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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2.04.13 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대구올레팔공산1코스, 시인 이상화고택 나들이
  3. 2016.04.28 봄맞이 산사 나들이, 대구 팔공산 파계사 (파계사계곡, 성전암)
  4. 2014.03.02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
  5. 2012.12.18 우리나라 서원의 떠오르는 성지 ~ 달성 도동서원 (다람재, 이노정) 1
  6. 2012.04.24 팔공산 성전암, 대비암(현응대사부도)
  7. 2011.03.27 비슬산 용연사
  8. 2009.08.04 비슬산 소재사 (비슬산자연휴양림)
  9. 2009.07.30 도동서원
  10. 2007.10.21 [대구] 비슬산 가을 나들이 (유가사, 따끈한 곰탕 1그릇)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 나들이 <서상돈고택, 계산동성당, 청라언덕, 선교사 스윗즈 주택...>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 나들이



'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 나들이 '

대구 계산동성당
▲  대구 계산동성당

청라언덕 사과나무 선교사 스윗즈주택

▲  청라언덕 사과나무

▲  선교사 스윗즈주택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간만에 대구(大邱) 땅을 찾았다. 팔공산
남쪽 자락에 깃든 북지장사(北地藏寺, ☞ 관련글 보기)와 방짜유기박물관을 먼저 둘러
보고 대구 도심으로 나와 후식거리로 여러 근대문화유산을 더듬었다.

대구시는 중구 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을 손질하고 코스를 여러 개 엮어서 '대구 근대(近
代)로의 여행'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것이 크게 주목을 받으면서 근대문
화유산의 1급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 풍문이 내 두 귀까지 들려오
면서 그곳의 위엄을 내 침침한 두 망막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알고 있던 계산동성당으로 이동하다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로 유명한 이상화(李相和) 시인의 고택이 마중을 나와 그를 먼저 둘러보았고, 그 옆에
도 기와집이 하나 있어 살펴보니 구한말 민족 기업가인 서상돈의 고택이다. 본글은 서
상돈 고택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상화 고택은 북지장사글 참조)



 

♠  구한말 대구 지역 민족기업가이자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던
서상돈 고택(徐相燉 古宅)

▲  서쪽에서 바라본 서상돈고택

이상화 고택 동쪽에는 이상화만큼이나 대구에서 자랑스러워하는 인물, 서상돈의 재현된 고택
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서상돈(1850~1913)은 구한말에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로 1850년 10월 17일 경북 김천
마잠(지좌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달성서씨 집안으로 집안이 유난히도 천주교와 인연이 깊어
천주교 박해로 고통을 겪거나 죽음을 당한 인물이 많았다. 그 역시 집안의 피는 못속여 일찍
부터 천주교를 신봉했다.
1859년 아버지 서광수(徐光修)가 병사하자 어머니는 서상돈 형제를 데리고 외가가 있는 대구
새방골 죽전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외할아버지인 김후상(金厚詳)의 교육과 보살핌을 받았
으며, 시내 상점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어머니를 도왔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터지자 큰아버지 서인순과 삼촌인 서익순, 서태순이 처단을 당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서상돈은 나중에 큰 부자가 되면 꼭 천주교 전교와 자선사업을 하기
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1868년 대구 천주교 원로회장 서용서(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 등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
을 받아 보부상(褓負商)을 시작했다. 그는 사업 수완이 뛰어나 사업이 나날이 번창했고 1880
년대 중반에는 수많은 보부상을 거느리며 매년 3만 석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대구에서 제일
잘나가는 대상(大商)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 사업에 열중한 나머지 혼기를 놓쳐 1880년, 30세
의 늦깎이 나이로 수안김씨와 혼인을 올렸다.

1885년 경상도 지역 천주교 영업을 담당하던 로베르<Robert, 김보록(金保祿)> 신부가 신나무
골 교우촌(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을 찾았다. 이에 서상돈은 사촌 여동생 서마리아와 그를 도
왔고 1891년 12월 대어벌에 임시성당을 세웠다. 그 성당은 1897년 계산동 초가로 자리를 옮겼
으며 1899년 로베르가 십자형 기와집 성당을 세우자 흔쾌히 많은 비용을 제공했다.

1894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대우로 탁지부(度支部) 세무시찰관<稅務視察官, 봉세관(封稅官)
>에 임명되어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의 세정을 관리하기도 했으며, 1896년 독립협회가 설립되
자 거기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교육사업에도 큰 관심을 보이며 돈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1899년 계산동성당 부속
건물에 한문 서당인 해성재(海星齋)를 지어 주었고, 그 학교는 1908년 봄, 성립학교로 간판을
바꾸었다. 그리고 1905년 이일우를 도와 달서여학교 설립을 도와주었고, 1910년에는 성립여학
교를 세웠으며 1906년에 출판사인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를 설립해 학교 교과서와 계몽잡지.
신문, 교양서적을 발간하는 등 대구 지역 근대교육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  서상돈 고택 모형도
여기서는 생가로 나와있으나 그가 태어난 곳은 경북 김천이므로 '생가'란 명칭은
맞지가 않다. 엄연히 '서상돈고택'을 칭하고 있으면서 여기서는 생가라고
쓰고 있으니 고택 관리자들의 초보적인 실수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1906년 비리비리한 조선(대한제국) 정부는 왜열도에 1,300만원의 거금을 빌렸는데 그 돈을 갚
지 못해 총체적 난국에 빠지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서상돈은 돈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
한다고 인식하고 1907년 1월 29일, 그 유명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다. 하여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국채를 갚자는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했고 군민대회를 개최해 나라의 빚을 갚자고 호
소했다.
그래서 4월 말까지 외국 동포를 포함해 4만여 명이 흔쾌히 참여해 230만원의 돈을 모았다. 허
나 모처럼의 대동단결도 친일매국노인 일진회와 왜 통감부(統監府)의 방해로 결실을 맺지 못
했다.

1911년 로마교황청이 주교 소재지를 전주와 대구를 놓고 고심을 하자 대구로 낙점될 수 있도
록 힘을 썼으며 임시 주교관(主敎館) 부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3년 6월 30일 새벽
2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3세의 조금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1999년 광복절에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고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대구
매일신문사를 중심으로 '서상돈상'을 제정했다. 그리고 2002년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고 2011년 10월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개관되어 늦게나마 그의 자주자강 민족정신을
기린다.

▲  서상돈 고택 사랑채

▲  서상돈 고택 관리사무소

서상돈 고택은 개량한옥 스타일로 여러 동의 집을 지닌 고래등 기와집이었다. 서양식 수목을
심고 연못과 석탑을 두었으며, 서양식과 우리식이 절충된 정원을 지니고 있는 등 대구 제일의
부잣집으로 위엄을 날렸다. 허나 아쉽게도 왜정을 거치면서 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
라졌고, 서상돈 일가의 빛바랜 사진을 통해 고택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더듬어 볼 수 있을 따
름이다.

현재 고택은 2008년에 원래 자리 부근에 크게 축소하여 재현한 것으로 건물 3동과 문, 벽돌문
이 전부이다. 키다리 빌딩 뒤쪽에 조그맣게 자리해 있다 보니 초라한 기분도 적지 않게 드는
데 아무래도 마련된 자리가 좁고 고택에 대한 자료도 부족해 되는대로 이렇게나마 재현을 한
것이다. (복원보다는 재현이 맞을 듯)

   ◀  정면이 꽉 막힌 고택 대문과 벽돌문
문은 바로 앞에 신성미소시티아파트가 높이
들어앉아 있어 굳게 닫혀 있다. 하여 뻥 뚫린
고택 서쪽을 통해 내부로 들어서야 된다.

* 서상돈 고택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100 (달구벌대로 2051)



 

♠  대구 최초의 근대 건축 스타일의 천주교 성당
대구 계산동성당(桂山洞聖堂) - 사적 290호

이상화고택 북쪽에는 계산동성당(주교좌 계산대성당)이 이국적인 멋을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주변에 기라성처럼 널린 키다리 건물들에게 절대로 꿇리지 않는 위엄을 보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계산동성당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자 최초의 근대식 성당이며, 이 땅에서 3번째로
지어진 근대식 성당으로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앞서 서상돈 고택에서 언급한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1891년 대어벌 임시성당(인교동)을 지었
는데 1897년 현 성당 자리에 있던 초가를 매입하여 성당을 옮겼다. 1899년 그 초가를 부시고
서상돈의 후원으로 번듯하게 십자형 기와집 성당을 지었으나 1901년 2월 지진으로 화재가 나
서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로베르는 제대로 된 서양 스타일의 성당을 짓기로 마음을 먹고 서상돈의 도움을 다시 받
아 1902년 지금의 성당을 세우게 된다. 설계는 로베르가 했고 서울 명동성당(明洞聖堂) 공사
에 참여했던 청나라 애들을 잡아와 공사를 시켰다.
1911년 주교좌 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크게 높였고 계속해서 건물을 불려나가 1918년 12
월 24일, 현재의 우람한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성당 정면은 라틴십자형으로 2개의 종각(종탑)이 우뚝 솟아 있어 지역 사람들은 '뾰족집'이라
불렀다.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첨탑(尖塔) 2개를 대칭구조로 세웠는데 첨탑을 포함하여 성당
높이가 거의 10층 건물에 버금간다. 앞면과 양측에 장미창으로 장식을 했으며, 화강석 기단(
基壇) 위에 붉은 벽돌로 건물을 닦고 그 위를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다졌다.


▲  장엄함이 묻어난 계산동성당 내부

성당 내부는 자유 관람 및 출사가 가능하다. (단 예배와 미사시간은 안되며, 성당의 여러 사
정으로 개방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하여 성당 정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서면 되는데 마치 유
럽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듯, 분위기가 정말 서양틱하다.
비록 천주교에 일말에 관심도 없지만 잠시 의자에 앉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불끈 모아 기도
를 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 오른다. 허나 기도를 해봐야 천주교 주인이 리플이나 댓글도 달아
주지 않을 것이고, 난 어디까지나 답사를 가장한 나그네이니 이 정도로 내부를 살피고 밖으로
나왔다.


▲  1984년 5월 5일, 로마교황청의 주인 요한 바오로2세가 이곳을 다녀간
것을 기리고자 성당에서 달아놓은 동판과 석조 조형물

▲  계산동성당의 다양한 옆문들 ▲
(성당 내부는 정문으로 들어가기 바람)

▲  계산동성당의 뒷모습
성당이 동서로 길쭉한 모습이라 마치 커다란 4발 동물이 고개를 쳐들고
꼬랑지를 흔들며 앉아있는 모습 같다.

▲  계산동성당의 꼬리 부분

▲  성립여학교 2회 졸업식 사진(1913년)

성립여학교는 서상돈이 계산동성당에 지어준 여학교이다. 이 사진은 수녀들이 찍은 것으로 수
녀(2명)와 앳된 모습의 여학생(10명), 교회와 학교 관계자들(3명)이 나란히 촬영에 임하고 있
다. 남는 것은 정말 그림과 사진밖에 없다고 하더만 이미 저 세상으로 훌쩍 가버린 저들은 이
렇게 그들의 생전의 모습을 남겼다.

* 계산동성당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71-1 (서성로10, ☎ 053-254-2300)
* 계산동성당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구사과의 고향이자 근대 건축물을 3개나 품은 대구 도심의
상큼한 언덕, 청라(靑蘿)언덕

▲  3.1운동계단 윗부분

계산동성당에서 서성로를 건너면 청라언덕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손을 내민다. 속세에서는 그
를 3.1운동계단(3.1만세운동 계단)이라 부르는데 1919년 대구 지역 3.1운동의 현장으로 지역
사람들은 왜정의 감시를 피해 이 계단으로 계산동성당과 도심으로 들어가 만세운동에 참여했
다. 9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 청라언덕 정상이 있다.


▲  청라언덕과 동무생각 노래가 담겨진 표석

'동무생각'
봄의 교향곡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대구 도심의 상큼한 언덕인 청라언덕은 20세기 초반 동산의료원과 계명대를 꾸렸던 미국 선교
사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그들은 푸른 담쟁이를 많이 심어서 푸른 담쟁이덩굴을 뜻하는 청라
언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달성(達城, 달성공원) 동쪽에 있다고 해서 오랫동안 동산
(東山)이라 불렸다. 달성과 더불어 대구 도심의 야트막한 지붕으로 한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대구사과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재 언덕에는 선교사들이 살았던 늙은 주택 3동과 3.1운동계단, 사과나무,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歌曲)인 동무생각 노래비, 동산의료원 구관 현관, 동산의료원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무
덤인 은혜정원이 있다. 대구에서 꼭 가봐야 되는 근대문화유산 명소로 시간이 흐르다가 잠시
졸도하여 정지된 듯, 고풍스런 모습을 지니고 있어 촬영지로도 많이 등장한다.

청라언덕하면 박태준(朴泰俊, 1901~1986)의 '동무생각'이란 노래가 유명하다. 그는 대구 출신
작곡가로 청라언덕 부근에 있던 신명학교의 어느 여학생을 짝사랑했는데 결국 사랑은 이루어
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를 추억하고자 직접 작곡을 했고 이은상(李殷相)이 노랫말을 붙여주
었다. 가사에 나오는 백합과 동무는 그 여학생을 뜻하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의 고통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이런 명곡이 태어났다.


▲  선교사 챔니스(Chamness)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5호

청라언덕을 장식하고 있는 근대 주택 3동 중 챔니스 주택이 가운데에 자리해 있다. 마치 너른
정원의 별장처럼 이색적으로 생긴 그는 1910년경 미국 선교사들의 주거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1907년 대구 도심을 품던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거기서 가져온 안산암(安山巖) 등의 성돌로
기초를 닦고 붉은 벽돌로 미국식 2층주택을 지었다.

남북으로 약간 긴 사각형 형태로 서쪽 중앙에 있는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오르는 계
단홀이 있고 그 홀을 중심으로 거실과 서재, 부엌, 식당을 배치했다. 2층에는 계단실을 중심
으로 좌,우측에 각각 침실을 두고 욕실, 벽장 등을 설치했으며, 지붕은 삼각형으로 2개의 굴
뚝이 있는데, 1층 동남쪽에는 넓은 베란다를 설치했다. 이런 양식의 건물은 그 시절 미대륙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유행한 방갈로풍으로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집의 이름인 챔니스는 이곳에 살았던 미대륙 북장로교 선교사로 우리식 이름은 차미수(車米秀
)이다. 1925년 부인과 이 땅에 들어와 대구에서 16년을 살았으며, 1927년 딸 바바라를 얻었으
나 생후 3달 만에 잃고 만다. 1941년 왜정에게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93년까지 동
산의료원 의료원장을 지냈던 모페트(H.F Moffett)가 거주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의료선교박물
관으로 활용하여 개방하고 있으나 내가 갔을 때는 이미 17시가 넘은 때라 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계명대에서 세운 의료선교박물관은 조선 후기에서 20세기까지의 우리나라 의학 역사와 의학자
료, 대구 지역 기독교와 선교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전자는 챔니스 주택에, 후자는 스윗즈
주택에 두었다.
* 의료선교박물관 관람문의 : ☎ 053-250-8700

▲  챔니스 주택의 뒷모습
앞에 하얀 피부의 공간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덧붙여진 것이다.

▲  챔니스 주택의 앞모습


▲  챔니스 주택 산책로와 장식물로 놓인 돌확 등의 석물들

▲  선교사 블레어(Blair)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6호

챔니스 주택 남쪽에는 비슷하게 생긴 2층짜리 블레어주택이 있다. 1910년에 지어진 미국 선교
사 주택으로 블레어란 선교사가 거주했다고 해서 블레어주택이라 불린다.
대구읍성 성돌로 기초를 닦은 챔니스와 스윗즈주택과 달리 콘크리트로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닦고 그 위에 미국식으로 붉은 벽돌 집을 다진 것으로 남북으로 약간 길쭉한 네모 형태를 이
루고 있으며, 1층 서쪽에 현관으로 이어지는 베란다가 있고 현관홀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2층
으로 오르는 계단실이 있다. 그 오른쪽이 집 중앙으로 거실과 응접실이 앞뒤로 있으며 그 좌
우로 침실과 부엌, 식당 등을 두었다.
2층에는 계단홀을 중심으로 3개의 침실과 욕실을 두었고 현관홀 위에는 빛을 받아들이는 선룸
(Sun room)을 설치했다. 지붕은 삼각형으로 2개의 굴뚝을 지니고 있으며, 집의 전체적인 모습
에서 그 시절 미국 양이(洋夷)들의 주택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챔니스와 스윗즈주택은 사진을 여럿 담았으나 블레어주택은 저거밖에 없었다. 다른 것을 우선
담고 나중에 담는다는 것을 깜박했던 모양이다.


▲  1899년을 강조하는 동산병원(동산의료원) 구관 현관(포치, Porch)

머리에 'Since 1899'라 쓰인 이 포치는 동산병원의 구관 중앙입구이다. 동산병원의 전신인 제
중원(濟衆院)은 1899년에 세워진 것으로 1931년 구관(舊館)이 세워졌으며, 2010년 대구지하철
3호선 공사로 인해 부득이 포치를 떼어와 이곳에 두면서 이렇게 허전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구관은 그대로 있음)

▲  구관 현관(포치)의 옆 모습

▲  1970년대 고압산소 치료기

구관 현관 안에는 현역에서 물러난 고압산소 치료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는 연탄가스에서 많
이 배출되는 일산화탄소 급성 중독환자 치료에 쓰였던 것으로 1970년대 초 미대륙 북장로교의
밴 클레브(Van Cleve) 선교사가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대구 한성메디칼(구 한성공업사)의
고(故) 최운한 대표가 이 땅 최초로 제작했다.
1972년 동산의료원 응급실에 설치되어 2012년까지 활약했으며 그를 모델로 전국에 고압산소치
료기가 많이 보급되었다. 1970~1990년대에 연탄보일러의 대중적인 공급으로 겨울 제국의 핍박
에서 조금은 벗어났으나 대신 바람직하지 않은 대기물질인 일산화탄소 배출로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 죽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내 주변에도 여럿 있었음) 바로 이 치료기
가 그들을 저승의 문턱에서 많이 꺼내주었다.


▲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청라언덕 대나무군락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식물들이 모두 누렇게 뜨거나 가지만 앙상한 가운데 유일하게 푸
른 빛을 내는 고고한 존재가 있다. 바로 스윗즈주택 부근의 작게 우거진 대나무군락이다. 대
나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의 기독교 일변도가 되버린 청라언덕에서 대나무숲을 보니 마치
서라벌 경주(慶州)에서 조선시대 유적을 만난 기분인데 동산의료원 초창기에 여기서 100여m
떨어진 곳에 대나무군락지가 있었다.
허나 그들은 싹 사라지고 뿌리만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것을 의료원 개원 100주년이 되는
1999년에 지금의 자리에서 푸르게 돋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기적의 나무'라 부르고
있는데, 동산의료원과 계명대는 구한말과 왜정 시절에 서양 선교사들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준 은혜와 사랑이 대나무 뿌리처럼 깊고 단단하게 여기에 뿌리 내린 것이라며 말하고 있다.


▲  선교사 스윗즈(Switzer)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4호

스윗즈 주택은 1906~1910년경에 지어진 2층 벽돌 양옥이다. 지어진 이유는 앞서 두 주택과 같
으며 대구읍성 철거로 나온 성돌을 가져와 터를 다지고 그 위에 지었다.
스윗즈(스위처) 여자 선교사(1880~1929, 한국명 성마리다)는 1911년 이 땅에 들어와 살았으며
이후 계성학교 4대 교장인 핸더슨 해롤드(한국명 현거선), 계명대 초대학장인 캠벨 등의 선교
사가 머물렀는데 전통 한식과 서양식이 조화를 이룬 모습으로 지붕은 한식 기와를 이은 박공
지붕이었으나 나중에 함석으로 개조되었고 다시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계단을 여러 단 설치하여 바닥을 높인 현관(포치)을 들어서면 남면 중앙에 거실, 동쪽에 응접
실과 이어지며, 남쪽 벽을 일부 밀어 창을 설치한 거실은 응접실과 서쪽의 침실, 북쪽의 계단
실과 통하게 되어있다. 계단실의 좁은 마루에서 식당과 화장실로 연결되며 뒤쪽 주방은 작은
홀을 지나 외부로 출입할 수 있다. 그리고 2층에는 계단실 남쪽에 침실 2개를 두고 서쪽에 욕
실을 두었으며, 지붕에는 2개의 굴뚝이 멀뚱히 자리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
한다.

