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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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4.01.05 우리나라 최초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당, 여수 충민사 <마래산 석천사>
  3. 2023.08.02 천하의 땅끝을 거닐다. 해남 땅끝 (맴섬, 땅끝마을, 땅끝탑, 땅끝전망대, 갈두산)
  4. 2023.05.17 화순 만연산, 만연산 오감연결길, 만연사 늦가을 나들이 <만연폭포, 큰재, 만연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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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21.05.28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신안군의 상큼한 지붕, 압해도 송공산 (송공산둘레길)
  8. 2021.01.18 우주와 은하계를 꿈꾸다.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외나로도)
  9. 2019.12.30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10. 2019.10.16 초가을에 가면 딱 좋은 곳 ~ 꽃무릇(상사화)의 대표 성지, 영광 불갑사 (수다라성보박물관)

첩첩한 산주름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3층 법당 대웅전을 지닌 화순 쌍봉사

화순 쌍봉사



' 늦가을 산사 나들이, 화순 쌍봉사 '

▲  쌍봉사 대웅전

'쌍봉사 삼청각에서 읊다'

시내 사이로 멋들어지게 지은 다리 누각이여
삼청이라는 글씨만 봐도 눈이 상쾌하구나
못에 비친 달은 고기들의 맑은 거울이요
구름 걷힌 산봉우리 학은 둥지를 사랑하네
금빛들에 머문 안개는 항상 서기를 드러내고
옷빛계곡에서 부는 솔바람은 언제나 차가워라
난간에 기대어 처마 밑에 흐르는 물을 다시 보니
낙화도 뜻이 있는지 잔물결 따라 쫓아가네

* 고려 명종 때 문인인 김극기(金克己)가 쌍봉사 삼청각에서
지은 시 (현재 삼청각은 없음)
 



 

늦가을이 깊어가던 10월의 끝 무렵에 광주 동남쪽에 넓게 자리한 전남 화순(和順)을 찾
았다.
오전에 일행들과 만연산(萬淵山, ☞ 관련글 보기)을 둘러보고 화순 읍내로 내려가 점심
으로 한정식을 섭취했는데, 화순에서 유명한 밥집이라 사람들로 내내 미어터져 겨우 자
리를 잡아 먹었으나 맛은 그저 그랬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운주사(雲住寺)와 더불어 화순 지역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꼽히
는 쌍봉사를 찾았는데, 쌍봉사는 화순군 남쪽 끝인 이양면 산골에 있는 절로 화순 읍내
에서 30km 이상 떨어져 있다.



 

♠  쌍봉사(雙峯寺) 입문

▲  흙탕물이 되버린 연못

쌍봉사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동그란 연못이 마중을 한다. 주차장 옆에 자리한 이 못은 소나
무가 깃든 동그란 섬을 복판에 띄워놓아 운치를 우려내고 있는데. 고려 때 김극기가 지은 시
를 통해 그 시절 삼청각과 연못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비록 삼청각은 세월의 거친 흐름
으로 형편없이 떠내려갔지만 연못은 오랫동안 살아남아 천왕문 직전에 넓게 누워있었다.
허나 관리 소홀과 주차장 조성으로 연못을 밀어버리는 우를 범했으며, 근래에 작게나마 연못
을 다시 닦았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변 공사로 연못이 뿌연 흙탕물이 되어버린
채, 나를 맞이한다. 마치 흙탕물 같은 속세와 그보다 더한 종교계를 상징하듯이...


▲  연못 바위에 걸터앉은 돌거북

평범해보이는 연못에 눈길을 진하게 끄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거북 모양의 돌이다.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돌에 걸터앉은 작은 돌거북으로 거북의 등껍질과 얼굴, 발이 묘사되어 있는
데, 전체적으로 보면 거북선처럼 보이고, 등껍질 주위로 시선을 좁히면 기어가는 거북처럼 보
여 2가지의 시각 효과를 보인다. 그는 연못을 새로 지으면서 장식용이나 비보풍수(悲報風水)
의 일환으로 설치된 듯 싶다.

          ◀  쌍봉사 천왕문(天王門)
연못을 지나면 절의 2번째 문인 천왕문이 계단
을 늘어트리며 마중을 나온다. (1번째 문인 일
주문은 연못 남쪽에 있음)
이곳은 석가여래의 경호부대인 사천왕(四天王)
의 집으로 좌우로 길게 돌담을 둘러 속세의 기
운을 경계한다.


▲  쌍봉사 대웅전(大雄殿)과 그 주변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3층 모습의 늘씬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너른 경내가 펼쳐진다.
대웅전 좌우와 뒤쪽으로 지장전, 극락전, 호성전, 나한전, 요사, 종무소 등이 포진해 있으며,
천왕문과 대웅전 사이가 거의 풀밭이라 다소 허전하게 다가온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쌍봉사
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쌍봉사는 9세기에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 798~86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825년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847년에 돌아왔는데, 화순 지역을 지나다가 이곳의 수려
한 풍경에 퐁당 반해 절을 세웠다고 한다.
허나 곡성 태안사(泰安寺, ☞ 관련글 보기)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문(桐裏
山門)을 열었던 적인선사 혜철(寂忍禪師 惠哲)이 839년 당나라에서 돌아와 쌍봉사에서 첫 하
안거(夏安居)를 지냈다는 기록이 태안사 적인선사비에 쓰여 있어 적어도 8세기나 9세기 초부
터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쌍봉사는 839년을 창건시기로 삼고 있음)
하여 실질적인 창건자는 철감선사가 아니며, 그는 신라로 돌아와 이곳에 머물면서 구산선문의
일원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고 절의 이름을 크게 날렸다.

철감선사는 절의 앞쪽과 뒷쪽 산봉우리가 2개여서 도호(道號)를 쌍봉이라 했는데, 그의 명성
을 들은 신라 경문왕(景文王)은 그를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그의 도호를 따서 절 이
름을 쌍봉사라 하였다.
철감의 열성제자였던 징효절중(澄曉折中)은 스승의 법맥을 이어받아 영월 법흥사(法興寺)에서
사자산문을 본격적으로 개창했다. 그는 891년 쌍봉사에 들려 스승인 철감선사탑비에 예를 올
렸다고 전한다.

1081년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했다고 하며,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전라도관찰사인 김방(金倣)이 돈을 내어 절을 중창했다. 조선 세조(世祖)는 쌍봉사 토지에 면
세 혜택을 주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8년에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67년과 1724년에 중창했으나 조광조(趙光祖) 등을 배향한 인근 죽수서원(竹樹書院)의 말사
로 들어가면서 매년 66가지의 봉물을 상납하느라 허리가 거의 아작날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6.25전쟁 때 대웅전과 극락전 등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984
년에 대웅전이 전소되어 쓰러지는 고통을 겪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나한전, 호성전, 극락전, 지장전, 종무소, 요사, 범종각 등 10여 동의 건
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보로 지정된 철감선사탑과 보물인 철감선사탑비와 목조지
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지방문화재인 극락전과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웅전 목
조삼존불상 등이 있다.
그 외에 조선 후기에 세워진 쌍봉사 사적비(事蹟碑)와 승탑(僧塔, 부도) 5기, 관찰사 윤웅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절 자체는 '화순 쌍봉사'란 이름으로 전남 지방기념물
247호
로 지정되어 있다.

쌍봉사는 이 땅의 승탑(僧塔, 부도) 중 우수급에 속하는 철감선사탑과 우수급 비석인 철감선
사탑비, 그리고 비록 화재로 다시 지었지만 3층 목탑 양식의 대웅전으로 유명하다. 아마 그들
이 없었다면 이곳은 그저 그런 옛 절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첩첩한 산주름 속에 푹
묻혀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며 절 앞까지 2차선 신작로가 닦여져 차량 접근성은 좋다.
단 대중교통이 영 좋지 못한 것은 함정이다.

* 쌍봉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741 (쌍산의로 459, ☎ 061-372-3765)


▲  옛 모습 그대로 재현된 대웅전 (옆에서 바라본 모습)

쌍봉사 대웅전은 3층 목탑(木塔) 스타일의 건물이다. 높이 12m의 홀쭉한 정방형 집으로 2층에
대웅전 현판이 걸려있으며, 1962년 해체수리를 했을 때, 3층 중도리에서 고맙게도 상량문(上
樑文)이 튀어나왔다. 그 문서를 통해 1690년에 중창했고, 1724년에 3번째 중창이 있었음이 밝
혀졌으나 정작 중요한 첫 조성시기와 1번째 중창 시기는 나와있지 않았다.

건물의 조성시기는 조선 중기로 여겨지며, 원래는 대웅전이 아닌 목탑이었다고 전한다. 경내
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이렇다할 탑이 없는데, 이 건물이 탑의 역할을 대신 하고 있던 것이다.
법주사(法住寺)의 5층 팔상전(八相殿)과 더불어 이 땅에 몇 없는 목탑 스타일의 건물이자 거
의 유일한 3층 목탑으로 그 가치가 대단하여 일찌감치 국가 보물 163호의 지위를 누렸다.

6.25 시절에는 절의 상당수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대웅전은 총탄이 비켜가 구사일행으로 살아
남았다. 그 큰 난리에도 살아남았건만 1984년 4월 어느 어리석은 신도가 촛불을 잘못 다룬 통
에 화마(火魔)의 부질없는 먹이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허무하게 사라진 대웅전을 다시 소환하고자 1985년 8월 복원공사를 벌여 1986년 12월 완
성을 보았으나 국가 보물의 지위는 끝내 박탈되고 말았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본래 지붕이 사각이란 것이 확인되어 기존의 팔작지붕 대신 사각의 사모
지붕으로 바꾸었으며, 상륜(相輪) 부분을 보완했다.


▲  대웅전 목조삼존불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51호

대웅전의 겉모습이 비록 3층이긴 하나 무늬만 3층이지 완전 하나의 공간이다. 내부에는 목조3
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그의 열성제자인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아난존
자(阿難尊者)가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며 서 있다. 이들은 1984년 대웅전이 화재로 무너지
면서 자칫 화마의 먹이가 될 뻔했으나, 절 부근에 있던 마을 농부가 불길을 보고 달려와 저들
을 등에 업고 탈출시키면서 화를 면했다.
이후 대웅전이 복원되자 석가여래상과 존자상을 새로 개금(改金)하고 채색하여 제자리로 옮겼
다.

석가여래의 얼굴은 거의 4각형 모습으로 꽤나 복스러워 보이는데 머리는 꼽슬인 나발이며, 눈
은 지그시 감고 있고, 붉은 입술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중생들의 고충을 빠짐없이 들으
려는듯, 귀는 크고 두꺼우며 어깨를 감싼 옷은 두툼해 보인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펴서 무릎
안쪽에 올려놓았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오른쪽 발바닥 위에 놓았다.
그의 왼쪽에는 다소 늙어보이는 가섭존자가 있는데 표정이 매우 밝고 손이 매우 두껍다. 그에
반해 아난존자는 명상에 잠긴 조금은 늙은 동자승 같은 모습이다.

이들 3존불은 1694년에 조성된 것으로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조성시기와 참여자 이름이 드러
나 있으며, 만들어진 시기가 확실해 다른 조각상의 표준이 된다. 대웅전 화재 때 중생에 의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만큼, 절과 불교의 이익을 위해 살지 말고, 중생의 고충을 위로하면서
그들을 위해 살아가기를 바란다.


▲  호성전(護聖殿)

호성전은 이 땅에서 거의 흔치 않은 T자형 맞배지붕 집으로 절 건축물 중에 T자형은 오직 이
곳 하나 뿐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제외) 앞서 대웅전처럼 매우 희귀한 형
태의 집이라 국가 지정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겠으나 아쉽게도 6.25때 파괴되어 다시 지어
진 것이라 그 자격은 떨어진다.

이 건물은 쌍봉사에 많은 혜택을 주었던 세조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로 전해진다. 허나 지금은
철감선사와 그의 사형(師兄)인 조주종심(趙州從諗, 조주대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철감은 825년 당나라로 건너가 남천보원(南泉普願. 남천선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때 조주
선사를 만났다. 조주는 철감보다 20살 연상으로 남천에게 '평상의 마음이 도(道)이다'는 말을
듣고 바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철감과 조주는 친한 선후배 관계로 10년 정도 남천의 문하에서 정진했으며, 철감이 조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므로 그들의 진영을 마련해 호성전에 봉안했다. 조주의 진영은 하북성(河
北省) 백림선사에 있는 송나라 때 판각된 그의 초상화 영인본(影印本)을 참고해 제작했을 정
도로 크게 공을 들였다.


▲  늙은 티가 너무 풍기는 조주대사의 진영와 중년의
중후함이 느껴지는 철감선사의 진영

▲  나한전(羅漢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거처이다. 6.25때 파괴된 것을 다시 세웠다.

▲  극락전(極樂殿)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66호

두툼한 맞배지붕을 지닌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조선 중
기 건물로 6.25때 대웅전과 함께 운좋게 살아남았으며, 대웅전이 1984년 화재로 무너지자 경
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란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다.
극락전 앞에는 수백 년 정도 묵은 단풍나무 2그루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 운치
를 우려내고 있는데 그들은 대웅전 화재 때 천하를 집어삼킬 정도로 강렬했던 화마의 공격으
로부터 극락전을 지킨 존재들이다. 온 몸으로 막는 과정에서 나무들은 가지를 적지 않게 잃었
으나 덕분에 극락전은 무사했다. 만약 극락전까지 허무하게 날라갔다면 경내에 오래된 건축물
은 전멸하게 된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52호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좌상은 1694년에 조성된 것이다. 그의 좌우에는 같은 시기에 조성
된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해 있었으나 1989년 8월, 어느 나쁜 손에
도난을 당해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하여 새로 협시보살상을 장만해 아미타불의 허
전한 옆구리를 채웠다.
아미타불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얼굴은 거의 네모진 큰 모습이며, 덩치도 제법
있어 보인다. 머리는 나발(꼽슬)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으며, 얼굴은 거의 무표정 같
다. 목에는 삼도가 그어져 있고 어깨를 감싼 옷의 주름은 매우 뚜렷하다. 오른손은 올리고 왼
손은 내린 모습인데, 양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걸치며 앉아있다.

대웅전의 목조삼존불상과 같은 해에 조성된 것으로 조각 형식이 비슷해 같은 사람이 만든 것
으로 여겨지며, 대웅전의 그것보다 허리가 곧고 늘씬한 모습이라 대웅전 삼존불 다음으로 조
성된 듯 싶다.



 

♠  쌍봉사 마무리

▲  지장전(地藏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의
거처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졌으나 6.25때 파괴된 것을 이후에 다시
세웠다.

▲  지장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탱

지장전에 봉안된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은 1667년경에 운혜(雲惠)를 비롯한 그의 일
파 조각승들이 조성했다. 아주 고맙게도 조성발원문이 나왔고, 쌍봉사 사적기(事蹟記)와 '능
주지 사자산 쌍봉사제전 기문집록(綾州地 獅子山 雙峰寺諸殿記 文輯錄)' 등에 조성 관련 내용
이 나와있다.
이 지장보살상의 조성시기가 밝혀지면서 해남 대흥사(大興寺) 지장시왕상, 강진 백련사(白蓮
寺) 지장시왕상, 미황사(美黃寺) 지장시왕상, 순천 동화사(桐華寺) 지장시왕상 등 운혜 계열
의 조각으로 여겨지는 조각상들의 조성 연대 추정에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며, 명계조각(冥界
彫刻)이라는 종교적 엄숙성과 17세기 불교 조각계가 추구한 대중적 평담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여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
으로 국가 보물 1,726호로 지정되었다.

얼굴이 거의 네모난 지장보살상은 양 어깨를 덮은 옷을 입고 있으며, 아미타수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서 있는데, 도명존자는 합장
인을 선보이고 있고, 무독귀왕은 가슴에 모은 두 손이 옷에 감추어져 있다. 그들 뒤로는 근래
조성된 지장탱이 있는데, 지장보살의 푸른 대머리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  의자에 앉아있는 시왕상과 불꽃을 휘날리고 있는 금강역사상

▲  경내에서 철감선사탑으로 인도하는 숲길 ①

쌍봉사에 왔다면 경내만 살피지 말고 철감선사탑과 탑비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경내에서 서
북쪽으로 난 숲길을 조금 올라가면 그 길의 끝에 쌍봉사 제일의 보물인 그들이 있다.


▲  경내에서 철감선사탑으로 인도하는 숲길 ②
늦가을이 철감선사탑과 탑비에 퐁당퐁당 반했는지 한참을 머물고 있다.

▲  철감선사탑 - 국보 57호

철감선사는 쌍봉사에 머물며 사자산문의 기초를 닦다가 868년 7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의
입적 소식을 들은 경문왕은 크게 아쉬워하며 '철감'이란 시호를 내려 탑과 탑비를 세우게 했
는데, 그가 입적한 그해에 탑과 비석이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철감의 제자들은 우수한 석공을 초빙하여 스승의 승탑을 조성했다. 비록 2.3m의 낮은 높이지
만 온갖 정성을 들여 탑의 밑도리부터 윗도리까지 조각을 했으며, 탑은 전체적으로 8각의 형
태로 8각 바닥돌 위에 기단부를 두었다. 기단부는 밑돌, 가운데돌, 윗돌 세 부분으로 이루어
져 있는데, 밑돌과 윗돌 장식이 꽤 화려하며,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8마리의 사자가 구름 위
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제각각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윗돌은 2단으로 두어 밑에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迦陵頻伽)>가
악기를 다루는 모습을 새겼다.

철감의 사리가 깃들여진 탑신(塔身)에는 8개의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
다 문짝 모양, 사천왕상, 비천상(飛天像) 등을 조각했다. 지붕돌에는 아주 현란한 조각 솜씨
가 깃들여져 있는데,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
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허나 너무 완벽하면 재미가 없는지
라 머리장식은 장대한 세월에게 싹 날라가 없어진 상태이다.

신라 후기 대표적인 승탑이자 9세기에 조성된 승탑 중 제일로 꼽히는 명작으로 1,100년의 적
지 않은 나이에도 조각이 살아있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자연과 세월도 보는 눈이 있는지 그
를 비켜간 모양이다.

▲  내 시선을 계속 잡아두고 있는 철감선사탑의 위엄

▲  철감선사탑비 - 보물 170호

탑 옆에 자리한 탑비는 철감선사의 행장을 머금은 비석이다. 용 머리의 귀부(龜趺)와 비신(碑
身),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으나 탑비에 군침을 흘린 세월이 비신을 잡아가버려 현재는 귀
부와 이수만 남은 상태다. 하여 비석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용머리의 귀부를 두었는데, 여의주를 입에 머금고 있는 모습이며,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어 앞으로 슬금슬금 기어가는 것 같다. 이수는 용조각을 생략하고 구름
무늬만 가득하다.
탑과 더불어 868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조각 수법이 휼륭해 신라 말 대표적인 탑비로
꼽힌다. 이 역시 철감을 향한 제자들의 지극정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철감선사탑비
거북이 등짐을 지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다.

▲  철감선사탑비의 옆모습

▲  철감선사탑비의 뒷모습

철감선사탑, 철감선사탑비를 끝으로 쌍봉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들에게 꽂힌 시선이
좀처럼 떼어지지를 않아서 나올 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는지 모른다.

쌍봉사 이후 내용은 생략하며 본글은 여기서 쿨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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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당, 여수 충민사 <마래산 석천사>

