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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04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 (백석동천, 백사골)
  2. 2013.07.11 물맞이 명소로 유명한 피서의 성지, 청도 남산 낙대폭포
  3. 2013.05.14 봄맞이 산사 나들이 ~ 아름다운 숲길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고색의 절집, 곡성 동리산 태안사
  4. 2013.04.11 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5. 2013.03.04 늦겨울 산사 나들이 ~ 계룡산 갑사 (갑사계곡, 숲길)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 (백석동천, 백사골)

 


'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


여름이 한참 흥이 오르던 7월 첫주에 후배들과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백사골은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정처 없는 내 마
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곳이다. 2005년 5월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처음 발을 들인 이
래 매년 3~4번 정도 발걸음을 이으면서 그곳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을 비추었다.

지하철 경복궁역(3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1711번 시내버스(국민대↔공덕역)를 타고 세검정
초교에서 내려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편의점 옆으로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그의 지시에 따라 주택가 골목(세검정로6다길)을 비집고 들어가
면 빌라 옆으로 긴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혜문사입구인데, 여기서 오른쪽
으로 꺾어 산동네 골목길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백사골의 남쪽 관문인 백사폭포
와 현통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  혜문사입구에서 바라본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
저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뽀얀 피부의 백사폭포가 나타난다.


♠  서울 도심 속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일품인 백사폭포(白沙瀑布)

▲  피서의 성지(聖地) 자격이 충분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문짝에 그려진 현통사 일주문(一柱門) 밑에는
하얗고 뽀얀 피부를 지닌 반석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매끄러운 바위면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별천지를 꿈꾸
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흔든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이곳은 서울 도심에선 정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그 가치는 단연 높다. 만약 쟁쟁한 폭포들
이 많은 설악산(雪嶽山)이나 순창 강천산(剛泉山) 같은 곳에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아마도 그
저 그런 폭포로 주목도 못받았을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자리 운도 중요하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장쾌한 편은 아니다. 수수하고 조촐한 모습
이지만 나름대로 수려한 멋을 풍기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도하며 그곳에
대한 기대감까지 크게 드높인다.
폭포를 빚은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盤石)으로 청정한 계곡
물이 끊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수채화를 자아낸다. 특히 비가 많이 와서 계곡의 수량이 많
을 때는 시원한 멋도 풍기는데,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넘쳐 귀신도 놀라
도망치게 만든다.

백사골이 무명이던 시절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나 동네 사람들의 피서지
로 주로 쓰였으나 속세에 강제로 알려지면서 폭포 주변에 자리를 피고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
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  옆에서 본 백사폭포 - 거의 50도 각도로 이루어진 바위 미끄럼틀을 타고
백사골 냇물은 속세로 흘러간다.
 

▲  백사골의 냇물과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서쪽 못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다리 서쪽에 있는 못에서 심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고향
을 등지고 큰 세상을 향한 장대한 여정을 떠난다. 한번 폭포를 내려왔으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오로지 앞만 보고 흘러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아랫폭포를 타고 홍제천으로 내려가 한
강(漢江)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이 없는 여행을 떠난다.

늦가을이 되면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낙엽들이 폭포를 타고 속세로
내려가거나 그 주변에서 저항하며 고향으로의 컴백을 꿈꾼다. 허나 자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
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밑으로 흘러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낙엽의 발
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여름의 절정을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푸른 아름다움 뒤에는 늦가을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 뒤
에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겨울 제국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  급하게 흘러가는 백사골 하류 (아랫폭포)

서쪽 못은 폭포 못보다 조금 넓은 편인데, 그곳에 모인 물은 주택가가 있는 서쪽으로 거의 30~
40도 경사를 이룬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아주 빠르게 내려간다. 각박한 경사를 이룬 바위를
타고 흐르니 폭포로 봐도 무관할 것이다. 폭포의 길이는 150m 남짓으로 강수량이 많아 수량이
많으면 그 흐르는 소리가 멀리서까지 귀를 때린다.

폭포가 흐르는 바위는 넓게 반석을 이루며 제법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폭포 주변을 가득 메
운 주택들만 없었다면 설악산이나 금강산(金剛山) 못지 않은 풍경을 자랑했을 것이다.


▲  주택들 사이를 흐르며 볼품없는 꼴이 되버린 백사골의 그늘

▲  백사골의 생매장 현장 ~ 자하주택 북쪽(세검정로6길)

서울 제일의 경승지인 백사골은 자하주택 북쪽에서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지하에
묻힌 백사골은 약 150m 정도 흐르다가 홍제천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자연이 빚은 얼큰한 작
품이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은 개발의 난도질 때문으로 나무와 계곡만 있던 이곳까지 주택들이 마
구잡이로 들어와 백사골 아랫폭포의 목까지 조르고 있다.

차라리 주택가를 들이밀지 말고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았던 인근 세검정(洗劍亭)과 함
께 장안 제일의 명승지로 가꾸었다면 더욱 빛을 발했을텐데, 개발의 난도질은 그런 여유도 주지
않고 백사폭포 밑까지 올라온 것이다. 다행히 난도질은 폭포 앞에서 멈추었지만 나중에 반드시
계곡 주변 집을 밀어버리고 2012년 여름에 복원된 인왕산 수성동(水聲洞) 계곡처럼 옛 모습을
되살렸으면 좋겠다. 적어도 백사폭포에서 홍제천 합류지점까지 말이다.
이 땅에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은 너무나 천박하다. 그 칼질에 목숨이 다한 명소가 어디 한둘
이랴.?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玄通寺)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
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1~2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할만한 매력도 없기 때문이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
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다. 대웅전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을 향한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은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유발시켜 경내에 깃들여진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  백사골의 속살로 들어서다

▲  소나무가 마중하는 백사골 산길

현통사를 지나면 제일 먼저 솔내음이 그윽한 소나무 숲이 반긴다. 마치 속세를 뒤로 하고 신선
의 세계에 입산한 듯, 아랫세상과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그것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말
이다. 시원하고 청명한 산바람에 속세(俗世)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머리와 마음이 말끔히 정화
되는 것 같다.


▲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의 끝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고,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나그네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졸졸졸 흘러가는 청정한 백사골(백사실계곡) <현통사와 별서터 중간>

▲  백사골 중류 (별서터 직전)
사진 정면에 보이는 큰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백사골에 발을 들이면 한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들 것
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이곳을 대자연에 대한 명예
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말자랑, 글자랑을 하지 않고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
르며, 조용히 백사골을 거닌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
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롱
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서울 관내에서
는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몇 남지 않은 낙원이 되었다. 만약 그
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동물과 신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순결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
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골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널리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혼용했음) 이곳의 정식 지명은 백사실로 거기에 계곡을 붙여 백사실계곡
이라 불리기도 한다.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의 다른 이름이며,(나는 입버릇처럼 백사골이라 부름)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일부로 백사폭포와 별서터, 백석동천 바위글씨 주변을 일컫는다.


▲  백석동천 별서터 갈림길

▲  연못 곁을 지나는 백사골 중류 (징검다리)

백석동천 이정표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
석동천의 중심인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이 꽤나 묵은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인이 돌
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별서터로 인도하는 조촐한 돌다리 - 19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계곡에 콘크리트 둑을 쌓으면서 지금의 높이로 조정되었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 윗부분을 뚫어지라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
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어렴풋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의 바로 서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
리다보면 우연히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월암은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
)을 새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바 있는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
습은 가히 명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양반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북악산 백석동천(北岳山 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서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에
안긴 분지(盆地)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는 지방이나 고산지대의 소읍(小邑) 같은 분위기이다.
이곳은 녹지 비율이 서울에서 매우 높은 편이며,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이 살아 숨쉰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던 부암동은 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인
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비롯하
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피서지였던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
君)이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
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백사골)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조선 후기부터 백사실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르고 있다.
그 이름은 하얀 피부의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으로 동천(洞天)이란 칭호는 경관
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돌담의 흔적

▲  사랑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별장의 일원)이다. 누가
만들고 이곳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
채, 그리고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별서 주변에는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를 심
어 별서를 최대한 꾸몄을 것이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
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
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도 무거운 상처를 입으
면서 그 휴유증으로 연못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
장의 일부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하며, 이 정도의 별서
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을 지닌 양반이었을 것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옛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정자나 별장 비슷한 것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허씨의 모정을 그의 후손들이 별서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며, 19세기에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대부가 이 일대를 차지해 별서를 지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내몰던 백석동천은 2005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부암동, 신영동)
사람들만 찾아오던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숨어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에서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면서 비지정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
동안 안내문이나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다가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
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건졌다.

▲  연못에 세워진 정자터

▲  백사골 중류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과 가을, 겨울의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부산하다.
이곳은 숲이 매우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의 햇빛도 굴복시키며 나무가 베풀어준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졸졸졸~♪ 음악소리를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며 독서를 하거나 낮
잠을 청하면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신선처럼 살고자 했던 그들(주로 지배층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
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나날이 쓸데없이 증가하면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흉물같은 낙서를 남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등의 천박한 짓이 늘고 있어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
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외딴 곳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
램인데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의 아는 사람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나의
곁에 남았으면 좋겠는데, 이미 그 선은 넘은 듯 싶다. 또한 2013년에 이르러 종로구청에서 별서
를 복원한다며 설치고 있는데, 괜히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비
록 폐허가 되긴 했지만 지금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고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복원을 한다면 이건 그냥 두는 것만 못하다.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에서 들어가는 것이며, 하림각은 골목길 경사가 무지 급해
  오르지도 전에 맥이 빠진다. 그리고 창의문은 많이 걸어가야 된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과 자하문터널입구 정류장 사이에 백석동길이란 골목길이 있다. (백석
   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좀 가면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음)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쭉 오른다. (구기터널이나 정릉 방면에서 오는 경우는 육교를
   건너 길 건너편으로 이동한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6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
   스 이용 / 4호선 길음역(7번 출구)에서 153번 버스 이용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북쪽(부암동 방면)으로 가면 창의문3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가는 2차선 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백석동길)로 들어서
   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이 길을 쭉 올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서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능금마을(뒷골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사실이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관람정보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개구리 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
  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백사골 일대는 의자를 제외하고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다. 약수터는 능금마을 뒷쪽 산자락에
  하나 있다. (백사실약수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가 자리한 언덕 (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모습)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이곳에 있었을 사랑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이곳의 운치를 깨뜨릴 수 있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백석동천 별서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
온다. 세월의 태클로 다소 헝클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그리고 연못 쪽에도 돌계단이 하나 있는데, 다듬은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은 수수한 모
습이지만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오르기 힘들다.

계단 끝 언덕에는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석축의 윤곽이 진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가 있다. 연
못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ㄱ' 구조의 사랑채로 아쉽게도 생전의 뚜렷한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
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 이후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산듯하게 정비했다.


▲  2중으로 쌓은 석축 위에 심어진 사랑채터의 높다란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하여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서쪽 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

연못쪽으로 돌출된 사랑채 서쪽 부분은 주춧돌의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은
별서 주인의 생활공간으로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과 석축이 남아있는데, 별서 주인의 서재(書齋)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본 사랑채터

▲  동쪽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석조유구(遺構)로 연못(또는 우물터)으로 여겨진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푸른 잡초가 따스히 보듬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고 한다. 이후
그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서 갈아 없앴으며, 지하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
습했다. 이후 발굴을 정리하고 2011년 3월에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으며, 한쪽 구석
에는 이곳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햇살을 된 주춧돌과 기와조각, 여러 돌조각을 한데 수습해 조그
만 돌탑을 이룬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  안채터 북쪽 구석 (평창동과 조망점으로 넘어가는 산길)
조그만 시냇물이 백사골로 흐르고 있으며, 예전에 약수터가 있었으나
오래전에 폐쇄되었다.

▲  사랑채 뒤쪽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산사태 등을 막고자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
던 돌담이 길게 이어져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지 돌담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헝클어진 채 남아있는 돌담의 흔적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의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
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방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詩想)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대자연에 의해 잠시 연못의 기능을 회복한 연못

백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
다. 별서 주인은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기술자를 불러 별서를 만들
고 사대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파고 돌과 나무를 나르게 했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도록 유도
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
잔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19세기 초/중반)은 천하가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시기로 백성
들의 삶은 매우 퍽퍽했다. 민초(民草)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
금삥과 상당수 양반들의 수탈에 털려 궁색하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
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당시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일가이거나 그들과 가깝던 자가 아닐까 싶음..)

별서의 주인이 골로 간 이후,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
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그 이후 연못에는 물과 물고기, 연꽃 대신 잡초와 잡석만 무성하게 되었고, 늦
가을에는 나무들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
막 보금자리가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  정자터 남쪽에서 본 연못과 별서터 일대

▲  동쪽 언덕에서 바라본 연못과 별서터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이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담겨 비록 예전만큼의 위엄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찾기
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하늘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오기 며칠 전부터 비가 많이 내려 연못에는 물이 가득했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고이긴 했으나 서쪽에 뚫어놓
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며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나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난쟁이었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나무가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들다. 서울 도심 속에 별천지이자 보석과 같은 곳으로 처음 왔을 때 이곳에서 받은 감동이 슬
슬 되살아난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의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삼림
은 이곳을 찾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의 정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허나 지금은 저렇게 허
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그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정자를 복원
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연못
에 심어진 기둥 중 4개는 높이가 약 2m이며, 나머지 2개는 돌계단 옆에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곡차를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안다면 기생들을 불러 정자 안에서 팔자 늘어지게 놀았
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 상상으로만 끝나기 때문이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높이가 대략 20m 되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가 약 150~200
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를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
에 한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연못 우측 수로에 놓은 소박한 돌다리
길쭉한 통돌 2개를 놓는 선에서 간단하게 다리를 마무리지었다.
다리가 놓인 수로는 연못에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  연못과 별서터에서 수습한 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쉼터
가운데 길다란 돌에 간식거리를 두고 양쪽 석재에 모여 앉아 간식이나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많이 그랬음~ 그렇다고 저기서 취사행위까지는 하지 말 것~~

▲  연못/정자터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서터 윗쪽 계곡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
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여 예전처
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기는 그렇다. 계곡의
통제로 산길로 조금 우회해서 가야된다.
2012년에 별서터 주변 산길을 손질하면서 산불
방제 장비를 둔 붉은 색의 구제함을 두었고 이
곳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돌탑과 오리 솟대를
세워 조촐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산길을 오르면 소나무 숲이 나오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
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  오리 모양이 달린 솟대와 그를 품은 돌탑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

▲  백석동천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  너무나 뚜렷한 백석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소나무숲에서 부암동 주택가로 통하는 서쪽 산길로 접어들면 '白石洞天' 4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산천에 붙여지는 이름으
로 비슷한 말로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이 백석동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하
얀 피부의 바위와 암반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이 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
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를 꿈꾸었
던 선비와 사대부들은 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에는 저렇게 기념 낙서를 남겼는데, 백사골 역시 그
런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그들을 애타게 감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거창 수승대(搜勝臺)의 귀연암(龜淵岩,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지나치게 낙서로 도배가 된 것
도 그리 보기는 좋지 않다. 어느 것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  녹음(綠陰)에 물든 백사골의 호젓한 숲길 ▼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넓적한 하얀 바위가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백사골 상류가 나온다. 하얀 피
부의 넓은 반석과 이끼가 낀 까무잡잡한 바위들이 줄줄이 쏟아지면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며,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현장이 되고, 시민들도 이곳에 들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은 능금마을 뒷쪽에서 시작하여 백석동천을 가로질러 홍제천으로 흐른다. 그리고 윗 사진
의 바위부터 백사폭포까지를 백석동천 구역으로 보면 되는데, 그 상류에는 더 이상 괜찮은 바위
나 옛 사람들의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  백사골 상류 - 이 부분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계곡을 건너 산길로 들어서면 백사골 동쪽 능선과
백사실약수터로 이어진다.

