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40건

  1. 2021.04.10 울산 무룡산 강동사랑길, 어물동마애여래좌상, 동해바다 당사항 나들이 (길상바위, 용바위)
  2. 2021.03.31 도봉산의 숨겨진 명소 ~~ 방학동사지(절터),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윗무수골 나들이 (귀록계산 바위글씨, 자현암) 1
  3. 2021.03.21 금강 상류에 숨겨진 아름다운 비경 ~~ 옥천 둔주봉, 한반도지형, 향수바람길 나들이 (독락정)
  4. 2021.03.12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정릉을 지키던 조선왕실 최초의 원찰인 돈암동 흥천사 (돈암동 느티나무)
  5. 2021.03.01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일원이자 화려한 늙은 윤장대로 유명한 예천 용문사 (용문사 성보박물관)
  6. 2021.01.25 북촌에서 2번째로 큰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7. 2021.01.18 우주와 은하계를 꿈꾸다.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외나로도)
  8. 2021.01.08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9. 2020.12.31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10. 2020.12.21 한강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던 옥수동 미타사 2

울산 무룡산 강동사랑길, 어물동마애여래좌상, 동해바다 당사항 나들이 (길상바위, 용바위)

울산 겨울 나들이 (어물동마애여래좌상, 강동사랑길, 당사항)



' 울산 겨울 나들이 '
(강동사랑길,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당사항)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당사해양낚시공원과 동해바다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  당사해양낚시공원과 동해바다

▲  어물동, 주전 앞바다



 

늦가을을 내치고 천하를 접수한 겨울 제국이 한참 세력을 일구던 12월의 한복판, 남동임
해지역(부산, 울산)을 찾았다.
천하 제일에 항구도시이자 이 땅의 두 번째 대도시인 부산에 볼일(친척 문상)이 있어 오
후 늦게 급히 내려가 이튿날 발인과 후속 과정까지 지켜보고 친척들과 작별을 고했다.
비록 경조사로 오긴 했지만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못지나친다고 기왕 부산까지 왔으니 그
냥 올라가는 것도 좀 허전하다. 하여 부산과 기장(機張) 지역에서 정처를 물색해 보았으
나 부산을 50번 넘게 들락거린 터라 부산 사람들도 거의 안가는 숨겨진 명소까지도 많이
가본 상태이다. 그래서 딱히 끌리는 곳이 없어 울산까지 시야를 올렸다가 적당한 미답처
(未踏處)가 걸려들어 그곳으로 흔쾌히 길을 향했다.

울산(蔚山) 시내에 들어서 울산시내버스 411번(태화강역↔신명)을 타고 학성공원과 염포
동, 남목, 주전을 지나 금천마을에서 두 발을 내린다.
정류장 동쪽에는 이름만 들어도 무척이나 반가운 동해바다가 살짝 넝실거리고 있고 육지
와 바다의 경계에는 자갈돌이 깔린 해변이 조용히 누워있다. 그리고 전혀 생각치도 못했
던 존재의 안내문이 나의 눈을 붙들어맨다.


▲  금천마을 정류장 동쪽에 펼쳐진 동해바다



 

♠  강동사랑길 7-B코스(소망의 사랑길)와 길상바위 여근곡

▲  강동사랑길 7-B코스 (누운소나무 부근)

그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는 바로 강동사랑길이다. 울산 북구에서 어물동과 당사동, 정자동 지
역(이들은 행정동명 '강동동'의 관할 동네임)의 산과 바다, 들녘, 개천, 시골길을 엮어서 야
심차게 닦은 도보길로 강동동의 이름을 따서 강동사랑길이라 했다.
코스는 크게 7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징은 이름에 모두 '사랑'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1
코스는 '믿음의 사랑길', 2코스는 '연인의 사랑길', 3코스는 '윤회의 사랑길', 4코스는 '부부
의 사랑길', 5코스는 '배움의 사랑길', 6코스는 '사색의 사랑길', 그리고 7코스는 '소망의 사
랑길'로 이름이 하나 같이 사랑스럽고 정감을 느끼게 한다.

강동사랑길 안내도를 보니 내 목적지인 어물동 마애불까지 7-B코스가 닦여져 있다. 그러니 자
연스럽게 그 코스의 신세를 지면 된다. 강동사랑길 7코스인 소망의 사랑길은 A와 B, 2개의 코
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A코스(3,4km)는 금천마을에서 복골, 까치골을 거쳐 다시 금천마을로,
B코스(2.7km)는 금천교에서 누운소나무, 무룡산, 어물동 마애불. 어물천을 거쳐 금천마을로
돌아온다. 이 코스는 산과 들, 개천, 문화유산이 어우러진 길이다.


▲  누운소나무

강동7-B코스로 들어서니 하천에 바짝 누운 소나무가 마중한다. 하천을 향해 몸을 푹 숙인 그
를 보니 목이 어지간히도 탔던 모양이다. 그렇게 물을 향해 몸부림을 하다가 하늘로 곧게 크
지 못하고 누워 버린 소나무가 되버린 것이다. 허나 그 모습도 나름 운치가 있으며 그덕에 강
동사랑길의 소중한 명물로 이름을 남겼다. 만약 곧게 자랐다면 강동사랑길 안내도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나이는 100년 내외로 여겨지며, 철없는 사람들의 발에 다치지 않도록 밑둥 위에 다리를
놓아 그를 배려했다.


▲  어물동 마애불로 넘어가는 무룡산 동쪽 자락

누운소나무를 지나면 강동7코스는 2갈래로 갈린다. 직진하면 A코스(복골 방면)이고, 왼쪽 개
천을 건너면 B코스(어물동 마애불 방면)인데, 그 개천을 건너 마치 장대한 성벽처럼 버티고
있는 무룡산 동쪽 산줄기를 넘어야 된다. 높이야 얼마 되지 않지만 초반부터 각박한 경사가
시작되니 은근히 기운이 빠진다. 게다가 일몰시간까지 눈치를 주고 있어 (그때가 16시였음)
길을 서둘러야 된다.
다행히 저 경사만 오르면 약간의 오르락과 내리락이 있을 뿐, 길은 느긋해지며, 평일이라 인
적이 너무 없어 한적하기 그지 없다.


▲  강동사랑길 7-B코스 무룡산(舞龍山) 코스 시작점

▲  솔내음이 너불너불하는 무룡산 산길 (강동7-B코스)

▲  무룡산 산길에 닦여진 108번뇌계단
오래된 마애불로 인도하는 산길이라 적당히 계단처럼 다듬어 108계단으로 삼았다.

▲  어물동의 명물, 길상바위 (가운데 틈이 여근곡)

108번뇌계단을 올라 산굽이를 하나 넘으면 마애불로 인도하는 내리막길이 급하게 펼쳐진다.
그 길을 내려가면 마애불을 품은 방바위와 거대하게 생긴 길상바위가 신비로운 모습으로 마중
을 한다.

울퉁불퉁한 피부를 지닌 길상바위의 가운데 틈이 여근곡으로 그 모습이 여인네의 은밀한 부분
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나는 순수한(?) 사람이라 잘 모르겠지만 얼핏 봐도 좀 비
슷하게는 보인다. 대자연이 심술궂게(?) 빚어놓은 현장으로 이런 곳은 반드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터로 쓰이기 마련이다. 하여 오랫동안 아들을 기원하던 기자
신앙(祈子信仰)과 성기신앙(性器信仰), 용왕신앙(龍王信仰)의 현장으로 쓰였고, 신라 후기에
어물동 마애불이 들어선 이후에는 불교까지 가세하여 여러 신앙이 두루 어우러진 이색 현장이
되었다. 마치 서울 인왕산(仁王山)의 선바위처럼 말이다.
(☞ 인왕산 선바위글 보러가기 )

또한 길상바위는 용왕당(龍王堂)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이는 바다와 가깝기 때문이다. 현
재는 방바위 밑 바위에 용왕당을 두고 있으며, 이런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붙여놓은 재미난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그 보따리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주전 앞바다 섬에는 하느님(하늘님)의 명을 받고 아그락할머니가 내려와 살고 있었다
. 비바람이 불어 높은 파도가 치거나 해적이 쳐들어오면 할머니가 친히 막아주어 바닷가 마을
(금천, 당사, 구암, 주전) 사람들은 안심하며 생업에 종사했다.
아그락할머니가 지켜주는 당사마을에는 뱀이, 구암마을에는 거북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할
머니를 도우며 서로 용이 되려고 경쟁했다. 그들을 오랫동안 살펴본 할머니는 뱀이 더 바람직
해보여 그를 용으로 상승시켜 달라고 하늘에 청했다. 그 청을 받은 하느님은 뱀과 거북이를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해 모두 용으로 승진시켜 주었다.
뱀과 거북은 각자의 영역에서 승천하여 각각 청룡과 황룡이 되었는데, 용의 필수품인 여의주
(如意珠)를 꼭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평가에서 실격이 되는 모양이다. 하여 여의주가
숨겨진 무룡산을 샅샅이 살폈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어느덧 마애불이 깃든 방바위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마애불의 위엄에 단단히 이끌려 여의주를 포기하고 마애불의 수호신을 자처하
여 이곳에 아예 눌러앉았다고 한다.
청룡과 황룡이 여의주를 찾느라 법석을 떨며 춤을 추었던 산은 용이 춤을 추었다 하여 무룡산
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용왕당 청룡과 황룡, 마애불에게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
루어진다고 한다. 특히 자손을 얻지 못한 이들이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기자신앙의
현장으로 애지중지 되었다.


▲  피부가 매우 거친 길상바위와 여근곡 윗쪽

▲  어물동 마애불을 품은 방바위의 뒷통수
바위와 마애불이 남쪽만 죽어라 쳐다보고 있으니 내가 이렇게 뒤로 잠입한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  어물동의 명물, 아그락 돌할매

방바위 옆에는 '아그락 돌할매'라 불리는 큰 돌이 있다. 돌 위의 움푹 패인 공간에는 주먹만
한 돌이 놓여져 있는데, 피부가 아주 맨들맨들하여 주먹돌로 오랜 세월 밀었음을 보여준다.

이 돌은 이 지역의 오랜 수호신인 아그락 할매의 화신(化身)으로 여기고 있어 큰 돌 자체를
아그락돌할매라 부른다. 자신의 소망을 들이밀고 돌을 밀었다가 당길 때 돌이 무겁거나 달라
붙어 움직이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여 이곳을 찾은 중생들은 주먹돌로 열심
히 돌을 문질러 돌할매에게 소원 접수 여부를 알아본 것이다.
언제부터 이 돌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물동 마애불과 함께 해왔다면 무려 1,000년이 넘는
다. 주먹돌은 하도 문질러서 맨들맨들하지만 할매돌은 제법 연식이 있어 보인다.

이곳과 비슷한 경우로는 인천 영종도(永宗島) 용궁사(龍宮寺)가 있는데, 그곳은 돌을 민 다음
들어올릴 때 무거움을 느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한다.

나도 소원거리가 많은 사람이라 돌을 밀고 당겨보았다. 그런데 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바위
에 달라붙어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제발 붙어라' 심리상 그런 것인지 실제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지만 어쨌든 붙었다. 그렇다면 내 소원은 접수된 것일까? 과연? 허나 인천 용궁사에서
도 돌이 무거움을 느꼈으나 그 소원은 지금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이곳이라고 다르
겠는가. 그냥 이렇게 기복(祈福)행위를 하는 것만으로 잠시나마 마음의 평안을 누리라는 뜻이
돌할매의 뜻일 것이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괜히 이곳의 명물, 돌할매에게 해코지는
하지 말자.


 

♠  방바위에 깃든 신라 후기 마애불, 어물동(於勿洞) 마애여래좌상
-
울산 지방유형문화재 6호

하늘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방바위(방바우) 남쪽 면에는 약사불을 중심으로 한 마애삼존상이
두텁게 깃들여져 있다. 가운데 자리한 큰 존재는 약사여래불이며, 좌우에 조그만 존재들은 일
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로 보관(寶冠)에 해와 달이 새겨져 있어 그들의 정체
를 살짝 귀뜀해준다.

약사불은 높이 5.2m, 어깨 폭 2.9m로 고된 세월에 많이도 울었는지 얼굴은 거의 지워졌다. 허
나 귀와 머리, 입, 코 등은 윤곽이 남아있어 확인은 가능하다. 두터워 보이는 목에는 삼도(三
道)가 그어져 있으며, 몸통은 꽤 단단한 모습으로 옷주름선이 이리저리 그어져 있다.
좌우에 자리한 일광/월광보살 역시 얼굴이 지워져 있으나 얼굴과 눈, 코, 귀, 보관 윤곽은 그
런데로 남아있으며, 바위 모서리에 직각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는데, 이는 집을 만들고자 서까
래를 걸쳤던 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노천에 자리한 지금과 달리 따뜻한 집에 봉안된 마애불이
었음을 알려준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마애불로 바로 옆에 자리한 아그락 돌할매와 뒷쪽에 병풍처럼 들어선 장
대한 길상바위, 여근곡과 어우러진 복합 신앙의 현장으로 방바위 자체도 범상치 않은 모습이
라 마애불이 깃들기 전에는 길상바위, 돌할매와 더불어 민간신앙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특히 마애불과 길상바위 주변에는 부처의 발자국 모양을 닮은 붉은 불족적(佛足跡)이 여럿 발
견되었는데,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자연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을 상대로 숨은그림찾기
를 벌였으나 눈이 나쁜 것인지, 마음이 나쁜 것인지, 불족적이 나쁜 것인지 결국 발견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와서 도전하라는 마애불의 뜻은 아닐까? 허나 여기까지 언제
또 오겠는가? 아직도 천하에 미답처가 은하계의 별처럼 수두룩하여 나의 목을 죄거늘.

▲  약사불 오른쪽의 일광보살

▲  약사불 왼쪽의 월광보살


▲  약간 옆에서 바라본 어물동 마애불과 방바위
마애불에 씌웠던 집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기와를 얹힌 팔작지붕 건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집은 장대한 세월 앞에 훌쩍 녹아 없어지고 단단한
바위와 마애불만 남아 자리를 지킨다.

▲  선사시대 사람들의 오리무중 낙서판, 마애사 암각화

이곳에 왔을 때는 오로지 어물동 마애불만 알고 있었고, 그 마애불만 생각하고 왔다. 그런데
전혀 머리 속에 없던 존재들을 덤으로 보게 되었다. 강동사랑길도 그렇고, 길상바위와 여근곡
, 아그락돌할매, 그리고 암각화까지, 그야말로 마애불이 내게 건네준 두둑한 선물꾸러미였다.
이런 뜻밖에 추가 옵션을 받을 때는 참 기분이 좋다.

마애불 밑 바위에 자리한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남긴 낙서가 깃들여져 있다. 주술적인
흔적인 성혈(聖穴)과 수로(水路), 별자리 모양 등이 있다고 하며, 부귀와 장수를 발원한 거북
형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그저 굵직한 주름선만 가득 보인다. 어쨌든 수수께
끼의 오래된 돌판으로 그를 통해 이곳 일대가 옛 조선(朝鮮)이 천하를 호령하던 청동기시대부
터 신앙의 현장으로 쓰였음을 알려준다.

이 암각화는 마애사 승려가 발견했는데, 현재 주위로 금줄을 쳐놓아 암각화를 보존하고 있으
며,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  마애사 주차장에서 어물동 마애불로 인도하는 'S'라인의 오르막길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S라인이 아니던가..


▲  마애불 밑 바위에 자리한 석굴 기도처, 용왕당
넉넉하게 벌어진 바위 틈에 용왕의 거처를 닦아 용왕당으로 삼았다.

▲  밑에서 바라본 어물동 마애불 주변
밑에 보이는 바위가 용왕당, 석축이 깔린 중간 바위가 방바위와 마애불,
가장 윗쪽에 길상바위가 자리한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마애불 주변, 마애불로 인도하는 문과 계단

▲  어물동 마애불을 지키는 조그만 현대 사찰 마애사(磨崖寺) <2015년>

마애불 밑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마애사가 있다. 오로지 그를 바라보는 절집이라 이름
또한 마애사라 했는데, 2008년에 창건되었으며, 불법으로 절을 등록하고 우물을 파는 등 말썽
이 적지 않아 2010년에 울산 북구청에서 행정대집행으로 강제 철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타결이 잘되어 철거는 면했고, 승려 휴암이 신도와 불교계의 도움을 받아 주변 4,000
여 평의 땅을 매입, 정식으로 절 등록을 하여 2011년 10월 다시 문을 열었다. 이때 금개구리
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4~5동 정도의 집과 바위 석굴을 다듬은 용왕당 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연꽃을 심은 연못을 갖추어 여름에는 연꽃의 향연을 선사하며, 마애불과 주변 바
위에 나타났다는 불족적을 내세워 약사기도도량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소재지 : 울산광역시 북구 어물동 산121 (마애사 ☎ 052-209-0255)


▲  강동사랑길 7-B코스 (어물동 시골길)

어물동 마애불을 둘러보고 강동7-B코스의 나머지 구간(어물천, 어물동 시골길)을 따라 금천마
을로 나왔다. 이 구간은 도로와 비포장 시골길, 어물천 둑방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물천에
는 갈대가 바닷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고 가을 수확이 끝난 어물동 들녘은 겨울잠을 자며 살
며시 봄을 잉태하고 있다.


▲  강동사랑길 7-B코스 (어물천 구간)

▲  오래된 팽나무(울산 보호수 16호)와 금천마을 서낭당

강동7-B코스 어물천 구간을 걷다보면 잠시 어물천 남쪽으로 길이 넘어갈 때가 있다. 그때 논
두렁 한복판에 오래된 팽나무 하나가 '잠시 나좀 보고 가소!' 눈짓을 보낸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서니 팽나무와 함께 금천마을 서낭당이 나를 맞는다.

팽나무는 느티나무와 더불어 귀신이 좋아하는 나무라 하여 마을 신목(神木)으로 많이 삼는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2000년 10월) 추정 나이가 26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280년 정도 되며,
높이는 약 20m 정도, 둘레는 3.7m이다. 오랜 세월 금천마을을 지키던 나무로 그의 그늘에는
현대식으로 지어진 기와집 서낭당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으며, 그들 주위로 담장이 둘러져 혹
여 모를 나쁜 기분을 경계한다.

* 팽나무 소재지 : 울산광역시 북구 어물동 152


▲  굳게 닫힌 금천마을 서낭당
시대가 변하면 서낭당도 마지 못해 변하는 법, 마치 현대 가옥과 같은 모습으로
마을 수호신을 봉안하고 있다.


 

♠  동해바다 거닐기 (용바위, 당사항)

▲  해질녘 금천마을 몽돌해변

어물동 마애불을 둘러보고 다시 금천마을 정류장으로 되돌아왔다. 지금까지는 산과 들녘을 돌
아다녔으니 이제는 바닷가에 온 기분도 낼 겸 바닷가를 거닐기로 했다. 원래는 정자동으로 넘
어가 주상절리해안을 보려고 했으나 햇님이 바로 꼴까닥 직전이라 여기서 당사항까지만 둘러
보고 오늘 나들이를 흔쾌히 끝내기로 했다.

금천마을 해변에는 몽돌이 가득 입혀져 있다. 동대해(東大海)는 파도로 몽돌을 살며시 어루만
지고, 그들의 손길을 받은 몽돌은 더욱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윤기를 낸다. 한여름에 왔다면
바다와의 스킨쉽도 가능하겠지만 혹독한 겨울 제국 시절이라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아무
리 따뜻한 남쪽 지방이라고 해도 거의 0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해변을 따라 당사항 쪽으로 걷다보면 용바위가 나오고, 바로 당사해양낚시공원이 모습을 드러
낸다.


▲  바다와 몽돌과의 끊임없는 속삭임 - 금천마을 몽돌해변

▲  금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바라본 금천~주전 해변

▲  바다를 향해 팔을 뻗은 당사해양낚시공원 구름다리

용바위를 지나면 동대해를 향해 팔을 뻗은 다리가 나온다. 넘섬이라는 조그만 바위섬까지 이
어진 220m의 다리로 이 다리가 당사해양낚시공원이다. 즉 바다 구경과 낚시를 위한 해상공원
이다. 그 역시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보너스 같은 존재인데, 울산 북구청에서 35억을 들여 만
든 것으로 2013년 7월 26일에 문을 열었다.
당사마을의 수익 증대와 동대해를 옆에 낀 강동 지역의 관광활성화를 위해 조성된 것으로 처
음부터 유료의 공간으로 운영되었다. 달랑 보이는 것이 전부인 저 구름다리가 말이다. 그래도
초창기에는 1달에 1천 명 내외로 왔으나 입장료의 한계와 주변에 널린 낚시터(당사항 방파제)
로 인해 입장객 수가 나날이 줄어 세금을 축내어 지은 현장이라며 언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당사어촌계에서 위탁관리를 하고 있으며, 구름다리(낚시잔교, 156m)와 진입도교(64m), 해상전
망대 2개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매년 1월 1일 공원을 중심으로 해돋이행사가 절찬리에 열린
다.

낚시공원 시작이야 어쨌든 당사항의 명물이니 한번 들어가볼까 했으나 여전히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매표소가 다리 직전에 버티고 서 있어 바다로 가지 않는 이상은 들어가기도
힘들다. 어차피 여기서 보이는 것이 전부인데, 바다와 더 가까워지는 것 외에는 매력이 없어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  용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당사해양낚시공원 구름다리

▲  당사항에서 바라본 당사해양낚시공원 구름다리

▲  용바위조망대에 세워진 용의 형상

당사해양낚시공원 매표소 맞은편에 낚시도구를 파는 가게가 있고, 그 옆에 용의 형상으로 인
도하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용바위 조망대인데, 조망대 한복판에 용이 용트림을
하고 있고, 그 꼬랑지 바로 뒷쪽에 용바위가 있다.

용바위는 바닷가에 있는 큰 바위로 그 꼭대기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는데, 이미 개인 소유가
되버려 무덤이 자리해 있다. 명당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바닷가 바위까지도 무덤으로 만들어
버린 것. 그래서 용바위 꼭대기는 아쉽게도 발을 들일 수가 없다.


▲  서쪽에서 바라본 용바위

용바위는 당사마을의 오랜 명물로 그에 걸맞게 그럴싸한 전설이 깃들여져 있다. 내용이 앞서
언급했던 어물동 마애불의 아그락할머니 전설과 좀 비슷한데, 아무래도 아그락할머니 전설을
다소 따라한 듯 싶다.

아주 먼 옛날, 하늘나라에 큰 뱀과 거북이가 살았다. 그들은 워낙 사이가 좋지 않아 볼 때마
다 으르렁거리고 싸웠는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옥황상제가 열받은 나머지 지상으로 내쫓았다.
누가 더 나쁜지 확인할 수가 없어 모두 벌을 내렸는데, 거북은 뱀을 궁지에 몰고자 일부러 고
개를 안으로 당겨놓고 말없이 지냈다. 그러니 옥황상제는 거북이를 더 믿고 뱀을 더 의심하게
되었다.
거북이의 간계에 열이 받은 뱀은 계속 인내한 결과 끝내 승천하게 되었고, 벼락이 꽈당 내리
치니 용바위가 둘로 갈라지면서 용은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부터 바위 때문에 막혔던 물길이
뚫리니 사람들은 용바위라 불렀다. 즉 전설의 결론은 착한 쪽은 뱀, 나쁜 쪽은 거북이다.

▲  용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용바위

▲  바로 앞에서 바라본 용 형상


▲  용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동대해와 주전, 금천 앞바다

▲  동대해에 몸을 기댄 당사항

▲  당사항 남쪽 부분

동대해를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당사항은 울산 당사동(堂舍洞)에 자리한 조그만 항구이다. 지
방 어항(漁港)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항구에는 수산물 직판장이 있어 싱싱한 물고기를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낚시터로도 유명하여 방파제와 해양낚시공원이 주요 포인트이다.
강동사랑길 6코스가 당사항을 지나가며, 주변에 500년 묵은 느티나무가 있고, 근래 마을 골목
과 담벼락에 그림이 그려져 조그만 벽화마을을 이룬다.

내가 당사항에 이른 시간은 17시가 넘은 시간, 일몰 바로 직전이다. 제아무리 천하 제일의 맷
집을 자랑하는 햇님이라 한들 겨울 제국의 눈치는 보는 모양이다. 그 눈치에 못이겨 그 커다
란 몸뚱이를 바다 속에 있을 것 같은 그만의 공간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고 달이 그 자리를 대
신해 땅꺼미를 내린다. 어둠이 밀려오자 방파제와 항구의 조명시설이 일제히 몸을 불사르며
조금이나마 어둠을 몰아낸다. 우리는 그것을 야경(夜景)이라고 부른다. 이곳 야경이 그리 대
단하지는 않지만 나름 조촐히 불빛을 뿜어내며 당사항의 밤풍경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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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구에 몸을 기대 고된 몸을 쉬는 어선들과 그들을 지켜주는 방파제

▲  어둠이 밀려온 당사항

▲  당사항의 든든한 갑옷, 방파제와 하얀 등대

▲  다양한 색채로 어둠을 긴장시키는 방파제 등
방파제 등에는 울산의 상징인 고래 형상이 귀엽게 표현되어 있다.

▲  방파제에서 바라본 당사항과 수산물직판장

당사항을 둘러보니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햇님의 기운은 싹 사그라들고 완전 어둠의 세상이 되
었다. 햇님도 그의 집으로 돌아갔으니 나도 내 제자리로 돌아가야겠지. 게다가 다음날부터 날
씨가 더 추워진다고 하니 더 돌아다닐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럴 때는 그저 우리집 이불 속이
최고다.

당사항을 끝으로 울산 겨울 나들이는 미련없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당사항 소재지 : 울산광역시 북구 당사동 378-3 (용바위1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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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의 숨겨진 명소 ~~ 방학동사지(절터),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윗무수골 나들이 (귀록계산 바위글씨, 자현암)

도봉산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무수골(자현암)



~~~~~  도봉산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무수골 나들이
~~~~~

도봉산 방학동사지

▲  도봉산 방학동사지

귀록계산 바위글씨 윗무수골 숲길

▲  귀록계산 바위글씨

▲  윗무수골


 

서울의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20m)은 내가 서식하는 도봉구(道峰區)의 듬직한 뒷
동산이다. 그의 그늘에 묻혀 산지가 어언 20년 남짓, 비록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그의
품을 찾곤 한다. 도봉산을 거의 손바닥 보듯 돌아다니는 본인이지만 그것을 깨는 신선한
존재들이 가끔 나타나 나를 놀래키니 그런 것을 보면 도봉산이 내 손바닥이 아니라 오히
려 내가 그의 손바닥 안에서 재롱을 떠는 것 같다.

도봉동 집과 가까운 도봉산 방학동(放鶴洞) 구역에 늙은 바위글씨와 절터 유적이 있음을
근래 알게 되었다. 집 근처에 아직도 그런 미답처(未踏處)들이 숨겨져 있었다니 내심 놀
랐는데, 다른 곳은 몰라도 서울의 미답처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 하여 여름 제국(帝國)
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늦여름에 그들을 찾아 나섰다.

집과도 가까우니 슬슬 걸어가면 된다. 신도봉4거리에서 우이동(牛耳洞) 방면으로 이어지
는 시루봉로를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면 신방학중학교이다. 여기서 '방학동 전형필(全鎣
弼) 가옥' 옆길로 들어서면 그 길의 끝에 택시 회사가 있는데, 그 옆에 방학동계곡을 낀
산길로 들어서면 바로 도봉산의 품이다.


 

♠  방학동계곡에서 만난 한줄기 바위글씨

▲  도봉산 방학동계곡 산길

방학동계곡 산길은 시루봉과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로 인도하는 숲길이다. 방학
동 주민의 소중한 산책 코스로 왕래가 빈번해 산길 또한 잘 닦여있는데, 길과 가깝게 거리를
두고 방학동계곡이 졸졸졸~♪ 교향곡을 선사하며 흘러간다.


▲  숲에 묻힌 방학동계곡 (바위글씨 윗쪽)

방학동계곡은 도봉산 최남단에 자리한 조그만 계곡으로 방학천과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
다. 숲이 짙은 계곡 중류에는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싹둑 다듬은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즐비해 경관도 괜찮은데, 서울 시내와 가까운 이런 계곡에는 옛 사람들이 남긴 풍류 흔적과
낙서가 거의 있기 마련이다. 그 예상대로 이곳에도 그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숨겨져 있다.
허나 그들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기에 계곡을 더듬으며 알아서 숨바꼭질을 해야 된다.
다행히 숨바꼭질의 난이도는 낮으며 계곡을 따라 한문이 새겨진 바위만 찾으면 술래는 끝이
다.


▲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많은 방학동계곡
자연이 칼로 싹둑 다듬은 것일까? 유난히 각이 지고 반듯한 암반이 많다. 비록
골짜기는 작아도 이 정도의 경치면 충분히 옛 사람들이 반할만하다.

▲  암반 사이를 잔잔히 흐르는 방학동계곡
바위 피부에 푸른 이끼들이 가득해 이곳이 속세의 때를 덜 탄
청정한 곳임을 알려준다.

▲  바위글씨가 서린 조그만 폭포 주변

바위글씨와 숨바꼭질을 벌이며 계곡을 더듬으면 조그만 폭포가 나온다. (산길에서 조금 떨어
져 있음) 사실 폭포라 하기도 좀 민망한 수준인데 그래도 계곡물이 완만하게 누운 바위를 타
고 아래로 미끄러지니 엄연한 폭포이다. 바로 이 폭포 주변에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바위글씨
2개가 서려있다.


▲  바위에 의연하게 깃든 귀록계산(歸鹿溪山) 바위글씨

폭포 옆에 90도로 각을 진 바위 피부에는 귀록계산 바위글씨가 선명하게 깃들여져 있다. 바위
에 네모나게 홈을 파고 행서체(行書體)로 글씨를 새겼는데, 그 홈 크기는 77x28cm이다. 그 4
자를 단순히 풀이해보면 사슴이 산과 계곡으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여기서 귀록(歸鹿)은 그
뜻이 아니라 방학동과 인연이 깊은 귀록 조현명(趙顯命, 1691~1752)의 호이다. 그러니까 조현
명의 산과 계곡, 즉 그의 조그만 세상이란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현명은 누구일까?

조현명은 풍양조씨로 조인수(趙仁壽)의 아들이다. 자는 치회(稚晦), 호는 녹옹(鹿翁), 귀록(
歸鹿)으로 모두 '사슴록(鹿)'자가 들어가는데, 이중 귀록은 1731년 이후 2번이나 파직과 복직
을 당했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1713년 진사(進士)가 되고, 1719년 증광시 문과(增廣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
에 진출했다. 1721년 경종(景宗)이 숙종(肅宗)의 아들이자 숙빈최씨의 소생인 연잉군(延礽君)
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내세워 소론(小論)의 공격으
로 힘들어하던 왕세제를 지켰다. 그 연잉군이 바로 영조(英祖)이다.

1728년 영조를 부정하는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
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했고, 반란이 진압되자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
(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大司憲)과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
가 되어 영남 남인(南人)을 다독거리며 백성을 보살폈다.
1731년 경상도에서 가장 큰 섬인 대마도(對馬島)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자 대마도주가 급히 지
원을 애걸했다. 하여 조정에서 쌀을 내리려고 했으나 이를 반대하자 파직을 당했으며, 1733년
전라도관찰사로 다시 기용되면서 공조참판(工曹參判)과 총융사(摠戎使), 어영대장(御營大將)
을 지냈다. 허나 1736년 예조판서 시절에 형정(刑政)의 불공평을 상소하다가 또 파직을 당했
다.
다행히 1738년 복직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1740년
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74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으며, 1746년 우의정(右議政)
이 되면서 문란해진 양역(良役)을 손질하고자 군액(軍額)과 군역부담자 파악에 착수, 1748년
에 양역실총(良役實總)을 간행하여 왕에게 올렸다.
1749년 청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갔다왔고,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며, 균역법의 제정
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으로 영돈녕
부사로 물러났다.

조현명은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적극 지지하며 양역의 개혁과 온갖 세금의 개선책을 제시
했다. 그리고 많은 문인과 교류를 했는데, 그중에서 김재로(金在魯), 박문수(朴文秀)와 친분
이 깊었다. 그가 남긴 책으로는 '귀록집(歸鹿集)'이 있고,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그의 시조 1
수가 전하며,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  아직도 뚜렷한 귀록계산 바위글씨의 위엄
300년 가까운 세월이 덧없이 흘렀건만 글씨는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은 정정한
모습이다.