여수 충민사



~~~ 여수 겨울 나들이 ~~~
(충민사, 석천사)

여수 충민사, 석천사
▲  여수 충민사, 석천사 모형도 (충민사 유물전시관)
 



 

겨울의 차디찬 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하던 1월의 끝 무렵, 겨울 제국의 핍박에서 잠
시 벗어나고자 일행들과 따뜻한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햇님이 막 출근을 하던 이른 아침에 서울을 떠나 충북과 충남, 전북의 여러 곳을 두루 거
쳐 21시가 넘어서 여수(麗水) 땅에 들어섰다. 여수는 원래 계획에 없었으나 광양(光陽)에
서 저녁으로 광양불고기를 섭취할 때, 그곳 이야기가 나와 즉흥적으로 가게 되었다.

동광양에서 환상적인 야경을 자랑하는 이순신대교를 건너 여천공단을 가로질러 여수 시내
로 진입, 돌산대교와 가까운 봉산동에 여장을 풀고 과식에 가까운 여로(旅路)에 오지게도
고생한 몸을 뉘였다. 베게에 머리를 대기가 무섭게 잠이 들어 한 9시간 정도 달달하게 숙
면을 취했다.
여수는 향일암(向日庵)을 보러 4번이나 인연을 지은 아련하고도 달달한 추억이 있다. (향
일암을 4번이나 갔음) 그때(파릇파릇했던 20대 중~후반 시절)는 심야 무궁화호 열차를 5~
6시간이나 타고 내려갔었지. 허나 여수에서 하룻밤을 머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여수까지 즉흥적으로 오긴 했으나 정작 정처(定處)를 정하는데 많은 갈등이 생겼다. 딱히
땡기는 메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존재가 있어 그를 찾으니 바로 충
민사와 석천사였다.



 

♠  천하 최초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당, 여수 충민사(忠愍祠)
- 사적 381호

▲  충민사의 정문인 숭모문(崇慕門)

전라선의 남쪽 종점인 여수, 의식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격하게 떠오르는 존재가 하나 있
을 것이다. 바로 남해바다의 영원한 해신(海神)인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장군이다.
그는 1591년 여수에 설치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좌수사(左水使)로 부임하여 왜군이 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당시 여론을 과감히 무시하며 수군을 육성했다. 그 결과 전라좌수영
수군은 천하를 모두 씹어먹을 정도의 최강의 해군이 되어 임진왜란 때 거침없는 활약을 펼친
다.
특히 그 시절에 매우 흔했던 백병전(白兵戰) 대신 원거리 화포 공격을 중심으로 전쟁을 펼쳐
근대 해전의 효시로 격하게 추앙 받고 있으며, 그의 수군이 처리한 왜선은 800척 이상, 물고
기 밥으로 만든 왜군은 10만이 넘는다. 임진~정유란 때 조선에 투입된 왜군이 30만이 넘으니
1/3 가까이를 처리한 셈이다. 반면 이순신 수군의 피해는 아주 경미하다. (손상된 배는 없음,
전사자는 1,000명 이하, 그 유명한 한산도대첩 때 아군 사상자가 119명)

하늘도 놀라고 귀신도 울고 갈 전략으로 모든 해전에서 일방적에 가까운 연승을 거두어 왜군
은 그의 이름 3자에 오줌을 지리며 줄행랑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에 대한 왜인들의 두려움
이 얼마나 컸던지 이순신이 번개를 내리쳐 왜장을 죽이고 왜 수군을 격파했다고 했을 정도이
다.
이순신은 1598년 11월, 여수에서 가까운 남해 노량(露梁)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인 노량해전(
露梁海戰)을 일구고 남해의 영원한 해신이 되었다.

그의 사당하면 아산 현충사(顯忠祠)가 대표적이다. 수학여행의 필수 답사지인 그곳 외에도 남
해 충렬사(忠烈祠), 고금도 충무사(忠武祠), 통영 충렬사 등 남해바다에 그의 사당이 여럿 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사당 중 제일 먼저 지어진 곳은 어디일까? 그 해답은 바로 여수 충
민사이다. 충민사는 현충사, 충렬사(통영, 남해)에 비해 인지도는 다소 떨어지나 충무공의 제
1호 사당으로 그 가치는 백두산에 붙어있을 정도로 크다.

체찰사(體察使)인 오성 이항복(李恒福)은 1601년 선조(宣祖)에게 충무공 사당 건립을 청했다.
그렇게 왕의 허락을 맡아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된 이시언(
李時言, ?~1624)을 시켜 사당을 세우니 그것이 충민사의 시작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인 김상
용(金尙容)이 왕에게 청해 '충민사'란 사액을 받으면서 국가 공인 충무공 사당 제1호가 되었
다.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통영 충렬사보다 62년이나 빨리 세워졌음)
충무공 외에도 의민공(毅愍公) 이억기(李億祺)와 충현공(忠顯公) 안홍국(安弘國)도 봉안했으
며, 나중에 충민공 이봉상(李鳳祥)을 추가해 별도 신묘(新廟)에 봉안하고 석천재(石泉齋)를
세웠다.

1732년에 중수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 때 충민단(忠愍壇)만 남기고 모두
철거되었으며, 1873년 지역 유림들의 건의로 다시 사당을 세웠다. 이때 판서(判書) 윤용술이
충민사 현판을 작성해 사당에 내걸었다.

1919년 고약한 왜정(倭政)이 충민사를 철거하면서 그 옆구리에 자리한 석천사가 충민사의 역
할을 도맡았으며 1947년 지역 주민들이 2칸 기와집을 지어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5년 정화사
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춘기 석채례(釋菜禮)를 지내고, 음력 9월 10일에 추기 석채례를, 양력
4월 28일에는 충무공 탄신제를 지낸다.


▲  겨울 햇살이 잔잔히 내려앉은 충민사 외곽 공원

충민사는 사당 본전과 석천사, 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 앞에는 공원이 닦여져 있어 평
화로운 풍경을 선사하며, 정문 동쪽에는 유물전시관이 있다. 그리고 사당 뒤에는 마래산(馬來
山, 386m)이 넓게 나래를 펼치며 여수 시내와 한려수도(閑麗水道)를 굽어본다.

▲  익살스럽게 생긴 연등동 벅수 모조품

정문 안쪽에는 연등동 벅수의 모조품 1쌍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지킨다. 벅수는
이 땅에 흔한 돌장승으로 여수 지역에서는 벅수라고 부른다.
연등동 벅수는 1788년에 지어진 것으로 좌수영 서문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여 좌수영과 마을
을 지키는 수호신 및 이정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좌수영과도 관련이 조금 있어 전라
좌수영을 천하 제일의 해군기지로 키웠던 이순신 장군의 사당, 충민사에 그 모조품을 세워 사
당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  충민사 홍살문
다소 차갑게 생긴 홍살문이 이곳이 성역임을 알리며 엄숙함을 요구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충민사 정도면 홍살문의 당부를 100% 지켜야 된다.

▲  충민사 약수터
내가 갔을 때는 부적합 딱지를 받은 상태였다. 부적합 판정에도 불구하고 마래산은
속세를 향해 아낌없이 물을 베푼다. 오염 정도는 낮아 보여 약수터 주변을 잘
정화하고 비도 적당히 와준다면 언제든 회생이 가능하다.

▲  충민사 정화사적비
박정희 정권이 1975년 충민사를 정화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  경내를 가리며 계단을 길게 늘어뜨린 충민사 외삼문(外三門)

▲  충민사의 심장을 머금고 있는 내삼문(內三門)

▲  충민사 본전(本殿)
내삼문 안에 자리한 충민사 본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그만 팔작지붕 집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이억기, 안홍국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건물은 1975년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 못했다.

▲  충민사의 중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亂中日記)나 시문 등, 글씨는 많이 남겼으나 정작 그의 생전에 모습
은 남기지 못했다. 하여 그의 영정은 오로지 100% 상상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 영정에는 아
주 개 같은 진실이 숨겨져 있어 심히 암 유발을 유도하고 있으니 바로 친일파 화가인 김은호
(金殷鎬)가 그렸다.
이 나라가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더러운 친일파 화가가 거룩
한 해신의 영정까지 그려넣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인데, 물론 김은호는 조선 황실의 어진화가
로 활동했을 정도로 능력은 대단하나 문제는 왜정에 적극 빌붙었다는 것이다.

친일매국노의 후손과 그 추종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행정, 역사, 교육, 문학 등 참
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말기 암 환자의 암세포처럼 몸살 나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 이 나라를
크게 좀먹고 있다. 그들을 모두 청산하고 처단해야만 나라가 바로 서거늘 시간이 흐를수록 점
점 산으로 가고 있는 것이 실로 한탄스럽다.


▲  충민사 본전 좌측에 자리한 의민공 이억기의 영정

이억기의 영정 역시 상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장군 뒤로 푸른 하
늘과 구름까지 묘사되어 있어 마치 상반신 사진을 찍어 그림처럼 표현한 것 같다.

이억기(1561~1597)는 왕족 출신으로 자는 경수(景受)이다. 수영과 무예에 능했으며, 17살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번호(蕃胡)가 압록강을 침범하자 경
흥부사(慶興府使)가 되어 그들을 때려잡았으며,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우도 수사(水使)가 되
었다.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의 협조 요청을 받아 전라우도 소속의 함선과 수군을 이끌고 공동작전을
펼쳐 5년 넘게 왜 수군을 때려잡았으며, 이순신과도 매우 사이가 돈독했다.

1597년 이순신이 원균(元均)에게 참소를 당해 하옥되자 이항복,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이순
신의 무죄를 변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원균이 통제사가 되어 무리하게 왜군 토벌에
나서자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랐다.
허나 칠천량에서 방심하고 쉬는 동안, 이순신의 수군에게 5년 넘게 탈탈 털렸던 왜 수군은 작
심하고 파상적인 공세를 펼쳤고 방심한 조선 수군은 우왕좌왕하며 크게 참패를 당했다. 이때
이억기는 분전했으나 힘이 다해 물에 빠져 전사했으며, 원균 또한 이순신이 힘들게 길러놓은
수군을 거하게 말아먹고 지옥으로 떨어졌다.

이후 이억기는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지고 충민사(忠愍
祠)에 봉안되었다.


▲  충민사 본전 우측에 자리한 충현공 안홍국 영정

안홍국(1555~1597)은 순흥안씨 집안으로 자는 신경(藎卿)이다. 1583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
진왜란이 터지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했다.
영흥(永興)에 있는 임해군(臨海君)에게 왕명을 전했고, 삼남 지역의 여러 진과 전쟁터를 돌며
왕명을 전하는 역할을 맡다가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온갖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보성군수로 있던 중,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원균으로 주인이 바뀐 통제영(統制營)으로
달려가 그 중군이 되었다. 안골포(安骨浦) 해전에서 승리했으나 가덕도 해전에서 패해 전사했
으며, 이때 원균은 칠천량으로 후퇴했다.
이후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었고 여수 충민사와 보성 정충사(旌忠祠)에 배향되었다. 안홍국
역시 이억기처럼 암균이라 손가락질 받는 원균의 어리석은 전략으로 허무하게 전사했다.

이곳에 봉안된 안홍국의 영정을 보니 얼굴이 충무공 이순신과 비슷하다. 옷과 포즈만 다를 뿐
서로 비슷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영정도 김은호가 그린 듯싶다. 문화재청과 충민사는 생각
이란 것이 있다면 친일파가 그린 영정은 내다 버리고 옛 무인에 어울리게 새 영정을 만들어
봉안해야 될 것이다. 해신이 된 충무공과 충현공(안홍국)도 그걸 간절히 원하고 있을 것이다.

* 충민사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산114-12 (충민사길 52-23, ☎ 061-666-5738)

▲  귀부와 비신(碑身), 이수를 갖춘
충민사 사적비(事蹟碑)

▲  충민사 뜨락에 배치된 커다란 돌들
돌의 생김새를 봐서는 옛 충민사의
주춧돌로 여겨진다.


 

♠  충민사 마무리, 석천사와 유물전시관

▲  석천사(石泉寺) 경내

충민사 서쪽에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석천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충민사와 늘 한몸처럼
지낸 단짝으로 지금도 서로 바짝 붙어 둘의 깊은 인연을 과시한다.

석천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화엄사(華嚴寺)의 말사(末寺)이다. 여수 지역에서 흥국사
(興國寺) 다음으로 명성이 있는 절로 신도 규모는 여수 지역 사찰 중 제일이라고 한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창건설과 1601년 창건설이 있는데, 1195년에 보조국사가
인근 흥국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거의 없으며, 1601년에 옥형(玉炯)과 자운(
慈雲)이 창건한 것으로 크게 무게를 두고 있다. (절 안내문에도 1601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와
있음)

자운과 옥형은 승장(僧將)으로 300여 명의 승군(僧軍)을 이끌고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
갔다. 자운은 충무공이 지휘하는 배에 승선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옥형은 군량미를 조달하며
충무공의 식사와 차를 직접 챙겼다.
충무공이 전사하자 자운은 백미 600석을 마련하여 노량에서 수륙재(水陸齋)를 열었고,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충민사에 제를 올렸다. 옥형도 충무공을 따라다니며 큰 신임을 받았으며 그 은
혜를 조금이나마 갚고자 충민사 옆에 작은 초당을 짓고 그의 인품과 충절을 추앙하며 매일 사
당을 쓸고 닦고 제사도 직접 챙겼다. 바로 그 초당에서 석천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향교 교리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했던 박대복(朴大福)은 혼자서라도 충무공
에게 제향을 올리고 싶어서 충무공이 운동 삼아 물을 마셨던 마래산 자락 석간수(석천) 주변
에 두어 칸의 사당을 지었으며, 옥형이 그 옆에 작은 초당을 지어 충무공의 영정과 일생을 같
이 했다고 전한다.

석천사란 이름은 충민사 뒤쪽 큰 바위 밑에 있던 석간수에서 비롯되었으며, 왜정 때 충민사가
파괴되자 충민사의 역할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충민사를 손질하는 과정에서 일주문(一柱門)이 철거되고 대웅전과 요사(寮
舍)의 위치도 강제로 바뀌어 본래 모습을 많이 잃었으며, 경내 건물도 1980년대 이후 것들이
라 고색의 내음은 모두 말라버렸다.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의승당(義僧堂), 종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400년을 묵
은 절임에도 소장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다.

* 석천사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830 (충민사길 52-21, ☎ 061-662-1607)
* 석천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하얀 피부의 석조관세음보살입상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부를 지닌 고운 보살상으로
근래 장만했다.

▲  석천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  대웅전 앞에 놓인 석조(샘터)
마래산이 베푼 물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와 나그네의 갈증을 아낌없이
해소해 준다.

▲  경내 앞에 무성하게 자라난 동백나무
동백은 친 겨울파의 꽃이라 한겨울에도 푸른 녹음(綠陰)을 자랑한다.

▲  충민사 유물전시관

충민사 공원 동쪽에는 유물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전라좌수영과 충민사의 역사, 충무공 이
순신 관련 자료와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주로 복제품이 주류를 이룬다. 허나 충민사 유
허비 등 일부를 제외하고 딱히 두드러지는 전시물은 없어 일부만 본글에 소개한다.
(9시부터 18시까지 운영함, 겨울에는 17시까지, 입장료 없음)


▲  유물전시관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존재
충민사 성격에 걸맞게 제일 앞에 칼을 높이 든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승병,
군사, 의병, 화포, 거북선 등이 담겨져 있다.

▲  왼쪽부터 계사일기(1593년), 갑오일기(1594년), 병신일기(1596년),
정유일기(1597년) 2권, 무술일기(1598년)
저 일기 중 정유일기만 진품이고 나머지는 복제품이다.

▲  수군절도사가 사용했던 귀도(鬼刀)와 참도(斬刀)
저들도 모두 복제품임

▲  충민사 유허비(遺墟碑)

충민사 유허비는 진품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10세손(이름 부분은 마멸되어 확인 불가)이 병술
년(丙戌年, 1826년인듯?) 9월에 세운 것으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으로 충민사
가 문을 닫자 유허비도 손상을 당했다.
여수향교에서 이 비석을 수습해 66년간 품으면서 단비제(斷碑祭)를 지냈으며, 왜정 때 충민사
가 다시 파괴의 고통을 입자 왜정이 이 비석까지 괴롭힐까 우려하여 충민사 앞뜰에 몰래 묻어
버렸다.
이후 1975년 충민사를 손질했을 때 화단에서 분리된 채, 발견되었으며, 복원과정을 거쳐 유물
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비석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나중에 충민사 뜨락으로 옮길 계
획이라고 하며, 비석의 높이는 124cm, 폭 57.5cm, 두께 11.5cm이다.

충민사와 석천사를 간만에 둘러보고 여수와의 인연을 싹둑 정리하며, 보성(寶城), 고흥(高興)
지역으로 서둘러 넘어갔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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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땅끝을 거닐다. 해남 땅끝 (맴섬, 땅끝마을, 땅끝탑, 땅끝전망대, 갈두산)

해남 땅끝



' 천하의 땅끝, 해남 땅끝 봄맞이 나들이 '

해남 땅끝마을 (갈두마을)
▲  해남 땅끝마을 (갈두마을)

땅끝전망대 땅끝탑 앞바다 (남해바다)

▲  땅끝전망대

▲  땅끝탑 앞바다 (남해바다)

 



 

차디찬 겨울이 저물고 봄이 훈풍을 일으키던 3월 한복판의 어느 볕 좋은 날, 천하의 땅
끝이라 불리는 해남 땅끝을 찾았다.
바로 전날에 신안군의 새로운 중심지인 압해도(押海島)를 찾아 그곳의 대표 지붕, 송공
산(宋孔山, ☞ 관련글 보기)을 둘러보고 목포 시내로 나와 적당한 찜질방에서 1박을 청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해남(海南)으로 넘어가 해남시외터미널에서 땅끝 방면 군내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50여 분을 내달려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땅끝마을에 도착했다.



 

♠  해남 땅끝 입문

▲  땅끝을 알리는 표석

땅끝마을은 해남 본토의 최남단(最南端)이자 한반도의 최남단을 장식하고 있는 바닷가 마을로
원래 이름은 갈두마을(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이다. 천하의 땅끝<토말(土末)>이란 듬직한 후광
(後光)을 등에 업은 곳으로 땅끝탑이 있는 갈두산(葛頭山) 남쪽 해안이 실질적인 땅끝인데,
땅끝마을에서 15분 정도 걸어가야 된다.

땅끝의 위치는 북위 34도 17분 32초, 동경 126도 31분 25초로 어디까지나 한반도의 남쪽 끝이
지 우리나라의 남쪽 끝은 절대로 아니다. <현재 이어도(離於島)와 마라도가 임시로 남쪽 끝을
잡고 있음>
우리는 가까운 북한부터 해서 만주(길림성, 흑룡강성)와 요동반도, 요서(遼西), 중원 화북 지
역, 산동반도, 연해주, 대마도(對馬島), 왜열도 등 잃어버린 땅이 정말 오지게도 많다. 그 땅
의 오랑캐를 모두 때려잡아 고토를 회복하고 그 이상의 영토를 점유해야 될 의무가 우리에게
있으며, 지금의 땅끝에서 만족하면 절대로 안된다. 그러니 이곳은 어디까지나 임시 땅끝이다.

해남 땅끝은 갈두산과 주변 해안, 땅끝마을 일대를 일컫는데 동,서,남 3면이 남해바다에 접해
있고 오로지 북쪽만 육지로 이어진다. 하여 일출과 일몰을 모두 만날 수 있다. 땅끝의 지붕인
갈두산 사자봉 정상(156m)에는 땅끝전망대가 설치되어 조망을 돕고 있으며, 그곳까지 땅끝 모
노레일이 닦여져 전망대까지 빠른 이동을 돕는다.
이곳에 퐁당 반한 대자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바위와 벼랑들이 바닷가에 잔뜩 펼쳐
져 있어 풍경을 크게 돋구고 있으며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내음도 그윽하다. 또한 남해바다 너
머로 무려 100여 개의 섬들이 두 눈에 들어와 조망도 일품이다. 땅끝전망대에서는 멀리 제주
도 한라산(漢拏山)까지 보인다고 하나 아무리 눈을 후벼파도 한라산은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이번 땅끝 나들이는 땅끝마을에서 시작하여 땅끝탑, 연리지, 땅끝전망대를 거쳐 다시 땅끝마
을로 돌아오는 코스로 진행했으며,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자꾸 발걸음을 멈추다보니 3시간이
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야말로 이곳은 시간 도둑, 시선 도둑, 마음 도둑이다.


▲  땅끝항에서 바라본 송호리 동부 지역

▲  땅끝항에 몸을 기댄 노화도행 여객선

땅끝항(땅끝항여객선터미널)에서는 노화도(蘆花島)와 횡간도, 흑일도, 넙도 방면으로 가는 여
객선이 운항하고 있다. 그중 노화도 산양항으로 가는 배는 20~40분 간격으로 자주 뜨며 차량
수송도 가능하다. 게다가 노화도에서 보길도(甫吉島)까지 다리(보길대교)가 이어져 있어 보길
도 나들이 때 아주 유용하다.


▲  땅끝항 남쪽에 떠있는 맴섬

땅끝 풍경화의 조촐한 장식물인 맴섬은 2개의 작은 바위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저들은
하나의 섬으로 밀물 때는 2개, 썰물 때는 하나의 단단한 모습을 보인다. 섬 윗도리에는 키 작
은 소나무와 수풀이 뿌리를 내려 섬을 꾸미고 있으며 여기서 바라보는 일출이 꽤 장관으로 알
려져 있다. 그들 사이로 햇님이 붉은 얼굴을 내밀며 찬란한 해돋이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일출은 아니며, 매년 2월 13~18일 경과 10월 23~28일 경 등
1년에 딱 10~12일 정도 밖에는 만날 수 없는 아주 비싼 일출로 그 외에는 비껴서 해가 뜬다.


▲  형제처럼 나란히 자리한 형제바위
대자연이 긴 세월을 두고 빚은 작품으로 오른쪽 바위는 사람 얼굴 같은 모습이다.

▲  옆에서 바라본 형제바위 (바위 너머로 보이는 섬은 흑일도)

▲  정자 쉼터에서 바라본 형제바위(왼쪽)와 맴섬, 땅끝항

▲  땅끝의 짧은 백사장 (땅끝마을 방풍림)
땅끝 해변은 태반이 벼랑이라 모래사장은 이곳 뿐이다.

▲  땅끝 방풍림(防風林)에서 바라본 흑일도(黑日島)

땅끝 동부와 갈두산에서는 어디서든 흑일도가 시야에 보인다. 땅끝마을에서 불과 2~3km 거리
로 해안에 검은 모래가 깔려있어 흑일도라 불리는데, 해가 지는 서쪽에 자리해 있어 해가 뜨
는 백일도와 대비되어 흑일도라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해온다.
땅끝에서 하루에 2회(여름에는 3회) 여객선이 들리며 섬의 면적은 1.58㎢, 해안선 길이는 약
7.9㎞이다. 속세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섬이고 딱히 명소도 없어 외지인의 발걸음은 거의 없
는 실정이다. 하여 저 섬에 과연 발을 들일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  저만치 멀어진 땅끝항, 그리고 바로 밑에 보이는 땅끝 백사장

▲  서로 교행하는 노화도와 땅끝행 여객선

▲  잘 닦여진 산책로 (땅끝천년숲옛길 1코스)

땅끝선착장에서 방풍림을 지나면 땅끝전망대로 인도하는 모노레일(Monorail) 승강장이 나온다
. 모노레일이 '이거 좀 타고 가소!' 진하게 유혹을 건네지만 나는 아직 두 다리가 멀쩡하므로
꿋꿋이 걸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탈 돈이 없음 ㅠㅠ)
여기서 땅끝탑까지 해안 산책로를 따라가면 되는데 바다와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
이나 바다와 접한 부분은 거의 낭떠러지이다. 그리고 문바위와 병풍바위 등의 바위와 사재끝
샘 같은 오래된 샘터도 있으나 모두 해변에 붙어있어 접근이 꽤 까다로우며(앞서 백사장에서
해안 바위길을 타고 가야됨) 땅끝탑 직전에 땅끝전망대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길이 있다.
또한 전국적인 둘레길, 도보길 유행에 따라 땅끝천년숲옛길이란 도보길이 이곳 해안 산책로의
신세를 지고 있는데, 땅끝 구간을 1코스(15.4km)로 갈두산 정상(땅끝전망대)과 갯재를 거쳐
북쪽으로 달마산 미황사까지 연결되며 거기서 2코스와 접선되어 더욱 북으로 달려간다.


▲  보다 가까워진 흑일도
흑일도와 조금은 가까워졌다. 허나 아무리 그래 봐야 여기서는
만질 수도 없는 바다 건너의 섬이다.

▲  벼랑을 극복하고 다져진 나무데크 해안 산책로

▲  벼랑 위를 달리는 해안 산책로 (문바위 부근)

▲  해안 산책로에서 바라본 평화로운 풍경
오른쪽에 보이는 섬이 흑일도와 대비된다는 백일도(白日島)이고
그 뒤에 동화처럼 숨은 섬이 동화도(東花島)이다.

▲  해안 산책로에서 바라본 노화도와 보길도, 넙도



 

♠  땅끝의 진정한 종결자, 땅끝탑

해남 땅끝의 진정한 땅끝에 세워진 땅끝탑은 한반도의 남쪽 끝을 붙잡고 있다. 삼각형 모양의
탑을 세우고 그 밑도리에 땅끝을 주제로 한 시문(詩文)들이 아로 새겨져 있는데 그 앞쪽에 배
의 선두 부분처럼 생긴 전망대와 한반도 모양의 조각품이 땅끝을 제일 위로 하여 꺼꾸로 새겨
져 있다. 이는 이곳이 한반도의 끝이자 동시에 시작점임을 뜻한다.

천하의 남쪽 끝을 강조하고자 세워진 땅끝탑 주변에는 남해바다와 자연산 벼랑이 펼쳐져 있고
바다에는 섬들이 점점이 뿌려져 있어 경관 하나는 아주 예술이다. 어느 세상이든 그 끝자락에
는 다 이런 선경(仙境)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곳은 막다른 곳이라 탑을 둘러보고 다시 왔던 길로 올라가야 된다. 서쪽과 남쪽, 동쪽은 바
다와 벼랑으로 막혀있고 북쪽은 각박한 절벽으로 속세를 잇는 계단이 있다.

* 땅끝탑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산43-3


▲  땅끝탑 앞에 닦여진 조망대와 거꾸로 세워진 한반도 조각품

▲  옆에서 바라본 땅끝탑 조망대
원래 자연산 바위와 벼랑만 있던 곳이나 단지 땅끝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저런 인공적인 시설이 혹처럼 달리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서로가
다소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  땅끝탑까지 따라온 흑일도

▲  땅끝탑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 ①

▲  땅끝탑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 ②
수평선 건너에 보이는 섬은 어룡도와 소장구도, 대장구도이다.

▲  땅끝탑을 뒤로하며 다시 걷는 해안 산책로 (땅끝천년숲옛길 1코스)

땅끝탑을 나와서 해안 산책로를 마저 걸었다. 갈두산 정상으로 직통하는 계단길이 손짓을 했
으나 길이 너무 각박하고(경사가 다소 있음) 해안길이 너무 고와서 해안길을 최대한 걷고 정
상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다.


▲  아찔한 벼랑 위를 달리는 해안 산책로

▲  바다 파도와 바위, 그들만의 상큼한 속삭임

▲  노란 봄꽃이 살랑거리는 해안 산책로
따뜻한 남쪽이라 벌써부터 봄꽃이 노란 꽃망울을 터트렸다. 비록
짧지만 그들의 격려를 받으며 걷는 길이 가히 싫지는 않다.

▲  각박한 벼랑을 개척하여 다져놓은 해안 산책로 (땅끝탑 방향)

▲  저만치 멀어진 땅끝탑과 흑일도

▲  너른 남해바다와 어룡도, 소장구도, 대장구도
저들 섬에는 언제쯤 나의 발을 들일 수 있을까? (어룡도, 대장구도는 유인도)
외딴섬들은 정말로 인연이 쉽게 닿지가 않는다.

▲  남해바다를 가득 품으며 (저 멀리 노화도, 넙도, 보길도 등이 바라보임)

▲  서쪽으로 굽이친 땅끝 서쪽 댈기미 해변 (김 양식장이 여럿 보임)

▲  고깔섬과 그 너머로 보이는 어룡도, 소장구도, 대장구도

▲  갈두산 연리지(連理枝)

댈기미 해변 산책로에는 2그루의 연리지가 있다. 윗 사진의 연리지는 50~60년 정도 묵은 때죽
나무로 오른쪽 나무의 줄기와 왼쪽 나무 가지가 붙어서 연리지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서 10m
정도 떨어진 작은 연리지 또한 30~40년 정도 묵은 때죽나무로 오른쪽 나무의 가지가 왼쪽 나
무의 줄기로 파고 들었다.
보통 연리지는 오래된 나무에서 많이 발생하나 땅끝 연리지는 나이도 아직 어린 것들이 벌써
부터 밝히고(?) 있다. 어린 나무에서 연리지가 발생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편이라 그를 보
는 경우 혹시 모르니 복권을 사두기 바란다.


▲  연리지 주변에서 바라본 댈기미 해변과 고깔섬

▲  댈기미에서 댈기미잔등, 갈두산으로 오르는 계단길

댈기미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해안 산책로를 계속 고집하면 갈산동백숲, 송호해변으로 이
어지며 동쪽 계단길을 오르면 땅끝의 지붕길인 갈두산 능선이다. 해안길은 땅끝마을부터 지겹
게 거닐었으니 이제부터 땅끝 지붕길로 갈아타고자 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동쪽 계단길은 경사가 거의 느긋한 편으로 그 길의 끝에 갈두산 능선과 만나는 '댈기미잔등'
이 있다. 그 밑 해변을 '댈기미'라 부르니 그 동쪽 능선은 등을 뜻하는 잔등을 붙여 '댈기미
잔등'이라 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땅끝전망대 주차장이며 주차장
서쪽에 조망대가 높이 닦여져 있다.


▲  댈기미잔등 산길에서 바라본 땅끝전망대
갈두산이 낮은 뫼이긴 하지만 이렇게 보니 그리 만만해 보이지가 않는다.
아직도 저만큼을 올라가야 되니 말이다.

▲  댈기미잔등 주변 갈두산 능선길

▲  소나무가 울창한 갈두산 능선길 (땅끝전망대 방향)



 

♠  땅끝의 지붕을 거닐다 (땅끝전망대)

▲  땅끝전망대 주차장 조망대에서 바라본 댈기미 해변

땅끝전망대 주차장 서쪽에는 전망대의 맛보기 버전인 조망대가 있다. 이곳에 오르면 내가 올
라왔던 갈두산 서부와 댈기미, 그리고 주변 바다가 훤히 바라보인다. 허나 이 정도의 조망으
로 만족하고 내려가서는 안된다. 땅끝에 왔다면 땅끝탑과 땅끝의 하늘을 붙잡고 있는 갈두산
(사자봉) 정상, 그리고 땅끝전망대까지는 올라가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차량은 이곳 주차장까지 접근 가능)


▲  땅끝전망대 (왼쪽 돌무더기는 갈두산 봉수대)

주차장에서 계단길을 6~7분 정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갈두산 정상과 땅끝전망대가 있다. 땅
끝을 끌어안은 갈두산(葛頭山)은 해발 156m의 낮은 뫼로 바다와 접한 남쪽과 서쪽은 경사가
좀 각박하고(특히 남쪽이 심함) 북쪽과 서쪽은 완만하다. 갈두산 정상을 사자봉이라 부르는
데, 땅끝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그 현장에 땅끝전망대를 닦아 땅끝을 상큼하게 꾸며
주고 있다.
친일 문학가로 더러운 뒷끝을 보였던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은 땅끝에서 서울까지 1,000리
,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穩城)까지 2,000리로 하여 이 땅을 3,000리 강산이라 했다. 그 3천
리의 시작점이자 남쪽 끝이 바로 땅끝인 것이다.

전망대 남쪽에 1981년 땅끝을 알리는 비석을 세웠고 1986년 땅끝 일대가 국민관광지로 지정되
면서 이곳을 관광지로 꾸미고자 높이 10m의 땅끝탑을 세우고, 정상에 갈두산 봉수대를 복원했
다. 그리고 1987년 전망대를 지어 땅끝의 지붕을 올렸다.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전망대가 퇴
락하자 2001년 1월에 부시고 1년에 공사 끝에 2002년 1월 현재 전망대가 지어졌다.
지하 1층, 지상 9층의 높이 39.5m로 타오르는 횃불의 역동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해 천하 통일
의 염원과 소망을 담았다고 하며, 특히 달님이 천하를 지배하는 밤에는 야간 조명을 쏘아 야
경까지 고려했다.
그렇게 여러 의미를 담아 나름 정성껏 지었으니 공짜의 공간일 리는 없을 터, 전망대 바로 앞
에 매표소를 두어 관람객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노려본다. 허나 입장료가 1,000원이고 멀리서
여기까지 왔으니 흔쾌히 입장료를 치르고 유료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만약 그를 안 보고 상경
하면 땅끝을 보다 만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마치 뒷간에서 덜 닦은 기분)


▲  땅끝전망대에서 바라본 흑일도(오른쪽)와 백일도(왼쪽), 동화도
(백일도 뒤쪽 섬), 그리고 그들을 띄워놓은 쪽빛 남해바다

▲  남쪽 소식을 안고 물살을 가르며 땅끝으로 향하는 여객선

▲  땅끝전망대에서 바라본 땅끝마을(갈두마을)

▲  땅끝전망대에서 바라본 어룡도, 소장구도, 대장구도

▲  땅끝전망대에서 바라본 댈구미 해변 주변

갈두산 정상은 사방이 확 트여있어 일출과 일몰을 모두 친견할 수 있다. 게다가 바다에 그림
처럼 떠있는 수많은 섬(대략 100여 개)들이 두 눈에 쏙 들어와 조망도 아주 일품이며 날씨가
좋을 때는 제주도 한라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고 한다. 하여 한라산이 보일까 해서 주름이 잡
히도록 눈동자를 굴렸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으니 내가 보기 싫어서 수평선 너머로 쏙 숨어버
린 모양이다. (그날 황사나 미세먼지는 거의 없었음)


▲  갈두산 봉수대(烽燧臺)

땅끝전망대 바로 앞에는 소도(蘇塗)의 돌탑처럼 생긴 돌무더기가 있다. 처음에는 전망대를 수
식하는 용도로 지어진 단순한 돌탑으로 여겼으나 살펴보니 이곳에 있었다는 옛 갈두산 봉수대
를 복원한 것이다.

갈두산 봉수대는 조선 초에 지어진 것으로 동쪽으로 강진 좌곡산(佐谷山), 서쪽은 해남 화산(
花山, 현 관두산)에 준하여 설치되었다. 원래 땅끝은 영암군(靈巖郡) 땅이었으나 1906년 해남
군으로 넘어갔다.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흔적만 겨우 남아있던 것을 땅끝전망대를 세우면서 다시 세웠으며 봉
수대의 역할은 이제 땅끝전망대가 모두 도맡고 있어 그의 그늘에서 그를 수식하는 장식용으로
조용히 묻혀 지낸다. 시대의 거친 흐름 속에 더 이상 연기를 쏟아낼 일이 없는 것이다.


▲  땅끝전망대 9층 전망대 내부 (망원경은 유료임)

전망대로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9층)로 올라갔다. 이곳에 오르니 앞서보다 더 국
보급의 조망이 펼쳐져 눈과 마음을 크게 흥분시킨다. 다만 9층을 감싼 유리창이 조금 꼬질꼬
질하여 검은 주근깨가 군데군데 피어있으나 조망을 누리는데 크게 지장은 없다.
혹시나 한라산이 보일까 싶어 다시 한번 눈동자에 힘을 주었으나 역시 허사였다. 그날따라 남
쪽 조망 범위는 노화도와 보길도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넘어야 겨우 보일 듯싶은데 그
들이 워낙 단단하게 자리하여 시야를 막으니 일개 인간인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


▲  땅끝전망대 9층에서 바라본 땅끝마을
이렇게 보니 바닷가의 조그만 읍내 같다. (현실은 송지면에 속한 해안 마을)


전망대에는 다리를 쉴 수 있도록 의자가 닦여져 있고, 조망의 질을 조금이나마 높여주고자 망
원경을 여럿 두었다. 망원경은 500원짜리 동전을 먹어야 눈을 뜨므로 평소에는 장님처럼 눈을
감고 있다. 어차피 망원경의 힘을 빌려도 제주도까지는 어림도 없어 보인다.
9층에서 내려올 때는 계단을 이용했다. 계단은 지그재그가 아닌 빙글빙글 이어져 있는데 밑의
층에는 까페와 전시장 등이 있으나 별로 내키지 않아 바로 1층으로 향했다.

* 땅끝전망대(갈두산)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1158-5 (땅끝마을길 100, ☎
  061-530-5544)


▲  땅끝전망대 9층에서 바라본 갈두산 북쪽 산줄기
미황사를 품은 달마산(達磨山)과 대흥사(大興寺)를 품은 두륜산(頭輪山)까지
산줄기가 거침없이 이어진다.

▲  땅끝전망대 9층에서 바라본 흑일도와 백일도, 동화도
땅끝에 와서 흑일도를 정말 지겹도록 본다. 이렇게 멀리서 볼 것만 아니라
나중에 인연을 잡아서 한번 들어가 봐야겠다.

▲  땅끝전망대 9층에서 바라본 노화도, 넙도, 보길도

▲  땅끝전망대 9층에서 바라본 어룡도, 소장구도, 대장구도,
소정원도, 대정원도, 죽굴도

▲  땅끝전망대에서 바라본 땅끝마을 앞바다와 백일도, 동화도,
완도(莞島) 지역

▲  동쪽 밑에서 바라본 땅끝전망대와 땅끝 조형물(오른쪽)
왼쪽에 보이는 야자수가 이곳이 따뜻한 남쪽 지역임을 강하게 어필한다.

▲  땅끝전망대로 인도하는 동쪽 숲길

▲  다시 땅끝마을로 (땅끝마을길에서 바라본 마을)

땅끝의 지붕을 둘러보고 동쪽 길(땅끝마을길)을 통해 마을로 내려갔다. 모노레일이 편하게 가
라며 다시 손짓을 보냈으나 어차피 내려가는 길이라 그 손짓을 흔쾌히 무시했는데, 차량을 위
한 길이라서 뚜벅이길은 따로 없었으며, 거의 1~2분 간격으로 차량들이 지나가 나에게 소음과
매연을 강제로 안겨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땅끝탑 방면 남쪽 계단길로 내
려가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내려가는 중간에 마을의 안녕을 책임지는 '국수당'이란 당집이 있으나 너무 숲속에 묻혀있고
귀찮기도 해서 들어가진 않았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찻길을 내려가 땅끝마을로 진입, 마을의
중심인 땅끝항에 이르렀다.
그런데 앞서 땅끝 나들이를 시작했을 때는 물이 가득 올라와 맴섬과 형제바위를 외로운 바위
섬으로 만들던 바다가 그새 쏙 빠져 그들이 완전 육지의 일원이 되었다. 언제 이곳이 바다의
한복판이었냐는 듯이 아주 감쪽같이 말이다.


▲  바다에서 잠시 해방되어 육지의 일원이 된 맴섬

▲  바다에서 해방되어 자갈밭의 바위처럼 되버린 형제바위

그들을 섬으로 만든 바다는 대자연의 힘에 의해 썰물이란 이름으로 저만치 밀려나 그들을 향
해 다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다. 땅끝을 거진 둘러보고 떠나려는 나에게 형제바위와 맴섬은
밀물 때와 다른 얼굴을 보여주며 작별을 고한다.

땅끝 정류장으로 나와서 해남읍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거의 1,000리가 넘는 나의 제자리
를 향해 출발했다. (땅끝에서 해남읍까지 해남군내버스와 시외직행버스가 운행하고 있음, 군
내버스는 해남읍까지 기본 요금으로 아주 저렴하나 시외직행버스는 철저한 거리비례라 요금이
꽤 비쌈)
이렇게 하여 해남 땅끝 3월 나들이는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땅끝마을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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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만연산, 만연산 오감연결길, 만연사 늦가을 나들이 <만연폭포, 큰재, 만연저수지>

화순 만연산(만연사)



' 화순 만연산 늦가을 나들이 '
만연산 오감연결길
▲  만연산 오감연결길
 


 

가을이 늦가을로 익어가던 가던 10월의 끝 무렵, 광주(光州) 동남쪽에 자리한 전남 화
순(和順)을 찾았다.
이번에는 남동임해지역 일행들과 같이 가기로 했는데, 만연산 큰재에서 10시에 만나기
로 했다. (그들은 남동임해지역, 나는 서울에서 출발) 그 시간을 맞추려면 1박이 아닌
이상은 비행기나 고속열차를 타야 되는데, 하늘길은 첫 비행기가 9시대라 부득불 고속
열차를 타야 된다.
그래서 수서역 출발 SRT 고속열차를 타고자 햇님이 출근하기가 무섭게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서울 남쪽 끝부분에 매달린 수서역으로 이동, 목포(木浦)로 가는 SRT 첫 차
에 나를 담았다.

열차는 오송역, 익산역, 정읍역을 거쳐 1시간 30여 분 만에 광주송정역으로 나를 고스
란히 옮겨 주었다. 여기서 광주1호선을 타고 광주 도심을 가로질러 소태역으로 이동하
여 화순으로 가는 광주152번(전남대치과병원↔화순 도웅리)을 타고 너릿재터널을 넘어
화순읍내로 진입, 화순우체국에서 하차하여 만연산이 보이는 북쪽으로 15분 정도 걸으
니 신기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서 큰재로 이어지는 안양산로를 들어서면 만연폭포로 인
