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산'에 해당되는 글 125건

  1. 2023.02.06 서울 도심의 북현무를 거닐다. 북악산 한양도성 나들이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숙정문, 말바위>
  2. 2023.01.12 은평구의 작은 지붕들, 봉산 ~ 백련산 나들이 <봉산 봉수대, 서울둘레길7코스, 백련근린공원>
  3. 2022.10.03 서울 동쪽 변두리에 숨겨진 작고 상큼한 뒷동산, 일자산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서울둘레길3코스, 둔굴)
  4. 2022.09.24 서울의 북쪽 지붕이자 우리 동네 뒷동산, 도봉산 <무수골, 우이암(관음봉), 관음암, 천축사>
  5. 2022.07.30 서울의 동쪽 지붕이자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거닐기 (아차산둘레길, 긴고랑계곡, 아차산4보루, 서울둘레길2코스)
  6. 2022.07.09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동쪽 지붕, 아차산 초여름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5보루, 아차산1보루)
  7. 2022.03.18 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인왕산둘레길 나들이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8. 2022.02.26 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나들이 (홍제천인공폭포, 연희숲속쉼터, 안산자락길, 안산메타세콰이어숲길)
  9. 2022.01.21 호랑이해 기념) 호랑이를 닮은 서울의 숨겨진 바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호암산폭포, 서울둘레길5코스)
  10. 2022.01.18 광주 무등산옛길3구간, 충효동, 광주호 겨울 나들이 (풍암정, 원효계곡, 충효동요지, 충효동 왕버들군, 광주호호수생태원)

서울 도심의 북현무를 거닐다. 북악산 한양도성 나들이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숙정문, 말바위>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도심 북악산 청운대

▲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북악산 청운대

 



 

가을이 늦가을로 한참 숙성되어 가던 11월의 첫 무렵, 서울 도심의 북현무(北玄武)인 북
<北岳山, 백악산(白岳山)>을 찾았다.

북악산은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구석구석 찾고 있는데, 이
번에는 한양도성이 흐르는 주능선(창의문~말바위)을 복습하기로 했다. 이미 지겹도록 복
습한 곳이지만 돌아서면 또 생각나고 몸살 나게 그리워지니 내 전생이 아마도 북악산 고
양이나 산짐승이었던 모양이다.


 

♠  북악산 창의문~백악마루 구간

▲  창의문(彰義門) - 보물 1,881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의 서쪽 관문이자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경계에 자리한 창의문은 자
하문고개를 오랫동안 지켜온 성문이다.
성밖 부암동(付岩洞)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서울 도심을
둘러싼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이다. 여기
서 4소문이란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과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
小門, 광희문(光熙門)>, 그리고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렸으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北小門)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닦으면서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했다. 또한 문 북쪽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에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별서와 그들이 즐겨 찾던 경승지가 즐비하여 그들의 은밀한 통행로
로 쓰이기도 했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
監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
문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늙었을 뿐, 문루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58년에
중수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의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은 끝
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  창의문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
(혹은 닭)과 구름무늬


1960년대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았는데, 그 과정에서 문 서쪽 50m 남짓 성
곽이 끊어지게 되었다. 하여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
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곽이 견우와 직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
간은 도로 위에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앞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봐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의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해서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
림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고,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
황의 모습 같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늦가을에 잠긴 창의문 안쪽(남쪽) 숲길

창의문을 둘러보고 마치 국경 검문소 같은 창의문안내소를 들어서면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시작되어 방심하기 쉽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성곽길은 점차 각박한 모
습을 보인다. 하여 쉬엄쉬엄 가라며 돌고래쉼터와 백악쉼터 등 2곳의 쉼터를 두었다. 가쁜 숨
을 내쉬며 발을 움직여야 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 거리도 그리 길지가 않다.


▲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돌고래쉼터 구간 (백악마루 방향)

▲  돌고래쉼터와 돌고래바위

성곽길이 슬슬 흥분기를 보일 쯤에 돌고래쉼터가 모습을 비춘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악산 주능선을 개방하고 이곳에 쉼터를 닦으면서 붙인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며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
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으로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바라보인다.


▲  힘차게 흘러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 방향)
성 안쪽은 종로구 청운동(淸雲洞), 바깥은 부암동 지역이다.

▲  정상을 향해 숨가쁘게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

▲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 북악산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비봉능선, 문수봉 등


눈이 시리도록 맑은 푸른 하늘 밑으로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북악산과 북한산(삼
각산)을 빚었고,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은 그 틈에 평창동
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부암동 같은 동네를 닦았다.
사진 왼쪽 동네가 홍지동(弘智洞)과 부암동, 신영동이며, 중앙과 오른쪽은 이 땅에 0.1%가 산
다는 평창동(平倉洞)으로 졸부들의 고래등 저택과 고급 빌라가 즐비해 보는 눈이 썩 즐겁지가
않다.


▲  백악마루입구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부암동과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과 북악산 북쪽 자락,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창의문에서 백악마루입구 구간 중에서 '돌고래쉼터~백악마루입구' 구간이 가장 경사가 각박하
다. 안그래도 힘든 가파른 길이 여기서 크게 흥분기를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백악마루에
서 창의문 구간 산세가 거의 급경사를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 산에 대한 자존심을 곱게 접고
천천히 한 발자국씩 딛다 보면 나올 것 같지 않던 백악마루가 알아서 모습을 드러낸다.


▲  북악산 정상 바위 (백악마루)

창의문안내소에서 20여 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342m)에 이르게 된
다. 여기서 마루는 순수 우리말로 정상, 산꼭대기를 뜻하는데,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현장으로 정상 한복판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 사람 키보다 2배 남짓 높은 크고 견고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
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그러니 정상 인증을 하려면 무조건 바위에 올라가기 바란다.

정상 남쪽에는 소나무와 진달래가 우거져 있으며, 정상 바위와 난간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숨겨진 산길이 있으나 아주 비싼 길이라 출입을 통제
하고 있으며, 난간 너머는 나라의 예민한 구역이니 애써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북쪽으로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
쪽은 부암동과 인왕산,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산, 멀리 관악산(冠岳山)과 호암산까지 두 눈
에 들어와 조망도 일품이다.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으로 서
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고 오랜 세월 서울을 지켜온 북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북악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27

▲  백악산 정상 표석

▲  북악산 정상부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白岳山)> - 국가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은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다. 이들을 내사산
(內四山)이라 부르는데, 그들 중 북악산이 맏형이며, 낙산은 막내 동생이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구축했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따라
북악산을 북현무(北玄武)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산으로 서울 도심(종로구, 중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바라보이는데,
오랫동안 서울을 상징하는 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닦고, 그
북쪽(현재 청와대)에는 넓게 경복궁 후원을 두었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북문인 숙정문
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자하문)이 고색의 모습으로 고개 중
턱을 지킨다.
북악산 남쪽 자락인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성
했으며, 북악산이 베푼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
堂)계곡 등이 있었고, 풍경이 아름다워 조선 초기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숙정문 남쪽 주변은 사대부 여인들의 봄꽃놀이 명소로 바쁘게 살았다.
한양도성과 법흥사(法興寺)터, 대은암계곡 바위글씨, 만세동방성수남극 바위글씨 등 여러 문
화유적이 있으며, 북악산 북쪽 자락 백사실계곡에는 백석동천이란 별서(別墅) 유적이 전하고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짙어서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
났다. 그들은 툭하면 궁궐 후원과 북촌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
가 호랑이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북악산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은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進宮)
귀신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하여 인왕산과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
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당임)

1968년 1.21사태 이후 굳게 닫힌 북악산은 북악산길과 주택가와 접한 일부 산자락만 겨우 출
입이 가능했으나 2000년대 초반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이 개방되었고, 2006년 4월 1일 홍련사
에서 숙정문, 촛대바위 구간이 해방되면서 굳게 잠겼던 북악산 주능선의 자물쇠가 드디어 열
리기 시작했다.
하여 2007년 4월 5일 말바위에서 창의문까지 주능선 구간(4.3km)이 싹 해방되었으며, 2009년
에 북쪽 능선의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열렸고, 삼청공원~말바위 구간 등이 해방되었다가
2020년 11월 '북악산길~청운대쉼터','북악산길~곡장' 구간이 추가로 열렸다. 그리고 2022년
봄에 '삼청공원~청운대쉼터','삼청공원~법흥사터~숙정문','칠궁/춘추관~백악정' 등이 더 열려
지금에 이른다.
이렇듯 북악산의 금지된 속살이 많이 열렸지만 그렇다고 이곳의 예민한 성격까지 가라앉은 것
은 아니다. 하여 여전히 금지 구역은 적지 않으며, 북악산 주능선과 주능선으로 인도하는 길,
청와대 주변 길(칠궁/춘추관~백악정)은 탐방시간에 제한이 있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주로 남아있다. 또한 오랫동
안 금지된 곳으로 엄격히 묶여있던 탓에 나무와 식물들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려 숲이 원시림
마냥 울창해 서울 도심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
고 있어 새들이 많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아차산, 관악산 등과 더불어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
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쭉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으니 개발의 칼질 또한 그 눈치로 마음껏 칼질을 할 수는 없
다.

북악산(백악산)은 '서울 백악산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된 면
적은 3,598,127㎡에 이른다.

* 북악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부암동, 삼청동, 명륜동 / 성북구 성북동 (창
  의문안내소 ☎ 02-730-9924,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 말바위안내소 ☎ 02-765-0297)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관악산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 동쪽 자락과 성북동,
성북구, 동대문구, 서울 동부 및 동북부 지역


 

♠  북악산 청운대~말바위 구간

▲  청운대(靑雲臺) 표석의 위엄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청운대(293m)가 마중을 한다. 난쟁
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키의 청운대 표석이 이곳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는데, 공간이 넓
고 의자가 넉넉히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특히 말바위나 숙정문, 삼청공원, 북악산길
에서 올라왔다면 여기서 코앞에 보이는 백악마루에 입맛을 다시며 잠시 두 다리를 쉬기 마련
이다.
여기서는 성북동과 북한산(삼각산),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울 도심, 남산 등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아주 일품이다.


▲  청운대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 주능선과 동쪽 자락, 성북동, 성북구, 강북구 등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등이 흔쾌히 시야에 잡힌다.

▲  시원스럽게 뻗은 한양도성 청운대~곡장입구 구간 (동쪽 방향)

성곽 바깥 길 북쪽에는 철책이 꽁꽁 둘러져 마치 휴전선이나 국경선을
거니는 쫄깃한 기분이다.

▲  청운대쉼터
북악산 주능선에서 가장 너른 쉼터로 군부대 운동장을 개조해 나그네들의
쉼터로 삼았다.

▲  한양도성 촛대바위~곡장입구 구간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 소나무의 푸른 물결과 향긋한 솔내음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숙정문 서쪽에는 촛대바위가 있다. (숙정문과 곡장입구 사이에 있음)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듯 싶은데, 바위 남쪽 밑에서 봐도 그다지 촛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바위 남쪽 밑 탐방로는 2022년 봄에 해방되었으며, 바위 정상부는 여전히 금지구역임)

천하가 북악산 촛대바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왜정이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무식하게 쇠말
뚝을 박았던 추악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에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는데,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의
정수리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의 머리 부분을 아작 내어 이 땅을 영원히 뜯어먹겠다는 의
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으나 말뚝의 휴유증 때문일까? 이 땅은 아직
도 혼돈에 잠겨있다. 친일매국노와 그런 것을 추종하는 잡것들이 권력과 부를 챙기고 이 땅을
이간질시켜 나라의 기본부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촛대바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까?
그때가 되면 주름진 나라 사정도 좀 펴지겠지.
(왜정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측량용이란 말도 있으나 설령 측량용이라고 해도 그건 일부에 불
과함. 대부분은 추악한 의도로 꽂은 것들임)


▲  숙정문 서쪽에서 바라본 성북동(城北洞)
산자락에 포근히 감싸인 동네가 평창동과 더불어 이 땅에 0.1%가
산다고 하는 성북동이다.

▲  한양도성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 앞은 바로 각박한 산비탈이라 성문을 지키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북쪽을 향해 입을 연 숙정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으로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과 함께 도성 4대문의 일원이다. 하
여 북문, 북대문(北大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고 규모가 작아 도
성의 대문이라기 보다 산성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진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가운데 1자만 다른 숙청문(
肅淸門)이었다. 1396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 풍수학자인 최양선이 태
종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해 이들 문을 꽁꽁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 연유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이는 예
민한 위치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설령 이 성문을 나와도 이어지는 곳은 숲이 무성한 북악산 북쪽 능선과 북한산, 성북동이 고
작이었다. <성북동은 동소문(東小門)을 통해서 갈 수도 있음>
그리고 평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고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에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서 북쪽은 음
(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의 존재
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훨씬 컸던 것이다.

1504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이름이 갈렸
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한다. 숙정문 외에도 북정문(北靖門)
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언제부턴가 숙정문으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이 금지된 구역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
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문루를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성북동 일대가 바라보이며, 높은 곳에 자리한 것
은 분명하지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고, 북쪽도 겨우 성북동과 삼청각
, 북악산 북쪽 능선이 전부라 조망은 생각보다 별로이다.
매년 봄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전하는 것은 없다.

* 숙정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5-22


▲  한양도성 숙정문~말바위 구간

▲  북악산 말바위

말바위안내소를 나와 동쪽으로 조금 가면 성 밖으로 넘어가는 계단길이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을 부시고 길을 낼 수가 없어 부득이 성곽 위로 높게 나무다리를 내어 성밖으로 통
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전망대를 설치해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을 비롯해 성북구, 종로구 동부,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 성동구, 수락산~불암산, 아차산~용마산 등이 훤히 망막에 들어와 조망도 진국이다. 특히 여
기서는 성북동 대부분이 시야에 들어와 성북동전망대라 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서 성곽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말바위란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가 마중을 한다. 그
는 북악산(백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 때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詩文)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쉬었다고 한다. 하여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
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북악산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한다. 즉 말처럼 생겼다고 해
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39
년에 시간이 흐른 2007년 4월에 다시 공개가 되었고 관람 통제가 심한 북악산 주능선 구간과
달리 이곳은 아침과 저녁에도 접근이 가능하다.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말바위에서 성곽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오른쪽(남쪽)으로 길이 90도 꺾인다. 성곽과 더 함께
하고 싶어도 군사시설로 길이 완전히 막혀 별수 없이 남쪽 길로 내려가야 되는데, 소나무가
무성한 그 길을 내려가면 북악산 남쪽 자락에 넓게 깃든 삼청공원(三淸公園)이다.

삼청공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나와 취운정(翠雲亭)터 표석이 있는 감사원교차로에서 왼쪽(북
쪽) 길로 가면 성북동과 성대후문으로 인도하는 와룡공원 고갯길(와룡고개)이 펼쳐진다. 이곳
은 도심과 성북동을 바로 이어주는 지름길로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지그재그로 굴곡의
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숲도 삼삼하고 경치도 아름다우며, 특히 벚꽃이 살랑거리는 봄과 단풍
의 향연이 우울한 마음을 부여잡는 늦가을 풍경은 이곳의 갑(甲)으로 꼽힌다.
게다가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조망과 야경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걸작이다. 길 밑에
는 도심에 숨겨진 뒷길인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너른 숲
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서울의 동궐(東闕)인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이다.

이렇게 하여 북악산(백악산) 나들이는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와룡공원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 이후 내용은 생략~~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월 22일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은평구의 작은 지붕들, 봉산 ~ 백련산 나들이 <봉산 봉수대, 서울둘레길7코스, 백련근린공원>

서울 봉산, 백련산



' 은평구의 작은 지붕들을 거닐다 (봉산, 백련산) '

봉산 봉수대

▲  봉산 봉수대 (봉산 정상)

백련산에서 바라본 은평구 지역 백련산 능선길

▲  백련산에서 바라본 은평구 지역

▲  백련산 능선길

 



 

♠  봉산(烽山) 둘러보기

▲  수국사에서 봉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길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5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봉산을 찾았다. 둥근 해가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구산동(龜山洞) 버스 종점에서 그를 만나 떡볶이와 순대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황금사
원으로 유명한 수국사에 발을 들였다. (☞ 수국사 둘러보기)
이미 여러 차례 인연을 지었던 수국사는 코 앞으로 다가온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준비에
아주 분주했는데 그런 경내를 20분 정도 둘러보고 서쪽 산길을 통해 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수국사에서 완만하게 이어진 산길을 10여 분 정도 오르면 봉산 능선길에 이르는데 여기서 북
쪽으로 가면 벌고개, 앵봉산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5~6분 정도 가면 봉산 정상이다.


▲  수국사 서남쪽 산자락에 닦인 체육시설과 쉼터

봉산 능선은 수색에서 벌고개까지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북쪽으로 바로 이어진 앵봉산
과 더불어 은평구의 서쪽 벽으로 천하 제일의 둘레길로 콧대가 높은 서울둘레길이 그들의 신
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가는데, 봉산 능선을 거쳐가는 서울둘레길 7코스<봉산~앵봉산 코스,
가양역↔구파발역 16.4km> 덕분에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면서 외지 탐방객들이 많이 늘었다.


▲  녹음이 익어가는 봉산 능선길 (서울둘레길7코스, 정상 방향)

▲  봉산 정상 직전 능선길 (서울둘레길7코스)

▲  봉산 정상에 세워진 봉화정(烽火亭)

봉산(207.8m)은 서울 은평구와 고양시(高陽市)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약간 작은 산이다. 폭은
좁지만 대신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수풀이 걸쳐진 커다란 벽 같다.
봉화대(烽火臺)가 있던 산이라 하여 단순하게 '봉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산 정상에
서 좌우로 뻗은 산줄기가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평화롭게 앉아있는 형상이라 하여 봉령산(
鳳嶺山)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으며, 수국사에서는 '태화산(太華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봉산 북쪽은 벌고개를 경계로 하여 앵봉산과 살을 대고 있고, 남쪽은 경의선 철로를 넘어 하
늘공원과 매봉산으로 이어지는데 정상 동북쪽에 봉산의 대표 명소인 수국사가 안겨져 있으며
정상에는 2011년에 지어진 봉수대와 봉화정이 있어 약소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또한 예로부터 봉산 무지개가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여름에 소나기가 온 이후, 봉산
과 백련산(응암동) 사이로 일곱 색깔 무지개가 종종 나타났다고 한다. 그 빛깔이 선명하고 고
와 천하 무지개 중 최고였다고 하며, 무지개가 나타나면 동네 아이들은 그것을 타고 선녀 누
님이 내려온다고 하여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허나 인간의 이기적인 개발의 칼질과 산업화로 선녀도 등을 돌리면서 그 무지개도 거의 자취
를 감추었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에는 무지개를 종종 만났지만 다 커서는 자연산 무지개를
제대로 구경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분수대나 인공폭포에서 생기는 무지개는 제외)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구산동, 갈현동 주민
들이 정상에 모여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
를 외쳤던 유서 깊은 현장이기도 하며, 2011년
에 은평구에서 정상에 '봉산 해맞이공원'을 닦
으면서 봉화대와 봉화정, 조망데크를 설치했다.
또한 산길을 정비하여 벌고개와 수국사, 구산
동, 신사동(新寺洞), 수색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서울둘레길7코스가 봉산을 지나가면서
산의 명성도 적지 않게 상승했다.

▲  봉산 정상 남쪽 능선길
(신사동, 수색 방향)


▲  봉화정에서 바라본 봉산 봉수대

▲  봉수대 옆에 지어진 조망데크

▲  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고양시 향동동, 망월산


▲  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구산동과 갈현동, 연신내, 북한산(삼각산) 서부


봉산은 동쪽과 동북쪽, 서쪽이 훤히 트여있어 조망이 매우 일품이며, 해돋이와 일몰 구경에도
정말 최적화되어 있다.
여기서는 은평구의 대부분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서쪽 산줄기, 백련산, 서대문구 일부, 고양
시 향동동과 용두동, 망월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오는데, 봄에 종종 지독하게 침범하는
중공 잡것들의 미세먼지 패거리가 푸른 하늘을 앗아가면서 마치 하늘이 주저앉은 듯, 시야가
뿌옇다. 구름 밑 세상은 그런데로 보이나 하늘이 미세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두 눈도 편
치 못하고, 코와 입도 괴롭다.


▲  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오늘도 중공 잡것들의 미세먼지로 고통 받는 서울의 하늘 (응암동과 신사동,
녹번동, 수색, 백련산, 북가좌동 지역)

▲  봉산 봉수대(烽燧臺)
비록 장식물로 지어지긴 했지만 저들을 다시 세움으로써 봉산이란
이름값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봉산 정상의 상큼한 장식물인 봉수대는 동그랗게 다져진 공간 복판에 자리해 있다. 봉수 2기
가 쌍둥이꼴로 바짝 붙어서 천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꽤 돈독해 보이는데, 그 뒤쪽에 조
망데크가 있고 그 앞에 너른 공터와 봉화정이 있다.

봉산 봉수대는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전한다. '봉현(峰峴) 봉수'라 주로 불렸으며,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에는 '영서역(迎曙驛) 서산(西山) 봉화'라 나와있다. <영서역은 불광동 지역>
압록강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봉수 제4거(炬)의 경유지로 고양시 고봉산(高峯山) 봉화에서 신
호를 받아 안산(鞍山, 무악산) 봉수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18세기 이후, 인근 해포봉
수(고양시 강매동)로 봉수대가 옮겨지면서 봉산 봉수대는 문을 닫게 된다.

2011년에 은평구에서 봉산 정상에 '봉산 해맞이공원'을 닦으면서 고려 말~조선 초 양식을 참
조해 약 300년 만에 다시 봉수대를 심어 산의 이름값을 다시 하게 했다. 허나 어디까지나 장
식용이라 옛날처럼 모락모락 봉화를 피울 수 없다. 게다가 고색이 아직 여물지 못했고 마치
타일을 붙인 듯한 모습이라 다소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모습도 점점
익숙해질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약인 모양이다.


▲  봉산을 내려오다 (수국사 서남쪽 산자락 쉼터와 운동시설)

봉산 정상에서 미세먼지를 무릅쓰고 20분 정도 정상의 자리를 누렸다.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탐을 내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적당히 있다가 내려오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허나 사
람은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50% 모자란 존재들이라 그 기본적인
것을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봉산 남쪽 능선을 타고 수색 쪽으로 넘어가고 싶으나 시간도 그렇고 날씨도 그
렇고 해서 나머지 구간은 다음으로 미루고 도돌이표처럼 다시 수국사로 내려왔다.

* 봉산(봉산 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산136-13일대



 

♠  은평구와 서대문구의 공동 지붕, 백련산(白蓮山)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①
홍은동과 홍제동 지역, 인왕산(왼쪽 산), 안산(오른쪽 산)


여름 제국과 가을의 팽팽한 경계선인 9월의 첫 무렵, 은평구의 동남쪽 지붕이자 서대문구(西
大門區)의 북쪽 지붕인 백련산을 찾았다.
통일로와 세검정로, 연희로가 만나는 홍은4거리에서 서쪽(연희동 방향)으로 100여m 정도 가면
오른쪽(북쪽)으로 골목이 하나 있는데, 그 골목에 백련산으로 인도하는 나무계단길이 숨어있
다. (백련산 동남쪽 기점임) 시작부터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좀 각박하나 계단길을 적당히 닦
아놓아 그 급한 성질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런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바위에 심어진 조그만 네모난 정자가 마중을 한다. 이곳에 올라
서면 동쪽으로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산줄기부터 홍은동, 홍제동, 인왕산(仁王山), 안산, 연
희동이 좁게나마 시야에 들어온다. 백련산은 통일로와 맞닿은 동쪽 부분(산골고개, 녹번동)에
는 바위와 벼랑이 많으며 응암동과 백련사와 맞닿은 서쪽과 남쪽 부분은 거의 흙산이다.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푸른 하늘 밑으로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산줄기와 탕춘대능선, 홍은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홍은동(弘恩洞)과 홍제동(弘濟洞) 지역, 그리고 인왕산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홍은동과 홍제동, 연희동, 안산(왼쪽 산), 백련산 남쪽 부분(오른쪽 산줄기)

▲  바위에 걸터앉아 시내를 굽어보는 쉼터 정자
정자는 작고 보잘것은 없지만 위치와 조망만큼은 정말 기가 막힌다. 바로 밑으로
시내가 펼쳐져 있어 마치 세상의 주인이 된 기분인데 이곳에 걸터앉아 시내
야경을 바라보며 곡차 1잔 겯드리는 재미도 꽤 쏠쏠할 것 같다.