1981년 동산의료재단이 인수해 챔니스 주택과 함께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
로 기독교와 선교 관련 유물과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관람시간에 닿지 못해
내부를 구경하지 못했다.

▲  정면에서 바라본 선교사 스윗즈 주택

▲  선교사 스윗즈 주택의 옆 모습


▲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
전국 담장 허물기의 첫 행사로 동산의료원의 정문 및 중문의 기둥과 담장 일부를
이곳으로 옮기고 동산의료원이 초창기에 세운 교회 종을 가져와
개원 100주년(1999년) 기념 종탑으로 삼았다.

▲  대구사과의 고향, 청라언덕 사과나무 - 대구 보호수 01-01호

청라언덕은 대구사과의 고향이다.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기념으로 초대병원장인 존슨 박사<
Woodbridge O. Johnson, (우리식 이름, 장인차)>는 미대륙 미조리주에서 사과나무를 주문하여
이곳에 심으니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서양식 사과나무이다. 그 나무에서 나온 사과씨앗이 대구
일대로 널리 보급되면서 대구는 사과의 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많이 퇴색됨)
그때 심어진 나무는 벌써 세월이 잡아갔고 그의 아들 나무가 뿌리를 내려 자리를 지키고 있으
며, 높이 7m, 둘레 0.9m로 나이는 약 90년이다. (2000년에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70년) 벌써부터 몸이 부실한지 지탱할 수 있는 시설을 여럿 설치했는데, 사과나무는 대체
로 수명이 짧아서 그런듯 싶다.


▲  여호와 이레의 동산 표석
청라언덕은 대구 기독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하여 기독교 측에서는
이곳을 여호와 이레의 동산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  동산의료원 외국인묘지 (은혜정원)

청라언덕 서쪽에는 난데없이 조그만 서양식 공동묘지가 들어앉아 있다. 엄연한 대구 도심 한
복판이고 청라언덕의 일원인 알짜배기 땅에 왜 무덤들이 있나 살펴보니 동산의료원과 계명대
에서 의료, 교육, 기독교 선교를 벌인 20세기 초/중기 미국/유럽 선교사와 그 가족들 16명의
무덤이다.
이곳에 묻힌 사람 중에 생후 1년 남짓 만에 죽은 아기가 5명이나 되는데, 그중 4명은 반년도
못 채웠다. 어쨌든 그들 선교사들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무려 은혜정원이라 치켜세우고
있는데 그들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쿨하게 생략한다. (내용이 너무 많음)

청라언덕은 서양식 근대주택과 대구사과 시조의 자손나무, 대나무숲, 3.1운동계단, 거기에 서
양식 공동묘지까지 갖춘 참으로 이색적인 명소이다. 계산동성당만 생각하고 왔는데 서상돈 가
옥에 청라언덕 일대까지 싹 둘러보니 그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지려고 한다.

외국인묘지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햇님은 그만의 공간으로 쏙 들어가며 커텐을 치고 세상
은 달님의 검은 세상이 되었다. 다시 밤을 만난 겨울은 다시 기세가 드세져 코와 귀 끝이 다
시 얼얼해진다. 그날 목적한 것을 훨씬 초과하여 이룬 상태라 즐거운 기분으로 서울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담아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대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청라언덕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424 (달구벌대로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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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대구올레팔공산1코스, 시인 이상화고택 나들이

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이상화 고택



' 대구 겨울 나들이 '
(팔공산 북지장사, 시인 이상화 고택)

팔공산1코스 북지장사 가는 길

▲  팔공산1코스 북지장사 가는 길

북지장사 지장전 대구 이상화고택

▲  북지장사 지장전

▲  이상화 고택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오랜만에 대구(大邱) 땅을 찾았다. 올해도 변
함없이 미답처 지우기에 열을 올리며 어디로 갈까 궁리하던 중, 대구에서 적당한 미답
처가 감지되었다. 바로 팔공산에 있는 북지장사와 근래 무섭게 뜨고 있는 중구의 근대
문화유산들이다. 그래서 북지장사를 먼저 들렸다가 대구 도심으로 나와서 햇님이 떨어
질 때까지 중구의 근대문화유산을 최대한 챙겨보기로 했다.

햇님이 등청하기가 무섭게 서울을 출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를
달려 대구의 대표 관문인 동대구역에 두 발을 내렸다.
사람들로 늘 북새통인 동대구역을 서둘러 벗어나 동대구역 지하도 정류장에서 대구 급
행좌석 1번(동화사↔다사,매곡리)을 타고 북쪽으로 30분 정도를 올라가 동화사로 넘어
가기 직전인 방짜유기박물관에서 하차했다.



 

♠  팔공산 북지장사(北地藏寺) 둘러보기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①

북지장사는 방짜유기박물관 정류장에서 도장길을 따라 40분 정도 들어가야 된다. 전국적인 도
보길 유행에 따라 대구시는 북지장사 길을 '대구올레 팔공산1코스(북지장사 가는 길)'로 포장
하여 세상에 내놓았는데 거리는 2.5km(방짜유기박물관 입구↔북지장사)로 느긋한 길의 연속이
라 걷는 마음도 가볍다.
북지장사 길을 그대로 둘레길로 삼은 탓에 전 구간이 포장길로 박물관입구에서 약 0.9km 정도
는 보행길을 갖춘 2차선 길이나 그 이후부터는 굽이굽이 이어진 1차선 시골길이다. 그 모습이
정겹기 그지 없어 무리하게 길을 넓히지 말고 이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더군다나 길 중간에
두툼함 소나무 숲도 있으니 더욱 그렇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②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③

북지장사 길 중간에는 짙게 우거진 소나무 숲길이 있다. 소나무들이 얼마나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던지 하늘이 거의 보이질 않아 어두울 정도인데 그들이 베푼 솔내음이 속세의 번뇌를 거
의 털어주어 나의 돌머리와 어지러운 마음에 한 줄기 평화를 준다. 시작부터 이런 명품급 숲
길을 내밀며 중생을 맞이하니 북지장사에 대한 첫 인상과 기대감을 적지 않게 높여준다.


▲  북지장사 숲길과 겨울 가뭄으로 고통받는 계곡(숲길 왼쪽)

▲  드디어 도착한 북지장사 용호문(龍虎門)

도장길(북지장사 가는 길) 끝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북지장사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주
차장을 지나면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용호문과 그 좌우에 딸린 기와집이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데 절에 따로 일주문(一柱門)이 없기 때문에 용호문이 일주문(정문)의 역할을 도
맡고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경내의 중심인 지장전이 나타나고 그 뒤쪽에 대웅전이, 동쪽에는 오래된 3
층석탑이 있다. 그럼 여기서 북지장사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팔공산 동남쪽 끝자락이자 노족봉(老足峰, 600m)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북지장사는 팔공산에
무수히 널린 늙은 절의 하나이다. 같은 팔공산(八公山) 식구인 동화사(桐華寺), 파계사(把溪
寺, ☞ 관련글 보기), 갓바위(선본사, ☞ 관련글 보기)의 명성에 크게 가려져 있고 규모도 작
지만 그들 못지 않게 유구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오롯하게 지니고 있으며 산 속에 고적하게 자
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꽤 깊다.
북지장사란 이름은 '북쪽에 있는 지장사'란 뜻이다. 원래 이름은 '지장사'이나 대구의 동남쪽
끝인 가창면 우록리에도 오래된 지장사가 있어 그들을 구분하고자 팔공산 것은 북지장사, 우
록리 것은 남지장사(南地藏寺)를 칭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두 절이 특별한 사이도 아님)

북지장사는 485년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흔쾌히 밝혀줄 사료
(史料)와 유물은 없으며 그 시절 대구 지역을 다스렸던 신라의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은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고구려에서 전해준 불교를 때려잡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
니 팔공산(八公山)에 절이 세워질 근거가 전혀 없다.
1040년 최제안(崔齊顔)이 쓴 경주 천룡사(天龍寺) 중창 관련문서에는 북지장사의 밭이 200결
이나 된다고 쓰여있어 고려 초에도 제법 잘 잘나갔음을 알려준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공산(公山) 지장사'로 나와있고 신라 후기에 지어진 석조지장보살좌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
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동화사의 말사(末寺)로
조용히 있지만 왕년에는 오히려 동화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1192년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이 중창했다고 하며 지장전(옛 대웅전) 기와 중 1623년
과 1665년에 만들어진 것이 있어 17세기에 여러 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 부속 암자
를 여럿 거느리고 있었으나 동화사와 파계사 등 쟁쟁한 절에 밀려 19세기 초에 동화사의 그늘
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지장도량으로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지장전, 요사, 산령각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지장전을 비롯해 3층석탑과
석조지장보살좌상(대구 지방유형문화재 15호), 아미타삼존불좌상(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1호),
금고(金鼓,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5호) 등이 있다. 허나 정보 부족으로 아미타3존불과 금고는
만나지 못했으며, 조선 후기 지장탱(지장보살도)과 지장사유공인 영세불망비, 옛 석재(石材)
와 주춧돌 등이 전하고 있다.


▲  북지장사 지장전(地藏殿) - 보물 805호

단출하고 날씬하게 생긴 지장전은 북지장사의 상징 같은 존재이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겹
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과 뒷면에 사잇기둥을 세워 3칸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그 3칸을 다
합쳐봐야 겨우 일반 기와집 1칸 정도 크기이다. 홀쭉해 보이는 건물에 비해 지붕이 육중하게
보여 이를 받치고자 추녀가 있는 네 모서리에 붉은 피부의 기둥을 세웠는데, 그 기둥을 활주
(活柱)라고 한다.

건물 정면에는 꽃살창호를 달고 옆면과 뒷면에 띠살창호를 달았는데 기단(基壇)은 2단으로 다
지고 그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닦은 다음 건물을 올렸다. 기둥 윗쪽에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그 위에 공포를 안팎 4출목(出目)으로 촘촘히 짜서 다포(多包) 양식을 취했다.
공포의 세부 처리는 조선 중기 스타일이나 용봉(龍鳳) 머리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수법이다.
내부는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아 불단을 마련했고 가구(架構)는 도리칸이 1칸으로 대들보는 사
용하지 않고 사각귀틀맞춤으로 짠 다음, 둘레는 빗천장으로, 가운데는 우물천장으로 했다. 이
런 기법은 정자(亭子)에서 많이 쓰이는 것으로 사찰 건물로써는 흔치가 않아 처음에는 목탑으
로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건물 지붕에서 1623년과 1665년에 만들었음을 알리는 글씨가 깃든 기와가 발견되어 1623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2011년 해체보수 때 1761년에 지장전으로 상량(上樑)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원래부터 지장전으로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대웅전이 화마(火魔)의 장난으
로 쓰러지자 그 앞에 있던 지장전이 그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대웅전과 극락전으로 간판을 바
꾸기도 했으며, 대웅전이 새로 지어지자 그에게 법당(法堂)의 역할을 넘기고 지장전으로 돌아
왔다.

▲  방향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는 지장전

지장전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조선 후기 지장탱이 들어있다. 그
들을 모두 친견했으나 지장전 내부를 찍지 말라는 절 관계자의 당부로 굳이 사진에 담지 않고
나의 침침한 자연산 망각에 살짝 담고 나왔다.

나의 촬영을 거부했던 석조지장보살좌상은 대웅전 뒤쪽 땅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그의 정체는
아리송하긴 하나 머리의 형태나 손에 든 보주(寶珠) 등으로 보아 지장보살(地藏菩薩)로 여겨
진다. 단정한 모습과 온화한 인상으로 신라 말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로 북지장사의 불투명한 창건 시기를 최대 신라 후기까지 끌어올려준다.


▲  지장사유공인 영세불망비(地藏寺有功人 永世不忘碑)

지장전 바로 앞에는 약간 빛이 바랜 조그만 비석 하나가 멀뚱히 서 있다. 그는 운암당 옥준대
사(雲巖堂 玉峻大師)의 공적을 기리고자 1731년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
다.
17~18세기 지장사 승려들은 세금으로 종이를 만들어 관아에 바쳤는데 그 수고로움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운암당이 조금 해소해주자 이를 감사하게 여겨 비석까지 세웠고 나중에는
지장전 앞에까지 두어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기린다.
비석이 심어진 비좌(碑座)는 높이 30cm, 92x60cm 규모이며, 빗돌은 높이 101.5cm, 상부 폭 50
cm, 하부 폭 47cm로 빗돌 윗부분이 둥글게 처리되었다.

▲  지장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설선당(設禪堂)

▲  아직도 연꽃무늬가 생생한 옛 석재
(석등의 일부로 여겨짐)


▲  지장전 뒷통수에 자리한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마련했다. 예전 대웅전이 화재로 맥
없이 쓰러지자 지장전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으나 그가 다시 지어짐으로써 법당의 자격을 다
시 찾아왔다. 허나 북지장사에서 지장전의 존재감이 거의 독보적인 수준이라 대웅전이 절의
중심 건물임에도 지장전의 보조 건물 정도로 작게만 보인다. 게다가 지장전의 뒤쪽에 있으니
그런 기분에 더욱 부채질을 한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대웅전 뒷통수에 있는 산령각은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꽤 친숙한 산신의 공간이다.

▲  북지장사 3층석탑(동탑)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6호

지장전 뜨락 동쪽에는 고색이 깊게 묻어난 3층석탑 형제가 있다. 이들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히고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은 것으로 높이는 모두 3.8m이며 옥개석과 탑
신이 같은 돌로 지어졌다.
신라 후기 또는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1981년 5월 해체복원을 했는데 이때 땅 속에 묻혀있
거나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의 살을 갖다붙였다. 아무리 복원을 했다고 해도 고된 세월의 흔
적까진 어쩌질 못하여 군데군데 장대한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들이 역력하다.

▲  정면에서 바라본 3층석탑 동탑

▲  3층석탑 서탑


▲  북지장사를 뒤로하며

생각보다 꽤 작고 아담했던 북지장사를 30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사전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간 탓에 금고와 아미타삼존불좌상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 다시 와야될 구실
을 빚고 말았으나 아직도 이 땅에는 나의 발이 닿지 않은 미답지들이 우주의 별만큼이나 즐비
하여 이곳과의 재 인연은 솔직히 장담할 수가 없다.

북지장사를 나오다가 이 땅의 유일한 방짜유기 전문 박물관인 대구방짜유기박물관에 잠시 발
을 들였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8:22 비율로 녹여서 만든 유기의 일종으로 징과 꽹과
리 등은 오로지 방짜기법으로 만들어진다. <박물관 내부는 사진에 담지 않아서 이 정도 언급
으로 쿨하게 선을 긋겠음, 방짜유기박물관 ☎ 053-606-6171~4, ☞ 홈페이지 보기>
그곳을 둘러보고 백안3거리로 나와 뜨끈한 순두부찌개로 늦은 점심을 섭취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시간임에도 손님들이 제법 되었고 후식으로 커피 외에 식혜도 준비되어 있어 후식 인
심도 넉넉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중구(中區) 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을 보고자 대구시내버스 401번(갓바위↔
범물동)을 잡아타고 대구 도심 한복판인 반월당(半月堂)으로 나왔다.
허나 햇님이 적지 않게 기운 상태라 근대문화유산을 얼마나 잡을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가
없다. 햇님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고 싶지만 인간 주제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길을 서둘렀다.

* 북지장사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6225 (도장길 243, ☎ 053-985-5217)



 

♠  빼앗긴 들에서 민족혼을 일깨운 대구의 대표적인 민족시인
상화 이상화(尙火 李相和) 고택

▲  시인 이상화 고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에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쁜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반월당역(반월당교차로)에서 달구벌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500m 정도 가면 계산5거리이다. 여
기서 오른쪽(북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시인 이상화 고택과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서
상돈(徐相燉) 선생의 고택이 나란히 마중을 나온다.
이들은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대표 성지(聖地)로 원래 그들을 볼 계획은 없었다. (존재
조차 몰랐음) 그저 청라언덕과 계산동성당만 생각을 했었지. 그러다가 생각치도 못한 그들의
깜짝 등장에 두 다리가 얼어붙으면서 그들을 덤으로 둘러보게 되었다.


▲  주인이 가고 없는 이상화 고택 안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아주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는 1901년 4월 5일,
여기서 가까운 서문로2가 11번지에서 이시우(李時雨)와 김신자(金愼子)의 4남 중 2남으로 태
어났다.

그의 아호는 무량(無量)이며, 호는 상화(尙火, 想華), 백아(白啞)이다. 1908년 아버지를 잃자
14살까지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훈도(訓導)를 받으며 한문을 익혔다. 1915년 서울로 올
라가 경성중앙학교(중앙중고등학교)에 입학, 1918년 3학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 때 대구 지역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서울로 급히
피신, 박태원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머물렀으며, 그해 10월 서순애(徐順愛)와 혼인을 했다.

1922년 현진건(玄鎭健)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 나도향(羅稻香) 등
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말세의 희탄','단조','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해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보다 넓은 문학의 세계를 익히고자 바로 그해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아테네프랑세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1923년 3월 아테네프랑세를 수료하여 프랑스 유학을 추진하던 중, 그해 9월 동경을 중심으로
관동대지진이 터졌다. 그때 관동 지역에 살던 조선 사람들이 왜열도 원숭이들에게 잔인하게
탄압을 당하는 꼴을 보고 크게 분노해 프랑스를 포기, 1924년 3월 서울로 건너와 가회동(嘉會
洞)에 있는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며 그 유명한 '나의 침실로'를 '백조' 3호에 발표했다.

1925년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파스큘라(Paskyula)란 문학연구단체에 가담했으며, 그해 8
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26년에는 '개벽' 70호에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는데 그 시에 발작한 왜정(倭政)이 태클을 걸어
'개벽'은 판매 금지 처분을 당했다.

1928년에는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 출판간사로 있었는데, 자신의 집 사랑방을 담교장(淡交
莊)이라 칭하며 많은 항일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그러다가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1930년 '대구행진곡'을 '별건곤(別乾坤)' 10월호에 냈으며 1933년 교남학교에 들어갔으나 이
내 사임하고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 총국을 경영하다가 실패했다. 1935년 시 '역천'을 '시
원' 2호에, '나는 해를 먹다'를 '조광' 2호에 발표했다.

1936년 큰 형인 이상정(李相定)을 만나고자 중원대륙(서토)으로 건너가 남경과 북경, 상해 등
을 3개월 동안 여행했으며 1937년 3월 귀국하자 왜경에게 바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그해
11월 석방되었다.
이후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3년 동안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했으며, 1939년 6월 계산
동(桂山洞)2가 84번지(현 자리)로 집을 옮겼다. 허나 교가(校歌) 가사 문제로 왜정에게 가택
수색을 당하면서 시 원고와 고월 유고까지 압수를 당했으며, 그 충격으로 1941년 학교를 그만
두었다.

이후 시 '서러운 해조'를 '문장' 폐간호에 발표했고 '춘향전'을 영역했으며, 국문학사와 불란
서시정석 등을 시도했으나 완성을 하지 못한 채, 1943년 4월 25일 아침 8시 45분 경, 위암으
로 계산동 집에서 안타깝게 숨을 거두고 만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42살이었다.