도하는 시골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여기서부터 만연산 더듬기가 시작된다.


 

♠  만연산(萬淵山) 둘러보기 (만연폭포, 큰재, 오감연결길)

▲  만연산으로 인도하는 유천리 시골길

만연산(해발 668m)은 화순읍내의 든든한 뒷산으로 무등산국립공원의 일원이다. 북쪽으로 무등
산(無等山)과 이어져 있으며 산세는 완만하고 숲도 짙다. 서남쪽 자락에는 만연사가 안겨있는
데, 그곳 창건설화로 인해 나한산(羅漢山)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물맞이 명소로 유명한 만
연폭포가 큰재 밑에 숨어있고, 만연산 물을 먹고 자란 만연저수지가 산 밑에 누워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이 산은 숲과 둘레길을 닦아 건강을 주제로 한 이름을 붙여 속세에 내놨는데 만연사 주변 숲
을 다듬어 '치유의 숲'이라 하였다. 또한 '건강회복숲','건강오름숲' 등의 숲과 '오감연결길
(3.1km)','치유숲길(3.3km)','만연산숲길(1.4km)' 등의 둘레길을 다져 천하에 크게 어필하고
있다. 또한 큰재 북쪽에는 만연산 산림공원(철쭉공원)이 닦여져 있어 '한국의 알프스'란 별명
을 지니고 있으며, 봄철에는 철쭉의 향연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  만연폭포로 가면서 바라본 화순읍내
읍내 한복판에 발을 내딘 것이 정말 몇 분 전 같은데 그새 읍내와 저만치
떨어져 버렸다. 내가 정말 저기서 왔는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다.

▲  글씨가 또렷한 만연폭포 비석

▲  만연폭포 돌담 바깥


▲  인공티가 진한 만연폭포(萬淵瀑布)

화순 땅에서 만연폭포가 제법 이름이 있어서 잘생긴 자연산 폭포라 여기고 기대를 했으나 정
작 와보니 물맞이 장소로 지어진 조그만 인공폭포가 나를 맞이했다. 처음에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 거렸으나 그 폭포가 맞았다. 얼마나 허무감이 들던지 새벽 일찍
부터 부산을 떤 보람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다. 허나 어찌하리오. 이것도 엄연한 폭포이니 있
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는 없다. (만연폭포 도착시간은 8시 40분 정도)

나에게 허탈감을 선사했던 만연폭포는 만연산 남쪽 끝 170m 고지에 걸려있다. 인근 계곡물을
가져와 10m 정도의 폭포를 다지고 그 밑에 물맞이와 목욕 공간을 닦았다. 남자용과 여자용이
분리되어 높이 2m 이상으로 담장이 쳐져 있으며 옷을 갈아입는 공간도 설치되어 있다. 옛날부
터 물맞이 명소로 유명해 신경통 환자와 노인들이 많이들 찾고 있고 물이 차갑고 숲속에 짙게
잠겨 있어 피서의 성지(聖地)로도 존재감이 크다.
허나 약간은 쌀쌀한 늦가을 아침이라 폭포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름에 왔었다면 벌써부터 사
람들로 봐글봐글했을 것이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붙여놓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어느 옛날,
'만석이'와 '연순이'란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여 혼인을 약속하였으나 만석이가
전쟁터에 끌려가면서 한참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연순이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내려는 부모의 극성을 견디며 버텼으나 결국 굴복해 다른 사
람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바로 그날 만석이가 몰골이 상한 상태로 마을에 돌아온 것이다.
소식을 들은 연순은 바로 신방을 뛰쳐나와 꿈에 그리던 만석이를 만났고 그렇게 둘은 폭포에
이르게 되었다. 허나 이제 와서 어긋난 인연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저 세상에서 나머지 사
랑을 일구자며 폭포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 사연으로 그들의 이름 앞 자를 따서 만연폭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만연
사에서 산 이름이 비롯되었으며, 산 이름에서 폭포 이름이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투
신을 할만한 절벽이나 못(소)도 주변에 딱히 없다.

* 만연폭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유천리


▲  만연폭포의 삼삼한 숲길
폭포 주변에는 폭포에 물을 대주는 계곡이 흘러간다. 계곡 역시 피서지로
아주 좋은 곳으로 여름 제국도 이곳만큼은 눈치를 보며 피해간다.

▲  큰재로 이어지는 만연산 남쪽 숲길

▲  큰재 정상

만연폭포 주변 그늘에서 조금 머물다가 큰재로 길을 재촉했다. 숲길로 그곳까지 가려고 했으
나 길을 잘못 들어 '안양산로'로 나오게 되면서 별 수 없이 지나가는 차량의 눈치를 보며 그
길의 신세를 졌다. (뚜벅이길이 길 옆에 닦여져 있음)
구불구불 고갯길을 20여 분 오르니 비로소 해발 350m 고지인 큰재 정상에 이르렀다. (그때 시
간 9시 30분) 경사가 느슨한 길은 분명했으나 전날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한 탓에 대관령처럼
은근히 높고 거칠어 보였다.

큰재는 화순읍에서 이서면을 빠르게 잇는 고갯길로 만연산 동부에 자리한다. 만연산 등산로의
동쪽 기점으로 만연산숲길이 여기서 시작되며, 고개 너머로 높은 산이 시야에 보이는데 그 산
이 바로 무등산이다. 무등산이 생각 외로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무등산은 광주, 담양, 화순
에 걸쳐있는 큰 뫼임)


▲  큰재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위엄

▲  큰재약수터

큰재에 도착해 그늘진 서쪽 숲속 쉼터로 들어가 잠시 꿀휴식을 취했다. 그곳에는 큰재약수터
가 있어 만연산이 베푼 물을 마음껏 음미했는데 화순읍내에서 이곳까지 두 발로 올라온 고생
끝에 마신 물이라 거의 꿀맛 같다. 수질은 아직 정정하여 섭취에 문제는 없었으며, 여기서 40
분 정도 머물다가 남동임해지역에서 온 일행들과 만나 만연산 숲길로 들어섰다.


▲  만연산 숲길 (큰재 서쪽)

만연산숲길은 큰재에서 오감연결길을 이어주는 1.4km의 숲길이다. 큰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내리막길과 평탄한 길이 계속 이어지며 숲도 삼삼하다. 단 반대로 갈 경우에는 오르막길의 연
속이라 조금 힘들 수 있다. 울퉁불퉁한 구간에는 나무데크길을 닦아 통행의 편의를 극대화시
켰다.


▲  만연산 숲길 ①

▲  만연산 숲길 ②

▲  만연산 숲길에서 만난 돌너덜지대

▲  만연산 숲길에서 바라본 화순읍내와 푸르른 가을 하늘

▲  만연산 오감연결길 쉼터

오감연결길은 큰재 밑 유천리에서 만연산 치유의숲센터까지 이어지는 3.1km의 숲길이다. 해발
고도가 좀 차이가 나는 만연산숲길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높이를 유지하고 있어 오
르락 내리락이 적다. 그러다보니 거의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하며 숲 또한 짙어서 지루할 틈
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탐스러운 길이다.

이 길은 다산 정약용(丁若鏞)과도 인연이 깊다고 한다. 그가 10대 시절이던 1777년 화순현감
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화순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만연산을 자주 찾아 독서
를 즐기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다고 한다. (만연산 동림암에서 거처하기도 했음)
산림청에서 '치유의 숲' 사업의 일환으로 만연산에 둘레길을 닦고 숲을 정비했는데 누구나 편
하게 산길을 거닐고 오감(五感 :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자극하여 건강을 증진시킨
다는 의미에서 오감연결길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곳 숲에서는 피톤치드와 음이온이 풍부
하게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은 몸과 마음을 순화시키고 속세의 스트레스를 줄여주어 면역력을
높여준다.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①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②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③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④


 

♠  만연산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
화순 만연사(萬淵寺)

▲  '나한산 만연사' 현판을 내건 만연사 일주문(一柱門)

큰재에서 시작된 만연산 둘레길 산책은 만연산 치유의숲센터에서 쿨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여
기서부터 흙길 대신 읍내를 향해 뻗은 딱딱한 포장길(진각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이
곳에서 반대 방향(북쪽)으로 올라가면 만연사의 부속암자인 선정암(禪定庵)이 나온다.

읍내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니 만연사를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그의 안내로 동쪽 길을
오르면 '나한산 만연사' 현판을 내건 일주문이 나오고 그 너머로 화우천이란 2층 누각 건물이
경내를 가리며 앉아있다.
일주문 앞에는 하늘 높이 솟은 큰 전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27m에 이른다. (둘레는 3m) 기껏해
야 높이 2m도 안되는 인간들을 제대로 주눅 들게 만든 그는 진각국사(眞覺國師)가 만연사 창
건 기념으로 심었다고 하며 추정 나이가 무려 770년 이상을 헤아린다고 한다. 허나 그 품격에
걸맞게 지방문화재나 천연기념물의 지위도 얻지 못했고 딱히 안내문 조차 없어서 속세의 대접
이 너무 형편없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자세한 사연을 알지 못한 채, 속절없이 그
앞을 지나간다. (나무 사진은 너무 흐리게 나와서 생략했음)


▲  경내를 가리고 선 화우천(華雨天)
이름도 특이한 화우천은 2층 누각 건물로 강당과 매점, 종무소를 품고 있다.
화우천은 하늘에서 빛나는 비가 내린다는 뜻(또는 불교에서 좋아하는
꽃비가 하늘에서 내린다는 뜻) 정도 될 것이다.

▲  대웅전 뜨락에 우두커니 선 늙은 괘불대 (조선 후기 유물)

만연산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만연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순천 송광사(松廣寺)의 말사(末寺
)이다. 1208년에 만연선사(萬淵禪師)로 표현된 진각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는 무등산
원효사(元曉寺)에서 수도를 마치고 송광사로 돌아오다가 만연산 골짜기에서 잠시 쉬었다. 그
자리가 현재 만연사 나한전 자리라고 한다.
잠시 쉰다는 것이 꾸벅 잠까지 들었는데 16나한이 석가여래를 봉안할 역사(役事)를 하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이 하도 이상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그새 눈이 내려 천하를 뒤덮고 있었는데,
글쎄 그가 누웠던 자리 주변만 눈이 녹고 김이 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신기한 광경에 보
통 자리가 아님을 여기고 그 자리에 토굴을 짓고 불도를 닦다가 만연사를 세웠다고 하며 꿈
속에 16나한이 나왔다고 해서 산 이름을 나한산이라 했다고 한다.

창건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왕년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사리각
(舍利閣)과 대웅전, 시왕전(十王殿), 나한전, 승당(僧堂), 선당(禪堂), 동산실(東山室), 서상
실(西上室), 동별실(東別室), 서별실(西別室), 수정료(守靜寮), 송월료(送月寮) 등 3전8방(三
殿八房)과 대웅전 앞에 규모가 큰 설루(說樓)와 사왕문(四王門), 삼청각(三淸閣), 그리고 학
당암(學堂庵), 침계암(枕溪庵), 동림암(東林庵), 연혈암(燕穴庵) 등의 부속 암자를 지니고 있
던 큰 절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 시절에는 만연사에서 종이와 식량 등을 마련해 전방에 보냈으며, 1793년 화
재로 진언집(眞言集) 판각이 불탔으나 이듬해 중건했다.
구한말에 이동백(李東伯), 이날치(李捺致) 등의 명창(名唱)이 이곳을 찾아와 소리를 닦았고,
임방울(林芳蔚)과 정광수 등의 명창들은 여기서 창악을 가르키며 소리를 익혔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10대 시절, 만연사 동림암에서 잠시 머물며 독서를 했다.

국악(國樂)의 성지로 추앙까지 받으며 명성을 드날렸던 만연사는 6.25전쟁 때 정신 나간 총탄
의 먹이가 되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1978년부터 4년 동안 주지 철안(澈眼)이 중창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나한전, 명부전, 한산전, 화우천, 요사채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부속암자는 선정암과 성주암(聖住庵)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345호
지위를 가지고 있는 괘불탱(掛佛幀)과 선정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이 있
는데, 괘불은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등 특별한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하는 비싼 존재라
친견은 매우 어려우며 그 외에 석가3존상과 시왕상, 16나한상, 진각국사가 심었다고 전하는
700년 이상의 전나무가 전해 절의 오랜 내력을 유감없이 증명하고 있다. (원주 고판화박물관
에는 만연사에서 1777년에 발간된 '진언집'이 전시되어 있음)


▲  높이 자리를 다지고 그 위에 들어앉은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만연사의 중심 건물(법당)이다.

▲  대웅전 석가3존상
향나무로 다져 도금을 입힌 것으로 무려 고려 후기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맞는다면
전나무를 제외하고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정말 지정문화재감인데 아직까지
무명으로 있는 것을 보면 탄생 시기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  명부전(冥府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들어있다. 건물 앞에 야자수가 펼쳐져 있어 이곳이 따스한 남쪽임을
알려준다. (전남 내륙에서 야자수를 보는 건 처음임)

▲  달랑 1칸의 단출한 모습인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산신과 동자, 호랑이 등
산신 식구를 머금은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나한전(羅漢殿)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거처이다. 절을 창건한 진각이 피곤에 쩔어 잠을 잤던
곳이 바로 이 자리라고 하며, 그의 꿈 속에 나타난 16나한 덕에 만연사가 탄생했으니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 애지중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  만연사 장독대
장독대 주위로 녹색 펜스를 쳐서 이곳에서 숙성되는 것들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장독대에서 숙성된 된장과 고추장을 속세에 판매하고 있음)

▲  만연사의 명물, 연등이 달린 배롱나무

대웅전 앞에는 만연사의 명물인 배롱나무가 있다. 늦여름과 초가을에 백일홍을 펼쳐보이는 나
무로 인간이 달아놓은 꽃인 연등이 대롱대롱 걸려 있어 백일홍의 빈 자리를 채워준다.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연등에 불을 밝혀 요염한 야경을 선사하며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눈덮힌
풍경도 아름다워 나무를 담으려는 사진쟁이들의 발길이 잦다.
단순히 나무만 있었다면 감흥이 덜했겠지만 붉은 연등을 앙증맞게 걸쳐놓은 주지승의 작은 센
스가 그를 일약 만연사의 스타로 만든 것이다. 자연과 인공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현장이라
고나 할까?


▲  앞에서 바라본 배롱나무의 위엄

▲  만연산 밑에 그림처럼 펼쳐진 만연저수지 (북쪽에서 본 모습)

만연사를 둘러보고 읍내 쪽으로 4분 정도 가면 너른 호수인 만연저수지(만연제)가 모습을 드
러낸다. 만연산이 베푼 물을 먹고 자란 그는 1945년에 조성된 80년 묵은 저수지로 유역 면적
264ha, 수혜 면적 55ha, 만수 면적 4ha, 유효 저수량은 약 22만 톤이다. (제방 높이 13m, 제
방 길이 165m)
저수지 주변에는 공원과 산책로를 닦아 만연호수공원으로 삼았으며, 화순군에서 세운 석봉미
술관이 호수 남쪽에 뿌리를 내려 현대 미술의 향기까지 호수에 덧붙여졌다.

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수면에는 만연산과 주변 나무들, 지나가는 구름과 햇님, 달님, 하늘이
고스란히 비춰져 그들의 아름다운 거울 역할을 한다. 남쪽 제방에서는 화순읍내가 훤히 바라
보여 조망도 괜찮으며 산 바람과 호수 바람이 어우러져 은근히 시원하다.


▲  만연저수지 제방 (제방 너머로 화순읍내가 바라보임)

▲  남쪽에서 바라본 만연저수지
저수지 속에도 또 다른 만연산이 짙게 피어있다.


만연저수지를 끝으로 아침부터 시작된 만연산 더듬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만연산을 80% 이상
살핀 것은 아니지만 만연폭포와 만연산 숲길, 큰재, 오감연결길, 만연사, 만연저수지까지 만
연산의 주요 명소는 거진 둘러보아 정신적, 기분학적으로 포만감이 아주 넘친다. 이번에 인연
을 짓지 못한 곳은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이란 강물에 모두 던져버리면 된다. 그것이 돌고 돌
아 나에게 온다면 다시 인연을 짓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마는 것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만연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동구리 179 (진각로 367, ☎ 061-374-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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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뒷쪽에 깃든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 광주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 무등산 뒷쪽에 깃든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광주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광주 환벽당

▲  환벽당

광주 취가정 담양 식영정

▲  취가정

▲  식영정

 



 

겨울 제국이 한참 위엄을 떨치던 새해의 첫 무렵, 덜 추운 날을 가려서 호남 가사문학의
오랜 성지(聖地)이자 누정(樓亭) 문화의 대명사로 추앙을 받는 환벽당과 취가정, 식영정
을 찾았다.
이들은 증암천(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광주(光州) 땅인 서쪽에 환벽당과 취가정, 그리고
전남 담양(潭陽) 땅인 동쪽에 식영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행정구역만 무심히 다를 뿐, 서
로 같은 곳이나 다름이 없다.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는 충효동 지역은 원래 담양 땅이었
음) 게다가 서로 거리도 가까워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좋다. <소쇄원(瀟灑園)도 가
까운 곳에 있음>



 

♠  사촌 김윤제의 별서로 송강 정철이 그의 후광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던 곳
광주 환벽당(環碧堂)- 국가 명승 107호

▲  충효교에서 환벽당, 취가정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환벽당길)

광주호의 동쪽 끝이자 광주와 담양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충효교 남쪽 언덕에 환벽당이 살짝
깃들여져 있다.
환벽당을 품은 언덕은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내음이 아주 그윽한데 창계천(증암천) 너머 식영
정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옛 무덤처럼 동그랗고 두툼한 모습이다. 하여 혹시 고분(古
墳)이 아닐까 살짝 의심도 하였지만 생김새가 그러할 뿐, 그냥 자연산 언덕이다. 만약 그가
진짜로 고분이었다면 진작에 무덤 흔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옛 무덤을 좋아하다
보니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렇게 보이는 모양임;;)

충효교에서 환벽당 정문까지 창계천을 따라 담백한 운치를 지닌 오솔길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
다. 그 길을 거닐며 창계천을 살짝 훔쳐보면 반석(盤石)들이 펼쳐진 예사롭지 않은 곳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곳이 '조대', 그 앞 창계천이 '용소'로 환벽당을 수식하는 구수한 양념들이
다.


▲  식영정 앞 도로(887번 지방도)에서 바라본 환벽당 언덕
장대한 고분처럼 생긴 저 언덕 정상부에 환벽당이 살포시 안겨져 있다. 창계천
수면에 환벽당 언덕이 진하게 비춰지고 있어 마치 언덕 2개가 반대꼴의
모습으로 붙어있는 것 같다.

▲  창계천 조대(釣臺), 용소(龍沼)

용소는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이 우연한 물놀이로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
1572)를 만났던 현장이다.
정철은 서울 청운동(淸雲洞)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와 양재역(良
才驛) 벽서사건(1547년)에 나란히 연루되어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아버지 정유침(鄭
惟沈)은 유배형을 당해 유배살이에 정신이 없었고 정철은 양육 관계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꼬마 시절부터 유배살이의 혹독함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다가 1551년 명종(明宗)이 원자(元子)를 얻은 기쁨에 사면령을 내리면서 비로소 지긋지긋
한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이후 어머니를 따라 할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담양 창평(昌平)
당지산(唐旨山)으로 내려가 살았다.

어머니와 적적하게 살던 정철은 어느 여름 날, 순천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 친형을 만나고
자 길을 떠났다. 여름의 한복판이라 날씨도 무덥고, 마침 지나는 길에 풍경도 괜찮은 곳이 있
어서 피서본능에 따라 풍덩 들어가 물장구를 쳤는데 그곳이 공교롭게도 이곳 용소였다.
바로 그 시각, 용소 위쪽 환벽당에서는 사촌 김윤제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꿈에 용소
에서 용 1마리가 나타나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는 청룡 1마리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함)
꿈에서 깨어나자 뭔가 찜찜하여 하인을 시켜 용소를 살펴보게 하니 마침 잘생긴 소년(정철)이
혼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꿈에 나타난 용이 아닌가 싶어 그를 소환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의 영특함
에 흠뻑 반하여 순천(順天)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고 자기 슬하에 머물러 공부를 하도록 했다.
또한 그가 17세가 되자 자기 외손녀까지 짝지어주어 외손녀사위로 삼았으며 그의 뒷바라지도
넉넉히 해주어 정철의 앞날을 닦아주었다.

정철은 그렇게 사촌의 흔쾌한 지원에 힘입어 열심히 학문과 문학을 닦았고 27세에 과거에 급
제하면서 비로소 환벽당을 나오게 된다. 용소에서 잠시 물놀이를 한 인연 덕에 그의 인생을
크게 일으켜준 스승을 만났고 거기에 부인까지 얻었으며 조선 중기 가사문학(歌辭文學)을 크
게 달군 문학가로 이름까지 날렸으니 사람의 인생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만약 그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지 않았다면 벼슬이야 어떻게든 했겠지만 지금처럼 요란하게 이
름을 날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용소와 접한 반석(盤石)은 조대라 불리는데 김윤제가 낚시를 즐겼던 곳으로 정철을 비롯해 환
벽당을 다녀간 손님들도 낚시를 했다고 전하며 식영정 부근에서 용소까지 창계천 주변은 여름
마다 배롱나무(백일홍)가 장관을 이루어 자미탄(姿媚灘)이라 불리기도 했다.


▲  바로 위에서 바라본 조대와 용소
정철이 여기서 물놀이를 하고 낚시를 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의 흔적은 창밖에 이슬처럼
남아있지 않다. 몇 겁의 세월을 견디며 이곳을 지켜온 조대, 그리고 큰 세상을
향해 흘러가는 창계천에게 정철은 기억을 못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수많은 인연의 하나일 뿐이다.

▲  늙은 쌍송(雙松)
사촌 김윤제가 정철을 만난 것을 기리고자 심었다고 전한다. 그만큼
정철이란 탐이 나는 인재를 만난 기쁨이 실로 컸던 것이다.

▲  환벽당 돌담길 (쌍송 주변)
환벽당 주위로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둘러 바깥과의 경계를 그었다.

▲  활짝 열린 환벽당 정문(대문)

▲  환벽당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닦여진 언덕 동쪽 부분


▲  수수한 모습의 환벽당

환벽당은 충효동(충효마을) 출신인 사촌 김윤제가 1540년대에 지은 별서(別墅, 별장)이다. 그
는 한참 시절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기서 휴식과 여가를 즐기며 후학을 길렀는
데, 그를 거쳐간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과 김성원(金成遠, 1525~1597) 등이 있다.

별서의 이름인 환벽(環壁)은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이 지어준 것으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
른 듯 아름다운 곳이란 뜻이다. 별서 주위로 소나무와 배롱나무, 왕벚나무, 모과나무, 대나무
등을 심고 적당히 다듬은 호남의 대표적인 별서 원림(園林)이자 누정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환벽당' 시에 환벽당의 초창기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김창흡(
金昌翕, 1653~1722)의 남유일기(南遊日記)에는 환벽당에 심어진 식물과 조경 수종이 나와있으
며, 김성원의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는 환벽당의 모습이 그림으로 남겨져 있다.
부근에 면앙정을 짓고 머물렀던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은 1563년 식영정의 시를 차운(次韻
)하면서 식영정과 환벽당이 형제의 정자라고 했으며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두고 '한 동
(증암천) 안의 세 명승'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지금은 서로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원래 같
은 동네였음) 또한 벽간당(碧澗堂)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식영정과 더불어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이자 광주호 주변의 대표 명소로 답사객의 발길이 꾸준
히 이어지고 있는데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을 비롯하여 임억령(林億齡), 조자이(趙子以), 기
대승(奇大升) 등 16~17세기 사람들이 남긴 시 현판들이 정신 사납게 걸려있다.
정철은 이곳에서 학문을 닦으면서(집은 부근 지실마을에 있었음) 김인후(金麟厚), 기대승, 임
억령(林億齡) 등을 만나 그들에게도 학문과 가사문학을 배웠으며 임진왜란 때 호남의 대표적
인 의병장인 김덕령(金德齡)은 김윤제의 종손(宗孫)으로 할아버지의 정신적인 영향을 깊게 받
았다.

이곳은 김윤제의 후손이 관리해오다가 정철의 4대손인 정수환(鄭守環)이 매입해 그의 후손들(
연일 정씨)이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환벽당 옆에 후손들이 사는 집이 있어 관리의 손길이 마를
날이 없다.
환벽당은 처음에 광주 지방기념물 1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2013년에 부근 용소와 조대,
쌍송과 한 덩어리로 묶여 국가 명승으로 승진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광주 환벽당 일
원'
)

▲  서남쪽에서 바라본 환벽당

▲  환벽당의 뒷모습

환벽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 2칸과 마루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정
각(亭閣) 형태였으나 나중에 건물을 손질하면서 지금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네모난 기단
을 다지고 그 위에 집을 올린 형태로 섬돌에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방과 마루
에서 벌러덩 눕거나 음식 섭취는 안됨)

▲  글씨가 몸을 푸는 것 같은
환벽당 현판의 위엄

▲  활짝 열린 방문과 주인이 가고 없는
비어있는 방


▲  환벽당 연못과 김윤제 집이 있었던 너른 공터

환벽당을 받쳐들고 있는 석축 밑에는 3단으로 이루어진 화계(花階)와 네모난 연못이 누워있다
. 보통 별서를 지으면 앞에 연못을 두어 경치를 돋구게 하는데 이곳 역시 그렇다. 허나 연못
밑으로는 나무 몇 그루와 허전한 공터가 전부라 마치 별서를 짓다 만 것 같은데 그 공터에는
김윤제의 집 본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연못은 본채의 후원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본채는 어느 귀신이 떼어갔는지는 모르지만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자연의 공간으로 남겨
두어 환벽당의 앞뜨락 같은 모습이 되었다.

* 환벽당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87 (환벽당길 10)


▲  환벽당에 걸린 어느 검은 피부의 현판 (해석은 알아서)

▲  환벽당 돌담길 (쌍송 방향)

▲  환벽당 돌담길의 끝 부분 (취가정 방향)



 

♠  김덕령 장군의 원통한 넋을 기리고자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정자
광주 취가정(醉歌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30호

▲  취가정으로 인도하는 돌계단

담백한 풍경의 환벽당을 둘러보고 동남쪽으로 향하는 '환벽당길'을 3분 정도 들어가면 취가정
을 품은 언덕이 나온다. 환벽당 돌계단에 비해 조금은 흥분이 덜한 돌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
끝자락에 조촐하게 생긴 취가정이 자리해 있다.

취가정은 김윤제의 종손으로 임진왜란 시절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히는 김덕령(
金德齡, 1567~1596)의 넋을 기리고자 후손인 김만식 등이 1890년에 지은 것이다. 그를 기리고
자 세운 정자일 뿐, 정작 김덕령과 관련은 없으며, 충효동과 담양 가사문학면(예전 남면) 지
역에 흩어진 정자와 별서 가운데 제일 막내로 정자의 이름인 취가는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란
뜻이다. 근처에 있는 환벽당과 식영정, 풍암정, 소쇄원 등은 모두 자연스러운 이름인데 반해
이곳은 음주와 관련된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취가정이란 이름은 김덕령이 남긴 취시가(醉時
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취시가 - 취해서 부르는 노래
此曲無人聞           이를 듣는 이 아무도 없네
我不要醉花月         꽃과 달 아래 취하는 것도 바라지 않고
我不要樹功勳         나는 공훈 세우길 바라지 않네
樹功勳也是浮雲       공을 세우는 것은 뜬 구름이요
醉花月也是浮雲       꽃과 달 아래서 취하는 것도 뜬 구름이네
醉時歌無人知         취해서 부르는 노래, 이 노래 아는 사람 없으니
我心只願長劍奉明君   내 마음 다만 긴 칼 들어 명군 받들기 원하네


김덕령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권필(權韠, 1569~1612)은 어느 날 꿈속에서 김덕령을 만났다.
참고로 이들은 서로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김덕령이 억울하게 옥사(獄舍)를 당한 것을 호소
하며 취시가를 들려주었는데 이를 들은 권필이 화답의 시를 지어 위로했다고 한다. 그리고 꿈
나라를 나와서 그의 시를 활자로 남겼고 그 시의 이름을 취해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

취시가 앞에는 서문(序文)이 쓰여 있는데,
'꿈속에서 작은 책 하나를 얻으니 바로 김덕령 장군의 시집이었다. 그 첫머리에 실린 한 편
제목이 취시가로 나도 2~3번 읽어보았는데 그 가사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꿈에서 깨어난
뒤 너무 서글퍼서 그를 위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즉 이 시는 권필이 김덕령을 만난 것이 아니라 김덕령의 시집을 읽은 것이다. 그러니 꿈나라
에서 시를 접한 것이 아니라 김덕령이 남긴 시집을 통해 이미 접한 것으로 봐야 되며 그것을
마치 꿈나라에서 받은 양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사연이야 어쨌든 권필은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강제로 생을 마감한 그를 위로하고자 다음의 시를 덧붙여 남겼다.

將軍昔日把金戈   장군은 지난날에 창을 잡고 나섰건만 
壯志中摧奈命何   씩씩한 뜻 중도에 꺾이니 운명을 어이하랴 
地下英靈無限恨   지하에서 영령이 품었을 무한한 한이 
分明一曲醉時歌   한 곡조 취시가 속에 분명히 드러나네


▲  취가정의 앞 모습

취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 1칸과 툇마루를 지니고 있다. 6.25때 파
괴된 것을 1955년에 중건하여 고색의 기운은 덜하며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가 쓴 취가정
현판과 송근수(宋近洙, 1818~1903)의 취가정기, 김만식과 최수화의 시 현판이 걸려있다.

취가정 주위로 굴뚝과 취시가를 머금은 표석, 후손들의 집이 있으며, 동쪽 창계천 너머로 식
영정과 소쇄원 주변이 바라보인다. (방과 마루는 들어갈 수 있으며 섬돌에 신발을 벗고 들어
가면됨, 허나 벌러덩 눕거나 음식 섭취 행위는 자제 바람)

▲  송운회가 쓴 취가정 현판의 위엄

▲  취가정 상량문(上樑文)


▲  김덕령의 취시가와 권필의 화답시를 머금은 현판

▲  적막에 사로 잠긴 취가정 주변
(왼쪽은 굴뚝, 오른쪽은 취시가를 머금은 비석)

▲  취가정 옆구리에 짧게 펼쳐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취가정의 주변 풍경을 화사하게 돋군다.

▲  겨울 제국에게 강제로 봉인을 당한 채, 소쩍새의 울음을 기다리는
충효동 논두렁 - 논두렁 너머로 무등산(無等山)이 바라보인다.


취가정을 둘러보니 벌써 17시 직전이다. 햇님은 무거워진 고개를 자꾸 꺾으려고 하고 달은 그
틈을 타 검은색 물감을 마구 뿌리며 나에게 철수를 강요한다. 허나 그런 것으로 나는 쉽게 무
너지지 않는다. 일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 부근에 있는 식영정을 그날의 마지막 스페셜
메뉴로 정하고 충효교로 나와 다리를 건너 담양 땅으로 넘어갔다.

담양 관할로 넘어가면 바로 한국가사문학관인데 그 서북쪽 언덕에 환벽당과 더불어 호남 지역
가사문학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는 식영정이 뉘어져 있다.

* 취가정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96-1 (환벽당길 42-2)



 

♠  석천 임억령의 별서이자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의 무대
담양 식영정(息影亭) - 국가 명승 57호

▲  식영정과 성산별곡 시비

환벽당과 쌍벽이자 콤비를 이루고 있는 식영정은 1560년에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
齡)을 위해 지은 것이다. 그때 자신이 머물 서하당(棲霞堂)도 옆에 같이 지었다.
그는 정철의 처외재당숙(장모의 6촌 형제)으로 김윤제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식영정을 거쳐갔
던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을 가르켜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다. <그 연
유로 식영정을 사선정(四仙亭)이란 부르기도 했음>
그들은 성산(식영정 주변)의 경치 좋은 명소 20곳을 골라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
二十詠)'을 지었는데 정철은 이곳에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롯해 하당야좌(霞堂夜坐) 1수,
소쇄원제초정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많은 시와 가사를 내놓으면서 가사문학의 산실로 일컬
어진다.

식영정이란 이름은 '그림자가 쉬어가는 정자'란 아주 문학적인 뜻으로 정철이 자주 놀러온 곳
이다. 환벽당, 송강정(松江亭)과 함께 정철과 깊게 관련된 곳이라 하여 '정송강유적'이라 부
르기도 하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방은 가
운데가 아닌 귀퉁이에 두었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깔았으며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이다.
이곳은 전남 지방기념물 1-1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2009년 '담양 식영정 일원'이란 이
름으로 국가 명승으로 승급되었다.

식영정 옆 창계천 주변에는 노자암(鸕鹚巖), 방초주(芳草洲), 서석대(瑞石臺), 자미탄, 견로
암 등의 명소가 있었으나 광주호가 조성되면서 거의 생매장을 당하거나 파괴되어 전설 속의
존재가 되버렸으며 서하당 등 식영정 주변의 건물도 모두 사라져 식영정 홀로 자리를 지켰다.
예전 2000년에 왔을 때는 식영정과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부용당, 장서각 등이 전부였는데 그
새 서하당 등을 다시 지어 주변이 조금은 채워졌다.


▲  부용당(芙蓉堂)과 연지(蓮池)
식영정에 이런 존재가 있었나 싶어 살펴보니 복원된 것이 아닌 단순히 식영정을
수식하고자 1972년에 지은 것들이다. 2칸짜리 부용당이 연못에 두 발을
담구며 혹독한 겨울살이에 지친 몸을 달랜다.

▲  서하당
1560년에 김성원이 자신의 거처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터만 남아오다가 근래에 복원되어
새롭게 솟아났다.

▲  장서각(藏書閣)과 고직사(庫直舍)
송강집(松江集) 목판을 보존하고자
1973년에 세웠다.

▲  '송강 정철 가사의 터' 비석
식영정은 정철이 성산별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던 현장이다.

▲  태극마크가 그려진 성산사 정문(삼문)

▲  성산사(星山祠)

성산사는 석천 임억령, 서창 조흡, 정철의 5대손으로 1721년부터 식영정을 지켜온 소은 정민
하(簫隱 鄭敏河), 소은의 아들인 계당 정근(溪堂 鄭根) 등 7명을 봉안한 사당이다. 수재(水災
)로 파괴된 것을 1861년 정조원(鄭祚源)이 송씨에게서 환벽당을 다시 인수하면서 그 주변에
복원했으나 곧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제 철거되어 사라진 것을 2005년 담양군에서
원래 자리였던 식영정 뒤쪽에 복원했다.

성산사 뒤에는 대나무가 두텁게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이 사각사각 풍월을 선사하며 속세에
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청각을 어루만져 준다. 그리고 숲 사이로 좁게 내려오는 계곡에서는 청
량하면서도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겨울이라 그렇지 더울 때는 밀양(密
陽) 얼음골(☞ 관련글 보기)의 차디찬 바람에 못지않다.


▲  성산사를 감싸고 있는 짙은 대나무숲

