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32건

  1. 2020.08.02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2. 2020.07.26 서울 서쪽 변두리에 깃든 상큼한 호수공원, 신월동 서서울호수공원 (능골산, 백인의식탁, 몬드리안정원)
  3. 2020.07.16 초여름 산사 나들이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나한도량을 내세우고 있는 수락산 학림사 (수락산 귀임봉)
  4. 2020.07.09 오산의 꿀단지를 거닐다 ~~~ 보적사에서 독산성, 세마대, 고인돌공원까지 (경기도 삼남길7코스, 금암리지석묘군)
  5. 2020.06.29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지붕길,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서달산자락길~현충원길 나들이
  6. 2020.06.05 보은 땅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선병우고가, 선병묵고가 한옥 나들이
  7. 2020.06.01 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2
  8. 2020.05.19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3
  9. 2020.05.09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10. 2020.04.28 서울 도심에 깃든 상큼한 개나리동산, 응봉산 봄꽃 나들이 (응봉산 개나리, 독서당공원, 살곶이다리, 중랑천)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숨은폭포(밤골계곡) '



▲  숨은폭포 (윗폭포와 아랫폭포)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뒷통수에 숨
겨진 숨은폭포를 찾았다.
날도 징그럽게 더워서 도심에서 가까운 계곡에서 밤을 담구며 잠시 여름의 핍박을 피하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구파발(舊把撥)에서 가까운 진관사계곡이나 사기막골(효자동계곡)을 염두
에 두었으나 밤골계곡에 숨겨진 숨은폭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출동했다.

여름의 기운이 제법 강했던 14시에 연신내(3,6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폭포에서 섭취할 간단
한 먹거리와 막걸리를 구입했다. 그런 다음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
고 박석고개와 구파발역, 북한산성입구, 효자비를 지나 효자2통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밤골계곡으로 인도하는 길을 들어서면 농가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들을 지나면 바로
무성한 숲길이 펼쳐지면서 천하를 녹여먹을 정도로 강렬한 햇살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진다.
그 숲길을 조금 들어서면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과 만나게 되며, 거기서 2분 정도 가
면 밤골공원지킴터와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게이트(문)가 나온다.


▲  북한산국립공원 밤골공원지킴터와 공원 게이트(문)


 

♠  밤골계곡(숨은벽계곡)

▲  녹음(綠陰)이 짙은 밤골계곡 산길

밤골공원지킴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다. 숲도 녹음(綠陰)도 더욱 짙어져
원시림(原始林)을 방불케 하는데, 날씨는 덥지만 숲이 베푼 바람과 갖은 내음으로 땀은 줄행
랑 치기가 바쁘다.

밤골계곡은 숨은벽능선 북쪽에서 시작해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계곡으로 숨은벽계곡이
라 불리기도 한다. 북한산(삼각산)에는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일품 계곡이 참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북한산성계곡, 우이동계곡(우이9곡), 소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
포), 정릉계곡, 구기동계곡, 불광사계곡, 진관사계곡, 삼천사계곡 등이 있다. (도봉산과 사패
산 구역은 제외)
이들은 일찍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의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는데, 밤골
계곡은 그들에 비해 인지도는 낮으나 계곡 풍경은 그들 못지 않다. 게다가 계곡의 수질도 매
우 청정하여 신선들의 비밀 피서지로 손색이 없으며, 계곡 중간에 있는 숨은폭포는 북한산의
일품 폭포로 찬양을 받는다.

밤골계곡 코스(또는 숨은벽 코스)는 숨은폭포를 지나 숨은벽능선을 거쳐 북한산의 지붕인 백
운대(白雲臺, 837m)로 이어지며. 숨은벽능선은 바위 구간이 많아 제법 험하다고 하는데 대신
조망과 풍경이 국보급이다. 숨은벽이란 이름은 북한산 뒷쪽(북쪽)에 숨은 듯 자리해 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이 참 귀여우면서도 정감이 많이 간다.

북한산(삼각산)을 많이 갔다고 자부하는 본인이나 아직 숨은벽능선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
있다. 그 능선으로 들어가는 계곡과 폭포도 이번이 첫 인연이라 기대와 설렘이 아주 큰 편인
데, 밤골안내소에서 숨은폭포까지는 1km 정도 된다. 길은 거의 평탄한 수준으로 처음에는 산
길과 계곡이 조금 거리를 두고 펼쳐지다가 끝내는 서로가 붙어 나란히 이어지면서 폭포에 이
르게 된다.


▲  밤골계곡 물이 잠시 정체를 빚는 계곡 건널목


▲  인적이 거의 없는 밤골계곡 산길
길을 가다가 혹여 신선 형님이나 선녀 누님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폭포에 대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열심히 산길에 임한다.

▲  밤골계곡 산길 ~ 우리들은 점점 푸른 산속에 묻혀 간다.

▲  밤골계곡에서 만난 기묘하게 생긴 바위

숨은폭포로 열심히 가다보면 홀쭉하게 선 기묘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마치 옛 유적에서 많이
나오는 기와 조각이나 도자기 파편을 크게 확대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하늘에서 천제(
天帝)의 명으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인부가 실수로 떨어트린 기와 파편이 그대로 곤두박질 친
것 같다.

바위 피부에는 자연이 입힌 이끼와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해 시커먼 모습이며, 중간에는 누구
에게 얻어 맞은 듯, 움푹 패인 자국들이 있다. 바위 윗쪽에는 속인(俗人)들이 얹혀놓은 돌이
널려있는데, 산길에 접한 바위 피부에도 조금의 틈이 보이는 곳에는 꼭 돌들이 여러 개 얹혀
져 있다.
이곳을 지난 사람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 바위에 소망과 정성을 담아 얹힌 돌로 일종의 산악
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어준 이름도 있을 듯 싶으나 전해오는 것은
딱히 없는 것 같으며, 사람들이 얹힌 돌이 많이 붙어있어 그 흔한 '붙임바위'라 불러도 손색
은 없어 보인다. (기와 파편처럼 생겼으니 기와바위라 불러도 될 듯)


▲  기묘하게 생긴 바위 옆모습

▲  여기저기 절경과 벼랑을 빚은 밤골계곡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비경, 숨은폭포(숨은벽폭포)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

밤골공원지킴터에서 넉넉잡아 20분 정도 들어가면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진하게 귀청을 때리
면서 숨은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숨은벽폭포라 불리기도 하는데 숨은벽능선으로 오르는 길
목에 있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대자연 형님이 북한산이란 대작품을 빚고 혼자 두고두고 보려고 북한산 뒷쪽에 몰래 이 폭포
를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소리도 없이 묻혀있다. 북한산에 안긴
폭포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물이 매우 맑고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며, 경승지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던 선비와 양반들도 이곳의 존재를 몰랐던지 폭포에 대한 기록이나 시문(詩文)은 전하
는 것이 없다. 다만 북쪽에 있는 효자리계곡(사기막골)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육모정과 서산
정사터 등이 남아있어 그곳을 찾은 일부가 이곳에 왔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폭포는 2~3개(엄밀히 따지면 3개이나 2개로 봐도 무방)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폭포가 더 일품
이다. 단순히 폭포를 보러 온 이들은 윗사진의 아랫폭포가 전부인줄 알고 이거만 보고 돌아가
는 경우가 많은데, 반드시 1단계 더 올라 윗폭포도 보기 바란다. 그래야 괜히 애꿎은 땅을 치
며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숨은폭포에게도 숨겨진 별칭이 있다고 하는데, 아랫폭포를 총각폭포, 윗폭포를 색시폭포(처녀
폭포)라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그에 대한 사연과 전설은 딱히 전
해지는 것이 없다. 지금은 많이들 찾아오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이나 아는 사람만
찾아오던 숨겨진 비경이다 보니 그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아랫폭포의 높이는 대략 10m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30~40도의 경사진 바위를 미끄럼
을 타듯 내려온다. 어제까지 비가 많이 내려서 계곡의 수량이 크게 증가해 물줄기가 성난 기
세로 쏟아져 마치 하얀 비단을 드리운 듯 하다.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흔드니 여름 제
국도 크게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폭포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은 지금이 여름의 한복판이란 사
실 조차 흐릿하게 만든다.
폭포 앞에는 폭포수가 담긴 못이 있는데, 물이 얼마나 해맑은지 바닥이 훤히 보인다. 허나 바
닥이 보인다고 괜히 방심하지는 말자,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앞은 수심이 깊으니 주의해야
된다.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의 위엄 ▼



▲  풍덩 안기고 싶은 아랫폭포 못

폭포에 도착한 우리는 어린 아이 마냥 신이 났다. 때가 묻지 않은 폭포수에 발과 다리를 담구
니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이 무척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온몸으로 계곡물과 짜릿하게 스킨
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챙겨오지 않아 다리와 발을 담구는 선에서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마치 폭포를 전세낸 듯 한없이 다리를 담구니 다리가 정말 하얗고 매끄러워진
것 같다.

그렇게 발을 담구며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고 즐거운 간식 시간을 갖는다. 적당한 돌에 속세
에서 사들고 온 막걸리와 김밥, 과자, 커피 음료 등을 차려놓고 열심히 섭취를 했다. 폭포가
안겨준 시장기에 금세 동이 나고, 막걸리 또한 바닥을 보인다.


▲  폭포 윗쪽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아랫폭포로 빠르게 흘러가는 계곡물

즐거운 간식시간을 마치고 계속 폭포 앞에 머물렀다. 이곳이 분명 숨은폭포는 맞는데 폭포와
관련된 사진에는 이거 말고 폭포가 더 있었다. 그러니 분명히 위로 올라가면 나머지 폭포가
있을 것이다. 하여 윗쪽으로 올라가니 평탄한 계곡이 나오고, 그 계곡을 조금 들어서니 바로
숨겨진 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바로 숨은폭포의 윗폭포이다.


▲  숨은폭포 옆구리를 지나는 산길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윗폭포와 아랫폭포 사이의 계곡

▲  모습을 드러낸 윗폭포 -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  정면에서 본 윗폭포의 위엄

아랫폭포과 윗폭포는 대략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같은 숨은폭포 형제지만 서로가 완전
히 다른 모습으로 30~40도의 경사를 이룬 아랫폭포와 달리 윗폭포는 거의 90도 직각을 이루며
패기 넘치게 물을 아래로 내리 쏟는다. 그러다보니 폭포수 소리는 아랫폭포보다 한층 더 우렁
차다.

벽처럼 늘어선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장쾌하게 쏟아지는 윗폭포는 높이가 10m 남짓으로 폭
포 앞에는 물이 담긴 못 대신 바위 하나가 오랜 세월 물을 맞으며 누워있다. 한여름에야 시원
하겠지만 억겁의 세월 동안 종일 물을 맞으니 바위 피부가 완전 매끄럽다 못해 미끄럽다. 이
렇게 폭포 앞에 바위가 있으니 경북 청도(淸道)의 낙대폭포처럼 물맞이 장소로 적당하다.


▲  산길에서 본 윗폭포

윗폭포의 위엄을 제대로 보려면 계곡보다는 등산로(산길)에서 봐야 된다. 산길은 아랫폭포 옆
구리에서 바위를 타고 윗폭포 서쪽을 지나가는데, 윗폭포보다는 높은 곳에 있어 폭포와 그 윗
쪽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윗폭포 윗쪽에는 못과 함께 폭포가 하나 더 숨어있는데, 그 폭포는 완만한 경사로 높이는 5m
정도 되는 듯 싶다. 허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지 나무에 대부분 가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
고 귀차니즘 발동으로 그곳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위에 있는 것도 그런데로 폭포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그가 윗폭포가 되고, 윗폭포를 중간폭포
라 불러야 되겠지만 위에 있는 폭포는 느슨한 경사라 윗/아랫폭포보다 멋이 떨어져 별도로 다
루어도 무리는 없어보인다.


▲  윗폭포 윗쪽 부분의 못과 폭포
선녀 누님의 숨겨진 욕탕은 아닐까? 나뭇꾼과 선녀에 나오는 나뭇꾼처럼
주변 숲에 숨어 그들을 노리고 싶다.


윗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아랫폭포로 내려와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17시에 자리를 접고 폭포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등을 돌리기가 얼마나 섭섭했던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봤는지 모른
다. 삼척(三陟) 미인폭포(☞ 관련글 보러가기) 전설에 나오는 미인처럼 폭포를 끼고 살고 싶
었지만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다. 그러니 돌아가야 된다.

* 숨은폭포, 밤골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산 19-1


 

♠  호랑이와 효자의 애틋한 설화가 깃든 박태성 정려비(朴泰星 旌閭碑)
- 고양시 향토유적 35호

▲  효자비라 불리는 박태성 정려비

밤골계곡지킴터에서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을 따라 남쪽으로 10분 정도 넘어가면 효자
비(孝子碑)라 불리는 시커먼 피부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박태성 정려비로 비석 앞 도
로(북한산로)에 있는 정류장 이름도 무려 '효자비'이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에 박태성(朴泰星, 1679~1758)이란 효자를 기리고자 만든 것으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1679년 박세걸(朴世傑)의 아들로 태어난 박태성은 자가 경숙(景淑), 본관은 밀양이다. 품성이
온화하고 효성이 대단한 인물로 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에서는 고양시 효자동 뒷
산에 무덤을 썼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그의 효행이 영조(英祖) 때 조
정에까지 알려지면서 음사(蔭仕)로 내의(內醫)에 천거되었다. 허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데, 무슨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을 받겠습니까??'
하고 거절했다.

그는 효자란 이름에 걸맞게 종로구 효자동(孝子洞)에 살았는데, 부친이 별세한 갑년(甲年, 60
년)이 다가오자 63세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서
고양시 효자동에 있는 부친묘로 성묘를 다녔다. 그리고 성묘를 하고 도성으로 돌아와 궁궐로
등청(登廳)을 했다.
효자동에서 서대문을 거쳐 부친묘까지는 거의 30여 리(10리는 5km) 정도 된다. 지금이야 차량
으로 금방 오갈 수 있지만 그때는 오로지 두 발과 말 밖에는 없었다. 그는 큰 벼슬은 지내지
못했고 호랑이를 만나기 전에는 걸어다녔다고 하니 절하는 시간을 포함해 오가는데 왕복 7~8
시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도성(都城) 성문이 새벽 3시에 열리니 성묘를 하고 11시까지 등
청을 한 듯 싶으며, 그걸 매일처럼 했다는 것은 지나친 효심과 근면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
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묘를 하고자 새벽 일찍 집을 나서 무악재를 넘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
기 무서운 호랑이의 대명사인 인왕산(仁王山)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는 것이다. 그는 순간
쫄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선친묘에 가는 길이다. 나를 잡아 먹으려면 잡아 먹거라!!'
그 말을 들은 호랑이는 그를 덮치기는 커녕 머리를 반대로 돌리고 뒷걸음질을 하여 그의 곁으
로 다가가 '내 등에 타라!'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박태성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의 등에 올라탔다.

호랑이는 그를 태우고 깊은 산중으로 달려갔다. 자꾸 낯선 산속으로만 들어가니 박태성은 산
속으로 납치하여 잡아먹는 것은 아닌가 싶어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막상 당도한 곳은 다름 아
닌 부친묘 앞.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그는 옷깃을 여미고 무덤에 절을 올렸다. 그리고 무덤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그때 새 1마리가 주변 나무 가지에 앉더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몇 년
동안 같이 울었다고 함)
호랑이는 그의 성묘 장면을 지켜보다가 성묘가 끝나자 그에게 다시 타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
래서 그를 타니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 처음 만났던 무악재에서 그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다음날에도 무악재에 이르니 호랑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역시나 왕복으로 태워주어 편하
게 성묘를 다녀왔다. 호랑이는 무임으로 '무악재~효자동 선친묘'구간을 고속으로 셔틀 운행을
해준 것이다. 전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박태성은 자신을 매일처럼 태워주는 그를 위해 종종 고
기를 준비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
이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1758년에 박태성은 79세에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후손들은 그의 선
친묘 앞에 그의 묘를 썼다. 며칠 뒤, 후손들이 가보니 그의 묘 앞에 큰 호랑이 1마리가 엎드
려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박태성을 매일 태워주었던 그 호랑이였다. 이에 후손들은
호랑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 곁에 무덤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박태성의 이야기를 들은 고종(高宗)은 크게 감동을 먹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1893년
하사금을 내려 사당과 효자비를 세워 포상을 했으며, 비문(碑文)은 박태성의 증손인 박윤묵(
朴允默)이 썼다. 또한 그의 효심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무덤 주변으로 몰려와 마을을 이루
고 살면서 효자리(孝子里)가 되었다고 하며, 그의 효행을 길이길이 기억하게 해주었다.
<비석은 고종이 아닌 영조가 내렸다는 설도 있으며, 박태성이 부친묘에 성묘를 다니자 이곳에
들끓던 호랑이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효자리는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효자동으로 변경
됨>


▲  박태성 정려비

효자비의 설화처럼 호랑이가 부친묘까지 매일
왕복 운행을 해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호랑이가 동물의 제왕이면서 사람들이 제일로
두려워했던 존재다보니 전설/설화의 격을 높이
는 용도로 많이 등장한다. 이 설화 역시 후손
들이 그의 효행을 드높이고자 호랑이를 넣어
적절하게 꾸민 것으로 여겨지는데, 말을 타고
다닌 것을 호랑이로 둔갑시킨 것은 아닌지 모
르겠다.

1893년에 왕명으로 세운 효자비는 흑요석(黑曜
石)으로 된 검은 피부의 비석이다. 그의 피부
에는 박윤묵이 쓴 12자의 글씨가 있는데, '朝
鮮孝子朴公 泰星旌閭之碑'라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비석의 높이는 117cm, 폭은 40cm, 두께
는 12cm이다.

참고로 효자비에서 동쪽 산자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박태성의 묘역이 있다.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서 나는 길을 찾지 못했는데 그 묘역에는 박태성과 그의 부인인 완산이
씨, 김해김씨의 묘가 있으며, 묘비는 1778년에 흑요석으로 세웠다.
묘 옆에는 귀엽게 만든 호랑이상이 있는데, 이는 효자비 부근에서 농원을 하는 사람이 사비를
들여 만든 것이며, 그 옆에는 호랑이의 묘로 전하는 조그만 봉분(封墳)이 있다. 그리고 묘역
에서 50m 떨어진 곳에 박태성의 부친인 박세걸 묘역이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224


▲  봄이 빚은 아름다운 수채화 (효자비에서 북한산성입구 방향)

▲  효자동 내시묘역길에서 바라본 노고산(老姑山)

노고산에는 예비군훈련장이 많이 안겨져 있는데, 평일에는 예비군의 사격 훈련 총소리가 여기
까지 징하게 울려퍼진다. 그 정겨운 소리를 들으니 바람처럼 흘러간 예비군 시절이 진하게 떠
오른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 숨은폭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효자비와 노고산 사진은 봄에 별도로 담은 것임)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7월 1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 서쪽 변두리에 깃든 상큼한 호수공원, 신월동 서서울호수공원 (능골산, 백인의식탁, 몬드리안정원)

 


' 도심 속의 상큼한 호수공원, 서서울호수공원(능골산) '

▲  서서울호수공원 중앙호수와 소리분수


 

여름 제국(帝國)이 막바지 위엄을 보이던 8월 끝 무렵에 일행들과 서서울호수공원을 찾았
다.
서서울호수공원은 서울 서남쪽에 생겨난 호수공원으로 그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다. 비록
나와 서울 하늘을 같이 이고는 있지만 나는 서울 동북쪽 끝인 도봉동(道峰洞)이고 호수공
원은 그 반대인 서남쪽 끝에 있으니 서로의 거리가 무척 멀다. 하여 쉽게 인연이 닿지 않
았었지. 그러다가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그를 찾게 되었다.

오후 2시, 신도림역에서 일행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662번을 서서울호수공원으로 이동했는
데, 나머지 일행은 까치산역(2,5호선)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왔다.


 

  그림 같은 호수를 품은 서울 서남권 최대의 시민공원
~ 서서울호수공원 (제생정원, 능골산)

▲  정수장 시절 수도관을 활용한 제생정원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 그림 같은 호수를 품은 호수공원이 있다. 그 현장
은 바로 양천구 신월3동 신월나들목 북서쪽에 넓게 자리한 서서울호수공원(이하 호수공원)이
다.

이곳은 원래 물을 정화하여 상수(수도물)를 생산하던 정수장(淨水場)이었다. 얼핏 봐서는 이
곳이 설마? 믿겨지진 않겠지만 제생정원과 몬드리안정원 등 공원 곳곳에 정수장 시절의 흔적
이 짙게 남아있어 사연을 알게 된다면 아마 놀라게 될 것이다. 쾌쾌한 약품 냄새와 하수도 냄
새가 풍겼던 통제구역 정수장이 포근한 시민공원으로 완벽하게 변신을 꾀한 의미 깊은 현장이
기 때문이다.

1959년 경기도 김포군(金浦郡)은 이곳에 김포정수장을 닦았다. 당시 신월동(新月洞)을 비롯한
강서/양천구 지역은 모두 김포군 땅이었다. 1963년 이들 지역이 서울에 편입되었으나 계속 김
포군에서 소유하고 있던 것을 1979년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신월정수장으로 이름을 갈았다.
이곳은 매일 12만 톤의 수도물을 공급했으나 2003년 10월 '서울시 정수장 정비계획'에 의거하
여 정리 대상이 되면서 강제로 심장을 멈추게 된다. 이로써 44년이나 이어오던 정수장으로서
의 생명은 끝이 난 것이다.

이후 신월정수장 자리를 두고 청소년 유스타운 건설, 임대주택 조성, 징그럽기 그지 없는 영
어 사대주의 현장 조성(영어체험마을) 등 다양한 계획이 쏟아져 나왔으나 어느 것도 답이 되
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그러다가 2006년 서울의 지역간 불균형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김포공항 비행기 소음에 매일
고통받는 지역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마땅한 넓은 공원이 없던 강서/양천 지역 공원 확충을
위해 서울 서남권 제일의 테마공원을 닦기로 결정했다. 하여 3년 가까이 공원화 작업을 벌였
고, 정수장 뒷쪽에 자리한 능골산까지 공원에 포함시켜 숲을 복원하고 산길을 정비해 2009년
10월 26일 '서서울호수공원'이란 새로운 현판을 내걸며 세상에 공개되었다. 금지된 구역에서
누구나 안길 수 있는 시민공원으로 새롭게 거듭난 것이다.

이곳은 옛 정수장을 발판으로 삼아 일어선 친환경 공원이라 그에 걸맞게 '물'과 '재생'을 테
마로 내세웠다. 공원 면적은 217,946㎡(능골산 포함)로 여의도공원, 양재시민의숲에 버금가는
서울 서남권 최대의 공원이며, 소나무 등 47종의 나무와 눈주목 등 44종의 관목, 수호초와 원
추리 등 3종의 초화, 금잔디(22,961㎡)와 양잔디(417㎡)로 이루어진 잔디밭까지 갖추었다.
김포정수장 시절부터 있던 중앙호수에는 노즐 41개로 이루어진 소리분수를 닦아 비행기가 뜰
때마다 흥분하게 했고, 실개천과 생태수로 등의 물줄기와 백인의 식탁, 제생정원, 정수장 건
물을 활용한 몬드리안정원과 미디어벽천 등을 갖추어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호수공원에 왔다면 공원의 심장부(중앙호수, 몬드리안정원 일대)만 살피지 말고, 공원 서쪽에
자리한 능골산도 올라가보자. 그 산도 엄연한 호수공원의 일원(부천 구역은 제외)으로 정상까
지는 길어봐야 10분 정도이다.
정상을 찍고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조선 초기 무인(武人)인 변종인과 20세기 초/중반 유명
시인인 수주 변영로가 묻힌 밀양변씨묘역이 있으니 그들까지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제생정원

호수공원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제생공원이라 불리는 공간이다. 이곳은 정수장
에 쓰인 직경 1m짜리 수도관을 손질하여 깔아놓고 그 주변에 풀, 억새를 심은 정원이다. 즉
정수장 시절 수도관을 활용하여 짠 공간이다.
그 옆에는 네모난 얕은 연못을 깔았는데, 수도관과 정수장 기둥을 심고 다양한 색채를 입히거
나 기둥 위에 꽃을 두었다. 완전 친환경공원에 어울리게 말이다.


▲  서서울호수공원 스타일로 재현된 제생정원 연못

▲  호수공원 개원 기념으로 심어진 소나무 (2009,10,26일에 식수됨)
호수공원이 진국으로 숙성될수록 이 소나무도 덩달아 숙성의 기쁨을 누린다.

▲  강렬한 붉은 피부에 하얀 점을 지닌 백인의 식탁

제생정원 남쪽에는 붉은 피부에 네모난 하얀 점을 지닌 길쭉한 식탁과 의자가 있다. 그가 바
로 호수공원의 대표 명물인 '백인의 식탁'이다. 그 이름 그대로 100명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규모로 공원 조성 때 현상 공모에서 당선된 작품을 현실화시켰다. <씨토포스와 지안건축사사
무소에서 제출한 작품임>
여기서는 도시락이나 간단한 먹거리를 섭취할 수 있다. 다만 음식을 만들거나 취사는 절대로
안된다. 이렇게 휼륭한 식사 장소가 있으니 동네 축제나 모임 뒷풀이 장소, 야외 결혼식이나
생일잔치 피로연 장소로 활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큐브(cube) 모양으로 이루어진 어린이놀이터

미끄럼틀을 밖으로 내민 저 정육면체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살짝 들어가고는 싶어도 순
수 어린이 싸이즈다보니 나는 들어갈 수가 없다. 우리 때는 저런 신선한 놀이터도 없었는데,
이럴 때는 잠시나마 어린 시절로 역주행하고 싶다.


▲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진 열린마당(열린풀밭)
이곳은 이름 그대로 누구든 들어가 자리를 피고 쉴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  능골산, 몬드리안 정원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

▲  능골산 정자

호수공원 서쪽에는 짙은 숲을 지닌 능골산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다. 산이라 하기에는 좀 아쉬
운 모습이나 그래도 하늘을 향해 작게나마 솟아있으니 뫼는 뫼이다.

능골산은 해발 71.5m의 조그만 뫼로 거의 뒷동산 규모이다. 서울 신월동과 경기도 부천시(富
川市) 고강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산 남쪽으로 서울과 부천의 경계를 이루는 지양산(芝
陽山), 와룡산(臥龍山)과 이어져 있었으나 경인고속도로로 그 줄기가 끊겼다. 서쪽과 북쪽은
주거지(고강동, 신월3동)로 막혔고, 동쪽 또한 호수공원으로 막혀있다. 그야말로 속세(俗世)
에 좁게 갇힌 외로운 신세이다. 그나마 신월정수장과 밀양변씨묘역 덕분에 이 정도라도 살아
남은 것이다.

