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계곡'에 해당되는 글 55건

  1. 2018.10.05 서울의 동북쪽 지붕 ~ 수락산 벽운동계곡, 귀임봉 나들이 (염불사, 황자굴)
  2. 2018.09.15 둘레길의 정석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백화사, 마실길 느티나무, 화의군 이영묘역, 폭포동계곡)
  3. 2018.08.14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4
  4. 2018.07.29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간직한 아름다운 휴양림,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형제바위)
  5. 2018.07.15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속리산 폭포 나들이 ~~~ (장각폭포, 장각동계곡, 오송폭포, 시어동계곡, 성불사, 옥양폭포)
  6. 2018.01.30 경기도 안양의 상큼한 꿀단지를 거닐다 ~ 삼성산 안양예술공원, 김중업 건축박물관, 안양사지 겨울 나들이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7. 2017.10.11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8. 2017.09.15 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9. 2017.08.28 대자연이 빚은 단양8경의 으뜸 명승지, 단양 사인암 ~~~ (북상리 시골, 청련암, 남조천)
  10. 2017.08.16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숲과 계곡, 폭포, 옛 별서 유적이 어우러진 ~~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서울의 동북쪽 지붕 ~ 수락산 벽운동계곡, 귀임봉 나들이 (염불사, 황자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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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 여름 나들이 ~~~~~

▲  수락산 산줄기

▲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상계동 지역



수락산(水落山, 638m)은 서울 동북부 끝으머리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노원구 상계동(上溪
洞)과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 별내면에 걸쳐져 있다. 북한산(삼각산), 도봉산(道峯山
), 관악산과 더불어 서울 근교 4대 명산으로 격하게 찬양을 받고 있으며, 북한산(836m)과
도봉산(740m) 다음으로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뫼로 서울의 주요 지붕을 이루고 있
다.

수락산은 북한산(삼각산)에 비해 덩치는 작으나 멋드러진 바위와 계곡이 많고, 산세가 유
려해 꽤 야무진 산이다. 거대한 암벽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라 하여 수락산이
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산 정상부와 능선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온갖 모습의 바위(물개바위, 기차바위, 코끼리바위)들이 포진해 있다. 또한 물이 들어가
는 산이라 약수터도 푸짐하며, 벽운동계곡과 수락골(수락계곡), 동막골, 금류계곡(청학리
계곡), 석림사계곡, 거문돌계곡 등의 알찬 계곡도 아낌없이 품고 있다.

예로부터 명산(名山)에는 절이 많은 법, 수락산도 명산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온 뫼라 흥
국사(興國寺), 학림사(鶴林寺), 염불사, 용굴암(龍窟庵), 내원암(內院庵), 석림사(石林寺
) 등 오래된 절을 품고 있다. 그 가운데 흥국사에는 다량의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고 학
림사 또한 지방문화재 3점을 간직하여 고색의 위엄을 과시한다.
그밖에 노강서원(鷺江書院)과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묘, 수락산보루(堡壘) 등 오랜 명소
가 있고, 현대 사찰인 도선사(道詵寺)에는 지방문화재인 석삼존불상이 있다.

수락산 등산은 수락산역과 당고개역(학림사), 온곡초교, 동막골, 덕릉고개, 흥국사, 청학
리, 장암역(석림사), 산곡동(검은돌마을)에서 오르면 되는데, 수락산역과 당고개역, 청학
리에서 많이들 올라간다. 정상까지는 2~3시간 정도 걸린다.
수락산은 덕릉고개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 불암산(佛巖山)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으며 동쪽
은 국사봉, 퇴뫼산과 살짝 이어져 있다.

나에게 있어 수락산은 꽤 인연과 추억이 깊은 산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 산행으로 여
러번 찾은 적이 있으며, 1994년에 수락산 그늘인 상계1동 아파트단지에 살게 되면서 수락
산은 나의 뒷동산이 되었다. 벽운동계곡과 수락골은 나의 쉼터이자 놀이터가 되었고 수락
산의 상계1동 구역은 계곡부터 약수터, 산길까지 나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수락산의 품에 수 없이 안기며 그와 진한 정을 과시했으나 2002년 겨울에 도봉동(
道峰洞)으로 이사를 가면서 수락산과도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주 멀리 이
사를 갔느냐? 그것도 아니다. 바로 옆 동네인 도봉동으로 조금 갔을 뿐, 집 부근 중랑천(
中浪川)에 가면 수락산 산줄기가 훤하게 바라 보인다.
그 이후 수락산에 안긴 횟수는 얼마 되지 않으며 꼭대기도 1~2번 가본 것이 고작이다. 한
때는 나의 뒷동산으로 나를 수없이 안아주었던 수락산, 허나 그에게 오랫동안 무심(無心)
을 보이며 살아오다가 그의 품이 문득 생각나 여름의 한복판에 카메라에 물통 1개 짊어지
고 오랜만에 수락산을 찾았다.

집에서 수락산까지는 그런데로 가까운 거리라 두 발에 의지하여 걸어갔다. 중랑천 둑방길
을 따라 노원교를 건너 수락산역까지 도보 20분, 여기서 10분을 더 가면 벽운동계곡 하류
이다. 계곡 밑까지는 회색빛 아파트가 가득 들어차 수락산을 가리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
곳 모두 아름드리 숲이었다.


▲  벽운동계곡 하류에 세워진 수락산 표석의 위엄


 

♠  수락산 벽운동계곡 (벽운동 기점에서 염불사까지)

▲  벽운동계곡(碧雲洞溪谷) 하류

벽운동계곡(벽운계곡)은 수락산의 주요 계곡의 하나로 수락동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벽운동
이란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조선 때 서울 근교 경승지로 선비와 양반들의 발길
이 빈번했으며, 그들이 우수한 경관에 부여하는 동천(洞天)의 지위까지 누리면서 벽운동천(碧
雲洞天)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계곡을 유람에서 끝내지 않고 별장까지 지어 머문 이가 있다. 바로 사도세자(思
悼世子)의 장인이자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이다. 그
는 계곡 풍경에 퐁당퐁당 빠져 별장을 지었는데, 계곡에 바위가 하얗게 드러난 수락산 절경이
골짜기와 어우러져 마치 흰구름이 머무는 것 같다며 벽운동이라 하였다. 그래서 계곡 뿐 아니
라 계곡 밑에 자리한 마을까지 벽운동(碧雲洞)이란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이후 홍봉한이 영의정이 되고 조정의 실세가 되면서 많은 이들이 그의 벽운동 별장을 찾았다.
그로 인해 벽운동은 자연히 양반들의 순례 명소가 되었고, 혜경궁홍씨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벽운동계곡은 바위와 암반이 많고, 상류와 중류에 폭포와 소(못)이 여럿 널려 있다. 계곡 하
류(염불사 직전)는 수심이 얕고 숲이 무성하며 쉬어갈 자리도 넉넉하여 적은 발품으로 피서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덕성여대생활관 직전 계곡 북쪽에는 벽운동마을을 이루고 있는
식당들이 터를 닦고 있어 백숙과 도토리묵, 파전 등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허나 좀 더 세련
된 경관을 원한다면 하류를 버리고 과감히 위로 올라가길 권한다.

염불사를 지나면 암반들이 적지 않게 펼쳐지며, 벽운산악회를 지나면 이 계곡에서 가장 큰 폭
포(그래봐야 높이 5m도 안됨)와 못이 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큰 암벽과 조촐한 폭포 줄기
를 볼 수 있으나 더 이상은 괜찮은 곳이 없다.


▲  수락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벽운동계곡길(동일로250길)

▲  물이 거의 말라버린 벽운동계곡 (덕성여대생활관 뒤쪽)

벽운동계곡 기점에서 염불사까지는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잘 닦여져 있다.
이 길은 '김시습 문화 산책로'란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세조(世祖) 때 생육신(生六臣)의 하
나였던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梅月堂)이 이 계곡에서 잠시 은둔을 했었다. 하여 그를 기리고
자 그런 이름을 씌운 것이다. 허나 그와 관련된 유적과 설화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다.
포장길(동일로250길)이 싫다면 계곡 길로 가도 되며, 덕성여대생활관 북쪽 계곡에는 벽운동천
을 비롯한 바위글씨들이 숨어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계곡길은 염불사 부근까
지 이어져 있다.

포장길 중간에는 펜스가 둘러진 덕성여대 생활관이 있다. 이곳이 바로 홍봉한의 벽운동 별장
자리로 우우당(友于堂)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그마저 근래에 철거되어 주춧돌만 남은 실
정이다. 그는 'ㄱ' 모습의 건물로 우우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썼다고 전하나 세월
의 거친 흐름 속에 누가 잡아갔는지도 모르는 상태이다. 홍봉한이 꽤 잘나갔던 시절에는 사랑
방으로 쓰였는데 손님들로 늘 부산했다고 하며, 혜경궁 홍씨가 어린 시절 이곳에서 계곡 경치
를 즐기며 감수성과 서정성을 키워나갔다.

홍봉한이 사라진 이후, 그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다가 19세기 후반에 서예가로 유명한 국봉 이
병직(鞠峰 李秉直)의 고조부가 사들였다. 우우당 바깥 계곡 바위에는 벽운동천(碧雲洞天), 운
원수(雲源壽), 국봉(鞠峰), 소국(小鞠) 등의 바위글씨가 있는데, 이는 이병직이 새겼다고 전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병직은 국봉 외에 송은(松隱)이란 호도 가지고 있는데, 교육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으면서
후학 양성에 공을 들이다가 결국 거덜이 났다. 그래서 1957년 6월 덕성학원에서 매입해 생활
관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한옥 상당수를 밀어버리고 새 건물을 지으면서 우우당만 겨우 남게
되었다가 그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성북동 성락원(城樂園), 부암동 석파정(石坡亭)과 더불어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별장(
별서) 유적인 만큼 서울시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적극적으로 지켜주었으면 좋으련만 현
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  벽운동계곡의 주름진 반석들 (염불사 부근)

▲  염불사 정문 (오른쪽은 시립수락양로원)

벽운동계곡 기점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염불사가 있다. 그 흔한 기와집 일주문(
一柱門) 대신 철로 된 철문이 일주문의 역할을 도맡고 있는데 낮시간이라 문은 활짝 열려있다.
철문을 들어서면 바로 날씬하게 솟은 염불사 표석이 중생을 맞이하고, 그를 지나면 허전한 주
차장과 아주 짧은 숲길이 나오면서 바로 염불사 경내가 모습을 내민다.

염불사는 수락산 그늘에 살던 시절, 수없이 수락산의 품을 오갔음에도 1번도 들어간 적이 없
었다. 왜냐?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생각을 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눈길도 주지 않던 그곳에 이렇게 발을 들인 것은 생각 외로 좀 오래된 절이고 무려
지방문화재 2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최근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인터넷의 도
움이 무지 컸다.
절이 오래되었음에도 내력을 알리는 안내문 조차 꺼내놓지 않았으니 그동안 지나친 것은 어쩌
면 당연하다. 오래된 역사에다 문화유산까지 지니고 있으니 그런 절만 보면 격하게 구미가 땡
기는 것이 본인의 습성인지라 이번에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  염불사(念佛寺) 경내 (왼쪽이 큰법당, 오른쪽이 대웅전)

수락산 벽운동계곡에 조촐히 터를 닦은 염불사는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하여
백운사(白雲寺)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유물이나 기록이 전혀 없어 아마도 조
선 중기나 후기에 살짝 지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서울에는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우기는 절이 유난히도 많다. 아무래도 그가 고려 말~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승려이고 서울 천도에도 크게 관여를 했으며,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자
벗이었으니 그동안 많은 절에서 창건주로 우기던 원효(元曉)나 의상(義湘), 도선(道詵) 등의
쾌쾌묵은 존재보다는 더 무게감이 컸을 것이다.

어쨌든 창건 이후 오랫동안 마땅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1903년에 상궁(尙宮) 김씨
가 돈을 대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지장전을 지었다. 이때 자신의 부모와 고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발원문(發願文)과 복장주머니를 남겼다.
6.25 때 절이 파괴된 것을 다시 지어 영몽사(靈夢寺)로 이름을 갈았는데, 이후 쌍몽사(雙蒙寺
), 염불사(念佛寺)로 간판을 바꾸었다. 1965년에는 하씨가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이 수락산 산
신(山神)의 덕이라며 절에 산신각을 지어주었으며, 2005년에 2층짜리 큰법당을 짓고, 대웅전
을 부시고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큰법당과 대웅전, 지장전, 산신각(독성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관음보살좌상 및 복장(腹臟) 일괄','지장시왕도'가 있
다. 이중 목관음보살좌상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나 원래부터 이곳 불상은 아니며 지
장시왕도와 함께 다른 곳에서 넘어온 것이다.

절이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고색의 기운은 싹 말라버렸으며, 수락산의 주요 산길인 벽운
동계곡 산길 옆에 자리해 있어 산꾼들의 떠드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은근히 들려 온다. 허나
절을 감싸고 있는 짙푸른 나무들이 그 소리를 크게 걸러주니 고적한 산사의 기운을 누리기에
부족함은 없으며, 일렁이는 숲과 멋진 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산바람과 물바람, 풍경소리에
번뇌가 싹 달아난다.

▲  한글 현판이 인상적인 염불사 큰법당

▲  큰법당 석가3존불

경내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큰법당을 찾았다. 이곳에 염불사의 보물이 있을 듯 해서이다. 큰
법당은 이곳의 중심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2층 건물이다. 1층은 요사(寮舍)
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 등 복합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고, 2층이 큰법당으로 옆으로 난
계단을 통해 오르면 된다. (1층 내부에서 올라가도 됨)

큰법당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불단에 장엄하게 자리한 석가3존불은 문수보살(文殊菩薩)
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 뒤로 후불탱이 자리해 있고,
윗쪽에는 붉은 단청을 칠한 닫집이 화려하게 보궁(寶宮)을 이룬다. 천정에는 7마리의 새 모형
이 날개를 활짝 퍼득이며 날고 있다.
석가3존불 좌우에는 조그만 감실(龕室)을 가득 만들어 작은 금동불(金銅佛)을 안치했는데 이
들은 중생들에게 시주를 받아 달아준 원불(願佛)로 죄다 금빛을 내고 있어 너무 화사하다 못
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허나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은 대충 봐도 된다. 다 2005년 이후에 조
성된 따끈따끈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을 봐야 되느냐? 석가3존불 옆을 보면 3중으
로 이루어진 조그만 붉은 기와 닫집이 보일 것이다. 닫집 밑에는 유리막에 감싸인 불상이 있
는데, 그가 바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목관음보살좌상이다. (그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0호

목관음보살좌상은 1695년에 조성된 보살상이다.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는 63
cm로 조그만 편인데, 그의 뱃속에서 조성시기가 담겨진 발원문(發願文)과 후령통(候鈴筒), 법
화경(法華經) 3책, 주사다라니 등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어 그의 정체를 소상히 알려주고 있다.
발원문에 따르면 박삼룡과 박용산 등의 시주로 전라도 장흥 사자산 봉일암과 수도암(修道庵)
의 불상으로 조성되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 크게 활동한 조각승인 득우와 덕희가 만들었다.
봉일암과 수도암이 어떤 절이고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후 집을 잃고 이러지러 옮겨
다니던 것을 어찌어찌하여 이곳 염불사까지 흘러들어왔다.

그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조각 수법도 우수하다. 게다가 조성 관련 발원문이 남아있
어 17세기 후반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보여준다. 비록 보살상의 한계로 법당 불단을 차지하
지 못하고 옆으로 밀려났지만 석가3존불과 달리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몸이라 특별히 유
리막까지 씌워 그를 보호한다.

보살상 머리에는 화려하면서도 복잡한 무늬의
보관(寶冠)을 씌워져 있다. 보관은 귀까지 내
려와 있는데, 여러 장식물이 주렁주렁 달려있
고,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가 약간 보인다. 넓
은 이마 한복판에는 동그란 백호가 찍혀 있고,
눈썹은 약간 구부러져 있으며, 눈초리는 가늘
고 길다.
코는 조그맣고, 입술은 붉으며, 수염이 가늘게
표현되어 있는데, 얼굴은 거의 사각형에 살이
좀 올라 보인다.

▲  옆에서 바라본 목관음보살좌상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덮고 있는데, 가슴 쪽은 드러
냈으며, 오른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옷주름
선은 아래로 유려하게 흐르고 있고, 대좌(臺座)를 일부 덮고 있다. 붉은색 대좌는 닫집과 함
께 절에서 마련한 것으로 그의 거처가 은근히 탐이 난다.


▲  상궁김씨의 복장주머니와 목관음보살좌상에서 나온 복장 유물들

큰법당 남쪽 벽에는 오래된 문서와 주머니를 머금은 액자가 걸려있다. 이것들이 뭔가? 살펴보
니 글쎄 괘불(掛佛)보다 더 보기 힘들다는 복장 유물이 아닌가? 보통 절에서 복장유물은 공개
를 거의 하지 않는다. 혹 한다고 해도 박물관을 통해서 살짝 할 뿐인데, 유물 모두 부피가 가
벼운 것들이라 신변의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허나 염불사는 박물관도 아닌 그들 법당에 복장
유물을 과감하게 공개하는 위엄을 보였다.

액자 왼편에 있는 호리병 모양의 물건은 1903년에 상궁김씨가 지장전을 지어주면서 자신의 부
모와 고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만든 발원문을 담은 복장주머니이다. 천하에 무려 300곳
이 넘는 절을 찾아갔지만 복장주머니는 처음 본다. 수락산이 이렇게 귀한 선물을 내려주는구
나. 나는 그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액자 오른편에 있는 문서는 목관음보살좌
상 뱃속에서 나온 문서로 법화경(法華經)과 주사다라니이다. 글씨는 모두 붉은색인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  염불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1호

복장 유물 액자 옆에는 빛바랜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1869년에 위국과 그의 처 박씨,
유오 등이 별세한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조성한 것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
금암당 천여(錦巖堂 天如)가 그의 제자 취선(就善), 묘영(妙英)과 함께 그렸다.
처음에는 동대문 밖 감로암(甘露庵)에 있었으나 6.25로 염불사 탱화들이 죄다 못쓰게 되자 급
한데로 감로암에 있던 이것을 소환하여 봉안했다.

그림 중앙에는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이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발산하며 하얀 대좌에 결
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고, 그 좌우로 저승의 10왕과 문관(文官)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일제히 지장보살을 바라보며 서 있다. 등장 인물이 그리 복잡하지 않아 다소 여유로
운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정교한 필선과 정교한 금니 문양의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19세기 탱화 채색은 거의 원색적인데 비해 이 탱화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색채 대비의 조화를
이루고 있고, 채도를 낮추어 은은하면서도 맑은 17세기 불화 채색 양식을 보여준다.

큰법당 보물들을 한참 살펴보고 있으니 1층에서 신도 아저씨가 올라와 주름진 인상을 보이며
왜 사진을 찍냐고 물어본다. 하여 적당히 답을 하니 그제서야 인상을 풀면서 여러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
예전에 서울시에서 이들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관련 문화유산을 사진에 담아갔는데, 복
장 유물은 방바닥에 펼쳐놓고 사진에 담았다고 하며 그때 찍은 복장유물 사진이 절에 있으니
필요하면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는데, 아직까지 관련 사진
은 오리무중이다. 허나 솔직히 필요는 없다.
지방문화재 보유 기념으로 2008년 4월 26일에 알만한 가수를 소환하여 '염불사 산사음악회'를
떠들썩하게 열기도 했다. 안그래도 오래된 내력에 비해 내세울 것이 없는 열악한 형편인데 이
렇게 지방문화재를 지니게 되었으니 이만한 꿀단지가 없다.
그 외에 개인적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을 고하고 법당을 나왔다.

          ◀  염불사 지장전(地藏殿)
큰법당 뒷쪽에는 지장전과 이제 막 피어난 마
애약사여래좌상이 있다.
지장전은 1903년 상궁 김씨가 지어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6.25때 파괴되어 다시 지었으며, 내부에는 지
장전의 주인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저승 10
왕, 금강역사상, 시왕탱, 지장탱 등이 봉안되
어 있다.

▲  색채감이 넘치는 지장전 내부

▲  근래 조성된 마애약사여래좌상

▲  1지붕 2가족, 산신각과 독성각

▲  산신 가족을 담은 붉은 색채의 산신탱
오른쪽 벽에는 붉은 칠성탱이 걸려있다.

지장전을 지나면 큰 바위와 산신각(山神閣)이 나온다. 산신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건물로 1965년에 신도 하씨가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이 수락산 산신의 덕이라며 흔쾌히 지어
준 것이다.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을 봉안하고 있는데, 칠성(치성광여래) 가
족을 담은 칠성탱은 산신탱 옆에 놓았으나 독성의 공간은 그 옆에 독성각(獨聖閣)이란 독자적
인 현판을 달며 1칸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지붕은 하나, 건물 이름과 현판은 2개를 이루고
있다. 건물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를 뒷배경으로 자리한 산신각의 모습이 마
치 산꼭대기 부근 바위에 홀로 자리한 모습처럼 보인다.

※ 수락산 벽운동계곡, 염불사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 1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가면 수락산입구 교차로이다. 여기서 오른쪽
  으로 들어서 은빛3단지를 지나면 벽운동계곡이다. 염불사는 수락산입구 교차로에서 도보 15
  분
* 벽운동계곡은 주차 공간이 여의치 않으니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벽운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 염불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산51 (동일로250길 44-142, ☎ 02-938-9395)


 

♠  수락산 영원암(靈源庵)과 황자굴(皇子窟)

▲  싸리나무 담장에 감싸인 귀틀집 (지붕은 너와지붕)

염불사를 둘러보고 벽운동계곡을 따라 상류로 올라갔다. 10분 정도 오르면 벽운산악회 직전에
벽운교가 나오는데 여기서 다리를 건너면 벽운산악회와 수락산 정상 방면으로 이어지며, 오른
길로 가면 영원암과 수락골(노원골)로 이어진다. 나의 목적지는 하늘과 맞닿은 정상이 아닌
영원암(황자굴)과 귀임봉이기 때문에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

벽운교과 영원암 사이에는 수락산 도시산림공원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산림청에서 2002년에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하고자 닦은 것으로 산길에 숲과 자연 정보를 담은 책상과 안내문, 귀
틀집 등을 설치해 숲의 대한 이해와 숲 체험을 돕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두충나무가 많이 자
라고 있어 조촐하게 산림욕을 겯드린 산책 명소로 쏠쏠하다.


▲  영원암 산길

영원암 산길은 벽운동계곡과 수락골(노원골) 윗쪽을 이어주는 길로 인적은 별로 없다. 도시산
림공원을 지나면 산길은 조금 각박해지는데, 여름 제국의 무더위 태클에 땀은 비오듯 하고 숨
도 은근히 차다.
그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산중턱 벼랑 밑에 자리한 영원암이 슬며시 모습을 비춘다. 이곳
은 상계1동에 서식했던 시절에 여러 번 왔던 암자인데 이번에 이리 발걸음을 한 것은 황자굴
이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  영원암 중심 구역 (오른쪽 건물이 나한전)

수락산 서남쪽 산중턱 270m 고지에 살짝 둥지를 튼 영원암은 20세기에 지어진 아주 조촐한 암
자이다. 워낙 이름이 없는 곳이라 인터넷에도 정보가 거의 없는 실정인데 암자 뒷쪽에 눈썹바
위처럼 생긴 황자굴이 있어 예전부터 수행 공간이나 민간신앙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고색의 멋을 풍기는 문화유산은 아직 여물지도 못한 상태이며, 나한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독
성각, 칠성각, 산신각,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특히 산신각은 여기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앞서 귀틀집에서 서쪽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된다. 아마도 이곳만큼 경
내와 산신각의 거리를 멀리 둔 절은 없을 것이다.

절간 같다는 말이 바로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일까. 산바람 소리와 나의 발자국 소리가 이곳 소
리의 전부일 정도로 고적하기 그지 없으며, 인적도 거의 없어 이곳이 나의 비밀 아지트가 된
기분이다.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이곳에 잠시 푹 안겨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영산전에 봉안된 뜻밖에 존재들
용왕 2명과 용 2마리

▲  시골 농가 분위기의 요사


영원암 중심 구역에는 나한전과 영산전, 요사가 있다. 나한전(羅漢殿)은 석가불과 그의 제자
인 나한을 봉안한 건물로 절에는 따로 법당급의 건물이 없어 나한전이 법당의 역할을 수행하
고 있다. 어차피 석가불이 봉안되어 있으니 법당의 자격으로도 그리 손색은 없으며, 건물 앞
에는 수락산이 베푼 약수가 나오는 샘터가 있어 절과 나그네의 목을 축여준다. 그리고 뜨락에
는 누구나 쉬어갈 수 있도록 평상(平床) 등의 쉼터가 닦여져 있다.

나한전 옆에는 바위 밑에 자리를 닦은 건물이 있다. 현판은 없으나 기둥에 부착된 조그만 하
얀 딱지를 보니 영산전(靈山殿)이라 쓰여 있다. 영산전이라면 부처의 생애를 담은 8개의 그림,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한 건물인데 문을 여니 정작 팔상도는 온데간데 없고 엉뚱하게 용을 타
고 있는 용왕 2기가 나를 맞이한다. 아니 이건 뭐지? 겉은 영산전인데 속은 완전 용왕각이었
던 것이다. 아마도 하얀 딱지에 건물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아닐까 싶다. (용왕은 물을 관리하
는 존재임)

▲  6각형 모습의 독성각

▲  금색 옷을 걸친 독성

나한전 뒷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특이하게 6각형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 뒷쪽에는 황자굴이라 불리는 큰 암벽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독성각 옆으로 난
산길을 통해 굴까지 오를 수 있다. 허나 길 끝에서 벼랑을 좀 타야 되기 때문에 길이 조금 위
험하다. 비록 돌과 시멘트로 길을 닦긴 했지만, 바로 밑이 아찔한 낭떠러지이고 길까지 고르
지를 못하니 각별히 주의가 요망된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눈썹바위 모습의 황자굴

황자굴이라고 해서 동굴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니 이름에 파닥파닥 낚이지 말자. 벼
랑 윗부분에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곳을 바로 황자굴이라 부르는 것이다. 굴 윗쪽에
는 바위가 눈썹처럼 크게 돌출되어 굴을 감싸고 있어 마치 석모도(席毛島) 보문사(普門寺)의
눈썹바위(☞ 관련글 보러가기)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이곳이 황자굴이 되었을까? 천하에서 제일 크다는 정보의 바다 인터넷 조차도 '
황자굴이 뭐임? 먹는거임?'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황자굴은 말그대로 황제의 아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마침 인근에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
후(明成皇后) 민씨가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때 줄행랑을 치다가 잠시 들려 기도를 올렸
다고 전하는 용굴암이 있다. 그런 것을 보면 황자굴은 명성황후의 아들<나중에 순종(純宗) 황
제>이 숨거나 기도를 올렸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순종은 황태자(皇太子) 시절, 수락산에 온 적도 없고, 임오군란 때 모후(母后)를 따라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냥 용굴암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을 따라서 용굴암은 황후, 이곳은 황태
자가 각각 숨어 지냈다는 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봐야될 것이다.


▲  황자굴 바로 직전 (돌과 시멘트로 계단을 다짐)

▲  황자굴 내부
비바람을 피하기에는 아주 제격인 황자굴에는 조그만 단과 하얀 패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이 언급되어 있는 걸 보면 독성을 봉안한 공간인 듯 싶다.

▲  황자굴에 봉안된 패

▲  황자굴에서 바라본 도봉산

▲  석굴로 이루어진 칠성각(七星閣) 내부

나한전과 좀 떨어진 칠성각은 바위를 파서 만든 일종의 석굴이다. 석굴 내부는 한여름임에도
시원하기 그지 없는데, 광배를 갖춘 하얀 피부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하얀 피부 일색인 칠성(
치성광여래) 7기가 그 좌우와 뒷쪽에서 석가불을 지킨다. 보통 칠성각은 칠성탱이란 탱화를
걸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석고로 칠성상을 만들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든
모습과 겉모습, 머리 장식까지 죄다 비슷하지만 표정만큼은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 영원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산1 (☎ 02-937-1973)


 

♠  수락산 마무리 (귀임봉)

▲  구암약수터

영원암을 둘러보고 수락골 쪽으로 오르다보면 하얀 바위 밑에 자리한 구암약수터가 모습을 비
춘다. 조그만 파이프를 통해 수락산이 베푼 물이 실타래처럼 조금씩 흘러나오는데, 인내심을
가지고 컵에 가득 담아 들이키니 속이 시원하다. 이곳은 좀 외진 곳이라 인적은 그리 없으며,
속세와 멀리 거리를 둔 곳이라 수질은 아직 양호하다.


▲  구암약수터에서 수락골 능선길로 인도하는 길
영원암에서 수락골 능선으로 가는 산길은 가파른 산자락이다. 그래서 길 옆은
늘 아찔한 경사가 벼랑처럼 펼쳐져 있다.

▲  수락골 능선길 영원암입구 (왼쪽 길은 영원암, 오른쪽 길은 수락산 정상)

구암약수터에서 다시 길을 재촉하면 수락골 능선길로 이어진다.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수
락골과 수락산역 방면, 동쪽으로 올라가면 용굴암과 도솔봉, 수락산 정상으로 이어지는데, 수
락골 갈림길 부근 숲속에 예전에 종종 물을 뜨러 가던 약수터가 있어 찾아보았으나 길이 바뀌
었는지 찾지 못했다.