▲  솔내음이 율동을 부리는 백련산 동쪽 능선길

바위 정자를 지나서부터 백련산의 하늘길(능선길)이 시작된다. 능선을 따라 백련근린공원, 백
련산 정상(은평정), 백련산근린공원까지 이어지며 대부분 짙은 숲길이라 그늘의 질감도 좋다. 게다가 산길 경사도 거의 느긋하고 은평정과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1급 조망까지 누
릴 수 있어 걸어가는 길이 썩 지루하지가 않다.


▲  대통령이 기념 촬영을 했다는 백련근린공원 동쪽 능선 바위
2017년 5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백련근린공원 부근(홍은2동)에 거주했음>

▲  대통령이 기념촬영을 했던 백련근린공원 동쪽 능선 바위의 앞 모습
(바위 이름은 없음)

▲  백련산의 동북쪽 끝을 잡고 있는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

백련근린공원 동쪽 조망대는 백련산의 동북쪽 끝이다. 앞이 확 트여있어 백련산에서 2등으로
일품 조망을 자랑하고 있는데 동북쪽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탕춘대능선과 족두리봉, 비봉능
선 등이 보이고 바로 밑에 녹번동을 비롯한 은평구 북부 지역, 봉산~앵봉산 산줄기, 인왕산,
북악산(백악산)까지 싹 시야에 잡힌다.

전망대 주변이 벼랑 일색이라 안전을 위해 난간을 둘렀으며, 전망대 옆으로 내려가는 계단길
이 있는데, 그 길은 통일로와 통일로 허공에 닦여진 산골고개 생태다리로 이어진다. (산골고
개 생태다리를 통해 북한산, 탕춘대능선으로 넘어갈 수 있음)


▲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은평구 북부 지역 (녹번동, 불광동, 구산동, 갈현동, 연신내, 진관동)

▲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산줄기 (족두리봉, 비봉능선, 탕춘대능선 등)

▲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홍은동과 인왕산, 북악산(왼쪽 산줄기)

▲  백련근린공원 북쪽 능선길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능선길은 서남쪽으로 크게 꺾인다. 생태공원처럼 꾸며진 백련
근린공원을 지나면 숲이 매우 삼삼한 능선길이 펼쳐지는데, 정상 주변에서 경사가 좀 흥분기
를 보일 뿐, 거의 느긋하여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다. 그런 길을 20분 정도 가면 백련산 정
상에 이른다.


▲  백련산 서쪽 능선길 (백련근린공원~은평정 구간)

▲  백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정상 직전)

백련산(215m)은 은평구 녹번동과 응암동, 서대문구 홍은동에 걸쳐있는 조촐한 뫼이다. 산 남
쪽 자락에 오래된 절인 백련사(白蓮寺, ☞ 관련글 보기)가 안겨져 있어 백련산이란 이름을 지
니게 되었는데, 조선 때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이 매를 날리며 사냥을 했던 매바위가 산자락에
있어 '응봉(鷹峯)'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매바위는 부암동의 붙임바위, 인왕산 선바위 등과 함께 서울의 이름난 바위로 1970년대까
지 있었으나 개발에 눈이 뒤집힌 동네 사람들이 무식하게 폭파시키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백련산은 동쪽 자락을 빼면 산세가 거의 완만하며 흥은4거리에서 백련근린공원, 은평정을 거
쳐 백련산근린공원까지 환상적인 능선길이 이어져 있다. 산 동쪽은 산골고개를 통해 북한산(
삼각산)과 이어지나 나머지는 거의 평지이며, 동남쪽은 홍제천을 사이에 두고 안산과 만난다.

산에 안긴 늙은 명소로는 백련사가 있으며, 산 동북쪽 자락에 백련근린공원이, 그리고 산 남
쪽 자락에는 백련산근린공원이 닦여져 있고, 산 정상에는 은평정이 자리하고 있다.


▲  백련산 정상에 자리한 은평정(恩平亭)

은평정은 한옥 양식과 콘크리트 건축 양식이 조잡하게 섞인 2층짜리 정자로 1989년에 은평구
에서 지었다.
백련산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며, 앞서 봉산처럼 해돋이와 일몰 구경에 최적화된 곳으로
여기서는 은평구 대부분 지역과 마포구, 서대문구, 고양시 동부, 한강 너머로 강서구와 양천
구,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인천 지역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은평구 남부와 마포구 서부, 하늘공원, 한강,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인천 계양산 등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응암동, 구산동, 역촌동, 갈현동 지역, 봉산~앵봉산 산줄기,
봉산 너머로 고양시 지역과 고봉산까지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은평구 북부(녹번동, 갈현동, 불광동, 연신내, 진관동 지역) 지역과
앵봉산, 노고산(老姑山) 등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녹번동과 진관동, 북한산 서남쪽 산줄기(족두리봉, 비봉능선)

▲  은평정 2층에 걸린 창정기(創亭記)
은평정의 창건 이유가 소상히 적혀있다.

▲  숲터널 속으로 빠져들다 ~ 백련산 남쪽 능선길 (백련사 방향)

▲  내리막의 연속인 백련산 남쪽 능선길 (백련사 방향)

▲  백련산 남쪽 능선길에서 만난 돌탑
백련산을 찾은 중생들이 작은 소망을 담아 쌓은 돌이 쌓이고 쌓여
자유분방한 모습의 돌탑으로 성장했다.


백련산 정상에서 10분 정도 정상의 기분을 누리다가 남쪽 능선길로 내려갔다. 숲터널과 다름
이 없는 그 길을 10분 정도 가면 백련사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하면 백련산근린공원
과 홍연초교로 이어지며 오른쪽(서남쪽)으로 내려가면 백련사이다.
여기서 백련사로 내려가면 얼마 안가서 백련사 주차장이 마중을 하며,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백련사, 동쪽은 백련사 마을버스 종점이다. 백련사는 자주는 아니지만 수국사처럼 아주 가끔
씩 찾는 절이라 이번에는 통과하고 백련사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 홍연초교 쪽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백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백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 녹번동 / 서대문구 홍은동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2월 2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 동쪽 변두리에 숨겨진 작고 상큼한 뒷동산, 일자산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서울둘레길3코스, 둔굴)

강동구의 지붕,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둔굴, 서울둘레길3코스)



' 강동구의 지붕을 거닐다. 일자산 '
(허브천문공원, 둔굴, 서울둘레길3코스)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일자산 정상

일자산 둔굴

▲  일자산 정상

▲  일자산 둔굴

 



 

여름이 무심히 깊어가던 6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강동구의 대표 지붕인 일자산(
一字山)을 찾았다.
일자산은 서울에 버젓히 남아있는 미답처(未踏處)의 일원으로 그곳에 안겨있는 허브천문
공원과 일자산 능선길(서울둘레길3코스), 둔굴을 둘러보고자 그곳을 택했다. 허브천문공
원을 빼면 모두 인연이 없는 곳들로 아직까지도 서울 하늘 밑에는 나의 발걸음을 느끼지
못한 미답처들이 적지 않아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


▲  허브천문공원 후문(부출입구)으로 인도하는 숲길

▲  반쯤 열린 허브천문공원 후문(부출입구)



 

♠  허브식물과 천문을 한곳에 다룬 서울의 이색 명소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일자산 북쪽 끝자락에는 강동구(江東區)의 야심작, 일자산 허브천문공원이 가슴을 피며 자리
해 있다.
이곳은 원래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에서 만든 길동배수지의 윗부분이다. (길동배수지는 아직
도 있음) 강동구는 일자산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수목이 성장하기에 적합한 이곳에 공원을 조
성하고자 계획을 짰는데, 처음에는 단촐하게 화초류 중심으로 꾸미려고 하였으나 2005년 6월,
서울시 도시공원위원회에 변경계획안을 제출, 인근의 길동생태공원과 생태문화센터 등과 연계
할 수 있고 허브와 천문을 취급하는 공원으로 조성하여 2006년 9월 21일에 문을 열었다.

사람에게 매우 좋은 허브식물과 천문 관련 시설을 갖춘 공원이자 서울 최초의 허브 전문 공원
으로 면적은 25,500㎡, 사업비는 15억이 들었다. 이곳에 둥지를 튼 식물은 소나무 등의 수목
28종 4,694주(교목 254주, 관목 4,440주), 지피식물 181종<허브(herb)가 142종 32,448본, 자
생 39종 9,138본>이다. (식물 수는 나중에 증감될 수 있음)
공원은 동그란 구조를 하고 있는데, 우리 고유의 전통사상인 천,지,인(天,地,人) 삼재사상(三
才思想)에서 공간 개념을 도출해 우주공간(자미원, 태미원, 천시원, 별자리, 은하수 등)을 공
원에 반영했으며, 음양오행사상에 기초해 시설물과 수목을 배치했다.

공원 내부는 크게 허브원과 약초원, 암석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허브원은 이름 그대로 허브식
물의 공간으로 공원 중앙부에 넓게 자리해 있다. 약초원은 약용으로 쓰이는 허브를 모았으며,
암석원은 돌과 허브를 조화롭게 배치했다. 유리온실에는 120종의 허브를 화분 등에 담아 겨울
에도 허브향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공원 동쪽 끝에는 새벽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관천대(일대)가 있고, 시내를 향한 서쪽에는 
일몰을 감상하는 또 다른 관천대(월대)가 있다. 동남쪽에는 어린이를 위한 놀이 공간을 닦았
는데, 이는 옛날 궁궐에서 왕자의 거처인 동궁(東宮)을 동쪽에 배치해 햇님의 기운을 가장 먼
저 받게한 연유에서 착안한 배치라고 한다.
또한 야간에 찾는 이들을 위해 공원 바닥 곳곳에 282개의 오색 별자리 조명을 설치,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별자리를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바닥 조명은 직경 75m 천문도(天文圖)를
고스란히 공원 바닥에 옮겨놓은 것으로 동/서에 마련된 관천대(觀天臺) 위에서 바라보면 북극
성(北極星)을 비롯하여 견우와 직녀 등 다양한 별자리를 구경할 수 있다. 즉 낮에는 허브식물
공원으로, 밤에는 천문공원의 역할을 하는 2개의 얼굴을 지닌 공원이다.

공원 내부 뿐만 아니라 바깥에도 온갖 정성을 기울였는데, 동쪽 바깥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
복숭아나무를, 서쪽 바깥에는 느릅나무, 남쪽 바깥에는 오동나무와 매화나무, 대추나무, 북쪽
바깥에는 측백나무와 벚나무, 살구나무, 자작나무를 심었다. 이는 풍수지리사상의 사신사(四
神砂)를 표현하고자 함이며, 우주의 순환원리 중 상생원리(相生原理)에 맞게 수목배치를 하였
다.
자원봉사자들이 평일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공원에 머물고 있어 허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며, 매년 5~10월에는 작은 천문대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천문관측프로그램도 운영하
고 있다. 그리고 매년 9월 말~10월 초에는 이틀(금,토) 일정으로 '별의 별 축제'가 열려 공원
의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강동구의 꿀단지이자 일자산의 달콤한 양념으로 공원 정문은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이 있는
남쪽에 있으며 내가 오른 북쪽 길은 후문(부출입구)으로 이어진다. 만약 천호대로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후문으로 들어서면 빠르다.


▲  다양한 허브들이 공존하는 허브천문공원 내부

▲  피부색도 가지각색인 허브들 (차의 정원)
허브식물 대부분이 서양에서 건너온 것들이라 이름도 낯설고 외우기도 어려운
외래어 투성이다. 허나 그들이 서양 출신이니 어찌하겠는가?
우리 정서에 맞게 다듬고 이용하면 그만이다.

▲  보라빛 향기를 지닌 레몬베르가못(Lemon Bergamot)

원산지는 아메리카로 잎에 톡 쏘는 강한 레몬 같은 향기가 있다. 꽃잎 색깔이
분홍이나 보라색을 띠고 있으며, 샐러드나 차, 음료, 조미료에 많이 쓰인다.

▲  야로우(Yarrow)

서양톱풀로도 불리며 원산지는 유럽과 서아시아이다. 재배가 쉽고 번식력이 좋으며, 살균력과
수렴력, 지혈력이 있어 상처나 코피를 멎게 하는 작용이 있다. 또한 야로우의 생잎을 씹으면
치통을 멎게 한다고 하며, 생잎을 달인 즙은 열을 내리고 독소를 체외로 방출한다.


▲  온갖 허브향이 나래를 펼치는 천시원(天市垣)
허브들이 온갖 고운 향기를 베풀며 속세의 기운을 털어간다. 허브향이 늘 가득하니
그 향기에 취해 잠시 세상사를 놓으며 머물고 싶은 곳이다.

▲  동쪽 관천대 주변

▲  허브원 - 중앙에 볼록 나온 언덕 밑에 길동배수지가 있다.

삼재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 우주의 순환원리까지 복잡한 원리는 죄다 적용했다는 허
브천문공원, 과연 그래서일까? 공원 내부는 질서 있게 배치된 기분이며 그리 어수선해 보이지
도 않는다. 허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런 사연에 민감하지도 않고 신경쓰지도 않으며 알지도
못한다. 그저 허브식물과 공원을 즐길 뿐이다. 나도 이곳과 3번 정도 인연을 지었지만 이번에
서야 그런 원리가 깃들여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  감촉이 좋은 허브들이 옹기종기 모인 감촉정원

▲  아로마 워킹 산책로
아로마 향기를 베푸는 식물들 사이로 울퉁불퉁 길이 닦여져 있다.

▲  서로 아름다움을 견주는 남색 허브꽃과 분홍 허브꽃의 위엄

▲  콘플라워<Corn Flower, 블랙볼(Black ball)>
원산지는 유럽 동남부이다. 꽃의 높이는 30~90cm 정도로 가지가 다소 갈라지며
흰 솜털로 덮여있다. 밝은 청색의 아름다운 꽃은 정원이나 화단의 관상용으로
많이 쓰이며, 청색 안료나 잉크, 약품으로 많이 이용된다.

▲  에키네시아 화이트스완(Echinacea Whiteswan)
원산지는 북아메리카로 다년생으로 크며 성장이 빠르고 향기가 좋아 나비와
꿀벌을 잘 불러들인다. 그리고 꽃대를 잘라 포푸리나 리스를 만든다.

▲  허브천문공원 작은천문대 <관천대 = 일대(日臺)>

공원 동쪽에는 하늘을 겨낭하고 있는 '허브천문공원 작은천문대'가 있다. 식물원이나 허브정
원 같은 이곳에 천문대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어 조금 어색함은 주지만 허브식물과 천문과의
어색함을 줄여주고 그들을 한데 어우른 것이 바로 이 공원의 특징이다.
매년 7~9월 매주 목요일에 운영을 하며, 운영시간은 19시30~21시30분(7~8월 20~22시)이다. 어
두컴컴한 저녁에 천문대에 들어가 하늘을 구경하는 것으로 서울시 공공예약 홈페이지에서 미
리 예약을 해야 된다. (☞ 서울시 공공예약 홈페이지)


▲  색의정원과 공원을 동그랗게 둘러싼 남색 피부의 산책로
공원의 중심인 허브는 주로 남색 산책로 내부에, 관천대나 암석원,
작은천문대는 산책로 바깥에 두었다.

▲  허브천문공원 동쪽에서 바라본 일자산과 주차장
주차장 옆에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이 닦여져 있다.

▲  산토리나(Cotton Lavender, Gray Santolina, 오른쪽)
핑거볼 레몬제라늄(Fingerbowl Lemon Geranium, 왼쪽)

산토리나는 유럽 남부가 원산지이다. 향료 식물로 잎과 꽃에 구충과 방충 효과가 있으며, 꽃
잎을 말려도 색깔이 변하지 않아 드라이플라워로도 아주 좋다.
핑거볼 레몬제라늄은 남아프리카 출신으로 꽃이 고와 관상용으로 인기가 좋다. 특히 음식과
음료수에 향을 낼 때 많이 쓰이며, 해충을 괴롭히는 효능도 있다.


▲  태미원(太微垣)과 견본원

▲  견본원에 뿌리를 내린 허브식물들

▲  오렌지타임(Orange Balsam Thyme)
유럽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이다. 상록저목성으로 오렌지향이 진하며, 말린 잎은
샐러드나 스프, 소스 등 요리에 사용된다. 관상용으로도 널리 쓰이는 편이다.

▲  페니로얄민트(Pennyroyal Mint)
아프리카가 원산지로 상쾌한 박하향이 강하게 나며, 모기와 파리를 쫓는 구충제
역할도 한다. 즉 모기와 파리가 싫어하는 향기를 가진 허브식물이다.

▲  딜(Dill, Ameto)
미국이 원산지로 가는 실과 같은 잎을 가지고 있다. 여름에는 우산을 편 것 같은
모양의 황색 꽃을 피우며, 특유의 강한 향기가 있어 요리에 많이 쓰인다.
(잎과 종자는 모두 피클에 쓰임)

▲  애플사이다제라늄(Applecider Geranium, 왼쪽)과
솝워트(Soapwart, 오른쪽)

애플사이다제라늄(이름도 겁나 어려움)은 남아프리카가 원산지로 상큼하고 톡쏘는 향을 지녔
다. (허브차나 요리, 원예로 많이 쓰임)
그리고 솝워트는 유럽과 서아시아가 원산지로 비누로 쓰이는 다년초이다. 솝워트 추출액은 세
제, 삼푸로 사용되며, 여드름과 습진 등의 세정액으로도 효과가 있다. 개량된 관상 원예종은
꽃이 아름답고 향기가 고와 실용을 겸한 관상용으로 아주 좋다.


▲  계란꽃과 비슷하게 생긴 로먼캐모마일(Roman chamomile)
서유럽이 고향으로 다년생 꽃이다. 사과향이 나며 털모양의 줄기가 땅바닥을
기어가는 성질이 있다. 특히 아픈 식물체와 같이 심으면 그의 원기를
회복시켜주어 '식물의사'로도 불린다.

▲  에키네시아(Echinacea)
북아메리카가 고향으로 인디언들이 비상용 약으로 많이 사용했다. 꽃대를 잘라
포푸리나 리스를 만들며, 뿌리와 줄기는 면역부활제로 입증되어 에이즈
치료제로 쓰고자 연구하고 있다.

▲  공원 한복판에 봉긋 솟은 자미원
저 밑에 길동배수지가 숨겨져 있다. 언덕 위에는 별자리 조명이 닦여져 있어
저녁 때 하늘을 찌르며 조명을 비춘다. (언덕 윗쪽은 조명 보호를 위해
통행을 금하고 있음)

▲  약초용 허브로 가득한 약초원과 자미원(중앙에 솟은 언덕)

▲  시내를 바라보고 있는 관천대<월대(月臺)>

공원 서쪽에는 돌로 견고하게 다져진 관천대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일몰과 밤하늘, 시내를
구경하는 곳으로 앞서 작은천문대(일대)와 마찬가지로 천문을 담당한다. 동쪽에 계단을 닦고
사방을 난간으로 둘러 마치 제단처럼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저곳에 오르면 바로 밑으로
길동(吉洞)과 둔촌동, 천호동 지역이 작게나마 시야에 들어온다.


▲  관천대(월대)에서 바라본 허브천문공원

▲  관천대(월대)에서 바라본 허브천문공원 남쪽 (약초원, 온실)

▲  관천대(월대)에서 바라본 암석원

부출입구(후문) 바로 옆에 자리한 암석원은 돌덩어리와 허브를 같이 배치한 공간으로 다른 공
간(약초원, 허브원)보다 상당히 작은 편이다. 의자와 탁자를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유리막으로 이루어진 온실(식물원)
공원 서남쪽에는 햇살을 먹고 사는 유리온실이 있다. 120종의 허브를 화분 등에
담아 선보이고 있는데, 1년 내내 따스하여 겨울에도 허브들이
마음껏 몸을 풀며 허브향을 불어준다.

▲  바깥보다 더 무더운 온실 내부
이곳에 사는 허브들은 바깥 친구들과 달리 겨울 걱정은 안해도 된다.

▲  허브 화분들이 잔뜩 마중을 나온 허브천문공원 정문

오랜만에 인연을 지은 허브천문공원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작은천문대 주변 쉼터에 앉아 김
밥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허브향기가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어슬렁거려 정처 없는 나의
후각을 건드리니 따뜻한 허브차(Herb tea)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것을 후식으로 1잔 걸치면
아주 예술이지. 하지만 여기서는 허브차를 팔지 않으며 시각과 후각, 촉각으로만 허브를 즐겨
야 된다.

공원에 뿌리를 내린 허브식물을 본글에 모두 다루지는 못하고 일부 끌리는 존재들만 소개하였
다. 다 소개해봐야 내용만 길어질 뿐이다. 다음에 다시 이곳과 인연이 된다면 땅꺼미가 짙은
저녁에 찾아와 별자리 놀이를 해보고 싶다. (모두 낮에만 와봤음)

* 허브천문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산86일대 (☎ 02-3425-6448)



 

♠  강동구의 대표 지붕이자 남쪽 지붕, 작지만 아담하고 싱그러운
일자산(一字山) 둘러보기

▲  일자산 숲길로 들어서다 (유아숲체험장)

허브천문공원 정문을 나와 남쪽으로 내려가면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 주차장이 나온다. 이
곳 바로 서쪽에는 가족캠핑장(49면)과 오토캠핑장(8면)이 닦여져 있고, 그 주차장을 가로질러
남쪽 숲으로 들어서면 유아숲체험장이 잠깐 나타나면서 일자산의 푸른 품이 펼쳐진다. 그렇다
면 일자산은 어떤 곳일까?

일자산(134m)은 강동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뫼로 강동구와 경기도 하남시(河南市)의 경계
선 역할을 하고 있다. 위에서 보면 '一' 모습처럼 보여 일자산이란 단순한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실제로도 이 산은 남북으로 길게 '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라 해돋이 명소로도 유명하다.

산줄기는 약 5km에 이르나 허브천문공원 이북은 천호대로로 잘렸으며, 남쪽은 하남시 감북동(
서하남나들목입구 교차로 북쪽)까지 뻗는다. 1971년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숲길과 쉼터
가 조성되었으며, 강동구의 각별한 관심에 힘입어 허브천문공원과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
강동구 도시농업공원, 일자산 해맞이공원, 잔디광장 등이 닦여져 강동구의 소중한 꿀단지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또한 서울의 외곽을 가르는 서울둘레길 코스(157km) 중 서울둘레길3코스 고덕,일자산 코스(광
나루역↔수서역, 26.13km)가 이 산의 신세를 지며 남쪽과 동쪽으로 흘러간다.

일자산 잔디광장에서는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 1회씩 '강동그린웨이걷기대회'가 열려 성
황을 이루고 있으며, 산에는 딱히 문화유산은 없으나 오래된 자연산 동굴로 둔촌 이집이 피신
을 했던 둔굴이 전하고 있다.
그 외에 지금은 고된 세월에 녹아 없어졌지만 서울 유일의 탄산약수로 수도권에서 꽤 유명했
던 천호약수가 산 서쪽 자락 보훈병원 부근에 있었다. 한참 어린 시절(1980년대 초/중반) 그
곳에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는데, 그 착했던 약수는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핏줄이 끊겨 사
라지고 말았다. 그가 없어지면서 서울에서 탄산약수를 마시려면 최소 춘천과 양구, 홍천, 인
제, 평창까지 가야 된다. 기억 속의 풍물시로 아련히 잊혀진 천호약수 빈 자리의 무게가 그만
큼 커진 것이다.


▲  일자산 숲길 (서울둘레길3코스와 만나기 이전)

▲  서울둘레길3코스와 하나가 된 일자산 숲길
정면에 보이는 숲길이 서울둘레길3코스 상일동 방향이다. (오른쪽은 초이동 방향)


일자산 숲길은 유아숲체험장을 지나면서 서서히 시골 동구밭 고갯길 풍경을 자아내다가 상일
동(上一洞)에서 달려온 서울둘레길3코스와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일자산의 지붕길인 능선
길이 시작된다. 서울둘레길3코스는 일자산 능선길의 신세를 지며 둔촌습지, 배다리까지 거침
없이 흘러가며, 서울과 하남의 경계선도 이 능선의 몸을 의지하며 흘러간다. (능선 서쪽은 서
울 강동구, 동쪽은 하남시 땅)
능선길은 정상을 향해 서서히 올라가므로 길이 느긋하고 부드럽다. 산길도 잘 닦여져 있고 길
을 둘러싼 숲 또한 매우 짙어서 편한 둘레길의 정석을 보여준다.


▲  일자산 능선길, 정상 북쪽 구간 ①
능선길이 매우 부드러워 걷기에는 매우 좋다. 게다가 녹음이 짙은 숲이 숲터널을
이루며 펼쳐져 있어 여름 제국의 기운도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한다.