▲  능금마을로 가는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오른쪽이 경작지)

백석동천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만든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나무 목재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갈 정도로 좁다.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의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
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는 없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에는 여러 농작물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밭두렁과 비닐하우스 등
이 펼쳐져 있어 도심 속의 생소한 풍경 앞에 두 눈을 잠시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리를 지나서는 길이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2m 미만으로 폭이 좁아진다. 그런 길을 계속 고집
하면 계곡 너머로 집들이 보이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능금마을 부분은 추후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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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맞이 명소로 유명한 피서의 성지, 청도 남산 낙대폭포

 


' 청도 남산 낙대폭포 '
청도 낙대폭포(약수폭포)


여름의 제국이 봄을 사정없이 내몰고 한참 세력을 다지던 6월의 한복판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인 부산(釜山)으로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부산으로 바로 가는 것이 몹시 허전하여 부
산과 가까운 적당한 곳을 물색했는데 이제 더운 여름이고 하니 시원한 곳이 땡긴다. 그래서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리다가 청도에 있는 낙대폭포에 시선이 딱 멈춰 그곳을 중간 경유지로
삼았다. 청도읍내하고도 제법 가까워 부담없이 찾아갈 수 있고, 폭포의 명성이 주변에 자자
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충남 천안(天安)까지는 저렴하지만 딱딱한 의자에 굳센 정신력을 요구하는 1호선 전
철을 탔다. 장장 2시간 40분을 달려 천안역에 도착, 여기서 20분을 머물다가 부산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경북(慶北)의 최남단 동네인 청도에 들어선다. 청도(淸道) 땅은 거의
9년 만에 발을 들이는 것인데, 이곳도 정말 인연이 지지리도 없는 동네의 하나다.

청도역에서 읍내로 가니 청도의 명물인 추어탕집이 줄지어 늘어서 유혹의 손길을 진하게 내
민다. 내가 어패류를 썩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때가 점심시간이라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여
간 힘들지 않았다.
간신히 그곳을 벗어나 철길을 건너 낙대폭포가 있는 화양읍으로 이동하는데, 시간이 시간인
지라 점심을 먹고 가는 것이 신상에 좋을 듯 싶었다. 폭포를 보고 내려오면 적어도 오후 3
시가 넘을테니 말이다. 하여 적당한 곳을 찾던 중, 점심 할인을 내건 운문산가든이란 고깃
집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육류를 좋아하고 게다가 점심 할인까지 내거니 별로 망설일 것도
없이 그곳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할인 대상은 소고기 된장찌개와 냉면, 갈비탕 등인데, 토요일과 주말은 할인이 안된다고 그
런다. 허나 이미 신발을 벗고 들어와버렸고 가격도 5,000원선이라(당시 기준, 평일 점심 할
인 4,000원) 된장찌개를 주문했다. 주변을 보니 단체로 온 손님들이 운문산(雲門山)에서 길
렀다는 소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는데, 그 향기가 추어탕 저리 가라 할 정도이다.

잠시 뒤 잘 차려져 나온 된장찌개 백반이 내 앞에 펼쳐졌다. 반찬은 5~6가지 정도로 찌개에
는 소고기가 풍부하게 담겨져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기껏해봐야 조금 들어있겠지 싶었는데,
완전 소고기된장찌개의 이름을 한 것이다. 게다가 공기밥도 2그릇을 준다. 그래서 왜 2그릇
을 주는지 물어보니 식당 아줌마가 웃으며 장정이 1그릇으로 배가 차겠냐고 그런다.
그렇게 미리 1그릇을 서비스로 제공했으니 나야 그저 고마울 따름~ 된장찌개의 맛은 우리집
에서 먹던 것과 거의 비슷하여 2그릇을 흔쾌히 비우고 된장찌개도 말끔히 비웠다. 가격치고
는 제법 괜찮았다.
그렇게 배가 부르니 졸음이 슬쩍 다가와 한숨 자라며 나를 농한다. 아직은 갈 길이 멀어 희
롱을 뿌리치고자 커피 1잔 뽑아 마시며 뙤약볕 길을 재촉한다.

청도군청에 이르니 낙대폭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의 지시에 따라 왼쪽 길로 들어
서니 정면으로 멀리 솟은 남산(南山)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낙대폭포는 바로 그 깊은 산골
에 숨겨져 있다. 여기서 그곳까지는 최소 3km, 배도 두둑히 채웠으니 걸어갈 힘은 충분하
나 문제는 무더위다. 벌써부터 땀이 쭈르륵 쏟아난다. 허나 나는 두 발에 의지해 여기까지
왔으니 택시나 차를 얻어타지 않는 이상은 걸어가야 된다. 워낙 걷는 걸 좋아하고 편한 여
행이 별로인지라 20리 걷는 건 예사로 여긴다. 요즘 내 또래들과 20대 상당수는 편하게 먹
고 놀고 주마간산이나 하는 여행만 추구하여 좀만 힘들어도 개거품을 무는데, 이는 잘못된
여행/답사방식이다. 고생은 여행의 알맹이요 자신을 갈고 닦는 수양이거늘 그것을 외면하
니 무슨 여행이 되겠는가..?


♠  낙대폭포 올라가는 길

▲  남산 밑에 자리한 대동지

청도군청을 지나면 보기만 해도 포근한 전원(田園) 풍경이 펼쳐진다. 그늘이 전혀 없는 오르막
길을 오르면 대동지라 불리는 호수가 나오는데, 남산에서 내려온 물이 잠시 길을 멈추고 여행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수문을 통해 속세로 나간 물은 화양강(華陽江)과 낙동강을 거쳐 바다로 나
가게 된다. 주변 산과 나무들은 호수를 거울로 삼아 한참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대동지를 지나면 그리 급하지 않은 오르막길이 이어지는데, 여전히 햇빛을 막아줄 가로수가 없
으니 뙤약볕에 제대로 노출되어 땀이 대동지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남산과 제법 가까워질 무렵, 'z'모양의 고갯길이 나타나면서 고개의 경사가 다소 각박하게 변신
한다. 허나 그 길을 오르면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남산의 삼삼한 숲과 숲길이 나타나 시원한
그늘을 선사한다. 아무리 더워도 숲이 베푸는 시원한 바람과 청정한 기운 앞에 더위의 부산물(
땀)은 36계를 치느라 바쁘다.


▲  고개 중턱에 자리한 한옥학교의 정문
생김새가 절의 일주문(一柱門)과 비슷하다.


▲  한옥학교를 지나면서 서서히 숲길로 변해간다.

▲  낙대폭포 가는 숲길 (자연 속을 거닐다)
아직 가을도 아니건만 성질 급한 잎사귀들은 벌써부터 땅바닥에 떨어져
쓸쓸히 낙엽을 이룬다.

▲  낙대폭포 주차장과 안내소
4발 수레들은 여기서 무조건 바퀴를 접어야 된다. 여기서 폭포까지는
쉬엄쉬엄해도 10분 정도면 충분하다.

▲  낙대폭포 안내소에 있는 남산 등산로 안내도
안내소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정면에 잘 닦여진 길을 오르면 낙대폭포에 이르고,
오른쪽(낙대폭포 방향 기준) 산길로 가면 폭포 위쪽과 남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낙대폭포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돌길 (1)
햇빛도 굴복시킨 무성한 숲길이 잠시 느슨해지는 구간이다.

▲  낙대폭포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돌길 (2)
느슨해진 돌길은 다시 삼삼한 숲길로 변해간다. 저 산길의 끝에
물맞이 명소로 이름난 낙대폭포가 숨어있다.


♠  대자연이 빚은 명승지이자 물맞이 명소로 무더위마저
굴복시킨 피서의 성지 ~ 청도 낙대폭포(落臺瀑布)

청도읍과 화양읍의 듬직한 뒷산인 남산(南山) 북쪽 자락에 자리한 낙대폭포는 청도8경의 하나로
꼽히는 청도 지역의 명승지이다. 깎아지른 듯한 아찔한 절벽에 의지하여 떨어지는 이 폭포는 높
이 30여m로 2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이 수직으로 떨어지다가 중간에서 거의 50도로 구부러
지면서 다시 90도 직각으로 떨어진다.

폭포 주변은 숲이 삼삼하여 뜨거운 햇빛이 들어오기가 힘들며, 숲이 베푸는 잔잔한 바람과 폭포
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계곡 바람에 여름의 제국도 고개를 숙인 그야말로 피서의 성지(聖
地)이다. 여름 제국의 부산물이 아무리 사람 몸에 살짝 올라타 이곳을 정복하려 하지만 폭포 앞
에 서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줄행랑치기에 바쁘다.

이곳은 봄에는 벚꽃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綠陰)이, 가을에는 오색영롱
한 단풍이 장관을 이루며, 겨울에는 겨울 제국의 시샘을 받아 두터운 빙폭(氷暴)이 되버린다.
특히 이 폭포는 예로부터 신경통에 효과가 있다고 명성이 자자하여 물을 맞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약수폭포(藥水瀑布)란 별칭까지 지니고 있으며, 늦봄과 여름, 초가을에는 폭포물
을 맞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래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폭포 우측에는 샤워장과 옷을
갈아입는 공간을 두었고, 폭포 아래쪽에 화장실을 세웠으며, 의자와 탁자 등을 두었다.


▲  녹음과 어우러진 낙대폭포의 위엄

▲  어린이들을 위한 폭포 아랫쪽 공간

폭포의 물줄기는 그리 굵고 시원한 편은 아니다. 위에서 물방울 튀기듯 떨어져 암벽을 타고 조
용히 내려앉는 정도로 멀리서는 실감이 나지 않지만 폭포 앞에 서면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인
다. 물론 강수량의 차이에 따라 떨어지는 수량도 달라진다.
물맞이 장소는 폭포수가 90도로 떨어지는 아래로 거기서 수건 등을 뒤집어쓰고 물맞이에 임하면
된다. 나도 물맞이를 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지만 그럴 준비를 하지 못해 폭포 앞에서 약간의
물방울만 맞는 정도로 물맞이를 대신했다. 이곳에 있으니 정말 무더위란 단어를 잊을 정도로 시
원하기 그지 없다.


▲  폭포 상단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물줄기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물방울로 흩어져 떨어진다. 돌에 부딪쳐
산산히 부서지는 물방울 소리는 좀 단조롭긴 하지만
그 소리에 무더위는 싹 도망을 친다.

        ◀  폭포 우측에 난 바위 틈새
암벽 사이로 난 틈새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일부라도 남아있는 여름의 기운을 싹 털어낸다.
찬 바람이 부는 냉혈(冷穴)로 안쪽 깊숙히 들어
갈 수 있는데, 저 안에 들어가면 완전 냉동창고
라고 한다. 들어가지 않고 지나친게 아쉬울 따
름..

폭포 출사를 마치고 폭포 좌측에 마련된 휴식 공간에 여장을 풀고 1시간 정도 머물렀다. 폭포에
사람이라곤 나 혼자였으니 마치 폭포가 내 것이 된 마냥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폭포를 곁에 두고
바라본다. 이 폭포가 정말 내 것이었으면, 집으로 고이 담아갔으면 좋으련만 그럴 재주가 없는
것이 그저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대자연이 청도 땅에 내린 선물로 이 지역 명승지로 있어야 되
는 것이 바로 그의 임무이자 운명이다. 


▲  낙대폭포를 등지고 속세로 나오다 ▼
 

폭포에서 그렇게 머물고 있으니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찾아왔다. 그들은 내 곁에 자리를 잡았는
데, 돗자리를 뒤집어 쓰고 물을 맞는다. 여자 꼬마 2명은 폭포 밑에 조성된 공간에서 물놀이를
하며 때 이른 피서를 즐긴다. 기분 같아서는 속세를 잠시 등지고 삼척 미인폭포의 미인처럼 (☞
관련글 보러가기) 폭포 곁에 머물고 싶지만 부산도 내려가야되고 내가 있어야 될 공간이 아니기
에 그들에게 폭포를 넘기고 아쉬운 마음을 남기며 철수했다. 폭포를 등지면서 몇 번이나 돌아봤
는지 그만큼 미련이 컸었나 보다.

폭포를 등지고 나오는 길은 내리막의 연속이라 금세 대동지를 지나 화양읍에 이르렀다. 화양읍
과 청도읍은 행정구역만 다를 뿐, 하나의 읍이나 다름이 없다. 서로의 읍내가 붙어있기 때문이
다. (군청이 화양읍에 있음)
청도읍 동쪽에 자리한 청도역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열차를 타고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고자 남
쪽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청도 낙대폭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마무리를 고한다.

