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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7.04 피서의 1급 성지를 찾아서, 의성 빙계계곡 <빙계군립공원, 풍혈, 빙혈, 빙산사지5층석탑>
  2. 2022.09.12 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운달계곡)
  3. 2022.07.30 서울의 동쪽 지붕이자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거닐기 (아차산둘레길, 긴고랑계곡, 아차산4보루, 서울둘레길2코스)
  4. 2022.04.22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북악산 부암동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5. 2021.09.07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계곡이자 서촌의 오랜 경승지,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자락길)
  6. 2020.12.31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7. 2020.11.14 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8. 2020.09.04 서울 도심에 이런 두멧골이?? 북악산 산주름 속에 깃든 백사실계곡, 부암동 능금마을, 평창동 소나무 (백사실약수터)
  9. 2020.08.26 서울의 단단한 북쪽 지붕, 도봉산 계곡 나들이 ~~ 무수골계곡에서 우이암 관음봉,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도봉동문까지
  10. 2020.08.02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피서의 1급 성지를 찾아서, 의성 빙계계곡 <빙계군립공원, 풍혈, 빙혈, 빙산사지5층석탑>

의성 빙계계곡 (빙혈, 풍혈)



~~~~~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의성 빙계계곡 ~~~~~
빙계계곡 빙혈
▲  빙계계곡 빙혈
 



 

반년 가까이 세상을 지배했던 욕심꾸러기 겨울과 천하만물의 격렬한 호응을 받으며 새
로 일어선 봄이 천하를 두고 막판 자웅을 겨루던 3월의 한복판에 피서의 성지(聖地)로
유명한 의성 빙계계곡을 찾았다.

아침 일찍 일행들과 서울을 출발하여 충북의 여러 지역(진천, 보은, 영동)을 둘러보고
오후 늦게 경북으로 넘어와 어느덧 의성(義城) 땅에 이르렀다. 의성에서는 빙계계곡과
그곳에 서린 풍혈, 빙혈을 보고자 함으로 그곳에 도착하니 어느덧 18시이다.



 

♠  빙혈과 풍혈을 품은 의성 제일의 경승지,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의성 빙계계곡(氷溪溪谷) (빙계리 얼음골)

▲  빙계계곡 상류 ①

의성 빙계계곡은 이미 20여 년 전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다. 그때 빙혈과 풍혈, 빙산사지5층
석탑을 둘러보았는데, 그들은 계곡 중간인 빙산(氷山) 밑에 숨겨져 있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찾은 탓에 그들의 위치를 놓쳐 그만 계곡 상류까지 들어가버렸다. 허나 그렇게 멀리 들어온
것은 아니라서 왔던 길로 600m 정도 되돌아나가면 바로 빙혈/풍혈 입구이다.

기왕 상류까지 들어온 거 잠시 차에서 내려 상류의 깨끗한 공기도 마셔볼 겸 주변 풍경을 살
폈다. 겨울과 봄이 3월 내내 천하를 두고 다투느라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 계곡 물은 별로
없었지만 벼랑과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소나무가 우거져 그윽하게 경치를 자아내
고 있다. 그렇다면 빙계계곡은 어떤 곳일까?

빙계계곡은 말그대로 얼음 계곡이다. 밀양(密陽)의 얼음골과 비슷한 곳으로 빙계리 얼음골이
라 불리기도 하며, 대자연이 빚은 얼음 구멍과 바람 구멍이 있어 계곡 북쪽 산을 얼음산, 즉
빙산(氷山)이라 부르고, 그 곁을 흐르는 계곡을 빙계(빙계계곡, 빙계천)라고 한다.
예로부터 의성 제일의 경승지로 빙혈과 풍혈, 인암(仁岩), 의각(義閣), 수대(水碓, 물레방아)
, 빙산사지 5층석탑, 불정(佛頂, 불정봉 정상), 용추(龍湫)(용소) 등 8곳의 명소가 서려 있는
데,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 빙계8경이라 부르며, 그들 중 갑(甲)은 이곳의 얼굴이자 상징인
빙혈과 풍혈이다. 그들이 있기에 빙계계곡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 빙혈과 풍혈이 시원하게 막을 치고 있는 곳에 빙산사터가 있고, 계곡 입구에는 빙계서원이
있으며, 빙혈 부근에는 도교 사당인 태일전이 있어 승려와 선비, 도교(道敎) 신봉자들도 이곳
에 적지 않게 군침을 흘렸음을 보여준다. 그만큼 이곳은 자연이 의성 땅에 내린 특별한 선물
이다.


▲  빙계계곡 상류 ②
소나무와 벼랑, 맑은 계곡이 조화를 이루며 착한 경치를 자아낸다.


빙계 일대는 왜정 때 경북8승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으며, 여름만 되면 많은 피서객들이 몰려
와 북새통을 이룬다. 하여 의성군에서는 계곡 일대를 '빙계군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길을 정비
하고 오토캠핑장과 여러 편의시설을 닦는 등 특별히 애지중지하고 있다.

얼음과 서늘한 바람, 그리고 계곡이 한데 어우러진 피서의 완벽한 성지로 무더위에 대한 방어
력이 아주 삼엄하여 제아무리 여름 제국이라고 해도 그 방어선은 뚫지 못한다. 그러니 이곳에
서만큼은 여름 두 자를 잊어도 좋다. 빙혈과 풍혈에서 시원한 바람을 실컷 맞고 (대신 얼음은
건드리지 말자~!) 계곡에서 물놀이로 몸을 풀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꿀피서를 즐길 수 있다.


▲  누런 갈대가 덥수룩하게 자라고 있는 빙계계곡
갈대 너머로 보이는 집들 뒷쪽에 빙혈과 풍혈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  빙계계곡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 (용추 동쪽)

▲  용추 위에 걸린 구름다리

▲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용추와 빙계계곡 중류
빙계계곡에서 가장 풍경이 일품인 곳은 구름다리 주변 용추(용소)이다.
용추는 두 벼랑 사이에 자리한 깊은 못으로 나무와 해, 달 등이
그를 맑은 거울로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경북팔승 기념비<경북팔승지일(慶北八勝之一) 비석>
왜정 시절 빙계계곡이 경북8승의 하나로 크게 추앙을 받자 이를 기리고자
1934년 9월 24일에 세운 비석이다. (비석 옆면에 왜왕 연호인
소화9년 어쩌구 글씨가 있음)

▲  빙산사지(氷山寺址) 5층석탑 - 보물 327호

용추 구름다리 맞은편에 빙혈, 풍혈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들어서면 경북8승 기념비
가 나오고 그 뒷쪽에 너른 공터와 맵시가 좋은 석탑 하나가 진하게 눈짓을 보낸다. 그가 바로
빙계계곡의 오랜 유물인 빙산사지5층석탑이다.

이 탑은 돌을 벽돌 크기로 다듬어서 빚은 모전탑(模塼塔)으로 근처에 있는 탑리(塔里)5층석탑
을 모델로 하여 지었다고 한다. 비록 탑리 탑에는 미치지 못하나 나름 잘생긴 탑으로 신라 후
기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16개의 돌로 이루어진 바닥돌을 밑에 깔고 그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올린 다음 5층의 탑돌
을 얹힌 것으로 높이는 8.15m, 바닥돌 폭 4.06m이다. 1층 탑돌은 네 모서리에 각각 다른 돌로
모서리 기둥을 세우고 정면(남쪽)에 네모나게 홈을 판 감실(龕室)을 두었는데, 이곳에는 불상
을 봉안했다. 그리고 2층 이상부터 몸돌은 그 높이가 1층에 비해 절반 이상 줄어 적당하게 체
감률을 선보이고 있으며. 탑 머리에는 머리장식인 노반(露盤)이 남아있다.

지금은 이렇게 정정한 모습이지만 한때 탑의 건강 상태가 매우 심각하여 1973년에 탑을 해체
하여 복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3층 옥개석(屋蓋石)에서 석함(石函)이 나왔는데, 그 안에서
금동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그로 인해 탑의 존재와 가치가 한층 높아졌으며, 그 사리장치는
멀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빙산사지 5층석탑

▲  1층 탑돌에 있는 감실

이곳에 둥지를 틀며 5층석탑을 품고 있던 빙산사(氷山寺)는 신라 중기나 후기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진다. 허나 자세한 사적(事績)은 전하지 없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때 석탑 1층 감실에 있던 불상이 사라졌다고 하며 그가 앉아있던 좌대만 남아 빙혈 옆에 따
로 놓여져 있다.

절터의 범위는 경북8승 비석부터 빙혈까지로 보이며, 빙혈에는 도교의 태일<태일성(太一星)>
에게 제를 지내던 태일전(太一殿)이 있었다고 전한다. 건물이 꽤나 있었을 절은 잔디와 잡초
밭으로 그림이 180도 바뀌어 세월무상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으며, 5층석탑과 건물터, 주춧
돌만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언제 지어지고 무슨 사연이 깃든 절인지는 낸들 알 도리는 없으나 이곳을 완전 뒤집어 본다면
빙산사의 비밀이 조금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곳은 풍혈과 빙혈이 때에 따라 불어주는 시원한 바람과 따스한 바람이 늘 깃들여져 든든하
게 막을 형성해주니 그야말로 4계절 모두 살기가 좋은 곳이다. 하여 그들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지었던 모양이다.

* 빙산사지5층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산70


▲  잡초만 무성한 빙산사터 (탑 남쪽)

▲  대자연과 세월에 의해 무심히 헝클어진 빙산사터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과 얼음이, 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나오는
신비로운 현장, 빙계리 얼음골(빙혈, 풍혈) - 천연기념물 527호

▲  빙혈(氷穴)

빙산사터를 지나면 빙계계곡의 얼굴인 풍혈과 빙혈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한여름에는 시
원한 바람과 얼음을 내뿜고, 한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나온다는 그 신비의 현장으로 바깥 세
상과는 완전히 반대로 논다. 즉 바깥이 여름이면 속살은 겨울이나 늦가을이고, 바깥이 겨울이
면 속살은 늦봄이나 여름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들 주변을 보면 암괴(巖塊)들이 많다. 암괴
틈에 저장된 차가운 공기가 여름에 외부의 더운 공기와 만나 물방울과 얼음이 만들어지는데,
보통 입춘(立春) 무렵부터 찬 기운이 돌기 시작하여 하지 무렵까지 얼음이 언다. 그러다가 입
추(立秋)부터 얼음이 녹기 시작해 동지 무렵에는 훈훈한 기운이 감돈다.
이처럼 계절을 거역한 대자연의 신묘한 장난이 일어나는 곳은 밀양 얼음골과 진안(鎭安)의 풍
혈냉천(風穴冷泉) 정도가 고작으로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하다. 솔직히 너무 많으면 좀 의미가
없겠지. 그만큼 개체수가 적어야 이들 명소도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법이다.

▲  빙혈로 인도하는 문

▲  빙혈 내부에 걸린 태을영부 부적 돌판

빙혈은 폭 1.5m, 높이 2m, 길이 4.5m의 자연산 굴로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이곳
에서 수행을 했다고 전한다. 그때 이곳은 빙산원(氷山院)이라 불렸는데, 그의 부인인 요석공
주(瑤石公主, 무열왕의 딸)가 그를 보러 여기까지 왔다고 하며, 굴이 얼마나 깊던지 그 끝이
저승에 닿았다는 전설도 있다.

자연 상태로 있던 빙혈은 20세기 후반에 윗사진처럼 크게 손질되었는데, 인간들이 요란하게
손을 댄 탓에 얼음이 어는 것이 예전만은 못한 실정이다. 그래도 그런데로 얼음이 얼고는 있
으니 입춘 이후와 하지(夏至) 사이에 가면 꿈틀거리는 얼음을 만날 수 있다.

옛날 이곳에는 도교 사당인 태일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다보니 빙혈 내부에 '태을영부(太
乙靈符)'라는 도교 스타일의 부적 돌판을 달아서 없어진 태일전을 기리고 있는데, 태을영부란
'선한 사람은 흥하고, 악한 사람은 망하며, 다른 이들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은 살고, 손해를
끼치면 죽는다'는 내용이다. 허나 이 땅에서는 그 반대로 놀아야 흥하고 잘사니 부적의 내용
도 참 의미가 없어 보인다.


▲  얼음이 꿈틀거리는 빙혈 내부

빙혈의 속살로 들어서니 서늘한 바람이 우리를 엄습한다. 여름 제국 시절에 왔더라면 그 바람
이 참 반가웠을텐데, 3월에 왔으니 '그냥 찬 바람이구나~!' 로 감흥은 끝난다.
빙혈 안쪽에 얼음의 공간이 있는데 유리막으로 봉해져 있다. 바로 거기서 찬 바람이 나오며,
얼음 또한 꿈틀거린다. 우리가 갔을 당시는 시기가 좀 이른 탓에 얼음은 별로 없었다.

관람객들은 유리막 앞까지만 진입이 가능하며 내부는 들어갈 수 없다. 아니 빙혈의 보호를 위
해 들어가서는 절대로 안된다. 자꾸 인간들이 손과 발을 대다가는 빙혈도 발끈하여 신비의 현
상을 더 이상 못 보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  빙혈 문 옆에 깃든 글씨들
빙혈을 찬양하고 부처와 상제(上帝),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착하게 살 것을
권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빙계서원은 빙계계곡 하류에 있다.

▲  빙산사지5층석탑 감실 불좌대(佛座臺)

빙혈 옆에는 5층석탑 감실에서 가져온 불좌대가 가로로 뉘어져 있다. 임진왜란 때 빙산사가
파괴되고 감실에 있던 불상(금동불)이 사라지자 지역 사람들이 불상이 앉아있던 네모난 불좌
대를 이곳에 수습했는데, 세로로 눕히거나 절터에 두지 않고 빙혈 옆에 이렇게 가로로 뉘운
것이 꽤 이채롭다.


▲  풍혈(風穴)

빙혈과 빙산사지 사이에는 풍혈이 웅크리고 있다. 이곳은 한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한겨울
에는 따스한 바람이 부는 자연산 선풍기 겸 히터로 바위에 자연산 상태로 있던 것을 마치 석
실고분처럼 돌로 문을 내었다. 돌문 외에는 자연산 그대로로 푸른 이끼가 덥수룩하게 자라고
있어 이곳의 청정함을 보여준다.
풍혈에는 계절을 역행하는 바람 뿐 아니라 얼음도 존재하고 있어 빙혈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데, 문이 뚫려있으나 빙혈의 보호를 위해 절대 들어가면 안되며, 구멍 내부는 빙혈과 달리 좁
은 편이다.


▲  풍혈의 금지된 속살

▲  풍혈에서 꿈틀거리는 얼음

빙혈과 풍혈의 얼음은 입춘부터 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갔을 때가 3월 한복판이니 벌써부
터 저렇게 얼음이 숙성되었다. 얼음이 저리 크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올해는 무척이나 더울
것 같다.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존재들이지만 여름의 위세가 커야만 빙혈과 풍
혈도 제대로 몸을 푸니 여름과 빙혈/풍혈의 관계는 서로를 견제하면서 성장하는 사이이다.


▲  조그만 풍혈

풍혈 주변에는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바위 구멍이 여럿 있다. 앞서의 큰 풍혈이 어미 풍혈이
라면 나머지 조그만 바위 구멍들은 새끼 풍혈이라 할 수 있는데, 바위 사이에서 서늘한 바람
이 쏟아져 나와 여름 제국의 염통을 제대로 얼게 만든다.
비록 여름에 온 것은 아니지만 여름과 겨울 제국을 능히 굴복시키는 빙계계곡 얼음골의 위엄
앞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의 하나로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빙혈과 풍혈을 둘러보니 어느덧 시간은 19시가 되었다. 햇님은 그새 커텐을 치고 그만의 공간
으로 쏙 사라졌고 세상은 거의 검은 도화지로 물들어갔다.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나 충북의 여
러 지역을 거쳐 경북 의성의 빙계계곡까지 정말 배부른 나들이였다.

이렇게 바쁘게 보람찬 하루를 보내니 몸도 피곤하고 배도 고프다. 해도 졌으니 더 이상 답사
도 어려워 안동(安東)으로 바로 달려가 그곳의 명물인 안동찜닭에 곡차(穀茶) 1잔 겯드려 배
를 불리고 안동시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도 전날만큼이나 바쁜 답사 코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의성 빙계계곡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빙계계곡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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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운달계곡)

문경 운달산 김룡사



' 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

▲  문경 김룡사
 



 

여름 제국이 서서히 내리막을 보이던 8월의 끝 무렵. 문경(聞慶)에 있는 운달산 김룡사를
찾았다.
아침이 열리기가 무섭게 도봉동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점촌, 상주행 직행버스에 몸
을 실었다. 허나 아침부터 차가 오지게 막혀 무려 1시간이나 늦게 점촌(店村)에 도착했다.
그래서 김룡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간만에 차이로 놓쳤고, 다음 버스는 무려 2시간 이후에
나 있다.
하여 다른 곳을 급히 물색했으나 딱히 땡기는 대체 장소도 없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기
에도 시간이 애매하여 그냥 계획대로 다음 버스를 타고 김룡사로 들어가기로 했다.

졸지에 2시간 가까운 잉여 시간이 생겨버려 무엇을 할까 궁리했으나 답은 역시 하나 밖에
없었다. 그리 넓지 않은 점촌시내를 간단히 둘러보는 것이다. 시내에 마땅한 명소가 없어
서 점촌전통시장과 점촌역 등 시내를 돌며 중간에 편의점에서 간단히 요기도 하는 등, 억
지로 시간을 죽여가며 시내 북부에 자리한 점촌시내버스터미널로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니
김룡사행 좌석버스가 타는 곳으로 다가와 활짝 입을 연다.
드디어 시간이 되자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터미널을 출발했다. 우리의 버스는
산양과 산북을 거쳐 김룡사까지 곧게 가더니 갑자기 산골로 비집고 들어가 석봉리 지역까
지 강제투어를 시켜주어 점촌 출발 50분 만에 김룡사 종점에 이르렀다.

김룡사 종점에는 여느 유명 사찰과 마찬가지로 식당들이 가득 진을 치고 있는데, 절을 목
전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 같은 그들을 지나치면 그림 같은 숲길이 펼쳐지면서 속세(俗
世)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소독시켜준다.


▲  김룡사로 인도하는 숲길



 

♠  김룡사 숲길, 해우소

▲  녹음(綠陰)에 잠긴 김룡사 숲길

김룡사 주차장(종점)에서 김룡사로 이어지는 숲길을 10분 정도 가면 홍하문 현판을 내건 일주
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일주문 천정에 걸린 '雲達山金龍寺(운달산김룡사)' 현판은 근대 서화가로 명성이 높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것으로 문 주변에는 오래된 비석 2기 등, 비석 3기가
있다. (비석 내용은 모르겠음)


▲  홍하문(紅霞門)이라 불리는 김룡사 일주문(一柱門)과
김규진이 남긴 '운달산 김룡사' 현판

▲  일주문에서 김룡사로 인도하는 숲길
여름 제국의 강렬한 햇살도 우걱우걱 씹어먹을 정도로 숲이 울창하다.

일주문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김룡사입구 3거
리가 나온다. 여기서 김룡사는 오른쪽 전나무
숲길로 들어가면 되며, 직진하면 운달계곡(김
룡사계곡) 상류와 대성암, 양진암 등의 암자,
운달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김룡사 입구에 차곡차곡 구축된 돌탑

요즘 전국적으로 둘레길과 온갖 도보길이 크게
유행을 하면서 이곳 역시 그 유행에 호응하여
'김룡사 둘레길'을 천하에 내놓았다.
김룡사에서 대성암과 화장암, 양진암을 경유해
다시 김룡사로 돌아오는 2.6km의 산길로 그야
말로 김룡사와 산내 암자 순환 코스이다. 대성
암까지는 길이 널널하며 양진암과 화장암은 산
을 좀 타야 되지만 둘레길에 걸맞게 초급 수준
이다.

김룡사 경내 직전에는 늘씬하게 솟은 전나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루고 있다. 비록 긴 거리는
아니지만 소소하게 멋을 풍기며 김룡사에 대한
첫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한낮에도 햇님을 가려 어두울 정도로 그 숲길
을 지나면 경내를 가리고 선 보장문이 마중을
한다.


◀  김룡사를 목전에 둔 싱그러운 전나무숲길


▲  금강문(金剛門)의 역할을 하는 보장문(寶藏門)

솟을대문처럼 생긴 보장문은 김룡사의 2번째 문이다. 하지만 굳이 그의 밑도리를 지날 필요는
없다. 바로 옆에 차량을 위한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보장문은 금강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1960년대에 소실된 것을 옛 건물을 축소하여 중건했
다. 문짝에는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들의 검문을 통과하면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나오며, 그 너머로 김룡사 경내가 층층이 펼쳐진다.


▲  300년 이상 묵은 김룡사 해우소(解憂所)

보장문을 들어서 오른쪽을 보면 고색에 깃든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모습도 단촐하고 요상한
냄새까지 약간 풍기기도 하는데, 그 건물은 300년 이상 김룡사 사람들의 생리적 볼일을 묵묵
히 받아주던 해우소(뒷간)이다.
사진으로 보면 1층 같지만 엄연한 2층으로 윗층에는 볼일을 보는 공간을 남녀 구분하여 만들
었고, 밑층에는 생리적 볼일이 생산한 쾌쾌묵은 물질이 쌓여 있다. 이들 물질은 절에서 퇴비
로 사용했으나,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물질 공급도 여의치 않아 매우 한가한 처
지가 되었다.
그래도 김룡사에서 대웅전, 공루 다음으로 늙은 건물이고 사찰 해우소의 대명사로 통하는 순
천 선암사(仙巖寺) 해우소와 더불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절 뒷간이라 문화유산급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허나 아직까지 그 흔한 지방문화재 등급도 얻지 못했다. 그렇게 하기에는 다
소 껄끄럽고 예민한 냄새가 나는 공간이라 그런 것일까? 뒷간에 대한 이 땅의 사람들의 생각
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뒷간의 역사와 옛 구조를 조사하는 학자, 교수도 거의
없다고 함)


▲  주차장과 경내 밑부분 (보제루와 천왕문)

▲  범종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 천왕문(天王門)


김룡사는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 지형을 이용해 석축을 층층이 구축하고 등급에 맞게 건물
을 두었다. 석축의 높이는 2~3m 정도로 주차장에서 1단 석축을 오르면 범종각과 천왕문이며,
2단 석축을 오르면 보제루 밑도리, 그리고 3단 석축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 중심에 이른다.

▲  하얀 피부를 드러낸 석조 사천왕상
원래 나무로 만든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그 큰 것을 누가 훔쳐가서 돌로 다시
만들었다. 피부들이 너무 흰색이라 마치 하얀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모습 같은데, 끝없이 몰려드는 속세의 분진가루 같은
기운을 막느라 그리 된 모양이다.

▲  운달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연꽃 석조(石槽)

절에 왔으니 약수 한 모금은 마셔야 되겠지. 굳이 목이 마르지 않더라도 경내에 샘터가 있으
면 꼭 바가지를 깨워 마신다. 절의 인심과 산의 넉넉한 마음도 읽어볼 겸 말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마음과 오장육
부가 싹 시원해진다. 그리고 보는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물빛이 우유빛과 비슷하다는 말이 있
다. 그 이유는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와우형(臥牛形)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잠
시 김룡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운달산(雲達山) 남쪽 자락에 안긴 김룡사는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김천 직지사(直指寺)의 말사
(末寺)이다.