가만히 보면 정의롭게 살아온 문학인들은 거의 명줄이 짧고<이상화, 김영랑, 윤동주, 정지용,
이육사 등> 불의(不義)와 어울리며 자신의 배때기를 채우느라 여념들이 없던 작자들<서정주,
이광수 등>은 너무 쓸데없이 오래 산다. 언능 가야될 잡것들은 늦게 가고 정작 오래 살아야
될 사람들은 일찍 죽으니 그래서 이 나라의 정의가 제대로 안서는 모양이다.

1948년 달성공원에 그의 시비가 최초로 건립되었고, 1985년 죽순문학회가 '상화시인상'을 제
정하여 '2009기념사업회 설립'에 따라 시인상을 승계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  이상화 고택 안채 마루 (뒤주와 이상화의 흉상)

이상화 고택은 왜정 때 지어진 개량한옥으로 사랑채와 안채 등 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
고 마당에는 감나무가 자라고 있어 감나무 마당이라 불렸다.

이상화가 저 세상의 별로 홀연히 사라진 이후, 비록 주인도 바뀌고 모습도 조금 변화를 겪었
지만 집은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허나 이곳이 대구 도심 한복판의 금싸라기 땅이다보니 천
박한 개발의 칼질이 군침을 흘리며 집을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2001년 대구 중구청이 고택이
있는 계산동2가 84번지 일대 도로계획을 추진하면서 개념없이 집을 밀어버리려고 하였다.
이에 고택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방송국에 제보를 하여 2002년 1월, 대구MBC, 매일신문, 영남
일보, 한겨례신문 등에서 이를 보도했고, 윤순영(분도예술대표), 이상규(경북대 교수), 공재
성(대구MBC) 등 3명이 앞장서 고택보존운동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중구청 철밥통들을 참교육
시키면서 그 마수를 부려뜨렸다.
허나 2003년 5월, 이번에는 (주)L&G에서 32층 주상복합 건물을 짓고자 다시 고택을 괴롭히자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에서 대구시를 설득, 상화고택 보존을 조건부로 신축을
허가했다. 이에 (주)L&G는 상화고택과 인근 부지 1필지를 매입해 착공 전에 대구에 기부채납
하겠다며 대구시에 공증을 제출했다.

2004년 6월 (주)L&G와 상화고택 소유자간의 고택 매매계약이 체결되었고, 7월에 군인공제조합
이 그 신축건물 공사를 맡게 되자 상화고택 기부채납 기본 협약을 다시 체결, 2005년 6월 상
화고택과 인근 부지 1필지를 대구에 기부채납하였다.
그렇게 해서 고택이 완전히 살아남게 되자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는 해산되었고
그동안 모은 이상화 시집 1,729권과 모금액 8,600만원을 대구시에 기증했다. 또한 이상화의
후손들과 그를 흠모하는 문인들이 그의 유품과 자료를 흔쾌히 기증하여 이상화 고택을 아낌없
이 꾸며주었다.

2007년 5월 상화고택 보수공사에 들어가 11월 완성을 보았으며, 2008년에도 3달간 내부 공사
를 벌여 2008년 8월 12일, 속세에 개방되었다. 이후 대구 중구의 대표적인 근대 명소이자 문
학의 성지로 뜨겁게 추앙을 받으며 대구 도심 투어의 필수 명소로 자리매김하였다.


▲  책상과 의자가 놓인 안채 방 ①
사랑채에는 이상화의 시집과 유품, 사진, 그의 작품과 일생을 다룬 안내문을
배치하여 그의 조그만 전시관을 이루고 있다.

▲  이상화의 여러 문서와 유품이 담긴 안채 방 ②

▲  이상화의 여러 문서와 유품이 담긴 안채 방 ③

▲  무늬만 남은 부엌
이상화의 문학 작품은 바로 이곳에서 지어진 음식의 힘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2007년 이후 고택을 손질하면서 부엌이 조금 변형되었으며, 부뚜막은 더 이상
연기를 피울 일이 없어 그저 먼지만 가득하다.

▲  감나무 그늘에서 한가로운 인생을 보내는 장독대
왕년에는 다양한 음식들을 숙성시키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지금은 빈 껍데기이다.

▲  이상화 고택 서쪽에 자리한 계산예가(桂山禮家)
계산예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구 계산동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
근대문학 등을 사진과 자료, 영상물 등으로 엮어낸 근대문화체험관이다.
(기념스탬프 코너도 있음)

▲  계산예가 옆 골목길 (계산동성당 방향)

시민과 문학인들이 개발의 칼질과 중구청 철밥통들을 참교육시키며 지켜낸 이상화 고택을 둘
러보고 바로 이웃에 자리한 서상돈 고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흔쾌히 휘장을 걷는다.


* 이상화고택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84 (서성로 6-1, ☎ 053-256-3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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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대구 팔공산 파계사 (파계사계곡, 성전암)

 


' 봄맞이 산사 나들이, 대구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

▲  파계사 원통전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봄이 천하를 파릇파릇 물들이던 4월 한복판에 그리운 이들을 보고자 부산으로 길을 떠났다.
부산(釜山)으로 가면서 중간에 대구(大邱)에 들렸는데,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팔공산
파계사를 찾기로 했다. 이곳은 이미 13년 전에 가본 곳이지만 기억도 흐릿하고, 그때 보는
것과 지금 보는 것도 확연히 틀리며, 그 당시 안가봤던 파계사의 뒷쪽 부분(성전암과 현응
대사 부도)도 살펴볼 겸 해서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대구역 정류장에서 대구시내버스 101번을 타고 북구청, 복현5거리, 불로동, 지묘동을 차례
대로 지나 거의 1시간 만에 파계사 종점에 도착했다. (대구역 맞은 편에서 101-1번을 타도
됨)

파계사 종점에서 파계사로 인도하는 파계로 주변에는 파계사 지구가 형성되어 편의점과 온
갖 식당, 찻집, 까페, 숙박업소 등이 무리를 지어 앉아 속인(俗人)을 유혹한다. 허나 유혹
의 정도가 적어서 별무리 없이 파계사지구를 통과했다. 숲과 나무에는 녹색의 기운이 점차
강해지고 벚꽃을 비롯하여 개나리, 목련 등이 수줍게 꽃망울을 터트리며 봄의 분위기를 한
층 드높인다.



♠  파계사 가는 길 (느티나무, 하마비)

▲  현응대사 나무라 불리는 느티나무 - 대구 보호수 2-6호

파계사 종점에서 8분 정도 오르면 지긋한 연세의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약 250년 정도
묵었는데, 높이 15m, 둘레 4.1m에 이르며, 봄이 천하를 해방시켰건만 아직 잎도 피우지 못하고
겨울의 망령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성전암에 머물던 현응대사가 속세로 외출하여 밤에 돌아올 때 그
를 모시는 호랑이가 여기까지 내려와 그를 기다렸다가 성전암까지 태워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일종의 심야 셔틀 노릇을 한 모양이다. 그래서 '범의 정자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하여 대구시
에서 그 전설을 바탕으로 이 나무에게 '현응대사의 나무'란 이름을 지어주어 졸지에 이름이 2
개가 되었다. 허나 속세에서 무슨 이름을 지어주든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절과 산을 찾는 중
생에게 잠깐의 쉼터와 그늘을 제공하는 소중한 존재로 늘 그 자리를 지킨다.

현응대사 느티나무에서 5분 정도 오르면 별로 달갑지 않은 매표소가 중생과 차량을 멈춰 세우며
입장료를 받고 있다. 예전에는 입장료가 없었는데, 꼭 그런 미운 것만 도입하여 돈을 받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2012년 1월부터 차량들에게도 주차비를 물린다며 관련 현수막을 큼지막하게 걸
어놓아 적지 않게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매표소에 이르니 직원이 입장료를 내라고 그런다. 그래서 대학생 할인은 안되냐고 떠보니 인상
을 찌푸리며 그딴 것은 안된다고 한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발길을 되돌리기도 그렇고 나에게
는 딱히 선택권이 없는지라 동전을 다 털어서 1,5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유료(有料)의 땅으
로 들어선다.


▲  매표소 옆에 자라난 거대한 돌탑

파계사와 팔공산을 들락거리던 중생들이 얹힌 자연석이 모이고 모여 저렇게 장대한 돌탑으로 성
장했다. 산악신앙(山岳信仰)의 산물로 이렇게까지 커다란 돌탑은 처음 본다. 중생들의 소망을
양분 삼아 오랜 세월을 두고 다져진 돌탑으로 그의 건강을 위해 주위를 난간으로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다.


▲  슬슬 깨어나고 있는 파계사 계곡
나의 무거운 번뇌를 계곡에 내던지며 일주문을 들어선다. 번뇌가 멀리멀리 흘러가길
바랬건만 흘러가기는 커녕 계곡 옆에서 나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  파계사 일주문(一柱門)

파계사 계곡을 가르는 다리를 건너면 파계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나온다. 문 옆에는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2차선 도로가 뚫려있어 굳이 문을 지날 필요는 없겠으나, 절에 왔다면 일
주문은 꼭 지나가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다.

일주문을 지나면 경사가 다소 각박해져 숨이 턱까지 차게 만드는데, 해탈의 세계로 가는 속세의
마지막 고비란 심정으로 길을 임하면 길이 좀 짧게 느껴질 것이다.


▲  계곡물을 모아둔 파계지(把溪池)

일주문을 지나 8분 정도 오르면 둑을 만들어 계곡물을 집합시킨 파계지가 나온다. 파계사 부근
에서 발원하여 큰 세상을 향해 흐르던 계곡물이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정든 고향을 등지고
금호강(琴湖江)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호수 주변은 상수원 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며, 아직 초라한 몰골의 나무들은 봄의 도래에 기뻐하며 호수에 비친 자신의 매무새를 다듬
느라 여념이 없다.

파계지를 지나면 파계사가 모습을 보이면서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 길은 성전암과 대비암
으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길은 바로 파계사 주차장인데, 예전에는 연못이 있었다. 그 주차장을
지나면 경내로 이어지며, 주차장 한쪽에 있는 관광안내소 옆 길을 오르면 석축(石築) 위에 둥지
를 튼 비석과 부도(浮屠) 형제를 만나게 된다.


▲  부도와 비석들 (제일 오른쪽이 하마비)

부도와 비석 형제는 모두 8기(부도 3, 비석 5)로 조금은 오래된 조그만 부도 2기가 가운데에 있
으며, 하마비 옆 가장자리에는 근래에 지어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와 비석이 있다.
조그만 부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 자리한 비석은 파계사의 장대한 역사를 담은 사적비(事蹟
碑)로 1936년 5월에 세워졌으며,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는 특이하게도 조그만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어 눈길을 끈다.

하마비는 하마 서식지가 아닌 궁궐과 지체 높은 이의 사당, 향교, 관아, 왕릉, 귀족의 무덤 앞
에 세우는 비석으로 80cm 높이의 비석 피부에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 즉 무조건 말
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7자의 글씨가 쓰여 있다. 파계사에 이토록 지엄한 하마비가 있게 된 것은
경내에 있는 기영각이 제왕과 왕실의 안녕을 비는 원당(願堂)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응대사가
양반과 유생의 횡포와 해꼬지로부터 절을 지키고자 숙종 임금에게 왕실의 원당을 설치해줄 것을
요청하여 지어진 것이다. 아무리 절을 깔보는 양반이라고 해도 왕실의 원당이 있는 절까지는 감
히 해꼬지를 할 수 없다.


▲  측면에서 본 부도와 비석들 (부도 3기, 비석 5기)



♠  파계사 입문 (진동루 주변)

▲  파계사 진동루(鎭洞樓)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10호

부도와 하마비를 둘러보고 경내로 향하면 경내의 중심을 가리고 선 진동루를 만나게 된다. 높은
축대 위에 문어발보다 많은 다리를 딛으며 위엄을 뽐내는 2층 규모의 진동루는 속세를 향해 넓
직한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그 계단을 올라 진동루의 아랫도리를 지나면 원통전이 떠오르듯 모
습을 비춘다. (진동루의 양 옆구리로도 경내 진입이 가능함)

이 건물은 1715년(숙종 41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1층 가운데 칸에 경내로 인도하는 통로를 냈고, 우측 칸에는 옛날에 쓰던 거대한 목조(木槽)가
누워있다. 그리고 2층은 법회나 행사 장소로 쓰인 일종의 강당(講堂)으로 우물마루로 천정을 꾸
며 조선 중/후기 양식을 잘 보여준다.

파계사란 절 이름은 파계승(破戒僧)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절 좌우 계곡의 물줄기가 9갈래
나 되어 그 물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지기(地氣)가 흘러나가는 것을 막고자 계곡을 잡는다는 뜻
의 파계(把溪)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허나 그 이름으로도 이곳의 기운을 제압하기가 벅찬지 그
기를 마저 잡는다는 의미로 이 누각에 진동루란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  진동루 1층에 있는 목조(木槽, 구유)

진동루 1층 우측 공간에는 커다란 목조(구유)가 누워있다. 얼핏 보면 말이나 돼지가 밥을 먹을
때 쓰는 통으로 오인 할 수 있다. 허나 이것은 승려와 신도들의 밥통으로 부엌에서 지은 밥을
이 통에 담아 공양을 하게 했으며, 수백 명의 밥을 담을 수 있는 크기로 구유 가운데 바닥에는
통을 씻을 수 있도록 원공이 뚫려있다.
파계사가 잘나갔던 조선 후기에 절찬리에 쓰였던 통이지만 이제는 현역에서 강제로 물러나 밥풀
대신 먼지만 가득하며, 숟가락과 주걱이 수없이 드나들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영조(英祖) 임금 나무'라 불리는 느티나무

진동루 앞에는 250년 정도 묵은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다정하게 솟아나 있다. 이 나무는 영
조 임금 나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들으면 진짜 영조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나무로
보일 수 있다. 허나 영조가 파계사에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곳까지 내려
온 적은 없다. 단순히 경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나무를 골라 '영조임금나무'란 이름을 붙여
이곳의 명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영조하고도 전혀 관련이 없는 나무에게 그런 이름을 무턱대고 주었으니 그도 좀 어이가
없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파계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팔공산의 주요 사찰인 파계사의 역사
대구의 듬직한 진산(鎭山)이자 대구, 경북 지역의 불교 성지(聖地)로 꼽히는 팔공산(八公山)에
는 동화사(桐華寺)와 북지장사(北地藏寺), 부인사(符人寺), 갓바위(선본사), 파계사, 제2석굴암,
파계사, 송림사(松林寺), 염불암 등 크고 작은 오래된 절들 가득 포진해 있다. 그중에서 동화사
와 갓바위, 제2석굴암의 명성이 단연 갑(甲)이지만 파계사도 그들 못지 않은 고찰로 804년(신라
애장왕 5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뚜렷한 사적(事
績)을 남기지 못해 창건 시기에 대한 의구심을 가득 돋군다. 절을 알리는 첫 기록은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관음전에 봉안
된 건칠관음보살좌상으로 조선 초 이르면 고려 후기에 조성되었다. 그런 것을 보면 빨라도 고려
때 조촐하게 문을 연 것을 인근 동화사 내력에 등장하는 심지왕사를 앞세워 창건 시기를 부풀린
것이 아닐까 싶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된 것을 1605년에 계관(戒寬)이 중창했다고 하며, 1695년에 현응대사(玄
應大師)가 3번째 중창을 했다. 현응은 숙종(肅宗)과도 인연이 있는 인물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  2층 규모의 범종각

▲  주지실과 내원(內院)

현응은 성전암 부근 석굴에서 불도를 닦고 있었다. 그는 나라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과 절
과 승려에 물리는 막대한 부역(負役)과 조세, 그리고 나날이 심해지는 유생들의 횡포 등, 절망
적인 불교의 현실에 너무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를 탄원하고자 서울로 올라갔다. 조선시대에는
승려의 서울 도성(都城)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는지라 짧게 기른 머리로 솔잎 상투를 틀고
속세의 옷을 갖추어 도성 안으로 잠입했다.

그는 3년 동안 주막에서 일을 하거나 한강물을 날라 민가에 날라주면서 탄원할 기회를 노렸으나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전화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여 결국 쿨
하게 포기하고 남대문 부근 봉놋방에서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런데 바로 이날 밤 숙종은 남대문 부근에서 청룡과 황룡이 요란을 부리며 승천하는 꿈을 꾸었
다. 꿈이 하도 기이하여 그곳에 뭔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신하를 보내 살펴보니 현응이 행장을
꾸리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현응의 법명은 용피(龍被)였다. <혹은 용파(龍波)>

왕이 보낸 신하의 손에 이끌려 궁궐로 들어간 현응은 드디어 왕을 알현했다. 왕이 서울에 온 이
유를 묻자 그는 현재 불교의 힘든 현실을 이야기하며 탄압을 줄여줄 것을 건의했다. 그 말에 고
개를 끄덕인 숙종은
'너의 탄원을 흔쾌히 들어주겠다. 허나 나도 부탁이 있다. 내가 아직 왕자가 없어서 그러니 한
양 100리 이내에 적당한 곳에서 숙빈(淑嬪) 최씨의 잉태를 빌어줄 수 있겠는가?'

왕의 난이도가 높은 부탁에 현응은 다소 난감했지만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히 해보겠
다고 답을 올렸다. 그리고 친분이 있던 승려 농산(聾山)을 보러 북한산 금선사(金仙寺)를 찾았
다. (☞ 북한산 금선사글 보러가기)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현응은 수락산(水落山) 내원암(內院庵)에서, 농산은 금선사에
서 각각 100일 기도를 올렸다. 70일이 막 지났을 때 현응은 선정(禪定)에 들어 이 땅의 백성 가
운데 다음 세상에서 제왕의 지위에 오를 만한 인물을 찾았다. 허나 적당한 인물을 찾지 못해 천
상 자신 또는 농산이 죽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래야 그 혼이 숙빈의 몸에 들어가 금수저의 진
정한 갑(甲)인 왕자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응은 서울에 온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 농산에게 편지를 보내
왕자로 다시 태어날 것을 청했다. 이에 농산은
'내가 나라의 위축(爲祝) 기도를 맡은 것으로 인(因)을 삼았는데,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결과가
벌써 돌아왔구려. 50년 동안 망건(網巾)을 쓰게 되었다니~!'
답을 하고 100일 기도를 마치고 죽
었다. 그리고 그날 밤 농산의 혼은 숙종과 숙빈의 꿈에 나타나 현몽했고, 이듬해 1694년에 왕자
로 다시 태어나니 그가 곧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이었다.
 
숙종은 고대하던 왕자가 태어나자 기쁜 나머지 용피(현응)에게 현응(玄應)이란 이름을 내리고,
파계사를 중심으로 사방 40리에서 징수하는 세금을 파계사에서 거두도록 했다. 허나 현응은 이
를 거절하고 '절에 선대(先代) 왕의 위패를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윤허해 주십시오~~' 청했다.
이에 숙종은 흔쾌히 윤허하고 기영각을 지어 선대왕의 위패를 봉안했다. 이로써 양반들의 해꼬
지를 막을 수 있었으며, 경내 앞에 하마비를 세워 양반들을 살살 기게 만들었다.

