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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0.15 서울의 듬직한 뒷산이자 지붕, 도봉산 나들이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계곡)
  2. 2013.09.12 가지산 자락에 안긴 비구니 도량의 성지, 울주 석남사 (석남사계곡)
  3. 2013.07.11 물맞이 명소로 유명한 피서의 성지, 청도 남산 낙대폭포
  4. 2012.11.13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천년 묵은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 (용문산)
  5. 2012.10.18 산과 호수, 도자기축제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산 ~ 이천 설봉산 (설봉공원, 영월암)

서울의 듬직한 뒷산이자 지붕, 도봉산 나들이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계곡)

 

' 서울 도봉산(道峯山) 나들이 '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서원 주변)

▲  도봉산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험준한 도봉산 포대능선

▲  자운봉(紫雲峰)고개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봄이 한참 무르익던 5월 노동절에 옆동네 방학동(放鶴洞)에 사는 후배와 도봉구(道峰區)의 든든
한 뒷산인 도봉산을 찾았다.
도봉산 141번 종점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도봉서원과 도봉산대피소를 거쳐 산중턱에 자리한 천축
사(天竺寺)에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그런 다음 마당바위를 거쳐 각박한 산길을 개미처럼 올라
자운봉고개에 이른다. 고개 직전에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과 선인봉(仙人峰)이
있는데, 죄다 바위 봉우리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래도 올라갈 사람은 기를 쓰고 올라감)
자운봉고개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남쪽 주능선을 따라가면 칼바위와 오봉, 우이암
으로 이어지며, 북쪽으로 가면 포대능선을 거쳐 사패산과 의정부(議政府)로 통한다.

자운봉(740m)은 도봉산(道峯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도봉산의 실질적인 정상이다.
험준한 외모 탓에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데, 통행금지 안내문을 쿨하게 무시하고 봉우리로 오르
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봉산의 정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포대능선을 비롯한 주능선은 도봉산의
지붕으로 북쪽은 멀리 사패산까지, 남쪽은 우이암을 거쳐 우이동(牛耳洞)까지 이어진다.


▲  자운봉고개에서 바라본 의정부 시내 (건너편 산은 수락산)

◀  순도 100% 바위 봉우리인 도봉산의
머리, 자운봉의 위엄

자운봉고개에서 포대능선으로 진입했다.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탄 듯, 능선 양쪽으로 천하
가 눈 아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조망 또한 천하 일품이다. 수락산과 오봉 등 주변의 기라
성 같은 산들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다가오니 도봉산도 참 큰 산이긴 큰 산인 모
양이다. <그래봐야 북한산(삼각산), 용문산, 태백산,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백두산 형님 앞
에서는 고개도 못듬>

포대능선은 처음에는 길이 착하다. 그러다가 10분 정도 가면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왼
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같다. 허나 오른쪽 길이 진정한 포대능
선 길이며, 왼쪽 길은 능선에서 조금 떨어진 구간이다. 그래서 빨리 가려는 생각에 오른쪽 길을
택했는데, 지금까지 보였던 순한 양에서 악한 이리의 모습을 보이며, 등산객을 당황하게 한다.
코스가 완전 지옥이기 때문이다.


▲  포대능선 남쪽 능선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오봉과 여성봉, 양주 장흥면 지역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남쪽 <칼바위와 우이암, 멀리 북한산(삼각산)까지>

포대능선 남쪽 능선 길은 산길인지 지옥의 길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극악의 수준이다. 산길
에 박힌 철난간과 철봉이 아니면 거의 지나가기가 힘든 구간으로 그들에게 의지해 조금씩 움직
이는데, 완전 손에 땀을 쥐게 하며, 다리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간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송곳처럼 뾰족한 바위 위를 갈 때는 발바닥도 아프다고 난리를 친다. '우악~~ 이런 길
이 다 있다니..? 지옥이 따로 없네!!'

산길의 경사도 갑자기 몇십 척을 쑥 내려가더니 다시 몇십 척을 쑥 올라가는 미친 형식으로 높
이의 차도 심하다. 산길의 거리는 고작 1리도 안되지만 그 구간을 지나 716m 봉우리까지 거의
30분 정도 걸린거 같다. 도봉산을 그래도 만만하게 봤건만 이런 미친 구간이 있다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그 구간을 꿈 속에서 다시 탈까 두렵기만 하다. 이 구간을 가기 싫다면 앞서 갈
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된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북단과 의정부 남부 -
건너편에 보이는 장대한 산은 한때 나의 단골산이던 수락산(水落山, 637m)
우리가 그 수락산보다 더 높이 떠 있다.

▲  포대능선을 장식하는 바위 봉우리의 위엄
포대능선이란 이름은 불교에 많이 등장하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여겨진다. 도봉산에 절이 유난히 많으니까 말이다.

▲  포대능선에서 만난 멋드러진 소나무
그 너머로 서울 북부 지역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우리 동네도 훤히 보임)

▲  포대능선 716m 봉우리
봉우리 주변에는 초소를 비롯해 추억이 되버린 군부대 시설이 여럿 있다.


속세처럼 험난했던 포대능선 남쪽 능선길을 간신히 통과해 716m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지
치고 놀란 두 다리를 쉬며 눈 밑에 펼쳐진 천하를 가슴 가득히 굽어본다. 서울 도봉구(道峰區)
와 노원구(蘆原區)를 비롯해 강북구, 성북구, 중랑구, 동대문구를 비롯한 서울 북부 지역과 경
기도 의정부시, 양주시 장흥면과 율정/고읍지구가 훤히 눈에 박혀 속세로부터 오염되고 상처받
은 마음과 눈을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속세를 내려다보니 자연이 빚은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
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거만한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
머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
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  하늘 아래로 곱게 펼쳐진 의정부 남부와 서울 북부, 가운데에
보이는 고가도로는 수도권 외곽순환고속도로이다.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  오봉(五峯)과 양주시 장흥면 지역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  북쪽으로 힘차게 내닫는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포대능선은 716m 봉우리에서 회룡골재를 거쳐 사패산까지 이어진다.

▲  만월암에서 포대능선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길
경사가 워낙 미친 수준이라 나무 계단길을 만들어 통행의 편의를 제공했다.
하늘로 이어진 계단일까? 끝없이 펼쳐진 계단길, 내려갈 때야 쉽지만,
올라갈 때는 그야말로 진땀을 빼게 한다.


♠  서울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조그만 석굴 암자 ~ 도봉산 만월암(滿月庵)

▲  큰 바위 밑에 기묘하게 자리한 만월암 만월보전(滿月寶殿)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동쪽(도봉산역 방향)으로 20분 정도 내려가면 집채보다 더 큰 바위가
보일 것이다. 바로 그 바위 밑에 석굴 암자(庵子)인 만월암이 묘하게 둥지를 틀어 두 눈을 놀라
게 한다.

만월암은 자운봉 동쪽 약 500m 고지에 둥지를 튼 고적한 산중암자로 서울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
한 절이기도 하다. (이곳이 서울의 최북단임)
이 절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시절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시 이 지역은
신라의 변방으로 한강 이북을 둘러싸고 신라와 당(唐)이 한참 전쟁을 벌이던 때이다. 게다가 의
상은 영주에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 전에는 주로 왕경(王京, 경주)에 머물며 화엄종(華嚴宗)
연구 및 귀족 불교를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왕경에서 1,000리 밖에 떨
어진 이곳 변방까지 찾아와 절을 세울 이유는 전혀 없다.

이곳의 지형은 커다란 바위가 지붕을 이루고 있고 2개의 바위가 양쪽에서 그를 받치는 기둥 역
할을 하며, 그 사이에 조촐하게 공간이 생겨 조그만 자연산 동굴을 이루고 있다. 지금이야 등산
로와 이정표가 잘 닦여져 있어 찾기야 쉽겠지만 옛날에는 찾기가 힘들 정도로 외진 곳이다. 그
러다보니 조용히 참선에 임하기에는 그만인 곳이라 오래전부터 보덕굴(普德窟)이라 불리는 참선
석굴도량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애당초 절이나 암자는 없었고, 그냥 참선을 위한 동굴이 전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봉산에는 천축사와 망월사(望月寺), 회룡사(回龍寺), 원통사(圓通寺) 등의 크고 작은 오
랜 고찰이 많으니 그 절에 머무는 승려들의 비밀 수행 장소로도 널리 쓰였을 것이다.

지금의 만월암이 생긴 것은 만월보전에 봉안된 석불좌상을 통해 17~18세기 정도로 보이는데, 불
상이 1784년에 개금(改金)되었다는 명문이 있어, 적어도 1700년대(빠르면 1600년대)에 조성되었
을 것이다. 절이란 불상이 있어야 영업이 되니 17~18세기에 조촐하게 암자로 태어났음을 가늠케
하며, 암자의 이름인 만월(滿月)은 석불좌상이 약사여래불이라 그를 상징하는 뜻에서 지어진 이
름이다. (신라 중기 창건설은 그냥 뽀송뽀송한 거품임)

불상을 봉안하고 번듯한 암자로 거듭났지만 따로 건물을 짓지 않고 그냥 동굴을 법당으로 다듬
어 사용한 듯 싶으며, 1940년에 여여거사(如如居士) 서광전(徐光前)이 건물을 짓고 중창을 벌였
다. 그러다가 2002년에 혜공이 만월보전을 지었고, 2004년에 산신각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석굴 자리에 지은 만월보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산신각 등 달랑 건물 2동이 전
부이다. 만월보전은 법당과 요사(寮舍)의 역할을 겸하는데, 서쪽 칸은 법당, 동쪽 칸은 요사(寮
舍)와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며, 건물의 크기는 작고 투박하다. 아무래도 궁벽한 곳에 있다보니
불사(佛事)가 어려워 바위 뒤쪽에 자리를 마련해 산신각을 만들었으며,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이 주변을 밀어 건물을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절을 넓히는 것도 좋지만 그리 하려면 애궂은 숲
을 밀어야 된다. 내 바램이지만 만월암은 지금의 모습이 딱 좋다. 그냥 소박한 석굴도량으로 속
세 곁에 남았으면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작은 암자이건만 다행히 소장문화유산이 하나 있어 절을 길거리에 나앉게 만들지는 않는
다. 바로 만월보전의 주인인 석불좌상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도 다 그를 보기 위함
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포대능선 지옥 체험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암자에는 승려 1명이 머물고 있으며, 그를 돕는 할머니보살 1명이 낮시간에 암자를 지킨다. 외
진 곳에 있어 석가탄신일이 임박했음에도 연등 수입이 적어 큰일이라고 한다. 이곳 외에도 주변
암자들도 경영난이 심각하다고 하며, 이곳에서 가장 큰 절인 천축사도 연등 수입이 많이 줄었다
고 그런다.


▲  만월암 산신각(山神閣)

만월보전에서 바위 너머 북쪽 산자락에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만월보전에서 여기까지는 도보 2
분 거리로 법당과도 제법 떨어져 있어 별개의 공간처럼 다가온다.
이 건물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지은 것으로 건물 외벽은 갑옷처럼 돌로 둘렀고, 목조 지붕에는
동기와를 올렸다. 2004년에 혜공이 지었으며, 내부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산신탱이 있다.


▲  산신각에 봉안된 산신탱

하얀 수염에 하얀 바탕의 옷을 입은 산신이 중심에 앉아 있고, 그 좌우로 호랑이 2마리가 제법
성난 성난 표정으로 그의 곁을 지킨다. 아마도 산신이 제때 임금을 주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지금까지 본 산신탱 호랑이 가운데 가장 패기가 넘치는 모습임) 그리고 앳된 표정의 동자(童子
) 3명이 양쪽 가장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  만월암 바위 위쪽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이 바위 밑에 바로 만월보전이 자리해 있다.

▲  만월보전 현판 - 글씨에 생기가 서린 듯 하다.

바위 밑에 자리한 만월보전은 만월암의 중심 건물로 예전 석굴 자리이다. 2002년에 혜공이 지은
건물로 한정된 자리를 활용하다 보니 정면 4칸, 측면 1칸의 'ㄱ'자 모습이 되었으며, 서쪽 칸은
법당으로, 동쪽 칸은 요사로 쓰인다. 요사에는 만월선방(滿月禪房)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법
당과 요사를 바로 이어주는 문은 없고, 툇마루를 통해 이동하면 된다.
법당 안에는 약사여래인 석불좌상을 비롯하여, 관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 1969년에 만든 석
가모니후불탱화와 신중탱, 사천왕탱, 산신탱이 내부를 화려하게 수식한다.


▲  만월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탱(神衆幀)
1969년에 제작된 그림으로 등장인물이 복잡해 정신을 다 빼놓는 다른 신중탱과
달리 조금 여유가 있어 보인다.

▲  만월보전 우측 벽에 걸린 산신탱

만월암은 산신탱이 2개나 있다. 이 그림은 1969년에 조성된 것으로 산신각에 봉안된 것과 거의
비슷한 분위기이다. 앞서 산신각의 그것처럼 호랑이가 많이 성이 나 있으며, 꼬랑지는 산신의
머리를 칠 기세이다. 그리고 동자 2명은 산신의 지팡이와 여러 물건을 들며 산신 옆에 서 있다.


▲  만월암 석불좌상(가운데 큰 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1호

만월보전 불단에 봉안된 석불좌상은 만월암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소중한 밥줄이다. 포근한
인상을 지으며 속세를 굽어보는 그는 피부부터 옷에 이르기까지 온통 하얀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원래는 금동불(金銅佛)로 근래에 호분을 씌워 백불(白佛)이 되버린 것이다.

그의 왼손에는 빨간색의 약합(藥盒)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藥師如來)임을 알 수 있으며,
약합 안에는 중생의 갖은 병을 치유하는 약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약으로 여기까지 온 나부터
치료해주면 좋으련만 약합의 뚜껑은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의 두 귀는 중생의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려는 것인지 어깨까지 늘어졌다. 코는 오목하
고 눈은 지그시 떴는데, 눈동자가 진하며, 입술은 립스틱을 바른 듯, 매우 붉다. 불상이 지나치
게 하얗다보니 더 진하게 보이는 것이다.

예전 석굴 석벽에 '乾隆四十九年六月日佛像改金施...'이란 명문(銘文)이 있어 건륭(乾隆) 49년
6월, 즉 1784년에 시주를 받아 개금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개금시기 이전이
확실하고 불상의 양식까지 고려한다면 최대 1600년대까지 가능하며, 참선용 석굴에서 암자로 태
어난 시기도 불상이 조성된 그 시기가 아닐까 여겨진다.

불상의 높이는 78cm로 좌우에는 근래에 만든 하얀 피부의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
菩薩)을 협시(夾侍)로 두어 약사여래3존불을 이루었다. 사람 키에 가까운 높이와 단정한 체구,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의(通肩衣)에 보이는 옷 주름 표현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 도봉산(서울 구역)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획득했
으며(1999년에 지정됨), 만월암에 한줄기 빛으로 이곳을 먹여살리는 듬직한 존재이다.

만월보전 앞에는 샘터가 있다. 샘터라고 해서 물이 늘 졸졸졸 나오고 석조에 마냥 물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 수도꼭지로 물을 틀어서 마시는 형태로 이곳을 거쳐가는 등산객들의 지친 목을
달래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물은 마음껏 마셔도 되며, 반드시 꼭지를 잠그기 바람)
물을 마시고 절을 둘러보니 할머니보살이 커피 1잔 하겠냐고 그런다. 그래서 1잔 달라고 그러니
종이컵에 커피를 타서 건네준다. 커피를 마시며 석불좌상과 만월보전 구석구석을 사진에 담으니
부처님을 찍으면 실례라고 잔소리를 건넨다. 그래서 적당히 답을 하니 그제서야 표정을 바로 하
고는 그냥 둔다.

