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3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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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4.04.19 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봄꽃 나들이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3. 2024.04.08 정읍 봄맞이 나들이 <정읍피향정, 함벽루, 무성서원, 성황산, 한정, 송정, 동진강>
  4. 2024.03.31 첩첩한 산주름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3층 법당 대웅전을 지닌 화순 쌍봉사
  5. 2024.03.22 김포공항을 굽어보는 강서구의 대표 지붕,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둘레길, 개화산자락길, 개화산 봉수대, 미타사석불입상, 신선바위>
  6. 2024.03.11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진관동 나들이 <경천군이해룡 사패지송금비, 여기소터,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영산군 이전묘역, 숙용심씨묘표>
  7. 2023.05.26 금천구의 상큼한 뒷동산, 호암산 봄나들이 <호암산성, 석구상, 제2한우물, 신랑각시바위, 한우물, 불영암>
  8. 2023.05.17 화순 만연산, 만연산 오감연결길, 만연사 늦가을 나들이 <만연폭포, 큰재, 만연저수지>
  9. 2023.05.09 설렁탕의 탄생지이자 선농대제의 오랜 현장, 제기동 선농단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역사문화관, 선농대제 설렁탕>
  10. 2023.04.27 서울의 서남쪽 끝으머리, 오류동 류순정 류홍부자묘역~항동철길~푸른수목원 봄나들이

서울 서남쪽 끝자락에 깃든 상큼한 명소들, 푸른수목원~항동저수지~항동철길 1바퀴

구로구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가을 나들이



' 구로구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가을 나들이 '

푸른수목원 항동저수지

▲  푸른수목원 항동저수지

항동철길(오류선) 푸른수목원 장미원 분수대

▲  항동철길(오류선)

▲  장미원 분수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도 수목원이 있다. 바로 홍릉수목원과 서울 서
남쪽 변두리에 있는 푸른수목원이 그것이다.
구로구의 일원으로 서울의 서남쪽 끝을 잡고 있는 항동(航洞)에 자리한 푸른수목원은 이
미 2~3번 인연이 있으나 주마등(走馬燈)으로 둘러본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가을이 늦가
을로 숙성되어 가던 10월의 한복판에 겸사겸사 그곳을 찾았다.

비록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나 나는 서울의 동북쪽 끝, 푸른수목원은 서남쪽 끝
으로 완전 끝에서 끝이다. 거리만 해도 최소 34km가 넘는다. 우리 동네 전철역인 방학역
에서 1호선을 타고 70분을 달려 오류동역에서 하차, 여기서 서울시내버스 6614번(양천차
고지↔옥길지구)으로 환승하여 푸른수목원 후문에서 두 발을 내렸다.



 

♠  푸른수목원 입문 (항동저수지)

▲  활짝 열린 푸른수목원 후문

서울의 서남쪽 변두리인 항동 한복판에 서울 최초의 시립 수목원(樹木園)인 푸른수목원이 상
큼하게 누워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과 차량, 그리고 번잡한 시가지가 크게 연상
되는 서울에도 수목원이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짙은 숲으로 이루어진 국립산림과학
원 소속의 홍릉수목원과 오산(烏山)의 물향기수목원과 비슷한 푸른수목원을 가지고 있다.

푸른수목원 자리에는 지금도 건재한 항동저수지와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다. 저수지 동쪽에는
구로구(九老區)의 지붕인 천왕산(天王山, 144m)이 자리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도 그런
데로 띄고 있었다.
시골 향기 그윽했던 변두리로 조용히 묻혀있던 항동, 바로 그곳에 서울시는 수목원을 닦기로
하고 2004년 6월 30일에 수목원 기본계획용역을 실시해 같은 해 12월 30일, 수목원 실시설계
용역을 시행했다. 2005년 12월 15일 수목원 조성사업 실시계획 인가를 얻어 2006년 3월 8일까
지 토지 측량, 경계 측량, 분할 측량을 완료했으며, 4월 15일 실시계획 변경 인가를 받아 6월
16일 보상계획 공고를 하여 12월까지 수목원 토지 보상과 공사 시행을 완료했다.

2009년 10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1단계 조성 공사로 저수지 생태탐방로, 목재방틀을 설치했
으며, 2010년 9월 2단계 조성 공사에 들어갔으나 2011년 6월, 캠핑장 반영 변경 계획에 따른
시민들의 반대로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2012년 7월 17일 시민들의 제안을 받아들
여 정원 개념을 도입한 수목원으로 공원조성계획이 통과되어 2013년 3월, 3단계 조성 공사에
들어가 그해 6월 5일, 상큼한 모습으로 속세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18년 서울시 1호 공립
수목원으로 지정되었다.

수목원 면적은 103,354㎡로 2,400여 종 52만 주의 다양한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잔디마
당과 향기원, 초화원, 장미원, 암석원 등 20개의 테마공간과 북까페 등의 편의시설이 닦여져
있으며, 숲해설 등의 자연 교육 프로그램과 친환경관리의 중심인 '생태의 섬(Eco-island)'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도심 속에서 식물과 인간, 환경이 공존하고 3무(無, 농약과 무화학비료,
쓰레기 배출을 하지 않음) 운동을 실천하는 생태공간임을 내세우며 실천하고 있다.
수목원 동쪽에는 천왕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고, 북쪽은 주거지와 성공회대학교, 서쪽과 동쪽
은 들녘과 항동지구가 공존하고 있다. 수목원 남쪽에는 철길 관광지로 크게 인기를 누리고 있
는 항동철길(오류선)이 지나가며, 천왕산과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가 동쪽에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고 거닐 곳도 정말 많다. 하여 푸른수목원과 항동철길을 한 덩어리로 둘러보거나 천왕
산과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까지 보태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수목원이긴 하지만 나무가 빽빽한 그런 수목원이 아니라 정원 및 공원 같은 분위기로 정문과
후문, 2개의 쪽문(항동철길, 더불어숲길)을 통해 들어설 수 있으며, 나는 후문으로 들어가서
항동철길 쪽문으로 나왔다. 쉬는 날과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5시부터 22시까지로 이
땅의 수목원 중 이렇게 관람시간이 긴 곳은 여기 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도시와 도시 사람
들에게 최적화된 수목원이다.

* 푸른수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 81-1(연동로 240 ☎ 02-2686-3200)
* 푸른수목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장미원 ①

후문을 들어서면 바로 장미원(장미정원)이 마중을 한다. 수목원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붉은 장
미와 분홍 장미 등 천하의 온갖 장미 69종이 모여 아름다움을 견주고 있는데, 그들이 심어진
부지는 장미의 꽃잎과 푸른 잎의 모양을 따서 만들었으며, 분수대가 정원 한복판에 자리하여
경관을 크게 돕는다.


▲  장미원 ②
늦가을 장미의 향연이 한참 펼쳐져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  장미원 ③
수목원 너머로 항동지구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 도시 속의
장미공원을 보는 듯 하다.

▲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장미원 분수대

▲  더불어숲길 안내도

장미원 동쪽에는 천왕산으로 인도하는 더불어숲길 쪽문이 있다. 더불어숲길은 서울시와 구로
구청, 성공회대, 사단법인 더불어숲이 함께 조성한 짧은 숲길로 더불어숲길 쪽문에서 성공회
대 뒷쪽(천왕산 북쪽 자락) 언덕까지 이어지며 거기서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와 만난다.


▲  장미원 남쪽이자 조망원 주변 산책로

▲  항동저수지 수생식물원

항동저수지는 푸른수목원의 상큼한 거울이자 터줏대감이다. 근처의 궁동저수지(궁동저수지생
태공원)와 더불어 서울에 몇 없는 저수지로 경기도 농산물원종장의 농업용수를 위해 왜정(倭
政) 때 닦여졌다.
경기도 농산물원종장은 1917년 5월에 여기서 가까운 부천 역곡(벌응절리)에 세워진 경기도종
묘장에서 시작되었는데, 1932년 경기도 농사시험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49년에 경기도
농사기술원으로, 1957년에는 경기도농사원으로 이름이 갈렸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항동은 경기도 부천군(富川郡)에서 서울로 바뀌었으며, 서울의 지
나친 도시화로 1998년 폐지되면서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경기도 농업기술원에서 그 기능을 담
당하고 있다.

이 저수지는 농업용수 외에도 낚시터와 물놀이 장소로 바쁘게 살았는데, 겨울에는 썰매와 얼
음 낚시 명소로도 유명했다. 주변이 온통 경작지와 산이라 한때 존폐 위기까지 갔던 궁동저수
지와 달리 좋은 수질을 유지했으나 푸른수목원이 닦이면서 농업용수 제공은 중단되고 낚시와
썰매도 모두 금지되는 등, 그동안의 존재의 이유를 모두 빼앗기긴 했으나 대신 궁동저수지와
비슷한 수생식물원 및 생태저수지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저수지 동부에는 나무로 다진 생태탐방로를 닦았고 연꽃 등 수초(水草)들이 무성해 저수지의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저수지 주위로 산책로가 닦여져 있으며, 물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저수지 수중 식구들을 위해 접근을 삼가하기 바란다. 푸른수목원의 절반은 항동저수지
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곳에서 매우 비중이 크며, 그가 없는 푸른수목원은 정말 상상
할 수가 없다.


▲  저수지 위에 그물처럼 닦여진 수생식물원 생태탐방로

▲  푸르기 그지 없는 항동저수지
농업용수 제공과 낚시터, 피서지 바쁘게 살았던 그는 이제 인간의 손을
덜 받는 생태저수지로 새 삶을 누리고 있다.

▲  저수지 외곽에 삼삼하게 자라난 수초들
온갖 수초들이 저수지와 속세의 경계를 팽팽히 그으며 저수지 식구들을
지킨다.

▲  항동저수지 서쪽 산책로

▲  평화로운 모습의 항동저수지와 천왕산
천왕산은 물론 주변 나무와 하늘, 구름, 햇님, 달님까지 저수지를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항동저수지와 가까이에 보이는 옥의 티들(항동지구)

푸른수목원이 닦여졌을 때는 주변은 산과 들판이 전부인 자연의 공간이었다. (집들이 여럿 있
었음)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농촌이었으나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들어와 춤을 추면서 수목원
주변으로 회색빛 아파트들이 마구 들어서 일명 항동지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곳은 서울의 영원한 시골로 남았으면 했는데, 이 변두리까지 가만두지를 않고 자꾸 성냥갑
아파트를 올려 난개발을 일삼은 것이다. 아직 시골 들판이 좀 남아있긴 하나 그마저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 서울의 인구는 미세하게나마 줄고 있고, 전국적으로 비어있는 아파트가 즐
비하다고 하는데, 자연이 잘 남아있는 이곳까지 공간을 낭비해야 했을까? 아파트보다는 자연
공간을 크게 조성하여 푸른수목원의 확장판으로 삼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수목원과 천왕
산 일대는 숲을 중심으로 한 자연공간으로, 수목원 서쪽과 남쪽은 수목원 수식용 자연 공간과
주말농장 등의 경작지로 손질해야 했음)

▲  북쪽에서 바라본 항동저수지

▲  저수지와 습지식물원 사이 산책로



 

♠  푸른수목원 둘러보기

▲  참여정원의 평화로운 풍경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가 싹 정화되는 기분이다.

▲  가을에 푹 잠긴 붉은 단풍나무
올해의 마지막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  습지식물들의 조그만 낙원, 습지식물원

이곳은 동그란 작은 웅덩이가 여러 개 모여 이루어진 습지대(濕地帶)로 다양한 수생식물과 수
서곤충(水棲昆蟲)이 살아가고 있다. 습지대는 생태공원의 필수 요소로 오염된 물을 정화시켜
주며, 조그만 생물들의 삶터와 먹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습지를 이룬 물은 항동저수지로 흘
러가 저수지를 살찌워준다.


▲  야생화원과 계류원 주변 산책로

▲  계류원에 차려진 하얀 천막(국화정원)

계류원은 수목원 이전부터 있던 물길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다양한 수생식물이 살아가고 있
다. 그 위에는 나무다리를 닦고 천막을 씌워 국화정원으로 삼아 아름답게 꾸며진 국화와 분재
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 내용은 매달 다를 수 있음)


▲  계류원 국화정원의 학 모양 분재
학 분재 1쌍이 서로를 각별히 바라보며 정을 속삭인다. 그 앞에는 다양한
피부색의 국화들이 서로 아름다움을 견준다.

▲  불꽃처럼 화사하게 돋은 노란
국화의 위엄 (국화정원)

▲  늦가을에 점차 물들어가는 활엽수원
(闊葉樹園)


▲  활엽수원 산책로
단풍나무와 참나무, 벚나무 등의 활엽수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늦가을에는 단풍의 고운 향연을 구경할 수 있다.

▲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수목원 동쪽 끝자락에는 KB숲교육센터라 불리는 유리온실이 있다. 하얀 피부를 지닌 이 온실
은 국민은행(KB)의 후원(기부채납)으로 2015년에 지어진 것으로 시민을 위한 친환경 휴식 공
간과 체험형 생태교육공간으로 조성되었으며, 초승달 모양을 지닌 정남향 온실(溫室)로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열대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조촐하게 실내 식물원 역할을 한다.
수목원 구성원 중 유일한 실내 공간(관리사무소와 까페는 제외)으로 안으로 들어가면 조금은
더울 수 있다. (겨울에는 따스해서 좋으나 여름에는 다소 더울 수 있음)

▲  2015년 KB숲교육센터 조성 기념으로
전 서울시장 박원순이 심은 소나무

▲  열대 밀림 같은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 ①


▲  열대 밀림 같은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 ①

▲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의 조그만 문

▲  '아라우카리아'라 불리는 열대식물

▲  스코파리움호주매화(마누카)
이름도 무지하게 어렵고 생김새도 요상한 나무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고향이다. 최대 3m까지 자란다고 하며, 잎과 가지에서 오일을 추출한다.

▲  만지면 꽤 아플 것 같은 선인장 무리들
저들은 생긴 것 자체가 단단한 무기이다.

▲  벌써 휴식기에 잠긴 무궁화원
130여 종의 무궁화가 향연을 펼치는 곳이나 계절 관계로 벌써부터
휴식에 들어가 잠잠한 모습이다.

▲  무궁화원 부근에 닦여진 돌탑

▲  영국정원과 가로수


▲  영국정원과 늘씬하게 솟은 가로수들
영국(잉글랜드) 양이(洋夷) 스타일의 자연풍경식 정원의 소박함과 아름다움을
수목원 구석에 구겨 넣었다. (바로 옆에 억새원이 있음)

▲  야생화원
이 땅에 자생하는 야생화를 잔뜩 머금은 공간으로 그중에서
구절초(九節草)가 제일 많이 아른거린다.

▲  구절초의 앳되고 청초한 미소가 깃든 야생화원

▲  야생화원의 풍경 하나 (커다란 돌과 식물, 꽃들)

▲  프랑스정원(오른쪽)과 억새원(왼쪽)
영국정원이 있으니 그에 대비되는 프랑스정원도 그 옆에 구겨 넣었다.

▲  향기원
이곳에는 오감을 흥분시키는 다양한 허브식물과 약용식물, 식용식물 등이
닦여져 있다. 이들은 자원봉사자들이 정성을 들여 조성했다.

▲  항동철길 쪽문 방향

후문을 통해 푸른수목원으로 들어와 수목원 내부를 고루고루 둘러보고 항동철길 쪽문으로 나
갔다. 일몰이 턱 밑이라 흐리게 나오거나 별로인 사진이 적지 않아 수목원의 ¼> 정도의 분량
은 본글에서 쿨하게 뺐다.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별도의 글에
서 채울 생각이다. (생각에서만 멈출 수도 있음)



 

♠  서울에서 유일한 철길 명소, 항동철길(오류선)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푸른수목원 바로 남쪽에는 철길이 지나고 있다. 속세에서는 그 철길을 항동철길이라 부르는데
, 정식 명칭은 오류선(梧柳線)으로 오류동역(1호선)에서 광명시 옥길동에 있던 경기화학을 이
어주던 4.5km의 화물열차 전용 단선 철로이다. ('경기화학선'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음)

경기화학주식회사는 이 땅 최초의 비료 공장으로 1954년 옥길동에 설립되었다. (그 시절 지명
은 '부천군 소래면 옥길리') 원료와 비료 운송을 위해 1957년 9월 26일 철길을 닦기 시작해
1959년 5월 30일에 완성을 보았는데, 경기화학 외에도 한때 오류동에 있던 삼천리연탄공장과
동부제강도 이 철로의 신세를 졌다.
경기화학은 울주 온산공장으로 통합, 이전되면서 광명 공장은 문을 닫았으며, 그로 인해 열차
가 다닐 일이 거의 없어지면서 완전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동부제강과 삼천리연탄공장도 다
른 곳으로 이전됨)
그렇게 열차의 기적소리도 사라지고 열차의 바퀴자국도 녹이 슬면서 철로에는 잡초가 덥수룩
하게 끼었으며, 무쓸모급 철길로 전락했지만 주변에 천왕산공원, 푸른수목원이 조성되면서 그
들을 수식하는 철길 명소로 덕을 보게 되었고, 2014년 이후 방송매체에서 이곳을 줄기차게 홍
보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항동철길은 오류동역에서 1호선 경인선에서 살짝 갈라져 나와 서해안로와 오리로가 만나는 광
덕4거리를 지난다. 여기서부터 뚜벅이들이 거닐 수 있다. (광덕4거리~오류동역 구간은 접근
금지) 오리로11길 골목길이 바로 남쪽에 붙어있으며, 금강수목원아파트와 맞닿은 철길 북쪽에
는 짧게 숲길을 닦아놓아 눈길을 부드럽게 배려했다.
철길은 주택가의 끝인 우창굿모닝아파트를 지나면 숲에 감싸인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난다. 천
왕산 산세가 움푹 낮아진 곳에 산의 살을 파서 생긴 틈으로 그 고개를 지나면 푸른수목원 항
동철길 쪽문과 천왕산 등산로가 나온다. 그들을 지나면 푸른수목원 정문이 나오며, 항동우남
퍼스트빌까지 이동할 수 있다. 허나 그 이상은 곤란하다.
 
철길에 잡초가 덥수룩하고 골목길과 바로 붙어있어 열차도 완전히 등을 돌린 철길처럼 보이지
만 가뭄에 콩 나듯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주택가와 뚜벅이길이 바로 옆에 붙어있어 폭주는 하
지 못하고 천천히 지나가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 된다. 그것만 유념한다면 철길 산책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또한 열차가 아주 드문드문 지나가므로 산책 중에 열차를 만난다면 꼭
복권을 사보기 바란다. 그만큼 열차를 보기 힘들다.
한때 이 철길을 두고 관광지로 두느냐 안전을 위해 접근 불가로 봉인하느냐를 두고 말이 많았
으나 이제는 관광지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이 땅에 철길 명소가 여럿 있지만 서울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옛 경춘선 철길과 옛 경의
선 철길은 폐선된 철로라 제외) 게다가 주거지와 골목길 속을 거리낌없이 지나가므로 매우 친
숙하게 다가온다. 철길 주변 풍경도 주택가와 자연(천왕산, 푸른수목원)이 어우러진 모습이라
가히 싫지는 않다. 특히 우창굿모닝아파트에서 푸른수목원으로 넘어가는 나무에 감싸인 그늘
진 고갯길은 이곳의 백미로 소박한 자연 풍경을 보여준다.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오류동 방향)

▲  항동철길의 유일한 간이역(簡易驛), 항동철길역

항동철길에도 간이역이 있었다. 바로 항동철길역이 그것이다. 간이역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곳
에 바퀴를 멈추는 열차는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무늬만 역이다. 항동철길이 관광지로 뜨고 바
로 옆에 푸른수목원이 들어서면서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장식물이기 때문이다.
요즘 인기가 높은 레일바이크(Rail bike) 명소로 삼아도 좋을 듯 싶으나 화물열차가 랜덤 수
준으로 지나다녀 그것도 여의치 않다.

역무원 모자를 쓴 귀여운 개모형 옆에는 하얀 피부로 된 조그만 역명 간판이 달려있는데, 동
쪽 역은 무려 개성(開城), 서쪽 역은 해남(海南)으로 나와있다. 여기서 개성과 해남이 그렇게
나 가까웠던가? 갑자기 나의 둔한 돌머리에 혼돈이 온다. 해남은 비록 철도는 들어가지 않으
나 시외직행버스와 승용차로 언제든 갈 수 있지만 개성은 분명 우리 영역임에도 이상하게 70
년 이상 금지된 땅으로 봉해져 전혀 갈 수가 없다. 거리는 해남보다 개성이 훨씬 가까움에도
말이다. (항동철길에서 해남까지 400여km, 개성은 체감 거리가 달나라보다 훨씬 멈)

* 항동철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2동, 항동


▲  아무것도 정차하지 않는 간이역, 항동철길역 주변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오류동 방향)
철길을 닦고자 산세가 낮은 이곳을 손질했다. (나쁘게 말하면 천왕산 북쪽
산줄기를 철길로 끊어버림) 철길 좌우로 뚜벅이길이 닦여져 있는데
뚜벅이길로 가던 철길로 가던 그건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된다.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푸른수목원 방향)
항동철길을 끝으로 늦가을 초입에 벌인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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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봄꽃 나들이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조선 최초의 능, 정릉



' 정릉 봄맞이 나들이 '

정릉
▲  정릉

정릉 금천교 정릉 숲길

▲  정릉 금천교

▲  정릉 숲길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어루만지던 4월의 한복판에 조선 최
초의 능인 정릉을 찾았다.
서울 장안에는 도봉산(道峯山)부터 호암산(虎巖山)에 이르기까지 봄꽃 명소들이 무지하
게 많지만 역사와 자연이 오지게 어우러진 조선시대 왕릉(정릉, 의릉, 태강릉, 선정릉,
헌인릉 등)도 봄꽃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다. 하여 간만에 왕릉 봄 산책이
나 즐길 겸, 적당한 곳을 찾다가 집에서 가까운 정릉으로 길을 잡았다. 정릉은 이미 3~
4번 인연을 지었으나 다들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  정릉(貞陵) 입문

▲  정릉 세계문화유산 표석 앞 갈림길

정릉과의 첫 인연은 중학생 시절인 1990년대 초반이다. 지금이야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인터
넷 지도가 아주 훌륭하여 지독한 길치가 아닌 이상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정릉 이정표가 있음) 그때는 이정표가 너무 부실하여 찾기가 어려웠
다.
하여 2번에 시도 끝에 정릉동 골짜기에서 태연하게 숨바꼭질을 즐기던 정릉을 찾아내 술래 신
세를 면하게 되었다. 그 시절 정릉은 지금처럼 입장료를 받던 공개 구역이었으나 인지도가 낮
아 탐방객은 별로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정릉의 존재감은 슬슬 커져갔고 탐방객도 정
비례로 늘어갔다.

정릉 정문에 이르니 매표소가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정릉이 성북구 영역이라
성북구 주민은 50%를 깎아주나 나는 도봉구 사람이라 그 혜택을 전혀 받을 수가 없어 입장료
전액을 지불하여 유료의 공간, 정릉으로 들어섰다. (도봉구는 1973년 7월 성북구에서 분리되
었음)


▲  정릉 재실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2호

정릉으로 들어서니 왼쪽(남쪽)으로 재실과 보호수로 지정된 큰 느티나무가 눈짓을 보낸다. 정
릉에는 서울의 다른 조선 왕릉에는 없는 2가지가 있어 눈길을 끄는데, 바로 보호수 나무와 약
수터이다. (약수터는 지금 사라지고 없음)
보호수는 2그루가 있는데, 재실 앞 느티나무는 나이 약 380년, 나무 둘레 360cm, 높이 21m로
정릉에 있는 나무 중 가장 크고 늙었다. 4~5월에 황록색 꽃이 핀다고 하나 봄 햇살이 정릉 구
석구석을 넓게 어루만지는 4월의 한복판임에도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꽃은커녕 잎
도 없다. 이미 다른 나무와 꽃들은 봄의 향연에 한참인데 말이다.


▲  정릉 재실(齋室)의 행랑 외곽 모습

재실은 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陵參奉)의 생활공간이자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 좌우로 창고와 하인 방, 마구간, 집사방(執事房)을 갖춘 행랑(行廊)이
나오고, 안쪽 기와문을 들어서면 제사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재실 본채가 있다.

정릉 재실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12년에 발굴조사를 벌여 2014년에
복원했다. 그러다 보니 고색은 채 여물지 못했다. 비록 복원은 되었으나 딱히 놀려두기도 뭐
하여 다례체험 등 여러 전통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대문과 다양한 공간이 있는 행랑

▲  재실과 제기고로 인도하는
안쪽 기와문

▲  2칸짜리 제기고(祭器庫)
제사도구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  재실 본채
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능을 지키는 능참봉의 거처이자
영(令)이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  관리사무소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7호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도 앞서 보호수처럼 벌거숭이 상태이다. 추정 나이 200
년, 높이 17m, 나무 둘레 320cm로 정릉에서 2번째로 크고 늙은 나무인데, 계절 감각이 둔해진
것인지 아니면 게을러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여 겨울에서 깨어나 봄의 향연에 동참했으면 좋
겠다. (느티나무는 5월 초까지도 벌거숭이인 경우가 있음)


▲  금천교(錦川橋)

정릉 중심부로 들어서려면 계곡에 걸린 금천교를 건너야 된다. (금천교가 아니더라고 계곡은
꼭 건너야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음)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聖域)의 경계 역할 및 능으로 인도하는 돌다리로 현종(재위 1659~1674)
시절 정릉을 손질하면서 지어졌다. 다리 좌우 끝에 석축을 다지고 그 사이에 묵직하게 돌기둥
을 세운 다음 길쭉한 통돌을 걸쳐 놓은 단출한 형태로 다리 피부에는 세월이 입혀놓은 고색의
때가 자욱하여 고풍스런 멋을 한층 올려준다.


▲  금천교 주변 계곡

조선 왕릉과 궁궐에는 금천의 역할을 하는 물줄기가 꼭 있기 마련이다. 정릉은 북악산길(북악
스카이웨이) 북쪽에서 발원한 계곡이 그 역할을 담당하여 정릉을 촉촉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정릉 중심부 북쪽을 거쳐 바깥으로 흐른다. 허나 정릉 동쪽에 빼곡히 들어찬 주택가로 능 정
문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한 채, 정릉천으로 흘러가며, 북한산(삼각산) 정릉계곡에서 나온 정
릉천 또한 정릉2동부터 어둠의 경로로 흐르다가 종암동(鍾岩洞)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정릉 계곡은 크기는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적당히 섞여있고 흙이 많아서 어린이들이 놀기에는
아주 좋다. 허나 문화유산인 정릉 내부이니 요란하게 노는 행위는 절대 삼가하기 바라며, 손
만 담구는 정도에서 멈춰야 될 것이다.

▲  붉은 피부의 홍살문

▲  홍살문 옆에 닦여진 배위(拜位)

금천교를 건너면 길은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인다. (정면 길로 가면 관리사무소) 그 길을 들어
서면 쌀쌀맞게 생긴 붉은색 홍살문이 나타나 나그네로 하여금 절대 엄숙을 강조한다. 그는 왕
릉과 관아, 향교, 왕족과 사대부의 사당과 묘역 등 권력과 관련된 곳에 세우는 비싼 존재로
그를 들어서면 비로소 정릉 중심부에 이르게 된다.

홍살문 옆에는 돌로 다져진 네모난 배위<판위(板位)>가 누워있다. 이곳은 정릉을 찾은 제왕이
능 주인에게 절을 하는 곳으로 보통 4번 절을 했으며, 이를 국궁사배(鞠躬四拜)라고 한다. 현
재는 정릉 제향일에만 반짝 쓰이고 있어 꽤 한가해졌다.

그럼 여기서 잠시 정릉과 이곳 주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정릉 정자각 주변 (수라간, 수복방 등)

정릉은 서울의 영원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으로 정릉2동 서쪽 골짜기에 넓
게 누워있다. 능역(陵域) 동쪽과 남쪽은 정릉2동 주택가와 맞닿아있고, 북쪽은 정릉의 원찰(
願刹)이었던 봉국사(奉國寺, ☞ 관련글 보기) 남쪽에 이르며, 서쪽은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
이)과 정릉3동에 닿는다.
주택가와 매우 가깝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깊은 산골로 짙은 숲을 지니고 있으며 조촐한 계곡
과 그림 같은 숲길, 그리고 늙은 보호수도 2그루를 지녔다.

정릉의 주인은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1396)이다. 고종(高宗)
이 1897년 황제 위에 오르면서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높여졌으며, 태조는 태조고황제(太
祖高皇后)로 올려졌다. (정릉 안내문에는 '신덕고황후'라 나와있음)

신덕왕후 강씨(이하 강씨)는 곡산강씨(또는 신천강씨) 집안으로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
康允成)의 딸이다. 강씨의 숙부인 강윤충(康允忠)은 이성계의 큰아버지인 이자흥(李子興)의
사위로 두 집안은 제법 가까웠는데, 드넓은 동북면(東北面, 함경도와 길림성, 연해주 지역)
지역을 장악했던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조정에 출사하면서 강씨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때 강씨는 이성계보다 약 20살 정도 연하였다고 한다. (에구 부러워라~~)

이성계와 강씨의 첫 만남 설화는 꽤 유명한데 내용은 이렇다.
어느 평화로운 날, 사냥에 나섰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아리따
운 여인이 있었는데(아마 빨래를 했던 모양임) 그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하니 여인이 바가지
에 물을 담아 버들잎 하나를 물 위에 띄워주었다. 이성계는 이상하여 이유를 물으니
'급하게 마시면 탈이 날까봐 천천히 드시라고 그랬습니다'
답을 했다.
그 말에 이성계는 무한 감동을 먹었고, 마침 여인의 미모도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던 터
라 그녀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이다.

