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산'에 해당되는 글 126건

  1. 2019.01.17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2. 2018.12.19 김신조 공비패거리가 넘어갔다는 도심 속의 푸른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 북악산길)
  3. 2018.11.07 서울 변두리에 숨겨진 신선한 명소, 궁동 정선옹주묘역~구로올레길 늦가을 산책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원각사, 지양산) 2
  4. 2018.10.23 군포 수리산, 반월호수에서 가을을 맞이하다 ~~~ (철쭉동산, 수리산산림욕장, 수리산둘레길, 수리사)
  5. 2018.10.05 서울의 동북쪽 지붕 ~ 수락산 벽운동계곡, 귀임봉 나들이 (염불사, 황자굴)
  6. 2018.09.15 둘레길의 정석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백화사, 마실길 느티나무, 화의군 이영묘역, 폭포동계곡)
  7. 2018.08.14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4
  8. 2018.06.12 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절집, 낙산 숭인동 청룡사 ~~~ (동망봉) 2
  9. 2018.04.12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둘러보기 ~~~ (능말 은행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묘역,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와 석불입상)
  10. 2018.03.16 소백산 자락에 작은 도시처럼 들어앉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 단양 구인사 (구인사 공양밥, 구봉팔문)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용궁사) '

용궁사 느티나무

▲  용궁사 느티나무

백운산 정상 백운산 산길

▲  백운산 정상

▲  백운산 산길

 


 

여름이 한참 물이 오르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인천(仁川)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를
찾았다.
영종도(永宗島)는 천하 제일의 국제공항으로 찬양을 받는 인천국제공항을 품은 큰 섬으로
공항을 닦고자 영종도와 용유도(龍游島) 사이의 너른 갯뻘을 매립하고 삼목도(三木島) 등
의 여러 섬을 엮으면서 섬이 커졌다. 하여 영종도하면 기존의 영종도 외에 용유도와 삼목
도를 포함해서 일컬으며, 이들을 묶어 영종▪용유도라 부르기도 한다.

영종도에는 백운산이란 뫼와 용궁사란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곳에 살짝 마음이 가서 겸사
겸사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공항전철(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을 타고
운서역이나 영종역에서 접근하는 것이 제일로 좋지만 운서역과 영종역은 환승할인 무적용
역이라 나 같이 서민들에게는 조금 부담이 된다. (공항전철의 영종도 구간은 수도권 환승
할인이 되지 않음)
그래서 집 앞에 있는 1호선을 쭉 타고 동인천역까지 이동하여 인천좌석버스 307번을 타고
영종도로 들어갔다. 시간도 좀 걸리고 영종도 강제투어가 조금 심하긴 하지만 환승할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조금 일찍 부지런을 떨면 된다.

영종도에 진입하여 백운산 그늘에 자리한 전소에 두 발을 내렸다. 전소는 영종동행정복지
센터와 초등학교, 고등학교, 우체국, 아파트 등을 갖춘 오래된 마을로 서쪽에는 백운산이
, 동쪽과 남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평지에 한참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고 있음)
백운산 나들이는 바로 이곳 전소에서부터 시작된다.


 

♠  전소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비석 무리들

▲  전소마을 비석 무리들

전소에서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서 백운산을 잠시 접어두고 마을 북쪽에 있는 구립하늘어
린이집을 찾았다. 그 앞에는 오래된 비석들이 3열로 각각 4기씩, 총 12기의 비석이 늘어서 있
는데, 이들은 영종도 곳곳에서 수습한 옛 영종진(永宗鎭) 첨사(僉使)의 비석으로 주로 선정비
(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가 주류를 이룬다.
선정비는 첨사의 착한 행정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고, 불망비는 첨사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 것
인데, 백성들이 진심으로 세운 것도 있겠지만 선정은 쥐뿔도 없음에도 첨사가 강제로 세운 것
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채운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종진은 조선시대에 영종도에 설치된 군사 기지로 처음에는 남양부(南陽府, 화성시 남양) 소
속이었다가 1875년 운양호(雲揚號) 사건으로 된통 당하면서 인천부(仁川府)로 넘어갔다. 이후
영종진이 폐지되면서 섬 전체가 부천군(富川郡) 소속이 되었다가 이후 옹진군(甕津郡) 관할로
바뀌었으며, 1989년 인천 중구(中區)에 편입되어 인천의 그늘에 있게 되었다.

이들 비석 중에 제일 우측에 유리막에 감싸인 조그만 철비(鐵碑)가 있는데, 그것이 나를 이곳
으로 오게한 양주성금속비(梁柱星金屬碑)이다. 돌로 만든 비석은 참 많지만 철이나 금속으로
만든 비석은 흔치가 않은 편으로 수도권에서도 철비는 이것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다보
니 다른 석비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 철비에만 자꾸 눈길이 간다.


▲  비석 무리의 홍일점, 양주성 금속비 - 인천 지방기념물 13호

이 철비는 높이 91cm, 폭 31cm, 두께 3cm로 황동(놋쇠)을 녹여서 만든 것이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영종진이 큰 피해를 입자 흥선대원군은 인천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 영
종진을 인천부 소속으로 넘겨 양주성을 영종진첨사<첨절제사(僉節制使)>로 파견했다.
양주성은 파괴된 진과 건물을 손질하고 방비를 튼튼히 했으며 전쟁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
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자 백성들은 크게 아쉬
워하며 놋그릇을 모아 1877년 9월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냥 석비(石碑)도 아닌 놋그
릇을 모아 철비를 세울 정도면 양주성의 선정이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  옆에서 바라본 비석 무리

▲  비석 무리 부근에 자리한 연자방아


▲  속세를 향해 길을 늘어뜨린 용궁사 숲길 ▼

비석 무리를 둘러보고 용궁사로 길을 향했다. 전소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용궁사로 인도하
는 숲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용궁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막길
이긴 해도 경사는 느긋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햇볕도 들어오기 힘들다.


 

♠  백운산에 안긴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 용궁사(龍宮寺)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15호

백운산(白雲山, 256m)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궁사는 개발의 칼춤 소리로 요란한 영
종도의 별천지 같은 곳이다. 바로 절 밑에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온갖 개발 소음이 난
무하지만 용궁사는 백운산의 비호로 그 소음을 거의 모르고 살 정도로 산자락에 푹 묻혀있다.

용궁사는 영종도의 몇 안되는 문화유적으로 670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원효는 그 시절 왕경<王京, 경주(慶州)>에 머물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상
대로 불교 대중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원효의 창건설은 속세살이만큼이나 참 부질
없는 소리이며, 그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다.
게다가 절에서는 1,300년 묵었다는 느티나무를 증거로 천년 고찰(古刹)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나무의 나이도 정확한 편이 아니며, 나무가 꼭 절 창건과 관련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 나무를 제외하면 오래된 것이라고 해봐야 요사와 관음전 정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된 것이 고작이다. 또한 창건 이후 19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도 남기지 못해 오랜 내력에 의
구심을 던지게 한다. 다만 백운산 봉수대 관리와 바다 조망을 구담사(舊曇寺) 승려가 담당했
는데 그 구담사가 바로 용궁사의 옛 이름이며, 옥불 전설에는 옛 이름의 하나인 '백운사(白雲
寺)'가 등장해 그것을 통해 적어도 고려나 조선 초에 조촐하게 법등(法燈)을 켰던 것 같다.

절의 사적(事蹟)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그것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과의 인연 덕분에 남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부인 민씨(閔氏)가 불
교 신자라 자연히 절 출입이 잦았다. 하여 서울과 경기도의 여러 절(화계사, 흥천사, 수락산
흥국사, 안성 운수암 등)과 흔쾌히 인연을 맺으며 기도를 하고 여러 승려와 교분을 쌓았는데,
용궁사도 그런 절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섬인데도 어떻게 인연을 지었는지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고 하
며, 1854년에 절을 중창했다. 이때 용궁사로 이름을 갈게 하면서 현판을 써주었는데 이는 관
음전 옥불이 바다 용궁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권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대원군은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약 10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용궁사와 대원군과의 인연은 요사에 걸린 그의 현판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니 창건설은
몰라도 대원군 중창설은 더 이상 왈가왈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원군 이후 딱히 적당한 내력은 없으며, 영종도가 인천에 편입되자 절과 경내에 있는 느티나
무가 인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칠성각, 용황각, 요사채 등 6~7동의 건
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수월관음도 등이 있다. 절 자체는 지방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절과 느티나무 때문
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음)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며 그렇게 깊은 골짜기는 아니지만 절을 둘
러싼 숲이 삼삼하여 바쁘게 변해만 가는 영종도에서 이곳만큼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다. 숲
이 속세의 소음을 걸러주니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윽하며, 절이 조촐한 규모라 눈에 쏙 넣
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근래에 절에서 백운산 정상을 잇는 산길을 손질하여 백운산 둘레길로 삼았는데 절을 둘러보고
둘레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백운산 정상에 이른다. 절만
둘러보고 가면 많이 허전할 것이니 백운산도 같이 겯드린다면 영종도 여로(旅路)를 더욱 알뜰
하게 꾸며줄 것이다.

※ 영종도 용궁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중구 지선 3번, 4번을 타고 용궁사입구 하차. 이 방법이 제
  일 최적이나 배차간격이 허벌나게 길고 영종역에서 서로 타는 곳이 틀리다.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203번, 598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598번은 크게 돌
  아가므로 203번이 나음)
* 서울 1호선 동인천역(4번 출구)에서 307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인천 1호선 동막역(3번 출구)에서 304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승용차
①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 금산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교차로에서 우회
   전 → 용궁사입구에서 우회전 → 용궁사 주차장
② 인천대교 → 영종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로 → 전소 → 용궁사입구에
   서 좌회전 → 용궁사 주차장
*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667 (운남로 199-1 ☎ 032-746-1361)


▲  용궁사 샘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샘터가 마중한다. 산사에 으레 있는 샘터이건만 요즘처럼 더울 때
는 보물급 문화유산보다 100배 더 반가운 존재이다.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백운산이 내린 약
수가 가득 담겨져 있는데,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해진
다.

▲  용왕의 공간, 용황각(龍皇閣)

▲  용황탱과 관음보살탱화

샘터를 지나면 석축 위에 세워진 용황각이 나온다. 용황각이란 이름은 여기서 처음 만나는데
일반적인 용왕(龍王)을 용황으로 격을 높여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을 황제로 높인 것
과 같은 이치~) 아무래도 섬이다보니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섬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우상인
용왕을 봉안한 것인데 용왕을 용황으로 높여 특별 대접을 하며 주민들의 용왕신앙을 돕고 있
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용황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밑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 샘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샘터 위에 석축(石築)을 다지고 건물을 세운 터라 주
춧돌의 키가 높으며, 북쪽에 트인 문을 통해 용황각으로 들어서면 된다. (동쪽 문 바깥은 허
공이라 추락 주의 요망)
용황각 불단에는 용황이 담긴 용황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용황의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반짝
반짝 윤을 내고 있으며, 용황탱 옆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이 그려진 탱화가 나란히 자
리해 있다.


▲  용궁사 느티나무(할아버지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9호

요사 앞에는 용궁사의 오랜 자연산 보물이자 이곳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 2그루가 넓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이들 나무 가운데 요사 동쪽에 자리한 나무는 나이가 무려 1,300년을 헤아린다고 한다. 나무
의 덩치가 참 크긴 하지만 1,300살로는 보이지 않고 훨씬 젊어보이는데, (한 600~700살 정도)
요즘 하도 거품이 많은 세상이라 나이 재측정이 필요해 보인다. 실제 예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나무로 손꼽히던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나이가 830년을 호가한다고 했지만 2013년
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다시 나이를 재본 결과 600년 정도 된 것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230년 정도의 적지않은 거품이 끼어있던 셈이다.

요사 동쪽 느티나무는 높이 20m, 나무둘레 5.63m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여기서는 할아버지
나무라 불린다. 그리고 요사 북쪽 느티나무는 할머니나무라 불리는데 덩치는 할아버지나무보
다 작으며, 그 나무보다 후대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할아버지나무는
할머니 나무쪽으로만 늘 가지를 뻗는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옛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
낙네들의 치성 장소로 애용되었는데, 절이 있기 전부터 기자(祈子) 신앙의 현장으로 널리 쓰
인 듯 싶다.
이후 절이 들어서면서 예불을 먼저 올리고 용황각 밑의 약수를 마신 다음 할아버지나무에 기
원을 하는 순서로 변경되었으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서쪽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할아버지나무)

▲  요사 북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할머니나무)


▲  용궁사 요사(寮舍)

두 느티나무 그늘에 자리한 요사는 대원군이 1854년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관음전과 더불
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
대중방(大衆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건물 동쪽에는 툇마루 2칸을 두었으며,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벽으로 막았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용궁사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용궁사로 바꿀 것을 제
안하며 친히 써준 것으로 그의 호인 석파(石坡)가 쓰여있어 대원군과의 진한 인연을 가늠케
한다. 그는 어찌하여 바다 건너 이곳까지 애써 인연을 지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흥선대원군이 1854년에 남겼다는 '용궁사' 현판의 위엄
용궁사에서 느티나무 다음으로 애지중지하는 존재로 이 현판이 없었다면
대원군 중창설도 자칫 신뢰를 잃을 뻔 했다.

▲  두목 포스가 느껴지는 묘공(猫公)의 위엄

요사에는 용궁사에서 기르는 누런 털의 묘공(고양이)이 있었다. 요사와 할배나무 주변을 순찰
하면서 여름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니 묘공 특유의 관심 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여 잠자리를 잡아서 조공(?)으로 바칠려고 했으나 이곳 잠자리는
눈치가 100단인지 하나도 잡지 못했다. 한때 외갓집이 있는 단양(丹陽) 시골의 잠자리 씨를
거의 마르게 할 정도로 잠자리를 잘 잡았는데, 이젠 나도 늙은 모양이라 오히려 그들에게 희
롱을 당할 판이다.

묘공 하나가 요사 툇마루에 앉아있다가 더운지 아랫 돌에 벌러덩 누워 강렬한 포스를 보이니
마치 두목 포스 같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내를 지키는 그들이 있기에
용궁사는 오늘도 무탈하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용황각 뒤쪽에는 가건물로 된 대웅보전이 있다. 이곳은 관음도량을 칭하는지라 정식 법당(法
堂)은 관음전으로 2000년 이후 합판으로 대웅보전을 지어 새로운 법당으로 삼았으나 건물의
볼품은 많이 떨어진다.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지장보살상,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 부분은 종무소(
宗務所)로 쓰이고 있다.

▲  포근한 인상의 석가3존불

▲  조금은 빛바랜 신중탱(神衆幀)

▲  한참 몸단장 중인 관음전(觀音殿)

▲  관음전 뒤쪽에 자리한 석조관음보살입상

요사 바로 뒤쪽에는 이곳의 법당인 관음전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관음전은 대원군
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요사와 함께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보수공사 중으로 불단에 있던 관음보살상은 칠성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으며, 김규진(金圭鎭
)이 쓴 주련(柱聯)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관음전에는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玉佛)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아련하게 전해온
다.
때는 조선 중기(또는 후기)의 어느 평화로운 날, 영종도 월촌에 어부(漁夫) 손씨(또는 윤씨)
가 살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날도
바다로 나가 그물을 치며 대어를 기대했다. 허나 원하는 물고기는 없고 왠 옥불 하나가 걸려
든 것이 아닌가? 이에 어부는 단단히 흥분하여
'물고기는 하나도 없고 왠 이런 게 걸리고 앉았냐!'
투덜거리며 옥불을 바다에 내던지고 다시 그물을 쳤다. 그런데 그물을 건져올리니 아까 옥불
이 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육두문자 요란하게 내뱉고 다시 내던졌으나 이후에도 계속 옥불
만 그물에 걸려든다. 이에 어부는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불상을 백운사(白雲寺, 지
금의 용궁사)에 넘겼다.
그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운사 앞을 말이나 소를 타고 지나가면 무조건 멈춰서 움직
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절 앞을 지날 때는 말과 소에서 내려서 지나갔으며,
불상의 영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주변에 퍼져 육지에서도 많은 이가 찾아와 불전함이 매일 터
져나갈 정도였다. 또한 불상을 발견하여 절에 넘긴 어부도 이후 풍어(風魚)를 누리면서 부자
가 되었다고 전한다.

19세기 중반 용궁사를 찾은 대원군은 이 사연을 전해듣고 불상이 바다 용궁(龍宮)에서 나왔으
니 절 이름을 용궁사로 고칠 것을 제안하며 현판을 써주었다. 그 현판이 바로 요사에 걸린 그
것이다.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은 인근을 지나다가 침몰한 배에 있던 것이거나 절이 파괴되면서 버려
져 바닷속을 방황한 불상으로 여겨진다. 그 옥불이 있었다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느티
나무 제외)이 되었을 것인데, 왜정(倭政) 때 도난을 당해 지금은 없으며, 새로 만든 조그만
관음보살상이 그 자리를 조금이나마 대신한다.


▲  날렵한 처마선이 인상적인 칠성각(七星閣)

관음전 옆에는 근래에 지어진 석조관음보살입
상과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칠성각은 칠성(七
星)을 봉안한 건물이지만 칠성 외에 산신(山神
)과 독성(獨聖)도 함께 담고 있어 삼성각(三聖
閣)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음전 중수로 그곳
에 있던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가 이곳의 신
세를 지고 있었음)

칠성각에 봉안된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은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이
제법 역력하다.

▲  다른 산신탱과 달리 꽤 젊어보이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담긴 산신탱

▲  독성과 동자가 그려진 독성탱

▲  칠성 가족을 빼곡히 머금은 칠성탱


▲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76호
관음보살상 뒤에는 수월관음도가 후불탱으로 걸려있다. 그 탱화는 1880년에 축연
(竺演)과 종현(宗現)이 그린 것으로 3폭의 비단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화폭
규모는 세로 135.5cm, 가로 174.3cm으로 가운데 화폭은 102.2cm, 향좌폭
29.3cm, 향우폭 33.5cm으로 화폭이 제일 넓다.

▲  경내 뒤쪽에 자리한 소원바위

용궁사의 다른 명물로는 소원바위가 있다. 관음전 뒤쪽 산자락에 있는 이 바위(바위라기보다
는 커다란 돌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 위에 작은 돌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자석에 붙는 듯
한 무거운 느낌이 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가볍게 돌아가면 꽝~!!) 바위 앞에 하는
요령이 적혀있는데 우선 바위 뒤쪽에 놓인 불상 앞에 조공(돈)을 바치고 (역시나 돈이다~!!)
그런 다음 생년월일과 소원을 말하며 3배를 올리고 돌을 돌리라고 나와있다.
나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절이 나보다는 경제 사정이 훨씬 좋으니~~) 그냥 소원을 빌고 3배
를 하며 돌을 돌렸다. 기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이 순간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소원이 접수된 모양이다. 하여 다시 한번 해봤는데 역시나 무거웠다. 혹여 접수 대상이 아니
더라도 돌의 무거움은 누구나 같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기분상일까? 과연 소원 성취가 이루
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를 잠시 들뜨게 한다. (허나
현실은 소원 성취 그딴거 없음~~~)


 

♠  안개 낀 백운산(白雲山)을 오르다.

▲  용궁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백운산둘레길

용궁사에서 50분 정도를 머물다가 절을 등지며 백운산둘레길에 발을 들였다. 백운산 정상까지
오를까 말까 궁리를 하다가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용궁사와 둘레길만 보고 철수하
기에는 너무 싱거워 흔쾌히 정상까지 가기로 했다.

백운산둘레길은 영종도의 지붕인 백운산 주위를 도는 산길로 4.4km 정도 된다. 시작점은 접근
성이 좋은 용궁사에서 하는 것이 좋은데, 용궁사에서 2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둘레길과 작별하고 1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대체로
경사는 느긋한 편이다. 수목이 울창하여 햇볕이 들어올 틈이 거의 없으며 산바람도 넉넉히 불
어 땀을 제대로 털어간다. 다만 약수터가 없기 때문에 용궁사에서 물배를 채우거나 물통을 채
워 산행에 임하기 바란다.


▲  쉼터로 조성된 6각형 정자 (용궁사 부근)

▲  둘레길에 왠 연자방아?
1981년 12월에 용궁사 신도가 기증한 연자방아로 왜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이곳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절에 두거나 산 밑에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  잠시 미친 경사를 보여주는 둘레길

▲  백운산 봉수대(烽燧臺)터

둘레길과 정상 방면 산길이 갈리는 곳에 백운산 봉수대가 있었다. 이 봉수대는 서해바다의 동
태를 살피며 위급시 봉화를 피워 인천 철마산(鐵馬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알렸는데, 구담사(
용궁사) 승려(1명 또는 3명)와 봉수지기 2명이 봉수대를 지켰다고 한다.

서해를 지키던 당당한 모습의 봉수대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사라진지 오래이고 이곳과 정상
으로 가는 길목에 약간의 돌무더기가 남아있다. 여기서는 두께 1cm 정도의 경질와편 등이 나
오고 있어 봉수대의 옛 흔적을 희미하게 더듬을 수 있다.


▲  정상 동쪽에 자리한 헬기장

▲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

▲  백운산 정상 전망대

용궁사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백운산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
에는 전망대를 두어 조망(眺望)의 나래를 누리게 했는데,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안개가
자욱히 끼어 100m 전방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물급 조망을 기대하고 올라왔건만 서해바다가
빚은 안개의 심술에 그 기대는 산산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전망대에는 인천국제공항과 공항신도시, 용유도(龍游島), 서해바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
들이 보인다는 전망 안내문과 사진이 있지만 오리무중과 같은 안개가 그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려 전망 안내문이 참 무색하게 되었다.

▲  우두커니 서 있는 백운산 정상 표석

▲  백운산 정상 전망대


▲  안개 속에 몸을 가린 백운산 남쪽 봉우리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1)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2)

진한 안개에 털려 정체성을 잃은 정상 전망대를 벗어나 전소 쪽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보이는
것도 없으니 더 머물러봐야 의미도 없고, 시간도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내려갈 때는 동남쪽 전소 방향으로 내려갔는데 이 길도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안개가 자욱해
도 전방 50m 까지는 보이기 때문에 하산에 별로 무리는 없었다. 야속한 안개를 뚫고 20분 정
도 내려가니 산속에 묻힌 집이 나오고, 군사 훈련시설을 지나니 울퉁불퉁했던 흙길은 끝나고
신작로가 앞에 펼쳐진다.

신작로를 따라 시골스러운 전소마을 서쪽을 지나면 영종자이아파트와 영종국제물류고등학교가
나오고 영종동의 주요 간선도로인 운남로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영종도 백운산 나들이는 바다 안개를 뒤로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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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공비패거리가 넘어갔다는 도심 속의 푸른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 북악산길)

