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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1.09 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이자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남산야외식물원, 남산공원길, 남산팔각정, 한양도성)
  2. 2022.01.02 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 남녀근석, 안양예술공원, 석수동 석실분)
  3. 2021.12.18 대전의 첩첩한 남쪽 지붕을 거닐다. 만인산~만인산자연휴양림 (태조대왕태실, 대전둘레산길, 대전천발원지)
  4. 2021.11.08 강남의 상큼한 지붕을 거닐다. 대모산 나들이 (완남부원군 이후원묘역, 대모산성, 불국사, 서울둘레길4코스)
  5. 2021.09.30 국보급 조망과 넉넉한 볼거리를 지닌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 (호압사, 호암산 정상, 민주동산 깃대봉)
  6. 2021.08.11 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도심의 달달한 뒷동산, 초안산 (초안산분묘군, 월계동 비석골근린공원)
  7. 2021.07.23 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꿩고개산 나들이 (강서둘레길, 개화산자락길, 신선바위, 미타사, 치현정)
  8. 2021.06.21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정릉계곡 나들이 (형제봉, 보현봉, 청수천약수) 2
  9. 2021.05.28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신안군의 상큼한 지붕, 압해도 송공산 (송공산둘레길)
  10. 2021.05.15 서울 도심의 우백호, 인왕산 남쪽 자락을 거닐다 ~~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해골바위 나들이

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이자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남산야외식물원, 남산공원길, 남산팔각정, 한양도성)

서울 도심의 남주작, 남산 봄나들이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봄나들이 '
남산공원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
▲  남산공원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
 



 

듣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는 그 한 글자 봄, 그 봄이 반년 가까이 천하를 지배했던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천하 만물을 따스히 어루만지던 4월의 첫 무렵에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이자 상큼한 뒷동산인 남산을 찾았다.

봄이 도래하면서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 등 온갖 꽃과 나무들이 겨울 몰래 잉태했던 꿈
을 펼치며 앞다투어 봄의 나래를 펼친다. 이럴 때는 정말 집에 있기가 너무 섭하지. 하
여 무조건 집을 나서 나들이나 답사, 등산 등으로 봄의 향연(饗宴)을 즐긴다. 그래야만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봄이 비록 겨울 제국과 제국의 부흥을 꿈꾸는 꽃샘추위를 말끔히 토벌했지만 황사와 미
세먼지 등 다른 세력이 극성을 부리며 기껏 해방에 들뜬 천하를 유린한다. 몽골과 고비
사막 등에서 일어난 봄의 단골 불청객인 황사야 봄에는 늘 찝적거리던 존재라 그렇다쳐
도 중공 잡것들이 악의적으로 날려보내는 미세먼지 패거리들이 나날이 세력을 불려나가
맑은 하늘 보기가 점점 우울해지고 있다. 우리가 남산을 찾은 날도 그 먼지가 작렬하여
시야가 곱지 못했다.
이럴 때는 집에 틀어박히는 것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좋다고 하나 날씨도 좋고 봄꽃
이 유혹하니 그러기가 힘들다. 특히 역마살 끼가 단단히 낀 나는 더욱 그렇다.


▲  벚꽃이 만연한 그랜드하얏트(Grand hyatt) 서울호텔 앞 산책로
(경리단길에서 남산야외식물원으로 넘어가는 길)



 

♠  남산 남쪽 끝에 자리한 남산야외식물원

▲  남산야외식물원 동쪽 산책로

이번 남산(南山) 나들이는 경리단길과 가까운 남산야외식물원에서 그 첫 단추를 여밀었다. (6
호선 녹사평역에서 경리단길을 거쳐 남산야외식물원으로 접근했음)
남산야외식물원은 남산 남쪽 끝자락에 넓게 둥지를 튼 싱그러운 공간으로 예전에는 외인아파
트 2동이 건방지게 남산을 가리며 흉물스럽게 자리해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 그들을 싹 밀
어버리고 9,811㎡ 부지에 야생화공원을 닦으면서 남산야외식물원은 싹을 틔웠다.

1995년 전국 광역단체 시도에서 옮겨온 소나무 80그루로 팔도소나무숲을 닦았으며, 1997년 2
월 야외식물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2년 4월에는 이 땅의 산야에서 자라는 야생화 185종
과 나무 93종을 심었고, 생태연못과 조그만 계곡을 덩달아 조성했다. 야생화공원을 포함한 공
원 면적은 59.241㎡, 품고 있는 식물은 10여 개의 주제로 나누어 배치했으며, 현재 식물 269
종 117,132주가 심어져 거대한 야외식물원을 이룬다.

이곳 야외식물원의 중심은 야생화공원이며, 그 외는 그냥 자연공원이다. 숲이 짙고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으며, 야외식물원이라고 해서 입장료를 받거나 관람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은 절
대 아니다.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포근한 공간이다.


▲  야생화들의 강인한 협동심이 빚어낸 어여쁜 화단

▲  남산야외식물원 야생화공원 산책로

▲  생태계곡 남쪽 종점과 야생화화원
야외식물원 서쪽에는 2002년에 닦여진 생태연못이 있다. 그 연못에서 발원한
조촐한 계곡이 싱그러운 자연을 머금으며 공원을 곱게 수식한다.

▲  생태계곡과 산책로

▲  생태계곡에서 만난 물레방아의 위엄
동그란 물레방아가 이곳의 고운 경치를 크게 돋군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그저 평범한 경치였겠지.

▲  단촐하게 생긴 생태계곡 징검다리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정겨운 징검다리이다.

▲  졸졸졸~~♪ 노래를 부르며 흐르는 생태계곡 (서쪽 구간)

▲  수중식물과 개구리가 나래를 펼치는 생태연못 (동쪽)

2002년에 조성된 생태연못에는 연꽃을 비롯해 많은 수중 동물과 식물이 살아가고 있다. 이제
막 봄에 의해 겨울 제국이 씌운 봉인이 풀린 상태라 수초가 어색한 푸른 머리를 보이며 덥수
룩하게 있지만 곧 여름이 오면 자연 속의 늪지대처럼 무성해질 것이다.
연못은 조촐한 크기로 주변에 산책로와 나무데크길이 닦여져 있으며, 연못 중간에 나무 다리
가 운치를 더한다.

*
남산야외식물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2동 258-148 (소월로323)


▲  생태연못 서쪽

▲  소나무가 무성한 남산 산책로

생태연못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남산으로 오르는 산책로가 나온다. 남산 남쪽이 대체로 경사
가 각박한 편이라 그 경사를 다소 순화시켜 길을 냈는데, 애국가에도 나오는 남산의 상징 소
나무가 삼삼하여 솔내음이 아주 진하다. 길 중간에는 약수터와 운동시설이 여럿 있으며, 그
길의 끝은 남산 남측순환도로와 만난다.


▲  솔내음이 진하게 깃든 남산 산책로
(남산야외식물원에서 남측순환도로로 올라가는 길)

▲  남산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에 들어서다



 

♠  남산의 하늘길 거닐기

▲  하늘로 이어질 것 같은 남산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

남산의 하늘길이자 서울 도심의 남쪽 하늘길인 남산 남측순환도로에 이르자 여기서 정상 방향
인 왼쪽(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때가 때인지라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 산수유 등이 앞다투
어 아름다움을 뽐내며 봄의 향연을 펼치고, 사람들은 그들의 즐거운 향연에 제대로 눈 호강,
마음 호강을 누리며 미세먼지에도 아랑곳 않고 봄꽃놀이를 즐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워있는 남산(270m, 또는 262m)은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낙산(낙타산)과 더불어 한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산이란 아
주 평범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천하에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아주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안기는
휴식처이며, 경주(慶州) 남산(468m)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
는 친근한 산이라는 것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그런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한다. 인경산(引慶山),
잠두봉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395년 조선 태조(太祖)는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산꼭대기에 세웠다. 그리고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에
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군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
호란 이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
는 왜군 헌병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
으며 갖은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비록 인왕산, 북악산(백악산)만은 못해도 도성 경승지로 명성이 자자하여 양반사대부
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비했다. 허나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 이후 왜인(倭人)들이 남산 북
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는 청계천 이남에 터를 닦고 살았는데,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
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으면서 그들
만의 꼬질꼬질한 놀이터로 만들기도 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이던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정이 속좁게 징징거리자 어쩔 수 없이 인왕산(仁王山)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로 바뀌었다.
그렇게 왜정이 남긴 잡다한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기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
인 서울타워(남산서울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
되어 남산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다.


▲  벚꽃비가 우수수 대지를 적시는 남산 남측순환도로

비록 친일파 떨거지가 지은 것이긴 하나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악산(백악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
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남산이 베푼 약수터가 뿌리를 내리며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주고 있
는데, 그중에서 부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라진 상태이다. 그 외에 여러 약수터가 있으나 도심 속에 있다는 단점으로 목
숨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이며, 문을 닫은 약수터도 적지 않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
아있지 않으며,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이다.

남산은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와 북측순환도로, 그리고 여러 갈래의 탐방로가 있는데, 장
충단공원과 국립극장, 필동(筆洞), 남산골공원, 백범광장, 남산도서관, 남산야외식물원 등에
서 오르는 길이 있다.
또한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남산봉수대, 와룡묘,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남산골공
원) 등의 문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남산서울타워 등의 명소를 지
니고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도심 속 나들이, 산책 명소로 그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서울을 찾은 타 지역 사람들과 외국인 잡것들 등 외래 관광객의 1/3 이상
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단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등의 조선 왕궁이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나의 옛 추억이 몇 권
씩 녹아있는 현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인데, 내가 제일 많이 안긴 산이 바로 남산
으로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500회 이상은 올랐던 나의 원조 즐겨찾기 명소이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지점에서 바라본 천하 (이태원, 용산구 방면)
서토(중원대륙)에서 불법적으로 날라온 더러운 미세먼지에게 서울의 하늘을
도둑질 당했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
미세먼지 때문에 가까이에 있는 남산서울타워 조차 희미하게 다가온다.

▲  다시 남측순환도로를 거닐다 (정상 방향)

▲  한양도성과 만나기 직전 남측순환도로

▲  고개를 내민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4번 종점)에 이르니 온갖
관광객들로 뒤엉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  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길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정상 방향)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과
남산서울타워 밑에 이르게 된다.


▲  서울 도심의 남쪽 머리, 남산 정상(270m)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남산동, 회현동 / 용산구 용산동2가, 후암동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윗 사진을 클릭한다.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3783-5900)



 

♠  남산 정상 주변

▲  남산 팔각정(八角亭)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가 둥지를 틀고 있다. 남산
서울타워는 남쪽, 팔각정은 중앙, 남산봉수대는 북쪽에 각각 자리해 있는데, 그중 인파가 가
장 많은 곳은 남산서울타워(높이 236.7m)와 팔각정 주변이다.

팔각정은 남산서울타워와 더불어 남산의 주요 장식물로 이곳에는 원래 1959년에 이승만(李承
晩) 대통령을 치켜세우고자 세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다. 여기서 우남은 이승만의 호로
1960년 4.19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팔각정을 지었으며, 남산 정상을 수
식하는 존재로 삼았다. 정자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산바람이 주변
에 늘 머물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정자 자체는 60년도 채 안된 존재이나 관광객들로
늘 붐비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  옛 국사당(國師堂)터 표석

남산 정상은 늘 사람들로 미어터지지만 팔각정 부근 구석에 누워있는 국사당터 표석에는 눈길
을 주는 이들이 거의 없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지나는 이들의 눈길과 관심을 호소하나 거의
외면을 받는 국사당 표석, 표석에 쓰인 국사당은 앞서 언급했던 남산의 수호신 목멱대왕의 사
당으로 1395년에 태조가 세웠다.
1404년에 목멱대왕을 호국(護國)의 신으로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리기도 했던 남
산의 성역이자 중심이었으나 1925년 왜정이 조선신궁을 지을 때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에 쓸데없이 아니꼬움을 드러내면서 다른 데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태조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하는 인왕산 선바위 밑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사
를 가게 되었고, 목멱대왕의 남산은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이 판을 치는 일그러진 현장이 되었
다.

국사당을 핍박했던 왜정도, 조선신궁도 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건방지게 들어앉던 왜
열도의 잡귀들도 추방되었지만 남산의 주인인 국사당은 끝내 제자리로 오지 못하고 인왕산에
뿌리를 내려 선바위와 함께 무속신앙의 성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집과 탑, 비석 등의 부동산 문화유산은 가급적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맞겠지만 사람들로 미
어터지는 이곳에 다시 와봐야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국사당 신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 그만큼 남산은 많이도 변했다.


▲  남산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 - 서울 지방기념물 14호

정상 북쪽에는 남산의 오랜 상징물인 남산봉수대가 도심을 바라보며 우뚝 자리해 있다. 남산
의 옛 이름을 취해 목멱산봉수대(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목멱산봉수대터')라 불리기도 하며,
서울에 있다고 해서 '경(京)봉수대'란 별칭도 있으나 그냥 속편하게 남산봉수대라 불러도 크
게 문제는 없다. 어차피 남산이나 목멱산이나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봉수대란 불을 피우거나 연기를 이용하여 변방에 소식을 알리던 옛날 통신 수단으로 주로 산
꼭대기에 설치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알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으며, 비가 많이
오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다음 봉수대까지 힘들게 달려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봉수대는 크게 5개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변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
滿江), 남해바다에서 시작하여 남산을 종점으로 삼았으며, 평소에는 봉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다다르면 3개, 경계를 넘으면 4개, 전쟁이 터지면 5개를 올렸다.

전국 봉수대의 종점 남산봉수대는 1394년에 설치되어 하루도 연기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으며, 동쪽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5개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1895년 봉수
제도가 폐지되면서 문을 닫았고, 왜정 때 싹 철거되면서 그만 그 위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청구도(靑邱圖)를 통해 봉수대터 1곳을 발견하니 그곳이 지금 봉수대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94년에 복원되었다. (나머지 4곳은 아직도 위치를 모른다고 함;;)

남산봉수대는 벽돌로 쌓은 5개의 봉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불과 연기를 피울 일이
없는 죽은 봉수대로 남산 정상을 수식하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조선시대 봉수제도의 중앙봉수
대란 의미 밖에는 없다. 그것이 현역에서 물러난 사물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봉수대는 관람이
가능하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가히 장관이라 이곳이 왜 조선 봉수대의 중심이 되었는
지 이해가 될 것이다. 남산이 서울 한복판에 솟아 있고 조망이 뛰어나 사방에서 날라오는 봉
수대 연락을 받기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남산 외에도 무악봉(毋岳峰) 동봉수대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아차산봉수
대터), 봉산 봉수대, 개화산 봉수대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근래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상태로 봉산과 어설프게 재현된 개화산봉수대를 빼고 모두 서울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
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1


▲  벽돌로 잘 지어진 목멱산봉수대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벽돌로 쌓고 그 밑도리는 성벽처럼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1994년에 복원된 상태라 고색의 때는 채 익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는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고 있다.

▲  목멱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울 도심은 어디로 갔지?)
천하의 최대 민폐덩어리 중공이 보낸 미세먼지의 농간으로 바로 밑인 서울
도심도 짙은 안개에 감싸인 듯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차라리
저게 안개였으면 좋겠다.

▲  남산 정상에 묻힌 85타임캠슐
1985년 10월 17일에 묻은 것으로 딱 500년 뒤인 2485년에 봉인을 푼다고 한다.
500년 전 사람들의 물건을 본 그들의 반응은 과연 어떠할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  남산 숲길 (북측순환도로로 내려가는 길)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려고 들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게다가 남산은 어린 시절부터 수
없이 안겼던 곳이라 20분 정도 머물고 왔던 길로 내려가 북측순환도로로 질러가는 숲길로 들
어섰다.
이 숲길은 숲이 울창한 아름다운 길로 남산 정상과 북측순환도로, 장충단공원을 빠르게 이어
준다. 예전에는 시멘트 계단길로 닦여져 있었고, 길 좌우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었으나 길을
순화시키면서 철조망을 없애고 계단을 크게 줄였다. 허나 길의 상당수는 여전히 시멘트로 되
어 있어 그 점이 아쉽다. 산에 걸맞게 흙길로 깔았다면 발걸음이 더 즐거웠을텐데 말이다.


▲  남산의 숨겨진 숲길 (남산약수터 방면)

숲길을 조금 가다보면 샛길 하나가 살짝 손을 내민다. 그 길은 한양도성 남산약수터 주변 구
간으로 이어지는 따끈따끈한 숲길로 근래 닦여졌는데, 2010년 이후 금지된 땅에서 해방된 남
산의 숨겨진 속살로 성곽 조망대로 이어지며, 성곽 조망대에서 한양도성 밑도리를 따라 남측
순환도로 시작점(남산약수터 입구)까지 이어진다.


▲  아직까지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있는 성곽 조망대 남쪽 한양도성

▲  성곽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국립극장, 장충동 주변)
여전히 미세먼지 밑에 가려져 보이는 것이 별로 없다.


숲길 성곽 부분에는 성 안과 성 밖을 이어주는 나무 계단이 닦여져 있다. 국가 사적으로 지정
된 귀한 몸을 배려해 성곽 여장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통로를 내었는데, 북쪽으로 돌출된
부분에 성곽 조망대가 닦여져 있다.


▲  북쪽을 향해 거칠게 달려가는 한양도성 (성곽 조망대 북쪽)

성곽조망대에서 나무 계단을 통해 성 밖으로 넘어가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여기서
남산약수터 입구 갈림길까지는 2010년 이후에 개방된 구간으로 성 바깥에 탐방로를 닦았다.
경사가 다소 거칠어 올라갈 때는 다소 진땀을 빼야 되며, 성곽길(성곽 안쪽)은 성곽 보존과
자연보호 때문에 아직까지 통제의 봉인에서 풀리지 않았다. 하긴 속세에 너무 풀어버리면 남
산의 건강에도 문제가 생긴다.


▲  성곽 바깥 탐방로 (남산약수터 입구 방향)

▲  각박하게 펼쳐진 성곽 바깥 탐방로 (성곽 조망대 방향)

▲  다시 만난 남측순환도로 (남산약수터 입구)

성곽 탐방로를 내려오면 다시 남측순환도로와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남쪽)은 남산 정상, 왼
쪽은 국립극장 방면이며, 성곽은 도로에서 잠깐 끊겼다가 길 건너편에서 다시 부활하여 제 갈
길을 간다.
우리는 왼쪽 길로 접어들어 국립극장을 거쳐 동대입구역(3호선)으로 내려갔다. 이미 정상을
찍고 내려왔으니 또 올라갈 필요는 없고 오로지 뚜벅이 길로 이용되는 북측순환도로(국립극장
~소파로)도 종종 복습을 하는 길이니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남산 봄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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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 남녀근석, 안양예술공원, 석수동 석실분)

안양 삼성산 삼막사, 석수동 석실분



' 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3층석탑
▲  삼막사3층석탑
 



 

겨울 제국이 늦가을을 몰아내고 천하를 완전히 휘어잡던 12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삼성산
삼막사를 찾았다.
삼성산(三聖山, 481m)을 오르면 삼막사는 거의 거쳐가기 마련인데, 햇님이 하늘 높이 걸
려있던 12시에 서울대입구역(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6515번(양천차고지
↔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관악구청, 서울대를 지나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
다. 바로 여기서 삼막사를 찾기 위한 삼성산 산행을 시작했다.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聖地)로 꼽히는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를 지나 호암산(虎
巖山, 385m) 정상 부근에서 속세(俗世)에서 가져온 먹거리(김밥, 과일, 과자 등)로 간단
히 점심을 때웠다.
호암산 정상에서 삼성산까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삼성산 서북쪽 능선이 펼쳐져 있는
데, 능선길이 느긋하고 각박한 구간이 별로 없어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다. 장군
봉과 운동장바위, 446봉을 지나 15시에 삼성산 정상 서남쪽에 자리한 삼막사에 도착했다.


▲  경내에서 내려다본 삼막사 일주문(一柱門)



 

♠  많은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삼성산의 대표 산사,
~ 안양 삼막사(三幕寺)

▲  밑에서 바라본 삼막사 - 마치 산 위에 닦여진 요새를 보는 것 같다.

삼성산 정상(481m) 서쪽 360m 고지에 둥지를 튼 삼막사는 삼성산(三聖山)의 대표적인 고찰(古
刹)이다. 오래된 절들은 그럴싸한 창건 설화나 사연을 하나씩은 지니고 있기 마련인데, 이곳
역시 창건 설화 한 토막을 내밀고 있다.
때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시절인 677년, 신라(新羅) 불교의 핵심 인물인 원효
(元曉)와 의상(義湘), 윤필(潤筆) 3명의 고승이 삼성산에서 막(幕)을 치고 수도를 했는데, 원
효가 지은 막이 1막, 윤필은 2막, 의상은 3막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자리에 절을 세우면서 그들이 막을 지어 수행한 곳이라 하여 삼막사라 하였으며 산
이름도 삼성산이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삼성(三聖)은 3명의 성인으로 원효, 의상, 윤필을 뜻
한다. 하지만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그의 좌우를 지키는 관세음
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삼성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산 이름을 따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삼성산에는 절이 많았다. (지금도 많음)

삼성산의 이름은 그렇다쳐도 삼막사 창건설화는 어디까지나 삼막사에서 지어낸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창건 시기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상은 당나
라에서 가져온 화엄종(華嚴宗) 보급과 귀족 중심의 불교를 추구하면서 왕경(王京, 경주)과 그
가 지은 영주 부석사(浮石寺) 등 10개 사찰에 주로 머물러 있었으며, 원효 또한 불교 대중화
를 위해 민중에 뛰어들던 시기이므로 그가 지은 절은 정작 거의 없다. 그렇다면 절 이름인 '
삼막'은 어디서 나왔을까?
관음사(觀音寺)로 불리던 신라 후기 또는 고려 때, 절이 나날이 융성하여 도량의 짜임이 송나
라 소주(昭州)의 삼막사(三邈寺)를 닮아 격하게 찬양을 받았다고 한다. 하여 자연스레 삼막사
로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삼막(三幕)으로 바뀌었는데, 절에서 창건 설화를 지으면서 한자를
바꾸고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신라 고승 3명을 강제로 등장시켜 그들이 막을 치고 머물렀다고
설화를 짠 것이다. 그러니 절의 처음 이름도 '삼막'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 후기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道詵)이 절을 중건하고 불상을 봉안하여 관음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하며, 고려 태조(太祖)가 중수하여 다시 삼막사로 바꿨다고 전한다. 태조는 삼막사
남쪽에 있는 염불사(念佛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안양사(安養寺, ☞ 관련글 보러가기) 창
건 설화에도 절찬리에 등장하는데, 그가 후백제(後百濟)를 치러 갈 때, 그 길목인 삼성산에
여러 절을 짓거나 중수를 도와준 것으로 여겨진다.

1348년 나옹(懶翁)과 지공(指空)이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날렸고,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나라의 융성을 기원했는데, 1398년 왕명으로 중건했다. 그 인연으로 북
쪽에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 서쪽에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 동쪽에 불암
사(佛巖寺, ☞ 관련글 보기)와 더불어 서울을 지키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중 삼막사는 남쪽에 있으므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역할을 했는데, 그 연유로 남왈삼막(南
曰三幕)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을 질렀으나 법당이 타지 않아서 그들은 참회를 하고 철수했다고 전하
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1880년에는 의민(義旻)이 명부전을 짓고,
1881년 칠성각을 지었으며,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인 지운영(池雲英)이 절 옆에 백련
암을 지어 은거하기도 했다.

경내에는 천불전과 명부전, 망해루, 대방, 칠성각, 육관음전 등 10여 동이 있으며, 상당수의
건물이 지형상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
석탑과 명부전, 사적비, 남녀근석, 마애3존불 등이 있고, 삼귀자 바위글씨와 감로정 등의 비
지정문화재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아낌없이 대변해준다. 특히 3층석탑은 이곳에서 가장 늙
은 존재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이라 절이 적어도 고려 중기에 창건되었음을 알려준다.

삼막사는 삼성산 정상부 서쪽 요충지에 자리하여 산꾼과 답사꾼들이 많이 찾아오며, 특히 삼
성산 정상을 가거나 삼성산을 가로지를 경우 거의 꼭 거쳐야되는 황금 길목에 위치해 사람들
로 늘 북적거린다. 게다가 절까지 길이 잘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도 가능하다. (서울대와 삼
성산성지, 호압사, 경인교대, 안양예술공원에서 등산으로 1~2시간 정도 걸림)
또한 서울과 안양(安養) 도심에서 가깝고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어 조망도 괜찮으며, 공기질
이 좋을 때는 멀리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잡힌다.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4 (삼막로 478, ☎ 031-471-5978)


▲  삼막사 명부전(冥府殿)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서울대와 호압사, 호암산 주변, 경인교대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일주문에서 계단길을 오
르면 비로소 삼막사 경내에 이른다. 경내는 일주문 윗쪽에 높이 자리해 있는데, 망해루와 범
종각 등을 바깥에 내밀며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다.

경내 북부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천불전과 망해루 등 다
른 건물들이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반해 명부전은 거의 혼자 남쪽을 향하고 있다. 남
향(南向) 건물이 이 땅에서 일반적이긴 하지만 이곳만큼은 그 원칙은 서향(西向)이 진리이다.
(물론 지형적인 영향이 크지만;;)
이 건물은 1880년에 의민이 지은 것으로 1975년에 수리를 했다. 네모난 장대석(長臺石)으로
다진 기단(基壇)을 2단으로 깔고 그 위에 집을 얹혔는데, 현재 맞배지붕 건물에 흔치 않은 방
풍판(防風板)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팔작지붕인 것을 개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공포는 주심포(柱心包) 형태로 귀포의 용머리 조각 등 장식적인 요소가 많으며, 건물 내부에
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상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중 시왕상은 명부전 이상으로 늙은 보물이다.


▲  중생 구제를 염원하는 4개의 지물, 사물(四物)이 담겨진
범종루(梵鍾樓)

▲  삼막사 망해루(望海樓)

범종루와 함께 경내를 가리고 앉은 망해루는 삼막사의 얼굴과 같은 존재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중기에 지어진 것을 20세기에 중건했는데, 건물 이름 그대로 바
다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허나 인천(仁川)과 시흥(始興), 안산(安山) 지역의 갯벌이
마구 매립되어 육지가 늘어남에 따라 바다는 그만큼 멀어졌고, 대기오염도 툭하면 말썽을 부
려 이제는 공기질이 아주 좋은 날이 아닌 이상은 바다를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망해루' 이
름 값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막사는 서울을 지키는 남쪽 비보 사찰이라 선비와 관리들의 출입이 잦았는데, 그중에는 백
호 윤휴(白湖 尹鑴, 1617~1680)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시 성리학(性理學)에 쓸데없이 능했
던 송시열(宋時烈) 마저 질리게 만든 문인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년) 직전에 삼막사를 찾아 망해루에 걸터앉으며 시 1수를 지었다.

 푸른 산에 찬 기운 일어 망해루에 바람이 거세고
 강구름이 비를 불러 해는 모래톱으로 사라지네
 이때 높이 올라 바라보는 것도 우연한 충성인데
 눈 들어 산하를 보니 시름을 이길 수 없도다

허나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시가 될 줄은... 이처럼 망해루는 문인들 시에 종
종 등장했으며, 현재는 주로 강당의 역할을 맡고 있다.


▲  망해루 옆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경인교대를 비롯하여 안양 석수동, 광명 남부 지역, 시흥시,
그리고 멀리 인천 땅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이날은 아무리 인상을
쓰고 살펴도 서해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  청기와를 지닌 육관음전(六觀音殿)

명부전 옆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6명의 관세음보살이 봉안된 육관음전이 청기와 지붕을 뽐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칸을 구분 짓
는 기둥이 돌로 이루어져 있어 나름 이형(異形)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다양한 관세음보살을 모아놓은 육관음전 내부

▲  삼막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12호

육관음전과 천불전 중간 높은 곳에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기 어
려운 석축 윗쪽 바위에 높이 들어앉아 있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인데, 보통 석
탑은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나 이곳은 다소 구석진 곳에 두어 사람의 손길을 피하게 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이 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삼막사 출신인 승려 김윤후(金允
侯)가 몽골(원나라)의 제2차 침공(1232년) 때 처인성(處仁城, 용인 남쪽)에서 몽골군 우두머
리인 살리타이를 처단하여 대승을 거둔 것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살례탑'이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김윤후는 이후 충주(忠州)에서도 대승을 거두어 그 위엄을 크게 떨쳤으며, 나라에서 상장군(
上將軍) 직을 내리려고 했으나 쿨하게 거절했다.

탑의 높이는 2.55m로 조그만 편인데,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으며, 3층 탑
신은 옥개석(屋蓋石, 지붕돌)만 겨우 남은 실정이다.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며, 탑 꼭대기에는 1979년에 보수한 머리장식이 하얀 피부
를 드러내고 있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 탑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탑 뒤에는 소나
무들이 푸르름을 드러내며 탑의 우산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  감로정 석조 옆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삼막사는 육관음전이라 하여 6명의 관세음보살을 두었는데, 밖에도 마애불(磨崖佛)
비슷하게 하얀 피부의 관세음보살상을 두어 관음도량처럼 꾸몄다.

