 주지로 부임, 마애여래좌상으로 오르는 108계단을 대리석으로 업그
레이드하고 절 진입로를 확장하는 한편, 전기를 가설했다.
1976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동정각에 봉안했고, 1994년에 호국보탑을 지어올려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각박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정신없이 건물을 닦았으며, 법
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과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
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큰 전쟁 때마다 파괴되는 고통을 겪으면서 겉으로 보이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말랐으나 구기
동 마애여래좌상과 석조승가대사좌상 등 국가 보물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성월선사의 탑과
탑비, 옛 석탑의 부재(部材)와 비좌 등이 남아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북한산(삼각산) 제일의 선원(禪院)을 칭하고 있으며, 경관이 빼어나
고 국보급 조망을 지니고 있어 예로부터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다. 조선 때는 서쪽의 진관사(
津寬寺), 남쪽의 삼막사(三幕寺), 동쪽의 불암사(佛巖寺)와 더불어 서울 근교의 명승 사찰로
꼽혔는데, 승가사는 그 북쪽으로 그들 가운데 단연 갑(甲)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많
은 문인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 고종(高宗)의 스승이던 유원순(兪
元淳)도 이곳에 안겨 다음의 걸쭉한 시를 남겼다.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 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구름도 능히 잡힐 듯한 높은 산중에 묻혀 있어 제아무리 무거운 번뇌라도 감히 따라오기 힘들
다. (번뇌는 절 밑에서 얌체처럼 기다리고 있음, 결국 해탈은 꿈임)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며,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해 공기도 청정하다. 게다가
서울 도심과도 가까워 멀리 갈 것도 없이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가
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와서 안기고 싶은 곳이다.

* 승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비봉4길 213, ☎ 02-379-2996)



 

♠  승가사 둘러보기 (대웅전 주변, 성월선사 승탑과 탑비)

▲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운 대웅전(大雄殿) 뜨락

동정각의 아랫도리를 들어서면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이다. 대웅전 뜨락을 중심으로 서쪽
에는 서래당, 동쪽에는 적묵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승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7년에 짓기 시작
하여 1980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좌우벽과 뒷쪽에는 부처의 생애를 머금은 전생도와 심우
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림 옆에 해석을 달아놓아 이해를 돕게 했다.

뜨락 서쪽에 자리한 서래당(西來堂)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86년 중창되
었다.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뜨락에 노출된 부분은 종무소(宗務所)와 주지실
로 쓰이며 호국대탑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목인 아랫층에는 공양간이 있다. 공양간은 장작으로
땐 밥과 국을 공양으로 제공하는데, 일요일과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에는 산꾼과 답사꾼도
공양이 가능하다. (절 사정으로 공양을 주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음)
서래당 맞은편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선방(禪房
)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85년에 중창되어 매년 100여 명의 비구니가 수행 안거(安居)를 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소조여래좌상 1구와 1966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

대웅전 내부는 황금색으로 개금(改金)된 목각탱(木刻幀)들로 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불단에
자리한 석가여래상은 꽤나 단련을 했는지 어깨가 쩍 벌어져 있으며, 두터운 얼굴은 다소 경직
된 표정을 머금고 있다. 그의 좌우로 그 흔한 협시(夾侍)보살은 없지만 대신 뒷쪽에는 호화로
운 금동후불탱을 배치해 그를 든든히 받쳐준다.
후불탱(後佛幀)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며
8대 보살과 아난(阿難), 가섭(迦葉)이 그를 에워싸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다. 붉은 지붕
의 닫집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으며, 극락조(極樂鳥)와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  대웅전 계단 우측에 누운 석조(石槽)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통이지만 첩첩한 산골이
라 물 사정이 너그럽지 못해 거의 항상 비워둔
다. 하여 물을 마시려면 꼭지를 틀어 바가지에
받아 마시면 된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전 뜨락과
그 끝에 자리한 동정각(動靜閣)


대웅전 맞은편에는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동정각이 마치 천상(天上) 세계의 누각처럼 높다
랗게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동정각은 2층 규모로 아래층은 경내와 속세를 이어주는 통로
이고, 윗층은 범종의 거처로 기존 범종각과는 다른 6각형 정자(亭子)식 건물이다.

동정각에 고이 간직된 범종은 1976년에 봉안된 것인데 그 종을 운반할 때 15명이 꼬박 매달려
무려 1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때는 차들이 감히 올라올 수도 없었던 산속이라 종 밑에 나무
토막을 깔고 밀어올리는 옛 방식으로 종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아침 4시와 저녁 6시가 되면 잠든 종을 살짝 깨우며 종소리를 속세로 흘려보내는데, 그 종소
리가 매우 은은하다.


▲  동정각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승가사 남쪽 산줄기, 북악산,
서울 도심과 강남, 강동 지역 등)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1년에 중창되었다. 석가3존상을 비롯하여
석가후불탱, 16나한탱, 신중탱 등이 들어있는데, 대웅전의 탱화들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모조리
금색을 입혀 등장인물이 다른 것 빼고는 거기서 거기 같고, 너무 찬란함에 치중한 나머지 거
부감과 식상함마저 적지 않게 들게 한다. (지나친 화려함은 오히려 소박함보다 못함) 이들 탱
화는 1987년에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조성했다.


▲  산신각(山神閣)

영산전 좌측 높은 벼랑 위에 산신의 거처인 산신각이 있다.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조촐한 건
물로 화재로 무너진 것을 1984년에 다시 지었는데, 그때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건물을 남향(
南向)으로 조정했다. 내부에는 1986년에 김광한/김광열 형제가 만든 산신탱이 있으며, 역시
금칠로 도배를 해놓았다. (불교에서 제일 좋아하는 색이 황금색이라고 함)


▲  산신과 호랑이, 동자 2명, 나무 등이 묘사된 산신탱

▲  철책 너머로 바라본 성월선사의 승탑(僧塔, 부도)과 탑비

영산전 동쪽은 통제구역으로 중생들의 발길을 막고 있는데, 그곳에 성월선사의 탑이 있어 살
짝 문을 열고 들어가보았다.

통제구역으로 들어서면 계곡이 나오는데, 그 건너에 푸른 철책이 쳐져 있고 바로 그 안에 성
월대사의 승탑과 비석이 마치 철창 안에 갇힌 양 고적하게 자리해 있다. 그곳을 가려면 철책
문을 지나야 되나 갑자기 새가슴이 되어 그곳까지는 가지 않고 계곡 너머에서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했다.
성월선사의 탑과 탑비는 1802년 8월에 조성된 것으로 비석에 '朝鮮國 正憲大夫 城月堂 碑銘竝
序(조선국 정헌대부 성월당 비명병서)','嘉慶 七年 壬戌 八月日立(가경 7년 임술 8월일입)'이
라 쓰여 있어 탑의 주인과 조성시기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승려임에도 정헌대부의 지위
를 받은 것이 이채로운데, 서울에 흔치 않은 19세기 승탑이고 조성 관련 내용을 머금은 비석
까지 지니고 있어 지방문화재의 자격은 충분해 보인다.

▲  명부전(冥府殿)

▲  명부전 지장탱

대웅전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약사전과 마애불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1단계 오
르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명부전이 마중을 한다.

대웅전과 약사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72년 착공
해 1975년에 완성을 보았다. 1년 정도면 능히 만들고도 남을 규모지만 궁색한 산중이라 공사
가 더뎌 3년이나 걸린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특이하게도 지장보살상 등의 독립적인 불상/보살상은 없고 지장보살과 명부(冥
府, 저승)의 식구를 싹 몰아 넣은 지장탱이 전부이다. 이 탱화는 1983년에 김원각, 김석담이
조성한 것으로 다른 건물의 탱화와 마찬가지로 금칠로 도배를 했다. 다만 다른 것은 지장보살
의 머리만 푸른 색을 입혀 약간의 차별화를 두었다.


▲  약사전 앞에 놓인 옛 석탑의 흔적

명부전에서 1단계 더 올라서면 승가굴(약사전)이 나온다. 약사전 앞에는 늙은 석탑의 흔적이
우수에 잠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과 탑신이 한 덩이씩만 남았다.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이 땅에 흔한 3층석탑이 아닐까 싶은데, 임
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같이 비극을 맞았을 것이다.
이후 일부만 남은 채, 버려진 것을 비좌와 함께 수습하여 약사전 앞에 두었으며, 탑의 사라진
부분이 많아서 복원까진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승가사의 옛 유물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좌(碑座)

향로각 앞에는 비석을 받치던 비좌가 초췌하게 누워있다. 고색의 때로 가득한 이 비좌는 화강
암으로 다진 것으로 3단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넓직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무슨 비석의 아랫도리인지는 북한산(삼각산)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승가사에 고려 중기 승
려인 탄연(坦然, 1070~1159)이 쓴 승가굴 중수비(重修碑)가 있었다고 하니 그 비석의 아랫도
리가 아닐까 의심된다.
조선 중기 이후 전쟁으로 여러 번 절이 파괴되면서 비석 윗도리가 몽땅 날라가 그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비좌 자신도 그때의 충격으로 기억조차 상실했다.

사라진 비신과 이수(螭首)는 경내와 그 주변을 싹 뒤집으면 일부라도 나올 듯 싶은데, 그 작
업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  승가사의 오랜 보물들 (승가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자연산 석굴인 승가굴에 터를 닦은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큰 바위 밑도리에 있는 자연산 석굴이다. 승가사를 세웠다는 수태가 바위를 뚫어 굴
을 만들고 돌을 쪼아 승가대사상을 새겼다는 창건 설화가 깃든 늙은 굴로 승가굴(僧伽窟)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 중기에는 탄연이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정체가 아리송한 승가굴 중수비를 남겼으며, 조선
세종 때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쾌유를 빈 인연으로 약사전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1960년대 이후 석굴을 크게 손질하여 안과 바깥에 돌로 벽을 쌓고, 승가대사상의 불단과 연화
대를 만들었으며, 그 앞에 기도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등(引燈)을 대사상 좌측에 배치해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석굴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굴의 본능상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
는 따스하다.


▲  석조승가대사좌상(石造僧伽大師坐像) - 보물 1000호

약사전에는 승가대사상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역할과 직무를 대
신 하고 있는 그는 인도 출신 승려로 당나라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의 덕이 대단했던지 관세
음보살의 화신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인기가 신라까지 전해져 승가사를 세운 수
태가 그의 상까지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이 석상은 전설과 달리 신라 후기가 아닌 1024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 등이 조각을 했다. 조성 관련 내용은 광배 뒤쪽에 새겨져 있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확실
한 조각품으로 당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으며, 석상 높이는 76cm, 광배 높이 130cm로 호분(
胡粉)을 입혀 몸 전체가 하얀 천사처럼 되었으나 근래 호분을 벗겨내어 순백(純白)에서 벗어
났다.


▲  인등의 강렬한 빛을 즐기고 있는 석조승가대사좌상
(호분을 벗기기 전, 2012년 어느 날)


승가대사상은 하얀 피부의 석상으로 나이가 어느 정도 든 후에 호분을 입힌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어 지장보살의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손자나 손녀를 맞는 할머니와
같이 포근하고도 정이 넘치는 인상이라 그에게 다가서면 '세상 살기 힘들지?' 그러면서 손으
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려줄 것 같다.

그의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살짝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
고 입술은 무척 붉으며, 볼살이 많고 광대뼈가 나왔다. 두 귀는 두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
고, 몸에 걸친 옷은 목 부분을 빼고는 노출된 부분이 없는데 부처나 보살의 복장과 비슷하다.
그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연꽃 대좌는 근래 만들어진 것으로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의 4사자3층석탑 석상과도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상
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고려 초에 유행했던 철불(鐵佛)과도 비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의 뒷쪽에 달린 광배(光背)도 꽤나 명품이다. 커다란 배의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거신광배
(舟形擧身光背)로 신광(身光)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머리 뒤쪽인 두광(頭光)은 신광
과 일부 교집합을 이루면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을 무늬로 두르
고 그 바깥쪽을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로 치장했다. 또한 광배 외곽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정
교하고 실감나게 새겨 광배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천하에 흔치 않은 늙은 승려상으로 1,000년의 지긋한 나이와 오랜 세월 어두컴컴한 석굴에서
광합성 작용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건강과 피부만큼은 젊은 불상이나 석상 못지
않게 양호하여 방부제 외모를 자랑한다. 조선 중기와 현대에 일어난 3차례에 큰 전란으로 절
은 사라지기 바뻤지만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온전하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고 이렇게 승가사
의 늙은 보물이지 꿀단지로 변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석상은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2호였으나 나중에 재평가를 받아 국가 보물로 승진
되었다. 그런데 지정 번호가 우연히도 딱 1,000호이다. 매우 흔한 숫자이지만 결코 쉽게 꿰찰
수 없는 번호를 차지한 것이다. 외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숫자이니 이런 우연이 참 어디에 있을까 싶다.


▲  가양심신(可養心神) 바위글씨

승가굴을 지나면 향로각(香爐閣)이란 돌로 다진 동그란 건물이 있다. 그 직전에 바위가 누워
있는데 그의 피부에 마치 뱀이 기어간 흔적 같은 꼬부랑 바위글씨가 깃들여져 있다.
그는 '가양심신' 바위글씨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비봉에 있는 진흥왕순수비를 손수 탁본하
고 승가사에 잠시 들렸을 때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 4자는 마음을 수양하기 좋은 길지라는
뜻으로 승가사가 정신 수양과 독서를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란 의미로 그렇게 한 글자 남기고
간 모양이다.


▲  마애불로 인도하는 108계단의 위엄 ①

향로각을 지나면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이 나타나 중생들을 다시금 주눅을 들게 하는데, 그 계
단은 불교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계단으로 그 계단의 끝에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연화교(蓮花橋)란 약간 볼록 튀어나온 조그만 다리를 건너 108계단에 임하면 되는데, 그렇게
까지 각박한 경사도는 아니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속세의 부질없는 삶처럼 서두르지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천천히 한 계단씩 임하면 까마득하게 보이던 마애불이 마치 해
가 떠오르듯 크고 웅장하게 솟아오르며, 그 계단의 끝에 이르면 마애불의 거대한 위엄이 다시
한번 눈과 마음을 놀라게 만든다.


▲  마애불로 인도하는 108계단의 위엄 ②

▲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보물 215호

승가사 북쪽에 자리한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하 마애불)은 경내와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비봉능선의 일원인 사모바위의 바로 남쪽
밑이다.
승가사에서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나 지정 명칭은 '승가사 마애여래
좌상'이 아닌 지역 이름을 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다. 보통은 그 불상을 소유하거나 관리
하는 절의 이름을 앞에 붙이기 마련인데, 경내와 약간 거리가 있고 승가사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지역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문화재 지정 명칭은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
애여래좌상')

이 마애불은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왜정(倭政) 시절에 왜열도 학
자들이 고려 때 것이라며 지들 멋대로 평가를 했는데, 월북미술가인 김용준이 1947년 12월 14
일자 경향신문 칼럼에
'눈썹과 눈으로부터 코 입술이 모두 예쁘고 시원스런 표현이라든지 신라 석조의 특색인 턱 아
래 한 곡선을 그어 아래턱을 만든 솜씨며, 얼굴 모양의 턱이 꽉 받치고 원만후덕하고 복스러
운 맛이라든지 의복과 가부좌의 자세며 8각형으로 된 천개(天蓋)를 반쯤 돌을 파고 넣은 것과
연좌(蓮座)의 유려한 선'
등을 들어 신라 것이라 평가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인 삼천사지(三千寺址) 마애여래입상도 신라 말~고려 초기 것으
로 여겨지고 있어 이 둘은 서로 나이가 비슷하다.

직각을 이루며 솟은 거대한 바위의 남쪽 피부에 얇게 홈을 파고 돋음새김으로 도드라지게 결
가부좌로 앉은 불상을 새겼는데, 그의 건강을 위해 전실(前室, 보호각)을 만들고 머리 위에 8
각의 머릿돌(천개)을 끼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러다보니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피부도 얼굴
일부를 빼고는 하얀 편이다.
허나 그렇다고 그의 상태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1968년 김신조의 공비패거리가 서울에 침
투했을 때, 이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게 총상을 입었던 것이다. 하여 마애불의 생애
최초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갑옷과 같던 보호각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사라지고 보호각을 끼던 구멍 4개
만 윗쪽과 중간에 아련히 남아있다. 아마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자연재
해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  옆에서 바라본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양쪽에 보이는 구멍 4개는 보호각의 흔적들)


마애불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의 승가대사상과 달리 조금 경직되고 근엄한 표정 같다. 이마 중
간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진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러져 있으며, 두 눈은 감겨 있어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입술은 두꺼우며,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는지
빨간 기운이 조금 남아있다.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볼살이 좀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껍게 솟아 있는데, 바로 위에 머릿돌을 끼워 넣어 앞
으로 크게 돌출시켜 그의 모자로 삼았다. 모자가 큰 덕분에 얼굴에는 세월이 훈장처럼 달아준
검은 여드름이 여럿 있는 것 외에는 멀쩡하며 피부도 하얗다. 그리고 모자 밑부분에는 연꽃무
늬가 새겨져 있다.
몸통과 머리를 잇고 있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어깨는 꽤나 단련을 했는지 당당
하고 듬직한 모습이다.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 어깨와 가슴, 젖꼭지를 속시
원히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 스타일을 하고 있는
데, 우견편단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단연 으뜸으로 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난다.
몸에 걸친 옷은 얇은 편으로 왼쪽 어깨와 배, 두 다리를 가리고 있으며, 왼팔에 묘사된 옷주
름은 세로로 그어져 있어 기하학적인 추상성(抽象性)을 드러내고 있다.


▲  마애불의 가슴과 아랫부분, 그리고 연꽃이 활짝 열린 연화대

가슴을 비롯한 상반신은 아주 묵직한 모습으로 거대한 마애불의 위엄을 더욱 드높인다. 허리
는 밑부분이 쏙 들어가 괜찮은 몸매를 보이고 있으며 팔은 강철처럼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
리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배꼽 밑에 두어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스쳐
를 취했다. 또한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는데, 발바닥을 훤히 드러낸 불상이 천하에
그리 흔치가 않다.

불상이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는 꽃잎이 하늘을 향해 빵빵 열려있는 앙련(仰蓮)이 윗쪽
에, 반대로 꽃잎이 땅을 향한 복련(伏蓮)이 밑에 있는데, 연꽃무늬가 2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꽃잎도 너무 화사하기 그지 없어, 적당하게 색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기존 전통의 불상 양식에서 추상성을 조금 보태어 웅장하게 만든 마애불로 신라 말~고려 초의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준수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인정받아 북한산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는 1980년대에 지정됨> 게다가 상태도 양호하고 선각(線刻)도 선명하여 조성된 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석불 같다.

신라 말에서 고려 중기까지는 전국적으로 큰 마애불과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게다가 비슷
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다른 색을 보여 개성도 강하다. 구기동 마애불은 자세한 기록은 없
으나 당시 지방 세력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승가사가 고려 황실과도 인연이 깊
은 절이라 제왕과 황실의 지원으로 수준 높은 석공들을 투입해 조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마애불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장비와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
다고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 좋게 드러누워있던 것도 아니다. 줄을 매달고 올라가 일일이 정을
대고 쪼아야 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거의 몇 년에서 10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
이며,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그 당시 석공(石工)의 뛰어난 능력과 정
성, 그들이 공사에 전념하게끔 뒤를 받쳐준 지원 세력이 합작으로 이루어낸 대작품이라 할 것
이며 이런 명품급 마애불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마애불이 있는 바위 밑에는 근래에 돌로 벽을 쌓았고, 그 앞에 향로와 용이 휘감고 있는 돌기
둥을 만들어 단(壇)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앞을 돌출시켜 양쪽으로 계단을 내었으며, 기도는
그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하면 된다. 그리고 바위 주변은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출입이 통
제되어 있으니 괜히 바위를 오르거나 마애불을 만지는 등의 짓은 하지 않도록 한다. 또한 매
일 10시부터 11시(시간은 변경 가능)까지는 승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관계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1


▲  구기동 마애불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쌀가마니를 축내는 쥐새끼들 (경내에서 호국보탑으로 내려가는 길)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나라도 가만 보면 고양이보다는 쥐가 더 살기 좋은 세상 같다.
(이 땅에서 권력도 잡고 돈도 많이 챙기려면 쥐처럼 살아야 됨)

▲  승가사를 뒤로하며 다시 제자리로

마애불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승가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해질녘까지는 시간이 넉넉하게
있지만 이곳은 막다른 곳이라 다른 곳을 가려면 승가사 갈림길로 한참이나 내려가야 된다. 경
내에서 바로 위쪽 사모바위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었다면 그곳을 거뜬히 찍고 내려갔을 것인데,
그 점이 참 아쉽다.
이렇게 하여 5월 승가사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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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7월 3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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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땅끝을 거닐다. 해남 땅끝 (맴섬, 땅끝마을, 땅끝탑, 땅끝전망대, 갈두산)

해남 땅끝



' 천하의 땅끝, 해남 땅끝 봄맞이 나들이 '

해남 땅끝마을 (갈두마을)
▲  해남 땅끝마을 (갈두마을)

땅끝전망대 땅끝탑 앞바다 (남해바다)

▲  땅끝전망대

▲  땅끝탑 앞바다 (남해바다)

 



 

차디찬 겨울이 저물고 봄이 훈풍을 일으키던 3월 한복판의 어느 볕 좋은 날, 천하의 땅
끝이라 불리는 해남 땅끝을 찾았다.
바로 전날에 신안군의 새로운 중심지인 압해도(押海島)를 찾아 그곳의 대표 지붕, 송공
산(宋孔山, ☞ 관련글 보기)을 둘러보고 목포 시내로 나와 적당한 찜질방에서 1박을 청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해남(海南)으로 넘어가 해남시외터미널에서 땅끝 방면 군내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50여 분을 내달려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땅끝마을에 도착했다.



 

♠  해남 땅끝 입문

▲  땅끝을 알리는 표석

땅끝마을은 해남 본토의 최남단(最南端)이자 한반도의 최남단을 장식하고 있는 바닷가 마을로
원래 이름은 갈두마을(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이다. 천하의 땅끝<토말(土末)>이란 듬직한 후광
(後光)을 등에 업은 곳으로 땅끝탑이 있는 갈두산(葛頭山) 남쪽 해안이 실질적인 땅끝인데,
땅끝마을에서 15분 정도 걸어가야 된다.

땅끝의 위치는 북위 34도 17분 32초, 동경 126도 31분 25초로 어디까지나 한반도의 남쪽 끝이
지 우리나라의 남쪽 끝은 절대로 아니다. <현재 이어도(離於島)와 마라도가 임시로 남쪽 끝을
잡고 있음>
우리는 가까운 북한부터 해서 만주(길림성, 흑룡강성)와 요동반도, 요서(遼西), 중원 화북 지
역, 산동반도, 연해주, 대마도(對馬島), 왜열도 등 잃어버린 땅이 정말 오지게도 많다. 그 땅
의 오랑캐를 모두 때려잡아 고토를 회복하고 그 이상의 영토를 점유해야 될 의무가 우리에게
있으며, 지금의 땅끝에서 만족하면 절대로 안된다. 그러니 이곳은 어디까지나 임시 땅끝이다.