※ 청도 낙대폭포 찾아가기 (2013년 7월 기준)
① 대중교통
* 서울, 영등포, 수원, 천안, 조치원(세종), 대전, 구미, 동대구, 밀양, 구포, 부산역에서 경부
  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 하차 (1시간에 1~3회꼴로 운행)
* 진주, 마산, 창원역에서 동대구 방면 열차를 타고 청도역 하차
* 대구남부정류장과 경산에서 청도행 직행버스 이용 (30~60분 간격)
* 청도역과 청도터미널에서 낙대폭포까지 택시 이용 또는 도보 1시간 / 청도터미널(청도역전에
  있음)에서 이서, 각북, 풍각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범곡(청도군청)에서 하차하여 도보 40분
② 승용차
* 대구부산고속도로 → 청도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모강교차로에서 우회전 → 청도대교를
  건너서 청도군청 방면 한내길로 진입 → 청도군청(양정길) → 양정길 직진 → 낙대폭포

* 소재지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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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아름다운 숲길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고색의 절집, 곡성 동리산 태안사

 


' 봄맞이 산사 나들이 ~ 곡성 태안사(泰安寺) '

▲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겨울 제국의 부흥을 꿈꾸며 1달 넘게 천하를 어지럽히던 꽃샘추위가 봄에게 말끔히 꼬리가 잡
히면서 비로소 진정한 봄의 세상이 도래했다. 하늘 아래 세상을 겨울의 제국주의(帝國主義)로
부터 해방시킨 봄을 찬양하며 연초부터 가고자 했던 곡성 태안사를 찾았다.

전국에 널린 미답지의 하나로 베일의 가려진 곡성에 첫 발을 내리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
침 곡성 5일장이었다. 터미널 근처에 마련된 5일 장터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서울에선 아
직 꽃망울도 피우지 못한 벚꽃이 여기서는 한참 절정을 누리며 순백의 미를 자랑
다.

태안사 버스 시간까지는 여유가 넉넉해 그 사이에 점심을 먹고자 읍내로 들어섰다. 허나 장터
와 달리 읍내는 썰렁함이 감돈다. 먹을 곳도 마땅치 않아 읍내를 이리저리 서성이니 삼기국밥
이란 국밥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순간 순대국 생각이 간절하여 그 집에 들어가 메뉴판을 살피
니 암뽕순대국밥이란 특이한 국밥이 있어 주인 아지매에게 뭐냐고 물어봤다.
이에 아지매는 암뽕은 암돼지를 잡아서 만든 순대국밥이라면서 이 집의 주메뉴라고 설명을 한
다. 그래서 이름도 재밌고 해서 그것을 주문했다.

얼마 뒤 내 앞에 차려진 암뽕순대국밥, 밥은 양이 좀 적었지만, 순대국은 순대와 파, 여러 고
기가 버무려져 정말 풍성했다. 순대는 함경도 순대처럼 꽤 두꺼운데 몇 개를 집어먹으니 뱃속
에서 용량이 초과되었다고 신호가 날라올 정도다. 파가 많아서 맛을 더욱 띄워주며, 팔뚝만한
순대에는 무려 21가지의 재료가 들어갔다고 하며, 고기들도 입 속에서 살살 녹아 목구멍이 즐
겁다. 밑반찬은 김치와 송송(깎두기), 양파, 양념장과 고추장이 나왔다.


▲  한상 차려져 나온 암뽕순대국밥의 위엄

이렇게 점심을 먹고 맛있다고 운을 띄우니 주인 아지매는 커피 1잔을 타주며 환송해준다. 커피
를 마시니 시간은 버스 시간 10분 전, 서둘러 터미널로 뛰어가 태안사행 군내버스를 탔다.

5일 장의 후광으로 상당한 손님을 태운 버스는 읍내로 바로 가지 않고 장터로 갔다. 장터 남문
에 이르니 장을 본 노공(老公)들이 우루루 몰리면서 차는 그야말로 가축수송의 경지에 이른다. 그런데 그 많은 승객 가운데 나를 빼면 모두 노공들, 지방 인구 감소와 농촌 고령화 현상의 심
각함이 버스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수도권은 지방 인구를 계속해서 빨아먹어 점점 비대해
지는데 지방은 빨대 끝에 있는 쥬스처럼 사람 수가 나날이 홀쭉해지니 이도 참 큰일이다.

곡성역을 지나 오지리까지 노공들은 계속 버스에 오른다. 자리에 앉지 못한 노공들은 장터에서
사온 물건에 몸을 의지하며 주변 사람들과 사투리로 구수하게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런 풍경은
서로 인상이 쓰고 경계나 품는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정겨운 광경이지. 그래서 지
방에 가면 가급적 군내/시내버스를 탄다. 지역 사람들의 삶의 향기가 담긴 풍경이 그립기 때문
이다. 비록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그런 현장 속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
겁다.

섬진강(蟾津江)을 따라 이어지는 17번 국도를 달리며 레일 바이크(Rail Bike)로 수입이 쏠쏠한
옛 전라선 철로와 나란히 달리기를 20분, 호남의 대성리/청평으로 일컬어지는 압록에 이른다.
압록에서 오른쪽 18번 국도로 꺾어 보성강(寶城江)을 따라 달리는데, 한참 벚꽃과 보성강에 시
선을 둔 사이 버스는 태안3거리를 지나친다. 다리를 건너야 태안사인데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의문을 품고 있으니 곧바로 죽곡면주민센터가 있는 태평리에서 차를 돌려 다시 태안3거리로 돌
아와 그제서야 보성강을 건넌다.
이제 다왔구나 안심을 하고 있으니 버스는 그 안심에 먹칠을 하는 듯 태안사가 있는 동쪽을 놔
두고 서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버스가 하는 양을 지켜보니 1차선 크
기의 농로를 한없이 비집고 들어가 비봉에서 바퀴를 돌린다. 알고보니 곡성 장날에만 특별히 1
일 2회 운행한다는 비봉 경유 차였다. (장날 이외에는 들어가지 않음)
덕분에 생각치도 못한 곳을 강제투어 당하고 다시 태안교로 나와 동남쪽으로 10분을 달리니 비
로소 태안사입구에 도착했다. 곡성에서 5일장과 비봉 경유의 여파로 무려 1시간 20분이나 걸렸
다.
(보통은 40분 정도 걸림)


♠  태안사 숲길 (태안사입구 ~ 능파각)

▲  태안사 입구

태안사입구에는 다른 고찰(古刹)과 비슷하게 주막촌이 둥지를 트고 있다. 허나 태안사는 입구에
뿌리를 내린 주막 3~4곳이 전부라 그리 번잡하지는 않다. 게다가 평일이니 그 한적함은 자연히
배가 된다. 속세의 마지막 유혹을 뿌리치며 주막을 지나면 대자연에 잠긴 오솔길이 나타난다.


▲  태안사 입구 벚꽃길

태안3거리에서 태안사 입구까지는 벚꽃가로수길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겨울제국의 오랜 시련
을 극복하고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터트린 그들에게 어느새 마음을 내주고 만다. 허나 저들의 천
하도 김옥균(金玉均)의 3일 천하만큼이나 짧으니 사람이든 꽃이든 인생은 무상한 모양이다.


▲  장절공 태사 신선생 영적비(壯節公太師 申先生 靈蹟碑)

주막촌을 들어서면 조촐하게 생긴 비각(碑閣) 하나를 만나게 된다. 절을 찾은 사람들은 다들 무
시하고 넘어가기 일쑤지만 무엇이든 그냥 지나치지 않는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 싶어서 그를 기
웃거렸다. 무슨 사연이 있으니 비석이 있지 않겠는가?

비각에는 '장절공태사 신선생 영적비(壯節公太師 申先生 靈蹟碑)'라 쓰인 비석이 안겨져 있는데,
처음에는 태안사나 마을에 공적이 있는 사람의 비석으로 여겼으나 장절공이란 낯익은 이름이 계
속 마음에 걸려 조사를 해보니 곡성 출신으로 태조 왕건(太祖 王建)을 도운 고려의 개국공신(開
國功臣) 신숭겸(申崇謙)의 영적비였다. 여기서 신선생은 신숭겸을 뜻한다.

그는 927년 후백제의 빛나는 승리, 고려의 무참한 패배로 마무리 된 대구 공산(公山)에서 전사
했다. 그때 그의 말이 잘려진 주인의 머리를 물고 태안사 뒷산으로 달려와 3일 동안 구슬피 울
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를 발견한 태안사 승려가 신숭겸의 머리와 말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에
묻었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경내에 제단을 두어 그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절 입구에 세워
진 영적비는 절과 고을 사람들이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신숭겸에 대한 고장 사람들의 강한
긍지가 묻어나 있다.

▲  비각에 새겨진 동물 장식
비각 좌우에 하얀 동물 장식이 평방(平枋)을
받치고 있다. 토끼로 보이면서도 기지개를
켜는 개로도 보이는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  경내로 인도하는 1번째 다리
자유교(自由橋)


주막촌을 지나면 계곡을 옆구리에 낀 오솔길이 나타난다. 절까지는 2km 거리로 총 4개의 다리를
거쳐야 되는데, 그 1번째가 자유교다.
보통 절에 갈 때 만나는 계곡과 다리는 번뇌를 떠내려 보내고 해탈(解脫)을 하라는 의미가 있다.
허나 그 번뇌란 것은 쉽사리 떠내려가지 않는다. 그래서 태안사는 계곡을 따라 1개도 아닌 4개
의 다리를 놓아 인내를 가지고 번뇌를 내던질 것을 중생에게 주문한다.

자유교는 번뇌와 속세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의미로 다리를 건너면 옛 매표소와 주차장이 나오
고, 길도 비포장길로 변신한다. 대부분의 절은 절 앞까지 포장길을 뚫었는데 반해 이곳은 여전
히 비포장길을 고수하고 있다. 수레들에게는 다소 불편할진 몰라도 그 덕분에 산사로 가는 고적
한 분위기가 진하게 우려져 오히려 정감이 가고 좋다. 길의 폭이 산길처럼 작았다면 그런 느낌
은 더욱 컸겠지만 절도 먹고 살아야되고 수레 편의도 고려해야되니 그것까지는 무리일 것이다.


▲  자유교 건너의 동리산 태안사 표석의 위엄

▲  늘씬한 전나무 숲길
순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전나무 숲길을 닮은 아름다운 길이다.

▲  겨울에서 느리게 깨어나고 있는 태안사 오솔길

태안사 오솔길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급한 오르막길도 없고 그냥 평탄한 길의 연속이다. 속인
(俗人)의 집은 절 입구에만 있을 뿐, 절까지는 단 1채도 없다. (중간에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이
전부임) 숲이 삼삼하고 계곡이 졸졸졸~♬ 노래를 부르며 산새의 지저귐이 오솔길의 적막을 살포
시 깨뜨리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이라 산사로 가는 길의 진수를 보여준다. 절까지 2km에 이르는
적지 않은 거리지만 가는 길이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자연과 동화되어 걷다보면 '어머나 벌써
다왔어?' 싶을 정도로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아직까지 겨울에 잠겨있는 숲길이 처량하기까지 하지만 곳곳에 봄의 기운이 싹트고 나무들도 서
서히 살을 불릴 채비를 한다. 새소리와 물소리에 속세의 오염된 귀가 정화되며, 잔잔히 불어오
는 산바람에 속세의 때가 싹 가시는 듯 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해탈의 경지로 다가서는 것
같은 기분이 엄습하면서 속세로 나오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이대로 들어가 다시는 속세에
얼굴을 내밀지 말까? 아 갈등된다~~. 허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겠는가? 나는 절과 자연에 영원히
묻히러 가는 것이 아닌 답사를 온 나그네일 뿐이다.

태안사는 볼거리도 풍부하지만 오솔길과 계곡도 태안사의 매력을 수식하는 아름다운 존재이자
얼굴이다. 부디 개발의 난도질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유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봄의 서정이 조금씩 살아나는 태안사 오솔길
비포장길의 위엄이 영원하길 고대한다. 괜히 방문자와 수레의 편의를
위한답시고 콘크리트로 떡칠을 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  3번째 다리인 반야교(般若橋)
다리 난간에는 12지신상이 서로 마주보며 자리해있다.

◀  12지신상의 하나인 말의 위엄
내가 말띠다 보니 ~~~


▲  마지막 다리인 해탈교(解脫橋)

4개의 다리를 필터로 삼아 철저히 번뇌를 거르고 그것을 이룬 사람은 이 다리를 건너면서 해탈
의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허나 그 경지에 이룬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무리 다리를 4
중, 10중으로 둬도 속세에 길들여진 중생은 물론 승려 상당수도 그것을 맛보기 힘들다. 번뇌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제대로 떠내려가겠는가?


▲  더 큰 세상을 꿈꾸며 열심히 물길을 재촉하는 태안사계곡


♠  태안사의 얼굴인 능파각(凌波閣)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82호

지루하지 않는 오솔길을 20분 정도 걸으면 주차장과 절 안내문이 나오고, 바로 계곡 위에 사뿐
히 걸린 아름다운 능파각이 마중을 나온다.

능파각은 태안사의 얼굴이자 모델로 누각(樓閣)의 역할과 금강문(金剛門)의 기능까지 도맡고 있
는 누각식 다리이다. 그러니까 다리와 문, 누각 3개의 역할을 지닌 셈이다. 주변 풍경이 빼어나
아름다운 여인네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뜻한다는 능파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850년(신라 문성왕 11년) 혜철대사(惠哲大師)가 지었다고 하며, 941년(고려 태조 23
년)에 광자대사(廣慈大師)가 보수했다고 한다. 그 이후 파손된 것을 1767년(영조 43년)에 다시
지었으며,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특히 일주문과 더불어 6.25전쟁 때도 살아남
은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능파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다리 양쪽에 바위를 이용해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2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보통 옛 다리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걸치지
만 능파각은 교각도 없이 지은 나무 다리로 이 땅에선 매우 드문 케이스다. 천정에는 여러가지
동물상을 천정에 조각했으며,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수려한 풍경을 자아낸다. 


▲  계곡 양쪽에 양 다리를 걸치고 계곡을 굽어보는 능파각

▲  능파각 천정에 매달린 용머리 장식
귀여움이 묻어난 용머리가 눈을 부라리고
입을 벌리며 중생을 검문한다.