  바위에 비스듬히 누운 와운폭(臥雲瀑) 바위글씨 (25x94cm 크기로 행서체)

조현명이 방학동계곡과 인연을 맺은 것은 처음 파직을 당한 1731년 이후로 여겨진다. 벼슬에
서 떨려나자 아버지가 묻힌 방학동에 들어와 잠시 머물렀는데 그 묘역이 바로 전형필가옥 뒷
쪽에 있다. (시루봉로 길가 북쪽 언덕) 그때 묘역과 가까운 이 계곡에 홀딱 반해 별서(別墅)
를 짓고 '귀록계산'과 '와운폭' 바위글씨를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글씨를 굳이 조현명과 연관 짓는 것은 그가 시루봉 주변 어딘가에 별서를 지은 적이 있
고, 귀록이란 호를 사용했으며, 그의 '귀록집'과 귀록집 권3에 실린 '와운폭우증가련(臥雲瀑
又贈可憐)','와운폭'이란 시가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의 글씨로 100%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
으며,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계곡 주변에 있었다는 그의 별서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지만 1744년 별
서 후원에 명오정(名吾亭, 귀록정)을 짓고 소기영회(小耆英會) 벗들을 불러 시문을 짓고 술을
마시며 놀았으며, 등산을 좋아하여 종종 도봉산과 우이암(관음봉) 부근 원통사(圓通寺)에 올
라가 몸을 풀었다.
또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와운폭'이란 시를 남겼는데, 이 와운폭을 두고 당시 함경도 함흥
(咸興)의 유명한 늙은 기생과 시를 몇 수 주고 받았다. 그때 기생에게 보낸 시 1수를 보면 다
음과 같다. 정리하면 즉 인생무상... 인간의 인생은 결국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功名文武前身事 - 문무의 공명은 모두 전생의 일만 같고
歌舞繁華一夢間 - 번화한 가무는 한바탕 꿈결처럼 지나갔다
大笑相看頭似雪 - 크게 웃는다 서로 쳐다보고 머리가 새하얗게 센 것을
空山斜日水流閑 - 공산에는 해 기우는데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0-1


▲  장수주말농장 옆 산길

방학동계곡에 깃든 2개의 바위글씨를 둘러보고 방학동사지를 찾고자 도봉산의 품으로 더 파고
들었다.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과 만나는 곳에서 계속 직진하면 너른 밭두렁이 나타나 사람을
놀라케 하는데, 그곳은 장수주말농장으로 도봉동과 방학동에 흔한 주말농장의 하나이다.

푸르게 익어가는 밭을 보니 우울했던 마음이 잠시나마 봄이 된 기분이랄까? 수많은 사람과 회
색빛 빌딩숲,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에서 이렇게 밭두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곳이 그만큼
서울 변두리란 소리이다.


 

♠  도봉산에 숨겨진 옛 절터, 방학동사지(放鶴洞寺址)

▲  방학동사지 2단과 3단 석축

장수주말농장에서 산속으로 더 들어가면 숲속에 묻힌 체육시설이 마중을 한다. 이곳은 방학동
주민들이 결성한 장수산악회가 약수터 주변에 운동시설을 닦아놓은 것으로 단순히 보면 도시
뒷산에 널린 운동시설과 공원으로 보고 지나치기 쉽지만 문제는 그 운동시설이 자리한 곳에
돌로 쌓은 심상치 않은 석축(石築)이 요란하게 널려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석축을 이루고 있
는 돌도 꽤 고색이 깊어보여 이곳에 무슨 사연이 있음을 살짝 속삭인다.

이곳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이곳은 오래된 절터이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절의 이름과 창건 시기, 망한 시기에 대해서는 전혀 전하는 내용이 없어 안타
까울 따름인데, 절터에 남아있는 석축과 맷돌은 마지막 날의 충격이 참 대단했던지 여전히 입
을 굳게 닫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인근 계곡에 별서를 지었던 조현명의 기록에도 절은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절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덮여있어 지역 이름을 따서 편의상 '방학
동사지'라 부른다.

이 미지의 절터에는 돌을 거칠게 다듬어 쌓은 석축 3단이 남아있다. 가장 위에 있는 1단 평탄
지는 길이 60m, 너비 17m로 20~120cm 크기의 장방형 석재를 5단 정도로 쌓아서 구축했다. 터
가 가장 넓어서 법당(法堂) 같은 건물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1단 밑에는 2단을 두
었는데, 평탄지 길이 15m, 너비 5m 이며, 석축 길이는 10m, 높이 1.5m로 15~95cm 크기의 석재
를 6단 정도로 쌓았다. 3단 석축 평탄지는 길이 14m, 너비 6m이다. 석축 앞에는 완만하게 내
리막 경사가 펼쳐져 있고, 바위와 온갖 돌들이 널려 있다.

3단의 석축 외에 맷돌과 우물이 있으며, 서울역사박물관이 2003년에 1,100㎡를 조사하면서 어
골문(魚骨文)과 종선문(縱線文), 사선문, '官'이 새겨진 기와, 청자 양각 접시, 청자와 백자,
기와, 토기 파편 등을 건졌다. 이들 유물을 통해 적어도 고려 후기 이전에 절이 세워진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중기나 후기에 홀연히 망한 것으로 보인다.


▲  절터 2단 석축 (석축 서편은 시멘트와 현대 벽돌이 섞여 있음)

절이 망한 이유는 억불정책으로 인한 경영 악화도 있을 것이고, 주변에 도선사(道詵寺)나 천
축사(天竺寺) 등의 쟁쟁한 절도 많았으며, 계곡을 낀 숲속이라 자연재해도 늘 도사리고 있으
니 충분히 상상과 추측은 가능하다.
절이 사라진 이후, 터만 황량하게 전해오다가 1970년대 이후 장수산악회에서 이곳에 체육시설
을 닦으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아직까지도 문화유산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해 관리의 손
길마저 부실한 실정이다. 그래도 절터 석축과 맷돌이 간신히 남아있으니 눈썰미가 좀 있다면
금세 이곳이 절터였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  돌들이 헝클어진 절터 1단 석축

방학동사지는 서울에 거의 남지 않은 제대로 된 절터 유적으로 그 희소성이 크다. 허나 그 가
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무책임하게 버려져 있으니 실로 안타깝다. 그 외에 북한산(삼
각산) 향림사지(香林寺址), 화곡동(禾谷洞)사지, 대모산(大母山) 절터 등이 희미하게 전하고
있다.


▲  절터에 남은 약수터
옛날 이곳에 있던 절 사람들의 식수로 절과 승려는 온데간데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물은 쏟아져 나와 대자연의 넒은 마음을 보여준다.

▲  형태만 남은 절터 맷돌
어처구니가 바쁘게 돌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저 맷돌을 통해 절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고 공양을 했다.

▲  절터 1단 석축 평탄지에 조성된 무심한 체육시설들

터가 너른 1단 석축에는 법당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있었을 법당과 주변 건물 모습
은 어떠했을까? 법당 좌우에는 삼성각(三聖閣)이나 명부전(冥府殿)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건물 크기도 다 고만고만했을 것이다. 이렇게 머리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름도 전하
지 않는 옛 절터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절터를 무심히 짓누르고 있는 체육시설과 의자를 싹 밀어버리고 이곳 일대를 싹 뒤집어 조사
를 벌였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도봉사 영국사(寧國寺)터로 여겨지는 도봉서원터처럼 이곳
의 놀라운 비밀이 드러날지도. 지금까지는 그저 간보는 수준의 조사만 벌였기 때문에 토기나
도자기 파편 정도만 수습된 것이다.

▲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진 1단 석축

▲  맷돌 주변 절터 석축과 주춧돌


▲  절터에 있는 마애불(磨崖佛)과 불상복원비

절터 서쪽 바위에는 체격도 늠름하고 잘생긴 마애불이 깃들여져 있다. 이 석불은 옛 방학동사
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로 동네 주민들이 장수산악회를 조직하면서 그 기념으로 1973년
5월에 마련한 것이다. 절도 아니고 산악회에서 자체적으로 마애불을 만들어 봉안한 점이 이채
로운데, 그들은 이곳이 절터였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마애불은 이곳의 상징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켰으나 기독교 애들이 불상에 해코지를 하며 훼손
시키는 만행을 저지르자 산악회 회장이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1993년 음력 4월에 복원하고 불
상복원비를 세웠다.


▲  가까이서 대한 마애불의 위엄

마애불을 살펴보면 윗쪽에 비를 막아줄 보개(寶蓋) 같은 것이 두툼히 씌워져 있다. 머리와 몸
통에는 각각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두텁게 달려있어 그를 윤기나게 빛내주고 있으며, 머
리는 민머리 스타일로 머리 정상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두 눈은 지그시 감았으며, 코는 약간 오똑하고, 다물
어진 입술에는 그런데로 미소가 피어나 있다. 볼살은 풍만하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들의 소리만큼은 정말 잘 들을 것 같다.

불상의 체격은 매우 당당해보이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냈다. 손에는 보주(寶珠) 같은 것을 들
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었으며, 연꽃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명상에
임한다. 대좌 밑에는 법륜(法輪) 2글자가 굵직하게 쓰여 있다.

* 방학동사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58-1


▲  1단 석축 윗쪽에 쌓여진 석축들
절터에서 나온 온갖 돌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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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계곡에 서린 바위글씨와 절터를 둘러보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 방학동길을 타고 무수골
로 넘어가기로 했다.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북한산둘레길19구간)은 무수골에서 정의공주묘역까지 이어지는 3.1km
의 산길이다. 짙은 숲속을 거니는 그림 같은 숲길로 오르락 내리락이 다소 있을 뿐, 살방한
코스이며, 경사도 그리 각박하지 않다. 북한산둘레길의 서울 구간 상당수는 주택가와 산림 사
이를 오가지만 이 코스는 남쪽 구간 일부를 제외하면 시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금은 깊은
산길이며, 북쪽인 무수골에서 도봉옛길(북한산둘레길18구간)로 간판을 바꾸고, 정의공주묘역
에서는 왕실묘역길(북한산둘레길20구간)로 간판을 갈고 우이동으로 흘러간다.

방학동길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연산군묘 북쪽에 자리한 정의공주(貞懿公主)와 안맹담(
安孟聃) 묘역, 무수골, 둘레길을 닦으면서 만든 쌍둥이전망대가 있으며, 둘레길과 좀 거리는
있지만 방학동사지와 귀록계산/와운폭 바위글씨가 있다. 방학동길이란 이름은 방학동을 지나
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수해(樹海)와 속삭임 ~ 방학동길

▲  쌍둥이전망대

방학동길이 흐르는 무수골 남쪽 언덕에 똑같이 생긴 쇳덩어리 구조 2개로 이루어진 쌍둥이전
망대가 있다. 둘레길을 닦으면서 심어놓은 것으로 회전 계단을 오르면 전망대 윗쪽에 이르는
데, 이곳에 서면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도봉구와 노원구 지역이 그런데로 시야에 박힌다.


▲  하늘과 보다 가까이, 쌍둥이전망대 윗쪽
꼭대기로 올라가보니 그저 그런 하늘 아래 전망대더라..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방학동 구역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동과 노원구, 수락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안개가 극성이었다.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산줄기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지역

▲  무수골 직전, 야트막한 고갯길 (방학동길)


 

♠  서울 속의 별천지, 도봉산 무수골 (윗무수골)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서울 속의 산골마을이자 도봉산의 숨겨진 비경이며 도봉산의 3대 계곡의 하나로 추앙받는 무
수골은 근심이 없는 계곡이란 뜻이다.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
도 있으며,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초기까지는 대장장이가 많이 살아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
'이라 불렸는데, 그 무쇠골이 영해군(寧海君)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이야
기도 있다. 그리고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15세기에 세종 9번째 아들인 영해군이 무수골 명당자리에 묻힌 이후, 그의 후손(전주이씨)들
이 터를 닦았고, 이후 안동김씨와 함열남궁씨, 진주류씨, 개성이씨 등이 이곳에 무덤을 쓴 인
연으로 들어와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골짜기에 영해군파묘역과 함열남
궁씨묘역, 진주류씨묘역,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 1379~1457년)과 그의 부
인인 태조의 서장녀(序長女) 의령옹주(義寧翁主, ?~1466) 묘역 등 조선시대 무덤이 많이 깃들
여져 있다.

방학동길 북쪽 종점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면 무수골의 속살이 나온다. 그 전에 성신여대 난향
원 돌담길을 지나야 되는데, 길 좌우로 돌담이 둘러져있어 비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
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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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르게 익은 윗무수골 논

난향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온
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삼삼한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속세와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지만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너른 편이다. 마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2~3개의 논두렁이
있다.
이들 논두렁이 무수골의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
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
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  윗무수골 숲길

논두렁을 지나면 250년 묵은 느티나무가 나타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느티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었다는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내외의 묘역이 있고, 오른쪽으로 식당을 가로 질러 숲속으로 들어서면 무수골의 오랜 주인인
영해군 묘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반면 느티나무에서 왼쪽으로 가면 자현암, 원통사, 우이암(관음봉)으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
다운 숲길 100선은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인데,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
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을 타고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한여름 피서의 성지로 손색이 없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자현암입구 갈림길 (무수골공원 지킴터)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윗무수골 가장 안쪽에 조그만 비구니 암자인 자현암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첩첩한 산주
름 속에 제대로 묻힌 산사(山寺)로 1943년에 승려 김혜향(金慧香)이 이름이 전하지 않은 절터
에 세웠다.
혜향은 자현(慈賢)의 3대 제자의 하나로 스승의 이름을 절 이름으로 삼았는데, 1991년 요사채
를 새로 짓고 2011년에 범종각을 갖추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범종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고색이 피어나
지 못한 상태라 문화유산은 없다. 딱히 볼거리는 없으나 바깥에 석불과 보살상을 많이 만들어
놓았고, 요사채 옆에 노천 부뚜막을 설치해 나무장작으로 밥과 국을 만든다.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그런 부뚜막을 갖추고 있으니 밥맛 하나는 좋을 것 같다.

* 자현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86-2 (도봉로169길 500 ☎ 02-954-2578)

▲  솥뚜껑도 갖춘 부뚜막

▲  대웅전(大雄殿)과 7층석탑

▲  석불과 김혜향 공로비(오른쪽 비석)

▲  칠성과 산신, 독성이 봉안된 삼성각


▲  정헌대부(正憲大夫) 남궁숙 신도비(神道碑, 왼쪽에 보이는 비석)와
후손들이 사는 집과 재실


자현암 못미쳐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남쪽 길로 조금 가면 마치 먼 지방의 깊은 산골에 들어
선 듯, 숲에 감싸인 조촐한 공간이 나온다. 그야말로 숲과 하늘만 보이는 이런 두메산골에 2
채의 집과 너른 텃밭이 펼쳐져 있는데, 한쪽에 근래에 지어진 남궁숙(南宮淑, 1491~1553) 신
도비가 있다.
신도비 뒷쪽 숲에는 남궁숙과 그의 자손들이 묻힌 함열남궁씨 제1묘역이 있는데, 이들은 16세
기 이후에 조성된 묘역으로 그 입구에 철책과 철문을 둘러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긴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존재도 아니고, 묘역도 다소 젊어져서 철문을 뚫으면서까지 살필 생각은 없
다. 그냥 여기서 길을 접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신도비 주위로 후손이 사는 집과 재실(齋室)
이 있으며, 주변 텃밭은 주말농장으로 개방하고 있다.

함열남궁씨는 무수골과 도봉동 토박이의 일원으로 그들의 묘역은 이곳 외에 무수골 하류인 도
봉초교 뒷쪽(함열남궁씨 제2묘역)에도 있다.

이렇게 하여 늦여름에 벌인 도봉산 동네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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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상류에 숨겨진 아름다운 비경 ~~ 옥천 둔주봉, 한반도지형, 향수바람길 나들이 (독락정)

옥천 둔주봉, 한반도지형(향수바람길)


' 금강 상류에 숨겨진 비경,
옥천 둔주봉(한반도지형)~향수바람길 '
옥천 한반도지형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옥천 한반도지형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대전 옆에 자리한 충북 옥천(沃川)을
찾았다. 옥천 땅에 한반도 비슷하게 생긴 지형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어 그를 찾고자 추
위를 무릅쓰고 출동한 것이다.

햇님이 아직 등청하지 않은 이른 아침, 한강 건너 영등포역에서 경부선(京釜線) 무궁화
호 열차에 나를 담았다. 열차는 2시간을 내달려 옥천역에 이르렀는데, 금강산도 식후경
(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명언에 따라 옥천역 부근에서 따끈하게 순대국 1그릇 말고
둔주봉에서 먹을 김밥 2줄을 구입하여(옥천버스 종점에 가격이 저렴한 괜찮은 김밥집이
있음) 안남으로 가는 옥천군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옥천읍에서 둔주봉이 있는 안남면 중심지<연주리(蓮舟里)>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중
간에 장계에서 금강을 건너가는데, 그는 내가 찾아갈 둔주봉과 한반도지형 옆구리도 지
나간다. 그래서 오늘은 하루 종일 금강을 지켜봐야 된다.

안남(연주리) 종점에서 남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안남초교로 그 직전에 한반도지형을 굽
어보는 둔주봉으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경사도 거의 완만한 그 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둔주봉의 북쪽 입구인 비들목재(점촌재)로 여기서 왼쪽(남쪽)으로 틀어 둔
주봉의 품으로 들어섰다. (길을 그대로 직진하면 피실나루터로 이어짐)


▲  서서히 솟구치는 비들목재(점촌재) 고갯길


▲  비들목재를 넘으면서 바라본 안남면 연주리 지역

▲  둔주봉 능선길과 만나는 비들목재 갈림길 (둔주봉 북쪽 입구)
여기서 직진하면 금강이 있는 피실나루터로 이어진다.



 

  ♠  둔주봉 한반도지형 (둔주봉정)

▲  둔주봉정 북쪽 소나무숲길

둔주봉(屯駐峰, 384m)은 안남면 연주리의 듬직한 뒷산으로 등주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동/서/
남 3면이 금강(錦江)에 접해있고 북쪽만 육지로 이어져 있는데 이 일대는 뫼가 첩첩히 둘러진
산악지대라 강이 곧게 흐르지 못하고 구불구불 굴곡미를 보이며 흘러간다. 그러다보니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속칭 반도(半島)식 지형이 많다.
둔주봉 역시 그런 지형의 하나로 동남쪽 금강 건너에도 비슷한 지형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둔
주봉의 상큼한 양념인 한반도지형이다. 한반도지형의 대명사로 추앙받는 강원도 영월(寧越)의
한반도지형을 시작으로 천하 곳곳에서 그런 비슷한 지형이 발견되고 있는데 옥천에서도 하나
발견되어 괴산 산막이옛길의 한반도지형(☞ 관련글 보기)과 함께 충북 속의 조그만 한반도를
이루고 있다.

이곳도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만 살짝 찾던 숨겨진 곳이었으나 다녀간 사람들의 글과 사진, 입
소문을 통해 찾는 이가 늘자 옥천군청이 2007년 7월부터 9월까지 한반도지형이 잘 바라보이는
둔주봉 2번째 봉우리에 전망대(둔주봉정)를 닦고 산길을 정비했으며 이후로도 계속 정성을 들
여 옥천 제일의 꿀단지로 키우고 있다. 한반도 비슷하게 생긴 지형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나
찾던 동네 뒷산이 전국적 수준의 뒷산으로 성장한 것이다.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그리 높지는
않음)

둔주봉 유래에 대해서는 연주리 일대가 풍수지리적으로 장군대좌형(將軍大座形)의 자리로 일
컬어져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한국지명총람'에 '둔주봉'으로 나와있어 꽤 오래된
이름임을 알려주고 있다. 산봉우리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하며, 정상부에는 삼국시대 유적
인 둔주봉산성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  한반도지형을 굽어보는 둔주봉정 (한반도지형 전망대)

둔주봉 나들이는 접근성도 좋고 오르기도 편한 비들목재(점촌재)에서 시작하면 편하다. 거기
서 산길을 따라가면 둔주봉정(0.8km), 둔주봉 정상(1.6km)과 무리없이 이어지며 정상에서 다
시 비들목재로 나오거나 고성(1코스), 금정골(2코스), 피실(3코스)로 내려가도 된다. 그 3곳
으로 내려가면 둔주봉을 3면으로 포위하여 흐르는 금강과 만난다. <반대로 고성, 금정골, 피
실에서 올라가도 되나 경사가 각박하여 조금 힘듬>

고성이 둔주봉의 제일 남쪽 끝으로 비들목재에서 3.5km 거리이며 둔주봉과 금강 경계에는 좁
은 비포장길이 펼쳐져 있어 산골 벽지의 운치를 더해준다. 이 길은 피실에서 금정골, 고성을
거쳐 연주리 남쪽의 독락정마을까지 이어진다.

▲  둔주봉정 현판의 위엄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동쪽(연주리 지역)

비들목재에서 느긋하게 펼쳐진 능선 숲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조촐하게 생긴 둔주봉정이 마중
을 한다. 이곳이 둔주봉의 2번째 봉우리로 금강 건너에 펼쳐진 한반도지형을 속시원하게 바라
볼 수 있는 현장이다. 하여 2007년 여름, 옥천군청에서 둔주봉정과 전망데크를 닦아 한반도지
형 전망대로 세상에 내놓았다.
여기서는 한반도지형과 그 지형을 감싸며 구비쳐 흐르는 금강, 둔주봉 남쪽 능선이 시야에 쏙
들어오며 동쪽(연주리 방향)도 바라보이기는 하나 수목이 적지 않게 시야를 가려 조망은 별로
이다. (북쪽과 서쪽은 산으로 거의 막힘) 그러니 이곳은 오로지 한반도지형을 위한 곳이다.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옥천 한반도지형

옥천 한반도지형은 대자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아주 기가 막힌 작품으로 금강과 주
변 산들이 조화를 이루며 아주 걸쭉한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속세(俗世)의 때가 거의 느껴
지지 않는 이곳 풍경에 세상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눈과 마음이 제대로 위로가 된다.
허나 그가 아무리 한반도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도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나의 침침한 두 눈에는
양말이나 버선처럼 보인다. 하여 나 같은 사람의 그런 시각을 잡아주고자 둔주봉정 안에 동그
란 볼록거울을 설치했으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그 거울로 보면 맨눈으로 보는 것과 완전 반
대로 다가와 한반도 비슷하게 바라보인다. 인간의 눈과 특수 효과를 넣은 거울의 미묘한 차이
라고나 할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렌즈의 장난일 뿐이다.


▲  볼록거울의 시각 농간, 둔주봉정 볼록거울로 바라본 한반도지형
이렇게 보니 정말 한반도 비슷하게 바라보인다.


▲  얼어붙은 금강에 감싸인 한반도지형의 위엄

한반도지형에는 경작지를 비롯하여 백사장과 숲, 산이 있다. 지형 남쪽에는 뫼들이 칼처럼 솟
아있고 그 좁은 산골에 집들이 여럿 깃들여져 있으며, 지형 북쪽에는 백사장이 펼쳐져 금강의
푸른 물줄기와 스킨쉽을 즐긴다.
동/서/북 3면이 금강에 막혀있고 남쪽 또한 높은 산에 막혀있으니 영월의 청령포(淸泠浦)처럼
육지 속의 외로운 섬이자 하늘의 감옥 같은 곳이다. 동이면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으나 길이
험해 보통 연주리 독락정마을이나 고성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 그게 훨씬 접근성이 편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겨울의 한복판이라 강이 얼어붙어 나룻배 또한 강제 휴업에 들어간 상태이
다. 그러니 저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사실상 막힌 셈이다. 얼어붙은 강을 두 발로 건너가는 방
법이 있지만 설익거나 틈을 보인 얼음이 적지 않아 그건 무모하다. 그러니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둔주봉정 밑에서 바라본 한반도지형

현재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가 전부이다. (그마저도 2개로 형편없이 쪼개
져 있음ㅠ) 그러다보니 이 땅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한반도를 닮은 지형에 집착을 보이는
경향이 다소 있는 것 같다. (특히 지방자치단체가 더한 거 같음~) 그래서 그런 지형을 찾거나
일부로 만들어 하나 같이 관광지로 요란하게 키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 한반도보다 더 넓은 영역을 누비고 살던 사람들이다. 만주와 요동(遼東),
요서(遼西), 하북(북경), 산동반도, 대마도, 왜열도, 연해주 등이 싹 우리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를 너무 한반도로 국한해서 보거나 그 좁은 땅으로 만족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반드시 주변 오랑캐들을 때려잡고 그동안 잃어버린 땅의 그 몇 배를 회복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야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북한을 흡수하고 옛 땅을 되찾는 그날이 찾아오면 케케묵은 한반도지형
은 싹 내다 버리고 그에 걸맞은 지형을 찾아 키워야 될 것이다.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둔주봉 산줄기
오른쪽에 높이 솟은 봉우리가 정상, 왼쪽에 하얀 존재는 얼어붙은 금강


둔주봉정에 올라 한반도지형과 그림 같은 주변 풍경에 한참을 심취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둔주봉정 관리아저씨가 살짝 다가와 잘 구경했냐며 말을 건넨다. 그는 9시부터 17~18시(
한겨울에는 일몰 직전까지)까지 이곳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으로 둔주봉정 서쪽에 그가 일을
보는 조그만 초소가 있다.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한반도지형이 양말, 버선 같다고 하니 빙그레 웃으며 둔주봉정 안에 있
는 볼록거울로 한번 보라고 그런다. 하여 그 거울을 바라보니 과연 한반도 비슷하게 바라보인
다. 나 같은 사람에 대비해서 볼록거울까지 설치하여 어떻게든 한반도지형처럼 보이게 하려는
옥천군청의 치밀함에 정말 혀를 내둘렀다.

둔주봉정에서 고성까지 소요시간을 물으니 족히 2시간은 걸린다고 그런다. 원래는 둔주봉 정
상을 찍고 고성으로 내려가 금강 강변길을 따라 연주리로 나오려고 했는데 그 말에 경로를 바
꾸어 정상에서 바로 독락정으로 내려가는 빠른 길을 문의했다. 그러니 정상에선 길이 없고 한
반도지형전망대 남쪽에 그곳으로 내려가는 샛길이 있다고 그런다. 하여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
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  둔주봉의 지붕을 거닐다. (둔주봉 정상)

▲  솔내음이 그윽한 둔주봉 북쪽 능선길 (둔주봉정 남쪽)

둔주봉정에서 뻔히 바라보이는 둔주봉 정상까지는 약 0.8km이다. 허나 체감거리는 거의 2배가
넘으니 이정표의 농간에 속지 말자~~!
한반도지형전망대를 나오면 바로 내리막길이 펼쳐지는데 그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왼쪽(동쪽)
으로 내려가는 길이 살짝 눈에 들어온다. (이정표는 없음) 그 길이 둔주봉정 관리원이 알려준
샛길이다. 일단 그 샛길은 접어두고 능선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했다.

하늘과 한층 가까워졌는지 지금까지 거의 보이지 않던 눈이 크게 존재감을 보이며 하얗게 길
을 덮는다. 게다가 산길도 흥분기를 보이며 낭떠러지 비슷한 곳까지 내놓으면서 긴장과 함께
체감거리를 증가시킨다. 다행히 아이젠을 챙겨와 신발에 씌우고 조심조심 다리를 움직였다.


▲  둔주봉 정상으로 인도하는 북쪽 능선길

▲  겨울 제국이 깔아놓은 하얀 카페트 길을 거닐다~!
눈이 쌓인 둔주봉 북쪽 능선길


▲  둔주봉 정상 밑에 자리한 둔주봉산성 표석

둔주봉 정상 직전에 이르니 '둔주봉산성'을 알리는 조그만 표석이 마중을 한다. 거의 한반도
지형만 생각하고 온 터라 '이런 곳도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 이곳에도 비록 희미하
지만 옛 사람들이 씌워놓은 흔적이 있었다.

뜻밖의 만남이었던 둔주봉산성은 정상 주변에 다져진 약 150m 규모의 토성(土城)이다. 삼국시
대에 조성되었다고 하지만 위치상 백제(百濟)로 여겨지며, 지금은 그 윤곽만 흐릿하게 남아있
다. 바로 뒤에 있는 정상에 오르면 주변이 훤히 바라보여 큰 산성(山城)이나 요새는 아니어도
조그만 보루(堡壘)를 둘만한 군사적 요충지의 자격이 충분함을 느끼게 한다.

이곳을 지켰던 옛 백제 군사들도 금강 동쪽 건너편의 한반도지형을 봤을 것이다. 허나 그 시
절 한반도지형은 천하 사람들을 홀릴만한 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저 금강이 굴곡을 보이며 빚
은 지형의 하나였을 뿐이다. 또한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몇 배의 영토를 지니고 있었다면 결코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며 이렇게 옥천의 꿀단지로 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나
명승지나 시대와 장소를 잘 만나야 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훤칠한 존재라도 결코 뜨지
못한다.


▲  둔주봉 정상에 둘러진 둔주봉산성의 흐릿한 흔적
토성의 흔적이 봉우리의 일부로 녹아든 채 얇게 남아있다.

▲  드디어 도착한 둔주봉 정상 (384m)

둔주봉 정상은 정상을 알리는 표석 외에는 완전한 대자연의 공간이다. 여기서는 둔주봉의 존
재를 천하에 일깨워준 한반도지형은 보이지 않으나 북쪽과 서쪽의 산하가 훤히 보여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특히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금강과 그를 둘러싼 뫼들이 생생히 다가와 마치
하나의 파노라마 같으며 그 서쪽 산하 너머로 멀리 대전 외곽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둔주봉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 ①
구불구불 흐르는 금강과 옥천군 동이면, 안남면 지역 (멀리 대전 외곽의 산들까지)

▲  둔주봉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 ②

▲  둔주봉 정상에서 바라본 북쪽 (옥천 안남면, 안내면 지역)

정상에서 10분 정도를 머물며 아무도 없는 자연의 한복판을 마음껏 누렸다. 마음 같아서는 아
비규환의 세상에서 잠시 나를 지우며 이곳에 더 묻히고 싶었지만 내가 있어야 될 곳이 아닌지
라 그러지를 못한다. 하여 아쉽지만 자리를 정리하고 둔주봉정 방향으로 이동하여 한반도지형
전망대 남쪽에 숨겨진 독락정 방향 샛길로 들어섰다.

둔주봉 안내도에도 투명 취급을 받는 샛길이라 사람들 왕래가 적어 잡초가 좀 많았고 경사 또
한 급하여 거의 달리다시피 하여 내려왔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가니 산 밑에 아득하게만
보였던 독락정마을이 진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270m 고지에서 순식간에 아랫 세상(해발 100m)
으로 내려왔으니 마치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안남천과 금강이 만나는 곳 (독락정마을 앞)



 

♠  금강 거닐기 (독락정, 향수바람길)

▲  금강과 안남천이 만나는 곳에 섬이 빚어져 있다.

독락정마을은 금강과 안남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해 있다. 연주리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지어
진 독락정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경작지로 쓰이는 섬이 있
으며 한반도지형으로 넘어가는 나루터가 있다.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독락정(獨樂亭)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23호

독락정마을의 유래가 된 독락정은 마을 남쪽 언덕에 자리해 있다. 금강과 안남천이 하나가 되
는 현장을 묵묵히 굽어보고 있는 이곳은 둔주봉 주변에서 둔주봉산성터 다음으로 오래된 명소
로 절충장군 중추부사(折衝將軍 中樞府事)를 지냈던 주몽득(周夢得)이 1607년(또는 1630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주몽득은 이곳에 정착하여 만년을 지냈으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書堂)으로 쓰이기
도 했다. 또한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역 선비와 관리들이 많이 찾아와 풍류를 즐겼다. 1668
년 옥천군수 심후(沈候)가 방문 기념으로 '독락정' 현판을 남겼으며 대청에는 송근수(宋近洙)
가 쓴 율시기문(律時記文) 등 10개 정도의 현판이 어지럽게 걸려있다.
1772년 정자를 중수했고, 1888년과 1923년 다시 수리를 했으며, 1965년 주몽득의 후손인 초계
주씨 문중에서 다시 고쳐지어 지금에 이른다.

독락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금강을 바라보고자 약간 비스듬하게 동남향
을 취하고 있다. 지형을 이용해 석축을 쌓아 자리를 닦고 그 복판에 네모난 기단을 다져 정자
를 올렸으며, 정자 양쪽 측면은 툇마루를 설치하고자 내부를 4칸으로 지었다. 동,서,북 3면은
돌담을 둘렀고 동쪽에 출입문을 냈으며, 남쪽은 금강을 보는데 지장이 없게끔 담장을 두지 않
고 앞을 완전히 트이게 했다. 대신 서서히 낮아지는 지형을 이용해 석축을 2m 정도로 다져 담
장을 대신했다.