해남 땅끝은 갈두산과 주변 해안, 땅끝마을 일대를 일컫는데 동,서,남 3면이 남해바다에 접해
있고 오로지 북쪽만 육지로 이어진다. 하여 일출과 일몰을 모두 만날 수 있다. 땅끝의 지붕인
갈두산 사자봉 정상(156m)에는 땅끝전망대가 설치되어 조망을 돕고 있으며, 그곳까지 땅끝 모
노레일이 닦여져 전망대까지 빠른 이동을 돕는다.
이곳에 퐁당 반한 대자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바위와 벼랑들이 바닷가에 잔뜩 펼쳐
져 있어 풍경을 크게 돋구고 있으며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내음도 그윽하다. 또한 남해바다 너
머로 무려 100여 개의 섬들이 두 눈에 들어와 조망도 일품이다. 땅끝전망대에서는 멀리 제주
도 한라산(漢拏山)까지 보인다고 하나 아무리 눈을 후벼파도 한라산은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이번 땅끝 나들이는 땅끝마을에서 시작하여 땅끝탑, 연리지, 땅끝전망대를 거쳐 다시 땅끝마
을로 돌아오는 코스로 진행했으며,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자꾸 발걸음을 멈추다보니 3시간이
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야말로 이곳은 시간 도둑, 시선 도둑, 마음 도둑이다.


▲  땅끝항에서 바라본 송호리 동부 지역

▲  땅끝항에 몸을 기댄 노화도행 여객선

땅끝항(땅끝항여객선터미널)에서는 노화도(蘆花島)와 횡간도, 흑일도, 넙도 방면으로 가는 여
객선이 운항하고 있다. 그중 노화도 산양항으로 가는 배는 20~40분 간격으로 자주 뜨며 차량
수송도 가능하다. 게다가 노화도에서 보길도(甫吉島)까지 다리(보길대교)가 이어져 있어 보길
도 나들이 때 아주 유용하다.


▲  땅끝항 남쪽에 떠있는 맴섬

땅끝 풍경화의 조촐한 장식물인 맴섬은 2개의 작은 바위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저들은
하나의 섬으로 밀물 때는 2개, 썰물 때는 하나의 단단한 모습을 보인다. 섬 윗도리에는 키 작
은 소나무와 수풀이 뿌리를 내려 섬을 꾸미고 있으며 여기서 바라보는 일출이 꽤 장관으로 알
려져 있다. 그들 사이로 햇님이 붉은 얼굴을 내밀며 찬란한 해돋이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일출은 아니며, 매년 2월 13~18일 경과 10월 23~28일 경 등
1년에 딱 10~12일 정도 밖에는 만날 수 없는 아주 비싼 일출로 그 외에는 비껴서 해가 뜬다.


▲  형제처럼 나란히 자리한 형제바위
대자연이 긴 세월을 두고 빚은 작품으로 오른쪽 바위는 사람 얼굴 같은 모습이다.

▲  옆에서 바라본 형제바위 (바위 너머로 보이는 섬은 흑일도)

▲  정자 쉼터에서 바라본 형제바위(왼쪽)와 맴섬, 땅끝항

▲  땅끝의 짧은 백사장 (땅끝마을 방풍림)
땅끝 해변은 태반이 벼랑이라 모래사장은 이곳 뿐이다.

▲  땅끝 방풍림(防風林)에서 바라본 흑일도(黑日島)

땅끝 동부와 갈두산에서는 어디서든 흑일도가 시야에 보인다. 땅끝마을에서 불과 2~3km 거리
로 해안에 검은 모래가 깔려있어 흑일도라 불리는데, 해가 지는 서쪽에 자리해 있어 해가 뜨
는 백일도와 대비되어 흑일도라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해온다.
땅끝에서 하루에 2회(여름에는 3회) 여객선이 들리며 섬의 면적은 1.58㎢, 해안선 길이는 약
7.9㎞이다. 속세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섬이고 딱히 명소도 없어 외지인의 발걸음은 거의 없
는 실정이다. 하여 저 섬에 과연 발을 들일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  저만치 멀어진 땅끝항, 그리고 바로 밑에 보이는 땅끝 백사장

▲  서로 교행하는 노화도와 땅끝행 여객선

▲  잘 닦여진 산책로 (땅끝천년숲옛길 1코스)

땅끝선착장에서 방풍림을 지나면 땅끝전망대로 인도하는 모노레일(Monorail) 승강장이 나온다
. 모노레일이 '이거 좀 타고 가소!' 진하게 유혹을 건네지만 나는 아직 두 다리가 멀쩡하므로
꿋꿋이 걸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탈 돈이 없음 ㅠㅠ)
여기서 땅끝탑까지 해안 산책로를 따라가면 되는데 바다와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
이나 바다와 접한 부분은 거의 낭떠러지이다. 그리고 문바위와 병풍바위 등의 바위와 사재끝
샘 같은 오래된 샘터도 있으나 모두 해변에 붙어있어 접근이 꽤 까다로우며(앞서 백사장에서
해안 바위길을 타고 가야됨) 땅끝탑 직전에 땅끝전망대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길이 있다.
또한 전국적인 둘레길, 도보길 유행에 따라 땅끝천년숲옛길이란 도보길이 이곳 해안 산책로의
신세를 지고 있는데, 땅끝 구간을 1코스(15.4km)로 갈두산 정상(땅끝전망대)과 갯재를 거쳐
북쪽으로 달마산 미황사까지 연결되며 거기서 2코스와 접선되어 더욱 북으로 달려간다.


▲  보다 가까워진 흑일도
흑일도와 조금은 가까워졌다. 허나 아무리 그래 봐야 여기서는
만질 수도 없는 바다 건너의 섬이다.

▲  벼랑을 극복하고 다져진 나무데크 해안 산책로

▲  벼랑 위를 달리는 해안 산책로 (문바위 부근)

▲  해안 산책로에서 바라본 평화로운 풍경
오른쪽에 보이는 섬이 흑일도와 대비된다는 백일도(白日島)이고
그 뒤에 동화처럼 숨은 섬이 동화도(東花島)이다.

▲  해안 산책로에서 바라본 노화도와 보길도, 넙도



 

♠  땅끝의 진정한 종결자, 땅끝탑

해남 땅끝의 진정한 땅끝에 세워진 땅끝탑은 한반도의 남쪽 끝을 붙잡고 있다. 삼각형 모양의
탑을 세우고 그 밑도리에 땅끝을 주제로 한 시문(詩文)들이 아로 새겨져 있는데 그 앞쪽에 배
의 선두 부분처럼 생긴 전망대와 한반도 모양의 조각품이 땅끝을 제일 위로 하여 꺼꾸로 새겨
져 있다. 이는 이곳이 한반도의 끝이자 동시에 시작점임을 뜻한다.

천하의 남쪽 끝을 강조하고자 세워진 땅끝탑 주변에는 남해바다와 자연산 벼랑이 펼쳐져 있고
바다에는 섬들이 점점이 뿌려져 있어 경관 하나는 아주 예술이다. 어느 세상이든 그 끝자락에
는 다 이런 선경(仙境)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곳은 막다른 곳이라 탑을 둘러보고 다시 왔던 길로 올라가야 된다. 서쪽과 남쪽, 동쪽은 바
다와 벼랑으로 막혀있고 북쪽은 각박한 절벽으로 속세를 잇는 계단이 있다.

* 땅끝탑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산43-3


▲  땅끝탑 앞에 닦여진 조망대와 거꾸로 세워진 한반도 조각품

▲  옆에서 바라본 땅끝탑 조망대
원래 자연산 바위와 벼랑만 있던 곳이나 단지 땅끝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저런 인공적인 시설이 혹처럼 달리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서로가
다소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  땅끝탑까지 따라온 흑일도

▲  땅끝탑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 ①

▲  땅끝탑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 ②
수평선 건너에 보이는 섬은 어룡도와 소장구도, 대장구도이다.

▲  땅끝탑을 뒤로하며 다시 걷는 해안 산책로 (땅끝천년숲옛길 1코스)

땅끝탑을 나와서 해안 산책로를 마저 걸었다. 갈두산 정상으로 직통하는 계단길이 손짓을 했
으나 길이 너무 각박하고(경사가 다소 있음) 해안길이 너무 고와서 해안길을 최대한 걷고 정
상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다.


▲  아찔한 벼랑 위를 달리는 해안 산책로

▲  바다 파도와 바위, 그들만의 상큼한 속삭임

▲  노란 봄꽃이 살랑거리는 해안 산책로
따뜻한 남쪽이라 벌써부터 봄꽃이 노란 꽃망울을 터트렸다. 비록
짧지만 그들의 격려를 받으며 걷는 길이 가히 싫지는 않다.

▲  각박한 벼랑을 개척하여 다져놓은 해안 산책로 (땅끝탑 방향)

▲  저만치 멀어진 땅끝탑과 흑일도

▲  너른 남해바다와 어룡도, 소장구도, 대장구도
저들 섬에는 언제쯤 나의 발을 들일 수 있을까? (어룡도, 대장구도는 유인도)
외딴섬들은 정말로 인연이 쉽게 닿지가 않는다.

▲  남해바다를 가득 품으며 (저 멀리 노화도, 넙도, 보길도 등이 바라보임)

▲  서쪽으로 굽이친 땅끝 서쪽 댈기미 해변 (김 양식장이 여럿 보임)

▲  고깔섬과 그 너머로 보이는 어룡도, 소장구도, 대장구도

▲  갈두산 연리지(連理枝)

댈기미 해변 산책로에는 2그루의 연리지가 있다. 윗 사진의 연리지는 50~60년 정도 묵은 때죽
나무로 오른쪽 나무의 줄기와 왼쪽 나무 가지가 붙어서 연리지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서 10m
정도 떨어진 작은 연리지 또한 30~40년 정도 묵은 때죽나무로 오른쪽 나무의 가지가 왼쪽 나
무의 줄기로 파고 들었다.
보통 연리지는 오래된 나무에서 많이 발생하나 땅끝 연리지는 나이도 아직 어린 것들이 벌써
부터 밝히고(?) 있다. 어린 나무에서 연리지가 발생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편이라 그를 보
는 경우 혹시 모르니 복권을 사두기 바란다.


▲  연리지 주변에서 바라본 댈기미 해변과 고깔섬

▲  댈기미에서 댈기미잔등, 갈두산으로 오르는 계단길

댈기미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해안 산책로를 계속 고집하면 갈산동백숲, 송호해변으로 이
어지며 동쪽 계단길을 오르면 땅끝의 지붕길인 갈두산 능선이다. 해안길은 땅끝마을부터 지겹
게 거닐었으니 이제부터 땅끝 지붕길로 갈아타고자 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동쪽 계단길은 경사가 거의 느긋한 편으로 그 길의 끝에 갈두산 능선과 만나는 '댈기미잔등'
이 있다. 그 밑 해변을 '댈기미'라 부르니 그 동쪽 능선은 등을 뜻하는 잔등을 붙여 '댈기미
잔등'이라 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땅끝전망대 주차장이며 주차장
서쪽에 조망대가 높이 닦여져 있다.


▲  댈기미잔등 산길에서 바라본 땅끝전망대
갈두산이 낮은 뫼이긴 하지만 이렇게 보니 그리 만만해 보이지가 않는다.
아직도 저만큼을 올라가야 되니 말이다.

▲  댈기미잔등 주변 갈두산 능선길

▲  소나무가 울창한 갈두산 능선길 (땅끝전망대 방향)



 

♠  땅끝의 지붕을 거닐다 (땅끝전망대)

▲  땅끝전망대 주차장 조망대에서 바라본 댈기미 해변

땅끝전망대 주차장 서쪽에는 전망대의 맛보기 버전인 조망대가 있다. 이곳에 오르면 내가 올
라왔던 갈두산 서부와 댈기미, 그리고 주변 바다가 훤히 바라보인다. 허나 이 정도의 조망으
로 만족하고 내려가서는 안된다. 땅끝에 왔다면 땅끝탑과 땅끝의 하늘을 붙잡고 있는 갈두산
(사자봉) 정상, 그리고 땅끝전망대까지는 올라가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차량은 이곳 주차장까지 접근 가능)


▲  땅끝전망대 (왼쪽 돌무더기는 갈두산 봉수대)

주차장에서 계단길을 6~7분 정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갈두산 정상과 땅끝전망대가 있다. 땅
끝을 끌어안은 갈두산(葛頭山)은 해발 156m의 낮은 뫼로 바다와 접한 남쪽과 서쪽은 경사가
좀 각박하고(특히 남쪽이 심함) 북쪽과 서쪽은 완만하다. 갈두산 정상을 사자봉이라 부르는
데, 땅끝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그 현장에 땅끝전망대를 닦아 땅끝을 상큼하게 꾸며
주고 있다.
친일 문학가로 더러운 뒷끝을 보였던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은 땅끝에서 서울까지 1,000리
,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穩城)까지 2,000리로 하여 이 땅을 3,000리 강산이라 했다. 그 3천
리의 시작점이자 남쪽 끝이 바로 땅끝인 것이다.

전망대 남쪽에 1981년 땅끝을 알리는 비석을 세웠고 1986년 땅끝 일대가 국민관광지로 지정되
면서 이곳을 관광지로 꾸미고자 높이 10m의 땅끝탑을 세우고, 정상에 갈두산 봉수대를 복원했
다. 그리고 1987년 전망대를 지어 땅끝의 지붕을 올렸다.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전망대가 퇴
락하자 2001년 1월에 부시고 1년에 공사 끝에 2002년 1월 현재 전망대가 지어졌다.
지하 1층, 지상 9층의 높이 39.5m로 타오르는 횃불의 역동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해 천하 통일
의 염원과 소망을 담았다고 하며, 특히 달님이 천하를 지배하는 밤에는 야간 조명을 쏘아 야
경까지 고려했다.
그렇게 여러 의미를 담아 나름 정성껏 지었으니 공짜의 공간일 리는 없을 터, 전망대 바로 앞
에 매표소를 두어 관람객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노려본다. 허나 입장료가 1,000원이고 멀리서
여기까지 왔으니 흔쾌히 입장료를 치르고 유료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만약 그를 안 보고 상경
하면 땅끝을 보다 만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마치 뒷간에서 덜 닦은 기분)


▲  땅끝전망대에서 바라본 흑일도(오른쪽)와 백일도(왼쪽), 동화도
(백일도 뒤쪽 섬), 그리고 그들을 띄워놓은 쪽빛 남해바다

▲  남쪽 소식을 안고 물살을 가르며 땅끝으로 향하는 여객선

▲  땅끝전망대에서 바라본 땅끝마을(갈두마을)

▲  땅끝전망대에서 바라본 어룡도, 소장구도, 대장구도

▲  땅끝전망대에서 바라본 댈구미 해변 주변

갈두산 정상은 사방이 확 트여있어 일출과 일몰을 모두 친견할 수 있다. 게다가 바다에 그림
처럼 떠있는 수많은 섬(대략 100여 개)들이 두 눈에 쏙 들어와 조망도 아주 일품이며 날씨가
좋을 때는 제주도 한라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고 한다. 하여 한라산이 보일까 해서 주름이 잡
히도록 눈동자를 굴렸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으니 내가 보기 싫어서 수평선 너머로 쏙 숨어버
린 모양이다. (그날 황사나 미세먼지는 거의 없었음)


▲  갈두산 봉수대(烽燧臺)

땅끝전망대 바로 앞에는 소도(蘇塗)의 돌탑처럼 생긴 돌무더기가 있다. 처음에는 전망대를 수
식하는 용도로 지어진 단순한 돌탑으로 여겼으나 살펴보니 이곳에 있었다는 옛 갈두산 봉수대
를 복원한 것이다.

갈두산 봉수대는 조선 초에 지어진 것으로 동쪽으로 강진 좌곡산(佐谷山), 서쪽은 해남 화산(
花山, 현 관두산)에 준하여 설치되었다. 원래 땅끝은 영암군(靈巖郡) 땅이었으나 1906년 해남
군으로 넘어갔다.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흔적만 겨우 남아있던 것을 땅끝전망대를 세우면서 다시 세웠으며 봉
수대의 역할은 이제 땅끝전망대가 모두 도맡고 있어 그의 그늘에서 그를 수식하는 장식용으로
조용히 묻혀 지낸다. 시대의 거친 흐름 속에 더 이상 연기를 쏟아낼 일이 없는 것이다.


▲  땅끝전망대 9층 전망대 내부 (망원경은 유료임)

전망대로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9층)로 올라갔다. 이곳에 오르니 앞서보다 더 국
보급의 조망이 펼쳐져 눈과 마음을 크게 흥분시킨다. 다만 9층을 감싼 유리창이 조금 꼬질꼬
질하여 검은 주근깨가 군데군데 피어있으나 조망을 누리는데 크게 지장은 없다.
혹시나 한라산이 보일까 싶어 다시 한번 눈동자에 힘을 주었으나 역시 허사였다. 그날따라 남
쪽 조망 범위는 노화도와 보길도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넘어야 겨우 보일 듯싶은데 그
들이 워낙 단단하게 자리하여 시야를 막으니 일개 인간인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


▲  땅끝전망대 9층에서 바라본 땅끝마을
이렇게 보니 바닷가의 조그만 읍내 같다. (현실은 송지면에 속한 해안 마을)


전망대에는 다리를 쉴 수 있도록 의자가 닦여져 있고, 조망의 질을 조금이나마 높여주고자 망
원경을 여럿 두었다. 망원경은 500원짜리 동전을 먹어야 눈을 뜨므로 평소에는 장님처럼 눈을
감고 있다. 어차피 망원경의 힘을 빌려도 제주도까지는 어림도 없어 보인다.
9층에서 내려올 때는 계단을 이용했다. 계단은 지그재그가 아닌 빙글빙글 이어져 있는데 밑의
층에는 까페와 전시장 등이 있으나 별로 내키지 않아 바로 1층으로 향했다.

* 땅끝전망대(갈두산)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1158-5 (땅끝마을길 100, ☎
  061-530-5544)


▲  땅끝전망대 9층에서 바라본 갈두산 북쪽 산줄기
미황사를 품은 달마산(達磨山)과 대흥사(大興寺)를 품은 두륜산(頭輪山)까지
산줄기가 거침없이 이어진다.

▲  땅끝전망대 9층에서 바라본 흑일도와 백일도, 동화도
땅끝에 와서 흑일도를 정말 지겹도록 본다. 이렇게 멀리서 볼 것만 아니라
나중에 인연을 잡아서 한번 들어가 봐야겠다.

▲  땅끝전망대 9층에서 바라본 노화도, 넙도, 보길도

▲  땅끝전망대 9층에서 바라본 어룡도, 소장구도, 대장구도,
소정원도, 대정원도, 죽굴도

▲  땅끝전망대에서 바라본 땅끝마을 앞바다와 백일도, 동화도,
완도(莞島) 지역

▲  동쪽 밑에서 바라본 땅끝전망대와 땅끝 조형물(오른쪽)
왼쪽에 보이는 야자수가 이곳이 따뜻한 남쪽 지역임을 강하게 어필한다.

▲  땅끝전망대로 인도하는 동쪽 숲길

▲  다시 땅끝마을로 (땅끝마을길에서 바라본 마을)

땅끝의 지붕을 둘러보고 동쪽 길(땅끝마을길)을 통해 마을로 내려갔다. 모노레일이 편하게 가
라며 다시 손짓을 보냈으나 어차피 내려가는 길이라 그 손짓을 흔쾌히 무시했는데, 차량을 위
한 길이라서 뚜벅이길은 따로 없었으며, 거의 1~2분 간격으로 차량들이 지나가 나에게 소음과
매연을 강제로 안겨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땅끝탑 방면 남쪽 계단길로 내
려가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내려가는 중간에 마을의 안녕을 책임지는 '국수당'이란 당집이 있으나 너무 숲속에 묻혀있고
귀찮기도 해서 들어가진 않았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찻길을 내려가 땅끝마을로 진입, 마을의
중심인 땅끝항에 이르렀다.
그런데 앞서 땅끝 나들이를 시작했을 때는 물이 가득 올라와 맴섬과 형제바위를 외로운 바위
섬으로 만들던 바다가 그새 쏙 빠져 그들이 완전 육지의 일원이 되었다. 언제 이곳이 바다의
한복판이었냐는 듯이 아주 감쪽같이 말이다.


▲  바다에서 잠시 해방되어 육지의 일원이 된 맴섬

▲  바다에서 해방되어 자갈밭의 바위처럼 되버린 형제바위

그들을 섬으로 만든 바다는 대자연의 힘에 의해 썰물이란 이름으로 저만치 밀려나 그들을 향
해 다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다. 땅끝을 거진 둘러보고 떠나려는 나에게 형제바위와 맴섬은
밀물 때와 다른 얼굴을 보여주며 작별을 고한다.

땅끝 정류장으로 나와서 해남읍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거의 1,000리가 넘는 나의 제자리
를 향해 출발했다. (땅끝에서 해남읍까지 해남군내버스와 시외직행버스가 운행하고 있음, 군
내버스는 해남읍까지 기본 요금으로 아주 저렴하나 시외직행버스는 철저한 거리비례라 요금이
꽤 비쌈)
이렇게 하여 해남 땅끝 3월 나들이는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땅끝마을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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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의 매운 얼이여, 용인 능골에 넓게 자리한 정몽주선생묘 <저헌 이석형묘, 충렬서원>

용인 정몽주선생묘



' 용인 정몽주선생묘 여름 나들이 '

   

▲  정몽주 선생묘
◀ 저헌 이석형묘
▶ 정몽주 묘역 영모재
▼ 충렬서원

   

 



 

여름 제국이 절정에 치닫던 7월의 끝 무렵. 용인 능골에 자리한 정몽주선생묘를 찾았다. 이곳
은 학창시절부터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곳으로 계속해서 미루고 있다가 이번에 비로소 인연을
지었다. 도봉동(道峰洞) 누옥에서 거리가 제법 되지만 서울에서는 그런데로 가까운 곳으로 교
통편도 양호하여 넉넉잡아 3시간 이내면 충분히 접근이 가능하다.



 

♠  정몽주선생묘 입문

▲  정몽주 선생묘를 알리는 표석

능원초교(정몽주선생 묘역입구) 정류장에서 바로 동쪽에 있는 능원초교입구4거리로 나와서 4
거리를 건너 남쪽으로 가면 오산천에 걸린 포은교가 마중을 한다. 그 다리를 건너 5~6분 정도
가면 왼쪽(동쪽)에 정몽주 묘소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누워있는데, 여기서 왼쪽 길로 들어
서면 정몽주 신도비를 시작으로 그의 드넓은 묘역이 장대하게 펼쳐져 거의 왕릉을 연상케 한
다.