허나 로맨틱한 설화와 달리 강윤성은 이성계의 미래를 크게 보고 딸과의 혼인을 적극 추진했
고, 이성계 또한 개경(開京)에 마땅한 기반이 없는 상태라 사돈관계에 있고 개경 귀족들과 두
루 가까웠던 강씨 일가의 힘이 필요했다. 즉 두 집안과의 결속 강화와 미래에 대한 투자 차원
에서 혼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계는 개경에 있을 때 강씨 집에 머물렀다. 그가 요동반도에 있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
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강씨는 포천 철현(鐵峴)에 있는 전장(田莊)에 머물렀고, 만약을
대비해 동북면과 가까운 이천(伊川)의 한충(韓忠)집으로 거처를 옮겨 상황을 지켜보았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 크게 다치자 정몽주(鄭夢周)는 이
때다 싶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강씨는 이방원(李芳遠)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
으로 오게 했으며, 이방원이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살해하자
이성계가 크게 노발대발한 것을 강씨가 무마시켰다. 이렇듯 강씨는 이성계를 힘껏 도와 조선
개국을 이끌어냈으며, 이성계의 첫 부인인 한씨가 조선 건국 1년을 앞두고 세상을 뜨자 조선
의 첫 왕후<현비(顯妃)>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  비각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陵寢)

강씨는 태조와의 사이에서 경순공주(敬順公主, ?~1407)와 무안대군 이방번(撫安大君 李芳蕃,
1381~1398), 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李芳碩, 1382~1398)을 두었다. 그녀는 권력욕이 너무
커서 태조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과 연합해 태조를 설득하여 장남도 아닌 막내 이방석을
왕세자(王世子)에 앉히게 했다.
이렇게 후처 소생의 차남을 세자로 책봉하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제대로 뚜껑이 열렸다. 하
여 그들은 이방원<정안대군(靖安大君)>을 중심으로 강씨와 정도전 세력과 팽팽히 대립하게 된
다.

1396년 음력 8월 13일 강씨는 40대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크게 애통하여 도성
한복판에 능을 쓰게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 존호(尊號)를 신덕이라 했으며, 개국공신들의
건의로 공신수능제(功臣守陵制)를 받아들여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능 지킴이를 맡겼다.
또한 정릉 곁에 원찰인 흥천사(興天寺)를 크게 지어 매일 같이 찾아가 명복을 빌었으며, 흥천
사의 아침 종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아침 수라를 들었다. 그때 정릉은 덕수궁(경운궁) 북쪽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지며, 정릉 때문에 정동(貞洞)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1398년 정도전이 크게 방심한 틈을 노려서 이방간(李芳幹)과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다. 궁궐을
접수한 그들은 이복 동생인 이방번, 이방석 형제와 경순공주의 남편을 처단했고, 형제의 맏이
인 이방과(李芳果, 정종)를 왕위에 올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1차 왕자의 난이다. (경순공
주는 이후 비구니가 되었음)
그리고 1400년 이방간의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이방원은 형 이방과의 왕위를 물려받아 꿈에
그리던 옥좌(玉座)를 차지하게 된다.

이방원은 의붓어머니 강씨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태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크게
정릉을 건드리지 않았으나 1406년 정릉이 너무 넓다는 의견이 있어 정릉 100보 밖까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때 하륜(河崙) 등 권력가들이 너도나도 정릉 숲에서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니 그것이 정릉 수난의 시작이었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바로 이빨을 드러내며, 정릉 탄압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1409년 의정부(議政府)는 왕의 비위를 맞추고자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이 말이 안되며 명
나라 사신이 묵는 숙소와 가까워 도성 밖으로 옮겨야 된다고 하였다. 굳이 그런 것이 아니더
라도 도성 한복판에 능이 넓게 자리한 것도 솔직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태종은 의정부의 갸륵한 뜻을 받아들여 정릉을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곡으로 추방시켰고, 능
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지기 바쁜 광통교(廣通橋)를 돌다리로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동원했다. 이는 단순히 광통교 복구가 아닌 백성들이 정릉 석물을 밟고 지나가게 하
여 강씨를 길이길이 욕보이고자 함이었다. 또한 정자각과 일부 석물을 소환하여 태평관(太平
館, 명나라 사신의 숙소)을 짓는데 썼으며, 봉분을 깎아 무덤임을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석인
(石人)은 생매장시켰다.

능의 제례 또한 폐지되고 봄, 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으며, 서모(庶母)의 기신제(忌
晨祭)의 예에 따라 삼품관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한 후궁으로 격하시켜 후궁의 예로 제를
올리게 하였다. 강씨가 지하에서 크게 통곡을 했는지 능이 파괴되던 날, 폭우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전한다.


▲  수라간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과 소전대(燒錢臺, 밑에 보이는 석물)

태종 사후로도 정릉의 고통은 계속되었고 정릉의 존재는 속세의 뇌리 속에서 거의 잊혀져 갔
다. 겨우 후손들이 살짝살짝 제사를 챙겼을 뿐이다.
그러다가 1581년 강씨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이 선조(宣祖)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
가 엎드리면서
'소인은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國墓)에 봉사(奉
祀)하는 사람들의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 면제시켜 주십시요'
하소연했다. 즉 정릉을
지키고 있으니 군역 면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거의 잊혀졌던 정릉의 존재감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때 삼사(三司)에서는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 정릉을 회복하자는 의견을 올렸으나 수용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계
속 논의를 벌이다가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싹 마무리가 되었다.
송시열은 태종의 잘못된 조치로 정릉이 고통을 당했음을 바로 말하기가 애매해 그 시절 신하
들의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고 돌려 말하며,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있음을 지적하
여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현종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 1669년 태조의 왕후로 인정하여 종묘(宗廟)에 봉안했으며, 순원현
경(順元顯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능을 복구했다.
이때 정릉에서 강씨의 넋도 달랠 겸, 성대하게 제를 지냈는데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려서
사람들은 이를 두고 '강씨의 원한을 씻는 비'라고 하였다.

정릉 석물은 17세기 후반 것들이나 4각형 장명등(長明燈)과 혼유석(魂遊石)을 받치는 고석(鼓
石) 2개, 그리고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는 옛 정릉 것들이다. 즉 14세기 후반 것들로 조선 왕
릉에 설치된 석물 중 가장 늙은 존재들이 된다. 그리고 정자각과 비각 등은 모두 17세기 이후
것들이다.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을 이끌어냈던 강씨, 허나 지나친 권력욕으로 끝내 자식을 잃고, 남편
의 말로를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자신의 묘까지 태웠으니 인생무상, 권력무상이 따로 없
다. 왕후가 되면서 거기서 딱 절제를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게 안되었던 것이다. 물론 한씨
소생의 왕자(이방원, 이방과 등)들이 자신의 소생들을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방원 형제
들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나마 똘똘했던 막내를 세자로 세워 자식들의 불투명한 미래
를 지켜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궁궐은 그만큼 무서운 곳이니 말이다.
허나 강씨와 그의 친자식들은 결국 패배자가 되어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왔으니 역사의 패배자
가 어찌된다는 것을 아주 몸서리치게 보여준다.

정릉은 중구 정동의 지명 유래가 되기도 했지만 이곳 정릉동의 유래도 된다. 그래서 2개의 지
명이 정릉으로 인해 생겨났다.



 

♠  정릉 중심부

▲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박석이 입혀진 향로와 어로가 닦여져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참
도(參道)라고 하는데, 어로는 제왕이 걷는 길이며, 왼쪽에 조금 높은 향로<신도(神道)>는 제
향 때 향과 축문(祝文)을 들고 가는 길이다.
이곳 참도는 중간에서 'ㄱ'자로 90도 꺾이는데, 이는 지형 탓으로 정자각 정면에서 금천까지
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직선으로 홍살문을 두기에는 좀 비좁아 보인다. 하여 나름 융통성
을 발휘한 것이다.


▲  정자각(丁字閣)

참도의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정자각이 있다. 싹둑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丁'처럼 생겨서 정자각이란 쉬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자각은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제왕은 좌측 계단으로 올라가 제사를 치르고 반대쪽 우측 계
단으로 내려갔다. 건물 안에는 제향에 쓰이는 여러 상(床)들이 있는데, 거의 황색 피부를 지
니고 있다. 황색은 황제와 황후를 상징하는 색깔로 고종이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높이면서
제사상의 피부 색깔도 변하였다.

▲  신좌(神坐)
신, 즉 정릉의 주인이 제향 때 머무는
추상적인 자리이다.

▲  관세상(盥洗床)
제관이 손 씻을 물을 올려놓는 상이다.
여기서 관은 대야를 뜻한다.

▲  제물을 올려놓는 상
(정자각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  정자각 좌측 계단
왼쪽 계단은 정릉 주인의 혼과 참배를 온
제왕이, 그리고 오른쪽 계단은 신하와
아랫 사람들이 이용했다.


▲  수복방(守僕房)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측에 수복방과 비각이, 우측에는 수라간이 있다.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근무하는 건물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  정릉 비각
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의 거처이다.

▲  정릉 비석
'대한(大韓) 신덕고황후 정릉'이라 쓰여있다.

     ◀  수복방과 마주보고 있는 수라간
수복방과 비슷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제
향 때 제사 음식을 데우거나 손질하던 곳이다.
터만 아련하게 있던 것을 근래 복원하여 채워
넣었다.

능침 밑부분에 소전대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있다. 소전대란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오
로지 이곳 정릉과 태종의 헌릉(獻陵),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만 있는 희귀한 존재이다. 태
종 이후, 소전대가 사라지고 '예감'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정릉 소전대는 정릉이 이곳으로 추방되면서 같이 왔는데 오랫동안 정릉약수터 주변에 찌그러
져 있던 것을 정릉관리소 김용욱 소장이 발견하여 고증을 통해 이곳에 두었다. 정릉을 옮기는
과정에서 태종의 지시로 능 주변에 두지 않고 고의로 계곡에 처박아둔 것으로 여겨진다.
정릉의 한낱 석물에게까지 화풀이를 한 태종, 그만큼 의붓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컸던 것이며,
정릉이란 존재 자체도 그야말로 눈에 가시와 같았다.


▲  확대해서 바라본 정릉 능침

소나무숲에 감싸인 정릉 능침에는 커다란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 1기, 혼유석, 여러 석호와 석양이 배치되어 있다. 이중 장명등은 고려 양식을 이
은 14세기 후반 것이며,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 2개도 옛 정릉 출신이다.
예전에는 능 옆구리까지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통제구역으로 묶여 능침 자체를 올라갈 수
없다.


▲  정릉 북쪽 산책로에서 만난 넓적한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  봄이 깊어가는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의 젖줄인 계곡(금천)을 따라 그림 같은 산책로가 서쪽으로 이어져 있다. 이 길을 쫓아가
면 정릉 주변을 도는 2.5km의 숲길이 펼쳐지니 정릉 중심부만 살피지 말고 꼭 1바퀴 둘러보기
바란다. 즉 정릉 외곽을 도는 것으로 산책로 안팎이 모두 정릉 능역(陵域)이다.


▲  생태계가 살아있는 정릉 계곡(금천)

▲  봄 속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따뜻한 기운이 소리 없이 내리면서 푸른 잎과 온갖 꽃들이 기지개를 켠다.
그런 봄에 물들고 싶어서 저 속으로 나를 숨기러 간다.



 

♠  정릉 산책로 돌기

▲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 정자각 계곡 건너편)

정릉 숲길은 정릉 중심부와 맞닿은 북쪽 산책로만 평지이고 나머지는 모두 산길이다. 능이 첩
첩한 산골에 묻혀있기 때문에 숲길을 거닐다 보면 자연히 약간의 등산도 하게 된다. 허나 경
사가 그리 각박하지 않고 길이 잘 닦여져 있어서 두 다리만 멀쩡하면 어린이와 노인도 거뜬히
1바퀴 돈다.


▲  정릉 북쪽 산책로 (옛 정릉약수터 주변)

▲  이제는 과거가 되버린 정릉약수터(정심약수터)

정릉 서쪽에는 정릉약수터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약수터까지 갖
추고 있던 정릉에서 특별히 맛볼 수 있는 자연산 수분으로 물이 졸졸 알아서 나오는 약수가
아니라서 직접 챙겨 먹어야 된다. 능 제사에 쓰이는 물은 모두 여기서 가져왔으며, 정릉2동
사람들이 많이 물을 떠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음)


▲  서남쪽으로 꺾이는 정릉 산책로

▲  봄꽃의 마지막 물놀이 현장 (정릉 계곡)
4월 초를 짧게 주름잡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훔쳐갔던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계곡에서 생애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계곡은
저들의 인생을 정리하는 조그만 블랙홀인 모양이다.

▲  정릉 서쪽 숲길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전까지는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  지그재그 율동을 부리는 정릉 서쪽 숲길

▲  동그란 석축에 뿌리를 내린 벚꽃나무 (정릉 서남쪽 숲길)

▲  정릉 서남쪽 숲길 ①

▲  정릉 서남쪽 숲길 ②

정릉 서남쪽 끝에는 서울의 대표 지붕길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이 흐르고 있다. 정릉에
는 북악산길을 향해 2개의 소방문을 내고 있는데 이들은 업무와 비상용 문이라 관람객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하여 둘이 맞닿아 있음에도 철책을 사이에 두고 서로 금지된 땅 보듯 해야
된다. 현재 정릉은 정문으로만 통행이 가능하여 무조건 그곳으로 오가야 되는데, 북악산길도
서울의 주요 꿀명소인만큼 비상용문 하나를 따고 매표소를 두어 서로 왕래가 가능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정릉~북악산길~성북동(길상사, 삼청각, 간송미술관 등)/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부암동/북한산(삼각산)'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나들이/도보 코스가 만들어진다.

서울시청과 성북구청, 문화재청 철밥통들은 거지 같은 탁상행정으로 세금이나 빼먹지 말고 저
런 것들도 적극 검토해 추진해주었으면 좋겠다.


▲  북악산길(오른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을 지나는 차량들의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  북악산길(왼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②
북악산길을 코앞에 두고 입맛만 다셔야 되니 은근히 아쉽기만 하다.
서로를 잇는 것이 천하통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일까?

▲  정릉 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까지 올라온 숲길은 다시 내리막으로 변신한다.

▲  정릉 남쪽 숲길 ②

▲  정릉 남쪽 숲길 ③

▲  정릉 능침 바로 윗쪽 쉼터

정릉 남쪽 숲길은 중간에 3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서쪽)으로 가면 앞서 서쪽 숲길로 빠
지며,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정릉 정문, 그리고 직진(북쪽)하면 위와 같은 쉼터가 나온다.
허나 그 쉼터는 막다른 곳으로 다시 갈림길로 나와야 된다. 허나 쉼터 주변으로 철책이 없어
서 자칫 숲으로 막 내려갈 수도 있는데 여기서 북쪽 숲으로 내려가면 바로 정릉 능침이다. 능
침 주변은 금지된 구역이니 굶주린 공비들처럼 숲을 막 헤집고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냥 쉼터
에서 얌전히 쉬다가 갈림길로 그냥 사라져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정릉 남쪽 숲길에서 서쪽 숲길을 잇는 사잇길

갈림길에서 바로 정문으로 내려가기는 다소 아쉬워서 서쪽 숲길로 향하는 사잇길로 우회해서
갔다. 정릉 북쪽 산책로를 거쳐 정릉 정문을 나오면서 2시간에 걸쳐 아주 여유롭게 진행된 정
릉 봄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정릉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 87-16 (아리랑로 19길 116, ☎ 02-914-5133)
* 정릉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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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봄맞이 나들이 <정읍피향정, 함벽루, 무성서원, 성황산, 한정, 송정, 동진강>

정읍 피향정, 무성서원


 
' 정읍 봄맞이 나들이 (피향정, 무성서원) '

피향정 하연지

▲  피향정 하연지

무성서원 태산사 칠보 성황산 숲길

▲  무성서원 태산사

▲  칠보 성황산 숲길

 


 

차디찬 겨울 제국과 봄의 마지막 경계선인 3월의 한복판에 간만에 전북 정읍(井邑)을 찾
았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정읍으로 가는 일
반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정읍까지 들어가지 않고 그 이전인 태인(泰仁)에서 내렸다.
태인면과 칠보면의 여러 미답처를 그날의 메뉴로 정했는데, 태인터미널 뒤쪽으로 이동하
니 피향정이 하연지란 너른 못을 내밀며 마중을 나온다.
(서울에서 태인 경유 정읍으로 가는 일반고속버스가 1일 3회 운행함)



 

♠  호남 제일의 정자로 오랫동안 칭송을 받았던
피향정(披香亭) - 보물 289호

▲  서쪽에서 바라본 피향정

태인면 중심지(태창리)에 위치한 태인터미널 뒤쪽에는 아침 햇살을 머금은 피향정과 하연지(
태창지)가 나란히 자리해 단아하고 고즈넉한 모습을 풍기고 있다.
예로부터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으로 명성이 높았던 피향정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
붕 정자이다. 신라 말에 그 유명한 최치원(崔致遠)이 세웠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는 헌안왕(
憲安王) 때 태산군수(泰山郡守, 태산은 태인의 옛 이름이라고 함)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넉
넉히 베풀었다. 허나 그가 세운 것도 확실치가 않으며,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조선 광해군(光海君) 시절, 태인현감인 이지굉(李志宏)이 중건했으며, 현종 때 현감 박숭고(
朴崇古)가 증축했고, 1716년 현감 유근(柳近)이 전라감사와 호조(戶曹)의 도움을 받아 변산(
邊山)에서 나무를 베어와 현재의 규모로 중건했다. 그래서 작은 정자였던 피향정이 누각 수준
으로 커진 것이다. 허나 그에 걸맞게 루(樓)를 칭하지 않고 계속 정(亭)을 고집하고 있어 칭
호와 겉모습이 완전 따로 논다. (1974년에 단청을 새로 했음)

땅바닥에 낮게 석축을 다지고 1.42m 높이의 화강암 돌기둥 28개를 세운 다음, 그 위에 누마루
건물을 올렸는데, 정면과 뒷면 가운데 칸에 통행 편의를 위해 돌계단을 늘어뜨렸으며, 누각에
어울리도록 건물 4면이 모두 뚫려있다. 난간은 짧은 기둥으로 촘촘히 둘렀고, 건물 천장은 지
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나 천장 일부를 가리고자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 천장으로
꾸몄으며, 이곳에 퐁당퐁당 빠진 현감과 관리, 선비들이 남긴 글을 머금은 현판이 가득 걸려
있어 호남제일의 정자, 피향정의 오랜 명성을 귀띔해준다.

조선 중기 목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누각 앞뒤로 연꽃이 심어진 상연지(上蓮池)
와 하연지(下蓮池)가 있어 피향정을 아름답게 수식했으나 왜정 때 상연지가 강제 매립되면서
하연지만 남아있다. 연못에 연꽃이 그윽하게 피어나면 그 향기가 주위에 가득했는데, 거기서
피향정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 피향정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2-2 (태산로 2951)


▲  동쪽에서 바라본 피향정과 돌계단

▲  누각 바깥에 걸린 피향정 현판의 위엄

▲  누각 내부에 숨어있는 또 다른
피향정 현판

▲  누각 기능에 충실하게 지어진
피향정 내부

▲  검은 피부의 피향정 중수기


▲  피향정 동쪽에 길게 늘어선 비석들

이들 비석은 옛 태인 고을 현감과 전라도관찰사의 선정비(善政碑) 및 불망비(不忘碑)로 주변
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집합시켰다. 모두 19기로 지붕돌을 지닌 비석과 대머리 비석,
그리고 장대한 세월에게 정통으로 맞아 몸통이 날라간 가련한 비석들까지 다양한 모습과 사연
들을 간직하고 있는데, 선정비를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저 비석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아마도 상당수 비석들은 고개를 떨구겠지.


▲  피향정 서쪽에 닦여진 하연지(태창지)
하연지는 피향정의 상큼한 꿀단지로 연꽃의 보금자리이다. 연못 복판에
동그란 섬을 띄워놓아 운치를 극대화시켰다.

▲  육지와 하연지 섬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돌다리와
섬의 주인장인 함벽루(涵碧樓)


피향정 서쪽에는 누렇게 뜬 잡초 같은 것으로 가득한 너른 공간이 있다. 바로 하연지(태창지)
이다. 누런 잡초들은 모두 연꽃으로 지금은 비록 우울한 모습들을 하고 있지만 여름이 되면
연못 수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통 연꽃밭이 되어버린다. 원래 상연지와 하연지 2개의 연
못이 있어 피향정을 앞다투어 수식했으나 고약한 감성의 왜정이 상연지를 밀어버리면서 하연
지만 남게 되었다.

하연지 복판(정확히는 연못 북부)에는 동그란 작은 섬을 띄워놓았는데, 바로 그 섬에 함벽루
가 둥지를 틀어 섬의 주인 노릇을 한다. 그는 20세기에 지어진 6각형 정자로 1971년에 중수했
으며, 생김새는 완전한 정자(亭子)임에도 그 모습과 다르게 누각을 칭하고 있다. 하여 함벽루
보다는 '함벽정'이 맞다고 본다. 피향정은 나중에 증축되어 누각처럼 되었으나 여전히 '정'을
고집하고 있고, 함벽루는 정자 스타일임에도 누각을 칭하고 있으니 이곳만큼은 모든 것을 반
대로 보는 모양이다.
육지와 함벽루가 있는 섬은 돌다리가 짧게 이어져 있으며, 함벽루 내부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연꽃이 한참인 한여름에 와야 하연지의 진풍경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인데, 엉뚱하게도 3
월에 인연을 지어 연못 풍경이 참 황량하기가 그지 없다. 피향정에서 즐기는 연꽃의 향연은
정읍9경 중 제6경으로 꼽히며, 전주(全州) 덕진공원과 더불어 전북 제일로 찬양을 받는다.


▲  지붕돌을 지닌 함벽루 중수기념비(오른쪽 비석)

1971년에 함벽루를 중수한 기념으로 그해 8월에 장만한 비석이다. 그들 좌우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훨씬 작은 석인(石人, 동자석으로 여겨짐) 2기가 홀(忽)을 들고 서 있는데, 세월
을 너무 좋지 않게 탔는지 머리를 비롯한 윗도리가 완전히 아작이 나버렸다. 저들은 부근에서
수습된 것으로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  6각형 정자 모습의 함벽루
'함벽루'라 쓰고 '함벽정'이라 읽으면 딱 맞는다.

▲  서쪽에서 바라본 하연지와 함벽루 (비수기에 잠긴 하연지)

▲  태인이로비(泰仁移路碑)

하연지 서쪽 끝에는 '태인이로비'란 키다리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871년 태인현감 김인근(
金寅根)이 길을 이곳으로 이설하고 세운 것으로 높이 210cm, 두께 45cm인데, 길을 옮긴 것을
기리고자 세운 옛 비석은 여기서 처음 본다.


▲  남쪽에서 바라본 하연지와 함벽루 섬 (오른쪽에 돌다리가 있음)

피향정은 이미 대학생 시절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다. 그때는 겨울이 시작되던 11월 말이었지.
이번에는 겨울과 봄의 마지막 경계선에 왔으나 황량한 풍경은 11월 말과 비슷하다. 어쩌면 그
때와 비슷한 상황에 왔을까? 다음에 또 이곳과 인연을 짓는다면 무조건 여름에 찾고 싶다. 그
래야 피향정의 자랑인 연꽃의 향연을 제대로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피향정 다음 답사지는 칠보(七寶)에 있는 무성서원이다. 태인에서 칠보까지는 약 8km 거리로
가까운 편이나 정작 시내버스는 하루에 7~8회가 고작이다. 게다가 시간도 맞지 않아서 1시간
이나 기다려야 했지. 하여 그 시간을 때우고자 달이 지구 주위를 돌 듯 하연지를 2바퀴나 돌
았다. (하연지 둘레가 약 480m 정도임)
그렇게 돌고도 시간이 남아 터미널에서 억지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정읍시내버스 91번(신태
인터미널↔칠보) 소형 차량(카운티)이 나타나 반갑게 입을 벌린다.
버스는 겨우 나 하나만을 담고 칠보로 이동했는데, 칠보면 중심지(시산리)까지 15분 정도 걸
렸다. 신태인에서 태인, 칠보 구간은 이동 수요가 좀 있는 줄 알았더만 평일 학생 수요를 빼
면 지지리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소형 차량으로 가뭄에 콩나는 수준으로 다니는 것이다.

전북의 서남부를 이루고 있는 정읍시는 태인면과 북면까지는 평지(평야)이고 동부 지역인 칠
보, 산외, 산내 지역은 첩첩한 산골이다. 즉 태인을 경계로 정읍은 평지와 산악 지대,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  최치원을 기리는 오래된 서원, 무성서원(武城書院)
- 사적 166호

▲  무성서원의 외경 (왼쪽 2층 누각이 현가루)

칠보면 중심지(시산리)에서 바로 남쪽에 흐르는 동진강(東津江)을 건너면 무성리이다. 무성리
를 이루고 있는 마을 중 무성서원을 간직한 곳이 바로 원촌(원촌마을)으로 그곳은 무성서원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오래된 마을이다. 하여 양반과 선비들이 지어놓은 정자(10개가 있음)와
한옥, 제각(祭閣) 등이 많이 전하고 있으며, 서원도 무성서원 외에 용계서원도 지니고 있다.
게다가 향토문화사료관 등의 문화공간도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며,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歌
詞)로 유명한 상춘곡(賞春曲)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유서가 깊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내 침침한 두 눈에는 오로지 무성서원 밖에는 보이지
않아 무성서원과 서원 뒷산인 성황산에 몇몇 명소만 둘러보고 철수했다.

원촌마을 안쪽에 자리한 무성서원은 전북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신라 후기에 최치원이
태산군수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는데, 이에 감동을 먹은 지역 사람들이 그의 생사당(生祠堂)
을 세워 태산사(泰山祠)라 했다. 생사당이란 살아있는 사람에게 제를 지내는 사당으로 그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최치원이 태수로 거쳐갔던 태산고을이 과연 이곳
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음)

그렇게 시작된 태산사는 고려 말에 철거되어 사라졌으며, 1483년에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
학당(鄕學堂)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그곳이 현재 무성서원 자리이다.
1549년 신잠(申潛)의 생사당을 경내에 추가했으며, 1630년에는 정극인, 안세림(安世琳), 정언
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이 추가되었고, 1675년에는 김관(金灌)이 추가되어 총 7명의 사당
이 되었다. 최치원의 생사당으로 시작된 태산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에 유명 인사들까지
기리는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1696년 태산사와 신잠의 사당을 통합했고, 조정에 상주하여 '무성(武城)'이란 사액을 받아 무
성서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의 서슬 퍼런 서원 정리 사업 때도 살아남았으며, 면
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이 1906년 6월 토왜(討倭)를 외치며 의병을 조직했던 병오창의(丙午倡
義)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원을 이루고 있는 건물은 사당(태산사)과 현가루, 명륜당(강당), 동재(강수재), 비각 등이
있으며, 1486년 이후 제작된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院規) 등의 귀중한 서원 자료가 보
존되어 있다.

* 무성서원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원촌1길 44-12)


▲  뾰족한 붉은 살을 지닌 무성서원 홍살문
차디찬 인상의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 관리사무소와 주차장이 나오고 바로
서원 정문인 현가루가 마중을 한다.


▲  맞배지붕 비각과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 오른쪽 비석)

무성서원하면 대표적인 사건이 '병오창의'가 아닐까 싶다.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에 분
개한 최익현은 1906년(병오년) 2월 제자인 임병찬(林秉瓚)과 정읍으로 넘어와 창의를 준비했
다. 하여 그해 6월 4일 이곳 무성서원에서 유생들에게 강회(講會)를 펼치며 토왜(討倭)에 동
참할 것을 호소하여 의병을 조직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병오창의이다.
그 소식을 들은 왜군은 조선인 진위대를 파견해 시비를 걸자 최익현은 동족간의 싸움은 절대
로 안됀다며 의병을 해산했고 핵심 인물 13명이 너무 쉽게 오라를 받으면서 그의 창의는 허무
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최익현의 병오창의를 기리고자 정읍 지역 유림들이 1992년 12월 10일 병오창의기적비를
세웠다.


▲  강수재(講修齋)

병오창의기적비를 바라보고 있는 강수재는 무성서원의 동재(東齋)로 유생들의 기숙 공간이다.
원래 고사(庫舍)였던 것을 무성서원 간판을 내건 이후, 강수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서재(西
齋)인 흥학재(興學齋)도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다.
현 건물은 1887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온돌방과 마루를 갖추고 있다.


▲  서원의 정문인 현가루(絃歌樓)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정문 역할 외에도 시를 짓고
음악 등의 여흥을 즐기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누각의 이름인 '현가'는
거문고 등의 악기와 노래를 뜻함)

◀  무성서원의 역사를 더욱 살찌우고
있는 현가루 앞 비석들

          ◀  신용희(申瑢熙) 불망비
통정대부(通政大夫) 신용희의 공적을 기리고자
1925년에 세웠다. (서원 중수에 공적이 있음)
무성서원에는 맞배지붕 비각 4개, 비석 15기가
전하고 있어 서원의 내력을 풍성하게 돕고 있
는데, 이들 대부분은 서원 중수를 돕거나 서원
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태인현감 등의 관리와
양반사대부의 공덕비이다. (불망비도 공덕비의
일원임)


▲  무성서원 강당<명륜당(明倫堂)>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으로 공부를 하거나 시국을 논의하던 학업
공간이다. 1825년 화재를 만나 1828년에 중건했으며, 마루가 3칸, 방이 2칸 규모로 더울 때는
마루에서 교육을 했고, 추울 때는 마루 좌우에 있는 온돌방에서 교육을 했다.


▲  비각에 갇혀있는 서호순(徐灝淳) 불망비
강당(명륜당) 재건을 도운 태인현감 서호순의 공을 기리고자 1849년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23m, 폭 0.36m이다.