▲  성산사에서 식영정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  멋지게 잘 늙은 식영정
식영정 툇마루와 방은 접근이 가능하다. 아무리 비어있는 정자라고 해도
문화유산의 지체 높은 몸이니 그냥 구경만 하거나 툇마루에
몸을 기대어 쉬기만 하자~~!

▲  글씨가 율동을 부리는 듯한 식영정 현판의 위엄
'정'자는 연이 하늘로 오르거나 개구리가 움직이는 것 같고 '식'자는
하늘로 비상하는 비행물체를 그린 것 같다.

▲  보면 볼수록 정감이 넘치는 식영정의 뒷모습
요즘도 장작을 떼는지 아궁이 주변 피부가 다소 시커멓다.

▲  식영정 안내문에서 식영정으로 바로 이어주는 돌계단길

▲  고직사 밑에 있는 옛 건물터
고직사와 도로 사이에 조금 움푹 들어간 희미한 흔적이 있다. 식영정을
수식하던 건물터로 여겨지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식영정을 1바퀴 둘러보니 어느덧 18시이다. 더 둘러보고 싶어도 검은 기운이 자욱해지고 찬바
람까지 마치 칼처럼 찔러대니 이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어차피 그날 목적한 것을 모두 보았
고 거기에 식영정까지 덤으로 챙겼으니 여기서 길을 접어도 여한은 없다. 솔직히 눈과 다리가
쉴 겨를도 없이 많은 것을 보아서 머리가 좀 아프다.

이렇게 하여 새해 시작에 찾아간 광주 충효동, 가사문화권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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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모악산 용천사, 목포 갓바위 늦봄 나들이 (용천사 꽃무릇공원, 목포 달맞이공원)

함평 용천사, 목포 갓바위



' 함평 용천사, 목포 갓바위 늦봄 나들이 '
함평 용천사
▲  용천사 대웅전과 석등(오른쪽)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1박2일 일정으로 전남 서남해
지역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4시간 정도를 달려 전남 함평에 이르렀다. 함평읍내 동부
에 자리한 함평오일시장 주변에 육회비빔밥을 다루는 식당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한 곳
에 들어가 점심으로 육회비빔밥을 섭취했다. 비빔밥에는 선지국이 딸려나왔으나 그리
입맛이 맞지 않아(선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 비빔밥만 후다닥 먹고 자리를 나왔는
데, 후식용 커피로 밀려온 졸음을 단죄하고 함평(咸平) 북쪽 끝자락에 자리한 모악산
용천사로 이동했다. 그곳이 이번 나들이의 첫 답사지이다.



 

♠  꽃무릇의 성지이자 함평 제일의 고찰, 용천사(龍泉寺) 입문

▲  용천사 숲길 (주차장 직전)

모악산(母岳山) 남쪽 자락에 자리한 용천사는 산 북쪽에 있는 영광 불갑사(佛甲寺, ☞ 관련글
보기
)와 더불어 꽃무릇<상사화(相思花)>의 성지(聖地)로 유명하다. 꽃무릇은 8~9월에 황홀하
게 붉은 입술을 드러내는 아리따운 꽃으로 절 주차장(사천왕문 서쪽) 주변과 꽃무릇공원에 둥
지를 틀고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꽃무릇철이 아닌지라 꽃잎 대신 짙은 녹색 잎을 드러낸
꽃무릇이 3달 앞으로 다가온 향연을 숨죽이며 준비하고 있었다.
사천왕문 밑 주차장에는 200년 정도 묵은 큰 느티나무가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바로 그
의 고품격 그늘 덕에 이곳의 꽃무릇이 유난히도 아름답게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다.


▲  용천사의 첫 관문, 사천왕문(四天王門)

주차장에서 동쪽 계단길을 오르면 맞배지붕을 지닌 사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부처의 경호원인
4명의 천왕,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여기서 그들의 검문을 거쳐 다시 계단길을 오르면
사상루가 마중을 나온다.

▲  밑에서 바라본 사상루

▲  사상루(思想樓)의 앞 모습

사상루는 맞배지붕을 지닌 2층 건물로 1층은 통로, 2층은 강당(講堂)과 행사 장소로 쓰인다.
절 바깥에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노출되지 않도록 꽁꽁 가리고 있는데 그의 밑도리를 통
해 안으로 들어서면 꽃무릇으로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용천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용천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자.

모악산 용천사는 함평 제일의 고찰로 장성 백양사(白羊寺, ☞ 관련글 보기)의 말사(末寺)이다
. 백제 후기인 600년에 행은존자(幸恩尊者)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산 너머 불갑사에도 마라
난타(摩羅難陀) 창건설 외에 640년 행은의 창건설이 전하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시
기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645년에 각진(覺眞)이 중수했다고 전하며 1275년에 각적국사(覺積國師)가 중수했다고 하니 어
쩌면 13세기에 각적국사 또는 행은이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용천사란 이름은 대웅전 밑에
있는 용천이란 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의하면 서해로 통하는 이
샘에 용이 살다가 승천을 했다고 한다. 하여 용천이라 불리게 되었고 그 곁에 지은 절이라 자
연히 용천사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조선 세조(世祖)와 명종 때 중수를 거치면서 제법 큰 사찰의 면모를 지녔는데 '용천사 대웅전
현판단청기'에 의하면 왕년에는 무려 3,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하지만 정유재란
(1597년) 때 그 모든 것이 파괴되어 1600년에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32년 법당을 새로 짓고 1638년과 1705년에 중건을 하고 '단청기'를 남겼으며, 1938년 다시
중수를 했으나 1950년 6.25 때 북한군이 불의의 방화를 저질러 절은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만다
. 이때 석등과 해시계를 제외한 대부분의 문화유산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1964년 옛 보광전(普光殿) 자리에 대웅전과 요사채를 지었으며 1996년 대웅전을 새로 지
어 지금에 이른다.

넓직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지장전, 산신각, 사상루,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
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독특한 자태의 석등이 있다. 그 외에 6.25 때 사라졌다가
1980년 흙더미 속에서 발견된 해시계가 있는데 두께 14cm, 가로와 세로가 39cm의 정사각형 모
습으로 겨우 절반만 남아있으나 묘시(卯時, 5~7시)부터 유시(酉時, 17~19시)까지 남아있어 낮
에 사용하는데 별 지장은 없다. 그리고 18세기에 조성된 탱화가 있었으나 2000년에 도난을 당
해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정묵당(靜默堂)
요사 및 선방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의 거처로 정묵당과 마주보고 있다.


용천사는 자연물인 꽃무릇에 크게 집중하여 이제는 꽃무릇의 성지로 우뚝 섰다. 꽃무릇이 한
참일 때 꽃무릇 축제를 열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꽃무릇의 즐거운 향연을 구경한다.

* 용천사 소재지 :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415 (용천사길 209 ☎ 061-322-1822)

▲  사상루 옆에 자리한 샘터
모악산이 베푼 물이 쉼없이 쏟아져 나와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준다.

▲  지장전 지장보살입상
관세음보살 누님 못지않은 아름다운 용모로
중생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  용천사 둘러보기

▲  용천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대웅보전)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곳에는 보광
전이 있었으나 6.25때 사라졌으며 1964년 그 자리에 대웅전을 세웠다. 현재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손질된 것이다.
용천사의 강한 자신감이 담긴 건물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석가3존상과 탱화들이 봉안
되어 있으며 대웅전 앞 가운데 계단은 옛날 것으로 고색이 꽤 묻어있다. 바로 그 앞에는 '용
천'이란 샘이 누워있고, 건물을 받쳐든 석축 밑도리에는 고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기단석(
基壇石)이 가득 들어 있는데 그 윗도리에는 새 돌이 입혀져 있어 늙은 돌과 새 돌이 다소 어
색한 조화를 보인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후불탱, 닫집의 위엄

▲  고색이 깃든 대웅전 가운데 계단

▲  대웅전 그늘에 자리한 용천(龍泉)

대웅전 앞에는 절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는 용천이란 조그만 샘이 있다. 옛날 이 샘은 서해바
다로 통했다고 하는데 이곳에 살던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허나 여기서 바다까지는 30리가 넘는 거리이며, 샘 또한 작고 바닥이 바로 보일 정도로 얕다.

용천에는 물이 모여있으나 여기 물은 마시지 못하며 대신 사상루 옆구리에 동그란 석조(石槽
)를 닦아 샘터로 삼았다. 그러니 거기서 물을 마시면 된다.


▲ 툇마루를 지닌 산신각(山神閣)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의 공간이다. 건물에 단청이
입혀져 있지 않아 마치 서원이나 양반가의 기와집 같은 조금은
수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산신각 현판

▲  산신각 산신탱


▲  용천사 석등(石燈)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84호

대웅전 옆구리에는 이곳의 오랜 보물이자 상징과 같은 석등이 묘한 자태를 부리고 있다. 용천
사가 아무리 오래된 절이라고 하지만 그 장대했던 흔적이 전쟁의 참화로 싹 사라진 상태라 이
석등의 값어치는 대단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다른 석등과 완전히 차별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고 조성 관련 문신까지 새겨져 있어 그 가치는 실로 상당하다. 그러니 이곳에 왔다면 석등
은 꼭 눈여겨 살펴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는 쑥돌로 지어진 키 2.37m의 석등으로 바닥돌에 하대석(下臺石)을 놓고 그 위에 밑으로 연
꽃잎을 펼친 복련(伏蓮) 무늬를 새겼으며, 가운데 기둥<간석(竿石)> 받침 상단 네 모서리에
거북을 새겼다. 기둥은 8각으로 앞쪽에 '강희(康熙) 24년 을축(乙丑) 6월일'이란 명문이 있어
1685년 6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석등을 만든 옛 사람들의 작은 배려 덕에 그의
탄생 시기와 시주자 등의 정보를 흔쾌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화사석(火舍石)은 4각 형태로 면마다 둥근 창을 두었으며 그 밑도리에 위로 연꽃잎을 펼친 앙
련(仰蓮)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지붕돌은 팔작지붕 모습으로 마치 지붕이 그대로 돌로 굳은
듯하다.
조선시대 4각 석등 중 꽤 우수한 작품으로 크기나 짜임새가 투박하고 정감이 있으며, 다른 곳
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하여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이나 어
찌된 영문인지 아직까지 지방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석등 옆에는 시멘트가 발라진 바닥돌 위에 3층 탑신과 머리장식을 지닌 하얀 피부의 3층석탑
이 있다.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의 그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그 모습이 남원 백장암(百丈庵)에 있는 3층석탑과 조금 닮아보인다.

▲  앞에서 바라본 석등

▲  기둥에 새겨진 조성 관련 글씨들

       ◀  맞배지붕의 천불전(千佛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가여
래와 미륵불, 아미타불의 3존불과 조그만 금동
(金銅) 천불이 장엄하게 금빛 물결을 이루고
있다.
건물 현판은 정면은 물론 측면까지 내걸어 이
곳의 정체를 강하게 알려준다.

▲  천불전 내부를 가득 채운 불상들

▲  천불전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길


▲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꽃무릇들

▲  녹음(綠陰)에 잠긴 용천사를 뒤로하며

용천사를 나오면서 뭔가 10% 부족한 느낌이 들어 정신을 차려보니 글쎄 석등과 더불어 이곳의
값비싼 존재인 해시계를 빠트렸다. 분명 통제구역을 제외한 경내 상당수 부분을 살펴보았는데
해시계 같은 것은 전혀 두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신변보호를 위해 내부 공간에
꽁꽁 숨겨둔 모양이다. 그렇게 해시계와는 인연을 짓지 못하고 다음 장소로 쿨하게 넘어갔다.



 

♠  대자연이 빚은 심오한 작품이자 입암반조(笠岩返照)의 현장
 목포 갓바위 - 천연기념물 500호


▲  야경에 잠긴 갓바위 주변 (갓바위 산책로)

우리는 무안(務安)을 거쳐 호남선의 종점인 목포(木浦)로 이동했다. 하당신도시 동부에 홍어
삼합으로 이름난 식당이 있어 거기서 홍어삼합과 막걸리로 배불리 저녁을 섭취하고 근처 적당
한 모텔에 들어가 차를 세우고 여장을 풀었다.
먼 길을 오느라 여독이 두둑히 쌓여있지만 잠자리에 들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렀다.(19시) 하
여 근처에 있는 갓바위의 야경을 후식으로 보고자 택시를 잡아타고 갓바위의 동쪽 입구인 달
맞이공원으로 이동했다. 공원 남쪽에는 하당신도시와 서해바다의 경계를 긋고 잇는 해안 산책
로가 닦여져 있는데 저녁 산책과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로 제법 붐볐다.

달맞이공원에서 바다 위에 닦여진 나무데크 산책로를 들어서면 갓바위로 이어진다. 갓바위가
해안 벼랑에 있다보니 육지에서는 그의 뒷통수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배를 타고
봐야 했었지. 바로 그런 고충을 덜고자 2008년 4월에 298m 길이의 해안보행교를 닦은 것이다.
갓바위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다리 형식이지만 갓바위 앞은 수면 위에 두둥실 띄워놓은 형태라
밀물 때는 바닷물을 따라 1m 정도 육지쪽으로 올라갔다가 썰물이 지면 바닷물을 따라 내려간
다. 그러다보니 바다의 기분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게다가 조명을 설치해 통행편의
는 물론 갓바위의 환상적인 야경까지 보너스로 선사하고 있다.

이 산책로는 서쪽으로 목포자연사박물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목포해양유물전시관과 이어지
는데, 예전 갓바위와 첫 인연을 지었을 때는 서쪽으로 들어가 동쪽(하당신도시)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동쪽에서 들어와서 다시 동쪽으로 나갔다. 숙소가 동쪽 하당신도시에 있기
때문이다.


▲  바다에 떠있는 갓바위 산책로 (하당신도시 방향)

갓바위 산을 뜻하는 입암산(笠岩山) 남쪽 바닷가 벼랑에 자리한 갓바위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
을 두고 빚은 철학적인 작품이다. 허나 그의 작품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며 지금도 계속 자
연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굼벵이 속도로 손질되고 있어 몇백 년 후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
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갓바위는 갓을 쓰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여 갓바위란 단순한 이름을 지
니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감탄만 자꾸 더하게 하는 그는 2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쪽
(서쪽) 바위는 모자가 달린 외투나 옷을 껴입은 모습처럼 보여 사오정 시리즈로 유명한 귀머
거리 사오정과 비슷해 보이며, 오른쪽(동쪽) 바위는 철모를 쓴 군인 같다. 예전에야 갓처럼
보였겠지만 그동안 모진 풍파가 더해지면서 저런 모습으로 서서히 변했을 것이다. 겉으로 보
면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듯한 모습이라 사람들이 건드린 것은 아닐까 싶지만 저게 모두 순수
자연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  울퉁불퉁하고 괴상한 피부를 지닌 갓바위 동쪽 벼랑
마치 끌 같은 도구로 바위 피부를 후벼판 것 같다. 허나 저것은 모두
자연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갓바위가 이런 모습이 된 것은 이곳이 바닷물과 담수가 만나는 곳으로 암석 표면에 파도가 치
거나 안개가 끼면 소금기를 머금은 물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되풀이한다. 그 와중에 수분에 들
어있던 실리카 성분이 침전되면서 용해된 부분은 조직이 이완되고 강도가 낮아져 모자 모양의
경질부와 아랫쪽이 움푹 패인 벌집 모양의 풍화혈(風化穴)이 형성된 것이다. 파도와 해류, 바
다 바람에 의해 바위가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현장으로 다른 풍화혈에서는 찾기
힘든 희귀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삿갓이 동남쪽을 향한 것은 햇볕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곳을 물든 저녁 노을과 갓바위와 해안 벼랑에서 반사되는 노을빛이 무척 아름다워 예로부터
목포8경의 하나인 입암반조(笠岩返照)의 현장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파도와 바닷바람에
의해 바위가 이렇게도 성형이 될 수 있음을 실감나게 하는 현장으로 2009년 국가 천연기념물
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목포9경의 제3경임)


▲  입암산의 끝을 잡고 있는 갓바위의 옆 모습
바다에 돌출된 모자 끝부분을 손으로 만지면 가루처럼 뚝 부러질 것만 같다.
정말 만져보고 싶은데 위치가 저러니 그 미련을 쿨하게 접어야 된다.


▲  갓바위 형제와 수면에 비친 그들의 모습
바다에도 그들을 닮은 갓바위가 하나 더 있다.


이렇게 개성이 넘치는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붙여놓은 그럴싸한 전설 보따리가 꼭 담겨져 있
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목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갓바위 역시 그 예외는 아닌데, 그들
이 붙여놓은 전설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가 수염을 태워먹던 어느 옛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 있었
다. 그는 소금을 팔아서 생계를 꾸렸는데 살림살이는 늘 궁핍했으나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
하여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마를 날이 없었다.
허나 소금 장사로는 생계가 어려워 부득이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으나 주인은 돈도 주지도
않고 그저 부려먹기만 하는지라 1달 만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보니 심상치 않
은 기운이 있어 방문을 열어보니 글쎄 아버지의 손과 발이 이미 식어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
이 집을 비운 사이 그는 힘겹게 유지했던 숨줄을 놓은 것이다.

청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양지바른 곳에 묫자리를 잡고 관을 가지고 가던 중,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빠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설은 그냥 그렇
게만 나와있음)
이 어이없는 고통에 청년은 다시 한번 불효를 통회(痛悔)하며 울부짖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살
수 없다고 자책하며 평생 갓을 쓰고 관이 빠진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이후 그곳에 2개의
바위가 불쑥 올라왔는데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 불렀다.

다른 전설로는 부처가 나한(羅漢)을 이끌고 영산강을 건너 이곳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때 모
르고 놓고 간 삿갓이 바위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여 갓바위 대신 중바위란 이름도 지니고 있
다.
앞 전설이 효도를 소재로 한 것이라면 뒷 전설은 불교를 소재로 한 것으로 효행사상을 장려하
고자 갓바위를 이용해 어설프게 이야기를 엮은 선비들과 이곳에 오지도 않은 부처와 나한을
내세워 바위를 포교의 소재물로 삼은 승려들의 투철한 영업 정신이 교차된 현장이다.


▲  조명에 의지해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갓바위 야경의 위엄

칼퇴근의 달인, 햇님이 그만의 공간으로 쏙 사라지고 달이 어둠을 가져와 천하를 장악하자 인
간이 설치한 조명이 전기에 의지해 일제히 빛을 뿜어내며 갓바위 주변의 어둠을 몰아냈다. 그
렇게 갓바위의 환상적인 야경은 태어났다. 예전에는 낮에 봤고 이번에는 야경을 봤으니 그의
낮과 밤, 두 얼굴을 모두 본 셈이다.

바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벌써부터 설치고 있는 여름 제국(帝國)의 기운을 단죄하고 있으
며, 갓바위 앞 산책로는 수면 위에 둥둥 띄워놓은 형태라 파도에 따라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갓바위 앞으로 더 다가가 그의 피부를 만져보고 싶지만 다리를 그 자리에 고정하여 그러지도
못한다.
그렇게 갓바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21시, 다시 하당신도시로 나와 곡차 1잔 걸친 다음 숙소로
돌아가 다음 날을 위해 고된 몸을 뉘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갓바위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산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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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신안군의 상큼한 지붕, 압해도 송공산 (송공산둘레길)

신안 압해도 송공산



' 압해도 송공산 봄맞이 나들이 '
송공산 남쪽 숲길
▲  송공산 남쪽 숲길



 

천하를 놓지 않으려는 욕심꾸러기 겨울 제국(帝國)과 그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정의로운 봄이 막판 다툼을 벌이던 3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신안군(新安郡)의 중
심 섬인 압해도(押海島)를 찾았다.

압해도를 가려면 우선 목포(木浦)로 가야 된다. (무안에서 들어가는 길도 있음) 동트기가
무섭게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아 남쪽으로 보냈는데, 간밤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해 눈꺼풀은 백두산보다 훨씬 무거워진 상태이다. 그 무거움에 순응하면서
자다깨다를 수 차례 반복하니 어느덧 목포에 이르렀다. (잠만큼 좋은 축지법은 없음)

점심을 먹기가 애매하여 목포역 부근에서 간식거리를 여럿 사들고 신안군내버스 130번(삼
학도↔압해도 송공항)을 타고 압해도로 들어갔다. 목포와 압해도를 철석같이 이어주는 압
해대교를 건너면 섬의 은하계로 일컬어지는 신안군 땅으로 신안 땅은 처음으로 발을 들여
본다. <바다를 제압하는 섬이란 뜻의 압해도는 면적이 48.95㎢, 인구는 약 6,000명대> 섬
으로 들어서 신안군청과 압해읍내, 대천리를 지나 송공리 상촌에서 두 발을 내렸다.

상촌마을 직전 3거리에서 송공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고 하여 찾아봤으나 딱히 보이
지가 않는다. 분명 지도에는 길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이정표도 없고 길 비슷한 것도 보
이지가 않으니 송공산이 벌써부터 나를 시험하는 모양이다. 결국 그 숨바꼭질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펼쳐진 수락길을 따라 천사섬분재공원으로 이동했다. 분재공원 옆에는 확실하게
산길이 있으니 거기서 송공산의 품으로 들어갈 요량이었다.

수락길은 송공산 남쪽을 도는 2차선 길로 한쪽에는 송공산이, 다른 한쪽에는 너른 서해바
다가 펼쳐져 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과 이제 막 겨울에서 해방되는 송공산, 그리고
푸르른 바다까지 3박자가 어우러진 착한 길로 지나가는 차량도 별로 없어 내가 이 일대를
잠시나마 장악한 기분이다. 이따금 지나는 차량이 그 흥을 깨뜨려 문제긴 하지만 워낙 고
적한 곳이라 금세 회복이 된다.


▲  오늘도 평화로운 압해도 앞바다 (수락길에서 바라본 모습)



 

♠  송공산(宋孔山) 입문

▲  1004 기둥을 내세운 천사섬분재공원(송공산분재공원) 정문

수락길을 1km 정도 들어가니 송공산의 상큼한 꿀단지인 천사섬분재공원이 마중을 나온다. 입
장료가 없다는 말이 있어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섰으나 조금은 비싼 입장료가 나의 빈약한 호
주머니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입장료의 압박에 정문 양쪽에 가로로 세워진 '1004' 기둥이 참으로 사악하게 보였다. 여기서
공원 이름인 천사(1,004)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그 천사가 아니라 신안군의 섬 갯수를 뜻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800여 개로 알려졌으나 200개가 더 추스려져 1,004개가 되면서 신안군은
천사(1,004)의 섬임을 무척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로도 20여 개의 섬이 더해지면서 대략
1,025개로 파악되고 있다. <유인도 72개, 무인도 953개> 그럼에도 천사섬의 고장임을 계속 강
조하고 있으며, 압해도와 암태면을 잇는 다리의 이름까지 천사대교라 이름을 붙여 천사(1,004
)란 이름에 지나친 집착을 보인다.

분재공원에서는 그냥 화장실(매표소 뒤쪽에 있음)만 구경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정문에서
동쪽으로 4분 가량 가면 송공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송공산 남쪽 기점)이 손을 내미니 여기서
부터 약 3시간에 걸친 송공산 더듬기가 시작된다.


▲  천사섬분재공원 앞 포구와 주차장

▲  송공산으로 들어서다. (팔각정 방면 소나무숲길)

분재공원 동쪽(송공산 남쪽 기점)에서 송공산 팔각정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시작
부터 키가 작은 소나무들이 긴 행렬로 마중을 하며 청정한 솔내음을 불어주고, 뒤를 돌아서면
서해바다가 장엄하게 나타나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에 한 줄기 해조음을 선사한다.


▲  잠깐 뒤를 돌아보는 여유 ~~ 송공산 소나무숲과 서해바다

▲  송공산 소나무숲길과 천사섬분재공원의 녹색 철책
분재공원이 엄연한 유료의 땅이라 저렇게 철책을 쳐놓아 무료의 땅과
팽팽히 경계를 그었다.

▲  소나무숲길 속으로 ~~~ ①

▲  소나무숲길 속으로 ~~~ ②

▲  소나무숲길 속으로 ~~~ ③ 팔각정 밑 부분

▲  송공산 팔각정

팔각정은 송공산 남쪽 능선 해발 170m 지점에 자리해 있다. <송공산 남쪽 기점(분재공원 동쪽
)에서 20분 정도 걸림> 이 땅에 흔한 기와집 팔각정이 아닌 8각 모습의 단출한 건물로 남쪽으
로 분재공원과 서해바다, 목포의 여러 섬들(율도, 외달도, 달리도), 해남 화원면(화원반도),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신안군의 여러 섬들이 싹 시야에 들어와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  팔각정에서 굽어본 천사섬분재공원과 서해바다

▲  확대해서 살펴본 유료의 공간, 천사섬분재공원

▲  팔각정에서 바라본 목포의 여러 섬(외달도, 달리도)과
해남 화원면(화원반도) 지역

▲  팔각정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구름 위를 거닐듯 느긋하게 이어진 능선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비로소
송공산 정상에 이른다.

▲  정상 가는 길에서 만난 돌탑
산을 찾은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얹힌 막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  정상 서쪽 능선부에 자리한 김해김씨 정재 김수영(靜齋 金守榮) 묘

정상 서쪽 직전에는 정재 김수영의 무덤이 누워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무덤 자리
만큼은 아주 기가 막히게 좋다. 산바람과 바다바람이 서로 어우러진 현장으로 조망 또한 휼륭
하며 송공산 서쪽과 남쪽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 무조건 거쳐가야 된다. 그러다보
니 산꾼의 왕래가 잦아 조금은 시끄럽긴 해도 외로움은 덜 할 것이다.


▲  송공산 정상 (해발 231m)

압해도 서부에 자리한 송공산은 압해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자 신안군의 주요 지붕의
하나이다. 북쪽과 남쪽은 바다에 접해있고, 서쪽은 송공리 들판, 동쪽은 대천리 들판과 맞닿
아 있는데 평평한 곳에 홀로 솟아 있어 제법 존재감이 커 보인다.

송공산은 산세가 조촐하고 완만하여 어디서든 30분 정도면 충분히 정상에 닿는다. 주변이 온
통 평야와 바다라 조망이 거의 독보적인 수준으로 산 허리에는 명품급 둘레길이 닦여져 있다.
정상 주변에는 옛 송공산성(宋孔山城, 신안군 향토자료 16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는데
석성과 토성(土城)으로 이루어진 230m 규모의 조그만 테뫼식 산성(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성)
이다.
축성시기는 멀리 가면 삼한시대(마한), 적당히 가면 백제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부속시설
로 우물 1기가 발견되었다. 해양대국 백제 시절에는 압해도에 아차산현(阿次山縣)이 설치되었
는데, 송공산성이 그 중심지로 보이며, 산성 동쪽 대천리 일대에서 고분 58기가 발견되어 압
해도 지방 세력이나 관리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후삼국시대에는 압해도 지방 세력인 능창<能昌, 일명 수달(水獺)>이 서남해를 주름잡고 있었
다. 그는 송공산성을 본부로 하여 전남 서남해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 진훤)의 그늘로 들어가면서 그 넓은 서남해가 싹 후백제의 영역이 된다. 허나 후
백제 조정과 서남해/나주 세력과의 갈등이 나날이 커져가자 이를 간파한 후고구려<태봉(泰封)
>의 왕건(王建)은 이간책을 구사해 나주 세력(오씨)과 서남해 상당수의 세력들이 후고구려에
붙어버렸다.
허나 압해도와 안파, 갈도, 염산 지역은 나주를 점령한 후고구려군과 그들에게 붙은 나주/서
남해 세력과 싸우며 후백제의 후방을 지켰다. 허나 910년 능창이 왕건의 수군에 대패하여 철
원(鐵原)으로 압송되면서 압해도까지 후고구려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몽골과의 전쟁이 한참이던 1256년에는 몽골 수군 70여 척이 압해도를 공격했는데, 관
군과 지역 주민들이 송공산성에서 항전하여 그들을 때려잡고 서남해를 지켰다.

이렇듯 압해도와 서남해 방어의 듬직한 요새였던 송공산성은 이후 중요성이 상실되어 역사에
서 장렬히 사라졌고 일부 흔적만 겨우 남아있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만든 것이 제
아무리 대단하다한들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모래성에 불과한 것이다.


▲  송공산 정상에서 바라본 송공리와 천사대교

압해도 서쪽 끝(송공리)과 암태도(巖泰島)를 이어주는 천사대교의 등장으로 암태도와 자은도,
추포도, 팔금도, 안좌도까지 한반도와 간접적으로 연륙되어 더 이상 불편한 해상교통에 의지
하지 않고 육상교통으로 흔쾌히 이동이 가능해졌다.


▲  송공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길
정상에서 동쪽 하산길은 경사가 잠깐 각박하다. 그 구간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완만한 산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  송공산 둘레길 빙글빙글 돌기

▲  송공산 동쪽 능선길

정상에서 동쪽으로 10여 분 내려가면 송공산 둘레길과 만나는 갈림길에 이른다. 여기서 동쪽
으로 10분을 더 내려가면 송공산 주차장(송공산 동쪽 기점)으로 원래는 정상을 찍고 주차장으
로 바로 내려가려고 했다. 허나 둘레길 북쪽 구간에 출렁다리가 있다고 하여 '이곳에도 그런
다리가 있었나~?'
호기심이 가득 피어나 계획을 조금 수정해 그곳까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허나 그곳까지만 간다는 것이 그만 둘레길을 완전히 1바퀴 돌고 말았다. 출렁다리에서 길을
접기에는 90% 아쉬워 계속 전진을 했고 생각보다 너무 잘생긴 송공산둘레길에 퐁당퐁당 빠져
버린 것이다.


▲  송공산둘레길 동북쪽 구간 ①
둘레길을 천천히 1바퀴 돌면 1시간 10~30분 정도 걸린다. 둘레길 북쪽 구간에는
출렁다리도 있고, 차마고도 비슷하게 생겨먹은 벼랑길도 있으며, 어디서든
서해바다가 바라보여 마치 1폭의 수채화 속을 거니는 기분이다.

▲  송공산둘레길 동북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북쪽 구간 (출렁다리 이전)

▲  드디어 만난 송공산 출렁다리

송공산 출렁다리는 이 땅에 흔한 흔들다리(출렁다리) 스타일이다. 협곡 위에 걸쳐진 것으로
폭은 성인 2인분 크기이며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반응을 보여 염통을 은근히 건드
린다. 살살 건너면 다리도 살살 반응을 하지만 격하게 뛰어다니면 다리도 같이 흥분하여 출렁
출렁 파도를 친다. 바로 그런 맛으로 출렁다리나 흔들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출렁다리

▲  출렁다리 속으로~~


▲  송공산 북쪽 자락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매화도(梅花島)

▲  벼랑이 펼쳐진 송공산둘레길 북쪽 구간 ①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진 벼랑길로 바로 옆은 경사가 급한 벼랑이다. (낭떠러지 수준은 아니지
만 경사가 60도 이상 됨) 어떤 이들은 이 길을 두고 송공산의 차마고도라 부르기도 하는데 출
렁다리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구간으로 암벽과 소나무, 하늘, 바다가 서로 절묘를 이룬다.


▲  벼랑이 펼쳐진 송공산둘레길 북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바라본 송공리 지역과 천사대교

▲  송공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그 너머로
팔금도, 안좌도(安佐島)가 희미하게 모습을 비춘다.

▲  송공산 우물터 (송공산둘레길 서쪽 구간)
옛 송공산성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던 우물로 여겨진다. 지금은 물 대신
누렇게 뜬 낙엽들이 가득 들어가 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  송공산 서쪽 능선길

송공산둘레길을 동에서 서로 거의 절반(약 2.5km 정도)을 돌았다. 둘레길을 1굽이 돌 때마다
풍경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여 마치 움직이는 거대한 수채화 같다. 길이 너무 곱다보니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아 만약 늦가을이나 봄의 한복판에 왔다면 2~3바퀴를 돌았을 지도 모른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서쪽 능선길과 만나는 갈림길에 이르자 잠시 고심을 했다. 둘레길을 마저
돌면 지금까지 온 거리 만큼 더 움직여야 되고, 능선길로 진입해 정상으로 질러가면 길은 절
반 가까이 줄어든다. 어느 것이 좋을까 망설이다가 일단 능선길로 접어들기로 했다.


▲  송공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바다와 천사섬분재공원(가운데 부분)

▲  팔각정에서 남쪽 기점으로 내려가는 길 (앞서 올라왔던 길)

서쪽 능선길을 거닐던 중, 낯이 익어보이는 쉼터가 마중을 나왔다. 알고보니 앞서 남쪽 기점
에서 올라갔을 때 만났던 그 팔각정으로 어쩌다보니 산을 1바퀴 돌아 이곳으로 다시 온 것이
다.
팔각정에서 다시 정상으로 갈까 하다가 더 이상의 재방송은 별로 안땡겨 남쪽 기점(분재공원
동쪽)으로 향하는 산길을 다시 내려가다가 중간에서 잠시 작별을 했던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  다시 만난 둘레길 (둘레길 남쪽 구간)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①
송공산은 유난히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의 뫼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러다가 송공의 '송(宋)'이 소나무송(松)으로 바뀌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③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쉼터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율도, 외달도, 달리도, 해남 화원반도)

▲  송공산둘레길 동쪽 구간 ①

▲  송공산둘레길 동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동쪽 구간 ③

▲  송공산 동쪽 기점 (송공산 주차장, 등산로입구)

둘레길 남쪽 구간과 동쪽 구간 약 1.5km를 추가로 도니 다시 낯익은 곳이 마중을 한다. 정상
에서 내려와 둘레길로 진입했던 바로 그곳이다. 출렁다리만 보려고 나선 것이 일이 몇 배로
커져 이렇게 산을 1바퀴 돈 것인데 둘레길은 서남부 구간(약 1km)을 제외하고 거의 3/4를 돌
았다.
<천사섬분재공원→송공산 남쪽 기점→팔각정→송공산 정상→동쪽 능선길→둘레길 북쪽 구간(
출렁다리)→둘레길 서쪽 구간→서쪽 능선→팔각정→둘레길 남쪽 구간→동쪽 능선길 갈림길→
송공산 동쪽 기점>

동쪽 능선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7분 정도 내려가면 주차장이 있는 송공산 동쪽 기점이다. 평
일이라 주차장에는 차량 2대가 낮잠을 자고 있을 뿐, 한적하다.
여기서 목포로 나가는 150번 시내버스가 있으나 배차간격이 거의 2시간에 이르고, 차 시간도
모른다. 막연히 기다리며 희망고문을 하는 것보다 송공산입구까지 내려가 1시간 내외로 오는
130번을 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듯 싶어 기왕 벌인 발품, 10분을 더 팔았다.

송공산입구3거리까지 내려와 130번을 기다렸으나 타이밍이 영 좋지 못해 거의 50분을 기다렸
다. 때마침 바다바람까지 거세게 나를 때려대니 겨울 제국이 다시 도래한 듯, 얼마나 추웠는
지 모른다.
그렇게 피곤과 추위로 막바지 고통을 겪고 있으니 목포 130번이 다가와 입을 벌린다. 반가움
과 미움이 교차되는 그와의 만남, 그에게 나를 담아서 다시 목포시내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압해도 송공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의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송공산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 송공리


▲  송공산과 작별을 고하다. 송공산입구로 내려가는 수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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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5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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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은하계를 꿈꾸다.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외나로도)

 