588년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창건해 운봉사(雲峰寺)라 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으며,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무려 1,100년 동안 마땅한 사적(事績)도
전하는 것이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심히 회의감을 품게 한다. 1624년에 혜총선사(慧總禪師)
가 중창했다는 기록이 절의 첫 중창 기록이고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가 17세기 중반에 조성
된 대웅전과 삼장탱화 정도라 빠르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늦으면 1624년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진다.

혜총이 그의 제자인 광제(廣濟)와 묘정(妙渟), 수헌(守軒)과 함께 1년 동안 공을 들여 선방,
승방, 법당 등을 완성해 혜총도장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1643년 여름, 화재로 말끔히 소실된
것을 1649년에 의윤(義允)과 무진(無盡), 태휴(太休) 등이 중수했으며, 계속 경내를 확장하여
왜정(倭政) 때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50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로 성장했다.
허나 워낙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골이라 교통이 불편하여 말사 가운데 하나인 김천 직지
사에게 그 감투를 넘기고 그의 그늘로 들어갔다. 1940년에는 요사와 범종각을 중수했으며, 이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절 이름이 운봉사에서 김룡사로 바뀐 것은 조선 후기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
하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봉사 입구인 용소(龍沼
) 부근에 살았다고 한다. 그는 매일 지극 정성으로 불공을 올렸는데, 용소에 살던 용왕(龍王)
이 그 불공에 감동을 먹어 딸을 그에게 시집 보냈다. (또는 김씨가 죄를 짓고 운달산에 숨어
살다가 신의 딸을 만나 혼인했다고 함)
그들 부부는 아들을 낳자 이름을 '김용(金龍)'이라 했으며, 나날이 집안이 번창하니 지역 사
람들은 그를 김장자(金長者)라 불렀다. 또한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던지 마을 이름도 그의 이
름을 따서 김용리라 했으며, 절 이름 또한 김용사로 갈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지원이 상당
하여 그 은혜를 기리고자 절 이름까지 그의 이름에 맞춘 모양이다.
이 전설 외에도 금선대(金仙臺)의 '금'과 용소폭포의 '용'을 따 금룡사(김룡사)로 했다는 설
도 덧붙여 전해온다.

비록 31본산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왕년에는 48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
은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전, 금륜전, 명부전, 보제루, 명부전, 응진전 등 무려 30여 동(부속
암자 포함)을 지니고 있어 여전히 큰 규모를 자랑한다. 부속 암자로는 대성암(大成庵)과 화장
암(華藏庵), 양진암(養眞庵), 금선대 등 4곳이 있는데, 이중 양진암은 1658년에 지어졌고, 나
머지는 18~19세기에 세워졌다. 이들 암자는 모두 비구니 도량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640호로 지정된 '영산회괘불도(靈山會掛佛圖)'와 '사료수집(史料
蒐集, 국가등록문화재 635호)','대본산 김룡사 본말사 연혁 원고(국가등록문화재 636호)'를
위시해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제상(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85호), 대웅전, 영산회상도, 석
불입상, 3층석탑, 양진암 신중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쇠북과 삼장탱화,
해우소, 노주석, 업경대, 지장탱, 시왕탱 등의 오래된 유물이 있다.
또한 1670년에 사인비구(思印比丘)가 만든 동종(김룡사 동종, 보물 11-2호)도 있었으나 1990
년대 중반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해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겨 지금은 없다.

속세의 기운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첩첩한 산골에 묻혀있으며, 절을 둘러싼 숲이 매
우 삼삼하고 바람소리와 새소리, 풍경소리,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소리의 전부일 정도로 적막
하기 그지 없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내음을 누리기에 아주 좋다. 또한 비구니 절집이라 경
내도 참 정갈하고 차분하며, 절을 둘러싼 풍경 또한 일품이라 문경8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끝으로 김룡사에는 대승사(大乘寺)의 불을 껐다는 동자승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역
시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지나치게 영리한 동자승과 그를 의심하는 어른 승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언젠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절의 요지경 갈등이나 일종의 시기심을 전설
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듯 싶다.
 
김룡사가 꽤 잘나가던 시절(고려 때라고 함)에 영리하게 생긴 동자승이 있었다. 어느 날 주지
승이 저녁에 먹을 상추를 씻어 오라고 시켰다. 하여 계곡으로 내려가 상추를 씻고 있으려니
난데없이 동쪽 산 너머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는 것이다. 그래서 상황을 살펴보니 글쎄 산너머
에 있는 대승사에서 불이 난 것이 아니던가.
대승사 승려들은 불을 잡기는커녕, 불에게 단단히 희롱을 당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어 자칫
절 하나가 화마(火魔)에게 통째로 날라갈 판이었다.

동자승은 염불을 외운 다음 물을 소쿠리에 담아 산 너머를 향해 열심히 퍼부었다. 그 물은 동
자승의 주문에 힘입어 대승사까지 태풍의 기세로 날라갔고, 한참 만에 간신히 불길이 잡혔다.
그제서야 동자승은 다시 상추를 마저 씻으려고 했으나 소쿠리로 물을 정신없이 퍼붓는 과정에
서 상추까지 죄다 날라가 거의 몇 잎밖에 남지 않았다. 하여 주지승에게 혼날까봐 걱정이 되
었으나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서둘러 절로 돌아갔다.
한편 주지승은 그를 기다리다가 지쳐 뚜껑이 제대로 폭발한 상태였다. 게다가 배도 무지 고픈
상태였으니 오죽했으랴. 그런데 동자승이 몇 잎 남지 않은 상추를 들고 헐레벌떡 왔으니 안그
래도 폭발한 뚜껑, 더 폭발하여
'왜 늦게 왔냐. 상추는 어디다 팔아먹었냐?'
역정을 내며 그의 종아리를 때렸다, 동자승은 앞
서의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냥 매를 맞고 말았다.

그날 밤, 동자승 옆에 누운 승려가 무슨 일로 매를 맞았냐며 물었다. 그래서 낮에 있던 일을
설명해주었는데, 솔직히 누가 그걸 믿겠는가? 그 말을 들은 승려는 웃기지 말라며 비웃었고,
자기 말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듯싶어 이튿날 새벽, 미련 없이 절을 떠나고 말았다.

동자승이 사라진 것을 안 승려들은 그가 대승사의 불을 껐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두고 서
로 수근거리다가 승려 하나가 대승사에 직접 갔다오기로 했다.
가보니 전날 불이 났다고 했다. 불을 끄지 못해 애태우던 중 어디선가 상추와 함께 물줄기가
날라와 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김룡사 승려들은 동자승이 비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를 찬양했다. 허나 한번 떠난 동자승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 김룡사 소재지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410 (김용길 372, ☎ 054-552-7006)



 

♠  김룡사 대웅전 주변

▲  경내 중심부를 가리고 앉은 콧대 높은 보제루(普濟樓)

보제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2층 건물로 교육이나 설법(說法)을 하는 강당(講堂)
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보통 1층 가운데 칸에 법당 등 경내 중심부로 인도하는 통로를 내나 여
기서는 모두 틀어막고 건물 옆구리에 계단을 내어 법당으로 가도록 했다.
건물이 워낙 장대한 모습이라 절 중심부를 완전히 가리고 앉았는데, 이는 경내 중심부를 외부
에 노출시키지 않고자 그리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흔히 보이는 가람 형태이다.


▲  김룡사의 중심부, 대웅전 주변

보제루 옆구리를 통해 경내 중심부로 들어섰다. 뜨락을 중심으로 정면에 법당인 대웅전이 남
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웅전 맞은편에는 보제루, 뜨락 우측에는 설선당, 좌측에는 종무소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는 해운암(解雲庵)이 있다.


▲  천하에서 가장 큰 방을 지닌 설선당(設禪堂, 경흥강원)

대웅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설선당은 예전 향응각(凝香閣)으로 경흥강원(慶興講院)이라 불리
기도 한다.
이 건물은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70평짜리 온돌방을 가지고 있는데, 장판지만 무려 120
장이 소요될 정도로 천하에서 가장 큰 방이자 최대의 강원(講院) 건물로 위엄이 자자하다. 게
다가 온돌을 때는 아궁이 또한 장대하여 어린이가 서서 들어갈 정도로 크다.
김룡사의 왕년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물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으며, 큰 승려
로 추앙을 받는 성철(性徹, 1912~1993)이 처음으로 설법을 펼쳤던 현장이기도 하다. 경흥강원
이란 현판이 측면에 걸려 있으며, 강당과 숙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조각이 아름다운 서쪽 노주석(露柱石)

▲  단촐한 모습의 동쪽 노주석

뜨락 남쪽에는 이쁘게 조각된 돌기둥 2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들의 정체는 노주석
으로 야간에 불을 피워 그 위에 올려놓거나 숯을 피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용도로 쓰였다.
절에 흔한 석등(石燈)과 서원이나 향교의 정료대(庭燎臺)와 성격이 비슷하며, 화광대(火光臺)
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데, 순 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한다.

김룡사 노주석은 서로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데, 다른 모습 만큼이나 서로 태어난 시기도 다르
다. 조각이 유난히 아름다운 서쪽 노주석은 1940년에 설선당 중수 기념으로 조성되었는데, 높
이 176cm, 불을 피우던 꼭대기 폭은 75cm로 대웅전을 향한 피부면에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글
씨 10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ㅇㅇ十五年 庚辰十月日(경진십월일)'로 앞줄 2자가 고의적으
로 뭉개져 있었다.

고약했던 왜정 때 조성된 탓에 혹시 왜왕(倭王
)의 연호가 쓰이지 않았을까 싶어 1940년 경진
년을 찾아보니 왜왕 소화(昭和) 15년이 있었다.
즉 그때 조성된 것이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입에 담기도 구역질 나는 그 연호를 지우면서
일종의 옥에 티가 되버린 것이다.
그런 점만 뺀다면 이 노주석은 제법 휼륭한 작
품이다. 연꽃봉오리가 늘씬하게 깃들여져 있고
각 면마다 조그만 연꽃잎이 앙증맞게 있다. 그
리고 밑에는 '亞' 무늬가 있다.
동쪽 노주석은 높이 179.5cm, 꼭대기 폭 75cm
로 돌기둥 윗쪽에 구름 무늬가 있다. 그는 강
희(康熙) 51년, 1712년(임진년) 3월에 조성된
것으로 서쪽 노주석보다 단촐한 모습이다.

노주석은 김룡사 외에 대승사, 봉암사(鳳巖寺)
등 문경 지역 고찰(古刹)에서 유난히 많이 나
타나고 있는데, 노주석이 있는 대신 탑이 없는
점도 특징이다. 이는 대승사에서 시작된 문경
지역 사찰만의 개성이라고 보면 될 듯 싶다.

▲  서쪽 노주석에 새겨진 글씨들
왜왕 연호가 빡빡 지워져 있다.


▲  김룡사 대웅전(大雄殿)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453호

남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2중으로 된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이 건물의 6할을 차지할 정도로 육중해 보인다. 그러다보니
건물의 규모도 꽤 크다.
17세기 중반에 지어진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기단 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기둥을 세
워 높이가 하나 같이 일정하지가 않다. 허나 기둥 모두 대웅전의 중심 쪽으로 약간씩 기울어
져 있어 안정감을 주며, 커다란 지붕 처마를 받치고자 공포(空包)를 기둥과 기둥 사이에 촘촘
하게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을 취했다.

비록 영가(靈駕)의 49재 행사로 대웅전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천정에는 천녀(天女), 비
천상(飛天像) 등 다양한 존재들이 그려져 있으며, 1644년에 조성된 삼장탱화가 좌측 벽에 걸
려있고, 성균대사(省均大師)가 그린 영산회상도가 삼세불좌상(석가여래불, 아미타불, 약사불)
의 뒤를 든든히 받쳐준다.
삼세불좌상은 1649년에 설잠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9년에 경북도청에 이들 삼세
불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하면서 불상 뱃속에서 나온 복장유물을 살펴본 결과,
1658년에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아직 삼세불은 비지정문화재임)


▲  대웅전 삼세불좌상과 영산회상도(경북 지방유형문화재 524호)

영산회상도는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비단 바탕에 그려진 탱화로 높이 5.2
m, 너비 4.3m 규모인데, 그림 가운데에 석가여래가 크게 그려져 있고, 그를 중심으로 앞에는
4위의 보살이 일렬로 있으며, 좌우로는 8위의 보살이 서 있다. 그림 상단에는 가섭존자와 아
난존자를 비롯한 10대 제자와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포함한 사자관을 쓴 건달파, 그
리고 사자관을 쓴 야차와 4명의 금강이 있으며, 하단에는 비파, 검, 용과 여의주, 탑 등의 연
장을 쥐어든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이 탱화는 제작 당시부터 이곳 대웅전 삼세불좌상의 후불벽에 꾸준히 있었다. 화기(畵記) 부
분이 훼손되어 제작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룡사사료수집'에 의하면, 1648년에 제작된 불화
들이 낡아 1803년에 적지 않은 탱화를 새로 제작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때 사불산 화승
홍안(弘眼)과 신겸(愼謙)을 중심으로 18명이 탱화 제작에 참여했다.

영산회상도에 나타난 사불산화파의 특징을 살펴보면, 측면향을 한 보살의 얼굴형은 타원형에
눈 부분은 들어가고 이마와 볼을 튀어나오게 표현했고, 채색은 홍색과 녹색을 선명하게 대비
되도록 진채(珍菜)를 사용했으며, 보살과 사천왕 등의 장신구와 지물은 돋음기법에 금을 칠했
다. 특히 존상 구성에서 지장보살이 권속으로 표현된 점이 가장 주목된다. 지장보살은 아미타
불회도에서 8대 보살로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나 19세기 전반 사불산화승들은 지장보
살을 주요 권속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김룡사 영산회상도는 조선 후기 후불도 양식을 고수하
는 한편 화면 구성과 존상 구성 및 상호 표현, 채색법 등에서 사불산화파의 특징적인 도상과
화풍이 잘 드러난 불화로 바로 그런 점 때문에 2018년 12월 뒤늦게나마 지방문화재에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측면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종무소와 선방의 역할을 하는 해운암


▲  괘불(영산회괘불도)이 담긴 길쭉한 괘불함 (대웅전 뒷쪽)

1703년에 제작된 김룡사 영산회괘불도는 국가 보물 1640호로 지정된 비싼 몸이다. 비싼 만큼
이나 만나기도 여간 힘들지가 않아 석가탄신일과 일부 행사 때만 반짝 얼굴을 드러낼 뿐이며,
대부분의 날을 괘불함 속에서 지낸다. 괘불이 워낙 큰 그림이라 그의 보금자리 또한 길쭉한데,
기분 같아서는 그 함을 열어 괘불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만 그럴 위치가 되지 못한다.

괘불의 신상이 적힌 화기에는 제작시기와 기원문, 시주자 5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김
룡사 대신 운봉사로 나와있어 18세기까지 운봉사로 불렸음을 알려준다.


▲  빛바랜 쇠북 <청동금고(靑銅金鼓)>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밥 시간과 예불 시간, 기타 주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쓰인다.



 

♠  김룡사 마무리

▲  김룡사의 창고인 공루(空樓)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98호

해운암 뒷쪽에는 고색이 제법 느껴지는 2층짜리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그는 절의 살림살이와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인 공루로 정면 4칸, 측면 1칸의 누각 형태를 취하고 있다. 1624년에 지
어져 여러 번 중건을 거쳤는데, 2층에는 1칸, 1층은 1칸, 2칸, 1칸 규모로 방이 나뉘어져 있
으며, 원래 자리를 지키면서 절 창고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런 가치가 있음에도 오랫
동안 비지정문화재에 서러움을 간직하며 살다가 2022년 6월에 이르러 경북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얻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김룡사에는 특이한 늙은 존재들이 많다. 앞서 해우소도 그렇고, 노주석도, 그리고
창고까지. 역시 김룡사가 예사롭지 않은 큰 절임을 귀뜀해준다.


▲  앞에서 바라본 공루

▲  김룡사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보금
자리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다고 하며
석가여래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해 3존
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작고 귀엽다.
16나한 또한 다들 제각각의 모습으로 옷과 얼
굴, 머리스타일, 포즈가 모두 틀리며, 그들 뒤
로 16나한도가 걸려있다.

그리고 좌우 모서리에는 신중도와 독성도가 걸
려 있는데, 독성도(獨聖圖) 같은 경우 그 주인
공이 나한의 일원인 나반존자(那畔尊者)이기
때문에 이곳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  응진전 석가3존상

▲  응진전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512호

응진전 식구 중 16나한상과 제석천 2구, 사자(使者) 2구가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이란 이름
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6나한상은 가부좌(跏趺坐)를 튼 모습으로 각자의 표정, 옷차림, 연장을 취하고 있으며, 보관
(寶冠)을 눌러쓰고 홀을 쥐어든 제석천 2구와 두건을 쓰고 두루마기를 든 사자 2구가 그 주변
에 자리한다. 이들은 1709년에 조각승 수연(守衍) 등이 조성한 것으로 수연의 스승인 승호파(
勝湖派) 양식에 기반한 17세기 말~18세기 초기 조각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  김용사 금륜전(金輪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금륜전이란 칠성각의 다른 이름이다.

▲  금륜전 식구들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
금륜전이란 이름답게 칠성(치성광여래) 식구를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산신 식구,
오른쪽에는 혼자 유유자적하는 독성이 자리해 있다. 독성탱 같은 경우
앞서 응진전에 있음에도 이곳에도 별도의 독성탱을 두었다.

▲  극락전(極樂殿)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보금자리로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아미타후불탱

▲  상선원(上禪院)

상선원은 이름 그대로 윗 선원으로 성철 등 많은 선승(禪僧)들이 머물던 곳이다. 허나 지금은
요사로 쓰이고 있으며, 고승(高僧)들의 진영(眞影) 35점과 1830년에 조성된 시왕탱, 1858년에
조성된 지장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  김룡사 경내에서 석불입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하얀 들꽃이 가득해 마치 소금이 뿌려진 듯 하다.

▲  소나무숲에 자리한 김룡사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67호

경내 동쪽 산자락에는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숨겨져 있다. 경내에서 그곳까지는 산길이 살짝
이어져 있는데, 3층석탑은 산길에서 다소 떨어진(그래봐야 길에서 다 보임) 소나무숲 바로 앞
에 외로이 떨어져 있다.

이 탑은 1709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체 높이는 2.85m이다. 바닥돌과 1층 기단, 3층 탑신(塔身)
,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으로 탑과 석불입상을 경내 중심이 아닌 경내 뒷쪽 구석
에 둔 것은 그들이 꼴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단죄하고 운달산의 촉맥(
促脈)을 보우하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유는 단순히 그것
뿐이다.
한때 이들을 천왕문 앞으로 옮기기도 했으나 절의 전통을 지키고자 1989년 10월에 다시 원위
치시켰다.


▲  석불입상으로 인도하는 계단 (사진 중앙에 석불이 있음)

▲  소나무숲에 자리한 석불입상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55호

김룡사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석불입상이 고적하게 자리해 있다. 8각형 기단 위에 연화
대좌를 깔고 그 위에 2.27m의 석불을 올렸는데, 머리에 주름선이 많이 있어 나발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평온한 모습으로 눈썹이 구부러져 있고, 눈은 가늘게 떠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
으며, 코는 약간 오똑하고, 입은 살짝 다물고 있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무엇이든
들을 자세가 되어 있다.
몸통에는 얕은 새김이 이리저리 주름선을 자아내고 있는데, 두 손에 약합 같은 것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알려준다. 그의 아랫도리는 장대한 세월에 선이 거의 지워졌다.

그는 1709년에 조성된 것으로 거의 민불(民佛) 스타일의 석불이다. 3층석탑과 함께 비보풍수
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인데, 절 자리가 와우형혈(臥牛形穴)이라 그 이름에 걸맞게 소를 모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여 당시 유행했던 약사신앙을 내세워 이곳에 석불입상(석조약사여래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덕분인까? 31본산에서 밀려난 것 외에는 절에 딱히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비보풍수
의 덕인지 그냥 운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보장문 앞에 펼쳐진 전나무숲길

이렇게 김룡사를 둘러보니 1시간 반 정도가 정말 훌쩍 가버렸다. 나름 꼼꼼하게 봤다고 여겼
으나 나중에 보니 명부전(冥府殿)을 빼먹었다. 거기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지장3존상이
있는데, 명부전이 경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보니 보기 좋게 놓친 것이다. 영산회괘불도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적이야 원래부터 만나기 어렵고 아무나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마음을 비웠지만 명부전은 늘 열려있는 공간이라 정말 곡소리를 내고 싶은 심정이다.


▲  조촐한 모습의 김룡사계곡(운달계곡)

▲  김룡사를 뒤로하며 (김룡사 숲길)

김룡사를 나와서 부속암자도 둘러보려고 했으나 버스 시간이 임박해 그만 발길을 돌렸다. 여
기서 버스 하나 놓치면 2시간 이상 강제 대기를 해야 되고 그리되면 이후 일정에 차질이 생긴
다, (이후에 들릴 곳이 있었음)
그래서 대성암 등의 부속암자는 쿨하게 포기하고 절입구에 조촐하게 펼쳐진 김룡사계곡(운달
계곡)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쉰 다음, 자리를 떴다. 명부전 목조지장3존상도 놓치고 부속 암자
들도 싹 놓쳤으니 결국 다시 와야 될 명분을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과 또 인연이 닿을지
는 솔직히 장담하기가 어렵다. 아직도 나를 못참게 하는 미답처(未踏處)들이 천하에 수두룩하
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늦여름 김룡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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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동쪽 지붕이자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거닐기 (아차산둘레길, 긴고랑계곡, 아차산4보루,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 긴고랑계곡 봄나들이



' 아차산, 긴고랑계곡 봄나들이 '

아차산둘레길과 용마산

▲  아차산둘레길과 용마산

긴고랑계곡 벚꽃나무길 아차산4보루

▲  긴고랑계곡 벚꽃나무길

▲  아차산4보루



 


아차산(峨嵯山, 295.7m)은 수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커
다란 동쪽 지붕으로 용마산(龍馬山, 348m)과 망우산(忘憂山, 282m), 시루봉, 홍련봉을 식
구로 거느리고 있다.
아차산 식구들은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매년 적지 않게 재활용을 하여 어느덧 200회
가 넘게 안겼는데, 그렇게 안겼음에도 갈 때마다 늘 마음이 설레고 새롭다.

기나긴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자 아차산의 봄 풍경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야심 차게 추진된 이번 나들이는 아차산 기점의 하나인
구의동(九宜洞) 기원정사에서 시작했다.



 

♠  아차산둘레길 (기원정사~긴고랑 구간)

▲  기원정사에서 아차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기원정사 방향)

아차산역(5호선) 1번 출구에서 바로 나오는 골목길(천호대로 129길, 영화사로11길)을 10분 정
도 쭉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기원정사(祇園精舍)란 조그만 현대 사찰이 있다. 천호대로129길
구간에는 온갖 식당들이 즐비해 후각과 미각, 식욕을 마구 들쑤시는데, 아차산을 타고 기원정
사나 영화사(永華寺)로 내려오면 이 골목길에서 많이 저녁 뒷풀이를 한다.

기원정사 옆구리에는 아차산으로 끌어주는 나무데크 계단길이 손을 내밀고 있다. 하얀 피부의
벚꽃과 노란 피부의 개나리가 마중하는 그 계단을 오르면 이내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직
진하면 아차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좌/우 길은 아차산둘레길이다. 나는 긴고랑 방향인 왼쪽
길로 접어들어서 긴고랑계곡으로 이동했다.


▲  아차산둘레길 나무데크길

아차산 남쪽과 서남쪽, 서쪽 허리에 둘러진 아차산둘레길은 고구려정 밑 평강교에서 시작하여
용마산 너머 중곡지구까지 이어지는 3.8km의 달달한 숲길이다.