▲  서원 뒷쪽에 높이 자라나 1급 그늘을 선사하는 늙은 나무들
(오른쪽에 보이는 지붕은 태산사)

▲  태산사로 인도하는 내삼문(內三門)
태극마크가 그려진 가운데 문은 제향일에만 열린다. (제왕 등의 아주 높은
사람이나 사당 주인공의 혼령만 이용할 수 있는 특별한 문)

▲  무성서원의 모태이자 상징, 태산사(泰山祠)

무성서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태산사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맞배지
붕 집으로 최치원과 신잠을 비롯한 7명이 봉안되어 있는데, 기존 태산사가 고려 말에 파괴되
자 1483년 현 자리에 중건했다. 현 건물은 1844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문에는 태극마크가 문짝 하나당 2개씩 앙증맞게 그려져 있는데, 제향일을 제외하면 늘 굳게
닫혀있어 내부 관람은 어렵다. 제향은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과 8월 중정일 등 1년에 2번
열렸으나 지금은 2월 중정일에만 지낸다.


▲  서쪽에서 바라본 태산사



 

♠  성황산(城隍山)에서 만난 소소한 명소들

▲  필양사(泌陽祠)

무성서원은 오랜 명성에 비해 조촐한 규모라 관람이 생각 외로 일찍 마무리가 되었다. 피향정
에 비해 대단한 시간 도둑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은 약 13시, 무성서원 이후의 정처(定處)를 딱히 정해두지 않아서 어디를 갈까 궁리
하며 원촌마을을 거닐고 있으니 맞배지붕 사당이 잠깐 보고 가라며 애타게 손짓을 보낸다. 고
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무슨 물건인가 살펴보니 춘우정 김영상(春雨亭 金
永相, 1836~1911)의 사당인 필양사이다.

김영상은 도강김씨 집안으로 정읍시 정우면 산북리에서 태어났다. 16살에 선조들이 살던 이곳
원촌으로 이사를 했으며, 유학을 익히고 지역의 여러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 터지자 의병활동에 참여했고 최익현의 병오창의에도 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1910년 이후 왜정은 이 땅의 선비와 사대부(士大夫)를 회유하고자 돈과 작위(爵位)를 마구 뿌
렸는데, 그에게도 돈의 유혹이 뿌려졌다. 허나 그는 이를 거절하며 왜정이 내민 사령서(辭令
書)에 적힌 자신의 이름 3자까지 찢어버렸다. 이에 뚜껑이 뒤집힌 속 좁은 왜군은 불경죄(不
敬罪)를 물어 군산감옥으로 잡아갔다.
군산으로 이송 도중, 만경강(萬頃江) 사챙이 나루터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을 시도했으나
눈치 없는 왜군이 이를 구출해 실패했으며, 군산감옥에 투옥되자 단식에 들어가 겨우 8일만인
1911년 5월 9일 10시경, 7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그에게 독립유공 대통령 포상을 올려 그의 충절을 기렸으며, 1991년 8
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가로 추서되었다.
필양사는 지역 유림들이 1945년에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국가
보훈부 현충시설(관리번호 51-1-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3년 5월에 수해로 지붕이 무너
지자 복구했다. 그리고 2010년 김영상 순절 100주년을 맞이해 필양사 앞에 '애국지사 춘우정
김영상 선생 순국추모비'를 세웠으며, 사당 뒷쪽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여 경건한 분위기를 자
아낸다.

필양사를 보고 다시 길을 재촉하니 원촌마을의 뒷동산인 성황산(城隍山)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마을과 맞닿은 산 동쪽 자락에는 원촌마을 선비와 양반들이 조선 후기
와 20세기에 뿌려놓은 정자와 제각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시간도 아직 널널하고 딱히 정처도
정하지 못해 그 유혹에 푹 빠져보기로 했다.
기왕 산에 두 발을 들였으니 비록 높이는 낮지만 그 정상에 올라 천하를 한번 굽어봐야 되겠
지. 하여 정상으로 발을 움직였으나 대자연의 괴롭힘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나무들이
계속해서 길을 막는다. 몇 번을 넘었으나 이제는 더 큰 나무가 드러누워 길을 가로막는다. 얼
핏 보면 큰 태풍이 얼마 전에 다녀간 듯 보이나 이때는 태풍과 관련이 없는 3월이다. 아무래
도 작년 여름부터 쓰러진 나무들을 정읍시청 철밥통들이 제대로 치우지 않고 방치한 듯 싶다.
쓰러진 나무로 길이 엉망진창이라 계속 오르는 것은 무리가 있고 올라갈 기분도 급 저하되어
정상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산자락에 깃든 여러 정자와 기와집을 둘러보았다.


▲  한정(閒亭) - 정읍시 향토유적 1호

이름이 달랑 1자인 한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조선 중종(中宗) 시절 한
정 김약회(閒亭 金若晦)가 사화(士禍)로 시끄러운 조정이 싫어서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것으
로 자신의 호를 따서 '한정'이라 했다. 여기서 한(閒)은 한가함과 고요함을 뜻하는데, 그 이
름 그대로 주변이 고요 속에 잠겨있어 내 발자국 소리, 사진 소리가 미안할 정도이다.

김약회가 세상을 떠난 이후 전라도 유림들이 모여 학문을 나누던 현장으로 쓰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파괴되어 사라졌으며, 320여 년이 지난 1920년에 후손 김환정이 재건했다. 그러
니까 현재 한정은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1칸씩 딸려있으며, 전면과 좌우로 툇마루를 갖춘 전형적인 누정
(樓亭) 건축물이다. 


▲  시산사로 인도하는 계단길

▲  시산사(侍山祠)

이곳은 무성서원에서 병오창의를 일으킨 최익현의 사당으로 1907년에 세워졌다. 첫 이름은 태
산사(台山祠)로 왜정의 태클로 철거되었으며, 1975년에 다시 세워 시산사라 하였다. 이때 국
헌 김기술(菊軒 金箕述, 1849~1929)과 화개헌 김직술(和介軒 金直述)이 추가로 배향되었는데,
김직술은 최익현과 함께 병오창의를 일으킨 인물이다.


▲  송정(松亭)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33호

소나무 정자를 뜻하는 송정은 앞서 '한정'처럼 이름이 달랑 1글자이다. 1글자의 이름을 지닌
정자나 누각이 이 땅에 흔치가 않은데, 이곳 성황산에는 무려 2개 이상이나 있다. 아마도 이
곳에는 단순하면서도 무언가 강렬한 의미의 1글자를 선호했던 양반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곳은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 사건을 비롯하여 광해군의 정치에 쓸데없이 불만을 품은 지
역 선비들이 낙향하여 시를 읊으며 팔자 좋게 놀던 곳이다. 세상에서는 그들을 7광(狂)과 10
현(賢)이라 불렀는데, 7광은 김대림(金大林), 김응빈(金應賓), 김감(金勘), 송치중(宋致中),
송민고(宋民古), 이상형(李尙馨), 이탁(李鐸)이며, 10현은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
탁을 포함해 김관(金灌), 김정(金鼎), 김급(金汲), 김우직(金友直), 양몽우(梁夢禹)이다.

정자는 한복판에 온돌방이 있고, 마루가 방을 둘러싼 구조로 부근 숲속에 10현이 봉안된 영모
당(永慕堂)이 있다. 영모당은 1898년에 지어진 것으로 송정영당(影堂)이라 불리기도 한다.

* 송정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310 (원촌1길 12-3)

▲  파란 현판에 도도하게 쓰인
송정 두 글자의 위엄

▲  산 밑에 있는 후송정(後松亭)


후송정은 송정 밑 바위에 자리해 있다. 화개헌 김직술이 쓰러지기 직전인 송정을 대신하고자
10현의 후손 42명의 지원을 받아 1899년에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송정의 10현을 추모하는 뜻
에서 십송정(十松亭)이라 했으나 1985년 현재의 정자를 지으면서 후송정으로 이름을 갈았다.

정자의 이름인 후송은 논어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짐을 안다)'의 의미로 절개가 높은 선비의 고결한 뜻을 뜻한
다. 예전에는 정자 밑으로 개울이 흘렀으나 지금은 길이 들어서 예전과 풍경이 다소 달라졌다.


▲  산외면과 칠보면, 태인면의 산하를 두루 적시며 서해로
흘러가는 동진강


후송정을 끝으로 무성서원 후식용으로 둘러본 성황산 더듬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들 외에도
안가본 제각과 정자가 여럿 있으나 썩 내키지가 않아 적당히 둘러보고 나왔다. 그래도 한정,
시산사, 필양사, 송정, 후송정, 영모당(사진은 없음)을 둘러봤으나 거의 70% 이상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원촌마을을 뒤로 하며 서해를 향해 흘러가는 동진강을 건너 칠보면 중심지(시산리)로 나왔다.
여기서 정읍시내버스 91번을 타고 신태인읍으로 나와서 신태인역으로 이동하니 11시 이후부터
잔뜩 인상을 쓰던 하늘이 기어코 빗방울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오후 늦게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우산을 준비해 갔으나 비가 생각 외로 꽤 길게 내렸다. (저녁 늦게까지) 시간도 이제
15시 정도인데 벌써 날씨가 이러하니 어디로 가야되나 그야말로 갈팡질팡에 빠져버렸다.

신태인역에 이르니 마침 서울 용산행 무궁화호 열차가 막 기적소리를 울리며 들어온다. 콩을
볶듯 급히 표를 사들고 열차에 올랐는데, 좌석이 모두 매진되어 오랜만에 입석으로 갔다. 그
를 타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을 하면서 비가 그치길 염원했으나 비는 나를 졸래졸래 따라와 가
는 곳마다 비를 뿌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  내장산(內藏山)에서 발원하여 칠보에서 동진강과
합쳐지는 칠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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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3층 법당 대웅전을 지닌 화순 쌍봉사

화순 쌍봉사



' 늦가을 산사 나들이, 화순 쌍봉사 '

▲  쌍봉사 대웅전

'쌍봉사 삼청각에서 읊다'

시내 사이로 멋들어지게 지은 다리 누각이여
삼청이라는 글씨만 봐도 눈이 상쾌하구나
못에 비친 달은 고기들의 맑은 거울이요
구름 걷힌 산봉우리 학은 둥지를 사랑하네
금빛들에 머문 안개는 항상 서기를 드러내고
옷빛계곡에서 부는 솔바람은 언제나 차가워라
난간에 기대어 처마 밑에 흐르는 물을 다시 보니
낙화도 뜻이 있는지 잔물결 따라 쫓아가네

* 고려 명종 때 문인인 김극기(金克己)가 쌍봉사 삼청각에서
지은 시 (현재 삼청각은 없음)
 



 

늦가을이 깊어가던 10월의 끝 무렵에 광주 동남쪽에 넓게 자리한 전남 화순(和順)을 찾
았다.
오전에 일행들과 만연산(萬淵山, ☞ 관련글 보기)을 둘러보고 화순 읍내로 내려가 점심
으로 한정식을 섭취했는데, 화순에서 유명한 밥집이라 사람들로 내내 미어터져 겨우 자
리를 잡아 먹었으나 맛은 그저 그랬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운주사(雲住寺)와 더불어 화순 지역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꼽히
는 쌍봉사를 찾았는데, 쌍봉사는 화순군 남쪽 끝인 이양면 산골에 있는 절로 화순 읍내
에서 30km 이상 떨어져 있다.



 

♠  쌍봉사(雙峯寺) 입문

▲  흙탕물이 되버린 연못

쌍봉사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동그란 연못이 마중을 한다. 주차장 옆에 자리한 이 못은 소나
무가 깃든 동그란 섬을 복판에 띄워놓아 운치를 우려내고 있는데. 고려 때 김극기가 지은 시
를 통해 그 시절 삼청각과 연못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비록 삼청각은 세월의 거친 흐름
으로 형편없이 떠내려갔지만 연못은 오랫동안 살아남아 천왕문 직전에 넓게 누워있었다.
허나 관리 소홀과 주차장 조성으로 연못을 밀어버리는 우를 범했으며, 근래에 작게나마 연못
을 다시 닦았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변 공사로 연못이 뿌연 흙탕물이 되어버린
채, 나를 맞이한다. 마치 흙탕물 같은 속세와 그보다 더한 종교계를 상징하듯이...


▲  연못 바위에 걸터앉은 돌거북

평범해보이는 연못에 눈길을 진하게 끄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거북 모양의 돌이다.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돌에 걸터앉은 작은 돌거북으로 거북의 등껍질과 얼굴, 발이 묘사되어 있는
데, 전체적으로 보면 거북선처럼 보이고, 등껍질 주위로 시선을 좁히면 기어가는 거북처럼 보
여 2가지의 시각 효과를 보인다. 그는 연못을 새로 지으면서 장식용이나 비보풍수(悲報風水)
의 일환으로 설치된 듯 싶다.

          ◀  쌍봉사 천왕문(天王門)
연못을 지나면 절의 2번째 문인 천왕문이 계단
을 늘어트리며 마중을 나온다. (1번째 문인 일
주문은 연못 남쪽에 있음)
이곳은 석가여래의 경호부대인 사천왕(四天王)
의 집으로 좌우로 길게 돌담을 둘러 속세의 기
운을 경계한다.


▲  쌍봉사 대웅전(大雄殿)과 그 주변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3층 모습의 늘씬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너른 경내가 펼쳐진다.
대웅전 좌우와 뒤쪽으로 지장전, 극락전, 호성전, 나한전, 요사, 종무소 등이 포진해 있으며,
천왕문과 대웅전 사이가 거의 풀밭이라 다소 허전하게 다가온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쌍봉사
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쌍봉사는 9세기에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 798~86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825년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847년에 돌아왔는데, 화순 지역을 지나다가 이곳의 수려
한 풍경에 퐁당 반해 절을 세웠다고 한다.
허나 곡성 태안사(泰安寺, ☞ 관련글 보기)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문(桐裏
山門)을 열었던 적인선사 혜철(寂忍禪師 惠哲)이 839년 당나라에서 돌아와 쌍봉사에서 첫 하
안거(夏安居)를 지냈다는 기록이 태안사 적인선사비에 쓰여 있어 적어도 8세기나 9세기 초부
터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쌍봉사는 839년을 창건시기로 삼고 있음)
하여 실질적인 창건자는 철감선사가 아니며, 그는 신라로 돌아와 이곳에 머물면서 구산선문의
일원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고 절의 이름을 크게 날렸다.

철감선사는 절의 앞쪽과 뒷쪽 산봉우리가 2개여서 도호(道號)를 쌍봉이라 했는데, 그의 명성
을 들은 신라 경문왕(景文王)은 그를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그의 도호를 따서 절 이
름을 쌍봉사라 하였다.
철감의 열성제자였던 징효절중(澄曉折中)은 스승의 법맥을 이어받아 영월 법흥사(法興寺)에서
사자산문을 본격적으로 개창했다. 그는 891년 쌍봉사에 들려 스승인 철감선사탑비에 예를 올
렸다고 전한다.

1081년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했다고 하며,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전라도관찰사인 김방(金倣)이 돈을 내어 절을 중창했다. 조선 세조(世祖)는 쌍봉사 토지에 면
세 혜택을 주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8년에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67년과 1724년에 중창했으나 조광조(趙光祖) 등을 배향한 인근 죽수서원(竹樹書院)의 말사
로 들어가면서 매년 66가지의 봉물을 상납하느라 허리가 거의 아작날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6.25전쟁 때 대웅전과 극락전 등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984
년에 대웅전이 전소되어 쓰러지는 고통을 겪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나한전, 호성전, 극락전, 지장전, 종무소, 요사, 범종각 등 10여 동의 건
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보로 지정된 철감선사탑과 보물인 철감선사탑비와 목조지
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지방문화재인 극락전과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웅전 목
조삼존불상 등이 있다.
그 외에 조선 후기에 세워진 쌍봉사 사적비(事蹟碑)와 승탑(僧塔, 부도) 5기, 관찰사 윤웅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절 자체는 '화순 쌍봉사'란 이름으로 전남 지방기념물
247호
로 지정되어 있다.

쌍봉사는 이 땅의 승탑(僧塔, 부도) 중 우수급에 속하는 철감선사탑과 우수급 비석인 철감선
사탑비, 그리고 비록 화재로 다시 지었지만 3층 목탑 양식의 대웅전으로 유명하다. 아마 그들
이 없었다면 이곳은 그저 그런 옛 절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첩첩한 산주름 속에 푹
묻혀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며 절 앞까지 2차선 신작로가 닦여져 차량 접근성은 좋다.
단 대중교통이 영 좋지 못한 것은 함정이다.

* 쌍봉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741 (쌍산의로 459, ☎ 061-372-3765)


▲  옛 모습 그대로 재현된 대웅전 (옆에서 바라본 모습)

쌍봉사 대웅전은 3층 목탑(木塔) 스타일의 건물이다. 높이 12m의 홀쭉한 정방형 집으로 2층에
대웅전 현판이 걸려있으며, 1962년 해체수리를 했을 때, 3층 중도리에서 고맙게도 상량문(上
樑文)이 튀어나왔다. 그 문서를 통해 1690년에 중창했고, 1724년에 3번째 중창이 있었음이 밝
혀졌으나 정작 중요한 첫 조성시기와 1번째 중창 시기는 나와있지 않았다.

건물의 조성시기는 조선 중기로 여겨지며, 원래는 대웅전이 아닌 목탑이었다고 전한다. 경내
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이렇다할 탑이 없는데, 이 건물이 탑의 역할을 대신 하고 있던 것이다.
법주사(法住寺)의 5층 팔상전(八相殿)과 더불어 이 땅에 몇 없는 목탑 스타일의 건물이자 거
의 유일한 3층 목탑으로 그 가치가 대단하여 일찌감치 국가 보물 163호의 지위를 누렸다.

6.25 시절에는 절의 상당수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대웅전은 총탄이 비켜가 구사일행으로 살아
남았다. 그 큰 난리에도 살아남았건만 1984년 4월 어느 어리석은 신도가 촛불을 잘못 다룬 통
에 화마(火魔)의 부질없는 먹이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허무하게 사라진 대웅전을 다시 소환하고자 1985년 8월 복원공사를 벌여 1986년 12월 완
성을 보았으나 국가 보물의 지위는 끝내 박탈되고 말았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본래 지붕이 사각이란 것이 확인되어 기존의 팔작지붕 대신 사각의 사모
지붕으로 바꾸었으며, 상륜(相輪) 부분을 보완했다.


▲  대웅전 목조삼존불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51호

대웅전의 겉모습이 비록 3층이긴 하나 무늬만 3층이지 완전 하나의 공간이다. 내부에는 목조3
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그의 열성제자인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아난존
자(阿難尊者)가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며 서 있다. 이들은 1984년 대웅전이 화재로 무너지
면서 자칫 화마의 먹이가 될 뻔했으나, 절 부근에 있던 마을 농부가 불길을 보고 달려와 저들
을 등에 업고 탈출시키면서 화를 면했다.
이후 대웅전이 복원되자 석가여래상과 존자상을 새로 개금(改金)하고 채색하여 제자리로 옮겼
다.

석가여래의 얼굴은 거의 4각형 모습으로 꽤나 복스러워 보이는데 머리는 꼽슬인 나발이며, 눈
은 지그시 감고 있고, 붉은 입술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중생들의 고충을 빠짐없이 들으
려는듯, 귀는 크고 두꺼우며 어깨를 감싼 옷은 두툼해 보인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펴서 무릎
안쪽에 올려놓았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오른쪽 발바닥 위에 놓았다.
그의 왼쪽에는 다소 늙어보이는 가섭존자가 있는데 표정이 매우 밝고 손이 매우 두껍다. 그에
반해 아난존자는 명상에 잠긴 조금은 늙은 동자승 같은 모습이다.

이들 3존불은 1694년에 조성된 것으로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조성시기와 참여자 이름이 드러
나 있으며, 만들어진 시기가 확실해 다른 조각상의 표준이 된다. 대웅전 화재 때 중생에 의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만큼, 절과 불교의 이익을 위해 살지 말고, 중생의 고충을 위로하면서
그들을 위해 살아가기를 바란다.


▲  호성전(護聖殿)

호성전은 이 땅에서 거의 흔치 않은 T자형 맞배지붕 집으로 절 건축물 중에 T자형은 오직 이
곳 하나 뿐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제외) 앞서 대웅전처럼 매우 희귀한 형
태의 집이라 국가 지정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겠으나 아쉽게도 6.25때 파괴되어 다시 지어
진 것이라 그 자격은 떨어진다.

이 건물은 쌍봉사에 많은 혜택을 주었던 세조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로 전해진다. 허나 지금은
철감선사와 그의 사형(師兄)인 조주종심(趙州從諗, 조주대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철감은 825년 당나라로 건너가 남천보원(南泉普願. 남천선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때 조주
선사를 만났다. 조주는 철감보다 20살 연상으로 남천에게 '평상의 마음이 도(道)이다'는 말을
듣고 바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철감과 조주는 친한 선후배 관계로 10년 정도 남천의 문하에서 정진했으며, 철감이 조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므로 그들의 진영을 마련해 호성전에 봉안했다. 조주의 진영은 하북성(河
北省) 백림선사에 있는 송나라 때 판각된 그의 초상화 영인본(影印本)을 참고해 제작했을 정
도로 크게 공을 들였다.


▲  늙은 티가 너무 풍기는 조주대사의 진영와 중년의
중후함이 느껴지는 철감선사의 진영

▲  나한전(羅漢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거처이다. 6.25때 파괴된 것을 다시 세웠다.

▲  극락전(極樂殿)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66호

두툼한 맞배지붕을 지닌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조선 중
기 건물로 6.25때 대웅전과 함께 운좋게 살아남았으며, 대웅전이 1984년 화재로 무너지자 경
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란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다.
극락전 앞에는 수백 년 정도 묵은 단풍나무 2그루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 운치
를 우려내고 있는데 그들은 대웅전 화재 때 천하를 집어삼킬 정도로 강렬했던 화마의 공격으
로부터 극락전을 지킨 존재들이다. 온 몸으로 막는 과정에서 나무들은 가지를 적지 않게 잃었
으나 덕분에 극락전은 무사했다. 만약 극락전까지 허무하게 날라갔다면 경내에 오래된 건축물
은 전멸하게 된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52호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좌상은 1694년에 조성된 것이다. 그의 좌우에는 같은 시기에 조성
된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해 있었으나 1989년 8월, 어느 나쁜 손에
도난을 당해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하여 새로 협시보살상을 장만해 아미타불의 허
전한 옆구리를 채웠다.
아미타불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얼굴은 거의 네모진 큰 모습이며, 덩치도 제법
있어 보인다. 머리는 나발(꼽슬)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으며, 얼굴은 거의 무표정 같
다. 목에는 삼도가 그어져 있고 어깨를 감싼 옷의 주름은 매우 뚜렷하다. 오른손은 올리고 왼
손은 내린 모습인데, 양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걸치며 앉아있다.

대웅전의 목조삼존불상과 같은 해에 조성된 것으로 조각 형식이 비슷해 같은 사람이 만든 것
으로 여겨지며, 대웅전의 그것보다 허리가 곧고 늘씬한 모습이라 대웅전 삼존불 다음으로 조
성된 듯 싶다.



 

♠  쌍봉사 마무리

▲  지장전(地藏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의
거처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졌으나 6.25때 파괴된 것을 이후에 다시
세웠다.

▲  지장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탱

지장전에 봉안된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은 1667년경에 운혜(雲惠)를 비롯한 그의 일
파 조각승들이 조성했다. 아주 고맙게도 조성발원문이 나왔고, 쌍봉사 사적기(事蹟記)와 '능
주지 사자산 쌍봉사제전 기문집록(綾州地 獅子山 雙峰寺諸殿記 文輯錄)' 등에 조성 관련 내용
이 나와있다.
이 지장보살상의 조성시기가 밝혀지면서 해남 대흥사(大興寺) 지장시왕상, 강진 백련사(白蓮
寺) 지장시왕상, 미황사(美黃寺) 지장시왕상, 순천 동화사(桐華寺) 지장시왕상 등 운혜 계열
의 조각으로 여겨지는 조각상들의 조성 연대 추정에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며, 명계조각(冥界
彫刻)이라는 종교적 엄숙성과 17세기 불교 조각계가 추구한 대중적 평담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여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
으로 국가 보물 1,726호로 지정되었다.

얼굴이 거의 네모난 지장보살상은 양 어깨를 덮은 옷을 입고 있으며, 아미타수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서 있는데, 도명존자는 합장
인을 선보이고 있고, 무독귀왕은 가슴에 모은 두 손이 옷에 감추어져 있다. 그들 뒤로는 근래
조성된 지장탱이 있는데, 지장보살의 푸른 대머리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  의자에 앉아있는 시왕상과 불꽃을 휘날리고 있는 금강역사상

▲  경내에서 철감선사탑으로 인도하는 숲길 ①

쌍봉사에 왔다면 경내만 살피지 말고 철감선사탑과 탑비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경내에서 서
북쪽으로 난 숲길을 조금 올라가면 그 길의 끝에 쌍봉사 제일의 보물인 그들이 있다.


▲  경내에서 철감선사탑으로 인도하는 숲길 ②
늦가을이 철감선사탑과 탑비에 퐁당퐁당 반했는지 한참을 머물고 있다.

▲  철감선사탑 - 국보 57호

철감선사는 쌍봉사에 머물며 사자산문의 기초를 닦다가 868년 7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의
입적 소식을 들은 경문왕은 크게 아쉬워하며 '철감'이란 시호를 내려 탑과 탑비를 세우게 했
는데, 그가 입적한 그해에 탑과 비석이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철감의 제자들은 우수한 석공을 초빙하여 스승의 승탑을 조성했다. 비록 2.3m의 낮은 높이지
만 온갖 정성을 들여 탑의 밑도리부터 윗도리까지 조각을 했으며, 탑은 전체적으로 8각의 형
태로 8각 바닥돌 위에 기단부를 두었다. 기단부는 밑돌, 가운데돌, 윗돌 세 부분으로 이루어
져 있는데, 밑돌과 윗돌 장식이 꽤 화려하며,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8마리의 사자가 구름 위
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제각각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윗돌은 2단으로 두어 밑에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迦陵頻伽)>가
악기를 다루는 모습을 새겼다.

철감의 사리가 깃들여진 탑신(塔身)에는 8개의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
다 문짝 모양, 사천왕상, 비천상(飛天像) 등을 조각했다. 지붕돌에는 아주 현란한 조각 솜씨
가 깃들여져 있는데,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
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허나 너무 완벽하면 재미가 없는지
라 머리장식은 장대한 세월에게 싹 날라가 없어진 상태이다.

신라 후기 대표적인 승탑이자 9세기에 조성된 승탑 중 제일로 꼽히는 명작으로 1,100년의 적
지 않은 나이에도 조각이 살아있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자연과 세월도 보는 눈이 있는지 그
를 비켜간 모양이다.

▲  내 시선을 계속 잡아두고 있는 철감선사탑의 위엄

▲  철감선사탑비 - 보물 170호

탑 옆에 자리한 탑비는 철감선사의 행장을 머금은 비석이다. 용 머리의 귀부(龜趺)와 비신(碑
身),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으나 탑비에 군침을 흘린 세월이 비신을 잡아가버려 현재는 귀
부와 이수만 남은 상태다. 하여 비석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용머리의 귀부를 두었는데, 여의주를 입에 머금고 있는 모습이며,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어 앞으로 슬금슬금 기어가는 것 같다. 이수는 용조각을 생략하고 구름
무늬만 가득하다.
탑과 더불어 868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조각 수법이 휼륭해 신라 말 대표적인 탑비로
꼽힌다. 이 역시 철감을 향한 제자들의 지극정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철감선사탑비
거북이 등짐을 지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다.

▲  철감선사탑비의 옆모습

▲  철감선사탑비의 뒷모습

철감선사탑, 철감선사탑비를 끝으로 쌍봉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들에게 꽂힌 시선이
좀처럼 떼어지지를 않아서 나올 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는지 모른다.

쌍봉사 이후 내용은 생략하며 본글은 여기서 쿨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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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공항을 굽어보는 강서구의 대표 지붕,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둘레길, 개화산자락길, 개화산 봉수대, 미타사석불입상, 신선바위>

강서구 개화산(약사사, 개화산둘레길, 미타사)



'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나들이 '


▲  개화산둘레길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 숲길)

▲  약사사 석불입상

▲  미타사 석불입상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5월의 첫 무렵, 강서구(江西區)의 대표 지붕인 개화산(開花山)을
찾았다.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지만 나는 서울의 동북쪽 끝인 도봉산 그늘에 있고 개화산
은 서울의 서쪽 끝으머리인 개화동과 방화동에 있다. 서로 끝과 끝에 있어서 거리도 거
의 40km, 지하철로 가도 족히 1시간 반 이상이 걸려 그곳에 이르기 전에 거의 떡실신할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개화산을 비롯한 강서/양천 지역은 많이 가지 않는 편이다.

개화산은 즐겨찾기급 명소는 아니지만 매년 1번 정도는 가는 편이다. 자고로 좋은 곳은
1번이 아닌 두고두고 찾는 법, 이번 나들이는 방화역(5호선)에서 시작하여 약사사와 개
화산전망대, 개화산둘레길(강서둘레길1코스), 미타사, 하늘길전망대를 거쳐 방화근린공
원에서 끝을 맺었다.



 

♠  개화산 약사사(藥師寺)

▲  약사사로 인도하는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개화동(開花洞)과 방화동(傍花洞)에 걸쳐있는 뫼로 거의 평지로 이루
어진 강서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은 작고 야트막하지만 평지 속에 솟아있는 존재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일품이며,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무성하여 풍경도 아름답다. 산 동북쪽에
는 꿩고개라 불리는 치현산(雉峴山)이 이어져 있고, 북쪽에는 한강과 5호선 방화차량기지, 서
쪽은 김포평야(金浦平野), 남쪽에는 방화동과 김포국제공항이 있다.