 


~~~ 서울의 듬직한 허파이자 상큼한 숲길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남마루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남마루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호경암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  호경암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가을이 여름 제국을 몰아내고 천하를 막 접수하던 9월의 끝 무렵에 일행들과 북악산(백악
산) 북악하늘길을 찾았다. 이곳은 김신조루트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2010년에 처음 발을
들인 이후 매년 1~2회 정도 발걸음을 하고 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 한성대입구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1111번(
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城北洞) 서울다원학교 종점에 두 발을 내린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성북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
하는 조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의 심장부가 바로 지척이건만 그런 도심(都心)을 비웃듯
숲과 계곡이 어우러진 전원(田園) 풍경이 도시에서 오염된 안구를 어루만진다. 길 옆에는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부르며 흘러가는데 이 물줄기는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간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와 약간의 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그
산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  우정의 공원에서 북악산(백악산)으로 인도하는 골목길(성북로31가길)


 

  북악산 북악하늘길 입문

▲  도심과 성북동을 바짝 이어주는 삼청터널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도심 북쪽인 삼청동(三淸洞)을 이어주는 2차선 땅굴이다. 이곳은 성북동
의 가장 막다른 구석으로 북악산(백악산)의 산세가 칼처럼 솟은 곳이라 오르기가 좀 각박하다.
그런 구석진 곳에서 다른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듯 넘어갈 수 있는 한줄기 희망을 선사한 것이
바로 삼청터널이 되겠다.

이 터널은 군사정권이 절정에 이르던 1969년에 삽을 떠서 1970년 12월 30일에 완성되었다. 공
사비는 총 2억 4,900만원(민자 1억 9,900만원, 시비 5,000만원)으로 당시 성북동에는 차지철
을 비롯한 군사정권의 실세들이 여럿 살았는데 그들의 청와대 접근 편의와 땅값 상승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그 시절 성북동과 삼청동은 한적한 동네로 두 동네를 이을
터널의 필요성은 그다지 없었다.
터널이 뚫리자 안그래도 졸부들로 가득한 성북동의 땅값이 백두산처럼 치솟아 금싸라기 땅이
되었고,
성북동과 청와대, 서울 도심간의 접근이 한결 편해지면서 대원각, 삼청각 등의 고급
요정과 식당들이 아주 재미를 보았다.

산간지방의 조촐한 터널 같은 삼청터널은 길이 302m, 폭 8.5m(2차선)로 오로지 차량만 들락거
릴 수 있다. 예전에는 권력층과 돈 많은 작자들이 주로 이용하던 터널이었지만 시대가 바뀌고
성북동이 도심 속 명소로 크게 각광을 받으면서 나들이와 드라이브를 즐기려는 차량들이 크게
늘었다. 허나 터널도 그렇고 도로도 그렇고 확장은 커녕 여전히 2차선을 고수하고 있어 휴일
에는 꼬리에 꼬리를 잡고 굼벵이 속도로 가는 차량의 행렬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삼청동과 북촌으로 이어지지만 걷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억지로 터널
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한다. (벌금 내야됨) 차라리 쿨하게 택시를 타고 넘어가던가 숙정문안
내소에서 한양도성 북쪽 산길을 타고 말바위쉼터나 와룡고개(와룡공원)를 넘어 북촌으로 넘어
가길 바란다.


▲  삼청각(三淸閣) 정문

성북동의 가장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있다. 이곳
은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이 갈라지는 150m 고지로 도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이곳
을 감싸고 흐르는 공기부터가 무척 산뜻하고 청정하다.

삼청각은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사
정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
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청
각이란 이름은 북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는데, 1972년 7월 4일에 벌어
진 7.4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이 만찬을 가졌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권력
실세들의 공간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도심 속의 전통문화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
리하고 있다.

한때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고 전통문화를 즐
기며 식사와 차 1잔의 여유, 혼인, 돌잔치 등을 가질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현장
으로 이는 길상사(☞ 관련글 보러가기)란 절집으로 변신한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이곳은 오래된 문화유산도 아니고 비록 속세에 개방되었다고 해도 비싼 이미지는 여전히 깃들
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의 후덜덜한 음식/차 가격과 행사 비용은 서민들에게는 그리 호락호
락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서울의 허파인 북악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곳으로 20세기
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2007년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조림 표석 (숙정문 안내소 부근)

▲  숙정문 안내소로 인도하는 숲길 (홍련사~숙정문 안내소 구간)

▲  숙정문안내소

홍련사와 삼청터널 사이로 난 산길을 오르면 북악산 전면개방 조림을 기념하는 커다란 표석이
마중을 한다. 지금은 사라진 어느 전(前) 대통령이 남긴 것이라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
서 기념촬영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그 표석을 지나면 북악산 주능선의 주요 관문인 숙정문안
내소가 고개를 내민다.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안내소를 지나 직진하면 숙정문(肅靖門)과 주능선, 북악
산 정상(342m)으로 이어지며, 안내소 직전 왼쪽(남쪽) 길은 한양도성의 북쪽 산길로 말바위나
와룡공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오른쪽(북쪽) 길이 김신조루트로 통하는 북악하늘길이다.


▲  숙정문안내소에서 북쪽 능선으로 인도하는 북악하늘길 계단길
왼쪽은 통제 시절에 닦여진 군부대 계단, 오른쪽은 2011년 이후에 새로 닦여진
계단으로 어느 계단을 이용하든 상관없다.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은 통제가 여전한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달리 백성들의 출입이 자유
로운 편이었다. 그러다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공비 패거리가 서울에 침투한
이른바 1.21사태로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허리에 군사 작전 및 관광을 겸한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길)를 급하게 만들었다.

금지된 구역이 된 북악산 북부는 41년이 지난 2009년부터 홍련사에서 말바위를 비롯해 성북동
, 정릉동, 평창동에서
북악산길을 잇는 산길이 속속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2010년 2월 27일
에 홍련사에서 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을 손질하여 '북악하늘길'이란 이름으로 속
세에 내놓았다. 그중 제2산책로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루트라 하여 김신조루트란 이름으로
인기를 더하고 있으며, 북악하늘길의 백미이자, 안보관광지로 가장 볼거리가 많은 산길이다.
(실제로 김신조는 이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함)
이곳이 주능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24시간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팔
팔한 시절에 공개되어 이렇게 발을 들이니 기쁘기 그지 없다. 북한이나 휴전선처럼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무려 40여 년 동안 금지되어 속인들의 발길을 거부한 탓에 북악산 북부의 자연은 군부대로 인
한 일부의 훼손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하여 생태적인 가치가 높고, 자
연경관이 우수하며, 서울 도심을 비웃듯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어 '서울 속의 비무장
지대','도심 속의 허파','도심 속의 신세계'란 별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대부분은 통제 시절 군인들이 오가던 산길로
군사 시설과 그 당시 지어진 계단길이 줄지어 있으며, 제2산책로는 경사가 좀 각박하여 탐방
객의 편의를 위해 나무로 만든 등산로를 곳곳에 만들었다.

북악산 북쪽 능선을 개방하면서 닦여진 북악하늘길 코스는 다음과 같다.
*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 말바위쉼터 - 한양도성 북쪽 산길 - 숙정문안내소 - 성북천발원지
  - 북악팔각정 (1.4km)
* 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호경암 - 하늘전
  망대 - 북까페 - 하늘교 - 하늘마루 (2km)
*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 북까페 - 동마루 - 숲속다리 (640m)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둘러보기 (1)
삼청각쉼터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삼청각쉼터

숙정문안내소에서 북악하늘길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높다란 계단길이 나그네의 기를 주눅 들
게 만든다. 시작부터 각박한 계단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신조루트는 이렇게 첫 이미지에서 보
이듯 계단길이 유별나게 많아 숨을 적지 않게 차게 하는데, 이건 맛보기 버전이다. 여기서부
터 지친다면 김신조루트 산책은 어렵다. 자존심을 곱게 버리고 악으로 깡으로 올라간다면 김
신조루트는 그의 속살을 하나씩 벗겨주며 그대를 반겨줄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힘든 코스는
아님, 오르막과 내리막이 좀 반복되는 것이 있을 뿐임)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삼청각쉼터가 마중을 한다. 이곳은 삼청각의 서쪽이자 뒷통수로 소
나무의 산인 북악산답게 소나무 1그루가 쉼터 중간에서 운치를 가득 불어주며 솔내음과 선선
한 그늘을 드리운다. 여기서 잠시 삼청각을 비롯한 좁은 천하를 굽어보고 더 올라가면 제1산
책로와 제2산책로가 갈라지는 성북천발원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청각쉼터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삼청각과 성북동, 성북구 지역)
이제 시작 단계라 조망 범위는 매우 좁다. 허나 산길을 오르며 하늘과
보다 가까워질 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높아진다.

▲  성북천(城北川) 발원지

성북천은 북악산 동북쪽 자락에서 발원(發源)하여 성북동과 삼선교, 보문동, 제기동(祭基洞)
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7.7km의 지방 2급 하천이다. 조그만 하천의 발원지라 한강의 발
원지인 검룡소(儉龍沼)나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黃池)처럼 뭔가 특별하거나 요란한 것은 없
으며, 속세를 향해 흐르는 계곡 주변에는 바위들이 벌러덩 누워 있고 수심은 매우 얕다.

성북구에서 이곳을 생물 서식처로 가꾸고자 사람들의 계곡 접근을 통제하고 여러 식물을 심으
며, 수질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결과 가재를 비롯한 여러 수중 동물들이 좀 늘어났다. 하여 이
를 기념하고자 성북천발원지 바로 남쪽에 있는 다리 이름을 가재가 물에서 물장구를 치는 다
리란 뜻에
수고해(水鼓蟹)다리라 하였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기존의 제1산책로로 바로 북악팔각정과 빠르게
이어지며, 오른쪽은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제2산책로로 호경암을 거쳐 하늘교까지 이어지는 2
km의 산길이다. 이 산길은 중간중간 조망이 괜찮은 곳에 '~~마루'와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를 두어 천하를 마음껏 굽어볼 수 있게 했다.


▲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로 오르는 김신조루트 계단길

▲  김신조루트 서마루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까지는 속절없는 세상살이처럼 고통스런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나무
로 지어진 서마루에 오르면 삼청각쉼터보다 1단계 높아진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의자가 넉
넉하게 베풀어져 있어 잠시 숨을 고르며 천하를 굽어보기에 좋다. 이곳에선 북악팔각정이 가
까이에 보이며, 여기서 길은 동쪽을 향해 급하게 내리막길로 돌변한다. 그래서 처음 온 이들
은 '벌써 다 올라온거야? 이거 정말 싱거운데!' 생각을 하며 방심을 하지만 이는 북악산이 내
린 일종의 속임수이니 속지말자.
북악산이 북한산(삼각산)이나 관악산(冠岳山), 수락산(水落山) 등 서울 주변의 쟁쟁한 산들에
비해 키는 낮지만 그래도 악(岳)이 들어가는 서울의 북현무(北玄武)이다. 남산처럼 만만한 산
이 아니란 말이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소나무 너머로 성북동과 와룡공원, 성북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2)
북악산의 두터운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바라보인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3)
북악산 주능선과 남산, 서울 도심은 물론 멀리 관악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이름도 시원한 솔바람교

서마루에서 솔바람교까지 220m 구간은 각박한 경사의 내리막이다. 다 올라왔구나 싶겠지만 솔
바람교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흥분기를 보이며 무지막지한 오르막길로 나그네의 기를 죽인
다.
내리막길은 고난 앞에서 잠시 즐기는 여유라고나 할까..? 한라산(漢拏山)도 관음사(觀音
寺) 방면으로 한참 내려갈 때 중간에 오르막길이 나와 속인들을 잠시 좌절하게 만드는데 바로
그 이치이다.
남마루까지는 가파른 길이 계속 이어지니 방심의 늪에 빠지지 말자~~

솔바람교는 계곡 위에 걸린 나무다리로 그 이름이 순 우리말이라 정감이 참 깊다. 주변은 소
나무를 비롯해 온갖 수목이
삼삼하여 그 이름 그대로 솔바람이 나를 날려보낼 것 같다. 계곡
이라고 하지만 워낙 생긴 것이 부실하고 돌만 가득하여 이곳에 올 때마다 늘 황량한 모습을
보여주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다리를 내려오면 쉼터가 있으며 다리 북쪽 구석으로 가면 약수터가 있는데, 이곳이 김신조루
트의 유일한 샘터이다. 산에서의 약수터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라 갈증이 없어도 꼭 물
을 마시기 마련이나 무심한 가을 가뭄 때문인지 물은 이미 사라졌다. 북악하늘길에서 가장 첩
첩한 곳으로 북쪽과 서쪽, 동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쪽만 가늘게 뚫려있다.


▲  솔바람교 밑에 자리한 약수터 -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이름 없는 약수터이다.

▲  솔바람교 쉼터
이곳은 김신조루트의 중간 정도 지점이다.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둘러보기 (2)
솔바람교 ~ 남마루 ~ 호경암

▲  솔바람교 쉼터에서 남마루로 올라가는 계단길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느껴진다.


솔바람교에서 남마루까지는 다시 지독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그 거리는 약 600m 정도로 여
기가 김신조루트에게 가장 산행의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곳이다. 하긴 공비 패거리들이 살아
돌아가려는 일념으로 넘었던 곳인데 오죽 험하겠는가..? 게다가 이곳은 산길도 없던 구간이라
각박한 산세를 순화시키고자 나무로 길게 계단길을 닦고 짧은 간격을 두며 쉼터를 만들어 턱
까지 밀려오는 숨을 잠시나마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그렇게 잔뜩 흥분한 산길을 오르면 남마루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은 앞서 서마루보
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더 휼륭한 조망을 선물로 준다. 이곳 이후 흥분했던 산길은 진정
을 되찾으며 호젓한 산길의 기품을 서서히 회복한다.


▲  지옥 끝에 나온 극락, 남마루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성북동과 성북구, 동대문구, 성동구를 비롯한 서울 동부지역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2)
북악산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 관악산, 우면산 등이 보인다.

▲  서서히 진정되고 있는 산길 (남마루와 호경암 사이)

▲  호경암으로 오르는 계단길
이 구간은 거의 벼랑이라 그 옆구리에 계단 잔도를 깔았다.

▲  김신조루트의 상징물, 호경암(虎京岩)

남마루에서 360m 오르면 길 왼쪽에 가득 상처를 입은 큼직한 바위가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심을 바라보며 자리한 이 바위가 바로 김신조루트의 상징인 호경암이다. 바위는 그리
잘생긴 편은 아니고 그저 평범한 수준인데, 그냥 흔한 바위로 묻힐 뻔한 그가 일약 유명해진
것은 김신조 공비 패거리와 격전을 벌였던 남북분단의 서글픈 현장이기 때문이다.

청운동에서 경찰에게 털린 김신조 패거리는 북악산을 넘어 성북동 뒷산(북악산 북쪽 능선)으
로 줄행랑을 치며 몸을 숨겼다. 39대대 2중대는 호경암 주변을 수색하던 중, 등을 보이고 도
망치는 공비 3명을 발견, 호경암에서 교전을 벌이다가 인근 구진봉 주변에서 모조리 사살했다.

처단된 김신조 패거리 29명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군묘지(敵軍墓地)에
묻어주었다. 적군묘지는 6.25때 남한 땅에서 죽은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묻은 곳으로 김
신조 사건과 동해 잠수함 침투 때 죽은 공비들, 그리고 1987년 KAL기를 폭파시킨 폭파범도 같
이 묻혀 있다.


▲  남북분단의 비극이 안겨준 선물 아닌 선물 - 총탄 자국으로
계속 고통받고 있는 호경암


북악산이 서울 근교 경승지로 조선시대부터 귀족들의 별장과 기와집, 바위글씨가 즐비했던 탓
에 호경암도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허나 막상 확인해보니 1968년에 서울을 지켰던
맹호부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의 손길은 북악산 주능선과 서쪽(부암
동, 청운동), 남쪽(삼청동)에 치우쳐져 있을 뿐, 김신조루트와 북쪽 능선은 전혀 없는 것이다.
아마도 금표(禁標) 구역으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묶인 탓이 아닐까 싶다.

바위 밑에는 이곳이 격전지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는데, 1998년 1월 호경암 주변에서 복무하
는 군장병들의 애국심과 경각심을 크게 돋구고자 안내문을 설치했다고 하며, 울퉁불퉁한 바위
피부에는 당시 총격전으로 생긴 50여 발의 탄흔이 진하게 남아 당시에 긴장되고 숨막히던 상
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그런 악연으로 북악산의 이름 없는 바위는 김신조 사건의 격전지로 이
들을 격퇴한 부대 이름을 따서 호경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고, 이곳이 개방되면서 북악산
의 새로운 명물이자 이 땅의 비극적 현실을 담고 있는 산증인으로 몸값과 이름을 크게 올리고
있다. 좋은 쪽으로 이름을 높여야 되는데 안좋은 쪽으로 높이고 있으니 바위 자신도 참 우울
할 것이다. 바위를 보면 표정이 조금은 굳어져 있는데, 이 땅이 통일이 되면 그의 표정도 씨
익~ 펴지지는 않을까?


▲  이 땅의 비극은 저렇게 깊었다 - 바위에 박힌 탄흔

▲  호경암 정상에 비스듬히 박힌 호경암 표석
이곳에서 바라보는 천하는 앞에서 봐왔던 조망을 훨씬 뛰어넘는 1등급의 조망이다.
(이곳은 통제구역이긴 하나 그 통제의 정도가 느슨함, 낮은 난간만 넘으면 됨)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1)
북악산 일대와 성북동, 서울 도심, 남산 등이 바라보인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2)
성북동과 정릉동, 성북구, 중랑구, 강북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3)
평창동과 구기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형제봉 등이 바라보인다.

▲  호경암에서 하늘전망대로 인도하는 길
호경암을 지나면 더 이상 오르막길은 나오질 않는다. 가을에 잠긴 잔잔한
숲길만이 조용히 사색을 도울 뿐이다.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마무리

▲  김신조루트 북쪽에 자리한 하늘전망대

호경암에서 4~5분 정도 가면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지금까지 나온 '~~마루'
보다 덩치도 크고 조망도 괜찮은 편으로 그 이름은 북악하늘길에서 따왔지만 그만큼 하늘과도
가까운 곳이라 이름이 썩 어울린다.

서마루부터 호경암까는 성북동과 북악산 주능선, 서울 도심, 남산 등의 남쪽과 성북구와 중랑
구, 동대문구 등 동쪽이 주로 보였다. 허나 호경암을 경계로 능선 남부에서 북부로 넘어왔기
때문에 하늘전망대부터는 그와는 반대인 북쪽으로 파노라마가 바뀌면서 평창동과 구기동, 정
릉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를 비롯하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서울의 대표 졸부 동네인 평창동(平倉洞)과 구기동(舊基洞)을 비롯하여
탕춘대성 능선과 북한산 서부가 거침없이 시야에 박힌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평창동과 북한산 산줄기, 형제봉 등이 바라보인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정릉동과 길음동, 삼양동,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수락산 등이 흔쾌히
두 눈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4)
정릉동과 돈암동, 성북구, 노원구, 중랑구, 불암산 지역

▲  솔내음이 그윽한 북까페

하늘전망대에서 북쪽으로 110m 가면 북까페라 불리는 소나무숲이 나온다. 이곳에는 책장과 의
자 등이 닦여져 있는데 북한산과 북악산의 산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며 솔내음도 그윽하여 독서
도 무지 잘될 것 같다.
그런데 북까페보다는 '독서마당'이나 '소나무 책방','솔내음 책방','사색의 공간'으로 이름을
지었으면 훨씬 부드럽지 않을까? 다른 곳은 '~~마루(마루는 정상을 뜻하는 순 우리말)'나 '하
늘전망대' 등의 우리말을 쓰면서 왜 이곳만큼은 영어로 지었는지 철밥통들의 뇌 속이 궁금할
따름이다.

북까페 책장은 달랑 1개로 책은 많이 담겨져 있으나 상당수는 어린이와 청소년용 책이거나 소
설이다. 집에 버려둔 책이 있다면 썩혀두지 말고 이곳에 기증하는 것도 공익 차원에서 괜찮을
것이다. 다만 이곳의 책은 인간적으로 가져가지 말자. 그리고 책을 봤다면 의자에 두지 말고
반드시 책장에 넣기 바란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까페를 등지고 북쪽으로 직진하면 하늘교가 나오고, 북
까페를 가로지르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이다.

▲  조촐하게 생긴 북까페 책장

▲  북악산길 위에 걸린 하늘교


▲  하늘교 밑에 펼쳐진 북악산길
서울 도심 속의 산악 도로로 드라이브 코스로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야간에는
회색빛 대도시 서울의 야경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 하늘마루

북까페에서 1분 정도 가면 하늘교란 콘크리트 다리가 나온다. 다리 밑에는 2차선 북악산길이
펼쳐져 있는데 차들이 1분이 멀다하고 지나간다. 그 다리를 건너면 하늘마루가 나오니, 이곳
이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이다.

하늘마루에는 6각형 정자와 쉼터, 운동기구 등이 있으며,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서
쪽으로 가면 북악팔각정과 부암동, 창의문, 사직공원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가면 북악정과
성북구민회관, 아리랑고개 방면으로 통한다. 중간에 국민대나 배밭골, 성북동 길상사로 내려
가는 길이 있으며, 하늘마루를 조금 지나면 북한산 형제봉으로 가는 산길이 있어 북한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 산길은 북악터널 위쪽과 여래사(如來寺)를 지나며, 형제봉고개에서 북한
산둘레길과도 만난다. 이렇게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은 북악터널에서 서로 이어져 있고, 북
악산 북쪽 능선은 넓게 북한산의 남쪽 줄기로도 볼 수가 있어 성북동 북쪽에 자리한 길상사와
정법사(正法寺)가 삼각산(三角山)에 있음을 칭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마루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북한산과 형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온다. 그 길로 들
어서면 얼마 안가서 정릉동 배밭골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을 조금 내려가면 조망이
괜찮은 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전망대 이름은 딱히 없으나 여기서는 국민대 남쪽 전망대라
고 하겠음)


▲  국민대 남쪽 전망대

▲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산줄기
거대한 수해(樹海)를 이룬 북한산 산줄기의 녹음이 참 짙기만 하다.

▲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국민대를 비롯하여 정릉동과 길음동, 강북구, 수락산~불암산
산줄기가 두 눈에 들어온다.


▲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 동쪽 산줄기와 정릉동, 길음동, 성북구 지역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다시 한번 천하를 굽어본 다음, 여래사를 거쳐 형제봉 방면으로 이동
했다. 원래는 형제봉고개를 거쳐 평창동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시간도 늦어서 북악터널 북쪽
을 거쳐 국민대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도심 속의 허파이자 별천지, 북악산 김신조루트 나
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닫는다.

※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찾아가기 (2018년 1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서울다원학
  교 종점 하차. 여기서 10분 정도 가면 삼청터널이 나오는데 삼청각과 삼청터널 사잇길로 들
  어가면 숙정문안내소로 안내소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김신조루
  트이다.
*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구민회관(구민회관
  입구) 종점에서 하차, 여기서 북악산길을 따라 이동한다. (하늘마루까지 1시간 소요)

★ 북악산 북악하늘길 관람정보
*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단 출입금지 지역과 등산로 외에 구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 김신조루트는 약수터 1곳과 화장실 1곳(호경암 부근) 밖에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정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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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에 숨겨진 신선한 명소, 궁동 정선옹주묘역~구로올레길 늦가을 산책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원각사, 지양산)

 


' 늦가을 서울 궁동 나들이 '
(궁동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구로올레길)

▲  구로올레길 (와룡산~지양산 구간)

궁동생태공원 (궁동저수지생태공원)

▲  정선옹주 묘역

▲  궁동생태공원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산지도 어언 30여 년이 넘었다. 남들보
다 일찍 지리(地理)와 역마살에 두 눈이 뜨면서 10대 시절부터 서울에 온갖 명소를 쑤시
고 다녔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다녔지만 서울에는 아직도 내 손길이 닿지 않은 미답처(
未踏處)가 수두룩해 나의 자존심을 적지 않게 긁어 놓는다.

늦가을이 절정에 치닫던 어느 평화로운 날, 미답처 사냥을 위해 서울 장안 서쪽 끝에 위
치한 궁동을 찾았다. 이곳은 아직 발을 들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신선한 곳이다.
궁동(宮洞)은 구로구(九老區)의 일원으로 동/서/북쪽이 와룡산(臥龍山)과 매봉산의 야트
막한 산줄기에 막혀있고, 남쪽만 뚫려있는 반 분지 지형으로 3면이 산에 감싸여 있어 포
근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농사를 짓던 시골로 지금도 밭두렁
이 적지 않게 펼쳐져 있어 전원(田園) 분위기는 여전하다. 게다가 궁동생태공원, 정선옹
주묘역, 구로올레길 등의 참신한 명소가 숨겨져 있어 이번에 그들을 미답처 목록에서 싹
지우기로 했다.
참고로 궁동은 법정동명으로 행정동명인 수궁동(水宮洞)의 관할구역이다. 수궁동은 온수
동과 궁동을 합친 이름으로 흔히 생각하는 용왕의 수궁과는 관련이 없음을 밝힌다.

햇님이 하늘 한복판에 걸려있던 14시, 오류동역(1호선)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6613번 시
내버스(양천차고지↔대림역)를 타고 궁동의 좁디좁은 골목길을 가로질러 서서울생활과학
고 정류장에 두 발을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니 서울이 무색할 정도의 전원풍경과 함께 이번의 첫 메뉴인 궁동생태공원
이 바로 모습을 드러낸다.


 

♠  농업/낚시용 저수지에서 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궁동생태공원(궁동저수지생태공원)

▲  북쪽에서 바라본 궁동생태공원 1구역 (이하 1구역)

궁동 한복판에 자리한 궁동생태공원은 기존의 궁동저수지를 손질한 일종의 호수공원이다. 길
게는 '궁동저수지생태공원'이라 불리며 저수지 중앙에 도로(오리로)가 지나가면서 강제로 2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서쪽은 2구역, 동쪽은 1구역이라 불린다.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1구역 동
쪽에 조그만 골목길로 서서울생활과학고에서 회차하는 시내버스와 차량들이 오갔다.

궁동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꾸리고 있는 궁동저수지는 1943년에 농업용수 해결을 위해 왜
정(倭政)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들었다. 저수지 자리에는 원래 '벼락구덩이 우물'이라 불리
는 우물이 있었는데, 마치 벼락을 맞아 생긴 듯한 구덩이에서 물이 솟아나 그런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허나 궁동 일대 경작지가 종종 물부족에 허덕이자 왜정은 농업용수 해결과 쌀 수
탈을 위해 우물을 밀어버리고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우물에서 솟던 물이 자연히 저수지를 채워주면서, 저수지는 늘 마를 날이 없었고, 궁동을 비
롯해 이웃 오류동(梧柳洞) 주민들까지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풍수
지리(風水地理)적으로 산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든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까지
그럭저럭 띄게 되었다. 허나 왜정의 수탈은 나날이 심해갔고, 왜인(倭人)이 저수지를 소유하
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온갖 까칠함을 아끼지 않았다.

해방 이후 저수지는 국유지로 바뀌었으며, 인근 항동저수지와 함께 서울의 주요 낚시터로 인
기를 모았다. 이 땅에서 저수지란 존재가 참 흔한 존재이긴 하지만 정작 서울에서는 인근 항
동(航洞)과 궁동 2곳 밖에는 없었다. 저수지가 넓고 물이 깨끗하여 물놀이 수요가 많았고, 거
기에 연꽃까지 심으면서 한여름에는 연꽃의 화려한 향연까지 펼쳐졌다.

이렇게 서울의 외진 시골로 조용히 묻혀 지내던 궁동은 1970년대 이후 도시화의 물결이 몰아
치면서 많은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적지않은 경작지를 밀어내고 연립주택과 온갖 도시형 주
택이 들어서면서 농업 인구와 경작지는 그만큼 줄어들었고, 저수지는 자연히 낚시터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낚시꾼들에게 소정의 이용료를 받고 마을 기금으로 활용했으며,
저수지가 넓다보니 배를 타고 관리했다.

낚시터로 그런데로 밥값을 하던 궁동저수지는 2000년 이후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계속되는 궁
동 지역 개발로 시가지는 궁동저수지 남쪽까지 밀려왔고, 서울~부천간 도로 확충으로 궁동 북
쪽에 도로(신정로)가 뚫리면서, 부일로(1호선 경인선 북쪽 도로)와 그 도로를 잇는 신작로(오
리로)를 추진하게 되었는데, 그 도로가 저수지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저수지의 한복판을 건방
지게 가르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저수지는 2개로 갈라졌고 덩치 또한 반토막이 되었다.
이후 수맥에 문제가 생겨 저수지는 날로 야위어 갔고 수질까지 영 좋지 않게 변하면서 낚시터
로도 더 이상 부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여 점차 동네 사람들의 근심거리로 변해갔다. 궁동
의 꿀단지이던 저수지가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인해 꿀이 쏙 빠진 깨진 단지가 된 것이다.

천덕꾸러기가 된 저수지를 두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심하다가 구로구에서 2003년 9월, 저
수지와 주변 일대 10,205㎡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하였다. 즉 요즘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생태공원 카드를 내민 것이다. 그래서 39억을 들여 저수지 리모델링을 추진했으나 돈 문제로
공사가 지연되면서 2008년 4월 완성을 보았으니 이렇게 하여 자칫 폐기될 뻔한 위기를 극복하
고 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저수지 주변에는 25,000여 그루의 꽃과 나무를 심고 2구역 저수지 북쪽에는 3,379㎡의 생태습
지(궁동 생태습지원)를 닦아 생태공원의 풍경을 돕게 했다. 100여 마리의 비단잉어를 풀어 저
수지에 다시 물고기가 살게 했으며, 1구역과 2구역 저수지 위로 목재로 생태 탐방로를 만들었
다. 또한 저수지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정자(수궁정) 등을 두어 쉼터의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했다.
오리로로 저수지가 동서로 분단된 탓에 조금은 좁아 보이며, 저수지 2구역 서쪽 야산에는 궁
동을 호령했던 정선옹주와 안동권씨 묘역이 자리해 있어 같이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궁동을 넘어 이제는 구로구의 꿀단지로 고개를 든 궁동생태공원은 궁동 산신제를 비롯해 동네
의 여러 행사가 열리는 광장이 되었고, 지역 사람들의 쉼터이자 변변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
던 구로구의 단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  저수지를 남북으로 가르는 1구역 생태 탐방로
저수지의 중앙을 빈틈도 없이 관통하는 오리로와 달리 저수지에게도
숨쉴 틈을 주어 생태 탐방로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  쉼터가 놓인 생태 탐방로 중간
부분과 1구역 북쪽

▲  나른한 늦가을 오후를 깨우는
1구역 분수대


저수지 1구역과 2구역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소소하긴 하지만 서로를 이어주
는 수로 4개를 두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도로를 냈을 때 저수지를 배려하여 지금처럼 꽉막힌
둑처럼 공구리치지 말고 밑도리가 뚫린 다리로 놓았다면 저수지가 최악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
이다. 다행히 조그만 수로를 내어
죽어가는 저수지를 위로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1구역

▲  남쪽에서 바라본 1구역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다. (단 왼쪽에 오리로를 빼고) 갈대와 나무,
꽃, 전봇대, 그리고 푸른 하늘을 거니는 구름과 햇님, 달님도
수면을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궁동생태공원 2구역(이하 2구역)과 생태 탐방로
늦가을과 갈대가 너무 익다 못해 이제는 누렇게 말라가고 있다.


궁동저수지의 원흉인 오리로를 건너 서쪽으로 넘어가면 저수지의 나머지 부분인 2구역이 펼쳐
진다. 2구역은 1구역과 비슷하게 수면 위로 생태 탐방로를 남북으로 내었고, 8각형 정자인 수
궁정을 북쪽에 두어 경관을 돕게 했다. 그리고 1구역보다 갈대가 더 수북하게 자리고 있어 이
곳이 1구역보다 생태공원의 질감이 더 높아 보인다.


▲  서쪽에서 본 2구역과 생태 탐방로

▲  2구역을 장식하고 있는 상큼한 존재들
거북이 등짝에는 토끼가 귀엽게도 서 있다. 저들은 이곳과 전혀 관련은 없지만
이곳 행정동명이 '수궁동(水宮洞)'이다보니 그 이름에 아주 잘 어울리도록
별주부전(鼈主簿傳)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를 갖다 놓은 것 같다.

▲  저수지를 바라보고 선 2구역의 감초, 수궁정(水宮亭)

▲  돌탑과 솟대

솟대는 삼한시대 종교 성역이던 소도(蘇塗)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겁나게 흐른 지금
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대중적인 존재가 되었는데 솟대에는 보통 오리 등의 날짐승을 두어
하늘(신)과 인간을 잇는 중간 역할로 삼았다.
솟대는 그렇다치고, 솟대가 몸을 의지한 돌탑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돌을 차곡차곡 얹혀
서 오리지날 돌탑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아주 편하게 돌에다가 시멘트를 발라서 돌탑 형식만
띄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날림 돌탑이 어딨단 말인가? 구로구청의 철밥통 발상이 애
써 꿀단지로 일으킨 궁동생태공원의 옥의 티를 유발시켰다.

* 궁동생태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서 구로구 궁동 42-2, 42-4


 

♠  궁동을 호령했던 옛 주인들의 사후 안식처
정선옹주(貞善翁主) 묘역

▲  정선옹주/안동권씨 묘역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제일 앞쪽이 권세태묘)

궁동생태공원 2구역 서쪽 언덕에는 궁동을 호령했던 정선옹주와 그의 시댁인 안동권씨 일가의
묘역이 넓게 자리를 닦았다. 분명 묘역은 권협(權悏, 1553~1618)을 중심으로 한 안동권씨 묘
역이지만 공주가 묻힌 탓에 세상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정선옹주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제왕의
딸인 옹주의 위엄 앞에 권협 일가의 이름이 묻힌 것으로 권협이나 공주의 남편인 권대임이 아
무리 잘나도 왕실 공주보다 감히 높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묘역에는 모두 6기의 묘(권근중 묘까지 합치면 8기)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권협과 전주최씨 부인의 묘가 1단을 이루고 있고, 그 밑에 권협의 손자인 권대임
(權大任)과 정선옹주의 묘가 2단을 이룬다. 그 아래로 권대임의 부모인 권신중과 전주이씨 묘
(3단), 권대임의 아들 권진과 남양홍씨 숙부인(淑夫人)의 묘(4단), 권진의 장남 권이경의 묘(
5단), 권이경의 장남 권세태의 무덤(6단)이 차례대로 자리한다.
그리고 별도로 권협 묘역 북쪽에는 권대임의 삼촌이 되는 권근중(權謹中) 내외의 묘가 숨겨져
있으며, 이들 무덤은 기본적으로 묘비와 상석(床石), 문인석(文人石) 1쌍, 망주석(望柱石) 1
쌍을 갖추고 있다. (단 권대임/정선옹주묘는 호석에 장명등까지 지니고 있음)

묘역과 생태공원 사이 산자락에는 권대임의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생태공원 솟대 옆에는 권
협의 신도비가 자리해 있어 이곳을 비선거리 또는 비석거리라 불렸다. 권협을 기준으로 6대가
이어져 내려온 묘역으로 묘비와 문인석, 상석, 호석(護石), 장명등, 촛대석 등이 잘 남아있어
조선 중기(16~17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음)

그럼 묘역의 주인공이 되버린 정선옹주(
貞善翁主, 1594~1614)는 누구일까?
정선옹주(이하 옹주)는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7녀로 정빈(靜嬪)민씨의 소생이다. 정
빈은 어질고 예를 갖춘 여인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옹주 또한 그런 생모를 닮아서 공손하고 부
녀자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전한다.
옹주가 권협의 손자인 권대임에게 시집가자 선조는 궁동(궁골)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
하며 그곳에 살도록 했다. 그래서 공주의 위엄에 걸맞게 고래등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집이 궁궐만큼이나 컸다고 하여 동네 이름도 궁골, 궁동(궁마을)이 되었다.

옹주의 집은 궁동생태공원 북쪽인 서서울생활과학고 자리에 있었는데. 학교 정문 안쪽에 궁골
유허비를 세워 옹주의 고래등 저택이 있던 곳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이 집은 6.25전쟁까지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며, 당시 집의 면적은 700여 평, 집 크기는 50칸이었다고 한다.
허나 6.25로 인해 집은 모두 불타버려 가루가 되었고, 그 자리는 경작지로 쓰였다가 서서울생
활과학고가 들어앉았다. 생각 외로 옹주의 집은 1950년대 초반까지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생
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림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허나 궁동 토박이들의 증언과 집터에서 쏟아져나온 기왓조각과 도자기, 옹기 파편을 통해 집
이 제법 대단했음을 가늠케 하며, 집의 모습과 구조가 어떠했는지는 아직 조사를 벌이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궁집(가민속문화재 130호,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 내외의 집)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그것도 정답은 아니니 각자 취
향에 따라 조선 중기 옹주의 집을 머릿 속에 그려보기 바란다.


▲  정선옹주/안동권씨 묘역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와룡산 자락에 안긴 정선옹주 묘역은 명당(明堂)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질 정도로 아주 대단
한 명당 자리로 우리나라 100대 명당의 으뜸으로 꼽힌다. 궁동을 북쪽으로 감싸는 와룡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동쪽으로 뻗어간 줄기가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서쪽으로 흐르는 산
줄기가 우백호(右白虎)를 이룬다.
주산에서 좌우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정중앙에 고추처럼 생긴 짧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흐르니
그 산줄기 끝에 이들 묘역과 궁동저수지가 자리한다. 이 지형을 풍수지리적으로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형이라 부른다. 그냥 닭도 아닌 금닭이 알을 품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지형인가?

허나 한참 뒤에 일이지만 옹주의 집이 전쟁으로 박살이 나고, 그 후손도 딱히 두드러지는 인
물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10%가 부족했던 명당이었듯 싶다. 명당이나 묘자리에 관심이 있
다면 한번 가보기 바란다. 저수지로 인해 그런데로 배산임수를 취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전망도 확 트여있어 욕심이 확 날 정도로 자리도 괜찮은 편이다.


▲  고된 세월의 때가 입혀진 권대임(權大任) 신도비

정선옹주 묘역에는 2기의 신도비가 있는데, 그중 북쪽 산자락에 권대임 신도비가 서 있다. 궁
동생태공원과 묘역 중간에 자리해 있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신도비란 고위 관료와 왕족들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다. 이곳도 그 원칙을 지키고 있으며, 네모난 비좌(碑座)에 권대임의 일대기를
담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권대임(1595~1645)은 권협의 손자이자 권신중(權信中)의 아들로 자는 홍보(
弘輔)
이다. 서예를 매우 잘하여 선조 임금에게 자주 칭찬과 상을 받았으며, 1살 연상인 정선
옹주에게 장가들어 길성위(吉城尉)가 되었다. 허나 옹주는 1614년 20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
을 떠나 19살의 나이에 홀아비가 되고 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봉헌대부(奉憲大夫)가 되었으며, 1635년 선무공신(
宣武功臣)의 적손(嫡孫) 자격으로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터지자 못
난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간 공적으로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진되고 도총관(都摠管)이
되었으며, 1639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자신의 재화를 싹 털어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
혀간 사람들(특히 노인들)을 데리고 돌아와 칭송이 자자했다.
그가 세상을 뜨자 선무원종공신으로 유록대부(綏祿大夫)를 더해 정1품에 추증되었으며, 신도
비를 세워 그의 행적을 기렸다.


▲  권협(權悏) 신도비

궁동생태공원 솟대 옆에는 묘역의 최고 어른인 권협의 신도비가 있다. 형태는 앞서 권대임 신
도비와 비슷하며, 비석의 피부가 꽤 꺼무잡잡하여 고색의 기운이 진하다.

권협(1553~1618)의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
낸 권상(權常)의 아들이다. 1577년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
文院), 춘추관(春秋館) 등을 거쳐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1589년 전국에 괴
질이 유행하자 함경도로 파견되어 백성을 돌보고 제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염통이 쫄깃해져 좌불안석이 된 선조에게 서울을 끝까지 지킬 것을
강력히 건의했으나 왕은 거절했다. <선조는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겨 자신이 차고 있던 패검(
佩劍)를 하사했다고 함>
1596년 시강관(侍講官)과 응교(應敎)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터지자 급히 명나라로 파견
되어 원병을 청했다. 이때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정(李楨)은 '당신네 나라 지세를 알
아야 우리가 도울 수 있소'
무리한 부탁을 하자 별수 없이 조선 산천의 형세와 원근을 도면에
그려가며 막힘 없이 설명을 했다.
솔직히 명나라군은 왜군 조총의 밥으로도 아까울 정도의 쓰레기 수준으로 조선에서 온갖 민폐
를 아끼지 않았는데, 선조를 비롯한 상당수의 조선 위정자들은 명나라에 쓸개까지 다 내주며
지나친 사대주의를 일삼아 명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그러다보니 국가의 기밀이나 다름없던
조선의 지도를 명나라에게 그려주는 우를 범하고 만다.

조선 지도를 얻은 명나라 신종(神宗)은 흡족해하며 군사와 군량을 보냈으며, 원군을 끌고 온
공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604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선무원종공신(宣撫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길창군
(吉昌君)에 봉해져 전라도감사가 되었다. 1607년 예조판서를 거쳐 1609년 종묘(宗廟) 영건을
감수한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으나, 광해군(光海君) 시절에 홍문관(弘文館)의 탄
핵을 받으면서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다가 1618년 세상을 떴다. 그의 시호는 충정
(忠貞)이다.


▲  두툼하게 솟은 권진(權瑱)과 숙부인 남양홍씨묘 봉분
묘비를 세웠던 자리에 비석은 온데간데 없고 현란한 무늬의 비좌만 멀뚱히 남아있다.

▲  권진 묘역의 뒷모습 (저 밑에 권이경, 권세태묘가 보임)

묘역 가장 앞쪽에 자리한 권세태는 이 묘역의 막내로 권이경의 장남이다. 1659년에 태어났으
며, 1690년 식년시(式年試)에 을과로 붙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권세태의 아버지이자 권진의 아들인 권이경(權以經) 묘가 있는데, 그는 사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그런 아들과 손자묘를 굽어보는 권진은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장
남으로 돈령부봉사(敦寧府奉事)를 지내고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권신중(權信中)과 부인 전주이씨묘

▲  권신중과 전주이씨묘 뒷모습

묘역 3단에 자리한 권신중(1575~1633)은 자가 군집(君執)으로 권협의 아들이자 권대임의 아버
지이다. 부인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 이정필(李廷弼)의 딸이다.

1605년 증광시(增廣試) 생원과(生員科) 3등 45위로 합격하여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
고, 이듬해 의정부도사(議政府都事)가 되었다. 이후 형조좌랑(刑曹佐郞)과 강서현령(江西縣令
),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김제군수(金堤郡守). 단양군수(丹陽郡守) 등 여러 내/외직을 거
쳤고, 말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병으로 사양했다. 장남 권대임이 길
성군(吉城君)에 봉해지면서 좌찬성(左贊成)과 우의정(右議政)에 차례로 증직되었고, 이후 길
흥군(吉興君)에 봉해졌다. 그는 총명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말수가 적고 위엄이 대단했다고 전
한다.

권신중은 원칙대로라면 권협묘 밑에 있어야 된다. 허나 며느리인 정선옹주가 일찍 세상을 등
지자 일찍 묘역을 조성했는데, 아무래도 신분이 높은 공주이고, 그런 공주를 맞아들인 아들
권대임이 왕의 사위이기 때문에 권신중이 자리를 양보했다.


▲  권대임과 정선옹주묘

묘역 2단을 이루고 있는 권대임과 정선옹주묘는 같은 묘역임에도 다른 묘와 좀 차별화를 두었
다. 봉분(封墳)만 봉긋 오른 나머지 묘와 달리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장명등(長
明燈)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족이다보니 그런 파격적인 옵션을 달게 된 모양이
다. 역시 사람은 돈 많고 신분이 높고 봐야 된다.


▲  권대임과 정선옹주묘 뒷모습과 묘역 전경

▲  정선옹주묘 서쪽 문인석

▲  정선옹주묘 동쪽 문인석


▲  묘역의 어른인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최씨묘

▲  뒤에서 바라본 권협 내외 묘

묘역 1단에는 권협 내외의 묘가 자리해 자손들을 굽어본다. 묘 뒤쪽에는 권근중 내외의 묘가
자리해 있는데, 그곳까지는 알지 못해 살피지는 못했다.

구로구에서는 이곳과 궁동생태공원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역사/자연공원으로 삼고자 계획하고
있으며, 묘역을 지정문화재 등급인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고자 서울시와 협의를 했으나 아직
까지 비지정에 머물러 있다. 허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조선 중기 묘역
들이니 구로구와 후손들이 잘 나서준다면 지방기념물 자리를 딸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구로
구에는 이곳 외에도 많은 사대부 묘역이 궁동과 천왕동(天旺洞), 고척동(高尺洞), 오류동 일
대에 흩어져 있는데 그중 유순정(柳順汀). 유홍(柳泓) 묘역과 함양여씨 여계(呂稽) 묘역이 지
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궁동생태공원(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찾아가기 (2018년 10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온수역(8번 출구)에서 6613, 6616, 6716번 시내버스를 타고 서서울생활과학
  고(서울전파관리소)에서 내리면 바로 궁동생태공원이다.
  (6613번은 양천차고지 방향 차를 타야 되며, 6616번은 원각사입구에서 하차, 6613번과 6616
  번은 정진학교와 온수힐스테이트아파트로 크게 돌아가므로 6716번 버스를 타는 것이 빠름)
* 지하철 1호선 오류동역(3번 출구) 북쪽 오류1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6613, 6616번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정네거리역(1번 출구를 나가서 180도 뒷쪽)에서 6716번 시내버스 이용
* 정선옹주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54-2

 


 

♠  구로구의 지붕, 구로올레길을 거닐다

▲  궁동 서쪽 배밀 밭두렁

정선옹주묘역 서쪽에는 밭두렁이 펼쳐져 있다. 와룡산 산줄기에 동/서/북이 막힌 골짜기로 채
소밭과 비닐하우스가 가득해 갑자기 머나먼 시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골짜기에 일군
경작지의 모양이 마치 뱀과 같아서 또는 뱀이 자주 나타난다고 하여 '배밀'이라 불렸으며, 정
선옹주묘역 남쪽은 '양지말'이라 불렸다.
궁동 배밀은 서울 변두리에 널린 시골의 하나로 회색빛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이런 전원 풍경
은 눈을 맑게 하는 안약과 같은 존재이다. 특히 서울에서 만나는 전원 풍경은 더욱 그러하다.
다행히 천박한 개발의 칼질은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이미 사람과 건물, 차량들로 비대해진 서울에서 이런 시골은 꼭 필요하다. 괜히 성냥갑 아파
트나 잔뜩 짓지 말고 조금은 어수선한 밭두렁이나 반듯이 정비하여 동네 경작지나 주말농장으
로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다.


▲  원각사로 오르는 언덕길 (원각사 직전)

▲  원각사 직전에서 바라본 궁동

배밀 밭두렁 길을 따라 서북쪽으로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와룡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
은 원각사란 조그만 절이 모습을 비춘다. 산자락 숲속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런데로 풍기고 있는데, 옛날에 절이 있던 터로 '절안'이라 불렸으며, 원각사는 바로 그 옛
터에 세운 현대 사찰로 이곳에 있었다는 옛 절에 대해서는 딱히 전해오는 정보가 없다.


▲  원각사 요사(寮舍)와 미륵불입상

원각사(圓覺寺)는 60년도 안된 절이라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못했다. 구미가 당길만한 오
래된 보물이나 볼거리가 없어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늦가을이 만연하게 깃든 산사의 풍경이
너무 고와서 이번 나들이가 주는 보너스로 생각하고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숲속에 자리한 경내에 이르면 넓은 주차장이 먼저 나타나고 그 서쪽 높은 곳에 'ㄱ'모양의 요
사가 있다. 이곳은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는데, 그 북쪽에는 하얀 피부의 미륵불이 시무
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며 동쪽을 굽어본다.
미륵불에서 북쪽 오솔길로 가면 6각형 범종각이 있고, 그 길의 끝에 법당(法堂)이 있다. 기와
집으로 이루어져 전통 불전(佛殿) 양식을 취했으나 철과 알루미늄 등으로 집을 크게 불리면서
조금은 어색한 모습이 되었다. 법당 내부에는 석가여래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하며 3
존불을 이루고 있고 그 좌우에 지장보살과 칠성탱 등이 자리하고 있다.

* 원각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1-56 (오리로21가길 146, ☎ 02-2688-5421)

▲  서울을 굽어보는 미륵불입상

▲  6각형으로 빚어진 범종각(梵鍾閣)


▲  늦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원각사 법당
기존의 조그만 법당을 크게 확장하면서 저런 모습이 되었다.

▲  갖출 것은 다 갖춘 법당 내부 (석가3존불, 지장보살, 칠성탱)

▲  범종각 앞에서 바라본 원각사 요사 주변

범종각 옆에는 와룡산과 구로올레길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 있다. 절이 궁동 구석에 자리해 있
고 속세에 그리 알려진 절이 아니라서 좀 고적하긴 하지만 와룡산과 구로올레길로 마실과 나
들이를 나온 이들이 심심치 않게 지나다녀 고적한 절에 잠깐잠깐씩 활력을 불어놓는다.

범종각 옆 산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바로 산능선인데, 이 능선이 와룡산 능선으로 구로올레길
산림형 2코스가 지나간다. 동시에 서울과 부천(富川)의 경계선 역할도 겸한다.


▲  구로올레길 산림형 2코스 (원각사 뒷쪽)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濟州島), 그곳에는 담장길을 뜻하는 올레길이 있다. 그 올
레길을 시작으로 도보 산책길이 전국에 급속히 번져나갔는데,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많은 지
역에서 앞다투어 도보길을 내놓고 있다. 서울도 도보길의 성지인 북한산둘레길과 서울둘레길
을 비롯해 관악산둘레길, 강서둘레길, 동작충효길, 강동그린웨이, 아차산둘레길, 안산(鞍山)
자락길, 구로올레길 등이 있다.
도보길의 명칭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산을 낀 곳은 상당수 '둘레길'을 칭하고 있으며, '갈맷길
'이나 '산막이길','동작충효길','산꼬라데이길' 등 토속적인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구로올레
길은 그런 도보길 유행에 따라 구로구에서 야심차게 닦은 산책로로 둘레길을 칭하지 않고 제
주도를 따라 올레길이라 했다.

구로올레길은 기존의 산길과 숲길, 골목길, 하천길을 활용하여 도심형 코스 2개. 하천형 코스
3개, 산림형 4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가 찾은 길은 산림형 2코스로 온수역에서 궁동을 감
싸는 와룡산과 지양산 산줄기를 따라 매봉초교에 이르는 4.8km의 산길이다. 구로구의 지붕과
같은 곳으로 이중 와룡산과 지양산 남쪽 구간은 서울~부천의 경계선을 이루기도 하며, 접근은
온수역(5번 출구)과 정진학교, 원각사, 궁동3거리, 신정이펜하우스4단지, 매봉초교에서 하면
편하다.

우리는 2코스 구간 중, 원각사뒷쪽~궁동터널 북쪽 구간을 이용했는데, 이 구간은 전형적인 산
길로 경사도 거의 느긋한 편이며, 상당수가 능선길이다. 해발도 아무리 용을 써봐야 120~130m
정도이고, 숲이 무성하고 공기가 청정해 간단히 몸도 풀 겸, 마실 장소로도 아주 좋다. 허나
산길에 딱히 볼거리는 없으며, 그냥 나무와 꽃, 바위, 숲 너머로 펼쳐지는 조망(서울 구로구
와 부천 작동, 춘의동 지역)이 전부이다. 올레길 이전에는 동네 사람들이나 찾던 그들만의 숨
겨진 공간이었으나 올레길로 포장된 이후 조금씩 세상에 알려져 외지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  차돌바위 쉼터
의자 너머로 보이는 하얀 바위가 차돌바위이다. 그 유래는 모르겠음.

        ◀  작동터널 윗쪽 (수렁고개)
능선길이 상당수를 이루며 흘러가는 산림형 2
코스 구간 가운데 가장 쑥 주저앉은 구간이다.
그래서 여기서만큼은 급한 경사로 내려갔다가
다시 급하게 올라가야 된다.
저 밑에는 작동터널이 뚫려있어 온갖 차량들이
굉음을 부르짖으며. 저 양쪽으로 작동과 궁동3
거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다.


▲  작동터널 북쪽 (수렁고개)

▲  지양산 국기봉으로 오르는 올레길
겨울 제국의 도래를 앞두고 늦가을 약기운이 다된 나무들은 그동안 걸친 나뭇잎을
떨어트리며 늦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낙엽이란 우울한 이름을 단 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  지양산 국기봉
지양산 남쪽 봉우리에 신성한 태극기를 달고 국기봉이라 하였다.

▲  지양산 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산줄기 너머로 구로구와 양천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시내에서 별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제법 멀리 나온 것 같다.

▲  구로올레길 궁동3거리 북쪽

▲  구로올레길에서 지양산 생태순환길로 갈아탄 궁동터널 북쪽 갈림길

햇님이 뉘엿뉘엿 꽁무니를 빼면서 땅꺼미가 조금씩 약기운이 더해지자 잠시나마 정을 붙인 구
로올레길을 버리고 속세로 철수했다. 기분 같아서는 동쪽 종점인 매봉초교까지 가고 싶었지만
어둠에 잠긴 산길 산책도 썩 좋은 편도 아니고, 더군다나 야간 사진은 제대로 담기도 힘들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올 여운을 충분히 남기며
궁동터널 북쪽 갈림길에서 지양산 생태순환길로
갈아타 신정3지구 푸른마을3단지로 내려갔다.


▲  소나무가 가득한 지양산 생태순환길

▲  푸른마을3단지로 내려가는 지양산 생태순환길

지양산 생태순환길로 접어들어 6~7분 내려가니 어느덧 회색빛 도시가 보이기 시작한다. 시내
에서 고작 바로 옆 산, 그것도 높이가 낮은 산에 오른 것인데 산속을 꽤나 깊이 들어간 기분
이다.

지양산 생태순환길은 양천구(陽川區)에서 닦은 숲길로 신월7동에서 지양산 동쪽 산줄기를 따
라 궁동터널 북쪽 갈림길까지 이어지는 순 100% 산길이다. 이와 별도로 지양산 주능선을 쫓아
서 양천둘레길이 지나가는데 지양산 국기봉에서 매봉초교를 거쳐 계남근린공원까지 구로올레
길과 같은 길을 쓴다. 이 구간은 구로구와 양천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마을3단지로 내려오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칼퇴근의 달인 햇님은 이제 보이지도 않고 달
님이 하늘에 높이 떠 위엄을 부린다. 이렇게 하여
구로올레길을 겯드린 궁동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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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0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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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수리산, 반월호수에서 가을을 맞이하다 ~~~ (철쭉동산, 수리산산림욕장, 수리산둘레길, 수리사)

 

 