아차산에는 이미 주능선을 따라가는 서울둘레길2코스(용마, 아차산코스)와 아차산 주능선과
아차산 동쪽 자락을 도는 구리둘레길이 있으나 아차산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다보니 광진구(廣
津區)도 아차산 광진구 구역에 둘레길을 그어 아차산둘레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평강교(친수계곡)에서 기원정사 윗쪽까지는 나무데크길이 깔려있어 안산자락길 못지 않은 편
한 둘레길의 정석을 보여주며, 기원정사 윗쪽에서 긴고랑 구간은 나무데크길과 흙길, 바위길,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고루고루 섞여있어 걷는 재미를 더해준다. 일부 구간에 경사가 조금 있
을 뿐, 그 외에는 착한 수준이며, 긴고랑에서 중곡지구까지는 용마산의 각박한 산길을 넘어야
되는데, 이 구간에는 용마산1보루와 2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기원정사 윗쪽~긴고랑 구간에는 유난히도 진달래가 많이 피어나 봄의 완연한 기운을 전해주며
개나리와 벚꽃도 이따금씩 나와 지나가는 나그네를 격려한다.


▲  연분홍 진달래가 화사하게 마중하는 아차산둘레길 (긴고랑 방향)

▲  부드럽게 이어지는 아차산둘레길

▲  아차산둘레길에서 바라본 작은 천하 (구의동과 중곡동 지역)
사진 가운데로 큰 기와집 같은 것이 보이는데 그곳이 내가 출발했던
기원정사 그 절이다.

▲  아차산둘레길에서 바라본 중곡동과 군자동, 광진구, 동대문구 지역

바로 밑에 보이는 동네가 중곡동(中谷洞) 긴고랑이다. 둘레길을 1굽이 지날 때마다 조망의 질
과 보이는 범위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이렇게 보니 서울이 정말 빽빽하긴 빽빽하다. 사진 가운
데로 어렴풋이 보이는 뫼는 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인 남산(南山)이다.


▲  아차산둘레길에서 바라본 용마산 산줄기의 위엄

▲  슬슬 가까워지는 긴고랑계곡과 용마산

▲  아차산둘레길에서 만난 주름진 바위 벼랑

첩첩한 주름선을 휘날리는 바위 벼랑이 까칠한 경사를 보이고 있다. 아차산의 산세가 대체로
부드러운 편이나 저런 벼랑과 바위도 곳곳에 포진해 있어 아차산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아차산 석실고분이 있는 너럭바위가 아주 일품임) 둘레길 조성으로 보호 난간이 둘러
져 있어 저 난간을 넘지 않는다면 별일은 없을 것이다.


▲  벼랑을 타고 긴고랑으로 급하게 내려가는 조그만 폭포
아차산이 빚은 물이 켜켜이 주름진 벼랑을 타고 속세로 흘러간다.


▲  개나리와 소나무 사이를 지나는 아차산둘레길

▲  긴고랑 직전 아차산둘레길 나무데크길
길이 각박한 곳은 나무데크를 깔아 각박함을 크게 순화시켰다.

▲  바위 벼랑 밑을 지나는 아차산둘레길 (긴고랑 직전)

▲  벚꽃들이 반갑게 마중하는 긴고랑길
길 좌우로 벚꽃들이 길게 늘어서 이곳에 온 것을 격하게 환영한다.



 

♠  아차산의 일품 계곡, 긴고랑(긴고랑계곡)

▲  긴고랑에서 만난 벚꽃의 향연
벚꽃들이 상큼하게 봄의 향연을 뿌려댄다.


기원정사 윗쪽에서 둘레길을 따라 20분 정도 가면 긴고랑계곡에 이른다. 이곳은 아차산과 용
마산 사이에 깊게 들어간 골짜기로 그 계곡이 길어서 긴골, 진골이라 불렸으며, 점차 긴고랑
으로 변화되었다. (긴 골짜기란 뜻이나 실제로는 별로 길지 않음)
아차산의 대표적인 계곡이자 몇 없는 자연산 계곡으로 계곡 하류에 제방이 다소 닦여져 옥의
티가 적지 않으나 자연산 풍경도 그런데로 남아있다. 게다가 계곡도 어느 정도 크기가 있는
편이며, 지나친 가뭄이 아닌 이상은 수량도 풍부하여 여름 제국 시절에는 도심 속 피서지로
북새통을 이룬다. (계곡 물놀이도 가능함)

* 긴고랑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143-146


▲  개나리와 진달래가 손짓하는 긴고랑계곡 하류
평화롭게 흐르던 긴고랑계곡은 계곡 주차장에서 강제로 생매장을 당해
어둠의 경로를 통해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이곳과 중랑천 사이에는
주택가가 빽빽하게 들어찼기 때문이다.

▲  인공 조미료가 과하게 들어간 긴고랑계곡 하류 제방

▲  긴고랑의 따사로운 봄 풍경

▲  개나리들이 무성한 긴고랑계곡

인공이 다소 가해진 계곡 주변으로 개나리의 노란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계곡 하류에 인공이
크게 씌워진 것은 심히 안타까우나 상류와 중류는 자연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  아차산 주능선으로 인도하는 긴고랑계곡 산길

긴고랑에서 아차산 주능선까지는 20~3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주능선 직전을 제외하면 세상
에서 가장 편한 오르막길 수준으로 계곡이 중간 정도까지 따라가주며, 온갖 봄꽃과 나무들로
무성하다. 초봄이라 그렇지 5월 이후에서 늦가을까지는 거의 숲터널 수준이다.


▲  긴고랑계곡 중류
물놀이나 아이들을 동반한 피서지로 적당한 곳이다. 긴고랑계곡은 딱히 통제구역이
없어 적당한 곳에 들어가 쉬거나 피서에 임하면 된다. 단 계곡을 더럽히거나
다녀간 흔적은 남기지 않도록 한다.

▲  졸졸졸~♪ 흘러가는 긴고랑계곡과 그 옆에 닦여진 나무데크길

▲  진달래와 소나무, 주름진 벼랑이 어우러진 긴고랑계곡 상류

▲  긴고랑계곡 상류
계곡 상류는 다른 계곡과 마찬가지로 물이 별로 없다. 봄의 해방군에 크게
들뜬 밑과 달리 하늘과 가까질수록 봄과 겨울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나무들이 많이 늘어난다.

▲  아차산 주능선으로 끌어주는 긴고랑 산길

▲  아차산 주능선 직전

긴고랑계곡 하류에서 20여 분을 오르면 주능선 갈림길에 이른다. 여기서 북쪽으로 오르면 용
마산과 망우산, 시루봉으로 이어지며, 남쪽은 아차산4보루와 아차산 정상, 그리고 동쪽 내리
막길은 구리시 아천동으로 통한다. 나는 남쪽 길로 들어서 아차산4보루로 이동했는데, 아차산
에 왔다면 4보루와 정상은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와 동남쪽 성곽

아차산4보루는 용마산과 망우산을 제외한 아차산 보루 식구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잃
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고구려 성곽 유적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아주 남다른 곳인데,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보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다소 남아있었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는 높이가 0.8m를 넘지 못했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들여쌓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4보루 남쪽 2중치

구리시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움을 받아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를 확인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닦여진 보루임이 명백해졌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에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4보루 한복판으로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선이 지나가 절
반은 서울시, 나머지 절반은 구리시 영역인데, 구리사가 2008년부터 복원을 적극 추진하여 2
년의 공사 끝에 2010년 12월 24일에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
원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늙은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적어서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쩔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
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땅으로 덮었다.
그리고 보루 중앙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에 보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축소 재현하여 마치 역사 왜곡의 현장 같은 아쉬움을 준다. 지형의 경사면을 이
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
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치성(치)은 성곽 방어를 위해 앞쪽으로 다소 튀어나온 성벽으로 고구려표 축성 양식의 하나이
다. 그 양식은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은 물론 왜열도와 서토(중원대륙)까지 전해져 절찬리
에 쓰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를 지닌 특이한 치가 남쪽으로 길게 나와있다. 그는 전체 길이 13.2m
로 중간에 목책(木柵)이 둘러진 2.5m 정도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로 무자비하게 사라
진 구의동보루에서도 일부 확인이 되고 있으나 사실상 아차산4보루가 유일하며, 고구려 보루
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닦여져 안정감을 준다.


▲  4보루 서남쪽 치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 일
대 병참기지로 추정된다.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
고, 방어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님의 꾸준한 괴롭
힘 앞에 모두 사라지고 터만 황량이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는 숙제
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4보루의 7개 건물터 중 남쪽에 있는 1호 건물터가 가장 높다. 여기서는 온돌 유구 2기와 주춧
돌이 나왔으며,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투구 등이 나와 4보루를 관
리하던 높은 장수나 지휘관의 숙소로 여겨진다.
1호 건물터 주변에는 6호 건물터와 7호 건물터, 2호 건물터 등이 있으며, 3호 건물터 밑에서
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는데, 층위(層位)로 보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
혀져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닦았던 것이다.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탐방로 좌우로 잔디와 흙이 두툼히 덮여진 건물터와 저수시설 유적이 있고, 키가 작은 금줄을
둘러놓아 고구려의 거룩한 흔적을 지키고 있다. 금줄의 의미처럼 줄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지키는 사람이 딱히 없어서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펴고 쉬거나 음식을 처묵처묵하는 골 빈 작
자들이 적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4보루 저수시설

4보루에서는 물을 저장하는 2개의 저수조(貯水槽) 흔적이 나왔다. 이들은 깊이 3.5m 정도 수
직으로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입자가 고운 회색 뻘흙을 발라 물이 새지 않도록 방수
처리를 한 것으로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350x310x깊이240cm'이다.


▲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남양주, 하남, 강동구 지역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한강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4보루 동북쪽 치

4보루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아주 예술이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종로구, 중구, 송파구, 강동구, 한강은 물론 하남시와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까지 시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해돋이 수요와 일몰 수요,
야간 등산 수요가 많다. (1월 1일에는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완전히 미어터짐)
게다가 아차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주능선의 목구멍 같은
곳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큰 보루를 쌓아 무척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4보루 동북쪽 치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남한산성 등

▲  아차산4보루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아차산 주능선과 용마산)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서쪽 성곽

▲  4보루 북쪽 치

4보루 바깥에는 우회 산길이 있다. 4보루의 속살로 들어가기 싫다면 그 우회길을 이용하면 되
는데, 아차산에 왔다면 4보루는 무조건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그러다보
니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많으며,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는 이들도 적지 않
다. (특히 저녁에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단체로 먹거리를 섭취하는 등산 동호회 사람들이 많
음) 휴식과 음식 섭취는 좋으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금줄을 넘어가는 행위는 하지 말자.

아차산4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보루 6식구, 용마산 보루 7식구, 망우산1보루, 홍련봉 보루 2식
구, 시루봉보루는 한 덩어리로 묶어 '아차산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5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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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북악산 부암동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계곡)



'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 늦가을 나들이 '

백석동천 별서터
백사실계곡 백사폭포 백사실계곡 외나무다리

 



 

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1월의 첫 무렵, 후배 여인네와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을 찾았다.
백석동천은 내 오랜 즐겨찾기의 하나로 매년 3~4회 이상 발걸음을 하며 나의 수줍은 마음
을 비추고 있는데, 내 즐겨찾기의 일원인 부암동(付岩洞)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세검정
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 다리(신영교)를 건너 '세검정로6다길' 골목길로 들어섰다.

백사실의 요즘 인기를 보여주듯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수시로 나타나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인도를 해주는데, 골목길 끝에 자리한 빌라 옆으로 높게 닦여진 계단을 오르면 혜
문사입구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야트막한 길을 넘으면 바로 백사실의 남쪽인 현통사와 백
사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마치 속세를 버리고 신선의 세계로 들어선 듯, 아랫 세상과 공기와 풍경부터가 확
연히 틀리다. 그것도 무려 서울 도심 지척에서 말이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仁王山)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盆地)이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실계곡(백석동천)으로 인도하는 산길
저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의 속살로 들어서다

▲  현통사 앞에 자리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일주문) 밑에
는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 피부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작은 폭포로 웅장하거나 수려한 멋은 딱히 없다. 그저 수수하게
생긴 폭포로 하얀 반석과 잘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나그네로 하여금 백사실계
곡에 대한 첫 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그곳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돋군다.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라 그 희소성이 높은데, 그가 만약 설악산이나 금
강산, 주왕산(周王山) 등 일품 폭포가 즐비한 곳에 있었다면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
러니 사람이나 폭포나 때와 자리를 잘 잡아야 덕을 본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실계곡(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예전 이름이 동령폭
포란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폭포는 자신의 이름까지
저 멀리 흘려보내고 만 것이다.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아서 폭포수가 실보다 가늘고 누런 낙엽이 짙게 깔려있지만 비가 많이 오
면 폭포수도 제법 패기를 보인다. 한여름에는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 되며, 사
람들이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자거나 쉬는 등,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자 꿀피서지로 인기가
높다.


▲  백사폭포와 하얀 반석

▲  가을과 낙엽을 속세로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겨울 제국(帝國)의 차디찬 시련을 견뎌내고자 나무들이 속절없이 털어낸 낙엽들이 폭포 주변
에 수북히 쌓여있다. 이들 낙엽은 폭포 밑에 모여 이곳에서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며, 올해
도 변함없이 도래한 겨울을 원망한다. 몇몇 낙엽은 한이 골수까지 맺혔는지 폭포 중간에 철썩
같이 달라 붙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자연은
그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아래로 흘러가거나 썩어 문드
러질 것이니 그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실계곡 냇물은 넓은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소(沼, 못)에서 큰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기 힘들 그리운 고
향, 북악산(백악산)의 그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
랫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서 신나게 바위를 타고 내려가 홍제천, 한강을 거쳐 서해바다로 종점
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
심히 매무새를 다듬는다. 저들의 처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잔
잔한 수면에는 귀를 접은 낙엽들이 둥실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실에 머문
늦가을도 낙엽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실계곡 밑에 둥지를 틀어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는 20세기 이후에 지어진 조그만 산
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였던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로 백사실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
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겨우 2~3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
타게 만들만한 구석도 없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실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
한 풍경소리가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다.


▲  늦가을이 깃든 백사실계곡 숲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에 물들게 한다.

▲  운치가 진한 백사실계곡 숲길 (백사폭포~백석동천 별서터 구간)

간만에 백사실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
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실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수묵
담채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
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실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 나는 감히 언어로 이곳을 희롱하지 않고 그저 탄
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실계곡을 거닌다.
 
숲에 깃든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숲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실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도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줄어들고 서울에서는 이곳을 비롯한 일부 계곡에만 겨우 살아가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  백사실계곡 별서터 직전 계곡 풍경

▲  별서터 돌다리에서 바라본 백사실계곡
바로 앞에 보이는 크고 견고하게 생긴 바위들 피부에는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닦을 때 필요한 돌을 떼던 흔적들이다.


계곡에 누워있는 바위들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어렵지, 이처럼 백사실계곡은 마치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실계곡은 백석동천, 백사실, 백사골 등이라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크게 상관은 없
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표현
한 이름이다. 그리고 백석동천은 이곳에 퐁당 반한 선비와 양반들이 붙인 칭호이자 백사실의
다른 이름이다.


▲  별서터 옆을 지나는 백사실계곡 (별서터 징검다리 주변)

백사실계곡 안내도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정겹게 펼쳐진 계곡 징
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
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닦은 둑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 별서 주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백석동천 돌다리
백석동천 별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통돌 2개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이다.

▲  별서터에서 바라본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별서터 맞은 편인 서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큰 바위 하나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
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화석처럼 깃든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발이 닿기 어려운 궁색한 곳에 자리해 있다. 별서
터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짙은 숲에 가려져 있어 이곳을 찾
은 사람들의 99% 이상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11월 중순 이후나
겨울에는 침침한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다 보면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파고 그 안에 월암(月巖) 2자를
새겼는데, 18세기에 백석동천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
정되나 확실한 것은 아니며,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실계곡은 나무가 울창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1잔 걸치러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
광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 바위에 달바위(월암)란 이름을 붙여
주고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벗어나
면 여기가 서울이 맞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고운 경치가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
인 부암동과 신영동(新營洞),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
산)에 포근히 안긴 분지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 지방의 산골 마을이나 깊은 산에 푹 묻힌 조
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산속에 자리한 탓도 있겠
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크게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서(별장) 및
피서지로 인기가 대단했다. 세종의 3번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
舍)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휴식과 풍류의 장소로 지어진 세검정(洗
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
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백악산) 북서쪽 백사실계곡에 푹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해서 백사실이라 하나 그는 이곳과 관련이 없으며, 백사실계곡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비롯되었으나 계곡에
하얀 바위가 많고 경치도 고와 굳이 북악산이 아니더라도 백석동천의 이름 자격은 충분하다.
여기서 동천(洞天)이란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경승지의 명예로운 칭호이다. <동학(
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연못 정자터

▲  사랑채터

백석동천과 관련된 첫 기록은 18세기 인물인 월암 이광여(1720~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있다. 그 책에는
'비가 온 뒤 북한산(삼각산)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폭포수를 보았다. 세검정으로 빠지
는 계곡 위쪽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폭포(백사폭포)가 있는데
그 위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다. 그곳의 편액은 간정료(看鼎寮)였다'
여기서 간정료는 '솥을 보는 집'이란 뜻으로 차를 끓이는 다조(茶俎)를 말한다. 허씨의 초가
정자가 일찌감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여기서 허씨는 허필(許佖)로 여겨진다. 그는 시
문과 그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손가락으로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를 잘했다. 1737년 '북
한산 남쪽 백석별업(別業)에서 정윤, 강세황(姜世晃)과 함께 짓다'
는 제목의 시를 지으니 그
때 이미 '백석(백석동천)'이란 지명이 있었음을 살짝 밝혀주고 있다.

개화파로 유명한 박규수(朴珪壽)도 14살이던 1820년에 외할아버지를 따라 한양도성 북쪽의 여
러 명소를 거닐었는데, 그때 백석동천에도 들려 시문을 남겼다. 그는 석경루 위쪽에 백석정의
옛 터가 있는데 허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살던 곳이라 하였고, 백석정은 허도사가 단약(
丹藥)을 달이던 곳이라 언급하며 백석정은 이미 사라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허씨(허도
사)는 허필로 보이며, 백석정은 간정료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2012년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백석동천에 손을 댄 기록이 발견되었다. 김정희
는 금헌(今軒)이란 친구와 읊은 시에서
'하찮은 문자에도 정령이 배었으니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쪽 별서
는 백석정의 옛터에 있다'
는 문구가 나온 것이다. 김정희가 백석동천을 북쪽 별서<북서(北墅)
>라 한 것은 이미 한양도성 동남쪽 금호동(金湖洞)과 경기도 과천(果川)에 별서가 있었기 때
문이며,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에도 백석동천 별서를 산루(山樓)라고 표현했다.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가 1960년대에 낸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에는 이곳 별서가 1830년
대에 지어진 것으로 나와있는데 추사가 그때 이곳을 사들여 정자를 짓고 600평 규모의 별서를
지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허나 추사가 이곳을 계속 소유하지 않은 듯 싶으며, 이후 이곳
관련 기록에는 주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尹致昊)는 1926년 11월, 이곳을 유람했는데, 그의 '윤치호일기'에 '
백석실'이라 나와있어 백석동천(백사실)의 다른 명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잇으며, 1930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에는 '북악8경'의 하나인 '백석곡 팔각정'이 나왔는데, 백석곡은 백석동천의
별칭으로 그 신문에 정자의 사진이 나왔다. 그것이 백석동천 별서터의 유일한 생전의 사진이
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 별서를 둘러싸던
담장이 있었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는데,
안채는 1917년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6.25때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은 기능을 잃었다.
사랑채와 안채는 1970년대까지 살아는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감당치 못
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사랑채터와 안채터, 동그란 연못, 정자터, 담장터, 돌다
리, 돌계단, '백석동천'과 '월암' 바위글씨 2개가 남아 이곳의 정취를 아련히 전한다.

옛날(1960년대까지)에는 마음 놓고 발을 들일 수 있던 열린 공간이었으나 북한이 저지른 1968
년 1.21사태(김신조 공비사건)로 북악산(백악산) 일대와 백사실계곡이 금지된 곳(청와대 경호
구역)으로 꽁꽁 묶이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거의 끊기게 된다. 이후 동네 사람들이나 오갈 정
도로 비밀의 공간으로 있다가 2004년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통제구역에서 해방되었고
, 그 시절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임을 강조해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명승 36
로 변경되었다.

2010년과 2011년에 별서터 일대를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
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백석동천 바위글씨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와
여름의 녹음과 피서삼매, 늦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고루고루 몸살
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여름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실계곡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살짝 다리를
담구거나, 침침한 두 눈을 비비며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의
성지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고 싶었던 옛 사람(주로 지
배층들)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
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쭉
남았으면 좋겠다. 찾는 이가 늘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까지 섞여 들어와 사랑채터 주춧
돌에 낙서를 하고 계곡을 괴롭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9년 이후 관리인을 두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또한 2013년에 종로구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이곳을 들쑤실 생각까지 했었는데, 괜히 복
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기 바란다. 비록 폐허가 되었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운
치가 진하며,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다. 그리고 백사실계곡은 서울시에
서 지정한 도룡뇽 보호구역이나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않기 바란다.


* 백사실계곡(백석동천)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부암동 산25일대


▲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깃든 언덕

백사실계곡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
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이어주는 돌계단이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계단돌이 좀 헝클어진 했으나 경사가 완만해 통행에는 별로 어려움은 없다. 다
만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가 있었다. 허나 아쉽게도 생전
의 사진이나 그림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무너져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 남아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정
비되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서 별서 주
인은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를 대접
하여 1잔씩 걸쳤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채 동쪽 부분에는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石築)이
남아있다.


▲  석축 위에 닦여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누마루가 사라지면서 주춧돌은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옆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우물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우물(또는 작은 연못)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공터로 남아있는 안채터
안채가 가고 없는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에
는 엉뚱하게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적지 않게 파괴되어 생매장을 당
했다.
그렇게 별서터를 깔고 앉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
대를 발굴하면서 없앴으며, 땅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건
졌다. 그리고 2011년 3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고이 묻고 그 위를 풀로 덮
어 완전히 가렸으며,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수습된 주춧돌 등의 돌덩어리들은 안채터 서쪽 구
석에 모아두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
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사랑
채에서 연못에 비친 달과 별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에 잠겼을 별서 주인을 머리 속에 그
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사랑채터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던 집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크게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담장터

사랑채터와 안채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담장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되며, 석축 윗쪽에는 별서와 속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던 담
장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거진 무너지고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
지 담장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서쪽 돌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



 

♠  백석동천 별서터의 중심,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사랑채터에서 바라보이는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살며시 떠있는 그런 연못이 아니
라 나무들이 털어놓은 낙엽과 잡초로 가득한 모습을 보인다. 애미도 몰라본다는 장대한 세월
의 흐름은 연못의 성격과 구성원까지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정자터 옆에 배수로를 만들어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동그런 연못을 채웠으며 연못을
채운 물은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돌다리 밑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빼면서 연못은 계속 물갈
이가 되었다.