만월암이 워낙 작다보니 외딴 산골에 묻힌 여염집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게다가 앉아
갈 수 있도록 툇마루도 있고, 석조약사불의 인자함도 깃든 곳이다 보니 아비규환의 속세를 등지
며 하룻밤 청하고 싶다. (단 해우소 상태는 장담 못함) 번뇌도 멋모르고 뒤쫓아오다가 떡실신할
정도로 깊은 산주름에 묻힌 고적한 암자로 만약 아무도 없는 버려진 공간이었다면 나만의 비밀
아지트로 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만월암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아쉽지만 다시 길을 떠났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니
기 때문이다. 보살 할머니가 합장을 하며 '이제 망월사로 가십니까?' 그러니 내가 '아니요. 속
세로 내려갑니다'

※ 도봉산 만월암, 포대능선 찾아가기 (2013년 10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보 이동, 만월암까지는 1:40~50분, 포대능선은 2:00
  ~2:10 소요, <도봉산역(도봉산역 중앙차로 정류장) → 도봉산 141번종점 → 광륜사 → 도봉서
  원 → 도봉산장 → 만월암 → 716m봉우리 → 포대능선>
  포대능선은 거기서 20분 정도 추가>
* 서울시내버스 141번(도봉산↔염곡동), 142번(도봉산↔방배동), 1127번(도봉산↔수유리), 1128
  번(도봉산↔길음역)을 타고 도봉산 종점에서 내리면 걷는 거리를 10분 줄일 수 있다.
* 만월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29-1 (☎ 02-955-3719)


▲  밑에서 바라본 만월암 만월보전
만월암 석불좌상 문화재 안내판이 만월보전 앞이 아닌 밑에 세워져 있다.
그만큼 만월보전 주변이 협소하다.


♠  도봉산 마무리

▲  도봉서원(道峯書院) 복원 조감도(鳥瞰圖)

만월암을 등지고 정신없이 내려가니 천축사와 길이 갈리는 도봉산장이다. 여기서부터 길은 수월
하여 마치 말에 올라탄 듯, 거침없이 내달려 어느덧 도봉서원에 이른다. 허나 도봉서원은 서원
주변을 철제 담장으로 빙 두르며 복원 공사에 여념이 없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공사는 2014년까
지 진행되며, 조감도에 나온 모습대로 재현된다고 한다.

도봉서원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으로 나름 희소가치가 있는 명소이다. 한때 서울에
는 노량진(鷺梁津)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암사동(岩寺洞) 한강변의 구암서원(龜巖書院)이 있었
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내리친 서원철폐령에 앞다투어 사라지고 말았다. 구암서원은 그
나마 조두비(俎豆碑)와 주춧돌이 남아있고, 민절서원은 사육신묘(死六臣墓) 사당이 대체 역할을
하고 있다.

도봉산입구에서 천축사나 자운봉, 우이암으로 가려면 꼭 지나야되는 목좋은 곳에 자리한 도봉서
원은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지역 유림(儒林)이 뜻을 모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세웠다. 원래는 도봉산에 제일 가는 사찰이었다는 영국사(寧國寺)가 있었으
나 유림들이 절을 때려부셨다고 전하며, 조선 말까지 이곳 일대를 영국동(寧國洞)이라 불렀다.

사당을 비롯한 서원의 주요 건물은 1574년에 완성되었으나 남언경이 병에 걸려 양주목사를 그만
두자 서원 공사는 잠시 중단되었고, 뒤를 이어 양주목사가 된 이제민(李齊閔)과 이정암(李廷馣)
이 나머지 공사를 진행하여 1579년 완성을 보았다.
서원이 완성되자 조정에서 도봉(道峯)이란 사액을 내려 도봉서원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
되어 1608년 이후에 중건했다. 1696년에는 도봉서원 단골이던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했으
며, 1723년 조정을 장악하던 세력의 압박으로 송시열의 위패가 추방되기도 했으나 1775년 영조
의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받아 다시 제삿밥을 받게 되었다. 서울 근교의 유명 서원으로 많은 유
생들이 찾아와 한가롭게 성리학이나 논하다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은 아작
이 나고, 위패는 땅에 매장되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해 임시로 단이 설치되어 봄과 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냈으나 6.25가 터지
면서 그마저 중단되고 만다. 그러다가 1972년 '도봉서원 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사우와 신문(
神門)을 복원했으나 왕년의 모습에 1/4도 안되는 규모이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정로사
(靜老祠)는 3칸 규모로 조광조와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
에 향사를 지낸다. (지금도 지냄) 제품(祭品)은 3변(籩) 3두(豆)로 한때 재산은 전답 700여 평
이 있었다.

사우 외에는 복원을 하지 못했으나 다행히 윤곽이 남아있고 이율곡(李栗谷)의 '도봉서원기'를
비롯하여 옛 자료가 많이 남아있어 복원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2012년부터 기존 건물을
눕히고 한참 복원공사를 벌이고 있는데, 2014년 서원이 완성되면 서울 유일의 서원이자 도봉산
을 수식하는 명소로 선비문화 체험의 장으로 한몫 단단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도봉구청에서
서원 활용에 매우 열성적임) 또한 공사중에 옛 영국사의 흔적이 나오면 주춧돌은 서원 주변에
두고, 불상 등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넘겨서 유생들에 의해 비명에 간 영국사도 조금은 위로해주
었으면 좋겠다.
도봉서원 주변 도봉계곡은 서울 근교 으뜸 계곡으로 칭송을 받았는데, 서원의 주인인 조광조는
이곳을 즐겨찾기 했으며, 조정 일을 마치면 수레를 몰아 이곳에서 놀았다고 전한다. 또한 송시
열의 수제자로 도봉서원 운영에도 관여한 권상하(權尙夏)는 '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여 원래부터
경기도에서 제일 이름난 곳'이라 찬양했고, (당시 도봉동은 경기도 양주목 관할)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한양 성곽을 등지고 있는 명산이라면 도봉산과 삼각산을 언급하는데, 그 계곡과
수석이 아름답기로는 영국동(도봉계곡)과 중흥동(重興洞, 북한산성계곡)이 가장 뛰어나다'했다.

이들 계곡에는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권상하, 이재(李縡), 김수증(金壽增) 등 옛 사람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14개 전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9년 10
월 도봉서원과 하나로 묶어 '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지정되었다.


▲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

도봉서원 바로 앞 계곡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1700년 7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죽기 1년 전에 새긴 글씨이다. 고산앙지란 옛 사람들
이 필수로 배웠던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김수
증이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산앙지 4글자 가운데 제일 밑에 있는 지(止)는 늘 계곡물에 잠겨 있으며, 앙(仰)은 절반 정도
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가뭄 때면 온전하게 볼 수 있다. 위쪽에 쓰인 고산(高山)
은 완전히 뭍으로 나와 햇볕을 쬐고 있다. 이들 글자 가운데 산(山)은 3개의 산봉우리처럼 귀엽
게도 새겨져 눈길을 끈다. 고산앙지 옆에는 글씨를 새긴 시기가 적혀있는데 경진(庚辰) 7월 (밑
에 부분은 물에 잠겨 안보임)이라 쓰여 있다.


▲  광륜사(光輪寺) 앞에 솟아난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5호

도봉서원을 지나 10분 정도 내려가면 광륜사란 절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법등(法燈)의 역
사가 만월암의 신중탱(1969년 제작)보다 더 짧아보이는데, 연혁이 담긴 안내문을 보니 이곳 역
시 67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쓰여있다.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의상대사를 천축사와 만월
암, 광륜사가 아주 사이좋게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경내에 오래된 유물은 전혀 없고, 고색의 기운이 말라 구체적인 창건 시기는 파악하기 힘드나
이이(李珥)가 남긴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에 광륜사의 옛 이름인 만장사(萬丈寺)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고려 때나 늦어도 조선 초에 법등(法燈)을 킨 것으로 여겨진다.
한때는 영국사, 천축사와 더불어 도봉산의 대표적인 절이었으나 영국사가 강제로 폐사되면서 그
영향으로 쇠락해오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후 터만 간신히 남은 것을 조선 후기
에 신정황후(神貞皇后) 조씨<조대비(趙大妃)>가 부친인 조만영(趙萬永)이 죽자 집안 선산(先山)
과 가까운 만장사터에 지금의 절을 짓고, 인근에 별장을 지어 자주 찾아왔다. <인근 녹야원(鹿
野苑)에 조대비 별장이 남아있음> 그리고 흥선대원군도 조대비 별장을 가끔 찾아와 국정에 지친
머리를 식히기도 했다.
1970년 이후 금득보살이 절을 크게 중창했으며, 2002년에는 신도들의 열화와 같은 시주에 힘입
어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했는데, 이때 무주당 청화대종사가 절의 이름을 광륜사로 갈았다.

광륜사 앞에는 2그루의 나이 지긋한 나무가 서로 앞다투어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윗 사진
의 나무는 나이가 약 215년(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기준임, 지금은 약 250년)으로 높이 17m,
나무 둘레가 3.8m에 이르며, 광륜사에서 관리한다. 아마도 도봉서원을 들락거리던 선비들이 중
간 휴식처로 삼고자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  광륜사 앞에 솟아난 2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4호
나무 높이 18m, 둘레 1.9m로 앞의 나무보다
키가 1m 더 크고, 둘레가 절반 정도 밖에
안되는 무지 날씬한 나무이다.
(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는
165년, 지금은 200년)


▲  도봉산 서원마을터<서원동(書院洞)> 표석

도봉서원 밑에 형성된 서원마을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절로 따지면 일종의 사하촌(寺下村)과
비슷한 마을이다. 이곳에 있던 마을은 도봉산을 포함한 북한산국립공원 일대를 정비하면서 모두
밀어버렸다.


▲  북한산국립공원 표석의 위엄
도봉산이 편의상 북한산국립공원에 편입되어 버렸지만 북한산과 도봉산은
엄연히 다른 산이다.

▲  도봉동문(道峯洞門) 바위글씨 -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도봉산탐방지원센터 부근에 있는 도봉동문 바위글씨는 대노(大老), 송자(宋子)로 추앙받는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멸망한 명나라에 충성과 사대(事大)를 보이며 명나라의 부흥을 꿈꾸던 어리석
은 꼴통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라고 한다.
도봉동문은 도봉서원과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며, 대학자가 쓴 글씨가 그런지 필체가
아주 율동을 부린다.


▲  도봉산에서 먹은 순두부찌개와 해물파전의 위엄

도봉산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내려오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 7시를 가르킨다. 오후 2시에 올라
갔으니까 5시간 동안 도봉산을 방황한 셈이다. (도봉산 종점 → 천축사 → 마당바위 → 자운봉
고개 → 포대능선 → 716m봉우리 → 만월암 → 도봉서원 → 도봉산 종점)

도봉산(도봉동 지구)은 두부와 순두부 음식이 유명하다. 도봉산 종점과 도봉산탐방지원센터 사
이에 등산복/등산용품 가게와 온갖 식당이 밀집된 공간이 있는데, 그곳의 두부 음식이 괜찮다.
예전에 가봤던 식당에 가볼까 궁리를 하다가 적당한 식당(식당 이름은 까먹음)에 들어가 자리를
피고 앉았다.

나는 순두부조치(찌개)를 시키고, 후배는 산채비빔밥을 골랐다. 그리고 그것만 먹으면 무척 허
전하니 산행뒷풀이용으로 해물파전 1장과 동동주 1동이도 같이 주문했다.
제일 먼저 해물파전이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 덩어리가 제법 크다. 처음에는 시장기가 상당하여
이거 가지고 되겠나 싶었는데, 먹고 보니 계속 커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맛은 괜찮아 파전 그
릇을 모두 비웠다. 파전을 1/3정도 먹은 시점에서 순두부찌개와 산채비빔밥, 동동주, 밑반찬이
나타나니 파전에게 일제히 쏠린 시선을 2/3 이상 덜게 해준다.

순두부찌개는 속세에서도 종종 먹는 음식인데, 순두부도 많고, 조개도 많이 들어가 있고, 그런
데로 먹을 만하다. 밑반찬은 김치와 콩나물, 산채나물 등 3가지 정도이며, 동동주 같은 경우는
양이 깊어서 배부른 배를 꾸역꾸역 억지로 눌러가며 간신히 동이를 비웠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저녁 겸 산행 뒷풀이를 마치며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도봉
산과 내 제자리는 무척이나 가깝다는 것.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매년 10월 중순 주말에는 도봉구 가을축제의 일환으로 도봉산축제가 열린다. 도봉산 공영주차
장과 생태공원, 도봉산 제1휴식처(광륜사 부근) 일대에서 등산대회와 도봉서원 추향제(秋享祭),
자연음악회, 도봉산 사찰음식전, 산사음악회 등을 선보이며, 보통 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문의 도봉문화원 ☎ 02-905-4026, 도봉구청 문화관광과 ☎ 02-2091-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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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 자락에 안긴 비구니 도량의 성지, 울주 석남사 (석남사계곡)

 


' 한여름 산사 나들이, 울주 가지산 석남사(石南寺) '

▲  석남사에서 만난 한 송이 연꽃

물소리 깊은 골에 다소곳 앉은 암자
석양 고인 뜰에 모란은 홀로 듣고 
낭랑히 올리는 마지 메아리만 감돈다
일체를 외면한 젊음 먹장삼에 감싸는데
서리는 향연(香煙) 속 손이 고운 수자(修子)들
법탈(法脫)은 애정보다도 더 뜨거운 혈맥(血脈)일레

* 시인 이영도(李永道)가 석남사 수좌들의 삶을 그린 시


여름 제국의 삼복(三伏) 더위가 한참 절정을 이루던 7월 끝무렵에 울주군에 자리한 석남사를
찾았다.
아침 일찍 부산서부(사상)터미널에서 밀양(密陽)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천황산 얼음골로
들어가는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피서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얼음골의 품으로 들어선다.
안하무인이던 여름의 제국도 그 앞에서는 꼬랑지를 내리고 피해간다는 얼음골. 여기서만큼은
무더위란 단어는 잊어도 좋다. 땀을 흘릴 일이 거의 없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느낄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겨울에는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와 겨울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
게 만든다. (☞ 얼음골 보러가기)

얼음골에서 거의 12시까지 더위를 잊으며 머물다가 자리를 털고 속세로 나왔다. 마침 석남사
로 가는 직행버스 시간과 맞아떨어져 그곳을 거쳐 울산(蔚山)시내로 넘어가려고 했다.
드디어 나타난 석남사행 직행버스, 얼음골에서 사람들이 싹 내려 차 안은 적막에 잠겼다. 버
스도 시원한 얼음골이 좋은지 출발시간을 5분이나 넘기고 나서야 출발을 했다.