~~~ 우주를 꿈꾸며,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호(KSLV-1)
▲  나로호(KSLV-1)


 

겨울 제국의 차디찬 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하던 1월의 끝 무렵, 겨울의 핍박에서 잠
시 벗어나고자 일행들과 따스한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번잡한 서울을 떠나 충북과 충남, 전북의 여러 지역을 거쳐 저녁 늦게 전남 여
수(麗水)에 이르렀다. 여수는 원래 계획에 없었으나 광양(光陽) 땅에 이르다보니 바다 남
쪽에 아른거리는 여수 땅이 갑자기 땡기는 것이다. 하여 그 마음 뜻대로 이순신대교를 건
너 여수로 진입, 환상적인 야경을 보여주는 여천공단을 가로질러 여수 도심부에서 흔쾌히
1박을 청했다.
첫날의 여독이 대단했는지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 거의 9시간을 잔 것 같다. 아침 햇살
의 보챔으로 겨우 꿈나라에서 벗어나 둘째 날 여로(旅路)를 배불리 채우고자 서둘러 길을
재촉했는데 이번에는 인연이 참 지지리도 없던 고흥(高興)으로 길을 향했다. (고흥은 20
여 년 전에 잠시 스쳐 지나간 것이 전부임)

고흥의 관문인 벌교읍(筏橋邑)에 이르자 점심으로 그 지역의 별미(別味)인 꼬막정식을 섭
취했다. 10가지가 넘게 나온 반찬을 거뜬히 비우며 배를 남산처럼 불리고 고흥 땅으로 진
입, 적당한 곳을 찾다가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명소를 잠시 접어두고 21세기 스타일에 걸
맞게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으로 길을 잡았다.
그곳은 고흥읍내에서 1시간 가까이 들어가야 되는 고흥의 동남쪽 구석으로 바다를 무려 2
번(나로1대교, 나로2대교)이나 건너고 고개도 여러 번을 넘어야 되며, 내나로도(內羅老島
)란 큰 섬을 가로질러야 된다. 게다가 외나로도(外羅老島)로 들어서 15분 이상 들어가야
되니 그 길이 참 파란만장하다. 또한 거기서 나올 때도 왔던 길로 다시 나와야 되므로 외
지에서 들어가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내던져야 된다.