허나 이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6.25전쟁 때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
되고 연못 또한 손상을 입어 배수가 불가능하게 되면서 무늬만 연못이 되버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
가 비가 많이 오면 비록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그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가득한 연못의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늦가을에는 낙엽
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주변은 나무들
로 삼삼하여 두텁게 시원한 그늘이 펼쳐진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
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은
나그네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여기
가 서울이 아닌 지방이었다면 그 감동은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별서터를 지켜온 늙은 물푸레나무
(나이는 약 150~200년 정도)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六茅亭)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궜던 정자는 윗도리와 중심부는
모두 사라지고 6개의 돌기둥과 돌계단만 남아
있다. 정자터 옆구리에는 계곡물을 끌어들이던
배수구의 흔적이 작게 남아있는데, 6.25전쟁으
로 손상되면서 더 이상 물을 소환할 수 없게
되었다.

백석동천 별서터 식구 증 유일하게 생전의 모
습을 남긴 운이 좋은 존재로 1930년 7월 19일
자 동아일보에 백석곡 팔각정으로 등장했다.

▲  옆에서 바라본 정자터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
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과 기둥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했을 것이다.
비록 터만 남아있으나 지금의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으며 괜히 복원하려고 난리치지 말고 지
금 모습 그대로 둬야 이곳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15~20m에 이르는 커다란 물푸레나무가 연못과 그 주변에 그늘을 드리
운다. 나이는 약 150~200년 정도로 여겨져 추사 김정희가 심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데 나
무 밑에는 커다란 바위가 누워있어 별서를 닦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두었으니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과
별서를 꾸몄던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노비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
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  별서터에서 수습된 돌로 이루어진 소박한 쉼터 (연못 정자터 옆)

별서터 일대에서 수습된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들을 이곳에 모아두었다. 이들은 아마도 사랑채
와 안채, 정자에 쓰인 석재로 보이는데, 시커먼 피부를 지닌 큰 돌을 가운데 두고, 그보다 작
은 돌덩어리 2개를 좌우에 두어 마치 탁자와 의자와 같은 모습이 되어 조촐하게 이곳의 쉼터
역할을 한다.
나도 둘이나 여럿이서 이곳을 찾았을 때 여기서 앉아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섭취하
고는 했는데, 저곳에 앉은 횟수는 최소 50회는 넘을 것이다. 저 돌덩어리들과 별서터 유적은
거의 그대로이거늘 나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계속 늙어가고 변해가니 정말 인상무상이로다.


▲  통돌 2개로 이루어진 작은 돌다리

정자터 옆에 있던 배수구를 통해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연못을 채우고 채워진 물은 돌다리
(윗 사진)가 있는 작은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내보내 고인물을 경계했다.
이곳 돌다리는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관련글 보기)의 기린교처럼 길쭉한 통돌 2
개로 이루어진 단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은근히 정감을 가게 한다. 별서가 조성되던 1830년
에 수로, 연못과 함께 닦여진 것으로 보이며, 수로에는 더 이상 물이 나갈 일이 없어 낙엽만
가득하다.


▲  연못을 중심으로 한 백석동천 별서터

▲  늦가을이 고스란히 담긴 별서터 옆 백사실계곡 (능금마을 방향)

▲  연못 동쪽 산비탈에 닦여진 석축의 흔적



 

♠  백석동천 마무리

 별서터에서 백사실계곡 상류로 인도하는 산길

백사실계곡은 별서터 옆에서 백사실약수터 입구까지 도룡뇽과 맹꽁이 등의 수중동물 보호를
위해 금줄을 둘러 접근을 막고 있다. 하여 별서터에서 계곡 상류로 가려면 별서터를 등지고
다시 계곡을 건너 솟대 돌탑이 있는 별서터 입구로 나와야 된다. 이 구간을 제외한 계곡은 접
근은 물론 발을 담구는 것도 가능하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금줄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의 침입이 빈번해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는 2012년에 마련된 산불방제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이 있는데, 솟대 돌탑
은 백석동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냥 백석동천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돌탑을 지
나면 소나무숲과 늦가을에 잠긴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동쪽)으로
가면 백사실계곡 상류와 능금마을, 북악산길로 이어지고,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
위글씨가 나타난다.


▲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는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간절히 꾀했다.

▲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짧은 은행나무숲길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남쪽) 길로 가면 서쪽을 향해 95~100도 정도 약간 고개를 숙인 큰 바
위가 나타나는데, 그 피부에 '白石洞天' 바위글씨가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여기서 '백석'은
북악산(백악산)을 뜻한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북악산(백악산) 산신
도 모른다. 아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지는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조선 때 선비와 양반 등 지배층들은 경관이 수려한 곳에 저렇게 낙서를 남기는 습
성이 있었는데 백석동천 역시 그들의 낙서가 2개나 전하고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일 것이다.


▲  늦가을에 잠긴 백사실계곡 숲길 (능금마을 방향)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할 것이다. 비록 짧은 거리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 말벗이 되어 본다.

▲  너른 반석들이 가득 펼쳐진 백사실계곡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이어지는 숲길을 조금 가면 별서터에서 잠시 떨어졌던 백
사실계곡이 나타난다.
이곳은 진정한 계곡 상류로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부터 이끼 옷을 걸친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
져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과 금강산, 주왕산, 지리산 등 큰 산의 계곡만은 못
해도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때묻지 않은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는데, 이렇게 순수함을 지닌
백사실계곡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
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
겠는가?

한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생물의 탄압 현장이 되고, 시민들의 소풍/나들이 장소로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
터앉아 시를 읊거나 탁족(濯足)을 하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  숲과 잡초로 가득한 백사실계곡 상류

▲   백사실계곡 외나무다리

백사실계곡 상류의 너른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
도 달달한 풍경을 자아낸다. 길쭉한 목재 2개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
도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어찌해야 될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
요는 없다.
사람도 오지게 많고, 차량도 허벌나게 많으며, 키다리 빌딩도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게 보이
는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기할 따름이다. 백사실계곡(백석동
천)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백사폭포에서 시작된 백석동천은 이곳 외나무다리에서 끝나며, 백사실계
곡은 능금마을 안쪽까지 이어진다.


▲  능금마을 방향 백사실계곡 상류와 마을 밭두렁(오른쪽)

▲  폭이 매우 좁아진 백사실계곡 상류 (능금마을 직전)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줄어든다. 계곡 건너
에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나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종
로구가 맞는데 이런 두멧골이 있었나. 마음을 설레게 하니 그곳은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
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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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계곡이자 서촌의 오랜 경승지,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자락길)

인왕산 수성동계곡



'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쉼터 - 인왕산 수성동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 (기린교 주변)



 

늦가을이 절정에 이르던 11월 첫 무렵 주말에 일행들과 수성동계곡을 찾았다. 햇님이 하
늘 높이 걸린 14시에 그들을 만나 내 즐겨찾기 명소인 백사실계곡(백사골)과 부암동산복
길(백석동길), 인왕산자락길을 거쳐 16시 넘어서 수성동계곡에 이르렀다.
이곳도 즐겨찾기의 하나로 정말 지겹도록 찾은 곳이라 계곡 윗도리만 주마등처럼 통과하
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못지나친다고 기린교가 있는 계곡 밑도리까지 싹 복습
을 하였다.



 

♠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현장, 서울의 경승지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렸던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서촌(西村, 웃대) 한복판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한양도성(漢陽都城)에
오랜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한경지략(韓京識 略) 등에 서
울의 명승지로 절찬리에 소개된 곳이다. 이곳 계곡(기린교와 공원 일대)을 예로부터 수성동이
라 불렀는데, 이는 계곡에 걸린 기린교 밑의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물소
리가 좋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거대한 돌산으로 제대로 된 계곡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
왕산(仁王山)이지만 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계곡이 제법 있다. 수성동을 비롯해 청풍
계(淸風溪, 청운동), 청계동천(淸溪洞天, 부암동) 등이 명소로 꼽혔으나 개발의 칼질로 죄다
쓰러지고 수성동만 옥인아파트의 압박 속에 간신히 살아남은 것을 2012년에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그 외에 환희사계곡과 몇몇 약수터 주변에 조그만 계곡이 있으나 죄다
볼품은 없다.

수성동계곡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8)이 그린 장
동팔경첩(壯洞八景帖)의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어깨를 피고 등장한다. 여기서 장동은 인왕산
자락인 효자동(孝子洞)과 청운동(淸雲洞) 일대를 말하며, 북촌(北村)과 더불어 왕족과 사대부
(士大夫)들이 집과 별장을 짓고 살던 금싸라기 땅이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이 빚은 절경이 많은데, 그중에 장동8경이 대표적
이다. (지금은 수성동과 창의문, 대은암 바위글씨만 살아남았음)

수성동에 가장 먼저 집을 지은 사람은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문무(文
武)를 겸비하고 풍류의 1인자였던 안평대군은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으며, 나중에 창의문 북쪽에 무계정사(武溪精舍)란 별장을 지었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란 그림
을 남기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그림을 보면 기린교를 건넌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
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낀 바위와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속
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격하게 찬양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 속의 골짜기가 아닌 도성(都城) 속에 자리해 있어서 접근성도 아주 착
하다. 하여 사대부 외에도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정(宋石亭)과 더
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
활동)의 성지(聖地)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으며 장안의 경승지로 큰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과 장동8
경은 1960년대 이후 서울 도심이 개발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오로지 개발 밖에 모르던 천
박한 개발의 칼질은 장동8경의 태반을 가루로 만든 것이다. 대은암 같은 경우는 그 칼질에 희
생되지는 않았으나 엉뚱하게 군사작전지역에 묶이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 되었고, 수성
동도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계곡 중류 일대에 들어서면서 참으로 아름답던 그 경관은
99% 망가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인근 청풍계나 청계동천처럼 계곡이 대부분 증발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
트로 인해 계곡의 폭도 줄어들었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
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또한 옥인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
하를 거쳐 역시나 생매장 신세가 되버린 청계천(淸溪川)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가는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을 정도로 명성은 크게 하락했다.

▲  수성동계곡 사모정

▲  기린교 돌다리

개발의 난도질로 태어난 옥인시범아파트가 계곡을 건방지게 깔고 앉으면서 수성동계곡은 40년
가까이 어둠에 묻혀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원히 지워지는 것
은 아닐까? 빼앗긴 계곡에도 과연 봄은 오는가? 수성동에게는 그야말로 절망의 시절이었다.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이, 수성동에게도 끝내 좋은 소식이 날라왔
다. 계곡을 깔고 앉던 옥인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
정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발일변도(一邊倒)로 일관하던 세상도 조금은 변하면서 수성동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가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계곡을 되살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여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으면서 뒤
늦게나마 문화유산의 대우를 받게 된다. (서울의 계곡 중 최초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됨)
 
이후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는 입주민을 모두 내보내고 2011년까지 모두 철거되었다. 그
리고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여 그해 여름부터 복원 공사에 착수, 1년 동안 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완성을 보면서 시민공원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개발의 칼질에 날라간 계곡을 살리고자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으며, 옛 경
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와 참나무, 산철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다.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그 외에 돌단풍, 띠,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고, 좁아진 계곡을
크게 넓혀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
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인 사모정을 세워 선비와 지배층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끼도록 했다.
그리고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여겨지는 계곡 아랫쪽(기린교 동쪽)에 관람공간을
조성해 정선의 눈으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으며, 게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
를 닦아 인왕산과 어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늙은 존재인 기린
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두어 수
성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비록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완전 옛날 모습은 아니며 여전히 비슷한 자리(옛 옥인아파
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계곡 관람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이 계곡은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기분 같아서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 복원하면 좋겠지
만 이미 회색빛 시가지가 가득 들어차 지금으로써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계곡이 생매장
되는 구역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로 주변 바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으며, 기린교 같은 경우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
하다.
그래도 수성동의 혜성(彗星)과 같은 재등장으로 서울 도심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하나 늘었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고, 복원공사를 벌이는 중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아 계곡을 재현했으
니 어설프게 재현된 청계천과 달리 살아있는 계곡이다.

수성동계곡의 범위는 보통 공원 일대 계곡과 기린교를 일컫지만 인왕산길에서 공원으로 내려
가는 계곡도 수성동 범위에 들어간다. 그 계곡이 있기에 수성동계곡도 있는 것이다. 비록 재
현된 폼이 낯설기는 하나 그것은 장차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옛날의 경치도
슬슬 피어오를 것이요. 도심 속의 상큼한 피서의 성지(聖地)로 잃어버린 왕년의 명성도 되찾
을 것이다.

* 수성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85-3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 - 기린교(麒麟橋)
칼로 싹둑 손질을 했는지 바위들이 90도 절벽을 이루며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낸다.


넉넉한 폭으로 흐르던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이전에서 급격히 좁아지고 하얀 피부의 반석들도
무시무시한 낭떠러지를 계곡 쪽에 빚으면서 제법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 낭떠러지 바위
사이에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짧은 돌다리가 고색의 때를 간직하며 놓여져 있는데, 이
다리가 바로 수성동의 오랜 명물인 기린교이다.

기린교는 길쭉한 통돌 2개로만 이루어진 아주 단촐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리 남쪽에 다리를
보조하는 커다란 돌 여럿을 둔 것이 전부이다. 다리 폭은 1m 남짓, 길이는 3m로 언제 조성되
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겸재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 다리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적
어도 17세기 이전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계곡을 찾은 귀족과 사대부들의 편의를 위해 닦은 것으로 보이는데, 벼랑으로 이루어진 이 부
분이 계곡 가운데 가장 위험하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는 광통교(廣
通橋)이다. 그리고 수표교(水標橋)와 창경궁(
昌慶宮) 옥천교(玉川橋)가 2위, 3위에 들어간
다.
(중랑천 살곶이다리는 도심이 아니므로 제외)
수표교는 청계천 생매장 때 제자리를 떠나 장
충단공원에 둥지를 틀었고, 광통교는 비록 자
리는 지켰지만 생매장의 치욕을 겪다가 청계천
복원 때 약간 서쪽으로 옮겨졌다.
그에 반해 기린교는 그들보다 한참 후배이지만
제자리를 지키며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게다가 통돌로 만든 다리 가
운데 가장 긴 편이다.


◀  높은 벼랑 위에 걸쳐진 기린교


▲  정면에서 본 기린교의 위엄

▲  바로 앞에서 본 기린교
다리 너머로 수성동계곡의 생매장 현장이 보인다.



 

♠  수성동계곡 둘러보기

▲  잘 닦여진 수성동계곡 북쪽 산책로
계곡 일대를 두 눈으로 살피며 거닐 수 있다. 계곡 복원에 걸맞게 흙길이면
좋으련만 길을 현대식으로 닦은 것이 상당히 아쉽다.

▲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옛 옥인시범아파트의 잔해

수성동계곡 북쪽에는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 흔적은 아파트 7동의 1
층으로 2008년 철거가 결정되자 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계곡과 조금 떨어진 7동의 아랫도
리 일부만 남겨 이곳의 기념물로 삼았다.

한때 계곡을 깔고 앉아 감히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의 최후로 이곳을 요란법석 거쳐간
엄연한 역사의 흔적이다. 아파트를 말끔히 밀어버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일부라도 남겨 개발의
난도질에 희생된 수성동의 서글픈 과거를 보여주고, 무분별한 난개발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이 적당하다.
또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20세기 말 서울 지역 아파트의 양식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인
정되어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계곡을 유린하던 인간의 창조물은 그 자리를 원주인인 계곡과 자연에게 내주고 이제는 그들의
눈치를 살살 보며 공원 한쪽 구석에 찌그러진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용을 쓰고 만들
어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귀여운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아파트의 남겨진 흔적은
마치 예비군훈련장의 시가전 훈련장이나 전쟁의 폭격으로 주저앉은 건물처럼 보이는데, 그렇
다. 대자연의 보복 폭격에 옥인아파트는 저렇게 주저앉은 것이다.


▲  옛 옥인아파트의 초라한 잔해

▲  계곡 북쪽 산책로 (인왕산길 방향)
지나가던 늦가을도 이곳이 좋았는지 알록달록 봉숭아물을 입혔다.

▲  계곡 북쪽 산책로 (하류 방향, 사모정 옆)

▲  수성동계곡의 구수한 양념, 사모정

사모정은 1칸 밖에 안되는 조촐한 팔작지붕 정자로 2012년에 지어졌다. 사모정이란 이름은 네
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는 이곳
을 스쳐갔던 옛날 정자를 재현한 것이 아닌 수성동계곡 수식용으로 세운 것이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에도 정자는 나와있지 않고,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가 있었다는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계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풍경이 한층 더 살
아나는 것 같다.

계곡 바람과 인왕산 바람이 앞다투어 선선한 바람을 선사하고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솔내
음을 불어주는 명당 자리라 저곳에 들어가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맛일 것 같다.


▲  계곡 상류와 인왕산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나무와 꽃들이 산듯하게 가을옷을 입으며 막바지 처절한 아름다움을 불사른다.

▲  수성동계곡 공원 윗쪽 계곡

▲  인왕산 품과 맞닿은 수성동계곡 서쪽 산책로

▲  수성동계곡 상류 -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수성동계곡의 상류는 대략 3개 정도 되는 것 같다. 석굴암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그 남쪽에서
내려오는 계곡, 인왕산에서 꽤 유명했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오는 계곡까지 서로가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슬금슬금 내려온다. 특히 인왕천약수터에서 온 계곡은 거의 90도 각도의
암벽 사이로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룬다. 그리고 작은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물놀이하기에 적당하다.
모래 옆과 공원 쪽에는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있어 조금은 어색하지만 이는 계곡을 복원하
면서 끼워놓은 것으로 2012년 복원 이전에는 폭포와 주변 암벽, 모래밭까지만 원래 모습이었
다.


▲  수성동계곡 남쪽 산책로

▲  계곡 남쪽 산책로에서 바라본 사모정

▲  슬럼프에 빠진 사모정 앞 수성동계곡

한때는 밋밋한 성냥갑 아파트 사이로 그들의 눈치를 보며 눈물처럼 흘러야했던 수성동계곡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없이 가슴을 피며 당차게 흘러간다. 허나 늦가을 비가 적었던 탓에 상류
에서 물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사모정 앞 계곡은 수풀만 무성한 늪지대처럼 변해버렸다.


▲  계곡 남쪽 산책로 (기린교 방향)

▲  잠시 흙길로 돌아선 계곡 남쪽 산책로 (기린교 부근)

▲  수성동계곡 관람공간에서 바라본 계곡 (계곡 동쪽 광장)

수성동계곡 동쪽에는 넓게 다져진 광장이 있다. 이곳은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위치로 여
겨지는 자리로 그 당시 정선의 눈높이가 되어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과 인왕산을 한 덩
어리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상류를 제외한 수성동계곡 일대와 인왕산이 바라보
이는데, 보통은 높은 곳에 전경(全景)을 바라보는 자리를 두지만 이곳은 거꾸로 계곡 밑에 그
자리를 두었다.

인왕산이 빚은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밑도리를 지나 낭떠러지 밑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관람공
간 밑에서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하수구를 통해 칠흙같은 지하로 생매장된다. 계곡을 복원했
다고는 하지만 옛 옥인아파트 주변만 재현된 것이며, 이후 서촌(웃대)을 가로질러 세종로 서
쪽을 거쳐 청계천까지 흘러가는데, 이 구간은 보기만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복잡한 시가지로
땅을 열기도 힘들다.
이들도 마저 끄집어낼려면 수많은 건물과 도로를 밀어야 되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하
긴 서울 도심에서 수성동계곡만 그렇겠는가? 삼청골(삼청천)이나 청풍계, 창덕궁 빨래터에서
나오는 냇물 등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에서 베푼 수많은 물줄기들이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어 대부분 생매장을 당했다.


▲  가로등이 불을 밝히며 어두운 저녁을 대비한다.

계곡을 1바퀴 둘러보고 동쪽 관람공간으로 내려가니 시간은 어언 17시가 넘었다. 햇님이 커튼
을 치고 꽁무니를 빼면 인왕산과 수성동계곡은 검게 익고, 계곡 가로등이 불을 밝히며 어둠에
대항한다. 허나 가로등의 패기가 미약하고 이곳도 엄연한 자연 공간이라 그 어둠을 제대로 극
복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수성동계곡 나들이는 저물어가는 햇님처럼 그렇게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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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영동 백화산 반야사 '

반야사3층석탑
▲  반야사3층석탑과 배롱나무

▲  영천과 망경대

▲  반야사계곡(석천계곡)

 


 

♠  백화산(白華山)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반야사(般若寺) - 영동군 향토유적 9호

▲  반야사 경내
경내 뒷쪽으로 꼬랑지를 든 호랑이를 닮았다는 돌너덜(반야산 호랑이)이 보인다.


영동 고을의 동부를 맡고 있는 황간(黃澗), 그 황간 북쪽 우매리에서 석천계곡(반야사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 반야사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반겨준다.

백두대간의 일원이기도 한 백화산이 베푼 석천계곡이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
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그곳 한복판에 둥지를 닦은 반야사는 백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절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매우 곱고 절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영동(永同) 지역 경승지이자 피서의 성지로 오랜 세월 찬양을 받고 있
다.

경관 하나는 아주 일품인 반야사는 신라 말에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가 황간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심묘사(深妙寺)에 주석하고 있었을 때, 현재 절 자리에 있던
연못에 나쁜 악룡(惡龍)이 머물며 갖은 민폐를 부리자 사미승(沙彌僧) 순인(純仁)을 보내 그
들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닦으니 그것이 반야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용(龍)이 진짜로 있을 리는 없을 터이니 아마도 백화산에서 설치던 산적을 교화하
거나 때려잡고 그들의 본거지에 절을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비록 무염이 창건했는지는 의문
이나 대웅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불상이 있어 9~10세기에 창건된 것은 확실한 것 같
다.
무염의 창건설 외에도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원효(元曉)가 세웠다는 설과 의상(義湘)의 10
대 제자 중 하나인 상원(相源)이 세웠다는 설도 덩달아 전하고 있으나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
은 이 땅에 많은 절에서 사골이 되도록 우려먹는 흔한 소재이다. 반야사도 예전에는 그들이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요즘은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부분을 생략하고 신라 후기에 크게 활약했
던 무염을 창건주로 내세우고 있다.
절 주변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 했으며 산
이름을 지장산에서 백화산으로 바꾸어 문수도량임을 내세웠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352년에 중건되었다고 하며, 1464년 신미
(信眉)가 세조(世祖)의 허락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세조는 법주사(法住寺)를 방문했다
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에 들려 새로 지은 대웅전에 참배하고 '반야'란 현판을 내렸다고
하며 그때부터 절 이름이 '반야사'가 되었다고 한다. ('반야'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뜻함)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잠수를 탔다가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
히 불사를 벌여나갔고 1993년에 새 대웅전과 요사를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산신각, 지장전, 심검당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서 다소 떨어진 망경대 벼랑 위에는 이곳의 상징인 문수전이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닦았다.
절이 들어앉은 특성상 대웅전과 극락전 등 주요 건물들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문수전은 북
쪽을 향하고 있다, (경내에서 계곡 건너 서쪽에 전답과 관세음보살상이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유일한 국가 지정문화재인 3층석탑을 비롯해 영동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대웅전 불상, 조선 후기 부도 2기가 있으며, 그 외에 500년 묵은 배롱나무 2그루와 신
중탱이 전하고 있다.
또한 절 뒷쪽 계곡 너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파쇄석이 모인 돌너덜이 있는데,
마치 꼬랑지를 세운 호랑이 모습이라 절에서는 그를 '반야사 호랑이'로 삼으며 호랑이로 화현
(化現)한 산신(山神)으로 내세우고 있다. 경내에서도 그 돌너덜이 보이며, 그 너덜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닦은 모양이다.