얼음골에서 석남사로 가는 길은 예전에는 무척 험했으나 4차선 신작로와 터널이 뚫리면서 겨
우 20분 만에 석남사에 이른다. 버스에서 내려 석남사를 애써 외면하며 언양(彦陽)으로 나가
려고 했으나 가까이에 보이는 일주문이 정처 없는 내 마음에 진하게 동요를 일으키면서 나도
모르게 석남사로 뚜벅뚜벅 움직였다. 이곳은 10여 년 전에 가본 적이 있어서 통과하려고 했는
떼, 어느새 일주문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1년도 아닌 자그마치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정말 간만에 들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석남사 가는 길

▲  석남사 일주문(一柱門)

일주문 앞에는 관람객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는 매표소가 있다. 매표소에는 아저씨 대신에
중년으로 보이는 비구니<比丘尼, 여승>가 표를 팔고 있었는데, 소장 문화유산에 비해 쓸데없이
비싸게 책정된 입장료에 놀란 가슴을 간신히 쓸어 내리며, 혹여 대학생 할인이 되는지를 물어봤
다. (대학교 졸업한지는 여러 해 되었지만 만약에 대비하여 학생증은 고이 간직하고 있음)
허나 비구니의 답변은 승려답지 않게 꽤나 세속적이었다. 19세 이상은 무조건 어른 요금을 내야
된다며 인상을 쓴다. 그 정도의 돈을 기꺼이 내고 들어갈 만큼 땡기는 곳은 아니지만 마땅한 정
처도 없고 해서 씁쓸한 마음을 꿀꺽 삼키며 입장료를 내놓고 일주문을 들어선다.
 
청기와가 입혀진 일주문은 1984년에 법용(法涌)이 세웠다. 문 정면에는 절의 이름을 알리는 '가
지산 석남사(迦智山 石南寺)' 현판이, 뒤에는 '장엄적멸도량(莊嚴寂滅道場)' 현판이 있다.

절을 찾으면 보통 일주문이 가장 먼저 나와 중
생을 맞이하는데,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
짝이 없다. 모든 중생을 안고 가겠다는 부처의
마음이 담긴 것이다. 허나 바로 앞에 매표소를
두어 돈 내는 사람만 가려서 보내니 일주문의
열린 마음을 무색하게 만든다.


       ◀  일주문 '장엄적멸도량' 현판


▲  숲이 무성한 석남사 가는 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녹음(綠陰)이 진하게 서린 숲길이 곧게 펼쳐진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
하여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이 싹 정화되는 듯 하다. 나무가 베풀어 준 청정한 기운
과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에 번뇌(煩惱)와 무더위가 배겨나지 못하고 훨훨 털려간다. 허나 번뇌
가 무거워 저 멀리 날라가지 못하고 일주문 앞에서 떡 나를 기다리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속인(
俗人)인 모양이다.

삼삼하게 우거진 석남사 숲길은 정말 우리집으로 고이 훔쳐오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여름이
저 정도로 속인의 마음을 앗아가니 늦가을은 오죽할까?


▲  석남사 승탑(僧塔) 무리들

길에 단단히 홀려 정면만 보고 가다가는 중간에 자리한 승탑군을 놓칠 수 있다. 일주문을 지
나 150m 거리에 자리한 이들 승탑은 넓게 다져진 기단(基壇) 위에 석종형(石鐘形) 3기와 석등을
닮은 독특한 모습의 네모난 승탑 1기, 그리고 승탑의 주인을 알리는 비석 3기가 자리를 메운다.
이들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네모난 승탑은 지봉당 거기대사(智峰堂
巨機大師)의 탑이며, 비석을 갖춘 석종형 3기는 제월당 화백대선사(霽月堂 和伯大禪師)와 함월
당 덕휘대선사(含月堂 德輝大禪師), 시암당(矢岩堂) 세위대사(世位大師)의 탑이다.

▲  숲길 중간에 네모난 샘터

▲  석남사 계곡

승탑군을 지나면 가깝지만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석남사계곡이 속시원히 모습을 비춘다. 피서
의 성지로 명성이 높은 이곳은 일주문 부근까진 피서객들이 가득 진을 치며, 여름에 대항한다.
허나 그 위쪽(청운교 위쪽과 석남사 주변)은 석남사에서 식수원과 수행을 이유로 계곡 출입을
막고 있어 완전 대조를 이루는데, 그 덕분에 계곡 상류는 맑은 기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청운교를 건너면 석남사를 크게 일군 인홍선사(仁弘禪師)의 승탑과 비석이 나온다. 1957년부터
석남사 주지로 있으면서 영남 제일의 비구니 도량으로 일군 인홍은 목소리가 우렁차 고함을 지
르면 가지산이 쩌렁쩌렁 울렸다고 한다.


▲  경내를 가린 침계루(沈溪樓)

인홍선사의 승탑과 섭진교를 건너면 석축(石築) 위에 터를 다진 석남사의 모습이 떠오르듯 보이
기 시작한다. 잔잔한 물소리의 계곡을 길동무로 삼으며 조금 더 들어가면 경내로 인도하는 침계
루가 마중한다.

침계루는 2층 건물로 1974년 주지 인홍이 중건했다. 1984년 법희(法希)가 중수했으며, 대중의식
과 좌석, 공양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원래 1층은 건물로 막혀있었으나 가운데 칸을
뚫어 경내로 통하는 문으로 삼았다. 침계루 현판은 청남 오제봉(靑南 吳濟峯)의 글씨이다.

침계루로 가는 길 주변 돌난간과 난간줄, 꽃과 풀에는 잠자리가 가득했다. 심심해서 절을 앞둔
시점에서 잠자리 사냥을 잠시 즐기니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잡힌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단
양(丹陽) 시골에서 갈고 닦은 잠자리 사냥 기술도 한몫 한다. 그들을 잡으면 미련 없이 바로 풀
어주고 다시 사냥에 들어가는 식으로 약간의 시간 만에 50마리를 넘게 잡았다. 물론 잡힌 것들
이 또 잡힌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 비슷해서 생겼으니 말이다.
몇몇 잠자리들은 높은 곳 대신 땅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길바닥에 처참하게 뭉게진 잠자
리 시체가 여기저기 보인다. 그들은 빠르게 다가오는 수레의 바퀴를 피하지 못하여 참변을 당했
는데, 빈대떡이 된 그들의 비참한 말로를 보니 어두운 기분이 잠시 나를 엄습한다. 잠자리들이
좀더 깨어있었더라면 그 피해는 훨씬 줄일 수 있었을텐데, 그렇다고 절에서 그들의 안전까지 지
켜주는 것은 힘든 일이다. (관심도 없을테고..)

그들의 극락왕생을 마음 속으로 기원하며 침계루의 아랫도리로 경내로 들어서면 담장과 침계루
에 가려진 석남사의 속살이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석남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도량, 가지산 석남사(迦智山 石南寺)
가지산에 안긴 석남사는 우리나라 비구니 사찰의 중심지이자 비구니 수행도량의 성지로 공부가
매우 엄하기로 유명하다.

이 절은 신라가 한참 기울어가던 824년<신라 헌덕왕(憲德王) 16년>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창건
했다고 한다. 도의는 이 땅에 처음으로 선종(禪宗)을 들인 인물로 784년 당(唐)나라로 넘어가
오랫동안 선종을 익히고 821년에 귀국했다.
그는 이곳에 석남사를 세웠는데, 경내에 만든 화관보탑(華觀寶塔)의 빼어남과 각로자탑(覺路慈
塔)의 아름다움이 영남 제일이라 하여 절 이름을 석남사(石南寺)라 했다고 하며, 다른 설로는
가지산의 별명이 석안산(碩眼山)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석안사라 칭했다고도 한다. 허나
도의의 창건설은 신뢰하기가 어려운 실정으로 울산시에서 펴낸 '울산광역시시사(市史)'에는 도
의의 제자이자 진골(眞骨) 출신인 진공(眞空, 855~937)이 창건했다고 나와있다.
다만 경내에 도의국사승탑이라 우기고 있는 신라 후기 승탑과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신라 말기
에 창건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도의의 제자나 도의와 관련된 가지산문(迦智山門) 파에
서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700년 동안 적당한 바퀴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74년(현
종 15년)에 언양현감 강옹(姜甕)의
시주로 탁령(卓靈), 자운(慈雲), 의철(義哲)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때 진혜(振慧), 쌍원(雙遠), 익의(益儀) 등이 단청을 칠하고 종과 북을 만들었다.

1736년(영조 12년) 김언창(金彦昌)의 시주로 대웅전 영산회상도가 조성되었으며, 1803년(순조 3
년)에는 침허(枕虛)와 수일(守一)이 가람을 중수하고 미타탱과 지장탱을 조성했다. 1863년(철종
14년)에는 대웅전의 신중탱과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89년에는 독성탱을 만들었다.

1912년 우운(友雲)이 중수했으나 6.25전쟁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만다. 1957년 인홍(仁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망해가던 석남사는 중흥의 기운을 맞게 된다. 1958년 청화당을 짓는 것을 시
작으로 대웅전과 극락전 등을 일으켰으며, 1963년 심검당과 침계루 등을 신축했다.
그리고 꾸준히 불사를 벌여나가 20여 동의 건물을 싹틔웠으며, 우리나라 으뜸의 비구니 선원도
량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2001년에는 옛 동인암터에 금당(金堂)을 지어 선원을 늘렸으며, 100여 명이 넘는 비구니들이 상
주하면서 엄격한 계율을 지키는 종립특별선원(宗立特別禪院)이 되었다.

석남사는 다양한 방식의 선원(禪房)을 운영하는데, 그중의 하나인 정수원(正受院)은 보통의 선
방처럼 결제와 해제를 지키지만, 금당은 해제가 따로 없이 1년과 3년씩 정진하는 수좌(首座)들
만 모여 있다. 또한 심검당(尋劒堂)은 노승(老僧)들이 자유롭게 수행하는 곳이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조사전, 금당, 심검당, 강선당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승탑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인 3층석탑과 수조 등의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비록 건
물들은 고색의 내음이 싹 씻겨 내려갔지만 승탑과 3층석탑은 신라 후기 석조물이며, 수조는 고
려 후기(또는 조선 초기) 것이라 석남사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또한 비구니 사찰이라 경
내가 무척 깔끔하고 정갈하며, 지세를 이용해 건물들이 알맞게 배치된 점이 눈에 띈다.

가지산의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심산유곡의 절집으로 경관이 아름답고 석남사계곡이 절의 곁을
감돌아 그야말로 명당이다.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복잡한 마음이나 번뇌를 가다듬
기에 좋다. 또한 얼음골과 호박소계곡을 비롯하여 배내계곡, 간월산 등이 가까운 곳에 포진해
있어 이들을 겯드리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석남사에서 가지산 정상까지는 2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운문산이나 남명, 호박소계곡으로 내려
갈 수 있다.

※ 석남사 찾아가기 (2013년 9월 기준)
* 태화강역(옛 울산역), 울산시외터미널(터미널4거리 서쪽 정류장), 공업탑, 신복로터리, 언양
  터미널(내부)에서 석남사행 1713번 좌석버스 이용 (15~40분 간격)
* 태화강역, 울산시외터미널(터미널4거리 서쪽 정류장), 울산시청, 울산역(고속전철), 언양터미
  널(바깥)에서 807번 시내버스 이용 (20~30분 간격)
* 울산시내에서 갈 경우에는 1713번이 807번보다 훨씬 빠르다.
* 울산역(고속전철)에서 328, 807번 시내버스 이용
* 밀양터미널에서 석남사행 직행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경부고속도로 → 언양나들목에서 밀양 방면 24번 국도 → 궁근정 → 석남사주차장
② 대구~부산고속도로 → 밀양나들목에서 울산 방면 24번 국도 → 산내 → 호박소터널 → 덕현
   교차로에서 석남사 방면 → 석남사주차장

★ 석남사 관람정보 (2013년 9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700원 (단체 1,500원) / 청소년과 군인 1,300원 (단체 1,000원) / 어린이
  1,000원 (단체 800원) <단체는 30인 이상>
*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 (☎ 052-264-8900)
* 석남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석남사 승탑에서 바라본 석남사의 뒷모습


♠  석남사 둘러보기 (대웅전 주변)

▲  대웅전(大雄殿)과 3층석가사리탑

침계루를 들어서면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 구역이 나온다. 뜨락에 심어진 3층석탑을 중심으로 북
쪽에 대웅전, 양 옆구리에 서래각, 강선당이 마주하고 있으며, 남쪽은 침계루이다.

푸른색 기와가 입혀진 대웅전은 석남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
붕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66년에 언양현감 강옹의 지원으로 재건했으며, 6.25시
절에 소실된 것을 1974년에 중수했다. 그런 대웅전 앞에는 1973년에 복원된 3층석탑 1기가 자리
해 있어 1금당 1탑 양식의 가람(伽藍)배치를 이루고 있다.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대웅전 내부에는 화려한 꽃과 서수로 수식된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그 자리에 18세기에 조성된
석가3존불을 봉안했다. 이들은 돌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1736년 후불탱화 조성 때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허나 1716년 청월추연(靑月秋演)이 쓴 석남사적(石南寺蹟)을 통해 17
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보관(寶冠)을 쓴 미륵불(彌勒佛)과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을 두
었으며, 표정은 조금 인상을 쓴 듯 보이기도 하나 그런데로 미소를 띄우고 있다.

석가3존불 뒤에 든든히 자리한 후불탱화는 1736년 금어 임한(任閑), 민휘(敏煇)가 그린 영산회
상도이다. 색채가 서로 조화를 이룬 우수한 작품으로 불단 동쪽에는 1893년에 그린 지장탱화가,
서쪽에는 1863년에 그린 신장탱화가 있다.

▲  종무소로 쓰이는 서래각(西來閣)

▲  3층석탑과 선열당(禪悅堂) 뜨락

       ◀  대웅전 뜨락 3층석가사리탑
대웅전 뜨락에 심어진 3층석탑은 폐허를 딛고 일
어선 석남사의 도약을 상징하듯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이 탑은 824년 도의국사가 세웠다고 전하나 신
뢰도는 없으며, 원래는 15층의 장대한 탑이었다
고 전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경주 정혜사지(淨
惠寺址) 13층석탑을 뛰어넘는 이 땅 최대의 다
층(多層)탑이 되는 셈이다.
허나 아쉽게도 이 역시 믿기가 곤란하며, 임진
왜란 때 파괴되어 기단부(基壇部)만 남아있다가
1973년 주지 인홍이 3층석탑으로 다시 세웠다.
그러니까 기단 위쪽은 그때 새롭게 만들어진 셈
이다.
탑의 높이는 11m, 기단부의 폭은 4.57m로 2중의
기단 위에 탑을 세운 것과 상층기단의 탱주가 1
개인 점은 전형적인 신라 후기 석탑 양식으로
비록 824년은 아니더라도 빠르면 신라 후기, 늦
어도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탑 내부에는 스리랑카 사타시싸가 기증한 부처의 진신사리 2과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석가사리
탑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  수조(水槽) - 울산 지방문화재자료 4호

침계루 뒤쪽에는 석남사의 식수를 제공하는 화강암 수조가 있다. 수조는 옛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조(石槽)로 대부분 네모난 모습이나 이 수조는 모서리 부분의 안과 밖을 둥글게 다듬고
연꽃봉우리 문양을 새겨 보기는 좋게 만들었다. 고려 후기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
는데, 원래는 공양간 내부에 있었다. 그러다가 대웅전 뜨락 침계루 뒤쪽으로 꺼내 만인이 보게
끔 공개했다.

석조의 길이 2.7m, 높이 0.9m, 너비 1m로 가지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마를 날이 없다. 물도 담
백하여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마시니 목구멍이 시원하다고 쾌재를 외친다. 수조 바닥에는 중생
들이 무책임하게 내던진 동전들이 빛을 잃어가며 잠들어 있다.