▲  능파각의 늘씬한 뒷모습


▲  충의문(忠義門), 문 너머로 경찰충혼탑이 보인다.

능파각에서 절로 가는 길은 2갈래로 갈린다. 능파각을 건너 신선의 세계로 통할 것 같은 오솔길
로 가도 되고, 능파각을 건너지 않고 큰 길로 가도 된다.

능파각을 오른쪽에 두고 길을 오르면 베이지 색이 입혀진 충의문과 함께 경찰충혼탑이 눈에 들
어올 것이다. 이들은 6.25의 뼈아픈 현장으로 그 당시 이곳을 지키다 산화한 우리 경찰의 충혼
이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잠시 숙연하게 한다.

때는 1950년 여름, 북한은 남침을 개시한지 겨우 1달 만에 전라도 상당수를 점령했다. 당시 곡
성경찰서장 한정일은 부하 경찰과 함께 곡성을 지키기로 마음 먹고 태안사 보제루를 작전지휘소
로 삼아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1950년 7월 29일 북한군 603기갑연대가 하동에서 남원으로 이동하고자 곡성 압록교를
지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압록교 부근에 매복하여 기습을 가해 북한군 55명을 생포하거나 죽
이고, 트럭과 싸이카 및 총 70여 점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뚜껑이 뒤집힌 북한군은 경찰의 근거지가 태안사임을 알아내고 8월 6일 기습 공격을 했다. 우리
경찰은 그들과 맞섰으나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48명 전원이 전사했으며, 이때 태안사
는 잿더미가 되고 만다.

그 이후 그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성금을 모아 절 옆에 자리를 마련해 충혼탑을 세우고, 매년 8
월 6일에 유족과 지역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다가 나라에서 1985년 현재의 충혼탑과 호국관
을 세워 매년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또한 2000년에는 그들이 승전했던 압록에 승전탑(勝戰塔)
을 세워 그날의 함성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보통 절에는 나라를 지키다 호국(護國)의 신이 된 이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 있지만
이렇게 충혼탑까지 둔 곳은 태안사가 거의 유일하다.


▲  1985년에 세운 경찰충혼탑(警察忠魂塔)
그들의 함성과 충혼을 잊고 산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6.25와 같은 쓰라린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부디 저들의 피가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호국관(護國館)

▲  충혼불멸(忠魂不滅) 표석


▲  충혼탑 뒤쪽에 둘러진 병풍석
1950년 당시 어둠에 저항하며 산화한 경찰들의 전투 장면을 어설프면서도
약소하게 처리한 얕음새김의 조각품이 중앙에 자리해 있고, 그 양쪽에는
그들에게 바치는 진혼시(鎭魂詩)가 장엄하게 자리를 차지고 있다.

▲  경찰충혼탑을 지나 경내로 가는 길목에 심어진 커다란 돌탑


♠ 연못에 심어진 태안사3층석탑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170호

▲  북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연못
탑이 있는 섬까지는 조그만 나무다리가 놓여져 그에게 인도해준다.

경찰충혼탑에서 잠시 옷깃을 여미고 안으로 향
하면 경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길 왼쪽
에 잔디가 깔린 언덕이 나온다. 언덕 너머로 3
층석탑이 작게 바라보이는데, 그 언덕을 오르면
둥그런 넓은 연못이 나오고, 3층석탑은 연못 중
앙에 두둥실 뜬 동그란 섬에 단아하게 뿌리를
내렸다.

이 연못은 일주문 서쪽에 자리해 있다. 능파각
과 더불어 태안사의 백미(白眉)로 주변 만물들
이 거울로 삼으며 그들의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
념이 없다.
섬에 자리한 석탑은 이전에는 광자대사탑 앞에
있었다. 그때는 기단부 면석 1매와 1층 옥개석,
2/3층 탑신(塔身)이 사라진 상태였지. 그러다가
연못과 섬을 만들어 이곳으로 옮기면서 사라진
부분을 보충해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연못

이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혔으며, 그 위에 머리장식을 두었다. 탑을 옮기
면서 바닥돌을 넓게 깔아 탑이 제법 커 보이며, 탑신부는 옛 석재와 새 것을 적당히 섞었고 머
리장식은 노반(露盤)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 붙였다.
신라 말 석탑 양식을 갖춘 고려 초기 석탑으로 여겨지며, 광자대사탑 부근에 옥개석이 하나 더
있고 금강선원 앞 축대에도 옥개석이 있어 쌍탑(雙塔)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탑의 전체 높이는
4.17m로 연못을 굽어보는 탑의 위엄이 자못 넘쳐보인다.


▲  연못 동쪽 바위에 얹혀진 조그만 돌탑들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얹힌 조그만 돌탑들이 모여 그들만의 조그만 세계를 이룬다. 바위 오른쪽
에는 석탑 옥개석이 얹혀져 있는데, 연못에 있는 3층석탑의 일부거나 씽탑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  태안사 일주문(一柱門)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83호

▲  고색의 무게가 서린 일주문의 위엄
동리산은 태안사를 품고 있는 봉두산(鳳頭山)의 옛 이름이다. 산이 오동나무 줄기 속처럼
아늑하여 동리산이라 불렸으며, 오동나무는 봉황이 서식하는 나무라고 한다.


연못을 지나면 능파교에서 갈라진 길이 다시 합쳐지면서 절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은 속
세와 부처의 세계를 가르는 문으로 절의 정문인 능파각과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이 문은 937년 광자대사가 세웠다고 전하며, 1683년 각현선사가 다시 지었다. 1917년 영월(映月
)선사가 중수하고 1980년에 보수를 하여 지금에 이르는데, 능파각과 더불어 격동의 6.25시절에
도 살아남은 건물로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문 정면에는 '동리산태안사(桐裏山泰安寺)'라 쓰인 커다란 현판이, 뒤쪽에는 '봉황문(鳳凰門)'
이란 작은 현판이 걸려있다. 민흘림으로 이루어진 일주문 기둥은 중심기둥 외에 각각 2개의 기
둥이 더 있는데, 이는 지붕과 공포를 받치는 보조용 기둥이다. 문을 보면 현판이 걸린 평방 위
쪽 공포(空包)와 지붕이 육중해 기둥 2개로는 어림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별도로 2개씩을 더
두어 중심 기둥을 돕게 한 것이다.
천정 좌우에는 눈을 부릅뜨고 여의주를 문 용머리 장식이 서로 마주보며 달려있어 촘촘히 박힌
공포덩어리와 곱게 입혀진 단청과 더불어 문의 아름다움을 더욱 수식해 준다.

▲  일주문 천정 좌측 용머리 장식

▲  일주문 천정 우측 용머리 장식


▲  일주문에서 속세로 가는 길
집으로 살짝 가져와 두고두고 거닐고 싶은 길이다.

▲  안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일주문에서 경내까지는 인생처럼 짧긴 하지만 전나무 숲길이 푸르게
펼쳐져 한폭의 그림을 이룬다.


※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지 ~ 태안사의 내력
동리산이라 불린 봉두산 서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태안사는 742년(신라 경덕왕 원년)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3명의 신승(神僧)이 창건하여 대안사(大安寺)라 했다고 한다. 9세기 후반에 조성된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에 '有舍名曰 大安其寺也'란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대안사라 불리는
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시절에는 혜철대사(惠哲大師)가 절을 크게 일으키고 태안사
로 이름을 갈았다. 그는 이곳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열어 선
종(禪宗) 보급에 열을 올렸는데, 그가 이곳을 택한 것은 경치가 아름답고 속세와 어느 정도 거
리를 두고 있어 수행하기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풍수지리(風水地理)의 시조
인 도선국사(道詵國師)도 20대 시절 이곳에서 혜철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선종은 교종(敎宗)에 대항하여 신라 말에 유행했던 불교 종파로 교리를 중심으로 한 교
종과 달리 참선(參禪)을 중시하여 경전을 어려워했던 백성과 지방세력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고려 태조 시절에는 혜철의 손제자(孫弟子)인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가 중창을 벌였는데,
그 규모가 건물 40여 동, 110칸에 이르렀다고 하며, 법당에는 1.4m 높이의 철조약사여래(鐵造藥
師如來)를 봉안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순천 송광사(松廣寺)를 말사(
末寺)로 두었다고 하니 왕년의 위엄이 한때나마 호남 하늘을 가리고도 남았음을 보여준다. (지
금은 화엄사의 말사임)

1223년(고종 10년)에는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인 최우(崔瑀)가 왕명을 받들어 중건을 했고, 조
선 세종(世宗) 때는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이곳에 머물며 왕실의 복을 빌고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바라를 남기기도 했다.
1684년에 중창된 이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해 오다가 6.25전쟁 때 이곳에 숨어 곡성 수
비를 꾀하던 곡성경찰서 경찰을 치고자 북한군이 기습을 가하면서 능파각과 일주문을 제외한 모
든 건물이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당시 화마(火魔)에 사라진 건물이 15동에 이른다.

1969년 대웅전을 복원했으며, 계속 복원불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대웅전
을 중심으로 약사전, 삼성각, 보제루, 해회당, 적묵당, 천불전 등 15~16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
득 채우고 있으며, 적인선사탑, 광자대사탑, 광자대사탑비, 청동 대바라, 동종 등 보물 5점과
지방문화재 3점을 간직하고 있어 고색의 무게를 진하게 간직한다. 또한 절 전체는 전남 지방문
화재자료 23호
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속세의 기운이 범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산골에 묻혀있고 찾는 이도 별로 많지 않아 한
적한 편이다. 게다가 숲이 무성하고 계곡이 깊으며, 절로 인도하는 오솔길도 사색하기에 좋은
아름다운 길로 신선의 세계로 여겨질 정도이다. 속세에서 나를 잠시 지우고 싶을 때 마냥 묻혀
지내고 싶은 절집으로 속세에 오염된 마음을 가다듬고 정리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


♠  태안사의 장대한 역사가 담긴 승탑(僧塔)과 비석(碑石)의 보금자리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태안사의 장대한 역사가 서린 승탑과 비석의 보금자리가 있다. 광
자대사탑을 비롯하여 고려부터 조선까지를 망라한 승탑 7기와 광자대사탑비, 탑의 옥개석 등이
보금자리를 가득 메우는데, 그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광자대사탑과 탑비이다.


▲  아찔한 아름다움을 머금은 광자대사탑비(廣慈大師塔碑) - 보물 275호

광자대사비는 태안사에서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새와 용머리, 보주(寶珠), 구름
무늬 등 다양한 문양이 비석의 수려함을 크게 돋보이게 한다. 아쉽게도 비신(碑身)은 오래 전에
도괴되어 우측에 따로 자리해 있으며, 비신이 빠진 것을 빼면 고려 초기 비석의 으뜸급임은 분
명하다.

비석의 주인공인 광자대사 윤다는 혜철의 손제자로 864년에 태어나 8살에 출가했다고 한다. 태
안사에 들어와 혜철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고 돌아와 태안
사를 크게 일으켜 세웠다.
945년(혜종 2년) 81세로 입적하자 혜종(惠宗)은 '광자(廣慈)'란 시호를 내리고 그의 행장을 적
어 950년 비석을 세워주었다.

1941년 태안사 사적기에 '1928년 중건 당시 광자대사비의 이수를 옮겨와 적인선사비의 이수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인선사탑비와 광자대사탑비의 이수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  발을 움직이며 입에서 무언가를 쏟아낼 것 같은 광자대사탑비 귀부

▲  광자대사탑비의 이수 부분

▲  이수 중앙에 새(극락조?) 문양

▲  광자대사탑비의 뒷모습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조각의 비석 귀부는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별다른 상
처 없이 건재함을 과시한다.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이 벌려져 있고, 목에는 주름무늬가
세세히 표현되어 적당히 색칠을 가한다면 정말 거북이의 목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비석이 심어
진 비좌(碑座)에는 구름 무늬가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고 빼곡히 자리를 채우며, 그의 등에는
등껍데기 무늬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고, 꼬리는 하늘로 말려져 있다.

비석 꼭대기를 장식하는 이수에는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 대신 날개를 활짝 편 새가 눈길
을 끄는데, 극락조(極樂鳥)로 일컬어지는 가릉빈가(迦陵頻伽)로 여겨진다. 파괴된 얼굴을 제외
하면 발톱부터 목부분까지 정교하게 박혀있어 하얀 새가 지금이라도 당장 하늘로 날라갈 것 같
다. 새 조각 밑에는 탑비 주인공 이름이 적혀있던 것으로 보이나 파손이 심해 확인이 어렵다.
이수 양쪽 끝에는 용머리가 달려있으며, 새 뒤쪽과 좌우에 3개의 보주(寶珠)를 올려놓았다. 이
수 뒷면에는 구름무늬가 가득 수놓여 있고, 곳곳에 용의 몸통을 조각하여 모서리에 조각된 용과
조화를 꾀했다.

▲  이수 모서리에 용머리와 보주

▲  탑비에서 떨어져 나온 비신(碑身) 부분

광자대사탑비 옆에 나란히 놓인 비석은 원래 광자대사탑비의 비신으로 파손이 심해 판독하기가
거의 어려운 상태다. 허나 다행히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비
문의 내용이 실려있어 그 내용을 알게 해준다. 내용은 광자대사의 생애와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
한 대우를 받았던 일, 불가에 입문한 것 등이다.


▲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 - 보물 274호

광자대사비 옆에는 광자대사가 잠들어있는 승탑이 있다. 이 승탑 역시 탑비를 닮아 수려하기는
마찬가지라 바닥돌을 맨 밑에 두고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8각의 탑신을 차례대로 얹혔으며,
그 위를 머리장식으로 마무리한 8각원당형 부도이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기단부 밑 받침돌 위에 가운데 받침이 올려져 있으며, 윗받침에
는 16잎씩 연꽃을 2줄로 나열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탑신은 앞,뒷면 모두 향로 모양을
새겼고, 그 옆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지붕돌의 추녀는 너무 얇게 올려져
있고, 탑 꼭대기에는 보륜(寶輪)과 보주를 비롯한 머리장식이 완전하게 남아있는데, 조각솜씨가
매우 섬세하고 조화로워 고려 초기 부도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  광자대사탑 옆에 자리한 조선시대 승탑
한참 선배인 광자대사탑과 탑비의 높은
명성에 눌려 거의 무명의 부도로 살아간다.