개화산의 첫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어느 시절에 주룡(駐龍)이란 도인(
道人)이 살고 있었는데, 매년 9월 9일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
다. 이것을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 9월 9일마다 주룡산에서 술을 마심)'이라 불렀는데 그가
죽자 9월 9일마다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는 그가 죽은 자리
에서 꽃이 피어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우니 그곳이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이며, 개
화사가 있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으로 이름이 갈렸다고 전한다. 또한 주룡 설화 외에도 산 모
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는 뜻의 개화산(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산이 코끼리, 개화산과 마주보고 있는 한강 북쪽 행주산
(幸州山, 덕양산)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주고 서울에
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이라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겉모습은 작지만 속은 아주 알찬 개화산에는 많은 명소가 안겨져 있는데, 늙은 석탑과
석불을 간직한 약사사를 비롯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미타사 석불입상, 호국충혼위령비,
방화근린공원, 신선바위, 능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봉수대, 상사마을 은행나무 등이 있으며,
약수터도 많이 있었으나 그 수가 계속 줄어 이곳의 제일 가는 물이었던 약사사 약수터가 2013
년 봄에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또한 산 허리에는 강서둘레길1코스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 3.35km)이 닦여져 있는데, 조
망이 괜찮은 곳에 전망대(개화산, 아라뱃길, 신선바위)가 설치되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다만 군부대가 정상과 북쪽 자락에 있어 정상에는 발을 들일 수 없다.


▲  약사사 방면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

▲  약사사를 알리는 표석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로 들어서 약사사로 가다 보면 길 중간과 약사사 표석 전에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豊山沈氏 文靖公派 墓域,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7호)이 간만에 보고 가라
며 손짓을 보낸다. 허나 이번에는 그들에게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아서 오직 정면에 보이는 먹
이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고양이처럼 바로 약사사로 넘어갔다.

약사사 표석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봉화정과 개화산전망대로 이
어지고, 오른쪽은 약사사와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데 봉화정과 강서둘레길1코스 서쪽 구간
이 목적이라면 왼쪽 길로 가면 되고, 약사사를 거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약사사 경내

약사사 표석에서 2분 정도 들어가면 개화산의 오랜 상징인 약사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개화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이 절은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으나 앞서 언급했던 주룡선생과 관련
된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신라 때 개화산을 주름잡던 주룡이 세상을 떠나자 매년 9월 9일마다 그가 술을 마셨던 곳에서
이상한 꽃이 피었는데,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개화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설화와
1827년에 송숙옥(宋淑玉)이 쓴 '개화산약사암중건기',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를 통해
신라 때 창건된 것이라 내세우고는 있으나 신빙성이 있는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개화산약사암중건기'와 '양천읍지'는 약사사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다만
경내에 고려 때 석탑과 석불이 전하고 있어 적어도 고려 초/중기부터 법등을 켠 것으로 여겨
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는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에 개화사로 나와 예전 이름이 개화사였음을 알려준다.
절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37년 좌의정(左議政) 송인명(
宋寅明, 1689~1746)이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송씨 가문의 원찰(願刹)로 삼았는데, 그는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으나 개화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해 과거에 붙었다.
이후 재상에 오르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개화사의 덕이라며 절을 중수하고 절 밑에 불량답
(佛糧畓)을 보시했다. 또한 영조(英祖) 시절 그와 가깝게 지냈던 이병연(李秉淵)이 개화사와
송인명과의 끈끈한 사이를 '사천시초(槎川詩抄)'란 시로 표현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 가양동에 있었음)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조선 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이병연
의 시를 보고 개화사를 찾아가 그림을 남겼는데, 그는 1740년부터 5년 동안 양천현감(현령)으
로 있으면서 개화사와 소악루를 비롯한 양천의 명승지를 아낌없이 화폭에 담아 당시의 정취를
아련히 알려주고 있다.

1799년 송인명의 후손인 송백옥(宋伯玉)이 절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남겼으며 1827년 절이 퇴
락하자 처사 창선(昌善)과 청신녀(淸信女) 경자(京子)가 돈을 모아 기존 절터에서 몇 걸음 떨
어진 곳에 새롭게 자리를 파 절을 옮겼고 석불입상을 약사불로 삼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藥
師庵)으로 갈았다. <이후 약수사(藥水寺), 약사사 등으로 변경됨>

1911년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의 되었고, 1928년 주지 박원표(朴元杓)가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허나 6.25 때 개화산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그나마 세운 건물이 모두 무너졌으며
가건물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1984년 이후 대웅전과 감로당, 삼성각을 지어 지금에 이
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감로당, 삼성각, 범종각, 공양간 등 5~6동 정
도의 건물이 있으며, 크게 지어진 감로당은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주며, 석불
은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기도 수요가 제법 많다. 허나 경내에서 이들 외에는 고색의 향기는
전혀 없다.
또한 경내 밑에는 개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던 약수터가 있었는데 그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
다고 하여 중생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약수터 때문에 절의 이름이 한때 약수사가 된 적도 있
을 정도.. 허나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부적합 판정으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끝내 부
적합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3년 봄에 완전 폐쇄되고 말았다. 석불과 더불어 절의 든든한 양대
밥줄이자 아주 착했던 약수터의 퇴장은 개화산과 절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고, 이제는 추억
이나 사진에서나 끄집어 봐야 되는 흐릿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약사사는 숲에 둘러싸여 있어 산사의 향기도 그런데로 진하며, 절이 아담
하여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다. 또한 방화역에서 절까지 길이 잘 닦여있고 도보
20분 정도로 접근성도 괜찮으며, 차량으로 경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절을 둘러보고 개화산
봉화정과 강서구의 야심작인 강서둘레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을 곁드린다면 아주 영양가
만점의 나들이가 될 것이다.

* 약사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332-2 (금낭화로17길261 ☎ 02-2662-2551)
* 약사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있음)

절 정문을 들어서면 약사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3층석탑과 대웅전이 시
선을 주고 있으며, 왼쪽에 약사사 안내문과 매점, 범종각이, 오른쪽에는 주차장과 해우소, 감
로당이 자리한다.

▲  범종각(梵鍾閣)
1976년에 조성된 범종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전(佛殿)이긴 하
지만 겉모습은 거의 요사(寮舍)나 여염집 같은 분위기로 가운데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
조이다.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탱과 산신탱은 1960
년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그림이다. (삼성각 바로 옆에 공양간이 있음)


▲  감로당(甘露堂)

3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삼성각을 바라보고 선 감로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요사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甘露堂','開
花山 藥師寺' 현판은 승려 석정(石鼎)의 필체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
기에 좋으며, 벽면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혜능(慧能) 이야기, 백락천과 도림선사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다.


▲  약사사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호

대웅전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약사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창건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보물로 탑 높이는 4m이다. 땅에 바닥돌을
깔고 1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으며, 머리 장식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없어진 것을 근래에 새로 붙여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랫 부분과 전혀 다른 피부색을 보인다.

탑은 길쭉하고 홀쭉한 모습으로 기단이 1층으로 간략화 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의 밑면 받침
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어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로 서울에는 오래된 석탑이 많이 있지만 정작 토박이 옛 탑은 몇 되지
않는다. 토박이 고려 탑은 낙성대(落星垈) 3층석탑과 홍제동(弘濟洞) 5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에 있음), 그리고 이곳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왜정(倭政) 이후에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상경
한 것들이다.

▲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3층석탑
마치 하늘이 움푹 낮아진 듯, 자욱하게 낀 오색 연등이 탑의 머리와 하늘을
앗아가 버렸다. (이때가 석가탄신일 며칠 후였음)

▲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1988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을 청기와로 수를 놓아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내며 절의 왜소함을
능히 커버한다.


▲  대웅전의 붉은 닫집과 불단을 장식하는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 불단에는 1기의 석불과 7기의 불상/보살상이 있다. 그 뒤에는 조
그만 금동불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거의 3천불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금동(金
銅) 일색인 곳에 홀로 빛바랜 돌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의 큰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가 3층석탑 다음으로 경내에서 늙
은 존재로 이곳의 든든한 밥줄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석불, 나머지 금동불은 그를 위한 조
연이 된다.
비록 겉은 초라해 보일 지 몰라도 그의 가치는 그들보다 한참이나 높다. 다른 불상은 제쳐두
더라도 3층석탑과 그는 꼭 봐야만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석불 앞에는 아주 조그만 금동석가여래상이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앉아있고, 좌우
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그 옆에는 큼직한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 중생을
굽어본다. 금동불은 모두 1995년 이후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들이다.


▲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호

많은 후배급 불상/보살상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불입상은 머리에 쓴 돌갓 밑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해 고려 후기,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의 든든한 밥줄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에 일장미륵(一丈彌勒)으로 등장한다.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으나 가슴 앞에 댄 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세음보살로 여
겨지기도 하며, 불상의 투박한 모습을 통해 고려와 조선 때 온갖 모습으로 조성된 미륵불(彌
勒佛)의 일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그를 약사불(藥師佛)로 삼으면서 절 이
름을 약사암으로 갈았으며, 현재도 영험한 약사불로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 석불은 현재 위치 바로 옆에 있었던 건물에 있었는데, 밑도리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
다가 1974년 그 건물을 부시고 대웅전을 조성하면서 불상 밑에 기단석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
했다.
불상의 얼굴은 길고 넓적한데, 표정은 썩 별로이다. 경직된 인상에 두 눈은 너무 크기 때문이
다. 코는 세모로 오똑하나, 코 끝은 크게 닳아진 상태이고, 입은 그 모양만 확인이 가능하다.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의 고충을 듣기에는 별 지장은 없어 보이며, 머리에는
둥근 돌갓을 쓰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미륵불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가 얼굴에 비해 작고, 옷도 옷주름 몇 가닥이 표현된 것이 전부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꽃을 든 불상의 이미지를 주며, 밑도리는 바로 앞에 있는 금동석
가여래상과 불단에 가려져 확인이 어렵다.
썩 괜찮은 작품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존재로 소망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해 많
은 이들이 찾아와 소망과 고충을 털어놓는다. 약사사가 지금에 이른 것도 거의 그의 공이다.


▲  약사사 돌담길
약사사를 둘러보고 돌담길을 통해 개화산전망대로 이동했다.


 

♠  개화산전망대와 개화산둘레길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에서 느긋한 산길을 5~6분 오르면 개화산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전망대

개화산 북쪽 능선에 개화산전망대가 조촐히 터를 닦았다. 2011년 5월 근교산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한강과 방화대교를 비롯하여 난지도, 은평/서대문/마포구, 남산, 북
한산(삼각산), 가양동 지역이 두 눈에 바라보여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가성비가 높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①

겸재 정선은 1740년부터 5년 동안 천하에서 제일 작은 고을인 양천현(陽川縣)의 현령(縣令)을
지내면서 양천(서울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김포시 고촌읍)의 주요 명소를 그림으로 남겼
다. 이들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에 실려있어 무척이나 많
이 변해버린 양천 지역과 한강(염창동~행주산성 구간)의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있다.

개화사(약사사)는 벗인 이병연의 소개로 찾았다가 그곳 경관에 감탄하여 그림으로 남긴 것이
다. 하나는 한강에서 바라본 시점,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
다.
낙건정(樂建亭)은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별서(別墅,
별장)인 낙건정을 그린 것으로 한강 북쪽 덕양산(德陽山, 행주산) 자락에 있었다. 그리고 행
호관어(杏湖觀漁)는 행호<杏湖, 행주산 주변 한강> 주변을 담은 것으로 지금이야 그저 그런
곳이지만 그때는 양반, 귀족들의 별서/유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②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소악루(小岳樓)는 양천
고을의 중심지였던 가양동의 뒷산, 궁산(宮山) 동쪽에 있었는데, 왼쪽 하단에 소악루를 두고
탑산과 두미암, 선유봉, 와우산, 잠두봉(蠶頭峰) 등의 경강(京江) 서쪽 명소를 담았다. (현재
소악루는 궁산에 재현되어 있음)

금성평사(錦城平沙)는 양천(가양동)에서 바라본 난지도(蘭芝島)를 담은 것이다. 서울의 쓰레
기장이 되기 전에는 홍제천과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너른 저지대로 한강의 폭이
넓어져 경치가 꽤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쓰레기를 딛고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이란 거
대한 자연공원으로 거듭났다. 허나 그래봐야 순수 자연산이던 예전만은 못하다.

목멱조돈(木覓朝暾)은 목멱산(남산)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 모습을 담은 것으로 양천에서 바라
본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다. 남산 앞에는 만리동고개, 애오개(아현동), 노고산(老姑山) 등이
그려져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방화대교와 난지도, 고양시 화전 지역, 서울 서북부를 비롯해 멀리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개화산전망대 주변 너른 공터와 헬기장
공터 주변에 널린 군사시설은 군사 훈련 및 예비군 훈련지로 활용되고 있다.

▲  재현된 개화산 봉수대(烽燧臺)

조선은 총 5개의 봉수 노선<거로(炬路)라고 함>을 운영했다. 개화산봉수대는 전남 순천(順天)
에서 시작되어 서울 남산 제5봉수대에서 끝을 맺는 5번째 거로로 김포 북성산(北城山) 봉수대
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 제5봉수대로 넘겼다.

개화산봉수대는 개화산 정상에 있었다. 이곳 외에도 동북쪽 꿩고개산(치현산) 정상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를 개화산 제2봉수대라 부른다. 이들 봉수대는 1950년대까지 있었으나 6.25
전쟁 시절, 군부대가 정상 주변에 주둔하면서 싹 밀어버리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자리만 겨
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기와조각과 백자 파편, 도기 파편 등이 여럿 수습되었으며 1994년
11월에 개화산 봉수대터에 표석을 세웠다.

개화산은 한자만 달리하여 개화산(開火山)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봉수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행주산성(幸州山城), 양천고성(陽川古城, 가양동)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시절에 행주산성을 지원하던 역할을 했던 것으
로 보인다. 6.25때도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고 지금까지 군부대가 쭉 주둔하면서 그 역사를 계
속 이어간다.

강서구청에서 개화산 봉수대를 복원하고자 이
미 복원된 남산 봉수대와 안산(鞍山) 봉수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를 참조하여 2013년 11
월 재현을 했는데 원래 자리에 군부대가 들어
앉은 관계로 부득이 북쪽으로 250m 떨어진 봉
화정 맞은 편에 세웠다.
높이 2m, 둘레 4m 규모의 봉수대 2개를 지었는
데 옛날처럼 불을 피울 일도 없고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이라 딱히 볼품은 없다.

▲  봉수대 맞은편에 자리한 봉화정(烽火亭)


▲  봉화정에서 개화산숲길로 들어서다 (강서둘레길1코스)

도보길이 천하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강서구에서도 야심작을 내놓았다. 바로 강서둘레길이다.
산과 숲, 한강, 철새도래지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둘레길로 총 3코스가 있는데, 1코스는 개화
산숲길로 개화산을 1바퀴 도는 3.35km의 산길이다. 개화산 둘레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오르
락내리락이 다소 반복될 뿐, 딱히 힘든 구간은 없으며 가볍게 걸으면 60~70분 정도면 충분하
다. 중간에 여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조망의 기품을 누릴 수 있으며,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과 약사사 등의 늙은 문화유산도 만날 수 있다.
개화산숲길 외에도 '개화산자락길'도 별도로 준비되어 있다. (방원중학교~금낭화로17길~약사
사 표석~개화산전망대/하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


▲  나무데크로 이루어진 개화산숲길 (아라뱃길전망대 부근)

▲  아라뱃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라뱃길과 김포시(金浦市) 고촌읍 지역

서쪽을 향하고 있는 아라뱃길전망대는 이름 그대로 아라뱃길이나 바라보라고 만든 곳이다. 아
라뱃길은 서해바다와 한강을 잇는 운하로 2009년에 착공하여 2011년 완성을 보았는데, 여객선
과 유람선, 화물선을 서울까지 들어오게 해야 물류비용도 절감되고 관광객이 늘어난다는 바람
직하지 못한 개소리를 늘어뜨리며 억지로 만들었으나 그 기대치에 1%도 안되는 놀라운(?) 실
적을 보이며 서울과 인천의 아주 저주스러운 애물단지가 되었다.


▲  신선바위 윗쪽에서 바라본 천하
비행기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김포국제공항을 비롯해 김포평야와 부천 북부,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눈에 들어온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신선바위

개화산은 흙산이라 신선바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바위가 거의 없다. 서쪽을 향해 누워있는
이 바위는 개화산 산신(山神)이 호랑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위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산신이 과연 이곳을 거쳐갔는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다. 신선
도 결국 인간이 만든 가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이곳은 개화산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이를 두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천하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여 신선바위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호국충혼위령비(호국충혼비)와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

신선바위를 지나면 미타사로 내려가는 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 둘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 손
에 이끌려 3분 정도 내려가면 곱게 단장된 푸른 잔디밭 위에 서 있는 호국충혼위령비(이하 충
혼비)가 나타나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 충혼비는 천하에 매우 흔한 6.25 관련 기념물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한다. 6.25가 터지
자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6.25 이전에는 남한 영역이었음)을 지키던 1사단은 북한군을 감당
하지 못하고 김포를 거쳐 김포공항 부근까지 후퇴했다.
개화산에 진을 치고 김포비행장을 지키고자 장비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며 싸웠으나 설상가
상으로 탄약과 식량보급까지 끊겼다. 결국 북한군의 대량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1사단 12연
대 3대대 대대장 김무중 소령과 12연대,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해 1,100여 명이 전사하
고 말았다.
이후 호국(護國)의 신이 된 그들의 넋을 기리고자 미타사에서 1993년 12월에 충혼비를 세웠으
며, 매년 6월에 지역 주민들과 군부대 장병이 위령제를 지낸다. (11월 가을걷이 이후에도 지
낸다고 함) 바로 이 충혼비 밑이 미타사이다.



 

♠  서울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절집, 개화산 미타사(彌陀寺)

김포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 서쪽 자락에 살짝 둥지를 튼 미타사는 조그만 절이다. 서울
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절로 예전에는 약사사와 함께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내세우기도
했으나 경내에 있는 석불이 고려 말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계점과 삼국시대 창건설을 입
증할 존재가 전혀 없어 이제는 쏙 들어갔다.
또한 19세기에 '김대공'이란 사람이 석불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집안의 원
찰(願刹)로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역시나 구전에 불과하다.
그나마 확실한 것은 1924년 창건설로 절 밑에 있는 내촌마을 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집
을 지어줄 것을 청하므로 그해 4월 8일 미륵당(彌勒堂)을 세웠다는 것이다. 하여 그 이전에는
애당초 절이 없었고, 미륵불로 숭상을 받던 석불만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후 미륵당이 미타사로 발전했으나 6.25전쟁으로 모두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이후 자리
를 조금 달리하여 절을 재건했다. 1970년 승려 한지일(韓智壹)이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제자리를 떠났던 지장보살입상을 1993년에 다시 가져와 새 법당에 봉안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절 뒷쪽에 호국충혼위령비를 세워 6.25때 개화산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린다.
경내에는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과 2기의 노천 석불, 그리고 5층석탑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있다.

절이 조촐하고 숲에 둘러싸여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선사하며, 시내와 가깝지만 적당히 거리
를 두고 있다. 김포공항을 수시로 드나드는 비거(飛車)들의 소음을 빼면 정말 고즈넉한 곳으
로 개화산숲길과도 가까워 개화산 나들이 때 이곳을 곁드리며 숲길을 1바퀴 돌면 나름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미타사란 이름을 지닌 오래된 절이 3곳 있음, 보문동 미타사(☞ 관련글 보
), 옥수동 미타사(☞ 관련글 보기), 그리고 이곳 개화동 미타사>

* 미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산81-24 (개화동로13길 56-33 ☎ 02-2662-4736)

▲  따사로운 봄볕을 즐기고 있는
여염집 스타일의 미타사 법당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서쪽을 굽어보는 석불좌상


전형적인 불전(佛殿) 스타일과 거리가 좀 있어 보이는 미타사 법당은 1970년대에 중건된 것이
다. 불단에는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석가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93년에 마련된 것으로 왜정 때 석고로 조성된 지장보살입
상도 있다. (그는 친견하지 못했음)
그 보살상은 경내에서 석불입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로 참으로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
는 원래 옛 법당에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절이 파괴되자 실종되었다. 이후 인근 군부대 장교
가 부대 우물에서 불에 그을린 채 망가진 그를 수습하여 군부대에서 가지고 있다가 경주의 어
느 사찰로 넘어간 것을 1993년에 다시 찾아와 봉안했으니 무려 40년 이상 타향살이의 고통을
겪은 것이다. 아마도 6.25시절에 개화산을 점거한 북한군이 불상에 화풀이를 하며 우물에 버
린 것으로 여겨진다.


▲  미타사에서 바라본 천하
김포국제공항과 김포평야,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돌탑과 날렵한 몸매의 5층석탑(왼쪽 탑)
석불입상 뒤쪽에 경내의 유일한 석탑인 5층석탑이 있다. 그는 198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의 단골 신도인 석물 판매업자가 1995년에 기증했는데,
그로 인해 힘들지 않게 탑을 소유하게 되었다.

▲  미타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9호

이 석불은 미타사에서 미륵불로 받들고 있는 존재로 고려 후기,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모습은 다른데서는 보기 힘든 이형적(異形的)인 모습으로 밑도리에는
세월의 고된 때가 자욱한 반면, 그 윗쪽 몸통의 3/4 이상은 완전 하얀 피부라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다. 그가 서 있는 대좌(臺座)만 근래 것이지 석
불 자체는 순수 오래된 불상이다.

미타사가 있기 전부터 이곳을 지켰던 노천 석불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여
러 번 땅속에 들어갔다가 빛을 보기를 반복했다. 1924년 내촌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서 그를
위한 집이 지어졌으니 그것이 미타사의 시초로 여겨지며 요사 자리에 미륵당이란 조그만 건물
을 지어 봉안했으나 근래에 요사를 새로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때 대좌를 새로
만들어 넣었고, 예전의 헌 대좌는 석불 윗쪽에 있는 바위 밑에 있다.

석불의 모습은 개화산 동쪽 약사사의 석불좌상과 좀 비슷하다. 그는 고려 말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머리에 동그란 갓돌을 쓰고 있고, 얼굴 표정은 좀 일그러져 있다. 아마도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서 그리 된 모양이다. 얼굴은 거의 동그란 모습이며, 눈과 눈썹, 입은 선으로
처리했고, 코는 매우 오똑하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은 긴 편으로 삼도(三道)는 보이질 않으며, 몸통은 매우 길쭉하다.
두 손은 가슴 앞에 서로 교차되게 모으고 있는데, 그만의 특이한 수인(手印)으로 손가락이 꽤
두껍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을 하고 있으며, 다리와 발 등의 밑도리는 옷에 가려져
생략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로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몸통이 길며, 특이한 신체 표현과 밑도리를
생략하는 센스, 갓돌 모양의 보관(寶冠) 등에서 고려시대 큰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오랜 세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음에도 피부가 하얗고 건강도 양호하며, 약사사 석불과 함께
서울에 몇 없는 고려 말 석불이란 점이 인정되어 2008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옆에서 바라본 석불입상과 그 주변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국제공항

미타사를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개화산둘레길(개화산숲길)로 다시 진입하여 남쪽으로 조
금 가니 '하늘길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서울의 하늘길을 책임지고 있는 김포국제공항이 아주 잘 바라보이는 곳이라 그런 이름
을 지니게 되었는데, 정말로 공항 내부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공항뿐 아니라 주변 김포평
야와 인천 동북부(계양구), 부천 지역이 덩달아 두 눈으로 달려오며 국내선과 국제선 비행기
가 5분이 멀다 하고 공항을 들락거려 김포공항의 위엄을 보여준다.


▲  솔내음이 그윽한 개화산둘레길 서쪽 구간

▲  짙은 숲속을 가르는 개화산둘레길 서쪽 구간

▲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하늘길전망대를 지나 무장애숲길 남쪽 기점에서 개화산자락길로 갈아탔다. 자락길 서쪽 구간
은 하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까지로 이중 개화산둘레길과 겹치지 않는 북까페 주변 숲
길이 무장애숲길로 이루어져 있어 천하에서 가장 편한 둘레길로 칭송 받는 안산(鞍山) 자락길
못지 않은 편안함과 느긋함을 보여준다.
이런 나무데크길은 통행편의도 있지만 인간의 발길로부터 나무와 흙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
다. 그러다 보니 나무의 피해를 최소화하여 길을 닦았고 부득이 길 복판에 자리하게 된 경우
는 그냥 그 자리에 둔 채로 길을 내었다. 물론 나무가 숨을 쉴 수 있게끔 공간을 내어 그를
배려했으며, 개화산둘레길 나무데크길도 같은 방법으로 길을 내었다.


▲  시원하게 뻗은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개화산자락길 무장애숲길을 모두 거닐고 약사사 표석에서 다시 개화산둘레길(개화산 숲길)로
갈아타 방화근린공원으로 내려갔다. 이때 시간은 거의 19시, 햇님도 슬슬 퇴근 준비를 서두르
고 있고 나 역시 피곤한 상태라 여기서 출사를 마치고 쿨하게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개화산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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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진관동 나들이 <경천군이해룡 사패지송금비, 여기소터,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영산군 이전묘역, 숙용심씨묘표>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산책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숙용심씨묘표

▲  마실길 돌탑

▲  숙용심씨묘표

 



 

봄이 한참 익어가던 4월의 끝 무렵, 천하 도보길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는 북한
산둘레길을 찾았다.
이번 둘레길 나들이는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해 내시묘역길 진관동(津寬洞) 구간과 마실
길을 거쳐 은평뉴타운 제각말아파트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천하 탐방밀도 1위(1㎢당 5만
여 명)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북한산(삼각산) 탐방객의 절반 정도가 둘레길 방문자라고
하니 그 인기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진관동 구간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 입구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서울에서 제일 작은 초등학교인 북한산초교가 있다.
(거의 시골학교 분위기임)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인 내시묘역길은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공설묘지에서 진관동 방패교육대
에 이르는 3.5km의 산길이다. 북한천(北漢川)에 걸린 둘레교를 사이로 북쪽은 고양시, 남쪽은
서울 영역으로 평지와 야트막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주이씨 서흥군파묘역과 경천군 송
금비, 경주이씨묘역, 여기소터, 백화사, 중골마을 느티나무 등의 늙은 명소가 있다.

백화사 뒤쪽 산자락에 천하 최대의 내시묘역이었던 이사문 공파(李似文 公派)의 묘역이 있었
다. 바로 그 묘역 때문에 '내시묘역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그 묘역의 규모는 8,800평
으로 45기의 조선 중~후기 무덤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묘는 자헌대
부(資憲大夫)로 승전관(承傳官)을 지낸 김충영(金忠英)의 무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한
곳이 있구나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묘역은 2012년 4월 귀신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후손들이 묘역을 정리해 조경개발업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백화사까
지 길이 뚫리면서 땅값이 많이 오르자 팔았다고 전하며 후손들은 땅값으로 4.8억원을 만졌다
고 한다. 유골은 화장하여 납골당 등에 두었고 무덤에서 나온 유물 또한 후손들이 가져갔으나
무덤에 배치된 문인석(文人石)과 상석(床石) 등의 무거운 석물은 버려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얼마나 비밀리에 콩 볶듯이 했는지 동네 사람들과 백화사 승려들도 묘역이 없어진 것을 뒤늦
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 땅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녔던 그곳은 그렇게 사라져 이제는 한낱 전
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었다. 진작에 국가 사적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이런 일은 막
을 수 있었을 것인데(후손들이 문화재 등급 지정을 신청하거나 동의해야 가능함) 많은 이들의
그릇된 생각과 내시묘역에 대한 저평가, 그리고 철밥통들의 직무유기가 낳은 비극이다.
(현재는 거의 숲이 들어섬)

이제 내시묘역도 없는 내시묘역길이 되었으니 그 이름도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이는 갈비탕
에 갈비가 빠졌음에도 갈비탕을 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적당하
다고 본다. 하지만 북한산국립공원 철밥통들은 이름 변경도 귀찮다며 계속 수수방관하고 있다.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에서 경천군 송금비 구간)
숲이 워낙 삼삼하여 햇살도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긴다.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내시묘역길
산길 주변은 경주이씨 경천군파 문중 땅이라 양쪽에 철책과 나무난간을 둘러
외지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 서울시 지방기념물 35호


한산초교입구에서 내시묘역길을 따라 자연에 묻힌 민가를 여럿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들어
서게 된다. 마치 자연휴양림에 들어온 듯,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이로운
기운을 아낌없이 베풀어 속세에서 오염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그 1폭의 수채화와 같은
오솔길을 가다 보면 조그만 늙은 비석이 활짝 마중을 나온다. 그 비석이 바로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이다. (줄여서 '경천군 송금비', '경천군 송금물침비'라 불림)

경천군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서예가 겸 역관(譯官)으로 이름은 이해룡(李海龍)이다. 본관
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으로 해서체(楷書體)를 꽤 잘 썼다고 하며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한호<韓濩, 한석봉(韓石峯)>에 필적하는 명필이라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어(倭語)에 능숙해 1588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사자관(寫字官)으로
왜열도에 갔다 왔으며 많은 글씨를 그곳에 뿌리고 왔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역관으로 왜군과의 협상테이블에 참여해 화평교섭에 힘썼으며, 1595년 중
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고 1602년에는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가 되었다. 선조(宣祖)
는 왜군과의 교섭에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치하하며 그를 경천군에 봉했으며, 지금의 백화사
북쪽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광해군(光海君)은 1614년 사패지(賜牌地, 제왕으로부터 받은 땅) 적당한 곳에 송금비를 세워
주었는데, 비문에는 큼지막하게 '慶川君 賜牌定界內 松禁勿侵碑' 13자가 쓰여 있다. 그 내용
은 경천군이 하사받은 땅에서 소나무를 벌목하거나 무단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으로 뒷면에
는 '만력(萬曆) 42년 갑인(甲寅) 10월'이라 쓰여 있어 1614년 10월에 세웠음을 알려준다.