▲  조사전(祖師殿)

대웅전 뒤쪽 높다란 곳에 터를 다진 조사전은 호진당(護眞堂)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1905년 남
호선사(南湖禪師)가 중건했다.
1961년 인홍이 중수했고, 1974년 다시 지을 때 도의국사의 진영을 새롭게 제작했다. 이후 2003
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으며, 절을 창건했다는 도의국사를 비롯해 석남사와 인연이 깊은
승려 11명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極樂殿)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은 1674년 정우선사가 지었다고 전하며, 지금 건물은 1974년 인홍
이 새롭게 지었다. 불단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석정(石
鼎)이 그린 아미타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준다. 그외에 1994년에 만든 신중탱
과 독성탱, 산신탱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인법(印法)의 작품이다.


▲  극락전 석조아미타3존불
조선 후기에 조성된 아미타3존불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夾侍)하고 있다.

◀ 석남사 3층석탑 - 울산 지방유형문화재 5호
극락전 앞에는 고운 맵시의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대웅전 앞 3층석탑 자리에 있었는
데, 1973년 극락전 뜨락에 있던 연못을 메우고
그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오랫
동안 버려져 있던 옛 석탑의 잔해를 가져와 복
원하면서 중심 탑(3층석가사리탑)으로 삼았다.

탑의 높이 5m, 폭 2.3m로 바닥돌 위에 2중의 기
단(基壇)을 두고 3층의 탑신과 상륜부를 얹힌 신
라 후기 탑으로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相輪部)는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으며, 탑신 옥개석(屋蓋石)
의 층급받침이 5단이라 9세기 후반 정도에 조성
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랜 세월의 때가 곳곳에 끼어 중후한 멋을 선사하며, 적절한 높이와 체감률로 안정감이 돋보인
다. 맵시와 선의 미가 아름다워 비슷한 시대에 태어난 국보/보물급 석탑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
이 없다. 보물로 지정된 승탑 다음으로 오래된 이곳의 보물로 기억마저 희미해진 옛 석남사의
존재를 아련히 일깨워준다.


▲  대웅전 뒤쪽에 누운 엄나무 구유

대웅전 뒤에는 엄나무를 깎아서 만든 길쭉한 구
유가 누워있다. 구유는 나무나 돌의 속을 깎아
서 만든 통으로 절에서 공양밥을 담거나 쌀을
씻어 담는 용도로 쓰이며, 길이 6.3m, 폭 72cm,
높이 62cm의 큰 규모이다.

이 구유는 적어도 500년 이상 된 것으로 원래부
터 석남사에 것은 아니다. 구유 한쪽에 '간월사
(肝月寺) 유(柚) 임○(壬○)'이란 명문이 있어
언양 부근 간월사에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절이 망하면서 가까운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구유에 밥을 담으면 가히 1,000명이 공양을 할
수 있다고 하니 그 크기가 가히 대단한데, 부엌
이 현대화 되기 전에는 저 통을 사용해 쌀을 씻
고 공양용으로 썼겠지만 그 이후는 석남사의 오
랜 기념물로 바래지면서 대웅전 한쪽에 누워 한
가로운 노후를 보낸다. 구유 바닥에는 쌀 대신
먼지만이 수북하니 현대판 식기에 밀린 노장의
쓸쓸함이 비춰진다.

저 구유를 저렇게 놀게 하는 것보다는 구유 공양 체험 행사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통이야 요즘
청결제가 잘 나오니 깨끗하게 빡빡 씻으면 되는 것이고, 그 안에 모락모락 밥을 담아서 4월 초
파일이나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법회일에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석남사 승탑으로 가는 길


♠  석남사 승탑 - 보물 369호

▲  길 끝에 자리한 석남사 부도

대웅전 좌측에는 기와 담장에 둘러싸인 계단길이 있다. 석남사 제일의 보물인 승탑을 알리는 이
정표가 계단 앞에 있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평탄한 길이 나타나며, 그 길의 끝에 맵시가 아름
다운 석남사 승탑이 중생을 기다리고 있다.
승탑으로 가는 길은 비구니의 손길 덕분에 매우 정갈하고 이쁘다. 차곡차곡 입혀진 석축 위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살랑거리며, 한줌의 티끌도 없이 깨끗한 길은 발을 무책임하게 내딛는 것
조차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성지라 할 수 있는 석남사 승탑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경
내에서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넓은 대지에 터를 닦고 팔각원당형(八
角圓堂形)의 형태를 취한 이 탑은 높이가 3.53m로 탑의 주인은 절을 세운 것으로 막연히 여겨지
는 도의국사(道義國師)라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절에서는 안내문과 홈페이지를 통해 '도
의국사부도'라고 강하게 우기고 있음) 다만 탑의 양식을 볼 때 후삼국시대인 10세기 초반에 조
성된 것으로 보이며, 정확한 주인은 설만 있을 뿐, 탑비(塔碑)나 명문(銘文) 등의 물증이 없는
실정이다.

하대석(下臺石) 주위에는 사자와 구름무늬를 돋게 새기고, 중대석(中臺石) 8각의 각 면에는 안
상(眼象)을 조각했으며, 그 안에 꽃모양의 띠를 둘렀다. 중대석은 북을 세로로 세워놓은 모습으
로 가운데 받침돌에는 상하좌우에서 안쪽을 향해 낮게 솟은 꽃모양의 안상을 투각(透刻)하고 그
안에 꽃모양의 띠를 둘렀는데, 이는 신라 후기 승탑의 특징이다.

8각의 앙련(仰蓮) 받침대 위에 탑신을 두고 각 8면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얇게 새겼으며, 앞,뒷
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그 중 앞면에만 자물쇠가 새겨져 있다. 문의 양 옆으로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배치되어 있어 문비와 함께 탑을 수호하려는 장식임을 알 수 있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추녀가 짧고 서까래와 기왓골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그 당시 목조건축 양
식까지 덤으로 살펴볼 수 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앙화(仰花)와 보개(寶蓋), 보주(寶珠)로 이
루어진 상륜(相輪)이 남아 있다.

지금은 저렇게 멀쩡하고 뛰어난 조각과 수려한 미를 보이고 있지만 왜정(倭政) 때 도괴되는 아
픔을 겪었으며, 그 이후 복원은 했으나 너무 대충해서 석재의 위치가 바뀌는 우를 범했다. 그래
서 1962년 복원을 하여 지금에 이른다. 그에게도 나름대로의 우여곡절이 있는 셈이다.


▲  다시 속세로

석남사 승탑을 끝으로 석남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경내에 건물이 많긴 하나 넓게 퍼져있고,
수행공간인 선원이 많은 터라 둘러볼 수 있는 범위는 대웅전과 승탑, 침계루 주변이 고작이다.
솔직히 일반인은 그 이상 살펴볼 필요까지는 없지, 대웅전 주변과 3층석탑, 신라 후기 승탑만
봐도 석남사의 알맹이는 모두 본 것이다.

10여 년 만에 찾은 석남사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제자리로 가기 싫은 마음을 살살 달래며 무거
운 발걸음을 옮긴다. 언제나 부처와 관음보살이 염원하는 그런 세상이 올까? 그런 세상이 과연
있기나 하는 것일까? 이렇게 하여 성하(盛夏)의 석남사 나들이는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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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맞이 명소로 유명한 피서의 성지, 청도 남산 낙대폭포

 


' 청도 남산 낙대폭포 '
청도 낙대폭포(약수폭포)


여름의 제국이 봄을 사정없이 내몰고 한참 세력을 다지던 6월의 한복판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인 부산(釜山)으로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부산으로 바로 가는 것이 몹시 허전하여 부
산과 가까운 적당한 곳을 물색했는데 이제 더운 여름이고 하니 시원한 곳이 땡긴다. 그래서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리다가 청도에 있는 낙대폭포에 시선이 딱 멈춰 그곳을 중간 경유지로
삼았다. 청도읍내하고도 제법 가까워 부담없이 찾아갈 수 있고, 폭포의 명성이 주변에 자자
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충남 천안(天安)까지는 저렴하지만 딱딱한 의자에 굳센 정신력을 요구하는 1호선 전
철을 탔다. 장장 2시간 40분을 달려 천안역에 도착, 여기서 20분을 머물다가 부산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경북(慶北)의 최남단 동네인 청도에 들어선다. 청도(淸道) 땅은 거의
9년 만에 발을 들이는 것인데, 이곳도 정말 인연이 지지리도 없는 동네의 하나다.

청도역에서 읍내로 가니 청도의 명물인 추어탕집이 줄지어 늘어서 유혹의 손길을 진하게 내
민다. 내가 어패류를 썩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때가 점심시간이라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여
간 힘들지 않았다.
간신히 그곳을 벗어나 철길을 건너 낙대폭포가 있는 화양읍으로 이동하는데, 시간이 시간인
지라 점심을 먹고 가는 것이 신상에 좋을 듯 싶었다. 폭포를 보고 내려오면 적어도 오후 3
시가 넘을테니 말이다. 하여 적당한 곳을 찾던 중, 점심 할인을 내건 운문산가든이란 고깃
집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육류를 좋아하고 게다가 점심 할인까지 내거니 별로 망설일 것도
없이 그곳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할인 대상은 소고기 된장찌개와 냉면, 갈비탕 등인데, 토요일과 주말은 할인이 안된다고 그
런다. 허나 이미 신발을 벗고 들어와버렸고 가격도 5,000원선이라(당시 기준, 평일 점심 할
인 4,000원) 된장찌개를 주문했다. 주변을 보니 단체로 온 손님들이 운문산(雲門山)에서 길
렀다는 소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는데, 그 향기가 추어탕 저리 가라 할 정도이다.

잠시 뒤 잘 차려져 나온 된장찌개 백반이 내 앞에 펼쳐졌다. 반찬은 5~6가지 정도로 찌개에
는 소고기가 풍부하게 담겨져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기껏해봐야 조금 들어있겠지 싶었는데,
완전 소고기된장찌개의 이름을 한 것이다. 게다가 공기밥도 2그릇을 준다. 그래서 왜 2그릇
을 주는지 물어보니 식당 아줌마가 웃으며 장정이 1그릇으로 배가 차겠냐고 그런다.
그렇게 미리 1그릇을 서비스로 제공했으니 나야 그저 고마울 따름~ 된장찌개의 맛은 우리집
에서 먹던 것과 거의 비슷하여 2그릇을 흔쾌히 비우고 된장찌개도 말끔히 비웠다. 가격치고
는 제법 괜찮았다.
그렇게 배가 부르니 졸음이 슬쩍 다가와 한숨 자라며 나를 농한다. 아직은 갈 길이 멀어 희
롱을 뿌리치고자 커피 1잔 뽑아 마시며 뙤약볕 길을 재촉한다.

청도군청에 이르니 낙대폭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의 지시에 따라 왼쪽 길로 들어
서니 정면으로 멀리 솟은 남산(南山)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낙대폭포는 바로 그 깊은 산골
에 숨겨져 있다. 여기서 그곳까지는 최소 3km, 배도 두둑히 채웠으니 걸어갈 힘은 충분하
나 문제는 무더위다. 벌써부터 땀이 쭈르륵 쏟아난다. 허나 나는 두 발에 의지해 여기까지
왔으니 택시나 차를 얻어타지 않는 이상은 걸어가야 된다. 워낙 걷는 걸 좋아하고 편한 여
행이 별로인지라 20리 걷는 건 예사로 여긴다. 요즘 내 또래들과 20대 상당수는 편하게 먹
고 놀고 주마간산이나 하는 여행만 추구하여 좀만 힘들어도 개거품을 무는데, 이는 잘못된
여행/답사방식이다. 고생은 여행의 알맹이요 자신을 갈고 닦는 수양이거늘 그것을 외면하
니 무슨 여행이 되겠는가..?


♠  낙대폭포 올라가는 길

▲  남산 밑에 자리한 대동지

청도군청을 지나면 보기만 해도 포근한 전원(田園) 풍경이 펼쳐진다. 그늘이 전혀 없는 오르막
길을 오르면 대동지라 불리는 호수가 나오는데, 남산에서 내려온 물이 잠시 길을 멈추고 여행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수문을 통해 속세로 나간 물은 화양강(華陽江)과 낙동강을 거쳐 바다로 나
가게 된다. 주변 산과 나무들은 호수를 거울로 삼아 한참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대동지를 지나면 그리 급하지 않은 오르막길이 이어지는데, 여전히 햇빛을 막아줄 가로수가 없
으니 뙤약볕에 제대로 노출되어 땀이 대동지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남산과 제법 가까워질 무렵, 'z'모양의 고갯길이 나타나면서 고개의 경사가 다소 각박하게 변신
한다. 허나 그 길을 오르면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남산의 삼삼한 숲과 숲길이 나타나 시원한
그늘을 선사한다. 아무리 더워도 숲이 베푸는 시원한 바람과 청정한 기운 앞에 더위의 부산물(
땀)은 36계를 치느라 바쁘다.


▲  고개 중턱에 자리한 한옥학교의 정문
생김새가 절의 일주문(一柱門)과 비슷하다.


▲  한옥학교를 지나면서 서서히 숲길로 변해간다.

▲  낙대폭포 가는 숲길 (자연 속을 거닐다)
아직 가을도 아니건만 성질 급한 잎사귀들은 벌써부터 땅바닥에 떨어져
쓸쓸히 낙엽을 이룬다.

▲  낙대폭포 주차장과 안내소
4발 수레들은 여기서 무조건 바퀴를 접어야 된다. 여기서 폭포까지는
쉬엄쉬엄해도 10분 정도면 충분하다.

▲  낙대폭포 안내소에 있는 남산 등산로 안내도
안내소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정면에 잘 닦여진 길을 오르면 낙대폭포에 이르고,
오른쪽(낙대폭포 방향 기준) 산길로 가면 폭포 위쪽과 남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낙대폭포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돌길 (1)
햇빛도 굴복시킨 무성한 숲길이 잠시 느슨해지는 구간이다.

▲  낙대폭포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돌길 (2)
느슨해진 돌길은 다시 삼삼한 숲길로 변해간다. 저 산길의 끝에
물맞이 명소로 이름난 낙대폭포가 숨어있다.


♠  대자연이 빚은 명승지이자 물맞이 명소로 무더위마저
굴복시킨 피서의 성지 ~ 청도 낙대폭포(落臺瀑布)

청도읍과 화양읍의 듬직한 뒷산인 남산(南山) 북쪽 자락에 자리한 낙대폭포는 청도8경의 하나로
꼽히는 청도 지역의 명승지이다. 깎아지른 듯한 아찔한 절벽에 의지하여 떨어지는 이 폭포는 높
이 30여m로 2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이 수직으로 떨어지다가 중간에서 거의 50도로 구부러
지면서 다시 90도 직각으로 떨어진다.

폭포 주변은 숲이 삼삼하여 뜨거운 햇빛이 들어오기가 힘들며, 숲이 베푸는 잔잔한 바람과 폭포
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계곡 바람에 여름의 제국도 고개를 숙인 그야말로 피서의 성지(聖
地)이다. 여름 제국의 부산물이 아무리 사람 몸에 살짝 올라타 이곳을 정복하려 하지만 폭포 앞
에 서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줄행랑치기에 바쁘다.

이곳은 봄에는 벚꽃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綠陰)이, 가을에는 오색영롱
한 단풍이 장관을 이루며, 겨울에는 겨울 제국의 시샘을 받아 두터운 빙폭(氷暴)이 되버린다.
특히 이 폭포는 예로부터 신경통에 효과가 있다고 명성이 자자하여 물을 맞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약수폭포(藥水瀑布)란 별칭까지 지니고 있으며, 늦봄과 여름, 초가을에는 폭포물
을 맞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래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폭포 우측에는 샤워장과 옷을
갈아입는 공간을 두었고, 폭포 아래쪽에 화장실을 세웠으며, 의자와 탁자 등을 두었다.