▲  응향각(凝香閣)

▲  산령각

여기까지가 현응과 숙종, 영조에 얽힌 설화이다. 허나 설화의 내용과 달리 숙종은 당시 장희빈(
張禧嬪)을 통해 나중에 경종(景宗)이 되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니 왕자가 없어 징징거렸다는 부
분은 맞지가 않는다. 또한 숙빈최씨도 잉태를 위해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숙종과 숙빈과
의 처음 만남에서 일을 치룬 상태였다. (장희빈이 숙빈의 임신에 뚜껑이 폭발해 매질하여 죽이
려는 것을 숙종이 간신히 구했음)
그리고 농산이 자신의 육신을 버리고 숙빈의 몸에 들어가 왕자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런 전설
은 북한산 금선사 전설에도 거의 똑같이 전해온다. 여기서는 파계사 승려인 용파가 서울로 올라
와 정조(正祖)에게 불교의 폐단을 시정해 줄 것을 건의했고, 이에 정조는 그것을 들어줄 터이니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탁을 받은 용파는 금선사를 찾아가 농산과 300일 기도를 올렸는데, 왕자로 태어날 이는 농산
밖에 없음을 알고 농산에게 왕자로 태어날 것을 청했다. 이에 농산은 금선사 목정굴에서 기도를
마치고 죽었고, 그 혼이 정조의 후궁인 수빈(綏嬪) 박씨의 몸에 들어가 왕자로 태어났다고 한다.
금선사의 전설과는 시절과 기도를 올린 날짜 수만 다르지 완전 똑같다. 아마도 파계사의 전설을
금선사가 그대로 모방한 듯 싶으며, 농산이 죽어 정말 왕자로 태어났는지는 그야말로 믿거나 말
거나이지만 이런 전설을 통해 왕실과 관련이 있는 절임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금선사는 정조 때 왕자의 탄생을 기원하던 곳으로 왕실 원찰의 하나였으며, 파계사 역시 현응대
사를 통해 왕실과 인연이 닿아 숙종과 영조의 안녕을 비는 원찰이 된 것이다. 그걸 마치 농산의
혼이 들어가 영조로 태어난 것처럼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숙종의 명으로 만든 기영각에는 선조(宣祖)와 덕종(德宗, 세조의 아들로 추존된 왕), 숙종, 영
조의 위패를 봉안했으며, 1979년 원통전 건칠관음보살좌상에 도금을 입힐 때 불상에서 영조의
도포와 1740년 9월 영조의 지원으로 탱화를 만들고 불상과 나한을 중수했다는 내용의 발원문(發
願文)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성전암에는 영조가 11세에 썼다는 자응전(慈應殿) 편액이 있어
영조가 어린 시절부터 이곳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음은 물론 이들이 영조를 위한 절이었음을 보
여준다.

숙종 이후 여러 차례 건물을 수리한 것 외에는 딱히 별다른 일은 없으며, 계속 몸집을 불려나가
지금은 법당(法堂)인 원통전을 중심으로 설선당, 적묵당, 기영각, 산령각, 내원, 응향각, 진동
루, 극락전, 설법전, 지장전 등 약 20여 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지장전과 극락전은 경내에
서 좀 떨어져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 영산회상도, 원통전, 영조대
왕의 도포(중요민속문화재 220호)를 비롯해 설선당과 산령각, 적묵당, 진동루, 기영각, 왕실원
당 관련 고문서 일괄(대구 지방유형문화재 74호), 소장 책판 일괄(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4호)
등 10여 점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그밖에 숙종이 하사한 병풍 2개와 구슬 2개, 석등, 하마비,
현응대사 부도를 위시한 조선 중기 부도 3기와 탑비, 영조임금나무가 있으며, 성전암과 대비암
등의 부속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번뇌도 쫓아오다가 떡실신할 정도로 팔공산 깊은 산자락 500m 고지에 둥지를 틀고 있으며, 속세
하고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고, 숲이 울창하고 맑은 계곡이 절 양쪽으로 흐르고 있어 공기도
청정하다. 또한 공양밥도 맛있기로 유명해 점심시간에 지나간다면 공양 1끼 하고 가길 권한다.
다만 입장료를 적지 않은 가격으로 징수하는 것이 이곳의 옥의 티이다.

파계사 종점에서 파계사까지는 넉넉잡아 20분 정도 걸리며, 파계재까지 1시간 30분, 성전암까지
50분 정도 잡으면 된다.

※ 팔공산 파계사 찾아가기 (2016년 4월 기준)
* 대구역 건너 정류장, 동대구역 북쪽 지하도, 큰고개역(2호선, 3번 출구), 아양교역(2호선, 2
  번 출구)에서 대구시내버스 101-1번을 타고 파계사 종점 하차
* 대구역앞, 옛 경북도청 건너, 복현5거리에서 대구시내버스 101번 이용
* 불로전통시장, 파군재3거리에서 101, 101-1번 시내버스 이용
* 4월부터 11월까지 주말마다 팔공3번 시내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다닌다. 이 노선은 칠곡경
  북대병원에서 동명, 송림사, 파계사, 부인사, 수태골, 동화사를 거쳐 갓바위까지 운행한다.
* 승용차편 (경내까지 진입 가능)
① 대구시내 → 서변동 / 불로동 → 지묘동(파계교교차로) → 파계로 직진 → 파계3거리 직진
   → 파계사 매표소 → 파계사

★ 파계사 관람정보 (2016년 4월 기준)
* 관람비 :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 주차비 : 승용차 2,000원 / 대형차 5,000원
* 관람/출입시간 : 일출부터 일몰시까지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7 (파계로 741 ☎ 053-984-4550)
* 파계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원통전 수미단(대구 지방유형문화재 73호)과 건칠관음보살좌상



♠  파계사 둘러보기

▲  파계사 설선당(設禪堂)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7호

진동루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3줄로 이루어진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비로
소 경내의 중심인 원통전 앞이다.
원통전 뜨락을 중심으로 원통전은 진동루와 마주보고 있으며, 뜨락 좌우에는 설선당, 적묵당이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법당 앞에는 흔히 있는 석탑(石塔)이 없는데, 탑을 두기에는 뜨락이
좀 좁긴 하지만 파계사에는 석탑 자체가 없다. 파계사의 지형이 돌을 올리면 깨지는 계란형 지
형이라 그런가..? 아니면 일부로 두지 않은 것일까?

설선당은 1623년에 계관이 지은 것으로 1646년과 1725년, 1762년에 각각 중건을 했고, 1922년과
1973년에 보수 공사를 벌였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ㄱ'자형 건물로 교육 및 참선의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요사(寮舍)처럼 툇마루도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가기에 좋다.


▲  파계사 적묵당(寂默堂)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9호

설선당을 마주보고 있는 적묵당은 절이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804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1620년
에 중건을 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없으며, 1695년과 1920년에 중건을 하고 1976년에 번와 공
사를 벌였다.
정면 6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설선당과 마찬가지로 'ㄱ'자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정
확히는 'Γ' 모습이다. 그러니까 설선당과 적묵당이 각각 'ㄱ, Γ' 구조가 된다. 설선당과 달리
단청이나 색이 입혀지지 않은 수수한 모습으로 참선 및 숙소로 쓰인다.


▲  파계사 원통전(圓通殿) - 보물 1850호

진동루가 있는 남쪽을 굽어보고 선 원통전은 파계사의 중심 건물인 법당이다. 관음보살을 봉안
한 건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5년에 계관이 중건하고, 1695년에 현응이 수리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축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깔고 둥근 기둥을 올렸으며,
불단은 영천 백흥암(百興庵) 극락전의 수미단(須彌壇)과 비슷한 형태로 화려함을 선사한다. 그
리고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를 씌웠다. 계단 양쪽에는 고된 세월에 지친 키 작은 당간지주(幢
竿支柱) 2쌍과 근래에 심은 뽀얀 피부의 석등 1쌍이 원통전 주변을 수식한다.


▲  원통전 수미단(須彌壇)에 봉안된 건칠(乾漆)관음보살좌상 - 보물 992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 보물 1214호

원통전 수미단에는 이 건물의 주인인 관음보살좌상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화유산 도난
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안타까운 현실을 고려해 그에게 방탄막같은 유리상자를 굴레처
럼 씌웠는데, 철창 안에 갇힌 새처럼 답답하긴 하겠지만 그의 신변을 위해서는 별 도리가 없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1979년 불상에서 발견된 복장발원문(腹藏發願
文)에는 1447년(세종 29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르면 고려 후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현재 파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높이가 108.1cm에 이르며, 머리에는 꽃모양을 붙인
수려한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다.

그의 작은 얼굴은 미소가 살짝 드리워져 편안한 인상을 풍기는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
러져 선의 미를 선사하며, 두 눈은 살짝 감겨져 명상에 잠긴 듯 보인다. 코는 작고 끝이 좀 두
툼하며, 다물어진 조그만 입에는 엷게 미소가 담겨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목에는 두툼
하게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귀는 다른 불상에 비해 좀 짧다.
오른손은 어깨 쪽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이 하여 손바닥을 위로 했다. 옷깃이 양쪽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 오른발 끝을
덮은 상현좌(裳懸坐)를 하고 있으며, 가슴 윗부분은 시원하게 트여 있다. 가슴까지 올라온 상의
(裳衣, 치마)를 주름잡아 끈으로 묶은 것과 손의 모양, 두터운 옷 등은 고려 후기 불상 양식에
서 많이 보이고 있으며, 영덕 장육사(莊陸寺)에 있는 보살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관음보살 뒤에 후광(後光)처럼 자리한 큰 그림은 부처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는 장면을 비단에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길이 3.4m, 폭 2.54m에 이르며 1707년에 숙종을 비롯
한 왕실의 지원으로 제작된 것으로 채색도 화려하고 색감도 매우 좋다. 18세기를 대표하는 불화
로 다른 영산회상도와 달리 부처의 광배는 신광(身光)만 나와있고, 부처의 옷에 전(田) 비슷한
무늬가 없으며, 부처의 오른쪽 발목에 꽃잎 장식이 없는 등 3가지의 유별난 차별화를 두었다.

관음보살이 앉아있는 수미단은 상,중,하대를 갖춘 조선 후기 일반적인 수미단으로 수호와 공양
을 상징하는 문양과 불교적 색채를 띤 길상문(吉祥紋)이 조각되어 있다. 원통전이 중건된 1605
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영천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과 비슷한 모습이다.


▲  원통전 내부 우측 부분 -
절과 부처를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이 꾸역꾸역 담긴 신중탱(神衆幀)과
민화(民畵)처럼 그려진 선명한 색채의 그림 2점이 걸려있다.

▲  원통전 내부 좌측 부분
원통전 좌측에 걸린 큰 그림은 삼장탱화로 천장(天藏), 지장(地藏), 지지(地指)보살을
담았다. 삼장탱화는 이 땅에만 있는 불화로 하늘과 땅, 지하를 다스리는
보살을 설정하고 그린 것인데, 18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  파계사 산령각(山靈閣)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8호

원통전 우측 석축 위에는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산령각이 자리해 있다. 그 모습이 너무
나 단촐하여 두 눈에 쏙 넣어 보기에도 부담이 없다.
원통전보다 1단계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은 산신(山神)을 봉안한 건물로 산신각의 다른 이름
이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겯처마의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물 천
정은 우물천정으로 되어있고, 내/외부에는 금단청(錦丹靑)을 입혀 올렸다.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山神幀)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에는 붉은 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산신을 중심으로 그의 시중을 드는 동
자(童子) 2명이 서 있으며,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고양이처럼 재
롱을 부린다. 산신 주변에는 학과 소나무, 구름 등이 그려져 신선 세계의 분위기를 그려낸다.


▲  파계사 기영각(祈永閣)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11호

산령각 우측에 자리한 기영각은 1696년에 현응대사가 왕실의 원당으로 세웠다. 영조 때는 매일
마다 그의 안녕을 빌었고 (그래서 영조가 오래 산 것은 아닐까?) 정조 때는 영조를 위해 기도한
건물이란 뜻에서 기영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영조 외에도 숙종, 선조, 덕종의 위패를 봉
안해 명실상부한 왕실의 원당이 되면서, 절에 해꼬지를 일삼던 양반과 유생들도 파계사 앞에서
는 살살 기었다고 한다.
정조가 내린 어필(御筆)을 보관하여 어필각(御筆閣)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그 어필은 전하지 않
으며, 1910년 이후 제왕의 위패가 모두 서울로 옮겨지면서 건물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 아미타
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한 공간이 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직지붕 건물로 늘씬한 처마선을 자랑하며, 덤벙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
고, 기둥 위에 주두(柱頭)의 장식이 번잡하여 조선 후기 공포(空包) 양식을 잘 보여준다. 가구
는 5량가로 우물 천정에 가려져 있다.


▲  기영각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제왕들의 위패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며 기영각의 주인이 된 아미타3존불은 아미타불을 중심으
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좌우에 앉아있다. 머리에 보관을 쓴 이가 관음보살이고, 초록색 머리
를 한 이가 지장보살(地藏菩薩)로 그들의 신변을 위해 유리를 씌웠다. 그들 뒤에는 붉은 종이에
금색으로 선묘(線描)된 약사후불탱화가 붉은 빛을 드러내며 아미타불의 뒤를 받쳐준다. 이런 그
림을 유식한 말로 홍지금니화(紅紙金泥畵)라고 한다.

▲  홍지금니화로 그려진 붉은 불화들

▲  삼세불(三世佛)이 그려진 불화와 독성탱
삼세불은 석가불과 약사불, 아미타불이다.


▲  석등(石燈)과 순백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목련

원통전과 응향각 사이에는 경내의 유일한 석물(石物)이라 할 수 있는 석등이 서 있다. 이 석등
은 높이가 2m로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하대석(下臺石)은 사라졌지만 8각 기둥과 앙련
(仰蓮)이 새겨진 상대석(上臺石), 불을 밝히던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蓋石)이 진하게 남아
있다. 기영각, 산령각과 견줄 정도로 오래된 존재이지만 아직까진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  설법전(說法殿)에 봉안된 석가불

파계사 경내를 동쪽에서 가리고 선 3층짜리 큰 건물이 있다. 건물 3층은 설법전으로 쓰이고 있
는데, 연병장처럼 무지 넓어 꾸역꾸역 넣으면 능히 2,000명도 가능해 보인다. 교육과 행사 공간
으로 북쪽 끝에 석가불이 봉안된 불단이 있으며, 내부는 은근히 시원하여 에어컨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건물 2층은 밥을 먹는 공양간으로 점심을 먹고자 들어갔더니 식사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청
소를 하고 나오는 아줌마 신도에게 물으니 공양시간이 끝났다고 그런다. 점심시간은 1시까지인
데 시간은 이미 1시 반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 이런 ~~!' 한숨을 몰아 쉬니 아줌마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그래서 서울에서
왔다고 답을 하니 멀리서 왔다면서 밥과 반찬이 남아있을 것이니 잠시 기다리라고 그런다. 그러
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뒷정리를 하고 있는 아줌마들에게 이야기를 하더니 같이 냉장고를 뒤적거
려 콩나물과 김치, 시금치, 박나물 등 다량의 반찬을 배식 장소로 가져온다. 밥통은 배식하는
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큰 그릇에 밥을 듬뿍 담아주고는 반찬통을 보이며, 먹을 만큼 가져가라고 그런다. 그
래서 양씬 담으니, 아줌마가 빙그레 웃으며 이 그릇에 배가 차겠냐면서 그보다 덩치가 큰 양은
냄비를 가져와 밥과 반찬을 죄다 담아서 준다. 물론 밥도 2주걱을 더 주었고 고추장과 참기름도
넉넉히 부어주었다.

그렇게 공양밥 1그릇을 마련하여 기분 좋게 점심 공양을 들었다. 밥과 나물을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절집 비빔밥으로 밥에 나물을 가득 비벼 먹으니 정말 꿀맛이 따로 없다. 처음에는 양이 적
어 보였으나 먹고 나니 상상을 초월하게 양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니 밥은 서서히 줄어들어 이내 1톨의 밥알도 없이 아주 깨끗한 그릇이 되었다.
밥을 먹고나니 아줌마들이 물까지 1컵 따라준다. 절에 들어올 때 입장료 때문에 기분이 좀 그랬
으나 아줌마 신도들의 후한 인심에 감격하여 섭섭한 기분도 바로 풀어졌다. 거액의 입장료는 공
양밥으로 충분히 본전을 뽑은 셈이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서울에서 온 단체 관광객 6명이 공양
간을 찾았는데, 공양시간이 끝았음에도 공양밥을 제공하여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었다.

공양을 마치자 부엌에 들어가 그릇을 씻고 포만감의 행복을 느끼며 밖으로 나온다. 졸음이 그새
살짝 밀려와 한숨 자고 가라며 희롱을 걸면서 눈이 좀 흐려지긴 했으나 아직 갈 길이 아직인 관
계로 과감히 뿌리치고 성전암으로 길을 향했다.


▲  찻집 앞에서 바라본 진동루 주변 (진동루 앞 주차장과 영조임금나무)

▲  지장전(地藏殿)

▲  경내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극락전

파계사에서 성전암으로 가려면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가는 길도 있지만 진동루 서쪽으로 난 길을
이용하는 것이 조금은 빠르다. 그 길목에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
된 지장전과 납골당(納骨堂)을 겸한 극락전(極樂殿)이 자리해 있는데, 경내와는 조금 거리를 두
고 있는 파계사의 변두리로 극락전이 가장 외진 곳이다.



♠  대비암(大悲庵)과 현응대사부도, 험준한 곳에 묻힌 산중암자
성전암(聖殿庵)

▲  대비암 입구

파계사에서 성전암 방면으로 5분 정도 가면 대비암이란 암자가 나온다. 이곳은 2000년에 지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절로 암자이긴 하지만 경내가 제법 넓으며, 법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
하여 선방과 요사, 돌로 만든 관음보살상과 석가여래상이 있다.
선방은 정면 7칸, 측면 4칸에 이르는 큰 규모이며, 뜨락에는 금잔디가 곱게 입혀져 괜찮은 별장
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
대비암은 법등(法燈)이 매우 짧은 절이라 딱히 오래된 볼거리는 없으나, 절 동쪽 산자락에 현응
대사 부도를 비롯한 조선 중기 석종형(石鐘形) 부도가 있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성전암으로
가는 산길에서도 진하게 바라보여 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는 것은 무지 쉽다.


▲  대비암에서 가장 높은 곳에 대웅보전이 자리해 있다.

▲  광배를 등에 지고 선 관음보살상
왼손에 꽃을 들며 고운 누님의 모습을 취했다.

▲  조그만 바위에 감실을 파고 들어앉은
석가불좌상


▲  대비암 동쪽 산자락에 있는 비석과 부도
대비암을 일으킨 승려의 탑과 비석으로 근래에 지어진 탓에 피부가 매우 곱다
.

▲  현응대사 부도를 비롯한 부도군

대비암 동쪽 소나무 숲에는 솔내음을 누리고 선 석종형 부도 4기와 비석 1기가 있다. 고된 세월
의 때를 간직한 이들은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현응대사를 비롯해 파계사를 빛낸 승려들
이 고이 잠들어 있는데, 이중에서 제일 오래된 것은 1648년에 조성된 원의(圓義)의 탑이며, 그
다음이 1658년에 지어진 전명(傳明)의 탑, 그 다음이 1701년에 만들어진 현응대사의 탑이다. 허
나 나머지 1기는 주인을 모르겠다.
부도 가운데 현응대사만 유일하게 비석을 갖추고 있는데, 그 비신(碑身)에는 '선종 현응당대사
지고현(禪宗 玄應堂大士之高現)'이라 쓰여 있다. 그런데 큰 승려를 뜻하는 대사(大師) 대신 대
사(大士)로 쓰인 것이 특이하다. 아마도 옛 사람들이 낸 신선한 오타거나 그의 활약을 기리고자
선비, 관리를 뜻하는 '士'를 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비신 윗쪽 가장자리에는 '성상 즉위(聖上 卽位) 37년~~~'이라 쓰여 있어 부도의 나이를
알려주고 있는데, 청나라 연호 대신 성상 즉위라고 쓴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비신 뒤쪽에는 그
의 생애와 업적이 간추려져 적혀 있으나 마멸된 부분이 많다. 팔공산의 조그만 절을 왕실의 원
찰로 크게 일으킨 현응의 마지막 흔적들이지만 아직도 비지정문화재의 서러움 속에서 살고 있으
니 참 이유를 모르겠다. 다른 부도와의 형편성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 흔한 석종형부
도의 하나라서 그런 것일까?