▲  일주문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
하늘 높이 솟은 전나무들이 아늑하게 숲길을 이루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  태안사 대웅전 주변

▲  경쾌하게 추녀를 들어올린 대웅전(大雄殿)

일주문 전나무숲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태안사 중심부가 모습을 비춘다.
대웅전 뜨락에는 곧 다가올 불교의 경축일 석가탄신일을 대비하여 동서로 길게 줄을 치고 연등
을 달고 있었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대웅전은 태안사의 법당으로 광자대사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가 6.25때 파괴된 것을 1969년에 다시 세웠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한 아
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태안사를 빛낸 혜철국사와 광자대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물
론 상상으로 그려진 영정(影幀)이다. 그리고 부처의 10대 제자의 영정을 비롯해 석가불의 본생
도(本生圖)로 내부 벽을 장엄했고, 내부 좌측에 조그만 동종(銅鐘)이 놓여있는데, 자칫 지나치
기가 쉽다. 하지만 그 종은 1457년에 주조되어 1581년에 다시 만든 조선 초기 종으로 태안사의
주요 보물 중 하나이니 꼭 살펴보자.
이 종에는 제작과 관련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조선시대 동종의 변화 과정을 담은 점이
인정되어 보물 1349호로 지정되었다. 그 종을 사진에 담으려는 찰라 갑자기 인천(仁川)에서 단
체로 온 신도들이 대웅전을 빼곡히 점거하는 통에 사진에 담지는 못했다.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하는 아미타불, 그 좌우로 현란한 보관(寶冠)을 갖춘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승려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란히 자리한다.

▲  대웅전 정면에 자리한 보제루(普濟樓)

보제루는 강당의 역할을 하는 건물로 조선시대 절은 보통 법당 앞에 누(樓)를 두어 그 아랫도리
로 경내를 오르도록 했다. 허나 이곳은 아랫도리 대신 옆구리에 길을 내 돌아가는 형식을 취했
으며, 6.25때는 곡성 경찰이 이 건물을 작전지휘소로 삼아 북한군에 항전했다.

         ◀  보제루에 걸린 목어(木魚)
파란 피부를 지닌 목어는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
의 메세지가 담겨져 있다. 보통 절은 사물(四物
)이라 불리는 목어, 범종, 운판(雲版), 법고(法
鼓)를 갖추고 있기 마련이나 이곳은 목어가 유
일하며 그 흔한 범종각도 아직 없다.
지느러미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허공을 헤엄치는
커다란 목어의 자태가 꽤 인상적이다. 속세로
내려갈 때는 그의 등을 타고 가볼까..?

▲  종무소의 역할을 겸하는 적묵당(寂默堂)

▲  어처구니를 상실하며 옛 추억에 젖은 맷돌


▲  해회당(海會堂)

해회당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태안사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바라가 있는데, 바라란 불교의식(불교 무용의 하나인 바라춤이나 설법, 큰 행사 등) 때 쓰는 접
시 모양의 악기로 2개가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로 놋쇠로 만드는데, 놋쇠판 중앙에 구멍을
뚫고 끈을 매어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낸다.
 
태안사 바라는 지름이 92cm, 둘레가 자그마치 3m에 이르는 규모로 효령대군이 남긴 것인데, 별
다른 손상이 없어 지금도 별무리 없이 쓰인다. 허나 워낙 무거워 두 사람 이상이 같이 들어서
사용하며, 바라 피부에는 정통(正統) 12년(1447년)에 만들어졌다는 내용과 효령대군이 아우인
세종 내외와 왕세자<훗날 문종(文宗)>의 복을 빌고자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다.

대바라는 태안사 일급의 보물인만큼 속세에 공개를 하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서 적묵당에 문의
를 했으나 역시나 안된다고 그런다. 대바라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 앞에선 절대 안심할 수는 없다. 무덤의 육중한 석물도 아무렇지 않게 훔
쳐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니던가? 그래서 깊숙한 곳에 두어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다. 그외
에 1770년 고흥 능가사(楞伽寺)에서 만든 금고(金鼓)가 내부에 있는데, 지름이 1m가 넘는다고
한다. 금고는 반자(飯子)라 불리기도 한다.


▲  태안사 청동 대바라 - 보물 956호 (문화재청 사진)

▲  물이 없는 것처럼 나를 속인 석조(石槽)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석조는 늘 맨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수도꼭지
로 물을 통제하기 때문으로 다른 절과 달리 온종일 물이 나와 석조를 메우는 형태가 아니다. 그
래서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중생은 물이 없구나 싶어서 넘어간다. 나 역시 속았지. 허나 절을
다 둘러보고 나오니 신도 1명이 꼭지를 틀어서 물을 마시는 장면을 보고는 정말 한대 맞은 기분
이었다. 꼭지를 틀면 물이 콸콸 나오는 것을 왜 그것까지 생각을 못했을까?

▲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근래에 만든
건물로 약사불의 거처이다. 정면 가운데 칸이
좌우 협칸보다 크게 설정되어 있다.


▲  삼성각 좌측에 봉안된 독성도(獨聖圖)


▲  약사전에 봉안된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약사전의 주인인 약사불은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취하며 왼손에는 중생의 고통을 치료할 약이
담겨진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남쪽을 지그시 굽어보는 그의 뒤쪽에는 후불탱화(後佛幀畵)가
있는데, 이는 벽에 받친 그림이 아닌 유화(油畵) 그림판이다. 임창수(林昶壽) 화백(畵伯)이 그
린 것으로 전통 안료를 쓰지 않고 유화로 한 것이 특징이며, 닫집이나 불상을 수식하는 장식물
이 없어 대웅전 불단보다 다소 허전하다.

◀  고참 승려의 공간인 염화실(拈花室)과
적인선사탑으로 인도하는 돌계단


♠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 -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
보물 273호


▲  적인선사탑 앞에 마련된 배알문(拜謁門)

선원 북쪽,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태안사의 개산조사(開山祖師)라 할 수 있는 혜철대사의
승탑이 넓게 터를 닦았다. 절을 세운 이는 3명의 신승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정체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혜철을 태안사의 시조로 여긴다. 그의 승탑은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
照輪淸淨塔)'이란 길고 어려운 이름을 지니고 있어 외우기도 좀 어렵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태안사 적인선사탑')

부도에 잠들어 있는 혜철(惠哲)은 성이 박씨(朴氏), 자는 체공(體空)으로 785년 경주에서 태어
났다. 16세에 출가하여 806년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814년 당나라로 건너가 서당지장(西
堂地藏)에게 심인(心印)을 받았다.
839년 귀국하여 태안사에 들어가 절을 크게 일으키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열어 선종
보급에 크게 기여했으며, 861년 76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경문왕(景文王)은 적인(寂忍)이란 시호
를 내렸다.


▲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의 위엄

872년에 조성된 적인선사탑은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이곳에 서린 다른 보물과는 달리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절을 개창한 시조에 걸맞게 규모가 크며, 조각솜씨도 뛰어나 아찔한
아름다움에 두 눈이 마비될 정도이다. 승탑은 네모난 넓은 기단 위에 심어져 있는데, 거의 석가
불의 세존사리탑에 버금가는 대우로 위엄이 철철 넘쳐 흐른다.
탑 앞에는 높은 어른을 뵌다는 뜻의 배알문이 있는데, 높이가 다소 낮다. 하여 키가 큰 사람은
자연히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데, 이는 머리를 숙여 정중히 예를 표하라는 의미다.

적인선사탑은 광자대사탑과 마찬가지로 8각원당
형의 승탑이다. 2중의 바닥돌 위에 8각 하대석
(下臺石)을 두어 각 면마다 방향과 형태를 달리
한 사자 1구를 새겼다. 중대석(中臺石)은 높이
가 낮으나 격을 잃지 않았으며, 상대석(上臺石)
에는 하늘을 향해 꽃잎을 펼친 앙련(仰蓮)이 3
중으로 조각되어 탑신부를 우러르는 것 같다.

탑신 전면에는 문비(門扉)라 불리는 네모난 문
짝이 새겨져 있고, 탑신 위쪽 지붕에는 지붕선
이 세세히 표현되었다. 탑의 꼭대기인 상륜(相
輪)에는 복발과 앙화(仰花), 보륜이 차례대로
장식되어 있고, 보주로 꼭대기를 마무리 했다.

9세기 후반에 조성된 오래된 승탑임에도 근래 만든 것처럼 정정하며 탑의 피부는 조금 회색 빛
깔을 띌 뿐, 장대한 세월의 때와 상처는 전혀 없다. 온후한 기품이 돋보이고 거의 완전히 보존
되어 신라 후기에 가장 우수한 승탑으로 칭송을 받는다. 특히 6.25 때 북한군이 이곳까지 습격
해 절을 죄다 불질렀음에도 별다른 외상을 입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적인선사탑과 동백나무 (승탑 오른쪽 나무가 동백나무)

▲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

청정탑 우측에는 혜철의 생애와 업적을 담은 청정탑비가 부도를 바라보며 자리한다. 이 비석은
오래 전에 비신(碑身)이 파괴되어 쓰러져 있던 것을 비신을 새로 만들어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귀부와 이수는 옛날 것이며 비신에 적힌 비문은 다행히 탁본한 것이 경내에 전하고 있다.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으나 광자대사탑비에 비하면 조금은 수준이 떨어진다. 또한 1928년 절
을 중건할 때 광자대사탑비의 이수를 옮겨와 청정탑비의 이수로 썼다는 기록이 있어 서로 뒤바
뀌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오다. (일주문에서 능파각으로 가는 길)

▲  솔내음이 충만한 오솔길 (성기암 입구)

태안사 곳곳을 사진에 담으며 머문 시간이 거의 1시간, 시간이 집으로 갈 시간이라며 자꾸 나가
자고 보챈다. 나가기 싫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속세에서 살아갈 운명이기에 마음만은 능파각 기
둥에 살짝 걸어놓은 채, 속세로 길을 떠났다.

절을 나오면서 계곡 동쪽에 있다는 천불전(千佛殿)과 산왕각(山王閣)은 가지 않았으며, 태안사
의 부속암자인 성기암은 가려다가 귀찮아서 통과했다. 이렇게 다음에 다시 찾을 구실을 남기며
자연과 벗삼은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 태안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는다.

※ 곡성 태안사 찾아가기 (2013년 5월 기준)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익산역, 순천역, 여수엑스포역에서 전
  라선 열차를 타고 곡성역 하차
*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곡성행 고속버스가 1일 1회(15시) 떠난다.
* 광주에서 곡성행 직행버스가 15~40분 간격. 전주에서는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곡성터미널에서 태안사입구 경유 원달리행 군내버스가 1일 7~8회 다니며, 곡성역을 경유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능파각까지 진입 가능, 능파각과 조태일시문학관에 주차장 있음)
① 순천완주고속도로 → 황전나들목을 나와서 곡성방면 17번 국도 → 압록교를 건너 좌회전 →
   태안3거리에서 좌회전(다리를 건넘) → 태안사입구 → 태안사
② 남해고속도로 → 석곡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석곡에서 압록 방면 우회전 → 죽곡 → 태
   안교3거리에서 우회전 → 태안사입구 → 태안사
*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
061-362-4906,4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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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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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3년 5월 9일부터
 
* 글을 보셨다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바로 밑의 네모난 박스 안에 담긴 손가락 View on을
   흔쾌히 눌러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댓글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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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글로 바로 이어집니다)

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 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
* 명소에 대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본글에 문의 댓글(명소에 대한 정보나 교통정보, 역사 등)을
  달아주시면 아는 한도에서 최대한 답변 드립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셔도 됨)
* 불펌은 사절합니다. 무조건 출처와 원작자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스크랩 기능을 사용하시기 바람)
* 본인 기준으로 작성된 만큼 쓸데없는 태클은 정중히 사절합니다.


1. 서울 종로구 내부 (북악산~인왕산 줄기 남쪽)
1. 경복궁
2. 국립고궁박물관 (경복궁 남쪽)
3. 국립민속박물관 (경복궁 동쪽)
4. 청와대 앞길
5. 청와대와 육상궁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관람신청)
6. 윤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7. 청운공원

8. 인왕산길

9. 사직단공원 (사직단)

10. 황학정

11. 수성동계곡

12. 선희궁터 사우

13. 통의동 백송터

14. 청와대사랑채

15. 서촌 일대

 

16. 해공 신익희가옥

17. 이상범 가옥(화실)

18. 필운대 (배화여고 안에 있음)

19. 삼청동길

20. 삼청공원

21. 북악산 정상 (촛대바위, 북악산 한양성곽길)

22, 북악산 말바위

23. 숙정문

24. 창덕궁 후원뒷길 (감사원에서 성대로 넘어가는 고개)

25. 와룡고개 (와룡공원)

26. 창덕궁과 후원

27. 창경궁

28. 종묘

29. 성균관 (문묘, 은행나무)

30. 송시열집터 (증주벽립 바위글씨) 

 

31. 대학로거리 (마로니에공원)

32. 이화장

33. 함춘원터 (서울대병원 북쪽)

34. 구 서울대본관

35. 구 대한의원본관 (서울대병원 남쪽)

36. 낙산공원 (낙산 일대)

37. 비우당과 자지동천(자주동천)바위글씨

38. 청룡사와 정업원구기

39. 낙산 이화마을 (이화벽화마을)

40. 서울국립과학관

 

41. 동대문(흥인지문)

42. 청계천 일대

43. 광장시장

44. 동묘

45. 인사동거리

46. 조계사와 불교중앙박물관

47. 우정총국 (우정박물관)

48, 세종문화회관

49. 경희궁

50. 서울역사박물관

 

51. 홍파동 홍난파가옥

52. 딜쿠샤와 행촌동은행나무

53. 보신각

54. 종로2,3가 거리

55. 경인미술관

56. 천도교 중앙대교당

57. 운현궁

58. 관상감 관천대

59. 인왕산

60. 대림미술관

 

61. 목인박물관

62. 광화문광장

63. 북촌한옥마을

64. 북촌문화센터

65. 한국불교미술박물관

66. 원서동 고희동가옥

67. 원서동 빨래터 (신선원전 외삼문)

68. 배렴가옥(북촌게스트하우스)