반야사는 풍경도 좋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교통편이 영 좋지 못한 것이 큰 흠이라 대중교통으
로 오려면 여간 힘들지가 않다. 허나 그만큼 첩첩한 산속으로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
거나 마음을 싹둑 다듬고 싶을 때 안기면 아주 좋은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템플스테이도 운
영하고 있으니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고적한 산사에 묻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1 (백화산로 652 ☎ 043-742-4199, 7722)
* 반야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주차장 남쪽에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문수도량과 산신기도 도량까지 내세우는 이곳에는 재미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 2
가지를 우선 꺼내보겠다. (다른 1가지는 영천 부분에서)

①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시절 글재주가 좋은 황도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간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했는데, 웃기는 것은 아주 쉬운 한자인 '수(
水)'와 '산(山)' 2자를 몰라서 백일장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크게 발끈한 황도령은 바로 반야사로 달려가 그곳에 있던 일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일우
는 학식이 뛰어난 승려로 그에게 많은 학문을 전해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황도령의 얼굴색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어 얼굴을 살펴보니 글쎄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 아닌가? 그냥 방치하다
가는 황도령이 골로 갈 수 있기에 그의 옷을 벗겨 온몸에 금강경(金剛經) 5,149자를 빼곡히
적어넣고 옷을 입혔다.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은 도령 몸에 쓰인 금강경을 보고는 크게 발작했다. 금강
경의 위엄에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줄행랑을 쳤는데 이는 일우가 금
강경을 쓸 때 귀 부분을 실수로 빼놓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도령은 귀는 잃었지만 스승 덕
분에 살아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출가를 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이법사(無耳法師)라
했다. 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② 불교 탄압이 극성이던 조선 성종~연산군(燕山君) 시절, 벽계선사(碧溪禪師)는 그 소나기를
피하고자 머리를 기르고 속인(俗人)으로 가장하여 살았다. 그는 과부를 맞아들여 같이 살았는
데 어디까지나 위장 혼인일 뿐, 3년을 살아도 여전히 남남처럼 살았다. 부부의 재미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에 완전히 뿔이 난 과부는 어느 날 '야~ 나 갈꺼야~~!!'
선사 왈 '왜?'
과부 '이름만 부부지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 살겠냐?'
선사 '그러면 말리지 않겠다. 그래도 3년 동안 밥해주느라 고생했는데 수고비로 이거나 가져
가셔~!'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주었다.

과부는 표주박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와 동구 밖 샘물가에서 그것으로 물을 떠마시며 팔자 한
탄을 간드러지게 하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있던 표주박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자 그만 포기하고 3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재혼처를 물
색했으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벽계선사를 다시 찾아갔다.
선사는 '내 다시 올 줄 알았다'
그 말에 과부는 '어찌 알았누?'
선사 '그 이유가 궁금함? 그런데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따 팔아먹었노?'
과부 '아 그거... 마을 동구 밖 샘터에서 잃어버렸어. 쩝'
선사 '그 자리에 다시 가봐라. 아직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과부가 놀라서 '어째서?'
선사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중이 되기를 500번이나 했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
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것이라 이
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지~~!'

과부는 웃기고 있네~~! 표정을 지으며 그 샘터로 가보니 과연 그 표주박이 3년 전 모습 그대
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과부는 다시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며 선사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잘살았다고 한다.

▲  반야사 심검당(尋劍堂)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  반야사 용머리 연꽃 석조
백화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그의 넉넉한 마음을 비춘다.

▲  반야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大雄殿)
1993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극락전이 대웅전 행세를 하였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불단과 붉은 닫집, 그리고 석가3존상
(대웅전 불상 - 영동군 향토유적 12호)


대웅전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이루어진 조그만 석
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경주 옥석(玉石)으로 조성되어 산뜻하게 도금을 입힌 것으
로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여래상은 검은 머리칼을 드러내고 있고
좌우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눌러쓰며 석가여래 좌우를 받쳐준다. 그들 뒤로는 검은 바탕으
로 이루어진 석가후불탱이 든든하게 후광이 되어준다.

▲  대웅전 신중탱
대웅전을 지키는 온갖 호법신의 무리가
그려진 것으로 석가후불탱과 비슷한
스타일로 조성되었다.

▲  산신각(山神閣)
2단으로 다져진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  반야사3층석탑 - 보물 1371호

극락전 앞에는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지금이야 반야사의 일원
으로 완전히 묻혀있어 이곳의 오랜 유물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는 원래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석천계곡 탑벌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50년에 주지 성학(性學)이 수습
하여 일으킨 것이다. 그 덕분에 반야사에 오래된 존재가 하나 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다음 머리장식
으로 마무리를 한 형태로 밑에서 머리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높이는 335cm이다. 바
닥돌은 모두 6매의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바닥돌 윗면 네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돌출
되어 있고, 중심부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 기단면석이 꼽히도록 하였다.
기단부는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가 모각되었다. 갑석 윗
면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했으며, 중앙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서 1층 탑신을 꼽도록 조
성했다. 그리고 갑석의 네 모퉁이에도 합각선이 돌출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를 새겼으며, 남/북쪽 면석은 새
로 끼워 넣었다. 2,3층 탑신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2층 탑신에 모각된 우주에서는 엔
타시스 수법을 볼 수 있다. 3층 탑신은 현상으로 보아 새로 끼운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屋蓋石)은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층 옥개석의 낙수면은 길이
가 짧고 경사가 급해 보이며, 옥개석 받침은 1층 5단, 2/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추녀는 비
교적 두껍게 조성되었는데, 직선화되는 보편적인 수법과는 달리 둥글게 표현되어 전각의 반전
은 예리한 편이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찰주(刹柱)가 관통된 노반(露盤)과 복발 등의 머리장식
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보기도 함) 1층 탑신의 결구 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 면석과
1층 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백제계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제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탑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건강 상태도 좋으며, 반야사의 보물로 묵묵히 살
아가고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배롱나무
, 극락전

▲  범종을 비롯한 4물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배롱나무 - 영동군 보호수 13호

극락전과 3층석탑 사이에는 오래된 배롱나무 형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들은 추정 나이가 약
530년(1994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년) 정도로 높이는 각각 8m, 7m, 나무 둘
레는 각각 0.8m, 0.6m이다.
경내에서 대웅전 불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3층석탑은 제외)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자신이
가지고 댕기던 주장자(柱杖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갈라져 쌍배롱나무로 자랐다는 믿거나 말
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한여름(7~8월)에 왔더라면 배롱나무(백일홍)의 아름다운 붉은 향연을 제대로 누릴수 있을텐데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에 오다 보니 그 아름답다는 나무도 다른 나무와 비슷하게 그저 알
몸만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걸치는 옷을 빼버리면 다 똑같거늘 왜 그리도 욕심을 부리고 계
급을 나누는지 모르겠다.


▲  배롱나무의 여름 모습 (반야사 홈페이지 참조)
배롱이의 향연은 기껏해야 2달 정도이다. 6~7개월 정도는 푸른 옷을 걸치고 있으나
나머지 5~6개월은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한 채, 알몸으로 살아간다.


▲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 반야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이곳의 대웅전이었으나 1993년 바로 옆에 새 대웅전이 지어지면서 법당에서
물러나 아미타불의 거처인 극락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석천계곡(반야사계곡)과 반야사의 상징, 문수전

▲  석천계곡 (반야사계곡)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이제 다봤구나~!' 싶어서 발길을 돌리려고 하니 문수전을 알리는 이
정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발길을 붙잡는다. 문수전이라?? 반야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나
싶어서 살펴보니 그곳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경내 뒷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왕 온 것이니 다
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말끔히 둘러봐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산길은 석천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계곡 풍경이 반야사 이전보다 더욱
장관이었다. 물은 깊고 청명하며, 바위와 벼랑이 적당히 나타나 여흥거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누런 갈대가 바람에 펄럭이며 나그네의 마음을 간지럽히고, 소나무 등 나무도 삼삼해 이런 곳
이야말도 진정한 신선(神仙)의 세계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신선의 세계는 인간계보다 시간이 빛의 속도만큼 빠르다고 한다. 신선의 장기를 구경하는 동
안 몇 대(代)가 흘러갔다는 난가(爛柯)의 전설도 있을 정도이니 괜히 이 계곡에 발을 들였다
가 기백 년 뒤에나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돌너덜 (반야사 호랑이)

반야사의 명물 중에는 '반야사 호랑이'라 불리는 돌너덜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꼬
랑지를 치켜든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들은 순 자연산으로 수 만년
동안 흘러내린 파쇄석이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쌓이고 쌓여 높이 80여m, 길이 300여m에 이르는
돌너덜을 이루게 되었다. 근데 하필이면 호랑이 모습을 이루고 있어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
솜씨에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반야사는 그를 산신의 화현으로 삼고 있으며, 산신각 산신탱에
그려진 호랑이 모습과도 비슷하다.


▲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

▲  망경대(문수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튼 문수전(文殊殿)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은 아주 느긋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착했던 길은 영천을 앞
에 두고 갑자기 180도 흥분하여 아주 각박한 오르막길로 돌변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맞배지붕 건물 하나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들어앉은 건물처럼 장엄하게 보이는데, 그것이
반야사의 상징인 문수전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벼랑 옆에 닦여진 가파른 길을 올라가
야 되는데, 경내에서도 다소 떨어져 있고, 길도 각박하여 문수전을 건너뛰는 사람도 있다.
허나 이는 갈비탕에서 고기를 빼먹는 거와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문수보살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주변 풍경이 가히 일품이니 조금은 힘들더라도 발품을 팔만하다.


▲  망경대 밑에 자리한 석천계곡 영천(靈川)

문수전을 강제로 머리에 이고 있는 망경대(문수바위) 밑 계곡을 영천이라 부른다. 이곳은 세
조와 문수보살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세조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를 방문하니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 세조
가 예를 차리자 그는 왕을 영천으로 인도하여 몸을 씻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는
'왕이 불심(佛心)이 갸륵하니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오'

한 마디 남기고는 사자를 타고 망경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사라졌다.

왕이 목욕을 마치고 계곡 밖으로 나오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며, 병을 낫게 해준 문수
보살을 기리고자 절 이름을 반야사로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화는 가만보면 오대산 상원
사(上院寺)에 서린 세조와 문수동자 전설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아무래도 거기 설화를 가져와
서 반야사 스타일로 다듬은 듯 싶다.
세조가 과연 여기서 목욕을 했는지는 의문이나 그만큼 왕실의 인연과 지원이 각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절 부근 경치 좋은 곳에 이런 전설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그 전설로 인해 영천
옆 벼랑을 문수바위 또는 망경대(望京臺)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망경대는 서울을 바라본다
는 뜻이니 절을 중창시켜준 세조와 왕실의 은혜를 두고두고 기리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  망경대 꼭대기에 자리한 문수전의 위엄

문수전은 세조와 문수보살의 설화가 깃든 망경대 벼랑 위 250m 고지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
해 있다. 건물을 짓기에는 다소 척박한 곳이지만 그 현장에 문수보살을 위한 건물을 지어야
문수도량의 뽀대가 나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건물을 지어올렸다.
문수전에 오르면 백화산 남쪽 자락과 석천계곡, 호랑이 돌너덜 등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오
나 주변이 칼처럼 솟은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어 보이는 범위는 그것이 전부이다.


▲  문수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상과 문수동자상

문수전은 북쪽을 향해 문이 나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늠름한 모습의 문수보살상이 파란 피
부의 목각사자상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푸근한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는다. 그 좌우에
는 붉은 옷을 걸친 문수동자와 녹색 옷을 입은 문수동자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문수'의 세상이다.
문수보살과 동자상은 근래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여물지도 못했지만 목각사자상은 조
선 후기 것이라고 하며. 그 좌우에 중생들의 시주를 받아 봉안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어두운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  문수전에서 바라본 반야사 호랑이(돌너덜)

▲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북쪽과 백화산 산줄기
다음에 오면 저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나의 존재를 잠시 지우고 싶다.

▲  백화산의 첩첩한 산줄기 (백화산 정상 방면)

▲  망경대 바로 밑에 펼쳐진 영천
영천 주변에 흙과 자갈이 넓게 깔려 있어 여름 피서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혹시 아는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면 세조 임금처럼 병이 싹 나을지도~~?

▲  문수전에서 경내로 내려가는 산길

반야사 경내에서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길은 2개가 있다. 우리가 이용한 계곡 길을 거쳐서 가
는 것과 경내 동쪽 산길로 오르는 길이 그것인데, 보통 계곡 길로 올라가서 문수전을 찍고 경
내 동쪽 산길로 내려오며 절에서도 그렇게 가기를 적극 권하고 있다. 이유는 계곡 길에서 망
경대 벼랑으로 오르는 길이 좁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도 상관은 없음)
계곡 길은 완만하게 가다가 망경대에서 아주 화끈하게 흥분을 하지만, 동쪽 산길은 서서히 오
르는 형태로 덜 가파르다. 그 길을 내려오면 잠시 떨어졌던 경내가 이내 모습을 드러내며, 주
차장 쪽으로 떨어진다.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  반야사 부도(浮屠) - 영동군 향토유적 10호, 11호

주차장 남쪽 산자락에 고색이 짙은 부도 2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은 주차장 부근에 있
어 찾기는 쉽지만 구석진 곳에 있어 자칫 놓치기가 쉬우니 꼭 등잔 밑을 살펴보기 바란다.

반야사 부도는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 1호 부도(향토유적 10호)는 검은 주
근깨(이끼)가 가득 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대추알처럼 생긴 탑신을 얹히고 네모난 지붕돌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오른쪽 2호 부도(향토유적 11호)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8각의 대석(臺
石)과 석종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지붕돌과 정체가 아리송한 기둥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누구의 승탑(僧塔)인지는 귀신
도 모른다.

▲  왼쪽 1호 부도

▲  머리장식이 특이한 오른쪽 2호 부도

▲  주차장에서 부도로 인도하는 돌계단

▲  주차장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  봄을 기다리는 석천계곡
백화산 등산을 하려면 저 다리를 건너면 된다. (관세음보살상도 저 다리를 건너면 됨)


부도를 끝으로 그림 같은 절, 반야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기분 같아서는 계곡 다
리를 건너서 관세음보살상까지도 가보고 싶고, 계곡길을 따라 일주문(주차장에서 우매리로 나
가면 중간에 있음)까지 걸어가며 계곡을 느끼고 싶지만 다음 답사지(경북 어느 지역)로 빨리
넘어가자는 일행의 독촉에 그 좋은 후식거리를 모두 포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쉽긴 했지
만 반야사에 깃든 보물과 문수전, 영천과 망경대 등 볼만한 것은 거의 다 보았으니 별로 후회
는 없다.

시간은 어느덧 16시. 해가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조금씩 어둠의 기운이 피어나 세상을 훔치려
들고 우리는 고적한 산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우리는 반야사란 절을 기억하겠지만 반야사는 잠깐 스치고 지나간 나를 기억이나 할련지 모르
겠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여름에 인연을 잡고 싶음) 계곡도 말끔히 둘러보고 세조가
몸을 씻었다는 영천에도 풍덩해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반야사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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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 주왕산 늦가을 나들이 '
(절골, 가메봉, 용연폭포, 용추폭포, 주왕계곡)

▲  대전사에서 바라본 주왕산

▲  용추폭포

▲  절골계곡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기 시작하던 10월의 한복판에 늦가을 단풍 성지로 격
하게 추앙받고 있는 청송(靑松) 주왕산을 찾았다.
주왕산은 대자연이 경북 한복판에 빚은 크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호남 내장산(內藏山)에 버
금가는 단풍의 대표 성지(聖地)이다. 서울에서 약 600리(옛 10리는 약 5km) 거리로 당일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좀 넉넉하게 무박 2일 코스로 다녀왔다.

토요일 저녁 10시, 신도림역(1,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준비된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주
왕산이 있는 동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늦가을 단풍의 화려한 향연과 아직까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주왕산에 대한 강한 설
레임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검은 도화지가 되버린 차창 밖만 열심히 바라보며 나름대
로 주왕산을 그려본다. 말로만 듣던 주왕산의 실물은 어떠할까?? 단풍은 제법 물이 올랐겠
지? 대전사까지 모두 볼 수 있을까? 등등...

서울을 출발하여 약 5시간 30분 만에 주왕산 남쪽 끝에 자리한 주산지 주차장(상이전마을)
에 이르렀다. 아직 새벽 어둠에 잠긴 주차장에는 천하 곳곳에서 산꾼과 나들이꾼을 바리바
리 싣고 온 관광버스로 가득한데,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주차장 모퉁이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먹었다.
밥과 반찬을 가져온 이들이 많았고, 취사 도구까지 가져와 라면과 찌개, 오뎅탕 등을 해먹
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렇게 갖은 먹거리들이 모두 모이니 그야말로 출장 뷔페가 따로 없
으며, 주차장 옆에는 식당을 겸한 가게가 환하게 불을 켜며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을 때우고 4시 30분에 다시 버스를 타고 서쪽에 자리한 절골교로 이동했다. 그
림 같은 비경을 자랑하는 주산지(注山池)도 봤으면 좋으련만 그곳은 일정에 없었기 때문에
공간의 여유가 있는 주산지 주차장에서 아침만 먹고 바로 철수한 것이다.
절골교에서 모두 버스에서 내려 절골탐방지원센터까지 12분 정도 걸었다. 여기서 주왕산의
빗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5시, 빗장이 열리기가 무섭게 주왕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주왕산 절골, 가메봉, 사창골

▲  주왕산 뒷쪽에 숨겨진 절골

절골(절골계곡)은 주왕산 동남쪽에 깃든 계곡으로 주왕산 뒷통수에 해당된다. 주산천(注山川)
의 상류로 골짜기가 꽤 깊고 숲이 울창하며,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골이라 불린다. 계
곡 길이는 8km로 주왕산 동쪽 대관령(731m)에서 발원한 갈전골(갈절골)과 신술골이 한데 모여
절골을 이룬다.
삼삼한 숲에 포근히 감싸여 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피해갈 정
도로 시원하다. 계곡은 물이 풍부하고 기암괴석과 반석, 간간히 나오는 조그만 폭포가 운치를
더해주며. 상류로 올라갈수록 풍경의 질이 높아지니 꼭 상류(대문다리)까지는 오르기 바란다.
  
절골코스는 절골탐방지원센터에서 계곡을 따라 펼쳐지는데 여러 차례 계곡을 건너야 된다. 반
듯한 다리 대신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으나 부실한 곳이 적지 않아 자칫 물에 빠지기 쉽다. 하
지만 수심이 얕아 그리 위험은 없으며, 계곡 트래킹 및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절골은 인근 주산지와 함께 '내주왕계곡'이라 불리며, 풍경이 고와 주왕계곡(周王溪谷) 못지
않다. 계곡을 옆에 끼고 상류로 올라가다가 대문다리를 지나서부터 계곡과 서서히 멀어지며,
산길 경사도 점차 각박해져 깔딱 직전까지 이른다. 그렇게 각박한 산길을 오르면 가메봉 동쪽
갈림길에 이르고, 여기서 서쪽 능선길로 가면 가메봉이다.

* 절골탐방지원센터 → 대문다리 → 가메봉 (3시간 20~30분 소요)


▲  고요함에 잠긴 절골 (절골 중류)
늦가을 향연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계곡을 거울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벼랑 사이를 흐르는 절골

▲  늦가을 채색이 짙은 절골 상류
너른 반석과 조촐한 폭포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돕는다.

▲  가메봉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바라본 주왕산 남쪽 줄기
산 아랫도리와 중간 도리는 단풍의 향연이 한참이나 해발 700m 이후로는 벌써부터
앙상한 분위기를 자아내 올해도 거의 저물었음을 실감케 한다.

▲  주왕산 가메봉(882m) 바위와 그 너머로 보이는 왕거암

가메봉은 주왕산 구역에서 두수람(923m), 왕거암(907m)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다. 주왕산 동
쪽에 자리한 가메봉은 넓직한 바위로 이루어져 동쪽과 남쪽, 서쪽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으
며, 하늘에서 가까운 봉우리이나 칼처럼 솟은 뫼에 꽁꽁 둘러싸여 있어 조망의 질은 그리 시
원치 못하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행동식을 섭취하고 주왕계곡으로 내려갔다. (일부는 칼등고개를 경유하
여 주왕산 정상으로 이동)


▲  가메봉에서 바라본 천하 (주왕산 남쪽)
가메봉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  가메봉에서 주왕계곡, 사창골로 내려가는 산길


 

♠  주왕산 사창골, 용연폭포

▲  사창골 상류

가메봉에서 울퉁불퉁한 산길을 20~30분 정도 내려가면 사창골이 슬쩍 모습을 비춘다. 가메봉
북쪽에서 발원하여 주왕계곡으로 흘러가는 사창골은 숲이 매우 삼삼하고 바위와 소(沼)가 많
아 절골 못지 않은 고운 매력을 드러내고 있으며, 후리메기3거리를 지나 40~50분 정도 내려가
면 주왕계곡이 모습을 비춘다.


▲  동그랗게 자리를 닦은 조그만 소(못)
해가 지고 밤이 되면 하늘에서 선녀 누님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지는 않을까? 그러고 보니 못의 사이즈도 선녀 누님에 걸맞게
아담하다.

▲  너른 반석과 조그만 폭포
계곡 주위로는 낙엽이란 쓸쓸한 꼬리표를 단 단풍들이 귀를 접고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있다.

▲  풍덩 스킨쉽을 하고 싶은 동그란 소
사창골 냇물은 여기서 숨 좀 고르다가 다시 종점 없는 길을 재촉한다.

▲  사창골 하류 산길
사창골 산길은 하류에 이르러 잠시 계곡과 멀어지고 벼랑길로 돌변한다.
벼랑 밑에는 사창골이 빚은 절구폭포가 있으며, 벼랑길을 지나면
주왕계곡에 이르게 된다.

▲  주왕계곡 용연폭포(龍淵瀑布, 제3폭포)

주왕계곡(주왕천계곡, 주방천계곡)은 주왕산(720m)의 중심 계곡으로 '내주왕계곡'이라 불리기
도 한다. 주왕산 동쪽에서 발원한 큰골에서 시작하여 주왕산 심장부를 구비구비 돌다가 대전
사를 지나서 주방천(周房川)이란 이름으로 속세로 흘러간다.
용연폭포와 용추폭포, 시루봉, 학소대, 급수대 등 대자연이 빚은 온갖 작품이 가득해 눈을 부
시게 하며, 특히 용추폭포 주변은 주왕산의 모든 것을 긁어모은 것처럼 대장관을 이룬다.
깊은 산골에 숲이 울창하고, 계곡 좌우는 높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협곡이 적지 않은데, 그런
계곡을 둘러싸고 600m가 넘는 많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그래서 주왕산을 석병
산(石屛山)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험한 지형을 지닌 탓에 예로부터 산적들이 많았고, 난리가
날 때마다 이곳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특히 바위 봉우리가 많아 설악산,
월출산(月出山)과 더불어 이 땅의 3대 암산(岩山)으로 격하게 꼽히기도 하며, 경북의 금강(金
剛)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신라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의 족자(簇子)이자 원성왕(元聖王)에게 밀린 김주원(金周
元)이 머물렀다고 해서 주방산(周房山)이라 불렸는데, 이후 그는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
졌다. 하여 그 연유로 주왕산으로 이름이 갈린 것으로 보이며, 고려 후기에 나옹화상이 그리
바꾸자고 해서 이름이 갈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다른 유래로는 당나라 사람인 주도(周鍍)가 8세기 후반,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을 칭하며
진나라 재건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당나라군에게 보기 좋게 털렸다. 그래서 요동을 거쳐
신라로 도망, 주왕산이 험하다는 풍문을 듣고 그곳에 들어가 주변을 약탈하며 후일을 도모하
다가 당나라의 토벌 요청을 받은 신라에게 털리고 자신은 잡혀 처단되었다. 그래서 주왕산이
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 전설은 마땅한 기록도 없고 역사적인 근거가 없으며, 조선 때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
대주의(事大主義)에 젖은 지역 유생들이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명나라가 있던 중원대륙과
청송의 명산인 주왕산을 연결시켜 지역의 자부심을 어떻게든 높이려고 머리를 싸맸던 유생들
의 그릇된 생각이 지어낸 산물인 것이다.