▲  세월의 주름과 기미가 깃들여진 현응대사 탑비

▲  성전암으로 올라가는 길

대비암에서 성전암으로 가는 길은 인간의 고되고 부질없는 인생을 축소한 것처럼 험난하다. 처
음에는 경사가 완만하고 계곡도 옆에 흘러 쏠쏠하게 시원한 바람을 건네니 금방 가겠구나 싶지
만, 가면 갈수록 경사가 각박해져 다시 한번 숨을 차게 만든다.
차량도 힘들어 하는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주차장이 나타나면서 길은 끝나고, 거의 60도 가
까이 이루어진 산자락에 펼쳐진 산길이 시작된다. 그 길이 얼마나 아슬아슬하던지 그야말로 기
겁을 하게 만들며 길도 가늘고 각박하다. 길을 오르다가 뒤를 돌아다보면 천길낭떠러지에서 있
는 기분처럼 두 눈이 놀라 어쩌지를 못할 것이다. 그만큼 길이 고되고 험준하다.
그 길을 10분 정도 타면 성전암이 마치 산속의 요새처럼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며, 절이 늘어뜨
린 계단을 오르면 소박한 모습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  성전암 일주문 - 하늘로 오르는 문 같다.

▲  성전암 경내와 현응선원 (커다란 기와집이 현응선원)

파계사에서 25분 정도 올라간 680m 고지에 조그만 암자 성전암이 자리해 있다. 경사면에 석축을
쌓고 터를 다진 이 절은 파계사의 부속암자로 영남 3대 선원도량의 하나로 명성을 날리던 곳이
다. 그래서 조선 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이 다녀갔는데, 그 이름도 낯이 익은 성
철(性徹, 1912~1993)이 1955년부터 10년 동안 절문도 나서지 않고 동구불출(洞口不出)했던 곳으
로도 유명하다. 성철 외에도 만공, 해월, 서옹 등도 다녀가 이곳의 가치를 드높였다.

성전암의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딱히 전하는 것은 없으나 현응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하며,
1695년에 중창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가 아닐까 싶다. 파계사와
더불어 영조의 탄생과 건강을 빌었던 곳으로 영조가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해주는 현응을 위해 11
세에 현응전(玄應殿)이란 현판을 써서 이곳에 보냈는데, 그 편액이 아직도 현응선원에 걸려있다.
그리고 영조 때 조성된 특이한 모습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조선 후기에 제작된 현응의 영정
과 벽화가 보존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모두 친견하지 못했다.
현응이 일군 성전암은 1915년 보령(保寧)이 중건했고 1955년 성철이 머물면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완전한 수도도량으로 만들어 영남 3대 선원도량의 하나로 키웠다. 허나 2007년 불의의 화
재로 현응선원이 불에 탔으며, 험한 지형에 공사 자재 운반도 쉽지 않아 간신히 공사를 진행하
여 2010년 3월 3일 낙성식을 가졌다. 이후 경내에서 주차장까지 일종의 모노레일을 만들어 물자
수송이 다소 수월해졌다.

절의 위치도 속세의 기운이 엄습하기 어려운 첩첩한 산중턱 가파른 곳에 매달린 듯 자리해 있고
번뇌도 오다가 졸도할 정도로 궁벽한 곳이라 참선의 공간으로는 아주 제격이다. 굳이 참선이 아
니더라도 속세에서 잠시 나란 존재를 지우고 싶을 때,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속세의
번뇌를 싹둑 정리하고 싶을 때 문을 두드려 안기고 싶은 산중암자이다. 제 아무리 천하의 번뇌
라도 이곳까지는 감히 오르기 힘들 것이다.

* 성전암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1206 (파계로741 ☎ 053-982-3600)


▲  높은 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보는 성전암의 위엄

경내에는 현응선원과 관음전을 비롯해 약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현응선원 주위로 건물이 몰려
있다. 현응의 영정과 벽화, 불상, 현응전 현판을 빼고는 딱히 오래된 것은 없으며, 그나마 현응
선원 주변은 참선시간에는 참선 공간으로 전환되어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참선 시간은 새
벽 3~5시, 8~10시, 14~16시, 19~21시이며, 그때는 관음전과 종무소 주변에만 머물 수 있다.

▲  성전암의 중심 건물인 현응선원
내가 갔을 때는 오후 참선시간이었음 (15시)

▲  꽃창살이 아름다운 관음전(觀音殿)과
쉼터로 조성된 조그만 정자

▲  현응선원 뒤쪽에 있는 조그만 동굴
현응대사가 참선했던 동굴로 전해진다.

▲  물로 가득한 석조(石槽)
이런 척박한 산중턱에 어디서 저렇게
많은 물이 나오는 건지 신기하다.


▲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현역에서 물러난 맷돌
문명의 이기(利器)가 이곳에 오기 이전까지 쓰였던 맷돌
지금은 석조 주변에서 때아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  관음전에 봉안된 관음보살상

성전암에서 언제나 관람이 가능한 건물은 현응선원 서쪽에 있는 관음전이다. 경내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건물로 문에 새겨진 꽃창살이 매우 아름다운데, 그 때문에 그런지 그 주변에는 꽃
이 없다. 아마도 꽃창살을 시샘해 다른 곳으로 가버린 모양이다.

관음전 불단에는 아주 조그만 관음보살이 가녀린 모습으로 서 있는데,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지
나치게 커서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불상이 자리를 커버할 정도로 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의 좌우에는 협시불 대신에 산신과 문수보살(文殊童子)로 보이는 작은 존재들이 그를 지키고
있으며, 그들 뒤에 관음탱화가 자리한다.


▲  성전암에서 바라본 천하
높은 곳에 자리해 있어 조망이 좋을 것이라 여기겠지만 산들이 첩첩히 시야를
막고 있어 보이는 범위는 저게 전부이다.

            ◀  성전암 5층석탑
경내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수수하게
생긴 5층석탑이 있다. 근래에 세워진 것으로 기
단(基壇)이나 탑신이 서로 비슷한 모습이라 지
식이 짧은 경우에는 6층탑으로 오인하기 쉽다.
탑 주변에는 잠시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닦여져 있으며, 여기서 보는 조망이 경내에서
보는 것보다는 조금은 괜찮다.

성전암에서 파계재를 가려면 이 탑을 거쳐서 가
면 되며, 탑 서쪽 나지막한 곳에 성전암에서 경
작하는 밭이 있다.

성전암은 하필이면 참선시간에 발을 들인 죄로 현응선원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 마음 놓
고 다리를 부릴 수 있는 곳은 관음전과 종무소, 5층석탑 주변이 고작이다. 석조에서 팔공산이
베푼 물을 한 바가지 마시니 몸 속에 낀 온갖 체증이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정자에 앉아 불만에 잠긴 두 다리와 발을 쉬게 하면서 잠시 머물렀는데, 구름과 비슷한 위치에
있고보니 완전 수미산(須彌山)이나 신선의 세계에 입산한 기분이다. 기분 같아서는 탑 주변 쉼
터에 더 머물며 현응선원 내부를 꼭 보고 싶지만 시간이 나를 압박하면서 아쉽지만 성전암과 작
별을 고하며 혼란한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했다.
내려갈 때는 파계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내려가 파계사 종점에서 대구시내버스 101번을 타고 동
대구역으로 이동해 동대구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성전암을 겯드린 대구 파계사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파계사의 점심 공
양과 보살 아줌마들의 후한 인심, 그리고 참선 도량의 품격을 지닌 성전암까지, 정말 배부른 대
구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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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龍淵寺) '
용연사 석조계단
▲  용연사 석조계단


 

겨울 제국(帝國)의 기세가 슬슬 꺾이던 3월 첫무렵에 대구 지역의 오랜 고찰, 용연사를 찾
았다.

서울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 달려 대구역에 도착, 대구지하철 1호선을 타
고 서쪽 종점인 대곡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용연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야 되는데 배차간
격이 참 아름다운 수준이라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다행히 대기 10분 만에 그곳으로 들어가
는 달성5번 시내버스(대곡역↔용연사↔현풍,유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옛 지기를 만난 듯, 반가운 표정을 지우며 그 버스를 타고 화원읍, 반송리를 지나 비
슬산 북쪽 골짜리에 자리한 용연사 주차장에 두 발을 내리니 곧바로 용연사 매표소가 흐뭇
한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엥 여기도 입장료를 받았었나?'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매표소
아줌마가 직업 본능에 따라 밖으로 나와 돈 받을 준비를 갖춘다. 그때 버스에서 같이 내린
아줌마 신도가 있었는데, 그의 뒤를 바짝 뒤쫓으니 나를 같은 신도라 여기고 아무런 제지
없이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매표소에 적힌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무려 1,500원..

매표소를 무사히 지나 7분 정도 오르면 비슬산 계곡물이 한데 모인 용연지(龍淵池)가 나타
나고 이어 일주문도 얼굴을 드러낸다.


♠  용연사 입문 (일주문, 천왕문)

▲  용연사 일주문인 자운문(紫雲門)

용연지를 지나면 수레들의 쉼터인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 중간에는 고색이 깃든 일주문(一柱
門)이 뿌리를 내렸는데, 4발 수레들에게 둘러싸여 약간은 뒷전으로 밀려난 인상이다. 다른 절은
거의 일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게 하지만 여기는 일주문 옆에 수레길을 내고 그로 인해 문이
옆으로 상당히 밀려난 형세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이 아닌 수레길로 경내를 오간다.

절의 일주문은 보통 일주문이라 불리지만 이곳 일주문은 특별히 붉은 구름이란 뜻의 자운문이란
어여쁜 이름을 지니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지붕은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하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 부분이 현저히 커서 공포와 지붕 등 문의 윗부분이 문 높이의
거의 60%를 차지하고 있어 다소 육중해 보인다. 지붕을 받치는 문 기둥은 그런데로 굵직함을 지
녔지만 커다란 윗도리 때문에 오랜 세월 어찌 저들을 받쳤을까? 걱정이 들 정도이다. 공포와 평
방(平枋)에는 단청이 채색되어 있으나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퇴색했다.

▲  적멸보궁, 석조계단 입구

▲  경내로 인도하는 극락교. 다리를 건너면
용연사 경내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용연사 문화유산 해설사가 머무는 관광안내소가 있다. 내가 나타나니 해설사
아저씨가 모습을 비추며 용연사 안내문을 하나 건네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그런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며 길을 재촉하니 길은 이내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로 가면
석조계단(적멸보궁), 오른쪽은 경내로 우선은 경내부터 살피기로 하고 오른쪽으로 갔다.

경내 직전에는 계곡에 걸린 극락교(極樂橋)란 다리가 있다. 여기서 절의 주문에 따라 속세의 온
갖 기운과 번뇌를 내려놓고 경내로 임하면 되는데,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천왕문(天王門)
이 나타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온몸을 가리며 보수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
서 천왕문은 이용하지 못하고 그 옆으로 우회하여 들어갔다.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그들의 검문을 거치면 바로 2층 규모의
안양루(安養樓)가 나온다. 안양루는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
(四物)이 담겨져 있는데, 보광루(寶光樓)라 불린 것을 근래에 안양루로 이름을 갈았다.


▲  천왕문 밑에 자리한 둥그런 석조

▲  절에 왠 악어?

천왕문 밑에는 둥그런 석조(石槽)가 있는데 샘물 대신 먼지만 가득한 거의 죽은 샘터이다. 그런
데 그런 석조 옆에는 생뚱맞게도 악어상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자비(慈悲)와 평화를 강조하는
절집에 왠 무시무시한 악어상이 있는 것일까? 악어와 관련된 불교 설화는 딱히 들어본 적도 없
고. 그렇다고 용연사 주변에 악어 서식지나 관련 설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
도나 소승불교가 전파된 동남아에 악어가 있으니 그곳에 혹 관련 설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
중에 해설사에게 문의를 했다.
그 답변에 따르면 이 악어상은 어느 신도의 집 정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몇년 전에 절에
기증을 했는데 마땅히 둘 데가 없어서 이 자리에 두었다는 것이다. 사연이 생각 외로 정말 엉뚱
하다. 신도가 준 것이니 차마 안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내에 두기에도 조화롭지 않으니 혹
여 찾아올지 모르는 화마(火魔)와 나쁜 기운이나 막으라고 천왕문 밑에 둔 듯 싶다.

그럼 여기서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용연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안양루의 뒷모습

▲  극락전과 뜨락

※ 비슬산 북쪽에 포근히 안긴 고찰, 비슬산 용연사(琵瑟山 龍淵寺)
팔공산(八公山)과 더불어 대구를 크게 보듬은 비슬산(琵瑟山)에는 유서 깊은 고찰(古刹)이 많은
데, 그중에서 북쪽 계곡에 안긴 용연사가 단연 갑(甲)이다. <유가사는 을(乙) 정도>

용연사는 후삼국시대의 한복판인 912년<신라 신덕왕(神德王) 원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
했다고 전한다. 보양은 청도에 운문사(雲門寺)를 세운 인물로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불법을 배우
고 귀국하는 길에 서해바다 용이 용궁(龍宮)으로 초청해 그를 대접했다.
용은 자신의 아들인 이목(璃目)을 딸려 그를 호위케 했는데, 마침 나라에는 가뭄이 극성이라 보
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설화이지만 그 연유로 절 이름
에 용(龍)이 들어간 것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까지 내세우며 창건설화를 그럴싸하게 지어냈지만 정작 창건 이후 조선 초기까
지 이렇다 할 바퀴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다만 극락전 앞에 고려 때 지어진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고려 때부터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띔해준다.

절의 사적(事績)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419년으로 그때 승려 천일(天日)이 망해가던 용
연사의 모습이 슬픈 마음이 솟구쳐 크게 중창을 했다고 한다. 허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603년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인잠(印岑)과 탄옥(坦玉), 경천(敬天)에게 명해
다시 짓도록 했다. 이때 지은 건물이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해 5동이었고 거주하는 승려는 20여
명이었다고 한다.

1650년 어느 날 저녁, 난데없이 별똥이 떨어져 대웅전과 요사가 불에 탔으며, 이듬해 일언(一彦
)과 학신(學信)이 동상실(東上室)과 서상실(西上室)을 세웠다. 1653년에는 홍묵(弘黙)이 대웅전
을,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세웠고, 이듬해에 일주(一珠)가 만월루(滿月樓)를 세웠으며, 1661년
까지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 관음전(觀音殿), 반상료(返常寮), 명월당(明月堂), 향
로전(香爐殿), 약사전(藥師殿), 두월료(斗月寮) 등을 지었다. 또한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18세
기 초까지 사리각(舍利閣), 천왕문, 응진전, 영류당(詠流堂), 일주문, 명부전 등이 건립되어 무
려 200칸의 규모를 지닌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이야 팔공산 동화사(桐華寺)가 대구 지역
사찰의 으뜸이지만 그때는 오히려 동화사가 용연사의 말사(末寺)였다.

1673년에는 임진왜란 때 통도사(通度寺)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옮긴 부처의 사리를 다시 통도
사로 가져오면서 그중 1과를 용연사에 봉안하고 사리를 담을 사리탑(舍利塔)과 석조계단(石造戒
壇)을 만들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은 1676년(숙종 2년) 권해(權瑎, 1648-1723)가 쓴 '파사교주
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 이란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1708년 사리탑을 중수했고, 1715년 찬화(粲和)가 대웅전과 여러 건물을 중수하고 단청(丹靑)을
새롭게 입혔다. 중수를 마치자 1722년 홍문관(弘文館) 교리(狡吏)인 임수간에게 청해 중수비를
세웠는데, 그 중수비에 의하면 당시에는 부속 암자로 명적암과 은적암, 보리암과 법장암이 있었
으며, 절 계곡에 용문교과 천태교 등 5개의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허나 1726년 1월 불이 나
서 대웅전과 다수 건물이 소실되었고, 1728년에 중건을 했는데, 이때 법당 이름이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갈린 듯 싶다.


이렇게 대구 굴지의 사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용연사는 1911년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
으로 동화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면서 처지가 서로 뒤바뀌고 만다. 이후 1934년 석가사리
탑을 수리하면서 탑 주위에 석주(石柱)를 둘렀으며, 그 이후 여러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영산전과 삼성각, 안양루, 사명당 등 약 16~17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
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로 지정된 석조계단과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과 복장
유물 등 보물 2점과 3층석탑과 극락전 등 지방문화재 2점을 지녔다. 그리고 부속 암자로는 은적
암(隱寂庵)과 명적암(明寂庵), 광선암(廣仙庵)을 거느리고 있다.

대구의 남쪽 지붕인 비슬산 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틀었고,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기
운 또한 청정하며, 티끌 없이 맑은 계곡이 경내를 가로지르며 청정한 기운을 돕는다. 시내와도
멀리감치 거리를 두고 있고, 산새의 지저귐과 바람의 소리가 잔잔하게 경내를 감싸며 산바람에
흥분한 풍경물고기가 그윽한 풍경소리를 베풀어 산사의 고즈넉함을 더해준다.

용연사에서 비슬산을 거쳐 유가사나 비슬산휴양림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정상까지는 4시간 정
도 걸린다.

※ 용연사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달성2번,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탄다. 달성2번은 지선
  이 무지막지하게 많아서 반드시 용연사행(1일 8회)을 확인하고 타야 된다. 잘못탈 경우 엉뚱
  한 곳으로 강제투어를 당할 수 있다.
  달성5번은 용연사를 경유하여 현풍, 유가사(瑜伽寺)까지 다니며 1일 10회 다닌다. 또한 주말
  과 휴일에는 600번 버스 일부가 '대곡역~용연사~비슬산휴양림~유가사' 구간을 1일 10회 운행
  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 일주문에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공짜)
① 구마고속도로 → 화원옥포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반송리 → 용연사
② 대구시내 → 화원 → 간경교에서 좌회전 (또는 화원에서 명곡지구를 거쳐 명곡로 경유) →
   반송리 → 용연사

★ 용연사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500원 (20인 이상 단체 1,000원) / 청소년 1,200원 (단체 800원) / 어린이
  800원 (단체 400원)
* 용연사 점심공양은 맛이 제법 좋다. 공양시간은 12~13시이며, 음력 초하루나 석가탄신일, 기
  타 절 행사가 있을 때는 연장될 수 있다.
* 용연사 관광안내소에서 문화유산해설사의 용연사 이야기를 들어보자.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10시부터 18시까지(겨울 17시) 근무하며, 설과 추석 연휴에는 쉰다. (근무 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82 (용연사길 260 ☎ 053-616-8846)


♠  용연사 극락전 주변 둘러보기

▲  요사채와 삼성각

경내 중앙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이 뜨락을 굽어보며 좌우로 삼성각과 영산전을 거느리고 있
고, 뜨락에는 3층석탑이 서 있다. 뜨락을 중심으로 극락전과 종무소, 요사채, 안양루가 포근히
감싸는 형태로 법당 하나에 탑이 하나인 이른바 1금당 1탑 형식의 가람배치를 취했다.


▲  용연사 극락전(極樂殿)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41호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53년에 지어졌다. 1726년 화재로 무너진 것
을 1728년에 중건했는데, 이때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간판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규모는 그리 크진 않지만 좌우로 반토막 크기의 영산전과 삼성각을 거느리고 있어 중심 건물로
서의 기품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건물의 가운데 어칸을 협칸보다 넓게 잡았으며,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를 얹히고 전면에 운각과 용을 장식해 아름다움을 끌어올렸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 - 보물 1813호

극락전 불단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을 거느리며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이들은 1655년에 당시 유명한 조각승이던
도우(道祐)가 만든 것으로 근래에 아미타불 뱃속에서 후령통과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 복장전
적(腹臟典籍) 등 발원문 8점과 후령통 3점이 쏟아져 나왔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불상 조성 시기와 조성 주체, 제작자 등이 속시원히 밝혀져 17세기 불상 연
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1762년에 작성된 중수개금기까지 딸려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올해(2014년) 1월 20일 아미타불과 복장유물이 한 덩어리로 국가지정 보물 1813호로 단
번에 승진되었다.
 