▲  일자산 능선길, 정상 북쪽 구간 ②

▲  일자산 능선길, 정상 북쪽 구간 ③
능선이긴 하지만 숲이 매우 삼삼해 능선길의 기분을 다소 잊게 한다.

▲  일자산 정상, 해맞이광장 (134m)

일자산 정상은 능선길과 마찬가지로 숲에 감싸여 있다. 하여 정상에서 맛볼 수 있는 일품 조
망을 누리기가 어렵다. 정상 바닥에는 큰 돌이 입혀져 있고, 주위로 낮은 돌담이 둘러져 있는
데, 강동구에서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고자 이곳을 해맞이광장으로 닦으면서
입혀놓은 것들이다.
서쪽에는 둔촌 이집의 시(詩)가 적힌 동그란 표석이 있고, 동쪽에는 1994년 해맞이광장 준공
을 기념하는 조그만 비석이 자리하여 조촐하게 눈요깃감을 선사한다.

▲  둔촌 이집의 시비
(둔촌 선생이 후손에게 이르기를...)

▲  거의 30년 세월의 때가 묻어난 1994년
해맞이광장 준공 기념비


둔촌 이집(遁村 李集, 1327~1387)은 일자산과 인연이 깊은 고려 후기 문인이다. 본관은 광주(
廣州)로 초명(初名)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이다.
그는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충목왕(忠穆王, 재위 1344~1348)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했다. 공민왕(恭愍王) 시절 당시 권력자인 신돈(辛旽)에게 제대로 찍혀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그 핍박을 피해 일자산 둔굴 등에 은신하기도 했으며, 그 고통의 시간을 후세까지 잊지 않고
자 호를 둔촌으로 갈기도 했다. <일자산을 간직한 둔촌동(遁村洞)의 이름은 바로 그의 호 '둔
촌'에서 비롯됨>
신돈이 사라지자 바로 상경하여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그만두
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시를 지으며 무척 한가롭게 지내다가 60살에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의 시는 꾸밈과 우회적 표현보다는 직서적이고 자연스러운 작품이 많으며, 임심문(任深文)
을 비롯한 문인 60여 명과 교류했다. 무덤은 성남시(城南市) 하대원동에 있는데 그의 후손들
까지 같이 묘역에 잠들어 있어 완전 집안 묘역을 이루고 있다.

정상 서쪽에는 이집의 후손에게 당부하는 시가 적힌 시비가 물결치는 파도 위에서 솟는 햇님
의 모습처럼 자리해 있는데, 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으며, 결론은 무조건 머리가 터져라 공부
하라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충고처럼 말이다.

                       독서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니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늙어서 무능하면 공연히 후회만 하게 되니
                       머리 맡의 세월은 괴롭도록 빠르기만 하느니라
                       자손에게 금을 광주리로 준다 해도
                       경서 1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느니라
                       이 말은 비록 쉬운 말이나
                       너희들을 위해서 간곡히 이르노라


▲  일자산 능선길, 정상에서 둔굴 구간 ①
저 계단 위쪽이 바로 일자산 정상이다.


▲  일자산 능선길, 정상에서 둔굴 구간 ②
정상을 벗어나면 바로 내리막길이 느긋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  일자산 능선길, 정상에서 둔굴 구간 ③

둔굴이 가까워 오면서 일자산 능선길도 다소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동쪽 풍경(하남시 감북
동)이 숲 대신 수풀과 밭으로 이루어진 확트인 공간으로 풍경이 바뀌는 것이다. 곳곳에 작은
무덤들도 여럿 보여 어둑어둑한 밤에 오면 염통도 좀 쫄깃해질 듯싶다.
비록 이곳이 하남시와 맞닿은 서울의 변두리이나 '정녕 서울 곁이 맞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싱그러운 산골 풍경을 보인다. 일자산에 이런 비경도 있었다니 이번에 인연 짓기를 참 잘한
것 같다.


* 일자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2동 /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감북동


▲  일자산 능선길에서 바라본 하남시 감북동, 감일동 지역
남한산성을 간직한 남한산(청량산)이 정면에 바라보인다.



 

♠  일자산 마무리 (둔굴)

▲  둔굴(遁窟) 입구 쉼터

일자산 정상에서 남쪽 능선을 계속 더듬으면 둔굴 입구 쉼터가 마중을 나온다. 둔굴 바로 위
쪽에 나무로 넓게 자리를 닦아 쉼터를 조성했는데, 여기서 능선길을 잠시 버리고 쉼터를 지나
아래쪽 계단을 내려가면 일자산에서 가장 구석에 자리한 일자산의 오랜 명물, 둔굴이 주름진
모습을 드러낸다.
둔굴은 능선길 서쪽 벼랑에 자리해 있어 접근하기가 넉넉치 못했는데, 바로 앞에 의자와 탁자
를 갖춘 쉼터 데크를 닦고 계단을 내면서 그 고통이 크게 줄었다. 이제는 둔굴을 바라보면서
간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허나 둔굴 주변은 난간이 둘러져 있어 굴을 보호하고 있으니
애써 들어가서 굴을 괴롭히지는 말자. 어차피 쉼터에서 둔굴의 속살까지 다 보인다.


▲  벼랑에 깃든 둔굴

둔굴은 대자연이 빚은 조그만 자연산 굴로 벼랑 밑에 자리해 있다. 굴이라고는 하지만 그 깊
이는 얕으며 윗 사진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 바로 이곳이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이집이 신
돈의 괴롭힘을 피해 잠시 숨어산 곳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산 밑까지 주거지가 들
어서고 바로 옆까지 산길이 뚫려 접근하기 쉽지만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는 워낙 외
진 곳이라 찾기가 어려워 여기서 여러 날 머무른 것으로 여겨진다.

굴의 크기는 작지만 비바람을 피해 잠시 머물기에는 적당해 보이며, 굴 속에서 고통스런 시간
을 보냈을 이집의 모습이 그런데로 상상이 간다. '이곳이 발각되는 것은 아닐까? 나라는 앞으
로 어떻게 될 것인가?' 시름에 잠겼을 그의 모습이 말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둔굴

▲  북쪽에서 바라본 둔굴

둔굴은 둔촌 이집 외에도 지역 사람들의 손때가 적지 않게 묻었을 것이다. 일자산에 사냥이나
산나물을 채집하러 갔다가 잠시 쉬거나 비를 피했을 수도 있고, 죄를 저지른 사람이 은신했을
수도 있으며, 여기서 고기 굽기 등의 취사행위를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지역 명소이
자 일자산의 명물로 존재감의 무게를 더했으니 그런 행위는 이제 없어야 될 것이다.


▲  둔굴 입구에서 바라본 하남시 감북동과 감일동, 남한산(청량산)

▲  둔굴 입구 남쪽 능선길 ①
오솔길의 진수를 보여주며 남쪽으로 구불구불 흘러간다.

▲  둔굴 입구 남쪽 능선길 ②

둔굴을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능선길(서울둘레길3코스)을 다시 잡아 남쪽으로 향했다. 이
제 딱히 잡아야될 명소는 없으며 숲길을 따라 쭉 이동하면 된다. 중간중간에 서쪽과 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손짓하나 서울둘레길3코스의 미답 구간도 조금씩 줄일 겸, 계속 능선길을 고집
했다.
동쪽으로 확트인 능선길은 다시 무성한 나무에 갇힌 숲길로 변하며, 그 상태로 둔촌습지(배다
리) 정류장까지 이어진다.


▲  둔굴 입구 남쪽 능선길 ③

▲  일자산의 남쪽 끝 내리막 길

▲  한강으로 흘러가는 감이천 (서부교에서 바라본 모습)

일자산 숲길은 둔촌습지, 배다리 정류장 북쪽에서 그 끝을 맺는다. 서울둘레길3코스도 여기서
일자산과 작별하여 서울의 동쪽 끝을 가르는 '동남로'를 따라간다. 비록 차량들 통행이 빈번
한 도로를 따라가야 되나 서울의 변두리답게 죄다 밭두렁과 논두렁, 야산 등의 시골 풍경투성
이라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차량의 눈치를 보던 서울둘레길3코스는 감이천(서부교)을 건너 효죽동입구에서 비로소 찻길을
버리고 서쪽 시골길로 들어서면서 차량 소음에서 해방된다. 그 길로 들어서면 늪지대를 간직
한 방이동(芳荑洞) 생태경관보전지역이 나온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일자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9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의 북쪽 지붕이자 우리 동네 뒷동산, 도봉산 <무수골, 우이암(관음봉), 관음암, 천축사>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나들이 (우이암 관음봉,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



'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
<우이암(관음봉), 도봉산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

도봉산
▲  도봉산의 위엄

우이암(관음봉)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

▲  우이암(관음봉)

▲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한복판에 서울의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39m)
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그의 그늘에 머문
지도 어언 20년이 넘었다.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아차산, 호암산 못지 않은
나의 즐겨찾기 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아 나의 마음을 꾸준히 비추고 있다.

햇님이 하늘 한복판에 걸린 12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김밥
과 간식 등을 사들고 무수천(無愁川)을 따라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산골, 무수골의 논두렁과 밭두렁, 울창한 숲길을 주마등처럼 지나 자현암
(慈賢庵)에 이르니 본격적인 산길이 펼쳐진다.

무수골의 최상류이자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인 원통사계곡을 오르다가 지독한 시장기를
잠재우고자 계곡 적당한 곳에 자리를 피고 김밥과 만두, 과자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하
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으니 모든 것이 정말 꿀맛 같은데, 대자연이 우리 몰래 음식에 꿀
을 바른 모양이다. 거기에 입가심용으로 막걸리까지 몇 잔 들이키니 정말 신선놀음이 따
로 없다.
그렇게 점심을 마치고 하늘과 더욱 가까워지려는 본능에 충실하며 계곡을 올라가면 우이
암 밑 400m 고지에 들어앉은 원통사(圓通寺)가 마중을 한다. 우이암(관음봉)을 내세우며
관음도량을 칭하는 이곳은 규모는 작지만 조망만큼은 가히 국보급이라 서울 장안에 있는
산사 중, 북한산 일선사(一禪寺) 다음급으로 최우수 조망을 자랑한다.
원통사에서 잠시 일품 조망을 누리다가 다시 출발, 이전보다 더욱 각박해진 산길을 땀을
거하게 쏟아내며 10분 정도 오르니 비로소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 도착했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우이암 정상이 아닌 바위로 이루어진 서쪽 봉우리이며,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관음봉)이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이 빚은 걸출한 작품,
암벽 등반의 성지로 추앙을 받는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긴 순 100% 바위 봉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걸작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
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하며, 이후 바람과 비 등
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그것이 지
금의 도봉산이 되었다.
하여 도봉산은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위엄을 날리고 있는데, 자운봉과 선
인봉, 만장봉, 칼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巖峰)이 즐비하다.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
의 하나로 대자연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격하
게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히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그리고 봉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
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봉우리 자체가 완전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또한 내려가는 것
도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
벽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이곳은 암벽 타기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
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
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처럼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
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굴(현
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서 머물던 승려가 발견하여 관음성지로 격하게 추켜
세웠을 것이다. 이렇게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
자 바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어 관음도량을 칭한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문구 지역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허나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
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
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이 원래 이
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지만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지역,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
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문
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와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지역(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과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만경대, 영봉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산 산줄기와 도봉1,2동,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등이 두 망막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른거
리는 속세의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
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다는 것.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히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허나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
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다. 내가 저기로 순간이동을 당
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적
당히 거리를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막걸리 1병이 남아있어 남은 행동
식과 함께 몇 잔 들이켰는데 이렇게 산 정상부에서 곡차를 걸치니 마치 구름 위에서 마시는
기분이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산바람이 땀과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
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리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마음과 두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는 것 같다.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 우이암(관음봉)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우이암능선은 도봉산의 남쪽 지붕길로 우이암에서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남쪽까지 짧게 이
어진다. 이곳에서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동쪽과 북쪽으로 서울 동북부와 의정
부, 도봉산 주능선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오봉산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이며, 특
히 능선에서 바라보는 우이암의 모습이 자못 위엄이 돋는다.

우이암의 자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서쪽 봉우리와 우이암 능선에서 보는 것이 좋다. 서쪽에
서 보는 것과 능선에서 보는 것이 서로 다른데, 마치 유럽식 투구를 쓴 장군이 비스듬히 기대
어 서울을 바라보는 모습 같으며, (하얀색 모자 달린 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듬히 기댄 모습으
로도 보임) 두건을 쓴 관세음보살이 서울을 걱정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허나 왜정의 개소리
처럼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관음봉을 우이암으로 깎아내린 왜정의 눈이 정상
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이암의 원래 이름을 속히 찾아주고, 우이암능선의 이름도 관음봉능선
으로 바꿔야됨)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도봉구, 노원구, 강북구, 중랑구, 성북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등

▲  우이암능선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봉(五峯)과 오봉능선
오봉(해발 660m)은 오봉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이령 북쪽 봉우리로 도봉산이나
송추에서 접근하면 된다. (바로 밑에 있는 우이령에서는 접근 불가)


우이암능선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서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우이암능선 전망대가 모습을 비
춘다. 능선길 서쪽 벼랑에 닦여진 이곳은 위치상 오봉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의 북쪽 뒷통
수(상장봉 등)가 바라보이는데, 특히 오봉이 잘 조망된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우이령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도봉산 주능선과 칼바위, 만장봉, 자운봉

우이암능선 전망대에서 북쪽으로 마저 내려가면 보문능선 갈림길이다. 원래는 여기서 동쪽(문
사동계곡)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오랜만에 인연 지은 도봉산 지붕길이라 욕심이 무럭무럭 솟
아났다. 하여 도봉산의 깊이를 간만에 더 누릴 겸, 지붕길(주능선)을 따라 자운봉까지 가기로
했다. 이번에 내려가면 비록 집이 코앞이라고 해도 언제 이곳에 다시 올지 장담할 수 없기 때
문이다.



 

♠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거닐기

▲  도봉산 주능선 남쪽 구간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도봉산 주능선은 우이암능선 북쪽 보문능선갈림길에서 칼바위를 거쳐 도봉산 정상까지 이어지
는 도봉산의 진정한 지붕길이다. 서울의 최북단 지붕길이기도 하며, 서울 도봉구와 경기도 양
주시(楊州市)의 경계선 역할도 겸하고 있다.
오르락내리락이 다소 있고 바위 암릉도 적지 않으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으
며, 북쪽으로 갈수록 하늘과 점점 가까워진다. 길 좌우로 일품 조망이 펼쳐져 두 눈이 호강을
하며, 하늘의 속살도 보일 정도로 나의 위치도 높아진다.


▲  도봉산 주능선 남쪽 구간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우이암(관음봉) 서쪽 봉우리에서 곡차를 마셨다. 허나
어느새 우이암과 저만큼이나 떨어졌으니 정말 저기서 곡차를 마셨나 싶은
착각 마저 든다. 그래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모양이다.

▲  한층 더 멀어진 우이암 (오봉갈림길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도봉산 주능선(오봉갈림길 북쪽)에서 바라본 북한산 북쪽 산줄기
가운데 움푹 들어간 곳이 우이령이다.

▲  칼처럼 솟은 도봉산 칼바위
칼바위는 해발 700m의 바위 봉우리로 그 접근이 험해 옆구리에 우회길을 두었다.

▲  칼바위 남쪽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학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도봉산 정상을 향한 불굴의 집념을 품으며 주능선을 더듬으니 어느덧 칼바위 남쪽 갈림길(640
m 고지)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오봉능선과 오봉(오봉산)으로, 직진하면 칼바위와
자운봉, 동쪽은 마당바위와 문사동계곡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직진을 해야겠지만 일행 중 1명
이 심히 안좋은 상태를 보여 직진이 어렵게 되었다.
아무래도 산보다 사람이 우선이니 아쉽지만 자운봉은 불투명한 다음으로 쿨하게 미루고 주능
선을 버리고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기서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면 도봉산 종점으로 빨리 이동할 수 있다. 허나 그냥 내려가기
에는 너무나 아쉬워 일행들의 동의를 받아 조금은 돌아가지만 마당바위로 이어지는 산길을 택
했다. 이 코스는 각박한 경사지에 가늘게 길이 이어져 있는데, 동쪽은 거의 벼랑이라 통행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바위도 여러 번 넘어야 됨)
허나 벼랑길이라 능선길처럼 일품 조망은 여전히 옆에서 따라 댕긴다. 바로 그 재미로 이 길
을 거닐면 되겠다. 하지만 그리 알려진 길은 아니라서 지나가는 이는 없었다. 그야말로 우리
가 이 길을 전세를 내며 거닌 것이다.


▲  칼바위 남쪽에서 바라본 북한산(백운대, 영봉)
대자연이 초록 물결과 푸른 물결,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신선의 경지를 자아낸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붓을 휘날린들 저 모습 그대로 재현하기 힘들 것이다.

▲  마당바위 방면 산길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도봉산 남쪽 자락

▲  마당바위 방면 산길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관음암(觀音庵)의 자랑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인적이 거의 없는 마당바위 방면 산길을 10분 정도 가니 숲과 큰 바위에 묻힌 관음암이란 비
구니 암자가 살며시 마중을 한다. '어머나 도봉산에 이런 곳이 있었나?' 나의 돌머리 속에는
전혀 정보가 없는 미지의 장소로 적지 않은 놀라움을 안겨준 관음암, 그 절은 법당인 극락보
전과 삼성각 등의 목조 건물 2동과 돌로 지은 요사 등 3~4동이 전부인 조그만 암자이다.

숲에 완전히 감싸여있고 서쪽에는 큰 바위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 바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
는 곳으로 이렇게 없는 듯 자리해 있으니 절간답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암자이다. 이런 곳이
기도 올리기에도 딱 좋겠지. 비록 너무 궁벽한 곳이고 접근성 또한 좋지 못하지만 작지만 반
듯한 건물과 오백나한상까지 바위 밑에 주렁주렁 조성했으니 이런 첩첩한 산골에 어찌 이렇게
지었을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곳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태조 이성계를 위해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한다. 그가 기도를
하던 중,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이 갈라지며 미륵불(彌勒佛)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에 크게
놀란 무학이 태조에게 그 말을 전하니 그 자리에 암자를 지었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
지나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기도처나 산악신앙의 현장으로 쓰였던 것
으로 여겨진다.
현재 관음암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 못했다. 딱히
볼거리는 없으나 커다란 바위 밑에 만든 오백나한상이 아주 장관으로 비록 건물이 아닌 바위
밑 노천 공간이지만 오백나한전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다. 또한 마당바위와 칼바위를 잇는
산길이 경내를 관통해서 지나기 때문에 절은 꼭 거쳐가야 된다.

▲  맞배지붕을 지닌 관음암 삼성각(三聖閣)

▲  관음암 극락보전(極樂寶殿)

관음암은 해발 560m 고지에 자리해 있지만 워낙 숲의 위엄이 대단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요사(寮舍)에서는 보살 아줌마와 비구니의 이야기 소리가 흘러나와 '이 첩첩한 곳도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를 느끼게 한다. 산속에 별천지처럼 숨겨진 관음암, 정말 세상에서 잠
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이곳의 신세를 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관음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31 (도봉산길 92-6 ☎ 02-955-4246)


▲  마당바위와 그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산하

관음암을 벗어나 10분 정도 내려가면 하얀 피부를 지닌 너른 모습의 마당바위가 마중을 한다.
이름 그대로 마당처럼 넓은 바위로 도봉산역과 도봉산 종점에서 도봉산 정상을 향해 오를 경
우 거의 반드시 거쳐야 되는 길목이자 관음암, 문사동계곡 방면으로 갈라지는 요충지이다. 
마당바위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며 천하를 굽어보다가 동쪽 밑에 자리한 천축사로 길을 향했
다. 천축사는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마애사리탑의 존재도
확인할 겸 다시 인연을 잡았다.



 

♠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둘러보기

▲  천축사 대웅전과 만장봉(萬丈峯)

천축사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동불의 장대한 물결이 두 눈을 놀라게 한다. 거의 4~5단
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청동으로 지어진 석가여래상,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 약사여
래 등 다양한 불(佛)과 보살(菩薩)을 집합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지어진 원
불(願佛)로 근래에 조성된 것인데, 대충 헤아려봐도 108불은 넘어 보인다.

청동불/보살군상에서 1굽이를 돌면 북쪽 건너편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바라보인다. 경
내 뒷쪽에 바라보이는 바위 봉우리는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으로 이곳의 든든한 후광
(後光)이 되어준다.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담장 끝에 자리한 아담한 석조(石槽)가 모습을 비춘다. 석조란 물
을 담아두는 돌통으로 높은 산중이라 물을 아끼기 위해 수도꼭지를 달았다. 하여 물을 마시려
면 졸고 있는 수도꼭지를 반드시 움직여야 된다. (가뭄과 수질 문제로 물 섭취가 어려울 수도
있음)

▲  청동불/보살군상의 위엄

▲  담장 끝에 자리한 천축사 석조


▲  고된 세월이 느껴지는 늙은 승탑(僧塔, 부도)

석조 맞은편에는 고색의 때로 자욱한 승탑(부도)이 옥개석(屋蓋石) 등 일부만 남은 채 측은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 땅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으로 연꽃잎을 비롯하여 사
자와 코끼리 등 동물이 새겨져 있으며, 조각 수법이 수려하여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는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며, 그 옆에는 오래된 승탑의 옥개석이 덩그러니 놓여져 동병상
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천축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겨우 뚜껑(옥개석)만 남은 승탑
그의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  연등으로 머리를 가린 독성각(獨聖閣)
2002년에 조성된 독성탱과 석고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만장봉 동쪽 자락에 안긴 천축사는 도봉산 서울 구역의 대표적인 고찰(古刹)이다. 이 절은 의
상대사(義湘大師)가 673년에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는 인근 의상대(義湘臺)에서 도를 닦다
가 빼어난 산세에 감탄하여 제자를 시켜 물이 나오는 곳에 암자를 짓게 하니 맑은 샘물이 나
온다는 뜻에 옥천암(玉泉庵)이라 했다고 하며, 그것이 천축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의상은 문무왕(文武王)의 허가를 받아 부석
사(浮石寺)를 세우기 이전까지 주로 서라벌 왕경(王京)에 머물면서 화엄종(華嚴宗) 보급에 힘
쓰고 있었다.

천축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가슴을 펴는 것은 조선 태조 때이다. 의상의 창건설과 달리 신라
와 고려 때 흔적이 전혀 없고, 고려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때 영국사(寧國寺, 도봉서원
자리에 있었음)의 부속암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그러니 조선
태조 시절이나 빠르면 고려 중/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398년 태조 이성계는 1차 왕자의 난으로 단단히 뚜껑이 열려 왕위를 2째 아들인 정종(定宗)
에게 던져주고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인 도봉산 밑을 지날 때 만장봉
천축사 주변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올라 직접 그곳을 찾아가 봉우리는 하얗고 꽃은 삼문에
떨어져 길이 붉다는 시구(詩句)를 읊고 절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후 함흥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 들려 100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절을 중수했는데, 고려 후기
에 인도에서 건너온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과 이곳에 들려 '천축국(天竺國) 영축산
(靈鷲山)의 일부가 완연히 이곳에 있구나'
격찬한 일을 승려에게 듣고, 옥천암에서 천축사로
이름을 갈게 했다.

1474년(또는 1470년)에는 성종(成宗)의 명으로 절을 중창하고, 명종 시절에는 문정왕후(文定
王后)가 화류용상(樺榴龍床)을 내려 불좌(佛座)로 삼게 했다고 한다. 1812년에 경학(敬學)이
중창을 하였고, 1816년에는 김연화(金蓮花)가 불량답(佛糧沓) 15두락을 시주해 살림이 많이
좋아졌다.
1862년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 판서(判書) 김보근(金輔根), 참판(參判) 이장오 등이 불
량을 희사했으며, 1863년에는 주지 긍순(肯順)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하고, 1895
년에 화주 성암응부(星巖應夫)가 명성황후(明成皇后) 및 상궁(尙宮) 박씨 등의 시주로 후불탱
과 신중탱, 지장탱을 조성했으나 관리 소홀로 불화 대부분이 도난을 당했다.