▲  감로정 석조(甘露井 石槽)

3층석탑 바로 밑에는 삼막사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감로정 석조가 누워있다. 삼성산이 베푼 감
로(甘露) 같은 약수가 늘 넘칠 정도로 쏟아져 나와 대자연 형님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주고 있
는데, 감로를 머금은 거북 모양의 석조에는 고색의 때와 주근깨가 자욱하다. 그 역시 삼막사
의 오래된 유물 중 하나로 앞쪽에 '甘露井(감로정)'이란 글씨와 1837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
주는 글씨가 있어 그의 이름과 경력을 알려준다.

거북 모양의 석조 옆에 원통형 석조는 근래 마련된 것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뚜껑이 닫힌 거
북 석조에서 직접 물을 떠다 마셨다. 지금은 옆으로 홈을 내서 물이 원통형 석조로 흘러내려
와 그것을 마시면 된다. 특히 이 석조에는 조선 정조 때 인물인 김창영(金昌永)의 탄생 설화
가 전하고 있다.


▲  삼막사의 법당 역할을 하는 천불전(千佛殿)

육관음전 못지 않게 청기와 지붕을 드러내고 있는 천불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역시나 서쪽을 향하고 있다.
천불전이란 이름 그대로 1,000개의 조그만 불상을 지니고 있는데, 그 모습이 이 땅의 7천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이다. 귀찮아서 건물 내부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지만 현재 법당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건물 뒷쪽에는 원효가 수행했다고 전하는 토굴(土窟)이 있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종무소(宗務所) 옆 쉼터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아직까지 남은
식량이 있어서 커피와 과자 등을 꺼내 잠시나마 조촐한 향연을 즐긴다. 서쪽 전방에 펼쳐진
일품 조망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으며,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
람은 번뇌와 온갖 상념을 싹 털어간다. 그렇게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다가 삼막사의
나머지 부분을 보고자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보통 천불전과 명부전, 육관음전, 3층석탑이 있는 경내가 삼막사의 전부로 착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삼막사의 함정이다. 아직 사적비와 삼귀자, 마애불, 남녀근석 등의 문화유산이 남아있
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을 지나치면 삼막사의 절반 밖에는 못보는 것이다. 기왕 여기까지
올라온 거 말끔하게 보고 가는 것이 좋으며, 그것이 삼막사에 대한 작은 예의가 될 것이다.
사적비와 삼귀자는 경내와 가까운 곳에 있으며, 마애불과 남녀근석(칠성각 구역)은 5~6분 정
도 산을 타야 된다.


▲  삼막사 사적비(事蹟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으로 길을 접어들면 바로 왼쪽 높은 곳에 빛바랜 비석 하나가 눈에 아른
거릴 것이다. 그는 삼막사의 일기장인 사적비로 네모난 비좌(碑座)와 비신(碑身), 지붕돌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인데, 삼막사 창건 설화부터 조선 후기까지 내력이 적혀있으나 아쉽게도
비문(碑文) 상당수가 훼손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다만 관악산맥 삼성산 밑에 있다는 것과 절 이름이 삼막사로 향로봉이 왼쪽에 있다는 것, 사
적비를 1707년에 세웠음을 알리는 내용만 간신히 확인이 가능하다.


▲  산신각 - 바위에 새겨진 마애 산신탱

사적비를 지나면 바위에 깃든 산신탱이 마중을 한다. 지팡이를 든 대머리 산신 할배를 중심으
로 동자와 호랑이, 소나무, 구름, 햇님 등을 담았는데, 색을 입히지 않아서 윗쪽을 제외하면
모두 하얀색이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말이다.
이렇게 산신탱을 닦고 그 주변을 노천식 산신각(山神閣)으로 삼았는데, 산신탱 앞에는 중생들
이 올린 막걸리와 사탕, 과자, 떡 등이 가득하여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삼귀자(三龜字) 바위글씨를 머금은 바위

예전에는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으로 가려면 무조건 사적비와 삼귀자 앞을 지나가야 했다. 허
나 지금은 질러가는 길이 생겨서 그들 앞을 굳이 지나갈 필요는 없어졌으나 그들은 삼막사의
오랜 보물들이니 이곳이 초행이라면 꼭 살펴보기 바란다.

산신탱을 지나치면 기묘하게 생긴 삼귀자 바위글씨가 발목을 붙잡는다. 바위 피부에 쓰인 글
씨는 모두 거북 귀(龜)로 그 글씨를 전서체 등 다양한 모습으로 디자인하여 새긴 것인데, 오
른쪽 글씨는 그나마 귀자 비슷하게 생겼으나 무슨 부적 분위기가 나고, 가운데 글씨는 엉금엉
금 기어가는 거북이(또는 무당벌레) 모습 같으며, 왼쪽 글씨 또한 거북이를 닮았다.
이들 삼귀자는 종두법(種痘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의 친형 지운영(地雲英, 1852~1935)
이 이곳에 소박하게 백련암(白蓮庵, 지금은 남아있지 않음)을 짓고 은거했을 때 쓴 것으로 지
석영이야 워낙 인지도가 높아 삼척동자도 다 알지만 그에게 형이 있었다는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지운영은 여기서 관세음보살 누님을 친견하는 꿈을 꾸고 너무 기뻐 새겼다고 하며, 삼귀자 이
웃 바위에 '관음몽수장수 영자(觀音夢授長壽 靈字)'라 해서 그 소감을 밝혔다.

삼귀자 글씨의 크기는 왼쪽부터 높이 74cm, 77cm, 86cm이며, '불기(佛紀) 2947년 경신중양 불
제자 지운영'이란 글씨가 있어 1920년에 그가 썼음을 귀띔해 준다. 그리고 옆 바위에는 시주
자 명단이 적힌 명문이 있다.


▲  거북귀(龜)의 화려한 변신, 삼귀자(3개의 거북귀) 바위글씨의 위엄
명필가는 이렇게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악필가는 살아있는 글씨마저
죽여버린다.

▲  삼귀자 안내문 뒷쪽 바위에 새겨진 시주자 명단 바위글씨



 

♠  삼막사 마무리

▲  칠성각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 ①

삼막사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까지는 5~6분 정도 발품을 팔아야 된다. 그만큼 외딴 곳에 떨어
져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까지는 돌로 길을 잘 닦아놓아 통행에 어려움은 없으며, 혹시나
엉뚱한 길로 빠질까봐 연분홍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안내하고 있다.


▲  칠성각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 ②

▲  삼막사 남녀근석(남근석) - 경기도 지방민속문화재 3호

삼막사 경내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 칠성각 구역에 이르면 아주 재미있게 생긴 바위가 마
중을 한다. 바로 삼막사의 백미이자 이곳에서 꼭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남근석(男根石)과 여근
석(女根石)이다.
이들은 2개의 바위로 남쪽에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남근석이, 북쪽에는 여인네의 은밀한
부분을 닮은 여근석이 누워있는데,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특히나 여근
석은 그 부분과 너무 닮아서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렇게 거시기하게 생긴 돌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이른바 성기신앙(性器信仰)
의 대상으로 격하게 숭배를 받았다. 이 바위를 만지며 기원을 하면 아들 낳기와 출산에 효험
이 있다고 전해져 석가탄신일과 7월 칠석에는 많은 사람들(특히 아줌마들)이 찾아온다.
남근석의 높이는 1.5m, 여근석은 1.1m로 삼막사는 이 바위를 매우 애지중지 다루고 있다. 여
자를 멀리해야 되는 절간에서 예민하게 생긴 바위를 옆구리에 끼고 있다는 점이 참 이채롭기
까지 하는데, 이는 모두 절의 인지도와 수입을 위해 그리 한 것이다. 그리고 18세기에는 그들
옆에 마애불을 세우고 칠성각을 세워 칠성신앙까지 어우러진 현장으로 만들었다.


▲  대자연 형님의 심술궂은 작품, 여근석

▲  바로 앞에서 바라본 여근석의 위엄
앞이나 옆이 아닌 바로 위에서 보면 기가 막히게 실감이 난다. 마치 그 모습 그대로
돌로 굳어버린 듯한 느낌. 나는 쑥쓰러워서(?) 위에서 사진을 담지 않고
약간 옆에서 살짝(?) 담았다. 이거 좀 무안해서 말이지 ~~~!

▲  바위에 씌워진 삼막사 칠성각(七星閣)

칠성각은 바위에 깃든 마애3존불의 거처로 1881년에 지어졌다. 바위와 마애불에 맞게 짓다 보
니 지붕이 2겹이 되어버렸는데, 마애불이 바라보는 서쪽에 문과 성인 키 정도의 계단을 내었
다. 전실(前室)처럼 자리한 건물 내부는 마치 석굴(石窟) 마냥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중
생들이 달아놓은 조그만 인등(引燈)이 강인한 협동심을 드러내며 내부를 환하게 수식한다.


▲  삼막사 마애3존불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4호

칠성각에 담긴 마애3존불은 칠성(치성광여래)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
보살(月光菩薩)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존재를 칠성이라 한 것은 건물 이름이 바로 칠성각
이기 때문이다. 건물이 칠성각인데 엉뚱한 존재가 중심에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들은 연화좌(蓮花座)에 앉아있는데, 보관(寶冠)을 눌러쓴 양쪽 보살상은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고 있으며, 칠성은 두 손을 가부좌(跏趺坐)를 튼 무릎 위에 대고 보륜(寶輪)를 들고 있
다.
수인(手印)을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얼굴부터 옷주름까지 진하게 남아있어
형태를 알아보는데 문제는 없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가슴에는 내의의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마애불 밑에는 고맙게도 '乾隆二十八年癸未八月日化主悟心'이란 명문이 있어 1763년 계미년 8
월에 화주(化主) 오심이 조성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 땅에 칠성을 담은 그림(칠성탱, 칠
성도)은 많지만 이렇게 바위에 마애불로 새긴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또한 조성 관련 명
문까지 새겨져 있어 당시 마애불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어준다.

마애3존불의 눈, 입, 귀, 눈썹이 매우 선명하나 코는 닳아져 형태만 남아있다. 이는 그 코를
갈아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아낙네들이 그의 코를 마구 갈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성
기신앙의 현장이 옆에 있으니 그 현상은 심했으리라, 그렇게 중생들에게 코까지 떼였으니 마
애불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마애불이 누구를 위해 있는가? 바로 중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 중생을 위해 기꺼이 코 하나 내놓는 것은 그들의 임무이며, 코는 나중
에 새로 달아도 된다.


▲  칠성각을 뒤로하며



 

♠  삼성산 서남쪽 능선에 숨겨진 아주 늙은 무덤,
석수동 석실분(石室墳) - 경기도 지방기념물 126호

이렇게 삼막사를 고루고루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 햇님도 이제 고개가 아픈지 슬슬 지
평선 너머로 내려앉을 준비를 한다.
염불사(염불암)를 둘러보고 안양예술공원으로 내려갔는데, 일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 삼
성산의 숨겨진 명소이자 은자(隱者)인 석수동 석실분을 이날의 마지막 메뉴로 둘러보기로 했
다.

석수동 석실분은 안양예술공원 공영주차장 뒷쪽에 있는 석수동 마애종(磨崖鍾)을 기준으로 삼
아서 찾는 것이 편하다. 마애종에서 서쪽 길(예술공원로117번길)로 들어가면 막다른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예술공원로 117번길)로 접어들면 안양노인전문요양원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 쭉 올라가면 된다. 이곳은 옛날
에 광산이 있던 곳으로 마을의 밥줄이던 광산이 없어지면서 가옥 몇 채와 폐광의 흔적만 황량
하게 남아 늦은 시간에 오면 으시시함까지 느끼게 한다.

석실분을 알리는 이정표는 다행히 넉넉하게 닦여져 있어 길을 잃을만하면 나타나 길을 비춰준
다. 심지어 무덤 50m 전까지도 이정표가 있다. (석수동 마애종에서 도보 20분 거리)

▲  돌탑 위에 피어난 석실분 이정표

▲  석실분으로 인도하는 산길

▲  북쪽에서 바라본 석실분

▲  동쪽에서 바라본 석실분

석수동 석실분은 삼성산 서남쪽 능선 300m 고지에 둥지를 튼 삼국시대 무덤이다. 보통 고구려
무덤들은 흙무덤과 돌무덤(4세기 이후) 중심으로 주로 평지에 널려있고, 백제 무덤은 거의 흙
무덤 중심으로 바깥은 흙으로, 안은 돌로 돌방(석실)을 만든 구조인데, 대체로 평지와 언덕을
선호했다. (백제 돌무덤도 석촌동고분군을 비롯해 일부 남아있음) 그리고 신라 무덤은 흙으로
다지고 안에 돌방을 넣은 형태로 평지와 언덕을 선호했고, 가야는 특이하게 산자락이나 능선
을 주로 선호했다.

우리가 찾은 석수동 석실분은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가야 무덤이 아닐까 싶지만. 가야의 무덤
은 아니다. 가야(伽倻)의 영역은 경기도에 이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막연히 삼국시대 무덤
으로만 여겨질 뿐, 정확한 조성 시기와 무덤 주인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
으나 무덤 안에 석실을 다지고 윗도리에 흙으로 봉분(封墳)을 씌웠으며, 바깥과 석실(石室)을
잇는 연도(羨道)가 없는 횡혈식고분(橫穴式古墳)인 것으로 보아 6~7세기 이후 신라 무덤으로
여겨진다.
비록 봉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심술쟁이 자연의 손길, 일확천금을 노린 도굴꾼의 검
은 마수로 오래 전에 녹아 없어졌지만 석실까지 갖춘 규모와 안양시내를 바라보는 산자락에
자리한 점으로 보아 안양 지역을 다스리던 관리나 지방 세력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왜 하필이면 이런 첩첩한 산능선에 무덤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양사 동쪽 산자락에도 늙은
고분이 1기 있다고 하며(이곳은 확인하지 못했음), 지형 조건을 통해 조그만 고분이 더 숨겨
져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허나 아직까지 이 무덤을 포함하여 주변을 싹 뒤집지는 못했다.

무덤은 산 정상부를 향해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옛날에 이미 도굴을 당한 상태라 발견된
유물은 없다. 들리는 풍문에는 여기서 금관(金冠)과 금귀걸이가 나왔다고 전하는데, 진위 여
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히 높은 인물의 무덤임이 틀림없다.

흙으로 다진 봉분은 무참히 벗겨나가 흔적은 없으며, 석실과 석실 천정을 이루던 거대한 판석
(板石)이 대머리처럼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태이다. 석실 내부는 길이가 3.4~4.5m, 폭 1.5~1.7
m, 높이 85~100cm이며,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서 동/서/북벽을 쌓았고, 남쪽 벽은 커다란 판
석 1매로 축조했다. 그리고 3개의 넓다란 판석으로 석실을 덮었는데, 가운데 판석이 파괴되어
무덤의 속살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연도가 생기기 이전 형태로 여겨지며, 조선총독부가
1942년에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흥군(始興郡)
35. <고분>,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의 후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여기서 귀부는 안양사 귀부로 여겨지나 확실치는 않
음)

▲  세상을 향해 입을 벌린 석실분

▲  돌로 다져진 석실분 내부 ①

◀  돌로 다져진 석실분 내부 ②

무덤 내부는 문화유적 보호 차원에서 들어가면 안되지만, 이미 뚜껑이 열린 상태라 살짝 들어
가 볼 수 있다. 하지만 깊이가 1.5m 정도로 깊고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없어 다리에 무리가
없도록 조심을 기해 내려가야 된다.

주인도 오래전에 떠나버린 무덤 내부는 상석(床石)처럼 놓인 돌을 빼고는 텅 비어 있다. 무덤
이라기보다는 임시 거처나 아지트 같은 기분이다. 소름이 끼치는 무덤의 속살이지만 이곳을
알리는 문화유산 안내문이 없고, 옛 고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이게 무덤인지 군사시설인지,
숨겨진 아지트인지 헷갈릴만하다. 누가 이런 곳에 무덤을 쓸 것이라 생각을 하겠는가. 죽어서
도 권력과 부귀를 누리고 싶었던 옛날의 어느 부질없는 망족(望族, 귀족)의 욕심이 이 무덤을
탄생시켰고, 그 욕심에 대한 혹독한 대가로 사람과 자연, 세월에 의해 여러 차례 털리고, 파
괴되는 비운을 맞으며 '내가 과연 무덤일까?' 이곳의 성격마저 크게 흔들어 놓았다.

햇살이 조금씩 내려앉은 석실 내부는 오싹하기는 커녕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다. 학우봉과 삼
막사 방면으로 산길이 나있지만 다소 외진 숨겨진 곳이라 이곳을 지나는 산꾼의 수요는 별로
없으며 석실분 내부는 포근하고 비바람을 피하기에 좋아 간단한 먹거리나 손전등을 갖춘다면
염치불구하고 하룻밤 살짝 머물고 싶은 곳이다. 물론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그리해서는 안되
지만 정말 나만의 비밀 공간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간다.


▲  석수동 석실분에서 바라본 천하, 안양시내
멀리 바라보이는 산은 안양을 서쪽에서 감싸는 수리산이다.


무덤 밖에서 눈 아래로 펼쳐진 속세를 바라보며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수리산과 삼성산 사
이에 둥지를 튼 안양시내를 바라보니 그곳이 나의 영지(領地)인양 거만한 착각에 마음이 잠시
즐거워진다. 무덤 주인도 아마 그런 것 때문에 노비와 백성들을 닥달하여 이곳에 무덤을 쓴
것은 아닐까?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그만의 공간으로 가고자 슬슬 휘장을 거두고, 진하게 보이던 안양시내
도 그만큼 흐릿하게 다가온다. 어둠이 내려앉으니 사람도, 도시도, 산도, 어둠을 몰아내고자
불빛을 여기저기서 발산하면 검게 익은 안양의 산하는 그것을 얼굴에 바르며, 환상적인 야경
을 선보인다. 안양의 야경을 제대로 누리고 싶다면 안양예술공원 남쪽 산자락에 자리한 망해
암(望海庵)도 좋지만 석수동 석실분도 엄지를 강하게 치켜들며 추천하고 싶다.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산236-9


▲  석수동 석실분에서 맞이한 일몰
이렇게 하여 삼성산, 삼막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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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첩첩한 남쪽 지붕을 거닐다. 만인산~만인산자연휴양림 (태조대왕태실, 대전둘레산길, 대전천발원지)

대전 만인산 (만인산자연휴양림)



' 대전의 남쪽 지붕, 만인산 나들이 (만인산 자연휴양림) '

만인산 분수연못
▲  만인산 분수연못

금산 태조대왕태실

만인산휴양림

▲  태조대왕태실

▲  만인산휴양림 숲길

 



 

봄이 겨울 제국의 오랜 압정(壓政)에 지친 생명들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던 3월의 마지막
날, 대전의 남쪽 지붕인 만인산을 찾았다.
만인산은 장태산(長泰山), 계족산(鷄足山)과 더불어 대전 지역의 이름난 뫼이나 일찌감
치 관심을 두어 인연을 지었던 장태산과 계족산과 달리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러
다가 그곳이 좋다는 풍문을 전해듣고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400여 리의 먼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편으로 대전으로 내려가 대전역에서 대전 501번(비래동
↔마전)을 타고 40여 분을 달려 대전과 금산(錦山) 경계인 추부터널 앞 만인산휴양림에
서 두 발을 내렸다.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만인산에 남기며 칠흑과 같은 터널 속으
로 유유히 사라져 갔고, 나는 만인산의 품으로 길을 재촉했다.



 

♠  만인산(萬仞山) 입문

▲  대전과 충남 금산의 경계를 가르는 추부터널
<터널 뒤쪽 산줄기는 만인산 남쪽 능선(태봉재)>


만인산을 지나는 2차선 도로는 옛 대전~금산 17번 국도이다. 우회도로(금산로)가 생기기 이전
에는 두 지역을 왕래하는 차량들로 꽤나 번잡했으나 지금은 우회도로에게 국도의 자격과 기능
을 대부분 넘기고 '산내로'란 시내 외곽 도로로 조용히 살아간다. 차량 통행도 많이 줄어 다
소 한가한 신세가 되긴 했으나 만인산과 중부대, 상소동과 하소동 지역이 이 도로에 크게 의
존하고 있고 특히 주말에는 만인산 등산/나들이 수요로 왕년의 위엄을 다시금 뽐낸다.

만인산휴양림 정류장에서 만인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길은 만인산휴게소로 접근하는 것과 만인
산푸른학습원으로 가는 길, 2갈래가 있다. 어느 길로 가든 취향에 따라 움직이면 되며(만인산
정상이 목적이면 만인산휴게소로 가면 됨) 나는 푸른학습원 쪽으로 접근하여 만인산을 크게 1
바퀴 돌기로 했다.


▲  만인산 푸른학습원으로 인도하는 잘빠진 언덕길

그리 각박하지 않은 오르막길을 10분 오르니 만인산 푸른학습원이 산뜻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
다. 이곳은 만인산휴양림을 수식하는 편의시설로 1993년부터 터를 닦아 1997년 8월 26일에 문
을 열었다.
이후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시설물을 손질하고 시스템을 변경했으며, 자연학습전시실과 목공
체험실, 운동장, 천문대.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개인, 단체 숙박 가능)를 갖추고 있다.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동쪽 산길을 오르면 정기봉(580m)이 서남쪽에 잘 닦여진
길은 만인산 남쪽 능선과 태조대왕태실, 남쪽에 가파른 산길은 만인산 남쪽 능선과 정기봉 능
선으로 이어진다. 특히 대전에서 야심차게 닦은 대전둘레산길 2구간(금동고개~만인산휴게소,
13.1km)과 3구간(만인산휴게소~삼괴동 덕산마을, 12.5km)이 만인산휴게소에서 기지개를 켜 학
습원 앞을 지나 각자의 갈 길로 흘러간다. 그럼 여기서 만인산과 만인산휴양림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만인산 푸른학습원 직전 숲길

▲  만인산 푸른학습원

만인산 품에 포근히 둥지를 튼 만인산휴양림(자연휴양림)은 1990년에 문을 열었다. (1989년부
터 휴양림을 닦음) 장태산자연휴양림(☞ 관련글 보러가기), 국립대전숲체원과 더불어 대전에
있는 3개의 자연휴양림 중 하나로 구역 면적은 183만㎡, 조성 비용은 103억(푸른학습원 건립
비용 포함)이 들었으며, 휴양림 범위는 서쪽과 남쪽은 대전천발원지까지, 동쪽은 푸른학습원,
북쪽은 분수연못에 이른다. (대전광역시 만인산푸른학습원에서 관리하고 있음)

이 휴양림은 숲을 전혀 말아먹지 않고 숲과 계곡 물길을 있는 그대로 이용하여 닦았으며, 가
족휴양지구, 청소년지구, 피크닉지구, 푸른학습지구 등으로 나눠 조성했다. 편의시설로는 푸
른학습원과 만인산휴게소, 학습농장, 모험놀이시설 등이 있고, 그 외에 분수연못과 대전둘레
산길 2, 3코스 등 여러 산길을 지니고 있다. 청정함을 자랑하는 계곡은 만인산 서쪽 자락에서
분수연못으로 흘러가며, 활엽수(闊葉樹)가 삼삼한 숲을 이루어 휴양림 및 산림욕장으로 아주
바람직한 조건을 갖추었다.

휴양림을 안고 있는 만인산(538m)은 대전 남쪽 끝에 자리한 산으로 대전과 금산의 경계를 이
루고 있다. 산 이름은 '높고 깊은 산'이란 뜻으로 수많은 골짜기가 모여 산을 이루었다는 뜻
에서 그리 불렸다는 설도 덧붙여 전하며, 산봉우리가 마치 만발한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명당
(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하여 태조 이성계도 이곳에 탐을 내어 자신의 원초적 흔적(
태실)을 이곳에 맡겼는데, 그로 인해 태실산(胎室山), 태봉산(胎峰山)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
으며, 금산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태봉재(태봉고개)라 불렀다.

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들어앉아 전라도에서 올라온 봉화를 받아 서울로 전했으며, 봉수레미골
은 대전천(大田川)의 발원지로 그 대전천에서 대전이란 지명이 유래하였다. (1872년에 제작된
지도에 '산내면 대전리'란 지명이 등장함) 흔히 대전의 옛 이름인 한밭을 왜정(倭政) 때 대전
으로 바꾼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이전부터 대전이란 지명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봄에는 진달래와 산벚꽃이 산을 곱게 수식하며, 5월의 신록이 볼만하다. 늦가을 풍경도 일품
이며, 겨울의 설경(雪景) 또한 아름다우나 나는 본의 아니게 그들을 모두 피해 와서 그 아름
다운 풍경을 누릴 수가 없었다.
대전둘레산길 2코스와 3코스가 만인산의 신세를 지며, 태조대왕태실과 봉수대터 등의 문화유
산과 만인산휴양림, 만인루, 분수연못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다. 또한 아름다운 숲길이 거미
줄처럼 펼쳐져 있어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으며, 만인산휴게소에서 정상까지는 넉넉잡아 40분
정도 걸린다.

* 만인산휴양림 소재지 : 대전광역시 동구 하소동 산47일대 (☎ 042-270-8651,8660)
* 만인산휴양림과 푸른학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푸른학습원에서 만인산 남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산길

푸른학습원에서 각박하게 펼쳐진 남쪽 산길을 조금 오르면 만인산~정기봉 능선이다. 여기서
동쪽(왼쪽)으로 가면 정기봉과 대전둘레산길 3구간이며, 서쪽(오른쪽)은 만인산과 태조대왕태
실, 대전둘레산길 2구간으로 이어진다. 나는 만인산이 목적이라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푸른학습원 남쪽 능선에 닦여진 각박한 전망대

능선 갈림길에서 서쪽으로 가면 전망대라 불리는 존재가 마중을 한다. 전망대라고 해서 나무
로 잘 지어진 조망대나 오르기 쉽게 다져진 그런 전망대가 아닌 군사훈련이나 극기훈련용(모
험놀이시설)으로 지어진 것으로 거의 90도의 뻣뻣한 철사다리를 힘겹게 올라가야 된다. 비록
생긴 것이 저 모양이라 그렇지 하늘을 향해 솟아있어 전망대로서의 흠은 거의 없다. 다만 그
를 둘러싼 나무들이 모두 키다리라 그의 조망을 크게 훔치고 있어 보이는 범위는 매우 적다.

저 위로 올라가서 잠시 머물까도 했으나 오르기가 좀 각박해 보이고 굳이 이 나이에 저길 꼭
올라가야 되나 싶어 그 밑 의자에 얌전히 앉아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으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일까 모든 것이 다 꿀맛 같으니 대자연 형님이 나도 모르게 간식
에 꿀을 발라준 모양이다.


▲  태봉고개 (마전, 태조대왕태실 방향)

행동식 섭취를 마치고 서쪽으로 내려가니 바로 태봉고개(태봉재)가 나온다. 이곳은 대전과 금
산을 이어주던 옛 고개로 추부터널이 생기기 전까지는 사람과 차량이 이 고개의 신세를 졌다.
하지만 고개 밑도리에 땅굴이 뚫리면서 매우 한가한 신세가 되었고, 지금은 만인산을 찾은 산
꾼과 나들이꾼들이 고개의 심심함을 달래준다.

고개 정상 양쪽에는 바위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고개 하늘에는 극기훈련용 구름다
리가 아슬아슬하게 놓여져 있다. 그리고 저 고갯길을 넘으면 바로 왼쪽(동쪽)에 만인산의 오
랜 명물인 태조대왕태실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  만인산 거닐기 (태조대왕태실, 만인산 정상)

▲  태조대왕태실(太祖大王胎室)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31호

만인산 태봉고개를 기준으로 북쪽은 대전, 남쪽은 충남 금산 땅으로 바로 경계선 남쪽에 태조
의 태실과 태실비가 있다. 바로 그 태실을 보고자 잠시 대전 땅을 벗어났다. (그래봐야 100m
도 되지 않음)
함경도와 두만강(豆滿江) 이북 지역의 너른 땅을 관리했던 지역 세력가 출신의 이성계가 그의
고향이나 서울 부근이 아닌 머나먼 금산 땅에 태실을 둔 점이 꽤 흥미로운데, 그렇다면 왜 그
의 태실이 엉뚱하다 여겨지는 이곳에 박혀있는 것일까?

이성계(李成桂)의 태실은 원래 함경도 함흥(咸興)의 함흥본궁(本宮) 용연(龍淵)에 있었다. 함
흥본궁은 이성계가 그의 조상들이 살던 집터에 새로 지은 집으로 4대 조상들의 신주를 봉안했
던 조선 왕실의 주요 성역이다.
조선이 갓 들어선 시절, 부동산에 눈썰미가 있던 어떤 시인이 만인산을 둘러보았는데, 산세가
깊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연꽃이 만발한 것 같으며, 99산의 물이 하나로 모여드는 지형이라 하
여 격하게 찬양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무학대사(無學大師)는 크게 호기심이 일어
직접 찾아가 확인을 해보니 아주 대단한 터였다. 하여 태조에게 건의하여 1393년 차디찬 삭풍
(朔風)이 맴도는 함흥에서 이곳<그때는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으로 옮기고 태실비를 세웠다.
그때 권중화(權仲和)가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겸 봉안사(奉安使)가 되어 그 임무를 수행했
으며, 태실이 봉안되자 진동현은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승격되었다.