▲  녹음과 어우러진 낙대폭포의 위엄

▲  어린이들을 위한 폭포 아랫쪽 공간

폭포의 물줄기는 그리 굵고 시원한 편은 아니다. 위에서 물방울 튀기듯 떨어져 암벽을 타고 조
용히 내려앉는 정도로 멀리서는 실감이 나지 않지만 폭포 앞에 서면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인
다. 물론 강수량의 차이에 따라 떨어지는 수량도 달라진다.
물맞이 장소는 폭포수가 90도로 떨어지는 아래로 거기서 수건 등을 뒤집어쓰고 물맞이에 임하면
된다. 나도 물맞이를 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지만 그럴 준비를 하지 못해 폭포 앞에서 약간의
물방울만 맞는 정도로 물맞이를 대신했다. 이곳에 있으니 정말 무더위란 단어를 잊을 정도로 시
원하기 그지 없다.


▲  폭포 상단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물줄기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물방울로 흩어져 떨어진다. 돌에 부딪쳐
산산히 부서지는 물방울 소리는 좀 단조롭긴 하지만
그 소리에 무더위는 싹 도망을 친다.

        ◀  폭포 우측에 난 바위 틈새
암벽 사이로 난 틈새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일부라도 남아있는 여름의 기운을 싹 털어낸다.
찬 바람이 부는 냉혈(冷穴)로 안쪽 깊숙히 들어
갈 수 있는데, 저 안에 들어가면 완전 냉동창고
라고 한다. 들어가지 않고 지나친게 아쉬울 따
름..

폭포 출사를 마치고 폭포 좌측에 마련된 휴식 공간에 여장을 풀고 1시간 정도 머물렀다. 폭포에
사람이라곤 나 혼자였으니 마치 폭포가 내 것이 된 마냥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폭포를 곁에 두고
바라본다. 이 폭포가 정말 내 것이었으면, 집으로 고이 담아갔으면 좋으련만 그럴 재주가 없는
것이 그저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대자연이 청도 땅에 내린 선물로 이 지역 명승지로 있어야 되
는 것이 바로 그의 임무이자 운명이다. 


▲  낙대폭포를 등지고 속세로 나오다 ▼
 

폭포에서 그렇게 머물고 있으니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찾아왔다. 그들은 내 곁에 자리를 잡았는
데, 돗자리를 뒤집어 쓰고 물을 맞는다. 여자 꼬마 2명은 폭포 밑에 조성된 공간에서 물놀이를
하며 때 이른 피서를 즐긴다. 기분 같아서는 속세를 잠시 등지고 삼척 미인폭포의 미인처럼 (☞
관련글 보러가기) 폭포 곁에 머물고 싶지만 부산도 내려가야되고 내가 있어야 될 공간이 아니기
에 그들에게 폭포를 넘기고 아쉬운 마음을 남기며 철수했다. 폭포를 등지면서 몇 번이나 돌아봤
는지 그만큼 미련이 컸었나 보다.

폭포를 등지고 나오는 길은 내리막의 연속이라 금세 대동지를 지나 화양읍에 이르렀다. 화양읍
과 청도읍은 행정구역만 다를 뿐, 하나의 읍이나 다름이 없다. 서로의 읍내가 붙어있기 때문이
다. (군청이 화양읍에 있음)
청도읍 동쪽에 자리한 청도역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열차를 타고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고자 남
쪽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청도 낙대폭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마무리를 고한다.

※ 청도 낙대폭포 찾아가기 (2013년 7월 기준)
① 대중교통
* 서울, 영등포, 수원, 천안, 조치원(세종), 대전, 구미, 동대구, 밀양, 구포, 부산역에서 경부
  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 하차 (1시간에 1~3회꼴로 운행)
* 진주, 마산, 창원역에서 동대구 방면 열차를 타고 청도역 하차
* 대구남부정류장과 경산에서 청도행 직행버스 이용 (30~60분 간격)
* 청도역과 청도터미널에서 낙대폭포까지 택시 이용 또는 도보 1시간 / 청도터미널(청도역전에
  있음)에서 이서, 각북, 풍각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범곡(청도군청)에서 하차하여 도보 40분
② 승용차
* 대구부산고속도로 → 청도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모강교차로에서 우회전 → 청도대교를
  건너서 청도군청 방면 한내길로 진입 → 청도군청(양정길) → 양정길 직진 → 낙대폭포

* 소재지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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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사 나들이 ~ 천년 묵은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 (용문산)

 


'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양평 용문산 용문사(龍門寺) '
용문사 정지국사탑
▲  용문사 정지국사탑


여름의 제국을 몰아내고 잠시나마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가을은 겨울제국의 등쌀에
떠밀려 우리 곁을 떠나려고 한다. 차디찬 바람은 겨울의 도래를 알리고 늦가을의 향연을 즐긴
단풍잎은 그 이름도 우울한 낙엽으로 화하여 화려한 윤회(輪廻)를 꿈꾼다. 세상만물을 우울쟁
이로 돌변시키는 늦가을과 겨울의 길목에 친한 이들을 이끌고 양평 용문사를 찾았다.

용문사(龍門寺)는 우리나라에 3곳이 있는데(근래에 지어진 절 제외) 양평 용문사와 예천 용문
사, 남해 용문사가 그것이다. 이들을 묶어서 세상에서는 3대 용문사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특징은 내력이 깊이가 대단하고 문화유산을 적당히 지니고 있으며 속세에 널리 알려진 명물을
1가지는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평 용문사는 이 땅에서 제일 오래되고 크다는 은행나무로
명성을 누리고 있고, 예천(醴泉) 용문사는 불가(佛家)의 사치품으로 꼽히는 윤장대(輪藏臺)가
유명하다. (남해 용문사는 문화유산은 허벌나게 많지만 딱히 대표적인 것은 없음)
양평 용문사는 그 문턱인 용문까지 수도권 전철이 들어오면서 서울과의 접근성이 한층 좋아져
예전보다 훨씬 편하고 저렴하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용문산(龍門山)을 찾는 주말
등산객이 제법 늘었다.

1호선과 중앙선이 만나는 회기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용문행 중앙선 전철을 타고 1시간을 내달
려 용문(龍門)에 발을 내린다. 용문행은 배차간격이 거의 30분이라 1대를 놓치면 그야말로 치
명적이다. 기다리다 지쳐 졸도(?)할 수도 있다.

용문역에서 인근 용문터미널로 이동하니 마침 용문사행 군내버스가 출발을 하려고 한다. 버스
는 용문산 등산객들로 이미 초가축수송 상태, 버스의 네 바퀴가 뭉개질 지경이다. 허나 그 차
를 보내면 무작정 30~40분 이상을 기다려야 된다. 그리되면 환승할인(33분)도 받지 못하고 일
정에도 약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인정사정 없이 버스에 올라 짐짝 수송에 흔쾌히 일
조하며, 간신히 앞문에 매달려 용문사까지 고행의 길을 자처했다.

용문에서 용문사까진 차로 15분 거리로 가깝다. 허나 힘들게 가는 상황이니 그 거리도 지나치
게 멀게만 느껴진다. 정말 서울에서 묘향산(妙香山)을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좀처럼 나오
지 않는 종점을 원망하며 가까스로 손잡이에 매달려 몸을 지탱했다.

용문사 종점에 이르니 가축 수송으로 숨도 못 쉬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하차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대혼란을 겪는다. 게다가 환승할인과 경기도 버스 거리비례제 때문에 무조건 하차단말기와
승차단말기에 카드를 대야 되니 (카드를 안대고 내리면 다음에 1,100원의 패널티 요금을 강제
로 뜯기야 됨~) 자연히 하차 시간은 길어질 수 밖에 없다. 그 줄이 엉키고 설키니 오죽하겠는
가? 그야말로 버스는 아비규환 속세의 축소판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해탈의 경지를 누린 듯 이제서야 숨을 제대로 쉴 것 같다. 버스 안에는 대략
90명 정도가 타고 있던 듯 싶으며, 그들이 싹 내리니 찌그려져 있던 버스 바퀴의 표정도 씨익
밝아진다.

시간이 점심 때를 약간 넘긴 터라 우리는 점심을 먹고자 용문산중앙식당에 자리를 폈다. 용문
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용문산 주막촌에는 많은 주막과 숙박업소가 있지만 그 집의
이름은 예전에 들은 바가 있어서 그 집을 골랐다. 물론 맛은 옆집이나 앞집이나 비슷하다.

우리는 산채비빔밥과 도토리묵, 파전 등 정말 두루두루 시켜 뱃속의 불만을 잠재운다. 그렇게
배불리 먹고 동동주 1잔 걸치니 정말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하니 졸음
이 배 깔고 한숨 자라며 나를 희롱하려 든다.


▲  점심으로 먹은 산채비빔밥

점심을 먹고 잠시나마 쉬었던 두 발을 다시 움직였다. 주막촌을 지나면 관광안내소와 함께 용
문사매표소가 나타난다.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는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확인해보
니 성인은 무려 2,000원... 혹여 단체할인이 안될까 싶어서 할인을 요청했으나 인원이 부족하
다고 절대로 안된다고 그런다. 다른 곳은 적정 인원을 못채워도 10명만 넘으면 눈치껏 해주던
데, 여기는 그렇지 않은 듯 하다. 꿩 대신 닭을 잡을 겨를도 없이 소정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
로 들어선다.


♠  용문사 가는 길 (일주문, 은행나무)

▲  용문사매표소에서 용문사로 인도하는 길

매표소를 지나면 드넓은 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놀이시설이 있는 용문산관광단지
가 나오고, 직진을 하면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과 용문사로 통한다. 광장 주변은 조촐하게 공원
으로 꾸며져 있다. 오래 전에 왔을 때는 주막촌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새 이것저것 심
어 놓아 위락관광단지로 번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을 지나면 용문사 길은 말끔히 포장된 수레길과 흙길인 산길로 갈린다. 여
기서 빠르고 편하게 가고자 한다면 수레길로 가면 된다. 이 길이 용문사로 가는 주된 길로 매표
소에서 용문사까지 수레길로 가볍게 걸어도 20분이면 족하다. 또한 경사도 무척 낮아 누구나 쉽
게 오를 수 있다. 반면 산길은 끝없는 오르막의 연속으로 약간의 등산을 요하지만 운치가 진하
게 깃들여져 있으며, 소위 말하는 친환경적인 흙길이다. 수레길에 비해 인적도 많지 않아 잠시
나마 한적한 산행을 누릴 수 있으며, 용문사의 보물인 정지국사탑비와도 이어진다.

수레길로 접어들어 다리를 건너면 (산길은 다리
건너기 직전에 있음) 용문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중생을 마중한다.
이 문은 1986년에 세운 것으로 여의주를 머금은
용머리가 달린 기둥 2개 위에 평방(平枋)을 두
어 절의 이름이 담긴 현판(懸板)을 달고 맞배지
붕으로 마무리했다.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은 없다. 누구든 맞아들여 보듬어 주겠다는
부처나 자연의 마음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일주문처럼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면
이 세상은 정말 극락이 따로 없을터인데 신과
동물 사이에 들어앉은 애매한 존재다 보니 전혀
그러지를 못하는 것 같다.

▲  용문사 일주문(一柱門)

 


▲  겨울제국이 눈치챌라 물 흐르는 소리도 조용한 용문사계곡

일주문을 지나면 은행과자를 파는 가게가 나온다. 이곳은 용문사에서 운영하는 집으로 은행나무
의 은행 열매를 넣어 만든 과자를 판매한다. 과자의 생김새는 호두과자와 같으며, 과자 안에 호
두 대신 은행이 들어있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5천원과 1만원 단위로 판매하는데, 과자를
만드는데 시간이 조금 걸려서 어쩔 때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된다. 20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5천원치 은행과자를 샀는데, 맛은 호두과자와 비슷한 것 같다. 양이 20개 남짓으로 일행이 많다
보니 금세 동이 난다.

일주문을 지나 15분을 들어가면 찻집과 기념품점을 겸하는 전통다원이 나오고, 용문사의 명물인
은행나무가 장대한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난다.

◀  용문사를 상징하는 대명사이자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 용문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30호

이 은행나무는 용문사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애지중지하는 이곳의 꿀단지이자 듬직한 밥줄
이다. 이 나무가 없었다면 지금의 용문사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최대의 은행나무이자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란 지위까지 지지고 있는 고품격의 나무로
높이가 무려 42m, 가슴높이 줄기둘레 14m, 가지퍼짐은 동쪽 14.1m, 서쪽 13m, 남쪽 12m, 북쪽
16.4m, 뿌리부분 둘레는 15.2m이다. 추정 나이는 약 1,100년을 헤아리며, 줄기 아래쪽에 큰 혹
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무가 너무 큰지라 경내 어디서든지 그가 흔쾌히 보인다.

이 나무는 신라(新羅)의 마지막 자존심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신라의 재건을 꿈꾸며 경주(慶州)
를 버리고 금강산으로 가던 중에 심었다고 전한다. 신라가 935년 10월에 쿨하게 망했으니 태자
가 무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은 적어도 935년 11월 정도 될 것이다. 그러면 나무의 나이와
대충 맞아 떨어진다. 허나 전설처럼 태자가 과연 이곳에 들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용문사가
10세기 초반에 양평함씨(양근함씨)의 지원으로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함씨(咸氏) 세력
이나 절에서 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전설로는 7세기에 활약하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고 하는데, 이는
나무의 나이나 그 당시 상황을 봐도 전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조선 세종 때는 당상관(堂上官) 품계를 받아 정삼품송(正三品松)이라 불리기도 하며, 절이 수차
례 불타고 재건되기를 반복했으나 이 나무는 별탈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특히 사천왕전(四天王
殿)이 불탄 이후에는 절을 지키는 천왕목(天王木)으로 받들었다고 하며,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마다 소리를 내어 세상에 알렸다고 전한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순 재변(災變)
투성이인데도 근래는 한번도 소리를 안낸 모양이니 참으로 이상하다. 너무 소리를 내서 이제는
낼 소리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1907년 왜군이 의병 토벌을 구실로 용문사를 불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고 하며, 왜정(
倭政) 때는 왜군이 나무를 자르려고 용을 쓰다가 벼락을 맞아 줄행랑을 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 증명하듯 그 당시의 도끼자국이 아련히 남아있어 우리의 아픈 역사를 비추게 한다.

은행나무는 녹음(綠陰)이 깃드는 여름에도 멋있고 시원하지만 아무래도 황금빛으로 물드는 늦가
을의 자태가 단연 으뜸이다. 바로 그 절정을 보려고 왔지만 너무 늦게 와서 은행잎은 커녕 굵은
가지만 남은 그의 앙상한 모습만 눈에 넣고 말았다. 아무리 잘나가는 나무라 해도 겨울의 제국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가지만 가련히 남은 모습은 누구나 같기 때문이다. (동백나무 등의
친겨울계 나무나 소나무, 향나무는 제외)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는 은행나무의 모습을 담지 못해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문화재청에 올려진
사진을 아래 첨부하니 안구정화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늦가을 용문사 은행나무의 위엄 (문화재청 사진)

▲  땅바닥에 떨어져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는 은행잎들

▲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용문사 경내
탑 너머로 보이는 용문산 산줄기

▲  경내로 조심스레 인도하는 돌계단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간략하게 용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의 굵직한 내력
용문산 남쪽 자락에 안긴 용문사는 913년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다른 설로는 신라의 마지막 군주,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이 친히 행차하여 세웠다고 한
다. 허나 당시 신라는 고려와 백제, 여러 지방세력에게 영토 대부분을 빼앗기고 간신히 경주 일
대만을 지키던 상황이었다. 그런 지경에 어찌 머나먼 용문산까지 와서 한가롭게 절을 짓겠는가?
게다가 그럴 재정도 없었다.
또한 양근(楊根)이라 불리던 양평 일대는 고려의 영역으로 양평함씨 세력의 본거지로 고려에 투
항한 그들이 신라의 떨거지 왕이 와서 설치는 것을 그냥 팔짱만 끼고 보고 있을 리도 없기 때문
이다. 아마도 은행나무를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전설 때문에 그의 부왕(父王)이 등장한 듯 싶다.
그것 말고도 649년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가 중창했다는 설도 있으니 이 역
시 신뢰성이 없다.