▲  정몽주 신도비(神道碑)

정몽주 묘역 대파노라마의 시작인 정몽주 신도비는 묘역과 함께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지형
상의 이유도 있지만 정몽주가 그렇게나 지키고자 했던 고려의 옛 국도(國都), 개경(開京)이
서쪽에 있어 후손들이 그의 심정을 헤아리고자 그렇게 배치를 한 것이다.

팔작지붕 비각 안에 담긴 신도비는 정몽주가 강제로 세상을 뜬지 300여 년이 지난 1699년에
세워졌다. 송시열(宋時烈)이 찬을 하고, 김수증(金壽增)이 글을 썼으며, 영의정 김수항(金壽
恒)이 전액(篆額)을 썼는데, 비석의 높이는 388cm, 비신(碑身)의 높이는 238cm이다. 비석이
나이를 예민하게 타다 보니 비신 뒷쪽의 글씨 상태가 영 고르지가 못하며, 비신 앞쪽에는
'皇
明 高麗守門下侍中 益陽郡 忠義伯 圃隱鄭先生 神道碑銘幷序<황명 고려수문하시중 익양군 충의
백 포은정선생 신도비명병서>'
라 쓰여 있다.
여기서 황명(皇明)은 명나라로 정몽주가 죽던 시기는 명나라 초기이다. 그냥 '고려 수문하시
중(守門下侍中)~~'으로 시작하면 정말 깔끔하겠지만 비석 제작 당시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만연했던 시절이고, 그 꼴통 사대주의자들이 신도비를 담
당하면서 비석에도 명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것이다.

우리의 장대한 역사와 강역을 아주 크게 말아먹은 우리의 최대 흑역사 조선, 그런 검은 시대
에 걸맞게 조선 위정자와 유학자들에게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 풍조가 아주 지독했으며, 그런
풍조는 무려 왜정 때까지 이어졌다.


▲  연안이씨 비각공원

정몽주 신도비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고운 피부의 비석들이 즐비한 연안이씨(延安李氏) 비각
공원이 나온다. 이들은 정몽주 묘역을 품고 있는 문수산(文秀山) 자락에 흩어진 연안이씨 선
조들의 묘비와 신도비의 내용을 번역하여 세운 것으로 10여 기의 비석이 공원을 이루고 있는
데, 그 끝에는 저헌 이석형의 신도비가 비각에 감싸인 채 장대한 세월을 머금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분명 정몽주의 영일(迎日) 정씨 묘역이 분명한데, 엉뚱하게도 연안이씨 집안의
비석이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 집안을 일으켜 세운 이석형의 묘가
정몽주 묘와 성씨를 초월하며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꽤 신선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이석형이 정몽주의 증손녀에게 장가를 든 인연 때문이다.
이후 영일정씨와 연안이씨 집안은 한집안처럼 가깝게 지냈고 두 집안의 무덤이 정몽주 묘역
주변에 서로 어울리며 자리해 있었다. 그러다가 왜정(倭政) 때 토지 소유권을 두고 다투다가
영일정씨가 승리하면서 연안이씨 무덤은 이석형과 일부 묘소를 제외하고 모두 문수산 남쪽으
로 이장되었다.
그렇다고 600년 넘게 지속된 두 집안의 정이 깨진 것은 아니다. 이석형의 묘는 아직 제자리
에 건재해 있고, 묘역 입구에 비각공원을 두는 등 여전히 허울 없이 지내고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200m 정도 들어가면 이석형의 생가 연못에 세워졌던 계일정(戒溢亭)이 재
현되어 있다. 참고로 그의 생가는 서울 연지동(蓮池洞, 종로5가 북쪽)에 있었다.


▲  저헌 이석형(李石亨) 신도비 - 경기도 지방기념물 171호

정몽주 신도비와 마찬가지로 팔작지붕 비각(碑
閣)에 소중히 감싸인 이석형 신도비는 1624년
에 대리석으로 조성되었다. 원래 이석형묘 앞
에 있었으나 비각을 씌우면서 이곳으로 이전되
었다.
비문(碑文)은 후손인 이정구(李廷龜)가 지었고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
容)이 제자(題字)를 남겼는데, 비석의 높이는
270cm 정도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주름
선이 마치 토성의 띠처럼 생긴 비신(碑身)으로
이루어져 있다.


◀  주름선이 멋드러진 이석형 신도비


▲  홍살문과 정몽주 묘역

▲  왕릉처럼 드넓은 정몽주 묘역의 위엄

정몽주 묘역은 상상 외로 무척 넓었다. 거의 조선 왕릉 수준으로 말이다. 내가 왕릉에 온 것
인지 고려 충신의 묘에 온 것인지 잠시 혼돈에 둘러싸인다. 허나 분명히 정몽주 묘역은 맞다.

그의 묘역이 이렇게 넓어진 것은 조선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다. 비록 조선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 잔인하게 없애긴 했지만 그만한 충신이 또 없다. 하여 신하들의 철저한 정
몽주 화(化)가 필요했던 터라 필요에 따라 죽였으면서 역시 필요에 따라 그를 띄워주고 묘역
에도 적지 않게 신경을 써준 것이다.
후손들은 조선 조정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씁쓸했을 것이요, 정몽주
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만, 죽은 자는 원래 말이 없는 법이다.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자를 이리 볶고 저리 볶고 저들 편리에 따라 이용하는 것이다.

정몽주 외에도 고려의 많은 충신, 그리고 고려의 마지막 무신(武臣)인 최영(崔瑩)장군도 있지
만 명성은 아무래도 정몽주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최영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로 일컬어지던 큰 인물이지만 무(武)를 경시하고 유학을 중시하던 조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정몽주가 훨씬 구미가 당긴다.

정몽주 묘역이 얼마나 드넓은지 묘역을 알리는 표석에서 그의 묘까지는 거리가 약 400m에 이
른다. 게다가 그의 아들과 후손들 묘역이 주변에 잔뜩 포진해 있고, 묘역 서쪽은 싹 밀어버렸
다. 그래서 그만큼 넓어 보이며, 거의 조선 왕릉 뺨칠 정도이다. 이곳의 지명인 능골과 능원
리는 바로 이 묘역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다. 얼마나 능처럼 넓으면 지명에 능(陵)이 다 붙었
겠는가.


▲  경모사(敬慕祠, 왼쪽)와 모현당(慕賢堂, 오른쪽)
1980년 묘역 정비 때 새로 지은 것들이다.

▲  영모재(永慕齋)
조선 후기에 지어진 정몽주 묘역의 재실(齋室)이다.

▲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백로가(白鷺歌) 시비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  단심가(丹心歌) 시비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이방원(李芳遠)이 하여가(何如歌)로 은연중 반란에 협조해 줄 것을 청하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 묘 - 경기도 지방기념물 171호

▲  밑에서 바라본 이석형묘

▲  옆에서 바라본 이석형묘

정몽주 묘역에 들어서면 가운데 언덕에 정몽주묘가 큼지막하게 자리해 있고, 그 남쪽에 증손
녀 내외인 이석형 내외의 묘와 아들인 정종성 내외묘, 북쪽에는 정몽주의 후손들 묘가 잔뜩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이석형(1415~1477)은 연안이씨 집안으로 자는 백옥(伯玉), 호는 저헌(樗軒)이다. 이회림(李懷
林)의 아들로 생모는 박언(朴彦)의 딸이다.
1441년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에 합격했고, 1442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원(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집현전부교리(集賢殿副校理)가 되어 14년
동안 집현전(集賢殿) 학사로 일했으며,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로 있던 1447년 문과 중시(重
試)에 붙어 왕명으로 북한산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했다.

1455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가 되었고,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던 1456년 6월 단종(端宗)
의 복위를 꾀하던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터지자 사육신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익산
(益山) 동헌(東軒)에 남긴 일로 대간(大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세조(世祖)에게 오히려 칭찬을
들으며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승진되었다.
이어 판공주목사(判公州牧使)와 한성부윤(漢城府尹, 서울시장)이 되었으며, 1460년 세조의 특
명으로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왕의 관서(關西) 지방 순행을 도와 왕으로부터 서도주인(西道主
人)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듬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1466년 팔도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가 되어 호패법(號牌法)을 조사했고, 1468년 세조가 승하
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건너가 왕의 부음을 전했다. 이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470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승진,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했으며, 1471년
에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필법이 신묘하여 집현전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治平要覽),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
여했으며, 세조 때는 사서(四書)의 구결(口訣) 작업에 참여해 논어(論語)의 구결을 주관했다.
또한 불우한 백성들을 늘 보살폈으며, 말년에는 서울 연지동 집에 계일정을 지어 시문을 지으
며 자손들을 가르쳤다. 그는 계일(戒溢)정신이라 하여 분에 넘치는 것을 자손들에게 늘 경계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신선(神仙) 같다며 칭송했다.

남긴 저서로는 대학연의(大學衍義)와 고려사에서 권계(勸戒)를 덧붙인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
輯略) 21권과 저헌집(樗軒集)이 있다. 편저로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치평요람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석헌의 부인은 정몽주의 증손녀로 정보(鄭保)의 딸이다. 1445년 1월 아들인 이혼(李混)을
낳았는데, 산후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딸을 잃은 슬픔에 눈물로
밤을 지새던 정보는 자신이 봐둔 묘자리에 딸을 안
장했는데, 이석형이 죽자 자연히 부인묘에
합장되어 당대의 명사(名士)이자 충신의 대명사인 정몽주 곁에 묻히게 된 것이다. 사연은 그
러한데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속설도 전해온다.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가 죽자, 그가 평소에 봐두던 정몽주묘 남쪽에 안장하기로 했다. 딸인
이석헌의 처(이하 정씨부인)는 그 자리가 매우 신통한 명당 자리임을 알고 자신의 아들과 손
자들을 위해 시댁에 좋은 일을 해주기로 하고, 간밤을 이용해 관을 넣을 자리에 물을 잔뜩 퍼
날라 부었다.
다음날 집안 사람들이 가보니 무덤에 물이 많은지라 그 자리를 버리고 다른 곳에 장지를 마련
해 안장했다. 아무리 명당이라도 물이 나오면 영 좋지 못한 터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보가 안
장된 이후, 친정 가족들에게 버려진 터를 우리 시댁에 주면 안되겠니 청하니 친정은 흔쾌히
그 자리를 주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속설임)

정몽주가 당대 명사이긴 하지만 그 후손들은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없었고, 마침 떠오르는
연안이씨 집안의 사위 내외를 정몽주묘 곁에 묻히는 영광을 부여함으로써 양 집안 간의 유대
감을 꾀했다. 하여 그 인연으로 두 집안은 오랜 동안 오순도순 지냈고, 서로의 집안 묘가 두
루 섞인 진풍경을 보인 것이다.
허나 왜정 때 두 집안 간의 무덤 자리를 두고 재판이 벌어졌고, 그 재판에서 영일정씨가 승소
하면서 정몽주묘역 일대는 99% 정씨 집안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연안이씨는 이석형과 일부
묘를 빼고 대부분 문수산 남쪽으로 옮겼으나 두 집안의 친목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석형묘는 정씨부인과 함께 묻힌 합장묘(合葬墓)로 이곳이 그렇게 기가 막힌 명당 자리라고
한다. 이석형 이후 집안에서 수십 명의 고위 관리가 배출되었고, 현대에 와서도 장관 3명을
배출했다. 그래서 명당에 관심있는 사람과 풍수지리가들이 자주 찾는다. 서쪽을 바라보며 자
리한 묘역은 전방이 확 트여 있고, 뒤쪽에는 문수산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어 문외한인 내가
봐도 착한 명당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 무덤은 영일정씨에서 소유하고 있으며, 연안이씨 정헌공파에서 관리하고 있다.

▲  앞에서 본 이석형묘 (봉분, 상석)

▲  고색의 때깔이 자욱한 이석형 묘표(墓表)

▲  고된 표정의 우측 문인석 2기

▲  좌측 문인석 2기


▲  뒷쪽에서 바라본 이석형묘와 전방 풍경

▲  정몽주묘에서 바라본 이석형묘

▲  이석형묘에서 바라본 정종성(鄭宗誠)과 죽산박씨 묘

원사(院事) 정종성(1374~?)은 정몽주의 맏아들로 고려 후기 9명의 효자 가운데 하나이다. 조
선 조정에서 정몽주 후손 달래기의 일환으로 여러 차례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했으며, 1437년
에 마지못해 벼슬을 받아 철원부사가 되었다.



 

♠  아 충신의 매운 얼이여..!! 충신의 영원한 성지(聖地)
정몽주선생묘(鄭夢周先生墓) -
경기도 지방기념물 1호

포은 정몽주(1337~1392)는 1337년 경북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자는 달가(達可), 호는 그
유명한 포은(圃隱)이며, 고려 중기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자 정운관(鄭云瓘)의 아들이다. 생모 이씨가 꿈에서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트렸는데, 이에 놀라 깨어난 뒤 바로 그를 낳았다고 하여 정몽란(鄭夢蘭)이라 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빼어났다고 하는데, 어깨 위에 7개의 검은 점이 북두칠성처럼 벌
여져 있었다고 하며, 9살에 생모가 낮잠을 자다가 검은 용이 뜰에 있는 배나무로 올라가는 꿈
에 놀라 급히 나가보니 배나무에 정몽란이 있었다. (위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설화임) 그래
서 이름을 몽룡(夢龍)으로 바꿨고, 관례를 치른 이후에는 정몽주로 이름을 갈았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문하에 들어가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학문에 정진했는데, 목은은 포
은에 대해 '학문은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 이
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칭찬을 했다.

1357년 감시(監試)에 붙었고, 1360년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과 수찬(修撰
), 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
사관(從事官)으로 따라가 고려의 그늘에 있던 동북 지역(길림성, 흑룡강성, 연해주 지역)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고, 전농시승(典農寺丞)과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성균박사(成均博士),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으며,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과(太常少卿
寶文閣應敎)와 성균직강(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으로 승진했다.

1372년 정몽주를 싫어했던 친원패거리의 의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
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당시 명은 고려를 크게 의식해 의도적으로 많은 무례를 범하면서
양국의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칫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가는 길도
험난해 풍랑으로 고생을 했는데, 힘들게 명나라 남경(南京)에 가니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
璋)이 태도를 달리하며 극진히 예우했다.
1376년 이인임(李仁任)의 배명친원(排明親元, 명나라를 멀리하고 원나라와 가깝게 지냄)을 반
대하다가 언양(彦陽, 울산 언양)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377년 나날이 극성을 부리는 왜구(倭寇)를 처리하고자 왜열도 규슈(九州)로 건너가 규수 지
역 지방 세력에게 왜구 단속을 요구했다. 이에 규슈 지방 세력은 흔쾌히 협조를 약조했고, 왜
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구출하여 그에게 인계했다. 그렇게 그들을 데리고 귀국하자
정몽주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급부상했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와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예의판서(禮儀判書), 예문관제학, 전
법판서,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했고,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를 따라 전라도 지역의 왜구를 토벌했다.
이성계는 정몽주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남원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싹 쓸어버리고 상경하던
중, 전주(全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전주는 그의 선조들이 살던 곳이며, 전주이씨 일족
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는 오목대(梧木臺, ☞ 관련글 보기)에서 이씨 일족을 모아 거하게 잔치를 벌였는데, 여기서
대풍가(大風歌)를 크게 불렀다. 대풍가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정벌하고
고향인 패(沛)로 돌아와 승전 연회에서 부른 시로 이를 통해 자신의 야망을 은근히 드러냈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했지만 정몽주만큼은 그 시의 의도를 파악
하고는 기분이 몹시 불쾌해졌다.
그래서 그 자리를 나와 인근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서 우국시(憂國詩)를 읊으며 착잡한 마
음을 달랬다고 한다. 어쩌면 장차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되는 비극을 이때 예견했을지도 모
른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
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를 찾은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
었으며, 1388년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추진하자 이성계를 지지하며 정벌을 반대했
다.
통한스러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를 도와 우왕을 폐했고, 1389년
에는 그와 함께 우왕의 아들인 창왕(昌王)까지 폐해 그들을 공민왕(恭愍王)의 후손이 아닌 신
돈(辛旽)의 후손으로 왜곡시키는 일에 동참했다. 또한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마지막 군주인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여 13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과 수문하시중(守門下
侍中),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 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 우문
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 등의 다양한 관직과 작위를 받았다.

이토록 이성계와 행동을 같이하며 때로는 백로가의 뜻을 저버리고 이성계 패거리와 까마귀 짓
도 하면서 나름 나라의 개혁을 갈망했으나 이성계의 세력이 나날이 커지자 고려를 뒤엎고 그
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의 예를 통해
군주가 별로면 갈아치우는 한이 있더라고 고려란 나라를 유지한 채, 개혁을 하자는 것인데,
이성계 패거리는 '고려는 이제 틀렸다. 다 갈아엎고 새로운 나라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의견
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함께 해온 이성계를 제거하여 고려 사직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고 기회를 노
렸다.

드디어 1392년 3월 때가 왔다. 공양왕의 세자(世子)인 왕석(王奭)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자 이성계가 그를 마중하러 황주(黃州)로 나갔다. 거기서 사냥을 벌이다가 그만 말에서 떨
어져 크게 다쳤는데, 정몽주는 크게 기뻐하며 대간(大諫)을 움직여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
개경에 있던 이성계 패거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정도전을 잡아 가두고 조
준과 남은(南誾) 등을 귀양 보냈다.
이성계는 아픈 몸을 이끌고 상경하다가 벽란도(碧瀾渡)에서 하룻밤 쉬려고 했는데, 아들인 이
방원이 급히 찾아와 정몽주가 일을 벌이고 있음을 알리며 서둘러 상경하자고 했다. 정몽주에
대한 신뢰가 두텁던 이성계는 무슨 소리냐며 잔소리를 했으나 이방원이 계속 권하는 것이 심
상치가 않아 가마를 타고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정몽주의 대사는 그르치게 된다. 이때
그는 3일이나 밥을 먹지 않으며 기회가 사라졌음을 안타까워 했다.

이방원은 형세가 매우 위급하므로 정몽주를 제거하자고 이성계에게 제의했다. 이에 가족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 이씨가 왕실에 충성을 바친 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데, 지금 정몽주에게 모함을 받
아 악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후세에 누가 이것을 변명하겠는가'
외치며 정몽주 제거를 모의
했다.
이때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정몽주에게 그 사실을 귀띔해
주자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찾아가 상황을 살폈다. 허나 이성계는 평소와 비슷하게 그를
대해주면서 정몽주는 지금 당장은 일을 벌이지 않겠지 싶은 방심을 하고 돌아간다.
이때 이방원이 주안상을 마련하여 그에게 술 1잔을 권했다. 포은은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정
도전과 핵심 패거리만 염두에 두었지 이방원은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설마 저 어린 것이 나
에게 무슨 짓을 하겠는가 싶었을 것이다.

이방원은 어느 정도 술을 주고 받자 지필묵(紙筆墨)을 꺼내 하여가(何如歌)를 선보이며, 그를
시험했다. 허나 시험 결과는 역시나였다.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을 하며 하여가를 무색케 만
든 것이다. 즉 포은은 이성계 패거리에게 더 이상 협조하지 않고 필요하면 죽음으로써 역모를
막겠다는 것이다.

이방원과 작별한 포은은 별다른 대비도 없이 귀가를 했다. 곧 다가올 저승사자를 눈치채지 못
했던 것이다. 정몽주 제거를 결심한 이방원은 서둘러 수하인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귀가하던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철퇴로 때려 죽였다. 그때 포은이 흘린 피가 마르지 않고 다리
에 남아있다고 하는데, 실상은 붉은색을 띠는 돌이지 그의 피가 아니다. (정몽주 띄워주기의
일환으로 윤색된 것임)
정몽주가 잔혹하게 살해되자 이성계는 크게 놀라며 이방원을 꾸짖자 그는 정몽주가 우리를 공
격하는데 어찌 가만 있겠냐며 항변을 했다. 이에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이성계는 왕을 찾
아가 정몽주가 모함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를 추종한 이들을 잡아 족치며 정몽주의 목을 개경
십자거리에 매달았다. 그리고 얼마 뒤 이성계는 그의 패거리와 함께 공양왕을 끌어내려 고려
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열었다.

정몽주는 시문에 뛰어나 단심가와 많은 한시를 남겼고,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글씨
와 작품들은 후손들이 정리하여 1439년에 간행된 포은집(圃隱集)에 담겨져 있다. 또한 지혜와
용기가 대단했고, 충효와 지조가 대단했으며, 학문을 좋아해 정도전과 함께 원나라에서 들어
온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키고 보급하여 동방성리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노력으로 이때
부터 집에서 가묘(家廟) 등을 세워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겨났으며, 의창(義倉)을
세우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의 편리를 도모했다.

고려를 지키고자 나름 충신의 매운 얼을 드높였던 포은은 이성계 패거리에게 패해 역적이 되
었고,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면서 아들은 죄다 귀양 신세가 되었다. 그의 무덤 역시 개경
인근 풍덕군(豊德郡)에 대충 썼다.

1400년 조선의 3대 군주가 된 태종(太宗) 이방원은 그동안 뜨거운 맛으로 일관했던 정몽주 일
가에 대한 태조를 180도 달리하며, 후손을 달래주고 정몽주를 띄워주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
들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은 괘씸하지만 다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그를
충신의 대명사로 드높인 것이다.
그래서 1401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했고, 이어서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으로 추봉했으며,
후손의 소망에 따라 묘를 옮길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또한 중종(中宗) 때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을 비롯한 수많은 서원에 배향되면서 대대손손 두둑한
제삿밥을 받으며 영원히 추앙을 받게 된다.

그들 야망에 도움이 안되어 때려죽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살만하니까 진정한 충신이자 성리학
의 시조라며 지나치게 띄워주는 태종의 이중적인 행태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 태종
의 입장에서도 솔직히 정몽주 스타일 즉 군주에 대한 일편단심 충신을 열망했던 것이다. 조선
이 오래간다는 보장도 없고, 늘 변수가 도사리고 있기에 정몽주 같은 충신이 나와 나라를 지
키고 망국(亡國)의 초라함을 달래달라는 주문이 담긴 것이다. 고려는 비록 망했지만 정몽주와
그를 포함한 3은(三隱)과 최영 등 많은 충신이 있기에 그 마지막은 외롭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신권(臣權)과 개혁을 강조하며, 자신을 한때 괴롭게 했던 정도전보다는 이미 없어진 정
몽주가 훨씬 이용하기가 좋았다. 그러니 죽은 정몽주를 이용해 그들 입맛에 맞게 요리한 것이
다.