주왕계곡은 '청송 주왕산 주왕계곡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11호로 지정되었다.


▲  용연폭포의 위엄 (윗폭포)

주왕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연폭포는 제3폭포, 쌍폭, 용폭이라 불리기도 한다. 예전에는 간단
하게 제3폭포라 불렸으며, 2단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폭포가 위엄을 자랑하며 하얀 실타래 같
은 물줄기를 밑으로 뽑아낸다. 폭포 밑에는 푸른 못이 펼쳐져 있는데, 영덕 강구항 앞바다와
이어져 용이 머물렀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다. 그래서 용연폭포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
다.
윗폭포 옆에는 얕게 파인 3개의 동굴이 있어 폭포의 경관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주며, 물소리
가 우렁차 귀신도 도망을 칠 정도이다. 못 남쪽에는 탐방로와 조망대가 있는데, 사람들이 폭
포를 구경하느라 금방금방 빠지지를 않아 정체가 심하다. 그만큼 폭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제
대로 앗아간 것이다. 우리도 폭포를 구경하느라 한동안 발을 움직이지 못했지. 대자연의 기묘
한 작품 앞에 우리가 할 일이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촬영 뿐이다.

▲  용연폭포 옆에 패인 3개의 동굴

▲  푸르게 익은 용연폭포 못 (윗폭포)


▲  용연폭포 아랫폭포
아랫폭포도 윗폭포 못지 않은 장쾌함을 보여준다. 이곳은 못 바로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주왕계곡의 백미, 절구폭포~용추폭포

▲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사창골 협곡

용연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가면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협곡이 마중을 한다
. 앞서 사창골 산길의 아랫쪽으로 사창골의 하류이기도 한데, 그 협곡을 5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절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절구폭포 (제2폭포)

바위 너머 윗쪽에서 2단으로 쏟아지는 절구폭포는 제2폭포라 불리기도 한다. 응회암(凝灰巖)
에 주로 생성되는 절리(암석이 갈라진 틈)에 의해 생긴 폭포로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윗폭
포 밑에는 선녀탕(仙女湯)이 수줍은 듯 숨겨져 있으며, 아랫 폭포 밑에는 수심이 얕은 못이
형성되어 있어 물놀이 장소로 아주 그만이다.
이곳은 사창골 하류로 폭포 주변이 모두 벼랑으로 막혀 길이 없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나가야
된다. 전쟁 때 만약 이곳으로 몰린다면 정말 몰살을 각오해야 될 정도로 궁벽한 곳이나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물이 시리도록 맑아서 내 즐겨찾기 명소로 살짝 숨기고 싶다. 현재 선녀탕과
윗폭포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얌전히 아랫폭포 앞에서만 머물기 바란다.


▲  옆에서 바라본 절구폭포

▲  병풍바위

절구폭포를 둘러보고 주왕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주변 풍경이 서서히 흥분을 하면서 나도 모르
게 장대한 벼랑에 감싸이게 된다. 그 벼랑은 병풍바위로 계곡 양쪽으로 거의 직각으로 솟은
낭떠러지가 병풍처럼 둘러져 그야말로 하늘만 보이는데, 벼랑 밑에는 옥처럼 맑은 주왕계곡이
청정함을 자랑하며 힘차게 흐르고 있다.
발을 전혀 들일 수도 없을 이런 험지에 인간들은 산천유람 욕구를 위해 마구 탐방로를 내었는
데, 벼랑 밑부분에는 혹시나 모를 대자연의 테러(낙석)에 대비해 지붕까지 둘렀다. 주왕산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웅장한 멋을 지닌 병풍바위 밑에는 제1폭포라
불리는 용추폭포가 달려있는데, 이곳 풍경은 가히 압권이라 앞서 제2폭포, 제3폭포를 능가한
다.
대자연의 위대한 작품에 혼이 탈탈 털린 속인들은 사진을 찍고 풍경을 구경하느라 좁은 탐방
로는 늘 정체를 빚어 행렬이 다소 버벅거리는데, 풍경이 풍경인지라 정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게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들의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아무리 여름 제국이 무더위 갑질로 천하를 뜨겁게 달구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을 정도로
무더위를 잊게 한다. 벼랑에 감싸여 햇살도 마음 놓고 착륙을 못하고, 계곡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주니 땀이 붙어있을 재간이 없다.

용추폭포 윗쪽에는 선녀탕이 있고, 그 위에 구룡소(九龍沼)가 있으며, 탐방로 밑은 계곡과 벼
랑으로 되어있어 계곡과 폭포로의 접근은 통제되어 있다.


▲  대륙의 협곡 같은 병풍바위의 위엄
협곡 사이로 탐방로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다. 이렇게 보니 주왕산의 옛 이름인
석병산(石屛山)이란 이름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  용추폭포 구룡소
수심도 깊고 지형도 각박한 이곳에 9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  구룡소와 용추폭포 사이에 자리한 선녀탕
선녀 누님들이 들어가기에는 수심이 좀 깊다. 하늘나라 선녀들은
키가 나무만 했던 것일까?

▲  용추폭포(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와 달리 폭포의 정면 모습을 담을 수가 없다. 그만큼
이곳은 칼처럼 솟은 벼랑 밑에 무섭게 펼쳐진 첩첩한 협곡이다.
그나마 탐방로가 닦여져 있으니 이 정도로라도 보는 것이다.

▲  가까이에 있으나 그림의 떡처럼 보이는 용추폭포 밑 동그란 못

▲  벼랑 사이로 각박하게 이어진 병풍바위 협곡 (서쪽 부분)


 

♠  주왕산 마무리

▲  주름선이 인상적인 시루봉 ▲

병풍바위 협곡을 지나면 계곡을 건너는 학소교가 나온다. 다리 옆에는 홀로 솟은 날씬한 돌기
둥이 손짓을 하는데, 그 돌기둥이 시루봉이다.
시루봉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그 모습이 떡을 찌는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바위 피부에는 주름선이 많은데 옆에서 보면
어두운 표정을 지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여 신비감을 더한다. 완전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무장된 천험의 돌기둥이라 접근은 정말 어림도 없어 보이는데, 저 봉우리 위에는 주왕산 산신
이나 신선만의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의 숨겨진 보물이라도? 그러니까 대자연
이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게끔 저렇게 깎아 놓았을 것이다.

이런 절경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붙여놓은 전설이 하나씩은 꼭 있기 마련, 그 내용
은 대략 이렇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 한 도사가 바위 위에 올라가 열심히 도를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신선 2명이 하늘에서 내려와 도사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바위 밑에 불을 지폈는데,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며 봉우리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이게 끝임.


▲  시루봉 밑 주왕계곡


▲  학소대(鶴巢臺)

시루봉 맞은편에는 학소대라 불리는 커다란 낭
떠러지가 장대한 모습을 자랑하며 시루봉과 자
웅을 겨룬다.

계곡 바로 옆에 직각으로 높이 솟아있어 그 장
엄함에 주눅을 들게 만드는데, 시루봉 마냥 낭
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철옹성 마냥 범접하기
가 어려워 보인다.
절벽 꼭대기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 세상
을 굽어보고 있으며, 학소대의 덩치가 대단하
여 주변 계곡에 늘 그늘을 드리운다.
옛날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이 무리를 지
어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 불리며, 그 학소대
밑에 도승(道僧)이 절을 짓고 살았는데, 꿈에
신선이 나타나 빨리 피하라고 재촉하므로 밖으
로 나오니 위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져 절을 덮
쳤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온
다.


▲  인간이 만든 비루한 작품, 학소교 (학소대 밑)
대자연의 걸쭉한 작품을 쭉 보다가 인간이 만든 콘크리트 다리를 보니 정말로
못봐주겠다. 아무리 아치형으로 만들어도 거기서 거기임..

▲  급수대(汲水臺)

학소대를 지나면 육중한 바위 봉우리인 급수대가 모습을 비춘다. 그 역시 낭떠러지로 이루어
진 30여m의 주상절리(柱狀節理) 바위로 옛날 주왕의 군사들이 바위 위에 무자위를 설치해 계
곡 물을 위로 소환했다는 전설이 있어 급수대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주왕의 전설도
거짓이며 급수대의 전설 또한 거짓이다.


▲  주왕계곡 북쪽에 솟아난 벼랑 (이름은 모르겠음)

▲  자하성(紫霞城)터

급수대를 지나 계곡 하류(대전사)로 계속 길을 재촉하면 길 오른쪽에 자하성터가 초췌한 몰골
로 마중을 한다.
자하성은 주왕굴을 중심으로 하여 지형을 이용해 쌓은 산성(山城)으로 주방산성, 주왕산성이
라 불리기도 한다. 주왕이 신라군을 막고자 쌓았다고 하나 현실은 삼국시대 또는 고려 때 축
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곳을 거쳐 갔다는 신라 왕족 김주원이 자신에게 돌아올 왕위를
가로챈 김경신(원성왕)을 크게 원망하며, 여기서 잠시 딴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 싶다. 허나
그 마음도 부질 없음을 깨달았는지 강릉(명주)으로 내려가 거기에 둥지를 틀었다.

성 둘레는 12km에 이르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끊임없는 태클과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
다 무너지고 지금은 일부만 겨우 남아 있다. 그 모습도 돌무더기처럼 남아있어 자하성터 안내
문이 없었다면 그냥 자연산 돌무더기로 지나쳐도 이상할 것이 없다.


▲  주왕계곡의 흥미로운 존재, 아들바위

자하성터를 지나면 계곡 냇가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아들바위를 만나게 된다. 덩치가 큰 네
모난 바위가 다소 기운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겉모습은 딱히 유별난 것은 없으며, 그냥 계
곡에 놓인 커다란 바위 정도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신비한 존재로 각인되어 옛날부터 아들바위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의 오랜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아들 선호 사상이 빚은 산물이라고나 할까? 냇가 한복판
에 저런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돌을 던졌을 것이고, 바위 위에 얹혀지면
마치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것이 점차 확장되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이
야기까지 생겨난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바위와 달리 여기서는 그냥 던지면 안된다. 바위를 등지고 다리 가랑이 사이로
돌을 던져 바위에 골인을 해야 아들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냥 왼팔로 던져 골인을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새 수법이 바뀐 모양이다. 어쨌든 오랜 세월 사람들이 던질 돌이 바위
위에 수북히 쌓여 그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잠시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 (주왕계곡 하류와 주왕산 산줄기)

▲  주왕계곡 하류 (대전사 동쪽)

▲  주왕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대전사

주왕산에 들어서면서 시간이 되면 주왕굴과 대전사(大典寺)까지 말끔히 둘러보려고 했다. 주
왕산 상의주차장까지 13시까지 모이기로 해서 시간이 좀 넉넉할 줄 알았는데 벌써 12시 반이
넘어버렸다. 상의주차장까지는 앞으로도 30분을 더 가야 된다. 그러니 이들을 제대로 볼 시간
이 없는 것이다.
하여 산을 좀 타야 되는 주왕굴은 다음으로 미루고 상의주차장 직전 길목에 있는 대전사라도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이 절은 신라 후기에 창건된 오래된 절로 주왕산의 터줏대감격 존재인
데, 문화유산이 여럿 있어서 사진에 모두 담고 싶었다. 허나 시간 부족이란 현실 앞에 경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쳐야 했다.
그렇다고 무리를 해서 보는 것도 단체 활동에 대한 예의는 아니며, 너무 시간에 쫓기듯이 보
느니 쿨하게 다음으로 넘기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하지만 얼마나 아쉽던지 아무리 다음에
오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 다음이란 것이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이다. 서울에서 제
법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전사를 지나니 바로 주왕산의 대표 관문인 상의 매표소이다. 이곳은 대전사 때문에
문화재 관람료란 명목으로 입장료를 뜯고 있는데, 매표소 사람들의 눈빛에는 어느 누구도 그
냥 들여보내서는 안된다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다. 그 돈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주왕산 상의(대전사)매표소만 입장료를 징수함, 나머지(절골, 월외리 등)는 입장료 없음>

상의매표소를 지나니 다른 유명 산과 마찬가지로 먹거리촌이 징하게 펼쳐진다. 도토리묵과 파
전, 송이, 동동주, 산채비빔밥, 백숙 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서둘러 길을 재촉하려는 찰라 낯
익은 얼굴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적지 않은 일행들이 거기서 동동주 1잔에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늦을까봐 대전사 등 많은 것을 두고 왔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산행
뒤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럴줄 알았다면 대전사라도 제대로 보고 오는 건데
갑자기 기분이 허탈해진다.
상황이 뭐 그리 되었으니 다시 대전사로 가기는 틀렸고, 일행들과 어울려 주왕산의 명물인 송
이와 도토리묵, 동동주 1잔을 걸치며 같이 상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  상의주차장에서 바라본 주왕산과 주왕계곡

상의주차장에 도착하니 13시 20분, 늦게 오는 사람들이 속출하여 13시 40분이 되어서야 출발
을 했다. 주차장에는 산꾼과 나들이꾼을 태운 관광버스와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었고 그에 아
랑곳하지 않고 차량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어온다. 그러나보니 들어오는 길은 정체가 대단하여
많은 차량들이 마을 밑에 차를 대고 걸어오기도 했다.

주왕산을 벗어난 우리는 안동(安東)으로 넘어갔다. 안동댐 주변에 자리한 식당에 들어가 안동
의 토속 음식인 헛제사밥 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헛제사밥 정식은 일반적인 제삿상
음식과 비슷하다.
헛제사밥의 유래는 조선 때 유생들이 배가 고프거나 비싼 음식을 먹고 싶어서 성현(聖賢)들에
게 제사를 지낸다고 거짓말을 치고 노비와 주변 백성들을 닥달하여 만들게 한 음식상으로 '헛
'이란 접두어를 붙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음식상이 이제는 안동의 대표 밥상이 되
어 전국에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이곳 헛제사밥 정식은 나물이 버무려진 놋쇠 그릇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인데, 제사 때 쓰는 국
과 간고등어, 전, 떡, 잡채 등이 정식을 이룬다. 맛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 순식간에 밥과 반
찬을 비우고, 술도 여러 잔 마시니 졸음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식당 남쪽에 자리한 낙동강(落東江)과 월영교에서 잠시 소화 좀 시키다가
16시 30분에 출발했다. 아무리 목적지가 주왕산이라고 해도 마지막 종점은 결국 집이다. 서울
까지는 4시간 정도 걸렸으며, 피곤한 탓에 자다깨다를 무한으로 반복했다.

정말 번개처럼 날라가 재미나게 보냈던 무박 2일,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이들이 보고 싶
은 마음에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긴다. 다소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아쉬움은
다음이란 인연을 잡아 해결하면 될 것이다.

* 절골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주산지리
* 주왕계곡(용연폭포, 용추폭포 등)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의리
* 주왕산국립공원(☎ 054-870-5300)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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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이런 두멧골이?? 북악산 산주름 속에 깃든 백사실계곡, 부암동 능금마을, 평창동 소나무 (백사실약수터)

 


'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을 거닐다 '
(부암동 능금마을, 백사실계곡, 북악산 북쪽 자락)


▲  부암동 능금마을(뒷골마을)

▲  은덕사에서 바라본 부암동

▲  평창동 소나무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
을 찾았다.
북악산 북쪽 자락(부암동, 평창동 지역)에는 나의 오랜 즐겨찾기 명소인 백석동천(白石洞
天, 백사실계곡)을 비롯해 능금마을(뒷골마을), 평창동(平倉洞) 소나무 등의 명소가 깃들
여져 있는데 여름 제국의 핍박도 피할 겸, 간만에 그들을 복습할 생각으로 북악산의 품을
찾은 것이다.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弘濟川)을 건너 백석동천의 북쪽 관문인 현통사(玄通寺)와
백사폭포로 접근했다. 그곳을 지나면 백사골(백사실)의 속살로 들어서게 되는데 백사폭포
와 계곡 곳곳에 자리를 피고 피서 삼매에 빠진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숲속에 진하게 묻힌 백석동천 중심부에 이르면 이곳의 상징인 별서(別墅)터가 있고, 그곳
을 지나 은행나무와 소나무숲을 지나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여기
서 동쪽 산길로 들어서면 잘생긴 반석과 바위들이 늘어선 백사골 상류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은 백사골, 백사실, 백사실계곡 등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데, 정식 이름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표현한 이름이다.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엄
연한 일부로 백사폭포에서 백석동천 바위글씨와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직전까지를 주로
일컫는다.


 

♠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로 가는 산길)

▲  백석동천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너른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길쭉한 통나무 2개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
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서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
는 없을 것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외나무다리

사람도 많고, 차량도 많고, 빌딩도 많고, 돌아다니는 돈도 많고, 그저 복잡하고 각박하게 보
이는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기할 따름이다. 백사골은 그 존
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
계 같다.
백사폭포에서 시작된 백석동천은 이 외나무다리에서 사실상 끝이 나며 백사골은 능금마을 안
쪽까지 이어진다.


▲  백사골 상류의 평화로운 풍경
푸른 옷을 걸친 큰 나무가 하늘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겸손함 때문인지
곧게 자라나지 않고 허리를 푹 숙이고 있다.

▲  백사골 냇물이 잠시 쉬어가는 조그만 못

백사골에는 푸른 이끼 옷을 입은 바위들이 참 많다. 이끼가 마음 놓고 자라고 있다는 것은 여
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지, 백사골의 이런 청정함과 순수함이 앞으로도 영원했으면 좋겠다.


▲  온갖 채소와 과일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백사골 밭두렁

▲  남쪽에서 본 백사골 밭두렁

백사골 밭두렁은 여러 채소와 과일이 자라나고 있다. 비닐하우스와 밭을 지키는 원두막 같은
것도 있어 마치 산간지방의 깊은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라 백석동천에서 여러 번 놀
란 가슴을 또 놀라게 만든다.


▲  백사골 산길에서 만난 연분홍 코스모스의 위엄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마구 들쑤시는 코스모스들~ 코스모스가 가을
꽃의 상징이다 보니 6~8월에 왠 코스모스가 피나 싶겠지만, 성질 급한 코스모스는 이미 6월부
터 꽃망울을 피운다. 그러니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  완전 시골 둑방길을 거니는 기분 ~ 능금마을 백사골 둑방길

계곡 너머로 2012년에 지어진 커다란 농원용 비닐하우스가 있다. 도심에 있는 잇점을 살려서
요즘 잘나가는 허브 식물이나 과일 농장, 채소 농장, 농사 체험 현장 등으로 꾸리면 괜찮을
듯 싶다. 아무리 도심 속이라고 해도 이곳이 농촌인 것은 변함이 없다.


▲  능금마을에서 백석동천으로 내려가는 둑방길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두메산골마을
부암동 능금마을(뒷골마을)


▲  능금마을

부암동(付岩洞) 능금마을(뒷골마을)은 백사골 상류이자 북악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두멧골
이다. 행정구역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으로 주소는 분명 서울 종로구가 맞는데 분위기는
번잡한 도심을 제대로 비웃듯 첩첩한 산주름 속에 박힌 외딴 산골마을이라 그야말로 서울 도
심 속의 산골마을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능금나무가 많아 능금나무골, 능금마을이라 불렸는데, 뒷골마을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뒷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북악산 앞쪽인 청
와대 일대를 앞골이라 불렀다. 예전에는 뒷골마을로 많이 불려 나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부르
고 있으나 요즘에는 능금마을로 크게 부르고 있으며, 마을에는 약 10여 가구에 50~60명 정도
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의 지형은 백사골이 흐르는 북쪽은 내리막이고, 서쪽과 남쪽, 동쪽은 모두 산으로 막혀있
다. 창의문(자하문)에서 넘어오는 유일한 포장길인 남쪽 골목길(백석동2길)은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지형이 이렇다보니 시내보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며, 아랫
세상보다는 조금은 춥다.

마을 중앙부에는 창의문으로 나가는 골목길(백석동2길)의 종점이 있다. 그 종점이 마을 사람
들의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으로 여기서 더 이상 차량은 들어갈 수 없다. 게다가
궁벽한 곳이다보니 쓰레기도 1주에 이틀 정도만 수거하러 온다.
주차장 북쪽에는 슬레이트 지붕 여러 채와 2층짜리 빌라 1동, 비닐하우스가 여럿 있으며, 동
쪽으로 백사골을 따라 여러 가옥과 밭,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북악산이 베푼 백사골은 마을
을 동쪽에서 북쪽으로 가로지르며 백석동천과 홍제천으로 흘러간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려면 백사골을 거치거나 창의문(자하문)에서 북악산 허리에 둘러진 부
암동 산복길(백석동길)을 이용해야 된다. 세검정초교에서 접근할 경우는 마을까지 30여 분 걸
리며, 창의문에서 갈 때는 산복길(백석동길)을 따라 20여 분 걸어야 되는데 중간에 고개를 하
나 넘어야 된다. 차량으로 갈 경우에는 창의문에서 부암동 산복길을 타거나 북악산길로 접근
하면 되며, 그 흔한 대중교통의 혜택도 미치지 않는 시내 속 벽지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농사를 짓거나 시내로 출퇴근을 한다. 서울에서 공기가 1등급으로 맑고
청정한 계곡물이 흐르니 조촐하게 밭농사나 과수원을 하기에 적당하다. 백사골의 깨끗한 물을
먹고 자란 농작물(오이나 배추, 상추 등)은 밭과 비닐하우스에서 주민들의 갖은 정성을 거쳐
시내로 팔려 나간다.

이곳이 인구 1,000만을 지닌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 도심에 있음에도 개발의 칼질을 굴복시
키며 두메산골로 남을 수 있던 것은 푸른 기와집과 국무총리공관, 수방사 군부대를 비롯한 국
가의 예민한 장소를 품은 북악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북악산 주변은 개발제한구역
및 군사보호구역으로 상당수 묶여있다. 게다가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조선시대부터 서울을
지키는 전략적인 곳으로 군부대가 주변에 있으며, 북악산(백악산) 한양도성 능선을 따라 철책
과 초소가 줄지어 있다. 상황이 이러니 천박한 개발의 칼질도 무릎을 끓은 것이다.
북악산 북쪽 자락에 안긴 부암동과 성북동(城北洞)에 키다리 건물이 없는 것도, 녹지 비율이
두드러지게 높은 것도, 전원(田園) 분위기를 물씬 간직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북
악산과 인왕산의 성격이 180도 확 달라지거나 예민한 국가 시설들을 다른 데로 이전하지 않는
이상은 능금마을은 서울 도심 속의 두멧골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쭉 그리 되기를 염원해 본
다.
물론 마을 사람들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집 보수나 신축 등은 어느 정도 보장해줘야 될 것
이며, 북악산 나들이나 답사/출사를 이유로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은 삼가해야 될 것이
다. 어차피 도심 속의 두멧골이란 상징성 외에는 명소라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냥 지방 시골
에 널린 시골마을과 비슷하며 백석동천과 부암동 답사의 후식용으로 삼으면 적당하다.


▲  능금마을 북쪽 구역 (빌라 뒷쪽)

능금마을은 여러 번 와봤지만 딱히 명승지까지는 아니라서 제대로 둘러본 적은 없다. 하여 이
번에 제대로 마을의 속살을 살펴보기로 했다. 숨겨진 속살을 발견하고 보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다.