절의 창건 시기를 알리는 최초의 기록은 조선 세조 때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용문사기(龍門寺
記)'와, 1493년 임사홍(任士洪, ?∼1506)이 쓴 '용문사중수기(龍門寺重修記)'가 있다. 이들 기
록에는 '신라 때 창건된 나라의 이름 있는 절','경기도의 이름 있는 절로 오래 되었다'고 쓰여
있을 뿐이며, 1927년 안진호(安震浩)가 쓴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와 권상로(權相老)의 '
한국사찰전서'에는‘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대사가 창건했다. 일설에는 경순왕이 친히 거
둥하여 절을 창건하고 손수 공손수(公孫樹)를 심었다고 하나 증명할 기록은 없다'
라 되어있어
대경대사 창건설에 무게를 잔뜩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용문사는 절 앞에 있는 은행나무를 통해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중에 창건된 후삼국시대
절은 확실하다. 절을 창건했다는 대경대사는 용문사 창건 10년 뒤인 923년에는 용문산 서북쪽이
자 양평함씨의 성지인 함왕혈(咸王穴) 인근에 사나사(舍那寺. ☞ 관련글 보기)를 세운 것을 보
면 양평함씨의 후원을 업은 승려가 분명하며, 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창건된 절이 확실하다.

창건 이후 1378년(우왕 4년) 정지국사(正智國師) 지천(智泉)이 개성 경천사(敬天寺)에 있던 대
장경(大藏經)을 가져와 대장전(大藏殿) 3칸을 지어 보관했다고 하며, 1395년 중창을 벌였다.
1447년(세종 29년)에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모후(母后)인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위해 중수를
벌이면서 왕실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57년(세조 2년) 왕명으로 절을 크게 불려 '동국(東國)
제일가는 사찰'이라 불릴 정도로 호황을 맞는다.

1480년(성종 11년)에는 처안(處安)이 중수를 하고 1890년 봉성(鳳城)이 신정익황후(神貞益皇后)
조씨<조대비(趙大妃)>의 지원으로 중창했고, 1893년 다시 중창을 했다. 봉성은 조대비에게 극진
한 예우를 받았는데, 1891년 대비의 권유로 양주 견성암(見聖庵)에서 용문사로 넘어왔다.

이렇게나 잘나가던 용문사는 1907년 왜군들이 용문산에 머물던 의병(義兵)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불을 지르면서 그 영화로움은 순식간에 한줌의 재가 되고 만다. 이때 같은 산에 안긴 사나사와
상원사(上院寺)도 불타고 말았다.

1909년 취운(翠雲)이 큰방을 다시 짓고, 1938년 태욱(泰旭)이 대웅전과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 등을 중건하며 다시 재흥을 꿈꾸었으나 6.25전쟁으로 상당수가 불타고, 대웅전과
관음전만 간신히 남았다. 1983년 범종각과 지장전을 중건했고, 끊임없이 불사(佛事)를 벌여 지
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지장전, 삼성각, 독성각 등 약 10동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 깃들여진 고색의 향기는 죄다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허나 1,100년 묵은 은행나무와 정
지국사탑비, 금동관음보살좌상 등의 문화유산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용문사는 용문산과 한덩어리로 오래 전부터 수도권 유명 관광지로 명성을 누렸다. 특히 중앙선
전철이 뚫린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용문사는 등산객과 관광객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어 아늑하
고 적막한 산사의 향기를 누리는 것은 조금은 힘들 듯 싶다. 다만 은행나무 아래쪽에 전통다원
이란 찻집이 있어 산사에서의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또한 용문산 등산로 길목에 있어
절을 둘러보고 상원사나 윤필암터, 용문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으며, 근래에는 템플스테이를 운
영하면서 산사 체험을 누릴 수 있다.

동양 최대라는 은행나무의 아름다움과 용문산의 삼삼한 숲이 어우러진 산사로 한번은 안기고 싶
은 그런 절집이다.

※ 용문사 찾아가기 (2012년 11월 기준)
* 용문행 중앙선 전철(용산~용문)을 타고 용문역 하차(30분 간격), 중앙선과 환승이 가능한 전
  철역은 용산역(1호선), 이촌역(4호선), 옥수역(3호선), 왕십리역(2/5호선, 분당선), 회기역(1
  호선), 상봉역(7호선, 경춘선), 망우역(경춘선)이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용문 경유 홍천 방면 직행버스 이용 → 용문 정류장에서 용문터미널이나 용
  문축협까지 도보로 이동(터미널은 10분 정도, 축협은 5분)하여 용문사행 군내버스 이용
* 용문터미널(군내버스만 정차)과 용문역에서 용문사행 군내버스가 거의 50~60분 간격으로 다닌
  다. (휴일에는 30~50분 간격으로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울 → 홍천 방면 6번 국도 → 용문사나들목을 나와서 331번 지방도 → 용문사주차장
② 중부고속도로 → 하남나들목 → 팔당대교 → 6번 국도 → 용문사나들목을 나와서 331번 지방
   도 → 용문사주차장

★ 용문사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2,000원 (30인 이상 단체 1,800원) / 청소년과 군인 1,400원 (30인 이상 1,200
  원) / 어린이 1,000원 (30인 이상 800원)
* 주차비 : 승용차 3,000원 / 버스 5,000원
* 용문사 템플스테이는 주말에 하는 1박 2일 프로그램과 평일에 자유롭게 머무는 휴식형 프로그
  램이 있다. 참가비는 어른 5만원, 학생(대학생 포함) 4만원. 자세한건  ☞ 용문사 홈페이지
  참조 또는 전화로 문의요망 (☎ 031-775-5797)
* 용문사에서 상원사까지 산행 1시간, 장군약수가 있는 운필암은 2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정상
  까지는 3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운필암을 거쳐 사나사나 연수리 방면으로 내려갈 수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 031-773-3797)


♠  용문사 경내 둘러보기

▲  용문사 대웅전(大雄殿)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법당(法堂)인 대웅전과 마주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
붕 건물로 1983년에 새롭게 지은 것이다. 대웅전 현판은 서울 봉은사(奉恩寺)에 있는 추사 김정
희(金正喜)의 글씨를 번각(飜刻)한거라 한다.

◀  용문사3층석탑

대웅전 뜨락에 심어진 3층석탑은 1989년에 주지
이선걸이 만든 것이다. 저 탑이 있기 전에는 용
문사에는 이렇다 할 탑이 없었다. 불국사 석가
탑(釋迦塔)을 빼닮은 탑의 풍채가 제법 돋보인
다.


▲  용문사 삼성각(三聖閣)

대웅전에서 산령각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삼성각은 1985년에 지은 것으로 단청은 박정원이 했
다. 같은 해에 조성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
지붕 건물이다.


▲  삼성각 칠성탱(七星幀) - 1985년 제작
색상이 진해서 그런지 그려진 인물이 많음에도 그리 번잡해 보이지가 않는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최근에 지어진 산령각과 독성각이 자리해 있다. 경내를 굽어보며 자
리한 이들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정말 조촐한 건물이다.
산령각은 산신(山神)을 봉안한 건물로 아래 삼성각에서 산신을 모시고 있음에도 그만의 별도 공
간을 두었다. 건물의 정체를 밝히는 현판은 가로로 걸려 있으며, 건물은 비록 작지만 제법 품격
이 서려 보인다.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과 산신상

산령각에는 산신 가족이 그려진 산신탱과 호랑이와 같이 있는 산신상이 있다. 산신탱에는 흰 수
염의 산신할배를 비롯해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와 앳된 동자(童子)가 그려져 있으며, 소나무와
산이 뒷배경이 되어준다. 산신탱 앞에 자리한 산신상은 지팡이를 들고 앉아 있으며, 오른쪽에는
호랑이가 귀여운 표정으로 으러렁거리며 산신의 곁을 지킨다.


▲  산령각과 이웃한 독성각(獨聖閣)

산령각 이웃에 자리한 독성각은 삼성(三聖)의 하나인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역시나
삼성각에서 그를 다루고 있음에도 별도로 그만의 공간을 지어 중생들의 하례를 받게 했다. 독성
전과 산령각 앞에는 넓게 예불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조그만 독성각에는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이 있으며, 앞가슴을 시원스레 드러내고 아줌
마 자세로 앉은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얼굴에는 뭔가 수심에 잠긴 듯, 오른쪽을 바라보며 편치
않은 표정을 짓는다.


▲  독성각의 주인 독성상


▲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의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梵鍾)

지장전 맞은편에는 범종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이 자리해 있다. 범종각에는 보통 범종을 비롯하여
목어(木魚)와 운판(雲版), 법고(法鼓) 등 사물(四物)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허나 이곳은 오로지
범종만을 두어 중생 구제를 향한 부처의 메세지를 용문산에 울려 보낸다.

범종각은 1986년에 조성되었으며, 다른 절과 달리 중생들에게도 종을 칠 수 있게 하였다. 물론
불전함에 돈을 넣고 쳐야 된다. 그냥 치면 눈치가 보일 수 있으니...


▲  청기와를 입힌 지장전(地藏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지장전은 1993년에 세워졌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비롯하여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으며, 특별히 청기와를 입혀 건물의 품격을 높였다. 지장전의
편액은 서예가로 유명한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이 1973년에 남긴 것이다.


▲  용문사 약수

▲  연못에 가라앉은 무심한 동전들

지장전 좌측에는 동그란 연못과 약수터가 있다. 산사에는 필수적으로있는 약수터, 용문산이 내
리는 옥계수가 마를 날 없이 흘러 나와 중생들의 목을 축여준다. 용머리 밑에 꽂힌 대나무통에
서 흘러나온 물은 동그란 석조에 머물다가 어느 정도 물이 차면 밑에 있는 조그만 석조로 떨어
지고, 역시 같은 원리로 연못으로 흘러간다.
연못은 수심이 얇아 바닥이 보일 정도로 인간들이 심심풀이로 내던진 동전들이 수북히 쌓여있어
마치 보물선이 침몰한 자리를 연상시킨다. 수면 밑에서 빛을 발하며 잠들어 있는 동전들의 물밑
세상, 저기 깔린 돈은 과연 얼마나 될까? 겉으로는 10원짜리나 50원, 100원이 주류라 얼마 되겠
나 싶지만. 티끌도 모아지면 태산이 된다고 상상 이상의 금액이 될 것이다. 저들을 손수 수거하
여 세상에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보는 이목들이 많으니 그림의 떡처럼 그저 바라볼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  6각형의 관음전(觀音殿)

용문사 경내를 이루는 건물들은 죄다 네모이다. 허나 경내 동쪽에 자리한 관음전만큼은 독특하
게도 6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어 눈길을 잡아 맨다.

관음전은 관음보살의 거처로 원래는 대웅전 우측 툇마루를 지닌 선방(禪房)이 관음전이었다. 그
러다가 최근에 동쪽에 터를 닦고 새롭게 관음전을 지어 올렸다. 내부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금동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72호

불단에 홀로 앉은 관음보살은 수려한 보관(寶冠)에 누님처럼 인자한 표정, 찬란한 장식으로 보
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머금게 한다.
그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원래부터 용문사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왔
는지는 알 수 없다. 불상의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으로 얼굴은 작고 동그랗고 볼살이 좀
있어 보인다.

머리를 장식하는 화려한 보관은 나무로 만들었으며, 리본처럼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흘러 내린
다. 원만하고 볼살이 있는 얼굴에는 조촐한 얼굴 크기처럼이나 눈과 코, 입이 소소하게 표현되
었으며, 상체는 약간 뒤로 젖혀져 있다. 특히 유난히도 구슬장식이 많이 달려 있어, 귀족적 분
위기도 느껴진다.
양 어깨에 걸친 옷은 목 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고 있으며, 오른쪽 소매
자락은 배 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고 있다. 발목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접힌
'八'자형의 옷주름을 이루며 두 무릎을 덮는다.

불상의 구슬장식과 왼쪽 가슴에 있는 금으로 된 세모 장식 등은 14세기 보살상(菩薩像) 양식으
로 고려 후기 보살상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촐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 불상
은 금동(金銅)인데. 이는 근래에 입힌 것이다.


▲  금동관음보살좌상과 건물 외벽에 빙 둘러진 관음후불탱화
관음보살을 주위 3면에는 관음보살이 주인공인 후불탱화가 있다.
탱화의 색채가 매우 밝고 고운지라 관음보살상과 잘 조화를 이루며
관음전 내부를 눈부시게 밝혀준다.

▲  관음전 내부를 수식하는 하얀 피부의
 지장보살상 - 마치 '반지의제왕'에 나오는
 회색 간달프를 보는 듯 하다.

▲  옷주름을 휘날리며 푸른 정병을 들고
 선 관음보살상 (석가탄신일용 장엄등)


▲  관음전에서 바라본 용문사 경내

▲  부도군(浮屠群)
고색의 떼로 가득한 조선 후기 승탑(僧塔, 부도)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을 넘나들며 한 자리에 모인 승탑들의 보금자리이다.


♠  용문사 정지국사탑/비(正智國師塔/碑) - 보물 531호

▲  정지국사탑

용문사를 찾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은행나무와 경내만 둘러보고 다봤다면서 그냥 돌아간다. 허나
이는 큰 실수이다. 경내에서 동쪽으로 300m 가량 떨어진 산자락에 보물로 지정된 정지국사탑/비
가 있기 때문이다. 은행나무야 원래 유명한데다 경내 앞에 떡 있으니 보고 싶지 않아도 무조건
보고 가야 되는 존재이고 절에 왔으니 대웅전을 위시한 경내를 보고 가야 된다. 허나 정지국사
탑/비는 경내와 다소 떨어진 산모퉁이에 있고 속세에 노출 정도가 낮아서 많은 이들이 모르고
지나친다.

정지국사탑비를 가려면 경내에서 부도전 뒤쪽으로 난 산길을 이용하면 된다. 이정표는 있으므로
헤맬 염려는 없다. 겨울이 깃들여진 산길은 경사가 없는 평지라 부담은 없다. 그 길을 5분 정도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의 가파른 계단길로 오르면 정지국사탑/비가 나온다. 탑은
그 길의 끝에 있고, 비석은 그 중간에 있는데, 비석 같은 경우는 안내문이 없어 자칫 지나치기
가 쉽다. 게다가 지형을 이용해 나무로 엮은 계단들이 키다리들에게 맞춰졌는지 계단의 높이가
상당히 높아 오르기가 좀 힘들어 키 작은 사람이나 어린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쥐약이다.

허나 오르는 길이 힘들다 한들 각박한 속세살이보다는 쉽다. 자존심을 곱게 접고 차근차근 길을
임하면 나올 것 같지 않던 그들이 나타나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다.