1911년 화주 보허축전(寶虛竺典)이 관음탱과 신중탱을 봉안했고, 1931년에 주지 김용태(金瑢
泰)가 천축사로 가는 산길을 확장했으며, 1936년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바
로 그 시절에 천하 제일의 참선수행도량으로 명성이 높던 무문관이 지어졌다. 1959년에는 주
지 용태가 불사를 벌였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웅전, 독성각, 산신각을 중수했으며, 요
사와 공양간을 신축해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도봉산의 주요 비구니 사찰이자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고승들의 수행공간
인 무문관을 경내 북쪽에 두어 참선도량으로 꾸려가고 있으나 수행의 난이도가 아주 최상급이
라 도전하는 이가 드물어 그 맥이 거의 끊겼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과 산신각, 독성각, 무문관, 범종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비로자나삼신불도 및 복장유물, 비로자나삼신괘불도(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293호
), 목조석가삼존불, 마애사리탑 등 지방문화재 4점과 늙은 승탑, 천축사 편액 등
이 전한다. 또한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목조불단(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6호)이
있는데, 지금은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 가있다.

절이 각박한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곳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닦았으며, 주어진 공
간을 최대한 채운 터라 경내 확장도 여의치 않다. 그래도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치고는 그
런데로 넓은 편이다.
일요일에는 산꾼들에게 점심 공양을 제공하며, 평소에는 대웅전 1층 앞 쉼터에서 따뜻한 차와
티백차, 물을 제공한다. (차와 티백차는 알아서 마시면 됨) 그리고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에는 아침~점심 공양밥 외에 떡과 염주 등도 제공하여 석가탄신일 인심도 넉넉하다.

* 천축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9 (도봉산길 92-2 ☎ 02-954-1474)
* 천축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1979년에 금어 조정우가 그린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원통전(圓通殿)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관세음보살과 1980년에 조성된
천수천안관음탱(千手天眼觀音幀)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석굴, 옥천석굴(玉石窟庵)

원통전 좌측이자 대웅전 뒤쪽에는 높은 벼랑이 있는데, 그 밑도리에 옥천석굴이라 불리는 석
굴(石窟)이 있다. 천축사의 예전 이름인 옥천암의 유래가 된 옥천이 여기서 용솟음치고 있으
나 불공 공양 용도로만 쓰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꽁꽁 봉해둔다.

이곳은 자연산 석굴로 승려들이 오랫동안 수행을 했던 공간이다. 태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하며, 근래에 내부를 손질하여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해 약사전(藥師殿)으로
삼았다. 그리고 좌우에 조그만 감실(龕室)을 파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을 두었다.

▲  석굴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  경내 북쪽에 자리한 무문관(無門關)

천축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이곳의 상징인 무문관이다. 오로지 수행
을 위한 공간으로 1964년에 주지 정영이 새로 지었다.
건물 이름인 무문(門無)은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 길도 문도 없다는 뜻으로 부처의 설산 6년
고행을 본받아 4년 또는 6년 동안 면벽(面壁), 즉 벽만 바라보고 수행을 하는 고난의 길을 걸
어야 된다. 방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일체 금지되며, 한번 발을 들이면 무조건 4년이나 6년
을 채워야 된다. 게다가 수행 중에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해 받아야 되는 등, 수행 규범이 매
우 엄격하다. 그야말로 그 기간 동안은 '나 죽었소' 하며 인간의 삶을 포기해야 된다. 그러다
보니 수행을 통과한 승려 수가 거의 없다. 1965년과 1979년에 100여 명이 도전했으나 겨우 4
명만 통과했다.
워낙 가시밭보다 더한 곳이라 도전자가 거의 없어 시민선원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
어서 결국 문을 닫았으며, 2010년 11월 지금의 건물을 지어 다시 문을 열었다.

허나 불교의 세속화와 어려운 것을 꺼려하는 성향 때문인지 도전자가 없는 실정이라 새 건물
을 그냥 두기도 그래서 시민선방과 절의 쏠쏠한 수입원인 템플스테이(Temple stay)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천축사 편액을 머금고 있다.


▲  대웅전 목조석가삼존불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7호

경내 중앙에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건물로 꽤 우람한 모습이다. 대웅전은 원래 1812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ㄷ'자 팔작지붕인 것을 현공이 2004년에 부시고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1층은 5칸 규모의 종무소(宗務所)와 쉼터로 쓰이고, 2층에 대웅전을 두었는데, 정면 5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그 안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존재들이 있으니 꼭 눈에 넣어가지
고 가자.

화려한 닫집을 지닌 불단에는 목조석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미륵
보살과 제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로 이루어져 있는데, 푸근한 표정과 살짝 머금은 미소로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이한다.
처음에는 오래 숙성되지 않은 삼존불로 여겼으나 근래 석가여래 뱃속에서 복장(腹臟)유물이
쏟아져 나와 그들의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다. 복장유물은 불상의 중수 사실을 담은 2장의 발
원문(發願文)과 경전, 다라니 등으로 이를 통해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
~1618> 시절에 조성되어 북한산 노적사(露積寺)에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 원래부터
천축사 불상은 아니었다.
1713년 발원문에는 진열(進悅)과 영희(靈熙), 태원(太元), 처림(處林), 청휘(淸徽) 등이 불상
을 개금, 중수하여 민지사<閔漬寺, 북한산 서암사(西岩寺)>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으며, 1730
년 발원문에는 황금을 시주받아 개금불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돈암동 흥천사(興天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20세기 중반 정도에 천축사로 흘러들어와 이곳의 보물을 하나 늘려주었다.

이들 삼존불은 그리 크지 않은 중간 규모의 불상으로 조선 중기(16세기 후반~17세기 초)의 불
상 양식(또렷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 안정된 인상, 팽팽하고 풍만한 신체의 질감, 간략화되
고 형식화된 천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복장유물을 통해 조성시기와 중수에 참여한
승려 등이 밝혀져 바로 그 점 때문에 2013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요즘은 늙은 불상이나 보살상, 불화 중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내용만 나오면 거의 무조건 지
정문화재로 삼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배려가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것이
다. (발원문 하나에 국가 보물이냐 지방문화재냐, 그냥 비지정문화재냐가 갈리는 세상임)


▲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毘盧舍那三神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2호

대웅전 우측 벽에는 고색의 기운이 자욱한 비로자나삼신불도가 걸려있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불화(佛畵)는 언제 봐도 참 어렵고 난해하여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그 성격, 그림의 특성까지 다 파악하려면 그야말로 암이 걸릴 정도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그렸을까? 세상의 복잡함을 상징하고자 함일까..?

탱화 중앙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있고, 왼쪽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
), 오른쪽에는 석가여래가 자리하고 있다. 이들이 삼불도의 중심인 삼불로 목리문(木理紋, 나
무결 무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있다. 녹색을 띈 두광(頭光)과 살색의
신광(身光)을 표현해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불어넣었으며, 삼불 주변에는 제일 위에 4명의 보
살을 두었고, 좌우에 시방제불, 그 밑에 보살 2명과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을 삼불 사이
에 넣었다.
비로자나불 무릎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있고, 그림 하단의
8명 보살은 모두 동그란 두광과 모서리가 둥근 네모난 신광을 가지고 있다. 지장보살을 제외
한 모든 보살은 비슷한 모습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각자의 연장을 들고 있다.

조선 후기에 흔한 삼신불도이나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서울과 경
기도 지역에서 활약했던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 환감(幻鑑). 혜조(慧
照). 경림(璟林). 탄인(呑仁). 창오(昌悟) 등이 합심하여 제작했다.
경선당은 이곳 삼신불도처럼 전통적인 화법으로 작품을 그리면서 간혹 도상을 나름대로 변화
시켜 새로운 도상을 창출했으며, 갸름한 얼굴과 지극히 작은 이목구비의 얼굴, 꽃무늬가 새겨
진 대의, 적색, 녹색, 청색의 색조, 목리문의 표현 등의 양식적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림 오른쪽 밑에는 '臣尙宮 己酉生朴氏  尙宮己 酉生金氏 等○○奉爲 王妃殿下 辛亥生閔氏
玉體恒安 聖壽萬歲'란 명문이 있어 기유년생 상궁 박씨와 기유년생 상궁 김씨 등이 왕비전하
(명성황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고자 시주한 불화임을 알려준다.
그림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으나 그림 상단이 그을음 등으로 채색이 좀 어두워
져 있고, 화폭 상단 오른쪽이 일부 찢겨져 나갔다.


▲  천축사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5호

천축사 경내를 20분 정도 둘러보면서 주변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2016년 2월에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마애사리탑을 찾기 위함이다. 그것말고도 비로자나삼신괘불도도 있으나 괘불(掛
佛)은 석가탄신일 같은 특별한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기 때문에 평소에는 친견이 불가능
하다.

경내 주변 바위를 살펴보았지만 마애사리탑 비슷한 것도 보이질 않는다. 인근 불암산(佛巖山)
의 학도암(鶴到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절 밑에 있을 듯 싶어서 절을 나와 동쪽으로 내
려가면서 주변에 널린 바위들을 계속 살펴보던 중, 일주문 직전의 북쪽 바위 높은 곳에 수상
한 것이 눈에 아른거린다. 바로 마애사리탑이다. 천축사를 여러 번 찾았지만 마애사리탑은 이
번에 처음 인연을 짓는다.

견고한 바위 피부에 살짝 깃든 마애사리탑은 모두 2기이다. 아쉽게도 나는 1기만 확인을 했는
데, 바위 남쪽에 있는 사리탑은 사리를 넣었던 감실(龕室) 위에 '청신녀정월 영주봉안탑 정축
사월일(淸信女淨月 靈珠奉安塔 丁丑四月日)'이라 새겨져 있어 정월(淨月)의 것으로 정축년(
1817년 또는 1877년) 4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탑은 '신녀○영
영주탑 임오팔월(信女○英靈珠塔 壬午八月)'이라 쓰여 있어 임오년(1822년 또는 1882년) 8월
에 조성된 것임을 귀뜀해 준다. 이중 내가 만난 것은 남쪽 탑이다.

마애사리탑은 19~20세기에 잠시 등장하는 아주 간편한 사리탑 양식으로 부도탑을 세우기 어려
운 산사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보통 바위에 감실을 파서 사리함을 봉안하고 주변에 관련
글씨를 새기는데, 학도암 마애사리탑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곳 천축사와
안양 염불사(念佛寺)에 19세기 마애사리탑이 있고, 인왕산 석굴암(石窟庵)과 국사봉 사자암(
상도동) 등에 20세기 사리탑이 있다.


▲  최근에 지어진 천축사 일주문(一柱門)

마애사리탑을 만나기가 무섭게 천축사 일주문이 뒷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없던 존재로 그
새 새로 장만하여 이곳에 심어두었다. 문의 위치가 경사진 산길에 자리해 있는데 문 정면에는
'도봉산 천축사'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하얗게 쓰인 글씨는 마치 날라갈 것
같은 기세라 명필임이 분명해 보였다.

일주문을 벗어나니 시간은 17시 반, 여기서부터 열심히 내려가다가 금강암(金剛庵) 부근 계곡
에서 잠시 길을 멈추고 신발에 오랫동안 갇힌 꼬질꼬질한 두 발을 해방시켜 계곡에 담구었다.
계곡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졸졸졸 흐르는 물에 발을 넣으니 그동안의 피로감이 싹 가시는 듯
하다. 그리고 동시에 발에 깃든 냄새도 다소 가셨다.

그렇게 발을 정화시키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18시 반, 도봉산 종점에 이르렀다. 12시에 시작
된 도봉산 산행은 무수골과 원통사, 우이암(관음봉),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를 거쳐 도봉산
종점까지 거의 6시간 반 동안 파란만장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정상은 가지 못해 아쉽지
만 우리에게는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그때를 기약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9월 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의 동쪽 지붕이자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거닐기 (아차산둘레길, 긴고랑계곡, 아차산4보루,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 긴고랑계곡 봄나들이



' 아차산, 긴고랑계곡 봄나들이 '

아차산둘레길과 용마산

▲  아차산둘레길과 용마산

긴고랑계곡 벚꽃나무길 아차산4보루

▲  긴고랑계곡 벚꽃나무길

▲  아차산4보루



 


아차산(峨嵯山, 295.7m)은 수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커
다란 동쪽 지붕으로 용마산(龍馬山, 348m)과 망우산(忘憂山, 282m), 시루봉, 홍련봉을 식
구로 거느리고 있다.
아차산 식구들은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매년 적지 않게 재활용을 하여 어느덧 200회
가 넘게 안겼는데, 그렇게 안겼음에도 갈 때마다 늘 마음이 설레고 새롭다.

기나긴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자 아차산의 봄 풍경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야심 차게 추진된 이번 나들이는 아차산 기점의 하나인
구의동(九宜洞) 기원정사에서 시작했다.



 

♠  아차산둘레길 (기원정사~긴고랑 구간)

▲  기원정사에서 아차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기원정사 방향)

아차산역(5호선) 1번 출구에서 바로 나오는 골목길(천호대로 129길, 영화사로11길)을 10분 정
도 쭉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기원정사(祇園精舍)란 조그만 현대 사찰이 있다. 천호대로129길
구간에는 온갖 식당들이 즐비해 후각과 미각, 식욕을 마구 들쑤시는데, 아차산을 타고 기원정
사나 영화사(永華寺)로 내려오면 이 골목길에서 많이 저녁 뒷풀이를 한다.

기원정사 옆구리에는 아차산으로 끌어주는 나무데크 계단길이 손을 내밀고 있다. 하얀 피부의
벚꽃과 노란 피부의 개나리가 마중하는 그 계단을 오르면 이내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직
진하면 아차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좌/우 길은 아차산둘레길이다. 나는 긴고랑 방향인 왼쪽
길로 접어들어서 긴고랑계곡으로 이동했다.


▲  아차산둘레길 나무데크길

아차산 남쪽과 서남쪽, 서쪽 허리에 둘러진 아차산둘레길은 고구려정 밑 평강교에서 시작하여
용마산 너머 중곡지구까지 이어지는 3.8km의 달달한 숲길이다.
아차산에는 이미 주능선을 따라가는 서울둘레길2코스(용마, 아차산코스)와 아차산 주능선과
아차산 동쪽 자락을 도는 구리둘레길이 있으나 아차산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다보니 광진구(廣
津區)도 아차산 광진구 구역에 둘레길을 그어 아차산둘레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평강교(친수계곡)에서 기원정사 윗쪽까지는 나무데크길이 깔려있어 안산자락길 못지 않은 편
한 둘레길의 정석을 보여주며, 기원정사 윗쪽에서 긴고랑 구간은 나무데크길과 흙길, 바위길,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고루고루 섞여있어 걷는 재미를 더해준다. 일부 구간에 경사가 조금 있
을 뿐, 그 외에는 착한 수준이며, 긴고랑에서 중곡지구까지는 용마산의 각박한 산길을 넘어야
되는데, 이 구간에는 용마산1보루와 2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기원정사 윗쪽~긴고랑 구간에는 유난히도 진달래가 많이 피어나 봄의 완연한 기운을 전해주며
개나리와 벚꽃도 이따금씩 나와 지나가는 나그네를 격려한다.


▲  연분홍 진달래가 화사하게 마중하는 아차산둘레길 (긴고랑 방향)

▲  부드럽게 이어지는 아차산둘레길

▲  아차산둘레길에서 바라본 작은 천하 (구의동과 중곡동 지역)
사진 가운데로 큰 기와집 같은 것이 보이는데 그곳이 내가 출발했던
기원정사 그 절이다.

▲  아차산둘레길에서 바라본 중곡동과 군자동, 광진구, 동대문구 지역

바로 밑에 보이는 동네가 중곡동(中谷洞) 긴고랑이다. 둘레길을 1굽이 지날 때마다 조망의 질
과 보이는 범위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이렇게 보니 서울이 정말 빽빽하긴 빽빽하다. 사진 가운
데로 어렴풋이 보이는 뫼는 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인 남산(南山)이다.


▲  아차산둘레길에서 바라본 용마산 산줄기의 위엄

▲  슬슬 가까워지는 긴고랑계곡과 용마산

▲  아차산둘레길에서 만난 주름진 바위 벼랑

첩첩한 주름선을 휘날리는 바위 벼랑이 까칠한 경사를 보이고 있다. 아차산의 산세가 대체로
부드러운 편이나 저런 벼랑과 바위도 곳곳에 포진해 있어 아차산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아차산 석실고분이 있는 너럭바위가 아주 일품임) 둘레길 조성으로 보호 난간이 둘러
져 있어 저 난간을 넘지 않는다면 별일은 없을 것이다.


▲  벼랑을 타고 긴고랑으로 급하게 내려가는 조그만 폭포
아차산이 빚은 물이 켜켜이 주름진 벼랑을 타고 속세로 흘러간다.


▲  개나리와 소나무 사이를 지나는 아차산둘레길

▲  긴고랑 직전 아차산둘레길 나무데크길
길이 각박한 곳은 나무데크를 깔아 각박함을 크게 순화시켰다.

▲  바위 벼랑 밑을 지나는 아차산둘레길 (긴고랑 직전)

▲  벚꽃들이 반갑게 마중하는 긴고랑길
길 좌우로 벚꽃들이 길게 늘어서 이곳에 온 것을 격하게 환영한다.



 

♠  아차산의 일품 계곡, 긴고랑(긴고랑계곡)

▲  긴고랑에서 만난 벚꽃의 향연
벚꽃들이 상큼하게 봄의 향연을 뿌려댄다.


기원정사 윗쪽에서 둘레길을 따라 20분 정도 가면 긴고랑계곡에 이른다. 이곳은 아차산과 용
마산 사이에 깊게 들어간 골짜기로 그 계곡이 길어서 긴골, 진골이라 불렸으며, 점차 긴고랑
으로 변화되었다. (긴 골짜기란 뜻이나 실제로는 별로 길지 않음)
아차산의 대표적인 계곡이자 몇 없는 자연산 계곡으로 계곡 하류에 제방이 다소 닦여져 옥의
티가 적지 않으나 자연산 풍경도 그런데로 남아있다. 게다가 계곡도 어느 정도 크기가 있는
편이며, 지나친 가뭄이 아닌 이상은 수량도 풍부하여 여름 제국 시절에는 도심 속 피서지로
북새통을 이룬다. (계곡 물놀이도 가능함)

* 긴고랑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143-146


▲  개나리와 진달래가 손짓하는 긴고랑계곡 하류
평화롭게 흐르던 긴고랑계곡은 계곡 주차장에서 강제로 생매장을 당해
어둠의 경로를 통해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이곳과 중랑천 사이에는
주택가가 빽빽하게 들어찼기 때문이다.

▲  인공 조미료가 과하게 들어간 긴고랑계곡 하류 제방

▲  긴고랑의 따사로운 봄 풍경

▲  개나리들이 무성한 긴고랑계곡

인공이 다소 가해진 계곡 주변으로 개나리의 노란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계곡 하류에 인공이
크게 씌워진 것은 심히 안타까우나 상류와 중류는 자연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  아차산 주능선으로 인도하는 긴고랑계곡 산길

긴고랑에서 아차산 주능선까지는 20~3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주능선 직전을 제외하면 세상
에서 가장 편한 오르막길 수준으로 계곡이 중간 정도까지 따라가주며, 온갖 봄꽃과 나무들로
무성하다. 초봄이라 그렇지 5월 이후에서 늦가을까지는 거의 숲터널 수준이다.


▲  긴고랑계곡 중류
물놀이나 아이들을 동반한 피서지로 적당한 곳이다. 긴고랑계곡은 딱히 통제구역이
없어 적당한 곳에 들어가 쉬거나 피서에 임하면 된다. 단 계곡을 더럽히거나
다녀간 흔적은 남기지 않도록 한다.

▲  졸졸졸~♪ 흘러가는 긴고랑계곡과 그 옆에 닦여진 나무데크길

▲  진달래와 소나무, 주름진 벼랑이 어우러진 긴고랑계곡 상류

▲  긴고랑계곡 상류
계곡 상류는 다른 계곡과 마찬가지로 물이 별로 없다. 봄의 해방군에 크게
들뜬 밑과 달리 하늘과 가까질수록 봄과 겨울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나무들이 많이 늘어난다.

▲  아차산 주능선으로 끌어주는 긴고랑 산길

▲  아차산 주능선 직전

긴고랑계곡 하류에서 20여 분을 오르면 주능선 갈림길에 이른다. 여기서 북쪽으로 오르면 용
마산과 망우산, 시루봉으로 이어지며, 남쪽은 아차산4보루와 아차산 정상, 그리고 동쪽 내리
막길은 구리시 아천동으로 통한다. 나는 남쪽 길로 들어서 아차산4보루로 이동했는데, 아차산
에 왔다면 4보루와 정상은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와 동남쪽 성곽

아차산4보루는 용마산과 망우산을 제외한 아차산 보루 식구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잃
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고구려 성곽 유적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아주 남다른 곳인데,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보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다소 남아있었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는 높이가 0.8m를 넘지 못했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들여쌓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4보루 남쪽 2중치

구리시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움을 받아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를 확인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닦여진 보루임이 명백해졌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에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4보루 한복판으로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선이 지나가 절
반은 서울시, 나머지 절반은 구리시 영역인데, 구리사가 2008년부터 복원을 적극 추진하여 2
년의 공사 끝에 2010년 12월 24일에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
원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늙은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적어서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쩔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
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땅으로 덮었다.
그리고 보루 중앙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에 보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축소 재현하여 마치 역사 왜곡의 현장 같은 아쉬움을 준다. 지형의 경사면을 이
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
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치성(치)은 성곽 방어를 위해 앞쪽으로 다소 튀어나온 성벽으로 고구려표 축성 양식의 하나이
다. 그 양식은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은 물론 왜열도와 서토(중원대륙)까지 전해져 절찬리
에 쓰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를 지닌 특이한 치가 남쪽으로 길게 나와있다. 그는 전체 길이 13.2m
로 중간에 목책(木柵)이 둘러진 2.5m 정도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로 무자비하게 사라
진 구의동보루에서도 일부 확인이 되고 있으나 사실상 아차산4보루가 유일하며, 고구려 보루
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닦여져 안정감을 준다.


▲  4보루 서남쪽 치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 일
대 병참기지로 추정된다.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
고, 방어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님의 꾸준한 괴롭
힘 앞에 모두 사라지고 터만 황량이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는 숙제
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4보루의 7개 건물터 중 남쪽에 있는 1호 건물터가 가장 높다. 여기서는 온돌 유구 2기와 주춧
돌이 나왔으며,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투구 등이 나와 4보루를 관
리하던 높은 장수나 지휘관의 숙소로 여겨진다.
1호 건물터 주변에는 6호 건물터와 7호 건물터, 2호 건물터 등이 있으며, 3호 건물터 밑에서
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는데, 층위(層位)로 보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
혀져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닦았던 것이다.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탐방로 좌우로 잔디와 흙이 두툼히 덮여진 건물터와 저수시설 유적이 있고, 키가 작은 금줄을
둘러놓아 고구려의 거룩한 흔적을 지키고 있다. 금줄의 의미처럼 줄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지키는 사람이 딱히 없어서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펴고 쉬거나 음식을 처묵처묵하는 골 빈 작
자들이 적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4보루 저수시설

4보루에서는 물을 저장하는 2개의 저수조(貯水槽) 흔적이 나왔다. 이들은 깊이 3.5m 정도 수
직으로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입자가 고운 회색 뻘흙을 발라 물이 새지 않도록 방수
처리를 한 것으로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350x310x깊이240cm'이다.


▲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남양주, 하남, 강동구 지역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한강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4보루 동북쪽 치

4보루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아주 예술이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종로구, 중구, 송파구, 강동구, 한강은 물론 하남시와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까지 시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해돋이 수요와 일몰 수요,
야간 등산 수요가 많다. (1월 1일에는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완전히 미어터짐)
게다가 아차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주능선의 목구멍 같은
곳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큰 보루를 쌓아 무척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4보루 동북쪽 치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남한산성 등

▲  아차산4보루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아차산 주능선과 용마산)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서쪽 성곽

▲  4보루 북쪽 치

4보루 바깥에는 우회 산길이 있다. 4보루의 속살로 들어가기 싫다면 그 우회길을 이용하면 되
는데, 아차산에 왔다면 4보루는 무조건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그러다보
니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많으며,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는 이들도 적지 않
다. (특히 저녁에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단체로 먹거리를 섭취하는 등산 동호회 사람들이 많
음) 휴식과 음식 섭취는 좋으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금줄을 넘어가는 행위는 하지 말자.

