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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3.22 김포공항을 굽어보는 강서구의 대표 지붕,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둘레길, 개화산자락길, 개화산 봉수대, 미타사석불입상, 신선바위>
  2. 2024.01.14 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 용마산~아차산~망우산 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용마산1보루, 용마산5보루, 망우산1보루>
  3. 2023.10.23 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1바퀴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 흔들바위>
  4. 2023.10.15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서울 도심의 싱그러운 공간,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늦가을 나들이 <북악스카이웨이>
  5. 2023.09.23 동작구의 지붕을 거닐다. 상도동 사자암~국사봉~동작충효길6코스 동작마루길 <상도근린공원, 성현드림숲공원>
  6. 2023.09.12 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서울 변두리의 이색 뒷동산, 구파발 이말산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최효원묘역, 은평둘레길3코스, 약수사>
  7. 2023.05.26 금천구의 상큼한 뒷동산, 호암산 봄나들이 <호암산성, 석구상, 제2한우물, 신랑각시바위, 한우물, 불영암>
  8. 2023.05.17 화순 만연산, 만연산 오감연결길, 만연사 늦가을 나들이 <만연폭포, 큰재, 만연저수지>
  9. 2023.03.17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 봄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4보루, 3보루, 2보루, 1보루>
  10. 2023.03.05 서울의 상큼한 남쪽 지붕, 삼성산~호암산~목골산 <관악산호수공원, 성주암, 서울둘레길5코스, 독산자락길>

김포공항을 굽어보는 강서구의 대표 지붕,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둘레길, 개화산자락길, 개화산 봉수대, 미타사석불입상, 신선바위>

강서구 개화산(약사사, 개화산둘레길, 미타사)



'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나들이 '


▲  개화산둘레길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 숲길)

▲  약사사 석불입상

▲  미타사 석불입상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5월의 첫 무렵, 강서구(江西區)의 대표 지붕인 개화산(開花山)을
찾았다.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지만 나는 서울의 동북쪽 끝인 도봉산 그늘에 있고 개화산
은 서울의 서쪽 끝으머리인 개화동과 방화동에 있다. 서로 끝과 끝에 있어서 거리도 거
의 40km, 지하철로 가도 족히 1시간 반 이상이 걸려 그곳에 이르기 전에 거의 떡실신할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개화산을 비롯한 강서/양천 지역은 많이 가지 않는 편이다.

개화산은 즐겨찾기급 명소는 아니지만 매년 1번 정도는 가는 편이다. 자고로 좋은 곳은
1번이 아닌 두고두고 찾는 법, 이번 나들이는 방화역(5호선)에서 시작하여 약사사와 개
화산전망대, 개화산둘레길(강서둘레길1코스), 미타사, 하늘길전망대를 거쳐 방화근린공
원에서 끝을 맺었다.



 

♠  개화산 약사사(藥師寺)

▲  약사사로 인도하는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개화동(開花洞)과 방화동(傍花洞)에 걸쳐있는 뫼로 거의 평지로 이루
어진 강서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은 작고 야트막하지만 평지 속에 솟아있는 존재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일품이며,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무성하여 풍경도 아름답다. 산 동북쪽에
는 꿩고개라 불리는 치현산(雉峴山)이 이어져 있고, 북쪽에는 한강과 5호선 방화차량기지, 서
쪽은 김포평야(金浦平野), 남쪽에는 방화동과 김포국제공항이 있다.

개화산의 첫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어느 시절에 주룡(駐龍)이란 도인(
道人)이 살고 있었는데, 매년 9월 9일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
다. 이것을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 9월 9일마다 주룡산에서 술을 마심)'이라 불렀는데 그가
죽자 9월 9일마다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는 그가 죽은 자리
에서 꽃이 피어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우니 그곳이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이며, 개
화사가 있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으로 이름이 갈렸다고 전한다. 또한 주룡 설화 외에도 산 모
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는 뜻의 개화산(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산이 코끼리, 개화산과 마주보고 있는 한강 북쪽 행주산
(幸州山, 덕양산)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주고 서울에
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이라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겉모습은 작지만 속은 아주 알찬 개화산에는 많은 명소가 안겨져 있는데, 늙은 석탑과
석불을 간직한 약사사를 비롯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미타사 석불입상, 호국충혼위령비,
방화근린공원, 신선바위, 능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봉수대, 상사마을 은행나무 등이 있으며,
약수터도 많이 있었으나 그 수가 계속 줄어 이곳의 제일 가는 물이었던 약사사 약수터가 2013
년 봄에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또한 산 허리에는 강서둘레길1코스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 3.35km)이 닦여져 있는데, 조
망이 괜찮은 곳에 전망대(개화산, 아라뱃길, 신선바위)가 설치되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다만 군부대가 정상과 북쪽 자락에 있어 정상에는 발을 들일 수 없다.


▲  약사사 방면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

▲  약사사를 알리는 표석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로 들어서 약사사로 가다 보면 길 중간과 약사사 표석 전에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豊山沈氏 文靖公派 墓域,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7호)이 간만에 보고 가라
며 손짓을 보낸다. 허나 이번에는 그들에게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아서 오직 정면에 보이는 먹
이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고양이처럼 바로 약사사로 넘어갔다.

약사사 표석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봉화정과 개화산전망대로 이
어지고, 오른쪽은 약사사와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데 봉화정과 강서둘레길1코스 서쪽 구간
이 목적이라면 왼쪽 길로 가면 되고, 약사사를 거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약사사 경내

약사사 표석에서 2분 정도 들어가면 개화산의 오랜 상징인 약사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개화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이 절은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으나 앞서 언급했던 주룡선생과 관련
된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신라 때 개화산을 주름잡던 주룡이 세상을 떠나자 매년 9월 9일마다 그가 술을 마셨던 곳에서
이상한 꽃이 피었는데,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개화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설화와
1827년에 송숙옥(宋淑玉)이 쓴 '개화산약사암중건기',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를 통해
신라 때 창건된 것이라 내세우고는 있으나 신빙성이 있는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개화산약사암중건기'와 '양천읍지'는 약사사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다만
경내에 고려 때 석탑과 석불이 전하고 있어 적어도 고려 초/중기부터 법등을 켠 것으로 여겨
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는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에 개화사로 나와 예전 이름이 개화사였음을 알려준다.
절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37년 좌의정(左議政) 송인명(
宋寅明, 1689~1746)이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송씨 가문의 원찰(願刹)로 삼았는데, 그는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으나 개화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해 과거에 붙었다.
이후 재상에 오르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개화사의 덕이라며 절을 중수하고 절 밑에 불량답
(佛糧畓)을 보시했다. 또한 영조(英祖) 시절 그와 가깝게 지냈던 이병연(李秉淵)이 개화사와
송인명과의 끈끈한 사이를 '사천시초(槎川詩抄)'란 시로 표현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 가양동에 있었음)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조선 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이병연
의 시를 보고 개화사를 찾아가 그림을 남겼는데, 그는 1740년부터 5년 동안 양천현감(현령)으
로 있으면서 개화사와 소악루를 비롯한 양천의 명승지를 아낌없이 화폭에 담아 당시의 정취를
아련히 알려주고 있다.

1799년 송인명의 후손인 송백옥(宋伯玉)이 절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남겼으며 1827년 절이 퇴
락하자 처사 창선(昌善)과 청신녀(淸信女) 경자(京子)가 돈을 모아 기존 절터에서 몇 걸음 떨
어진 곳에 새롭게 자리를 파 절을 옮겼고 석불입상을 약사불로 삼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藥
師庵)으로 갈았다. <이후 약수사(藥水寺), 약사사 등으로 변경됨>

1911년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의 되었고, 1928년 주지 박원표(朴元杓)가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허나 6.25 때 개화산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그나마 세운 건물이 모두 무너졌으며
가건물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1984년 이후 대웅전과 감로당, 삼성각을 지어 지금에 이
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감로당, 삼성각, 범종각, 공양간 등 5~6동 정
도의 건물이 있으며, 크게 지어진 감로당은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주며, 석불
은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기도 수요가 제법 많다. 허나 경내에서 이들 외에는 고색의 향기는
전혀 없다.
또한 경내 밑에는 개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던 약수터가 있었는데 그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
다고 하여 중생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약수터 때문에 절의 이름이 한때 약수사가 된 적도 있
을 정도.. 허나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부적합 판정으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끝내 부
적합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3년 봄에 완전 폐쇄되고 말았다. 석불과 더불어 절의 든든한 양대
밥줄이자 아주 착했던 약수터의 퇴장은 개화산과 절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고, 이제는 추억
이나 사진에서나 끄집어 봐야 되는 흐릿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약사사는 숲에 둘러싸여 있어 산사의 향기도 그런데로 진하며, 절이 아담
하여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다. 또한 방화역에서 절까지 길이 잘 닦여있고 도보
20분 정도로 접근성도 괜찮으며, 차량으로 경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절을 둘러보고 개화산
봉화정과 강서구의 야심작인 강서둘레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을 곁드린다면 아주 영양가
만점의 나들이가 될 것이다.

* 약사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332-2 (금낭화로17길261 ☎ 02-2662-2551)
* 약사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있음)

절 정문을 들어서면 약사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3층석탑과 대웅전이 시
선을 주고 있으며, 왼쪽에 약사사 안내문과 매점, 범종각이, 오른쪽에는 주차장과 해우소, 감
로당이 자리한다.

▲  범종각(梵鍾閣)
1976년에 조성된 범종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전(佛殿)이긴 하
지만 겉모습은 거의 요사(寮舍)나 여염집 같은 분위기로 가운데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
조이다.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탱과 산신탱은 1960
년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그림이다. (삼성각 바로 옆에 공양간이 있음)


▲  감로당(甘露堂)

3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삼성각을 바라보고 선 감로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요사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甘露堂','開
花山 藥師寺' 현판은 승려 석정(石鼎)의 필체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
기에 좋으며, 벽면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혜능(慧能) 이야기, 백락천과 도림선사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다.


▲  약사사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호

대웅전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약사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창건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보물로 탑 높이는 4m이다. 땅에 바닥돌을
깔고 1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으며, 머리 장식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없어진 것을 근래에 새로 붙여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랫 부분과 전혀 다른 피부색을 보인다.

탑은 길쭉하고 홀쭉한 모습으로 기단이 1층으로 간략화 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의 밑면 받침
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어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로 서울에는 오래된 석탑이 많이 있지만 정작 토박이 옛 탑은 몇 되지
않는다. 토박이 고려 탑은 낙성대(落星垈) 3층석탑과 홍제동(弘濟洞) 5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에 있음), 그리고 이곳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왜정(倭政) 이후에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상경
한 것들이다.

▲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3층석탑
마치 하늘이 움푹 낮아진 듯, 자욱하게 낀 오색 연등이 탑의 머리와 하늘을
앗아가 버렸다. (이때가 석가탄신일 며칠 후였음)

▲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1988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을 청기와로 수를 놓아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내며 절의 왜소함을
능히 커버한다.


▲  대웅전의 붉은 닫집과 불단을 장식하는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 불단에는 1기의 석불과 7기의 불상/보살상이 있다. 그 뒤에는 조
그만 금동불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거의 3천불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금동(金
銅) 일색인 곳에 홀로 빛바랜 돌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의 큰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가 3층석탑 다음으로 경내에서 늙
은 존재로 이곳의 든든한 밥줄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석불, 나머지 금동불은 그를 위한 조
연이 된다.
비록 겉은 초라해 보일 지 몰라도 그의 가치는 그들보다 한참이나 높다. 다른 불상은 제쳐두
더라도 3층석탑과 그는 꼭 봐야만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석불 앞에는 아주 조그만 금동석가여래상이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앉아있고, 좌우
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그 옆에는 큼직한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 중생을
굽어본다. 금동불은 모두 1995년 이후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들이다.


▲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호

많은 후배급 불상/보살상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불입상은 머리에 쓴 돌갓 밑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해 고려 후기,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의 든든한 밥줄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에 일장미륵(一丈彌勒)으로 등장한다.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으나 가슴 앞에 댄 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세음보살로 여
겨지기도 하며, 불상의 투박한 모습을 통해 고려와 조선 때 온갖 모습으로 조성된 미륵불(彌
勒佛)의 일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그를 약사불(藥師佛)로 삼으면서 절 이
름을 약사암으로 갈았으며, 현재도 영험한 약사불로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 석불은 현재 위치 바로 옆에 있었던 건물에 있었는데, 밑도리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
다가 1974년 그 건물을 부시고 대웅전을 조성하면서 불상 밑에 기단석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
했다.
불상의 얼굴은 길고 넓적한데, 표정은 썩 별로이다. 경직된 인상에 두 눈은 너무 크기 때문이
다. 코는 세모로 오똑하나, 코 끝은 크게 닳아진 상태이고, 입은 그 모양만 확인이 가능하다.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의 고충을 듣기에는 별 지장은 없어 보이며, 머리에는
둥근 돌갓을 쓰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미륵불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가 얼굴에 비해 작고, 옷도 옷주름 몇 가닥이 표현된 것이 전부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꽃을 든 불상의 이미지를 주며, 밑도리는 바로 앞에 있는 금동석
가여래상과 불단에 가려져 확인이 어렵다.
썩 괜찮은 작품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존재로 소망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해 많
은 이들이 찾아와 소망과 고충을 털어놓는다. 약사사가 지금에 이른 것도 거의 그의 공이다.


▲  약사사 돌담길
약사사를 둘러보고 돌담길을 통해 개화산전망대로 이동했다.


 

♠  개화산전망대와 개화산둘레길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에서 느긋한 산길을 5~6분 오르면 개화산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전망대

개화산 북쪽 능선에 개화산전망대가 조촐히 터를 닦았다. 2011년 5월 근교산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한강과 방화대교를 비롯하여 난지도, 은평/서대문/마포구, 남산, 북
한산(삼각산), 가양동 지역이 두 눈에 바라보여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가성비가 높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①

겸재 정선은 1740년부터 5년 동안 천하에서 제일 작은 고을인 양천현(陽川縣)의 현령(縣令)을
지내면서 양천(서울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김포시 고촌읍)의 주요 명소를 그림으로 남겼
다. 이들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에 실려있어 무척이나 많
이 변해버린 양천 지역과 한강(염창동~행주산성 구간)의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있다.

개화사(약사사)는 벗인 이병연의 소개로 찾았다가 그곳 경관에 감탄하여 그림으로 남긴 것이
다. 하나는 한강에서 바라본 시점,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
다.
낙건정(樂建亭)은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별서(別墅,
별장)인 낙건정을 그린 것으로 한강 북쪽 덕양산(德陽山, 행주산) 자락에 있었다. 그리고 행
호관어(杏湖觀漁)는 행호<杏湖, 행주산 주변 한강> 주변을 담은 것으로 지금이야 그저 그런
곳이지만 그때는 양반, 귀족들의 별서/유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②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소악루(小岳樓)는 양천
고을의 중심지였던 가양동의 뒷산, 궁산(宮山) 동쪽에 있었는데, 왼쪽 하단에 소악루를 두고
탑산과 두미암, 선유봉, 와우산, 잠두봉(蠶頭峰) 등의 경강(京江) 서쪽 명소를 담았다. (현재
소악루는 궁산에 재현되어 있음)

금성평사(錦城平沙)는 양천(가양동)에서 바라본 난지도(蘭芝島)를 담은 것이다. 서울의 쓰레
기장이 되기 전에는 홍제천과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너른 저지대로 한강의 폭이
넓어져 경치가 꽤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쓰레기를 딛고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이란 거
대한 자연공원으로 거듭났다. 허나 그래봐야 순수 자연산이던 예전만은 못하다.

목멱조돈(木覓朝暾)은 목멱산(남산)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 모습을 담은 것으로 양천에서 바라
본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다. 남산 앞에는 만리동고개, 애오개(아현동), 노고산(老姑山) 등이
그려져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방화대교와 난지도, 고양시 화전 지역, 서울 서북부를 비롯해 멀리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개화산전망대 주변 너른 공터와 헬기장
공터 주변에 널린 군사시설은 군사 훈련 및 예비군 훈련지로 활용되고 있다.

▲  재현된 개화산 봉수대(烽燧臺)

조선은 총 5개의 봉수 노선<거로(炬路)라고 함>을 운영했다. 개화산봉수대는 전남 순천(順天)
에서 시작되어 서울 남산 제5봉수대에서 끝을 맺는 5번째 거로로 김포 북성산(北城山) 봉수대
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 제5봉수대로 넘겼다.

개화산봉수대는 개화산 정상에 있었다. 이곳 외에도 동북쪽 꿩고개산(치현산) 정상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를 개화산 제2봉수대라 부른다. 이들 봉수대는 1950년대까지 있었으나 6.25
전쟁 시절, 군부대가 정상 주변에 주둔하면서 싹 밀어버리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자리만 겨
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기와조각과 백자 파편, 도기 파편 등이 여럿 수습되었으며 1994년
11월에 개화산 봉수대터에 표석을 세웠다.

개화산은 한자만 달리하여 개화산(開火山)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봉수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행주산성(幸州山城), 양천고성(陽川古城, 가양동)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시절에 행주산성을 지원하던 역할을 했던 것으
로 보인다. 6.25때도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고 지금까지 군부대가 쭉 주둔하면서 그 역사를 계
속 이어간다.

강서구청에서 개화산 봉수대를 복원하고자 이
미 복원된 남산 봉수대와 안산(鞍山) 봉수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를 참조하여 2013년 11
월 재현을 했는데 원래 자리에 군부대가 들어
앉은 관계로 부득이 북쪽으로 250m 떨어진 봉
화정 맞은 편에 세웠다.
높이 2m, 둘레 4m 규모의 봉수대 2개를 지었는
데 옛날처럼 불을 피울 일도 없고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이라 딱히 볼품은 없다.

▲  봉수대 맞은편에 자리한 봉화정(烽火亭)


▲  봉화정에서 개화산숲길로 들어서다 (강서둘레길1코스)

도보길이 천하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강서구에서도 야심작을 내놓았다. 바로 강서둘레길이다.
산과 숲, 한강, 철새도래지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둘레길로 총 3코스가 있는데, 1코스는 개화
산숲길로 개화산을 1바퀴 도는 3.35km의 산길이다. 개화산 둘레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오르
락내리락이 다소 반복될 뿐, 딱히 힘든 구간은 없으며 가볍게 걸으면 60~70분 정도면 충분하
다. 중간에 여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조망의 기품을 누릴 수 있으며,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과 약사사 등의 늙은 문화유산도 만날 수 있다.
개화산숲길 외에도 '개화산자락길'도 별도로 준비되어 있다. (방원중학교~금낭화로17길~약사
사 표석~개화산전망대/하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


▲  나무데크로 이루어진 개화산숲길 (아라뱃길전망대 부근)

▲  아라뱃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라뱃길과 김포시(金浦市) 고촌읍 지역

서쪽을 향하고 있는 아라뱃길전망대는 이름 그대로 아라뱃길이나 바라보라고 만든 곳이다. 아
라뱃길은 서해바다와 한강을 잇는 운하로 2009년에 착공하여 2011년 완성을 보았는데, 여객선
과 유람선, 화물선을 서울까지 들어오게 해야 물류비용도 절감되고 관광객이 늘어난다는 바람
직하지 못한 개소리를 늘어뜨리며 억지로 만들었으나 그 기대치에 1%도 안되는 놀라운(?) 실
적을 보이며 서울과 인천의 아주 저주스러운 애물단지가 되었다.


▲  신선바위 윗쪽에서 바라본 천하
비행기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김포국제공항을 비롯해 김포평야와 부천 북부,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눈에 들어온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신선바위

개화산은 흙산이라 신선바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바위가 거의 없다. 서쪽을 향해 누워있는
이 바위는 개화산 산신(山神)이 호랑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위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산신이 과연 이곳을 거쳐갔는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다. 신선
도 결국 인간이 만든 가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이곳은 개화산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이를 두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천하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여 신선바위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호국충혼위령비(호국충혼비)와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

신선바위를 지나면 미타사로 내려가는 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 둘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 손
에 이끌려 3분 정도 내려가면 곱게 단장된 푸른 잔디밭 위에 서 있는 호국충혼위령비(이하 충
혼비)가 나타나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 충혼비는 천하에 매우 흔한 6.25 관련 기념물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한다. 6.25가 터지
자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6.25 이전에는 남한 영역이었음)을 지키던 1사단은 북한군을 감당
하지 못하고 김포를 거쳐 김포공항 부근까지 후퇴했다.
개화산에 진을 치고 김포비행장을 지키고자 장비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며 싸웠으나 설상가
상으로 탄약과 식량보급까지 끊겼다. 결국 북한군의 대량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1사단 12연
대 3대대 대대장 김무중 소령과 12연대,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해 1,100여 명이 전사하
고 말았다.
이후 호국(護國)의 신이 된 그들의 넋을 기리고자 미타사에서 1993년 12월에 충혼비를 세웠으
며, 매년 6월에 지역 주민들과 군부대 장병이 위령제를 지낸다. (11월 가을걷이 이후에도 지
낸다고 함) 바로 이 충혼비 밑이 미타사이다.



 

♠  서울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절집, 개화산 미타사(彌陀寺)

김포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 서쪽 자락에 살짝 둥지를 튼 미타사는 조그만 절이다. 서울
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절로 예전에는 약사사와 함께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내세우기도
했으나 경내에 있는 석불이 고려 말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계점과 삼국시대 창건설을 입
증할 존재가 전혀 없어 이제는 쏙 들어갔다.
또한 19세기에 '김대공'이란 사람이 석불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집안의 원
찰(願刹)로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역시나 구전에 불과하다.
그나마 확실한 것은 1924년 창건설로 절 밑에 있는 내촌마을 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집
을 지어줄 것을 청하므로 그해 4월 8일 미륵당(彌勒堂)을 세웠다는 것이다. 하여 그 이전에는
애당초 절이 없었고, 미륵불로 숭상을 받던 석불만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후 미륵당이 미타사로 발전했으나 6.25전쟁으로 모두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이후 자리
를 조금 달리하여 절을 재건했다. 1970년 승려 한지일(韓智壹)이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제자리를 떠났던 지장보살입상을 1993년에 다시 가져와 새 법당에 봉안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절 뒷쪽에 호국충혼위령비를 세워 6.25때 개화산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린다.
경내에는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과 2기의 노천 석불, 그리고 5층석탑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있다.

절이 조촐하고 숲에 둘러싸여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선사하며, 시내와 가깝지만 적당히 거리
를 두고 있다. 김포공항을 수시로 드나드는 비거(飛車)들의 소음을 빼면 정말 고즈넉한 곳으
로 개화산숲길과도 가까워 개화산 나들이 때 이곳을 곁드리며 숲길을 1바퀴 돌면 나름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미타사란 이름을 지닌 오래된 절이 3곳 있음, 보문동 미타사(☞ 관련글 보
), 옥수동 미타사(☞ 관련글 보기), 그리고 이곳 개화동 미타사>

* 미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산81-24 (개화동로13길 56-33 ☎ 02-2662-4736)

▲  따사로운 봄볕을 즐기고 있는
여염집 스타일의 미타사 법당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서쪽을 굽어보는 석불좌상


전형적인 불전(佛殿) 스타일과 거리가 좀 있어 보이는 미타사 법당은 1970년대에 중건된 것이
다. 불단에는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석가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93년에 마련된 것으로 왜정 때 석고로 조성된 지장보살입
상도 있다. (그는 친견하지 못했음)
그 보살상은 경내에서 석불입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로 참으로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
는 원래 옛 법당에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절이 파괴되자 실종되었다. 이후 인근 군부대 장교
가 부대 우물에서 불에 그을린 채 망가진 그를 수습하여 군부대에서 가지고 있다가 경주의 어
느 사찰로 넘어간 것을 1993년에 다시 찾아와 봉안했으니 무려 40년 이상 타향살이의 고통을
겪은 것이다. 아마도 6.25시절에 개화산을 점거한 북한군이 불상에 화풀이를 하며 우물에 버
린 것으로 여겨진다.


▲  미타사에서 바라본 천하
김포국제공항과 김포평야,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돌탑과 날렵한 몸매의 5층석탑(왼쪽 탑)
석불입상 뒤쪽에 경내의 유일한 석탑인 5층석탑이 있다. 그는 198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의 단골 신도인 석물 판매업자가 1995년에 기증했는데,
그로 인해 힘들지 않게 탑을 소유하게 되었다.

▲  미타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9호

이 석불은 미타사에서 미륵불로 받들고 있는 존재로 고려 후기,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모습은 다른데서는 보기 힘든 이형적(異形的)인 모습으로 밑도리에는
세월의 고된 때가 자욱한 반면, 그 윗쪽 몸통의 3/4 이상은 완전 하얀 피부라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다. 그가 서 있는 대좌(臺座)만 근래 것이지 석
불 자체는 순수 오래된 불상이다.

미타사가 있기 전부터 이곳을 지켰던 노천 석불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여
러 번 땅속에 들어갔다가 빛을 보기를 반복했다. 1924년 내촌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서 그를
위한 집이 지어졌으니 그것이 미타사의 시초로 여겨지며 요사 자리에 미륵당이란 조그만 건물
을 지어 봉안했으나 근래에 요사를 새로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때 대좌를 새로
만들어 넣었고, 예전의 헌 대좌는 석불 윗쪽에 있는 바위 밑에 있다.

석불의 모습은 개화산 동쪽 약사사의 석불좌상과 좀 비슷하다. 그는 고려 말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머리에 동그란 갓돌을 쓰고 있고, 얼굴 표정은 좀 일그러져 있다. 아마도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서 그리 된 모양이다. 얼굴은 거의 동그란 모습이며, 눈과 눈썹, 입은 선으로
처리했고, 코는 매우 오똑하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은 긴 편으로 삼도(三道)는 보이질 않으며, 몸통은 매우 길쭉하다.
두 손은 가슴 앞에 서로 교차되게 모으고 있는데, 그만의 특이한 수인(手印)으로 손가락이 꽤
두껍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을 하고 있으며, 다리와 발 등의 밑도리는 옷에 가려져
생략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로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몸통이 길며, 특이한 신체 표현과 밑도리를
생략하는 센스, 갓돌 모양의 보관(寶冠) 등에서 고려시대 큰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오랜 세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음에도 피부가 하얗고 건강도 양호하며, 약사사 석불과 함께
서울에 몇 없는 고려 말 석불이란 점이 인정되어 2008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옆에서 바라본 석불입상과 그 주변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국제공항

미타사를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개화산둘레길(개화산숲길)로 다시 진입하여 남쪽으로 조
금 가니 '하늘길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서울의 하늘길을 책임지고 있는 김포국제공항이 아주 잘 바라보이는 곳이라 그런 이름
을 지니게 되었는데, 정말로 공항 내부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공항뿐 아니라 주변 김포평
야와 인천 동북부(계양구), 부천 지역이 덩달아 두 눈으로 달려오며 국내선과 국제선 비행기
가 5분이 멀다 하고 공항을 들락거려 김포공항의 위엄을 보여준다.


▲  솔내음이 그윽한 개화산둘레길 서쪽 구간

▲  짙은 숲속을 가르는 개화산둘레길 서쪽 구간

▲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하늘길전망대를 지나 무장애숲길 남쪽 기점에서 개화산자락길로 갈아탔다. 자락길 서쪽 구간
은 하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까지로 이중 개화산둘레길과 겹치지 않는 북까페 주변 숲
길이 무장애숲길로 이루어져 있어 천하에서 가장 편한 둘레길로 칭송 받는 안산(鞍山) 자락길
못지 않은 편안함과 느긋함을 보여준다.
이런 나무데크길은 통행편의도 있지만 인간의 발길로부터 나무와 흙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
다. 그러다 보니 나무의 피해를 최소화하여 길을 닦았고 부득이 길 복판에 자리하게 된 경우
는 그냥 그 자리에 둔 채로 길을 내었다. 물론 나무가 숨을 쉴 수 있게끔 공간을 내어 그를
배려했으며, 개화산둘레길 나무데크길도 같은 방법으로 길을 내었다.