▲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정지국사탑(부도)

넓은 네모난 기단 위에 자리한 정지국사탑은 바닥돌과 하대석(下臺石)이 네모로 지붕돌과 탑신(
塔身)은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큰 기단(基壇) 한복판에 네모난 바닥돌을 두고 연꽃이 새겨진 하대석(下臺石)과 중대석(中臺石)
을 두었으며, 그 위로 8각의 탑신(塔身)을 두었는데, 문짝 모양이 얇게 새겨져 있다. 고색의 검
은 떼가 서린 지붕돌은 밑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돌 위에는 지붕선이 있고, 하늘을 향한 앙련(仰蓮) 장식으로 꼭대기를 마무리했다.

탑에 묻힌 정지국사(1324~1395)는 고려 후기 승려로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이다. 명나라 연경
(燕京)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며 구법승(求法僧)으로 생활했다. 1356년(공민왕 5년)에 귀국하여
전국을 돌면서 오로지 수도에 임했으며, 속세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며 거의 은둔생활을 했다.
말년에는 용문사에 들어와 절을 중창하며 머물다가 1395년 7월 7일 열반에 들었다.
그를 다비(茶毘)하면서 찬연한 사리들이 많이 나오자,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正智國師)란
시호를 내렸으며,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탑의 크기는 고려 때와 비교하면 대체로 작은 편이고, 그다지 수려하지도 않다. 장식이라고 해
봐야 연꽃무늬와 문짝무늬가 고작이기 때문이다. 허나 고색의 떼가 적당히 입혀 있고 조촐하고
소박한 모습이 은근히 마음에 든다. 사람들로 시장통을 이루는 경내와 달리 인적도 별로 없어
적막감이 진하게 감싸 흐른다. 가끔씩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나 메아리 소리, 바람의
소리만이 살짝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  소박한 스타일의 정지국사탑비

정지국사탑으로 오르는 길목에 조그만 비석이 하나 있다. 마땅한 안내문도 없고 흔한 모습의 비
석이라 지나치기 쉬우나 그는 정지국사탑과 한 덩어리인 탑비(塔碑)이다. 다만 비석이 이수(螭
首)와 귀부(龜趺)를 기본적으로 갖추는 고승(高僧)의 비석치고는 너무 궁색한 모습이라 나그네
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바위 위에 세워진 이 비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머리 부분 양쪽 모서리를 종이 끝이 접혀진
듯 깎았다. 글씨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으며, 비문(碑文)에는 정지국사의 생애
가 20행의 880자로 빼곡히 적혀있다. 뒷면에는 조성자의 명단이 적혀있으며, 비문은 조선 초기
이름을 날린 권근(權近, 1352~1409)이 썼다.

비석은 처음에는 정지국사탑 20m 아래 바위에 있었는데, 바위에서 뽑혀나와 경내에서 이리저리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에 지금의 자리에 안착을 시켰다. 비석의 모습이 평범한 수준에 머문
것은 정지국사가 고승이긴 하나 딱히 알려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도와 탑비
를 화려하지 크지도 않게 적당한 선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정지국사탑으로 올라가는 길
보기와 달리 제법 가파르다. 길 중간
왼쪽에 정지국사탑비가 있음

▲  용문사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길

정지국사탑/비를 둘러보고 산길을 거쳐 속세로 나왔다. 수레길과 달리 한적하기 그지 없는 산길
은 흙길이다. 산에 왔으니 흙은 밟아봐야 되는 법~~ 산길의 경사는 그리 급하진 않다. 수레길과
일정한 간격을 두며 진행되던 산길은 결국 일주문 부근에서 수레길과 합쳐진다.


▲  용문사 입구에 지어진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용문사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2007년 10월에 문을 연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양평
의 역사와 문화, 농업, 자연, 용문산을 아낌없이 담은 박물관으로 이름이 좀 길다. 그냥 간편하
게 양평농업박물관이나 양평박물관으로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박물관은 2층 규모로 전시실은 2층에 있다. 양평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제1전시관과 농업과 자
연을 담은 제2전시실, 양평의 역사를 담은 역사실과 다양한 테마의 기획전시실이 있으며, 2층
실외 한쪽에 누각(樓閣)을 두어 관람객에게 조촐히 쉼터를 제공한다.
용문산관광단지의 한 획을 장식하는 문화 공간으로 볼거리도 많이 있으므로 용문사나 용문산에
왔다면 꼭 둘러보기 바란다. 입장료도 공짜이니 경제적 부담도 없으며, 2012년 1월부터 용문사
에서 위탁관리하고 있다.

우리가 이곳에 이른 시간은 오후 4시, 폐장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박물관을 가볍게 둘러
보았다. 박물관에 대한 내용은 2장의 사진으로 간단히 마무리를 짓는다.

★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관람정보 (2012년 11월 기준)
* 관람시간 : 하절기(3~10월) 9시 ~ 18시 / 동절기(11~2월) 9시 30분 ~ 18시 (입장은 폐장 30분
  전까지)
* 입장료 공짜
* 휴관일 :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508-10 (용문산로 670) <☎ 070-7715-3796>
* 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박물관 2층 로비에 놓인 기이한 장식물
나무 장작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무슨 의미가 있을 듯 싶은데 ;;

▲  제1전시관에서 담은 차정첩(差定帖)
차정첩은 공공기관에서 사무를 맡기는 임명장의 하나로 1815년 양평현감이
김치성(金致聲)에게 권농별유사(勸農別有司)의 임무를 맡긴 내용이다.
별유사는 관청에서 호적 등의 사무를 보는 직책이다.


용문사에서 속세로 나가는 길도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200m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휴일에 증회 운행을 한다고 떠들어도 배차간격이 길기는 마찬가지,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10분 내외 간격으로 투입하여 등산객 수요를 바로바로 처리했으면 좋겠다.

15분 정도를 기다리자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 바퀴가 뭉개질 정도로 금세 콩나물시루가 되었지
만 운전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사람들을 태운다. 더 이상 공간이 없음에도 말이다. 승객들
은 그만 태우고 빨리 가자고 소리치지만 운전사는 출발시간이 되지 않았다며 손사래를 친다. 이
건 무슨 버스 승차 기네스북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점심 때 용문사로 올 때 보다 더 심하게 태
운다. 길이 10.6m의 버스 안에 100명은 넘게 탄 듯 싶다. 다시 한번 아비규환이 된 버스..

드디어 버스는 시동을 걸고 인원초과로 초죽음이 된 바퀴를 굴린다. 손잡이를 간신히 붙잡고 용
문역까지 가던 15분의 시간은 정말 150분처럼 길고 고통스러웠다. 용문역에서 지옥과 같던 버스
에서 해방되어 전철을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늦가을 용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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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1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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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글로 바로 이어집니다)

 

산과 호수, 도자기축제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산 ~ 이천 설봉산 (설봉공원, 영월암)

 


' 이천 설봉산 나들이 (설봉공원, 3형제바위, 영월암) '
설봉산 삼형제바위에서 굽어본 이천시내
▲  설봉산 삼형제바위에서 바라본 이천시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을 얼마 앞둔 5월 초에 쌀과 도자기의 고장인 경기도 이천 고을을 찾
았다. 이천에 간 것은 이천의 명산(名山)이자 듬직한 뒷산인 설봉산을 보고자 함인데 이천은
서울과도 가까운 곳임에도 지지리도 인연이 없는 고장이라 발을 들인 횟수는 정말 한손에 꼽
을 정도이다.

이천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관고리 석불로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이다.
광주(廣州)에서 광주좌석버스 114번을 타고 설봉산과 가까운 이천의료원(소방서) 정류장에서
내리니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게 왠 떡인가!' 싶어 흥분하는
마음을 다독이며 이정표의 지시를 따라 산 쪽으로 들어가니 대각사(大覺寺)란 조그만 절집이
모습을 비춘다. 이 절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선방으로 쓰이는 건물 2채가 전부로 대웅전을 지
나면 흙길이 야트막한 경사로 펼쳐지는데, 그 길의 끝에 관고리석불입상이 있다.


♠  귀와 손이 유난히도 큰 고려시대 석불 ~
관고리 석불입상(官庫里 石佛立像) - 이천시 향토유적 6호

대각사(옛 법왕정사) 뒤쪽 언덕에 고색이 때로 가득한 관고리석불입상이 자리해 있다. 고려 중
기 이후에 세워진 불상으로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는 대각사의 든든한 밥줄이다. 원래는 미륵골
이라 불리던 산골 밭에 있던 것을 1987년 12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문화재 안내문에
는 석불입상이 아닌 입상석불로 나와있음>


이 석불은 높이가 4m로 머리칼은 나발(螺髮)이며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
굴은 밤하늘에 비치는 보름달처럼 동그란 모습으로 볼에는 살이 적당하게 붙어 있다. 무지개처
럼 구부러진 눈썹에 두 눈은 지그시 감겨져 있으며, 코는 세모 모양으로 오뚝하다. 다물어진 입
술에는 은은히 미소가 풍겨져 나와 중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귀는 얼굴보다 길어서 양쪽
어깨에 닿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석불이 걸치고 있는 법의(法衣)는 通肩(통견)으로 가슴부터 옷무늬가 거의 'u'자형으로 살짝 구
부러지다가 무릎에서 타원형을 이루어 발 밑까지 닿아있다. 오른손은 옆으로 곧게 내리고 왼손
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배 앞에서 구부렸는데, 몸에 비해 손이 좀 큰 편이다. 콧마루와 손가락
부위는 일부가 떨어져 나가 시멘트로 땜질하였고, 등 복판에는 10cm가량의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데, 머리 뒤에 씌우는 두광(頭光)을 만들기 위한 자리로 여겨진다.

석불의 정체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지만 그가 있던 골짜기가 미륵골이란 점을 보면 오랫동안 지
역 주민들로부터 미륵불(彌勒佛)로 숭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
진다.  또한 석불 주변에서 돌덩어리와 기와조각이 나온 적이 있어 불상을 모신 건물이나 조그
만 절이 있었음을 가늠케 한다.

* 관고리 석불입상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산39-3

관고리석불입상을 둘러보고 다시 큰길로 나와 설
봉공원으로 이동했다. 은빛물결이 일렁이는 설봉
저수지(관고저수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설봉공원
을 벗어나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을 지나면 영월암
으로 가는 조그만 숲길과 계곡이 그림처럼 나타
난다. 이 골짜기를 범앙골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호랑이가 살던 곳이라 하며, 영월암 승려가 출타
하여 늦게 귀가하면 그가 걱정이 되었는지 범앙
골 호랑이가 종종 마중을 나갔다는 재미난 전설
도 1토막 전해온다.
영월암 가는 길은 사람과 수레들로 부산한 설봉
저수지와 달리 인적이 없어 고요함과 녹음이 가
득 깃들여진 것이 속세에 찌든 마음을 무척 시원
하게 해준다.

▲  석불의 측면
오른손에 마치 야구글러브를 낀 듯
손의 크기가 상식 밖으로 너무 크다.


♠  이천 도자기축제의 현장, 설봉저수지(설봉호)와 설봉공원(雪峯公園)

▲ 설봉저수지(설봉호) - 수면 위로 도자기 모양의 분수대가 이채롭다.▼

드넓게 펼쳐진 설봉저수지(관고저수지)는 이천의 손꼽히는 관광지로 1969년 관개수로 및 관광개
발을 목적으로 1970년 7월에 준공되었다. (총 공사비는 2,800만원) 낚시터로도 명성이 자자하여
많은 강태공(姜太公)들이 찾아오며 저수지 주변으로 설봉공원이 조성되어 이천의 주요 밥벌이인
이천도자기축제(4~5월)와 이천쌀문화축제(가을), 세계도자비엔날레가 절찬리에 열린다. 호수 주
변으로 순환도로가 놓여져 아름다운 산책코스를 뽐내며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그만이다.


▲  설봉저수지 둑방에 '새계도자기엑스포 주행사장'이 쓰여 있다.
설봉저수지를 옆에 낀 설봉공원은 2001년 세계도자기엑스포가 열린 현장으로
매년 4~5월에 이천도자기 축제가 열린다. 축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설봉호의 은빛물결 너머로 바라본 설봉공원과 설봉산 줄기

▲  봄도 한없이 머물다 가는 설봉저수지 산책로
저수지 주변으로 운치가 서린 산책로가 둘러져 있다. 산책로 곳곳으로
조각품을 아낌없이 배치하여 밋밋한 공간을 채워준다.


▲  월전미술관 부근에서 만난 어느 심오한 작품

멀뚱한 표정의 사람 조형이 큰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마치 갖은 욕심과 속세의 짐 등을 싫든
좋든 머리와 마음 속에 이고 사는 우리네 가련한 인간을 상징하는 것 같다. 번뇌로 상징되는 저
돌을 과감히 내던지는 순간 마음도 편해지고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에도 이를 수 있을지
도 모른다. 허나 해탈을 한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단계에 가면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 모를 또 다른 걱정꺼리가 존재할 것이다.


▲  이천 고을을 빛낸 이들의 조각상과 고을에 얽힌 충효 이야기를
한데 정리한 충효(忠孝)동산

▲  충효동산 정문인 충효문(忠孝門)

◀  충효동산 한복판에 듬직하게 자리한 복천
서희(福川 徐熙) 동상의 위엄
서희는 993년 고려와 거란과의 1차전쟁을 승리
로 이끌며 거란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통해 청천강 서부에 강동6주(江東六州) 280리
땅을 얻은 고려의 대영웅이자 이천의 자랑이다.


▲  설봉서원(雪峯書院) - 이천시 향토유적 18호

월전미술관을 지나 5분 정도 걸으면 길 오른쪽으로 태극마크의 홍살문을 갖춘 설봉서원이 나온
다. 이곳은 1564년 이천부사(利川府使) 정현(鄭玄)이 안흥지 주변에 세운 안흥정사(安興精舍)에
서 시작되었다.
159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설봉서원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
원철폐령으로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다. 1990년 이천시와 유림의 노력으로 서원복원이 추진되었
으며, 2005년에 드디어 삽을 뜨기 시작하여 2007년 4월에 복원되었다. 비록 고색의 내음은 증발
해버렸지만 서희를 비롯하여 김안국(金安國), 최숙정(崔淑精), 이관의(李寬義) 등을 배향(配享)
하고 있으며, 지역 학생들과 일반인을 위해 한문학과 전통예절, 국악 교실을 개설하여 호응이
좋다고 한다. 교육은 무료 (문의 ☎ 031-632-6564)


♠  설봉산(雪峯山, 394m)의 명물, 3형제바위

▲  3형제바위 입구

산내음을 만끽하며 숲길을 10분 가량 오르면 3형제바위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바위 쪽으로 가
나 수레길로 가나 영월암은 나오지만 기왕 산에 온 거 콘크리트 수레길보다는 흙으로 이루어진
산길이 더 호젓하지 않을까? 여기서 절까지는 두 길 모두 10~15분 정도 걸린다.