▲  단출한 모습의 독락정
정자의 이름처럼 자연을 벗삼아 혼자 놀기에 딱 적당한 크기이다.


▲  초계주씨의 시조인 한림학사(翰林學士) 주황(周璜)의 위령비(慰靈碑)와
영모각(永慕閣, 뒤에 보이는 기와집)


독락정은 초계주씨의 조그만 성역(聖域)과 같은 곳이다. 독락정 북쪽에 후손들이 사는 영모각
과 주몽득에게 제를 지내는 영모사(永慕祠)가 있으며, 주몽득을 시작으로 이곳에 정착한 것을
기리고자 초계주씨세거비(世居碑)도 한쪽에 세워두었다.
또한 이곳과는 인연이 없지만 초계주씨의 시조인 주황의 위령비까지 세워 시조를 기리고 있다.
주황은 당나라 사람으로 후삼국시대인 907년에 신라로 넘어와 합천 초계(草溪) 지역에 둥지를
틀었다고 전한다.

▲  정겨운 모습의 독락정 동쪽 돌담과
맞배지붕 대문

▲  1668년 옥천군수 심후가 썼다는
독락정 현판의 위엄

▲  독락정의 역사를 머금은 독락정 추모기

▲  붉은 피부의 현판, 송근수가 썼다는
'율시기문'일까? 잘 모르겠다.


▲  독락정에서 바라본 둔주봉 정상
방금까지 나는 저 정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문득 눈을 떠보니 독락정
툇마루에서 정상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을 보면
세월도 그렇고 인생도 정말 무상한 모양이다.

▲  독락정마을에서 바라본 금강과 한반도지형

독락정을 지나면 금강과 둔주봉의 경계를 따라 비포장 흙길이 정겹게 펼쳐진다. 얼어붙은 금
강 너머로 보이는 곳이 둔주봉정에서 바라봤던 한반도지형 바로 그것이다. 위에서 보는 것과
달리 강변에서 보니 그냥 숲이 우거진 언덕처럼 평범하게 보인다.

굽이굽이 요동치는 금강과 거의 절벽 수준의 둔주봉 사이에 놓인 비포장길(금강 강변길)은 1
차선 크기로 고성을 지나 피실까지 이어진다. 둘레길과 도보길이 천하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옥천군청도 거기에 숟가락을 얹혀 '향수바람길'이란 도보길을 내놓았는데, 그 이름은 옥천이
낳은 현대시인 정지용(鄭芝溶)의 대표 작품 '향수'에서 따온 것으로 그 코스 중 전설바닷길(
4.5km, 피실나루터~독락정)이 바로 이곳의 신세를 진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금강과 산, 숲, 흙길이 어우러진 두멧골의 진수를 보여주는 아주 아
름다운 길로 바다를 지나지도 않는데 왜 '전설바닷길'로 간판을 달았는지 의문이다. 차라리 '
전설의 강변길'이나 '한반도지형길','둔주봉길'이 낫지 않았을까? 이름이야 어쨌든 둔주봉정
에서 한반도지형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꼭 금강 강변길도 거닐어보기 바란다. 나는
한반도지형보다는 이 길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  비포장 흙길의 진수를 보여주는 금강 강변길 (전설바닷길)
가끔 차량들이 오갈 뿐 인적도 매우 드물다. (휴일에는 좀 있는 편) 산바람과
강바람 소리가 전부인 고적한 길로 처음에는 조금만 가려고 했으나 주변
풍경이 너무 고와 그 풍경에 취한 나머지 그만 고성까지 가버렸다.

▲  독락정과 한반도지형을 갈라놓은 얼어붙은 금강
얼핏 보면 얼음이 단단해 보이지만 중간에 설익거나 비리비리한 부분이 있으니
괜히 온몸을 던져 건널 생각은 하지 말자.

▲  한반도지형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나룻배 (독락정 나루터)
이곳에서 배를 타고 옥천 속의 섬, 한반도지형으로 들어갈 수 있다.
허나 겨울 제국이 얼음을 꽁꽁 씌워놓으면서 배는 강제로
겨울 휴가에 들어간 상태이다.

▲  강 건너로 보이는 한반도지형과 백사장

▲  한반도지형(왼쪽)과 금강, 그리고 둔주봉(오른쪽) ▼


 
▲  한반도지형의 잘생긴 서쪽 옆구리

▲  독락정마을과는 저만큼 멀어지고..

▲  시야에서 사라진 독락정마을
햇님이 둔주봉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한반도지형과 맞닿은 동쪽 강변길은
벌써부터 어둠에 잠겼다. 강변길이 거의 벼랑처럼 펼쳐진 둔주봉의
바로 동쪽 밑이라 바깥보다 일찍 컴컴해지는 것이다.

▲  고성나루터 직전 (강 건너는 여전히 한반도지형)

▲  둔주봉의 남쪽 끝이자 한반도지형 남쪽을 이어주는 고성나루터

고성은 둔주봉 남쪽 끝이자 독락정에서 피실로 이어지는 길 중간이다. 한반도지형 남쪽을 이
어주는 나루터가 이곳에 있는데, 겨울 제국에게 완전히 굴복당한 독락정 나루터와 달리 고성
나루터는 사람들이 얼음에서 강을 해방시켜 뱃길을 내고자 강 건너편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얼
음을 깨뜨린 흔적이 있다. 저 정도로는 제대로 건너가기도 어렵겠지만 겨울 제국에게 조금이
나마 단죄를 하였으니 겨울도 조금은 긴장을 했을 것이다.

고성을 지나면 강변길은 둔주봉 서쪽으로 넘어가게 되며, 둔주봉이 있는 지형도 한반도지형과
비슷한 반도형 지형으로 그 남쪽 끝이 바로 고성이다. 마음 같아서는 피실까지 가서 점촌고개
를 통해 연주리로 원점회귀하고 싶었지만 그 거리가 길고 일몰이 코앞이라 여기서 그만 발걸
음을 접고 독락정마을로 돌아갔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천근만근처럼 무겁고 섭하던지 몇 번
이나 뒤를 돌아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  다시 가까워진 독락정마을

금강 강변길이 길이 좋다보니 고성까지 갈 때도 그렇고 다시 연주리로 나올 때도 그 적지 않
은 거리(3km)가 매우 짧게 느껴졌다.
연주리 중심지(안남면사무소 주변)에 이르러 읍내에서 사온 김밥으로 출출함을 잠시 달래고
17시에 옥천읍내로 나가는 옥천군내버스에 고된 몸을 실었다. 나가는 길에 장계국민관광지에
있다는 청석교를 잠시 보고자 했으나 달님이 햇님을 쪼아대며 일몰을 재촉하니 불투명한 다음
으로 흔쾌히 미루고 옥천읍내로 나왔다.

이리하여 늦겨울에 찾아간 옥천 한반도지형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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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정릉을 지키던 조선왕실 최초의 원찰인 돈암동 흥천사 (돈암동 느티나무)

돈암동 흥천사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돈암동 흥천사 '
돈암동 흥천사
▲  흥천사 전경



 

흥겨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을 며칠 앞둔 어느 평화로운 봄날, 돈암동
(敦岩洞) 흥천사를 찾았다.

돈암동 산자락에 깃든 흥천사는 내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로 이미 20번 이상 발을 들였다.
첫 인연이었던 1990년대 초에는 소장 지정문화재가 2개(극락보전, 명부전)에 불과했으나
조선 중/후기 탱화와 불상, 보살상을 많이 지니고 있다보니 나날이 지정문화재가 늘어나
이제는 국가 보물 1점, 등록문화재 1점을 포함해 무려 20점 이상을 간직하게 되었다.
하여 지정문화재가 새로 생겼다는 풍문을 전해 들을 때마다 그것을 확인하러 왔고, 석가
탄신일에도 여러 번 찾아가 그곳의 후한 초파일 인심(공양밥, 떡 공양)을 누리기도 했다.
게다가 내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악산길 동쪽 기점에 자리해 있고, 우리집과도 20리 거리
로 가까워 둘 중에 하나가 사라질 때까지는 인연이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  흥천사 입문

▲  봄내음이 진하게 서린 돈암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4호

흥천사입구(돈암2동 주민센터)에 이르니 장대하게 솟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내밀며 반
갑게 마중을 한다.
그는 높이 10m, 둘레 2.4m로 약 380년 정도 묵었다. (1988년 7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50년) 나무 주변에는 흥천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마을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준 존재로 왕년에는 나무 그늘에 장승과 돌탑도 있었다고 전한다.
허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거친 칼질이 흥천사 주변을 적지 않게 갈아엎으면서 나무 밑
에 있던 장승과 돌탑도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싹 사라져버렸다. 나무 역시 개발의 칼날을
잘못 맞아 골로 가기 직전인 것을 동네 주민과 흥천사 승려가 합심해 정성스럽게 보살피면서
다행히 생기를 되찾았다.

2014년 정자나무 가꾸기 사업으로 주변이 산뜻하게 정비되었으며, 흥천사를 알리는 오랜 이정
표이자 동네 사람들의 정자나무로 그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  느티나무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옛 일주문 자리)

느티나무를 지나면 잘 닦여진 길이 나타난다. 도로 차단봉이 설치된 지점 쯤에 흥천사의 정문
인 일주문(一柱門)이 있었는데, 2014년에 경내를 정비하면서 밀어버렸다. 일주문은 절의 거의
필수 요소임에도 있던 일주문을 밀어버려 일주문이란 존재 자체를 지운 것이다.

느티나무에서 흥천사 경내로 향하는 길 북쪽 언덕에는 숲이 우거져 있다. 숲 서쪽 7층석탑 주
변과 삼각선원 주변에는 속인(俗人)들의 집이 즐비했으나 2011년 이후, 흥천사에서 매입해 말
끔하게 정리했다. 그때 이곳에 살던 사람들(거주자 22가구, 세입자 60여 세대)에게 이사 비용
과 생활비까지 보태어 이주를 시켰다고 하니 인심도 넉넉히 베푼 모양이다. 하긴 절이 중생에
게 야박하게 굴면 못쓰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바로 종교와 절의 역할이 아니던가? 그
역할을 외면하면 그건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  주차장 북쪽에서 바라본 흥천사 대방
대방이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어서 보이는 것은 별로 없다. 그 뒤로 높이 솟은
한신한진아파트가 묵묵히 절을 굽어보고 있다.

▲  오색 연등을 두룬 7층석탑
탑신(塔身)이 위로 올라갈 수록 일정하게 줄어드는 균형 잡힌 맵시를 자랑한다.


주차장에서 정릉(貞陵)으로 넘어가는 길목 오른쪽 숲속에 잘생긴 7층석탑이 있다. 파리도 미
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부를 지닌 그는 관음전 옆에 있었으나 2014년에 그 자리에
요사(寮舍)와 선원을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밀려났다.
흥천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원래 탑은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인데, 법당(극락보전) 앞 자리가
협소해 경내 밖까지 나온 것이다.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을 위해 오색 연등으로 몸을 치장한 석탑 옆에 서면 흥천사 경내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흥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7층석탑 주변에서 바라본 흥천사

서울 시내 한복판인 돈암동 산자락에 둥지를 튼 흥천사는 '삼각산(북한산) 흥천사'를 칭하고
있다. 여기서 북한산은 다소 떨어져 보여 고개가 갸우뚱거릴 수 있지만 성북동(城北洞)과 돈
암동 산자락도 엄연히 북한산 남쪽 끝자락에 해당되어 삼각산 흥천사를 칭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1. 조선 왕실 최초의 원찰(願刹) 흥천사의 탄생
1396년 태조(太祖)의 왕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가 세상을 뜨자 태조 이성계는 도성(都
城) 밖도 아닌 경복궁(景福宮) 근처 황화방(皇華坊, 정동 미국대사관과 러시아공사관터 일대)
에 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을 조성했다.
그리고 정릉 동쪽 취현방 북쪽 언덕(덕수초교와 서울시의회 일대로 여겨짐)에 정릉의 원찰을
세우니 그것이 조선 최초의 원찰, 흥천사이다. 흥천사는 1397년 1월 공사에 들어가 그해 9월
170칸 규모로 완성을 보았는데, 공사 감독은 건축 경력이 상당했던 김사행(金師幸)과 김주(金
湊)가 맡았으며, 태조는 공사기간에 수시로 현장을 찾아 일꾼들을 격려하고 돈과 식량을 두둑
히 내리는 등 많은 신경을 썼다.

절이 완성되자 초대 흥천사 주지로 상총(尙聰)을 임명했으며, 조계종(曹溪宗)의 본산(本山)으
로 삼았다. 그리고 밭
250결을 내려 절 유지비에 쓰도록 했으며, 절 전각 기둥과 서까래까지
모두 금단청을 입혀 그야말로 금빛 찬란했다고 전한다.
태조는 신덕왕후를 얼마나 그리워했던지 매일 아침 흥천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어야 비
로소 밥숟가락을 들었다고 한다.

2. 억불숭유(抑佛崇儒) 속에서도 번영을 누린 흥천사
1398년 6월, 태조는 흥천사에 3층석탑을 세워 통도사(通度寺)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했다. 그리고 그 탑의 집으로 8각형의 사리전
(舍利殿)을 장엄하게 지었는데 건물이 완성
되자 태조를 우란분재(盂蘭盆齋)와 신덕왕후의 수륙재(水陸齋)를 성대하게 열었다. 사리전이
얼마나 화려하고 대단했던지 그 시절 서울의 대표 명소로 인기가 대단했으며, 그것을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고 전한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은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계모(季母)의 정
릉에 스트레스를 풀었다. 하여 정릉 석물을 동원해 광통교(廣通橋) 공사와 태평관(太平館) 보
수에 썼으며, 1409년 능을 정릉동으로 추방시켜 사람들의 뇌리에게 잠시 잊혀지게 만들었다.
허나 흥천사는 절을 잘 지켜달라는 부왕의 유언으로 정릉의 원찰 자격을 거두고 절의 노비와
밭의 면적을 줄이는 선에서 끝냈다. 허나 태평관을 철거하면서 남게된 밭과 노비를 흥천사로
넘기면서 오히려 밭과 노비수가 증가했으며 1410년 절을 수리하고 1411년 사리각을 중수했다.

세종 때는 1424년 각 종파를 통합 정리하여 흥천사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삼았으며, 전
답을 두둑히 내리면서 승려 120명이 머무는 큰 절로 성장했다. 1435년과 1437년 절을 수리했
으며, 1440년에는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했다.

1441년 3월, 절 중수공사가 끝나자 5일 동안 경찬회(慶讚會)를 열었으며, 1447년 세종은 3번
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시켜 사리각에 불골(佛骨)을 봉안하게 했다. 그리고 1449년
가뭄이 심하게 들자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며칠 뒤 비가 내려 전국을 적시면서 세종
은 너무 기뻐 절 승려 140명에게 상을 내렸다.
불교를 신봉했던 세조(世祖)는 큰 동종을 만들어 하사했으며, 1469년 명나라 황제가 불번(佛
幡)을 보내오자 이를 흥천사에 봉안했다. 그리고 1480년 절을 크게 중수했다.

흥천사는 도성 안에 자리한 잇점으로 많은 사대부와 선비들이 찾아와 공부를 했는데 황희(黃
喜)의 아들인 황수신(黃守身, 1407~1467)도 여기서 공부하다가 나중에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
(忠 寧大君)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충녕은 막힘없이 글을 외우는 황수신에게 퐁당퐁당 반해
나중에 왕위에 오르자 그를 불러 종7품 종묘서부승직을 내리기도 했다.


3. 흥천사의 비참한 최후

세조 이후 왕실의 지원이 감소하면서 잘나가던 흥천사에 서서히 적신호가 켜지게 된다. 연산
군(燕山君)은 1503년 궁궐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흥천사의 건축자재 일
부와 불상을 양주 회암사(檜巖寺)로 옮겼다. 그리고 절에 궁궐의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司僕
寺) 관아를 설치하여 절의 적지 않은 고통을 주었다.

1504년 화재로 사리전을 제외한 건물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으나 복구하지 못했으며, 1510년
3월, 4부학당 유생들이 불교 배척을 외치며 야음을 틈타 불을 지르면서 남아있던 사리전까지
모두 아작내었다. 왕실의 원찰임에도 그 지경이 된 것을 보면 왕실의 무관심이 대단했던 모양
이며, 절 자리는 집 없는 사대부에게 고루 분배되면서 흥천사는 잠시 말끔히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최후를 맞은 흥천사는 세조 때 조성된 동종(銅鍾, 보물 1460호)만 살아남았고. 그마저
도 제자리를 잃고 동대문과 광화문을 방황하다가 덕수궁(경운궁) 광명문(光明門)에서 남은 여
생을 보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쓴 흥천사 현판

▲  흥선대원군이 쓴 흥천사 현판

▲  흥천사 극락보전

4. 신흥사에서 다시 태어난 흥천사, 다시 정릉과 이웃이 되다.
1569년 정릉 인근 함취정(含翠亭)터에 정릉을 지키고 제를 지내는 조그만 절이 왕명으로 지어
졌다. 절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1669년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정릉을 중수하고 능역(陵域
)을 넓히면서 절을 석문 밖으로 옮기고 절 이름을 신흥사(新興寺)라 하여 옛 흥천사의 뒤를
잇게 했다. 1738년 불전을 새로 조성했으며, 이후 절이 퇴락하게 되자 성민(聖敏)과 경신(敬
信)이 정릉을 지키는 능참봉(陵參奉)에게 건의하여 전국에 권선문(勸善文)을 돌려 협찬받은
돈과 폐사된 은석사의 목재로 1794년에 현 자리로 이전해 절을 크게 중창했다.
1846년 구봉(九峰)이 칠성각을 세웠으며, 1849년에 성혜(性慧)가 절 서쪽에 적조암(지금은 분
리됨)을 세웠다. 또한 1853년 극락보전을 중수했으며, 1855년 명부전을 지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지원으로 전국 8도에서 시주를 받아 크게 중창했다. 대원군
은 신흥사와 정릉이 이웃한 점을 들어 중종 때 없어진 '흥천사' 이름을 다시 쓰게 했는데, 이
로써 흥천사 이름 3자는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이때 이름 변경 기념으로 대원군은 친히 '흥
천사' 편액을 내렸다. (1794년 지금의 자리로 절을 이전하면서 새로운 흥천사란 뜻에서 신흥
사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흥천사로 거듭난 이후 왕족과 사대부, 궁궐 상궁의 발길이 늘었으며, 1891년 42수 관음보살상
을 봉안했다.


5
. 조선의 마지막 황후가 머물던 왕실의 원찰, 그리고 현재
1933년 독성각이 불타자 이듬해 재건했다. 그리고 1942년 종각을 새로 지었는데, 이때 오세창
(吳世昌)이 종각 현판을 선물했다.
6.25 때는 격전지인 미아리고개가 지척임에도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화를 면했으며, 순종(純
宗)의 황후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 윤씨가 여기서 힘
겨운 피난 생활을 하였다. 그때 윤씨는 양식 1홉으로 하루를 지냈는데, 그 1홉에서 매일 1줌
씩을 떼어 향과 초를 사들고 기도를 올렸다고 전한다.

왜정(倭政) 때는 혼인한 승려와 그 가족들이 절 주변에 거주하면서 주변이 산만해지기 시작했
는데, 6.25 이후 경내 옆까지 민가가 밀려들어왔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추진한 불교정화운
동부터 조계종과 사찰 관리를 두고 오랫동안 갈등을 빚으면서 오랫동안 방황을 겪는다. 그러
다가 2011년 흥천사 주지로 들어온 금곡 정념이 스승인 무산오현의 뜻을 따라 많은 돈을 들여
22가구와 세입자 60여 세대를 이주시키면서 경내를 온전히 보전했다.
민가가 떠난 자리에는 2014년에 삼각선원을 크게 지었고, 극락보전과 대방을 중수했으며, 경
내를 꾸준히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명부전, 대방(만세루), 용화전, 독성각, 용화전, 삼각선
원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절은 서남쪽으로 산을 등지고 있어 대방과 극락보전은 동
북쪽을, 명부전은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인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과 국가 등록문화재인 대방을 비롯해
극락보전, 명부전,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판(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板.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379호
), 도량장엄번(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2호), 약사불도(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6호),
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4호) 등 지방문화재 20여 점을 지니고 있어
절의 풍부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이곳은 산사이긴 하나 턱밑과 머리 윗쪽까지 밀려온 개발의 칼질 앞에 고즈넉한 산사의 농도
가 다소 떨어졌다. 심지어 아파트들이 절 윗쪽까지 들어서 절을 굽어보고 있는 실정이며, 절
을 둘러싼 숲도 예전 같지가 않다.
흥천사는 조선 최초의 원찰로 의미가 깊으며, 비록 100여 년의 공백기가 있으나 조선 왕실의
지원으로 자라난 절의 하나이다. 또한 번잡한 도심 속에 박혀 있지만 정작 절로 들어서면 겉
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차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윽하며, 흥천사의 영원한 단짝인 정
릉과도 가깝고 이정표도 잘 정비되어 있어 같이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게다가 절 뒷쪽에 도심의 하늘길, 북악산길이 흐르고 있으니 여기서 북악산길 트래킹을 시작
하는 것도 괜찮다. 또한 10월 중순에는
흥천사 느티나무 광장과 주차장 일대에서 돈암동 느
티나무 축제가 열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2동 595 (흥천사길 29 ☎ 02-929-6611~12)


 

♠  흥천사 대방과 명부전

▲  흥천사 대방(大房) - 등록문화재 583호

내 핵심부를 가리며 동북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방은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특이하게 'H'
구조를 취하고 있다.
대방이란 왕실 원찰에서 주로 지니고 있는 특별한 건물로 왕족과 귀족들의 예불과 숙식 편의
를 위해 지어졌다. 숙식을 하는 방과 예불 공간, 부엌, 누(樓) 등을 갖추고 있으며, 높은 것
들의 편의 외에도 신도와 승려들의 숙식, 예불 공간의 역할도 하였다. 또한 법당(극락보전)
앞에 자리하여 경내가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가리는 역할도 했다.

이 건물은 1865년에 지어진 것으로 만세루
(萬歲樓)라 불리기도 하는데, 흥선대원군이 남긴 흥
천사 현판이 있으며, 대방 가운데에는 너른 방이 있고, 그 좌우로 여러 방들이 있어 대방이란
이름을 무색하지 않게 한다.
2016년에 해체 복원에 들어가 2019년에 마무리를 지었으나 시멘트를 이용하고 부실하게 손질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해 복원이 되었음에도 오랫동안 비워두다가 2020년 석가탄신일부터 부
분 공개를 하고 있다. 이곳에는 많은 불상과 보살상, 탱화가 있었으나 공사로 인해 관음전과
극락보전 등 주변 건물로 모두 흩어졌다.

▲  대방 정면에 걸린 흥천사 현판

▲  대방 우측의 옥정루(玉井樓)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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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방 좌측의 서선실(西禪室) 현판

▲  대방의 다른 이름, 만세루 현판
1926년(병인년) 악질 친일파 송병준의
아들인 송종헌(宋鍾憲)이 쓴 것이다.


▲  흥선대원군이 쓴 흥천사 현판의 위엄
1865년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흥천사로 갈게 하면서 그 기념으로 남긴 현판이다.
대원군의 체취가 서린 필체로 글씨가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다.

▲  대방의 듬직한 뒷모습

▲  종각(鐘閣)
1942년에 지어진 것으로 범종의 거처이다.

▲  오세창 선생이 남긴 종각 현판
현판 글씨가 마치 사람 모습 같다.


▲  흥천사 명부전(冥府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7호

대방 서쪽에는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동남쪽을 향하고 있는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1855년에 승려 순기(舜猉)가 세운 것을 1894년에 중수했다.
건물 좌우로 풍판을 달았으며, 평방(平枋) 윗쪽에는 공포를 촘촘히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으
로 기둥 위에는 밖으로 용머리를, 안쪽에 용꼬리를 새겨 건물의 품격을 높였다. 그리고 건물
내부에는 판형(版型)으로 운봉(雲峰)을 장식했다.

조선 후기 사찰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서울에 몇 없는 오래된 불교 건물로 명부
전의 현판이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점이 매우 이채로운데, 보통 현판의 색깔인 검은색 바
탕이 아닌 붉은색 바탕에 글씨가 쓰여 있어 마치 중원대륙 양식의 건물을 보는 듯 하다.


▲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5호

명부전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석조
지장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이름 그대로 돌로 만들어 도금과 색을 입힌 것으로 그 좌우로 시
왕상(十王像), 귀왕(鬼王) 2구, 사자(使者) 2구, 판관(判官) 2구, 금강역사(金剛力士) 2구,
동자상 6구 등 27구가 명부전 식구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흥천사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이란 기나긴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명부전의 주인인 지장보살상은 84.5cm의 보살상으로 푸른 민머리를 지니고 있다. 몸통과 같이
조각된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에 둥근 보주(寶珠)를 들고 있으며, 왼손은 편
상태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손의 형태는 조선 후기 석불상과 석조보살상에서 많이 등
장한다. 푸짐한 인상의 각진 얼굴에는 가늘게 뜬 눈과 살짝 구부러진 눈썹, 미소를 머금은 입
, 길쭉한 귀를 지니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대의(大衣) 안쪽에 편삼(扁衫)을 걸쳤고, 대의 자락이 오른쪽 어깨를 덮고 팔꿈치와 배를 지
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있으며, 왼쪽 어깨의 대의 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배에서 편삼과
겹쳐져 있다. 아랫도리를 덮은 옷자락은 배에서 앞으로 한 가닥의 옷주름이 늘어져 있고, 그
옆으로 낮은 옷자락이 펼쳐져 있다.
대의 안쪽에 가슴을 가린 승각기(僧脚崎)는 상단이 수평이고, 내부에 대각선으로 간략하게 접
혀 있다. 보살상의 뒷면은 목 주위에 대의를 두르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 자락이
늘어져 있다.

지장보살 좌우에 자리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은 자리가 낮아서 그렇지 지장보살과 덩치가
비슷하다.
그들 좌우로 왼쪽에 시왕 중 홀수 대왕 5명을,
오른쪽에 짝수 대왕 5명을 배치하여 시왕상을
이루고 있으며, 시왕상 사이로 동자상을 두고,
그 앞에는 귀왕과 판관을 배치했다. 그리고
문 앞에는 무기를 든 사자와 금강역사가 자리
해 명부전 식구들을 지킨다.

▲  사자상과 금강역사상, 사자도

▲  명부전 시왕상과 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23호)

시왕을 머금은 시왕상은 패널에 오려 붙인 형식으로 1/3왕과 5/7/9왕, 2/4왕, 6/8/10왕이 한
세트를 이루고 있다. 5/7/9왕, 6/8/10왕이 그려진 화기(畵記) 일부가 사라졌으나 '유(酉)'가
남아있어 1885년 을유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화기를 통해 상궁이 시주하여 흥천사에 봉
안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19세기 말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시왕도 양식으로 봉국사(奉國寺) 시왕도(1872)와 화
계사(華溪寺) 시왕도(1878) 등이 비슷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림 상단에는 시왕을 중심
으로 심판 장면이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지옥 장면이 펼쳐져 있다.

상단에는 병풍을 배경으로 시왕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크게 표현되어 있으며, 시왕 주위
난간과 계단 밑에 권속들이 서 있다. 옥졸(獄卒)은 창과 같은 무기류를 들고 있으며, 판관은
복두를 쓰고 우산이나 부채를, 동자는 벼루와 두루마리, 책을, 천녀는 부채를 들고 있다. 하
단에는 지옥의 형벌 장면이 가득 채워져 보는 이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다. 즉 착하게 살라는 흥천사와 시왕도의 뜻이다.


▲  명부전 윗쪽에 걸린 괘불함(掛佛函)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2호

명부전 가운데 칸 문 위쪽에는 시커먼 피부의 길쭉한 나무 상자가 걸려있으니 그가 비로자나
삼신괘불도의 보금자리인 괘불함이다. 이곳 괘불은 서울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1832년
작(作)으로 예전 석가탄신일에 친견한 추억이 있다.
괘불은 만나기가 꽤 어려운 까칠한 존재로 그를 보고 싶다면 석가탄신일(가급적 15시 이전까
지)을 이용하기 바란다. 그날은 날이 날인지라 95% 이상 외출을 나온다. 만약 평일이나 일반
휴일에 외출을 나온 그를 봤다면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반드시 복권을 구입하기 바란다.

흥천사 괘불과 괘불함은 '흥천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 및 괘불함'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372호
로 지정되어 있다.


▲  명부전 뒷통수에 깃든 벽화 5점
반야용선을 이끄는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하늘을 나는 천녀(天女),
호랑이를 타고 질주하는 승려 등이 그려져 있다.

▲  극락보전 서쪽 바위에 깃든 관세음보살상과 산신상(왼쪽 감실)

극락보전 서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있는 바위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의 끝에 구멍
이 여럿 패인 바위가 있고, 그곳에 하얀 피부를 지닌 맵시가 고운 관세음보살과 조그만 산신
상이 둥지를 틀고 있다.
자애로운 표정을 지닌 관세음보살은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데, 그 옆 바위에 감실(龕室)을 파
서 산신과 호랑이를 두었으며, 유리로 그 감실을 봉해버려 답답하게 갇혀 있는 모습이다. 그
들을 품은 바위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절이 있기 전에는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흥천사의 보물 창고, 극락보전(極樂寶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6호

대방 뒷쪽에는 흥천사의 법당인 극락보전(극락전)이 대방의 뒷꽁무니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
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1853년에 구봉계장(九峰啓壯)이
지었는데, 경내에서 가장 늙은 집으로 처음에는 대웅전(大雄殿)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극락보전으로 이름이 갈렸는데, 흥천사는 창건 초부터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을 중심 불상으로 삼았다고 전하며, 극락보전이란 그 아미타불의 거처를 일컫는다.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밑에서 보면 제법 장엄하게 보이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
이에 촘촘히 박힌 다포 양식으로 건물 좌/우/뒷면은 판벽(板壁)으로 사천왕(四天王)을 비롯한
여러 벽화가 그려져 있다. 건물 정면 3칸에는 마치 그림 판화를 긁어놓은 듯, 온갖 꽃과 나무
무늬(꽃살 창호)가 색채감 가득히 새겨져 있으며, 가운데 두 기둥 위에는 용머리 장식을 두어
건물을 수식한다.

앞서 명부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사찰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화려한 장식과 그 시
절 뛰어난 건축 기술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서울에 얼마 없는 조선 후기 사찰 건축
물로 그 가치가 높아 일찌감치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벽화가 그려진 극락보전의 뒷모습
건물 좌/우/뒷쪽 외벽에는 여러 벽화를 담아 법당을 곱게 수식하고 있다.

▲  극락보전의 빛바랜 일기장 '흥천사 대웅전 불량대시주(佛糧大施主)' 현판
1899년에 쓰여진 것으로 극락보전의 옛 이름이 대웅전이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  1972년에 제작된 흥천사 개금불사시주기

▲  망국의 황자(皇子), 영친왕이 5살 때 흥천사에 남긴 현판

영친왕<英親王, 영왕(英王) 1897~1970>은 고종의 7번 째 아들로 1901년에 흥천사를 방문해 글
씨 하나를 남겼다. 물론 수행원과 승려의 간청에 의해 그리 했을 것이다. 현판에는 '王孝 天
地玄黃金雨孝王海史. 英親王殿下五歲書, 大韓光武五年'이라 쓰여 있으며, 저 글씨 중 '王孝天
地玄黃金雨孝王海史'만 영친왕의 필적이다.
지체 높은 왕자의 친필인지라 특별히 법당 천정에 걸어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아무리 황제의
아들이 쓴 글씨라고 해도 4살 어린이가 쓴 글씨답게 천진난만함이 가득 묻어 나온다. 글씨가
다소 흐트러져 보이긴 하나 그 나이에 저 정도의 글씨를 썼을 정도면 어린 시절 총기가 조금
있었던 모양이다. 허나 현실은 망국의 황족...