▲  수락골 갈림길 주변 조망대에서 바라본 노원구와 도봉구 지역,
그리고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의 힘찬 산줄기

▲  수락골 갈림길에서 귀임봉으로 인도하는 수락골 남쪽 능선길

수락골 갈림길에서 귀임봉으로 이어지는 수락골 남쪽 능선길로 접어들었다. 이 산길은 상계1
동과 상계3,4동 경계를 가르며 서남쪽으로 달리는 산줄기로 중간에 바위가 일품인 귀임봉이
있고, 산줄기의 끝 봉우리에는 고구려(高句麗) 유적인 수락산보루터가 있다. 길 중간에는 학
림사와 당고개역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어 속세와도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다.

능선길이 매우 완만하고 부드러우며 숲이 짙어서 여름 햇살도 살짝 몸을 사리며 200~300m 고
지라 약간의 등산으로 충분히 접근이 가능하다. 게다가 능선 양쪽으로 수락산 산줄기와 노원
구(蘆原區)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까지 일품이다. 마치 천상(天上)의 산책로를 거니는 기
분이다. 그래서 내가 수락산에서 가장 즐겨찾던 산길이기도 했다.


▲  귀임봉 조망대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을 뿐,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달리던 능선길은 귀임봉에 이르러
아주 조금 흥분을 한다. 다시 하늘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귀임봉은 해발 약 280m로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꼭대기 동쪽에는 조망대가 있는데, 수
락산 산줄기와 정상, 덕릉고개, 불암산, 상계3,4동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정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남쪽 줄기와 덕릉고개, 불암산 북쪽 줄기

▲  귀임봉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상계3,4동 지역
상계3,4동은 서울에서 가장 동북쪽 동네로 수락산과 불암산 사이에 포근히
감싸여 있다. 허나 아직 달동네가 적지 않게 남아있어 이 땅의 몹쓸
고질병인 빈부격차의 극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귀임봉 서쪽 바위길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수락산이 산 끝에
살짝 빚어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지역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창동, 도봉구, 성북구 지역
산 밑이 온통 아파트 일색~~ 이 땅에 너무 흔한 풍경이다. 가까이에 보이는
봉우리 정상에 수락산보루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회색빛
아파트의 물결이 거치게 출렁이는 외로운 섬을 보는 듯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1동과 도봉동, 도봉산

수락산보루까지 거침없이 내려가려고 했으나 일몰시간이 자꾸 눈치를 주어 귀임봉에서 수락골
로 철수했다. 아쉽긴 하지만 일몰 바로 직전이라 설령 가서 사진에 담더라도 일그러지게 나올
것이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며 미련없이 속세로 내려왔다. 어차피 집과도 가까우니 수락산
이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종종 찾아와 그의 품에 안길 생각이다.

이날 수락산 코스는 '수락산역 → 벽운동계곡 → 염불사 → 영원암 → 수락골 갈림길 → 귀임
봉 → 수락골'로 소요시간은 출사 시간을 포함하여 4시간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수락산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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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9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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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의 정석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백화사, 마실길 느티나무, 화의군 이영묘역, 폭포동계곡)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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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실길에서 만난 은행나무숲길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  마실길 느티나무

 


여름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첫 무렵,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을 찾았다.
이번 둘레길 산책은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하여 내시묘역길, 마실길, 화의군묘역, 구름
정원길 북쪽 구간을 거쳐 불광2동에서 그 끝을 맺었다.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
지만 내 마음을 적지 않게 앗아간 곳 중 하나라 그 마음을 찾으러 다시 그들을 찾은 것
이다. 탐방밀도 1위(1㎢당 5만여 명)로 세계 기네스북에도 당당히 올라있는 북한산(삼각
산) 탐방객의 절반 정도가 둘레길 방문자라고 하니 그의 인기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진관동 구간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 입구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초등학교인 북한산초교가 있다.
(거의 시골학교 분위기임)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인 내시묘역길은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공설묘지에서 진관동 방패교육대
에 이르는 3.5km의 산길이다. 북한천(北漢川)에 걸린 둘레교를 사이로 북쪽은 고양시, 남쪽은
서울 영역으로 평지와 야트막한 산길이 전부인 아주 착한 길이다. 전주이씨 서흥군파묘역, 경
천군 송금비, 경주이씨묘역, 여기소터, 백화사, 중골마을 느티나무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으
며, 백화사 뒤쪽 산자락에는 천하 최대의 내시묘역이었던 이사문 공파(李似文 公派)의 묘역이
있었다. 바로 그 묘역 때문에 '내시묘역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그 묘역의 규모는 약 8,800평으로 45기의 조선 중~후기 무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묘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전관(承傳官)을 지낸 김충영(金忠英)의 무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한 곳이 있구나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묘역은 2012년 4월 귀신같이 사
라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내시의 후손임을 껄끄럽게 여긴 후손들이 묘역을 파서 유골과 부장물을
챙기고 그 일대를 조경개발업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백화사까지 포장길이 뚫리면서 땅값이
많이 오르자 팔았다고 전하며 후손들은 땅값으로 4억 8천만원을 만졌다고 한다. 유골은 화장
하여 납골당 등에 두었고 유물 또한 후손이 가져갔으나 무덤에 배치된 문인석 등의 무거운 석
물은 버려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얼마나 비밀리에 콩 볶듯이 했는지 동네 사람들과 백화사 승
려들도 묘역이 없어진 것을 뒤늦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 땅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녔던 그곳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이제는
한낱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었다. 진작에 국가 지정 사적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이런 무덤 대학살(?)은 막을 수 있었을텐데 후손들의 그릇된 생각과 문화재청과 서울시 철밥
통의 직무유기, 그리고 내시묘역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과 저평가가 낳은 비극이다.
이제 내시묘역도 없는 내시묘역길이 되었으니 그 이름도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이는 갈비탕
에 갈비가 빠졌음에도 갈비탕을 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적당하
다고 본다. 하지만 늘 그렇듯 북한산국립공원 철밥통들은 이름 변경도 귀찮다며 계속 수수방
관하고 있다.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에서 백화사 구간)
숲이 워낙 삼삼하여 햇살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긴다.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내시묘역길
길 주변은 경주이씨 경천군파 문중 땅이라 양쪽에 철책과 나무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 서울시 지방기념물 35호

한산초교입구에서 내시묘역길을 따라 자연에 묻힌 민가를 여럿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들어
서게 된다. 마치 자연휴양림에 들어선 듯,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이로운
기운을 아낌없이 베풀어 속세에서 오염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오솔길을 거닐다보면 조그만 오래된 비석이 활짝 마중을 나오니 그가 바로 경천군 이해룡 사
패지 송금비이다. (줄여서 '경천군 송금비', '경천군 송금물침비'라 불림)

경천군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서예가 겸 역관(譯官)으로 이름은 이해룡(李海龍)이다. 본관
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으로 해서체(楷書體)를 잘 썼다고 하며 비
슷한 시대를 살았던 한호<韓濩, 한석봉(韓石峯)>에 필적하는 명필로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어(倭語)에 능숙해 1588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사자관(寫字官)으로
왜열도에 갔다왔으며 많은 글씨를 그곳에 뿌리고 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역관으로 왜군과의 협상테이블에 참여해 화평교섭을 위해 노력했으
며 1595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었고 1602년에 사섬시주부(簿)가 되었다.
선조(宣祖)는 왜군과의 교섭에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치하해 경천군에 봉했으며 지금의 백화
사 동쪽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광해군(光海君)은 1614년 사패지(賜牌地, 제왕
이 하사한 땅) 적당한 곳에 송금비를 세워주었
는데, 비문에는 큼지막하게 '慶川君 賜牌定界
內 松禁勿侵碑' 13자가 쓰여 있다. 그 내용은
경천군이 하사받은 땅에서 소나무를 벌목하거
나 무단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으로 뒷면에는
'만력(萬曆) 42년 갑인(甲寅) 10월'이라 쓰여
있어 1614년 10월에 세워졌음을 귀뜀해준다.

비석에 쓰여있는 송금(松禁)은 나라에서 필요
한 목재를 확보하고자 소나무가 많은 산을 선
정해 보호하는 것으로 고려 때 시행되었다.
이곳 송금비는 조선시대 임업 정책인 송금 정
책을 보여주는 산증인으로 400년이 넘는 나이
에도 무탈하게 잘 남아있으며 조선 임업사에서
꽤 중요한 유적이자 천하에서 딱 하나 밖에 없
는 존재로 가치가 높다.
이런 비가 2기가 있다고 하나 현재는 이곳만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숨바꼭질
중)

▲  조성시기가 쓰여진 송금비 뒷면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철책 사이로 잠겨진 문이 보일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숲으로 살
짝 몸을 숨기면 이곳의 주인인 이해룡의 묘역을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묘역은 경주이씨 묘역이
라 불린다. (문이 늘 잠겨있으나 느슨한 경우가 종종 있어 순수한 의도로 살짝 들어가 살펴보
는 것도 괜찮을 듯 싶음)

고색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풍기는 비석 주위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들이 마련
되어 있다. 워낙 숲속이고 평일에는 인적도 드물어 바람의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가 이곳을 이
루는 소리의 전부이다. 둘레길이 닦이면서 비로소 그 존재를 속세에 내보인 존재로 둘레길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북한산둘레길이 산자락에 숨겨진 많
은 명소를 속세로 꺼내주었음)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과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 34번 시내버스를 타고 백화사 하차, 백화사 방면 둘레길을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4번 출구) 롯데몰 정류장에서 704번, 건너편 2번 출구 정류장에서
  34, 8772번(토요일과 휴일에만 운행)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  경천군 송금비 주변

▲  경천군 송금비에서 백화사로 이어지는 내시묘역길
중간에 의상봉, 용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  내시묘역길 중간에 자리한 백화사(白華寺)

경천군 송금비에서 6~7분 정도 가면 백화사란 조그만 절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중골마을의
동쪽 끝으로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못지나친다고 잠깐 살펴보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다.

백화사는 1930년경에 지어진 비구니 절로 자세한 내력은 딱히 모르겠다. 조촐한 경내에는 종
무소(宗務所)의 역할을 겸하는 요사(寮舍)와 대웅전(大雄殿), 삼성각(三聖閣) 등 5~6동 정도
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옆에는 아주 도드라지게 새겨진 잘생긴 마애3존불이 있다.


▲  백화사 마애3존불

백화사 마애3존불은 바위 윗부분을 싹둑 다듬고 석가불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문수보살(文
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배치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196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로 그 조각수법이 뛰어나고 돋음새김으로 사실감있게 다
듬어 그들이 마치 내 앞에 나타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비록 숙성 기간이 적어 고색의 때
는 끼지도 못했지만 50년 이상 지나면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거뜬히 따
낼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연꽃대좌(臺座)에 앉은 석가불은 선정인(禪定印)을 선보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있는데 꽤나 몸을 단련한듯, 어깨와 가슴이 매우 당당하다. 좌우 협시불은 시무외인으로 그
들 나름대로의 제스쳐를 취하고 있고, 3존불 모두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어 그들의 광명(光
明)을 표현한다.

* 백화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18-2 (의상봉길 70-7, ☎ 02-381-9103)


▲  백화사 삼성각(三聖閣)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창건 초기부터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이곳에 큼직한 대웅전이
들어앉아있고 삼성각은 마애불 뒤쪽으로 자리가 옮겨졌다.

▲  경내 남쪽에 자리한 돌탑
경주 첨성대(瞻星臺)와 비슷한 모습으로 가지각색의 돌이 협동심을 보이며
어엿한 돌탑을 이루었다.

▲  중골마을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0호

백화사를 지닌 중골마을은 산에 감싸인 산골마을로 여기소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잡고 있는데 높이 19m, 둘레 4.7m로 추정 나이
는 210년 정도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치가 165년~) 이 일대는 이사문 내시
집안이 살던 곳으로 그 후손이 심은 것으로 보이며 오늘도 마을에 시원한 그늘을 베풀어 자연
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  여기소(汝其沼)터 표석

백화사 정류장에서 백화사로 가는 길목 초입에 여기소터 표석이 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아련히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숙종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크게 증축했을 때 지방 관리로 있다가 공사 현장에 파
견된 관리가 있었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기생은 그를 보고자 먼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으나 공사 관계자
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하여 너무 열받은 나머지 이곳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며 '너의 그 사람이 잠긴 못'이란 뜻에서 '여기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공사가 끝날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섣부른 행동을 했을까? 옛말에도 급하면
돌아가라고 했거늘, 그 속담만 얌전히 지켰으면 해피 엔딩으로 끝났을텐데 말이다. 아마도 꽤
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이후 기생의 한이 서린 연못은 매립되었고 그 자리에 표석을 두어 여기소의 흔적과 교훈을 아
련히 일깨운다.


▲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북한산 글램핑장 주변)
내시묘역길도 그렇고 북한산둘레길은 민가와 농장, 경작지, 개인 토지를
이리저리 피해가느라 우리네 인생처럼 굴곡이 좀 크다.

▲  내시묘역길의 남쪽 끝을 잡다 (방패교육대 직전)


 

♠  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

▲  마실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다~

내시묘역이 없는 내시묘역길은 여기서 마실길로 간판을 바꾸어 달린다. 방패교육대에서 진관
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으로 완전 평지 수준이고 북한산둘레길 구간 중 가장 짧고
편한 길로 살랑살랑 거닐기에 아주 좋다. 하여 마실길이라 불린다.
이 코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숲길, 삼천사계곡, 진관사계곡, 숙용심씨묘표, 영산
군묘역, 화의군묘역, 진관동 느티나무 등의 명소가 있어 짧은 거리에 비해 볼거리가 아주 풍
부하며 진관사(津寬寺)와 삼천사(三千寺)도 아주 가까워 답사 코스로 아주 안성맞춤이다.


▲  진관천 옆구리를 지나는 벼랑길 (마실길)

마실길을 들어서면 진관천 벼랑에 닦여진 나무데크길이 나온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
처럼 길을 낸 것으로 동쪽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벼랑이, 서쪽은 진관천이 삼
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물을 모두 머금으며 창릉천으로 흘러간다.
예전에는 피서의 성지로 여름마다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서쪽에 연서로가 닦이면서 풍경이 조
금 깎여지고 지나는 차량의 소음도 적지 않아 요즘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중/상류로
많이 넘어갔다.


▲  삐죽 고개를 내민 바위로 약간 구부러진 계곡 벼랑길

▲  식당을 지나 삼천사계곡을 건너는 마실길

진관천 벼랑을 통과한 마실길은 삼천사입구에 이른다.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
(磨崖佛)을 지닌 오래된 절로 그곳이 땡기면 잠시 둘레길을 놓아두고 갔다와도 상관없다. (20
분 정도 걸림)
삼천사입구에서 삼천사계곡 구간에는 농장과 식당이 여럿 있는데 그들을 지나 삼천사계곡을 건
너야 다음 코스로 진행이 된다. 평일에는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맛있는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
여 그 유혹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어찌 식당 앞도 아니고 한복판을 지나가게 했는지는 모르지
만 주변에 마땅한 길이 없어 기존 길을 활용한 모양이다.


▲  마실길 돌탑 구간

삼천사계곡을 건너면 'S'자로 살짝 구부러진 길이 나오고 길 왼편으로 비슷하게 생긴 돌탑 4
형제가 마중을 한다. 이들 돌탑은 둘레길을 닦으면서 수식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둘레길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준다.


▲  나란히 자리한 돌탑 4형제

▲  마실길의 오랜 터줏대감,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1호

돌탑을 지나면 울창한 모습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두 눈을 단단히 동여맨다. 동화 속
푸른 언덕이나 초원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나무로 나이가 약 170년에 이른다.
자꾸만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높이 18m, 둘레 4.2m에 큰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위치는 진관동 132-20번지로 북한산둘레길이 생기기 이전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삼천사와 진관사를 수없이 들락거린 나 조
차도 둘레길의 안내로 2012년 이후에나 그를 만났으니 앞서 경천군 송금비와 더불어 둘레길이
캐준 소중한 보물이다.


▲  느티나무 주변 풍경

▲  은행나무숲길 옆에 닦여진 돌탑들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숲과 돌탑이 나란히 있으니 마치 신성한 어딘가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은행나무숲길 (왼쪽은 늦봄, 오른쪽은 여름)

마실길에서 가장 으뜸인 곳이자 북한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바로 170
년 묵은 느티나무와 그 옆에 자리한 은행나무숲길을 꼽고 싶다. (솔직히 둘레길 주변에서 이
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별로 없었음)
수목원이나 휴양림의 그림 같은 숲속길이나 산책로를 거니는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드는 곳으로
느티나무 주변을 곱게 손질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어 마실의 기분을 진하게 들게 했다. 게
다가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로 조촐하게 은행나무숲길을 내면서 전남 담양의 명물, 메타세콰
이어 가로수길에 못지 않은 맵시를 자랑한다. 
산책로 주변에는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여럿 있다. 굳이 의자가 아니더라도 돗자리를 가져와
은행나무 그늘이나 주변에 깔고 간식을 먹으며 수다 몇 송이를 피우면 정말 소풍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은행나무숲길은 북한산둘레길이 지나는 명소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홀린 곳으로 집으로 훔쳐
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보고 또 보고 누리고 싶다. 이런 곳에서는 정말 옛 사람들처럼 시 1수
읊어줘야 운치가 나거늘, 시적(詩的) 감각이 떨어지고 인간의 하찮은 말과 언어로 자연의 아
름다움을 표현하고 희롱한다는 것이 실례가 되는 일인듯 싶어 그저 탄성만 질렀다.


▲  봄과 여름, 가을이 앞다투어 머물다 가는 은행나무숲의 위엄
겨울은 그 시샘이 더 높아 아예 은행나무의 옷을 다 벗겨가 버린다.


 

♠  화의군 이영 묘역과 구름정원길

▲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4호

은행나무숲에서 진관사계곡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진관사로 인도하는 도로(진관길)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은 진관사로, 서쪽은 은평한옥마을로 이어지며 마실길은 바로 서쪽에 있는 3거리
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3거리 서남쪽에 오래된 느티나무 4형제가 있음) 그리고 바로 정
면에 있는 산자락에 무덤들이 여럿 눈에 보일 것인데 그들은 영산군 이전(寧山君 李恮) 묘역
이다. (영산군 묘역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함)

서쪽 3거리에서 은평한옥마을 동부를 가르는 마실길(연서로48길)을 따라가 진관생태다리를 지
나서 동쪽 산자락에 홍살문과 사당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무덤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화
의군 묘역이다.

화의군(和義君, 1425~?)은 세종의 9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영(李瓔), 자는 양지(良之)이며 생
모는 영빈 강씨(令嬪 姜氏)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매우 좋아해 매일 책에 파묻혀 살았다고 하며, 초서(草書)와 예서(禮
書)에 쓸데없이 능했다. 또한 이미 6살에 한시(漢詩)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人生斯世 忠孝爲大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충효가 크다 하니
忠能保國 孝能匡世 
 충성으로 나라를 보전할 수 있고 효도로써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

1433년에 화의군에 봉해졌고 1436년 11살의 어린 나이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했다. 1441년
에는 사춘기 시절의 호기심 때문인지 이복형인 임영대군(
臨瀛大君)과 함께 여염집 여자를 남
장을 시켜 궁 안으로 납치해 온 적이 있었는데 그만 부왕(父王)인 세종에게 들켜 된통 혼이
났다. 그 벌로 그에게 주어진 화의군의 직첩(職牒)과 과전(科田)이 몰수되었다.
허나 1447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 남의 기첩(妓妾)을 가로챈 일로 직첩이 또
몰수되었다. 그러다가 맏형(문종)이 재위에 오른 1450년에 다시 환원되었다.

화의군은 누이동생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더불어 훈민정음에 제법 조예가 깊었는데 정음청
(正音廳)에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프로젝트에 참
여하였고, 평소 친분이 있던 박팽년의 매부 박중손(朴仲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세 아들을
두었다.
1455년 2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를 밀어내고 재위에 오른 이후, 4째 형인 금성대
군(錦城大君)을 비롯한 60여 명의 무인과 활쏘기 사냥을 나갔다가 대간(臺諫)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변경으로 귀양 갔다가 그 이듬해 풀려났다. 그리고 성삼문과 박팽년, 유응부(兪應孚) 등
이 단종(端宗) 복위를 꾀하다 걸려들자, 세조는 화의군에게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물었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잘못하면 자신까지 화를 당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1457년, 순흥(順興,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귀양간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를 몰래 꾀하였고
영월로 유배간 단종이 결국 사사(賜死)되자 복위에 가담한 죄로 충청도 금산(錦山)으로 유배
되었다. 이때 그에게 주어진 모든 관직과 왕족의 특권, 재산이 싹 몰수되었으며, 그의 이름과
자손들의 이름은 왕실 종친록(宗親錄)에서 제명되는 치욕을 맞는다.
그가 금산으로 유배된 이후,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① 1460년 단종 복위 사건으로 사사(賜死)되었다는 것, (화의군 묘역 안내문, 화의군파 족보,
   은평문화원에서 편찬한 '은평구의 문화유산')
② 거의 60~70세까지 유배지에서 살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 했다는 것. (조선왕조실록..)

화의군이 죽은 이후, 그의 세 아들과 자손들은 죄인의 신분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오다가 성종
시절에 들어와 세조의 부인이자 화의군의 형수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지시로 도성(都
城) 밖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중종 시절에는 화의군의 손자 이윤(李允)의 상언(上言)에 따라
복관(復官)되면서 신분이 회복되는 한편, 종친록에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552년에는 금산에 있던 화의군의 묘소를 현재 위치인 양주(楊州) 땅 신혈리(新穴里, 현 서울
진관동)로 이장했으며, 1736년 영조(英祖)는 그에게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에 영월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 때 단종에 대한 충절이 인정되어 그 제단
에 배향되었다.
 
화의군 묘역에는 그의 차자(次子)인
'여성군 번(驪城君 轓)', 3자인 '금난수 식(金蘭守 軾)',
증손자인 '태산군 황(泰山君 凰)'의 묘가 있으며, 묘역 밑에 충경사
(忠景祠)란 사당을 세워
화의군 부부와 그의 생모의 신위(神位)를 봉안했다. 또한 그 주변에는 화의군의 후손들이 살
고 있었는데 은평뉴타운 개발의 칼질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묘역 주변에는 충경사 사당
과 재실(齋室)만 남게 되었다.

화의군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조선 왕족의 하나로 단종 복위운동에도 참여했었고 훈
민정음 프로젝트에도 크게 활약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인물이다. 물론 여자를 너무
밝혀 남의 여자를 마구 건드렸던 진상은 좀 있었지만...
그의 우울했던 인생 만큼이나 그의 묘역 또한 긴 세월을 비지정문화재의 영욕을 간직하며 지
내오다가 2005년 말에서야 뒤늦게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팔자가 조금은 펴졌다.

▲  묘역 서쪽에 자리한 화의군 신도비
(神道碑)

▲  화의군 사당인 충경사와 붉은 피부의
홍살문


충경사 앞에는 성역(聖域)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차가운 인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홍살문
과 충경사의 배치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조금은 북쪽으로 삐뚤어져 있다. 둘의 방향이
일치해야 좀 안정감있게 보이는데 말이다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충경사와 홍살문은 1970년 이후에 지어졌으며 사당 남쪽 언덕에 화의군
의 묘역이 자리해 있다.


▲  화의군 묘역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묘역 주변은 잘 익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운치를 자아낸다. 묘역 주변은 묘역 보호를 위
해 사람 키보다 높게 철책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묘역으로 인도하는 문은 충경사
뒤쪽에 있는데 늘 굳게 잠겨져 있어 철책 너머로 보던가, 중간중간 보이는 허술한 곳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던가 해야된다. 허나 철책 밖에서도 보일 만큼 보이니 괜히 무리는 하지 말자.


▲  서북쪽을 바라보고 선 화의군 묘역

▲  곡장을 병풍처럼 두른 화의군 묘와 그의 아들인 금난수 식의 무덤

화의군묘는 일반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처럼 조촐한 크기로 곡장을 봉분(封墳) 뒤쪽에 병풍처
럼 둘러 무덤의 품격을 조금 높였다. 무덤 앞에는 상석(床石)과 묘표, 장명등이 있고 그 양쪽
으로 문인석 1쌍과 근래에 지은 무인석(武人石) 1쌍이 나란히 무덤을 지킨다. 게다가 근래에
봉분 밑도리에 엉뚱하게도 12지신상을 두룬 호석(護石)을 둘러 서로가 너무 어색한 조화를 보
인다.
봉분에 비해 호석을 너무 크게 둘러 근래에 지어진 무덤처럼 요상한 모습이 되었으며, 12지신
상의 모습도 지금 당장이라도 산으로 뛰어갈 것 같은 생동감 있는 모습이라 다들 산만해 보여
오히려 없는 것보다 못한 것 같다. 물론 무덤에 대한 후손들의 지극정성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 정성이 너무 지나쳐 조선 초기 무덤을 20세기 무덤으로 품격을 떨어뜨렸다.
문화재로 지정된 무덤은 크게 망가지지 않은 이상은 초창기의 모습을 지켜주는 것이 무덤 주
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무덤을 너무 기존의 모습과 다르게 치장해버리면 무덤 주인이
잠시 마실갔다가 자신의 무덤도 찾지 못하고 헤매지 않겠는가?

※ 화의군 이영 묘역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가변차로 정류장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에서 하차 (701, 7211번을 타
  는 것이 더 빠름) 정류장 남쪽에 자리한 제각말아파트교차로에서 동쪽 길(연서로48길)을 3
  분 정도 가면 오른쪽(남쪽)에 화의군 묘역이 있다.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1, 704번(구파발역 경유), 가변
  차로 정류장에서 7211번을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44 (연서로48길 22)


▲  화의군묘역 인근 구름정원길에서 만난 주인 잃은 비좌(碑座)

화의군 묘역 남쪽에 북한산(삼각산)과 조선시대 최대의 공동묘지였던 이말산(莉茉山)을 이어
주는 진관생태다리가 있다. (밑에 터널을 두고 그 위에 산줄기를 만듬) 여기서부터 잠시나마
정들었던 마실길은 막을 내리고 북한산둘레길 8구간인 구름정원길로 이름이 갈린다.

구름정원길은 진관생태다리에서 북한산생태공원 상단까지 4.9km 거리이다. 옛 기자촌터 뒤쪽
으로 구름정원이란 이름이 참 어여쁜데 그 이름 그대로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구름과 조금
이나마 가까워지는 구간으로 평지 일색의 마실길과는 완전 차원이 틀려 마실길에 적응된 몸이
조금 괴로워함을 느낄 것이다.

진관생태다리에서 10분 이상 올라야 비로소 옛 기자촌 뒷쪽 산능선에 이르는데, 길 중간에 주
인을 잃은 비좌와 동자석 등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허나 대부분 속인들은 둘레길에 눈이 멀어
그들을 지나치고 만다. 이곳을 비롯하여 이말산과 내시묘역길 주변에는 왕족과 사대부, 상궁,
내시들의 무덤이 즐비하며 이 비좌와 동자석도 그들 무덤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러다가 자연재해로 묘가 사라지고 비석 또한 파괴되어 이렇게 비석의 아랫도리인 비좌만 간
신히 남아 햇볕을 보고 있다. 이 비좌의 주인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분명 주변을 싹 뒤
집어 엎으면 유력한 단서가 나올 듯 싶은데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이상 비좌와 동자석의 주
인을 찾는 시도는 없을 듯 싶다.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향로봉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북한산 서쪽 줄기와 은평구 동부 지역

기자촌지킴터에 이르면 동쪽으로 북한산(삼각산) 향로봉, 남쪽으로 은평구 동부 지역, 서쪽으
로는 개발의 칼질로 거의 허허벌판이 된 옛 기자촌이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기자들의 생활
터전으로 제공했다고 하는 기자촌(記者村)은 서울 지역 달동네의 상징으로 쇠락된 것을 2008
년 이후 모조리 갈아엎었다.
이곳도 은평뉴타운 개발지의 일부로 현재는 근린공원이 닦여져 있다. 기왕 이렇게 밀어버린거
후회가 없게끔 잘 다듬었으면 좋겠고, 진관동 일대에 대한 개발의 난도질도 이곳에서 그만 멈
췄으면 좋겠다.


▲  구름정원길 중간인 폭포동 선림사 주변 계곡

기자촌지킴터에서 약 15분 정도 가면 기자촌 남쪽인 폭포동 선림사(禪林寺)에 이른다. 폭포동
(瀑布洞)이란 이름은 금지된 구역으로 묶인 산 위쪽 바위에 있는 폭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
소에는 보기 힘들며 비가 많이 온 날과 그 이후에만 잠깐씩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폭포이다. 

이곳은 숲이 삼삼하고 계곡은 작으나 맑은 물이 흐르고 반석과 바위가 많아 피서를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다. 여기서 아파트가 보이는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바로 은평뉴타운의 동남쪽 끝
인 폭포동 힐스테이트아파트이다. 이 아파트는 완전 산속에 묻힌 아파트단지로 교통이 썩 좋
지는 못해 버스를 타려면 도보 10분 거리인 은평경찰서까지 걸어나가야 된다.


▲  하얀 피부의 반석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는 폭포동 계곡

▲  폭포동 계곡에서 만난 어느 문인석과 망주석(望柱石)

이들은 인근 산자락에 있다가 사라진 사대부묘에서 수습된 것으로 여겨진다.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은 근심이 있는 표정으로 눈을 살짝 감으며 상념에 잠겨 있고, 오른쪽 망주석에는 꼬랑
지가 긴 세호(혹은 다람쥐)로 보이는 동물이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다.