~~~~~  가을맞이 수리산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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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둘레길

▲  수리산 수리사

 


이 땅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추석) 연휴 끝 무렵에 친한 후배와 군포 수리산(修理山)을
찾았다. 수리산에 대한 사람들의 찬양이 대단하여 얼마나 괜찮은 산인지 직접 확인하고
자 간 것이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 무렵, 금정역에서 그를 만나 서울 5623번 버스(군포공
영차고지↔여의도)를 타고 둔전초교에서 군포마을버스 3-1번으로 환승하여 수리산 입구
인 중앙도서관에서 두 발을 내렸다. 수리산 나들이는 여기서부터 막을 연다.


 

♠  수리산(수리산 도립공원) 입문

▲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은 인구 30만을 지닌 군포시(軍浦市)의 듬직한 진산(鎭山)으로 군포 북서쪽과 안양시(
安養市)의 서남쪽, 안산시(安山市) 동쪽에 넓게 누워있다. 삼성산(三聖山, 480m), 관악산(冠
岳山, 629m)과 더불어 안양권의 이름난 명산(名山)으로 등산/나들이 수요가 상당하며 2009년
에 경기도의 3번째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수리산이란 이름 3자를 들으면 대입 수능시험의 수리영역이나 '수리수리 마수리' 주문이 생각
이 난다. 허나 산 이름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전해오
는데, 산 바위가 마치 독수리처럼 생겨서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고(수암봉 정상에 독수리
의 일종인 검둥수리가 앉아있는 듯한 바위가 있음), 산 남쪽 자락에 안긴 수리사에서 유래되
었다는 설, 그리고 조선시대 때 왕손(이씨)이 수도했다고 하여 수리산(修李山)이라 했다는 설
이 그것이다. 그래서 '修理山'이란 한자 대신 '修李山'이라 하기도 하며, '修理山'으로 바뀐
것은 20세기 중반 때라고 한다.

수리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봉우리는 태을봉(489.2m)이며, 슬기봉(469m)과 관모봉(426m),
수암봉(395m) 등이 수리산을 이루고 있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산세가 완만하고 숲이 짙
으며 수리사계곡과 창박골(병목안) 등의 계곡이 흘러 조촐한 피서지를 선사한다.
수리산 동남쪽 자락인 군포 수리동 일대에는 산림욕장이 닦여져 있고, 산 주위로 수리산둘레
길과 수리산임도길 등의 둘레길이 닦여져 수리산의 멋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수리사와 철쭉
동산, 2016년에 문을 연 초막골 생태공원 등의 명소가 있다. 특히 철쭉동산은 군포시의 야심
작으로 산자락에 넓게 철쭉밭을 닦아놓았는데 매년 5월 군포철쭉축제가 거하게 열려 사방을
온통 연분홍 천지로 만든다. 서울 근교에 이렇게 너른 철쭉의 공간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  윗쪽에서 바라본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층층히 이어진 수리산 철쭉동산의 위엄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등산은 수리산역(4호선)이나 철쭉동산, 군포시 중앙도서관, 태을초교, 수리약수터, 명
학역 등에서 시작하면 되며 군포시가 수리산 일대에 걸쳐놓은 둘레길은 총 4코스로 다음과 같
다.
① 수리산둘레길(군포수릿길 1코스) : 산본역~태을초교~노랑바위~임도5거리~감투봉~밤바위~시
민체육공원~산본역 (16km, 5시간 30분 소요)
② 수리산임도길 구름산책길(군포수릿길 2코스) : 중앙도서관~임도5거리~덕고개~행복쉼터~속
달동 마을길  (4.8km, 1시간 40분 소요)
③ 수리산임도길 풍경소리길(군포수릿길 3코스) : 수리산역~철쭉동산~중앙도서관~임도5거리~
수리사 (5km, 1시간 20분 소요)
④ 수리산임도길 바람고개길(군포수릿길 4코스) : 납덕골주차장~수리사방향~임도입구~바람고
개~에덴기도원~납덕골주차장 (5.6km, 1시간 50분 소요)

끝으로 수리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6.25전쟁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이 부분은
거의 모르고 지나치는 실정인데, 6.25 시절인 1951년 1월, 북한에게 서울을 빼앗기자(1.4후퇴
) 서울을 수복하고자 국군 1사단과 미군 25사단, 터키 여단 1개 대대가 수리산 일대에서 북한
군과 머릿수만 무식하게 많은 중공군 수만 명을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는 그
해 2월 10일 서울 재탈환에 큰 역할을 했으며, 지형적인 불리함과 막대한 인명피해를 극복하
고 강력한 화력과 항공기 지원, 군사들의 투지에 힘입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2007년부터 산 일대를 조사하여 국군 유해 4구와 유품 600여 점을 수습, 뒤늦게 국립현
충원에 봉안했다.


▲  수리산의 자랑, 숲길 (수리산 임도길)

수리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수리산 산림욕장은 군포시가 1993년부터 조금씩 조금씩 닦
아놓은 것으로 면적은 159.4ha이다.
상수리나무와 때죽나무 등 활엽수림이 주류를 이루며, 리기다소나무 등 침엽수(針葉樹)가 산
중턱을 장식한다. 군포시내(산본, 수리동)와 바짝 붙어있어 접근성 하나는 매우 착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산림욕에는 아주 좋다. 또한 피크닉장과 자연학습장도 갖추고 있어 가족 나들이
와 소풍지로도 손색이 없다.

우리는 산림욕장 내부까지 들어가진 않고 항아리 겉돌 듯 입구 주변만 살펴보고 바로 수리산
둘레길에 임했다.
산림욕장 남쪽에서 성불사를 거쳐 임도5거리로 인도하는 수리산둘레길은 차량들이 다녀도 충
분할 정도로 폭이 넓다. 순 흙길로 이루어져 있고 햇살이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숲이 무성하
여 이곳만큼은 무더위와 자외선을 잊어도 좋다. 나무가 베푼 숲내음이 속세에서 오염된 심신
을 어루만져 주며, 산바람이 이따끔 불어와 번뇌와 땀을 단죄한다.

집으로 살짝 훔쳐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로 성불사 직전 구간을 제외하면 경
사는 거의 느긋하며, 뱀처럼 구불구불한 고개를 넘으면 임도5거리에 이른다.


▲  수리산 임도5거리

임도5거리는 수리산 남쪽 요충지로 숲길이 5갈래로 갈리는 곳이라 하여 속편하게 임도(林道)5
거리를 칭하고 있다. 우리의 목적지인 수리사는 여기서 북서쪽 길을 이용하면 되며, 남쪽 큰
길로 내려가면 덕고개와 갈치저수지 방면으로 이어진다. 5거리에는 쉼터와 조그만 정자가 있
고, 소나무와 온갖 나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베풀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임도5거리에서 수리사로 가는 숲길 (수리산임도길 풍경소리길)

임도5거리에서 수리사입구까지는 앞서 길보다는 좁지만 흙길이 진하게 닦여져 있다. 깊은 산
주름 속에 묻힌 산중이라 완전 산과 푸른 숲, 하늘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정녕 수도
권의 주요 도시인 군포시가 맞는지 절로 고개라 갸우뚱할 정도로 마치 강원도 산골로 순간이
동을 당한 기분이다.

자연의 소리가 전부인 숲길로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으며 경사도 꽤 느긋하다. 우리네 인생이
이런 산길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길을 25분 내려가면 수리사입구에 이른다.


▲  수리산이 베푼 조그만 샘터
빨간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늦더위로 타들어가는 몸 속을 진화한다.

▲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 (1)

수리사입구에서 수리사까지는 각박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임도5거리에서 여기
까지 내려온 높이 만큼 말이다. 절까지는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며, 길 옆에는 수리사계곡이 수줍은 모습으로 졸졸졸~~♪ 화음을 선보이며 반월저수지(반
월호수)로 흘러간다. 울창한 숲이 길과 계곡의 지붕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있으며 바로 그 길
의 끝에 수리사가 자리해 있다.

▲  가늘게 흘러가는 수리사계곡

▲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 (2)


▲  수리사계곡에서 만난 조그만 자연산 폭포
계곡은 작지만 수리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갖은 바위와 조그만 폭포들이
아기자기한 풍경을 자아낸다.

▲  드디어 도착한 수리사의 정문, 일주문(一柱門)


 

♠  수리산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오래된 절집
~ 수리사(修理寺)

수리사는 수리산 서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산사(山寺)로 군포에서 가장 산골 벽지이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제대로 묻힌 비구니 절로 화성시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인데 6세기
중반인 신라 진흥왕(眞興王) 시절에 신라 왕족인 운산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부처를
친견해 반드시 부처가 된다는 기별(記別)을 받고서 여기서 부처를 만났다고 하며, 그 연유로
산 이름을 견불산<見佛山, 또는 불견산(佛見山)>, 절 이름은 수리사라 했다고 한다.
허나 진흥왕 시절 안양/군포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 지역으로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신라
가 동맹국인 백제의 뒷통수를 치며 한참 한강 유역과 경기도 지역을 점령하던 시절이다. 게다
가 신라의 불교가 법흥왕(法興王) 때 공인되었다고 하지만 문무왕(文武王) 시절까지 절은 대
부분 왕경(王京, 경주)에만 지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변경이나 다름없는 이곳까지 와서 위험
을 무릅쓰고 절을 지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만 경내에 오래된 석불 등이 있어 절이 우후죽
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대웅전 등 건물 36동과 12개의 암자(庵子)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다고 한
다. 허나 이 역시 자료와 유물이 부족해 신빙성은 떨어지며, 절 주변 산세를 보면 그만한 건
물을 짓기에도 벅차 보인다. 비록 그 정도는 아니지만 왕년에는 시흥(始興) 지역(그때는 시흥
고을이었음)에서 그런데로 잘나갔던 모양이며,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경남 지역에서 크게 활약을 했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가 쓰러진 절을 재건하고 이곳에서 수도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허나 그는 근거지인 현풍
(玄風)과 의령(宜寧)에서 벼슬을 멀리하고 후학을 길렀던 사람이다. 수리사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그를 왜 이곳 중창주로 등장을 시켰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를 흠모하던 이곳
승려가 장대한 세월에 산산히 흩어진 수리사 내력을 손질하면서 그를 살짝 넣은 것은 아닐까?
20세기에 들어서 경허(鏡虛)가 이곳에 주석하여 머물렀으며, 대선사(大禪師)인 금오(金烏)가
이곳에서 출가했다. 6.25 전쟁으로 절이 파괴된 것을 1955년 청운(靑雲)이 중건했으며, 계속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산신각, 나한전, 요사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죄다 20세
기 중/후반에 지어진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말라버렸다. 소장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오래
된 석불이 하나 전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간신히 귀뜀해준다.

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부터 수리사 경내로 문을 들어서던 우
회길을 이용하던 그건 각자 마음이다. 여기서 주차장까지는 경사가 좀 가파르며 그 경사를 오
르면 수리사 표석과 차량들이 평화롭게 쉬는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1단 더 올라가면 요사
(寮舍)이며, 1단 더 오르면 경내의 중심 구역으로 대웅전과 나한전(羅漢殿), 범종각, 약수터
등이 있다.

▲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

▲  석가불과 500나한이 봉안된 나한전

▲  나한전 석가3존불
(석가불과 문수,보현보살)

▲  가지각색의 나한전 오백나한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편강약수 ~ 약수는 어디가고 물통만 있나?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리사 역시 그 예외는
아니라서 대웅전 옆구리에 샘터를 두고 이름도 좋은 편강약수라 하였다. 하지만 샘터가 어디
아픈지 물은 막혔고, 대신 철덩어리 물통을 두어 샘터의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샘터에 놓인
바가지들이 어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속히 샘터와 물줄기를 복구하여 약수터를 되찾기 바란
다.


▲  수리사 대웅전(大雄殿)

이곳의 법당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으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
물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위엄 있게 들어앉아 남쪽을 굽어보고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
3존불과 여러 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3존불 위로 황금색 닫집이 장엄하게 자리한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닫집

▲  단촐한 모습의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뒷쪽 언덕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정
면과 측면이 달랑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과 독성(나반존자), 칠성
(치성광여래)이 봉안되어 있다.


▲  산신(山神) 가족이 담긴 산신탱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대웅전과 요사 뒷통수가 보이고, 수해(樹海)를 이루는 수리산
남쪽 줄기 너머로 인구 120만을 지닌 경기도의 중심 도시,
수원(水原)이 시야에 들어온다.

▲  수리사의 숙성된 흔적, 파괴된 석불과 석탑 잔재들

삼성각 옆에는 완전하지 못한 석재들이 고색의 때를 가득 머금으며 옹기종기 모여있다. 넓적
한 돌판에는 주름이 여러 겹 그어진 큰 돌이 있는데, 딱 보니 석불의 흔적으로 보인다. 석불
의 얼굴과 아랫도리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졌고 옷을 걸친 몸통
부분만 남은 것이다. 그 앞에는 석탑의 잔재로 보이는 돌이 놓여져 있으며, 예전 수리사에 5
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므로 그 탑의 잔재나 옛 건물의 주춧돌로 보인다.
다들 왕년에는 한 가닥 하던 존재들이나 지금은 초췌한 몰골로 지나간 세월을 원망하니 역시
나 인생은 부질 없는 모양이다. 수리사의 오래된 숙성의 흔적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절을 중
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수습한 것이다.

※ 수리산 수리사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산본역(2, 3번 출구)에서 군포마을버스 2, 3-1번을 타고 중앙도서관 하차 →
  중앙도서관 정류장에서 수리산임도길(수리산로)을 따라 도보 50~60분
* 지하철 1,4호선 금정역(6번 출구)에서 안양시내버스 15번을 타고 중앙도서관 하차
*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1번 출구)에서 군포 100-1번<60~80분 간격>, 군포마을버스 1-2번<60
  분 간격>을 타고 납덕골 하차 → 수리사까지 도보 25분
* 지하철 1호선 의왕역 2번 출구 건너편 정류장에서 군포 100-1번 이용
* 승용차 (경내 밑에 주차장 있음)
  ① 군포 → 대야미역 → 갈치저수지 → 덕고개 → 납덕골 → 수리사 
  ② 수원/안산 → 반월동 → 반월호수 → 납덕골 → 수리사
*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329 (속달로 347-181, ☎ 031-438-1823)


 

♠  수리산 마무리 (대야동 시골길, 반월호수)

▲  수리산을 뒤로하며 (수리사입구 남쪽)

수리사를 둘러보고 임도5거리로 다시 나가려고 했으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반월호수로 길
을 잡았다. 수리사입구에서 임도5거리 방면 동쪽 산길 대신 남쪽 길을 쭉 내려가면 되는데 수
리사에서 호수까지 무려 4km를 걸어야 된다.

반월호수 방면 도로(속달로, 둔대로)는 잘 포장되어 있어 걷기는 좋다. 군포시가 서울과 안양
의 배후 도시로 20여 년 동안 크게 성장하여 시가지가 나날이 확장되고 있는데, 이로 인해 겉
으로 보이는 군포는 완전 시가지와 아파트만 있는 도시로 보인다. 허나 시내 서남부에는 산과
논, 밭, 숲이 전부인 시골도 여실히 남아있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군포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대야동과 속달동 지역으로 이들이 군포의 시골로 남게 된 것은 수리산과 반월호수 덕분
이다. 그들이 이곳을 지킨 든든한 방패인 것이다.


▲  속달동 마을에서 바라본 수리산과 바다처럼 너른 하늘

▲  속달동 시골길(둔대로)

납덕골에서 이르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속달로'를 계속 고집하여 동남쪽으로 가면 갈치저
수지, 덕고개, 대야미 쪽으로 이어지며, 서남쪽 '둔대로'로 가면 반월호수로 이어진다. 둔대
로는 2차선 길에서 이내 조그만 시골길로 변신하여 우리를 인도한다.

가로수인 듯, 아닌 듯, 길가에 자리한 나무들은 슬슬 가을옷을 꺼내들고 있고, 길 주변에 펼
쳐진 논은 푸르게 익어 올해도 변함없이 풍년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고로 이런 시골길과 숲길
은 도시인들에게 청량제이자 꿀 같은 존재로 속세에서 상처받고 오염된 안구와 마음을 정화해
주기에 아주 좋다.


▲  벼들이 푸르게 익어가는 속달동 평야

▲  반월호수 북쪽 개울(반월천)

그림 같은 시골길(둔대로)을 걷느라 시간도, 지루함도 잠시 잊고 있으려니 다리 하나가 나온
다. 다리 밑 반월천에는 나들이객들이 개울 주변에 자리를 피고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어린
이들은 아직까지도 덤벼들고 있는 여름 제국(帝國)의 기운에 맞서고자 개울에 들어가 애궂은
물고기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물놀이를 즐긴다. 그런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계속 가다보면
영동고속도로가 나오고 그 밑도리를 지나면 반월호수가 펼쳐진다.


▲  서쪽에서 바라본 반월호수(半月湖水, 반월저수지)

▲  북쪽에서 바라본 반월호수

반월저수지는 반월호수라고도 불린다. 안양/안산권의 이름난 호수 관광지로 1957년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조성된 오래된 호수이다. 총 저수량은 118.7만㎥로 만수 면적은 37ha에 이르며, 수리산(집예골, 샘골, 지방바위골)이 베푼 물을 먹고 자라 아주 단단히 물이 올랐다. 수리사
계곡도 바로 이곳으로 내려와 잠시 머문 다음 큰 세상으로 흘러간다.

호수는 농어촌공사 화성,수원지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호수가 산에 빙 둘러싸여 있어 주변
풍경이 제법 아름답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관광지로 손질되어 산책로와 공원이 닦였으며, 식
당과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가 많이 들어서 이제는 수리산 못지 않은 군포시의 꿀단지가 되었
다.
호수 주변은 추석 연휴의 끝을 잡은 나들이 수요와 그들이 끌고 온 차량들로 완전히 시장통을
이루었다. 가족 단위 나들이객과 수리산에서 내려온 산꾼,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꾼들, 이곳으
로 밥이나 차, 커피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몰려들어 호수의 몸값을 더욱
높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호수는 특히 저녁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반월낙조(半月落照)라 하여 2004년에 군포
3경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한 다른 호수도 마찬가지겠지만 새벽 물빛에 슬금 피어오르는 물
안개가 아주 장관이다.

▲  오늘도 평화로운 반월호수

▲  호수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는 산

◀  푸른 하늘과 구름도 잠시 길을 멈춘
반월호수


▲  호수 곁을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고속전철

호수 바로 서쪽에는 경부고속전철 고속선이 닦여있다. 그러다보니 수시로 고속열차(KTX)가 빛
을 가르며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징하던지 호수가 쩌렁쩌렁 울리고, 귀신까
자빠트릴 정도이다. 호수를 거울로 삼은 존재들이 하늘과 구름, 산, 나무, 꽃에다가 고속전철
까지 참 다양하다.
이곳을 지나는 고속전철은 위로는 서울, 용산, 행신역, 아래로는 대전, 동대구, 포항, 부산,
마산, 진주, 익산, 광주송정, 목포, 여수까지 운행하며, 하루에 수백 차례 지나간다.


▲  호수에서 만난 서양 모화사상의 잔재, 풍차

호수 북쪽에는 산책로와 공원이 닦여져 있다. 그 산책로를 거닐다보면 천천히 바람개비를 돌리
고 있는 이색 정취의 풍차를 만나게 된다. 나무로 축소해서 만든 것으로 나름 어울리는 풍물시
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양 모화사상의 잔재이기도 하여 좀 씁쓸하기도 하다. 이 땅의 민중
과 18세기부터 함께한 물레방아를 두었으면 더 정감이 컸을텐데 말이다.

반월호수는 다 돌지는 못하고 1/4 정도만 돌았다. 시간도 이미 17시가 넘은 상태이고 배도 고
프기 때문이다. 호수는 이 정도면 충분히 본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미련을 버리고 군포마을
버스 1-2번을 타고 대야미로 이동, 대야미역에서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늘의 일정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가을맞이 수리산, 반월호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반월호수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 1번 출구 밖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군포마을버스 1-2, 6-1번을 타고
  반월호수(둔터) 하차 <6-1번은 산본역 2,3번 출구 밖 정류장에서도 이용 가능>
* 승용차 (호수 주변에 주차장 있음)
① 안양,군포 → 대야미역 → 둔대초교 → 반월호수
② 안산,화성 → 반월 → 팔곡2교차로 → 반월호수
*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둔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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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8년 9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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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동북쪽 지붕 ~ 수락산 벽운동계곡, 귀임봉 나들이 (염불사, 황자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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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 여름 나들이 ~~~~~

▲  수락산 산줄기

▲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상계동 지역



수락산(水落山, 638m)은 서울 동북부 끝으머리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노원구 상계동(上溪
洞)과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 별내면에 걸쳐져 있다. 북한산(삼각산), 도봉산(道峯山
), 관악산과 더불어 서울 근교 4대 명산으로 격하게 찬양을 받고 있으며, 북한산(836m)과
도봉산(740m) 다음으로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뫼로 서울의 주요 지붕을 이루고 있
다.

수락산은 북한산(삼각산)에 비해 덩치는 작으나 멋드러진 바위와 계곡이 많고, 산세가 유
려해 꽤 야무진 산이다. 거대한 암벽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라 하여 수락산이
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산 정상부와 능선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온갖 모습의 바위(물개바위, 기차바위, 코끼리바위)들이 포진해 있다. 또한 물이 들어가
는 산이라 약수터도 푸짐하며, 벽운동계곡과 수락골(수락계곡), 동막골, 금류계곡(청학리
계곡), 석림사계곡, 거문돌계곡 등의 알찬 계곡도 아낌없이 품고 있다.

예로부터 명산(名山)에는 절이 많은 법, 수락산도 명산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온 뫼라 흥
국사(興國寺), 학림사(鶴林寺), 염불사, 용굴암(龍窟庵), 내원암(內院庵), 석림사(石林寺
) 등 오래된 절을 품고 있다. 그 가운데 흥국사에는 다량의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고 학
림사 또한 지방문화재 3점을 간직하여 고색의 위엄을 과시한다.
그밖에 노강서원(鷺江書院)과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묘, 수락산보루(堡壘) 등 오랜 명소
가 있고, 현대 사찰인 도선사(道詵寺)에는 지방문화재인 석삼존불상이 있다.

수락산 등산은 수락산역과 당고개역(학림사), 온곡초교, 동막골, 덕릉고개, 흥국사, 청학
리, 장암역(석림사), 산곡동(검은돌마을)에서 오르면 되는데, 수락산역과 당고개역, 청학
리에서 많이들 올라간다. 정상까지는 2~3시간 정도 걸린다.
수락산은 덕릉고개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 불암산(佛巖山)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으며 동쪽
은 국사봉, 퇴뫼산과 살짝 이어져 있다.

나에게 있어 수락산은 꽤 인연과 추억이 깊은 산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 산행으로 여
러번 찾은 적이 있으며, 1994년에 수락산 그늘인 상계1동 아파트단지에 살게 되면서 수락
산은 나의 뒷동산이 되었다. 벽운동계곡과 수락골은 나의 쉼터이자 놀이터가 되었고 수락
산의 상계1동 구역은 계곡부터 약수터, 산길까지 나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수락산의 품에 수 없이 안기며 그와 진한 정을 과시했으나 2002년 겨울에 도봉동(
道峰洞)으로 이사를 가면서 수락산과도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주 멀리 이
사를 갔느냐? 그것도 아니다. 바로 옆 동네인 도봉동으로 조금 갔을 뿐, 집 부근 중랑천(
中浪川)에 가면 수락산 산줄기가 훤하게 바라 보인다.
그 이후 수락산에 안긴 횟수는 얼마 되지 않으며 꼭대기도 1~2번 가본 것이 고작이다. 한
때는 나의 뒷동산으로 나를 수없이 안아주었던 수락산, 허나 그에게 오랫동안 무심(無心)
을 보이며 살아오다가 그의 품이 문득 생각나 여름의 한복판에 카메라에 물통 1개 짊어지
고 오랜만에 수락산을 찾았다.