호수공원을 조성하면서 숲을 짙게 깔아놓아 생태숲탐방로로 활용하고 있으며, 산 남쪽에는 다
목적운동장을 닦았다. 그리고 산 서쪽 고강동(古康洞)에는 변종인(卞宗仁, 1433~1500)의 묘를
중심으로 한 밀양변씨 묘역이 자리해 있는데, 비록 왕족의 묘역은 아니나 정2품 벼슬을 지낸
변종인의 묘가 있어 능골이라 불리게 되었고, 그게 산 이름으로 굳어졌다.

변종인묘역은 능골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면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신도비(神道碑)까지
갖추고 있으며 '논개(論介)'란 시로 유명한 수주 변영로(卞榮魯, 1898~1961)의 무덤도 그 곁
에 함께 있어 같이 둘러보기를 권한다. 호수공원에서 길어봐야 도보 20분 이내 거리이다.

▲  능골산 정상 표석
호수공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  고강동, 변종인 묘역으로 이어지는
능골산 서쪽 산길


 

♠  서서울호수공원의 상징이자 아름다운 거울, 중앙호수와 소리분수

서서울호수공원의 상징이자 얼굴은 바로 중앙호수이다. 그가 있었기에 이곳이 호수공원이란
명분과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서울 서남쪽 변두리에 이렇게 큰 호수가 있었다니?? 처음에는 공원을 닦으면서 만든 호수로
단순하게 생각을 했다. 허나 그는 김포정수장 시절부터 있던 50년 이상 묵은 호수였다. 다만
정수장이 엄격히 금지된 보안시설이기 때문에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었고, 그로 인해 그 존
재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오랜 세월 철저히 베일에 감싸여 그 속살을 드러내지 않던 숨
겨진 호수였던 것이다.

천하에 그 미모를 드러낸 호수의 면적은 18,000㎡로 정수장에서 제공한 물을 먹고 자랐다. 정
수장을 지우고 공원을 한참 닦을 때 호수를 그대로 보전하고 연꽃을 비롯한 여러 수생식물과
동물을 풀어놓아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치장했다.
호수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왔으나 정작 와보니 대단했다. 비록 인공호수지만 자연산처
럼 변해버린 생태 호수, 거기에 호수를 둘러싼 산책로도 일품급이다. 특히 호수 복판에 분수
를 깔아놓았는데, 비행기가 지날 때마다 격하게 흥분하여 스스로 물줄기를 뿜어내는 이색 분
수쇼를 선보인다. 그가 바로 호수의 운치를 크게 돋구는 명물, 소리분수이다.
분수는 41개 노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비행기 소음(81db)을 감지하여 자동으로 흥분하
게끔 했다. 또한 조명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밤에도 볼 수가 있다.
안그래도 이 지역은 김포공항 근처고 그곳으로 착륙하는 경로라 비행기 소음에 늘 고통을 받
고 있었는데, 비록 2001년에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하여 국제선 대부분이 그곳으로 옮겨갔지만
소음은 여전하다. 그 소음을 이용한 것이 바로 소리분수이다. 지역 환경의 단점을 역발상으로
공원 명물로 꾸민 것이다. 하여 이곳만큼은 비행기를 애타게 기다리게 된다. 소음이 들려야
분수가 흥분을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분수가 1년 내내, 24시간 내내 흥분하는 것은 아니며,
호수 주변에서 너무 시끄럽게 떠드는 경우 자칫 비행기 소리로 잘못 인식해 흥분하는 경우도
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달아놓은 기계라 그 한계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 소리분수 가동기간 : 5월1일~9월30일 (12~18시에만 가동, 비가 오거나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에는 움직이지 않음)


▲  저기 비행기가 떴다

▲  비행기가 소음을 선사하며 호수 하늘을 가르자 소리분수는
슬슬 흥분을 낸다.

▲  비행기를 향한 그리움인가? 비행기 소음에 대한 단체 항의인가?
일제히 허공을 찌르는 소리분수의 위엄

▲  비행기가 사라질 때까지 분수는 계속 하늘을 찌르고

▲  비행기가 사라지자 분수는 남쪽부터 진정을 되찾는다.
지금까지 많은 분수를 보았지만 비행기 소음을 양분으로 삼은 분수는 처음이다.

▲  슬슬 가라앉는 소리분수
소리분수는 남북으로 41개의 노즐이 펼쳐져 있다. 비행기가 남쪽에서 오니
자연히 남쪽부터 반응을 보이며, 북쪽이 제일 늦게 흥분을 보인다.

▲  남쪽에서 바라본 소리분수의 격한 흥분 ▼



▲  북쪽에서 바라본 중앙호수와 소리분수의 향연

▲  호수 서쪽, 문화마당에서 바라본 중앙호수
호수에 개구리 운동장(연잎)이 넓게 닦여져 있다.

▲  목재로 닦아놓은 문화마당과 중앙호수

▲  비행기가 뜨는 중앙호수 남쪽

▲  서쪽에서 바라본 중앙호수

▲  호수를 지키는 물고기들 (이곳에서 낚시는 안됨)

▲  호수 동쪽 산책로 ①

중앙호수 주위로 마치 테이프를 두른 듯, 산책로를 빙 둘렀는데, 그중에서 북쪽과 동쪽 산책
로가 가장 호젓하다. 온갖 나무와 강아지풀 등 다양한 수풀이 진한 녹음을 휘날리며 운치를
강렬히 수식하기 때문이다. (호수 서쪽에는 문화마당과 방문자센터가 있음)
호수에서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과 능골산이 불어주는 산바람이 교차해 여름 제국의 한복판에
도 늘 시원하며, 호수는 보는 지점에 따라 늘 모습을 달리하여 그의 다양한 얼굴을 만날 수
있다.


▲  호수 동쪽 산책로 ②

▲  호수 동쪽 산책로 ③
집으로 살짝 훔쳐와 혼자서만 누리고 싶은 길이다. 허나 그럴 재주가
없으니 가끔 찾아와 거닐어야겠다.


 

♠  서서울호수공원 몬드리안정원과 미디어벽천

▲  옛 정수장과 자연의 조화, 몬드리안 정원

중앙호수 남쪽에는 마치 폐허의 유적지 같은 공간이 있다. 초췌한 기둥과 벽 사이로 온갖 꽃
과 나무들이 어깨를 펴고 있는데, 그곳은 정수장 시절에 쓰인 침전조 등의 여러 시설이 있던
공간으로 그 시설을 부시고 몬드리안 정원을 새로 심었다.
정수장 시설을 다 밀어버리지 않고 기둥과 천정 등을 남기고 추상화가 몬드리안의 구성 기법
을 도입해 수직과 수평의 선이 조화되게끔 만들었는데, 미디어벽천과 수생식물원, 하늘정원,
생태수로 등이 있으며, 공간마다 꽃과 나무를 심어 조촐하게 야외식물원(야생화원)의 역할도
겸하게 했다. 또한 옛 시설을 재활용한 수질정화 시스템과 빗물을 이용한 물순환 시스템 등의
친환경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정원 주위로 늘 깨끗한 물이 흐른다.


▲  온갖 키 작은 화초들이 자라고 있는 몬드리안 정원 (야생화원)

▲  물과 화초, 옛 정수장 시설이 어우러진 몬드리안 정원

▲  수풀의 보금자리가 되버린 옛 정수장 벽
여러 갈래로 쪼개진 정수장 벽이 도처에 남아 옛 정수장 시절을 아련히 귀뜀해준다,
마치 일부만 남은 폐허의 근대 유적지 같은 모습으로 푸른 옷을 걸친 벽은
친자연적으로 변화한 이곳의 긍정적인 현실을 대변해준다.

▲  옛 정수장 벽 사이로 이어진 정원 통로
마치 20세기에 벌어진 전쟁의 흔적 마냥 폐허의 벽에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하다.

▲  몬드리안 정원 야생화원 탐방로
야생화초가 나와 비슷한 눈높이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다.

▲  야트막한 경사에 마치 눈이 흩날리듯 메밀꽃으로 보이는 하얀 꽃이
심어져 있다.

▲  폭포처럼 이루어진 미디어벽천(Media Waterfall)

미디어벽천은 몬드리안 정원의 명물로 파워글라스라는 투명 디스플레이 글라스를 사용하여 문
자나 이미지, 동영상 등을 표현한다. 그러니까 디지털영상을 벽천이라 불리는 90도 직각면에
표현하는 것이다.
허나 우리가 갔을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라 그냥 맨바닥만 있었을 뿐 아무 것도 재현된 것이
없다. 소리분수보다 훨씬 보기 힘든 존재로 그를 보려면 12~13시대에 와야 된다.

* 미디어벽천 가동 시간 : 5월1일~9월30일까지 (12시~12시30분, 13시~13시30분)


▲  위에서 바라본 미디어벽천
벽천 앞에는 늘 물이 머물러 있다. 이들은 생태수로의 일원으로 수심은 매우 얕다.
그렇다고 물에 들어가지는 말자. (물놀이, 발담구기 금지)

▲  서서울호수공원을 닦은 기념으로 세워진 비석 (2009년 10월 26일)

▲  물순환시스템이 적용된 몬드리안 정원 생태수로

▲  물이 모여있는 몬드리안 정원 남쪽 끝

▲  옛 정수장 기둥이 남아있는 몬드리안정원 하늘정원

몬드리안정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하늘정원이 자리해 있다. 그래서 이름도 하늘정원
인 모양이다. 하얀 기둥 끝에는 철골이 을씨년스럽게 노출되어 있어 옛 정수장 시절을 애타게
그리는 듯 하다.
이곳에는 여러 꽃과 풀이 심어져 있으며, 의자가 넉넉히 깔려있어 밑에 펼쳐진 중앙호수를 바
라보며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다채로운 화초가 심어진 하늘정원
마치 빌딩 옥상 정원 같은 기분이다.

▲  몬드리안 정원 허공을 가르는 윗 탐방로 ①

▲  몬드리안 정원 허공을 가르는 윗 탐방로 ②

▲  몬드리안 정원 허공을 가르는 윗 탐방로 ③

▲  중앙호수와 접한 몬드리안정원 북쪽 구역

호수공원을 한바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가 되었다. 햇님도 슬슬 빈틈을 보이기 시작
하고 그 틈을 노려 달이 세상을 훔치려 든다. 열심히 돌아다녔더니 배도 고프고 슬슬 따끈한
저녁밥이 간절해지는 시간이라 부근에서 저녁에 곡차(穀茶) 1잔 걸치고 각자 제자리로 돌아왔
다.
이렇게 하여 늦여름 서서울호수공원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월3동 149-20 (남부순환로64길20, ☎ 02-2604-3004)
* 서서울호수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중앙호수 사진을 클릭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중앙호수
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잔잔한 호수에도 어느덧 어둠이 몰려온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7월 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초여름 산사 나들이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나한도량을 내세우고 있는 수락산 학림사 (수락산 귀임봉)