▲  극락보전의 화려한 붉은 닫집과 보물들이 가득한 불단

극락보전 내부는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불단에는 목조여래좌상(아미타여래)
과 목조보살좌상, 천수관음보살좌상이 있으며, 그 뒤로 아미타불도, 그 위로 붉은 기와의 닫
집이 호화롭게 지어져 있다.
불단 좌우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온갖 탱화들이 가득 깃들여져 있으며, 천정에도 고운 색
채의 벽화가 넉넉히 깃들여져 있어 극락보전은 그야말로 흥천사의 보물 창고이자 불교미술박
물관이다. 그러니 흥천사에 왔다면 극락보전 내부는 꼭 둘러봐고 또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흥천사의 얼굴과 같은 존재이며, 흥천사의 지
정문화재 40% 정도가 이곳에 들어있다.


▲  왼쪽 목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4호)
가운데 목조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3호)
오른쪽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보물 1891호)
후불탱화인 아미타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7호)


극락보전 불단 중심에 자리한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은 입힌 아미타여래(阿彌陀
如來像)이다.
좌우 협시로 자리한 목조보살좌상과 금동천수관음보살보다 덩치가 많이 밀려 그가 과연 중심
불상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들보다 앉아있는 대좌(臺座)를 더 높였으나 그래도 많
이 밀려 다 큰 어른들 사이에 아이가 앉아있는 것 같다.

목조여래좌상은 56.3cm 높이의 불상으로 허리가 유난히 길고 어깨가 넓은데, 이는 조선 초기
불상에서 많이 나오는 특징이다. 얼굴은 약간 내밀어 밑을 보는 자세이고, 덩치에 비해 얼굴
이 너무 작으며, 머리의 측면 폭은 또 넓다.
무견정상(육계)은 낮게 솟아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콧날은 오똑 솟아있고 입술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가사를 2벌 겹쳐 입었는데, 오른족 어깨에 부견의(覆肩衣)를 걸치고, 대의 자락이 왼쪽 어깨
뒤로 넘겨져 늘어졌다. 앞가슴은 U자형으로 열려있고 안에 입은 승각기(내의)가 접혀저 사선
의 주름을 이루고 있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두 다리를 덮은 옷자락은 오른발을 반쯤 덮
고 무릎 아래로 흘러내렸다.
수인(手印)은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으며, 불상 뒷면에는 네모난 복장유물 공간이 있는
데, 여기서 지본묵서 다라니경 2건과 발원자명이 쓰인 목판이 나왔다.

불상의 이런 스타일은 1606년에 조성된 공주 동학사(東鶴寺)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비슷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동학사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 석준
(釋俊)
각민(覺敏) 등이 조성하거나 그 계열에서 만든 것을 19세기 중기 이후에 흥천사로 흘러들
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 옆에 연꽃을 든 화려한 보관(寶冠)의 목조보살상은 앉은 키 101.5cm 크기로 보관에는 정면
을 향해 날개짓을 하는 봉황 2마리가 좌우대칭을 이루며, 꽃무늬와 연화문(蓮花紋) 장식이 붙
어있고 상단에 5개의 화염문과 측면 좌우로 관대(冠帶)가 매달려있다. 그리고 보관 겉면에 여
러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있어 장식 일부가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무견정상이 솟아있고, 보관 밑 이마에 머리카락이 단정히 처리되어 있으며, 머리카
락이 어깨 위까지 내려와 3가닥으로 늘어져 있다. 머리는 어깨에 비해 크나 상반신이 지나치
게 길고, 하반신은 넓으며, 명상이나 졸음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의 눈꼬리가 많이 올라가
있고, 코는 뾰족하고 콧등은 짧다. 그리고 이마에는 큰 백호가 찍혀져 있다.
두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무릎에 놓인 오른손과 어깨까지 치켜든 왼손에 연꽃이
달린 줄기를 들고 있다. 대의 안쪽에 편삼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 자락이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끝자락이 엉덩이까지 늘어져 있다. 내의(승각기)는 상단이 자연스
롭게 접혀 있다.

그의 조성 관련 기록은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으나 그의 스타일을 볼 때, 15~17세기에 조성된
불/보살상과 많이 비슷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19세기 중기 이
후에 흥천사로 흘러들어와 극락보전 식구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단 식구들 뒤에 조용히 깃든 아미타불도는 1867년에 그려진 것으로 경상도 화승(畵僧)들이
여럿 참여해 19세기 말 경상도 화풍이 만힝 반영되어 있다. 왕실 상궁인 조씨와 안씨, 천씨
등이 고종(高宗) 내외의 안녕과 무강을 빌고자 돈을 대어 만든 것으로 19세기 말 서울 지역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왕실과 절과의 후원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  확대해서 바라본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보물 1891호)의 위엄

극락보전 보물 중 가장 백미(白眉)는 복잡하게 생긴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이 아닐까 싶다. 연
꽃을 든 목조보살좌상보다 덩치는 작으나 무수한 손과 팔의 무리가 관세음보살상 덩치만해 비
록 키는 딸려도 덩치는 목조보살좌상과 비슷해 보인다.

이 보살좌상은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42수 천수관세음보살(千手觀世音菩薩)로 1894년에 작성
된 '삼각산 흥천사 42수(手) 관세음보살 불량시주(佛糧施主)' 현판 기록을 통해 19세기부터
흥천사에 있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성 시기는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우나 얼굴 모습이나 잘록
한 허리 등의 형식을 통해 고려에서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천수관세음은 많은 손과 다양한 지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며 호국적 성격까지 지닌 보살상으
로 신라 중/후기부터 널리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관련 관세음보살상은 거의 없는 실정
이며, 그림 또한 매우 희귀하다. 이 땅에 몇 없는 존재가 흥천사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흥천
사가 잘나갔음을 뜻하는데,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며, 19세기 중/후반 흥천사가 급
성장을 거듭하고 있을 때 왕실에서 내린 것으로 보인다. 즉 그의 제자리는 그의 닫힌 입처럼
알 수가 없다.

앞에 두 손으로 합장인을 선보이고 있고, 나머지 손은 각자의 방향에서 제각각 춤을 추고 있
다. 저렇게 손이 많으니 일을 하거나 물건을 들 때는 편하겠으나 손과 팔 동작, 관리는 쉽지
않을 듯 싶다. 그냥 두 손, 두 팔만 있어도 충분하다. 어쨌든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존재가
흥천사에 있고 늘 이렇게 친견할 수 있으나 마치 유명한 위인을 만난 듯 마음이 뿌듯하다.


▲  흥천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8호

지장시왕도는 1867년에 의운자우(義雲慈雨)가 그렸다. 푸른 두광(頭光)과 연두색 신광(身光)
을 지닌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로 시왕과 명부(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19세기 후반 서울 지역 지장시왕도의 새로운 형식을 연 그림으로 지장보살이 두 손으로 보주
를 들고 있는 점, 그 밑에 선악동자(善惡童子) 2명이 지장보살의 석장(錫杖)을 대신 들고 있
는 점이 기존의 지장시왕도와 다르다. 개운사(開運寺) 지장시왕도(1870년)와 봉국사(奉國寺)
지장시왕도(1885년) 등이 이것을 참조해서 그렸으며, 점차 확대되어 19세기 후반 서울, 경기,
경상도에서 널리 유행했다.
안정된 구도와 홍색을 기반으로 녹색과 청색이 대비를 이루는 색채의 구사력, 세부 문양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표현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80호

현왕도는 덥수룩한 검은 수염을 휘날리는 제왕 모습의 염라대왕(현왕)이 그의 부하들을 거느
리고 죽은 자를 심판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1867년에 조성되었다.
화기는 아쉽게도 없으나 18세기 말~19세기 초에 경북 사불산파 화승인 신겸(愼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19세기 밀 서울과 경기도, 경북 지역에서 유행한 현왕도의 형식을 따르
고 있어 당시 서울 경기 지역과 경북 화승들 간의 교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  극락보전 신중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7호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를 정신없이 담은 법당 지킴이용 탱화이다. 그림 상단에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일/월대신(日/月大臣), 일궁천자(日宮天子), 월궁천자(月宮天
子) 등 천부세계(天部世界)를 표현하고, 하단에는 위태천(韋太天)과 조왕신(竈王神) 등 여러
무기를 지닌 천룡부(天龍部)를 표현했다.

채색은 적색과 녹색을 중심으로 하여 하늘색 계열의 밝은 청색이 사용되었으며, 위태천의 투
구 및 갑옷. 삼지창, 검과 각종 기물 등에 고분법을 적용하고 금색을 칠했다.
그림 밑에 화기가 있는데 글씨가 조금 떨어져 나가긴 했으나 대허체훈(大虛體訓)과 혜산축연
(惠山竺衍), 학허석운(鶴虛石雲)가 1885년에 조성되었고, 상궁 김씨와 홍씨가 대표 시주자로
나와있어 고종 내외 등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왕실발원 탱화로 여겨진다.


▲  극락보전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5호

극락9품도는 화면을 9개로 나누어 극락세계의 구품(九品)을 그린 것으로 고양시 흥국사(興國
寺)의 극락구품도와 같은 모본(模本)을 사용했다. 대허체훈과 혜산축연, 학허석운 등이 그린
것으로 그들이 1885년에 극락보전 신중도도 제작했으므로 같은 해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천룡도(天龍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8호

천룡도는 신중도의 축소형 탱화로 위태천과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담겨져 있다. 1898년 용담
(蓉潭)이 초본을 제작했는데, 다른 천룡도와 달리 위태천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하단의 산
신과 조왕산, 기타 신중이 부각되는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의복과 기물 등에 금박(金箔)을
사용했다.
인물 묘사에는 섬세한 바림질과 세칠의 묘사로 입체감과 사실성이 돋보이며, 간략히 표현된
옷주름에도 활달한 필력이 엿보인다. 신중도의 일원이나 천룡도 형식은 거의 없으며, 서울에
서는 거의 이곳이 유일하여 19세기 말 서울, 경기 지역의 천룡도 양식을 보여주는 희귀한 존
재이다.

이렇게 극락보전에 지킴이용 탱화가 신중도 외에 천룡도까지 있으니 그들의 협동심으로 극락
보전이 이렇게 무탈했던 모양이다.


▲  극락보전 도량신도(道場神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6호

이름도 생소한 도량신도는 삼보(三寶)의 도량을 지키는 도량신을 머금은 그림이다. 도량신은
화엄경 략찬게(略纂偈)에 나오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의 일원으로 도량신과 신장(神將) 5명이
각이 진 흰색을 배경으로 정면을 향해 앉아들 있다.
도량신 뒤쪽 좌우에는 산개(傘蓋)와 당번(幢幡)을 든 동자가 있으며, 정면 좌우에는 신장 2명
이 칼과 동그란 지물을 들고 가운데를 향해 서있다. 인상을 잔뜩 쓴 붉은 얼굴의 도량신은 단
령의 붉은 관복을 입고 가슴과 허리에 각각 각대(角帶)를 차고 있으며, 관복에는 주름을 표현
한 먹선을 따라 바람질로 채색하고 입체감을 표현했다.

향우측 신장은 앙발(仰髮)의 귀졸(鬼卒) 모습으로 이마에 검은 띠를 둘렀고, 오른손은 허리춤
에 대고 왼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둥근 지물을 들고 맨발로 서있다. 향좌측 신장도 앙발의 귀
졸 모습으로 머리에 청색 두건을 쓰고 두 다리를 약간 벌리며 오른손에 긴 칼을 들고 서있다.

이 그림은 대허체훈과 학허석운 등이 그렸는데, 1885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연화대감로도(蓮花大甘露圖)
1939년에 그려진 것으로 극락보전 탱화 식구 중 가장 막내이다. 고색이 제대로
여물지 못하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는데, 그 시절의 우울했던
생활상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 등 현대식 전쟁 장면까지
들어있어 기존의 감로도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  극락보전 천정에 깃든 벽화 (노승과 천녀인 듯)
극락보전에 발을 들였다면 고개를 들어 천정을 꼭 살펴보자. 여러 벽화와 문양,
용머리 장식 등이 눈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이들은 극락보전이 지어진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건물의 품격과 아름다움을 드높인다.

▲  극락보전 천정에 그려진 벽화 (천녀와 동자인 듯)


 

♠  흥천사 마무리

▲  흥천사 용화전(龍華殿)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용화전은 막연히 56.7억년 후에나 온다는 미륵불(미륵보살)의 거처이
다. 1967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현판이 있는 가운데 칸만 있었으나 나중에 좌우로 1칸씩
넓혀 지금의 특이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  용화전 식구들
하얀 피부를 지닌 미륵불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에 금동 피부의
관세음보살상을, 왼쪽에 여래연지내영도를 두었다.

▲  여래연지내영도(如來蓮池來迎圖)
미륵불 왼쪽에는 마치 추상화처럼 생긴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여래(미륵불)가
연꽃이 핀 연지에 왔음을 표현한 것으로 그 자비로움의 향기가 천하에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근래 제작됨)

▲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간만에 마실을 나온 장엄등(莊嚴燈)들

장엄등은 큰 연등으로 저녁이 되면 스스로를 불사르며 몸을 환하게 밝힌다. 그것이 연등과 장
엄등, 유등의 매력이다. 흥천사 장엄등은 귀엽게 표현된 부처상과 코끼리, 청룡상 등이 있으
며, 서울연등회 제등행렬에도 참여한다.


▲  임시로 지어진 관음전(觀音殿) <2020년 가을 이전>

대방 서쪽에는 갈색 피부를 지닌 관음전이 있다. 대방 정도의 큰 집으로 일반적인 사찰 기와
집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이형적(異形的)인 모습이라 다소 쌩뚱 맞기는 하지만 대방 중수로 인
해 2017년에 임시로 마련한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 대체용 건물이 생기면 이 집은 사라지게
되며 저것이 생전에 마지막 사진이 될 수도 있다.
(관음전은 2020년 10월에 북쪽으로 이전되었으며, 윗 사진의 건물은 철거되었음)

대방에 있던 종무소(宗務所)가 이곳에 들어와 일을 보고 있으며, 강당의 역할도 도맡고 있는
데, 특히 대방에 들어있던 지방문화재 목조관음보살상과 탱화 일부가 이곳에 신세를 지고 있
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목조관음보살상을 봉안하여 건물 이름이 관음전을 칭하게 되었다.


▲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6호)
아미타불회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9호)


관음전의 주인인 목조관음보살상과 그 뒤쪽에 든든하게 걸린 아미타불회도는 대방에서 넘어왔
다. 대방에도 저들은 한 세트로 있었는데 여기서도 늘 같이 있어 서로의 진한 정을 드러낸다.
꽃이 화려하게 치장된 불단에 장엄하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원래 용왕과 선재동자를 거느린
관음3존상이나 이곳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좌우 협시상은 다른 곳으로 넘어가고 관세음보살
누님 혼자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보살상은 고맙게도 뱃속에 조성발원문을 품고 있어 조성시기 등 여러 정보를 속삭이고 있
는데, 1701년 전북 임실(任實) 사자산 적조암(寂照庵)에서 조성되었다. 그것이 19세기 중/후
반 이후에 이곳까지 들어와 안그래도 보물로 넘치는 흥천사의 곳간을 더욱 채워준 것이다.

용왕과 선재동자를 협시로 둔 관세음보살은 조각의 경우 법주사(法住寺)와 남해 보리암 정도
를 빼면 거의 없어 매우 가치가 있으며, 근래 그의 뱃속에서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묵서다라
니, 여러 불서(佛書) 등 9건 633점의 복장(腹臟)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여 '흥천사 만세루
목조관음보살삼존상 및 복장유물
'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6호의 지위를 부여받
았다. 현재는 관세음보살상만 친견이 가능하다. (만세루는 대방의 다른 이름)

관세음보살 뒤에 걸린 아미타불도(阿彌陀佛會圖)는 상궁들의 시주로 1890년에 조성된 것으로
수화승 긍조(亘照)와 만파정익(萬波定翼), 보암긍법(普庵肯法), 혜산축연 등이 조성했다. 화
기에 조성연대는 누락되어 있으나 같은 대방에 있던 신중도를 1890년에 긍조가 제작하여 같은
해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 중앙에 연화대좌 위에 앉은 아미타불이 두광과 신광을 드러내고 있고, 그 좌우로 연꽃을
든 8위의 보살과 사천왕이 자리해 일제시 아미타불을 바라보고 있다. 특히 비싼 금이 재료로
쓰인 것이 돋보이는데, 그림에 등장하는 이들의 지물에는 금박을, 천의 등 옷 문양에는 금니
(金泥)로 그렸으며, 아미타불 신광에도 금색을 사용해 빛이 반짝반짝 비추는 것 같다.


▲  만세루 신중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0호

만세루 신중도는 관음전의 신세를 지켜 그곳을 지키고 있는데, 제석천과 범천, 위태천 등 온
갖 호법신들이 정신없이 담겨져 있다.
채색은 어두운 암록색과 조금 탁해진 적색을 사용했는데, 삼지창과 검 등 무기와 기물, 관대,
의복에 부분적으로 금을 사용해 그리거나 문양을 넣어 그림이 부분부분 밝아보인다. 극락보전
신중도와 하늘 공간 처리와 색채에서 조금 차이점이 있을 뿐, 도상은 거의 일치하며, 그것을
참조하여 그린 것으로 여겨져 1885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만세루 제석천도(帝釋天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1호

제석천도 역시 대방에서 넘어온 것으로 제석천이 중심이 된 신중도의 간단 버전이다. 제석천
을 중심으로 천부중(天部衆) 8위와 천녀 등이 빙 둘러져 있는데, 제석천은 두광과 신광을 지
니고 있으며, 정면을 향해 합장인을 선보고 있다.

천부중은 4위가 원유관(遠遊冠) 형식의 관모를 쓰고 있고, 나머지가 방형(方形)과 반월형(半
月形) 일월관(日月冠)을 눌러쓰고 있는데 일월관을 쓴 이는 일궁천자와 월궁천자로 여겨진다.
상단 천부중 옆에는 당번(幢幡)을 들고 과일은 받쳐 든 천녀가 있으며, 제석천 머리 위쪽에는
당과 부채를 든 동녀 2명이 있다.
의복과 관, 광배는 탁한 적색과 암록색이 주조를 이루며, 피부색은 거의 흰색을, 하늘 공간과
관, 의복에는 밝은 청색을 사용했다. 천부중이 들고 있는 홀과 관모에 부분적으로 금이 사용
되었고, 옷 위에 그려진 문양 일부에도 금을 썼다.
1890년에 청신녀(淸信女) 조묘법월(趙妙法月)과 원씨의 시주로 받아 도편수 긍조 등이 조성했
으며 신중도의 축소판으로 등장 인물이 단촐한 천룡도와 제석천도가 특별하게도 흥천사에 모
두 들어있으니 흥천사가 범상치 않은 절임을 알려준다. 하긴 시작부터가 범상치 않았고 조선
후기에도 잘나갔으니 오죽하겠는가.


▲  독성각, 북극전으로 인도하는 길

명부전 뒷쪽 언덕에는 독성각과 북극전이 있다. 이들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경내 중심(극락보전, 대방)과 조금 떨어져 있고, 숲에 진하게 묻혀 있어 경내 중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구석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으니 지나치기도 쉽다.

명부전 뒷쪽에 독성각, 북극전으로 오르는 길이 닦여져 있다.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안내하고
있는데, 북극전과 독성각 주변에서 길은 끊긴다. 적조사와 북악산길로 나가는 길을 펜스로 모
두 막았기 때문이다.

▲  비닐막을 씌운 북극전(北極殿)

▲  북극전의 주인, 칠성탱

북극전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칠성(七星)의 보금자리로 귀에 많이 익은 칠성각(七星閣)
의 다른 이름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59년에 지어져 칠성각이라 했다가 북극전으로 이름
을 갈았으며, 기도 수요가 많아서 정면에 비닐막을 씌워 기도 공간을 늘렸다. 건물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산신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산신은 이미 극락보전 옆 바위에 봉안되어 있음
에도 북극전에도 별도로 둔 것을 보면 산신을 크게 대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칠성탱 옆에 자리한 산신탱과 산신상

▲  독성각(獨聖閣)

북극전과 나란히 자리한 독성각도 앞에 비닐막을 씌워 기도 공간을 늘렸다.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북극전보다 덩치는 작지만 서로 비슷한 모습인데, 1933년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홀로 건물을 지킨다.

▲  색채가 선명한 독성상과 독성탱

▲  흥천사에서 적조사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삼각선원)


공개를 꺼리는 지방문화재 몇 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정문화재와 공개된 건물은 싹 둘러보았
다. 간만에 왔지만 지정문화재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들 낯이 익지만 오랜 지기처럼 언제 봐도
반갑다.
이렇게 하여 흥천사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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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일원이자 화려한 늙은 윤장대로 유명한 예천 용문사 (용문사 성보박물관)

예천 용문사


'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예천 용문사 '
우측 윤장대좌측 윤장대
▲  용문사의 자랑, 윤장대

용문사에 다시 오니 산이 깊어 세속의 소란함이 끊어졌네
상방(上方)에는 중의 평상이 고요하고 옛 벽에는 부처의 등불이 환하다.
한 줄기 샘물 소리는 가늘고 일천 봉우리 달빛이 나뉜다
고요히 깊은 반성에 잠겨지니 다시 이미 나의 가졌던 것까지 잃어버린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이 용문사에서 지은 시


 

♠  용문사(龍門寺) 입문

▲  회전문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증장천왕(增長天王)

▲  회전문을 지키는 사천왕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


늦가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겨울이 제국의 기틀을 닦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일행들과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예천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용문사를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찾았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
고 경내로 들어서니 일주문(一柱門)이 제일 먼저 마중을 나온다. 
 
용문사 일주문은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따르면 1608년에 시작된 대대적인 중창의 마
지막 불사로 81년 뒤인 1689년에 세울 예정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80여 년의 장대한 계획
을 세우고 중창에 임한 듯 싶다. 당시의 계획대로 81년 뒤에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공포의 조
각 수법이나 장식이 18세기 후반 양식이 강해서 1767년 대장전 중창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1938년에 보수를 했다.
문 현판에는 '소백산(小白山) 용문사'라 쓰여있어 이곳의 이름을 밝혀주며, 용문사를 직접 품
고 있는 용문산(龍門山)보다는 거리가 조금 있는 소백산을 칭하고 있으니 이는 소백산이 훨씬
명성이 높고 웅장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소백산의 영역을 좀 늘려보면 용문산도 그 범주에 들
어가기는 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삼삼한 숲길이 중생을 맞는다. 늦가을의 절정을 누렸던 나무들은 마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낸 중생 마냥 벌거숭이가 되어 겨울 제국(帝國)의 눈치를 받는다. '올해도 다
저물었구나. 이제 곧 강제로 나이 1살이 얹혀지겠군'
싶은 생각이 거친 파도처럼 몰려와 나그
네들을 잠시 우울쟁이로 만들어버린다. 숲이 아무리 청량한 바람을 불어 속세에서 꾸리고 온
번뇌를 싹 단죄한다고 해도 그런 우울한 생각까지 악성바이러스처럼 심어놓으니 심기가 별로
이다. 간신히 번뇌를 일주문 부근에 내던지고 경내로 발길을 향한다.

그렇게 길을 재촉하다보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든 용문사에는 이르나 두 발로
가는 경우에는 산사의 정취에 어울리게 오른쪽 돌계단으로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절을 다
둘러보고 나올 때는 경내 서쪽 주차장(제3주차장)을 거쳐 잘 닦여진 찻길로 내려오면 된다.

돌계단을 오르면 경내로 인도하는 2번째 관문인 회전문(回轉門)이 마중을 한다. 그는 석가여
래의 경호원인 사천왕의 보금자리로 흔히 천왕문(天王門)이라 불린다. 여기서 그들의 간단한
검문을 받고 경내로 들어서면 되는데, 사천왕의 표정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다기보다는
느긋하고 친숙한 표정 같다.


▲  용문사 해운루(海雲樓)

회전문을 지나면 바로 조급한 게단이 숨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펼쳐진다. 다행히 계단은 짧
은데, 그 계단의 끝에는 해운루가 수미산(須彌山)에 높이 선 누각 마냥 물끄러미 천왕문을 통
과한 중생을 굽어본다.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인 해운루는 경내로 향하는 3번째 관문으로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경내
를 가리고 있다. 1984년 대화재 때 불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이 누각을 지나면 대장전과 보
광명전이 정면에 나타나면서 비로소 경내에 이르게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용문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해우소에서 바라본 용문사 외경

예천군 용문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문사는 양평(楊平) 용문사, 남해(南海) 용문
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하나로 꼽힌다. 다들 쟁쟁한 역사와 보물을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한번 가려보라면 바로 예천 용문사가
단연 갑(甲)이 아닐까 싶다.
양평 용문사는 이 땅 최대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로 유명하나 6.25때 죄다 파괴되어 고
색의 깊이가 얕고, 남해 용문사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지만 고색이 깊고 문화유산이 많다.
허나 예천 용문사는 그곳의 상징이자 천하에서 거의 유일하다는 오래된 윤장대를 간직하고 있
고, 조선 중기 건물인 대장전을 비롯해 무수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성보박물관까지 따
로 장만할 정도이다. 1984년 불의의 큰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대단했을 것인데,
천하의 시샘 때문인지 화재로 많은 것을 잃었다.

예천의 대표급 관광지로 몸값을 올린 용문사는 870년에 두운선사(杜雲禪師)가 당나라에서 귀
국하여 지은 조그만 암자인 두운암(杜雲庵)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 초막을 짓고 머물고 있었는데, 920~930년경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경상도를 정벌하러 하늘재를 넘어 예천 땅을 지나다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그를 보러 찾아갔다.
허나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헤매고 있다가 어디선가 청룡(靑龍) 2마리가 바위 위에 나타나 길
을 인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용문산이라 했다고 하며, 두운을 위해 용문사를 창건
했다고 한다. 이때 절을 짓는데, 나무 둥치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이 나와 공사비로 썼
다고 전한다.
전설에 나오는 청룡은 진짜 용은 아닐테고 아마도 지역 사람들이나 지방 세력의 격한 환영을
받거나 도움을 받은 것을 과대포장하여 그렇게 표현한 듯 싶으며, 은병 16냥은 예천의 지방
세력이나 백성들의 지원을 뜻하는 것 같다.

태조는 이곳에 머물며 장차 천하를 평정하면 큰 절로 지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936
년 오랜 숙원인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자 약속대로 그해에 칙명(勅命)을 내려 절을 크게 중
건하고 매년 150석의 쌀을 내렸다. 그 쌀은 지역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충당했다.

1165년에 의종(毅宗)의 칙명으로 중수했으며, 1171년에 명종(明宗)의 태자(太子)의 태를 절의
왼쪽 봉우리에 묻으면서 창기사()로 이름을 바꾸고 축성수법회()를 열어 낮
에는 금광명경(金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의식을 항규()로 삼았다.
그 법회가 끝나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승려 500명을 불러 50일 동안 담선회()를 열었
으며, 그때 산청 단속사(斷俗寺)의 승려인 효돈()이 전등록(傳錄), 인악집(仁集), 설
두집
(雪集) 등을 강의했다.
그리고
1173년 무신정권에 대항하는 김보당(金甫當)의 난이 일어나자 3만 승재()를 여는
한편 1180∼1182년에 대법회를 열었다.

▲  용문사 보광명전

▲  용문사 명부전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많은 절들의 법등(法燈)이 간당간당하던 조선 때도 용문사는 승
승장구하여 세조(世祖)가 이곳 승려의 잡역(雜役)을 감하거나 면제하라는 교지(敎旨)를 내렸
으며, 1478년에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실을 봉안하고 1480년에 세조의 왕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중수하여 성불산(成佛山) 용문사라 했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왜군은 절 입구인 초간정(草澗亭)에서 돌아갔다
고 한다. 그 기나긴 왜란 동안 용문사에서 짚신을 짜서 전국 승군(僧軍)들에게 보급하는 한편,
승병을 훈련시켰다.
1783년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갈았으며, 1835년
에 불이 나자 열파(), 상민(), 부열() 등이 힘을 모아 1840년대에 공사를 마쳤다.

6.25때도 별 피해를 입지 않는 등, 전화(戰禍)도 피해가는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을 날렸으
나, 1984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보광명전과 해운루, 강원, 요사 등 대부분의 건물을 날리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허나 다행히도 화마(火魔)는 대장전과 윤장대, 자운루 등은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으며,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벌여 주변의 나무를 베어내고 뜨락을 넓게
다졌다.
또한 용문사와 인근 사찰의 문화유산 관리를 위해 경내 우측에 성보박물관을 세웠으며, 구식
해우소를 폐쇄하고 샤워장을 갖춘 신식 해우소를 갖추어 중생과 승려의 편의를 고려했다.


용문사에는 3가지의 믿거나 말거나 이적(異蹟)이 있는데, 하나는 태조 왕건이 두운을 찾았을
때 용이 나와 영접한 일이고, 둘째는 절을 지을 때 은병이 나와 공사비로 충당한 일이며, 3째
는 절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 지금은 없음)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할 때 4층 위로 오색구
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경내에는 오랜 내력과 명성에 걸맞게 법당(法堂)인 보광명전을 비롯해 대장전, 극락보전, 명
부전, 자운루, 원통전, 산신각, 해운루, 성보박물관 등 20동의 건물이 경내를 한가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대표 보물인 대장전과 윤장대를 위시해 세조의 감역교지,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영산회괘불탱, 천불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 국가 국보 1점과 국
가 보물 7점, 중수용문사기비 등의 약간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  영남제일강원(嶺南第一講院)

▲  성보박물관에 있는 독성상과 지장보살좌상

깊숙한 산자락에 묻혀 있어 아무리 질긴 번뇌라도 쫓아오다 제풀에 졸도하며, 절을 감싼 숲이
삼삼하여 서거정의 시처럼 속인들의 마음을 정화해 준다. 거기에 고색이 깊은 경내에 발을 들
이면 나도 모르게 속세를 잊고 잠시나마 번뇌가 끊어지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로부터 4계절이 아름다운 경승지라 선비와 문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
와 문장으로 남겼으며, 20세기에는 출세를 위해 공부하러 절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행정, 법조계, 경찰 쪽으로 크게 출세한 이들이 많아 공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다.

대장전과 자운루를 제외하고는 1984년 이후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 부분에 따라 고색의 질감이
다르다. 허나 윤장대를 비롯하여 이곳의 깊은 내력을 가늠케 해주는 늙은 유물이 많아 경북
북부권에서 영주 부석사(浮石寺) 다음 급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예전에 이곳 승려인 청
안이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란 광고 문구로 유명한 모 핸드폰 통
신사 TV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 용문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391 (용문사길 285-30 ☎ 054-655-1010)
* 용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용문사 대장전과 그 주변



 

♠  용문사 경내 둘러보기

▲  보광명전(普光明殿)과 3층석탑

해운루를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입혀진 너른 뜨락과 함께 석탑 2기를 거느린 보광명전이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중생을 맞는다.

보광명전은 대장전 다음급의 건물로 1984년 대화재로 쓰러진 것을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철조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봉안했으며, 앞뜨락에는 하얀 피부
의 맨들맨들한 석탑 2기가 나란히 솟아 있는데, 우측 탑은 5층, 좌측 탑은 3층으로 층수를 달
리했다. 둘은 높이가 조금 차이가 날 뿐, 모습이 비슷하여 층수를 같게 하고 높이를 맞췄으면
보기에도 자연스러웠을텐데, 그 점이 좀 아쉽다.


▲  성보박물관에서 바라본 보광명전 뜨락

▲  보광명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광명전 불단(佛壇)에는 이곳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이 그만의 특허 제스쳐인 지권인(智拳印)
을 선보이고 있다. 얼굴이 너무 부어있어 통통한 인상을 주는데, 그의 좌우에는 소조(塑造)
로 만든 석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이 협시(夾侍)로 자리를 지킨다. 허나 주불(主佛)보다 덩치
가 지나치게 작아 마치 어른과 아이가 앉아있는 듯 하다. 그런 불단을 둘러싸고 중생들의 소
망이 한아름 담긴 연분홍 연등이 천정을 가리며 허공을 가득 메운다.


▲  보광명전 좌측에 있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똥배하면 속인들은 만병의 근원이라며 다들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하여 똥배를 출렁이고
다니는 모습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기도 한다. 허나 포대화상만큼은 예외이다. 다 같은 똥
배인데도 말이다. 역시나 사람은 출세하거나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면 속인들이 흔히 안좋게
보는 것도 모두 좋게 보는 모양이다.
똥배는 그의 상징으로 사람들은 소원을 빌고 그의 배를 문지른다. 무척이나 두꺼운 얼굴과 축
쳐진 가슴은 그의 비만이 꽤 심각함을 여실히 보여주나 그걸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
려 두꺼우면 두꺼울 수록 그의 인기가 올라간다.