 

♠  외나로도에 둥지를 튼 우리나라 우주 진출의 중심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입문

▲  북쪽에서 바라본 우주과학관

외나로도 동쪽 구석인 예내리에는 우리나라 우주 개척의 중심지인 나로우주센터가 있다. 우주
진출을 향한 강인한 집념이 서린 특별한 현장으로 그 북쪽 해안에 우주 개척과 우주과학의 이
해를 돕고자 2009년 6월 12일 우주과학관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다.

동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과학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상설전시관에는 우주에서의
기본적인 운동원리와 로켓, 인공위성, 우주탐사(태양계), 달 탐사를 다루고 있으며, 기획전시
실에는 우리나라 로켓의 역사와 로켓의 실물을 다루고 있다. 3D영상관은 우주에 관한 프로그
램을 상영하고 있으며, 4D영상관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우주영상 콘텐츠와 직접 몸으
로 느끼는 체험효과를 선보이고 있다. (3D, 4D영상관은 별도 관람비가 있음)
야외전시장은 로켓광장, 포물면통신, 태양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로켓광장에는 나로호 관
련 로켓 모형을 전시하여 속인(俗人)들의 호기심을 건드리고 있으며, 매년 5월 초에는 우주를
주제로 고흥우주항공축제를 연다. (보통 어린이날을 끼고 함)
입장료는 성인 3,000원, 청소년과 어린이는 1,500원으로 과학관 내부만 적용되며, 야외전시장
과 예내리 앞바다는 무료이다. 또한 주차비도 받지 않는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어린이와 청소년을 동반한 가족 나들이 명소로 아주 좋다. 그러다보니 가
족 단위 관광객들이 거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우주과학교실
과 우주체험교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과학관 동쪽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몽돌해변(예내리 앞바
다)이 펼쳐져 자연적 운치를 더한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나로우주센터에 속한 우주과학관으로 여기서 남쪽으로 3km 이상 들어가야
나로우주센터의 중심지가 나온다. 그곳에서 로켓과 인공위성을 하늘로 날려보낸다. 허나 우주
개척의 야망이 담긴 국가의 예민한 곳이라 금지된 구역으로 굳게 잠겨 있으며, 일반인은 우주
과학관 주차장까지만 발길을 허용하고 있다. (그 이상은 못들어감)
단 나로우주센터 발사현장과 발사통제동은 고흥우주항공축제를 비롯한 일부 기간에 한해 제한
적으로 열어두고 있어 사전 예약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다. 이때는 우주과학관 관람권 구입자
에 한해 입장이 가능하며, 셔틀버스를 타고 들어간다. 발사 현장과 발사통제동은 촬영이 엄격
히 금지되어 있어 사전에 핸드폰과 카메라를 수거하며 미성년자는 반드시 보호자와 동반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또한 한국 국적 사람만 접근이 가능하므로 검은 머리 외국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 사람은 접근 불가이다.


▲  크게 펄럭이는 태극기와 나로호(오른쪽)

고색의 향기와 자연, 산, 길(둘레길, 산길), 역사가 대부분을 이루는 본인 여행기에서 이렇게
과학관을 다룬 것은 2003년 1월 국립서울과학관 이후 2번째이다. (해당 글은 분실됨) 과학 분
야(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는 학창 시절부터 관심도 매우 적었고, 그러다보니 지식의 깊
이도 밑바닥이라 시험 점수는 늘 50점 이하를 맴돌았다. (20점을 맞은 적도 있음 ㅠ) 아무리
벼락치기로 죽어라 외워도 과학 쪽은 통 효과가 없었으며 찍기 신공 또한 형편없었다.
그렇게 본인과 과학은 영 좋지 못한 궁합이라 본인의 돌머리로 비록 일부만 다루었다고 해도
본글을 풀어나가는 것이 적지 않게 고통스러웠다. 허나 오랜만에 찾은 과학관이고 언젠가 우
주도 한번 나가봐야 되기에 미리 예습 차원에서 이곳을 찾은 것이다.

내 어렸을 적에 21세기가 되면 하늘을 나는 차가 생기고, 로보트를 만들어 지구를 지키며, 인
공지능이 일상화되어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우주 여행은 지하철을 타듯 쉬워지며,
다른 행성에서 집과 도시를 짓고 사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 배웠다. 또 그런 식의 공상영화
와 만화가 홍수를 이루며 21세기만 되면 완전한 신세대가 펼쳐질 것 마냥 어린이와 10대들에
게 주입을 시켰다.
허나 21세기가 밝은지 벌써 20년이 넘었으나 하늘을 나는 자동차 그리고 우주 여행, 모두 어
림도 없다. 10년은 커녕 100년 안에도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지구에서 가까운 달 조차 마음
놓고 부리지를 못하니 말이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품고 있던 그 동심과 환상은 생각보다 더
딘 과학기술의 속도 앞에 보기 좋게 아작나고 말았으니 어릴 적 공상 속의 세상은 여전히 상
상 속에나 머물러 있다. 마치 당장이라도 우주를 잡아먹을 기세였던 오만한 인간들의 실수였
던 것이다.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소재지 :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예내리 480 (하반로 490)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061-830-8700)


▲  목성에서의 내 몸무게는?
상설전시관 1층에는 수성, 금성, 목성, 토성 기준으로 몸무게를 재는 공간이 있다.
내가 지구에서는 70kg대인데, 목성에서는 그 2배 이상인 189kg이나 나왔다.

▲  귀엽게 표현된 우리나라 우주인 인형

▲  우주에서 멋대로 보내온 선물들 ①
이들은 운석으로 우주가 우리나라로 던진 것들이다. 우주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우주과학관의 전시물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  우주에서 멋대로 보내온 선물들 ②
저들 중 왼쪽에 잘생긴 운석이 고흥군 두원에 떨어진 '두원운석'이다. 운석은
우주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고마운 존재들로 우주에서 던진 것이
전부일 정도로 희소성이 크기 때문에 금덩이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  우주선 발사를 내 손으로~~! 나로우주센터 발사통제센터 모형

나로호 발사를 주관했던 나로우주센터의 발사통제센터를 재현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
주발사체인 나로호(KSLV-1)는 2013년 1월 30일에 발사되어 탑재 위성인 나로과학위성(STSAT-
2C)이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했는데, 이를 통해 우주기술개발의 기본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이 기술을 기반으로 순수 국산 발사체인 한국형발사체(KSLV-II)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  나로우주센터 발사통제센터 모형 바깥 모습

▲  나로과학위성
2013년 1월 나로3호에 실렸던 나로과학위성의 실제 크기 모형품이다. 무게는 100kg,
크기는 763x1033x1167mm로 300km~1,500km 타원궤도에서 1년 정도 임무를 수행한다.

▲  우리별1호
이름도 상큼한 우리별1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 연구센터와 영국 써리대학이 같이 만든 것으로 1992년 8월
남미 쿠루기지에서 우주로 날려보냈다.

▲  우주인들이 먹는 우주식량들 (모형)

주로 날라간 사람들은 무엇을 섭취했을까? 그들이 우주선과 우주정거장에서 먹는 음식들이
재현되어 있다.
처음에는 분말 음식 위주로 먹었으나 점차 호박파이, 육류, 피자, 과자 등으로 종류가 확대되
었으며, 우주정거장에서 오븐 등을 통해 간단한 조리도 가능하게 되었다. 단 무중력 공간이라
음식물 찌꺼기와 물은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캔이나 튜브 같은 밀폐된 용기를 사
용해 밥을 먹는다.

 ◀  우주인 화장실 (밑에 좌식 변기가 있음)
아무리 우주라고 해도 쌀 것은 싸야 된다. 하
여 우주선과 우주정거장에 화장실을 두었는데,
무중력 공간이라 배설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면 그것들이 공간 내부를 둥둥 떠다니는 최
악의 사태가 발생할 수가 있다.
그래서 소변용 진공수거기와 대변용 수거기로
나누어서 취급하고 있는데, 강력한 흡입력으로
배설물을 빨아들여 저장탱크에서 폐기한다. 속
편하게 우주선 밖으로 배출하는 것으로 알았더
만 그게 아니었다.

       ◀  우주인 샤워실 (샤워부스)
우주에서 지구처럼 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하여 젖은 스펀지 등으로 몸을 닦거나 목욕
수건에 물을 묻혀 닦아내는 방식으로 몸을 씻
는다. 그야말로 고양이식 세수 방식이다.
머리를 감을 때는 린스 기능이 있는 샴푸를 사
용하며, 이를 닦을 때는 먹을 수 있는 치약을
사용하여 삼키거나 진공튜브로 처리한다. 샤워
부스에서 이용한 물은 폐수탱크에 연결된 진공
흡입기로 처리하며, 우주선 밖으로는 배출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주선 생활이 생각 이상으로 고통스럽
고 그나마 개선된 것이 저 정도이니 아직 우주
개척의 길은 한참이나 멀었다. 솔직히 저런 공
간에서는 하루도 지내고 싶지 않다.


▲  우주 도시(Space city) 상상모형도

언제가 될지 모를 막연한 미래에 달과 화성, 금성 등에 우주 도시를 만든다면 저런 모습이 된
다고 한다. 지구와는 대기부터가 틀리니 저런 보호막 식의 도시를 닦은 다음 태양발전소나 원
자력 발전소로 에너지를 충당하고 양극에 얼어붙어있는 드라이아이스에서 탄산가스를 만들어
산소를 추출하면 100년 안에 지구의 대기층과 비슷한 대기권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때가
되면 보호막은 싹 거둬도 될 것이다.


▲  재현된 달 표면과 우주탐사로봇

▲  한없이 착하게 쓰인 우주윤리

우주 공간은 인류 공용의 공간으로 어느 우주도, 어느 별도 영유권과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
다고 쓰여있다. 허나 저것은 어디까지나 미국과 러시아 등 우주에 조금이나마 손을 대고 있는
나라들이 편의상 만든 윤리이다. 다른 행성과 은하계의 생명들로부터 동의를 받은 것도 아니
며, 어디까지나 윤리적인 내용이라 강제구속력은 없다.
지금이야 달 하나 다루는 것도 벅찬 상태라 저 윤리가 잘 지켜지고 있지만 나중에 우주를 마
음대로 하는 세상이 오면 저것은 일개 휴지조각이 될 것이다. 지구도 그렇지만 우주에서도 강
한 것이 장땡이다. 그러니 우리도 우주 개척을 착실히 준비하여 꼭 장땡이 되어야 한다.


▲  아리랑3A호 (KOMPSAT-3A)
2015년 3월 26일 러시아 야스니 발사장에서 쏘아올린 인공위성으로 2019년
봄까지 우주에서 몸을 풀었다.

▲  아리랑위성1호 (KOMPSAT-1)

▲  아리랑위성5호 (KOMPSAT-5)


▲  호버만의 구(Hoberman Sphere)

1층과 2층이 확트인 과학관 중심부에 '호버만의 구'라 불리는 아름답고 요염하게 생긴 동그란
물체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제작된 그는 우주의 역동적인 팽창과 수축의 반복원리로 구성
되어 있는데, 우리의 우주 개발에 대한 의지와 염원이 담겨져 있으며, 우주 탄생의 신비로움,
우주 개발을 위한 도전 정신, 우주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우주의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인도하는 상징적 조형물로 삼고 있다.
호버만의 구는 평상시에는 가만히 있다가 2층에 특정 장소에 멈춰서면 율동을 부리며 움직인
다. (2층에 안내문이 있음)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마무리

▲  과학로켓 KSR-III

KSR-III은 1997년 12월부터 5년에 걸쳐 개발된 우리나라 최초의 액체연료로켓이다. 그의 추진
기관은 액체산소와 케로신을 추진제로 사용하는 지상 추력(推力) 13톤급의 액체엔진으로 가압
식 추진제 공급방식을 채택했다.
가압식 사이클은 액체연료 로켓의 연료 공급 방식 중의 하나로 기체를 이용해 추진체 탱크 내
의 추진체를 연소기로 밀어내는 방식을 말하며 구조가 간단하고 저렴해 신뢰성이 높다.


▲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 여행자인 이소연이 우주선에서 먹었던 식량과
실험도구들

▲  나로호 2차 발사 실패와 원인 규명을 위해 만든
비행종단시스템 2단 로켓


나로호 2차 발사는 2010년 6월 10일 17시 1분에 있었다. 허나 발사된 뒤 겨우 136,6초만에 1
차 진동이 생겼고, 1초 뒤인 137.3초에 내부 폭발로 보이는 2차 진동으로 원격측정이 중단되
면서 실패했다. 통신이 두절되었을 때 그의 고도는 67.73km였다.

사고 발생 원인을 파악하고자 에네르고마시 관계자들이 포함된 한,러 공동위원회가 구성되어
3번의 FTS-킥모터 연계실험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FTS 오류였음이 밝혀졌다. 이곳에 전시된
것은 FTS-킥모터 연계실험 때 사용한 것이다.


▲  우리나라의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의 위엄 (2013년 1월 30일에 발사됨)

▲  75톤급 액체로켓 개발모텔 엔진 목업
한국형발사체의 기본 엔진으로 4기를 묶어 한국형발사체의 1단에 적용하고 확대
노즐을 적용한 엔진 1기로 2단을 구성했다. 2015년부터 나로우주센터에서
지상연소시험 등의 개발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장차 국가 우주개발을
위한 핵심 부품으로 삼을 예정이다.

▲  7톤급 액체로켓 엔진 목업

▲  하얀 피부의 잘생긴 나로호와 로켓 형제들

우주과학관 내부에는 볼거리들이 많이 깔려있다. 그중에는 호기심을 흥분시키는 것들도 여럿
있으나 본인이 우주과학 지식이 일천하여 그들을 모두 다루지 못하고 겨우 일부만 본글에 끄
집어냈다.

야외전시장에는 크고 견고한 무쇠덩어리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모습으로 자리들 하고 있는데,
그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와 KSR로켓 형제들의 모조품이다. 그중 훤칠한
외모를 자랑하는 나로호는 2009년 8월 25일 1차 발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2010년 6월 10
일 또 실패했으며, 2013년 1월 30일 드디어 성공하여 우주로 날려보냈다.
나로호의 몸매는 길이 33m, 지름 2.9m, 무게 140톤으로 2단형(1단은 액체추진 로켓으로 러시
아에서 개발함, 2단은 고체추진 로켓으로 우리나라가 개발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를 우
주로 보낸 현장이 바로 나로우주센터이며, 이때 나로과학위성을 실어보냈다.


▲  나로호의 굵직한 밑도리와 KSR로켓 형제들(KSR-1, KSR-2, KSR-3)

나로호보다 키가 작은 무쇠덩어리들은 KSR시리즈의 로켓이다. 그중 KSR-1은 길이 6.7m, 지름
0.42m, 무게 1.2톤으로 1단형 무유도 고체추진 로켓이며 1993년 6월 4일 1차 발사하고, 그해
9월 1일에 2차 발사를 했다. 추진관과 구조체, 탑재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존농도 관
측장비를 포함한 탑재물을 지상에 각종 관측자료를 송신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KSR-2는 길이 11.1m, 지름 0.42m, 무게 2.02톤으로 2단형 고체추진 로켓이다. 1998년 6월 11
일에 발사되었으며, KSR-1보다 더 높은 고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리고 KSR-3
은 길이 13.5m, 지름 1m, 무게 6.1톤으로 2단형 액체추진 로켓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액체추
진엔진의 로켓으로 한국형 인공위성 발사체를 쏘아올리기 위한 기반기술 확보 차원에서 제작
되었다. 추력 13톤의 액체로켓엔진이 부탁되었으며, 탑재부와 유도조종장치, 자세조종장치,
가압용 고압가스 탱크, 연료 및 산화제탱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예내리 앞바다(몽돌해변)

우주과학관 동북쪽에는 300m 정도의 잘생긴 몽돌해변이 펼쳐져 있다. 흥미롭지만 그만큼 머리
가 아픈 우주과학관 관람으로 나의 돌머리가 지끈거리던 상태였는데, 이 해변을 보니 그 통증
이 싹 해소되는 것 같다. 역시 인간에게는 대자연이 빨간약이고, 자연만큼 좋은 것은 없다.
게다가 과학관 앞에 이렇게 좋은 자연 공간이 있으니 자리 하나는 정말 잘 잡은 것 같다.

우주과학관 앞 몽돌해변(예내리 앞바다)은 잔잔한 바다와 밟는 느낌이 좋은 몽돌, 짙게 띠를
이루며 해안을 둘러싼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곳으로 물놀이 장소로도 아주 좋다. 허나 이곳에
부여된 '~~해수욕장'이란 명칭은 없고 외나로도에서도 아주 구석진 곳이라 그냥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숨겨진 해변이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것이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이 들어서면서
과학관의 후식용으로 들렸다가는 명소가 되었다. 나로우주센터와 우주를 든든한 후광(後光)으
로 삼았으니 나로우주센터를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우주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사람이 끊길
일은 전혀 없다.


▲  부드러운 곡선미를 보이는 예내리 앞바다와 북쪽 방파제
사람들이 몽돌 해변을 사각사각 밟으며 겨울 바다의 낭만을 누린다.

▲  몽돌해변과 바다의 부드러운 만남, 그리고 그들만의 속삭임

▲  예내리 앞바다 남쪽 부분
저 산줄기 너머에 금지된 구역인 나로우주센터 중심지가 있다. 예내리 앞바다도
해변 남쪽 방파제까지만 접근이 가능하며 그 이상은 발을 들일 수 없다.


몽돌해변에서 잠시 멍 좀 때리다가 햇님의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부랴부랴 다음 답사
지로 길을 떠났다. 안그래도 겨울 제국 시절이라 낮이 짧은데 칼출근과 칼퇴근을 좋아하는 햇
님이 날씨 변화 등으로 일찍 퇴근하면 낭패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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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2월 3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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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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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간송미술관, 심우장, 성락원, 선잠단터 201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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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로구 경복궁, 인사동 200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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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로구 창경궁 (1) 20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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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로구 창경궁 (2) 20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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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남구 봉은사 1 (사월초파일)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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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강남구 봉은사 2 (사월초파일)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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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종로구
서대문구

세검정, 대원군별장, 홍지문
옥천암 마애좌상

200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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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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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금선사

20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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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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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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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종로구

선희궁터, 청와대분수대, 청와대앞길,
경복궁신무문, 인사동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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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대모산 불국사 (사월초파일)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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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사월초파일)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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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이종석 별장

200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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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수락산 학림사 2009, 8 ☞ 블로그글 보기

16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09, 12 ☞ 블로그글 보기

17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0, 4 ☞ 블로그글 보기

18

은평구 태화산 수국사 2010, 7 ☞ 블로그글 보기

19

종로구 부암동 뒷골마을, 북악산길, 창의문 2011, 3 ☞ 블로그글 보기

20

관악구

관악산 관음사, 효민공이경직묘역,
사당동백제요지, 구벨기에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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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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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1, 5 ☞ 블로그글 보기

23

종로구

가회박물관, 삼청동(북촌), 인사동

2011, 9 ☞ 블로그글 보기

24

성북구

성북동 삼청각, 홍련사, 북악산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25 도봉구

방학동 은행나무, 원당샘, 안맹담/정의공주묘
목서흠묘역

20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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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백석동천 2012, 2 ☞ 블로그글 보기
27

종로구

장의사지당간지주, 세검정, 석파정별당, 홍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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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공원(광주바위), 허가바위, 허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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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이윤탁한글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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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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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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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동 사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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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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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백사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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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북악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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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성북동 심우장, 최순우옛집, 선잠단터

2012, 10 ☞ 블로그글 보기
36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관상감관천대, 계동길, 창덕궁길,
요금문, 고희동가옥, 백흥범가옥, 빨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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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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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별당(석파랑), 부침바위터, 무계정사터,
현진건집터, 청계동천, 반계윤웅렬별장

20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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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 안국동 윤보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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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본원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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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동 경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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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201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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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서원,
광륜사)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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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간송미술관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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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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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시인의 언덕(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20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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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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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등회 (서울연등축제)
조계사, 우정국로, 청계천, 광통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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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201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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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원구단), 덕수궁 대한문, 성공회 서울성당,
양이재, 구세군 중앙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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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201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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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성곽공원, 이화마을, 낙산(낙산공원) 20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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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선잠단터, 최순우옛집, 삼청각 201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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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해골바위 201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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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서울연등회(연등축제), 조계사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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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정릉 봉국사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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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충원(창빈안씨묘역, 부안군이석수묘역),
동작충효길(현충원길), 이수폭포

201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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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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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종로구

북악산 주능선 (숙정문, 촛대바위, 청운대,
백악마루, 창의문)

201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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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원터

201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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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창덕궁 후원뒷길, 흥덕사터, 북묘하마비,
우암 송시열집터

201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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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북촌(고희동가옥, 기기국번사창, 삼청동길) 201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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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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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남산공원길, 남산 정상
(팔각정), 남산야외식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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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자운봉, 포대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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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인왕산 개미마을, 환희사, 큰절골

20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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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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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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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수성동계곡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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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구

북한산 구천폭포(구천계곡),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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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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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20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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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대모산, 불국사, 구룡산

201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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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부암동 무계원, 무계정사터(안평대군 이용집터),
청계동천, 반계 윤웅렬별장

201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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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한양도성,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난파가옥
, 월암근린공원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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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 (삼성산성지, 호압사, 호암산 정상)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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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안산, 무악동봉수대 (안산자락길, 무악정)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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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중앙고등학교(본관, 서관, 동관), 창덕궁 신선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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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보문동 보문사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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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

홍련봉 보루,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5/6보루, 고구려정

201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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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기동 연화사
월계동 기원사

20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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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개운산 보타사 20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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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201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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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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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삼청공원, 북악산 말바위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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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삼천사계곡)

201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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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구

강감찬생가터, 낙성대(안국사), 난곡로 느티나무,
신림동 굴참나무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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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성북구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자지동천,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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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 옛 윤덕영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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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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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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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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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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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가옥, 흥덕사터, 북묘 하마비, 송시열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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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말 은행나무/느티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개화산 약사사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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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 석파정 별당(석파랑), 홍지문과 탕춘대성
옥천암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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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단(선농대제),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역사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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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암동 개운사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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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청룡사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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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구

북한산 화계사

201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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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구름정원길,
경천군 송금비, 백화사, 화의군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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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 벽운동계곡, 염불사, 영원암, 귀임봉

201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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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구로올레길,
지양산

201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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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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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김신조루트)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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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20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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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성북동 최순우옛집, 수연산방(상허 이태준 가옥)

20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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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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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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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선옹주묘역, 봉화산(아차산봉수대터),
봉화산둘레길, 충익공 신경진 묘역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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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학도암, 중계본동 느티나무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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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구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묘, 김병로묘,
유림묘,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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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골, 무수골느티나무,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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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봉원사(서울연꽃문화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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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수락산 노원골, 수락산보루, 동막골, 도선사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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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김형태가옥, 이준구가옥,
북촌 가회동 일대

201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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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능원사, 도봉사, 윗무수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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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월암근린공원(한양도성), 홍난파가옥, 딜쿠샤,
행촌동 은행나무, 황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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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구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관악산 사당능선,
선유천국기봉, 관음사국기봉, 관음사

201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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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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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바위, 가온다리, 산들수목원약수터)
수성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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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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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인천 - 4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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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천

야인시대촬영장, 루미나리에축제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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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양 북한산성(대서문, 중흥사터, 북한산행궁터)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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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양 북한산성(태고사, 산영루터, 북한산성계곡)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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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남 망경암, 봉국사 (사월초파일)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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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수원

오산 물향기수목원 / 수원 팔달문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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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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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양주

덕릉마을 산신각, 덕흥대원군 묘역

2008, 5 ☞ 블로그글 보기

8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08, 10 ☞ 블로그글 보기
9

안양

안양사, 석수동마애종, 석수동석실고분 2009, 3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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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서운산 석남사 (사월초파일)

2009, 5 ☞ 블로그글 보기
11

하남

춘궁동동사지(동사지3/5층석탑), 광주향교

2010, 2 ☞ 블로그글 보기
12

안양

삼성산 염불암, 중초사지당간지주, 안양예술공원

2010, 12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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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용문산 사나사, 사나사계곡

2011, 5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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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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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북한산성 중성문, 노적사, 중흥사터, 봉성암,
산영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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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포천

반월성, 청성공원, 포천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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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하남

선법사(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2011, 11 ☞ 블로그글 보기
18

고양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9

고양

중남미문화원, 벽제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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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장정리5층석탑, 고려궁터,
김상용 순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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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이천

관고리 석불입상, 설봉공원(설봉저수지),
설봉서원, 설봉산 영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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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양평

용문산 용문사,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23

파주

고령산 보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24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 2014, 3 ☞ 블로그글 보기
25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26