▲  폭포동에서 불광2동으로 넘어가는 구름정원길 (선림사 뒷쪽)

▲  선림사 남쪽 구름정원길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된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선림사 남쪽 불광2동에서 쿨하게 마무리 지
었다.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했고 이른 무더위와 장거리 도보로 적지않게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다 살펴보았으니 나름 뿌듯하며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자주는 아니어도 이렇게 종종 찾을 수 있어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둘레길 산책은 흔쾌히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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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원하폭포

▲  관악산 일명사지

▲  보광사 문원리3층석탑



 

여름이 한참 깊어가던 7월 초에 일행들과 관악산(冠岳山, 632m) 문원계곡을 찾았다. 예전
에는 관악산의 품에 자주 안기곤 했으나 그에 대한 마음이 시들시들해졌는지 기껏 가봐야
그의 외곽만 겉돌 뿐, 그곳 정상<연주대(戀主臺)>을 오른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가 버렸다.
연주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만에 관악산과 인연을 짓고자 여름에 걸맞은 정처를 물색하다
가 과천(果川)에 있는 문원계곡을 찾기로 했다. 이곳은 관악산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
踏處)이자 대표적인 피서의 성지(聖地)로 관악산 뒷통수에 자리해 있는데, 문원폭포와 문
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등의 명소가 숨겨져 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1시에 정부과천청사역(4호선)에서 일행을 만나 관악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넓게 깔린 교육원로를 가다보면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오른쪽에 2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비좁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이 문원계곡으로 인도하
는 길로(이정표가 있음) 길 양쪽에는 철책이 둘러져 답답함을 안겨준다.
그런 길을 4분 정도 들어가면 산림초소가 나오면서 비로소 관악산 산길이 펼쳐진다. 여기
서 서쪽으로 가면 백운사(용운암)란 절이 나오고, 직진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 동북쪽으로 가면 문원계곡 산길이다.


▲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두 행정관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짓눌려 좁고 각박한 길이 되어버렸다.
관악산 탐방객을 위해 길을 조금 트여주면 좋으련만..


 

♠  문원계곡(文原溪谷) 입문

▲  문원계곡의 생매장 현장

문원계곡은 관악산을 수식하고 있는 주요 계곡의 하나이다. 관악산에는 바로 근처에 있는 자
하동천(紫霞洞天) 계곡을 비롯해 관악산계곡(서울대 서쪽), 관음사계곡(남현동), 삼성천계곡
(안양예술공원)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반해 문원계곡은
아기자기한 변화도 좀 보이고 있고, 높이도 제법 되는 자연산 폭포를 2개나 간직하고 있다.

정부과천청사역에서 문원계곡으로 가는 길목에는 식당이나 가게가 전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지체높은 정부청사와 여러 공공기관이 단단하게 자리하여 그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번잡하지 않아서 좋음) 그러니 먹거리를 사거나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면
정부과천청사역 10번이나 11번 출구로 나가거나 KT과천지사 정류장에서 내리기 바란다. 그곳
이 과천의 중심지로 식당과 가게가 많다.

문원계곡은 관악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정부청사 서쪽으로 흐르는데, 옛 기술표준원 북쪽에서
그만 강제 생매장을 당한다. 강제로 지하에 묻히는 계곡의 한이 얼마나 깊은지 물소리가 귀신
을 쫓아낼 정도로 우렁찬데 아무리 공공기관이라도 계곡이 그리 크지도 않거늘, 계곡에 대한
부족한 배려가 참 아쉽다. 허나 다행히 생매장 구간은 짧아서 옛 기술표준원을 지나면 교육원
로 남쪽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기술표준원은 충북혁신도시로 이전되었음)

산림초소를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문원
계곡 하류가 나온다. 생매장 직전인 이곳에 폭
포 2개가 연달아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데 이
들은 자연산이 아닌 지형을 이용하여 다듬은
인공폭포이니 속지 말자. 문원계곡의 알짜배기
폭포는 여기서 더 들어가야 된다.

▲  인공(人工)이 가해진 문원계곡 하류 폭포

 


▲  각세도의 성지(聖地), 신계 이선평(晨鷄 李善枰)의 묘역

인공폭포를 지나면 산길 오른쪽으로 소나무 그늘에 묻힌 무덤과 안내문이 손짓을 한다. 전혀
정보가 없는 무덤이라 안내문을 기웃거리니 각세도(覺世道)를 세운 이선평의 묘역이다. 각세
도에서는 그를 도조(道祖)로, 그의 묘는 성묘(聖墓)라 추앙하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선평(1882~1956)은 황해도 문화군(文化郡) 태산촌(泰山村)에서 태어났다. 조선 2대 군주인
정종(定宗)의 16대손으로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에 정진했는데, 평양 근교에서 '천하대보 정
진무외(天下大寶 正眞無外)'라는 글귀가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고 각세(覺世)의 진리를 깨달
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 인근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 도를 닦으면서 의술과
복점(卜占), 풍수지리서를 익혔다고 한다.

수도를 마치고 잠시 세상으로 내려와 군의(軍醫)가 되기도 했으나 1907년 군대해산으로 실업
자가 되자 다시 수도를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1913년 비봉산(飛鳳山)에 들어가 1,000일 기도
에 돌입했다.
기도를 벌인지 488일째 정오에 남쪽 하늘에서 황금색으로 쓰인 각세도 3자가 나타났다. 그리
고 다음날에는 서쪽 하늘에 '원각천지 무궁조화 해탈사멸 영귀영계(圓覺天地 無窮造化 解脫死
滅 永歸靈界)'란 16자의 주문이 나타났다고 하며 그 이후 초하루부터 매일 1자씩 하늘에서 글
씨를 받아 30계명과 도기(道旗), 각세훈사(覺世訓詞) 등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1,000일을
채우고 속세로 내려와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치니 그것이 각세도의 시작이다.

왜정(倭政) 말기에는 신도가 3만에 이르렀고, 해방 이후에는 10만까지 늘어났으며, 이선평은
문원계곡 하류에 세심정(洗心亭)이란 초막을 지으며 포교를 벌이다가 마땅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1956년에 세상을 떴다. 그래서 후계자를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나 여러 갈래로 갈라지
게 된다. (이선평과 각세도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겠음)

이선평의 묘는 1976년부터 2년 동안 성역화 사업을 벌였으며,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망주석(
望柱石) 1쌍, 묘비,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를 대충 덤으
로 챙기고 서둘러 문원계곡으로 들어섰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문원계곡 산길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문원계곡 중류
한여름에는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으며, 피서객들의 욕탕이 되버린다.

▲  문원계곡 바위 산길 - 보호 난간이 등산객의 발길을 지켜준다.

문원계곡 산길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느긋하다. 산길과 계곡과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
다가 바위 산길(이선평 묘역과 문원하폭포 중간)에서 잠시 멀어지는데 바위 벼랑 밑으로 아득
하게 계곡이 보인다.


▲  바위 산길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숲 너머로 과천 시내와 청계산(淸溪山)이 두 눈에 들어온다.

▲  문원계곡을 건너는 나무 다리
바위 산길을 지나면 잠시 멀어진 계곡과 다시금 가까워진다. 그 상태는
문원폭포까지 쭉 이어져 서로의 끈끈한 정을 과시한다.

▲  나무다리 주변 문원계곡 중류


 

♠  문원계곡의 꿀단지, 문원하폭포와 문원폭포

▲  관악산 제일의 폭포, 문원하폭포(文原下瀑布)

산림초소에서 천천히 30분 정도 오르면 계곡 상류에 걸린 문원하폭포(이하 하폭포)가 마중을
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를 문원폭포로 알고 있었으나 이는 답이 아니었다. 그 문원폭포는 여
기서 더 올라가야 되며, 그 폭포 밑에 있다고 해서 문원하폭포라 불린다. 허나 외모는 문원폭
포보다 하폭포가 훨씬 잘났다. 그래서 문원폭포보다는 하폭포가 이곳의 중심 폭포이자 관악산
제일의 폭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차라리 하폭포를 문원폭포라 하고, 문원폭포를 문원상
폭포나 윗폭포로 칭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하폭포는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명주 자락을 늘어뜨린 듯 하얀 물보라를 쏟아내는데, 위에
서 바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거의 20도 정도로 구부러졌다가 다시 바위
를 타고 힘차게 내려온다. 폭포의 높이는 약 20m 정도로 폭포 밑에는 물놀이 하기에 좋게 얕
은 수심의 못이 형성되어 있으며, 폭포 남쪽에 산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폭포가 있는
바위는 안전을 위하여 하얀 금줄을 쳐놓았으나 어기는 산꾼이 적지 않다.

관악산은 산세와 바위는 참 일품이지만 문원계곡과 관악산 제일의 경승지로 추앙받던 자하동
천을 빼면 계곡도 평범하고 폭포도 거의 없다. 그나마 문원계곡이 좀 아기자기한 편이고, 그
곳에 빚어진 하폭포와 문원폭포가 관악산에서 제일 화끈하게 폭포의 패기를 보여준다.


▲  위에서 바라본 하폭포

▲  반석으로 이루어진 하폭포 윗쪽

하폭포 옆구리를 통해 폭포 위쪽으로 오르면 계곡을 둘러싸고 넓게 펼쳐진 반석이 나온다. 문
원계곡을 찾은 산꾼들이 많이 쉬어가는 쉼터로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난 마당바위를 오르면 일명사지와 연주암으로 이어지고,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문원폭포
가 나온다. 그리고 서북쪽 길로 오르면 육봉과 팔부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정상(연주대)이 목적
이라면 북쪽 마당바위로 오르면 된다.


▲  하폭포 윗쪽에 자리한 마당바위

▲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정경백(鄭景伯) 바위

마당바위 꼭대기에는 큰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살짝 밀면 당
장이라도 때굴때굴 굴러떨어질 것 같은 기세인데, 그의 피부에는 한자로 큼지막하게 '정경백'
이라 쓰여 있다. 바로 그 바위글씨 때문에 '정경백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정
경백은 사람 이름으로 뭐하던 양반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씨의 폼을 보니 구한말이나 왜정 때
새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찾은 정경백은 문원계곡의 뛰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지면서 마당바위 피부가 아닌 이
바위에 이름 3자를 낙서로 남겼다. 인명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에도 그의 정보가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면 그저 평범한 선비거나 글 좀 아는 백성인 듯 싶으며, 바위에 이름을 남긴 인연으로
비록 그의 정체는 몰라도 그의 이름은 바위와 함께 지금까지 남게 되었고, 관악산의 주요 바
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관악산에 널린 바위 가운데 사람 이름을 취한 바위는 이
것이 유일하다.


▲  정경백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과천과 의왕시내, 청계산, 광교산)

  하폭포에서 문원폭포로 인도하는 산길

   ◀  그늘에 숨겨진 문원폭포(文原瀑布)
하폭포에서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그
늘에 묻힌 문원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폭
포는 위성지도에도 나올 정도로 그 위용을 속
세에 드러내고 있지만 문원폭포는 숲 그늘 속
에서 수줍게 물보라를 피운다.
폭포의 높이는 10m 정도로 하폭포에 비해 볼
품도 많이 떨어지고 물소리도 차분하다. 거의
90도 각을 이룬 윗부분을 빼면 경사도 거의
40~50도 정도로 물이 미끄럼을 타듯 부드럽게
내려와 착지를 한다.
폭포 옆에는 벼랑이 있는데 그 벼랑 밑에 비
와 눈을 피할 정도로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
다.
거의 석모도 보문사(普門寺)의 눈썹바위와 좀
비슷한 모습으로 그곳에 태극기를 비롯해 기
도나 굿에 사용하는 물건과 그것을 보관하는
공간이 있어 굿이나 기도터로 몰래 쓰이고 있
음을 알려준다.


▲  시원찮게 떨어지는 문원폭포 윗도리

▲  문원폭포 옆 기도처
깎아지른 벼랑 밑도리에 움푹 들어간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 있어 기도나 굿터로
암암리에 쓰이고 있다. 아마도 이곳의 지기(地氣)가 높거나 지형상의 이유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승려와 참선하는 사람들의 수행 공간이나
산악신앙의 현장으로 바쁘게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원폭포 아랫 계곡 (왼쪽은 폭포 옆
기도터로 인도하는 길)


 

♠  하늘과 가까운 곳에 숨겨진 옛 절터, 관악산 일명사지(逸名寺址)
- 경기도 지방기념물 191호

▲  동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육봉일명사지)

▲  서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하폭포에서 마당바위를 지나 각박한 산길을 6~7분 정도 오르면 긴 석축이 나온다. 그 석축이
바로 옛 일명사터로 석축 앞에 관련 안내문이 서 있어 등산객들의 관심을 호소한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명사터는 육봉(六峰) 밑에 있다고 해서 육봉일명사터라 불리기도 한
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육봉일명사지') 절터의 면적은 400평 정도 되는데, 이곳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비밀을 캐려는 집념으로 1999년 절
터를 뒤집은 결과 연꽃잎이 새겨진 연화문대석(蓮花紋臺石) 2점과 석탑(石塔)의 잔재 1기, 우
물 2곳이 나왔고, 조선시대 암막새기와 조각 20여 점이 나왔다. 또한 범어(梵語)가 새겨진 기
와와 무늬가 없는 조그만 기와 등 신라 후기 기와도 여럿 나와 신라 후기에 법등(法燈)을 켰
음을 짐작케 한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절터의 입을 강제로 열면서 그동안 밝혀진 사실을 정리하면,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가 고려 중기나 후기에 망한 것으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세기 후반에 다시
중창되어 그런데로 절을 꾸리다가 17세기 후반에 완전 문을 닫고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재정 악화와 주변 사찰과의 경쟁 등이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 무리한 조세와 공납(貢納), 고적한 곳에 위치한 지리적 불리함 등으로> 만약 산사태 등의 자
연재해로 망했다면 절터가 좀 온전하지 못해야 되는데 절터는 너무 선명하다.

절터에는 건물터와 석축, 연화문대석이 있는데, 절이 망한지 꽤 되었음에도 절터가 원형을 잃
지않고 잘 남아있어 관악산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관악산에는 이곳 외에도 연
주암의 전신(前身)으로 여겨지는 관악사(冠岳寺)터가 있으며, 관악산과 삼성산은 신라 후기부
터 절이 많이 생겨나 북한산(삼각산)과 더불어 수도권 불교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특히 연화
문대석은 관악산에 남아있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받고 있어
일명사도 왕년에 꽤 잘나갔음을 가늠케 한다.
그 잘나가던 절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가늠할 수 없는 전설이 되었고, 건물을 받쳐들던 주춧돌
만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받들고 있으니 참 인생무상이 아닐 수 없다. 일명사는 스스로를 태
우며 그 위대한 진리인 인생무상 4자를 우리에게 진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 허나 그러면 뭐하
나. 인간은 동물과 신(神) 사이에 어정쩡하게 들어앉은 존재라 그것을 죽기 전에나 깨달으니
말이다.

일명사터는 하폭포에서 연주암 가는 길목에 있어 찾기는 쉽다. 연화문대석 2기는 절터 한복판
에 박혀있어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석탑의 잔재와 우물은 절터 인근 수풀에 묻혀 있다.
석탑은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산11


▲  일명사터 석축

▲  여름 햇살을 즐기고 있는 일명사터 중앙 건물터
다른 건물터와 달리 규모가 크고 절터 중앙에 자리해 있어 절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으로 여겨진다.

▲  일명사터 동쪽 건물터
조그만 건물이 여럿 뿌리를 내렸던 곳으로 산신각(山神閣)이나 명부전(冥府殿),
요사채 자리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  화석처럼 박힌 연화문대석 형제
이들은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석불 대좌(臺座)의
일부로 여겨진다. 관악산의 몇 안되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게
새겨진 것으로 천하에 짧게나마 주목을 받았다.

▲  절터 북쪽 석축과 돌다리

절터 북쪽과 동쪽에는 조그만 물줄기를 두어 산에서 내려온 시냇물을 아래로 흘러보낸다. 이
렇게 배수 시설까지 갖추어 식수를 해결하고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도
대비를 했는데, 석축 북쪽에는 통돌을 깔아 조그만 돌다리까지 두었다.

일명사터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내려갔다. 기분 같아서는 오랜만에 연주암까지 오
르고 싶었지만 거까지 가려면 1시간 이상 각박한 산길을 올라야 되고, 날씨도 무지 덥다. 하
여 쿨하게 포기하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오늘 인연도 아님에도 억지로 인연을 짓는 것은 그렇
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문원계곡 하류인 산림초소로 내려와서 바로 속세로 향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마애승용군을 찾
았다. 그곳은 산림초소와 매우 가까운데,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 있어 찾기는 쉽다.
오르는 길도 그리 힘든 편은 아니라서 2분 정도 수고하면 바위 2개와 소나무가 마중을 나오는
데, 소나무 서쪽 바위에 '용운암 마애승용군'이 자리해 있다.


▲  바위에 새겨진 용운암 마애승용군(磨崖僧容群) - 과천시 향토유적 4호

이름도 참 생소한 마애승용군(이하 승용군)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승용(僧容)은 승려의 얼
굴을 뜻한다. 그러니 쉽게 풀이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된다. 승용군 앞에 붙은 용
운암은 부근에 자리한 절 이름으로 예전에는 승용군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홍촌(洪村) 마애승용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 밑에 홍촌이란 마을이 있어서 유래된 것이
다.

보통 불상이나 보살 등을 바위에 새겨 마애불(磨崖佛)로 삼지만 그들 대신 승려의 얼굴을 새
긴 경우는 천하에서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바위 윗도리에 얼굴 3구가 새겨져 있고, 밑도리에
2구가 간결하게 스며들었는데, 얼굴이 하나 같이 동자승처럼 밝고 귀여운 표정이다. 3명은 정
면을, 2명은 측면(側面)상을 하고 있으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불상도 아닌 승려 얼굴을 새겼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해답은 없다. 승려
를 귀족처럼 받들던 고려 때 관악산의 이름 있는 승려를 기리고자 얼굴을 새겼을 가능성도 있
으나 이 역시 부질없는 추측일 뿐이다. 참고로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관악산 서쪽 자락인 안
양예술공원에 마애종(磨崖鍾)이 새겨져 있는데, 범종과 이를 치는 승려가 조각되어 있다. 이
역시 이 땅의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새겨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관악산에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존재가 1종류도 아닌 2종류가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
다.


▲  바위 윗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3구
가운데와 오른쪽 승려는 정면을 보고 있고, 왼쪽 승려는 옆을 보이고 있다. 눈썹과
살짝 감긴 눈, 코, 입, 귀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표정이 하나같이 앳된
동자승이나 원숭이처럼 해맑기 그지 없다.

▲  바위 밑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2구
귀마개나 이어폰을 낀 것 같은 왼쪽 승려는 정면을, 오른쪽 승려는 옆을 보고 있다.
승려 얼굴 상 외에도 정체가 아리송한 문양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  승용군 바위 뒤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근래까지 불공 장소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래된 마애미륵불이 있다.


 

♠  법등의 역사는 짧지만 문화유산 3점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과천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의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관악산 문원계곡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오다가 과천중앙고 서쪽에 자리한 보광사에 잠시 발을
들였다.
교육원3거리에서 교육원로를 따라 6~7분 정도 걸으면 길 왼쪽(남쪽)에 보광사를 알리는 이정
표가 손짓을 하는데 그의 손짓에 맞춰 다리를 건너면 바로 보광사가 모습을 비춘다.

이 땅의 흔한 절 이름의 하나인 보광사, 서울과 수도권에만 우이동(牛耳洞) 보광사, 파주 보
광사(☞ 관련글 보러가기), 남양주 보광사, 그리고 이곳까지 60년 이상 묵은 절만 쳐도 최소
4곳이 넘는다.

관악산 남쪽 자락이자 정부과천청사를 바라보고 선 과천 보광사는 1946년에 창건되었다. 이때
법당 6칸과 요사 1동이 닦았는데 현재의 가람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룩된 것으로 2001년
에 극락보전을 새로 지어 법당으로 삼았고, 삼성각과 명부전, 설법전 등을 세워 지금에 이른
다.
법등(法燈)이 켜진 역사는 고작 70년 남짓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싹트지도 못했다. 허나 인
근 문원동 절터에서 오래된 3층석탑과 석조보살입상을 업어와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는 이곳
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았고, 1993년에는 조선 후기 불상까지 새로 영입하면서 매우 짧
은 법등에 비해 오래된 문화유산을 3개나 간직하게 되었다. 비록 보광사와 관련이 없는 것들
이지만 바로 그들 때문에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현대에 지어진 그저 그
런 사찰의 하나로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로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보전을 비롯하
여 명부전과 설법전, 삼성각, 요사, 범종각 등 6~7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설법전(說法殿)
과 요사(寮舍) 같은 경우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밑에도 공간을 만들어 2층을 이루고 있다.

▲  2002년에 지어진 보광사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칠성,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보광사 설법전

◀  관악산이 베푼 물로 늘 만조를 이루는
보광사 샘터과 이끼 옷을 살짝 걸친
석조(石槽)


▲  보광사 경내 동부 <3층석탑과 명부전(冥府殿), 석조보살입상>

▲  보광사 문원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39호

툇마루를 간직한 주지실 앞에 조그만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관문동 절터(어딘지는 모르
겠음)에서 가져온 것으로 하얀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닥돌 위에 얹혀져 있는데 2중의 기단(基
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한 맵시 좋은 탑이다.
이중 바닥돌은 시멘트로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1층 탑신에는 2중으로 새겨진 자물쇠가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 밑에는 얇게 만든 3단의 받침
이 있고, 지붕돌의 처마 끝은 살짝 올려져 약간 경쾌감을 준다.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을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탑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시흥 문원리 3층석탑'이다. 허나 과천은 어엿한 시(市)로 시
흥군에서 분리된지도 30년이 넘었고, 그 문원리도 문원동이 되었건만 명칭은 아직도 30여 년
전에 머물러 있다. 그 쾌쾌묵은 이름을 현실에 맞게 다듬어 '보광사 3층석탑'이나 '과천 문원
동 3층석탑'으로 갈아야 될 것인데 말이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그래도 시대와 지역에 맞게 이
름이 많이 바뀌고 있으나 지방문화재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77호

명부전 앞에는 오래된 석조보살입상이 서 있다. 이 석불은 문원동 15-166번지에서 가져온 것
으로 높이 1.7m 정도 되는 돌에 얇게 선각으로 새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씌우는 선에서 아주
간단히 처리했다. 허나 세월의 태클로 그 선각도 희미해져 자세히 안보면 석불인지 다른 석상
(石像)인지 햇갈릴 정도이다.

갓으로 머리가 가려진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썹과 눈, 입, 코를 새겼으나 거의 표정이 지워진
상태이고 목은 짧지만 두껍다. 돌을 제대로 깎지 않고 그냥 선각만 했기 때문이다. 왼손은 가
슴에 대어 연꽃 봉오리를 잡고 있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見)의 법의(法衣)이다.
많이 부실해 보이는 이 석불은 납작한 얼굴과 짧은 어깨, 간략화된 옷주름 등 도식화된 모습
을 통해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목조여래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2호

극락보전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그중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삼고 있
는 불상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좌상이다. 그 좌우에 자리한 존재들은 대세지보살(大
勢至菩薩)과 관음보살로 2001년에 조성되었다.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의 하례를 받고 있는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서 금칠을 입힌
것으로 원래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있었다고 한다. 6.25가 터지자 어
느 신도가 여주(驪州)로 피신시켰고, 그렇게 개인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이곳에 기증하여
보광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불상의 얼굴은 크고 둥근 편인데, 눈썹이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뜨며 북쪽을 바라
본다. 코는 작고 오똑하며, 붉은 입술 위에 검은 수염이 살짝 그려져 있다. 얼굴이 크다보니
볼살도 많아 보이며, 두 귀는 거의 어깨에 닿는다. 저리 귀가 크니 중생의 민원은 하나도 누
락됨이 없이 잘 들어줄 것이다. (민원도 잘 처리해주는지는 모르겠음)
머리는 나발로 두툼하게 무견정상이 솟아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가슴과 배 사
이에는 연꽃이 새겨진 허리띠가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따로 만들었는데,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구부렸다. 불상의 양식을 보아 조선 초기 또는 조선 초기 양식을 간
직한 조선 중기 불상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126-21 (교육원로 41, ☎ 02-502-2262)


▲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본 관악산
절은 작지만 관악산을 앞뜰로 품고 있어 앞뜰 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보광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반이 넘었다. 칼퇴근의 달인 햇님도 뉘엿뉘엿 그만의
공간으로 꽁무니를 빼고, 장대한 관악산도 어둠의 커텐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한다. 이렇게
하여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는 저물어가는 햇님처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관악산 보광사, 문원계곡(문원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찾아가기 (2018년 7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정부과천청사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정부청사입구 교육원3거리이다. 여기서 국
  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인도하는 교육원로를 6~7분 가면 왼쪽에 보광사가 있으며, 15분 정
  도 가면 오른쪽에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이 나온다. 여기서 마애승용군까
  지는 6~7분, 문원하폭포까지는 35~40분, 일명사터와 문원폭포는 40~45분 정도 걸린다.
* 441, 502, 540, 541, 542, 1-1, 9, 9-3, 11-1, 11-2, 11-3, 11-5, 103, 777, 3030번 시내버
  스를 타고 정부과천청사나 과천주공2,3단지 하차
* 문원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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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간직한 아름다운 휴양림,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형제바위)



' 대전의 숨겨진 보석, 장태산 자연휴양림 '


▲  장태산 자연휴양림 메타세콰이어숲길


 

한밭이라 불렸던 대전(大田)은 이 땅의 6번째 대도시이다. 너무 빡빡하게 도시화가 이루
어진 서울과는 달리 변두리 태반은 자연 공간으로 남아있는데, 분지 지형인 탓에 계족산
(鷄足山), 식장산(食藏山), 보문산, 장태산, 빈계산 등 쟁쟁한 뫼에 감싸여 있다. 그 뫼
의 품에는 교통이 불편한 산골마을이 아직도 많이 있으며, 만인산(萬仞山)과 장태산에는
천하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꿀리지 않는 높은 수준의 자연휴양림이 2개씩이나 있어 여기
가 대도시 대전이 맞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런 대전의 자연휴양림 중 장태산에는 다른 휴양림에는 없는 메타세콰이어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하여 그들의 매력에 단단히 녹아들었고 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그곳으로
미련없이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대전역에 두 발을 내
렸다. 여기서 쉴 겨를도 없이 대전시내버스 급행1번(원내동↔대전역)을 타고 도마시장으
로 넘어가 30여 분 정도 억지로 시간을 죽이다가 장태산 골짜기로 들어가는 천하 유일의
노선, 대전시내버스 22번(서부터미널↔장안동)에 몸을 싣는다. (지금은 '기성동-장안동'
으로 노선이 크게 단축되어 대전 시내에 들어오지도 않음)

나를 담은 버스는 대전의 주요 간선로인 계백로를 달리다가 가수원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수원동 시내를 지나니 회색빛 건물만 보이던 차창 밖 풍경은 180도 돌변해 시
골로 바뀌었고, 흑석동(기성동) 이후 첩첩한 산골로 들어서면서 강원도 산골로 순간이동
을 당한 기분이었다. 대도시에서 접한 깊은 산골의 맛은 그윽하고 신선했던 것이다.

그렇게 산골을 파고 드니 장태산의 물을 먹고 자란 장안저수지가 그림 같은 모습을 드러
낸다. 저수지를 지나면 깎아지른 좁은 협곡으로 들어서게 되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이
마중을 나와 휴양림이 지척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한 굽이를 지나면 휴양림 정
류장에 이르고, 정류장 바로 동쪽에 휴양림 정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버스는 이곳에 나를 뱉어내고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긴 채, 장안동 안쪽으로 총총히 사라
졌다. 장태산의 막다른 산골에 누워있는 장안동은 북쪽으로만 길이 있을 뿐, 나머지 3면
은 싹 산으로 막힌 궁벽한 곳으로 대전에서 가장 깊은 산골이다.


▲  산중에 자리한 장안저수지
겨울 제국이 호수의 아름다움을 시샘했는지 두꺼운 얼음으로 꽁꽁 봉해버렸다.
허나 겨울이 저물고 소쩍새가 울면 호수는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고
활짝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장태산 자연휴양림 정문 직전 메타세콰이어길
이곳은 휴양림 이전부터 메타세콰이어가 숲길을 이루어 휴양림의 대한 첫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  전국 최초의 민간 휴양림이자 전국에서 유일하게 메타세콰이어 숲을
지닌 아름다운 휴양림, 장태산 자연휴양림 입문

▲  장태산 자연휴양림 정문

대전 서남쪽 변두리에 자리한 장태산(長泰山, 374m)의 북쪽 자락이자 형제산(302m) 서쪽 품에
는 대전의 싱그러운 보석인 장태산자연휴양림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송파 임창봉(1922~2002) 선생이 1972년부터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곳으로 24만 평에
2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휴양림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다가 1991년 5월 전국 최초의 민간
휴양림으로 세상에 문을 열면서 메타세콰이어를 잔뜩 심어 휴양림을 값지게 꾸몄으며, 1992년
부터 공익사업으로 운영해 오다가 2002년 2월에 대전시에 운영권을 넘겼다. 대전시는 이를 인
수하여 새롭게 손질, 2006년 4월 25일 시립 자연휴양림으로 다시 빗장을 열었다.