▲  진영당(眞影堂)

대장전 좌측에 자리한 진영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681년에 희인대사(希
仁大師)가 세웠다고 전한다.
진영당은 이름 그대로 용문사를 거쳐간 조사(祖師)들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건물로 1934년과
1935년에 주지 이광하가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곳에 깃든 진영들은 모두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무늬뿐인 건물의 이름과 달리 주지승의 집무실 및 종무소(宗務所)로 쓰이
고 있다.

주지승 집무실에는 목각탱화처럼 무늬가 복잡하고 현란한 의자들이 놓여있는데, 마치 부유층
집안의 거실이나 대기업 회장 사무실, 고위관료 접대실 같은 분위기라 조금은 이질감이 든다.
절에 어울리게 소박한 의자를 두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진영당 주지승 집무실

▲  용문사 명부전(冥府殿)

진영당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
낸다.
이 건물은 1682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며, 불단에는 지장보살
(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
며 양쪽에 서 있다. 그 좌우에는 시왕상(十王像)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앉아 중생을 굽어보
고 있는데, 이들은 명부전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실적(實籍)과 신경(神鏡) 등이 만
들었다고 전한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명부(저승) 식구들

▲  용문사 자운루(慈雲樓)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476호

영남제일강원 남쪽에 맞배지붕 누각인 자운루가 속세를 바라보고 있다. 이 건물은 1166년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1561년과 1621년에 중수를 했고, 1979년에 보수를 하여 지금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쓸 짚신을 만들어 보급하던 의미 깊은 현장으로 조선 중/후기 건축 기
법을 지니고 있으며, 절에서 큰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행사장이나 공양 장소로 쓰인다.

자운루 옆구리를 통해 경내를 벗어나면 바로 2층 규모의 옛 해우소가 나온다. 재래식 화장실
로 신식 해우소가 세워지면서 지금은 문을 닫아 걸고 한가로운 노후를 보낸다.


▲  용문사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영남제일강원 뒤쪽에는 보기만 해도 장맛을 돋구는 장독대들이 5열로 늘어서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저 안에는 온갖 전통 먹거리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으며 햇볕을 볼 그날을 꿈꾼다.

▲  원통전(왼쪽)과 산신각(오른쪽)

경내의 중심인 대장전과 보광명전 뒤쪽 높은 곳에 원통전(圓通殿)과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는데, 문이 가운데
칸에만 달려있다. 그 뒤쪽 높은 곳에는 1칸짜리 산신각이 원통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있는
데,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로 산령각(山靈閣)이라 불리기도 한다.


▲  보광명전, 대장전 뒤쪽 산책로

▲  극락보전(極樂寶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극락보전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건물로 1984년 이후 경내를 크게 정비할 때 장만했는데, 원래는 천불전(千佛殿)이었으나
근래에 극락보전(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아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삼았다.
허나 예전 천불전의 성격은 여전하여 하얀 피부의 조그만 불상 1,000개가 아미타3존불을 빼곡
히 둘러싸며 장관을 이룬다.


▲  극락보전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아미타3존불과 조그만 천불의 물결

▲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경내 (정면에 보광명전의 뒷통수가 보임)

▲  성보박물관 좌측에 자리한 샘터
용문산에 베푼 물이 나무로 만든 수로를 타고 석조(石槽)로 내려간다.


 

♠  용문사의 상징, 대장전(大藏殿) - 국보 328호

대장전은 용문사의 으뜸 건물이자 대표 보물이다. 만약 그와 윤장대가 없었다면 용문사를 찾
는 이는 지금보다 적었을 것이고, 명성도 다른 용문사에 비해 낮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용
문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크다. 작게는 절의 보물이나 크게는 나라의 귀한 보물로 절
에서도 그들을 특별히 옆구리에 두어 온갖 정성을 들인다. 화마(火魔)가 한바탕 할퀴고 지나
간 1984년에도 대장전은 띠끌의 피해도 없이 살아 남았으며, 그 이후 화재방지를 위해 보존처
리를 가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그만 맞배지붕 집으로 얕은 석축에 막돌 주초를 놓고 민흘
림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안과 밖을 모두 2출목(出目)으로 짜고 기둥 사이마다 공간포(空間
包)를 두었으며, 주심도리가 대들보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 지붕이 높아진 만큼 기둥이 짧아
보인다. 단청은 금단청(錦丹靑)을 입혀 내부를 화려하게 치장했으며, 천정의 반자틀에도 화려
하게 단청을 입히고 대들보와 종보 사이의 화반(花盤)에 풀무늬를, 대들보 위의 용은 물고기
를 몰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천정 곳곳을 화려하게 수식해 건물의 품격을 드높였다.

이렇게 화려한 대장전은 1173년에 자엄대사(資嚴大師)가 세웠다고 한다. 허나 그때 세워진 대
장전이 지금의 건물은 아니다. 자엄은 인도의 고승인 구담(瞿曇)이 대장경(大藏經)을 용궁(龍
宮)에 소장했다는 옛 이야기에 따라 용이 나타났다고 하는 용문사에 나라의 호국(護國)을 기
원하고자 대장경을 보관하고 건물 이름을 대장전이라 했으며, 나중에 그런 연유를 잘 상징하
고자 천정에 용과 물고기 장식을 만든 것이다.

그 이후 1467년과 1534년, 1597년, 1665년(또는 1670년)에 중수했으며, 1684년에 아미타3존불
과 목각탱화를 만들어 봉안했다. 그리고 1767년에 중수를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
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해체수리를 하면서 19세기에도 보수가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기단 공
사를 위해 간이시굴조사를 벌이던 중, 현재 기단 속에서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이 모습을 드러
냈는데, 이는 대장전의 창건 당시의 흔적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중앙 뒷쪽에 불단을 두고 그 좌우에 윤장대를 1개씩을 설치
해 서적을 두었다. 내부 구조 양식은 조선 중기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으나, 외부는 고려
건축양식을 띄고 있는데, 가까운 안동의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과도 좀 비슷해 보이
기도 한다.

▲  우측에서 본 대장전

▲  좌측에서 본 대장전


▲  붉은 무늬 현판에 쓰여진 대장전 3글자의 위엄

▲  온갖 무늬가 그려진 대장전 우물천정

▲  대장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 보물 989-1호
뒤에 보이는 후불탱화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 보물 989-2호


용문사 대장전하면 다들 윤장대가 생각날 것이다. 허나 윤장대보다 명성과 시대가 조금 떨어
지지만 불단을 지키고 앉은 목조아미타3존상과 그 뒤에 걸린 아미타후불탱화도 그에 못지 않
은 귀중한 보물이다.

두툼한 붉은 방석에 앉아 중생을 위로하는 아미타3존상은 나무로 만들어 금색 피부를 입힌 것
으로 아미타불이 자비로운 인상으로 가운데에 앉아있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
菩薩)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그 좌우를 지킨다. 뒤에 있는 후불탱화와 더불어 17세
기 후반 숙종(肅宗) 시절에 조성된 것이다.

그들 뒤로 목각아미타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는데, 그는 1684년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나
라에 널린 목각후불탱 가운데 가장 늙은 것이다. 후불탱화가 너무 화려해 가히 눈이 부실 지
경으로 기본 구조는 상하가 긴 직사각형이지만 더듬이처럼 생긴 하얀색의 구름무늬 광선을 표
현하여 금색과 흰색의 어색한 조화를 이루며 탱화의 수려함을 더욱 돋게 만든다.

탱화 중앙에 본존불은 얼굴을 앞으로 숙여 속세를 살피고 있으며,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
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
을 구분했다.

본존불을 둘러싼 나머지 불상은 상,중,하 3줄로 배치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
좌(臺座) 좌우로 2구씩 1렬로 서 있으며,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각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었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인 아난(阿難
)과 가섭(迦葉)을 배치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본존불과 보살상 사이
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하여 여백을 빼곡히 채웠는데, 너무 빼곡하여 솔직히 눈이 어지럽
다. 또한 탱화를 지탱하고 있는 양쪽 나무 기둥에는 용무늬 같은 것이 새겨져 장엄함을 드러
낸다.

▲  용문사 윤장대(輪藏臺) - 국보 328호

용문사에 왔다면 대장전에 깃든 윤장대는 꼭 한번 만져봐야 된다. 예전에는 돌리는 것도 가능
했으나 이제는 연로한 탓에 돌릴 수는 없고, 대신 성보박물관에 마련된 윤장대를 돌리면 된다.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1개씩 배치되어 있는데, 이 땅의 수많은 고찰 가운데 유일하게 있는
늙은 윤장대로 그 명성이 저승에까지 전해졌는지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꾸중을 듣는다
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도 있다.

윤장대는 원래 서적이나 장경판(藏經板)을 넣어두던 일종의 장경각(藏經閣)이다. 장경각은 쉽
게 말하면 책장이다. 법회 때는 경전을 넣고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염불을 했는데, 옛날에는
일반 백성들 상당수가 까막눈이었고, 설령 한자(漢字)를 알아도 불교 경전이 좀체 어려운 것
이 아니다. 하여 '윤장대를 1번 돌리면 경전을 1번 읽은 것과 같다 /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
다 / 소망이 이루어진다 /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혼난다'
는 식으로 속인들에게 영업을
했던 것이다.

이들 윤장대는 높이 4.2m, 둘레 3.37m 크기로 양쪽에는 손잡이가 있어 그를 잡고 돌리면 되며,
기둥을 마루 밑에 있는 문둔테에 박아 회전식으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8각원당형의 굴도리식
모양의 책장을 만들었다. 책장을 여닫는 문은 8개로 우측 윤장대의 문창살은 가지각색의 문양
으로 아름다움을 더하며, 좌측 윤장대는 그냥 소박한 빗살로 서로 대조를 이루는데, 이는 음
양의 조화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또한 문 위쪽에는 연꽃과 보살 등이 그려져 있어 안그래도
포식하는 두 눈을 더욱 배부르게 만든다.

윤장대의 조성시기는 1190년이라고 하며, 두운이 절을 세울 때 용궁에 보관된 대장경을 보관
하고자 대장전에 윤장대를 만들고 7일 동안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윤장대 때문
에 그를 간직한 건물 이름이 대장전이 된 것이다.


▲  좌측 윤장대 윗부분

▲  우측 윤장대 윗부분

지붕과 촘촘하게 짜여진 공포덩어리는 그가 그냥 책장이 아닌 법당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던
져주며 좌측 윤장대의 처마와 공포는 금을 칠한 듯, 너무나 화사하다. 이렇듯 윤장대는 세밀
하고 뛰어난 조각품으로 우리나라 불교 미술의 또 다른 정화이다.

      ◀  책이 담긴 윤장대 가운데 부분
대장전 윤장대는 돌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그걸 무시하고 억지로 돌리려고 해도, 밑에 단
단하게 고정을 시켜버려 돌려지지도 않는다.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내 책장으로 삼고 싶
은 윤장대, 나중에 윤장대 모양의 책장을 하나
만들어 대리만족으로 옆에 두고 싶다.

(대장전은 원래 국가 보물 145호, 윤장대는
가 보물 684호
였으나 2019년 12월 '용문사 대
장전과 윤장대'란 이름으로 국보 328호로 특진
되었음)


 

♠  용문사의 보물을 간직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경내 서쪽에는 용문사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성보박물관이 넓게 터를 닦았다. 2010년에 문
을 연 이곳은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용문사의 보물을 비롯해 주변 사찰에서 맡긴 문화유
산 등 315점이 전시/보관되고 있다. 내부 촬영은 상업성이 아니라면 가능하며, 대장전과 더불
어 필수로 봐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는 윤장대를 돌리는 코너도 있으니 꼭 살펴
보길 권한다.
마음 같아서는 박물관의 유물을 모두 다루고 싶으나 내용이 너무 길어질 수 있어 일부 중요한
유물만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른 유물은 직접 가서 눈에 담기 바란다.
 
* 성보박물관(☎ 054-655-8695) 관람시간은 9:30~17:30 (11~2월에는 10시부터 17시까지) 매주
  월요일과 설날, 추석연휴는 문을 닫아걸고 쉰다.

       ◀  영산회괘불탱 - 보물 1445호
괘불은 석가탄신일이나 주요 법회 때만 잠깐씩
등장하는 비싼 존재이다. 이 괘불은 1705년에
승려 92명과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조성되었는
데, 석가여래가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
華經)을 설법하는 영산회를 표현했다.
초록색 두광(頭光)을 갖춘 석가여래 좌우에 붉
두광을 두룬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리해
있으며, 그 위에 석가여래의 제자인 아난과 가
섭이 합장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림 하단에는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고, 테두리
하단부에 그림과 관련된 화기(畵記)가 있다.
이 괘불의 특징이라면 그림 상단에 하늘색 바
탕으로 하늘을 표현한 점과 석가여래가 연꽃가
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다른 괘불과는 다른 새
로운 모습이다.


▲  용문사 천불도(千佛圖) - 보물 1644호

이곳 성보박물관의 탱화 중 크게 두드러지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천불도가 아닐까 싶다. 천
불을 봉안한 천불전이란 건물은 많이 있지만 정작 천불을 그린 늙은 그림은 천하에 딱 2개 밖
에 없는 희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탱화는 1709년에 화승(畵僧) 도문(道文)과 설잠(雪岑), 계순(戒淳), 해영(海英) 등이 제작
한 것으로 붉은 바탕에 조그만 1,000개의 불상을 질서정연하게 그려넣었다. 이 땅에 전해오는
천불도는 1754년에 그려진 선운사(禪雲寺) 천불도 5폭과 이곳 용문사가 전부로 18세기 초기
천불신앙(千佛信仰)과 당시의 불화 양식을 잘보여준다고 하여 국가 보물로 대접받고 있다.


▲  극락암 지장시왕탱 (1812년 제작)
용문사의 부속 암자인 극락암에서 가져온 그림으로 중앙에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명부(저승)의 시왕(十王)과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극락암 지장시왕탱 복장 발원문(發願文)과 복장유물

▲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동자입상(童子立像)과 사자입상(使者立像)

동자입상은 용문사 명부전에 있던 것으로 시왕의 심부름을 하는 비서이다. 원래 동자상 10개
가 각각 시왕(十王) 곁에 있었으나 관리소홀로 지금은 달랑 1개만 남아 성보박물관으로 옮겼
다.
오른쪽 눈에 안타깝게도 크게 금이 가서 애꾸눈처럼 되었지만 동자에 걸맞게 그의 표정에는
귀여운 티가 배여 있으며 양손에는 시왕의 물건을 들고 있는데, 물건을 숨기며 장난을 칠 것
같은 천진난만함이 묻어나온다.

동자입상 옆에는 응진전에서 가져온 사자상(使者像)이 나란히 서 있는데, 동자상과 달리 머리
에 모자를 쓰고 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조그만 독성좌상(獨聖坐像)

독성이 그려진 독성도(獨聖圖)는 많이 봐왔지만 늙은 독성상은 흔치 않다. 이 독성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塑造像)으로 원래 응진전 내부 정방형 감실(龕室)에 홀로 봉안되어 있었다.
왼손에는 게이트볼에서 공을 칠 때 쓰는 것과 비스므리하게 생긴 긴 장대를 들고 있는데, 조
선 후기에 신경대사가 시왕상과 금당의 판불(板佛)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여 승려들이 축수
전(祝壽殿) 서쪽에 별도로 감실(龕室)을 만들어 신경대사의 진영을 안치했다는 기록이 '속용
문사적기'에 나와있어 그의 상이라는 의견도 있다.


▲  너그러운 표정의 지장보살좌상

독성상 옆에 자리한 지장보살좌상은 원래 강원(講院)에 있었다. 15~16세기에 나무로 만든 목
불(木佛)로 도금을 입혔으며,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지그시 눈을 감은 둥근 얼굴에는 온화함
이 물씬 배여나와 중생들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목에는 화려한 목걸이가 있는데, 두건과 수인
(手印)이 아니라면 관세음보살 누님으로 착각하고도 남을 모습이다.

강원 불단에 있던 그는 1984년 대화재로 강원이 불타면서 응진전으로 옮겨졌으며, 화재로 인
해 어깨 부분과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에 그을음이 생겨 당시의 참담함을 증언한다. 다행
히도 재빨리 구조한 탓에 이렇게 살아있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  봉인사(奉印寺) 부도암(浮屠庵) 신중탱 복장낭(腹臟囊, 복장주머니)과
복장물

봉인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사릉(思陵) 인근에 있는 절로 광해군(光海君) 시절부터 왕실의 원
찰(願刹)로 지원을 받았다. 1867년 상궁의 시주로 신중탱과 복장물을 만들었는데, 1887년 봉
인사가 불에 타면서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 용문사에 안착하
게 되었다.
복장주머니에는 한글로 쓰인 발원문이 있으며, 이 주머니에서 각종 다라니경과 약초, 금과 은
이 나오기도 했다.


▲  전패(殿牌)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전패로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으나 경내에 1884년 6월에 궁궐 상궁(尙
宮)의 지원으로 만든 탱화가 있어 그 시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패 중앙의 붉은 부분에는 '황실삼전하수만세(皇室三殿下壽萬歲)'라 쓰여 있어 제왕(帝王)의
장수를 기원하는 전패임을 보여주며, 여기서 삼전하는 당시 제왕인 고종과 명성황후, 세자 순
종(純宗)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돋보이는 것은 왕실이 아닌 황실로 썼다는 것이다. 하여 고종
이 황제를 칭한 1897년 이후에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제왕을 폐하(陛下)가 아닌 전하로
칭하고 있어 앞뒤가 맞지를 않는다.

이 전패는 8각형의 높은 대좌(臺座) 위에 패를 올렸으며, 발원 내용을 적은 가운데 부분에는
연화좌(蓮花座) 위에 화려한 꽃장식을 채웠다. 머리 부분에는 2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채
색은 좀 희미해졌지만 용과 꽃무늬 장식을 갖춘 화려한 모습으로 왕실을 위한 전패임을 알려
준다. 그리고 조선 때 만들어진 전패나 위패(位牌), 불패(佛牌)는 많지만 이렇게 대좌부터 머
리까지 완벽하게 남은 것은 흔치 않다.

             ◀  업경대(業鏡臺)
조선 후기에 나무로 만들어 채색을 입힌 것으
로 저승의 염라대왕이 심판할 때 쓰는 거울이
라고 한다. 거울을 보면 생전의 죄업이 싹 비
친다고 하며, 그 경량에 따라 지옥으로 갈지,
극락으로 갈지가 정해진다고 한다.
이 업경대는 원래 명부전에 있었는데, 아랫부
분을 수미산(須彌山) 형태로 조각했다. 이는
죄업(罪業)을 쌓지 않고 깨달음을 통해 극락으
로 갈 수 있다는 업경(業鏡)의 상징성을 강조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죄업을 비추는 거울
인 업경은 불꽃 형태로 조각된 원형의 놋쇠로
만들었다.
나도 만약 저세상에 가서 업경대를 본다면 과
연 어떻게 나올까? 궁금함보다는 왠지 두려움
이 앞선다.


▲  화엄칠조탱(華嚴七祖幀) - 19세기 탱화

화엄7조탱은 화엄종(華嚴宗)의 정통을 계승한 7명의 승려를 담은 탱화이다. 다들 열심히 화엄
경책을 보고 있는데, 모두 머리에 초록색 두광(頭光)을 지니고 있어 그들을 높이고 있다.
화엄7조는 인도의 마명(馬鳴, 50~150)부터 시작하여 용수(龍樹, 150~250), 중원대륙의 법순두
순(法順杜順. 557~640), 지상지엄(至相智儼, 602~668),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청량징
관(淸凉澄觀. 738~839),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로 그들을 순서에 따라 배치했다.

상단 중앙에는 마명이, 그 좌측에는 용수가 앉아있고, 우측에는 두순을 앉혀 3명이 기나긴 세
월을 뛰어넘어 같은 경상에 앉아있다. 그 옆에 지엄과 현수가 있으며, 하단 좌우에 막내인 청
량과 종밀이 따로 앉아있다. 용수와 마명은 후대에 보살로 격이 높아져, 보살의 얼굴처럼 표
현되었으며, 다른 조사들은 거의 비슷비슷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킨다. 조사 옆에는 그들의 법
호(法號)와 생애를 함축한 글이 적혀있으며, 각자의 저서가 놓여져 있다.
그래서 마명이 앉은 경상에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있고, 종밀의 경상에는 '대방광불
원각경(大方廣佛圓覺經)'이 놓여 있다. 또한 마명 앞에는 앞발을 들어 힘차게 달려가는 말이
그려져 눈길을 끈다.

이 탱화는 원래 진영각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화엄종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7조탱이 제작되어
봉안된 것은 용문사가 유일하다. 또한 19세기 화엄사상을 중시했던 용문사의 노선이 잘 반영
되어 있다.


▲  묘법연화경 변상도(妙法蓮華經 變相圖) - 조선 후기

▲  묘법연화경 권제1
1635년에 인쇄된 것으로 용문사에는 묘법연화경 27책이 전하고 있다.

▲  대장전기일록(大藏殿忌日錄)
대장전에서 사용한 서적으로 용문사 승려들이 그들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  문수사리설마가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說摩訶般若波羅密經)과
백유경(百喩經) 1,2,3,4권
기나긴 이름부터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반야바라밀경과 백유경은
고려 고종 때 간행된 8만대장경에 수록된 경전의 하나로 여기의 것은
조선 후기에 간행되었다.

▲  고색의 때가 자욱한 감역교지(減役敎旨) - 보물 729호

감역교지(면역사패교지)는 1457년 8월 14일에 세조가 용문사에 내린 교지이다. 큰아버지인 효
령대군(孝寧大君, 세종의 둘째 형)과 함께 불교를 믿었던 세조는 용문사를 비롯하여 여러 절
에 교지를 내려 승려의 잡역을 면제시켜주는 한편,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교지에

'경상도 예천 용문사를 경상도 감사와 예천 수령에게 이미 알린데로 더욱 살펴 한층 완호(完
護)하고 잡역을 영구히 면제해줄 것'
이란 내용과 함께 국왕의 친필 수결(手決)이 있으며, 교
지를 담던 봉투에는 '교지함(敎旨函)','어압(御押)'이라 적혀 있다. 그리고 천안 광덕사(廣德
寺)와 화순 쌍봉사(雙峯寺)에도 비슷한 시기에 교지를 내렸는데, 용문사보다 4일 전에 내린
것이다. 허나 대상 사찰명과 발급일자만 틀릴 뿐, 문장과 체제는 똑같다.


▲  용문사를 빛낸 고승들의 진영(眞影)
절을 창건했다는 두운선사를 비롯해 고승 16명의 진영이 걸려있다. 이들은
원래 진영각에 있던 것으로 보관을 위해 성보박물관 지하로 옮겨졌다.

▲  경내에서 제3주차장으로 인도하는 돌담길
(밑에서 본 모습,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성보박물관)


성보박물관을 끝으로 2시간에 걸친 용문사 관람은 정말 배부르게 마무리가 되었다. 경내에서
속세로 나갈 때는 돌계단이 있는 회전문 대신 제3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담장(토담)길과 숲길을
거쳐 일주문 옆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담장길에는 아무렇게나 생긴 큼직한 박석이 깔려 토
담과 함께 한줄기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근처에서 우두커니 있던 번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다시 절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들을 강제로 껴앉고 나의 제자리로 향했다. 이래서
정말 해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리하여 윤장대로 빛나는 고찰, 용문사 관람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예천 용문사를 끝으로
우리나라 3대 용문사는 모두 인연을 지은 셈인데, 이들 용문사 중 가장 작성하기 힘들었던 곳
이 예천 용문사가 아닐까 싶다. (작성하기 쉬운 곳은 양평 용문사)
(양평 용문사 ☞ 보러 가기  / 남해 용문사 ☞ 보러 가기)


▲  일주문으로 내려가는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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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2번째로 큰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 북촌한옥마을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

▲  백인제가옥 안채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한옥마을의 성지(聖地)로 추
앙받고 있는 북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이 있다.

북촌은 안국역 이북이자(원래는 청계천 이북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로 1,000채가 넘는
한옥들이 널려있으나 정작 속시원히 개방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북촌
제일의 고래등 기와집으로 꼽히는 가회동 백인제가옥이 2015년 11월, 세상을 향해 그 대
문을 활짝 열었다.
북촌한옥마을에서 고래등급 한옥으로써는 사상 최초로 빗장을 연 의미 깊은 현장으로 이
런 좋은 곳은 미리미리 발자국을 찍어 둬야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 법이
다. 하여 고래등 기와집의 좋은 기운도 훔칠 겸, 늦가을 평일을 이용해 그곳을 찾았다.

나는 자유관람으로 30분 동안 예습 차원에서 1바퀴 둘러보고 바로 가이드투어로 50분 동
안 가옥 내부(안채, 사랑채, 별당 내부까지)까지 말끔히 둘러보았다.


▲  있는 자들의 폐쇄적인 공간에서 시민들의 열린 공간으로 새로 거듭난
백인제 가옥 입구 (오른쪽 한옥은 관리사무소로 예전 바깥채)


 

♠  20세기 초반 상류층 고래등 한옥의 결정체
가회동 백인제 가옥(白麟濟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2호

▲  백인제가옥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백인제가옥 입구를 들어서면 한옥으로 된 관리사무소와 공터, 그리고 솟을대문이 차례대로 펼
쳐진다.
관리사무소로 쓰이는 한옥은 원래 가옥 바깥채로 세월의 고된 때를 간직한 채, 우중층하게 있
던 것을 손질하여 사무실과 화장실을 두었다. 바깥채 동쪽에는 차량들을 위한 검은 철제 대문
이 있었고 서쪽은 담장과 골목으로 막혀있었으나 바깥채 동쪽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면서 대문
을 밀어버리고 돌담을 둘렀으며, 대신 서쪽을 뚫어서 가옥 입구로 삼았다.

솟을대문 앞 공터 동쪽에는 쉼터가 조촐히 닦여져 있는데, 가이드투어를 신청했을 경우 지정
시간까지 그 쉼터로 와서 대기하면 된다.


▲  예전 백인제 가옥 바깥채 (2011년)

▲  남남이 되버린 바깥채 동쪽 한옥과 담장

바깥채 동쪽 담장 너머에는 깔끔한 모습의 한옥이 있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현
대 한옥처럼 보이지만 그 집도 엄연한 백인제가옥의 일원으로 그 부분만 따로 분리하여 매각
했다.
현재는 친일 성향을 보이는 롯데 회장 일가가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도심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한옥 별장까지 둔 그것들이 몹시 부러울 따름이다. 백인제가옥의 태생
도 그리 좋지는 못한 편인데 (친일파 한상룡이 지었음) 그 역사는 속일 수가 없는 것인지 친
일 성향 기업이 바로 옆에까지 들어와 북촌의 꿀을 빨고 있었던 것이다.


▲  솟을대문에 걸린 백인제가옥 현판의 위엄

▲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서쪽 부분, 중문간채

가옥이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솟을대문은 여전히 닫혀있었다. 대문도 주인을 닮는다고 졸부
들의 부질없는 자존심이 아직까지 깃들여진 탓일까? 그렇다고 문짝이 사용 불가일 정도로 부
실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든 정면에 보이는 대문이 빳빳하게 닫혀 있으니 처음 온 사람
은 '이거 개방된거 맞어?' 당황할 터, 허나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문 옆에 난 조그만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니까.
솟을대문에는 '백인제가옥'이라 쓰인 한글 현판이 높이 걸려있다. 이 현판은 개방 기념으로
달아놓은 것으로 한글로 점잖게 쓰인 점이 이채롭다.

솟을대문을 지닌 건물을 대문간채라고 한다. 대문을 중심으로 5개의 방을 지니고 있는데, 이
들은 궂은 일을 담당하던 아랫 사람들의 생활공간으로 지금은 3개의 방을 활용하여 백인제가
옥의 100년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4명의 인물(한상용, 최선익, 백인제, 최경진)을 다루는 공
간으로 쓰이고 있다. 가옥과 인물에 대한 설명과 사진, 시청각 자료가 있으며, 열린 공간이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 된다. 또한 일반 관람시 가옥에서 유일하게 발을 들일 수 있는
방이기도 하다.
그럼 여기서 가옥의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인물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솟을대문 안쪽 모습과 대문간채

① 시작이 좋지 못했던 백인제 가옥, 가옥의 1대 주인, 친일파 한상룡(韓相龍, 1880~1947)
이 가옥을 지은 한상룡은 돈 꽤나 주무르던 친일파 한관수(韓觀洙)의 아들로 인근 재동(齋洞)
에서 태어났다. 그 부친도 더러운 친일파지만 아들도 그 못지 않은 친일파로 악질 친일파로
악명이 대단한 이완용(李完用) 또한 그의 외삼촌이다. 아주 집안과 외가까지 쌍으로 더러운
존재들인 셈이다.

1898년 왜열도로 유학을 가서 그곳의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1903년에 왜국(倭國)이
친일파 왕족인 이재완(李載完, 흥선대원군의 조카)을 앞세워 한성은행(漢城銀行)을 세울 때,
총무가 되어 실질적인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친일파 집안의 배경이 컸을
것이다.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위원으로 참가해 적지 않은 돈을 쥐기도 했으며, 1923년
한성은행 두취(頭取)로 취임했다. 그리고 친일 유력자 모임인 대정실업친목회 초대 평의장(評
議長)을 지냈으며, 그것도 모자라 데라우치 총독의 동상을 세우고, 안중근(安重根)에게 처단
된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와 사이토 마코토 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뻔뻔함까지 보였다.
심지어는 1919년 왜정(倭政)에게 조선 사람들 모두 왜식으로 창씨개명을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1930년대부터 각종 친일 단체에 빠짐없이 얼굴을 비추며 많은 돈을 전쟁에 내놓았으며, 관동
군(關東軍) 사령부의 사무촉탁을 맡기도 했다. 이런 더러운 공로로 왜정에게 많은 훈장을 받
았고, 중추원(中樞院) 참의, 중추원 고문, 칙선 일본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기도 했으며, 1935
년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하나로 수록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부인인 이용경도 애국금차회에 참여하는 등 부부가 쌍으로 왜정에 협력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넘겨졌으나 이승만의 농간으로 풀려났으며, 1947년 그 더러
운 목숨을 강제로 놓으며 지옥으로 떨어졌다.

한상룡은 가회동 이곳을 점찍어두고 1906년부터 이 일대를 매입했다. 1907년 경성박람회에 압
록강 흑송(黑松)이 소개되자 그 나무를 대량으로 구입해 7년 동안 터를 다지고 공사를 벌여
1913년 7월 완성을 보았다.
당시 서울 장안에서 가장 큰 기와집으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친분이 있는 왜인 사업가와 왜정
관료를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으며, 왜정 총독도 초청하여 술을 대접했다. 또한 미국인 석유
사업가인 록펠러2세도 다녀가는 등, 집의 위세가 대단했다.
허나 한상룡이 은행을 잘못 굴려 적자가 커지자 1928년 6월 한성은행에 집을 넘겼다. 은행 소
유로 바뀌자 천도교 단체가 손병희(孫秉熙) 집과 가까운 이곳을 종종 빌려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및 회합 장소로 사용했다.


▲  중문간채 앞에서 바라본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대문간채 동쪽 방에는 백인제 가옥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담장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백인제가옥의 잃어버린 부분이다.


가옥의 2대 주인, 개성 출신 부호이자 민족언론인, 최선익(崔善益, 1905~?)
최선익은 개성 출신 부유층으로 불과 19세인 1924년 조선일보사에 주주이자 기자로 언론 활동
을 시작했다. 1932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했는데, 여운형(呂運亨)을 사
장으로 두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
한성은행에서 매물로 나온 가회동 한옥에 격한 반응을 보이며 1935년 1월 29일 인수했다. 친
일파로 더러운 발자국을 남겼던 1대 주인과 달리 오랜 시간 민족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집에
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솟을대문의 위치를 지금처럼 변경하고 필지 정리를 했다.
허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1944년 백인제에게 매각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
를 알 수 없다.

③ 가옥의 3대 주인, 집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백인제(白麟濟, 1898~?)
백병원 창립자로 유명한 백인제는 왜정 시절 외과 의사의 1인자이다. 1915년 평북 정주의 오
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6개월 투옥되면서 퇴학을 당했으나 1921년 복교하여 졸업을 했다. 192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수(조교), 총독부의원으로 일하다가 1923년 의사면허증을 받게 된다.