집에서 수락산까지는 그런데로 가까운 거리라 두 발에 의지하여 걸어갔다. 중랑천 둑방길
을 따라 노원교를 건너 수락산역까지 도보 20분, 여기서 10분을 더 가면 벽운동계곡 하류
이다. 계곡 밑까지는 회색빛 아파트가 가득 들어차 수락산을 가리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
곳 모두 아름드리 숲이었다.


▲  벽운동계곡 하류에 세워진 수락산 표석의 위엄


 

♠  수락산 벽운동계곡 (벽운동 기점에서 염불사까지)

▲  벽운동계곡(碧雲洞溪谷) 하류

벽운동계곡(벽운계곡)은 수락산의 주요 계곡의 하나로 수락동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벽운동
이란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조선 때 서울 근교 경승지로 선비와 양반들의 발길
이 빈번했으며, 그들이 우수한 경관에 부여하는 동천(洞天)의 지위까지 누리면서 벽운동천(碧
雲洞天)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계곡을 유람에서 끝내지 않고 별장까지 지어 머문 이가 있다. 바로 사도세자(思
悼世子)의 장인이자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이다. 그
는 계곡 풍경에 퐁당퐁당 빠져 별장을 지었는데, 계곡에 바위가 하얗게 드러난 수락산 절경이
골짜기와 어우러져 마치 흰구름이 머무는 것 같다며 벽운동이라 하였다. 그래서 계곡 뿐 아니
라 계곡 밑에 자리한 마을까지 벽운동(碧雲洞)이란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이후 홍봉한이 영의정이 되고 조정의 실세가 되면서 많은 이들이 그의 벽운동 별장을 찾았다.
그로 인해 벽운동은 자연히 양반들의 순례 명소가 되었고, 혜경궁홍씨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벽운동계곡은 바위와 암반이 많고, 상류와 중류에 폭포와 소(못)이 여럿 널려 있다. 계곡 하
류(염불사 직전)는 수심이 얕고 숲이 무성하며 쉬어갈 자리도 넉넉하여 적은 발품으로 피서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덕성여대생활관 직전 계곡 북쪽에는 벽운동마을을 이루고 있는
식당들이 터를 닦고 있어 백숙과 도토리묵, 파전 등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허나 좀 더 세련
된 경관을 원한다면 하류를 버리고 과감히 위로 올라가길 권한다.

염불사를 지나면 암반들이 적지 않게 펼쳐지며, 벽운산악회를 지나면 이 계곡에서 가장 큰 폭
포(그래봐야 높이 5m도 안됨)와 못이 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큰 암벽과 조촐한 폭포 줄기
를 볼 수 있으나 더 이상은 괜찮은 곳이 없다.


▲  수락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벽운동계곡길(동일로250길)

▲  물이 거의 말라버린 벽운동계곡 (덕성여대생활관 뒤쪽)

벽운동계곡 기점에서 염불사까지는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잘 닦여져 있다.
이 길은 '김시습 문화 산책로'란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세조(世祖) 때 생육신(生六臣)의 하
나였던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梅月堂)이 이 계곡에서 잠시 은둔을 했었다. 하여 그를 기리고
자 그런 이름을 씌운 것이다. 허나 그와 관련된 유적과 설화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다.
포장길(동일로250길)이 싫다면 계곡 길로 가도 되며, 덕성여대생활관 북쪽 계곡에는 벽운동천
을 비롯한 바위글씨들이 숨어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계곡길은 염불사 부근까
지 이어져 있다.

포장길 중간에는 펜스가 둘러진 덕성여대 생활관이 있다. 이곳이 바로 홍봉한의 벽운동 별장
자리로 우우당(友于堂)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그마저 근래에 철거되어 주춧돌만 남은 실
정이다. 그는 'ㄱ' 모습의 건물로 우우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썼다고 전하나 세월
의 거친 흐름 속에 누가 잡아갔는지도 모르는 상태이다. 홍봉한이 꽤 잘나갔던 시절에는 사랑
방으로 쓰였는데 손님들로 늘 부산했다고 하며, 혜경궁 홍씨가 어린 시절 이곳에서 계곡 경치
를 즐기며 감수성과 서정성을 키워나갔다.

홍봉한이 사라진 이후, 그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다가 19세기 후반에 서예가로 유명한 국봉 이
병직(鞠峰 李秉直)의 고조부가 사들였다. 우우당 바깥 계곡 바위에는 벽운동천(碧雲洞天), 운
원수(雲源壽), 국봉(鞠峰), 소국(小鞠) 등의 바위글씨가 있는데, 이는 이병직이 새겼다고 전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병직은 국봉 외에 송은(松隱)이란 호도 가지고 있는데, 교육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으면서
후학 양성에 공을 들이다가 결국 거덜이 났다. 그래서 1957년 6월 덕성학원에서 매입해 생활
관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한옥 상당수를 밀어버리고 새 건물을 지으면서 우우당만 겨우 남게
되었다가 그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성북동 성락원(城樂園), 부암동 석파정(石坡亭)과 더불어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별장(
별서) 유적인 만큼 서울시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적극적으로 지켜주었으면 좋으련만 현
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  벽운동계곡의 주름진 반석들 (염불사 부근)

▲  염불사 정문 (오른쪽은 시립수락양로원)

벽운동계곡 기점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염불사가 있다. 그 흔한 기와집 일주문(
一柱門) 대신 철로 된 철문이 일주문의 역할을 도맡고 있는데 낮시간이라 문은 활짝 열려있다.
철문을 들어서면 바로 날씬하게 솟은 염불사 표석이 중생을 맞이하고, 그를 지나면 허전한 주
차장과 아주 짧은 숲길이 나오면서 바로 염불사 경내가 모습을 내민다.

염불사는 수락산 그늘에 살던 시절, 수없이 수락산의 품을 오갔음에도 1번도 들어간 적이 없
었다. 왜냐?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생각을 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눈길도 주지 않던 그곳에 이렇게 발을 들인 것은 생각 외로 좀 오래된 절이고 무려
지방문화재 2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최근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인터넷의 도
움이 무지 컸다.
절이 오래되었음에도 내력을 알리는 안내문 조차 꺼내놓지 않았으니 그동안 지나친 것은 어쩌
면 당연하다. 오래된 역사에다 문화유산까지 지니고 있으니 그런 절만 보면 격하게 구미가 땡
기는 것이 본인의 습성인지라 이번에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  염불사(念佛寺) 경내 (왼쪽이 큰법당, 오른쪽이 대웅전)

수락산 벽운동계곡에 조촐히 터를 닦은 염불사는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하여
백운사(白雲寺)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유물이나 기록이 전혀 없어 아마도 조
선 중기나 후기에 살짝 지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서울에는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우기는 절이 유난히도 많다. 아무래도 그가 고려 말~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승려이고 서울 천도에도 크게 관여를 했으며,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자
벗이었으니 그동안 많은 절에서 창건주로 우기던 원효(元曉)나 의상(義湘), 도선(道詵) 등의
쾌쾌묵은 존재보다는 더 무게감이 컸을 것이다.

어쨌든 창건 이후 오랫동안 마땅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1903년에 상궁(尙宮) 김씨
가 돈을 대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지장전을 지었다. 이때 자신의 부모와 고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발원문(發願文)과 복장주머니를 남겼다.
6.25 때 절이 파괴된 것을 다시 지어 영몽사(靈夢寺)로 이름을 갈았는데, 이후 쌍몽사(雙蒙寺
), 염불사(念佛寺)로 간판을 바꾸었다. 1965년에는 하씨가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이 수락산 산
신(山神)의 덕이라며 절에 산신각을 지어주었으며, 2005년에 2층짜리 큰법당을 짓고, 대웅전
을 부시고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큰법당과 대웅전, 지장전, 산신각(독성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관음보살좌상 및 복장(腹臟) 일괄','지장시왕도'가 있
다. 이중 목관음보살좌상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나 원래부터 이곳 불상은 아니며 지
장시왕도와 함께 다른 곳에서 넘어온 것이다.

절이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고색의 기운은 싹 말라버렸으며, 수락산의 주요 산길인 벽운
동계곡 산길 옆에 자리해 있어 산꾼들의 떠드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은근히 들려 온다. 허나
절을 감싸고 있는 짙푸른 나무들이 그 소리를 크게 걸러주니 고적한 산사의 기운을 누리기에
부족함은 없으며, 일렁이는 숲과 멋진 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산바람과 물바람, 풍경소리에
번뇌가 싹 달아난다.

▲  한글 현판이 인상적인 염불사 큰법당

▲  큰법당 석가3존불

경내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큰법당을 찾았다. 이곳에 염불사의 보물이 있을 듯 해서이다. 큰
법당은 이곳의 중심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2층 건물이다. 1층은 요사(寮舍)
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 등 복합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고, 2층이 큰법당으로 옆으로 난
계단을 통해 오르면 된다. (1층 내부에서 올라가도 됨)

큰법당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불단에 장엄하게 자리한 석가3존불은 문수보살(文殊菩薩)
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 뒤로 후불탱이 자리해 있고,
윗쪽에는 붉은 단청을 칠한 닫집이 화려하게 보궁(寶宮)을 이룬다. 천정에는 7마리의 새 모형
이 날개를 활짝 퍼득이며 날고 있다.
석가3존불 좌우에는 조그만 감실(龕室)을 가득 만들어 작은 금동불(金銅佛)을 안치했는데 이
들은 중생들에게 시주를 받아 달아준 원불(願佛)로 죄다 금빛을 내고 있어 너무 화사하다 못
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허나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은 대충 봐도 된다. 다 2005년 이후에 조
성된 따끈따끈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을 봐야 되느냐? 석가3존불 옆을 보면 3중으
로 이루어진 조그만 붉은 기와 닫집이 보일 것이다. 닫집 밑에는 유리막에 감싸인 불상이 있
는데, 그가 바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목관음보살좌상이다. (그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0호

목관음보살좌상은 1695년에 조성된 보살상이다.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는 63
cm로 조그만 편인데, 그의 뱃속에서 조성시기가 담겨진 발원문(發願文)과 후령통(候鈴筒), 법
화경(法華經) 3책, 주사다라니 등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어 그의 정체를 소상히 알려주고 있다.
발원문에 따르면 박삼룡과 박용산 등의 시주로 전라도 장흥 사자산 봉일암과 수도암(修道庵)
의 불상으로 조성되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 크게 활동한 조각승인 득우와 덕희가 만들었다.
봉일암과 수도암이 어떤 절이고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후 집을 잃고 이러지러 옮겨
다니던 것을 어찌어찌하여 이곳 염불사까지 흘러들어왔다.

그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조각 수법도 우수하다. 게다가 조성 관련 발원문이 남아있
어 17세기 후반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보여준다. 비록 보살상의 한계로 법당 불단을 차지하
지 못하고 옆으로 밀려났지만 석가3존불과 달리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몸이라 특별히 유
리막까지 씌워 그를 보호한다.

보살상 머리에는 화려하면서도 복잡한 무늬의
보관(寶冠)을 씌워져 있다. 보관은 귀까지 내
려와 있는데, 여러 장식물이 주렁주렁 달려있
고,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가 약간 보인다. 넓
은 이마 한복판에는 동그란 백호가 찍혀 있고,
눈썹은 약간 구부러져 있으며, 눈초리는 가늘
고 길다.
코는 조그맣고, 입술은 붉으며, 수염이 가늘게
표현되어 있는데, 얼굴은 거의 사각형에 살이
좀 올라 보인다.

▲  옆에서 바라본 목관음보살좌상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덮고 있는데, 가슴 쪽은 드러
냈으며, 오른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옷주름
선은 아래로 유려하게 흐르고 있고, 대좌(臺座)를 일부 덮고 있다. 붉은색 대좌는 닫집과 함
께 절에서 마련한 것으로 그의 거처가 은근히 탐이 난다.


▲  상궁김씨의 복장주머니와 목관음보살좌상에서 나온 복장 유물들

큰법당 남쪽 벽에는 오래된 문서와 주머니를 머금은 액자가 걸려있다. 이것들이 뭔가? 살펴보
니 글쎄 괘불(掛佛)보다 더 보기 힘들다는 복장 유물이 아닌가? 보통 절에서 복장유물은 공개
를 거의 하지 않는다. 혹 한다고 해도 박물관을 통해서 살짝 할 뿐인데, 유물 모두 부피가 가
벼운 것들이라 신변의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허나 염불사는 박물관도 아닌 그들 법당에 복장
유물을 과감하게 공개하는 위엄을 보였다.

액자 왼편에 있는 호리병 모양의 물건은 1903년에 상궁김씨가 지장전을 지어주면서 자신의 부
모와 고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만든 발원문을 담은 복장주머니이다. 천하에 무려 300곳
이 넘는 절을 찾아갔지만 복장주머니는 처음 본다. 수락산이 이렇게 귀한 선물을 내려주는구
나. 나는 그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액자 오른편에 있는 문서는 목관음보살좌
상 뱃속에서 나온 문서로 법화경(法華經)과 주사다라니이다. 글씨는 모두 붉은색인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  염불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1호

복장 유물 액자 옆에는 빛바랜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1869년에 위국과 그의 처 박씨,
유오 등이 별세한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조성한 것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
금암당 천여(錦巖堂 天如)가 그의 제자 취선(就善), 묘영(妙英)과 함께 그렸다.
처음에는 동대문 밖 감로암(甘露庵)에 있었으나 6.25로 염불사 탱화들이 죄다 못쓰게 되자 급
한데로 감로암에 있던 이것을 소환하여 봉안했다.

그림 중앙에는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이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발산하며 하얀 대좌에 결
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고, 그 좌우로 저승의 10왕과 문관(文官)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일제히 지장보살을 바라보며 서 있다. 등장 인물이 그리 복잡하지 않아 다소 여유로
운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정교한 필선과 정교한 금니 문양의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19세기 탱화 채색은 거의 원색적인데 비해 이 탱화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색채 대비의 조화를
이루고 있고, 채도를 낮추어 은은하면서도 맑은 17세기 불화 채색 양식을 보여준다.

큰법당 보물들을 한참 살펴보고 있으니 1층에서 신도 아저씨가 올라와 주름진 인상을 보이며
왜 사진을 찍냐고 물어본다. 하여 적당히 답을 하니 그제서야 인상을 풀면서 여러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
예전에 서울시에서 이들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관련 문화유산을 사진에 담아갔는데, 복
장 유물은 방바닥에 펼쳐놓고 사진에 담았다고 하며 그때 찍은 복장유물 사진이 절에 있으니
필요하면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는데, 아직까지 관련 사진
은 오리무중이다. 허나 솔직히 필요는 없다.
지방문화재 보유 기념으로 2008년 4월 26일에 알만한 가수를 소환하여 '염불사 산사음악회'를
떠들썩하게 열기도 했다. 안그래도 오래된 내력에 비해 내세울 것이 없는 열악한 형편인데 이
렇게 지방문화재를 지니게 되었으니 이만한 꿀단지가 없다.
그 외에 개인적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을 고하고 법당을 나왔다.

          ◀  염불사 지장전(地藏殿)
큰법당 뒷쪽에는 지장전과 이제 막 피어난 마
애약사여래좌상이 있다.
지장전은 1903년 상궁 김씨가 지어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6.25때 파괴되어 다시 지었으며, 내부에는 지
장전의 주인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저승 10
왕, 금강역사상, 시왕탱, 지장탱 등이 봉안되
어 있다.

▲  색채감이 넘치는 지장전 내부

▲  근래 조성된 마애약사여래좌상

▲  1지붕 2가족, 산신각과 독성각

▲  산신 가족을 담은 붉은 색채의 산신탱
오른쪽 벽에는 붉은 칠성탱이 걸려있다.

지장전을 지나면 큰 바위와 산신각(山神閣)이 나온다. 산신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건물로 1965년에 신도 하씨가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이 수락산 산신의 덕이라며 흔쾌히 지어
준 것이다.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을 봉안하고 있는데, 칠성(치성광여래) 가
족을 담은 칠성탱은 산신탱 옆에 놓았으나 독성의 공간은 그 옆에 독성각(獨聖閣)이란 독자적
인 현판을 달며 1칸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지붕은 하나, 건물 이름과 현판은 2개를 이루고
있다. 건물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를 뒷배경으로 자리한 산신각의 모습이 마
치 산꼭대기 부근 바위에 홀로 자리한 모습처럼 보인다.

※ 수락산 벽운동계곡, 염불사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 1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가면 수락산입구 교차로이다. 여기서 오른쪽
  으로 들어서 은빛3단지를 지나면 벽운동계곡이다. 염불사는 수락산입구 교차로에서 도보 15
  분
* 벽운동계곡은 주차 공간이 여의치 않으니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벽운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 염불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산51 (동일로250길 44-142, ☎ 02-938-9395)


 

♠  수락산 영원암(靈源庵)과 황자굴(皇子窟)

▲  싸리나무 담장에 감싸인 귀틀집 (지붕은 너와지붕)

염불사를 둘러보고 벽운동계곡을 따라 상류로 올라갔다. 10분 정도 오르면 벽운산악회 직전에
벽운교가 나오는데 여기서 다리를 건너면 벽운산악회와 수락산 정상 방면으로 이어지며, 오른
길로 가면 영원암과 수락골(노원골)로 이어진다. 나의 목적지는 하늘과 맞닿은 정상이 아닌
영원암(황자굴)과 귀임봉이기 때문에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

벽운교과 영원암 사이에는 수락산 도시산림공원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산림청에서 2002년에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하고자 닦은 것으로 산길에 숲과 자연 정보를 담은 책상과 안내문, 귀
틀집 등을 설치해 숲의 대한 이해와 숲 체험을 돕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두충나무가 많이 자
라고 있어 조촐하게 산림욕을 겯드린 산책 명소로 쏠쏠하다.


▲  영원암 산길

영원암 산길은 벽운동계곡과 수락골(노원골) 윗쪽을 이어주는 길로 인적은 별로 없다. 도시산
림공원을 지나면 산길은 조금 각박해지는데, 여름 제국의 무더위 태클에 땀은 비오듯 하고 숨
도 은근히 차다.
그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산중턱 벼랑 밑에 자리한 영원암이 슬며시 모습을 비춘다. 이곳
은 상계1동에 서식했던 시절에 여러 번 왔던 암자인데 이번에 이리 발걸음을 한 것은 황자굴
이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  영원암 중심 구역 (오른쪽 건물이 나한전)

수락산 서남쪽 산중턱 270m 고지에 살짝 둥지를 튼 영원암은 20세기에 지어진 아주 조촐한 암
자이다. 워낙 이름이 없는 곳이라 인터넷에도 정보가 거의 없는 실정인데 암자 뒷쪽에 눈썹바
위처럼 생긴 황자굴이 있어 예전부터 수행 공간이나 민간신앙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고색의 멋을 풍기는 문화유산은 아직 여물지도 못한 상태이며, 나한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독
성각, 칠성각, 산신각,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특히 산신각은 여기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앞서 귀틀집에서 서쪽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된다. 아마도 이곳만큼 경
내와 산신각의 거리를 멀리 둔 절은 없을 것이다.

절간 같다는 말이 바로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일까. 산바람 소리와 나의 발자국 소리가 이곳 소
리의 전부일 정도로 고적하기 그지 없으며, 인적도 거의 없어 이곳이 나의 비밀 아지트가 된
기분이다.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이곳에 잠시 푹 안겨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영산전에 봉안된 뜻밖에 존재들
용왕 2명과 용 2마리

▲  시골 농가 분위기의 요사


영원암 중심 구역에는 나한전과 영산전, 요사가 있다. 나한전(羅漢殿)은 석가불과 그의 제자
인 나한을 봉안한 건물로 절에는 따로 법당급의 건물이 없어 나한전이 법당의 역할을 수행하
고 있다. 어차피 석가불이 봉안되어 있으니 법당의 자격으로도 그리 손색은 없으며, 건물 앞
에는 수락산이 베푼 약수가 나오는 샘터가 있어 절과 나그네의 목을 축여준다. 그리고 뜨락에
는 누구나 쉬어갈 수 있도록 평상(平床) 등의 쉼터가 닦여져 있다.

나한전 옆에는 바위 밑에 자리를 닦은 건물이 있다. 현판은 없으나 기둥에 부착된 조그만 하
얀 딱지를 보니 영산전(靈山殿)이라 쓰여 있다. 영산전이라면 부처의 생애를 담은 8개의 그림,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한 건물인데 문을 여니 정작 팔상도는 온데간데 없고 엉뚱하게 용을 타
고 있는 용왕 2기가 나를 맞이한다. 아니 이건 뭐지? 겉은 영산전인데 속은 완전 용왕각이었
던 것이다. 아마도 하얀 딱지에 건물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아닐까 싶다. (용왕은 물을 관리하
는 존재임)

▲  6각형 모습의 독성각

▲  금색 옷을 걸친 독성

나한전 뒷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특이하게 6각형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 뒷쪽에는 황자굴이라 불리는 큰 암벽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독성각 옆으로 난
산길을 통해 굴까지 오를 수 있다. 허나 길 끝에서 벼랑을 좀 타야 되기 때문에 길이 조금 위
험하다. 비록 돌과 시멘트로 길을 닦긴 했지만, 바로 밑이 아찔한 낭떠러지이고 길까지 고르
지를 못하니 각별히 주의가 요망된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눈썹바위 모습의 황자굴

황자굴이라고 해서 동굴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니 이름에 파닥파닥 낚이지 말자. 벼
랑 윗부분에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곳을 바로 황자굴이라 부르는 것이다. 굴 윗쪽에
는 바위가 눈썹처럼 크게 돌출되어 굴을 감싸고 있어 마치 석모도(席毛島) 보문사(普門寺)의
눈썹바위(☞ 관련글 보러가기)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이곳이 황자굴이 되었을까? 천하에서 제일 크다는 정보의 바다 인터넷 조차도 '
황자굴이 뭐임? 먹는거임?'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황자굴은 말그대로 황제의 아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마침 인근에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
후(明成皇后) 민씨가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때 줄행랑을 치다가 잠시 들려 기도를 올렸
다고 전하는 용굴암이 있다. 그런 것을 보면 황자굴은 명성황후의 아들<나중에 순종(純宗) 황
제>이 숨거나 기도를 올렸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순종은 황태자(皇太子) 시절, 수락산에 온 적도 없고, 임오군란 때 모후(母后)를 따라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냥 용굴암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을 따라서 용굴암은 황후, 이곳은 황태
자가 각각 숨어 지냈다는 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봐야될 것이다.


▲  황자굴 바로 직전 (돌과 시멘트로 계단을 다짐)

▲  황자굴 내부
비바람을 피하기에는 아주 제격인 황자굴에는 조그만 단과 하얀 패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이 언급되어 있는 걸 보면 독성을 봉안한 공간인 듯 싶다.

▲  황자굴에 봉안된 패

▲  황자굴에서 바라본 도봉산

▲  석굴로 이루어진 칠성각(七星閣) 내부

나한전과 좀 떨어진 칠성각은 바위를 파서 만든 일종의 석굴이다. 석굴 내부는 한여름임에도
시원하기 그지 없는데, 광배를 갖춘 하얀 피부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하얀 피부 일색인 칠성(
치성광여래) 7기가 그 좌우와 뒷쪽에서 석가불을 지킨다. 보통 칠성각은 칠성탱이란 탱화를
걸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석고로 칠성상을 만들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든
모습과 겉모습, 머리 장식까지 죄다 비슷하지만 표정만큼은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 영원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산1 (☎ 02-937-1973)


 

♠  수락산 마무리 (귀임봉)

▲  구암약수터

영원암을 둘러보고 수락골 쪽으로 오르다보면 하얀 바위 밑에 자리한 구암약수터가 모습을 비
춘다. 조그만 파이프를 통해 수락산이 베푼 물이 실타래처럼 조금씩 흘러나오는데, 인내심을
가지고 컵에 가득 담아 들이키니 속이 시원하다. 이곳은 좀 외진 곳이라 인적은 그리 없으며,
속세와 멀리 거리를 둔 곳이라 수질은 아직 양호하다.


▲  구암약수터에서 수락골 능선길로 인도하는 길
영원암에서 수락골 능선으로 가는 산길은 가파른 산자락이다. 그래서 길 옆은
늘 아찔한 경사가 벼랑처럼 펼쳐져 있다.

▲  수락골 능선길 영원암입구 (왼쪽 길은 영원암, 오른쪽 길은 수락산 정상)

구암약수터에서 다시 길을 재촉하면 수락골 능선길로 이어진다.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수
락골과 수락산역 방면, 동쪽으로 올라가면 용굴암과 도솔봉, 수락산 정상으로 이어지는데, 수
락골 갈림길 부근 숲속에 예전에 종종 물을 뜨러 가던 약수터가 있어 찾아보았으나 길이 바뀌
었는지 찾지 못했다.


▲  수락골 갈림길 주변 조망대에서 바라본 노원구와 도봉구 지역,
그리고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의 힘찬 산줄기

▲  수락골 갈림길에서 귀임봉으로 인도하는 수락골 남쪽 능선길

수락골 갈림길에서 귀임봉으로 이어지는 수락골 남쪽 능선길로 접어들었다. 이 산길은 상계1
동과 상계3,4동 경계를 가르며 서남쪽으로 달리는 산줄기로 중간에 바위가 일품인 귀임봉이
있고, 산줄기의 끝 봉우리에는 고구려(高句麗) 유적인 수락산보루터가 있다. 길 중간에는 학
림사와 당고개역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어 속세와도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다.

능선길이 매우 완만하고 부드러우며 숲이 짙어서 여름 햇살도 살짝 몸을 사리며 200~300m 고
지라 약간의 등산으로 충분히 접근이 가능하다. 게다가 능선 양쪽으로 수락산 산줄기와 노원
구(蘆原區)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까지 일품이다. 마치 천상(天上)의 산책로를 거니는 기
분이다. 그래서 내가 수락산에서 가장 즐겨찾던 산길이기도 했다.


▲  귀임봉 조망대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을 뿐,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달리던 능선길은 귀임봉에 이르러
아주 조금 흥분을 한다. 다시 하늘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귀임봉은 해발 약 280m로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꼭대기 동쪽에는 조망대가 있는데, 수
락산 산줄기와 정상, 덕릉고개, 불암산, 상계3,4동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정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남쪽 줄기와 덕릉고개, 불암산 북쪽 줄기

▲  귀임봉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상계3,4동 지역
상계3,4동은 서울에서 가장 동북쪽 동네로 수락산과 불암산 사이에 포근히
감싸여 있다. 허나 아직 달동네가 적지 않게 남아있어 이 땅의 몹쓸
고질병인 빈부격차의 극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귀임봉 서쪽 바위길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수락산이 산 끝에
살짝 빚어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지역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창동, 도봉구, 성북구 지역
산 밑이 온통 아파트 일색~~ 이 땅에 너무 흔한 풍경이다. 가까이에 보이는
봉우리 정상에 수락산보루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회색빛
아파트의 물결이 거치게 출렁이는 외로운 섬을 보는 듯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1동과 도봉동, 도봉산

수락산보루까지 거침없이 내려가려고 했으나 일몰시간이 자꾸 눈치를 주어 귀임봉에서 수락골
로 철수했다. 아쉽긴 하지만 일몰 바로 직전이라 설령 가서 사진에 담더라도 일그러지게 나올
것이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며 미련없이 속세로 내려왔다. 어차피 집과도 가까우니 수락산
이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종종 찾아와 그의 품에 안길 생각이다.

이날 수락산 코스는 '수락산역 → 벽운동계곡 → 염불사 → 영원암 → 수락골 갈림길 → 귀임
봉 → 수락골'로 소요시간은 출사 시간을 포함하여 4시간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수락산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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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의 정석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백화사, 마실길 느티나무, 화의군 이영묘역, 폭포동계곡)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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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실길에서 만난 은행나무숲길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  마실길 느티나무

 


여름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첫 무렵,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을 찾았다.
이번 둘레길 산책은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하여 내시묘역길, 마실길, 화의군묘역, 구름
정원길 북쪽 구간을 거쳐 불광2동에서 그 끝을 맺었다.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
지만 내 마음을 적지 않게 앗아간 곳 중 하나라 그 마음을 찾으러 다시 그들을 찾은 것
이다. 탐방밀도 1위(1㎢당 5만여 명)로 세계 기네스북에도 당당히 올라있는 북한산(삼각
산) 탐방객의 절반 정도가 둘레길 방문자라고 하니 그의 인기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진관동 구간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 입구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초등학교인 북한산초교가 있다.
(거의 시골학교 분위기임)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인 내시묘역길은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공설묘지에서 진관동 방패교육대
에 이르는 3.5km의 산길이다. 북한천(北漢川)에 걸린 둘레교를 사이로 북쪽은 고양시, 남쪽은
서울 영역으로 평지와 야트막한 산길이 전부인 아주 착한 길이다. 전주이씨 서흥군파묘역, 경
천군 송금비, 경주이씨묘역, 여기소터, 백화사, 중골마을 느티나무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으
며, 백화사 뒤쪽 산자락에는 천하 최대의 내시묘역이었던 이사문 공파(李似文 公派)의 묘역이
있었다. 바로 그 묘역 때문에 '내시묘역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그 묘역의 규모는 약 8,800평으로 45기의 조선 중~후기 무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묘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전관(承傳官)을 지낸 김충영(金忠英)의 무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한 곳이 있구나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묘역은 2012년 4월 귀신같이 사
라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내시의 후손임을 껄끄럽게 여긴 후손들이 묘역을 파서 유골과 부장물을
챙기고 그 일대를 조경개발업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백화사까지 포장길이 뚫리면서 땅값이
많이 오르자 팔았다고 전하며 후손들은 땅값으로 4억 8천만원을 만졌다고 한다. 유골은 화장
하여 납골당 등에 두었고 유물 또한 후손이 가져갔으나 무덤에 배치된 문인석 등의 무거운 석
물은 버려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얼마나 비밀리에 콩 볶듯이 했는지 동네 사람들과 백화사 승
려들도 묘역이 없어진 것을 뒤늦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 땅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녔던 그곳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이제는
한낱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었다. 진작에 국가 지정 사적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이런 무덤 대학살(?)은 막을 수 있었을텐데 후손들의 그릇된 생각과 문화재청과 서울시 철밥
통의 직무유기, 그리고 내시묘역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과 저평가가 낳은 비극이다.
이제 내시묘역도 없는 내시묘역길이 되었으니 그 이름도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이는 갈비탕
에 갈비가 빠졌음에도 갈비탕을 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적당하
다고 본다. 하지만 늘 그렇듯 북한산국립공원 철밥통들은 이름 변경도 귀찮다며 계속 수수방
관하고 있다.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에서 백화사 구간)
숲이 워낙 삼삼하여 햇살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긴다.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내시묘역길
길 주변은 경주이씨 경천군파 문중 땅이라 양쪽에 철책과 나무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 서울시 지방기념물 35호

한산초교입구에서 내시묘역길을 따라 자연에 묻힌 민가를 여럿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들어
서게 된다. 마치 자연휴양림에 들어선 듯,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이로운
기운을 아낌없이 베풀어 속세에서 오염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오솔길을 거닐다보면 조그만 오래된 비석이 활짝 마중을 나오니 그가 바로 경천군 이해룡 사
패지 송금비이다. (줄여서 '경천군 송금비', '경천군 송금물침비'라 불림)

경천군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서예가 겸 역관(譯官)으로 이름은 이해룡(李海龍)이다. 본관
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으로 해서체(楷書體)를 잘 썼다고 하며 비
슷한 시대를 살았던 한호<韓濩, 한석봉(韓石峯)>에 필적하는 명필로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어(倭語)에 능숙해 1588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사자관(寫字官)으로
왜열도에 갔다왔으며 많은 글씨를 그곳에 뿌리고 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역관으로 왜군과의 협상테이블에 참여해 화평교섭을 위해 노력했으
며 1595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었고 1602년에 사섬시주부(簿)가 되었다.
선조(宣祖)는 왜군과의 교섭에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치하해 경천군에 봉했으며 지금의 백화
사 동쪽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광해군(光海君)은 1614년 사패지(賜牌地, 제왕
이 하사한 땅) 적당한 곳에 송금비를 세워주었
는데, 비문에는 큼지막하게 '慶川君 賜牌定界
內 松禁勿侵碑' 13자가 쓰여 있다. 그 내용은
경천군이 하사받은 땅에서 소나무를 벌목하거
나 무단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으로 뒷면에는
'만력(萬曆) 42년 갑인(甲寅) 10월'이라 쓰여
있어 1614년 10월에 세워졌음을 귀뜀해준다.

비석에 쓰여있는 송금(松禁)은 나라에서 필요
한 목재를 확보하고자 소나무가 많은 산을 선
정해 보호하는 것으로 고려 때 시행되었다.
이곳 송금비는 조선시대 임업 정책인 송금 정
책을 보여주는 산증인으로 400년이 넘는 나이
에도 무탈하게 잘 남아있으며 조선 임업사에서
꽤 중요한 유적이자 천하에서 딱 하나 밖에 없
는 존재로 가치가 높다.
이런 비가 2기가 있다고 하나 현재는 이곳만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숨바꼭질
중)

▲  조성시기가 쓰여진 송금비 뒷면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철책 사이로 잠겨진 문이 보일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숲으로 살
짝 몸을 숨기면 이곳의 주인인 이해룡의 묘역을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묘역은 경주이씨 묘역이
라 불린다. (문이 늘 잠겨있으나 느슨한 경우가 종종 있어 순수한 의도로 살짝 들어가 살펴보
는 것도 괜찮을 듯 싶음)

고색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풍기는 비석 주위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들이 마련
되어 있다. 워낙 숲속이고 평일에는 인적도 드물어 바람의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가 이곳을 이
루는 소리의 전부이다. 둘레길이 닦이면서 비로소 그 존재를 속세에 내보인 존재로 둘레길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북한산둘레길이 산자락에 숨겨진 많
은 명소를 속세로 꺼내주었음)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과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 34번 시내버스를 타고 백화사 하차, 백화사 방면 둘레길을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4번 출구) 롯데몰 정류장에서 704번, 건너편 2번 출구 정류장에서
  34, 8772번(토요일과 휴일에만 운행)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  경천군 송금비 주변

▲  경천군 송금비에서 백화사로 이어지는 내시묘역길
중간에 의상봉, 용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  내시묘역길 중간에 자리한 백화사(白華寺)

경천군 송금비에서 6~7분 정도 가면 백화사란 조그만 절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중골마을의
동쪽 끝으로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못지나친다고 잠깐 살펴보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다.