휴양림 주변은 가파른 산에 꽁꽁 감싸여 있고 계곡(매노천)이 그 한복판을 지나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특히 메타세콰이어숲을 지닌 천하 유일의 휴양림으로 이곳에 심어진 메타세콰이어
만 약 6,240그루에 이른다.
대전8경의 일원이자 대전의 대표 관광지 12선의 하나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으며, 이제는 대전
을 넘어 천하 굴지의 휴양림으로 그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휴양림 면적은 약 815,855㎡, 하루 이용 가능 인원은 6,000명 정도이며, 숲속의집, 산림문화
휴양관, 숲속수련장 등의 숙박시설과 숲속어드벤처, 삼림욕장, 생태연못 등을 갖추고 있다.
또한 2003년 4월 미국 과학교사인 카슨이 이끼도룡뇽을 발견했는데 그 넓은 아시아에서 유일
하게 이곳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만큼 휴양림의 자연환경이 우수하고 청정하다
는 뜻으로 휴양림에서는 그들을 귀엽게 포장해 이곳의 캐릭터로 삼았다. (이끼도룡뇽은 대전
주변에서만 발견된다고 함)

▲  장태산 자연휴양림 표석의 위엄

▲  휴양림의 젖줄, 장태산계곡(매노천)


▲ 장태산 자연휴양림의 아버지, 송파 임창봉 선생의 흉상(胸像)
송파는 충남 논산(論山) 출신으로 대전에서 건설업을 하면서 이곳에 넓게 숲을 닦았다.
그에게 이곳을 인수받은 대전시는 4년 동안 손질하여 2006년 4월 재개장하였고 숲을
조성한 송파의 업적과 뜻을 기리고자 그가 닦았던 메타세콰이어 숲길에
그의 흉상을 조성해 그를 기린다.

▲  장태산 자연휴양림의 자랑이자 꿀단지, 메타세콰이어 숲길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의 높이는 30~40m로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모습이 마치 나무들의 사열식을 받는 기분이다.

▲  계곡(매노천)과 잘 어우러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  메타세콰이어 숲길 (관리사무소 방면)

▲  얼어붙은 생태연못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연못 중간에 생태 탐방로가 닦여져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생태연못

▲  생태연못 부근에 단아하게 들어앉은 녹수정(綠樹亭)

휴양림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이곳의 명물이라는 숲속어드벤처가 나온다. 메타세콰이어 윗도리
와 비슷한 높이로 고가(高架) 식으로 설치된 탐방로로 이를 '숲체험 스카이웨이'라 부르며 그
길의 끝에 철골로 이루어진 스카이타워가 설치되어 있다. 그 타워에 오르면 휴양림 일대와 메
타세콰이어의 꼭대기 부분이 훤히 두 눈에 잡히는데 탐방로의 폭이 좁고, 그 밑이 아찔한 높
이라 통행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마치 낭떠러지 위의 낙락장송(落落長松)처럼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메타세콰이어 윗도리를 보
다 가까이서 살펴보라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지만 숲과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하여 잘
가꾸어진 휴양림의 옥의 티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자연 탐방이라고 하지만 이처럼 싱그
러운 자연 공간에 메타세콰이어가 부담을 가질 정도의 인공물을 굳이 지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 숲속 어드벤처 이용 시간 : 3~6월, 9~10월은 9시~18시 (7~8월 9~19시, 11~2월 9~17시)
- 폭설과 폭우, 안전점검 등으로 이용시간은 변경될 수 있음


▲  메타세콰이어숲을 가로지르는 숲속어드벤처 숲체험 스카이웨이

▲  숲체험 스카이웨이 정문

▲  숲체험 스카이웨이


▲  아찔한 높이의 숲체험 스카이웨이

▲  스카이타워를 향해 달려가는 숲체험 스카이웨이
난간 밖은 그야말로 천길 허공이라 염통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어린이는 반드시
어른과 동반해야 뒷탈이 없으며, 탐방로에서 절대로 장난을 치면 안된다.

▲  마치 커다란 주차장 건물 같은 스카이타워

타워 꼭대기로 오르는 길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구조이다. 길의 폭도 좁고, 길도 오로지 하나
이며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허공의 아찔함은 더해만 간다. 만약 타워에서 사고가 생기거나 고
소공포증으로 발이 얼어붙을 경우 정말 난감하게 된다. 자연휴양림에 썩 어울리지 않는 옥의
티 같은 존재. 나중에 휴양림을 손질할 일이 있다면 스카이웨이와 함께 싹 밀어버렸으면 좋겠
다.


▲  스카이웨이 부근에서 바라본 형제산 능선 (저기까지 올라갔음)


 

♠  장태산 자연휴양림 형제봉 주변

▲  생태연못에서 산림문화휴양관으로 인도하는 메타세콰이어숲길 (1)

생태연못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오르면 휴양림 숙소로 쓰이는 산림문화휴
양관과 숲속수련장으로 이어진다. 메타세콰이어가 얼마나 많은지 이 구간에도 아낌없이 포진
하여 눈과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진다.


▲  생태연못에서 산림문화휴양관으로 인도하는 메타세콰이어숲길 (2)

▲  숲속수련장 매점 앞 메타세콰이어 숲길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매점으로 관리사무소 1층에도 식당 겸 매점이 있다.

▲  숲속수련장

▲  산림문화휴양관


▲  숲속수련장에서 형제산 능선으로 인도하는 메타세콰이어 숲길

휴양림에서 그를 품고 있는 형제산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크게 3가지가 있다. 그중 숲속수련
장에서 오르는 길이 가장 느긋하며, 메타세콰이어도 우거져 있어 풍치가 좋다. 지름길을 원한
다면 생태연못에서 형제바위를 거쳐 가는 길이 있으나 경사가 좀 각박하며, 휴양림 가장 안쪽
에 자리한 숲속의집에서 오르는 길은 경사는 느긋하나 코스가 길다.


▲  숲속수련장에서 형제산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
숲속수련장에서 암석식물원을 거쳐 형제산으로 오르는 길은 다소 지그재그이다.
세상살이처럼 각박한 경사의 압박을 줄이고자 그렇게 길을 닦은 것이다.

▲  형제산으로 오르는 길 (1)
끝없이 펼쳐진 저 산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  형제산으로 오르는 길 (2)

▲  형제산으로 오르는 길 (3)

▲  드디어 도착한 형제산 능선, 그곳에 자리한 8층석탑

형제산 능선에 이르니 뜬금없이 석탑 1기가 마중을 한다. 이곳에 왠 석탑인가 싶어서 살펴보
니 두툼한 바닥돌 위에 얕게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8층의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얹혔다.
탑은 특이하게도 8층 짝수를 이루고 있는데, 7층이 아닐까 싶어서 세어보았으나 아무리 봐도
8층이다. (1층을 기단부로 친다면 7층으로 봐도 됨)
탑의 소상한 사연은 알지 못하나 송파 임창봉 선생이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아니면 마
땅히 세울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1~4층 탑신에는 꽃무늬가 진하게 새겨져 있으며 기존의 석
탑과는 다른 독특한 양식으로 지금은 별볼일 없지만 1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면 20세기 이형
(異形) 탑의 하나로 크게 대서특필될지도 모른다.


▲  형제산 남쪽 봉우리에 자리한 장태루(長泰樓)

형제산 남쪽 봉우리에는 8각형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그는 장태산의 이름
을 따서 장태루란 간판을 내걸고 있는데 정(亭)이 아닌 루(樓)를 칭하고 있는 점이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루'급은 아닌데 말이다. 그에 걸맞게 '장태정'으로 이름을 갈았으면 좋겠다.


▲  장태루에서 바라본 장안저수지와 형제산 북쪽

▲  장태루에서 바라본 동쪽 안평산

▲  형제산 정상

▲  형제산 정상에서 바라본 남쪽 (장태산 방면)
이렇게 보니 정말 강원도나 함경도 산골에 파묻힌 기분이다.


형제산(302m)은 장태산휴양림의 지붕으로 휴양림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다. 정상에 오
르면 장안저수지와 장태산 정상 등이 시야에 잡히나 주변이 온통 높은 산들 투성이라 조망의
범위는 그리 넓지 못하다.


 

♠  장태산 자연휴양림 마무리

▲  세모처럼 솟아난 형제산 붙임바위

형제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온갖 막돌이 신세를 지고 있는 붙임바위가 나온다. 지나
가는 사람들이 소망을 담아 붙이거나 심심풀이로 붙인 돌들이 더덕더덕 붙어있어 붙임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휴양림이며 북쪽으로 내려가면 형제산의
제일 북쪽 봉우리이자 장안저수지를 호수로 품고 있는 팔마정으로 이어진다.
팔마정은 중간에 출렁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그곳까지 가보고 싶었으나 산길에 덜 녹은 눈과
얼음이 가득하여 몸도 사릴 겸, 욕심을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보내고 휴양림으로 내려갔다.
겨울 산행에는 그저 안전이 최고지. 팔마정은 아쉽지만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이란 인연에 맡
기면 된다.


▲  형제바위 조망대

정상에서 휴양림으로 조금 내려가면 깎아지른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친 형제바위 조
망대가 나온다. 이곳은 형제바위 윗쪽으로 여기에 올라서면 바로 밑으로 장태산자연휴양림 전
체가 조금의 숨김도 없이 속시원하게 펼쳐진다. 휴양림 전체를 사진에 담고 싶다면 꼭 이곳을
찾기 바란다.


▲  형제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휴양림과 장태산의 첩첩한 산줄기

▲  장태산 산골에 깊게 묻힌 장안동 안쪽

▲  형제바위 (바위는 접근 불가)
형제산을 비롯한 장태산의 명물바위로 그의 모습이 마치 형제처럼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라 하여 형제바위라 불린다. 그를 제대로 보려면
밑에서 봐야 되나 수목의 방해가 적지 않다.

▲  형제바위에서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산길

▲  승려 머리 석불과 2기의 석등

산을 내려오니 승려 머리를 지닌 석불(또는 승
려상)이 나를 맞는다.
이곳에 왠 석불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살펴
보니 두 손으로 동자승 하나를 안고 있고, 벌
거벗은 다른 동자승은 그의 오른팔을 붙잡고
있다. 즉 아기를 안고 있는 어미와 같은 인자
한 모습이다.
기존의 석불 양식과는 많이 다르지만 휴양림을
지은 송파 임창봉 선생이 세운 것으로 여겨지
며 석불 좌우에는 무궁화가 새겨진 석등 2기가
그의 주변을 밝혀준다.

▲  동자승을 안고 있는 석불의
감동적인 모습


▲  야생화원
석불 가까운 곳에 야생화의 보금자리인 야생화원이 있다. 허나 혹독한
겨울 제국에서 영혼까지 털린 상태라 화원에는 황량함만이 가득하다.

▲  야생화원 내부

야생화원을 끝으로 진지하게 진행된 장태산자연휴양림 산책은 마무리가 되었다. 비록 휴양림
의 깊숙한 부분과 그를 품은 장태산까지는 살피지 못했지만 휴양림의 어지간한 부분은 다 살
폈으니 그리 아쉬움은 없다.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현장은 한번에 몽땅 보거나 한번만 오고
말 것이 아니라 다음에 또 오게끔 약간의 아쉬움을 남겨야 다시 인연이 생길 것이다.
봄이나 늦가을에 오면 아름다움에 젖은 휴양림의 진면목을 제대로 누릴 수 있건만 한겨울에
인연이 닿아 이렇게 다소 아쉬운 나들이가 되었다. 허나 겨울에 잠긴 휴양림의 모습도 제법
아름다웠다. 겨울도 이런데 봄과 늦가을은 오죽하랴.

휴양림 정류장으로 나오니 시간은 벌써 15시가 되었다. 마침 버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정
류장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장태산휴양림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대전 22번 버스가 다가
와 활짝 입을 벌린다. 평일이라 장안동과 휴양림 수요는 거의 없어 한산한 상태로 속세로 나
왔다.
이렇게 하여 장태산자연휴양림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찾아가기 (2018년 7월 기준)
* 대전역(대전역 동광장, 역전시장, 목척교)과 1호선 중앙로역(6번 출구), 1호선 서대전네거
  리역(3번 출구), 도마시장, 가수원시장에서 대전시내버스 200번을 타고 흑석네거리나 기성
  농협 하차 → 흑석
  네거리나 기성농협에서 장안동으로 가는 22번 시내버스(30~50분 간격)로 환승
* 숲속의집과 산림문화휴양관에서 1박을 머물 수 있다. 그 외에 야영장도 있으며 자세한 정보
  (이용료)는 아래 장태산자연휴양림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 소재지 : 대전광역시 서구 장안동 산46 (장안로 461 ☎ 042-270-7883)
* 장태산자연휴양림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숲속의집과 산림문화휴양관, 야영장
  이용 정보와 이용료, 숲체험 프로그램 정보가 있음)


▲  꿈 속의 별천지 같은 장태산자연휴양림을 뒤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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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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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속리산 폭포 나들이 ~~~ (장각폭포, 장각동계곡, 오송폭포, 시어동계곡, 성불사, 옥양폭포)



' 상주 속리산 폭포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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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리산 장각폭포

▲  오송폭포

▲  옥양폭포



 

봄이 겨울 제국을 응징하며 얼어붙은 천하에 한참 희망을 내리던 3월 끝 무렵에 친한 후
배와 1박 2일 일정으로 짧게 좁은 천하를 주유했다.
첫날은 강원도 내륙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충북 단양(丹陽)으로 내려가 단양 친척집에
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오랜만에 찾은 단양 시골이지만 다음 날도 갈 길이 멀기에 나머
지 회포는 불투명한 미래로 쿨하게 넘기고 아침을 두둑히 섭취한 다음, 길을 떠났다.

둘째 날은 소백산맥 너머 경북으로 시야를 돌려 예천(醴泉) 지역을 둘러보고 이 땅의 마
지막 전통 주막으로 꿀재미를 보고 있는 삼강주막(三江酒幕)을 찾았다. 거기서 소고기국
밥과 파전, 도토리묵, 두부로 두둑히 점심을 먹었는데 나올 때는 인절미도 1개 구입하여
후식까지 챙겼다.

삼강주막을 나오면서 후식거리로 어디로 갈지 궁리하다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속리산
(俗離山)을 찾기로 했다. 속리산하면 흔히 충북 보은(報恩)과 괴산(槐山) 지역만 생각하
기 쉽지만 경북 상주(尙州)에도 적지 않게 덩치를 걸치고 있다. 바로 그 상주 권역에 이
름난 폭포들이 여럿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데 이들을 시간이 되는데까지 찾아보기로 했다.
그중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장각폭포이다.


 

♠  장각동계곡 하류에 그림처럼 자리한 조그만 폭포
장각폭포(長角瀑布)

속리산의 최고 봉우리는 과연 어디일까? 흔히 문장대(文藏臺, 1,054m)를 생각하기 쉽지만 정
답은 바로 그 남쪽에 자리한 천왕봉(天王峰, 1,057m)이다. 그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계곡이 장각동계곡(長角洞溪谷)으로 그 계곡이 굽이굽이 큰 세상을 향해 흐르다가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 하류에 걸쭉한 폭포를 빚어놓으니 그 폭포가 장각폭포이다.

동쪽을 향해 힘차게 물을 내뱉는 장각폭포는 높이가 겨우 6m 정도인 조그만 폭포이나 수량만
큼은 풍부하여 우렁찬 폭포수 소리에 귀신의 염통까지 쫄깃하게 한다. 폭포 밑에는 용소(龍沼
)라 불리는 깊은 못이 푸르고 청초한 빛을 띄며 상류에서 온 계곡물을 담아두고, 폭포 윗쪽에
는 근래에 지어진 금란정과 아름드리 소나무가 폭포의 운치를 한층 돕는다.
폭포 좌우에는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벼랑이 6~7m 높이로 형성되어 있고 폭포 정면에
는 폭포의 모습을 사진에 잘 담을 수 있도록 포토존(photo zone)이 설치되어있다. 용소 주변
에는 조그만 돌이 많아 조촐하게 백사장을 이루고 있어 피서의 성지(聖地)로도 아주 그만이다.

이곳은 풍경이 아름다워 속리산의 주요 명소이자 피서지로 인기가 높으며, 고려 중기 무인정
권기를 다룬 '무인시대(KBS)'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정리한 '불멸의 이순신(KBS)'
등의 사극이 여기를 거쳐가기도 했다. 무인시대(武人時代)는 무인정권 3번째 권력자인 이의민
(李義旼)이 이의방(李義方)의 명을 받고 거제도로 귀양간 의종(毅宗)을 만나 그의 허리를 분
질러 죽이는 장면을 담았으며, '불멸의 이순신'은 그의 어린 시절, 친한 선배(유성룡과 원균
이 그의 선배로 나왔음)들과 폭포에서 뛰어내리며 담력을 기르는 장면을 담았다. 그외에 '태
양인 이제마(MBC)', 영화 '낭만자객'이 이곳의 신세를 졌다.


▲  겨울 제국(帝國)의 먼지를 털어내며 슬슬 기지개를 켜는
장각동계곡 (장각폭포 직전)

▲  장각폭포 윗쪽, 금란정과 소나무

▲  장각폭포를 수식하는 구수한 양념, 금란정(金蘭亭)

장각폭포 윗쪽에는 금란정이 동쪽을 굽어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그만 팔
작지붕 정자로 20세기 한복판에 지어졌는데 그의 곁에는 소나무들이 운치를 이루며 조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늘 장각폭포와 한 덩어리를 이루며 세상에 그 존재를 진하게 알리고 있으며
정자에 올라서면 폭포와 용소를 비롯해 상오리(上五里) 일부가 좁게나마 시야에 들어온다.

정자의 이름인 '금란(金蘭)'은 주위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이로움은 쇠붙이도 끊을
수 있고 마음을 같이 한다는 말은 그 냄새가 난보다 향기롭다는 복잡한 뜻이다. 정자를 보다
전통식으로 지었다면 지금보다 운치가 더 진했을 터인데, 기둥과 지붕은 어설픈 전통식, 마루
와 난간은 현대식으로 만들어 일종의 절충양식이 되어버렸다. 정자 동쪽에는 금란정 현판이
걸려있다.

▲  최근에 지어진 금란정 기념비

▲  금란정에서 바라본 용소와 그 너머
풍경 (상오리 지역)


▲  장각폭포의 위엄

폭포 밑 용소에는 속리산이 베푼 옥계수들이 푸른 빛을 띄며 모여 있다. 용소의 수심이 꽤 깊
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바닥은 어렴풋이 보인다. 허나 수심은 2m가 넘으니 물놀이를 할 때 반
드시 주의해야 된다. 폭포가 조촐하게 생겼고 폭포 앞에 이렇게 대자연이 빚은 잘생긴 자연산
수영장이 있으니 자연히 피서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으면서 여름에는 무더위에 대항하며
벼랑 중간과 벼랑 위에서 뛰어내리는 용자들이 많다. 허나 그로 인해 물놀이 사고도 적지 않
은 터라 2014년 여름에는 동네 주민들이 벼랑 앞에 그물망을 치기도 했다.

마침 우리가 폭포에 이르렀을 때 2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반바지만 입고 벼랑 중간에 주름진
틈으로 기어올라가 폭포를 향해 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봄이 한참 선전을 해주어 날이 좀 포
근하긴 했으나 그래도 쌀쌀한 기운은 좀 남아있어 물놀이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허나 그들은
젊은 혈기만을 믿고 폭포로 뛰어들며 이른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도 춥기는 한지 큰
수건으로 몸을 가리며 물을 닦느라 부산하다.
그들이 요란하게 거쳐간 후, 폭포 주변은 다시 적막감이 감돈다. 이때다 싶어 잠시나마 폭포
를 나의 전유물로 삼으며 열심히 그를 사진에 담는다. 종종 관광객들이 폭포 밑으로 내려와
사진에 담기는 하지만 콩을 볶듯 금세 가버리고, 폭포 주변은 산바람 소리와 폭포 소리만이
적막감을 살포시 어루만질 따름이다.


▲  장각폭포를 거쳐 큰 세상으로 흘러가는 장각동계곡
이 계곡은 상오리 마을에서 용유천의 일원으로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내려간다.


폭포를 열심히 사진에 담으며 폭포 주변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시어동계곡(오송골)에 자리
한 오송폭포로 이동했다. 장각폭포에서 그곳까지는 약 6km 거리로 가깝지만 옥양폭포까지 모
두 보려는 욕심에 길을 서둘렀다.

※ 장각폭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① 상주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상주행 고속버스가 50~7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30~50분 간격
  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송면 경유 화북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화북 하차 (동서울에서 1일 1
  회, 13시 출발)
* 인천, 부천, 성남, 안산, 청주, 충주, 대전(복합), 김천, 구미, 안동, 대구(북부), 울산에
  서 상주행 직행버스 이용
* 경북선 무궁화호 열차(부산~밀양~경산~동대구~구미~김천~영주)를 타고 상주역 하차 (1일 3
  회, 금/토는 1일 4회 운행)
② 현지교통
* 상주시외터미널에서 화북 방면 시내버스(1일 7회 운행)를 타고 상오리 하차, 장각폭포까지
  도보 7~8분 (상주역에서 갈 경우에는 1.1km 정도 떨어진 상주초교 정류장까지 나와서 버스
  를 타야 됨)
* 화북에서 상주시내 방면 시내버스(1일 7회)를 타고 상오리 하차
③ 승용차 (폭포 주변에 주차장 있음)
* 당진영덕고속도로 → 화서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수청거리3거리에서 좌회전 → 상오리
  에서 장각동, 장각폭포 방면 좌회전 → 장각폭포

*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 ☎ 054-533-3389)



♠  시어동계곡의 아름다운 보석, 오송폭포(五松瀑布)

상오리에서 북쪽(괴산 방면)으로 가다가 장암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입석천을 따라 구비구비
산길을 오르면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 진훤)이 쌓았다고 전하는 견훤산성(甄萱山
城) 입구가 손을 내민다. 견훤은 상주 출신으로 이곳에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하며 경주(慶州
)로 가는 진상품과 세금을 빼앗아 세력의 발판을 닦던 곳이라 전한다. 기분 같아서는 그곳도
흔쾌히 들리면 좋겠지만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되고, 나의 마음은 이미 오송폭포에 가
있던 터라 견훤산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견훤산성입구를 지나면 속리산 화북탐방지원센터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 한굽이 오르면 화북분
소와 문장대주차장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소정의 주차비를 치른 다음 잘 닦여
진 길을 10분 정도 가면 오송폭포 입구가 나오고, 여기서 계곡을 2~3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
의 끝 막다른 곳에 오송폭포가 있다.

오송폭포는 속리산 신선대(神仙臺)에서 발원한 시어동계곡(오송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작품으로 폭포수가 마치 하늘에서 은가루를 쏟아내는 듯한 아름답고 경쾌한 폭포이다. 높이는
15m로 5단(혹은 7단)으로 주름진 벼랑을 타고 폭포수가 내려앉는데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
르지 않으며, 비가 온 이후에는 더욱 장쾌하게 쏟아진다. 폭포 밑에는 담(潭)이 형성되어 있
으나 수심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아주 얕아서 아이들 물놀이 장소 및 물맞이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지금은 비록 흔적도 없지만 예전에는 폭포 옆에 오송정(五松亭)이란 정자가 있어 거기서 오송
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폭포 윗쪽에는 20세기 중반에 창건된 성불사가 자리해
폭포를 거쳐가는 옥계수를 제일 먼저 만진다.


▲  오송지구 문장대 주차장
속리산을 대표하는 문장대를 비롯하여 문수봉과 청법대(聽法臺), 신선대 등
속리산 주능선의 봉우리들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  오송폭포와 문장대로 인도하는 길 (화북분소 부근)

▲  오송폭포 입구 주변 시어동계곡

오송폭포를 끼며 흐르는 계곡을 시어동(侍御洞)계곡이라 부른다. (또는 오송골) 그 이름은 조
선 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속리산을 찾았을 때 땅에 널려있던 칡넝쿨이 모두 나무 위로 올
라가 왕의 행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모셨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물론 칡넝쿨
이 스스로 올라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에게나 제왕일 뿐이지 식물에게는 그저 두 발 달
린 생명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허나 왕이 온다고 하니 지역 수령(守令)들이 왕에게 잘보이고자 백성과 군사들을 들들볶아 칡
넝쿨과 행차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미리 치웠을 것이고, 이를 칡넝쿨이 스스로 올라갔다는 식
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  오송폭포 직전 계곡 - 멋드러진 돌과 반석(盤石)이 제법 널려 있다.

▲  시원하게 물보라를 뿜어내는 오송폭포

▲  옆에서 바라본 오송폭포의 위엄
하얀 실타래를 밑으로 풀어놓은 듯 하다.

▲  폭포 밑 못 - 깊이도 매우 얕고 돌도 그리 거칠지 않아 물놀이나
물맞이 장소로 아주 휼륭하다.

▲  오송폭포 윗쪽

오송폭포를 둘러보고 폭포 윗쪽에 있는 성불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폭포 입구에서 가파른 언
덕길을 오르면 오송폭포로 흘러가는 시어동계곡이 다시 옆에 나타난다. 그 계곡과 함께 속리
산의 품으로 조금 들어가면 속리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성불사(成佛寺)가 모습을
드러낸다.
첩첩한 속리산의 산주름 속에 묻혀있는 성불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창건된 현대 사찰이다.
1980년대 제작된 관광책에 속리산 성불사의 앳된(?)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조그만 삼성각과
양옥처럼 지어진 건물이 전부인 그야말로 숲에 묻힌 조촐한 산사였다. 허나 지금은 속리산이
부담을 가질 정도로 정말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 2층짜리 건물하며 온갖 석탑과 석불을 잔뜩
지어올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따로 없는 것이다.
허나 성불사가 커질수록 속리산의 희생은 그만큼 커지는 법, 더 이상 경내 확장은 하지 않았
으면 좋겠다. 지금 성불사도 충분히 크기 때문이다.


▲  산속에 숨겨진 조그만 궁궐 같은 성불사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등 약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다. 건물들은 하나 같이 덩치가 커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꽤 장대하며, 3개의 옥불(玉佛)을 봉안한 대옥불전(大玉佛殿)은 무려
금칠까지 해놓아 화려함을 더욱 돋구었다.
법등(法燈)의 역사가 짧다보니 오래된 문화유산은 없으며 죄다 199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들
이라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도 않았다. 다만 대웅전(大雄殿) 뒷쪽 삼성각(三聖閣)이 이곳에서
그나마 오래된 건물이며, 나의 관심을 돋굴만한 오래된 존재가 없기 때문에 그냥 가볍게 둘러
보고 절을 나왔다.


▲  피안불로장생문(彼岸不老長生門)과 바위에 새겨진 하얀 선각의 마애불

▲  3개의 옥불(석가불, 미륵불, 아미타불)이
봉안된 대옥불전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과 붉은 닫집

※ 오송폭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① 상주까지 교통편은 앞의 장각폭포 참조
② 현지교통
* 상주시외터미널에서 화북, 입석, 용화 방면 시내버스(1일 7회 운행)를 타고 장암리(문장대
  입구) 하차, 오송폭포까지 도보 50분, 성불사는 1시간 / 주말과 휴일에는 입석, 용화 방면
  시내버스 중 3회(상주발 7:40, 11:10, 16:40)가 화북분소 문장대주차장까지 들어간다. (평
  일에는 안들어감)
* 화북에서 입석, 용화 방면 시내버스(1일 7회) 이용 또는 택시 이용 (주말과 휴일에는 입석
  , 용화 방면 시내버스 중 3회가 화북분소 문장대주차장까지 들어감)

③ 승용차 (주차비는 유료)
* 당진영덕고속도로 → 화서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수청거리3거리에서 좌회전 → 상오리
  → 장암교차로에서 좌회전 → 화북분소 문장대 주차장

* 오송폭포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 ☎ 054-533-
  3389)
* 성불사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산33 (문장대2길 293, ☎ 054-532-5555)


 

♠  자연산 돌다리를 위에 두룬 옥양폭포(玉樑瀑布)

오송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밑으로 내려가 북쪽으로 길을 향했다. 7km를 달려 충북 괴산 땅을
바로 코 앞에 둔 입석리에 이르니 길 왼쪽에 '백악산 옥양폭포'와 '석문사'를 알리는 이정표
가 슬며시 얼굴을 내민다. 그의 안내를 따라 인적도 없는 각박한 고갯길을 올라가다가 석문사
(石門寺) 직전 적당한 공터에 차량을 세우고 백악산의 품으로 들어서니 이내 석문사가 모습을
비춘다.

석문사는 백악산(白岳山, 858m) 동쪽 자락 옥양골에 묻힌 조그만 현대 사찰이다. 옥양폭포 북
쪽 절벽에 있는 굴 주위에 보굴암(寶窟庵)이란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절의 뒤를 잇고자
지어진 듯 싶으며 법등의 역사는 앞서 성불사보다 짧은 듯 싶다. 대웅전과 요사(寮舍), 벼랑
밑에 세운 석불 등이 전부로 요사 옆에는 장독대들이 가득 놓여져 음식들이 한참 숙성의 과정
을 밟고 있다.
그 곁에는 나무 장작으로 밥과 국을 짓는 작은 부뚜막이 있는데 무슨 국을 끓이고 있는지 김
이 모락모락 푸른 하늘에 회색 점을 찍는다.

백악산이 베푼 옥양골 계곡은 경내를 가로질러 흘러가며 계곡 옆구리에 석축을 높이 쌓아 길
과 경내를 닦은 점이 적지 않게 옥의 티로 남는다.


▲  옥양폭포, 석문사로 올라가는 길

▲  석문사 곁을 흐르는 옥양골 - 계곡 옆구리에 적지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상당히 아쉽다.

▲  석문사를 지키는 백구(白狗)의 위엄
간밤에 무리를 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절을 지키는 그가 있기에 오늘도 석문사는 평화롭다.