▲  조성시기가 쓰여진 송금비 뒷면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비석에 쓰인 송금(松禁)은 나라에서 필요한 목재를 확보하고자 소나무가 많은 산을 선정해 보
호하는 것으로 고려 때 시행되었다. 이곳 송금비는 조선시대 임업정책의 하나인 송금 정책을
보여주는 산증인으로 400년이 넘은 나이에도 무탈하게 잘 남아있으며 조선 임업사에서 꽤 중
요한 유적이자 천하에서 딱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가치가 무지하게 높다. 그래서 2014년 뒤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받게 되었다. 이런 비가 2기가 있다고 하나 현재는 이
곳만 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숨바꼭질 중)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철책 사이로 잠겨진 문이 보일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숲으로 살
짝 몸을 숨기면 이곳의 주인인 이해룡의 묘역을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묘역은 경주이씨 묘역이
라 불린다.
고색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풍기는 비석 주위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 3개가 마
련되어 있다. 워낙 숲속이고 평일에는 인적도 별로 없어 바람의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가 이곳
을 이루는 소리의 거의 전부이다. 북한산둘레길이 닦이면서 비로소 그 존재를 속세에 내보인
존재로 만약 둘레길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둘레길이 많
은 숨겨진 명소를 속세로 꺼내주었음)

* 경천군 송금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  경천군 송금비에서 백화사로 이어지는 내시묘역길
중간에 의상봉과 용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손을 내민다.

▲  고품격 숲길을 자랑하는 내시묘역길 (백화사 직전)

▲  중골마을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0호

경천군 송금비에서 7~8분 정도 남쪽으로 가면 백화사(白華寺) 옆구리이다. 여기서부터 전원(
田園) 분위기를 지닌 중골마을(여기소마을)이 펼쳐지는데, 마을로 들어서면 늙은 느티나무가
바로 마중을 나온다.

이 나무는 높이 19m, 둘레 4.7m의 큰 나무로 추정 나이는 210년 정도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165년) 이곳은 이사문 내시 집안이 살던 곳으로 그 후손이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오늘도 시원한 그늘을 베풀어 자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  여기소(汝其沼)터 표석

백화사입구 정류장에서 백화사로 가는 길목 초입에 여기소터 표석이 있다. 여기소는 소(못)의
이름으로 지금은 실체는 없고, 이름만 남아있는데,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북한산(삼
각산)의 산바람을 타며 아련히 전한다.

조선 숙종(肅宗)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크게 증축했을 때 지방 관리로 있다가 공사 현
장에 파견된 관리가 있었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기생은 그를 보고자 먼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으나 공사 관계자
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너무 열받은 나머지 이곳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그런 사연으로 '너의 그 사람이 잠긴 못'이란 뜻에서 '여기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공사가 끝날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섣부른 행동을 했을까? 옛말에도 급하
면 돌아가라고 했거늘, 그 속담만 얌전히 지켰으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인데 말이다. 아마
도 꽤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북한산캠핑장 주변)
내시묘역길도 그렇고 북한산둘레길은 민가와 농장, 경작지, 개인 토지를 이리저리
피해가느라 우리네 인생처럼 굴곡이 좀 크다.

▲  쭉쭉 뻗은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  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

▲  마실길 북쪽 시작점

내시묘역이 없는 내시묘역길은 여기서 마실길로 간판을 바꾼다. 마실길은 방패교육대에서 진
관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으로 완전 평지 수준이며 북한산둘레길 구간 중 가장 짧
고 편한 길로 살랑살랑 거닐기에 아주 좋다. 하여 마실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코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숲길, 삼천사계곡, 진관사계곡, 숙용심씨묘표, 영산
군묘역, 화의군묘역, 진관동 느티나무 4형제 등의 명소가 있어 볼거리도 풍년이며 진관사(津
寬寺)와 삼천사(三千寺)도 가까워 자연과 산책을 겯드린 답사 코스로 아주 좋다.


▲  마실길 진관천 벼랑길

마실길을 들어서면 진관천 벼랑에 닦여진 나무데크길이 나온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
처럼 길을 낸 것으로 동쪽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벼랑이, 서쪽은 진관천이 삼
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물을 모두 머금으며 창릉천으로 흘러간다.


▲  수풀로 무성한 진관천(津寬川)과 벼랑길(마실길)
예전에는 이곳도 피서의 성지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요즘은 진관사계곡과
삼천사계곡 상류로 많이 넘어갔다.


진관천 벼랑을 통과한 마실길은 삼천사입구에 이른다.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늙은 마애불(
磨崖佛)을 지닌 절로 그곳이 당기면 잠시 둘레길을 놓아두고 갔다 와도 상관없다. (20~30분
정도 걸림)
삼천사입구에서 삼천사계곡 구간에는 농장과 식당이 여럿 있는데 식당 중간을 지나 삼천사계
곡을 건너야 다음 코스로 진행이 된다. 평일에는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맛있는 냄새가 아주 진
동을 하여 그 유혹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  마실길 돌탑 구간

삼천사계곡을 건너면 'S'자로 살짝 구부러진 길이 나오고 길 왼편으로 비슷하게 생긴 돌탑 4
형제가 마중을 한다. 이들 돌탑은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수식용으로 만든 것으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둘레길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준다.


▲  마실길의 오랜 터줏대감,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1호

돌탑을 지나면 울창한 모습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두 눈을 단단히 동여맨다. 그는 동
화 속 푸른 언덕이나 초원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나무로 나이는 약 170년에 이른다.
자꾸만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높이 18m, 둘레 4.2m에 큰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위치는 진관동 132-20번지로 북한산둘레길이 생기기 이전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삼천사와 진관사를 수없이 들락거린 나도
둘레길의 안내로 2012년 이후가 되어서야 그를 만났으니 앞서 경천군 송금비와 더불어 둘레길
이 캐준 소중한 보물이다.


▲  은행나무숲길 옆에 닦여진 돌탑들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숲과 돌탑이 나란히 있으니 마치 신성한 어딘가로
인도당하는 기분이다. 저곳을 지나면 신선이나 어느 영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북한산둘레길에 아름다운 풍경이 꽤 있지만 그중에서 5곳을 뽑는다면 이곳 은행나무숲길과 그
옆에 자리한 170년 묵은 느티나무를 강하게 꼽고 싶다.
이곳은 마실길의 백미(白眉)와 같은 곳으로 수목원이나 휴양림의 그림 같은 숲속길이나 산책
로를 거니는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든다. 느티나무 주변을 곱게 손질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
어 마실의 기분을 진하게 들게 했으며,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로 조촐하게 은행나무숲길을
내어 전남 담양(潭陽)의 명물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에 못지 않은 맵시를 자랑한다.

은행나무숲길은 북한산둘레길이 지나는 명소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홀린 곳으로 집으로 훔쳐
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보고 또 보고 누리고 싶다. 이런 곳에서는 정말 옛 사람들처럼 시 1수
흉내내야 운치가 나거늘, 시적(詩的) 감각이 떨어지고 인간의 하찮은 말과 언어로 자연의 아
름다움을 감히 표현하고 희롱한다는 것도 조금은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닐까 싶어 그냥 탄성만
질러본다.



 

♠ 마실길 끝에서 만난 문화유산들

▲  영산군 이전 묘역(寧山君 李恮 墓域) - 서울 지방기념물 26호

은행나무숲에서 진관사계곡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진관사로 인도하는 도로(진관길)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은 진관사로 이어지며, 서쪽은 은평한옥마을로 마실길은 바로 서쪽에 있는 3거리
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산자락을 가만히 살펴보면 무덤들
이 보일 것인데 그곳이 바로 영산군 묘역이다.

묘역에는 영산군 내외와 그의 아들인 장흥군 이상(長興君 李祥), 손자 이경의(李鏡義), 증손
자 이종(李琮) 등 4대가 묻혀있는데, 가장 위쪽이 묘역의 터줏대감인 영산군의 무덤이고, 제
일 밑이 이종의 무덤이다. 그 묘역으로 가려면 서쪽 3거리에서 마실길을 따라가다가 동쪽(오
른쪽)을 살펴보면 그곳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그 길을 오르면 된다.

묘역의 주인인 영산군 이전(1490~1538)은 조선 9대 군주인 성종(成宗)의 13번째 아들로 숙용
심씨(淑容沈氏)의 소생이자 연산군(燕山君)과 중종의 이복 동생이다. 그는 문무에 매우 능했
다고 하며 말을 매우 잘탔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 시절의 어느 날, 그는 연산군, 진성대군(晋城大君, 후에 중종)과 함께 도성(
都城) 밖 금표(禁標) 구역으로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다. 사냥을 마친 연산군은 무엇을 시험
하고자 함인지 진성대군에게
'나는 동대문으로 들어갈테니, 너는 남대문(南大門)으로 들어가라. 만약 나보다 늦게 도착하
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야!!' 이랬다.
그 말을 들은 진성대군은 크게 쫄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자, 영산군이 진성대군에게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제 말이 전하(殿下, 연산군)께서 타신 말보다 훨씬 빠르니 제
가 대신 하겠습니다'
말하면서 진성대군을 따라가니 말이 갑자기 나는 듯이 도망쳐버렸고, 도
성에 이르니 조금 후에 연산군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영산군이 나서준 덕에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끈 진성대군은 1506년 박원종(朴元宗)
과 성희안(成希顔), 홍경주(洪景舟) 등이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
에 올랐다. 후대 사람들은
'영산군은 중종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말했다고 하며 중종 자신도 연산군 시절 그에게 받
은 신세로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중종 시절 영산군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1538년 48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시호는 충
희공(忠僖公)으로 부인은 2명이 있었는데, 전처는 금릉군부인 청송심씨(金陵郡夫人 靑松沈氏)
이며, 후처는 교성군부인 경주정씨(交城郡夫人 慶州鄭氏)이다.

묘역은 북쪽과 서쪽 지형이 다소 바뀌고 신도비가 묘역 앞으로 이전된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은평뉴타운 개발의 삽질이 막 시작되던 2006년에 강제 이전될 처지에 놓였으나 다
행히 제자리를 지켰다.
16~17세기 왕족 묘역의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묘비(묘표)와 문인석, 상석(床石)의
상당수는 그 시절 것이라 가치가 상당해 2007년 2월에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
다. 또한 인근에 자리한 화의군 묘역과 달리 사당(祠堂)은 따로 없다.

▲  충희공 영산군 신도비(神道碑)
근래 마련된 신도비로 원래는 여기서
북서쪽에 있었다.

▲  이종(李琮) 내외묘와 묘비(墓碑)
영산군의 증손자인 이종의 합장묘로 근래
만든 묘비와 망주석을 지니고 있다.


▲  영산군의 손자인 이경의(李鏡義) 묘

이종 묘 바로 위에는 그의 부모이자 영산군의 손자인 이경의 내외의 무덤이 있다. 그는 창원
황씨 부인과 합장(合葬)되어 있으며 후처인 곡산노씨(谷山盧氏)는 옆에 따로 작은 무덤을 만
들었는데, 이종의 무덤과 달리 문인석도 1쌍 갖추고 있다.

▲  이경의 묘와 묘비

▲  복스러운 모습의 문인석(文人石)


▲  영산군의 아들인 장흥군 이상(長興君 李祥)의 묘

이경의 묘 바로 윗쪽에는 그의 부모이자 영산군의 아들인 이상 묘가 있다. 봉긋하게 솟아있는
왼쪽 봉분(封墳)에는 장흥군 이상, 오른쪽 봉분에는 죽산안씨 부인이 잠들어 있으며, 묘비는
근래 새롭게 만들었지만 상석과 혼유석은 16세기 모습 그대로로 고색의 때가 짙다.


▲  조촐한 모습의 영산군 묘

묘역 제일 위쪽의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하여 아들과 손자들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영산군 내
외의 무덤은 2기로 이루어져 있다. 묘비를 갖춘 왼쪽 묘는 영산군과 교성군부인 경주정씨(交
城郡夫人 慶州鄭氏)의 합장묘이고, 오른쪽은 금릉군부인(金陵郡夫人) 청송심씨의 묘이다.


▲  장대한 세월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3기의 비석

영산군묘 한쪽에는 3기의 비석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오른쪽의 작은 비석
이 초창기의 영산군묘 묘표(墓表)로 1538년에 지어졌다. 그 묘표가 노쇠하자 이수를 갖춘 비
석을 새로 장만하니 그것이 가운데에 있는 검은 피부의 비석이며, 그것 역시 세월을 예민하게
타자 지붕돌 비석을 새로 마련했다. 허나 그마저 지금 무덤 앞에 있는 비석에게 자리를 내주
고 현재 자리로 밀려나 한참이나 선배들인 비석들과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마치 3대가 나란히 기념촬영에 임하는 듯한 모습으로 오른쪽에 작은 묘표가 할아버지, 가운데
비석이 그의 아들, 그리고 지붕돌 비석이 손자 같다.


▲  영산군 옛 묘표의 이수(螭首) 부분
물결무늬 구름 사이로 이무기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장면이 담겨져 있다.

▲  영산군묘를 지키는 문인석

영산군묘는 호석(護石)이 없는 조촐한 봉분 앞에 상석과 묘표를 두고 그 앞에 장명등(長明燈)
과 문인석 1쌍을 두었다.. 홀(忽)을 쥐어들고 서로를 연모하듯 바라보는 문인석은 무려 480년
이 넘는 기나긴 세월에도 표정 하나 고치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무덤을 지킨다.

왼쪽 문인석(왼쪽 문인석 사진) 측면에는 3개의 구멍이 있다. 이들은 6.25시절에 구파발 지역
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흔적으로 북한군이 쏜 것으로 보이는 총탄 3개가 그의 몸을 가격해
저렇게 치유하지 못할 상처를 안게 되었다. 겉으로야 표정관리하며 태연하게 서 있지만 얼마
나 아팠겠는가.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될 그 전쟁은 이 땅의 사람 뿐만 아니라 말을 못하
는 저들에게도 무수한 비극을 안겼다.

* 영산군 이전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39


▲  숙용심씨묘표 주변

진관동 느티나무 3거리에서 진관사입구 교차로 방면(서쪽)으로 몇 걸음 가면 오른쪽에 '셋이
서문학관'이란 2층 한옥이 있다. 거기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낮은 철책이 둘러진 야트
막한 동산이 있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이 손을 내민다. 그 손에 이끌려 그 길을 오르
면 그 정상에 숙용심씨묘표와 제단이 있다.

숙용심씨(淑容沈氏, 1465~1515)는 성종(成宗)의 여러 후궁 중의 하나로 세조(世祖) 즉위에 큰
공을 세웠던 원종공신(原從功臣) 심말동(沈末同)의 딸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영산군을
비롯한 이성군(利城君), 경순옹주(慶順翁主), 숙혜옹주(淑惠翁主)등 2남 2녀를 두었으며, 내
명부(內命婦)의 4품인 숙원(淑媛)까지 올랐다. 1515년에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중
에 3품인 '숙용(淑容)'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심씨의 묘역은 분명 서울 근교 어딘가에 마련되었으나 그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잠겨있다.
조선시대 왕족의 무덤 중 거의 흔치 않게 무덤 위치가 날라간 것이다. 하여 산사태나 홍수 등
의 천재지변으로 갑자기 사라지거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실전(失傳)된 것으로 보이며, 그의
무덤 앞에 세웠던 묘표(묘비) 역시 500년 가까이 행방이 묘연했다.

이후 한참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 1999년 6월, 부산일보 동경지사장이자 한일역사공동연구학회
장으로 있던 최성규(崔性圭)가 우연히 왜열도 동경(東京) 미나토구(區)에 있는 '다카하시 고
레키요(高橋是淸) 기념공원'에서 이 묘비를 발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산군과 이성군파 후손들은 즉각 '묘비환원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왜국 정부
와 동경시에 묘비 반환을 요구했고, 주일(主日) 한국문화원과 한국대사관에서도 적극 그들을
도왔다. 그렇게 1년의 협상 끝에 동경시가 반환에 협조하여 2000년 6월 16일 비석이 있는 공
원에서 후손들과 미나토구청장이 반환 기념행사를 열었고, 7월 3일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허나 이 비석이 언제 어떤 경로로 왜열도로 넘어갔는지, 어찌하여 동경의 조그만 공원에 있게
되었는지는 전혀 전하는 것이 없다. 그 진실은 오직 비석만이 알 것이나 그 역시 묵비권을 행
사하고 있어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심씨의 묘역을 파괴한 왜군이 가져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비석을 되찾은 영산군과 이성군 후손들은 영산군 묘역 맞은편 북한산(삼각산)이 잘바
라보이는 언덕에 자리를 닦아 사라진 묘역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낼 제단(祭壇)을 쌓고 그 위
에 이 묘비를 안착시켰다.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 등 제사에 필요한 시설을 세워 매년 제사를
지내면서 늘 주변을 손질하는 등 각별하게 관리를 하고 있다.

심씨의 무덤은 거의 영구적으로 사라졌고 묘표에도 그 위치가 나와있지 않다. 그 묘표마저도
다른 나라로 넘어가 자칫 공원의 미아로 그렇게 썩을 뻔했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발견되어 고
국으로 돌아와 아들의 묘역을 마주보고 있는 곳에 둥지를 틀었으니 심씨도 이제 그 한을 풀고
지하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을 것이다.

숙용심씨묘표는 이런 우울한 사연으로 망향의 묘비란 별명을 지니고 있는데, 그와 함께 2005
년 겨울, 동경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서 우리나라를 통해 고향인 함경북도로 돌아간 정문
부(鄭文孚) 장군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도 다시 되찾기까지 그 과정은 가히 한 편의 영
화와 같았다. 다른 나라로 빼돌려진 문화유산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많
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야 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귀중한 유물이라 하겠다.
이들은 그래도 고국으로 돌아와 거의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이
다. 그런 케이스는 아직 흔치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의 수많은 문화유산이 고국을 꿈
꾸며 타국살이를 전전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될 것이며 언젠가는 그들을 싹 되찾아와야 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국력을 증강시켜
돈으로 밀어부치거나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되찾아오는 것이지만 우리 국력에 그것도 쉽지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구의 평화와 고토(故土) 수복을 위해 왜열도와 중원대륙, 만주를 공격하게 된
다면 그곳에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 외에 그들의 문화유산과 보물도 싹 긁어왔으면 좋겠다. 더
불어 지구 정화를 위해 오랑캐들도 싹 청소 좀 하고 말이다.


▲  유리막에 감싸인 숙용심씨묘표(서울 지방기념물 25호)
비석이 작고 이곳이 바깥이라 도난의 위험이 늘 도사린다. 하여 두껍게 유리막을
씌워 그를 보호하고 있다. 비석 입장에서는 좀 답답하겠지만 그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가 없으니 이런 걸 두고 필요악이라 하는 모양이다.


숙용심씨묘표는 비신(碑身)과 머릿돌(이수)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 비신에는 해서(
楷書)로 '숙용심씨지묘(淑容沈氏之墓)'라 쓰여 있는데, 글씨의 크기가 깨알같이 작아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보일 것이다.
비석이 꽂힌 비좌(碑座)는 특이하게 2단으로 이루어져 통비(通碑)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2단으로 된 비좌는 이 땅에서 이 묘표가 거의 유일하다. 그러니 그의 가치와 의미는 꽤 남다
른 것이다. 비좌 밑에는 연꽃잎이, 위로는 복련(覆蓮)이 새겨져 있으며 그 측면에는 안상(眼
象)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비석 뒷부분에는 앞면과 달리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다.


▲  숙용심씨묘표 이수 앞부분

이수에는 화려해 보이는 무늬들이 잔뜩 새겨져 속세에서 오염된 두 눈을 호강시킨다. 그 무늬
는 꽃잎이나 소용돌이처럼 생긴 구름무늬로 그 무늬 사이로 뿔과 수염이 달린 이무기(반룡)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얼핏 보면 좀 복잡해 보여서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살펴보면 하나, 둘 보일 것이다.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이무기의 모습이.

비석의 머릿돌(이수)에 구름무늬가 나타난 것은 조선 초부터로 이곳처럼 구름무늬와 용이 함
께 새겨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니 그만의 매력을 가진 개성이 넘치는 비석이다. 이건 지방
기념물에 둘 것이 아니라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보물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흔치
않은 사연에 2단으로 된 비좌, 그리고 구름무늬와 용이 같이 새겨진 이수까지, 겉은 조그만
비석이지만 대충 넘기기에는 그의 존재는 너무나 크다.

* 숙용심씨묘표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26


▲  구름무늬로 가득해 침침한 두 눈을 빙빙 돌게 만드는 이수의 뒷부분
구름무늬가 내소사(來蘇寺) 대웅전의 꽃창살과 많이 닮았다.

▲  2001년에 세워진 숙용심씨묘비 환원기념비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아주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허나 거의 한자 투성이에 문단 간격도
아주 각박하여 읽기가 좀 고통스럽다. (오늘도 고통받는 나의 두 망막)

이렇게 하여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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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의 상큼한 뒷동산, 호암산 봄나들이 <호암산성, 석구상, 제2한우물, 신랑각시바위,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 둘러보기 (호암산성, 석구상, 한우물, 신랑각시바위, 칼바위 등)



' 금천구 호암산 봄나들이 '

호암산

▲  호암산

호암산 신랑각시바위 제2한우물터

▲  호암산 신랑각시바위

▲  호암산 제2한우물터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끝 무렵, 서울 서남쪽에 누워있는 호암산(虎巖山, 393m)을
찾았다.

호암산은 나의 오랜 즐겨찾기 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아 나의 마음을 꾸준하게
비추고 있다. 20대의 한복판이던 2002년 가을에 첫 인연을 지은 이후, 무려 100회 이상을
오갔으나 뒤를 돌아서기가 무섭게 그가 간절해진다.
나의 마음을 오랫동안 들었다 놓은 호암산은 서울 금천구(衿川區)와 관악구, 경기도 안양
시에 걸쳐있는 뫼로 산세(또는 산에 있는 바위)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이
름을 지니게 되었다. 금천구 시흥동(始興洞) 지역을 중심지로 삼았던 옛 금천<衿川, 시흥
(始興)> 고을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주산(主山)으로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뫼이나 풍수지리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더
불어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오랫동안 인식되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그들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호암산 밑에 절(호압사)을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
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호암산에는 신라 중기에 조성된 호암산성을 비롯하여 한우물과 제2한우물터, 석구상 등의
늙은 문화유산과 호압사(虎壓寺), 약수사, 불영암 등의 오래된 절, 서울에 대표적인 천주
교 성지로 꼽히는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가 있으며, 호암산폭포와 시흥계곡, 호암산잣나
무산림욕장 등의 싱그러운 자연 명소를 품고 있다.
또한 호랑이를 닮은 바위 뫼에 걸맞게 정상부와 서남쪽 능선, 돌산 능선에 잘생긴 바위들
이 잔뜩 포진해 있어 바위 구경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조망도 일품이라 서울의 상당수 지
역과 북한산(삼각산), 안양, 광명, 부천, 인천, 서해바다, 심지어 멀리 파주와 개성 지역
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호암산 정상부와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잠시 각박할 뿐, 그 잠깐의 고생만 감내하면 부드
러운 능선길과 국보급 조망이 두 망막과 마음, 다리를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 서울둘레길
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가 호암산 자락을 가로질러 흘러가며, 잣나무산림욕장을 중
심으로 호암늘솔길이 싱그럽게 닦여져 있어 산은 비록 작지만 매우 알찬 팔방미인 뫼이다.
이러니 내가 호암산에게 단단히 퐁당퐁당 빠진 것이다.



 

♠  석구상과 호암산성(虎巖山城) 북문터 주변

▲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

이번 호암산 나들이는 호암산 북쪽 자락에 안긴 약수사(藥水寺)에서 시작했다. 약수사를 둘러
보고 서울둘레길5코스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에서 남쪽 산길을 통해
민주동산(깃대봉)과 호암산 정상으로 이동했다. (약수사와 호암산 정상은 별도의 글에서)

호암산 정상에 올라 발 아래 펼쳐진 서울과 주변 지역을 굽어보며 일품 조망을 배불리 누리다
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넘어갔다. 호암산에 오면 꼭 남쪽 봉우리는 들리는 편으로 그곳에는
한우물과 석구상, 호암산성 등의 늙은 명소가 깃들여져 있고, 불영암 등의 절과 신랑각시바위
, 칼바위, 호암산폭포 등의 자연 명소도 듬뿍 들어있어 그야말로 호암산의 보물창고 같은 곳
이다.

호암산 정상부에서 남쪽 봉우리까지는 부드럽게 이어진 서남쪽 능선길의 연속으로 그 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산길 곳곳에는 이름 없는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안양시와 수리산(修理山)
호암산과 삼성산, 수리산 사이에 극락정토를 뜻하는 안양시(安養市)가
포근히 뉘어져 있다.

▲  부드럽게 펼쳐진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

▲  호암산성 북문터 (북쪽 모습)

호암산 서남쪽 능선을 더듬어 남쪽 봉우리로 올라서면 금줄이 둘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석구상 북쪽으로 근래 이곳이 호암산성 북문(北門)터로 확인되면서 북문터 보존을 위해 금줄
을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그 서쪽에 계단식 우회길을 내었다.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들어서면 꼭 거치던 곳이었는데, 그동안 밟고 지나갔던 그곳이 북문터
였다니 새삼 놀라고 말았다.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모습)

호암산 남쪽 봉우리(347m) 정상부에 호암산성의 흔적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성(石城)으로
조성되었는데, 축성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안쪽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
)을 사용했다.
예전에는 산성 둘레를 약 1,250m, 남아있는 길이는 300m로 보았으나 2018년 이후 새로운 곳이
발견되어 산성 관련 자료가 크게 업데이트되면서 산성 둘레는 약 1,547m, 남아있는 것은 약
1,016m, 산성 면적 133,790㎡로 확장되었다.

1990년 봄, 호암산성과 한우물 일대를 조사하면서 우물터 2곳과 건물터 4곳이 발견되었고, 무
려 6,500여 점에 이르는 토기와 다양한 유물(청동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이 쏟
아져 나왔는데, 특히 신라 중기 것이 많이 나왔다. 하여 신라 중기인 6세기 말~7세기 초에 군
사기지 및 행정 치소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672년에 쌓았다는 설
도 있다. 그 시절 신라는 당나라를 때려잡으며, 옛 고구려(高句麗, 고구리) 땅의 일원인 요동
(遼東)과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산성 서쪽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바라보이고, 북쪽으로 한강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잡
힌다. 그래서 서해바다와 한강, 내륙을 잇는 요충지로 중요시되었으며, 양천고성(陽川古城,
서울 가양동)과 행주산성(幸州山城), 오두산성(파주시)를 잇는 거점 성곽으로 보고 있다.

고려 때는 한강과 서해바다를 살피는 요충지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그
런데로 밥값을 했다. 특히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
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에서 왜군을 때려잡은 권율(權慄)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자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을 쳤는데,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면서 서울 수복 작전을 펼쳤다. 호암산은 서
울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로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
름이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현재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
성은 관리 소홀과 대자연의 무심한 장난, 덧없는 세월의 무게까지 더해져 서서히 녹아내렸고,
산꾼들의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산성 내에 늙은 존재로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 건물터, 석구상이 있으며, 불영암
이란 작은 절이 있다. 성곽은 동벽이 그나마 잘 남아있고, 북문터 주변과 서문터 주변, 남문
터 주변에 조금씩 남아있다.
특히 2018년 이후 발굴조사에서 석구상 주변에서 북문터, 석수역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능선에
서 남문터, 불영암 남쪽 가파른 곳에서 서문터가 새롭게 확인되어 3개의 성문(城門)이 있었음
을 알려주고 있으며, 대자연에 묻힌 채, 강제로 숨바꼭질을 하던 성벽 흔적을 많이 건져내었
다. 이들 성문터와 성벽 흔적은 예전부터 수없이 지나쳤던 곳인데 그곳이 산성의 흩어진 흔적
이자 살점이었던 것이다.

호암산성은 석구상과 한우물, 제2한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서울 호암산성터'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343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호암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8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높은 곳에는 호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는 석구상이 있다. 사방을 난간
으로 두룬 기단 위에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엽게도 앉아있는데, 지금은 석구상으로 통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광화문(光化門)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와 호암산 기
운으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
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
南七里)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석구상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석구상의 위엄

석구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해태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해태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
습 같기도 하나 양과도 비슷해 보이며,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한다. 하여 보면 볼수
록 답이 없는 기이한 석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는 길
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랑지와 비슷해 손으
로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후기로 보인다. 그는 정확
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으며, 그를 만든 이유도 속시원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산꾼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성 터져 나오며,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적지 않게 웃음을 준다.


▲  석구상의 귀여운 뒷부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  석구상 남쪽 호암산성 동벽

석구상을 지나면 인공티가 팍팍 느껴지는 약간 부풀어오른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이 바로 호암
산성의 동벽(東壁) 흔적이다. 예전에는 수풀에 감싸여 있었으나 성곽을 무수히 깔고 앉던 수
풀을 싹 쳐내고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으며, 석구상 바로 남쪽 성곽에는 나무데크길을 씌워
놓아 헝클어진 성곽을 보호한다. 그리고 성곽 서쪽에는 제2한우물과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산
길이 넓게 자리한다.

크고 견고했던 성곽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2m 내외로 움푹 낮아졌고, 산길로 변해버린
산성 동벽에는 성돌이 이리저리 박혀 단단한 성곽을 이루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숲 그늘에 자리한 호암산성 동벽
고된 세월에 많이 초췌해진 산성 동벽이 그런데로 산성의 모습을
풍기며, 건물터 부근까지 이어진다.