▲  시원하게 뻗은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개화산자락길 무장애숲길을 모두 거닐고 약사사 표석에서 다시 개화산둘레길(개화산 숲길)로
갈아타 방화근린공원으로 내려갔다. 이때 시간은 거의 19시, 햇님도 슬슬 퇴근 준비를 서두르
고 있고 나 역시 피곤한 상태라 여기서 출사를 마치고 쿨하게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개화산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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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 용마산~아차산~망우산 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용마산1보루, 용마산5보루, 망우산1보루>

용마산~망우산 나들이


'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 용마산~망우산 나들이 '
용마산1보루와 서울시내
▲  용마산1보루 봉우리와 서울 시내
 



 

용마산은 아차산(峨嵯山, 295m)의 일원으로 한강에서 중랑구 북쪽까지 이어진 아차산 산
줄기의 중간을 맡고 있다. (북쪽은 망우산이 맡고 있음)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용마봉(龍馬峰), 장군봉(將軍峯)이라 불리기도 하며, 봉우리가 커서 대봉(大峰
)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광진구와 중랑구(中浪區), 그리고 중랑구와 구리시(九里市)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
울 동부와 동북부, 동남부 지역과 구리, 남양주, 하남 지역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전략
적 요충지로 고구려(고구리)와 신라(新羅)가 보루를 주렁주렁 달며 애지중지 했다. 또한
아차산에서 시작된 아차산장성(長城)이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까지 이어지는데, 군데군데
장성의 흔적이 아련히 남아있다.

용마산에는 아기와 용마의 짧막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급 아이가
태어나면 이유 불문하고 그 가족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
럴까?) 그 시절 이곳에서 장사급 아기가 태어났는데, 집안 몰살을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
를 죽였다. 그러자 용마봉에서 아기가 타고 다닐 용마(龍馬)가 나타나 다른 곳으로 갔다
고 하며 (또는 죽었다고도 함) 그 연유로 용마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며,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어 무인(武人)을 차별했던 고려 중기나 조선 때 빚어진 전설이 아닐까 싶
다. 또한 용마산과 아차산 서쪽 자락에는 조선 왕실에서 운영하던 살곶이 말목장이 있었
는데, 용마급 말이 많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또는 용마가 나왔다고 해서;) 용마
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러니 후자가 맞을 것이다.

용마산은 아차산과 더불어 나의 진심 어린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지금까지 200번 넘게
그의 품을 찾았다. 그렇게 오지게 안겼음에도 질리기는커녕 매년 꾸준히 나의 마음을 비
추고 있는데, 늦가을이 깊어가던 11월 첫 무렵에 용마산의 여러 보루를 복습하고자 다시
발걸음을 했다.


▲  긴고랑공원



 

♠  용마산1보루와 2보루(堡壘)

▲  용마산 남쪽 능선길

이번 용마산 나들이는 중곡4동 긴고랑에서 시작했다. 긴고랑은 아차산과 용마산 사이에 자리
한 골짜기로 골이 길어서 긴골, 진골이라 불리다가 긴고랑으로 이름이 갈렸는데, 아차산과 용
마산이 베푼 물이 긴고랑계곡을 이루며 중랑천과 한강으로 흘러간다.
아차산 일원(아차~용마~망우산)에서 가장 크고 상태도 좋은 계곡으로 물도 많고 바위와 너른
반석이 즐비하며, 풍경도 괜찮아서 도심 속 피서의 성지(聖地)이자 쉼터로 바쁘게 살고 있다.
(계곡 상류~중류에 괜찮은 곳이 많음)

계곡 하류에 닦여진 긴고랑공원 서쪽에 용마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남쪽 능선길이 있다. 바로
그 길로 가야 용마산1/2보루를 만날 수 있는데, 간만에 긴고랑에 왔지만 마음은 이미 보루에
가 올라가 있어 바로 능선길로 들어섰다.
용마산 남쪽 능선길은 시작부터 속세살이만큼이나 각박한 경사가 펼쳐져 숨을 제대로 가쁘게
만든다. 흥분한 경사를 순화시키고자 계단길을 적지 않게 깔았으나 그래도 힘든 것은 마찬가
지이다. 이런 길은 그저 자존심을 곱게 접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좋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
오르면 경사가 조금씩 순해지며 닿지 않을 것 같던 용마산1보루터가 활짝 마중을 나온다.


▲  용마산 남쪽 능선(용마산1보루 남쪽)에서 바라본 아차산의
부드러운 산줄기

▲  용마산 남쪽 능선(용마산1보루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광진구 중곡동과 중랑구 남부 지역을 비롯해 동대문구와 성북구,
멀리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용마산1보루터 남쪽 외곽

▲  용마산1보루터 - 사적 455호

용마산1보루는 용마산 남쪽 능선 183m 봉우리에 살짝 깃들여져 있다. 용마산 보루 중 가장 남
쪽으로 돌로 다진 석축 부분은 거의 노출되어 있지 않으나 30~40cm 정도의 할석이 곳곳에 튀
어나와 햇살을 받고 있다. 비교적 평탄한 석축 안쪽에는 흙이 쌓여있는데, 그 남쪽 부분 퇴적
토(堆積土)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가 다진 보루임을 강하게 어필한다.

1보루의 규모는 직경 5m, 길이 16m 정도로 파악되고 있으며, 조그만 군사시설이나 초소로 한
강과 중랑천에서 용마산 정상, 아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다. 하여 바로 위에 있는 2/3보루
를 보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루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흔적 일부가 수풀과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뒤
늦게 발견되어 대륙을 꿈꾸는 우리로 하여금 고구려를 다시 기억하게 해준다.


▲  자연의 일부로 녹아든 용마산1보루

이 보루가 용마산1보루, 즉 넘버원 보루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것은 없다. 물론 고구려가 만
든 그 자체로도 아주 특별한 존재이나 이곳이 1보루가 된 것은 용마산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보루이기 때문이다. 6개의 보루가 나온 아차산도 발견된 순서대로 1보루~6보루로 매겼고, 망
우산도 그렇다. (망우산은 3보루까지 확인됨)

현재 용마산에는 보루터 7곳이 있으나 그게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아직까지 숨바꼭질을 하
고 있는 보루터가 더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차산과 망우산도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이곳을 비롯한 용마산 보루 7형제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용마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밑에 긴고랑과 중곡동, 구의동(九宜洞)을 비롯해 송파구, 강동구,
강남 지역, 남한산, 대모산 산줄기가 두 눈에 들어온다.

▲  용마산1보루~2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세상을 향해 고개를 쳐든 정면 봉우리에 용마산1보루가 있다. 그 너머로
광진구, 성동구, 송파구, 강남구, 우면산, 관악산 등이 두 망막에
잡힌다.

▲  용마산2보루 남쪽 오르막길

▲  용마산2보루터 - 사적 455호

용마산1보루에서 북쪽으로 250m 정도 떨어진 해발 225~230m 능선에 용마산2보루터가 있다. 면
적 약 379㎡, 둘레 약 60~79m, 폭 8m로 1보루보다 훨씬 덩치가 큰데, 윗 부분이 평탄하게 닦
여졌고 그 주위로 석축이 둘러져 있다. 보루 동쪽 중간 경사진 곳에 무덤 1기가 있고 무덤 옆
에는 소토층이 노출되어 있는데, 거기서 흑갈색과 황갈색 피부의 고구려 토기편이 여럿 발견
되어 고구려가 다졌음을 살짝 귀띔해 준다.

이곳은 한강과 중랑천에서 용마산 정상, 아차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밑으로 1보루를 관리하고
위로는 3보루를 보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1보루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우수하
며 여기서 천하를 굽어봤을 2보루의 모습에 대해서는 딱히 정답은 없으나 강화도에 널려있는
조그만 돈대(墩臺)를 생각하면 될 듯 싶다.


▲  용마산2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왼쪽은 아차산이고, 아차산과 용마산 사이로 움푹 들어간 곳이 긴고랑이다.

▲  용마산2보루 북쪽에서 바라본 천하
용마산 서쪽 능선과 중랑구, 동대문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등

▲  용마산 명품소나무 제1호

용마산2보루에서 남쪽 능선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서울 시내를 굽어보는 용마산전망대에 이른
다. 그 전망대 남쪽에 좌우로 넉넉하게 퍼진 소나무가 있는데, 그가 용마산 명품소나무 1호이
다.
광진구(廣津區)는 용마산 능선부에서 잘생긴 소나무를 선별해 2009년에 명품소나무의 지위를
주었는데, 처진소나무처럼 좌우로 넉넉하게 퍼져 상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용마산전망대

천하를 향해 고개를 쳐든 용마산전망대는 용마산 정상 서남쪽에 닦여져 있다. 서/남/북이 확
트인 곳에 자리해 있어 용마산 구역에서 가장 조망 맛이 좋은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
가 높은 서울 시내가 저 밑에 납작하게 펼쳐져 마치 천하가 내 것처럼 즐거운 기분이 모락모
락 피어오른다. 산을 오르는 재미가 바로 이런 맛 때문이지.

여기서는 서울 동부와 동북부(도봉구, 강북구), 동남부(송파구, 강동구), 강남권(강남구, 서
초구), 서울 도심부(중구, 종로구), 도봉산, 북한산(삼각산), 북악산(백악산), 남산, 관악산,
대모산, 남한산, 한강 등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특히 야경(夜景) 맛이 좋다.


▲  용마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두껍게 다가오는 아차산 산줄기 너머로 강동구와 송파구, 강남구, 성남시,
남한산, 대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용마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긴고랑과 용마산1보루, 광진구, 성동구, 송파구, 강남구, 관악산 등

▲  용마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중랑구와 동대문구, 성북구, 강북구, 서울 도심부,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등



 

♠  용마산3보루, 4보루, 망우산

▲  용마산 정상(348m)

용마산 정상은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남쪽과 동쪽, 서쪽은 조금 가파르고 북
쪽은 약간 완만하다. 아차산 주능선과 망우산, 긴고랑에서 접근했을 때는 정상 동남쪽 체육시
설에서 계단길로 정상으로 올라가면 되며, 용마폭포공원 주변에서 올랐을 때는 북쪽 계단길을
통해 정상으로 들어서게 된다.
바위로 이루어진 용마산 정상부에는 정상 인증 모델로 인기가 높은 살짝 둥근 얼굴의 용마산
표석과 삼각점(三角點, 대삼각본점). 태극기가 펄럭이는 게양대가 있으며, 인공이 가해진 듯
한 돌들의 무리가 정상부와 정상 남쪽 경사면, 정상 북쪽 곳곳에서 눈에 띄는데, 그들은 용마
산3보루의 흔적들이다.

이곳 보루는 정상부에 씌워진 것으로 3보루터 흔적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얼핏 보면 봉우리
전체가 인공으로 다진 언덕처럼 보이나 봉우리는 순수 자연산이 맞다. 정상부에 헬기장(지금
은 없음)을 닦으면서 보루 상당수가 파괴되고 헝클어졌는데, 평탄하게 깎여진 부분과 산길 주
변에서 흑회색과 황갈색, 홍갈색 피부의 토기를 중심으로 다량의 토기 파편들이 햇살을 보았
다.
이들은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라 고구려가 다진 보루임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데, 신라가 만
들었다는 의견도 있어 고구려가 먼저 3보루를 닦고 신라가 수리해서 쓴 것으로 여겨진다. 그
리고 옛 헬기장 서쪽 부분에 적갈색의 소토층이 있다.

* 용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7동, 광진구 중곡4동


▲  정상 인증 모델로 인기가 높은 용마산 정상 표석의 위엄
평일 오후라 한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주말과 휴일, 평일 저녁에는
정상 인증을 하려는 사람들로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용마산 동쪽 능선(용마산 정상~아차산 주능선)에서 바라본
아차산 산줄기 ①

▲  용마산 동쪽 능선(용마산 정상~아차산 주능선)에서 바라본
아차산 산줄기 ②


▲  용마산 동쪽 능선길(용마산 정상~아차산 주능선)

용마산 정상과 아차산 주능선을 이어주는 용마산 동쪽 능선길은 쑥 내려갔다가 바위가 펼쳐진
중간에서 다시 올라갔다가 서서히 내려가는 구조이다. 오르락 내리락을 2번을 해서 그렇지 대
체로 완만한 능선길로 남쪽으로 아차산 주능선과 광진구, 송파구, 한강 등이 바라보이며, 북
쪽으로 중랑구와 망우산 등이 늘 시야에 따라붙어 두 눈을 즐겁게 한다.


▲  용마산4보루터 - 사적 455호

용마산 정상에서 동쪽 능선을 가다 보면 아차산 주능선을 만나기 직전에 'H'마크가 새겨진 헬
기장이 있다. 바로 그곳에 고구려가 심은 조그만 점 용마산4보루가 살짝 깃들여져 있다.

용마산4보루는 용마산3보루와 아차산 주능선 보루를 연결하는 곳으로 보루 둘레는 약 228m이
다. 동쪽 무덤 주변에서 회흑색 연질토기와 대형 항아리 조각, 대상파수편이 나왔고, 북서쪽
에서는 철제 화살촉 1개가 발견되었는데, 보루터 동쪽 지상에서는 석축 구조물이 일부 노출되
어 있으며, 동쪽과 서쪽 중간 지점 저지대는 집수(集水)시설로 여겨진다.
1994년에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했을 때는 동쪽과 서쪽을 별개 보루로 여겼으나, 2003년에 서울
시에서 다시 조사를 벌여 하나의 보루임을 확인했다. 아직 전체적인 발굴조사는 받지 못했으
나 하루 속히 주변을 뒤집어 이곳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 보따리가 싹 풀렸으면 좋겠다.


▲  동쪽에서 바라본 용마산4보루터

▲  아차산~망우산 주능선길 (용마산 동북쪽 능선)

용마산4보루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아차산~망우산 주능선과 만난다. 이 능선은 아차산생태
공원에서 아차산성, 아차산 정상, 아차산4보루, 용마산5보루을 거쳐 망우산으로 이어지는 능
선길로 대자연이 내린 서울의 거대한 동쪽 벽이다.
아차산과 용마산 일부 구간에서 조금 각박한 경사를 보이나 거의 완만한 편이며, 동/서/남/북
으로 일품 조망이 펼쳐져 환상적인 지붕길을 보여준다. 또한 천하 둘레길의 성지로 추앙을 받
는 서울둘레길2코스(용마~아차산 코스)도 이 주능선의 신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간다.


▲  용마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망우산 주능선으로 들어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헬기장이 나오면서 용마산5보루터를 알
리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용마산5보루는 아차~망우산 주능선 해발 316m 고지에 자리해 있다. 아차~용마~망우산 보루 식
구 중 용마산3보루 다음으로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성벽 둘레 약 132m. 내부 면적은 약 936㎡
정도로 파악되고 있는데, 보루 북동쪽 비탈면에 성벽으로 여겨지는 석축 일부가 약간 드러나
있을 뿐, 대자연에 제대로 녹아들어 흔적은 희미하다.
보루 북쪽에서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회흑색 연질토기)가 깨진 채로 출토되었고, 물미
로 추정되는 철제품도 발견되어 고구려가 닦은 보루임이 분명해졌다. 석축과 상층부에 보루
건물터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아차산3보루와 4보루처럼 헬기장이 닦이면서 상당수가 파괴되
었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하여 고구려 보루임을 확인했고, 2000년에 서울대박물관에서 조사
를 했으며, 2003년 서울시에서 측량 조사를 했다. 허나 이곳도 완전한 발굴 조사를 받지 않은
상태라 언젠가 이 일대를 싹 뒤집고 조사를 해야 될 것이다.

이곳은 동/서가 뻥 뚫려있는 곳으로 서쪽으로 중랑천과 서울 동부, 동북부 지역이, 동쪽으로
는 한강과 구리시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그러니 여기에 보루를 닦아
아차산과 용마산에서 망우산, 봉화산, 수락산을 잇는 요충지로 사용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이
처럼 아차~용마~망우산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은 것은 오랜 라이벌이자 숙적인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고 한강 유역을 수비하고자 함이다.
이후 신라가 서울 지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가 다진 보루 일부를 손질해 요새로 삼았고 신라
말 이후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면서 보루들이 모두 버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 용마산5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산1-2


▲  아차산~망우산 주능선길 (용마산 동북쪽 능선길)

▲  아차산~망우산 주능선(용마산 동북쪽 능선길)에서 바라본
한강과 구리시, 강동구, 하남시 지역


용마산5보루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하염없이 펼쳐진다. 나무로 다져진 나무데크길이 잘 닦여져
있으나 경사가 좀 각박하고 계단이 많아 이곳으로 오를 경우 숨이 제대로 찰 것이다.
그 산길을 쑥 내려가면 용마산 북쪽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면목동 사
가정공원, 동쪽으로 가면 구리시 아치울마을과 시루봉, 북쪽 산길을 오르면 망우산이다. 여기
서 바로 내려갈까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망우산을 조금 복습하
기로 했다.


▲  망우산(忘憂山)

아차산과 용마산 북쪽에 넓게 솟은 망우산(忘憂山, 281m)은 아차산 식구의 일원으로 그 유명
한 망우리공동묘지를 품고 있다. 현재는 묘지란 이름 대신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세탁되었는
데, 고구려가 심은 보루 유적 3곳이 발견되어 망우산1보루와 2보루, 3보루란 이름으로 살아가
고 있다. 허나 1보루만 간신히 남아있으며, 나머지는 완전 중환자 이상의 상태이다. 그래서 1
보루만 아차산일대 보루군 식구로 들어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어둠에 잠긴 망우산1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 북쪽 갈림길에서 10분 정도를 오르면 망우산 남쪽 봉우리(해발 280.3m)에 깃든 망우산
1보루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1994년 지표 조사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 보루로 여겨지며, 보루로 밝
혀지기 훨씬 이전부터 헬기장과 군부대 시설, 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철저히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가 근래에 헬기장과 참호를 없애고 보루가 있던 자리를 정리하여 보루터 티를 조금이나
마 내게 했다.
안내문이 없다면 그냥 지나쳐도 용서가 될 정도로 보루터 흔적은 딱히 없으며, 여기서 더 북
쪽으로 향하면 2보루와 3보루가 나오는데, 마음 같아서는 그곳까지 가고 싶었으나 아직 여유
가 있을 것 같던 땅꺼미가 그새 짙어지면서 그곳을 향한 내 마음을 완전히 접고 철수했다. 산
은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는 것이 상책이다. (아차산과 용마산은 야간 등산으로 많이 올랐지
만 정작 망우산은 야간 경험이 없음)

이렇게 하여 용마산, 망우산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망우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3,8동


▲  망우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와 일몰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산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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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1바퀴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 흔들바위>

서울 안산 (안산자락길, 무악동봉수대)



' 서울 도심의 서쪽 뒷동산, 안산 '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안산 남쪽 자락

▲  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안산 남쪽 자락

안산 잣나무숲길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길

▲  안산 잣나무숲길

▲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길

 



 

봄을 몰아낸 여름 제국(帝國)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6월의 끝 무렵, 서울 도심의 서
쪽 뒷동산인 안산(鞍山)을 찾았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 깃든 봉원사(奉元寺, ☞ 관련글 보기)에서 길을 시작하여 15분 정도
숲길을 오르니 무악정이란 2층 정자가 마중을 나온다. 무악정은 근래에 지어진 8각형 정
자로 여기서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내려가면 홍제1동과 연희동(延禧洞)
으로 이어지며, 동쪽 길을 10여 분 오르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이다. 그럼 여기
서 잠시 안산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녹음에 잠긴 안산 숲길 (봉원사에서 무악정으로 오르는 길)



 

♠  안산의 지붕, 무악산 동봉수대(毋岳山 東烽燧臺)

▲  정상 입구에 자리한 무악정(毋岳亭)

서울 도심 서쪽에 누워있는 안산은 해발 295.9m의 조촐한 산이다. 대륙을 향해 뻗어가는 의주
로(義州路)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338m)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홍제천(弘濟川)을 사이에 두고 백련산(白蓮山)과 이어진다.
산의 영역은 남쪽으로 천연동(天然洞)과 북아현동(北阿峴洞), 북쪽은 홍제동과 연희동, 동쪽
은 의주로, 서쪽은 서대문구청 뒷쪽과 연세대에 이르며, 남북으로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3km
내외이다.

안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습이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싣고자 걸치는 길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된 것으로 길마재라고도 부른다. <안(鞍)은 안장을 뜻함> 모래내, 추모련, 무악산이란 이
름도 지니고 있으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서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안산에 대한
속세의 관심이 지대했다는 뜻이다.
서울의 남주작(南朱雀)인 남산(南山, 목멱산)보다는 조금 높으나 인왕산과 서울의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보다는 조금 낮으며, 이들 산과 비슷하게 덩치도 고만고만해
아무리 산행을 길게 잡아도 2시간 내외면 충분하다. 또한 바위와 벼랑이 많은 동쪽 정상부를
제외하면 산세가 완만하고 산길이 잘 닦여져 있어 누구든 부담 없이 안길 수 있으며, 조망도
일품이고 수맥도 풍부하여 20여 개의 약수터가 나그네의 목마름을 어루만진다.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인왕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서북쪽으로 둘러싼 형태로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주요 요충지이다. 하여 산을 둘러싼 다툼도 여럿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1623년에 일어났던 이괄(李适)의 난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의 주역이던 이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
으켜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
祖)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충청도 공주(公州)로 급하게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인조의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쳤는데,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
췄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사람들이 대체로 하얀 옷을 즐겨입다
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면서 도성을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까지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이때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후금(後金)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청태종(淸太
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래서 그 푸닥거리로 일
어난 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청나라군이 안산과 무악재의 눈치를 보며 서울로 진격
했고, 1950년 9월에는 인천(仁川)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고자 북한군과 격전
을 벌였다.

안산의 품으로 들어서려면 서대문구청이나 홍제천 인공폭포(연희숲속쉼터). 봉원사, 천연동,
독립문파크빌, 무악재역, 홍제1동, 한성과학고 등지에서 접근하면 된다. 또한 서대문구청에서
안산자락길이라 불리는 둘레길(7km)을 야심차게 닦아놓았는데,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
행길 10선'에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격하게 칭송을 받고 있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 지역의 주요 고찰(古刹)이자 영산재(靈山齋)의 성지(聖地)인 봉원
사가 있고, 산 동쪽 정상에는 무악산 동봉수대가 있으며, 연희숲속쉼터와 안산자락길, 메타세
콰이어숲길, 잣나무숲길 등의 명소가 준비되어 있어 지루할 틈이 거의 없다.


▲  안산 동쪽 정상 밑에 자리한 헬기장
(서쪽 정상과 동쪽 정상 사이)

▲  안산 동쪽 정상에 씌워진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지방기념물 13호

하늘과 맞닿은 안산의 지붕에는 2개의 봉우리가 봉긋 솟아있다. 이중 서쪽 봉우리가 안산 정
상으로 안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그곳에는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이 100% 통제되어 있다. 하
여 자유로운 공간인 동쪽 봉우리(동쪽 정상)가 실질적인 정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 서쪽 봉우
리보다 약간 낮을 뿐, 높이는 거의 비슷하며 바로 그 봉우리에 무악산 동봉수대(문화재청 지
정 명칭은 '무악산 동봉수대터')가 천하를 굽어보며 요새처럼 자리해 있다.

봉수대는 불을 피워 연기와 불빛을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서울로 빠르게 전달하던 것으로 주
로 산 정상에 자리를 닦았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 봉수대의 역할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고 그 봉수대를 이용한 봉수체제가 그나마 제일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비와 눈이 내려 연기가 여의치 못할 때는 봉수지기가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조선시대 봉수제(烽燧制)는 1438년에 확립되었는데, 그때 무악산(안산) 정상에 봉수대가 만들
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악산은 안산의 다른 이름으로 안산과 인왕산 경계에 자리한 무악재에
서 비롯됨)
지금은 동봉수대 1개 밖에 없지만 원래는 2개로 동,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봉수대는 조선의
제3봉수로(烽燧路)의 경유지로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시작하여 황해도(黃海道)와 파주, 고양
해포나루, 무악산 동봉수대를 거쳐 남산 훈도방(남산 목멱산 봉수대)에서 그 끝을 맺는다. 이
노선은 직봉 78곳,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그리고 서봉수대는 제4봉수로의 경유지로 황해도에
서 시작하여 경기도 해안을 따라 고양시 고봉, 무악산 서봉수대를 거쳐 남산 명래방으로 연결
되며, 직봉 71처,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이들 봉수대는 1894년 이후 봉수제가 폐지되면서 귀신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며, 그 터만 아
련히 남아 전하던 것을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동쪽 정상에 있던
동봉수대만 복원되었다. 허나 서쪽 정상에 있던 서봉수대터는 군부대가 있는 관계로 복원되지
못했다.

비록 동봉수대가 복원되긴 했으나 주위가 문화유산과 어울리지 않고 추락사고의 위험이 있다
는 문제점이 2008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하여 그때부터 2011년까지 서울시 문화재위원들
이 현장실사와 고증을 통해 화강석 성곽으로 재현하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봉수대를 부시고 2
단의 석축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봉수대를 얹혔다.
허나 이번에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이 떨어진다고 민원이 들어와 지금의 모습으로 어
색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모습이 아닌 그저 사람들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변질을
시킨 꼴이다. 굳이 좋게 포장한다면 융통성이 있고 시대에 맞게 재현된 것이 되겠지.
그러다보니 봉수대를 받치고 있는 석축과 불을 피우던 봉수대, 봉수대 주변 테두리의 돌 피부
가 확연히 차이가 나서 어색하기 그지 없다. 봉수대 석축을 이루는 돌은 고색의 기운이 약간
돌지만 봉수대와 테두리에 쓰인 돌은 하얀 피부로 파리가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맨질맨질하다.


▲  천하를 굽어보며 왕년의 향수를 달래는 봉수대
연기를 모락모락 풍기며 불빛을 날리던 왕년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안산 정상을 수식하는 장식용이자 전망대 그 이상도 아니게 되었다.