▲  눈썹 모양의 장대한 바위 밑에 자리한 석불좌상

바위 그늘에 석불이 들어앉아 동쪽을 바라보며 한참 선정(禪定)에 잠겨있다. 바위 윗쪽이 눈
썹처럼 두텁게 나와있어 눈과 비를 피할 수 있고 주변에 소나무도 무성해 바람 또한 그를 마
음껏 희롱하지 못한다. 다만 바위 윗쪽이 무너지면 그냥 게임 끝~~!
바위의 풍채가 대단하여 예로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 아니었을까 싶으며 석문사에
서 그나마 두 눈을 호강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  옥양폭포 윗쪽

석문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며 폭포를 찾았으나 경내 계곡에는 폭포 비슷한 것도 보이질 않는다.
하여 절 밑에 있을 듯 싶어 (절 윗쪽은 출입금지임~) 계곡을 살피며 차를 세운 곳까지 내려왔
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옆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있다. 그래서 벼랑 밑을
살펴보니 무언가 두터운 존재감이 느껴진다. 바로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옥양폭포였다.

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다소 경사가 급하다. 그 길을 조심스레 임하면 폭포의 윗도리가 나오는
데 특이하게 폭포 윗도리와 아랫도리 사이에 돌다리처럼 생긴 길쭉한 막대형 돌이 걸려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인공이 아닐까 싶었으나 자세히 보니 대자연 형님이 빚은 돌다리였다. 그
모습이 마치 돌다리, 또는 대들보처럼 생겼는데 폭포의 이름인 양(량, 梁)이 바로 대들보를
뜻한다. 옥(玉)은 폭포의 풍경과 폭포수를 옥으로 비유한 것이니 자연히 폭포의 대들보를 의
미하게 된다.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옥양(옥량)폭포는 높이가 약 20m에 이르며, 은빛 물보라를 일으
키며 흘러가는 폭포 윗쪽에 길이 20m, 두께 1.5m 정도 되는 자연산 돌다리가 걸쳐져 있다.


▲  윗쪽에서 바라본 폭포와 자연산 돌다리 ▼

옥양폭포의 백미(白眉)는 폭포 위에 있는 자연산 돌다리이다. 큼직한 바위와 돌들이 밑에 깔
려있고, 그 중간에 폭포수를 위한 통로가 뚫려 있어 마치 사람의 손이 간 것 같기도 하다. 그
위에 장대한 크기의 하얀 돌이 길쭉하게 다리처럼 놓여져 있는데 사람이 만든 돌다리보다 더
튼실한 모습이다. 대자연의 거룩한 작품 앞에 사람들은 그저 감동과 감탄사를 연발하고 문자
꽤나 쓴다는 사람들은 한낱 언어와 문자로 폭포의 아름다움을 감히 표현한다.
앞서 본 장각폭포와 오송폭포도 아름다운 폭포임은 분명하나 천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포
의 형태로 개성은 조금 부족하다. 허나 옥양폭포는 그들보다 덩치도 크고 자연산 돌다리라는
희귀한 아이템까지 가지고 있어 이날 본 폭포 가운데 단연 으뜸이다. (앞서 폭포는 조연, 옥
양폭포는 주연) 게다가 그리 알려진 곳도 아니라서 인적도 거의 없다.


▲  폭포 윗쪽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 (옥양폭포 바위글씨가 새겨짐)

▲  옛 사람들이 새긴 옥양폭포 바위글씨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옛 사람들은 경치가 좋은 곳 바위에 꼭 바위글씨를 남기는 버릇이 있었다. 옥양폭포 역시 그
예외는 아니라서 조선 후기 언젠가 이곳을 거쳐간 선비들이 걸쭉하게 낙서와 이름을 남겼으니
그 글씨가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다.


▲  밑에서 바라본 옥양폭포
자연산 돌다리 중간에 뚫린 수구(水口)를 통해 폭포수가 힘차게 쏟아진다. 돌다리
모서리 부분은 경사가 급해 자칫 미끄러져 폭포 밑으로 추락할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기 바란다.

▲  폭포 돌다리와 옥양폭포

▲  옥양폭포 밑부분
옥양폭포에서 급하게 흥분기를 보인 옥양골 계곡은 폭포를 내려오면서 비로소
진정을 되찾는다. 이곳도 피서지로는 아주 좋은 곳..

◀  수구를 거쳐 장쾌하게 쏟아지는
옥양폭포 폭포수의 위엄

옥양폭포 북쪽 절벽 위에는 조그만 굴이 있다. 굴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지만 그
굴 속에는 옛날에 미륵불이 있었고, 굴 밖에는 보굴암이란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조
선 초기에 나중에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의 왕위를 빼앗으려는 움직임
을 보이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수양의 딸이 이를 만류하다가(또는 신하들에게 아버지가 하는
일이 옳지 못함을 말하고 다녔다고 함~)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서울에서 추방되었다. 그래서
이 굴에서 숨어 살았다고 전한다. (그 딸의 존재도 불투명함)

※ 옥양폭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송면 경유 화북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옥양동 하차 (동서울에서 1일
  1회, 13시 출발)
* 상주시외터미널에서 입석리행 시내버스를 타고 삼송(옥양동) 하차 (1일 4회 운행 / 7:40,
  11:10,16:40, 18:15)
* 동서울터미널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운행 → 괴산시외터미널 부근 아성
  교통 군내버스터미널(시외터미널에서 동쪽으로 도보 3분)에서 옥양동(입석리)행 군내버스(
  1일 4회 운행)를 타고 삼송(옥양동) 하차
* 삼송(옥양동) 정류장에서 석문사 방향으로 도보 10분
*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대자연의 기묘한 작품, 옥양폭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가 되었다. 봄이 서서히 천하
를 평정하면서 낮도 많이 길어졌지만 일요일 오후에 지방에서 서울(수도권)까지 올라가는 길
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 날씨가 따스해지자 행락객들이 대거 지방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하여
옥양폭포를 끝으로 1박2일에 걸친 천하 유람을 쿨하게 마무리 짓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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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양의 상큼한 꿀단지를 거닐다 ~ 삼성산 안양예술공원, 김중업 건축박물관, 안양사지 겨울 나들이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 묵은 해의 끝에 찾아간 안양예술공원, 안양사터 나들이 '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  안양사지와 김중업박물관

▲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3층석탑

▲  석수동 마애종


 

새해가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건만 벌써 연말의 끝에 이르렀다. 이제 며칠이 흐르면
올해는 완전히 끝나고 새해로 포장된 날이 밝아와 연말 우울감에 빠진 인간들에게 새해
의 부질 없는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그렇게 우리네 인생은 챗바퀴처럼 비슷한 데를 돌
고 또 돈다. 하여 연말의 우울감도 잠시 잊을 겸, 올해의 마지막 나들이로 삼성산 남쪽
에 길게 누운 안양예술공원을 찾았다.

안양예술공원은 삼성산(三聖山)과 관악산(冠岳山)으로 오르는 주요 기점으로 경관이 아
름답고 볼거리가 풍부하여 소풍 및 등산/답사/출사/피서 수요가 대단하다. 게다가 접근
성도 매우 좋고 서울과도 지척이라 계절과 날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 마를 날이 없다.
관악산과 삼성산이 사이좋게 빚어놓은 삼성천을 따라 서울대 관악수목원까지 길게 이어
져 있는데 비록 예술공원을 칭하고 있지만 원래는 안양유원지로 70여 년의 기나긴 역사
를 간직한 서울 근교에서 가장 오래된 유원지이다.
1950년대에 벌써부터 수영장이 생겼을 정도로 서울 근교의 제일 가는 유원지로 미친 존
재감을 드날렸으나 1990년대 이후 서서히 망해가던 것을 2005년에 안양시에서 유원지의
명성을 되찾고자 안양예술공원으로 새롭게 간판을 갈아치우고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
젝트'를 도입했다.
그 프로젝트에 따라 국내외 예술 작가의 예술 작품 50여 점을 공원에 설치하여 '지붕이
없는 미술관'으로 시민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고, 삼성천과 산책로, 편의시설 등을 정
비하고 조명시설까지 갖추어 야경(夜景)까지 배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유원지
기능을 완전히 내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 원래부터 삼성산과 관악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유원지라 그 성격을 완전히 갈아엎는 것은 어렵다. 휴양과 나들이, 유원지의 기능을 바
탕으로 문화와 예술을 얹힌 것이 지금의 안양예술공원이 되겠다.


▲  안양예술공원을 촉촉히 어루만지는 삼성천 (안양워터랜드 주변)


 

♠  칙칙한 공장을 걷어내니 숨겨진 절터가 기지개를 켜는구나~~!
제약공장에서 역사와 문화의 공간으로 거듭난 상큼한 현장
~ 안양사터(安養寺)터와 김중업건축박물관(안양박물관)

안양예술공원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옛 유유산업과 안양사터를 만나게 된다. 예술공원의 젖줄
인 삼성천 북쪽에 자리한 이들은 예술공원의 어귀로 예술공원로(공원 산책로)에서도 훤히 바
라보이는데 예전에는 유유산업이란 제약 공장이 들어앉아 고얀 연기로 하늘과 삼성산을 찌르
던 현장이었다.
삼성산과 안양유원지의 아름다운 경관을 적지 않게 들쑤시던 유유산업은 1959년에 유특한 회
장이 세웠다. 비나폴로 등의 비타민을 생산하던 제약 공장으로 공장 건물은 당시 건축의 1인
자로 삼일빌딩과 평화의문, 프랑스대사관 등을 설계했던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이 설계했
으며, 굴뚝과 경비실까지 모두 그의 손에서 디자인되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공장이 들어앉은 터는 안양의 지명 유래가 되었던 안양사터였다. 허나 그
때까지만 해도 바깥으로 드러난 절터의 흔적은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3층석탑, 약간의 주춧돌
뿐이었고 오로지 경제 개발이 우선이었던 시대라 절터를 싹 밀고 공장을 닦았다.

이후 안양유원지 초입에서 의약 발달을 향한 집념의 연기를 내뿜던 유유산업은 2007년, 공장
증축을 꾀했으나 인허가 제한으로 어렵게 되면서 48년 동안 기대던 안양 공장을 버리고 충북
제천(堤川)으로 둥지를 옮겼다.
유유산업이 그렇게 자리를 뜨자 안양시는 공장과 부지를 240억에 매입했으며, 문화재청의 권
고에 따라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 5동을 제외하고 모두 부셨는데, 그 과정에서 공장에 가려져
고통받던 절터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차에 걸쳐 발굴조
사를 벌인 결과 '안양사(安養寺)'라 쓰인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안양사터임이 밝혀졌으며,
중초사와 안양사가 별개의 존재가 아닌 같은 존재임이 드러났다.

안양사터의 등장으로 잔뜩 흥이 오른 안양시는 이곳을 김중업박물관과 안양사지 전시관을 갖
춘 복합문화공간이자 안양예술공원을 수식하는 상큼한 꿀단지로 꾸미기로 마음 먹고 2013년에
발굴로 어수선했던 안양사지를  복원했다. 그리고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 5동을 손질하여 드디
어 2014년 3월 28일, 안양 최초의 박물관이자 안양사터까지 아우른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때 제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가 2달 동안 열렸으며 2017년 9월에는 평촌에 있
던 안양박물관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2개의 박물관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김중업의 일생과 작품을 다룬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관련
문헌 자료, 안양시의 역사와 문화를 머금은 안양박물관, 그리고 특별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이들 전시관은 모두 김중업이 설계했던 옛 유유산업 건물을 다듬은 것으로 뜨락에는 옛
안양사터가 펼쳐져 있어 신라 후기와 고려, 조선, 현대까지 모두 아우른 문화/역사의 공간이
다.


▲  중초사지(中初寺址) 3층석탑과 당간지주

유유산업이 멋모르고 깔고 앉았던 안양사터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시절인 826
년에 창건된 중초사(中初寺)에서 비롯되었다.
중초사는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약간의 건물터를 남겼는데 당간지주의 겉모습은 그저 흔한 모
습이지만 이 땅에서 유일하게 조성 시기와 공사 참여자 이름, 절 이름이 담긴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것만으로 이미 다른 당간지주와 크게 차별화된 가치가 높은 보물이다. 특히 안양사에
묻혀 잊혀질뻔한 중초사의 이름 3자를 고맙게도 밝혀주고 있으며, 바로 그 명문 덕에 일찌감
치 보물 4호라는 큼지막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조성 명문은 서쪽 돌기둥 바깥쪽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826년 8월 6일, 절 동쪽 승악(僧岳, 관악산으로 여겨짐)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
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돌을 가져와 9월 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827년 2월 30일에 완
성되었다.
이때 황룡사(皇龍寺) 주통<州統, 승려의 직책으로 국통(國統) 밑임>인 항창화상(恒昌和尙)이
공사를 지휘했으며, 상화상(上和上)은 진행법사, 정좌<貞坐, 승직(僧職)의 하나>는 연숭법사,
사사<史師, 승려를 통솔하고 사무를 돌보는 자리>는 2명으로 묘범법사와 칙영법사. 전도유내
<典都唯乃, 승직의 하나>는 2명으로 창악법사와 법지법사, 도상(徒上)은 2명으로 지생법사와
진방법사, 작상<作上, 승직의 하나이나 역할은 확실치 않음>은 수남법사이다'


당간지주 동쪽 돌기둥의 윗쪽은 살이 좀 뜯겨져 있는데, 이는 해방 이후 석수장이들이 석재로
쓰고자 뜯어간 것이라고 한다.


▲  중초사지 당간지주 - 보물 4호

중초사는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太祖)의 지원으로 크게 몸집을 불리게 된다. 안양사 창건설
화에 따르면 900년에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남쪽(후백제)으로 출정하면서 안양을 지나던
중, 삼성산 꼭대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며 떠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를 이상히 여겨 산
을 살펴보다가 구름 밑에서 능정(能淨)이란 나이 지긋한 승려를 만났다.

능정과 이야기를 나눈 왕건(王建)은 서로 뜻이 잘 통하자 너무 기분이 좋았던지 그를 만난 자
리에 절을 세웠다. 그것이 안양사의 시초라는 것이다. 허나 900년이면 왕건의 왕씨 세력은 고
작 송악(松嶽, 개성) 일대가 전부였고, 황해도(黃海道)의 여러 지방 세력과 더불어 당시 한참
신라 북부를 평정하고 있던 궁예(弓裔)와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던 시기
였다. 그러니 900년은 전혀 맞지가 않다.
하지만 왕건의 지원을 받은 것은 확실해보이며 연도(年度)의 오류는 흔한 일이므로 고려를 세
운 918년 이후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또한 설화에는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하러 가던
중이라고 했으니 후백제를 치러 가던 중에 잠시 들렸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중초사 주지로 여겨지는 능정과 마음이 잘맞자 두둑히 지원을 내려 절을 중창케 했고 경
내 남쪽에 벽돌로 7층전탑을 세웠다. 그리고 천하를 통일하여 좋은 세상을 이루고 싶은 심정
을 담아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뜻하는 안양(安養)으로 절 이름을 바꾸게 했다. 제왕(帝王)이
발걸음을 하고 지원을 내렸을 정도면 절도 어느 정도 명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능정 또
한 도선국사(道詵國師)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명망을 갖춘 승려였을 것이다.
참고로 극락정토는 이 세상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야 나온다는 이상의 세계
로 안양세계(安養世界), 안양정토(安養淨土)라고도 한다. 수도권 굴지의 도시로 인구 70만을
지닌 안양시의 이름도 바로 이 안양사에서 유래되었다. 불교색이 진한 이름이긴 하지만 의미
만큼은 정말 일품이다.

고려 중기에는 천태종(天台宗)을 일으킨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잠시 들려서 능정의
영정에 참배한 적이 있으며, 특히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 1314~1388)장군과도 인연
이 꽤 깊었다.
그는 젊었을 때 안양사에서 하룻밤 머문 적이 있었는데, 전탑을 바라보며 태조가 안양사를 경
영했던 의미를 되새기고 스스로에게 '제가 나중에 잘되고도 이 탑을 새로 세우지 않는다면 하
늘에 계신 신령이 내려다 보실 것입니다'
다짐을 했다.

이후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시절, 제일 높은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자 안양
사 주지인 혜겸(惠謙)과 함께 옛 시절의 다짐을 실행코자 전탑을 새롭게 중수했다. 그는 자신
의 재물과 신도들의 지원을 모아 쌀과 콩, 베 등을 마련했고 양광도(楊廣道, 경기도와 충청도
) 안렴사(按廉使)에게 명을 내려 군납미(軍納米)를 감액하여 경비를 마련하고 장정을 모았다.
그래서 1381년 8월 공사를 시작해 그해 10월 완성을 보았는데, 완성이 되자 우왕이 내시 박원
계(朴元桂)를 보내 향을 하사하고, 승려 1천여 명으로 성대하게 불사(佛事)를 치르면서 사리
12개와 불아(佛牙) 1개를 탑에 봉안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때 탑 중수에 시주를 한 관리와 귀족, 부자가 3천 명에 이르렀으며, 1382년 탑에 단청을 장
식하고 1383년에는 탑 안에 그림을 그렸는데, 동쪽 벽에는 약사회(藥師會), 남쪽 벽에는 석가
열반회(釋迦涅槃會), 서쪽에는 미타극락회(彌陁極樂會), 북쪽에는 금경신중회(金經神衆會)를
그리고 탑을 둘러싼 회랑(廻廊) 12칸에는 벽마다 부처와 보살, 인천(人天)을 그려놓았다. 이
들 단청과 그림을 그리는데 동원된 인원은 400여 명, 소요된 쌀은 595석, 콩 200석, 베 1,155
필에 이르렀고, 전탑 중수가 완료되자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은 자신의 도은집(陶隱集)에
'금주 안양사탑 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를 남기며 최영을 찬양했다.

조선으로 들어와서도 왕실과 사대부와의 교류는 빈번하여 1411년 태종(太宗)이 충청도 온양(
溫陽)으로 온천욕을 가다가 잠시 들렸으며, 안양사와 관련된 여러 수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이렇게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찬란하게 광을 냈던 안양사는 16세기
중반 이후 갑자기 사라지고 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거나, 억불숭유(抑佛崇儒)의
거친 파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쫄딱 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안양사터는 당간지주와 3층석탑 등을 속세에 드러낸 채, 땅 속에 묻혀있다가 1959년
엉뚱하게 유유산업이 절터를 깔고 앉았고 공장 주변에는 집들이 들어찼다. 하여 제자리에 안
양사 재건이 어렵게 되자 1960년대에 동북쪽 산자락에 새 안양사를 짓고 안양사의 유물로 여
겨지는 승탑과 귀부를 업어와 옛 안양사의 뒤를 자처하고 있다.


▲  중초사지 3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4호

당간지주 옆에는 조금 부실하게 생긴 3층석탑이 멀뚱히 서 있다. 높이 약 3.6m의 석탑으로 당
간지주보다 다소 늦은 고려 중/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때는 중초사가 아닌 안양
사 시절이니 '안양사지 3층석탑'이 적당한 명칭이겠으나 아직 바로 잡히지는 않았다.

이 탑은 원래 지금보다 동쪽에 있었으나 공장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자리로 강제로 옮겨졌으며
탑의 기단(基壇)은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부(塔身部)에 비해 기단부가 훨씬 커서 전체
적으로 균형이 떨어지고 볼품이 좀 떨어진다. 하지만 당간지주의 후광(後光) 덕인지 보물 5호
라는 큼직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나 1997년 1월 문화재지정등급 재조정으로 결국 지방문화재
로 등급이 떨어지고 말았다. (현재 보물 5호의 자리는 비어있음)


▲  삼성천을 향해 누워있는 중문(中門)터

안양사터의 구조는 남쪽에 중문터와 남회랑터를 두어 경내를 감싸고, 중문을 들어서면 전탑터
와 금당이 나온다. 금당 북쪽에는 설법단터와 승방터가 있고, 동쪽에는 동회랑터, 서쪽에 서
회랑터를 두었다.
하지만 공장 건물을 모두 철거하지 못했고 공장 주변에 집과 건물이 가득하여 아쉽게도 절터
를 모두 파내진 못했다. 겨우 금당(법당)과 전탑, 그 주변만 속살을 캤을 뿐이다. 허나 지금
까지 드러난 모습도 충분히 입을 벌어지게 만드니 나중에 나머지를 싹 뒤집으면 지금보다 훨
씬 장대한 안양사터의 진면목을 만나게 될 것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중문터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안양박물관 사이에는 중문터가 누워있다. 옛 유유산업 건물을 밀어버린
이후에 모습을 드러낸 건물터의 하나로 지금까지 확인된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인데
절 바깥에서 법당(法堂)으로 가려면 거의 반드시 중문을 거쳐야 된다.
중문 앞에는 삼성천이 흐르고 있는데 절로 인도하는 돌다리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며, 중문 옆
건물(안양박물관)을 밀어버리지 않고 박물관으로 활용하면서 중문터 일대를 완전히 캐내진 못
했다. 대략 중문의 전체적인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여겨지며, 중문지 북쪽 13m 거리
에 안양사의 명물인 전탑터가 있다.


▲  중문터 남쪽에 널려있는 석물들
안양사터 발굴로 다시 햇살을 본 주춧돌과 계단, 석탑, 석등의 석재 등
여러 석물이 놓여져 있다.


▲  남회랑(南回廊)터

중문터를 들어서면 바로 북쪽에 전탑터가 있고 그 서쪽에 남쪽 회랑터가 있다. 김중업박물관
남쪽에 자리한 남회랑은 북쪽으로 강당터와 이어지는데, 회랑 동서방향으로 2차에 걸쳐 중복
된 건물터 형태를 보여준다. 회랑 남측 건물터에 추가적으로 흙을 얹힌 사실이 확인되어 북측
건물터가 먼저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북측 건물터는 남북 3.21m, 동서 26.6m에 달한다.
동회랑터는 안양박물관과 담장으로 인해 완전하게 조사를 벌이지 못했으며, 서회랑터는 남북
약 70m, 동서 6m로 추정된다. 또한 남회랑터 일대에서 신라 후기 기와조각과 막새, 토기파편
등이 출토되어 중초사 시절부터 절찬리에 쓰였던 현장임을 귀뜀해준다.


▲  안양사의 명물, 전탑터

금당터와 중문터 사이에는 네모난 터가 바짝 누워 있다. 이 자리가 바로 고려 태조가 세우고
최영장군이 중수했다는 7층전탑이 어깨를 활짝 피며 푸른 하늘을 받쳐든 현장이다.
금당터 정면 6m 앞에 자리한 이 탑은 그 동안 기록에만 있었으나 안양사터 발굴로 인해 전탑
터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전탑은 전설이 아닌 사실이 되었다. 비록 그 장대했던 전탑의 모
습은 녹아없어지고 그 터만 메마르게 남았지만 발굴 결과 남북 9.62m, 동서 5.29m에 이르러
백제의 미륵사지5층석탑 이상만큼이나 웅장한 탑이었음이 밝혀졌다.

전탑터 기단부는 암갈색 사질점토층에 삼성천 냇돌을 섞어서 다졌고, 그 위에 냇돌과 사질점
토층을 채워서 다졌다. 전탑터 남쪽 답도시설 일부에 벽돌과 기와편들이 확인되었는데, 전탑
옥개석(屋蓋石) 위에는 기와가 덮혀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고려시대 백자와 분청자 연봉 등이
기와와 함께 출토되어 최영장군 중수설을 진하게 뒷받침해준다. 안양사의 상큼한 상징이었던
이 탑은 조선 초/중기 때 무너져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전탑터와 금당터

▲  두 터의 공존 ~ 금당(金堂)터와 옛 유유산업 공장터의 기둥

전탑터 북쪽에 자리한 금당(법당)은 안양사의 중심 건물로 건물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안
양사의 위엄에 걸맞게 금당도 제법 컸을 것으로 여겨지나 동쪽에 자리한 옛 공장 건물을 모두
부시지 않고 기둥과 지하 구조물을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겨두어 겨우 반쪽만
조사를 벌인 탓에 정확한 규모는 아직 모른다.
금당터에서는 9개의 적심이 확인되었으며, 적심은 정면 1칸, 측면 4칸 규모로 기둥간의 거리
는 정면 360~370cm, 측면은 270~280cm 정도이다. 공공예술도 좋지만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기
둥의 모습도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어차피 이 땅에 흔한 콘크리트 건물 기둥이니 그들을 싹
뽑아 주변으로 옮기고 금당터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들추었으면 좋겠다.


▲  강당터와 동회랑터, 특별전시관

▲  강당터

금당터 북쪽에 자리한 강당터는 교육 공간으로 정면 9칸(동서 39.5m), 측면 4칸(남북 14.4m)
에 이르는 거대한 터이다. 건물 어칸(가운데 칸)에서는 대좌(臺座) 시설이 양쪽으로 마련된
형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경주 황룡사터 강당터의 내부와 비슷하여 안양사의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건물을 받치던 초석은 자연석을 일부 손질했으며, 기둥 자리에는 40~50cm의 원주가 사용되었
다. 그리고 초석 밑에 예전 건물터(중초사 시절 건물)의 원형 초석이 발견되어 이전보다 50~
60cm 정도 높아졌음이 드러났으며, 강당 좌우로는 동회랑과 서회랑을 이어주는 조그만 건물터
가 배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강당터 북쪽에 수북히 쌓인 기와편들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편을 한데 수습하여 그들만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고, 보잘 것 없는 기와 파편을 저렇게 쌓아두니
왠만한 대(臺)와 단(壇)이 부럽지가 않다.

▲  승방(僧房)터

강당터 북쪽에 자리한 승방은 승려들의 생활공간이다. 정면 9칸, 측면 1칸의 동/서향 장방형(
長方形) 건물로 터 전체를 모두 들추지 못해 완전한 규모는 파악하지 못했다. 건물터 남쪽과
북쪽 기단부에선 기와편들이 많이 나왔는데 조선 중기에 어떤 연유로 절이 파괴되어 건물이
내려앉으면서 지붕의 기와들이 그대로 떨어져 쌓인 것으로 보인다.
기둥 간의 거리는 4.05~4.25m, 측면은 5.1m로 기와편 가운데 '안양사'라 쓰인 기와가 발견되
어 이곳의 정체를 살짝 알려주었다.

안양사터는 양주 회암사(檜巖寺)터, 북한산 삼천사(三千寺)터와 더불어 서울 인근에 몇 남지
않은 커다란 절터 유적(조그만 절터는 제외)으로 그 가치는 중초사지 당간지주 못지 않다. 사
적(史蹟)이나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으며,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주변을 싹 밀
고 안양사터의 숨겨진 속살까지 모두 들추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들춰낸 것은 기껏해야 절
반 정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갔을 당시는 박물관의 공통 휴일인 월요일이라 박물관은 언제가 될 지 모를 다음으로
미루고 안양사터만 둘러보고 나왔다.

※ 안양사터, 김중업건축박물관(안양박물관) 찾아가기 (2018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석수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관악역(2번 출구)에서 5530, 5624, 5625,
  5626, 5713, 1, 51, 900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양예술공원에서 하차, 도보 10분 (관악역 2번
  출구에서 도보 20분)
* 지하철 1호선 안양역(1번 출구)에서 안양마을버스 2번 안양예술공원행 차량을 타고 안양박
  물관(김중업건축박물관) 하차 (반드시 예술공원행을 타야됨)

★ 안양사터,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관람정보 (2018년 1월 기준)
* 박물관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 / 매주 월요일, 설날, 한가위 당일 휴관)
* 박물관 입장료는 없음 (특별 전시 때는 상황에 따라 유료 입장)
* 안양사지는 언제든 관람 가능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안양예술공원로 103번길4 ☎ 031-687-0909)
*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옛 안양사의 유물로 천하에서 단 하나뿐인 바위 종
석수동 마애종(石水洞 磨崖鐘)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2호

▲  석수동 마애종을 품은 보호각

안양사터 동쪽이자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북쪽에는 기와 보호각에 감싸인 석수동 마애종이 조
용히 웅크리고 있다. 마애종을 품은 바위에는 사람들이 치성을 올린 흔적(촛불이나 불에 그을
린 흔적)이 많은데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질 만큼 범상치 않은 자태를 지녔다. 그런 탓일
까? 그의 남쪽 피부에는 승려와 종을 묘사한 마애종이 새겨져 있는데, 바위에 새긴 마애불(磨
崖佛)은 기러기의 털처럼 많이 널려있지만 바위 종은 천하에서 오직 이것 뿐이다.

종각(鐘閣)을 묘사한 듯 'ㅍ'자 공간 안에 두툼히 새겨진 마애종은 9개의 유두가 달린 2개의
유곽을 지닌 범종으로 종 위에 쇠사슬이 단단히 묘사되어 있으며, 범종의 기본 메뉴인 음통, 상대, 유곽, 당좌, 하대 등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종 우측에는 종을 치는 승려가 새겨져 있
다.
공중에 높이 떠있는 듯한 마애종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지며, 조각 수법과 종류, 종신(
鐘身)의 표현으로 보아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안양사터 바로 옆에 자리해 있어
안양사의 유물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예전
에는 중초사의 유물로 여겨졌는데, 조선총독부
에서 1924년에 만든 '고적급유물등록대장'에도
'중초사지 마애종'으로 표시했다.
중초사나 안양사나 같은 곳이니 어느 이름이든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이제 안양사의 정체가
훤히 드러난 만큼 '안양사지 마애종'으로 이름
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마애종 보호각


▲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석수동 마애종

무려 1,000년 가까운 지긋한 나이에도 마애종의 건강 상태는 썩 양호하며, 승려와 종의 모습
을 무난히 살펴볼 수 있다. 무슨 이유로 바위에 이런 독특한 것을 새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땅의 유일한 존재로 서울 가까이서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토록 희소성이 큰 보물이건만 아직도 국가지정 보물이 아닌 지방문화재 등급에 머물러 있다
는 현실에 고개가 좀 갸우뚱하지만 그까짓 인위적인 등급이 무슨 대수겠는가. 비록 보호각 때
문에 마애종 앞까지는 다가갈 순 없지만. 종을 향해 귀를 쫑긋 기울이면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올 것만 같다.