풍덕군에 있던 정몽주묘는 1406년 후손들의 뜻으로 그의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기로 하고 운
구를 끌고 내려갔는데, 인근 수지 풍덕천(豊德川)에 이르자 명정(銘旌, 죽은 이의 품계, 관직
, 성씨를 기록한 기)이 갑자기 바람에 날라간 것이다. 명정을 쫓아가니 지금의 정몽주묘 자리
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연한 일도 아닌 것 같고, 그곳 자리도 좋아 보여 굳이
영천까지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무덤을 썼다고 전한다.
이후 정몽주의 아들과 손자를 비롯해 후손들이 모두 그의 곁에 묻히면서 이곳은 정몽주 일가
의 묘역이 되었고, 1517년 중종이 정몽주묘 주변 능골 일대를 후손들에게 내리면서 이곳에 완
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  이석형묘에서 바라본 정몽주묘

개경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정몽주묘는 거의 조선 왕족 묘에 버금가는 모습이다. 망주
석(望柱石) 1쌍과 상석(床石) 2기, 문인석 2쌍, 석양(石羊) 1쌍, 장명등(長明燈) 1기가 앞에
배치되어 있고, 봉분(封墳) 주위로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두고 묘
3면에 곡장(曲牆)이란 담장까지 둘러 묘의 품격과 장엄함을 높였다.
원래는 문인석 1쌍과 묘표, 상석, 봉분, 곡장이 전부였으나 1980년 이후 묘역을 크게 정비하
면서 후손들이 더 갖다 붙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때와 하얀 피부의 석물이 어색하게
공존을 하게 되었다.


▲  난간석과 호석까지 갖춘 정몽주묘

▲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 지붕돌이 인상적인 정몽주 묘표
묘표는 1517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신 앞쪽에는 '高麗 守門下侍中 鄭夢周之墓'라
쓰여 있어 고려를 위해 산화한 그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다.

▲  우측 문인석

▲  좌측 문인석

고색의 때가 만연해 문인석 1쌍은 키가 작다. 표정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정몽주의 심정과 표
정을 상징하듯 꽤 우울해 보인다. 반면 그 옆에는 근래에 세운 하얀 피부의 매끈한 문인석이
서 있는데, 키도 크고 표정도 매우 긍정적이다. 마치 정몽주를 없애고 나라를 뒤엎으며 야망
을 실현한 이성계와 이방원의 흐뭇한 표정 같은. 문인석을 세우더라도 좀 근엄한 표정이 좋았
을 것인데, 그 점이 아쉽다.


▲  정몽주묘에서 바라본 작은 천하

▲  북쪽에서 바라본 정몽주묘와 멋드러진 소나무의 위엄

▲  설곡 정보(雪谷 鄭保)와 밀양박씨 내외묘

정몽주묘 북쪽에는 후손들의 무덤이 산기슭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그중에는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의 묘가 있다.
정보는 원사 정종성의 아들로 생몰시기는 전하지 않는데, 경상도 예안(禮安)현감과 사헌부 감
찰을 지냈다. 1456년 사육신 사건이 터지자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포항 연일로 유배되었
으며, 다시 산청(山淸)으로 옮겨져 거기서 어느 해 4월 20일에 생을 마감했다.

봉분은 원래 부부가 따로 썼는데, 1982년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기면서 하나로 합쳤으며, 문
인석 2쌍과 묘표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하다.

▲  고색의 미가 담긴 설곡 정보 묘표

▲  봉분 옆에 새로 만든 정보의 새 묘표


▲  정충전(鄭忠傳)과 전주이씨 내외묘
정충전은 정몽주의 7세손으로 1606년 식년시(式年試) 2등에 합격해 관직에 진출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가 되었으나
그 외에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다.

▲  선죽교 앞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

작렬하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의 핍박에 맞서며 정몽주 묘역을 둘러보고 충렬서원으로 길을 옮
겼다. 묘역으로 갈 때는 포은교를 건너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선죽교란 다리를 통해 오포로로
나왔다. 선죽교는 포은교 서쪽 90m 지점에 있는 다리로 능원초교(정몽주선생묘역입구) 정류장
바로 뒷쪽이다.
선죽교라고 해서 개성에 있는 그곳을 옮기거나 본을 따서 만든 것은 아니며, 그냥 흔한 하천
다리로 정몽주 묘역 입구라서 그에 걸맞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니 복잡한 의미 부여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선죽교 북단에는 검은 주근깨가 자욱한 늙은 하마비가 서 있어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하
마비란 하마 서식지가 아니라 대소인원(大小人員) 모두 이곳 앞에서는 말에서 내리라는 추상
같은 뜻이다. 보통 궁궐, 관아, 향교, 서원, 왕릉. 사당, 고위 관료의 묘역 입구에 세우는데,
정몽주 묘역도 그에 해당되어 하마비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곳이 정몽주묘와 충렬서원의 중간
지점이라 이곳에 비석을 세운 모양인데, 여기서 묘와 서원이 제법 거리가 되어(묘는 도보 15
분 거리) 다른 곳에서 옮겨왔을 가능성도 있다.

말을 타고 오가는 이들을 귀찮게 했던 하마비, 허나 이제는 하마비의 눈치를 보며 말이나 차
량에서 내릴 필요는 없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의 권위도 이미 상실된 상태이며, 이제는 지
나가는 이들이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나도 그의 존재를 여기서
처음 알았다.


▲  능원리 느티나무(용인시 보호수 70호)와 정한영 효자비

▲  정한영 효자비(鄭漢永 孝子碑)

포은교와 충렬서원입구 사이에는 늙은 느티나무와 정한영 효자비가 있다. 이곳 느티나무는 나
이가 약 270년 정도로 1988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의 높이는 19.5m, 둘레 4.5m로 좌우로
가지가 길게 뻗어 있어 그늘의 면적이 제법 된다. 그 시원한 그늘 밑에 정한영 효자비가 둥지
를 틀었다.

정한영(1862~1947)은 정몽주의 19대 손으로 호는 모은(慕隱)이다. 이곳 능원리 출신으로 성품
이 바르고 효성이 지극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묘 밑인 지금의 자리에 여막(廬幕)을 짓
고 3년 동안이나 그 힘든 시묘살이를 했다.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기름진 음식을 입에 대지 않
았으며, 오로지 미음과 채소로 연명했다. 또한 부모가 준 거라면서 머리는 물론 손/발톱도 전
혀 깎지 않았다.
그 효행을 기리고자 유림에서는 이곳에 효자비를 세웠으며, 비석의 지명(誌銘)은 김세기가 쓰
고, 행장기(行狀記)는 김학열이 썼다.

* 정몽주선생묘와 저헌 이석형묘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산3 (능곡로
  45)



 

♠  정몽주를 배향한 오래된 서원 - 충렬서원(忠烈書院)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호

느티나무와 효자비를 둘러보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충렬서원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한다. 그
의 지시를 따라 오른쪽 골목길(충렬로)로 3분 정도 들어가면 그 끝 양지바른 곳에 충렬서원이
자리해 있다.

충렬서원은 1576년 이계(李棨)를 비롯한 지역 유림들이 용인에 잠든 정몽주와 조광조(趙光祖)
를 배향하고자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역 중간인 죽전(용인 수지구 죽전동)에 세운 것으로 처음
에는 죽전서원(竹田書院)이라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5년 경기도관찰사 이정구(李廷龜)가 용인현감 정종전(鄭從善) 등
과 협의하여 정몽주묘와 가까운 곳에 서원을 중건했다. 공사는 무려 3년이 걸렸으며, 사우 3
칸과 동/서재 2칸, 문루 3칸을 지어 구색을 맞추었고, 조광조의 위패를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으로 옮기면서 완전히 정몽주를 위한 서원이 되었다.

1609년 광해군은 충렬(忠烈)이란 사액을 내려 이때부터 충렬서원이라 불렸으며, 설곡 정보와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을 추가로 배향했다. 1706년 정몽주의 후손인 정제두(鄭齊斗)와 정
찬조(鄭纘祖) 등이 유림의 협조를 받아 옛터에서 조금 서쪽인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정리 사업으로 철거되었으며, 1911년 유림에서 사우를
복원하고, 1956년 강당(講堂)을 복원했다. 또한 1972년 사당을 전면 보수하고 강당과 내삼문
(內三門)을 중건했으며, 1975년 홍살문과 외삼문(外三門)을 만들었다.

이 서원의 특징이라면 교육보다는 제사의 기능을 더 강조했다는 것이다. 강당을 앞에 두고 사
당을 뒤에 두는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제사를 지낼 때는 강당까지 몽땅 제사와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  차갑게 생긴 붉은 피부의 홍살문

▲  굳게 입을 닫은 외삼문

▲  많이 한가해진 강당

▲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당

이곳은 속세에 활짝 문을 열고 있으나 내가 갔을 때는 서원 내부 사정으로 태극마크가 그려진
내삼문은 굳게 입을 닫고 있었다. 하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돌담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보
는 선에서 서원과의 인연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정몽주묘역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충렬서원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118-1 (충렬로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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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산 자락에 넓게 깃들여진 달달한 시민공원, 강북구 북서울꿈의숲 <창녕위궁재사, 월영지, 청운답원,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북서울꿈의숲 늦가을 산책



' 북서울꿈의숲 가을 나들이 '

북서울꿈의숲 청운답원

▲  북서울꿈의숲 청운답원

창녕위궁재사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옥상정원

▲  창녕위궁재사

▲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옥상정원

 



 

가을이 깊어가던 10월의 한복판에 강북구 번동(樊洞)에 위치한 '북서울꿈의숲'을 찾았다.
북서울꿈의숲은 집에서 겨우 6km 거리로 아주 가까운 곳이나 그곳은 이상하게도 몸과 마
음이 썩 흥미를 보이지 않아 오랜 세월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었다. 하여 이번에 그곳
을 미답처 목록에서 싹싹 지우고자 햇님이 중천에 걸린 14시에 집을 나섰다.



 

♠  북서울꿈의숲 입문 (창녕위궁재사)

▲  '북서울꿈의숲' 마크

북서울꿈의숲(이하 '북서울숲')은 강북구 번동과 미아동(彌阿洞) 일부에 걸쳐있는 너른 공원
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두 귀에 생생한 '드림랜드'란 서울 북부 최대의 테마파크가 뿌리를 내
려 왕성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2008년 문을 닫았다. 하여 서울시가 인수하여 1년에 걸친
손질 끝에 2009년 10월 시립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공원 이름은 드림랜드의 분위기를 잇는다는 뜻에서 '드림(Dream)'의 우리말인 '꿈'을 취했으
며, 서울 북부권에 자리해 있어 부르기 좋게 '북서울꿈의숲'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공원 면적은 684,157㎡로 서울에서 월드컵공원, 올림픽공원, 서울숲에 이어 4번째로 큰 공원
이다. 월영지와 초화원, 칠폭지, 허브정원, 사슴장 등 자연 중심의 다양한 공간을 담고 있으
며, 꿈의아트센터와 상상톡톡미술관, 숲속문화전시장 등의 공연장과 전시장도 아낌 없이 갖추
고 있다.
또한 청운답원이란 너른 풀밭도 지니고 있어 보기만 해도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며, 창녕위궁
재사란 늙은 한옥도 지니고 있어 고색의 멋도 잠시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오패산과 벽오산(碧
梧山) 자락에 자리한 탓에 울창한 숲도 지니고 있으며, 그 숲속에는 숲길과 여러 운동시설이
닦여져 동네 사람들의 발길도 빈번하다. 그래서 가족 나들이와 소풍, 모임, 산책, 데이트 명
소로 완전 만점급이다.

북서울숲 서남쪽 숲에는 이곳의 옛 주인인 창녕위 김병주와 복온공주의 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을 '공주능'이라 불렀으며, 버스정류장 이름 역시 '공주능'이었다. 허나 드림랜
드가 들어서면서 경기도 용인시로 무덤을 이전했고, 무덤을 관리하던 창녕위궁재사만 제자리
에 남게 되었다.
드림랜드는 가본 적은 없으나 수영장과 눈썰매장이 제법 유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허나 어
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공원 시설은 싹 사라지고 자연을 중심으로 한 상큼한 공간으로 다시금
태어나 드림랜드 몇 배 이상으로 왕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처음으로 발을 들인 북서울숲, 생각보다 크고 아름다운 모습에 놀랬고 볼거리도 꽤 넉넉하여
다시 놀랬으며, 산책로도 아주 그림 같았다. 이렇게 좋은 곳을 왜 이제서야 인연을 지었을까.
그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가지를 않았으니 그를 하찮게 봤던 내 안목이 정말로 쓰레기였음
을 실감한다. 또한 앞으로 등장 밑도 잘 살펴봐야 되겠다. 등잔 밑에 은근히 월척거리가 많으
니 말이다.

북서울숲은 무료 자유 공간으로 미술관 등 건물을 제외하면 관람시간에 제한은 없다. 접근은
옛 드림랜드 정문이었던 동문(북서울꿈의숲 동문교차로)과 후문이었던 서문에서 접근하면 되
며, 그 외에 동네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소소한 접근로가 10여 개가 있다.


▲  칠폭지(七瀑池)

북서울숲 동문으로 들어서니 칠폭지란 생태연못이 마중을 한다. 이름 그대로 7개의 폭포를 지
닌 연못으로 경사를 이용한 물길 위에 9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다. 옛 드림랜드의 흔적인 풍화
암 주변에 억새와 자작나무길이 닦여졌고, 다양한 수생식물들이 수북히 자라나 서로를 의지한
다. 또한 분수대도 지니고 있는데, 5월부터 9월까지만 짧게 몸을 푼다. (비가 오면 자동으로
분수 가동이 정지됨)


▲  긴 방학에 들어간 칠폭지 분수대와 그 너머로 보이는 방문자센터

▲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 안채와 제사를 위한
제청(오른쪽에 삐죽 나온 부분)


방문자센터 서쪽에는 고색이 깃든 한옥이 있다. 얼핏 보면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장식용 한
옥처럼 여길 수 있으나 그는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이자 북서울숲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창녕위
궁재사이니 여로(旅路)를 살찌울 겸, 꼭 둘러보기 바란다.

이름도 긴 이곳은 순조(純祖, 재위 1800~1831)의 둘째 딸인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와
공주의 남편인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 1819~1853)의 묘를 관리하고 제를 지내던 재사(
齋舍)이다. 건물 이름에 무려 '궁(宮)'이 쓰인 것은 공주 부부의 재사라 그런 것인데, 지금은
비록 다른 곳으로 갔지만 서남쪽 산자락에 그들의 무덤이 있었으며, 재사이긴 하나 서울 시내
와 가까워 살림집도 겸하고 있었다.

공주묘의 재실이라 왕실에서 내린 좋은 재료로 지어졌으며, 사랑채와 안채, 대문채, 아래채를
지니고 있었다. 안채는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집으로 그 날개채에 제사 공간인 4칸 반 규모의
제청(祭廳)이 딸려있다. 제청이 사랑채가 아닌 안채에 딸린 것은 거의 흔치가 않은데 6.25 때
아래채와 함께 파괴된 것을 1955년에 재건했으나 아래채는 다시 일으키지 못해 사랑채와 안채
, 대문채만 남게 되었다.

안채 옆에 자리한 사랑채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건물로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彈琴臺) 전
투를 신나게 말아먹은 신립(申砬)의 아들, 충익공 신경진(忠翼公 申景禛)의 별장에서 가져왔
다고 전한다. 안채와 나란히 자리해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1910년 김병주의
손자인 김석진(金奭鎭, 1847~1910)이 경술국치(庚戌國恥)에 격분하여 자결한 곳으로 널리 알
려져 있다. <그때 고약한 왜정(倭政)은 김석진에게 남작 작위를 주며 회유하려고 했음>

창녕위궁재사는 조선 후기 재사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고 김석진이 자결한 현장으로
가 등록문화재 40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복온공주 부부묘는 드림랜드 건설로 용인 지역
으로 자리를 떴지만 재사는 제자리를 지켜 이곳의 옛 이야기를 붙잡고 있다.
재사 관람은 가능하나 사랑채와 안채 내부는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 있어 뜨락과 건물 외부만
살펴야 되며, 9시부터 18시까지만 발을 들일 수 있다. 그리고 재사 서쪽과 뒷쪽으로 대나무가
무성하여 깊은 숲에 묻힌 별서(別墅)에 들어선 기분까지 선사한다.

▲  활짝 열린 대문과 대문채 (바깥쪽)

▲  대문과 대문채 (안쪽)
대문채는 하인들의 생활공간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안채와 그 안채를 가리고 있는 소나무
소나무 자리에는 6.25 때 쓰러진 아래채가 있었다. 그의 빈자리를
잘생긴 소나무가 조금이나마 채워준다.

▲  창녕위궁재사 사랑채
안채와 비슷한 'ㄱ' 구조의 건물로 다른 곳(신경진의 별서로 여겨짐)에서
가져와 사랑채로 삼았다.

▲  사랑채 마루

▲  우수에 잠긴 사랑채 뒤쪽 굴뚝


▲  사랑채 주변에 옹기종기 모인 주춧돌들
고색이 깃든 주춧돌의 높이가 어느 정도 있어 옛 안채와 아래채 것들로 여겨진다.
이제는 받쳐들 상대를 상실하여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 뒤쪽에 짙게 우거진 대나무숲
살랑거리는 가을 바람에 대나무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  창녕위궁재사의 서쪽 협문과 키 작은 돌담

▲  낮은 돌담 너머로 바라본 창녕위궁재사
(왼쪽이 사랑채, 오른쪽이 안채 부분)

▲  이야기정원 대나무숲길

창녕위궁재사 서쪽과 남쪽에는 이야기정원이 닦여져 있다. 월영지까지 경사지를 활용하여 닦
여진 것으로 대나무숲과 전통화계정원(꽃계단정원), 사랑마당 등이 있으며, 특히 창녕위궁재
사 바로 옆구리에 펼쳐진 대나무 숲길이 백미(白眉)로 비록 거리는 짧지만 이곳을 거닐면 대
나무 관광지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담양 죽녹원이 크게 부럽지가 않다.



 

♠  북서울꿈의숲 월영지, 청운답원 주변

▲  월영지(月影池)

북서울숲 한복판에는 월영지란 너른 수면 공간이 있다. 전통정원 분위기로 조성된 호수와 같
은 큰 연못으로 월영지란 이름 그대로 달 그림자가 수면에 비춘다. 달님뿐만 아니라 햇님과
구름, 벽오산과 나무들까지 모두 거울로 삼아 매뭇새를 다듬는 상큼한 못으로 주변에 월영대
(月影臺), 월광폭포, 월광대, 애월정 등 달과 관련된 이름으로 도배된 명소가 늘어서 있으며,
물속에서 자라는 낙우송(落羽松) 군락지와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 못은 둥글고 섬은 네모난
모습)의 연지(蓮池), 매화가 있는 매대(梅臺) 등이 있다.
이곳도 칠폭지처럼 분수를 품고 있는데, 5월부터 9월까지만 짧게 몸을 푼다. (비가 오면 자동
으로 분수 가동이 정지됨)


▲  애월정(愛月亭)과 월광대(月光臺), 월영지 일대

▲  월영지의 화려한 입술, 애월정

월영지 북쪽 월광대에 자리한 애월정은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이다. 연못 이름이 월영지라 정
자 또한 달을 사랑하는 이름의 애월정으로 이곳의 운치를 아름답게 돋구는 장식물이다. 정자
에 앉아 월영지와 벽오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누리고 있으면 정말 세상 시름이 절로 잊혀진
다. 물론 잠깐이긴 하지만.

▲  품격이 느껴지는 애월정 현판의 위엄

▲  애월정에서 바라본 월영지와 벽오산


▲  북서울숲의 너른 들판, 청운답원(淸雲踏圓) <남쪽에서 본 모습>

월영지와 창포원 사이로 청운답원이라 불리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완만한 경사의 풀
밭으로 대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넓은 초원을 보기가 참 쉽지가 않은데 돗자리를 펴고 김밥과
도시락을 까먹거나, 수다를 떨거나, 모임이나 놀이를 하거나. 한숨 자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
다.
단 그늘이 없는 것이 흠이라 여름과 햇살이 크게 흥분했을 때는 피해야 된다. 또한 들쥐와 진
드기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존재들도 있을 수 있으므로 풀밭에 그냥 앉거나 벌러덩 눕는 것은
피해야 된다.


▲  북쪽에서 바라본 청운답원

▲  도심 속의 푸른 초원, 청운답원의 위엄
공원 너머로 보이는 회색 도시는 장위동과 석관동 지역으로 저 멀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상상톡톡미술관

청운답원 북쪽에는 이름도 톡톡 튀는 상상톡톡미술관이 있다. 꿈의숲 아트센터에 있는 미술관
을 새로 손질한 2층 규모의 어린이와 어린이 동반 가족을 위한 이색미술관으로 어린이들이 미
술과 함께 자연을 직접 체험하며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이 이곳의 목적이다. 그러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객들은 꼭 들려서 자녀들의 창의력과 상상력 경험치를 조금씩 높
여주기 바란다.

이곳은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식물 캐릭터와 숲을 형상
화한 계단, 파이프를 이용하여 만든 난간 등 그들이 흥미를 보일 수 있도록 독특한 인테리어
로 꾸며져 있으며, 작은 전시실 3개와 옥상 야외까페를 지니고 있다. 또한 가족 관람객을 위
해 휴게실과 수유실을 지니고 있으며, 어린이들의 공간은 모두 친환경 소재로 만들었다.
(이곳은 미술관의 특성상 굳이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음)


▲  서쪽에서 바라본 청운답원과 상상톡톡미술관

▲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와 전망대(오른쪽에 붕 떠있는 건물)

벽오산 정상과 가까운 북서울숲 북서쪽 산자락에 북서울드림스튜디오와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이하 꿈의숲아트센터), 전망대가 몰려있다.
스튜디오는 언제든 공개 방송이 가능한 라디오 방송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디지털라디오 방
송시스템을 지녀 양질의 방송 품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꿈의숲아트센터는 스튜디
오 132㎡(조정실 16.5㎡ 포함)와 방청석, MC석, 조정실 등을 지니고 있으며 이곳은 드림랜드
시절에 눈썰매장이 있던 곳으로 눈썰매장 지형 형태를 활용해 다졌다.
또한 옥상에는 들꽃을 가득 머금은 옥상공원이 닦여져 상큼한 볼거리를 선사하는데, 옥상이라
고 해서 꼭 건물을 거칠 필요는 없으며, 건물 옆에 벽오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어 그 길로 접
근하면 된다. 그리고 아트센터 서쪽으로 허공에 떠있는듯한 건물이 있는데, 그는 북서울숲의
지붕인 전망대이다.


▲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옥상공원

옥상공원(옥상정원)은 2009년 10월에 조성된 것으로 구절초 등 들꽃 11종, 단풍철쭉 외 7종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들꽃들의 보금자리이다. 면적은 590㎡로 의자 등의 쉼터도 마련되어 있
으며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하다.


▲  해맑게 웃고 있는 가녀린 구절초들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너무 비슷하게 생겨먹어 나 같은 돌머리들은
자주 햇갈린다. (내 머리가 나쁜 것을 어찌하누?)