69. 중앙중고교

70. 인문학박물관

71. 가회민화박물관

72. 한상수자수박물관

73. 재동백송

74. 정독도서관

75. 서울교육박물관

 

76. 북촌생활사박물관

77. 북촌4,5,6,7경

78. 번사창

79. 부엉이공예박물관

80. 동아일보 일민미술관

81. 성곡미술관

82. 떡박물관

83. 혜화문(동소문)

 

 2. 서울 종로구 외곽 (북악산~인왕산 줄기 북쪽)
 1. 창의문(자하문)
 2. 부암동 (부암동 산복도로)
 3. 무계정사터 (안평대군집터)
 4. 반계 윤웅렬별서
 5. 능금마을 (뒷골마을)
 6. 북악산 백석동천
 7. 서울미술관과 석파정

 8. 석파랑 (석파정 별당)
 9. 환기미술관
 10. 홍지문

 11. 세검정
 12. 북악산 백사골 (백사실계곡)
 13. 평창동 소나무 (평창동 남쪽 북악산 자락)

 14. 보현산신각
 15. 북한산 금선사
 16. 동령폭포
 17. 북한산 승가사
 18. 북한산 문수사
 19. 북한산 비봉
 20. 화정박물관


 21. 평창동 박종화가옥

 22. 구기동계곡
 23.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탕춘대성 암문)
 24. 삼성출판박물관

 25. 북한산둘레길 평창마을길

 26. 북악산길

 27. 자하미술관

 

 

 3. 서울 중구
 1. 덕수궁(경운궁)
 2. 덕수궁돌담길
 3. 서울시립미술관
 4. 옛 러시아공사관터와 정동공원
 5. 중명전

 6. 배재학당역사박물관

 7. 이화여고박물관과 유관순우물

 8. 정동교회

 9. 서울광장

 10. 서울도서관 (옛 서울시청사)

 11. 서울시청 신청사

 12. 환구단 (황궁우)

 13. 명동거리

 14. 명동성당

 15. 남대문시장

 

 16. 남대문(숭례문)

 17. 서울역 (문화역 서울284)

 18. 약현성당

 19. 손기정공원 (손기정월계관수)

 20. 화폐금융박물관 (한국은행본관)
 21,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22. 남산 와룡묘

 23. 남산N서울타워

 24. 남산 정상 주변 (봉수대, 팔각정)

 25. 남산골한옥마을

 26. 동대문쇼핑타운

 27. 동대문역사문화공원
 28. 장충단공원

 29. 신당동 떡복기골목

 30. 신당동 중앙시장


 31. 금호산 (금호산 벚꽃축제)

 32. 광희문(수구문)

 33. 대한성공회성당 서울교구, 경운궁 양이재

 

 4. 서울 강북 서부 (은평, 서대문, 마포, 용산구)
 1. 북한산 삼천사 (삼천리골)
 2. 북한산 삼천사지 (삼천사에서 등산 2km)

 3. 북한산 진관사

 4. 진관사계곡

 5. 숙용심씨묘표

 6. 영산군묘역

 7.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내시묘역은 없음)

 8. 경천군송금물침비 (내시묘역길 중간에 있음)

 9. 북한산성 대서문

 10. 북한산둘레길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11. 북한산둘레길 구름정원길

 12. 북한산 불광사계곡

 13. 금성당

 14. 금암문화공원 (금암기적비)

 15. 인조별서유기비

 

 16. 수국사

 17. 백련산 백련사

 18. 불광천 (불광천길)

 19. 옥천암 마애좌상 (보도각백불)

 20. 인왕산 환희사

 21. 홍제동 개미마을

 22. 안산(鞍山)

 23. 안산 무악봉 동봉수대터

 24. 봉원사 (연꽃축제)

 25. 서대문역사공원 (옛 서대문형무소)

 26. 독립문과 영은문주초

 27. 인왕산 선바위, 국사당

 28. 연세대 근대건축물 (언더우드관, 스팀슨관 등)

 29. 신촌거리

 30. 홍대거리


 31. 효창공원

 32. 용문동 남이장군 사당 (남이장군제)
 33. 원효로성당

 34. 전쟁기념관

 35. 이태원거리

 36. 남산야외식물원

 37. 용산가족공원

 38. 국립중앙박물관

 39. 공덕동, 마포 먹자골목

 40. 절두산성지와 잠두봉

 

 41. 양화진외국인묘역

 42. 망원정

 43. 평화의공원과 난지연못

 44. 월드컵경기장 주변

 45.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

 46. 난지캠핑장

 47, 무악재 고갯길

 48. 삼성미술관리움

 49. 화의군묘역

 

 5. 서울 강북 동부 (동대문, 성북, 성동, 광진, 중랑구)
 1. 선농단 (선농대제)

 2. 세종대왕기념관
 3. 영휘원과 숭인원
 4. 홍릉수목원

 5. 고려대박물관

 6. 동망봉

 7. 보문사

 8. 개운사

 9. 보타사

 10. 개운산공원

 

 11. 삼군부총무당 (삼선어린이공원)

 12. 최순우옛집

 13. 돈암장

 14. 선잠단터

 15. 간송미술관

 16. 성북동 성락원

 17. 길상사

 18. 성북동 이종석별장

 19. 수연산방

 20. 성북구립미술관

 

 21. 심우장

 22. 삼청각

 23. 북악산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24. 정릉

 25. 봉국사

 26. 경국사

 27. 정릉계곡

 28. 북한산둘레길 솔샘길

 29. 경동시장과 약령시장

 30. 서울풍물시장

 

 31. 서울숲

 32. 수도박물관

 33. 뚝섬

 34. 화양리느티나무

 35. 어린이대공원

 36. 아차산생태공원

 37. 아차산 홍련봉보루유적
 38. 아차산성과 아차산 보루유적

 39. 용마폭포공원

 40. 서울시립대, 배봉산공원

 

 41. 의릉

 42. 망우리공원 (망우리묘지)

 43. 중랑캠핑숲

 44. 봉화산 (봉화대)

 45. 살곶이다리

 

 6. 서울 강북 북부 (강북, 도봉, 노원구)
 1. 북한산 화계사
 2.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3. 조병옥박사묘

 4. 북한산 본원정사

 5. 북한산 구천폭포

 6. 4.19국립민주묘지

 7.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8. 우이동 솔밭공원

 9. 북한산 소귀천계곡

 10. 북한산 도선사

 

 11. 봉황각

 12. 손병희선생묘

 13. 우이령길 (우이동~우이동유원지~우이령)

 14. 북서울꿈의숲

 15. 초안산공원 (초안산조선시대분묘군)

 16. 옹기민속박물관

 17. 연산군묘

 18. 방학동은행나무와 원당샘

 19. 양효공안맹담과 정의공주묘역

 20. 북한산둘레길 소나무숲길

 

 21. 도봉산둘레길 (우이동~무수골~도봉산입구)

 22. 중랑천 (중랑천둑방길)

 23. 도봉산 무수골

 24. 도봉산 도봉서원

 25. 도봉산 천축사

 26. 도봉산 만월암

 27. 도봉산 우이암 봉우리

 28. 도봉산 만장봉, 자운봉

 29. 창포원

 30. 수락산 벽운동계곡


 31. 수락산 정상

 32. 수락산 학림사

 33. 불암산 (불암산성, 불암산둘레길)

 34. 불암산 학도암

 35. 이윤탁한글영비 (한글고비)

 36. 태릉 (조선왕릉전시관)

 37. 강릉 (태릉 동쪽, 제한관람)

 38.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39. 화랑대역

 40. 태릉이스턴캐슬공원 (옛 태릉푸른동산)

 

 7. 서울 강서 (강서, 양천, 구로, 영등포, 금천구)
 1. 강서습지생태공원
 2. 개화산 약사사 (개화산)
 3. 개화산 미타사

 4. 서남물재생센터공원

 5. 겸재정선기념관

 6. 양천향교

 7. 궁산공원 (옛 양천고성터)

 8. 허준박물관

 9. 구암공원, 허가바위

 10. 안양천 (안양천 둑방길)


 11. 우장산공원

 12. 서서울호수공원

 13. 궁동 정선옹주묘역

 14. 궁동저수지생태공원

 15. 오류동 류순정, 류홍묘역

 16. 선유도공원

 17. 여의도 여의도둑방길 (여의도 벚꽃축제)

 18. 여의도공원
 19. 63빌딩

 20. 샛강생태공원

 

 21. 가산(가리봉)로데오거리

 22. 금천아트캠프, 금천구청역~독산역 벚꽃거리

 23. 시흥동 은행나무 (은행나무4거리)

 24. 호암산 호압사

 25. 관악산둘레길 호암산 구간

 26. 호암산성터와 한우물, 석구상 (불영암)

 27. 호암산 칼바위

 

 8. 서울 강남 (동작, 관악, 강남, 서초구)
 1. 사육신묘
 2. 흑석동 효사정
 3. 상도동 양녕대군묘역
 4. 국사봉 사자암 (국사봉)
 5. 보라매공원
 6. 신림동 굴참나무

 7. 난곡 강사상/강홍립(진주강씨)묘역, 신도비

 8. 삼성산성지
 9. 관악산 (관악산 철쭉제)

 10. 관악산 둘레길 (사당~낙성대~삼성산성지 구간)

 11. 낙성대
 12. 봉천동마애미륵불
 13. 사당동 임당 정공신도비 (동래정씨묘역)

 14. 효간공 이정영 묘역

 15. 관악산 관음사

 16. 구 벨기에공사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17. 국립서울현충원

 18. 호국지장사
 19. 동작충효길 (동작구 둘레길)
 20. 잠실뽕나무 (잠원동)

 

 21. 강남역거리

 22. 도산공원

 23. 봉은사

 24. 삼성역 코엑스 (코엑스 아쿠아리움)

 25. 선정릉

 26. 효령대군묘역

 27. 우면산

 28.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29. 양재시민의숲

 30.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31. 양재천

 32. 구룡산

 33. 대모산

 34. 대모산 불국사

 35. 헌인릉

 36. 광평대군묘역

 37.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38. 한국자수박물관

 39. 호림박물관

 

 9. 서울 강동 (송파, 강동구)
 1. 잠실종합운동장

 2. 석촌호수

 3. 잠실롯데월드

 4. 삼전도비

 5. 석촌동고분군

 6. 방이동고분군

 7. 오금공원

 8.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9. 한성백제박물관

 10. 방이동 생태학습관

 

 11. 풍납토성

 12. 암사동 선사유적지

 13. 일자산 (일자산 해맞이공원, 둔굴)

 14.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

 15. 길동자연생태공원
 
16. 고덕산 (고덕산림욕장, 강동그린웨이, 광주부원군묘역)

 17. 성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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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여행도서] 여행책의 백미, '남한 명승비경 79곳'

"예예원출판사(드라이브사)"에서 만든 "남한 명승비경 79곳" 책을 추천합니다.
이 책은 수도권부터 강원,충청,경상,전라도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산,계곡, 폭포 등의

명소 79곳을 소개하는 책으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지도가 잘 나와있습니다.

특히 여름휴가철이나 계곡,폭포,명승비경 여행에는 아주 요긴한 책이지요.

책에 실려있는 사진들은 전문사진작가가 찍었다고 하며, 사진은 정말 괜찮습니다.
일부는 사진대회에도 출품하여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하며 여러 번 언론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단점이 딱 하나 있다면 숲,계곡,폭포 주변 음식점, 숙박업소에 대한 정보가

약간 미흡한 점인데, 그건 별로 신경쓸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만큼 명승지 관련 설명과

사진,정보가 풍부하니까 말이죠.


이 책은 현재 왠만한 유명서점,대형서점에서 판매되고 있구요.
저도 이책 1권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계곡 등에 갈때 이 책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남한 명승비경 79곳"입니다.
가격은 13000원..

한번 봐보세요.  저도 여기서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
후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노련한 여행/사진 전문가가 만든 책이니까요.

 
 

 

 

늦겨울 산사 나들이 ~ 계룡산 갑사 (갑사계곡, 숲길)

 

' 계룡산 갑사(甲寺) '
갑사 대적전과 승탑
▲  갑사 대적전과 승탑


겨울의 제국이 서서히 저물어 가던 2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계룡산을 찾았다. 중악(中嶽)
이라 불리며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부터 신성시되오던 계룡산의 맑은 정기를 듬뿍 받고 싶
은 마음에서였다. 저번 주만해도 날씨가 겁나게 추웠는데, 이번 주는 좀 포근하여 두꺼운 잠
바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뫼에 오르면 좀 춥겠지? 그래서 그보다 1단계 낮은 잠바
와 두툼한 장갑을 갖추어 길을 떠났다.

동학사(東鶴寺)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동학사 경내를 둘러보고 오뉘탑이라 불리는 청량사지 5
/7층석탑에서 잠시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로 배를 채운 다음 삼불봉(三佛峰)으로 올라가 천
하를 굽어본다. 여기서 금잔디고개로 내려와 신흥암(新興庵)에서 잠시 발을 멈추며 천진보탑
(天眞寶塔)을 친견하고 갑사 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문폭포(龍門瀑布)에서 다시 발을 멈췄다.
계룡산 동학사 보러가기 (클릭)
계룡산 오뉘탑, 삼불봉, 천진보탑 보러가기 (클릭)

용문폭포에서 갑사 방면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대성암이란 작은 암자가 나온다. 여기서 다
리를 건너면 대나무에 둘러싸인 길이 나오고 운치가 서린 그 대나무길을 지나면 슬슬 갑사의
건물이 해가 떠오르듯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시 갑사에 대한 급한 마음을 접고 왼쪽 길
로 들어가 보자. 보통은 그 길을 외면하고 지나치지만 그건 갑사에 대한 큰 실수이다. 그 길
로 들어서면 갑사계곡의 으뜸인 명월담(明月潭)이 있고 유리 지붕이 얹혀진 공간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고려시대 불상인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자리해 있다.


♠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50호

갑사 경내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명월담 왼쪽에 큰 바위가 있다. 바위 위쪽에는 대나
무가 삼삼하게 자라고 있고, 바위 밑에는 얕게 판 석굴(石窟)이 있는데, 그 안에 석조약사불이
둥지를 트고 있다.