    ◀  때깔이 고운 하얀 피부의 봉수대
봉수대 가운데에 있는 네모난 창을 통해 불과
연기를 피웠는데, 그 연기는 봉수대 꼭대기를
통해 하늘로 솟구쳤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동봉수대

▲  새롭게 둘러진 봉수대 테두리

봉수대를 모자처럼 눌러쓴 안산 동쪽 정상, 그 동쪽은 바위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고,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다소 각박해 봉수대 복원 이후 추락사고의 위험이 늘 제기되었다. 하여 2011년
이후 봉수대를 새로 갈면서 주변에 하얀 피부의 테두리를 성곽처럼 두른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봉수대 모습을 다소 잃게 되었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무악재
그날따라 안개가 말썽이라 시야는 다소 흐릿했다. 이렇게 보면 인왕산이
좀 낮아보일 수 있지만 저곳이 이곳보다 무려 40m 이상 높다.
그래도 서울을 지키는 당당한 우백호가 아니던가~~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①
홍제동과 홍은동, 녹번동,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서남부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②
바로 밑으로 옛 서대문형무소를 간직한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부와 남산이 바라보인다. 안개만 아니었다면
시야가 더욱 나래를 펼쳤을 것인데 하늘의 심술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③
안산 남쪽 자락과 서울 도심부, 아현동 지역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④
안산 남쪽 자락과 봉원사, 신촌, 서대문구 지역


안산 정상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아주 휼륭하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장
안을 발 아래 두며 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뫼에 오르는 이유의 큰 하나는 바로 이런 조망
맛을 누리고자 함으로 이때만큼은 제왕도, 옥황상제도, 청와대 주인도 부럽지가 않다.
정상에서 보이는 범위는 가까이로 인왕산과 무악재, 독립문, 서울 도심부, 홍제동, 신촌, 북
한산(삼각산), 북악산(백악산)을 비롯해 멀리 서울 동부, 불암산, 아차산, 여의도, 서울 서남
부, 동작구, 강남구, 관악산과 호암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래서 왜 이곳에 봉수대를 세우고 이괄의 난(1623년)과
6.25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군사적인 요충지로 절찬리에 쓰이고 있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 무악산 동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안산에 녹아들다 (잣나무숲, 메타세콰이어숲길)

▲  가파른 벼랑을 이루고 있는 안산 북쪽 자락

안산 동쪽 정상에서 시원스러운 산바람과 조망을 누리며 20분 정도 머물렀다. 비록 하늘의 비
협조로 시야는 썩 좋지 못했으나 마치 학의 등에 올라탄 개미처럼 흐릿한 천하를 굽어보니 기
분은 즐겁다.
이곳은 예전에도 가끔씩 찾았던 곳이고 땅꺼미가 자욱한 저녁에도 침침한 두 망막을 무릅쓰고
올라가 도심 야경을 즐기며 일행들과 곡차(穀茶) 1잔 걸치기도 하였다. 지금도 1년에 서너 번
정도 찾으며 안산에 대한 나의 변치 않는 마음을 비춘다.

동쪽 정상에서 다시 무악정 방면으로 내려가면 헬기장이 있다. 여기서 길은 3갈래로 갈리는데
, 서쪽은 무악정으로, 남쪽은 안산 남쪽 능선, 그리고 북쪽은 홍제동으로 이어진다. 그중 북
쪽 길은 아직 미답(未踏)의 상태라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북쪽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각박한 경사로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바로 동쪽이 무악재와 접한 벼랑이라 각별한 주의
가 필요하다. (길 중간중간에 바위들이 있음)


▲  안산 정상 북쪽 밑에 자리한 안천약수터 주변

정상 헬기장에서 북쪽 길을 6~7분 정도 내려 가면 안천약수터가 모습을 비춘다. 안산에서 가
장 높은 곳에 자리한 약수터로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으니 물맛도 좀 특별할 것이라 여겨지
나 내가 갔을 때는 여름 가뭄으로 물은 완전히 말라버렸고, 여러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이 검
출되어 '음용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은 상태였다.
하긴 이곳만의 일이랴. 안산을 비롯해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의 많은 약수터도 비슷
한 곤란을 겪고 있어 서울 도심에서 깨끗한 자연산 물을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줄고 있다.
그만큼 서울의 건강이 나쁘게 변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샘터 주변에는 간단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이 닦여져 있으며, 동쪽에는 주름진 바위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다.

▲  깔끔하게 정비된 보람도 없이 부적합
판정을 받은 안천약수터

▲  샘터 동쪽에는 주름진 바위와 간단한
운동시설이 모여있다.


▲  안천약수터에서 바라본 무악재와 인왕산

▲  안산 북쪽 자락 숲길
인적도 없는 호젓한 산길을 혼자 거닐으니 마치 아비규환의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해탈감이라고나 할까?
비록 잠시뿐이지만..


▲  안산 메타세콰이어 북쪽 숲 직전 숲길

안천약수터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안산자락길과 홍
제동으로 바로 이어지고, 왼쪽(서쪽)으로 가면 메타세콰이어숲이 싱그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안산에는 북쪽 자락과 서쪽 자락(숲속무대 주변)에 메타세콰이어숲을 닦았는데, 이들은 안산
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아름다운 얼굴이다. 북쪽 숲은 서쪽 숲에 비해 덩치가 매우 작아
정말 순식간에 숲길이 끝나 조금은 섭섭하다. 허나 늘씬하게 솟아나 하늘을 찌르는 모습이 시
원시원하니 그것이 발음도 어려운 외래종 메타세콰이어의 매력이라 하겠다. 안산자락길은 북
쪽 숲 밑을 지나가며 서쪽 숲 한복판을 가로질러 안산을 1바퀴 휘감는다.


▲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숲길
군살 없이 쭉쭉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하늘을 가리며 우수한 그늘을 베푼다.


▲  한낮에도 거의 어두운 메타세콰이어숲의 위엄
해가 긴 여름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낮의 길이를 감소시킨다.

▲  북쪽 메타세콰이어숲에서 잣나무숲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숲길

▲  드디어 이른 안산자락길 (잣나무숲길)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에서 서쪽 산길을 고집하면 무장애길로 이루어진 안산자락길이 마중을
한다.
안산 허리를 따라 이어진 안산자락길은 이 땅에 흔한 둘레길의 하나로 '둘레길' 대신 '자락
길'을 칭하고 있는 점이 이채로운데, 총 길이는 7km로 2010년 10월부터 3단계 과정을 거쳐
2013년 12월 완성을 보았다.
총 사업비는 48억(서울시 지원 33억, 서대문구 15억)으로 노약자와 장애인, 휠체어나 유모차
의 편의를 위하여 전 구간을 무장애자락길(나무데크길, 마사토 포장길)로 싹 닦았다. 그래서
2016년 4월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의 하나로 꼽
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널리 칭송을 받기도 했다.
허나 너무 편리를 강조하다 보니 산길의 진미인 흙길이 거의 없는 것이 단점이다. 하여 흙길
을 원한다면 다른 산길을 이용하거나 자락길 안쪽에 닦여진 초록숲길을 이용해야 되며, 자락
길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시내에서 접근하려면 어느 정도 오르막길과 산길을 겪어야 만날
수 있다.

안산자락길은 연희숲속쉼터 윗쪽, 자락길전망대, 천연마당쉼터, 안산천약수터, 숲속무대, 메
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을 두루 거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순환형으로 봉원사나 천연동
뜨란채아파트, 독립문파크빌아파트, 무악재역, 기원정사, 연희숲속쉼터, 서대문구청에서 접근
하면 된다.


▲  잣내음으로 그윽한 잣나무숲길

안산자락길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잣나무숲이 진한 잣내음을 들이밀며 나타난다. 이곳은 연희
숲속쉼터와 메타세콰이어 서쪽 숲 사이에 자리해 있는데, 숲 한복판에 안산자락길이 흘러가
그림 같은 잣나무숲길을 빚어내고 있으며, 숲길의 길이는 0.3km로 메타세콰이어숲과 함께 안
산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잣내음이 가득해 상쾌한 느낌을 안겨주며, 잣나무가 베푼 산바람이 비록 약하긴 하지만 속세
의 기운과 여름의 기세를 꾸준히 털어간다. 이 숲을 지나면 바로 메타세콰이어 서쪽 숲길이
펼쳐지나 그곳은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터라 길을 접고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안산
자락길 북쪽 구간으로 방향을 돌렸다.


▲  저 자락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원스럽게 뻗어가는 잣나무숲길의 위엄

▲  잣나무숲길 남쪽 구간

서울에 대표적인 잣나무숲으로는 이곳 외에도 동작충효길 고구동산 잣나무숲과 호암산(虎巖山
) 잣나무숲이 있다. 이들이 시골에 있었다면 감흥이 덜했겠지만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 한복
판에 고스란히 박혀 있으니 그 감흥은 클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자연은 인간에게 소중하다.



 

♠  안산자락길 마무리

▲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

잣나무숲에서 잠시 자락길을 버리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넓게 잘 닦여진 안산 산책로(연희로32
길)가 나온다. 그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올라온 길로 안산자락길이 이 길의 신세를 잠시
지며 동북쪽으로 흘러가는데 그 길의 끝에서 폭이 확 줄어들면서 북쪽 전망대가 고개를 내민
다.

북쪽 전망대는 안산의 가장 북쪽 끝(모래내로 이북은 제외)으로 비록 조망의 질은 정상보다
엷어도 홍제동과 홍은동, 무악재, 탕춘대능선, 북한산(삼각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앞서 잣나무숲에서 내려온 자락길과 연희로32길이 합쳐지는 곳에서 북쪽 전망대까지 1890년대
부터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까지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100여 인의 정보가 담긴 안내문이
차례대로 걸려 있어 잠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자락길 전망대에도 일부가 있음)
이들의 안내문을 설치한 것은 안산 동남쪽 밑에 서대문독립공원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자락
길을 거닐면서 이 땅의 광명을 위해 숭고하고 거룩한 삶을 살다간 그들을 생각하고 기려보자.
그것이 안산이 우리에게 준 의무이자 숙제이다.

북쪽 전망대에서 무악재를 거쳐 독립문파크빌까지 나무로 다진 무장애데크길이 펼쳐지며, 홍
제동과 무악재에서 안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만 있었을 뿐, 무악재 옆을 가로질러 남북으
로 이어지는 산길은 원래 없었다. 그러다가 자락길이 닦이면서 발길이 어려웠던 안산 무악재
구간 접근이 가능해졌다.


▲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홍제동과 홍은동을 위시하여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자락길 북쪽 구간과 무악재 구간이 만나는 곳
길 경계에 계수기(計數機)를 설치하여 안산자락길을 이용하는
사람 수를 조용히 체크한다.

▲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북쪽 전망대에서 무악재 방면)

▲  서울에도 흔들바위가?? 귀엽게도 들어앉은 안산 흔들바위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에서 자락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가면 흔들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마
중을 한다.
커다란 암반에 바짝 붙어있는 돌덩어리가 흔들바위로 흔들바위의 대명사인 설악산 흔들바위보
다는 볼품과 위엄이 많이 떨어진다. 허나 손으로 밀면 아주 조금은 흔들거려 흔들바위의 자격
은 그런데로 갖추고 있다. 허나 대부분 사람들이 지나칠 뿐, 그를 밀어 흔들바위의 이름값을
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어 속세의 관심이 시급하다.

이 바위는 안산자락길 조성으로 발견된 것으로 암반 위에 철썩 붙은 것이 충주 미륵리절터의
공기돌바위와 비슷한 폼이다.
안산은 돌이 많은 산이라 동쪽 정상 주변과 동쪽 자락을 중심으로 바위와 벼랑이 즐비하니 이
바위 역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이 안산에 살포시 얹혀놓은 소소한 작품이다. 그 동쪽에도 잘
생긴 바위 하나가 이름도 없이 자리해 있는데, 동쪽에서 보면 거북이가 바위에 웅크리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다.

▲  흔들바위 동쪽에 있는 이름 없는 바위

▲  너와집쉼터 입구

흔들바위를 지나 무악재 쪽으로 움직이면 너와집쉼터 이정표가 마중한다. 그 이정표의 안내를
받으며 서쪽 산길을 오르면 숲속에 묻힌 너와집이 진하게 모습을 비춘다. 서울 도심에서 너와
집이라니? 흔들바위만큼이나 신선하기 그지 없는데 그는 서대문구청에서 안산자락길을 다지면
서 조촐한 여흥거리로 마련한 것으로 경상북도 산골의 너와집을 현대식으로 조금 손질하여 지
은 것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살림집은 아니라고 하며, 관리하는 사람이 매주 여러 번 찾아와 관리를 하거
나 잠깐씩 머문다. 서울에 거의 유일한 너와집으로 너와집 체험 겸 전통찻집으로 활용하는 것
이 좋을 듯 싶은데, 그냥 눈요깃감으로만 두고 있는 것이 조금 아쉽다.

집 옆에는 하얀 피부의 위성방송 안테나가 귀를 열고 있어 이런 산골까지 TV가 들어오나 놀라
울 따름이다. 허나 생각해보니 여긴 엄연한 서울 한복판이다. 지리산이나 태백산맥, 개마고원
산골이 아니다.
집 앞에는 안산이 베푼 조그만 개울이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데, 그 개울에는 나무다리가 있으
며, 집 주변에는 장독대와 너와집쉼터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안산 산골에 숨겨진 너와집
이렇게 보면 강원도나 경북의 첩첩한 산골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엄연한
서울 한복판이다. (서울 4대문이 바로 지척임)

▲  너와집 옆에 자리한 너와집쉼터

▲  너와집 샘터

▲  시원스럽게 뻗은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  무악재 서쪽 벼랑에 닦여진
자락길전망대


자락길전망대는 무악재 서쪽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닦여져 있다. 이곳은 자락길을 닦으면서 달
아놓은 공간으로 필체가 돋보이는 '자락길전망대' 현판이 인상적인데, 이 글씨는 2012년 10월
에 작성된 것으로 글씨 좌우에 도장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투구처럼 생긴 바위와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의자가 여럿 설치되어 있고, 바로 밑에
자리한 홍제동을 비롯해 홍은동과 무악재, 인왕산,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잡히나 보이
는 범위는 좁다.


▲  자락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회색빛으로 물든 홍제동과 홍은동 지역을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자락과
인왕산 일부가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자락길전망대 바위 (투구바위)
바위 이름은 아직 없으나 일부가 투구처럼 생겨서 투구바위라 불러도 손색은
없어 보인다. 자락길전망대 개설로 바위 아랫도리가 가려져서 그렇지
저 바위 자체가 장대한 바위 벼랑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자락길전망대

▲  잠깐 포장길로 안면을 바꾼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무악재 남쪽)

▲  숲속에 자리한 조그만 야외 독서실, 자락길 북까페(Book cafe)

자락길 전망대에서 무악재 구간을 넘으면 조그만 책장을 지닌 북까페가 마중한다. 이곳은 책
장과 기와 정자, 그리고 동그란 탁자와 의자 세트가 여럿 놓여져 있는데, 책은 대부분 기증받
은 것으로 누구든 기증과 독서가 가능하다. 허나 그렇다고 책을 소장용으로 가져가지는 말자.
이곳이 공용 북까페의 성격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  북까페에서 바라본 안산 정상 (가운데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

나는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 봉우리 정상(무악산 동봉수대)에 서 있었다. 허나 눈을 떠보니
나는 그 한참 밑 북까페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정상에 있던 것은 혹여 꿈속은 아닐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축지법이나 순간이동을 쓴
것일까? 산과 자락길은 그대로인데 나란 존재는 계속 바뀌니 말이다. 이렇게 보니 정말 안산
을 휘감듯 돌아다녔다.


▲  한성과학고 뒷쪽 안산자락길

▲  한성과학고 뒷쪽 안산자락길에서 바라본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

▲  안산자락길 현저동 구간

무악재를 넘은 안산자락길은 현저동(峴底洞) 구간으로 들어서면서 한성과학고와 독립문파크빌
아파트의 뒤쪽을 지나간다. 이 구간은 벼랑 일색이라 잔도(棧道)처럼 나무데크길을 길게 내었
으며, 벼랑길을 지나면 포장길이 펼쳐진다.


▲  벼랑 밑을 지나는 안산자락길 현저동 구간

안산자락길이 너무 안(安)스럽게 닦여진 탓에 움직이는 길이 정말 순식간이다. 북까페에서 한
성과학고 뒷쪽을 지나 어느덧 독립문파크빌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무데크길은 끝나고
포장길이 펼쳐져 안산 남부까지 이어지는데, 제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19시가 넘어간 상태라
햇님은 꼴딱꼴딱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뺀다. 그 사이를 비집고 어두운 땅꺼미가 자리를 피
며 천하에 어두운 물감을 물들인다.

독립문파크빌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 독립문삼호아파트 뒷쪽에서 안산자락길과 인연을 정리
하고 시내로 내려왔다. 이렇게 하여 안산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신촌동, 연희동, 홍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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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0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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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서울 도심의 싱그러운 공간,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늦가을 나들이 <북악스카이웨이>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늦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0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들과 북악산(백악산) 북악하늘길을 찾았
다. 이곳은 김신조루트로 속세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2010년에 처음 발을 들인 이래 가끔 발
걸음을 한다.

오후 2시에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서울다원학교(한용운활동터)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로 일
컬어지는 성북동(城北洞)은 내 즐겨찾기 명소의 일원으로 대부분의 명소를 지겹도록 가봤건만
갔다 오면 또 가고 싶고, 자꾸만 안기고 싶은 곳이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우정의 공원(公園)'을 지나 삼청각으로 가는 조
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의 심장부가 바로 지척이건만 그런 도심을 비웃듯 숲과 계곡이 어우
러진 전원 풍경이 도시에서 오염된 안구를 어루만진다. 길 옆에는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부
르며 흘러가는데, 이 물줄기는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간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와 약간의 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그 산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  북악산(백악산) 북악하늘길 입문

▲  도심과 성북동을 바짝 이어주는 삼청터널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도심 북쪽인 삼청동(三淸洞)을 이어주는 2차선 땅굴이다. 이곳은 성북동
의 가장 막다른 구석으로 한양도성이 흐르는 북악산(백악산)의 주능선과 북쪽 능선(북악산길)
이 갈라지는 곳이며, 산세도 칼처럼 솟은 편이라 오르기가 좀 각박한 편이다. 그런 구석에서
다른 곳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한줄기 희망을 선사한 것이 바로 삼청터널이다.

이 터널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절정을 누리던 1969년에 삽을 떠서 1970년 12월 30일 완성을 보
았다. 공사비는 총 2억 4,900만원(민자 1억 9,900만원, 시비 5,000만원)으로 당시 성북동에는
차지철을 비롯한 군사정권의 실세들이 여럿 살았는데 그들의 청와대 접근 편의와 땅값 상승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그 시절 성북동과 삼청동은 한적한 동네로 두 동네를
이을 터널의 필요성은 그다지 없었다.

터널이 뚫리자 안그래도 졸부들로 가득한 성북동의 땅값이 더욱 하늘 높이 치솟아 금싸라기
땅이 되었고, 성북동과 청와대, 서울 도심간의 접근이 편해지면서 대원각, 삼청각 등의 고급
요정과 식당이 생겨났다. 이들은 썩은내와 돈냄새가 풍기는 지배층과 부유층의 공간으로 돈을
포크레인으로 쓸어 담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산간 지방의 조촐한 터널 같은 삼청터널은 길이 302m, 폭 8.5m(2차선)로 오로지 차량만 들락
거릴 수 있다. 예전에는 권력층과 돈 많은 작자들이 주로 이용하던 터널이었지만 시대가 여러
번씩 바뀌고 성북동이 도심 속 명소로 각광을 받으면서 나들이와 드라이브 수요도 크게 늘었
다. 허나 터널도 그렇고 도로도 그렇고 확장은커녕 여전히 2차선을 고수하고 있어 휴일에는
꼬리에 꼬리를 잡고 굼벵이 속도로 버벅거리는 차량의 행렬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삼청동과 북촌(北村)으로 이어지지만 걷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억지
로 터널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한다. (벌금을 내야됨) 차라리 쿨하게 택시를 타고 넘어가던가
숙정문안내소에서 숙정문이나 말바위, 와룡공원을 넘어 북촌으로 넘어가길 바란다.


▲  삼청각(三淸閣) 정문

성북동의 가장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자리해 있
다. 이곳은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이 갈라지는 150m 고지로 도심이 바로 지척임
에도 이곳을 감싸고 흐르는 공기부터가 무척 산뜻하고 청정하다.

삼청각은 겉모습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사정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
청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는데, 1972년 7월 4일에 벌어
진 7.4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이 만찬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권력실세들의 공
간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도심
속의 전통문화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한다.

한때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고 전통문화를 즐
기며, 식사와 차 1잔, 혼인, 돌잔치 등을 가질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현장으로
이는 길상사(☞ 관련글 보기)란 절집으로 변신한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이곳은 오래된 문화유산도 아니고 비록 속세에 개방되었다고 해도 비싼 이미지는 여전히 깃들
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의 착하지 못한 음식/차 가격과 행사 비용은 서민들에게는 그리 호
락호락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서울의 허파인 북악산(백악산) 품에 포근히 안긴 곳
으로 20세기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삼청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30-115 (대사관로 3, ☎ 02-765-3000)
* 삼청각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조림 표석 - 숙정문 안내소 부근

▲  늦가을의 처절한 향연이 펼쳐진 북악산(백악산) 등산로
(홍련사와 숙정문안내소 중간)

▲  숙정문안내소

홍련사와 삼청터널 사이로 난 산길을 오르면 북악산 전면개방 조림(造林)을 기념하는 커다란
표석이 나그네를 맞는다. 그 표석을 지나면 북악산 주능선(한양도성 능선)의 주요 관문인 숙
정문안내소(☎ 02-747-2152)가 모습을 비추는데,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린다.
안내소를 지나 직진하면 숙정문(肅靖門)과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북악산 정상(342m)으로 이
어지며, 안내소 직전 왼쪽(남쪽) 길은 한양도성 북쪽 산길로 말바위와 와룡공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오른쪽(북쪽) 길이 김신조루트로 통하는 북악하늘길이다.


▲  숙정문안내소 주변 북악산(백악산) 산림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은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러다가 1968
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공비 패거리 31명이 북한산(삼각산)을 넘어 창의문을 거쳐
시내로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침투 소식을 접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
)은 경찰을 청와대 길목에 배치하고 직접 현장을 지휘했다.
드디어 공비패거리가 청와대 서쪽 청운동(淸雲洞)에 나타나자 최서장은 그들이 공비임을 눈치
채고 검문을 한다며 길을 막았다. 이에 공비들은 크게 발작하여 외투 속에 숨긴 기관단총을
꺼내 이판사판으로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총격적이 발생했고, 최서장은 불행히도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당해 쓰러지면서
'끝까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마지막 명령을 내리며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의 반격으로 공비들은 거의 벌집이 되었고 살아남은
것들은 인왕산(仁王山)과 북악산으로 도주했다. 이후 14일 동안 수색을 벌여 북악산 북쪽 능
선을 끝으로 토벌을 완료했으며, 생포된 김신조와 도주 1명을 뺀 29명을 처단했다.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뚜껑이 단단히 폭발한 박정희 전대통령은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을 완
전히 통제하여 백성들의 출입을 막고 군사 지역으로 삼았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허리에 군작
전 및 관광을 겸한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길)를 급하게 만들게 했다.

금지된 곳으로 묶인 북악산 북쪽은 41년이 지난 2009년부터 삼청각에서 말바위, 성북동과 정
릉, 평창동에서 북악스카이웨이를 잇는 산길이 속속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2010년 2월 27일
에 삼청각에서 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을 손질해 '북악하늘길'이란 간판을 걸어 속
세에 개방했다. 그중 제2산책로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루트라 하여 김신조루트란 이름으로
인기를 더하고 있으며, 북악하늘길의 백미이자 안보관광지로 가장 볼거리가 많은 산길이다.
(실제로 김신조는 이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함)

이곳이 주능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24시간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팔
팔한 시절에 공개되어 이렇게 발을 들이니 기쁘기 그지 없다. 북한이나 휴전선처럼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무려 40여 년 동안 통제되어 속인들의 발길을 금지한 탓에 북악산 북쪽의 자연은 군부대로 인
한 약간의 훼손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잘 보존되고 있다. 그리하여 생태적인 가치가 높고, 자
연경관이 우수하며, 서울 도심을 비웃듯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어 '서울 속의 비무장
지대','도심 속의 허파','도심 속의 신세계'란 별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또한 키다리 빌딩이
즐비한 서울 도심 속의 이색 장소로 한나절 나들이 코스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대부분은 통제 시절 군인들이 오가던 산길로
군사 시설과 그 당시 지어진 계단길이 줄지어 있으며, 제2산책로는 경사가 매우 각박하여 탐
방객의 편의를 위해 나무데크식 등산로를 곳곳에 만들었다.
이렇게 북악산 북쪽 능선을 개방하면서 조성된 등산로 3개는 다음과 같다.

①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 말바위쉼터 ~ 한양도성 북쪽 산길 ~ 숙정문안내소 ~ 성북천발원지
   ~ 북악팔각정 (1.4km)
② 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호경암 ~ 하늘
   전망대 ~ 북까페 ~ 하늘교 ~ 하늘마루 (2km)
③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 북까페 ~ 동마루 ~ 숲속다리 (640m)



 

♠  북악하늘길(김신조투르) 둘러보기 ①
삼청각쉼터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삼청각쉼터

숙정문안내소에서 북악하늘길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높다란 계단길이 나그네의 기를 제대로
주눅 들게 만든다. 시작부터 각박한 계단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신조루트는 이렇게 첫 이미지
에서 보이듯 계단길이 유별나게 많아 숨을 적지 않게 차게 하는데, 이건 맛보기 버전이다. 여
기서부터 지친다면 김신조루트 산책은 어렵다. 자존심을 곱게 버리고 악으로 깡으로 올라간다
면 김신조루트는 자신의 속살을 하나씩 벗겨주며 그대를 반겨줄 것이다.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삼청각쉼터가 마중을 한다. 이곳은 삼청각의 서쪽이자 뒷통수로 소
나무의 산인 북악산답게 소나무 1그루가 쉼터 중간에서 운치를 그윽하게 불어주며 솔내음과
선선한 그늘을 드리운다. 여기서 잠시 삼청각을 비롯한 좁은 천하를 굽어보고 더 올라가면 제
1산책로와 제2산책로가 갈리는 성북천발원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청각쉼터에서 바라본 천하 (삼청각과 성북동, 성북구 지역)
이제 시작 단계라 조망 범위는 매우 좁다. 허나 산길을 오르면서 하늘과
보다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높아진다.

▲  늦가을의 물감이 야드르르 번진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북악산 북쪽 능선 (삼청각쉼터와 성북천발원지 중간)

▲  성북천발원지에 자리한 수고해(水鼓蟹)다리 (가운데에 보이는 다리)

▲  성북천(城北川) 발원지

성북천은 북악산 동북쪽 자락에서 발원하여 성북동과 삼선교, 보문동, 제기동(祭基洞)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7.7km의 지방 2급 하천이다. 조그만 하천의 발원지라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儉龍沼)나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黃池)처럼 뭔가 특별하거나 요란한 것은 없으며,
계곡 수심은 매우 얕고 주변에는 하얀 피부의 바위들이 벌러덩 누워 있는 그야말로 평화로운
풍경이다.

성북구청에서 이곳을 생물 서식처로 가꾸고자 여러 식물을 심고 수질에 특별히 신경을 쓴 결
과 가재를 비롯한 여러 조그만 수중 동물들이 좀 늘어났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고자 성북천발
원지 남쪽에 있는 다리 이름을 가재가 물에서 물장구를 치는 다리란 뜻에 수고해(水鼓蟹)다리
라 하였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기존의 제1산책로로 북악팔각정과 빠르게 이어
지며, 오른쪽은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제2산책로로 호경암을 거쳐 하늘교까지 이어지는 2km의
산길이다. 이 산길은 중간중간 조망(眺望)이 괜찮은 곳에 '~~마루'와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를 닦아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  성북천발원지에서 바라본 삼청각 편운정(片雲亭)과 유하정
편운정에서 계곡을 따라 북악하늘길로 바로 접근할 수 있으나, 이 구간은
통제구간으로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길이 헝클어져 있어
조금은 거칠다.