 


~~~~~ 초여름 산사 나들이, 수락산 학림사 ~~~~~

▲  학림사 경내

▲  학림사 석불좌상

▲  수락산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슬슬 고개를 들던 7월의 첫 무렵, 서울의 동북쪽 지붕인 수락
산을 찾았다.
수락산(水落山, 638m)은 그의 그늘인 상계1동에 8년을 살면서 수없이 안겼던 뫼로 지금은
도봉산(道峯山) 그늘인 도봉동에 살고 있지만 가끔식 중랑천(中浪川)을 건너 수락산의 품
을 찾는 편이다.
수락산에는 다양한 코스가 있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학림사로 올라가기로 했다. 지하철
4호선의 북쪽 종점인 당고개역에서 상계3,4동 달동네를 가로질러 수락산의 품으로 들어섰
는데, 길이 좀 복잡하긴 해도 햇갈릴만 하면 이정표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니 헤맬 염려는
거의 없다.

달동네를 벗어나니 여름 제국(帝國)의 은혜로 연두연두하게 익은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
다.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며, 길의 경사가 완만하여
그리 힘든 것은 없다.


▲  녹음에 잠긴 학림사 가는 길

▲  학림사 200m 직전 (학림사 부도 앞)


 

♠  학림사 입문 (부도와 석불좌상)

▲  학림사 부도(浮屠)

숲길을 어느 정도 오르면 발을 잠시 쉴 수 있는 나무 벤치와 수락산 안내도, 그리고 늙은 티
가 풍기는 부도(승탑) 2기가 마중을 한다.

이들 부도는 학림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존재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다정함이 물씬 풍기는
부부처럼 다가온다. 왼쪽에 조금 평퍼짐한 부도는 남편, 오른쪽에 홀쭉한 부도는 아내, 그들
이 나에게 기념촬영을 요청하는 것 같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대추알 모양의 길쭉한 탑을 얹히
고 머리장식을 올렸는데, 누구의 부도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그중 1기에 '상궁(尙宮)~
' 명문이 있어 학림사에서 여생을 마친 궁궐 상궁의 부도임을 귀뜀해준다. 부도는 원래 경내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부도에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자욱해 중후한 멋을 풍긴다.

▲  나무 벤치와 부도

▲  부도의 뒷모습


▲  학림사 약사전(藥師殿)

부도를 지나 학림사 안내문에 이르면 오른쪽에 약사전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다. 안내문 옆
높은 곳에 담장을 두르고 들어앉은 약사전에는 학림사에서 자랑하는 오랜 보물이자 영험하기
로 이름난 석불좌상(약사여래상)이 봉안되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접해온 약사전은 모두 경내에 있었다. 허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경내로 들어서
는 길목에 세워두어 중생들로 하여금 가장 먼저 찾게 하였으니 그만큼 약사불이 학림사의 간
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곳 약사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이름이 쓰인 현판을 보니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힘이 넘쳐보이는데 '藥(약)'자가 '茶(다)'로 보인다. 건물 주변
으로는 담장이 빙 둘러져 있으며 건물 앞에는 석등 1기가 멀뚱히 서 있다.


▲  학림사 석불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2호

약사전의 주인장인 석불좌상은 키가 불과 77cm(어깨 너비 53cm)에 불과한 아주 왜소한 석불이
다. 신체 비례가 너무 떨어져 얼굴 높이가 신체의 거의 2/5에 이를 지경이며, 석불이 앉아있
은 연화대좌(蓮花臺座)는 높이 42cm로 석불보다 덩치가 더 크다. 연꽃이 위로 향한 앙련(仰蓮
)과 아래로 향한 복련(伏蓮)이 대좌를 화사하게 꾸며주고 있는데, 자신보다 큰 대좌 위에 앉
은 모습이 마치 조그만 아이가 커다란 의자에 걸터앉은 것 같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석불
은 거의 네모난 얼굴로 두 눈은 살짝 감겨져
있고 코는 깎여나가 윤곽만 남아있다. 입술에
는 약간의 미소가 드리워져 있고, 중생의 소망
을 모두 들으려는 듯, 커다란 두 귀를 지녔다.

목은 두꺼워서 어깨와 단단히 붙었고, 가슴 앞
에 모은 그의 손에는 조그만 약합이 들려져 있
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배꼽
밑 아랫도리는 보이지가 않는데, 오래전에 사
라진 것으로 여겨지며, 그 모습을 통해 아마도
입상(立像)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 여기서 잠시 학림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옆에서 바라본 석불좌상과 대좌


▲  학림사 경내 직전 (오른쪽 계단은 용굴암, 수락산 정상 방면)


덕릉고개 너머에 있는 흥국사(☞ 관련글 보러가기)가 약사도량(藥師道場)으로 좀 유명하다면
학림사는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 명성이 조금 자자하다.
학림사란 이름은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이른바 학지포란(鶴之抱卵)의 지
세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런 지세에는 무거운 돌로 만든 탑이나 석물은 가급적 피해
야 된다는데 근래에 3층석탑과 5층석탑, 석불 등을 잔뜩 지어놓아 자칫 알이 깨져 탈이 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곳은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671년에 원효대사(元曉大
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없으며, 1881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순항(金淳
恒)이 쓴 '학림암중수기(鶴林庵重修記)'에
'절의 내력을 적은 문서가 모두 사라져 절을 창건한 이와 절의 사적(事蹟)을 알지 못한다'

였으니 원효대사의 창건설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나옹화상 혜근(懶
翁和尙 慧勤, 1320~1376)이 머물렀다고 하지만 학림암중수기에는 언급조차 없다.

중수기에 본격적으로 기록이 나타나는 건 16세기 이후로 임진왜란 시절인 1597년에 절이 소실
되었다고 한다. 1624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터만 남은 이곳에 법당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
켜 세웠으며, 1780년에 최백(崔伯), 궤징(軌澄) 두 승려가 중수하고 1830년에 다시 손질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문 닫기 직전에 이르자 1880년 영상(景惺), 경선(慶船) 두 승려가 나서
절을 일으켜보려고 했다. 허나 돈이 한 푼도 없어 애태우다가 마침 판관 하도일(判官 河道一)
이 절을 찾아오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절의 사정을 전해들은 하도일은 서울로 돌아가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학림사 중수를 건의했
고 이에 황후는 천금의 하사금을 지원했다. 그 돈으로 중수가 마무리되자 단청은 찬란하여 빛
을 발했다고 하며, 부처의 성전은 의연하게 자리잡았다고 중수기에는 적고 있다.

1918년 4월 주지 금운(錦雲)이 중수를 했는데 승려 연응(淵凝)이 '학림암대방여각전각중수기(
鶴林庵大房與各殿閣重修記)'에
'전각이 낡고 기울어 거꾸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보다 못한 금운화상이 발심해 작
은 물건까지도 모두 보시(報施)해 다시 세우니, 가히 후세의 귀감이 될만하다'
고 기록했으니
중수 이전 절의 상태가 가히 짐작이 간다.
또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역과 지척이라 매년 봄과 가을 제사 때마다 많은 제물을 부담
했다. 심지어는 절을 묘역에 포함시키는 등 그 폐해가 컸다고 하며, 1927년에는 도정궁(都正
宮) 소유가 되면서 절을 찾는 중생이 줄어 수입이 감소하기도 했다.

흥국사처럼 왕실의 원찰(願刹)은 아니나 궁궐 상궁들이 자주 드나들며 자신들의 안녕을 빌었
고 퇴직하여 오갈 데 없는 상궁들이 기거하기도 했다.
6.25 때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어 다시 쇠퇴의 늪에 빠졌으나 1985년 전각들을 개축하고 대
웅전, 오백나한전 등을 새로 지었으며, 1994년에 노원역 부근에 7층 규모의 불교회관을 지어
올리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선불당, 청학루, 약사전, 삼성각, 오백나한전 등 9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삼신불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1호
)
와 석불좌상,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등 지방문화재 3점이 있다. 이중 괘불(掛佛
)은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어려워 아예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좌상과 부도 2기 등의 비지정문화재가 추가로 전하고 있다.

학이 알을 품은 지세라 그런지 포근함이 느껴지며, 비록 시내와 가깝지만 첩첩한 산골에 들어
선듯 산사(山寺)의 고즈넉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4동 산1
(덕릉로129가길 241 ☎ 02-936-1700)


▲  학림사 옆구리로 흐르는 계곡
계곡과 나란히 한 산길을 1km 오르면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
용굴암(龍窟庵)이 나온다.


 

♠  학림사 경내 둘러보기

▲  학림사 해탈문(解脫門)과 108계단

약사전을 지나 100m 정도 가면 경내로 인도하는 108계단 앞에 이른다. 계단 중간에는 해탈문
이 걸려있는데, 문 바깥 쪽에는 우람한 모습의 금강역사(金剛力士)상이 그려져 있고, 안에는
사자를 탄 천진난만한 표정의 문수동자(文殊童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가 중생
을 맞는다. 그들 뒤로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그려져 있어 천왕문(天王門)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  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

▲  108계단에서 만난 원숭이들 - 그들의 자세에는 모두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다.

108계단에는 4쌍(8마리)의 귀여운 원숭이 조각이 배치되어 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
부터 눈을 가린 원숭이, 귀를 막은 원숭이,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까지 적
당히 거리를 두며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의 자세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학림사에서
그저 눈요기나 하라고 갖다놓은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우선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쁜 말을 내뱉을 바에는 차
라리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 좋다. 그 다음 눈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것을 보지 말란 뜻이며,
귀를 막은 원숭이는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뜻이다. 끝으로 두 손을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
이는 이들을 모두 지키며 열심히 정진하면 해탈의 환희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를 제외한 3가지의 원숭이는 속인(俗人)들에게 중요한 충고 3가지를 자
세로써 보여주고 있다. 나쁜 것을 말하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정말 극
락처럼 아름다울 것인데 사람은 동물과 신(神) 중간에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존재라 좀처
럼 지키려 들질 않는다. 원숭이의 메세지를 뼛속 깊이 새기며 계단 끝에 이르면 청학루 뜨락
이다.


▲  학림사 청학루(靑鶴樓)와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108계단의 끝에는 포대화상과 2층 누각의 청학루가 자리해 있다. 설법전(說法殿)이라 불리기
도 하는데, 대웅전으로 통하는 1층 좌우에 종무소(宗務所)가 있고, 2층은 강당(講堂)으로 쓰
인다. 2층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불암산이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보이며, 돌로 다진 청학루
밑에는 공양간 등이 들어있다.

청학루 앞에는 4명의 동자승을 안고 있는 똥배 포대화상이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복덕원
만(福德圓滿)한 인상을 지닌 그는 많은 절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몸집이 비대하고 배가 축
나왔으며, 항상 커다란 자루를 등에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으며 시주를 하거나 인간사의 길흉
을 점쳤다는 승려로 미륵불의 화신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의 배를 만지면 복이
오거나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이들이 그의 배를 살살 문지르며 소망을 들
이민다.


▲  청학루에서 바라본 불암산의 위엄

▲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나한도량을 자처하는 절답게 대웅전 밑에 오백나한이 봉안된 오백나한전을 두었다.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오래된 약사여래상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대
동하여 약사여래3불좌상을 이루고 있으며 그 좌우로 16나한상, 그 뒤로 조그만 500나한을 빼
곡히 배치해 놓았다.
이 땅의 7,000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색채를 지닌 500나한의 모습은 이곳을 둘
러보는 중생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한다.


▲  오백나한전 내부 오백나한상과 약사여래3불좌상, 16나한상
오백이 넘는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앞을 향하고 있으니 건물로 들어서는
내가 부담스러워 마주보기가 쑥쓰러울 지경이다.

▲  석조약사여래3불좌상 및 복장유물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6호

500나한과 16나한 등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는 약사여래3불좌상은 가운데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조성 시기는 수락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
나 조선 중기 또는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나한(羅漢)들이 죄다 칼라 색채를 지닌데
반해 약사여래3불좌상은 온통 하얀 피부과 검은 머리로 이루어져 흑백사진을 이룬다.
이들은 옥돌로 조성된 것으로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구부정한 자세이다. 표정은 동
자승을 모델로 했는지 작고 귀엽기 그지 없으며,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다. 가운데 약사여래는 약합을 들고 있어 그의 정체를 알려주며, 불상의 바닥면에는
복장공이 있고, 내부에는 복장(腹臟)이 들어있으나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겠다.


▲  오백나한전과 마주한 선불당(選佛堂)
승려들의 수행공간으로 선불장(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  웃음을 묻어나게 하는 동자상
해맑은 표정의 동자가 엉덩이를 요염하게 쳐들며 연꽃 향기에 심취해 있다.
동자승의 연꽃 심취를 돕고자 대웅전과 소나무가 그에게 늘 그늘을
드리우며 여름 햇살을 막아준다.

▲  대웅전(大雄殿)과 5층석탑

높은 계단 위에 위엄 돋게 자리한 대웅전은 학림사의 법당(法堂)으로 1985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고 우기고 있
는 청동석가여래좌상이 있으며, 석가여래상 뒤로 1985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화가 있고 좌
우 벽면에는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천불탱 등이 깃들여져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대웅전 내부는 마침 영가(靈駕)를 위한 49재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살짝 담았다
. 유난히 귀가 큰 석가여래상은 청동(靑銅)으로 빚어 금색을 입힌 것으로 좌우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앉아있다.
절에서는 이 석가여래상이 신라 후기(또는 고려 초기) 불상이라고 우기고 있으나 절의 역사나
불상의 양식을 볼 때 조선 불상으로 여겨진다. 옛날이야 신라 불상이라고 우기면 다 통했지만
이제는 불교미술사학과 불상의 시대별 양식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이니 함부로 우기다가
는 망신만 당한다. 그만큼 시대는 바뀌었다.


▲  멋드러진 노송(老松) 1그루
대웅전 뜨락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로 그의 나이는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으나
약 100~150년 정도로 여겨진다. 보호수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3층석탑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탑으로 2중으로 된
기단부가 탑의 40% 정도를 차지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청학루와
오백나한전, 5층석탑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삼성각(三聖閣)
1985년에 지어진 1칸짜리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  산신과 호랑이, 동자가 담긴 산신탱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  특이한 모습의 4사자 3층석탑
사자가 있는 부분이 1층을 이룬다.


▲  석조미륵불입상(石造彌勒佛立像)

경내 서쪽에 서 있는 석조미륵불입상은 근래에 세운 것이나 몸통에 검은 때가 약간 입혀져 나
이가 조금 들어 보인다. 처음에는 100년 이상 먹은 미륵불인가 싶었는데 대략 20년 정도 되었
다고 한다.
온후한 표정을 지닌 석불로 연화대좌 위에 우뚝 서 있으며 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데 생김새가 석탑의 옥개석(屋蓋石)과 상륜부(相輪部)를 얹혀놓은 것 같다.

이렇게 학림사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옆 산길을 통해 노원골 남쪽 능선으로 올라갔다. 여기
서 능선을 통해 귀임봉을 거쳐 노원골로 내려갈 생각에서였다.


 

♠  수락산 귀임봉

▲  노원골 남쪽 능선길 (당고개공원 갈림길)

노원골 남쪽 능선길은 영원암 뒷쪽 노원골갈림길에서 귀임봉을 거쳐 수락산보루(堡壘)까지 이
어지는 환상의 지붕길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느긋하며 마치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한 길로 좌
우로 좁게나마 천하가 펼쳐져 있어 조망 또한 좋다. 예전 상계1동에 살 적에 즐겨찾던 산길로
약간의 오르막만 감내하면 도달할 수 있다.


▲  귀임봉 조망대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있을 뿐, 완만한 곡선을 이루던 능선길은 귀임봉에서 아주 조금 흥
분기를 보인다. 다시 하늘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귀임봉은 해발 280m로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꼭대기 동쪽에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는
데, 수락산 산줄기와 정상, 덕릉고개, 불암산, 상계3,4동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왼쪽에 높은 봉우리가 정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남쪽 줄기와 덕릉고개, 불암산 북쪽 줄기

▲  귀임봉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당고개역, 상계3,4동 지역

▲  귀임봉 서쪽 바위길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대자연이
수락산 끝에 살짝 빚어놓은 작품이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도봉동,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의
장대한 산줄기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창동, 도봉구 지역
산 밑이 온통 아파트 일색~~ 이 땅에 너무 흔한 풍경이다. 가까이에 보이는
봉우리 정상에 수락산보루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회색빛
아파트의 물결이 거치게 출렁이는 외로운 섬을 보는 듯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노원구, 중랑구 지역

수락산보루까지 가려고 했으나 일몰시간이 자꾸 눈치를 주어 보루 봉우리 직전에서 노원골로
철수했다. 아쉽긴 하지만 일몰 직전이라 설령 가서 사진에 담더라도 대부분 일그러지게 나올
것이다. 하여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흔쾌히 미루고 미련 없이 속세로 내려왔다. 어차피
집과도 가깝고 나에게도 매우 익숙한 곳이다.

이날 수락산 코스는 '당고개역 → 학림사 → 노원골 남쪽 능선 → 귀임봉 → 노원골'로 소요
시간은 출사 시간을 포함하여 3시간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수락산 학림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6월 2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오산의 꿀단지를 거닐다 ~~~ 보적사에서 독산성, 세마대, 고인돌공원까지 (경기도 삼남길7코스, 금암리지석묘군)

 


' 오산 독산성(세마대) 봄나들이 '

▲  오산 독산성(독성산성)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평화로운 어린이날에 다 큰 일행들과 오산 독산성(독산)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떠있던 12시에 병점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화성시마을버스 56번을
타고 독산 북쪽인 한신대학교로 이동했다. (병점역에서 한신대까지는 버스 10분 거리)

한신대 종점에서 완만한 산길을 타고 10여 분 정도 오르니 독산성 산림욕장이 마중을 한
다. 이곳은 오산시(烏山市)에서 1999년에 닦은 숲으로 소나무가 무성하여 그윽한 솔내음
을 불어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우리는 소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가져온
간식과 음식을 섭취하며 늦은 점심을 때웠다. 그렇게 배를 잔뜩 불리고 다시 10여 분 오
르니 보적사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고 그 길을 오르면 독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  독산성과 보적사로 인도하는 오르막길
오색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비추며 중생을 맞이한다.

▲  보적사 방면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수원시내와 화성시 병점 지역

▲  보적사로 인도하는 구부러진 오르막길 (보적사 주차장)

오산 북부에 자리한 독산은 해발 208m의 조촐한 산으로 독성산(禿城山), 세마산(洗馬山)
. 석대산, 향노봉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다. 이곳이 유명세를 탄 것은 바로 독산성과 세
마대 덕분으로 면적도 적고, 인구도 적고, 볼거리도 빈약한 오산시에서 매우 애지중지하
는 꿀단지 같은 존재이다.


▲  보적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천하
경기도 제일의 도시, 수원(水原)과 그를 남쪽으로 둘러싼 화성시 병점, 동탄 지역


 

♠  독산성에 감싸인 조촐한 산사, 보적사(寶積寺)
- 오산시 향토유적 8호

▲  보적사 해탈문(解脫門)으로 살아가고 있는 독산성 동문

하늘을 향해 야트막하게 솟은 독산 정상 북쪽에 오산 지역 유일의 전통사찰인 보적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경기도 전통사찰 34호)
독산성 동문 바로 안쪽에 자리해 있어 성곽을 담장으로, 동문을 정문으로 삼고 있는데, 동문
에 '해탈의 문'이란 간판을 내걸어 일종의 해탈문으로 삼았다.

독산성 품에 안긴 보적사는 인근에 있는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무려 401년에 백제(百
濟) 왕실에서 창건했다고 전한다. (또는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고 함) 허나 아쉽게도 이를 밝
혀줄 유물과 증거가 없는 실정이며, 오래된 전설 외에는 그리 오래된 유물도 없고, 절의 원래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의 절은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것이라 창건 시기를 추정하
기가 어렵다.
하여 아마도 절이 우후죽순 들어서던 고려 때나, 독산성이 다소 밥값을 하던 조선시대에 승병
들의 주둔지로 조촐하게 지어진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920년에 주대식이 약사전(藥師殿)을 부시고 대웅전을 지으면서 절 이름을 보적사라 했다. 이
는 절에 전해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을 바탕으로 지은 것으로 옛날 어느 춘궁기(春窮期) 때
먹을 것이 쌀 1되 밖에 남지 않던 노부부가 그 쌀을 미련 없이 절 부처에게 공양을 했다. 그
리고 집에 돌아오니 희안하게도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부처가 몇 배로 되돌려준 모양이다. 이에 무한 감동을 먹은 그들은 계속 열심히 공양
을 하였고 여기서 보물을 쌓았다는 뜻에 '보적사'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허나 전설에서는
보물 대신 쌀이 쌓인 것이니 미적사(米積寺)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싶다.

1986년 주지 도광(道光)이 세마대의 이름을 따서 세마사(洗馬寺)로 이름을 갈았으나 얼마 안
가서 다시 보적사로 변경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1986년에 중수된 대웅전과 선실(禪室), 요사(寮舍), 삼성각(三聖閣) 등이 있
으며, 성문 밑까지 길이 닦여져 있어 차량으로도 경내 접근이 가능하다.

* 보적사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50 (독산성로 269번길 144, ☎ 031-372-3433)


▲  보적사의 담장이 되버린 독산성 북쪽 성곽
옛날처럼 군사 기지로 쓰일 일이 없으니 이제는 절을 지키는 담장이 되어
자신을 낮추어 살아가고 있다.

▲  보적사 3층석탑
근래에 지어진 탑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많이 닮았다.

▲  배가 시커먼 똥배 포대화상의 위엄
그의 배를 어루만지며 소원을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  맞배지붕을 지닌 대웅전(大雄殿)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3존상


▲  보적사에서 바라본 푸른 천하 (화성시 북부 지역)

보적사 경내 남쪽에 독산성 성곽길이 펼쳐져 있다. 성곽 방어물인 여장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그냥 성곽만 남아있는데, 성곽 높이가 3~5m에 이르니 자칫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  보적사 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수원 남부와 화성 병점, 동탄 지역)
보이는 범위는 앞서 보적사 방면 오르막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까지 독산 북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  독산성 북동쪽 성곽 (세마대 동쪽)


 

♠  권율장군의 세마(洗馬) 설화가 깃든 오래된 산성
오산 독산성(禿山城)과 세마대(洗馬臺)터 - 사적 140호


▲  독산성 동문 주변

독산 산정에 자리한 독산성<독성산성(禿城山城)>은 백제 때 닦여진 매우 늙은 성이다. 신라와
고려도 이 성을 손질해 사용했으며, 조선도 서울 남부를 지키는 요충지로 썼다.

이곳이 크게 이름을 날린 것은 바로 임진왜란 시절이다. 1592년 12월,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
사(巡邊使)인 권율(權慄)장군이 근왕병(勤王兵) 2만을 모아 서울로 향하다가 바로 이곳에 진
을 치고 주변에 있던 왜군을 토벌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재미난 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
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권율이 2만 대군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진을 쳤다. 그들을 두려워한 왜군은 성을 포위해 공
격을 가했는데, 아무리 공격을 해도 소용이 없자 뿔이 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은 첩자를
보내 성의 결점을 알아오라고 했다. 그 결과 성에 물이 매우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식량이 많아도 물이 없으면 게임이 끝나는 법, 왜군은 성 밑에 큰 웅덩이를 파 성 내
부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지하수를 차단하니 얼마 안가서 조선군은 물로 크게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왜장은 물 1지게를 보내 조롱하며 조선군의 분열을 조장하려고 했다. 허나 권
율이 누구던가?
그는 기가 막힌 계략을 생각해내고 다음 날 아침, 왜군들이 잘 바라보이는 곳에 백마를 데리
고 와서 흰쌀을 말에게 끼얹어 목욕시키는 연극을 보였다. 그것을 본 단순한 왜군은 말을 목
욕 시킬 정도로 물이 많다고 판단하여 포위를 풀고 바로 줄행랑을 쳤다. 그때 권율은 그들을
추격하여 수천의 왜군을 잘 다져진 고기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상이 독산성의 세마대 설화이다. 쌀로 말을 씻겼다고 해서 장대(將臺) 이름을 세마대라 했
을 정도이니 아마도 사실이 아닐까 싶다. 이런 설화는 구미 천생산성(天生山城)에도 전해오고
있는데, 해가 막 뜰 때쯤 저리 연극을 한다면 정말 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1593년 9월, 3일 동안 백성들이 합심하여 성을 수축했으며, 1595년 포루(砲樓) 시설이 설치되
었다. 1597년 2월에는 조총을 방어하고자 평평한 집을 성벽 안에 짓고, 거기에 성 아래로 향
한 창문을 설치해 석차와 포차를 배치했다. 그리고 성 밖에는 목책을 세우려고 했으나 실현하
지는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권율의 빛나는 전승지로 천하에 널리 알려지자 성의 중요성도 커져 1602년
수원부사 변응성(邊應城)이 수축했으며, 1796년 수원 화성(華城) 축조로 그 남쪽을 지키는 용
도로 개축되었다. 이때 독산의 이름이 잠시 향로봉으로 갈렸는데, 앞서 말했듯이 늘 물이 부
족한 곳이라 그 이후 철저히 버려지게 되었다. 아무리 수비하기에 좋은 곳이라 해도 물이 없
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성 둘레는 1,800보(3,240m)로 현재는 그 1/3정도만 남아있으며, 4개의 문을 갖추고 있다. 성
벽 바깥은 장방형 또는 방형(方形)으로 다듬었고, 약간의 기울기를 주어 매우 단단하게 쌓았
다. 성 내부에는 보적사와 세마대가 있으며, 옛 건물터가 조금 남아있다.
오산의 대표적인 명소로 탐방로와 숲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숲이 무성하고 조망도 일품이라
교외 나들이 및 소풍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속세에서 독산성으로 가려면 세마역(1호선)에서
보적사입구를 거쳐 가거나 한신대에서 산림욕장을 거쳐가는 것이 좋으며 경사가 완만하여 오
르기도 쉽다.

*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55외


▲  독산성의 얼굴, 세마대

독산 정상에는 독산성의 얼굴이자 장대인 세마대가 의연하게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졌으며, 왜정(倭政) 때 세마대 이야기에 크게 발
작한 왜인들이 부셔버렸다. 이때 성 안에 살던 300호 정도의 민가도 강제로 정든 고향을 떠나
주변으로 흩어져야 했다.
1957년 세마대가 복원되었으며,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을 다녀가 세마대 현판을 남겼다. 건
물 중앙에는 툇마루 같은 것이 있어 앉아갈 수 있으며,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어 이곳에 앉아
있으면 자연히 솔내음을 누리게 된다.


▲  이승만이 남긴 세마대 현판의 위엄

▲  독산성 동쪽 치 (독산성에서 가장 동쪽 부분)
이곳에 서면 세교지구와 오산시내, 운암지구, 동탄신도시가 앞다투어
시야에 잡힌다.

▲  부드럽게 펼쳐진 독산성 성곽 (동남쪽 성곽길)

▲  남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독산성 남쪽 치

이곳은 독산성의 남쪽 끝으로 오산시내와 화성시 정남면 지역이 훤히 두 눈에 들어온다. 권율
이 쌀로 말을 씻기는 연극을 했던 현장이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그만큼 시야도 좋고 산 밑
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곳이다.


▲  봄이 활짝 나래를 펼치는 독산성 남쪽 성곽

▲  독산성 남쪽 성곽

독산성을 다시는 안와도 될 정도로 완전히 1바퀴를 돌고 싶었는데, 일행들의 권유로(나는 힘
이 없었음) 절반만 돌다 철수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인연을 지어 나머지를 모두 둘러보라
는 독산성의 숨겨진 뜻인가 보다. 어쨌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  독산성 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오산 서북부(세마동) 지역
정면에 보이는 산줄기를 넘으면 바로 오산 시내이다.

▲  수풀 속에 잠든 의문의 주춧돌

동문터 주변에는 2013년 11월에 발견된 오래된 돌이 누워있다. 딱 봐도 사람의 손길이 거쳐간
돌임을 눈치챌 수 있는데, 고려 때 이용된 건물터 주춧돌이나 석등 초석으로 보고 있다.
현재 독산성에는 세마대 외에는 성곽 건물이 남아있지 않은데, 그가 건물 주춧돌이라면 장대
나 군창(軍倉), 군사 숙소를 받치는 용도로 쓰였을 것이고, 석등 초석이라면 오래된 유물이
없어 애태우는 보적사의 유물일 것이다. 하지만 발견된 것이 달랑 돌 하나 뿐이니 그 이상의
상상은 어렵다.


▲  문 천정이 사라진 동문

독산성 동문은 동그란 천정인 홍예도 없이 문의 흔적만 남아있다. 잘 쌓여진 성돌을 보니 이
곳이 정말 크고 단단한 성임을 느끼게 하는데 그 문을 나서 15분 정도 내려가면 보적사 일주
문이 나온다.


▲  보적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일주문(一柱門)
높이가 상당한 일주문 현판에는 '독산성세마대산문(山門)'이라 쓰여 있다.
즉 보적사를 뜻한다.


보적사입구로 나온 우리는 물향기수목원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날 코스가 그랬음) 버스로
가기에는 매우 애매하여 도보로 가기로 했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독산과 오산시내
사이에 자리한 여계산을 넘어 세교지구로 넘어갔다.
이 구간은 경기도와 오산시가 닦아놓은 '경기도 삼남길 7코스' 독산성길로 세마교에서 독산성
과 여계산. 고인돌공원을 거쳐 은빛개울공원까지 이어지는 7.2km의 길이다. 여계산은 독산보
다 낮은 산이나 숲이 삼삼하여 오솔길처럼 걷기 좋으며, 그 산을 넘어 세교지구에 이르니 왠
돌덩이들이 땅에 바짝 누워 우리를 바라본다. 뭔가 해서 살펴보니 고인돌(지석묘)로 산을 내
려오니 너른 공원이 나타나는데, 그 공원에도 고인돌이 잔뜩 널려있다. 바로 금암동 고인돌공
원이다.


 

♠  오래된 고인돌을 후광으로 삼은 금암동 고인돌공원
'오산 금암리 지석묘군 - 경기도 지방기념물 122호'

▲  금암리 5호 고인돌

오산 세교지구(세교신도시) 남부에 고인돌공원이 넓게 누워있다. 이곳은 큰 바위가 많은 마을
이라 하여 '묘바위', '검바위', '금암'이라 불렸는데, 그것이 이 지역의 이름인 '금암동(錦岩
洞)'이 되었다.
공원을 중심으로 고인돌 11기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신원이 확실한 9기가 경기도 지방기념물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나머지 2기(10,11호)는 신원이 확실치 않은 존재> 11기 중 4기는 공
원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어 공원 안내문을 참조하여 숨바꼭질을 하기 바란다. (7기는 공원
에 있음)
이들 고인돌은 덮개돌(뚜껑돌)이 모두 땅에 누워있어 내부 구조는 아직 밝혀진 게 없으나 아
마도 무덤방이 땅 속에 있을 것으로 보이며, 달랑 덮개돌만 있는 고인돌로 보인다. 덮개돌은
화강암을 사용했으며, 길이는 1.96m에서 최대 6m까지, 너비 1.2~3m, 두께 0.3~1.1m이다. 2호
고인돌에는 알구멍이라 불리는 성혈(聖穴)의 흔적이 있으며, 청동시시대 유물로 이곳을 다스
렸던 세력의 우두머리 무덤으로 여겨진다. 그 시대면 한참 옛 조선(朝鮮, 고조선)이 동아시아
와 중원대륙의 적지 않은 땅을 다스리던 시절이니 아마도 옛 조선의 간접 지배를 받았을 것이
다.

고인돌 주변에 세교지구가 들어서자 오산시는 여계산 동쪽 자락과 묶어 고인돌공원을 닦아 시
민들에게 선사했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흔치 않은 고인돌공원으로 시민들의 포근한 휴식처
이며, 공원 한복판에는 잔디를 넓게 닦아 탁 트인 모습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오산의 새로
운 명소로 인근에 독산성, 여계산, 물향기수목원과 같이 연계해서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여로
(旅路)가 될 것이다.

*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금암동 520일대 (수목원로 449)


▲  금암리 4호 고인돌

▲  재현된 움집

여기서 움집터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청동시시대까지 무작정 선사시대(先史
時代)로 몰고 있는 경향이 커 그에 걸맞게 움집을 재현한 모양이다. 그래도 청동기시대는 돌
만 다르던 석기시대보다 더 진보된 사회인데, 사람들이 다 움집에만 살았을까? 게다가 옛 조
선(고조선)과 동이족의 수준 높은 문화가 천하 곳곳을 어루만지던 시절이고 그들이 만든 한자
(漢字)까지 있거늘...


▲  고대(古代)의 비밀을 품으며 오후 햇살을 누리고 있는 1,2호 고인돌

▲  멀리서 바라본 1,2호 고인돌의 위엄

고인돌공원에 있는 고인돌을 모두 둘러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여의치 못해 이 정도만 둘러보고
문헌근린공원을 넘어 물향기수목원으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생략하며, 5월 5일 오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6월 1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지붕길,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서달산자락길~현충원길 나들이

 


' 동작구의 지붕을 거닐다 '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서달산~현충원길)

▲  고구동산길 잣나무숲길

▲  서달산 정상

▲  현충원길


 

더운 여름이 저물고 가을이 조금씩 세력을 다지던 초가을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일행들과
동작충효길을 찾았다.
동작충효길은 서울 동작구(銅雀區)가 야심차게 내놓은 도보길이다. 도보길 유행에 따라 제
주올레길, 지리산둘레길, 북한산둘레길, 서울둘레길, 해파랑길 등 온갖 둘레길이 생겨났는
데, 동작구도 그 시류를 타고 산과 공원, 한강을 잇는 도보길을 닦아 동작충효길이란 간판
을 내건 것이다. 여기서 충효(忠孝)는 동작구 관내에 있는 국립현충원과 노량진 사육신묘(
死六臣墓)에서 따온 명칭이다.

동작충효길은 총 7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별로 넓지 않은 동작구에 이렇게 많은 코스가
가능한 것일까? 고개가 갸우뚱하긴 하지만 충분히 쥐어짜면 못할 것도 없다.
제1코스는 본글의 주인공인 고구동산길(3.4km)로 노들역에서 서달산을 거쳐 현충원 상도출
입문까지, 제2코스는 현충원길(3.4km)로 현충원 상도출입문에서 동작역까지 이어진다.
제3코스는 한강나들길(4.6km)로 동작역에서 한강을 따라 노량진역까지, 제4코스는 노량진
길(3.4km)로 노량진역에서 용마산을 거쳐 신대방3거리역까지. 제5코스는 보라매길(2.9km)
로 신대방3거리역에서 보라매공원을 거쳐 보라매역까지 이어진다.
제6코스는 동작마루길(4.8km)로 신대방3거리역에서 국사봉을 거쳐 현충원 상도출입문까지,