조선 왕실의 성역으로 나라의 관리와 통제가 매우 엄격했으며 옥계부사(玉溪府使)를 두어 관
리했다. 또한 부근에 비례리(備禮里)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는 거기서부터 예를 갖추어 태실에
참배했다고 해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만큼 태조 태실에 각별한 공을 들인 것이다.
숙종(肅宗) 시절에 지역 백성들이 태실 주변에서 경작을 하고 벌목한 일을 제외하면 딱히 별
일은 없었으나 1910년 이후 왜정(倭政)은 망국(亡國) 시조의 태실을 욕보이고자 1928년에 태
실을 부시고 태항아리를 창덕궁으로 빼돌렸으며, 태실 주변은 민간에 팔아먹었다. 그나마 남
아있던 태실비와 태실도 개념없는 땅 주인이 죄다 부셔버렸고, 태실 자리에는 자기 선조의 무
덤을 쓰면서 제자리까지 강제로 잃게 된다.

이후 테실 석재들이 주변에 이리저리 흩어져 굴욕의 시간을 보내다가 1993년 금산군청과 주민
들이 수습해 원래 위치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지금 자리에 복원했다. 허나 없어진 석재가 적
지 않아 새 돌을 많이 투입하다보니 헌돌과 새돌이 다소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  서쪽에서 바라본 태실과 태실비

▲  동쪽에서 바라본 태실과 태실비

이성계의 최초의 흔적이 담겼을 태실은 8각형 구조로 윗도리는 원래 것이나 밑도리는 남아있
는 석재가 없어 새로 붙였다. 그리고 태실 주위로 난간을 둘렀는데, 이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태실비는 바닥에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해태를 닮은 귀부(龜趺)를 둔 다음 이곳의 정
체를 밝히는 빗돌을 세웠다. 그리고 그 위로 교룡(蛟龍, 이무기)이 여의주(如意珠)를 두고 다
투는 모습을 새긴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빗돌 앞면에는 한자로 '태조대왕태실'이라 쓰여 있으며, 뒷면에는 '강희(康熙) 28년(1689년)
3월 29일'에 중건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빗돌 역시 여러 조각으로 아작 나서 쓰러진 것
을 다시 이어붙여 일으켜 세웠다.

만인산은 태조의 태실을 품게 되면서 태봉산, 태실산이란 별칭을 지니게 되었으며, 태실 옆을
지나는 고개는 태봉재(태봉고개)가 되었다. 또한 태가 묻힌 능선은 쌍봉낙타(雙峯駱駝)형으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태봉산의 북풍을 막아주고 햇빛 또한 잘 들어 명당자리로 격하게 추앙
을 받고 있다.

* 태조대왕태실 소재지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1-86


▲  태조대왕태실비
귀부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서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보통은 정면을 바라보기
마련인데 왜 서쪽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쪽에 참한 여인네라도
있는 것일까?

▲  태조대왕태실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금산 중부대학교 주변

▲  만인산 자연학습체험로 ①

만인산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인 태조대왕태실을 둘러보고 다시 대전 땅으로 들어와 만인산 남
쪽 능선을 거닐었다.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 천하를 해방시켰지만 산록의 나무들은 아직
도 흐릿한 모습들이다. 마치 독재에 오랫동안 쇠뇌당한 민중들처럼 말이다.

능선길을 좀 거닐다가 북쪽길로 내려가니 잘 닦여진 숲길이 나온다. 이 길은 자연학습체험로(
0.7km)로 푸른학습원 운동장에서 대전천발원지 직전까지 이어지는데 오르락과 내리락이 거의
없는 그야말로 편안한 길이다.


▲  굽이굽이 흘러가는 만인산 자연학습체험로 ②

▲  만인산 자연학습체험로 ③
앞에서 아른거리는 노란색 존재는 산수유이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만난 봄꽃들;

▲  만인산 자연학습체험로 ④

▲  수목(樹木) 속을 비집으며 ~~ 만인산 남쪽 능선길

자연학습체험로가 끝나는 지점(대전천발원지)에서 다시 비좁은 남쪽 능선길로 향했다. 만인산
정상까지는 자연학습체험로 같은 편한 길은 커녕 무조건 각박한 능선길의 신세를 져야 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금세 오를 것 같지만 그래도 500m가 넘는 뫼인지라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대전천 발원지에서 20~30분 정도 걸림)
허나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묵묵히 산길을 걷다보면 보이지 않던 만인산 정상이 흔쾌히 그 모습
을 드러낸다.


▲  서서히 흥분을 보이는 만인산 남쪽 능선길

▲  대전의 남쪽 지붕, 만인산 정상을 향하여 ~~~

▲  드디어 도착한 만인산(538m) 정상 (만인산 봉수대터)

만인산 정상은 대전 남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사방이 모두 트여있어 조망도 그런
데로 괜찮은 편이라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이곳에 봉수대(烽燧臺)를 두었다.
봉수대는 돌을 이용해 절구통 모양으로 닦았는데, 전라도에서 날라온 봉화를 받아 북쪽(서울
)으로 넘겼으며, 만인산 동쪽 정기봉에도 봉수대를 두어 경상도의 봉화를 전달했다. 평소에는
불을 때워 연기로 신호를 보냈으나 비나 눈이 올 때는 봉수지기가 다음 봉수대까지 뛰어가 소
식을 전했다.

그렇게 바쁘게 살던 봉수대는 1894년 이후 봉수제도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연기를 피우지 못
했고 장대한 세월의 거친 격류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하나둘 사라져 갔다. 만인산 봉수대와
정기봉 봉수대 역시 그 험난한 과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녹아내려 터만 아련하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살짝 속삭여준다.


▲  만인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만인산 서쪽 자락을 비롯해 멀리 장태산의 뒷통수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만인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금산 마전(추부면) 지역과 중부대학교(바로 밑에 보이는 건물들)


대전은 대구(大邱)와 비슷하게 산에 둘러싸인 분지형 지형으로 동북쪽과 동쪽, 남쪽, 서쪽에
높은 뫼들이 가득 포진해 있다. 특히 만인산과 장태산이 있는 남쪽은 산들이 첩첩히 주름진
산악지대로 만인산이 아무리 높다 한들 주변이 온통 산 투성이라 보이는 범위는 높이에 그리
시원치 못하다. 대전 시내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보이는 범위는 북쪽으로 하소동, 서쪽으로 장태산, 동쪽은 정기봉, 남쪽은 금산 추부면(마전)
북부 정도이다.



 

♠  만인산 마무리

▲  정상에서 만인루로 내려가는 가파른 산길

정상에서 첩첩히 주름진 좁은 천하를 굽어보며 10분 가량 머물다가 동쪽 산길로 내려갔다. 여
기서 길은 3갈래로 갈리는데, 동쪽 길은 만인루와 만인산휴게소, 남쪽 길은 아까 올라왔던 남
쪽 능선, 북서쪽은 대전둘레산길 2구간으로 먹티재와 하소동, 금동으로 이어진다.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금산 마전(추부면)과 중부대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정기봉(580m)

▲  만인루로 인도하는 계단길 (만인루 입구)

동쪽 산길을 조금 내려가면 만인루 입구에 이른다. 여기서 길은 3갈래로 갈려 나그네로 하여
금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드는데 계단길로 직진하면 만인루, 남쪽의 가파른 산길을 내려
가면 대전천발원지, 잘 닦여진 북쪽 길로 내려가면 사방댐이다.
우선 봉우리 위에 지어진 만인루를 보고자 누렇게 뜬 낙엽들이 어수선하게 깔린 계단길을 올
랐다.


▲  만인산의 새로운 장식물, 만인루(萬仞樓)

만인루는 2층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 누각으로 정상 동쪽 440m 고지에 자리하고 있다. 지붕은
목조 와가(瓦家)로 닦고 나머지는 철근콘크리트로 다진 것으로 서울 신영동(新營洞)에 있는
세검정(洗劍亭)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조금 낯이 익은 모습이다.
대전시가 2001년 5월 10일에 짓기 시작해 그해 11월 30일 완성을 보았으며, 사업비는 1.35억
원이다. 만인산을 수식하는 존재이자 이곳의 새로운 명물로 누각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만인산
정상, 동쪽은 정기봉, 남쪽은 마전 지역이 시야에 들어오며, 옛날 스타일로 작성된 '만인루
창건기'가 윗쪽에 걸려있으나 글씨가 너무 깨알 같아서 읽기가 힘들다.


▲  만인루에서 바라본 금산 마전(추부면) 지역

▲  만인루에서 바라본 정기봉(왼쪽 봉우리)과 만인산 푸른학습원
(가운데 부분), 그리고 만인산 남쪽 능선(오른쪽 산줄기)

▲  만인루 입구에서 사방댐으로
내려가는 너른 숲길

▲  만인루 입구에서 대전천발원지로
내려가는 각박한 내리막길


만인루를 둘러보고 다시 입구로 내려와 남쪽인 대전천발원지로 내려갔다. 그 길이 얼마나 각
박한 수준이던지 내려가니까 망정이지 만약 이 길로 올라왔더라면 숨이 제대로 찼을 것이다.
만인산에서 가장 흥분한 산길로 앞서 정상으로 가는 길보다 더 가파르며, 그 길을 내려가면
대전천발원지에 이른다.


▲  대전천발원지 방향 산길

▲  대전천발원지(봉수레미골)

앞서 잠깐 스쳐 지나갔던 대전천발원지는 만인산 정상 동쪽 골짜기로 이 일대를 봉수레미골이
라 부른다. 만인산에서 달맞이 행사나 큰 제향(祭享)이 있을 때 정상을 향해 봉화를 올리던
골짜기라 하여 '봉수내미골'이라 했는데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봉수레미골로 살짝 바뀌었다
고 한다. 내용이야 어쨌든 만인산 봉수대와 관련된 이름은 분명하다.
봉수레미골은 대전천으로 간판을 바꾸어 대전시내를 굽이쳐 금강으로 흘러가며 그 대전천에서
대전이란 이름이 시작되었다. 그러니 이곳은 대전의 조촐한 성역과 같은 현장이다.

▲  가늘게 흘러가는 봉수레미골

▲  봉수레미골 숲길

▲  봉수레미골에 설치된 모험놀이시설
(외나무다리 타기)

▲  분수가 용솟음치는 분수연못


▲  만인산의 아름다운 거울, 분수연못

봉수레미골 상류에서 내려온 시냇물은 만인산휴게소 옆에 닦여진 분수연못에 모여 종점이 없
는 대장정을 준비한다. 이 연못은 만인산이 베푼 냇물을 십시일반 모아둔 것으로 거의 호수에
버금가는 규모라 연못이란 말을 무색케 한다. 차라리 '분수호수'나 '만인산호수'란 이름이 더
적당해 보인다.
산 속에 숨겨진 그림 같은 호수로 봄맞이에 들뜬 나무와 꽃들이 그를 거울로 삼아 겨울로 초
췌해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지나가는 구름과 햇님, 달님도 잠깐씩 길을
멈추어 호수를 굽어보며 빗질을 한다.
호수 주위로 산책로를 닦아놓았으며 조촐하게 분수를 깔아놓아 나른한 봄 오후를 깨운다. 여
기서 1차 정모를 한 만인산 냇물은 다시 밑으로 흘러가 사방댐에서 2차 정모를 하며, 거기서
부터 큰 세상을 향한 끝없는 여정이 시작된다.


▲  만인산의 화려한 율동, 분수연못 분수의 위엄 ①
분수 뒷쪽에 보이는 건물이 만인산휴게소이다.

▲  만인산의 화려한 율동, 분수연못 분수의 위엄 ②

▲  하트를 중심으로 펼쳐진 분수연못 포토존

분수연못을 1바퀴 둘러보고 바로 동쪽에 자리한 만인산휴게소로 이동했다. 이 휴게소는 1990
년도에 민간자본으로 지어진 만인산휴양림의 거의 유일한 편의시설로 지상 2층, 반지하 1층
규모이다.
휴게소 앞에는 봉수레미골의 물을 붙잡아 연못을 닦았는데, 휴게소와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
도록 조성하여 이 땅의 휴게소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고 휼륭한 건축물로 찬양을 받기도 했다.
만인산 자락 복판에 있고, 대전과 금산을 이어주는 도로(산내로)변에 자리해 있어 접근성도
좋으며, 식당과 커피집, 편의점 등이 휴게소를 이루고 있다. 특히 호떡(봉이호떡)이 유명해
이곳에 들린 사람들은 거의 호떡 하나씩 사먹기 마련이다.
마침 출출하기도 하여 나도 흔쾌히 호떡 줄에 동참했는데, 평일이라 대기줄이 적어 금방 손에
쥘 수 있었다. 맛은 시내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일반적인 호떡보다 조금 달달하다고 해야 될
까? 호떡 크기는 그런데로 적당해 보이며, 가격은 1개당 1,000원(지금은 1,200원이라고 함)이
나 받는다. 그렇게 만인산의 명물 비슷하게 되어 매일 소고기 회식을 할 정도로 장사가 잘되
니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휴게소 주변에는 의자와 탁자가 여럿 놓여져 휴게소에서 먹거리를 구입하거나 속세에서 가져
온 음식과 간식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하며, 연못이 바라보이는 곳에는 전망데크를 깔았다. 그
리고 여기서 '만인산 숲속의 탐방로'란 간판을 내건 고가도로 식의 탐방로가 시작되는데, 그
길은 산내로 허공을 가로질러 도로 동쪽 임도로 연결된다.
요즘 이런 식의 탐방로가 자연휴양림에 많이 닦여져 있어 탐방에는 좋을 지 모르나 은근히 경
관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탐방로의 폭이 좁고 난간도 그리 높지 않아 자칫 추락 등의 사
고 위험도 적지 않다. 특히 고소공포증이 있거나 심신이 부실한 노약자, 음주자는 출입을 자
제하여 하나 뿐인 목숨을 아끼기 바란다.


▲  만인산 숲속의 탐방로(숲속자연탐방로) 동쪽 종점

만인산 숲속의 탐방로는 그런 위험성 때문에 이용시간에 제한을 두고 있다. 3~6월과 9~11월은
9~18시까지 통행할 수 있으며, 7~8월은 9~19시까지, 12~2월은 9~17시이다. (이용시간은 변동
될 수 있음) 그 외에 시간과 눈, 비, 태풍이 엄습할 시에는 문을 닫아건다. 그러니 억지로 들
어가지 말자.
탐방로의 길이는 200m, 높이는 6~10m이며, 만인산휴게소와 산내로 동쪽 임도(숲길)를 이어준
다.


▲  호젓하게 펼쳐진 산내로 동쪽 임도

산내로 동쪽 임도는 푸른학습원 밑 숲속의 교실에서 만인산공원 정류장까지 이어지는 0.95km
의 달달한 비포장 숲길이다. 길 서쪽은 산내로와 접한 벼랑이며, 동쪽 역시 하늘로 솟은 깎아
지른 벼랑이라 만약 이런 곳에서 적의 매복 공격에 걸리면 꼼짝없이 털리기 좋다. 허나 이곳
에서 그럴 일은 1도 없으므로 마음 편히 임도를 거닐며 자연을 즐기면 된다.


▲  산내로 동쪽 임도 ①
왼쪽 낭떠러지 밑에 대전~금산을 이어주는 '산내로'가 있다.

▲  산내로 동쪽 임도 ②
직선으로 가면 재미가 없으므로 종종 굴곡의 미(美)도 보여준다.

▲  산내로 동쪽 임도 ③

만인산에서 만난 숲길 중, 산내로 동쪽 임도가 가장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나의 정처없는 마
음이 그 길에 퐁당퐁당 빠진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 길을 집으로 훔쳐와 혼자서만 누리
고 싶지만 내가 조물주도 아니고 고위 권력자도 아니니 그건 어림도 없다. 사진으로 두고두고
보거나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찾아와야겠다.

동쪽 임도는 서쪽 산내로와 마치 하늘과 땅처럼 높이를 두고 펼쳐지다가 서서히 그 간격이 줄
면서 만인산공원 정류장에서 완전히 같아지게 된다. 이곳은 만인산휴양림과는 관련이 없는 곳
으로 분위기를 내세운 커피집이 하나 있으며, 만인산의 사실상 북쪽 끝이나 다름이 없다. 여
기서 북쪽으로는 산길이 없으며(산내로 도로만 있음) 남쪽 길 건너에 분수연못에서 내려온 물
을 다시 붙잡은 사방댐이 있고, 거기서 분수연못과 만인루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만인산공원 정류장에서 3시간에 걸친 만인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만인산의 알짜
배기를 고루도루 겯드려 제대로 1바퀴 둘러보았는데, 이렇게 좋은 곳을 왜 이제서야 인연을
지었는지 만인산을 낮게 봤던 나의 안목이 정말 쓰레기였음을 통감한다. 만약 다음에도 이곳
과 인연이 닿는다면 만인산 동쪽에 있는 정기봉도 꼭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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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1월 2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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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상큼한 지붕을 거닐다. 대모산 나들이 (완남부원군 이후원묘역, 대모산성, 불국사, 서울둘레길4코스)

강남 대모산 (완남부원군 이후원묘역, 대모산성, 불국사)


    
' 서울 강남의 대표 지붕, 대모산 나들이 '

  대모산 숲길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  대모산 숲길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  대모산 불국사

대모산 불국사

 



 


서울 강남권의 대표 지붕인 대모산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번 인연을 지었던 친숙한 뫼이
다. 보통 접근성이 좋은 일원동(逸院洞)이나 수서역에서 길을 시작했는데, 한 해의 절반
이 끝나가는 시점에 이르러 다시 대모산 앓이가 도졌다. 그 앓이는 대모산에 안겨야 100
% 낫는 병이라 겸사겸사 시간을 내어 그를 찾았는데, 이번에는 산 남쪽인 자곡동(紫谷洞
)에서 산 더듬기를 시작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3시, 지하철로 수서역까지 이동하여 거기서 강남구 마을버스 03
번을 타고 못골마을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자곡로를 따라 서쪽으로 6분 정
도 가면 래미안강남힐즈아파트가 나오는데, 그 옆구리에 닦여진 '자곡로5길'로 들어서면
오른쪽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인 무덤들이 두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이들이 바로 완남부
원군 묘역으로 그들을 미답처 목록에서 싹싹 지우고자 이곳을 대모산 나들이의 시작점으
로 삼은 것이다. (못골마을 정류장보다는 래미안강남힐즈 정류장에서 내리는 것이 더 가
까움)


▲  완남부원군 묘역 남쪽에 상큼하게 닦여진 공원 산책로



 

♠  대모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선 중기 무덤,
완남부원군 이후원(完南府院君 李厚源)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9호

▲  밑에서 바라본 묘역

대모산 남쪽 산골인 못골에는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인적이 드
물던 이 두멧골까지 개발의 칼질이 밀려오면서 묘역 서쪽에 아파트가 심어지고 신작로가 바로
옆구리까지 들어왔으며, 남쪽과 동쪽에 공원이 조성되는 등, 주변 풍경이 다소 변화를 겪었다.
묘역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이거늘 그 주변이 크게 홍역을 치룬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이곳
으로 부른 묘역의 주인공, 이후원 그는 누구인가?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은 자는 사진(士晋),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로 세종(世宗)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7세손이다. 그의 아비는 이욱(李郁), 어미는 장수황씨로 황정욱
(黃廷彧)의 딸이다.

10대 시절, 김장생(金長生)의 문하로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때 김집(金集)과 조속(趙涑),
송준길(宋浚吉)과 친분을 쌓았다. 1623년 서인 패거리들이 일으킨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
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평가를 받아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으며, 1624년 이괄(李
适)의 난 때 반란 토벌에 앞장섰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지자 총융사(摠戎使)로 전쟁에 임했으며, 이듬해 청나라군 포
로를 잡은 공로로 녹훈되었으나 이를 반기지 않았다. 이후 단양군수와 태안군수를 지냈고, 조
정으로 돌아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종4품)을 지내다가 1635년 익산군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뒤늦게 과거시험을 통과했다.

1636년 김상헌(金尙憲)의 천거로 지평(持平, 정5품)이 되었으며, 얼마 가지 않아서 장령(掌令
, 정4품)이 되었다. 바로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터지자 인조(仁祖)를 따라 남한산
성으로 서둘러 도망을 쳤으며, 그곳이 청군에게 포위되자 염통이 오그라든 김류(金瑬) 등이
강화도로 도망치자며 어리석은 인조를 구워삶았다.
그러자 이후원은 남한산성을 끝까지 지킬 것을 주장하여 그들의 의견을 가라앉혔고, 최명길(
崔鳴吉)이 항복을 제안하자 죽기로 싸울 것을 주장했다.

1639년 승지(承旨)가 되고 이어 수원부사에 천거되었으나 인조가 그를 곁에 두고 싶어서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삼았다. 이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백성의 힘을 무리하게 쓰지 않고 사풍(
士風)을 변경시켜 군정(軍政)을 닦았으며 이어 강화부유수가 되었다가 1642년에 대사간(大司
諫)을, 1643년에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이 좌의정(左議政)과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임하자 심복의 장사
들을 호위대에 집어넣고 전 지사(知事) 이일원(李一元)과 작당하여 회은군 이덕인(懷恩君 李
德仁)을 추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후원이 적극 나서 반란을 토벌했으며, 이듬해 호
조판서와 대사헌이 되고 1646년에는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어 회명연(會盟宴)에 참여했다.

1650년 효종(孝宗)이 청나라 정벌 프로젝트인 이른바 북벌(北伐)을 추진하자 그 참모가 되었
다. 효종의 명으로 전함 200척을 준비하여 그때를 알뜰히 대비했으나 1659년에 효종이 아쉽게
도 승하를 하면서 북벌프로젝트는 흐지부지 되고 만다.
1653년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655년 예조판서로 추쇄도감제조
(推刷都監提調)가 되어 도망간 노비나 부역, 군역을 회피한 사람들을 잡아와 그 죄를 물었고,
악학궤범(樂學軌範)을 개간해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이어서 한성부판윤(漢城
府判尹), 형조판서, 공조판서, 대사간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165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면서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을 이조
판서에, 송준길을 병조판서로 임명했으며, 이후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지경연사(知經
筵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을 지냈다.

그는 성품이 청개(淸介, 청렴하고 절개가 있음)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으며, 선(善)을 좋아하
고 악을 멀리했다. 그리고 관직생활 중에도 틈틈히 경사(經史)를 읽으며 머리 속에 늘 풍부한
지식을 쌓아두었다.
1685년 경기도 광주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세상 사람
들은 그를 완남부원군이라 부른다.


▲  고색의 기운을 머금은 이후원 신도비(神道碑)

이후원 묘역은 광명시 일직동 삼석산(三石山) 호봉골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그와 같
은 시대를 살았던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묘역 부근이다. 그러다가 1685년 광주 세촌(細
村) 금성산(金星山)으로 이장되었으며, 1714년 현 자리에 완전히 안착을 했다. 이때 그의 전
처인 광주김씨, 후처인 영월신씨와 같은 봉분(封墳)을 쓰는 합장묘(合葬墓)로 조성되었다.

이후원 신도비는 묘역 동남쪽에 자리해 있다. 신도비란 2품 이상의 높은 사람과 왕족들만 지
닐 수 있었던 비싼 비석으로 무덤 주인의 생애를 기록해 놓는다. 두툼하게 생긴 비좌(碑座)
위에 글씨를 깨알 같이 적어놓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으
로 비석에 딱히 '신도비'를 칭하는 내용은 없으나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자리
해 있고, 묘표도 따로 마련되어 있어 그를 신도비로 보고 있다.
비문(碑文)은 이후원의 벗인 송준길이 짓고, 송시열이 추기를 지었으며, 명필로 유명한 이정
영(李正英)이 글씨를 쓰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두전(頭篆)을 썼다. 1685년 광주로 이장
되었을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당대 유명한 사람들의 글과 글씨를 머금고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대단하다.


▲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후원 묘

이후원 묘는 이후원 자신과 그의 전처, 후처가 모두 안장된 봉분을 중심으로 묘표(墓表), 상
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2기, 해치석 2기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다.
봉분 밑도리에는 호석(護石)을 둘러 무덤이 조금 있어 보이게 하였으며 묘표는 봉분 앞이 아
닌 옆에 두었다. 허나 높은 사람들 무덤에 흔히 쓰는 문인석(文人石)과 동자석(童子石) 같은
석물을 전혀 갖추지 않았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 대신 독특하게도 해치석을 지
니고 있으며, 이들은 다른 사대부나 왕족의 무덤에서는 만날 수 없는 희귀한 예로 나 역시 이
곳에서 그들을 처음으로 접해 본다. 이들 해치는 무덤 지킴이로 배치되었다.

▲  호석을 두룬 봉분과 상석, 향로석
묘표(오른쪽 돌기둥)

▲  이후원 후손들의 무덤 (3기)
이들은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만 갖추었다.


▲  오늘도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이후원 묘역의 초여름 풍경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는 묘표
연꽃 무늬가 진하게 새겨진 비좌 위에 곧게 솟은 비신(빗돌)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난 지붕돌을 얹혔다. 빗돌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로
얼룩이 져 있으나 글씨를 확인하는데는 그리 어려움은 없다.

▲  향로석에 새겨진 글씨 '완남 이충정공묘(完南 李忠貞公墓)'
여기서 '완남 이충정공'은 이후원을 뜻한다. 300년이 넘은 글씨이지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정함을 과시하고 있다.

▲  뻐드렁니를 드러낸 서쪽 해치석의 위엄

이후원 묘만의 특별한 옵션, 해치석은 아주 조그맣고 앙증맞은 모습으로 상석 앞에 2기가 자
리해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귀엽게도 앉아있는 해치는 상상 속의 동물로 광화문 앞에도
커다란 해치석(해태석)이 있는데, 얼굴과 이빨, 귀, 뒷다리, 꼬랑지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서쪽 해치상의 두 눈은 장대한 세월에게 제대로 얻어맞은 듯 멍이 부었고, 코는 깎여나가 흔
적만 남았다. 아마도 그의 코를 갈아 그 가루를 먹으면 아들을 낳거나 시험에 붙는다는 유언
비어가 있었던 듯 싶다. 그래도 코를 제외한 나머지는 잘 남아있으며, 동쪽 해치상은 눈과 코
가 모두 멀쩡하다.
그들의 귀여운 자태에 반해 집으로 살짝 가져가 나의 수호용 석수(石獸)로 삼고 싶지만 그들
을 들고 갈 힘도, 지위도 되지 못한다.

▲  서쪽 해치석의 얼굴

▲  서쪽 해치석의 옆모습


▲  맞은편 해치석을 바라보고 있는 동쪽 해치석
무덤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바람직하지 못한 기운들도 해치의 귀여운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그들의 임무도 잊은 채, 돌아갈 것이다.

▲  동쪽 해치석의 해맑은 얼굴

▲  동쪽 해치석의 옆모습


▲  이후원 묘역 동쪽 숲길 (못골위 근린공원)

이후원 묘역 남쪽과 동쪽에는 '못골위 근린공원'이 닦여져 있다. 동쪽 산책로는 야트막한 오
르막길로 그 고개를 넘으면 바로 못골마을로 이어지는데, 고개 너머 길은 잡초들이 덥수룩하
여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대모산으로 이어지는 산길도 없는 눈치여서 다시 묘역
으로 나와 그 서쪽 길(래미안강남힐즈 동쪽 길)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딱히 길은 없어 보였다.
하여 자곡로로 나와 길을 탐색하니 LH강남3단지아파트 남쪽 세명근린공원에서 대모산으로 가
는 계단길을 발견, 그 길을 통해 오랜만에 대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자곡동 산39-3


▲  대모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세명근린공원)



 

♠  대모산(大母山, 293m)을 더듬다

▲  대모산 숲길 (자곡동에서 정상 방향)

대모산은 강남의 대표 지붕이자 듬직한 뒷동산이다. 1977년에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 1989년 이후 공원으로 조금씩 꾸며지기 시작했다. 개포동과 일원동, 수서동, 자곡동, 내곡
동(內谷洞), 세곡동(細谷洞)에 걸쳐있는 산으로 1980년대 개포동(開浦洞) 개발 이전에는 산세
가 양재천(良才川)까지 이르렀다. <꼬마 시절인 1980년대 중반에 대모산을 타고 도곡동(道谷
洞)까지 내려간 기억이 있음>
산의 모습이 늙은 할머니처럼 생겼다고 해서 할미산, 대고산(大故山)이라 했으나 조선 세종(
世宗) 때 태종(太宗)의 능인 헌릉(獻陵)이 산 남쪽에 조성되면서 어명에 의해 대모산(大母山)
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산세가 비구니가 앉은 모습 또는 여자의 앞가슴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리 이름을 내렸다는 설도 덧붙여 전해지고 있음)
조선 후기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산경표(山經表)에는 한남정맥(漢南整脈)에 속하는 산이
라 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목(廣州牧) 기사에는 '관아 남쪽 30리에 있으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고 나와있다.

