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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3.05 눈덮힌 폐허의 절터에서 인생무상을 느끼다. 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곳 ~~ 보령 성주사지
  2. 2017.02.08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을 거닐다. 안산 나들이 ~~~ (영천시장,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
  3. 2017.01.21 무주의 꿀단지, 무주 머루와인동굴~덕유산 겨울 나들이 (설천봉, 덕유산리조트)
  4. 2017.01.07 서울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렸던 잘생긴 바위 명산, 호암산 (서울둘레길, 호압사)
  5. 2016.12.26 경북 의성 늦가을 나들이 ~~~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조문국 경덕왕릉...) 2
  6. 2016.12.19 겨울의 길목에서 찾아간 무주 적상산 나들이 ~~~ (적상호, 적상산성, 안국사...)
  7. 2016.11.17 오랜 세월 굳게 잠겨있던 아름다운 고갯길, 북한산 우이령 늦가을 나들이 (우이령길)
  8. 2016.10.29 서울 강남의 지붕을 거닐다. 대모산~구룡산 가을 나들이 (불국사)
  9. 2016.10.19 황토길과 맨발축제의 영원한 성지, 대전 계족산 (장동산림욕장, 계족산황토길, 계족산맨발축제, 계족산성)
  10. 2016.09.26 부산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뒷산을 거닐다 ~~~ 배산 (배산성터, 진달래밭)

눈덮힌 폐허의 절터에서 인생무상을 느끼다. 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곳 ~~ 보령 성주사지

 


' 폐허의 옛 절터를 거닐다, 보령 성주사지 '

▲  눈에 뒤덮힌 폐허의 성주사지

 


겨울 제국의 한복판을 헤매던 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충남 예산과 보령 지역을 찾았다.
우선 예산에 먼저 들려 예산읍내 근처에 있는 향천사(香泉寺. ☞ 관련글 살펴보)를 둘
러보고 예산역으로 나온 다음, 장항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보령시(保寧市)의 관문, 대
천역에서 두 발을 내렸다.

장항선 대천역과 보령시외터미널이 보령시내 도심인 옛 대천역에서 현 자리로 이전을 했
지만 보령시내버스 대부분은 여전히 옛 보령역을 기/종점으로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그
곳까지 20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 오천(鰲川)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자 했다. <충청수
영성(忠淸水營城)과 오천항을 보려고 했음>
허나 버스 시간도 맞지 않고 일몰까지 코앞에 다가와 그야말로 마음이 급해졌다. 겨울의
한복판이라 해가 일찍 지기 때문이다. (그때 시간 16시경) 그래서 시내와 가까운 성주사
터나 갈까 해서 성주/웅천행 정류장에서 시간표를 확인하니 성주사터 앞까지 가는 800번
대 버스(백운사행)가 곧 올 시간이다. 하여 꿩 대신 닭으로 성주사지를 가게 되었다.

그 버스를 타고 보령시청을 지나 성주고개의 눈치를 덜어준 성주터널을 통과하니 서해안
과는 전혀 다른 첩첩한 산골의 성주면이 펼쳐진다. 충남 서해안 지역은 거의 평지이지만
이렇게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거의 강원도(江原道) 산골 분위기가 나타나니 마치 강원도까
지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성주면사무소에서 왼쪽(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성주천(聖住川)을 따라 들어가는데, 하늘
을 가리며 늘어선 오래된 가로수들의 유혹에 그만 성주사지를 하나 앞둔 성주초교(성주2
구)에서 내리고 말았다. 허나 여기서 성주사지까지는 도보 5분 거리에 지나지 않아 별로
부담도 없다.
이곳 가로수는 100~200년 정도 숙성된 느티나무로 10여 그루의 조촐한 모습이다. 이들은
성주천의 범람을 막고자 조성된 일종의 제림(堤林)으로 동네의 정자나무 역할도 겸한다.


▲  성주천과 나란히 이어진 성주초교 앞 가로수길(심원계곡로)

▲  가로수길의 제일 어른인 200년 묵은 느티나무 -
보령시 보호수 8-1-11-5-479호
성주천을 향해 몸을 구부리며 하천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우수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나무 높이 15m, 둘레 2.8m

▲  돌담 사이로 난 저 계단을 오르면 폐허의 현장 성주사지가 모습을 비춘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던 곳, 허나 지금은
폐허의 현장이 되버린 거대한 옛 절터, 성주사지(聖住寺址)
- 사적 307호

성주산(聖住山) 남쪽 평지에 포근히 자리를 깐 성주사터는 백제 법왕(法王, 재위 599~600) 때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법왕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의 영혼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
하며 처음 이름은 오합사(烏合寺)였다. 백제의 마지막 국도(國都)인 부여(扶餘)에서 서해바다
로 가는 길목에 있어 어느 정도 번영을 누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때는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이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이곳 주지로 머물면서 선종(禪宗)을 보급하는 한편,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를 개창해 이곳을 중심지로 삼았다.
선종은 경전 중심의 학문적이고 귀족들이 선호하던 교종(敎宗)과 달리 문자를 통하지 않고 오
로지 참선을 중시하던 사상이라 백성들의 인기가 높았다. 그러다보니 성주사를 찾는 신도의 수
가 급증하면서 그 인기에 힘입어 절을 크게 중창했는데, 불전 80칸, 수각 7칸, 고사(庫舍) 50
여 칸 등 1,000여 칸을 자랑했으며, 이곳에 머물던 승려만 2,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에 문성왕은 무염을 성인(聖人)이라 칭하며 그 성인이 머무는 절이란 뜻의 '성주사'란 이름을
내렸다.
이렇게 신라 막판에 선종 사찰의 하나로 번영을 누리던 성주사는 고려 이후 마땅한 사적(事蹟)
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 석등이 전하는 것으로 봐서는 조선 때까지 법등(法燈)을 그런
데로 유지했던 모양이다. 허나 이후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다
시는 일어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거의 전설처럼 사라져 허망함을 던진 성주사터는 속인들의 경작지로 변했고, 그 밭두렁 사이로
성주사의 옛 영광을 숨죽여 간직한 석탑과 석등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불상이라도 남아있
었으면 사람들이 와서 예불도 올리고 보호각도 짓고 했을 터인데, 그러지도 못했다. 절터 한쪽
에 있는 석불입상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인근에서 가져온 석불로 성주사와는 관련이 없다.

근래에 절터를 정비하면서 절터의 목을 단단히 죄고 있던 경작지를 모두 밀어버렸으며,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드넓은 면적의 절터에는 국보 8호인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중앙3층
석탑과 서3층석탑, 동3층석탑, 5층석탑, 석등, 석계단, 석불입상 등의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널
려있다. 이 중 국보가 1점, 보물이 3점이나 된다. 또한 중문터(동문터)와 강당터, 금당터, 화
랑터, 삼천불터 등의 건물터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으며. 신라 후기 불상의 머리와 백제와 신라
, 고려의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어 성주사의 옛 영화로움을 속삭여주고 있다.
가람배치는 중문(동문터)과 석탑, 금당, 강당으로 이어지는 배치이나 3층석탑 2기 대신에 5층
석탑을 둔 것이 특이하며, 금당 뒤로 3층석탑이 3기나 몰려있어 기존 신라 사찰의 가람배치와
는 조금 틀리다.

현재 절터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넓지만 절터 일대를 완전히 조사한 것은 아니다. 절
터 주위로 돌담이 길게 둘러져 있는데, 이는 절터에서 출토된 돌을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담
장으로 만든 것이며 그렇다고 그 돌담이 성주사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돌담 안
에 감싸인 절터도 아직까지도 절반 이상이 미발굴지로 남아있고, 절의 명성을 봤을 때 절터 서
쪽 산자락과 절터 북쪽에 자리한 마을도 모두 성주사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부분 발굴만 할 것이 아니라 언제 한번 절터와 주변 산자락, 마을까지 속시원하게 뒤엎
어 발굴조사를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성주사의 숨겨진 행적과 보물이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성주사의 왕년의 모습은 남겨진 그림이 없다. 그러니 각자 알아서 그 당시에 맞게 상상의 나래
를 살찌우면 된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그렇다고 인도식이나 아랍식, 유럽식으로 엉뚱하게 상
상하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 전통 사찰의 맞게 상상을 하면 될 것이다.
4기의 석탑에 둘러싸인 금당은 이 땅의 흔한 법당(法堂) 이름인 대웅전(大雄殿)으로 불렸을 것
이고, 아마도 맞배지붕을 지녔을 것 같다. 그 옆에는 동서로 길쭉한 건물터가 있는데, 이는 삼
천불전(三千佛殿)터라고 한다. 건물의 이름처럼 3,000기의 조그만 불상이 불단을 가득 메우며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3층석탑 뒤에는 남북으로 긴 강당(講堂)터가 있으며, 금당터 남쪽에
는 회랑터가 있다. 그리고 성주사의 제일 보물은 낭혜화상탑비는 강당터 서쪽에 두어 절을 크
게 키운 그를 두고두고 기린다. 절의 건물 배치는 현재 이 정도만 살을 드러내고 있어 나머지
는 아직 수수께끼에 머물러 있다.

※ 성주사지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① 보령까지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장항
  선 열차를 타고 대천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보령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나며, 동서울터
  미널에서 1일 10회, 남부터미널에서 1일 3회 떠난다.
* 인천, 부천, 고양, 성남, 안산에서 보령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서부, 복합, 유성), 천안, 아산, 공주, 서산, 군산에서 보령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서부터미널과 논산, 부여에서 성주 경유 보령행 직행버스(1일 6회)를 타고 성주 하차.
  성주사지까지 도보 15분
② 현지교통
* 대천역과 보령터미널에서 시내(옛 대천역)로 나가는 100번 시내버스를 타고 보령요양벙원에
  서 하차, 건너편 정류장에서 백운사, 먹방, 심원동으로 가는 800번대 시내버스(1일 12회 운
  행)로 환승하여 성주사지에서 하차.
  차 시간이 맞지 않을 경우 성주, 외산으로 가는 800번 시내버스 아무거나 잡아타고 성주에서
  하차하여 도보 15분, 이들 버스는 모두 옛 대천역에서 출발한다.
* 보령터미널에서 성주 경유 부여, 서대전행 직행버스(1일 6회)를 타고 성주 하차.

★ 성주사지 관람정보
* 성주사지 문화유산해설사가 9시부터 18시(겨울에는 17시까지)까지 근무한다.
*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  설피(雪皮)를 뒤집어 쓴 성주사터
대머리처럼 허전한 절터를 하얀 눈이 두텁게 감싸준다.


▲  문화재발굴체험 학습장
절터 동쪽에 담장을 갖춘 기와집을 만들어 문화재발굴 체험장으로 삼았다.
평일 오후라 대문은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는 적막만이 감돈다.
체험문의는 보령관광안내소(☎ 041-932-2023, 대천역 소재)

▲  동문터로 인도하는 돌계단

▲  돌계단을 오르면 중문터인 동문(東門)터가 나타난다.
큼직한 주춧돌이 동문의 옛 모습에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준다.

▲  남쪽 회랑(回廊)터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회랑의 모습은 신라 사찰의 대명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대웅전 주변 회랑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듯 싶다. 금당 주변을 회랑으로 두룬 것은
신라와 고려 절의 특징이다.

▲  남쪽 회랑터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동문터와 회랑터가 접히는 부분에서 바라본 금당터 주변

▲  성주사지 석등(石燈)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33호

훤칠한 키의 5층석탑 그늘에 자리하여 조금은 초췌해 보이는 이 석등은 조선 초기 것으로 여겨
진다. 석탑 주변에 이리저리 조각나서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에 수습한 것으로 네모난 창이
4개나 뚫린 화사석(火舍石) 밑에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에는 8각의 지붕돌과 머리장
식을 얹혔다. 화사석 받침 밑과 석등의 제일 밑부분인 바닥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석등
의 기둥은 신라나 고려의 석등보다는 굵기가 가는 편이다. 별 꾸밈이 없는 수수한 모습으로 절
이 있던 시절에는 부처의 광명(光明)을 상징하듯 경내를 환하게 밝혀주었을 것이다.

▲  성주사지 5층석탑 - 보물 19호

금당터 앞에 자리한 5층석탑은 성주사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존재이다. 금당터 뒤쪽에 있는 3층석탑 3형제와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거의 비슷하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
신을 얹힌 형태로 성주사가 한참 잘나가던 9세기 후반 탑으로 여겨진다.
기단 바로 위쪽에는 네모난 괴임돌을 끼워 두었는데, 탑에 괴임돌을 두는 것은 고려시대 탑에서 흔히 나타나는 양식이다. 이 탑은 괴임돌이 하나기 때문에 그 이전 단계라고 보면 될 듯 싶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고,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고개를 들었
으며, 탑신은 위로 올라갈 수록 일정하게 줄어드는 비율로 균형이 잡히고 우아한 모습을 자랑한
다. 탑 위쪽에는 머리장식인 노반(露盤)이 있을 뿐 다른 것은 없다.


▲  동남향(東南向)을 취한 금당터

금당터는 특이하게도 동쪽도 남쪽도 아닌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 방향을 그리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터 동쪽에 흐르는 성주천에 맞추고자 함일 수도 있고, 신라의 왕도(王都)인 경주
를 바라보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허나 딱히 증거가 없으니 상상 속에서 더 이상 끌어오지를
못한다.

신라 후기에 지어졌을 금당은 이렇게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만 남아있을 뿐, 그 위에는 텅 비었
다. 금당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상상 속 도화지에 그 모습을 그려본다.


▲  성주사지 석계단(금당 동쪽 계단)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40호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2개가 있는데, 위로 올라갈 수록 계단의 폭이 줄어드는 형태를 취하
고 있다. 동쪽을 향한 계단 양쪽 소맷돌에는 수려한 조각의 사자상(獅子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돌계단이 1984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허나 공무원의 관리소홀로 인해
1986년 도둑을 맞아 그때 생긴 상처를 간직한 계단만 남아있으며, 그때 사라진 사자상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어여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들 돌계단과 사라진 사자상은 금당이 세워진 신라 후기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금당터 중앙에 자리한 연화대석(蓮花臺石)

금당터 중앙에 자리한 연화대석은 금당에 봉안했던 불상의 보금자리로 불상과 좌대(座臺)는 전
란 중에 사라지고 좌대를 받치던 밑부분만 남아있다. 옛날에 쓰라린 상처를 간직한 대석(臺石)
위에는 눈이 소복히 내려앉아 그를 보듬는다. 그래도 대석에 새겨진 연꽃잎은 선명하고 두툼하
게 살아있어 채색만 적당하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것 같다.


▲  금당 서쪽 석계단 - 동쪽 계단과 달리 위,아래가 일정한 폭을 유지한다.


 

  성주사지 금당터 주변

▲  금당터 북쪽에 자리한 삼천불전(三千佛殿)터
향천사 천불전(千佛殿) 1,500불의 2배가 넘는 불상이 있었다는 삼천불전터
허나 지금은 터만 아련하게 남아있다. 삼천불전 생전의 모습이
어땠을지는 각자의 상상 속에 답이 있을 것이다.

▲  금당터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3층석탑 3형제
(왼쪽부터 서3층석탑, 중앙3층석탑, 동3층석탑)

▲  성주사지 중앙3층석탑 - 보물 20호

금당터 뒤쪽에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3층석탑 3형제가 서로를 보듬으며 정을 누리고 있다. 이
들 3형제는 위치에 따라서 편의상 중앙/동/서3층석탑이라 불리는데, 정확히는 서남/중앙/동북
이 맞다. 그렇다고 서남3층석탑, 동북3층석탑이라 부르기는 뭐하니 흔히 쓰는 동/서3층석탑으
로 이름을 잡은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이들은 정광(定光), 약사(藥師), 가섭(
迦葉) 등 3여래(三如來)의 사리탑(舍利塔)이라고 전한다.

3층석탑 형제의 맏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3층석탑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형태
로 성주사가 구산선문의 하나로 한참 상한가를 치던 9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단 바로 위쪽에는 5층석탑과 마찬가지로 괴임돌을 하나 끼워두었으며, 1층 탑신이 2층과 3층
보다 훨씬 커 보인다.
1층 탑신 남쪽 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겼는데, 자물쇠 모양을 가운데에 두고 그 자물쇠 밑에 동
물 얼굴 모양의 문고리 1쌍을 배치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에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을 채
웠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귀퉁이 끝이 아주 살짝 올려져 마치 병아리가 날
개짓을 하는 듯 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인 노반이 있으며, 그 둘레에 작은 구멍이 있고,
그 위를 복발(覆鉢)로 마무리하였다.
1층 탑신 모서리와 기단 모서리 부분이 좀 손상된 것을 빼고는 그런데로 상태는 양호하며, 문
짝과 자물쇠 문양이 새겨진 것 외에는 이 땅에 흔한 신라탑의 모습이다. 안내문에는 경쾌하고
화려하다고 하는데, 딱히 그런 점은 다가오지 않는다.


▲  중앙3층석탑 1층 탑신에 새겨진 문짝과 자물쇠, 문고리 문양
문짝과 자물쇠, 문고리 문양이 있지만 정작 문짝을 여는 열쇠 문양은 없다.
혹 열쇠가 있어 저 문고리를 열 수 있다면 탑 안에 안치된 보물이나
성주사의 숨겨진 역사를 밝혀줄 무엇인가가 나오지는 않을까?
우리집 열쇠라도 들이밀며 저 문고리를 따고 싶다.

▲  성주사지 동3층석탑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26호

3층석탑 3형제 중 동북쪽에 자리한 동3층석탑은 중앙3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중앙과 서3층
석탑은 국가지정 보물의 큰 지위를 누리고 있는데, 유독 이 탑만은 유일하게 지방문화재의 지
위에 머물러 있다. 어차피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정한 등급이긴 하지만 서로 비슷한 시기에 비
슷한 모습으로 조성되었는데, 왜 하나는 등급이 달라야되는지 그 기준이 참 아리송할 따름이다.

동3층석탑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에 탑신을 얹힌 형태로 기단 바로 위쪽에 괴임돌이 끼워져있
으며, 1층 탑신의 남/북면에는 자물쇠모양과 1쌍의 고리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이며, 귀퉁이 끝이 살짝 올려져 있다. 조성시기는 역시나 9세기 중/후반으로 보
인다.


▲  성주사지 서3층석탑 - 보물 47호

3층석탑 3형제의 둘째라고 할 수 있는 서3층석탑은 중앙/동3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역시나
기단 위쪽에 괴임돌을 두었고, 1층 탑신에는 동물 얼굴 모양의 문고리 1쌍을 새겼는데,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씻겨 내려가 거의 희미해진 모습이다. (자물쇠 문양은 없음) 지붕돌은
밑면이 4단으로 되어있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려져 있으며, 머리장식은 노반만 남아있다.
1971년 탑을 해체수리했을 때 1층 탑신에서 네모난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가득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미 도굴을 당한 듯 싶다. 조성시기는 9세기 중/후반으로 탑
의 높이는 4m이다. 이는 3형제 모두 같다.


▲  서3층석탑 1층 탑신에 화석처럼 남겨진 문고리 장식

▲  장대한 세월에 흔적마저 사라진 3층석탑 뒤쪽 강당(講堂)터
강당은 승려와 신도들의 교육 및 행사 공간이다.

▲  성주사지 석불입상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373호

이 석불은 마치 온몸에 붕대를 둘둘 감은 듯한 우울한 모습으로 얼굴은 거의 타원형이다. 타원
형 얼굴을 지닌 불상은 그리 흔치가 않은 편으로 머리는 머리칼이나 육계를 표현하지 않은 그
냥 맨피부이며, 얼굴 부분은 마치 단단히 화상을 입은 듯, 돌의 겉면이 떨어져 나가 누런 색을
이룬다. 얼굴은 좀 고통스러워 보이며, 목부분도 돌의 겉면이 나갔다.
몸통은 군데군데 표면이 벗겨진 상처가 있고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있는데, 무슨 제스쳐인지
는 모르겠다. 오른손은 왼손 밑에 조그맣게 표현되어 있으며 아랫도리는 없다. 아마도 얼굴과
상반신만 만들어 땅에 심은 듯 싶다.

그는 원래 성주사에 있던 것이 아닌 근처 어딘가에서 옮겨온 것으로 석불을 받치고 있는 바닥
돌의 움직인 흔적이 이를 입증한다. 조성시기는 조선시대에 많이 보이는 불상 형태로 조선 중
기나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성주사가 사라진 이후, 인근에 방치된 석불을 사람들이
수습해 가져온 듯 싶다.
고향을 떠난 것은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의 미래를 위해서는 참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에 원래 자리에 있었다면 관리나 제대로 받았을까? 성주사터라는 보령 제일의 꿀단지에 숟가락
을 얹히고 들어앉았으니 이렇게 관리도 받고 사람들의 주목도 받는 것이다.


▲  성주사지 석불입상의 뒷모습
뒤에는 별다른 조각은 없다. 다만 뒷통수 가운데 주위로 돌껍질이 죄다 벗겨나가
심한 탈모증 환자를 보는 듯 하다.

▲  성주사지 서쪽 경계에 쌓은 돌담
절터에서 나온 무수한 돌로 절터 주변에 길게 돌담을 쌓았다.
담의 모습이 조그만 성곽 같다.


 

  최치원의 문장이 담긴 성주사터 제일의 보물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朗慧和尙塔碑) - 국보 8호

▲  비각 안에 담긴 낭혜화상탑비

강당터 서남쪽에는 성주사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보물이 있다. 바로 낭혜화상탑비이다. 비각
(碑閣) 안에 소중히 안긴 이 비석은 성주사를 크게 일으키며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를 개
창한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로 높이가 5m에 이른다. 글씨들이 깨알같이 적힌 비신(碑身)
은 절 뒤쪽 성주산에서 많이 나오는 유명한 돌, 남포오석(藍浦烏石)으로 빚었다. 1,100년이 넘
는 적지 않은 나이를 먹었음에도 글씨들이 온전하여 남포오석의 위엄을 더욱 높여준다.

비석을 받쳐든 귀부는 거북의 머리로 깨지고 다친 부분이 많아 안타까운 마음을 솟게 한다. 이
는 임진왜란 때 생긴 상처로 보인다. 머리 위쪽에는 둥근 뿔이 나 있고, 회오리 모양의 눈썹이
표현되어 있으며, 등에는 2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가운데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표현되
어 있다. 구름무늬 위에는 비신을 꽂은 비좌(碑座)가 있다. 귀부는 파손이 심해 흙에 묻혀 있
던 것을 1974년에 복원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비신에는 앞쪽에만 글씨가 쓰여있는데, 낭혜화상의 생애와 업적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비
신 위쪽의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다. 비신 위에 얹혀진 이수(螭首)는 밑부분에 연꽃을 두르
고 그 위에 구름과 함께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반룡(蟠龍)의 모습을 조각했는데, 너무 섬세하
여 흑백영화 속에 나오는 용을 보는 듯 하다.


▲  낭혜화상탑비

비석의 주인공인 낭혜화상 무염(801~888)은 무열왕(武烈王)의 8세손으로 신라 왕족이다. (성은
김씨임) 801년(애장왕 1년) 금수저로 태어나 13살에 출가를 했으며, 821년 당나라로 건너가 불
교를 공부하고 845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 오합사(성주사)의 주지가 되면서 선종을 널리 보급하여 신라 후기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를 개창하게 되었고, 신도가 급증하자 절을 크게 일으키니 문성왕이 성주사란 이름을
내려 그를 기렸다.
888년 87세의 나이로 성주사에서 입적을 하니 진성여왕(眞聖女王)은 낭혜(朗慧)란 시호를 내리
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 하였다.

비문을 쓴 이는 신라 후기에 대표적인 인물인 최치원(崔致遠)이며, 그의 사촌이자 당대의 명필
로 꼽히는 최인곤(崔仁滾)이 글씨를 썼다. 그런 연유로 최치원이 썼다는 사산비문(四山碑文)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여기서 사산비문이란 이곳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하동 쌍계사 진감선
사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 智證大師寂照塔
碑), 경주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로 모두 신라 후기에 이름난 비석들이다. 나는 성주사 낭혜
화상탑비를 끝으로 사산비문과 모두 인연을 지었다.

비석의 조성시기는 확실치는 않으나 890년에 낭혜화상의 사리탑(소재 불명)을 만들었다는 기록
이 있으므로 그때쯤 해서 만든 듯 싶다. 비석에는 그의 생애 외에도 가문에 대해서도 나와있는
데,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왕족임에도 6두품(六頭品)으로 신분이 낮아진 적이 있었다. 그래
서 무염이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승려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비석의 원래 이름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로 이름이 좀 길다. 그래서 근래 문화재청에서 '백
월보광' 4글자를 빼고 '낭혜화상탑비'로 이름을 줄였다.
신라 후기에 지어진 비석 가운데 가장 큰 풍채를 자랑하며, 깨진 부분이 많지만 화려하고 아름
다운 조각 솜씨를 엿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으며, 거기에 최치원의 명문장까지 깃들여져 있어
신라 후기 최고의 비석이자 성주사터의 제일 가는 보물로 손꼽힌다.


▲  상처가 심한 낭혜화상탑비의 귀부
눈 위쪽에 회오리 모양의 문양이 눈썹이라고 하는데, 마치 1대 얻어맞아서
눈이 핑 돌아가는 모습 같아 약간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  비석이 꽂힌 비좌 부분
마치 소용돌이 치는 물결이 그대로 화석(化石)으로 굳은 듯한 구름무늬 위에
비좌를 두어 육중한 비신을 꽂았다.

▲  귀부의 뒷쪽 부분
귀부의 등에는 등갑무늬가 근래에 새겨진 듯 선명하게 남아있고 덩치에 비해
조그만 꼬랑지가 하늘을 향해 귀엽게 말려져 있다.

▲  비석의 꼭대기인 이수
회오리 모양의 연꽃무늬 위에 구름과 반룡이 새겨져 있으니 잘 찾아보기 바란다.

▲  글씨가 선명하게 남은 비신
1,100년이 넘은 나이에도 글씨들은 정정하다.

▲  비각 안에 담긴 낭혜화상탑비


▲  낭혜화상탑비 옆에 수습된 기와조각과 주춧돌

▲  낭혜화상탑비 옆에 누운 석물 (정체는 모르겠음)

▲  성주사지 서북쪽 구석에서 바라본 성주사터
절터를 비추던 햇님이 조금씩 발을 빼면서 깊은 골짜기인 이곳에도
어둠의 땅꺼미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성주사터를 1시간 반 정도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세상을 열렬히 비추던 햇님도 슬슬
막을 치며 그만의 공간으로 사라질 채비를 한다.
한 토막 신화가 되어 사라진 성주사터, 대머리처럼 허전하고 황량한 절터에 탑비와 석탑을 안
테나처럼 드러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왔다. 다행히 보령 굴지의 명소이자 답사의 필수 코스
로 인기를 얻으면서 휴일에는 많은 이들이 절터를 보듬으러 온다. 게다가 성주산과 성주산자연
휴양림, 성주계곡, 보령 석탄박물관, 심연동계곡, 백운사(白雲寺) 등의 명소가 가까이에 있어
이들을 1~2개 겯드리면 더욱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에 이루어진 성주사지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역시 황량한 절터
는 겨울에 찾아가야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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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을 거닐다. 안산 나들이 ~~~ (영천시장,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 안산 (무악산 동봉수대) '

▲  무악산 동봉수대(안산 동쪽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천하만물의 마지막 희망, 늦가을이 세월의 저편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혹독한 겨울 제국(帝
國)이 한참 기세를 올리던 11월 끝 무렵, 떠나가는 늦가을 누님의 뒷자락이라도 잡아볼 생
각에 친한 후배와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안산을 찾았다.

오후 3시 서대문역(5호선)에서 그를 만나 독립문 남쪽에 있는 영천시장에서 떡복이와 오뎅,
튀김 등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원래 시장은 일정에 없었으나 안산에 가다보니 자연히
지나치게 되었고,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쿨하게 못지나치듯 시장 먹거리를 온전히 뿌리치기
가 어려웠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름다운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그래서
잠시 안산을 잊고 먹거리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요기를 마치고 포만감의 행복을 누리며 독립문 삼호아파트 뒷쪽으로 흘러가는 안산
자락길로 들어섰다. 그 길을 따라 안산의 남쪽 기점인 천연뜨란채아파트로 이동, 거기서부
터 안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안산(鞍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안산 남쪽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멀리 관악산과 호암산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 도심 북서쪽에 누워있는 안산은 해발 295.9m의 조촐한 산이다. 대륙을 향해 뻗어가는 의
주로(義州路)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338m)
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홍제천(弘濟川)을 사이에 두고 백련산(白蓮山)과 이어진다.
산의 영역은 남쪽으로 천연동(天然洞)과 북아현동(北阿峴洞), 북쪽은 홍제1동과 연희동. 동쪽
은 의주로, 서쪽은 서대문구청 뒷쪽과 연세대에 이르며, 남북으로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3km
남짓이다.

안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습이 마치 말과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사용하는 길마처럼 생겼다
하여 유래된 것으로 <안(鞍)은 안장을 뜻함> 길마재라고도 하며, 모래내, 추모련, 무악산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또한 산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서울의 남주작
(南朱雀)인 남산(南山, 목멱산)보다는 조금 높지만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보다는 조
금 낮으며, 이들 산과 비슷하게 덩치도 고만고만하여 아무리 산행을 길게 잡아도 2~3시간 내외
면 충분하다.
또한 바위와 벼랑이 많은 정상부(동쪽 정상)를 제외하면 산세가 완만하고 산길이 잘 닦여져 있
어 누구든 부담없이 안길 수 있으며, 편한 둘레길의 정석으로 추앙받는 안산자락길이 산 허리
에 둘러져 있다. 게다가 조망도 일품이고 수맥도 풍부하여 20여 개가 넘는 약수터가 나그네의
목마름을 어루만진다.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인왕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서북쪽으로 둘러싼 형태로 예나 지금이나 서
울을 지키는 주요 요충지이다. (지금도 안산 정상에 군사시설이 있음) 하여 산을 둘러싼 다툼
도 여럿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1623년에 일어났던 이괄(李适)의 난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의 주역이던 이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
으켜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祖)
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충청도 공주(公州)로 급하게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치
니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
비췄다. 그리고 군사<군사 중에 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를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여들었는데, 조선 사람들은 대체로 흰 옷을 즐겨입다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면서 도성을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까지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이때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後金)으로 도망쳤는
데, 그들은 청태종(淸太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
래서 일어난 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되겠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청나라군이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무악재를 눈치를 보며 넘었
으며, 1950년 9월에는 인천(仁川)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고자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던 현장이기도 하다.