▲  호암산성 동벽 (남쪽 방향)

앉은뱅이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1.5km 구간 중 석구상에서 건물터 동북쪽 벼랑에 이르는 동벽
이 그나마 상태가 좋다. 비록 산성은 헝클어진 상태이나 성곽 밑은 크게 각이 진 벼랑급이라
성곽길을 음미하면서 걸을 경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안전시설도 전혀 없음)


▲  호암산성 동북쪽 벼랑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호암산성 건물터 동북쪽에는 일품 조망을 지닌 큼직한 바위들이 여럿 있다. 이곳은 호암산성
동벽 구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바위 너머로 호암산 동남쪽 능선과 장군봉, 삼성산
(三聖山), 관악산(冠岳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은 정말 예술이다.
허나 장미꽃의 가시처럼 바위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보기만 해도 염통을 제대로 쫄
깃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산성을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하늘의 요새 같은 낭떠러지라 그 존재
자체로도 인공적인 성곽보다 훨씬 든든하다.



 

♠  제2한우물터에서 호암산성 남문터까지

▲  호암산 제2한우물터

석구상, 북문터에서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서남쪽 능선길을 3~4분 정도 가면 제2한우물터와 건
물터가 황량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호암산성 동벽 산길로 가도 나옴)

제2한우물터는 남북 18.5m, 동서 10m 이상, 추정 깊이 2m에 이르는 커다란 사각형 우물 유적
이다. 길이 50cm, 너비 35cm, 높이 25cm 크기의 화강암을 '臣'자 모양으로 10단(높이 1.75m)
까지 쌓았는데, 2번에 걸쳐 15cm 정도 물려 쌓은 형태가 확인되었다.
우물 바닥과 석축 쌓기 방식, 석재의 크기와 모양, 전체적인 모양새 등은 북서쪽 밑에 있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비슷하며, 여기서는 신라 중/후기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제 숟가락이 햇
살을 보았는데, 숟가락에는 정말 고맙게도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내용은 '仍伐內力 只來(잉
벌내역 지래)..'로 여기서 잉벌내(仍伐內)는 고구려 시절 금천 지역의 지명으로 여겨지는 잉
벌노(仍伐奴)와 비슷해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6세기 이후에도 그 이름은 유지했던 것으로 보
인다.


▲  상큼하게 봄옷을 입은 제2한우물터 (남쪽에서 본 모습)

산꼭대기에 커다란 우물이 1개도 아닌 2개씩이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이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큰
우물을 2개나 둘 정도로 물이 풍부했음을 알려준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장난으로 제대로 헝클어져 땅
속에 잠겨있던 것을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 꺼내놓았는데, 복원된 제1한우물과 달리 복원은
하지 않고 잡초가 무성한 자연 상태로 두고 있어 조금은 우울한 모습이다. 우물터 곳곳에는
우물을 구성하던 돌이 널려있으며, 복원 계획은 예전부터 나오고는 있으나 구체적인 것은 없
다. 허나 제1한우물이 복원되었으니 제2한우물은 어설프게 복원하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진리라고 본다. 대자연의 일부로 녹아내린 현재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으며 현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  옆에서 바라본 제2한우물터
돌로 다진 석축이 없었다면 자연산 늪지대로
봐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만큼
이곳은 대자연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  제2한우물터에 모여있는 수분들
비록 흔적만 남은 늙은 우물이나 비가 내린 이
후에는 약간씩 물이 고여 이곳의 본분을 조금
이나마 회복한다.
하지만 우물터는 제대로 흩어진 상태라 식수는
곤란하며, 우물터 주변 수풀들이 이 물에 의지
해 살아가 늪지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  호암산성 건물터

제2한우물터 동쪽에는 건물터가 수풀을 뒤집어 쓰며 조용히 누워있다. 여기서는 시기가 다른
건물터들이 중복되어 확인되었는데, 제일 처음에는 기단(基壇)을 지닌 건물이 자리했다. 이
건물은 신라 중/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세월에게 잡혀간 이후, 23x27m 범위에
서 기존 건물터의 초석을 옮기고 평지를 닦은 다음, 새로운 건물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신라 후기 기와편과 글씨가 새겨진 기와 등, 많은 기와들이 햇살을 보았으며, 축조
시기가 아리송한 문비석(門扉石)과 네모꼴의 석렬, 외곽의 자취가 확인되었으나 이곳에 깃든
흔적들이 워낙 복잡하여 건물터의 정확한 규모와 형태,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다만 이곳이 호암산성 내부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산성을 관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장
수와 군사들의 숙소로 여겨진다.


▲  호암산성 건물터 주춧돌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건물터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오랫동안 상실한 채,
윗도리가 묵직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호암산 신랑각시바위(사랑바위)

제2한우물터에서 석수역 방향 서남쪽 능선길을 6~7분 내려가면 호암산성 남문터가 나온다. 이
곳 직전 서쪽에 천하를 굽어보는 조망대가 있는데, 남문터는 잠시 접어두고 그 조망대로 내려
가보자. 한참 내려갈 것도 없이 성벽터 경사에 닦여진 계단만 내려가면 끝으로 거기서 오른쪽
(북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신랑각시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반갑게 눈인사를 건넬 것이다.

호암산은 호랑이를 닮은 바위 뫼에 걸맞게 잘
생긴 바위와 벼랑이 많다. 신랑각시바위도 호
암산을 수식하는 명품 바위의 하나로 사람 손
과 발이 닿기 어려운 벼랑에 우뚝 솟아 금천구
를 비롯한 천하를 굽어본다.
그는 오랫동안 사랑과 혼인, 심지어 아들까지
얻게 해준다는 특별한 바위로 지역에서 명성이
자자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아련히 전하
고 있다.

▲  신랑각시바위 조망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익히기 전인 한참 옛날, 금천 고을(시흥동)에 잘생긴 총각과 아리따운 낭
자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집안은 대대로 원수
관계라 부모가 쌍수를 들고 교제를 반대했다. 하여 서로 불이 난 자식들을 떼어놓고자 다른
곳에 혼인을 시키려 했고, 이에 뚜껑이 뒤집힌 낭자는 깊은 밤에 가출하여 호암산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

이를 늦게 안 총각은 낭자를 찾으러 서둘러 호암산으로 올라갔는데, 이미 날은 어두워진 상태
였다. 허나 다행히도 산중턱 절벽 위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낭자를 발견, 그녀에게 달려가 서
로 격하게 껴안으며 하염없이 눈물즙을 짰다.
그들은 달님에게 세상 끝까지 함께 하겠다며 기도를 올리고 밤을 지샜는데, 이를 엿들은 달님
은 신통력을 부려 서로 마주보며 우뚝 선 바위로 만들어버렸다. 달의 친절한(?) 배려 덕에 영
원히 같이 있게는 되었으나 문제는 돌이라는 것. 혼인은 커녕 움직일 수도 없고, 숨도 못쉬며
, 아주 중요한 예민한(?) 짓도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해피엔딩인지 그 반대인지 솔직히 판단
이 서질 않는다.

어쨌든 그 전설로 인해 이 바위는 사랑바위, 신랑각시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호암산
그늘에 사는 선남선녀들이 이곳을 찾아 손을 맞잡고 사랑을 고백하면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한
다. 또한 혼인을 하여 여기서 기도를 하면 옥동자까지 얻을 수 있었다고 하며, 늙어 죽을 때
까지 백년해로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물론 전설의 내용처럼 그들이 바위로 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집을 뛰
쳐나와 여기서 사랑을 굳게 다짐하고 인근 산속이나 머나먼 곳에서 살림을 차려 잘 먹고 잘
살았거나 아니면 현실을 비관해 같이 벼랑 아래로 뛰어내린 것으로 보이며, 그 사연이 바위에
씌워져 사랑과 관련된 바위로 포장되었을 것이다.


▲  확대해서 바라본 신랑각시바위의 위엄
호암산 서남쪽 능선 서쪽 벼랑에 자리해 있어 서쪽과 북서쪽이 확 트여있다.
하여 일품 바위와 함께 일품 조망까지 덩달아 누릴 수 있다.

▲  신랑각시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동과 독산동, 가산동 등 금천구 지역과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시 지역이 흔쾌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호암산성 남문터 주변 서쪽 남벽(南壁)터

신랑각시바위 동남쪽에는 호암산성 남문터가 있다. 신랑각시바위 관람용으로 지어진 조망대도
산성 성벽터에 닦여진 것으로 이곳은 석수역에서 호암산, 삼성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산꾼
들의 발길이 무척 잦다.
나도 이 코스를 여러 번 탔었으나 산성의 흔적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근래 발굴조사에
서 교묘하게 숨바꼭질을 벌이던 남문터와 주변 성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그들을 보존하
고자 기존 산길에는 금줄을 치고 서쪽에 나무데크 계단길을 내었으며(남문터 동쪽에도 오르는
길이 있음) 호암산성 안내문과 안내도를 설치했다.

▲  일부만 남아있는 호암산성 남벽

▲  남문터 서쪽 남벽터

푸르게 우거진 나무와 황토색 흙 사이로 고된 세월에 지친 남벽 성돌이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며 이곳이 옛 산성이었음을 애써 속삭인다.

▲  호암산성 남문터
인공티가 느껴지는 돌들의 무리가 여기저기 모여있으니 그들이 호암산성과
남문을 이루던 성곽의 흔적들이다. 뒤늦게 세상에 잡힌 그들의 보존을
위해 기존 산길에 금줄을 치고 옆에 우회길을 내었다.

▲  경사를 따라 층층이 주름진 남문터

이곳은 오랫동안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로 바쁘게 살았다. 커다란 바위와 인공티가 다소 느껴
지는 층층이 둘러진 둘들은 이곳이 예사로운 장소가 아니었음을 오랜 세월 동안 눈치를 보냈
으나 나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무더기로 여기고 무심히 지나쳤다.
허나 그들이 글쎄 호암산성의 숨겨진 흔적들이었다.
그냥 돌무더기가 아닌 늙은 호암산성의 흔적이라니 그들이 정말 180도 달라 보인다. 사람에게
는 옷이 날개이듯, 돌에게는 문화유산 경력이 날개인 모양이다.


▲  호암산성 서남쪽 성곽터

남문터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아직 확인을 하지 못한 서남쪽 성곽길을 쫓아갔다. 이 성
곽길은 서남쪽 능선 서쪽 벼랑을 따라 이어지며 서서히 능선길과 멀어진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숨겨진 길이나 성곽터가 얇게 이어져 있고, 사람들의 발길도 이미 적지 않게 들어간 상
태라 그런데로 길 티를 낸다.
벼랑 구간이 많으나 괜찮은 조망지가 많아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지역이 늘 시야에 따라와
두 망막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며 그 길을 계속 따라 가면 서문터 뒤쪽으로 이어진다.


▲  호암산성 서남쪽 성곽터에서 바라본 천하
금천구 지역과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지역

▲  산성 안쪽에서 바라본 호암산성 서문터 (추정 서문터)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산길에 서문터가 있다. 허나 아직까지는 확
신이 부족하여 '추정' 2자를 붙여 회피 조건을 붙이고 있는데, 주변 지세를 보면 이곳이 성문
터는 맞는 듯 싶다. 성문이라고 해서 문루(門樓)까지 달아서 크게 지을 필요는 없으며, 조그
만 암문(暗門) 형태로도 충분하다.
산성 밑으로 난간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그 길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불영암~시흥동 산
길이며, 희미하게 남아있는 산성 흔적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바로 불영암 뒷쪽으로 이어진다.
남문터에서 서남쪽 성곽과 서문터 안쪽을 거쳐 불영암을 바로 잇는 길을 새로 개척하여 호암
산 정보력과 경험치를 크게 살찌웠으니 이번 호암산 복습 산행의 성과가 실로 크다.



 

♠  호암산 한우물, 불영암(佛影庵)

▲  북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호암산성 북문터에서 서남쪽 길로 내려가면 한우물과 불영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우물은 석
구상과 더불어 호암산의 오랜 명물로 한우물이란 큰 우물을 뜻한다. 하여 천정(天井), 용복,
용초 등에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고, 마땅한 수원(水源)이 없음에도
물은 늘 넉넉하게 나온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해 신비로움을 준다.

이 우물은 신라가 호암산성을 닦던 7~8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물 자리 밑
에서 7~8세기 우물(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못의 규모는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였다. 이후 조선 때 서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겨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
의 장방형 못(우물)을 구축했다.
허나 조선 후기 이후, 호암산성과 함께 버려져 제대로 망가진 것을 1991년 2차 보수 정비공사
때 신라 우물터와 조선 우물터를 혼합하여 복원했다. 하여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은 신라 때 우
물 자리이며, 수풀이 자라는 남쪽 부분은 조선 때 우물 자리이다. 또한 동쪽 산정에도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우물 유적이 있는데, 그를 제2한우물, 불영암 옆에 있는 이곳을 제1한우물이
라 부르기도 한다.
 
1990년 봄, 한우물 2개를 발굴하면서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
서 '仍伐內力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제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
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 때 유물이 많이 나왔다.


▲  윗쪽에서 바라본 한우물의 위엄

임진왜란 시절인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썼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있어 일찍
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상시와 전쟁 때는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려준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득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여기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나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딱히 손은 대지 않는다. 우
물에 가득 모인 수분은 식수가 아닌 우물을 채워 연못 분위기를 내는 원초적인 역할을 할 뿐
이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 등의 수풀이 둥지를 틀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우물 주위로 돌난간과 철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호암산 한우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한우물의 깊은 속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우물을 거울로 삼으며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한우물과 불영암은 서쪽과 북쪽이 확 트인 벼랑에 자리해 있어 천하를 조망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하여 여기서는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강서구, 양천구, 한강 이북에 서울 서북
부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광명시, 부천시, 인천 지역은 물론 대기가 좋으면 서해바다와 고
양시, 파주시, 심지어 개성(開城) 지역까지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한다.
그리고 한우물 주변과 한우물조망대에는 의자가 여럿 있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을 굽어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독산동, 가산동 등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지역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②
호암산 북쪽인 목골산과 금천구,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한강 너머의
서울 서북부 지역,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 밑이자 한우물 옆에는 불영암이란 작은 암자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한우물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
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인데, 가파른 벼랑에 자리해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
고 있어 호압사나 시흥동 벽산아파트,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띈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
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여기서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그런 것을 보면 오랫동안 승려의 기도 수행처로 쓰였던 듯 싶으며, 호암산성 서벽에 위
치해 있고, 조망도 우수하여 산성을 지키며 속세를 살피던 망대(望臺)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100년 이상 묵은 절들은 자신들의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내걸지만 이곳은 그런
것이 일절 없어 20세기 중반 이후 지금의 절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무지 짧은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물이 전부이
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하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
게 불리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가 않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어 물 수급은 어렵지 않으며,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우물과 천하를 향한 일품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서 절을 세웠을 것이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조촐한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
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늙은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두어 볼거리를 잠시 늘
리기도 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음)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
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가 봉안되어 있어 이곳의 새로운 명물을 꿈
꾼다.

*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02-809-3754)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남쪽 방향)

    ◀  간단하게 이루어진 불영암 범종각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의 보
금자리이다. 매일 6시와 18시가 되면 잠든 범
종을 흔들어 깨우는데, 그 종소리가 호압사는
물론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까지 널리 울려퍼
진다.

▲  돌탑과 오색연등이 늘어선 불영암 앞길
(한우물 방향)

▲  산신 할배의 공간인 산신각

            ◀  산신각 산신상
대웅전 뒤쪽 벼랑에는 산신 식구를 머금은 산
신각이 달려있다. 불영암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곳으로 벼랑에 목재로 대를 쌓고 그곳에
1칸짜리 산신각을 닦았는데, 보통 산신 가족은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이 전부이나 이곳
은 특이하게 사슴까지 겯드려 놓았다.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는 2009년에 마련된 석불이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
에 커다란 머리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머리 주
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을 주나 세월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
치 불상에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 듯하며, 석불 머리 옆에는 산신각이 달려있다.


▲  불영암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밑에 불영암 경내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시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두 망막을 제대로 흥분시킨다.
한우물과 불영암 구역에서 제일 높은 곳이자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니 한우물에 왔다면 이곳
에 꼭 들려 국보급 조망을 덤으로 누리기 바란다.


▲  호암산성 서문터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 방향 산길을 조금 내려가면 앞서 지났던 서문터가 다시 마중을 한
다.
앞서에는 산성 안쪽에서 서문터와 불영암~시흥동 산길을 내려다봤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가 되
어 산성 바깥에서 이렇게 올려다보는 입장이 되었는데, 호암산에 오면 거의 이 코스로 내려가
는 편이었다. 예전에는 호암산성이 여기까지 팔을 뻗을 줄은 생각도 못 하였고, 아직 추정이
긴 하나 이곳에 성문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안했는데, 여기서 성곽과 성문터가 버젓이
나온 것이다.


▲  호암산성 서문터와 돌탑 하나

서문터는 각박한 경사지에 자리해 있고, 좌우로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감히 기웃거릴
수 없는 천험(天險)의 자리이다. 남문은 여기보다 지형이 약간 좋으나 역시 공격에 불리하며,
북문도 능선에 자리하나 적들이 호암산 정상부를 점령하고 치고 들어올 경우 수비가 약간 힘
들 수 있다.

서문터를 둘러보고 칼바위와 호암산폭포를 거쳐 시흥동 벽산아파트로 내려갔다. 이번 호암산
나들이는 약간씩 남아있던 미답 공간과 새로 발견된 호암산성의 숨겨진 부분을 크게 들추는
성과를 거두며 기분 좋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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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만연산, 만연산 오감연결길, 만연사 늦가을 나들이 <만연폭포, 큰재, 만연저수지>

화순 만연산(만연사)



' 화순 만연산 늦가을 나들이 '
만연산 오감연결길
▲  만연산 오감연결길
 


 

가을이 늦가을로 익어가던 가던 10월의 끝 무렵, 광주(光州) 동남쪽에 자리한 전남 화
순(和順)을 찾았다.
이번에는 남동임해지역 일행들과 같이 가기로 했는데, 만연산 큰재에서 10시에 만나기
로 했다. (그들은 남동임해지역, 나는 서울에서 출발) 그 시간을 맞추려면 1박이 아닌
이상은 비행기나 고속열차를 타야 되는데, 하늘길은 첫 비행기가 9시대라 부득불 고속
열차를 타야 된다.
그래서 수서역 출발 SRT 고속열차를 타고자 햇님이 출근하기가 무섭게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서울 남쪽 끝부분에 매달린 수서역으로 이동, 목포(木浦)로 가는 SRT 첫 차
에 나를 담았다.

열차는 오송역, 익산역, 정읍역을 거쳐 1시간 30여 분 만에 광주송정역으로 나를 고스
란히 옮겨 주었다. 여기서 광주1호선을 타고 광주 도심을 가로질러 소태역으로 이동하
여 화순으로 가는 광주152번(전남대치과병원↔화순 도웅리)을 타고 너릿재터널을 넘어
화순읍내로 진입, 화순우체국에서 하차하여 만연산이 보이는 북쪽으로 15분 정도 걸으
니 신기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서 큰재로 이어지는 안양산로를 들어서면 만연폭포로 인
도하는 시골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여기서부터 만연산 더듬기가 시작된다.


 

♠  만연산(萬淵山) 둘러보기 (만연폭포, 큰재, 오감연결길)

▲  만연산으로 인도하는 유천리 시골길

만연산(해발 668m)은 화순읍내의 든든한 뒷산으로 무등산국립공원의 일원이다. 북쪽으로 무등
산(無等山)과 이어져 있으며 산세는 완만하고 숲도 짙다. 서남쪽 자락에는 만연사가 안겨있는
데, 그곳 창건설화로 인해 나한산(羅漢山)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물맞이 명소로 유명한 만
연폭포가 큰재 밑에 숨어있고, 만연산 물을 먹고 자란 만연저수지가 산 밑에 누워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이 산은 숲과 둘레길을 닦아 건강을 주제로 한 이름을 붙여 속세에 내놨는데 만연사 주변 숲
을 다듬어 '치유의 숲'이라 하였다. 또한 '건강회복숲','건강오름숲' 등의 숲과 '오감연결길
(3.1km)','치유숲길(3.3km)','만연산숲길(1.4km)' 등의 둘레길을 다져 천하에 크게 어필하고
있다. 또한 큰재 북쪽에는 만연산 산림공원(철쭉공원)이 닦여져 있어 '한국의 알프스'란 별명
을 지니고 있으며, 봄철에는 철쭉의 향연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  만연폭포로 가면서 바라본 화순읍내
읍내 한복판에 발을 내딘 것이 정말 몇 분 전 같은데 그새 읍내와 저만치
떨어져 버렸다. 내가 정말 저기서 왔는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다.

▲  글씨가 또렷한 만연폭포 비석

▲  만연폭포 돌담 바깥


▲  인공티가 진한 만연폭포(萬淵瀑布)

화순 땅에서 만연폭포가 제법 이름이 있어서 잘생긴 자연산 폭포라 여기고 기대를 했으나 정
작 와보니 물맞이 장소로 지어진 조그만 인공폭포가 나를 맞이했다. 처음에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 거렸으나 그 폭포가 맞았다. 얼마나 허무감이 들던지 새벽 일찍
부터 부산을 떤 보람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다. 허나 어찌하리오. 이것도 엄연한 폭포이니 있
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는 없다. (만연폭포 도착시간은 8시 40분 정도)

나에게 허탈감을 선사했던 만연폭포는 만연산 남쪽 끝 170m 고지에 걸려있다. 인근 계곡물을
가져와 10m 정도의 폭포를 다지고 그 밑에 물맞이와 목욕 공간을 닦았다. 남자용과 여자용이
분리되어 높이 2m 이상으로 담장이 쳐져 있으며 옷을 갈아입는 공간도 설치되어 있다. 옛날부
터 물맞이 명소로 유명해 신경통 환자와 노인들이 많이들 찾고 있고 물이 차갑고 숲속에 짙게
잠겨 있어 피서의 성지(聖地)로도 존재감이 크다.
허나 약간은 쌀쌀한 늦가을 아침이라 폭포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름에 왔었다면 벌써부터 사
람들로 봐글봐글했을 것이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붙여놓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어느 옛날,
'만석이'와 '연순이'란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여 혼인을 약속하였으나 만석이가
전쟁터에 끌려가면서 한참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연순이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내려는 부모의 극성을 견디며 버텼으나 결국 굴복해 다른 사
람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바로 그날 만석이가 몰골이 상한 상태로 마을에 돌아온 것이다.
소식을 들은 연순은 바로 신방을 뛰쳐나와 꿈에 그리던 만석이를 만났고 그렇게 둘은 폭포에
이르게 되었다. 허나 이제 와서 어긋난 인연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저 세상에서 나머지 사
랑을 일구자며 폭포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 사연으로 그들의 이름 앞 자를 따서 만연폭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만연
사에서 산 이름이 비롯되었으며, 산 이름에서 폭포 이름이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투
신을 할만한 절벽이나 못(소)도 주변에 딱히 없다.

* 만연폭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유천리


▲  만연폭포의 삼삼한 숲길
폭포 주변에는 폭포에 물을 대주는 계곡이 흘러간다. 계곡 역시 피서지로
아주 좋은 곳으로 여름 제국도 이곳만큼은 눈치를 보며 피해간다.

▲  큰재로 이어지는 만연산 남쪽 숲길

▲  큰재 정상

만연폭포 주변 그늘에서 조금 머물다가 큰재로 길을 재촉했다. 숲길로 그곳까지 가려고 했으
나 길을 잘못 들어 '안양산로'로 나오게 되면서 별 수 없이 지나가는 차량의 눈치를 보며 그
길의 신세를 졌다. (뚜벅이길이 길 옆에 닦여져 있음)
구불구불 고갯길을 20여 분 오르니 비로소 해발 350m 고지인 큰재 정상에 이르렀다. (그때 시
간 9시 30분) 경사가 느슨한 길은 분명했으나 전날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한 탓에 대관령처럼
은근히 높고 거칠어 보였다.

큰재는 화순읍에서 이서면을 빠르게 잇는 고갯길로 만연산 동부에 자리한다. 만연산 등산로의
동쪽 기점으로 만연산숲길이 여기서 시작되며, 고개 너머로 높은 산이 시야에 보이는데 그 산
이 바로 무등산이다. 무등산이 생각 외로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무등산은 광주, 담양, 화순
에 걸쳐있는 큰 뫼임)


▲  큰재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위엄

▲  큰재약수터

큰재에 도착해 그늘진 서쪽 숲속 쉼터로 들어가 잠시 꿀휴식을 취했다. 그곳에는 큰재약수터
가 있어 만연산이 베푼 물을 마음껏 음미했는데 화순읍내에서 이곳까지 두 발로 올라온 고생
끝에 마신 물이라 거의 꿀맛 같다. 수질은 아직 정정하여 섭취에 문제는 없었으며, 여기서 40
분 정도 머물다가 남동임해지역에서 온 일행들과 만나 만연산 숲길로 들어섰다.


▲  만연산 숲길 (큰재 서쪽)

만연산숲길은 큰재에서 오감연결길을 이어주는 1.4km의 숲길이다. 큰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내리막길과 평탄한 길이 계속 이어지며 숲도 삼삼하다. 단 반대로 갈 경우에는 오르막길의 연
속이라 조금 힘들 수 있다. 울퉁불퉁한 구간에는 나무데크길을 닦아 통행의 편의를 극대화시
켰다.


▲  만연산 숲길 ①

▲  만연산 숲길 ②

▲  만연산 숲길에서 만난 돌너덜지대

▲  만연산 숲길에서 바라본 화순읍내와 푸르른 가을 하늘

▲  만연산 오감연결길 쉼터

오감연결길은 큰재 밑 유천리에서 만연산 치유의숲센터까지 이어지는 3.1km의 숲길이다. 해발
고도가 좀 차이가 나는 만연산숲길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높이를 유지하고 있어 오
르락 내리락이 적다. 그러다보니 거의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하며 숲 또한 짙어서 지루할 틈
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탐스러운 길이다.

이 길은 다산 정약용(丁若鏞)과도 인연이 깊다고 한다. 그가 10대 시절이던 1777년 화순현감
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화순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만연산을 자주 찾아 독서
를 즐기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다고 한다. (만연산 동림암에서 거처하기도 했음)
산림청에서 '치유의 숲' 사업의 일환으로 만연산에 둘레길을 닦고 숲을 정비했는데 누구나 편
하게 산길을 거닐고 오감(五感 :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자극하여 건강을 증진시킨
다는 의미에서 오감연결길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곳 숲에서는 피톤치드와 음이온이 풍부
하게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은 몸과 마음을 순화시키고 속세의 스트레스를 줄여주어 면역력을
높여준다.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①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②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③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④


 

♠  만연산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
화순 만연사(萬淵寺)

▲  '나한산 만연사' 현판을 내건 만연사 일주문(一柱門)

큰재에서 시작된 만연산 둘레길 산책은 만연산 치유의숲센터에서 쿨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여
기서부터 흙길 대신 읍내를 향해 뻗은 딱딱한 포장길(진각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이
곳에서 반대 방향(북쪽)으로 올라가면 만연사의 부속암자인 선정암(禪定庵)이 나온다.

읍내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니 만연사를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그의 안내로 동쪽 길을
오르면 '나한산 만연사' 현판을 내건 일주문이 나오고 그 너머로 화우천이란 2층 누각 건물이
경내를 가리며 앉아있다.
일주문 앞에는 하늘 높이 솟은 큰 전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27m에 이른다. (둘레는 3m) 기껏해
야 높이 2m도 안되는 인간들을 제대로 주눅 들게 만든 그는 진각국사(眞覺國師)가 만연사 창
건 기념으로 심었다고 하며 추정 나이가 무려 770년 이상을 헤아린다고 한다. 허나 그 품격에
걸맞게 지방문화재나 천연기념물의 지위도 얻지 못했고 딱히 안내문 조차 없어서 속세의 대접
이 너무 형편없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자세한 사연을 알지 못한 채, 속절없이 그
앞을 지나간다. (나무 사진은 너무 흐리게 나와서 생략했음)


▲  경내를 가리고 선 화우천(華雨天)
이름도 특이한 화우천은 2층 누각 건물로 강당과 매점, 종무소를 품고 있다.
화우천은 하늘에서 빛나는 비가 내린다는 뜻(또는 불교에서 좋아하는
꽃비가 하늘에서 내린다는 뜻) 정도 될 것이다.

▲  대웅전 뜨락에 우두커니 선 늙은 괘불대 (조선 후기 유물)

만연산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만연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순천 송광사(松廣寺)의 말사(末寺
)이다. 1208년에 만연선사(萬淵禪師)로 표현된 진각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는 무등산
원효사(元曉寺)에서 수도를 마치고 송광사로 돌아오다가 만연산 골짜기에서 잠시 쉬었다. 그
자리가 현재 만연사 나한전 자리라고 한다.
잠시 쉰다는 것이 꾸벅 잠까지 들었는데 16나한이 석가여래를 봉안할 역사(役事)를 하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이 하도 이상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그새 눈이 내려 천하를 뒤덮고 있었는데,
글쎄 그가 누웠던 자리 주변만 눈이 녹고 김이 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신기한 광경에 보
통 자리가 아님을 여기고 그 자리에 토굴을 짓고 불도를 닦다가 만연사를 세웠다고 하며 꿈
속에 16나한이 나왔다고 해서 산 이름을 나한산이라 했다고 한다.