참고로 관악산 동쪽 문원계곡 입구에는 이 땅의 유일한 마애 승려 얼굴상이 있다. <마애승용
군(磨崖僧容群)이라고 함> 이렇게 관악산 자락에는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1종류도
아닌 무려 3종류(중초사지 당간지주, 마애종, 마애승용군)씩이나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로운데
예로부터 잘생기고 험준한 산은 산악신앙(山岳信仰)과 불교의 성지(聖地)로 널리 추앙을 받았
으니 관악산 또한 그중의 하나로 그 덕을 제대로 본 것 같다.

* 석수동 마애종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32


▲  안양사 입구 삼성천 바위에 닦여진 어느 예술작품 (무슨 작품일까?)


 

♠  옛 안양사의 뒤를 이은 조촐한 절집,
삼성산 안양사(安養寺)

▲  경내 입구에 자리한 안양사 표석

석수동 마애종에서 동쪽으로 3~4분 정도 가면 안양사입구이다. (안양예술공원입구에서 예술공
원로를 따라 10분 정도 들어가면 안양사 이정표가 나옴) 사람들로 늘 붐비는 예술공원길과 달
리 안양사 길은 종종 스치는 산바람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나그네의 두 귀를 간지럽힐
뿐, 거의 고적한 편으로 그 길의 끝에 안양사가 왕년의 영광을 꿈꾸며 조용히 둥지를 틀었다.

경내 입구에는 마치 서예 작품을 보듯 기품이 넘치는 안양사 표석이 서 있는데, 그 표석을 지
나면 버려진 집 1채와 다소 볼품이 떨어지는 연못이 나오고, 이어서 계단을 오르면 주차장과
안양사 경내에 이른다.
이곳 안양사는 앞서 언급한 안양사(안양사터)의 뒤를 이은 사찰로 원 자리를 잃음에 따라 지
금의 자리에 새롭게 자리를 닦았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비구니 사찰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 않았으나 옛 안양사의 유물로 여겨지는 승탑과 귀부를 업어와 고색의 향기를 조
금이나마 보태고 있다.
경내는 크게 명부전이 있는 남쪽과 대웅전이 있는 북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가람
이 허벌나게 큰 것도 아니며, 단지 둘 사이에 소나무 숲이 자리해 있어 자연히 구분이 된 것
뿐이다.

▲  푸른 지붕을 지닌 요사(종무소)

▲  소나무 밑에 자리한 샘터

명부전(冥府殿)을 중심으로 한 남쪽 구역에는 종무소와 명부전, 기묘한 자세로 솟아나 명부전
을 지키는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 밑에는 산사(山寺)의 필수품인 약수터가 있는데, 삼성산이
베푼 청정한 샘물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와 조그만 석조(石槽)를 가득 채운다. 마침 목도 마
르고 해서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체증이 싹 가신 듯 개운하다.
 
남쪽 구역의 유일한 불전(佛殿)인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
(地 藏菩薩)과 저승<명부(冥府)>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으며, 명부전을 지나 솔내음이 진동하
는 오솔길을 오르면 미륵불과 대웅전이 있는 북쪽 구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내가 숲을 경계
로 둘로 나눠진 점이 이곳의 큰 특징이다.


▲  안양사 명부전과 소나무

▲  홀쭉하고 넉넉한 표정의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명부전 내부를 가득 채운다.

▲  경내 북쪽 구역으로 인도하는 짧은
소나무 숲길

▲  심검당과 경내를 지키는 호랑이상

안양사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북쪽 구역에는 심검당과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을 비롯해 이
곳의 오랜 보물인 승탑과 귀부가 있다. 심검당 주변에 자리한 호랑이상과 두꺼비상은 이곳을
지키는 용도로 배치해 놓은 것으로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운 인상이 강하다. 절에 볼일이 있어
서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귀여운 표정 앞에 자신의 소임도 깜빡 잊고 길을 돌아설 것이
다.


▲  안양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금동을 입힌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잘 다듬어진 수작(秀作), 하지만 중요한 탑신 부분을 잃어버린
안양사 승탑<僧塔, 부도(浮屠)>

대웅전 앞에는 장대한 세월의 때로 자욱한 승탑과 귀부가 단짝처럼 자리해 있다. 승탑(부도)
은 머릿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그의 인
생이 그리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듯, 승탑의 알맹이인 탑신(塔身)은 오래 전에 상실되어 머
리 부분과 아랫도리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탑의 높이는 1.4m로 누구의 승탑인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며, 원래 인근 숲에 있던 것을
업어왔다. 옛 안양사의 유물로 여겨진다.


▲  안양사 귀부(龜趺)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3호

승탑을 바라보며 넓직하게 앉아있는 귀부는 안양사의 제일 가는 보물이자 유일한 지정문화재
로 비석의 일부이다. 용머리가 받쳐들던 비신(碑身)과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
는 모습이 묘사된 비석의 머리 부분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이미 사라진 상태이다.
이 귀부는 고려 중기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원래 위치는 확실하지 않으나 안양사와 관련
된 유물로 여겨진다. 비석의 성격은 그 중요한 비신이 없어 헤아리기는 힘들지만 대략 승려의
탑비(塔碑)나 안양사의 사적비(事蹟碑)로 여겨지며,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한 김부식(金
富軾)이 비문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귀부의 등에는 등껍데기가 세세히 묘사되어 있고 비신이 심어져 있던 비좌(碑座)는 치아가 빠
진 모양처럼 무척 허전해 보인다. 엄금엄금 기어갈 것 같은 용머리(귀부)의 높이는 1m, 길이
3m, 너비 2.18m로 머리와 수염, 4개의 발, 등껍데기, 살랑살랑 흔드는 꼬랑지 등이 섬세히 표
현되어 조각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리고 귀부 주위로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석주(石柱)
18개를 심었다.

귀부의 원래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1942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수
록된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고적유물에 석비귀부(현 안양사 귀부)와 고분(현 석수동 석실고
분)의 관한 기록이 있다.

24. <석비귀부(石碑龜趺), 석등(石燈)> 동면 안양리(東面 安養里, 현 안양시) 불곡(佛谷, 국
유림) - 석비귀부는 길이 10척, 폭 7척, 높이 3척5촌으로 석비는 분쇄되어 파편의 일부만 남
아 곁에 넘어져 있으며, 석등 하나와 폐정(廢井) 하나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불곡이라는 사
찰이 있었다고 하지만 절의 이름 등은 알지 못한다.

35. <고분(古墳)>,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 후
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  꼬랑지가 옆으로 늘어진 귀부의 뒷모습

▲  당당한 자태의 귀부 앞모습

▲  귀부의 옆 모습

▲  미륵불 곁에 새로 지은 나한전(羅漢殿)


▲  속세를 굽어보는 안양사 미륵불(彌勒佛)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안양사의 든든한 후광인 미륵불이 있다.
1976년에 조성된 안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높이는 거의 20m에 이르며 얼마나 키다리던지 바
로 밑에서 바라보니 고개가 아파서 뚝 떨어질 것 같다.
온몸이 온통 하얀 피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에는 면류관(冕旒冠)과 비슷한 보관(寶冠)을
쓰고 오른손에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스처를 취했으며,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높다랗
게 서서 남쪽을 굽어 본다. 석불 양쪽으로 계단을 만들었고, 그 앞에 넓게 기도처를 닦았다.

▲  미륵불 옆에 자리한 1칸짜리
산신각(山神閣)

▲  대웅전에 봉안된 금동석가3존불

경내를 이렇게 둘러보고 미륵불에게 3배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들이밀어본다. 기도를 올리니
소망이 들어진 듯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나는 저 미륵불에게 해준 것이 전혀 없는데 염
치없이 나의 소망만을 요구하니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정작 그 소망도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미륵불도 공무원들처럼 민원만 받고는 모르쇠로 일관~~)
안양사를 끝으로 연말에 벌인 안양예술공원 주변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양사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28 (안양예술공원로 131번길 ☎ 031-471-
  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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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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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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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삼각산) 삼천사 '

▲  삼천사 대웅보전


 

♠  삼천사 입문

▲  알록달록 연등이 길을 안내하는 삼천사 길

따사롭던 5월의 첫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삼천사를 찾았다. 연신내역에서 그들을 만
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고지↔신설동)을 타고 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잘 닦여진 길을 따라 그곳으로 다가섰다.


▲  그늘에 자리한 족구장 - 이곳은 절터였다.

삼천사 숲길을 들어서면 식당을 옆에 낀 너른 공터가 나온다. 지금은 식당에 딸린 공간이지만
예전에는 사슴농장이 있었지~. 사슴의 숙성된 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시절이 정말 엊그
제 같거늘, 그들은 죄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진다.

겉으로 보면 산이나 계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과 농장의 쉼터이지만 놀랍게도 이곳에 옛
절터의 흔적(삼천리골사지1)이 아주 희미하게 묻혀있다. (안내문은 없음) 그 절터는 공터를 중
심으로 주변 식당들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절의 정체
를 알 수 없다. 다만 진관사(津寬寺)가 근처에 있어 그의 전신(前身)이라는 신혈사(神穴寺)터
로 보기도 하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편의상 '삼천리골사지(寺址) 1'로 분류했다.
<삼천리골사지2는 삼천사계곡 상류에 있으며 삼천사터의 일부로 여겨짐>
여기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 청자파편 등이 나왔는데, 행락지로 먹고 사는 사유지다보니 훼
손이 심각해 하루 속히 발굴조사가 절실해 보인다. 혹시 아는가 이곳이 정말 고려 8대 제왕인
현종(顯宗)과 인연이 아주 깊다는 신혈사의 마지막 흔적이었을지도?


▲  녹음(綠陰)이 짙은 삼천사 가는 길
저 짙푸른 녹음 속에 나를 잠시 숨겨본다.


삼천리골사지1을 지나면 식당들이 줄지어 나타나는데, 그 와중에 '삼천탐방지원센터'로 변신한
옛 매표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내야했으나 2007년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매표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삼천탐방지원센터에서 3분 정도 가면 고개가 나타난다. 고개 앞에는 삼천사를 알리는 돌기둥이
멀뚱히 서 있는데 여기서 고갯길과 계곡길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던 삼천사는 나오게 되어 있
으나 시멘트길인 고갯길은 다소 각박하고 돌아가는 편이며, 차량들의 왕래가 잦다. 반면 계곡
길은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계곡 주변에 주막들이 여럿 모여 앉아 절을 목전에 둔 속세
의 마지막 유혹을 펼친다.


▲  미타교 직전 고갯길

▲  계곡의 아름다운 경관을 크게 들쑤신 미타교(彌陀橋)

계곡길을 5분 정도 오르면 고갯길과 다시 만나면서 약간 경사가 진 고개가 나타난다. 그 고개
를 넘으면 북한산 일품 계곡의 하나로 널리 추앙받는 삼천사계곡(삼천리골) 중류가 나타난다.

이곳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초소에 출입신고를 하고 신분증을 맡겨야만 들어갈 수 있던 금지
된 구역이었다. 물론 삼천사 승려와 신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92년 통행제한이 풀
리면서 삼천사계곡을 통해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비봉능선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계
곡 주변에는 군사시설 일부가 옥의 티처럼 남아있으며, 삼천사와 옛 군부대 수영장 사이 계곡
은 여전히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속인들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다. (옛 수영장 이후와 삼천사
위쪽 계곡은 출입이 가능함)

삼천사로 가려면 계곡을 1번 건너야 되는데 예전에는 키 작은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2011년 이
후 높이와 폭을 높여 미타교란 하얀 피부의 돌다리를 새롭게 깔았다. 다리를 업그레이드한 것
은 좋으나 문제는 주변 환경을 고려치 않고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크게 들쑤시며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곡 다리(미타교)에서 삼천사 중간의 짧은 계곡 풍경(밑에 있는 2011년 사진 참조)은 개인적
으로 참 좋아했던 풍경이었는데 다리를 놓으면서 잘생긴 바위와 반석을 깨뜨리고 자잘한 돌이
계곡 주변을 적지 않게 차지하면서 심히 안좋게 변해버린 것이다.


▲  예전의 경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미타교 주변)
계곡에 자잘한 돌들만 가득하여 마치 돌의 무덤처럼 황량하기 그지 없다.

▲  이제는 전설이 되버린 미타교 주변 삼천사계곡의 옛 모습 (2011년)
선녀 누님이 살짝 내려와 목욕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고운 절경이었다.
허나 지금은 선녀는 커녕 맷돼지도 외면할 것 같다.


너무나 이질적으로 변해버린 삼천사계곡에 안타까움의 한숨을 여러 번 날려 보낸다. 자꾸 예전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려 부질없이 변해버린 현실을 인정하기가 싫다.

미타교를 건너면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중생을 주눅들게 만든다. 그 길을 3분 정도 오르면
옛 발해(渤海)의 국도(國都)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석등(石燈)을 닮은 우람한 석등 1쌍
이 힘들게 올라온 중생들을 맞이하니 여기서부터 산사의 향기와 오래된 마애불의 인자함이 깃
든 산사, 삼천사 경내가 흔쾌히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삼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경내 직전에 자리한 석등 1쌍

북한산(삼각산) 서쪽 삼천사계곡에 둥지를 튼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磨崖佛)
을 품은 절이자 도심에서도 멀리 떨어진 첩첩한 산골의 산사이다. 1992년까지만 해도 사찰 출
입의 제한이 많았으나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방되면서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삼천사는 삼국시대가 한참 정리되고 있던 661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
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정말로 곤란하다. 그가 세웠다는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고 그
당시 신라를 둘러싼 천하의 정세도 한가롭게 절이나 세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었던 신라(新羅)도 그 시절에는 왕경(王京, 경주)을 중심으로 절이 세워지
고 있었으며 원효대사 역시 바쁘게 움직였던 시기이므로 절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무열왕(武烈王)과
의 친분으로 그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어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되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자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던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면서 당시 신라 불교
의 1인자였던 자장율사(慈藏律師)를 강원도 산골짜기로 밀어내고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라 불
교의 지존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삼천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661년, 당나라 고종(高宗)은
'이제 백제도 망했으니 고구려를
쳐도 별무리는 없을 것이다!'
싶은 엉뚱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 전
쟁에서는 당나라의 맹장으로 손꼽히는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하여 많은 군사를 보
냈는데 방효태는 천하장사로 손가락질 받던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 모조리 데리고 나가
고구려 정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군은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遼東)을 용케도 통과, 압록강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그 기세를 타고 평양성(平壤城) 부근인 사수<蛇水, 대동강의 지류인 합장강으로 여겨짐>까지
진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10만 대군은 몰살을 당했고 고구려를 꼭
무너뜨리겠다고 헛소리를 했던 방효태는 그의 아들과 나란히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한편 서해바다를 건너 평양 서쪽으로 기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대군이 절단났다는
소식에 그야말로 큰 충격에 빠졌다. 날씨는 춥지. 식량은 부족하지. 언제 고구려군이 들이닥쳐
자신들의 목을 댕강 칠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하여 소정방은 쫄깃해진 간을 부여잡고 신라에 급히 사자를 보내 식량과 원군을 요구했다. 당
나라에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며 그들의 비유를 맞추느라 급급했던 신라는 소정방의 요구를
흔쾌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요청을 무시하면 나중에 고구려를 치거나 공격을 받았을
때 도움을 받기가 어렵게 될 것이고 고구려에게 계속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케 했는데 이때 분황사(芬皇寺)에 있던 원효가
그를 따라 종군(從軍)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군은 그들을 때려잡
기 위해 길목에 매복을 했는데, 소정방이 이를 알아내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보냈다.
그 암호문을 바로 원효가 해독한 것이다. 그래서 김유신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무사히 군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 원효대사의 행적이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언제 고구
려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자 전운이 감도는 북한산(삼각산)에 절을 세웠겠는가? 이것으로 이미
원효 창건설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절은 언제 지어졌을까?
경내에 있는 마애불과 옛 절터의 유물을 통해 이르면 신라 말, 늦어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에 간행된 북한지(北漢
誌)에는 최
대 3,000명이 머물 정도로 번창했다고 쓰여 있다.

▲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  삼천사터 금당(金堂) 구역

고려 초에는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이 주지로
있었으며, 고려 왕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큰 절로 성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
(西山大師)의 지휘 아래 승병(僧兵)의 주요 집결지가 되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말았
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은 지금보다 1.5km 안쪽 산속에 있었으며 절 이름은 지금과 음은 같지
만 한자가 1글자 틀린 삼천사(三川寺)였다.
그 이후 진영화상이 삼천사의 암자가 있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건하여 3천 명을 뜻하는 삼천
사(三千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6.25때 파괴된 것을 1960년에 중건했다.

1970년대 성운(聖雲)화상이 주지로 들어와 절에 있는 마애불이 오래된 불상임을 밝혀내었고 20
년 동안 계속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1994년에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을 설립해 복지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산령각, 천태각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또한 옛 삼천사터(고양시 북한동)에는 대지국사의 탑비(塔碑)
와 절터 주춧돌이 어지럽게 남아있는데 오랫동안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가 서울역
사박물관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여 500여 점의 유물을 건져냈다. (2009년
이후에도 여러 번 발굴조사를 했음)
이처럼 북한산(삼각산) 제일의 절터 유적임에도 이상하게도 북한산 관련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
조차 되어 있지 않으며, 그에 합당한 지정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계속 방치되고 있다.
(사적이나 지방기념물 등급이 적당해 보임) 또한 이곳에 있는 대지국사비는 태고사(太古寺) 원
증국사탑비와 더불어 북한산에 있는 고려 때 비석이자 북한산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나 그 역
시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절터 관람은 가능함)

※ 북한산 삼천사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
  ) 입구 하차 → 삼천사까지 도보 30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 또는 1번과 2번 출구 중간에서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에서 하차
*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에서 삼천사 셔틀버스가 1일 4회 운행한다. (구파발역 출발 시간은
  8:20, 10시, 11시, 13:30) 법회와 절 행사가 있는 날에는 오전 8시부터 11시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석가탄신일에는 저녁까지 수시로 운행
* 삼천사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하며 경내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음

* 삼천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25-2 (연서로54길 127 ☎ 02-353-3004)
* 삼천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삼천사 종형사리탑과 마애여래입상


 

♠  삼천사 5층석탑, 대웅보전 주변

▲  나한사리를 머금은 5층석탑

삼천사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4마리의 석사자가 탑신(塔身)을 받들고 있는 5층석탑을 만
나게 된다. 1988년 삼천사 주지인 성운화상이 미얀마의 마하시사사나 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
곳 대승정(大僧正)인 아판디타에게 부처 사리 3과와 나한사리를 선물로 받았는데, 부처사리는
마애불 앞 종형사리탑에 봉안하고 나한사리는 일주문 앞에 이 탑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이 탑은 바닥돌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여러 단으로 된 기단부(基壇部)를 둔 다음, 4마리의 사자
와 5층 탑신,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갖춘 형태로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제천 빈신사지(頻迅寺
址)의 4사자 석탑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  삼천사의 새로운 명물, 세존진신사리 불탑(佛塔)

5층석탑을 지나면 바로 9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당도 아닌 경내 외곽에 서로 다른 모습
의 탑을 2개씩이나 지어 올린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삼천사는 법당 앞에 탑을 둘 공간이
여의치가 않아 공간이 넉넉한 이곳에 탑을 심은 것이다.

9층석탑 자리는 원래 주차장의 일부로 미얀마 대승정에게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하
고 절의 위엄도 제대로 드러낼 겸, 거대한 탑을 또 짓기로 결정하고 2012년 초에 자리를 닦아
그해 5월 완성을 보았다. 이 탑 역시 9층석탑처럼 높게 기단부를 쌓고 그 위에 탑을 올렸는데
탑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을 비슷하게 재현했으며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
는 4두의 금빛 사자상은 인도의 사르나트 아쇼카 석주(石柱)의 사자상을 모방한 것이다.
금빛 사자상은 8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 담긴 법륜(法輪)에 안치되었고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군주로 평화와 생명존중을 천명한 아쇼카왕(인도 마가다왕조의 3대 왕)의 '담마 왕령(王令)'
정신을 새기고자 아쇼카왕의 상징인 4두 사자상을 꼭대기에 얹혔다. 그리고 9류 중생의 안녕과
화엄 10지에 이른 후 정토세계의 9품 연대에 오르기를 발원하는 보리심을 9층탑으로 묘사했다.

탑이 완성되자 진신사리 7과를 비롯해 조그만 금동석가불과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 대장경(
大藏經) 1질, 600명의 신도들이 손수 제작한 금강경(金剛經) 600부, 신도들이 기증한 갖은 고
가품을 탑에 넣었다.
탑에게 주어진 첫 이름은 '세존진신 다보 9층대탑(世尊眞身 多寶 九層大塔)'이었으나 '세존진
신사리 불탑'으로 간단히 줄였다. 탑이 얼마나 큰지 사람들이 거의 개미로 보이며, 장대한 탑
의 모습이 마치 삼천사의 탄탄한 재정과 세를 부질없이 과시하는 것 같다.


▲  군인들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

9층석탑을 지나면 오른쪽 높은 곳에 화강암 통돌로 조성된 지장보살입상이 자리해 있다. 이 보
살상은 9층석탑과 5층석탑은 물론 절 서쪽에 있는 34사단 유격훈련장 방향(산을 올려다보면 유
격장이 보임)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34사단 장병들이 이곳에서 로프를 타고 훈련을 하는데 해마다 사고가 일어났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삼천사 주지승이 장병들의 덧없는 희생을 막고 더 이상의 사고와 살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발원하는 뜻에서 유격훈련장이 보이는 곳에 지장보살입상을 세웠는데, 신기하게도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지장보살 형님의 가호가 진하게 피어나 그들
을 지켜준 모양이다.

어진 어미의 모습처럼 자리한 보살상은 8각의 기단을 밑에 깔고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
에 여의주를 오른손에 들고 서 있으며 8각 대좌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와 도명존자(道明尊者)
, 시왕상 등이 새겨져 있다.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연못 (일주문 앞)

▲  삼천사 일주문(一柱門)

9층석탑을 지나면 문짝을 단 큰 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일주문이라 부른다. 보통 일주문은 절
입구나 길목에 세우기 마련으로 미타교와 5층석탑 사이에 일주문을 둘 자리가 넉넉하나 삼천사
는 그 자리를 모두 내버리고 특이하게 대웅보전 입구에 갖다 놓았다.
세로로 걸린 현판에는 '三角山 三千寺'라 쓰여 있는데 쓰여진 글씨가 꽤 걸출하여 하늘로 날라
갈 것만 같다.


▲  새끼두꺼비 2마리를 등에 짊어진 어미 두꺼비상 (일주문 난간)
절의 지형 때문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갖다둔 것은 아닐까?

▲  삼천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일주문을 들어서면 종무소(宗務所)와 법당인 대웅보전(대웅전)이 차례로 모습을 비춘다. 예전
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절의 법당)을 칭했는데 건물이 얼마나 허벌나
게 큰지 가히 절 이름값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붕 용마루 양쪽에는 치미가 날카롭게 솟아
북한산 봉우리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고,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장보살상,
신중탱, 16나한, 500나한상 등이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대웅보전 앞에도 2마리의 새끼를
등에 진 두꺼비상이 있다.

▲  등장 인물로 빼곡한 신중탱(神衆幀)
모두 104명이 담겨져 있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석가3존불과 후불(後佛)목각탱

석가불이 조그만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석가3존불을 이
룬다. 그들 뒤에는 호화롭고 복잡해 보이는 후불목각탱화(木刻幀畵)가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이들은 삼세불화(三世佛畵)를 표현한 것으로 가운데에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배치하고 왼
쪽에 약사회도(藥師會圖), 오른쪽에 극락회도(極樂會圖)를 배치했다.

▲ 석가3존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진 16나한(羅漢)과 500나한들
우리나라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의상을 취하고 있어 다들 개성들이 넘친다.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명품급 마애불이자 삼천사계곡의 영원한 은둔자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657호

▲  마애불과 그에게 보금자리를 내준 눈썹바위

대웅보전 옆구리를 지나면 왼쪽으로 범상치 않은 모습의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애불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으니 그가 바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마애불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이다.

불상 앞에는 그에게 예불을 올리는 석조 공간이 넓게 닦여져 있는데 그 공간 밑에는 삼천사계
곡이 일조권을 강제로 빼앗긴 채 숨죽여 흘러간다. 한참 학창 시절이던 1992년 가을,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지금처럼 계곡을 가리고 앉은 돌로 다진 공
간이 없었고 계곡을 건너면 마애불 앞에 조그만 예불 공간이 전부였다.

서울에 있는 4개의 고려시대 마애불<① 승가사 마애여래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② 안암동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③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④ 삼천사 마애여래입상>
의 일원으로 고려 초기(멀리 신라 말로 보기도 함)에 조성된 선각(線刻) 마애불이다. 불상 대
부분은 선을 그어 처리했지만 일부는 약간 튀어나온 얕음새김으로 전체 높이는 3m, 불상의 높
이는 2.6m이다.

이 마애불은 윤곽을 따라 금분이 칠해져 있었으나 2000년 이후에 사라졌고, 그의 왼쪽(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부분에는 약간 붉은 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는 그에게 채색을 했던 흔
적들이다. 마애불에 색을 입힌 경우는 이곳과 경북 칠곡군 왜관(倭館) 부근에 있는 노석리 마
애불상군 등이 있다.


▲  마애불 양쪽에는 네모난 구멍이 2개 있는데 저들은 마애불을 보호했던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으로 그가 감싸주던 부분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유난히도 밝고 하얗다. 마치 광배(光背)에서 나온 빛이 그의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처럼 말이다.


불상의 머리 뒷쪽에 2겹으로 된 둥근 두광(頭光)이 그를 밝히고 있고 소발(素髮)한 머리 위에
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작고 갸름한 편으로 눈은 지그시 감아 명
상에 잠긴 모습이며 코의 끝부분은 두툼하다. 입은 살짝 오무려 약간의 미소를 선보이고 있고
눈썹 사이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박혀있다.
그의 키는 얼굴에 비해 꽤 긴 편으로 조금은 두꺼워 보이는 법의(法衣)를 걸치며 두 어깨를 가
렸고 발 밑에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있으며, 몸 뒤에는 반짝반짝 윤기를 흐르는 광배(光背)
가 새겨져 있다.
신체적인 균형이 그런데로 비슷하며 몸매는 단정하고 단아한 인상을 풍긴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배 앞에서 받쳐든 모습인데, 이는 부처의 성도(成道)를 상징한다고 한다.

불상 어깨 좌우와 윗부분에는 네모난 구멍과 좌우로 길게 파여진 홈이 있는데 이는 자연현상이
아닌 마애불을 보호하던 목조 가구(架構)를 씌우던 흔적이다. 그 가구는 오래 전에 자연재해나
화재로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가 사라진 이후에는 불상 위쪽에 있는 눈썹바위의 보호를 받으
면서 눈과 비를 피했다. 게다가 첩첩한 계곡 바위에 자리한 탓에 태풍과 거센 바람의 공격을
피하기에 좋아 거의 천 년의 세월을 살았음에도 바위에 진하게 현신한 듯 건강상태는 좋다.

지금은 이렇게 답사객과 순례객의 발길이 빈번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리 주목을 받
지 못했다. 게다가 민간인 통제구역에 묶여 출입도 부자유스러우니 아는 사람과 절 신도만 조
금 찾는 정도였다. 허나 삼천사와 삼천사계곡에 꽁꽁 씌워진 통제의 굴레가 벗겨지면서 삼천사
의 존재와 함께 마애불의 이름도 약간이나마 알려지면서 찾는 이가 늘었다.


▲  바위에 현신한 듯 두드러진 모습의 마애불 윗부분
불상을 수식하고 있는 두광과 신광은 마치 몸에 빛이 발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도록 그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준다.


▲  마애불의 아랫도리
연꽃으로 치장된 연화대좌 위에 불상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에 걸쳐진
법의 밑에 그의 두 발이 나와 있는데 발가락이 다소 두터워 보인다.


내가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1992년 가을, 진관사 부근 야산에 숨어있는 줄 알고 부근 야산
을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미지의 세계나 다름이 없던 삼천사까지 들어왔다. 당시 적멸보궁이던
대웅보전 뒷쪽에서 나와 숨바꼭질을 한 마애불을 발견하고
'서울에도 이렇게 휼륭한 마애불이 있었다니!!' 감탄을 연발하며 북악산(백악산)의 백석동천<
白石洞天, 백사실계곡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그에게 은근슬쩍 빠져들고 말았지. 하여 매년
적어도 1~2회 정도 그를 찾고 있다. 나는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점점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비록 인간이 만든 조각물이긴 하지만 여
전히 정정함을 잃지 않으며 오늘도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맞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은 삼천사 경내지만 예전에는 옛 삼천사로 가던 길목으로 조그만 암자와 계곡, 바위만 있
었다. 그러다가 마애불 주변에 삼천사를 세우면서 지금처럼 경내 한복판이 되었고, 지금의 삼
천사를 일군 성운의 노력으로 오래된 마애불임을 입증받아 1979년 국가 보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이 마애불은 영험(靈驗)이 있기로 소문이 자자해 많은 중생들이 먼 거리를 걷는 수고로움을 마
다하지 않으며 이곳을 찾는다.