안산의 포근한 품으로 들어서려면 서대문구청이나 홍제천인공폭포(연희숲속쉼터). 봉원사, 천
연동, 홍제1동, 무악재역, 한성과학고 등지에서 접근하면 된다. 근래에는 서대문구청에서 안산
자락길이라 불리는 둘레길(7km)을 야심차게 닦았는데,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
'에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칭송을 받고 있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 지역의 주요 고찰(古刹)이자 영산재(靈山齋)의 성지(聖地)인 봉원
사가 있고, 산 동쪽 정상에는 무악산 동봉수대가 있으며, 연희숲속쉼터와 안산허브공원, 흔들
바위, 안산자락길, 메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 등의 명소가 즐비해 지루할 틈이 거의 없다.
이렇게 착한 산임에도 오랫동안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 남산에게 제대로 가려져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가 안산자락길을 계기로 동네 명소에서 벗어나 서울 굴지의 꿀단지로 훨훨 나래
를 펼치고 있다.

※ 안산 찾아가기 (2017년 1월 기준)
① 봉원사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지하철 2호선 신촌역(3,4번 출구), 서울역버스환승센터에
  서 7024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고에서 하차, 동쪽
  (오른쪽) GS25시(봉원동4거리) 앞에서 7024번 시내버스로 환승 또는 도보 10분
② 천연동
*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7,8번 출구)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2번(대) 천연뜨란채아파트 방
  면 차량을 타고 뜨란채아파트 101동 종점에서 하차
③ 독립문역
*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 3번 출구에서 1분 정도 가면 통일로23길 골목길이 나온다. 그 가파른
  골목길을 5~6분 정도 오르면 안산자락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신촌동, 연희동, 홍제동


▲  안산 숲 너머로 바라보이는 서울 시내 (남산과 N서울타워도 덤으로)

▲  안산 산책로에서 만난 조촐한 쉼터

천연동에서 안산 정상까지는 능선길을 따라 30~40분 정도 걸리는데, 경사가 거의 느긋하고 길
도 잘 닦여져 있다. 능선길이라 오로지 직진을 고수하면 무난하게 봉수대가 있는 정상으로 갈
수 있으며, 서울 도심과 독립문, 서대문구/마포구 지역만 보이던 시야도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정비례로 늘어나 조망의 품질도 높아진다.

늦가을의 향연을 누린 나무들은 무심히 다가온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거추장스러운 잎을 떨
구고 초라한 몰골로 내년 봄을 기다린다. 몇몇 나무들은 나뭇잎을 단단히 붙들며 가을을 끝까
지 고수하지만 이미 하늘마저 겨울로 가득차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은 귀를 접으며 인
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산꾼들은 낙엽의 사각사각 소리가 듣고자 그들을 밟고 지나간다. 낙
엽의 처절한 말로를 보면서 '올해도 완전 저물었구나, 이제 곧 1살이 강제로 누적되겠지~!' 싶
은 우울감이 나를 감싼다.


▲  안산 능선길 동쪽으로 보이는 독립문 주변과 인왕산
인왕산 너머로 북악산(백악산)과 북한산(삼각산)까지 두 눈에 들어온다.

▲  안산 능선길에서 바라본 천연동, 서대문 주변과 서울 도심

▲  정상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안산천약수터

안산 정상을 10여 분 정도 앞둔 곳에서 길은 능선길과 서북쪽 길로 갈린다. 정상으로 빨리 가
고 싶다면 능선길을 이용하면 되나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경사가 좀 각박하여 각별한 주
의가 필요하다. 하여 잠시 여유를 갖고 서북쪽 길로 우회하니 안산에 별처럼 널린 안산천약수
터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샘터로 가뭄에도 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안산이
베푼 약수를 몇 바가지나 들이키니 목구멍과 몸 속의 불이 싹 진화되는 것 같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산악회에서 만든 조그만 건물이 여럿 있으며, 여기서 북쪽으로 가
면 무악정이란 2층 정자가 모습을 비춘다. 무악정은 근래에 지어진 8각형 2층 정자(亭子)로 여
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은 홍제1동과 연희동, 동쪽은 안산 정상이다.


▲  겨울에 잠긴 안산 오솔길 (안산천약수터에서 무악정 방향)
발자국 소리, 낙엽 밟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하기 그지 없다.

▲  정상 입구에 자리한 무악정(毋岳亭)
안산의 구수한 명물로 나그네들의 포근한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에 이른다.

▲  무악정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서대문구와 마포구, 한강 너머로 강남, 동작, 관악, 영등포구 지역과
관악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안산 동쪽 정상 밑에 자리한 'H' 마크의 헬기장
(서쪽 정상과 동쪽 정상 사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毋岳山 東烽燧臺)

▲  안산 동쪽 정상에 자리한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지방기념물 13호

하늘과 맞닿은 안산의 지붕에는 2개의 봉우리가 봉긋 솟아있다. 이중 서쪽 봉우리가 안산의 정
상으로 안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그곳에는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출입이 100% 통제되어 있
다. 하여 자유로운 땅인 동쪽 봉우리(동쪽 정상, 이하 '안산 정상')가 실질적인 정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 서쪽 봉우리보다 약간 낮을 뿐, 거의 비슷하며 바로 그 봉우리에 무악산 동봉수대(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무악산 동봉수대터')가 천하를 굽어보며 요새처럼 버티고 있다.

봉수대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불을 피워 연기와 불빛을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중앙으로 빠
르게 전달하던 것으로 주로 산 정상에 자리를 닦았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 봉수대의 역할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고 그 봉수대를 이용한 봉수체제가 그나마 제일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비와 눈이 내려 연기가 여의치 못할 때는 봉수지기가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조선시대 봉수제(烽燧制)는 1438년(세종 20년)에 확립되었는데, 그때 무악산(안산) 정상에 봉
수대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악산은 안산의 다른 이름으로 안산과 인왕산 경계에 자리
한 무악재에서 비롯됨)
지금은 동봉수대 1개 밖에 없지만 원래는 2개로 동,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봉수대는 조선의
제3봉수로(烽燧路)의 경유지로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시작하여 황해도(黃海道)와 파주, 고양
해포나루, 무악산 동봉수대를 거쳐 남산 훈도방(남산 목멱산 봉수대)에서 그 끝을 맺는다. 이
노선은 직봉 78곳,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그리고 서봉수대는 제4봉수로의 경유지로 황해도에
서 시작하여 경기도 해안을 따라 고양시 고봉, 무악산 서봉수대를 거쳐 남산 명래방으로 연결
되며, 직봉 71처,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이들 봉수대는 구한말(舊韓末)에 봉수제가 폐지되면서 귀신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며, 그 터
만 아련히 남아 전하던 것을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동쪽 정상에
있던 동봉수대만 대충 복원되었다. 허나 서쪽 정상에 있던 서봉수대터는 군부대가 들어앉은 관
계로 재현되지 못했다.

비록 동봉수대가 복원되긴 하였으나 주위가 문화재와 어울리지 않고 추락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문제점이 2008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하여 그때부터 2011년까지 서울시 문화재위원들이 현
장실사와 고증을 통해 화강석 성곽으로 재현하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봉수대를 부시고 2단의 석
축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봉수대를 얹혔다.
허나 이번에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이 떨어진다고 민원이 들어와 지금의 모습으로 어
색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모습이 아닌 사람들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변질된 것이다.
굳이 좋게 포장한다면 융통성 있고 시대에 맞게 재현된 것이 되겠지.
그러다보니 봉수대를 받치고 있는 석축과 불을 피우던 봉수대, 봉수대 주변 테두리의 돌 피부
가 확연히 차이가 나 어색하기 그지 없다. 봉수대 석축을 이루는 돌은 고색의 기운이 약간이나
마 피어있는데 반해 봉수대와 테두리에 쓰인 돌은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
부이다.


▲  천하를 굽어보며 왕년의 향수를 달래는 봉수대
연기를 모락모락 풍기며 불빛을 날리던 왕년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안산 정상을 수식하는 장식용이자 전망대 그 이상도 아니게 되었다.

▲  때깔이 고운 하얀 피부의 봉수대
봉수대 중앙에 있는 네모난 창을 통해 불과 연기를 피웠다. 그 연기는
봉수대 꼭대기를 통해 하늘을 찔렀다.

▲  새롭게 두룬 봉수대 테두리

봉수대를 모자처럼 눌러쓴 안산 동쪽 정상, 그 동쪽은 바위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고,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다소 각박하여 봉수대 복원 이후 추락사고의 위험이 늘 제기되었다. 하여 2011
년 이후 봉수대를 새로 갈면서 주변에 하얀 피부의 테두리를 성곽처럼 두른 것이다. 그러다보
니 기존의 봉수대 모습을 좀 잃게 되었다.
아무리 호랑이 담배 빨던 시절에 없어진 것을 복원한 거라고 해도 철저하게 고증하여 재현했으
면 좋겠다. 입맛대로 변형을 가하면 그건 더 이상 문화유산이 아니다.


▲  안산 정상(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인왕산(仁王山)의 위엄
이렇게 보면 인왕산이 좀 낮아보이겠지만 저곳이 이곳보다 40m 이상 더 높다.
그래도 서울의 우백호(右白虎)가 아니던가~~


안산 정상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이만저만이 아
닌 서울을 두 발 아래 두며 제대로 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뫼에 오르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맛이 아닐까? 이때만큼은 천제(天帝)도 황제도, 청와대 주인도 부럽지가 않다.

정상에서 보이는 범위는 바로 밑에 무악재를 비롯하여 인왕산, 독립문, 홍제동, 홍은동, 신촌,
서울 도심부, 북한산(삼각산), 북악산을 비롯해 멀리로는 서울 동부, 불암산, 아차산, 여의도,
서울 서남부, 동작구, 강남구, 관악산과 호암산(虎巖山)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래서 이곳에 왜 봉수대를 씌우고 이괄의
난(1623년)과 6.25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군사적인 요충지로 절찬리에 쓰이고 있는지 십분 이
해가 간다.

* 무악산 동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홍제동과 홍은동, 불광동, 평창동,
북한산 서남부 지역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홍제동과 홍은동, 녹번동, 연신내를 비롯하여 멀리 고양과 파주 지역의
산줄기까지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울 도심
도심을 이루는 빌딩숲 너머로 남산과 N서울타워가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4)
바로 밑에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을 비롯하여 도심부와 남산,
서울 동부, 강남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5) 안산 남부와 도심부, 신촌 지역
우리가 저 밑의 안산 남쪽 기점(천연뜨란채아파트)에서 길을 시작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꽤나 올라왔다. (초여름 사진)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6)
안산 남부와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여의도 63빌딩을 비롯하여
동작구와 관악산, 호암산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7)
일몰이 진행되는 가운데 서대문구와 마포구, 강서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8)
인왕산 남쪽과 서대문독립공원, 도심부, 서울 동부 지역을 비롯해
불암산과 아차산 산줄기가 까마득하게 바라보인다.

▲  정상 바로 밑 바위 (정상 동쪽)
정상 동쪽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다.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가파르며
그나마 서쪽이 좀 접근이 편하다.


안산 정상에서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며 열심히 사진에 담으니 시간은 어느덧 6시가 되
었다. 산바람은 더욱 매서워져 바람과 맞닿은 얼굴이 아플 정도이며,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달
님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뺀다. 특히 산에서는 평지보다 일찍 해가 떨
어지기 때문에 서둘러야 뒷탈이 없다. 아무리 안산이 작은 산이라고 해도 염연히 뫼는 뫼이기
때문이다.

짙어져가는 땅거미에 안산 정상을 내주고 봉원사 방면으로 내려가는데 금세 어두워졌다. 길이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흩어져 조금 정신이 없었으나 길눈과 지리에 밝은 나의 직감을 믿고 내
려가니 어느덧 봉원사 경내에 이른다. 봉원사는 일몰 이후에 모든 건물을 잠궈놓기 때문에 그
규모에 맞지 않게 벌써부터 어둠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봉원사와 절 밑에 펼쳐진 마을(봉원사 승려들의 집이 대부분)을 지나면 7024번 종점과 봉원사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서울역으로 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대기시간이 길어
서 봉원동로터리, 이대부고까지 더 내려갔다. 거기까지만 가면 도심으로 가는 버스는 물 흐르
듯 넘쳐난다.

이대부고 정류장에 이르러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 궁리를 하다가 북촌(北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무리 명소나 맛집을 많이 안다고 해도 정작 필요할 때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 내 돌
머리의 단점이다. 하여 생각난 감에 북촌으로 흔쾌히 넘어가기로 했다.

퇴근/하교 손님들로 가축 수송을 이룬 272번 시내버스(면목4동↔남가좌동)를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북촌으로 들어섰다. 한정식을 먹자는 의견이 있어서 마땅한
곳을 물색하던 중, 마침 부근에 '다정'이란 한정식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에 가봤던 집을
생각했으나 새로운 집을 개척할 겸, 별 미련 없이 그 집의 사립문을 열었다.


▲  김치 등의 밑반찬과 보쌈, 잡채, 굴

▲  고기 8조각 보쌈의 위엄

▲  달랑 3종류 6조각 전의 초라함

▲  제일 마지막에 나온 칼국수의 위엄

다정에서 2만원대의 한정식을 주문하였다. (가격은 변동 가능) 시장한 배를 달래며 맛이 어떨
까 기대를 하고 있으니 얼마 안가서 김치 등의 밑반찬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굴
과 보쌈, 잡채, 전이 차례대로 나왔는데 (그 외 몇 가지가 더 있었으나 생각이 안 남) 높은 가
격에 비해 성인 남자들이 먹기에는 양이 적었다.
좀 두둑하게 나왔으면 좋으련만 쥐꼬리마냥 찔끔찔끔 나오니 나오기가 무섭게 동이 난다. 다행
히 주인 아지매가 인심이 좀 있는지 전과 잡채, 몇몇 반찬을 더 갖다주었으나 그것으로는 택도
없었다.

그렇게 메인 메뉴를 처리하고 나니 제일 끝에 칼국수가 나온다. 칼국수 대신 밥을 먹어도 되지
만 칼국시가 양이 많다고 하여 그것을 택했다. 조개와 호박, 면발이 어우러진 칼국수는 국물이
꽤 진국이었다. 국수와 호박도 괜찮았지. 칼국수가 나오기 전까지는 배가 덜 찼지만 국수로 인
해 배는 완전히 만땅이 되었다. 이건 완전 한정식보다 칼국수가 더 생각이 날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비싼 한정식을 끝으로 11월 안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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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의 꿀단지, 무주 머루와인동굴~덕유산 겨울 나들이 (설천봉, 덕유산리조트)

 


' 무주 머루와인동굴, 덕유산 나들이 '

▲  덕유산 설천봉


 

늦가을이 힘없이 쓰러지고 겨울이 한참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11월 끝자락에 전북 동북부
끝으머리에 자리한 무주(茂朱) 땅을 찾았다. 이번 나들이는 멀리 동남쪽에서 온 일행들과
함께 하였는데, 무주터미널에서 그들에게 합류하여 같이 움직였다.

무주에서 제일 먼저 인연을 지은 곳은 덕유산 북서쪽에 자리한 적상산(赤裳山, 1,034m)이
다. 그곳에 안긴 안국사(安國寺)와 적상산성(赤裳山城),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적상호
수를 둘러보고 (☞ 관련글 보러가기) 뱀처럼 구불구불한 고갯길(산성로)을 다시 내려오다
가 적상산 고개 밑에 자리한 무주머루와인동굴에서 잠시 바퀴를 멈추었다.


 

♠  무주의 새로운 꿀단지, 머루와인이 아낌없이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 무주머루와인동굴

▲  무주머루와인동굴 매표소

적상산 북쪽 450m 고지에 무주머루와인동굴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1988년 이후 적상산의 지도
를 크게 흔들어 놓은 무주양수발전소 건설 당시에 굴착 작업용으로 뚫어놓은 인공 동굴로 무주
양수발전소 상부댐, 적상호와 더불어 인간이 적상산에 남긴 혹이다.

1995년 발전소가 완성된 이후에는 쓸모가 없어 거의 버려졌는데, 무주군청에서 동굴 활용을 두
고 머리를 굴리다가 머루 재배 농가를 위해 머루로 만든 머루주의 숙성 장소로 사용하기로 하
였다. 하여 2007년 한국수력원자력으로부터 임대를 받아 내부를 상큼하게 손질하여 무주머루와
인동굴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처음에는 머루와인(머루주)을 숙성시키는 숙성고로 쓰였으나 이곳을 관광지로 널리 개방하면서
완전 대박을 쳤다. 위치도 적상산이나 무주리조트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수요 확보에도 어렵지
않았고, 이곳을 찾는 발길이 늘어나는 만큼, 머루와인의 인기도 치솟으면서 무주의 소중한 꿀
단지로 등극한 것이다.

이 동굴의 몸매는 길이 579m로 이중 290m만 개방하고 있다. 높이 4.7m, 폭 4.5m로 넓은 편이며,
비록 인공 땅꿀이긴 하지만 동굴은 동굴인지라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스하다. 또한 연
평균 기온은 13~14도로 머루주를 숙성시키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머루주의 발효
온도는 18도, 보관 온도는 12도, 평균 일교차가 18도가 되야 맛이 좋다고 함)


▲  머루와인동굴 앞을 지키는 머루장승부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들고 안으로 들어서면 동굴 앞에 재미나게 생긴 갈색 피부의 머루장승
부부가 하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우리를 맞이한다. 이들은 동굴 수식용으로 여기서는 머루장
승부부로 통하는데, 그들에게 적당한 정체성과 주제를 붙여주어 동굴 나들이의 달달한 재미를
더해준다.
비록 장승을 칭하고 있지만 그 흔한 장승의 모습이 아닌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석상 같은 모습
으로 너무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나그네들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게 한다.

이들 가운데 왼쪽에 하늘색 머리를 가진 이는 남편으로 머루와인을 즐겨 마셔 노화가 늦게 진
행되었다고 한다. 나이는 50대 후반이라고 하나, 실제 나이는 90세라는 설이 있다고? 그는 과
묵하지만 바람기가 많다고 하며 정력도 무지 대단하다고 한다.
그리고 오른쪽 노란 머리는 부인으로 50대 초반이라고 한다. 머루와인을 즐기는 탓에 기억력이
매우 좋아 남편의 외도 횟수와 장소를 모두 기억한다고 하며, 애교의 본좌라고 한다. 지금이야
허허 웃지만 시간이 몇 갑절 흐르면 그들에게 부여한 주제는 한토막 전설로 승화될 것이다. 이
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결국은 머루와인 찬양이다.


▲  머루와인동굴 정문 (비밀의문)

머루장승부부를 지나면 '머루와인 비밀의 문'이라 이름 붙여진 동굴 정문이 나온다. 문 위쪽에
는 두툼한 코와 온갖 주름 곡선이 자욱한 얼굴이 있는데, 좌우로 가늘게 뜬 눈도 보인다. 이
얼굴은 이곳을 지키는 머루정령으로 동굴 관람객에게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려주며, 머루와인
숙성의 신비스러운 기운을 불어넣는 용으로 주제를 잡았다. 성격은 좀 더럽지만 책임감과 인내
력이 강하다고 한다.


▲  머루와인동굴 통로

비밀의 문을 들어서면 동굴 통로가 일직선으로 펼쳐진다. 양쪽 벽에 휘날리는 모습의 등을 비
롯하여 내부를 밝히는 다양한 등을 두어 심봉사 같은 장님이 아닌 이상은 통행에 지장은 없다.
통로 양쪽에는 무주 고을의 풍경 사진과 옛날 사진들이 배열되어 있다.


▲  통로 중간 - 머루와인과 머루에 대한 정보를 머금은 온갖 안내문들이
오른쪽 벽을 가득 메운다.

▲  통로 좌우에 배열된 사진들 (무주 풍경 사진)

▲  동굴 광장 직전

▲  와인 시음 현장인 동굴 광장

동굴 정문(비밀의 문)에서 3~4분 정도 들어가면 동굴 광장에 이른다. 이곳은 와인을 테마로 한
공간으로 여기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왼쪽 코너로 가 와인잔을 받기 바란다. 와인잔은 1명당 1
개씩 제공되며 집으로 가져가도 상관없다. (동굴 입장료에 와인잔과 와인 시음 비용이 포함되
어 있음)
와인잔을 받으면 우선 잔의 상태를 확인하기 바란다. 간혹 부실한 잔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래가 약간 깨진 잔을 받았는데 교환을 요청하니 바로 다른 잔으로 바꿔준다. 그렇게 교
환을 당한 부실한 잔은 와인잔 담당자가 아무 미련도 없이 옆으로 던져 깨뜨렸다. (그 현장에
는 그렇게 깨진 와인잔이 가득했음, 잔을 어떻게 만들길래 부실 잔이 그리 많은 걸까?)

와인잔을 들고 반대쪽 와인바로 가면 머루와인을 주는데, 보통 3종류를 준다. 첫 잔을 마시고
다음 칸으로 가면 다른 와인을 주며, 1번 정도는 리필을 해준다. (줄이 길다면 그냥 1잔만 마
시기 바람) 술이 싫다면 머루 아이스바나 머루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된다. 허나 이들은 따로
돈을 줘야 된다.

       ▲  와인바의 명물 오줌누는 아이
머루장승 부부의 늦둥이 아들로 5살이라고 한다
. (영원한 5살) 자랑스럽게 거시기를 내밀고 소
변에 임하는 모습이 참 패기가 넘쳐 보인다.

▲  문이 닫힌 통제 구간에는 머루와인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다 (윗 사진)

▲  와인 시음 현장인 와인바 (밑 사진)


▲  와인동굴 통로 (밖으로 나가는 방향) ▼

머루장승부부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동굴 주변 물레방아에 있는 연인상이 그 딸이라고 한다.
상대방 남자하고는 무려 나이트클럽 부킹에서 만났다고 하며 (좀 건전한 걸루 하지 ㅋㅋㅋ) 그
들은 포석정 물레방아에서 주로 데이트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에 그들의 상을 두었다고?
머루장승부부는 그들의 교제를 반대하고 있으며, 딸은 23세, 상대남은 27세라고 한다.


동굴 관람은 와인 마시고, 사진을 찍고 하다 보면 보통 20~30분 정도 걸린다. 휴일에 관광객이
폭주하는 경우에는 와인이 일찍 동날 수가 있어 휴일이나 성수기에는 가급적 빨리 가야 뒷탈이
없다.

※ 무주머루와인동굴 찾아가기 (2017년 1월 기준)
무주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광주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정도, 전주에서는 1일 14회 떠난다.
* 영동역(경부선)에서 무주행 군내버스가 50~7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② 현지교통
* 무주터미널에서 내창행 군내버스 이용 (1일 2회, 11:40, 16:30) → 내창에서 도보 40분 (무
  주터미널에서 택시로 접근 가능)
③ 승용차
* 대전~통영고속도로 → 무주나들목을 나와서 무주방면 우회전 → 무주1교차로에서 우회전 →
  적상산입구에서 우회전 → 북창리 → 적상분소 → 무주머루와인동굴

★ 무주머루와인동굴 관람정보 (2017년 1월 기준)
* 입장료 : 2,000원 (20인 이상 단체 1,800원) <미취학 아동, 국가/독립유공자와 그 가족은 무
  료>
* 관람시간 : 10:00~17:30 (12~3월은 10:40~16:30) / 매주 월요일 휴관(성수기는 개관함)
* 와인족욕 이용료 : 성인 3,000원 / 만7세 미만 2,500원 (10:00~16:30, 12~3월은 10:30~15:30)
* 소재지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산119-5 (산성로 359, ☎ 063-322-4720)
* 무주머루와인동굴 홈페이지는 ☞ 여기를 클릭한다.



무주 머루와인동굴에서 잠시 머루주의 달콤한 향기에 빠져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무주덕유

산리조트(이하 덕유산리조트)로 이동했다.
북창리와 무주양수발전소 하부댐이 있는 무주호, 괴목리, 구천동터널을 차례로 지나 온갖 식당
과 숙박업소, 스키용품 가게로 즐비한 덕유산리조트입구 심곡리에서 잠시 길을 멈추고 두부 음
식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여기서는 두부전골을 먹었는데, 맛도 제법 괜찮다. 게다가 시장기가 진하게 발동해 밥을 2그릇
이나 해치우고 전골과 반찬도 싹싹 긁어먹고 나서야 겨우 손이 멈춘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점심
을 마치고 덕유산리조트로 진입하여 곤도라(Gondola) 승강장이 있는 설천하우스를 찾았다.


 

♠  덕유산리조트 곤도라를 타고 덕유산 설천봉(雪川峰)으로 오르다~~

▲  덕유산리조트 설천하우스

덕유산리조트는 덕유산 정상 북쪽 산자락에 넓게 들어앉은 대규모 휴양시설이다. 스키와 보드
등 겨울레포츠의 성지(聖地)로도 아주 명성이 높은데, 스키장을 비롯, 수영장과 골프장, 눈썰
매장, 호텔 등을 갖추고 있다. 리조트 내부가 매우 넓어서 내부를 이동할 때 차량과 셔틀버스
를 이용해야 될 정도이며, 곤도라 승강장이 있는 설천하우스는 리조트 동부에 자리해 있다.

이곳 리조트의 중심인 스키장은 덕유산의 피부를 싹 밀고 만든 것으로 덕유산 정상 북쪽 봉우
리인 설천봉까지 펼쳐져 있다. 설천봉이나 그 중간까지 곤도라나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스키나
보드로 내려오는 것이다.
겨울 레포츠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지나치게 넓은 공간을 잡아먹는 스키장이나 골프장이 너무
남발되고 있어 이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나라가 미대륙이나 시베리아 벌판, 중원대륙,
호주대륙 정도 되면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매우 좁고 좁은 현실이라 그런 것들을 몇 개 만들
면 국토가 거의 꽉찰 지경이다. 게다가 그들로 인해 자연도 적지 않게 파괴되고 있으니 지구와
후손들을 위해 한번 생각을 해봐야 될 문제이다.

나무로 삼삼해야 될 산자락이 스키장으로 벌거숭이 임금처럼 된 현장을 보니 인간이 오로지 그
들의 부질없는 취미를 위해 너무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덕유산에 희귀
한 동/식물이 많고, 전나무의 일종인 구상나무의 대규모 자생지인데, 스키장과 리조트로 인해
적지 않은 자연이 고통을 받게 된 것이다.
흔히 말하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 우리는 친구라는 구호. 실은 자연과 지구의 최대 적은 인간
이다. 그 인간이 전기를 만든답시고 적상산에 양수발전소와 적상호란 혹을 붙였고, 덕유산에는
그보다 더 큰 덕유산리조트와 스키장을 붙였다. 더 이상 대자연 형님의 콧털을 건드리지 않았
으면 좋으련만, 이러다 정말 그의 대보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덕유산리조트 곤도라는 케이블카와 비슷한 것으로 설천하우스(해발 700m)와 설천봉 정상(1520m
)을 이어준다. 무려 해발 800m를 뛰어넘는 이 곤도라는 선로 길이 2.659m, 속도는 초속 5m, 소
요시간은 약 20분, 곤도라 1대당 정원은 8명이다.
그의 등장으로 덕유산 정상까지 2시간 이상 힘들게 올라야 되는 수고로움이 크게 줄었으며, 설
천봉에서 정상(향적봉)까지는 달랑 20분 정도만 오르면 된다. 허나 정상의 접근성이 너무 쉬워
지면서 사람들의 방문이 크게 늘어났고, 그로 인해 향적봉과 설천봉 구간의 자연이 크게 망가
졌다. 곤도라가 다니는 구간 역시 스키장으로 인해 망가지긴 마찬가지, 2012년 5월부터 2개월
간 설천봉~향적봉 구간의 자연을 복원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땜방용에 불과하다.


▲  설천하우스에서 바라본 곤도라 승강장과 덕유산 설천봉

▲  스키장에 인공눈을 뿌려 슬슬 겨울 장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곳은 인공눈이지만 곤도라를 타고 윗세상으로 올라가면 거기는 진짜
눈이 기다리고 있다.

▲  스키장 인공눈밭을 누비는 관광객들

▲  곤도라 타는 곳

▲  설천봉으로 인도하는 곤도라 승강장

▲  좁은 곤도라에서 바라본 스키장

곤도라를 타는 줄이 조금 길었지만 거의 20초에 1대씩 빗자루 배차를 하는 지라 오래 기다리지
않고 탑승했다. 초속 5m로 사람의 뛰는 속도와 거의 비슷해 처음에는 이 속도로 설천봉까지 언
제 올라가나 싶었다. 하지만 금세 설천하우스가 작은 점이 되어 흐릿해지고 대신 푸른 하늘이
점점 가까워진다. 밑에는 아직 늦가을인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서서히 겨울로 변하여
눈쌓인 풍경이 펼쳐진다.

곤도라에서 정면을 보면 바로 앞에 가파른 오르막이 있어 덜하지만 뒤를 보면 정말 까마득하게
펼쳐지는 풍경에 두 눈이 어지럽다. 그렇게 곤도라를 20분 타면 설천봉에 도착한다.


▲  설천봉 정상

설천봉(1520m)은 덕유산 정상 북쪽에 자리한 봉우리로 덕유산리조트 스키장의 윗쪽 시작점이다.
설천봉에서 내려가는 스키와 보드 코스는 경사가 꽤 각박해 상급 코스로 치며 스키철에는 곤도
라 외에 별도로 리프트도 운행한다.