백화사는 1930년경에 지어진 비구니 절로 자세한 내력은 딱히 모르겠다. 조촐한 경내에는 종
무소(宗務所)의 역할을 겸하는 요사(寮舍)와 대웅전(大雄殿), 삼성각(三聖閣) 등 5~6동 정도
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옆에는 아주 도드라지게 새겨진 잘생긴 마애3존불이 있다.


▲  백화사 마애3존불

백화사 마애3존불은 바위 윗부분을 싹둑 다듬고 석가불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문수보살(文
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배치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196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로 그 조각수법이 뛰어나고 돋음새김으로 사실감있게 다
듬어 그들이 마치 내 앞에 나타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비록 숙성 기간이 적어 고색의 때
는 끼지도 못했지만 50년 이상 지나면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거뜬히 따
낼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연꽃대좌(臺座)에 앉은 석가불은 선정인(禪定印)을 선보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있는데 꽤나 몸을 단련한듯, 어깨와 가슴이 매우 당당하다. 좌우 협시불은 시무외인으로 그
들 나름대로의 제스쳐를 취하고 있고, 3존불 모두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어 그들의 광명(光
明)을 표현한다.

* 백화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18-2 (의상봉길 70-7, ☎ 02-381-9103)


▲  백화사 삼성각(三聖閣)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창건 초기부터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이곳에 큼직한 대웅전이
들어앉아있고 삼성각은 마애불 뒤쪽으로 자리가 옮겨졌다.

▲  경내 남쪽에 자리한 돌탑
경주 첨성대(瞻星臺)와 비슷한 모습으로 가지각색의 돌이 협동심을 보이며
어엿한 돌탑을 이루었다.

▲  중골마을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0호

백화사를 지닌 중골마을은 산에 감싸인 산골마을로 여기소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잡고 있는데 높이 19m, 둘레 4.7m로 추정 나이
는 210년 정도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치가 165년~) 이 일대는 이사문 내시
집안이 살던 곳으로 그 후손이 심은 것으로 보이며 오늘도 마을에 시원한 그늘을 베풀어 자연
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  여기소(汝其沼)터 표석

백화사 정류장에서 백화사로 가는 길목 초입에 여기소터 표석이 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아련히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숙종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크게 증축했을 때 지방 관리로 있다가 공사 현장에 파
견된 관리가 있었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기생은 그를 보고자 먼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으나 공사 관계자
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하여 너무 열받은 나머지 이곳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며 '너의 그 사람이 잠긴 못'이란 뜻에서 '여기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공사가 끝날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섣부른 행동을 했을까? 옛말에도 급하면
돌아가라고 했거늘, 그 속담만 얌전히 지켰으면 해피 엔딩으로 끝났을텐데 말이다. 아마도 꽤
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이후 기생의 한이 서린 연못은 매립되었고 그 자리에 표석을 두어 여기소의 흔적과 교훈을 아
련히 일깨운다.


▲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북한산 글램핑장 주변)
내시묘역길도 그렇고 북한산둘레길은 민가와 농장, 경작지, 개인 토지를
이리저리 피해가느라 우리네 인생처럼 굴곡이 좀 크다.

▲  내시묘역길의 남쪽 끝을 잡다 (방패교육대 직전)


 

♠  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

▲  마실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다~

내시묘역이 없는 내시묘역길은 여기서 마실길로 간판을 바꾸어 달린다. 방패교육대에서 진관
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으로 완전 평지 수준이고 북한산둘레길 구간 중 가장 짧고
편한 길로 살랑살랑 거닐기에 아주 좋다. 하여 마실길이라 불린다.
이 코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숲길, 삼천사계곡, 진관사계곡, 숙용심씨묘표, 영산
군묘역, 화의군묘역, 진관동 느티나무 등의 명소가 있어 짧은 거리에 비해 볼거리가 아주 풍
부하며 진관사(津寬寺)와 삼천사(三千寺)도 아주 가까워 답사 코스로 아주 안성맞춤이다.


▲  진관천 옆구리를 지나는 벼랑길 (마실길)

마실길을 들어서면 진관천 벼랑에 닦여진 나무데크길이 나온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
처럼 길을 낸 것으로 동쪽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벼랑이, 서쪽은 진관천이 삼
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물을 모두 머금으며 창릉천으로 흘러간다.
예전에는 피서의 성지로 여름마다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서쪽에 연서로가 닦이면서 풍경이 조
금 깎여지고 지나는 차량의 소음도 적지 않아 요즘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중/상류로
많이 넘어갔다.


▲  삐죽 고개를 내민 바위로 약간 구부러진 계곡 벼랑길

▲  식당을 지나 삼천사계곡을 건너는 마실길

진관천 벼랑을 통과한 마실길은 삼천사입구에 이른다.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
(磨崖佛)을 지닌 오래된 절로 그곳이 땡기면 잠시 둘레길을 놓아두고 갔다와도 상관없다. (20
분 정도 걸림)
삼천사입구에서 삼천사계곡 구간에는 농장과 식당이 여럿 있는데 그들을 지나 삼천사계곡을 건
너야 다음 코스로 진행이 된다. 평일에는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맛있는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
여 그 유혹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어찌 식당 앞도 아니고 한복판을 지나가게 했는지는 모르지
만 주변에 마땅한 길이 없어 기존 길을 활용한 모양이다.


▲  마실길 돌탑 구간

삼천사계곡을 건너면 'S'자로 살짝 구부러진 길이 나오고 길 왼편으로 비슷하게 생긴 돌탑 4
형제가 마중을 한다. 이들 돌탑은 둘레길을 닦으면서 수식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둘레길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준다.


▲  나란히 자리한 돌탑 4형제

▲  마실길의 오랜 터줏대감,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1호

돌탑을 지나면 울창한 모습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두 눈을 단단히 동여맨다. 동화 속
푸른 언덕이나 초원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나무로 나이가 약 170년에 이른다.
자꾸만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높이 18m, 둘레 4.2m에 큰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위치는 진관동 132-20번지로 북한산둘레길이 생기기 이전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삼천사와 진관사를 수없이 들락거린 나 조
차도 둘레길의 안내로 2012년 이후에나 그를 만났으니 앞서 경천군 송금비와 더불어 둘레길이
캐준 소중한 보물이다.


▲  느티나무 주변 풍경

▲  은행나무숲길 옆에 닦여진 돌탑들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숲과 돌탑이 나란히 있으니 마치 신성한 어딘가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은행나무숲길 (왼쪽은 늦봄, 오른쪽은 여름)

마실길에서 가장 으뜸인 곳이자 북한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바로 170
년 묵은 느티나무와 그 옆에 자리한 은행나무숲길을 꼽고 싶다. (솔직히 둘레길 주변에서 이
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별로 없었음)
수목원이나 휴양림의 그림 같은 숲속길이나 산책로를 거니는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드는 곳으로
느티나무 주변을 곱게 손질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어 마실의 기분을 진하게 들게 했다. 게
다가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로 조촐하게 은행나무숲길을 내면서 전남 담양의 명물, 메타세콰
이어 가로수길에 못지 않은 맵시를 자랑한다. 
산책로 주변에는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여럿 있다. 굳이 의자가 아니더라도 돗자리를 가져와
은행나무 그늘이나 주변에 깔고 간식을 먹으며 수다 몇 송이를 피우면 정말 소풍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은행나무숲길은 북한산둘레길이 지나는 명소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홀린 곳으로 집으로 훔쳐
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보고 또 보고 누리고 싶다. 이런 곳에서는 정말 옛 사람들처럼 시 1수
읊어줘야 운치가 나거늘, 시적(詩的) 감각이 떨어지고 인간의 하찮은 말과 언어로 자연의 아
름다움을 표현하고 희롱한다는 것이 실례가 되는 일인듯 싶어 그저 탄성만 질렀다.


▲  봄과 여름, 가을이 앞다투어 머물다 가는 은행나무숲의 위엄
겨울은 그 시샘이 더 높아 아예 은행나무의 옷을 다 벗겨가 버린다.


 

♠  화의군 이영 묘역과 구름정원길

▲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4호

은행나무숲에서 진관사계곡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진관사로 인도하는 도로(진관길)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은 진관사로, 서쪽은 은평한옥마을로 이어지며 마실길은 바로 서쪽에 있는 3거리
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3거리 서남쪽에 오래된 느티나무 4형제가 있음) 그리고 바로 정
면에 있는 산자락에 무덤들이 여럿 눈에 보일 것인데 그들은 영산군 이전(寧山君 李恮) 묘역
이다. (영산군 묘역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함)

서쪽 3거리에서 은평한옥마을 동부를 가르는 마실길(연서로48길)을 따라가 진관생태다리를 지
나서 동쪽 산자락에 홍살문과 사당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무덤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화
의군 묘역이다.

화의군(和義君, 1425~?)은 세종의 9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영(李瓔), 자는 양지(良之)이며 생
모는 영빈 강씨(令嬪 姜氏)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매우 좋아해 매일 책에 파묻혀 살았다고 하며, 초서(草書)와 예서(禮
書)에 쓸데없이 능했다. 또한 이미 6살에 한시(漢詩)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人生斯世 忠孝爲大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충효가 크다 하니
忠能保國 孝能匡世 
 충성으로 나라를 보전할 수 있고 효도로써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

1433년에 화의군에 봉해졌고 1436년 11살의 어린 나이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했다. 1441년
에는 사춘기 시절의 호기심 때문인지 이복형인 임영대군(
臨瀛大君)과 함께 여염집 여자를 남
장을 시켜 궁 안으로 납치해 온 적이 있었는데 그만 부왕(父王)인 세종에게 들켜 된통 혼이
났다. 그 벌로 그에게 주어진 화의군의 직첩(職牒)과 과전(科田)이 몰수되었다.
허나 1447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 남의 기첩(妓妾)을 가로챈 일로 직첩이 또
몰수되었다. 그러다가 맏형(문종)이 재위에 오른 1450년에 다시 환원되었다.

화의군은 누이동생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더불어 훈민정음에 제법 조예가 깊었는데 정음청
(正音廳)에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프로젝트에 참
여하였고, 평소 친분이 있던 박팽년의 매부 박중손(朴仲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세 아들을
두었다.
1455년 2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를 밀어내고 재위에 오른 이후, 4째 형인 금성대
군(錦城大君)을 비롯한 60여 명의 무인과 활쏘기 사냥을 나갔다가 대간(臺諫)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변경으로 귀양 갔다가 그 이듬해 풀려났다. 그리고 성삼문과 박팽년, 유응부(兪應孚) 등
이 단종(端宗) 복위를 꾀하다 걸려들자, 세조는 화의군에게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물었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잘못하면 자신까지 화를 당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1457년, 순흥(順興,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귀양간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를 몰래 꾀하였고
영월로 유배간 단종이 결국 사사(賜死)되자 복위에 가담한 죄로 충청도 금산(錦山)으로 유배
되었다. 이때 그에게 주어진 모든 관직과 왕족의 특권, 재산이 싹 몰수되었으며, 그의 이름과
자손들의 이름은 왕실 종친록(宗親錄)에서 제명되는 치욕을 맞는다.
그가 금산으로 유배된 이후,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① 1460년 단종 복위 사건으로 사사(賜死)되었다는 것, (화의군 묘역 안내문, 화의군파 족보,
   은평문화원에서 편찬한 '은평구의 문화유산')
② 거의 60~70세까지 유배지에서 살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 했다는 것. (조선왕조실록..)

화의군이 죽은 이후, 그의 세 아들과 자손들은 죄인의 신분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오다가 성종
시절에 들어와 세조의 부인이자 화의군의 형수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지시로 도성(都
城) 밖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중종 시절에는 화의군의 손자 이윤(李允)의 상언(上言)에 따라
복관(復官)되면서 신분이 회복되는 한편, 종친록에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552년에는 금산에 있던 화의군의 묘소를 현재 위치인 양주(楊州) 땅 신혈리(新穴里, 현 서울
진관동)로 이장했으며, 1736년 영조(英祖)는 그에게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에 영월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 때 단종에 대한 충절이 인정되어 그 제단
에 배향되었다.
 
화의군 묘역에는 그의 차자(次子)인
'여성군 번(驪城君 轓)', 3자인 '금난수 식(金蘭守 軾)',
증손자인 '태산군 황(泰山君 凰)'의 묘가 있으며, 묘역 밑에 충경사
(忠景祠)란 사당을 세워
화의군 부부와 그의 생모의 신위(神位)를 봉안했다. 또한 그 주변에는 화의군의 후손들이 살
고 있었는데 은평뉴타운 개발의 칼질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묘역 주변에는 충경사 사당
과 재실(齋室)만 남게 되었다.

화의군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조선 왕족의 하나로 단종 복위운동에도 참여했었고 훈
민정음 프로젝트에도 크게 활약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인물이다. 물론 여자를 너무
밝혀 남의 여자를 마구 건드렸던 진상은 좀 있었지만...
그의 우울했던 인생 만큼이나 그의 묘역 또한 긴 세월을 비지정문화재의 영욕을 간직하며 지
내오다가 2005년 말에서야 뒤늦게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팔자가 조금은 펴졌다.

▲  묘역 서쪽에 자리한 화의군 신도비
(神道碑)

▲  화의군 사당인 충경사와 붉은 피부의
홍살문


충경사 앞에는 성역(聖域)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차가운 인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홍살문
과 충경사의 배치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조금은 북쪽으로 삐뚤어져 있다. 둘의 방향이
일치해야 좀 안정감있게 보이는데 말이다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충경사와 홍살문은 1970년 이후에 지어졌으며 사당 남쪽 언덕에 화의군
의 묘역이 자리해 있다.


▲  화의군 묘역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묘역 주변은 잘 익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운치를 자아낸다. 묘역 주변은 묘역 보호를 위
해 사람 키보다 높게 철책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묘역으로 인도하는 문은 충경사
뒤쪽에 있는데 늘 굳게 잠겨져 있어 철책 너머로 보던가, 중간중간 보이는 허술한 곳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던가 해야된다. 허나 철책 밖에서도 보일 만큼 보이니 괜히 무리는 하지 말자.


▲  서북쪽을 바라보고 선 화의군 묘역

▲  곡장을 병풍처럼 두른 화의군 묘와 그의 아들인 금난수 식의 무덤

화의군묘는 일반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처럼 조촐한 크기로 곡장을 봉분(封墳) 뒤쪽에 병풍처
럼 둘러 무덤의 품격을 조금 높였다. 무덤 앞에는 상석(床石)과 묘표, 장명등이 있고 그 양쪽
으로 문인석 1쌍과 근래에 지은 무인석(武人石) 1쌍이 나란히 무덤을 지킨다. 게다가 근래에
봉분 밑도리에 엉뚱하게도 12지신상을 두룬 호석(護石)을 둘러 서로가 너무 어색한 조화를 보
인다.
봉분에 비해 호석을 너무 크게 둘러 근래에 지어진 무덤처럼 요상한 모습이 되었으며, 12지신
상의 모습도 지금 당장이라도 산으로 뛰어갈 것 같은 생동감 있는 모습이라 다들 산만해 보여
오히려 없는 것보다 못한 것 같다. 물론 무덤에 대한 후손들의 지극정성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 정성이 너무 지나쳐 조선 초기 무덤을 20세기 무덤으로 품격을 떨어뜨렸다.
문화재로 지정된 무덤은 크게 망가지지 않은 이상은 초창기의 모습을 지켜주는 것이 무덤 주
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무덤을 너무 기존의 모습과 다르게 치장해버리면 무덤 주인이
잠시 마실갔다가 자신의 무덤도 찾지 못하고 헤매지 않겠는가?

※ 화의군 이영 묘역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가변차로 정류장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에서 하차 (701, 7211번을 타
  는 것이 더 빠름) 정류장 남쪽에 자리한 제각말아파트교차로에서 동쪽 길(연서로48길)을 3
  분 정도 가면 오른쪽(남쪽)에 화의군 묘역이 있다.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1, 704번(구파발역 경유), 가변
  차로 정류장에서 7211번을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44 (연서로48길 22)


▲  화의군묘역 인근 구름정원길에서 만난 주인 잃은 비좌(碑座)

화의군 묘역 남쪽에 북한산(삼각산)과 조선시대 최대의 공동묘지였던 이말산(莉茉山)을 이어
주는 진관생태다리가 있다. (밑에 터널을 두고 그 위에 산줄기를 만듬) 여기서부터 잠시나마
정들었던 마실길은 막을 내리고 북한산둘레길 8구간인 구름정원길로 이름이 갈린다.

구름정원길은 진관생태다리에서 북한산생태공원 상단까지 4.9km 거리이다. 옛 기자촌터 뒤쪽
으로 구름정원이란 이름이 참 어여쁜데 그 이름 그대로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구름과 조금
이나마 가까워지는 구간으로 평지 일색의 마실길과는 완전 차원이 틀려 마실길에 적응된 몸이
조금 괴로워함을 느낄 것이다.

진관생태다리에서 10분 이상 올라야 비로소 옛 기자촌 뒷쪽 산능선에 이르는데, 길 중간에 주
인을 잃은 비좌와 동자석 등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허나 대부분 속인들은 둘레길에 눈이 멀어
그들을 지나치고 만다. 이곳을 비롯하여 이말산과 내시묘역길 주변에는 왕족과 사대부, 상궁,
내시들의 무덤이 즐비하며 이 비좌와 동자석도 그들 무덤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러다가 자연재해로 묘가 사라지고 비석 또한 파괴되어 이렇게 비석의 아랫도리인 비좌만 간
신히 남아 햇볕을 보고 있다. 이 비좌의 주인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분명 주변을 싹 뒤
집어 엎으면 유력한 단서가 나올 듯 싶은데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이상 비좌와 동자석의 주
인을 찾는 시도는 없을 듯 싶다.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향로봉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북한산 서쪽 줄기와 은평구 동부 지역

기자촌지킴터에 이르면 동쪽으로 북한산(삼각산) 향로봉, 남쪽으로 은평구 동부 지역, 서쪽으
로는 개발의 칼질로 거의 허허벌판이 된 옛 기자촌이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기자들의 생활
터전으로 제공했다고 하는 기자촌(記者村)은 서울 지역 달동네의 상징으로 쇠락된 것을 2008
년 이후 모조리 갈아엎었다.
이곳도 은평뉴타운 개발지의 일부로 현재는 근린공원이 닦여져 있다. 기왕 이렇게 밀어버린거
후회가 없게끔 잘 다듬었으면 좋겠고, 진관동 일대에 대한 개발의 난도질도 이곳에서 그만 멈
췄으면 좋겠다.


▲  구름정원길 중간인 폭포동 선림사 주변 계곡

기자촌지킴터에서 약 15분 정도 가면 기자촌 남쪽인 폭포동 선림사(禪林寺)에 이른다. 폭포동
(瀑布洞)이란 이름은 금지된 구역으로 묶인 산 위쪽 바위에 있는 폭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
소에는 보기 힘들며 비가 많이 온 날과 그 이후에만 잠깐씩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폭포이다. 

이곳은 숲이 삼삼하고 계곡은 작으나 맑은 물이 흐르고 반석과 바위가 많아 피서를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다. 여기서 아파트가 보이는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바로 은평뉴타운의 동남쪽 끝
인 폭포동 힐스테이트아파트이다. 이 아파트는 완전 산속에 묻힌 아파트단지로 교통이 썩 좋
지는 못해 버스를 타려면 도보 10분 거리인 은평경찰서까지 걸어나가야 된다.


▲  하얀 피부의 반석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는 폭포동 계곡

▲  폭포동 계곡에서 만난 어느 문인석과 망주석(望柱石)

이들은 인근 산자락에 있다가 사라진 사대부묘에서 수습된 것으로 여겨진다.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은 근심이 있는 표정으로 눈을 살짝 감으며 상념에 잠겨 있고, 오른쪽 망주석에는 꼬랑
지가 긴 세호(혹은 다람쥐)로 보이는 동물이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다.


▲  폭포동에서 불광2동으로 넘어가는 구름정원길 (선림사 뒷쪽)

▲  선림사 남쪽 구름정원길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된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선림사 남쪽 불광2동에서 쿨하게 마무리 지
었다.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했고 이른 무더위와 장거리 도보로 적지않게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다 살펴보았으니 나름 뿌듯하며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자주는 아니어도 이렇게 종종 찾을 수 있어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둘레길 산책은 흔쾌히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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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 '


▲  문원하폭포

▲  관악산 일명사지

▲  보광사 문원리3층석탑



 

여름이 한참 깊어가던 7월 초에 일행들과 관악산(冠岳山, 632m) 문원계곡을 찾았다. 예전
에는 관악산의 품에 자주 안기곤 했으나 그에 대한 마음이 시들시들해졌는지 기껏 가봐야
그의 외곽만 겉돌 뿐, 그곳 정상<연주대(戀主臺)>을 오른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가 버렸다.
연주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만에 관악산과 인연을 짓고자 여름에 걸맞은 정처를 물색하다
가 과천(果川)에 있는 문원계곡을 찾기로 했다. 이곳은 관악산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
踏處)이자 대표적인 피서의 성지(聖地)로 관악산 뒷통수에 자리해 있는데, 문원폭포와 문
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등의 명소가 숨겨져 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1시에 정부과천청사역(4호선)에서 일행을 만나 관악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넓게 깔린 교육원로를 가다보면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오른쪽에 2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비좁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이 문원계곡으로 인도하
는 길로(이정표가 있음) 길 양쪽에는 철책이 둘러져 답답함을 안겨준다.
그런 길을 4분 정도 들어가면 산림초소가 나오면서 비로소 관악산 산길이 펼쳐진다. 여기
서 서쪽으로 가면 백운사(용운암)란 절이 나오고, 직진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 동북쪽으로 가면 문원계곡 산길이다.


▲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두 행정관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짓눌려 좁고 각박한 길이 되어버렸다.
관악산 탐방객을 위해 길을 조금 트여주면 좋으련만..


 

♠  문원계곡(文原溪谷) 입문

▲  문원계곡의 생매장 현장

문원계곡은 관악산을 수식하고 있는 주요 계곡의 하나이다. 관악산에는 바로 근처에 있는 자
하동천(紫霞洞天) 계곡을 비롯해 관악산계곡(서울대 서쪽), 관음사계곡(남현동), 삼성천계곡
(안양예술공원)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반해 문원계곡은
아기자기한 변화도 좀 보이고 있고, 높이도 제법 되는 자연산 폭포를 2개나 간직하고 있다.

정부과천청사역에서 문원계곡으로 가는 길목에는 식당이나 가게가 전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지체높은 정부청사와 여러 공공기관이 단단하게 자리하여 그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번잡하지 않아서 좋음) 그러니 먹거리를 사거나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면
정부과천청사역 10번이나 11번 출구로 나가거나 KT과천지사 정류장에서 내리기 바란다. 그곳
이 과천의 중심지로 식당과 가게가 많다.

문원계곡은 관악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정부청사 서쪽으로 흐르는데, 옛 기술표준원 북쪽에서
그만 강제 생매장을 당한다. 강제로 지하에 묻히는 계곡의 한이 얼마나 깊은지 물소리가 귀신
을 쫓아낼 정도로 우렁찬데 아무리 공공기관이라도 계곡이 그리 크지도 않거늘, 계곡에 대한
부족한 배려가 참 아쉽다. 허나 다행히 생매장 구간은 짧아서 옛 기술표준원을 지나면 교육원
로 남쪽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기술표준원은 충북혁신도시로 이전되었음)

산림초소를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문원
계곡 하류가 나온다. 생매장 직전인 이곳에 폭
포 2개가 연달아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데 이
들은 자연산이 아닌 지형을 이용하여 다듬은
인공폭포이니 속지 말자. 문원계곡의 알짜배기
폭포는 여기서 더 들어가야 된다.

▲  인공(人工)이 가해진 문원계곡 하류 폭포

 


▲  각세도의 성지(聖地), 신계 이선평(晨鷄 李善枰)의 묘역

인공폭포를 지나면 산길 오른쪽으로 소나무 그늘에 묻힌 무덤과 안내문이 손짓을 한다. 전혀
정보가 없는 무덤이라 안내문을 기웃거리니 각세도(覺世道)를 세운 이선평의 묘역이다. 각세
도에서는 그를 도조(道祖)로, 그의 묘는 성묘(聖墓)라 추앙하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선평(1882~1956)은 황해도 문화군(文化郡) 태산촌(泰山村)에서 태어났다. 조선 2대 군주인
정종(定宗)의 16대손으로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에 정진했는데, 평양 근교에서 '천하대보 정
진무외(天下大寶 正眞無外)'라는 글귀가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고 각세(覺世)의 진리를 깨달
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 인근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 도를 닦으면서 의술과
복점(卜占), 풍수지리서를 익혔다고 한다.

수도를 마치고 잠시 세상으로 내려와 군의(軍醫)가 되기도 했으나 1907년 군대해산으로 실업
자가 되자 다시 수도를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1913년 비봉산(飛鳳山)에 들어가 1,000일 기도
에 돌입했다.
기도를 벌인지 488일째 정오에 남쪽 하늘에서 황금색으로 쓰인 각세도 3자가 나타났다. 그리
고 다음날에는 서쪽 하늘에 '원각천지 무궁조화 해탈사멸 영귀영계(圓覺天地 無窮造化 解脫死
滅 永歸靈界)'란 16자의 주문이 나타났다고 하며 그 이후 초하루부터 매일 1자씩 하늘에서 글
씨를 받아 30계명과 도기(道旗), 각세훈사(覺世訓詞) 등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1,000일을
채우고 속세로 내려와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치니 그것이 각세도의 시작이다.

왜정(倭政) 말기에는 신도가 3만에 이르렀고, 해방 이후에는 10만까지 늘어났으며, 이선평은
문원계곡 하류에 세심정(洗心亭)이란 초막을 지으며 포교를 벌이다가 마땅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1956년에 세상을 떴다. 그래서 후계자를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나 여러 갈래로 갈라지
게 된다. (이선평과 각세도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겠음)

이선평의 묘는 1976년부터 2년 동안 성역화 사업을 벌였으며,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망주석(
望柱石) 1쌍, 묘비,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를 대충 덤으
로 챙기고 서둘러 문원계곡으로 들어섰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문원계곡 산길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문원계곡 중류
한여름에는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으며, 피서객들의 욕탕이 되버린다.

▲  문원계곡 바위 산길 - 보호 난간이 등산객의 발길을 지켜준다.

문원계곡 산길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느긋하다. 산길과 계곡과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
다가 바위 산길(이선평 묘역과 문원하폭포 중간)에서 잠시 멀어지는데 바위 벼랑 밑으로 아득
하게 계곡이 보인다.


▲  바위 산길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숲 너머로 과천 시내와 청계산(淸溪山)이 두 눈에 들어온다.

▲  문원계곡을 건너는 나무 다리
바위 산길을 지나면 잠시 멀어진 계곡과 다시금 가까워진다. 그 상태는
문원폭포까지 쭉 이어져 서로의 끈끈한 정을 과시한다.

▲  나무다리 주변 문원계곡 중류


 

♠  문원계곡의 꿀단지, 문원하폭포와 문원폭포

▲  관악산 제일의 폭포, 문원하폭포(文原下瀑布)

산림초소에서 천천히 30분 정도 오르면 계곡 상류에 걸린 문원하폭포(이하 하폭포)가 마중을
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를 문원폭포로 알고 있었으나 이는 답이 아니었다. 그 문원폭포는 여
기서 더 올라가야 되며, 그 폭포 밑에 있다고 해서 문원하폭포라 불린다. 허나 외모는 문원폭
포보다 하폭포가 훨씬 잘났다. 그래서 문원폭포보다는 하폭포가 이곳의 중심 폭포이자 관악산
제일의 폭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차라리 하폭포를 문원폭포라 하고, 문원폭포를 문원상
폭포나 윗폭포로 칭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하폭포는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명주 자락을 늘어뜨린 듯 하얀 물보라를 쏟아내는데, 위에
서 바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거의 20도 정도로 구부러졌다가 다시 바위
를 타고 힘차게 내려온다. 폭포의 높이는 약 20m 정도로 폭포 밑에는 물놀이 하기에 좋게 얕
은 수심의 못이 형성되어 있으며, 폭포 남쪽에 산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폭포가 있는
바위는 안전을 위하여 하얀 금줄을 쳐놓았으나 어기는 산꾼이 적지 않다.

관악산은 산세와 바위는 참 일품이지만 문원계곡과 관악산 제일의 경승지로 추앙받던 자하동
천을 빼면 계곡도 평범하고 폭포도 거의 없다. 그나마 문원계곡이 좀 아기자기한 편이고, 그
곳에 빚어진 하폭포와 문원폭포가 관악산에서 제일 화끈하게 폭포의 패기를 보여준다.


▲  위에서 바라본 하폭포

▲  반석으로 이루어진 하폭포 윗쪽

하폭포 옆구리를 통해 폭포 위쪽으로 오르면 계곡을 둘러싸고 넓게 펼쳐진 반석이 나온다. 문
원계곡을 찾은 산꾼들이 많이 쉬어가는 쉼터로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난 마당바위를 오르면 일명사지와 연주암으로 이어지고,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문원폭포
가 나온다. 그리고 서북쪽 길로 오르면 육봉과 팔부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정상(연주대)이 목적
이라면 북쪽 마당바위로 오르면 된다.


▲  하폭포 윗쪽에 자리한 마당바위

▲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정경백(鄭景伯) 바위

마당바위 꼭대기에는 큰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살짝 밀면 당
장이라도 때굴때굴 굴러떨어질 것 같은 기세인데, 그의 피부에는 한자로 큼지막하게 '정경백'
이라 쓰여 있다. 바로 그 바위글씨 때문에 '정경백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정
경백은 사람 이름으로 뭐하던 양반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씨의 폼을 보니 구한말이나 왜정 때
새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찾은 정경백은 문원계곡의 뛰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지면서 마당바위 피부가 아닌 이
바위에 이름 3자를 낙서로 남겼다. 인명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에도 그의 정보가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면 그저 평범한 선비거나 글 좀 아는 백성인 듯 싶으며, 바위에 이름을 남긴 인연으로
비록 그의 정체는 몰라도 그의 이름은 바위와 함께 지금까지 남게 되었고, 관악산의 주요 바
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관악산에 널린 바위 가운데 사람 이름을 취한 바위는 이
것이 유일하다.


▲  정경백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과천과 의왕시내, 청계산, 광교산)

  하폭포에서 문원폭포로 인도하는 산길

   ◀  그늘에 숨겨진 문원폭포(文原瀑布)
하폭포에서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그
늘에 묻힌 문원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폭
포는 위성지도에도 나올 정도로 그 위용을 속
세에 드러내고 있지만 문원폭포는 숲 그늘 속
에서 수줍게 물보라를 피운다.
폭포의 높이는 10m 정도로 하폭포에 비해 볼
품도 많이 떨어지고 물소리도 차분하다. 거의
90도 각을 이룬 윗부분을 빼면 경사도 거의
40~50도 정도로 물이 미끄럼을 타듯 부드럽게
내려와 착지를 한다.
폭포 옆에는 벼랑이 있는데 그 벼랑 밑에 비
와 눈을 피할 정도로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
다.
거의 석모도 보문사(普門寺)의 눈썹바위와 좀
비슷한 모습으로 그곳에 태극기를 비롯해 기
도나 굿에 사용하는 물건과 그것을 보관하는
공간이 있어 굿이나 기도터로 몰래 쓰이고 있
음을 알려준다.


▲  시원찮게 떨어지는 문원폭포 윗도리

▲  문원폭포 옆 기도처
깎아지른 벼랑 밑도리에 움푹 들어간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 있어 기도나 굿터로
암암리에 쓰이고 있다. 아마도 이곳의 지기(地氣)가 높거나 지형상의 이유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승려와 참선하는 사람들의 수행 공간이나
산악신앙의 현장으로 바쁘게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원폭포 아랫 계곡 (왼쪽은 폭포 옆
기도터로 인도하는 길)


 

♠  하늘과 가까운 곳에 숨겨진 옛 절터, 관악산 일명사지(逸名寺址)
- 경기도 지방기념물 191호

▲  동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육봉일명사지)

▲  서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하폭포에서 마당바위를 지나 각박한 산길을 6~7분 정도 오르면 긴 석축이 나온다. 그 석축이
바로 옛 일명사터로 석축 앞에 관련 안내문이 서 있어 등산객들의 관심을 호소한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명사터는 육봉(六峰) 밑에 있다고 해서 육봉일명사터라 불리기도 한
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육봉일명사지') 절터의 면적은 400평 정도 되는데, 이곳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비밀을 캐려는 집념으로 1999년 절
터를 뒤집은 결과 연꽃잎이 새겨진 연화문대석(蓮花紋臺石) 2점과 석탑(石塔)의 잔재 1기, 우
물 2곳이 나왔고, 조선시대 암막새기와 조각 20여 점이 나왔다. 또한 범어(梵語)가 새겨진 기
와와 무늬가 없는 조그만 기와 등 신라 후기 기와도 여럿 나와 신라 후기에 법등(法燈)을 켰
음을 짐작케 한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절터의 입을 강제로 열면서 그동안 밝혀진 사실을 정리하면,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가 고려 중기나 후기에 망한 것으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세기 후반에 다시
중창되어 그런데로 절을 꾸리다가 17세기 후반에 완전 문을 닫고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재정 악화와 주변 사찰과의 경쟁 등이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 무리한 조세와 공납(貢納), 고적한 곳에 위치한 지리적 불리함 등으로> 만약 산사태 등의 자
연재해로 망했다면 절터가 좀 온전하지 못해야 되는데 절터는 너무 선명하다.