▲  마애불 좌측 면에 새겨진 '일붕선사좌선대(一鵬禪師坐禪坮)' 바위글씨
20세기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 서경보 선사가 이곳에서
좌선한 것을 기리고자 새긴 것이다.

▲  꼬랑지가 인상적인 귀여운 다람쥐상 (마애불 예불 장소 난간)
(그의 존재의 이유는 모르겠음)

▲  부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종형사리탑(鐘形舍利塔)

마애불 앞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이 있다. 이 탑은 1988년에 성
운화상이 미얀마 마하시사사나 사원의 아판디타 대승정에게서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
안하고 있는데 그 연유로 서울에서 제일 처음 적멸보궁을 마련하여 석가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사찰임을 천하에 어필했다.
마애불과 함께 삼천사의 성역으로 무척 애지중지되다가 2012년 진신사리를 담은 거대한 9층석
탑이 지어지면서 중요성이 조금은 떨어졌다.

◀  종형사리탑 우측의 세존진신사리비
미얀마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과정과 이유를 소상히 담아 넣었다.


 2층 규모의 산령각(山靈閣)

마애불이 의지하고 있는 눈썹바위 옆구리에는 2층짜리 산령각이 있다. 산령각이란 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산신각(山神閣)의 다른 이름으로 삼천사는 그 흔한 이름 대신 천태각이나 산령각
처럼 생소하고 어려운 이름을 선택해 중생들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산신
각이긴 하지만 독성(獨聖)과 칠성(七星)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한
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은 2층으로(1층은 창고 등으로 쓰임) 내부 중앙에는 금
칠을 한 거대한 산신탱이 걸려있다. 예전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은 나무로 돋음새
김으로 새기고 나머지는 그림으로 상큼하게 처리했으나 돈을 좀 벌었는지 죄다 도금을 하여 금
색 옷으로 갈아입혔다.
화려하게 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산신의 수염과 동자의 머리를 빼고는 모조리 색이 같아서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벌이듯 분간이 쉽지 않아 눈만 아프다.

이렇게 산신탱은 삼천사에서 마애여래입상, 세존진신사리탑 다음으로 자랑하는 보물로 비록 고
색의 기운은 없지만 다른 절과 달리 산신을 크게 내세운 산신도량으로 절을 키우면서 '북한산(
삼각산) 산신이 보좌를 튼 절'임을 진하게 자처하고 있다.


▲  요란한 금칠의 산신탱과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올려진 공양미들

 독성(나반존자)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칠성들의 회합 현장, 칠성탱


▲  산령각과 마주한 눈썹바위 - 오랜 세월의 주름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  산령각에서 굽어본 마애불 예불 공간과 종형사리탑 주변,
그리고 대웅보전의 두툼한 뒷모습

▲  산령각에서 굽어본 삼천사 위쪽 다리
저 다리는 삼천사계곡 등산로로 북한산성과 비봉, 옛 삼천사터로 이어진다.
다리 주변 계곡에는 중생들이 쌓아올린 기하학적인 돌탑들로 가득해
조그만 돌탑의 세상을 이룬다.

 삼천사의 독특한 불전 ~ 천태각(天台閣)

산령각 옆에는 천태각이라 불리는 벽돌 건물이 있다. 천태각은 16나한의 하나로 천태산(天台山
)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독성각(獨聖閣)과 비슷하다. 삼천사
는 독성각이란 보편적인 이름을 취하지 않고 그가 일어난 천태산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이라 했
는데 산령각에 독성탱이 있음에도 별도로 그만의 건물까지 두어 대우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9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108개의 인등(引燈)이 내뿜는 열기와 기름냄
새로 가득해 더울 때 오면 정말 한증막이 따로 없다. 인등은 기름을 담고 심지를 넣어 불을 켠
것으로 하루 종일 불을 밝힌다. 그래서 건물 내부가 더운 것이다.
건물 지붕에는 매일 치솟는 열을 외부로 배출하고 공기를 통하게 하여 내부 온도를 유지시키는
통풍구가 있으며, 다른 건물과 달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2개로 바깥 문인 여닫이문은 언제나
열려있으나 안쪽 문인 미닫이문은 인등을 지키기 위해 항시 닫혀져 있다. 문을 들락날락 거릴
때는 반드시 문을 닫아야 인등의 건강에 지장이 없다.


 천태각의 주인, 독성상과 자연석으로 간단하게 손질한 16나한들

천태각 독성은 대머리의 둥근널쩍한 얼굴, 길다란 귀, 약간 두꺼워 보이는 옷(얼마나 더울까?)
, 그리고 배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한 여유로운 모습이다. 명
상에 잠긴 그의 익살스런 표정은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하며 그 좌우에는 조그만 16나
한상이 포진해 있는데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자연석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한 것이다.


▲  삼천사 위쪽 계곡을 가득 메운 돌탑의 물결

▲  삼천사 돌담길 (삼천사계곡 산길)

삼천사에서 북한산(삼각산)으로 오르려면 종형사리탑 좌측에 있는 대문으로 나가거나 일주문에
서 오른쪽 길로 가야 된다. 마치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기와집이나 궁궐 담장길을 거닐 듯, 운
치가 깃들여진 돌담길은 삼천사의 또다른 명물이라 할만하다.


 아비규환의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다~~

 연등의 전송을 받으며 ~~
이렇게 하여 봄의 한복판에 찾아간 북한산 삼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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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나들이
(삼청공원, 말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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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숲이 무성한 서울 도심의 든든한 허파, 삼청공원(三淸公園)

▲  감사원 서쪽에 있는 삼청공원 후문

여름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6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촌(北村)을 찾
았다. 북촌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계속 북쪽으로 가니 어느덧 북촌과 북악산(백악산)의 경계인
삼청공원까지 발길이 가게 되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오랜만에 공원이나 1바퀴 둘러보고자
공원 정문을 통해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북악산 동남쪽 자락에 넓게 누운 삼청공원은 서울 도심의 북쪽 끝으로 조선시대에도 한양도성(
都城)의 북쪽 끝을 담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싱그러운 나무가 바다를 이루던 명승지로 서울 사
람들의 오랜 나들이 명소였으며, 봄꽃이 만연할 때는 사대부 여인들이 봄꽃놀이를 즐기던 현장
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도성
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삼청동 골짜기를 꼽았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으로 '산이
높고 나무가 빽빽한데 바위 골짜기가 깊숙하다'
라며 이곳을 표현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표현은 유효한데, 공원 일대에는 북악산의 명물인 소나무를 비롯해 노간주
나무, 붉나무, 팥배나무, 쪽동백나무, 신갈나무, 때죽나무, 진달래 등 갖은 나무들이 숲을 이
루고 있으며, 골짜기가 깊고 멋드러진 바위가 여럿 포진해 있다.

이렇게 서울 사람들의 오랜 산책 명소이자 피서지였지만 공원에 서린 옛 흔적은 북악산 주능선
에 붙어있는 숙정문(肅靖門)과 한양도성 밖에는 없다. 이들은 도성 수비용이니 풍류와는 관련
이 없고 기껏해봐야 관리들이 말을 타고 올라와 시를 지었다는 자연산 바위, 말바위 정도가 있
다. <공원 바깥까지 확대한다면 '삼청동문(三淸洞門)' 바위글씨를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와 유
길준(兪吉濬)이 유폐되어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작성했던 취운정(翠雲亭)터 정도가 있음>

왜정(倭政) 시절인 1934년 3월, 삼청골 일대를 삼림공원으로 삼아 관리하기 시작했으며, 1940
년 3월, 총독부고시 208호에 따라 도시계획공원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왜정은 도시계획공원
140개를 발표했는데 삼청공원이 그 1호로 당시 공원 면적은 약 432,000㎡였으며, 소나무를 비
롯한 온갖 나무들로 울림(鬱林)을 이룬 이곳에 산책로와 정자, 의자, 풀장 등을 설치했다.

1945년 이후에는 정몽주 시조비 등의 시비(詩碑), 영무정, 어린이놀이터, 운동시설 등을 계속
해서 설치했고 산책로와 계곡을 정비했으며 삼청동길과 계곡(삼청골) 사이에 나무데크길을 닦
았다. 그리고 근래에 후문 부근에 숲속도서관을 짓는 등, 자연에 크게 반(反)하지 않는 범위에
서 얌전하게 손질을 했다.
공원 손질이 얌전했던 이유는 공원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잔뜩 포진해 있어 천박한 개발
의 칼날을 뚝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하여 자연에 쏙 묻힌 싱그러운 공간으로 도심 속에 남게
된 것이다. 다만 시내 확장과 군부대로 공원 면적은 5만㎡가 줄어 현재는 약 388,109㎡이다.

삼청공원은 도심의 핵심인 광화문(光化門)과 종로에서도 무척이나 가깝다. 게다가 공원과 살을
맞댄 북촌과 삼청동길의 인기가 계속 하늘을 찌르면서 찾는 이도 많이 늘어났다. 숲이 매우 짙
어서 그늘도 꽤 깊으며 조촐하게 자연산 계곡까지 갖추어 북악산 서북쪽 자락에 묻힌 백사실계
곡(백석동천, ☞ 관련글 보러가기)과 더불어 도심 속 피서지로 인기를 더하고 있다.
 비록 천하에 이름 꽤나 있는 계곡 앞에 명함조차 내밀기 쑥쓰러운 수준이지만 도심 속에서 발
을 담구며 간단하게 피서를 누릴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대단하다. 공원을 가로질
러 도심으로 향하는 삼청골은 삼청천(三淸川)이라 불리며 청계천 상류의 하나를 이룬다.

시내에서 공원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삼청동(三淸洞)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는 것과 감사원
서쪽의 후문으로 가는 길이 가장 일반적이다. 북촌에서 들어간다면 후문을 이용하면 되며, 삼
청동길로 접근하거나 마을버스를 이용한다면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면 편하다. 또한
2009년에 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뚫리면서 북악산 주능선과 숙정문은 물론 그 너머
성북동(城北洞) 지역까지 바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이 길이 지나가는 북악산 동남
쪽 자락은 오랫동안 속인(俗人)들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던 금지된 곳으로 산길이 닦이면서 이
곳을 잠궜던 자물쇠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공원 서쪽에는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시작된 삼청동길이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면서 구불구불 또
아리를 튼 2차선 산악도로의 모습을 보이며 삼청터널을 거쳐 성북동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박
정희 정권 시절 성북동에 서식하던 권력 실세들이 그들의 교통 편의와 땅값 상승, 청와대와 정
부기관에서 삼청각/대원각 등 고급요정으로의 접근 편의를 위해 낸 것으로 당시에는 차량이 많
지 않아 조촐하게 2차선으로 만들었다.
 허나 시간이 흘러 차량들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도로와 터널을 넓혀야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개발제한구역이라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2차선으로 마냥 두고 있는 것이다.

삼청터널과 터널로 이어지는 길(삼청공원~삼청터널 북쪽, 삼청각 구간)은 뚜벅이들의 배려 따
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로지 차량을 위한 길이니 괜히 도보로 가는 일이 없기 바라며 삼청동에
서 숙정문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이 길은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묻혀 속세의 뇌리 속에
잊혀진 상태이다.

※ 삼청공원 찾아가기 (2017년 8월 기준)
* 지하철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을 타
  고 삼청동 종점 하차. 이 버스는 삼청동에서 정독도서관입구, 동십자각, 광화문, 시청, 남대
  문을 거쳐 서울역(서울역전우체국 북쪽)까지 운행한다.
* 지하철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감사원 하차(또는 도보 15
  분), 감사원에서 서쪽(삼청동)으로 내려가면 막다른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들어
  가면 공원이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삼청동길)
*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25분 정도 걷거나 동십자각 북쪽 법련사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이용
*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이용시간 : 10시~18시 (여름은 20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 ☎
  02-734-3900)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1 일대 (북촌로 134-1)


▲  삼청공원 후문 안쪽

공원 후문을 들어서면 수목원 같은 삼청공원의 고운 속살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수목원 같지만
속살을 깊이 들어가면 수목원 분위기는 울림으로 변화하고 산내음과 솔내음이 청정한 기운을
볶아내면서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  숲터널을 이룬 삼청공원 산책로 ▼


▲  시인 김경린(金璟麟, 1918~2003)의 '차창'이 담긴 시비(詩碑)

차창(車窓)
나는 수족관에 온 한마리의 어족
미끄러지는 바깥 세계가 뿜는 향수로
안경은 차웁다

우리나라 현대 시인의 하나인 김경린이 2003년 세상을 뜨자 그의 후학들이
그가 살았던 삼청동에 그의 대표작, 차창을 담은 시비를 세웠다.

▲  동심이 깃든 삼청공원 어린이놀이터
어린이들의 안전과 그들의 흙놀이 공간을 위해 흙으로 놀이터를 닦았다. 나도
어렸을 때 흙장난 참 많이 했었지. 그때는 흙으로 많은 세상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도 아리송하다.

▲  삼청공원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옛 약수터
오른쪽에 보이는 네모난 구멍에서 약수가 콸콸 쏟아져 나왔으나
이제는 목구멍이 막힌 죽은 샘터가 되었다.

▲  삼청공원 약수터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담는 약수터로 근래 부적합 판정을 받아 찾는 이가 많이 줄었다.
약수터 맞은편 의자에는 1996년 10월 문화체육부에서 세운 근대 소설가 염상섭
(廉想涉, 1897~1963)의 앉아있는 동상이 있었으나 2014년에 치워버렸다.
(염상섭의 생가터가 이곳 부근이라 동상을 세웠음)


▲  비둘기도 이곳 경관에 반해 뒤뚱뒤뚱 산책을 즐긴다.

▲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비

정몽주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가 담긴 정몽주 시조비는 이곳에서 그나마 오래된 볼거리로 1973
년에 세워진 것이다. 포은(圃隱)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을 덜 초라하게 해준 3은(三隱)의 하
나로 그의 시조비가 떡하니 있어 이곳과 무슨 관련이 있겠구나 싶지만 실상은 서로 아무런 관
련이 없다.

시조비 오른쪽을 장식하고 있는 시조는 백로가(白鷺歌)로 정몽주의 어머니가 간신과 역신(逆臣
) 등 질이 안좋은 무리와 어울리지 말 것을 훈계하고자 지은 시라고 한다. 허나 조선 영조 때
간행된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작자 미상이라 나와있고 조선 말 학자인 이희령(李希齡)이 지
은 약파만록(藥坡漫錄)에는 연산군 시절에 김정구(金鼎九)가 지은 시라고 나와있어 작자에 대
해서는 아직도 말들이 많다.

시조비 왼쪽에는 정몽주가 지은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가 쓰여 있다. 이 시는 이성계(李成
桂) 패거리가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인 이방원(李芳
遠, 후에 조선 태종)이 정몽주를 살짝 찾아와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를 들이밀며 그의 의중
을 물었다.
 허나 정몽주는 그 이름도 높은 단심가로 답을 하며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강하게 내비췄다.
결국 안되겠다 여긴 이방원은 부하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잔인
하게 처단하고 만다.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과 정몽주를 잃은 고려는 더 이상 지탱
하지 못하고 결국 이성계 패거리에 의해 강제로 휘장을 내리게 된다.



백로가(白鷺歌)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빗을 새오나니
창파(滄波)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하여가(何如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영무정의 4계절' 시비
영무정 보존회에서 2008년 10월에 세운 시비이다.


영무정 시비에서 북쪽을 보면 초록색 철책이 빙 둘러진 후미진 공간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속살에는 조그만 폭포가 동천(洞天)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그 밑에 물이 담겨진 욕조처
럼 생긴 통이 있으며, 그 옆에 조그만 정자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의 숨겨진 명물, 영
무정이다.

이곳은 서울에 거의 남지 않은 노천 목욕탕으로 1960년경에 동네 사람들이 목욕터로 만든 곳이
다. 폭포 밑에 3명 정도 들어갈 크기의 욕조를 만들었는데 물이 매우 맑고 차다고 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람 여럿이 욕조에 몸을 담구거나 (물론 옷은 입었음) 주변에 앉아 대
화를 하고 있어서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특히 아저씨와 노공(老公)>의 오랜 목욕터이나 문제는 시민들이 거니는 공원에서
벌거벗고 목욕과 냉수마찰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계속 논란이 불거지자 종로구청에서
이곳을 없애려고 삽을 들었으나 영무정보존회에서 쌍수 들고 반대하여 철거는 하지 못했다. 또
한 방송에도 여러 번 등장해 그 이름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철거하기에 좀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여 종로구청은 기존에 있던 펜스를 치우고 초록색 철책을 둘렀으며, 벌거벗고 씻지
말라는 경고문을 붙이는 선에서 영무정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허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늦은 밤에 몰래 벗고 씻는 이들도 아직 있을 듯 싶으며 구석진 곳이
라 둘만의 조용한 대화(?)를 원하는 이들이 찾기에 좋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이자 내 어린 시절 뒷동산이었던 남산(
南山)의 여러 약수터에는 이런 노천 목욕탕이 거의 딸려있었다. 약수터와 운동시설 옆에 담장
등을 둘러 벗고 씻는 공간을 둔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남산 그늘에 살았을 적에 부친을 따라
남산의 모 약수터에서 냉수마찰을 한 적이 있다. 냉수마찰을 해야 감기가 안걸린다는 말에 깜
빡 속아서 말이다.

영무정이 법에는 다소 저촉은 되지만 동네 사람들의 쉼터이자 피서지로 차가운 물이 모였다는
욕조에 들어가 피서를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단 물놀이에 적당한 가벼운 옷차림(속옷바
람은 안됨)으로 통에 들어가길 바라며, 삼청골 오염을 방지하고자 비누 사용과 음식물 취사행
위를 금하고 있으니 그냥 몸만 시원하게 담구고 오자.


▲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영무정 북쪽)
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만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  구부러진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  삼청공원 산책로는 경사가 별로 없어 누구든 마음 편히
거닐 수 있는 착한 오솔길이다.

▲  오랜 가뭄으로 목이 타버린 삼청골
물은 온데간데 없고 흙과 돌만 어지럽게 흩어져 초여름 가뭄의
심각함을 드러낸다.


 

♠  삼청공원의 새로운 산길, 북악산 말바위 산길

▲  말바위 산길 입구

삼청공원 윗쪽에는 북악산 말바위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2008년에 닦기 시작하여 2009년에
완성되어 세상에 선보인 산길로 말바위조망대까지 600m 정도 이어져 있으며, 그곳까지는 가볍
게 10~15분 정도 걸린다. (중간에 갈림길이 있음,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소나무 숲길, 직진하
면 말바위임)

말바위조망대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숙정문 방향)으로 조금 가면 성곽 밖으로 나가는 나무데크
길이 있는데 그 길로 내려가면 바로 성북동으로 북악하늘길 제3코스와 만난다. 여기서 왼쪽(서
쪽)으로 가면 삼청각과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북악하늘길2/3코스로 이어지고,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와룡공원<여기서 성북동 종점이나 성균관대, 감사원 방면으로 내려가면 됨>으로 이어진다.
 또한 성곽길을 더 가면 말바위안내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숙정문을 거쳐 북악산 정상과 창의문
(彰義門, 자하문)으로 넘어갈 수 있어 코스 또한 다양하다. 그러니 취향에 따라 코스를 잡으면
된다.
허나 숙정문과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성곽길은 9시부터 16시(동절기는 10
~15시)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 (신분증을 지참하여 출입증을 작성해야 됨)

삼청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생기기 전에는 거기서 성북동/북악산 방면으로 가는 정
식적인 길이 없었다. 삼청터널이 있지만 거긴 오직 차량 전용이며, 걸어서 간다면 와룡고개로
우회해서 가야했다. 지도에서 보는 거리는 매우 가깝지만 걸어서 가는 체감거리는 이론과 다르
게 꽤 각박했던 것이다.
 허나 말바위 산길이 생김으로써 비록 산을 넘어야되는 부담은 있지만 서로의 거리가 꽤 줄어
들었고 반대로 성북동(삼청각)에서도 삼청공원과 도심 도보 접근이 수월해졌다.

출입절차를 밟아야 되는 말바위안내소에서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말바위
등산로와 성곽 밖 북악하늘길은 언제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단 군사시설이 여럿 있으
므로 그곳은 들어가거나 촬영하지 말 것)
 이렇게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뚫렸다니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한 모양이
다. 국가의 예민한 곳으로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하고 먼산 쳐다보듯 해야 했던, 잘못
들어갔다가는 정말 총 맞을 것 같던 그곳이 말이다. 이제 도성 남쪽인 북악산 남쪽만 개방되면
북악산은 거의 완전히 해방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는 청와대와 여러 예민한 시설이 있으니 당
장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  말바위 입구에 세워진 건강 돌탑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돌탑이든 우선 건강하고 봐야 된다.
건강이 없다면 바닷가의 힘없는 모래성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  소나무가 운치를 우려내는 말바위 산길

북악산은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절부터 소나무가 유명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특별
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하여 산이 온통 솔내음의 향기가 진동했다. 허나 왜정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 다른 나무의 유입 등으로 소나무가 많이 줄어 지금은 주능선 주변과 고지대에
주로 남아있다. 삼청공원이나 와룡고개 등 속세와 가까운 곳은 소나무가 거의 없고 속세와 어
느 정도 거리를 둔 고지대에서 소나무들이 이슬을 먹으며 자라고 있다.

북악산 일대는 오랫동안 금지된 산으로 묶여있다 보니 나무와 식물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리면
서 숲이 매우 울창하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삼청공원 일대에서는 직
박구리와 박새, 멧비둘기, 오색딱따구리, 꿩, 노랑지빠귀, 다람쥐, 청솔모 등이 살고 있다.


▲  삼청공원과 말바위 사이에 조성된 쉼터
말바위 등산로는 흙길과 나무로 만든 계단길이 적당히 섞여 있다.

▲  한양도성 (말바위 방향) - 사적 10호

삼청공원에서 말바위 등산로를 15분 정도 오르면 한양도성(한양성곽)의 여장이 나타난다. 여장
이란 성곽을 수비하고자 두툼하게 돌벽을 쌓고, 중간에 여러 개의 구멍을 낸 수비시설인데, 이
곳이 성내(城內)이다 보니 여장 안쪽에 있게 된 것이다. 여장 너머는 성밖으로 바로 성북동이
다.


▲  한양도성 (삼청공원 방향)
서울을 지키던 성곽도 부끄러움을 타는 것일까? 몸에 걸친 담쟁이덩굴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성곽은 1974년 이후에 복원한 거라 일부 검은 주근깨가 낀 것을 빼고는
대부분 하얀 피부를 자랑한다.

▲  말바위로 오르는 각박한 계단길 (왼쪽에 보이는 길로 가면 말바위 조망대)

한양도성과 만나는 곳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각박한 각도의 계단길이 나타
난다. (동쪽은 군사시설로 길이 막혀 있음)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말바위인데 계단길 중간에
왼쪽으로 통하는 나무길이 있으며 그 길로 들어서면 말바위 조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북악산 말바위조망대와 말바위

▲  도심을 향해 들어앉은 말바위 조망대

말바위 밑에 자리한 말바위 조망대(전망데크)는 커다란 바위 위에 나무로 만든 조망대로 도심
이 있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천하 굴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밑에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북악산 정상(342m)이나 그 동쪽 봉우리인 청운대(293m), 인왕산(338m)보다 키
가 낮아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도 사대문(四大門) 안쪽으로 좁다. 하여 이곳이 그리 높다는 생
각도 들지 않는다.
 허나 삼청공원을 비롯해 북악산 남쪽 자락과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그리고 그 안쪽에
둥지를 튼 도심이 속시원히 바라보며 그런데로 후한 점수를 줄만하다. 낮은 높이치고는 제법
선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과 남쪽 자락
북악산 너머로 인왕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쪽 동네> 일대가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①
바로 정면에 서울의 남주작인 남산이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②
삼청공원과 삼청동, 경복궁 주변 일대가 바라보인다.

▲  북악산의 오랜 명소, 말바위

말바위는 촛대바위와 더불어 북악산에 이름난 바위이다. 이곳까지 삼청공원의 영역에 들어가는
데, 북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시대에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
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많이들 쉬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로는 북악산의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左靑龍)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자리한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까 말
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
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  말바위의 옆모습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2007
년 4월 다시 공개가 되었다. 그때 말바위에서 북악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제한적으로 개방
되었으며, 말바위는 24시간 언제든 발을 들일 수 있는 자유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  말바위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 (북악산 정상에서 숙정문 구간)

▲  도성 밖으로 인도하는 말바위 나무다리와 한양도성 성곽길
탐방객 유의사항 현수막이 걸린 나무다리를 내려가면 도성 밖 성북동이다.
 

말바위와 말바위안내소 중간에는 성밖으로 나가는 나무다리가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
을 부시고 내려가는 길을 낼 수가 없기에 부득이 성곽 위에 나무 다리를 다져 성밖으로 통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과 김신조투르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괜찮다. 여기서
다리를 내려가면 성곽 북쪽 자락길로 삼청각(三淸閣)과 숙정문안내소, 북정마을, 와룡공원, 김
신조루트(북악하늘길) 방면으로 이어지며,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북악산 주능선의 동
쪽 관문인 말바위안내소가 마중한다.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삼청각과 북악산 북쪽 능선
삼청각 뒷쪽에는 2009년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숨겨져 있다.

▲  성북동 서부 - 북악산의 두 능선에 막힌 궁벽한 곳이지만 그곳에
자리한 집들은 궁벽과는 거리가 먼 크고 호화로운 집들 투성이다.
빈부격차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현장이라
눈도 그리 즐겁지가 않다.

▲  성북동 일대
성북동은 북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북악산길이 지나가는 능선) 사이에 포근히 터를
닦은 도심 속의 전원마을이자 완사명월형(浣絲明月形)의 명당 자리로 유명하다.
그러다보니 시커먼 졸부들이 가득 기어들어와 속칭 이 땅의 0.1%가 사는
비싼 동네가 되어버렸다.

▲  성북동 너머로 성북구 삼선동, 돈암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다시 삼청공원으로 (말바위 산길 입구)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성밖으로 넘어가 와룡공원을 거쳐 시내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귀찮기도 하여 왔던 길을 다시 재방송하여 삼청공원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시조비를 거쳐 삼청동길로 나오니 길 동쪽으로 북악산이 베푼 삼청골이 착한 풍경을 도
처에 빚으며 도로와 나란히 흘러간다. 허나 오랜 가뭄으로 비리비리한 모습을 보이니 보는 내
가 답답할 따름이다.


▲  가뭄에 타들어가는 가련한 삼청골 (삼청동길 동쪽 계곡)

▲  삼청동길과 삼청골 사이에 만든 뚜벅이용 나무데크길

▲  삼청동길 나무데크길의 남쪽 종점

서울 도심의 거의 흔치 않은 계곡인 삼청골(삼청천)은 공원 남쪽에 있는 삼청테니스장에서 어
두컴컴한 지하로 흘러간다. 개발의 칼질에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이다. 이 물줄기는 삼청동
길을 따라 경복궁(景福宮) 동쪽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옛날 경복궁 주변 사진을 보면
경복궁 동쪽과 북촌 주거지 사이로 하천이 하나 보이니 그가 바로 삼청천이다.

삼청공원을 벗어나 2분 정도 가면 삼청동 종점(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종점)이 나온다. 삼청동
과 도심을 이어주는 마을버스의 쉼터로 이곳도 엄연한 도심이라 경복궁과 광화문은 물론 시청
까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우리는 지친 몸을 마을버스에 담아 시내로 나왔다. 어차피 종점이라 100% 앉아가는 것은 가능
하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찾아간 북악산 삼청공원, 말바위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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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이 빚은 단양8경의 으뜸 명승지, 단양 사인암 ~~~ (북상리 시골, 청련암, 남조천)



' 단양 사인암 나들이 '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며 오랜 추위에 지친 천하를 진정시키던 3월 끝 무렵, 친한 후배
와 오랜만에 1박2일 장거리 여행을 나섰다.
렌트카를 이용하여 토요일 아침 8시에 서울을 출발, 백두대간 골짜기에 숨겨진 홍천(洪川
)의 삼봉약수(三峰藥水, ☞ 관련글 보러가기)를 찾아가 몸에 좋다는 탄산약수를 배터지게
섭취했다. 그런 다음 영월(寧越)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저녁 늦게 단양(丹陽)으로 넘어
갔다.

단양은 충북 동쪽 끝에 뉘어진 산간 고을로 나의 외가 동네(단성면 북하리)이다. 서울 다
음으로 오래 머문 곳으로<다 합쳐봐야 1년도 안됨> 지금은 다들 서울과 인천, 경기도, 원
주 등지로 나가고 모친의 작은아버지(나에게는 삼촌뻘~) 가족만 북하리 남쪽인 북상리(北
上里)에 머물며 터전을 지키고 있다. 바로 그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영월읍에서 제천(提川)을 거쳐 가라는 네비양의 안내를 쿨하게 무시하고 남한강을 따라서
고씨동굴, 영춘면, 향산리, 단양읍을 거쳐 저녁 10시가 넘어서 북상리 친척집에 도착했다.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삼겹살로 늦은 저녁을 들고 새벽 4시까지 코가 비뚤어지도록 곡차(
穀茶, 술)를 기울이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곡차의 기운이 몸 속에 진하게 퍼져 이거 아침에 일어날 수나 있겠나 걱정이 들었지만 아
침 9시가 되자 스르륵 잠이 깼다. 천근만근 무거운 두 눈을 비비며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든 다음 10시쯤 그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그곳에 머문 시간은 고작 12시간 남짓, 간
만에 온 것치고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허나 같이 간 후배 때문에 더 머물기도 그랬고 그날 경북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올라가야
되서 다음 인연을 격하게 고대하며 단양 친척집을 떠났다.