설천봉 정상에는 마치 요새처럼 생긴 휴게소가 있는데, 식당과 편의점을 갖추고 있다. 허나 물
가는 속세에 비해 1.5~2배 이상 비싸다. 음료 역시 산의 높이만큼 비싸게 받는다. 그래도 사먹
는 사람이 적지 않아 장사는 쏠쏠해 보인다. 편의점은 비록 할인카드에 의지해 할인을 해도 시
중의 같은 편의점보다 비싼 건 마찬가지다.

▲  설천봉에 자리한 3층 기와집

▲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오르는 산길

설천봉휴게소 남쪽에는 8각형을 띈 3층짜리 기와집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기와집이 설천봉의
실질적인 꼭대기로 겉으로 보면 하늘에 제를 지내는 원구단이나 천단(天壇)처럼 신성한 건물로
보인다. 허나 저것은 이곳이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그 분위기에 어울리게끔 만든 장식용 건물
에 불과하다. 그래도 그냥 휴게소만 있는 것보다는 저거라도 있으니 정상 풍경이 조금 신비롭
게 다가오며, 덕유산리조트 관련 관광자료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곳의 간판과 같은 존재이다.

설천봉까지 올라온 일행들은 가득 쌓인 눈과 미끄러운 산길에 기겁을 하여 대다수 휴게소 주변
에서 길을 멈추었다. 향적봉까지 편히 가게끔 길이 정비되어 있기는 해도 눈빙판길까지 개선된
것은 아니다. 나도 향적봉까지 가려고 했지만 생각 외로 미끄러운 그 길을 오르기가 겁이 났다.
아무리 팔팔한 30대라고 해도 20대는 아니며, 나도 이제 몸을 사려야 된다. 자칫 미끄러지면
큰일난다. 향적봉까지 간 일행은 1/3 정도인 10여 명, 그중 1명이 내려오는 중 크게 미끄러져
응급차 신세를 졌다.

눈길에 단단히 꼬리를 접고 설천봉으로 도로 내려가 그곳에서 계속 머물렀다. 덕유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향적봉(1614m)이 바로 코앞이건만 가지 못하는 한이 오죽하랴. 결국 다음에 다
시 와야될 명분만 만들고 말았다. 하긴 이렇게 좋은 명소를 1번만 오는 것도 솔직히 섭섭하지.
집에서 가까우면 두고두고 옆구리에 끼고 싶다.


▲  향적봉으로 잠깐 오르는 길에 바라본 설천봉
설천봉 정상을 장식하고 있는 3층 기와집이 꽤 신비롭게 보인다.
마치 높은 존재가 하늘에 제를 지내는 공간처럼 말이다.

▲  가깝고도 먼 덕유산 향적봉
20분 거리란 말에 많이 주저했지만 결국 몸을 사리는 쪽으로 기울었다.
허나 돌리는 발길이 너무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  설천봉 정상을 장식하는 3층 기와집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이 꽤 일품이다.

▲  힘차게 남쪽으로 달려가는 덕유산 산줄기

▲  설천봉에서 바라본 천하 (무주 안성면 지역)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타 천하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천상(天上)세계가
보일 정도로 하늘과 맞닿은 곳이니 조망의 품질도 꽤 우수하다.

▲  설천봉에서 바라본 천하 (무주 안성면 지역)

▲  설천봉휴게소 옥상에 조그만 기와집이 있어 마치
성곽 위에 세운 망대 같다.

▲  설천봉에서 만난 구상나무들

구상나무(Korean Fir)는 제주도 한라산(漢拏山)이 원산지로 한라산과 지리산(智異山), 덕유산
에 많이 살고 있다.
이 나무는 전나무의 일종으로 우리나라 토종 나무인데, 서양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많이 애용
되고 있는 나무가 바로 구상나무이다. 지구촌에 퍼진 구상나무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식재된 것
으로 공룡을 깨끗히 말아잡순 빙하기(氷河期)를 견딘 강인한 나무이기도 하다. 허나 아무리 강
한 나무라고 해도 빙하기의 후예인 겨울 제국 앞에 모든 것이 털린 상태라 정말 빙하기를 이긴
나무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앙상하기 그지 없다.


▲  설천봉에서 바라본 천하 (구천동, 무풍면 방면)

▲  설천봉 정상 동쪽 부분

▲  설천봉과 밑 세상을 이어주는 곤도라

향적봉을 찍고 내려오는 일행을 기다리느라 1시간 정도 설천봉에 머물렀다. 하늘의 속살이 보
일 정도의 고지대라 바람이 무척 패기가 있어 휴게소에 들어가 30분 정도 추위를 녹이고 있으
니 그곳에 갔던 사람들이 모두 내려왔다.
그래서 덕유산을 뒤로 한 채, 다시 곤도라에 의지해 밑 세상으로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올라
갈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속도로 움직여 소요시간은 비슷하며, 밑이 까마득하게 보여 언제 내
려가나 싶었으나 점처럼 작았던 밑의 여러 시설(설천하우스 등)이 점점 커지고 대신 설천봉은
한줄기 점이 되어 사라지면서 무탈히 설천하우스에 도착했다.

이렇게 짧게나마 덕유산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구천동터널과 적상산입구를 거쳐 무주터미널로
나왔다. 여기서 아쉽지만 일행들과 쿨하게 작별을 고하며 충북 영동(永同)으로 가는 군내버스
를 타고 40여 분을 달려 영동역으로 넘어갔다. 여기서 서울행 누리로 열차(무궁화호의 별종격
열차)에 고된 몸을 담고 북쪽으로 달려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번개처럼 날라가 재미나게 보냈던 그날 하루,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이들이 보고 싶
은 마음에 비록 한참이나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겨 그날을 추억해본다.
이렇게 하여 겨울맞이 무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무주 덕유산리조트 찾아가기 (2017년 1월 기준)
* 무주까지 가는 방법은 앞에 무주머루와인동굴 참조
* 무주시외터미널에서 구천동으로 가는 직행버스(1일 11회)나 군내버스(1일 5회)를 타고 덕유
  산리조트(리조트3거리)에서 하차. 리조트 방면으로 2분 걸어가면 '생두부촌'이란 식당이 있
  다. 그 앞에서 리조트행 무료셔틀버스 이용 (1일 20여 회 운행)
* 무주읍내(제일의원, 산림조합)에서 리조트행 무료셔틀버스 이용 (1일 6회 운행, 아침 2회는
  시장4거리, 반딧불주유소, 군민회관 경유)
* 설천면(면사무소 앞)과 구천동(관리공단 밑 주차장)에서 리조트행 무료셔틀버스 이용 (설천
  에서는 1일 9회, 구천동에서는 1일 10여 회)
* 서울 종합운동장(2,9호선 종합운동장역 7번 출구 밖 150m 지점)에서 덕유산리조트행 정기셔
  틀버스가 1일 1회 떠난다. (비수기에는 주말만 운행하며 자세한 운행 정보는 덕유산리조트
  홈페이지 참조)

★ 덕유산리조트 곤도라 관람 정보 (2017년 1월 기준)
* 이용요금 : 어른 편도 11,000원, 왕복 15,000원 / 어린이 편도 7,700원, 왕복 11,000원 (리
  조트 회원은 30% 할인)
* 곤도라 설천봉행은 대체로 9시부터 17:30분까지, 리조트행은 16:30~18시까지 운행한다. 4계
  절마다 운행시간이 다르므로 자세한 운행시간은 덕유산리조트 홈페이지 곤도라 부분을 참조.
* 덕유산리조트 설천하우스 소재지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 1287-5 (만선로 185)
* 덕유산리조트 문의 ☎ 063-322-9000
* 덕유산리조트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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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렸던 잘생긴 바위 명산, 호암산 (서울둘레길, 호압사)

 

 

'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 '

▲  호암산 (사진 밑부분에 보이는 기와집이 호압사)


 

천하가 늦가을에서 겨울로 서서히 변해가던 11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 명소
인 호암산을 찾았다. 호암산에 안길 때는 시흥2동 호압사입구에서 보통 출발을 하였지만
이번에는 약간의 변화를 주어 삼성산성지에서 첫발을 떼었다.

신림역(2호선)에서 서울시내버스 152번(화계사↔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관악구를 가로질
러 삼성산성지에서 발을 내린다. 여기서 호암산의 품으로 들어서면 삼성산성당과 삼성산
청소년수련관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 5분 정도 더 가면 계곡 오른쪽 산중턱에 천주교 성
지인 삼성산성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성산성지 동쪽 삼호약수터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의 하나, 기해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이 안장되었던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

▲  기해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의 무덤 (유해 일부가 묻힘)

삼성산 북쪽이자 호암산 북쪽 자락 소나무 숲에 둥지를 튼 삼성산성지는 용산 새남터, 합정동
절두산성지(合井洞 切頭山聖地)와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의 하나로 1839년 기해
박해(己亥迫害) 때 새남터에서 처단된 프랑스 천주교 신부 3명이 안장된 곳이다.

이곳에는 제2대 조선교구 주교인 라우젠시오 엥배르<1797~1839, 조선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와 모방 신부로 잘 알려진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1803~1839, 조선 이름은 나백다록(羅伯多祿)>
, 그리고 자코브 오노레 샤스탕<1803~1839, 조선 이름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사사당(沙斯當)>
이 묻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프랑스 출신으로 청나라를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라우젠시오 엥배르(Laurent Joseph Marie Imbert)는 1797년 프랑스 뷰슈뒤론 데파르트망에서
태어나 1819년 천주교에 입문하여 신부가 되었다. 1820년 마카오로 건너가 활동했고, 1830년에
청나라 사천성(四川省) 부주교로 승진되었다가 1837년 제2대 조선교구 주교(主敎)로 임명돼 그
해 정하상(丁夏祥)과 함께 조선에 잠입했다.
1838년 서울로 들어와 천주교 영업과 교세 확장에 매진했으며, '범세형'이란 조선 이름까지 만
들었다. 허나 1839년 수원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 21일 이곳에 묻힌 2명과 나란히 망나니의 칼
을 받아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그는 조선 신도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한양교우회장인 현석문(玄錫文)에게 넘겼는데, 이것
이 1958년 프랑스 파리에서 간행된 기해일기(己亥日記)이다.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시복<諡福, 천주교 신앙에 모범을 보이며 죽은 이를 복자(福者)의 반열로 추대하는 것, 복자는
교황청에서 추대함>되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한국 103명 순교자의 하나로 추대를 받았다.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Phillibert Maubant)은 1803년 프랑스 바시 출생으로 1831년 파
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신학교에 들어갔다.
1832년 청나라 사천성으로 가던 중, 조선교구 초대 주교인 브뤼기에르와 조선으로 가기로 하고
압록강까지 왔으나 국경 감시가 심하여 만주 마가자(馬架子)에 머물렀다. 이후 브뤼기에르가
병사하자 1835년 겨울, 삿갓에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잠입, 정하상의 안내로 서
울에 들어와 영업을 하면서 '나백다록'이란 조선 이름을 만들었다.
1837년 김대건(金大建)과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를 마카오 오문신학교(澳門神學校)로
유학을 보냈으며, 기해박해 때 충청도 홍성(洪城)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처단되었다. 1925
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한국 103명 순교자의 하나로 추대되었다.

자코스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 Chastan)은 1803년 프랑스 마르쿠에서 출생, 1826년 디뉴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었다. 1837년 조선교구 주교의 서품을 받고 앵베르와 서울로 잠
입했으며, '정아각백', '사사당'이란 조선 이름을 만들었다.
그 역시 서슬 시퍼런 기해박해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충청도 홍성에서 체포되었으며, 새
남터에서 처단되었다. 1925년 로마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 반열에 올랐고, 1984년 한국
순교자 103인의 하나로 추대되었다.

그들이 처단되자, 목은 하늘 높이 효수되고 유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
었다. 이에 발끈한 박바오로 등 신자 여럿이 시신을 수습해 신촌 뒷산인 노고산(老姑山)에 안
장했으며, 1843년 박바오로가 삼성산에 있는 그의 선산(지금의 삼성산성지)으로 몰래 옮겼는데
아들인 박순집(朴順集, 1830~1911, 세례명 박베드로)에게만 무덤 자리를 알려주고 다른 사람에
게는 절대 비밀로 부쳤다.
이후 천주교가 공인되고 순교자에 대한 시복이 이루어지자 박순집이 교구에 이 사실을 알렸고
1901년 10월 21일 유해를 발굴하여 원효로(元曉路)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긴 다음, 11월
2일 명동성당(明洞聖堂) 지하묘지로 안장되었다.

1970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 신부의 회고를 바
탕으로 프랑스 신부가 묻혔던 무덤 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그해 5월 12일 김수환 추기경과 노
기남 대주교(大主敎),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삼성산순교자성지(三聖山殉敎者聖地)
기념비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89년 서울대교구에서는 이곳 임야 16,000평을 사들여 명동
성당 지하에 안치된 3명의 유해 일부를 가져와 무덤을 만들고 축성식을 가졌으며, 1992년에는
무덤 북쪽에 삼성산성당을 세워 이곳을 천주교의 주요 성지로 애지중지 하고 있다.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은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 윤필대사
(尹弼大師)가 삼막사(三幕寺) 자리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하여 유래된 오래된 이름인데, (또는
고려 후기에 무학대사, 나옹선사, 지공대사가 수도했다고 함) 천주교에서는 프랑스 신부 3명이
묻힌 연유로 삼성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우기고 있다. 허나 근거는 없으며 불교와 관련해서
유래된 이름이 맞다.


▲  1970년에 지어진 삼성산순교자성지 기념비와 십자가에 박힌 예수 형상

삼삼한 소나무 숲에 묻힌 삼성산성지는 순교자성지 기념비와 예수상, 프랑스 신부의 무덤, 성
모마리아상, 예수의 고난을 표현한 조그만 석물, 그리고 두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
여럿이 전부이다. 천주교 성지라기보다는 누구나 편히 안길 수 있는 자연공원 같은 아늑한 분
위기로 순교자성지 기념비와 무덤 주위를 돌며 기도를 하는 신도들이 여럿 눈에 띈다.

이곳은 인적도 그리 많지 않아 한적하기 그지 없으며 솔내음이 진하게 나래를 펼치고 있고, 도
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공기가 청정하여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을 정화하기에는 딱 좋다.
호암산(삼성산)에 널린 명소의 하나로 간단히 둘러볼 만하며, 2011년 11월에 전구간이 뚫린 관
악산 둘레길과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이 이곳을 통과한다.

참고로 관악산둘레길은 사당역에서 출발하여 관음사,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약수암, 삼성산
성지, 호압사, 시흥계곡을 거쳐 석수역까지 연결되는 13km의 장대한 산길로 서울시의 야심작인
157km 서울둘레길도 이 구간의 신세를 징하게 진다. (사당역~석수역 같은 구간을 이용함)

※ 삼성산성지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152, 5522(A)번 버스를 타고 삼성산성지 하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5517, 651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1,9호선 노량진역(1,2,8번 출구를 나와서 한강대교 방면으로 가면 정류장 있음)에서
  152, 5517번 버스 이용
*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도보 10분 거리로 관악산둘레길과 서울둘레길이 성지 옆을 지나간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4


▲  겨울에 서서히 잠기고 있는 관악산둘레길 (삼성산성지 남쪽)

▲  삼성산성지에서 호압사로 이어지는 산길 (관악산둘레길)

삼성산성지를 간단히 둘러보고 호암산 서쪽에 자리한 호압사로 길을 옮긴다. 지도로 보면 조금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야트막한 산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바로 호압사의 뒷통수인 호압
사 분기점에 이른다.


▲  호압사 채소밭에서 바라본 호암산(虎巖山)의 위엄
알록달록 익어가는 늦가을 단풍이 산 전체를 활활 태우고 있다.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관악산둘레길이 이곳을 거쳐 호암산폭포, 석수역, 서울대 방면으로 이어지고, 서울둘
레길 또한 그 길에 숟가락을 얹히며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며 채소밭을 끼고 동쪽으로
이어진 산길(관악산둘레길)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북쪽으로 난 평평한 길은 난곡(蘭谷)과
독산동으로 통하며, 서쪽은 호압사와 시흥2동 벽산아파트로 이어지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  서울을 위협하는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지어진 오래된 산사 - 호암산 호압사(虎壓寺)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호압사 경내

삼성산의 일원인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자리한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으
로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 절이 호랑이와 무슨 원수를 졌
길래 호랑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지금이야 그리 신경은 쓰지 않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매우 신봉했다. 고려
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개경(開京)을 버리고 지금의
서울을 도읍으로 삼고자 땅을 살폈는데,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이 나란히 서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잔뜩 기겁을 하게 된다. 이들 산이 서울에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조물주 형님이 그렇게 빚어놓은 것 뿐인데, 생긴 모습이 그러
하니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하여 두 산의 기운을 잡고자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세웠으며, 호암산에 호압
사를 세우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호압사는 1394년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약사전에 조선 초기 석불좌상이 깃들여져 있어 그런대로 시기는 맞아떨어지며, 조
선 조정에서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을 잡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지은 것은 분명
해 보인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와있으며 태
종이 호압
(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
기지 못했다가 1841년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했으며
1935년에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으며, 2008년에 9층석탑
을 세워 지금에 이른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는
이 절이 호암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수호하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절에서 그럴싸하게 빚은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궁궐(경복궁)을 지을 때인 1394년, 전국에 잘나가는 장인
을 싹 소환해 궁궐을 짓고 있는데, 건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무
너지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현상이 계속 터지자 뚜껑이 폭발한 태조는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했다.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殿下),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
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죄다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발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가 없어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
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장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나 괴물
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갈까?'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공은 뉘시오?'
'허허~ 그런 것은 아실 필요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문의하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
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불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를 누른
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 이후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천 고을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
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라고 나와있음.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호압사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등장함>

▲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 쓰인 일주문

▲  호압사 범종각과 원두막 쉼터

서울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도심 속에서 아늑한 산사의 내음과 분위기를 누리는데 아
주 좋은 곳이며 접근성도 괜찮아 언제든 안길 수 있다. (호압사입구에서 도보 10분이면 끝) 절
의 규모는 작지만 쓸데없이 으리으리한 것보다는 정감이 가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
이 없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절의 오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주고 있으며, 2008년 이후 8각9층석탑을 만들고, 원두막 쉼터를 만드는 등, 경내를 조금씩 채워나가면서 올 때마다(1년에 2~3번 정도 방문함) 늘 낯선 것들이 하나씩은 보
인다. 특히 중생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등을 마련하는 등
호압사의 배려가 돋보인다. 범종각 우측 쉼터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으며, 종무소에서 물과 음료
수, 염주 등의 불교용품을 판매한다.

호압사는 내가 서울 장안에서 1년에 여러 번 발걸음을 하는 절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호압사를 안고 있는 호암산 때문이다.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도봉산(道峯山)과 더불
어 나의 마음을 앗아간 뫼이다보니 호압사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늘어난 것이다.

※ 호압사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152번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삼성산성지
  에서 내려서 25분 정도 올라가도 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5517번(서울대↔중앙대), 6515번(양
  천차고지↔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금천구마을버스 01번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호압사입구 정류장에서 도보 10분

* 매주 일요일 12~13시에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상황에 따라 안주는 경우도 있음)
* 매년 12월 31일 밤 10시 이후 제야의 종 타종식 행사를 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
바로 저곳에 호암산의 명물인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있다.

▲  호압사 심검당(尋劍堂)
건물 앞에 서 있는 굵직한 나무가 서울시 보호수 18-5호로 지정된 느티나무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면 서쪽에 2층 규모의 심검당이 있고,
북쪽에는 법당인 약사전, 그 옆구리 높은 곳에 삼성각, 그 아래쪽에 근래에 심은 9층석탑이 조
촐히 경내를 이룬다. 심검당은 호압사의 요사(寮舍) 겸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으로 쓰이는 다
용도 건물로 심검(尋劍)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선원(禪院)에서 많이 쓰는 이름이다.


▲  심검당 옆에 솟아난 5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5호

▲  쉼터 옆에 자리한 5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6호

심검당과 범종각 옆에는 500년 숙성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이들 느티나무 형제는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하는 산증인들로 오랫동안 뜨락에 아낌없이 그늘을 드리운 고마운 존재들이
다. 늦가을의 끝자락이라 그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떠나가려는 늦가을의 발목이라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늦가을의 약기운이 떨어질수록 겨울 제국의 이빨이 커지면서 뜨락에는 벌써부터 맥없이 떨어진
단풍잎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낙엽이란 꼬리표를 달며 산바람과 사람들의 빗자루질, 발질에 이
리저리 흩날려 속절없는 삶을 정리한다.

심검당 옆에 자리하며 천하를 굽어보는 느티나무는 키가 7m, 가슴둘레 4.2m이며, 범종각 옆에서
나란히 천하를 바라보는 느티나무는 키 11m, 가슴둘레 3.6m로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장대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성장했다.


▲  호압사 9층석탑
탑 너머로 절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 호암산 정상이 바라보인다.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9년에 조성되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
을 유난히도 닮았는데, 호압사의 유일한 탑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이곳에는 그 흔한 탑이 하나
도 없었다. 그 허전함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아주 통 크게 9층석탑을 심었다.
탑 안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며, 1층 탑신(塔身)에 담긴 사리를 친견할 수 있도
록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 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 정면에 탑을 세워야 하나 특이하게도 좌
측 구석에 세운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석탑, 늦가을 햇빛에 한층 빛나
보인다.


▲  삼성각(三聖閣)과 9층석탑

약사전보다 조금 높은 곳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삼성
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1995
년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년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내부를 가득 메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은 1978년에 제작된 것이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
웠다는 무학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어 절의 창시자를 기린다.

▲  삼성각 무학대사의 진영(眞影)

▲  치성광여래(칠성)가 그려진 칠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山神幀)

▲  푸른 두광(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獨聖幀)


▲  호압사의 법당인 약사전(藥師殿)

경내 중심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는 약사전은 호압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  호압사 석불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8호

호압사는 석가불 대신 약사불을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래서 법당 불단에
는 약사불을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을 칭했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든든한 밥줄
이자 상징인 석조약사불좌상<예전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석약사불좌상', 지금은 '석불좌상(약사
불)'>이 협시보살을 대동하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불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좌
우에 붙여 약사3존불을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에 천진불(天眞佛)이라 불리는 귀여
운 아기부처 2구를 갖다 붙였다.
인상이 온후하기 그지없는 약사불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
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주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에선 절
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  호압사 석불좌상과 일광, 월광보살좌상

15~16세기 조성된 이 불상은 금동불(金銅佛)로 보이지만 실은 돌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이다.
불두(佛頭)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습으로 약
간의 양감이 표현되어 있다.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그의 두 손에는 고달픈
중생들을 치료하기 위한 약합(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불 좌우에는 새로운 식구인 일광, 월광보살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머리에 쓰고 각각 꽃을
1송이씩 들며 좌우를 지킨다. 중생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어린 동자승 마냥 포근하
기만 하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가 있으며, 불단 위쪽에 걸쳐진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려하여 중생의 눈을 매료시킨다.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훤하게 만든다.


▲  넓직한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왼쪽 하얀 책장이 도서관)

범종각 좌측에는 2칸짜리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이라 불리는 하얀 피부의 책장이 있다. 이들은
호압사에서 절과 호암산을 찾은 동네 사람들과 산꾼, 답사꾼을 위해 2012년에 만든 것으로 누구
든 찾아와 시간과 종교,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독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개방형 책쉼터이다.

절에 아주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에는 절과 신도, 동네 사람들이 기증
한 책들이 담겨져 있는데, 소장 권수는 적으나 기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책장도 조만간 늘어날
것이다. 책장과 쉼터는 종일 개방하며, 누구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쉼터에 앉아 독서의 여유를
누리면 된다. 책을 며칠 빌리고자 하는 경우(대여비는 없음)에는 종무소에 문의하면 되며, 관리
가 느슨하다고 몰래 책을 가져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란다.
쉼터에서는 독서 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도 된다. (음주나
벌러덩 누워서 자는 것은 안됨)

▲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

▲  새롭게 마련된 호압사 샘터

호압사는 산중 사찰이지만 제대로 된 샘터가 몇 년 동안 없었다. 물론 예전에 샘터가 있긴 했지
만 사라진 지 이미 오래,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종무소 옆에 큰 물통을 두어 물을 제공했다. 그
러다가 2011년 이후 풍경소리 도서관 주변에 자리를 마련해 새롭게 샘터를 갖추었다.
긴 파이프에서 쏟아져 나온 물은 호암산이 제공한 물로 동그란 조그만 석조로 떨어진다. 늦가을
오후 햇살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서 갈증에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하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호암산 정상

▲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산길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까지는 해발 160m 정도만 오르면 끝난다. (절 바로 윗봉우리가 정상임)
허나 그 길이 다소 각박하여 만만히 보고 덤벼든 속인(俗人)들의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다행
히 그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아서 호압사분기점에서 10~15분 정도만 고생하면 정상 입구 갈림길
이며,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4~5분 가면 호암산 꼭대기(393m, 또는 385m)에 이른다.

호암산은 호압사입구에서 호압사까지, 호압사에서 정상 입구까지, 산림욕장에서 남쪽능선까지,
벽산5단지에서 불영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좀 야박한 편이지, 그곳만 오른다면 구름 위를 거닐
듯 편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  돌로 이루어진 호암산 정상(393m)

호암산은 돌의 성분이 많은 산이라 정상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2개의 커다
란 바위가 비스듬히 매달려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중 오른쪽 바위가 정상으로 호암산의 머
리에 해당된다.
서울에 이름난 조망지로 마치 서울을 향해 미사일이나 로켓포를 쏘는 듯한 무시무시한 모습이
다. 대자연은 이미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한 미사일과
로켓포, 그것을 취급하는 기계의 모습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니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
산을 경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굳이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날릴 것 같
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위 꼭대기나 그 부근까지 오르면 서울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도심부와 서북부와 동북
부, 강남과 강동 일부, 도심 주변의 여러 산들(북한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 그리고 광
명(光明)과 안양(安養), 멀리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이 두 발 밑에 펼쳐지니 굳
이 풍수지리나 산의 생김새가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도 꽤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만약 적에게
넘어가면 서울 도심을 물론 서울의 왠만한 곳이 적지않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선녀 누님의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오가는 신선
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눈과 발 밑으로 점점히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니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양,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 것 같은 즐거운 기분이 솟아 오른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ㅠㅠ)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금천구와 관악구, 구로구, 영등포구를 비롯한 서울 서남부와 광명, 부천이 바라보인다.
바로 밑에 보이는 곳은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관악구와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도심과 서북부, 동북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정면에 아득하게 보이는 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구와 서울대, 서초구, 강남구, 성동구, 광진구를 비롯하여 서울 동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줄기는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1)
푸른 하늘 밑으로 서울 서남부 지역과 광명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2)
서울 금천구와 시흥2동 벽산아파트단지, 광명, 도덕산, 소래산 등이 보인다.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호암산 정상에서 한우물이 있는 남쪽 봉우리까지는 구름처럼 느긋한 능선길(남쪽 능선)의 연속
이다. 하여 능선을 따라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호암
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많은 바위들이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
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능선부와 정상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렇게 명품급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유연하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다
가 오래된 명소들도 풍부하니 정말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우리는 호암산 남쪽 봉우리까지 가지 않고 호암산산림욕장을 거쳐 시흥동(始興洞) 시내로 내려
왔다. 넓게 퍼진 벽산아파트단지를 지나면 바로 시흥2,5동 시내인데,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며 걷던 중, 솔향기란 식당이 진하게 손짓을 한다. 날씨도 쌀쌀하여 다들 뜨끈한 해물칼
국수를 먹자고 하여 그 집에 들어갔다.


▲  시흥동 솔향기에서 먹은 돌솥비빔밥과 조개 국물의 위엄

솔향기는 해물칼국수와 돌솥비빔밥 등을 취급하는 식당이다. 다들 칼국수를 몇 그릇씩 먹을 기
세로 들어왔지만 정작 시킨 것은 돌솥비빔밥이었다. 갖은 나물과 고추장, 그리고 돌솥에 바짝
익혀진 밥이 잘 버무려져 그런대로 섭취할 만 했고, 밑반찬으로 깔린 김치도 잘익어 맛이 좋았
다. 특히 하얀 조개 국물이 일품이라 비록 비빔밥의 부속물로 나왔지만 오히려 주물로 봐도 손
색이 없을 정도였다.
비빔밥으로는 성이 차지 않을 듯 싶어 손만두 2인분을 주문했다. 그러니 조그만 만두 10개(1인
분)가 각 테이블에 수줍은 듯 차려져 나온다. 만두를 집어먹으니 뱃속은 말끔히 채워졌고, 그
렇게 저녁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근데 이 집은 특이하게도 소주나 맥주 등의 곡차(穀茶)
를 팔지 않는 이 땅에 흔치 않은 무알콜 식당이었다. 산행도 했으니 곡차 1잔 걸쳐야 마땅하지
만 술이 없으니 조금은 아쉬운 저녁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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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늦가을 나들이 ~~~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조문국 경덕왕릉...)

 

 

' 경북 의성 늦가을 나들이 '

▲  늦가을이 살짝 거쳐간 문소루 가는 길


 

가을이 한참 천하를 곱게 수놓던 10월 끝 무렵에 경북 한복판에 자리한 의성(義城) 고
을을 찾았다.

마침 같은 날, 아는 이들이 주왕산(周王山)으로 여행을 가는지라 그 길목인 안동까지 태
워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내 부탁을 흔쾌히 받아주었고, 아침 7시에 삼송역(3호선)에
서 함께 남쪽으로 출발했다.
지옥 같은 서울 근교의 교통 체증을 간신히 뚫고 영동고속도로에 진입, 여주휴게소에 잠
시 바퀴를 멈추고 교통 정체로 인해 놀란 몸과 차량을 달래며 김밥과 우동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웠다. 이후로는 신나게 가속도를 붙이면서 11시가 좀 넘어 안동의 주요 관문인
안동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소 아쉽지만 그들과 작별을 고하면서 나는 남쪽(의성)
, 그들은 동쪽(주왕산)으로 제 갈 길로 흩어졌다. 각자의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안동터미널에 홀로 남겨진 나는 남쪽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려 의성터미널
에 두 발을 내렸다. 의성은
1996년 이후 2번째 인연인데,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
듯 싶다. 이곳에서는 이미 정처(定處)를 정해둔 상태이므로 그곳에 그냥 가기만 하면 된
다. 다만 그날의 종점인 부산(釜山)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해 조금은 서둘러야 된다.