이 불상은 원래 갑사 동쪽 자락에 자리한 사자암(獅子庵)에 있던 것으로 왜정(倭政) 시절에 악
덕 친일파로 악명 높은 윤덕영(尹德榮)이 옮긴 것이라고 한다. 키가 남자 성인만한 조그만 불상
으로 머리에는 큼직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다. 얼굴은 조금 길며, 중생들의 소망을 하
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귀가 어깨까지 닿았다.

몸에 걸친 옷은 가슴을 약간 드러내고 있으며, 무릎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가슴 밑에는 반원형
의 옷주름이 표현되었으며, 왼손에 조그만 약병을 쥐고 있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불
상의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바위 석굴에 들어앉아 비와 바
람, 눈 등 자연의 괴롭힘에서 자유로우니 덕분에 건강은 양호하다. 허나 친일파의 의해 강제로
옮겨진 점은 조금은 찜찜한데, 옮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예전에는 불상과 기도를 올리는 조그만 노천 공간만 있었으나 그의 건강 및 중생들의 예불 편의
를 위해 유리 지붕을 얹혀 보호각을 만들었다. 또한 예불 공간을 확장했으며, 조그만 석등(石燈
)을 석불 오른쪽(석불이 바라보는 방향 기준)에 주렁주렁 설치했는데, 좀 어색해 보인다.


▲  석조약사여래입상의 조촐한 보금자리

▲  가까이서 본 석조약사여래입상

▲  겨울잠에서 깨어나려는 명월담

석굴에 들어앉은 석불을 가까이서 친견하니 얼굴에 비해 몸이 너무나 커 보인다. 표정도 걱정에
시름하는 중생들처럼 그렇게 밝아 보이진 않는다. 그의 발 밑에는 그의 인기를 보여주듯 꽃 2송
이가 살짝 놓여져 있다.

석불 동쪽에는 갑사계곡의 백미(白眉)인 명월담이 있다. 상류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잠시 한숨을
돌리는 공간으로 옛 사람들이 새긴 '명월담(明月潭)'을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이 주변에는 윤덕영의 별장이 있었는데, 그는 나라를 팔아먹고 왜정의 지원의 배때기를 가득 불
리며 명월담의 정취를 누렸다고 한다.
그럼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갑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백제 때 창건된 계룡산 사찰의 으뜸, 갑사(甲寺)
계룡산 서쪽에 안긴 갑사는 420년<백제 구이신왕(久爾辛王) 원년>에 고구려 승려인 아도화상(阿
道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다. 아도는 고구려 불교를 전하고자 신라로 건너갔는데, 그는 일선군(
一善郡, 경북 구미)의 부호(富戶)인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며 신라에 고구려식 불교 포교의 임
무를 수행하고 귀국하는 길에 계룡산을 지나갔다.
그런데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오르는 광경에 넋을 잃고 빛이 발하는 곳을 찾아가니
그곳이 바로 천진보탑(天眞寶塔)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보탑에 예를 올리고 갑사를 창건했
다고 한다. 그러니까 천진보탑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신흥암과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이다. 허
나 이를 입증할 유물이나 기록은 전혀 없으며, 천진보탑 전설도 허무맹랑하다. 하지만 백제의
국도(國都)인 공주와 부여하고도 가깝고 계룡산의 오랜 명성을 생각해 보면 백제 때 창건된 것
은 확실해 보인다.

창건 이후 556년<위덕왕(威德王) 2년> 혜명(慧命)이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했다고
하며,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한다. 679년(신라 문무왕 18년)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
가 불전 1,000칸을 지어 화엄도량(華嚴道場)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종(華嚴宗) 10대 사찰의 하
나로 성장했다고 한다.
887년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중창했으며,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킨 영규대사(靈圭大師)
가 잠시 머물렀다. 그는 조헌(趙憲)과 의기투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나
금산(錦山) 연곤평에서 조헌과 의병 700명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고 만다.

1597년 영규대사에 대한 복수로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1604년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하고
1654년 크게 중창을 벌였다. 1875년에는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수했으며, 1899년 적묵당을 지었
다. 1911년 사찰령(寺刹令)으로 마곡사(麻谷寺)의 말사(末寺)로 들어갔으며, 6.25전쟁 때는 다
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갑사란 이름은 으뜸 또는 첫째 가는 절이란 뜻으로 갑(甲)에는 1등의 뜻이 있다. 이외에 한자는
다르지만 갑사(岬寺), 갑사사(岬士寺), 계룡갑사(鷄龍甲寺) 등으로 불리웠으며, 18세기 후반 산
의 이름을 딴 계룡갑사란 이름도 적지 않게 쓰였다.

고색이 만연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적묵당, 전해당, 삼성각, 보장각, 팔상전, 표충원,
범종루, 강당, 대적전 등 약 20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어 규모도 상당하며, 대성암과 내원암, 신
흥암 등을 부속암자로 거느리고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국보 298호인 삼신불괘불탱화를 비
롯하여 철당간과 승탑, 동종, 월인석보판목 등 보물 4점과 석조약사여래입상과 사적비, 강당,
대웅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다. 장대한 역사에 걸맞게 풍부한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절은 크게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 구역과 팔상전이 있는 북쪽 구역,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대
적전 구역 등, 3개로 나눌 수 있다. 원래는 대적전 구역이 절의 중심이었으나 1604년 대웅전 구
역에 대웅전을 지으면서 중심지가 그곳으로 이전되고 대적전은 변두리가 되었다. 그 이후 북쪽
으로 영역이 확대되면서 경내가 무지 넓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 넓은 대지에 건물이 대
도시처럼 촘촘히 박힌 것도 아니다. 대웅전 구역을 빼면 다 널널하게 자리해 있다.
계룡산의 주요 사찰이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만 깊은 속세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깊은 산골에 터를 잡고 있어 산사의 고요함과 고즈넉함을 누리기에 적당하다. 게다가 절을 둘러
싼 숲도 무성하고 유리처럼 맑은 계곡이 경내를 가로지르면서 청정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또한
역사의 숨결이 서린 볼거리도 매우 푸짐하니 눈과 마음도 배불리 호강을 누리며 정화가 된다.

갑사는 계룡산으로 오르는 3대 기점의 하나로 등산객과 답사객, 신도들의 발길이 빈번하며, 여
기서 금잔디고개를 거쳐 동학사로 내려가거나 연천봉을 거쳐 신원사로 내려가도 된다.

※ 갑사 찾아가기 (2013년 2월 기준)
① 공주 경유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공주행 고속버스가 25~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공주 산성동행 직행버스가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공주 산성동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수원, 성남, 천안, 청주, 대전(서부, 동부, 유성), 보령에서 공주행 직행버스 이용
* 공주 산성동에 있는 시내버스터미널에서 갑사행 공주시내버스 320, 322번이 30~50분 간격으로
  다닌다. 공주시외/고속터미널에서 갈 경우는 시내(산성동 방향)로 들어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금강(공주대교)을 건너자마자 옥룡동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길 건너편 옥룡동주민센터 정류장
  에서 320, 322번 시내버스로 환승하면 빠르다. (공주터미널에서 시내버스터미널까지 택시로 5
  분 거리)
② 대전 유성/논산 경유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유성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유성행 직행버스가 10~25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성남, 수원, 천안, 청주, 전주, 익산, 광주에서 유성행 직행버스 이용
* 유성시외버스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장<유성시외터미널에서 서쪽(공주 방면)으로 120m 지점>에
  서 갑사로 가는 공주시내버스 340, 341, 342번 시내버스 이용 (1일 7회 운행, 대전지하철 유
  성온천역(6번 출구)과 현충원역(3번 출구) 경유)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나들목을 나와서 공주/논산 방면 23번 국도 → 신공주대교 → 계룡
  → 계룡저수지 → 갑사 주차장
* 호남고속도로(회덕~논산) → 유성나들목을 나와서 공주 방면 32번 국도 → 공암 → 청벽대교
  건너기 전에서 갑사 방면 → 내흥리 → 갑사주차장

★ 갑사 관람정보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000원(단체 1,800원) / 청소년,학생,군인 700원(단체 600
  원) / 어린이 400원 (단체 300원)
* 주차비 : 대형 6천원 / 소형 4천원
* 매년 가을(10월)에 영규대사를 추모하는 추모재와 산사음악회를 연다.
* 갑사 템플스테이는 주말에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사찰예절과 새벽예불, 사물체험, 숲길
  명상 등을 하며, 참가비는 성인 5만원, 어린이 3만5천원이다. 신청은 갑사 홈페이지의 템플스
  테이 메뉴에서 하면 되며, 자세한 것은 전화로 문의하거나 갑사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 041-857-8981~2)
* 갑사 홈페이지는 아래 갑사 배치도를 클릭한다.


▲  갑사 경내 배치도 (갑사 홈페이지 참조)


♠  갑사 둘러보기 (1) 종각, 강당 주변

▲  갑사 종각(鐘閣)

석조약사불을 친견하고 경내로 들어서면 강당 앞에 단촐한 모습의 종각이 있다. 종각에는 조선
중기에 조성된 동종이 소중히 안겨져 있다.


▲  갑사 동종(銅鍾) - 보물 478호

이 동종은 당시 조선 국왕이던 선조(宣祖)의 만
수무강을 기원하고자 1584년에 만든 것으로 높
이 1.3m, 입지름 91cm의 조그만 종이다. 명세기
왕을 위해 만든 것이니 조선 정부나 공주 관아
의 지원이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다.

종 꼭대기에는 음관(音觀)이 없고 대신 2마리의
용이 종을 들고 있으니 이는 조선시대 종의 특
징이다. (그 이전에는 용통=음관이 있었음)
종의 견대(상대)에는 물결모양의 꽃무늬를 둘렀
고, 밑에는 연꽃무늬와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
다. 범자 역시 조선 동종의 특징.. 상대 밑에는
4곳의 네모난 유곽이 있으며 그 안에 볼록 나온
9개의 유두가 있다. 유두는 종을 옮길 때마다
1개씩 뽑는다고 한다.

종신(鐘身) 아랫쪽에는 동그란 모양의 당좌가
있는데 여기는 종을 치는 부분이며, 4개의 당좌
사이로 구름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지장보살
(地藏菩薩)이 있다.

어둠의 시절 당시 왜정(倭政)이 헌납(獻納)을 구실로 가져가면서 자칫 그들의 전쟁무기로 사라
질 뻔했으나 해방을 맞이하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이 아름다운 종은
무기의 일부로 변했을지도 모르니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종각 옆에 있는 약수터

종각 맞은편에는 산사(山寺)에는 으레 있는 약수터가 있다. 고개를 들며 웅크린 거북이가 쉬지
않고 옥계수를 뽑아내 물이 마를 날이 없다. 계룡산이 중생에게 베푼 물로 바가지에 가득 담아
1모금을 들이키면 세상 시름과 몸 속의 떼가 싹 내려간 듯 오장육부와 마음이 시원하다고 쾌재
를 부른다.

▲  강당 옆에 경내로 인도하는 돌문

▲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루(梵鍾樓)
2003년에 새로 만들었다.


▲  갑사 강당(講堂)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95호

온몸을 다해 경내를 가리고 있는 강당 자리에는 원래 해탈문(解脫門)이 있었으며, 강당은 해탈
문과 대웅전 사이에 있었다. 그러다가 해탈문을 없애고 강당을 해탈문 자리로 밀어 대웅전 뜨락
을 넓혔다. 해탈문의 빈 공간에는 돌을 채워 강당 전면을 석축 바깥에 돌출시켰고, 나무 기둥을
세우면서 지금의 누각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그외에는 단청이 퇴락하고 문짝이 바뀐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승려들이 공부를 하며 법문(法文)을 강론하던 교
육 공간이다. 조선 초기에 지어졌으며, 1597년에 불탄 것을 조선 후기에 다시 세웠다.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 나온 배흘림기둥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촘촘히 공포를 박은 다포(多包) 양식
이다. 강당 정면에는 갑사의 다른 이름인 '鷄龍甲寺(계룡갑사)'라 쓰인 현판이 당당한 풍채로
걸려 있는데, 이는 충청도절도사(節度使) 홍재의가 썼다고 한다. 글씨는 특이하게 파란색이다.


▲  휘황찬란한 강당 내부

강당 내부에는 동쪽에 불단을 두고 육환장(六環杖)을 든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두었다. 그 뒤에
는 후불탱화 대신 거의 1,000개의 달하는 조그만 금동불을 빼곡히 배치하여 지장보살의 뒤를 든
든하게 받쳐준다. 금동불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금빛 찬란함에 두 눈이 가히 마비될 지경이다.
 


♠  갑사 둘러보기 (2) 사적비, 팔상전 주변

▲  갑사의 보물을 간직한 성보보장각(聖寶寶藏閣)

강당 앞에서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직진하면 성보보장각을 중심으로 한 갑사의 북쪽 구역이 펼
쳐진다. 사람들이 대부분 대웅전 구역만 보고 갈 뿐, 북쪽 구역은 지나치기가 쉽다. 허나 이곳
에는 팔상전과 표충원, 사적비, 성보보장각 등의 볼거리가 있으므로 반드시 눈에 넣고 가길 바
란다.

맞배지붕의 단아한 모습을 지닌 성보보장각은 갑사가 지닌 동산문화유산들이 들어있다. 허나 시
간이 늦었는지 문을 굳게 닫아 걸어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  갑사의 역사가 담긴 사적비(史蹟碑)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52호

성보보장각 정면에는 해우소가 있고, 여기서 일주문 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에 사적비가 자리
해 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사적비는 갑사의 내력이 담겨져 있으며, 바위 위에 비좌(碑座)를
만들고 그 위에 비석을 세운 다음 솥뚜껑처럼 생긴 지붕돌을 얹혔다. 비석 4면에는 모두 글씨를
새겼는데, 일부는 손상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비석에 금이 들어있다는
잘못된 이야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캐고자 비석을 괴롭히면서 그리 된 것이라고 한다.

1659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이천(李志賤, 1589~1683)이 짓고, 공
주목사 이기징(李箕徵)이 글씨를 썼다.


▲  갑사 표충원(表忠院)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2호

성보보장각 뒤쪽에 담장에 둘러싸인 건물이 있는데, 그 앞쪽은 표충원, 뒤에는 팔상전이 있다.
표충원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738년에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뜨락에는 영규대사비가 세워져 있다.