제7코스는 까치산길(4.4km)로 현충원 상도출입문에서 까치산을 거쳐 사당역까지 이어진다.


 

♠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 (고구동산)

▲  고구동산길 노들역 시작점

동작충효길1코스 고구동산길 나들이는 노들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하면 아주 편리하다. 지하철
9호선이 노들역을 지나가고 있고, 부근에 1호선(노량진역)이 빗자루 배차로 운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시내버스 노선이 노들역 주변을 물 흐르듯 빈번히 운행해 접근성이 아주 좋기 때문이
다.

노들역에서 상도터널 쪽으로 가면 서쪽에 나무가 우거진 산이 보이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계
단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그 길이 바로 고구동산길 북쪽 시작점이다. 그 계단을 오르면 '고
구동산'이란 조그만 뫼의 품에 들어서게 되면서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고구동산길(3.4km)은 노들역에서 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까지 이어지는 길로 고구동산과 서달
산 등 뫼 2개를 지난다. 이들은 모두 숲을 지니고 있어 길 대부분이 숲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택가와 아파트 사이에 완충지대처럼 자리한 숲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중앙대 후문에서 서
달산 생태다리 구간은 상도동과 흑석동(黑石洞)의 경계를 가르는 산줄기를 지나가며, 잣나무
숲과 소나무숲이 짙게 닦여져 있어 예사로운 숲길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또한 서달산 정상까
지 이어지는 동작구의 북쪽 지붕길이기도 하다.


▲  한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짙게 우거진 고구동산길
(본동 신동아아파트 옆)

▲  본동 신동아아파트 옆을 흐르는 고구동산길 ①

▲  본동 신동아아파트 옆을 흐르는 고구동산길 ②

▲  노량진근린공원 고구동산길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

고구동산은 노량진과 상도동(上道洞) 사이에 자리한 조그만 뫼로 산 중앙(상도터널 윗쪽, 본
동) 정상부에 노량진근린공원이 자리해 있다.
노량진근린공원에는 게이트볼장과 배드민턴장, 축구장, 농구장, 간단한 운동기구 등의 운동시
설과 조망대, 산책로, 정자쉼터 등이 있으며, 조망대는 한강과 여의도가 훤히 바라보이는 곳
에 위치해 있어 조망이 시원하다. 특히 천하 제일의 불꽃축제로 추앙을 받는 여의도불꽃축제
를 바로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는 명당으로 불꽃의 향연을 코 앞에서 누릴 수 있다.

* 고구동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흑석동 (노량진근린공원 : 동작구 본동 486-2)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여의도와 63빌딩, 한강, 마포 지역이 바라보인다.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1호선 전철과 온갖 철도가 매일 수백 차례씩 오가는 한강철교를 비롯해
원효로, 마포 지역과 멀리 북한산(삼각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숲 너머로 한강과 노들섬, 용산, 남산(南山) 등이 바라보인다.

▲  노량진근린공원에서 중앙대 후문으로 넘어가는 고구동산길
공원을 지나 남쪽으로 가면 다시 싱그러운 숲이 펼쳐진다. 고구동산길은
그 숲속을 가르며 중앙대후문까지 거침없이 흘러간다.

▲  푸른 철책이 둘러진 고구동산길 (강남초교 동쪽)

▲  강남초교 동쪽을 흐르는 고구동산길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  고구동산길의 백미, 잣나무숲길

▲  서달산으로 인도하는 고구동산길

고구동산에서 남쪽으로 나오면 차량들이 오가는 흑석로가 나온다. 여기서 잠시 숲길이 끊기면
서 처음 온 사람들을 적지 않게 동요하게 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당황할 필요는 없다. 고구동
산길은 여기서 상도동 패리스아파트까지 잠시 시멘트 도로의 신세를 지는 것일 뿐, 끊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구간을 제외하면 거의 흙으로 된 산길(숲길)이다.

흑석로로 진입하여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중앙대후문이다. 후문 입구 커브를 지나면 바로 3
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남쪽) 길(상도로53길)로 조금 가면 고구동산길의 부활을 알리
는 나무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고구동산길의 나머지 부분과 서달산이 흔쾌히 펼
쳐진다.


▲  중앙대와 상도동 사이를 지나는 고구동산길

중앙대후문~서달산 생태다리 구간은 상도동과 흑석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를 따라 이어진
다. 이 산줄기는 개발의 칼질이 미치지 않은 자연 공간으로 그 능선에 동작충효길을 살짝 얹
혔는데, 산줄기는 길지만 산길 좌우로 주택과 아파트가 진하게 보일 정도로 그 폭은 좁다.


▲  고구동산길의 자랑, 잣나무숲길

고구동산길 중간인 중앙대후문~숲속도서관 사이에 잣나무숲이 짙게 자리를 닦았다. 이곳은 고
구동산길의 자랑이자 백미로 동작구가 동작충효길을 만들면서 잣나무를 더욱 확충했다.
잣나무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많이 베푸는 나무로 그들이 우거진 숲은 산림욕 장소로 아
주 좋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한복판에 이런 잣나무숲이 있다니 그저 놀
라울 따름인데, 동작충효길은 나에게 여러 번 신선한 충격과 공포를 주니 범상치 않은 둘레길
이 분명하다.


▲  잣나무숲길 ①

▲  잣나무숲길 ②
이곳에서 만큼은 서울을 잊어도 좋다. 도시와 머나먼 산골이라 우겨도
손색이 없으니 말이다.

▲  잣나무숲길 ③④

▲  잣나무숲길 ⑤

▲  잣나무숲길 ⑥

잣나무숲 남쪽에는 숲에 완전히 묻힌 동작충효
길 숲속도서관이 있다. 숲이 얼마나 삼삼한지
한낮에도 거의 어두울 지경인데, 숲내음이 가
득한 숲속 한복판에 어린이와 동네 주민을 위
해 초소 건물을 손질하여 도서관을 닦았다.
이런 숲속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술술
머리 속에 잘 들어올 것만 같은데, 9시부터 18
시까지 운영하며, 평일에는 가끔 빗장을 닫아
거는 경우가 있다. 도서관 북쪽에는 청강정이
란 네모난 정자가 있으며 주변에 의자와 탁자
를 지닌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  4각형 정자인 청강정(淸康亭)


▲  장봉옥 영모비와 송덕비 <백운암 창건주 장대보화(張大寶華) 송덕비>

숲속도서관에서 초화원 쪽으로 조금 가면 장봉옥 송덕비와 영모비를 만날 수 있다. 단 고구동
산길에서 남쪽으로 조금 비껴있기 때문에 지나치기가 쉽다.

비석에 쓰인 장대보화 장봉옥(1904~1981)은 누구일까? 내 돌머리에는 전혀 정보가 없는 존재
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진정한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했던 여
인이었다. 그리고 이름 대신 쓰인 대보화(大寶華)는 그의 법명(法名)이다.

장봉옥은 1904년 8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동덕여학교를 졸업하여 돈이 많은 친일파 관료의 소
실(첩)로 들어갔는데, 남편 몰래 조경한(趙擎韓) 등의 독립운동가를 도우며 독립운동 자금도
넉넉히 지원했다. 그래서 해방 이후 신문에서는 그를 '광복군의 어머니'라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1930년대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을 다녔는데, 안국동에 있
는 선학원(禪學院)에 들어가 열심히 수행을 하며 깊은 불심을 다졌고, 그 인연으로 불교계에
주요 승려, 인사들과 두루두루 알고 지냈다. 그리고 1950년대에 마야부인회를 조직하여 불교
지도자의 면목까지 보여주었다.

6.25 이후 어머니가 별세하자 그의 명복을 빌고자 그동안 모은 돈을 싹 털어 현재 비석이 있
는 자리를 중심으로 20,000평의 부지를 매입해 1961년에 백운암(白雲庵)을 지었다. 백운암은
현재 상도선원(上道禪院)의 모태가 된다.
또한 남편이 죽자 그의 막대한 재산까지 물려받았는데, 그 돈으로 크게 사업을 벌여 큰 돈을
벌었으며, 도심 한복판인 무교동(武橋洞) 일대 땅을 거의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막대한 재력을
자랑했다. 그 재력을 기반으로 온갖 불사(佛事)에 나서 불교계에서 '불사를 많이 일으킨 화주
보살'로 격하게 칭송을 받았다.

그는 백운암 주변에 160여 채의 연립주택을 지어 '나라사랑반'이란 이름 짓고 전몰군경의 유
가족과 집이 없는 어려운 이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노인대학을 지어 노인들을 배
려했고, 1964년 성조장학회를 세워 학생과 청년, 어려운 이웃을 넉넉히 도왔다. 그 장학회는
지금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어쨌든 그 공로로 1966년 서울시경으로부터 '청소년 선도 유공
자 표창장'을, 1979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한평생 모은 재산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풀면서 불법(佛法)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
았고, 노승과 불교 수행자들에게도 극진히 대접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살아있는
보살'이라 추앙했고,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서옹(西翁)도 그를 크게 찬양하며 종종 백운암
에 들려 법문을 전했다.

딱히 자녀가 없던 그는 수양딸을 1명 맞이했는데, 그가 1982년 어음사기 사건으로 천하를 크
게 경악하게 했던 '장영자' 그 사람이었다. 장영자도 불교 신자로 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
던 장봉옥은 그를 수양딸로 삼아 많은 것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는 장영자 사건 1년 전(198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만약 더 살았더라면 못된 수양딸로 인
해 자칫 명예가 크게 훼손되었을 지도 모른다.

지붕돌을 지닌 장봉옥 송덕비는 1974년 서옹이 직접 비문을 쓰고 지어준 것이다. 그 옆에 자
리한 영모비는 독립운동가로 그의 신세를 졌던 백강 조경한(1900~1993)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나라사랑반' 주민과 상도동 주민들을 대표해 1982년 4월에 세운 것이다. 그는 비문(碑
文)에
'나라사랑반 주민들이 장여사의 시은(施恩)을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우니 이 땅에 보은의 씨
앗이 살아있음을 기뻐하며 기꺼이 비문을 쓴다'
고 소감을 밝혔다.

이들 비석과 장봉옥의 무덤은 백운암 뒷쪽에 있었으나 이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절은
아랫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비석과 묘소까지 제자리를 잃고 김포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2010
년 비석만 지금의 자리로 돌아와 옛 백운암 자리를 쓸쓸히 지키고 있다.
사회와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의 흔적이건만 이 땅의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부동
산 수익에 눈이 어두운 졸부와 위정자들은 그런 이들의 흔적마저 온전히 놔두지를 않는다. 이
게 이 나라의 몹쓸 현실이다.


 

♠  서달산 서쪽 자락 (초화원, 생태다리, 서달산자락길)

▲  온갖 화초가 향연을 벌이는 초화원(草花園)

장봉옥 송덕비를 지나면 온갖 화초가 자라고 있는 초화원(서달산 야생초화원)이 모습을 드러
낸다.
이곳은 서달산의 서쪽 자락으로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미꽃과 구절초, 붓꽃, 톱풀 등
야생화 30여 종을 음지와 양지에 맞게 배치했다. 이곳 역시 동작충효길을 닦으면서 조촐한 규
모로 조성된 것으로 화초가 한참 기지개를 켜는 봄이나 무성함을 이루는 여름, 처절한 아름다
움을 선보이는 가을에 와야 제대로 된 초화원을 누릴 수 있다.


▲  녹음(綠陰)이 짙은 초화원

▲  초화원 수풀들

▲  상록잔디패랭이


▲  초화원과 이웃한 암석원(Rock Garden)
둥근 바위와 꼬리풀 등 30여 종의 꽃과 풀이 돌과 함께 배치한 공간으로
초화원과 거의 비슷하다.

▲  옥잠화

▲  이름도 참 특이한 큰꿩의비름만추

▲  이름도 초롱초롱한 초롱꽃

▲  여름이 깃든 암석원 내부


▲  숲이 무성한 초화원 남쪽

초화원과 암석원 주변에는 자연학습원과 수목학습원, 2015년 11월에 닦여진 유아숲체험장 등
이 있다. 이들은 나무와 여러 화초를 심은 공간으로 그리 넓지 않은 산자락을 활용하여 자연
과 관련된 많은 것을 닦아 놓아 집약적 공간 활용도는 정말 높다.


▲  수목학습원 부근 숲길

▲  서달산 생태육교

서달산 생태육교는 상도동과 흑석동을 잇는 도로(서달로)로 인해 강제로 끊긴 서달산 자락을
연결하고 양쪽 산의 동물 이동을 위해 닦여진 것이다. 육교 밑에는 터널을 뚫어 차량의 통행
을 배려했으며, 생태육교 윗도리에는 산책로를 닦고 나무와 온갖 풀을 심어 산의 자연스런 일
부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감쪽 같이 만들었다.
육교 동북쪽에는 달마사(達磨寺)란 80여 년 묵은 절이 있는데, 그 절 이름을 따서 육교 동쪽
산자락을 달마공원이라 부르기도 하며, 고구동산길과 별도로 '서달산자락길'이 따로 가지를
뻗어 숭실대 후문 쪽으로 이어진다.


▲  서달산 생태육교에서 바라본 흑석동과 한강, 남산

▲  조그만 새집을 주렁주렁 머금은 나무조각과 의자
새집이긴 하지만 너무 작아서 어느 새도 들어오기 어렵다. 하여 새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 같은 장식물이다.

▲  소나무숲을 따라 이어진 서달산자락길

생태육교 동쪽 서달산 자락에는 소나무숲이 짙게 우거져 있다. 그래서 이곳을 피톤치드체험장
으로 삼았는데, 앞서 잣나무숲 만큼이나 삼삼해 다시금 이곳이 서울임을 잊게 만든다.
소나무숲 밑부분에는 나무로 도보길을 닦아 서달산자락길을 내었는데 숭실대 후문까지 이어지
며, 고구동산길과 서달산 정상으로 가려면 무조건 산을 오르면 된다.


▲  하늘을 훔친 서달산 소나무숲
피톤치드가 진하게 꿈틀거리는 싱그러운 자연의 현장이다.

▲  국립현충원 서남쪽 철책길 (서달산 정상 북쪽)
현충원과 속세의 경계에 푸른색 철책을 삼엄하게 둘러놓아 국가의 성역을 지킨다.
그 철책을 따라 산길이 나있는데, 고구동산길도 그 철책길을 잠시 거쳐간다.


 

♠  서달산(西達山) 정상과 현충원길

▲  서달산 정상

서달산(179m)은 동작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뫼로 동작구의 대표 지붕이다. 국립현충원을
품은 특별한 뫼로 화장산(華藏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화장사(華藏寺,
현재 호국지장사)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산세가 마치 공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이라 하여 공작
봉(孔雀峰)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서달산의 범위는 현충원 주변과 달마공원, 서달로 서쪽 잣나무숲까지로 숲이 무성하여 동작구
의 허파 역할을 한다. 현충원이 조성되면서 서달산 정상을 비롯한 현충원 외곽이 현충원 영역
에 꽁꽁 묶였는데, 동작구가 그 외곽을 시민 공간으로 삼고자 서울시, 국방부와 협상해 2009
년 8월 현충원 영역(묘지공원)에서 근린공원으로 풀렸다. 즉 현충원 철책 바깥은 자유의 공간
으로 해방된 것이다.
이를 기리고자 2010년 봄, 정상에 동작대란 조망대를 세웠고, 주변 산길과 숲을 정비해 아주
휼륭한 시민들의 쉼터로 거듭났다.

서달산 정상에는 정상 표석과 토지지신(土地之神) 표석, 동작대, 쉼터, 운동장 등이 있으며, 산세도 완만하다. 이곳에 편히 오려면 국립현충원과 호국지장사를 거치거나 달마사, 중앙대
후문에서 접근하면 되며, 노들역이나 동작역에서 동작충효길을 따라 들어가도 된다.


▲  서달산 정상에 세워진 동작대(銅雀臺)

동작대는 서달산의 새로운 명물이자 상징물로 2010년 봄에 지어진 3층짜리 8각형 정자(亭子)
이다. 동작대하면 3세기 초반, 조조가 업(業) 부근에 세운 동작대가 떠오를 것인데, 이 동작
대는 그 동작대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한자만 같음) 그 이름도 동작구에서 따온 것이다.
정자 옆에는 윗층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을 별도로 내어 새로운 정자 형태를 그려내고 있는
데, 정자가 아무리 높아도 숲에 몽땅 감싸여 있어 조망은 별로 시원치 못하다. 

동작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동작대 3층에 올라 나무들의 눈치를 피해가며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 상도동과 사당동, 관악구 지역, 관악산, 여의도 등이 시야에 잡히며, 북쪽은 겨우 서
달산 정상만 시야에 들어온다.

▲  동작대 현판의 위엄

▲  동작대에서 바라본 상도동 지역

▲  동작대에서 바라본 관악산(冠岳山)의
위엄

▲  서달산 정상에서 상도출입문으로
이어지는 고구동산길


▲  동작충효길의 허브, 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 앞 갈림길

▲  현충원과 속세를 이어주는 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

서달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7~8분 가면 현충원 상도출입문이 나온다. 노들역에서 시작된 고구
동산길은 여기서 흔쾌히 그 끝을 맺는데, 고구동산길 뿐만 아니라 현충원길(2코스)과 동작마
루길(6코스), 까치산길(7코스) 등 무려 4코스의 시작점이자 종점이기도 하다.

상도출입문은 현충원의 남쪽 후문으로 6시부터 18시까지(주말과 현충일은 19시까지) 문을 열
어둔다. 그 문을 들어서면 바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와 국립현충원으로 이어지며 문 안쪽
에는 초소가 있어 혹시나 방향을 잃고 들어올지 모를 속세의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우리는 여기서 현충원길로 갈아타 동북쪽으로 이동했다. 현충원길(3.4km)은 상도출입문에서
동작역까지 이어지는 숲길로 현충원 철책을 따라 이어져 마치 국경선을 거니는 기분을 들게
한다.
철책 안쪽은 영원한 성역인 현충원이요, 우리가 걷는 바깥은 속세이다. 이 구간 역시 서달산
동쪽 자락으로 숲이 짙으며 길 북쪽 종점(동작역, 이수폭포)을 제외하면 각박한 구간은 없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사당2,3동과 정금마을로 내려가는 산길이 여럿 있다.


▲  현충원길에서 바라본 한강
숲 너머로 한강에 발을 담군 동작대교와 반포대교, 한남대교 등이 바라보인다.

▲  끝없이 펼쳐진 현충원길과 현충원 철책의 위엄

▲  푸른 철책과 함께 이어지는 현충원길 ①

▲  푸른 철책과 함께 이어지는 현충원길 ②

▲  길 중간중간에 설치된 메모리얼 게이트(Memorial Gate)

현충원길에는 메모리얼 게이트란 문이 심심치 않게 있다. 이 문은 현충원에 봉안된 순국선열
을 추모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태극기를 형상화하여 문의 지붕은 태극모양처럼 넝실거리게
했고, 기둥은 건, 곤, 감, 리로 표현했다고 한다. 허나 그런 심오한 의미와 다르게 문의 이름
은 어렵게 영어로 되어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문 이름은 보나마나 서울시나 동작구청 공무원들이 없는 지식 쥐어짜서 만든 이름으로 보이는
데, 굳이 영어로 이름을 삼아야 폼이 나는 것일까? 그냥 순국선열의 문이나 애국의 문으로 하
면 정녕 안되는 것일까? 이 땅의 정말 과하기 그지 없는 영어 사대주의는 실로 역겹기가 그지
없다.


▲  굳게 닫힌 사당출입문
현충원의 동쪽 후문으로 개방 시간은 앞서 상도출입문과 같다.

▲  푸른 철책과 함께 이어지는 현충원길 ③

현충원길은 예전에 완주를 했기 때문에 1/3 정도만 거닐다가 사당3동으로 쿨하게 빠졌다. 일
몰도 적지 않게 눈치를 주고 있고, 나와 일행도 모두 지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동작충효길(고구동산길, 현충원길), 서달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나
중에 억지로라도 인연을 지어 동작충효길의 나머지 구간도 모두 맛보고 싶다.

* 서달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상도동, 사당동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6월 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보은 땅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선병우고가, 선병묵고가 한옥 나들이

 


' 새해맞이 충북 보은 나들이 '

▲  보은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사랑채


 

온갖 아쉬움 속에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밝았다. 올해는 제발 좋은 일이 많기를
애타게 소망하며 날씨가 최적화된 날을 택해 서울에서 고속/시외버스나 철도로 2시간 내
외 범위에서 새해 첫 답사지를 물색. 고르고 고른 끝에 보은(報恩)의 우당고택이 선정되
었다. 그곳이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명당(明堂)이라 하여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
문이다.

차디찬 기운이 가득한 이른 아침,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하여 청주시내와 미원을 거쳐
보은읍에 이르렀다. 보은 읍내는 마침 5일장이라 장을 보러온 노인들로 활기를 띠었는데
읍내 한복판 중앙4거리에서 관기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15분을 달려 장안3거리
에 두 발을 내린다.

장안3거리<개안리(開安里)>에서 북쪽으로 가면 장안면행정복지센터가 나오는데, 그 맞은
편에 우당고택으로 인도하는 하개교가 있다. 삼가천 위에 걸린 그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선병우고가와 선병묵고가가 있는 개안리 마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우당고택
이다.


▲  겨울에 잠긴 삼가천 (하개교 주변)
누렇게 뜬 갈대가 겨울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며 소쩍새가 울 그날을 기다린다.
(왼쪽이 우당고택이 있는 섬, 오른쪽이 장안로와 장안면행정복지센터)


 

♠  20세기 초에 지어진 고래등 기와집, 우당고택<愚堂古宅,
선병국가옥(宣炳國家屋)> - 국가민속문화재 134호

▲  우당고택 사주문(四柱門, 정문)과 돌담길

화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우당고택 주차장이다. 주차장 한쪽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
무는 조그만 집이 있는데, 거기서 안내 자료를 쥐어들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우당고택으로 이
동했다.

고택에 이르니 제일 먼저 북쪽 대문인 사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에는 대문이 남북으로 2개
가 있는데, 바깥에서 들어올 때는 무조건 사주문을 거쳐야 된다. 명문 부잣집의 대문답게 문
의 덩치도 크고 품격도 제법 깃들여져 있으며, 이미 세상에 공개된 집이라 낮에는 대문이 늘
열려있어 나들이객과 답사객, 사진꾼, 이곳에서 공부하는 고시생과 그들을 보러온 가족 등등
사람들이 마를 날이 거의 없다.

대문 옆에는 황토와 돌, 기와로 지어진 돌담이 고색의 내음을 물씬 풍기며, 조촐하게 돌담길
을 이룬다. 서쪽 돌담길로 가면 효열각과 고택의 남문인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며, 대문을 들어
서면 고래등 기와집으로 유명한 우당고택 내부가 장대하게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우당고택의 역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

▲  정면에서 바라본 북쪽 대문(사주문)

속리산(俗離山)에서 발원한 삼가천(三街川)이 금강으로 흘러가면서 개안리에 조그만 삼각주(
三角洲) 섬을 빚어놓았는데, 바로 그 섬에 20세기 초기 대표적인 근대 한옥으로 손꼽히는 우
당고택(선병국가옥)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보은 땅의 거의 유일한 자연산 섬으로 이 부근은 조선 때 나라에서 운영하던 마장(馬
場)이 있었다. 그래서 마장 안쪽 동네라 하여 '장안','장내'라 불렸으며, 지금도 그 지명은
유효하다.

우당고택을 지은 이는 보성선씨 집안인 우당 선영홍(愚堂 宣永鴻, 1861~1924)과 그의 큰아들
인 남헌 선정훈(南軒 宣政薰)이다. 이들은 원래 전남 고흥(高興) 출신으로 고흥 지역의 제일
가는 부자였다. 풍요로운 재산만큼이나 인심도 후하여 소작농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눠주고 적
은 소작료를 받았으며, 어려운 사람들의 세금을 대신 처리해주는 등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인
심을 베풀었다.

선영홍은 아들이 4명 있었는데, 모두 끝이 훈(薰)자 돌림이다. (정훈, 남훈, 준훈, 동훈) 그
는 아들과 손자, 자손의 번창을 위해 천하에 제일가는 명당으로 터전을 옮기고자 이름난 지관
을 섭외하여 명당 자리를 물색했다. 그는 섬에 집을 지어야만 집안이 흥한다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에 걸맞는 자리를 찾은 끝에 서울 여의도와 충남 천안, 보은 개안리가 후보 장소로
꼽혔고, 지관인 심씨의 추천과 속리산과 가까운 개안리의 지형에 단단히 반해 1903년 이곳에
터를 닦았다.
이곳 지형은 삼가천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육지 속의 섬으로 그 모습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이라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불린다. 이런 자리는 꽤 좋은 명
당으로 꼽힌다.

1919년 아들 선정훈과 함께 그 섬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자신과 후손들이 길이길이 살 명당
자리라 천하에서 제일 이상적인 집을 짓기로 했는데, 선정훈이 공사를 주도했으며, 그 시절
잘나가던 목공과 기술자를 비롯해 일꾼들까지 후하게 대접했다. 공사 자재에도 돈을 아끼지
않아 질이 좋은 목재와 재료를 사용했으며, 이때 도편수로 참여한 사람이 궁궐 목수로 이름난
'방대문'이었다.
섬의 지형이 모래로 되어있어 따로 배수시설은 닦지 않았으며, 왜식과 서양식이 섞인 개량형
한옥이 한참 주류를 이루던 때라 너무 전통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시류에 흔쾌히 동참했다.
이렇게 큰 정성을 들여 5년 만인 1924년 집이 완성되니 집의 전체 면적은 3,900평. 집 크기는
99칸을 자랑했으며, 사랑채와 안채, 사당 3구역으로 구성되어 각각 담장을 둘렀다. 특이한 것
은 사랑채와 안채가 '工'구조로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옛날 집에서는 극히 꺼리던 형태
였다. (부수는 것을 뜻한다고 함)
그럼에도 집의 중요한 공간을 '工' 구조로 한 것은 집터가 길하지 않아서 흉택의 평면인 '工'
구조를 택하면 70~80년 이후부터 길하게 된다는 지관의 해석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즉 후손
대에 반전을 노린 것이다.

선정훈은 아버지와 별도로 대동상사(大東商社)를 운영했는데, 고흥의 토산물인 우뭇가사리를
왜열도와 중원대륙에 수출해 큰 돈을 벌었다. 그의 곳간만해도 무려 33칸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재산의 정도를 알만하다.
그들은 오늘날 이 땅에 썩어빠진 위정자와 상류층과 달리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
던 인물이다. 선영홍은 고흥에 대흥사(大興司)란 서숙(書塾)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으며, 보은
에도 집 남쪽에 관선정이란 33칸짜리 서당을 세워 한학(漢學)을 교육시키고 우수한 학자를 초
빙해 수백 명의 후학을 길렀다. 또한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 서숙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지역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덕행을 베풀었다.

6.25시절 폭격으로 대문 좌우 바깥행랑채와 주변 부속 건물이 파괴되어 사라졌다. 허나 그 외
에 건물은 별탈 없이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덕에 20세기 초에 지어진 전통 개량한옥
으로 학술 가치가 대단히 높다. 또한 6.25 때 군부대가 집 동쪽에 주둔을 했는데, 시간이 지
나면서 아예 그곳에 눌러앉았고, 동쪽 토지 2만 평은 그렇게 군부대 땅이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집을 끼고 흐르는 하천 동쪽 물길을 막아 농토를 개간했으나 1980년
과 1998년 집중호우로 집이 물에 잠겨 돌각담들이 여럿 무너졌고, 집을 지키고자 안산(安山)
의 역할로 심은 소나무 숲까지 쑥대밭이 되는 피해를 입었다. 하여 현재 집 주인인 선민혁이
지역 사람들의 동의를 구해 하천을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수해를 입지
않았으며, 소나무 숲도 다시 복원해 옛날의 운치를 되찾았다.

선정훈은 집만 물려주면 된다면서 많은 돈을 썼으나 워낙 돈이 많아 결국 아들에게 많이 상속
되었다. (아 부러워라ㅠㅠ) 현재는 선병국의 아들인 선민혁이 집을 지키고 있으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선병국가옥'이었으나 근래에 선정훈의 호를 따서 우당고택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0년대에 안채에 있는 곳간채를 손질하여 고시원을 열었는데, 최소의 비용만 받고 고시생들
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교육에 아낌없이 돈을 던진 할아버지(선정훈)와 증조부(선
영홍)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다. 또한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문의 별미인 씨간장이 있
는데, 무려 350년 이상 되었다고 전하며, 간장 보존을 위해 특별히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구는 햇간장을 부어 보존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
전'에 출품, 1리터가 500만 원에 팔리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래서 우당고택(선병국가옥)이 천
하에 크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김정옥 종부(宗婦)가 '선씨 종가 아당골'이란 이름으
로 간장을 판매하고 있으며, 집 안팎에 700여 개의 장독을 두어 씨간장을 숙성/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전통 한옥과 간장으로 이곳이 크게 떠오르자 보은군에게 2007년에 고택 북쪽에 주차장
을 닦고 대문 앞 소나무숲 주변에 잔디를 입히며 의자와 이정표를 지어주었다. 이곳이 보은의
새로운 꿀로 부상하자 그 꿀에 서둘러 그럴싸하게 단지를 입힌 것이다.

현재 고택 내부는 사랑채와 사주문에서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는 통로만 개방되고 있으며, 안채
와 사당, 그밖에 건물은 개방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개방 공간은 변경될 수 있음~~) 고택
바깥에 있는 효열각과 비석, 복원된 관선정은 관람이 가능하며, 안채 곳간채에는 고시생들이
머물고 있는데, 이곳을 거쳐간 고시생이 1,000여명, 사법고시 합격자만 50명을 넘는다고 한다.
시내와 멀리 떨어진 외지이고 적막한 곳이라 고시생의 인기가 대단했으나 최근 관광객의 발길
이 증가하면서 고시생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  행랑채 북쪽에 자리한 장독대의 물결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사당을 품은 담장이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고택 내부로 인
도하는 너른 길이 나오는데, 그 왼쪽에 낮게 돌담을 두르고 키 작은 나무와 조촐한 텃밭, 씨
간장을 품은 장독대들의 공간이 있어 정겨운 분위기를 우려낸다. 그 장독대 너머로 행랑채와
안채가 있다.


▲  사주문에서 안채, 사랑채로 인도하는 너른 길
집 내부에 이렇게 넓은 길이 있다니? 집이 정말 넓기는 넓다. 조선과 왜정 때
지어진 어지간한 큰 기와집을 능가하는 규모로 완전 조그만 궁궐 같다.


▲  사당(祠堂)

양반가는 보통 집 내부에 가묘(家廟)라 불리는 사당을 갖추고 있는데,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
다.
이곳 사당은 3칸 규모의 사당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재실<齋室, 제수(祭需)채라고도 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당과 재실이 복도채로 연결되어 완전 한 몸처럼 되어 있어 자연히 'ㄱ'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제수채와 복도채를 둔 사당은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복도 폭은 1.1m이며, 사당 각
칸 앞에는 시멘트몰탈로 이루어진 디딤돌이 있는데, 이는 건립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사당을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그 시절 새로운 건축 재료가 시도되었다.
 
사당 주위는 돌담으로 꽁꽁 둘렀으며, 사당으로 인도하는 솟을삼문은 굳게 잠겨져 있는데, 선
씨 집안의 선조를 봉안한 공간이라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는다.

▲  사당의 솟을삼문(三門)

▲  'ㄷ'자로 이루어진 행랑채


▲  안채 북쪽

사당 남쪽에는 안채와 행랑채가 있다. 돌담으로 주변을 빙 둘러 눈으로 하얗게 바래진 지붕과
집 윗도리만 보일 따름인데, 이곳은 선씨 일가의 생활 공간으로 내부 관람은 통제되어 있다.
그러니 그들의 사생활과 재산 보호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안채는 사랑채 동쪽에 자리하여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랑채와 모습과 구조, 규모가 똑같
다. 그러니 괜히 안채를 기웃거려 안좋은 소리 듣지 말고 그냥 사랑채를 보면 된다. 집 모습
은 '工' 구조로 이 땅의 한옥 안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안채를 받치고 있는 기
단(基壇)은 사랑채보다 1단 낮은 2단짜리 석축으로 가운데 4칸짜리 대청을 끼고 왼쪽이 안방,
오른쪽이 건너방이다. 건물 중앙에 마루가 있고, 무려 9개의 온돌방을 갖추고 있으며, 부엌은
큰살림에 걸맞게 상당히 크고 위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앞뒤에 달린 툇마루가 복도
역할을 하여 모든 방과 부엌으로 이동할 수 있다.
안채 옆에는 'ㄷ'모양의 중행랑채를 두어 안채를 가리고 있는데, 그 사이로 조그만 안마당을
만들었고, 행랑채 남쪽 끝에 안대문을 두었다. 안대문 밖에는 담이 가로질러 있어서 바깥 대
문에서 안채로 가려면 'ㄹ'자로 꺾어 들어가야 했다.
행랑채 옆에는 쌀과 재물을 보관하던 곳간채가 있는데, 1칸 또는 1칸 반, 2칸 간격으로 있었
다.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더 이상 쌀과 재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게 되자 이들을 손질하여 고
시생들의 숙식 공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곳이 세상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관광/답사 수요가
늘면서 고시생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도 속세의 때를 크게 탄 모양이다.


▲  반쯤 열린 사랑채 중문

▲  우당고택의 백미, 사랑채

안채 서쪽에는 고택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사랑채가 있다. 안채와 같은 '工' 구조로 주위를
돌담으로 둘렀는데, 동쪽과 남쪽, 북쪽에 바깥과 사랑채를 이어주는 문을 냈으며, 남쪽에는
넓게 뜨락을 닦았다. 그리고 서쪽과 서남쪽, 동쪽, 북쪽 공터에는 소나무와 갖은 화초를 심어
사랑채 주변을 아름답게 꾸몄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2고주 5량가로 3단으로 싹둑 다듬
어진 석축 위에 큼직한 집을 세우고 8각으로 다듬은 화강암 주춧돌로 둥근 바깥 기둥을 받쳐
들고 있다. 집 구조는 안채와 같으며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그 좌우로 온돌방 8개, 창고,
부엌을 두었는데, 앞뒤로 툇마루(퇴칸마루)를 두어 일종의 통로를 두었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는데, 난간의 모양이 섬세하며, 대청에는 사분합문(四分閤門)을 설치했다.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서까래가 길다. 그리고 합작지붕의 박공면과 마루 밑은 붉은 벽돌로 쌓았는데,
이들은 나중에 손을 댄 것이다.

이곳은 일반에 공개된 공간으로 찻집과 전통체험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평일이라 사람이 없
다보니 거의 닫혀있다. (주말에는 북적댄다고 함) 그래서 굳이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고 소심
하게 바깥만 둘러보았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운치 있게 자라난 사랑채 소나무

▲  이제 무늬만 남은 사랑채 서쪽 우물

▲  사랑채 동쪽 부분

▲  사랑채 뒷쪽(북쪽)


▲  사랑채 정면에 걸린 '위선최락(僞善最樂)' 현판의 위엄

사랑채 정면에는 파란 글씨로 쓰여진 '위선최락'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
을 부리듯 필체의 힘이 대단한데 '위선최락'이란 '선을 베푸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란 뜻
으로 선영홍/선정훈 부자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 좌우명을 말로만 끝내지 않고 평생 실천하고 살았다. 지역 사람들과 전통 유학을
배우고 지키려는 인재들을 위해 많은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송덕비와 시
혜비(施惠碑)까지 세워 그들을 기리겠는가?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위인이자 성인군자라 할만
하다.
이런 상류층이 많아야 이 땅도 정말 희망이 있을 것인데 이 땅의 상류층과 권력층들은 어찌된
것이 하나같이 치졸하고 욕심들이 과한지 모르겠다. (특히 친일매국노의 후손들과 친일 패거
리들, 20세기 중/후반 독재정권 패거리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등쳐먹고, 백성
들 등골 빼먹고, 공기업과 도시, 나라까지 말아먹는 걸 예사로 여기니 말이다.
허나 그 치졸한 작자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선정훈 부자가 '위선최락'을 실천하고자 많
은 돈을 썼다. 그렇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했을까? 전혀 그
렇지가 않다. 소작농은 소작농대로, 선정훈이 세운 대동상사 사람들은 역시 그들대로 열심히
살며 그를 도왔고, 지역 사람들도 그들 일가에게 호의적이었다. 또한 그들의 지원을 받아 공
부한 인재들은 사회 곳곳에 진출했으니 그들로 인해 선정훈 일가의 이름은 더욱 크게 빛을 발
하는 것이다. 그러니 크게 보면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간 것이다. 선정훈 부자도 그들의 도
움을 크게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계속 집안이 번영을 하고 있고, 그들의 덕을 받은 사람들도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반면 이 땅 대부분의 상류/권력층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뜯어먹기만 하
지 상부상조할 줄을 모른다. 그러니 대다수의 백성들은 빈곤해지고, 상류/권력층의 배때기는
더욱 짙어만 간다. 그들에게 있어 '위선최락'은 '그게 뭐임? 먹는 거임? 그런 건 빨갱이들이
나 하는 거야!!' 하며 현판을 깨부실 것이다.

사랑채에는 '위선최락' 현판 외에도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도 있었다. 이것은 해남 대흥
사(大興寺)에 있던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 현판을 6.25 이후에 모각한 것으로 사랑채에 당당
히 걸려있었다. 허나 우당고택이 천하에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 찾는 이가 부쩍 늘었고
그 속에 불온한 무리까지 섞여서 들어오면서 2008년 2월 13일과 14일 사이 도난을 당하고 말
았다. 아직까지 현판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그의 빈자리는 여전하다.


▲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사랑채 외곽 (담장과 중문, 사랑채)
사랑채 너머로 이곳의 든든한 후광이자 주산(主山)인 옥녀봉(玉女峯)이 바라보인다.

▲  가옥의 남쪽 대문인 솟을대문
사대부 기와집 대문의 품격이 느껴진다. 대문 바깥에는 너른 공터와 텃밭이
있으며, 서남쪽 소나무 숲에는 효열각과 3기의 비석이 서 있다. 대문
주변에는 바깥행랑채와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6.25 전쟁 때
파괴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대문과 돌담만 남아있다.


 

♠  우당고택 바깥쪽

▲  솟을대문 남쪽에 자리한 3기의 비석들

솟을대문 서남쪽에는 시대를 달리한 비석 3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가장 왼쪽에 있는 비석