아차산4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보루 6식구, 용마산 보루 7식구, 망우산1보루, 홍련봉 보루 2식
구, 시루봉보루는 한 덩어리로 묶어 '아차산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5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7월 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동쪽 지붕, 아차산 초여름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5보루, 아차산1보루)

아차산 여름맞이 나들이 (아차산성, 아차산5보루, 아차산1보루)


    
' 아차산 여름맞이 나들이 '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  아차산성
◀  아차산1보루
▶  아차산3층석탑

아차산3층석탑

 



아차산(峨嵯山, 285m)은 내 즐겨찾기의 하나로 낮과 저녁(야간 등산)을 가리지 않고 무수
히 안겼던 친숙한 뫼이다. 특히 듣기만 해도 가슴이 꽤 벅차오르는 세 글자. 고구려(高句
麗, 고구리)의 영광스러운 흔적이 풍부히 깃든 현장으로 북쪽 미수복지(북한, 만주, 요동
, 요서, 연해주, 산동반도 등)를 제외한 이 땅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의 성지(聖地)이기
도 하다.

아차산은 용마산(龍馬山, 348m)과 망우산(忘憂山, 282m), 홍련봉(紅蓮峰), 시루봉을 식구
로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의 품을 무려 100회가 넘게 구석구석 더듬었으나 미답처(未踏處
)들이 일부 깨알처럼 남아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 하여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그 미답처
들을 여럿 잡고자 여름이 한참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 한복판에 다시 아차산을 찾았다.



 

♠  아차산 남쪽 끝에 자리한 싱그러운 생태공간
~ 아차산생태공원

▲  아차산생태공원 동쪽 연못 (습지원)

아차산의 신세대 명소인 아차산생태공원은 도심 속의 싱그러운 생태공원으로 홍련봉과 더불어
아차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다.

이곳은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1996~2001년) 계획에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29.5억원
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 2000년부터 토지 보상과 설계 용역, 공사 다지기를 거쳐 2001년 12
월 31일 만남의 광장이 우선 준공되었으며, 2002년 3월 29일에 생태공원이 완성되었다.
공원 면적은 23,450㎡로 생태공원(자생식물원, 나비정원, 습지원, 생태자료실)과 만남의광장,
소나무숲, 생태관찰로, 관상용 논, 재배용 밭,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야유회장(4개소), 운
동장과 여러 운동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상, 인어공주상 등도 갖추어 공
원의 풍치를 돋구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다양한 생태체험학습 프로그램(조류탐험교실, 곤충교실, 식물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공원이 닦여진 이후 고라니와 꿩, 해오라기, 쇠박새는 물론 멸종위기종인
맹꽁이까지 종종 관찰되고 있다. 심지어 서울 땅에서 처음으로 금개구리까지 목격되어 이곳의
생태계가 적지 않게 살아났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저 무늬만 생태공원이 아닌 진정한 생태공
원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공원에는 쉼터가 넉넉히 베풀어져 있으며, 숲이 짙고 그늘의 질이 우수해 잠시 망중한에 잠기
기에 좋다.

* 아차산생태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370 (영화사로 145 ☎ 02-450-1655)
* 아차산생태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생태공원 위쪽을 장식하고 있는 관상용 논

아차산생태공원의 백미(白眉)이자 아름다운 거울이라 할 수 있는 습지원(연못)은 그 이름 그
대로 습지식물의 삶터이다.
연못 한복판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걸쳐져 있어 시각의 농간으로 2개의 연못으로 보일 수 있
지만 실제는 하나로 주변 나무와 봄꽃, 지나가는 햇님과 달님, 구름까지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동쪽 못에는 서양 동화의 단골 모델인 인어공주상이
고운 맵시를 드러내며 연못의 운치를 한껏 띄운다.


▲  인어공주가 살고 있는 습지원 동쪽 연못

▲  습지원의 구수한 양념, 인어공주상
인어공주와 분수대 사이로 일곱 색깔 무지개가 반짝 모습을 비추었다.


인어공주는 윗도리는 여자 사람, 아랫도리는 물고기로 서양 동화에서 나오는 상상의 존재이다
. 잘빠진 몸매와 아름다운 가슴을 모두 드러낸 채, 바위에 걸터앉아 두툼한 꼬랑지를 흔드는
모습이 은근 매혹적이라 정처가 없는 나의 두 눈이 자꾸 그에게로 쏠린다.
그는 습지원을 닦으면서 갖다둔 조각품일 뿐, 아차산과는 관련이 없으며, 이곳이 어린이의 생
태학습 체험장의 역할을 하고 있어 순수함의 비중이 아직까지는 높을 그들의 눈높이와 공간의
성격을 배려하여 배치하였다.

그런데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반가운 손님이 인어공주상과 분수대 사이에 반짝 왕림을 하였다
. 바로 일곱 색깔 무지개이다. 언제부터인가 1년에 1번 볼까 말까 한 존재가 되어버린 무지개
, 올해 들어 처음으로 보는 무지개로 갑작스런 그의 등장은 이번 아차산 미답처 사냥에서 큰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하늘의 게시이자 복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날 계획한 미답처는 모두
인연을 지었음)


▲  무거운 동전은 이곳으로?? 연못에 동전을 버리는 공간
인어공주 누님이 바라보는 방향에 동전을 받아먹는 동그란 돌통이 있다. 그곳에
동전이 들어가면 행운이 온다나 뭐라나? 그렇게 모인 동전은 광진구청에서
수거하여 불우이웃돕기에 쓴다고 한다. (과연??)


▲  분수가 한참 나래를 펼치고 있는 습지원 서쪽 못

▲  생태공원 동쪽 산책로 (생태자료실 동쪽)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 주능선으로 갈려면 이곳을 거쳐 가면
된다.
소나무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
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
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퐁당퐁당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내
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



 

♠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흔적이 고루고루 깃든 삼국시대 산성 유적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①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덥수룩
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밀
어내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늙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차산성 외에 장
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기지가 되었다. 위례성으로 여겨지는 서
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의 라이벌이기
도 했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치자고 요구했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그 사건을 구실로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
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해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이들은 개로
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했는데,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게
넘겼다.
그렇게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왜열도와 중
원대륙(서토)의 무수한 영토를 거느리며 천하의 바다를 장악했던 백제의 도읍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후손들
이 위례성을 찾느라 오랜 세월 진땀을 뺀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②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서울 동부 지역, 구리 지
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堡壘)를 주렁주렁 달아
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水落山),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
천 지역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
한 요새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쳐들어온 신라군과 싸우다
가 전사했다고 전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
(北漢山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
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세월과 자연에 의
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③ 장대터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
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
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 등이 남아
있다.
장대(장대터)는 전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
며,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
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래도 아직 건드리지 못한 숨겨진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
산을 지원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인 '연화문와
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 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에서는 신
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
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왔으며, 신
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이 이
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
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속시원히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
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
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
부터 서울시와 광진구,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떡밥이 꾸준히 나오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빗장은 열리지 못했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워커힐 쪽에서 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으나 통제되어 있어 대놓고 들어가
기는 그렇다. 하여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광진구청에서 운영하는 아차산
역사문화해설(역사문화투어)을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다.
(문의 광진구청 문화체육과 ☎ 02-450-7593)
내가 아차산을 무수히 오갔으나 아직까지 아차산성의 속살은 들어가지 못했다. 아차산성 내부
가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롭게 둘러볼 때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 해방이 참으로 힘들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아차산성 서벽을 지나면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낙타고개와 아차산 주능선으로 이
어지며, 동쪽은 아차산성 북벽 앞과 우미내계곡, 고구려 대장간마을로 이어진다.
여기서 아차산 동쪽 구역(구리시 아천동)으로 넘어가 우미내계곡과 아차산 큰바위얼굴, 석실
고분(石室古墳), 아차산3층석탑, 범굴사(대성암), 아차산2보루터를 둘러보고 아차산6보루터를
거쳐 서울과 구리의 경계선인 아차산 주능선으로 들어섰다. (아차산 구리 구역은 별도의 글에
서 다루도록 하겠음)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아차산6보루, 5보루, 1보루)

▲  아차산6보루터 - 사적 455호

범굴사(대성암)에서 뒤쪽 너른 바위를 올라 아차산2보루터를 지나면 주능선 바로 직전에 6보
루가 마중을 한다.

언덕처럼 봉긋 솟은 터가 바로 6보루터로 2005년에 아차산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다. 허나 아직까지 속시원한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생김새가 보
루터 비슷하게 생겨서 아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6보루의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여기서 나온 불씨는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아차산 주
능선의 바로 동쪽으로 아차산의 옛 과거를 적지 않게 간직하고 있으리라 여겨지며, 속히 발굴
조사를 벌여 6보루의 정체성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구의동(九宜洞), 자양동(紫陽洞),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
산, 사패산, 천보산, 양주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했는데, 이들 보루 중, 그
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 보루 1곳, 홍련봉 보루 2곳,
시루봉보루, 수락산 보루 1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묶어 국가 사적 455호
지정했다.


▲  소나무가 운치를 자아내는 아차산 주능선길

아차산6보루와 간만에 인연을 짓고 아차산의 하늘길인 아차산 주능선으로 진입했다. 천하 둘
레길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서울둘레길(157km)도 신세를 지는 능선길로 서울둘레길 2
코스(용마,아차산코스 12.4km)가 지나간다. 여기서 남쪽으로 향하면 아차산5보루터가 깃든 두
툼한 언덕이 마중을 한다.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 성벽은 거친 세월의 강물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있는 형편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존을 위
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다소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닦았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
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新
羅)가 기존의 고구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아차산5보루는 현재 문화유산 보호로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아차산5보루 정상을 장식하고 있는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
는 돌 대부분은 헝클어진 5보루 성돌로 그 성돌이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돌탑으로 다
시 태어났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  아차산5보루터에서 바라본 천하 ①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금곡,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가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5보루터에서 바라본 천하 ②
아차산 남쪽 자락과 한강, 강동구, 하남시 지역

▲  아차산5보루터에서 바라본 천하 ③
아차산 남쪽 자락과 광진구,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성남시 지역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1보루 (가운데 봉우리)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에서 능선길을 조금 내려가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가 나온다. 이곳이 넘
버원 1보루가 된 것은 아주 단순하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용마산~망
우산 주능선을 이어주는 요새였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
히게 좋다.
특히 5보루와 남쪽 아차산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
으며, 1월 1일만 되면 해맞이광장과 함께 새해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아주 북새통을 이루
어 발을 디딜 공간 조차 없을 지경이다.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  아차산1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해질녘에 서울시내

▲  아차산 해맞이광장 주변

아차산1보루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아차산 해맞이광장이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묵은 1,000
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하던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이 이곳에서 새천년
해맞이 행사를 가졌는데, 그것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았다.
여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해맞이 축제가 성황리에 열린다.


▲  아차산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광진구와 송파구, 강남구, 대모산과 관악산 등


아차산 해맞이광장을 벗어나 무덤 갈림길에 이르니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햇님의 근무 시간
이 나날이 연장되면서 아직도 대낮과 같은 상태이나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아차산의 여러 미
답처(온달샘 석탑, 석실고분, 아차산3층석탑)와 쿨하게 계산을 끝낸 상태라 내려가는 발걸음
이 아주 가벼웠다. 비로소 그들과의 술래 신세를 면했기 때문이다.

무덤 갈림길에서 남쪽으로 직진하여 너른 바위 위에 들어앉아 황색 지붕을 휘날리는 고구려정
을 둘러보고, 친수계곡과 동의초교를 거쳐 어린이대공원후문(아차산역)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6월 나들이는 다음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6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인왕산둘레길 나들이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서울 도심의 우백호, 인왕산 (탕춘대성, 기차바위, 석굴암)



' 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 '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인왕산 한양도성길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  인왕산 한양도성길

▲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은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이다. 하여 그의 품을
지겹도록 오갔지만(100번은 넘게 갔음) 아직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미답처(未踏處)들이
여럿 남아있어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 하여 그들을 미답 목록에서 흔쾌히 지우고자 겨
울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보이던 11월 끝 무렵에 그곳을 찾았다.

이번 인왕산 나들이는 세검정교차로에서 첫 발을 떼었다, 거기서 세검정로를 따라 남쪽
으로 조금 가면 홍지문(弘智門)이 나오는데, 그 남쪽에 탕춘대성과 인왕산 산길(인왕산
둘레길)이 있다. 그 길이 인왕산 북쪽 기점의 하나(홍지문 기점)이자 인왕산의 가장 북
쪽 끝으로 아직 미답의 상태로 남아있었다.

홍지문 기점으로 접근하려면 세검정교차로에서 세검정길 남쪽 보도로 가거나, 홍지문
·
옥천암 정류장(홍은동에서 세검정 방향)세검정 방향)에서 보도로 접근해야 된다.



 

♠  인왕산(仁王山) 북쪽 능선과 탕춘대성(蕩春臺城)

▲  탕춘대성과 인왕산둘레길 (홍지문 기점 남쪽)

홍지문 기점 코스는 탕춘대성과 인왕산 북쪽 능선을 거쳐 기차바위로 이어진다. 시작부터 사
람들의 기를 꽉 잡으려는 듯, 경사가 각박하여 숨을 적지 않게 헐떡이게 하는데, 처음 10~15
분 정도가 좀 고통스러울 뿐, 산길은 서서히 진정을 되찾는다. 게다가 산이 크게 흥분을 보이
는 구간은 나무데크 길과 계단을 닦아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다. (중간에 가
파른 구간이 여럿 있음)
홍지문에서 기차바위를 거쳐 한양도성이 흐르는 인왕산 주능선까지 35~45분 정도 걸리며, 정
상은 거기서 10~15분 정도 추가하면 된다.

산길을 따라 이어진 빛바랜 성곽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이어주던 탕춘대성이다. 연
산군(燕山君)이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지었다는 탕춘대(蕩春臺)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겹성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 임금이 만약에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
년에 신완(申琬)이 성곽 축성을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弘濟川)에
홍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
서 10월 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고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으려고 했
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하여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백
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취소되었다.


▲  산길과 잠시 분리되는 탕춘대성
성곽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수풀을 위해 동쪽으로 짧게 우회길을 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능
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탕춘대성 인왕산 구간은 홍지문에서 북쪽 능선 사이에 남아있는데, 홍지문 기점에서 5분 정도
올라간 정도까지만 여장이 복원되어 있고 그 이남은 성곽만 남아있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홍지문 및 탕춘대성'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되어 있음>

* 탕춘대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외


▲  키 작은 돌담처럼 남아있는 탕춘대성
인왕산 쪽 탕춘대성은 거의 키가 작다. 워낙 각박한 지형에 나무도 무성하여
높이 다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최대 높이는 2~3m 정도)

▲  소나무숲에 묻힌 탕춘대성 (오른쪽 돌무더기가 성곽)
이곳 이후로는 성곽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라 흔적을 더듬기도 힘들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① <내부순환로와 홍은동 지역>

왼쪽에 부드럽게 곡선을 보인 도로가 서울 도심 주변을 챗바퀴처럼 도는 내부순환로이다. 차
량들의 통행이 빈번하여 그들이 내는 굉음이 나의 두 귀를 마구 때려댄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한산 탕춘대성 남쪽 능선>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 산줄기와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평창동 지역>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평창동(平倉洞), 신영동(新營洞) 지역은
인왕산과 북한산, 북악산(백악산)에 포근히 감싸인 분지 지형으로
마치 산악 도시나 마을 같은 아늑한 분위기이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부암동과 북악산>
사진 가운데 산속에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백사골)이
묻혀있다. 그 너머로 성북동과 더불어 이 땅의 0.1%가 산다는 졸부 마을
평창동이 곱지 않게 바라보인다.

▲  벼랑을 오르는 계단길 (인왕산 북쪽 능선)

▲  인왕산 북쪽 능선 중간쯤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북쪽 능선은 탕춘대성에서 기차바위능선 북쪽까지로 그 중간쯤에 동쪽(기차바위 방향
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철조망이 쳐진 구간이 있다. 그 철조망 안쪽이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유명한 석파정(石坡亭)을 품고 있는 서울미술관 땅이다. (철조망만 있을 뿐, 문이나 개구멍은
보이지 않았음)


▲  인왕산 북쪽 능선 중간쯤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  솔내음이 깃든 인왕산 북쪽 능선길
인왕산은 바위도 많지만 소나무도 제법 우거져 있다.

▲  인왕산 북쪽 능선 남쪽에서 바라본 홍은동과 은평구 지역
서울과 은평구의 서쪽 벽이자 서울둘레길이 흐르는 앵봉산(235m)과
봉산(烽山, 209m)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 북쪽 갈림길
여기서 부암동(성덕사)과 홍제동 개미마을, 환희사(歡喜寺)에서 올라온 길이
하나가 되어 기차바위로 이어진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의 위엄
내가 천하를 스케치하는 조물주라면 그 밑에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졸부들의
흔적을 지우개로 지워 북한산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338m)



 

♠  인왕산 기차바위와 인왕산 주능선(한양도성)

▲  인왕산의 북쪽 하늘길, 기차바위 (기차바위능선)

인왕산 바위의 갑(甲)으로 찬양받는 기차바위는 기차처럼 길쭉한 바위 능선이다. 절대 기차처
럼 생기지는 않았으며, 그저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이런 구절이 있다. 그만큼 기
차는 이 땅에서 길쭉한 존재의 대명사이다.
기차바위 능선은 약 300m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닐면 실감이 덜하겠지만
세검정초교에서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로 올라가는 길이나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에서 바
라보면 정말 단단하고 두툼한 바위임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조망은 1등급이나 양
쪽이 자비심이 없는 낭떠러지이니 난간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①
바로 앞에 부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서울 도심부는 물론 멀리 동대문구와
중랑구, 광진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강동구, 송파 지역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와 두 눈이 호사를 누린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악산(백악산)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北玄武) 북악산과 부암동, 청운동 지역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③ 인왕산 그늘에 묻힌 부암동
부암동 일대가 인왕산 그늘에 푹 잠겨 있다. 그 너머로 북악산(백악산)과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④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
인왕산 북쪽 자락과 홍은동, 홍제동, 백련산, 은평구, 앵봉산~봉산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⑤
서울 도심과 서촌(웃대), 그리고 멀리 강동, 송파, 강남 지역까지;;

▲  인왕산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기차바위 능선

기차바위를 지나면 한양도성 전까지 내리막이 펼쳐진다. 성곽 앞에 이르면 잠시 오르막이 펼
쳐지면서 계단이 나타나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한양도성이 흐르는 인왕산 주능선에 발을 들
이게 된다. (기차바위 갈림길)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인왕산 정상이며, 동쪽은 창의문(彰義門, 자하문)과 북악산(백악산)으
로 이어진다. 그날은 정상에 대한 미련이 없었고 눈 감고도 갈 정도로 익숙해진 곳이라 바로
동쪽으로 내려갔다. 정상이란 자리가 탐이 나는 자리긴 해도 그렇다고 늘 좋은 것은 아니다.


▲  기차바위 갈림길 계단 밑에서 바라본 한양도성 (여름 사진)
성벽과 여장의 피부색이 너무 차이가 난다. 성벽은 조선 때 것으로 고색의 때가
자욱한 반면, 여장은 근래에 새로 붙인 것이라 피부가 매우 하얗다.


▲  인왕산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이미 인왕산의 어깨와 목 부분까지 올라탄 상태라 조망이 가히 천하일품이다.
마치 하늘을 배회하는 큰 새의 등에 강제로 업힌 기분이다.

▲  인왕산 한양도성 북쪽 성곽길 - 창의문 방향 ①
성곽길은 계단이 좀 팍팍하여 통행이 조금 고통스러우며, 그 옆에 급한 경사를
조금 순화시킨 계단길이 있어 그 길을 많이 이용한다.


인왕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서울의 든든한 갑옷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1388년 압록강을 건너 단동(丹東) 북쪽 위화도(威化島, 현재 압록강에 있는 그 위화도가 아님
)에서 그 유명한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 그는 1394년 남경(
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서울)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
北岳山,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
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으며, 평지는 토성
(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 다시 79,400명을 콩 볶듯이 동원, 49
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축조를 마무리 지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여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해 공사에 들어갔
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정도였다고 하니 그 3배의 인원이 동원된 것이며, 이는 조선
최대의 공사로 꼽힌다.
또한 공사를 너무 닥달하여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그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
한 도성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 도성을 관리하고자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
었으며, 워낙 성곽을 단단하게 다진 덕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성
곽 보수도 1704년 숙종이 벌인 1차례가 전부이다.


▲  인왕산 한양도성 북쪽 성곽길 <창의문 방향 ②>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
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구한말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양이(洋夷)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
었다. 콜브란은 고종(高宗)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
하라며 전차(電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
淸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
나갔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제왕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하지만 문제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이다.
을사늑약 이후 왜는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
는 해괴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
(昭義門)>과 서대문<돈의문(敦義門)>은 물론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어버리면서 망국
(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중수하기 시작해 광희문과 숙정문을 손
질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
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  한양도성 여장 너머로 보이는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부암동, 평창동 지역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갈렸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
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도성을 어떤 코스로 쌓을지 고심을 했다. 그러던 어느 밤, 난데없이 큰 눈
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었다
.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 쌓인 자리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
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
이라 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허나 신라의 중심지인 서라벌에서 서울이란 말이 유래된 것으로 크게 보고 있다.


▲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비춘 서울 도심 (인왕산 한양도성 성곽길)



 

♠  인왕산 동쪽 자락에 숨겨진 작은 석굴 암자, 흔한 이름에 비해
존재감이 매우 낮은 석굴암(石窟庵)

▲  만수천약수터

기차바위 갈림길에서 성곽길을 5분 정도 내려가면 신교동(新橋洞)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슬쩍
손을 내민다. 석굴암을 가려면 여기서 성곽과 헤어져야 되기에 그를 버리고 신교동 방향으로
가다가 중간에 석굴암 입구로 이어지는 길로 빠져 2~3분 내려가니 만수천약수터가 마중을 나
온다.

만수천은 인왕산 동부의 대표적인 약수터이나 가뭄으로 물이 마르면서 부적합 주홍글씨를 받
은 상태였다. 이곳이 아무리 도심 지척이라고 해도 비가 적당히 내려주고 약수터 주변을 잘
관리하면 충분히 적합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비가 가뭄에 콩 나듯이 거의 내리지를
않으니 물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영 좋지 않은 존재들이 샘물에 활개를 치는 것이
다.
약수터 주변에는 쉼터와 간단히 몸을 풀 수 있는 운동기구들이 있으며, 커다란 바위도 여럿
포진해 있어 인왕산이 바위의 산임을 실감케 한다. 그중 북쪽에 있는 바위에는 작은 자연산
굴이 있는데,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씌웠지만 예전에는 기도나 굿을 벌이는 장소로
널리 쓰였다. 인왕산에 잘생긴 바위가 많고 기가 센 산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자 굿터로 유명했다.

▲  만수천약수터 쉼터

▲  겨울잠에 잠긴 석굴암1약수터

만수천약수터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오른쪽 길로 질러가면 석굴암약수터가 나온다. (왼쪽은 석
굴암입구 초소로 이어짐) 이 샘터는 물낭비를 줄이고자 수도꼭지를 달아 놓았는데, 이곳 역시
바가지들이 무색할 정도로 부적합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석굴암 부근에도 약수터가 있어 이
를 구분하고자 편의상 석굴암1약수터라 부르기도 한다.


▲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나무데크 계단길

석굴암1약수터에서 석굴암까지는 나무데크 계단길이 닦여져 있다. 마치 하늘로 이어진 것일까
? 계단이 얼마나 길던지 거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경사 또한 각박하여 오르는 길이
조금은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계단을 닦아놓아 길이 좀 순해진 것으로 예전에는 경사지고
울퉁불퉁한 산길에 의지해 힘겹게 올라가야 했다.
저 계단의 끝에는 하늘 대신 석굴암이 자리해 있으며, 길 중간에 조망이 괜찮은 장소(바위)가
하나 있다.


▲  서울에 석양이 진다. 석굴암 밑 바위에서 바라본 도심
이곳은 인왕산에 숨겨진 조망 포인트이다.

▲  석굴암 석굴법당

석굴암은 인왕산 정상 치마바위 동쪽 밑에 둥지를 튼 작은 석굴 암자이다. 장대하게 생긴 바
위가 석굴암의 거의 모든 것으로 그의 밑도리에는 조그만 자연산 석굴이 깃들여져 있다. 호랑
이가 담배에 호기심을 품던 머나먼 시절부터 산악신앙과 무속이 벌여지던 현장이었으며, 20세
기 중반 이후, 수성동계곡 인근에 자리한 불국사(佛國寺)에서 이곳을 접수해 굴 내부를 손질
하고 부속암자인 석굴암으로 삼았다. 암자 이름은 바로 이 석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어째 경
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관계를 따라한 느낌마저 든다.