주차장에서 빌라가 보이는 북쪽 골목길을 오르면 조금은 낡아보이는 산동네 기와집과 번듯하
게 지은 2층 빌라가 나란히 나타나 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대변하는 듯 하다. 작지만 빌라까지
들어섰고 근래에 새로 몸단장을 한 주택이 여럿 있을 정도면 개발 제한도 어느 정도 풀린 모
양이다.
빌라의 옆구리를 지나면 그나마 포장된 길은 끝나고 흙길로 변신하는데, 마치 백두대간 깊숙
한 곳에 숨겨진 화전민(火田民) 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며 밭두렁과 수풀이 우거진 그 길의 끝
에는 전원주택처럼 생긴 아담한 집이 있다.

다시 주차장으로 나와서 백사골을 따라 이어진 동쪽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 길도 좁다보니 자
전거나 오토바이 등만 겨우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동쪽 골목길은 세월을 먹은 집들이 여럿
있으며, 밭과 과수원이 제법 펼쳐져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는 전원주택 스타일의 정원 넓은 집이 있다.

동쪽 골목길 중간에는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다. 따로 이정표는 없지만 조금은 가파
르게 동쪽으로 이어진 길이 바로 그 길이다.

* 능금마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산50~69


▲  경작물이 무성하게 익어가는 동쪽 골목길

▲  백사골과 나란히 한 능금마을 동쪽 골목길
문명의 혜택이 전혀 들어오지 못할 것 같은 이 산골에도 전기와 전화는
모두 들어온다.

▲  능금마을 동쪽 골목길 밭두렁

▲  경작물이 익어가는 동쪽 골목길


▲  부암동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각박한 고갯길
길의 경사가 각박해 내려가기는 쉬워도 오르는 건 조금 힘들다. (그래도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음)


 

♠  백사실약수터와 여러 돌탑들

▲  외나무다리 주변에 펼쳐진 하얀 피부의 반석
저 반석을 내려가면 계곡 오른쪽으로 백사실약수터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온다.


능금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백석동천으로 내려가 외나무다리를 지나면 윗 사진의 넓은 반석이
나온다. 반석(磐石)을 지나면 바로 계곡 건너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곳을 건너면 백사
실약수터를 알리는 조그만 이정표가 조용히 손짓한다.
백석동천(백사실)을 15년 넘게 들락거렸지만 백사실약수터는 한참의 세월이 흐른 이후에야 인
연을 지은 곳이다. 별서터와 바위글씨들, 능금마을이 전부인줄 알고 등잔 밑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으로 무슨 일이든 방심은 정말 금물이다.


▲  백사골 돌탑

백사실약수터로 인도하는 산길을 30초 정도 가면 산등성이에 수북하게 쌓인 돌탑이 마중을 한
다. 이곳을 지나던 중생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은 돌탑으로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악신
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백석동천 별서터가 지배층의 산물이라면 이 탑은 백성들의 한 줄기 희망과 애환이 만들어낸
산물로 별서터는 터만 남은 채, 성장이 멈추었지만 이 탑은 지금도 지나가는 이들에 의해 조
금씩 성장하고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돌탑 가족들 (얼핏 보면 3기처럼 보이나 4기임)

▲  옆에서 본 돌탑 가족

백석동천에서 백사실약수터로 오르는 산길에는 돌탑이 유난히도 많다. 앞 돌탑에서 3분 정도
가면 돌탑 4기를 만나게 되는데, (조금 후미진 곳에 있음) 이중 1기는 나머지 3기를 다 합쳐
도 한참이나 모자를 정도로 유별나게 크다.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으나 앞 돌탑과
달리 규칙적인 모습이고 그리 묵은 티가 보이지 않아 근래에 백사실 수식용으로 닦여진 것으
로 보인다.

돌탑을 만들려면 서로 비슷한 덩치로 만들 것이지 하나만 지나치게 크고 나머지는 완전 쥐꼬
리만한 크기라 마치 어미와 꼬마 3형제를 보는 듯 하다. 꼬마 탑도 어엿한 돌탑을 이루는 어
미탑처럼 장차 큰 탑으로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  백사실약수터로 오르는 적막한 산길

▲  소나무 산길 (백사실약수터 방향)
길을 가다가 뜬금없이 산신이나 신선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선녀 누님이
갑자기 나타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첩첩한 산주름의 산길이다.

▲  백사실약수터와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산길

백사실약수터는 백사골의 거의 유일한 약수터이자 백사골의 오랜 은자(隱者)로 능금마을 뒷쪽
(북쪽)에 숨겨져 있다. 북악산이 속세에 베푼 소중한 샘터로 백사골의 청정한 기운을 머금은
탓인지 수질도 청정하고 맛도 좀 달콤한 기분이다.
벽돌을 다진 약수터 주변은 산뜻하게 정비되어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의자와 간단한 운동시설
이 닦여져 있다. 약수터 뒷쪽에는 나무 기둥 난간이 둘러진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여러 식
물이 담겨져 있어 마치 신선의 묘약(妙藥)이나 신선초(神仙草)가 자라는 듯한 기분이다. 그리
고 약수터 동남쪽으로 산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길이 마중을 한다.


▲  백사실약수터 인근 바위에 심어진 조촐한 돌탑
이 돌탑도 앞에 돌탑 가족과 마찬가지로 근래에 조성된 것 같다. 그 모습이
산이나 계곡에 널린 일반적인 산악신앙의 돌탑이 아닌 조그만
봉수대(烽燧臺)처럼 보인다.


 

♠  북악산 백사실 동쪽 능선

▲  백사실 동쪽 능선길

백사실 동쪽 능선은 북악산길에서 시작되어 백사실약수터, 은덕사를 지나 북쪽으로 KT기지국,
평창동조망점까지 내려가듯 이어진다. 백사실의 동쪽 지붕으로 중간중간에 현통사와 백사골(
백석동천), 평창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을 늘어뜨렸으며, 소나무를 비롯한 갖은 나무들이 삼삼
하게 우거져 있다.
백사골에 왔다면 별서터와 계곡만 살피지 말고 백사실약수터와 1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백사
골 동쪽 능선도 한번 거닐기 바란다.


▲  소나무가 우거진 동쪽 능선에 걸터앉은 은덕사(恩德寺)

백사실 동쪽 능선을 걷다 보면 왼쪽에 건물 하나가 손짓한다. 소나무숲을 병풍으로 삼아 서쪽
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은덕사란 조그만 절로 건물 1동이 전부이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건물
에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까지 싹 담겨져 있는데, 절집에 흔한 기와집이 아
닌 별장이나 전원주택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법당 앞에는 잔디가 입혀진 뜨락이 있으며, 이곳에서 가꾸는 여러 농작물이 한참 숙성의 과정
을 밟고 있다. 또한 절 앞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는 꼭 가보도록 하자. 여기서 보는 조망
맛이 그런데로 일품이다.


▲  은덕사 앞 바위에서 굽어본 부암동

은덕사 앞 바위에 올라서면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 북부와 홍지동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다
만 자하문터널과 하림각이 있는 부암동 남부는 백사실 서쪽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저 너머에 멋드러진 바위를 여럿 품고 있는 산은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우리나라
호랑이의 성지(聖地)였던 인왕산으로 나와 비슷한 위치에서 바라보인다. 그리고 바로 밑에 보
이는 기와집들은 백사폭포 위에 자리한 현통사로 백사폭포의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두 귀를 멍하게 한다. 은덕사 바위에서 현통사로 바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는데, 경사가
다소 각박하므로 조심해야 된다.


▲  솔내음이 진동하는 백사실 동쪽 능선길

▲  평창동 조망점 바위

백사실 동쪽 능선의 북쪽 끝에는 KT기지국이 있다. 그곳에 이르기 전에 오른쪽으로 산길이 하
나 나있는데, 바위가 그 길의 끝을 장식하고 있다. (더 이상 내려가는 길도 없음)
이 바위는 딱히 이름은 없으나 백사골에 있는 안내도에는 단순히 조망점이라고 나온다. 북쪽
을 바라보고 선 이 바위에 올라서면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남쪽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오는
데 본글에서는 평창동이 보이는 곳이란 뜻에서 평창동 조망점이라 칭하도록 하겠다.


▲  평창동 조망점에서 바라본 천하 - 왜 이리 옥의 때가 많은지..?

평창동 조망점에서 훤히 바라보이는 평창동은 성북동(城北洞)과 한남동(漢南洞), 장충동(奬忠
洞)과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부자 동네이다. 강남이 부자라고는 하지만 이들 동네 앞에서는
감히 이름도 꺼내지 못하는 그들의 후배에 불과하다.
평창동은 북한산과 북악산 사이에 자리한 산악 지대로 나름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하
다. 게다가 경관도 수려하여 해방 이후 돈 꽤나 만지던 이들이 조금씩 들어와 살더니만 이제
는 완전 졸부들의 씁쓸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물론 서민들도 적지 않게 살고 있음)

성북동이 우리나라의 0.1% 부자들이 산다고 하지만 평창동도 그에 못지 않다. 완전 산동네로
차량이 없으면 왕래도 힘든 곳이지만 명당의 기운과 수려한 경승지의 덕을 보고자 졸부들이
가득 밀려와 북한산을 건방지게 압박했다. 그래서 산자락 곳곳에 무식하게 큰 저택과 빌라를
짓고 자연을 훼손하면서 북한산 남쪽 경관은 적지않게 손상되고 말았다. 다행히 평창동 윗쪽
이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으로 꽁꽁 묶여있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북한산성 밑까지 졸부
들이 싹 밀어버릴 뻔했다.

조망점에서 보이는 천하는 정말 1폭의 그림이 분명한데, 옥의 티가 너무 많다. 내게 저 장면
을 손질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졸부들의 집을 지우개로 다 지우고 그들로 파괴된 숲과 계곡
을 그려 자연의 모습으로 채색하고 싶다.


 

♠  평창동에 숨겨진 오래된 소나무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평창동 방향)

평창동 조망점에서 다시 은덕사 쪽으로 나오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 있다. 여기서 직진(남
쪽)하면 백사실 동쪽 능선을 쭉 타게 되고, 오른쪽(서쪽)은 현통사, 왼쪽(동쪽)은 평창동으로
이어진다. 나는 평창동 소나무를 보고자 평창동 방향을 택했다.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2분 정도 내려가면 평탄한 곳이 나타나면서 1차선 크기의 비포장 오솔길
이 펼쳐진다. 이 길은 묘각사 입구까지 이어지는데, 햇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삼삼한 숲속
에 포장도 씌우지 않은 흙길이라 그냥 지나치기 아쉬울 정도로 매우 정겹기만 하다. 그 길 오
른쪽에는 3~4m 높이로 닦인 석축이 길게 이어져 있어 옛 산성(山城)이나 건물터 유적이 아닐
까 싶은 기대감을 안긴다. 허나 그 석축은 산성도 아니고 옛 건물터 등의 문화유적도 아니다.
자세한 사연까지는 모르겠지만 군부대나 체육 시설을 만들면서 넓게 땅을 다지고 석축을 쌓은
것으로 지금은 배드민턴장과 쉼터가 있어 동네 주민들의 조촐한 쉼터 역할을 한다. 바로 저곳
에 오래된 소나무가 깃들여져 있다.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백사실 능선, 은덕사 방향)

평창동 소나무를 보고자 석축 서쪽 끝에서 접근을 시도했으나 철책의 위엄 앞에 돌아서고 말
았다. 석축 밑 오솔길을 거닐면 중간에 그 소나무가 보이나 주변 나무들이 시선을 방해해 제
대로 사진에 담을 수가 없다.
석축 윗부분이 사유지라 출입이 통제된 것이라 여겨 살짝 들어갈 길을 찾던 중, 석축 동쪽 끝
에서 그곳으로 인도하는 길이 슬쩍 손을 내민다. 서쪽 끝과 달리 방해물도 없어 그 길을 오르
니 숲에 둘러싸인 제법 너른 터가 나온다. 


▲  석축 윗쪽에 넓게 닦여진 배드민턴장

▲  평창동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7호

북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평창동 소나무는 280년 정도 묵은 늙은 나무이다. 그의 신상이 적
힌 안내문에는 보호수 지정일 기준으로 230년이라고 나와있는데, 그가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1968년 7월 3일이다. 그 이후 50여 년이 무심하게 흘렀으니 약 280~290년 정도로 보면 된다.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세월을 든든한 양분으로 삼아 높이 13m, 둘레 2.24m의 어엿하고 기품 넘
치는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생김새가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정2품송(正二品松)과 좀 비슷
하여 그리 낯설지는 않은 모습이다.

서울에서 100년 이상 묵은 나무 중, 소나무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보호수나 문화재로 지정
된 것은 이곳과 여기서 가까운 석파정(石坡亭) 소나무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평창동 소나무가
나이가 제일 많아 서울에서 가장 늙은 소나무라 봐도 무리는 없다.
이 나무를 누가 심었고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전해오는 것은 없지만 백사실로 가는 길목에 자
리해 있어 그곳을 찾거나 백사실에 머물던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평창동 소나무의 위엄

하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까?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40도 정도 고개를 숙였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이 나무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고개를 꺾은 모양이다. 그만큼 숙성될
수록 겸손을 차리라는 대자연 형님의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은 아닐까 싶다. 자연물은 그 뜻을
받들고 잘 지키는데,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며 온갖 민폐를 아끼지
않는 인간들은 왜 단순한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인간은 신이 아닌 늘 애매한 존
재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고개를 수그린 소나무의 자태가 곧게 서있는 모습보다는 기품과 운치가 더 진해
보이는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낮추며 겸손을
보이는 사람이 더 값어치가 있어 보인다.
평창동 소나무를 끝으로 한여름 북악산 북쪽 자락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평창동 소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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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20년 8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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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단단한 북쪽 지붕, 도봉산 계곡 나들이 ~~ 무수골계곡에서 우이암 관음봉,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도봉동문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우이암,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문사동 바위글씨

▲  도봉산 (주능선, 자운봉)


 

봄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던 5월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서울의 북쪽 지붕, 도
봉산(道峯山)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가운데서 방긋거리던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점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 등을 넉넉히 사들고 무수골을 통해 도봉산의 포근한 품
으로 들어섰다.

서울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골 마을로 논까지 갖추고 있는 무수골을 지나 원통사계곡(
보문사계곡, 무수골 상류)을 오른다. 계곡은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즐비하고 수심이 얕
아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 계곡을 30분(무수골공원지킴터 기준)
정도 오르면 우이암(관음봉) 밑에 자리한 원통사(圓通寺)에 이른다.

원통사는 관음성지로 일컬어지는 우이암(관음봉)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관음도량(觀音
道場)으로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 후기 정도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짐) 절은 오래되긴 했으나 건물은 죄다 20세기 이후 것들이라 고색의 기운은 말
라버렸으나 대신 조망이 일품이라 서울 사찰 중 북한산(삼각산) 일선사(一禪寺) 다음으
로 우수 조망을 자랑한다. (서울 사찰 조망 부분 2위임)
약사전(藥師殿) 거북바위에 깃들여진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뒤엎기 전, 여기서 기도를 했는데, 그 마지막 날,
하늘나라의 상공(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하여 그것을 기
리고자 조선 말에 이곳을 찾은 사대부가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원통사에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10여 분 정도 각박한 산길을 올라 드디어 우이암(
관음봉) 서쪽 봉우리에 이르렀다. (우이암 이전의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긴 순 100% 바위 봉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
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하며 이후 바람과 비 등
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다.
그래서 도봉산은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과 선인봉, 만장봉, 칼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다.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이 신
(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불락
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크고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바라보인다.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
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암벽 등반을 위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으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
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불교 성지로 격하
게 추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라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남아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바위 봉우리가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
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단체, 뜻있는 이들이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의 썩
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과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 동쪽 자락 등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무려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
는 구름과 햇님, 별님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
북구, 동대문구, 광진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와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산 산줄기와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가 추가로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
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
을까? (현실은 시궁창 인생 ㅠㅠ)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하여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더듬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허나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
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이
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
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으로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마음과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는 것 같다. 이보다 좋은 정
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20분 정도 머물다가 자리를 털고 우이암
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의 위엄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  우이암능선과 문사동계곡(問師洞溪谷)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우이암을 중앙으로>

우이암능선은 도봉산의 남쪽 지붕길로 우이암에서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남쪽까지 짧게 이
어진다. 이곳에서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동쪽과 북쪽으로 서울 동북부와 의정
부, 도봉산 주능선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오봉산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이며, 특
히 능선에서 바라보는 우이암의 모습이 자못 위엄이 돋는다.

우이암의 자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서쪽 봉우리와 우이암 능선에서 보는 것이 좋다. 서쪽에
서 보는 것과 능선에서 보는 것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데, 마치 유럽식 투구를 쓴 장군이 비스
듬히 기대어 서울을 바라보는 모습 같으며, (하얀색 모자 달린 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듬히 기
댄 모습으로도 보임) 두건을 쓴 관세음보살 누님이 서울을 걱정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허나
왜정의 비뚤어진 주장처럼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관음봉을 우이암으로 깎아내린 왜정
의 눈이 비정상임을 보여준다. 빠른 시일 내에 제 이름을 회복한다면 우이암능선도 관음봉능
선으로 이름을 갈아야 될 것이다.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도봉구, 노원구, 강북구, 중랑구,
성북구, 광진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무수골 등)

▲  우이암능선 조망대

우이암능선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서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우이암능선 조망대가 모습을 비
춘다. 능선길 서쪽 벼랑 위에 닦여진 이곳은 위치상 오봉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의 북쪽
뒷통수(상장봉 등)가 바라보이는데, 특히 오봉이 잘 조망된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오봉(五峯)과 오봉능선
오봉(해발 660m)은 오봉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이령 북쪽 봉우리로 도봉산이나
송추에서 접근하면 되며, 바로 밑에 있는 우이령에서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우이령, 북한산 북쪽 능선(상장봉)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주능선과 칼바위,
만장봉, 자운봉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북쪽으로 마저 내려가면 우이암능선분기점이다. 여기서 직진하면 지붕
길을 따라 칼바위, 오봉, 도봉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동쪽은 보문능선으로 도봉산 종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서쪽은 우이령(牛耳嶺)으로 이어지나 금지된 길인 비법정 탐방로이다. 그러
니 도봉산의 건강을 위해 아예 가지도 말자~~!
우리는 목적지인 우이암(관음봉)을 찍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붕길을 고집하지 않고 쿨하게 보
문능선으로 내려갔다.


▲  보문능선에서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는 산길

▲  산악신앙의 현장,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돌탑으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  경쾌하게 몸을 푸는 문사동계곡 상류

내려가는 길이긴 하지만 느낌상 가도가도 끝이 없어 보인다. 그 산길에 연두연두하게 익은 나
무들과 진달래 등의 봄꽃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산바람이 종종 스쳐가며 조금씩 꿈틀거리는 땀
의 기운을 털어간다. 보이지 않던 계곡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살짝 다가와 낭랑한 물소리를 들
려준다. 이 계곡은 문사동계곡 상류로 전날까지 넉넉히 내린 봄비로 인해 물이 아주 넘쳐 흐
른다.

문사동계곡은 무수골(원통사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
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문사동계곡이 단연 갑(甲)으로 상류 부분은 작고 조촐한 모
습이라 두드러지는 풍경은 별로 없지만 속세로 내려갈수록 일품 풍경이 펼쳐져 두 눈을 제대
로 호강을 시킨다. 주름지고 잘생긴 바위와 벼랑은 물론 폭포도 여럿 나타나 산행의 여흥을
제대로 돋구며 특히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과 구봉사 주변이 최고의 절경으로 꼽힌다.
이 계곡은 용어천계곡과 합쳐져 도봉계곡으로 간판을 바꾸며, 도봉역에서 무수골에서 나온 무
수천과 하나를 이루며 중랑천(中浪川)으로, 다시 한강으로 흘러간다. 문사동은 도봉계곡과 한
덩어리로 묶어 도봉동천(道峰洞天)이라 불리기도 하며, 계곡 밑에 도봉서원이 자리해 있어서
서원 유생과 선비들의 피서지로 명성을 누렸다.


▲  문사동(問師洞) 바위글씨

문사동계곡의 이름표인 문사동 바위글씨는 하늘을 향해 약간 고개를 든 바위 피부에 깃들여져
있다. 문사동이란 '스승을 모시는 곳','스승에게 묻는 곳'이란 뜻으로 도봉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스승과 함께 학문을 논하거나 경치를 즐기거나 팔자좋게 탁족(濯足) 등의 피서를 즐
겼던 현장이다. 그래서 계곡 이름도 교육에 걸맞게 문사동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 바위글씨는 초서체(草書體)로 쓰여 있어 알아보기가 조금 까다로운데,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글씨 크기는 41x16cm으로 예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바위글씨전' 포스
터에 절찬리에 실렸던 명필이기도 하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도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
나 조선 후기에 서원 유생이 남긴 것으로 여겨지며, 바위글씨 주변은 문사동계곡에서 가장 아
름다운 절경을 자아내고 있어 두고두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다.


▲  가까이서 바라본 문사동 바위글씨의 위엄
동(洞)은 그런데로 알아보겠는데, 나머지 글씨는 진짜 해독 불가 수준이다.
(초서체 글씨들이 그런 경향이 큼)

▲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 풍경

계곡이 흘러가는 글씨 건너편에는 주름진 폭포와 벼랑이 펼쳐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이
런 절경에는 늘 신선(神仙) 전설이 있기 마련인데 이곳에는 없는 모양이다. 하긴 고리타분한
유생들이 지겹게 찾아와 쓸데없는 사상 논쟁이나 일삼고 있으니 신선 형과 선녀 누님들도 딱
히 오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  층층이 주름진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 폭포

▲  문사동계곡 마당바위 갈림길
이곳에서는 자운봉, 윗마당바위(천축사 윗쪽)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


 

♠  도봉산 마무리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  문사동계곡 중류

문사동계곡의 절경은 도봉계곡까지 연거푸 이어진다. '과연 도봉산 3대 계곡의 위엄이 전혀
녹슬지 않았구나' 감탄사를 마구 쏟아내며 계곡 풍경에 퐁당퐁당 빠지고 말았다.
대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절경, 그 절경을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장으로 감히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무례가 아닐까? 아무리 좋은 단어를 마구마구 갖다붙여도 이곳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
을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그냥 '와~~!' 탄성만 자아내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  문사동계곡 중류 (보문능선, 성불사입구)

계곡을 옆구리에 낀 넓적바위가 지나가는 산꾼을 유혹한다. 아직 봄이니까 그냥 지나쳤지, 한
여름이었다면 정말 뿌리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온몸으로 풍덩은 하지 않더라도 냄새가 모락
모락 나는 두 발을 꺼내들고 계곡을 휘저으며 피서삼매를 즐겼을 것이다~~!


▲  돌과 계곡이 어우러진 문사동계곡 중류 (성불사입구 부근)

▲  문사동계곡 서광폭포
폭포가 귀신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굉음을 울리며 굵은 명주실 같은
하얀 물줄기를 뽑아낸다. 그렇게 내려온 폭포수는 폭포 밑에 닦여진
담(潭)에서 잠시 숨 좀 고르다가 다시 긴 여정을 떠난다.

▲  옆에서 바라본 서광폭포의 위엄
폭포의 높이는 5m에 불과하지만 그 매력과 위엄은 어느 폭포 못지 않다.

▲  폭포가 여러 겹으로 펼쳐진 문사동계곡 (구봉사 주변)

서광폭포를 지나면 구봉사(龜峰寺)라 불리는 절집이 나온다. 법당인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요
사(寮舍), 범종각, 커다란 금동미륵불을 지닌 조그만 현대 사찰로 이 주변이 '문사동' 바위글
씨 주변과 함께 문사동계곡의 대표적인 흥미거리로 꼽힌다. 구봉사는 아마도 이들의 후광을
단단히 보고자 이곳에 둥지를 튼 모양인데, 층층이 이루어진 암벽에 키 작은 폭포가 여러 개
걸쳐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꽤 청아하다.