은 '전승지성공 정훈공덕비(前承旨惺公 政薰功德碑)'로 20세기 중반에 선정훈을 기리고자 세
워진 것이며, 그 비석을 크게 업데이트한 것이 오른쪽 끝에 자리한 큰 비석 '남헌 선정훈 선
생 송덕비(頌德碑)'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까지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선정훈은 매년 보릿고개가 되면 우리의 북방 영토인 만주에서 좁쌀을 수입해 보은 지역 빈민
들에게 나눠주었고, 지역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생활고로 고생하면 직접 해결해주곤
했다. 광복 이후, 공산당 세력인 남로당에 가입한 주민들이 많았는데, 국군이 그들을 잡아들
여 이유불문 모두 총살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선정훈이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고, 돈이 필요해 명의를 빌려주고 서명을 한 것 뿐이다!'
라며 주
민 구제에 나섰고 보은군수와 지역 유지, 국군을 설득하여 주민들을 모두 구제했다.
그렇게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공덕을 베푸니 그 은혜에 감동한 지역민들이 송덕비를 세운 것
이다. 처음에는 보은읍내에 있는 동헌(東軒)에 있었으나 근래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비문에
는 그의 덕행을 한자 16자로 표현했는데,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학군을 일으키고 가난을 구제하니, 대대로 내려온 덕행이다. 각박한 인심을 순화시키고 경각
심을 일으키니 길이길이 감명되어 마멸되지 않으리라'


▲  관선정 기적비(觀善亭 記蹟碑)

비석 3형제 가운데에 있는 지붕돌 비석은 '관선정 기적비'이다. 남헌 선정훈은 1926년 집 동
쪽에 '착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복을 받는다'는 뜻에 관선정을 지었다. 규모는 33칸으로 이곳
을 서당으로 삼아 왜정에 의해 시들해진 이 땅의 한문학과 유학을 배우고 닦는 공간으로 삼았
는데, 그는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도 서숙을 설치해주어 당시 유명한 유학자인 홍치유(洪
致裕)를 초빙해 관선정과 보은향교에서 젊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가르치는 선생과 후학들의 숙식은 물론 생활비까지 두둑히 지원해주니 배우고는 싶으나 가난
앞에서 붓을 꺾어야 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와 시험으로 그들을 가려뽑았다. 무작정 다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곳을 거쳐간 학생 수는 무려 수백 명이 넘었으며, 그 많은 이들
을 선정훈이 다 책임졌다.
이렇게 관선정은 왜정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이 땅의 전통유학을 교육시켜 민족정신 함양
은 물론 한문학과 전통문화계승 발전에 크게 공헌했는데, 이에 속이 뒤틀린 왜정이 1944년 강
제로 폐쇄시키고 건물까지 부셔버렸다.

관선정에서 수학한 사람들은 1960~70년대 우리나라 한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청명 임창순
(靑溟 任昌淳, 1914~1999)이 그 대표적이다. 그는 14살에 이곳에 들어와 6년 동안 한문학을
배웠다.
이들 관선정 학생들은 1951년 '관선정학우회'를 세워 매년마다 선정훈을 기리는 행사를 가지
고 있으며, 1973년 뜻을 모아 관선정기적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왕희지(王羲之)의 필체를
집자(集字)했다.

왜정에 의해 철거된 관선정은 1945년 경북 상주에 다시 지어졌으며, 상주 화북면으로 옮겨져
계속 후학을 기르다가 1951년에 철거되었다.


▲  옛 관선정의 모습과 평면도
관선정은 2개의 공부방, 선생방, 2개의 대청, 부엌, 고지기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선영홍 시혜비)

비석 3형제 부근에는 철로 이루어진 철비(鐵碑)가 있다. 철비는 이 땅에서 그리 흔치 않은 비
석 스타일로 우당고택에서 전혀 생각치도 못한 그를 만나니 생소하면서도 무척 반가웠다.

이 철비는 선영홍을 기리는 시혜비로 시혜비란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세운
비석을 뜻한다. 선영홍이 전남 고흥에 살던 시절 자신의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골고루 나눠주
고 소작료도 깎아주었다. 또한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이 굶지 않도록 도왔고, 세금을 대신 내
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하여 그의 덕을 입은 고흥 두원, 점암, 남양, 남면 지역 소작
농은 그의 은덕에 감사를 표하고자 십시일반 돈을 모아 1922년 시혜비를 세웠다. 그러니 거의
100년 정도 묵은 소중한 은혜의 증표인 것이다.
왜정 말기에 고약한 왜정이 전쟁 물자로 쓰고자 몰래 빼돌렸으나 다행히도 여수에서 선영홍의
종손인 선민혁이 주민들의 도움으로 발견해 원래 자리로 옮겼다. 허나 도로 확장 사업으로 제
자리를 떠나야될 상황에 이르자 철비를 만든 사람들의 후손들과 협의해 2004년 이곳으로 옮겼
다.

부자가 많은 선행을 베풀어 그 선행에 감동한 지역 사람들이 손수 지은 비석으로 의미가 정말
남다르다. 정말 인간적인 미와 정이 넘치는 비석인 것이다.


▲  비석의 모습을 취한 선공영홍시혜비

▲  돌담에 둘러싸인 선처흠 효열각(宣處欽 孝烈閣)

시혜비 옆에는 돌담을 두룬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선처흠 효열각이 담겨져 있다. 이 효열각
은 선영홍의 부모인 선처흠과 경주김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1892년에 명정(命旌)하여 지어진
것으로 편액 우측에는 '효자증조 산대부동몽교관 선처흠지문(孝子贈朝 散大夫童蒙敎官 宣處欽
之門)', 좌측에는 '열녀 선처흠 처금인 경주김씨지문(烈女 宣處欽悽今人 慶州金氏之門)'이라
쓰여 있다.

선처흠(?~1921)은 그의 아버지가 심한 안질로 고생하자 의원을 찾아가 침과 약으로 계속 안질
을 다스렸다. 허나 딱히 차도가 없자 의원이 매고기가 명약이라고 귀뜀을 해주었다. 하여 매
를 잡고자 영마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니 마침 1쌍의 매가 날아와 알아서 잡혀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 부친에게 먹이니 차도가 있었고, 추운 겨울 눈보라를 무릅쓰고 산에 올라
단을 쌓고 7일 동안 기도를 하니 또 다시 매가 알아서 잡혀주어 끝내 안질이 완쾌되었다고 한
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픽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건으로 선처흠의 효행은 서울까지 알려
졌다.
선처흠의 부인인 경주김씨도 효성이 지극하고 남편을 잘 따랐는데, 남편이 위독하자 넙적다리
를 베어 먹이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였다고 한다. 이후 남편의 병이 낫자 열녀(烈女)로 명
성이 높아졌다.

그들 부부의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들을 효자와 열녀로 명정하여 효열각을 지어주었으며, 원
래 선처흠이 살던 전남 보성에 있었으나 자손들이 모두 보은으로 들어오면서 192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효열각 역시 전혀 생각치도 못한 존재라 앞서 시혜비와 함께 우당고택이 나에게 덤
으로 얹혀준 선물이다.

▲  키가 작은 효열각 정문

▲  1칸 크기로 단촐한 효열각


▲  효열각 내부에 걸린 현판
오른쪽은 효자 선처흠, 왼쪽은 열녀 경주김씨의 정려문(旌閭文)이다.

▲  관선정과 간장의 숙성 공간, 장독대

효열각은 우당고택에서 가장 남쪽이다. 여기서 서쪽과 남쪽은 삼가천으로 막혀있으며, 동쪽은
고택의 텃밭이 있어 다시 고택으로 들어오던가 아니면 고택 서쪽 돌담길로 나와야 된다.
돌담길로 들어서면 근래 복원된 관선정과 기와 돌담에 둘러싸인 거대한 장독대의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관선정은 앞서 관선정기적비에서 소상히 다루었는데, 옛날과 달리 새로 지어진
지금은 강당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복원된 의미 정도로 머물러 있다.

관선정 앞에는 장독대들이 넓게 포진해 있는데, 이들은 이곳의 오랜 자랑인 씨간장과 그 간장
을 혼합한 햇간장을 보관하고 있다. 즉 우당고택의 듬직한 꿀단지들인 것이다. 350년째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근 햇간장을 부어 간장을 생산하고 있는데, 콩 80kg
가마로 만든 메주에 간장이 10L밖에 나오지 않는다. 2009년부터는 문화재청이 밀어주는 '전통
한옥 관광자원 활성화사업'에 일환으로 '전통 장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내놓아 호응을 얻
고 있는데, 바로 전통 간장 덕분에 이곳이 크게 뜬 것이다.

장독대는 각 지역 스타일로 조성하여 지역 별로 모아 두었는데,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 경
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장독대를 재현했으며, 그들은 모두 간장을 품
으며 숙성시키고 있다.

▲  황해도 장독대

▲  평안도 장독대

▲  제주도 장독대

▲  충청도 장독대

▲  관선정 옆 돌담길

▲  관선정 옆 송림에 묻힌 1칸짜리 정자


▲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과 돌담에 그려진 자연의 벽화
대자연이 그린 멋드러진 벽화가 황토 돌담의 품격을 드높인다. 그려진 폼을 보니
아마도 그만의 추상화 듯 싶은데, 아무리 천재화가가 모방해본들 자연이
그린 벽화만은 못하다.


서쪽 돌담길을 타고 고택의 시작인 사주문으로 나왔다. 고래등 기와집을 그런데로 1바퀴 둘러
본 셈이다. (통제 구역은 제외)
주차장에 있는 문화유산해설사 사무실을 바라보니 그 안에서 쉬고 있던 해설사 아저씨가 구경
잘 했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답을 하고 몇 가지를 물어보니 날도 추운데, 안으로 들어와 커
피 1잔 하라고 그런다. 내가 그런걸 마다할 이유가 없어 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한 커피 1잔을
제공해준다.
해설사 아저씨는 정년퇴직을 하고 해설사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주말에는 관람객이 많
지만 평일은 썰렁하고 해설 요청 수요도 주말 평일 가리지 않고 거의 없다며 거의 대충 보고
간다고 그런다. 그렇게 그와 오랜 시간 세상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 어느덧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해 왔다.
날이 겨울인지라 햇님도 동절기 근무로 일찍 퇴근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갈 곳이 몇 곳 남았
는데, 더 이상 꾸물거려서는 안될 듯 싶어 그에게 선병우/선병묵고가, 상현서원에 대해 물어
보고 작별을 고했다.

* 우당고택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 (개안길 10-2, ☎ 043-543-7177)


 

♠  개안리에 있는 선씨 일가의 다른 한옥 둘러보기

▲  보은 선병우 고가(宣炳禹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5호

개안리에는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외에 선병우, 선병묵고가 등 3채의 오래된 한옥이 있다. 이
는 서울 북촌(北村), 전주한옥마을,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등 한옥 밀집 지역과 오래
된 전통 마을을 제외하고는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이들 모두 선정훈 형제가 세운 것이다.
가장 먼저 선영홍/선정훈이 이곳에 자리를 닦았고 1940년대에 선정훈의 형제들도 본거지인 고
흥을 버리고 이곳으로 올라와 선정훈집(우당고택) 북쪽 삼가천 너머에 집을 지은 것이다. 이
들은 20세기 중반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선병우고가는 선정훈의 동생인 선준훈(宣俊薰)이 세운 것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중문 등
을 갖춘 당당한 한옥이다. (선병우는 선준훈의 아들) 집주인이 남쪽에서 올라온 탓인지 집의
구조는 남부 지방 가옥 배치와 유사하며, 간실을 넓게 잡은 것이 특징이다. 건축양식은 우당
고택과 너무 비슷한데, 이는 선정훈이 좋은 목수를 보내주어 도와준 탓이다.
비록 우당고택보다는 작아도 커다란 한옥은 분명한지라 집 상당수를 식당으로 쓰고 있다. 식
당 이름은 '복해가든'으로 닭백숙과 돼지고기, 버섯찌개 등을 내놓고 있는데, 집 관람은 딱히
제한은 없으나 개인 집이기 때문에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고 대문 밖에만 잠깐 기웃거리고
선병묵고가로 이동했다.

* 선병우고가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142-1 (개안길 15-9, ☎ 043-543-0606)


▲  선병우고가 앞에 자리한 3기의 비석과 넓게 퍼진 큰 소나무

선병우고가 앞에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의 처
진소나무처럼 좌우로 넓게 퍼진 큰 소나무가
운치를 지어내고 있다. 그 앞에는 3기의 비석
이 나란히 자리해 있는데, 그들 중 가운데에
자리한 늙은 비석이 이 집을 세운 '국당(菊堂
) 선준훈 추모비'이다.
194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나이에 비해 비석
이 너무 낡자 근래에 기존 비석을 업그레이드
시킨 새로운 비석을 옆에 지어놓았다. 그래서
기존 비석에 비해 때깔이 무지 고우며, 비석
형태는 앞서 '남헌 선정훈 선생 송덕비'와 유
사하다.

▲  소나무 앞에 자리한 3기의 비석들


▲  보은 선병묵 고가(宣炳默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4호

선병우고가에서 동쪽으로 5분 정도 들어가면 뫼로 막힌 막다른 곳에 선병묵고가가 짧은 고색
의 기운을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이 집은 선정훈의 동생인 선남훈(또는 선동훈)이 1940년대에 지은 것으로 그의 아들인 선병묵
이 소유하고 있다. 집 주위를 황토색 돌담으로 빙 두르고 그 안에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창
고로 쓰이는 초가 등을 두었는데, 남쪽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에 사랑채가 있고, 중
문을 지나야 안채가 나오는 분산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담장 서쪽 길에서 바로 사랑마
당과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서쪽 대문을 따로 내었는데,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변형으
로 보면 된다.

현재는 우당고택(선병국가옥)처럼 집 일부를 고시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속세에 너무 알려
진 우당고택보다 찾는 이도 훨씬 적고 다소 외진 곳이며, 바로 옆에 산이 있어 공부는 정말
잘 될 것 같다.
이곳도 내부는 그런데로 공개되어 있으나(상황에 따라 비공개할 수도 있음) 개인 집이라 깊숙
하게 들어가지는 않고 사랑채까지만 보고 살짝 나왔다.

* 선병묵고가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면 개안리 96 (개안길 60)

▲  선병묵 고가 남쪽 대문
대문은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다.

▲  고가 내부 (남쪽 대문 안쪽)
집 내부에 조촐하게 텃밭을 두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사랑채

▲  겨울 제국의 의해 꽁꽁 봉해진 연못


▲  삼가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선병묵고가
검은 피부의 기와집, 하얀 피부의 기와집, 그리고 누런 피부의 초가까지
다양한 집이 망라되어 있다.

▲  삼가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개안리와 옥녀봉

▲  눈에 젖은 삼가천 둑방길

선병묵고가를 둘러보고 아직 햇님 퇴근까지는 시간이 있어 북쪽 서원리에 있는 상현서원(象賢
書院)까지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선병국가옥 입구인 하개교에서 장안로를 따라 1.7km 정도 가면 상현서원인데, 차량의 눈치를
피하고자 장안로 동쪽 건너편, 그러니까 삼가천 둑방길로 걸어갔다. 서원에 다다르면 하천을
건너는 징검다리라도 있을 듯 싶어서였다. 둑방길은 거의 응달이라 눈이 좀 쌓여있었고, 주변
경작지와 삼가천 갈대는 죄다 누렇게 뜬 모습으로 겨울 제국이 속히 지나가기를 염원한다.

한참 둑방길이 잘 이어져 있다가 삼가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에서 길이 끊기고 말았다. 하천
으로 내려가는 조그만 길은 있지만 눈과 얼음 투성이라 접근이 어려웠고, 괜히 내려가다가 큰
일 날듯 싶어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되돌아나왔다. 괜히 차량의 눈치를 피한답시고 꾀를 부리
다가 오히려 그 꾀에 당한 셈이다. 그 사이 햇님은 더욱 기울어지고 첩첩한 산속이라 날씨까
지 다시 추워진다.

장안3거리로 다시 나와 군내버스를 타고 보은읍내로 들어서 후식거리로 보은동헌이라도 볼까
했으나 길을 헤매어 결국 우당고택 등 선씨 고택 3채를 보는 선에서 올해 첫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허나 날이 이날 뿐이랴..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은 언제든 보은 땅에 찾아
올 수 있다. 그러니 그리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부디 선영홍/선정훈 부자 같은 대인배 부유/상류층이 많이 나오기를 염원하며 대단
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5월 1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 북한산 늦봄 나들이 (빨래골, 삼성암, 흰구름길) '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

▲  삼성암(삼성사)

▲  빨래골 숲길


 

북한산(삼각산, 836m)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으
로 나의 오랜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그의 품을
드나들면서 그가 품고 있는 수많은 명소를 섭렵했지만, 아직도 미답처(未踏處)가 무수히
남아있어 나를 무척 애를 태우게 한다.
미답처 식구 중에는 북한산 동쪽 자락(수유/우이지구)에 안긴 삼성암과 빨래골도 포함되
어 있는데, 이들을 뼛속 깊이 새겨두었다가 5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길을 나섰다.

빨래골은 도봉동 집에서도 무척 가까운 곳이라 여유롭게 15시에 길을 나섰다. 수유역(수
유리)으로 이동하여 강북구 마을버스 03번(빨래골↔수유역)에 나를 담아 수유1동 구석에
자리한 빨래골 종점으로 보냈다.


▲  북한산(삼각산)의 싱그러운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 빨래골공원지킴터
여기서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과 만난다.


 

♠  북한산 빨래골

▲  봄가뭄으로 부실한 모습을 비추는 빨래골 (수유리 빨래터)

빨래골은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묻힌 조그만 골짜기이다. 작은 냇가 같은 모습으로 딱
히 유별난 구석은 없으며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을 거닐 때 아주 잠깐 스쳤을 뿐, 제대로 살
펴본 적은 없었다. 그저 골짜기 이름을 통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동네 아낙네
들이 빨래를 하던 곳으로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곳이 왜 빨래골이 되었을까?

북한산 동쪽 밑에 자리한 수유동(水踰洞)은 북한산 계곡 물이 많아 '무너미'라 불렸다. 무너
미란 저수지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한쪽 둑을 조금 낮추어 물이 넘치면 자연히
흐르게끔 만든 것으로 물이 풍부하다보니 일찌감치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마을이 이제는 서
울 동북부 부도심이자 강북구(江北區)의 중심지로 어엿하게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유동(
수유리) 아낙들이 여기서 빨래를 해서 빨래골이 된 것일까? 물론 그들도 빨래를 하긴 했으나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다.

조선 왕궁에는 궁궐의 허드렛일을 처리하던 무수리들이 많았다. 그들은 제왕(帝王) 내외와 왕
족들,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내시)과 상궁(尙宮), 궁녀, 군사의 옷을 개천(청계천)이나 인근
산골에서 빨았는데, 궁궐 식구들이 많다보니 하루에 나오는 빨래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들 빨
래 중에는 속옷 등의 예민한 옷이나 특별히 다뤄야 되는 빨랫감도 많아 청계천에서 같이 처리
하기가 그랬다. 하여 그런 것들은 특별히 이곳 빨래골에서 처리를 했다. 그래서 '빨래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지역 이름을 따서 '수유리 빨래터'라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그나마 가까운 궁궐인 창경궁(昌慶宮)까지는 약 7km 거리인데, 계곡 물이 풍부하고 매
우 구석진 한적한 곳이라 이곳을 고른 것 같다. 어쨌든 무수리들은 무거운 빨랫감을 짊어지고
동소문(東小門, 혜화문)을 나와 단장의 미아리고개(또는 아리랑고개)를 넘어 여기까지 낑낑대
고 올라왔다.
그들은 빨래를 마치면 잠시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궁궐에서 누리기 힘든 자유를 만끽했고, 한
여름에는 조촐히 물놀이도 즐겼을 것이다. 비록 궁궐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고단하지만 휴
양도 누릴 수 있으니 일종의 휴가나 마찬가지라 무수리들의 선호도 대단했을 것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의 휴식시설도 있었다고 전하며, 환궁(還宮)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인근 화계사(華溪寺)에서 숙박 신세를 지기도 했다.

* 빨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일대


▲  윗쪽에서 바라본 빨래골

▲  2004년에 심어진 빨래골 표석
이곳 빨래골은 궁궐 무수리 뿐 아니라 지역 아낙들의 즐겨찾기 빨래터였다.

▲  녹음(綠陰)이 짙은 삼성암 숲길
속세의 번뇌와 먼지를 털기에는 좋은 길이다.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람에 번뇌를
실어 멀리 날려보내고 싶으나 그 번뇌가 너무 무거워 결국 내가 내려가는
길목에 매복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성암 일주문(一柱門)

빨래골 숲길을 오르면 삼성암으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경사는 그리 각박
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더위로 인해 조금은 지친다.
자존심을 곱게 접고 그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삼성암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한다. 오르막길
에서 봐서 그런지 한층 웅장해보이는데,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는 일주문 현판에는 '삼각산 삼
성암'이 아닌 '삼각산 삼성사'라 쓰여있다. 근래 암(庵)에서 사(寺)로 격을 높이면서 삼성사
를 칭하고는 있으나 속세에서도, 절에서도 삼성암이란 이름을 많이 쓴다. (심지어 삼성암 홈
페이지에도 삼성암이라 나옴)


▲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만월당 현종종사탑(滿月堂 玄宗宗師塔)

일주문을 지나 한 굽이 오르면 숲속에 때깔이 고운 부도<浮屠, 승탑(僧塔)> 2기와 비석이 뜨
겁게 눈길을 보낸다. 그들 중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맵시가 고운 탑은 '만월당 현종종사'의 사
리가 담긴 승탑으로 만월당은 20세기 후반, 삼성암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이
다. 그러다보니 그의 제자와 신도들이 크게 정성을 기울여 아름다운 승탑을 지었다.

◀  보광당 중현대선사비(寶光堂 重玄大禪師碑)
중현대선사(박중현)는 왜정 후기에 삼성암
대방을 지은 승려이다.

◀  본공당 성학대선사탑(本空堂 性學大禪師塔)
본공당은 1961년 이후 만월당을 도와
여러 건물을 지은 승려이다.


▲  활짝 열린 삼성암 정문


 

♠  북한산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는
삼성암(三聖庵, 삼성사)

▲  삼성암 외경

삼성암은 빨래골 상류 숲속에 묻힌 조그만 산사로 1872년에 고상진(高商鎭) 거사가 창건했다
고 전한다. 원래 삼성암 자리에는 천태굴이란 조그만 굴이 있었는데, 북한산(삼각산)에 숨겨
진 기도처로 많은 승려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천태굴이란 이름은 삼성암이 독성도량을 칭
한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임)

19세기 후반, 서울에 살던 박선묵은 16세에 불교에 귀의했다. 그는 1870년 봄, 고상진, 유성
종 등 7명과 이곳 천태굴에 들어와 3일 동안 독성기도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이곳의 지세가
절을 지으면 딱 좋은 터요!'
절을 지을 것을 제안, 2년 동안 준비하여 1872년 봄, 여러 칸의
건물을 짓고 작은 절이란 뜻에 '소난야(小蘭若)'라 하였다. 이후 주변 산지를 조금씩 매입했
고 1881년에 독성각을 장만해 절 이름을 삼성암으로 갈면서 본격적으로 독성도량을 칭했다.

1936년 봄, 한동운(韓東雲)이 신도 김용태의 지원으로 칠성각을 다시 짓고, 돌다리와 계단을
닦았으며, 요사를 수리하고 기와를 바꾸는 등 절의 규모가 한층 커졌다. 허나 1942년 7월 폭
우의 희롱에 잔뜩 흥분한 뒷산이 산사태를 일으켜 절을 덮치면서 그만 폐허가 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계사 주지 박회경(朴會鏡)이 중창의 뜻을 밝혔고, 삼성암 승려 박중현
(보광당), 김성섭 등과 함께 쓰러진 절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 김용태가 목재를 지원했고, 인
근의 여러 절이 흔쾌히 도움을 주어 1943년 3월 대방 등 12칸을 세웠으며, 그 기념으로 승려
김태흡(金泰洽)이 '화계사삼성암중건기'를 지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독성각을 다시 세웠다.
현재의 가람은 1961년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본공당, 세민(世敏), 현종(만월당) 등이 계속해
서 규모를 불렸다. 세민은 주지가 되자 대웅전을 고치고 범종루를 지었으며, 현종이 그 마무
리를 지어 지금의 삼성암을 이루게 되었다. 근래에 '사(寺)'로 격을 높였으나 여전히 삼성암
으로 많이 불린다.

삼성암은 초창기부터 독성도량을 칭했다. 그래서 중부 지역의 이름난 독성 기도도량을 자처하
고 있고 그 명성을 누리고 있는데, 독성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 독성기도를 하러 많은 이들
이 온다. 아직 절의 내력도 짧고 문화유산도 빈약하니 독성도량을 내세워 절의 존재를 천하에
홍보하는 것이다. 나 역시 삼성암의 이름 3자만 아련히 듣고 있었을 뿐, 관심도 보이지 않다
가 그런데로 묵은 절임을 알고 뒤늦게 살짝 찾아온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독성각, 명부전, 칠성각, 요사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
으며, 겉보기와 달리 건물도 제법 있고, 면적도 넓다. 소장 문화유산은 아직 없으나 1908년에
조성된 산신탱과 철원(鐵原) 심원사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 그리고 상궁윤씨의 헌답기
념비 등이 절의 100년 내력을 살짝 귀뜀해준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숲속에 짙게 감싸여 있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기분이며, 사람
들의 발길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고적한 산사의 멋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바람에 잠을
깬 풍경물고기의 풍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산164-5 (인수봉로23길 235 ☎ 02-988-9300, 1996)
* 삼성암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청기와를 눌러쓴 삼성암 명부전(冥府殿)

활짝 열린 정문을 들어서 온갖 봄꽃이 미소 짓는 오르막 길을 오르면 청기와를 지닌 2층 명부
전이 나온다. 2층이긴 하지만 1층은 종무소(宗務所) 등으로 쓰이고 있어 2층이 진짜 명부전인
데, 원래 이름은 지장전(地藏殿)이었다. 그 뒷쪽에는 요사, 선방(禪房) 등이 자리해 있고, 옆
에는 범종각이 있다.


▲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이 담겨져 있다.

▲  북한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샘터

▲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영월각(소법당)


▲  탐스럽게 익은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약간은 통통해 보이는 관세음보살 누님이 어진 표정으로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  청기와로 단장된 대웅전(大雄殿)

명부전에서 1단 더 오르면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나온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머리에 푸른 청기와를 입혀 고급지게 꾸몄으며,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과 철원 심원사(深
源寺)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그곳 천불전(千佛殿)에 봉안된 천불(千
佛)의 하나였으나 6.25전쟁으로 심원사가 파괴되자 승려들이 부랴부랴 그것을 챙기고 이곳으
로 넘어왔고, 그 불상을 아미타불로 삼아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 서울에
는 심원사에서 넘어왔다는 불상과 보살상이 여럿 있어 심원사가 왕년에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허나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온 나는 그만 대웅전 내부를 살피지 않고 지나쳤다. 모두 근래
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불상과 불화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남쪽에는 삼성암의 자랑
인 독성각이 있고, 북쪽에는 칠성각과 관세음보살상, 헌답기념비 등이 있다.


▲  오색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일찌감치 오색 연등으로 대웅전 뜨락을 곱게
수놓았다. 하늘을 훔친 연등의 위엄으로 대웅전 머리는 가려져 마치
자욱한 하얀 안개로 산 윗부분이 가려진 것 같다.


▲  바위 위에 자리한 '상궁 청신녀(淸信女) 윤씨 실상행(實相行)
헌답기념비(獻畓紀念碑)'
약간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조그만 비석으로 구한말에 상궁 윤씨가 전답을
시주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그 전답은 삼성암의 살을
찌우는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좌측 안쪽에는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의 보금자리로 '칠성각' 현판
외에 주원영 거사가 쓴 '영모각(靈母閣)' 현판도 내밀고 있는데, 여기서 '영모(靈母)'는 산신
할매의 다른 표현 같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지니고 있는데, 19세기 말
에 지어진 것으로 1936년에 수리한 것을 근래에 산뜻하게 청기와를 입혔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벼랑이 바짝 붙어있어 산사태에 다소 취약해 보이는데, 1984년 여름 장마
의 희롱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적지 않은 흙과 물이 거세게 칠성각을 향해 밀려왔다. 붕괴 직
전에 놓였으나 뿌리채 뽑혀 떠내려오던 소나무 1그루가 마치 문어가 감싸듯 그 줄기와 뿌리가
칠성각을 감싸 무너지지 않게 지켜준 이변이 발생했다. 우연인지 칠성/산신의 가호인지는 모
르겠으나 어쨌든 산신각은 위기를 모면했고, 절에서는 그 소나무를 치우고 3일 동안 산신 기
도를 올렸다.


▲  등장 인물이 많은 칠성탱 (왜정 때 그려짐)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고색이 느껴지는 산신탱은 1908년 석옹 철유(石翁 喆裕)가 출초(出草, 초안을 그림)하고 두흠
(斗欽)과 윤오(允旿) 등이 참여해 구산동 수국사(守國寺)에서 그린 것으로 나중에 삼성암으로
넘어왔다.
붉은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산신은 호랑이에 기대 앉아있는데, 꼬랑지를 살랑살랑
거리는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하다. 산신의 왼손에는 잘생긴 부채가 있고, 그들 뒤에
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심원사에서 넘어온 아미타불을 제외하면 경내에서 가
장 늙은 보물로 아직 그 흔한 지정문화재 등급은 얻지 못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독성각(獨聖閣)

대웅전 우측 벼랑 위에는 삼성암의 얼굴이자 후광(後光)인 독성각이 걸려 있다. 보통 절에서
산신각이나 산신이 봉안된 삼성각(三聖閣)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마련이나 삼성각
은 독성도량답게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거처인 독성각을 가장 하늘 가까이에 두어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독성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쓰고 있
다. 1881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전하며, 1942년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7월에 다시 지었
다. 현재 건물은 근래 손질된 것으로 지형적인 탓에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정면에 유리창을
내어 비록 좁지만 경내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들어앉은 위치가 경사가 각박하고 자리가 협
소해 지그재그로 돌계단을 내었는데,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계단이 우중층하니 주의가 좀 필
요하다.


▲  독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옆구리

▲  목각으로 이루어진 독성탱

독성각에는 나무로 조각되어 곱게 채색을 입힌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그림 가운데에 두광(
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가 서 있으며, 독성 좌우에는 늙은 큰 소나
무가 있고, 뒷쪽에는 독성의 활동 무대인 천태산(天台山)이 주름진 선을 이루고 있다.

독성각이 19세기 후반부터 있던 것으로 보아 그와 연배가 비슷한 독성탱이 있었을 것이나 지
금 독성탱은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 못했다. 삼성암은 독성을 주
인으로 삼아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으며, 중부 지방 제일의 독성 도량을 자처하고 있지만 역시
나 아는 사람만 찾을 뿐이다. 나도 이곳에 오기 얼마 전에야 겨우 그 사실을 접했다.

독성탱 앞에는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조그만 원등(願燈)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이 강인한 협동심으로 몸을 불사르며 독성각 내부를 환히 밝힌다.


▲  마치 자수를 놓은 듯, 꽃잎과 새 등이 그려진 독성각 우물천정

▲  삼성암을 뒤로하며... (일주문 부근)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  삼성암 일주문 밑에 자리한 세심천 약수터

그날의 목적지인 삼성암을 둘러보고 뿌듯한 마음을 품으며 절을 나왔다. 다음 인연이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때가 되면 이번에 놓친 대웅전의 조그만 아미타불을 꼭 친견하고
싶다. 
절을 뒤로 하며 일주문에 이르니 부근에 세심천약수터가 있다. 산에 왔다면 뫼가 베푼 약수는
꼭 마셔봐야 그 산의 맛과 마음을 아는 법,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들이킨다. 허
나 봄가뭄으로 물이 답답하게 나와 조그만 바가지를 채우는데 꽤 인내를 요했다. 삼성암은 그
래도 물이 넉넉했는데, 이곳은 그렇지가 못하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오랫동안 동네 사람들의 몸
풀기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약수터를 나와 빨래골로 내려가지 않고 화계사로 질러가는 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숲에 묻힌
그 길을 정신없이 내려가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이 모
습을 비춘다.
북한산둘레길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패산(賜牌山)의 밑도리를 지나는 21개
구간, 71.5km의 장대한 산길인데, 삼성암 입구와 빨래골을 지나는 길은 그 둘레길의 일원인
흰구름길이다. 이름도 참 어여쁜 흰구름길(북한산둘레길 3구간)은 이준열사묘역입구에서 북한
산(삼각산)과 속세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북한산생태숲(성북생태체험관)에 이르는 4.1km의 산
길로 구름을 만날 것 같은 길 이름과는 달리 현실은 해발 100~150m를 왔다갔다하는 구름도 만
질 수 없는 얕은 높이이다. 그러니 괜히 이름에 속지 말자~~!

흰구름길은 북쪽으로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 서남쪽으로는 솔샘길(둘레길 4구간)과 이
어지며, 그리 각박한 경사가 없는 정말 착한 산길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코스라 마실 삼아
가다보면 길게 잡아도 1시간 20분 내외면 완주할 수 있는데, 이 구간에는 화계사(☞ 관련글
보기)와 본원정사(☞ 관련글 보기), 삼성암 등의 오래된 절과 냉골, 빨래골 등의 계곡, 조병
옥(趙炳玉, 1894~1960)박사묘, 구름전망대 등의 명소가 있어 무작정 앞사람의 뒷통수만 보며
산길만 걸을 것이 아니라 이들을 여럿 겯드려서 거닐면 정말 영양가 높은 둘레길 산책이 될
것이다.

흰구름길 구간에는 냉골(화계사와 본원정사 중간)이란 깊은 골짜기가 있다. 도로가 냉골 윗쪽
에 자리한 영락교회기도원까지 닦여져 있어 차량들도 마음 편히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냉골
공원 지킴터에서 칼바위능선으로 조금 오르면 현대사의 주요 인물인 유석(維石) 조병옥박사의
묘소가 있다.

또한 화계사 남쪽 산자락에는 속세를 향해 고
개를 든 3층짜리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둘레길의 이름을 따서 구름전망
대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구름까지 닿는 높이
는 아니다. 전망대 꼭대기까지는 계단이 빙글
빙글 늘어져 있으며, 20m 내외의 높이인 전망
대 꼭대기에 올라서면 강북구와 도봉구, 성북
구, 노원구를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동쪽의
주요 봉우리와 도봉산, 수락산(水落山), 불암
산(佛巖山) 등이 거침없이 들어와 조망이 제
법 일품이다.


◀  나무로 지어진 구름전망대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오른쪽 산줄기)

녹색 물결이 일렁이는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 그 너머로 이 산의 대표 봉우리인 백운대(
白雲臺, 북한산 꼭대기)와 인수봉(仁壽峯)을 비롯해 북한산 동쪽 봉우리 능선이 흔쾌히 시야
에 들어온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우이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 왼쪽에 보이는 산이 도봉산,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쌍문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 그 오른쪽이 불암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미아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미아동, 길음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잘 닦여진 흰구름길 (화계사 남쪽)

▲  화계사 직전 (흰구름길과 만나는 구간)

간만에 찾은 흰구름길은 화계사까지만 거닐었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슬슬 임박했고 종종 왔
던 곳이라 그렇게까지 무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멀리 가고 요란하게 간다 한
들 그 일정의 끝은 언제나 집이다.
이렇게 하여 삼성암을 겯드린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5월 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미타사
~~~~~