보물의 지위를 누린 아미타불과 좌우 보살의 표정에는 자비로움이 가득하여 속세살이에 지친 중
생을 위로하며 그들 뒤에는 1777년에 제작된 영산회상도가 병풍처럼 자리한다.


▲  용연사 3층석탑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28호

극락전 뜨락에 서 있는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고려시대 탑
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옥개석 받침이 4단인 것과 옥개 낙수면이 짧고 추녀가 얇
은데 반해 받침이 높은 형식으로 이들을 통해 신라 탑에서 변질된 고려 탑으로 여겨진다.
탑 높이는 3.2m로 근래에 보수를 벌여 깨지거나 부실한 부분을 보충했으며, 장대한 세월의 때가
곳곳에 역력하다.


▲  빛바랜 목조 구시

극락전 곁에는 나무로 만든 길쭉한 목조 구시가 누워있다. 이 구시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나무
통으로 쌀을 담거나 법회나 행사 때 공양용으로 쓰였는데, 왕년에는 거의 100명 분의 밥을 담았
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밥 대신 먼지만 가득하니 사람이든 물건이든 뒷전
으로 밀려난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구시의 체면도 살려줄 겸, 그를 깨끗히 손질하여
옛날 공양 체험 이벤트를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  삼성각 밑에 누운 두꺼비상의 위엄
조각 수법이 아까 전 악어상과 비슷하다. 아마도 악어상을 기증한 신도가
악어와 같이 넘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  선열당(禪悅堂)이라 불리는 요사(寮舍) 정면
승려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으로 공양간과 넓은 방을 갖추고 있다.
점심공양은 요사 뒤쪽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는 심검당(尋劍堂)

▲  용연사 영산전(靈山殿)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은 석가3존불과 16나한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지어졌다.

▲  영산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좌우를 협시한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우리에게도 무척 친숙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 봉안된 그림들
오른쪽부터 산신할배의 산신탱,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독성할배의
느긋함이 돋보이는 독성탱


♠  용연사 명부전 주변, 그리고 점심공양

▲  요사에서 명부전으로 넘어가는 불이문(不二門)

용연사는 중심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석조계단 등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구역
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명부전 구역은 경내
의 중심인 극락전 구역 남쪽에 있는데 요사 옆구리와 불이문을 지나 청운교(靑雲橋)란 다리를
건너면 바로 나온다. 이 구역에는 명부전과 사명당, 독산각이 자리해 있다.


▲  불이문에서 바라본 명부전 구역
명부전을 비롯한 건물 3동이 조촐하게 구역을 이룬다.

▲  용연사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 판관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다. 처마 밑에는 어느 갑술년(甲戌年)에 쓰인 공덕기(功德記)와 관음계(觀音契) 현판이 걸
려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
온화한 미소를 드리우며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헌신하는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해 나란히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  문을 꽁꽁 걸어잠군 사명당(四溟堂)

명부전 곁에 높이 축대를 쌓고 황토색 담장을 걸치며 들어앉은 사명당은 절의 가장 어른인 주지
승이 머무는 주지실이다. 원래는 관음전(觀音殿)이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이후 절 중창을 지시
한 사명대사(四溟大師)를 기리고자 사명당이라 했다. 사명당 곁에는 독산각(獨山閣)이라 불리는
작은 건물이 있으며, 이들 건물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명부전에서 바라본 청운교와 요사채

명부전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극락전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언 13시, 1시간 가까이 경내를 방황
하니 시장기가 가득 피어올라 나를 괴롭힌다. 경내에는 적막한 산사의 이미지를 지키듯,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공양간이 있는 요사 뒤쪽으로 들어가니 그 안은 사람들(아줌마와 할머니가
대부분)로 북새통을 이루어 썰렁한 바깥과 완전 대조를 보인다. 그 시간 절에 발을 들인 사람들
2/3 이상이 요사에 있었다고 보면 될 듯 싶다.

점심시간은 13시까지인데, 사람들이 많아 아직도 공양(供養)을 제공하고 있었다. 요사로 들어가
일반인도 공양이 가능한가 물으니 당연히 그렇다며 한숟가락 들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기쁜
표정을 띄며 신발을 벗고 요사로 들어가 공양 행렬에 동참했다. 약간 붉은 양파를 비롯한 갖은
채소가 버무려진 그릇에 주걱으로 밥을 담아주는데, 많이 달라고 청하니 2주걱을 더 준다.
밥과 함께 숭늉 1그릇과 떡을 하나씩 거머쥐고 마땅한 자리를 찾았으나 사람들로 미어터져 두
다리를 편히 할 자리가 마땅치가 않았다. 간신히 좁게나마 자리가 하나 생겨 그곳에 낑겨 앉아
열심히 점심 공양에 임했다.


▲  용연사 점심공양의 위엄

공양밥은 다양한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이다. 붉은 양파와 콩나물, 시금치, 고사리 등의 나물
이 흰쌀밥과 고추장과 조화를 이루며 어엿한 비빔밥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용연사 공양밥은 공양간 아줌마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담겨 제법 맛이 좋았다. 지금까지 섭취한
공양밥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치켜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반대로 공양밥 최악의 종
결자는 여기서도 그리 멀지 않은 경산 갓바위(선본사) 공양이었다. 절 나들이에서 공양을 하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지만 안타깝게도 중생들에게 널리 공양을 펼치는 절이 그리 많지 않다.

밥그릇을 아주 깨끗히 비우고, 숭늉과 떡을 먹고 나니 포만감의 행복과 식곤증이 나를 감싸고
돈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5분 정도 머물렀으나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와 자리를 내주고 방을 나섰다. 동화사나 갓바위처럼 그렇게까지 유명한 절도 아닌데 사람(특히
신도들)이 많은 걸 보아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어 문의를 하니 음력 초하루라고 그런다.
자리를 뜨면서 공양할 때 발견하지 못한 된장국을 1그릇 섭취하고 숭늉도 2그릇이나 더 마신 다
음 내가 먹은 그릇을 목욕시키고 밖으로 나왔다.


♠  용연사 석조계단, 적멸보궁

▲  적멸보궁 입구

▲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계단

기분 좋게 점심공양을 마치고 용연사의 나머지 부분인 석조계단(적멸보궁)으로 이동했다. 적멸
보궁 입구에는 일주문을 닮은 문이 서 있는데 '비슬산 용연사 적멸보궁(琵瑟山 龍淵寺 寂滅寶宮
)'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지나 잘 다듬어진 계단을 한발짝씩 오르면 초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적멸보궁과 비슬
산으로 갈린다. 초소를 지나니 아까 문화유산 해설사(이하 해설사) 아저씨가 초소에서 나와 구
경 잘했냐고 묻는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금세 표정을 바로 하고 잘 둘러
봤다고 답을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주마간산처럼 보고 가는데 반해 1시간 이상 꼼꼼히 본
것 같다며 칭찬의 말을 건네면서 적멸보궁을 안내해주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그를 따라 적멸보
궁으로 들어갔다.

▲  용연사 주변을 정비한 기념으로 세운 정비불사공덕비(整備佛事功德碑)

▲  시원스런 지붕의 적멸보궁 정문 -
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용연사 3대 구역의 하나인 금강계단 구역은 높이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적멸보궁과 향로전을 두
고 가장 높은 뒷쪽에 자리를 다져 석조계단과 사리탑을 세웠다.

석조계단을 가리고 선 적멸보궁(이하 보궁)은 극락전에 버금가는 지체 높은 건물로 보통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앞에 둔다. 사리탑에 불사리(佛舍利)가 있으므로 적멸보궁 불단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그냥 빈 자리로 둔다. 살짝 휘어진 2개의 활주가 지붕 추녀를 받들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덩어리가 매우 섬세하다. 보궁 어칸(가운데 칸) 앞에는 돌계단이 놓여
있는데, 그 계단은 법회(法會) 때 절의 고참 승려만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계단 외에는 보
궁으로 접근하는 계단이 쉽게 보이질 않아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무심코 그 계단을 오르
락거린다. 허나 건물 양쪽에 보궁으로 가는 계단이 있으니 가운데 계단을 오르는 실례는 범하지
않도록 한다. 물론 제지하는 사람도 없고 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가면 어디 법을
지키라는 명언처럼 예의는 되도록 지키는 것이 좋다.


▲  적멸보궁 내부
불단에는 불상이 없고, 대신 뒤에 유리창을 내어 석조계단과 사리탑이 보이게끔 했다.

▲  적멸보궁 곁을 지키는 향로전(香爐殿)
적멸보궁을 관리하는 건물로 승려의 거처로 쓰인다.

▲  적멸보궁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건물들

적멸보궁 좌우에는 고작 1칸에 불과한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이들 건물은 따로 이름이
없다고 하며, 사리탑과 석조계단을 관리하던 승려의 숙소나 예불을 하던 공간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굳게 문을 봉한 채, 적멸보궁의 좌우를 호위한다.


▲  용연사 석조계단(石造戒壇) - 보물 539호

적멸보궁 뒤에는 용연사의 상징인 석조계단이 자리해 있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고도 하며,
네모난 기단에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을 심어 부처의 불사리를 봉안했다. 계단(戒壇)은 흔히 말
하는 오르락 내리락 계단이 아닌 수계의식(受戒儀式)을 거행하던 곳으로 통도사(通度寺) 금강계
단이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도사 사리탑을 파괴하자 사명대사가 사리를 수습하여 금강산으로 가져가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어찌하면 좋을 지를 문의했다. 서산은 본래 있던 곳에 마땅히
되돌려 줘야 한다고 답을 하니, 사리함 하나는 통도사에 두고 만약을 위해 다른 하나는 제자 선
화(禪和)에게 주어 태백산 보현사(어딘지??)에 봉안토록 했다. 허나 그때는 아직 경상도 지방이
안정되지 못했고, 선조(宣祖)의 명으로 왜열도(倭列島)에 사신으로 가게 되면서 사리를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임시로 두었다.
그 이후 사명이 입적하자 제자 청진(淸振)이 각림사에 봉안한 사리함을 용연사로 가져와 모시면
서 신도들과 상의하여 사리탑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서산과 사명의 뜻을 모두 받들어 사리 2과
중 1과를 통도사로 보내고 1과만 용연사 북쪽에 봉안했으며, 사리탑은 1673년에 완성되었다.

이 탑은 2단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큼직한 네모난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얇은 원형 괴임돌을
2개 포개 석종형 사리탑을 올렸다. 사리탑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졌다가 중간을 지
나면서 좁아지는 것이 영락없이 범종을 닮았는데, 탑 윗부분에는 구슬 무늬를 1줄로 두르고 겹
으로 된 연꽃 무늬 위에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새겼다. 2단의 기단 중 윗층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면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4면을 8칸으로 나눈 뒤, 칸마
다 팔부신장(八部神將)을 새겼다. 아래 기단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장대석으로 마감했다.

기단 네 모서리에는 원래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여러 차례 도난을 당해 지금은 경내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며, 기단 주변으로 12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8각으로 깎은 돌을 그 중간에 끼
워 연결했다. 난간에 쇠창살을 꽂은 것은 1934년에 탑을 보호하고자 설치했으나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계단 앞에는 상석(床石)을 두었고, 그 옆에 조금 비뚤어진 석등(石燈)은 계단에 난간을 달았을
때 같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계단 주변에는 황토 담장을 둘렀고, 계단의 보호를 위해 계단
앞쪽에 보호철책을 두르면서 접근이 어렵게 되었다. (석가탄신일에만 개방한다고 함)

이곳 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과 더불어 이 땅의 대표적인 계단으로
꼽히며, 계단에 얽힌 이야기처럼 정말 사리가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수 차례 도굴 시도가
있었다고 하니 도굴이 되었을 가능성도 제법 있다고 한다.


▲  석조계단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석조계단비 - 비석 이름은
'사바교주 석가여래 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이다.

▲  적멸보궁 부근에 터를 닦은 승탑 형제들

향로전 뒤쪽 담장 너머에 조선 후기 승탑 7기가 1열로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들은 죄다
석종 스타일로 별도로 비석 2기가 서 있는데, 하나는 송파 각민(松坡覺敏, 1596~1675), 다른 하
나는 동운 혜원(東雲慧遠, 1637~1702)의 비석이다. 승탑의 주인이나 승탑 이름에 대해서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며, 여기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산자락에도 조선 후기 승탑 5기가 숨겨져
있다.

적멸보궁과 석조계단을 둘러보면서 해설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궁금한 것은 정말 은하
계에 널린 별만큼이나 많은데 정작 질문 거리가 생각이 안난다. 머릿 속에서 간신히 질문 거리
를 긁어내어 물어보면서 의문 거리를 일부나마 해소했으나 머리가 장식용이라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해설사는 제법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초청 강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통
도사에서 해설사를 하다가 용연사로 넘어왔는데 각 절마다 익혀야 될 내용이 너무 많아서 힘들
다고 한다. 간신히 용연사의 모든 것을 꿰었는데. 다른 절로 근무지가 바뀌면 그 절에 대해 처
음부터 공부를 해야 된다. 또한 관람객들이 대충 둘러보고 가는 게 다반사라 너무 사물을 볼 줄
모른다며 따끔한 충고도 건넨다. 상황이 이러니 질문을 건네는 사람도 거의 없을 정도이며, 이
렇게 자신을 귀찮게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대구시티투어버스가 들어왔다. 가이드 2명이 양이(洋夷) 여자 관광
객 2명을 데리고 와서 석조계단을 구경시켜주고 해설사와 인사를 하며 시내로 나갔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더 머물러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한다. 이곳에
발을 들인지 벌써 4시간이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2시간 남짓 있다 갈려고 했는데, 시간
도 참 빠르다. 게다가 부산(釜山)에도 늦지 않게 들어가야 되는 터라 슬슬 떠날 채비를 했다.
속세로 나가는 버스가 20분 뒤에 있길래 매표소 밑 주차장까지 가려고 했으나 마침 해설사와 안
면이 있는 신도 아줌마 3명이 수레를 끌고 속세로 나가려고 하자 해설사가 그들에게 나를 태워
달라고 부탁을 넣으면서 그들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렇게 짧지만 용연사와 해설사와 작별을
고하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갔다.

나를 태워준 아줌마 신도는 모두 대구 사람<1명은 인천 사람으로 대구로 시집 왔음>이다. 수레
를 끌고 온 아줌마는 시지동에서 왔는데, 그들은 절에서 가져온 고사떡과 사과를 나에게도 아낌
없이 나눠주었다.
화원으로 나와서 아줌마 2명과 작별을 고하고 인천 출신 아줌마 신도와 대구시내버스 655번을
타고 대곡역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환승하여 칠성역에서 나머지 작별을 고했다.

이날은 원래 팔공산 부인사(夫人寺)를 가려고 했으나 교통이 좋지 못해 용연사로 바꿨다. 허나
용연사에서 맛있는 점심공양도 먹고 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궁금했던 부분을 해소했으며(해
소하면 뭐하나? 다 까먹는데) 아줌마 신도의 도움으로 쉽게 속세로 나왔고, 그들에게 떡과 사과
를 나눠 받는 등, 푸짐한 인심을 느꼈다. 부인사로 갔으면 아마도 이런 것을 누리진 못했을 것
이다. 용연사로 가게 된 것도 다 이런 인연들과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우라는 하늘의 지극한 뜻이
었던 것 같다.
용연사에게 나는 잠깐 스치고 사라지는 존재이고, 내 입장에서도 용연사는 1번 아니면 2번 정도
스치는 그런 장소이지만, 지금까지의 사찰 나들이 가운데 제법 인상과 정이 깊었으며, 여러 좋
은 경험과 넉넉한 인심을 체험했던 것 같다. 용연사에서 겪은 그 추억과 인연을 고이 간직하며
다음의 인연을 애타게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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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2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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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원의 떠오르는 성지 ~ 달성 도동서원 (다람재, 이노정)

 


♠  대구 현풍(玄風) 나들이 ~ 도동서원, 이노정 ♠
도동서원 담장
▲  도동서원 담장
 


여름의 제국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7월 중순, 경북의 중심지인 대구(大邱)를 찾았다. 대구에서
현풍(玄風) 지역 투어를 같이 할 여인네와는 북부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하여 동서울터미널에서
구미행 직행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바로 대구 북부로 가는 차편이 없음)
피서객들로 미어터지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 경주 방면 버스는 대기시
간이 무지 긴데 반해 구미행 버스는 무척이나 한산하다.

피서차량으로 여름 몸살을 앓는 중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여
구미까지는 무려 4시간이나 걸렸다. 구미에 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대구 북부행 직행버스를 잡
아타고 오후 2시에 북부정류장에 도착했다. 그곳에 이르니 만나기로 한 여인네는 그의 4발 수
레를 끌고 일찌감치 나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차에 오르니 현풍에서 왔다는 그의 친구도
같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셋이서 현풍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지~~

아직 다들 점심을 못먹은 터라 현풍 직전 달성1차공단에서 그들의 단골 식당에 들어가 간단하
게 뼈다귀해장국을 먹었다. 그렇게 점심을 채우고 그의 친구가 만든 과자를 후식으로 배의 나
머지 공간까지 꾸역꾸역 채우니 포만감의 행복에 쓰러질 지경이다.

잠시 현풍터미널에서 들려 부산으로 가는 직행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1번째 답사지인 도동서원
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 여인네는 고향이 달성군 구지면이라 현풍과 구지 일대를 훤하게 꿰고
있어 나들이에 그리 불편은 없었다.

현풍에서 도동서원까지는 성하리와 자모리를 거쳐 낙동강변을 따라가다가 대니산(戴尼山, 408
m) 북쪽에 둘러진 험한 고갯길 다람재를 넘어야 된다. 다람쥐가 연상되는 다람재는 그 귀여운
이름과 걸맞지 않게 강원도의 고갯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험준하기 그지 없어 눈이 오
면 아예 통행이 불가능하다.
구불구불의 극치를 누리며 힘겹게 고개를 오르니 드디어 전망이 확트인 고개 마루에 이른다.
고개 정상에는 고개를 오르느라 지친 나그네와 수레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조촐하게 공
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선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을 비롯하여 도동서원 주변과 강 건너로
고령군 개진면이 시원스레 두 눈에 다가와 조망도 괜찮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마음까지 여
유로워지는 이런 곳에 서면 멋드러지게 시(詩) 한 수 읊어야 폼이 나겠지만 그럴 실력이 되지
못해 그냥 쉽게 감탄사만 연발했다.


▲  다람재 정상에 세워진 6각형 정자
정자에 오르면 낙동강을 비롯하여 도동리, 강 건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오사리, 옥산리 지역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온다.

▲  다람재에서 굽어본 천하 (1)
강 왼쪽은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리로 기와가 씌워진 도동서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강 오른쪽은 고령군 개진면이다.

▲  다람재에서 굽어본 천하 (2)
장마로 누런빛을 드러낸 낙동강 너머의 비옥한 평야는 고령군 개진면 옥산리

▲  뭉글뭉글한 다람재 표석
도동서원을 찾는 답사객이 늘자 대구시에서는 서원으로 가는 길목의 하나인 다람재를
정비하고 고갯 마루에 다람재 표석과 정자를 갖춘 아담한 쉼터를
만들어 그들의 발길을 배려했다.

▲  김굉필(金宏弼)의 시 한 수가 담긴 표석

 <
길가의 소나무(路傍松)>
  一老蒼髥任路塵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어
勞勞迎送往來賓  괴로이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  찬 겨울에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經過人中見幾人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는가


다람재에서 비록 보이는 범위는 좁지만 눈 아래로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며 대니산과 낙동강이
제공헌 선선한 기운을 즐기다가 구비구비 고갯길을 내려와 도동서원을 찾았다. 서원 주차장에
이르니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먹구름이 조금씩 빗방울을 뿌려 천하를 적히기 시작한다.
서원을 둘러보기 전에 잠시 도동서원의 내력을 흔쾌히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서원 건축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서원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道東書院) - 사적 488호
(강당과 사당, 담장은 보물 350호)

▲  다람쥐와 서화 무늬
자모에서 도동으로 넘어오는 다람재란 고개 이름이 이 다람쥐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하늘을 향해 꼬랑지를 흔들며 열심히 올라가는
모습은 조정으로의 출세를 염원하는 유생들의 욕심이 담겨진 것이다.