의성터미널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산이 하나 보인다. 그 산을 구봉산이라 하는데 바로 그
곳에 첫 답사지인 문소루가 있다.


 

♠  의성읍의 소중한 명소, 문소루(聞韶樓)와 구봉산(九峰山)

▲  낙엽이 깔린 문소루 가는 길

의성읍내 서쪽에는 이 땅의 흔한 이름의 하천인 남대천(南大川)이 흐르고 있다. 남대천 서쪽에
는 남북으로 길쭉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이 산줄기가 의성읍의 든든한 진산(鎭山)
이자 쉼터이며 산림욕장으로 쓰이는 구봉산(211.4m)이다.

구봉산은 말 그대로 9개 봉우리의 산으로 원래는 구성산(九成山)이었으나 왜정(倭政) 때 구봉산
으로 바뀌었다. 산 정상에는 봉의정(鳳儀亭)이란 정자가 천하를 굽어보고 있고 구봉산 제3봉 아
래쪽에는 조선 중기 때 효자(孝子)인 오천송(吳千松)을 기리고자 숙종(肅宗) 시절에 지어진 소
원정(溯源亭)이 있다. 또한 산 북쪽에는 영남의 이름난 누각이었던 문소루가 자리해 있어 산의
경관을 돋구며, 근래에는 유아숲체험원이 부근(원당리)에 조성되어 꽤 알찬 체험시설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30여 점의 차별화된 체험시설을 갖추고 있음)

읍내에서 남대천을 건너면 구봉산과 문소루로 올라가는 길이 나타난다. 거의 읍내 사람들만 산
책과 운동 삼아 찾는 숨겨진 지역 명소라 주말 한낮임에도 인적이 없다. 고요함만이 가득한 그
길에 요란하게 발자국 소리를 내며 정적을 잠시 깨뜨려 본다.
구봉산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아름다움을 처절히 선보이며 한편으로는 우수에 잠겨 있다. 좀
있으면 자비가 없다는 겨울 제국(帝國)의 압정(壓政)이 펼쳐질테니 어느 누가 좋아들 하겠는가?
나무들은 아직 단풍과 울긋불긋 타오른 잎을 붙들고 있으나, 절반 이상은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
쓸쓸한 이름, 낙엽이 되었다. 길바닥에는 낙엽들이 가득 깔려 붉은 카페트를 이루며 나를 맞이
한다. 나 역시 늦가을의 단상 앞에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  길바닥을 메운 낙엽들
바람이 스르륵 빗자루질을 할 때마다 낙엽들은 힘없이 이리저리 날려간다.

▲  은행잎이 가득 입혀진 문소루 가는 길 (문소루 직전)

낙엽을 사각사각 밟으며 한굽이를 오르니 이번에는 은행나무 길이 나타난다. 길바닥에는 은행나
무가 겨울의 도래를 원망하며 훌훌 털어버린 은행잎이 두툼하게 깔려있다. 워낙 두텁게 쌓인 탓
에 콘크리트 길바닥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라 마치 노란 카페트를 깔거나 노란 물감을 입힌
것처럼 보인다. 가벼운 낙엽과 달리 바람의 빗자루질에도 거의 동요하질 않으며, 길이 푹신푹신
해서 그냥 벌러덩 드러눕고 싶은 마음도 조금씩 솟아난다.


▲  은행잎이 노란 카페트를 이룬 문소루 가는 길
아무리 레드(red) 카펫이 부와 명예의 상징이라 해도
자연이 베푼 자연산 노란 카펫만 할까..?

▲  단풍나무 밑에 서서 읍내를 바라보고 있는 문소루 중건 기념비(紀念碑)

▲  의성읍내를 굽어보는 문소루(聞韶樓)

아름다운 문소루에 비 피해 오르니 해가 저문다
풀빛의 푸르름은 역로(驛路)에 닿았고
화사한 복숭아 꽃은 인가(人家)를 덮는다.
봄의 시름은 술처럼 진하고
살아가는 재미는 점점 깁처럼 얇아간다.
애끓는 강남의 길손 변방의 당나귀는 또 서울로 간다.

* 고려 후기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문소루에 올라 지은 시
 

구봉산의 제9봉에는 의성의 명물인 문소루가 의성 고을을 굽어보며 자리해 있다. 문소루는 원래
의성고을 관아에 딸린 누각으로 관아 서북쪽에 있었으며, 문소(聞韶)란 이름은 신라 후기 때 의
성 고을의 이름이다. (고려 초에 의성으로 이름이 갈림)
고려 중기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며, 고려 고종(高宗) 때까지 있
다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의성현령(縣令) 이원제(李元濟)가 중건했고
1657년(효종 8년)에 불에 탔다가 1694년 의성현감 황응일(黃應一)이 다시 지었다.

이곳은 관리들의 향연 장소로 이용되었던 공간으로 왕년에는 영남4대루의 하나로 명성을 떨치기
도 했다. 여기서 4대 누각이란 진주(晋州)의 촉석루(矗石樓),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 안
동(安東)의 영호루
(), 그리고 이곳 문소루로 영남 지역에서 꽤나 이름이 있는 누각들이다.
그 누각 가운데 문소루가 제일 나이가 많다고 한다.
허나 그런 명성이 있음에도 가장 굴곡진 인생을 가진 비운의 누각으로 6.25전쟁 때 폭격으로 그
만 파괴되고 말았는데, 그때 정몽주와 상촌 김자수(桑村 子粹, 1351~1413), 김지대(金之岱,
1190~1266) 등 여러 문인들의 시가 담긴 현판(懸板)과 이지원(李止遠, ?~1866)의 문소루 중건기
문(重建記文)도 모조리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의성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뒤늦게나
마 1981년 1월 중건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3년 9월 옛 모습을 가급적 되살리며 복원되었
다. 허나 원래 자리에는 이미 건물이 가득 들어차버려 읍내가 훤히 바라보이는 구봉산 제9봉에
새 둥지를 틀었다.

문소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이곳에 올라서면 의성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
인다. 풍류를 안다면 술 1병 들고와 눈 아래 펼쳐진 조그만 천하를 바라보며 시 짓기 놀이를 하
거나 달놀이를 즐기며 명상에 잠기고 싶은 그런 곳이다.
비록 옛 건물이 아닌 근래에 자리를 옮겨 복원했다는 한계점이 있고, 오랜 명성이 바닥으로 추
락된지 오래지만 의성의 명물이자 군민들의 성원으로 다시 태어난 의미 깊은 곳으로 의성 제일
의 명소로 자라날 싹수가 충분한 곳이다. 혹시 아는가? 나중에 영호루와 촉석루를 능가하는 유
명 인사가 될지도 말이다. 그때에 대비해 미리 얼굴을 비추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시원스런 팔작지붕의 문소루

▲  글씨의 패기가 느껴지는 문소루 현판


▲  문소루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시(詩) 현판들

▲  '소소구성봉황래의(簫韶九成鳳凰來儀)' 현판
서경(書經) 익직편(益稷篇)에 나오는 구절로 '순임금이 음악을 9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는 내용이다.

▲  속세와 문소루 내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 -
신발을 벗고 들어오기 바란다.

▲  문소루에서 바라본 천하 (1) - 의성읍내

▲  문소루에서 바라본 천하 (2) - 의성읍내 원당리와 후죽리

▲  구봉산 능선길

문소루에서 1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바로 읍내로 나갈까 했으나 늦가을에 잠긴
구봉산 산길이 너무 고와서 잠깐의 시간을 던져 구봉산 능선을 더듬기로 했다.

구봉산은 남대천 서쪽에 병풍처럼 자리한 산으로 서쪽은 완만하고 읍내와 남대천이 보이는 동쪽
은 경사가 60도 이상으로 급하여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잘못 발을 놀렸다가는 바로 남대천으
로 곤두박질 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능선 산길이 완전 읍내를 굽어보는 산성(山城)이
나 요새를 걷는 기분이다.
구봉산 북쪽 문소루에서 구봉산 정상까지는 대략 2km이다. 그 부근에 소원정과 봉의정, 소원석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으나 거기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넉넉치 못해 중간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  늦가을의 막바지 스케치 현장 ~ 구봉산 능선길
능선길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한다. 마치 인간의 인생처럼...

▲  구봉산 능선 오르막길 - 인생이 늘 저렇게 상승곡선이면 얼마나 좋을꼬~~

▲  만추(晩秋)가 깃들여진 구봉산 능선
내리막길 - 인생의 내리막길이 저렇게
화려하고 곱다면 자주 해볼 만할텐데.

▲  능선길에서 만난 당산나무
여기서 저 계단을 오르면 정상으로 이어지고
왼쪽 내려가는 길로 가면 남대천이다.


▲  남대천으로 내려가는 좁은 산길
왼쪽은 남대천과 맞닿은 낭떠러지이므로 주의 깊게 움직이기 바란다.

▲  낭떠러지 산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남대천에 이른다.
물길을 막은 저 보(洑) 밑의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구봉공원이다.

▲  남대천 징검다리
여기서는 실수로 물에 빠져도 생명에 지장은 없다. 수심이 매우 얕기 때문이다.

▲  구봉공원에서 바라본 징검다리와 구봉산 산줄기
남대천과 만나는 구봉산 동쪽은 거의 낭떠러지라 오를 수 있는 길이 거의 없다.
저런 곳에 산성(山城)이나 방어시설을 만든다면 정말 요새가 따로 없겠지.

▲  의성읍내로 가다가 만난 늦가을의 서정 -
은행나무의 빛깔이 너무 매혹적이다.

※ 문소루, 구봉산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의성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의성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동서울터미널에서 1일 6회 떠난다.
* 서울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1일 2회 떠난다.
*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의성행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 떠난다.
* 인천, 대전(복합), 구미, 영천, 부산(동부)에서 의성행 직행버스 이용
* 동대구역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1일 1회, 부전역과 해운대역, 태화강역, 경주역, 영천역에서 1
  일 3회 운행
* 의성역과 의성터미널에서 왼쪽(북쪽)으로 가면 북원4거리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로 꺾어서
  중앙선 굴다리를 지나면 왼쪽 산 정상에 문소루가 보이며, 의성교를 건너 100m 정도 가면 문
  소루와 구봉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② 승용차 이용시 (문소루까지 차량 접근 가능, 주차는 문소루 주변에)
* 중앙고속도로 → 의성나들목을 나와서 의성 방면으로 우회전 → 원당3거리에서 우회전 → 의
  성군새마을회관과 현대자동차 의성지점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문소루로 오르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 문소루

* 문소루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원당리87


 

♠  옛 조문국(召文國)의 영화로움을 숨죽여 간직한
의성 금성산고분군(金城山古墳群) - 경북 지방기념물 128호

문소루와 구봉산을 둘러보고 의성터미널에서 탑리(塔里)로 가는 군내버스를 탔다. 탑리 직전에
자리한 고개를 넘으면 오른쪽(서쪽)으로 큰 무덤들이 즐비한 벌판이 펼쳐지니 그곳이 금성산고
분군이다. (탑리 방면 28번 국도변에 있음)

금성산고분군은 탑리 북쪽인 대리리(大里里)와 초전리에 옹기종기 모인 고분들로 약 200여 기의
옛 무덤이 산재해 있다. 이들은 의성 금성면(탑리) 지역에 있었던 조문국(召文國)의 것으로 그
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다. 이들 무덤 사이로 신라 무덤도 다수 섞여 있다.
조문국은 한자 발음에 따라 '소문국'이라고도 하는데, 진한(辰韓)의 일원으로 탑리를 중심으로
둥지를 틀었던 손바닥만한 나라이다. 영역은 의성 남부(길게 잡으면 의성 북/중부까지)와 군위
일부에 불과했으며, 진한연맹이 하나둘 신라에게 먹히는 와중에도 용케 버텨오다가 185년<신라
벌휴왕(伐休王) 2년>에 결국 복속되고 만다.
그 이후 신라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 다스리거나 항복한 조문국 왕족이나 귀족에게 이곳을 통치
하게 했을 것이고 이 땅을 발판으로 삼아 상주의 사벌국(沙伐國)과 인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야금야금 점령했다.

조문국에 대한 정보는 이것 외에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의 거의 유일한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금성산고분군은 1960년부터 최근까지 국립중앙박물관과 경희대, 경북대 박물관에서 발굴조
사를 벌였다. 그 결과 앞트기식무덤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변형된 돌무
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토기의 일종으로 의성
지역에서 주로 나오는 '의성양식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금동관(金銅冠)과 금동관 장식
품, 금동제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철제 무기류, 마구류(馬具類) 등이 있다. 이들 유물은 대구에
있는 국립대구박물관과 경북대박물관, 2012년에 문을 연 의성조문국박물관에 분산되어 있다.


▲  드넓게 펼쳐진 금성산고분군의 위엄 ▼

금성산고분군이 지금처럼 깔끔히 정비된 것은 근래에 일이다. 겨우 경덕왕릉이라 불리는 1호분
만 봉분(封墳)을 갖추고 있었을 뿐, 나머지는 그냥 경작지로 쓰였다. 그러다가 고분을 발굴하
고 그 무덤을 복원하는 한편, 주변을 말끔히 밀고 정비하면서 일종의 고분공원으로 거듭난 것
이다.

고분의 모습은 흙으로 만든 봉토분(封土墳)으로 다른 고분과 별로 다를 것은 없다. 조문국의 수
수께끼를 한 움큼 간직한 큼지막한 고분들이 듬성듬성 또 다른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
에 조그만 민묘(民墓)들이 수줍은 듯 들어앉았다. 고분은 당연히 옛 조문국이나 신라 귀족들의
무덤이고, 민묘는 20세기 이후 조성된 인근 백성들의 무덤이니 서로의 신분과 시공(時空)을 초
월하며 한 공간에 어색하게 자리한 것이다.
물론 민묘는 고분군 보호와 정비를 위해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연고가 없는 경우
함부로 이장(移葬)하기도 어렵다. 또한 어차피 같은 무덤이고 모습도 비슷하니 조문국의 무덤과
신라의 무덤, 그리고 현대의 무덤을 비교할 겸, 그냥 두어 고분군의 일원으로 삼는 것도 괜찮다
여겨진다.

손으로 더듬고 싶은 두툼하고 요염하게 솟아난 고분들 사이로 산책로가 나 있는데, 이들 고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천천히 둘러보면 대략 1시간 정도 걸린다. 또한 이곳의 상징은 경덕왕릉
이라 불리는 1호분으로 이곳 무덤 가운데 유일하게 석물을 갖췄으며, 국도 변에는 문익점 면작
기념비도 있으니 같이 둘러보면 된다.


▲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쏘는 조문국 무인상(武人像)
조문국의 무인이 정말 저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발굴된 무기와 마구류를
토대로 가야나 고구려의 무인을 모방하여 재현한 듯 싶다.

▲  금성산고분군 한쪽에 들어앉은 조그만 민묘들
비록 무덤의 크기와 시대는 틀리지만 저들도 어엿한 금성산고분군의 일원이다.
조문국부터 신라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초월한 다양한 시대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생생한 현장이니 말이다.

▲  국도변에 누운 43호 고분

▲  40호 고분

▲  35호 고분

◀  국도변에 굵직하게 솟은 조문국사적지
(召文國史蹟地) 표석의 위엄
표석에 쓰여진 글씨체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33,34,36,37호 고분

▲  민묘와 옛 고분의 공존

▲  20호 고분

▲  25호 고분

▲  5호 고분

▲  19호 고분


▲  금성산고분군의 서쪽 부분

▲  고분 북쪽에 남아있는 민가
나무 외에는 민가와 고분의 마땅한 경계선이 없어 거의 금성산고분군의 일부처럼 보인다.
저 집도 고분군의 범위가 확대되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전될 수도 있다.

▲  나란히 솟아난 고분 3형제

▲  금성산고분군의 상징, 조문국 경덕왕릉(景德王陵)

금성산고분군은 그냥 몇호분이란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곳 1호분은 특별히 경덕왕릉이란 이름
을 달고 있다. 게다가 석물까지 갖추고 있으니 특별한 존재임은 분명하다. 열심히 발품을 팔게
만드는 너른 금성산고분군의 서남쪽 가장자리에 자리한 무덤으로 이곳의 주인이라고 전하는 경
덕왕(景德王)은 조문국 군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 숙종 때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쓴 그의 문집(文集)을 통해 옛날부터 막연히 경덕왕릉이
란 이름으로 살아오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나 경덕왕의 존재와 경덕왕릉의 진위여부는 여전
히 수수께끼이다.

왕릉의 둘레는 74m, 높이 8m로 능 앞에는 근래에 만든 1.6m 높이의 비석과 상석(床石), 멀뚱한
표정의 문인석(文人石) 1쌍, 장명등(長明燈) 1쌍이 세워져 있다.


▲  조촐한 모습의 조문국 경덕왕릉

허목의 문집에는 경덕왕릉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실려있다.
옛날 이곳에 살던 농부가 외밭을 마련하고자 야트막한 언덕을 갈았다. 밭을 일구던 농부는 우연
히 큼직한 구멍을 발견했는데,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이었다.
그는 이상하게 여겨 일손을 멈추고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그 안에는 돌로 만든 석실(石
室)이 있고, 그 둘레에는 금칠(金漆)이 되어 있었으며, 석실 안에는 금칠을 한 소상(塑像)이 있
으니 그 머리에는 금관이 씌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금관을 본 농부는 '이게 웬떡이냐~!!' 욕심이 솟아나 그 금관을 벗기려고 했다. 허나 그의 손이
금관에 닿자 자석처럼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의성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옛 조문국의 경덕왕이다. 나의 능이 황폐해져서 농부의 외밭이 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속
히 능을 복원토록 하라'
그리고는 능의 위치를 알려주고 사라졌다.

날이 밝자 현령은 사람들을 이끌고 노인이 일러준 곳으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밭이 되기 직전인
고분이 있었다. 이에 현령은 왕릉을 조성했다고 하며, 지금 있는 고분이 바로 그때 조성한 경덕
왕릉이란 것이다. 그런데 석실 안에 들어가 금관에 손을 댄 농부는 어찌되었는지는 나와있지 않
으니 그게 궁금할 따름이다. 아마도 며칠을 빌고 빌어서 간신히 손을 떼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그 농부가 봤다는 금관과 금칠이 과연 존재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이곳은 오극겸(吳克謙)이란 농부의 외밭이었다고 한다. 그는 외밭에
원두막을 짓고 밭을 지켰는데, 어느 날 꿈에 조복(朝服)을 입고 금관을 쓴 백발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문국의 경덕왕이다. 너가 지은 원두막이 나의 능 위에 있으니 속히 철거하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고는 농부의 등에 1줄의 글을 쓰고는 사라졌다. 농부는 깜짝놀라 잠에서 깨어나보니
등짝에 노인이 쓴 글이 그대로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농부는 너무 신기하여 당장 의성 관아로 달라가 현령에게 꿈의 내용을 말한 뒤, 고을 유지들과
봉분을 만들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들 전설을 통해 오랜 세월 지하에 묻혀있다가 조선시대에 경작이나 농경지 개척을 통해 발견
되어 고을 현감과 지역 사람들이 능을 복원하고 제향까지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제향은 1470년
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1945년 이후 지역 사람들이 살짝 지내오다가 '경덕왕릉보존회'가 결
성되어 매년 음력 3월에 군수와 군민들이 춘계향사(春季享祀)를 지낸다.

▲  조문국 경덕왕릉 능비

▲  두 손으로 홀(忽)을 들고 선 긴 수염의
문인석과 장명등


▲  경덕왕릉의 동쪽 피부면
무덤 동쪽 피부에 얕게 패인 부분이 있는데 저것이 혹 농부가 발견했다는
그 구멍이 아닐까 싶다.

▲  3호분

경덕왕릉 부근에 자리한 3호분은 높이가 3m, 밑지름이 14.3m~10.7m 내외이다. 여기서 돌무지덧
널무덤, 덧널무덤, 유사돌무지덧널무덤 등 3기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금귀
걸이와 은허리띠, 삼엽문대도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신라 유물로 덧널무덤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류가 나왔다.


▲  6호분

6호분은 북쪽 높이 2.5m, 남쪽 높이가 4m이다. 이 고분 안에서는 적석목관(積石木棺)의 제1묘
곽과 장방형의 토광인 제2묘곽이 들어있다.
제1묘곽에서는 금제세환귀걸이, 은제과대장식, 은제교구 등의 장신구와 T자형 장병무기와 철모,
철촉, 소화두대도 등이 나왔고, 장경호와 고배(高杯), 고배뚜껑 등의 토기류와 11cm나 되는 대
퇴골편이 나왔다. 그리고 제2묘곽에서는 홍색과 갈색의 유리구슬과 장경호(長頸壺), 유개호(有
蓋壺), 고배 등의 토기류가 다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  문익점 면작기념비(綿作紀念碑)
기념비 뒤로 보이는 동그란 지붕이 금성산고분군 방문자센터이다.


28번 국도변 소나무 사이에 문익점 면작기념비가 서 있다. 이곳에 왔다면 금성산고분군과 경덕
왕릉과 더불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봐야 될 존재로 비록 110여 년 밖에 묵지 않았지만 문익
점이 목화 재배에 성공했던 의미 깊은 곳으로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석이다.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 1329~1398)은 고려 후기에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우리 의
류사(衣類史)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국사책은 물론 역사 수험서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유명 인
사이다. 허나 우리나라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목화솜이 있었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는 아마
도 기존보다 더 품질이 좋은 목화로 여겨지며, 그 목화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널리 퍼트렸다.
하여 그 점을 너무 부각시키다보니 '목화씨=문익점'이란 공식이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원나라(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역모에 연루되어 3년 만에 귀국했다. 돌아오는 길에 귀양
살이를 했던 금주(錦州)에서 목화씨 5개를 붓대 속에 숨겨와 고향인 산청(山淸)에서 장인인 정
천익(鄭天益)과 함께 목화 재배에 성공했다. 그곳이 바로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면작시배
지(綿作始培地, ☞ 관련글 보러가기)이다.
이후 그는 안찰사(按察使)가 되어 경상도를 돌다가 의성 금성면 일대가 목화씨를 가져온 원나라
금주와 토질이 비슷함을 발견하고 금성면 제오리(堤梧里)에 목화씨를 심어 성공했다. 마침 의성
현감이 그의 손자인 문승로(文承魯)라 그를 시켜 목화를 파종했다고 한다. (또는 조선 태종 때
문익점의 손자 문승로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파종했다고 함)

이후 문익점의 목화면작을 기념하기 위해 1909년 지역 주민들이 목화밭인 원전(元田)에 기념비
를 세웠다. 그 비석이 바로 윗 사진의 면작기념비이다. 1935년 왜인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
며, 유서 깊은 원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경지 정리로 흔적조차 더듬기 어렵게 되었다.
1991년 김우현 경북도지사의 지시로 면작기념비 주변을 정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금성산고분군을 둘러보고 탑리의 지명 유래가 된 탑리5층석탑을 간만에 보려고 했다. 하지만 시
간도 여의치 않고 영천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몰라서 일단 탑리터미널로 갔다.
터미널로 가니 마침 영천행 직행버스가 올 시간이다. 여기서 외지로 나가는 시외버스가 너무 부
실하고 그걸 1대 놓치면 꼼짝없이 몇 시간 이상을 죽치고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하여 바로 표를 끊고 5분 뒤에 머리를 들이민 영천(永川)행 직행버스를 타
고 의성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의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  문익점 면작기념비(왼쪽이 1909년에 만들어진 것, 오른쪽은 1991년 것)

※ 의성 금성산고분군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탑리까지
* 서울 청량리역에서 8시 25분에 출발하는 부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양평, 원주, 제천, 단
  양, 영주, 안동경유)
* 부산 부전역에서 7시20분에 출발하는 청량리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해운대, 태화강, 경주,
  영천 경유)
* 동대구역에서 16시 30분에 출발하는 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하양, 북영천 경유)
*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탑리, 의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부산 동부터미널(노포동)에서는 1일
  2회 떠난다.
* 영천과 안동에서 탑리행 직행버스 이용 (1일 2회 운행)
② 현지교통
* 의성터미널(의성역) 밖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탑리 방면 군내버스(30~70분 간격)를 타고 금성
  산고분군에서 하차
* 탑리터미널 부근 대리3리 군내버스 정류장과 탑리역 정류장에서 의성 방면 군내버스(20~70분
  간격)를 타고 금성산고분군 하차. (탑리터미널에서 도보 35분, 탑리역에서 도보 25분)
③ 승용차편 (주차장 있음)
* 중앙고속도로 → 군위나들목을 나와서 군위읍 방면 5번 국도 → 동부4거리에서 우회전 → 청
  로교에서 좌회전 → 탑리 우회도로 → 금성산고분군
* 입장료와 주차비는 공짜
* 금성산고분군 서쪽 초전리에 금성산고분군과 조문국의 모든 것을 담은 조문국박물관이 있다.
  도보로 20분(차로 3~4분) 거리로 가까우니 같이 둘러보길 권한다.(☞ 박물관 홈페이지 보기)
*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351외 (고분전시관 ☎ 054-83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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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12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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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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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길목에서 찾아간 무주 적상산 나들이 ~~~ (적상호, 적상산성, 안국사...)

 


' 무주 적상산 겨울 나들이 '


▲  적상산 산정에 자리한 적상호

▲  안국사 극락전

▲  적상산사고

 


 

늦가을이 무심히 저물고 겨울이 한참 이빨을 드러내던 11월 마지막 주말에 전북 무주(茂
朱) 땅을 찾았다. 이번에는 멀리 남쪽에서 오는 일행들과 함께 하기로 했는데 서로 본거
지가 극과 극이다보니 무주터미널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도봉동 집을 나서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대전
행 고속버스를 몸을 실었다. 거의 2시간을 달려 대전(大田)에 도착, 새롭게 몸단장을 벌
인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를 타고 다시 50분을 내달려 무주의 관문인 무주
터미널에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10분 정도 대기했다가 남쪽에서 온 본대에 합류했다.

이번 무주 기행의 첫 답사지는 적상산이다. 무주시외터미널에서 동남쪽으로 6분 정도 달
리면
적상산 입구인데, 여기서 적상산으로 인도하는 서쪽 길로 들어서면 북창리(北倉里)
가 나온다. 그 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서서히 흥분을 드러내고 강원도나 함경도 고갯길에
버금가는 꼬불꼬불 고갯길로 변신하여 정신을 쏙 빼놓는다.

적상산은 단풍이 매우 곱다고 하는데, 가을이 떠나간 시점이라 단풍 구경은 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건 겨울 제국(帝國)에 설설 기고 있는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 뿐, 푸른 기운
을 가진 존재는 소나무와 전나무 밖에는 없었다.


 

♠  적상산(赤裳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적상산의 지도를 크게 바꿔놓은 산정호수, 적상호(赤裳湖)

구절양장(九折羊腸) 같은 적상산 고갯길을 어느 정도 오르면 적상터널이 나온다. 적상산의 콧
대를 피하고자 산 밑에 판 땅굴로 그 터널을 나와 세 굽이를 지나면 푸른 호수인 적상호가 나
오고 길은 비로소 진정을 되찾는다.

적상산 850m 고지에 마치 백두산(白頭山)의 천지(天池)처럼 들어앉은 적상호는 무주양수발전소
상부댐을 만들면서 조성된 인공 호수이다. 여기서 양수발전소(揚水發電所)란 심야에 남는 전기
로 밑(하부댐)에 있는 물을 위쪽 저수지로 올리고, 필요한 시기에 그 물을 떨어트려 전기를 빚
는 수력발전의 일종이다.
이 발전소는 1988년 4월에 착공해 1995년 5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시설용량은 60만kw이며, 적
상호를 담고 있는 상부댐은 높이 60.7m, 길이 287m, 저수량은 372만㎥이다.

수력발전은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멀쩡한 땅을 수장시켜야 되는 단점이 있다. 계곡을 막아 둑을
쌓고 호수를 만들면서 안국사와 적상산사고터는 제자리를 강제로 내줘야했고, 많은 숲이 억지
로 희생당해야 했다. 또한 호수와 발전소 관리를 위해 적상산의 피부를 깎아 구불구불 도로를
내면서 적상산 정상 밑까지 건방지게 차량들이 올라가게 되었다. 그 덕분에 오로지 두 발로 힘
겹게 올라야 했던 적상산 접근이 보다 쉬워졌고, 적상호는 이곳의 또 다른 볼거리로 부각되었
으며, 양수발전을 통해 무주 지역의 전기를 책임지는 중요한 곳이 되었다.

우리의 버스는 적상호를 지나 안국사 방면 서쪽 길을 조금 오르다가 900m 고지 주차장에서 육
중한 바퀴를 접었다. 절까지 버스 접근은 가능하나 차를 돌릴 공간이 없어서 멈춘 것이다. 허
나 그곳까지는 거리도 매우 가깝고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경사 또한 그리 각박하지 않아 어려운 것은 없다.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안국사 일주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  적상호에서 안국사로 올라가는 숲길

▲  안국사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절의 정문으로 앞에는 '적상산 안국사'라 쓰인 현판이, 뒤에는 '국중제일정토도량(國
中第一淨土道場)'이라 쓰인 현판이 자리해 이곳의 이름과 성격을 말해준다. 절 이름이 쓰인 현
판은 1992년에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이 썼으며, 국중제일정토도량 현판은 1995년 여산 권
갑석(如山 權甲石)이 쓴 것으로 다들 필체에 힘이 넘쳐난다.
절을 옮기면서 새로 만든 현판과 달리 문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는 고색의 기운이 약간 느껴져
문이 좀 오래된 존재임을 살짝 속삭여준다.