대모산에 안긴 오랜 명소로는 불국사와 대모산성터 등이 있으며, 넓은 산세에 비해 계곡은 매
우 빈약하다. 개포동과 일원동 개발로 계곡 상당수가 날라갔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계
곡들도 시멘트를 바르고 요상하게 공구리를 쳐서 볼품이 매우 없다. 반면 약수터는 주변 산들
못지 않게 많아서 구룡산을 포함하여 무려 18개소의 샘터가 있다. (일부는 부적합 상태임)
또한 도보 산책길의 전국적인 유행으로 강남구청에서는 수서역에서 대모산 북쪽 자락과 구룡
산 북쪽 자락을 거쳐 염곡동(廉谷洞)으로 이어지는 대모산 둘레길인 '강남그린웨이'를 닦았으
며,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찬양받는 서울둘레길4코스(대모, 우면산 코스)가 대
모/구룡산 북쪽 자락으로 흘러간다. (불국사를 경유함)


▲  대모산 숲길 (왼쪽 철책 너머는 헌인릉 보호구역)

자곡동 세명근린공원에서 20여 분 정도 오르면 대모산 능선길에 이른다. 길은 거의 완만한 수
준으로 길이 약간 흥분기를 보이는 구간은 나무데크 계단길을 깔아 그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
다.


▲  대모산 능선길
왼쪽 푸른 철책은 헌인릉과 국정원 구역이니 넘어가지 말자. 국가의
예민한 곳을 건드려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  숲에 감싸인 대모산 정상(293m)

대모산 능선길로 들어서 서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대모산 정상에 이른다. (동쪽 능선길로 가
면 수서역임)
보통 하늘을 이고 있는 뫼의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거나 잡초로 이루어진 대머리 같은 지
형이나 대모산 정상은 나무가 무성하여 정상이라는 것이 그리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삼삼하게
솟은 나무들로 하늘은 절반 밖에 보이지 않으며 조망 또한 별로 기대할 수 없다. 하여 여기서
는 동남쪽인 자곡동과 세곡동, 성남시 정도만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대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대모산 정상

대모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나온다. 이곳은 북쪽이 확 트
여있어 앞서 정상에서 누리지 못한 조망을 제대로 보상 받을 수 있다. 바로 앞에 개포동과 일
원동을 비롯하여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성동구, 광진구, 중랑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구리시, 멀리 불암산과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삼각산), 남양주 지역까지 시야에 잡혀 조망
도 제법 진국이다.


▲  대모산 헬기장에서 바라본 천하 ①
개포동과 일원동을 비롯하여 송파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그리고 멀리 수락산과 도봉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대모산 헬기장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개포동과 일원동, 송파구, 강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수락산,
구리시, 남양주 지역 등

▲  천하를 향해 고개를 내민 대모산 서쪽 조망대

대모산 정상 서쪽에는 천하를 굽어보는 조그만 조망대가 있다. 이곳은 동쪽 헬기장보다 더 조
망이 일품으로 강남구 지역을 중심으로 송파구, 강동구, 구리시, 서초구, 성동구, 광진구, 중
구와 남산, 동대문구, 멀리는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남양주 지역까지 망막에 들어
온다. 강남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고 서쪽의 구룡산 외에는 주변이 상당수 평지라 조망
의 깊이도 클 수 밖에 없다.


▲  대모산 서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개포동과 도곡동, 양재동을 비롯한 강남/서초구 지역과 동작구, 용산구,
중구, 남산,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대모산 서쪽 조망대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강남구와 서초구, 우면산, 관악산, 동작구 지역

▲  옛 대모산성(大母山城)의 아련한 흔적들

대모산 헬기장 서쪽 능선길과 대모산 조망대 주변을 잘 살펴보면 무리를 지어 모인 돌무더기
들이 심심치 않게 보일 것이다.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저 잡석들의 무리로 보고 밟고 지나
가기 일쑤이나 눈썰미가 조금 있다면 그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님을 느낄 것이다. 그들은 바
로 대모산의 갑옷이었던 대모산성의 흔적들(대모산성터)이다.

산꾼과 행정당국의 오랜 외면을 받으며 굴욕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대모산성은 6~7세기 정도
(또는 신라 후기)에 신라(新羅)가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양대
박물관팀이 발굴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이때 짧은 굽다리 접시를 비롯하여 다양한 신라 유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곳 산성은 정상을 둘러싸며 조성된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600m, 내부 면적은 약 8,276
㎡이며, 성돌은 50~70cm 정도의 자연석과 활석을 이용했다. 봉은사(奉恩寺)에서 편찬한 '봉은
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백제 때 고성(古城)으로 나와있고, 북쪽 성벽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일부 확인되기도 했으나 나중에 성곽을 구축하면서 과반수 이상 날라간 상태였다,
또한 정상 중간 지점에 제단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바위가 널려있는데 이 바위에는 달걀 모
양의 조각이 50여 개 이상 새겨져 있다. 이들 흔적을 어려운 말로 성혈(聖穴)이라 하며, 그
흔적을 문신처럼 지닌 바위는 알바위라 부른다. 하여 이를 통해 대모산은 옛 조선(고조선)부
터 지역에서 꽤나 애지중지되었음을 귀뜀해준다.
그랬던 대모산성은 고려 이후 버려졌고,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힘으
로 완전히 헝클어져 돌이 약간 뭉쳐있는 형태로 여럿 남아있을 뿐이다.

옛 조선부터 신라 후기까지 절찬리에 이용된 의미 깊은 곳이지만 오랫동안 세상의 관심을 받
지 못했다가 2012년에 비로소 서울시에서 지방기념물로 지정하고자 문화재위원회에 상정했다.
허나 여러 가지 이유(사유지, 강남구의 의지 부족 등)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보호 조치도 계속 보류되었다. 게다가 대모산성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는
실정이라 사람들의 발길에 계속 고통받고 있으며, 봉우리 주변에 철탑 시설물과 국정원 철책
까지 산성터를 그냥 두지 않아 상태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러니 더 망가지기 전에 서둘러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흐릿하게 남아있는 흔적이라도 수습
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산성 유적이 아니던가.


▲  옛 대모산성의 흔적들 ①
대모산성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차산에 깃든 아차산성(阿且山城)이나
금천구 호암산에 깃든 호암산성(虎巖山城)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까?

▲  옛 대모산성의 흔적들 ②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성벽이 많이 남아있었다고 하며 멀리서도 그 흔적이
보였다고 한다. 허나 속세의 무관심 속에 그마저도 대부분 헝클어지고
지금과 같은 우울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  옛 대모산성의 흔적들 ③
성곽을 다졌던 자리에는 성돌 일부와 성터 윤곽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  불국사로 내려가는 숲길



 

♠  대모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오래된 산사
~ 대모산 불국사(大母山 佛國寺)


▲  불국사 약사보전(藥師寶殿)

대모산성터에서 일원동 쪽으로 15분 정도 내려가니 불국사가 뒷통수를 보이며 모습을 드러낸
다. 이름도 참 좋은 불국사는 몇 번 인연을 지었던 절로 그냥 넘어갈까 했으나, 간만에 대모
산에 왔고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치듯, 그냥 가기가 아쉬웠다. 하여 석불좌상의 안
부도 물을 겸, 불국사로 발을 들였다.

절 밑에는 약수터(불국사 약수터)가 있어 더위로 지친 목구멍을 적실 겸 다가갔다. 허나 수질
부적합 빨간 딱지가 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것을 무시하고 마셔도 상관은 없으나
이후는 장담하지 못한다. 요즘 내리는 비가 너무 각박한 수준이다보니 약수터의 목구멍도 죄
다 타들어가고 있었고, 바가지들도 실업자 신세가 되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런 약수터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약사보
전과 그곳의 주인 약사여래(불국사 석불좌상)와도 시선이 딱 마주친다.

대모산 북쪽 자락에는 이름도 참 아름답고 외우기도 쉬운 불국사가 조용히 안겨져 있다. 흔히
불국사하면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유명한 경주(慶州) 불국사를 100% 생각하기 마련이라 불국사
에 간다고 하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다들 경주에 가냐고 묻는다. 허나 부처 형님의 나라를 뜻
하는 '불국'이란 이름을 경주 불국사 혼자서만 누리면 어디 쓰겠는가?
비록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불국사' 이름을 지닌 절은 천하에 수십 곳이 넘는다. (그나
마 오래된 절은 경주와 대모산 불국사가 고작임)

'불국사' 이름의 절 중에 경주 다음으로 2위(1위와 2위의 차이가 완전 넘사벽 수준;;)라고 볼
수 있는 대모산 불국사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한 약사도량으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다. 법
당(法堂)인 약사보전을 중심으로 삼성각, 나한전 등 4~5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지형상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시선의 끝에는 이곳의 마르지 않는 샘 강남이 펼쳐져 있다.
가람배치는 법당 앞에 석탑 1기를 둔 1법당 1탑 배치로 절에 흔히 있는 일주문(一柱門)은 없
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사세 확장에 그리 용이한 지형이 아니라서 새로 건물을 짓
기에도 여의치가 않아 보인다.

▲  불국사 약수터
내가 갔을 때는 수질 부적합 판정으로
잠시 휴업 상태였다.

▲  2층으로 이루어진 삼성각(三聖閣)
1993년에 지은 것으로 2층은 삼성각, 1층은
공양간과 요사, 선방으로 쓰인다.


이 절은 고려 말기인 1352년에 진정국사(眞靜國師)가 창건하여 약사사(藥師寺, 약사절)라 했
다고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 설화에 따르면 절 아랫마을(일원동)에서 박씨 농부가 경작을 하
고 있었는데 소가 논 한가운데서 나아가지 않아 살펴보니 글쎄 땅 속에 석불(지금의 불국사
석불좌상)이 있는 것이었다.
하여 바깥으로 꺼내 가까운 봉은사(奉恩寺)에 넘기려고 했으나 석불이 거부 반응을 보이며 꿈
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사절로 보내려고 하니 갑자기 석불이 지푸라기보다 가벼워져 그
곳으로 옮겼다. 그때 불상이 발견된 논을 부처논이라 불렀고 그 옆을 흐르는 개천을 부처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절 아랫마을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석불을 발견하여 마을 뒷산에 자리를 만들
어 봉안했는데, 진정국사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1385년에 그 자리에 절을 세워 약사절(약
사사)이라 했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설화의 내용처럼 과연 진정국사가 창건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석불은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이 난 상태라 창건시기와도 그런데로 맞아보인다. 또한 밭에서 발견되었다는
설화를 통해 지역 농민들이나 지역 세력가의 발원으로 석불이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국사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옛 절터(일원동 246-12)가 있는데, 그곳이 불국사의 원래 자
리라고 한다. 허나 언제쯤 현 위치로 옮겨졌는지는 대모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창건 이후
500년 동안 마땅한 흔적을 남기지 못했으며, 1874년 고종(高宗)의 지원으로 중창을 했다고 전
하는데, 그때 현 자리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모산 남쪽 헌인릉(獻仁陵)에서 물이 나오자 고종은 그곳과 가까운 약사사 주지에게 의
견을 물었다고 한다. 이에 주지승이 대모산 동쪽(현 성지약수터)의 수맥을 끊으면 된다고 답
을 올려 그렇게 하니 과연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며, 고종은 고마움의 뜻으로 불국정토를
이루라는 뜻에 '불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고종의 꿈에 헌릉에 묻힌 태종이 자꾸 나타나자 그를 달래고자 약사사를 증축하
고 불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  1칸짜리 나한전(羅漢殿)
불국사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1964년에 지어졌다.

▲  나한전 내부
석가여래와 문수/보현보살, 16나한,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6.25전쟁 때 절이 처참히 파괴되고 오로지 창건 설화에 나온 석불만 겨우 살아남았는데, 1963
년 안양 삼막사(三幕寺)에서 온 권영선(풍곡당)이 중창해 법당과 칠성각, 나한전(1964년)을
세웠다. 이후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영길(법선당)이 1993년부터 3년의 불사 끝에 나한전을 제
외한 모든 건물을 싹 갈고 탱화를 새로 제작했다.

강남구의 거의 유일한 늙은 산사로 강남권에서는 봉은사 다음 급이며, 고색의 향기는 말끔히
씻겨 내려갔으나 이곳의 유일한 보물인 늙은 석불이 전하고 있어 나름 오래된 절임을 증명하
고 있다.
시내와 가깝긴 하지만 숲에 푹 묻힌 탓에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리기에 부족
함은 없으며, 으리으리한 경주 불국사와 달리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하여 은근히 정
감이 간다.


▲  약사보전 내부 (단란한 모습의 약사5존상과 불단, 닫집)

불국사의 중심 건물(법당)인 약사보전(약사전)은 삼성각과 더불어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약사전 앞에는 근래 마련된 5층석탑이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드러내
고 있고, 약사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좌우에는 수호의 의무를 지닌 돌사자 2기가 있는데, 사자
의 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엽게 다가온다.

약사전 불단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3존상도 아닌 무려 5존상이 봉안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 왜 특이하게 5존상으로 불단을 장식했을까? 실제 다른 절에서는 3존불(또는 3존상) 주변에
별도의 불상과 보살상을 두는 사례도 많고 이곳 불국사 같은 경우는 지형상 다른 여래나 보살
상을 중심으로 한 건물을 더 두기가 곤란하므로 그 역할을 약사전이 싹 도맡고 있는 것이다.
즉 약사전이라고 해서 약사여래만 집중적으로 취급해야 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불단
가운데에 약사여래를 높게 배치하고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4개의 협시보살상을 낮게 배치
하여 5존상을 구성했다.


▲  불국사 석불좌상(가운데 석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6호

이들 5존상 가운데 가장 맏이는 가운데에 있는 석불좌상(약사여래상)이다. 이곳의 중심 불상
답게 좌우에 거느린 보살상보다 대좌(臺座)가 높은데, 그의 우측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든 승
려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좌측에는 보관(寶冠)을 눌러쓰고 가슴에 금색 장식을 단 관
세음보살이 있으며, 양쪽 끝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앉아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석가여
래를 중심으로 도드라지게 돋음새김으로 조성된 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다.

불국사 석불좌상이라 불리는 이 약사여래상은 밭에서 나왔다고 전한다. (지역 농민이나 지역
세력가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을 그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음)
불국사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이곳의 든든한 밥줄로 그를 내세워 약사도량을 칭하고 있는데,
절에서는 약사불(약사여래)이라 하여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다. 허나 고려 때 약사여래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 처음부터 약사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래 정체는 아미타불로 여겨
진다. 그런 것을 나중에 약사여래로 강제 전환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불상의 높이는 79.5cm로 머리의 크기가 신체에 비하여 너무 크다. 하얀 피부의 몸과 달리 머
리는 검은 색이며 꼽슬인 나발이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로 보이는 하얀 혹이 솟아 있으며,
홍예처럼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백호가 있다. 지그시 뜬 두 눈으로 중생을 보는 약사여래의
표정은 그야말로 인자함이 느껴진다. 오뚝 솟은 코와 붉은 입술, 살이 두툼해 보이는 양쪽 볼
은 정말 손으로 비벼보고 싶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안
테나처럼 크다.
그의 몸에 걸쳐진 법의(法衣)는 석굴암(石窟庵)의 본존불처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런 형태를 어려운 말로 우견편단(右肩偏袒)이라고 한다. 다리 위에 놓여진 두 손은 선정인(
禪定印)을 취하고 있으며, 손 위로 알 모양의 빨간색 물건이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가 늘 지
니고 다닌다는 약합(藥盒)이다. 약합에는 중생을 치료하기 위한 그만의 치료제가 들어있을 것
이다.

그는 원래 맨돌의 불상이었으나 나중에 호분(胡粉, 조개껍데기를 태워 만든 것으로 여자들의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됨)
으로 하얗게 떡칠을 하여 하얀 피부의 석불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원래 모습을 적지 않게 잃었다.
신라 후기~고려 초기 시절 유행했던 불상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머리와 신체 비례가 맞지 않
으며, 자연스럽지 않은 옷주름 조각 등으로 고려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 불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442
(광평로10길 30-71 ☎ 02-445-4543)


▲  두툼하고 탐스럽게 열린 어여쁜 불두화(수국)
순백의 불두화보다는 그래도 색이 입혀진 불두화가 더 유혹적이다.

▲  불국사를 뒤로하며... 대모산도시자연공원 숲길

▲  그림 같은 숲길, 대모산공원 산책로

대모산공원으로 내려와 에어브러쉬(air brush)로 대모산이 나에게 살짝 붙여둔 존재들을 말끔
히 털어버렸다. 이제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세상으로 갈아타야 되니 지금까지 의지한 다른 세상
의 흔적을 싹 지우는 것이다. 오늘 나들이도 충분히 그리고 달달하게 즐겼으니 나의 제자리로
돌아가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이렇게 하여 대모산 여름 나들이는 그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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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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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조망과 넉넉한 볼거리를 지닌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 (호압사, 호암산 정상, 민주동산 깃대봉)