대구의 대표적인 서원인 도동서원은 앞에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대니산을
배경으로 삼아 자리해 있다. 이 서원은 1568년 조선5현(朝鮮五賢)의 하나로 꼽히는 한훤당 김굉
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유림(儒林)에서 현풍 동쪽 비슬산(琵
瑟山) 자락에 세웠다. 여기서 조선5현이란 정여창(鄭汝昌), 이황(李滉), 조광조(趙光祖), 김굉
필, 이언적(李彦迪)을 일컫는다. 1573년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정식으로 사액(賜額)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파괴되었다.

1605년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유생들의 후원을 받아 김굉필의 무덤 밑인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재건하고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했다. 김굉필의 명성 탓인지 유생
들이 보낸 후원금이 상당하여 제법 많은 돈이 남았다고 하며, 정구는 그 돈을 다른데 쓰지 않고
죄다 서원을 꾸미는 데 쏟아부었다고 한다. (차라리 왜란 이후 어렵게 살던 백성들을 도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1607년 공자(孔子)의 도가 동쪽에 이르렀다는 뜻에서 도동서원으로 사액되면서 동네 이름도 도
동(道東)으로 강제로 변경되었다.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도 운좋게 비켜
가면서 조선 중기 서원 양식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달성군이 경상북도 시절에는 도동서원이 경북 제일 남쪽 끝으머리에 자리한 탓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서원을 이루는 건물도 거의 폐가처럼 변해갔고, 용머리와 여러가지 조각들이 도난
당하고 훼손되기가 바뻤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6년 대구에 강제로 편입된 이후, 비로소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곳은 산지형(山地形) 서원의 배치형태로 진입공간과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나눠져 있다. 진
입공간에는 수월루와 외삼문이 있고, 공부를 하는 강학공간에는 강당과 동재, 서재, 장판각이
있으며, 서원에서 제일 뒤쪽이자 가장 높다란 곳에 제향공간인 사당이 자리한다.

도동서원은 달성군(達城郡)의 이름난 명소로 필수 답사지로 손꼽힌다. 비록 안동 도산서원(陶山
書院)이나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명성까지는 아니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고 시간이 흐
를수록 찾는 이도 정비례로 늘어나 우리나라 서원의 새로운 성지(聖地)로 부각되고 있다. 이곳
이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다른 서원과 차별화된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선 서원 주변을 두르는 흙담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담장으
로 유명하며, 강당은 기단이 높고, 용머리와 다람쥐 등의 동물상, 서화(瑞花) 등이 조각되어 건
물의 품격을 드높인다. 게다가 강당으로 들어서는 환주문(煥主門)은 특이한 구조로 눈길을 잡아
맨다. 이들 담장과 강당은 서원에서 따로 분리하여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서원 앞에는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아름드리 그늘을 드리워주며, 신도비와 사
적비 등이 자리한다. 유물전시관에는 왕이 서원에 내린 서책과 제기(祭器), 경현록(景賢錄) 목
판 등이 전시되어 있으나 거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윽하고 정겹기 그지없는 도동서원, 400년 묵은 오랜 은행나무가 선사한 그늘로 마음이 시원하
며, 선비의 낭낭한 글읽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서원 내부, 다른 서원과 차별을 둔 다양한 볼
거리로 눈과 마음이 즐거운 곳이다.

※ 도동서원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600, 655,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타고 현풍터미널 하차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급행좌석 4번을 타고 유가치안센터 하차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현풍 경유 창녕, 의령 방면 직행버스 이용
* 현풍터미널과 유가치안센터, 구지에서 달성4번(1일 7회 운행)을 타고 도동 종점 하차, 버스에
  서 내리면 바로 도동서원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이정표가 잘 갖추어져 있어 찾기는 쉬움)
① 구마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현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구지 → 수라리 → 도
   동서원
② 구마고속도로 → 달성나들목 → 논공카톨릭병원 → 현풍외곽도로 → 현풍3교 지나서 우회전
   → 자모 → 다람재 → 도동서원

★ 도동서원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
* 사당은 향사(享祀)를 지내는 매년 음력 2월 중정일과 8월 중정일에만 공개된다.
* 유물전시관은 평소에는 문이 잠겨져 있다. 사전에 문의하기 바란다.
* 도동서원 뒷산에 김굉필의 묘소가 있다.
* 도동서원 문화관광해설사가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근무하고 있다. 근무시간은 10시~18시까지
  이며 설과 추석연휴에는 근무하지 않는다. 해설을 원하면 도동서원 관광안내소를 찾는다.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구지서로 726) <☎ 053-617-7620>


▲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은행나무 - 대구 보호구 3-9호

도동서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존재가 바로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커다란 은행나무이
다. 나무의 덩치가 얼마나 거대한지 그의 앞에서는 그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위대한 자연
의 힘과 400년의 세월이 그를 산만한 덩치로 만든 것이다.
이 나무는 서원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존재로 1607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던 한강 정구가
서원이 사액된 기념으로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하나 확실하진 않으며,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을 기
리고자 조선 후기에 서원 관계자들이 김굉필나무라 이름을 붙인 것이지 절대 김굉필이 심은 나
무가 아니다.

400년의 지긋한 나이에도 변함없이 울창한 모습을 간직한 은행나무의 자태와 웅장함에 그저 감
탄사 밖에는 쏟아지지 않는다. 천연기념물이나 적어도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정말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나무의 품격에 걸맞지 않게 아직까지 보호수(保護樹) 등급에 머물러 있다. 먹구름의
영향으로 나무 사진이 다소 흐리게 나왔지만 여름의 제국이 사라지고 가을이 오면 가을에 물든
아름다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  노쇠한 나무의 가지를 받치는 기둥들

아무리 울창하고 거대한 모습을 지녀도 400년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400년의 노구를
지탱하기 힘들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지구의 중력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다. 나무의 동쪽 줄기
는 이미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역시나 세월보다 무거운
것은 천하에 아무것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 없을 따름이지 세월의 무게는 무한대(∞)이기 때문
이다, 옛날에는 동네 애들이 땅에 내려앉은 가지를 타고 나무에 올라가 놀았다고 한다.


▲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水月樓)

수수한 모습을 지닌 수월루는 서원의 정문이자 외삼문(外三門)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누각이다. 누각에 오르면 은행나무 너머로 낙동강의 풍광이 속시원하게 다가온다. 이곳은
유생들이 공부로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며 바람을 쐬는 쉼터 및 교육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누
각으로 들어서는 계단이 2명 정도가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이는 세상의 번잡함을 멀리하고
서원에 지나치게 사람이 많은 것을 경계하며, 정말로 학문에 정진할 소수정예만을 받아들이겠다
는 서원의 의지로 보인다.

수월루란 이름은 누각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밤하늘을 비추는 달이 바라보여 지어진
풍류적인 이름이다. 강과 달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헛제사밥을 차려 음식과 곡차를 끼며 달놀이
를 즐기던 현장으로 선비들의 해학적이고 고풍스런 풍류가 와 닿는 공간이다. 지금은 노쇠한 수
월루의 보존을 위해 누각 출입이 통제되어 그들의 풍류를 따라하지 못함이 애석할 따름이다.

◀  수월루에서 강당으로 들어서는 환주문(煥主
門)
수월루를 지나면 강당으로 향하는 조그만 계단
과 함께 환주문이 나온다.
환주문은 주인을 부르는 문이란 뜻으로 주인의
식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
다. 이곳의 계단도 수월루의 계단처럼 폭이 좁
고, 문의 높이도 낮아 부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가야 된다. 이는 옛 사람들의 키가 작아서
가 아니라 서원에 들어온 이들에게 자신을 낮추
고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과 서원에 있는 덕망있
는 이들에게 머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란 뜻에서
문의 높이를 일부로 낮게 만든 것이다.
머리가 부딪쳐 혹여나 문이 손상되지 않도록 머
리를 푹 숙여 문을 들어서니 마음가짐이 절로
숙연해진다.

여닫이 문을 고정시키는 정지석(현판이 걸린 평
방의 양쪽 모서리)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
져 있으니 살펴보기 바란다.

▲  도동서원 서재<西齋, 거의재(居義齋)>

▲  도동서원 동재<(東齋), 거인재(居仁齋)>

환주문을 들어서면 강학공간인 강당이 정면에 나타난다. 그 좌우로 서원 유생들의 숙소인 조그
만 서재와 동재가 서로 마주보며 자리해 있는데, 서재는 의로움이 산다는 뜻에서 거의재, 동재
는 인자함이 사는 뜻에서 거인재라 불린다. 서원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구름처럼 몰려
왔을 유생들의 고무신이 가득했을 섬돌에는 먼지만이 자욱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드러낸다. 아무
도 없는 방문에 귀를 대면 학문의 어려움에 넋두리를 떨던 그들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올 것만
같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는 어려운 것이다.


▲  강당 앞뜨락에 머리를 내민 거북이
화마(火魔) 등의 나쁜 기운을 막고자 만든 것으로 보인다.

▲  강당 우측에 자리한 장판각(藏板閣)
서원의 소중한 보물인 경현록(景賢錄)이 있었으나 지금은 유물전시관에 가 있다.

▲  도동서원의 강당인 중정당(中正堂) - 보물 350호

고색의 때가 만연한 서원의 강당(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1.5m의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여 웅장함과 품격이 더욱 돋보인다. 건물 좌측과 우측 방은 온돌방이고
가운데 3칸은 개방된 대청마루로 유생들이 유학의 도를 배우며 토론하던 장이다.
건물의 모습은 여느 한옥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이 건물의 매력은 바로 기단부에 있다. 기
단을 이루는 돌은 일정한 법칙이 없이 제멋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분방하게 늘어서 눈길을 끈다.
그런 기단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가 삐죽 나와 있으며, 다람쥐 모양의 동
물상과 서화(瑞花)무늬 2쌍이 조각되어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들 무늬는 모두 나름대로
의 뜻을 담고 있으니, 기단을 유심히 살펴 괜한 보물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  삐죽 고개를 내민 용머리

멀뚱한 표정으로 기단 밖으로 고개를 내민 4마리의 용은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마(火
魔)의 피해를 막고자 만든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들 용머리는 겉으로 보기에
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여러 차례 도난을 당했던 아픔의 과거를 간직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저 중에서 1~2개만 진품이고 나머지는 모조품이
라고 한다. 모조품의 진품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물전시관이나 대구에 있는 모박물관
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  해학적인 표정의 용머리 ~ 용머리의 눈이 마치 누군가에게 단단히
얻어터진 듯, 밤탱이가 된 것처럼 보여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  강당 내부에 걸린 2개의 현판

▲  강당 좌측에 있는 굴뚝
연기를 모락모락 뿜어내던 왕년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의 모습에 쓸쓸함이 비쳐진다.

▲  사당으로 들어서는 내삼문(內三門)

강당 뒤에는 서원의 중심인 사당이 있다. 김굉필이 배향된 사당으로 들어서려면 내삼문을 지나
야 되는데 제향일을 제외하고는 입을 굳게 봉한 채,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  도동서원의 백미, 담장 - 보물 350호

고색이 가득 깃들여진 담장은 자연석을 정렬시킨 바닥돌 위에 자연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키와
를 5단으로 놓아 그 사이에 진흙층을 쌓아 거의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웠다. 담장에
암키와와 수막새를 사용한 것은 음양(陰陽)의 조화를 통해 담장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장식효과
를 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밋밋한 모습의 다른 서원의 담장과 달리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
으로 우리나라의 오래된 담장 중에서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흙과 돌, 기와를 적절히 이용했으며 수막새를 달아놓은 매력적인 담장으로 나중에 한옥을 짓고
산다면 저런 담장을 만들어 집을 두르고 싶다. 서원과 외부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담장에 미적
(美的)인 부분이 크게 배려되어 밤손님조차도 담을 아껴줄 것 같다. 담에 쓰인 흙에는 오랜 세
월의 누런 때가 가득 끼여 담장에 대한 눈길을 단단히 붙들어 맨다.


♠  김굉필과 정여창 두 노인이 말년을 보내며, 석별의 정을 나누던 곳
이노정(二老亭)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30호

▲  이노정 전경 (정자를 가린 건물은 정자를 관리하는 노부부의 집)

▲  담장 너머로 바라본 이노정

▲  곁에서 바라본 이노정

도동서원을 둘러보고 구지(창리)를 거쳐 내리에 있는 이노정을 찾았다. 모정에서 이노정을 알리
는 갈색 이정표를 따라 조그만 농로로 들어서면 막다른 곳에 녹음이 짙은 숲을 병풍으로 두르며
부뚜막 연기가 뿜어 나올 것 같은 정겨운 풍경의 기와집, 이노정이 나온다.
세상과 거리를 두며 강가에 홀로 자리한 외로운 기와집인 이곳까지는 현대의 이기(利器)는 전혀
들어오지 못하고 전통 방식으로 초롱불로 어두운 밤을 밝히며 장작을 뗄 것 같은 분위기가 엄습
한다. 허나 안으로 들어가보면 티비에 냉장고까지 현대의 이기는 이미 여기까지 손을 썼다. 이
곳은 도동서원처럼 낙동강변에 자리해 있는데 그곳과는 달리 강이 바라보이는 높다란 곳에 터를
잡았다.
 
고색창연해 보이는 이노정은 다른 말로 제일강정(第一江亭)이라고도 하며, 김굉필과 정여창(鄭
汝昌)이 말년을 보낸 곳이라 전한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를 당한 그들이 시골(김굉필은 도
동서원이 있는 도동리, 정여창은 함양)로 내려와 살다가 1504년 이곳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정자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팔자 좋게 지내다가 연산군(燕山君)이 훈구파(勳舊派)와 건
방진 사림계열 유생들을 때려잡고자 일을 벌린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로 석별의 정을 나누
었고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처단되었다. 정자의 이름인 이노(二老)는 김굉필과 정여창 두 노인
네를 지칭한 것으로 그 당시 그들의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다.

도동에 머물던 김굉필은 배를 타고 10km 떨어진 이곳을 자주 왕래했다고 하며 그들이 사라진 이
후 정자는 그들을 추모하는 이들이 관리하였다. 1885년 영남 유림에서 중수를 했고, 1904년에도
수리를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자의 두 이름(이노정, 제일강정)이 새
겨진 현판과 그들이 지은 유악양(遊岳陽, 악양을 거닐다)이란 시가 걸려있다.

이곳은 우물마루를 둔 정자 건축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평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천정에는
우물정(井) 모양의 통풍구를 두어 산바람과 강바람이 서로 어우러지게 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을 정도로 시원하다. 정자 주변으로는 얕은 담장을 둘렀으며 정자 밖에 뒷간을 두었다.

현재 이노정은 어느 노부부가 관리하고 있다. 그들은 정자 앞에 딸린 조그만 기와집에 살고 있
는데, 드문드문 오긴 하지만 정자를 찾은 답사객에게 정자 내부를 둘러볼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다. 우리가 갔을 때는 처음에는 조금 경계의 눈빛을 보냈는데,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표정을
바로 하고는 구경하고 가라며 내부로 안내해 주었다.

그들은 이노정에서도 가끔 잠을 자고 생활을 하는지, 정자 내부는 모기장이 쳐져있고, 여러 생
활용품이 널려 있는 등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비록 세상물정 모르고 공자와 성리학 사상만 들
쑤시던 지배층의 전유물이긴 하지만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살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가짐이 보
이는 정자로 두 노인네가 술 한잔 걸치며 시를 짓고 달놀이를 즐길 때 그들의 노비는 강에 돌을
던지며 신세 한탄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벼슬을 박탈당하고 시골에 숨어 사는 처지긴 하
나 잘나가는 집안의 양반이자 조선의 중심계층인 선비이며, 그들을 추종하는 제자들이 많기 때
문에 먹고 사는 문제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  중후한 멋이 엿보이는 이노정 현판

▲  제일강산(第一江山) 현판


▲  정자 밖에 자리한 뒷간 - 하얀 털의 견공(犬公)이 처음 본 우리에게
경계의 메세지를 보낸다.

▲  정자 담장 밖으로 장맛비로 불어난 낙동강이 보인다.
강 건너로 보이는 곳은 고령군 우곡면이다.

▲  온돌방을 지피던 아궁이의 흔적

▲  아마존의 깊은 늪지대처럼 다가서기가 두려운 이노정 앞 낙동강 늪지대
홍수가 심할 때는 저 늪지대는 물론이고 정자 앞까지 강물이 넝실거린다.


※ 이노정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현풍 경유 이방, 의령 방면 직행버스를 타고 모정(내리) 하차 (1일 20회
  남짓 운행)
* 현풍터미널에서 이방, 신반, 의령 방면 직행버스 또는 달성7번 시내버스(1일 6회)를 타고 모
  정(내리) 하차
* 모정에서 대암리, 의령 방면으로 2분 정도 걸으면 이노정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기서
  5분 정도 들어가면 이노정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이노정까지 차량 접근 가능, 단 길이 좁으므로 정자를 둘러보고 차를 돌
  려 나갈 때 주의 요망)
① 구마/중부내륙고속도로 → 현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구지 → 모정 → 이노정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내리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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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글로 바로 이어집니다)

 

팔공산 성전암, 대비암(현응대사부도)


















비슬산 용연사















비슬산 소재사 (비슬산자연휴양림)























도동서원























[대구] 비슬산 가을 나들이 (유가사, 따끈한 곰탕 1그릇)


' 대구 비슬산(琵瑟山) 나들이 (2006년 10월 7일)'


▲ 현풍석빙고에서 바라본 비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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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제3의 도시 대구(大邱)에는 그 명성에 걸맞게 2개의 큰 산을 남북으로 품고 있다.
북으로는 신라 5악의 하나이자 동화사(桐華寺), 파계사, 갓바위 등의 굵직한 불교 성지를 지닌
팔공산(八公山), 남으로는 팔공산에 못지 않은 웅장한 자태와 함께 용연사(龍淵寺), 유가사 등
의 가히 만만치 않은 불교 문화유산을 간직한 비슬산(琵瑟山,1084m)이 바로 그 것인데 본 글에
서 다루고자 하는 곳은 비슬산, 거기서도 비슬산을 대표하는 고찰 유가사(瑜伽寺)이다.

2006년 추석, 대구에 아는 후배 여인네(지금은 행방이 묘연)와 함께 유가사를 찾았다. 그 곳은
오랜 명성에 걸맞지 않게 교통이 그리 좋은 편이 못되나서 대구 1호선의 서쪽 종점인 대곡전철
역에서 거의 1시간을 기다려서 11시 40분에 유가사행 달성군내버스 5번을 탔다.

우리가 탄 버스는 화원과 반송리, 달성공단을 지나 현풍터미널에서 잠시 숨좀 돌리다가 다시 길
을 재촉, 하향주(荷香酒)의 고향인 음리(陰里)를 거쳐 비슬산의 품 속으로 계속 파고 들어가서
12시 50분 드디어 산 속 깊히 숨겨진 유가사 종점에 도착했다.

바깥세상과 거의 단절된 듯한 유가사 마을을 지나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걸린 돌다리를 건넌다.
절로 들어서는 계류(溪流)에 돌다리를 걸쳐놓은 것은 통행의 편의도 있지만 가람에 들어서기 전
에 자신의 온갖 번뇌를 모두 계곡물에 흘려 보내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것들을 물에 히염
없이 떠내려 보내고 싶어도 오랜 가을 가뭄의 영향으로 계곡에 어디 물이 있어야 말이지, 물은
온데 간데 없고 계단식으로 차곡차곡 정비된 계곡에는 그저 돌만이 어지러히 널려 있을 뿐이다.