석굴을 법당(法堂)으로 삼아 돌로 만든 석가3존상과 여러 보살상을 두었으며, 문을 남쪽과 동
쪽에 내었다. 석굴 서남쪽에는 산신각 공간이 있으며 숙식을 할 수 있는 건물이 따로 없어 불
국사에서 승려와 보살 아줌마들이 왕래하면서 이곳을 관리한다. 보통 일몰 때 불국사로 돌아
가며, 가끔 기도를 위해 절을 지키기도 한다. 허나 내가 갔을 때(17시 이후)는 경내에 아무도
없는 빈 암자 상태였다. (그래도 소중한 불전함을 지키고자 cctv를 달아놓음;;)

비록 조그만 암자이지만 여기서 동쪽과 동남쪽으로 도심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좋으며
, 그 도심을 이곳의 너른 뜨락으로 삼고 있다. 절 주위로 치마바위와 매바위, 닭바위 등 대자
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들이 많아 풍경 또한 일품이며, 석굴암 주변은
2007년 12월에 지정된 '인왕산 생태경관보전지역'의 하나로 자연경관이 아주 수려하고 소나무
와 상수리나무, 아까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또한 박새, 어치, 유리딱새, 소쩍새, 암먹부전나비, 작은주홍부전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
등 다양한 새와 곤충이 서식하고 있는 도심 속의 소중한 자연의 보고이다.


▲  석굴암 석굴법당 내부 (석가3존상)

자연산 굴을 손질한 석굴 내부는 굴의 타고난 본능상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좀
면할 정도이다. 사람은 없지만 방석과 난방기구, 선풍기 등을 갖추고 있으며, 석굴 허공에는
중생의 소망을 머금은 분홍 연등이 가득 매달려 또 다른 낮은 하늘을 이루고 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석굴암과 인왕산 치마바위

▲  산신각(山神閣)의 예전 모습
인왕산 산신의 보금자리로 어엿한 기와집이 아닌 바위 앞에
터를 다지고 가건물을 씌웠다.

▲  산신각 마애산신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산신각에는 산신(山神) 가족을 담은 마애산신도가 깃들여져 있다. 신선
처럼 생긴 산신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고양이 같은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거리고 있으며,
산신의 비서인 동자와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있다.
산신의 위엄과 진지함보다는 동네에 친근한 노인네를 다룬 것 같은 느낌으로 바위에 산신도
를 새긴 예는 서울은 물론 천하에서도 매우 흔치가 않다. 아쉽게도 20세기 후반에 제작되어
문화재적 가치는 아직 여물지 못했지만 최소 60~70년 이상 숙성되면 거뜬히 지방문화재의 자
리 하나는 따지 않을까 싶다.


▲  석굴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바위 윗쪽 네모난 구멍>

경내의 서남쪽 바위를 숨은 그림을 찾듯 눈으로 잘 더듬어보자. 그러면 바위 윗쪽에 있는 네
모난 구멍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구멍이 18~20세기에 서울 지역 사찰에서 많이 등장했던
마애사리탑으로 바위 피부에 홈을 파고 그 안에 승려나 신도의 사리함을 봉안한 간편한 사리
탑이다. 이 탑은 돈을 크게 들여 탑을 지을 필요도 없으며, 그저 바위만 있으면 된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사리탑은 불암산 학도암(鶴到庵, ☞ 관련글 보기)에 있는 것으로
19세기 초에 조성된 2기가 있으며,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 관련글 보기)에도 19세기 사리
탑 2기가 전한다. 그리고 상도동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기)과 석굴암에도 20세기 것이
있는데, 석굴암 것은 20세기 초/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는 달랑 구멍(감실)만 남아있다.

석굴암에서 치마바위와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었다. 허나 그 길은 금지된 길이
되었으며, 절 북쪽과 서쪽은 바위와 벼랑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내가 올라온 동쪽 길과 근래
속세에 개방된 남쪽 길이 전부이다.
지금은 비록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인왕산은 한때 서울에서 잘나갔던 암장(암벽장)이었다. 서
울 유일의 암장이란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는데, 석굴암에서 시작하여 치마바위 정상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코스로 1968년 1,21사태 이후 인왕산 등산이 통제되었지만 암장은 군부
대에 허가를 받으면 누구든 가능했다. 허나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불암산이 인기 암장으
로 부상했고 실내 암장까지 많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거의 잊혀졌다.


▲  천향암(天香庵) 돌문

숨겨진 볼거리가 더 없을까 싶어 경내를 더 기웃거리니 북쪽으로 가늘게 이어진 산길이 보인
다. 마치 보물을 찾으러가듯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득 품으며 그 길로 접어드니 바로 벼랑 길
(밑이 벼랑임)이 나오고 커다란 바위들이 기묘하게 서로 기대선 틈에 자연산 돌문이 나 있다.
서쪽은 그야말로 장대한 바위이고 오른쪽은 그 바위에 몸을 기댄 돌덩어리이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바위에 둘러싸인 샘터와 기도처가 나온다. 이곳을 '천향암'이라 부르는데,
이름으로 봐서는 암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가건물 같은 것으로 대충 때우다가 사라진 듯 싶으
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며 석굴암과 비슷하게 오랫동안 무속/산악신앙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
이다. 지금은 석굴암의 부속 공간으로 딱히 주제는 없으나 샘터가 있는 것으로 봐서 용왕(龍
王)을 위한 공간으로 쓰이는 듯 싶다.
조그만 샘터에는 물이 고여 있으나 원효대사가 마셨다는 해골에 고인 물처럼 상태가 그리 좋
아 보이진 않는다.


▲  암벽에 감싸인 천향암 샘터

벼랑 길은 천향암에서 뚝 끊겼다. 얼핏 보니 북쪽으로 넘어가는 암릉길이 있는 듯 싶은데, 딱
히 안내문도 없고 햇님도 슬슬 커텐을 칠 준비를 하니 감히 살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북쪽
과 서쪽, 남쪽은 암벽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동쪽만 트여있는 궁벽한 곳으로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도 석굴암 못지 않다.


▲  하늘이 지은 기묘한 돌문

서울 한복판에 이런 자연산 돌문이 있다니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인왕산을 수없이 들락거린
내가 이제서야 이곳을 오다니 그동안 인왕산을 정말 헛 다닌 모양이다. 이런 것을 두고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하는 모양이다.


▲  천향암에서 바라본 일몰녘에 서울 도심

▲  석굴암과 인왕산을 뒤로 하며 (석굴암 계단길)

천향암에서는 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된다. 바람소리와 낙엽 소리가 전부인 적막한 석굴암과
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계단길을 내려왔다. 석굴암입구에
이르니 햇님은 퇴근 본능에 따라 철수를 했고, 달님이 자리를 이어받아 검은 도화지에 가녀린
한줄기 빛을 선사한다.

이렇게 하여 연말 인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그날 목적했던 인왕산의 미답처를
모두 지우긴 했으나 그 기억 또한 흐릿한 과거의 하나로 싹 사라지니 모든 것이 참 부질없는
것 같다.

* 인왕산 석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산3-14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2월 2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나들이 (홍제천인공폭포, 연희숲속쉼터, 안산자락길, 안산메타세콰이어숲길)

서울 안산 (홍제천 인공폭포, 안산자락길, 메타세콰이어숲길)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안산 여름 나들이 '

안산 메타세콰이어 숲길

▲  안산 메타세콰이어 숲길

홍제천인공폭포 안산 잣나무숲길

▲  홍제천 인공폭포

▲  안산 잣나무숲길

 



 

여름 제국이 지독한 무더위로 천하만물을 들들 볶던 성하(盛夏)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
와 서대문구 안산을 찾았다.
보통 안산에 안길 때는 봉원사(奉元寺, ☞ 관련글 보기)나 독립문(獨立門)에서 올라갔으
나 이번에는 길을 달리 잡아 홍제천 인공폭포에서 시작했다. 이곳은 안산의 서북쪽 자락
으로 홍제천변에 자리해 있다.

서대문구의 동쪽 젖줄인 홍제천(弘濟川)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仁
王山)이 사이좋게 빚은 하천이다. 지금이야 생물이 살아 숨 쉬는 착한 하천으로 있지만
오직 개발만 앞세우던 20세기 후반, 개발의 칼질에 서울의 다른 하천과 마찬가지로 시커
먼 하천으로 전락되어 세상을 향해 온갖 악취를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1999년 내부순환
로가 홍제천에 구축되면서 하천이 자주 마르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그렇게 인간들에게 제대로 만신창이가 된 홍제천은 2008년 이후 하천 정비사업으로 수질
을 개선시키고 꽃과 수풀을 잔뜩 심으면서 생물을 불러들이는 생태하천으로 다시금 살아
났다. 또한 지하수를 소환해 하천을 채우면서 이제는 물이 마를 날이 없으며, 하천 주변
에 산책로와 운동시설, 쉼터, 홍제천폭포, 홍제천 폭포마당 등을 닦아 지역 주민들의 상
큼한 명소이자 쉼터로 착하게 거듭났다.


▲  백련교 주변 홍제천과 그에게 씌워진 칼, 내부순환로
고가 형태로 지어진 내부순환로가 홍제천에 육중한 다리를 걸치고 있다.

▲  멀리서 바라본 홍제천 인공폭포
홍제천과 폭포 주변은 수질이 어느 정도 개선되고 수풀도 무성해지면서
물고기와 새들이 앞다투어 비빌 구석을 마련했다.



 

♠  홍제천과 안산의 새로운 명물, 홍제천 인공폭포

▲  홍제천폭포와 음악분수

홍제천 백련교와 홍연교 사이에는 서대문구의 새로운 명물로 애지중지되고 있는 홍제천 인공
폭포(이하 홍제천폭포)가 여름 제국의 염통을 건드린다.

이 폭포는 2008년부터 진행된 홍제천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2월에 짓기 시작해 2011년
에 완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백련교 옆에 있다 하여 '백련교폭포'라 하였으나 나중에 '홍제천
인공폭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은 안산과 홍제천이 만나는 유일한 곳으로 하천변에 20~30m 정도에 벼랑이 형성되어 있는
데, 그 벼랑을 활용해 높이 25m, 폭 60m에 장대한 폭포를 닦았다. 물줄기는 크게 3줄기로 굵
은 실타래마냥 물(지하수)을 뽑아내며 홍제천을 듬뿍 살찌운다.
비록 인공폭포긴 하지만 인공의 느낌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감쪽같이 지어져 자연산
폭포로 착각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며, 주변 풍경과도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달달한
풍경을 자아낸다.

폭포 앞 하천에는 폭포를 수식하는 음악분수를 매복시켜 하루에 2번씩(12~13시, 17~18시) 1시
간 동안 음악에 맞춰 깜짝 율동을 부린다. 그리고 폭포 맞은편(동신병원 뒷쪽)에는 쉼터인 홍
제천 폭포마당을 2층으로 설치했고, 폭포 남쪽에는 안산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와 물레방아를
닦아 조촐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홍제천폭포가 자연산 흉내를 제대로 내고 있지만 그래도 엄연한 인공폭포이다. 그러다보니 하
루 종일, 1년 내내 돌리기가 여의치가 않다. 그만큼 전기와 수도 등 유지 비용이 소요되기 때
문이다. 하여 겨울을 제외한 4월부터 10월까지만 폭포와 음악분수를 돌리며, 가동시간은 8시
~19시(6~8월은 20시까지, 비오는 날과 사정이 여의치 않은 날은 가동하지 않거나 단축 운영)
이다. 그 외에는 죽은 폭포로 지낸다.


▲  홍제천 폭포마당에서 바라본 홍제천폭포

이곳은 한때 지상파 방송 날씨예보에 자주 등장했던 곳이다. 서대문구가 야심 차게 지어놓기
는 했으나 문제는 홍보이다. 기껏 잘 지어놓은 것인데 겨우 동네 명소로만 머물면 얼마나 아
깝겠는가. 그래서 홍보에 이용한 것이 바로 지상파 방송사이다.


▲  서남쪽에서 바라본 홍제천폭포의 위엄

하얀 명주처럼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가 얼마나 장쾌한지 귀신이 놀라 도망칠 정도이며, 천하
를 쥐고 흔드는 여름 제국도 이곳만큼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니 이곳에 머물고 있는 한, 여름
을 잊어도 좋은 착한 납량처이다.


▲  홍제천 너머에 웬 벽지 산골이? 물레방앗간과 안산
홍제천폭포에서 안산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바로 저곳에 숨겨져 있다.

   ◀  홍제천 징검다리 (홍제천폭포 서남쪽)
잘 다듬어진 큼지막한 돌을 점점이 깔아놓아
정겹게 징검다리를 이루고 있다. 저 다리를 건
너 왼쪽(징검다리)으로 가면 물레방앗간과 안
산으로 이어지며, 오른쪽 나무데크길은 홍제천
동쪽 산책로이다.


▲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홍제천폭포와 폭포마당 주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의 맑은 기운을 싣고 한강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홍제천은 오늘도 평화롭기 그지 없다.


홍제천폭포를 둘러보고 서남쪽으로 조금 가면 안산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나온다. 이들은
홍제천을 정비하면서 닦은 것으로 초등학교 고학년 발걸음에 맞게 돌이 놓여져 있어 덤벙대지
만 않는다면 물에 빠질 위험은 거의 없다. 그리고 설사 빠진다고 해도 수심이 얕아서 그리 위
험하지는 않다.
징검다리는 내를 건너 물레방앗간 이전까지 이어져 있으며 그 길로 가야 안산의 품으로 들어
설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 나무데크길은 홍제천 동쪽 산책로이다.

▲  물레방앗간과 안산으로 인도하는
하천변 징검다리

▲  징검다리가 끝나면 박석이 입혀진 길이
물레방앗간까지 펼쳐진다.

▲  장식물로 놓여진 연자방아

▲  홍제천 물레방아

징검다리를 건너면 박석이 깔린 길이 나오면서 물레방아와 연자방아 등이 자신들 좀 보고 가
라며 발길을 붙잡는다. 그들의 등장은 주변 숲과 어우러져 잠시나마 서울에서 머나먼 첩첩한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을 선사하는데, 이들은 홍제천폭포를 닦으면서 지어진 것들로 비
록 고색의 때는 여물지 못했으나 안산 동쪽 자락에 있는 너와집과 함께 안산 속의 전통 민속
공간으로 소소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물레방아는 강원도 물레방아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정선군(旌善郡) 백전리 물레방아(19세
기에 지어짐)를 모델로 삼아 만든 것으로 물레방아 위에서 쉬지 않고 물이 떨어져 물레방아의
나태함을 경계하고 있다. 그 옆에는 물레방앗간이 있고, 연못과 연자방아, 장독대, 전통식 배
등이 놓여져 있는데, 이중 물레방아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고, 나머지는 장식용으로 한가로운
여름 오후를 보낸다.


▲  물레방앗간과 전통식 배

20년도 채 익지 않은 방앗간 지붕에는 벌써부터 세월이 달아준 잡초가 무성하다. 그 오른쪽에
자리한 배는 옛날에 바다와 경강(京江, 한강)을 오가던 전통 배를 재현한 것으로 물레방아와
더불어 이곳의 장식물로 살아가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닻을 올리고 홍제천을 따라 당장이라
도 한강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홍제천이 배를 띄울만한 처지가 되지 못한다.

* 홍제천인공폭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170-181



 

♠  연희숲속쉼터와 잣나무숲길

▲  안산의 싱그러운 꽃밭, 연희숲속쉼터 허브정원

물레방아에서 개울을 옆구리에 낀 산길을 조금 오르면 안산의 꽃밭, 연희숲속쉼터 허브정원이
그윽한 허브향기와 시원스런 풍경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강동구(江東區)의 일자산(一字山)
허브천문공원과 더불어 서울에 대표적인 허브(Hub)공원으로 산비탈을 이용해 계단식 정원으로
닦여져 있다.

이곳 허브정원은 연희숲속쉼터의 일원으로 2010년에 조성되었다. 순 외래어 투성이인 허브식
물과 허브꽃들이 고운 미소를 머금고 유혹적인 허브향으로 사람들의 후각을 정화시켜주며, 그
런 식물들 사이로 산책로가 산뜻하게 닦여져 있다. 그리고 돌 모양 스피커 8개가 설치되어 있
는데, 여기서는 잔잔한 음악과 가요가 흘러나와 허브공원의 향연을 고조시킨다. 이 음악은 보
통 7시부터 19시까지(주말은 9시부터 19시까지) 운영한다. (운영시간은 변경될 수 있음)


▲  허브정원 아랫부분
애플민트와 파인애플민트, 초코민트, 골드레몬타임 등 귀에 익은
허브식물들이 서로 매력을 겨룬다.

▲  허브정원 윗부분
레몬밤과 에키네시아, 레몬타임, 야로우 등 귀에 그리 익숙치 않은
허브식물이 자라고 있다.

▲  밑에서 바라본 허브정원 윗부분

▲  '허브'라는 공동체로 똘똘 뭉친 허브식물들

▲  허브의 향연장을 거닐다 ~~
부드러운 곡선의 허브정원 윗쪽 산책로

▲  끝없이 이어진 허브정원 계단 산책로

▲  2개의 동그라미처럼 닦여진 허브밭
허브들의 햇님을 향한 마음의 표현일까?


▲  윗쪽에서 바라본 허브정원
허브정원 너머로 연희동과 홍은동 지역, 백련산(白蓮山)이 흐릿하게
바라보인다.

▲  연희숲속쉼터 산책로 (허브정원 윗쪽)

허브정원을 거느리고 있는 연희숲속쉼터는 안산 서북쪽 자락에 자리해 있다. 이곳 동네 이름
이 연희동(延禧洞)이라 '연희숲속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쉼터 서쪽에는 허브정원이
곱게 입혀져 있고, 숲이 매우 짙어 풍경도 자못 일품이다. 특히 봄을 책임지는 왕벚나무와 산
벚나무, 수양벚나무 등이 0.5km 정도 벚꽃길을 이루고 있어 매년 4월에는 '안산 벚꽃축제'가
성황리에 열리며, 이곳 벚꽃축제는 서울 장안의 이름난 벚꽃축제로 격하게 손꼽힌다.
허나 봄에만 반짝 순백(純白)의 향연이 열릴 뿐, 그 외에는 푸른 잎으로 다른 나무와 그리 다
를 것이 없다. 그것이 벚꽃의 반짝 인생이다.

이곳은 서대문구에서 추진하는 지역 축제와 행사의 중심지로 벚꽃축제 외에도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벚꽃이 향연을 펼치는 봄에 행사가 집중되어 있으며, 가을에도 여러 행사가 열려 자
연과 문화의 향기를 선사한다.


▲  푸른 옷을 두룬 연희숲속쉼터 벚꽃길 (쉼터 숲길)

▲  드디어 만난 안산자락길 (연희숲속쉼터 윗쪽)

연희숲속쉼터에서 산길을 조금 오르면 서대문구 제일의 야심작, 안산자락길이 모습을 드러낸
다. 안산 허리를 따라 이어진 이 길은 이 땅에 흔한 산 둘레길로 '둘레길' 대신 '자락길'을
칭하고 있는 점이 이채로운데, 자락길의 총 길이는 7km로 2010년 10월부터 3단계 과정으로 닦
아 2013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총 사업비는 48억(서울시 지원 33억, 서대문구 15억)으로 노약자와 장애인, 휠체어나 유모차
의 통행 편의를 위해 전 구간을 무장애자락길(나무데크길, 마사토 포장길)로 싹 닦아놓은 점
이 특징이다. 하여 2016년 4월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의 하나로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격하게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걷기 편한 길이
라 이보다 편한 둘레길은 천하에 거의 없을 것이며, 비록 서울둘레길, 제주올레길, 지리산둘
레길처럼 전국적인 둘레길은 아니지만 서울 굴지의 둘레길로 인기와 위엄이 대단하다.
허나 편리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산길의 진미인 흙길이 거의 없는 것이 단점이라 흙길을 원한
다면 일반 산길을 이용하거나 자락길 안쪽에 닦여진 초록숲길을 이용해야 되며, 자락길이 산
자락에 있기 때문에 시내에서 접근하려면 어느 정도 오르막길과 산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
다.

안산자락길은 연희숲속쉼터 윗쪽, 자락길전망대, 흔들바위, 북카페, 천연마당쉼터, 안산천약
수터, 숲속무대, 메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을 두루 거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순환형
둘레길로 봉원사나 천연동 뜨란채아파트, 서대문독립공원 서쪽, 독립문파크빌아파트, 무악재
역, 풍진베이스타운아파트, 연희숲속쉼터, 서대문구청에서 접근하면 된다. 우리는 남쪽인 잣
나무숲길로 해서 메타세콰이어숲으로 이동했다.


▲  드디어 나타난 안산자락길 잣나무숲길



 

♠  안산자락길 잣나무숲길, 메타세콰이어숲길
▲  잣내음으로 그윽한 잣나무숲길

안산 잣나무숲은 연희숲속쉼터와 메타세콰이어 숲 사이에 자리해 있다. 숲 한복판에 안산자락
길이 유연히 흘러가 그림 같은 잣나무숲길을 이루고 있는데, 숲길 길이는 0.3km로 메타세콰이
어숲과 함께 안산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아름다운 얼굴이다.
잣내음과 솔내음이 가득하여 상쾌한 기분을 안겨주며, 잣나무들이 베푼 산바람이 비록 약하긴
하지만 속세의 기운과 여름의 기세를 조금씩 털어간다. 이 숲을 지나면 바로 메타세콰이어숲
길이 나타나 두 눈을 다시금 호강을 시킨다.


▲  삼삼하게 자라나 하늘을 가린 잣나무숲의 위엄

▲  잣나무와 초록 수풀이 어우러진 잣나무숲
숲길이 너무 고와서 0.3km(잣나무 숲길 길이)가 참으로 짧게만 느껴진다.

▲  자락길의 기둥 역할도 도맡은 잣나무들
잣나무의 생명을 위해 그들을 밀어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었다. 그들의
줄기만큼 구멍을 내어 그들의 삶을 배려한 것이다.

▲  시원하게 뻗은 잣나무숲길

▲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잣나무숲길)
그저 보이는 것은 녹음(綠陰)에 깃든 나무들 뿐이다.

▲  허공에 붕 떠있는 잣나무숲길
길이 아닌 곳에 자락길을 내다보니 이런 구간도 적지 않다.

▲  잣나무숲길 남쪽 구간

서울에 대표적인 잣나무숲으로는 이곳 외에도 동작구 서달산 잣나무숲(☞ 관련글 보기)과 호
암산(虎巖山) 잣나무숲이 있다. 이들이 시골에 있었다면 감흥이 덜하겠지만 번잡함이 격하게
연상되는 서울 한복판에 고스란히 박혀 있으니 그 감흥은 클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자연은 인
간에게 소중하다.


▲  잣나무숲길 남쪽 끝부분

▲  안산 서쪽 자락 메타세콰이어숲길 (북쪽 시작점)

잣나무숲길이 끝나면 바로 메타세콰이어숲길이 펼쳐진다. 그 잠깐 사이에 대자연이 그린 풍경
화가 색깔을 빼고는 싹 바뀌는 것이다.
이 숲길은 앞서 잣나무숲길과 더불어 안산의 아름다운 얼굴로 안산을 꾸밀 때 야무지게 닦여
졌다. 늘씬하게 솟아나 하늘을 가린 메타세콰이어의 위엄 앞에 잣나무숲보다 더욱 짙은 숲을
선사하고 있으며, 그 기세가 얼마나 당찬지 한낮임에도 꽤 어두울 정도이다.

메타세콰이어 숲은 안산 서쪽 자락과 북쪽 자락에 있는데 이곳은 서쪽 자락이다. 이들 사이를
안산자락길이 무장애 데크길을 내밀며 흘러간다. 흔히 메타세콰이어하면 전남 담양(潭陽)과
전북 순창(淳昌)의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생각하기 쉽지만 이제는 천하에 널리 보급되어 서울
에서도 그들의 시원스런 풍경을 누릴 수 있다. 이곳 외에도 난지도(蘭芝島) 하늘공원과 마곡
동(麻谷洞) 서남물재생센터공원에도 닦여져 있으니 말이다. 허나 숲으로 크게 조성된 것은 이
곳 안산 밖에 없으며, 나머지 2곳은 가로수길 수준이다.


▲  늘씬한 자태로 하늘을 훔친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의 위엄
숲 사이로 안산자락길이 그들의 기운을 받으며 지그재그로 흘러간다.