호암산 호압사, 호암산 정상



~~~ 볼거리가 풍부한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
(호압사, 정상 주변)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호압사 석불좌상

호암산 남쪽 봉우리

▲  호압사 석불좌상

▲  호암산 남쪽 봉우리

 



 

천하를 접수한 가을이 늦가을로 숙성되어 가던 10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나의 즐겨찾
기 뫼의 하나인 호암산을 찾았다.

1년에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고 있는 호암산(虎巖山, 393m)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
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우뚝 솟아 있다. 서울 금천구와 관악구, 경기도 안양시에 걸쳐있
는 그는 산세(또는 산에 있는 바위의 모습)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옛 금천<衿川, 시흥(始興)> 고을의 주산(主山)으로 금지산(衿芝山), 금
주산(衿州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호랑이를 닮은 잘 생긴 뫼이나 풍수지리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과 함께 오랫
동안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그들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산 밑에 절(호압사)을 세우고, 관악산(冠岳山) 정상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
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산의 매서운 기운을 누르고자 세웠다는 호압사를 비롯하여 한우물, 석
구상, 호암산성터, 제2한우물터, 약수사, 불영암, 삼성산성지 등의 늙은 문화유산과 절이
깃들여져 있으며, 조망 또한 일품이라 서울 대부분과 안양, 광명, 부천, 인천, 북한산(삼
각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또한 호랑이를 닮은 뫼답게 잘생긴 바위들이 잔뜩 포진해 있고, 산 정상부와 능선부로 오
르는 길이 잠시 각박할 뿐, 그 잠깐의 고생만 감내하면 부드러운 주능선과 국보급 조망이
두 망막과 마음, 다리를 즐겁게 해준다. 그밖에 시흥계곡과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 호암
산폭포 등의 명소가 있고, 서울둘레길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가 호암산을 남북으로
흘러가며. 잣나무 산림욕장을 중심으로 호암늘솔길이 싱그럽게 닦여져 있어 산은 비록 작
지만 매우 알찬 팔방미인 뫼이다. 이러니 내가 호암산에게 단단히 퐁당퐁당 빠진 것이다.



 

  호압사(虎壓寺) 입문

▲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 쓰인 호압사 일주문(一柱門)

호압사입구(벽산아파트1단지) 정류장 동쪽에는 호압사 일주문이 팔작지붕을 펄럭이며 중생을
맞이한다.
이 문은 절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2000년에 금천구(衿川區)에서 지어준 것으로 그 당시 금천
구가 서울시 25개 자치구 민원행정실적평가에서 우수 구로 선정되어 시상금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활기찬 금천구 만들기 기념'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관내에서 호압사의 입구이자 호암
산의 대표 관문인 이곳에 세운 것이다.

문 현판에 쓰인 호암산문은 호암산에 안긴 절, 즉 호압사를 뜻하며,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
는 문짝이 없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문 앞에는 호암산 안내문과 조그만 공원이 자
리해 있다.


▲  호압사로 올라가는 산길

일주문을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오르막길이 펼쳐져 시작부터 숨을 헐떡이게 한다. 절까
지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나 경사의 패기가 대단하여 아
무리 4발 차량이라 한들 바퀴를 조심스럽게 굴려야 된다.
처음에는 경사가 조금 완만하나 서서히 기울기가 커지면서 주차장을 지날 쯤에는 상당히 급해
지며,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수록 호압사의 모습이 솟아나듯 보이기 시작한다.


▲  콘크리트 석축 위에 모습을 드러낸 호압사

호압사는 돌로 다진 석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경내 밑부분은 콘크리트로 높게 기단을 만들고
주차장과 해우소 등을 두었는데, 돌이 아닌 콘크리트라 다소 눈에 거슬린다. 차라리 돌과 흙
으로 2단이나 3단의 계단식 기단(基壇)을 다졌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저 콘크리트 공간을 지나 2개의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호압사 심장부에 이른다. 그럼 여기서
잠시 호압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둥지를 튼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으로 자비를 강
조하는 불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 절이 호랑이와 무슨 원수를 졌길래 호랑이
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호압사는 1394년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약사전에 조선 초기 석불좌상이 깃들여져 있어 그런데로 시기
는 맞아떨어지며, 조선 조정에서 관악산과 호암산의 매서운 기운을 잡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
로 세운 것은 분명해 보인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오며, 태종
(太宗)이 호압(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
을 남기지 못했다가 1841년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
했으며, 1935년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다. 그리고 2008
년에 9층석탑을 세워 지금에 이른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
는 이 절이 호암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수호하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후대에 그럴싸하게
지어진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태조 이성계가 백성들을 동원해 서울에 궁궐(경복궁)을 짓던 1394년, 궁궐 건
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무너지는 현상이 일어나자 태조는 뚜껑
이 폭발하여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했다. 이제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모두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펴주십시요!!'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가 없어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는 것이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것이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정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 듯 합니
다'

하여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
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장
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나
괴물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야되나?'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공은 뉘시오?'
'허허~ 그런 것은 아실 필요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문의하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
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
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호출하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
를 누른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랬더니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
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금천 고을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라는 내용이 있어 이것이 호압사의
유래로 크게 여겨진다.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호압사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약사전을 비롯해 삼성각, 심검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
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준다.
호압사는 서울 장안에서 1년에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는 절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호압사를
안고 있는 호암산 때문이다.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도봉산(道峯山)과 더
불어 나의 마음을 앗아간 뫼이다보니 호압사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늘어난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
바로 저곳에 호암산의 명물인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깃들여져 있다.



 

♠  호압사 둘러보기

▲  호압사 서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5호 (늦가을 사진)

경내에 들어서면 계단 양쪽으로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마중한다. 이들은 약사전에 있
는 석불좌상과 더불어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존재들로 서쪽 느티나무는 50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7m, 허리둘레 4.2m이다. 그리고 계단 동쪽 나무는 키 11m, 허리둘레 3.6m이다.


▲  호압사 동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6호 (늦가을 사진)

▲  호압사 심검당(尋劍堂)
건물 앞에 서 있는 크고 굵직한 나무가 서울시 보호수 18-5호인 느티나무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면 서쪽에 2층 규모의 심검당이 있
고, 북쪽에는 법당인 약사전, 그 옆구리 높은 곳에 삼성각, 그리고 그 아래쪽에 근래에 심은
9층석탑이 조촐히 경내를 이룬다.
심검당은 호압사의 요사(寮舍)이자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으로 쓰이는 다용도 건물로 심검(
尋劍)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선원(禪院)에서 많이 쓰는 이름이다.


▲  호압사 삼성각(三聖閣)과 9층석탑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9년에 조성되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있는 8각9
층석탑을 유난히도 많이 닮았는데, 호압사의 유일한 탑으로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이곳에는
그 흔한 탑이 하나도 없었다. 그 허전함이 계속 걸렸는지 통 크게 9층석탑을 세우고, 기증 받
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그리고 그 사리를 직접 친견할 수 있도록 1층 탑신에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 정면에 탑을 세워야 하겠으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좌측 구석에
세웠으며,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부를 지녀 가을 햇살에 한층 빛나 보인
다.

그리고 석탑 북쪽 높은 곳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인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건물인데 1995년에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
년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내부에 봉안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은 1978년에 제작된 것이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
웠다는 무학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어 절의 창시자를 기린다.


▲  호압사 9층석탑
탑 너머로 호압사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 호암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  삼성각에 봉안된 무학대사의 진영(眞影)

▲  칠성 식구들이 그려진 칠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독성 식구들이 담긴 독성탱

▲  삼성각 뒤쪽에 있는 관세음보살상
(2012년 작)


▲  호압사 약사전(藥師殿)

경내 중심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약사전은 이곳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
었다.


▲  호압사 석불좌상(약사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8호

호압사는 석가여래 대신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하
여 법당 불단(佛壇)에는 약사여래를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이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오랜 보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석조약사여래좌상<예전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석약사불
좌상', 지금은 '석불좌상(약사불)'임>이 협시보살을 넉넉히 대동하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여래상이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
菩薩)을 좌우에 붙여 약사3존불을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에 천진불(天眞佛)이라
불리는 귀여운 아기부처 2기를 갖다 붙였다.

인상이 온후하기 그지없는 약사여래상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주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에
선 절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  호압사 석불좌상(가운데)과 일광/월광보살상

15세기(늦어도 16세기)에 조성된 이 불상은 돌로 만들어 금색 피부를 입힌 것으로 불두(佛頭)
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습으로 약간의 양
감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그의 두 손에는 약합
(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여래 좌우에는 일광, 월광보살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각기 꽃을 1송이씩 들며 좌우
를 지킨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가 있으며, 불단 위쪽에 걸쳐진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려하여 중생의 눈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
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화사하게 만든다.

▲  약사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탱(神衆幀)

▲  약사전 뒤쪽 굴뚝과 지장보살상


▲  넓직한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왼쪽 하얀 책장이 도서관)

범종과 목어, 법고, 운판을 머금은 사물(四物)의 공간인 범종각 좌측에는 2칸짜리 쉼터와 풍
경소리 도서관이라 불리는 하얀 피부의 책장이 있다. 이들은 호압사에서 절과 호암산을 찾은
동네 사람들과 산꾼, 답사꾼을 위해 2012년에 만든 것으로 누구든 찾아와 시간과 종교, 장르
에 구애받지 않고 독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개방형 책쉼터이다.

절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에는 절과 신도, 동네 사람들이 기증한
책들이 담겨져 있는데, 소장 권수는 적으나 기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책장도 조만간 미어터질
것이다.
책장과 쉼터는 매일 개방하며, 누구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쉼터에 앉아 독서의 여유를 누리면
된다. 책을 며칠 빌리고자 한다면 종무소에 문의하면 되며, 쉼터에서는 독서 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도 된다. (음주나 누워서 자는 것은 안됨)

호압사는 산중 사찰이나 제대로 된 샘터가 몇
년 동안 없었다. 물론 예전에 샘터가 있긴 했
지만 사라진 지 오래, 그래서 종무소 옆에 큰
물통을 두어 거기서 물을 마셔야 했다.
그러다가 2011년 이후 풍경소리 도서관 주변에
자리를 마련해 새롭게 샘터를 갖추었다.
긴 파이프에서 쏟아져 나온 물은 호암산이 베
푼 물로 동그란 조그만 석조로 떨어진다. 가을
오후 햇살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서 갈증
에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하니 몸 속의 때가 싹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  호압사 샘터


▲  호암산 정상을 목전에 둔 호압사 분기점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고, 채소밭을 끼고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길(서울둘레길5코스)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그리고 북쪽으로 난 평
평한 길은 독산동(禿山洞)과 목골산으로, 서쪽은 호압사와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으로 이어지
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호암산 정상(385m)

▲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처음에는 방심하기 좋을 정도로 얌전한 수준이나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산길은 잔뜩 흥분하여 속인들의 혼을 다 빼놓는다.

 

호암산 정상을 보다 빨리 오르고 싶다면 호압사에서 오르는 것이 좋다. 호압사 바로 뒤에 병
풍처럼 둘러진 뫼가 바로 정상이고 시내버스와 마을버스가 해발 140m(호압사입구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상까지는 해발 250m만 오르면 된다.
허나 그만큼 산길의 경사는 각박하여 만만히 보고 덤벼든 속인(俗人)들의 혼을 제대로 빼놓는
다. 호압사입구에서 호압사로 오르는 길도 그렇고, 호압사 분기점에서 정상 입구로 오르는 길
도 제법 야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중간인 호압사에서 잠시 경내를 둘러보며 쉬다가 정상
으로 오르는 것이 좋다.

호압사분기점에서 10~15분 정도 오르면 정상 입구인데,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4~5분 가면 호
암산 꼭대기이다.
호암산은 대체로 호압사입구에서 호압사까지, 호압사에서 정상 입구까지, 잣나무 산림욕장에
서 서남쪽 능선까지, 벽산5단지에서 불영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좀 야박한 편이지, 그곳만 오
르면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한 능선길이 펼쳐진다.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동을 비롯한 금천구, 광명시를 비롯하여 멀리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광명시 지역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천하 ③
신림동과 난곡을 비롯한 관악구 지역과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서남/서북부 지역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호암산 남쪽 봉우리
저 봉우리에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깃들여져 있다.

▲  호암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
정상 입구에 이르면 흥분된 산길은 급히 진정을 되찾으며, 여기서부터
조금은 느긋한 산길(바위길 위주)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  돌로 이루어진 호암산 정상(385m)

호암산은 돌의 성분이 많은 산이라 정상도 견고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2개의 커
다란 바위가 비스듬히 매달려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중 오른쪽 바위가 정상으로 호암산
의 머리에 해당된다.
이곳은 서울에 이름난 조망터이자 야경(夜景) 명소로 마치 서울을 향해 미사일이나 로켓포를
쏘는 듯한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자연은 이미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
전부터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한 미사일과 로켓포, 그것을 취급하는 기계의 모습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니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 산을 경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굳
이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날려보낼 것 같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위 꼭대기나 그 부근까지 오르면 서울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도심부와 서북부, 동북
부, 강남과 강동 일부, 도심 주변의 여러 산들(북한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 그리고 광
명과 안양, 멀리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이 두 발 밑에 펼쳐지니 굳이 풍수지리
나 산의 생김새가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도 꽤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만약 적에게 넘어가면
서울 도심을 물론 서울의 왠만한 곳이 거의 다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선녀 누님의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오가는 신선
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눈과 발 밑으로 점점이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니 저
모든 것을 다스리고 소유한 군주가 된 듯 즐거운 기분이 솟아 오른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영등포구 등 서울의 서남부 지역과
광명, 부천 지역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강서구 등 서울 서남부 지역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관악구와 동작구, 영등포구, 강남구, 서울 도심과 남산, 서북부, 동북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정면에 아득하게 보이는 큰 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관악구와 서울대,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 강동구, 성동구, 광진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긴 산줄기들은 수락산과
불암산, 용마산~아차산이다.

▲  호암산 정상과 깃대봉 사이에 자리한 헬기 착륙장

▲  태극기가 펄럭이는 깃대봉(민주동산)

호암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4~5분 정도 가면 태극기가 있는 깃대봉(민주동산)이 나온다. 두꺼
운 바위에 우리의 영원한 국기인 태극기가 심어져 있어 잠시 옷깃을 여미게 하는데, 국기(國
旗)가 걸린 깃대가 있다고 해서 깃대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깃대봉 조망대(민주동산 조망대)가 바로 나오며, 남쪽으로 가면 장군봉
과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쪽으로, 동쪽은 신우초교와 약수사, 서울대 쪽으로 이어진다.


▲  늦가을이 알록달록 타오른 삼성산 돌산 능선
대자연이 지른 늦가을 불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망막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  서울을 굽어보는 깃대봉 조망대(민주동산 조망대)

깃대봉 북쪽 벼랑에 터를 다진 깃대봉 조망대는 호암산 정상 만큼이나 호화로운 조망을 자랑
한다. 서울 대부분의 지역은 물론, 북한산(삼각산)과 수락산 등 서울을 둘러싼 온갖 산들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보이는 범위는 정상과 비슷함)


▲  깃대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서남부(관악구,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와 강서구 지역

▲  깃대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신림동과 난곡을 비롯한 관악구 지역과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서북부 지역

▲  깃대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신림동과 봉천동, 관악구, 동작구, 강남구, 용산구, 남산, 도심부
(멀리 보이는 산이 북한산)

▲  깃대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신림동과 서울대, 관악구. 서초구, 강남구, 서울 동남부, 동북부 지역


깃대봉 조망대에서 하늘 아래 세상을 마음껏 굽어보고 호암산 남쪽 능선으로 움직였다. 호암
산은 시작이 좀 빡세서 그렇지 잠깐의 고생으로 능선까지 오르면 평지만큼이나 느긋하고 부드
러운 곡선의 산길을 즐길 수 있다. 내가 호암산을 즐겨찾기하여 종종 찾아오는 것도 바로 그
매력 때문이다. 또한 호압사와 한우물, 석구상, 호암산성터 등 오래 숙성된 맛좋은 양념도 가
득하니 정말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깃대봉에서 남쪽으로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남쪽으로 가면 장군봉(412m)과 삼성
산으로 이어지고, 서남쪽으로 가면 호암산 남쪽 능선과 남쪽 봉우리로 이어진다. 장군봉이나
남쪽 능선이나 길은 매우 부드럽다.

본글은 내용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에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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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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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도심의 달달한 뒷동산, 초안산 (초안산분묘군, 월계동 비석골근린공원)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이자 조선시대 공동묘지, 초안산 나들이 (초안산 분묘군)



'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이자 조선시대 공동묘지, 초안산 '

초안산 숲길

▲  봄이 무르익은 초안산 숲길

초안산의 조선시대 무덤들 비석골근린공원

▲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

▲  비석골근린공원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화창한 날, 집에서 무척 가까운 초안산(楚安山)을
찾았다.

초안산(114.1m)은 도봉구 창동(倉洞)과 노원구 월계동(月溪洞)에 걸쳐있는 야트막한 뫼로
내가 서식하고 있는 도봉구(道峰區)의 남쪽 끝을 붙잡고 있다.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흙산으로 산세는 아주 느긋하며, 서쪽에는 우이천(牛耳川)이, 동쪽에는 중랑천(中浪川)이
흘러 마치 산을 둘러싸고 도는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동쪽과 서쪽은 자연히 배산임수라는
착한 지형을 띄면서 무덤이나 마을, 집 자리로는 아주 그만이다. 그래서 초안산 주변에는
안골, 녹천, 벼루말, 각심사 등 여러 마을이 둥지를 틀었다. (현재는 개발의 칼질에 모두
날라가 이름만 희미하게 남아있음)
또한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 밖 10리 안<성저십리(城底十里)>에는 대놓고 무덤을 닦을 수
가 없어 천상 도성 10리 밖에 무덤을 써야 했는데 배산임수의 조건을 지닌 초안산이 10리
밖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런 조건들이 묘하게 맞아 떨어져 구파발의 이말산(莉 茉山)
과 더불어 서울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이곳에는 양반사대부부터 내시, 상궁, 중인,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신분을 초
월하며 묻혀 있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시대 무덤만 1,100여 기에 이르러 천하 최대의
조선시대 공동묘지를 이루게 되었다. 산 전체가 거의 무덤밭인 것이다. (무덤은 20세기까
지 들어섰음) 초안산이란 이름도 죽은 이들의 편안한 안식처를 정한다는 뜻이니 그야말로
이곳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비록 서울 지역 최대의 조선시대 공동묘지란 조금은 후덜덜하고 우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
지만 그 덕에 2000년 이후 조금씩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조선시대 무덤 양식과 변천
을 한 자리에서 더듬을 수 있는 소중한 현장으로 뒤늦게 인정을 받으면서 '서울 초안산분
묘군'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440호로 지정되었다. <산 전체가 아닌 무덤이 몰려있는 곳
들이 사적으로 지정됨, 사적으로 지정된 면적은 319,503㎡>
초안산에 안긴 무덤 가운데 내시 무덤이 무려 100여 기에 이르러 '내시산(內侍山)','내시
네 산'이란 별명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무덤은 거의 서쪽(서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는 그들이 일했던 궁궐과 충성을 바쳤던 제왕이 서쪽<정확히는 서남쪽~>에 있어 죽어서도
그 일편단심을 보이고자 함이라 한다.

그렇게 산을 가득 뒤덮은 무덤들은 아쉽게도 예안이씨묘역(정간공 이명 묘역) 등 극히 일
부를 제외하고 관리 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사람들의 못된 손장난 등으로 적지
않게 고통과 파괴를 당했다. 하여 형체를 온전하게 남긴 무덤은 별로 없으며 문인석과 상
석, 묘표 등 석물만 일부 남아있거나 납작해진 봉분이 고작인 무덤이 태반이다. 그러다보
니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이 태반이다. 
다행히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나라와 관할 구청(도봉/노원구)의 보호를 받게 되어 고
통도 많이 줄었지만 워낙 무덤이 많다보니 그 관리도 여간 어렵지가 않다.

초안산은 북한산(삼각산)까지 산줄기가 이어져 있었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그 주변을
마구 들쑤시면서 서로 끊긴 상태이다. (산줄기의 윤곽만 남아있음) 게다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1971년 '초안산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음에도 행정관청의 오랜 무관심과 관
리 소홀로 적지 않은 살을 인간에게 내주면서 그 영역도 많이 줄어들었다. 다행히 서울시
가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 자연의 기운이 많이 살아났다.
그 결과 맹꽁이, 무당개구리, 청개구리 등 다양한 양서류와 파충류가 안기는 공간이 되었
으며, 2006년에는 서울에서 최초로 멸종위기종인 표범장지뱀이 발견되기도 했다. 도시 한
복판에 외로이 자리한 초안산에서 말이다. 또한 2012년에는 생태계 복원 차원에서 두꺼비
, 도룡뇽, 산개구리 등 3종 1,500여 마리를 방사하기도 했다.
한때 골프연습장이 이곳에 숟가락을 얹히고자 난리법석을 피우기도 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산을 지켰다. 그만큼 창동, 월계동 사람들의 소중한 쉼터이자 꿀단지로 뿌리 깊
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초안산은 녹천역(1호선)과 창동주공3단지, 창동주공4단지, 도봉문화정보도서관 서쪽 생태
다리, 창3동어린이집, 초안1단지아파트, 비석골근린공원, 청백1단지, 초안산체육공원에서
올라가면 된다. 정상까지는 넉넉잡아서 15~30분 정도 걸리며, 창동주공3단지에서 오를 경
우에는 30~40분 정도 잡으면 된다.

초안산에는 조선시대 무덤군을 비롯해 비석골근린공원과 각심재, 정간공 이명 묘역, 허공
바위, 잣나무숲, 세대공감공원, 초안산공원캠핑장 등의 명소가 있으며 축구장과 배드민턴
장 등의 체육시설도 닦여져 있다.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낮아 지역 사람들이 주로 찾는 쉼터이자 명소로 머물러 있으나 주머
니 속의 뾰족한 송곳처럼 언젠가는 서울의 잘나가는 명소로 거듭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다. 게다가 늙은 무덤들이 산자락과 산길 도처에 헝클어진 모습으로 흩어져 있으니 내 염
통 상태도 체크하고 소소하게 납량특집도 즐길 겸, 한여름 밤에 야간 산책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달님도 등을 돌린 어둑어둑한 밤이면 효과가 더 좋을 듯 싶다. 혹시 아는가 무덤
이나 문인석 등에서 귀신 형님이나 누님이 확 튀어나와 반가이 맞이해줄지도??


▲  녹천역에서 초안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  초안산 둘러보기 (녹천역에서 정상 주변까지)

▲  봄이 시정(詩情)을 뿌리는 초안산 산길 (녹천역에서 정상 방향)

녹천역(1호선) 1번 출구를 나오면 초안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손짓을 한다. 경사도 느긋하여
그리 힘든 것은 없으며,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은 다양한 색채로 봄 풍경의 아름다움을 돕고
나무들은 녹색 옷을 걸치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봄이 겨울 제국(帝國)을 힘겹게 몰아내고 따스한 기운으로 천하를 해방시키니 세상만물의 찬
양과 우러름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봄이 너무 짧다는 것. 봄이 되기가 무섭게 겨
울에 상반되는 여름 제국이 천하를 삼키니 말이다.


▲  느긋한 산길의 정석, 초안산 산길 (녹천역에서 정상 방향)

▲  초안산 북쪽 능선길 ▼

녹천역에서 초안산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오래된 무덤이 없다. 중간에 생태공원으로 거듭
난 세대공감공원과 창동4단지로 내려가는 산길이 실핏줄 만큼이나 복잡하게 엉켜 있으며 이정
표가 많이 부실하여 잘 골라서 움직여야 된다.


▲  초안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초안산 정상

녹천역에서 20분 남짓 오르니 드디어 초안산 정상(114.1m)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삼각점과 태
극기, 정자, 헬기장 등이 있는데, 나무가 울창하여 조망은 별로이며 나지막하게 누운 뫼의 꼭
대기라 그런지 마치 고양이가 주인 배 위에 올라가 야옹거리며 두리번거리는 기분이다.

여기서 길은 여러 갈래로 갈리는데, 동북쪽은 녹천역과 창동4단지, 서북쪽은 도봉문화정보도
서관과 창1동, 창3동, 서남쪽은 창3동, 남쪽은 매봉과 월계동이다. 초안산의 오랜 문신이나
다름없는 조선시대 무덤을 보려면 서북쪽과 서남쪽, 남쪽으로 내려가면 되며 정상 남쪽 헬기
장 부근부터 무덤의 흔적들이 초췌한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  정상에 자리한 4각형 정자

▲  'H'마크가 박힌 헬기장


▲  헬기장 남쪽에 자리한 무덤 2기와 묘비

헬기장 남쪽 산길 옆에는 무덤 2기가 납작하게 누워 있다. 이들은 원래 저거보다 더 컸지만
후손들의 손길에서 벗어난 이후, 대자연과 장대한 세월의 의해 저런 몰골이 되버렸다. 하긴
천하에 어느 누가 대자연과 세월을 이기겠는가?
주변에 비석과 비석을 세우던 비좌(碑座) 등이 널려있어 얼핏 봐도 무덤 티가 나는데, 묘비와
비좌는 제자리를 약간 벗어나 무덤 옆과 뒷쪽에 널부러져 있다.

▲  무덤 뒷쪽에 누운 비좌
비좌에 의지했을 비석은 온데간데 없고,
그 빈자리에는 빗물이 고여 있다.

▲  헬기장 부근에 외로이 서 있는
문인석 1기


▲  헬기장 남쪽에 있었던 체육시설 (2015년)

헬기장 남쪽에는 체육시설과 너른 공터가 있다. 이 주변에는 자연의 일부로 동화된 무덤의 흔
적과 문인석이 적지 않게 방황하고 있어 무덤이 여럿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초안산의 옛
무덤에 대한 인식이 바닥이었던 20세기 중~후반, 동네 사람들이 그들을 밀어내고 체육시설을
닦았고 상태가 괜찮은 문인석을 주위에 갖다 놓아 이곳의 장식물로 삼았다.
이처럼 무덤 문인석으로 주변을 치장한 체육시설은 천하에서 이곳이 유일할 것인데, 다행히도
근래에 무덤 유적 보호를 위해 배드민턴장을 밀어버렸으며, 지금은 체육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  초안산 정상에서 창3동으로 내려가는 산길
이 산길 주변에도 무덤들이 많다.

▲  무덤 봉분(封墳)은 대자연의 의해 완전 가루가 되었지만 상석과
향로석, 혈(穴)에 해당되는 봉분 뒷쪽은 그런데로 남아있다.



 

♠  초안산 서남쪽 둘러보기 (창3동 구역)

▲  창3동 산자락에서 만난 무덤 3기

초안산 창3동 구역에는 늙은 무덤이 많다. 산자락은 물론이고 산길에도 세월의 무게로 납작해
진 무덤이 널려있어 한밤에 오면 정말 기분이 오싹해질 정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초안
산 분묘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초안산에 깃든 무덤 가운데 가장 늙은 것은 좌의정을 지낸 이명(李蓂, 1496~1572)의 무덤이다.
그의 묘는 월계동 예안이씨 묘역(각심재 주변)에 있는데, 예안이씨 외에 밀양박씨(창3동 지역
), 태안이씨(창3동 지역) 묘역 등 3개의 사대부 집안 묘역이 초안산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
들은 후손들의 보살핌이 각별하여 무덤 상당수가 양호하게 남아있다.
이들 외에는 내시, 상궁, 중인, 서민들의 무덤으로 산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상당수는 관리
의 손길이 끊겨 초췌한 몰골이다. 특히 100여 기에 이르는 내시 무덤 중에는 김계한(金繼韓,
?~1624)과 김광택(金光澤)의 묘가 제일 오래되었으나, 1993년 김계한의 13세손이 경기도 양주
시 광적면 효촌리로 이장시키면서 이제는 인덕대학 뒷쪽 매봉에 자리한 승극철(承克哲) 부부
묘가 제일 늙은 내시의 무덤이 되었다. 묘비에 의하면 1634년에 조성되었다고 나온다.

현재까지 산에서 확인된 오래된 무덤은 2000년 기준으로 1,154기로 상석 511기, 향로석(香爐
石) 210기, 석인상 169기, 묘비 182기, 비석 대좌 123기, 망주석(望柱石) 58기, 초석 2기, 장
명등 1기이다. 하지만 아직도 땅 속에 잠긴 묘와 석물이 적지 않아 그 갯수는 계속 변동된다.
상황이 이리된 것은 후손에게 버려진 묘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런 묘들은 대자연과 몰지각