▲  꿈의숲아트센터 옥상공원에서 바라본 오패산과 북한산(삼각산)

▲  꿈의숲아트센터 옥상공원에서 바라본 번동과 수락산(水落山)

▲  꿈의숲아트센터 옥상정원에서 바라본 청운답원과 상상톡톡미술관



 

♠  북서울꿈의숲 전망대와 벽오산(碧梧山)

▲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전망대 (옥상공원에서 바라본 모습)

북서울숲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전망대가 있다. 건물이 일직선이 아닌 크게 비스듬한
모습으로 1층에서 거의 30도 기울어진 길쭉한 부분을 계단이나 경사식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그 끝에서 일직선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타고 꼭대기 전망대로 올라가는 방식이다. 그 모습이
공룡이나 큰 동물이 웅크리고 앉아 긴 목을 길게 쳐든 모습으로 비스듬한 부분 끝에 매달린
전망대는 그것을 받치는 기둥 같은 것이 없어 한편으로는 아찔하면서도 신기하다.

전망대 높이는 49.7m로 면적 860.27㎡, 연면적 1,173.26㎡의 철근철골콘크리트 건물이다. 꼭
대기 3층에는 360도 조망이 가능한 까페가 있으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 동북부(도봉구, 강
북구, 노원구, 성북구)와 동부(중랑구, 동대문구)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아차산 산줄기가 거침없이 바라보여 조망도 꽤 일품이다. 그러니 북서울숲에 왔다면 이곳까지
꼭 들려서 일품 조망을 누려보기 바란다. 입장료는 없으며, 까페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누
리며 천하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서울 야경(夜景) 구경이 백미이다.

▲  전망대로 올라가는 경사식 엘리베이터

▲  크게 비스듬한 부분 끝에 매달린
전망대의 아찔한 위엄


▲  단출한 모습의 전망대 까페 3층
까페에서는 커피 등의 음료를 팔고 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 산줄기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도봉산(왼쪽 산)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수락산(오른쪽 산)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과 불암산이고, 그 앞에 길게 누운 산이
조선시대 서울 근교 공동묘지인 초안산(楚安山)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수락산(왼쪽 끝)과 불암산, 노원구, 중랑구, 장위동 지역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⑤
장위동과 석관동, 성북구, 중랑구, 동대문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⑥
바로 앞에서 시야를 방해하는 뫼가 벽오산이다. 그 뒷쪽으로 장위동, 석관동,
중랑구, 동대문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가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전망대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계단길 (오른쪽이 계단식 엘리베이터)
전망대로 올라갈 때는 엘리베이터, 내려갈 때는 계단을 이용했다.

▲  벽오산 숲길

북서울숲을 품고 있는 산은 오패산(123m)과 벽오산(135m)이다. 이들을 같은 뫼로 보기도 하나
보통 북서울숲 북쪽이자 미아역 동쪽 뫼를 오패산, 북서울숲 서남쪽 뫼(전망대가 있는 뫼)를
벽오산이라 구분 짓기도 한다.
벽오산은 매봉산, 빡빡산이라 불리기도 하며, 철종(哲宗, 재위 1849~1863)의 왕비인 철인왕후
(哲仁王后) 김씨가 복온공주의 손자인 김석진에게 '벽오산' 3자를 친필로 써주기도 했다. 이
는 벽오산에 복온공주 부부의 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거 외에는 딱히 옛 이야기는 없다.

전망대 바로 서남쪽에 벽오산의 싱그러운 숲이 펼쳐져 있는데, 숲속에 그어진 숲길(남측순환
로)을 따라 북서울숲 동문까지 이동이 가능하다. 경사는 느긋한 편이며, 숲이 매우 짙어서 햇
살이 들어오기가 힘들다. 중간중간 미아동 동네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나 처음 인연을 짓는 뫼
라 혹시 숨겨진 꿀단지가 있을까 싶어 동문까지 싹 살펴보기로 했다.


▲  벽오산 서쪽 자락에 있는 네모난 정자
미아4거리 방향인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미아동과 삼양동,
길음동, 종암동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벽오산에서 만난 이름없는 샘터
이곳 약수는 철뚜껑을 열어 바가지로 떠마시는 형태로 수질 검사 안내문이
없어서 굳이 마시지는 않았다. (안 마시는 것이 좋을 듯)

▲  벽오산 남쪽 자락에서 바라본 일몰 풍경
(장위동과 석관동, 동대문구, 중랑구, 아차산)

▲  벽오산 남쪽 자락에서 만난 주름진 큰 바위
주름선이 범상치 않은 크고 견고한 바위로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아직 없다.
이 조그만 산에 이런 큰 바위가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숲에 완전히 파묻힌 벽오산 남쪽 오솔길

이 부근에 벽오산의 옛 주인이던 복온공주와 창녕위 김병주의 묘가 있었다. 드림랜드가 아니
었다면 이곳에 계속 눌러앉아 북서울숲의 문화유산을 1개 늘려주었을 텐데, 이미 떠나간 그들
의 빈자리가 무척 아쉽기만 하다.


▲  칠폭지 서쪽 숲길

벽오산 남쪽 숲길의 끝에 낯익은 곳이 마중을 나온다. 바로 북서울숲 나들이를 시작했던 칠폭
지이다.
시간은 어느덧 18시, 낮 근무인 햇님은 퇴근 준비를 서두르고 야간 근무인 달님이 세상을 인
계 받는다. 비록 초화원 등 놓친 곳이 여럿 있으나 땅꺼미도 짙어지고 몸도 피곤하여 무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우리집과도 가까우니 봄이나 다음 늦가을에 다시 인연을 지으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북서울꿈의숲 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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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1급 성지를 찾아서, 의성 빙계계곡 <빙계군립공원, 풍혈, 빙혈, 빙산사지5층석탑>