▲  영규대사비

▲  저 문을 들어서면 표충원이다.


▲  갑사 팔상전(八相殿)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4호

표충원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팔상전은 조선 후기 건물이다. 부처의 일대기를 8부
작으로 나눠 그린 팔상탱화(八相幀畵)가 있어서 흔히 팔상전이라 부른다. 팔상탱화 외에 신중탱
과 석가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多包) 양식으로 나름대로의 격조를 갖
추었다. 팔상전 정면에는 툇마루를 지닌 요사(寮舍)가 있으며, 팔상전을 나와 산을 조금 오르면
내원암(內院庵)이 나온다.


▲  담장 너머로 본 보장각(寶藏閣)

팔상전을 나오면 정면에 담장에 둘러진 대웅전 구역이 보인다. 그중에서 담장도 안심이 안되는
지 녹색 펜스까지 치고 사나운 견공(犬公)까지 옆에 둔 맞배지붕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보물 582호로 지정된 월인석보(月印釋譜)의 판목(版木)을 간직한 보장각이다.

월인석보는 1459년(세조 4년) 세조의 명으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
을 합쳐 만든 불교대장경이다. 여기서 석보는 부처의 일대기를 뜻한다. 본래는 57매 233장으로
모두 24권이었으나 지금은 전국적으로 21권 46매만이 남아있다. 갑사의 월인석보는 1569년 충청
도 한산(서천군 한산면)에 사는 백개만(白介萬)이 시주하여 활자를 새기고, 논산 쌍계사(雙磎寺
)에서 보관하던 것을 왜정 때 갑사로 넘어왔다.
계수나무에 돋음새김으로 새겼고, 판목의 오른쪽 밑에 시주자의 이름과 새긴 이들의 이름이 있
으며, 내용표기에 있어서는 방점과 글자 획이 닳아 없어져 변모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는 보호를 위해 속세에는 공개하지 않으며, 사자암에서 가져온 석조보살입상도 저 안에 있다.
(성보보장각에 있을 수도 있음)


♠  갑사 둘러보기 (3) 대웅전 주변

▲  갑사 대웅전(大雄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05호

팔상전이 있는 북쪽 구역을 살피고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으로 넘어갔다. 이 구역은 1604년
절을 중건하면서 새롭게 개척한 곳으로 대웅전은 원래 대적전 주변에 있었다. 절의 법당(法堂)
인 대웅전이 개척지에 생겼으니 그 주변이 흥(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원래 자리였던 대적
전 구역은 변두리로 밀려나 호랑이가 나타날 정도로 인적이 드물 지경이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 건물답게 규모가 매우 상당하다. 건물을 받치는 기단도 높이가 거의 2.5m에
이르러 그의 거창함을 더욱 끌어올린다. 대웅전 현판도 내 키에 이를 정도로 큼지막하여 주눅이
앞다투어 밀려온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불전으로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양식이다. 건물 내
부는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고, 불단(佛壇)에는 석가불을 비롯하여 3존불과 4개의 보살상을 봉안
하여 눈길을 끈다.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으며, 뜨락에는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
탑을 닮은 5층석탑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철거했다.


▲  대웅전 현판의 위엄
현판의 글씨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현판 글씨는
1669년에 쓰여진 것으로 석봉체 계통의 명필(名筆)을 자랑한다.

▲  대웅전 불단

대웅전 볼단에는 건물만큼이나 육중한 3존불이 자리를 지킨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阿
彌陀佛)과 약사불(藥師佛)이 좌우에 앉아 3존불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
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문수보살(文殊菩薩), 보
현보살(普賢菩薩) 등이 서 있는데, 한결같이 자비로운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이한다.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진해당(振海堂)
승려들의 생활공간 및 선방으로 쓰인다.

▲  대웅전 뜨락 좌측의 적묵당(寂默堂)
요사 겸 종무소로 쓰이며, 1899년에 세워졌다.


▲  갑사 삼성각(三聖閣)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3호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조선 후기
에 지어졌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사이에 담장을 놓아 속인의 접근을 통제했으나 이제는
삼성각까지 접근이 가능해졌다. 대신 뒤쪽의 대적선원과 승탑은 여전히 통제 구역이다.

▲  산신탱화와 산신상

▲  칠성탱화


▲  계곡을 바라보며 자리한 갑사 전통찻집
예전 2004년 3월에 왔을 때 일행들과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던 기억이 솔솔 떠오른다.


♠  갑사 둘러보기 (4) 대적전, 철당간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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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우탑(功牛塔)

▲  공우탑에 새겨진 '功牛塔(공우탑) 명문

전통찻집에서 계곡을 건너면 조그만 3층석탑이 나온다. 겉으로 보면 3층 탑신(塔身)만 있는 것
으로 보이지만 기단부(基壇部)는 땅 속에 묻혀 윗부분만 햇살을 받고 있다. 이 탑은 원래 갑사
가 아닌 부속 암자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공우탑이란 말 그대로 절 중창 때 크
게 도움을 준 우공(牛公)의 부도탑이라고 하며, 짧막한 전설 한토막이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백제 비류왕(比流王, 재위 304~344) 시절, 이곳에 절을 세울 때에 일이다. 목재
를 운반하던 소가 냇물을 건너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아마도 과로사인 듯 싶다. 소
가 죽자 지금의 자리에 그를 묻고 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전설의 스토리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
는 일이나 그 시기가 100% 의문이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대략 384년으로 전설에 나오는
시기는 그 이전이다. 불교도 들어오지 않은 시절에 어찌 절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이 전설이
과연 사실이라면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 되겠지만 탑의 양식을 보면 전혀 신뢰
성이 없다. 아마도 고려나 조선 때 절을 중건하면서 목재를 운반하던 소가 숨지자 그를 화장하
여 지금의 탑을 세웠을 것이다.
1층 탑신에는 '臥塔起立人道偶合 三層己巳厥功居甲<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니 인도(人道)에 우
연히 합치되었네, 3번을 수고하고 수고했으니 그 공이 으뜸이다>
이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
며 2층에는 '牛塔', 3층에는 '功'이 새겨져 있어 이 탑이 절에 공을 세운 소를 위해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절 건축에 헌신하다 죽은 동물을 위해 탑을 만들어 그의 영혼을 위로했던 승려의 지극한 마음과
심하게 부려먹었던 그들의 미안한 마음까지 느낄 수 있는 정(情)이 담긴 문화유적이라 하겠다.


▲  갑사의 옛 중심지를 지키는 대적전(大寂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06호

공우탑에서 전통찻집으로 나가지 말고 안쪽으로 좀 들어가면 대적전이 나온다. 경내를 3개로 나
누면 이곳은 대적전 구역에 해당된다. 지금은 경내에서도 한참 외곽으로 밀려나 한적하기 그지
없지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엄연한 갑사의 중심 구역이었다. 대웅전도 원래는 대적전 옆에 있
었다.
그러다가 1597년 절이 파괴되고 1604년 절을 다시 일으킬 때 계곡 건너에 자리를 다져 대웅전을
지었고, 자연히 그 일대가 흥하면서 절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면 원래 중심지였던 대적전 구역
은 대적전과 돌담에 둘러싸인 요사를 다시 짓는 선에서 더 이상의 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경내 변두리로 밀려나고 만다.

대적전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의 거처이다. 허나 이곳에는 비로자나불
대신에 석가불과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불단 위에
천정을 1단 올려 닫집의 효과를 내고 있다.

대적전의 창건 시기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대적전은 18세기부터 많이 나타나는 다
포식 공포의 법식화된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공포의 구성에 화려한 초각의 경향을
보이는 등 18세기 이후 불전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또한 도리통의 협칸을 어칸에 비해 1/2정도
로 줄인 것은 19세기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건축 특성과 함께 현판에 쓰인 명문으
로 보아 현판이 씌어진 1826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 주변에는 옛 주춧돌과 기와가
널려 있어 옛 시절을 그리워한다.

▲  갑사 승탑(僧塔) - 보물 257호

대적전 뜨락에는 수려한 자태로 속인(俗人)들의 안구를 정화시켜주는 아름다운 승탑(부도)이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갑사의 것은 아니며, 절 뒤편 산자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17년 지금의 자
리로 수습한 것이다.

8각의 바닥돌 위에 여러 조각을 베푼 3단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차례로 얹
힌 형태로 기단은 위로 올라갈 수록 줄어든다. 기단 밑부분에는 사자와 용, 구름을 어지럽게 새
겼는데, 승탑을 둘러싸고 심하게 각축전을 벌이는 듯,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기단 중간에
는 각 귀퉁이마다 꽃 모양의 장식이 있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배치했다. 탑신
을 받치는 윗부분에는 연꽃을 둘렀고, 탑신 4면에는 자물쇠가 있는 문을 새겼다. 그리고 다른 4
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탑을 지키게 했다. 지붕돌은 기왓골을 표현하여 지붕 모양을 정교하게
따랐으며, 머리 장식은 옛날에 없어지고 나중에 달아놓은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로 꼭대기를
마무리했다.

이 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승탑에 비해 목조건축의
구조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기단부의 화려한 조각은 승탑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
다. 누구의 승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래전 갑사 인근에 터를 닦은 이름 모를 암자가 남긴 유
일한 유물이다.


▲  철당간에서 대적전으로 오르는 길

▲  갑사 철당간(鐵幢竿) - 보물 256호

대적전에서 일주문으로 내려가면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철당간을 만나게 된다. 양쪽 2개의 돌기
둥이 가운데에 있는 철기둥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데, 여기서 양쪽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
柱)라고 하며, 가운데 철기둥을 한 덩어리로 묶어 철당간이라 부른다.

철기둥은 현재 24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28개였다고 하며, 1893년 7월 25일 벼
락을 맞아 4개가 떨어져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너무 하늘로 노출이 되있다보니 피뢰침 작
용을 받은 듯 싶다. 그것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웅장했을 것이고, 하늘을 찌르
는 그의 모습에 하늘은 더욱 기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철통을 보좌하는 돌기둥은 별 꾸밈
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당간지주는 대체적으로 멋대가리가 떨어진다. 꾸밈이나 화려함은 통하
지 않는다.
이 철당간은 680년에 세웠다고 하나 근거는 없으며, 당간의 양식을 보아 신라 후기인 9~10세기
경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철당간은 갑사를 비롯하여 청주시 도심
에 있는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이 전부로 그만큼 희소가치가 상당하다.

철당간이 얼마나 높은지 주변 나무들을 죄다 압도한다. 그의 높이는 15m가 넘으며, 나무들은 기
껏해봐야 10m가 고작이다. 거기에 겨울 제국의 모든 것을 공출당한 상태이니 그 왜소함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철당간을 세웠을까? 풍수지리의 영향 때문은 아닐까?
용두사지 철당간 설화를 보면 청주 고을이 북쪽으로 떠내려가자 이를 막고자 세웠다고 한다. 갑
사의 철당간 역시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곳이 풍수적으로 배의 지형을 상징한다하여 떠
내려가지 말란 의미와 함께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부분을 보충하고 마을과 절의 안녕을 기원하려
는 의미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  갑사 사천왕문(四天王門)

철당간을 둘러보고 계곡을 건너 일주문으로 향했다. 겨울에 잠긴 갑사 숲길을 거닐면 사천왕(四
天王)의 보금자리인 사천왕문이 모습을 비춘다. 이 문은 2002년에 지은 것으로 내부에는 사천왕
상이 봉안되어 절을 찾은 중생들을 검문한다.


▲  겨울 제국의 신민이 되어 봄을 열망하는 갑사 숲길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의 눈치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던 저들은
환하게 기지개를 켤 것이다.

▲  갑사 숲길 (일주문 → 천왕문 방향)
갑사로 가는 숲길은 갑사가 품은 또다른 보물이다. 겨울이라 그렇지
봄과 여름, 늦가을에는 매우 매혹적인 숲길이다. 

▲  갑사 일주문(一柱門)

갑사 일주문은 1998년에 만든 것으로 현판에는 절의 이름인 '계룡산 갑사'가 쓰여 있다. 문이라
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은 없다.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하겠다는 부처의 뜻이 담긴 것
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입장료를 받는 매표소가 나오고, 이윽고 등산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주막촌
이 펼쳐진다. 절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하는데, 산채비빔밥이나
파전, 도토리묵, 동동주, 백숙, 된장찌개 등을 판매한다. 휴일이면 주막촌이 시끌벅적할텐데 평
일이라 썰렁함이 진하게 감돈다. 몇몇 집은 아예 문을 닫아걸고 쉬었다.
이곳에 오니 시간은 어느덧 6시, 햇님은 달님에게 업무를 넘기고 천하는 다시 땅거미의 세상이
되었다. 오전에 계룡산을 오를 때 점심은 대충 때우고 저녁은 황제처럼 먹기로 했지. 그래서 점
심은 동학사 주막촌에서 산 김밥 4줄과 컵라면, 계란으로 동학사와 남매탑에서 반반씩 먹었다.
이제 저녁시간이고 하니 먹을 곳을 물색하다가 서울식당이란 곳에 들어갔다. 이 집도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주인 아줌마가 몇년 만에 맞는 손님처
럼 환하게 맞이한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그날 매출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거의 주말 장사니)

식당에 자리를 피고 된장찌개와 묵밥, 해물파전을 주문했다. 점심을 간단하게 먹었고, 등산을
한 탓에 시장기가 하늘을 찌른다. 드디어 나타난 저녁밥상, 나오기가 무섭게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총동원해 열심히 배를 채운다. 처음에는 배고픔에 눈이 뵈는 것이 없어 양이 적어 보
였으나 먹고나니 양이 많았다. 파전은 덩어리가 커서 간신히 다 먹었고, 묵밥과 된장조치(찌개)
는 조금 남겼다. 반찬도 맛있는 것은 동이 나고 몇몇은 반 정도 남았다. 동동주나 막걸리도 1잔
하면 좋겠지만 술은 땡기지 않아 그냥 식사만 했다.

그렇게 황제처럼 저녁을 마치고 커피 1잔 뽑아마시며 갑사 주차장으로 갔다. 여기서 속세로 나
가는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날이 어두워지니 따스한 기운 대신 제법 매서운 산바람이 우리를
희롱한다. 그렇게 20분을 기다려 공주시내버스 320번을 타고 공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아간 계룡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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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2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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