▲  일주문의 뒷모습

     ◀  일주문 '국중제일정토도량' 현판
이 현판은 무학대사가 안국사를 두고 '국중(國
中) 제일의 길지(吉地)'라 찬양한 설화를 참조
하여 쓴 것으로 안국(安國)과 정토(淨土)를 꿈
꾸는 안국사의 바램이 담겨져 있다.


▲  적상산성(赤裳山城) - 사적 146호

일주문 바로 옆에는 키 작은 돌담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져있다. 그를 알리는 안내문이 없었
다면 단순히 돌담으로 여겨 넘어가기 쉬울 정도인데, 그는 국가 지정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
는 적상산의 두툼한 갑옷, 적상산성이다.

적상산성은 적상산 고지대의 분지(盆地)를 둘러싸고 있는 절벽과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전체 길이는 8,143m, 성곽 높이는 거의 1~2m이다. 경사가 각박한 적상산의 정상 주변은
절벽에 둘러싸인 곳이라 그 절벽을 활용하다보니 성곽의 높이는 대부분 낮다. 물론 장대

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인해 무너진 것도 한몫 한다. 현재는 안국사 주변과 서문터 등
일부만 남아있으며, 문은 동/서/남/북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북문과 서문, 남문터만 남았다. 성
내부 면적은 약 214,976㎡에 이른다.

이 산성은 예전에는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축성된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설명을 했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하여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
輿地勝覽)','여지승람(輿地勝覽)'을 살펴보니 고려 초기인 거란의 2차 침공(1010년) 이전부터
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바로 거란(요)의 2차 침공 시절, 거란의 군주인 성종(成宗)은 몸소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힘겹게 점령했다. 고려 군주인 현종(顯宗)은 급히 나
주(羅州)로 몽진을 갔는데, 거란군의 남하를 우려한 인근 백성들이 이곳으로 피신을 온 것이다.
그러니 빠르면 신라 후기, 늦어도 고려 초에 성이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는 최영(崔瑩)장군이 이곳을 지나면서 산성을 보수하여 창고를 세
울 것을 건의했으며, 조선 세종 때는 최윤덕(崔潤德)도 이곳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허나 그들
의 건의는 허공의 메아리로 끝났고, 이후 다시금 주목을 받은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光海君)은 우리의 친척 민족인 여진족의 후금(後金)이 나날이 강성
해지자 압록강과 가까운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에 있던 실록과 선원록(璿源錄)의 안위가 걱정
이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던 중, 순안어사(巡按御史) 최현(崔晛)과 무주현감 이
유경(李有慶)이 바로 적상산을 추천했다.
하여 사관(史官)을 보내 적상산을 살피게 했는데, 적상산이 꽤 괜찮다는 사관의 긍정적인 보고
로 1614년 실록전을 짓고, 1618년 선조실록을 넣으면서 사고(史庫)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
상에서는 이 사고를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라 부른다.

사고를 수비하고자 헝클어진 적상산성을 손질해 4개의 문을 두었고, 성 안에 호국사(護國寺)를
세워 안국사와 함께 지키도록 했다. 사고 외에도 군기고(軍器庫), 사각(史閣), 대별관(大別館)
등의 시설을 두었다. 허나 1910년 이후 적상산사고는 폐지되었고 산성까지 버려지게 되면서 그
이후는 지금의 모습이 잘 말해준다.

산성을 1바퀴 둘러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겠지만 시간 관계상 안국사 주변의 성곽만 둘러봤다.

▲  적상산성의 이모저모

우리가 찾은 적상산(1034m)은 무주군 적상면에 위치한다. 산의 이름인 적상(赤裳)은 붉은 치마
를 뜻하는데, 산의 모습은 장쾌한 남성적인 모습이지만 이름은 의외로 여성적이다. 이는 산을
이루고 있는 붉은 피부의 바위가 마치 붉은 치마를 입은 것처럼 보여 유래되었다고 하며, 봄의
진달래, 가을의 단풍이 붉은 치마를 두룬 것처럼 보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적상산 정상부는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주봉(主峯)은 기봉으로 2번째 봉우리인 향
로봉(1025m)과 마주보고 있고, 정상 일대가 토산(土山)이라 숲이 매우 삼삼하다. 산정은 평탄
하지만 산허리까지는 거의 절벽이며, 물이 매우 풍부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요
새로 이용되었다.

산중에는 안국사와 호국사비, 적상산사고터, 적상산성 등의 문화유적을 비롯해 장도바위와 장
군바위, 처마바위, 천일폭포, 송대폭포, 안렴대(按廉臺) 등의 자연 명소가 있으며, 이중 장도
바위는 최영 장군이 적상산을 오르던 중, 바위가 건방지게 길을 막자 장도(長刀)로 내리쳐 길
을 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있다.
그리고 안렴대는 고려 초에 거란이 침공했을 때 3도 안렴사(按廉使)가 피난을 왔다고 해서 그
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하며, 정묘호란 때 안국사 승려 상훈이 혼자서 사고에 있던 조선
왕조실록을 이곳 석굴로 옮겨 잠시 보관하기도 했다.

대자연이 빚은 천연의 요새이자 걸작품인 적상산은 인간의 오만으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 앞
에 강제로 성형수술을 당하는 시련을 겪는다. 바로 1988년 정상부에 무주양수발전소가 들어선
것이다. 그 발전소로 인하여 호수와 댐이 생기면서 산정의 모습은 크게 변하였고, 호수 주변에
도로를 내고 댐 동북쪽에 적상산휴게소와 전망대까지 마구 닦여지면서 적지 않은 혹을 달게 되
었다.


 

♠  적상산의 오랜 터줏대감, 적상산 사고를 지켰던 수호사찰
~ 적상산 안국사(安國寺)

▲  청하루(淸霞樓) 현판 - 송석 이도익(松石 李都翼)이 1859년에 쓴 것이다.

적상산 정상 남쪽 950m 고지에 자리한 안국사는 금산사(金山寺)의 말사(末寺)로 적상산의 유일
한 고찰(古刹)이다. 적성지(赤城誌)와 적상산안국사기(赤裳山安國寺記)에 따르면 1277년 월인(
月印)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산성과 함께 중건했는데, 이때 성 안에
는 고경사(高境寺)와 상원사(上元寺), 중원사(中元寺) 등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 후기 창건설 외에도 조선 태조 때 적상산성을 쌓으면서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어느 것
이 정답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게다가 창건 이후 16세기까지 마땅한 내력도
남기지 못해 창건 시기에 대해 다소 의구심을 품게 한다.

안국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임진왜란 시절에 승병(僧兵)
이 주둔했다고 하며, 1614년 적상산사고를 설치하면서 안국사 승려 덕웅(德雄)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적상산성을 중수하고 사고를 수비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지자 마침 사고를 지킬 승병이 하나도 없어 안국사 승려 상훈
(尙訓)이 혼자서 사고의 서적을 바리바리 싸들고 안렴대에 있는 석굴로 옮겨 보관하기도 했다.
1643년 적상산을 둘러본 이조판서 이직(李稙)은 산성의 수비가 허술하고 승병이 모두 흩어지고
없으며, 창고에 군량도 없는 등, 수비의 어려운 실정을 보고하고 승군 모집을 위해 사찰 건립
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1643년 왕명으로 호국사(護國寺)를 지어 안국사를 보조하도록 했다. 이때 전라감사 윤명
은(尹鳴殷)이 자신의 녹봉을 털어 공사비로 댔고, 승려 각명(覺明)이 일을 맡았으며 무주현감
심헌(沈憲)이 감독을 했다. 호국사란 이름은 삼장법사(三藏法師)의 경축기도(經祝祈禱)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고를 이웃한 인연으로 조정(朝廷)에서는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수호한다는 의미로 '
안국사'와 '호국사'란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 절도 그 기대에
부응코자 열심히 사고를 지켰고, 그로 인해 적상산사고는 조선 사고 중 유일하게 전쟁과 화재
를 만나지 않은 사고가 되었다.

1728년에는 괘불을 제작하였고, 1758년에는 감로탱을, 1772년에는 극락전 후불탱을 조성했으며, 1788년에 범종을 봉안해 제법 절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1864년 적상산사고를 방문한 이면광(李
冕光)의 건의로 안국사를 중수했는데 그 기념으로 안국사중수기(重修記) 현판을 남겼다. 그 현
판에
'나라에서 선사 양각(璿史兩閣)을 지어 왕조실록과 왕실의 계보를 비장(秘藏)하고 승병들로 하
여금 수호하게 하였으므로 족히 믿고 근심할 것이 없다. 이 절의 이름을 안국(安國)이라고 붙
인 것과 이 절에 소속된 작은 절을 호국(護國)이라 한 것은 대개 뜻이 있는 것이다. 안국사라
고 이름한 것은 비록 작은 절이기는 하지만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큰일을 하는 절이기
때문이다'
란 구절이 있어 조선 조정의 안국사에 대한 높은 신뢰도와 절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1872년에는 사고의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改修)했고, 1902년 사고와 안국사를 크게 중수했다.
이때 안국사는 무주에서 가장 큰 절로 성장했으며, 1910년에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
전과 산신각을 두고 그 앞에 청하루와 승방(僧房)을 세웠다.
1910년 이후 적상산사고가 왜정에 의해 폐쇄되면서 당시 안국사 주지인 친일파 승려 이철허(李
澈虛)가 선원각을 경내로 가져와서 절 건물로 부려먹었다. 1949년 여순(麗順)반란 사건 때 공
비패거리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호국사가 전소되어 비석만 남게 되었으며, 1968년 주지 유정환(
柳正煥)이 선원각을 천불전으로 손질하고 퇴락된 청하루를 철거했다.

1988년이 되자 안국사는 강제로 정든 터전을 버려야 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바로 무주양수발
전소 상부댐 건설로 안국사와 적상산사고터가 수몰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땅한 자
리를 물색하다가 적상산 정상 남쪽에 자리한 호국사터로 결정하고 1991년부터 이전 공사에 들
어가 1993년에 마무리를 지었다.
1994년 범종각을 새로 지었고, 1996년에는 3도(전북, 경북, 경남) 접경지에 위치한 이유를 들
어 대화합의 범종을 조성했다. 그리고 1998년에는 주지 원행이 동양 여러 나라에서 수집한 불
상과 불교 유물을 전시하고자 성보박물관을 만들어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또한 복
지 사업에도 손을 뻗쳐 노인복지시설인 '무우수마을'을 세웠고, 무주와 영동 지역 병원과 자매
결연을 맺어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비록 개발의 칼질에 제자리를 잃기는 했지만 구름이 창문으로 들어와 방문으로 나갈 정도로 하
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좋다. 마치 천상(天上) 세계에서 속세를 굽어보는 기분이랄까? 또
한 속세(俗世)와도 길게 거리를 두고 있어 아무리 끈질긴 번뇌(煩惱)라 한들 쫓아오다 졸도할
정도의 첩첩하고 고적한 산골이다. 차량으로 오면 접근은 다소 편하지만 길이 험해 운전에 각
별한 주의가 필요하며, 대중교통으로 갈 경우에는 내창마을에서 2시간 3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영산회괘불도를 비롯하여 극락전과 호국사비, 목조아미타3
존불상, 범종 등 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그외에 조선 후기 승탑 4기와 선원각을 개
조한 천불전, 1730년에 만든 괘불대(掛佛臺) 등이 있어 고색의 향기는 풍부하며, 법당인 극락
전을 비롯해 삼성각, 지장전, 청하루, 천불전, 성보박물관, 안국선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경내를 조촐히 메우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넓은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을 하면 호국사란 이름의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은 안국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옛 가람을 기억하고자 세운 것으로 호국사는 정확히 주
차장 일대에 있었다.
여기서 왼쪽 숲을 살펴보면 조그만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 집은 호국사의 유일한 흔
적인 호국사비(전북 지방유형문화재 85호)를 머금은 비각이다. 경내를 다 둘러보고 나올 때 보
려고 아껴두었으나 그것이 그만 화근이 되어 깜박 지나치고 말았지. 어느 곳이든 그곳에 서린
볼거리는 다 봐야 직성이 풀리는데, 이렇게 중요한 것을 놓쳤으니 다음에 또 와야 되는 구실을
만들고 말았다. 이렇게 벽지인 곳은 다시는 오지 않아도 서운치 않을 정도로 싹 돌아봐야 되는
데 또 올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 물론 인연이 또 닿으면 알아서 찾아오겠지만 말이다.

주차장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청하루가 자리해 있다. 정
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누각 건물로 수몰된 옛터에 있던 누각을 1992년에 옮긴 것이다.
1층에는 사무실과 불교용품점이 있으며, 정면에 걸린 현판은 송석 이도익이 쓴 명필이다.
그리고 지나치기는 쉽지만 청하루 안에 옛 안국사의 현판이 여럿 있다. 1627년 상훈이 사고의
서적을 옮긴 일화를 4자로 요약한 '석실비장(石室秘藏)'과 '청하루(淸霞樓)','극락전(極樂殿)
','산신각(山神閣)' 등이 있으며, 석실비장은 1902년 절을 중수했을 때 유인철이 상훈의 이야
기를 듣고 쓴 것이다.


▲  안국사 성보박물관

청하루를 들어서면 하늘 높이 자리한 안국사 경내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왼쪽을 보면 성보박
물관이 있는데, 보통 성보박물관하면 그 절의 오래된 문화유산이나 부근 절에서 맡긴 문화유산
을 전시하기 마련이나 이곳은 그와는 관련이 없는 다른 나라의 불교 유물이 주류를 이룬다.

이곳에 담긴 유물은 주지인 원행이 15년 간 여러 불교국가를 여행하면서 수집하거나 기증 받은
것들로 이들을 한데 모아 1998년에 조촐하게 성보박물관을 열었다. 중원대륙과 왜열도, 인도,
티벳, 월남, 라오스, 파키스탄 등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다양한 시대의 불상, 불화, 불
교 유물, 다기류 등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어 조그만 세계불교박물관을 이룬다.


▲  성보박물관 중앙에 자리한 철불 - 중원대륙에서 가져온 불상인 듯 하다.
불상은 수입산이지만 그가 앉은 금동대좌는 국산이다.

▲  동양 불교국가에서 가져온 온갖 불상과 불화들 ▼



▲  안국사 범종각(梵鍾閣)

성보박물관 맞은편에 자리한 범종각은 1994년에 원행이 지은 것으로 조선 후기 동종을 비롯하
여 1996년에 만든 대화합의 범종과 운판(雲版)까지 담겨져 있다. 대화합의 범종은 덕유산을 둘
러싼 3도 중생들의 대화합을 바라는 뜻에서 만든 것으로 범종각 현판은 일중(一中)거사가 썼다.

▲  대화합의 범종

▲  안국사 범종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88호

우람한 대화합의 범종과 달리 그 곁에 있는 범종은 매우 조그만하여 눈길이 잠깐 가다가 만다.
보통 사찰의 종은 크기에 상관없이 허공에 달려 있지만 이건 허공은 커녕 땅바닥에 나무 막대
기를 깔고 앉아있어 안그래도 작은 종, 더 작아 보일 수 밖에 없다. 허나 작은 고추가 맵다고
겉모습은 저래도 이래뵈도 안국사의 오랜 보물의 하나이다. 오히려 대화합의 범종보다 더 눈길
을 줘야 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 범종은 1788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85cm, 구경 78cm의 작은 종이다. 4개의 유곽과 보살상
이 배치되어 있고, 종을 매달던 용뉴는 아예 사라져 바닥에 나무 막대기를 깔아 그를 받치고
있다. 그의 몸통에는 '乾隆五十三年(건륭53년) 戊申三月日(무신 3월일) 赤裳山安國寺大鍾(적상
산 안국사 대종)'과 '改鑄重(개주중)'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의 탄생 시기를 알려준다.


▲  피부가 바랜 오래된 솥

극락전 뜨락에는 그 옛날 안국사 공양간에서 모락모락 밥과 국의 연기를 피어내던 솥이 놓여져
있다. 겉으로 보면 일광욕을 하며 팔자 좋게 보이지만 현대화된 공양간에 밀려 이제는 바깥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역시 범종처럼 나무 막대기에 의지해 자리해 있는데,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피부가 완전 붉게 변했다.
절을 품은 산도 붉은 피부의 바위, 혹은 진달래와 단풍으로 산이 온통 붉다고 하여 적상산인데
솥 역시 완전히 붉게 변했으니 그 역시 적상산의 기운을 받은 모양이다. 안국사의 오랜 유물인
만큼 낡은 피부를 깨끗히 닦아주고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남은 여생 편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외국산 불상보다는 오랜 세월 안국사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나고 이곳의
음식을 책임진 저 솥이 더 가치가 높지 않을까?


 

♠  안국사 극락전 주변

▲  안국사 극락전(極樂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42호  
(앞 계단 오른쪽에 남근석이 있음)

청하루를 지나면 바로 정면에 계단을 늘어뜨리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극락전과 시선이 마주
친다. 극락전 뜨락에는 빛바랜 솥과 아주 기가 막히게 생긴 남근석이 서 있어 잠시 얼굴을 붉
히게 하는데, 보통 절로 가는 길목이나 외곽에 남근석을 둔 경우는 봤어도 법당 앞에 둔 것은
처음 본다. 절의 승려나 신도의 상당수를 이루었을 여자 신도들이 법당에 들어가면서 무슨 생
각을 했을까~~?? 절에서 아예 파계를 장려하는 듯한 인상이다.
허나 저 돌이 원래부터 안국사에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절을 이곳으로 옮길 때 주변
에서 수습한 것이 아닐까 여겨지는데, 왜 하필이면 법당 앞에 두었는지 그저 어리둥절하다. 성
기신앙의 일원이긴 해도 경내 핵심에 두기에는 좀 거시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중으로 구축된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
물이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199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잘 다듬어진 자연석 축대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썼으며, 정면에는 꽃빗살문을 칸마
다 두었다. 정면과 좌측은 4분합이나 우측은 2분합으로 협칸의 구조가 특이하며 공포를 촘촘히
박은 다포(多包) 양식으로 외부는 3출목(出目)으로 되어있으나 내부는 4출목이다. 그리고 우측
측면을 보면 단청이 채색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난 설화가 전한다.


▲  건물 우측에 단청을 하다만 부분이 있다. (사진 중앙 부분)

극락전을 지은 안국사 주지는 단청 불사를 어찌해야 될지 고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얀 도포를 입은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그리겠다고 하였다. 이에 기뻐한 주지승이 쾌히 승낙
하자 노인은
'내가 100일 동안 단청을 칠할테니 극락전에 하얀 천막을 치고 물 1그릇만 넣어주시오. 그리고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
신신당부를 했다.

범상치 않은 노인의 말에 '명심할테니 걱정 마시오!!' 답을 하고는 궁금증을 억지로 죽여가며
불사가 잘 마무리되기를 기도했다. 허나 겨우 하루를 앞둔 99일째가 되자 주지는 궁금해서 도
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딱 하루만 참으면 정말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인데 더 참다가는 제명에
못죽어 사리만 잔뜩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 살짝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지.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천막 안에 노인은 온데간데 없고, 하얀 학이 입에 붓을 물고 단청을 하
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크게 놀란 주지의 인기척에 학은 붓을 내던지고 사라졌다. 그
래서 윗사진처럼 건물 우측의 평방과 창방 일부가 단청이 되지 않은 것이며, 그 남아있는 부분
이 딱 하루치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전설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와 부안 내소사(來蘇寺)에도 전하고 있다. 모두
일정 기간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며 단청이나 그림을 그리다가 딱 하루를 앞두고
훔쳐보는 바람에 그림을 그리던 새가 도망가 일부가 채색되지 않았다는 스토리로 말이다. 이런
전설은 일을 맡은 사람의 개인 문제나 절 내부 문제로 도중에 중단된 것을 그럴싸하게 설화로
빚은 것으로 여겨진다.
무위사 같은 경우는 관음조(觀音鳥)가 그렸다고 하는데, 안국사 주지는 학을 좋아했는지 학으
로 대체했으며 예전에는 극락전에 학 그림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채색되지 않은 달랑 하루
거리의 분량을 그냥 두고 있는 것은 그 설화의 증거물로 내세우는 동시에 학으로 상징되는 노
인이 그림을 그려준 절이라며 속세에 요란하게 홍보하려는 일종의 꼼수로 봐야 될 것이다.
어차피 전체도 아닌 일부에 불과하니 그냥 둬도 무리는 없겠지. 그래서 1% 부족한 모습으로 있
게 된 것이다. 안좋은 이유로 단청이 중단된 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은 안국사 주지의 지혜가 참
으로 돋보인다.


▲  극락전 불단을 장식한 목조아미타3존불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01호

화려하기 그지없는 극락전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세지보살(勢至
菩薩)이 아미타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나무로 만들어 개금을 한 것으로 불상은 매우 조
그만하지만 나름 미소를 띄우느라 애를 쓴다. 이들 3존불의 중심인 아미타여래는 통견의(通肩
衣)를 입고 있고, 소매자락이 발가락을 덮고 있는데, 높이 67cm, 무릎폭 43.5cm, 어깨폭 30cm
내외이다.

좌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은 옷주름이 본존불과 비슷하며, 머리에 쓴 보관(寶冠) 밑에 검은 머리
칼을 살짝 표현했는데, 귓바퀴를 1번 감아내려 어깨 위로 흘러내리게 했다. 그의 높이는 63cm,
무릎폭 35.5cm, 어깨폭 26cm 내외이다.
우측에 자리한 세지보살은 관음보살과 손모양이 대칭적이고 불의형(佛衣形) 법의를 입고 있는
데, 대체로 관음보살과 비슷한 모습이다. 높이는 61cm, 무릎폭 36.5cm, 어깨폭 24cm 정도이다.

이들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약간 구부정한 자세와 굵고
짧아진 목, 납작해진 턱과 각진 얼굴, 오똑한 코와 미소,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주름, 사실적
표현의 손 등으로 볼 때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들 뒤로 화사한 색채
의 후불탱이 병풍처럼 든든히 자리해 있는데 원래는 1772년에 제작된 탱화가 있었으나 관리소
홀로 그만 도난을 당해 1994년에 혜원(慧園)이 그린 아미타후불탱으로 땜빵한 것이다. 법당의
후불탱화면 꽤나 보는 눈이 많아 만지기도 어려울텐데 그것을 극복하고 탱화를 떼어가다니 참
대단한 도둑이 아닐 수 없다. 혹 신이 실수로 가져간 것은 아닐까?

  ◀  극락전 뒷쪽, 괘불이 담긴 길쭉한 상자
극락전 내부에는 1965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
幀)과 1995년에 만든 청동금고(靑銅金鼓)가
다. 그리고 불단 뒷쪽으로 가면 길쭉한 나무

자가 눈에 들어올 것인데, 과연 무엇이 들었

래 상자가 저래도 긴 것일까?

그 안에는 바로 18세기에 제작된 영산회괘불도
(靈山會掛佛圖)가 잠들어 있다. 괘불은 석가탄
신일이나 영산재(靈山齋) 등 아주 특별한 날에
만 만날 수 있는 귀한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이
불가능하다.
천하에 200곳이 넘는 오래된 절집을 찾아다닌
본인도 괘불을 본 횟수는 겨우 10번도 되지를
않는다. 그만큼 만나기가 힘든 존재로 1년에
고작 한손에 꼽을 정도로 외출을 하며 대부분
의 시간은 괘불함이나 금고 등에 꼼짝없이 갇
혀있어야 된다. 그것이 괘불의 운명이다.

안국사 영산회괘불도는 보물 1267호로 석가가 설법을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 주위로 다보
여래(多寶如來)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등이 자리해 있다. 괘
불의 길이는 10.75m, 폭은 7.2m의 큰 그림으로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발원하고자 만들
었으며, 18세기 중반에 경남 고성 운흥사(雲興寺)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비구 의겸(義謙)을 비
롯해 5명의 승려가 제작했다.
제작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화기(畵記)에 '?? 6년'이란 기록이 있는데, 의겸이 활동하던 시
절에 '?? 6년'이라 하면 1728년(옹정 6년)과 1741년(건륭 6년) 밖에는 없으며, 요즘은 1728년
을 제작 시기로 삼고 있다. 1792년과 1809년 그림을 수리했으며, 운흥사 괘불과 부안 개암사(
開巖寺) 영산회괘불탱과 대체로 비슷하다.

이 괘불은 가뭄 때 밖으로 꺼내 기우제를 올리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가뭄이 심
하면 추가적으로 외출을 시켜주었으나 요즘은 석가탄신일과 특정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외출을
안시켜 준다.
비록 괘불은 못봤지만 괘불이 담긴 괘불함은 극락전에 보관하고 있어 그 함에 기도를 하는 사
람도 많으며, 높이 10m가 넘는 그 큰 그림이 과연 저 안에 다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함이 작아
보인다. (괘불함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안국사 천불전(千佛殿)

극락전 우측에는 천불전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다른 불전과 달리 조금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원래 적상산사고의 선원각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적상산사고가 버려진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선원각을 친일파 주지 이철허가 경내로 가져와서
사찰 건물로 부려먹었으며 나중에 천불전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사고 가운데 유일하게 화마(火
魔)의 희롱을 받지 않은 건물로 바로 앞에서 보면 1층으로 보이지만 엄연한 2층 구조이며, 밑
은 창고, 위는 천불전으로 쓰이고 있다. 정면 가운데 칸에 강암 송성용이 쓴 천불전 현판이 걸
려있고 좌우 측면에는 내부에 채광을 공급하는 교창이 있다.

내부에는 1995년에 조성된 석가불과 문수/보현보살을 비롯해 석고로 만든 하얀 피부의 조그만
불상 1,000기가 자리해 장관을 이룬다. 유일하게 남은 사고 건물이지만 변형이 심해 지정문화
재의 지위까지는 얻지 못했다.


◀  안국사 지장전(地藏殿)

극락전 옆에 자리한 지장전은 1992년에 원행이
세운 것으로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도명존자(道
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안국사 삼성각(三聖閣)

천불전 뒤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2년에 원행이 옮겨 세웠으며, 우리 귀에 매우 익은 산신(山神)과 칠
성(七星),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보금자리로 그중 칠성을 담은 칠성탱은 1899년 김천 봉
곡사(鳳谷寺)의 부속암자인 극락암(極樂庵)에서 우송 상수(友松 爽洙)가 조성한 것이다. 그가
그린 칠성탱은 무주읍내 북쪽에 있는 북고사(北固寺)에도 있다.


▲  삼성각에 봉안된 칠성탱  (1899년에 우송 상수가 그린 것임)

▲  안국사 부도군(浮屠群)

안국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호국사비와 천불전 내부를 살피지 못한 아쉬움과 다음 답사지에 대
한 기대를 나란히 품으며 절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한다. 그 2개를 못봤으니 다음에 또 와야되
는 빌미를 만든 것이다.

다음 답사지는 적상산사고인데, 사고로 정신없이 내려가다가 중간에 오른쪽으로 빠지는 산길을
만났다. 일행 몇몇이 그 산길로 들어가길래 '그곳에 뭐가 있나' 싶어 따라 들어가니 그 숲속에
는 안국사의 숨겨진 보물인 승탑(僧塔, 부도) 4기가 푸른 이끼 옷을 걸치며 우리를 맞이한다.

이들 승탑은 석종형(石鐘形) 탑으로 탑신(塔身)에 고맙게도 조성 시기와 탑의 주인이 적혀있다.
모두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이중 가장 오래된 것은 팔각원당형의 지붕 옥개석을 지닌 청운당
사리탑과 그 옆에 머리 부분이 여의두문(如意頭紋)의 보륜(寶輪)으로 이루어진 청운당 봉골탑(
奉骨塔)으로 1717년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 꼭대기에 연화보주를 단 승탑은 보운당(寶雲堂)의 넋이 서린 사정탑(思正塔)으
로 1753년에 조성되었으며, 그 옆의 것은 월인당(月印堂)의 영골탑(靈骨塔)으로 1750년에 세워
졌다.

승탑들이 모두 높이 1.3m 미만의 조그만 탑으로 불교의 쇠퇴기이다 보니 신라나 고려처럼 장엄
한 부도는 기대하기 힘들다. 그나마 승탑 주인의 제자들이 정성을 다해 저 정도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딱히 이정표가 없어 지나치기 쉬우며, 이들도 원래 수몰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  호젓한 분위기의 안국사 숲길 (안국사에서 속세 방향)


 

♠  조선 왕실의 보물 창고, 조선 후기 주요 사고(史庫)의 하나였던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 전북 지방기념물 88호

적상호 서쪽 언덕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2층 기와집 2동이 적상호를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근
래에 복원된 적상산사고로 원래는 적상호에 있었다. 양수발전소 건립으로 이들 보금자리가 강
제로 묻히게 되자 사고터 주춧돌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와 선원각과 실록각을 복원했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 광해군 시절, 우리의 옛 땅인 만주에 또아리를 튼 후금(後金)이 나날이 강
성해지면서 북방에 자리한 묘향산사고에 담긴 왕실 서적과 보물의 안위가 크게 위협을 받자 다
른 장소로 실록을 옮겨야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마침 순안어사 최현과 무주현감 이유경이 적
상산을 강하게 추천하자 사관을 보내 현지를 살펴보게 했는데, 아주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 그
래서 즉시 적상산성을 수리하고 1614년 실록전을 세우면서 적상산사고가 탄생했다. 1618년 9월
묘향산에 있던 실록을 이곳으로 옮기기 시작하여 1633년 마무리를 지었다.

1641년에는 선원각을 세워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면서 완전한 사고가 된다. 1636년 병자호란
으로 강화도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의 실록이 손실되자. 이를 보완하고자 적상산 사고에 담긴
실록을 참조하여 작업을 했다. 이때 3도 유생 300명이 동원되었다.
적상산사고를 수호하고자 1643년 왕명으로 호국사를 세워 안국사와 함께 사고 수비에 전념토록
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안국사 승려 상훈이 사고의 서적을 안렴대로 대피시키기도 했다.

1872년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며, 1902년에 다시 개수를 벌였으나 1910년 왜정이 적상산
사고에 담긴 모든 서적을 서울로 가져가면서 사고는 방치되고 만다. 선원각은 안국사 주지 이
철허가 경내로 가져가 불당으로 부리면서 살아남았으나 나머지 건물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만큼 완전하게 방치된 것이다.