의정부

도봉산 회룡사, 석굴암, 회룡골 2015, 7 ☞ 블로그글 보기
27

고양,
서울
종로구

북한산 북한산성계곡, 태고사, 행궁터,
금위영이건기비, 금위영유영지, 경리청상창터,
대남문, 문수사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28

의왕

청계산 청계사

2016, 2 ☞ 블로그글 보기
29

강화

외포리, 석모도 보문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0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1

양주
서울

우이령길(교현리~우이동), 우이동유원지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32

인천

소래철교, 소래포구(소래어시장), 장도포대지
(댕구산), 논현포대

2017, 2 ☞ 블로그글 보기

33

수원

서호(서호공원), 항미정 2017, 6 ☞ 블로그글 보기

34

광명

광명동굴, 가학산 2017, 7 ☞ 블로그글 보기

35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2017, 11 ☞ 블로그글 보기

36

안양

안양예술공원, 안양사지,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2018, 1 ☞ 블로그글 보기

37

강화

월곶돈대, 연미정, 강화평화전망대

2018, 6 ☞ 블로그글 보기

38

과천

관악산 문원계곡,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2018, 7 ☞ 블로그글 보기

39

군포

수리산(철쭉동산,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
둘레길), 수리사, 반월호수

2018, 9 ☞ 블로그글 보기

40

인천

양주성금속비, 용궁사, 영종도 백운산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41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2019, 1 ☞ 블로그글 보기

42

강화

교동도 (교동읍성, 교동향교, 화개사, 화개산)

2019, 6 ☞ 블로그글 보기

43

화성

봉림사, 구봉산 당성

2019, 10 ☞ 블로그글 보기

 

강원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양양

낙산사, 홍련암, 오색약수, 성국사, 설악산 주전골 2004, 3

☞ 블로그글 보기

2 강릉 객사문, 오죽헌, 경포대, 굴산사터, 신복사터 2004, 6

☞ 블로그글 보기

3 평창 대관령 양떼목장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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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릉
동해

경포대해수욕장, 등명낙가사, 묵호항 2006, 8

☞ 블로그글 보기

5 동해 감추사, 감추해변 2007, 2

☞ 블로그글 보기

6 태백 구문소 2007, 2

☞ 블로그글 보기

7

양구

양구 선사박물관 2010, 1

☞ 블로그글 보기

8

화천

토고미마을(산천어축제), 딴산 2011, 1 ☞ 블로그글 보기
9

화천,양구
춘천

화천 평화의댐, 세계평화의종공원,
춘천 윗샘밭

2011, 2 ☞ 블로그글 보기
10

평창

남산공원, 송학루, 노산성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1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2, 6 ☞ 블로그글 보기
12

정선

정선5일장, 봉양리뽕나무, 아우라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3

영월

보덕사, 금몽암, 낙화암, 금강정, 금강공원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4

태백

태백산 (당골, 석탄박물관, 석장승, 눈꽃축제장,
단군성전)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5

동해

추암(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 해암정,
추암조각공원, 북평5일장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6

화천

화천 산천어축제(화천읍내, 북한강) 2015, 1 ☞ 블로그글 보기
17

정선,태백

함백산, 만항재 2015, 9 ☞ 블로그글 보기
18

정선

아라리촌, 아우라지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19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0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21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2017, 6 ☞ 블로그글 보기
22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고인돌

2018, 2 ☞ 블로그글 보기
23

원주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계곡, 학곡리 황장금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충청북도 - 1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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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은
대전

보은 삼년산성
대전 동춘당 / 송애당 / 법동 석장승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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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동 영동향토민속자료전시관, 가학루, 황간향교 20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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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주

단호사, 사문리당산나무숲, 미륵리사터,
하늘재, 충주호

20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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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양

사인암, 청련암, 중선암, 북상리 시골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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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괴산

각연사 (각연사계곡)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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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홍범식고가, 개심사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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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옥천

정지용 생가(정지용문학관), 육영수생가,
죽향리초교 구교사, 죽향리사지3층석탑, 옥천성당

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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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주

낙가산 보살사, 명암약수터, 명암저수지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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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단양

북상리 시골, 사인암, 청련암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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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단양

구인사 (구봉팔문)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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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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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청남도, 세종 - 16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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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안 태화산 광덕사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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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진
태안

행담도, 꽃지해수욕장, 방포항,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암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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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전

식장산 고산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4 공주

계룡산 동학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5 공주

계룡산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용문폭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6 공주

계룡산 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7 태안

신진도(안흥외항), 마도, 안흥항, 안흥성(태국사)

2013, 8 ☞ 블로그글 보기
8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산자연휴양림)

2014, 6 ☞ 블로그글 보기

9

당진
아산

장고항, 삽교호관광지, 외암리민속마을

2015, 11 ☞ 블로그글 보기

10

예산

금오산 향천사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1

대전

계족산(계족산성, 계족산 황톳길), 장동산림욕장

2016, 10 ☞ 블로그글 보기

12

보령

성주사지, 성주천 가로수길

2017, 2 ☞ 블로그글 보기

13

서산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

2017, 12 ☞ 블로그글 보기

14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2018, 7 ☞ 블로그글 보기

15

천안

태조산 각원사, 성불사 2019, 1 ☞ 블로그글 보기

16

세종

비암사, 도깨비도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전라북도 - 15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부안 상록해수욕장, 내소사, 곰소항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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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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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주
장수

한풍루, 무주향교
의암송, 장수향교

2009, 3

☞ 블로그글 보기

4 전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이목대), 한벽당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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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등학교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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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산

응항, 선유도, 고군산군도 일주

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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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순창

강천산(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강천사, 삼인대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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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망루, 오수리석불, 해월암

201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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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20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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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안 변산 내소사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1

무주 적상산(적상호, 적상산성, 적상산사고), 안국사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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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무주

무주머루와인동굴, 덕유산무주리조트(곤도라),
덕유산 설천봉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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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제 모악산 귀신사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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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완주 종남산 송광사 2018, 4

☞ 블로그글 보기

15

완주 모악산 대원사, 수왕사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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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라남도 - 14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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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성
담양
나주

장성 방울샘,
담양 관방제림 / 담양읍 5층석탑 / 석당간
나주 남고문 / 정수루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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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광 내산서원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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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주
광주

정수루, 금성관
광주 풍영정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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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천 금전산 금둔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5

순천 개운산 동화사 2010, 1 ☞ 블로그글 보기

6

순천 조계산 천자암 2010, 2 ☞ 블로그글 보기

7

장성 백암산 백양사 2011, 9 ☞ 블로그글 보기

8

광주 무등산 원효사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9

구례 지리산 천은사(천은제) 2012, 4 ☞ 블로그글 보기

10

곡성 동리산 태안사(태안사계곡) 2013, 5 ☞ 블로그글 보기

11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운암사)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2

목포

노적봉, 유달산(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갓바위

2017, 9 ☞ 블로그글 보기

13

나주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14

영광

불갑산 불갑사(꽃무릇군락지)

2019, 9 ☞ 블로그글 보기

 

대구, 경상북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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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

반월성, 석빙고, 남산 서쪽(용장사터, 천룡사터)

20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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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경 문경새재(여궁폭포, 혜국사, 주흘산, 주흘관) 20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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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달성 비슬산(유가사 / 암괴류), 현풍석빙고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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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미 의구총, 낙산리고분군, 낙산리3층석탑 2009, 2

☞ 블로그글 보기

5

예천
상주

개심사지5층석탑
용화사(증촌리석불좌상/입상), 전고령가야왕릉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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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신문왕릉 2009, 7 ☞ 블로그글 보기
7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불무사)

2009, 9 ☞ 블로그글 보기
8

영덕
울진

고래불해수욕장, 후포항, 월송정, 월송해변 2011, 6 ☞ 블로그글 보기
9

달성

다람재, 도동서원, 이노정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청도

남산 낙대폭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달성

비슬산 용연사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2

예천

회룡포, 비룡산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3

경산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4

경주

효소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귀부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15

경주

남산 보리사(미륵곡 석조여래좌상) 2015, 10 ☞ 블로그글 보기
16

안동

도산서원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7

대구

팔공산 파계사, 대비암, 성전암 2016, 4 ☞ 블로그글 보기
18

경주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19

의성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문익점면작기념비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20

예천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석조여래입상과
3층석탑, 초간정(초간정 원림)

2018, 3 ☞ 블로그글 보기
21

상주

장각폭포, 오송폭포(성불사), 옥양폭포

2018, 6 ☞ 블로그글 보기
22

영주
봉화

휴천동 지석 및 입석
오전약수,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2019, 6 ☞ 블로그글 보기
23

경주

감산사, 연지암, 숭복사(숭복사터)

2019, 8 ☞ 블로그글 보기

 

부산 - 1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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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영구
강서구

광안리해수욕장, 가덕도(외양포, 대항, 세바지)

200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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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서구
서구

망상도/유주암, 송도해변, 송도해수욕장

2008, 9 ☞ 블로그글 보기
3

기장군

불광산 (장안사. 장안사계곡) 2009, 1 ☞ 블로그글 보기
4

기장군

불광산 (척판암, 백련암) 2009, 1 ☞ 블로그글 보기

5

서구
북구

내원정사, 만덕사(만덕사 당간지주), 알터유적 2009, 9 ☞ 블로그글 보기

6

금정구

금정산(금정산성, 국청사) 2011, 1 ☞ 블로그글 보기

7

금정구

금정산 미륵사, 금성동 2011, 1 ☞ 블로그글 보기

8

강서구

가덕도(가덕도등대, 외양포, 대항, 새바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9

사상구
강서구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 숲길,
범방동3층석탑, 부산경남경마공원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사하구

몰운대, 다대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남구

백운포, 오륙도 (오륙도등대, 등대섬) 2014, 1 ☞ 블로그글 보기

12

사하구
서구

승학산, 구덕문화공원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3

금정구

금정산(고당봉, 금샘), 원효암, 금정산성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4

해운대구

해운대 동백섬, 해운대해수욕장, 미포,
달맞이길, 문텐로드, 청사포, 구덕포, 송정해수욕장

2015, 7 ☞ 블로그글 보기

15

연제구

배산, 배산성터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6

기장군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황학대, 두호포구,
기장성당, 월전포구

2017, 4 ☞ 블로그글 보기

17

기장군

월전~대변 해안가, 대변항, 죽도, 연하리 해변,
오랑대, 해동용궁사

2017, 7 ☞ 블로그글 보기

 

울산, 경상남도 - 2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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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
부산

처용암
옥련선원 / 정묘사(배롱나무)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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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원 무학산(관해정), 가포해변 2006, 11

☞ 블로그글 보기

3

김해

김해 수로왕릉

2006, 11

☞ 블로그글 보기

4

진주
사천

진주 금선암
사천읍성(산성공원), 대방진굴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5

함안
창원

함안박물관, 말산리/도항리고분군
진해 우체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6

창원

불모산 성흥사, 대장동계곡

2008, 9 ☞ 블로그글 보기
7

밀양

밀양 표충비, 무안리 향나무(홍제사) 2009, 1 ☞ 블로그글 보기
8

양산

천성산 홍룡사(홍룡폭포), 원효암 2009, 6 ☞ 블로그글 보기

9

울산 일산해수욕장, 대왕암공원 2009, 7 ☞ 블로그글 보기

10

창녕

창녕석빙고, 송현동석불좌상, 송현동고분군,
진흥왕척경비, 만옥정공원, 남지철교

2010, 5 ☞ 블로그글 보기

11

거창

수승대(귀연서원, 요수정)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2

울주
밀양

서생 나사리해변,
밀양 얼음골(천황사)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3

함양

상림공원, 한남군묘역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4

산청

목면시배유지, 배산서원, 덕천서원, 남명조식유적

2012, 9 ☞ 블로그글 보기

15

남해

호구산 용문사, 남해자생식물단지, 미국마을,
용소리/금평해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16

통영

통영 달아공원

2013, 3 ☞ 블로그글 보기

17

울주

가지산 석남사 (석남사계곡)

2013, 9 ☞ 블로그글 보기

18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9

창원

불모산 성주사 (성주사계곡)

2014, 10 ☞ 블로그글 보기

20

울주

서생포왜성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1

산청

덕양전, 전 구형왕릉, 왕산(유의태약수터,
왕산사지)

2018, 10 ☞ 블로그글 보기

 

제주도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제주

외도 월대, 수산봉, 수산리곰솔, 납읍리
납읍 금산공원(납읍리 난대림)

2019, 3 ☞ 블로그글 보기


 

기타 지역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왜열도

동경 지역(긴자, 록뽕키, 우에노, 도쿄도청타워,
아사쿠사<관음사>, 신주쿠, 코쿄, 디즈니랜드)

2002, 6

☞ 블로그글 보


1. 천하에 공개된 글 중에서 하자가 없는 글만 선정해서 지역별로 모았습니다.
2. 2003년 4월 이전 글은 모두 제외했습니다.
3. 답사기 내용과 사진을 전체 혹은 일부라도 퍼갈 경우, 반드시 출처와 원작자(박융) 이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사진이 일부 뜨지 않는 글들이 약간 있습니다. 이 점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5. 공개된 글 중, 추후 업데이트 판이 나올 경우, 이전 판은 모음집에서 삭제 될 수 있으며 2개 이상의 시리즈로
   작성된 글 중 추후 본인 필요에 따라 1개나 2개로 통폐합 정리될 수 있습니다.
6. 지역 별로 분류했으나 지역이 2개 이상 겹치는 글은 먼저 간 곳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7. 최종 업데이트 2019년 12월 30일

초가을에 가면 딱 좋은 곳 ~ 꽃무릇(상사화)의 대표 성지, 영광 불갑사 (수다라성보박물관)

 


' 가을맞이 산사 나들이 ~ 꽃무릇의 성지, 영광 불갑사 '

▲  눈과 코, 입이 달린 불갑사 굴뚝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불갑산 산길


 

상사화(相思花)는 꽃무릇이라 불리기도 한다. <열반에 드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피안화
(彼岸花)라 불리기도 함> 그들은 8~9월이 절정기로 상사화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
는 영광 불갑사에서는 매년 9월 한복판에 상사화 축제를 벌인다. 비록 축제는 과거완료형
이 되었고 시간 또한 이미 10월 초를 가르키고 있지만, 아직까지 상사화가 남아있을 것이
란 순진한 생각에 불갑사로 콩 볶듯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영광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담
았다. 자리는 널널하여 편하게 이동을 했는데 거의 3시간 40분을 내달려 영광읍내에 자리
한 영광터미널에 도착했다. 전남 영광(靈光)은 2006년 가을 이후 10여 년 만에 방문이다.
영광터미널에서 잠시 숨 좀 돌렸다가 불갑사행 군내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20분 정도를 달
려 불갑사 종점에 두 발을 내린다. 이제 비로소 꽃무릇의 성지로 추앙받는 불갑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  불갑사 입문

▲  불갑사 주차장 느티나무 - 전남 보호수 15-18-6-8호

버스가 얌전히 바퀴를 접은 불갑사 주차장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
다. 이 나무는 2004년 12월에 보호수의 지위를 받았는데, 당시 추정 나이가 6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0여 년이 더해져 660~670년 정도 된다. (어디까지나 추정 나이임)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무럭무럭 자라나 지금은 높이 25m
, 둘레 5.9m의 장대한 나무로 성장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불갑사를 찾은 사람들의 정자나
무와 이정표 역할을 하였고, 지금도 그 역할은 여전한데, 문명의 이기(利器)인 차량들도 앞다
투어 그의 포근한 그늘 속에 들어가 가을 단잠을 즐긴다.

주차장을 지나면 육중하게 생긴 일주문이 마중
을 한다. 보통 문 정면에는 절 이름을 알리는
현판을 내걸기 마련이나 이곳은 뒷쪽에 걸어두
어 문을 꺼꾸로 세운 듯한 모습이다.
일주문을 중심으로 잘 꾸며진 공원이 넓게 자
리해 있는데, 이 일대를 '불갑사 관광지'라 부
른다. 이곳에는 산책로와 연못, 진달래동산,
오토캠핑장, 영광산림박물관 등이 있으며, 나
는 오로지 불갑사와 상사화만 바라보고 온 터
라 모두 쿨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  불갑사 일주문(一柱門)


▲  불갑산 호랑이상의 위엄

일주문을 지나 조금 들어서면 왼쪽에 위엄 돋는 모습에 불갑산 호랑이상이 있다. 지금이야 호
랑이와 마주칠 일이 없으니 돌에 새겨진 공룡 화석을 보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오랫동
안 이 땅을 주름잡던 무서운 맹수였다. 호환(虎患)을 제일 두려워할 정도로 옛 사람들에게 공
포의 대상이었으나 20세기 초반 왜정(倭政)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동물원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다.

불갑산에도 호랑이가 살았었는데, 1908년 2월 덫고개에서 어느 농부가 호랑이 1마리를 잡았다.
그때는 호랑이 사냥으로 먹고 살던 사냥꾼과 농사꾼이 많았던 시절로 잡은 호랑이를 어찌 처
리할까 궁리하던 중, 왜인(倭人) '하라구찌'가 찾아와 자기에게 넘기라며 200원을 주었다. 당
시 200원은 무려 논 50마지기(1만 평) 가격이었다.
호랑이를 매입한 하라구찌는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의 시마쓰 제작소에서 표본 박제를 했으며, 그것을 들고 목포로 건너와 살다가 나중에 목포 유달초교에 기증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기증
을 했는지, 1945년 패망으로 강제 귀국을 하게 되자 일종의 떨이로 넘긴 것인지는 모르겠음)
그 박제는 아직도 유달초교에 간직되어 있으며, 북한과 만주 등의 실지(失地)를 제외한 이 땅
(남한)에서 잡힌 호랑이 중 유일하게 박제 표본으로 남은 것으로 호랑이에게는 억울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무척 귀한 자료이다.
이후 영광군에서 '포획 100년 만에 귀향'이라는 주제로 유달초교와 국립생물자원관 척추동물
연구과의 도움으로 모형을 제작해 2009년 4월 이곳에 갖다두어 불갑산의 새로운 명물로 삼았
다.

호랑이상 뒷쪽에는 호랑이굴이 재현되어 있는데, 가짜 돌로 만든 모형굴이라 허접하기가 그지
없으며, 호랑이상은 그럴싸하게 지어져 있어 어두울 때 보면 자칫 염통이 쫄깃해질 수 있다.


▲  불갑산 호랑이상과 호랑이굴(뒷쪽)

▲  산뜻하게 닦여진 불갑사 가는 길 (불갑사 관광지)

▲  푸른 잎만 남은 진달래동산

▲  불갑사 해탈교

불갑사 관광지와 불갑사의 경계를 이루는 해탈교를 건너면 꿈에 그리던 상사화 군락지가 나온
다. 상사화의 마지막 향연을 기대했건만, 정작 나를 맞이한 것은 검게 떡이 되버린 시들시들
해진 상사화였다. 이것이 정녕 8~9월 동안 천하를 홀렸던 그 상사화가 맞단 말인가?


▲  잔치가 끝나버린 상사화 군락지

나의 계산은 틀렸다. 적어도 9월 말까지는 왔어야 상사화의 끝물이라도 볼 수 있는데 너무 늦
게 왔다. 여기서 불갑사 경내까지 죄다 뒤적거려도 멀쩡한 상사화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얄미운 세월이 그들의 젊음을 죄다 앗아갔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젊음이 사라진 상사화의 말로는 어떻게 저리 비참할 수가 있지? 되물을 정
도였다. 솔직히 검게 타듯 시들어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꽃에 매달린 푸른 잎과 나
무가 더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으니 상사화의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보다도 못한 것 같다.
단지 그 2달을 위해 그들은 용을 썼던 모양이다. 세상에 그 무엇이든 전성기가 지나면 그 이
후의 모습은 참 우울하기 그지 없지. 그래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내년을 기약하며 잔뜩 웅크린 상사화(꽃무릇) 군락지
향연이 끝난 상사화의 쓸쓸한 말로, 허나 그것이 절대 끝은 아니다. 꽃은 비록 졌지만
그 꽃을 피우는 숙주(뿌리, 줄기)는 그대로 남아 내년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  숲속에 묻힌 상사화 군락지

▲  상사화 군락지 산책로 - 상사화 전성기 때 한번 거닐어보고 싶다.

상사화는 서로를 애타게 생각하는 꽃이란 뜻이다. 잎이 진 후에 꽃이 피고 꽃이 진 후에 잎이
나기 때문에 잎과 꽃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그래서 상사화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
다고 한다. 또한 그럴싸한 전설 한 토막이 덧붙여져 전해오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불갑산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어흥거리던 옛날, 효성이 지극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
의 부모는 금슬 좋기로 이름난 부부였는데,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절에 들어와 100일 동안 탑돌이 불공을 올렸다.
그녀를 본 큰스님 수발승은 마음에 불이 나면서 그만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승려
의 신분이고 수줍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를 표현하지 못하고 몰래 그를 보면서 끙끙 마음을
앓았다. 여인은 그런 것도 모르고 100일 불공을 마치자 미련 없이 속세로 돌아갔고, 승려는
더 이상 그를 못보게 되자 그리움이 더욱 사무쳐 결국 상사병(相思病)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 승려의 사리가 안긴 부도 주변에 잎이 진 후 꽃이 피어났는데, 마치 그 승
려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꽃 이름을 상사화라 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로 그
만큼 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런 슬프고도 혹독한 전설을 붙인 모양이다.


▲  불갑사 가는길 (상사화 군락지 옆)

상사화 군락지를 지나면 석축 위에 오롯하게 자리한 승탑군(부도군)이 마중을 한다. 비석 4기
와 조그만 승탑 6기가 조촐히 승탑군을 이루고 있는데, 승탑들은 고려 말부터 조선, 20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절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34년에 이곳으로 집합시켰다.

이들 승탑은 회명당 처묵(晦明堂 處墨), 청봉당(晴峰堂), 서산(西山), 설두(雪竇), 설제(雪醍
), 각진국사의 승탑으로 이중 각진국사 자운탑은 1355년에 조성된 것이라 전한다. 비석 중에
는 '정3품 통정대부 김상기(金商基) 공덕송비(功德頌碑)'가 있는데, 영광 출신으로 정3품 벼
슬까지 지낸 김상기가 1939년 대웅전과 종루를 세우는데 시주를 하여 그를 기리고자 세웠다.
승탑군을 지나면 담장을 두른 불갑사 경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 여기서 잠시 불갑
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불갑사 승탑(僧塔)군

불갑산(516m) 서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불갑사는 상사화로도 유명하지만 자칭 백제 최
초의 사찰이라는 자부심을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384년, 그 시절 백제는 천하 제일의 해양대국으로 바다를 건너 왜
열도를 비롯해 중원대륙의 산동(山東) 등 대륙의 여러 해안 지역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과시하
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의 위엄을 듣고 동진(東晉)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이다.

마라난타는 바다를 건너 영광 법성포(法聖浦)에 상륙했다고 전하는데, 그곳과 가까운 불갑산
자락에 절을 세우니 백제 최초의 절이자, 첫째 가는 절이라 하여 불갑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
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 (관련 기록도 없고 유물도 없는 실정임)
마라난타 창건설이 신빙성이 떨어지자 따로 내세운 것이 백제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
창건설이다. 이때 행은(幸恩)이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무왕(武王) 시절인 640년에 창건되었다
는 설도 덧붙여 전하고 있다. (불갑산 남쪽 너머에 자리한 함평 용천사는 600년에 행은이 창
건했다고 함) 허나 아쉽게도 이 역시 증거가 부실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창건 이후, 8세기 중반에 행사존자(行思尊者)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행사존자는 마라난타
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아마도 창건 시기를 부풀리면서 나온 실수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신라 후기나 행은이 활동했다고 전하는 7세기(무왕 시절)가 그나마 적당한 창건 시기가 아닐
까 여겨지며, 백제 후기에 살짝 창건되었다가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백제 부흥군과 이를 막으려는 신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파괴된 것을 중건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후기에 각진국사(覺眞國師, 1270~1355)가 머물면서 절을 크게 불리니 전각이 100여 칸,
요사(寮舍) 400칸, 부속 암자가 31개에 이르렀다고 하며, 승려 수는 수백 명을 헤아렸다고 한
다. 또한 누각의 기둥 높이는 90척, 사전(寺田)은 10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그 규모가 가히 대단했다. <각진은 순천 송광사(松廣寺) 16국사의 하나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전일암(錢日庵)을 제외하고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며, 법릉(法
稜)이 전일암을 터전으로 삼아 급한데로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1634년 해릉이 중
창했으나 사세가 점점 어려워져 규모 또한 축소되었다.
1802년 득성(得成)이 중창을 했고, 1869년 설두대사(雪竇大師)가 크게 중창을 벌이면서 그동
안 잃어버린 토지를 많이 회복하였다. 1879년에 중창을 했으며, 1938년 설제가 중수를 했고,
1984년에 다시 중수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만세루, 일광당, 설선당, 명부전, 조사전, 칠성각,
팔상전, 천왕문, 백운당, 향로전 등 20여 동에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왕년에는 부속암자
가 31개나 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일암, 해불암(海佛庵), 불영대(佛影臺), 수도암(修道庵),
무각선원(無覺禪院) 등 5개만 남아 있다. 특히 전일암은 정유재란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
로 법릉이 이곳에 머물며 불갑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왜열도로 끌려가 고생
을 무지했던 강항(姜沆)이 종종 찾아와 참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불복장전적 등 국가 보물 3점과 천연기념
물로 지정된 참식나무 자생북한지, 사천왕상과 대웅전 삼세불회도, 팔상전 영산회상도, 지장
시왕도, 동종(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11호), 고적급위시답병록(전남 지방문화재자료 205호).
만세루 등 지방문화재 여러 점을 지니고 있다. 그 외에 일광당과 명부전, 괘불지주, 팔상전,
각진국사자운탑비, 업경대, 대법고, 승탑군 등 수많은 비지정문화재가 있으며, 수다라 성보박
물관을 경내에 지어 절의 오랜 보물을 담아두었다.

불갑사는 고창 선운사(禪雲寺), 함평 용천사(龍泉寺)와 더불어 상사화(꽃무릇)의 3대 성지로
꼽힌다. 절 주변에 상사화를 가득 심어 8~9월에는 상사화의 향기가 경내를 뒤덮으며, 9월에는
상사화축제가 열려 절의 존재감을 천하에 널리 드러낸다.
영광 지역에서 가장 큰 절이고 영광의 주요 명승지라 답사/나들이 수요가 적지 않으며, 불갑
산이란 명산(名山)까지 끼고 있어 산꾼 수요도 대단하다. 깊은 산골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
)의 내음을 뿜어내고 있으며, 문화유산도 풍부해 고색의 진한 내음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게
다가 상사화와 참식나무 등 진귀한 꽃과 나무도 절을 수식해 자연의 내음까지 덩달아 누릴 수
있다.