▲  하늘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메타세콰이어숲길

안산 서쪽 자락 메타세콰이어숲길은 0.3km 거리로 우리네 인생만큼이나 매우 짧다. 게다가 숲
길이 워낙 고와 정처없는 속인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으니 체감거리는 그보다 짧다. 숲길 중간
에는 숲속무대라 불리는 너른 공간이 있는데, 무장애데크길을 닦으면서 조성된 것이다.

▲  점점 짙어지는 메타세콰이어숲길

▲  메타세콰이어숲길 속으로~~

▲  메타세콰이어숲이 얼마나 삼삼한지 한낮에도 어두울 지경이다.

▲  메타세콰이어숲 숲속무대

메타세콰이어숲 한복판에는 숲속무대가 있다. 목재로 높이 공간을 다져 허공에 떠있는 형태로
비록 무대를 칭하고는 있지만 그 이름과 달리 나그네의 포근한 쉼터로 탁자와 의자가 넉넉히
깔려 있어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과 행동식을 먹거나 쉬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사방이 메타세콰이어로 꽁꽁 감싸여 있어 깊은 숲속에 갇힌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숲내음과
산바람도 달콤하여 여기서만큼은 속세의 시름을 잊어도 좋을 것 같다.


▲  지그재그로 펼쳐진 메타세콰이어숲 안산자락길
각박한 경사의 눈치를 줄이고자 길을 지그재그로 펼쳐놓았다.
그래서 오르는 길이 그리 힘들지는 않다.

▲  지그재그 안산자락길 중간 부분 ①

▲  지그재그 안산자락길 중간 부분 ②

▲  지그재그 안산자락길 중간 부분 ③

▲  지그재그 안산자락길 윗쪽

▲  메타세콰이어숲길 남쪽 끝 지점

짧게만 느껴지는 메타세콰이어숲길을 지나면 무악정과 봉원사로 인도하는 숲길이 나온다. 기
분 같아서는 무악정을 거쳐 안산 정상 봉수대(무악산 동봉수대)까지 거침없이 내달리고 싶으
나 날씨가 전혀 내 마음 같지가 않은 폭염 앞에 정상에 대한 욕심을 쿨하게 버리고 봉원사로
내려갔다. 어차피 안산 정상은 무려 100번 넘게 찾은 곳이다. 게다가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
에 있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곳이니 굳이 여름 제국에 힘겹게 저항하며 오를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여 홍제천인공폭포, 안산자락길, 잣나무숲, 메타세콰이어숲을 겯드린 안산 여름 나
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2월 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호랑이해 기념) 호랑이를 닮은 서울의 숨겨진 바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호암산폭포, 서울둘레길5코스)