사고에는 선원각, 실록전을 기본으로 하여 승장청(僧將廳), 군기고, 화약고, 수사당, 문루 등
이 있었으며, 그 흔적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1992년 무주양수발전소 건립으로 그 자리마저 빼앗
기게 된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흔적을 옮겼고, 1997년에 선원각, 1998년에 실록각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적상산사고는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은 '
적상산사고지 유구(遺構)'이다.

선원각과 실록각은 2층식 창고 형태로 지어졌다. 1층은 허공에 떠 있는 형태로 기둥이 2층을
받치고 있으며, 2층이 바로 서고이다. 이는 혹시나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의 방문이나 습기
의 침투, 이 땅을 망치고 있는 쥐들의 공격을 막고 서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함이다. 이
런 식의 창고는 고구려(高句麗)의 창고 건물인 부경에서 비롯되었는데, 우리나라는 물론 왜열
도까지 전파된 국제적인 건축 양식이다.

건물 2층에는 조선왕조실록과 사고, 무주 고을에 관한 설명문과 디오라마, 모형도, 유물 등이
담겨져 있는데, 관람을 원할 경우 적상산사고를 관리하는 문화재해설사한테 요청하면 된다. 건
물은 모두 새것이라 고색의 기운이 피어나기에는 아직도 멀었지만 이곳에서 푸른 물결의 적상
호가 바라보여 호수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에 마음이 시원해진다.

▲  선원각(璿源閣)

▲  실록각(實錄閣)

▲  실록각 1층 마루

▲  적상산사고 정문

적상산사고를 간단하게 둘러보고 버스에 올라타 적상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무주머루와인동굴
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글의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한다.

※ 적상산 (적상산성, 안국사, 적상산사고)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무주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광주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6~7회, 전주에서는 1일 14회 떠난다.
* 영동역(경부선)에서 무주행 군내버스가 1일 12회 운행한다.
② 현지교통
* 무주터미널에서 내창행 군내버스 이용 (1일 2회, 11:40, 16:30분)  내창에서 적상산사고까지
  도보 2시간 10분 (무주터미널에서 안국사까지 택시로 접근 가능)
* 무주터미널에서 적상, 안성, 장계, 안천 방면 군내버스(20~50분 간격)를 타고 사천리(서창탐
  방지원센터 입구)에서 하차. 적상산 안국사까지 등산 약 2시간 20분 소요 (사천리→서창탐방
  지원센터→장도바위→서문터→향로봉→안국사
  <등산 출입 시간(서창탐방지원센터 기준) 4~10월은 4~15시, 11~3월은 5~14시, 그 외에 시간
  은 출입 불가>
③ 승용차 (안국사까지 접근 가능)
* 대전~통영고속도로 → 무주나들목을 나와서 무주방면 우회전 → 무주1교차로에서 우회전 →
  적상산입구에서 우회전 → 북창리 → 적상호 → 적상산 안국사

* 적상산 주차비 : 승용차 2,000~5,000원, 버스 6,000~7,500원 (안국사 주차장은 무료)
* 안국사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산184-1
(☎ 063-322-6162)
* 적상산성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괴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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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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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6년 12월 1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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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굳게 잠겨있던 아름다운 고갯길, 북한산 우이령 늦가을 나들이 (우이령길)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아름다운 고갯길 ~~~
우이령 늦가을 나들이 '

▲ 우이령에서 바라본 오봉

▲ 석굴암입구 유격광장

▲ 우이령길 우이동 구간


 

가을 누님이 눈이 시리도록 곱게 천하를 물들이던 10월의 끝 무렵에 친한 여인네들과 북
한산(삼각산)의 숨겨진 뒷통수, 우이령(우이령길)을 찾았다.

우이령은 개방 이후 애타게 인연을 짓고 싶었지만 딱히 인연이 없어 애태우다가 10월 중순
에 아는 여인네의 제안으로 콩볶듯 계획을 잡게 되었다. 이곳은 미리 탐방예약을 해야되는
데, 평일은 그나마 널널하나 주말에는 자리 구하기가 어렵다. 탐방 인원을 매일 1,000명으
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가 송추 출발로 4명 자리를 확보하여 그냥 흔쾌히 가기만
하면 된다. 하여 친분이 있는 2명을 더 소환하여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비경의 우
이령 탐험을 떠났다.

우이령은 야속하게도 입장시간(오후 2시까지)과 퇴장시간(오후 4시까지)이 정해져 있어 우
이령길 완주에 석굴암 답사까지 널널하게 겯드리려면 가급적 오전에 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아침 9시부터 입장)
잠시 일상을 접고 떠나는 나들이인데 그것마저 콩볶듯이 가면 좀 그렇겠지. 하여 오전 9시
에 연신내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김밥과 간단한 먹거리를 사들고 북한산(삼각산) 등산객 인
파 속으로 들어가 송추로 가는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한참 단풍철이다 보니 북한산으로 가는 34, 704번 시내버스
가 타지도 못할 정도로 가축 수송 상태로 오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버스를 기다리는 등
산객도 족히 100명은 넘어 육중한 바퀴가 뭉개질 정도로 가득찬 버스에 서로 타고자 경쟁
이 치열하다. 허나 구제받는 사람은 불과 서너 명, 나머지는 강제로 다음 버스를 기다리지
만 오는 버스 모두 무심하게도 가축 수송을 면치 못하고 있다. 마음은 이미 우이령을 헤매
고 있지만 몸은 아직도 서울 연신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연신내에서 40분을 소비하다가 이러면 정말 못갈듯 싶어서 조금이라도 더 전진하고
자 삼천사입구로 가는 701번 시내버스(진관차고지↔종로2가)를 탔다. 그것을 타고 입곡3거
리에서 34, 704번으로 갈아탈 생각이었지. 그렇게 701번에 의지해 입곡3거리(삼천리골입구)
에서 내렸는데, 여기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산으로 가는 행락객들의 차량들로 도로
가 거의 혼돈의 상태라 걷는 거나 차를 타고 가는 거나 속도가 비슷할 정도이다.

입곡3거리에서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버스를 기다렸으나, 역시나 자리가 빠지지 않아 여전
히 승차 불가, 그래서 백화사입구와 흥국사입구(노고산)까지 걸어가 기회를 엿보았나 역시
승차 불가, 하여 등산객이 많이 빠지는 북한산성입구까지 걸어갔다. 아직까지도 서울을 벗
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서울 땅을 나가기가 어려웠던 말인가?

북한산성입구 정류장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버스를 기다리니 버벅거리는 차량들 행
렬을 쿨하게 뚫고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서울역)이 구세주처럼 나타난다. 이곳이 북
한산 서부의 대표 기점지라 산꾼들이 많이 빠지기 때문에 그제서야 들어갈 공간이 생긴다.
이제 살았구나 싶어 기쁜 마음에 승차했으나 자리는 없다. 여전히 가득찬 상태. 다행히 도
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의 행렬도 여기서 끝을 맺는다. 죄다 여기서 북한산성으로 우회전하
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겹게 송추로 가는 버스를 잡아 타고 고양시(高陽市)로 넘어가 효자비와 안골, 사
기동에서 많은 산꾼을 쏟아내니 그제서야 자리가 생긴다.

솔고개를 넘어 양주시(楊州市) 땅으로 진입, 우이령/오봉산석굴암입구 정류장에 발을 내린
다. 연신내에서 이곳까지는 겨우 12km 정도인데 그 짧은 거리를 오는데 무려 2시간이나 걸
린 것이다. 그렇게 모진 과정을 겪고 이곳에 이르니 마치 목적지에 다 온 듯, 안도의 한숨
이 나온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정말 기쁨이 가득했지. 허나 내려보니 현실은 시궁창.. 뜻
하지 않은 나들이 강제 전쟁으로 혼과 기운은 2/3 이상 빠졌고 시간도 벌써 11시가 넘었다.
우이령 탐방은 이제서야 시작이거늘, 겨우 그 입구에 온 것에 불과하다.

벌써부터 지친 몸과 마음, 그리고 심심한 뱃속을 달래고자 정류장 부근 편의점에서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원래는 산책 중간에 먹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먹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아름다운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속세에서 가져온 김밥과 온갖 과자, 그리고 편의점에서 구입한 컵라면 등으로 열심히 몸을
달래니 다시금 사기가 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밥도 두둑히 먹었으니 슬슬 움직여볼까~! 근
데 어느 세월에 저 까마득하게 보이는 우이령을 넘어가나 은근히 막막해진다. 거기에 식곤
증까지 거침없이 희롱을 하니 사기가 다시 떨어지려고 한다. 그래도 우이령을 목적으로 왔
으니 가야지. 힘차게 발걸음을 떼며 우이령의 품으로 들어선다.


 

♠ 우이령의 품으로 (교현리~석굴암 입구 구간)

▲ 교현(송추) 탐방지원센터

우이령(오봉산 석굴암) 입구에서 10분 정도 들어가면 속세와 우이령의 경계를 짓는 교현탐방지
원센터가 나온다. 길 주변에는 군부대 시설이 즐비해 부푼 마음을 품고 찾아온 탐방객에게 적
지 않은 긴장감을 준다.

교현탐방지원센터는 우이령의 북쪽 검문소로 여기서 소정의 출입 절차를 밟아야 되는데, 예약
자의 신분증과 예약확인증을 보여주면 된다. 동행자의 신분증은 상황에 따라 검사를 안하는 경
우도 있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늘 있으니 반드시 지참해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예
약을 했어도 예약자의 신분증과 예약확인증이 없으면 최순실이나 대통령급이 아닌 이상은 아무
리 날고 기어도 들여보내지 않는다. 우이령이 비록 개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북악산(北
岳山, 백악산) 한양도성 능선처럼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렇게 출입 절차를 마치고 꿈에도 그린 고갯길, 우이령으로 들어선다. 그럼 여기서 잠시 우이
령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 북한산과 도봉산의 숨겨진 뒷통수이자 비단처럼 아름다운 고갯길, 우이령(牛耳嶺)
우이령은 순 우리말로 소귀고개라고 한다. 높이 600~800m를 다투는 북한산(삼각산) 영역과 도
봉산(道峯山) 영역 사이에 약간 움푹 들어간 고개로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橋峴里)와 서울 우
이동(牛耳洞)을 잇고 있다. 고갯길 정상을 기준으로 서남쪽은 북한산, 동북쪽은 도봉산 영역이
며 그들의 뒷통수에 자리한다.

예로부터 송추(교현리) 지역과 서울 동북부(강북구)를 빠르게 이어주는 고갯길로 그리 주목을
받는 길은 아니었다.
6.25가 터지자 파주와 양주 사람들이 대거 이 고개로 넘어왔으며, 서울을 수복한 이후에는 병
력 이동과 물자 수송을 위해 미군 공병대가 넓게 길을 닦아 탱크와 4발 차량의 통행이 가능하
게 되었다. 1951년 1.4후퇴 때도 많은 피난민들이 이곳을 통해 넘어왔고, 1953년 휴전까지 많
은 군인과 군수물자가 이 고개의 신세를 지면서 반짝 전성기를 누린다.

휴전 이후 지역 사람들이 이용하다가 1968년 북한의 김신조 공비 패거리가 서울 도심을 습격한
이른바 1.21사태가 터지자 1969년 국가 안보와 서울 방어를 이유로 지금의 교현탐방지원센터에
서 우이탐방지원센터에 이르는 4.46km 구간의 통행이 전면 금지된다. 이때 우이령 뿐만 아니라
인왕산(仁王山)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 삼천사계곡, 북한산성 내부까지 통제 구역으로 묶이
는 비운을 겪는다.
그렇게 금지된 고개가 되버린 우이령은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기고 군인과 경찰의 훈련지로 이용
되면서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석굴암입구 구간은 물론 석굴암 밑까지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우이령 개방에 대해서는 1990년대부터 조금씩 이야기가 나왔다. 1994년 4월 17일에는 시민환경
대회를 위해 딱 하루 개방되기도 했으며, 이후 개방 여론이 급물살을 타면서 드디어 2009년 7
월, 제한적이나마 빗장이 열린 것이다. 개방에 앞서 군부대 시설로 망가진 부분은 자연친화적
으로 정비했고 오봉산을 관망하는 전망대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시설과 안내문을 설치했다.

그 망할 북한 공비 때문에 40년이나 강제로 닫힌 우이령, 허나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유명한
말이 있듯이 그 덕분에 지구에 민폐나 끼치며 사는 인간들의 발길이 거의 끊기면서 이곳 생태
계는 매우 우수한 수준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인간의 개발 칼질에 오갈데 없어진 수리부엉이
와 소쩍새, 산개나리 등 희귀 동/식물이 앞다투어 찾아와 안긴 자연의 보물 창고이자 서울 근
교의 듬직한 허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서면 북한산의 다른 구역보다 공기가 꽤 상
큼하고 청정하다.
물론 우이령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1994년 이후 서울시와 경기도에서 서울 동북 지역과 경기도
서북 지역을 잇는 도로망 개설을 위해 우이령에 도로를 내려고 했다. 이때 길 너비를 현재 5~6
m에서 8m로 넓히려고 했지. 하지만 환경/시민단체, 국방부가 쌍수를 들고 반대했고, 반대 여론
이 상당하여 보기 좋게 무산되었다. 이곳에 도로가 놓이면 양주 서남부지역과 고양/파주에서
서울 강북구 지역을 빠르게 이어주게 되며, 강북구 지역에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빠르게
잇는 역할까지 하게 되면서 나름 소중한 길이 되어줄 것이나 대신 우이령의 희생을 감수해야
된다. 1969년 이곳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면 진작에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었겠지. 그 인연으로
이곳은 차량의 도로가 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왓다. 이것이 하늘이 우이령에게 준 운명이다.

우이령을 개방하면서 이곳의 자연환경을 지키고자 매일 탐방인원을 1,000명으로 제한했다. 덕
분에 천하에서 가장 탐방밀도(1㎢당 5만명)가 높은 북한산국립공원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한적
한 곳으로 남게 되었지. 또한 지정된 길(우이령길과 석굴암으로 가는 길)만 이용토록 했으며,
계곡과 숲으로의 통행을 금했다. 그리고 입장시간과 퇴장시간에 엄하게 제한을 두어 혹여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게 했다. 허나 사람이란 존재가 지구에는 도움이 안되는지라 마음대로 샛길을
개척하고 식물을 채취하는 행위가 발생해 종종 문제가 되고 있다.

우이령길은 수도권 도보 나들이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이다. 북한산
둘레길은 총 21구간 71.5km로 그중에서 가장 으뜸은 바로 우이령길이 아닐까 싶다. (우이령길
찬양~~!!)
우이령길 구간은 교현리 우이령 입구에서 우이동 광장에 이르는 6.8km이다. 이중 4.46km가 아
무나 들어갈 수 없는 예약 탐방구간이며, 교현리 우이령 입구에서 교현탐방지원센터, 우이동광
장에서 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은 예약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거닐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우이
령길을 둘러보도록 하자.

※ 우이령길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① 송추 교현리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서울
704번, 의정부 34번 시내버스를 타고 우이령(오봉산 석굴암입구) 하차
* 1,4호선 서울역(4,9-1번 출구), 2호선 을지로입구역(3번 출구), 1호선 종각역(3-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 3호선 홍제역(2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녹번역(1번 출
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 이용
② 서울 우이동
* 지하철 4호선 수유역(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01, 120, 130, 153번 시내버스 이용
(120번과 130번은 우이동 종점, 나머지는 우이동 도선사입구 하차) / 수유역 6번 출구에서
도봉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우이동 종점 하차
* 지하철 4,7호선 노원역 5번 출구에서 1144번, 7번 출구에서 노원구 마을버스 15번을 타고 우
이동 도선사입구 하차
* 우이동 도선사입구(우이동 광장)에서 우이탐방지원센터까지 도보 35분

★ 우이령 탐방 정보 (2016년 11월 기준)
* 우이령은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의 '국립공원 예약' 메뉴에 있는 '북한산 우이령 탐방'
게시판에서 예약을 하면 된다. 예약은 10시부터 하루 전 17시까지 하면 된다.
예약 홈페이지로 이동하기
* 탐방객은 매일 1,000명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송추 500명, 우이동 500명이다. 인터넷 예약은
매일 800명으로 1인당 10명까지 가능하다. 전화 예약자는 200명으로 노령층(65세 이상)과 장
애인, 외국인 관광객에 한한다. (전화예약은 9~17시까지)
* 입장시간은 9시부터 14시까지며, 16시까지 무조건 하산을 마쳐야 된다. (16시까지 교현/우이
탐방지원센터까지 나와야 됨) 늦게 하산하면 자칫 벌금을 뜯길 수 있다.
* 석굴암 신도와 탐방객은 우이령길을 예약할 필요가 없으며,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신분증 확
인을 거쳐 들어가면 된다. (석굴암까지만 이동 가능)
* 교현탐방지원센터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산47-10 (예약/문의 ☎ 031-855-6559)
* 우이탐방지원센터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산74 (예약/문의 ☎ 02-998-8365)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1)

교현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우이령 탐방이 시작된다. 속인(俗人)들이 이 길을 걷고자
40년이나 기다렸던 그 금지된 길이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가을도 우이령이 마음에 들었는
지 길을 멈추고 주변을 온통 화사하게 불지른다. 이렇게 늦가을과 우이령의 만남으로 우이령은
아름다운 비단길로 거듭났다.

우이령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길이 완만하다. 서서히 올라갔다가 다시 서서히 내려가는 아주 느
긋한 코스로 각박한 속세살이와는 정반대이다. 게다가 흙길이 잘 닦여져 있고, 주변 풍경이 매
우 고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짧게 느껴져 흔쾌히 왕복을 뛰고 싶은 마음이다.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석굴암입구 유격광장까지는 약 2.3km로 30분 정도 걸린다. 동쪽에는 도
봉산과 오봉이 빚은 우이령계곡이 때묻지 않은 청정함을 간직하며 속세로 흐르는데, 아쉽게도
계곡은 금지된 구역이다. 게다가 길과도 거리를 제법 두고 있어 휴전선 너머 동해바다를 바라
보듯 해야 된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곳을 속세로부터 지키려면 그럴 수 밖에.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2)
휴일을 맞이하며 북한산과 도봉산의 왠만한 등산로는 늦가을 나들이 인파로 세계
탐방밀도 1위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미어터지는데 반해 이곳은 여기가
북한산의 일부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한적하기 그지 없다.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3)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4)
숲이 무성해 강렬한 햇빛도 고개를 숙인다.

▲ 우이령길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흘러가는 우이령 계곡
속인의 발길이 오랫동안 금지된 저곳에 선녀(仙女) 누님의 비밀 욕탕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달 깊은 밤에 몰래 찾아와 확인해 보고 싶다~~

▲ 늦가을이 온 산천에 알록달록 불을 질렀다.
늦가을의 즐거운 불장난은 11월 이후 겨울 제국에 의해 모두 진압될 것이다.
단풍으로 타오르는 산 너머로 바위 봉우리인 오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우이령 계곡과 오봉 산줄기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에서는 어디서든 오봉이 바라보인다.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5)


 

♠ 우이령의 심장으로

▲ 석굴암입구 유격광장

우이령길 심장의 서쪽인 석굴암입구 유격광장은 우이령길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다. 이곳은 군
부대의 유격 연병장으로 광장 동쪽에 서 있는 유격 표석이 이곳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여기서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데, 석등을 옆구리에 낀 다리를 건너 오봉으로 향하는 북쪽 길을 오
르면 석굴암이고, 광장 남쪽으로 난 길을 직진하면 우이령길 정상이다.

유격장은 주로 석굴암으로 오르는 길목에 분포하고 있는데, 군대를 나온 이 땅의 사내들로 하
여금 당시의 향수를 진하게 불러일으킨다. 우이령이 아무리 개방이 되어 탐방 장소로 인기 몰
이를 하고 있어도 이들은 여전히 군사용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니 철조망 안에 있거나 접근이
통제된 유격시설은 괜히 접근치 않도록 한다. 이처럼 우이령은 민간인의 등산/나들이와 군인의
유격장이 공존하는 곳으로 남북분단의 우울한 현실이 담긴 조금은 씁쓸한 현장이기도 하다.

흙이 잘 입혀진 유격광장은 터가 매우 넓어 그늘진 곳에는 산꾼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피고 밥
과 행동식을 먹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우이동까지는 딱히 휴식 장소는 없으니 교현리에서 오를
경우에는 적어도 여기서 먹고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광장 동쪽에는 우이령 상류를 막아서 만
든 조그만 호수가 있는데, 곱게 몸을 치장한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로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
듬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은 서로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1달 뒤면 겨울 제국에게 영혼까지 털려
호수에 비친 앙상한 모습에 시름에 잠길 것이다.


▲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길 (석굴암입구)

우이령에 왔다면 오봉 서쪽에 안긴 석굴암(石窟庵)은 꼭 둘러보기 바란다. 첩첩한 산주름에 제
대로 묻힌 석굴암은 우이령 개방과 함께 흥한 기운이 찾아들어 요즘 제법 잘나가고 있는데, 절
로 오르는 길은 좀 각박하지만 경내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꽤나 일품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공양을 제공하고 있으니 시간이 맞으면 공양 1그릇 들고 가는 것도 좋다. (정월대보름에는 오
곡밥에 나물을, 동짓날에는 팥죽을 제공함) 또한 매년 10월에는 번뇌가 쫓아오다 졸도할 정도
의 이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단풍음악회까지 연다. (2016년에는 10월 29일 토요일에 열림)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내가 이곳을 그냥 통과할리는 없을 터, 잠시 우이령을
잊고 석굴암을 찾았다. 석굴암에 관한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유격 표석의 위엄 - 이제는 이곳의 상징물이 되어 우이령길 사진의
단골 모델로 자주 등장한다.

▲ 유격광장에서 바라본 오봉의 위엄 (왼쪽 바위 봉우리는 관음봉)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에서는 어디서든 오봉(五峯, 660m)이 바라보인다. 오봉산(五峯山)이라 불
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도봉산의 뒷쪽으로 5개의 봉우리가 위엄을 뽐내며 속세를 굽어본다. 이
런 멋드러진 봉우리에는 옛 사람들이 붙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기 마련이라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랑이가 담배 피다 암에 걸리던 시절, 양주 고을에 총각 5명이 살고 있었는데, 양주목(楊州牧
) 원님(사또)의 외동딸이 참 이쁘다고 하여 서로 장가를 들고자 시합을 벌였다. 아마도 원님이
시합을 붙인 듯 싶다. 시합이란 바로 우이령 서쪽에 있는 상장능선에 올라 그곳의 바위를 오봉
에 던져올리는 것, 그들 가운데 누가 이겼는지는 전설을 지은 옛사람의 생각이 짧아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로 인해 오봉이 저렇게 묘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사람 주제에 어찌
저런 봉우리를 만들 수 있을까?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을 사람 따위가 황당한
전설로 가로채려고 하니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하다.

우이령에서 뻔히 보이는 오봉이지만 정작 여기서는 오르지 못한다. 그곳에 가려면 무조건 도봉
산을 거쳐야 되며, 우이령과 석굴암에서 가는 길은 모두 통제되었다.


▲ 석굴암입구~우이령길 정상 구간 (1)

석굴암입구 유격광장을 지나면 우이령길은 기존보다 조금 작아지고 길을 둘러싼 숲은 더욱 삼
삼해진다. 여기서부터 우이탐방지원센터까지가 우이령길의 단연 갑(甲)이자 심장과 같은 구간
으로 인간의 언어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건방질 정도로 미치도록 아름답다. 벌써부터 누렇
게 뜬 낙엽이 길 주변을 잔잔히 덮어 겨울 제국의 도래가 멀지 않았음을 가늠케 하며, 사람도
별로 없어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한적하다. 그야말로 산바람과 새의 지저귀
는 소리가 전부인 자연의 공간이다. 산내음이 진하게 우려진 이런 길을 거닐면 아무리 문학의
문외한이라도 시(詩) 한 수, 읊어주거나 지어야 되는데, 그럴 실력이 되지 못함이 애석하다.


▲ 석굴암입구~우이령길 정상 구간 (2)

▲ 석굴암입구~우이령길 정상 구간에서 만난 조그만 계곡

▲ 오봉과 우이령 산줄기 너머로 보이는 도봉산의 잘생긴 뒷통수

▲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오봉의 기묘한 위엄

▲ 석굴암입구~우이령길 정상 구간 (3)

▲ 우이령길 정상과 대전차 장애물 (우이동 방향)

▲ 우이령길 정상과 대전차 장애물 (송추 방향)

석굴암입구에서 살랑살랑 20분 정도 오르면 우이령길 정상이다. 여기서부터 경기도 양주시에서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으로 바뀌는데, 행정구역이 싹 바뀐다고 해서 고갯길과 주변 풍경이 죄다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편의상 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우이령길 정상에는 돌로 쌓은 방어시설이 있는데, 이는 탱크의 저지를 막는 대전차(對戰車) 장
애물(고가 낙석)이다. 이 장애물은 6.25 이후 북한의 침공에 대비코자 만든 것으로 전차(탱크)
가 밀려올 때 석축 위에 올려진 콘크리트 덩어리를 떨어뜨려 탱크의 진입을 막는 시설이다. 서
울과 경기도 북부(고양, 양주, 구리, 남양주 방면)로 넘어가는 고개, 경기도와 강원도 북부권
고갯길에 주로 설치되었는데, 다행히 저들이 제대로 쓰인 적은 없으며, 근래에는 서울 주변을
중심으로 도시 개발과 도로 개선으로 조금씩 없어지는 추세다. (파주나 양주, 포천, 연천, 화
천 등 전방 쪽은 많이 남아있음)

남북분단이 빚은 어이없는 작품으로 겉모습은 참 정떨어지지만 20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국방
시설로 등록문화재로 삼아 보존할 가치는 충분하다 여겨진다. 혹여 나중에 통일이 되고 주변
나라를 아우르는 놀라운 시대가 와도 꼭 국방 유적으로 남겨야 될 것이다.


 

♠ 우이령 마무리 (서울 우이동 구간)

▲ 우이령정상~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 (1)

우이령길 정상을 지나면 길은 내리막으로 변하고 그나마 조금 가까워진 하늘은 다시 멀어져 간
다. 우이동으로 내려가는 길도 앞서 교현리 구간처럼 느긋한 경사로 길도 잘 닦여져 있어 등산
보다는 마실이나 산책의 기분이 진하게 든다.

우이령의 우이동 구간은 딱히 명소나 특별한 존재는 없으며, 그저 삼삼하고 비단처럼 고운 숲
길의 연속이다. 하늘과 멀어질 수록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속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길을 15분 정도 내려가면 우이령길의 남쪽 검문소인 우이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이로써
우이령길의 금지된 구간은 모두 완주한 셈이며, 여기서부터 우이동 광장까지는 항시 개방되는
구간이다.


▲ 돌탑의 보금자리
속인(俗人)들이 쌓아올린 산악신앙의 소박한 현장 ▼



▲ 우이령정상~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 (2)

▲ 우이령정상~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 (3)

▲ 우이령정상~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 (4)

▲ 우이탐방지원센터 주변

우이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비로소 자유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우이동
유원지의 번잡함을 피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되며, 우이령을 넘어온 북한산둘레길은 바
로 오른쪽 길로 해서 내려간다. 그리고 먹거리나 우이동유원지를 원한다면 그냥 직진한다.

둘레길의 일원인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우이동 계곡인데, 다리 주변에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탑
들이 우리나라 7천만 인구 마냥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마이산 탑사(馬耳山 塔寺)의 간지나는 돌
탑을 꿈꾸며 조촐히 장관을 이룬다. 우이동은 우리 동네 옆이라 자주 가는 곳이지만 우이동광
장에서 우이령 구간은 처음 와본다.


▲ 우이동계곡 돌탑들
돌탑이 뿌리를 내린 돌에 푸른 이끼가 가득하니 이곳이 그만큼 청정하다는 뜻이다.

▲ 바위 위에 왠 소나무 분재
돌로 두툼히 석축을 쌓고 키 작은 소나무를 심었다.

▲ 우이동유원지 외곽길 (1)

▲ 우이동유원지 외곽길 (2)

우이령 남쪽에 옥의 티처럼 자리한 우이동유원지는 우이동광장에서 우이탐방지원센터 직전에
이르는 약 1.4km의 길쭉한 산간 마을이다. 이곳은 다른 이름 돋는 산이나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산채비빔밥과 닭백숙, 오리고기, 도토리묵, 동동주, 두부 음식, 고기류, 동동주 등을 다루는
온갖 식당들이 즐비하며, 민박과 산장 등의 숙박시설, 수련원과 연수원 등이 정신없이 들어서
있어 서울 지역 대학교와 직장, 동호회의 당일, 1박 모임 장소로 인기가 높다.

이곳은 엄연히 북한산국립공원 구역이지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이전부터 형성된 마을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이 2000년 이후 북한산성(北漢山城) 내부에 오래된 자연 마을인 북한동(北漢洞)
마을을 철거하고 등산로 기점 가운데 어수선한 곳을 많이 정비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우이동유
원지는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유원지 남쪽에는 훼밀리랜드와 그린파크호텔도 있지만 현재는
망해서 문이 닫힌 상태이다.

우이동유원지의 번잡함을 피하고 싶다면 외곽길(유원지 기준 서쪽 길, 우이탐방지원센터에서
오른쪽 길 이용)을 이용하기 바란다. 수목이 삼삼히 우거진 완연한 숲길로 길 동쪽에는 유원지
식당과 숙박업소의 철담과 나무 담장이 길게 둘러져 있다. 또한 길 중간에 유원지로 들어가는
조그만 길이 여럿 있으니 먹거리를 원한다면 그 길로 들어가면 된다.