단양에서 경북으로 가려면 손쉽게 죽령터널(중앙고속도로)을 통하거나 아니면 사인암, 방
곡리를 거쳐 문경으로 넘어가야 된다. 우리는 쉬운 길 대신 미답로인 문경 방면 고갯길을
택했는데 그 길목에 단양8경의 으뜸인 사인암이 요염하게 버티고 있다.
사인암은 예전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었고 이번에는 경북 지역에 크게 비중을 두었으므로
단양은 하룻밤 머무는 선에서 딱 선을 그으려고 했다. 허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
지나친다고 창밖에서 자꾸 손짓하는 사인암을 애써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나 잘생긴
사인암을 훌쩍 지나치는 것도 마음에 좀 걸리고 요즘 같은 난세(?)에 다음을 흔쾌히 기약
할 수가 없어 그곳에서 잠시 바퀴를 멈추고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  단양8경의 으뜸이자 운선9곡(雲仙九曲)의 아름다운 입술
사인암(舍人岩) -
명승 47호

단양8경(丹陽八景)이란 단양의 이름난 경승지 8곳을 일컫는다. 조선 명종(明宗) 시절, 퇴계 이
황(退溪 李滉)이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는 단양의 명승지 8곳을 뽑아서
단양8경으로 묶으면서 명나라의 소상8경(瀟湘八景)보다 더 아름답다고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했다. 그 단양8경을 이루고 있는 식구로는 도담삼봉(島潭三峯)과 석문(石門), 구담봉(龜潭峯),
옥순봉(玉荀峯),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 등으로 그중 도담3봉과 석문을 제외하고 모
두 옛 단양의 중심지였던 단성(丹城) 주변에 몰려있다. (8곳 중, 5곳만 가봤음)

사인암은 단양8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현장으로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70m 높이의 기암절벽(奇
巖絶壁)이 사인암의 핵심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절벽에 상하 좌우로 균형 있게 줄이 그어
져 있어 마치 천연의 바둑판을 보는 듯 한데 하늘나라의 신선 형님들이 인간들이 자고 있을 때
살포시 내려와 이 절벽을 바로 눕혀 내기바둑을 한판 두고, 하늘로 올라갈 때는 인간들이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끔 하늘을 향해 세워두고 가는 모양이다.
절벽 꼭대기에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닮은 노송(老松)들이 사인암의 운치를 가득 수식하는데,
어찌 저런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혹 바둑판이 비와 눈에
젖을까봐 신선이 심어둔 작은 우산은 아닐까?

이곳은 단양 출신인 고려 후기 대학자, 역동 우탁(易東 禹倬, 1263~1342)이 사인(舍人) 벼슬에
있었을 때 휴양했던 곳이라 전한다. 우탁은 단양우씨 집안으로 원나라에서 들어온 정주학(程朱
學) 서적을 처음으로 터득한 인물인데,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 임제광(林齊光)이 우탁이 머무
른 것을 기리고자 그의 벼슬 이름을 따서 사인암이라 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인 김홍도(金弘道)도 이곳을 다녀가 멋지게 그림으로 남겼고, 많은 시인묵
객들이 찾아와 시문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며 이곳의 절경을 즐겼다.

사인암은 남조천(南造川)을 따라 이어진 운선9곡의 하나로 유리처럼 맑은 남조천의 물이 이곳
을 굽이쳐 흘러 안그래도 절경인 경치에 더욱 윤기를 북돋는다. 사인암 옆에는 고려 때 지어졌
다는 청련암(靑蓮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터를 닦았으며, 사인암 입구에는 1977년 6월 지방 유
림에서 세운 역동우탁기적비(易東禹倬紀績碑)가 서 있다.

예전에는 상선암, 중선암 등에 밀려 좀 한적했으나 서서히 단양의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주변에
음식점과 민박, 펜션 등이 많이 생겨났으며, 시골 북하리와 10여 리 거리로 가까워 외가 친척
들도 자주 놀러왔던 곳이다. 시골과도 꽤 가까운 곳이 분명하건만 시골을 자주 찾았던 어렸을
적에는 이상하게도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고 (상선암과 중선암, 하선암도 못가봤음) 다 장성
한 이후에야 겨우 인연이 닿아 이렇게 2번 인연을 지었다.


▲  사인암 앞을 굽이쳐 흐르는 남조천
남한강을 향해 격하게 흐르던 남조천의 물줄기도 이곳만큼은 서행하여
사인암의 절경을 즐긴다.

▲  남조천에 조성된 타원형 모양의 섬
사인암과 조금 떨어진 남조천 한쪽에 흙과 돌로 대(臺)을 쌓고 역동우탁기적비와
운치가 깊은 소나무3그루를 심었다. 남조천 물줄기 틈에 자리해 있어
사인암 속의 조그만 섬을 이루고 있다.

▲  역동우탁기적비 주변에서 바라본 남조천과 사인암

▲  남조천에 사뿐히 걸린 구름다리

▲  우탁의 시를 머금은 커다란 표석

▶ 춘산에 눈 녹인 바람 ◀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듸 업다
져근 덧 비러다가 마리 우희 불니고져
귀 밋태 해묵은 셔리랄 녹여볼가 하노라

☞ 봄 산에 쌓인 눈을 녹인 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가 간 곳이 없다.
잠시 동안 (그 봄바람을)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봄 바람을 이용해 자신의 젊음을 되찾고 싶은 우탁 할배의 부질없는 꿈을 담은 시,
나이를 먹는 것 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래서 노인들이 좋아하는 폭포가
'미대륙에 있는 나이아가라'폭포라고??)

▲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사인암
그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사인암의 모습도 조금씩 달리 보인다.

▲  바로 건너편에서 바라본 사인암의 위엄

예전 사인암을 찾았을 때(친척들과 같이 갔음)는 정작 사인암 건너편은 가지 않았다. 그 건너
편에서 바로 정면으로 그를 대하니 정말 대자연 형님의 위대한 작품성이 느껴진다. 마치 바둑
판을 하늘로 향해 곧게 세운 듯한 모습, 절벽 꼭대기에 소나무들이 운치를 뽐내며 절벽의 우산
이 되어주는 모습 등 그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선보이며 1폭의 그림 같은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대단하다 설친들 저런 작품은 감히 흉내내지 못할 것이다.


▲  사인암 건너편에서 바라본 청련암


 

♠  사인암에 안긴 조그만 절집, 보기와 달리 깊은 역사를 지닌
청련암(靑蓮庵)


▲  사립문이 활짝 열린 청련암

사인암 옆구리에는 청련암이란 조그만 절집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런 곳에 왠 절이 있나? 싶
을 정도로 좀 쌩뚱맞기도 한데 얼핏보면 근래 지어진 절로 생각하기 쉬우나 현실은 제법 오래
된 절이다.

청련암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의 말사(末寺)로 1373년(공민왕 22년)에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허나 신빙성은 그리 없어 보이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710년에 중창하
여 청련암이라 했다고 한다.
원래는 여기서 가까운 대강면 황정리 산28번지에 있었는데, 그 부근에 있었다는 대흥사(大興寺
)의 말사로 있었다. 허나 그 대흥사는 19세기 후반 의병(義兵)과 왜군과의 싸움에서 파괴되었
고, 1954년 소백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황정리 일대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지자 청련암도 부
득이 방을 빼야 되서 절의 대들보와 기둥을 들고 사인암 옆에 새롭게 터를 닦았다.

청련암은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는 조촐한 암자로 법당인 극락전과 옛 법당, 삼성각, 요
사 등이 전부이다. 2013년 4월 새 극락전을 만들어 법당으로 삼았으며, 옛날의 유물로는 18세
기에 조성된 목조보살좌상이 있다.
사인암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있어 사인암에 온 사람들은 무조건 절에 발을 들이기 마
련이다. 절을 거쳐야만 사인암의 뒷통수로 올라갈 수 있으며, 사인암과 청련암이 완전히 한 덩
어리가 되어 생사고락을 같이한다. 사인암 방문객이 늘면 자연히 절을 찾는 발길도 정비례할
수 밖에 없으니 정말 자리 하나는 잘 잡았다. (당시 주지승의 혜안이 참 놀라울 따름!) 사인암
이 건재하는 동안은 청련암은 결코 법등(法燈)이 마를 날이 없을 테니 말이다.


▲  청련암 경내와 사인암의 옆구리

▲  청련암 극락보전(極樂寶殿)

경내로 들어서면 옛 법당 직전에 극락보전이 산듯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2013년 4월에 지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새 건물
로 경내 제일의 보물인 목조보살좌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건물 내부를 살피지 않고 그냥 지나
쳐버려 목조보살좌상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냥 옛 법당에 계속 있는 줄 알았음


▲  예전에 담은 청련암 목조보살좌상(木彫菩薩坐像)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09호

청련암 목조보살좌상은 원래 청련암 법당에 봉안되었던 아미타3존불의 구성원인 대세지보살상
(大勢至菩薩像)이다. 1954년 이곳으로 절을 옮기는 과정에서 그만 본존불(本尊佛)을 잃어버렸
으며,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은 엉뚱하게 제천 원각사로 넘어가고 대세지보살상만 간신히 수
습하여 가져왔다. 그래서 협시불이 본존불로 출세하여 불단 중앙에 홀로 봉안된 것이다. 또한
그의 뱃속에서는 여러 복장(腹臟)유물이 나왔으나 근래 도난당하고 말았다.
불상에 입혀진 도금을 벗기고 새로 개금(改金)을 했을 때 목불(木佛)의 형태를 확인했으며 은
행나무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청련암의 옛 유물로 1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절 충청도 지역 불상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보살상의 모습을 보면 마치 어린 동자가 관음보살의 탈을 쓰고 대신 앉아있는 것 같다. 동자와
같은 귀여움과 해맑은 미소가 진하게 드리워진 그의 표정은 너무 밝아 보는 이의 눈을 눈부시
게 하니 사인암과 청련암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도 그의 표정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냥 돌아갈 것이다.


▲  석불좌상과 옛 법당

극락전으로 쓰인 옛 법당은 법당의 품격과는 좀 거리가 있는 여염집 모습으로 새로운 극락보전
이 지어지자 법당에서 물러나 평범한 신세가 되었다. 현재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목조
보살좌상은 새 극락보전으로 옮겨 청련암 중심 불상의 업무를 계속 수행한다. (이들 불상의 위
치는 절의 사정상 바뀔 수도 있음)
옛 법당 앞에는 조그만 석불좌상이 자리해 있는데, 원래 새 극락보전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옛 법당에 봉안된 석가3존불

▲  옛 법당에서 바라본 청련암 경내


▲  물이 넘치는 연꽃무늬 석조(石槽)
사인암이 중생들에게 베푼 소중한 옥계수로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몸과 마음이 시원해진다.

▲  우탁의 탄로가(嘆老歌)를 머금은 표석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은 늙음을 탄식하는 시를 여럿 남겼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탄로가이다. 아무리 발버
둥을 치며 피부와 건강에 힘써도 세월은 자꾸만 흐르고 자신도 강제로 늙어만 가니 정말 무서
운 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30대의 끝 무렵을 달리고 있지만 탄로가의 시 앞에 무책임하게 나이나 처묵처묵하고 있는
내 모습에 정말 열불이 난다. 물론 나이는 강제로 먹는 것이니 거절을 해도 소용은 없다. 아직
까지는 젊다고 자부를 하지만 빛의 속도로 내달리는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신선 세계의
하루는 인간 세상의 몇십~몇백년이라고 하는데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 같다.


▲  탄로가 표석에서 바라본 남조천과 구름다리
단양은 소백산맥에 묻힌 산골이라 봄과 여름은 늦게 오고 겨울은 일찍 온다.
날은 조금씩 따스함이 더해지고 있으나 비록 힘은 잃었지만 아직까지는
겨울 제국의 세력이 적지 않게 남아있어 아직까지 제국의 눈치를 본다.
허나 곧 소쩍새가 울 때면 지긋지긋한 겨울을 완전히 떨쳐내며
다들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사인암의 뒷통수로 오르는 계단길

어떻게 경사도 꽤 각박한 사인암 뒷통수에 감히 건물을 올릴 생각을 했을까? 청련암 주지승의
기발한 생각<사인암 입장에서는 좀 고달프겠지만>으로 궁색한 자리를 극복하여 좁게나마 터를
다지고 삼성각을 지어 속세를 향해 계단을 늘어뜨렸다. 이로 인해 사인암이 삼성각을 업고 있
는 모습이 되었다.
삼성각으로 인도하는 계단은 보기와 달리 상당히 거칠고 고르지가 못해 오르락내리락 할 때 주
의가 필요하다. 예전에는 삼성각 뒤쪽을 통해 사인암 정상으로 오를 수 있었으나 사인암의 건
강과 안전 문제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애써 오르지 않도록 하며 사인암에 왔다면 삼성각에
꼭 올라가보도록 하자. 이곳을 지나쳤다면 사인암의 거의 절반을 놓친거나 다름이 없다.


▲  사인암 뒤쪽 바위 틈에 둥지를 튼 푸른 머리의 삼성각(三聖閣)
이 건물은 예전 칠성각(七星閣)으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이 봉안되어 있다.

▲  삼성각 중앙에 자리한 칠성탱과 석가불

▲  삼성각 독성탱

◀  삼성각 산신탱


▲  삼성각 우측 바위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바위글씨 '퇴장(退藏)'

사인암의 명성이 멀리 우주 밖까지 전해진 것일까? 너무 유별나게 휘갈겨진 글씨가 바위 피부
에 새겨져 있어 그 정체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허나 그는 외계인의 글씨가 아닌 한
자의 일종인 전서체(篆書體)로 쓰인 '退藏(퇴장, 스스로 물러나 숨는다)'이란 글씨로 조선 전
기에 판교종사<判敎宗師, 불교 교종(敎宗)의 우두머리>를 지낸 운수의 낙관으로 추정될 뿐 확
실한 것은 없다.


▲  삼성각 맞은편 낭떠러지 위에 중생들이 쌓아올린 조그만 돌탑들이
그들의 소망을 머금으며 조촐하게 보금자리를 이룬다. 이곳은
막다른 바위로 바로 밑이 벼랑이니 조심하기 바란다.


▲  삼성각 북쪽 벼랑

▲  삼성각에서 바라본 계단 밑부분과 청련암

이렇게 1시간 동안 사인암과 청련암 세트를 둘러보고 정든 단양 땅에서 퇴장하여 경북 문경 땅
으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예천 명봉사(鳴鳳寺)에 가려고 했으나 전날부터 여러 곳의 절을 들린
상태라 후배는 다른 데로 가자고 정색을 한다. (절을 좋아하는 후배임)
그래서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천하의 마지막 주막으로 명성이 높은 예천 삼강주막(三江酒幕)
을 둘러보고 속리산 동쪽 자락에 안긴 여러 폭포를 탐방하기로 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흔쾌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 단양 사인암 찾아가기 (2017년 8월 기준)

① 단양까지
* 동서울터미널에서 단양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청량리역에서 단양행 열차가 1일 8~9회 떠난다. (양평, 원주 경유)
* 안산, 원주, 청주, 영주, 안동, 대구(북부)에서 단양행 직행버스 이용
* 부산 부전역, 태화강역, 경주역, 영천역,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 이용
* 대전역, 오송역, 청주역에서 영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1일 2회 운행)

② 현지 교통

* 단양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부근 고수대교 종점, 단양역 입구(단양역3거리 북쪽)에서 사인암
  방면 군내버스 이용 (1일 14회 운행, 대강 경유)

③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중앙고속도로 → 단양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장림4거리에서 좌회전 → 사인암(청련암)


* 사인암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산27 (청련암 ☎ 043-422-1330)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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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숲과 계곡, 폭포, 옛 별서 유적이 어우러진 ~~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 서울 도심 속의 아름다운 별천지,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늦가을 나들이 '



늦가을이 거의 저물어가던 11월 끝 무렵에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본글에서 '백사실=백사골'임>

백사실은 서울 장안에서 가장 흠모하는 곳의 하나로 2005년 5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처음 발을 들인 이래 매년 6~7회 이상 발걸음을 하고 있다. 그렇게나 많이 찾았으
면<지금까지 80번은 넘게 찾은 듯> 정말 지겹고도 남음이 있을텐데 그에게 제대로 중독된
것일까? 돌아서기가 무섭게 또 들어가고 싶은 곳이다.
 
우선 도심 속의 전원 마을, 부암동(付岩洞)의 여러 명소(☞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너 '세검정로 6다길' 골목으로 들어섰다.
백사실의 눈부신 인기를 보여주듯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자주 비춰주니 길치들도 조금 마
음을 놓고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백사실로 들어가는 골목이 조금 복잡함)
골목길 끝에 자리한 빌라 옆으로 높게 펼쳐진 계단을 오르면 혜문사입구인데 여기서 오른
쪽으로 야트막한 길을 넘으면 바로 백사실의 남쪽 정문인 현통사와 백사폭포(동령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盆地)이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산길
저곳을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두근두근 백석동천(백사실)의 속살로 들어서다.

▲  현통사 밑에 자리한 백사폭포(白沙瀑布, 동령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 밑에 새하얀 반
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그의 매끄러운 피부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
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수려한 멋은 별로 없다. 그냥 수수하게 생
긴 폭포로 하얀 반석(盤石)과 썩 어우러져 제법 수려한 멋을 풍기면서 백사골에 대한 첫 인상
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서울 도심에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나름 가치가 높으며, 만약 설악산이나 주왕산(周王
山) 등 1급 폭포가 즐비한 산에 붙어있었다면 그리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
람이나 폭포나 때와 장소를 잘 만나야 된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멋대로 갖다붙인 것인데, 원래 이름은 동령폭포
라고 한다. 하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 자신의 이름마저 계곡에 떠내려보내면서 그의 이름
은 아득히 잊혀지고 말았다.


▲  백사폭포와 하얀 반석

늦가을이라 폭포수가 가늘고 누런 낙엽이 짙게 깔려있지만 비가 많이 오면 폭포수도 제법 패기
를 보인다. 한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 되어주며, 여름 제국(帝國)에
대항하고자 찾아온 피서객들이 돗자리를 피며 한숨 자거나 쉬는 등, 도심 속의 조촐한 꿀피서
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  낙엽은 물론 가을까지 무심히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겨울 제국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백사골 나무들이 속절없이 털어낸 낙엽들은 폭포 주변에 수북
히 쌓여있다. 이들 낙엽은 폭포 밑에서 마지막 정모를 즐기며 올해도 변함없이 도래한 겨울을
원망한다. 몇몇 낙엽은 한이 맺혔는지 폭포 중간에 철썩 달라붙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가고 싶겠지만 매정한 자연은 그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며 그렇게 발버
둥을 치다가 결국 힘이 다해 떠내려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 담(潭)에서
큰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지 못할 그리운 고향, 북악산(백악산)의 그
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랫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
서 다시금 바위를 타고 홍제천으로, 한강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심
히 매뭇새를 다듬는다. 저들의 처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잔잔
한 수면에는 낙엽들이 두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골에 머문 늦가을도 낙엽
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쿨하게 흘러간다.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골 밑에 둥지를 튼 현통사는 조그만 현대 사찰로 20세기 후반 큰 승려의 하나로 추앙을 받
는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이다.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도 없기 때문
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과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지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는
데, 대웅전은 서남쪽을, 나머지는 남쪽과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인적도 거의 없는 적막한 산사에 백사골 산바람이 살며시 들어와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
짝 희롱하고 그 희롱에 놀란 풍경은 그윽한 풍경소리를 풍기며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  늦가을이 깃들여진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자연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대자연이 그린 아름다운 작품, 백사골(백사실계곡) - 별서터 서쪽

간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
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담채
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몸살이 날 지경인데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
들 이곳의 풍경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이며,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
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골에 묻혀간다.
 
숲에 깃든 순결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 땅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롱뇽, 가
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
점 사라지고 이제 이곳이 그들의 몇 안되는 낙원이 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하
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성한 이
끼를 만나는 것은 보기가 정말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을 여
실히 간직하고 있다.


▲  별서터 북쪽 계곡에 드러누운 바위들
오른쪽 하얀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  별서터 연못 옆을 지나는 백사골 (별서터 징검다리)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계곡에 둑
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린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
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직전 갈림길(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뒤쪽(서남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눈여겨 살펴보자. 그 언덕 정상에 커다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면 글씨가 화석처럼 박혀있는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별서터(연못터 주
변) 바로 서남쪽 산자락이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거의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
람들은 그의 존재감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강제로 벌거벗는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그나
마 쉽게 눈동자에 들어오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마저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月巖' 바위글씨를
를 다졌는데, 백사실의 존재를 처음으로 언급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
나 확실한 것은 없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 중의 명필
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늦가을과 겨울을 제외하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하기가 어렵다. 백
사골의 경치를 즐기러 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확트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
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굳이 이광여가 아니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
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으며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백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옛 별서 유적,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전경

한양도성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나서면 여기가 정녕 서
울일까?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
암동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감싸인 분지로 서
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로 지
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지형 탓도 있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
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도성 밖 경승지로 꼽혔던 부암동은 양반과 왕족의 별서(別墅, 별장) 및 피서지
로 인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로 형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완전히 털려 강제로 사라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武溪精舍),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
(石坡亭), 인조반정(1623년)과 관련이 깊은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닦았던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했던 그들의 메아리를 아련히 전해준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인 백사골(백사실)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의 별장이 있었다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다고 하며, 백사골
과 별서터를 하나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북악산의 바위 명소란 뜻인데, 그만큼 하얀 바위와 반석이 많고 경치가 고왔다. 그리고 동천<
洞天, 동학(洞壑)이라고도 함>은 양반과 선비들이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붙어주는 경승지의 명
예로운 칭호이다.

이곳은 백석동천 외에 백사실(계곡), 백사골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백석정(亭), 백석실(
室)이란 옛 이름도 있다. (백석정은 19세기에 주로 쓰였음) 옛 이름을 제외하고 어느 이름을
쓰던 그건 각자의 취향이나 백사실, 백사실계곡, 백석동천으로 많이 불리며 백사골은 백사실계
곡을 줄여서 표현한 이름이다. (나는 백사골이라 많이 부름)

▲  연못 한쪽에 자리한 정자터

▲  사랑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830년경에 지어진(또는 중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600평 규모의 별서이다. 누
가 지었는지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백석동천과 관련된 최초 기록인 월암 이광여(1720~
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이 조
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
이 있어 현재의 별서 이전(17~18세기)부터 조그만 집이 이미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2012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곳을 매입하여 별장으로 삼았음이 밝혀지면서
백사실의 비밀이 다소 벗겨졌다. 추사의 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 권9'에 '선인이 살던 백
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서(北墅, 북쪽 별서)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
등의 내용이 있
고 그곳과 관련된 시가 여럿 발견되어 추사가 백석정 자리를 구입하여 크고 아름답게 다시 지
었음이 밝혀졌다. 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던 1830년 창건설(또는 중건설)의 주인공이 바로 추사
로 여겨진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안채는 4
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
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 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전쟁 때 정자가 파괴되고 그 휴유증으로 연못
마저 그 기능이 상실되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흔적, 바
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몰아넣던 백석동천은 2006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
던 그들만의 숨겨진 명소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조용히 잠들어 있
던 그는 2005년 문화재청으로부터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으로 아름답게 평가를 받으면서 무명 수준에서 바로
적 462호
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변변한 안내문과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
정표가 설치되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싹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
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에서 바라본 연못

▲  사랑채와 안채터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꿀단지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
거니와 여름의 녹음(綠陰), 늦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
운 경승지이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아 백사골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옛 사람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으
로 살았을까? 그려보면서 그들의 생활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체험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2006년 이후 이곳의 존재감이 널리 퍼져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고적했던
분위기는 조금 떨어진 것 같다. (평일은 그래도 한적함) 게다가 정신줄을 놓은 사람까지 불순
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낙서를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계곡을 뒤집거나, 수목을 괴
롭히는 행위가 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아직은 괜찮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도
제대로 없는 첩첩한 산골이라 방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2013년 종로구청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뇌에 주름 잡힌 소리를 일삼아 크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 개소리는 쏙 들어갔지만 어설프게 복원하려 들지 말고 제발 지금의
모습 그대로 두길 바란다. 비록 폐허의 상태여도 현재 모습이 더 운치가 진하며 옛터 위에 상
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가 있다. 끝으로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로
너무 노출되는 것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남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미 그러기에는 그의 존재감이 한라산 꼭대기에 붙어있을 정도로 커버렸다.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
  장 쉽고 가까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이며, 하림각은 경사가 각박하고, 창의문은 거리가 길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AW컨벤션센터) 길 건너편에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다. 그 길(백석동길
   )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자하문터널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 → 신영교를 건너 백석동천 이정표를 따라 '세검정로
   6다길'로 쭉 올라감 → 혜문사입구 →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4호
   선 길음역(6,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시내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서쪽(부암동 방향)으로 조금 가면 창의문앞 교차로이
   다. 여기서 오른쪽 길(북악산길 방향)로 꺾어서 백석동길 골목(부암동 산복길)으로 진입해
   산모퉁이와 지하우스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하여 계속 들어가면<왼쪽 길
   로 가도 됨> 그 길의 끝에 뒷골마을(능금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
   면 바로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
  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산2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 언덕 밑 (백석동천 안내문)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오롯하게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계단 돌이 좀 헝클어져 있으나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의 역할은 그리 녹슬지 않
았다. 반면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았는데 높이
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를 두었는데, 아쉽게도 생전의 사진
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영구히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건물터와 주춧돌은 잘 남아있
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까지 더해 산듯하게 정비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선 별서 주
인이 연못을 바라보며 독서를 하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이 오면 여기서 곡차와 산해
진미를 대접하거나 시 1수 주고 받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름) 사랑
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있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  석축 위에 세워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바로 옆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연못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이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어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
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완전히 생매장을 당했다. 그
러다가 2010년 이곳이 서울시와 문화재청의 조사 대상이 되면서 옥의 티 같은 배드민턴장을 밀
어버렸으며,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습했다. 이후 2011년 3월 문
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다.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담의 흔적이 여럿 남아있으며, 비록 기와를 지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이란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
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남쪽 돌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를 이어주는 서쪽 돌계단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
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던 돌담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상당수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북쪽까
지 돌담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사랑채 뒷쪽 돌담장의 흔적

▲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끄집어낸 기와조각과
그릇 파편


 

♠  물 대신 낙엽과 잡초로 가득한 연못과 정자터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보이는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떠있는 물 대신 나무들이 미련없이
떨군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다. 세월의 자비 없는 흐름
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보름달처럼 둥그런 연못을 채웠으며, 지나가던 햇님과 달님이
그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무들도 연못을 거울 삼아 매무새를 다듬었다. 허나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을 휘날려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기능이 상실되어 껍데기만 남았다.


▲  연못에 들어가서 바라본 사랑채터와 동쪽 돌계단

비록 살아있는 연못은 아니지만 비가 많이 오면 물이 가득히 고여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
찾기도 한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놓고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였다면 단단한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빗물이 모이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덥수룩한 연못의 여름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띄고 있으
며 늦가을에는 낙엽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그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짙은 그늘이 연못을 덮어주고 있으
며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
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은 그
다지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으로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싶구나. 그
렇다고 정자를 복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시를 읊거나 벗들과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
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아는 사람이면 기생들도 불러 정자 안에서 얼씨구~ 춤과 노래, 시를
즐겼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몸살이 날 정도로 부러울 뿐이다. 이래서 무슨 수를 쓰든
권력층이 되야 되고 부자가 되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과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20m에 이르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이는 대략
150~200년 정도로 여겨진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또는 매입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
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
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쯤이나 올련지...?


▲  백석동천 별서터 전경

▲  연못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늦가을)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백석동천 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정신
이 없어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우회하여 백사골 상류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
을 정비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한 볼거리를 선사하
고 있다. 허나 솟대 돌탑은 백사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이다.
돌탑을 지나면 소나무숲과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늦가을에 잠긴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
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별서터 입구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층 돕고 있는 호젓한 은행나무숲길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 산길로 가면 '白石洞天'이란 문신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이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운 경승지에 붙여진 이름으로 아무 산천에나
주어지는 이름이 아니다. <백석동천의 유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음>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썼는지 북악산 귀신도 모른다. 아
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가 아닐 듯 싶은데 글씨가 정말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
다. 옛 사람들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저렇게 낙서를 남기는 습성이 있었는데, 백사골 역시
그들의 낙서가 1개도 아닌 2개나 깃들여져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이다.


▲  백사골의 그림 같은 숲길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외나무다리 방향)

 새하얀 반석들이 가득 펼쳐진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동쪽)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뒷골마을(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
골 냇물이 나타난다.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과 푸른 이끼 옷을 입은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지면
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이나 금강산 등 쟁쟁한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도 서울
도심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을 탄압(?)하는 현장이 되고 시민들이 소풍과 나들이로
이곳에 들어와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
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나타나 깊은 산골의 고적
하고도 정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목재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
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 길이도 짧고 다
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
울 필요는 없다.

사람도 많고, 차량도 많고, 키다리 빌딩도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기만 한 서울 도심 속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백사골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
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만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방면)
모든 것을 내버린 나무들이 하늘이 두려운지 아니면 벌써 노년에 들어선 건지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였다.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직전)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좁아진다. 계곡 오른쪽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
나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 종로구가 분명
한데 풍경은 완전히 강원도 두멧골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에 벌인 부암동 백사실(백석동천)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 이후 내용은
분량상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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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7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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