▲  김신조루트 서마루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까지는 속절없는 세상살이처럼 고통스런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나무
데크로 지어진 서마루에 오르면 삼청각쉼터보다 1단계 높아진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의자가
넉넉히 베풀어져 있어 잠시 숨을 고르며 천하를 굽어보기에 좋다.
이곳에선 북악팔각정이 가까이에 보이며, 여기서 길은 동쪽을 향해 급하게 내리막길로 돌변한
다. 그래서 처음 온 이들은
'벌써 다 올라왔나? 이거 정말 싱거운데!' 생각을 하며 방심을 하지만 이는 북악산이 내린 일
종의 속임수이니 속지말자. 북악산이 북한산(삼각산)이나 관악산(冠岳山), 수락산(水落山) 등
서울 주변의 쟁쟁한 산들에 비해 키는 낮지만 그래도 악(岳)이 들어가는 서울의 오랜 북현무(
北玄武)이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①
소나무 너머로 성북동과 성북구, 도심 동부 지역,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강동구, 송파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악산(백악산)의 두터운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바라보인다.

▲  이름도 시원한 솔바람교

서마루에서 솔바람교까지 220m 구간은 각박한 경사의 내리막이다. 다 올라왔구나 싶겠지만 솔
바람교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흥분하여 무지막지한 오르막길로 나그네의 기를 죽인다. 내리
막길은 고난 앞에서 잠시 즐기는 여유라고나 할까..? 한라산(漢拏山)도 관음사(觀音寺) 방면
으로 한참 내려갈 때 중간에 오르막길이 나와 속인들을 좌절하게 만드는데 바로 그 이치이다.
남마루까지는 가파른 길이 계속 이어지니 방심의 늪에 빠지지 말자~~

솔바람교는 계곡 위에 걸린 나무다리로 그 이름이 순 우리말이라 정감이 참 깊다. 주변은 소
나무를 비롯해 온갖 수목이 삼삼하여 그 이름 그대로 솔바람이 나를 날려보낼 것 같다. 계곡
이라고 하지만 워낙 생긴 것이 부실하고 돌만 가득해 이곳에 올 때마다 늘 황량한 모습을 보
여주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다리를 내려오면 쉼터가 있으며 다리 북쪽 구석으로 가면 약수터가 있는데, 이곳이 김신조루
트의 유일한 샘터이다. 산에서의 약수터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라 갈증이 없어도 꼭 물
은 섭취하기 마련인데, 무심한 가을 가뭄 때문인지 수분은 이미 실종되었다. 약수터 주변은
숲이 바다를 이루고 있어 햇살이 쉽게 손을 뻗치지 못하며, 북악하늘길에서 가장 궁벽한 곳으
로 북쪽과 서쪽, 동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쪽만 가늘게 뚫려있는 고적한 곳이다.


▲  솔바람교 밑에 자리한 약수터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약수터이다.

▲  솔바람교 쉼터
이곳은 김신조루트의 중간 정도로 속세에서 간식거리를 가져왔다면 여기서
잠시 요기를 하며 쉬었다 가는 것도 괜찮다.



 

♠  북악하늘길(김신조투르) 둘러보기 ②
솔바람교 ~ 남마루 ~ 호경암

▲  솔바람교 쉼터에서 남마루로 올라가는 계단길
보기만 해도 회의가 느껴진다.


솔바람교에서 남마루까지는 다시 지독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그 거리는 약 600m 정도로 여
기가 김신조루트에게 가장 인생의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곳이다. 하긴 공비 패거리가 살아 돌
아가려는 일념으로 넘었던 곳인데 오죽 험하겠는가. 게다가 이곳은 산길도 없던 구간으로 각
박한 산세를 극복해 나무데크 계단길을 닦았으며, 적당하게 간격을 두며 쉼터를 만들어 턱까
지 밀려오는 숨을 잠시나마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그렇게 잔뜩 흥분한 산길을 오르면 남마루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은 앞서 서마루보
다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더 휼륭한 조망을 선물로 준다. 이곳 이후 흥분했던 산길은 다소
진정을 되찾으며 호젓한 산길의 기품을 서서히 회복한다.


▲  지옥 끝에 나온 극락, 남마루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성북동과 성북구, 낙산, 도심 동부 지역, 동대문구, 중랑구, 성동구,
광진구, 송파구, 강동구 지역

▲  서서히 진정되고 있는 산길 (남마루와 호경암 사이)

▲  호경암으로 오르는 계단길

▲  김신조루트의 상징물, 호경암(虎京岩)

남마루에서 360m 오르면 길 왼쪽에 상처를 가득 입은 큼직한 바위가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심을 바라보고 선 이 바위가 바로 김신조루트의 상징인 호경암으로 그가 이곳의 유명
바위가 된 것은 김신조 공비 패거리와 격전을 벌였던 남북분단의 서글픈 현장이기 때문이다.

청운동에서 우리 경찰에게 털린 김신조 패거리는 북악산을 넘어 성북동 뒷산(북악산 북쪽 능
선)으로 줄행랑을 치며 몸을 숨겼다. 39대대 2중대는 호경암 주변을 수색하던 중, 등을 보이
고 도망치는 공비 3명을 발견, 호경암에서 교전을 벌이다가 인근 구진봉 주변에서 모조리 사
살했다.
그렇게 처리된 김신조 패거리 29명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군묘지(敵軍
墓地)에 묻어주었다. 적군묘지는 6.25 때 남한 땅에서 처단된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묻은
곳으로 김신조 사건과 동해 잠수함 침투 때 처리한 공비, 그리고 1987년 KAL기를 폭파시킨 폭
파범까지 이곳에 묻혀 있다.


▲  남북분단의 비극이 안겨준 선물 아닌 선물
총탄 자국으로 가득한 호경암


북악산(백악산)이 서울 근교 경승지로 조선시대부터 왕족과 사대부들의 별장과 기와집, 바위
글씨가 즐비했던 탓에 호경암도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허나 막상 확인해보니 1968
년 때 서울을 지키던 맹호부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의 손길은 북악
산 주능선과 서쪽(부암동, 청운동), 남쪽(삼청동)에 치우쳐져 있을 뿐, 김신조루트와 북쪽 능
선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아마도 금표(禁標) 구역으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묶인 탓이 아
닐까 싶다.

바위 밑에는 이곳이 격전지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는데, 1998년 1월 호경암 주변에서 복무하
는 군장병들의 애국심과 경각심을 돋게 하려고 안내문을 설치했다고 하며, 바위 피부에는 당
시 총격전으로 생긴 50여 발의 탄흔이 진하게 남아 그 시절 긴장되고 숨막히던 상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그런 악연으로 북악산의 이름 없는 바위는 김신조 사건의 격전지로 이들을 격퇴한 부대 이름
을 따서 호경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고, 이곳이 개방되면서 북악산의 새로운 명물이자 이
땅의 비극적인 현실을 담고 있는 산증인으로 몸값과 이름을 크게 올리고 있다. 좋은 쪽으로
이름을 높여야지 영 좋지 않은 쪽으로 높이고 있으니 바위 자신도 어이가 없을 것이다. 바위
를 보면 표정이 조금은 굳어져 있는데, 이 땅이 통일이 되면 그의 표정도 씨익~ 펴지지는 않
을까.


▲  이 땅의 비극은 저렇게 깊었다 - 바위에 박힌 탄흔

▲  호경암 표석
표석이 박힌 호경암 정상에 올라서면 지금까지의 조망을 훨씬 뛰어넘는
국보급의 조망이 발 밑에 펼쳐진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①
북악산 일대와 성북동, 서울 도심, 남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성북동과 정릉동, 성북구, 강북구, 중랑구, 성동구, 광진구 등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③
평창동과 구기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형제봉 등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호경암에서 하늘전망대로 내려가는 길
호경암을 지나면 더 이상 오르막길은 나오질 않는다. 늦가을에 물들어가는
잔잔한 숲길만이 조용히 사색을 도울 뿐~



 

♠  북악하늘길(김신조투르) 마무리

▲  김신조루트 북쪽에 자리한 하늘전망대

호경암에서 4~5분 정도 가면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지금까지 나온 '~~마루'
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조망도 괜찮은 편으로 전망대 이름은 북악하늘길에서 따왔지만 그만큼
하늘과도 가까운 곳이다 보니 이름이 그런데로 잘 어울린다.

서마루부터 호경암까는 성북동과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서울 도심, 남산 등의 남쪽과 성북
구와 중랑구, 동대문구, 광진구 등 동쪽이 주로 보였다. 허나 호경암을 경계로 능선 남부에서
북부로 넘어왔기 때문에 하늘전망대부터는 그와는 반대인 북쪽으로 파노라마가 바뀌면서 평창
동과 구기동, 정릉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를 위시해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의 대표 졸부 동네인 평창동을 비롯해 부암동과 구기동, 탕춘대능선,
북한산 서부가 거침없이 시야에 박힌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정릉동과 길음동, 성북구, 강북구 일대는 물론 멀리 도봉구와 노원구,
수락산~불암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성북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구리시 지역 등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산줄기와 형제봉

▲  솔내음이 그윽한 북까페

하늘전망대에서 북쪽으로 110m 가면 북까페라 불리는 소나무숲이 마중을 한다. 이곳에는 책장
과 의자가 있어 자연을 벗삼아 책을 읽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북한산과 북악산의 산바람
이 교차하는 곳이라 독서도 무지 잘될 것 같다. 그런데 북까페보다는 '독서마당'이나 '소나무
책방','솔내음책방','사색의 공간'으로 이름을 지었으면 훨씬 부드럽지 않을까 싶다. 다른 곳
은 '~~마루(마루는 정상을 뜻하는 순 우리말)'나 '하늘전망대' 등의 우리말을 쓰면서 왜 이곳
만큼은 두 귀에 거북한 영어로 지었을까?

북까페 책장은 달랑 하나로 책은 많이 담겨져 있으나 상당수는 어린이와 청소년 책이거나 소
설이다. 집에 버려둔 책이 있다면 썩혀두지 말고 이곳에 기증하는 것도 공익 차원에서 괜찮을
것이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까페를 등지고 북쪽으로 직진하면 하늘교가 나오고, 북
까페를 가로지르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가 시작된다.


▲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동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정릉동과 길음동을 위시해 성북구와 강북구, 도봉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북까페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이다. 이 구간은 북악산길 남쪽으로
중간에 호경암으로 가는 샛길이 있으며, 오르락 내리락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숲속다리를 지
난 체육공원에서 그 막을 내리는 1리 정도의 짧은 산길이다.

산길 중간에 동마루라 불리는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
남쪽 자락을 비롯해 정릉동과 길음동, 성북구와 강북구, 도봉구 등이 훤히 바라보이며, 대자
연이 여기저기 채색한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를 놓으며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  체육공원에서 마무리를 짓는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동쪽 종점

동마루에서 북악산길에 걸린 숲속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넘어가면 체육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동네 주민과 산꾼들이 간단히 몸을 풀 수 있게끔 다양한 운동 기구가 닦여져 있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인 하늘마루와 하늘교가 나오며, 그 직전에 형제봉과
북한산둘레길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그리고 하늘마루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북악팔각정과
부암동, 창의문,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반면 동쪽으로 가면 북악정과 성북구민회관, 아리랑고개, 정릉동 방면으로 통하며, 중간에 국
민대나 배밭골, 길상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우리는 북악산길을 옆구리에 끼며 해가 뜨는
동쪽으로 가다가 북악정에서 성북동으로 진입하여 길상사를 거쳐 속세로 내려왔다.


▲  북악스카이웨이4교
여기서 직진하면 아리랑고개, 성북구민회관으로 이어지며, 아래로 내려가
북쪽으로 가면 국민대와 정릉, 남쪽은 성북동과 길상사으로 연결된다.
이들 모두 2차선 길이지만 보기와 달리 차량의 왕래가 제법 잦다.


41년 만에 속세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과 김신조루트, 비록 남북분단의 상처가 서린 서글픈 현
장이지만 서울 도심 속의 허파이자 달달한 명소로 자연이 잘 보존되고 경관도 아름다운 보석
같은 곳이다. 이곳은 마치 미지의 땅에 들어온 듯한 신선한 기분이었고, 서울 땅에서 안가본
곳이 거의 없는 나에게도 꽤 서름한 곳이라 길을 거닐면서도 무엇이 나올까? 늘 마음이 두근
거렸다.
이렇게 하여 도심 속의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정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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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9월 3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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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의 지붕을 거닐다. 상도동 사자암~국사봉~동작충효길6코스 동작마루길 <상도근린공원, 성현드림숲공원>

상도동 사자암, 국사봉, 동작충효길(동작마루길)



' 동작구 사자암, 국사봉, 동작마루길 봄나들이 '

▲  국사봉 정상

▲  사자암 단하각

▲  동작마루길 (상도근린공원)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어느 따사로운 주말, 오래간만에 상도동(上道洞) 사자암을
찾았다. 사자암을 비롯하여 미답처(未踏處)인 국사봉 정상과 동작충효길6코스(동작마루길
)를 싹 둘러보고자 찾은 것으로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2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1호선을 타고 한강을 넘어 노량진역에서 두 발을 내렸다.

노량진역에서 동작구 마을버스 02번(사자암-노량진역)을 추가로 탑승하여 상도3동 뒤쪽에
자리한 사자암 종점에서 내렸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왼쪽(남쪽)으로 오르막 숲
길이 나타나니 바로 그 길의 끝에 국사봉 사자암이 걸려있다.


▲  사자암 오르막길 ①
오색 연등이 푸른 허공을 희롱하며 중생들을 사자암으로 인도한다.
만약 길이 햇갈린다면 그저 연등만 믿고 올라가면 된다.

▲  사자암 오르막길 ②



 

♠  국사봉 그늘에 둥지를 튼 아늑한 고색의 암자
상도동 사자암(獅子庵)

▲  사자암 일주문(一柱門)

상도동의 듬직한 뒷산인 국사봉(國思峰, 186.3m) 북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은 사자암은 조
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396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옮기고자 무학을 미리 보내 풍수지리를 살피게
했는데, 만리현(만리동)이 밖으로 도망가는 백호(白虎)의 형상이고, 호암산(虎巖山)은 북쪽으
로 달리는 호량이의 형국이라 풍수상 서울에게는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여 그 기세를 막
고자 호암산에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의 호압사(虎壓寺, ☞ 관련글 보기)를 짓고 사자 형상인
국사봉에 사자암을 세우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는 것이다.
허나 무학의 창건설은 딱히 근거와 유물은 없는 실정이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가 17세
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다. 하여 빠르면 15세기 정도, 늦어도
16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호압사와 함께 서울을 지키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
로 세워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만큼 옛 사람들에게 있어 풍수지리는 절대 진리나 다름이
없었다. 참고로 절 이름인 사자암은 국사봉 바위가 사자처럼 생겨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어쨌든 창건 이후 300년 이상이나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다가 18세기 한복판에 이르러 비
로소 제대로 된 활자 기록이 등장한다.
1726년 숙종의 6째 아들 연령군(延齡君, 1699~1719)의 부인 서씨가 너무 일찍 죽은 남편의 명
복을 빌고자 극락보전 아미타불(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했으며, 1846년
에 지장탱과 신장탱을 조성하고 1880년에는 현왕탱을 봉안했다.
1910년 경암(敬庵)이 극락전과 산신각, 요사채를 중수했으며, 1936년 성월이 극락전을 보수했
다. 그리고 1977년 원명이 주지로 부임하여 조실당(祖室堂)을 짓고, 1985년에 극락보전과 단
하각, 수세전, 요사 2동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단하각과 수세전, 강당 등 7~8동 정도의 건물을 지
니고 있으며 절이 들어앉은 자리가 협소하여 극락보전 뒤쪽 가파른 언덕에 단하각과 수세전을
닦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신중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0호),
영산회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8호), 현왕도(
울 지방유형문화재 289호), 목조보살좌
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50호)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중 신중도와 목조아
미타여래좌상만 속세에 공개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친견이 극히 어렵다. 다만 영산회괘불도(
靈山會掛佛圖, 1909년 작)는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는 편이다.


▲  사자암에서 바라본 아담한 천하 (상도동, 대방동, 여의도 지역)

상도동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숲속에 진하게 묻혀있던 산사였다. 허나 1960년대 이후 서울 인
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그로 인해 서울의 몸집이 지나치게 커짐에 따라 변두리인 이곳까지
거친 밀물처럼 집들이 들어찼다. 다행히 개발의 칼질이 사자암 앞에서 그 꼬랑지를 내리면서
사자암과 국사봉 윗도리는 자연의 공간으로 남게 되었고 사자암은 이렇게 자연(국사봉)과 속
세의 경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비록 옛날만큼의 운치는 아니어도 국사봉의 푸른 숲이 절을 남쪽에서 감싸고 있어 산사(山寺)
의 내음은 변함이 없다. 절을 이루는 건물은 근래에 지어진 것들이라 겉으로 우러나오는 고찰
의 내음은 말라버렸지만 신중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통해 오랜 내력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시내와도 무척이나 가까워 접근성도 괜찮다. 게다가 암(庵)이란 이름에 걸맞게 절
의 크기도 조촐하여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도 없다.


* 사자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3동 280 (국사봉1길 235-14 ☎ 02-825-1046)


▲  사자암 강당(講堂, 설법전)

사자암 경내로 들어서니 조금은 모를 답답함이 밀려온다. 터가 좀 작다보니<그래도 우리집보
다는 오지게 넓음> 그 좁은 공간에 건물을 꾸역꾸역 심어 여백의 미가 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극락보전도 강당과 좁은 간격을 두고 자리해 있어 탑이나 석등을 세울 공간도 마땅치 않다.

극락보전 맞은편에 자리한 강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교육과 행사 공간으로 대방(大房), 설법전(說法殿)으로 불리며 종무소(宗務所)와 선
방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연등이 허공을 가르고 있는 강당 뒷쪽

▲  공양간을 지닌 동쪽 요사와 그 뒤쪽에 자리한 단하각 (오른쪽 건물)

▲  공양간에 담긴 조왕탱화(竈王幀畵)

사자암 공양간에는 부엌지킴이인 조왕신<竈王神 = 조왕(竈王), 조왕대신(竈王大神)>이 그려진
조왕탱이 있다.
조왕이란 이 땅 고유의 신으로 부엌을 지키는 존재이다. 부엌을 관리하던 여인네들이 주로 숭
상했는데 불교가 산신과 칠성 등의 민간신앙을 거의 흡수하면서 조왕 역시 호법신중(護法神衆
)의 일원으로 스카웃되어 그 모습도 다른 신과 보살에 못지 않게 화려하게 변신했다. 하지만
기존의 호법신중과 조왕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 별도의 조왕탱으로 독립했다고 하며 그 성
격을 고려해 주로 요사나 공양간에 둔다.

조왕탱을 보면 제왕(帝王)의 복장을 한 조왕신이 수염을 어루만지며 조식취모(造食炊母)가 바
치는 후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노란 천이 깔려 고급진 이미지를 주는 책상에는 서적과 찻잔이
놓여져 있고, 그의 왼쪽에는 땔감 조달을 담당하는 담자역사(擔紫力士)가 항아리와 도끼를 들
고 서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공양간을 관리하는 조식취모라 불리는 여자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과일 쟁반을 조왕신에게 바친다.

부엌지킴이가 남자란 것이 매우 눈길을 끄는데, 조왕신이 꼭 남자만 있는 것은 아니며 속세에
서는 조왕할머니를 조왕신으로 많이 받들고 있다.

   ◀  범종(梵鍾)의 거처인 사자후(獅子吼)
극락보전 우측에는 범종의 보금자리인 범종각
이 있다.
범종은 1987년에 조성했고, 범종각은 1985년에
미리 지은 것으로 사자암에서는 범종각을 '사
자후'란 꽤 낯선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
는 모든 사람이 깨달음의 길에 오를 수 있도록
원음(圓音)의 사자후를 토하란 의미라고 한다.
또한 절의 창건 설화와 절의 이름도 그가 사자
후란 이름을 지니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강당과 마주하며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극락보전은 사자암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10년에 중건했으며, 1936년과 1985년에도 손질을 했다.
건물 안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3존상을 비롯해 신중도, 지장목각탱 등이 들어있으며 바
깥 벽에는 심우도와 달을 보면서 자신의 본성을 찾아서 본다는 간월견성(看月見性), 그리고
팔을 싹둑 잘라 믿음을 강하게 비췄다는 혜가대사(慧可大師)의 이야기를 다룬 벽화가 있다.


▲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6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머리가 유난히도 큰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장, 아미타불(목조아미타여
래좌상)이 온후한 표정을 머금으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그의 좌우로 녹색머리의 지장보살(地
藏菩薩)과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이 자리하여 아미타3존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 뒤로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에서 설법을 하는 장면을 담은 붉은 색채의 아미타후불탱이 든
든히 자리해 있다.

이곳 아미타불은 사자암에서 가장 늙은 보물로 예전에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 허나 근래 재평가를 해보니 17세기 초에 조각승인 현진(玄眞)이나 그의 제자들이 만든 것으
로 파악되고 있다. 다만 불상의 내력을 밝혀주는 복장 발원문(發願文)이나 유물이 없어 더 자
세한 것은 알 수 없으며, 17세기 초반 현진의 조각적 특징을 잘 갖추고 있고, 보존 상태도 양
호한 편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그는 키 108cm로 1726년에 연령군의 부인 서씨가 세상을 떠난
남편과 다시 만날 것을 꿈꾸며 절에 돈을 대어 불상에 금칠을 했다. 1974년에 연화개금을 하
였고, 1980년에 다시 개금(改金)을 했는데, 몸을 가린 대의(大衣)의 옷주름은 배 아래 부분에
서 크게 'U'자형을 그리고 있고 두툼한 옷주름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얼굴과 머리 부분이
다소 커 보인다.
머리 중앙에는 육계(무견정상)가 두툼히 솟아있고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
는데 두 손은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  사자암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7호

아미타3존상 좌측에는 신중도가 액자에 고이 담겨져 있다. 이 탱화는 1846년에 조성된 것으로
불교를 지키는 호법신장들이 정신없이 담겨져 있어 그야말로 혼을 빼놓는다.

그림을 살펴보면 금강저(金剛杵)를 든 위태천(韋太天) 동진보살이 그림 상단 오른쪽에 독수리
깃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다. 연꽃가지를 든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은 화면의 상단 좌
측 중앙에 두고 토속신을 곳곳에 배치했으니 이는 기존의 토속신을 받아들여 성장한 우리나라
불교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가로 223cm, 세로 162cm의 크기로 지포(紙布) 위에 그려졌으며,
그림을 그린 이는 송은당 수찬(松隱堂 守讚)이다.

사자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가 4점씩이나 되건만 속시원히 공개된 것은 신중도가 거의
유일하며 이번에도 신중도 밖에는 친견하지 못했다.


▲  단하각(丹霞閣)

공양간(동쪽 요사) 뒤쪽 언덕에는 이름도 낯선 단하각과 수세전이 높게 터를 잡아 경내를 굽
어본다. 이들은 정면과 측면이 달랑 1칸인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서로 비슷하게 생겼다.

단하각은 1910년에 중수했다고 하며, 현재 건물은 1985년에 원명이 중건한 것으로 우리에게
꽤 익숙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다. 그러니까 산신각과 독성각의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보면 되겠다.


▲  단하각 산신탱(왼쪽)과 독성탱(오른쪽)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들로 세월의 때가 좀 끼어서 그럴까.
조금은 늙어 보인다.

▲  수세전(壽世殿)

단하각과 비슷하게 생긴 수세전은 인간의 목숨과 수명, 무병장수를 관장하는 칠성(七星)의 거
처이다. 보통 칠성(치성광여래)을 봉안한 건물을 칠성각이라 부르지만 여기서는 그 흔한 이름
대신 인간의 수명을 뜻하는 수세전을 이름으로 취해 좀 튀어보이게 했다.

이 건물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내부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칠성탱이 있으며, 앞서 산신과
독성이 봉안된 단하각처럼 '각'을 칭하지 않고 '전'을 칭하고 있어 칠성이 그들보다 1단계 높
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보다 '전'이 격이 더 높음)


▲  단하각 앞에 멋드러지게 솟은 소나무의 위엄

▲  사자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일주문 직전에서 나무가 우거진 산자락(남쪽)을 보면 산비탈에 누운 커다란 바위가 여럿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중 일주문과 가장 가까운 바위를 잘 살펴보면 그 한복판에 네모나게 다져진
홈과 구멍이 마치 바위의 눈 같은 모습으로 시야에 보일 것이니 그가 바로 마애사리탑으로 그
주변에도 1기가 더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마애사리탑이란 바위에 네모지게 홈을 다지고 그 윗도리에 감실(龕室)을 내어 사리나 유골 등
을 넣어둔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 승탑(僧塔, 부도)의 모습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쉽게 말하
면 바위에 새긴 사리 보관함으로 보면 된다. 이런 사리탑은 18~20세기에 나타나는 양식으로
그럴싸한 승탑(부도)을 짓기 어려운 절에서 절 주변 바위를 이용해 사리탑을 다졌다. 그저 바
위와 그의 피부를 파고 다듬는 도구만 있으면 되니 아주 쉽고 간편하다. (그런 사리탑을 강제
로 문신처럼 지녀야 되는 바위는 좀 고통스러울 듯)

사자암 마애사리탑은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승려의 유골함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정
보가 없음;) 관련 명문이 새겨진 18~19세기 것과 달리 조그만 감실과 홈만 있어 조금은 빈약
하다.


▲  가까이서 바라본 조촐한 마애사리탑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소소한 마음 같다.

▲  하얀 글씨가 칠해진 또 다른 마애사리탑 (20세기 중~후반)



 

♠  동작구의 지붕, 국사봉(國師峰)의 감성을 누리다.

▲  사자암에서 국사봉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사자암을 20분 정도 둘러보고 마애사리탑 옆에 있는 산길을 통해 국사봉으로 들어섰다. 사자
암이 상당한 위치라 넉넉잡아 10분 정도면 손쉽게 정상에 이르는데 각박한 속세살이와 달리
경사도 별로 급하지 않고 숲 또한 무성하여 시원한 기운이 주변에 감돈다. 어느 정도 오르면
능선에 이르게 되며 능선에 발을 올리기가 무섭게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  태극기가 휘날리는 국사봉 정상

국사봉(186.3m)은 동작구(銅雀區)의 대표 지붕이자 서쪽 지붕이며, 관악구(冠岳區)의 북쪽 지
붕으로 동작구 상도동과 관악구 봉천동(은천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삼성산(三聖山)의 한
지맥이 북쪽으로 달려가 그 끝에 용솟음친 산으로 산줄기가 동서로 이어져 있으며, 동쪽은 국
립서울현충원을 품은 공작봉(서달산)과 연결된다.

국사봉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하고 있는데, 태종(太宗)의 장자인 양녕대군(讓寧
大君)이 이곳에 올라 멀리 서울과 경복궁(景福宮)을 바라보며 나라와 자신의 아우인 세종(世
宗, 충녕대군)을 걱정했다고 해서 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의 국사봉(國思峰)이 되었다고 하며,
무학대사가 산 북쪽에 사자암을 세웠는데 태조(이성계)가 그를 국사(國師)에 버금가게 대우했
다고 해서 국사봉이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국사봉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두 설 모두 공통되게 서울과 나
라를 걱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사자암은 서울을 지키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세웠다고 함
> 비슷한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국사봉 정상에는 천하 제일의 국기, 태극기가 열심히 휘날리고 있고, 국사봉 표석과 삼각점,
운동시설, 쉼터 등이 닦여져 있다. 서북쪽 자락에는 사자암이, 동북쪽 자락에는 양녕대군 묘
역이 있으며, 동작구의 야심작인 동작충효길의 6번째 코스, 동작마루길(4.8km, 신대방3거리역
↔현충원 상도출입문)이 이 산의 신세를 지며 동서로 흘러간다.
높이는 낮지만 동작구와 관악구 사이에 봉긋 솟아 싱그러운 쉼터가 되어주고 있으며, 숲이 매
우 짙고 산세가 완만하여 산책 코스로도 아주 좋다. 그러다보니 동네 사람들의 왕래와 관심이
높아 휴일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비록 동네 뒷동산이자 지역 명소의 한계를 극복
하진 못했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서울의 이름난 뒷동산으로 거듭나리라 믿는다. 그만큼
싹수가 충분한 뫼이다.