절터에는 건물터와 석축, 연화문대석이 있는데, 절이 망한지 꽤 되었음에도 절터가 원형을 잃
지않고 잘 남아있어 관악산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관악산에는 이곳 외에도 연
주암의 전신(前身)으로 여겨지는 관악사(冠岳寺)터가 있으며, 관악산과 삼성산은 신라 후기부
터 절이 많이 생겨나 북한산(삼각산)과 더불어 수도권 불교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특히 연화
문대석은 관악산에 남아있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받고 있어
일명사도 왕년에 꽤 잘나갔음을 가늠케 한다.
그 잘나가던 절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가늠할 수 없는 전설이 되었고, 건물을 받쳐들던 주춧돌
만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받들고 있으니 참 인생무상이 아닐 수 없다. 일명사는 스스로를 태
우며 그 위대한 진리인 인생무상 4자를 우리에게 진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 허나 그러면 뭐하
나. 인간은 동물과 신(神) 사이에 어정쩡하게 들어앉은 존재라 그것을 죽기 전에나 깨달으니
말이다.

일명사터는 하폭포에서 연주암 가는 길목에 있어 찾기는 쉽다. 연화문대석 2기는 절터 한복판
에 박혀있어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석탑의 잔재와 우물은 절터 인근 수풀에 묻혀 있다.
석탑은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산11


▲  일명사터 석축

▲  여름 햇살을 즐기고 있는 일명사터 중앙 건물터
다른 건물터와 달리 규모가 크고 절터 중앙에 자리해 있어 절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으로 여겨진다.

▲  일명사터 동쪽 건물터
조그만 건물이 여럿 뿌리를 내렸던 곳으로 산신각(山神閣)이나 명부전(冥府殿),
요사채 자리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  화석처럼 박힌 연화문대석 형제
이들은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석불 대좌(臺座)의
일부로 여겨진다. 관악산의 몇 안되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게
새겨진 것으로 천하에 짧게나마 주목을 받았다.

▲  절터 북쪽 석축과 돌다리

절터 북쪽과 동쪽에는 조그만 물줄기를 두어 산에서 내려온 시냇물을 아래로 흘러보낸다. 이
렇게 배수 시설까지 갖추어 식수를 해결하고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도
대비를 했는데, 석축 북쪽에는 통돌을 깔아 조그만 돌다리까지 두었다.

일명사터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내려갔다. 기분 같아서는 오랜만에 연주암까지 오
르고 싶었지만 거까지 가려면 1시간 이상 각박한 산길을 올라야 되고, 날씨도 무지 덥다. 하
여 쿨하게 포기하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오늘 인연도 아님에도 억지로 인연을 짓는 것은 그렇
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문원계곡 하류인 산림초소로 내려와서 바로 속세로 향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마애승용군을 찾
았다. 그곳은 산림초소와 매우 가까운데,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 있어 찾기는 쉽다.
오르는 길도 그리 힘든 편은 아니라서 2분 정도 수고하면 바위 2개와 소나무가 마중을 나오는
데, 소나무 서쪽 바위에 '용운암 마애승용군'이 자리해 있다.


▲  바위에 새겨진 용운암 마애승용군(磨崖僧容群) - 과천시 향토유적 4호

이름도 참 생소한 마애승용군(이하 승용군)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승용(僧容)은 승려의 얼
굴을 뜻한다. 그러니 쉽게 풀이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된다. 승용군 앞에 붙은 용
운암은 부근에 자리한 절 이름으로 예전에는 승용군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홍촌(洪村) 마애승용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 밑에 홍촌이란 마을이 있어서 유래된 것이
다.

보통 불상이나 보살 등을 바위에 새겨 마애불(磨崖佛)로 삼지만 그들 대신 승려의 얼굴을 새
긴 경우는 천하에서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바위 윗도리에 얼굴 3구가 새겨져 있고, 밑도리에
2구가 간결하게 스며들었는데, 얼굴이 하나 같이 동자승처럼 밝고 귀여운 표정이다. 3명은 정
면을, 2명은 측면(側面)상을 하고 있으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불상도 아닌 승려 얼굴을 새겼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해답은 없다. 승려
를 귀족처럼 받들던 고려 때 관악산의 이름 있는 승려를 기리고자 얼굴을 새겼을 가능성도 있
으나 이 역시 부질없는 추측일 뿐이다. 참고로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관악산 서쪽 자락인 안
양예술공원에 마애종(磨崖鍾)이 새겨져 있는데, 범종과 이를 치는 승려가 조각되어 있다. 이
역시 이 땅의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새겨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관악산에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존재가 1종류도 아닌 2종류가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
다.


▲  바위 윗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3구
가운데와 오른쪽 승려는 정면을 보고 있고, 왼쪽 승려는 옆을 보이고 있다. 눈썹과
살짝 감긴 눈, 코, 입, 귀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표정이 하나같이 앳된
동자승이나 원숭이처럼 해맑기 그지 없다.

▲  바위 밑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2구
귀마개나 이어폰을 낀 것 같은 왼쪽 승려는 정면을, 오른쪽 승려는 옆을 보고 있다.
승려 얼굴 상 외에도 정체가 아리송한 문양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  승용군 바위 뒤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근래까지 불공 장소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래된 마애미륵불이 있다.


 

♠  법등의 역사는 짧지만 문화유산 3점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과천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의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관악산 문원계곡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오다가 과천중앙고 서쪽에 자리한 보광사에 잠시 발을
들였다.
교육원3거리에서 교육원로를 따라 6~7분 정도 걸으면 길 왼쪽(남쪽)에 보광사를 알리는 이정
표가 손짓을 하는데 그의 손짓에 맞춰 다리를 건너면 바로 보광사가 모습을 비춘다.

이 땅의 흔한 절 이름의 하나인 보광사, 서울과 수도권에만 우이동(牛耳洞) 보광사, 파주 보
광사(☞ 관련글 보러가기), 남양주 보광사, 그리고 이곳까지 60년 이상 묵은 절만 쳐도 최소
4곳이 넘는다.

관악산 남쪽 자락이자 정부과천청사를 바라보고 선 과천 보광사는 1946년에 창건되었다. 이때
법당 6칸과 요사 1동이 닦았는데 현재의 가람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룩된 것으로 2001년
에 극락보전을 새로 지어 법당으로 삼았고, 삼성각과 명부전, 설법전 등을 세워 지금에 이른
다.
법등(法燈)이 켜진 역사는 고작 70년 남짓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싹트지도 못했다. 허나 인
근 문원동 절터에서 오래된 3층석탑과 석조보살입상을 업어와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는 이곳
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았고, 1993년에는 조선 후기 불상까지 새로 영입하면서 매우 짧
은 법등에 비해 오래된 문화유산을 3개나 간직하게 되었다. 비록 보광사와 관련이 없는 것들
이지만 바로 그들 때문에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현대에 지어진 그저 그
런 사찰의 하나로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로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보전을 비롯하
여 명부전과 설법전, 삼성각, 요사, 범종각 등 6~7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설법전(說法殿)
과 요사(寮舍) 같은 경우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밑에도 공간을 만들어 2층을 이루고 있다.

▲  2002년에 지어진 보광사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칠성,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보광사 설법전

◀  관악산이 베푼 물로 늘 만조를 이루는
보광사 샘터과 이끼 옷을 살짝 걸친
석조(石槽)


▲  보광사 경내 동부 <3층석탑과 명부전(冥府殿), 석조보살입상>

▲  보광사 문원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39호

툇마루를 간직한 주지실 앞에 조그만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관문동 절터(어딘지는 모르
겠음)에서 가져온 것으로 하얀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닥돌 위에 얹혀져 있는데 2중의 기단(基
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한 맵시 좋은 탑이다.
이중 바닥돌은 시멘트로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1층 탑신에는 2중으로 새겨진 자물쇠가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 밑에는 얇게 만든 3단의 받침
이 있고, 지붕돌의 처마 끝은 살짝 올려져 약간 경쾌감을 준다.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을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탑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시흥 문원리 3층석탑'이다. 허나 과천은 어엿한 시(市)로 시
흥군에서 분리된지도 30년이 넘었고, 그 문원리도 문원동이 되었건만 명칭은 아직도 30여 년
전에 머물러 있다. 그 쾌쾌묵은 이름을 현실에 맞게 다듬어 '보광사 3층석탑'이나 '과천 문원
동 3층석탑'으로 갈아야 될 것인데 말이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그래도 시대와 지역에 맞게 이
름이 많이 바뀌고 있으나 지방문화재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77호

명부전 앞에는 오래된 석조보살입상이 서 있다. 이 석불은 문원동 15-166번지에서 가져온 것
으로 높이 1.7m 정도 되는 돌에 얇게 선각으로 새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씌우는 선에서 아주
간단히 처리했다. 허나 세월의 태클로 그 선각도 희미해져 자세히 안보면 석불인지 다른 석상
(石像)인지 햇갈릴 정도이다.

갓으로 머리가 가려진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썹과 눈, 입, 코를 새겼으나 거의 표정이 지워진
상태이고 목은 짧지만 두껍다. 돌을 제대로 깎지 않고 그냥 선각만 했기 때문이다. 왼손은 가
슴에 대어 연꽃 봉오리를 잡고 있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見)의 법의(法衣)이다.
많이 부실해 보이는 이 석불은 납작한 얼굴과 짧은 어깨, 간략화된 옷주름 등 도식화된 모습
을 통해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목조여래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2호

극락보전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그중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삼고 있
는 불상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좌상이다. 그 좌우에 자리한 존재들은 대세지보살(大
勢至菩薩)과 관음보살로 2001년에 조성되었다.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의 하례를 받고 있는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서 금칠을 입힌
것으로 원래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있었다고 한다. 6.25가 터지자 어
느 신도가 여주(驪州)로 피신시켰고, 그렇게 개인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이곳에 기증하여
보광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불상의 얼굴은 크고 둥근 편인데, 눈썹이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뜨며 북쪽을 바라
본다. 코는 작고 오똑하며, 붉은 입술 위에 검은 수염이 살짝 그려져 있다. 얼굴이 크다보니
볼살도 많아 보이며, 두 귀는 거의 어깨에 닿는다. 저리 귀가 크니 중생의 민원은 하나도 누
락됨이 없이 잘 들어줄 것이다. (민원도 잘 처리해주는지는 모르겠음)
머리는 나발로 두툼하게 무견정상이 솟아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가슴과 배 사
이에는 연꽃이 새겨진 허리띠가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따로 만들었는데,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구부렸다. 불상의 양식을 보아 조선 초기 또는 조선 초기 양식을 간
직한 조선 중기 불상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126-21 (교육원로 41, ☎ 02-502-2262)


▲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본 관악산
절은 작지만 관악산을 앞뜰로 품고 있어 앞뜰 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보광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반이 넘었다. 칼퇴근의 달인 햇님도 뉘엿뉘엿 그만의
공간으로 꽁무니를 빼고, 장대한 관악산도 어둠의 커텐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한다. 이렇게
하여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는 저물어가는 햇님처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관악산 보광사, 문원계곡(문원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찾아가기 (2018년 7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정부과천청사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정부청사입구 교육원3거리이다. 여기서 국
  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인도하는 교육원로를 6~7분 가면 왼쪽에 보광사가 있으며, 15분 정
  도 가면 오른쪽에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이 나온다. 여기서 마애승용군까
  지는 6~7분, 문원하폭포까지는 35~40분, 일명사터와 문원폭포는 40~45분 정도 걸린다.
* 441, 502, 540, 541, 542, 1-1, 9, 9-3, 11-1, 11-2, 11-3, 11-5, 103, 777, 3030번 시내버
  스를 타고 정부과천청사나 과천주공2,3단지 하차
* 문원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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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절집, 낙산 숭인동 청룡사 ~~~ (동망봉)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청룡사 '


▲  바깥에서 바라본 청룡사 우화루(雨花樓)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초파일에는 꼭 '석가탄신일 사찰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들먹이며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를 벌이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자냐? 그것도 아니다. 허
나 언제부터인가 설레는 날의 하나가 되었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번에는 어
느 절을 접수할까? 열심히 연구에 몰두했다.
허나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20세기 사찰 상당수는 인연을
지은 상태라 미답의 절은 거의 씨가 말랐다. 그래서 선택의 폭은 많이 좁아진 상태. 그렇
다고 서울 밖으로 나가기도 귀찮아서 옛날에 갔던 사찰 중, 볼거리가 많거나 급격히 소장
지정문화재가 늘어난 절을 선택하여 제일 먼저 낙산 청룡사를 찾았다


하지만 전날 지나친 과음과 새벽 귀가로 인해 15시에 비로소 두 눈이 떠졌다. 퇴근본능에
충실하며 자꾸 기울어만 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하여 청룡사 밑에 자리
한 창신역에 이르니 시간은 벌써 16시가 넘어버렸다.


 

♠  낙산 청룡사 입문 (정업원터 비각)

▲  정업원(淨業院)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호

창신역(6호선)에서 청룡사로 가다보면 경내 직전에 철책이 둘러진 비각(碑閣)이 마중을 한다.
청룡사의 일원인 그 비각은 한많은 인생을 살았던 조선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
씨의 넋을 위로하고자 세운 정업원터 비각(정업원구기)이다. 그렇다면 정업원은 무엇을 하던
집이었을까?

정업원이란 제왕의 왕후나 후궁, 궁녀가 궁궐을 나와 살거나, 귀족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
여 살던 곳이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때
처음 등장한 것으로 봐서 고려 초나 중기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통 제왕이 죽으면 그
의 후궁(後宮)과 궁녀는 출가하여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고, 왕족과 귀족 같은 경우 남편이 죽
으면 아내가 출가하여 머물기도 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개경(開京)에 있던 정업원을 서울로 가져왔다. 정업원 위치에
대해서는 창경궁(昌慶宮) 서쪽 설과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설이 있어 정확한 자리는 아리
송한 실정인데 동망봉 설은 정순왕후 송씨 때문에 잘못 전해진 것으로 영조가 1771년에 세운
정업원 비석이 그 설을 크게 부추겼다. (그 비석은 정업원이 없어진 지 160여 년 후에 세워짐)

정업원에 살던 비구니는 대부분 높은 계급의 여인이었고 주지는 보통 후궁이나 공주(옹주) 등
의 왕족이 담당했다. 그러다보니 왕실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써서 노비와 별사전(別賜田, 제왕
이 특별히 내린 전답), 분수료(焚修料, 향불을 피우고 도를 닦는데 드는 비용)를 두둑히 지원
했다. 허나 유생들의 정업원 폐지 건의가 끊이지 않아 1448년 일시 폐지되기도 했으나 1457년
다시 문을 열었으며, 연산군(燕山君) 시절 다시 폐지되어 그곳에 독서당(讀書堂)이 들어섰다.
하지만 독서당이 옥수동(玉水洞)으로 이전되면서 비어있는 공간이 되었고, 그 공간을 손질하
여 1550년 다시 정업원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유생들이 폐지하라며 아주 징하게도 징징거렸고 이에 왕실은 후궁들의 별처라 우기며
인수궁(仁壽宮)이란 간판까지 내걸었으나 유생들의 생떼 같은 반발을 감당하지 못하고 1612년
에 완전 폐지해버렸다. 그때 그곳에 살던 비구니는 모두 성밖 절로 쫓겨났다.

청룡사와 정업원하면 떠오르는 여인은 앞서 언급한 단종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이
다. 단종(端宗, 1442~1457)이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떨려나고 끝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
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강제 유배를 떠나자 왕후 역시 강제로 궁궐을 떠나야 했다. 그때 그들
의 나이는 불과 10대 중반, 송씨는 시녀 5명을 데리고 청룡사에 들어왔고, 단종 역시 같은 날
궁을 나와 여기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단종과 인근 영도교(永渡橋)에서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절로 돌아와 머리를 깎
고 비구니가 되니 이때 허경(虛鏡)이란 법명을 받았다.
이후 매일 동쪽(영월이 동쪽 방향임)에 자리한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안녕을 기원했으며, 단
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동쪽을 향해 크게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아랫마을까지 들렸
다고 한다.

세조(世祖)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조카며느리인 그에게 영빈정동(英嬪貞洞, 영빈전)이란
집을 내리고 식량을 주었으나 송씨는 그 일체를 거절하고 청룡사, 또는 그 인근에 묻혀 살면
서 자체적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자주동천(자지동천)에서 자줏물로 염색을 들여 그걸 팔았
는데, 염색을 할 때마다 빨간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자주동천(자지동천)이 되었음>
또한 그를 동정하던 백성들이 끼니 때마다 푸성귀 등의 먹거리를 갖다 주었는데 그 행렬이 매
우 길었다고 하며, 조정에서 이를 못하게 막자 여인들이 몰래 지금의 동묘(東廟) 인근에서 장
터를 열어 송씨를 도우니 세상에서는 그 장터를 '여인시장'이라 불렀다.

송씨는 16세에 강제 죽음을 당한 남편 단종과 달리 무려 81년이나 살았다. 그에게는 참 지옥
같은 삶이었으리라. 1521년에 기나긴 삶의 끈을 간신히 놓았으나 그의 집안 역시 역적으로 몰
려 풍비박산이 난 상태라 마땅히 묻힐 데가 없었다. 그래서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敬惠公主
)의 시댁 집안인 해주정씨 집안에 묻혔다. 그곳이 바로 사릉(思陵)이다.


▲  정업원터<정업원 구기(舊基)> 비석을 머금은 비각
너무 철통같이 머금고 있어 비석의 존재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햇살조차도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할 저 안에 들어있을 비석은 얼마나 답답할까?

▲  영조가 비석을 세우면서 친히 남긴 현판

1771년 영조(英祖) 임금은 창덕궁에 들렸다가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듣고 이곳을 찾아 비석
을 세웠다.
1칸짜리 비각이 비석을 꽉 조이듯 머금고 있어 그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정업원 옛터(구기)에
서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란 내용이 쓰여 있으며, 비각 앞 현판에는 '前峯後巖
於千萬年(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영조의 친필이다. 그밖에 동망봉
(東望峰)이란 바위글씨도 남겼으나 왜정 때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강제로 가루가 되었다.

이 비석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정업원구기'였으나 이름을 쉽게 한다며 단순하게 '정
업원터'로 갈았다. 허나 정업원은 이곳에 있지도 않았다. 송씨로 인해 엉뚱하게 이곳으로 엮
이게 된 것이다.


▲  담장 사이에 자리한 청룡사 일주문(一柱門)

청룡사는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해 있다. 옛날이야 주변이 죄다 숲과 밭두렁이었지만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위치로 20세기 이후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춤을 추면서 이제는 완전히 도
시 속에 외로운 공간이 되었다. 절 남쪽과 동쪽은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보문동
(普門洞) 주택가가, 서쪽과 북쪽에는 아파트가 높이 들어서 절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절 뒷쪽 언덕에 약간의 숲이 남아있긴 하나 산사(山寺)의 풍경은 와르르 녹아내려 근
처의 안양암(安養庵)처럼 속세에 완전 포위된 모습이다.

청룡사 일주문은 이곳의 정문으로 경내 바로 앞에 자리한다. 절 규모가 작고 주변이 싹 주거
지라 다른 산사와 달리 멀리 일주문을 내보내지 못했다. 문 좌우로 기와돌담을 둘러 절과 속
세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삼각산(三角山) 청룡사'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곳은 엄연히 낙산 자락이고 북한산(삼각산)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니 '낙
산 청룡사'를 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낙산(낙타산)이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이라 그리 칭하기가 썩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북한산 남쪽 줄기가 여기까지 이르고
있으니 삼각산을 칭하는 것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다.


▲  약간 빛바랜 모습의 우화루 현판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경내 한복판이다. 정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있고, 오른쪽에는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심검당이, 왼쪽에는 요사(寮舍), 일주문 옆구리에는 법회와 강의 장소
로 쓰이는 2층 규모의 우화루가 경내를 가리며 앉아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청룡사의 역사에 대해 잠시 풀어보도록 하자.

청룡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고려가 한참 후백제(後
百濟)와 다투던 922년 태조 왕건(王建)이 칙령(勅令)을 내려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이 들어선
위치가 한양(漢陽, 서울)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성이라 청룡사라 했으며, 비구니
혜원(慧圓)을 초대 주지로 삼으면서 창건 초기부터 비구니 절로 시작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에 따르면 도선대사(道詵大師)가 태조의 아버지인 왕융(王隆)에게 고
려 건국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이씨 왕조가 일어날 한양의 지기(地氣)를 억누를 필요가 있다며
개경 주변에 절 10개와 천하에 3,800개의 비보사찰을 세우도록 일렀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가
그 유언에 따라 절을 세우니 청룡사는 바로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허나 고려 초기 창건설을 입증할만한 유물과 기록이 없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하며, 그나
마 가장 오래된 존재가 17세기에 조성된 석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식구이다. 게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신뢰할만한 내력들이 쏙쏙 등장하고 있어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
이 크다.

어쨌든 문을 연 이후, 1036년 만선(萬善)이 1차 중창을 했으며, 1158년 회정(懷正)이 2차 중
창을 벌였는데 부근의 보문사(普門寺)가 문을 연 이후, 처음으로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세기 중반, 무려 40년 가까이 이어진 몽골과의 전쟁으로 절이 제대로 황폐화되자 1299년 지
환(知幻)이 중창했다고 한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혜비(惠妃) 이씨가 말년을 보냈고, 태조 이성계의 딸로 1398년 왕자
의 난으로 남편<흥안군 이제(興安君 李濟)>과 두 동생<세자 이방석(李芳碩), 무안대군 이방번
(撫安大君 李芳蕃)>을 몽땅 잃은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출가해 머물렀으며, 단종의 왕후인 정
순왕후 송씨도 이곳에 의지하는 등, 뒷전으로 밀려난 왕실 여인의 안식처 역할을 했다.
또한 1405년 태종(太宗)이 무학대사에게 명해 절을 중창케 했고, 1771년 영조가 직접 비석을
내리고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으로 바꾸는 등, 왕실의 지원과 관심도 넉넉했다.

1512년에 법공(法空)이 중창하고 1624년 예순(禮順)이 중창을 했으며, 1813년 화재로 소실되
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과 수인(守仁)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1823년 순조(純祖)의 왕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깊은 병에 걸리자 그의 아비인 김조순(金
祖淳)이 청룡사를 찾아 기도를 올렸다. 기도의 효과인지 어의(御醫)의 노력인지는 몰라도 병
세가 호전되자 김조순은 너무 기뻐 절 이름을 다시 청룡사로 갈게 했다. 1853년에는 그의 아
들 김좌근(金左根)이 중창을 하는 등, 나라를 말아먹은 안동김씨 패거리의 원찰(願刹) 역할까
지 도맡으며 제대로 배를 불렸다.

1902년에 정기(正基)와 창수(昌洙)가 중창했고, 1918년과 1932년에는 상근(詳根)이 중창했으
며, 윤호(輪浩)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대부분의 건물을 새로 손질하였다. 그리고 1973년
다시금 중창을 크게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  명부전 석조지장보살3존상

▲  지장시왕도

인근 보문사와 함께 서울에 대표적인 비구니(여승) 도량으로 대웅전과 우화루, 명부전, 산령
각, 심검당 등 8~9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2014년에 국가 보물로 지
정된 석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을 비롯해 지방문화재인 지장시왕도, 칠성도, 현왕도,
감로도, 가사도, 신중도, 석 삼불상, 독성도, 산신도, 정업원터 등 지정문화재 11점을 간직하
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대웅전, 명부전, 산령각에 분포해 있으며, 구한말에 제작된 가사도(袈裟圖,
울 지방유형문화재 205호
)와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넘어온 석 삼불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7호
)은 심검당에 들어있다. (이들의 위치는 바뀔 수 있으며, 나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음)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산사의 내음은 누리기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도시 속의 조그만 오
아시스 같은 존재로 비구니 고찰의 향기를 잔잔하게 불어주며, 비록 지금의 건물은 1950년대
이후 것들이라 겉으로 우러나오는 고색의 내음은 맡기 힘드나 건물 안에 오래된 불상과 불화
들이 앞다투어 고색의 향기를 불어주고 있다. 그러니 겉모습만 살피지 말고 반드시 대웅전과
명부전, 산령각, 심검당 안에도 들어가 그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그래야 청룡사의 진정한 깊
이를 누릴 수 있다. 즉 꿀단지의 단지만 보려고 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꿀을 보란 이야기다.

흥겨운 초파일 분위기에 맛있는 절밥과 먹거리를 기대하고 왔건만 예상 밖으로 절은 무척 썰
렁했다. 오색 연등의 물결과 관불의식의 현장이 없었다면 오늘이 초파일인지 모를 정도로 말
이다.
아무리 시간이 16시가 넘었어도 아직은 사람이 넘칠 시간인데 생각 밖으로 사람도 너무 없고,
심검당 주변을 아무리 기웃거려도 절밥이나 먹거리를 주는 분위기도 없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먹거리를 챙기지 못한 초파일 절로 쓰라리게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이곳 이후에 간 절에서는
국수와 떡을 얻어먹었음>

※ 낙산 청룡사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창신역 3번 출구를 나와서 도로(동망봉길)를 따라 도보 3분
* 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10번 출구)이나 1/4호선 동대문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청룡사(보문파크뷰자이아파트)에서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17-1 (동망산길 65, ☎ 02-763-4031)


▲  청룡사 심검당(尋劍堂)
절 뜨락의 하늘을 차지해버린 초파일 오색 연등의 위엄 앞에 심검당은
지붕이 거의 지워지는 굴욕(?)을 당했다.


 

♠  청룡사 명부전, 산령각

▲  청룡사 제일의 보물을 품은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명부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졌다. 정면 3칸
,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과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는데, 지장보살3존상을 비롯해 시왕상과 귀왕(2점), 판관(2점), 사자(2점), 동자상(1점),
장군상(2점)은 국가 보물로 지정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이들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청룡사 석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로 2014년 3월 지
방유형문화재에서 보물 1821호로 계급이 높아짐)


▲  명부전 석조지장보살3존상 - 보물 1821호

명부전에는 파란색 승려 머리를 한 지장보살이 조촐히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다. 돌을 빚어서
금색 옷을 입힌 것으로 그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인(合掌
印)을 선보이며 서 있다.

지장보살상의 높이는 92cm로 얼굴이 거의 네모난 편인데 이는 승일(勝一)이 만든 작품에서 많
이 나타난다. 머리가 좀 크다보니 신체비례가 그리 맞아보이지 않으며 몸에는 얇아보이는 법
의(法衣)를 걸쳤다. 달랑 2가지 색이 전부인 지장보살과 달리 밝은 색채의 옷을 입은 도명존
자와 무독귀왕은 조금 경직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하며(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그렇게 나옴),
시왕 같은 경우 각자의 스타일을 지니며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장보살3존상과 주위에 배열된 시왕상과 그의 식구들(지장탱, 시왕탱 등의 그림은 제외)은
17세기에 승일이 중심이 되어 조성된 것으로 이들은 건강 상태도 좋고 처음 봉안된 절과 불상
을 만든 승려, 시주자 이름이 적힌 발원문(發願文)이 전하고 있어 17세기 불교 조각을 이해하
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어준다. 즉 그 발원문 때문에 이들이 보물로 승진된 것이라 보면 된다.
조성 관련 절대 기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 기록 덕분에 국보나 보물로 오른
건물이나 불상, 탱화, 조각품이 적지 않다.

조성 관련 글자를 넣어둔 그 당시 절의 작은 배려가 그들을 무척 돋보이게 하였으며, 현재 우
리들에게 적지 않은 그 시절의 상황을 속삭여주는 시간적 유물이다.


▲  색채감이 돋보이는 좌측 시왕상 5점과 동자, 판관(判官), 시왕탱
이들은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시왕탱과 일부 동자상 제외) 다들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며 명부전 내부를 화사하게 수식한다.

▲  우측 시왕상 5점과 동자, 판관, 시왕탱

▲  우측과 좌측 가장자리에 자리한 판관과 사자, 금강역사상, 장군도


▲  산령각(山靈閣, 산신각)

대웅전 뒷쪽 높은 곳에는 산신을 봉안한 산령각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달랑 1칸에 불과한 맞
배지붕 건물로 그 안에 100년 이상 묵은 산신도와 독성도가 깃들여져 있다.


▲  산령각 산신도(왼쪽)와 독성도(오른쪽)

▲  청룡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1호

산신도와 독성도는 유리 액자에 담겨져 있어 반사되는 빛으로 인해 온전히 사진에 담기는 것
을 허락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내 모습도 조금 반사되어 나와 다소 쑥쓰럽다.

산신도는 1902년 4월에 조성되어 봉안된 것으로 금어 두흠(金魚 斗欽)이 그렸으며 비구니 충
근(忠根)이 시주를 했다. 그림 중앙에는 주인공인 산신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와 긴
꼬랑지를 살랑거리는 호랑이가 배치되어 있다. 그외에 산신의 활동무대인 산과 소나무 등이
있어 산신도의 기본적인 모습은 갖추었으며, 그림 우측 밑에 조성 관련 내용이 적혀있다.


▲  청룡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0호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 할배를 담은 것으로 산신도와 비슷
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독성을 비롯해 동자와 천태산 등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
리막 안에 담겨져 있다.


 

♠  청룡사의 보물 창고, 대웅전(大雄殿)

▲  연등을 뜨락에 늘어트린 대웅전

청룡사의 중심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안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와 칠성도, 현왕도, 감로도,
신중도 등이 담겨져 있다.


▲  초파일 행사의 백미,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간만의 외출에 신이 났을까? 그의 표정이 무척 해맑아보인다. 허나 손님도 없고
햇님도 무심하게 기울고 있으니 조금 있으면 다시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가
1년을 기다려야 된다. 그에게 그 1년은 마치 1,000년과 같으리라...

▲  청룡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2호

칠성도는 칠성 식구를 담은 그림이다. 186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
심으로 칠성원군(七星元君) 등이 빼곡히 담겨져 있어 정신이 없다. 산신도와 독성도는 참 단
촐한데 반해 칠성도는 식구들이 너무 많다. 그만큼 칠성 식구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는 이야
기겠지..


▲  영가단(靈駕壇)에 가려진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4호

감로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중생들에게 감로(甘露)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해탈(解脫)시
킨다는 의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영가(靈駕, 죽은 사람)를 위한 그림으로 쓰이며 그림
을 보면 대도시마냥 참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전체적인 내용은 부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
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
을 묻고 답을 듣는 것이다.
그림은 보통 3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상단에는 아미타3존블을 비롯한 7명의 여래(如來)와 지
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그려져 있고, 중간에는 지옥의 고통
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를 그린 반승(飯僧) 장면과 천도의 대상인 아귀(餓鬼)가 공양을 받
들어 먹는 장면을 그렸다. 그리고 하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양하게 묘
사되었다.


▲  청룡사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3호

붉은 색채의 현왕도는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저승의 시왕(10왕)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염라대왕(閻羅大王)을 다룬 그림이다. 그는 현왕(現王)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사람이 숨을 거
두고 3일 뒤에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을 할 때 사용된다. 그러니까 죽은 이의 내세와 극락왕생
을 위한 그림이다.

현왕탱은 현왕신앙이 유명하던 조선 후기에 많이 나타나며, 현왕을 비롯하여 판관과 사자 등
저승의 식구들과 그에게 심판을 받는 영가가 그려져 있다.
나도 언젠가 그의 면전에서 저럴 날이 있겠지. 나는 그에게 과연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솔직
히 그리 착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이득과 명예를 위해 뛸 뿐이다. 이 거지 같은 세
상에서 착하고 순하게 사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니까..


▲  청룡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1호

지장시왕도는 원래 명부전에 있었으나 내가 갔을 때는 대웅전에 머물러 있었다. 1868년에 그
려진 것으로 푸른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지닌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비롯하
여 시왕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빈틈 없이 자리해 있다. 그러니까 앞서 명부전의 구성 요소
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장3존상은 노란 광배 안에 들어있어 저승의 특별한 존재임을 알려
준다.

이것으로 대웅전에 깃든 오래된 그림은 모두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도(神衆圖)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나를 피해 이웃 심검당으로 마실을 간 모양이다. 그
리하여 청룡사에 깃든 문화유산 3점(신중도, 가사도, 석 삼불상)과 인연을 짓지 못했다. 아무
래도 다시 또 오라는 청룡사의 뜻인 모양인데 다행히 괘불(掛佛)이나 복장유물처럼 그리 만나
기 어려운 존재들은 아니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20세기 후반에 새로 만든 3존불로 가운데 석가불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고
그 좌우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  경내 뒷쪽 언덕에 자리한 하얀 피부의 약사불(藥師佛)

대웅전 뜨락에서 요사 옆으로 난 길을 가면 정업원터 비각 윗쪽이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오
르면 그 길의 끝에 근래 지어진 약사여래불이 환한 표정으로 맞이한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숲이 약간 우거져 있는데, 그 현장에 터를 닦고
중앙에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을 만든 다음 약사여래불을 앉혔다. 주변에는 녹음(綠陰)이
잠긴 나무들이 있고, 북쪽과 동쪽 너머는 속인(俗人)들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도시 속에
갇힌 청룡사의 현실을 말해준다.


▲  약사불에서 바라본 숭인동과 동망봉
바로 밑에 보이는 기와집은 산령각과 대웅전, 심검당이다.