▲  미타사 백의관음도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사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
왔다. 비록 불교 신자까지는 아니나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해 그날에 대한 설레
감이 큰 편이다. 하여 매년 연례행사처럼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
울을 중심으로 고색이 여문 절이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20세기 이후) 사찰을 대상
으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상시에도 절 답사/투어를 많이 하는 편임)

이번 초파일에는 어디를 가야 칭찬을 받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미답(未踏)으로
남은 서울 지역 사찰은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다행히 보문사(普門寺) 바로 옆에 미타
사가 마치 고갈에 대비한 듯,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그를 이번 나들이 동선에 흔
쾌히 넣었다. 그곳은 오래된 석탑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선 후기 탱화를 다수 보유
하고 있어 은근히 군침이 돌았다.

드디어 초파일의 여명이 밝아왔다. 제일 먼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아 그곳에 깃든 지방문화재(마애관음보살좌상, 마애사리탑)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점
심 공양으로 두둑히 배를 채웠다. (☞ 학도암 글 보러가기)
학도암에서 공양까지 마치니 시간은 벌써 13시가 넘었다. 그날따라 해가 참 짧게 느껴
져 점점 기울어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해 낙산(駱山) 동쪽에 자리한
미타사로 이동했다. 이곳은 보문사 바로 북쪽으로 서로 바짝 붙어있는데 얼핏 보면 같
은 절로 보일 수 있으나 엄연히 다른 절집이다. 허나 그들 모두 비구니 절이고 탑골승
방의 일원이라 이웃사촌 마냥 가깝다.


▲  집으로 경내를 꽁꽁 두룬 미타사 (미타사 정문 앞)


 

♠  미타사(彌陀寺) 입문 (대웅전)

▲  미타사 정문(일주문)

미타사는 사방이 꽁꽁 막힌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마치 속세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놀겠
다는 의지처럼 말이다. 절 남쪽은 보문사와 닿아있고, 동쪽과 북쪽은 건물 벽으로 막혀있으며,
서쪽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나 경동고등학교의 경계선 앞에서 결국 길이 끊긴다. 보문사에서
미타사로 이어지는 골목길(보문사길) 또한 미타사 앞(보문아이파크아파트)에서 짧게 그 길을
접는다.
이곳이 이런 구석진 모양새가 된 것은 서울 시내 팽창에 따른 개발의 영향이 크다. 원래 낙산
숲과 밭두렁이 주를 이루던 변두리였으나 1950년대 이후 시가지 확장으로 주택들이 마구 들어
서면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포위된 외로운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절도 속세의 기운
을 경계하고 속세와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자 사방을 건물로 두룬 폐쇄적인 모습이 되었다.

절 앞에 이르면 '미타사' 현판을 내건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이 문은 속세와 미타사를 이어
주는 존재로 일주문(一柱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문사와 미타사는 들어앉은 위치상 따로
일주문을 둘 처지가 못해 절과 속세의 경계에 이렇게 기와문을 두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보시함


정문을 들어서니 바로 정면과 왼쪽에 선방(禪房)과 요사(寮舍)가 있고, 오른쪽에 관음전과 대
웅전 뜨락이, 그리고 뜨락 서쪽 계단 너머로 대웅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뜨락에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
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온갖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껴얹으면서 나름의 소망을 들이민다. 그 앞에는 보시함
이 옥의 티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부처가 부리
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來歷)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5층석탑에서 바라본 미타사 경내
(바로 앞에 뒷통수를 보인 건물이 삼성각)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낙타산) 동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는 950년에 혜거(慧居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때 법등(法燈)을 켰는지는 심히 의문이나 1047년에 세웠다는
석탑이 있어(그 탑의 탄생 시기도 확실치 않음) 고려 초/중기에 지어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웃 보문사는 1115년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1314년 혜감국사(惠鑑國師) 만항(萬沆)이 중수했다고 하며, 1457년에 단종(端宗)의 왕후인 정
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낙산의 동남쪽 봉우리) 주변에 머물면서
중수했다고 전한다.
조선 초부터 미타사는 보문사와 한 덩어리로 '탑골승방(僧房)'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여
기서 탑골은 미타사에 있는 5층석탑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문사와 미타사 일대를 탑골이라 불
렀는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조선 왕실과의 인연이 두터워 후궁과 상궁(尙宮)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의지하거나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 
탑골승방 외에도 옥수동 두뭇개승방(미타사), 석관동 돌곶이승방(연화사), 숭인동 새절승방(
청룡사)도 있어 이들을 묶어 한양도성 밖 4대 승방이라 불렀으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탑
골승방과 성격이 비슷하다.

1801년에 중수를 했으며(이때가 4차 중수라고 함) 1836년에 비구니 상심(常心)이 인일(仁一)
의 도움으로 중수했다. 1969년 계주(季珠)가 고봉(古峰)의 도움으로 중수했으며,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관음전, 단하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관음전
은 지하에 공양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쪽은 보문사와 연결되어 있어 서로 왕래를 한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상, 대웅전과 삼성각, 단하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보문사와
비슷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도와 백의관음도, 아미타후불도 등 지방문화재 8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 모두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이들은 대웅전과 삼성각에 나눠 봉안되어
있으나 백의관음도는 관음전과 이어진 '불이문'이란 건물에 따로 있다. (그림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음)
그리고 앞서 언급한 1047년에 조성되었다는 5층석탑이 있는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탄생 시기는 의심스러우나 고려 때 탑은 분명해 보인다. 탑골이란 이름까지 낳은 장본인이나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도 거뜬히 받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있는 듯 싶다.

현재는 조계사의 말사(末寺)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이며, 낙산 자락에 있지만 '삼각산(三角山
)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비록 북한산(삼각산)이 여기서 거리가 좀 되지만 그 줄기가 낙산까
지 이르고 낙산이 다소 부실하게 생겨 멀리 있는 북한산을 가져와 칭한 것이다. 이곳 뿐만 아
니라 낙산에 안긴 보문사와 청룡사(靑龍寺) 또한 낙산 대신 삼각산을 칭하며 북한산에 의지하
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낙산 일대 절들은 비구니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지금 또한
여전하여 그 점이 참 흥미롭다. 미타사와 보문사, 청룡사, 거기에 최근에 지어진 정각사(正覺
寺)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실과 사대부 여인과의 적지 않은 인연 때문
일 것이다. 

예전에는 숲이 짙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대단했을 것이나 자비 없기로 유명한 개발의 칼질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갇힌 별천지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보문사의 그늘에 가려져 인지도도
낮은 실정이다. 비록 보문사보다 법등(法燈)의 역사는 조금 길고 문화유산도 풍부하나 이제서
야 처음 인연을 지을 정도이니 그곳의 인지도를 알만하다. 그래도 초파일이라 사람들도 제법
많았고, 관불의식과 연등 만들기, 불화(佛畵) 그리기, 전통차 시음 등의 이벤트도 열리고 있
어서 보문사보다는 덜 심심한 풍경이었다.

참고로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개화산(開花山)과 옥수동에도 '미타사' 간판을 내건 오래된 절
이 있다. 즉 3개의 늙은 미타사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51 (보문사길 6-16, ☎ 02-923-1738)


▲  강렬한 햇살과 연등의 위엄으로 다소 흐릿하게 다가온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미타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20세기 후반에 지
어진 것으로 오색 연등이 허공을 가리고 있는 동쪽 뜨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가3존상을 비
롯해 고색이 묻어난 아미타후불도와 감로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다.

▲  연분홍 연등으로 곱게 분을 바른
대웅전 앞

▲  대웅전 내부


▲  대웅전 석가3존상과 아미타후불도(阿彌陀後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8호
)


대웅전 불단에는 잘생긴 석가여래가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바로 그 뒷쪽에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도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데, 석가3존상 뒤에 석가여래도 아니고 아
미타불(阿彌陀佛)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미타후불도가 걸려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아무래도 절 이름이 '아미타불'의 줄임말(미타)에서 비롯되었고 따로 아미타불의 거처를 마련
하기도 여의치 않아 이곳에 둔 모양이다.

이 아미타후불도는 1873년에 신중도, 지장시왕도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제작자의 센스 부족으
로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
대 제자, 사천왕(四天王),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빼곡히 모여 정모를 하고 있는 일종의 아
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로 그림 중앙에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
진 아미타3존상이 낮은 불단에 마련된 연꽃대좌에 앉아 있으며, 그 주위로 6대 보살과 10대
제자, 금강역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은 평상에 편하게 앉아 있는데, 이는
다른 탱화와 확연히 틀리다. (다른 탱화의 사천왕은 모두 서 있음)
폭이 넓은 액자형의 화면 크기나 낮은 불단의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아미타3존상의 모습, 그리
고 평상에 앉은 사천왕의 등장은 경북 예천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
한 것으로 그 예가 별로 없다고 한다. 하여 그 때문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8호

대웅전 남쪽 벽에는 보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아주 복잡한 그림이 있으니 바로 감
로도<감로왕도(甘露王圖)>이다.
감로도는 이름 그대로 '맛있는 이슬'이란 뜻으로 여기서 이슬은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
을 베풀어 해탈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매우 파란만장한 스타일의 그림이라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림 해석이 어려워 거의 암이 걸
릴 지경인데, 주로 죽은 사람들, 즉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영가들의 위패나
영정을 두기 마련이다.
그림의 줄거리는 대체로 석가여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을 물어 답을 듣는 것으로 그림 상단
에는 아미타3존과 7여래,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을 담았
다. 그리고 중단에는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 아귀가 공양을 먹는 장면, 의식
을 주재하는 사람이 불덕(佛德)을 찬양하는 모습과 승려, 성현(聖賢) 등이 그려져 있으며, 하
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곳 감로도는 1918년에 고산축연(古山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다소 질이 떨어지는 합성연료
를 사용한 탓에 밝은 주홍색이 선명하다. 명암법(明暗法)의 일종으로 넓게 칠하는 요철법(凹
凸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화법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유형은 인근
청룡사(1868년) 감로도와 개운사(開運寺, 1883년), 옥수동 미타사(1887년), 봉원사(1905) 감
로도와 비교할만하며,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와 아귀의 규모가 줄어든 점은 그 시절 감
로도의 경향을 보여준다.
어쨌든 19세기 수도권에서 유행하던 감로도의 도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잘 짜여진 구성과 세
부 묘사가 정교하다.


▲  미타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0호

대웅전 북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있다. 신중도란 호법신중(護法神衆)을 담
은 그림으로 앞서 감로도만큼은 아니지만 등장 인물이 빼곡해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이 그림은 1873년 4월 포화당 정수(布和堂 定修)를 증명으로 하고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
이 출초(出草)를 했으며, 동화당(東化堂)과 두흠(斗欽), 만파당 돈조(萬波堂 頓照), 봉흡(奉
洽) 등이 같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향좌측부터 34cm, 39.3cm, 39.5cm, 39cm, 44.5cm의 비단을 이어 제작했으며 가로로 긴
화면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천부중(天部衆)을, 하단에는 위
태천(韋駄天)과 천룡팔부(天龍八部)를, 하단 중앙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칼과 창으로 무장한
천부8부가 그려져 있다. 그림 윗쪽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공간을 두고 구름 처리를 했으며, 인
물들은 대부분 얼굴이 둥글다. 채색은 다홍 계통의 적색과 녹색, 청색을 사용하여 색깔의 조
화도 괜찮은 편이다.

이 신중도는 19세기 후반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선당 응석의 작품으로 수도권에서는 이
초본을 바탕으로 한 신중도가 널리 유행했다. 섬세한 필치와 원만한 인물 형태, 안정적인 색
채로 19세기 말 수도권 신중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9호

신중도 옆에는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저승(명부, 冥府)의 식구들이 담겨진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계유생(癸酉生, 1813년) 이씨 부인이 부모와 남편인 정축생(丁丑生, 1817년) 남씨
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돈을 내어 만든 것으로 아쉽게도 제작 시기와 최초 봉안지가 화기에 나
와있지 않다. 허나 1873년에 조성된 신중도 제작에 참여한 포화 정수, 수산당 부윤(秀山堂冨
潤) 등이 제작에 나섰고, 신중도와 양식과 화풍이 비슷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은 향좌측부터 14.5cm, 36cm, 36.2cm, 35.8cm, 36cm, 35.5cm의 비단을 이어 그렸는데 여
러 곳이 찢어지고 박락된 부분이 보이는 등 불량한 부분이 조금 있다.
그림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녹색 두광(頭光)과 금색 신광(身光)을 지니며 연화대좌 위에 돋보
이게 앉아있고, 그 좌우에 10왕(시왕)이 지장보살을 바라보고 있으며, 판관(判官)과 사자(使
者), 천녀(天女), 동자(童子) 등이 배치되었다. 특히 지장보살 밑에는 2명의 동자상이 별도로
있는데, 이들 동자는 인간의 선악을 대변하는 선악동자(善惡童子)로 하얀 꽃으로 머리를 장식
했고, 윗도리는 맨살을 좀 드러냈으며, 치마를 두르고 휘날리는 천의로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등장 인물의 얼굴에는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밝
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화기가 다소 부실하긴 하지만 19세기 수도권과 경남에서 유행하던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인
선악동자를 표현한 작품으로 하얀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동자상은 경기도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리던 형식이라 수도권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다.