* 국사봉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 관악구 봉천동


▲  국사봉 정상과 삼각점(三角點), 그리고 푸르른 봄하늘

▲  국사봉 정상에서 서쪽(신대방3거리역) 방향 능선길 (동작마루길)

▲  국사봉 정상에서 동쪽(능고개)으로 내려가는 능선길 (동작마루길)

국사봉 정상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조망은 별로이다. 허나 나무들 사이로 동작구 서부와 관
악구 북부, 관악산 등이 시야에 들어와 그런데로 높이값은 한다.

나는 국사봉 동쪽 능선을 따라 능고개 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이 길은 동작마루길의 일원으
로 동작구의 지붕길<동시에 관악구의 북쪽 지붕길>인데, 인간이 무심히 그어놓은 관악구와 동
작구의 경계선을 따라가거나 서로 넘나든다.


▲  진달래가 연분홍 미소를 드리우는 국사봉 동쪽 능선길 (정상 방향)

▲  약간 흥분된 경사를 보이는 국사봉 동쪽 능선길 (능고개 방향)

▲  숲터널을 이루는 국사봉 동쪽 숲길 (능선길 주변)

▲  국사봉 생태연못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 계단길 (능고개)

▲  능고개에 자리한 국사봉 생태연못
부처꽃과 노랑꽃창포, 부들, 고랭이, 사초류, 버들류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연못 한복판에는 작게나마 바위섬까지 띄워놓아
살며시 운치를 더한다.

▲  능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국사봉의 위엄

국사봉 동쪽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능고개이다. 상도4동 양녕대군묘역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
는 고개로 지금은 그 밑에 4차선 국사봉터널이 뚫리면서 조금 한가해졌지만 고갯길의 기능은
크게 녹슬지 않았다. 국사봉과 상도근린공원, 동작마루길을 가려면 이 고개를 이용해야 되며,
국사봉중학교와 여러 아파트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능고개라고 해서 이곳에 왕릉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제왕이 될 뻔했던 양녕대군의 사당<지덕사
(至德祠)>과 묘역이 있어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양녕대군의 묘역만 국사봉에 있고
사당인 지덕사(至德祠)는 서울역 동쪽(도동)에 있었으며, 후손들은 지덕사 주변에 모여 살았
다. 처음에야 잘들 살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가산이 거덜나고 살림이 궁핍해져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겨울 날, 노승이 지덕사 앞을 지나다가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했다. 집주인은 흔
쾌히 방을 제공하고 자신이 먹을 죽까지 끓여서 대접을 했다. 다음날 그 사실을 안 노승은 크
게 감동을 먹고 답례를 하겠다며 주인을 데리고 지금의 능고개 자리로 데려가
'죽거든 이곳에 묘를 쓰시오' 알려주었다. 즉 기가 막힌 명당 자리를 잡아준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 집주인이 죽자 그 고개에 무덤을 쓰니 그 이후부터 자손이 번창하고 가세가 크게
살아났다고 한다. (지금도 양녕대군의 후손들은 잘나가고 있음)


▲  능고개 동쪽 능선길 (상도근린공원, 동작마루길)

▲  능고개 동쪽 능선길에서 만난 오리 솟대들
오리는 예로부터 인간 세계와 하늘을 이어주는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신성한 구역을 상징하는 솟대 기둥에 오리 등의 새 모양을
달아 하늘과의 소통을 꿈꾸었다.

▲  상도근린공원 정상에 심어진
4각형 정자

▲  상도근린공원 유아숲체험장 부근
동작마루길


▲  잘 닦여진 상도근린공원 동작마루길 (구암중교 뒤쪽)

▲  상도근린공원 생태터널 (상도로50길)

▲  구암고등학교 뒤쪽 동작마루길
키다리처럼 솟은 고등학교 건물이 그늘을 드리워준다.

▲  구암고등학교 뒤쪽 동작마루길 계단길 (성현드림숲공원 방향)

▲  푸르게 우거진 성현드림숲공원 서쪽 숲

▲  성현드림숲 향기정원 산책로

▲  성현드림숲과 하늘 높이 솟은 관악드림타운 아파트와의 어색한 조화
(철조망 바로 옆이 낭떠러지임)


능고개 동쪽 능선이자 관악드림타운 뒤쪽 산자락에는 성현드림숲공원이 닦여져 있다. 이곳은
무허가 달동네 판자집과 교회 등이 30년 이상 지저분하게 들어섰던 현장으로 2014년 관악구청
과 산림청, 지역 사람들이 협력해 그것들을 싹 밀어버리고 숲과 꽃밭을 다지면서 우울한 풍경
에서 싱그러운 풍경으로 180도 확 달라진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곳 이름을 두고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성현드림숲'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성현(聖賢)은 이
곳의 행정동명인 '성현동'으로 그 성현이란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姜邯瓚) 장군을 상징한다.
그리고 드림(dream)은 꿈을 뜻하는 꼬부랑 영어이다. 드림 대신 '성현꿈의숲','성현동 꿈의숲
'으로 했으면 참으로 크고 아름다웠을 것인데, 굳이 해괴망측한 영어로 해야 했는지 관련자들
의 대가리 속이 참으로 궁금해진다. 이 또한 이 땅의 아주 몹쓸 영어 사대주의의 더러운 폐해
이리라..

성현드림숲 남쪽에는 관악드림타운이 회색빛을 풍기며 들어차 있는데 산자락을 요란하게 깎아
서 다졌다. 하여 아파트와 접한 남쪽은 거의 아찔한 벼랑으로 이루어져 안전을 위해 철조망이
높게 펼쳐져 있다. 또한 아파트가 너무 밀착되어 있다 보니 공원에서 떠드는 소리가 아파트에
고스란히 퍼져 아파트 주민들에게 소음의 고통을 선사할 수 있다. 그러니 저녁이나 밤에 산책
할 경우 가급적 조용하게 하자.

성현드림숲을 끝으로 사자암에서 시작된 동작마루길(동작충효길6코스)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마음 같아서는 현충원 상도출입문까지 가고 싶지만 몸도 지쳤고, 두 눈도 지쳤고, 카메라도
지쳤고, 햇님의 퇴근시간 또한 임박하여 여기서 깔끔하게 철수했다.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고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비록 자주는 아니어도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너무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 성현드림숲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1712-6 (성현로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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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서울 변두리의 이색 뒷동산, 구파발 이말산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최효원묘역, 은평둘레길3코스, 약수사>

구파발 금성당, 이말산



' 구파발 이말산 봄나들이 '

이말산 조선시대 무덤군
▲  이말산 조선시대 무덤군

금성당 이말산 숲길

▲  금성당

▲  이말산 숲길

 



 

봄이 겨울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4월의 한복판에 서울의 서남쪽 끝
으머리를 잡고 있는 구파발을 찾았다.

구파발(舊把撥)은 서울 서북부 교통의 요충지로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골스런 모습
을 여실히 지니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구파발과 진관동 지역의 전원(田園) 풍경을 좋아했
고 그런 풍경이 쭉 유지되기를 바랬지만 개발 지상주의가 지배적인 이 땅의 현실 앞에 결
국 아파트 일색의 은평뉴타운으로 강제 성형을 당하고 말았다.

비록 구파발 주변에서 밭두렁과 논두렁 등의 경작지와 시골 풍경은 많이 사라졌으나 은평
뉴타운을 둘러싼 이말산과 북한산(삼각산), 앵봉산은 크게 건드리지 않아 산 속의 조그만
도시 같은 아늑한 분위기를 준다. 게다가 못자리골천, 구파발천 등의 짧은 하천이 뉴타운
내부를 흘러가고 뉴타운 북쪽에는 창릉천(昌陵川)이 흐르고 있어 은근히 배산임수(背山臨
水)의 형태까지 보인다. 그 뉴타운 한복판에 이말산이 자리해 뒷동산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남쪽 자락에 조선 후기 무속신앙의 현장인 금성당이 있다. 이번 나들이는 바로 금성당
과 이말산을 잡으러 간 것이다.



 

♠  서울에 숨겨진 옛 무속신앙의 현장, 조선시대 굿당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금성당(錦城堂) - 국가 민속문화재 258호

▲  서쪽에서 바라본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의 외경

이말산 남쪽 자락이자 은평뉴타운 우물골 2단지 한복판에 기와집 일색의 금성당이 있다. 회색
피부의 밋밋한 아파트 숲에서 고고한 전통 한옥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곳은 거의 새집처럼
보이지만 이래봬도 19세기 말에 지어진 무속신앙용 기와집으로 그 성격에 걸맞게 샤머니즘박
물관까지 겸하고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금성당은 세종의 6번째 아들인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을 주신(主
神)으로 봉안한 당집이다. 그래서 집 이름도 금성당을 칭하고 있는데, 금성대군은 2번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한 것에 잔뜩 불만을 품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순흥부(順興府, 경북 영주시 순흥면)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도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작당하다가 또 발각되어 형이 보낸 쓰디쓴
사약 1사발을 들이키고 죽게 된다. 그때 이보흠도 처단되었으며, 순흥 백성들까지 복위에 가
담했다는 이유로 대부분 학살을 당하면서 순흥 지역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순흥
고을도 강제로 폐쇄되어 풍기, 영주에 임시 통합됨)

이후 백성들 사이에서 금성대군과 단종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생겨났고 제와 굿을 지내 그들
의 넋을 달래주었다. (강원도 남부 지역은 단종을 산신으로 추앙하고 있음) 그러다보니 자연
히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무당들은 영업 차원에서 금성대군을 영험한
신으로 영입하기에 이른다. 서울에서는 진관동(津寬洞)과 망원동(望遠洞), 월계동(月溪洞)의
각심절마을에 그를 위한 금성당이 지어져 서울 토속신의 하나로 굳게 자리를 잡았다.

허나 20세기 중반 이후 무속신앙의 쇠퇴와 개발의 칼질로 망원동과 월계동 금성당이 1970년대
에 사라졌으며, 진관동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인 탓에 다행히 살아남아 계속 굿당의 역할을 수
행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구파발 지역에 은평뉴타운이 닦이게 되면서 퇴락된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철밥통 행정당국과 개발업자의 의해 가루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다행히 양종승 박사
와 뜻있는 이들이 금성당 구명에 나서면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게 되었고, 금성당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문화재청이 2008년 중요민속자료(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개발의 칼질
로부터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다.

한때 서울시는 그를 은평뉴타운 밖으로 내보내 복원하려고 했으나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그
를 옮기는 것이 영 바람직하지 않아 제자리에 2010년 복원, 정비하고 주변에 작은 공원을 닦
아서 세상에 내놓았다.
비록 복원되어 개방은 되었으나 굿당의 역할은 이미 상실된 상태라 민속촌 한옥처럼 거의 무
늬만 남은 한가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2016년 5월, 그런 금성당에게 활력을 주는 일이 생
겼다. 바로 양종승 박사가 세운 샤머니즘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양종승은 2013년 5월 사재를 털어 정릉동 국민대 남쪽에 샤머니즘박물관을 세웠다. 그는 우리
나라와 중원대륙, 히말리야, 몽골의 무속 유물 2만여 점을 보유하고 있었고 샤머니즘 관련 서
적과 영상/음향자료도 넉넉히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금성당을 없애려는 철밥통과 개발업자들을
보기 좋게 참교육시켜 금성당 보존에 크게 공헌을 한 이력이 있어 은평구청은 그에게 금성당
으로 옮길 것을 제안, 그에 따라 박물관을 이곳으로 가져와 금성당의 완전한 지킴이가 된 것
이다.
무속신앙의 현장과 그 신앙을 다루는 전시/교육 공간까지 그에 걸맞는 두 얼굴을 지닌 의미가
깊은 현장으로 보유한 유물은 많지만 공간이 매우 좁아서 극히 일부만 꺼내 본채, 행랑, 안채
, 본채 뜨락 등에 전시하고 있다.

▲  금성당 대문 (대문채)

▲  본채와 안채 경계에 놓인 오리 솟대

금성당은 인왕산(仁王山), 평창동(平倉洞) 보현산신각과 더불어 서울 지역 무속신앙의 성지(
聖地)로 1880년대 이전에 지어졌다. 지역 주민과 무당들이 무속신앙을 벌이고자 지은 공간으
로 조선 때 무악재에서 구파발까지 많은 무속 당집이 있었는데 서울로 들어오는 명/청나라 사
신과 반대로 중원대륙으로 가는 조선 사신의 안녕을 빌고 악의 기운을 없애는 의미에서 굿을
지냈다. 그러다보니 금성당은 나라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금성대군의 생일인 음력 3월 24일에 마을의 대동단결과 나라의 안녕을 위한 당굿을 열어 그의
넋을 기렸으며 왕년에는 서대문과 왕십리 등 서울의 유명한 무속인과 악사들이 문턱이 마르고
닳도록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뉴타운 개발 이전까지 당지기가 집을 지켰고 굿판도 계
속 이루어졌다.

금성당의 구조는 본채와 안채, 아래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금성대군과 여러 신
이 봉안되어 있고, 동쪽에 'ㄱ'자의 안채를 두어 금성당을 관리하는 당지기와 시봉자(侍奉者)
가 생활했다. 안채는 중부지방의 흔한 기와집 형태이나 동쪽 방을 '田'자 형태로 크게 지은
것은 금성당만의 특징이다.
본채에 있던 무신도<巫信圖, 금성도(금성대군의 영정)>와 무구(巫具)류, 제사도구 등은 보존
처리를 위해 서울역사박물관에 가 있으며 불화(佛畵)의 명가로 유명한 만봉(萬奉)의 제자 조
영희가 그린 금성도의 복사본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금성당 본채와 행랑채

대문채를 들어서면 왼쪽(북쪽)에 본채와 행랑이 있다. 본채는 마루로 이루어져 있어 굿과 제
사를 지내기에 좋으며, 대청 뒤쪽에는 벽감(壁龕)을 두어 금성대군(금성님) 등을 봉안했다.
현재 금성도(금성님) 등 이곳의 오랜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가 있으며, 샤머니즘박물관 유
물과 금성도 사본이 본채와 행랑채에 담겨져 있다. 허나 그들 내부는 매주 목/금(10~17시)에
만 잠깐씩 문이 열리며, 금성당 건물과 뜨락, 안채 서쪽과 마루에 놓인 유물들은 요일에 상관
없이 관람이 가능하다. (금성당 입장은 보통 17시까지, 입장료 없음)

나는 그런 사연을 알지 못한 채, 온 터라 전시 유물은 만나지 못했다. 금성당은 매주 문이 열
려있지만 정작 박물관의 중심인 본채와 행랑 내부는 1주에 딱 이틀만 만날 수 있는 비싼 존재
였던 것이다. 하여 여러 달 이후 금요일에 다시 인연을 지어 내부 유물까지 싹 살폈다.


▲  굳게 닫혀진 금성당 행랑채와 본채

▲  안채 서쪽에 기대어 선 샤머니즘박물관의 무속 유물들
개성 넘치게 생긴 저 작은 존재들은 몽골이나 히말리야, 티벳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  'ㄱ'자 모습의 금성당 안채

본채 맞은편에는 아래채가 있다. 현재 관리사무실로 쓰이고 있는데 그 옆구리를 지나 동쪽으
로 가면 안채 뜨락과 안채 정면이 모습을 보인다.
안채는 금성당을 관리하는 당지기와 시봉자가 머물던 공간으로 지금은 박물관 사무실과 자료
실(교육실), 박물관 전시공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허나 그날은 박물관 공개일이 아니므로 전
시 공간으로 쓰이는 부엌 등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민속유물이 있는 마루만 개방되어
있다. 그러니 그날 만난 박물관 유물은 안채 마루와 안채 서쪽 벽에 있는 석조 유물 뿐이다.

▲  금성당 아래채(왼쪽)와 대문채

▲  도자기와 여러 민속유물이 놓인
안채 마루 (왼쪽이 박물관 사무실)


▲  안채 뒤쪽 장독대와 부뚜막, 그리고 낡은 가마솥

안채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장식용으로 놓여진 장독대들이 있다. 그 옆에 부뚜막이 있
는데 금성당이 바쁘게 움직이던 시절, 부엌과 여기서 음식을 했으며, 누렇게 뜬 저 가마솥을
거쳐간 음식과 국거리는 동해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많았다. 허나 이제는 은퇴하여 뒷방 마님
처럼 아주 잉여로운 신세가 되었다.


▲  안채 뒤쪽 (굴뚝과 돌로 다져진 화단)
금성당은 보이지 않는 뒷통수 부분도 적지 않게 신경을 썼다. 화단을 닦아서
나무와 꽃을 심었고, 본채 뒤쪽에는 샤머니즘박물관에서 수집한 여러
스타일의 장독대들이 놓여져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  본채 뒤쪽에 가득 널린 장독대들 ①

▲  본채 뒤쪽에 가득 널린 장독대들 ②

▲  봄이 내려앉은 금성당 동쪽 돌담

▲  금성당 본채의 뒷모습

금성당 주변은 아늑하게 공원이 닦여져 있다. 그 좌우로 은평뉴타운 우물골2단지가 가득 들어
앉아 아파트 속의 이색 공간을 자아내고 있는데 다른 아파트단지와 달리 녹지 공간이 많고 바
로 뒤에 이말산이 있어 주변이 그리 번잡해 보이지는 않는다.

* 금성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75-836 (진관2로 57-23, ☎ 02-389-6522)
*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조선시대에 거대한 공동묘지 속으로, 이말산(莉茉山)

▲  최효원 묘역 (해주최씨와 남양홍씨 묘역)

금성당을 둘러보고 이말산의 품으로 들어서고자 은평메디텍고등학교(은평공고) 뒤쪽으로 이동
했다. 그 구석에도 아파트(우물골2단지 7블록)들이 들어차 있는데 그 동쪽 산자락을 올라서니
말끔한 모습의 최효원 묘역이 마중을 나온다.

묘역의 주인공인 최효원(崔孝元, 1638~1672)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아버지이
다. 숙빈최씨와 영조는 많이들 알지만 정작 그들의 뿌리인 최효원은 인지도가 극 밑바닥이라
아는 이가 적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그는 해주최씨 집안으로 자는 의경(義敬)이며, 아버지는 최태일(崔泰逸), 어머지는 평강장씨(
平康張氏)이다. 남양홍씨인 홍계남의 딸과 혼인했으며, 무관으로 관직에 진출해 선략장군 행
충무위 부사과(宣略將軍 行忠武衛 副司果, 종6품)까지 지내다가 34살에 사망했다.
그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여 막내딸은 궁궐 무수리로 들어갔다. 그
녀는 숙종의 왕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잠시 폐위의 고통을 받자 눈물을 흘리며 그의 복귀
를 빌었는데, 그 모습이 우연히 숙종의 눈에 띄면서 예민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 인
연으로 연잉군<延礽君, 영조>를 낳게 되었고 희빈장씨의 모진 구박을 이겨내면서 숙빈최씨로
승급된다.

1734년 영조는 외할아버지인 최효원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면서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손질했다. 딸과 외손주 덕분에 그의 존재와 무덤이 적게나마 호강을 누리게 된 것이다.


▲  최효원과 남양홍씨 합장묘 (오른쪽이 홍계웅 묘, 왼쪽이 홍계남묘)

최효원묘는 묘비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1쌍을 지니고 있다. 예전에
는 양석(羊石)도 1쌍 있었으나 1988년경 어느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이 그 무거운 돌덩이를
훔쳐가 버렸다.
묘비는 지붕돌을 갖춘 2면비로 내용은 영조가 친히 쓴 것이며 글씨는 당시 명필로 꼽히던 서
평군 이요(西平君 李橈)가 썼다. 이요는 왕족 출신으로 학문이 깊고 음악과 글씨에 능했는데,
영조(英祖)의 신임이 두텁자 부정하게 재산을 모아 사치향락을 일삼기도 했다.

최효원 묘역에는 총 6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뿐 아니라 장인(홍계남)
과 처남(홍계웅)의 묘도 같이 있다. 이는 최효원이 처가 묘역에 묻히면서 두 집안(해주최씨+
남양홍씨)이 같이 있게 된 것으로 장인과 처남 무덤 사이에 아주 눈에 띄도록 큼지막하게 자
리해 있어 딸과 외손주의 덕을 톡톡히 봤음을 알려준다. (최효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묘는
여기서 가까운 불광2동에 따로 있음)
이들 무덤은 묘비부터 상석, 향로석, 망주석까지 대체로 17~18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후손들의 정성이 너무 과한 탓에 무덤 밑도리에 20세기 스타일의 호석(護石)이 둘러져
옛 무덤으로서의 멋이 다소 떨어졌다. 윗도리는 17~18세기 옷인데 밑에는 20세기 옷을 입혀놓
았으니 그게 어디 어울리겠는가?

* 최효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85

      ◀  홍계웅(洪繼雄)과 김화김씨 묘
홍계웅은 홍계남의 아들로 최효원의 처남이자
숙빈최씨의 외삼촌이 된다. 최효원보다 낮은
봉분(封墳)과 머리가 둥근 묘비, 그리고 상석
이 전부인 단출한 모습이다.

      ◀  최수강(崔壽崗)과 김해김씨 묘
최수강은 최효원의 손자이자 최후의 아들로 영
조 시절에 무관을 지냈다. 왼쪽 비석은 최수강
의 아들인 최진해(崔鎭海)와 해풍김씨의 묘비
이다.

▲  늘씬하게 생긴 최수강 묘비

▲  최후(崔厚) 묘비


▲  최후와 순흥안씨 묘
최후는 최효원의 아들이자 숙빈최씨의 오라버니로 외할아버지(홍계남) 무덤 바로
앞에 있다. 묘비와 상석, 향로석, 망주석까지 갖추고 있어 최효원 묘 못지
않은 규모를 지녔다.

▲  최효원의 장인인 홍계남(洪繼男) 묘비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탄 것일까? 다른 비석에 비해 피부가 너무 검다.

▲  장대한 세월에게 목을 빼앗긴 가련한 동자석(童子石)

최효원 묘역을 둘러보고 본격적으로 이말산 더듬기를 시작했다. 이말산은 구파발역 동쪽에 자
리한 해발 132.7m의 야트막한 뫼로 군부대가 있는 북쪽 끝을 제외하고 모두 은평뉴타운에 감
싸여 있어 자연히 은평뉴타운의 포근한 뒷동산이 되었다.

산의 이름은 말리화(茉莉花)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리(이말)는 말리화
차, 쟈스민차, 향편으로도 불리며 말리화의 향을 잎차에 스며들게 하여 만든 것이 화차(花茶)
가 된다.
허나 말리화차가 외래종인 것을 감안하면 이 산에 정말 그것이 많았는지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말리화를 재배하는 공간이 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말산에 안긴 무덤 중
숙종~영조 시절에 활동했던 이영수의 묘가 있는데 그 묘비에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다른 이말산
(李末山)이라 쓰여 있어 말리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에 회의감을 던지게 한다.
그런데 영조 시절 무덤인 이세철 묘비와 홍세태(洪世泰)의 묘지명(墓誌銘) 등에는 이말산(茉
莉山)이라 나와있어 18세기부터 한자가 슬쩍 바뀐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두(吏讀)처럼 순
우리말을 한자의 음만 가져와 표기한듯싶다. 참고로 지금 이말산에는 말리화는커녕 비슷한 꽃
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말산은 1977년 진관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시민공원의 역할을 했으나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꾸며진 것은 은평뉴타운 개설 이후이다. 둘레길 유행에 따라 은평구는 그 산에 은평둘레길3코
스인 이말산 묘역길(거리 2.7km)을 닦았는데 그 길은 구파발역에서 이말산 주능선을 가로질러
은평한옥마을까지 이어진다.


▲  묘비와 상석만 덩그러니 남은 무덤
무덤 봉분은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밀어버리면서 졸지에 산길이 되어버렸다.


조선 때는 한양도성(서울) 밖 10리 이상부터 무덤을 쓸 수 있었는데, 북서쪽은 이말산, 북동
쪽은 초안산(楚安山, 도봉구 창동, 노원구 월계동 ☞ 관련글 보러가기)이 그 적격지였다. 게
다가 이들은 앞뒤로 하천이 흘러 은근히 배산임수의 형세를 이루고 있어 무덤 선호지로 인기
가 대단했다.
그러다보니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자인 은언군(恩彦君) 같은 왕족부터 해서 양반사대부, 중
인, 상궁, 내시,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이말산에 뼈를 묻으면서 지금까지
수습된 무덤만 1,700여 기에 달한다. (은언군묘는 파괴되어 사라짐) 이중 무연고가 313기, 나
머지는 연고가 있으며, 묘비와 문인석, 망주석, 상석 등의 석물도 13종 1,488기가 확인되어
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이자 살아있는 조선시대 무덤 박물관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비슷한 성격의 초안산은 조선시대 무덤들이 몰려있는 곳을 중심으로 국가
사적으로 애지중지되고 있고, 각심절 마을에 있는 정간공 이명(貞簡公 李蓂) 묘역은 지방문화
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나 이말산은 그보다 무덤도 더 많고 그에 못지 않은 가치를 지녔음에
도 어떠한 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초안산과 더불어 내시(내관) 무덤이 많은 곳으로 꼽히며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무덤
과 무덤 석물이 공존하고 있어 무덤 답사지로는 아주 좋다. 또한 산 곳곳에 무덤이 널려있고
심지어 산길에도 파괴된 무덤의 잔해들이 즐비해 산책의 흥미를 유발시키며 여름에는 납량(納
凉) 놀이를 벌이기에도 좋다. 어두컴컴한 산길을 걷다가 갑자기 무덤이나 인상을 쓴 문인석,
동자석이 툭 튀어나온다면 정말로 염통이 제대로 수축될 것이다.


▲  낙엽에 묻혀 고통받고 있는 상석과 향로석
저런 꼴을 보면 무덤을 쓰는 것도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후손의 관리가
끊기면 바로 게임 끝나는 것임)

▲  세상을 등지며 꺼꾸로 엎어진 문인석(文人石)
자신을 살피지 않는 무심한 세월과 세상에 대한 원망의 표현일까? 얼굴을
땅에 묻고 세상을 등진 채, 엎어져 있다.

▲  봄이 뿌려지고 있는 이말산 산길 (이말산 동남쪽 자락)

▲  나란히 목을 잃은 동자석들 ①
망나니의 칼과 세월의 칼날은 모두 목만 취하는 모양이다. 이 세상에 목을 취해야
될 썩은 작자와 무리들이 적지 않거늘 왜 그들은 건드리지 않고
죄없는 저들만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  나란히 목을 잃은 동자석들 ②

▲  이말산 능선길 (북쪽 방향)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①

이말산은 흙산이라 산길과 능선길이 거의 부드럽다. 산세도 일부를 제외하면 느긋한 편으로
구파발역(3호선)과 진관동주민센터, 진관초교, 약수사, 연화사, 우물골2단지7블록, 삼천사/
진관사입구 정류장 등에서 접근하면 되며, 구파발역에서 산의 동북쪽 끝 봉우리까지 30~40분
이면 충분하다. (거기서 부근으로 하산하면 40~50분이면 끝)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②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③
산길 주위로 방치된 옛 무덤들이 적지 않다. 하여 밤에 오면(달이 뜨지 않은
밤이나 비오는 날 밤) 염통이 제대로 쫄깃해질 것 같다.