유가사를 구경하기 전에 우선 유가사의 내력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겠다.



♠ 고려시대 유가종(瑜伽宗)의 총본산, 비슬산 자락에
아늑히 들어앉은 ~ 유가사(瑜伽寺)



▲ 유가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비슬산의 정상인 대견봉 아랫 자락에 아늑히 들어앉은 산사로 827년(흥덕왕 1년) 도성국사(道成
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도성국사는 시공을초월하는 놀라운 도력(道力)을 지녔다고 하며,
비슬산의 바위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구슬과 부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절의 이름을 '유가
사'라 했다고 한다.

▲ 유가사 찻집

▲ 석등이 심어져 있던 연화대석(蓮花臺石)

고려시대에는 유가종(瑜伽宗)의 총본산으로 3천 명의 승려가 머물 정도로 팔공산 동화사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했으나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 동화사의말사(末寺) 신세가 되었다.
당우(堂宇)로는 대웅전과백화당, 취적루, 용화전, 나한전, 산령각등의 약 10동의 불전이 있으
며,소장 문화재로는 지방문화재인 용화전 석조여래좌상이 있고, 비지정문화재로 조선 후기에 그
려진 16나한도, 부근 절터에서 가져온 고려시대 5층석탑, 유가사의 기나긴 역사가 담겨진 거대한
부도밭(총 15기로 유가사 북쪽 200m지점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못가봤음 ~~)등이 있다.

▲ 유가사 조사당(祖師堂)
천왕문 우측 소나무 사이에 들어앉은 건물로
우리의 토속신앙인 서낭당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안에는 향로만 있을 뿐 승려의 영정이나
불상은 없다.

▲ 언제나 물로 가득한 유가사 석조(石槽)
절을 찾은 중생들을 위해 아낌없이 물을
베푸는 석조, 바로 비슬산을 포함한 대자연과
중생구제를 열망하는 부처의 마음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그려진 괘불(掛佛)이 있는데 매우영험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여가뭄이나 여
러가지 어려움이 있을 때, 괘불을 법당에 모셔두고 기도를 드리면 가뭄 등의 어려움이해소되었
다고 하며, 예전에는 비슬산에 호랑이와 늑대등이 많아 사람과가축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하는데.괘불을 대웅전 앞에 걸고 제사를 지내니짐승들이 마치 괘불의위용에놀란 듯, 거의 얼
씬거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유가사의 부속 암자로는 수도암, 청신암, 도성암(道成庵)등이 있으며 잘나가던 시절의 옛 명성
을 되찾기 위해대규모의 불사를 구상 중에 있다. (왠만하면 그냥 두지 ~~)

비슬산에 포근히 안긴 조용하고 아담한 산사로 속세의 온갖번뇌와 시름을 잊기에는 매우 좋은
곳이다.이 곳에 와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앞날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은 어떨까..?


* 유가사 찾아가기 (2007년 10월 기준)
- 1호선 대곡역(1번 출구)과 현풍터미널에서 달성 5번 버스,1일 15회 운행(60 ~ 90분 간격)
- 휴일, 주말에는 600번 버스 2대를 투입하여 대곡역(1번출구) ~ 현풍터미널 ~ 유가사/비슬산휴
양림 구간을 운행한다. (거의 50 ~ 60분 간격)
* 승용차 - 대구 -> 현풍 -> 음리 -> 유가사
- 구마고속도로 -> 현풍나들목 -> 현풍 -> 음리-> 유가사
- 유가사 버스종점에 주차장이 있으며 유가사 바로 아래에도 조그만 주차장이 있다.
- 입장료 없음 / 관람시간 제한 없음
- 유가사에서 비슬산(대견봉)으로 올라가 휴양림(소재사), 용연사 방면으로 내려갈 수 있다.



♠ 유가사 둘러보기 ~ 일주문에서 천방루까지


▲ 유가사 일주문(一柱門)

다리를 넘으면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구분 짓는 기둥 2개의 일주문이 나온다.
문이라고는 하지만 문을 여닫는 문짝은 없으며 절을 찾은 중생들, 산을 찾은 등산객, 부자와
서민 등 가리지않고 누구나 반가이 맞이해 준다.
우리 현대인들에게 정녕 필요한 건 돈과 명예가 아닌 일주문과 같은 넓은 포용심이 아닐까?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비슬산의 오랜 명물인 암괴류 돌덩어리 서식지를 만나게 된다.


▲ 비슬산 암괴류(岩塊流) - 천연기념물 435호

비슬산에는 특이하게도 온갖 풍파를 겪은 돌덩어리들의 집단 서식지(?)가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이들 돌덩어리를 어려운 말로 암괴류라고 하는데 암괴류란 큰 자갈이나 커다란 암석 덩어리가
집단적으로산자락이나 골짜기에 천천히 흘러 내려와 쌓인 것을 일컫는다.
이 곳 암괴류는 주로 중생대 백악기(白堊紀, 1억 4500만년 전부터 ~ 6500만년 전까지)의돌들
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치 산사태가 일어나 와르르 무너져 내린 폐허의 현장을 보는 듯 하다.
비슬산 곳곳에 퍼진 암괴류의 길이는 2km, 폭은 80m 이며 돌덩어리의 직경이 1~2m에 이르러 한
반도에 분포하는 여러 암괴류 중 규모가 제일 커서. 자연 학술적으로 연구 가치가 높아 천연기
념물로보호하고 있다.

◀ 비슬산 곳곳에 또아리를 튼 암괴류
(유가사 → 대견사터 방향 약 1km 지점)

비슬산을 한층 신비롭게 만드는 암괴류, 중생
대에 태어난 돌들로 산자락과 계곡으로 물 흐
르듯 흘러 내려와 지금의 암괴류를형성하게
되었다.
마치 버려진 돌들의 무덤을 보는 듯, 황량해
보여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나 저들에게는 1억
년 태고의 신비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는
비슬산의 진정한 주인이다.


▲ 유가사 해탈문(解脫門)

일주문을 지나 5분 정도 오르면 유가사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유가사로 가는 길이 2갈래로 쪼개지는데 왼쪽 길은 해탈문을 거쳐 송림(松林)의 산길을
지나 천왕문으로 통하며 오른쪽은 콘크리트 도로로 유가사 경내의 동쪽으로 통한다.
기왕 산사(山寺)에 왔으니 호젓하게 산길로 가는 것이 더 좋겠지.
얇은 2개의 기둥에 의지한 해탈문의 모습이 꼭 속세의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던지고 해탈에 경
지에이른 듯 홀가분해 보인다.


▲ 유가사로 오르는 돌계단

해탈(解脫)을 꿈꾸며 해탈문을 들어서면 중년 신사처럼 멋드러진 송림길이 나온다.
소나무 사이로 펼쳐진 오솔길을 따라 2분 정도 가면 개성 만월대(滿月臺)의 옛 고려왕궁의 거
대한 계단을 닮은 높다란 돌계단이 우리를 맞이한다.


▲ 유가사 천왕문(天王門)

촘촘히 들어선 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맞배지붕의 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은 부처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보통 '天王門' 현판이 걸려있으나 여기는그냥 '瑜伽寺'라
쓰인 현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문 안에는 사천왕의 형상(形象) 대신 그들의 모습을 담은 벽
화(壁畵) 4장이 있다.

◀ 수염을 휘날리며 ~ 벽에 그려진 지국천왕(持國天王)


▲ 유가사 천방루(千方樓)

천왕문에서 사천왕의 검문(?)을 받고 나오면 바로 '천방루'라는 황색 지붕의 누각과 마주친다.
지붕이 누래서 마치 자금성(紫禁城)의 건물을 보는 듯하며 유가사의 옛 영화를 꿈꾸는 상징적
인 건물이지만 1층 부분은 가운데 통로를 제외하고 모두 벽으로 봉해버린 탓에 누(樓)의 이미
지가 상당히 떨어진다.
천방루를 들어서면 대견봉을 든든한 뒷배경으로 삼은 유가사 경내가 유감없이 펼쳐진다.

▲ 천방루 내부를 가득 메운 석가여래
3존불을 위시한 5백 금동불(金銅佛)

▲ 천방루 풍경물고기



♠ 유가사 3층석탑


▲ 유가사에서 바라본 비슬산 대견봉

비슬산의 정상 대견봉(大見峰)이 조그마한 산사, 유가사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조선시대 상당수의 절들은 예전 시대에 비해 절을 크게 꾸밀만한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몇몇 절들은 그 허전함을 채우려는 의도로 웅장한 산이 잘 보이는 곳에 절을 세우거나
혹은 이전했다고 한다.

◀ 유가사 3층석탑 (우측 탑)
유가사의 가람배치는 금당(대웅전) ~ 2탑 ~ 중문
(천방루) 형태로 대웅전 앞에는 3층석탑2기가 세
워져 있다.
그 중 우측의 이 석탑은 원래 유가사에서 1리정
도 떨어진 원각사(圓覺寺)라는 옛 절터에 있던 것
으로 절이 파괴되고 탑 또한 산산이 부셔진 채로
뒹굴고 있던 것을 1920년 유가사에서그 탑재(塔
材)를수습하여 복원하였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복원이 잘되어 탑의전
체적인 비례도 알맞고 보물급으로 지정해도손색
이 없을 정도로 돌을 다듬은 솜씨가 정교하다.

탑의 상륜(相輪) 부분에는 찰주가 하늘을 향해솟
아 있다.

▶ 유가사 3층석탑 (좌측 탑)

옛 원각사터에서 가져온 탑만으로는 부족
했는지 근래에 그 좌측으로 새로이 3층석
탑을 세웠다.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와 거기서 반사되는
햇빛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며, 탑의맵시
가 매우 곱다.



♠ 유가사 석조여래좌상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50호


▲ 유가사 용화전(龍華殿)

나한전과 산령각(山靈閣)중간에 들어앉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촐한 모습
을 간직하고 있다.
용화전은 보통 미륵불(彌勒佛)을 모시나 여기서는 유가사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인 석조여래좌상
을 모시고 있다.

◀ 약간 멍한 표정의 유가사 석조여래좌상
유가사에 유일한 지정문화재로 불상과 대좌(臺座
)가 같은 돌(화강암)로 조성되어 서로 끈끈하게
붙어 있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얼굴 부분과 양 무릎
을 시멘트로 땜방질 한 것을 빼면 대체로 옛모
습을 간직하고 있다.

다소 어벙벙해 보이는 그의 얼굴 주변으로 땜방
질의 검은 흔적들이 불에 그을린 양 옥의 티처럼
남아있다.

어깨는 꽤나 단련을 한 듯, 넓직하며 가슴 부분
은 근육도 우람하여 매우 듬직해 보인다.
대좌에는 조그만 불상들이 조용히 들어앉아 합장
인(合掌印)을 선보인다.



♠ 서서히 단풍철을 준비하는 비슬산을 잠시 오르다 ~~


▲ 비슬산의 꼭대기, 대견봉
산 정상에 마치 난공불락에 거대한 요새가 있는 듯, 그 모습에 위엄이 넘쳐 보인다.


유가사를 둘러보고 그 절을 품 안에 안고 있는 비슬산을 오른다.
처음부터 꼭대기인 대견봉까지 갈 생각이 없던 터라 욕심을 부리지 않고 유가사 기점 2km 정도
까지만 올라가다가 후배가 싸온 김밥과 귤을 먹고 천천히 내려왔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은 언제든 비슬산을 찾을 수 있다. 첫 술부터 그 정상까지 올
라가고 산자락 곳곳에 안긴 대견사터, 소재사 등의 명소를 다 보려 든다면 솔직히 지나친 욕심
이 아닐까? 이번은 어디까지나 비슬산 사전답사이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김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그렇다고 김밥에 꿀이 첨가된
것은 아니다. 그냥 1줄에 1000원하는 흔하디 흔한 김밥이지만 산에서 먹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목구멍으로 술술 잘 넘어간다.

가을이 그 절정을 향해 달려가야 될 시기이건만 마치 여름의 제국이 부활한 듯 마냥 마냥 덥기
만 했다. 땀은 장마가 내리듯 하고, 신발은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라 발은 고달퍼서 못살겠다며
앙탈(?)을 부린다.

산에 오면서 울긋불긋 단풍을 기대했지만
아직까지는 시기상조라 고운 색채의 나뭇
잎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유가사 계곡은 오랜 가뭄으로 인해 물이
말라버린지 오래라 이건 계곡인지 돌들의
무덤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이다.

◀ 녹음으로 가득한 비슬산 등산로
(유가사 출발 0.5km 지점)

◀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소나무 아래에
솟아난 돌탑
비슬산을 찾은 사람들이 전망이 확 트인 이곳에
그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은 돌탑을 쌓아 올렸다.
저 탑에는 과연 어떤 사연과 소망들이 담겨져 있
을까?

유가사 종점으로 내려오니 시간은 16시 20분, 마침 40분에 현풍으로 나가는 달성 5번이 들어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약간의 등산객을 태운 달성 5번은 첩첩산중의 깊은 산골, 유가사를 미련없이 출발
하여 20분 만에 우리를 현풍터미널로 데려다 준다.

저녁으로 현풍곰탕을 먹기 위해 곰탕집으로 가던 중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비슬산에서 발원
한 현풍천(玄風川)을 따라 동쪽으로 1리정도 들어가니 현풍향교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를 무시하고 하천을 따라 좀더 들어가면 냇가에 커다란 고분(古墳)같은 것이 숨을
죽이며 들어앉아 있으니, 바로 얼음을 보관하던 옛날의 냉동창고, 즉 석빙고이다.


♠ 얼음과 진상품을 보관하던 옛 냉장고, 현풍석빙고(玄風石氷庫)
- 보물 673호

'현풍 곽씨(郭氏)'의 고향이자 '현풍곰탕'의 탄생지인 현풍시내의 동쪽, 현풍천 개울가에는 옛
날에얼음을 보관하던 거대한 냉동창고인 현풍 석빙고가 자리해 있다.
오늘날이야 냉장고 등의 냉동시설이 잘되어 있어 언제든지 얼음을 취할 수 있으나 100년 전까
지만 해도 얼음은 절대적으로 귀하던 시절이라 나라에서 관리, 통제하였다.

그래서 주요 고을에는 개천 주변으로 고분 모양의 거대한 냉동창고(석빙고)를 만들어 겨울철에
강이나 하천에서 얼음을 뜯어내어 저장했다가 여름이나 기타 필요할 때 꺼내 썼으며 서울로 올
리는 진상품과 기타 냉동 보관이 필요한 여러 물품을 보관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여름은 무더웠다.
무더위를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석빙고에 몰래들어
와 얼음을슬쩍하거나 그것을 죽부인 삼아 시원하
게 단잠을 자던 사람들은 국가 시설 무단침입 및
절도죄로 거의 대부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만큼
그 형벌은 무척 심했다.
그 많고 많던 석빙고는 현재 이 곳을 비롯하여 경
주, 청도, 안동, 창녕 정도에만남아 있으며서울
에도 서빙고(西氷庫)와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현풍 석빙고는 경주의 그것과 구조와 크기가 많이
비슷하며 예전에 현풍천에서 잡히던 은어(銀魚)를
갈무리했다가 서울로 진상했다고 한다.

▲ 속인(俗人)들이 개척한 등산로(?)를
따라 석빙고 꼭대기에 오르면 돌로
만들어진 석빙고의 통풍시설이 있다.

석빙고를 이루는 돌은 모두 화강암으로 4개의홍
예로 천정을 덮었다. 또한 1982년 이 주변에서 석
빙고의 축조 연대가 적힌 비석을 발견했는데, 비
문(碑文)에는 '숭정 기원후 이경술 11월(崇禎紀元
後二庚戌十一月)'이라 쓰여 있으니 여기서 '숭정
기원후 이경술'은 1730년(영조 6년)이며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왕인 의종(毅宗)의 연호이다.

▲ 굳게 입을 봉한 석빙고

이제는 보물급 문화재로 귀한 몸이 되신지라 더 이상의 얼음 보관은 없다. 상황이 이러니 석빙
고로 들어서는 문은 더 이상 열릴 이유가 없어 보존을 위해 계속 문을 봉하고 있다.
하지만 빙고 내부는 아직도 서늘한 냉기로 가득하여 문 앞으로 다가서면 오히려 한기가 느껴질
정도이며, 문 주변으로 온갖 벌레들로 가득하여 접근하기가 좀 깨름칙하다.

* 현풍 석빙고 찾아가기 (2007년 10월 기준)
- 1호선 대곡전철역(1번 출구)에서 600번, 달성 5번 이용 현풍터미널에서 도보 10분
- 대구 서부정류장(1호선 성당못역 3번 출구)에서 현풍 방면 직행버스 수시 운행


어느덧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저녁밥이 그리워질 시간이다.
터미널과 가까운 현풍곰탕집은 추석연휴라 문을 굳게 닫아 걸어서 현풍시내 남쪽에 있는 또 다
른 곰탕집을 찾았다.
터미널 부근에 있는 곰탕집도 원조라 그러고 우리가 찾은 이 집도 원조라고 하니 도대체 어느
집이진짜인지 정말 비슬산 산신도 모를 지경이다.
이번에 찾은 곰탕집은 규모가 터미널 부근의 그 집보다 훨씬 넓었다. 2층 규모의 가히 300명은
채우고도 남을 공간, 그리고 넓은 주차장까지.
이 집도 꽤 진국인지 주막 내부에는 곰탕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넘쳐 난다.

다행히 구석 쪽에 자리를 잡고 곰탕을 먹었는데, 가격이 나주곰탕보다 3000원이나 비싼 9000원
이나한다.
하지만 밑반찬의 종류가 나주는 2가지인데 반해 이 곳은 6가지로 완전 하나의 곰탕 정식으로
나온다. 그래서 가격을 다소 밉게 책정한 것 같다.

곰탕의 영원한 동반자, 송송(깍두기)과 김치, 그 외에 나박김치와 고추 등이 우리의 손길을애
타게 기다린다.
현풍곰탕은 현풍 지역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황해도에 해주곰탕이 있고 전라도에 나주곰탕이 있
다면경상도에는 현풍곰탕이 있다. 곰탕은 설렁탕의 사촌 정도 되는 탕으로 소고기를원료로
하여 국을 진하게 우려서 내는 음식이다.

점심도 김밥 몇 줄과 과자 등으로 때운 것이 전부라 5년 전 현풍할매곰탕에서 먹은 기억을 더
듬으며 열심히 수저를 움직인다.
5년 전 기억으로는 거의 4000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그새 세월의 무게가 더해졌는지 가격은
9000원이다. 하긴 곰탕 먹으려고 현풍까지 왔는데 9000원이 무슨 대수랴. 그리고 후배가 사주
는 건데.. ~~


처음에는 배가 고파 눈에 뵈는게 없는지 양이 매우 적어 보였으나 먹고 나니 배가 가득 불러온
다. 뜨끈한 탕을 먹고나니 졸음이라는 놈이 배깔고 한숨 자라며 나를 거침없이 희롱해댄다.
마음 같아서는 배때기 깔고 한 숨 자고 싶지만 그런 것은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졸음을 떨구고자 서비스로 주는 수정과와 커피 1잔으로 저녁을 깔끔히 마무리 하였다.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후배와 작별을 고하고 20시 40분 일반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강남으로
올라와 새벽 2시에 시내버스 막차로 집에 들어오니 시간은 어느덧 새벽 3시.. ~~

-> 이리하여 2006년 추석, 대구 비슬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10월 7일
* 작성 시작일 - 2006년 10월 26일
* 작성 완료일 - 2006년 11월 2일
* 숙성기간 ~ 2006년 11월 3일 ~ 2007년 10월 16일
* 공개일 - 2007년 10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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