 

♠  미타사 삼성각, 백의관음도

▲  미타사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이웃에는 삼성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으로 그 앞에는 전통차 시음 및 판매, 과자 제공, 연등 만들기, 불화 그리기 등의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어 미타사의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밝게 해준다. 보문사와 달리 양이(洋夷)
관광객들도 10여 명 정도 찾아와 이 땅의 신나는 초파일을 즐긴다.

나는 전통차 2잔(녹차 비슷한 것으로 기억남)으로 갈증을 단죄하고, 과자 1컵을 받아 불만에
잠긴 뱃속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공양밥은 경내와 이곳의 문화유산을 싹 둘러보고 편안히 먹
을 생각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가끔 그 반대가 좋
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  미타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1호

삼성각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와 산신도, 독성도가 빛바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삼성(三聖)으로 추앙받는 칠성과 산신, 독성(나반존자)을 머금은 그림으로 그들 중에
서 굳이 서열을 둔다면 거의 부처의 대접을 받는 칠성(치성광여래)이 으뜸이라 보통 건물 중
앙에 봉안하고 있다.

칠성도는 그려진 식구들이 많아 대개 복잡해 보인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
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해 있으며, 그 좌우로 칠원성군(七元星君) 등
을 크기를 달리하여 배치했다. 그리고 화기 일부가 훼손된 것을 빼면 상태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이다.
치성광여래는 머리에 뿔이 달린 소가 이끄는 수레 위에 결가부좌(結加趺坐)로 자리해 있으며,
무릎 밑 좌우에 과일을 받쳐 든 동자가 몸은 본존을 향해 있으면서 얼굴은 정면을 향했다. 본
존 광배 주위를 에워싼 28수는 좌우로 대칭하여 14수씩 그려져 있으며, 그 옆으로는 정수리가
봉긋 솟은 태상노군(太上老君)과 좌우필성(左右弼星)이 있고, 상단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삼태(三台)와 6성(六星)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화면 밑 바깥쪽에는 동자상 4위가 있다.

이 그림은 강화도 정수사(淨水寺) 법당 칠성도(1878년), 강남 봉은사(奉恩寺) 북극보전 칠성
도(1886년), 의성 고운사(孤雲寺) 쌍수암 칠성도(1892년) 등과 동일한 형식으로, 19세기 후반
에서 20세기 초반에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경선당 응석과 용계 서익(龍溪 瑞翊),
봉간(奉侃), 현조(現照) 등이 참여하여 조성했다.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 칠성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넉넉하여 지방문화재
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9호

칠성도 오른쪽에는 산신도가 걸려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거의 독성 할배와 비슷한 꼴이라 처
음에는 독성도인줄 알았으나 산신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어 산신도가 100% 맞다.

그림에는 붉은 옷을 입은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가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고, 그 옆에 호
랑이가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산 등, 구름 등이 뒷배경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그림 밑에 화
기가 남아있어 1915년에 초암세복(草庵世復)과 금명운제(錦溟運齊)가 그렸음을 알려주고 있다.
19~20세기 산신도의 전형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표현력이 다소 뒤떨어지는 것으
로 평가되고 있으나 조성시기가 확실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  미타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칠성도 왼쪽에는 독성도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그
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는데, 화기를 통해 1915년에 산신도를 제작했던 초암세복과
금명운제가 조성했음을 알려준다. 19~20세기 독성도의 양식을 보여주는 존재로 조성시기가 분
명하고 보존 상태 또한 좋다.
독성도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는데, 칠성과 산신은 그림만
있는데 반해 독성은 그림과 형상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절에서 다소 각별하게 대우를 받는 것
같다.


▲  미타사 단하각(丹霞閣)

경내 뒤쪽(서쪽) 언덕에는 나무가 조금 우거져 있다. 이곳도 엄연한 낙산의 일부로 지금은 경
동고등학교가 바로 그 위에 터를 닦아 숲의 농도는 엷어졌다. 언덕은 조금 가파른 편이라 돌
로 여러 단의 석축을 다지고 계단을 놓았는데, 그 계단의 거의 끝에 단하각이란 1칸짜리 맞배
지붕 건물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단하각은 무엇일까?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단하각이란 산신각의 다른 이름
으로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미 삼성각에 늙은 산신도가 있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
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닦고 새 산신도를 파서 봉안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북쪽 계단을 오르
면 그 길의 끝에 5층석탑이 있다.

▲  새 그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단하각 산신도

▲  경내 뒷쪽 언덕 (단하각과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계단)


▲  미타사 5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구석진 곳에 고색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5층석탑이 있다.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가득하여 이곳만큼은 정말 산사의 석탑 같은 분위기인데, 그는 무려 거
의 1,000년 전인 1,047년에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만약 맞다면 서울 토박이 탑(외지에
서 옮겨온 것은 제외) 중 가장 늙은 석탑이 된다.
허나 생김새를 봐서는 딱히 1,000년 가까이 숙성된 탑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 때 탑은
분명한 듯 싶으며, 아직까지는 많은 것이 아리송해 한참이나 후배인 19~20세기 탱화들도 받은
지정문화재의 지위 조차 얻지 못했다. 허나 그 탑으로 인해 미타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열었음을 살짝 알려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곳 지명이 탑골이 되었고, 보문사와 미타
사가 탑골승방이란 이름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3층
까지는 고색의 때가 진하며, 옥개석(屋蓋石)과 탑신 일부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형님이 무
심고 할퀴고 간 흔적이 좀 있을 뿐, 대체로 무난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위에 어설프게 얹혀
놓은 2층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너무 흰색이라 근래 새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탑과 한참 무언(無言)의 대화를 즐기고 있으려니 초파일 행사를 도우러 온 보살 아줌마와 절
을 찾은 한 무리의 가족이 올라와 탑을 구경하며 주위를 1바퀴 돈다. 보살 아줌마가 탑을 사
진에 담는 나에게 절 구경을 잘했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하며 공양밥과 백의관음도를 문의하니
모두 관음전에 있다며 밥 1그릇을 권한다. 그래서 이따 내려갈테니 알려달라고 답을 하고 5층
석탑과 삼성각을 더 살펴본 다음 관음전(觀音殿)으로 갔다.

관음전은 대웅전 동쪽에 있는 'ㄱ' 구조의 건물로 서쪽은 관음전, 정문과 맞닿은 동쪽 부분은
특이하게도 불이문(不二門)이란 현판을 내걸고 있다. 문도 아닌 방이 딸린 건물에 문을 칭하
는 점이 참 특이하기 그지 없는데, 백의관음도가 관음전에 있을 것이라 여기고 안을 기웃거렸
으나 딱히 오래된 그림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방에 있던 나이 지긋한 비구니(주지승으로 여
겨짐)에게 문의를 했다. 그러자 저쪽 그림을 손으로 가르키며 백의관음도라고 하는데 그 그림
은 근래 것이라 내가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방황하던 중, 아까 5층석탑에서 만난 보살 아줌마를 만났다. 그는 관음
전 지하 공양간에서 밥을 먹고 가라며 안내를 했는데, 나는 밥보다 백의관음도가 급해 그 존
재를 다시 문의하니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끝에 불이문 방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방에는 보살 아줌마와 할머니 여럿이 이야기꽃을 몇 송이씩 피우고 있었고, 초파일 행사에
동원된 여러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정문과 맞닿은 벽에 백의관음도가 손짓을 하
고 있었다.


▲  미타사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2호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담겨진 백의관음도는 미타사에 깃든 문화유산 중 단연 백
미(白眉)가 아닐까 싶다. 물론 다른 탱화들도 휼륭하나 다들 흔한 그림인데 반해 오래된 백의
관음도는 서울에서 거의 흔치 않은 존재이다.

이 그림은 1906년 미타사 향로전(香爐殿, 지금은 없음) 불화로 조성된 것으로 석옹 철유(石翁
喆侑, 1851~1917)가 제작했다. 화면 중앙에는 넝실거리는 바다 파도와 백의(白衣)를 입은 관
세음보살이 붉은 연잎을 배로 삼아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다.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
는 정병을 들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용왕과 천녀, 선재동자(善財童子), 대나무와 파초
, 구름과 새 2마리가 들러리로 그려져 있다.

관세음보살 건너편 뭍에는 녹색 두광을 갖춘 용왕(龍王)이 마치 장군처럼 갑옷 위에 붉은 옷
을 입고 머리에는 비늘 모양의 견갑(肩甲)과 투구를 거치며 관세음보살을 향해 합장(合掌)을
하고 있다. 이는 청나라 판화도상에서 따온 것으로 근대 불화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채색은 청색과 백색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흰색 위에 갈색으로 윤곽선을 칠하여 음영을 표현
하는 등 새로운 기법이 돋보인다.

분출하는 물줄기와 선재동자의 모습에서 기존의 관음보살도와 다른 20세기 불화의 새로운 경
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관세음보살을 향해 예를 표하는 용왕의 모습은 청나라 판화에 등
장하는 도상을 가져온 것이라 청나라 판화와 서양화법을 수용했던 20세기 초반 수도권 불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늙은 백의관음도는 이 땅은 물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존재라 그
희소성은 더욱 크다.


▲  그림 제작자의 작은 배려, 백의관음도의 신상이 적힌 화기(畵記)

화기에는 조성 시기와 화주(化主), 제작자, 봉안 장소 등이 적혀 있다. 여기서 삼각산 미타사
는 다름이 아닌 바로 이곳 미타사로 낙산 미타사 대신 삼각산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이는 낙
산이 못미더운 탓이다.

화기의 유무와 조성시기 기재 여부에 따라 탱화의 운명도, 가치도 크게 달라진다. 특히 조선
후기 이전 것들은 더욱 그렇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국가 보물까지 지정된 불상이나 그림, 석
조물(석탑, 석불)이 수둑룩한데, 그 기록이 관련 유물의 절대적인 시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
다. 바로 옛 사람들의 이런 작은 센스 하나가 작품의 가치는 물론 그 앞날까지도 크게 열어주
는 것이다.


▲  액자의 눈치를 피해 옆에서 담은 백의관음도의 위엄
용왕과 선재동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로 관세음보살에게 잘보이고자
애를 쓰고 있고, 선녀처럼 생긴 천녀는 공양물을 들며 관세음보살을
맞이한다.


백의관음도를 신나게 사진에 담고 그의 존재를 찾는데 흔쾌히 도움을 준 보살 아줌마에게 고
마움을 표했다. 그는 여기 공양밥이 아주 맛있다며 꼭 먹고 갈 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그렇게까지 식사를 청하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안그래도 먹고 갈려고 했음)

공양간은 관음전 지하에 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공양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딱히 이
정표가 없어서 초행인 사람은 공양간을 찾기가 숨은그림찾기처럼 어려울 수 있는데, 처음에는
정문에서 바로 정면에 보이는 요사가 공양간인 줄 알았다.
미타사의 숨겨진 공간 같은 지하로 내려가니 방으로 이루어진 공양간이 모습을 비춘다. 시간
이 15시에 이르렀음에도 공양을 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초파일 절 구경을 온 양이들도 사람
들의 안내를 받으며 서툴게 밥을 먹고 있었다.

초파일이 되면 대부분의 절집에서 오전부터 오후 적당한 시간까지 공양밥과 떡 등 여러 먹거
리를 제공한다. 이는 절의 초파일 인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미타사는 밥과 나물(호박나물,
콩나물, 김치 등), 고추장은 소신껏 퍼가면 되며, 이들을 그릇에 담아 비벼먹는 이 땅의 흔한
절밥 스타일이다. 그 외에 나박김치와 미역국(고기는 없음)도 있었고, 심지어 부추전 등의 전
도 있어 찬이 매우 풍성했다.
그릇에 무리가 갈 정도로 담았던 밥과 음식은 불과 3~4시간 전에 불암산 학도암에서 배부르게
공양을 했음에도 넘치는 시장기에 그만 모두 빈 그릇으로 만들어 버렸다. 밥이 맛있기도 했지
만 오전부터 이른 더위를 무릅쓰고 절 투어를 벌인 탓에 눈이 침침할 정도로 피곤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시장기도 상당했다. 아무리 배터지게 먹어도 그만큼 절투어에 칼로리를 모조리 소
비하니 이내 배가 고파지는 것 같다.


▲  미타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미역국, 비빔밥, 나박김치)

기분 좋게 공양을 마치고 구석에 마련된 씽크대에서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했다. 보통 절집에
서 공양을 할 때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도록 유도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그릇 잘
섭취했으니 그 정도의 밥값은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후식으로는 믹스 커피가 준비되어 있어 식곤증의 희롱에서 벗어날 겸 1잔 마셨다. 아직도 길
이 바쁜데 벌써부터 나른해지면 곤란하다. 초파일은 공양밥에 초파일 행사, 절에 깃든 문화유
산까지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많아 이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누리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너무 일어난다. 그러니 초파일 해가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여 그날
만큼은 해를 그 자리에 강제로 붙잡아두고 싶을 따름이다.

공양을 끝으로 약 1시간 반에 걸친 미타사 답사는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본글은 여기서 마
무리를 지으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4월 2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 우이암)'


▲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원통사

▲  무수골 숲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친한 여인네들과 서울의 영
원한 북쪽 지붕, 도봉산(道峯山)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우리집에서도 훤히 보이는 천하의 명산(名山)이다.

둥근 해가 하늘 가운데에 걸린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
식집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을 두둑히 사들고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이번 산행은
무수골에서 시작하여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 문사동계곡을 거쳐 도봉산 종점에서 마
무리를 지었는데,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  너른 암반이 많은 무수골 하류 무수천(無愁川)


 

♠  서울에 숨겨진 별천지이자 아름다운 산골 마을, 무수골

▲  무수골길 (무수골 주말농장 부근)

무수골을 겯드린 도봉산 나들이는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
도하는 무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여기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
수골에서 시작된 무수천이 만나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10분 정도 가면 도봉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단독주택과 빌라가 많은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속인(俗人)들의 집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그림이 바뀐다. 그런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
라보여 뒷배경도 아주 탄탄하며,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산골 분위
기로 풍경이 변한다.

무수천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소에는 물
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 때는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무
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는데, 이때 무수천을 정비하
여 하천 양쪽에 중랑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내었다.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까지 이어짐)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허나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지닌 산골
마을로 좁게는 도봉산과 도봉구, 넓게는 서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큼 높은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의 별천
지가 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에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로 즐비한 번잡한 대도시로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고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산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종
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둘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는
곳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죽었으니 서
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의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며 근심이 없는
곳이라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근심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토막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무려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
들은 그를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해 이유를 물으니 노인
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으로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
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 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인양 팔꿈치를 치는 바람에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
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푹 고아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구슬이 나
왔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너무 기뻐 그동안의 근심을
다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섭취해 건강을 되찾았고, 1달 뒤,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
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하게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감복했고, 이후 노인은 잘 먹고 잘 살며 쓸데없이 오래 살았
다고 전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이곳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 이당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
形)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이 계곡
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
가 영해군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으
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
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의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으로 인도하는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험 등으로도 안길 수 있는 꿀단지 명소이다. 전주이씨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
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
'이란 간판을 달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도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로도 아주 좋다. 계곡 상류는 '원통사계곡(또는 보문
사계곡)'이라 불리는데,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
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무수골길 (세일교에서 윗무수골 방향)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윗무수골, 원통사 방향)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시작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도봉역 방향)

방학동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
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봄을 맞이하여 슬슬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바깥 세상과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나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마
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
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논두렁이
여럿 있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호수처럼 보이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모를 심지 않은
상태라 물만 가득해 마치 조그만 호수처럼 보였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서 10월에 수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숙성되
는 9월 이후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가히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느티나무 주변 윗무수골 (원통사 방면)

200년 이상 묵은 무수골 느티나무 앞에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에 느티
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은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묘역이 있고, 오른쪽(북쪽)으로 식당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들어가면 영해군의 묘
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그리고 느티나무에서 산꾼 왕래가 빈번한 왼쪽(서남쪽) 길로 가면 자현암과 원통사, 우이암으
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
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다운 숲길 100선까지는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
로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의 옆
구리를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햇살도 슬금슬금 피해가는 윗무수골 숲길을 지나면 무수골공원지킴터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3분 정도 오르면(왼쪽으로 가면 함열남궁씨1묘역과 후손들의 거처) 윗무수골 가
장 윗쪽에 자리한 조그만 비구니 암자 자현암이 나타나며, 그곳부터는 완전한 자연의 공간으
로 바뀐다.


▲  자현암 이후 원통사계곡 산길


 

♠  도봉산의 으뜸 계곡, 원통사계곡(보문사계곡)

▲  숲속에 묻힌 원통사계곡

무수골의 최상류를 이루고 있는 원통사계곡은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통사의 다른
이름이 '보문사'라 그런 이름도 지니게 되었는데 그냥 편하게 무수골계곡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이곳은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원통사 부근에서 발원하여 무수골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중
랑천으로 흘러간다. 골짜기는 조촐하지만 주름진 바위와 반석, 수심이 얕은 못이 가득해 아기
자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봉산의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맑고 허공을 덮을 정도로 숲
이 삼삼하다.
오랫동안 서울 근교 경승지로 계곡 밑에 왕족과 사대부의 묘역이 즐비하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발길이 빈번해 오랫동안 그들의 입과 기록에 오르내리던 현장이며,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계
곡을 거쳐 원통사까지는 약 30분 거리로 처음에는 경사가 느긋하다가 막판에 잠깐 각박해진다.
허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이니 그리 걱정은 안해도 된다.


▲  바위와 암반을 가득 품은 원통사계곡

▲  힘차게 쏟아지는 원통사계곡의 위엄

전날까지 비가 적지 않게 내린 탓에 계곡 수량이 매우 풍부했다. 풍부하게 쏟아진 봄비로 간
만에 포식을 즐긴 계곡은 기분이 좋은지 패기가 돋는 물소리를 베풀며 속세를 향해 두둑하게
물을 흘려보낸다.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계곡의 당찬 물소리던가.?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
어지기 때문에 물소리는 늘 우리를 따라다녔다.


▲  원통사계곡과 그를 쫓아가는 산길

▲  원통사계곡의 조촐한 여흥거리, 조그만 폭포와 주름진 벼랑들

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김밥 등의 간식거리를 섭취했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먹으니 꿀을 두르지 않았음에도 다들 꿀맛 같다.
그렇게 뱃속을 달래고 힘이 넘치는 계곡에 속세에서 딸려온 번뇌를 살짝 맡기니 시름이 잠시
나마 잊혀진 듯 하다. 하지만 그 번뇌는 우리가 내려올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解脫)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원통사계곡 상류 부분

▲  경쾌하게 흘러가는 조그만 폭포

▲  원통사계곡에서 바라본 보문능선

▲  계곡 징검다리


▲  원통사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길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느긋한 산길은 계곡 최상류에 이르면 잠시 매정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
서 계곡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는데, 각박한 산자락에 닦여진 나무데크 계단길을 오르면 우이
동에서 올라온 산길과 만나면서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이 서서히 모
습을 드러내 보인다.


▲  하늘의 요새 같은 원통사 (밑에서 바라본 모습)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 때마다 성큼성큼 커져 보이는 원통사, 그 뒤로
원통사의 든든한 후광, 우이암(관음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원통사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동북부 지역)

▲  우이암으로 이어지는 원통사 앞 길


 

♠  서울 지역 사찰 중 2번째로 조망이 우수한 높은 산중의 절집,
~ 도봉산 원통사(圓通寺)

도봉산의 제일 남쪽 봉우리인 우이암(관음봉, 542m) 동남쪽 자락 400m 고지에 원통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원통사는 서쪽과 북쪽이 산과 바위로 모두 막혀있지만 대신 동쪽과 남쪽은 조망이 훤히 트여
있으며, 흰구름이 손에 잡힐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의 품질만큼은 아주 우수하다.
여기서는 도봉동과 도봉구, 강북구를 비롯해 노원구, 성북구, 중랑구, 광진구, 동대문구, 수
락산과 불암산, 봉화산, 아차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이 아낌없이 바라보여 속세에서 오염
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서울에는 많은 산사(山寺)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북한산 보현봉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일선사(一禪寺)가 서울에서 1등으로 조망이 좋은 절이다. 원통사가 도봉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등 서울 동북부와 한강 이북의 동부 지역 중심으로 보인다면 일선사는 도봉구와 노원
구, 은평구, 강서구, 몇몇 구석진 지역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그러
니 조망(眺望) 부분에서는 이곳을 따라올 절집이 없다. 그 다음이 원통사이며, 3위는 호암산(
虎巖山) 남쪽 자락에 안긴 불영암(佛影庵)일 것이다. <불영암은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등
서울 서남부와 광명 지역이 바라보임>
조망은 일품이지만 그만큼 궁벽한 산중이라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석축을 쌓아 터
를 다졌으며, 뒷쪽 바위에도 약사전, 삼성각 등의 조그만 건물을 주렁주렁 올렸다. 거북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는데, 물이 귀할 것 같은 바위 밑임에도 수량이 넉넉하다. 그렇다면 원통사
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원통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864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원통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관련 기록과 유물, 흔적이 전혀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져다
준다. 또한 1053년 관월대사(觀月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
만 1392년에 천은선사(天隱禪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이때쯤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으
며,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현재 나한전으로 쓰이는 조그만 동굴에서 태조 이성계가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굳이 이성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동굴은 승려나 도를 닦는 이의 수행처로 사용되기 마
련이다. 게다가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형상이라는 우이암(관음봉)이
뒷쪽에 있어 지역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관세음보살의 성지(聖地)로 여겼다. 바로 그들을 후
광(後光)으로 삼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조촐히 절을 짓고 관세음도량(관음도량)을 뜻하는
원통사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유인(宥牣)이 중수를 했고, 1810년 청화(淸和)가 중수를 했는데, 중창 이후 나
라에 큰 경사가 있자 나라와 산천의 은혜를 갚았다는 뜻에서 보은사(報恩寺)로 이름을 갈았다.
1887년 응허 한규(應虛 漢奎)가 중창했으며, 1928년 자현(慈賢)이 주지로 들어와 퇴락한 절의
중건을 발원하고 설악산에 머물던 춘성(春城)을 청해 1,000일 관음기도를 올려 1929년에 절을
중건했다.
이후 보경 보현(寶鏡 普賢)을 데려와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1931년에 비로소
1,000일 기도가 끝나자 그해 겨울 보응과 함께 다시 만일 염불회를 시작하여 1933년 칠성각을
세우고 1936년 법당 일부와 큰방을 중수했으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보문사(普門寺)로 갈았
다가 원래 이름인 원통사로 돌렸다. 그리고 1988년 약사탱과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등을 만
들어 봉안했다.

원통사는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 인근 방학동(放鶴洞)과 무수골에 별장과 집을 지
어 머물던 그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조망을 즐겼는데, 영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현명
(趙顯命)과 서명균(徐命均)이 나라 일을 논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 석굴에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기도 마지막 날에 꿈 속에서 하늘
나라의 상공(相公, 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이를 기리고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과 삼성각, 정해료, 범종각, 자연산 석굴
을 활용한 나한전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이미 여러 개의 100년이 지났지만 그에 비
해 고색의 기운은 모두 말라버려 지정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선 말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고, 왜정 때 지어진 원통보전과 탱화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또한 나한전 석굴은 태조가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깃들여져 있으며, 오랫
동안 승려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앞서 이른 데로 조망 하나는 아주 최상급이라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바라보이며, 절 뒷쪽에 자리한 우이암(관음봉)을 들이밀며 관음도량을 내세우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6 (도봉로169길 520 ☎ 02-954-9944)

◀  서울을 굽어보는 범종루(청화대)
매일 새벽 4시와 18시에 은은한 종소리를
서울로 흘려보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히 일품급이다.

원통사는 산정(山頂)에 자리한 탓에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범종루를
대신 정문으로 내밀고 있는데, 절 남쪽 경계에는 돌담을 둘렀고, 동쪽 경계에는 석축을 2m 높
이로 다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절로 들어서려면 범종루의 밑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길이 속세와 원통사를 잇는 유일한 길로
범종루는 청화대(淸和臺)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범종루(청화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오색 연등을 늘어뜨린 원통보전(圓通寶殿)

남쪽을 바라보고 선 원통보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
물이다. 1929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나 여러 번 손질을 더하면서 90
년 숙성된 기운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호
법신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과 백의관세음보살을 담은 관음탱을 두었는데, 원통전은 관음
전(觀音殿)의 다른 말로 관세음보살 누님이 중심이 되야 맞지만 이곳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삼았다. 대신 관세음보살을 그림으로 1폭, 존상(尊像)으로 1기 등 총 2개를 두어 건물의 이름
값은 조금이나마 하고 있다.


▲  원통보전 내부 (왼쪽부터 백의관세음보살탱,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신중탱)

▲  바위에서 샘솟는 원통사 샘터

▲  자연산 석굴에 자리한 나한전

원통보전에서 약사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거북바위 밑에 이곳의 소중한 젖줄인 샘터가 있
다.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라 꼭 1모금 챙겨 마시는 편인데 바위 밑 산정에 있음에
도 물이 풍부한 편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몸 속이 싹 시원해진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하늘이 내린 이슬 맛이 담긴 탓일까? 물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기분이다.


 ▲  나한전(羅漢殿) 내부

샘터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약사전, 왼쪽은 바위 밑도리에 묻힌 나한전으로 이어진다. 나한
전 석굴은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했다는 현장이라 우기고는 있으나 신뢰성은 없으며, 오랫동
안 승려들의 기도처로 쓰였던 것을 근래 손질하여 돌로 만든 석가3존불과 보살입상, 나한상(
羅漢像)을 봉안해 나한전으로 삼았다.
석굴 내부는 더위 두 글자를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며, 촛불이 어둠을 조금이나마 밀어
내고 있으나 다소 어두운 편이다.