호암산 나들이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칼바위)



~~~ 호랑이를 닮은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터, 칼바위)

한우물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호암산 한우물

호암산폭포

▲  호암산 한우물

▲  호암산폭포

 



 

천하를 접수한 가을이 늦가을로 점점 숙성되어 가던 10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호암산
을 찾았다.

호암산(虎巖山, 393m)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우뚝 솟아 있
다. 서울 금천구(衿川區)와 관악구, 경기도 안양시에 걸쳐있는 그는 산세(또는 산에 있는
바위의 모습)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좋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옛 금
천<衿川, 시흥(始興)> 고을의 중심 산(主山)으로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이라 불
리기도 했다.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뫼이나 풍수지리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함
께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인식되었다. 하여 조선 조정은 그들로부터 서울(한양)을 지키고
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산 밑에 절(호압사)을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
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호암산성과 석구상, 한우물, 제2한우물터, 삼성산성지 등의 늙은 명소
와 호압사, 약수사, 불영암 등의 오래된 절이 깃들여져 있으며, 시흥계곡과 잣나무산림욕
장, 호암산폭포 등의 싱그러운 자연 명소가 있다. 또한 칼바위와 신랑각시바위 등 잘생긴
바위들도 잔뜩 포진해 있으며, 조망도 가히 천하일품이라 서울의 상당수 지역과 안양, 광
명, 부천, 인천, 서해바다, 북한산(삼각산)은 물론 공기가 좋을 때는 멀리 파주와 금지된
땅인 개성(開城) 지역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호암산 정상부와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잠시 각박할 뿐, 그 잠깐의 고생만 감내하면 부드
러운 능선길과 국보급 조망이 두 망막과 마음, 다리를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 서울둘레길
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가 호암산을 가로질러 흘러가며, 잣나무 산림욕장을 중심으
로 호암늘솔길이 싱그럽게 닦여져 있어 산은 비록 작지만 매우 알찬 팔방미인 뫼이다. 그
러다보니 일찌감치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져들었고,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고 있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석구상, 호암산성(사적 343호)까지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①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등 서울 서남부 지역과 광명, 부천, 김포 지역


호암산은 시작이 좀 빡세서 그렇지 잠깐의 고생으로 정상부와 능선까지 오르면 느긋하고 부드
러운 곡선의 산길을 즐길 수 있다. 내가 호암산을 즐겨찾기하며 종종 찾는 이유의 하나도 바
로 그것이다.

정상 동쪽에 자리한 깃대봉(민주동산)에서 남쪽으로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남쪽
으로 가면 장군봉(412m)과 삼성산으로 이어지고, 서남쪽으로 가면 호암산 서남쪽 능선과 남쪽
봉우리로 이어진다. 장군봉이나 서남쪽 능선이나 길은 거의 부드러운 편이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광명시 지역이 바로 밑에 바라보이고, 광명시의
지붕인 도덕산~가학산 산줄기 너머로 서해바다까지 능히 시야에 잡힌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호암산 북쪽 산줄기와 서울 서남부 지역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안양시와 수리산
호암산과 삼성산, 수리산(修理山) 사이로 극락정토를 뜻하는 안양시(安養市)가
포근히 뉘어져 있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⑤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서울 서남부 지역

▲  호암산 서남쪽 능선과 호암산 남쪽 봉우리

호암산 정상에서 남쪽 봉우리까지는 느긋한 능선길(서남쪽 능선)의 연속으로 능선을 따라 파
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산길 곳곳에는 이름이 없는 멋드러진 바위
와 벼랑이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
말 꿀맛이다.


▲  호암산성 북문터 (북쪽 모습)

호암산 서남쪽 능선을 더듬어 남쪽 봉우리로 올라서면 금줄이 둘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석구상 북쪽으로 서남쪽 능선에서 석구상, 한우물로 이어지는 길목인데, 근래 이곳이 호암산
성 북문(北門)터로 확인되면서 북문터 보존을 위해 금줄을 빙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그
서쪽에 계단식 우회길을 내었다.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들어서면 꼭 거치던 곳이었는데, 그동안 100번 이상 무심히 밟고 지나
갔던 곳이 북문터였다니 새삼 놀라고 말았다.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모습)

호암산 남쪽 봉우리(347m) 정상부에는 호암산성의 흔적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산성의 형태
는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성(石城)
으로 조성되었는데, 축성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뒷면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운 내탁법(
內托法)을 사용했다.
예전에는 산성 둘레를 약 1,250m, 남아있는 길이는 300m로 보았으나 2018년 이후 업데이트되
어 산성 둘레는 약 1,547m, 남아있는 것은 약 1,016m, 산성 면적은 133,790m로 확장되었다.

1990년 봄, 호암산성과 한우물 일대를 조사하면서 우물터 2곳과 건물터 4곳이 발견되었고, 무
려 6,500여 점에 이르는 토기와 다양한 유물(청동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이 쏟
아져 나왔는데, 신라 중기 것이 많이 나왔다. 하여 신라 중기인 6세기 말~7세기 초에 군사기
지 및 행정치소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672년에 당나라군의 공격
에 대비하고자 쌓았다는 설도 있다. 그 시절 신라는 옛 고구려(高句麗) 땅인 요동(遼東)과 평
안도를 중심으로 당나라와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산성 서쪽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바라보이고, 북쪽으로 한강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잡
힌다. 하여 서해바다와 한강, 내륙을 잇는 요충지로 중요시되었으며, 양천고성(陽川古城, 서
울 가양동)과 행주산성(幸州山城), 오두산성(파주시)를 잇는 거점 성곽으로 여겨진다.

고려 때는 한강과 서해바다를 살피는 요충지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그
런데로 밥값을 하였다. 특히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에서 왜군을 때려잡은 권율(權慄)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자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을 쳤는데,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여 서울 수복 작전을 펼쳤다. 호암산은 서울
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로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
름이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현재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
성은 관리 소홀과 대자연의 무심한 장난, 덧없는 세월의 무게까지 더해져 상당수 녹아내렸고,
산꾼들의 무심한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산성 내에 늙은 존재로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 건물터, 석구상이 있으며, 불영암
이란 작은 절이 있다. 성곽은 동벽이 그나마 잘 남아있고, 북문터 주변과 서문터 주변, 남문
터 주변에 조금씩 남아있다.
특히 2018년 이후 발굴조사에서 석구상 주변에서 북문터, 석수역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능선에
서 남문터, 불영암 남쪽 가파른 곳에서 서문터가 새롭게 확인되어 3개의 성문(城門)이 있었음
을 알려주며, 자연에 묻혀있던 성벽 흔적도 많이 건져내었다. 이들 성문터와 성벽 흔적은 예
전부터 수없이 지나쳤던 곳인데 그곳이 산성의 흩어진 흔적이자 살점이었던 것이다.

호암산성은 석구상과 한우물, 제2한우물터, 건물터를 모두 한 덩어리로 묶어서 '서울 호암산
성'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343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호암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8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

북문터 남쪽 높은 곳에는 호암산의 오랜 명물인 석구상이 있다. 사방이 난간으로 둘러진 기단
(基壇) 위에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엽게도 앉아있는데, 지금은 석구상으로 통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광화문(光化門)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와 호암산의 기운으로
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
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 7리(縣
南 七里)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석구상으로 무게가 크게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석구상의 위엄

석구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해태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해태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
습 같기도 하나 양이나 개구리처럼 보이기도 하여 보면 볼수록 정말 답이 안나오는 기이한 석
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는 긴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랑지
와 비슷해 손으로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이후로 보인다. 그는 정
확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정말로 광화문 해태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를 만든 이유도 속시원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
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산꾼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성 터져 나올 정도로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작게나마 웃음을 준다.


▲  석구상의 귀여운 뒷부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  석구상 남쪽 호암산성 동벽

석구상을 지나면 인공티가 팍팍 느껴지는 다소 부풀어오른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이 호암산성
의 동벽(東壁) 흔적이다. 예전에는 수풀에 감싸여 있었으나 산성을 무수히 깔고 앉던 수풀을
싹 쳐내고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으며, 석구상 바로 남쪽 동벽에는 나무데크길을 씌워 헝클
어진 산성 흔적을 보호한다. 그리고 동벽 서쪽에는 제2한우물과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크고 견고했던 성곽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2m 내외로 움푹 낮아졌고, 산길로 변해버
린 동벽에는 성돌이 이리저리 박혀 단단한 성곽을 이루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숲 그늘에 자리한 호암산성 동벽
고된 세월에 많이 초췌해진 산성 동벽이 그런데로 산성의 모습을
풍기며, 건물터 유적 동쪽까지 이어진다.

▲  호암산성 동벽 (남쪽에서 본 모습)

거의 앉은뱅이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1.5km 구간 중 석구상에서 건물터 유적에 이르는 동벽이
그나마 상태가 좋다. 비록 산성은 헝클어진 상태이나 성곽 밑은 아주 각박한 경사라 성곽 길
을 음미하면서 걸을 경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안전시설도 전혀 없음)



 

♠  호암산 한우물과 불영암(佛影庵)

▲  윗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호암산 남쪽 봉우리 정상 서쪽에는 불영암과 호암산의 오랜 명물인 한우물이 있다. 여기서 한
우물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산정(山頂)에 이런 거대한 우물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
인데, 천하가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어 하늘의 우물인 천정(天井) 분위기도 물씬 풍긴다.
특히 이곳은 물을 대줄 수원(水源)도 마땅치 않다고 하는데, 이런 큰 우물이 1개도 아니고 2
개나 있었음에도 물이 늘 풍부하게 고여 있으며,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하여 그 신비로움을 더
욱 끌어올린다. (지금은 이곳 우물만 있으며, 제2한우물로 살아가는 다른 우물은 터만 남음)

한우물은 다른 말로 천정, 용복, 용초 등이라 불렸으며, 7~8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
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신라 우물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못의 규모는 상당
하여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조선 때 그 위에
새롭게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우물을 닦았다.
1990년 봄, 한우물을 발굴하면서 12개 기종 1,313점의 유물이 앞을 다투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 '仍伐內力 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
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많이 나왔다.


▲  남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임진왜란 시절인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사용했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하나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시와 전쟁 때는 군사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득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데. 이는 한우물에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우물터(제2한우물터)가 발견되
어 제1한우물이란 이름도 가지고 있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나 현재는 우물 보호를 위해 딱히 손은 대지 않는다. (한우
물로 들어가는 수맥 일부를 불영암에서 쓰고 있음) 우물에 가득 모인 수분은 식수가 아닌 우
물을 채워 연못 분위기를 내는 원초적인 역할이나 할 뿐이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가 둥지를
틀고 있어 운치를 자아내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
는다. 그리고 우물 주위로 돌난간과 철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한우물 주변은 천하를 조망하기 아주 좋은 곳이다. 하여 이곳에서는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
구 등 서울 서남부와 경기도 광명, 부천, 인천 지역이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너무 호강
을 하며, (대기가 좋을 때는 고양, 파주, 개성까지 시야에 들어옴) 우물 주변에는 의자가 여
럿 있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을 굽어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한우물의 깊은 속살
우물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우물을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벽산아파트와 시흥동, 독산동 등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부천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호암산 북쪽인 목골산을 비롯해 금천구와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등 서울 서남부 지역과
한강 너머의 서울 서북부 지역, 북한산(삼각산), 고양, 파주 지역이 시야에 보인다. 그리고
푸른 창공에는 김포공항으로 내려가는 비행기가 하나 떠있다. (호암산은 제주와 부산 등 지
방에서 김포공항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비행기 구경에는 아주 좋음)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한우물 옆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불영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자리하여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호압사나
벽산아파트,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띈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
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것을 보면 오랫동안 승려들의 기도 수행처로 쓰였던 듯 싶으며, 호암산성 서벽에 위치해 있고
조망이 우수하여 산성을 지키며 속세를 살피던 망대의 역할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100년 이
상 묵은 절들은 그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내걸기 마련이나 이곳은 그런 것도 없어서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금의 절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무지 짧은 손바닥만한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
물이 전부이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할 뿐이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게 불리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 않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어 물수급은 어렵지 않으며,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만큼은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우물과 일품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 절을 세웠
을 것이다.
이곳 높이는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인데, 아
무리 시흥동 벽산아파트가 키다리라고 한들 불영암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조촐한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
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잠시 두어 볼거리를 늘리기도
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
神衆幀畵)'가 봉안되어 있어 이곳의 새로운 명물을 꿈꾼다.

*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02-809-3754)


▲  불영암 대웅전 내부
대웅전 내부는 조촐한 외부와 달리 꽤 장엄하다. 불단에는 석가여래상이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대동하여 3존상을 이루고 있고, 우측 벽에는 여지가 그린
104위 신중탱화가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간단하게 이루어진 불영암 범종각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의 보
금자리이다. 6시와 18시가 되면 잠든 범종을
흔들어 깨우는데, 그 종소리가 호압사와 벽산
아파트단지까지 널리 울려퍼진다.

            ◀  산신각 산신상
대웅전 뒤쪽 벼랑에는 산신 식구를 머금은 산
신각이 달려있다.
불영암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벼랑에
나무로 대를 쌓고 그곳에 1칸짜리 산신각을 닦
았는데, 보통 산신 가족은 산신 할배와 호랑이
, 동자 등이 전부이나 이곳은 특이하게 사슴까
지 겯드려 놓아 그의 구성원을 늘렸다.


▲  세모로 솟은 돌탑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에서 발견된
절구통(절구석)과 맷돌

돌탑 앞에 놓인 절구통과 맷돌은 호암산성 군사들이 쓰던 것들로 시흥동 주민이 발견하여 불
영암에 알렸다. 하여 불영암에서 2010년 이곳으로 수습했는데, 신라나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
지며 다른 절구통과 달리 금, 은, 동, 철의 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상당히 무겁다고 한다. 그
리고 옆에 놓인 맷돌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열심히 돌아가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짐)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는 2009년에 만든 석불이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에
커다란 머리만 심은 단출한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머리
주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을 주나 장대한 세월은 저들을 완전한 하나의 존재
로 만들어 줄 것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있는데, 그 모습이 마
치 불상에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 듯 하며, 석불 머리 옆에는 산신각이 달려있다.


▲  불영암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밑에 불영암 경내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광역시가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두 망막을 제대로 흥분시킨다.
한우물과 불영암 구역에서 제일 높은 곳이자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니 한우물에 왔다면 이곳
에 꼭 들려 국보급 조망을 덤으로 누리기 바란다. 대웅전 옆에서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바로
산신각이다.



 

♠  호암산 마무리

▲  호암산성 서문터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 방향 산길을 조금 내려가면 호암산성 서문터가 마중을 한다. 호암
산에 오면 거의 이 코스로 내려가는 편이었는데, 예전에는 호암산성이 여기까지 팔을 뻗을 줄
은 생각도 못했고, 여기에 성문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글쎄 여기서
성곽과 성문터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동안 호암산성이 숨겨왔던 속살이 많이 들춰지면서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호암산성 서문터와 돌탑 하나

서문터는 각박한 경사지에 자리해 있고, 좌우로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감히 기웃거릴
수 없는 천험(天險)의 자리이다. 남문은 여기보다 지형이 약간 좋으나 역시 공격에 불리하며,
북문도 능선에 자리하나 적들이 호암산 정상부를 점령하고 치고 들어올 경우 수비가 약간 힘
들 수 있다.


▲  속세를 향해 고개를 내민 칼바위조망대

서문터에서 2~3분 정도 내려가면 칼바위 조망대가 나온다. 바로 그 밑에 살짝 스쳐도 피가 나
올 것 같은 예리한 기세의 칼바위가 있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해 있어 자
칫 살짝만 건드려도 밑으로 미련없이 굴러떨어질 것 같은 모습이다.
이 바위는 위에서 보는 것보다는 밑에서 봐야 그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당
장이라도 속세를 향해 칼질을 벌일 듯한 기세라 보기만 해도 조마조마하다.


▲  예리한 칼날 같은 칼바위 (바로 밑이 벽산5단지)
서울을 위협하던 호암산의 날카로운 발톱은 아닐까?


이런 바위에는 옛사람들이 붙인 그럴싸한 전설이 있기 마련인데,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급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온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 고을까지 쳐들어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무수히 때
려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단단히 쫄은 왜장은 그에게 턱걸이 내기를 해서 이기면 물러가
겠다고 제안을 했는데, 바로 이 칼바위에서 내기를 한 것이다.
자신만만하던 왜군 장사는 턱걸이가 100번째에 이를 무렵, 힘이 다 떨어져서 바위 밑으로 떨
어져 골로 갔는데, 그때 바위의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전한다. 어쨌든 시흥 고을 장사는 내기
에서 이겼고, 약속을 철석처럼 어기기 일쑤였던 왜군이 의외로 후퇴하여 사라지자 긴장이 풀
린 장사는 인근에 소변을 보았는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한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
갔다고 하며, 그 바위가 옆에 있는 팽이바위라고 한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어서 6.25 때 이곳에 숨어 지낸 사람
도 있었다고 전한다. 허나 바위는 위치상 출입이 어려운 구역이라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  칼바위 옆에 있는 팽이바위 (고양이 얼굴처럼 보이기도 함)

▲  칼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광명시, 부천시 지역

▲  칼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 남부와 광명시 동부, 가학산~구름산 산줄기, 인천광역시 등

▲  칼바위 조망대에서 지켜본 햇님의 칼퇴근 현장
햇님은 무수한 빛을 뿌리며 그만의 공간으로 꽁무니를 빼고 천하는
점차 달님의 검은 도화지로 타들어간다.

▲  호암산 산길 (칼바위에서 호암산폭포 방향)

▲  호암산의 새로운 명물, 호암산폭포

칼바위에서 7~8분 정도 내려가면 서울둘레길5코스와 만난다. 여기서 북쪽(호압사입구)으로 조
금 가면 호암산폭포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겉으로 보면 자연산처럼 보여 서울에 이런 실한 폭
포가 있었나? 싶어 감동이 생길 수 있지만 현실은 근래 닦여진 인공폭포이다.

폭포가 있던 곳은 그냥 가파른 산지였으나 2011년 여름에 일어난 산사태로 아주 민망한 모습
이 되었다. 하여 금천구청은 3억원을 투입해 인공폭포로 다져 2012년 8월 11일에 세상에 내놓
았는데, 폭포 높이는 무려 75m, 경사도는 20~70도로 서울에서 가장 큰 폭포가 되었다.
인근 지하수를 소환해 폭포수로 삼았으며, 인공폭포긴 하지만 주변 풍경과 잘 조화를 이루게
최대한 인공미를 배제하여 딱 봐도 인공티가 나지 않게끔 만든 것이 큰 특징이다. 인공폭포란
한계는 있지만 감쪽 같이 자연산처럼 만들어 거부감을 크게 잠재웠으며, 물이 늘 흐르는 것이
아닌 일정 시간에만 잠깐씩 폭포수를 흘려보내 그것이 좀 아쉽다. 폭포 가동 시간은 8시, 9시
, 10시, 12시, 16:30, 17:30분이며, 30분 정도 물을 흘려보내고 닫아버린다. (폭포 가동 시간
은 변경될 수 있으며, 겨울에는 작동하지 않음)

폭포 중간에는 쉼터를 만들어 폭포를 가까이서 느끼도록 했고, 폭포 밑에 서울둘레길이 지나
는 곳에 둑을 쌓고 폭포의 전경을 볼 수 있게 했다. 허나 폭포긴 해도 물줄기가 그리 시원하
진 못하다. 그냥 물이 흐르는구나 여겨질 정도. 그리고 겨울 제국 시절에는 폭포수가 얼어붙
어 거대한 빙폭을 이룬다.


▲  호암산폭포의 전경을 구경할 수 있는 호암산폭포 둑방

▲  벽산5단지 정류장 옆에 있는 호천약수터
호암산에 여러 약수터가 있지만 속세와 가장 가까이 붙은 샘터는 바로 이곳이다.
이곳을 끝으로 가을에 찾아간 호암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월 2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광주 무등산옛길3구간, 충효동, 광주호 겨울 나들이 (풍암정, 원효계곡, 충효동요지, 충효동 왕버들군, 광주호호수생태원)

광주 무등산 겨울 나들이 (풍암정, 충효동 지역, 광주호 주변)


' 광주 무등산 겨울 나들이 '

  무등산 옛길 3구간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

▲ 무등산 옛길 3구간
◀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
 ▶ 풍암정

풍암정

 



 

다사다난으로 얼룩졌던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또다시 밝았다. 새해만 되면 심리
상 긍정적인 기대감이 커지기 마련인데, 올해는 제발 만사가 형통(亨通)하기를 염원하며
시간을 가리지 않고 늘 불끈 솟는 나의 역마살 기운을 풀고자 예전부터 목말라했던 무등
산의 뒷통수(광주 금곡동, 충효동 지역)를 새해 첫 답사지로 정했다.

그나마 덜 추운 날을 가려 길을 나섰지만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1월)이라 추운 것은
여전했다. 아침 일찍 매서운 새벽 기운을 가르며 영등포역으로 넘어가 광주로 가는 누리
로<무궁화호 열차와 동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심전심이라고 견고한 무쇠덩어리 열차
도 나처럼 추운 날씨가 싫었는지 따뜻한 남쪽을 향해 불이 나게 바퀴를 굴려 4시간 만에
광주(光州) 도심에 자리한 광주역에 도착했다.

예전과 다르게 많이 초췌해진 광주역을 나와 역 동남쪽 정류장에서 무등산(無等山)의 품
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광주시내버스 1187번(덕흥동↔원효사)을 탔다. 버스 번호인 '1187
'은 광주의 진산(鎭山)인 무등산의 키 높이로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국립아시아문화전당
), 산수5거리를 두루 지나 광주에서 제일 험한 고개로 꼽히는 잣고개를 넘는다. 그 고개
를 힘겹게 넘으면 대도시 광주의 모습 대신 무등산에 묻힌 산골 풍경이 싱그럽게 펼쳐져
광주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2차선 도로(무등로)를 따라 옛 무진주(武珍州)의 성곽 유적과 은빛물
결이 출렁이는 제4수원지, 충민사(忠愍祠), 충장사(忠壯祠) 등을 차례로 지나 원효사(元
曉寺) 직전인 풍암정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풍암정 정류장은 뭔가 있을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정류장 표시판이 전부인 완전한 산골
의 한복판이다. 이거 어디로 가야되나 두리번거리니 길 건너에 무등산옛길 3구간을 알리
는 이정표가 반갑게 손짓을 보낸다.



 

♠  무등산 옛길 3구간과 풍암정

▲  사촌 김윤제 재실(齋室) 입구 비석

무등산 옛길은 광주광역시가 무등산에 닦은 도보길로 무등산 북쪽 자락의 여러 길을 잇고 엮
어서 '무등산 옛길'이란 이름으로 천하에 내놓았다. 모두 3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3구
간(장원3거리~환벽당, 11.3km)의 신세를 잠깐 졌다. 3구간은 중간에 임진왜란 시절 의병을 일
으킨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소소한 흔적이 깃든 무등산 의병길과도 만난다.

무등산 옛길로 들어서니 사촌 김윤제의 재실을 알리는 빛바랜 비석이 마중을 한다. 비석을 받
쳐든 네모난 기단석(基壇石)에는 푸른 이끼로 가득해 이곳이 청정한 곳임을 알려주는데, 인적
도 없는 옛길을 더듬어 내려가면 숲속에 묻힌 김윤제의 재실, 귀후재(歸厚齋)를 만나게 된다.
그저 나무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런 외딴 곳에 기와집이 묻혀 있으니 마치 전설에 나오는 귀
신의 집이나 폐가를 만난 기분이다.
허나 그 집은 귀신 집도, 버려진 집도 아니며 김윤제의 후손(광산김씨)이 머무는 엄연한 살아
있는 집이다.


▲  담장 너머로 바라본 귀후재

귀후재의 주인인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는 그 유명한 송강 정철(鄭澈)의 스승
으로 충효동 지역에 살면서 이른바 가사문학(歌詞文學)을 크게 일군 사람이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광주호 남쪽에 사촌의 별장이던 환벽당(環碧堂)이 있는데, 그는 거기서 어린 정철
을 발견하여 제자로 삼은 일화는 꽤 유명하다.

매년 음력 3월 3일, 후손들이 귀후재에서 제사를 지내며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라 내부 관람은
어렵다. 하지만 고색이 깃든 돌담 너머로 내부가 왠만큼 보이며 귀후재 본채는 근래 손질되어
고색의 기운은 싹 빠져버렸으나 돌담과 대문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  고색이 깃든 귀후재 대문
지붕은 새로 갈았지만 그 외에는 낡은 모습 그대로이다.

▲  무등산 옛길 3구간 (귀후재 주변)
누렇게 뜬 낙엽들이 가득 깔려 산길의 촉감을 부드럽게 해준다.

▲  무등산에서 가장 예민한 곳, 무등산 지진관측소

귀후재를 지나 편백림으로 들어서면 원효계곡 상류에서 내려온 무등산 의병길(제철유적지~치
마바위~풍암제, 3.5km)과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느긋한 숲길의 연속으로 편백림을 지나면 기
상청에서 설치한 무등산 지진관측소가 왼쪽(북쪽)에 나타난다.

무등산 지진관측소는 이 땅에서 지진 관측이 가장 잘되는 곳이다. 굴을 파고 '초광대역지진계
' 등 여러 관측 시설을 닦았는데, 이곳이 얼마나 예민한 곳인지 지구 반대편의 지진도 잡아내
며, 사람의 발소리까지 실시간 관측되어 기상청에 고스란히 제공된다. (관측소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겨울에 잠긴 무등산 옛길 3구간(무등산 의병길) - 풍암정3거리 부근

▲  풍암정으로 인도하는 대나무 길

풍암정3거리(풍암정 입구)에서 잠시 곧게 뻗은 길을 버리고 풍암정으로 인도하는 오른쪽(남쪽
)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의 끝에는 원효계곡의 백미(白眉)로 추앙을 받는 풍암정이 있는데, 무
등산 옛길 3구간이나 무등산 의병길에 발을 들였다면 풍암정은 꼭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승
)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  풍암정 옆구리로 흘러가는 청정한 원효계곡

▲  풍암정 앞 징검다리

속세에서 풍암정으로 가려면 반드시 원효계곡을 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된다. 큼지막한 돌
이 잘 놓여져 있어 통행에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수심도 얕아 설령 발을 헛디뎠다고 해도 크
게 걱정할 것은 없다.
풍암정 입구에서 무등산 옛길 3구간은 풍암정을 거쳐 풍암제 남쪽 산자락으로 이어지며, 무등
산 의병길은 좋은 길을 계속 고집하며 풍암제까지 곧게 펼쳐진다.


▲  계곡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풍암정

▲  풍암정(楓巖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15호

풍암정은 원효계곡(元曉溪谷) 하류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해 있다. 좌/우 2칸, 총 4칸
의 조촐한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두텁게 기단(基壇)을 쌓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원형 기둥
을 세우고 정자 중앙에는 팔각 기둥을 세웠다.
정자 한복판에는 1명 정도 누울 수 있는 작은 방을 두고 북쪽에 문을 내었으며, 그 주변은 모
두 판자마루로 둘러 여름 별장으로는 아주 좋게 다져 놓았다. 정자의 천장은 연등 천장이며,
가운데는 우물천장으로 닦았다.

마치 신선(神仙) 세계의 축소판처럼 탐이 나는 풍경의 풍암정은 조선 중기에 활약했던 김덕보
(金德普, 1571~1627)가 지었다. 그의 호는 풍암(楓巖), 자는 자룡(子龍)으로 그에게는 애국심
이 매우 높은 형이 둘이나 있었으니 큰 형은 김덕홍(金德弘), 작은 형은 그 유명한 광주 출신
의병장인 김덕령이다.

김덕홍은 1592년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高敬命) 휘하에서 활동했다. 허나 금산(錦山
) 전투에서 고경명의 어리석음으로 크게 패하면서 제대로 몸도 풀지 못하고 전사를 하고 만다.
그리고 2째 형인 김덕령은 직접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왜군을 때려잡고 이몽학(李夢鶴)
의 난(1596년)까지 진압하는 등 공이 많았으나 선조(宣祖) 임금과 그 패거리들이 역적으로 몰
아세우면서 혹독한 고문 휴유증으로 29세의 한참 나이로 옥사(獄死)하고 만다.

큰 형은 전쟁에서 죽고 작은 형은 전공이 큼에도 권력층의 농간으로 맥없이 져버리니 김덕보
의 충격은 실로 상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썩어빠진 나라와 세상을 원망하며 은둔생활에 들어
갔다.

▲  옆에서 바라본 풍암정

▲  풍암정사(楓巖精舍) 현판

뒤늦게 형들의 공을 인정한 조정은 그를 달래며 달콤한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모두 쿨하게 거
절했다. ('장릉참봉'을 잠시 맡은 것이 전부임) 그리고 고향(충효동) 부근 원효계곡에 정자를
짓고 단풍과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란 뜻에서 풍암정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그 '풍암
'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정자 내부에는 1614년 정홍명(鄭弘溟)이 쓴 풍암기(楓巖記)와 임억령(林億齡), 안방준(安邦俊
) 등이 쓴 현판이 있으며, 고경명의 '차풍암정액(次楓巖亭額)'이란 시 현판이 있는데, 1614년
이전부터 정자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어 임진왜란 이전(1590년대)이나 1610년대 초반에 지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  풍암정 옆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들
바위들이 푸른 이끼옷을 걸치며 풍암정의 경치를 한껏 수식해준다.

▲  풍암정의 빛바랜 일기장, 1614년에 정홍명이 쓴 풍암기

풍암정은 '풍암정사'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김덕보와 친분이 있는 문인(이안눌, 안방준 등
)들이 놀러와 시문을 남겼으며 이후로도 많은 시인, 묵객들의 마루가 닳도록 찾아왔다. 현재
김덕보의 후손(광산김씨 문중)이 소유하고 있으며, 마루에는 앉거나 들어갈 수 있으나 방은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다.

* 풍암정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718 (풍암제길 117)


▲  풍암정의 탄생 시기를 한층 올려주고 있는 고경명의
차풍암정액 현판 (오른쪽 현판)

▲  곧게 뻗은 그림 같은 길, 무등산 의병길 (풍암정3거리 동쪽)

한여름이나 늦봄에 왔더라면 정자 마루에 벌러덩 누워 낮잠을 청했을 것이다. 무등산 산바람
과 원효계곡 물바람이 사이좋게 무더위를 단죄하여 낮잠 맛이 꿀맛일테니 말이다. 허나 겨울
제국의 한복판에 왔으니 마루에서 괜히 잠을 청했다가는 큰일나는 수가 있다.
그렇게 풍암정을 둘러보고 풍암정3거리로 나와 잠시 잊었던 무등산의병길을 마저 걸었다. 겨
울에 잠긴 숲길을 걷다보면 '풍암제'란 너른 호수가 은빛물결을 글썽이며 풍암정에게 빼앗겼
던 내 마음을 다시금 앗아가는데, 이 호수는 원효계곡의 물을 먹고 자라 아주 청정한 빛깔을
띄고 있다. 허나 아쉽게도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꽁꽁 묶여 있어 호수 접근은 통제되어 있다.


▲  원효계곡의 물을 먹고 자란 금지된 호수, 풍암제(楓巖堤)

▲  풍암제에서 충효동 도요지로 인도하는 길 (풍암제길)

풍암제를 지나면 무등산국립공원 경계선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그 안내문의 서쪽(풍암정
방향)이 무등산국립공원 영역, 동쪽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의 공간이다.



 

♠  무등산의 흙으로 분청사기와 백자를 빚었던 옛 가마터 유적
광주 충효동 요지(忠孝洞 窯址) - 사적 141호

▲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의 일원인 무등산 분청사기(粉靑沙器)전시실

풍암제에서 동쪽(충효동 방면)으로 10분 정도를 가면 무등산 분청사기전시실이 마중을 나온다
. 이곳은 충효동 가마터(4기)와 주변 가마터에서 발견된 분청사기와 백자를 전시하고 이들 유
적을 정리한 곳으로 가마터 자리 위에 터를 다져 1998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전시실
옆에는 충효동 2호 가마터가 보호각에 감싸여 보존되고 있는데 여기서 많은 분청사기와 백자
들이 무등산이 베푼 양질의 흙을 먹고 태어났다.

무등산 북쪽에 둥지를 튼 충효동 가마터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광주의 자
기소(瓷器所) 1곳이 고을 동쪽 이점(梨岾)에 있음>과 출토 유물의 연도를 통해 늦어도 1430년
정도, 빠르면 고려 후기(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충효동 2호 가마의 구조는 길이 20.6m, 폭 1.3m의 땅굴 모습으로 사람이 왕래하는 출입시설과
도자기를 집어넣는 번조실, 굴뚝시설를 갖추고 있으며, 진흙을 중심으로 돌을 섞어서 쌓은 형
태이다. 특히 아궁이(번조실)부터 굴뚝 부분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가마의 변화 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어준다.

여기서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생산되었는데<상감청자(象嵌靑瓷)도 일부 만들어짐> 처음에는 분
청사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분청사기는 작은 것이 주류를 이루던 백자와 달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있고 종류도 접시와 종지, 잔, 병, 항아리, 벼루, 제기 등 다양하며, 국화와 나비, 모란
, 물고기, 게, 구름 등이 분청사기 피부에 새겨졌다.
이후 백자까지 손을 대었는데, 분청사기는 박지(剝地)와 조화(彫和) 등 장식과 제작이 간단하
고 질이 조잡한 귀얄문이 주류를 이루면서 점차 쇠퇴를 하게 되었고, 반면 백자는 질이 좋은
탓에 크게 흥하면서 생산량이 늘어났다. 하여 분청사기 가마에서 백자 전문 가마로 완전히 바
뀌게 된다. (분청사기는 대체로 16세기부터 생산이 중단됨)
여기서 생산된 도자기는 왕실과 귀족들에게 주로 납품되었으며, 제작지를 알리는 내용과 제작
자의 이름, 제작시기, 수량, 관용(官用) 임을 알리는 '공(公)' 등 명문이 새겨진 백자와 분청
사기가 많이 나왔다. <'어존'이라 쓰인 한글 명문도 발견됨>

그렇게나 잘나갔던 충효동 가마는 16세기 초 정도에 돌연 폐업을 하여 사라지게 된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다른 가마와의 경쟁에서 밀리거나 흙이 고갈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
인다.
이후 터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왜정(倭政) 시절부터 광주가마, 무등산가마, 석곡면가마 등으로
불렸으며, 막연히 명품 자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전해져 왔다. 허나 딱히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방치되어 오다가 1961년에 처음 학계에 소개되었으며, 1963년에 이르러 국립중앙박
물관이 가마터의 퇴적층(堆積層) 일부를 들추면서 이곳의 성격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이 2차례에 발굴을 벌여 4기의 가마가 확인되었고 높이 3m에 퇴적
층위가 조사되었으며 분청사기가 변화하는 과정과 백자가 발전하는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
다.
그 4기 중 제일 상태가 좋은 것이 바로 이곳 2호 가마로 그 터를 손질해 특별히 보호각을 씌
우고 속세에 개방했다. 그리고 분청사기 전시실 자리에서 발견된 가마터 등 나머지 3기는 보
존을 위해 땅에 고이 묻었다. (이들 가마터 4기는 '충효동 요지'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됨)

충효동에는 이들 외에도 여러 가마터가 있으며 발견되지 않은 것도 여럿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충효동에서 가까운 담양군 가사문학면(옛 남면) 지역(광주호 주변)에도 가마터가 여럿
전하고 있어서 이 일대가 거대한 분청사기, 백자 생산지였음을 알려준다.
허나 이들 가마들은 16세기 이후 거의 버려지면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괴롭
힘 속에 모두 녹아버렸고 그나마 남은 흔적도 속세의 무관심과 도굴, 천박한 개발의 칼질 등
으로 대부분 목이 떨어졌다.


▲  온전하게 남은 분청사기의 고운 맵시
분청사기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잠깐 유행했던 도기, 자기 양식이다.

▲  분청사기 접시와 깨진 대접들

▲  분청사기 벼루와 하얀 뚜껑

분청사기 전시실은 독립적인 박물관이 아닌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소속의 전시실이다. <광주역
사민속박물관 무등산 분관으로 보면 됨> 그러다보니 규모는 작은 편이며, 충효동에서 발견된
유물 상당수는 역사민속박물관이나 광주국립박물관에 가 있고 이곳과 주변에서 나온 도기, 자
기와 복제품 등 200여 점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  장대한 세월에 의해 헝클어져 겨우 조각만 남은 분청사기 파편

▲  담양군 경상리 저수지 상류에서 발견된 경상리 유적 토기들

▲  화암마을 백자가마터에서 수습된 백자 파편들

▲  분청사기 접시와 제기(祭器, 가운데), 그리고 백자 접시 파편

▲  백자 잔(위쪽)과 깨진 대접

▲  재현된 충효동 가마의 왕년의 모습 (오른쪽이 2호 가마터)

▲  충효동 2호 가마터를 품고 있는 누런 보호각

분청사기 전시실 옆구리에는 충효동 2호 가마터를 품은 가마터 보호각이 있다. 지금이야 누런
피부의 가마터만 남아 실감도 덜하고 여기서 더 이상 도자기를 빚을 일도 없지만 그 흔적만
보더라도 예사 가마터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 잘나갔던 충효동 가마가 한낱 황량한 가마터
가 되버렸으니 세월이 참 무상할 따름이다.


▲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과 아궁이 흔적
굴뚝과 아궁이 위에는 흙을 두툼하게 씌워 땅굴 방식으로 그 속살을 가렸다.

▲  옆에서 바라본 충효동 2호 가마터

▲  충효동 2호 가마터 아궁이와 누런 퇴적층위

▲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에서 바라본 충효동, 금곡동 지역
오늘도 무등산의 뒷통수 지역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이 지역은 원래 담양군 땅이었음)


* 충효동 요지, 무등산 분청사기전시실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157 (풍암제길 14,
  ☎ 062-613-5379)



 

♠  충효동 광주호 주변 명소들

▲  충효동 왕버들 군(群) - 천연기념물 539호

충효동 요지를 둘러보고 바로 북쪽에 있는 금곡마을로 이동했다. 여기서 환벽당과 취가정, 왕
버들이 있는 충효동까지 걸어가려고 했으나 거리도 2km에 이르고 뚜벅이 길이 닦여져 있지 않
은 2차선 길(송강로)을 따라가야 되므로 차량의 눈치와 위협을 적지 않게 받아야 된다. 이 길
말고도 금곡에서 평촌 방면 매봉로를 따라 취가정, 환벽당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데, 차량의
왕래는 적지만 역시나 2km 정도를 걸어야 된다.

걷는 것이 싫다면 약간의 돈을 들여 문명의 이기(利己)인 시내버스를 타면 되지만 배차간격이
무려 50~60분에 이른다는 함정이 있다. 하여 스마트폰 버스어플을 검색해 15분 이내에 차가
오면 충효동으로 넘어가고, 그 이상을 넘거나 시내 방향 버스가 15분 이내에 오면 인연이 아
니라 여기고 쿨하게 광주 시내로 넘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6~7분 뒤에 충효동 방향 버스가 온다고 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기다리는 시간
만큼 길고 지루한 것은 없다. 초고속으로 흘러만 가는 시간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추고 싶다
면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면 된다. (퇴근시간을 기다리거나, 차를 기다리거나, 누군가를 기
다리거나 등) 그러면 그 시간만큼은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질 테니까. 허나 그 역시 부질없는
시간 장난에 불과하다.
과연 어플의 안내대로 광주시내버스 187번(충효187번, 장등동↔연천리)이 반갑게 모습을 드러
냈다. 그를 타니 불과 5분만에 충효동 동쪽 끝인 환벽당에 이르렀는데, 도보로 갔더라면 아무
리 빨라도 20분은 걸렸을 것이다.

조선 중기 가사문화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환벽당과 식영정(息影亭), 취가정(醉歌
亭)을 둘러보고 송강로 주변에 주렁주렁 자리한 여러 명소(왕버들군, 정려비각, 광주호 호수
생태원)를 살펴보았다. 환벽당과 식영정, 취가정은 내용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에서는 왕버들군과 정려비각, 광주호만 간단히 다루도록 하겠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겨울의 포로가 되버린 채, 개골(皆骨)
상태로 숨죽이고 있는 충효동 왕버들 -
왕버들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늦봄이나 여름,
가을에 와야 된다. 겨울에는 죄다 처량한
개골 상태라 거의 거기서 거기 같다.

광주호 호수생태원 진입광장 맞은편에 장대한 세월을 머금은 왕버들 3형제가 있다. 이들은 충
효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추정 나이는 약 430~450년에 이르는데, 가장 큰 것은 높이가 13m,
둘레 8.9m, 작은 것은 높이 8m, 둘레 7.2m로 키와 둘레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 덩치는 다 고
만고만하다.
이들 나무는 '김덕령나무'라 불리기도 하는데, 김덕령이 태어났을 때 집안에서 심었다고 전한
다. 하지만 단순히 그의 탄생 기념으로 심은 것은 아니며 마을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심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소나무 1그루, 매화나무 1그루, 왕버들 5그루가 한 식
구를 이루고 있었지만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다들 사라지고 지금은 왕버들 3그루만이 자리
를 지킨다.

* 충효동 왕버들군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1021


▲  충효동 정려비각(旌閭碑閣) - 광주 지방기념물 4호

왕버들 곁에는 기와집으로 된 정려비각이 자리해 있다. 이곳 출신인 김덕령과 그의 부인(흥양
이씨), 그의 형제(김덕홍, 김덕보)의 충(忠), 열(列), 효(孝)를 골고루 기리고자 1789년에 정
조 임금이 세운 것으로 정려비(旌閭碑)의 높이는 220cm, 너비 68cm이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비석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비각(碑閣) 안에 고이 깃들여져
있는데, 비각 주변에 기와 돌담을 두르고 북쪽으로 문을 냈다.

김덕령과 김덕홍은 앞서 풍암정에서 언급한 그대로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싸웠고, 김덕보
는 먼저 떠난 형들을 대신해 어머니를 잘 봉양했으며, 흥양이씨 부인은 정유재란(1597)때 담
양 추월산(秋月山)으로 피신을 갔으나 왜군의 추격으로 생포될 위기에 처하자 자결을 하였다.
그래서 충, 효, 열 3가지가 성립되어 뒤늦게나마 정려비를 받은 것이다.

비석 앞면에는 '조선국증좌찬성 충장공 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朝鮮國贈左贊成
忠壯公 金德齡 贈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라 쓰여있고, 뒷면에는 김덕령 일가의 충, 효,
열을 찬양하며 충효리의 유래를 담고 있다. 바로 이 정려비에서 충효동의 이름이 비롯된 것이
다. 비각 안에는 정려비 외에 상량문(上樑文), 중수기(重修記) 등이 걸려 있다.

* 충효동 정려비각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440 (충효샘길 7)


▲  정려비각에 소중히 담긴 김덕령 일가 정려비

▲  정려비의 빛바랜 일기장, 상량문

▲  왕버들 옆에 자리한 상징정원

상징정원은 광주의 대표 명물인 무등산 수박을 상징화하여 닦은 조촐한 공간이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무등산 수박쉼터와 수박을 형상화한 무등산 수박 토피어리, 무등산 수박밭의 고랑
을 묘사한 무등산 수박밭, 그리고 아름다운 가을꽃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존재 이유는
무등산 수박 찬양이다. (그래서 이곳의 주제도 '꽃으로 수박파티'임)


▲  무덤처럼 생긴 충효동 조산(造山) - 광주호 호수생태원 내부
충효동 사람들은 이 조산을 '말무덤'이라 부른다. 비보풍수에 따라 마을의
허한 부분을 달래고자 인공적으로 쌓은 것으로 건너편 입석(조탑)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  푸른 물결 글썽이는 광주호와 그 옆구리에 닦여진 광주호 호수생태원

광주와 전남 담양(潭陽) 경계에 자리한 광주호는 영산강(榮山江)의 주요 지류인 고서천(古西
川)에 광주댐을 닦으면서 조성된 너른 호수이다. 1974년 공사를 시작해 1976년 완성을 보았는
데, 무등산과 하늘이 거울로 삼을 정도로 풍경이 아름다우며, 주변에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 충효동 왕버들 등 쟁쟁한 명소도 즐비해 광주 외곽의 주요 명소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광주호 남쪽 충효동에는 2006년 3월에 닦여진 호수생태원이 있다. 면적은 184,948㎡로 자연관
찰원<수생식물원, 야생초화원, 암석원, 채원(菜園), 생태연못>, 습지보전지, 버드나무 군락지
, 칠성바위, 자미탄, 전망대, 관찰대, 쉼터 등이 있으며 철새를 비롯한 여러 새들이 잠시 들
리거나 살아가는 곳으로 그들의 삶도 훔쳐볼 수 있다.
관람시간은 딱히 제한은 없으나 이곳 생태환경이 너무 좋다보니 야생동물의 출현이 잦다. 하
여 일몰 이후에는 가급적 들어가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호수생태원 보호 목적도 있음)


▲  호수생태원 탐방로
탐방로 외에는 자연의 공간이니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겨울 제국의 심술로 누렇게 뜬 호수생태원

▲  호수생태원에서 바라본 담양 쪽 (소쇄원, 식영정 방면)

호수생태원은 햇님 퇴근 시간이 임박해옴에 따라 간단히 1바퀴 둘러보고 마무리를 지었다. 광
주에 발을 내린 것이 정말 1시간 전 같은데 세상은 벌써 타들어가 검은 도화지로 배경이 바뀌
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겨울 제국의 기운도 높아지고 출사도 어려우니 더 이상 둘러보는
것은 의미가 없지.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다 둘러보았으니 뿌듯하기 그지 없다.

마침 시내로 나가는 시내버스 시간이 임박하여 광주호 호수생태원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여기
서 버스 1대를 놓치면 50~60분을 꼼짝없이 강제 대기를 해야 된다. 어두워진 공간에서 추위를
견디며 1시간 가까운 시간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워 발을 재촉하여 정류장에 이르니
광주시내버스 187번이 딱 맞춰서 반갑게 다가선다. 하여 충효동과 무등산에 대한 미련을 흔쾌
히 버리고 차에 올라서니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고적한 충효동에 남기며 광주 시내로 넘
어갔다.

이렇게 하여 새해 시작부터 벌인 광주 무등산 뒷통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광주호호수 생태원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439-1 (충효샘길7 ☎ 062-613-7891)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12월 3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2 3 4 5 ··· 1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