기왕 불갑사를 찾는다면 상사화의 향연이 펼쳐지는 8~9월을 추천한다. 물론 다른 때도 상관없
다. 절에서 불갑산 정상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리며, 남쪽에 자리한 모악산(母岳山, 348m)을 넘
어 함평 용천사로 넘어가도 된다.

* 불갑사 소재지 :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8 (불갑산로450 ☎ 061-352-8097)
* 불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불갑사 경내 모형도 (수다라 성보박물관)


 

♠  불갑사의 보물 창고, 수다라(修多羅) 성보박물관

▲  불갑사 금강문(金剛門)

경내 앞에 이르니 맞배지붕 금강문이 마중을 한다. 보통 문 이름이 쓰인 현판을 정면에 내걸
기 마련이나 특이하게 '불갑사' 현판을 앞에 내밀고 금강문 현판을 문 안쪽에 수줍은 듯 걸어
두었다. 문 좌우에는 돌담을 둘러 경내를 가렸으며, 계단을 오르면 금강문의 주인인 금강역사
(金剛力士)가 정면을 바라보며 중생을 검문한다.
문을 들어서 계단을 1단계 더 오르면 정면에 천왕문이 계단을 늘어뜨리고 있고, 왼쪽에는 명
경당(明鏡堂), 오른쪽에는 수다라성보박물관이 손짓을 한다. 박물관의 존재는 전혀 몰랐던 터
라 여기서 잠시 불갑사를 잊고 보랏빛처럼 다가선 성보박물관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  수다라 성보박물관
박물관 앞에는 비석을 잃어버린 연꽃무늬 비좌(碑座)가 누워있다.


21세기 이후 많은 고찰(古刹)들이 성보박물관이란 자체 박물관을 지어 절의 보물을 보관/전시
하고 있다. 불갑사 역시 그 유행에 흔쾌히 합류하여 'ㄱ'자 구조의 성보박물관을 하나 장만해
세상에 내놓았다.
불갑사의 오랜 보물을 머금은 보물 창고로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서 내부를
둘러보면 되며 관람시간은 9시~17시까지다.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없음) 무슨 박물관이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지 사진에 담고 하느라 30분 정도 인적이 없는 박물관 내부를 신나게 누
볐다.

▲  다양한 모습을 지닌 16나한상과 인왕상(仁王像)

석가불3존좌상과 그들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인왕상. 제석(帝釋), 범
천(梵天) 등은 지금은 없어진 나한전(羅漢殿)
에 있었다.
그 나한전이 퇴락하자 그것을 부시고 팔상전으
로 자리를 옮겼으며, 지금은 이렇게 성보박물
관에 안착했다.
이들은 1706년 도인 옥잠의 발원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당시 유명한 화승(畵僧)인 색난과 그의
제자 초변, 영선 등 10명의 화승과 함께 만들
었으며, 석가불3존좌상의 얼굴이 둥글고 넓적
하여 포근한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  16나한을 거느린 석가불3존좌상
(석가불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


▲  팔상전 영산회상도(아랫 그림)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7호

팔상전(八相殿) 후불탱화였던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 석가여래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
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편히 뉘어져 있는데, 1777년 영광 지역에서
유명했던 비현, 복찬, 쾌윤 등 금어(金魚) 3명과 편수 12명이 참여하여 만들었다.


▲  두 눈이 인상적인 대웅전 용마루 보탑(寶塔)

불갑사의 왕년의 위엄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대웅전 용마루 중앙에 무려 용의 얼굴을 지닌 보
탑을 달았다. 현재는 용마루에서 떨어져 나와 성보박물관에 머물고 있는데 익살스럽게 표현된
용머리 위에 기와집 모양의 탑신(塔身)과 4각 지붕을 두었고, 다시 그 위에 둥근 머리 장식을
두었다.
이 보탑은 점토를 구워서 만든 것으로 그 피부에 '甲申 五月','盡○手 陟敏(척민)'이란 명문
이 새겨져 있어 1764년 5월, '척민'이 대웅전을 중수하면서 만든 것임을 귀뜀해 준다. 이렇게
용머리 보탑을 용마루에 둔 것은 대웅전의 위엄을 높이려는 의도로 볼 수 있으며, 지붕에 보
탑 등의 장엄물을 두는 것은 주로 동남아와 중원대륙 남쪽 사원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흔치 않은 유물이다.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8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를 담은 그림이다. 지장보살 좌우와 밑에 도명
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 범천, 제석천, 사천왕을 두고 그 밑부분에 판관
(判官) 등을 배치했으며, 윗쪽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대세지보살,
제화갈라보살 등 보살 6명을 집합시켰다.
보통 지장시왕도에는 다른 보살까지 무더기로 그려진 예는 거의 없는데, 그림의 색채가 밝고
선명하여 그저 어둡고 무서울 것만 같은 저승 식구들에 대한 이미지를 화사하게 비추고 있다. 가늘고 섬세한 필법과 안정적인 화면 구성 등을 보이고 있으며, 밑부분이 조금 헝클어진 것
외에는 건강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이 그림은 1777년에 비현, 복찬, 쾌윤 등 9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그들은 순천 선암사(仙巖
寺)를 중심으로 많은 불화(佛畵)를 남겼다.


▲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6호

삼세불회도(삼세불탱)란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삼세불(석가불, 약사불, 아미타불)을 담
은 그림으로 원래 대웅전에 있었다. 불갑사의 대표적인 불화로 꼽히고 있는 그림으로 1762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며, 비단 바탕에 아주 현란하게 채색되어 꽤 밝은 색채를 보인다.
그림 윗쪽에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춘 석가여래를 비롯해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해 삼세불을 이루었으며, 3세불 좌우와 밑부분에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미륵보살, 지장보살 등 8명의 보살을 배치했다. 그리고 네 모
서리에 사천왕을 하나씩 넣었고, 3세불 윗쪽에 분신불(分身佛) 2명과 10대 제자, 천중(天衆)
2구를 넣어 그림을 고루고루 채웠다.


▲  칠성탱(七星幀)

칠성탱은 1892년에 영광읍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든 탱화이다. 두광과 넓직한 신광
을 두룬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그림 윗쪽에 조그만 동자를, 중간에는 칠여래(七如來), 밑에
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했으며, 색채가 화사하여 선명한 기운을 전해준다.


▲  검은 피부의 조그만 철불좌상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불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 귀여운 동자승을
모델로 한 듯 덩치는 매우 작지만 고졸한 미소만큼은 잃지 않았다.

▲  오래된 법고(法鼓)
법고는 사물(四物)의 하나로 1885년에 통나무로 제작되었다. 원래 대웅전에 있었으며,
길이 85cm, 직경 75cm 규모로 이제 겨우 130살로 한참 북소리를 낼 나이지만
일찌감치 새 법고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  귀여움이 묻어난 6명의 동자상

곱게 색이 입혀진 동자상은 조선 후기에 나무로 제작된 것이다. 당시 불갑사 동자승을 모델로
했는지 하나 같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원래는 명부전 시왕상 옆에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이
들 6개만 남아 성보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몸에 걸친 옷과 손에 든 물건, 얼굴, 머리 스타일, 덩치, 키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각각의 모
습으로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들의 해맑은 표정이 보는 이로 하여금 한 줄기 웃
음을 머금게 한다.


▲  푸른 피부의 목어(木魚)
용머리에 물고기 몸통을 섞은 듯한 모습으로 앞서 법고와 더불어 사물의 일원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은 박물관 유물로 너무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  가마(연) 같은 모습의 불감(佛龕)
불감은 호신불을 휴대하고자 만든 것으로 가로 83cm, 세로 61cm, 높이 88cm이다.
다른 불감과 달리 여닫는 문이 없으며, 연(가마)의 형태를 취한 점이
이채롭다. (조선 후기 유물)

▲  업경대(業鏡臺)

업경대는 사람이 죽어서 저승(명부)에 이르렀을 때 얼마나 착하게 살았나 죄업을 비춰준다는
거울이다. 그 거울을 보면 자신의 나쁜 짓이 모두 비춰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거울 보
기가 좀 겁이 난다.
이들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아주 순한 표정을 지은 사자 암수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자
대좌 위에 업경을 받치는 간주(竿柱)를 세우고, 그 위에 업경과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화염무
늬를 두어 나쁜 짓에 대한 경각심을 주지시켰다. (나쁜 짓을 많이 하면 뜨거운 불구덩이 지옥
으로 간다는 식으로) 대좌까지 완전히 갖춘 업경대로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으며, 불갑사가 내
세우는 휼륭한 보물로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  불갑사를 거쳐갔던 옛 승려들의 진영(眞影)
18세기 후반~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진영(영정) 5점이 남아있다.
(누구의 진영인지는 모르겠음)

▲  조선 후기에 지어진 불연(佛輦)

불연은 불상과 보살상, 영가의 초상화나 위패를 운반하는 가마이다. 보통 절 문 밖까지 연을
메고 나가 대상물을 싣고 다시 절로 가져왔으며, 4명이 가마채를 들거나 끈으로 매어 운반했
다. 불연의 모습이 제왕과 왕족들이 사용하던 가마와 많이 비슷해 그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소통(疏筒)과 가사함(袈裟函)

소통(왼쪽)은 법회나 여러 불교 의식 때 신도들이 소망을 적어서 낭독한 후, 그 종이를 말아
넣어두던 통이다. 가로 23cm, 세로 16cm, 높이 88cm로 조선 후기에 제작되었으며, 통 밑에는
난간을 두룬 수미단(須彌壇) 모양의 대좌를 두어 소통의 품격을 드높였다.

가사함(오른쪽)은 승려의 가사(袈裟)를 보관하던 목함으로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별
도의 가사함을 둔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고 하며, 그 형태가 독특하다. (조선 후기에 제
작됨)


▲  불갑사 불복장전적(佛腹臟典籍) - 보물 1470호

불갑사에는 사천왕상과 석가불3존상 및 16나한상, 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몸 속에서 나온
오래된 서적들, 이른바 복장 전적(典籍)이 매우 많다. 자그마치 193종 259책의 분량으로 불갑
사의 장대한 내력을 더욱 꾸며주는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인데, 이들은 '불갑사 불복장전적'
이란 이름으로 국가 보물 14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상 몸 속에서 나온 것은 판본 33종 46책, 낙장본(落張本) 16종 20책 등, 총 49종 66책
으로 완주 화암사(花巖寺)에서 발행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1441년)','지장보살본원경(1453년
)' 등이 있으며, 임진왜란 이전 판본이 대부분이라 모두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석가불3존상과 16나한상 몸 속에서 나온 것은 76종 84책으로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
(1378년)','선종영가집(1381년)','천노금강경(1387)','묘벙연화경언해(1463년)' 등 고려 후기
와 조선 초기 판본이 많이 나왔다. 이들 역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 뱃속에서 나온 것은 68종 97책이다. 고려 후기 판본인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과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1464)' 등 조선 초기 서적이 대부분이라 모두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  묘법연화경 - 1382년 작

▲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 1382년 작

▲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 - 1464년 작

▲  법집별행녹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
要幷入私記) - 14세기 후반

▲ 지국천왕(持國天王) 탱화

↖  증장천왕(增長天王) 탱화

◀  다문천왕(多聞天王) 탱화


불갑사는 사천왕상을 배려하여 그들의 후불탱
까지 남겼다. 아마도 사천왕의 수호력이 길이
길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그리 한 것
이 아닐까 싶은데, 1904년에 조성하여 천왕문
내부의 사천왕상 뒷쪽에 배치했다. 허나 지금
은 성보박물관으로 탱화를 모두 옮겼으며, 사
천왕상만 천왕문에 남아있다.


 

♠  불갑사 경내 둘러보기

▲  천왕문(天王門)

성보박물관에서 계단 하나를 오르면 천왕문이다. 이 문은 부처와 절을 지키는 사천왕의 보금
자리로 이들 사천왕은 원래 고창 흥덕에 있던 연기사(烟起寺)터에서 가져온 것이다.

때는 1870년 어느 날, 불갑사에 머물던 설두대사 봉기(奉琪)의 꿈에 사천왕이 나타났다. 그들
은 비를 쫄딱 맞은 처량한 모습을 보여주며 지붕 좀 씌워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들을 소수
문해보니 이미 망해버린 고창 연기사터에 버려져 있었다.
그래서 배 4척을 끌고 가서 그들을 데리고 오니 영광 사람들의 환호가 대단했다고 하며 경내
에 사천왕의 집(천왕문)을 지어주자 그들의 가호 덕분인지 여러 번 화재를 모면했다고 한다.
허나 굳이 사천왕의 현몽이 아니더라도 설두는 연기사터 사천왕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
다. 아직 불갑사는 사천왕도 갖추지 못했고, 연기사터 사천왕이 잘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굳이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버려진 그들을 구제도 할 겸, 데리고 와 불갑사의 사천왕으로 삼
은 것이다.
또한 불갑사에서는 이들 사천왕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 뱃속에 오래된 귀중한 서
적(49종 66책)을 복장 유물로 넣어두기도 했고, 1904년에는 사천왕후불탱까지 제작하여 그들
뒷쪽에 걸어두었다. 보통 복장유물은 불상이나 보살상 뱃속에 넣어두기 마련인데 말이다.

▲  천왕문 사천왕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159호

▲  대웅전을 가리고 앉은 만세루(萬歲樓)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166호

천왕문을 지나면 만세루가 정면을 가리며 우뚝 자리해 있다. 그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1층 부분 높이를 낮게 해서 건물 옆구리로 돌아가 법당을 친견토록 했다. 이는
경내를 외부로부터 보이지 않게끔 하려는 조선 후기 사찰의 특징이다.
만세루는 강당(講堂) 및 행사 공간으로 왕년에는 정면 7칸, 기둥 높이는 무려 90척에 이르렀
다고 한다. 90척이면 1척에 23cm로 계산해도 20.7m라는 소리인데, 그만큼 불갑사가 잘나갔다
는 뜻이다. 허나 정유재란 때 파괴되었고, 수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아담하
게 굳어졌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만세루
만세루 현판이 앞이 아닌 뒷쪽에 걸려 있다.
불갑사는 은근 뒷쪽을 좋아하는 듯~~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일광당(一光堂)
1620년에 중건된 건물로 원래 선방이었으나
지금은 승려의 거처로 쓰인다.


▲  설선당 - 거의 'ㅁ' 구조의 건물로 선방(禪房)과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템플스테이 숙소로도 쓰임)

▲  불갑사의 목구멍, 세심정(洗心亭)

산사에는 늘 목을 축여주는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불갑사 역시 불갑산이 베푼 옥계수를 끌어
와 샘터(약수터)를 갖추었는데, 샘터 위에 기와 지붕을 얹히고 마음을 씻는다는 뜻에 '세심정
'이라 이름 지었다. 샘터를 뜻하는 정(井) 대신 정(亭)을 칭한 점이 이채로운데, 네모난 석조
에는 불갑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늘 물이 가득해 가뭄에도 별 끄떡이 없다고 한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갈증으로 활활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 작업을 하
니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속이 시원해진다. 그렇게 2~3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발이
떼어졌다. 물 맛이 괜찮은 것을 보니 불갑사의 인심도 그런데로 괜찮은 모양이다.

▲  갈증을 씻겨주는 세심정 샘터

▲  무량수전(無量壽殿)
아미타불의 거처로 근래에 지어졌다.


▲  무량수전 옆구리에 자리한 5층석탑

불갑사의 유일한 석탑이지만 대웅전 앞에 두지 않고 경내 외곽인 무량수전 옆에 마치 숨바꼭
질 하듯 숨겨두었다. 그의 모습이 백제(百濟) 탑의 상징인 부여 정림사(定林寺)터 5층석탑을
닮았는데, 옛 백제 땅의 중심인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백제 멸망 이후, 정림사 탑을 닮은 석탑
이 많이 등장했다.
지금도 정림사 탑의 후예는 계속 지어지고 있으니 아직도 백제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모
양이다. 하긴 백제는 정말 그리워할 가치가 있는 나라이다. 식민 사관 쓰레기들과 잘못된 역
사 지식을 가진 작자들에 의해 형편없이 왜곡되고 저평가되서 그렇지, 천하 제일의 해양 대국
으로 왜열도를 비롯한 동북아를 호령했었고 700년 동안 꾸려온 찬란한 문화와 유물을 후세에
넘겼던 팔방미인의 나라였다. (반면 조선과 왜정은 정말로 잊고 싶음)


▲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 등 저승(명부) 식구들의 보금자리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대웅전 바로 좌측에 있었으나 1936년 승려 만암이 지금 자리로
약간 후퇴시켰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 좌우에는 1654년에 조성된 시왕상이 자리해
있는데,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들이 꽤 느긋해 보인다. 그들 모두 시왕이라는 같은 간판을 달
고 있지만 다른 옷과 얼굴, 포즈를 지니고 있어 각자 개성이 넘치며, 시왕상과 지장보살3존상
뱃속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서적 68종 97책이 쏟아져 나와 성보박물관에 담아두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

▲  칠성각(七星閣, 왼쪽)과 팔상전(八相殿, 오른쪽)

대웅전 뒷쪽에는 조사전(祖師殿)과 칠성각, 팔상전이 쌍둥이꼴 모습으로 나란히 자리를 지키
고 있다.
조사전은 불갑사를 거쳐간 주요 승려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오래 숙성된 진영은 모두
성보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칠성각은 칠성 식구를 담은 칠성탱을 중심으로 산신(山神) 식
구가 담긴 산신탱, 독성(獨聖) 식구들이 담긴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팔상전은 1822년에
중건된 것으로 석가여래와 16나한, 1702년에 그려진 팔상도(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8개의 그림
)가 봉안되어 있다. 특히 팔상전 석가불과 16나한 뱃속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서적 76
종 84책이 쏟아져 나와 불갑사의 고색의 품질을 더욱 끌어올려주었다.


 

♠  불갑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830호

▲  불갑사의 중심, 대웅전

서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18세기 이전
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기와에서 '건륭(乾隆) 29년'이란 글씨가 발견되어 1764년에 수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9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지붕 용마루에는 도깨비 얼굴의 보주를 얹혔는데, 현재 성보박물관에 있는 용마루 보탑이 바
로 이곳에서 위엄을 뽐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를 촘촘히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으로 건물
가운데 칸 좌우 기둥 위에 용머리 조각을 두었으며, 문짝에는 연꽃과 국화 무늬 꽃창살을 달
아놓아 꽃창살의 상징인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웅전의 흑백 꽃창살과 자웅을 겨룬다. 그리고
건물 내부 모서리 공포 부분에도 용머리를 두었고 천정은 우물 천정으로 학과 까치가 그려진
벽화가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찰 건축물로 건물은 비록 작지만 안과 밖이 화려하기 그지 없으며, 시
대적인 특성과 용마루에 보탑 등의 장식을 다는 등,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독특한 개
성을 보여준 점이 참작되어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

▲  법당 수호용으로 걸어둔 신중탱


▲  대웅전의 낮고도 아름다운 하늘, 우물천정

▲  학과 잠자는 까치, 나무 등이 그려진 벽화

대웅전 내부에는 여러 벽화가 전하고 있다. 너무 불교 일색으로 도배하기가 뭐했는지 선비들
과 절의 주요 고객인 여자 신도들이 좋아할만한 것을 그려놓았는데, 마치 수묵담채화를 벽에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 하다.
이들 그림은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어느 화승(畵僧)이 그림 작업을 하면서 절대로 훔쳐
보지 말 것을 당부하며 문을 걸어잠궜다. 하지만 사람이란 궁금하면 오금이 저리는 법, 어느
성미 급한 승려가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러자 화승은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하며, 그 피
가 까치가 되어 날라갔다고 한다.
이런 비슷한 전설을 가진 절이 강진 무위사(無爲寺), 부안 내소사(來蘇寺), 무주 안국사(安國
寺) 등에 전하는데, 그림을 그린 승려가 모두 파랑새로 변해 사라진데 반해 여기서는 죽어서
까치가 되어 사라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워낙 잘 그려진 그림이라 절에서 그럴싸한 전설을 덧
붙여 그림 수식용으로 삼은 것이다.


▲  출입문에서 바라본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과 닫집

▲  가까이서 본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377호

대웅전 불단에는 쌍둥이처럼 생긴 목조석가여래삼불이 대좌(臺座)를 갖추며 앉아있다. 건물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반하여, 삼불과 불단은 남쪽을 향하고 있어 서로 따로 노는 모습이다.
이런 유형은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과 대전 고산사(高山寺) 등이 있는데, 고려~조선
불교 건축물에서는 거의 흔치 않은 구조로 주목을 끈다. 허나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건물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가 1869년 지금처럼 방향을 틀었다고 전하며,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다.

이들 삼세불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불과 아미타불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심 불상인 석가불
이 단연 덩치가 크다. 좌우 협시불은 석가불의 ¾ 정도 크기로 다들 듬직하게 생긴 신체에 무
릎도 넓어 안정되어 보인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 있고, 얼굴은 살이
좀 붙어있어 네모난 모습이며, 작은 입에는 나름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
져 있고, 눈은 살며시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귀는 중생의 민원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
깨까지 축 늘어졌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몸에 걸친 옷은 양쪽 어깨를 덮고 가슴 윗쪽을
드러내고 있다. 옷주름은 다리 위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항마촉지
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석가불만 다른 수인을 취함)

이들은 1635년 무염(無染)을 비롯한 승일, 도우, 성수 등 10명의 화승이 만든 것으로 불상 뱃
속에서 관련 조성기가 나와 조성 시기와 만든 사람을 고맙게도 밝혀주고 있다. 무염은 호남과
충청도, 강원도에서 활약한 승려로 이들 3세불이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다. 그래서
무염의 작품과 경향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어주어 보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만약 조성기가 없었다면 아직도 지방문화재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조성기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가 있냐 없냐에 따라서 몸값과 등급이 크게 달라진다.


▲  현란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의 하늘
(우물천정, 공포, 용머리 장식, 불상 그림과 연꽃무늬 등)

▲  장대한 세월 앞에 형편없이 쪼그라든
각진국사자운탑비(覺眞國師 紫雲塔碑)


대웅전 옆에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제대로 털린 비석이 하나 있다. 그는 불갑사를 크
게 일으킨 각진국사의 행장(行狀)이 적힌 자운탑비로 그의 명성의 반비례로 비석 상태는 참
우울하기 그지 없다. 귀부(龜趺)의 용머리는 절반 이상 날라간 상태이고, 발가락 또한 죄다
뜯겨져 나갔으며, 행장이 적혔을 빗돌은 죄다 날라가 겨우 일부만 남았다.
불갑사가 절의 큰 은인이나 다름이 없는 그의 탑비를 일부러 푸대접할리는 없을터, 그만큼 불
갑사의 인생이 파란만장했음을 이 비석이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각진국사 복구(復丘, 1270~1355)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10살에 천영(天英)에게 출가를 했다. 천영이 죽자, 도영(道英)의 제자가 되었으며, 21살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충주 정토사(淨
土寺), 강진 월남사(月南寺)에 머물렀다. 1320년 조계사 13세 사주(社主)가 되어 선풍을 날렸
으며, 장성 백양사(白羊寺)를 크게 중창하고, 말년에는 불갑사에 머물며 절을 크게 불렀다.
1350년과 1352년 왕사(王師)에 임명되었고,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각엄존자(覺儼尊者)라는
호를 받았으며, 1355년 입적하자 각진국사(覺眞國師)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기렸다.


▲  불갑사 참식나무 자생북한지대 - 천연기념물 112호

불갑사 남쪽 산자락에는 참식나무 자생지가 있다. 녹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와 왜열
도, 중원대륙, 대만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곳 자생지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 땅에서 가
장 북쪽 자생지(自生地)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마음편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최북단이 이
곳이다.

참식나무 자생지 안내문은 경내 바로 뒷쪽(남쪽)에 있지만 그들의 보금자리는 한참을 더 올라
가야 나온다. 나는 시간을 이유로 거기까진 가지 않았는데, 이 나무에도 믿거나 말거나 전설
이 하나 전해온다. 아마도 인도 승려 마라난타 창건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불갑사에서 지었을
것이다.

백제 때 불갑사 승려인 정운이 머나먼 인도로 유학길을 떠났다. 거기서 불교 공부를 하던 중,
인도 공주와 친해져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를 안 인도왕이 이래서는 안된다면서
승려를 추방시켰다. 정운과 강제 이별을 하게 된 공주는 너무 슬퍼하며 두 사람이 늘 만나던
곳에 자라던 나무의 열매를 따서 일종의 사랑의 증표로 주었고, 승려는 그것을 가져와 불갑사
뒷쪽에 심으니 그것이 자라서 참식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  그림 같은 호수 불갑사제

불갑사에서 3분 정도 오르면 불갑산 계곡물을 모아서 만든 불갑사제가 나온다. 절 바로 윗쪽
으로 불갑산이 베푼 계곡이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끝없는 대장정을 준비한다. 장차
다가올 늦가을의 향연을 준비하는 나무들과 알을 품은 어미새처럼 푸근하기 그지없는 불갑산
산줄기는 호수 수면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들이 없고,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묻힌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불갑사제 호수 산책로

▲  녹음이 짙은 불갑산 산길 (불갑산 정상 방면)

호수 주변 숲에도 상사화가 넓게 자리를 닦고 있었다. 허나 이곳 역시 검게 떡이 된 상태. 정
상인 상사화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 상사화 구경은 완전 틀렸구나~~! 가는 날이 완전 문
닫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  불갑산 산길 (불갑사제 주변)
해불암입구 갈림길까지만 조금 올라갔다가 불갑사로 쿨하게 철수했다.

▲  불갑사 관광지에 자리한 연지(蓮池)와 정자

기분 같아서는 해불암과 불갑산 정상, 그리고 함평 용천사까지 싹 인연을 짓고 싶지만, 시간
도 넉넉치 못하고 오늘 너무 무리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아서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
로 쿨하게 넘겼다. (용천사는 나중에 인연을 지었음)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한 언젠가 또 인연을 짓지 않겠는가? 게다가 상사화라는 아름다운 무
기도 있으니 10년 안에 꼭 찾아오리라 다짐을 하고 나의 제자리로 발길을 돌렸다.

이렇게 하여 영광 불갑사 나들이는 다소 아쉬움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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