▲  거북바위에 둥지를 튼 약사전(藥師殿)
샘터 뒷쪽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그의 등에는 약사여래의 거처인 1칸짜리 약사전이
둥지를 틀고 있는데, 바로 그 앞 바위 피부에 '상공암' 3자가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약사전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


▲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

약사전 바로 앞에 깃든 상공암 바위글씨는 직각으로 선 바위 피부에 새겨진 것이 아닌 누워있
는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상공이
란 정승(正承)을 뜻하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엎어버리기 이전 원통사에 들어와 기도
를 하다가 그 마지막 날 꿈에 하늘나라 상공이 되어 옥황상제를 알현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이곳에 상공암 바위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신뢰하기가 어려우며, 태조(太祖)가 과연 이곳까지 올라와 기도를 올렸는지
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와 회룡사(回龍寺)는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절로 그 절의 설화를 가져와 적당히 빚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이곳을 찾았던 사대부
가 그 전설을 전해 듣고 꿈 속에서 하늘나라 상공이 된 태조를 찬양하고자 거북바위 위에 '상
공암' 바위글씨를 새겼다.

75x230cm 크기로 네모나게 외곽 선을 긋고 그 안에 3자를 새겼는데, 서체는 해서체(楷書體)이
며, 마치 꿈틀거리는 듯 필체가 우수하고 투박하다. 원통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절 경내
에 바위글씨가 있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 글씨는 선비와 사대부, 왕족들이 즐겨하
던 낙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원통사에 그들의 왕래가 잦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약사전 앞에서 꺼꾸로 지켜본 상공암 바위글씨
태조의 하늘나라 꿈 전설을 상징하고자 하늘이 잘 바라보이는 이곳에
글씨를 새겼다.

▲  삼성각(三聖閣) 앞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산 동남쪽 자락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등이 아낌없이 바라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88년 작)
치성광여래와 칠성(七星)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정신이 없다.

▲  삼성각 산신탱 (1988년 작)
흰 수염의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삼성각 독성탱 (1988년 작)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
존자)과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원통사가 우이암(관음봉) 바로 밑이긴 하나 이전보다 더 각박해진 산길을 10여 분을 올라가야
된다. 지도상의 거리는 200m 정도라 금방 이를 듯 싶었으나 체감거리는 거의 1km가 넘어 벌써
부터 땀 육수를 제대로 배출했다.
우이암 그늘이라 그런지 올라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하나같이 생겨
먹은 것들이 예사롭지가 않아 몇몇 바위는 세상이 달아준 이름도 있을 법도 한데 사람들의 귀
차니즘 때문인지 다들 이름표가 없다. 허나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일이지 바위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칼처럼 솟은 우이암의 밑도리를 지나면 우이암을 바라보는 서쪽 봉우리에 이르게 된다. 드디
어 하늘 아래 우이암에 이른 것이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정상부가 바위로 이루어진
우이암 서쪽 바위 봉우리일 뿐,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이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위엄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기고 위엄도 대단한 순 100% 바위 봉
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바람과 비 등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 그것이 지금의 도봉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 도봉산은 자연히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 선인봉, 만장봉, 칼
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며,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
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
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
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성지로 격하게 추
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
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바라보인다.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은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긴 하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
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
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
문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조망과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 민락1,2지구(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까지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두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도봉산과 수락산부터 점
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희롱하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하지만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
이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두 안구와 마음이 싹 위로받은 것 같다. 하긴 이보다 좋은 정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서울시내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4월 1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 도심에 깃든 상큼한 개나리동산, 응봉산 봄꽃 나들이 (응봉산 개나리, 독서당공원, 살곶이다리, 중랑천)

 


' 서울 개나리의 성지, 응봉산 봄나들이 (살곶이다리) '


▲  봄티가 물씬 풍기는 응봉산

▲  응봉산 꼭대기 응봉산정

▲  살곶이다리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성동구 한복판에
자리한 응봉산(鷹峯山)을 찾았다.
서울숲을 먼저 둘러보고 중랑천에 걸린 용비교를 통해 그날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 응
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는데, 응봉산은 응봉역(경의중앙선)이나 금호동 독서당로, 용비교
에서 접근하면 편하다.


▲  용비교 동측에서 바라본 응봉산의 위엄
(그 밑에 경의중앙선과 중랑천이 있음)


 

♠  응봉산 둘러보기

▲  용비교에서 바라본 중랑천(中浪川)과 응봉교

용비교 밑을 흐르는 중랑천은 경기도 동두천과 양주, 의정부, 서울 동북부 지역의 물을 모두
모아 한강으로 보내는 긴 하천이다. 우리 동네 도봉동(道峰洞)을 지나는 하천이기도 한데 이
곳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이라 폭이 왠만한 강 못지 않게 넓다.

중랑천 좌/우 옆구리에는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닦여져 있는데, 그의 우측(서쪽)에는 경의중앙
선 복선 철로가 있어 경의중앙선 전철(문산~용산~청량리~용문,지평)과 경춘선 ITX-청춘열차(
용산~춘천), 강릉선 고속전철(서울~강릉,동해)까지 수시로 지나간다. 그러다보니 종종 그들이
버벅대는 모습을 보인다. 선로는 겨우 2개인데 지나는 열차 종류는 허벌나게 많기 때문이다.
(관광열차와 화물열차도 적지 않게 지나다님)
그런 경의중앙선 바로 뒤에 펼쳐진 뫼가 바로 응봉산으로 한강을 향해 우람하고 잘생긴 암벽
을 아낌없이 내밀고 있다. 개나리가 한참일 때는 벼랑을 빼고 거의 노란 천하가 되지만 개나
리의 기운이 70% 이상 빠진 때에 왔기 때문에 녹색 비율이 더 높다.


▲  응봉산과 그 밑도리를 지나는 경의중앙선 전철
바위들이 우럭우럭한 모습으로 포진해 있어 산의 경치를 크게 돋군다. 바위가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비슷하여 한강, 중랑천과 맞닿은 산 남쪽을
입석포(立石浦)라 불렀다.

▲  응봉산과 경의중앙선, 중랑천 3박자가 어우러진 현장
오직 용비교에서만 그 매력을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전철이나 각종 열차가
때맞추어 지나가면 더욱 금상첨화가 된다. 하여 이곳은 그런 풍경을
담으려는 사진쟁이들의 출사 장소로 명성이 자자하다.

▲  용비교 서쪽에서 응봉산으로 인도하는 남쪽 계단길
응봉산의 각박한 남쪽 벼랑을 극복하며 닦여진 길로 이쪽은 약간의 개나리와
하얀 벚꽃, 연분홍 진달래들이 봄의 향연을 이어가고 있다.

▲  응봉산 능선으로 인도하는 남쪽 계단길 (윗쪽에서 바라본 모습)
지그재그로 이어진 계단길을 오르면 바로 서쪽 능선이다.

▲  남쪽 계단길에서 바라본 용비교(왼쪽 다리)와 서울숲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①
능선길 주변의 수풀은 거의 개나리이다. 개나리가 적지 않게 주저앉은 시기에
와서 실감은 덜하지만 개나리가 한참일 때는 완전 노란 개나리길이다.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②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③ 정상 직전

밑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던 개나리들이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상 주변
은 개나리들이 아직 정정함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그래봐야 김옥균(金玉均)의 3일천
하처럼 고작 며칠 연장에 불과하다. 이래서 인생이나 세상만사가 참 부질없는 모양이다.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④

▲  응봉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나지막한 천하 ①
서울숲과 용비교(바로 밑의 다리), 중랑천, 한강, 성수대교,
청담동과 압구정동 지역

▲  응봉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나지막한 천하 ②
한강과 중랑천 하류, 동호대교, 옥수동, 한남동, 압구정동, 신사동 지역

▲  응봉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응봉산정(鷹峯山亭)

응봉산의 나지막한 꼭대기에는 단아하게 생긴 2층짜리 응봉산정이 자리해 있다. 근래에 응봉
산을 꾸미면서 달아놓은 것으로 그 주위로 너른 공터가 있는데 바로 여기가 응봉산 개나리축
제의 중심지로 공연과 먹거리 장터, 전시회 등이 열린다.
이곳에 올라서면 바로 밑에 서울숲과 한강, 중랑천을 비롯하여 성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
기, 옥수동, 한남동, 한강 너머로 강남구와 서초구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봄
마다 찾아오는 중공산 미세먼지의 역한 내습으로 시야가 적지 않게 꺾여 보이는 것은 평소에
2/3 이하에 불과하다.


▲  옆에서 바라본 응봉산정

응봉산(응봉)은 성동구(城東區)의 한복판이자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급하게 솟은 해발
94m(95m)의 조촐한 뫼이다.
산의 이름인 응봉(鷹峯)은 매봉우리란 뜻으로 조선 때 제왕과 왕족들이 매사냥을 즐겼던 곳이
다. 1395년에 응봉 기슭에 매를 기르는 관청인 응방(鷹坊)을 설치해 필요한 매를 충당했으며,
태조와 태종, 세종, 성종까지 여기서 자주 매사냥을 즐겨 꿩과 토끼 등을 사냥했다.
매사냥을 벌였던 곳이라 자연히 응봉, 응봉산, 매봉산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산의 모양새가 마
치 매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응봉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중랑천과 한강과 맞닿은 산 남쪽은 각박한 벼랑으로 우럭우럭하게 생긴 암벽들이 많으며 그들
이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습처럼 보여 산 밑의 포구(浦口)를 입석포(선돌개)라 불렀다. 뒤에
는 응봉이, 앞에는 강이 흐르는 빼어난 경치로 많은 시인묵객들을 홀렸으며,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라 물고기도 잘 잡혀 낚시터로도 이름이 높았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성종의 형)과 서거정(徐居正), 성임(成任) 등 조선 초에 이름있는 문인들
들이 서울(한양)의 아름다운 풍경 10곳을 선정하여 한도십영(漢都十詠)이라 칭하고 그에 관한
시를 남기며 격하게 찬양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입석조어(立石釣魚, 입석포에서의 낚
시)'이다.

응봉산은 남쪽과 동쪽은 한강과 중랑천으로 막혀 경사가 급하고 서쪽은 옥수역 동쪽 달맞이봉
과 이어져 있으며, 북쪽은 대현산, 금호산, 남산까지 산줄기가 이어져있다. 비록 개발의 칼질
로 중간중간 키다리 아파트와 주택가가 마구 들어서 서로 끊어진 듯 보이지만 엄연히 이어져
있으며, 서울숲에서 응봉산을 거쳐 남산까지 이들을 모두 엮은 도보길이 닦이면서 도시와 산,
숲을 아우른 서울 도심 속의 환상적인 지붕길로 각광을 받고 있다. (단 대현산공원~응봉공원
구간은 부득이 번잡한 도로와 시내를 지나가야 됨)

응봉산에 안겨있던 옛 명소로는 관리들의 학습 장려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동호독서당(東湖讀
書堂)이 서쪽 자락에 있었고, 양반사대부들이 지은 황화정, 유하정 등의 정자가 있었으며, 옥
수역 부근에는 얼음을 보관하던 국립 얼음창고인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또한 산 남쪽에는
앞서 언급했던 입석포가 있었다. (입석포를 제외하고 모두 세월이 잡아가고 없음)

허나 개발이 요란하게 칼춤을 추던 20세기를 거치면서 그렇게나 잘생기고 착했던 응봉산은 영
좋지 못한 모습으로 강제 성형수술을 강요 받게 된다. 응봉동(鷹峯洞)과 금호동 지역에 격하
게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산의 북쪽과 동쪽, 서쪽이 난도질을 당했고, 대현산과 이어지던 북쪽
은 독서당로가 닦이면서 완전 절벽 수준으로 칼질을 당했다.

나는 중학교 시절(1990년대 초반), 여기서 가까운 금호1가에서 여러 해를 살았었다. 그때 응
봉산은 동네 우범지대로 이미지가 별로 좋지 못했지. 하여 가까이 살았음에도 그곳은 쳐다보
지도 않았다. 그만큼 20세기 말, 응봉산의 이미지는 참으로 우울했던 것이다.
게다가 산이 나날이 허약해지면서 모래흙이 자꾸 흘러내리자 그 대책으로 20만 그루의 개나리
를 심었는데 그 개나리가 무럭무럭 자라나 개발의 칼질에 녹초가 다 된 응봉산을 되살려주었
고 그것이 글쎄 전화위복이 되어 도심 속 개나리동산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성동구는 1997년부터 응봉산 개나리축제를 벌여 이제는 서울의 주요 봄꽃 축제로 자리
를 잡게 되었으며, 금호동에 살 적에 단 1번도 오지 않았던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하였다. 사람
은 옷이 날개이듯, 산은 꽃이 날개인 모양이다.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성수동과 화양동, 송정동 지역,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차량들로 늘 버벅거리는 용비교와 서울숲, 성수대교 주변


응봉산은 매년 1월 1일 성동구청 주최로 해돋이행사가 열린다. 동쪽과 서쪽이 뻥 뚫려있어 일
출과 일몰을 모두 지켜볼 수 있으며, 개나리가 크게 위엄을 부리는 3월 말~4월 초에는 '응봉
산 개나리축제'가 열려 상춘객들로 완전 시장통을 이룬다. (축제가 열리는 토,일요일에는 개
나리보다 사람이 더 많을 정도임)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옛 저자도를 추억하다

윗 사진의 가운데 부분 한강(서울숲과 동호대교 사이)에는 저자도(楮子島)란 섬이 있었다. 그
는 한강의 주요 경승지의 일원으로 종이 제작에 쓰이는 닥나무가 많이 자랐던 곳이다. (섬의
이름인 저자는 닥나무를 뜻함)
그렇게 착했던 저자도는 1970년대 강남 개발과 압구정동 아파트 조성에 필요한 흙을 충당하고
자 무식하게 폭파되어 인간의 시야와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그렇게 영원히 없어진 듯 보
였던 저자도는 대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조금씩 살아나 아주 작지만 섬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하여 몇십 년 또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 지도에 다시 그를 표시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 응봉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응봉동, 금호4가동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굉음을 울리며 응봉산 밑도리를 지나는 경의중앙선 전철


 

♠  응봉산 마무리

▲  개나리와 벚꽃이 아른거리는 응봉산 동쪽 능선길 ▼



▲  응봉산 출렁다리 (동쪽)

동쪽 능선길을 내려가면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은 응봉산의 북쪽 자락을 돌아
응봉산정 북쪽까지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 출렁다리가 있다. (길 옆에 있음)
출렁다리는 응봉산정, 인공암벽공원과 함께 응봉산을 수식하는 조촐한 눈요깃감으로 벼랑 사
이에 짧은 허공을 이용해 다리를 놓았다. 천하 출렁다리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청양 천장
호 출렁다리, 파주 감악산(紺岳山) 출렁다리,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만은 못해도 복잡하기 그
지 없는 서울 도심에 거창할 것도 없이 저 정도의 흔들다리만 있어도 충분하다. 다리를 건널
때 조금씩 흔들거려 염통을 은근히 건드리니 다리의 이름값은 그런데로 하고 있다.


▲  응봉산 출렁다리를 건너다. (출렁다리 서쪽)

▲  개발의 칼질에 고통받는 응봉산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곳
절벽처럼 잘려나간 응봉산 북쪽 부분 (독서당로)


응봉산 서쪽과 북쪽은 개발의 칼질로 그의 살이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특히 대현산과 이어지
는 북쪽은 독서당로가 닦이면서 아예 산줄기를 절단을 내버려 강제로 절벽이 되어버렸다. 흉
하게 깎인 동쪽과 북쪽에 인공암벽공원(동쪽 자락)을 설치하고 풀과 나무로 덮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주변과 너무 어색하다.

독서당로로 산줄기가 끊긴 북쪽 벼랑에는 나무데크길을 마치 고산지대의 잔도(棧道)처럼 아슬
아슬하게 걸쳐놓아 보기만 해도 참 아찔하다. 길 북쪽의 신동아아파트를 이어주는 육교가 설
치되어 응봉산 북쪽 산줄기(대현산)와 연결은 시켜놓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통행로이지 산줄
기는 아니다.
이 땅의 개발이 일찍 철이 들었다면 생태다리 터널 방식으로 도로를 뚫어 산의 피해를 최소화
시켰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하긴 이 땅의 개발지상주의는 철이 들려면 아직도 멀었다.


▲  응봉산 북쪽에 자리한 독서당공원

응봉산에서 독서당로 육교를 건너 신동아아파트 서쪽 길로 가면 독서당공원이 마중을 나온다.
겉으로 보면 응봉산과 별개처럼 보이지만 이곳 역시 응봉산의 엄연한 일원으로 신동아아파트
와 벽산아파트 사이에 남북으로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공원 북쪽은 바로 대현산(대현산공원)
과 맞닿아있다. 또한 서울숲~남산을 잇는 둘레길이 이 공원의 신세를 지며 대현산, 금호산으
로 흘러간다.

공원 이름은 응봉산 자락에 있었다는 독서당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은 산뜻한 모습들을 드러
내고 있지만 1960년대 이후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금호동과 옥수동, 응봉동에 달동
네 스타일의 집들이 마구 들어서 꽤 우울하고 어지러운 모습을 간직했던 곳이다.
1973년 12월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으나 시행되지는 못했으며, 무허가 건물과 위험 건물이
마구 들어서 말썽이 자꾸만 늘자 2007년 10월 '공원화사업지구'로 지정하여 주변을 모두 갈아
엎고 2009년 12월 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달동네 시절보다 다소 정비되고 안정적인 모습이긴 하나 공원도 좀 단조롭고 주변이 온통 성
냥갑 아파트 일색이라 지금의 풍경이 참 낯설고 재미가 없다. 기존 시내와 주택가를 싹 밀어
버리고 재개발이 된 곳들은 마치 같은 도장을 찍어낸 듯 다들 비슷한 모습 같다. 나도 서울이
고향이고 약수동과 금호동 산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강제 성형을 당한 곳이 적지 않
아 어린 시절을 추억할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이 역시 모든 것을
지우기 좋아하는 심술쟁이 세월의 장난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1가 37-7일대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①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②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③

▲  북쪽(대현산)으로 넘어가는 독서당공원 산책로

▲  독서당공원 북쪽에서 만난 푸른 나무

▲  독서당공원 북쪽 입구 (금봉어린이집 옆)
공원 바로 북쪽에는 대현산을 등에 업은 대현산공원이 있다. 같은 지붕이지만
길(독서당로63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름만 다른 것이다.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돌다리, 살곶이다리<전곶교(箭串橋)>
- 보물 1,738호

늦가을이 깊어가던 1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한양대 남쪽 중랑천에 있는 살곶이다리를 찾았
다. (앞의 응봉산과 찾아간 시기는 틀리나 그곳과 가깝고 중랑천 라인이므로 편의상 본글에
넣었음)

살곶이다리는 한자로 전곶교(箭串橋)라 하는데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자 조선시대에
지어진 돌다리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그렇다고 다리 길이가 수백m씩이나 되는 것은 아니
다. 길이 78m(256척), 너비 6m(20척) 정도로 기둥을 4줄로 하여 모두 64개를 세우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려 대청마루를 올리듯 3줄의 판석을 빈틈없이 깔았다. 가운데 2줄 교각을 낮게하
여 다리의 중량을 안으로 모았으며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고자 마름모형으로 다듬고, 다리
기둥에 무수하게 흠집을 내어 물살의 흐름을 배려했다. 단순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과학과
기술이 꽤 들어간 것이다.

이 다리의 탄생 배경은 대략 이렇다. 왕위에서 물러난 태종(太宗)과 정종(定宗)은 서울 동부
지역으로 종종 외출을 나갔다. 하여 세종(世宗)은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위해 1420년 5월, 그
길목인 살곶이에 다리를 지었다. 허나 중랑천 너비가 넓고 여름마다 찾아오는 홍수를 이겨내
기 어려웠으며 때마침 태종도 승하하여 기초 공사 정도에서 공사는 중단되고 만다.
그렇게 50년 이상 방치되어 오다가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다리 가설의 필요성이 계속 제
기되면서 1475년 잠자고 있던 다리에 다시 손질을 가해 1483년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살곶이다리는 서울에서 뚝섬과 광진구, 송파, 경기도 동부와 동남부, 멀리로는 충청도 동부와
강원도, 경상도를 잇는 중요한 다리로 백성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게다가 제왕과 왕족들이 화
양정(華陽亭)과 성덕정(聖德亭, 성수동)으로 사냥이나 군사훈련을 보러 가거나 여주 영녕릉(
英寧陵), 헌인릉(獻仁陵)에 참배하러 갈 때도 꼭 이곳을 거쳐갔다. 이렇게 높은 사람들의 이
용이 높다보니 다리 폭을 넓게 잡았으며,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
불리기도 했다.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무리하게 경복궁(景福宮)을 재건할 때, 애궂은 살곶이다
리까지 손을 대어 다리 석재를 절반씩이나 뜯어갔으나 대부분 제대로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졌
다.
1920년대 대홍수로 다리가 크게 손실되었고 그런 상태로 방치되는 고통을 겪다가 1972년에 서
울시에서 복원을 했다. 허나 중랑천 폭이 그 사이 많이 넓어져 현재 다리로는 감당이 되지 않
자 북쪽 구석으로 옮겼으나 너무 대충 복원하여 원래 모습으로 하지는 못했다. 또한 다리 남
쪽에는 중랑천 물줄기 위에 시멘트로 연결다리를 엮으면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이게
모두 살곶이다리로 오해하기가 쉽다.
허나 북쪽의 돌로 된 다리가 진짜이며, 중간에 돌로 두텁게 다져진 돌축대와 그 남쪽 다리는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들이니 착오가 없기 바란다.


▲  가까이서 본 살곶이다리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랜만에 찾은 살곶이다리는 보수공사로 다리 북쪽이 다소 어수선했다.
1972년에 서울시 철밥통들이 너무 날림으로 복원을 해서 손댈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통행은 가능하며, 갈대와 온갖 수풀이 출렁이는 다리 밑도리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나 다리
높이가 낮고 물도 없기 때문에 적당히 들어가서 살피면 된다. 


▲  평지처럼 넓어 보이는 살곶이다리

돌다리를 이루고 있는 돌의 피부가 조금 거칠기는 하나 거닐기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이래뵈
도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크고 단단하며 제왕(帝王)들도 이용했던 비싼 다리이다. 다만 수
표교(水標橋)처럼 다리 양 모서리에 난간 같은 시설이 없으니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
다.


▲  남쪽 돌축대에서 바라본 살곶이다리와 한양대
돌다리와 시멘트 다리 사이에는 돌축대를 쌓았다. 그곳을 경계로 진짜 살곶이다리와
그를 접선하는 시멘트다리가 갈라진다. 돌축대 역시 1972년에 다져진 것이므로
원래 살곶이다리와는 관련이 없다.

▲  동쪽에서 바라본 살곶이다리
다리 주변에는 갈대와 온갖 수풀들이 늦가을의 막바지 향연을 즐기고 있다.


다리의 이름이 되고 있는 살곶이는 이곳의 지명이다. 살곶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난 설화가 아련히 전해온다.
고려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 그의 5번째 아들인 정안대군(
靖安大君)은 2차례(1398, 1400년)의 왕자의 난을 통해 이복동생(이방석, 이방번)을 때려죽이
고 친형인 이방간(李芳幹)까지 때려잡으면서 결국 1400년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그 유명
한 태종이다.
자식들의 권력 싸움에 뚜껑이 단단히 뒤집힌 이성계는 그의 본거지인 함경도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가 태종의 계속되는 설득에 못이겨 결국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부왕(父王)의 컴백
소식에 기뻐한 태종은 살곶이 부근에서 부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기다렸는데 하륜(河崙)이
혹시 모르니 연회장소에 큰 나무 기둥을 세우라고 했다. 즉 태조의 화가 아직 가라앉지 못해
그의 주특기인 화살을 갑자기 날릴지 모른다는 뜻이다. 하여 큰 기둥을 여러 개 세웠다.

태조 일행이 이곳에 이르자 태종은 너무 반가워 그에게 달려갔는데 태조는 그를 보자 다시금
뚜껑이 뒤집혀 귀신같이 화살을 매겨 쏘았다. 태종 또한 무예를 조금 하는지라 잽싸게 큰 기
둥 뒤로 숨어 화살을 피했다. 이를 지켜본 태조는 껄껄 웃으며 그에게 옥새를 내주었다고 하
며 태조가 화살을 쏜 곳이라 하여 이곳 지명이 살곶이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1가지 이상
한 점이 있다.
함흥에서 서울로 오려면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과 평강(平康), 철원(鐵原), 연천(漣川),
양주(楊州), 도봉구를 거쳐 동소문(혜화문)이나 동대문으로 들어서면 된다. 그런데 살곶이를
경유하는 것은 동남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좁은 중랑천을 배를 타고 이동
했을 리는 없다. 다만 다리 남쪽인 성수동 성덕정은 군사 훈련을 했던 곳이라 다리 부근에서
제왕이나 귀족들,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살곶이의 유래가 되
지 않았을까 싶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성수동1가


▲  살곶이다리의 옛 모습 (다리 남쪽 둑방길 터널에 있음)
저때 중랑천은 딱 살곶이다리 길이에 맞게 흘러갔다.

▲  살곶이다리에서 바라본 중랑천과 내부순환로
중랑천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서식하는 도봉동이 나온다.
그래서 무척 반가운 하천이다.

▲  살곶이다리에서 바라본 성동교와 2호선 철교

▲  늦가을에 물씬 잠긴 중랑천 둑방길

살곶이다리를 건너 중랑천 남쪽에 길게 둘러진 둑방길로 들어섰다. 이 둑방은 성동교에서 송
정동주민센터 부근까지 이어져 있는데, 둑방 위에 산책로를 닦고 긴 생머리의 버드나무와 여
러 나무를 심었다.
늦가을이라 나무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내보이며 둑방 주변을 마치 네온사인마냥 화사하게
물들였다.


▲  중랑천 둑방길 속으로 빠져들다...①

▲  중랑천 둑방길 속으로 빠져들다...②

▲  둑방길 옆에 짧게 펼쳐진 은행나무 숲길
황금색 은행잎이 우수수 내려앉아 우울한 2글자 '낙엽'이란 이름으로
귀를 접고 누워있다.

▲  중랑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중랑천과 동부간선도로
중랑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 너머가 송정동(松亭洞) 북부이다. 그 너머로
보이는 긴 산줄기는 고구려 유적의 성지인 아차산~용마산 산줄기이다.

둑방길을 끝으로 봄의 응봉산+늦가을 살곶이다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4월 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2 3 4 5 6 7 ··· 14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