약사불 주변에서는 아주 손바닥만한 천하가 조망되고 있는데 청룡사 경내와 숭인동, 숲이 우
거진 동망봉이 그 작은 천하를 이루고 있다.
동망봉은 정순왕후가 단종이 숨진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짓고 남편의 극락왕생
을 빌던 곳으로 동쪽을 애타게 바라본 곳이라 하여 동망봉이라 불린다. 그곳에는 숭인근린공
원이 닦여져 있는데, 이렇듯 청룡사와 동망봉, 낙산 동쪽에는 정순왕후의 흔적과 애환이 진하
게 깃들여져 있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청룡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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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둘러보기 ~~~ (능말 은행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묘역,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와 석불입상)



'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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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사사 3층석탑
◀ 풍산심씨 심사손 묘
▶ 약사사 석불입상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여름이 봄을 밀어내고 천하를 한참 삼키던 6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강서구의 상큼한
뒷동산인 개화산을 찾았다.
개화산은 서울 서쪽 끝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북쪽 끝으머리에 매달린 우리집(도봉동)에
서 꽤 먼 곳이다.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지만 서로가 끝과 끝이라 거리도 거의 40
km,
지하철로 가도 족히 1시간 반은 걸려 그곳에 가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다. 그
러다보니 개화산을 비롯한 강서/양천 지역은 발이 잘안가게 된다.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개화동(開花洞)과 방화동(傍花洞)에 걸쳐있는 뫼로 거의 평지로
이루어진 강서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은 작고 야트막하지만 평지 속에 솟아있는 존
재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일품이며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매우 무성하여 풍경도 아
름답다. 산 동북쪽에는 꿩고개라 불리는 치현산(雉峴山)이 이어져있고, 북쪽에는 한강과
5호선 방화차량기지, 서쪽은 김포평야(金浦平野), 남쪽에는 방화동과 김포국제공항이 있
다.

개화산의 첫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때 주룡(駐龍)이란 도인(道人
)이 살고 있었는데, 매년 9월 9일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
다. 이것을 '9일용산음(九日龍山飮, 9월 9일마다 주룡산에서 술을 마심~)'이라 불렀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9월 9일마다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
는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우니 그곳이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이며,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또한 주룡 설화 외에
도 산의 모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는 뜻의 개화산
(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산이 코끼리, 개화산과 마주보고 있는 한강 북쪽 행
주산(幸州山, 덕양산)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액운을 막고 서
울에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
(獅象之形)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겉모습은 작지만 속은 알찬 개화산에는 괘 많은 명소가 안겨져 있는데 오래된 석
탑과 석불을 간직한 약사사를 비롯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미타사 석불입상, 호국충
혼위령비, 방화근린공원, 신선바위, 능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봉수대터, 봉수대, 상사
마을 은행나무 등이 있으며 약수터도 많이 있었으나 그 수가 계속 줄어 이곳의 제일가는
물이었던 약사사 약수터가 2013년 봄에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또한 산 허리에는 강서둘레길 1코스인 개화산숲길(개화산 둘레길 3.35km)이 닦으면서 조
망이 괜찮은 곳에 전망대(개화산, 아라뱃길, 신선바위)를 설치하여 눈을 심심치 않게 해
준다. 다만 군부대가 정상과 북쪽 자락에 있어 정상에는 발을 들일 수 없다.

본글에서는 능말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를 시작으로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약사사를 살
펴보도록 하겠다.


 

♠  옛 능말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  은행나무(서울시 보호수 16-3호)와 느티나무(서울시 보호수 16-6호)

개화산에 안기기 바로 직전에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들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들은
오래 숙성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형제로 삼정초교 남쪽에 작게 터를 닦은 느티어린이공원(이
하 느티공원)에 자리해 있는데 나는 약사사와 미타사, 풍산심씨 심정공파 묘역, 강서둘레길에
만 눈이 어두웠지 그들 고목(古木)의 존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번 나들이가 나에게 준 커다란 선물인 이들 나무는 공원 남쪽에 삼삼하게 우거져 공원 전체
에 그늘을 드리우며 무더위를 제대로 긴장 타게 한다. 그들 가운데
몸통이 큰 동쪽 나무 2그
루가 서울시 보호수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서쪽 나무 2그루는 그들의 후손임)
가장 둘레가 큰 나무는 은행나무로 높이 11m, 둘레가 4.44m에 이른다. 그가 보호수로 지정된
시기는 1972년 10월 12일로 그때 추정 나이가 435년이라고 하니 그새 40여 년의 세월이 강제
로 얹혀져 지금은 480년 정도 된다. 그 옆의 느티나무는 여기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존재로
높이 17m, 둘레 3.86m이다. 1974년 4월 20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480년
이라 지금은 520년 정도 되었다.

이들은 솔직히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아직까지 말
단 보호수에 머물러 있다. 우리집과 가까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천연기념물로 아무 손
색이 없거늘, 오랫동안 보호수로 있다가 2013년 봄에서야 겨우 지방기념물로 승진된 바 있고,
반면 가치는 좀 떨어져 보이는데 외람되게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나무들도 적지 않아 도대체 무슨 기준인지 의문을 내던지게 한다.
허나 이들이 인간들이 멋대로 정한 잣대에 관심이나 있을까? 보호수이든 천연기념물이든 그런
것은 관심 밖일 것이다. 올해도 무탈히 잎을 피우고 길손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정자나무로
서의 소소한 역할에 만족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무는 신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이 아니다.

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에 활약했던 심정(沈貞)이 심은 것으
로 전해진다. 중종(中宗) 시절에 심정 일가가 이곳에 정착해 자연마을을 이루었는데, 심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심씨마을<또는 심울(沈蔚)이라 했음>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정곡리, 긴동
리와 함께 옛 방화동을 이루던 마을로 인조 시절에 왕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 1632년
인조에 의해 원종(元宗)으로 추존됨>의 능을 양주에서 이곳으로 옮기려다가 터가 좁아서 김포
풍무동으로 옮겼는데 그 연유로
능(陵)이 들어가는 능말(또는 능골, 능리)로 불리게 되었다.

1992년 능말 주변에 개발의 칼질이 가해지면서 마을은 강제로 사라졌고, 주민 대부분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 자리에는 방화택지지구가 들어서 성냥갑 아파트와 건물이 잔뜩 심어
지면서 전원(田園) 분위기는 많이 녹아내렸으나 다행히 이들 나무는 개발의 칼질도 쏙 피해가
면서 제자리를 지켜 옛 능말의 추억을 아련히 되새기게 해준다. 만약 보호수 등급이 아니었다
면 아무리 몇백 년 묵은 나무라고 해도 진작에 아작이 났을 것이다. 그것이 이 땅의 천박한
개발주의의 현실이다.


▲  느티공원 놀이터에서 바라본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의 위엄

능말의 정자나무이자 당산나무였던 이들 나무 형제는 낯선 이들로 이루어진 방화지구의 정자
나무가 되었다. 나무는 4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외에는 거의 그대로지만 주변이 싹
낯설게 변해 나무 자신도 가끔 놀랄 것이다. 이제 그들이 옛 능말의 유일한 흔적인 것이다.
개발의 칼질로 고향을 떠난 이들은 능우회(陵友會)란 모임을 결성했는데, 1992년 10월 17일에
그들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이 담긴 '애향(愛鄕) 능말 옛터' 비석을 나무 그늘에 세워 추억 속
으로 사라진 옛 고향을 그리워한다.

* 느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799


▲  개화산약수터

티공원에서 서쪽으로 가면 바로 숲내음이 진동하는 개화산이다. 여기서 북쪽 길로 가면 문
정공파 묘역의 시조(始祖)인 심정 묘역이 나오고, 정면으로 보이는 서쪽 산길을 3분 정도 오
르면 개화산약수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방화역을 나올 때 마신 커피음료가 목구멍에서 채 마르기도 전이지만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
냥 못지나치듯 샘터를 보면 꼭 물을 한모금 마셔야 발길이 떨어진다. 그래서 졸고 있는 파란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마시니 확실히 자연산이 더 좋은 것인지 앞서 마신 음료보다 더 시
원하고 달달하다. 아직 수질은 적합 판정을 받고 있지만 약사사 약수터를 비롯해 개화산에 적
지 않은 약수터가 개발의 칼질에 목이 달아난 상태라 이곳의 미래도 나처럼 장담하기가 어렵
다 부디 다음에 올 때도 이곳의 물을 꼭 마셔야 되는데, 아무쪼록 무탈하기를 기원해 본다.

산길 옆에는 조그만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자연 그대로 두지 않고 계곡 양쪽에 시멘트을 발
라 둑처럼 만들면서 아주 심하게 옥의 티를 선사하고 있다. 그래도 엄연한 산골인데 돌에 걸
터앉아 발을 담굴 수 있게 해줘야 진정한 계곡이 아닐까 싶다.


▲  개화산약수터 주변 오솔길


 

♠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豊山沈氏 文靖公派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7호

▲  심정(沈貞) 묘역

개화산 동쪽 자락에는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이하 문정공파 묘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들 묘역은 심정을 시작으로 그 자손들 50~60여 기의 묘로 이루어져 있는데 1~2곳에 뭉쳐있는
것이 아니라 산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다. (주로 방원중교에서 약사사로 올라가는 금낭화로17
길 주변과 삼정초교 서쪽 산자락에 있음)
이들 무덤 중 심정과 심사손, 심사순, 심수경(沈守慶) 묘역과 그에 딸린 석물, 신도비가 지방
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아님) 개화산을 주산(主山)으로 한 명당자리로 명
성이 자자하다.


정공파 묘역의 시조는 심정이다. 그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 후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묻혔기 때문이다. 허나 먼저 묻힌 이는 심정의 아들인 심사손
이다. (심정은 1532년, 심
사손은 1528년에 사망)
심정의 묘역은 문정공파 묘역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해 있는데, 삼정초교 바로 뒤쪽(서쪽)이다.
이곳에 가려면 느티공원에서 개화산으로 들어서자마자 북쪽 언덕 길로 가면 되는데 심정 쉼터
를 지나 오른쪽을 유심히 보면 샛길이 보인다. 그 길로 들어서면 심정과 심사순의 묘역이 모
습을 드러낸다.

심정(1471~1531)은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으로 아버지는 적개공신(敵愾功臣)
이던 심응(沈膺)이며, 어머니는 서문한(徐文翰)의 딸이다.
1495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1502년 별과(別科)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1503년 수찬(修撰)이 되었다. 1506년 연산군(燕山君)에게 불만을 품은 박원종(朴元宗), 성희
안(成希顔) 등에게 붙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가했으며,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
등에 녹훈(錄勳)되고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150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으며, 귀국하여 남
곤(南袞), 김극성(金克成) 등과 짜고 김공저(金公著)와 조광보(趙光輔)를 제거하고자 옥사(獄
事)를 벌이지만 실패했다.
1509년 성천부사(成川府使) 등을 지냈고, 1515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승진했으나 삼사(三司
)의 태클에 물러나고 만다. 1518년 형조판서(刑曹判書) 후보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를 중
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공격을 받아 소인(小人)으로 찍혔고 이조판서이던 안당(安瑭)의
거부까지 겹쳐 결국 떨려나고 만다.

이후 심정은 집과 가까운 가양동(加陽洞) 한강변에 자신의 호를 딴 소요정을 짓고 울분을 달
래다가 아들 심사손까지 사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사림패거리에 대한 원망이 아주 머리 끝
까지 치솟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 그는 머리가
좋고 꾀를 잘 내어 주변으로부터 지혜주머니라 불렸는데, 이때부터 그 주머니가 복수의 칼날
을 위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1519년 조광조가 왕에게 중종반정 공신들의 위훈(偉勳) 삭제를 청하면서 훈구파(勳舊派)를 건
드렸다. 이때 심정도 정국공신 자격을 삭탈당했는데 훈구파는 물론 왕의 후궁들까지 조광조에
게 치를 떨게 된다. 바로 이때다 싶어 중종의 후궁인 경빈박씨(敬嬪朴氏)와 짜고 조씨전국<趙
氏專國 : 조씨(조광조)가 나라를 마음대로 한다>이란 말을 궁중에 퍼트려 왕을 홀리게 했다.
조광조와 조금 거리를 두던 중종은 그 말에 넘어가고, 훈구파의 주요 인물인 남곤, 홍경주(洪
景舟)와 연합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사림패거리를 죄다 아작을 내버렸다. 사림의 핵
심인 조광조와 김식(金湜)은 쓰디쓴 사약을 먹여 영원히 보냄으로써 피맺힌 원한을 아주 속시
원하게 푼 것이다.

이후 남곤과 함께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라 그와 사이좋게 국정을 장악했으며, 1527년 남곤이
죽자 좌의정(左議政) 및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이항(李沆), 김극핍(金克愊)을 수하
에 두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세자<나중에 인종(仁宗)>의 인척 관계자이자 라이벌이던
이조판서 김안로(金安老)를 귀양 보내 제거하려고 했다.
허나 경빈박씨의 동궁(세자) 저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심정이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면
서 심정은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김안로는 이때다 싶어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
예(權輗)를 구워삶아 심정을 탄핵했으며, 중종의 명으로 평안도 강서군(江西郡)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김안로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심정의 부하인 이항과 김극핍까지 엮어
신묘삼간(辛卯三奸, 1531년)으로 내몰면서 끝내 사약을 마시고 죽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딱
60이었다.

심정의 시신은 그의 일가 뒷쪽 개화산에 묻혔으며, 1534년 부인이 합장되었다. 이후 김안로가
죽자 문정공(文靖公)이란 시호를 받으니, 그 연유로 그의 묘역이 문정공파 묘역이 된 것이다.
시호는 받았지만 명종(明宗) 이후 권력의 핵심에 서서 훈구파 못지 않게 파행을 일삼은 사림
파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기묘사화로 사림파를 제대로 절단낸 경력 때문이다. 그들은 남
곤과 심정을 한데 엮어 곤정(袞貞)이라 부르며 소인배의 대명사로 손가락질했고, 그것은 지금
까지 전해져 심정하면 개혁을 꿈꾸던 사림을 아작낸 기묘사화의 원흉, 지나친 권력의 화신 등
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생각나게 만든다. (나도 그렇음)

심정은 권력욕이 대단하고 자신의 지혜를 과신해 많은 무리수를 두었으며, 끝내 그 무리수로
스스로를 말아먹게 된다. 허나 다행히도 그와 아들 심사순 정도만 권력싸움에 패해 불명예스
럽게 퇴장했을 뿐, 그의 자손들까지 화는 미치지 않았으며, 아들 심사손과 손자 심수경은 많
은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형제간의 우의가 대단해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
지 살펴주었으며, 형제와 가족을 잘 챙겨주었다.

심정의 묘역은 부인(하양허씨)과 합장된 봉분(封墳) 1기와 묘비<묘갈(墓碣)>, 상석(床石), 문
인석 2기가 전부인 조촐한 모습으로 신도비는 없으며, 묘갈은 1579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손
자인 심수경이 짓고, 증손자인 심일취가 글을 썼다.

▲  심정과 부인의 합장묘(合葬墓)

  ◀▲  심정묘를 지키는 문인석(文人石) 2쌍
500년 가까운 고된 세월의 무게를 입고 있지만
별다른 상처 없이 잘 남아있다. 저들이 멀쩡히
무덤을 지키고 있기에 심정묘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준다고 해서 지방
문화재로 지정됨)


▲  심사순(沈思順)과 부인 덕수이씨 묘

심정 묘 밑에는 심사순의 묘가 자리해 있다. 심사순(1496~1531)은 심정의 아들로 자는 의중(
宜中), 호는 묵재(默齋)이다. 심정의 맏형인 심원(沈元)이 아들이 없어서 그의 후사로 들어갔
으며, 시를 잘짓고 문장에 아주 뛰어나 17세에 초시(初試)에 장원해 사림패거리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1516년 진사시(進士試)에 붙었고, 1517년 문과 별시(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승문원(承
文院)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그리고 병조정랑(兵曹正郞),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530년 산릉(山陵)에 대한 지문(誌文)을 작성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1531년 그 지문의 글이 문
제가 되어 필적을 대조받기도 했다. 그때 심정 일가를 아작내려는 김안로가 이름을 숨기고 글
을 썼다는 이유를 내세워 옥에 가두었고, 자신은 죄가 없다고 목이 터져라 외쳤건만 결국 거
친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그의 묘는 부인과 합장된 조그만 봉분과 묘비(묘갈), 상석, 문인석 1쌍이 전부로 바로 정면이
낭떠러지이다. 그 너머(동쪽)로 삼정초교와 방화1단지 아파트가 보이며, 예전에는 경사진 곳
이었지만 방화지구 개발로 인해 각박한 낭떠러지가 싹둑 잘리게 된 것이다.


▲  심정묘에서 약사사로 올라가는 소나무 숲길

▲  심일취(沈日就)와 부인 광산김씨 묘

방원중학교에서 약사사로 이어지는 길(금낭화로17길) 중간에 심사손의 아들인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묘와 신도비가 있는데, 이번에는 모르고 빼먹었다. 하여 본글에서는 다루지 않
는다. (어차피 예전에 다 봤음)

약사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 직전에 문정공파 묘역을 알리는 검은 피부의 문화유산 안내판이
있다. 그 동쪽 산자락에 무덤이 여럿 있는데, 윗쪽에 심일취의 묘가, 밑에는 심사손 묘와 신
도비가 자리한다.

심일취는 심수경의 2번째 아들로 자는 중진(仲進)이다. 1547년에 태어나 1573년 식년시(式年
試)에 3등으로 급제했으며,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지냈으나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문장을 잘 지어 심정과 심사손의 묘갈(墓碣)을 직접 썼으
며, 죽은 이후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추증되었다.
그의 묘는 상석과 묘갈(묘비),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면 심사손의 묘가 나온다.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  심사손<沈思遜, 또는 沈士遜>과 부인 전의이씨 묘

심사손(1493~1528)은 자가 양경(讓卿)으로 15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1517년 대과(
大科)에 급제했고, 승문원(承文院)과 예문관(藝文館)에서 사필(史筆)을 했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는데, 이때 군무(軍務)를 익혀 그런데로 문무를
겸비하게 되었다.

1525년 의정부(議政府)에 배치되어 사인(舍人)이 되었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홍
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지내던 중, 압록강(鴨綠江) 너머의 여진족이 저항할 조짐을 보이자 중
종은 그의 품계를 높여 만포진(滿浦鎭)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임명했다. 만포는 평안북도 강
계(江界) 서쪽에 자리한 변방이다.
심사손은 덕과 무력으로 여진족(女眞族)을 달래고 정벌하면서 변경을 안정시키니 군사와 여진
족들은 그를 어르신이라 부르며 복종했으며, 1528년 1월 진중에 땔감이 부족하자 군사를 이끌
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南滿洲)에서 나무를 벌채하였다. 그때 여진족이 불만을 품고 습격을
하는 통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후퇴했으나 명줄이 다되었는지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면서
사망하고 만다.

사망 소식을 접한 중종은 명신(名臣)을 잃었다며 크게 슬퍼했고, 며칠 동안이나 제때 수라를
들지 못했다고 하니 그만큼 왕의 신망이 대단했음을 가늠케 한다. 그의 시신은 그해 3월 11일
개화산에 묻혔으며, 문정공파 묘역의 첫 무덤이 되었다.
부인 전의이씨는 남편이 죽자 기절하여 간신히 소생했으며,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것을 한스
럽게 여겼다. 그는 1578년 86세의 나이로 뒤늦게 남편을 따랐다.

심사손의 묘는 봉분 2기, 묘갈(묘비), 상석,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심
정과 심사순도 갖추지 못한 신도비를 갖추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심정과 심사순은 권력싸움에
밀려 곱지 않게 죽은 탓에 간신히 문인석 1쌍만 갖추고 끝났지만 심사손은 나름 공적도 크고
왕과 아버지의 후광(後光)도 대단해 신도비까지 두게 된 것이다. 만약 1531년까지 살아있었다
면 그도 무슨 험한 꼴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허나 그의 묘라고 꼭 무탈한 것은 아니다. 2009년 가을에 도굴을 당했기 때문이다. 문정공파
묘역은 정말 도굴은 모르고 살았건만, 도굴범의 마수가 이곳까지 미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이때 무엇이 도굴당했는지 파악된 것은 없다. 무덤 부장품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범인도
아직 잡히지 못해 더욱 분노를 치밀게 만든다.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신도비

▲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  심사손 묘갈

▲  부인 전의이씨 묘갈


          ◀
  심사손 신도비(神道碑)
심사손묘 동남쪽에 자리한 이 신도비는 1580년
에 세워졌다. 신도비는 고위 관리와 왕족들의
무덤에만 세울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보통 신
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의 동남쪽에 세운다.
비석 높이는 311cm, 폭 120cm로 비문(碑文)은
영의정 홍섬(洪暹)이 짓고, 여성군 송인(宋寅)
이 썼으며, 행온성도호부사 한준(韓準)이 두전
을 썼다.
네모난 비좌(碑座)에 오랜 세월의 때가 멋지게
낀 비문을 세우고, 그 위에 2마리에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螭首)를 두었는데,
이수 조각이 꽤 섬세하고 생동적이다.

※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지하철 5호선 방화역 3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방화5단지로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약사사로 통하는 길(금낭화로17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들어가면 심
  수경, 심일취, 심사손의 묘역으로 접근할 수 있다.
* 방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북쪽으로 쭉 가면 방화역교차로 서쪽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
  로 가면 느티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을 가로질러 계속 직진하면 개화산이다. 여기서 오른쪽
  (북쪽)으로 가면 심정묘와 이어지고, 직진(서쪽)하면 약사사길(금낭화로17길)과 만난다.
* 방화역 경유 시내버스 노선 : 651, 654, 672, 6629, 6648, 6712, 강서구 마을버스 07번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산152-5일대


 

♠  오래된 석불과 석탑을 간직한 개화산의 상징적인 명소
약사사(藥師寺)

▲  약사사를 알리는 표석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둘러보고 북쪽으로 가면 약사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마중을 나
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으로 가면 봉화정과 개화산전망대로, 오른쪽은 약사사, 개
화산전망대로 이어진다. 봉화정과 강서둘레길 1코스 서쪽 구간이 목적이라면 왼쪽 길로 가면
되고 약사사를 거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속세를 향해 활짝 문을 연 약사사 정문

사사 표석에서 2분 정도 가면 개화산의 상징, 약사사가 모습을 비춘다. 개화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이 절은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으나 앞서 언급했던 주룡선생과 관련된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신라 때 개화산을 주름잡던 주룡이 세상을 떠나자 매년 9월 9일마다 그가 술을 마셨던 곳에서
이상한 꽃이 피었는데,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개화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설화와
1827년에 송숙옥(宋淑玉)이 작성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와 '양천읍지(陽川邑誌)'를 통해 신
라 때 창건된 것으로 우기고 있으나 신빙성이 있는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다. 개화산약사암중
건기와 양천읍지도 약사사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대신 경내에 고려 때 석탑
과 석불이 있어 적어도 고려 중/후기부터 법등(法燈)을 킨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는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에 개화사로 나와 예전 이름이 개화사였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임진왜
란 시절 격전지인 행주산성(幸州山城)과 양천(陽川) 고을의 중심지인 가양동이 근방이고, 개
화산은 이들을 이어주는 요충지라 그때 절이 파괴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절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37년 좌의정(左議政) 송인명(
宋寅明, 1689~1746)이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송씨 가문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그는 어린 시
절 매우 가난했는데, 개화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해 과거에 붙었다.
이후 재상에 오르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개화사의 덕이라며 절을 중수하고 절 밑에 불량답
(佛糧畓)을 보시했다. 또한 영조(英祖) 시절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이병연
(李秉淵)이 개화사와
송인명과의 끈끈한 사이를 '사천시초(槎川詩抄)'란 시로 표현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 가양동에 있었음)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조선 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이병연
의 시를 보고 개화사를 찾아가 그림을 남겼는데, 그는 1740년부터 5년 동안 양천현감으로 있
으면서 개화사와 소악루를 비롯한 양천의 명승지를 아낌없이 화폭에 담아 당시의 정취를 아련
히 알려준다.

1799년 송인명의 후손인 송백옥
(宋伯玉)이 절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남겼으며 1827년 절이 퇴
락하자 처사 창선
(昌善)과 청신녀(淸信女) 경자(京子)가 돈을 모아 기존 절터에서 몇 걸음 떨
어진 곳에 새롭게 자리를 파 절을 옮겼고 석불입상을 약사불로 삼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藥
師庵)으로 갈았다. <이후 약수사(藥水寺), 약사사 등으로 변경됨>
1911년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의 되었고, 1928년 주지 박원표(朴元杓)가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허나 6.25 때 개화산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그나마 세운 건물이 모두 무너졌으며
가건물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1984년 이후 대웅전과 감로당, 삼성각을 지어 지금에 이
른다.

그리 넓지 않은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위시하여 감로당과 삼성각, 범종각, 공양간
등 5~6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크게 지어진 감로당은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
해주며, 석불은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기도 수요가 제법 많다. 허나 경내에서 이들 외에는 고
색의 향기는 전혀 없다.
또한 경내 밑에는 개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던 약수터가 있었는데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
다고 하여 중생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약수터 때문에 절의 이름이 한때 약수사가 된 적도 있
을 정도.. 허나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부적합 판정으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끝내 부
적합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3년 봄에 완전 폐쇄되고 말았다. 석불과 더불어 절의 든든한 양대
밥줄이자 아주 착했던 약수터의 퇴장은 개화산과 절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고, 이제는 추억
이나 사진에서나 끄집어 봐야 되는 흐릿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약사사는 숲에 둘러싸여 있어 산사의 향기도 그런데로 진하며, 절이 아담
하여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또한 방화역에서 절까지 길이 잘 닦여있고 도
보 20분 정도로 접근성도 괜찮으며, 차량으로 경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절을 둘러보고 개화
산 봉화정과 강서구의 야심작인 강서둘레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을 겯드린다면 아주 영
양가 만점의 나들이가 될 것이다.

※ 개화산 약사사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① 지하철 5호선 방화역 3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방화5단지로터리이다. 여기
   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방원중교 옆으로 약사사로 이어지는 길(금낭화로17길)이 나온다.
   방화역에서 도보 20분
② 방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북쪽으로 쭉 가면 방화역교차로 서쪽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
   로 가면 느티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을 가로질러 직진하면 개화산이며, 여기서 직진을 하거
   나 오른쪽으로 가서 심정묘 직전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약사사로 이어진다. 1번 코스보다는
   5분 정도 빠르다.

* 약사사 공양밥이 꽤 맛이 좋다고 한다. 매일 12~13시에 점심 공양을 제공하며, 일반인도 공
  양이 가능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332-2 (금낭화로 17길 261 ☎ 02-2662-2551)
* 약사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범종각과 삼성각

절 정문을 들어서면 약사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3층석탑과 대웅전이 시
선을 주고 있으며, 왼쪽에 약사사 안내문과 매점, 범종각이, 오른쪽에는 주차장과 해우소, 감
로당이 자리한다.

▲  매점과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에는 1976년에 조성된 범종이 걸려있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공양간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전(佛殿)이긴 하
지만 겉모습은 거의 요사(寮舍)나 여염집 같은 분위기로 가운데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
조이다.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탱과 산신탱은 1960
년에 조성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삼성각 바로 옆에 공양간이 있음)

▲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는 독성상(獨聖像)
산신, 칠성과 달리 그림은 없다.

▲  전륜(轉輪)을 쥐어든 칠성상과 다소
빛이 바랜 칠성탱(七星幀)

◀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상과
산신탱(山神幀)


▲  감로당(甘露堂)

3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삼성각을 바라보고 선 감로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요사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甘露堂','開
花山 藥師寺' 현판은 승려 석정(石鼎)의 필체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
기에 좋으며, 벽면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혜능(慧能) 이야기, 백락천과 도림선사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다.


▲  약사사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호

대웅전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약사사가 적어
도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탑 높이는 4m로 땅에 바닥
돌을 깔고 1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머리 장식은 어느 세월이 잡아
갔는지 없어진 것을 근래에 새로 붙여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랫 부분과 전혀 다른 피부색을
보인다.

탑은 길쭉하고 홀쭉한 모습으로 기단이 1층으로 간략화 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의 밑면 받침
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어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서울에는 오래된 석탑이 많이 있지만 정
작 토박이 옛 탑은 몇 되지 않는다. 토박이 고려 탑은 낙성대(落星垈) 3층석탑과 홍제동(弘濟
洞) 5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 그리고 이곳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왜정(倭政) 이후에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상경한 것들이다.


▲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1988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을 청기와로 수를 놓아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내며 절의 왜소함을
능히 커버한다.


▲  대웅전 앞부분
정면 양쪽 모서리 기둥에는 힘차게 날아오르는 용을 그려놓아 대웅전의 화려함을
더욱 돋군다, 약사사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뜻에게 용을 새겼을 것이다.
허나 중요한 것은 겉면이 아닌 내실이다. 너무 겉치례만 차리지 말고
속세와 중생을 위해 더욱 헌신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  대웅전의 붉은 닫집과 불단을 장식하는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 불단에는 1기의 석불과 7기의 불상/보살상이 있다. 그 뒤에는 조
그만 금동불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거의 3천불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금동(金
銅) 일색인 곳에 홀로 빛바랜 돌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의 큰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가 3층석탑 다음으로 경내에서 오래된
존재로 이곳을 먹여살리는 든든한 밥줄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석불, 나머지 금동불은 그를
위한 조연이 된다.
비록 겉은 초라해 보일 지 몰라도 그의 가치는 그들보다 한참이나 높다. 다른 불상은 제쳐두
더라도 3층석탑과 그는 꼭 봐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석불 앞에는 조그만 금동석가불이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아 앉아있고,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그 옆에는 큼직한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 중생을 굽어본다. 금동불은
모두 1995년 이후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들이다.


▲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호

불단의 많은 불상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불입상은 머리에 쓴 돌갓 밑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하여 고려 후기, 아무리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의 든든한 밥줄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에 일장미륵(一丈彌勒)으로 등장한다.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많으나 가슴 앞에 댄 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음보살로 여
겨지기도 하며, 불상의 투박한 모습을 통해 고려와 조선 때 온갖 모습으로 재현된 미륵불(彌
勒佛)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그를 약사불(藥師佛)로 삼으면서 절 이름
을 약사암으로 갈았으며, 현재도 영험한 약사불로 삼아 애지중지한다.

이 석불은 현재 위치 바로 옆에 있었던 건물에 있었는데, 밑도리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
다가 1974년 그 건물을 부시고 대웅전을 조성하면서 불상 밑에 기단석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
했다.
불상의 얼굴은 길고 넓적한데, 표정은 썩 별로이다. 경직된 인상에 두 눈은 너무 크기 때문이
다. 코는 세모로 오똑하나, 코 끝은 크게 닳아진 상태이고, 입은 그 모양만 확인이 가능하다.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의 고충을 듣기에는 별 지장은 없어 보이며, 머리에는
둥근 돌갓을 쓰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미륵불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가 얼굴에 비해 너무 작고, 옷도 옷주름 몇 가닥이 표현된 것이 전부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꽃을 든 불상의 이미지를 주며, 밑도리는 앞에 있는 금동석
가불과 불단에 가려져 확인이 어렵다. 그렇다고 실례를 무릅쓰고 확인하기에도 좀 그렇다.
썩 괜찮은 작품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존재로 소망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해 많
은 이들이 찾아와 소망과 고충을 털어놓는다. 약사사가 지금에 이른 것도 거의 그의 공이다.


▲  후배 금동불을 압도하는 석불입상의 위엄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이 범하는 흔한 오류 중의
하나가 바로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겉모습으로 평가하지 마라.
생긴 건 저래도 꽤나 알찬 불상이다.

▲  약사사 돌담길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 숲길

정말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약사사를 둘러보고 범종각 옆 매점 아줌마에게 이곳의 명물인 약
수터의 위치를 문의했다. (이때는 약수가 없어진 것을 몰랐음) 예전에도 와봤지만 그 약수터
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경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그 약수는 2013년 봄에 폐쇄되었다는 답변을 듣고 기운이
싹 빠지는 듯 했다. 안그래도 개발의 칼질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서울인데 유명한 약수터 하
나가 허무하게 져버리니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그 칼질을 개념 없이 조정하는 행정관청 밥버
러지들, 개발업자들이 심히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매점 아줌마가 목이 마르면 생수 1병에 500원이니 사먹으라고 그런다. 그래서 가난한 중생이
라 돈이 없다고 둘러대니 물 1컵 먹고 가라며 정수기 물을 제공했다. 약수터가 없으니 절도
천상 정수기 물에 의존하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물을 싹 비우니 아줌마가 더 마시겠냐고 그런다. 그래서 더 달라고 하니 역시 한가득 담아 제
공한다. 그래도 이곳은 물을 주는 인심이 있구나 싶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절을 나와 개화
산숲길을 거쳐 개화산으로 올라갔다. 이후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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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자락에 작은 도시처럼 들어앉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 단양 구인사 (구인사 공양밥, 구봉팔문)



' 늦겨울 산사 나들이, 단양 구인사 '

▲  대조사전 광장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겨울 제국의 쌀쌀한 위엄 앞에 천하만물이 꽁꽁 몸을 사리던 2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
와 단양 구인사를 찾았다.
구인사는 이미 10여 년 전 연말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같은 겨울이지만 연
초에 가게 되었다. 그럼 왜 그곳을 다시 찾았을까?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땡겨서이다.

서울의 동쪽 관문, 청량리역에서 8시대에 출발하는 영동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영월(寧
越)에서 군내버스로 구인사로 진입하려고 했으나 여인네가 크게 지각을 하는 바람에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열차를 타면 영월읍내에서 구인사행 버스와 30분 이내로 시
간이 맞음) 그래서 별수 없이 9시대 열차를 타고 제천(提川)으로 이동하여 거기서 구인사
로 접근하기로 했다.

열차에서 시내에서 사온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우며 스마트폰으로 제천에서 구인사행 직행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제천역 도착시간을 기준으로 거의 10여 분 뒤에 있다. 하여 제천역
에 두 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이동하여 간신히 구인사행 직행버스를
잡아탔다. (그거 놓치면 꼼짝없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됨)
제천터미널에서 쌍용. 별방, 사지원, 영춘, 온달관광지(온달산성, 온달동굴), 구인사입구
를 경유하여 50분 만에 구인사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은 구인사 건물의 주류를 이루는
3층 기와집으로 1층에 쉼터를 겸한 매표소가 있다.

구인사입구에 이르니 다들 어디서들 왔는지 사람과 차량의 물결이 대도시 못지 않게 쏟아
져 나와 도로가 막힐 지경이다. 그날 구인사에서 본 사람의 수만 어림잡아 수천이 넘으니
하루로 따지만 수만이다. 거의 단양군(丹陽郡) 인구보다 많은 것이다. 구인사가 단양에서
차지하는 땅은 좁쌀 수준이지만 그곳을 찾는 1일 사람 수와 수입은 단양군을 훨씬 능가하
니 이건 완전 단양 속의 조그만 도시나 다름이 없다.