▲  흙과 나무에 깔린 무덤 상석

▲  머리가 덥수룩한 옛 무덤들
묘비는 사라졌지만 상석과 향로석은 잘 남아있다.

▲  이말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족두리봉
북한산이 남성적인 뫼라면 이말산은 귀여운 여동생 같은 작고 아늑한 뫼이다.



 

♠  이말산 마무리

▲  무덤이 떼거지로 나타나다 (묘비 1기와 상석 6기)

이말산 동북쪽 끝 봉우리에는 네모난 쉼터와 약간의 운동시설이 있다. 여기서 북쪽과 동쪽은
군부대로 막혀있어 서쪽(진관초교)으로 내려가거나 남쪽 능선길로 돌아나가야 되는데, 일몰까
지는 아직 여유가 넘쳐 남쪽 길로 다시 나가면서 옛 무덤들을 보물찾기 하듯 더 찾아보기로
했다.
남쪽을 바라보며 능선길을 거닐다 보니 앞서 보이지 않던 무덤들이 쏙쏙 시야에 걸려든다. 특
히 제각말5-3단지 뒤쪽인 동쪽 산자락에 여러 기가 몰려있는 무덤군들이 여럿 나타나 나에게
적지 않은 흥분감을 주었다. 역시 한쪽 방향으로만 향하면 놓치는 것이 많은 법이다.


▲  이말산 동쪽 자락 무덤군
대부분 묘비(묘표)를 지니고 있다. 그들 중 1기는 문인석까지 지니고 있어
잘나가던 집안의 묘역임을 알려준다. (누구 묘역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음)

▲  장대한 세월에 꼬꾸라진 묘비
그를 거느렸던 무덤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묘비만 뿌리가 뽑힌 채,
자빠져 있다. 무덤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저 꼬라지가 되어 버리니
굳이 많은 돈을 들여 사후(死後) 흔적을 남기는 것도 다 부질없다.

▲  장대한 세월에게 제대로 깨지고 요절난 묘비들

▲  칠원윤씨 윤용(尹鎔) 묘역

윤용은 16~17세기 인물로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631년 이곳에 무
덤을 썼으며<묘비에는 이곳 지명이 '양주군 신혈리 택사(神穴里 澤寺)'로 나옴> 부인 예안이
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다. 묘비(묘표)와 상석, 조그만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을 갖추
고 있으며, 후손들의 손길이 여전하여 호석도 새로 갖추었다.


▲  칠원윤씨 윤응린(尹應麟), 하동정씨 부부묘
윤응린은 16~17세기 인물로 자헌대부 형조판서를 지냈다. 비석과 호석은
20세기에 후손들이 새로 갈아넣은 것들이라 장대한 시간의 무게는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  칠원윤씨 윤용, 윤응린 묘역 전경

▲  상선(尙膳) 노윤천(盧允千) 묘역

노윤천은 16세기에 활동했던 내시(내관)이다. 1545년 명종(明宗) 즉위 때 승전색(承傳色)으로
써 왕명을 전달한 공이 있어 그해 8월, 가자(加資)되었으며 1546년 1월, 위사원종공신(衛社原
從功臣)에 책록되기도 했다.
세월의 불도저 같은 흐름 앞에 무덤 봉분은 사라지고 묘표(묘비)와 상석, 문인석 1기가 남아
있으며, 향우측에 비슷한 모습의 묘표가 있어 이곳이 그의 선영(先塋)이었음을 알려준다. 묘
비는 피부가 많이 손상되어 대부분의 글씨는 확인할 수 없다.

▲  무심한 세월 속에서도 표정 하나
잃지 않은 노윤천 묘역 문인석

▲  정체성을 잃은 어느 상석
무덤 상석이 졸지에 잠깐 쉬었다 가는
산길 쉼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  녹음이 짙어가는 이말산 서쪽 능선길
능선길을 거닐며 무덤과 석물을 찾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 이번 이말산 더듬기에서
대략 찾아낸 무덤만 어림잡아 200기는 넘을 것이다.


▲  방공호 시설이 있는 이말산 정상

이말산 정상은 산 서쪽 부분에 있다. 정상(132.7m)은 평평한 넓은 공간으로 방공호 등의 군사
시설이 있으나 이곳이 공원으로 해방되면서 버려진 상태이며 은평뉴타운과 앵봉산, 북한산 향
로봉 등이 시야에 보이나 수목(樹木)이 울창하여 조망의 깊이는 별로이다.


▲  소탈한 모습의 이말산 정상 표목(標木)

▲  개나리들이 격하게 반겨주는 약수사 방면 산길 ▼



▲  이말산 서북쪽 자락에 있는 약수사(藥水寺)

이말산 정상에서 구파발역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깜찍하게 손짓하는 개나리들에게 마음이 끌
려 약수사로 길을 틀었다.
4~5분 정도 내려가니 산과 아파트 경계에 자리한 약수사가 마중을 나온다. 이 절은 고색이 아
직 여물지도 못한 20세기 후반 현대 사찰로 20여 일 정도 남은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을
위해 벌써부터 연분홍 연등으로 경내를 곱게 다듬은 상태였다. 그 오색 연등에 순백 벚꽃까지
어우러져 조촐하게 별천지를 구가하고 있어 이말산에서 많은 것을 보고 담느라 힘겨운 두 눈
의 피로감을 크게 덜어준다.


▲  오색 연등으로 정신이 없는 약수사 경내
약수사를 끝으로 4월 한복판에 찾아간 이말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이말산, 진관근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74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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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의 상큼한 뒷동산, 호암산 봄나들이 <호암산성, 석구상, 제2한우물, 신랑각시바위,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 둘러보기 (호암산성, 석구상, 한우물, 신랑각시바위, 칼바위 등)



' 금천구 호암산 봄나들이 '

호암산

▲  호암산

호암산 신랑각시바위 제2한우물터

▲  호암산 신랑각시바위

▲  호암산 제2한우물터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끝 무렵, 서울 서남쪽에 누워있는 호암산(虎巖山, 393m)을
찾았다.

호암산은 나의 오랜 즐겨찾기 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아 나의 마음을 꾸준하게
비추고 있다. 20대의 한복판이던 2002년 가을에 첫 인연을 지은 이후, 무려 100회 이상을
오갔으나 뒤를 돌아서기가 무섭게 그가 간절해진다.
나의 마음을 오랫동안 들었다 놓은 호암산은 서울 금천구(衿川區)와 관악구, 경기도 안양
시에 걸쳐있는 뫼로 산세(또는 산에 있는 바위)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이
름을 지니게 되었다. 금천구 시흥동(始興洞) 지역을 중심지로 삼았던 옛 금천<衿川, 시흥
(始興)> 고을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주산(主山)으로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뫼이나 풍수지리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더
불어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오랫동안 인식되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그들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호암산 밑에 절(호압사)을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
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호암산에는 신라 중기에 조성된 호암산성을 비롯하여 한우물과 제2한우물터, 석구상 등의
늙은 문화유산과 호압사(虎壓寺), 약수사, 불영암 등의 오래된 절, 서울에 대표적인 천주
교 성지로 꼽히는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가 있으며, 호암산폭포와 시흥계곡, 호암산잣나
무산림욕장 등의 싱그러운 자연 명소를 품고 있다.
또한 호랑이를 닮은 바위 뫼에 걸맞게 정상부와 서남쪽 능선, 돌산 능선에 잘생긴 바위들
이 잔뜩 포진해 있어 바위 구경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조망도 일품이라 서울의 상당수 지
역과 북한산(삼각산), 안양, 광명, 부천, 인천, 서해바다, 심지어 멀리 파주와 개성 지역
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호암산 정상부와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잠시 각박할 뿐, 그 잠깐의 고생만 감내하면 부드
러운 능선길과 국보급 조망이 두 망막과 마음, 다리를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 서울둘레길
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가 호암산 자락을 가로질러 흘러가며, 잣나무산림욕장을 중
심으로 호암늘솔길이 싱그럽게 닦여져 있어 산은 비록 작지만 매우 알찬 팔방미인 뫼이다.
이러니 내가 호암산에게 단단히 퐁당퐁당 빠진 것이다.



 

♠  석구상과 호암산성(虎巖山城) 북문터 주변

▲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

이번 호암산 나들이는 호암산 북쪽 자락에 안긴 약수사(藥水寺)에서 시작했다. 약수사를 둘러
보고 서울둘레길5코스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에서 남쪽 산길을 통해
민주동산(깃대봉)과 호암산 정상으로 이동했다. (약수사와 호암산 정상은 별도의 글에서)

호암산 정상에 올라 발 아래 펼쳐진 서울과 주변 지역을 굽어보며 일품 조망을 배불리 누리다
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넘어갔다. 호암산에 오면 꼭 남쪽 봉우리는 들리는 편으로 그곳에는
한우물과 석구상, 호암산성 등의 늙은 명소가 깃들여져 있고, 불영암 등의 절과 신랑각시바위
, 칼바위, 호암산폭포 등의 자연 명소도 듬뿍 들어있어 그야말로 호암산의 보물창고 같은 곳
이다.

호암산 정상부에서 남쪽 봉우리까지는 부드럽게 이어진 서남쪽 능선길의 연속으로 그 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산길 곳곳에는 이름 없는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안양시와 수리산(修理山)
호암산과 삼성산, 수리산 사이에 극락정토를 뜻하는 안양시(安養市)가
포근히 뉘어져 있다.

▲  부드럽게 펼쳐진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

▲  호암산성 북문터 (북쪽 모습)

호암산 서남쪽 능선을 더듬어 남쪽 봉우리로 올라서면 금줄이 둘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석구상 북쪽으로 근래 이곳이 호암산성 북문(北門)터로 확인되면서 북문터 보존을 위해 금줄
을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그 서쪽에 계단식 우회길을 내었다.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들어서면 꼭 거치던 곳이었는데, 그동안 밟고 지나갔던 그곳이 북문터
였다니 새삼 놀라고 말았다.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모습)

호암산 남쪽 봉우리(347m) 정상부에 호암산성의 흔적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성(石城)으로
조성되었는데, 축성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안쪽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
)을 사용했다.
예전에는 산성 둘레를 약 1,250m, 남아있는 길이는 300m로 보았으나 2018년 이후 새로운 곳이
발견되어 산성 관련 자료가 크게 업데이트되면서 산성 둘레는 약 1,547m, 남아있는 것은 약
1,016m, 산성 면적 133,790㎡로 확장되었다.

1990년 봄, 호암산성과 한우물 일대를 조사하면서 우물터 2곳과 건물터 4곳이 발견되었고, 무
려 6,500여 점에 이르는 토기와 다양한 유물(청동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이 쏟
아져 나왔는데, 특히 신라 중기 것이 많이 나왔다. 하여 신라 중기인 6세기 말~7세기 초에 군
사기지 및 행정 치소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672년에 쌓았다는 설
도 있다. 그 시절 신라는 당나라를 때려잡으며, 옛 고구려(高句麗, 고구리) 땅의 일원인 요동
(遼東)과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산성 서쪽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바라보이고, 북쪽으로 한강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잡
힌다. 그래서 서해바다와 한강, 내륙을 잇는 요충지로 중요시되었으며, 양천고성(陽川古城,
서울 가양동)과 행주산성(幸州山城), 오두산성(파주시)를 잇는 거점 성곽으로 보고 있다.

고려 때는 한강과 서해바다를 살피는 요충지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그
런데로 밥값을 했다. 특히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
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에서 왜군을 때려잡은 권율(權慄)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자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을 쳤는데,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면서 서울 수복 작전을 펼쳤다. 호암산은 서
울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로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
름이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현재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
성은 관리 소홀과 대자연의 무심한 장난, 덧없는 세월의 무게까지 더해져 서서히 녹아내렸고,
산꾼들의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산성 내에 늙은 존재로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 건물터, 석구상이 있으며, 불영암
이란 작은 절이 있다. 성곽은 동벽이 그나마 잘 남아있고, 북문터 주변과 서문터 주변, 남문
터 주변에 조금씩 남아있다.
특히 2018년 이후 발굴조사에서 석구상 주변에서 북문터, 석수역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능선에
서 남문터, 불영암 남쪽 가파른 곳에서 서문터가 새롭게 확인되어 3개의 성문(城門)이 있었음
을 알려주고 있으며, 대자연에 묻힌 채, 강제로 숨바꼭질을 하던 성벽 흔적을 많이 건져내었
다. 이들 성문터와 성벽 흔적은 예전부터 수없이 지나쳤던 곳인데 그곳이 산성의 흩어진 흔적
이자 살점이었던 것이다.

호암산성은 석구상과 한우물, 제2한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서울 호암산성터'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343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호암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8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높은 곳에는 호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는 석구상이 있다. 사방을 난간
으로 두룬 기단 위에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엽게도 앉아있는데, 지금은 석구상으로 통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광화문(光化門)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와 호암산 기
운으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
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
南七里)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석구상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석구상의 위엄

석구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해태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해태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
습 같기도 하나 양과도 비슷해 보이며,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한다. 하여 보면 볼수
록 답이 없는 기이한 석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는 길
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랑지와 비슷해 손으
로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후기로 보인다. 그는 정확
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으며, 그를 만든 이유도 속시원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산꾼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성 터져 나오며,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적지 않게 웃음을 준다.


▲  석구상의 귀여운 뒷부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  석구상 남쪽 호암산성 동벽

석구상을 지나면 인공티가 팍팍 느껴지는 약간 부풀어오른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이 바로 호암
산성의 동벽(東壁) 흔적이다. 예전에는 수풀에 감싸여 있었으나 성곽을 무수히 깔고 앉던 수
풀을 싹 쳐내고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으며, 석구상 바로 남쪽 성곽에는 나무데크길을 씌워
놓아 헝클어진 성곽을 보호한다. 그리고 성곽 서쪽에는 제2한우물과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산
길이 넓게 자리한다.

크고 견고했던 성곽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2m 내외로 움푹 낮아졌고, 산길로 변해버린
산성 동벽에는 성돌이 이리저리 박혀 단단한 성곽을 이루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숲 그늘에 자리한 호암산성 동벽
고된 세월에 많이 초췌해진 산성 동벽이 그런데로 산성의 모습을
풍기며, 건물터 부근까지 이어진다.

▲  호암산성 동벽 (남쪽 방향)

앉은뱅이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1.5km 구간 중 석구상에서 건물터 동북쪽 벼랑에 이르는 동벽
이 그나마 상태가 좋다. 비록 산성은 헝클어진 상태이나 성곽 밑은 크게 각이 진 벼랑급이라
성곽길을 음미하면서 걸을 경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안전시설도 전혀 없음)


▲  호암산성 동북쪽 벼랑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호암산성 건물터 동북쪽에는 일품 조망을 지닌 큼직한 바위들이 여럿 있다. 이곳은 호암산성
동벽 구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바위 너머로 호암산 동남쪽 능선과 장군봉, 삼성산
(三聖山), 관악산(冠岳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은 정말 예술이다.
허나 장미꽃의 가시처럼 바위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보기만 해도 염통을 제대로 쫄
깃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산성을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하늘의 요새 같은 낭떠러지라 그 존재
자체로도 인공적인 성곽보다 훨씬 든든하다.



 

♠  제2한우물터에서 호암산성 남문터까지

▲  호암산 제2한우물터

석구상, 북문터에서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서남쪽 능선길을 3~4분 정도 가면 제2한우물터와 건
물터가 황량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호암산성 동벽 산길로 가도 나옴)

제2한우물터는 남북 18.5m, 동서 10m 이상, 추정 깊이 2m에 이르는 커다란 사각형 우물 유적
이다. 길이 50cm, 너비 35cm, 높이 25cm 크기의 화강암을 '臣'자 모양으로 10단(높이 1.75m)
까지 쌓았는데, 2번에 걸쳐 15cm 정도 물려 쌓은 형태가 확인되었다.
우물 바닥과 석축 쌓기 방식, 석재의 크기와 모양, 전체적인 모양새 등은 북서쪽 밑에 있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비슷하며, 여기서는 신라 중/후기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제 숟가락이 햇
살을 보았는데, 숟가락에는 정말 고맙게도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내용은 '仍伐內力 只來(잉
벌내역 지래)..'로 여기서 잉벌내(仍伐內)는 고구려 시절 금천 지역의 지명으로 여겨지는 잉
벌노(仍伐奴)와 비슷해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6세기 이후에도 그 이름은 유지했던 것으로 보
인다.


▲  상큼하게 봄옷을 입은 제2한우물터 (남쪽에서 본 모습)

산꼭대기에 커다란 우물이 1개도 아닌 2개씩이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이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큰
우물을 2개나 둘 정도로 물이 풍부했음을 알려준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장난으로 제대로 헝클어져 땅
속에 잠겨있던 것을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 꺼내놓았는데, 복원된 제1한우물과 달리 복원은
하지 않고 잡초가 무성한 자연 상태로 두고 있어 조금은 우울한 모습이다. 우물터 곳곳에는
우물을 구성하던 돌이 널려있으며, 복원 계획은 예전부터 나오고는 있으나 구체적인 것은 없
다. 허나 제1한우물이 복원되었으니 제2한우물은 어설프게 복원하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진리라고 본다. 대자연의 일부로 녹아내린 현재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으며 현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  옆에서 바라본 제2한우물터
돌로 다진 석축이 없었다면 자연산 늪지대로
봐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만큼
이곳은 대자연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  제2한우물터에 모여있는 수분들
비록 흔적만 남은 늙은 우물이나 비가 내린 이
후에는 약간씩 물이 고여 이곳의 본분을 조금
이나마 회복한다.
하지만 우물터는 제대로 흩어진 상태라 식수는
곤란하며, 우물터 주변 수풀들이 이 물에 의지
해 살아가 늪지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  호암산성 건물터

제2한우물터 동쪽에는 건물터가 수풀을 뒤집어 쓰며 조용히 누워있다. 여기서는 시기가 다른
건물터들이 중복되어 확인되었는데, 제일 처음에는 기단(基壇)을 지닌 건물이 자리했다. 이
건물은 신라 중/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세월에게 잡혀간 이후, 23x27m 범위에
서 기존 건물터의 초석을 옮기고 평지를 닦은 다음, 새로운 건물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신라 후기 기와편과 글씨가 새겨진 기와 등, 많은 기와들이 햇살을 보았으며, 축조
시기가 아리송한 문비석(門扉石)과 네모꼴의 석렬, 외곽의 자취가 확인되었으나 이곳에 깃든
흔적들이 워낙 복잡하여 건물터의 정확한 규모와 형태,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다만 이곳이 호암산성 내부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산성을 관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장
수와 군사들의 숙소로 여겨진다.


▲  호암산성 건물터 주춧돌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건물터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오랫동안 상실한 채,
윗도리가 묵직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호암산 신랑각시바위(사랑바위)

제2한우물터에서 석수역 방향 서남쪽 능선길을 6~7분 내려가면 호암산성 남문터가 나온다. 이
곳 직전 서쪽에 천하를 굽어보는 조망대가 있는데, 남문터는 잠시 접어두고 그 조망대로 내려
가보자. 한참 내려갈 것도 없이 성벽터 경사에 닦여진 계단만 내려가면 끝으로 거기서 오른쪽
(북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신랑각시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반갑게 눈인사를 건넬 것이다.

호암산은 호랑이를 닮은 바위 뫼에 걸맞게 잘
생긴 바위와 벼랑이 많다. 신랑각시바위도 호
암산을 수식하는 명품 바위의 하나로 사람 손
과 발이 닿기 어려운 벼랑에 우뚝 솟아 금천구
를 비롯한 천하를 굽어본다.
그는 오랫동안 사랑과 혼인, 심지어 아들까지
얻게 해준다는 특별한 바위로 지역에서 명성이
자자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아련히 전하
고 있다.

▲  신랑각시바위 조망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익히기 전인 한참 옛날, 금천 고을(시흥동)에 잘생긴 총각과 아리따운 낭
자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집안은 대대로 원수
관계라 부모가 쌍수를 들고 교제를 반대했다. 하여 서로 불이 난 자식들을 떼어놓고자 다른
곳에 혼인을 시키려 했고, 이에 뚜껑이 뒤집힌 낭자는 깊은 밤에 가출하여 호암산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

이를 늦게 안 총각은 낭자를 찾으러 서둘러 호암산으로 올라갔는데, 이미 날은 어두워진 상태
였다. 허나 다행히도 산중턱 절벽 위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낭자를 발견, 그녀에게 달려가 서
로 격하게 껴안으며 하염없이 눈물즙을 짰다.
그들은 달님에게 세상 끝까지 함께 하겠다며 기도를 올리고 밤을 지샜는데, 이를 엿들은 달님
은 신통력을 부려 서로 마주보며 우뚝 선 바위로 만들어버렸다. 달의 친절한(?) 배려 덕에 영
원히 같이 있게는 되었으나 문제는 돌이라는 것. 혼인은 커녕 움직일 수도 없고, 숨도 못쉬며
, 아주 중요한 예민한(?) 짓도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해피엔딩인지 그 반대인지 솔직히 판단
이 서질 않는다.

어쨌든 그 전설로 인해 이 바위는 사랑바위, 신랑각시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호암산
그늘에 사는 선남선녀들이 이곳을 찾아 손을 맞잡고 사랑을 고백하면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한
다. 또한 혼인을 하여 여기서 기도를 하면 옥동자까지 얻을 수 있었다고 하며, 늙어 죽을 때
까지 백년해로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물론 전설의 내용처럼 그들이 바위로 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집을 뛰
쳐나와 여기서 사랑을 굳게 다짐하고 인근 산속이나 머나먼 곳에서 살림을 차려 잘 먹고 잘
살았거나 아니면 현실을 비관해 같이 벼랑 아래로 뛰어내린 것으로 보이며, 그 사연이 바위에
씌워져 사랑과 관련된 바위로 포장되었을 것이다.


▲  확대해서 바라본 신랑각시바위의 위엄
호암산 서남쪽 능선 서쪽 벼랑에 자리해 있어 서쪽과 북서쪽이 확 트여있다.
하여 일품 바위와 함께 일품 조망까지 덩달아 누릴 수 있다.

▲  신랑각시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동과 독산동, 가산동 등 금천구 지역과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시 지역이 흔쾌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호암산성 남문터 주변 서쪽 남벽(南壁)터

신랑각시바위 동남쪽에는 호암산성 남문터가 있다. 신랑각시바위 관람용으로 지어진 조망대도
산성 성벽터에 닦여진 것으로 이곳은 석수역에서 호암산, 삼성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산꾼
들의 발길이 무척 잦다.
나도 이 코스를 여러 번 탔었으나 산성의 흔적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근래 발굴조사에
서 교묘하게 숨바꼭질을 벌이던 남문터와 주변 성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그들을 보존하
고자 기존 산길에는 금줄을 치고 서쪽에 나무데크 계단길을 내었으며(남문터 동쪽에도 오르는
길이 있음) 호암산성 안내문과 안내도를 설치했다.

▲  일부만 남아있는 호암산성 남벽

▲  남문터 서쪽 남벽터

푸르게 우거진 나무와 황토색 흙 사이로 고된 세월에 지친 남벽 성돌이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며 이곳이 옛 산성이었음을 애써 속삭인다.

▲  호암산성 남문터
인공티가 느껴지는 돌들의 무리가 여기저기 모여있으니 그들이 호암산성과
남문을 이루던 성곽의 흔적들이다. 뒤늦게 세상에 잡힌 그들의 보존을
위해 기존 산길에 금줄을 치고 옆에 우회길을 내었다.

▲  경사를 따라 층층이 주름진 남문터

이곳은 오랫동안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로 바쁘게 살았다. 커다란 바위와 인공티가 다소 느껴
지는 층층이 둘러진 둘들은 이곳이 예사로운 장소가 아니었음을 오랜 세월 동안 눈치를 보냈
으나 나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무더기로 여기고 무심히 지나쳤다.
허나 그들이 글쎄 호암산성의 숨겨진 흔적들이었다.
그냥 돌무더기가 아닌 늙은 호암산성의 흔적이라니 그들이 정말 180도 달라 보인다. 사람에게
는 옷이 날개이듯, 돌에게는 문화유산 경력이 날개인 모양이다.


▲  호암산성 서남쪽 성곽터

남문터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아직 확인을 하지 못한 서남쪽 성곽길을 쫓아갔다. 이 성
곽길은 서남쪽 능선 서쪽 벼랑을 따라 이어지며 서서히 능선길과 멀어진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숨겨진 길이나 성곽터가 얇게 이어져 있고, 사람들의 발길도 이미 적지 않게 들어간 상
태라 그런데로 길 티를 낸다.
벼랑 구간이 많으나 괜찮은 조망지가 많아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지역이 늘 시야에 따라와
두 망막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며 그 길을 계속 따라 가면 서문터 뒤쪽으로 이어진다.


▲  호암산성 서남쪽 성곽터에서 바라본 천하
금천구 지역과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지역

▲  산성 안쪽에서 바라본 호암산성 서문터 (추정 서문터)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산길에 서문터가 있다. 허나 아직까지는 확
신이 부족하여 '추정' 2자를 붙여 회피 조건을 붙이고 있는데, 주변 지세를 보면 이곳이 성문
터는 맞는 듯 싶다. 성문이라고 해서 문루(門樓)까지 달아서 크게 지을 필요는 없으며, 조그
만 암문(暗門) 형태로도 충분하다.
산성 밑으로 난간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그 길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불영암~시흥동 산
길이며, 희미하게 남아있는 산성 흔적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바로 불영암 뒷쪽으로 이어진다.
남문터에서 서남쪽 성곽과 서문터 안쪽을 거쳐 불영암을 바로 잇는 길을 새로 개척하여 호암
산 정보력과 경험치를 크게 살찌웠으니 이번 호암산 복습 산행의 성과가 실로 크다.



 

♠  호암산 한우물, 불영암(佛影庵)

▲  북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호암산성 북문터에서 서남쪽 길로 내려가면 한우물과 불영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우물은 석
구상과 더불어 호암산의 오랜 명물로 한우물이란 큰 우물을 뜻한다. 하여 천정(天井), 용복,
용초 등에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고, 마땅한 수원(水源)이 없음에도
물은 늘 넉넉하게 나온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해 신비로움을 준다.

이 우물은 신라가 호암산성을 닦던 7~8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물 자리 밑
에서 7~8세기 우물(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못의 규모는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였다. 이후 조선 때 서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겨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
의 장방형 못(우물)을 구축했다.
허나 조선 후기 이후, 호암산성과 함께 버려져 제대로 망가진 것을 1991년 2차 보수 정비공사
때 신라 우물터와 조선 우물터를 혼합하여 복원했다. 하여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은 신라 때 우
물 자리이며, 수풀이 자라는 남쪽 부분은 조선 때 우물 자리이다. 또한 동쪽 산정에도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우물 유적이 있는데, 그를 제2한우물, 불영암 옆에 있는 이곳을 제1한우물이
라 부르기도 한다.
 
1990년 봄, 한우물 2개를 발굴하면서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
서 '仍伐內力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제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
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 때 유물이 많이 나왔다.