한 인간들의 희롱으로 대부분 우울한 몰골이 되기 일쑤이고 심지어 도굴까지 당한 무덤도 적
지 않다.

높은 사람들이나 쓸 수 있던 신도비(神道碑)는 앞서 언급한 집안 묘역에 조금 있고, 그 외의
무덤은 묘표(墓表, 묘비)를 지녔다. 묘표는 15세기 형식인 하엽방부형(荷葉方趺形)은 일부이
고, 17~18세기 형식인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의 묘표가 대부분이다. 특히 방형(方形)의 비대
만 남은 것이 많은데 윗면에는 연판문이나 당초문(唐草紋), 옆면에는 안상문이나 운문(雲紋)
을 새기거나 아무 문양도 없는 것이 많았다. 이는 중인과 내시, 상궁, 서민의 무덤이 많기 때
문으로 풀이된다.

남아있는 석인상은 3대 가문 묘역을 비롯해 적지 않게 흩어져 있고 쌍계를 갖춘 동자석(童子
石)도 많다. 이들 석인은 대부분 17~18세기 것으로 18세기 중반 이후 사실주의 양식의 석물도
적지 않아 무덤 석물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상석(床石)은 장방형의 상석 받침을
지닌 형태거나 향로석이 상석 받침과 연결되어 겸용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많다. 이러한 석상
의 형식은 17세기 이후에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상석 받침과 겸용으로 만든 향로석은 18세기
이후 초안산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들 석물을 통해 빠르면 15세기에 무덤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17~18세기에 폭발적으로 늘
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 넓지 않은 산에 무덤이 마구 들어서니 자연히 묘역 구성은 간소
한 밀집형이 주류를 이루며 석물들은 단순하고 실용적인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곳은 특히나 내시묘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조선 제일의 법전(法典)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에 내시의 묘는 도성 10리 밖에 두라는 규정이 있어 그거에 맞는 이곳과 구파발 이말산(莉茉
山)이 무덤 자리로 격하게 선호되었다.
초안산에 안긴 1,100여 기의 무덤들은 '서울 초안산 분묘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40호로 지정
되었으며, 조선 중/후기에 걸쳐 긴 시간에 조성된 조선시대 공동묘지로 비록 상태가 양호한
석물은 별로 없으나 나름대로 무덤과 석물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초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1동, 창3동 / 노원구 월계2동
* 초안산 분묘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202-1, 노원구 월계동 산8-3번지 등


▲  문인석과 동자석까지 갖춘 무덤들 - 이들은 사대부의 무덤으로
무덤의 상태는 그런데로 양호하다.

▲  오랜 세월 표정을 잃지 않으며 주인
무덤을 지키는 문인석의 일편단심

▲  비석과 상석, 동자석을 갖춘 무덤
비석에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라 쓰여있어
통정대부로 추증된 이의 무덤임을 알려준다.

▲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무덤 앞에
자리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무덤

▲  산자락에 가득 깔린 옛 무덤의 물결


▲  봄이 곱게 붓질을 한 생생한 수채화, 창3동 주택가와 초안산 경계선

▲  창3동 주택가에서 초안산으로 오르는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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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안산 창3동 산자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창3동 지역을 비롯해 쌍문동(雙門洞)과 수유동(水踰洞) 지역이
낮게 바라보인다. 그들 너머로 보이는 장대한 산줄기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이다.

▲  초안산 창3동 산자락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위엄
북한산(삼각산)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 등이 거뜬히 시야에 잡힌다.
그만큼 이곳과 저곳은 가깝다.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①
인간이 빚은 봉분은 사라지고 감쪽같이 대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어 나무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결국 무덤도 인생처럼 부질 없는 것이다.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②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③

▲  봉분은 사라지고 상석만 덩그러니
남은 무덤 3기

▲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진 망주석
하늘을 향해 우뚝 섰던 망주석은 땅바닥에
쳐박혀 산길의 일부가 되었다.


▲  창3동 산자락의 작은 소나무숲

▲  소나무숲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무덤 상석들
이곳에는 상석을 갖춘 무덤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소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  마치 칼질을 당한 듯, 윗도리가 잘려나간 가련한 문인석

▲  산길의 일부가 되버린 무덤의 비애
봉분은 말끔히 파괴되어 겨우 흔적만 남아있고, 누렇게 뜬 낙엽이 그 자리에 한가득
쌓여 허전함을 달래준다. 무덤 주변에는 문인석 1기와 윗도리만 겨우 남은
상석이 제자리를 지켜 이곳에 무덤이 있었음을 강하게 어필한다.

▲  피부가 누렇게 뜬 비석(묘표)
피부가 손상되어 글 해독이 불가능하다.

▲  세월에 지쳐 쓰러진 비석이 상석을
베게 삼아 하늘을 바라본다.



 

♠  초안산 동남쪽 둘러보기 (월계동 구역)

▲  초안산 정상에서 비석골근린공원으로 내려가는 산길

초안산 정상에서 남쪽 길로 내려가면 월계동 청백1단지와 비석골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이
구간에도 늙은 무덤이 적지 않게 흩어져 있는데, 4각형 정자 쉼터에 이르면 산길 동쪽으로 철
조망이 빙 둘러져 있다. 그 안쪽은 예안이씨 땅으로 정간 이명을 중심으로 한 예안이씨 묘역
이 둥지를 틀었다.

▲  산길에 널부러진 상석들

▲  수풀에 파묻힌 고적한 상석


▲  파괴된 무덤에 남아있는 조그만 문인석과 상석 (바로 옆이 산길)
문인석이 상석보다 작은 경우는 처음 본다.

▲  4각형 정자 쉼터 (왼쪽 철조망 너머가 예안이씨 묘역)

▲  장대한 세월을 예민하게 탄 시커먼 피부의 문인석
무덤은 사라지고 문인석만 남아 있는데, 자신의 우울한 처지에
너무 울었던 탓일까? 얼굴이 거의 지워졌다.

▲  숲속에서 숨바꼭질을 당하고 있는 상석과 묘표

▲  세월의 때가 진하게 낀 검은 피부의 묘표와 상석
무덤 봉분은 진작에 녹아 없어지고 그 자리에 산길이 뚫렸다. 무덤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무덤 자리를 밟고 지나가니
저 세상에서도 속이 편치 않을 것이다. '내가 이럴려고 무덤을
썼나~~!' 자괴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  산비탈의 일부가 되버린 무덤 (묘표와 상석)

▲  월계고등학교 뒷쪽 숲길 (비석골근린공원 부근)

▲  비석골근린공원 서쪽 산자락에 안긴 옛 무덤들 (내시묘로 추정됨)



 

♠  초안산 비석골근린공원과 궁중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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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골근린공원 내부 ▼

초안산 남쪽 끝에는 비석골근린공원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염광여자메디텍고등학교와
월계고등학교 사이로 비석이 많다고 해서 비석골이라 불렸는데, 그 비석이란 다름 아닌 초안
산에 널린 묘표(묘비)들이다.

이곳은 초안산을 비롯해 노원구 곳곳에서 수습된 문인석과 동자석, 묘표를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공원 주소가 '노원구 월계동'이라 노원구 석물만 있음) 그래서 자연히 문화유산을 겯
드린 상큼한 시민공원이 되었는데, 매년 4월 하반기에는 '임금님과 충신의 만남이 시작된다'
는 주제로 '태강릉 • 초안산 궁중문화제(이하 궁중문화제)'가 열린다.
궁중문화제는 딱히 축제가 없어 애를 태웠던 노원구청이 개최하는 지역 축제로 태강릉(泰康
陵, 중종의 왕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인 태릉, 명종과 인순왕후 김씨의 능인 강릉>
과 비석골
근린공원 일대에서 열리는데, 태강릉은 제왕과 왕후의 지체높은 무덤이고 초안산은 궁궐에서
일했던 내시와 상궁들이 많이 묻혀있으니 이들을 하나로 묶어 궁중문화제란 그럴싸한 행사를
지어낸 것이다.

이 행사에는 어가행렬과 다양한 전통체험, 안골 치성제, 음악회, 포토존, 장터 등이 열리는데
, 내가 이번에 초안산을 찾은 이유 중의 하나도 궁중문화제를 약간이나마 맛보기 위함이다.
허나 내가 도착한 시간은 벌써 17시, 행사도 완전 끝 무렵에 이르러 음악 공연의 끝부분과 약
간의 전통 체험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  신명나는 궁중문화제 음악 공연 (통기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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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철수해버린 관상보기 체험장
나는 과연 무슨 상일까? 물론 관상이나 손금, 사주는 100% 믿으면 곤란하다.

▲  역시나 텅 비어버린 초안산 안골치성제 천막

서울 도심과 한참이나 떨어진 초안산,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안골, 녹천(鹿川), 각심절, 벼루
말 등의 오래된 마을이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불어닥친 개발의 칼질로 죄다 사라지고 그 이
름마저도 이제 희미해져 기억 속으로 꼴까닥하기 직전이다. 그나마 녹천역 남쪽에 있던 녹천
마을이 시골 풍경을 간드러지게 드러내며 늦게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자비 없는 개발의 칼질에
결국 2015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강제 퇴장당하고 만다.

옛날 마을에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이 하나씩은 있었다. 치성제나 당제(堂祭)
등 이름은 틀리지만 본질은 비슷한 마을 제사로 안골 역시 치성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단
합을 도모했다. 안골 치성제는 조선 초기 이후부터 전래된 것으로 소 1마리가 7개의 칼을 맞
고 쓰러져 있던 것을 잡아서 안골, 각심사(각심절), 벼루말 사람들이 매봉 남쪽 허공바위에서
제를 지내니 그것이 안골 당제(치성제)의 시초라고 한다.
그 사연으로 제를 지낼 때는 꼭 7개의 식칼을 놓는다. 왜 하필이면 7개의 칼을 맞은 소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름 상서로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소만 불쌍함;;)

옛날에는 소 1마리를 통째로 잡아서 제를 지냈으나 20세기 이후 약식으로 지내고 있으며 제각
(祭閣)을 두어 제사 도구를 보관하고 음식을 준비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고 말았다.
제는 1년에 3회를 지냈는데, 2월 초하루는 통합적으로 제를 지냈고, 6월 초하루는 할머니산제
라하여 간소하게 소 내장을 갖추어 지냈으며, 10월 초하루에는 소를 통째로 잡아서 지냈다.
제주(祭主)는 마을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나이 많은 남자를 뽑았는데, 3일간 바깥 출입을 금
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제를 준비했다.

허나 198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로 마을이 강제로 사라지면서 마을 사람 대부분은 다른 곳으
로 가버리고 9대째 안골에 살고 있는 박점순 할머니가 마을 제사를 지키고 있어 다행히 치성
제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요즘은 10월 초하루에만 제를 지내며 그날이 되면 각지에 흩어진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허공바위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단에는 대추, 밤, 사과의 3색 과일
과 생소고기를 올리고 향과 초를 켜 옛날부터 전해오던 식칼 7개와 놋숟가락을 놓는다.


▲  비석골근린공원을 장식하고 있는 문인석과 망주석들 ▼

공원 한쪽에는 문인석 13기가 무리지어 있다. 이들은 염광학원과 옛 경춘선 철로변, 영축산(
靈鷲山), 수락산(水落山)에서 가져온 것으로 16~19세기에 조성된 것들인데 세월의 때를 진하
게 탄 문인석부터 피부가 하얀 문인석까지 다양한 모습들이라 문인석의 변천 과정을 살피기에
는 아주 좋은 곳이다.


▲  서로 상반된 피부 색깔을 지닌 문인석들

▲  망주석들 - 염광학원과 불암산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  키 작은 동자석들 - 염광학원과 영축산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  빛바랜 묘표(묘비)와 하얀 피부의 상석, 향로석
비석이 너무 낡아서 글씨는 확인할 수 없다. 저들을 거느리던 봉분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저들만 겨우 남아 공원에 안착했다.

▲  비석골근린공원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 (초안산로5길, 청백3단지 옆)

축제 막바지라 짐싸기 바쁜 비석골근린공원을 벗어나 초안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각심재(恪心
齋)와 정간 이공묘를 찾았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보수 공사 중이라 온 몸을
가리고 있었다. (정간 이공 묘역과 신도비도 접근이 통제된 상태)
그래서 별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굳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사진에 담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
다. 어차피 내 서식지와도 가까운 곳이니 그들의 몸단장이 끝난 이후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 없다.

이렇게 하여 초안산 봄나들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비석골근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779 (월계로45가길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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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꿩고개산 나들이 (강서둘레길, 개화산자락길, 신선바위, 미타사, 치현정)

강서구 개화산 (강서둘레길, 미타사, 치현산)



' 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 나들이 '
(강서둘레길, 미타사, 꿩고개산)

  신선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미타사 석불입상

▲ 신선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 미타사 석불입상

▶ 개화산 호국공원(호국충혼비)

개화산 호국공원 (호국충혼비)


 


서울 서쪽 끝에 솟은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강서구(江西區)의 상큼한 지붕이자 김포국
제공항의 뒷동산이다.
동쪽에 솟은 치현산(꿩고개산)까지 개화산의 영역으로 북쪽은 한강과 맞닿아 있으며, 동
/서/남은 평지로 비록 산은 작으나 평지 속에 홀로 솟은 잇점으로 낮은 키에 비해 조망(
眺望)이 아주 좋다. 게다가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무성해 거닐기에 좋으며, 약사사와 미
타사 등의 오래된 절과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신선바위, 봉화대, 개화산호국공원, 치
현산(꿩고개산) 등의 다양한 명소들, 그리고 강서둘레길과 개화산자락길 등의 일품 숲길
까지 넉넉히 품은 알찬 뫼이다. 그러다보니 그의 매력에 일찌감치 녹아들어 매년 1번 이
상은 꼭 발걸음을 한다.

개화산의 옛적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라고 한다. 신라 때 주룡이란 도인(道人)이 이곳
에 살았는데, 매년 9월 9일에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것을 '9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불렀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9월 9일마다 술
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는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
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워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라 했으며, 그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해서 개화산으로 이름이 갈렸다고 전한다. 또한 산의 모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
는 뜻의 개화산(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그리고 강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과 궁산 양천고성(陽川古城)터와 더불어 한강 하류를
지키는 요충지로 개화산 정상과 꿩고개산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해 변경의 소식을 남산으
로 전달했으며, 6.25때는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했다. 특히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
산이 코끼리, 행주산(幸州山, 행주산성)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
는 액운을 막고, 서울에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으로
크게 소개하고 있다.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계절의 여왕 한복판에 찾은 이번 개화산 나들이는 약사사(
藥師寺)에서 시작해 개화산자락길과 강서둘레길1코스, 신선바위, 미타사를 거쳐 치현산(
꿩고개산)까지 싹 둘러보며 개화산을 철저히 복습했다.



 

♠  개화산 둘러보기 (개화산전망대에서 호국충혼비까지)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자락길
약사사에서 느긋한 산길을 따라 5~6분 가면 개화산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해맞이공원 개화산전망대

약사사 북쪽이자 개화산 북쪽 능선에 개화산전망대가 조촐히 터를 닦았다. 2011년 5월 근교산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한강과 방화대교를 비롯해 하늘공원과 은평구, 서대
문구, 마포구 지역, 남산, 북한산(삼각산), 가양동 지역이 두 눈에 바라보여 낮은 높이에 비
해 조망의 가성비는 높다.
또한 이곳은 동쪽으로 시야가 트여있어 해맞이에 최적화된 곳이라 개화산해맞이공원이란 이름
으로 살아가고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①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1740년부터 5년 동안 조선에서 제일 작은 고을, 양천현(
陽川縣)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그는 양천(서울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김포시 일부)의
명소를 아낌없이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들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양천8경첩(陽川
八景帖)에 실려있어 무척이나 많이 변한 양천 지역과 한강(염창동~행주산성 구간)의 옛 모습
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있다.

개화사(약사사)는 벗인 이병연(李秉淵)의 소개로 찾았다가 그곳 경관에 감탄하여 그림으로 남
긴 것이다. 하나는 한강에서 바라본 시점,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다.
낙건정(樂建亭)은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별서(別墅,
별장)인 낙건정을 그린 것으로 한강 북쪽 덕양산(행주산) 자락에 있었다. 그리고 행호관어(杏
湖觀漁)는 행호(행주산 주변 한강) 주변을 담은 것으로 지금이야 그저 그런 곳이지만 그때는
양반, 귀족들의 별서/유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②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소악루(小岳樓)는 양천
고을의 중심지였던 가양동의 뒷산, 궁산(宮山) 동쪽에 있었는데, 왼쪽 하단에 소악루를 두고
탑산과 두미암, 선유봉, 와우산, 잠두봉(蠶頭峰, 절두산성지) 등의 경강(京江) 서쪽 명소를
담았다. (현재 소악루는 궁산에 복원되어 있음)

금성평사(錦城平沙)는 양천(가양동)에서 바라본 난지도(蘭芝島)를 담은 것이다. 서울의 쓰레
기장이 되기 전에는 홍제천과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너른 저지대로 한강의 폭이
넓어져 경치가 꽤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쓰레기를 딛고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이란 거
대한 자연공원으로 거듭났다.

목멱조돈(木覓朝暾)은 목멱산(남산)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 모습을 담은 것으로 양천에서 바라
본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다. 남산 앞에는 만리동고개, 애오개(아현동), 노고산(老姑山) 등이
그려져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방화대교와 하늘공원(난지도), 고양시 화전 지역, 서울 서북부를 비롯해
멀리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개화산전망대 주변 (개화산해맞이공원)
이곳에 있는 헬기장과 군사시설은 군사 훈련과 예비군 훈련용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니 이들 시설은 건드리면 안된다.


▲  재현된 개화산 봉수대(烽燧臺)

조선은 총 5개의 봉수 노선<거로(炬路)라고 함>을 운영했다. 개화산봉수대는 전남 순천(順天)
에서 시작되어 서울 남산 제5봉수대에서 끝을 맺는 5번째 거로로 김포 북성산(北城山) 봉수대
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 제5봉수대로 넘겼다.

개화산봉수대는 원래 개화산 정상에 있었다. 이곳 외에도 동북쪽 꿩고개산(치현산) 정상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를 개화산 제2봉수대라 부른다. 이들 봉수대는 1950년대까지 있었으나
6.25 시절, 군부대가 정상 주변에 주둔하면서 싹 밀어버리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자리만 겨
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기와조각과 백자 파편, 도기 파편 등이 여럿 수습되었으며 1994년
11월 개화산 봉수대터에 표석을 세웠다.

개화산은 한자만 달리하여 개화산(開火山)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개화산봉수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행주산성, 양천고성(가양동)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시절 행주산성을 지원하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지금까지 군부대가 쭉 주둔하면서 그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강서구청에서 개화산 봉수대를 복원하고자 이
미 복원된 남산 봉수대와 안산 봉수대, 봉화산
(烽火山) 봉수대를 참조하여 2013년 11월에 재
현을 했는데 원래 자리가 금지된 구역이라 북
쪽으로 250m 떨어진 봉화정 맞은 편에 세웠다.
높이 2m, 둘레 4m 규모의 봉수대 2개를 지었는
데, 옛날처럼 불을 피울 일도 없고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이라 딱히 볼품은 없으며, 나중에 개
화산 정상이 해방되면 그곳으로 옮겨져 크게
손질될 것이다.

▲  봉수대 맞은편에 자리한 봉화정(烽火亭)


▲  상사마을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6-1호

봉화정에서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서 개화산숲길을 잠시 접고 강서둘레길 3코스(개화산전망
대↔서남환경공원 북쪽, 4.56km)를 따라 상사마을로 내려갔다.
상사마을은 개화동 북쪽 끝이자 개화산 북서쪽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북쪽에는 행주대교와 한
강이 있고 동쪽은 마을을 포근히 감싼 개화산, 남쪽에는 부석마을과 내촌마을, 서쪽에는 김포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여기서 행주대교와 이어지는 서쪽 도로(개화동로)를 넘어가면 경
기도 김포시임>

마을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으며, 부석마을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마
을이다. <예전에는 김포공항 서쪽 평야 한복판에 자리한 과해동(果海洞)이 서쪽 끝을 이루었
으나 김포공항 확장으로 마을이 철거됨> 마을 동쪽 끝에는 개화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산길이
있으며, 그 앞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마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1971년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약 410년이었다. 그
러니 그새 50여 년이 강제로 얹혀져 460년 정도의 적지 않은 나이를 지니게 되었다. 높이 22
m, 둘레 4.45cm로 상사마을이 적어도 400~500년 정도 되었음을 보여주는 산증인인데, 은행나
무는 스스로 싹을 틔우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사람들이 심은 것이다. 그러니 이 나무도
당시 마을 촌장이나 선비가 심었을 것이다.
나무 옆에는 상은약수터가 있으나 이미 옛날에 숨통이 끊겨 물이 마른지 오래되었으며, 지금
은 마을 창고로 쓰여 이곳이 예전 약수터였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  상사마을에서 개화산으로 올라가는 산길 (강서둘레길 3코스)

▲  봉화정에서 개화산숲길로 들어서다 (강서둘레길 1코스, 개화산둘레길)

상사마을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다시 개화산으로 올라와 개화산숲길에 임했다. 도보길이 천하
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강서구에서도 그 야심작을 내놓았으니 바로 강서둘레길이다.

강서둘레길은 개화산을 중심으로 모두 3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1코스는 개화산을 1바퀴 도
는 3.35km의 상큼한 산길이다. 그래서 개화산둘레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오르락내리락이 도
돌이표처럼 반복될 뿐, 힘든 구간은 거의 없으며, 60분 이내면 충분히 1바퀴가 가능하다. 여
러 전망대가 닦여져 있어 조망의 기품을 누릴 수 있으며, 약사사 윗쪽과 개화산전망대, 미타
사 윗쪽, 신선바위,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지나간다. 하여 이 길과 개화산자락길을 같이
돌면 개화산의 80% 이상을 둘러보는 것과 같다.


▲  나무데크로 이루어진 개화산숲길 (아라뱃길전망대 부근)

▲  아라뱃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라뱃길과 김포시 고촌읍 지역
서쪽을 향하고 있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희대의 세금 낭비의 현장,
아라뱃길이나 구경하라고 만든 의미 없는 전망대이다.

▲  신선바위 윗쪽에서 바라본 천하
비행기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김포공항을 비롯하여 김포평야와 부천 북부,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눈에 들어온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신선바위

개화산은 흙산이라 신선바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바위가 거의 없다. 서쪽을 향해 크게 누워
있는 이 바위는 개화산 산신(山神)이 호랑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위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
게 되었는데, 산신이 이곳을 지나는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다. 산신이
나 신선도 결국 인간이 만든 가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이곳은 개화산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이를 두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천하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여겨 신선바위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개화산 호국충혼비(개화산호국공원)

신선바위를 지나면 미타사로 내려가는 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 둘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 손
에 이끌려 3분 정도 내려가면 호국충혼비(김포지구 전투위령비)를 지닌 개화산 호국공원이 마
중을 한다. 나그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곳은 6.25 때 이곳에서 전사한 국군을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1950년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가 터지자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6.25 이전에는 남한 영역
이었음) 지역을 지키던 1사단은 북한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김포를 거쳐 김포공항까지 후퇴했
다.
개화산에 진을 치고 김포비행장을 지키고자 장비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며 싸웠으나 탄약과
식량보급이 끊겼고, 북한군의 대량 공세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1사단 12연대 3대대 대대장
김무중 소령과 12연대,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 1,100여 명이 안타깝게 전사하고 만다.
이후 호국신(護國神)이 된 그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미타사에서 1993년 12월 31일에 충혼비를
세우고 매년 6월과 가을걷이가 끝나는 11월에 지역 주민들과 1사단 군부대 장병들이 같이 위
령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충혼비와 태극기,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전부였으나 추모의벽과 명각비, 기
념조형물을 새로 닦고 주변을 산듯하게 정비하여 2017년 12월 개화산 호국공원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충혼비 뒤에 병풍처럼 둘러진 검은 피부의 추모의 벽에는 개화산에서 산화
한 1,100용사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 푸른 잔디와 개화산의 녹음(綠陰)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공간으로 호국신들을 기리며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평화로운 모습의 개화산 호국공원 (호국충혼비 주변)


 

♠  서울에서 가장 서쪽 끝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 개화산 미타사(彌陀寺)

개화산 서쪽 자락에 자리해 김포공항과 김포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미타사는 서울에서 가장 서
쪽 끝에 자리한 절이다. 약사사와 함께 개화산에 안긴 늙은 절로 19세기에 '김대공'이 석불입
상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집안의 원찰(願刹)로 세웠다고 전한다.
1924년 절 아래 내촌마을 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줄 것을 청하므로 그해 4월
8일 미륵당(彌勒堂)을 세웠는데, 이때를 절의 실질적인 창건시기로 보고 있다.

그 미륵당이 미타사로 발전했으나 6.25전쟁 때 모두 파괴되었으며, 이후 자리를 조금 달리하
여 절을 재건했다. 1970년 승려 한지일(韓智壹)이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
며, 제자리를 떠났던 지장보살입상을 1993년에 다시 가져와 새 법당에 봉안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절 뒷쪽에 호국충혼위령비를 세워 6.25때 개화산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고 있다.

숲에 감싸인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과 석불, 5층석탑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금의 미타사를 있게 한 오래된 석불입상이 있다. 바로 그를 보고자 이
곳에 온 것이다.

▲  여염집 모습의 미타사 법당
겉은 이래도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  법당에 신세를 지고 있는
산신탱과 칠성탱


이곳의 법당은 그 흔한 기와집 불전(佛殿)이 아닌 여염집 스타일의 집으로 1970년대에 중건되
었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석가여래3존
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93년에 조성된 것이며, 산신과 독성, 칠성 식구들도 법당의
신세를 지고 있다. 그리고 왜정(倭政) 때 석고로 만든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도 있는데,
그는 석불입상 다음으로 경내에서 늙은 존재로 원래 법당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절이 파괴
되자 실종되었다.
이후 인근 군부대 장교가 부대 우물에서 불에 그을린 채 망가진 그를 수습하여 군부대에서 가
지고 있다가 경주(慶州)의 어느 절로 넘긴 것을 1993년에 다시 찾아왔다. 무려 40년 이상 타
향살이의 고통을 겪은 그는 개화산을 점령한 북한군이 화풀이용으로 괴롭히다가 우물에 버린
것으로 여겨진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석불좌상
커다란 바위에 들어앉아 비행기가 수시로 뜨는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김포공항 비행기들이 늘 무탈한 것도 그의 묵묵한 가피 덕이
아닐까 싶다.

▲  미타사 석불입상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김포공항과 김포평야, 인천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날렵한 몸매의 5층석탑

석불입상 뒤쪽에는 경내의 유일한 돌탑인 5층탑이 있다.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하얀 피부를
지닌 잘생긴 탑으로 석탑은 보통 법당 앞이나 경내 안쪽에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자리가 여의
치 않아서 석불입상 뒤쪽 산자락에 두었다.
그는 198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의 단골 신도인 석물 판매업자가 1995년에 기증한 것인데,
그로 인해 미타사는 힘들지 않게 탑을 소유하게 되었다.


▲  미타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9호

석불입상은 이곳의 유일한 문화유산이자 가장 늙은 존재로 여기서는 미륵불(彌勒佛)로 애지중
지하고 있다.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는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이형적(異形
的)인 모습으로 밑도리에는 세월의 고된 때가 자욱한 반면, 그 윗쪽 몸통의 3/4 이상은 완전
하얀 피부라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허나 그것은 함정이다. 근래 교체된 대좌(
臺座)을 제외하고 석불 자체는 순수 늙은 석불이다.

미타사가 있기 전부터 이곳을 지켰던 석불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여러 번
땅속에 묻혔다가 빛을 보기를 반복했다. 19세기에 김대공이 그를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석
불 옆에 절을 세웠다고 전하며, 1924년에 내촌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 현 요사 자리에 미륵
당을 지어 봉안했다. 즉 미타사는 석불의 후광(後光)으로 지어진 절이다.
근래에 요사를 새로 지으면서 석불을 지금 자리로 옮겼으며, 그때 대좌를 새로 만들어 교체했
고, 옛 대좌는 석불 주변에 두었다.

석불 머리에는 동그란 갓돌이 씌워져 있고, 얼굴 표정은 좀 일그러져 있다. 아마도 순탄치 못
한 삶을 살아서 그리된 모양이다. 얼굴은 거의 동그란 모습이며, 눈과 눈썹, 입은 선으로 처
리했고, 코는 매우 오똑하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은 긴 편으로 삼도(三道)는 보이질 않으며, 몸통은 매우 길쭉하다.
두 손은 가슴 앞에 서로 교차되게 모으고 있는데, 그만의 특이한 수인(手印)으로 손가락이 꽤
두껍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을 하고 있으며, 다리와 발 등의 밑도리는 옷에 가려져
생략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로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몸통이 길며, 특이한 신체 표현과 밑도리를
생략하는 센스, 갓돌 모양의 보관(寶冠) 등에서 고려 때 큰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오
랜 세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음에도 피부도 하얗고 건강도 양호하며, 약사사 석불입상과 함
께 서울에 몇 없는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이란 점이 인정되어 2008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산81-24 (개화동로13길 56-33 ☎ 02-2662-4736)


▲  석불입상의 옛 대좌
커다란 석불입상이 사용했던 늙은 대좌로 근래 새 대좌로 갈아탔다. 하여
옛 대좌는 옆으로 물러나 막연히 허공을 이고 있다.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공항과 김포평야

미타사를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강서둘레길1코스(개화산숲길)로 돌아와 남쪽으로 조금 가
면 '하늘길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나무데크 형태로 닦여진 전망대로 서울의 하늘길을 책임지고 있는 김포국제공항과 그
곳을 오가는 비행기 구경에 최적화된 곳이다. 하여 전망대 이름도 하늘길이다. 여기서는 김포
공항 뿐 아니라 김포평야와 인천 계양구, 계양산(桂陽山), 부천 북부 지역, 김포 고촌읍 지역
이 두 눈에 들어와 조망 수준도 괜찮은 편이며, 국내선과 국제선 비행기가 5분이 멀다하고 공
항을 들락거려 김포국제공항의 높은 위엄을 보여준다.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평야와 개화동, 계양산

▲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하늘길전망대를 지나 무장애숲길(나무데크길) 남쪽 기점에서 개화산자락길 서쪽 길로 갈아탔
다.
개화산자락길은 '방원중학교~금낭화로17길~약사사 표석~개화산전망대' 구간의 동쪽 길과 '하
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 구간의 서쪽 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쪽 길은 북까페 주변
이 무장애숲길로 이루어져 있어 천하에서 가장 편한 둘레길로 찬양 받는 안산(鞍山) 자락길을
긴장시킬 정도로 큰 편안함을 보여준다. 북까페 주변을 제외하고는 흙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사가 느긋해 거닐기 좋으며, 길 중간에 근래 세운 개화산 정상 표지석이 있다.


▲  방화근린공원 방면 개화산숲길
개화산 자락길 무장애숲길을 지나 약사사 표석에서 다시 개화산 숲길로 갈아타고