창건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왕년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사리각
(舍利閣)과 대웅전, 시왕전(十王殿), 나한전, 승당(僧堂), 선당(禪堂), 동산실(東山室), 서상
실(西上室), 동별실(東別室), 서별실(西別室), 수정료(守靜寮), 송월료(送月寮) 등 3전8방(三
殿八房)과 대웅전 앞에 규모가 큰 설루(說樓)와 사왕문(四王門), 삼청각(三淸閣), 그리고 학
당암(學堂庵), 침계암(枕溪庵), 동림암(東林庵), 연혈암(燕穴庵) 등의 부속 암자를 지니고 있
던 큰 절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 시절에는 만연사에서 종이와 식량 등을 마련해 전방에 보냈으며, 1793년 화
재로 진언집(眞言集) 판각이 불탔으나 이듬해 중건했다.
구한말에 이동백(李東伯), 이날치(李捺致) 등의 명창(名唱)이 이곳을 찾아와 소리를 닦았고,
임방울(林芳蔚)과 정광수 등의 명창들은 여기서 창악을 가르키며 소리를 익혔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10대 시절, 만연사 동림암에서 잠시 머물며 독서를 했다.

국악(國樂)의 성지로 추앙까지 받으며 명성을 드날렸던 만연사는 6.25전쟁 때 정신 나간 총탄
의 먹이가 되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1978년부터 4년 동안 주지 철안(澈眼)이 중창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나한전, 명부전, 한산전, 화우천, 요사채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부속암자는 선정암과 성주암(聖住庵)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345호
지위를 가지고 있는 괘불탱(掛佛幀)과 선정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이 있
는데, 괘불은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등 특별한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하는 비싼 존재라
친견은 매우 어려우며 그 외에 석가3존상과 시왕상, 16나한상, 진각국사가 심었다고 전하는
700년 이상의 전나무가 전해 절의 오랜 내력을 유감없이 증명하고 있다. (원주 고판화박물관
에는 만연사에서 1777년에 발간된 '진언집'이 전시되어 있음)


▲  높이 자리를 다지고 그 위에 들어앉은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만연사의 중심 건물(법당)이다.

▲  대웅전 석가3존상
향나무로 다져 도금을 입힌 것으로 무려 고려 후기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맞는다면
전나무를 제외하고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정말 지정문화재감인데 아직까지
무명으로 있는 것을 보면 탄생 시기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  명부전(冥府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들어있다. 건물 앞에 야자수가 펼쳐져 있어 이곳이 따스한 남쪽임을
알려준다. (전남 내륙에서 야자수를 보는 건 처음임)

▲  달랑 1칸의 단출한 모습인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산신과 동자, 호랑이 등
산신 식구를 머금은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나한전(羅漢殿)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거처이다. 절을 창건한 진각이 피곤에 쩔어 잠을 잤던
곳이 바로 이 자리라고 하며, 그의 꿈 속에 나타난 16나한 덕에 만연사가 탄생했으니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 애지중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  만연사 장독대
장독대 주위로 녹색 펜스를 쳐서 이곳에서 숙성되는 것들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장독대에서 숙성된 된장과 고추장을 속세에 판매하고 있음)

▲  만연사의 명물, 연등이 달린 배롱나무

대웅전 앞에는 만연사의 명물인 배롱나무가 있다. 늦여름과 초가을에 백일홍을 펼쳐보이는 나
무로 인간이 달아놓은 꽃인 연등이 대롱대롱 걸려 있어 백일홍의 빈 자리를 채워준다.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연등에 불을 밝혀 요염한 야경을 선사하며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눈덮힌
풍경도 아름다워 나무를 담으려는 사진쟁이들의 발길이 잦다.
단순히 나무만 있었다면 감흥이 덜했겠지만 붉은 연등을 앙증맞게 걸쳐놓은 주지승의 작은 센
스가 그를 일약 만연사의 스타로 만든 것이다. 자연과 인공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현장이라
고나 할까?


▲  앞에서 바라본 배롱나무의 위엄

▲  만연산 밑에 그림처럼 펼쳐진 만연저수지 (북쪽에서 본 모습)

만연사를 둘러보고 읍내 쪽으로 4분 정도 가면 너른 호수인 만연저수지(만연제)가 모습을 드
러낸다. 만연산이 베푼 물을 먹고 자란 그는 1945년에 조성된 80년 묵은 저수지로 유역 면적
264ha, 수혜 면적 55ha, 만수 면적 4ha, 유효 저수량은 약 22만 톤이다. (제방 높이 13m, 제
방 길이 165m)
저수지 주변에는 공원과 산책로를 닦아 만연호수공원으로 삼았으며, 화순군에서 세운 석봉미
술관이 호수 남쪽에 뿌리를 내려 현대 미술의 향기까지 호수에 덧붙여졌다.

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수면에는 만연산과 주변 나무들, 지나가는 구름과 햇님, 달님, 하늘이
고스란히 비춰져 그들의 아름다운 거울 역할을 한다. 남쪽 제방에서는 화순읍내가 훤히 바라
보여 조망도 괜찮으며 산 바람과 호수 바람이 어우러져 은근히 시원하다.


▲  만연저수지 제방 (제방 너머로 화순읍내가 바라보임)

▲  남쪽에서 바라본 만연저수지
저수지 속에도 또 다른 만연산이 짙게 피어있다.


만연저수지를 끝으로 아침부터 시작된 만연산 더듬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만연산을 80% 이상
살핀 것은 아니지만 만연폭포와 만연산 숲길, 큰재, 오감연결길, 만연사, 만연저수지까지 만
연산의 주요 명소는 거진 둘러보아 정신적, 기분학적으로 포만감이 아주 넘친다. 이번에 인연
을 짓지 못한 곳은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이란 강물에 모두 던져버리면 된다. 그것이 돌고 돌
아 나에게 온다면 다시 인연을 짓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마는 것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만연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동구리 179 (진각로 367, ☎ 061-374-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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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탕의 탄생지이자 선농대제의 오랜 현장, 제기동 선농단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역사문화관, 선농대제 설렁탕>

제기동 선농단 선농대제



' 설렁탕의 고향, 제기동 선농단 (선농대제) '
선농단 선농대제
▲  선농단 선농대제
 


 

봄이 한참 절정에 이르는 4~5월이 되면 천하 곳곳에서 다양한 축제와 문화행사가 열린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서는 종묘대제(5월 1주 일요일)와 연등회(석가
탄신일 1주 전 토~일), 석가탄신일(음력 4월 8일), 선잠제향(5월 중), 선농대제(4월) 등
이 열리는데(그 외에도 더 있음) 이들 축제 중에서 무려 비싼 설렁탕을 무료로 제공하는
착한 축제가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제기동 선농단에서 열리는 선농대제(先農大祭)이다.
<3글자로 줄여 선농제(先農祭)라고도 함>


▲  제기동역에서 선농단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왕산로19길)
선농단입구인 함경면옥에서 선농단 방향으로 약 100m의 꿀 같은 숲길이
펼쳐져 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선농단 향나무
향나무가 있는 곳이 바로 선농대제의 뜨거운 현장인 선농단이다.


드디어 선농대제가 열리는 4월 말 토요일, 따사로운 오전 햇살의 응원을 받으며 도봉동(
道峰洞) 집을 나섰다.
1호선 전철을 타고 20여 분을 달려 제기동역에서 하차했는데 선농대제 관람과 잘 숙성된
설렁탕을 먹는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랜다.

선농단 입구에 이르니 선농대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시원한 봄바람에 펄럭이며 대제를 구
경하러 온 사람들을 인도한다. 현수막은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으
며, 이제 막 제왕의 어가행렬이 끝나고 제례를 봉행(奉行)할 시간이 되어 선농단 주변은
제관과 행사요원, 취재진, 나들이객, 동네 사람 등 수천 명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회색빛 대도시 속에 조용히 묻혀 지낸 선농단, 국가 지정문화재
란 굵직한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원래 임무인 제단에서 강제로 은퇴한 몸이라 꽤 적적한
신세이다. 그런 그에게도 천하가 미치도록 주목을 하는 때가 1년에 딱 하루가 있으니 바
로 선농대제일이다.



 

♠  설렁탕의 탄생지, 농사의 중요성을 알리고 풍년을 기원하던
조선의 주요 국가 제단, 선농단(先農壇) - 사적 436호

▲  선농단 (선농대제가 끝난 직후의 모습)

선농단은 종암초교 남쪽이자 제기동 주택가 한복판에 고즈넉하게 누워있다. 이곳은 1476년에
조성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관경대(觀耕臺)로 조선의 제왕들이 신하를 거느리고 농사의 소중
함을 알렸다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를 지내 풍년을 기원했다. 이 제사를
선농제(선농대제)라고 하며, 거기서 선농단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선농
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청동기시대부터 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은 그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제왕이 직접 제사를 챙기고 농사를 권장했다는 기록은 신라 초인 기원전 41년에 처음 나타난
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비와 함께 6부(六部)를 순행(巡行)하여 농사와 잠사(
蠶事)를 권장하고 감독했다고 하며, 매년 경칩(驚蟄)이 지나고 첫 해일(亥日)을 택하여 왕이
제를 지내고 적전을 갈거나 또는 관리를 보내 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나중에 경주 동쪽인 명활산성(明活山城) 남쪽 웅살곡(熊殺谷)에서 선농제를 지냈으
며, 입하(立夏) 뒤 첫 해일에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 선농제란 이름은 바로 신라 때 생겨
난 것이다.

고려 때는 983년 1월, 성종(成宗)이 원구단(園丘壇)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몸소 적전
을 갈아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냈다. 하여 이때부터 이 땅의 토속적인 농사 신(神) 대
신에 중원대륙에서 가져온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허나 고려는 제왕이 원구단에 나가 하늘에 제를 지낼 때, 풍년을 같이 기원했고, 매년 열리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에서도 일종의 기곡제(祈穀祭)를 지내 별도의 선농제는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던 선농제가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조선 초부터이다. 태조 때 적경공제지법(籍耕供
祭之法)을 제정하고 태종 때는 적전단(籍田壇)을 수축했으며, 1430년에는 박연(朴堧)의 건의
로 선농지악(先農之樂)에 쓰이는 토고(土鼓)를 대체하고자 가죽 테를 한 북을 만들어 사용했
다. 그러다가 1476년 성종의 왕명으로 관경대를 만드니 그것이 현재 선농단이며, 사직단(社稷
壇), 선잠단(先蠶壇), 영성단(靈星壇)과 더불어 국가의 주요 제단으로 큰 대접을 받았다.

선농제를 지낼 때는 제왕이 직접 신하를 거느리고 제를 지냈으며, 그것이 끝나면 동적전<제기
동과 전농동(典農洞) 일대>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적전을 관리하는 적전령(籍田令)이 푸른 보
자기에 감싸인 쟁기를 제왕에게 올리며, 그것을 받은 제왕은 직접 쟁기를 잡고 밭에 5번 쟁기
질을 하는 이른바 친경(親耕) 쇼를 벌였다.
쟁기가 끝나면 관경대로 올라가 백성 가운데 특별히 선발된 70세 이상 노인들을 위로하고 그
들이 밭을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농작물 씨앗이 얼어죽는 것을 막는 절차까지 마무리
되면 의식이 끝났음을 선포하고 궁궐로 돌아간다. 이렇듯 친경의례는 농사의 소중함을 제왕이
몸소 보여주고 비록 잠깐이지만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으로도 활용되었다.

허나 친경의례는 성종 이후 어쩌다 1회 벌일 정도로 거르는 경우가 많았으며(연산군 1회, 중
종 2회, 명종 1회, 선조 1회, 광해군 1회) 인조에서 현종까지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숙종(肅
宗)은 의식을 치루려고 단단히 준비까지 했으나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무산되었으며, 영조 시
절에 비로소 다시 치러지게 된다.

동적전이 있던 제기동과 전농동 지역은 지금은 완전 주택가라 썩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20세
기 초까지만 해도 너른 경작지였다. <제기동(祭基洞)은 제사를 지내는 터란 의미로 선농단에
서 비롯된 이름임>
왕실에서 관리하던 적전(籍田)은 2곳이 있었는데 선농단 근처에 동적전이 있었고, 개성(開城)
동쪽 전농동에 서적전(西籍田)이 있었다. 동적전은 제사용 곡식을 저장했는데, 선농단(관경대
)과 희우정(喜雨亭), 필분각(苾芬閣)이 있었고, 다수의 창고가 있었다. 반면 개성에 있는 서
적전에는 형향각(馨香閣)과 창고가 있었다.
동적전에서 나온 곡물은 종묘제례에 주로 썼으며, 서적전 곡물은 왕실에서 벌이는 온갖 제사
의식에 동원되었다. 이들 적전에서 쓰고 남은 곡물은 백성을 구휼할 때 쓰거나 의약청(議藥廳
), 산실청(産室廳) 및 제왕과 왕비의 예장(禮葬)에 사용했다.

▲  선농단 북쪽 홍살문

▲  선농단 향나무와 설렁탕 부뚜막

이렇듯 왕실의 주요 행사로 바쁘게 살았던 선농제는 1909년까지 잘 유지되었으나 1908년 이후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순종의 칙령(勅令)에 따라 국가 제단을 정리하면서 사직단에 통합
되었다. 허나 동적전 친경의례는 1910년 5월까지 이루어졌는데 그때 순종이 신하와 백성을 거
느리고 친경을 하는 장면이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다.

왜정(倭政) 때는 지역 사람들에 의해 선농제가 조촐히 진행되었으나 1940년대 왜정이 망국의
제단을 욕보이고자 선농단 주변에 청량대공원(청량대)을 닦으면서 제단을 아작내고 동적전이
있던 곳에는 전농공원을 만들었다. 이때 제단 북쪽 땅이 떨어져나가 보통학교(현재 종암초교,
1922년 개교)가 지어졌고, 1935년 제단 남쪽에 경성여자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가 들어
서면서 남쪽 땅까지 썰려나갔다. 또한 군수물자 징수란 명목으로 제사 도구까지 거의 뜯어가
제사도 중단되고 말았다.

어둠의 시절 이후에도 수난은 여전하여 1946년 이후 제단 주변에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30
년 이상 잠수 아닌 잠수를 타며 주택가에 묻혀있었다. 그러는 사이 선농단의 이름도, 존재감
도 모두 희미해져 세상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1979년 제기동에 뜻있는 이들이 '선농단친목회'를 결성하여 자비를 들여 1년에 1번
씩 치제(致祭)를 올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 세월의 저편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선
농단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그렇게 선농단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동대문구와 같이 제례를 지내다가 1988년 행
정기관장 최초로 동대문구청장이 선농제 초헌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1992년에는 '선
농대제 보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동대문구의 흔쾌한 지원과 폭풍 홍보에 힘입어 지역의 대
표 축제이자 문화행사로 제대로 거듭났다. 행사 규모도 비록 옛날만큼은 못해도 나날이 커져
갔다.
그러다가 선농단 복원 여론이 강하게 피어나면서 2013년 8월, 선농단 주변에 장막을 치고 복
원 공사에 들어갔고 2015년 4월 공사가 완료되어 옛 모습이 상당수 회복되었다. 그리고 선농
단 북쪽에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을 닦아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이해를 돕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선농단 일대는 선농단 역사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선농단의 구조는 단 주위로 크게 터를 다지고 그 한복판에 단을 두었다. 단이라고 해서 높이
구축된 것은 아니며 땅바닥에서 조금 솟은 정도이다. 제단 테두리는 돌로 잘 다지고 안쪽은
흙으로 다졌는데, 2015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부득이 하얀 피부의 석재가 다소 섞여있
다. 기존에 쓰였던 옛 석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여 늙은 돌과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 돌도 선배 돌을 닮아가며 고색의 기운을 머금을 것이
다.
제단 외곽에는 낮은 키의 토담을 쌓았고, 동쪽과 서/남/북쪽 테두리 중앙에 붉은 피부의 홍살
문을 세웠는데. 이들 문과 토담은 2015년에 복원된 것이다. 선농단 남쪽에 1단의 석축을 두었
으며, 단 서남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향나무가 영욕의 세월을 견딘 제단을 굽어보고 있다.

▲  선농대제의 한 모습

▲  선농단 동쪽 홍살문

선농대제는 처음에는 정월 길(吉) 해일(亥日)에 했으나 태종(太宗) 때 경칩이 지난 첫 해일로
변경되었다. 그때가 농사가 시작되는 3월이기 때문이다. 음력 2월 첫 신일(辛日)에도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1910년에는 양력 5월에 거행되었다. 그러다가 1979년 이후에는 4월 말~5월
초/중순 사이에 하다가 지금은 4월 하순 토요일에 한다. (2023년은 4월 22일에 했음)

제향(祭享)은 10변(籩) 10두(豆)의 중사(中祀)로 거행하고, 친림제향 때는 아헌관(亞獻官)은
왕세자(王世子)나 황태자(皇太子)가, 종헌관(終獻官)은 영의정이 맡았다. 집례(執禮)의 창홀
(唱笏)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고 육일무(六佾舞)를 추며, 제례 봉행 순서는
① 전폐례(奠幣禮) - 농업신에게 예물을 올리는 의식
② 천조례(薦俎禮) - 제신(祭神)에게 음식을 올리는 진찬(進饌)의식
③ 초헌례(初獻禮) - 초헌관이 1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④ 아헌례(亞獻禮) - 아헌관이 2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⑤ 종헌례(終獻禮) - 종헌관이 3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⑥ 음복례(飮福禮) - 제관이 제사를 마치고 신이 내린 제물을 먹는 의식
⑦ 망료례(望燎禮) - 폐백과 축문을 태워 땅에 묻는 의식
순으로 거행된다.

영신악(迎神樂)은 경안지악(景安之樂)을 연주하고 전폐례에는 숙안지악(肅安之樂). 진찬례에
는 옹안지악(雍安之樂), 초헌례에는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며 일무생들은 문무(文舞)를
춘다. 이어서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할 때는 일무생들은 무무(武舞)를 추기 시작하며, 아
헌례와 종헌례 때는 수안지악을 다시 연주하고 철변두(徹籩豆) 때는 옹안지악을, 송신할 때는
경안지악을 연주한다. (절차가 매우 복잡함)

제사 제물로는 소와 돼지, 양의 고기와 피, 쌀과 기장, 과일, 떡, 술 등을 썼으며, 모든 행사
가 끝나면 친경에 쓰인 소를 잡고, 제물로 쓰인 소고기를 넣어 탕을 끓였다. 그리고 제물로
쓰인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돼지고기는 편육으로 썰었는데, 탕에 밥을 말고 편육과 여러
반찬을 겯드려 행사에 참여한 신하와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제물에 김치가 없기 때문에 파를 씻어다 놓았고, 간장도 쓰지 않기 때문에 소금으로 탕의 간
을 맞추었다. 오늘날 설렁탕을 먹을 때 파와 소금을 겯드리는데, 그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
된 것이다. 또한 선농단에서 만든 탕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설농탕','설롱탕'이라 불렸
으며,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가운데 글자가 살짝 움직여 지금은 '설렁탕'으로 주로 불린다.
우리나라 대표 음식의 하나이자 서울의 토박이 음식 설렁탕은 이렇게 선농대제 뒷풀이 음식으
로 태어났다.

또한 설렁탕의 옛 이름 중 하나인 설농탕의 유래에 대해서 1940년에 홍선표가 쓴 '조선요리학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앞서 선농탕과는 약간 다른 것이라 햇갈림을 준다.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하던 때에 비가 심하게 내려서 촌보(寸步)를 옮기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신하들이 배가 고파서 견디기가 힘드니 왕이 친경에 쓰던 소를 잡아서 맹물에 넣고
끓이라 하였다. 고기 끓인 국물에 소금을 넣어 먹으니 이것이 설농탕이다'

그 외에 오랫동안 탕을 끓이면 국물이 흰빛을 띠어 '눈처럼 뽀얗다','눈과 같이 무르녹는다'
는 뜻에서 설롱탕이 되었고, 그것이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견해도 있다. 허나 보통은 선농탕
유래를 많이 따른다.

동대문구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거듭난 선농대제는 9시부터 시작된다. 왕산로에서 선농단까
지 짧게 어가행렬을 비롯한 제례 행렬을 선보이며 (예전에는 동대문구청에서 출발했음) 보통
10시 반부터 12시 전까지 제례를 봉행한다. (행사시간은 매년 조금씩 다를 수 있음)
제례를 치르는 동안 선농단 북쪽 종암초교에서 동대문구 공무원과 새마을단체 사람들이 점심
을 준비하며 보통 10시 반이나 11시부터 선농대제의 백미(白眉)이자 상징인 '전통 설렁탕 재
현 및 나누기' 시간을 갖는다. 설렁탕은 누구든 먹을 수 있으며, 밥과 김치, 깍두기, 떡, 생
수가 제공된다.
설렁탕은 넉넉히 준비하기 때문에(보통 2,000~3,000명 분을 준비함)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다만 초반에 가면 사람이 너무 미어터져 밥이 내 앞에 오기까지 상당한 인내를 요하니 사람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30~40분 이후에 먹기를 권한다. 음식은 각자가 알아서 챙기는 것이 아닌
새마을단체 사람들과 자원봉사 학생들이 알아서 갖다준다. 늦게 갔을 경우에는 밥을 먹을 의
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가급적 12시 안에 가야 안전함, 사람이 몰릴 경우 일
찍 떨어짐)

무료 설렁탕이지만 맛은 생각 외로 괜찮아 어지간한 설렁탕 전문점을 울게 할 정도이다. 시중
에서 거의 8,000원~10,000원대를 하는 설렁탕을 선농대제의 일환으로 무료로 먹을 수 있으니
정말 좋은 축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3시부터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에서 설렁탕 요리대회(설롱 요리대회)가 열리며 요리가
끝나면 시식 기회를 준다. (오후 행사는 매년마다 다를 수 있으며, 2023년에는 하지 않았음)

* 선농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선농단역사문화관 ☎
  02-3285-5560)
* 선농단역사문화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남쪽 홍살문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선농단과 선농대제 둘러보기

▲  서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에는 푸른색 시트 커버를 걸친 제사상 4개가 놓여져 있다. 이중 큰 상은 선농단 북쪽과
동쪽에 배열하니 이들은 농업신인 선농씨와 후직씨의 밥상이며, 다른 조그만 상 2개는 선농단
밑에 둔다.
제단에서 남쪽 홍살문까지 붉은 카페트를 깔고, 서쪽과 남쪽에도 붉은 카페트를 깔아 바로 남
쪽으로 향하게 했는데, 이들은 제왕을 비롯한 제관이 움직이는 동선이다. 제단 남쪽 정면 길
로 제단으로 들어가 의례를 치른 다음, 서쪽이나 동쪽 카페트를 따라 다시 남쪽 자리로 돌아
오는 것이다.

선농단 주위로 갑옷을 입거나 무관 복장을 갖춘 사람들이 삼엄하게 늘어서 있어 선농제의 엄
숙함을 한껏 고조시킨다. 1시간 반 가까이 저렇게 서 있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허나 옛날과 달리 그저 자리만 지키면 되며, 옆 사람과 수다를 떠는 모습도 쉽게 목격이 된다.
그것이 옛날과 오늘날 선농대제의 차이이다. 만약 옛날이었다면 바로 파직 또는 징계각이다.


▲  전통 방식으로 재현된 가마솥 설렁탕 부뚜막

선농단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부뚜막을 설치하여 정겨운 가마솥을 걸고 설렁탕을 끓이고 있다.
장작을 넣어 부뚜막을 계속 흥분시키며 탕을 숙성시키고 있는데, 선농대제가 무르익을수록 설
렁탕도 그만큼 익어간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대제

선농단 남쪽 밑에는 금관조복(金冠朝服)을 갖춘 제관들이 홀(忽)을 쥐어들며 3줄로 늘어서 있
다. 이들 상당수는 선농대제 보존위원회 위원들로 석전대제와 사직대제, 종묘대제 보존위원들
도 섞여있다. 제왕은 보통 동대문구청장이 담당하고 있는데, 대례복(大禮服)과 12면류관을 갖
춘 자못 제왕다운 모습으로 대제에 임하고 있다.
제관들은 노천에 멍석을 깔고 앉거나 절을 하지만 제왕은 그들 동쪽에 차려진 노란색 천막 안
에서 햇살을 피하며 대기한다. 그리고 의식을 행할 때는 옆에 자리한 내관이 붉은 일산(日傘)
을 받쳐들고 그를 따르니 역시나 제왕이나 우두머리 자리가 좋긴 좋다.

제관 자리 남쪽에는 하얀 천막이 쳐져 있고 의자가 넉넉히 놓여져 있어 행사 관계자들과 세금
이나 축내는 구의원과 국회의원, 고위 관리 잡것들과 지역 유지들, 관람객들이 앉아있으며 제
관들 서쪽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있는데 이들은 일무(佾舞)를 맡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 북쪽에는 제례악을 맡은 사람들이 각기 악기 1개 또는 2개씩 거느리
며 악기를 조정한다.


▲  선농대제에 임하고 있는 제관들
전통 행사로 진행되는 지금도 이러한데 옛날에는 정말 숨소리도 내기 힘들 정도로
정성과 엄숙을 다했다. 그때는 조금의 실수나 긴장 풀린 모습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만약 걸리면 파직이나 징계를 주었다.

▲  동쪽 홍살문 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대제
(노란 천막은 제왕이 대기하는 특별 공간)

▲  제례 봉행이 시작되면 제관들은 전폐례부터 망요례까지 무려 7개의
의식을 수행해야 된다. 그때마다 단으로 올라가 의식을 치루고
다시 내려와 대기하다가 다음 의식이 시작되면 또 올라간다.

▲  선농단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일무생들
사단법인 아악일무보존회 사람들로 모두 여자들이 맡는다. 앳된 20대부터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36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  문무(文舞) 율동을 선보이는 일무생들

▲  제례악을 맡은 사람들 (경기도립국악단)

▲  초헌례를 치르는 모습

▲  북서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음복례가 진행되고 있는 선농단
음복례는 제관이 제사를 마치고 제물로 올린 술을 마시는(음복) 의식이다.

▲  음복례도 거의 끝나가고

▲  대제의 마지막 단계, 망요례(望燎禮)

음복례가 끝나면 폐백과 축문을 태우고 선농단 북쪽에 마련된 공간에 묻는다. 망요례를 끝으
로 거의 1시간 반에 걸친 선농대제는 마무리가 되며, 원래대로라면 친경 의식도 해야 되나 부
근에 친경을 벌일 경작지가 없기 때문에 계속 생략되고 있다. 그러니 선농대제는 '설렁탕 나
누기'를 포함해 ⅔ 정도만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허나 어찌하겠는가? 아무리 전통 행사라고
해도 시대에 맞게 변형과 축소는 어쩔 수가 없다.


▲  망요례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제관들
다들 속으로 '이제 행사도 끝났으니 밥 묵으러 가자~~!' 이랬을 듯~~

▲  선농대제에서 몸을 푼 전통 악기들
궁중 의례나 종묘제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몸값 비싼 악기들이 주류를 이루어
선농대제의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대제가 끝나자 선농단 주변의 통금은 모두 풀렸다. 제관들과 행사 요원들, 높은 작자들은 기
념사진을 찍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 둘 밥 먹으러 사라지고, 제단 주변은 관리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어수선한 상황이 되었다. 대제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제단으로 들어와
초롱초롱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제삿상과 제물, 제기, 악기 등을 살펴보고 사진에 담느라 부산
하다. 그렇다고 제물과 제기를 가져가지는 말자~! 그냥 손으로 쓱쓱 어루만지고 끝내면 된다.


▲  선농대제 제삿상 <후직씨에게 올리는 제삿상, 2012년>

▲  금동 빛깔의 장엄스런 제기들
사극에서나 보던 고급 제기들이 속인들의 호기심을 건드린다. 백성들은 감히 쓰지도,
만지지도 못했을 저들을 직접 두 눈에 담으니 기분이 참 새롭다. 저들은 가격이
얼마나 하려나? 몇 개 장만하여 내 밥그릇으로 쓰고 싶다.

▲  제주(祭酒)를 담은 그릇과 의식 때마다
손을 씻는 정화수와 수건들

▲  창고로 퇴장하는 제기들
이제 1년 뒤에나 볼 수 있겠구나



 

♠  선농단 마무리 (향나무, 설렁탕, 선농단 역사문화관)

▲  선농단 향나무 - 천연기념물 240호

선농단 서쪽에는 나이도 지긋한 늙은 향나무가 넓게 그늘을 베풀고 있다. 그는 선농단의 오랜
상징이자 얼굴로 나이가 무려 500년 이상을 헤아린다. 20세기 후반에도 추정 나이가 500년이
었다고 하니 선농단과 나이가 그런데로 비슷할 듯 싶으며, 1476년 선농단을 닦을 때 성종이
기념으로 심거나 15세기 말에 선농대제 기념으로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천하에 널리고 널
린 나무 중에 유독 향나무를 심은 것은 제사 때 피울 향을 충당하고자 함이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세월이란 무한 양분과 국가 제단에 자리한 잇점으로 관리들과 왕족
들의 보살핌이 대단했다. 게다가 대제 때마다 곡차(穀茶)의 기운을 듬뿍 받으니 키 13.1m, 둘
레 2.28m에 어엿한 나무로 성장했다. 대제가 끝나면 막걸리를 비롯하여 제사에 쓰인 술은 이
나무에 모두 부었다고 하며, 어렸을 때부터 강제로 술에 길들여지다 보니 이제는 내성이 생겨
어지간한 술에도 눈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  선농단의 흑역사, 바닥에 눕혀진 청량대(淸凉臺) 표석

향나무 북쪽에는 '청량대' 3자가 쓰인 표석이 벌러덩 누워있다. 여기서 청량대는 고약한 왜정
이 선농단을 욕보이고자 제단 주변에 닦은 공원으로 '청량대공원'이라 불렸다. 공원 앞에 청
량대 표석을 세워 선농단의 이름을 억지로 대신했는데, 1945년 8.15이후 제기동과 용두동 주
민들이 왜정이 세운 청량대 표석을 때려눕혀 땅에 묻어버리면서 어둠의 시절에 대한 울분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그러다가 2013년 이후 선농단을 복원할 때 다시 꺼내 이곳에 눕혀놓았다. 90도로 세워놓으면
왜정 잔재에 기만 살려주는 꼴이 되니 이렇게 눕힌 것이다. 비록 왜정이 남긴 고약한 흔적이
지만 기왕 다시 햇살을 보게 된 거 이런 상태로 선농단 곁에 두어 후대에 경계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나 이 땅에는 아직도 때려눕혀야 될 왜정의 잔재가 너무나 많다. 그것들을 모두 잡는 그날,
이 땅에 진정한 광명이 올 것이나 그럴려면 아직도 까마득하니 그저 곡소리만 나올 뿐이다.