그렇게 우이동유원지 외곽길을 정신 없이 내려가 오후 4시 반에 우이동 광장에 도착했다. 우이
탐방지원센터는 3시 반에 통과했다. 산을 탔으니 조촐하게 뒷풀이는 해야 되겠지. 우이동유원
지에 양의 털처럼 널린 식당에서 먹으려고 했으나 이곳이 초행길이고 정보가 어두워 다 지나쳤
다. 그래서 서울 동북부 부도심인 수유역으로 나와 닭갈비에 맥주로 늦은 점심을 배불리 먹고
그날의 일정을 기분 좋게 마무리지었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우이령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우이령이 비록 제약이 많은 공
간이라 아쉬움은 다소 있지만 서울 근교에서 제법 환경이 잘 보존된 구역인만큼 지금처럼 제한
적 탐방제도를 유지했으면 좋겠다. 근래 양주시에서 예약이 필요없는 자유탐방을 요구하고 있
지만 그건 우이령의 숨통을 끊는 행위라고 본다. 하루 예약 인원을 지금보다 조금 늘리는 선에
서 끝내면 좋을 듯 싶으며, 휴식년제를 도입해 적으면 몇 달, 길면 몇년 정도의 휴식기를 주어
속인들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것이 우이령길이 서울 근교의 숨겨진 아름다
운 숲길로 길이 길이 보존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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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의 지붕을 거닐다. 대모산~구룡산 가을 나들이 (불국사)



' 서울 강남의 지붕을 거닐다. 대모산~구룡산 가을 나들이 '

▲ 구룡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하늘이 열리고 천하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유서깊은 개천절(開天節, 10월 3일)을 맞이하여
아는 후배와 함께 강남의 듬직한 뒷산, 대모산을 찾았다. 대모산과 개천절은 서로 연관이
있는 존재는 아니나 그날따라 그곳이 격하게 땡겨 그 본능에 따라 대모산(大母山)으로 흔
쾌히 길을 잡았다.

3호선 일원역에서 길을 시작하여 대모산입구교차로에서 남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대모산도
시자연공원이 모습을 비춘다. 여기서부터 대모산의 포근한 품으로 파고들면 되며, 우리는
대모산의 유일한 고찰(古刹)인 불국사로 우선 길을 잡았다.


 

♠ 대모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오래된 절집
~ 대모산 불국사(大母山 佛國寺)

▲ 대모산 북쪽 자락에 펼쳐진 밭과 비닐하우스, 그 너머로
강남시내가 빼꼼 고개를 들어보인다.


대모산도시자연공원에서 불국사로 인도하는 숲길은 평탄하고 순하기 그지 없다. 옥수수와 온갖
나물, 과일을 파는 아줌마 행상들이 중간중간 자리하여 나그네의 오감을 잠깐씩 흥분시키며 솔
솔 나부끼는 산바람은 가을임에도 버젓히 남아 괴롭히는 더위의 기운을 싹 털어간다.

산길 중간에는 과일과 채소를 기르는 밭이 펼쳐져 있다. 그저 높은 빌딩과 아파트, 호화 주택이
격하게 연상되는 강남스타일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 여기가 과연 서울 강남이 맞는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린다. 물론 서울이라고 꼭 키다리 건물과 사람, 차량으로 번잡한 거리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서울에 대한 그런 뿌리 깊은 고정관념 때문에 이런 풍경에는 다소
어색해들 한다.
그런 밭 너머로 강남 시내가 이곳을 삼킬 듯 노려보고 있어 내가 서 있는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
이 밀려오지 않기를 부디 바랄 뿐이다. 허공에 떠 있는 구름들도 이곳이 걱정이 되는지 잠시 길
을 멈추고 강남을 굽어본다.


▲ 불국사 약수터

숲길을 10분 정도 오르니 나올 것 같지 않던 불국사가 숲속에서 진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산사(山寺)들은 식수 해결을 위해 샘터를 하나 이상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라 불국사도 경내 밑
에 약수터를 내밀고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가뭄과 수질 악화로 못마시는 경우가 자주 있음)

물의 낭비를 막고자 수도꼭지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졸고 있는 붉은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
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하다며 쾌재를 부른다. 그렇게 약수를 마시고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약사보전과 그곳의 주인 약사불(불국사 석불좌상)과 시선이 딱 마주
친다. 그럼 여기서 잠시 불국사의 가람배치와 내력을 흔쾌히 살펴보도록 하자.

대모산 북쪽 자락에는 이름도 참 아름답고 외우기도 참 좋은 불국사가 조용히 안겨져 있다. 흔
히 불국사하면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유명한 경주(慶州) 불국사를 100% 생각하기 마련이라 불국
사에 간다고 하면 따지지도 않고 다들 경주에 가냐고 묻는다. 허나 부처 형님의 나라를 뜻하는
'불국'이란 이름을 경주 불국사 혼자서만 누리면 어디 쓰겠는가? 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불
국사' 간판을 가진 절이 무려 수십 곳이 넘었다. (그나마 오래된 절은 경주와 대모산 불국사가
고작임)

'불국사' 이름의 절 중, 경주 다음으로 2위(1위와 2위의 차이가 넘사벽 수준임)라고 볼 수 있는
대모산 불국사는 약사불을 중심으로 한 약사도량(藥師道場)으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다. 예전
2008년에 여러 번 인연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2008년 불국사 답사기 보기) 상당히 많은 세월
이 흘렀음에도 그때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다. 법당(法堂)인 약사보전을 중심으로
삼성각, 나한전, 가건물 1채를 포함하여 4~5동의 건물이 여전히 경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지형상 북쪽인 강남을 바라보고 있다. 가람(伽藍)배치는 법당 앞에 석탑 1기를 둔1법당
1탑 배치로 절에 흔히 있는 일주문(一柱門) 따위는 없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사세 확
장에 썩 용이한 지형이 아니라서 새로 건물을 짓기에도 여의치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불국사
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이 절은 1352년(공민왕 1년) 진정국사(眞靜國師)가 창건하여 약사사(藥師寺, 약사절)라 했다고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 설화에 따르면 절 아랫마을(일원동)에서 박씨 농부가 경작을 하고 있었
는데 소가 논 한가운데서 나아가지 않아 살펴보니 글쎄 땅 속에 석불(지금의 불국사 석불좌상)
이 있는 것이었다. 하여 바깥으로 꺼내 가까운 봉은사(奉恩寺)에 넘기려고 했으나 석불이 거부
반응을 보이며 꿈쩍도 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약사절로 보내려고 하니 갑자기 석불이 지푸라
기보다 가벼워져 그곳으로 옮겼다. 그때 불상이 발견된 논을 부처논이라 불렀고 그 옆을 흐르는
개천을 부처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절 아랫마을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석불을 발견하여 마을 뒷산에 자리를 만들어
봉안했는데, 진정국사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1385년에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워 약사절(약사
사)이라 했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설화의 내용처럼 과연 진정국사가 고려 말에 창건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석
불은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이 난 상태라 창건 시기도 그런데로 맞아보인다. 또한 발에서 발견
되었다는 설화를 통해 농사를 기반으로 한 지역 사람들이나 지역 세력가의 발원으로 석불이 조
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국사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옛 절터(일원동 246-12)가 하나 있는데, 그곳이 불국사의 원래
자리라고 한다. 허나 언제쯤 현 위치로 옮겨졌는지는 귀신도 알 수 없는 실정이나 창건 이후로
500년 동안 마땅한 흔적을 남기지 못하다가 1874년 고종(高宗)의 지원으로 중창을 했다고 전하
며, 그때 현 자리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모산 남쪽 헌인릉(獻仁陵)에서 물이 나오자 고종은 그곳과 가까운 약사사 주지에게 의견
을 물었다고 한다. 이에 주지승이 대모산 동쪽(현 성지약수터)의 수맥을 끊으면 된다고 답을 올
려 그렇게 하니 과연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며, 고종은 고마움의 뜻으로 불국정토를 이루라는
뜻에 '불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고종의 꿈에 헌릉(獻陵)에 묻힌 태종(太宗)이 자주 나타나자 그를 달래고자 약사사
를 증축하고 불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6.25전쟁 때 절이 처참히 파괴되고 오로지 창건 설화에 나온 석불만 살아남았는데, 1963년에 안
양 삼막사(三幕寺)에서 온 권영선 승려가 중창해 법당과 칠성각, 나한전을 세웠다. 이후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1993년부터 3년 동안 불사를 벌여 나한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을 싹 갈고 탱화를
새로 제작하여 지금에 이른다. 강남에서는 봉은사 다음으로 오래된 절로 신도수가 무려 2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강남구의 거의 유일한 산사로 고색의 향기는 말끔히 씻겨 내려가 과연 오래된 절인지 의문이 날
정도이지만 이곳의 유일한 보물이자 지정문화재인 오래된 석불이 전해오고 있어 나름 오래된 절
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일원동 주택가에서 불과 도보 20분 남짓 거리로 접근도 괜찮다. 시
내와 가깝긴 하지만 숲에 푹 묻힌 탓에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리기에 그리 부
족함은 없으며, 으리으리한 경주 불국사와 달리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하여 은근히 정
감이 간다.

절을 둘러보고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강남의 뒷동산인 대모산도 올라가보자. 산세도 대체로 완
만하고 그리 높지 않아 가볍게 산책 삼아 오를 수 있으며, 정상까지 30분 이내면 충분하다. 정
상을 찍고 개포동이나 일원동, 수서역, 자곡동, 염곡동 방면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정상에는
옛 대모산성(大母山城)의 흔적이 아련히 전한다.


▲ 불국사 삼성각(三聖閣)

돌이 잔뜩 깔린 약사보전 뜨락 우측(서쪽)에는 'ㄱ'자 모습의 삼성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커
다란 건물로 겉으로 보면 1층 같지만 실은 2층이며, 1층에는 공양간과 요사(寮舍), 선방(禪房)
등이 담겨져 있고, 2층은 삼성각과 요사로 쓰인다. 원래 칠성각(七星閣)이던 것을 1993년에 새
로 지은 것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 등이 봉안되어 있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나한전(羅漢殿)

약사보전 뒷쪽 높은 곳에는 1964년에 지어진 나한전이 아주 조촐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정면
과 측면이 달랑 1칸에 불과한 맞배지붕 건물로 고색의 향기가 메말라간 불국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불전인데 약사보전과 나란히 마르지 않는 샘인 강남(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불단에는 석가불과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이루어진 3존불을 비롯해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羅漢)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포진하여 건물 내부가 꽉 차보인다.


▲ 나한전 석가3존불 - 온후한 표정으로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맞이한다.

▲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선 16나한의 위엄

▲ 불국사 약사보전(藥師寶殿)

약사보전(약사전)은 불국사의 중심 건물(법당)이다. 절은 정말 손바닥만한데 반해 법당과 삼성
각은 다소 덩치가 있어서 경내가 다소 협소해 보인다.
약사전 앞에는 근래에 지어진 5층석탑이 하얀 피부를 자랑하며 서 있고, 건물로 오르는 돌계단
좌우에는 수호의 의무를 지닌 돌사자 2기가 자리해 있어 가까이서 보면 사자의 탈을 쓴 고양이
처럼 정말 쓰다듬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도 그들을 보고는
찾아온 본분도 싹 잊고 그냥 돌아갈 것이다.


▲ 단란한 모습의 그들, 3존불도 아닌 무려 약사5존불

약사전 불단에는 약사불을 중심으로 3존불도 아닌 무려 5존불을 봉안해 눈길을 끈다. 왜 특이하
게 5존불로 불단을 장식했을까? 실제 다른 절에서는 3존불 주변에 별도의 불/보살상을 두는 사
례도 많고 불국사 같은 경우는 경내 확장이 여의치 못해 다른 여래상이나 보살상을 중심으로 한
불전을 더 두기가 곤란하므로 그 역할을 약사전이 싸그리 도맡고 있는 것이다.
즉 약사전이라고 해서 약사불만 집중적으로 취급해야 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불단 가운데에
약사불을 높게 배치하고 그 좌우로 관음보살, 지장보살 등 4개의 협시보살상을 배치하여 5존불
로 구성했다.

이들 5존불은 한결같이 하얀 피부를 지닌 백불(白佛)로 돌로 만든 석불이다. 자신을 찾은 중생
을 환한 표정으로 맞이하는 그들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다. 그들의 미소
에 아무리 악귀라 한들 반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이다.
5존불은 모두 연꽃이 입혀진 연화대(蓮花臺)에 앉아들 있으며 연꽃은 하늘을 우러러 꽃잎을 벌
린 앙련(仰蓮)이다.


▲ 불국사 석불좌상(약사불, 가운데 석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6호

5존불 가운데 가장 맏이는 가운데에 자리한 약사불이다. 불국사의 오랜 내력을 증명해주는 상징
이자 창건설화에도 등장하는 존재로 대모산 불국사의 존재를 귀뜀해주고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
인 존재이기도 하다.

불국사의 주불(主佛)답게 좌우에 거느린 보살상보다 대좌의 높이가 높다. 그의 우측에는 육환장
(六環杖)을 든 승려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약사불 좌측에는 보관(寶冠)을 눌러쓰고 가슴
에 금색 장식을 단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있으며, 양쪽 끝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앉아있다
. 그리고 그들 뒤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도드라지게 돋음새김으로 조성된 후불탱이 든든히 자리
해 있다.

불국사 석불좌상이라 불리는 이 약사불은 앞서 창건설화에서 이른 데로 경작지에서 나왔다고 전
한다. (지역 농민이나 지역 세력가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을 그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음)
불국사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이곳의 든든한 밥줄로 그를 내세워 약사도량을 칭하고 있다. 절에
서는 약사불(약사여래)이라 하여 그 정성이 참 대단하지만 고려 때 약사불과는 다소 차이가 있
어 처음부터 약사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래는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여겨진다. 그러던
것을 나중에 약사불로 강제 전환시킨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높이는 79.5cm로 머리의 크기가 신체에 대비하여 너무 크다. 하얀 피부의 몸과 달리 머
리는 검은 색이며 꼽슬인 나발이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로 보이는 하얀 혹이 솟아 있으며 홍
예처럼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백호가 있다. 지그시 뜬 두 눈으로 중생을 보는 약사불의 표정은
그야말로 인자함이 느껴진다. 오뚝 솟은 코와 붉은 입술, 살이 두툼해 보이는 양쪽 볼은 정말
손으로 비벼보고 싶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안테나처럼
크다.
그의 몸에 걸쳐진 법의(法衣)는 석굴암(石窟庵)의 본존불처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런 형태를 어려운 말로 우견편단(右肩偏袒)이라고 한다. 다리 위에 놓여진 두 손은 선정인(
禪定印)을 취하고 있으며, 손 위로 알 모양의 빨간색 물건이 있는데, 이는 약사불이 늘 지니고
다닌다는 약합(藥盒)이다. 약합에는 중생을 치료하기 위한 그만의 치료제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는 원래 맨돌의 불상이었으나 나중에 호분(胡粉,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것으로 여자들 화
장용으로 많이 사용됨)
으로 하얗게 분을 칠하면서 백불이 되었으며, 그때 원래 모습을 많이 잃
었다. 나말여초(羅末麗初) 시절 유행했던 불상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머리와 신체의 비례가 맞
지 않으며, 자연스럽지 않은 옷주름 조각 등으로 고려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 대모산 불국사 찾아가기 (2016년 10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일원역 5번 출구에서 6분 정도 걸으면 대모산입구교차로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3분 정도 들어가면 불국사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온다. (일원역에서 불국사까지 도보 25분)
* 서울 시내(광화문, 시청, 서울역, 한남동, 여의도, 신림역, 남부터미널, 고속터미널, 압구정
역, 강남역, 삼성역)에서 333, 401
, 402, 461, 3425, 4419번 시내버스를 타고 일원동 한솔아
파트 하차, 바로 보이는 대모산입구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간다. (도보 20분)
* 수서역(3호선, 분당선/1번 출구)과 가락시장역(3,8호선/1번 출구), 잠실역, 성남시 등지에서
333, 401, 402, 461, 3413, 3425, 4419번 시내버스를 타고 푸른마을아파트 하차, 바로 옆에
대모산입구교차로가 있다.(도보 20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산442
(광평로10길 30-71 ☎ 02-445-4543)


 

♠ 대모산(大母山, 293m) 오르기

▲ 나무가 무성한 대모산 정상(293m)

약사불에게 약소하지만 조그만 소망 하나를 들이밀고 법당을 나왔다.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
로 아담한 불국사, 3분이면 다 둘러보고도 남음이 있으나, 강남을 앞뜰로 삼으며 산자락에 아
늑히 녹아있는 산사로 석불좌상의 미소 덕분인지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대모산 정상으로 길을 향했다.
불국사에서 정상까지는 넉넉잡아 25분 정도 걸리는데 산길은 정상 서쪽을 제외하고는 그리 각
박하지는 않다. 게다가 산길도 잘 정비되어 있고 이정표가 심심치 않게 나타나 길눈이 되어주
면서 헤맬 염려는 별로 없다.

보통 하늘을 이고 있는 뫼의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거나 잡초로 이루어진 대머리같은 지형
인데 반해 대모산 정상은 나무가 무성해 하늘이 절반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나무심기 사
업으로 정상까지 싹 나무로 덮은 모양이다. 정상에 오르면 조망을 바라보는 맛이 참 쏠쏠한데,
그 맛을 더하고자 정상 북쪽 가파른 곳에 조망대를 만들어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대모산 조망대에 오르면 앞에 한강을 두고 뒤에 대모산과 구룡산, 우면산(牛眠山)을 둔 전형적
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인 강남 시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송파구, 서쪽으로 서초구 등이
보이고, 한강 너머로 성동구와 광진구, 중구, 동대문구, 멀리는 도봉산(道峯山)과 북한산(삼각
산), 수락산(水落山), 불암산(佛巖山)까지 두 눈에 들어와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강남에서 가
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고 서쪽에 있는 구룡산 외에는 주변이 상당수 평지라 조망의 깊이도 클
수 밖에 없다.

강남의 듬직한 뒷산이자 포근한 쉼터로 단단히 자리를 잡은 대모산은 1977년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본격적으로 공원으로 꾸며진 것은 1989년 이후다. 개포동과 일원동, 수서동, 자
곡동, 내곡동(內谷洞), 세곡동(細谷洞)에 넓게 걸쳐있는 산으로 1980년대 개포동 개발 이전에
는 산세가 양재천(良才川)까지 이르렀다. (1980년대 중반 어렸을 때 대모산을 타고 도곡동까지
내려간 기억이 남)
산의 모습이 늙은 할머니처럼 생겼다고 해서 할미산, 대고산(大故山)이라 불렸으나 조선 세종
때 태종의 능인 헌릉이 산 남쪽에 조성되면서 어명에 의해 대모산(大母山)으로 바뀌었다고 한
다. 믿거나 말거나 설에 따르면 산세가 비구니가 앉은 모습 또는 여자의 앞가슴처럼 생겼다하
여 그리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山經表)에는 한남정맥(漢南整脈)에 속하는 산이라 했으
며,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목(廣州牧) 기사에는 '관아 남쪽 30리에 있으며 봉수대가 설치되
어 있다'고 나와있다.

대모산에 안긴 오랜 명소로는 불국사와 대모산성터 등이 있으며, 넓은 산세에 비해 계곡은 매
우 빈약하다. 개포동과 일원동 개발로 계곡들이 상당수 날라갔기 때문이다. 또한 속세로 흘러
가는 다른 계곡도 시멘트를 바르고 요상하게 공구리를 쳐서 볼품이 매우 없다. (개포시영아파
트 방면 계곡) 반면 산에 필수로 있는 약수터는 주변 산 못지 않게 많아서 구룡산을 포함하여
무려 18개소의 샘터가 있다.
또한 도보 산책길의 전국적인 유행으로 강남구청에서는 수서역에서 대모산 북쪽 자락과 구룡산
북쪽 자락을 거쳐 염곡동을 잇는 대모산 둘레길인 강남 그린웨이를 닦았으며,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찬양받는 서울둘레길4코스(대모, 우면산코스)가 대모/구룡산 북쪽 자락
으로 흘러간다. (불국사를 경유함)


▲ 대모산에서 바라본 천하 (1) 개포동과 도곡동, 양재동을 중심으로
강남구와 서초구 일대가 바라보인다. (남산 서울N타워도 희미하게 보임)

▲ 대모산에서 바라본 천하 (2)
일원동과 수서동을 비롯하여 송파구와 강동구, 광진구, 구리시,
아차산(阿且山)과 불암산, 수락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 대모산에서 바라본 천하 (3)
송파구를 중심으로 강동구, 아차산과 멀리 남양주(南楊州)의 산들이 바라보인다.

▲ 흐릿하게 남은 대모산성(大母山城)의 흔적

대모산 정상 서쪽에는 대모산의 갑옷이었던 대모산성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산성(山城)
이긴 하지만 장대한 세월의 거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산산히 헝클어져 산길 주변에 돌이 약
간 뭉쳐있는 형태로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모산성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는 실정이
라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무심히 밟고 지나치고 있으며 보호 조치도 딱히 받지 못하고 있다.

산꾼들의 외면을 받으며 굴욕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대모산성은 6~7세기 정도(또는 신라 후기)
에 신라(新羅)가 한강 유역과 서울 지역 수비를 위해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1999년 국립문화
재연구소와 한양대 박물관팀이 발굴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이때 짧은 굽다리 접시를 비롯해
다양한 신라 유물이 발견되었다. 정상을 둘러싸며 조성된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600m, 내
부 면적은
약 8,276㎡, 성돌은 50~70cm 정도의 자연석과 활석을 이용했다.
봉은사에서 편찬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백제 때 고성(古城)으로 나와있으며, 북
쪽 성벽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일부 확인되기도 했으나 나중에 성곽을 구축하면서 과반수
이상 날라간 상태였다, 또한 정상 중간 지점에 제단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바위가 널려있는
데 이들 바위에는 달걀 모양의 조각이 50여 개 이상 새겨져 있다. 이들 흔적을 어려운 말로 성
혈(聖穴)이라 하며, 그 흔적을 문신처럼 지닌 바위는 알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이를 통해 대모
산은 옛 조선시대(고조선)부터 지역에서 꽤나 애지중지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의미가 깊은 곳이지만 오랫동안 속세의 관심 밖에 머물러 있다가 2012년 서울시에서 뒤
늦게 대모산성을 지방기념물로 지정하고자 문화재위원회에 상정했다. 허나 여러 가지 이유(사
유지, 강남구의 의지 부족 등)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보호 조치도
계속 보류되어 산꾼들의 발 아래 짓밟히고 있다. 또한 정상 주변에 철탑시설물과 국정원 철책
등이 산성터를 그냥 두지 않아 상태는 더욱 악화되기만 한다.
더 망가지기 전에 서둘러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흐릿하게 남아있는 흔적이라도 수습했으면 좋
겠는데, 모든 것이 참 힘들기만 한 이 땅의 현실에서는 참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대모산성은 참고로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산성 유적이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산성 유적으
로는 아차산성(阿且山城)과 북한산성(北漢山城), 호암산성(虎巖山城), 불암산성(佛巖山城) 등
이 있다.


 

♠ 구룡산(九龍山, 306m) 오르기

▲ 구룡산에서 바라본 천하
(개포동과 도곡동, 강남구 일대와 멀리 남산과 북한산 산줄기까지 바라보인다.


대모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40분 정도 가면 구룡산 정상에 이른다. 구룡산은 대모산보다 13m 정
도 높은데, 산 이름만 다를 뿐이지 두 산은 완전 한 덩어리이다. 엄밀히 말하면 구룡산까지 모
두 대모산의 영역으로 보면 된다.대모산에서 넘어가는 것은 조금 내려갔다 올라가는 거라 정
상 직전의 오르막길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난하나 개포시영아파트와 염곡동에서 오르는 길은 경
사가 좀 각박하다.
예전에는 내곡동이나 헌인릉 쪽에서 이들 산을 오를 수 있었으나 국가정보원(國家情報院)이 내
곡동에 새로 둥지를 튼 이후에는 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구룡산은 개포동과 염곡동, 내곡동에 걸쳐있는데, 예전에는 국수봉(國守峰)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옛날에 부근에 살던 임신부가 용 10마리가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었는데, 거기
서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는 통에 용 1마리가 획 놀라 떨어지고 9마리만 승천했다. 그 연유
로 구룡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그때 떨어진 비리비리한 용은 물이 되어 양재천이 되었
다고 한다.

정상에서 서쪽 봉우리를 국수봉이라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이곳에는
바위굴이 있는데, 봉수대를 지키는 군인들이 숙소로 삼았다고 한다. 대모산과 달리
오래된 명
소는 없으며, 대모산과 서로 이어진 탓에 두 산을 같이 누리는 것도 괜찮다. 이들은 아무리 코
스를 길게 잡아도 3시간 이내면 산행이 끝나기 때문이다.

구룡산 정상은 대모산처럼 나무가 좀 우거져있는데, 정상 북쪽에 마련된 조망대는 대모산 못지
않은 일품 조망을 선보인다. 이곳에 오르면 개포동과 도곡동, 포이동을 비롯해 강남구와 서초
구, 용산구, 성동구, 남산 등이 바라보이고, 멀리 북한산과 수락산, 불암산도 시야에 앞다투어
들어온다.


▲ 구룡산에서 바라본 천하
강남구와 송파구, 멀리 북한산과 수락산 산줄기까지 보인다.

▲ 구룡산 정상 직전 (정상 서쪽 50m 전)

▲ 구룡산 북쪽 자락에 있는 개암약수터

구룡산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개포시영아파트 방면으로 내려왔다. 정상이란 자리가 좋긴 하
지만 너무 오래 머무는 것도 그리 좋지는 않다. 적당히 있다 내려오는 것이 다음 사람을 위해
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허나 사람은 신(神)과 동물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존재라 그 진리를 모르고 정상이란 자리를 오래 독차지하려고 한다. 너무 욕심을 부리
면 반드시 탈이 생기기 마련이건만 그걸 탈이 생긴 이후에나 깨닫는 것이다.

정상에서 개포시영아파트 방면 산길은 경사가 좀 있다. 내려가는 길이라 망정이지 만약 이 코
스로 올라갔다면 땀 꽤나 흘릴 뻔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내려가니 대모산과 구룡산에 널린 약
수터의 하나인 개암약수터가 나온다. 불국사 약수터 이후로 2번째로 만나는 약수터로 수질은
아직 이상이 없다고 하여 물을 바가지에 가득 담아 흔쾌히 마셔본다. 안그래도 날씨도 덥고 가
져간 음료수가 다 떨어져 갈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 갈증을 싹 풀어주니 몸과 마음이
싹 시원해진다. 약수터 부근에는 동네 사람들을 위한 체육시설이 있다.

개암약수터부터는 흥분한 산길도 진정을 되찾는다. 그 길을 5분 정도 내려가니 넓직한 오솔길
이 나오고 그 길을 조금 가면 차량들의 굉음이 들리면서 구룡터널교차로가 나온다. 일원역에서
시작된 대모산, 구룡산 나들이는 여기서 이렇게 마무리가 된 것이다. 총 소요시간은 불국사 관
람시간을 포함해 3시간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개천절 맞이 강남 대모산, 구룡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대모산, 구룡산으로 오르는 산길 기점 (불국사, 일원동은 앞서에 언급했으므로 제외)
① 염곡동(청계산입구3거리) - 지하철 7호선 논현역 중앙차로 정류장과 2호선/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신분당선 양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40, 407, 440, 462, 470,
471, 9404, 9408번 시내버스를 타고 내곡동주민센터나 하나로마트(코트라) 하차
(9404, 9408번은 내곡동주민센터 하차)
② 구룡터널교차로 - 141, 406, 2413, 4425, 6411번 시내버스를 타고 개포우성아파트나 개포주
공1단지 하차
* 지하철 3호선 매봉역(4번 출구)에서 406, 4435번 시내버스 이용
③ 개포동 구룡마을 - 406, 420, 472, 4412. 4435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룡마을 종점 하차
* 지하철 3호선 도곡역(4번 출구를 나와서 왼쪽으로 100m 가면 그랑프리백화점 정류장이 있음)
에서 472, 4432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분당선 개포동역(7번 출구)에서 420번 시내버스 이용
④ 수서역 - 지하철 3호선/분당선 수서역 6번 출구를 나오면 대모산 산길로 이어진다.
⑤ 세곡지구(LH강남힐스테이트아파트) - 논현역, 강남역, 양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440번,
3호선과 분당선 수서역(6번 출구)에서 2412, 3425, 강남03번 마을버스를 타고 세곡중학교(
세명초교) 하차


▲ 구룡산 오솔길 (개포시영아파트에서 구룡산으로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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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길과 맨발축제의 영원한 성지, 대전 계족산 (장동산림욕장, 계족산황토길, 계족산맨발축제, 계족산성)




' 대전 계족산 가을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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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족산의 자랑, 황톳길


 

가을 형님이 한참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10월 한복판에 대전(大田) 제일의 명소
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는 계족산(鷄足山)을 찾았다.

아침 해가 뜨기가 무섭게 대문을 나서 동네 전철역인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탔다. 너무
일찍 집을 나선 탓에 시간이 무척 여유로워 새벽 기운으로 약간은 쌀쌀한 전철에 의지하여
수도권 최남단인 평택까지 쭉 내려갔다. 그런 다음 남쪽 어딘가로 향하는 무궁화호 열차로
갈아타고 대전의 북쪽 관문인 신탄진(新灘津)역에 두 발을 내렸다.

신탄진역에서 대전 도심으로 들어가는 대전시내버스 2번(급행, 봉산동↔옥계동)를 타고 신
대주공아파트(회덕동)에서 하차, 길 건너편에서 장동으로 들어가는 대전시내버스 74번으로
환승했다.
그 버스를 타고 마치 뱀 허리에 올라탄 듯, 구불구불한 장동고개를 넘으니 논과 밭이 펼쳐
진 장동(長洞)이 수줍은 듯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장동은 계족산에 꽁꽁 감싸인 분지(盆地)
로 속세로 나가는 길은 오로지 장동고개가 유일한데, 대전 도심이 멀리도 아니고 바로 코
앞이건만 도심 지척에 이런 산골마을이 숨겨져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곳이 만
약 서울에 있었다면 그 놀라움은 그야말로 핵폭탄급이었을 것이다.