방화근린공원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치현산이란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개화산 동쪽에 솟은 작은 뫼, 치현산(雉峴山, 꿩고개산)

▲  치현산 공원길 입구

개화산 동쪽에는 꿩고개(70.5m)라 불리는 야트막한 산줄기가 있다. 개화산의 일원으로 방화동
(傍花洞) 시내와 한강 사이에 자리하여 강바람을 막아주는 병풍 같은 존재로 동서로 짧게 이
어져 있는데, 순 우리말로는 꿩고개(또는 꿩고개산), 한자로는 치현산이라 부른다.
이곳이 꿩과 관련된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2가지 설이 있다. 지금은 실감이 별로겠지만 옛날
에는 꿩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꿩사냥을 하기에 좋은 곳이라 꿩고개라 불렸다는 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꿩을 뜻하는 한자인 치(雉)가 꿩 외에도 성곽에 달린 방어시설도 뜻한다.
아무래도 개화산이 강 건너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는 요충지였고, 정상에 개화산
동봉수대가 있다보니 방어시설을 뜻하는 치를 사용했다가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이름 꿩
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꿩고개에는 강서둘레길 2코스인 공원길이 닦여져 있는데, 길 하나로 이루어진 1코스(개화산숲
길)와 달리 2갈래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시작점은 개화산숲길과 만나는 방화근린공원이며,
여기서 산길과 벚꽃길(수레길)로 분리되어 있다. 분리된 길은 마곡서광아파트 부근에서 잠시
만나지만 여기서 서남환경공원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2갈래로 갈려 공원을 1바퀴 돈다. 총 길
이는 4.5km로 서광아파트 서쪽은 산, 동쪽은 평지 공원이라 길은 거의 느긋하다.


▲  주민 혐오 공간에서 친화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방화근린공원 벚꽃길

방화택지 북쪽이자 개화산과 꿩고개산 사이에 넓게 터를 다진 방화근린공원은 1996년에 조성
되었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이 땅의 흔한 시민공원이나 수목이 울창하고 연못과 분수대, 광장, 물레방아 등이 공원 곳곳을 수식하고 있으며, 쉼터가 많아 소풍 장소로는 아주 제격이
다.
산책로가 개화산과 꿩고개산으로 핏줄처럼 이어져 있고, 불법주차와 덤프트럭의 통행으로 꽤
나 시끄럽던 공원 북쪽 길을 손질하면서 100여 그루의 벚꽃을 심어 상큼한 벚꽃길을 닦았다.
하여 이제는 서울의 어엿한 벚꽃 명소의 성지로 추앙을 받고 있다.


▲  숲이 무성한 치현산 서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  짙은 녹음 속으로~~ 치현산 서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  치현산 북쪽 벼랑에 매달린 치현정(雉峴亭)

치현산에 왔다면 꼭 가봐야 되는 명소가 있다. 바로 산 북쪽 벼랑에 깃든 치현정이란 팔각형
정자이다. 이곳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 나올 정도로 오래된 존재는 아니지만 강서구에서 한참
강서둘레길을 닦던 2012년, 강서구새마을금고협의회에서 만든 것으로 한강이 바라보이는 벼랑
에 자리한 탓에 조망도 제법 괜찮아 사진쟁이들의 발길이 잦다. 특히 야경이 아주 일품이다.
하여 겸재의 '행호관어(杏湖觀漁)'의 현대판 버전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사진으로 말이다.
물론 그때와 비교하면 완전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이곳도 결코 그
진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행주대교, 일산신도시
치현정 바로 앞으로 올림픽대로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펼쳐져 차량의 굉음이 대단하다. 그러니 그 소음을
감안하고 이곳의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 건너에 길게 누운 뫼가 행주대첩(幸州大捷)의 현장인 행주산이다.
행주산 앞 한강을 예전에는 행호라 불렀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③
방화대교와 고양 화전 지역, 앵봉산~봉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 노고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잡힌다.

▲  치현산 동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산은 작지만 숲이 생각 외로 짙어 마치 깊은 산골에 푹 묻힌 기분이다.

▲  치현산을 정리하며, 치현산 동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치현산 능선을 완전히 가로질러 산 동쪽 끝에 자리한 치현둘레소공원으로 내려갔다. 마곡서광
아파트 북서쪽에 자리한 작은 공원으로 치현산을 중심으로 한 꿩고개근린공원의 일원이다. 강
서둘레길2코스가 이곳을 지나며 동쪽을 서남물재생센터와 서남환경공원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하여 치현산까지 겯드린 개화산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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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7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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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정릉계곡 나들이 (형제봉, 보현봉, 청수천약수)

북한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 북한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봄나들이 ~~~ '

북한산 일선사에서 바라본 서울
▲  일선사에서 바라본 형제봉능선과 서울시내

영취사 5층석탑

형제봉 능선에서 바라본 보현봉

▲  영취사 5층석탑

▲  형제봉능선과 보현봉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을 하루 앞둔 어느 평화로운 봄날, 북한산(삼
각산) 형제봉능선 밑에 깃든 영취사를 찾았다. 영취사는 북한산성 대성문에서 정릉으
로 내려오면서 여러 번 거쳐간 인연이 있는데, 그곳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늙은 5층
석탑이 있다. 허나 그를 제대로 사진에 담은 적이 없어 이렇게 출동한 것이다.

북한산(삼각산) 기점의 하나인 정릉(貞陵) 코스는 어렸을 때부터 익혀온 길이라 이쪽
은 아주 잘 안다고 자부를 했었는데, 시작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 아주 초보적인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날이 초파일 직전이라 절까지 연등이 대롱대롱 달려있기 마련인데,
내가 빠진 길(정릉계곡~신성천약수터 방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만 했을 뿐, '조금만 가면 영취사로 가는 길이 나오겠지' 싶은 안
일한 생각으로 계속 고집을 부리니 신성천약수터와 이상한 능선길이 나온다. 이거 왠
능선인가? 싶어 살펴보니 글쎄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던가. 길을 완전히
잘못 들어선 것이다.
허나 형제봉능선에서 영취사나 정릉계곡으로 바로 빠지는 길은 헝클어진 수준의 비법
정길 외에는 없어 일선사입구까지 강제 등산을 해야 된다. 거기까지는 가야 영취사로
가는 법정 탐방로가 나온다. 하여 일정에도 없던 일선사(해발 560m)까지 강제로 덤으
로 보고 영취사로 내려가 5층석탑을 친견한 다음 정릉으로 원점 회기했다. 간단히 영
취사만 보려고 출동한 것이 잠깐의 실수로 아주 파란만장한 북한산 등산이 되버린 것
이다.


▲  두 암벽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북한산 정릉계곡 하류
(정릉탐방지원센터 서쪽)



 

♠  뜻밖에 인연들, 형제봉능선을 거쳐 일선사까지

▲  정릉계곡 하류에서 형제봉능선으로 인도하는 숲길

정릉 코스는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주요 기점의 하나로 도심과 매우 가깝고 교통
편 또한 착하여 이곳을 이용하는 등산/나들이 수요가 상당하다. 정릉동 북한산국립공원 종점(
110, 143, 162, 1020, 1113번 종점)에서 4~5분 정도 가면 정릉탐방지원센터가 마중을 하는데,
여기서부터 풍경은 180도 바뀌어 대자연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정릉계곡을 옆에 끼고 5~6분을 더 들어가면 다리 직전에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다리를 건너
면 정릉계곡 상류와 북한산성 보국문, 영취사로  이어지며, 서쪽 길은 형제봉능선으로 빠진다
. 허나 오랜만에 정릉 코스를 찾은 탓일까? 아니면 1살을 먹은 휴유증 때문일까? 판단을 잘못
하여 그만 서쪽 길로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 더 들어가야 영취사로 가는 산길이
나옴)
아무리 아는 길이라도 돌다리를 꼭 두들겨 패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뒷탈이 없는데, 자만 때
문에 뜻하지 않은 강제 고행의 길을 밟게 되었다.


▲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숲길

▲  빨간줄이 그어진 신성천(新盛泉) 약수터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숲이 매우 짙다. 게다가 사람도 별로 없어 고적하기만 하다. 초
파일 연등이 걸려있지 않아 이상하게 여겼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길을 임하니 완전히 숲
속에 묻힌 신성천약수터가 마중한다.
내 데이터에는 전혀 없는 곳이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이라도 한 모금 축낼까 했더니 안내문
에 빨간색 줄 2개(부적합 판정)이 매정하게 그어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다. 게다
가 봄가뭄으로 인해 걸려있는 바가지들이 무색할 정도로 물까지 말라버려 목도 축이지 못하고
바로 길을 재촉했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보현봉(普賢峰)
보현봉 밑에 일선사가 자리해 있고 봉우리 너머에 북한산성이 숨어 있다.


신성천약수터에서 5~6분 정도 오르면 낯설은 능선길에 이른다. '여기는 도대체 뭔가?' 두리번
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니 뜻밖에도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니던가. 그 길을 20여 분 오
르면 형제봉 밑도리에 이르게 되고 그 북쪽(형제봉3거리)에서 형제봉능선에 합류하게 된다.

형제봉(兄弟峰)은 평창동(平倉洞) 동쪽에 우뚝 솟은 북한산(삼각산) 남쪽 봉우리로 큰 형제봉
463m)과 작은 형제봉(461m)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형제처럼 다정하게 보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형제봉능선이라 부른다. 이 능선은 종로
구와 성북구(城北區)의 경계선 역할도 하고 있으며, 동서로 조망이 펼쳐져 썩 괜찮은 산길로
추앙을 받는다. 그 조망의 끝판왕은 보현봉 밑에 자리한 일선사이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칼바위능선
사진 가운데에 바위가 짙게 깔린 곳이 칼바위로 북한산에서 이름난
바위 능선길이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산 밑에 정릉동과 길음동을 비롯하여 성북구, 강북구, 중랑구, 동대문구,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구리시 등이 바라보인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동대문구, 아차산 산줄기, 강동구,
구리 지역


형제봉 능선에서 나의 목적지인 영취사로 가려면 천상 일선사입구까지 가야된다. 중간에 동쪽
으로 내려가는 헝클어진 수준의 비법정 탐방로와 비밀 샛길이 일루 오라며 유혹을 건네나 그
길의 속내를 알 수가 없고 괜히 조금이라도 빨리 가겠다고 금지된 그 길로 발을 들였다가 길
이 더 꼬일 수 있다.

형제봉 능선길은 부드러움과 각박함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각박하다고 하여 그렇게 절망
적인 길은 아니며 이 땅에 흔한 초급 능선길이다. 형제봉 북쪽에서 잠시 내리막길이 이어지다
가 다시 오르막길이 몇 배 이상으로 펼쳐지며,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느긋한 수준이다.


▲  푸른 옷을 두텁게 두른 형제봉(463m)
형제봉 정상은 접근이 가능하다. 허나 시간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고 통과했다.

▲  계단을 이루고 있는 형제봉 북쪽 능선길
능선 북쪽에 일선사가 자리해 있어서 평창동(동령폭포) 갈림길 이후부터는
길이 괜찮게 닦여져 있다.

▲  숲터널을 이루며 넓게 닦여진 형제봉 북쪽 능선길
숲의 등등한 기세에 뜨거운 햇살도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  일선사 입구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발에 불이 나도록 속도를 내며 오르니 어느덧 일선사입구에 이
르렀다. 여기서 왼쪽 길은 일선사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대성문 방면으로 그 길을 조금 가면
바로 오른쪽에 영취사, 정릉으로 내려가는 정식 탐방로가 있다.
여기서 '일선사를 보고 가는가? 그냥 통과하는가?'를 두고 잠시 갈등을 하였다. 아무리 햇님
의 근무 시간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시간은 벌써 17시가 넘었고, 일선사는 막연히 선학원 소속
의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땡기지가 않았지. 허나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어
찌 생긴 절인지 잠깐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여기서 일선사까지는 200m 거리, 그 산길의 끝에는 일선사가 일품 조망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인공티가 너무 거슬리는 대성문 방면 산길 (일선사입구에서 대성문 방면)
산길의 야성을 순화시키고자 인공티를 너무 과하게 넣은 것 같다. 죽도록 힘든
 구간이 아닌 이상은 흙길로 그냥 두는 것이 진정한 산길이 아닐까 싶다.


▲  일선사입구에서 일선사로 인도하는 산길
오색연등만 따라가면 별탈 없이 일선사에 이른다.



 

♠  서울에 있는 사찰 가운데 가장 조망이 우수한 절집, 절은 작지만
대도시 서울을 앞뜰로 삼은 ~ 북한산 일선사(一禪寺)


▲  일선사 대웅전(大雄殿)

일선사는 보현봉(普賢峰) 동쪽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튼 고적한 산사(山寺)이다. 첩첩한 산
주름에 묻힌 진정한 산사로 시내와도 멀리 거리를 둔 산속이라 제아무리 찰거머리 번뇌라도
감히 따라오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평창동 평창공원지킴터에서도 1시간 이상을 올라
가야 되며 정릉동 종점에서도 비슷한 시간을 내던져야 이를 수 있으니 이곳에 궁벽한 위치를
알만하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일선사는 북쪽과 서쪽은 보현봉으로 막혀있어 가파른 벼랑을 이루
고 있고, 남쪽은 낭떠러지에 가까우며, 오로지 동쪽에 바깥 세상과 이어지는 외줄 산길이 있
다. 절은 위치상 도심이 보이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규모는 비록 작지만 조망(眺望) 하나
는 천하 일품이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자연히 앞뜰로 삼고 있어 뜨락
또한 기가 막히게 넓다.
특히 서울 사찰 중 조망 맛집 1위를 거머쥔 산사로 가까이에 평창동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을 비롯하여 종로구, 중구, 성북구, 동대문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강동/송파구, 강남/
서초구, 동작/관악구, 금천구, 영등포구, 마포구, 관악산~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산줄기, 남
한산성까지 아낌없이 시야에 잡힌다. 절과 방향이 다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은평구, 서
대문구, 강서구, 양천구 등을 제외하면 서울의 상당수가 일선사에 몸을 보이는 셈이다.
그럼 조망 맛집 2위 사찰은 어딜까? 그곳은 400m 고지에 자리한 도봉산 원통사(圓通寺)로 도
봉구, 강북구, 노원구,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아차산 산줄기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조
망 맛집 3위 사찰은 310m 고지에 자리한 호암산 불영암(佛影庵)으로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
구, 광명시, 인천 지역 등이 바라보인다. (1~3위는 그곳을 다녀간 경험을 바탕으로 순위를 매
김)

일선사는 조망도 좋은 만큼 구름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서울 사찰 중 3번째로 하늘과 가
깝다. 제일 하늘과 맞닿은 절은 북한산 문수사(文殊寺)로 해발 640m에 자리해 있지만 조망은
조망 1~3위 절보다는 못하며, 2위는 도봉산 관음암(觀音庵)으로 해발 560~570m 고지이다. 그
다음이 이곳 일선사가 되겠다. 해발고도와 조망 부분에서 가히 서울 사찰 으뜸의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일선사는 언제부터 법등(法燈)을 켰을까?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일선사는 그저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내 생각과 달리 나이
를 제법 먹은 절이라고 한다. 절에서 들려주는 창건 설화에 따르면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
詵國師)가 보현봉 밑 보현굴(다라니굴)에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니 그것이 일선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허나 관련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그저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
다.
창건 이후 탄연(坦然)이 절을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는 없으며, 태조 이성계(李成桂
)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면서 서울(한양)로 콩 볶듯이 도읍을 옮기자 무학대사(無學大
師)가 보현사를 두고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터로 격하게 띄워주면서 태조의 명으로 중수했다
고 한다.
서울이 조선의 도읍이 된 이후, 서울 주변에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절(호압사, 개운
사, 사자암 등)이 많이 생겨났는데, 일선사도 그때 지어진 절이 아닐까 짐작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옛날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1600년 이후 서울을 지키
는 외곽 수호사찰로 인정되어 왕명으로 중창했다고 하며, 이후로 300년 이상 뚜렷한 발자국이
전하지 않아 조그만 석굴 암자 규모로 터를 유지하거나 얼마 가지 않아서 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0년에 이르러 절의 화주(化主)인 김만신행이 원래 보현굴 자리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지금의 자리에 절을 옮기고 절 이름을 관음사(觀音寺)로 갈았는데, 이를 통해 왜정 때 작게나
마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1957년 시인 고은<高銀, 법명 일초(一超)>)이 이곳에 머물며 절 이름을 도선대사의 '선'. 자
신의 법명인 일초의 '일'을 따서 일선사(一詵寺)로 갈았으며, 1962년 재단법인 선학원의 일원
이 되면서 가운데 한자만 바꾸어 지금의 일선사(一禪寺)가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정덕(幀德)
이 주지로 들어와 30년 동안 불사(佛事)를 일으켜 지금의 일선사를 이룩했다.
그는 1994년에 옛 법당을 밀어버리고 대웅전과 약사전, 요사를 새로 짓거나 증축했다. 그리고
많은 탱화와 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했으며, 절로 이어지는 길을 정비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약사전, 요사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절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고는 하나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산산히 사라져 고색의 유물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망은 가히 일품이라 그것으로 절의 부족한 부분이 많이 커버된다. 특히 대웅전은 어느 절
법당(法堂)에 못지 않은 큰 규모라 내심 놀랬다.
원래 절 자리에는 보현굴(다라니굴)이란 석굴이 있는데, 조선 초에 활약했던 기화함허(己和涵
虛)를 비롯해 많은 승려가 그곳의 신세를 졌다고 한다. 현재 절 자리는 1940년 이후이니 일선
사의 과거를 들추려면 보현굴 주변을 뒤집는 수 밖에는 없다.


▲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상
초파일을 맞이하여 미리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광합성 작용을 받고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 앞이 협
소하여 그나마 조금 트인 측면(동쪽)에 대웅전 현판과 출입문을 내어 좁은 측면을 정면으로
삼고 있는데, 건물 내부에는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석가여래3존상을 위시하여 칠성탱과 중생
들의 소망을 머금은 조그만 원불(願佛)이 가득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칠성탱(七星幀)

▲  대웅전 뒷쪽에 자리한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약사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하얀 피부의 작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중심으로 풍만하게 생긴 금동관세음보살상,
산신(山神)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등이 들어있는데, 이들은 20세기 후반에 마련된 것으로 보
통 산사에는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등 삼성(三聖)의 보금자리를 따로 두기 마
련이나 일선사는 자리가 협소하여 약사전과 대웅전에 나누어 배치했다.

▲  약사전 약사여래불과 약사후불탱,
관세음보살상

▲  산신 가족의 단란한 가족 사진
산신탱(山神幀)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①
종로구,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성동구, 송파/강동구 등


요사(寮舍) 동쪽에는 물통과 의자 등이 있는 쉼터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이곳은 조망
이 아주 좋은 자리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이 나의 발 밑에 펼쳐져 올망졸
망 펼쳐져 있어 잠시나마 천하의 주인이 된 듯 즐거운 기분이 든다. 이런 것이 바로 산을 타
는 재미의 하나이지. 허나 현실은 저 너른 땅에서 내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땅은 나의
작은 집 외에는 단 한 뼘도 없다는 것. 그것이 뼈저린 함정이다.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②
사진 중앙에 보이는 산이 내가 거쳐갔던 형제봉이다. 그 너머 길쭉한 산줄기는
북악산(백악산)이며, 그 너머로 종로구, 중구, 남산, 성북구, 성동구,
강남/서초구, 대모산,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③
형제봉과 북악산을 중심으로 인왕산,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마포구,
강남/서초구, 동작/관악구, 관악산, 호암산이 바라보인다.


일선사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초파일 준비로 승려와 보살 아줌마들이 꽤 부산했다. 낼 중생들
에게 제공할 공양밥과 국을 큰 솥에 미리 만들고 있었는데, 이곳 공양밥 맛이 제법 좋다고 한
다. 초파일 외에 동짓날에는 팥죽을 제공하며, 일요일 점심 시간(12~13시)에도 공양을 제공한
다고 하니 그때 이곳을 지날 일이 있다면 잠시 들려서 한 그릇 들고 가는 것도 좋다.

일선사에서 보현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비법정으로 묶여서 금지된 산길이 되었다. 그래
서 이제는 완전 막다른 곳이 되어 천상 왔던 길로 돌아나가야 된다. 그렇다고 금지된 길을 무
리해서 가지는 말도록.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유명한 말도 있고, 괜한 모험에 인생을 거는 것
만큼 무모한 것은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산6-1 (평창6길 79-141 ☎ 02-379-8697)


▲  일선사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길 (일선사입구 방면)



 

♠  늙은 석탑을 지닌 깊은 산골의 절집, 북한산 영취사(靈鷲寺)

▲  영취사 5층석탑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0호

일선사에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입구로 내려갔다. 여기서 정릉 방면 산길로 접어들어 원
래 목적지인 영취사로 내려갔는데 그 길이 속세살이만큼이나 제법 각박한 경사였다. 다행히도
내려가는 길이라 덜 힘들지 만약 이 길로 올라왔다면 제대로 땀을 뺐을 것이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별로 남지 않았고 지나가는 산꾼도 없는 상태라 걸음을 몇 배로 재촉하여
미끄러지듯 10분을 내려가니 인기척 소리가 조금씩 들리면서 숲 사이로 영취사 지붕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듣는 인기척만큼 썩 반가운 것은 없지~! 그렇게 1굽이를 내려가니 영취
사에 이른다. 이 산길은 영취사 경내를 거쳐가기 때문에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절을
경유해야 된다.

경내에 이르니 이곳 역시 초파일 준비로 조금은 부산해 보였다. 사람들이 연등을 달거나 청소
를 하면서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침 18시가 넘은 상태라 밥 연기도 모락모락 피어올라 나
의 시장기를 자극시킨다. 영취사도 초파일과 동짓날, 그리고 일요일 점심에 산꾼과 중생들에
게 공양밥을 제공한다. 비빔밥 또는 국수를 주고 있는데, 혹여 저녁공양이라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새가슴 마냥 요사 주변을 기웃거려봤지만 결국 먹지는 못했다. 예전에는 공양
1그릇 먹고 가도 되냐고 막 들이밀고 그랬는데 나이를 먹으니 점점 소심해지는 것 같다.

해발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영취사는 '절간답다'는 말이 아주 어울릴 정도로 고적한 산사이
다. 경내 주변이 죄다 숲이라 여기서는 하늘 밖에 보이지 않으며, 남쪽이 확 트여 형제봉능선
에서도 능히 바라보이는 일선사와 달리 숲에 푹 묻혀있어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정도
로 심산유곡이다.
허나 일선사와 달리 등산로가 경내를 지나가 주말, 휴일에는 지나가는 이들이 많다. 등산로가
접한 경내 밑부분에는 쉼터와 5층석탑이 있고, 거기서 1단계 올라가면 요사가 있으며, 다시 1
단계 오르면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  우중층한 대석(臺石) 위에 자리한 영취사 5층석탑

내가 영취사를 간만에 찾은 것은 경내에 서린 늙은 5층석탑을 보고자 함이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 석탑은 울퉁불퉁하게 생긴 커다란 대석 위에 작게 서 있는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히고 그 위를 연꽃무늬 석재로 마무리를 했다. 여기서 2중 기단과 5층
탑만 원래 것이고 나머지는 탑의 초라함을 달래고자 20세기 중반 이후에 새로 덧붙인 것들로
탑 자체는 아주 작은 수준이며 어쩌면 천하에서 가장 작은 석탑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원래 요사 앞에 기단부가 묻힌 상태로 있었다고 전한다. 문병대 박사가 직접 찾아와 그
를 평가하니 무려 고려 후기~조선 초기 석탑으로 밝혀졌다. 마침 서울에 토박이 석탑이 별로
없고 고려 말~조선 초기 탑이 매우 희귀하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어 이곳의 듬직한 꿀단지
가 되었다.
이후 탑은 보다 넓은 지금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여러 장의 돌을 높이 쌓아 대석을
다진 다음 조그만 탑을 올려 키를 높였다. 탑의 왜소함을 극복하고자 대석을 쌓았지만 오히려
대석이 너무 지나치게 커서 탑이 더욱 작아 보인다.
기단은 2중으로 밑 기단은 조금 높으나 고된 세월의 상처가 남아있으며, 손상된 부분 사이에
는 잡석을 끼웠다. 윗 기단은 밑 기단에 비해 높이가 약간 낮으며, 그 위에 5층 탑신을 올렸
는데, 윗층 옥개석(屋蓋石)과 연꽃무늬 석재는 새로 만든 것이다. 탑신은 1층만 달랑 남아있
고 윗층 탑신은 납작하여 무늬만 남은 실정인데,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으며, 1층 탑신 중앙에 감실(龕室) 같은 것이 뚫려 있어 불상을 봉안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은 두툼하나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흔적이 적지 않으며 머리 장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사라졌고 근래 만든 연꽃무늬 석재만 달랑 놓여있다.

기단부와 탑신의 구성법, 간략화된 옥개석 층급(層級) 표현 등을 통해 고려 후기~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토박이 탑으로 가치가 인정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동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기단과 탑신)

▲  북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늙은 5층석탑을 지니고 있는 이곳 영취사는 1962년에 신정옥(申貞玉)이 세웠다. 그는 1928년
7월 14일 충남 예산군 신례원에서 독립운동가 신현상(申鉉商)의 딸로 태어났는데, 불명(佛名)
은 대지행(大智行), 호는 초일(草一)로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수양녀(收養女)이기도 했으며,
1947넌에 마곡사(麻谷寺)에서 칩거 수양을 했다.
1972년 영취사 법당을 중건하고 요사를 신축했으며, 계속 절을 살펴주어 경내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의 남편은 강성진으로 삼보증권회장 및 대한증권업협
회장을 지냈으며, 자녀 또한 모두 사회에서 듬직한 지위를 누렸다.


▲  정면에서 바라본 5층석탑 (기단과 탑신)
중생들이 갖다놓은 작은 불상과 동자상들이 석탑에 기대어 앉아 그들만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고 있다.

▲  5층석탑 앞에 마련된 관불의식의 현장

5층석탑이 영취사의 유일한 보물이자 듬직한 꿀단지라 그 앞에 관불의식의 현장을 정성스럽게
닦아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은 초파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꽃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의식
의 현장에 주인공인 아기부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1년 만에 외출을 할 생각에 그도 마음이
너무 설레서 긴장이 된 모양이다. 

▲  영취사 요사 (선방, 공양간)

▲  대웅전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아주 조촐한 모습의 용왕각(龍王閣)

▲  용왕각에 봉안된 용왕탱

5층석탑에서 대웅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오른쪽에는 선방(禪房)과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
을 도맡고 있는 요사가 있고, 왼쪽에는 장난감 집처럼 아주 조그만 용왕각이 있다. 바다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이런 첩첩한 산골에 바다 용왕(龍王)의 거처인 용왕각이라...? 옛날에 이곳
이 바다였을까?
허나 용왕이라고 꼭 바다만 관리하라는 법은 없다. 그는 바다를 비롯해 천하의 모든 물을 관
리하는 존재라 물이 늘 풍족히 나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의 거처를 만들어 봉안한 것이다.
용왕각 옆에는 샘터가 있으나 물이 거의 없었고, 대신 요사 밑에 따로 샘터를 만들어 물을 제
공하고 있다.

▲  대웅전 - 기존 맞배지붕 건물에
1칸을 덧붙인 구조이다.

▲  삼성각(三聖閣) - 산신과 칠성,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서울
이곳도 결코 낮은 곳은 아니지만 삼삼한 숲의 방해로 겨우 일부만
시야에 들어온다.

▲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경내 (바로 밑 지붕이 요사)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3존상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3존상을 이루고 있다. 후불탱이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으며, 그 좌우로 신중탱 등 온갖 탱화들이
대웅전 내부를 환하게 비쳐준다.


경내 높은 곳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건물이 다들 조그만 수준으로 1974년 이후
에 중건을 하여 아직 고색의 때는 익지 못했는데, 대웅전 불단에는 벌써부터 갖다놓은 온갖
공양물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영취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1 (☎ 02-911-0005)


▲  대지행 신정옥 영취사 창건 공덕비
창건주 신정옥을 기리고자 절에서 정성을 다해 지은 공덕비이다.



 

♠  북한산(삼각산) 마무리

▲  한데 뭉쳐진 커다란 바위들 (영취사 남쪽)
바위의 모습이 썩 예사롭지가 않아 보여 예로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절찬리에 쓰였던 듯 싶다. 대자연이 그어놓은 주름선들도 멋지고 말이다.


영취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벌써 18시 반이 넘었다. 나날이 길어지는 연장 근무에 입이 한참이
나 삐죽 나왔을 햇님 덕에 아직까지 환한 낮을 유지하고 있지만 산속이 도시보다 밤이 일찍
온다. 그래도 그날의 목적을 모두 이루었고, 거기에 일선사라는 강제 보너스도 받았으니 보람
찬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영취사를 뒤로 하고 정릉계곡을 따라 정릉 기점으로 내려갔다. 이제는 오로지 내려가기만 하
면 되는지라 힘든 것은 없으며, 영취사에서 조금 내려가면 삼봉사 입구가 나온다. 이곳은 딱
히 끌리는 것이 전혀 없는 현대 사찰이라 그냥 통과했다.


▲  속세로 인도하는 정릉계곡 산길 (삼봉사 입구 부근)

▲  계곡과 나란히 이어지는 산길 (삼봉사 입구 남쪽)

▲  가늘게 실타래를 풀어내는 작은 폭포 (폭포 이름은 없음)

▲  푸른 숲터널을 이루는 정릉계곡 산길

▲  마이산(馬耳山) 탑사 돌탑의 후예일까? 거대한 돌탑의 위엄
이곳을 오간 수많은 사람들이 소망 하나를 깃들여 돌을 얹혔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세모 모양의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소망을 향한
중생들의 집념이 오랜 세월을 두고 그려놓은 탑이다.

▲  청수천약수<淸水川藥水, 청수천샘터, 청수약천(淸水藥泉)>

정릉계곡 중류 쯤에 이르면 북한산(삼각산)의 유명 약수의 하나라는 청수천샘터가 마중한다.
샘터의 이름인 '청수'는 정릉계곡의 별칭으로 '청수골','청수계곡'이라 불리기도 하며 계곡
하류에 있었던 유명한 고급 요리집 청수장(淸水莊)의 이름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청수천샘터는 2개의 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쪽은 계곡 암반에서 나오고, 오른쪽은 바위
밑에서 나온다. 어느 것을 마셔도 상관없으며 그건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나는 물 욕심
이 많아서 양쪽 물을 모두 마셔보았는데 딱히 특별한 맛은 없는 자연의 물맛 그대로이다.
이곳은 물이 풍부하여 물이 마를 날이 거의 없을 정도이며 관리도 썩 잘되어 있는 편이다. 샘
터 앞에는 의자, 정자 등의 쉼터가 베풀어져 있으며, 샘터 옆구리를 흐르는 계곡 풍경이 바위
와 어우러져 걸쭉한 멋을 자아내고 있다. 계곡 물도 티 하나 없이 맑고 수심도 얕아서 성하(
盛夏)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쿨하게 풍덩하고 싶지만 상수원 보호와 계곡 보호를 위해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여기서 계곡 종점(정릉 기점)까지 계속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있으니 괜히 발도 들이지 말기
바라며, 계곡에 정 들어가고 싶다면 청수천샘터 윗쪽으로 가야 된다. 그곳은 해방된 공간이나
계곡 풍경은 다소 별로이다.

▲  청수천약수 왼쪽 샘 (계곡 옆)

▲  보호각을 갖춘 청수천약수 오른쪽 샘


▲  청수천약수 곁을 흐르는 정릉계곡
청수천약수를 빚은 정릉계곡은 청정한 빛을 띄우며 속세로 흘러간다.
여기서부터는 접근이 금지된 계곡이니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자~~!

▲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청수천샘터 옆 계곡 (수심이 1자도 안됨)

▲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비추는 정릉계곡 산길 (청수천샘터 남쪽)

▲  정릉계곡 하류 산길 (보국문 갈림길 직전)

▲  암반들이 층층이 주름진 정릉계곡 하류
조그만 폭포들이 주름진 바위를 타고 속세로 신나게 흘러간다. 산행을 시작했던
정릉으로 다시 내려오니 시간은 19시. 이렇게 하여 초파일 전날
북한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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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5월 3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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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신안군의 상큼한 지붕, 압해도 송공산 (송공산둘레길)

신안 압해도 송공산



' 압해도 송공산 봄맞이 나들이 '
송공산 남쪽 숲길
▲  송공산 남쪽 숲길



 

천하를 놓지 않으려는 욕심꾸러기 겨울 제국(帝國)과 그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정의로운 봄이 막판 다툼을 벌이던 3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신안군(新安郡)의 중
심 섬인 압해도(押海島)를 찾았다.

압해도를 가려면 우선 목포(木浦)로 가야 된다. (무안에서 들어가는 길도 있음) 동트기가
무섭게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아 남쪽으로 보냈는데, 간밤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해 눈꺼풀은 백두산보다 훨씬 무거워진 상태이다. 그 무거움에 순응하면서
자다깨다를 수 차례 반복하니 어느덧 목포에 이르렀다. (잠만큼 좋은 축지법은 없음)

점심을 먹기가 애매하여 목포역 부근에서 간식거리를 여럿 사들고 신안군내버스 130번(삼
학도↔압해도 송공항)을 타고 압해도로 들어갔다. 목포와 압해도를 철석같이 이어주는 압
해대교를 건너면 섬의 은하계로 일컬어지는 신안군 땅으로 신안 땅은 처음으로 발을 들여
본다. <바다를 제압하는 섬이란 뜻의 압해도는 면적이 48.95㎢, 인구는 약 6,000명대> 섬
으로 들어서 신안군청과 압해읍내, 대천리를 지나 송공리 상촌에서 두 발을 내렸다.

상촌마을 직전 3거리에서 송공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고 하여 찾아봤으나 딱히 보이
지가 않는다. 분명 지도에는 길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이정표도 없고 길 비슷한 것도 보
이지가 않으니 송공산이 벌써부터 나를 시험하는 모양이다. 결국 그 숨바꼭질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펼쳐진 수락길을 따라 천사섬분재공원으로 이동했다. 분재공원 옆에는 확실하게
산길이 있으니 거기서 송공산의 품으로 들어갈 요량이었다.

수락길은 송공산 남쪽을 도는 2차선 길로 한쪽에는 송공산이, 다른 한쪽에는 너른 서해바
다가 펼쳐져 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과 이제 막 겨울에서 해방되는 송공산, 그리고