의성 빙계계곡 (빙혈, 풍혈)



~~~~~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의성 빙계계곡 ~~~~~
빙계계곡 빙혈
▲  빙계계곡 빙혈
 



 

반년 가까이 세상을 지배했던 욕심꾸러기 겨울과 천하만물의 격렬한 호응을 받으며 새
로 일어선 봄이 천하를 두고 막판 자웅을 겨루던 3월의 한복판에 피서의 성지(聖地)로
유명한 의성 빙계계곡을 찾았다.

아침 일찍 일행들과 서울을 출발하여 충북의 여러 지역(진천, 보은, 영동)을 둘러보고
오후 늦게 경북으로 넘어와 어느덧 의성(義城) 땅에 이르렀다. 의성에서는 빙계계곡과
그곳에 서린 풍혈, 빙혈을 보고자 함으로 그곳에 도착하니 어느덧 18시이다.



 

♠  빙혈과 풍혈을 품은 의성 제일의 경승지,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의성 빙계계곡(氷溪溪谷) (빙계리 얼음골)

▲  빙계계곡 상류 ①

의성 빙계계곡은 이미 20여 년 전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다. 그때 빙혈과 풍혈, 빙산사지5층
석탑을 둘러보았는데, 그들은 계곡 중간인 빙산(氷山) 밑에 숨겨져 있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찾은 탓에 그들의 위치를 놓쳐 그만 계곡 상류까지 들어가버렸다. 허나 그렇게 멀리 들어온
것은 아니라서 왔던 길로 600m 정도 되돌아나가면 바로 빙혈/풍혈 입구이다.

기왕 상류까지 들어온 거 잠시 차에서 내려 상류의 깨끗한 공기도 마셔볼 겸 주변 풍경을 살
폈다. 겨울과 봄이 3월 내내 천하를 두고 다투느라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 계곡 물은 별로
없었지만 벼랑과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소나무가 우거져 그윽하게 경치를 자아내
고 있다. 그렇다면 빙계계곡은 어떤 곳일까?

빙계계곡은 말그대로 얼음 계곡이다. 밀양(密陽)의 얼음골과 비슷한 곳으로 빙계리 얼음골이
라 불리기도 하며, 대자연이 빚은 얼음 구멍과 바람 구멍이 있어 계곡 북쪽 산을 얼음산, 즉
빙산(氷山)이라 부르고, 그 곁을 흐르는 계곡을 빙계(빙계계곡, 빙계천)라고 한다.
예로부터 의성 제일의 경승지로 빙혈과 풍혈, 인암(仁岩), 의각(義閣), 수대(水碓, 물레방아)
, 빙산사지 5층석탑, 불정(佛頂, 불정봉 정상), 용추(龍湫)(용소) 등 8곳의 명소가 서려 있는
데,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 빙계8경이라 부르며, 그들 중 갑(甲)은 이곳의 얼굴이자 상징인
빙혈과 풍혈이다. 그들이 있기에 빙계계곡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 빙혈과 풍혈이 시원하게 막을 치고 있는 곳에 빙산사터가 있고, 계곡 입구에는 빙계서원이
있으며, 빙혈 부근에는 도교 사당인 태일전이 있어 승려와 선비, 도교(道敎) 신봉자들도 이곳
에 적지 않게 군침을 흘렸음을 보여준다. 그만큼 이곳은 자연이 의성 땅에 내린 특별한 선물
이다.


▲  빙계계곡 상류 ②
소나무와 벼랑, 맑은 계곡이 조화를 이루며 착한 경치를 자아낸다.


빙계 일대는 왜정 때 경북8승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으며, 여름만 되면 많은 피서객들이 몰려
와 북새통을 이룬다. 하여 의성군에서는 계곡 일대를 '빙계군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길을 정비
하고 오토캠핑장과 여러 편의시설을 닦는 등 특별히 애지중지하고 있다.

얼음과 서늘한 바람, 그리고 계곡이 한데 어우러진 피서의 완벽한 성지로 무더위에 대한 방어
력이 아주 삼엄하여 제아무리 여름 제국이라고 해도 그 방어선은 뚫지 못한다. 그러니 이곳에
서만큼은 여름 두 자를 잊어도 좋다. 빙혈과 풍혈에서 시원한 바람을 실컷 맞고 (대신 얼음은
건드리지 말자~!) 계곡에서 물놀이로 몸을 풀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꿀피서를 즐길 수 있다.


▲  누런 갈대가 덥수룩하게 자라고 있는 빙계계곡
갈대 너머로 보이는 집들 뒷쪽에 빙혈과 풍혈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  빙계계곡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 (용추 동쪽)

▲  용추 위에 걸린 구름다리

▲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용추와 빙계계곡 중류
빙계계곡에서 가장 풍경이 일품인 곳은 구름다리 주변 용추(용소)이다.
용추는 두 벼랑 사이에 자리한 깊은 못으로 나무와 해, 달 등이
그를 맑은 거울로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경북팔승 기념비<경북팔승지일(慶北八勝之一) 비석>
왜정 시절 빙계계곡이 경북8승의 하나로 크게 추앙을 받자 이를 기리고자
1934년 9월 24일에 세운 비석이다. (비석 옆면에 왜왕 연호인
소화9년 어쩌구 글씨가 있음)

▲  빙산사지(氷山寺址) 5층석탑 - 보물 327호

용추 구름다리 맞은편에 빙혈, 풍혈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들어서면 경북8승 기념비
가 나오고 그 뒷쪽에 너른 공터와 맵시가 좋은 석탑 하나가 진하게 눈짓을 보낸다. 그가 바로
빙계계곡의 오랜 유물인 빙산사지5층석탑이다.

이 탑은 돌을 벽돌 크기로 다듬어서 빚은 모전탑(模塼塔)으로 근처에 있는 탑리(塔里)5층석탑
을 모델로 하여 지었다고 한다. 비록 탑리 탑에는 미치지 못하나 나름 잘생긴 탑으로 신라 후
기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16개의 돌로 이루어진 바닥돌을 밑에 깔고 그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올린 다음 5층의 탑돌
을 얹힌 것으로 높이는 8.15m, 바닥돌 폭 4.06m이다. 1층 탑돌은 네 모서리에 각각 다른 돌로
모서리 기둥을 세우고 정면(남쪽)에 네모나게 홈을 판 감실(龕室)을 두었는데, 이곳에는 불상
을 봉안했다. 그리고 2층 이상부터 몸돌은 그 높이가 1층에 비해 절반 이상 줄어 적당하게 체
감률을 선보이고 있으며. 탑 머리에는 머리장식인 노반(露盤)이 남아있다.

지금은 이렇게 정정한 모습이지만 한때 탑의 건강 상태가 매우 심각하여 1973년에 탑을 해체
하여 복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3층 옥개석(屋蓋石)에서 석함(石函)이 나왔는데, 그 안에서
금동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그로 인해 탑의 존재와 가치가 한층 높아졌으며, 그 사리장치는
멀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빙산사지 5층석탑

▲  1층 탑돌에 있는 감실

이곳에 둥지를 틀며 5층석탑을 품고 있던 빙산사(氷山寺)는 신라 중기나 후기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진다. 허나 자세한 사적(事績)은 전하지 없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때 석탑 1층 감실에 있던 불상이 사라졌다고 하며 그가 앉아있던 좌대만 남아 빙혈 옆에 따
로 놓여져 있다.

절터의 범위는 경북8승 비석부터 빙혈까지로 보이며, 빙혈에는 도교의 태일<태일성(太一星)>
에게 제를 지내던 태일전(太一殿)이 있었다고 전한다. 건물이 꽤나 있었을 절은 잔디와 잡초
밭으로 그림이 180도 바뀌어 세월무상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으며, 5층석탑과 건물터, 주춧
돌만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언제 지어지고 무슨 사연이 깃든 절인지는 낸들 알 도리는 없으나 이곳을 완전 뒤집어 본다면
빙산사의 비밀이 조금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곳은 풍혈과 빙혈이 때에 따라 불어주는 시원한 바람과 따스한 바람이 늘 깃들여져 든든하
게 막을 형성해주니 그야말로 4계절 모두 살기가 좋은 곳이다. 하여 그들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지었던 모양이다.

* 빙산사지5층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산70


▲  잡초만 무성한 빙산사터 (탑 남쪽)

▲  대자연과 세월에 의해 무심히 헝클어진 빙산사터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과 얼음이, 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나오는
신비로운 현장, 빙계리 얼음골(빙혈, 풍혈) - 천연기념물 527호

▲  빙혈(氷穴)

빙산사터를 지나면 빙계계곡의 얼굴인 풍혈과 빙혈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한여름에는 시
원한 바람과 얼음을 내뿜고, 한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나온다는 그 신비의 현장으로 바깥 세
상과는 완전히 반대로 논다. 즉 바깥이 여름이면 속살은 겨울이나 늦가을이고, 바깥이 겨울이
면 속살은 늦봄이나 여름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들 주변을 보면 암괴(巖塊)들이 많다. 암괴
틈에 저장된 차가운 공기가 여름에 외부의 더운 공기와 만나 물방울과 얼음이 만들어지는데,
보통 입춘(立春) 무렵부터 찬 기운이 돌기 시작하여 하지 무렵까지 얼음이 언다. 그러다가 입
추(立秋)부터 얼음이 녹기 시작해 동지 무렵에는 훈훈한 기운이 감돈다.
이처럼 계절을 거역한 대자연의 신묘한 장난이 일어나는 곳은 밀양 얼음골과 진안(鎭安)의 풍
혈냉천(風穴冷泉) 정도가 고작으로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하다. 솔직히 너무 많으면 좀 의미가
없겠지. 그만큼 개체수가 적어야 이들 명소도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법이다.

▲  빙혈로 인도하는 문

▲  빙혈 내부에 걸린 태을영부 부적 돌판

빙혈은 폭 1.5m, 높이 2m, 길이 4.5m의 자연산 굴로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이곳
에서 수행을 했다고 전한다. 그때 이곳은 빙산원(氷山院)이라 불렸는데, 그의 부인인 요석공
주(瑤石公主, 무열왕의 딸)가 그를 보러 여기까지 왔다고 하며, 굴이 얼마나 깊던지 그 끝이
저승에 닿았다는 전설도 있다.

자연 상태로 있던 빙혈은 20세기 후반에 윗사진처럼 크게 손질되었는데, 인간들이 요란하게
손을 댄 탓에 얼음이 어는 것이 예전만은 못한 실정이다. 그래도 그런데로 얼음이 얼고는 있
으니 입춘 이후와 하지(夏至) 사이에 가면 꿈틀거리는 얼음을 만날 수 있다.

옛날 이곳에는 도교 사당인 태일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다보니 빙혈 내부에 '태을영부(太
乙靈符)'라는 도교 스타일의 부적 돌판을 달아서 없어진 태일전을 기리고 있는데, 태을영부란
'선한 사람은 흥하고, 악한 사람은 망하며, 다른 이들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은 살고, 손해를
끼치면 죽는다'는 내용이다. 허나 이 땅에서는 그 반대로 놀아야 흥하고 잘사니 부적의 내용
도 참 의미가 없어 보인다.


▲  얼음이 꿈틀거리는 빙혈 내부

빙혈의 속살로 들어서니 서늘한 바람이 우리를 엄습한다. 여름 제국 시절에 왔더라면 그 바람
이 참 반가웠을텐데, 3월에 왔으니 '그냥 찬 바람이구나~!' 로 감흥은 끝난다.
빙혈 안쪽에 얼음의 공간이 있는데 유리막으로 봉해져 있다. 바로 거기서 찬 바람이 나오며,
얼음 또한 꿈틀거린다. 우리가 갔을 당시는 시기가 좀 이른 탓에 얼음은 별로 없었다.

관람객들은 유리막 앞까지만 진입이 가능하며 내부는 들어갈 수 없다. 아니 빙혈의 보호를 위
해 들어가서는 절대로 안된다. 자꾸 인간들이 손과 발을 대다가는 빙혈도 발끈하여 신비의 현
상을 더 이상 못 보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  빙혈 문 옆에 깃든 글씨들
빙혈을 찬양하고 부처와 상제(上帝),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착하게 살 것을
권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빙계서원은 빙계계곡 하류에 있다.

▲  빙산사지5층석탑 감실 불좌대(佛座臺)

빙혈 옆에는 5층석탑 감실에서 가져온 불좌대가 가로로 뉘어져 있다. 임진왜란 때 빙산사가
파괴되고 감실에 있던 불상(금동불)이 사라지자 지역 사람들이 불상이 앉아있던 네모난 불좌
대를 이곳에 수습했는데, 세로로 눕히거나 절터에 두지 않고 빙혈 옆에 이렇게 가로로 뉘운
것이 꽤 이채롭다.


▲  풍혈(風穴)

빙혈과 빙산사지 사이에는 풍혈이 웅크리고 있다. 이곳은 한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한겨울
에는 따스한 바람이 부는 자연산 선풍기 겸 히터로 바위에 자연산 상태로 있던 것을 마치 석
실고분처럼 돌로 문을 내었다. 돌문 외에는 자연산 그대로로 푸른 이끼가 덥수룩하게 자라고
있어 이곳의 청정함을 보여준다.
풍혈에는 계절을 역행하는 바람 뿐 아니라 얼음도 존재하고 있어 빙혈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데, 문이 뚫려있으나 빙혈의 보호를 위해 절대 들어가면 안되며, 구멍 내부는 빙혈과 달리 좁
은 편이다.


▲  풍혈의 금지된 속살

▲  풍혈에서 꿈틀거리는 얼음

빙혈과 풍혈의 얼음은 입춘부터 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갔을 때가 3월 한복판이니 벌써부
터 저렇게 얼음이 숙성되었다. 얼음이 저리 크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올해는 무척이나 더울
것 같다.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존재들이지만 여름의 위세가 커야만 빙혈과 풍
혈도 제대로 몸을 푸니 여름과 빙혈/풍혈의 관계는 서로를 견제하면서 성장하는 사이이다.


▲  조그만 풍혈

풍혈 주변에는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바위 구멍이 여럿 있다. 앞서의 큰 풍혈이 어미 풍혈이
라면 나머지 조그만 바위 구멍들은 새끼 풍혈이라 할 수 있는데, 바위 사이에서 서늘한 바람
이 쏟아져 나와 여름 제국의 염통을 제대로 얼게 만든다.
비록 여름에 온 것은 아니지만 여름과 겨울 제국을 능히 굴복시키는 빙계계곡 얼음골의 위엄
앞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의 하나로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빙혈과 풍혈을 둘러보니 어느덧 시간은 19시가 되었다. 햇님은 그새 커텐을 치고 그만의 공간
으로 쏙 사라졌고 세상은 거의 검은 도화지로 물들어갔다.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나 충북의 여
러 지역을 거쳐 경북 의성의 빙계계곡까지 정말 배부른 나들이였다.

이렇게 바쁘게 보람찬 하루를 보내니 몸도 피곤하고 배도 고프다. 해도 졌으니 더 이상 답사
도 어려워 안동(安東)으로 바로 달려가 그곳의 명물인 안동찜닭에 곡차(穀茶) 1잔 겯드려 배
를 불리고 안동시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도 전날만큼이나 바쁜 답사 코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의성 빙계계곡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빙계계곡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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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그늘에 깃든 서울 도심의 꿀명소, 서촌~청운공원 나들이 <선희궁터, 옥류동 청휘각터, 백세청풍 바위글씨, 송강정철 집터>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옛 청휘각터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  옛 청휘각터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늦가을이 막바지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에 서울 도심의 꿀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는
서촌(西村, 웃대)을 찾았다.
서촌은 원래 서대문과 경희궁(慶熙宮) 주변을 일컬었고, 경복궁 서쪽 동네는 웃대라 불
렸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이들 지역은 서촌으로 합쳐졌다. 요즘에는 경복궁(
景福宮)과 인왕산(仁王山) 사이 지역을 서촌이라 크게 부르고 있으며, 세종이 1397년에
태어난 곳이라 해서 세종마을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서촌은 가까운 북촌(北村)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부암동과 더불어 나의 마음을 계
속해서 훔치고 있는 내 즐겨찾기 명소로 한때는 북촌처럼 구석구석 누비고 다녀 안가본
골목이 없을 정도이다. 허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다른 즐겨찾기 명소들이 생겨나면
서 조금은 시들어졌다.

늦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서촌 앓이가 다시금 도지면서 오래간만에 그곳을 찾았는데, 이
번에는 신교동과 옥인동, 청운동(淸雲洞)의 일부 명소들을 복습했다. (본글에서 선희궁
터와 백세청풍 바위글씨, 청운공원 일부는 늦여름에 담은 사진을 이용했음)


▲  백세청풍 바위글씨

▲  청운공원의 늦가을 풍경



 

♠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사묘(私廟), 선희궁터 사우(祠宇)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호

서촌 북부에 자리한 신교동(新橋洞)에는 국립서울농학교가 있다. 그 학교 교정에는 고색이 깃
든 기와집이 하나 숨겨져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옛 선희궁터의 사우이다.

선희궁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년)의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신주(神主)를 봉안했
던 왕실의 사묘<私廟, 사친묘(私親廟)라고도 함>이다. 사묘란 왕후(王后) 반열에 들지 못하거
나 추존되지 못한 제왕의 생모(生母)나 친할머니를 위해 지은 사당이다.

영빈이씨는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로 1764
년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아들을 죽인 자책감에 늘 괴로워하던 영조는 영빈에게 의열(義
烈)이란 시호를 내리고, 1765년 현재 자리에 사당을 지어 의열묘(義烈廟)라 했으며, 사도세자
의 아들인 정조(正祖)는 선희궁으로 이름을 높였다.

1870년 선희궁 신주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원위치시켰으며, 1908년 순종(純
宗)이 칙령(勅令)을 내려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묘(祠廟)을 대거 정리하면서 육상궁에 통합시
키고 선희궁은 사우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했다.
그 빈터에는 1931년 제생원(濟生院) 소속 맹아부(盲兒部)가 둥지를 틀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서울농학교와 서울맹학교의 전신이다.


▲  반지하처럼 살아가고 있는 옛 선희궁터 초석

신교동교차로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서울농학교로 다가서면 길 오른쪽(북쪽)에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듯, 콘크리트 밑에 깔린 길다란 석축(石築)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선희궁을
받치던 늙은 초석들로 지금은 그 위에 학교 운동장을 깔았다.


▲  왕실 사당으로써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은 선희궁터 사우

▲  벽돌로 3면을 두룬 선희궁 사우의 뒷모습

▲  화려한 단청이 눈을 부시게 하는 사우 내부
텅 빈 내부에는 부질없는 먼지만이 가득하다.


서울농학교 안쪽에 자리한 선희궁 사우는 툇마루를 갖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정면을 제외하고 모두 벽돌로 둘렀으며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무심한 세월의 때가
아낌없이 깃들여진 기단 위에 가지런히 들어앉아 나름대로 위엄과 기품을 드러내고 있지만 한
참 후배인 키다리 학교 건물 속에 파묻혀 오히려 초라하게 다가온다.

교정에는 옛 선희궁의 식구였던 늙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는 사우 부근에, 
느티나무는 학교 정문에 있는데 정문에 있는 느티나무는 나이가 250년이 넘었다. 250년이면
선희궁과 나이가 비슷하니 아마도 선희궁을 짓고 기념 식수로 심은 듯 싶으며, 높이 16m, 둘
레는 4.3m에 이른다. 사람들의 오랜 보살핌과 세월이란 마르지 않는 양분으로 나날이 커져가
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올해도 변함없이 교정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준다.


▲  신교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7호
학교 아이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며 삭막한 속세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희망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소중한 정자나무이다.


▲  200여 년 묵은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5호
앞의 느티나무와 달리 하늘로 곧게 솟아 늘씬한 자태를 뽐낸다.

▲  서울맹학교 정문과 우당기념관 앞에 자리한 잘생긴 은행나무
나이는 약 100년대로 여겨진다. 그가 걸쳤던 황금옷의 실타래가 풀어지면서
슬슬 앙상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그 모습이 한라산(漢拏山)과
덕유산 고지대에서 볼 수 있는 구상나무와 비슷해 보인다.


* 선희궁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1-1 서울농학교 내 (필운대로 103)



 

♠  서촌의 주요 명소였던 옛 청휘각(晴暉閣)터

▲  옥인동(玉仁洞) 산자락에 깃든 청휘각터(옥인동 산47번지)

서촌의 서부를 달리는 필운대로에서 옥인동 북서쪽 주택가를 가로질러 인왕산 자락으로 향하
면 자연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골목길(옥인5길)이 나온다. 길 동쪽은 서촌 주거지, 서쪽은
숲이 무성한 인왕산으로 서촌을 비롯한 서울 도심이 훤히 바라보이고, 인왕산 숲속이라 풍경
도 뛰어나 아름다운 절경만 보면 사죽을 못쓰던 옛날 사람들의 흔적이 반드시 있을 듯싶은데,
그 예상대로 청휘각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발길을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청휘각은 인왕산 동쪽 계곡의 하나인 옥류동(玉流洞)에 있던 정자이다. 그 옥류동은 인근 청
풍계와 수성동(水聲洞)과 더불어 혼란의 20세기를 거치면서 거의 생매장을 당해 약간의 시냇
물만 남아있는 정도로 개울은 거의 사라졌지만 숲은 여전하여 옛날의 경치를 조금 간직하고
있다.
청휘각이란 '비가 개인 뒤에 맑은 햇살이 비치는 누각'이란 시적(詩的)인 뜻이다.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이곳에 집을 짓고 그 후원에 지은 누정이 바
로 청휘각으로 겸재 정선은 장동 일대(청운동 지역)의 명소 8곳을 선정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청휘각 생전의 모습이 바로 그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정선이 아니었다면 청휘각의 생
김새조차 모를 뻔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청휘각

정선이 그린 청휘각 그림을 보면 청휘각 주변은 온통 소나무를 비롯한 숲과 개울 뿐이다. 정
자 밑에는 서촌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청휘각을 후원으로 삼았다는 김수항 집은 나와있
지 않아 그 집은 진작에 사라진 모양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으로 많은 문인(文人)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청휘각은 대중적인 명
소가 되었으며, 그렇게 착했던 청휘각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인왕산 산신(山神)도 모르는 실정
이나 20세기 초반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슬쩍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방과 6.25이
후 정자 밑까지 집들이 들어차 달동네처럼 변하면서 옥류동 계곡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허나
다행히도 청휘각 주변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아직 자연 지대를 유지하고 있어 청휘각 그림에
담긴 풍경의 절반 정도는 아직 유효하다.

청휘각은 서촌에 널린 소소한 명소에 불과하나 풍경만큼은 능히 갑(甲) 수준이다. 서촌의 조
그만 보탬도 줄 겸, 그리고 잃어버린 옛 경승지를 되찾는 차원에서 그림과 관련 자료를 참조
해 청휘각을 복원했으면 좋겠다. 골목길 밑을 제외하면 모두 숲이니 잃어버린 정자를 다시 일
으킬 공간도 충분하며, 숲과 계곡도 옛 모습 그대로 재현을 시킨다면 정말 금상첨화가 될 것
이다. 


▲  청휘각터로 인도하는 옥인5길 골목길
인왕산과 가까운 옥인동 윗동네는 아직 달동네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  인왕산과 서촌(웃대) 주거지의 경계를 가르는 옥인5길 골목길

▲  옥인동에서 바라본 청운동 주택가와 북악산(백악산)



 

♠  김상용(金尙容) 집터와 정철(鄭澈) 집터

▲  김상용 집터에 남아있는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글씨

서촌의 북쪽 끝을 잡고 있는 청운동은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사이에 포근히 자리해 있다.
예로부터 절경을 자랑하던 이곳에는 늙은 바위글씨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백세청풍 바위글씨다. 바위글씨란 바위에 새긴 글씨로 어려운 말로
각자(刻子)라고 하는데, 요즘은 순수 우리말인 바위글씨로 많이 불린다.

백세청풍 바위글씨는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새긴 것이다. 지금은 달랑 4자만 남아있지
만 원래는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 8글자로 앞의 4글자는 왜정 때 영구히 지워지고 말
았다.
또한 이들 글씨의 보금자리인 바위 위에 높게 석축을 쌓고 커다란 주택을 세우면서 석축에 제
대로 깔린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 형태가 완전히 사람 발에 깔린 개미 같다. 그나마 뒤늦
게나마 바위 앞에 철책을 둘러 보호에 나서고는 있으니 문화유산 보존에 야박한 이 땅의 현실
에서는 그것으로도 다행이다. 기분 같아서는 바위를 뭉개고 있는 집들과 석축을 말끔히 지워
버려 바위에게 자유를 주고 싶을 정도이다.

바위글씨의 주인공인 김상용은 1607년 이곳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변 풍경이 수려
해 청풍각(淸風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짓고 바위에 8글자를 새겼다. 그 연유로 이곳을 흐르던
계곡이 청풍계(淸風溪)라 불리게 되었으며, 청풍계와 인근 백운동(白雲洞)의 이름을 따서 지
금의 청운동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동(壯洞)이라 불림>
서촌의 경승지이자 서울 굴지의 명소로 찬양을 받았던 청풍계는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에
왜열도 재벌인 미쓰이(三井)가 이곳을 매입하여 건물을 지으면서 개념없이 마구 아작을 내기
시작했다. 졸졸졸~ 흐르던 개울을 생매장시키고 바위를 깨뜨렸으며, 계곡에 단 1채 남았던 옛
건물인 태고정(太古亭) 마저 인부들의 숙소로 유린하면서 끝내 밀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바
위글씨까지 손을 대어 글씨의 절반을 지워버렸다.

해방 이후 이곳에는 민가들이 들어차 청풍계가 다시 돌아올 여유도 주지 않았고, 졸부들의 저
택까지 백세청풍 바위에 깔고 앉으면서 이제는 전설 속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인왕제
색도(仁王霽色圖)를 남긴 겸재 정선이 청풍계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이나 했는지 이곳의 풍경
을 여러 장의 화폭에 담으면서 옛 모습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다만 김상용의 집은 정선의 그림에 나오지 않아 겸재 이전에 사라진 모양이며, 이제는 백세청
풍 바위글씨만이 겨우 남아 그의 집터임을 아련히 귀띔해줄 따름이다.


▲  가까이서 본 백세청풍 바위글씨
옛날 글씨는 왼쪽이 아닌 오른쪽부터 읽는다. 괜히 풍청세백이라 읽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자~
 

그럼 바위에 새겨진 백세청풍은 무슨 뜻일까? 백세(百世)는 100세대를 뜻한다. 대략 1세대를
30년으로 잡으니 무려 3,000년이 된다. 쉽게 말하면 오랜 세월을 뜻한다. 청풍에서 청(淸)은
맑고 높다는 뜻이고 풍(風)은 군자의 덕과 절개를 뜻한다. 그러니까 오래도록 부는 맑은 바람
, '영원토록 변치 않는 높은 선비의 절개','대대로 맑은 가풍을 유지한다'는 의미로 그 유명
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옛 조선(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고죽국(孤竹國) 사람들로 여기까지는 별 이상
은 없다. 김상용도 선비이자 양반이므로 그런 글귀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며, 양반들에게는
이상향과 같은 내용으로 그들이 자주 쓰던 글귀였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은 지워진 대명일월은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크고 밝은 해와 달이다. 그
것도 맞긴 하지만 여기서 대명(大明)은 조선이 자존심도 버리며 지극히 섬기고 받들던 명나라
를 뜻한다. 그러니 명나라의 해와 달, 즉 명나라의 세상을 의미하며, 거기에 백세청풍까지 더
하면 명나라에 대한 절개를 지키자는 뜻이 된다.
조선의 위정자들 상당수는 명나라를 '황명(皇明)','대명(大明)' 등이라 높여 불렀다. 게다가
조선의 정치 이념이자 선비와 사대부들이 익혔던 성리학(性理學)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성리학이 문치(文治)에는 좋을지 몰라도 문을 강조하고 무(武)를 멀리하는 함정이 있고, 주희
(朱熹)가 몽골 원나라에게 완전히 구겨진 한족(漢族) 잡종들의 체면을 만회하고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을 고취시키려는 의도로 만든 학문이다. 그러다보니 조선의 위정자와 사대부들은 점
점 명에 대한 꼴사나운 사대주의에 젖게 되고 국방까지 덩달아 등한시 하면서 명나라도 한때
두려워했고 툭하면 북방 세력(여진족 등)을 초토화시켰던 조선의 군사력은 크게 떨어진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 조금 도와준 것을 가지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이
라 떠벌리며 더욱 명나라에 딸랑거렸다.

그 명나라가 1644년 풍비박산이 났으니 조선의 선비와 위정자들은 완전 어버이를 잃은 양 크
나큰 충격에 빠졌다. 물론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도 명에 대한 그리
움에 한몫 했다. 명이 사라진 이후 조선 지배층과 유생들 사이에서 '명나라를 회복해야 된다'
,'명나라의 세월로 돌아가야 된다'는 아주 거지 같은 사상이 지배적으로 형성되었는데, 바로
그때 생겨난 단어가 바로 '대명일월' 4자이다. 그들의 꼴통 사대주의로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
들을 도탄에 밀어넣은 지배층과 유학자들의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이념이 담겨 있는 것
이다.

그런데 김상용이 글씨를 새긴 것은 명이 망하기 이전이므로 '대명일월'이란 단어는 아직 두드
러지지 않은 상태다. 그가 1637년에 죽었지만 그때까지도 명은 질기게 명줄을 유지하고 있었
다. 그러면 백세청풍은 몰라도 대명일월은 다른 사람이 새겼을 가능성이 큰데,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에서 자결한 김상용을 기리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뜻에
서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의 1
인자였던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는 말이 있다.


※ 김상용(1561~1637)은 누구인가?
김상용은 안동 김씨로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이다. 1590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
하여 검열관(檢閱官)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權慄)장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승지(承旨)가 되어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으며, 서인(西人)의 일원으로 대
사성(大司成)을 비롯, 여러 외직을 거쳤다. 1623년 서인패거리가 광해군(光海君)에게 반기를
들며 창의문을 뚫고 도성을 범하는 파렴치한 반란을 일으키자<인조반정(仁祖反正)> 거기에 참
여해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라는 큰 자리를 얻었으며,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
에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었다.

1630년 나이가 70살에 이르러 조정에 사직을 청했으나 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우
의정(右議政)에 임명했다. 드디어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그는 빈궁(嬪宮)과 원손(
元孫)을 호종하여 급히 강화도로 줄행랑을 쳤다. 허나 1637년 1월 청나라군이 강화해협을 건
너 손쉽게 강화성을 점령하자 그 분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남문 문루(門樓)에 화약을 잔뜩 쌓
아 불을 질러 자살했다.

그 당시로는 드물게 76살씩이나 살았던 인물로 자살을 택한 덕에 죽어서는 충신의 대접을 제
대로 받았다. 인조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강화군 선원면에 그의 사당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선원면이란 지명은 바로 그의 호에서 유래됨>


▲  송강 정철 집터

청운초등학교 앞 자하문로 길가에는 송강 정철의 집터를 알리는 표석과 그의 시가 담긴 시비(
詩碑)들이 줄지어 있다. 정철은 조선 가사문학(歌詞文學)의 1인자로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비
롯한 그의 작품들은 초,중,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아주 지겹도록 등장해 일명 학생들과
대입 수험생들의 적이라 불리기도 하며, 국문학사에서도 큰 무게를 가진 인물이다.

※ 송강 정철(1536~1593)은 누구인가?
정철은 연일정씨로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
청(文淸)이며, 기대승(奇大升)과 김인후(金麟厚)의 제자이다.
그는 맏누이가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고, 2째 누이가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이 되면서 궁
중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나중에 명종(明宗)이 되는 경원대군(慶原大君)과 친했다. 1545년 을
사사화(乙巳士禍) 때 계림군이 연관이 되자 정철 일가는 거의 풍비박산이 나고 정철 부자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1551년 유배에서 풀려나자 그의 일가는 집안의 고향인 담양 창평(昌平)으로 집을 옮겼다. 송
강은 형이 장가를 들어 살고 있는 순천에 가다가 우연히 김윤제(金允悌)의 별장(환벽당) 밑
창계천에서 목욕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었다.
(환벽당과 창계천 관련 글 ☞ 보러가기)
그는 여기서 10년 동안 공부를 했으며, 이때 기대승 등 당대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이
(李珥)와도 교유했다.

1561년 진사시(進士試)에 붙고, 1562년 별시(別試)에 장원으로 붙으면서 전적(典籍) 등을 역
임했으며, 1566년 함경도(咸鏡道)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8년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고 도승지(承旨)로 승진했다. 하지만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으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고, 3년 동안 전라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이때 그 유명한 관동별곡(關東別曲)이 탄생했으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그리고 1585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4년을 쉬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비롯한 굴지의 작품을 남겼다.

1589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곧 이어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직접 다스리
게 되면서 라이벌인 동인 세력을 철저히 때려잡았다. 그 공로로 1590년 좌의정(左議政)이 되
었다.
1591년 광해군을 세자(世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으나 당시 선조(宣祖)는 인빈(仁嬪)김씨 소
생의 신성군(信城君)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송강의 건의에 뚜껑이 뒤집힌 선조는 그를 진주
와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를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왕의 소환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했으며, 1593년 명나라
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다. 이후 동인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떨려나 강화 송정촌(松亭村)
에 머물다가 5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조선 가사문학의 상징으로 고산 윤선도(尹善道)와 쌍벽을 이루며, 작품으로는 시조 70수
가 전한다.


▲  송강의 시비 ①
산사야음(山寺夜吟)과 함흥객사에 핀 국화

산사야음(山寺夜吟)
우수수 지는 나뭇잎 소리를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
동자승 불러 나가보랬더니
시내앞 나뭇가지에 달만 걸렸네

▲  송강의 시비 ②
백성들 교화용으로 만든 훈민가

▲  송강의 시비 ③ 사미인곡
임금을 그리며 섬기는 마음을 담은 가사이다.

▲  송강의 시비 ④ 관동별곡

▲  송강의 시비 ⑤ 성산별곡(星山別曲)


* 백세청풍 바위글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52-111
* 정철 집터 표석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123



 

♠  인왕산 중턱에 깃든 상큼한 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중턱에 넓게 자리한 청운공원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
은 공원이다. <산 전체 또는 대부분이 공원으로 지정된 남산과 안산(鞍山), 낙산공원은 제외>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새로운 꿀단지를 북쪽에 달고 있는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으로 청운
동 주택가와도 약간 거리를 둔 자연 지대이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며, 자
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로 간판을 바꾸고 북악산(백악산) 뒷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
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려간다.

청운공원은 인왕산 품에 조성된 평범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
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
원 북쪽에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닦였으며, 2014년에 이 땅 최초의 한옥 공공
도서관인 청운문학도서관이 들어서 볼거리도 크게 늘었다.
또한 이곳은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며,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꽃이 울
창하여 봄꽃 명소, 늦가을 단풍 명소로 격하게 칭송을 받는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
로35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좀 각박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
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못미쳐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
과 수성동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르는 때라 나무들이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끼와 기력을 모두 발산한 나무
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
들. 인간은 그들을 통해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  고양이 같은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
만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
지, 너무 순둥이처럼 만들어서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우습게 봤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를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인왕산 돌아파트)'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
에서 주운 돌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청운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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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동대문구 천장산 연화사~청량사 (연화사에서 먹은 초파일 절밥)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회기동 연화사, 청량리 청량사)



' 부처님오신날 도심 사찰 나들이 ~ 동대문구 연화사, 청량사 '

천장산 연화사

▲  천장산 연화사

연화사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 청량사 동별당

▲  연화사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

▲  청량사 동별당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이 다가왔다. 그날만 되면
'석가탄신일 사찰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장안을 중심으
로 열심히 절 투어를 벌이고 있는데, 이번 초파일에는 예전에 1번 찾았던 연화사와 그 부
근에 미답(未踏)으로 버젓히 남아있던 청량사를 주메뉴로 정했다.
청량사는 연화사보다 더 오래된 절로 그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으나 나를 몸살 나게 만들
정도의 늙은 유물이 없어 계속 발걸음을 미루다가 이번에 그를 꺼내 들었다.

둥근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1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1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
에서 내려 경희대 옆에 자리한 회기동(回基洞) 연화사를 찾았다.



 

♠  경희대 그늘에 자리한 오래된 절,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 천장산 연화사(天藏山 蓮華寺)

▲  활짝 열린 연화사 일주문(一柱門)

경희대병원 서쪽에는 연화사란 조그만 절이 둥지를 틀고 있다. 천장산(141m) 남쪽 자락에 자
리한 이곳은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499년 폐비윤씨의 묘역인 회묘(懷墓)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회묘는 원래 경희대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어미를 위해 연산군은 1504년 회묘
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석물을 심고 회묘를 지키는 절을 세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화사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절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어미를 향한 연산군의 사무친 마음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덧없이 아작이 나버렸고
, 연산군 자신도 교동도(喬桐島)로 추방되어 바로 그해 겨울,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회
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어 방치되었으며, 절도 이때 풍비박산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반정파들은
연산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능인 의릉이 인근 석관동(石串洞
)에 터를 닦으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조(英祖)가 1725년에 절을 지어 의릉의 원찰로
삼은 것이다. 허나 그 원찰의 이름도 야속하게도 전하지 않는다.
1870년대에 이르러 승려 묘련(妙蓮)이 절을 중수했는데, 그는 성품이 좋아서 인기가 대단했다
. 하여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절을 묘련사(妙蓮寺, 또는 묘련암)라 부르니 이때부터 절의
이름 3자가 역사에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파괴된 것을 1883년에 승려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
虛)의 도움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이때 궁인(宮人) 박씨와 상궁(尙宮) 최씨, 김씨 등이
시주해 여러 탱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중건이 마무리 되자 1884년 10월에 '천장산 묘련사 중
건기(重建記)'를 남겼다.
이후 절은 연화사로 이름이 갈렸는데, 그 시기가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1993년 자음(慈音)이
지은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 상량문(上樑文)'에는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
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아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
고 적고 있어 연화
장 세계에서 이름을 따왔음을 귀띔해 준다.

1950년대까지 절 주변은 자연에 묻힌 싱그러운 곳으로 그때는 영휘원<永徽園,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의 묘역>에서 오솔길을 따라 절로 들어섰다. 허나 1955년에
종로1가에 있던 경희대(옛 신흥대학)가 이곳으로 오면서 절 옆에 학교 건물이 들어섰고 덩달
아 주거지까지 조성되면서 절 주변 풍경화는 180도 달라지게 되었다.
하여 절은 경희대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모습이 되었으며, 연화사의 첫 후광(後光)이던 회
묘는 경희대에 떠밀려 1969년 고양시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전되었다. 또한 절 주변에 가득했
던 숲도 겨우 서북쪽에 일부가 남아 가늘게 천장산과 손을 잡고 있다.

1990년대까지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미륵전(彌勒殿), 대방(大房), 종각 등의 기와집들
이 경내를 이루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뜨락이 닦여있었고, 경내 뒤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운
치를 이루었다. 허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1993년부터 크게 중수를 벌여 기존의 건물을 부
시고 집약적인 공간인 2층짜리 대웅보전과 삼성각을 새로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전 상
량문'과 '묘련암 중수기(1875년)'가 발견되어 절의 숨겨진 역사 일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무애당, 관음전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
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2호)와 칠성도, 천수관음도, 신
중도, 지장시왕도, 산신도, 목각석가여래설법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4호), 산신도가 있다.
이중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는 1901년 10월 28일에 제작되어 다음달 11월 20일에 점안된
것으로 대은 돈희(大恩 頓喜)를 중심으로 계은 봉법(啓恩 奉法), 한봉 응작(漢峰 應作), 보암
긍법(普庵 亘法) 등이 참여해 조성했다. 아미타3존불을 비롯하여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보현동자상까지 등장시켰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
했던 괘불 양식이다. 날이 날인지라 괘불의 화려한 외출을 기대했으나 이번에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1880년에 제작된 독성도가 있으며, 지방문화재 탱화들은 괘불을 제외하고 삼성각과 대
웅보전 1층, 관음전에 포진해 있어 찾기는 쉽다. (그들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경내로 인도하는 짧은 숲길
봄이 푸르게 붓질을 한 숲길에 고운 빛깔의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부처님오신날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훤칠하게 솟은 일주문을 들어서 찰라와 같이 짧은 숲길을 지나면 바로 대웅보전 앞이다. 오색
찬란한 연등이 연화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메우며 부처님오신날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연화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좁게 경내를 이루고 있는데, 그 동쪽에 삼성각과 무애당, 관음
전이 있고 서쪽에는 불교용품과 공양미, 전통차를 파는 건물이 있다. 석가탄신일을 즐기러 나
온 수많은 사람들로 좁은 경내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절은 초파일 특수로 즐거운 비명
을 지른다.


▲  오색 연등이 그늘을 드리운 대웅보전 뜨락
대웅보전 뜨락에는 행사용 천막을 주렁주렁 지어 전통차 시음과 다도(茶道) 체험,
연등 만들기, 불교용품 판매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전통차 1잔을 섭취했음)

            ◀  삼성각(三聖閣)
대웅보전 뒷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
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친
숙한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건물 바로 뒷쪽에
콘크리트로 다져진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에
경희대 건물이 높이 자리하여 절을 대놓고 살
펴본다.


▲  삼성각 석가여래상과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3호)

삼성각 중앙에는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석가여래상과 고색이 역력한 칠성도가 자리해 있
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칠
성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 식구들이 복잡하게
담겨져 있는데,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신앙으로 머물
러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때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면서 그를 다루지 않는 절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칠성도의 주인, 치성광여래는 금륜(金輪
)을 들고 있는데,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
에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그리고 머리에 쓴 관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하얀 원이 그려져 있고, 치성광여래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된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향해 있으며, 칠원성군
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장한 채 치성광여래를 향해 서 있다.

이 탱화는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한곡 돈법(漢谷 頓法)을 중심으로 한
명 환조(漢明 幻照), 두삼(斗三), 태호(太湖), 창호(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에 그린 것으
로 이때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관음도가 같이 제작되었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6호

칠성도 우측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도가 걸려있다. 칠성도만큼
이나 고색이 깃들여져 있으나 그와 달리 등장 인물이 단출해서 보기는 좋다. 언제 제작되었는
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문성(文性)이 산신각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
어 이르면 1880년대 후반, 적어도 칠성도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가운데에 붉은 옷을 걸친 산신 할배가 커다랗게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 모
자 모양의 두건을 쓰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둥근 넓적하며 포근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
본다. 왼손에는 깃털로 된 부채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산신 오른쪽에는 그의 비서인 동자 2명이 자리해 있는데, 모두 기물을 들고 있으며, 왼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민화(속화)풍으로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
중에 돌고 있는 어느 유명한 민화(民畵)의 호랑이와 많이 닮아서 혹 그를 참조하여 그린 것은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호환(虎患)이라 하여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고양이처럼
친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산신 뒤에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있는데, 노송과 길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려 심산유곡(深山
幽谷)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칠성도 좌측에 자리한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를
담은 탱화로 아줌마 자세로 편안하게 앉은 백발의 독성 할배와 그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
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으로 1880년에 제작되었으며, 삼성각에 깃든 3개의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나 이상하게도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  연등을 두룬 대웅보전

연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은 1993년에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하
는 선방(禪房)과 공양간, 2층은 대웅보전, 1층은 강당(講堂)으로 작은 절에 걸맞게 집약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를 보고 싶다면 1층을 기웃거리면 되며 시장기
를 단죄하고 싶다면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  관음전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  대웅보전(2층) 내부

대웅보전 2층 불단에는 금동 피부의 석가여래상이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자리해 있다.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한 후불탱 3점이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으며,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떡과 과일 등으로 불단이 내려앉을 지경이다.


▲  연화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강당으로 쓰이는 대웅보전 1층에는 연화사의 보물인 신중도와 지장시왕도가 액자에 소중히 깃
들여져 있다.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과다하여 정신을 쏙 빼놓는
다. 주로 법당을 지키는 용도로 신중도(신중탱)를 많이 거는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좌우측에 대칭으로 자리한 제석천과 범천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뒤에 두루고 머
리에 보관(寶冠)을 눌러쓴 채, 두 손으로 꽃을 들고 있으며, 그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
로 칼로 무장한 팔부중(八部衆)이 있고, 제석천과 범천 주위로 일월대신(日月大神) 등의 천신
(天神)과 산개(傘蓋) 등을 받쳐든 천동(天童),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01년에 수화원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비롯해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
(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亘法), 재겸(在謙) 등 12명의 화승(畵僧)
이 그린 것으로 이중에서 계은 봉법, 보암 긍법, 돈법(頓法), 두삼(斗三) 등은 20세기 초 경
기도 지역에서 활약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과 교류를 가진 화승들이다.
그림의 구도와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세부묘사가 정교해 19세기 중
반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연화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6호

신중도 옆에 있는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
者),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중도만큼이나 정신이 없는
이 그림은 연화사 탱화가 대거 조성되던 1901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의 주인공인 지장보살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있으며, 투명한 흑색 두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 왼손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고, 지장보
살의 신광 좌우로는 온갖 모습의 시왕이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는데, 시왕 뒤에는 8곡병(曲屛
)이 둘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이렇게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한 수법은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것으
로 그림의 인물 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이다. 이 음영법은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보
인다.

이 그림은 1867년에 경선당 응석이 그린 낙산 보문사(普門寺, ☞ 관련글 보기)의 지장시왕도
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낙산 청룡사(靑龍寺, ☞ 관련글 보기) 지장시왕도와 유사하며, 대
한제국 시절 서울, 경기 지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채색 및
인물 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불화유파(佛畵
流派)의 사승(師僧)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대웅보전 1층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정대(灌頂臺)에 우뚝 자리해 중생들의 인사
를 받고 있다.
관불의식 수요가 많아서 여기서는 참여를 하지
않고 1층 안에서 살짝 사진에 담았는데, 중생
들이 껴얹은 물을 맞은 아기부처의 표정이 잠
시 환해진 듯 싶었다.
허나 햇님이 퇴근하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1년을 기다려야 되니 오늘 냉수마찰
을 실컷 받아야 여한이 없을 것이다.
예전 초파일에는 대웅보전 2층 앞에서 관불의
식을 했었는데, 그때 절에서 의식에 참여한 사
람들에게 손수건을 나눠주는 인심을 베풀었다.
(그 손수건은 아직도 가지고 있음)


▲  관음전(觀音殿)

대웅보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음전은 무애당(無礙堂) 머리에 올려놓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경내가 좁다 보니 새로 건물을 닦지 못하고 무애당의 허전한 머리를
활용해 관음전을 닦았는데, 이곳에는 대웅보전에 있던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가 봉안되어
있다.


▲  연화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4호

관음전이란 새로운 둥지를 마련한 천수관음도는 1901년에 한봉 응작, 보산 복주, 청암 운조(
淸菴 雲照) 등이 그렸다. 지금이야 천수관음(千手觀音)을 다루는 그림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
만 정작 늙은 천수관음도는 매우 드물게 남아있어 그 희소성이 크다. 그런 그림이 무려 연화
사에 소중히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바다 가운데에 봉긋 솟은 연화좌 위에 천수관음이 붉은색 바탕의 옷을 걸치며 앉아있다. 그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경책(經冊)을 받쳐 든 4비(臂) 등 40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의 커다
란 광배 안에는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려 놓아 관세음보살의 위엄을 한층 드높였다. 신
중도와 달리 등장인물은 달랑 1명이지만 그의 찬란한 광배로 인해 이 그림 또한 보는 이의 혼
을 쏙 빼놓는다.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수
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도상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5년에 제작된 대산사 천수
관음도가 연화사 천수관음도에서 계승을 받으니 그 가치는 꽤 크다. 특히 관세음보살의 얼굴
은 살이 많고 이목구비가 단정해 경선당 응석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보전 앞뜨락
(관음전에서 바라본 모습)

▲  연화사 북쪽에 있는 선동호(仙洞湖)

나무가 우거진 경내 서북쪽에는 경희대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서쪽에는 경희초등학교가 있고
, 동쪽은 경희여고와 경희대 교내로 연화사 주변을 180도 변형시킨 경희대이지만 천장산 자락
에 자리한 잇점을 살려 자연보호를 크게 여기면서 다른 대학교보다 녹지 비율이 엄청 높은 편
이다. 그러다보니 봄에는 봄꽃 명소, 늦가을에는 단풍 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는다.

주차장 북쪽에 무언가 낌새가 느껴져 가보니 조그만 호수가 숲에 무성히 감싸여 그림 같은 풍
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곳에 아름다운 호수가 감쪽 같이 숨어있었다니.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본 것인가?'
나 자
신도 크게 놀라 뒤로 자빠질 정도였는데, 그는 경희대 교내 서쪽 끝에 자리한 선동호로 숲속
에 깊히 묻혀 있어 서울이 아닌 먼 지방의 산골 호수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이런 곳이라면 선녀(仙女) 누님도 흔쾌히 내려와 목욕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걸
의식하여 호수 이름도 선녀의 동네를 뜻하는 선동호가 되었다.

호수 주변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며, 봄 풍경과 늦가을 풍경이 아름다워 연화사에 왔다면 경
내 북쪽으로 조금 벗어나 이곳까지 둘러보길 권한다. 호수를 둘러싼 나무와 꽃, 햇님과 달님,
구름 등 하늘을 장식하는 식구들까지 호수를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여기서
잠시 망중한에 잠겨보는 것도 괜찮다.


▲  연화사 공양밥의 위엄

연화사는 10분이면 능히 다 볼 정도로 조그만 절이지만 그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신이 나는 초
파일 분위기, 거기에 생각도 못 했던 선동호까지 겯드리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초파일 절투어의 으뜸 백미(白眉)는 뭐니뭐니해도 먹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공양밥과 국수,
과일, 떡, 전통차 등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눈과 마음을 실컷 호강시
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지친 몸에 활력을 주어 다음 일정을 수월하게 진행
할 수 있다.

대웅보전 지하층에 공양간이 있는데,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다. 절에서 준비한 공양밥과 미역
냉국, 그리고 후식용 절편을 받아 빈 자리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했는데, 공양밥은 호박과
김치, 콩나물 등 갖은 나물을 밥에 넣고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
다. 시장기가 강해서 그야말로 꿀맛이 따로 없었는데, 폭풍 흡입으로 불이 나기 직전인 목구
멍을 미역냉국으로 시원하게 진정을 시켰고, 절편은 청량사로 이동하면서 후식으로 섭취했다.
그렇게 연화사의 풍성한 초파일 인심을 확인하고 다음 인연을 기약하며 청량사로 이동했다.

* 연화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 (경희대로3길 56 ☎ 02-962-6186)



 

♠  청량리 뒤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천장산 청량사(淸凉寺)

▲  청량사 대웅전(大雄殿)

연화사를 나와서 빼곡히 들어찬 회기동 주택가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가면 삼육초등학교 남쪽
이자 영휘원 동남쪽에 자리한 청량사가 뒷통수를 보인다. 담장 너머로 청량사가 기와집 머리
를 보이고 있으나 정작 경내로 들어서는 문이 바로 나타나지 않아 나를 잠시 답답하게 만든다
. 그래서 골목길(제기로31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그제서야 문이 모습을 비추었고
, 그 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청량사 경내가 펼쳐진다.

이번에 처음 인연을 지은 청량사는 서울의 동쪽 철도 관문인 청량리역 북쪽이자 영휘원 동남
쪽으로 천장산 남쪽 끝자락에 안겨져 있다. 연화사가 경희대에 감싸여 있다면 청량사는 주택
가와 삼육초교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데 간신히 경내 동쪽과 남쪽에 숲 일부가 남아있어 산
사의 분위기를 아주 약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무려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고 내세우고 있다. 허나 신빙성은 전혀 없으며 처음에는
북한산(삼각산)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최근까지 '삼각산 청량사'를 칭했다. 고려 예종(
睿宗)이 1117년 9월 학자이자 승려인 식암 이자현(息庵李資玄, 1061~1125)을 불러 청량사에
머물게 했다는 내용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오는데, 그가 머문 절이 과연 이곳인지도
심히 의문이다.
성종실록(成宗實錄) 1471년 부분에 삼각산 청량사 승려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삼각산에 청량사가 있다고 나온다. 그리고 조선 초기 문신인 김정
(金淨)이 1504년에 청량사에 머문 인연이 있다.

이후 절은 홍릉수목원 자리로 이전되었으며,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 자리를 물색했
는데, 공교롭게도 청량사 자리가 명당의 정혈이라 하여 그곳에 능을 쓰기로 했다. 상황이 그
리 되자 절은 강제로 제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어 현 자리로 절을 옮겼다.
일부에서는 돌곶이승방인 석관사(石串寺)를 청량사의 전신(前身)으로 보기도 하나 김정호(金
正浩)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홍릉수목원 자리에 청량사가 표시되어 있고, 임업시
험장 쪽에 석관사(돌곶이절)가 따로 나와있어 별개의 절이었음을 알려준다. 허나 홍릉을 조성
하면서 절은 이곳으로 옮겨졌고, 돌곶이절도 청량사에 합쳐지면서 자연히 돌곶이승방의 역사
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돌곶이승방은 서울 주변 4대 비구니 승방의 하나이다.
그렇게 두 절이 합쳐지자 비구니 남채백(南彩白)이 1895년 석관사에서 법당과 칠성각을 가져
와 대니승방(大尼僧房)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후 김봉학, 신자영, 장동일, 정부연, 신원삼
비구니의 불사가 계속 이어졌다.

이곳은 연화사처럼 완전 숲속의 절이었다. 주변 풍경이 고와서 왜정(倭政) 때는 서울 근교 경
승지이자 휴양지, 집회 장소로 유명해 많은 이들이 찾았는데 특히 애국지사와 고승들의 발걸
음이 많았다.
별건곤(別乾坤) 제23호(1929년 9월)에는 청량사 절밥이 명물이라는 내용이 있고, 개벽(開闢)
에서도 청량사에 소풍을 갔다는 내용이 많이 나오며, 개벽 제38호(1923년 8월)에는
'청량사라고 하면 시원하게 들리지만 그다지 청량하지 않고 인근 홍릉의 수림(樹林)이 있고
교통이 편해서 군중이 몰리는 것이다'
평가하고 있다.

또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 현장으로도 바쁘게 살았는데, 1929년 왜경은 청량사를 수색하여
폭탄을 제조한 청년들을 검거했고, 1930년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원 수십 명을 체포했으
며, 경성농업전문학교(현 서울시립대학교) 학생 10여 명이 1930년에 여기서 철기단(鐵騎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1931년 경성제대(서울대) 학생들의 연구회 조직이 여기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1938년 연희전문(연세대) 동지회 흥업구락부가 자주 집회를 가졌다.
만해 한용운(韓龍雲)도 한때 이곳에 머물렀으며, 1939년 8월 29일(음력 7월 1일)에 그의 회갑
연이 여기서 열렸는데, 이광(李珖), 김관호(金觀鎬),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안종
원(安鍾元) 등 2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참여해 그의 회갑을 축하하면서 망국의 한과 자주독립
의 의지를 다졌다. 불교 학자인 박한영(朴漢永)도 이곳에 머물렀으며, 대방에 걸린 청량사 현
판은 그의 글씨이다.
1970년대 이후 계속 절을 손질했으며, 1988년 전통사찰 5-2호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절
은 연화사보다 넓은 편으로 생각보다 규모가 좀 크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보전, 무량수전, 동별당, 칠성각, 관음전 등 10동 정도
의 건물이 있으며, 경내를 크게 대웅전 구역과 동별당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지정문화재는
아직 없는 실정이나 1871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며, 그 외에 1938년
에 조성된 후불탱과 신중탱, 칠성탱 등을 지니고 있다.

청량리의 이름이 바로 청량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현장을 이제서야 가본다. 절의 인지도가
낮아서 연화사보다 찾는 이는 좀 적으나 한때 서울 근교 경승지이자 애국지사들의 활동터로
바쁘게 살았던 현장이라 다시 왕년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청량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61 (제기로31길 10-3, ☎ 02-962-7390)


▲  대웅전 앞에 닦여진 관불의식의 현장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80년에 지어졌다. 내부에는 금동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1938년에 그려진 후불탱과 신중탱 등 여러 탱화가 들어있으며, 건물 앞에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아기부처가 곱게 꽃단장이 된 연화대에서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대웅전 뜨락에는 쉼터를 닦아 절을 찾은 이들에게 커피와 시원한 음료수를 제공하고 있고 연
등 만들기 등의 행사도 열리고 있었다. 나는 시원한 커피 1잔을 받아 쉼터 의자에서 목구멍에
깃든 갈증을 단죄하며 5분 정도 쉬었다.


▲  곱게 연등 옷을 걸친 대웅전 앞 소나무

약 70~80년 정도 묵은 잘생긴 소나무에 오색 연등을 달아놓았다. 낮에는 조용히 웅크리고 있
다가 햇님이 칼퇴근을 하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연등은 일제히 몸을 불사르며 환상적인 연등
야경을 드러낸다.


▲  늠름하게 생긴 대웅전 석가여래상과 뒷쪽에 걸린 후불탱(1938년 작)

▲  대웅전 독성탱과 산신탱

▲  1938년에 제작된 대웅전 신중탱


▲  천장산 청량사 대법전 건립탑(大法殿 建立塔)
1996년 10월 28일에 세워진 것으로 특이하게 8각형 부도탑(승탑)
스타일로 지어졌다.

▲  극락보전 앞에 차려진 관불의식의 현장

보통 석가탄신일 관불의식의 현장은 경내에 1곳 또는 2곳을 두기 마련이나 청량사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앞, 무량수전 옆구리 등 무려 3곳이나 닦아 놓았다. 하여 사람들 눈치 없이 정말 여
유롭게 아기부처에게 냉수욕을 시켜주었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대웅전과 무량수전 사이에 자리한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상과 후불탱
조그만 덩치의 아미타불이 훤칠한 외모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아미타3존상을 이룬다. 그들 뒤쪽에 걸린 후불탱도 제법
고색이 있어 보이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극락보전 신중도(신중탱)

이곳 신중탱은 청량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무려 1871년에 조성되었다. 지방문화재감으로 전
혀 손색이 없어 보이나 아직까지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으니 절에서 문화재 신청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  한 지붕 두 가족, 산신각(山神閣)과 칠성각(七星閣)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산신과 칠성이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각각
산신탱과 칠성탱 간판을 내걸고 있으나 원래 이름은 칠성각이다.

▲  칠성각 산신탱과 칠성탱(오른쪽)
칠성 식구를 가득 머금은 칠성탱은 1938년에 그려졌다.

▲  밑에서 바라본 무량수전(無量壽殿)

동별전 구역 북쪽 높은 곳에 들어앉은 무량수전은 앞서 극락전처럼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이
미 극락전이 있어 그를 봉안했음에도 뜻도 비슷한 별도의 무량수전까지 두어 그의 공간을 또
마련했다. 아마도 나중에 아미타도량를 칭하고자 미리 밑밥을 닦아놓는 모양이다.


▲  무량수전 옆 3층석탑과 관불의식의 현장
하얀 피부의 키 작은 3층석탑 앞에도 관불의식의 현장이 차려졌다. 대웅전과
극락전은 사람이 조금 있었으나 여기는 조금 구석이라 썰렁했다.

▲  무량수전 아미타3존상과 붉은 닫집

▲  동별당(東別堂)


▲  관음전에서 바라본 동별당 방향
기와집이 첩첩히 둘러진 동별당은 청량사가 동쪽으로 확장되면서 닦여진
공간으로 요사, 선방, 공양간 등을 지니고 있다.

▲  관음전
2층짜리 팔작지붕 집으로 건물 외벽을 돌로 견고하게 장식했다.
관음전 공간은 2층이며, 1층은 요사(寮舍) 등으로 쓰인다.

▲  관음전 내부

청량사 경내를 30분 정도 말끔하게 둘러보니 다시 시장기가 피어오른다. 이미 연화사에서 배
부르게 공양밥을 섭취했는데도 말이다. 하여 이곳의 초파일 인심도 확인할 겸, 공양밥 섭취를
문의하니 동별당 지하층으로 가라고 그런다. (처음에는 대웅전 주변에 있는 줄 알았음)
하여 그곳으로 내려가니 공양시간은 20분 전에 끝났다고 그런다. (그때가 14시 20분) 허탈해
하며 발을 돌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은 백설기를 1개 건네준다. 하여 그것으로 이곳의 인
심을 조금 느끼고, 관음전을 잠시 둘러본 다음 청량사와의 짧은 첫 인연을 마무리 지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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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곁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창원 비음산 불곡사 (불곡사 일주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창원 불곡사