1928년 왜열도 동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해 바로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1935년 조선의사협회가 조직되자 그 간사로 선임되었다. 1936년에 1년 6
개월간 프랑스와 독일, 미국에 유학을 갔었고, 194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백
외과(현재 백병원)를 세워 병원 원장이 된다.

그는 의술, 특히 외과술이 뛰어나 고위층들이 그의 진료를 받고자 줄을 길게 섰다고 하며, 그
로 인해 적지 않게 돈을 벌어들였다. 그 돈으로 1944년 9월 최선익에게서 이 집을 매입해 자
신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1945년 9월 서울의과대학 외과 주임교수 겸 부속병원장이 되었고, 그해 12월 서울의사회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1946년 12월 서울대 의과대학 외과주임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다음달 그만두
었다.
1948년 대한외과학회 제3대 회장을 지냈으나, 6.25전쟁 때 미처 피신을 가지 못해 2대 주인,
최선익처럼 북한으로 납치되어 아직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그는 이 땅의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며, 사냥을 좋아하여 종종 북한산(삼각산)으로 사냥
을 나가 맷돼지나 토끼 등을 뜨락에 던져놓고는 구워먹기도 했다. 장인과 장모를 위해 집 서
쪽에 별채를 지어주기도 했으며, 서재필 박사를 초청해 연회를 열기도 했다.

④ 가옥의 4대 주인, 백인제의 부인인 최경진(崔炅珍, 1908~2011) 그리고 그 이후
백인제가 납북되자 집의 안주인인 최경진이 집 주인이 되었다. 소유기간이 1968년부터라고 하
니 이때부터 실질적인 소유권을 행사한 듯 싶다.
그는 1928년 백인제와 혼인하여 2남 4녀를 두었으며, 백병원의 2대 이사장으로 병원을 재건하
는데 노력했다. 1988년 8월까지 집을 소유하면서 일부만 손댄 것을 제외하면 거의 원형에 가
까운 모습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1977년 3월 서울시 지방민속자료(현 지방민속문화재)
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1988년 아들인 백낙훤에게 소유권을 넘겼으며, 2009년 11월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서울시 소유
가 되었다. 2012년 혜화동(惠化洞)에 있는 시장 공관(公館)이 한양도성 복원과 유네스코 등재
사업으로 인해 개방이 결정되자 공관 대체 장소로 백인제가옥을 정했다. 허나 문화유산 훼손
과 친일파 한상룡이 매국노 행위를 했던 현장이라며 비난이 쏟아지자 2013년 5월 그 야심을
버렸으며, 이곳을 속세에 열기로 결정하고 2015년 10월 부분 개방을 거쳐 11월 완전 개방되었
다.

⑤ 고래등 한옥의 결정체, 백인제가옥의 구조
북촌이 내려다보이는 가회동 언덕 2,460㎡에 닦여진 이 집은 장대한 규모의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에 두고 대문간채, 중문간채, 별채를 지었으며,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별당을 두었다.
정원을 넓게 닦고 갖은 화초를 심었으며,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던 기존의 전통 한옥과 달리
왜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어 서로 연결시켰다. 그래서 굳이 바깥을 나갈 필요가 없이 사랑채
와 안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화장실도 안에 있었음)
또한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했으니 이는 당시로는 생소한 건축 자재로 부를 과시하
고자 함이며, 안채 일부가 2층으로 되어있는 점도 이곳의 특징이다.

20세기 초반 근대 개량한옥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북촌 제일의 한옥인 안국동 윤보선
가(尹潽善家, 사적 438호)와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한옥으로 윤보선가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
랑한다. (윤보선가는 아직도 비공개임)

끝으로 가옥 이름을 백인제가옥으로 한 것은 별 이유 없다. 백인제와 그의 부인, 자녀들이 60
여 년을 살던 집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상룡의 더러운 이름을 붙일 수
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시작은 영 좋지 않았으나 그 다음 인수한 사람들로 인해 일종의 면죄
부를 받게 되어 북촌 제2의 한옥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100년 이상 묵은 잘 남아있는 근
대한옥이니 지방문화재보다는 국가지정 민속문화재로 승급시켜도 손색은 없다고 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93-1 (북촌로7길16, ☎ 02-724-0232)


 

♠  백인제가옥 바깥 둘러보기

▲  사랑채 (대청마루와 사랑방)

대문간채에서 붉은 벽돌문을 지나면 바로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사랑채가 마중한다. 사랑
채는 집 주인과 아들 등 남자들의 생활공간으로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책을 보는 서재의
기능도 같이 했는데, 넓직한 대청으로 이루어진 사랑방은 많은 손님을 치르기에 부족함이 없
는 규모이며, 방의 4면이 마루로 둘러싸인 특이한 구조이다. 사랑 대청은 전통 한옥의 우물마
루 대신 장마루를 깔았으며, 사랑채 내부는 가이드 투어 시에만 진입이 가능하다.

▲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로 이어지는
붉은 벽돌문

▲  동쪽 뜨락에서 바라본 사랑채


▲  바깥에서 바라본 사랑채 대청마루 (왼쪽은 사랑방)
집 안에 둔 물건 상당수는 백인제 가족이 쓴 것이 아닌 시중에서 구입한 것이다.

▲  상류층 한옥의 여유로움이 묻어난 사랑채 뜨락
뜨락의 구석 가장자리에는 온갖 화초를 심어 뜨락을 아름답게 수식했고
뜨락 한복판에는 잔디를 입혀 부잣집 뜨락의 위엄을 보이게 했다.

▲  뜨락 동쪽에 심어진 키 작은 소나무
백인제가 심은 나무로 여겨진다. 주인은 오래전에 가고 없지만
나무만은 잘 살아남아 주인의 빈자리를 보듬는다.

▲  뜨락 구석에 조촐히 닦여진 산책로

뜨락 구석에 약간 높게 터를 다져 박석을 깔고 조촐히 산책로를 내었다. 그 주변에는 여러 화
초와 소나무를 심어 아름다움을 더했으니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름답다. 뜨락이 너무 넓어서
박석 산책로까지 냈을 정도이니 왠만한 졸부집 이상급임을 보여준다.
산책로는 사색의 역할도 한다.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생각을 하는데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
다. 집을 지은 한상룡은 이 길을 거닐면서 어찌하면 왜정에 잘보여 부귀영화를 누릴까? 그 생
각을 했을 것이고, 백인제는 어떻게 하면 병원이 잘되고 외과술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생각
을 했을 것이며, 최경진 여사는 납북(拉北)된 남편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  뜨락 구석 산책로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단풍나무 밑에 자리한 사랑채 뒷쪽 벽돌문
벽돌문에서 사랑채 굴뚝까지 벽돌담이 있었다. 그렇게하여 안주인의 공간인
안채를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완전 가린 것이다. 허나 돌담은 무너져
흔적만 화석처럼 남아있고, 반쯤 열린 벽돌문만 전하고 있다.

▲  사랑채(왼쪽)와 2층 부분(오른쪽)

백인제가옥에는 특이한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랑채 뒷쪽에 달린 2층 공간이다. 한상룡 시
절에 귀빈 접대용으로 주로 사용했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기생까지 소환해 질탕나게 술마시고
놀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왜정 고위층과 친일파가 저곳을 들락거렸을까?
현재는 2층 보호와 계단 부실을 이유로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사랑채 위에 덧씌운 2층 부분
집 주인이 살아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반쯤 열린 사랑채 뒷쪽 벽돌문과
벽돌담의 흔적

▲  툇마루를 갖춘 안채 뒷쪽 부분


▲  백인제가옥의 뒷쪽, 안채 뒷쪽 주변
뜨락 북쪽에 자연 지형을 이용해 나무를 심고 돌을 다져 조촐하게 동산을 자아냈다.

▲  별당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바라본 안채 뒷쪽 부분

▲  안채 서쪽에 있는 부엌

식구도 많고, 부리는 사람도 많고, 거기에 손님도 늘 많았기에 부엌 또한 넓게 닦았다. 안방
쪽으로 부뚜막을 만들어 솥을 달고 장작을 이용해 불을 피웠는데, 이는 음식도 만들고 안채
난방도 고려한 기능이다. 부엌 바닥은 지표면보다 낮고 거의 흙바닥이며, 옆에는 부엌 살림살
이를 담당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찬방(饌房)이 있다. 부엌에서 일하는 아낙들의 거처이기도 하
다.


▲  완전 박제된 부엌처럼 되버린 안채 부엌 내부

왕년에는 부뚜막에서 연기가 꺼질 일이 없었다. 허나 지금은 언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웠는지
가물가물할 정도. 더군다나 이제는 사람이 사는 집도 아니고 지체 높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니 더욱 손대기가 그럴 것이다.
이렇게 박제된 모습으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가끔은 부뚜막을 깨워서 체험 이벤트를 해보는 것
은 어떨까 싶다. 부뚜막에서 지은 밥과 누룽지, 숭늉, 국 등을 먹어보는 도심 속에서 즐기는
옛 맛 체험 말이다. 아니면 저렴한 가격에 포장 판매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그만큼 이렇
게 놀려두기가 아깝다는 뜻이다. (영화 '암살'의 촬영장소로 잠시 쓰인 적이 있음)


▲  안채 서쪽에 자리한 별채

별채는 백인제가 그의 장인, 장모를 위해 지은 공간이다. 별도로 대문을 내어 가옥의 서쪽 문
으로 삼았는데, 처가 어른까지 모두 끌어안고 살 정도로 처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보여
주며, 그들이 모두 떠난 이후, 집은 빈 공간이 되었다가 현재는 남쪽의 'ㄷ'자형 한옥과 함께
운영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대문은 굳게 닫힌 채 무늬만 남아있다.


▲  부연이 쳐진 운영사무실 한옥과 별채(뒷쪽)

▲  안채 정면과 뜨락 (태극무늬 마크가 달린 부분은 사랑채 복도)

안채는 집의 안주인, 즉 가옥 주인 부인의 생활 공간이다. 부인 뿐 아니라 어머니와 며느리,
딸 등 집안 여인들의 공간으로 안채의 중심인 안방은 오로지 집안 남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백인제가 이북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그의 부인 최경진이 집 주인이 된 이후, 안채 안방과 대
청이 집의 중심이 되었고 그 영향 때문인지 가이드투어 때도 바로 안채에서 안으로 들어선다.
(사랑채로 들어가지 않음)


▲  흑백과 칼라의 조화, 사랑채와 안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 복도 바깥 벽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벽 한복판에 태극무늬 마크가 또렷히 새겨져 있다. 그냥 흑백TV 같은
다른 벽무늬 보다는 태극무늬가 새겨진 부분이 마치 칼라TV처럼 더욱 돋보인다.


▲  안채 서남쪽 부분과 늦가을이 곱게 깃든 단풍나무
가을도 이곳의 공개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온 모양이다. 이렇게 곱게 다녀간
흔적을 남겨놓고 갔네. 안채 서남쪽 끝부분에는 집안 사람들이
사용하던 화장실이 있다.

▲  지붕의 추녀 곡선이 아름다운 중문간채 (가운데가 안채로 인도하는 중문)

▲  뚜껑이 닫힌 술 수장고 (중문 안쪽에 있음)
수장고에는 집주인이 애지중지하던 온갖 귀한 술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망라한 술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괜히
열어보는 일은 없기 바란다. 인생만큼이나 허무한 짓이니까.


 

♠  백인제가옥 내부, 별당 둘러보기

▲  별당으로 인도하는 산책길

가이드투어 시간까지 백인제가옥을 살랑살랑 둘러보고 시간에 맞춰 솟을대문 밑 쉼터로 내려
갔다. 지금까지는 예습 차원에서 가옥 바깥을 자유롭게 둘러보았지만 이제는 급을 높여 심화
학습 및 복습 차원에서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가옥 내부까지 투어를 하게 된다. 투어 시간이
되자 곱게 개량 한복을 차려 입은 아줌마 가이드가 나와서 인사를 하며 안내를 해준다.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벽돌담, 사랑채 뜨락을 둘러보고 가옥 북쪽 돌담을 따라 이어진 약간
오르막의 산책로를 오른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나무와 화초가 무성해 산속 별장으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왼쪽 나무 너머로 안채와 사랑채 2층 부분이 보이며 오른쪽은 돌담으
로 그 너머로 북촌 일대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별당이 손짓한다.


▲  돌담과 함께 이어진 별당 산책길

▲  돌담 너머로 북촌 북부가 바라보인다. (계동, 가회동 지역)

▲  백인제가옥의 조촐한 피서지, 별당(別堂)

백인제가옥에서 가장 북쪽이자 하늘과 맞닿은 곳에 시원스레 팔작지붕을 휘날리고 있는 별당
이 있다. 누마루 형식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1층에는 돌기둥과 계단을 세워 건물의 키를 높였
고 그 2층에 방을 두었는데, 정면에 유리창을 내고, 돌담도 1층 높이 밖에 되지 않아서 정면
이 훤히 트여있다. 북촌 북부는 물론 북악산(백악산)까지 시야에 잡히나 시야의 범위는 그렇
게 넓지는 못하다.
집 주인과 가족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거나 조촐하게 피서를 즐겼으며, 창문만 열면 시원한 바
람이 솔솔 들어오는 피서철 명당으로 백인제는 여기서 온갖 상념을 즐겼다고 전한다.


▲  별당 주변에 둘러진 정겨운 토담

집 주인이 별당에 많은 공을 들였는지 별당의 갑옷인 주변 돌담까지 적지 않은 정성을 들였다.
흙과 자연막돌로 담을 쌓아 그 위에 암키와를 올렸는데, 담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하얀 피부
의 수막새를 엇갈리게 배치해 담장의 아름다움을 고려했다.
담장의 미(美)도 고려하여 아무리 밤손님이라도 저 담장만큼은 아껴줄 것 같다. 비록 무지 오
래된 존재는 아니나 20세기 근대 고래등 한옥의 생활상과 상류층의 팔자 좋던 인생을 보여주
는 현장으로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다행히 시민의 공간으로 해방되었으니 망정이지 계
속 졸부들의 전용 공간으로 남아있었더라면 그 미움은 더했을지도 모른다.


▲  별당 방에 홀로 자리한 병풍 (내용은 모름, 이곳과는 관련 없는 존재)

▲  고래등 기와집 속의 별천지, 별당 누마루

별당 내부는 오로지 가이드 투어 때만 들어갈 수 있다. 즉 아무 때나 갈 수 없는 비싼 구역이
다. 거추장스러운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 마루를 들어서면 바로 방인데 방 동쪽에는 별
당의 백미인 누마루가 펼쳐져 있다.
누마루는 누각 형태로 이루어진 마루방으로 집 주인은 여기서 손님과 곡차 1잔 하거나 가족들
또는 혼자 휴식을 취했다. 창문을 열어두면 바람이 솔솔 들어와 몸을 간지럽히니 여름 제국(
帝國) 시절에도 이곳만큼은 여름을 잊어도 좋을 정도이다. 또한 가옥 내부에서 조망이 제일
괜찮은 곳으로 담장 너머로 가회동과 계동, 북악산(백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보이는
범위는 그 뿐이다. 아무리 언덕에 지었다고 해도 높이가 낮기 때문이다.


▲  별당 누마루에서 바라본 북촌 북부 (가회동, 계동)

▲  남쪽에서 바라본 별당과 별당으로 인도하는 날씬한 기와문
집 속에 다른 집이 들어있는 기분이다. 그만큼 이곳은 넓고 크다.

▲  왕비의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안채 대청

별당을 둘러보고 안채로 이동했다. 안채 역시 실내화로 갈아타 내부로 들어서면 되는데, 마루
로 이루어진 대청은 안주인의 생활공간으로 그가 앉던 평상(平床) 모습의 높은 의자와 탁자,
방석 등이 놓여져 그들의 높은 위치를 보여준다. 허나 이들은 집을 거쳐간 사람들이 쓴 것이
아닌 서울시에서 구한 늙은 생활 유물로 가옥의 품격에 맞추고자 이런 것을 갖다놓은 것이다.
어쨌든 집 규모부터가 으리으리하니 서민 스타일의 내 눈이 전혀 적응을 하지 못한다.


▲  백인제와 최경진의 빛바랜 혼인 사진 (1928년)
가옥에 있는 물건 대부분은 이곳과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이나 이 사진만큼은
이곳을 거쳐간 사람(최경진)이 남기고 간 몇 안되는 진품의 하나이다.

▲  안채 대청과 안방

▲  안채 안방
대청마루 옆에 안주인이 머물던 안방이 있다. 지금은 바깥에서 수집한 생활유물이
안방을 채우고 있어 마치 민속마을 한옥 방을 보는 듯 하다.

▲  안채 윗방
안방 바로 북쪽에 자리한 작은 방으로
안주인의 옷과 살림살이, 귀중품을
보관하던 장과 농, 반닫이 등을 두었다.

  ▲  안채 서남쪽을 이루고 있는 할머니방
대청 (오른쪽이 할머니방)


▲  안채 할머니방
안살림을 며느리에게 물려준 시어미가 생활하는 방이다. 문 앞에 별도의 대청과
복도를 두었으며, 안방에서 복도로 연결은 되지만 중간에 양식문이 있어
안방 영역과는 분리된다. 이곳에 있는 물건 역시 서울시에서 수집한
민속 유물이다.

▲  부엌과 연결되던 안방 서쪽의 조그만 방

▲  안방 서쪽에 숨겨진 다락방 (부엌 바로 윗쪽임)
지금은 허공처럼 비어있지만 왕년에는 부엌에서 쓰던 식재료와 생활도구 등을
잔뜩 머금은 창고였다.

▲  안채 건넌방

안채 건넌방은 며느리가 머물던 공간으로 사랑방과 안방 중간에 자리한다. 시아비가 며느리를
이뻐해주니 시아비의 소환에 언제든 달려갈 수 있도록 그렇게 자리를 잡은 듯 싶고, 바로 남
쪽으로 집주인 아들방과도 이어지니 아들 부부를 가까이에 있게 하려는 배려도 은근 엿보인다.
방 북쪽에는 별당처럼 시원한 누마루를 만들어 조촐한 피서처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바깥 외
출이 쉽지 않았던 며느리를 배려하고자 그렇게 만든 모양이다.

▲  안채 건넌방의 특별함, 누마루
여인들의 공간이라 발을 쳐서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했다. 한여름에 저기서
자는 잠은 그야말로 꿀잠이겠지~!

▲  안채에서 사랑채(사랑방, 작은 사랑방,
사랑 대청마루)를 이어주는 복도
복도 끝에는 수세식 화장실과 욕실이 있는데,
이는 최경진이 설치한 것이다.


▲  건넌방 주변 방에서 만난 고풍스런 가구와 동그란 그림
서울시에서 구입한 생활 유물로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가고 싶다.

 ◀  사랑채 뒷쪽 복도와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사랑채와 안채는 복도로 서로 이어져 있고, 그
복도로 경계를 삼고 있다.
저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구역인데, 왼쪽에 삐
죽 나온 대각선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2층은 한상룡이 왜정의 고위층을 불러 배때기
늘어지게 놀던 현장으로 이후 다락방으로 쓰이
다가 지금은 금지 구역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
다. 계단이 오르락내리락하기에는 다소 위험하
고, 2층 공간이 그리 넓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
다.


▲  사랑채 사랑방

사랑채 사랑방은 집 주인의 거처로 서울시에서 수집한 여러 가구와 병풍 등이 주인이 없는 방
을 채워주고 있다. 서랍이 많이 달린 가구 위에는 이곳을 거쳐간 백인제의 흑백 사진 3점이
놓여져 있어 생전의 잘나갔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  사랑방에 놓인 백인제의 빛바랜 사진들

▲  고급진 모습의 사랑채 대청
집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던 공간이다. 개인적인 친분의
사람부터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여기서 대접을 받았으며,
창 밖으로 사랑채 뜨락이 훤히 바라보여 시야도 좋다.

▲  정면에서 바라본 사랑채 대청 탁자와 의자들

▲  빛바랜 사진 1장

사랑채 대청에는 백인제 가족이 남긴 흑백사진이 하나 놓여져 있다. 백인제가 서재필(徐載弼)
을 집으로 초청해 연회를 열고 사랑채 뜨락에서 기념 촬영을 한 것으로 순 남자들만 있는 가
운데 여자 1명이 사진 중앙에 홍일점이자 옥의티처럼 자리해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누구일까? 그는 백인제의 부인인 최경진으로 서재필이 사진 중앙에 있어
야 되지만 사람들의 양보로 부인을 중앙에 앉힌 모양이다. 무릎 밑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긴
머리에 꽃잎으로 보이는 머리 장식을 달고 있는데, 얼굴 또한 괜찮게 생겼다. 남자들 속에 있
어서 다소 부담스러웠던지 시선을 조금 오른쪽으로 향하며 시선 일탈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부인의 왼손 쪽에 앉은 이가 서재필이다. (백인제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음)


▲  중문간채 중문

사랑채를 둘러보고 안채에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안채 뜨락에서 중문까지 나머지 설명을 들
으면서 40여 분에 걸친 가이드투어는 쿨하게 마무리 되었다.
가이드는 관리사무소로 내려갔고, 나는 그냥 사라지기 아쉬워 중문 주변에서 두 발을 멈추었
다. 이렇게 백인제가옥을 최대한 갈 수 있는 범위까지 모두 가본 것이다. 자유관람과 가이드
투어를 포함한 관람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 서울시는 이곳을 일종의 민속박물관으로 삼으려
고 오래된 생활유물을 수집해 비어있는 방과 부엌에 배치하고 있다. 그들 덕에 방의 허전함은
많이 가셔진 상태. 그들도 없었다면 무척 허전했을 것이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에는 방이 무
지 많아 숨바꼭질을 벌여도 될 정도이다. 사랑채 지붕 위에 만든 2층 방과 부엌 위에 만든 반
2층짜리 방 등 숨겨진 방도 많으니 말이다.

10여 분 정도 사랑채 뜨락과 솟을대문 주변에 머물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쿨하게 고래등 기와
집 대문을 나섰다. 이렇게 하여 백인제 가옥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다음에는 윤보
선가옥도 꼭 개방되어 이렇게 글을 남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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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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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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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은하계를 꿈꾸다.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외나로도)