▲  윗쪽에서 바라본 한우물의 위엄

임진왜란 시절인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썼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있어 일찍
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상시와 전쟁 때는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려준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득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여기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나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딱히 손은 대지 않는다. 우
물에 가득 모인 수분은 식수가 아닌 우물을 채워 연못 분위기를 내는 원초적인 역할을 할 뿐
이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 등의 수풀이 둥지를 틀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우물 주위로 돌난간과 철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호암산 한우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한우물의 깊은 속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우물을 거울로 삼으며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한우물과 불영암은 서쪽과 북쪽이 확 트인 벼랑에 자리해 있어 천하를 조망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하여 여기서는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강서구, 양천구, 한강 이북에 서울 서북
부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광명시, 부천시, 인천 지역은 물론 대기가 좋으면 서해바다와 고
양시, 파주시, 심지어 개성(開城) 지역까지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한다.
그리고 한우물 주변과 한우물조망대에는 의자가 여럿 있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을 굽어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독산동, 가산동 등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지역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②
호암산 북쪽인 목골산과 금천구,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한강 너머의
서울 서북부 지역,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 밑이자 한우물 옆에는 불영암이란 작은 암자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한우물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
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인데, 가파른 벼랑에 자리해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
고 있어 호압사나 시흥동 벽산아파트,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띈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
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여기서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그런 것을 보면 오랫동안 승려의 기도 수행처로 쓰였던 듯 싶으며, 호암산성 서벽에 위
치해 있고, 조망도 우수하여 산성을 지키며 속세를 살피던 망대(望臺)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100년 이상 묵은 절들은 자신들의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내걸지만 이곳은 그런
것이 일절 없어 20세기 중반 이후 지금의 절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무지 짧은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물이 전부이
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하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
게 불리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가 않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어 물 수급은 어렵지 않으며,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우물과 천하를 향한 일품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서 절을 세웠을 것이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조촐한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
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늙은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두어 볼거리를 잠시 늘
리기도 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음)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
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가 봉안되어 있어 이곳의 새로운 명물을 꿈
꾼다.

*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02-809-3754)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남쪽 방향)

    ◀  간단하게 이루어진 불영암 범종각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의 보
금자리이다. 매일 6시와 18시가 되면 잠든 범
종을 흔들어 깨우는데, 그 종소리가 호압사는
물론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까지 널리 울려퍼
진다.

▲  돌탑과 오색연등이 늘어선 불영암 앞길
(한우물 방향)

▲  산신 할배의 공간인 산신각

            ◀  산신각 산신상
대웅전 뒤쪽 벼랑에는 산신 식구를 머금은 산
신각이 달려있다. 불영암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곳으로 벼랑에 목재로 대를 쌓고 그곳에
1칸짜리 산신각을 닦았는데, 보통 산신 가족은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이 전부이나 이곳
은 특이하게 사슴까지 겯드려 놓았다.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는 2009년에 마련된 석불이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
에 커다란 머리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머리 주
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을 주나 세월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
치 불상에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 듯하며, 석불 머리 옆에는 산신각이 달려있다.


▲  불영암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밑에 불영암 경내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시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두 망막을 제대로 흥분시킨다.
한우물과 불영암 구역에서 제일 높은 곳이자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니 한우물에 왔다면 이곳
에 꼭 들려 국보급 조망을 덤으로 누리기 바란다.


▲  호암산성 서문터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 방향 산길을 조금 내려가면 앞서 지났던 서문터가 다시 마중을 한
다.
앞서에는 산성 안쪽에서 서문터와 불영암~시흥동 산길을 내려다봤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가 되
어 산성 바깥에서 이렇게 올려다보는 입장이 되었는데, 호암산에 오면 거의 이 코스로 내려가
는 편이었다. 예전에는 호암산성이 여기까지 팔을 뻗을 줄은 생각도 못 하였고, 아직 추정이
긴 하나 이곳에 성문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안했는데, 여기서 성곽과 성문터가 버젓이
나온 것이다.


▲  호암산성 서문터와 돌탑 하나

서문터는 각박한 경사지에 자리해 있고, 좌우로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감히 기웃거릴
수 없는 천험(天險)의 자리이다. 남문은 여기보다 지형이 약간 좋으나 역시 공격에 불리하며,
북문도 능선에 자리하나 적들이 호암산 정상부를 점령하고 치고 들어올 경우 수비가 약간 힘
들 수 있다.

서문터를 둘러보고 칼바위와 호암산폭포를 거쳐 시흥동 벽산아파트로 내려갔다. 이번 호암산
나들이는 약간씩 남아있던 미답 공간과 새로 발견된 호암산성의 숨겨진 부분을 크게 들추는
성과를 거두며 기분 좋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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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만연산, 만연산 오감연결길, 만연사 늦가을 나들이 <만연폭포, 큰재, 만연저수지>

화순 만연산(만연사)



' 화순 만연산 늦가을 나들이 '
만연산 오감연결길
▲  만연산 오감연결길
 


 

가을이 늦가을로 익어가던 가던 10월의 끝 무렵, 광주(光州) 동남쪽에 자리한 전남 화
순(和順)을 찾았다.
이번에는 남동임해지역 일행들과 같이 가기로 했는데, 만연산 큰재에서 10시에 만나기
로 했다. (그들은 남동임해지역, 나는 서울에서 출발) 그 시간을 맞추려면 1박이 아닌
이상은 비행기나 고속열차를 타야 되는데, 하늘길은 첫 비행기가 9시대라 부득불 고속
열차를 타야 된다.
그래서 수서역 출발 SRT 고속열차를 타고자 햇님이 출근하기가 무섭게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서울 남쪽 끝부분에 매달린 수서역으로 이동, 목포(木浦)로 가는 SRT 첫 차
에 나를 담았다.

열차는 오송역, 익산역, 정읍역을 거쳐 1시간 30여 분 만에 광주송정역으로 나를 고스
란히 옮겨 주었다. 여기서 광주1호선을 타고 광주 도심을 가로질러 소태역으로 이동하
여 화순으로 가는 광주152번(전남대치과병원↔화순 도웅리)을 타고 너릿재터널을 넘어
화순읍내로 진입, 화순우체국에서 하차하여 만연산이 보이는 북쪽으로 15분 정도 걸으
니 신기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서 큰재로 이어지는 안양산로를 들어서면 만연폭포로 인
도하는 시골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여기서부터 만연산 더듬기가 시작된다.


 

♠  만연산(萬淵山) 둘러보기 (만연폭포, 큰재, 오감연결길)

▲  만연산으로 인도하는 유천리 시골길

만연산(해발 668m)은 화순읍내의 든든한 뒷산으로 무등산국립공원의 일원이다. 북쪽으로 무등
산(無等山)과 이어져 있으며 산세는 완만하고 숲도 짙다. 서남쪽 자락에는 만연사가 안겨있는
데, 그곳 창건설화로 인해 나한산(羅漢山)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물맞이 명소로 유명한 만
연폭포가 큰재 밑에 숨어있고, 만연산 물을 먹고 자란 만연저수지가 산 밑에 누워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이 산은 숲과 둘레길을 닦아 건강을 주제로 한 이름을 붙여 속세에 내놨는데 만연사 주변 숲
을 다듬어 '치유의 숲'이라 하였다. 또한 '건강회복숲','건강오름숲' 등의 숲과 '오감연결길
(3.1km)','치유숲길(3.3km)','만연산숲길(1.4km)' 등의 둘레길을 다져 천하에 크게 어필하고
있다. 또한 큰재 북쪽에는 만연산 산림공원(철쭉공원)이 닦여져 있어 '한국의 알프스'란 별명
을 지니고 있으며, 봄철에는 철쭉의 향연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  만연폭포로 가면서 바라본 화순읍내
읍내 한복판에 발을 내딘 것이 정말 몇 분 전 같은데 그새 읍내와 저만치
떨어져 버렸다. 내가 정말 저기서 왔는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다.

▲  글씨가 또렷한 만연폭포 비석

▲  만연폭포 돌담 바깥


▲  인공티가 진한 만연폭포(萬淵瀑布)

화순 땅에서 만연폭포가 제법 이름이 있어서 잘생긴 자연산 폭포라 여기고 기대를 했으나 정
작 와보니 물맞이 장소로 지어진 조그만 인공폭포가 나를 맞이했다. 처음에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 거렸으나 그 폭포가 맞았다. 얼마나 허무감이 들던지 새벽 일찍
부터 부산을 떤 보람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다. 허나 어찌하리오. 이것도 엄연한 폭포이니 있
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는 없다. (만연폭포 도착시간은 8시 40분 정도)

나에게 허탈감을 선사했던 만연폭포는 만연산 남쪽 끝 170m 고지에 걸려있다. 인근 계곡물을
가져와 10m 정도의 폭포를 다지고 그 밑에 물맞이와 목욕 공간을 닦았다. 남자용과 여자용이
분리되어 높이 2m 이상으로 담장이 쳐져 있으며 옷을 갈아입는 공간도 설치되어 있다. 옛날부
터 물맞이 명소로 유명해 신경통 환자와 노인들이 많이들 찾고 있고 물이 차갑고 숲속에 짙게
잠겨 있어 피서의 성지(聖地)로도 존재감이 크다.
허나 약간은 쌀쌀한 늦가을 아침이라 폭포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름에 왔었다면 벌써부터 사
람들로 봐글봐글했을 것이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붙여놓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어느 옛날,
'만석이'와 '연순이'란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여 혼인을 약속하였으나 만석이가
전쟁터에 끌려가면서 한참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연순이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내려는 부모의 극성을 견디며 버텼으나 결국 굴복해 다른 사
람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바로 그날 만석이가 몰골이 상한 상태로 마을에 돌아온 것이다.
소식을 들은 연순은 바로 신방을 뛰쳐나와 꿈에 그리던 만석이를 만났고 그렇게 둘은 폭포에
이르게 되었다. 허나 이제 와서 어긋난 인연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저 세상에서 나머지 사
랑을 일구자며 폭포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 사연으로 그들의 이름 앞 자를 따서 만연폭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만연
사에서 산 이름이 비롯되었으며, 산 이름에서 폭포 이름이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투
신을 할만한 절벽이나 못(소)도 주변에 딱히 없다.

* 만연폭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유천리


▲  만연폭포의 삼삼한 숲길
폭포 주변에는 폭포에 물을 대주는 계곡이 흘러간다. 계곡 역시 피서지로
아주 좋은 곳으로 여름 제국도 이곳만큼은 눈치를 보며 피해간다.

▲  큰재로 이어지는 만연산 남쪽 숲길

▲  큰재 정상

만연폭포 주변 그늘에서 조금 머물다가 큰재로 길을 재촉했다. 숲길로 그곳까지 가려고 했으
나 길을 잘못 들어 '안양산로'로 나오게 되면서 별 수 없이 지나가는 차량의 눈치를 보며 그
길의 신세를 졌다. (뚜벅이길이 길 옆에 닦여져 있음)
구불구불 고갯길을 20여 분 오르니 비로소 해발 350m 고지인 큰재 정상에 이르렀다. (그때 시
간 9시 30분) 경사가 느슨한 길은 분명했으나 전날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한 탓에 대관령처럼
은근히 높고 거칠어 보였다.

큰재는 화순읍에서 이서면을 빠르게 잇는 고갯길로 만연산 동부에 자리한다. 만연산 등산로의
동쪽 기점으로 만연산숲길이 여기서 시작되며, 고개 너머로 높은 산이 시야에 보이는데 그 산
이 바로 무등산이다. 무등산이 생각 외로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무등산은 광주, 담양, 화순
에 걸쳐있는 큰 뫼임)


▲  큰재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위엄

▲  큰재약수터

큰재에 도착해 그늘진 서쪽 숲속 쉼터로 들어가 잠시 꿀휴식을 취했다. 그곳에는 큰재약수터
가 있어 만연산이 베푼 물을 마음껏 음미했는데 화순읍내에서 이곳까지 두 발로 올라온 고생
끝에 마신 물이라 거의 꿀맛 같다. 수질은 아직 정정하여 섭취에 문제는 없었으며, 여기서 40
분 정도 머물다가 남동임해지역에서 온 일행들과 만나 만연산 숲길로 들어섰다.


▲  만연산 숲길 (큰재 서쪽)

만연산숲길은 큰재에서 오감연결길을 이어주는 1.4km의 숲길이다. 큰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내리막길과 평탄한 길이 계속 이어지며 숲도 삼삼하다. 단 반대로 갈 경우에는 오르막길의 연
속이라 조금 힘들 수 있다. 울퉁불퉁한 구간에는 나무데크길을 닦아 통행의 편의를 극대화시
켰다.


▲  만연산 숲길 ①

▲  만연산 숲길 ②

▲  만연산 숲길에서 만난 돌너덜지대

▲  만연산 숲길에서 바라본 화순읍내와 푸르른 가을 하늘

▲  만연산 오감연결길 쉼터

오감연결길은 큰재 밑 유천리에서 만연산 치유의숲센터까지 이어지는 3.1km의 숲길이다. 해발
고도가 좀 차이가 나는 만연산숲길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높이를 유지하고 있어 오
르락 내리락이 적다. 그러다보니 거의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하며 숲 또한 짙어서 지루할 틈
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탐스러운 길이다.

이 길은 다산 정약용(丁若鏞)과도 인연이 깊다고 한다. 그가 10대 시절이던 1777년 화순현감
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화순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만연산을 자주 찾아 독서
를 즐기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다고 한다. (만연산 동림암에서 거처하기도 했음)
산림청에서 '치유의 숲' 사업의 일환으로 만연산에 둘레길을 닦고 숲을 정비했는데 누구나 편
하게 산길을 거닐고 오감(五感 :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자극하여 건강을 증진시킨
다는 의미에서 오감연결길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곳 숲에서는 피톤치드와 음이온이 풍부
하게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은 몸과 마음을 순화시키고 속세의 스트레스를 줄여주어 면역력을
높여준다.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①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②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③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④


 

♠  만연산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
화순 만연사(萬淵寺)

▲  '나한산 만연사' 현판을 내건 만연사 일주문(一柱門)

큰재에서 시작된 만연산 둘레길 산책은 만연산 치유의숲센터에서 쿨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여
기서부터 흙길 대신 읍내를 향해 뻗은 딱딱한 포장길(진각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이
곳에서 반대 방향(북쪽)으로 올라가면 만연사의 부속암자인 선정암(禪定庵)이 나온다.

읍내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니 만연사를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그의 안내로 동쪽 길을
오르면 '나한산 만연사' 현판을 내건 일주문이 나오고 그 너머로 화우천이란 2층 누각 건물이
경내를 가리며 앉아있다.
일주문 앞에는 하늘 높이 솟은 큰 전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27m에 이른다. (둘레는 3m) 기껏해
야 높이 2m도 안되는 인간들을 제대로 주눅 들게 만든 그는 진각국사(眞覺國師)가 만연사 창
건 기념으로 심었다고 하며 추정 나이가 무려 770년 이상을 헤아린다고 한다. 허나 그 품격에
걸맞게 지방문화재나 천연기념물의 지위도 얻지 못했고 딱히 안내문 조차 없어서 속세의 대접
이 너무 형편없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자세한 사연을 알지 못한 채, 속절없이 그
앞을 지나간다. (나무 사진은 너무 흐리게 나와서 생략했음)


▲  경내를 가리고 선 화우천(華雨天)
이름도 특이한 화우천은 2층 누각 건물로 강당과 매점, 종무소를 품고 있다.
화우천은 하늘에서 빛나는 비가 내린다는 뜻(또는 불교에서 좋아하는
꽃비가 하늘에서 내린다는 뜻) 정도 될 것이다.

▲  대웅전 뜨락에 우두커니 선 늙은 괘불대 (조선 후기 유물)

만연산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만연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순천 송광사(松廣寺)의 말사(末寺
)이다. 1208년에 만연선사(萬淵禪師)로 표현된 진각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는 무등산
원효사(元曉寺)에서 수도를 마치고 송광사로 돌아오다가 만연산 골짜기에서 잠시 쉬었다. 그
자리가 현재 만연사 나한전 자리라고 한다.
잠시 쉰다는 것이 꾸벅 잠까지 들었는데 16나한이 석가여래를 봉안할 역사(役事)를 하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이 하도 이상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그새 눈이 내려 천하를 뒤덮고 있었는데,
글쎄 그가 누웠던 자리 주변만 눈이 녹고 김이 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신기한 광경에 보
통 자리가 아님을 여기고 그 자리에 토굴을 짓고 불도를 닦다가 만연사를 세웠다고 하며 꿈
속에 16나한이 나왔다고 해서 산 이름을 나한산이라 했다고 한다.

창건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왕년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사리각
(舍利閣)과 대웅전, 시왕전(十王殿), 나한전, 승당(僧堂), 선당(禪堂), 동산실(東山室), 서상
실(西上室), 동별실(東別室), 서별실(西別室), 수정료(守靜寮), 송월료(送月寮) 등 3전8방(三
殿八房)과 대웅전 앞에 규모가 큰 설루(說樓)와 사왕문(四王門), 삼청각(三淸閣), 그리고 학
당암(學堂庵), 침계암(枕溪庵), 동림암(東林庵), 연혈암(燕穴庵) 등의 부속 암자를 지니고 있
던 큰 절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 시절에는 만연사에서 종이와 식량 등을 마련해 전방에 보냈으며, 1793년 화
재로 진언집(眞言集) 판각이 불탔으나 이듬해 중건했다.
구한말에 이동백(李東伯), 이날치(李捺致) 등의 명창(名唱)이 이곳을 찾아와 소리를 닦았고,
임방울(林芳蔚)과 정광수 등의 명창들은 여기서 창악을 가르키며 소리를 익혔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10대 시절, 만연사 동림암에서 잠시 머물며 독서를 했다.

국악(國樂)의 성지로 추앙까지 받으며 명성을 드날렸던 만연사는 6.25전쟁 때 정신 나간 총탄
의 먹이가 되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1978년부터 4년 동안 주지 철안(澈眼)이 중창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나한전, 명부전, 한산전, 화우천, 요사채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부속암자는 선정암과 성주암(聖住庵)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345호
지위를 가지고 있는 괘불탱(掛佛幀)과 선정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이 있
는데, 괘불은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등 특별한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하는 비싼 존재라
친견은 매우 어려우며 그 외에 석가3존상과 시왕상, 16나한상, 진각국사가 심었다고 전하는
700년 이상의 전나무가 전해 절의 오랜 내력을 유감없이 증명하고 있다. (원주 고판화박물관
에는 만연사에서 1777년에 발간된 '진언집'이 전시되어 있음)


▲  높이 자리를 다지고 그 위에 들어앉은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만연사의 중심 건물(법당)이다.

▲  대웅전 석가3존상
향나무로 다져 도금을 입힌 것으로 무려 고려 후기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맞는다면
전나무를 제외하고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정말 지정문화재감인데 아직까지
무명으로 있는 것을 보면 탄생 시기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  명부전(冥府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들어있다. 건물 앞에 야자수가 펼쳐져 있어 이곳이 따스한 남쪽임을
알려준다. (전남 내륙에서 야자수를 보는 건 처음임)

▲  달랑 1칸의 단출한 모습인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산신과 동자, 호랑이 등
산신 식구를 머금은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나한전(羅漢殿)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거처이다. 절을 창건한 진각이 피곤에 쩔어 잠을 잤던
곳이 바로 이 자리라고 하며, 그의 꿈 속에 나타난 16나한 덕에 만연사가 탄생했으니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 애지중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  만연사 장독대
장독대 주위로 녹색 펜스를 쳐서 이곳에서 숙성되는 것들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장독대에서 숙성된 된장과 고추장을 속세에 판매하고 있음)

▲  만연사의 명물, 연등이 달린 배롱나무

대웅전 앞에는 만연사의 명물인 배롱나무가 있다. 늦여름과 초가을에 백일홍을 펼쳐보이는 나
무로 인간이 달아놓은 꽃인 연등이 대롱대롱 걸려 있어 백일홍의 빈 자리를 채워준다.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연등에 불을 밝혀 요염한 야경을 선사하며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눈덮힌
풍경도 아름다워 나무를 담으려는 사진쟁이들의 발길이 잦다.
단순히 나무만 있었다면 감흥이 덜했겠지만 붉은 연등을 앙증맞게 걸쳐놓은 주지승의 작은 센
스가 그를 일약 만연사의 스타로 만든 것이다. 자연과 인공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현장이라
고나 할까?


▲  앞에서 바라본 배롱나무의 위엄

▲  만연산 밑에 그림처럼 펼쳐진 만연저수지 (북쪽에서 본 모습)

만연사를 둘러보고 읍내 쪽으로 4분 정도 가면 너른 호수인 만연저수지(만연제)가 모습을 드
러낸다. 만연산이 베푼 물을 먹고 자란 그는 1945년에 조성된 80년 묵은 저수지로 유역 면적
264ha, 수혜 면적 55ha, 만수 면적 4ha, 유효 저수량은 약 22만 톤이다. (제방 높이 13m, 제
방 길이 165m)
저수지 주변에는 공원과 산책로를 닦아 만연호수공원으로 삼았으며, 화순군에서 세운 석봉미
술관이 호수 남쪽에 뿌리를 내려 현대 미술의 향기까지 호수에 덧붙여졌다.

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수면에는 만연산과 주변 나무들, 지나가는 구름과 햇님, 달님, 하늘이
고스란히 비춰져 그들의 아름다운 거울 역할을 한다. 남쪽 제방에서는 화순읍내가 훤히 바라
보여 조망도 괜찮으며 산 바람과 호수 바람이 어우러져 은근히 시원하다.


▲  만연저수지 제방 (제방 너머로 화순읍내가 바라보임)

▲  남쪽에서 바라본 만연저수지
저수지 속에도 또 다른 만연산이 짙게 피어있다.


만연저수지를 끝으로 아침부터 시작된 만연산 더듬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만연산을 80% 이상
살핀 것은 아니지만 만연폭포와 만연산 숲길, 큰재, 오감연결길, 만연사, 만연저수지까지 만
연산의 주요 명소는 거진 둘러보아 정신적, 기분학적으로 포만감이 아주 넘친다. 이번에 인연
을 짓지 못한 곳은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이란 강물에 모두 던져버리면 된다. 그것이 돌고 돌
아 나에게 온다면 다시 인연을 짓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마는 것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만연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동구리 179 (진각로 367, ☎ 061-374-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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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 봄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4보루, 3보루, 2보루, 1보루>

아차산 보루 나들이 (4보루, 3보루, 6보루, 2보루, 1보루)



' 아차산 봄나들이 (아차산 보루 식구들) '

아차산 정상(아차산3보루)

▲  아차산 정상부 (아차산3보루)

아차산4보루 아차산2보루

▲  아차산4보루

▲  아차산2보루

 



 

아차산(峨嵯山, 295.7m)은 수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부
드러운 동쪽 지붕이다.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아침과 낮, 그리고 일몰 이후(야간 등
산)까지 고루고루 찾아와 변치 않은 마음을 비추고 있는데, 이미 200번 넘게 찾은 아차산
이지만 갈 때마다 늘 마음이 설레고 새롭다.

기나긴 겨울 제국이 드디어 저물고 봄의 해방군이 천하를 해방시키자 아차산의 봄 풍경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이번 나들이는 구의동(九宜洞) 기원정사에서 시작
을 했는데, 분량상 본글에서는 아차산4보루 이후 구간만 다루도록 하겠다.
(이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와 동남쪽 성곽

아차산4보루는 용마산(龍馬山)과 망우산(忘憂山)을 제외한 아차산 식구 보루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잃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남한)의 고구려 성곽 유적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아주 남다른 곳인데,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보
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던 높이가 0.8m를 넘지 못했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들여쌓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4보루 남쪽 2중치

구리시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움을 받아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를 확인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닦여진 보루임이 명백해졌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에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4보루 사이로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선이 무심히 지나가
절반은 서울시, 나머지 절반은 구리시 영역인데, 구리시가 2008년부터 복원을 적극 추진하여
2년의 공사 끝에 2010년 12월 24일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원
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늙은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적어서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흙속에 묻었다.
그리고 보루 중앙 쪽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에 보
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크게 축소 재현하여 마치 역사 왜곡의 현장 같은 아쉬움을 준다. 지형의 경사면
을 이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치성(치)은 성곽 방어를 위해 앞쪽으로 다소 튀어나온 성벽으로 고구려표 축성 양식의 하나이
다. 그 양식은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은 물론 왜열도와 서토(중원대륙)까지 전해져 절찬리
에 쓰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를 지닌 독특한 치가 남쪽으로 길게 나와있다. 그는 전체 길이 13.2m
로 중간에 목책(木柵)이 둘러진 2.5m 정도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로 허무하게 사라진
구의동보루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으나 사실상 아차산4보루가 유일하며, 고구려 보루의 독특
한 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닦여져 안정감을 준다.


▲  4보루 서남쪽 치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의
병참기지로 추정된다.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
고, 방어시설 등이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님의 꾸준한 괴롭힘 앞에
모두 휩쓸려 사라지고 터만 아련히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는 숙제
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4보루의 7개 건물터 중 남쪽에 있는 1호 건물터가 가장 높다. 여기서는 온돌 유구 2기와 주춧
돌이 나왔는데,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투구 등이 나와 4보루를 관
리하던 높은 장수나 지휘관의 숙소로 여겨진다.
1호 건물터 주변에는 6호 건물터와 7호 건물터, 2호 건물터 등이 있으며, 3호 건물터 밑에서
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다. 층위(層位)로 보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혀
져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얹혔던 것이다.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탐방로 좌우로 잔디와 흙이 두툼히 덮여진 건물터와 저수시설 유적이 있고, 키가 작은 금줄을
둘러놓아 고구려의 거룩한 흔적을 지키고 있다. 금줄의 의미처럼 줄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지키는 사람이 딱히 없다 보니 안에 버젓이 들어가 자리를 펴고 쉬거나 음식을 처묵처묵하는
골 빈 작자들이 적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4보루 저수시설터

4보루에서는 물을 저장하는 2개의 저수조(貯水槽) 흔적이 나왔다. 이들은 깊이 3.5m 정도 수
직으로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입자가 고운 회색 뻘흙을 발라 물이 새지 못하도록 방
수처리를 한 것으로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350x310x깊이240cm'이다.


▲  한강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남양주, 하남, 강동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4보루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종로구, 중구, 송파구, 강동구, 한강은 물론 하남시와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해돋이 수요와 일몰 수
요, 야간 등산 수요가 많다. (1월 1일에는 새해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정말 미어터짐)
게다가 아차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주능선의 목구멍 같은
곳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큰 보루를 쌓아 무척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4보루 동북쪽 치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지역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서쪽 성곽

▲  4보루 북쪽 치

4보루 바깥에는 우회 산길이 있다. 4보루 속으로 들어가기 싫다면 그 우회길을 이용하면 되나
아차산에 왔다면 4보루는 무조건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그러다보니 여기
서 휴식을 취하거나 간식을 먹는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저녁에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단체
로 먹거리를 섭취하는 등산 동호회 사람들이 많음) 휴식과 음식 섭취는 좋으나 쓰레기를 버리
거나 금줄을 넘어가는 행위는 하지 말자.

아차산4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보루 6곳과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1보루, 시루봉 보루, 홍련
봉 보루 2곳은 한 덩어리로 '아차산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55호로 지정되었다.