~~~ 봄의 한복판에 찾아간 창원 불곡사 ~~~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따스한 봄의 한복판인 4월의 끝 무렵, 경남의 중심 도시인 창원(昌原)을 찾았다. 창원은
거의 6~7년 만에 방문으로 다른 곳으로 가는 도중에 잠깐 들리게 되었는데, 고양이가 생
선가게를 그냥 못둔다고 접근성이 좋은 간단한 볼거리를 고르다가 2005년에 갔던 불곡사
를 골랐다. 그때도 4월에 갔었는데 이번에도 4월이다.



 

♠  불곡사(佛谷寺) 입문

▲  불곡사 일주문(一柱門)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3호

불곡사는 숲이 우거진 대방동 언덕 남쪽에 자리한다. 이 절은 '비음산(飛音山) 불곡사'를 칭
하고 있는데 여기서 비음산(510m)은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뫼이다. 얼핏 보면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나 불곡사가 안긴 언덕 또한 비음산의 일원이다. 무분별한 개발의 칼질로 그 사이에
주거지가 조성되면서 서로가 끊긴 것이다.

불곡사 언덕 남쪽을 지나는 대암로를 들어서면 절로 인도하는 언덕길이 나타난다. 그 길의 손
을 잡으며 언덕을 오르면 경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다른 일
주문은 기둥 2개, 문 하나가 전부이나 여기는 부산 범어사(梵魚寺)의 일주문처럼 기둥이 4개,
문 3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문은 원래 창원객사(昌原客舍)의 정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1822년 웅천향교(진해)로 이전
되어 향교 정문으로 살다가 1940년에 그 향교가 사라지면서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된 것을 1943
년에 우담이 이곳으로 가져와 일주문으로 삼았다. 그래서 다른 일주문과 달리 객사, 향교(鄕
校), 그리고 절까지 다양한 곳의 정문을 두루 거쳐 경력도 화려하다.

그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계 문으로 절의 일주문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다. 아무래도 관
청 출신 문이라 그런 듯 싶다. 원래 지붕을 제외한 문 높이가 4m 정도 되었으나 기둥의 아랫
부분이 썩어버려 2m 정도를 잘라냈다. 그러다보니 지붕 덩치에 비해 문의 높이가 현저히 낮아
진 어색한 모습이 되었다. 지붕까지 합치면 4m 정도로 만약 아랫부분을 잘라내지 않았다면 거
의 6~7m의 장대한 규모를 자랑했을 것이다.