 


~~~ 우주를 꿈꾸며,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호(KSLV-1)
▲  나로호(KSLV-1)


 

겨울 제국의 차디찬 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하던 1월의 끝 무렵, 겨울의 핍박에서 잠
시 벗어나고자 일행들과 따스한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번잡한 서울을 떠나 충북과 충남, 전북의 여러 지역을 거쳐 저녁 늦게 전남 여
수(麗水)에 이르렀다. 여수는 원래 계획에 없었으나 광양(光陽) 땅에 이르다보니 바다 남
쪽에 아른거리는 여수 땅이 갑자기 땡기는 것이다. 하여 그 마음 뜻대로 이순신대교를 건
너 여수로 진입, 환상적인 야경을 보여주는 여천공단을 가로질러 여수 도심부에서 흔쾌히
1박을 청했다.
첫날의 여독이 대단했는지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 거의 9시간을 잔 것 같다. 아침 햇살
의 보챔으로 겨우 꿈나라에서 벗어나 둘째 날 여로(旅路)를 배불리 채우고자 서둘러 길을
재촉했는데 이번에는 인연이 참 지지리도 없던 고흥(高興)으로 길을 향했다. (고흥은 20
여 년 전에 잠시 스쳐 지나간 것이 전부임)

고흥의 관문인 벌교읍(筏橋邑)에 이르자 점심으로 그 지역의 별미(別味)인 꼬막정식을 섭
취했다. 10가지가 넘게 나온 반찬을 거뜬히 비우며 배를 남산처럼 불리고 고흥 땅으로 진
입, 적당한 곳을 찾다가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명소를 잠시 접어두고 21세기 스타일에 걸
맞게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으로 길을 잡았다.
그곳은 고흥읍내에서 1시간 가까이 들어가야 되는 고흥의 동남쪽 구석으로 바다를 무려 2
번(나로1대교, 나로2대교)이나 건너고 고개도 여러 번을 넘어야 되며, 내나로도(內羅老島
)란 큰 섬을 가로질러야 된다. 게다가 외나로도(外羅老島)로 들어서 15분 이상 들어가야
되니 그 길이 참 파란만장하다. 또한 거기서 나올 때도 왔던 길로 다시 나와야 되므로 외
지에서 들어가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내던져야 된다.


 

♠  외나로도에 둥지를 튼 우리나라 우주 진출의 중심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입문

▲  북쪽에서 바라본 우주과학관

외나로도 동쪽 구석인 예내리에는 우리나라 우주 개척의 중심지인 나로우주센터가 있다. 우주
진출을 향한 강인한 집념이 서린 특별한 현장으로 그 북쪽 해안에 우주 개척과 우주과학의 이
해를 돕고자 2009년 6월 12일 우주과학관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다.

동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과학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상설전시관에는 우주에서의
기본적인 운동원리와 로켓, 인공위성, 우주탐사(태양계), 달 탐사를 다루고 있으며, 기획전시
실에는 우리나라 로켓의 역사와 로켓의 실물을 다루고 있다. 3D영상관은 우주에 관한 프로그
램을 상영하고 있으며, 4D영상관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우주영상 콘텐츠와 직접 몸으
로 느끼는 체험효과를 선보이고 있다. (3D, 4D영상관은 별도 관람비가 있음)
야외전시장은 로켓광장, 포물면통신, 태양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로켓광장에는 나로호 관
련 로켓 모형을 전시하여 속인(俗人)들의 호기심을 건드리고 있으며, 매년 5월 초에는 우주를
주제로 고흥우주항공축제를 연다. (보통 어린이날을 끼고 함)
입장료는 성인 3,000원, 청소년과 어린이는 1,500원으로 과학관 내부만 적용되며, 야외전시장
과 예내리 앞바다는 무료이다. 또한 주차비도 받지 않는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어린이와 청소년을 동반한 가족 나들이 명소로 아주 좋다. 그러다보니 가
족 단위 관광객들이 거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우주과학교실
과 우주체험교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과학관 동쪽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몽돌해변(예내리 앞바
다)이 펼쳐져 자연적 운치를 더한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나로우주센터에 속한 우주과학관으로 여기서 남쪽으로 3km 이상 들어가야
나로우주센터의 중심지가 나온다. 그곳에서 로켓과 인공위성을 하늘로 날려보낸다. 허나 우주
개척의 야망이 담긴 국가의 예민한 곳이라 금지된 구역으로 굳게 잠겨 있으며, 일반인은 우주
과학관 주차장까지만 발길을 허용하고 있다. (그 이상은 못들어감)
단 나로우주센터 발사현장과 발사통제동은 고흥우주항공축제를 비롯한 일부 기간에 한해 제한
적으로 열어두고 있어 사전 예약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다. 이때는 우주과학관 관람권 구입자
에 한해 입장이 가능하며, 셔틀버스를 타고 들어간다. 발사 현장과 발사통제동은 촬영이 엄격
히 금지되어 있어 사전에 핸드폰과 카메라를 수거하며 미성년자는 반드시 보호자와 동반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또한 한국 국적 사람만 접근이 가능하므로 검은 머리 외국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 사람은 접근 불가이다.


▲  크게 펄럭이는 태극기와 나로호(오른쪽)

고색의 향기와 자연, 산, 길(둘레길, 산길), 역사가 대부분을 이루는 본인 여행기에서 이렇게
과학관을 다룬 것은 2003년 1월 국립서울과학관 이후 2번째이다. (해당 글은 분실됨) 과학 분
야(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는 학창 시절부터 관심도 매우 적었고, 그러다보니 지식의 깊
이도 밑바닥이라 시험 점수는 늘 50점 이하를 맴돌았다. (20점을 맞은 적도 있음 ㅠ) 아무리
벼락치기로 죽어라 외워도 과학 쪽은 통 효과가 없었으며 찍기 신공 또한 형편없었다.
그렇게 본인과 과학은 영 좋지 못한 궁합이라 본인의 돌머리로 비록 일부만 다루었다고 해도
본글을 풀어나가는 것이 적지 않게 고통스러웠다. 허나 오랜만에 찾은 과학관이고 언젠가 우
주도 한번 나가봐야 되기에 미리 예습 차원에서 이곳을 찾은 것이다.

내 어렸을 적에 21세기가 되면 하늘을 나는 차가 생기고, 로보트를 만들어 지구를 지키며, 인
공지능이 일상화되어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우주 여행은 지하철을 타듯 쉬워지며,
다른 행성에서 집과 도시를 짓고 사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 배웠다. 또 그런 식의 공상영화
와 만화가 홍수를 이루며 21세기만 되면 완전한 신세대가 펼쳐질 것 마냥 어린이와 10대들에
게 주입을 시켰다.
허나 21세기가 밝은지 벌써 20년이 넘었으나 하늘을 나는 자동차 그리고 우주 여행, 모두 어
림도 없다. 10년은 커녕 100년 안에도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지구에서 가까운 달 조차 마음
놓고 부리지를 못하니 말이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품고 있던 그 동심과 환상은 생각보다 더
딘 과학기술의 속도 앞에 보기 좋게 아작나고 말았으니 어릴 적 공상 속의 세상은 여전히 상
상 속에나 머물러 있다. 마치 당장이라도 우주를 잡아먹을 기세였던 오만한 인간들의 실수였
던 것이다.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소재지 :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예내리 480 (하반로 490)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061-830-8700)


▲  목성에서의 내 몸무게는?
상설전시관 1층에는 수성, 금성, 목성, 토성 기준으로 몸무게를 재는 공간이 있다.
내가 지구에서는 70kg대인데, 목성에서는 그 2배 이상인 189kg이나 나왔다.

▲  귀엽게 표현된 우리나라 우주인 인형

▲  우주에서 멋대로 보내온 선물들 ①
이들은 운석으로 우주가 우리나라로 던진 것들이다. 우주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우주과학관의 전시물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  우주에서 멋대로 보내온 선물들 ②
저들 중 왼쪽에 잘생긴 운석이 고흥군 두원에 떨어진 '두원운석'이다. 운석은
우주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고마운 존재들로 우주에서 던진 것이
전부일 정도로 희소성이 크기 때문에 금덩이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  우주선 발사를 내 손으로~~! 나로우주센터 발사통제센터 모형

나로호 발사를 주관했던 나로우주센터의 발사통제센터를 재현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
주발사체인 나로호(KSLV-1)는 2013년 1월 30일에 발사되어 탑재 위성인 나로과학위성(STSAT-
2C)이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했는데, 이를 통해 우주기술개발의 기본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이 기술을 기반으로 순수 국산 발사체인 한국형발사체(KSLV-II)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  나로우주센터 발사통제센터 모형 바깥 모습

▲  나로과학위성
2013년 1월 나로3호에 실렸던 나로과학위성의 실제 크기 모형품이다. 무게는 100kg,
크기는 763x1033x1167mm로 300km~1,500km 타원궤도에서 1년 정도 임무를 수행한다.

▲  우리별1호
이름도 상큼한 우리별1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 연구센터와 영국 써리대학이 같이 만든 것으로 1992년 8월
남미 쿠루기지에서 우주로 날려보냈다.

▲  우주인들이 먹는 우주식량들 (모형)

주로 날라간 사람들은 무엇을 섭취했을까? 그들이 우주선과 우주정거장에서 먹는 음식들이
재현되어 있다.
처음에는 분말 음식 위주로 먹었으나 점차 호박파이, 육류, 피자, 과자 등으로 종류가 확대되
었으며, 우주정거장에서 오븐 등을 통해 간단한 조리도 가능하게 되었다. 단 무중력 공간이라
음식물 찌꺼기와 물은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캔이나 튜브 같은 밀폐된 용기를 사
용해 밥을 먹는다.

 ◀  우주인 화장실 (밑에 좌식 변기가 있음)
아무리 우주라고 해도 쌀 것은 싸야 된다. 하
여 우주선과 우주정거장에 화장실을 두었는데,
무중력 공간이라 배설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면 그것들이 공간 내부를 둥둥 떠다니는 최
악의 사태가 발생할 수가 있다.
그래서 소변용 진공수거기와 대변용 수거기로
나누어서 취급하고 있는데, 강력한 흡입력으로
배설물을 빨아들여 저장탱크에서 폐기한다. 속
편하게 우주선 밖으로 배출하는 것으로 알았더
만 그게 아니었다.

       ◀  우주인 샤워실 (샤워부스)
우주에서 지구처럼 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하여 젖은 스펀지 등으로 몸을 닦거나 목욕
수건에 물을 묻혀 닦아내는 방식으로 몸을 씻
는다. 그야말로 고양이식 세수 방식이다.
머리를 감을 때는 린스 기능이 있는 샴푸를 사
용하며, 이를 닦을 때는 먹을 수 있는 치약을
사용하여 삼키거나 진공튜브로 처리한다. 샤워
부스에서 이용한 물은 폐수탱크에 연결된 진공
흡입기로 처리하며, 우주선 밖으로는 배출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주선 생활이 생각 이상으로 고통스럽
고 그나마 개선된 것이 저 정도이니 아직 우주
개척의 길은 한참이나 멀었다. 솔직히 저런 공
간에서는 하루도 지내고 싶지 않다.


▲  우주 도시(Space city) 상상모형도

언제가 될지 모를 막연한 미래에 달과 화성, 금성 등에 우주 도시를 만든다면 저런 모습이 된
다고 한다. 지구와는 대기부터가 틀리니 저런 보호막 식의 도시를 닦은 다음 태양발전소나 원
자력 발전소로 에너지를 충당하고 양극에 얼어붙어있는 드라이아이스에서 탄산가스를 만들어
산소를 추출하면 100년 안에 지구의 대기층과 비슷한 대기권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때가
되면 보호막은 싹 거둬도 될 것이다.


▲  재현된 달 표면과 우주탐사로봇

▲  한없이 착하게 쓰인 우주윤리

우주 공간은 인류 공용의 공간으로 어느 우주도, 어느 별도 영유권과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
다고 쓰여있다. 허나 저것은 어디까지나 미국과 러시아 등 우주에 조금이나마 손을 대고 있는
나라들이 편의상 만든 윤리이다. 다른 행성과 은하계의 생명들로부터 동의를 받은 것도 아니
며, 어디까지나 윤리적인 내용이라 강제구속력은 없다.
지금이야 달 하나 다루는 것도 벅찬 상태라 저 윤리가 잘 지켜지고 있지만 나중에 우주를 마
음대로 하는 세상이 오면 저것은 일개 휴지조각이 될 것이다. 지구도 그렇지만 우주에서도 강
한 것이 장땡이다. 그러니 우리도 우주 개척을 착실히 준비하여 꼭 장땡이 되어야 한다.


▲  아리랑3A호 (KOMPSAT-3A)
2015년 3월 26일 러시아 야스니 발사장에서 쏘아올린 인공위성으로 2019년
봄까지 우주에서 몸을 풀었다.

▲  아리랑위성1호 (KOMPSAT-1)

▲  아리랑위성5호 (KOMPSAT-5)


▲  호버만의 구(Hoberman Sphere)

1층과 2층이 확트인 과학관 중심부에 '호버만의 구'라 불리는 아름답고 요염하게 생긴 동그란
물체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제작된 그는 우주의 역동적인 팽창과 수축의 반복원리로 구성
되어 있는데, 우리의 우주 개발에 대한 의지와 염원이 담겨져 있으며, 우주 탄생의 신비로움,
우주 개발을 위한 도전 정신, 우주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우주의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인도하는 상징적 조형물로 삼고 있다.
호버만의 구는 평상시에는 가만히 있다가 2층에 특정 장소에 멈춰서면 율동을 부리며 움직인
다. (2층에 안내문이 있음)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마무리

▲  과학로켓 KSR-III

KSR-III은 1997년 12월부터 5년에 걸쳐 개발된 우리나라 최초의 액체연료로켓이다. 그의 추진
기관은 액체산소와 케로신을 추진제로 사용하는 지상 추력(推力) 13톤급의 액체엔진으로 가압
식 추진제 공급방식을 채택했다.
가압식 사이클은 액체연료 로켓의 연료 공급 방식 중의 하나로 기체를 이용해 추진체 탱크 내
의 추진체를 연소기로 밀어내는 방식을 말하며 구조가 간단하고 저렴해 신뢰성이 높다.


▲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 여행자인 이소연이 우주선에서 먹었던 식량과
실험도구들

▲  나로호 2차 발사 실패와 원인 규명을 위해 만든
비행종단시스템 2단 로켓


나로호 2차 발사는 2010년 6월 10일 17시 1분에 있었다. 허나 발사된 뒤 겨우 136,6초만에 1
차 진동이 생겼고, 1초 뒤인 137.3초에 내부 폭발로 보이는 2차 진동으로 원격측정이 중단되
면서 실패했다. 통신이 두절되었을 때 그의 고도는 67.73km였다.

사고 발생 원인을 파악하고자 에네르고마시 관계자들이 포함된 한,러 공동위원회가 구성되어
3번의 FTS-킥모터 연계실험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FTS 오류였음이 밝혀졌다. 이곳에 전시된
것은 FTS-킥모터 연계실험 때 사용한 것이다.


▲  우리나라의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의 위엄 (2013년 1월 30일에 발사됨)

▲  75톤급 액체로켓 개발모텔 엔진 목업
한국형발사체의 기본 엔진으로 4기를 묶어 한국형발사체의 1단에 적용하고 확대
노즐을 적용한 엔진 1기로 2단을 구성했다. 2015년부터 나로우주센터에서
지상연소시험 등의 개발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장차 국가 우주개발을
위한 핵심 부품으로 삼을 예정이다.

▲  7톤급 액체로켓 엔진 목업

▲  하얀 피부의 잘생긴 나로호와 로켓 형제들

우주과학관 내부에는 볼거리들이 많이 깔려있다. 그중에는 호기심을 흥분시키는 것들도 여럿
있으나 본인이 우주과학 지식이 일천하여 그들을 모두 다루지 못하고 겨우 일부만 본글에 끄
집어냈다.

야외전시장에는 크고 견고한 무쇠덩어리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모습으로 자리들 하고 있는데,
그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와 KSR로켓 형제들의 모조품이다. 그중 훤칠한
외모를 자랑하는 나로호는 2009년 8월 25일 1차 발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2010년 6월 10
일 또 실패했으며, 2013년 1월 30일 드디어 성공하여 우주로 날려보냈다.
나로호의 몸매는 길이 33m, 지름 2.9m, 무게 140톤으로 2단형(1단은 액체추진 로켓으로 러시
아에서 개발함, 2단은 고체추진 로켓으로 우리나라가 개발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를 우
주로 보낸 현장이 바로 나로우주센터이며, 이때 나로과학위성을 실어보냈다.


▲  나로호의 굵직한 밑도리와 KSR로켓 형제들(KSR-1, KSR-2, KSR-3)

나로호보다 키가 작은 무쇠덩어리들은 KSR시리즈의 로켓이다. 그중 KSR-1은 길이 6.7m, 지름
0.42m, 무게 1.2톤으로 1단형 무유도 고체추진 로켓이며 1993년 6월 4일 1차 발사하고, 그해
9월 1일에 2차 발사를 했다. 추진관과 구조체, 탑재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존농도 관
측장비를 포함한 탑재물을 지상에 각종 관측자료를 송신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KSR-2는 길이 11.1m, 지름 0.42m, 무게 2.02톤으로 2단형 고체추진 로켓이다. 1998년 6월 11
일에 발사되었으며, KSR-1보다 더 높은 고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리고 KSR-3
은 길이 13.5m, 지름 1m, 무게 6.1톤으로 2단형 액체추진 로켓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액체추
진엔진의 로켓으로 한국형 인공위성 발사체를 쏘아올리기 위한 기반기술 확보 차원에서 제작
되었다. 추력 13톤의 액체로켓엔진이 부탁되었으며, 탑재부와 유도조종장치, 자세조종장치,
가압용 고압가스 탱크, 연료 및 산화제탱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예내리 앞바다(몽돌해변)

우주과학관 동북쪽에는 300m 정도의 잘생긴 몽돌해변이 펼쳐져 있다. 흥미롭지만 그만큼 머리
가 아픈 우주과학관 관람으로 나의 돌머리가 지끈거리던 상태였는데, 이 해변을 보니 그 통증
이 싹 해소되는 것 같다. 역시 인간에게는 대자연이 빨간약이고, 자연만큼 좋은 것은 없다.
게다가 과학관 앞에 이렇게 좋은 자연 공간이 있으니 자리 하나는 정말 잘 잡은 것 같다.

우주과학관 앞 몽돌해변(예내리 앞바다)은 잔잔한 바다와 밟는 느낌이 좋은 몽돌, 짙게 띠를
이루며 해안을 둘러싼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곳으로 물놀이 장소로도 아주 좋다. 허나 이곳에
부여된 '~~해수욕장'이란 명칭은 없고 외나로도에서도 아주 구석진 곳이라 그냥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숨겨진 해변이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것이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이 들어서면서
과학관의 후식용으로 들렸다가는 명소가 되었다. 나로우주센터와 우주를 든든한 후광(後光)으
로 삼았으니 나로우주센터를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우주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사람이 끊길
일은 전혀 없다.


▲  부드러운 곡선미를 보이는 예내리 앞바다와 북쪽 방파제
사람들이 몽돌 해변을 사각사각 밟으며 겨울 바다의 낭만을 누린다.

▲  몽돌해변과 바다의 부드러운 만남, 그리고 그들만의 속삭임

▲  예내리 앞바다 남쪽 부분
저 산줄기 너머에 금지된 구역인 나로우주센터 중심지가 있다. 예내리 앞바다도
해변 남쪽 방파제까지만 접근이 가능하며 그 이상은 발을 들일 수 없다.


몽돌해변에서 잠시 멍 좀 때리다가 햇님의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부랴부랴 다음 답사
지로 길을 떠났다. 안그래도 겨울 제국 시절이라 낮이 짧은데 칼출근과 칼퇴근을 좋아하는 햇
님이 날씨 변화 등으로 일찍 퇴근하면 낭패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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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

▲  남산서울타워

▲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백범광장 주변


 

여름이 빠르게 익어가던 6월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南山)을
찾았다.
서울 한복판에 누워있는 남산은 내 어릴 적 즐겨찾기 장소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남산 인
근에 살면서 뒷동산 삼아 활보했던 추억 깊은 현장이다. 나는 남산의 물을 먹고 자랐으며,
남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남산 정상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이후 남산과 먼 곳에 살게 되면서 다소 뜸해졌고, 가끔 찾는 정도에서 머물다가
2015년 이후 오후와 저녁, 평일, 휴일을 가리지 않고 발걸음을 크게 늘리고 있다.

햇님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14시, 동대입구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장충단공원을 거쳐 국
립극장으로 이동했다. 국립공원교차로에 이르니 남산의 너른 품으로 인도하는 남산공원길
이 가파른 경사를 들이밀며 우리를 맞이한다.


 

♠  남산 품에 안기다 ~~~

▲  남산공원길 (남산북측순환로 입구)

국립극장 정문을 지나면 남산의 대동맥인 남산공원길이 시작된다. 길은 2갈래로 북쪽 길은 남
산북측순환로 입구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회현동(會賢洞) 소파로로 이어지며, 예전부터
오로지 뚜벅이 전용 산책로로 이용되어 차들의 바퀴 자국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크게 오르락
내리락 부분이 없는 느긋한 길로 장충단공원과 필동(筆洞), 남산1호터널로 내려가는 길이 있
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을 봉안한 와룡묘(臥龍廟)란 오래된 사당이 있다.
그리고 남쪽 길(2차선)은 남산 정상과 남산서울타워로 인도하는 길로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왕복 운행이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변경하면서 '국립극장→남산서울타워→
남산도서관' 방향으로만 바퀴를 굴릴 수 있다.

내가 남산에서 무척 가까운 신당동과 금호동(金湖洞)에 살던 시절, 가족이나 친구와 남산에
물을 뜨러 많이 갔었는데, 가족과 갈 때는 주로 평일 저녁을 이용했다. 그때는 약수터 입구까
지 차를 끌고 가서 약수를 뜬 다음 북측순환로 입구에 있던 차량 매표소까지 후진하여 국립극
장으로 내려갔지. 일방통행로라 그렇게 가는 것은 위법이긴 하나 거리도 그리 길지 않고, 매
표소 아저씨의 쿨한 묵인도 있어서 몇년을 그렇게 했었다.
이후 남쪽 길의 40% 정도를 뚜벅이길로 만들고 남산의 건강을 위해 차량 통행의 크게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반 차량은 절대로 바퀴를 들일 수 없게 되었으며, 오로지 시내버스
(02, 04번)와 시티투어버스, 관광버스, 공원/긴급 차량만 들어올 수 있다. 차를 끌고 온 경우
에는 국립극장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서 이동하거나 02, 04번 시내버스를 타야 된다.


▲  뚜벅이들의 낙원이 된 남산 남측순환로

남산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쪽 길로 접어들면 숲 사이로 빛바랜 한양도성이 모습을 비춘다. 그
리 멀지 않은 과거(2010년 이후)에 성곽 옆에 탐방로를 내었는데, 남산 정상까지 질러 가고
싶다면 그 길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경사가 좀 각박하여 조금은 힘들 수 있으나 짧은 거리라
서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다. 게다가 숲이 짙어서 대낮에도 그늘이 가득해 한여
름에는 시원하다.

성곽 앞에 난 산길의 일부는 예전부터 있던 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남산에서 제법 잘나갔던
남산약수터가 있었다. 남산산악회가 관리하는 곳으로 어린 시절 여러 번 가봤었지. 그곳은 입
구에 철문까지 설치했으며, 오로지 이른 아침에만 문이 열려 아무 때나 접근이 어려웠다. 다
행히 그곳 산길이 개방되어 이제는 자유의 공간이 되었으며, 약수터 주변에는 남산산악회 건
물과 체력 단련시설이 있다.

성곽길(남산산악회 입구)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2~3분
오르면 운동시설을 갖춘 상춘약수터가 나오는데, 예전 신당동, 금호동 시절 우리집 단골 약수
터였다. 약수터 옆에는 약수로 몸을 씻는 노천탕이 있었는데, 약수로 냉수마찰을 하면 겨울에
감기가 안걸린다고 해서 한때 인기가 대단했었다.
예전에는 서울에 노천 목욕터를 가진 약수터가 적지 않았는데, 대중이 이용하는 약수터에 아
저씨와 노공(老公)들이 벌고 벗고 씻는다는 것이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되었다. 하여 차츰 사
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기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남산 남측순환로 (4월 풍경)

상춘약수터입구를 지나 계속 남측순환로를 따라 가면 크게 구부러지는 남쪽에 2개의 조망대가
있다. 이 구간은 남쪽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일품인데, 바로 밑에 용산구 지역을 비롯해 한강
과 동작구, 강남/서초구,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대기만 청정하다면 보이는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운 남산(262m, 270m)은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낙산(낙타
산)과 더불어 한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어서 남산이란 아주 평범한 이름
을 지니고 있다.
천하에는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아주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안기
는 휴식처이며, 경주(慶州) 남산(468m)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는 친근한 산이라는 것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편히 안길 수 있는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한다. 인경산(引慶山),
잠두봉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395년 태조 이성계가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
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산꼭대기에 세웠다.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에
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장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이
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는 왜군
헌병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으며 갖
은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도성 경승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양반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
비했는데,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한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 이후 왜인들이 남산 북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는
청계천 이남에 두루 터를 닦고 살았는데,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어 그들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인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
정이 속좁게 징징거려 어쩔 수 없이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왜정이 남긴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기며 1945년 8월 패전 때 연합군에 살려달라고 징징거린 왜왕
(倭王)처럼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
인 남산서울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되어 남산
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다.


▲  남측순환로 아랫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남동과 보광동(普光洞), 한강을 비롯하여 강남 일대가 상쾌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
악산(백악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은 물론 도심 야경도 풍족하게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약수터가 뿌리를 내려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주었는데, 그중에서 부
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라
진 상태이며, 다른 약수터도 상당수 문을 닫거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
이다.

남산은 남산공원길 남측순환로와 북측순환로, 여러 갈래의 계단길이 있는데, 계단길은 장충단
공원에서 정상까지, 백범광장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길이 대표적이며, 남산1호터널과 남
산동, 후암동(厚岩洞)에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길 외에는 싹 철조망을 쳐놓아 산으로에 접
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모두 풀어버렸다. 허나 철조망을 없앴다고 해서 산자락 곳곳을 쑤시고
다니면 안된다. 무조건 지정된 길로 가야 남산도 좋고, 사람도 좋은 것이다.

남산에는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와룡묘, 남산봉수대,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 등의
문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남산서울타워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남산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심 속 나들이 명소이자 조촐한
등산 명소로 그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르며, 예로부터 서울에 오면 꼭 가봐야 되는 서울의 상징
적인 명소로 지방 사람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까지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 씩 몰려
드는 서울 관광의 성지이다. 하여 한적한 분위기는 좀 누리기가 어렵다. (서울을 찾은 외래
관광객의 1/3 이상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단
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조선 왕궁이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내 옛
추억이 몇 권씩 녹아있는 현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많이 오른 산이 바로 남산으로 어림잡아도 500번 이상은 올랐을 것이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남동과 보광동, 강남, 관악산과 우면산 산줄기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해방촌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
서울타워는 동양에서 제일 높은 타워로 높이가 236.7m에 달한다. 하늘을
찌를 듯 늘씬하게 솟은 저 타워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  다시 만난 한양도성 - 성곽 밑에도 탐방로가 닦여져 있다.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4번 종점)에 이르니 온갖 관광객들로 뒤엉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기서는 오로지 시내버스만 길게 바퀴를 접을 수 있으며 나머지
버스는 승하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야 된다. (주차 공간이 별로 없음)
무수한 인파 속으로 몸을 던져 하나의 점이 되어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
과 남산서울타워 밑에 이르며, 오르막길 대신 서남쪽 남측순환로를 내려가면 남산도서관으로
이어진다.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남산동, 회현동 / 용산구 용산동2가, 후암동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02-3783-5900)


▲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바라본 서울타워
남산 어디서든 구석진 곳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서울타워가 바라보인다.


 

♠  남산 정상

▲  정상 동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도심과 서울 북부)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가 둥지를 틀고 있다. 남산
서울타워(N서울타워)는 남쪽에, 팔각정은 중앙, 남산봉수대는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중
에서 인파가 가장 많은 곳은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주변이다.

남산서울타워는 236.7m의 키다리 타워로 아시아 최대를 자랑한다. 남산을 든든한 기반으로 삼
아 기둥과 철탑 하나로 하늘을 받들고 있는 웅장한 탑으로 TV와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으로 송
출하고자 1969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 1971년 공중선 철탑이 완
성되었고, 1975년 7월에 최종 마무리가 되어 전국 인구의 48%가 이 타워의 전파탑을 통해 방
송을 시청하고 있다고 한다.

1980년 10월 속세에 개방되어 남산의 소중한
꿀단지이자 야경과 조망의 진정한 성지로 자리
매김을 했는데,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
山). 수락산(水落山). 관악산(冠岳山), 불암산
(佛岩山) 정상을 빼고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그러다보니 콧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밑에서 그를 보려면 고개가 그냥 까
딱 넘어가 버린다.
게다가 입장료도 꽤 야박한 편, 그래도 관광
수요는 늘 꾸준하여 외국인 선정 서울 명소 1
위의 지위(2012년 서울시청 설문조사 결과)를
누리기도 했다.

 

◀  바로 밑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의 위엄

남산을 안방처럼 들락거린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 친척과 2~3번 타워에 오른 적이 있었
다. 허나 그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인연이 닿지 않아 그의 품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정상에 오
더라도 그냥 타워 밑도리와 정상 주변에서 좀 머물다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상 가려
고 해도 이상하게 땡기지가 않는다.

* 남산서울타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 산1-3 (남산공원길 105 ☎ 02-3455-
  9277)
* 남산서울타워 홈페이지는 아래 팔각정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남산 팔각정(八角亭)

팔각정은 남산서울타워와 더불어 남산의 주요 장식물로 이곳에는 원래 1959년에 이승만 대통
령을 치켜세우고자 세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다. 여기서 우남은 이승만의 호로 1960년 4.19
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팔각정을 지었으며, 남산 정상을 수
식하는 존재로 삼았다. 정자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산바람이 주변
에늘 머물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정자 자체는 60년도 채 안된 존재이지만 관광객들로
늘 붐비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  옛 국사당(國師堂)터 표석

남산 정상은 늘 사람들로 미어터지나 팔각정 부근 구석에 누운 국사당터 표석에 눈길을 주는
이는 거의 없다. 애처로운 눈빛을 보이며 눈길과 관심을 호소하지만 맨날 외면을 받는 그 표
석, 표석에 쓰인 국사당은 남산의 수호신인 목멱대왕의 사당으로 1395년에 태조가 세웠다.
1404년 목멱대왕을 호국(護國)의 신으로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리기도 했던 남산
의 성역이자 중심이었으나 1925년 왜정이 조선신궁을 지을 때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있
는 것에 쓸데없이 아니꼬움을 드러내면서 다른 데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태조와 무
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하는 인왕산 선바위 밑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사를
가게 되었고, 목멱대왕의 남산은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이 판을 치는 일그러진 현장이 되었다.

국사당을 핍박했던 왜정도, 조선신궁도 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건방지게 들어앉던 왜
열도의 잡귀들도 추방되었지만 남산의 주인인 국사당은 끝내 제자리로 오지 못하고 인왕산에
뿌리를 내려 선바위와 함께 기도처의 성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로 미어터
지는 이곳에 다시 와봐야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국사당 신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그
만큼 남산은 많이도 변했다.


▲  남산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 - 서울 지방기념물 14호

정상 북쪽에는 남산의 오랜 상징물인 남산봉수대가 도심을 바라보고 있다. 남산의 옛 이름을
취해 목멱산봉수대('목멱산봉수대터'가 문화재청 지정 명칭임)라 불리기도 하며 서울에 있다
고 해서 '경(京)봉수대'란 별칭도 있으나 그냥 속편하게 남산봉수대라 불러도 문제는 없다.

봉수대란 불을 피우거나 연기를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알리던 옛날 통신 수단으로 산꼭대기에
주로 설치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알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으며, 비가 많이 오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봉수대는 크게 5개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변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
滿江), 남해바다에서 시작하여 이곳 남산을 종점으로 삼았으며, 평소에는 봉화 1개, 적이 나
타나면 2개, 경계에 다다르면 3개, 경계를 넘으면 4개, 전쟁이 터지면 5개를 올렸다.

남산봉수대는 1394년에 설치되어 하루도 연기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으며, 동
쪽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5개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1895년 봉수제도가 폐지되면서 문
을 닫았고, 왜정 때 말끔히 철거되면서 그 위치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청구도(靑
邱圖)를 통해 봉수대터 1곳을 발견하니 그곳이 지금 봉수대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94년 복
원되었다. (나머지 4곳은 아직도 위치가 아리송하다고 함;;;)

이곳 봉수대는 벽돌로 쌓은 5개의 봉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불과 연기를 피울 일이
없는 죽은 봉수대로 남산 정상을 수식하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조선시대 봉수제도의 중앙봉수
대 의미 밖에는 없다. 그것이 현역에서 은퇴한 사물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봉수대는 관람이
가능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이 가히 차관도 아닌 장관이라 이곳이 왜 조선 봉수대의 중심
이 되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남산이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고 조망이 뛰어나 사방에
서 날라오는 봉수대 연락을 받기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남산 외에도 무악봉(毋岳峰) 동봉수대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 봉산 봉수
대, 개화산 봉수대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근래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상태로 무악산 동봉
수대와 봉화산 봉수대는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1


▲  목멱산봉수대 내부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벽돌로 쌓고 그 밑도리는 성벽처럼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1994년에 복원된 상태라 고색의 때는 채 익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는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 동부와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동대문/중랑/성동 권역을 비롯하여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등이 흔쾌히 두 눈에 잡힌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은 남산케이블카 승차장이다. 그 너머로 서울 도심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줄기가 바라보인다.


 

♠  남산 마무리

▲  성곽길에서 바라본 용산과 여의도, 서울 서남부 지역

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 백범광장으로 내려가는 성곽길은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다. 내려
갈 때야 상관은 없지만 올라갈 때는 거의 혼이 다 빠진다.

남산케이블카를 지나면 도심을 향해 튀어나온 잠두봉 전망대가 손짓을 하는데, 여기서 바라보
는 조망 맛이 아주 일품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달까지 올라간 서울의 심장부를
바로 발 밑에 두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가까이로 남산3호터널을 오가는 차량의 물결이
개미들의 행진처럼 보이며, 키다리급의 온갖 성냥갑 건축물들이 여기서만큼은 손가락보다 작
게 다가온다.


▲  남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장충단공원에서 올라가는 것보다 거리는 매우 짧지만 대신 경사가 좀 각박하다.
남산 산길 가운데 가장 경사진 곳으로 장충단공원이나 국립극장에서 올라가
정상을 찍고 남산도서관 방면으로 내려가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봐야 넉넉히 2시간이면 족함)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서울 도심 동부와 동대문,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등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남대문시장과 시청,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서울 도심과 안산(鞍山), 인왕산 등


정상에서 서쪽 성곽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가면 시립남산도서관이다. 이제 남산도 다 내려
온 것이다.

여기서 안중근의사기념관과 2020년 11월에 닦여진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지나면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고자 닦은 백범광장이 나온다. 공원을 이루고 있는 광장 남쪽에는 한양도성이 복
원되면서 나무와 온갖 꽃을 심은 녹지 공간이 대폭 늘어났다. 바로 옆이 키다리 빌딩이 즐비
한 도심이건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 딴 세상을 이루고 있으니 그 역시 남산이 있으니
가능한 것이다.


▲  백범광장 터널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한양도성과 남산을 복원하면서 예전에 도로 공사로 줄기가 끊긴 백범광장과
남산 사이의 산줄기를 다시 이어붙여 그 밑에 터널(소월로3길)을 냈다.

▲  휴일 오후 한가로움이 느껴지는 백범광장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  백범광장 남쪽에 다시 재현된 한양도성 - 사적 10호

백범광장 남쪽과 서쪽에는 근래 복원된 아주 따끈따끈한 성곽이 있다. 이들은 한양도성의 일
원으로 왜정 때 끊어진 남대문과 남산 구간의 일부이다.
오랫동안 잊혀진 이들을 끄집어내고자 백범광장 주변을 싹 뒤집어 조사를 벌였고, 땅속에 묻
힌 성터가 발견되어 그 자리를 바탕으로 성벽과 여장을 복원했다. 재현된 구간은 200m 정도로
최근 지어진 탓에 피부가 아주 하얗고 반질반질하여 마치 벽에다 그린 성벽 벽화 같다. 남산
도서관 북쪽 성곽터를 조사하여 2020년 11월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내었으며, 나머지 사라진
구간도 복원 계획에 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하얀 피부의 성곽 여장 너머로 서울역 동쪽에 자리한 여러 키다리 빌딩이 보이며,
성곽 안쪽에도 탐방로를 내어 억새를 비롯한 온갖 나무와 꽃을 심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서쪽 부분
성곽은 계속 달리고 싶다~~!! 허나 왜정과 개발의 칼질로 끊어진 구간이
적지 않고 복원 속도도 굼벵이보다 느려 그런 날은 아직도 멀었다.

▲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후암동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엄청난 광을 쏟아부으며 슬슬 커텐을 칠 준비를 하고
회색빛 도시도 석양이 짙어지면서 점차 검은 도화지 속에 묻혀간다.

▲  온갖 야생화가 살랑거리는 백범광장 서부

▲  도동3거리에 있는 남산공원 마크

백범광장과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을 뒤로하고 남산공원 출입구의 하나인 도동3거리로 나오
니 시간은 18시가 넘었다. 햇님도 그 기운이 다했는지 84,000광 보다 더 진한 석양을 비추며
슬슬 꽁무니를 내빼고 토끼의 달나라가 하늘 높이 떠올라 땅꺼미의 기운을 북돋는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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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2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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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영동 백화산 반야사 '

반야사3층석탑
▲  반야사3층석탑과 배롱나무

▲  영천과 망경대

▲  반야사계곡(석천계곡)

 


 

♠  백화산(白華山)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반야사(般若寺) - 영동군 향토유적 9호

▲  반야사 경내
경내 뒷쪽으로 꼬랑지를 든 호랑이를 닮았다는 돌너덜(반야산 호랑이)이 보인다.


영동 고을의 동부를 맡고 있는 황간(黃澗), 그 황간 북쪽 우매리에서 석천계곡(반야사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 반야사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반겨준다.

백두대간의 일원이기도 한 백화산이 베푼 석천계곡이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
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그곳 한복판에 둥지를 닦은 반야사는 백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절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매우 곱고 절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영동(永同) 지역 경승지이자 피서의 성지로 오랜 세월 찬양을 받고 있
다.

경관 하나는 아주 일품인 반야사는 신라 말에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가 황간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심묘사(深妙寺)에 주석하고 있었을 때, 현재 절 자리에 있던
연못에 나쁜 악룡(惡龍)이 머물며 갖은 민폐를 부리자 사미승(沙彌僧) 순인(純仁)을 보내 그
들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닦으니 그것이 반야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용(龍)이 진짜로 있을 리는 없을 터이니 아마도 백화산에서 설치던 산적을 교화하
거나 때려잡고 그들의 본거지에 절을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비록 무염이 창건했는지는 의문
이나 대웅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불상이 있어 9~10세기에 창건된 것은 확실한 것 같
다.
무염의 창건설 외에도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원효(元曉)가 세웠다는 설과 의상(義湘)의 10
대 제자 중 하나인 상원(相源)이 세웠다는 설도 덩달아 전하고 있으나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
은 이 땅에 많은 절에서 사골이 되도록 우려먹는 흔한 소재이다. 반야사도 예전에는 그들이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요즘은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부분을 생략하고 신라 후기에 크게 활약했
던 무염을 창건주로 내세우고 있다.
절 주변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 했으며 산
이름을 지장산에서 백화산으로 바꾸어 문수도량임을 내세웠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352년에 중건되었다고 하며, 1464년 신미
(信眉)가 세조(世祖)의 허락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세조는 법주사(法住寺)를 방문했다
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에 들려 새로 지은 대웅전에 참배하고 '반야'란 현판을 내렸다고
하며 그때부터 절 이름이 '반야사'가 되었다고 한다. ('반야'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뜻함)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잠수를 탔다가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
히 불사를 벌여나갔고 1993년에 새 대웅전과 요사를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산신각, 지장전, 심검당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서 다소 떨어진 망경대 벼랑 위에는 이곳의 상징인 문수전이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닦았다.
절이 들어앉은 특성상 대웅전과 극락전 등 주요 건물들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문수전은 북
쪽을 향하고 있다, (경내에서 계곡 건너 서쪽에 전답과 관세음보살상이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유일한 국가 지정문화재인 3층석탑을 비롯해 영동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대웅전 불상, 조선 후기 부도 2기가 있으며, 그 외에 500년 묵은 배롱나무 2그루와 신
중탱이 전하고 있다.
또한 절 뒷쪽 계곡 너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파쇄석이 모인 돌너덜이 있는데,
마치 꼬랑지를 세운 호랑이 모습이라 절에서는 그를 '반야사 호랑이'로 삼으며 호랑이로 화현
(化現)한 산신(山神)으로 내세우고 있다. 경내에서도 그 돌너덜이 보이며, 그 너덜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닦은 모양이다.

반야사는 풍경도 좋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교통편이 영 좋지 못한 것이 큰 흠이라 대중교통으
로 오려면 여간 힘들지가 않다. 허나 그만큼 첩첩한 산속으로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
거나 마음을 싹둑 다듬고 싶을 때 안기면 아주 좋은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템플스테이도 운
영하고 있으니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고적한 산사에 묻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1 (백화산로 652 ☎ 043-742-4199, 7722)
* 반야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주차장 남쪽에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문수도량과 산신기도 도량까지 내세우는 이곳에는 재미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 2
가지를 우선 꺼내보겠다. (다른 1가지는 영천 부분에서)

①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시절 글재주가 좋은 황도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간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했는데, 웃기는 것은 아주 쉬운 한자인 '수(
水)'와 '산(山)' 2자를 몰라서 백일장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크게 발끈한 황도령은 바로 반야사로 달려가 그곳에 있던 일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일우
는 학식이 뛰어난 승려로 그에게 많은 학문을 전해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황도령의 얼굴색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어 얼굴을 살펴보니 글쎄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 아닌가? 그냥 방치하다
가는 황도령이 골로 갈 수 있기에 그의 옷을 벗겨 온몸에 금강경(金剛經) 5,149자를 빼곡히
적어넣고 옷을 입혔다.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은 도령 몸에 쓰인 금강경을 보고는 크게 발작했다. 금강
경의 위엄에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줄행랑을 쳤는데 이는 일우가 금
강경을 쓸 때 귀 부분을 실수로 빼놓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도령은 귀는 잃었지만 스승 덕
분에 살아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출가를 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이법사(無耳法師)라
했다. 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② 불교 탄압이 극성이던 조선 성종~연산군(燕山君) 시절, 벽계선사(碧溪禪師)는 그 소나기를
피하고자 머리를 기르고 속인(俗人)으로 가장하여 살았다. 그는 과부를 맞아들여 같이 살았는
데 어디까지나 위장 혼인일 뿐, 3년을 살아도 여전히 남남처럼 살았다. 부부의 재미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에 완전히 뿔이 난 과부는 어느 날 '야~ 나 갈꺼야~~!!'
선사 왈 '왜?'
과부 '이름만 부부지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 살겠냐?'
선사 '그러면 말리지 않겠다. 그래도 3년 동안 밥해주느라 고생했는데 수고비로 이거나 가져
가셔~!'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주었다.

과부는 표주박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와 동구 밖 샘물가에서 그것으로 물을 떠마시며 팔자 한
탄을 간드러지게 하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있던 표주박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자 그만 포기하고 3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재혼처를 물
색했으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벽계선사를 다시 찾아갔다.
선사는 '내 다시 올 줄 알았다'
그 말에 과부는 '어찌 알았누?'
선사 '그 이유가 궁금함? 그런데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따 팔아먹었노?'
과부 '아 그거... 마을 동구 밖 샘터에서 잃어버렸어. 쩝'
선사 '그 자리에 다시 가봐라. 아직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과부가 놀라서 '어째서?'
선사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중이 되기를 500번이나 했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
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것이라 이
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지~~!'

과부는 웃기고 있네~~! 표정을 지으며 그 샘터로 가보니 과연 그 표주박이 3년 전 모습 그대
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과부는 다시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며 선사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잘살았다고 한다.

▲  반야사 심검당(尋劍堂)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  반야사 용머리 연꽃 석조
백화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그의 넉넉한 마음을 비춘다.

▲  반야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大雄殿)
1993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극락전이 대웅전 행세를 하였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불단과 붉은 닫집, 그리고 석가3존상
(대웅전 불상 - 영동군 향토유적 12호)


대웅전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이루어진 조그만 석
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경주 옥석(玉石)으로 조성되어 산뜻하게 도금을 입힌 것으
로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여래상은 검은 머리칼을 드러내고 있고
좌우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눌러쓰며 석가여래 좌우를 받쳐준다. 그들 뒤로는 검은 바탕으
로 이루어진 석가후불탱이 든든하게 후광이 되어준다.

▲  대웅전 신중탱
대웅전을 지키는 온갖 호법신의 무리가
그려진 것으로 석가후불탱과 비슷한
스타일로 조성되었다.

▲  산신각(山神閣)
2단으로 다져진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  반야사3층석탑 - 보물 1371호

극락전 앞에는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지금이야 반야사의 일원
으로 완전히 묻혀있어 이곳의 오랜 유물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는 원래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석천계곡 탑벌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50년에 주지 성학(性學)이 수습
하여 일으킨 것이다. 그 덕분에 반야사에 오래된 존재가 하나 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다음 머리장식
으로 마무리를 한 형태로 밑에서 머리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높이는 335cm이다. 바
닥돌은 모두 6매의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바닥돌 윗면 네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돌출
되어 있고, 중심부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 기단면석이 꼽히도록 하였다.
기단부는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가 모각되었다. 갑석 윗
면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했으며, 중앙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서 1층 탑신을 꼽도록 조
성했다. 그리고 갑석의 네 모퉁이에도 합각선이 돌출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를 새겼으며, 남/북쪽 면석은 새
로 끼워 넣었다. 2,3층 탑신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2층 탑신에 모각된 우주에서는 엔
타시스 수법을 볼 수 있다. 3층 탑신은 현상으로 보아 새로 끼운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屋蓋石)은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층 옥개석의 낙수면은 길이
가 짧고 경사가 급해 보이며, 옥개석 받침은 1층 5단, 2/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추녀는 비
교적 두껍게 조성되었는데, 직선화되는 보편적인 수법과는 달리 둥글게 표현되어 전각의 반전
은 예리한 편이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찰주(刹柱)가 관통된 노반(露盤)과 복발 등의 머리장식
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보기도 함) 1층 탑신의 결구 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 면석과
1층 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백제계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제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탑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건강 상태도 좋으며, 반야사의 보물로 묵묵히 살
아가고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배롱나무
, 극락전

▲  범종을 비롯한 4물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배롱나무 - 영동군 보호수 13호

극락전과 3층석탑 사이에는 오래된 배롱나무 형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들은 추정 나이가 약
530년(1994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년) 정도로 높이는 각각 8m, 7m, 나무 둘
레는 각각 0.8m, 0.6m이다.
경내에서 대웅전 불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3층석탑은 제외)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자신이
가지고 댕기던 주장자(柱杖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갈라져 쌍배롱나무로 자랐다는 믿거나 말
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한여름(7~8월)에 왔더라면 배롱나무(백일홍)의 아름다운 붉은 향연을 제대로 누릴수 있을텐데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에 오다 보니 그 아름답다는 나무도 다른 나무와 비슷하게 그저 알
몸만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걸치는 옷을 빼버리면 다 똑같거늘 왜 그리도 욕심을 부리고 계
급을 나누는지 모르겠다.


▲  배롱나무의 여름 모습 (반야사 홈페이지 참조)
배롱이의 향연은 기껏해야 2달 정도이다. 6~7개월 정도는 푸른 옷을 걸치고 있으나
나머지 5~6개월은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한 채, 알몸으로 살아간다.


▲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 반야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이곳의 대웅전이었으나 1993년 바로 옆에 새 대웅전이 지어지면서 법당에서
물러나 아미타불의 거처인 극락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석천계곡(반야사계곡)과 반야사의 상징, 문수전

▲  석천계곡 (반야사계곡)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이제 다봤구나~!' 싶어서 발길을 돌리려고 하니 문수전을 알리는 이
정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발길을 붙잡는다. 문수전이라?? 반야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나
싶어서 살펴보니 그곳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경내 뒷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왕 온 것이니 다
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말끔히 둘러봐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산길은 석천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계곡 풍경이 반야사 이전보다 더욱
장관이었다. 물은 깊고 청명하며, 바위와 벼랑이 적당히 나타나 여흥거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누런 갈대가 바람에 펄럭이며 나그네의 마음을 간지럽히고, 소나무 등 나무도 삼삼해 이런 곳
이야말도 진정한 신선(神仙)의 세계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신선의 세계는 인간계보다 시간이 빛의 속도만큼 빠르다고 한다. 신선의 장기를 구경하는 동
안 몇 대(代)가 흘러갔다는 난가(爛柯)의 전설도 있을 정도이니 괜히 이 계곡에 발을 들였다
가 기백 년 뒤에나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돌너덜 (반야사 호랑이)

반야사의 명물 중에는 '반야사 호랑이'라 불리는 돌너덜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꼬
랑지를 치켜든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들은 순 자연산으로 수 만년
동안 흘러내린 파쇄석이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쌓이고 쌓여 높이 80여m, 길이 300여m에 이르는
돌너덜을 이루게 되었다. 근데 하필이면 호랑이 모습을 이루고 있어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
솜씨에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반야사는 그를 산신의 화현으로 삼고 있으며, 산신각 산신탱에
그려진 호랑이 모습과도 비슷하다.


▲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

▲  망경대(문수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튼 문수전(文殊殿)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은 아주 느긋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착했던 길은 영천을 앞
에 두고 갑자기 180도 흥분하여 아주 각박한 오르막길로 돌변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맞배지붕 건물 하나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들어앉은 건물처럼 장엄하게 보이는데, 그것이
반야사의 상징인 문수전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벼랑 옆에 닦여진 가파른 길을 올라가
야 되는데, 경내에서도 다소 떨어져 있고, 길도 각박하여 문수전을 건너뛰는 사람도 있다.
허나 이는 갈비탕에서 고기를 빼먹는 거와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문수보살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주변 풍경이 가히 일품이니 조금은 힘들더라도 발품을 팔만하다.


▲  망경대 밑에 자리한 석천계곡 영천(靈川)

문수전을 강제로 머리에 이고 있는 망경대(문수바위) 밑 계곡을 영천이라 부른다. 이곳은 세
조와 문수보살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세조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를 방문하니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 세조
가 예를 차리자 그는 왕을 영천으로 인도하여 몸을 씻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는
'왕이 불심(佛心)이 갸륵하니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오'

한 마디 남기고는 사자를 타고 망경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사라졌다.

왕이 목욕을 마치고 계곡 밖으로 나오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며, 병을 낫게 해준 문수
보살을 기리고자 절 이름을 반야사로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화는 가만보면 오대산 상원
사(上院寺)에 서린 세조와 문수동자 전설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아무래도 거기 설화를 가져와
서 반야사 스타일로 다듬은 듯 싶다.
세조가 과연 여기서 목욕을 했는지는 의문이나 그만큼 왕실의 인연과 지원이 각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절 부근 경치 좋은 곳에 이런 전설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그 전설로 인해 영천
옆 벼랑을 문수바위 또는 망경대(望京臺)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망경대는 서울을 바라본다
는 뜻이니 절을 중창시켜준 세조와 왕실의 은혜를 두고두고 기리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  망경대 꼭대기에 자리한 문수전의 위엄

문수전은 세조와 문수보살의 설화가 깃든 망경대 벼랑 위 250m 고지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
해 있다. 건물을 짓기에는 다소 척박한 곳이지만 그 현장에 문수보살을 위한 건물을 지어야
문수도량의 뽀대가 나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건물을 지어올렸다.
문수전에 오르면 백화산 남쪽 자락과 석천계곡, 호랑이 돌너덜 등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오
나 주변이 칼처럼 솟은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어 보이는 범위는 그것이 전부이다.


▲  문수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상과 문수동자상

문수전은 북쪽을 향해 문이 나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늠름한 모습의 문수보살상이 파란 피
부의 목각사자상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푸근한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는다. 그 좌우에
는 붉은 옷을 걸친 문수동자와 녹색 옷을 입은 문수동자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문수'의 세상이다.
문수보살과 동자상은 근래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여물지도 못했지만 목각사자상은 조
선 후기 것이라고 하며. 그 좌우에 중생들의 시주를 받아 봉안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어두운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  문수전에서 바라본 반야사 호랑이(돌너덜)

▲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북쪽과 백화산 산줄기
다음에 오면 저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나의 존재를 잠시 지우고 싶다.

▲  백화산의 첩첩한 산줄기 (백화산 정상 방면)

▲  망경대 바로 밑에 펼쳐진 영천
영천 주변에 흙과 자갈이 넓게 깔려 있어 여름 피서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혹시 아는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면 세조 임금처럼 병이 싹 나을지도~~?

▲  문수전에서 경내로 내려가는 산길

반야사 경내에서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길은 2개가 있다. 우리가 이용한 계곡 길을 거쳐서 가
는 것과 경내 동쪽 산길로 오르는 길이 그것인데, 보통 계곡 길로 올라가서 문수전을 찍고 경
내 동쪽 산길로 내려오며 절에서도 그렇게 가기를 적극 권하고 있다. 이유는 계곡 길에서 망
경대 벼랑으로 오르는 길이 좁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도 상관은 없음)
계곡 길은 완만하게 가다가 망경대에서 아주 화끈하게 흥분을 하지만, 동쪽 산길은 서서히 오
르는 형태로 덜 가파르다. 그 길을 내려오면 잠시 떨어졌던 경내가 이내 모습을 드러내며, 주
차장 쪽으로 떨어진다.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  반야사 부도(浮屠) - 영동군 향토유적 10호, 11호

주차장 남쪽 산자락에 고색이 짙은 부도 2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은 주차장 부근에 있
어 찾기는 쉽지만 구석진 곳에 있어 자칫 놓치기가 쉬우니 꼭 등잔 밑을 살펴보기 바란다.

반야사 부도는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 1호 부도(향토유적 10호)는 검은 주
근깨(이끼)가 가득 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대추알처럼 생긴 탑신을 얹히고 네모난 지붕돌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오른쪽 2호 부도(향토유적 11호)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8각의 대석(臺
石)과 석종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지붕돌과 정체가 아리송한 기둥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누구의 승탑(僧塔)인지는 귀신
도 모른다.

▲  왼쪽 1호 부도

▲  머리장식이 특이한 오른쪽 2호 부도

▲  주차장에서 부도로 인도하는 돌계단

▲  주차장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  봄을 기다리는 석천계곡
백화산 등산을 하려면 저 다리를 건너면 된다. (관세음보살상도 저 다리를 건너면 됨)


부도를 끝으로 그림 같은 절, 반야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기분 같아서는 계곡 다
리를 건너서 관세음보살상까지도 가보고 싶고, 계곡길을 따라 일주문(주차장에서 우매리로 나
가면 중간에 있음)까지 걸어가며 계곡을 느끼고 싶지만 다음 답사지(경북 어느 지역)로 빨리
넘어가자는 일행의 독촉에 그 좋은 후식거리를 모두 포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쉽긴 했지
만 반야사에 깃든 보물과 문수전, 영천과 망경대 등 볼만한 것은 거의 다 보았으니 별로 후회
는 없다.

시간은 어느덧 16시. 해가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조금씩 어둠의 기운이 피어나 세상을 훔치려
들고 우리는 고적한 산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우리는 반야사란 절을 기억하겠지만 반야사는 잠깐 스치고 지나간 나를 기억이나 할련지 모르
겠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여름에 인연을 잡고 싶음) 계곡도 말끔히 둘러보고 세조가
몸을 씻었다는 영천에도 풍덩해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반야사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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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던 옥수동 미타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옥수동 미타사
~~~~~