장동1구를 지나 장동산림욕장에 이르니 승객들 모두 버스에서 내린다. 산림욕장 입구는 겨
우 2차선 도로로 관광객들의 차량이 도로 양쪽과 산림욕장 입구(이하 입구) 주차장을 이미
만땅으로 채운 상태였다. 하여 행사장 주차요원들은 차량들을 장동2구나 장동1구로 보내고
있었고, 관광버스는 공간이 조금 있는 장동2구 쪽으로 유도를 했다. 산림욕장 방향은 오로
지 행사 관련 차량들만 출입을 시켰다.

나와 같이 계족산을 거닐 남쪽 사람들은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아 입구에서 1시간 정도 멍하
게 기다렸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던지 체감상 며칠은 기다린 기분이다.
계족산과 그곳의 대표 축제인 맨발축제, 둘레길(황톳길) 때문에 1분이 멀다하고 천하 각지
에서 차량들이 몰려들고 사람들도 성난 파도처럼 꾸역꾸역 밀려들어와 이곳의 인기를 가히
실감케 한다.
드디어 남쪽에서 일행을 담은 관광버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버스를 보니 얼마나 반갑던
지, 그제서야 나는 혼자를 면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계족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계족산 맨발축제의 현장 장동산림욕장

▲ 장동산림욕장 정문

대전 도심의 대표적인 산림 휴양지인 장동산림욕장은 계족산성 서쪽 산자락에 자리해 있다. 계
족산의 너른 숲 148ha를 산림욕장으로 꾸며 1995년 6월에 문을 열었는데, 자연휴양림과 비슷하
긴 하나 숙박시설을 갖추지 않아 그냥 산림욕장을 내세우고 있다.
도심과 가까운 잇점으로 당일치기 나들이/휴식 장소로 널리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천하 명소로
격하게 떠오르고 있는 계족산 황톳길을 비롯해 체육/모험시설과 임간(林間)교실, 숲속의 문고,
잔디광장, 야외무대, 운동기구, 야생화단지, 물놀이장(매년 7~8월에 개장함) 등의 다양한 볼거
리와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청정한 계곡물이 산림욕장 한가운데를 가르며 금강(錦江
)으로 유유자적 흘러간다.

산림욕장 정문에서 20분 정도 들어가면 계족산 둘레길인 황톳길이 나타나며, 거기서 다시 30분
정도 발품을 팔면 대전 제일의 산성(山城) 유적인 계족산성이 모습을 비춘다. 반면 계족산 정
상(423m)은 여기서 거리가 좀 되며, 정상을 목표로 한다면 장동2구에서 들어가거나 법동(읍내
동)에서 접근해야 된다.
장동산림욕장과 계족산성은 따로 입장/퇴장 시간은 없으나 취사는 안되며, 도시락이나 간식을
싸오거나 산림욕장 입구에 있는 식당을 이용하면 된다.

산에 꽁꽁 감싸여 녹지가 풍부한 대전에는 이곳 외에도 만인산(萬仞山)자연휴양림, 장태산(長
泰山) 자연휴양림 등의 걸출한 휴양림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서 장동산림욕장이 가장 도심
과 가깝다.
특히 매년 5월(또는 10월)에 열리는 맨발축제는 이곳의 백미(白眉)로 대전 향토기업인 맥키스
컴퍼니(옛 선양, O2린 소주 회사임)에서 주최하고 있다. 그곳 회장인 조웅래가 직접 질이 좋은
황토를 구입하여 장동산림욕장과 계족산 둘레길에 넓게 황톳길을 다진 탓에 다른 흙길과 달리
황토색이 매우 진하다. 또한 계족산 맨발축제와 대전맨몸마라톤, 계족산 숲속음악회, 찾아가는
힐링음악회 등을 기획하여 선보이고 있고, 2014년부터 시작된 계족산 코스모스축제에도 후원을
하는 등 자신의 기업을 키워준 대전 시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있다.
오로지 돈과 회사키우기에만 눈이 어두워 노동력 착취와 온갖 비리만 일삼는 대기업들이 즐비
한 이 땅의 현실에서 그런데로 개념적인 회사라 할 수 있는데, 그 향토 기업의 적극적인 후원
으로 장동산림욕장과 계족산이 이만큼 성장한 거라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사진/서예전시로 분주한 장동산림욕장 산책로

▲ 계곡 건너 숲속에 자리한 임간학교

계족산 맨발축제(Barefoot Festa)는 2006년에 시작되어 매년 5월(또는 10월)에 2일 정도 열린
다. 이 축제는 크게 맨발 걷기대회, 문화예술제(숲속문화체험), 에코힐링 마사이마라톤(13km)
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숲속문화체험은 장동산림욕장 메인행사장에서 토우 만들기, 염색 체험,
연잎밥 만들기 등 각종 체험과 서예/사진전시회 등을 다루며, 숲속음악회 공연장에서는 연극과
악기 공연, 본 음악회의 중심인 뻔뻔(fun fun)한 클래식 공연이 열린다.
축제와 체험 이벤트는 따로 참여비는 없으며(에코힐링 마사이마라톤은 참가비가 있음) 그냥 가
서 즐기면 된다.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풍부하여 그것을 푸짐한 디저트로 삼아 계족산 황톳길과
계족산성 나들이를 즐기면 제법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숲속에 잠긴 호수 - 계곡을 막아서 만든 조그만 호수로 늦가을에
잠긴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하늘을 가린 아름드리 나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운 산책로

▲ 온갖 체험과 볼거리로 분주한 맨발축제 메인행사장
계족산 황톳길과 계족산성에 단단히 눈이 먼 나머지 메인행사장은 그냥 통과했다.

▲ 계족산을 찾은 속인(俗人)들의 황토빛 발자국 화석들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양말로부터 해방된 두 발을 황토에 묻혀 하얀 종이에 찍어 줄에 걸어놓은
것이다.발 크기가 좀 차이가 날 뿐이지 모습은 거의 비슷비슷해 발의 모습만큼은 서로가 평등
을 이루고 있다. 나도 한 줄기 발자국을 남길까하다가 신발을 벗기 귀찮아서 그냥 구경만 했다.


▲ 유난히 누런 계족산 황톳길

숲속음악회 야외무대를 지나 넓은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대전
의 꿀단지인 계족산 황톳길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장동산림욕장에서 이곳까지도 황토가 깔린
황톳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맛보기 버전이다.

계족산 황톳길은 2006년 맥키스컴퍼니 조웅래 회장이 깔아놓은 것으로 바로 그해 지인들과 이
곳을 오르던 중, 하이힐을 신고 오르고 있는 여성을 발견했다. 하여 자신의 신발을 그에게 빌
려주고 자신은 맨발로 흙길을 걸었는데, 그날 밤 귀가하여 아주 꿀밤을 잤다. 그 맨발의 첫 경
험이 너무 상큼하여 '이 좋은 것을 혼자 누리기가 아깝다' 생각해 바로 전국에 질 좋은 황토를
사들여 깐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황톳길은 계족산성을 품은 계족산 북쪽 봉우리를 둘러싼 순환형 둘레길로 14.5
km에 이른다. 길이 거의 느긋하고 폭이 넓으며, 황토가 두툼하게 입혀져있어 조금은 푹신하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땅의 기운을 느끼며 걷는 사람도 많다. 굳이 맨발축제가 아니더라
도 봄,여름,가을 언제나 맨발 산책이 가능하다. 맨발로 다니라고 황토를 입힌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차량의 접근은 불가하지만 길이 넓어 산악자전거의 출입도 가능하다.

황톳길 1바퀴를 도는데 4~5시간 정도 걸리며,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경치에 취해 사람에 취해
몽롱하게 걷다보면 그 길도 정말 짧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황톳길 중간에는 장동2구, 계족
산 정상, 절고개, 이현동, 대청호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는데, 절고개 갈림길에 이르면 대청호
가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 임도3거리 방면 계족산 황톳길

임도3거리 방면으로 황톳길을 따라가다보면 중간에 계족산성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한다. 산
성으로 오르는 길은 느긋한 황톳길과는 달리 속세살이처럼 무척이나 각박해 진땀을 빼게 한다.
처음이야 만만하게 시작해도 산성과 가까워질수록 본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길에
돌이 많아 이곳만큼은 맨발로 오르는 모험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산길을 10~15분
정도 오르면 나올 것 같지 않던 계족산성이 밑도리를 시작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 삼국시대에 조성된 대전 제일의 고성(古城)
계족산성(鷄足山城) - 사적 355호

계족산 북쪽 봉우리(해발 420m) 정상부에 자리한 계족산성은 길이 1,037m의 테뫼식 산성이다.
예로부터 백제(百濟)가 쌓은 성으로 전해졌으나 1998~1999년 발굴조사 때 백제 유물은 소수로
나오고 신라 유물이 무더기로 나와 신라가 쌓은 것으로 크게 보고 있다.

축성 방식은 충북 보은(報恩)에 있는 삼년산성(三年山城)과 비슷했으며,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 6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신라 토기라 적어도 6세기에 축성되었음을 가늠케 하는
데 문제는 위치이다. 하여 아직까지 논란이 많은 편인데,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백제의 도읍
인 공주(公州), 부여(扶餘)와 매우 가까운 곳인데다가 금강 서쪽이다. 비록 대전 동쪽인 옥천
관산성(管山城)까지 신라가 진출했으나 대전까지는 다소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으며, 백제가 작
게 쌓은 성을 신라가 6세기 중반 관산성 대승(554년)을 계기로 진출하여 크게 증축한 것을 백
제가 다시 탈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축성 주체가 아리송하니 그 논란을 살짝 피하고자
단순히 삼국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표시하기도 한다.

산성의 높이는 7~10m로 높은 편이고, 성문은 동문과 서문, 남문을 두었다. 우리가 들어온 곳은
서문터이다. 성내(城內)에는 남문터 부근에 봉수대(烽燧臺)터가 있고, 동벽 낮은 곳에는 백제
나 신라 때 것으로 여겨지는 우물터와 저수지터가 있다. 또한 장대(將臺)터를 비롯해 10여 곳
의 건물터가 나왔으며, 여기서는 고려시대 기와조각과 조선시대 자기파편이 나와 조선시대까지
그런데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천하 (1)
첩첩한 산주름 너머로 신탄진과 대덕테크노밸리, 전민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천하 (2)
산 밑에 잘익은 논이 바라보이는 곳이 장동2구, 그 산너머 구름 아래로
전민동과 유성(儒城)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천하 (3)
숲 너머로 대청호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백제가 망한 이후 백제부흥군이 활동하던 옹산성(甕山城)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조선 후기 이
후 버려져 단단히 헝클어진 것을 2000년 이후 서쪽과 남쪽, 동쪽 성벽 일부를 복원했다. 비록
먼저 쌓은 주체가 아리송하긴 하지만 삼국시대 후반에 축성된 성으로 대전의 전략적 중요성을
온몸으로 잘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지 대전 외곽에는 유난히 삼국시대 산성 유적이 많다.

계족산성이 정상부에 있다보니 조망 하나는 정말 일품이다. 서쪽과 북쪽에는 신탄진, 유성, 장
동 일대가, 동쪽으로는 대청호가 시야에 들어와 왜 이곳에 힘들여 성을 쌓았는지 십분이해가
된다. 게다가 지형도 험준하여 요새 자리로는 아주 그만이다.

대전에서 제법 하늘과 가깝고 동,서로 확트인 지형이다보니 해돋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어 대전
의 신년 해돋이 명소로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해돋이는 물론이고 일몰 풍경도 아름다워 일
출과 일몰을 같이 누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계족산성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85일대


▲ 계족산성 서문터
신탄진 방향을 바라보며 위엄을 뽐냈을 서문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없이 녹아내리고 지금은 흔적만 아련히 남아있다.

▲ 잡초가 듬성듬성 돋아난 계족산성 성곽길
성곽의 높이가 꽤 되므로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기 바란다.

▲ 계족산성 남문터 주변

▲ 대자연이 성벽에 남긴 소소한 작품

▲ 평평한 계족산성 내부 (서문터 안쪽)

계족산성 내부(서문터 안쪽)는 가파른 외부와 달리 평탄하다. 푸른 잡초가 피어난 너른 공간에
산꾼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간식 시간을 갖고 있는데, 뜨거운 가을 햇살을 피해 다들 나무
그늘에 진을 치고 있다.
우리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피고 속세에서 가져온 도시락과 김밥, 과일 등으로 즐거운 점심 시
간을 누렸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거진 꿀맛이다. 그렇게 가져온 음식들을 정
신없이 처리하고 잠시 쉬었다가 산성과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했다. 마음 같아서는 산성을 1바
퀴 돌아보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다음을 기약하며 서문터를 거쳐 황톳길로 내려갔다.


 

♠ 계족산 황톳길과 숲속음악회

▲ 계족산 황톳길

계족산성으로 잠시나마 떨어진 황톳길로 다시 되돌아와 남쪽을 향해 걸었다. 길이 평탄하고 숲
이 터널을 이루어 몸과 마음이 즐거우며 길이 그렇게 힘들지도 않다. 게다가 맨발로 길을 더듬
을 경우 촉감 또한 일품이다.
기분 같아서는 황톳길 1바퀴 본전을 뽑고 싶지만 우리 일정이 그렇게 넉넉치가 못해(숲속음악
회를 봐야됨) 임도3거리에서 발길을 돌렸다.

임도3거리에서 막걸리를 파는 행상이 있어서 일행들과 막걸리를 들이키고 안주로 제공되는 반
찬(이름이 생각이 안남)을 잔뜩 집어 먹었다. 다시 돌아나오는 길에는 나도 맨발족에 가세하여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황톳길에 임했다. 맨발 도보의 성지(聖地)에
왔으니 맨발로도 한번 움직여줘야 되겠지. 가끔 맨발로 이런 곳도 다녀줘야 두 발도 흥분하여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하여 임도3거리에서 산림욕장까지 잠시나마 맨발의 청춘을 누렸다.


▲ 황톳길에서 만난 돌탑

▲ 하얀 천에 그려진 2글자 '좋다' - 황톳길이 정말 좋다.

▲ 황톳길에서 바라본 장동2구 평야와 건너편 산줄기

▲ 살짝 구부러진 황톳길

▲ 쉼터와 운동기구가 있는 임도3거리

▲ 황토머드체험장

계족산성 입구와 임도3거리 중간에는 황톳길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황토머드체험장이 있다. 맨
발로 진흙 체험장에 들어가 빨래한 이불을 푹푹 밟듯이 황토를 밟는 것인데, 그 느낌이 매우
시원하고 좋다. 그래서 자꾸 발이 가는 통에 길이 10m 남짓의 머드체험장을 몇 바퀴나 돌았는
지 모른다.
머드체험장에서 누렇게 뜬 발과 다리는 임도3거리 방면에 있는 약수터에서 씻어도 되고, 장동
산림욕장 숲속음악회 부근에 마련된 발씻는 곳에서 씻으면 된다.


▲ 숲속음악회 뻔뻔(fun fun)한 클래식 공연

계족산 황톳길을 일부만 돌고 장동산림욕장으로 내려온 것은 오후 4시부터 진행되는 숲속음악
회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나들이의 백미는 숲속음악회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했는데, 음악회가 4시부터 한다고 하여 그 시간에 맞춰 3시 반 정도에 숲속음악회 공연장
으로 내려왔다.
아직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부근 발씻는 곳에서 황토에 취한 발을 씻고 공연장으로 넘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시간이 되자 막이 열리면서 무대 바로 뒷쪽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남자
성악가 4명(테너, 바리톤), 여자 성악가 1명(소프라노), 여자 피아니스트 1명 등, 8명으로 이
루어진 맥키스오페라 단원들이 나타나 공연을 시작했다.

공연 이름인 '뻔뻔'은 뻔뻔하다가 아니라 재밌다는 뜻의 영어 fun이다. 이름은 진짜 기가 차게
잘 지었다. 이 공연은 2007년 조웅래 회장이 계족산 맨발걷기 후식용으로 고안하여 시작된 것으
로 매월 1회 무료공연으로 시작되었다가 2012년부터 4~10월까지 매주 토/일요일에 절찬리에 열
리고 있다. 미모가 돋보이는 여자 소프라노가 맥키스오페라 단장(단장은 바뀔 수 있음)으로 평
소에 접하기 힘든 클래식을 위트와 유머, 대화를 통한 연극의 요소와 소리와 율동을 통한 뮤지
컬 요소까지 더한 일종의 멀티콘서트 방식으로 1시간 동안 열린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드는 자연 공간에서 이렇게 음악회를 접하는 것도 참 신선한다. 공연에서는
우리나라 가극과 민요, 서양의 클래식과 노래를 선보여 흥을 돋군다. 공연이 재밌어서 앵콜 요
청이 빈번하며 그래서 지정 시간보다 노래를 1~2곡 더 부르기도 한다. 공연이 끝나면 기념촬영
시간까지 있는데, 서로 같이 찍으려고 아주 난리가 아니다. 우리 일행도 단체 사진을 같이 찍
었다.


▲ 홀로 나와 노래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 성악가

▲ 뻔뻔한 클래식 공연 ▼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소프라노가 단연 돋보인다. 시선도 남자들보다는
여자에게만 집중. 내가 남자라서 그런가?


▲ 기념촬영 시간 - 웃음을 놓지 않는 에코페라 단원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숲속음악회를 끝으로 11시부터 시작된 계족산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6시간 정도
머문 셈이다. 음악회가 끝나자 잠시나마 마음을 빼앗긴 계족산을 뒤로하며 산림욕장 입구로 나
왔다.
6시가 되자 남쪽에서 온 일행들은 관광버스를 타고 그들의 본거지로 떠났다. 그들이 그렇게 간
이후 나는 관광객들로 가축 수송을 이룬 74번 시내버스에 짐짝처럼 낑겨타 간신히 바깥으로 나
왔고, 이후 파란만장한 상경길을 거쳐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계족산 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 계족산 장동산림욕장(계족산성, 황톳길) 찾아가기 (2016년 10월 기준)
* 대전역(1호선 대전역 3번 출구)에서 급행 2번, 611번, 711번 시내버스를 타고 와동현대아파
트 하차 (512번을 탔을 경우 '회덕동주민센터'나 '대한통운'에서 74번으로 환승)
* 대전복합터미널 건너편에서 급행 2번, 611, 701번 시내버스를 타고 와동현대아파트 하차
* 신탄진역에서 급행 2번, 703번 시내버스를 타고 신대주공아파트 하차
* 와동현대아파트(신대주공아파트의 반대편 정류장)에서 74번 시내버스(장동2구↔대한통운, 읍
내동 현대아파트)를 타고 장동지구산림욕장 하차 (40분 간격으로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산림욕장 입구에 주차장 있음, 산림욕장 진입은 불가)
① 경부고속도로 → 신탄진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덤바위3거리에서 우회전 → 회덕역에서 유
턴하여 가변으로 빠져 장동로로 진입 → 장동산림욕장(계족산)

★ 계족산 장동산림욕장(계족산성) 관람정보 (2016년 10월 기준)
* 입장료와 축제 체험비, 주차비는 없음 (에코힐링 마사이마라톤은 참가비 있음)
* 매년 5월(또는 10월)에는 계족산 맨발축제가 열린다. 축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밑에 있는
사진을 클릭한다. (맨발축제 문의 ☎ 042-530-1836)
* 매년 10월 초에는 장동만남공원에서 계족산 코스모스축제가 있다. 코스모스꽃길 승마체험을
비롯하여 장원급제 체험, 전통공예품 만들기, 드론 날리기 체험, 전통/연극 공연, 코스모스
와 함께하는 가을 음악회, 산디마을 캠핑 1박2일 민박 등의 이벤트가 열린다.
* 장동산림욕장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63일원
(☎ 042-623-9909)


▲ 장동산림욕장을 나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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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뒷산을 거닐다 ~~~ 배산 (배산성터, 진달래밭)



' 부산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뒷동산, 배산 '

부산 배산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이자 우리나라 2번째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부산(釜山) 도심 한복
판에 배산(盃山, 254m)이란 조그만 산이 솟아있다.
이 산은 연제구 연산동과 수영구 망미동(望美洞) 사이에 자리해 있는데 남쪽으로 금련산
(金蓮山)과 바짝 이어져 있다. 허나 그 사이로 연산로와 주택가가 비집고 들어오면서 그
들의 각별한 사이를 끊어버려 졸지에 시가지에 포위된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하긴 배산
뿐이겠는가?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는 개발의 칼질로 강제로 섬이 되어버린 가련한 작
은 산들이 적지 않다.

산의 모양이 마치 술잔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이라 하여 배산이라 불리며, 254m의 높이로
대도시 도심 속에 박힌 뫼치고는 제법 높아 보인다. 허나 부산은 백양산(白羊山)과 승학
산, 시약산, 황령산 등 400~600m급 산들이 도심 속에 무수히 포진해 있어 254m 정도로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서울에 서식하고 있는 내가 부산 사람들도 잘 모르는 배산을 주목한 것은 이미 오래전에
일이다. 배산 서북쪽 자락에 연산동고분군(連山洞古墳群)을 2006년에 간 적이 있기 때문
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새까맣게 잊고 살다가 다시금 배산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여 인
연을 엿보다가 봄이 한참 기지개를 켜던 4월, 광안동에 사는 선배와 해운대(海雲臺), 송
정(松亭) 20리 해안산책(☞ 관련글 보러가기)을 즐기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 배산을 찾았
다.

송정에서 부산시내버스 141번(송정↔당감동)을 타고 배산역(3호선)에서 하차하여 무작정
배산이 보이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워낙 인지도가 낮은 동네 뒷산이라 이정표가 거의 없
어 여러 골목을 들쑤신 끝에 드디어 연산병원 부근에서 산길을 찾아 배산의 품으로 들어
섰다.

배산에는 무척이나 오래된 배산성(盃山城, 부산 지방기념물 4호)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성은 삼국시대 초반에 동래(東萊) 지역에 둥지를 튼 거칠산국(居漆山國) 때 축성된 것으
로 여겨져 그 나라의 조촐한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거칠산국은 1세기 후반까지 숨을 쉬다가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신라에게 병합되었으며
얼마 뒤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이 접수하여 가야(伽倻)의 일부가 되었다. 그 이후 가
락국 제왕(帝王)이 보낸 관리나 지역 세력이 배산에 머물며 이곳을 다스리다가 법흥왕(
法興王) 시절 다시 신라 땅이 되었다.
배산 서북쪽 자락에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고분인 연산동고분군(부산 지방기념물 2호)
이 있는데 이들은 배산성을 토대로 이 지역을 다스렸던 지배층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배산성은 산 정상을 둘러싸고 만든 테뫼식으로 산 허리 부분과 정상에 축성되었으며, 쌍
가락지 모양의
2중성으로 흙으로 다져진 토성(土城)이었다. 허나 신라 중기 이후 버려지
면서 억겁의 세월과 대자연의 집요한 괴롭힘으로 웅장했을 토성은 쏴르르 녹아내리고 토
성 기초 부분만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산 일대에서 가야~신
라시대 그릇 조각과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어 옛날 이곳의 상황을
희미하게 전해준다.

배산에는 이렇게 배산성터와 연산동고분군 외에 거칠산국 사람들이 썼다고 전하는 우물
터가 있다. 이 우물터는 근래에 정비되었으나 우리는 아쉽게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해 가
지 못했다.
그 외에 겸호대
(謙戶臺)란 명소가 있었는데 김겸호란 선인(仙人)이 노닐었다 하여 붙여
진 이름이라 전하며, 고려 말에 정추(鄭樞, 1333~1382)가 동래현령(東萊縣令)을 지냈을
때 그곳에서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위치가 막연히 배산 위라고만 할 뿐,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하지만 그가 지었다는 겸호대 시는 우리 곁에 잘 살아
남아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謙孝濯濯似蓮花
胸呑八荒氣凌霞
回首肯羨萬戶邑
翩翩來徒神仙家

겸효의 밝은 빛은 연화를 닮고
가슴으로 품은 기품 속세를 떠났구나
고개를 돌리니 만호읍이 바로 거긴데
휘적휘적 신선가를 오간다

지금은 주거지가 되버린 배산 동북쪽 밑 부산광역시립 연산도서관 자리에는 거울바위가
있었다. 바위의 이름 그대로 아마도 거울처럼 생긴 모양이다. 옛날에 어느 문둥병 환자
가 거울바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경악하여 그 바위를 내리쳤다고 하며, 어느 여인을
사모하던 남자가 그 바위에 비친 자신의 못생긴 얼굴에 발작하여 돌로 쳐서 깨뜨렸다고
한다. 그래서 바위는 흔적도 없이 한 토막 전설이 되어버렸다.


 

♠  배산 둘러보기

▲  배산으로 올라가는 길 (배산 정상 아래쪽)

배산의 경사는 정상 주변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가파르지만 그 외에는 완만하다. 지금은 시민
들이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산책을 즐기는 평등한 공간이 되었지만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 수염
태워먹던 시절에는 거칠산국의 지배층이 머물던 중심지였고, 신라나 가야의 일원으로 있던 시
절에는 지방 세력이나 관리, 군인들이 철통같이 머물던 차별된 공간이었다.
허나 배산의 존재의 이유가 하락함에 따라 평범한 뒷동산으로 버려지게 되었고 그렇게 세월의
저편으로 묻혀지게 되었다. 게다가 부근의 황령산, 금정산, 장산 등 쟁쟁한 산에 가려져 지역
사람들이 주로 찾는 동네 명소로 부산 내에서도 인지도가 미약하다.
그나마 2006년, 3호선 배
산역의 등장으로 배산의 존재감이 조금씩 부각되었을 뿐이다.

산은 작지만 시가지 한가운데에 봉긋 솟아있어 이곳에 오르면 수영구와 연제구, 동래구, 해운
대구, 부산진구 일대가 시야에 거침없이 박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야말로 조망(
眺望) 하나는 일품이다.


▲  배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천하 (1)
수영구(水營區) 지역과 광안리, 해운대 앞바다

▲  배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천하 (2)
배산 남쪽 봉우리와 금련산 사이에 비집고 들어선 연산3,6동과 망미1동 지역

▲  배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천하 (3) 연산2,4,6동과 부산진구 지역

▲  배산 동쪽 바위 봉우리
저 바위 봉우리 밑에 오래된 우물터가 있다.

▲  배산의 정상(254.9m)
이곳은 배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현장이다. 거칠산국과 신라, 가야 시절에는
지역 지배층들이 제사나 주요 의식을 지냈던 곳으로 여겨지는데, 봉우리
주변으로 배산성터 흔적이 얇게 남아있으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연산병원에서 여기까지는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렸다.

▲  정상 부근에 솟아난 돌탑
산악신앙(山岳信仰)의 애듯한 현장으로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쌓은
다양한 돌들이 차곡차곡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  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연제구와 동래구 일대
자라의 목처럼 삐죽 나온 북쪽 산자락 끝에 연산동고분군이 안겨져 있다.
저곳까지 배산의 영역이며, 연제구와 동래구 시가지 너머로 부산의
영원한 진산(鎭山), 금정산(金井山)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동래구와 해운대구 서부

▲  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연산동 동부와 해운대구 서부
반여동과 재송동 너머로 부산 동부의 으뜸 산, 장산(萇山, 634m)이 바라보인다.


▲  순백의 미학(美學)을 지닌 벚꽃으로 하얗게 타오르고 있는 배산 봉우리
(봉우리 꼭대기가 배산 정상)

▲  진달래로 가득한 연산4동으로 내려가는 길

배산 서쪽 자락에는 분홍 피부를 지닌 진달래꽃이 가득 피어있다. 이곳은 부산 진달래꽃의 성
지(聖地)로 아무렇게나 생긴 바위들도 많이 포진해 있어 고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도심 한
복판에서 이런 풍경을 만나기도 힘든 터라 갑자기 먼 지방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매년 4월만 되면 배산 일대에 진달래가 연분홍 향연을 펼쳐보이지만 아직까지 그들을 주인공으
로 하는 지역 축제나 행사는 없는 모양이다. 연제구청에서 한번 추진해보면 좋을 듯 싶은데 말
이다.


▲  배산 서쪽 자락 소나무숲과 하얀 바위들

우리는 배산 정상에서 서쪽 능선을 거쳐 연산동고분군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허나 통제되는 길
이 여럿 있었고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엉뚱하게도 연산4동 혜원정사 쪽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혜원정사는 배산 서쪽 골짜기에 자리한 절로 법등(法燈)의 역사는 짧다. 그 주변으로 천지암과
감천사 등의 조그만 절들이 들어서 있는데, 분위기가 산골에 들어온 듯 꽤 시골스럽다.
혜원정사를 지나면 연산4동 주택가가 펼쳐지며, 10분을 내려가니 연일시장이 나온다. 연산동고
분군은 이미 옛날에 인연을 지은 터라 딱히 미련은 없어 바로 광안동으로 복귀하여 그날의 나
들이를 마무리 하였다.

배산이 더 이상 개발의 칼질에 다치지 않고 지금 모습 그대로 부산 사람들 곁에 있어주길 고대
하며 보잘것 없는 본글을 마친다. ~~


※ 배산 찾아가기 (2016년 9월 기준)
* 배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럿 있으나 여기서는 연산4동 혜원정사와 연산6동 연산병원 코스만
  소개한다.
* 지하철 3호선 배산역 6번 출구를 나와서 1분 정도 가면 부산은행 연미지점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골목길(연수로213길)로 들어서 3~4분 쭉 들어가면 남양아파트로 아파트 입구에서 왼
  쪽으로 빠지면 바로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배산북로)로 3분 오르면 연산병원
  입구로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연미주택 뒷쪽으로 산길이 있다.
* 지하철 1,3호선 연산동역 8번 출구를 나와서 9분 정도 가면 연산터널 바로 직전에 혜원정사
  와 연산동고분군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 지시에 따라 오른쪽 골목길(고분로68번길)로
  들어서면 고분군으로 오르는 산길과 혜원정사로 이어진다. (연산동고분군은 연산터널 윗쪽
  에 있음)
* 배산성 소재지 -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산 38-6번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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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9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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