문이 여러 번 이사를 가면서 적지 않은 변형을 겪은 것으로 여겨지며, 나무를 다루는 수법이
다양하기는 하나 정교함이 덜하다. 지붕 기와에서 '강희(康熙)24년 을축일~~'이라 쓰인 글씨
가 나와 숙종 시절인 16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문의 평방(平枋) 좌우 끝에는 귀엽게 다듬어진 호랑이와 거북 조각이 있는데, 이들은 불곡사
가 문 수식용 및 비보풍수의 목적으로 달아놓은 것으로 보인다.

▲  일주문 서쪽 평방에 닦여진 귀여운
호랑이와 용 꼬리 조각

▲  일주문 동쪽 평방에 닦여진
거북 조각


▲  고된 세월에 꽤 지쳐 보이는 늙은 승탑(僧塔, 부도탑)

일주문을 지나면 덥수룩한 모습의 옛 승탑이 손짓을 한다. 그는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으
로 탑의 주인은 알 수 없다. 기단과 탑신(塔身)이 남아있으나 사라진 부분은 새 돌을 끼워넣
어 낡은 돌과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탑 중간과 밑도리에는 중생들이 얹혀놓은 막
돌탑이 그들의 소망을 양분으로 삼으며 어수선하게 싹을 내렸다.


▲  경내를 가리고 선 세음루(洗音樓)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그 밑도리를 지나면 불곡사의 조촐한 경내가 펼쳐진다.


불곡사는 인근 성주사(聖住寺)와 함께 창원의 대표적인 오래된 절이다. 935년에 진경국사(眞
鏡國師)가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없으며, 이후 대한제국(大韓帝國) 시절까지 이렇다할
내력(來歷)이 전하지 않는다. 허나 경내에 신라 후기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이 있어 신라
말에 창건된 것은 분명해 보이며, 조선 중/후기 것으로 보이는 승탑과 대한제국 시절 탱화들
이 여럿 전하고 있어 고색의 깊이를 그런데로 우려낸다.
1932년 우담(優曇)이 비로전과 세음루, 산신각, 승당, 요사채 등을 중건했고, 1943년에 버려
진 웅천향교 정문을 가져와 일주문으로 꾸몄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비로전을 비롯해 명부전, 관음전, 칠성각, 세음루 등 8~9동 정
도의 건물이 있으며, 국가 보물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지방문화재인 일주문, 오래된 승탑과
대한제국 시절 탱화가 전한다.
불곡사가 자리한 언덕도 비음산의 엄연한 일원이었으나 개발의 칼질로 서로가 끊기면서 도시
속의 외로운 공간이 되었다. 그래도 절 주변 언덕은 숲이 우거져 있어 그런데로 산사의 내음
은 풍긴다. 만약 불곡사가 아니었다면 이 언덕 또한 아파트로 도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불곡사 소재지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대방동 1036-1 (대암로 55 ☎ 055-282-7402)



 

♠  불곡사 둘러보기

▲  비로전(毘盧殿)

불곡사의 중심 건물인 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법당치고는 규모가 작
다. 앞서 일주문처럼 지붕이 밑도리보다 너무 큰 모습으로 이곳에 불곡사 제일의 보물이 깃들
여져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  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436호

비로전의 주인이자 불곡사의 1급 보물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9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 딱
딱한 돌피부에 비해 부드럽고 정교한 모습을 지닌 석불로 머리는 나발이며, 상투 모양의 육계
(무견정상)가 두툼하게 솟아있다. 원만한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알맞은 크기와 모습으로 배
치되어 있으며, 귀는 짧고 목에 있는 3개의 주름선인 삼도(三道)는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법의(法衣)는 양 어깨와 석불 전체에 걸쳐져 있고, 옷주름은 다리까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
며 흐르고 있다. 손 모양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모습으로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석불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8각형으로 연꽃무늬와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석불의 높이는 약 101cm, 연화대좌(蓮花臺座)는 약 90cm로 석불 등에는 예전에 광배(光背)를
붙인 흔적인 구멍이 남아있다. 그 광배는 세월의 고된 무게에 석불의 등을 놓아버렸고, 지금
은 옆에 따로 누워있다.
무려 1,000년이 넘는 지긋한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어 그의 건강 비결이 사뭇
궁금해진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광배까지 온전하게 달려있었다면 정말 금상첨화였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하지만 천하무적으로 눈에 뵈는 게 없다는 세월을 누가 이기랴. 이 정도라도 남
아있는 것도 다행이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광배
석불의 광명을 상징하며 그 등에 붙어있던 광배로 지금은 석불 옆에 뉘어져 있다.
돌에 새겨진 무늬들은 세월을 예민하게 타면서 불곡사의 잃어버린 내력처럼
다소 희미해졌다.

▲  비로전 지장탱
1904년에 조성된 것으로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범종각과 명부전(冥府殿, 오른쪽 집)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1990년대에 지어졌다.

▲  금동으로 다져진 명부전 지장보살좌상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두광(頭光)을 지닌 지장보살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자리해 있다.

▲  칠성각(七星閣)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칠성과 독성(나반존자), 산신의 거처이다.

▲  칠성각 독성탱

망중한에 잠겨있는 듯한 독성(나반존자) 할배와 동자, 그가 몸을 일으킨 천태산(天台山) 등이
그려져 있다. (폭포와 소나무도 있음) 그림은 고색이 좀 있어 보이는데 화기(畵記)를 확인하
지 않아서 자세한 건 모르겠다. (20세기 초기 것으로 여겨짐)


▲  등장 인물이 꽤 많은 칠성각 칠성탱
독성탱만큼이나 늙어 보인다. (20세기 초나 중기로 여겨짐)

▲  칠성각 산신탱
온후해 보이는 산신 할배와 동자, 괴수처럼 무서워 보이는 호랑이 등 산신 가족이
담겨져 있다.

▲  불곡사 관음전(觀音殿)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2005년에
왔을 때는 지붕이 청기와로 뒤덮여 윤이 반짝반짝 빛났는데
그새 기와갈이를 했던 모양이다.

▲  관음전에 봉안된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
무려 1,000개의 손과 1,000개의 눈을 지닌 천수천안관세음보살, 그만큼
그가 지켜주고 어루만져야 될 중생들이 많다는 뜻일 거다.


관음전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불곡사 관람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창원
에서 더 이상 정처(定處)를 잡지 않고 바로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하여 창원 불곡사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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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5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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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축제)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

▲  봉원사에서 만난 한 송이 연꽃
 



 

여름 제국의 무더운 한복판에 이르면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내가 살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봉원사에서 열
리는 '서울연꽃문화축제'이다. <이곳 외에도 조계사(曹溪寺)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2003년에 처음 시작하여 벌써 20년 가까이 이르렀는데, 봉원사 연꽃은 이미 지겹게 인연
을 지었다. 허나 여름에는 친여름파인 연꽃의 향연을 꼭 봐줘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
)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여름 제국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봉원사 연꽃축제날의 서광이 밝아오자 후배 여인네와 그곳의 문을 두드
렸다. 이번에는 바로 봉원사로 가지 않고 안산자락길을 반바퀴 정도 돌아 봉원사로 들어
섰는데, 경내로 들어서니 벌써부터 연꽃 향기가 후각을 마구 찌르고, 연꽃의 아름다움이
속세살이로 오염된 두 눈과 정처 없는 마음을 찌르며, 연잎의 살랑거리는 소리가 청각을
찔러댄다.



 

♠  봉원사(奉元寺) 입문 (만월전, 명부전, 미륵전)

▲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서남쪽 자락에 서울 장안에 이름난 고찰(古
刹)로 꼽히는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
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
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
이 없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붕어(崩御)한 이
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소실된 것을 1651년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며, 이후 동,서 요사채가 불
타자 극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다.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
을 옮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했는데,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봉원사가 떠난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
역인 수경원(綏慶園)이 1764년에 닦여졌는데, 이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전되어 지금은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願刹) 역할까지 자연스럽게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게 되었다.

1788년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으며
,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
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11년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는 큰 비운을 겪는다.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 패거리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
자 봉원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삼천불전과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와 범종, 약사불회도, 산신도, 독성도, 시왕도 및 사자/장군도, 도량장엄용 불화(오여래도,
사보살도, 팔금강도, 십이지신도), 도량장엄용 불화(칠여래도, 사보살도, 팔금강도), 의소제
각 편액, 용암사(龍巖寺) 감로왕도, 반야암(般若庵) 목조관음보살좌상, 반야암 목조석가여래
좌상, 반야암 석조보살좌상 등 지방문화재 20점 정도를 지니고 있다. (이들 모두 2014년 이후
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용암사와 반야암은 봉원사의 부속 사찰임)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국가무형문
화재 50호
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가 여
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
문화축제'를 칭하고 있는데, 봉원사 연꽃축제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
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꽃밭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무척이나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봉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만월전(滿月殿)

안산자락길에서 조금 내려가면 기와집 일색의 봉원사 뒷통수가 보인다. 그 뒷통수가 점점 커
지면서 제일 먼저 만월전이 마중을 나오는데, 안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봉원사 경내를 거쳐
가기 때문에 자연히 산꾼의 왕래도 잦아 늦은 시간에도 길을 열어둔다.

만월전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외진 곳으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이다.
이곳에는 1894년에 조성된 약사불회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5호)와 1904년에 그려진 독성도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6호), 1905년에 조성된 산신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5호)가 봉안되
어 있는데, 이 건물은 무슨 사연을 숨기고 있는지 늘 굳게 잠겨져 있어 봉원사를 여러 번 왔
음에도 단 1번도 그 속살을 구경한 적이 없다. (산신도와 독성도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만월전 앞에는 극락전이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
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아미타
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옆에는 자
애수'란 어여쁜 이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
무가 그늘을 베풀고 있다. 나이는 100~150년
정도로 여겨지는데, 왜 자애수라 불리는지는
모르겠다.


▲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두툼한 맞배지붕 건물로 조
선 후기에 조성된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시왕) 등 명부(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삼봉 정도전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의 위엄
왼쪽 구석 위쪽에 '정도전 필' 4자가 쓰여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삼봉(三峯)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한다. 하지만 내 눈이 안경이
라고 내 침침한 두 눈에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다. 비록 현판 구석에 '정도전 필(鄭道
傳 筆)' 4글자가 아주 작게 쓰여있긴 하나 옛 사람들은 이름보다 '호'나 '자'를 우선적으로
썼기 때문에 역시 의구심이 든다.
허나 봉원사가 태조 이성계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고, 그의 어진까지 봉안했던 절이니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열었던 정도전도 봉원사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기념으
로 한 글자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현판이 세월을 너무 타자 필사(筆寫)를 해 새 것으
로 교체했는데, 그가 쓴 것을 강조하고자 실수로 이름만 덩그러니 썼을 수도 있다.

또한 원래 봉원사 것이 아닌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 정릉(貞陵)
에 설치된 명부전의 현판이란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정릉을 서울 외곽으로 추방하면서 명부
전을 때려부셨고, 그 현판이 이리저리 떠돌다가 봉원사로 흘러들어와 이곳 명부전의 현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부전은 정도전의 글씨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꼭 있다고 기둥에 달
린 주련 4개는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명나라
(요동)를 정벌하여 보다 큰 나라를 꿈꾸었던 나라의 창업 공신과 그 조선을 말아먹고 왜정에
빌붙은 작자의 흔적이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단죄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점점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이 매국
노의 고약한 흔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이완용이 쓴 주련을 싹 뜯어내 장작으로 쓰거나 내버리기 바란다.


▲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시왕도(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9호)

녹색 승려 머리에 금동 피부를 지닌 지장보살상은 지장전의 주인장으로 좌우로 도명존자(道明
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거느리고 있다. 그들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왕(十王)과 판관(判
官), 사자(使者), 인왕상, 동자 12위 등이 자리해 명부전 식구들은 총 33기이다.
2019년 7월 말에 지방문화재 지정 신청을 위해 그들을 조사했는데, 지장보살상 몸속에서 조성
발원문 2점과 후령통 2점, 묘법연화경 일부가 나왔고, 도명존자 몸속에서는 명주저고리와 명
주천, 무독귀왕에서는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다라니가 나왔다. 그리고 좌측 판관상에서 후령
통 3점과 1546년에 제작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3
), 성종 시절에 쓰여진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2호
), 묘법법화경(일부) 등이 쏟아져 나왔다.

조성 당시 발원문(發願文)은 3개가 나왔는데, 제작시기와 만든 사람, 시주자 등의 정보를 담
고 있으나 처음 봉안되었던 절 이름은 없다. 또한 대좌(臺座) 상면에 쓰인 조성기를 통해 수
조각승 색난(色難)을 비롯한 18명이 1704년 6월 30일에 완성했음을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무독귀왕이 들고 있는 네모난 지물 밑면에 숨겨진 묵서명(墨書名)을 통해 1858년에 봉
원사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여 비록 그들의 제자리를 확인할 수 없지만 1858년을 전후로 봉
원사에 안착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조성시기와 제작자 등을 알려주는 발원문과 글씨를 남겨둔 제작자의 작은 배려 덕에 여
러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봉원사 목조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1호로 지정됨)

그리고 지장보살 뒤에 든든히 걸린 지장시왕도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9호)는 목재로 딴 패널
형태로 관리 소홀로 화기(畵記) 부분이 사라져 자세한 정보는 알 도리가 없다.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위왕, 시왕상, 보살상, 공양천녀상, 동자상, 시방불상이 빙 둘러싸
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불화에 많이 쓰인 바림기법으로 옷주름 표현을 하고 있으며, 연화문(蓮花紋)
과 연화당초문(蓮花唐草紋), 모란화문, 운문(雲紋), 동심원문(同心圓文), 나비문, 칠보문 등
이 장식되어 있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 황색 등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채도
가 낮고 탁한 색조를 보인다. 특히 상/하단에는 얼룩이 심하며 피부색도 많이 변색되었고 곳
곳에 보채(補彩)된 흔적이 보인다. 또한 의복 문양, 무독귀왕상과 시왕상이 쓴 관, 손에 들고
있는 지물, 지장보살상의 광배 등은 금니(金泥) 기법을 사용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지장시왕도과 비교하여 19세기 후반 불화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 지
장시왕도의 일반적인 도상 형식과 다르게 간략화되어 집중도 있는 화면과 공간 구성이 돋보인
다.

▲  명부전 옆구리에 자리를 닦은 연꽃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석
을 세워 그날의 높은 뜻을 기린다.


▲  미륵전(彌勒殿)과 7층석탑

칠성각 뒷쪽에 자리한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
습이다. 그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낸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그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
라 불리기도 한다.
미륵전 앞에는 날씬한 몸매를 지닌 7층석탑이 서 있는데, 그는 왜정(倭政) 이후에 많이 나타
나는 석탑 양식으로 20세기 중~후기에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  봉원사 칠성각, 삼천불전, 대웅전

▲  칠성각(七星閣)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6호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의 보금자리이다. 허
나 이상하게도 칠성이 아닌 하얀 피부의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봉원사에서 가장 늙은 집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
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약사여래상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치성광여래도(서울 지방
문화재자료 80호
)가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호법
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들어있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세음보살
누님이 용선을 타고 파도를 즐기며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이다.

▲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 수각(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는 거의
마를 날이 없다. 특히 한여름에는
연꽃보다 샘물이 더 반갑지.


▲  삼천불전과 3층석탑(가운데 탑)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
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졌으며,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려 9년
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멀리 알래스카
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
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으
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
생의 돈을 받아 지은 원불(願佛)이다. 그 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다.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승정
(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
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
껏 뽐낸다.


▲  봉원사 산사음악회 (범패 공연이 한참 펼쳐지고 있다)

삼천불전 앞에는 연꽃축제의 일원인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산사라고 늘 고적(적막)만
고집해야 될 이유는 없지, 1년에 며칠 정도(절 축제나 석가탄신일)는 산사음악회로 떠들썩하
게 즐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고 사찰 홍보와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
봉원사 산사음악회는 이곳의 자랑인 영산재와 범패를 위시해 다양한 전통공연과 퓨전음악, 서
양음악, 초청 가수 공연 등이 열린다.

3층석탑 옆에는 떡과 전통차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는데, 18시 이전에 마감을 하여 서둘러 가
야 떡과 전통차를 먹을 수 있다. (무료로 제공되며 거의 무한 리필임, 차가 매우 시원함) 그
리고 17시부터 1시간 정도 삼천불전 지하층 공양간에서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연꽃축제 기간
외에도 평일과 일요일에도 제공하니 시간이 맞거든 한 숟가락 들며 이곳의 인심을 확인해보자.
(공양은 상황에 따라 제공되지 않을 수 있으며, 비빔밥 공양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음)
우리는 국수 1그릇과 떡, 전통차를 무한정 즐기고 산사음악회도 전부는 아니지만 ⅓ 정도 구
경을 했다. 이렇게 절 축제를 이용하여 전통공연과 서양음악 공연 등의 문화생활을 무료로 즐
겨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대웅전 뜨락 연꽃축제장에서 바라본 삼천불전

▲  연꽃의 향연을 바라보는 대웅전(大雄殿)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자리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
면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18세기 중반 건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사(華溪寺, ☞ 관련글 보러가기)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
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
로 홀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재가 되었으니 6.25 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
다 할 것이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부질없이 또 사라진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지만 떠나간 지방문
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흥선대원군이 부질없는 명당(明堂) 욕심으로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
(伽倻寺)로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할 때 그 절을 강제로 불을 질렀는데, 그때 타
지 않고 남은 것을 가져온 거라고 한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었으니 명당의 치명적인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석가3존상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좌우에 자리해 3존상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호법신들의 정모 현장, 신중도(神衆圖)

신중도에 빼곡하게 담긴 존재들이 모두 절과 석가여래를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이라고 한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그들을 담아놓아 너무 정신이 없는데, 여러 번의 화마(火魔)로 많은 것을
잃은 봉원사라 그런 사고가 다시는 없도록 호법신은 싹 소환하여 담은 모양이다. 저들의 한결
같은 보호가 있다면 정말 든든하겠지.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아미타불이 극락왕생하는 고혼들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들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에 귀여운 해태상까지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앞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다소 낡아보이는 영안각(靈晏閣)

▲  단촐한 1칸짜리 건물, 전씨영각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
각(雲水閣)으로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이며, 그 옆에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혼백을 봉안하
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하는데, 겉 나이는
거의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그 좌측에 있는 1칸짜리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봉원사에 넘긴 전성기
부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기일마다 절에서 온갖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주고 있는
데 절에서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유하면서 사당까지 지어 제삿밥까지 직접 챙겨
줄 정도이니 시주한 돈이 꽤 되었던 모양이다. 역시나 절이나 속세나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
는 모양이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염불당)

▲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밀림을
이룬다. 천하의 연꽃을 싹 소환한 것일까? 수련(睡蓮)을 제외한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
과 맵시를 견주면서 연꽃축제의 열기는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어여쁜 꽃잎을 펼쳐
보이는 연꽃들은 정처 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피며, 그들의 향연을 보고 있으면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이라도 싹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붉게 물든 홍련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진 심청 누님이 저 연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콩닥콩닥..

▲  연분홍 연잎을 4박자로 펼쳐보인 홍련의 경쾌함

▲  홍련을 희롱하는 나비
연꽃 속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진 것은 아닐까?

▲  잘 익은 홍련의 요염함


▲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닫은 홍련

▲  두툼하게 살이 오른 홍련

▲  푸른 연잎 밑에서 여름 햇살을 피하는 연꽃

▲  아주 화사하게 피어난 홍련

저토록 아름다운 연꽃이지만 그 미모는 불과 1달도 못 가서 꺾이고 만다. 한참 물이 오른 지
금이야 사람들이 서로 보려고 아우성을 떨지만 그때가 되면 누가 저들을 챙겨 보겠는가? 그래
서 인생은 부질없는 모양이다.


▲  푸른 연잎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민 홍련

▲  산바람을 즐기며 목운동을 하는 홍련 3자매의 위엄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다양한 인상의 홍련들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 같은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푸른 연잎 속에 홀로 솟은 홍련

▲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연꽃들

▲  방긋 웃는 푸른 연잎과 그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연꽃들

▲  작게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푸른 연잎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  수조에 몸을 담군 연꽃 무리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출렁이는 연꽃 밀림 너머로 바라보이는 대방

▲  봉원사 대방<大房,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봉원사 주지였던 영월은 6.25 때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였는데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
놓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
형하여 대방으로 삼았다.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
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
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
소했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 석조여래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7호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 공간,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간
으로 고루고루 쓰인다. 범패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聖地)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하얀 피부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높이 37cm
에 작은 불상으로 경주 불석으로 조성되었는데, 그는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이
라고 한다. 6.25때 심원사가 파괴되면서 그곳에 깃든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전국에 흩어졌는
데, 그때 들어온 것으로 보이나 확실한 것은 없다.
그의 뱃속에서는 '금강반야바라밀경'과 '팔엽대홍련지도', '준제구자천원지도', '열금강지방
지도' 등 각종 다라니가 나왔는데, 그들을 머금은 복장 주머니에는 '證明臣 華應 亨眞 謹封(
증명신 화응 형진 근봉)'이라 쓰인 띠를 둘렀다. 허나 이들은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화응
형진이 봉안한 것이지 불상 조성 당시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불상에 대한 기도 수요가 적지 않으며, 추사 김정희(金正喜)
가 쓴 현판과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대방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이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를 일군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문
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넉넉히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
란 글씨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
고 없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대방의 뒷모습 (건물 왼쪽 문짝에 그려진 것이 이만봉이 그린 신장도)
대웅전과 대방 앞은 물론 절의 숨겨진 뒤쪽까지 숙성된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이루고 있다.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돌덩어리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석물이다.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연꽃 밀림 너머에서 바라본 대방
지금은 연꽃 밀림이 되었지만 그들이 모두
사라지면(8월 말) 이곳은 원래의 모습
(대웅전 뜨락)으로 돌아간다.


▲  연꽃 밀림에서 바라본 삼천불전의 야경
산사음악회의 밤은 깊어만 가고...


연꽃축제 현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부지런히 사진에 담느라 정말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몰랐
다. 그야말로 연꽃이 시간 도둑인 셈이다. 허나 그런 어여쁜 도둑은 봐줄 만하다.
그 사이 세상은 낮에서 밤으로 바뀌고 시커먼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지면서 여름 제국의 혹독
한 기운도 조금은 꺾였다. 햇님이 커튼을 치자 음악회가 열리는 삼천불전 앞은 그 어둠을 몰
아내고지 일제히 조명을 틀었고, 산사음악회는 점점 숙성이 되어 분위기는 더욱 솟아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음악회를 끝까지 관람하고 싶지만 저녁밥이 그리울 시간이라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음악회가 신명이 나도 그저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봉원사에서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연꽃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을 실컷 눈에 넣었으니 그리 아쉽지
는 않다. 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뒤로 하며 그곳을 나왔다.

봉원사에는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늙은 나무(느티나무, 회화나무)와 16나한상,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등의 볼거리가 더 있으나 이들을 사진에 담지 않았고 시간이 늦
어 제대로 친견하지 못해 본글에서는 쿨하게 생략한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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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8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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