▲  미타사 느티나무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비
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들 이상만큼 그날을 즐기고 산 지도 어느덧 10여 년, 초파
일에 대한 설레감은 다른 날보다 높아 며칠 전부터 초파일 코스를 짜느라 부산하다.
그날만큼은 굳이 멀리 나가지 않고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
찰(20세기 이후)을 대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이제는 서울에서 미답(未踏) 절이 거의
고갈 상태에 이르렀다. 다행히 이때를 대비하여 남겨두었던 미답의 고찰(古刹)이 여럿
있는데, 그중 2개를 이번에 꺼냈다. (나머지는 이후에 모두 꺼냈음)

드디어 초파일 오전 10시, 도봉동 집을 나서 제일 먼저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았
다. 학도암은 여러 번 인연이 있던 절로 그곳에 깃든 조선 후기 문화유산을 간만에 친
견하고 점심공양에 후식(수박, 떡, 커피)까지 두둑히 챙겨 먹으며 학도암의 후한 초파
일 인심을 체험했다.
13시 정도에 보문동(普門洞) 미타사로 자리를 옮겨 그곳의 문화유산을 모두 사진에 담
고 공양간에서 공양까지 하였다. 이곳 초파일 인심도 학도암에 못지 않았는데, 초파일
절투어에서 먹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다
그렇게 미타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벌써 16시를 가르킨다. 왜 이렇게 초파일 해는 짧을
까? 퇴근 본능에 너무 충실한 햇님을 원망하며 지하철을 타고 부랴부랴 옥수동 미타사
로 넘어갔다. 이곳은 3호선과 경의중앙선(문산↔용문,지평)이 만나는 옥수역 북쪽으로
바로 한강 변이다. 학창 시절에 옥수동 북쪽 금호동(金湖洞)에 잠시 서식한 적이 있었
고, 옥수동도 적지 않게 들락거렸지만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불과 몇 년 전에 일이
다. 그만큼 등잔 밑이 매우 어두웠다.


▲  초파일의 향연 속으로 ~~~ 미타사 정문을 들어서다.


 

♠  1지붕 9가족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비구니 절집
옥수동 미타사(玉水洞 彌陀寺)

▲  청기와를 눌러쓴 천불전(千佛殿)

미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미타유치원과 주차장이 마중을 한다. 미타사는 아직 그 흔한 일
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는데, 노란 피부의 유치원 버스들이 옹기종기 모인 주차장을 지나
면 미타사의 법당(法堂)인 천불전이 우람한 모습을 비춘다.

천불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1988년 9월에 지
어진 미타사의 야심작으로 머리에는 푸른 빛을 도도하게 드러낸 청기와가 듬뿍 입혀져 건물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으며, 불단(佛壇)에는 장대한 모습의 석가여래상을 위시해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이 금빛 물결을 일으키며 두 눈을 부시게 만든다.


▲  화려함이 가득 묻어난 붉은 닫집과 천불전 석가여래상의 위엄

▲  미타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4-6, 4-7호

천불전 북쪽에는 천불전보다 더 장대한 모습의 느티나무 2그루가 천불전과 관음암에 짙게 그
늘을 드리우고 있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라난 그들은 1982년 10월 20일
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약 20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년이 더해
져 240년 정도 된다. 경내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미타사 승려가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생김새 또한 거의 비슷한데, 이들의 높이는 20m, 나무둘레는 320cm, 325cm이
며, 경내에서 2번째로 오래된 존재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  미타사 용운암(龍雲庵)

옥수역 북쪽에 자리한 미타사는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감싸고 도는 전형적인 배
산임수(背山臨水) 자리이다. 미타사는 그 뒷산을 종남산(終南山)이라 칭하고 있는데 원래 이
름은 금호산(金湖山, 응봉)이며, 경내 동쪽에는 달맞이봉이 있다. 지금은 강변도로와 중앙선
철도로 인해 한강과 조금 떨어지긴 하였으나 예전에는 바로 앞이 한강이었다.

옥수동 미타사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로 888년에 비구니 대원(大願)이 매주골(금호동
)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1115년 봉적(奉寂)
과 만보(萬寶) 두 비구니가 종남산 남쪽, 즉 현재의 위치로 옮겨 극락전을 세워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내세웠다. 이때 미타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하니 어쩌면 그 시절에 창건된 것이 아닐
까 여겨진다. 또한 창건주와 1115년 중건 승려 모두 비구니라 시작부터 비구니 절이었음을 알
려준다.

조선 때는 서울 근교 4개 승방(비구니 절)의 하나로 꼽혔는데, 두모포(豆毛浦)에 있다고 하여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다. (두모포는 동호대교 북단에 있던 포구임)
1827년 환신(幻信)이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세웠으며, 1862년에는 인허(印虛)가 조대비<趙大
妃. 신정왕후(神貞王后)>와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의 시주를 받아 극락전을 중창하고 요
사를 수리했다고 한다. 허나 그 시절 조진관은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1808년에 죽었기
때문) 하여 아마도 그의 후손이 시주를 하거나 기록의 오류인 듯 싶다.
1873년에는 성흔(性欣)이 법당과 요사를 중수했으며, 1928년에 선담(仙曇)이 7층석탑을 세웠
다. 그리고 1933년에 돈형과 이경화가 산신각을 중수하고 안성훈이 무량수전을 수리했다.

한참 잘나갔던 시절에는 9동 66칸이 있었다고 하나, 20세기 중반 이후 극락전 주변을 제외하
고 여러 암자로 쪼개졌다. 하여 용운암과 금수암(金水庵), 칠성암(七星庵, 칠성각), 토굴암(
土窟庵), 금보암(金寶庵), 관음암(觀音庵), 대승암(大乘庵), 정수암(淨水庵) 등 8개의 암자가
미타사의 상당수를 이루고 있으며, 미타사 본진을 포함하여 1지붕 9가족의 독특한 모습을 지
니게 되었다.
이들은 각자 법당과 생활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암자를 포함해 건물은 20여 동 정도로 기와집
과 현대식 주택이 두루 섞여있는데, 극락전이 여기서 가장 늙은 집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2017년 10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
유형문화재 417호
)이 있는데, 이 땅에 딱 2개 밖에 없는 윤왕좌(輪王坐) 보살상으로 고려 말
이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랫동안 숨바꼭질을 벌여 아는 이가 거의 없었으나
2016년 초에 대한불교조계종이 전통사찰 전수조사를 벌이면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그가 순수 미타사 토박이인지 중간에 다른 곳에서 넘어왔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1862년에 개금을 했고 그 사실을 비구 영선(永善)이 증명한다는 발원문(發願文)이 있어 19세
기 중반부터 미타사에 있던 것은 확실하며, 현재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금동관음보
살좌상은 친견하기 매우 어려움)
그 외에 19세기 말에 조성된 탱화가 적지 않게 전하고 있는데, 1883년에 제작된 칠성탱이 가
장 늙었으며(금수암에 있음), 1887년에 학허(鶴虛)가 그린 아미타후불탱, 현왕탱, 감로탱, 신
중탱, 지장탱, 1900년에 보암(寶庵)이 그린 신중탱과 아미타후불탱이 있다. 20세기 초에 그려
진 탱화가 더 있으며, 극락전과 금수암, 칠성암, 대승암에 흩어져 있어 알아서 숨바꼭질을 벌
여야 된다. (극락전에 많이 들어있음) 그리고 경내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한 대승암에는 1884
년에 제작된 희귀한 형태의 관음탱이 있으며, 앞서 천불전 앞에 24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실감이 덜하겠지만 옛날에는 절 앞에 한강물이 넝실거리던 두모포가 있고, 절 옆구리
와 뒤쪽에는 금호산과 달맞이봉의 푸른 산줄기와 바위가 펼쳐진 기가 막힌 경승지였다. 이승
만 전 대통령이 자주 찾았던 곳이기도 하며, 도심과 매우 가까운 탓에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
에 가해지면서 그 착했던 풍경은 이제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하철3호선과 동호대교가 육중한 덩치를 내밀며 절의 서쪽 시야를 완전히 앗아갔고, 그로 인
해 절은 다리 그늘에 들어앉은 처지가 되었다. 또한 옥수현대아파트가 경내 동쪽에 주렁주렁
뿌리를 내려 경내를 굽어보면서 동호대교와 아파트 사이에 끼어있는 도시에 완전히 갇힌 고적
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절 주변에는 아직 숲과 형제바위 등의 자연산 바위가 조금은
남아있어 산사(山寺)의 기운은 조금이나마 뿜고는 있다.

▲  연등을 두룬 용운암 대웅전(大雄殿)

▲  미타사 극락전과 종무소 바깥 모습


▲  미타사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미타사의 중심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천불전과 함께 법
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종무소(宗務所)와 독성전, 요사를 주변에 갖추고 있으며 1862
년에 중창된 이후 여러 번 수리를 거쳤다.
극락전 안에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제작된 탱화가 여럿 깃들여져 있어 고색의 기운을
더하고 있으며, 건물 앞에는 1928년에 선담이 세운 7층석탑이 날렵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왜정(倭政) 때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건물을 받치고 있는 석축 기
단(基壇)에는 검은 때가 적지 않아 100년 이상 묵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그는 서방정토가 있다
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의 거처 또한 서쪽을 향하고 있다.
금동 피부를 지닌 아미타불은 현란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
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고 있는데, 그들 뒤로 고색이 다소 깃든 아미타후
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다. 이 후불탱은 1887년에 학허가 그렸다.


▲  극락전 우측에 걸린 현왕탱(賢王幀, 왼쪽 탱화 / 1887년에 '학허'가 그림)

▲  극락전 좌측을 장식하고 있는 지장탱(왼쪽)과 신중탱(오른쪽)
이들 그림은 아미타후불탱과 마찬가지로 1887년에 학허가 그렸다.

▲  극락전 옆구리에 자리한 독성전(獨聖殿)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보금자리로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독성탱과 산신탱이 담겨져 있어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근래 조성된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상이 유리막에 꽁꽁 감싸인 탓에 독성상은
안나오고 내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런 민망할 때가...ㅠㅠ

▲  산신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흰 수염에 붉은 옷을 입은 산신 할배가
호랑이와 동자를 대동하며 단란한
모습을 보여준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깨알같은 보시함


극락전 앞에는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인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닦여져 있었다. 초파일
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항아리에
마련된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를 살짝 냉수마찰을 시키며 나름의 소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는 보시함이 깨알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
부처가 부리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  미타사의 빛바랜 일기장, 1930년 중수기(重修記)
1930년(불기 2957년)에 미타사를 중수하면서 작성된 중수기이다. 중수한 사연과
중수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돈을 낸 이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  미타사 나머지 부분 (대승암)

▲  느티나무 옆에 자리한 현대 주택 스타일의 관음암

미타사의 구조는 대략 이렇다. 정문을 들어서면 천불전이 나오고, 그 맞은편에 용운암과 극락
전이 별도의 담과 집을 두르고 있다. 천불전을 지나면 동네 골목길 같은 길이 펼쳐지고 그 좌
우로 양옥과 기와집이 늘어서 있는데, 관음전을 시작으로 금보암, 칠성암 등이 차례대로 문을
열고 있으며, 그 길의 끝에 대승암이 위치한다.


▲  관음암에 펼쳐진 관불의식의 현장
통통한 아기부처가 떨어지는 햇님을 원망하며 관불의식을 애타게 원하고 있다.

▲  금보암
미타사에서 가장 늙은 보물인 윤왕좌 금동관음보살좌상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를 보고자 금보암 법당을 기웃거리며 새가슴마냥 슬쩍슬쩍 살펴봤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  대승암 (오른쪽 건물은 칠성암)

미타사 골목 끝에는 대승암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막다른 곳으
로 2층 주택과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무량수전을 갖추고 있는데, 발길을 돌릴까 하다가 이곳은
분위기가 어떤가 궁금하여 한번 들어가 보았다.
무량수전 주변을 대충 둘러보고 '별거 없구나~!' 싶어 나가려고 하니 갑자기 주택에서 나이가
지긋한 노(老) 비구니가 나와 구경 잘했냐며 말을 건넨다. 하여 그렇다고 답을 하니 자연히
서로 말이 이어져 이야기꽃이 주렁주렁 피어날 분위기였다. 그래서 초파일 행사를 위해 무량
수전 뜨락에 깔아놓은 의자에 앉아서 일종의 선문답(禪問答)을 하게 되었다.

그는 70대 중반의 비구니로 원래 천주교였다가 20대에 출가를 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법명(
法名)을 묻지 못했음> 금보암의 어른 승려로 미타사와 대승암, 미타사에 깃든 오래된 탱화들,
그리고 불교 관련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기에 여러 법문까지 겯들여서 말이다. 대화 내
용은 벌써부터 퇴화된 머리의 한계상 1/3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궁금한 것을 마구 쏟아
내었고, 그는 그런데로 그것을 잘 담아주었다.
마침 목이 말라서 물을 청하니 그는 '허허허~! 우리 절 거덜내러 왔어여?' 웃으면서 생수 1병
을 공양간 냉장고에서 꺼내주었다. 그리고는 방금 맞춘 거라며 절편이 두둑히 담긴 비닐 1봉
지와 음료수 1병까지 건네주었다. 미타사는 16시 끝 무렵에 도착한 탓에 초파일 인심을 확인
하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금보암에서 그런데로 괜찮은 인심을 받았다.


▲  대승암 무량수전 앞에 차려진 관불의식의 현장
앞서 극락전, 관음전과 달리 코끼리 등 위에 아기부처의 자리를 마련했다.


금보암은 경내 구석에 위치해 있고 시간도 17시 이후라 그곳까지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
다. 대부분 천불전이나 관음암 정도에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물론 초파일 아침부터 오후 3~4
시까지는 그런데로 사람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저녁이 코 앞이니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
도 따분하여 하품을 쏟아낸다.

비구니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벌써 17시 40분이다. 초파일이 저물어감을 매우 아쉬워
하며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은 이제 어찌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일부터 인부를 고용해 모
조리 철거한다고 하며, 이들 연등은 절 창고에 나누어 보관한다고 한다.
그렇게 선문답을 마치고 무량수전 내부를 잠깐 둘러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안에 찍을
것들이 많다며 다 찍고 가라고 그런다.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승암 무량수전

▲  화려한 모습의 무량수전 닫집과 풍만하고 후박하게 생긴 아미타불

무량수전 내부는 노비구니가 이른 데로 정말 볼거리가 많았다. 붉은 지붕의 닫집은 내원궁(內
院宮) 현판을 내밀고 있고, 그 밑에 얼굴 살이 많고 목이 두꺼운 아미타불이 후덕한 표정으로
불단에 앉아 있다.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색채감 넘치는 아미타후불탱이 마치 칼라TV에 나온
만화와 같은 모습으로 생생히 자리해 있고, 불단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온갖 과일들로 불단이
무너질 지경이다.
닫집 지붕 앞에는 극락조(極樂鳥)로 여겨지는 새와 천녀(天女)가 날개를 펄럭이고 있고, 꽃을
비롯한 온갖 무늬들이 그려진 우물천정이 곱게 무량수전의 하늘을 수놓고 있다. 이들 모두 근
래 조성된 것들이라 다들 맨들맨들한데, 여기서 불단 우측 벽과 좌측 벽을 꼭 살펴보자. 그러
면 대승암의 오래된 탱화 2점이 시야에 흔쾌히 아른거릴 것이다.


▲  대승암 관음탱
관세음보살은 그림의 주인공답게 푸른 두광(頭光)과 노란색 신광(身光)을
갖추고 있고, 관세음보살을 향하고 있는 양쪽 협시들은 푸른 두광만을
갖추고 있다.
 

불단 좌측 벽에는 관음탱이 걸려있다. 백의(白衣)를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을 중심으로 지장보
살<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과 용왕으로 보이는 존재를 좌우에 두었다. 이 탱화는 고맙게도
밑에 붉은 화기(畵記)를 두어 조성시기를 알려주고 있는데, 광서(光緖) 10년(1884년) 9월, 북
한산(삼각산) 내원암에서 조성하여 수월도량공화불사(水月道場空花佛事)에 점안봉안하고 종남
산 미타사로 옮겼다. (이후 내용은 너무 흐리게 나와서 내용 파악이 불가함)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 관세음보살의 협시(夾侍)로 나타나는 선재동자(또는 지장보살)와
용왕을 3존도 구도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19세기에 잠깐 나타나는 이 땅에 흔치 않은 구도
의 관음탱으로 지방문화재 자격이 충분하다. 하여 비구니에게 이를 이야기하니 문화재 지정도
좋으나 대신 관리가 더 까다로워진다며 아직은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다고 한다.
요즘 서울의 많은 절에서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 불상까지도 앞다투어 지
방문화재 신청을 하고 있는 추세인데, 미타사는 그런 것에는 딱히 관심은 없는 모양이다.


▲  대승암 칠성탱

불단 우측 벽에는 8폭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칠성탱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앞
서 관음탱처럼 아주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 중앙에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와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싹 몰아넣은 치성광삼존도가 있고, 나머지 7폭에
는 칠성원군(七星元君, 북두칠성)을 하나씩 담았다. 지금까지 많은 칠성탱(칠성도)를 만났지
만 이렇게 생긴 것은 처음 본다.

이렇게 무량수전 내부를 살피니 벌써 18시가 되었다. 그 비구니는 법회(法會) 때 입는 복장을
갖추고 저녁예불을 위해 무량수전으로 들어왔는데, 저녁예불을 구경하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
서 잠시 예불에 참관했다가 슬쩍 그곳을 나왔다. 나중에 다시 인연이 되면 그때 여러 좋은 법
문을 청해볼 생각이다.


▲  칠성암(칠성각)

대승암을 나와 그 밑에 있는 칠성암도 잠시 들렸다. 칠성암 법당에서도 한참 저녁예불이 이루
어지고 있었는데, 대승암과 달리 아줌마 신도들이 제법 자리를 채웠다.

칠성암에는 1899년에 제작된 현왕탱과 신중탱이 있으나 친견은 하지 못했으며, 형제바위와 접
한 곳에는 산신각을 두었다. 형제바위는 넓직한 바위로 예로부터 치성 및 기도처로 널리 쓰였
다.


▲  호화로운 칠성암 법당 내부
법당 닫집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현판이 걸려있고, 닫집을 받치는 기둥에는
금색이 칠해져 있어 호화로움의 격을 제대로 높여준다.


칠성암을 끝으로 미타사 관람을 흔쾌히 마무리를 지었다. 미타사 본진을 비롯하여 용운암, 관
음암, 금보암, 대승암, 칠성암 등 5개의 암자만 살펴보았고, 나머지 토굴암과 정수암, 금수암
은 모두 통과했다. 그들은 딱히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보암의 희귀한 보살상을 친견하지
못해 매우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기대도 별로 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를 볼 인연이 아니기 때
문이다. 그래도 별로 기대하지도 않고 들렸던 대승암에서 뜻밖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 미타사
와의 첫 인연은 그런데로 괜찮았다.

이렇게 하여 옥수동 미타사 초파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가보았고, 그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초파일 인심까지 마음껏 누렸으니 비록 해가 짧아 아
쉽긴 하지만 미련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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