▲  선농대제는 끝났지만 숙성의 끝을 향해 부뚜막에 몸을 기대며
제 갈 길을 고집하는 가마솥 설렁탕


선농대제도 다 끝나고 사람들도 대부분 빠져나간 선농단에서 유일하게 펄펄 흥분을 내는 존재
가 있다. 바로 황토색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 설렁탕이다. 부뚜막에는 아직도 온기(溫氣)가 여
전해 뜨거운 입김을 불어대며 탕이 아주 사골이 되도록 펄펄 숙성시키고 있는데 탕 국물이 아
주 하얗게 변해 뽀얀 눈이 내려앉은 것 같다.
설렁탕 나누기 행사에서 이 가마솥 설렁탕을 쓸 것 같지만 절대로 쓰지 않는다. 동대문구에서
따로 조리하여 가져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이 설렁탕은 어디까지나 재현용이며 가마솥 안에
는 국물만 보일 뿐 고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허나 냄새만큼은 설렁탕 냄새 비슷하여 아
마도 소뼈 등을 넣고 푹 삶은 것 같다.


▲  선농단 북쪽 밑에 자리한 선농단 역사문화관

선농단 역사문화관은 선농단을 복원하면서 새로 닦은 것으로 2015년 4월에 문을 열었다. 이곳
에는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역사와 유물, 디오라마를 비롯하여 설렁탕의 유래, 농업의 역사와
농기구들을 다루고 있으며, 어린이를 위해 선농단 탁본 체험, 선농대제 의복 체험, 선농대제
사진 촬영 등의 여흥거리도 준비되어 있다.
지하 2층 규모로 지하 1층에는 선농단과 선농대제, 어가행렬, 제왕의 친경의례 등을 다루었고
, 지하 2층은 설렁탕과 농업 관련 유물과 서적 전시, 체험 코너, 청소년 쉼터와 배움터, 중정
(시간의 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정 같은 경우는 향나무 남쪽에 있었던 옛 선농단을 투
영한 곳으로 내,외부에 24절기를 표현하여 그 24절기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햇님의 운행에 따
라 시간과 계절, 날씨의 변화된 조건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려주는 공간이다.

선농단 후식거리로 1바퀴 둘러보며 선농단을 복습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면 적당하며, 특히 아
이들을 동반하여 왔다면 꼭 들려서 체험 코너에서 놀게 해주는 것도 좋다. 그리고 문화관 정
문에는 전통 찻집과 기념품점이 있어 잠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 선농단역사문화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 02-3295
  -5560)


▲  선농단과 동적전의 위치

▲  1739년에 작성된 친경의궤(親耕儀軌)

▲  동적전식례(東籍田式禮)
동적전에 관해 기록한 책으로 1824년부터 1853년까지 쓰였다.

▲  신농씨 제례상

▲  선농대제 뒷풀이로 먹은 설렁탕의 위엄

선농단과 선농대제를 둘러보고 그날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설렁탕을 먹으러 종암초교로
이동했다. 선농단 일대를 동분서주하다 보니 시장기가 무척 치솟아 뱃속이 아주 반란 직전이
다.

설렁탕은 동대문구청에서 마련하여 제공하는 것으로 행사 관계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무
료로 대접하고 있다. 그러니 누구든 와서 운동장에 설치된 천막에 앉으면 설렁탕과 김치, 깍
두기, 떡, 생수, 1회용 숟가락과 젓가락을 제공받는다. 직접 줄을 서서 음식을 받는 것이 아
닌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갖다주는 방식으로 초반에 가면 자리를 잡기도 힘들뿐 더러,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려 조금 늦게 가는 것이 낫다.
11시 30분 이후라 빈 자리들이 많아서 적당한 곳에 앉아 음식을 자원봉사자에게 1그릇 청하니
바로 잘 차려진 설렁탕을 가져다준다. 혹자(或者)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공짜 설렁
탕이니 맛도 별로고 고기도 별로일 것이다'
하지만 동대문구가 지역 이름과 선농단, 선농대제의 이름을 걸고 제공하는 설렁탕인지라 맛은
시중의 유명 설렁탕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안심하고 먹자. 파도 넉넉히 들어있고, 고
기도 그런데로 담겨져 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설렁탕 섭취를 마치고 나오니 시간은 어느덧 12시가 넘었다. 오랫만에 찾은
선농단에서 2시간 가까이를 머물며 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 역사문화관, 향나무, 거기에
설렁탕까지 남부럽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눈과 입, 코, 귀 등 5각(五覺)도 즐거웠다.

이렇게 하여 내년 선농대제와 설렁탕을 벌써부터 고대하며 '설렁탕의 고향, 선농단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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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4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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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서남쪽 끝으머리, 오류동 류순정 류홍부자묘역~항동철길~푸른수목원 봄나들이

구로구 오류동 봄나들이 (류순정 류홍묘역, 항동철길)



' 구로구 오류동 봄나들이 '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항동철길)
 

류순정 류홍 부자묘역

▲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항동철길 (오류선) 류홍 신도비와 류사필 묘갈

▲  항동철길 (오류선)

▲  류홍 신도비와 류사필 묘갈

 


 

서울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고 있는 구로구 오류동(梧柳洞)에는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과
항동철길, 천왕산 등의 명소가 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나의
심기를 적지 않게 건드리고 있는데, 별처럼 무수히 뿌려진 이 땅의 미답처를 다 지우지는
못해도 내가 있는 서울만큼은 미답처를 싹 지우고자 매년 부지런히 행동에 옮기고 있다.
남들 훨씬 이상으로 서울 구석구석을 다녔다고 자부하나 아직도 미답처가 차고 넘치니 겨
우 605㎢에 불과한 서울 땅이 실로 우주 이상만큼이나 장대해 보인다.


 

♠  서울에서 유일한 부자(父子) 2대 공신 묘역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2호

▲  무덤들이 물결을 이루는 류홍 묘역 (제일 위쪽에 류홍 묘가 있음)

구로구의 대표 지붕인 천왕산(天旺山. 144m) 북쪽 끝자락 구석에 류순정(유순정), 류홍(유홍)
부자를 중심으로 한 진주류씨(유씨) 묘역이 넓게 누워있다.

류순정과 류홍은 조선 초기 인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해 부자가 나란히 공신(功臣)이
되었다. 1512년 류순정이 병사하자 중종(中宗)은 매우 슬퍼하며 3일 동안 조회(朝會)를 열지
않았으며, 왕족들에게만 주던 장생전<長生殿, 장흥고(長興庫)>의 관곽(棺槨)을 특별히 내주어
장례를 도왔다. 또한 오류동과 온수동(溫水洞), 부천시(富川市) 여월동과 작동 지역에 300만
평(9,917,355㎡)에 이르는 너른 땅까지 내렸는데, 류순정은 그 땅 중에서 제일 명당으로 꼽히
는 천왕산 자락에 유택(幽宅)을 썼다.
1551년 류홍이 사망하자 아비 묘 서남쪽 자락에 묻혔으며, 이후 후손들은 중종에게 하사받은
다른 동네 땅에 묻혔다.

20세기 이후, 묘역 주변을 조금씩 처분하면서 묘역 규모가 줄어들었고, 속세로 떨어져나간 묘
역 동북쪽에는 동부제강에서 사원용 아파트로 세운 동보아파트가, 동남쪽에는 금강수목원아파
트와 주택이 들어섰다. 그렇게 해서 남은 묘역은 26,531㎡로 비록 옛날만큼은 못해도 여전히
넓은 편이다.
묘역 서북쪽과 서쪽, 서남쪽은 딱히 건드리지 않아 자연 지대로 남으면서 개발의 칼질에 완전
히 고립되는 꼴은 면했으며, 주변에 흩어진 류순정의 후손 묘 5기도 그 땅을 처분하면서 모두
류홍 묘 밑으로 가져와 7대가 모여있는 문중 묘역이 되었다.

20세기가 끝나도록 묘역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적지 않게 훼손이 되었으나 2004년에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더 이상 망가지는 꼴은 면했다. 또한 후손들은 집안의 보물로 16세
기에 제작된 류순정의 영정 4점과 류홍의 영정 1점을 안전하게 후대에 전하고자 서울시에 흔
쾌히 기증해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 보관되고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흔치 않은 16세기
초상화로 그림 바닥에 채전이 등장하는 최초의 예로 가치가 대단해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솔직히 국가 보물급임)
이들 영정은 고약했던 6.25 시절 진주류씨 종손인 유종식(柳宗植)이 목숨을 걸고 지킨 것으로
그때 식솔과 가재도구는 챙기지도 않고 오직 영정함만 챙겨 어깨에 맸다. 그의 부인이 피난길
에 가솔은 안중에도 없고 영정만 챙기냐고 따지자. 집안의 종손으로 그것을 잃어버리면 조상
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답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영정과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서적들, 필요한 가재도구를 챙겨 가솔들과 무사히 피
난을 떠났고, 그렇게 영정은 살아남아 그 가치는 백두산에 붙어있을 정도로 커졌다.

류순정, 류홍 묘역은 후손들의 배려로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 묘역 밑에 후손이 거처하는
집이 있으며, 그 집을 중심으로 북쪽에 묘역의 주인공인 류순정 묘, 서쪽에 류홍과 후손들의
묘가 자리해 있다. 류홍과 류순정 묘는 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무덤 석물과
신도비도 그 시절 것으로 가치가 높다. 그리고 후손들의 무덤도 묘비 등 일부를 제외하고 옛
날 것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류홍 묘는 뒤쪽에 숲이 있으나 류순정 묘는 바로 북쪽과 동쪽 담장 너머로 동보아파트가 들어
앉아 묘역을 굽어보고 있어 보기에도 좀 딱해 보인다. 적어도 류순정 묘 주변 땅은 지켰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 했던 것이다.


▲  진흥군(晋興君) 류식(柳寔)과 청풍김씨(오른쪽 무덤)의 합장묘,
류중광(柳重光)과 나주정씨(왼쪽 무덤) 합장묘


류식은 류돈의 손자이자 류시경의 아들로 류순정의 7대손이며, 류중광은 류준의 아들로 류순
정의 4대손이다. 무덤을 지키고 있는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 동자석(童子石), 상
석(床石), 혼유석(魂遊石)은 조선 중기 것으로 고색의 때가 역력하며, 묘비는 1989년 이후에
새로 장만했다.

▲  진흥군 류식과 청풍김씨의 묘비

▲  류중광과 류식 묘 (남쪽에서 본 모습)


▲  류사필(柳師弼)과 청주한씨의 합장묘(왼쪽),
류준(柳浚)과 연안이씨의 합장묘(오른쪽)


류중광, 류식 묘 바로 위에는 류사필과 류준의 묘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류사필(1501~1559)
은 류홍의 아들로 어머니(풍양조씨)가 2살에 사망하자 외가에서 자랐는데, 공신의 자손으로
과거시험도 거치지 않고 음보(蔭補)로 관리가 되어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 사헌부 감찰(
司憲府 監察), 금성현령, 김포현령, 예빈시 주부, 온양군수를 지냈다. 부인은 청주한씨로 영
의정을 지낸 한효원(韓效元)의 딸이다.

류준은 류사필의 아들로 아버지나 할아버지 만큼의 공적은 없으나 그들의 신도비를 세우지 못
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하여 1567년에 증조할아버지인 류순정의 신도비를 마련했고, 류
홍 신도비를 세우고자 친분이 있던 강령군(江寧君) 홍섬(洪暹)에게 신도비의 비명(碑銘)을 부
탁했다. 그래서 홍섬이 흔쾌히 글을 짓고 당대 문장가였던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글씨
를 써서 1573년 신도비를 완성시켰다.
또한 1574년에는 그들(홍섬, 송인)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인 류사필의 묘갈까지 장만했으니 묘
역 관리만큼은 아주 100점 감이었다. 이들 묘갈과 신도비는 류홍 묘역 밑에 나란히 자리해 있
다.

류중광, 류식의 묘처럼 문인석과 망주석, 키 작은 동자석, 상석, 묘비를 지니고 있으며, 1989
년 이후에 세운 묘비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16세기 것들이라 고색이 넘친다.

▲  류준과 류사필묘 (북쪽에서 본 모습)

▲  450년 가까이 묵은 류사필 묘갈(墓碣)


▲  류돈(柳焞)과 삭녕최씨묘
류돈은 류중광의 아들로 류중광묘 바로 남쪽에 자리해 있다. 묘비와
상석을 제외하고 16세기 것을 유지하고 있다.

▲  류홍(柳泓)묘

류홍 묘역 제일 높은 곳에는 류홍 묘가 자리해 후손들의 무덤을 굽어보고 있다. 류순정과 더
불어 이곳 묘역의 터줏대감으로 구름무늬 이수를 갖춘 늙은 묘표(묘비)와 문인석, 장명등, 망
주석, 상석을 지니고 있으며, 묘역 밑에는 높은 사람만 장만할 수 있던 신도비까지 두어 그의
높은 위치와 행적을 알려준다.

류홍(1483~1551)은 류순정의 아들로 어머니는 안동권씨<권효충(權孝忠)의 딸>이다. 자는 자연
(子淵)으로 1506년 중종반정 때 반정에 가담한 아버지를 도와 부자가 나란히 정국공신(靖國功
臣) 4등에 책록되는 위엄을 보였다. 그 인연으로 그들 부자의 무덤은 서울에서 유일한 부자 2
대 공신 묘역으로 천하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반정 이후 사복시주부,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공조정랑(工曹正郞)이 되었으며, 1510
년 부산포와 제포(薺浦), 염포(鹽浦)에서 왜인(倭人)들이 소란을 일으킨 삼포왜란(三浦倭亂)
이 터지자 남정도원수(南征都元帥)로 파견된 부친을 따라가 왜인을 토벌했다. 그들 부자는 무
예에 아주 능했는데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한다.

삼포왜란을 평정하고 내자시(內資寺)와 군기시(軍器寺)의 첨정(僉正)이 되었다가 1511년 무과
에 급제해 사복시 부정(副正)에 올랐으며, 훈련원부정을 거쳐 제포첨사(薺浦僉使, 창원 웅천)
가 되었다.
그는 역대 첨사들이 왜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그들에게 발급한 도서(圖書)의 검사를 소홀히 한
점을 지적하고 왜인들의 왜관(倭館) 출입과 왜선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이듬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오위장(五位將)을 겸임했다.
1519년 이후 원주와 정주 목사를 거쳐 훈련원도정, 충청도병마사, 수군절도사, 경상우도병마
사, 전라도수군절도사, 회령부사, 북병사(北兵使) 등의 주요 군직을 지냈으며, 1544년 진산군
(晋山君)에 봉해지고 부총관(副摠管)을 겸했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위사원종공
신(衛社原從功臣)에 책록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으며, 154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
府事)가 되었다.

무인이지만 문인, 선비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고, 청렴하고 검소하여 공조정랑으로 있을 때 선
임자들이 관청의 기명(器皿)을 멋대로 사용하던 폐습을 근절시켰다.

   ◀  류홍 묘의 동그란 봉분과 묘표(墓表)
비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구름
무늬가 물결치는 이수(螭首)를 두었다. 비신과
이수에는 무심한 세월이 강제로 달아놓은 검은
주근깨와 온갖 상처들로 가득하여 고색의 향기
를 깊이 뿌린다.

        ◀  류홍 묘 문인석과 망주석
문인석은 고된 세월에 지쳤는지 일그러진 표정
을 짓고 있으나 대체로 멀쩡한 모습이다. 허나
그 옆의 망주석은 장대한 세월의 칼날을 정통
으로 맞아 밑둥만 일부 남은 가련한 신세이다.


  류홍 묘에서 바라본 류순정, 류홍 묘역 일대
가운데 부분에 보이는 집이 후손이 사는 집(재실)으로 그 너머 언덕에
아파트에 둘러싸인 류순정 묘가 있다.

▲  류홍의 행장이 적힌 류홍 신도비(神道碑)

류홍 신도비는 1573년에 손자 류준이 세웠다. 그는 류홍이 사망한지 20년이 넘도록 신도비를
장만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 좌의정을 지낸 강령군 홍섬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했고, 여
성군 송인에게 글씨를 부탁하여 비로소 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좌(碑座) 윗면에 엎드린 연꽃잎 모양의 복련(伏蓮)을 새기고 비신 앞뒤에는 3구획의 안상(
眼象)과 그 밑에 당초문(唐草紋)을, 옆면에는 두 구획의 안상과 당초문을 새기고, 머리에 지
붕돌을 얹혔다. 그 곁에는 아들 류사필의 묘갈이 나란히 있는데 그 모습이 서로 비슷하나 비
석의 명칭은 다르다. (신도비는 3품 이상의 당상관과 왕족들의 무덤에만 쓸 수 있음)
류순정 묘에도 신도비가 있으며, 오랜 풍상에 시달린 비신에는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
나 중후한 멋을 보인다.


▲  류순정의 후처, 평창이씨묘

류홍 묘역과 류순정 묘역 중간 산기슭에는 류순정의 부인인 평창이씨묘가 홀로 자리해 있다.
류홍과 류순정 묘역은 2기 이상의 무덤이 몰려있어 심심치는 않아 보이나 평창이씨묘의 무덤
만 그 중간에 외롭게 자리해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마도 풍수지리에 따라 그렇게 묘를
쓴 것 같다. 
여기서는 류홍과 류순정 묘역은 물론 금강수목원아파트, 천왕산이 훤히 두 망막에 들어와 묘
역에서 위치가 아주 좋으며, 봉분(封墳)과 묘표, 상석, 문인석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16세
기 것으로 묘표 같은 경우 조선 초에 많이 나타나는 연꽃 봉오리 지붕돌로 작고 앙큼한 형태
이다.

▲  뒷쪽에서 바라본 평창이씨묘

▲  연꽃 봉오리 지붕돌을 지닌
평창이씨묘표

▲  눈이 유난히도 크고 귀여운 평창이씨묘의 꼬마 문인석
왼쪽 문인석은 피부가 덜 탔지만 오른쪽 문인석은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탔는지
피부가 아주 검다.

▲  평창이씨묘에서 바라본 류홍 묘역
제일 왼쪽 모퉁이에 류돈 묘, 바로 오른쪽에 류중광 묘와 류식 묘, 그 위쪽에
류사필 묘와 류준 묘가 차곡차곡 들어앉았다. 그리고 그 한참 위에
류홍 묘가 자리하여 후손의 무덤을 굽어본다.

▲  류순정(柳順汀)묘

묘역 북쪽에는 이곳의 시조인 류순정묘가 있다. 짙은 숲을 뒤에 둔 류홍묘와 달리 묘 북쪽과
동쪽에 아파트가 비집고 들어와 그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무덤을 굽어본다. 무덤과 키다리 아
파트의 어색한 조화. 이는 개발의 칼질이 개념 없이 자행되는 이 땅의 씁쓸한 현실의 산물로
이곳과 비슷한 처지의 조선시대 묘역이 서울과 수도권에 비일비재하다.

류순정(1459~1512)은 류양(柳壤)의 아들로 어머니는 정즙(鄭楫)의 딸이다. 자는 지옹(智翁),
호는 청천(菁川)이며, 부인은 안동권씨와 후처인 평창이씨가 있다.
청년 시절에는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에 뛰어나 그와 대
적할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1487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전적
(弘文館典籍)이 되었으며,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어 전라도에 들어온 왜구를 수색하여 잡아
들이는데 공을 세웠고, 1491년 함경도평사로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의 막료가 되어 평안
도평사를 역임했다.

연산군 시절에는 임사홍(任士洪)의 잘못을 논박했고, 평안도절도사 전림(田霖)의 권력 남용을
추궁했으며, 북방 야인 문제에 대한 대책을 진언했다. 그 뒤 홍문관교리가 되었는데, 문신임
에도 활솜씨가 뛰어나 부응교(副應敎)에 배수되었다. 이어 사헌부집의를 거쳐 의주목사가 되
었는데, 조선의 그늘에 있던 압록강 이북 지역의 야인을 토벌했을 때, 적정 탐지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군자금 확보와 성곽 수축 등 국경 경비 강화에도 힘썼다.

1503년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1504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 이때 연산군에게 밤사냥에 대해 진언하다가 임사홍의 모략으로 추국을 당하기도 했다.
1506년 연산군에게 불만을 품은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과 반란을 모의하여 그 유
명한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 1등에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숭정대부(崇
政大夫)란 큰 감투를 받았다.

반정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임했으며, 연산군 시절에 폐지된 경연 부
활에 앞장섰다. 이후 우의정과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1507년 이과(李顆) 등이 견성
군(甄城君)을 추대하려고 역모를 꾀하자 이를 처리해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에 봉해졌다.
1508년 평안도 인산(麟山)과 강계(江界) 지역에 둔전(屯田)을 설치했으며, 좌의정(左議政) 시
절에는 인천과 김포, 통진 지역에서 도둑들이 설치자 박영문(朴永文)과 유담년(柳聃年)을 포
도대장으로 삼아 그들을 토벌케하고 유민의 안집책을 마련했다.
1510년 삼포왜란이 터지자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병사를 총괄했으며, 다시 도원수가 되
어 왜란을 토벌하고 삼포(부산포, 제포, 염포)에 비왜방략(備倭方略)을 마련했다. 이때 대간
들이 재물을 늘린다는 명목으로 그를 탄핵했으나 오히려 군공(軍功)을 인정받아 영의정(領議
政)까지 올랐지만 불과 2달 뒤에 5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중종은 크게 슬퍼하며 장흥고의 관곽까지 내주는 등, 장례를 특별히 챙겨주었으며, 무안(武安
)이란 시호를 내려주었다가 나중에 문정(文定)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후 중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  류순정 묘표

▲  류순정 묘를 지키는 꼬마 동자석

류순정 묘는 이수를 갖춘 묘표와 상석, 동자석, 망주석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16세기에 조성
된 것들로 고색이 흠씬 묻어나있는데, 묘 바로 밑에는 부인 안동권씨 묘가 있으며, 서쪽 산자
락에는 앞서 언급한 부인 평창이씨묘가 있다. 부인 묘에는 모두 문인석을 갖추고 있어 류순정
묘에는 작은 동자석으로 대신했다. (장명등은 안동권씨 묘에만 세웠음)


▲  류순정 묘의 뒷통수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  류순정의 부인 안동권씨 묘
안동권씨 부인은 류홍의 어머니로 그가 불과 2살 때 세상을 떠났다. 봉분과 묘표,
상석, 문인석, 장명등을 지니고 있으며, 동자석과 망주석은 류순정 묘가
대신 지니고 있어 따로 갖추지는 않았다.

▲  뒷쪽에서 본 안동권씨 묘

▲  이수를 지닌 안동권씨 묘표

▲  얼굴과 왼쪽 어깨에 세월의 때가
가득 낀 안동권씨묘 문인석

▲  고된 세월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안동권씨묘 장명등


▲  류순정 신도비

안동권씨묘 옆구리에는 류순정 신도비가 우두커니 서 있다. 류순정 묘 바로 동쪽까지 아파트
가 들어서고 묘역과 아파트 경계에 돌담이 둘러지면서 신도비 정면 공간이 좀 야박하게 되었
다. 하여 부득불 옆에서 그를 담았다.

신도비의 모습은 류홍 신도비와 비슷한데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진천군(晉川君) 강
혼(姜渾)이 글을 짓고 여성군 송인이 글씨를 썼다. 허나 글만 받았지 비석을 세우지 못한 상
태로 50년 정도가 흐른 1567년에 류준이 비로소 비석을 세웠다. 비좌와 비신, 지붕돌로 이루
어진 형태로 비좌 윗면에 복련을 새겼고, 전면에 안상 3구획을, 측면에 안상 2구획을 새겼다.

*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 산 43-31, 43-32(오리로13가길
  42)


▲  류순정 묘역에서 바라본 류홍과 후손들의 묘역
저 공간에 류홍을 비롯한 6대의 유택이 둥지를 틀었다.


 

♠  서울에서 유일하게 마음 놓고 거닐 수 있는 철길 명소,
항동(航洞)철길(오류선)

▲  오류2동 주택가를 지나는 항동철길 ①

금강수목원아파트 바로 남쪽에는 오리로11길과 나란히 달리는 철길이 있다. 속세에서는 그 철
길을 항동철길이라 부르는데 정식 명칭은 오류선(梧柳線)으로 '경기화학선'이란 별칭도 지니
고 있으며, 경인선 오류동역(1호선)에서 광명시(光明市) 옥길동에 있던 경기화학을 잇는 4.5
km의 단선 철로이다.
경기화학주식회사는 이 땅 최초의 비료 공장으로 1954년 옥길동에 설립되었다. (그 시절 지명
은 부천군 소래면 옥길리) 원료와 비료 운송을 위해 1957년 9월 26일에 철길을 닦기 시작하여
1959년 5월 30일에 완성을 보았는데, 경기화학 외에도 한때 오류동에 있던 삼천리연탄공장과
동부제강도 이 철로의 신세를 졌다.

경기화학은 울주 온산공장으로 통합, 이전되면서 광명 옥길동 공장은 문을 닫았으며, 그로 인
해 열차가 다닐 일이 없어져 완전 한가한 신세가 된다.
그렇게 열차의 기적소리도 거의 사라지고 열차의 바퀴자국도 녹이 슬면서 철로에는 잡초가 덥
수룩하게 끼었으며, 무쓸모급 철길로 전락했지만 주변에 천왕산 공원, 푸른수목원이 조성되면
서 그들을 수식하는 철길 명소로 덕을 보게 되었고, 2014년 이후 방송매체에서 이곳을 줄기차
게 홍보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항동철길은 오류동역에서 1호선 경인선에서 살짝 갈라져 나와 서해안로와 오리로가 만나는 광
덕4거리를 지난다. 여기서부터 뚜벅이들이 거닐 수 있다. (광덕4거리~오류동역 구간은 접근
금지) 오리로11길 골목길이 바로 남쪽에 붙어있으며, 금강수목원아파트와 맞닿은 철길 북쪽에
는 짧게 숲길을 닦아놓아 눈길을 부드럽게 배려했다.
철길은 주택가의 끝인 우창굿모닝아파트를 지나면 숲에 감싸인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난다. 천
왕산 산세가 움푹 낮아진 곳에 산의 살을 파서 생긴 틈으로 그 고개를 지나면 푸른수목원 항
동철길 쪽문과 천왕산 등산로가 나온다. 보통 여기서 철길 산책을 시작하거나 접거나 하지만
서쪽으로 더 들어가 푸른수목원 정문까지 이동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어렵다. 즉 광덕4거리
에서 푸른수목원 정문까지 1.3km 구간만 뚜벅이들이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

비록 버려진 철길로 지금은 관광지로 꽤 바쁘게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열차가 완전히 끊긴 것
은 아니다. 가뭄에 콩나듯 아주 가끔씩 다닌다고 하며, 만약 산책 중에 열차를 만났다면 꼭
복권을 사보기 바란다. 그만큼 열차를 보기 힘들다. (나도 몇 번 가봤지만 열차 구경도 못했
음)
한때 이 철길을 두고 관광지로 두느냐 안전을 위해 접근 불가로 봉인하느냐를 두고 말이 많았
으나 이제는 관광지로 완전히 무게가 쏠렸다.

이 땅에 철길 명소가 여럿 있지만 서울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게다가 주거지와 골목길 속
을 거리낌없이 지나가므로 매우 친숙하게 다가온다. 철길 주변 풍경도 주택가와 자연(천왕산,
푸른수목원)이 어우러진 모습이라 가히 싫지는 않으며, 특히 우창굿모닝아파트에서 푸른수목
원으로 넘어가는 숲에 감싸인 그늘진 고갯길은 이곳의 백미로 소박한 자연 풍경을 보여준다.


▲  오류2동 주택가를 지나는 항동 철길 ②

▲  오류2동 주택가를 지나는 항동 철길 ③

▲  항동철길과 금강수목원아파트 사이에 닦여진 짧은 숲길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푸른수목원 방향)
철길을 닦고자 산세가 낮은 이곳을 손질했다. (나쁘게 말하면 천왕산 북쪽
산줄기를 철길로 끊어버림) 철길 좌우로 뚜벅이길이 닦여져 있는데,
뚜벅이길로 가던 철길로 가던 그건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된다.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금강수목원아파트 방향)

▲  푸른수목원 옆구리를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항동철길에 한참 빠져들 무렵이 되면 푸른수목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철길도 그렇고 주변 풍
경도 잠시 서울과 속세를 잊게 할 정도로 전원(田園) 풍경을 그려냈지만 안타깝게도 이 변두
리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아파트가 마구 들어서면서 그 흥이 많이 깨졌다.
게다가 철길은 수목원 정문까지만 거닐 수 있으니 그 이상은 가지 않기 바란다. (뚜벅이길도
없음) 저 철길의 끝에는 우리가 꿈꾸던 세상이 아닌 공장이나 군부대가 있으니 더 갈 이유가
없다.

푸른수목원 정문까지 항동철길(오류선)의 신세를 지고 남쪽에 닦여진 산길을 통해 천왕산 품
으로 들어섰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마무리를 지으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항동철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2동, 항동


▲  항동철길에서 바라본 천왕산과 푸른 봄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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