▲  마치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것 같은 3형제바위 산책로
산길 왼쪽에 엉뚱하게도 석탑의 부재(部材)로 여겨지는 납작한 돌이 박혀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영월암이나 인근 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  어머니를 향한 3형제의 애듯한 전설이 서린 3형제바위

3형제바위 입구에서 산길로 3분 가량 들어가면 하늘로 솟은 3개의 바위가 교묘하게 붙어있는 3
형제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위의 1/3지점에 가로로 가로로 틈이 그어져 정말 사람과 비슷한 모
습이다. 위대한 자연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어놓은 대작품으로 기가막힌 풍경에 사죽을 못쓰
는 옛 사람들은 그 바위에 단단히 반한 나머지 그럴싸한 전설을 만들어 우리에게 들려준다. 세
개의 바위가 서로 붙어 나란히 한 모습에 다정한 형제로 연상된 모양이다. 만약 바위가 2개였다
면 금슬이 좋은 부부바위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먼 옛날 늙은 어머니를 모신 나
무꾼 3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우애와 효성이 지
극하여 효자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어느날 설봉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던 형제가 날
이 저물도록 오지 않자 걱정이 된 어머니는 아
들을 찾아 산으로 나섰다. 뒤늦게 나무를 잔뜩
지고 귀가한 형제는 어머니가 없자 서둘러 어머
니를 찾으러 나섰다. 어디선가 호랭이의 울음소
리가 들려 달려가보니 낭떠러지 밑에서 어머니
가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다급한 광
경을 본 형제는 어머니를 구하러 아래로 뛰어내
렸는데 그 순간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전설로는 어머니를 모시던 형제는 징병
(徵兵)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무사귀환을
애타게 빌었으나 약속한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홀로 생계를 꾸려가다가 그리움이 병이 되
어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이후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뒤늦게 돌아온 3형제는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 엎드려 통곡하며
일어날 줄 몰랐고 그 모습이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  3형제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이천시내와 설봉저수지)


▲  드디어 녹음에 묻힌 영월암에 이르다.


♠  이천의 진산(鎭山) 설봉산에 포근히 안긴 오랜 산사
설봉산 영월암(映月庵) - 이천시 향토유적 14호


▲  영월암 경내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은 요사채로 쓰이는 안심당)

달이 비춘다는 뜻의 영월암은 설봉산 깊숙한 산골에 안긴 산중암자이다. 이천 고을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7세기 중반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전혀 없다. 다
만 경내에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광배와 연화대좌, 3층석탑, 거대한 마애불 등이
있어 절이 한참 우후죽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이렇다할 내력을 남기지 못하다가 18세기에 들어서 1774년(영조 50년) 영월
낭규대사(映月 郎奎大師)가 중창을 벌였다. 1760년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절의 이름
이 북악사(北岳寺)로 나와있는데, 낭규대사로 인해 지금의 이름으로 갈린 듯 하다.
 
1911년에 보은(普恩)이 중건하고, 1920년에는 극락전(極樂殿)을 옮겨 세웠으며, 1937년에 산신
각과 단하각을 손질하였다. 1949년에 이천향교 명륜당(明倫堂) 앞에 있던 풍영루(風詠樓)를 해
체하여 그 목재로 대웅전을 짓다가 그만 6.25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된 것을 전쟁이 끝난 1953년
11월 완성을 보았다. 1989년 불의의 화재로 삼성각과 서요사채가 무너져 내린 것을 1991년 복원
하여 지금에 이른다.

절을 이루고 있는 건물로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요사 등 6~7동이 있으며, 고색의
내음은 다들 시들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을 비롯하여 석조광배와
연화대좌, 3층석탑, 600년 묵은 오랜 은행나무 등이 있어 절의 유구한 내력을 가늠케 하며 1988
년 7월 27일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이천 시내에서도 제법 떨어져 있고, 달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삼삼한 산자락에 둥지를 튼 산
사로 속세의 번뇌를 설봉저수지에 던져놓고 무작정 안기고 싶은 정겨운 절집이다.

※ 영월암 찾아가기 (2012년 10월 기준)
* 서울강남고속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이천행 고속/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 수원, 성남(야탑), 강릉, 구미, 대구(북부)에서 이천행 직행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과 3호선 양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500-2
  번 좌석버스 / 2,8호선 잠실역 중앙차로 정류장 500-1번 좌석버스 / 2호선 강변역(1번 출구),
  5호선 천호역(6번 출구)에서 1113-1번 좌석버스 / 8호선,분당선 모란역(5번 출구)에서 500-1,
  500-2번 좌석버스 이용 → 광주시내(보건소, 터미널)나 초월읍사무소, 곤지암터미널에서 114
  번 좌석버스로 환승하여 이천의료원(소방서)에서 하차 → 정류장 남쪽(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5분 정도 가면 설봉공원 입구이다. 여기서 영월암까지 도보 35~40분
* 이천시외고속터미널 북쪽 건너편 정류장에서 28번 시내버스를 타고 설봉공원 하차, 허나 버스
  가 자주 안다니므로 택시를 타거나 30분 정도 걸으면 설봉공원이다. 공원을 지나 영월암까지
  도보 25~30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절 직전에 주차장 있음)
① 중부고속도로 → 서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사음동3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이천시내로
   직진 → 이천의료원을 지나 설봉공원 입구에서 우회전 → 설봉공원 → 월전미술관 → 영월암
② 영동고속도로 → 이천나들목을 나와서 이천시내 방면으로 우회전 → 이천육교에서 설봉공원
   으로 좌회전 → 설봉공원 → 월전미술관 → 영월암

★ 영월암 관람정보
* 영월암에서 설봉산성을 거쳐 설봉산 정상까지 오르는데 1시간 남짓 걸린다.
*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438 (☎ 031-635-3457)

▲  중생 구제를 향한 부처의 은은한 메세지가
담겨진 범종각(梵鐘閣)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연등으로 주변을 두룬 영월암 대웅전(大雄殿)

영월암은 코앞에 다가온 초파일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대웅전 앞에 아기부처를 두어 관정의식
의 장을 만들고 연등으로 경내를 곱게 치장하였다. 하늘을 가리며 뜨락 허공에 걸쳐진 검은 덮
개로 햇빛이 들어오지 못해 경내는 시원하다.

경내를 발을 들이면 정면으로 법당인 대웅전이 나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남향(南向)을 취하고 있는데, 1949년 이천향교 명륜당 앞의 풍영루를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지
은 것이다. 건물을 짓던 중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터지는 바람에 서둘러 피난짐을 꾸리느라
공사는 중단되었으며, 전쟁이 끝나고 1953년 11월에 가까스로 준공을 본 우여곡절이 많은 블전
이다. 불단(佛壇)에는 석가불을 비롯한 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앞에 차려진 관정(灌頂)의식의 현장

▲  오랜만에 바깥 나들이를 나온 아기부처의 희열(喜悅)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는 하얀 코끼리 등 위에 놓여진 연꽃대좌에 아기부처가 오른손을 치켜들며
서 있다. 곧있으면 중생들의 하례와 관정의식을 받으며 시원하게 이른 피서를 즐길 생각인지 그
의 표정이 해맑아 보인다. 다양한 꽃으로 코끼리 주변을 아리땁게 치장하며 두 눈이 단단히 호
강을 하다못해 쾌재를 부른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아미타전(阿彌陀殿)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을 모신 건물로 1920년에 지어진 것이다.
근래 손질을 해서 그런지 매우 깨끗한 모습이다.

▲  대웅전에서 마애여래입상 가는 길목에 자리한 석불좌상과 3층석탑

▲  석조광배와 연화대좌를 갖춘 패기 돋는 석불좌상
(석불좌상의 석조광배와 연화대좌는 이천시 향토유적 3호)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올라가는 길목에 석불좌상과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우측에 자리한 석불
좌상의 석조광배(石造光背)와 연화대좌(蓮花臺座)를 보면 당당한 패기의 석불과 달리 고색의 때
가 만연함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영월암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고려 때 혹은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영월암의 역
사가 꽤 깊음을 가늠하게 해준다. 광배의 높이는 156cm, 폭은 118cm, 두께가 45cm이며, 연화대
좌의 높이는 107cm에 이른다. 불상은 오래 전에 없어진 채, 땅에 엎어져 있던 것을 1980년에 불
상을 조성하면서 복원한 것이다.

▲  석불좌상의 뒷부분
기둥 모양의 길다란 돌이 연화대좌와 광배를
받치고 있다.

▲  석불좌상과 나란히 자리한 3층석탑
자신이 언제 태어나고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이 전혀 없는 가련한 탑이다.


불상이 편안히 기대고 선 광배는 하나의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표면에 두 줄의 선으로 신광
(身光)과 두광(頭光)을 나타내었다. 연꽃잎과 불꽃무늬, 당초(唐草)무늬 등이 광배를 가득 수놓
고 있으나 유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 깎이고 깎여 무늬만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두광과 신광
이 접히는 곳과 두광 위쪽 가운데에 3존의 화불좌상(化佛坐像)을 새겼다.

불상의 보금자리인 연화대좌는 바닥돌과 기단석(基壇石), 상/중/하대석으로 이루어졌다. 중대석
은 8각형으로 바닥돌은 네모난 모양이며, 하대석에는 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伏蓮)이, 상대석
에는 꽃잎이 하늘로 향한 앙련(仰蓮)을 새겼다. 꽃잎이 너무 아름다워 채색만 제대로 해주면 정
말 한 송이의 어여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석불좌상 좌측에 뿌리를 내린 3층석탑은 은행나무 밑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91년에 없어진 부
분을 보충하여 복원한 것이다. 탑은 보통 법당 앞에 있어야 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곳에 두지
를 않고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원래 절에 있던 탑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나중에 은행나무 밑에
수습한 것을 복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탑의 조성시기와 원래 위치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그야말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의 탑이다. (3형제바위 입구에 있는 석탑 부재가 혹 이 탑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음)

마애여래입상과 약간 거리를 두고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우리에게 친숙한 칠성(七星)과 산신
(山神),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1989년 불의의 화재로 무너져 내린 것을 1991년에 다시 지
은 것이다. 산신과 칠성은 탱화(幀畵)로 그려져 있지만 독성은 유별나게 불전 뒤쪽 바위를 파내
어 적당한 공간을 만들고 그 자리에 독성상을 봉안했으며, 건물에 유리창을 설치하여 안에서도
친견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  그림의 여백처럼 허전해 보이는 삼성각 우측 부분
가건물과 비닐하우스, 장독대 등이 넓은 터를 듬성듬성 채운다.


♠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커다란 불상,
영월암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822호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영월암 경내 뒤쪽 커다란 바위에는 장대한 규모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이 이천시내를 굽어보며
자리해 있다. 내가 이곳까지 발을 들인 것도 바로 그를 보기 위함이다.
고려시대 마애불은 대체로 덩치가 크며, 비슷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각각 독특한 모습을 지니
고 있으며, 다소 작품성이 떨어지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곳의 마애불 역시 그런 요소를 모두
갖춘 전형적인 고려 불상으로 높이가 9m, 폭이 3m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의 불상이다. 그의 앞에
서는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주눅이 일고도 남을 것이다.


▲  마애불의 위쪽 부분

불상은 대체로 선으로 표현된 선각(線刻)이며 얼굴과 손은 얕음새김으로 표현되었다. 머리는 바
위 꼭대기에 있어 자세한 모습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얼굴은 둥근 형태로 나이가 지긋하고 온후
한 승려의 얼굴 같으며, 눈은 지그시 감고 있다. 세모로 우뚝 선 코는 큰 편이며, 앙 다물어진
두터운 입술에는 약간의 미소가 아련히 떠 있다. 귀는 길쭉하여 목까지 닿으며 볼과 턱에는 살
이 두툼하다.
두꺼워 보이는 목에는 삼도가 획 그러져 있으며, 덩치에 걸맞게 커다란 양 손은 가슴에 모았는
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드러내어 설법인(說法印)을 취한 듯 하다.


▲  희미하게 비치는 옷주름이 전부인 마애불의 아랫 부분

불상의 몸을 뒤덮고 있는 옷은 발 아래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옷 주름은 소박하다. 위쪽의 주름
선은 확인이 쉽지만, 아랫쪽의 주름선은 마멸이 심해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확인이 가능하다. 온
화하고 덕망이 높은 승려의 분위기로 아마도 영월암과 인연이 깊은 어느 고승을 모델로 하여 만
든 듯 싶으며, 일부에서는 승려의 모습을 새긴 조사상(祖師像)으로 보기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후기 고승인 나옹선사(懶翁禪師)가 부모를 천도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니, 아마도 부모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이천 지역 지방세력이나 부호(富戶)의 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극한 나이를 먹었음에도 마애불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작품성은 그리 괜찮은 편은 아
니지만, 고려 마애불의 특징을 잘 간직한 불상으로 그 가치는 높다. 마애불 앞에 이르면 조촐한
영월암 경내가 훤히 바라보이며, 지나가는 봄도 마애불의 후덕한 모습에 단단히 매료되었는지
주변을 곱게 손질하였다. 녹음이 깃들여진 계단을 오르면 그 끝에 마애불이 그대들을 맞이할 것
이다.

▲  우측에서 바라본 마애불

▲  좌측에서 바라본 마애불

▲  녹음이 가득 깃들여진 영월암 은행나무 (경기-이천-1호)

경내로 들어서기 직전에 정겨운 풍경을 자아내는 고즈넉한 돌담길이 있다. 돌담길의 우측 끝부
분에 아름다운 여인네와 같은 커다란 은행나무 1그루가 한참 봄의 절정을 누린다.
은행나무는 자연으로 자라는 것이 아닌 사람이 심은 것이 대부분으로 이 나무 역시 영월암과 관
련된 승려가 어떤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심었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나옹화상이
심었다고 하나 나무에게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아니면 내가 나무의 언어를 구
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소상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지만 그러지를 못하니 진실을 알 도
리는 없다.
나무의 나이는 무려 640년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게 맞으면 나옹이 심었다는 전설도 어쩌면 들
어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의 높이는 마애불의 4배인 무려 37m에 이르며 세월을 꾸역꾸역
잡수신 탓에 둘레가 5m에 이른다.

초파일을 하루 앞둔 영월암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시간은 어언 18시를 가리킨다. 절에서는 저녁
공양(供養)을 보통 18시부터 하는데, 대웅전을 한참 사진에 넣고 있으려니 아줌마 신도가 저녁
시간이라며 밥 먹고 가라고 그런다. 절밥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거절할 이유가 없어 그들의 손길
을 따라 영월암 승려의 생활공간인 안심당(安心堂)으로 들어선다. 겉으론 대웅전처럼 작아보이
던 안심당 내부로 들어서니 서쪽으로 내부를 튼 탓에 무척 넓어 보였다. 공양간은 안심당의 서
쪽 칸으로 승려와 아줌마 신도들, 절을 찾은 이들이 한참 즐거운 공양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  영월암에서 먹은 저녁 공양의 위엄

공양은 뷔페식으로 반찬은 거의 10가지가 넘는다. 고기를 기피하는 절의 특성상 고기와 생선은
일체 없고 모두 나물이다. 국은 아욱국 비슷한 것이 제공되었다.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그릇이
깨질 정도로 밥과 반찬을 가득 담아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역시나 먹는 시간만큼 흐뭇한 것은
없다. 절에서 정성스럽게 다듬은 반찬은 밥도둑이 따로 없어 금세 밥그릇을 비우고, 점심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해 불만에 가득찬 목구멍과 뱃속도 너무 흥겨워 한다.


▲  영월암을 나오면서 만난 조그만 승탑

저녁 공양을 마치고 아쉽지만 영월암과의 짧은
인연을 마감하고 다시 속세로 발길을 돌린다.
절로 오를 때는 3형제바위가 있는 산길로 갔지
만 속세로 내려갈 때는 수레길로 갔다. 내려가
는 도중에 왼쪽 언덕으로 조그만 승탑<僧塔, 부
도>이 눈에 띈다. 이 탑은 근래에 세운 것으로
머리 부분은 8각으로 되어있다.
조그만 앵두를 보듯 귀엽고 산듯해 보이는 그와
작별을 고하며 이천 설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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