▲  주름진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문사동계곡 (구봉사 주변)
대자연이 그어놓은 주름이 주변 바위에 가득하다. 그만큼 도봉산도 늙었다.

▲  문사동계곡과 연등이 둘러진 산길 (구봉사 주변)
나무와 꽃들이 급하게 흐르는 계곡을 천연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  온갖 바위들이 재주를 부리는 문사동계곡 산길 (금강암 주변)

▲  연등이 허공을 가르는 금강암 주변 문사동계곡

구봉사에서 1굽이를 지나면 비구니 절집, 금강암(金剛庵)이 마중을 한다. 이곳 역시 구봉사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그곳을 지나면 천축사와 포대능선, 자운
봉에서 내려오는 산길과 합쳐져 사람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길은 더욱 수월
해져 마치 말에 올라탄 듯, 거침없이 내달려 어느덧 도봉서원터에 이른다.

도봉서원(道峰書院)은 서울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으로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세웠다. 이곳에는 원래
도봉산에서 가장 잘나갔던 영국사(寧國寺)가 있었으나 유림들이 절을 때려부셨으며, 조선 말
까지 이곳 일대를 영국동(寧國洞)이라 불렀다.
이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것을 임시로 단을 설치해 봄과 가을에
제를 지냈으나 6.25전쟁으로 중단되었고, 1972년 사당인 정로사(靜老祠)와 신문(神門)을 복원
했으나 왕년의 1/4도 안되는 규모였다. 허나 서울 유일의 서원이라는 큰 매력 덕분에 서울시
가 39억의 돈을 들여 2011년 기존의 건물을 밀어버리고 2014년 완공을 목표로 복원 공사에 들
어갔다.
하지만 이곳에서 옛 영국사 시절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불교계와 이해관계가 제대로 얽히게
되었고, 그때까지 지어진 건물을 모두 밀어버리고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후 계속 허전하게 터
만 남은 상태이며, 터 일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언제 복원이 될지는 모르지만 유교 쪽도
그렇고 불교 쪽도 영국사 복원을 계속 우기고 있는 실정이라 졸지에 뜨거운 감자가 되버렸다.
괜히 벌인 복원공사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  거친 물살의 희롱을 받는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

도봉서원터에서 잠시 앞 계곡(도봉계곡)을 살펴보자. 그러면 계곡에 반쯤 잠긴 바위에 새겨진
고산앙지 바위글씨가 크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는 1700년 7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죽기 1년 전에 새긴 글씨이다
. 고산앙지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하여 김
수증이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도봉서원이 조광조
를 배향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 글씨는 특이하게도 계곡물의 영향을 받는 자리에 새겨져 있어, 계곡 수량에 따라 보이는
범위가 천차만별인데, 제일 밑에 있는 '지(止)'는 늘 물에 잠겨 있어 심한 가뭄이 아닌 이상
은 보기가 참 힘들며, '앙(仰)'은 물이 많으면 역시나 보기가 힘드나 보통 때는 절반에서 1/3
정도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갔을 당시는 수량이 풍부해 '앙지' 2자는 강제 잠수 중이었다.
물의 희롱을 받는 '앙지'와 달리 '고산(高山)' 2자는 완전히 뭍으로 나와 햇살을 즐기고 있는
데 '산(山)'이 마치 3개의 산봉우리처럼 귀엽게도 새겨져 눈길을 끈다. 고산앙지 옆에는 글씨
가 새겨진 시기<경진 칠월(庚辰 七月)>가 쓰여져 있으며, 그 주변에는 이것 외에도 여러 바위
글씨들이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으니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도봉계곡과 문사동계곡 일대에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권상하, 이재(李縡), 김
수증 등 옛 사람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14개 전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
료로 인정되어 2009년 10월 도봉서원과 한 덩어리로 묶어 '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8호로 지정되었다.

* 도봉서원과 바위글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도봉동문(道峰洞門) 바위글씨 -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도봉서원터에서 계곡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를 간직한 광
륜사(光輪寺)가 나오고 여기서 다시 2분 정도 가면 도봉탐방지원센터 부근 큰 바위에 깃들여
진 도봉동문 바위글씨가 마중을 한다.
이 4자는 대노(大老), 송자(宋子)로 추앙 받던 조선 중기 문인이자 멸망한 명(明)나라에 과한
충성과 사대(事大)를 보인 꼴통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라고 전
한다. 도봉동문이란 도봉서원과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며, 유명 문인이 쓴 글씨라
그런지 필체가 요란하게 율동을 부린다. 도봉서원 단골 고객 중에는 송시열도 있었다.


▲  저녁으로 먹은 삼겹살쌈밥의 위엄

도봉산 종점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17시가 되었다. 모락모락 김이 풍기는 저녁 밥에 곡차(穀茶
) 1잔이 그리워질 시간이라 산행 뒷풀이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종점 부근에 있는 쌈밥
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고기를 겯드린 쌈밥집으로 우리는 삼겹살 쌈밥을 먹었는데, 삼겹살과 콩나물, 계란찜
, 무채, 김치, 된장찌개를 비롯해 상추, 양배추, 깻잎 등이 푸짐히 쏟아져 나왔다. 밥은 처음
에는 조금 주었으나 필요한 경우 더 제공해준다. 이들을 밥에 버무려 비빔밥처럼 해먹으면 되
며, 상추와 양배추에 노릇노릇 익은 삼겹살을 1점 넣어 쌈을 싸먹어도 된다. 이런 풍성한 찬
에 곡차가 없으면 안되겠지? 하여 막걸리를 시켜서 2병 정도 겯드렸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저녁 겸 산행 뒷풀이를 마치며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도
봉산과 내 제자리는 무척이나 가깝다는 것.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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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8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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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숨은폭포(밤골계곡) '



▲  숨은폭포 (윗폭포와 아랫폭포)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뒷통수에 숨
겨진 숨은폭포를 찾았다.
날도 징그럽게 더워서 도심에서 가까운 계곡에서 밤을 담구며 잠시 여름의 핍박을 피하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구파발(舊把撥)에서 가까운 진관사계곡이나 사기막골(효자동계곡)을 염두
에 두었으나 밤골계곡에 숨겨진 숨은폭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출동했다.

여름의 기운이 제법 강했던 14시에 연신내(3,6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폭포에서 섭취할 간단
한 먹거리와 막걸리를 구입했다. 그런 다음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
고 박석고개와 구파발역, 북한산성입구, 효자비를 지나 효자2통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밤골계곡으로 인도하는 길을 들어서면 농가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들을 지나면 바로
무성한 숲길이 펼쳐지면서 천하를 녹여먹을 정도로 강렬한 햇살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진다.
그 숲길을 조금 들어서면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과 만나게 되며, 거기서 2분 정도 가
면 밤골공원지킴터와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게이트(문)가 나온다.


▲  북한산국립공원 밤골공원지킴터와 공원 게이트(문)


 

♠  밤골계곡(숨은벽계곡)

▲  녹음(綠陰)이 짙은 밤골계곡 산길

밤골공원지킴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다. 숲도 녹음(綠陰)도 더욱 짙어져
원시림(原始林)을 방불케 하는데, 날씨는 덥지만 숲이 베푼 바람과 갖은 내음으로 땀은 줄행
랑 치기가 바쁘다.

밤골계곡은 숨은벽능선 북쪽에서 시작해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계곡으로 숨은벽계곡이
라 불리기도 한다. 북한산(삼각산)에는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일품 계곡이 참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북한산성계곡, 우이동계곡(우이9곡), 소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
포), 정릉계곡, 구기동계곡, 불광사계곡, 진관사계곡, 삼천사계곡 등이 있다. (도봉산과 사패
산 구역은 제외)
이들은 일찍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의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는데, 밤골
계곡은 그들에 비해 인지도는 낮으나 계곡 풍경은 그들 못지 않다. 게다가 계곡의 수질도 매
우 청정하여 신선들의 비밀 피서지로 손색이 없으며, 계곡 중간에 있는 숨은폭포는 북한산의
일품 폭포로 찬양을 받는다.

밤골계곡 코스(또는 숨은벽 코스)는 숨은폭포를 지나 숨은벽능선을 거쳐 북한산의 지붕인 백
운대(白雲臺, 837m)로 이어지며. 숨은벽능선은 바위 구간이 많아 제법 험하다고 하는데 대신
조망과 풍경이 국보급이다. 숨은벽이란 이름은 북한산 뒷쪽(북쪽)에 숨은 듯 자리해 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이 참 귀여우면서도 정감이 많이 간다.

북한산(삼각산)을 많이 갔다고 자부하는 본인이나 아직 숨은벽능선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
있다. 그 능선으로 들어가는 계곡과 폭포도 이번이 첫 인연이라 기대와 설렘이 아주 큰 편인
데, 밤골안내소에서 숨은폭포까지는 1km 정도 된다. 길은 거의 평탄한 수준으로 처음에는 산
길과 계곡이 조금 거리를 두고 펼쳐지다가 끝내는 서로가 붙어 나란히 이어지면서 폭포에 이
르게 된다.


▲  밤골계곡 물이 잠시 정체를 빚는 계곡 건널목


▲  인적이 거의 없는 밤골계곡 산길
길을 가다가 혹여 신선 형님이나 선녀 누님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폭포에 대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열심히 산길에 임한다.

▲  밤골계곡 산길 ~ 우리들은 점점 푸른 산속에 묻혀 간다.

▲  밤골계곡에서 만난 기묘하게 생긴 바위

숨은폭포로 열심히 가다보면 홀쭉하게 선 기묘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마치 옛 유적에서 많이
나오는 기와 조각이나 도자기 파편을 크게 확대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하늘에서 천제(
天帝)의 명으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인부가 실수로 떨어트린 기와 파편이 그대로 곤두박질 친
것 같다.

바위 피부에는 자연이 입힌 이끼와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해 시커먼 모습이며, 중간에는 누구
에게 얻어 맞은 듯, 움푹 패인 자국들이 있다. 바위 윗쪽에는 속인(俗人)들이 얹혀놓은 돌이
널려있는데, 산길에 접한 바위 피부에도 조금의 틈이 보이는 곳에는 꼭 돌들이 여러 개 얹혀
져 있다.
이곳을 지난 사람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 바위에 소망과 정성을 담아 얹힌 돌로 일종의 산악
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어준 이름도 있을 듯 싶으나 전해오는 것은
딱히 없는 것 같으며, 사람들이 얹힌 돌이 많이 붙어있어 그 흔한 '붙임바위'라 불러도 손색
은 없어 보인다. (기와 파편처럼 생겼으니 기와바위라 불러도 될 듯)


▲  기묘하게 생긴 바위 옆모습

▲  여기저기 절경과 벼랑을 빚은 밤골계곡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비경, 숨은폭포(숨은벽폭포)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

밤골공원지킴터에서 넉넉잡아 20분 정도 들어가면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진하게 귀청을 때리
면서 숨은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숨은벽폭포라 불리기도 하는데 숨은벽능선으로 오르는 길
목에 있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대자연 형님이 북한산이란 대작품을 빚고 혼자 두고두고 보려고 북한산 뒷쪽에 몰래 이 폭포
를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소리도 없이 묻혀있다. 북한산에 안긴
폭포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물이 매우 맑고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며, 경승지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던 선비와 양반들도 이곳의 존재를 몰랐던지 폭포에 대한 기록이나 시문(詩文)은 전하
는 것이 없다. 다만 북쪽에 있는 효자리계곡(사기막골)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육모정과 서산
정사터 등이 남아있어 그곳을 찾은 일부가 이곳에 왔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폭포는 2~3개(엄밀히 따지면 3개이나 2개로 봐도 무방)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폭포가 더 일품
이다. 단순히 폭포를 보러 온 이들은 윗사진의 아랫폭포가 전부인줄 알고 이거만 보고 돌아가
는 경우가 많은데, 반드시 1단계 더 올라 윗폭포도 보기 바란다. 그래야 괜히 애꿎은 땅을 치
며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숨은폭포에게도 숨겨진 별칭이 있다고 하는데, 아랫폭포를 총각폭포, 윗폭포를 색시폭포(처녀
폭포)라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그에 대한 사연과 전설은 딱히 전
해지는 것이 없다. 지금은 많이들 찾아오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이나 아는 사람만
찾아오던 숨겨진 비경이다 보니 그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아랫폭포의 높이는 대략 10m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30~40도의 경사진 바위를 미끄럼
을 타듯 내려온다. 어제까지 비가 많이 내려서 계곡의 수량이 크게 증가해 물줄기가 성난 기
세로 쏟아져 마치 하얀 비단을 드리운 듯 하다.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흔드니 여름 제
국도 크게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폭포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은 지금이 여름의 한복판이란 사
실 조차 흐릿하게 만든다.
폭포 앞에는 폭포수가 담긴 못이 있는데, 물이 얼마나 해맑은지 바닥이 훤히 보인다. 허나 바
닥이 보인다고 괜히 방심하지는 말자,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앞은 수심이 깊으니 주의해야
된다.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의 위엄 ▼



▲  풍덩 안기고 싶은 아랫폭포 못

폭포에 도착한 우리는 어린 아이 마냥 신이 났다. 때가 묻지 않은 폭포수에 발과 다리를 담구
니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이 무척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온몸으로 계곡물과 짜릿하게 스킨
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챙겨오지 않아 다리와 발을 담구는 선에서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마치 폭포를 전세낸 듯 한없이 다리를 담구니 다리가 정말 하얗고 매끄러워진
것 같다.

그렇게 발을 담구며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고 즐거운 간식 시간을 갖는다. 적당한 돌에 속세
에서 사들고 온 막걸리와 김밥, 과자, 커피 음료 등을 차려놓고 열심히 섭취를 했다. 폭포가
안겨준 시장기에 금세 동이 나고, 막걸리 또한 바닥을 보인다.


▲  폭포 윗쪽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아랫폭포로 빠르게 흘러가는 계곡물

즐거운 간식시간을 마치고 계속 폭포 앞에 머물렀다. 이곳이 분명 숨은폭포는 맞는데 폭포와
관련된 사진에는 이거 말고 폭포가 더 있었다. 그러니 분명히 위로 올라가면 나머지 폭포가
있을 것이다. 하여 윗쪽으로 올라가니 평탄한 계곡이 나오고, 그 계곡을 조금 들어서니 바로
숨겨진 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바로 숨은폭포의 윗폭포이다.


▲  숨은폭포 옆구리를 지나는 산길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윗폭포와 아랫폭포 사이의 계곡

▲  모습을 드러낸 윗폭포 -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  정면에서 본 윗폭포의 위엄

아랫폭포과 윗폭포는 대략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같은 숨은폭포 형제지만 서로가 완전
히 다른 모습으로 30~40도의 경사를 이룬 아랫폭포와 달리 윗폭포는 거의 90도 직각을 이루며
패기 넘치게 물을 아래로 내리 쏟는다. 그러다보니 폭포수 소리는 아랫폭포보다 한층 더 우렁
차다.

벽처럼 늘어선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장쾌하게 쏟아지는 윗폭포는 높이가 10m 남짓으로 폭
포 앞에는 물이 담긴 못 대신 바위 하나가 오랜 세월 물을 맞으며 누워있다. 한여름에야 시원
하겠지만 억겁의 세월 동안 종일 물을 맞으니 바위 피부가 완전 매끄럽다 못해 미끄럽다. 이
렇게 폭포 앞에 바위가 있으니 경북 청도(淸道)의 낙대폭포처럼 물맞이 장소로 적당하다.


▲  산길에서 본 윗폭포

윗폭포의 위엄을 제대로 보려면 계곡보다는 등산로(산길)에서 봐야 된다. 산길은 아랫폭포 옆
구리에서 바위를 타고 윗폭포 서쪽을 지나가는데, 윗폭포보다는 높은 곳에 있어 폭포와 그 윗
쪽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윗폭포 윗쪽에는 못과 함께 폭포가 하나 더 숨어있는데, 그 폭포는 완만한 경사로 높이는 5m
정도 되는 듯 싶다. 허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지 나무에 대부분 가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
고 귀차니즘 발동으로 그곳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위에 있는 것도 그런데로 폭포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그가 윗폭포가 되고, 윗폭포를 중간폭포
라 불러야 되겠지만 위에 있는 폭포는 느슨한 경사라 윗/아랫폭포보다 멋이 떨어져 별도로 다
루어도 무리는 없어보인다.


▲  윗폭포 윗쪽 부분의 못과 폭포
선녀 누님의 숨겨진 욕탕은 아닐까? 나뭇꾼과 선녀에 나오는 나뭇꾼처럼
주변 숲에 숨어 그들을 노리고 싶다.


윗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아랫폭포로 내려와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17시에 자리를 접고 폭포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등을 돌리기가 얼마나 섭섭했던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봤는지 모른
다. 삼척(三陟) 미인폭포(☞ 관련글 보러가기) 전설에 나오는 미인처럼 폭포를 끼고 살고 싶
었지만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다. 그러니 돌아가야 된다.

* 숨은폭포, 밤골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산 19-1


 

♠  호랑이와 효자의 애틋한 설화가 깃든 박태성 정려비(朴泰星 旌閭碑)
- 고양시 향토유적 35호

▲  효자비라 불리는 박태성 정려비

밤골계곡지킴터에서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을 따라 남쪽으로 10분 정도 넘어가면 효자
비(孝子碑)라 불리는 시커먼 피부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박태성 정려비로 비석 앞 도
로(북한산로)에 있는 정류장 이름도 무려 '효자비'이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에 박태성(朴泰星, 1679~1758)이란 효자를 기리고자 만든 것으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1679년 박세걸(朴世傑)의 아들로 태어난 박태성은 자가 경숙(景淑), 본관은 밀양이다. 품성이
온화하고 효성이 대단한 인물로 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에서는 고양시 효자동 뒷
산에 무덤을 썼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그의 효행이 영조(英祖) 때 조
정에까지 알려지면서 음사(蔭仕)로 내의(內醫)에 천거되었다. 허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데, 무슨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을 받겠습니까??'
하고 거절했다.

그는 효자란 이름에 걸맞게 종로구 효자동(孝子洞)에 살았는데, 부친이 별세한 갑년(甲年, 60
년)이 다가오자 63세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서
고양시 효자동에 있는 부친묘로 성묘를 다녔다. 그리고 성묘를 하고 도성으로 돌아와 궁궐로
등청(登廳)을 했다.
효자동에서 서대문을 거쳐 부친묘까지는 거의 30여 리(10리는 5km) 정도 된다. 지금이야 차량
으로 금방 오갈 수 있지만 그때는 오로지 두 발과 말 밖에는 없었다. 그는 큰 벼슬은 지내지
못했고 호랑이를 만나기 전에는 걸어다녔다고 하니 절하는 시간을 포함해 오가는데 왕복 7~8
시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도성(都城) 성문이 새벽 3시에 열리니 성묘를 하고 11시까지 등
청을 한 듯 싶으며, 그걸 매일처럼 했다는 것은 지나친 효심과 근면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
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묘를 하고자 새벽 일찍 집을 나서 무악재를 넘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
기 무서운 호랑이의 대명사인 인왕산(仁王山)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는 것이다. 그는 순간
쫄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선친묘에 가는 길이다. 나를 잡아 먹으려면 잡아 먹거라!!'
그 말을 들은 호랑이는 그를 덮치기는 커녕 머리를 반대로 돌리고 뒷걸음질을 하여 그의 곁으
로 다가가 '내 등에 타라!'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박태성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의 등에 올라탔다.

호랑이는 그를 태우고 깊은 산중으로 달려갔다. 자꾸 낯선 산속으로만 들어가니 박태성은 산
속으로 납치하여 잡아먹는 것은 아닌가 싶어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막상 당도한 곳은 다름 아
닌 부친묘 앞.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그는 옷깃을 여미고 무덤에 절을 올렸다. 그리고 무덤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그때 새 1마리가 주변 나무 가지에 앉더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몇 년
동안 같이 울었다고 함)
호랑이는 그의 성묘 장면을 지켜보다가 성묘가 끝나자 그에게 다시 타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
래서 그를 타니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 처음 만났던 무악재에서 그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다음날에도 무악재에 이르니 호랑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역시나 왕복으로 태워주어 편하
게 성묘를 다녀왔다. 호랑이는 무임으로 '무악재~효자동 선친묘'구간을 고속으로 셔틀 운행을
해준 것이다. 전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박태성은 자신을 매일처럼 태워주는 그를 위해 종종 고
기를 준비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
이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1758년에 박태성은 79세에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후손들은 그의 선
친묘 앞에 그의 묘를 썼다. 며칠 뒤, 후손들이 가보니 그의 묘 앞에 큰 호랑이 1마리가 엎드
려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박태성을 매일 태워주었던 그 호랑이였다. 이에 후손들은
호랑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 곁에 무덤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박태성의 이야기를 들은 고종(高宗)은 크게 감동을 먹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1893년
하사금을 내려 사당과 효자비를 세워 포상을 했으며, 비문(碑文)은 박태성의 증손인 박윤묵(
朴允默)이 썼다. 또한 그의 효심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무덤 주변으로 몰려와 마을을 이루
고 살면서 효자리(孝子里)가 되었다고 하며, 그의 효행을 길이길이 기억하게 해주었다.
<비석은 고종이 아닌 영조가 내렸다는 설도 있으며, 박태성이 부친묘에 성묘를 다니자 이곳에
들끓던 호랑이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효자리는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효자동으로 변경
됨>


▲  박태성 정려비

효자비의 설화처럼 호랑이가 부친묘까지 매일
왕복 운행을 해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호랑이가 동물의 제왕이면서 사람들이 제일로
두려워했던 존재다보니 전설/설화의 격을 높이
는 용도로 많이 등장한다. 이 설화 역시 후손
들이 그의 효행을 드높이고자 호랑이를 넣어
적절하게 꾸민 것으로 여겨지는데, 말을 타고
다닌 것을 호랑이로 둔갑시킨 것은 아닌지 모
르겠다.

1893년에 왕명으로 세운 효자비는 흑요석(黑曜
石)으로 된 검은 피부의 비석이다. 그의 피부
에는 박윤묵이 쓴 12자의 글씨가 있는데, '朝
鮮孝子朴公 泰星旌閭之碑'라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비석의 높이는 117cm, 폭은 40cm, 두께
는 12cm이다.

참고로 효자비에서 동쪽 산자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박태성의 묘역이 있다.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서 나는 길을 찾지 못했는데 그 묘역에는 박태성과 그의 부인인 완산이
씨, 김해김씨의 묘가 있으며, 묘비는 1778년에 흑요석으로 세웠다.
묘 옆에는 귀엽게 만든 호랑이상이 있는데, 이는 효자비 부근에서 농원을 하는 사람이 사비를
들여 만든 것이며, 그 옆에는 호랑이의 묘로 전하는 조그만 봉분(封墳)이 있다. 그리고 묘역
에서 50m 떨어진 곳에 박태성의 부친인 박세걸 묘역이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224


▲  봄이 빚은 아름다운 수채화 (효자비에서 북한산성입구 방향)

▲  효자동 내시묘역길에서 바라본 노고산(老姑山)

노고산에는 예비군훈련장이 많이 안겨져 있는데, 평일에는 예비군의 사격 훈련 총소리가 여기
까지 징하게 울려퍼진다. 그 정겨운 소리를 들으니 바람처럼 흘러간 예비군 시절이 진하게 떠
오른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 숨은폭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효자비와 노고산 사진은 봄에 별도로 담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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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7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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