 

♠  구인사 입문

▲  구인사 일주문(一柱門)

구인사터미널에서 거센 물결처럼 밀려오는 인파를 뚫고 2분 정도 오르면 구인사의 정문인 일
주문이 마중한다.
구인사 일주문은 이 땅의 일주문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것으로 문을 지나는 사람과 문의 크
기를 비교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실감이 날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서 장차 장
엄하게 펼쳐질 구인사의 맛보기 버전이라고나 할까..?
일주문의 높이는 대략 10m에 이르며, 문을 들어서면 바로 4층짜리 기와집인 관성당(觀性堂)이
다시 한번 위압감을 선사해 속인(俗人)의 기를 제대로 주눅들게 만든다. 구인사는 이런 식으
로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 혹여나 잠입할 번뇌를 단죄하는 모양이다.

▲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자리한 관성당

▲  구인사 천왕문(天王門)

구인사의 2번째 관문인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이다. 이곳 천왕
문은 특이하게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밑층은 경내로 통하는 3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윗층 문루에 바로 사천왕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천왕문은 보통 윗층을 일컫는다. 다른 절의
천왕문은 사천왕상 사이를 무조건 지나가게 하여 그들의 검문을 강제로 받아야 되지만 여기서
는 2층으로 가지 않는 이상은 그들을 마주칠 필요가 없다.

살짝 들려진 천왕문의 추녀를 보면 잡상(雜像)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모두 7개의 잡상이 추
녀마루에 붙어있는데 이들은 보통 궁궐이나 왕릉, 성문 등 지체높은 곳에서 많이 달았다. 지
금이야 그런 것을 지킬 필요가 없지만 절에서는 보통 잡상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허나 구
인사는 저렇게 천왕문에 그들을 달았다. 그 이유는 잡상의 본 목적인 장식용과 수호용도 있겠
지만 우리나라 현대불교 및 천태종의 성지로 우뚝 선 구인사의 끝없는 자부심과 권위를 진하
게 상징하려는 의도가 더 클 것이다.

▲  용을 쥐어든 광목천왕(廣目天王)과
탑을 든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위엄

▲  천왕문에서 바라본 인광당(仁光堂)
구인사 경내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3층 진신사리탑

천왕문을 거쳐 인광당과 총무원을 차례로 지나면 길 왼쪽에 부처의 사리가 담긴 3층석탑이 있
다.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 코끼리가 그를 받치고 있는데, 1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
塔身)을 올리고 바로 그 위에 금색의 보륜(寶輪)으로 치장된 상륜(相輪)을 두었다.

이 탑은 1983년 구인사 2대 대종사(大宗師)인 남대충이 인도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방문했
을 때 그곳 주지승이 선물한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자 만든 것으로 그때 기원정사 주지
승이 '인연이 있는 분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가 봉안해주십시요' 말했다.
탑의 모습은 동국대 전임 총장인 조명기 박사가 직접 설계했으며 코끼리 기단은 남대충 대종
사가 창안한 것이다. 1층 탑신에는 돌문을 두었는데 그 돌문을 열면 부처의 사리를 생생하게
친견할 수 있다. (1층 탑신까지는 사람 키와 손이 닿지 않아 아무나 열 수 없음~) 탑 주위로
돌난간을 둘렀고, 난간 기둥 위에는 12지신상(支神像)을 세웠는데, 사람들의 손길이 계속 누
적어 그들 피부가 완전 맨들맨들해졌다.


▲  구인사 삼보당(三寶堂)

3층석탑을 지나 경내를 계속 파고들면 관음전과 삼보당이 나온다. 삼보당은 구인사를 세운 천
태종 1대 종정(宗正)인 상월원각조사의 금동존상과 진영, 그리고 2대 남대충 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상월을 금동으로 장엄한 것은 구인사에서 현세에 부처로 극진히 떠받들고 있
기 때문이다. 건물 이름인 3보도 바로 상월과 남대충, 그리고 현재 천태종 종정인 김도용 대
종사를 일컬으며 만약 현 종정이 입적하고 새로운 이가 그 자리를 이어받으면 사보당(四寶堂)
으로 간판을 갈게 될 것이다.

이곳은 신도와 신참 승려들이 고참 승려에게 인사를 하는 곳이기도 하여 종단 승려들이 고참
승려를 상석에 앉혀 회의나 승려 안거(安居)를 주재하기도 한다. 그리고 삼보당 동쪽에는 조
실(祖室)이 있는데 그곳은 구인사와 천태종의 지배자가 머무는 곳이다. 지금은 3대 종정인 김
도용이 살고 있으며, 하루에 1번씩 삼보당으로 나와 신참 승려와 신도들에게 설법을 한다.
참고로 이곳에서는 대종사에게 예하(猊下)라는 존칭어를 사용한다. 제왕에게 폐하(陛下)라 부
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구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심지, 산속에 숨겨진 조그만 도시 같은 구인사(救仁寺)
소백산(小白山) 북쪽 자락에 꽉차게 들어앉은 구인사는 우리나라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지이
자 20세기 현대불교의 성지(聖地)이다. 이곳의 역사는 이제 70년여 년으로 1945년 초에 상월
원각조사(上月圓覺祖師)가 창건했다.

상월원각조사는 1911년 음력 11월 28일, 강원도 삼척시 상마읍리 봉촌마을의 밀양박씨 집안에
서 태어났다. 이름은 박준동(朴準東), 법명은 상월(上月)이며, 15세에 나름 큰 뜻을 품고 출
가하여 여러 선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워낙 총명하여 금방 배웠다고 한다.
1940년에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수도했다고 전하는 굴에서 도를 닦
으며 솔잎과 쑥으로 2년을 버티다가 1942년 가을, 깨달음을 얻어 현재 구인사 5층 대법당 자
리에 있던 연화지(蓮花池)를 찾았다. 거기서 만개한 백련(白蓮) 사이로 살짝 모습을 비친 관
음보살 누님을 친견했다고 전한다.
하여 그해 겨울 관음성지를 순례하고자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주산열도에 있는 천태산 수선사
(修禪寺)와 대륙 천태종의 중심지인 국청사(國淸寺)를 찾았고 그때 천태종을 접하게 되었다.

천태종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는 조국에서 반드시 크게 일으켜 다시 천태산(天台山)을 찾겠
노라 다짐하고 예전 관음보살을 친견했던 소백산 연화지로 돌아와 나무와 풀로 초암(草庵)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구인사의 시초이다. 절의 이름은 '억조창생 구제중생 구인사'라 지었으나
이름이 길어서 보통 구인사라고 부른다.

6.25 전쟁 때 이곳까지 들어온 북한군에 의해 절이 파괴되어 1952년 다시 지었으며 상월은 여
기서 속세와 왕래를 끊고 오로지 수행에 전념해 1962년 '한 마음 움직이지 않으면 만법(萬法)
이 일여(一如)하다'
는 경지와 '모든 법이 본래 무상(無常), 무생(無生)하다'는 무상대도(無上
大道)를 깨닫고 다음의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山色古今外  산색은 고금 밖이요,
水聲有無中  물소리는 있고 없고 중간이로다.
一見破萬劫  한번 보는 것이 만겁을 깨뜨리니,
性空是佛母  성품 공한 것이 부처의 어머니로다.


천태종과 구인사가 크게 흥하게 된 계기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이다. 박정희가 월남
전을 두고 고심하고 있을 때, 한 측근이 상월이 신통력이 있다며 만나보라고 권하자 즉시 그
를 청와대로 소환했다.
박정희의 고충을 들은 상월은 참전하면 국부(國富)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참전을 적극 권했
다. 대통령 자신도 월남(베트남) 정벌을 원하고 있었으나 반대 여론이 많아 전전긍긍하던 참
이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10년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은 듯, 너무나 기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월에게 뭐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머무는 소백산 골짜기에 불사(佛事)를 하
고 싶다고 답을 했고, 박정희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구인사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듯, 크
게 흥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군사정권의 도움이 구인사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 기세를 타고 상월은 천태종 초대 종정이 되어 '참된 자아의 개현','참된 생활의 구현','참
된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대중불교의 구현, 생활불교의 실천, 애국불교의 건립이라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했으며, 1971년 5월 1일에는 교화의 기본과 지침이 되는 법어(法語)를 발표했
다. 그리고 그해 10월 천태종이 나아갈 방향과 종지(宗旨), 종통에 관한 교시문을 발표한다.

1974년 상월원각조사(시호는 상월원각대조사)가 입적하자 그의 후계자인 남대충(南大忠)이 구
인사 주지 및 천태종 2대 종정이 되었다.
남대충은 1925년 음력 12월 5일 구인사 부근 여의생마을의 영양남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름
은 남익순(南益淳)으로 21살에 구인사에 들어와 상월의 가르침을 받았고, 1960년에 큰 깨달음
을 얻자 상월에게서 후계자의 인증을 받았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들고 공경했으며, 박정희 정권과 중생들의 시주를 발판 삼아
절을 더욱 크게 일으켰다. 또한 절 주변 야산에 잣나무 등 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숲을 일
구었고 수해 등으로 망가진 단양 관내의 도로 복구 공사에도 참여하는 등 아주 바쁘게 움직였
다. 하여 1980년 4월 사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았고 1987년에는 새마을훈장 자
조장을 받기도 했다.

1993년 9월 3일, 남대충이 6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그의 수제자인 김도용(金道勇)이 그 뒤를
이어 구인사와 천태종의 3대 종정이 되었다.
김도용은 1943년 10월 경북 울진군 평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김영춘(金永春)이다. 1977년
출가하여 남대충의 가르침을 받았고 출가 이후, 단 1번도 드러누운 적이 없다고 한다. 피곤하
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거늘 그는 그 본능을 일찌기 탈피한 것이
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저 신기할 따름.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신도와 승려가
많다.

▲  구인사 어른 승려가 머무는 조실

▲  구인사 대조사전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구인사는 그 형세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황금닭이 알을 품
고 있는 형세의 아주 대단한 명당(明堂) 자리라고 한다. (또는 독수리가 알을 품은 지세라고
도 함) 과연 그래서일까? 구인사의 사세는 끝을 모르고 나날이 번창하여 4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비좁은 산 사이로 길게 들어서 조그만 도시를 이루고 있으며, 승려 수 300여 명, 최대
수용 인원 1만여 명, 거느린 말사(末寺)만 300여 개, 신도 수는 무려 170만을 헤아리는 천하
굴지의 대 사찰(寺刹)이 되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아주 굵직한 절로 성장한 예는 그리 흔
치가 않으니 예사롭지 않은 명당은 분명하다.

구인사는 영춘면 일대에 상당한 논과 밭,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거기서 자체적으로 경작하
여 쌀과 채소 상당수를 충당한다. 신도가 많다보니 수입도 상상을 초월하여 포크레인으로 돈
을 쓸어 담아도 넘쳐날 지경인데 수입과 절을 찾는 신도 수는 전국 절집 가운데 1위가 아닐까
싶다. 오죽하면 단양군의 1년 수입보다 많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있으니 말이다. 제 아무리 팔
만대장경으로 유명한 해인사(海印寺)도, 소원은 다 들어준다며 과대 광고까지 일삼는 팔공산(
八公山)의 갓바위도,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인 서울 조계사(曹溪寺)도 구인사 앞에서는 감히
불전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그 천문학 이상의 재정을 바탕으로 구인사와 천태종은 끝없이 팽창을 한 것이며, 단양에서 구
인사로 이어지는 도로 공사 비용까지 구인사가 전액 부담했다고 한다.

허나 구인사가 들어앉은 지형상 절이 커질수록 자연히 소백산의 피부를 깎아야 되는 문제점이
있다. 구인사의 화려한 발전 뒤에는 소백산의 말없는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대조사전
을 끝으로 더 이상 큰 건물은 지어올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명당이라도 단점은 있게
마련으로 금계포란형 같은 지형에는 무거운 것을 세우면 안된다고 한다. 허나 구인사는 죄다
무거운 것 투성이라 너무 과욕을 부리다가 알이 와장창 깨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흥하기
는 힘들지만 망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다.
또한 구인사를 세우고 천태종을 크게 일으킨 상월원각조사를 기리고 찬양하는 것까지는 좋으
나 그게 너무 지나쳐 부처 이상의 존재로 떠받들고 있고, 경내 남쪽 산자락에는 승려에 걸맞
지 않게 상류층 수준의 그의 무덤(무려 석물까지 갖추고 있음)까지 있어 조금 이질감을 주기
도 한다. 그 무덤을 여기서는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삼아 경내 성지로 애지중지하고 있고,
경내의 가장 높은 곳에는 호화로운 대조사전을 지어 금으로 만든 그의 존상까지 봉안하고 있
어 불교 사찰인지 상월을 중심으로 한 다른 종교의 절인지 햇갈리게 만든다. (삼보당에도 그
의 금동존상이 있음)
게다가 절을 이루는 건물이나 모든 형상이 하나 같이 커서 썩 정감이 가지 않는다. 허나 절이
좁은 산골에 자리해 있고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그들을 수용하고 다양한 공간을 담을 건
물이 여럿 필요하다. 그래서 구인사 스타일의 다층 콘크리트 기와집이 빌딩처럼 들어선 것이
다.

법등(法燈)의 역사가 아직 짧다보니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물이나 불상은 없지만 꽤 많은 불
교문화유산을 수집하여 가지고 있다.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국보 257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74(국보 279호), 묘법연화경(보물 960호), 대방광원각약소주경 권상
의2(보물 1016호), 불설아미타경<언해, 보물 1050호> 등 국가 지정문화재 20여 점과 금동9층
소탑(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09호), 청자발우(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11호), 사경영험(四經靈驗,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10호) 등 지방문화재 30여 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몽골과 중원대륙, 티
벳, 네팔, 인도,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문화유산도 꽤 된다. 이들은 모두 구인사입구에 지어진
불교천태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 불교천태중앙박물관 관람 정보 :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추석과 설날 연휴는 휴관 / 관람비
없음 / 관람시간 9~17시 (평일은 10시부터) /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은 일부
만 전시 공개됨, 전화 043-423-9103>

그 외에 '삼회향(三廻向)놀이'라고 영산재(靈山齋)의 뒷풀이로 행해지는 축제가 있는데 땅설
법이라고 부른다. 이 축제는 충북 지방무형문화재 25호로 불교의식에 우리 민속이 더해진 불
교 행사이다.

깊은 산골에 묻혀있지만 거의 소도시 같은 곳이라 조촐한 산사의 내음과 고즈넉함을 기대하고
왔다면 적지 않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절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둘러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또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사찰이자 단양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주요 관광지로 이곳에 대한 역사와 미술사학적 평가는 후세가 알아서 해줄 것
이다.

※ 구인사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①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제천시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제천역에서 구인사행 제천시내버스 260
  번이 1일 4회 떠난다.
* 단양시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50~60분 간격, 터미널 밖 정류장에서 구인사행 군
  내버스가 1일 8회 다닌다. (군내버스가 시외직행버스보다 버스비가 60% 이상 저렴함)
* 영월읍내(세경대학, 영월터미널, 영월역 서쪽 덕포 정류장)에서 구인사행 군내버스가 1일 5
  회 다닌다.
* 구인사터미널에서 3분 정도 걸으면 관성당을 시작으로 구인사 경내가 펼쳐진다.
②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창원3거리에서 우회전 → 군
  간교3거리에서 좌회전 → 영춘교를 건너 우회전 → 구인사입구 주차장
* 구인사입구 주차장에서 구인사 총무원까지 무료셔틀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총무원까지
  걸어갈 경우 20분 정도 걸림)
* 구인사는 일반인도 며칠 동안 수행/기도가 가능하다. 4박5일을 기본으로 하며, 접수는 구인
  사 총무원 1층에서 한다. (소정의 참가비 있음) 4박5일 기도를 끝낸 사람에 한해 기도실 담
  당 승려의 허락으로 1회(4박 5일) 연장할 수 있다. 또한 교무부 담당 승려의 승인하에 최대
  2~3회 연장이 가능하다.
* 수행/기도 참여자는 간단히 덮을 것과 깔고 앉을 것, 세면도구를 가져와야 되며, 공양시간
  과 기도시간, 휴식시간을 최대한 지켜야 된다.
* 구인사는 휴식형과 체험형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1박에 무려 5만원이며 홍보체험관
  에서 단주와 연꽃, 지화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문의 ☎ 043-420-7397)
*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132-1 (구인사길 73 ☎ 043-423-7100)
* 천태종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보당 옆에서 바라본 관음전, 향적당 주변


 

♠  구인사의 핵심 둘러보기

▲  구인사 관음전(觀音殿)

구인사는 일주문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700m에 이르는 지극히 큰 절이다. (대신 좌우 폭은 짧
음) 일주문에서 향적당까지 이어지는 큰 길을 중심으로 갖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향적당에서 길이 2~3갈래로 갈리다가 광명전에서 모두 합쳐진다.

경내를 걷다보면 완전 한옥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거니는 기분이다. 마치 산속에 숨겨진 비밀
의 도시 같은 기분이랄까? 건물 상당수가 왠만한 단양읍내 건물보다 크고 좁은 산자락에 건물
들이 대량으로 몰려있으며, 매일 수천 명이 절에 머무니 구인사 일대를 따로 읍(邑)으로 삼아
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명칭은 '구인읍'이 좋을 듯, 대신 세금은 넉넉히 낼 것)

삼보당을 바라보고 선 관음전은 3층 규모로 그 3층이 관음전이다. 이름 그대로 청동으로 조성
된 관음보살 누님이 봉안된 건물로 그 규모는 5층 대법당보다는 현저히 작지만 그것보다 작을
뿐이지 다른 절의 법당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덩치가 크다.


▲  구인사 5층 대법당 옥상에 자리한 설법보전(說法寶殿)

관음전 북쪽에는 구인사의 법당(法堂)인 5층대법당이 자리해 있다. 천하에서 가장 큰 법당으
로 최대 5천명까지 수용 가능하며, 그 건물 정상에 실질적인 법당인 설법보전이 자리해 천하
를 굽어본다.
이 건물은 상월원각조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전하는 연화지가 있던 곳으로 1945년 이곳
에 3간 초암(草庵)을 지어 절을 세웠다. 그 초암은 6.25 때 파괴되어 1952년에 재건되었으며
1980년 4월, 그 역사적인 초암을 멀어버리고 지금의 대법당을 지었다. (초암은 자리를 옮겨서
라도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음)
건물이 하도 으리으리하여 5층 전체를 사진 1장에 담기도 벅차며, 설법보전 내부에는 석가불
을 중심으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관음보살이 협시한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설법보전 내부는 경내를 모두 둘러보고 내려가는 중에 잠시 들렸는데 마침 오후 법회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고참 승려와 신참 승려들이 여러 전통 악기를 가져와 30분 동안 승무(僧舞)
와 범패(梵唄)를 노련하게 선보이는데, 천하에 300곳이 넘는 절을 다녔지만 승무와 범패는 이
때 처음 구경했다. 꼬깔을 쓰고 동그란 바라를 치며 신들린 듯, 춤에 열중하는 승려의 모습에
는 정말 박수가 나올 정도로 사진과 동영상으로 담지 못한 것이 참 아쉽기만 하다. 허나 설법
보전 내부는 촬영을 금하고 있어 대놓고 찍기도 힘들다. (49재 행사도 여기서 주로 지냄)


▲  설법보전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관음전과 삼보당 사이에는 일종의 광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광장 남쪽에 향적당(香積堂)이
란 3층짜리 건물이 있다.

향적당은 여러가지 좋은 향기가 담겨있다는 의미로 그 향기란 바로 음식이다. 그러니까 음식
을 먹는 장소, 공양간인 셈이다. 절에서는 부엌을 향적대(香積台)라 부르는데, 1층은 음식을
짓는 부엌이고, 2층은 공양간으로 최대 1,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공양(供養)은 아침과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먹을 수 있는데, 점심 공양은 보통 11
시 반부터 13시까지 제공되며 상황에 따라 30분~1시간 정도 연장 제공되기도 한다. 아침공양
은 6시 반~7시 반, 저녁은 17시 반~22시까지로 구인사에서 재배한 쌀과 채소로 지어진 밥(보
리밥이 나오기도 함)과 국, 김치 등의 나물과 직접 숙성시킨 고추장을 주며 이들 고추장과 나
물을 밥에 비벼서 먹거나 그냥 먹어도 된다.
나름 맛이 있는지라(김치와 국이 괜찮음) 뚝딱 1그릇을 비우고 식기를 반납하여 밖으로 나오
면 길다방 자판기가 여러 대 대기해 커피 1잔의 여유을 권한다. 그들은 공짜가 아닌 300~400
원을 먹여줘야 커피나 코코아를 제공하는데 정 돈을 받아야겠다면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절에
걸맞게 100원만 받아도 충분할 것이다. 절은 중생과 속세를 위해 헌신하는 곳이지 돈을 버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황색 지붕를 지닌 천태종역대조사전(天台宗歷代祖師殿)

지관당(止觀堂) 부근에 '천태종역대조사전'이라는 절 건물 치고는 이름도 무지 긴 2층 건물이
있다.
이 집은 그 이름 그대로 천태종의 역대 고승(高僧)의 진영(眞影)과 존상이 봉안된 곳으로 천
태종 시조인 용수존자(龍樹尊者, 남인도 비달바국 출신)를 비롯해 고려 승려로 송나라로 건너
가 대륙의 천태종을 크게 발전시킨 제관법사(諦觀法師), 우리나라 천태종의 상징이자 고려 문
종(文宗)의 4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중원대륙 천태종의 초조(初祖)인 북제
존자 혜문(北齊尊者 慧門), 중원대륙 천태종의 실질적 개창자인 지자대사(智者大師), 백련결
사 운동을 전개했던 고려 중기 승려인 원묘국사(圓妙國師)와 진정국사(眞靜國師) 등 우리나라
천태종 승려 18명(모두 고려 승려)과 중원대륙 승려 18명 등 36명이 봉안되어 있다.

이 조사전은 2003년 5월에 기공하여 2008년 4월 22일 완공되었는데, 그때 존상 봉안식을 거행
했으며, 건물 면적은 206평, 2층은 조사전, 1층은 승려들의 교육 공간인 강원(講院)으로 쓰인
다.
참고로 중원대륙은 1993년에 대륙 천태종의 총본산인 국청사에 중원대륙 천태종의 개창자, 지
자대사와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 그리고 구인사를 세운 상월원각조사의 존상을
봉안한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中韓天台宗祖師記念堂)을 세웠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간의 천
태종 교류가 활발해지자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심지인 구인사에도 중원처럼 천태종 고승을 기
릴 건물을 세울 필요성이 대두되어 구인사의 위엄을 다시 한번 떨칠 겸, 이렇게 장엄하게 천
태종역대조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곳에 봉안된 36명 중 생전의 모습을 남기지 못한 승려가 꽤 되는지라 그들은 오로지 상상에
맡겨 진영과 존상을 조성했다. (건물 내부는 촬영 금지)


▲  구인사 광명전(光明殿)

대조사전 광장 바로 밑에는 경내에서 가장 큰 광명전이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구인사
의 위엄에 걸맞게 매우 우람한 규모를 자랑하는데 가파른 벼랑을 손질하여 지은 6층짜리 건물
로 내부 면적도 꽤 상당하다. 건물의 밑부분은 불전(佛殿)이라기보다는 회관(會館) 같은 분위
기가 진하며 그나마 윗부분의 겹으로 이루어진 기와지붕이 이 건물도 엄연한 불전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건물이 크다보니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2대나 갖추고 있으며, 절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기는 구
인사가 처음이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지.

광명전은 강당 및 단체 예불 공간으로 몰려드는 수행 신자를 수용하고자 세웠다. 그래서 기도
/수행 신자들이 강당 일대에 많이 머물며 이불 등을 깔고 잠을 청하거나 휴식을 취한다. 또한
그들을 위해 난방을 두둑하게 틀면서 봄날 마냥 따스해 졸음이 스르륵 몰려든다.
(대조사전으로 갈 때는 광명전 엘레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 제일 편함)


▲  광명전 강당 (강당 윗층과 밑층 모두 수행 신자들로 가득함)

▲  광명전 꼭대기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하늘과 한발자국 더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높아진다.

▲  광명전 꼭대기에 자리한 대조사전과 광장

광명전 정상에는 대조사전 광장이 넓게 닦여져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하
늘의 광장 같은 분위기를 진하게 풍기는데 상월원각조사와 남대충 대종사의 탄생 기념 법회와
열반 법회, 대각국사 의천의 탄생 기념 법회 등 구인사의 여러 행사와 축제가 여기서 성대하
게 열린다.


▲  대조사전 광장

▲  대조사전(大祖師殿)의 위엄~~!!

대조사전은 두루마기 옷을 입은 상월원각대조사의 금동존상이 봉안된 곳이다. 구인사에서 그
를 기리는 공간을 세우고자 1985년에 대조사전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단순히 조사전
의 성격에서 벗어나 천태종 부흥의 상징적 역할 및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겠다는 포부까지
듬뿍 넣어 1992년 착공을 시작해 2000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의 총건평 167평, 높이 27m로 이 땅의 목조 건물 중 가장 높다. 구인사의 건물이 모두 콘
크리트 기와집인데 반해 이 건물은 유일하게 나무로만 지어진 것으로 300년 이상 묵은 태백산
춘양목(春陽木) 50만 재를 벌채하여 일체 쇠못을 쓰지 않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었다. 또한 건
물 주춧돌 석재는 이 땅 최고의 돌이라는 강화 애석을 썼으며, 기와는 모두 황금색 기와로 덮
어 장엄함을 높였다. 이들 기와는 1,300도에서 구워 금빛을 영구 보존처리했으며, 단청에 들
어간 순금은 무려 2,700돈, 총 공사비는 자그만치 100억이나 소요되었다.
건물 건립에는 국가무형문화재 74호인 대목장 신응수씨가 도편수를 맡았는데, 그는 궁궐 건축
의 1인자로 광화문(光化門)과 숭례문(남대문) 복원공사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대조사전은 천태종 부흥의 상징적 역할과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빼면 단순히
상월을 위한 건물로 불교의 중심인 석가불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 온갖 보살(菩薩)들이 봉
안된 건물보다 더욱 크고 화려하다. 오래된 절들은 보통 그 절을 세우거나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를 기리는 조사전<祖師殿, 또는 진영각(眞影閣)>을 두기 마련이다. 그 규모는 대체로 법
당보다는 작은 편으로 그들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이 있지, 존상은 없다.
허나 구인사는 그냥 조사전도 아닌 대조사전을 칭하고 있고, 상월의 사진이나 진영도 아닌 금
으로 휘황찬란한 족히 20m는 될 듯한 거대한 존상을 두어 상월을 중심으로 한 다른 종교의 사
원에 들어선 기분이다. 게다가 단청에 엄청난 금을 발랐고, 무려 100억을 들인 건물이라고 하
니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호화로움과 웅장함이 넘치고 흐른다.


 

♠  구인사 마무리

▲  소백산이 빚은 장쾌한 산줄기 구봉팔문(九峰八門)

대조사전 서쪽에는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그곳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나는
처음에는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곳인줄 알았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사리가 담긴 곳이고 그러
다보니 따로 불상을 두지 않는다는 절대진리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 연말에 구인사에
왔을 때 그곳까지 간 기억이 없기에 이번에 몸소 가보기로 했다.

산길 입구에는 산길을 오를 때 쓰라며 나무 지팡이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그냥 오를까 하다
가 손이 허전해 지팡이(나무를 적당히 깎은 것임)를 하나 쥐어들고 산길에 임했다.
처음에는 길이 완만하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각박하게 돌변한다. 산자락에 눈이 많
이 쌓여있으나 성지로 가는 길이다보니 길만큼은 눈에서 해방되어 통행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
으며, 신도들의 발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남쪽을 향해 급하게 펼쳐진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상관은 없으나 보통 왼쪽 길로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는 것이 편하다. 여기서 다시 10
분 정도 더 다리를 부리면 비로소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이른다.
적멸보궁에 닿고 보니 그 흔한 적멸보궁이 아닌 것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적멸보궁의 주인공
은 다름아닌 상월원각조사로 그곳에는 그의 무덤이 자리해 있었다. 무덤은 봉분(封墳)과 양석
(羊石), 상석(床石) 등 여러 석물로 이루어진 제법 비싼 모습인데, 그곳이 구인사의 적멸보궁
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부처의 진신사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인사 창건주의 승탑(僧塔)도 아
니고 제법 잘 꾸며진 무덤이 적멸보궁이라니?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긴 곳을 적멸보궁이라 부
르는 불가(佛家)의 진리도 여기서는 예외인가 보다. 하긴 구인사에서 상월을 부처로 숭상하는
데 그럴만도 하겠지. 참고로 상월은 바로 여기서 인생의 마지막 숨을 쉬며 열반에 들었다고
전한다.

무덤과 적당히 거리를 둔 북쪽에 예불을 올리는 공간을 두었는데, 절을 올리는 신도들로 자리
가 없다. 그리고 그 북쪽에 무덤을 관리하는 건물을 두었고 건물과 예불 장소 옆은 엄청난 각
도의 내리막이라 주의를 요한다.
무덤 일대는 촬영이 통제되어 있어 굳이 담지는 않았다. 무덤 주위로 사람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끔 철조망과 줄을 쳐놓았으며 이곳 역시 기가 막힌 명당이라고 한다. 이렇게 상월의 무
덤이 있으니 당연히 남대충의 무덤도 있다.
그의 무덤은 경내에서 북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남한강 건너(영춘교 서남쪽) 산자락에 자리
해 있는데 그 무덤도 상류층 무덤 수준이다. 이곳은 구인사에서 거리가 좀 있으므로 매일 몇
회 정도 그곳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이곳은 예전에 가봤음)

구인사에서 수행/기도로 머무는 경우 5층대법당과 삼보당, 대조사전, 상월원각조사의 묘역은
매일 둘러봐야 된다고 그런다. (남대충 묘역은 선택 옵션임~) 매일 이들을 둘러보면 다리 하
나는 정말 단단해질 듯.


▲  구봉팔문 전망대

적멸보궁 남쪽에는 구봉팔문전망대가 있다. 묘역 옆으로 난 산길을 3분 정도 가면 그 끝에 전
망대가 달려있는데 전망대라고 해서 무슨 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구봉팔문이 잘 보이
는 언덕배기일뿐, 어떠한 인공시설도 없는 자연산 전망대이다.

구봉팔문은 구인사 남쪽 산줄기를 일컫는다. 영춘면 남천리에서 가곡면까지 5개 리에 걸친 소
백산의 북쪽 지맥이 9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그 사이로 8개의 골짜기가 형성되었는데 그 골짜
기를 봉우리로 인도하는 문으로 비유하여 9봉8문이라 부른다. 그 이름 외에도 옛날에 어떤 승
려가 이곳을 법문(法門)으로 오인해 오르려고 애를 쓰던 곳이라고 하여 법월팔문(法月八門)이
라 불리기도 하며, 상월도 이들 봉우리에 올라 정진에 힘썼다고 전한다.

9봉의 이름은 제1봉부터 아곡문봉, 밤실문봉, 여의생문봉. 뒤시랭이문봉, 덕평문봉. 곰절문봉
, 배골문봉, 귀기문봉, 새발문봉이며, 8문의 이름은 1문부터 아골문안골, 밤실문안골, 여의생
문안골, 덕가락문안골, 곰절문안골, 배골문안골, 귀기문안골, 새발문안골이라 부른다. 이들은
영춘면 남천리와 백자리에서 시작해 국망봉 계곡에서 끝을 맺으며, 곰절문봉을 중심으로 '八'
자 모양을 이룬다. 경관이 매우 뛰어나 제2단양8경의 일원으로 꼽히고 있으나 사람들의 발길
도 쉽지 않은 벽지라 아직은 청정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곳 전망대는 길이 막혀있어 더 이상 가지는 못한다. 그냥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
보듯 구봉팔문을 바라보고 다시 되돌아 나가야 된다. 이곳에 올라서면 정말 바람의 소리가 전
부인 고적한 곳으로 대기도 청정해 속세에 찌든 몸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거 같다. 구인사에
왔다면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이곳 전망대에 올라 소백산의 장대한 기운과 도시에서는 맛
보기 힘든 자연의 멋과 담백한 산정의 기운을 꼭 누리고 가기 바란다.


▲  적멸보궁에서 구인사 경내로 인도하는 산길

▲  구인사 온실 식물원 - 무궁무진한 햇살을 에너지로 삼아 식물원의
식구들을 먹여살린다.


이렇게 적멸보궁 일대를 둘러보고 다시 경내로 내려왔다.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와 달리 길이
쉬워서 금세 대조사전 옆구리에 이르렀다. 잠시나마 함께한 지팡이를 놓아주고 밑으로 내려갔
는데 중간에 5층대법당 설법보전에 들려 오후 법회와 승무, 범패를 구경했다.

설법보전을 끝으로 구인사와의 인연을 싹둑 정리하고 속세로 내려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다되어 가지만 경내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새통이었고, 빠지는 인원만큼 계속해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으니 구인사의 명성과 위엄이 새삼 대단함을 느낀다. 갓바위보다 돈을 더 많이 버
는 절이니 그 수입을 중생과 속세를 위해 과감히 쓰면 좋으련만, 너무 바람직하지 않게 쓰이
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 종교들이 돈을 너무 밝히고 외양 꾸미기에 지나치게 몰두함)

구인사 정류장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곧 동서울로 가는 직행버스와 제천역으로 가는 제천
시내버스가 올 시간이다. 일요일 늦은 오후라 버스를 타면 영동고속도로가 100% 막힐 것이니
제천에서 열차로 상경하기로 하고 제천역으로 가는 제천시내버스 260번에 몸을 실었다.

구인사에서 거의 1시간을 달려 제천역에 도착, 여기서 청량리(淸凉里)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
에 몸을 싣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과거완료형이 되버린 연초의 구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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