푸르른 바다까지 3박자가 어우러진 착한 길로 지나가는 차량도 별로 없어 내가 이 일대를
잠시나마 장악한 기분이다. 이따금 지나는 차량이 그 흥을 깨뜨려 문제긴 하지만 워낙 고
적한 곳이라 금세 회복이 된다.


▲  오늘도 평화로운 압해도 앞바다 (수락길에서 바라본 모습)



 

♠  송공산(宋孔山) 입문

▲  1004 기둥을 내세운 천사섬분재공원(송공산분재공원) 정문

수락길을 1km 정도 들어가니 송공산의 상큼한 꿀단지인 천사섬분재공원이 마중을 나온다. 입
장료가 없다는 말이 있어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섰으나 조금은 비싼 입장료가 나의 빈약한 호
주머니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입장료의 압박에 정문 양쪽에 가로로 세워진 '1004' 기둥이 참으로 사악하게 보였다. 여기서
공원 이름인 천사(1,004)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그 천사가 아니라 신안군의 섬 갯수를 뜻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800여 개로 알려졌으나 200개가 더 추스려져 1,004개가 되면서 신안군은
천사(1,004)의 섬임을 무척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로도 20여 개의 섬이 더해지면서 대략
1,025개로 파악되고 있다. <유인도 72개, 무인도 953개> 그럼에도 천사섬의 고장임을 계속 강
조하고 있으며, 압해도와 암태면을 잇는 다리의 이름까지 천사대교라 이름을 붙여 천사(1,004
)란 이름에 지나친 집착을 보인다.

분재공원에서는 그냥 화장실(매표소 뒤쪽에 있음)만 구경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정문에서
동쪽으로 4분 가량 가면 송공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송공산 남쪽 기점)이 손을 내미니 여기서
부터 약 3시간에 걸친 송공산 더듬기가 시작된다.


▲  천사섬분재공원 앞 포구와 주차장

▲  송공산으로 들어서다. (팔각정 방면 소나무숲길)

분재공원 동쪽(송공산 남쪽 기점)에서 송공산 팔각정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시작
부터 키가 작은 소나무들이 긴 행렬로 마중을 하며 청정한 솔내음을 불어주고, 뒤를 돌아서면
서해바다가 장엄하게 나타나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에 한 줄기 해조음을 선사한다.


▲  잠깐 뒤를 돌아보는 여유 ~~ 송공산 소나무숲과 서해바다

▲  송공산 소나무숲길과 천사섬분재공원의 녹색 철책
분재공원이 엄연한 유료의 땅이라 저렇게 철책을 쳐놓아 무료의 땅과
팽팽히 경계를 그었다.

▲  소나무숲길 속으로 ~~~ ①

▲  소나무숲길 속으로 ~~~ ②

▲  소나무숲길 속으로 ~~~ ③ 팔각정 밑 부분

▲  송공산 팔각정

팔각정은 송공산 남쪽 능선 해발 170m 지점에 자리해 있다. <송공산 남쪽 기점(분재공원 동쪽
)에서 20분 정도 걸림> 이 땅에 흔한 기와집 팔각정이 아닌 8각 모습의 단출한 건물로 남쪽으
로 분재공원과 서해바다, 목포의 여러 섬들(율도, 외달도, 달리도), 해남 화원면(화원반도),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신안군의 여러 섬들이 싹 시야에 들어와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  팔각정에서 굽어본 천사섬분재공원과 서해바다

▲  확대해서 살펴본 유료의 공간, 천사섬분재공원

▲  팔각정에서 바라본 목포의 여러 섬(외달도, 달리도)과
해남 화원면(화원반도) 지역

▲  팔각정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구름 위를 거닐듯 느긋하게 이어진 능선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비로소
송공산 정상에 이른다.

▲  정상 가는 길에서 만난 돌탑
산을 찾은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얹힌 막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  정상 서쪽 능선부에 자리한 김해김씨 정재 김수영(靜齋 金守榮) 묘

정상 서쪽 직전에는 정재 김수영의 무덤이 누워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무덤 자리
만큼은 아주 기가 막히게 좋다. 산바람과 바다바람이 서로 어우러진 현장으로 조망 또한 휼륭
하며 송공산 서쪽과 남쪽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 무조건 거쳐가야 된다. 그러다보
니 산꾼의 왕래가 잦아 조금은 시끄럽긴 해도 외로움은 덜 할 것이다.


▲  송공산 정상 (해발 231m)

압해도 서부에 자리한 송공산은 압해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자 신안군의 주요 지붕의
하나이다. 북쪽과 남쪽은 바다에 접해있고, 서쪽은 송공리 들판, 동쪽은 대천리 들판과 맞닿
아 있는데 평평한 곳에 홀로 솟아 있어 제법 존재감이 커 보인다.

송공산은 산세가 조촐하고 완만하여 어디서든 30분 정도면 충분히 정상에 닿는다. 주변이 온
통 평야와 바다라 조망이 거의 독보적인 수준으로 산 허리에는 명품급 둘레길이 닦여져 있다.
정상 주변에는 옛 송공산성(宋孔山城, 신안군 향토자료 16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는데
석성과 토성(土城)으로 이루어진 230m 규모의 조그만 테뫼식 산성(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성)
이다.
축성시기는 멀리 가면 삼한시대(마한), 적당히 가면 백제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부속시설
로 우물 1기가 발견되었다. 해양대국 백제 시절에는 압해도에 아차산현(阿次山縣)이 설치되었
는데, 송공산성이 그 중심지로 보이며, 산성 동쪽 대천리 일대에서 고분 58기가 발견되어 압
해도 지방 세력이나 관리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후삼국시대에는 압해도 지방 세력인 능창<能昌, 일명 수달(水獺)>이 서남해를 주름잡고 있었
다. 그는 송공산성을 본부로 하여 전남 서남해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 진훤)의 그늘로 들어가면서 그 넓은 서남해가 싹 후백제의 영역이 된다. 허나 후
백제 조정과 서남해/나주 세력과의 갈등이 나날이 커져가자 이를 간파한 후고구려<태봉(泰封)
>의 왕건(王建)은 이간책을 구사해 나주 세력(오씨)과 서남해 상당수의 세력들이 후고구려에
붙어버렸다.
허나 압해도와 안파, 갈도, 염산 지역은 나주를 점령한 후고구려군과 그들에게 붙은 나주/서
남해 세력과 싸우며 후백제의 후방을 지켰다. 허나 910년 능창이 왕건의 수군에 대패하여 철
원(鐵原)으로 압송되면서 압해도까지 후고구려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몽골과의 전쟁이 한참이던 1256년에는 몽골 수군 70여 척이 압해도를 공격했는데, 관
군과 지역 주민들이 송공산성에서 항전하여 그들을 때려잡고 서남해를 지켰다.

이렇듯 압해도와 서남해 방어의 듬직한 요새였던 송공산성은 이후 중요성이 상실되어 역사에
서 장렬히 사라졌고 일부 흔적만 겨우 남아있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만든 것이 제
아무리 대단하다한들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모래성에 불과한 것이다.


▲  송공산 정상에서 바라본 송공리와 천사대교

압해도 서쪽 끝(송공리)과 암태도(巖泰島)를 이어주는 천사대교의 등장으로 암태도와 자은도,
추포도, 팔금도, 안좌도까지 한반도와 간접적으로 연륙되어 더 이상 불편한 해상교통에 의지
하지 않고 육상교통으로 흔쾌히 이동이 가능해졌다.


▲  송공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길
정상에서 동쪽 하산길은 경사가 잠깐 각박하다. 그 구간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완만한 산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  송공산 둘레길 빙글빙글 돌기

▲  송공산 동쪽 능선길

정상에서 동쪽으로 10여 분 내려가면 송공산 둘레길과 만나는 갈림길에 이른다. 여기서 동쪽
으로 10분을 더 내려가면 송공산 주차장(송공산 동쪽 기점)으로 원래는 정상을 찍고 주차장으
로 바로 내려가려고 했다. 허나 둘레길 북쪽 구간에 출렁다리가 있다고 하여 '이곳에도 그런
다리가 있었나~?'
호기심이 가득 피어나 계획을 조금 수정해 그곳까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허나 그곳까지만 간다는 것이 그만 둘레길을 완전히 1바퀴 돌고 말았다. 출렁다리에서 길을
접기에는 90% 아쉬워 계속 전진을 했고 생각보다 너무 잘생긴 송공산둘레길에 퐁당퐁당 빠져
버린 것이다.


▲  송공산둘레길 동북쪽 구간 ①
둘레길을 천천히 1바퀴 돌면 1시간 10~30분 정도 걸린다. 둘레길 북쪽 구간에는
출렁다리도 있고, 차마고도 비슷하게 생겨먹은 벼랑길도 있으며, 어디서든
서해바다가 바라보여 마치 1폭의 수채화 속을 거니는 기분이다.

▲  송공산둘레길 동북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북쪽 구간 (출렁다리 이전)

▲  드디어 만난 송공산 출렁다리

송공산 출렁다리는 이 땅에 흔한 흔들다리(출렁다리) 스타일이다. 협곡 위에 걸쳐진 것으로
폭은 성인 2인분 크기이며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반응을 보여 염통을 은근히 건드
린다. 살살 건너면 다리도 살살 반응을 하지만 격하게 뛰어다니면 다리도 같이 흥분하여 출렁
출렁 파도를 친다. 바로 그런 맛으로 출렁다리나 흔들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출렁다리

▲  출렁다리 속으로~~


▲  송공산 북쪽 자락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매화도(梅花島)

▲  벼랑이 펼쳐진 송공산둘레길 북쪽 구간 ①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진 벼랑길로 바로 옆은 경사가 급한 벼랑이다. (낭떠러지 수준은 아니지
만 경사가 60도 이상 됨) 어떤 이들은 이 길을 두고 송공산의 차마고도라 부르기도 하는데 출
렁다리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구간으로 암벽과 소나무, 하늘, 바다가 서로 절묘를 이룬다.


▲  벼랑이 펼쳐진 송공산둘레길 북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바라본 송공리 지역과 천사대교

▲  송공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그 너머로
팔금도, 안좌도(安佐島)가 희미하게 모습을 비춘다.

▲  송공산 우물터 (송공산둘레길 서쪽 구간)
옛 송공산성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던 우물로 여겨진다. 지금은 물 대신
누렇게 뜬 낙엽들이 가득 들어가 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  송공산 서쪽 능선길

송공산둘레길을 동에서 서로 거의 절반(약 2.5km 정도)을 돌았다. 둘레길을 1굽이 돌 때마다
풍경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여 마치 움직이는 거대한 수채화 같다. 길이 너무 곱다보니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아 만약 늦가을이나 봄의 한복판에 왔다면 2~3바퀴를 돌았을 지도 모른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서쪽 능선길과 만나는 갈림길에 이르자 잠시 고심을 했다. 둘레길을 마저
돌면 지금까지 온 거리 만큼 더 움직여야 되고, 능선길로 진입해 정상으로 질러가면 길은 절
반 가까이 줄어든다. 어느 것이 좋을까 망설이다가 일단 능선길로 접어들기로 했다.


▲  송공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바다와 천사섬분재공원(가운데 부분)

▲  팔각정에서 남쪽 기점으로 내려가는 길 (앞서 올라왔던 길)

서쪽 능선길을 거닐던 중, 낯이 익어보이는 쉼터가 마중을 나왔다. 알고보니 앞서 남쪽 기점
에서 올라갔을 때 만났던 그 팔각정으로 어쩌다보니 산을 1바퀴 돌아 이곳으로 다시 온 것이
다.
팔각정에서 다시 정상으로 갈까 하다가 더 이상의 재방송은 별로 안땡겨 남쪽 기점(분재공원
동쪽)으로 향하는 산길을 다시 내려가다가 중간에서 잠시 작별을 했던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  다시 만난 둘레길 (둘레길 남쪽 구간)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①
송공산은 유난히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의 뫼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러다가 송공의 '송(宋)'이 소나무송(松)으로 바뀌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③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쉼터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율도, 외달도, 달리도, 해남 화원반도)

▲  송공산둘레길 동쪽 구간 ①

▲  송공산둘레길 동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동쪽 구간 ③

▲  송공산 동쪽 기점 (송공산 주차장, 등산로입구)

둘레길 남쪽 구간과 동쪽 구간 약 1.5km를 추가로 도니 다시 낯익은 곳이 마중을 한다. 정상
에서 내려와 둘레길로 진입했던 바로 그곳이다. 출렁다리만 보려고 나선 것이 일이 몇 배로
커져 이렇게 산을 1바퀴 돈 것인데 둘레길은 서남부 구간(약 1km)을 제외하고 거의 3/4를 돌
았다.
<천사섬분재공원→송공산 남쪽 기점→팔각정→송공산 정상→동쪽 능선길→둘레길 북쪽 구간(
출렁다리)→둘레길 서쪽 구간→서쪽 능선→팔각정→둘레길 남쪽 구간→동쪽 능선길 갈림길→
송공산 동쪽 기점>

동쪽 능선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7분 정도 내려가면 주차장이 있는 송공산 동쪽 기점이다. 평
일이라 주차장에는 차량 2대가 낮잠을 자고 있을 뿐, 한적하다.
여기서 목포로 나가는 150번 시내버스가 있으나 배차간격이 거의 2시간에 이르고, 차 시간도
모른다. 막연히 기다리며 희망고문을 하는 것보다 송공산입구까지 내려가 1시간 내외로 오는
130번을 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듯 싶어 기왕 벌인 발품, 10분을 더 팔았다.

송공산입구3거리까지 내려와 130번을 기다렸으나 타이밍이 영 좋지 못해 거의 50분을 기다렸
다. 때마침 바다바람까지 거세게 나를 때려대니 겨울 제국이 다시 도래한 듯, 얼마나 추웠는
지 모른다.
그렇게 피곤과 추위로 막바지 고통을 겪고 있으니 목포 130번이 다가와 입을 벌린다. 반가움
과 미움이 교차되는 그와의 만남, 그에게 나를 담아서 다시 목포시내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압해도 송공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의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송공산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 송공리


▲  송공산과 작별을 고하다. 송공산입구로 내려가는 수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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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5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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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우백호, 인왕산 남쪽 자락을 거닐다 ~~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해골바위 나들이

인왕산 국사당, 선바위



' 인왕산 나들이 (선바위, 국사당, 해골바위) '
인왕산 선바위
▲  인왕산의 상징, 선바위의 위엄



 

여름 제국(帝國)이 서서히 이빨을 보이던 6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내 즐겨찾기의
하나인 인왕산 선바위를 찾았다.

독립문역(3호선)에서 선바위로 가는 길목인 무악동(毋岳洞) 지역은 서울에 흔한 달동네의
하나로 주황색 기와를 지닌 달동네 집들이 즐비했다. 그 시절에는 선바위로 가는 길이 사
람의 실핏줄만큼이나 복잡했는데, 개발의 칼질이 무악동 달동네를 싹 밀어버리고 인왕산(
仁王山)의 살까지 야금야금 난도질하면서 밋밋한 회색빛 아파트를 심어놓았다.
하여 달동네의 체취는 크게 가셨고 산으로 올라가는 길도 조금은 직선화되어 찾기는 쉬워
졌다. 허나 주변 경관을 고려하지 않는 개발로 인왕산에 적지 않은 옥의 티를 선사하였으
니 그 점이 무척이나 아쉽다.

인왕사 입구에 이르니 인왕사가 일주문을 내밀며 나를 마중한다.



 

♠  한 지붕 11가족의 특이한 절집이자 불교와 무속이 어우러진
이색 현장 ~ 인왕산 인왕사(仁王寺)

▲  인왕사 일주문(一柱門)

인왕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속세살이만큼이나 각박한 경사면에 자리해 있다. 이 문은 다른 일
주문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1.5m 정도 솟은 기단 위에 붉은 피부의 기둥을 심고 그 기둥에
용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지붕의 좌우 길이와 비슷한 평방(平枋) 위에 절의 이름을 알리는
현판을 걸어 이곳의 정체를 속세에 밝힌다.

일주문을 오르면 주차장이 나오고, 여기서 국사당까지 선바위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중심으로
조급한 경사면에 잔뜩 건물을 지어놓은 인왕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각 건물
마다 다른 종단과 절 이름을 칭하고 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인왕사는 분명한데,
왜 건물들이 이름을 달리하며 따로 놀고 있을까? 그것이 바로 인왕사가 지닌 개성이자 결점이
다.
인왕사는 5개 종단에 무려 11개의 절이 가람을 이룬 독특한 형태의 절이다. 그러니까 인왕사
란 테두리 안에 서로 다른 절이 각자의 영역을 형성하며 인왕사란 한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
이다. 그러다보니 종단도 다르고 주지승도 달라 따로 놀고 있는데, 다행히 4년에 1번씩 인왕
사를 총괄하는 주지승을 뽑아 이곳의 전반적인 살림을 맡고 있다.

속세만큼이나 복잡한 인왕사의 고유 건물은 선암정사(본원정사), 대웅전, 관음전, 보광전, 극
락전 등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법회와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외에는 지붕과 이름만 같이
쓰고 있는 다른 절로 보면 될 것이다.


▲  인왕사 경내 (맞배지붕의 큰 건물이 대웅전)

인왕사는 1912년에 창건된 절로 경내 건물은 모두 근래 지어진 것이라 고색의 향기는 누리기
힘들다. 경내 위쪽에 국사당과 선바위 등의 문화유산이 있지만 그들은 원래부터 인왕사와 관
련이 없는 존재들이다.

인왕산에는 원래 조선 초기에 지어진 인왕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인왕사와는 전혀 관
련이 없는 존재이나 이름이 같다보니 절과 관련된 몇몇 자료에는 옛날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
다. 그렇다면 옛날 인왕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1394년 개경(開京)에서 한양(서울)으로 국도(國都)
를 옮겼는데, 이때 인왕산 동쪽 자락에 인왕사를 세워 궁궐 내원당(內願堂)에 있던 승려 조생
(祖生)을 보내 주지로 삼았다.

인왕사란 이름은 부처의 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규모
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절이 있던 골짜기를 인왕동(仁王洞)이라 불렀고, 산
의 이름도 덩달아 인왕산이 되었을 정도이니 절의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었던 모양이다. 게다
가 태조가 세운 절이니 왕실의 지원도 넉넉했을 것이며,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때 기록에
도 가끔씩 절의 이름이 등장한다.

연산군(燕山君)은 인왕사를 비롯해 인왕산에 있던 복세암(福世庵)과 금강굴(金剛窟)이 경복궁
(景福宮)보다 높은 곳에 자리해 궁궐을 누르며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인근 민가들과 함께 부
셔버렸다. 연산군은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군주라 절과 민가가 높은 곳에서 궁궐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적지 않게 기분이 뒤틀렸을 것이다. 중종(中宗) 이후에 중건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2년 박선묵 거사가 지금의 자리에 선암정사(禪巖精舍)를 세웠다, 아마도 선바위
의 덕을 보고자 그 자리를 택한 듯 싶은데 그때까지만 해도 인왕사란 이름은 쓰지 않았다.
1914년 탄옹(炭翁)이 선암정사 곁에 대원암(大願庵)을 지으니 그때부터 인왕사의 한 지붕 다
가족 시대가 시작되었다.
1922년 극락전(極樂殿)을 지었고, 1924년 자인(慈仁)이 안일암(安逸庵)을 세웠다. 1925년에는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이 인왕사 윗쪽으로 넘어와 새롭게 둥지를 틀었으며, 1927년 극락
전을 중수하고 1930년 치성당(致誠堂)을 세웠다. 그리고 1942년 각각 분리된 암자를 '인왕사'
란 이름으로 통합하면서 잊혀진 이름 인왕사가 다시 속세에 고개를 들었다. 하여 자연히 옛
인왕사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인왕사 위쪽에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인 선바위가 있다. 그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부
터 산악신앙(山岳信仰)과 기자신앙(祈子信仰)이 어우러진 토속신앙(土俗信仰)의 성지(聖地)였
으며, 그 밑에 자리한 국사당은 무당이 굿판을 벌이는 무속의 중심지이다.
또한 선바위 주변에는 대자연이 빚은 개성파 바위들이 즐비하며, 선바위와 국사당의 영향으로
산자락과 바위, 골짜기 곳곳에 자리를 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에 계룡산(鷄龍山) 같은 곳이자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으로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
고 있어 굿을 벌이기에도 좋다. 인왕사는 바로 이런 토속신앙과 산악신앙이 거리낌없이 어우
러진 무불(巫佛)의 공존 현장으로 색다른 신앙체계를 천하에 보여준다.


▲  국사당(國師堂) - 국가 민속문화재 28호

선바위를 향해 오르다보면 국사당이란 건물이 모습을 비춘다. 겉으로 보면 늙은 티가 그리 와
닿지 않지만 엄연한 조선 후기 건물로 비록 자리를 옮기긴 했어도 조선 초기부터 있던 신당(
神堂)이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비롯해 여러 무속신(巫俗神)을 봉안하고 있
으며, 무학대사를 봉안한 탓에 국사당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국사당은 정면 3칸(협칸을 포함하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목멱산(木覓山
)이라 불리던 남산 꼭대기의 팔각정(八角亭) 자리에 있었다.
태조는 1396년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여 서울을 지키는 존재로 신성시 여겼는데
,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1404년에는 호국(護國)의 신으로 품격을 높이면서 목멱신사(木
覓神祠)라 불렸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장안을 굽어보며 오랜 세월 살아온 국사당은 왜정(倭政) 때 강제로 정
든 곳을 떠나야 했다. 1925년 왜정이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었는데, 국
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들어앉은 것에 쓸데없이 뿔이 나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하여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를 하던 곳이며 명당(明堂) 자리에 속하는 현 자리로
둥지를 옮겼다.
사당의 목재를 옮겨와 원형대로 복원했으며,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하 기초
는 없다. 석재와 흙으로 터를 평탄하게 다지고 단단한 돌을 쌓아서 1m 정도의 전단(前壇)과
동단(東壇)을 만들었으며, 건물 양쪽에 마치 날개를 붙인 듯, 협칸 1칸씩을 달아 마치 큰 새
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이 협칸<양측실(兩側室)>은 무당과 기도를 하러 온 이들의 휴식처
및 기도처로 쓰인다.

건물의 면적은 11평 정도로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고 목재도 튼튼하여 18세기 건축 기법이
잘 드러나있으며, 당시 장인들의 솜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한
편이다.


▲  위에서 바라본 국사당

국사당은 자주 굿이 열리는 편이다. 굳이 굿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찾아와 기도를 하는 사
람도 많으며, 정월에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의 쾌유를 비는 병굿과 우환굿, 부모와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진오귀굿 등이다.
허나 이곳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은 아니며, 김명권이란 사람이 집안 대대로 관리하는 건물로
그가 당주(堂主)라고 한다.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돈을 받고 자리를 빌려주며 굿은 3월과 10
월에 많이 열린다. 반면 음력 섣달은 거의 없다고 한다.
건물 당주는 당에 봉안된 신들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를 올리
는데, 이때 무녀(巫女)를 불러 굿을 한다.

국사당 내부 중앙에는 무속신앙의 신을 그린 무신도(巫神圖) 18점이 있는데, 곽곽선생만 빼고
모두 비단 바탕에 그려졌다. 이들은 '국사당의 무신도'란 이름으로 국가 민속문화재 17호
지위를 누리고 있는데, 그림에 담긴 존재들은 태조 이성계인 아태조(我太祖)를 비롯해, 강씨
부인, 호구아씨, 용왕대신(龍王大神), 산신(山神)님, 창부씨(昌夫氏), 신장(神將)님, 무학대
사, 곽곽선생, 단군(檀君), 삼불제석(三佛帝釋), 나옹대사(懶翁大師), 칠성(七星)님, 군웅대
신(軍雄大神), 금성(錦聖)님, 민중전(閔中殿), 최영(崔瑩)장군 등이며, 양쪽 협칸에는 각각
4점과 6점의 무신도가 걸려있어 총 28개의 무신도가 있다. (무신도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또한 명도(明圖)란 이름에 명두(明斗) 7점이 무신도 사이에 걸려있는데, 명두란 무녀를 계승
할 때 넘겨주는 일종의 증표로 큰무당이 자신을 이을 사람을 선정해 그 상징물로 명도를 주고
이것을 받은 무녀는 자신의 수호신처럼 귀하게 여긴다. 이 명두는 놋쇠로 만든 것으로 청동기
시대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쓰인 도구들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들 무신도는 한 사람이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같은 화법의 조선 후기 그림과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섞여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중 12점은 조선 인조(仁祖) 때인 17세
기에, 나머지 16점은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없다.

▲  무신도의 하나인 아태조(이성계)
(문화재청 사진)

▲  강씨(康氏) 부인 (문화재청 사진)

무신도 중 태조 이성계를 머금은 아태조(우리의 태조라는 뜻)는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고 전한다. 강씨부인은 태조의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로 여겨지나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란 설도 있다. 허
나 태조의 그림이 있고 그림의 주인공이 강씨이니 그 마누라인 신덕왕후일 가능성이 더 크다.

국사당 안에서는 마침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문은 닫혀 있어 안에는 들어가
지 못했으며, 기분 같아서는 흔쾌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무신도를 사진과 나의 망막에
싹 담고 싶었으나 외부인에게는 거의 인색한 곳이라 그만두었다. 그러다보니 이곳에 30번 넘
게 왔음에도 내부 구경도 제대로 못했고, 무신도도 아직 사진에 담지도 못했다. (굳이 공개하
지 않는 것을 결례를 무릅쓰고까지 봐야될 이유는 없음, 관람에는 예의가 필요함)

* 국사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2-12 (통일로18가길 20)


▲  선바위로 인도하는 가파른 경사의 계단
계단 너머로 선바위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계단 양쪽에 있는 석등이
우리 전통식이 아닌 왜식(倭式) 석등인 것이 심히 눈에 거슬린다.
저 석등 좀 갈아치우면 안될까?



 

♠  산악신앙 및 기자(祈子)신앙의 성지로 바쁘게 살고 있는
인왕산 선바위<선암(禪岩)>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4호

▲  앞에서 바라본 선바위(선암)

인왕사 경내 윗쪽 해발 150m 고지에 자리한 선바위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로 2개의 큰 돌이 마
치 승려가 장삼을 입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선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제눈이
안경이라고 사람에 따라 보이는 모습은 다를 것이다.
바위 뒷쪽이나 옆에서 바라보면 비옷(우비)이나 모자 달린 잠바 등을 뒤집어 쓰고 고개를 숙
인 모습으로도 보이며, 서양 동화나 영화에 많이 나오는 마법사(판초의 비슷한 걸 입고 나옴)
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상과학 만화나 오락실 오락을 많이 즐긴 사람이라면 이상한 형체의 괴
물이나 새 대가리 괴물 등이 연상될 수도 있을 것이며, 바위에 길쭉한 구멍이 많이 뚫려있어
유령이나 귀신처럼 보이기도 하여 한밤중에 그를 본다면 정말 오싹할 것 같다.

옛날에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으로 여기기도 했으며, 인왕사가
밑에 들어온 이후에는 석불(石佛)로 대우를 받으며 석불님, 관세음보살님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절 신도나 선바위를 받드는 이들은 그 바위를 양주(兩主)라고 부르며, 마땅한 명물이
없어 애태우던 인왕사를 먹여살리는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그에 대한 지극정성이 엄청나다.

이 바위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기묘한 작품으로 보면 볼수록 온갖 감탄사가 나올
따름이다. 이곳 주변에는 해골바위나 모자바위 등 묘하게 생겨먹은 바위가 많아 인왕산이 과
연 바위의 산임을 실감케 한다.
이렇듯 선바위는 그 신비한 자태 때문에 머나먼 옛날부터 산악신앙 및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성지(聖地)이자 기복처(祈福處)로 바쁘게 살았다. 특히 아들을 원하는 부인이 바위에 소원을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이 찾아와 기도를 했는데, 작은 돌을 바위에 붙이면 효험이 더 크
다고 하여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꽤 많다. 그래서 붙임바위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바위 하나에 선바위,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 태조/무학대사의 상, 석불님, 관세음
보살님, 양주, 그리고 붙임바위까지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산악신앙과 기자신앙, 무속
신앙, 거기에 불교까지 다양한 성격을 지녀 그야말로 굶어죽을 일이 전혀 없는 팔방미인의 바
위이다. 바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난리를 피우며 이름과 성격을 붙
이고 떠받드는 것이다. (그의 공식 명칭은 '선바위'임)


▲  이리저리 틈새가 많은 선바위의 윗부분

바위의 형상은 2개의 큰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으로 높이 7∼8m, 가로 11m 내외, 앞뒤
의 폭이 3m 내외이다. 바위 밑에는 제단이 있으며 바위의 패인 부분에는 비둘기들이 머물고
있다. 매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쌀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있어 비둘기에게 이만한 삶터가
없다. 늘 뷔페(?)를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이곳은 무학대사와 얽힌 이야기가 서려있으며, 바위를 둘러싸고 정도전의 유교와 무학대사의
불교 간의 대립이 일어났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서 새로운 도읍(都邑)터를 부탁했다. 하여 무학은 전국
을 뒤적거리다가 지금의 서울(한양) 땅을 찾고 기뻐했다. 허나 자리를 보니 이곳에 도읍을 정
하면 나라가 500년 밖에는 못갈 팔자였다. 하여 선바위에서 나라의 수명 좀 연장시켜달라고
1,000일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500년에서 겨우 18년이 추가된 518년 만에 나라가 쫄
딱 망한 모양이다. 이는 서울이 조선의 국도가 되는 데에 무학대사와 선바위가 어느 정도 역
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한토막 이야기이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자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밖에 두느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 태조는 무학을 통해 그 바위의 명성을 듣고 있었지만, 정도전도 무학대사 못
지 않게 신뢰하고 있던 터라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침소로 들어와 그냥 자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초여름인 4월(음력 기준)임에도 눈이 쌓이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나
밖을 보니 글쎄 눈이 성벽 모양으로 쌓여있었고 안쪽 부분의 눈이 녹아버린 것이다. 이에 태
조는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정도전의 의견대로 선바위를 성밖에 두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무학대사는 단단히 뚜껑이 열려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
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 한탄했다고 한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선바위 사건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유교(성리학) 패거리와 무학대사로
상징되는 불교 패거리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흥하는 것으
로 자연히 도성 안에 절이 많아져 고려처럼 불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허나 도성
밖으로 밀려나면서 유교가 그 위를 점하게 되면서 불교는 힘을 잃고 밀려나게 된다. 하여 억
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태조와 세종, 세조 때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는 것
이다.

이렇게 조선시대 불교 몰락의 우울한 상징까지 떠맡게 된 선바위는 민간신앙의 애뜻한 현장으
로 백성들의 발길이 잦았다. 그러다가 인왕사가 들어와 불교까지 더해지면서 관세음보살, 석
불이란 이름까지 가지게 되었고, 국사당까지 밑에 들어와 무속신앙까지 더해지면서 그야말로
복합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굿은 바위에서 하지 않고, 국사당이나 인근 골짜기에서
한다.

인왕사는 음력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 그리고 영산제(靈山祭) 때 바위에서 제를 지내고 있
으며, 절을 많이 하면 좋다고 하여 108배를 하는 사람이 많다. 바위 서쪽에는 바위를 지키는
조그만 건물이 있으며, 바위 주변으로 빼곡히 돌담을 둘렀다.

* 선바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3-4 (통일로18가길 26)


▲  선바위의 깜찍한 뒷모습
판초의나 모자가 달린 옷을 입고 웅크리고 앉아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것 같다.

▲  선바위약수터

인왕산에는 남산만큼이나 약수터가 많이 있는데, 선바위 동쪽 계곡에 자리한 선바위약수터도
그중에 하나이다.
인왕산이 속세에 베푼 약수이나 물을 보니 수질이 조금 의심스러워 마시지는 않았다. 이곳은
예전에 굿판 장소로 많이 쓰였으나 굿에 제한을 걸면서 요즘은 약수터 주변에 조촐하게 머물
자리(사진 오른쪽 부분에 파라솔처럼)를 만들어 며칠씩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  선바위 동쪽 벼랑
(선바위약수터는 밑에 있음, 윗부분에 솟은 바위가 선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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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바위 뒷쪽 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도심이 저 밑에 펼쳐져 있다.

▲  선바위 뒷쪽 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독립문 주변과 서울 도심, 마포구와
서대문구 지역 (멀리 관악산과 삼성산까지 시야에 들어옴)

▲  선바위 뒤쪽에서 만난 해골바위
바위의 모습이 해골이나 투구처럼 생겼다. 그의 피부에는 대자연이 심술궂게
파놓은 구멍들이 여럿 있으며, 바위 정상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해골바위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인왕산 주능선에 걸쳐진 하얀 피부의 한양도성, 그 너머로 서울 도심과 시가지가 장대하게 펼
쳐져 있으며, 저 멀리 고구려의 장대한 혼이 깃든 아차산과 용마산 산줄기까지 흐릿하게 시야
에 들어온다.


▲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이는 모자바위
마치 사람이 모자나 고깔을 쓴 모습 같다. 저곳은 금지된 구역이라
밑에서 그림의 바위처럼 바라봐야 된다.

▲  인왕사 윗쪽 마애불(磨崖佛)

모자바위 밑 막다른 바위에 작은 마애불이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선바위에서 6~8분 정도 올
라가야 되는 곳으로 근래 인왕산 한양도성과 개나리동산, 무악재하늘다리를 이어주는 탐방로
가 닦이면서 접근성이 조금 좋아졌다. (마애불 앞을 지나감)

인왕사에는 20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마애불이 2개 정도 파악이 되고 있는데, 이 석불이 그중
의 하나로 절 한참 윗쪽에 있어서 편의상 '인왕사 윗쪽 마애불'(이하 윗쪽 마애불)이라 칭하
도록 하겠다.
이 마애불은 석불이라기보다는 상투를 튼 어린이나 사람 같은 모습으로 거칠게 다듬어져 거의
만들다가 만 모습 같다. 또한 이곳은 막다른 곳이라 더 이상 윗쪽으로 올라갈 수 없다.


▲  윗쪽 마애불 주변에서 바라본 모자바위의 위엄

▲  인왕사 아랫 마애불

선바위에서 서쪽(국사당과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면 큰 바위에 아주 두텁게 새겨진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인왕사 경내의 서쪽 끝으로 석불 앞에는 건물이 여럿 있는데 그들에게
가려져 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편의상 '인왕사 아랫 마애불'이라 칭했음)

이 석불은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머리의 무견정상
(無見頂相)부터 발까지 세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무릎에 대고 눈을 지그시 감으며 명
상에 잠겨있는 편안한 모습이다. 특히 배 부분은 볼록 나와있는데, 불상이나 보살상 중 얼굴
살이 많은 것은 많이 봤지만 저렇게 똥배 불상은 처음 본다. 게다가 이 땅에 흔한 마애불 스
타일이 아닌 다소 이형적인 모습이라 마치 동남아나 중남미의 석조 조각 같은 모습이다.
지금은 20세기 마애불로 속세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으나 100년 이상 지나면 불교미술사에
서 크게 다뤄질지도 모른다.

아랫 마애불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선바위와 국사당의 안부를 오랜만에
확인을 했고, 선바위 주변의 많은 바위와 마애불도 복습 차원에서 모두 확인을 했으니 나름
의미가 있고 배부른 나들이였다.
이렇게 하여 인왕산 6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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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4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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