고구려(고구리)는 경기도와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요동반도, 만주(길림성, 흑룡강성) 일대
, 연해주, 하북성, 산서성(山西省), 내몽고(內蒙古) 일대를 차지한 북쪽의 크나큰 나라였고,
백제(百濟)는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왜열도(倭列島), 산동반도, 강남과 오월(吳
越) 등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 월남 일대까지 장악한 남쪽의 크나큰 나라였다.
그 두 나라가 크게 충돌한 곳의 하나가 바로 한강 유역이며, 한강 남쪽의 송파/강동구 지역에
는 백제의 국도(國都)였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또는 그에 버금가는 주요 도시가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강력한 라이벌인 백제를 견제하며 한강 유역을 지키고 필요에 따라 백제 본
토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인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대에 보루 등의 군사시설
을 주렁주렁 달아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이들 보루는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차지하여 고구려 견제용으로 활용하다가 8세기 이후 전
략적인 가치가 상실되면서 모두 버려지게 된다. 그 시절 신라는 북쪽으로 최소 요동반도까지
차지했으며, 산동반도와 강남, 오월 지역에도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  아차산 정상과 3보루

▲  소나무가 무성한 아차산 주능선길 (4보루에서 정상 방향)

아차산4보루에서 낙타고개(아차산성 북쪽)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의 연속이다. 오르막 길도 일
부 있으나 거의 내리막 일색이라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능선길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구려
가 심어놓은 보루(4보루, 3보루, 5보루, 6보루, 1보루)들이 주렁주렁 깃들여져 멀게만 느껴지
던 고구려를 직접 체험하게 해준다. 또한 좌우로 시야가 확 트여 조망이 아주 예술이며 여기
서 바라보는 야경 맛과 일출, 일몰 풍경이 참 진국이다.

이처럼 길이 좋고 조망 또한 일품이니 새해 해돋이와 아침, 낮, 일몰 직후 야간 등산까지 상
당한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하여 너무 깊은 밤(23시 이후)이 아닌 이상은 늘 사람들이 있으
며 서울에서 남산(南山), 인왕산(仁王山) 다음으로 저녁 수요가 많은 뫼가 아차산~용마산일
것이다. (나도 아차산 야간 등산을 100번 넘게 했음)
또한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서울둘레길2코스(화랑대역↔광나루역, 12.3
km)도 이곳을 흠모하며 아차산 주능선을 타고 남북으로 흘러간다.

▲  아차산3보루 북쪽 오르막길

▲  아차산 정상을 알리는 나무 기둥


▲  아차산의 지붕, 아차산3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 정상(295.7m)에 깃든 아차산3보루는 성벽 둘레 약 450m, 내부면적 약 6,500㎡로 정상
부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어 아차산 보루 중 가장 규모가 크다. 2005년에 보루 일부를 들추
면서 배수로와 건물터, 기단, 성벽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디딜방아의 불씨로 여겨지는 존재가
나와 이곳이 아차산의 식량 창고로 추정된다.
허나 겨우 보루터의 일부만 꺼낸 상태라 나머지를 모두 들춰야만 이곳에 정확한 기능과 숨겨
진 이야기를 캐낼 수 있을 것이다.


▲  대머리처럼 허전한 아차산3보루

3보루 외곽은 나무가 무성하나 3보루 안쪽은 땅에 바짝 붙은 잡초와 탈모된 흔적처럼 풀이 벗
겨진 흙길, 그리고 잘려진 나무 밑둥이 대부분을 이루어 말끔하면서도 뭔가 허전한 기분이다.
이는 보루터 보존을 위해 그렇게 밀어버린 것이다.
보루터 한복판으로 탐방로를 내었고, 그 좌우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낮은 금줄을 설치
했는데, 지키는 이가 없다 보니 금줄을 넘는 이가 종종 눈에 띈다. 이곳은 아차산 정상이긴
하지만 완만한 능선이라 정상 같은 느낌은 별로 나지 않으며, 3보루 동쪽에 우회길이 있다.
 
* 아차산3보루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49-1,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  아차산3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①

아차산4보루 못지않은 일품 조망을 보여주는 3보루, 한강(아리수)을 중심으로 왼쪽에 구리시
와 남양주시(도농, 다산, 덕소) 지역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강동구와 하남시가 무성한
아파트숲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누가 아파트의 농도가 진한지 경쟁하듯이 말이다.


▲  아차산3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그리고 남한산과 검단산 등

▲  아차산3보루에서 수습된 보루터 성돌들
이곳에 있었을 3보루의 생전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상상의 나래를 한번
살찌워보자. 그것이 아차산이 우리에게 건네는 영원한 숙제이다.

▲  바위들이 울퉁불퉁 펼쳐진 아차산 주능선길
(아차산3보루에서 아차산5보루 방향)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①
광진구와 성동구, 한강, 송파구, 강남구 등 (멀리 보이는 산은 관악산)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용마산 너머로 멀리 남산서울타워를 지닌 남산과 인왕산(仁王山),
북악산(백악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③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부분이 아차산의 일품 계곡으로 꼽히는 긴고랑계곡이다.
그 오른쪽 뫼는 용마산, 왼쪽은 아차산이며, 그들 너머로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이 흐릿하게 두 망막에 박힌다.



 

♠  아차산 마무리 (6보루, 2보루, 1보루)

▲  아차산6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3보루에서 주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범굴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살짝 손짓
한다. 여기서 주능선을 버리고 그 손짓을 따라가면 바로 봉긋 솟은 언덕이 나타나는데, 그는
아차산 주능선 바로 동쪽으로 그 언덕에 아차산 보루의 막내인 6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6보루는 2005년에 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다. 생김새가 마치 옛 무
덤이나 보루터처럼 생겨서 눈썰미가 좀 있다면 정말 의심을 가져볼만한 존재로 아차산 보루의
발견 순서대로(남쪽을 기준으로 함) 아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아직 발굴조사는 벌이지 않았으며, 여기서 발견된 옛 불씨는 흙을
덮어서 보존하고 있다. 그가 보루인지 다른 존재인지는 아차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생김
새가 자연산 같지 않아서 속히 조사를 벌여 이곳의 정체를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6보루를 처
음 본 것이 2013년인데 아직까지도 조사를 받지 못했으니 아차산 보루 유적과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떨어진 것 같아 실로 우려스럽다.


▲  아차산2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6보루에서 범굴사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소나무가 우거진 북쪽 봉우리(해발 276.2m)가
있다. 봉우리 주변에는 금줄이 둘러져 있고, 안내문 1개가 나그네들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는
데, 금줄 너머 봉우리에 고구려가 심어놓은 아차산2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아차산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로 봉우리를 활용해 보루를 다졌는데,
둘레 50m 정도의 조그만 보루이다. 그 보루는 영원한 분해자인 자연과 세월에 의해 모두 와해
되고 돌탑 남쪽에 치로 여겨지는 성벽 3단이 바깥에 노출되어 분해자의 압박을 견디다가 보존
을 위해 흙으로 덮어 묻었으며, 그 주위로 금줄을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는다.

보루터 주변에서는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의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보루터 복판에 돌탑
이 있는데, 지나가는 이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
을 이루고 있는 돌 상당수는 2보루터 성돌로 보루를 이루던 돌이 돌탑의 일원으로 새로 거듭
난 것이다.

2보루터는 인근 6보루터와 비슷하게 숲이 자리해 있다. 2보루터에 깃든 고구려의 장대한 기상
과 이곳의 유구한 역사를 무럭무럭 먹고 자란 탓일까?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대머리처럼 허전
한 2보루터의 새로운 녹색 머리칼로 그 공간을 보듬는다.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구리, 남양주, 강동구, 하남 지역


아차산2보루 옆에는 동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조망 좋은 곳이 있다. 이곳은 범굴사(대성암)로
인도하는 너럭바위 윗쪽으로 여기서는 한강을 비롯해 구리시, 남양주, 하남, 강동구, 송파구,
성남 지역과 아차산성(阿且山城) 등이 훤히 두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조망 범위는 앞서 4보루, 3보루와 많이 비슷하여 감흥은 그리 크지 않다. 비슷한 조망
이 4보루부터 계속 따라왔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서쪽과 북쪽이 빠지고 남쪽으로 아
차산성과 송파구, 성남 지역이 조망권에 추가된 정도..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워커힐 뒷통수(골프장)가 바로 앞에 보이고 푸르른 한강 너머로 강동구와
하남시, 남한산(南漢山), 검단산, 예봉산~운길산 산줄기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정면에 솟은 산에 아차산성이 안겨져 있다. 그 너머로 강동구와 송파구,
멀리 성남 지역까지 두 눈에 들어온다.

▲  서울 속의 작은 민통선, 아차산성 - 사적 234호 (확대해서 바라본 모습)

아차산은 200번이 넘게 인연을 지었으나 정작 아차산성 내부는 아직까지 발을 들이지 못했다.
아차산성은 아직까지도 금지된 구역으로 몇 년 전부터 광진구청에서 저곳을 해방시킬 계획을
세웠고, 꾸준히 개방 떡밥이 나오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희망고문에 머물러 있다. 아차산성
의 적지 않은 땅을 가진 워커힐이 소국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아차산성이 휴전선 등 예민한 곳에 있거나 군부대에 있다면 금지된 구역이 이해가 가나 저곳
은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누가 들으면 아차산성이 휴전선 부근에 있는 걸로 알겠다.
속히 속세에 개방되어 자유롭게 발자국을 찍었으면 좋겠다.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2보루에서 다시 주능선으로 나와 남쪽으로 하염없이 내려가면 두툼히 살이 오른 봉우리
가 나타난다. 그가 아차산1보루이다. (중간에 아차산5보루가 있으나 여기서는 통과함)
1보루가 넘버원 1보루가 된 것은 아차산 보루 식구 중 가장 잘나서가 아니다. 남쪽을 기준으
로 발견된 순서대로 정리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3보
루)을 이어주었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  작은 봉우리 같은 아차산1보루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된 4보루를 참
고해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한번 그려보는 것도 의미
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모습을 남긴 뚜렷한 사진이나 기록도 없으
니까 말이다.

* 아차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143-127


▲  아차산1보루의 남쪽 끝

아차산1보루를 둘러보고 낙타고개와 영화사(永華寺)를 거쳐 속세로 내려왔다. 사진에 담는 것
은 1보루에서 완전히 마무리를 지어 더 이상 다룰 것은 없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복습한 아차산 나들이는 기분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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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상큼한 남쪽 지붕, 삼성산~호암산~목골산 <관악산호수공원, 성주암, 서울둘레길5코스, 독산자락길>

삼성산, 호암산, 목골산 초여름 나들이



' 삼성산, 호암산, 목골산 초여름 나들이 '

호암산
▲  호암산

삼성산 성주암 호암산 북쪽 능선길

▲  삼성산 성주암

▲  호암산 북쪽 능선길

 



 

여름 제국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던 6월의 끝 무렵,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인 호암산(虎
巖山, 393m)을 찾았다.
툭하면 찾아오는 호암산 앓이도 잠시 해소하고 호암산과 삼성산(三聖山)에 아직까지 살
아남아 내 속을 긁는 몇 남지 않은 미답처들도 싹 정리하고자 찾은 것으로 햇님의 고개
가 서서히 꺾이던 15시에 서울대 정류장에서 길을 시작했다.
(산행시간 약 3시간, 산행거리 약 9~10km)



 

♠  관악산호수공원과 삼성산 성주암(聖主庵)

▲  삼성산과 관악산으로 인도하는 신림로 숲길

삼성산과 관악산(冠岳山, 632m)의 주요 북쪽 기점인 서울대 정류장에서 짙은 숲에 감싸인 도
로를 따라 15분 정도 가면 관악산호수공원이 잘빠진 호수와 자하정, 귀여운 석구상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오로지 성주암 등의 미답처(未踏處)에 정신이 팔려 그냥 넘어가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
게를 그냥 못 지나친다고 못이긴 척 잠시 발을 들였는데, 이곳은 서울대에서 관악산, 삼성산
으로 오를 때 꼭 거쳐가는 곳으로 바쁘면 돌아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잠깐 들린다고
큰일 날 것은 없다.


▲  관악산 호수공원의 귀염둥이, 석구상(石狗像)
관악산 호수공원을 조성하면서 장만한 것으로 호암산 한우물 부근에 있는
석구상을 축소, 재현했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실물보다는 이곳
석구상이 훨씬 귀엽게 다가온다.

▲  관악산 호수공원의 이름값을 하는 호수

지금은 상큼한 호수공원으로 있지만 예전에는 계곡물을 이용한 수영장이 있었다. 그 수영장은
문을 닫았으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흉물스럽게 있던 것을 1996년 12월부터 거의 1년에 걸쳐 손
질을 하여 1997년 12월 자연과 어우러진 호수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공원에는 그 이름값을 하는 호수와 자하정, 석구상(1997년 11월 제작됨), 나무다리 2개, 분수
대, 쉼터 등이 있으며, 소나무 외 18종 9,180주, 초화류 수련 등 3,190본을 심어 아름답게 다
듬었다. 이렇게 싱그러운 공간이건만 바람직하지 않게도 옥의 티가 하나 있어 심히 불편함을
준다. 바로 왜정(倭政)과 독재 세력에 철저히 빌붙어 영혼을 팔고 부귀영달을 누렸던 서정주(
1915~2000)의 시비(詩碑)가 있다는 것이다.

서정주는 관악구 남현동(南峴洞)에서 30년이나 서식하여 관악구와도 인연이 깊다. 게다가 20
세기 주요 시인으로 쓸데없이 꼽히다보니 관악구청이 그의 그릇된 점을 살피지도 않고 문학적
업적만 내세우며 이렇게 개념도 없이 시비를 세운 것이다. 또한 서울시는 그보다 한술 더 떠
그의 남현동 2층 양옥을 인수해 내부 손질을 거쳐 그의 유품과 문학작품을 취급하는 기념관으
로 세상에 내놓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오히려 때려 부시고 연못을 파야 될 판에<예로부터 역적(逆賊)의 집은 말끔히 부시고 그 자리
에 연못을 팠음> 관악구와 서울시가 앞장을 서서 그의 흔적을 붙잡아 찬양하고 있으니 행정관
청 철밥통들의 역사의식과 개념들이 이렇게도 없다. <관악구는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도난을 당하자 이것도 쉬쉬하여 크게 욕을 먹은 화려한 전력이 있음>


▲  오늘도 평화로운 호수

호수는 거의 생태연못 수준으로 수초(水草)가 많고 오리와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거닐고 있어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 그 자체이다. 세상이 시끄럽든 말든 여기서는 그저 다른 세상의 이야
기 같다. 섬 복판에는 동그란 섬까지 띄워놓아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숲 너머로 서울대 농업
생명과학대학 건물이 고개를 내밀며 이곳의 경치를 시샘한다.

    ◀  연못에 두둥실 띄워진 동그란 섬
섬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깥 세상을 거부하며
고고하게 솟아있다. 인간의 손길이 거의 미치
지 않는 곳이라 마음껏 나래를 펼치며 그 섬의
주인 노릇을 한다.

◀  호수공원의 화려한 입술, 자하정(紫霞亭)
1997년에 지어진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살
짝 들려진 처마의 선이 꽤 경쾌하고 아름답다.


▲  북서쪽에서 바라본 자하정과 호수, 그리고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  호수를 순찰하는 압공(鴨公, 오리)의 위엄
오늘도 저들이 있기에 호수는 평안하다.

▲  성주암을 알리는 표석
관악산 호수공원을 둘러보고 성주암으로 이동했다. 공원에서 성주암까지 10분
거리로 관악산119산악구조대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성주암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  성주암 대웅전(大雄殿)

삼성산 북쪽 끝자락이자 돌산 동쪽에 성주암(聖住庵)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원
효대사(元曉大師)가 677년에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가 절을 짓고 머물렀다고 해서 성주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즉 원효대사를 성스러운 존재로 높인 것이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
은 아쉽게도 없는 실정이다.

14세기에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태정원년<泰定 元年, 원나라(몽골) 태
정제의 연호, 1324년>이라 쓰인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때 창건되거나 중창된 것으로 여겨진
다. 그것이 성주암에서 나온 것 중 가장 늙은 유물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삼막사(三幕寺), 안흥사<安興
寺, 염불사>, 망일사<望日寺, 망월암>와 더불어 관악산의 4개 사찰로 나오며 성주사(聖住寺)
로 기록되어 있다. (삼성산을 관악산의 일원으로 보기도 함) 또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시흥
읍지(始興邑誌)'에는 삼막사, 호압사(虎壓寺), 염불사(念佛寺)와 함께 4개 절의 하나로 나와
있어 삼성산 일대에서 제법 인지도가 있던 절임을 알려준다.
1883년 금화형기가 만든 현왕탱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으며 오래된 석탑도 1기 있었으나 왜정
(倭政) 때 왜인이 빼돌렸다.

1897년 만월(滿月)이 폐허가 된 절터에 작은 암자를 지어 법등(法燈)을 다시 켰고 1966년 혜
담(慧潭)이 중창을 했다. 1971년 화강석을 이용해 대방(大房)을 지었고 1981년 종연(宗演)이
3년에 걸쳐 대웅전을 지었으나 1997년 10월 화재로 대웅전 등 목조 건물이 모두 날라가고 말
았다. 이때 서울과 경기도의 40여 사찰이 불의의 방화를 당했다.
이후 주지 재홍(才弘)의 지도 아래 승려와 신도들이 임시 천막을 치고 3년에 걸쳐 불사(佛事)
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으며, 2006년 12월 관악구 전통사찰로 지정을 받았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대방 등 4~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늙은 유물은 커녕 고색도 다
말라버려 오랜 역사를 무색하게 한다. 절은 북/서/남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동쪽만 확
트여있어 관악산이 훤히 바라보이며 마치 알둥지처럼 자리 또한 포근하다. 게다가 절이 암자
에 걸맞게 아담하여 두 눈에 쏙 넣고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으며 대방 뒤쪽으로 돌산과 호암
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 성주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198 (신림로 15-250, ☎ 02-877-7180)

▲  성주암 대방(大房)
종무소와 선방, 요사(寮舍), 공양간의 역할을
하는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그 뒤쪽에
호암산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다.

▲  11면 관세음보살상
큰 얼굴 하나에 작은 얼굴 10개 등, 11개의
얼굴을 지닌 관세음보살이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관악산을 지그시 바라본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화려한 닫집
마침 유가족들이 49재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살짝 담았다.

▲  성주암에서 바라본 관악산의 위엄
성주암은 관악산 조망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다. 바로 정면에 관악산이
마치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  대웅전 뒤쪽 바위에 주렁주렁 달린 칠성탱과 산신탱, 약사여래상

성주암은 다른 절과 달리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머금은 그 흔한
삼성각(三聖閣)이나 산신각 등의 건물이 없고, 대신 대웅전 뒤쪽의 그늘진 암벽을 활용해 칠
성탱과 산신탱을 두어 노천 삼성각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바위 피부를 무작정 깎아서 만든 것은 아니며 별도의 돌판에 그들을 새겨 벼랑 앞에
두었다. 그리고 산신탱 위쪽 벼랑에는 석조(石造) 약사여래좌상을 두었는데 그가 경내에서 가
장 높은 곳을 장식하고 있다.

▲  하얀 피부의 석조 칠성탱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매끈하다.

▲  산신 가족이 담긴 석조 산신탱(밑)과
석조 약사여래좌상(위쪽)


▲  5층석탑과 마니차

성주암은 바로 눈에 보이는 대웅전 주변이 전부가 아니다. 대웅전 뒤쪽 벼랑에 칠성탱과 산신
탱 등이 있으며, 대방 뒤쪽으로 가면 8각으로 다듬은 참한 모습의 석탑과 그를 반원(半圓) 모
양으로 둘러싼 마니차가 있기 때문이다.

5층석탑은 성주암의 유일한 탑으로 8각의 바닥돌과 연꽃무늬와 팔부중상(八部衆像) 등이 새겨
진 기단석(基壇石) 위에 8각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를 보륜(寶輪) 등의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탑 뒤에는 '마니차'란 동그란 돌덩어리가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그는 티벳불교에서 전래된 것
으로 윤장대(輪藏臺)와 비슷한 것인데, 손으로 저것을 돌리며 염불을 하거나 소망을 빌면 경
전을 모두 이해한 것과 같다고 하며 소망도 같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 많다보니 저런 것을 이용해 영업을 한 것이다.


▲  티벳 글자가 새겨진 마니차

마니차 밑에 있는 검은 피부의 돌판에는 1997년 이후 절 중창에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이 빼
곡히 적혀있다. 저들이 있기에 성주암이 다시 일어선 것이다. 그러니 너무 외형 확장과 재물
에 욕심내지 말고 오직 사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여 속세(俗世)를 위해 사는 아름다운 절이
되기를 바라면서 성주암과의 첫 인연을 정리한다.



 

♠  호암산과 서울둘레길5코스 거닐기

▲  성주암에서 호암산으로 인도하는 산길

5층석탑을 지나면 돌산, 호암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손짓을 한다. 그 길을 오르면 돌산 북쪽
으로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서울둘레길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와 관악산둘레길 2구간(서울대 정류장↔국제산장아파트, 4.7km)과 만난다.
둘레길 대신 하늘과 가까운 곳을 원한다면 호암산과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서남쪽 산길을 이용
하면 되며 관악산둘레길 2구간이 장군봉 북쪽까지 동행을 한다. (둘레길의 위치상 삼성산둘레
길이 맞지만 관악산둘레길을 칭하고 있음)

나는 산봉우리 대신 성주암과 호암산 북쪽 능선 등의 미답처 개척을 위해 왔으므로 호압사로
빠르게 이어지는 서울둘레길5코스를 택해 길을 재촉했다.


▲  솔내음이 오각을 간지럽히는 돌산 북쪽 산길

▲  서울둘레길5코스 약수사 윗쪽 구간

돌산 북쪽에서 호압사까지 서울둘레길5코스 구간은 느긋한 길의 연속이다. 오르락과 내리락이
반복되지만 호압사 직전 구간을 빼면 그 기복은 별로 없으며 관악산 산림쉼터, 약수사(藥水寺
), 삼성산성지 등의 조촐한 명소들이 연이어 포진해있어 가는 길이 심심치 않다.


▲  관악산 산림쉼터 (약수사 윗쪽~삼성산성지 구간)

잣나무와 메타세콰이아, 단풍나무를 빽빽히 심고 그 짙은 그늘에 쉼터를 닦았다. 숲 그늘에는
의자와 평상 등을 넉넉히 깔아 잠시 쉬어가거나 낮잠, 독서, 간식 섭취에 아주 좋으며 숲속도
서함도 비치하여 독서의 여유도 누리게끔 했다.


▲  관악산 산림쉼터 앞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  삼성산성지 동쪽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①

▲  삼성산성지 동쪽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②
오로지 정면에 보이는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맹수처럼 삼성산성지는 쿨하게
통과했다. 어차피 적지 않게 인연을 지은 곳이다.

▲  수풀을 앙증맞게 다져놓은 서울둘레길5코스 (삼성산성지~호압사 구간)

▲  호암산 밑에 이르다 (사진에 보이는 산이 호암산 정상)

삼성산성지에서 10여 분 정도 오르면 호압사 분기점에 이른다. 이곳에는 넓게 쉼터가 닦여져
있는데, 남쪽으로 각박하게 이어진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호암산 정상에 이르며 호압사는
쉼터 서쪽에 펼쳐져 있다.
호암산에 가면 보통 호압사를 끼고 가는지라 이곳 분기점은 아주 낯이 익다. 여기서 보통 호
압사와 서울둘레길5코스 석수역 방향인 서쪽, 삼성산성지와 서울둘레길5코스 서울대 방향인
동쪽, 정상과 한우물 방향인 남쪽으로만 주로 갔지 북쪽 길은 단 1번도 가지를 않았다. 아무
래도 동/서/남쪽으로 호압사와 한우물, 석구상,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 서울둘레길5코스 등
호암산의 알짜배기 명소들과 잘생긴 바위들, 일품 조망들이 펼쳐져 있고, 삼성산과도 이어지
므로 버릇처럼 자꾸 가던 쪽으로만 간 것이다. 반면 북쪽은 딱히 흥미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북쪽을 개척하고자 찾은 것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독산자락길)과 목달산

▲  호압사분기점 북쪽 헬기장

호암산 북쪽 능선은 시흥동과 독산동(禿山洞), 난곡 사이로 펼쳐진 긴 산줄기이다. 북쪽으로
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져 금천구(衿川區)의 북쪽 지붕이자 관악구(冠岳區)의 서쪽 지붕을 이
루는데, 선우공원 주변은 따로 목달산이라 불리며, 그 산줄기를 따라 '독산자락길'이 호압사
분기점에서 독산고교(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진다.
 
처음에는 독산고교까지 욕심을 냈으나 산길이 생각 밖으로 너무 길었다. '아니 이렇게나 긴
산줄기였나?' 크게 놀라며 1시간이나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그곳 남쪽인 쌍용아파트에서 길을
접고 철수했다. 몸도 지쳤고 햇님의 퇴근시간도 임박했기 때문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①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②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은 북쪽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는다. 그러다보니 길도 완만하
고 숲도 삼삼해 여름 햇살도 눈치를 보며 내려앉는다. 정면만 본다면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을 거니는 기분이나 좌우로 시가지가 진하게 바라보여 그 감흥을 50% 이상 떨어트린다. 이
는 1960년대 이후 서울이 나날이 비대해짐에 따라 개발의 칼질이 호암산과 목골산의 살을 마
구 후벼 팠기 때문이다.
다행히 늦게나마 도시공원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이 정도라도 남게 된 것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아마도 호암산 북쪽 능선의 대부분은 절단이 났을 것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③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④

▲  독산자락길(호암산 북쪽 능선길) 시흥4동과 난향동 경계 구간
이쪽에 이르면 시흥4동과 난향동(난곡) 주택가가 능선 좌우로 너무 깊게 들어와
산세 폭이 200m 내외로 확 좁혀진다. 허나 이곳을 지나면 목골산이
나오면서 다시 산세가 넓어진다.

▲  목골산 남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①

목골산(163m)은 호암산의 북쪽 끝이자 삼성산의 서북쪽 끝으머리를 잡고 있는 뫼이다. 독산동
과 시흥4동, 난곡(난향동, 난곡동, 미성동)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 자락에는 선우공원이 넓
게 자리해 있다.
서쪽과 남쪽은 경사가 조금 있으나 북쪽과 동쪽은 완만하며 선우공원을 중심으로 미성동둘레
길이 별도로 닦여져 있다. 이 둘레길은 독산고교 뒤쪽에서 시작해 정심초교 뒤쪽 → 관악구
민방위교육장 → 목골산 북쪽 자락 → 선우공원 동부 → 영산홍동산을 거쳐 독산고교로 이어
지는 3.4km의 순환형 길이다.


▲  목골산 남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②

▲  목골산에서 만난 이정표 의자
이정표 역할을 하는 의자는 처음 본다. (동네 사람들이 만든 것임)

▲  잠시 하늘로 솟구치는 목골산 능선길

▲  목골산 미성동둘레길

▲  목골산 영산홍동산

선우공원 북쪽에 영산홍이 잔뜩 깃든 영산홍동산이 있다. 영산홍은 4~5월에 홍자색(紅紫色)
꽃을 피우는데 내가 갔던 때는 6월 말이라 영산홍은 커녕 그 떨어진 잎도 없었다. 이는 영산
홍의 잘못이 아닌 철을 맞추지 못하고 찾아온 나의 불찰이다. 다음에 영산홍 철에 다시 한번
찾아와 이곳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맛보고 싶다.


▲  목골산을 내려가며

영산홍동산을 내려가니 쌍용아파트가 나온다. 여기서 북쪽 산이 독산자연공원이나 시간도 이
미 18시가 넘었고 몸도 지친 터라 쿨하게 길을 접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성주암부터 해서 적
지않은 미답지를 지웠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보람을 느낀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 삼성산~호암산~목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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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2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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