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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2.27 임진강을 건너 찾아간 통한의 땅, 파주 민통선(DMZ) 겨울 나들이 <임진각관광지, 자유의다리, 도라산역, 도라산전망대, 제3땅굴, 통일촌>
  2. 2023.10.08 북한산성 내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노적사~태고사 <태고사 원증국사탑, 원증국사탑비>
  3. 2023.07.26 충신의 매운 얼이여, 용인 능골에 넓게 자리한 정몽주선생묘 <저헌 이석형묘, 충렬서원>
  4. 2023.04.08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비봉산 망해암 <안양예술공원,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5. 2023.01.31 늦겨울 산사 나들이,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정수사 법당, 사기리분청사기요지, 사기리탱자나무, 이건창생가)
  6. 2022.09.04 한여름 산사 나들이, 안성 고성산 운수암 (무한성, 무양성)
  7. 2022.04.07 광주 남한산성 봄맞이 나들이 ~~~ (남한산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연무관, 개원사)
  8. 2022.03.28 고양 최영장군묘, 고양동누리길, 성녕대군묘 역사기행 (대자산, 경안군 및 임창군묘)
  9. 2022.01.02 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 남녀근석, 안양예술공원, 석수동 석실분)
  10. 2021.08.20 한여름 산사 나들이, 남양주 불암산 불암사

임진강을 건너 찾아간 통한의 땅, 파주 민통선(DMZ) 겨울 나들이 <임진각관광지, 자유의다리, 도라산역, 도라산전망대, 제3땅굴, 통일촌>

파주 민통선(DMZ) 나들이


' 파주 민통선(DMZ) 겨울 나들이 '
(임진각, 도라산역, 도라산전망대, 제3땅굴)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휴전선과 개성 지역)

▲  장단역 증기기관차

▲  경의선 도라산역

 



 

겨울 제국(帝國)이 무심히 깊어가던 연말 한복판에 파주(坡州) 민통선(DMZ)을 찾았다. 늦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천하를 지배하면서 연말(年末)과 나이 1살 누적이란 우울한 선물을
뿌려대니 이때만큼은 참 기분이 꿀꿀하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곳은 천하에서 제일 예민
한 곳이자 민족의 통한이 깃든 남북의 경계선, 휴전선과 민통선 구역일 것이다.

민통선은 휴전선 주변에 그어진 금지된 땅으로 이들 지역에 주민들이 살고 있으나 외지인
의 출입은 아주 까다롭다. 그나마 신분증이 있으면 상당수 통과할 수 있지만 파주 임진강
이북(군내면, 진동면, 장단면)과 철원 북부, 화천 풍산리 이북 등은 신분증으로도 어림도
없다. 다만 파주 민통선 관광지는 제한적으로 개방되어 있어 임진각에서 DMZ관광이용권을
구입해 셔틀버스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단체 관광도 가능)



 

♠  남북분단이 빚은 안보관광지의 성지(聖地), 임진강(臨津閣)

▲  임진각

2001년 9월, 문산역에서 50년 가까이 끊겼던 남측 경의선이 임진강역까지 아주 살짝 연장되었
다. 임진강역은 임진각 바로 동쪽으로 연장 기념으로 발행된 기념승차권을 아는 경로를 통해
여러 장 입수하여 임진강역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임진각을 찾은 이후, 한참의 시간이 흐
르고 다시 그곳과 인연을 지었다.

간만에 찾은 임진각은 파주시 문산읍 임진강(臨津江)변에 자리해 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을 사이에 두고 금지된 땅, 민통선과 마주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안보관광지이자
민통선을 코앞에 둔 서울과 매우 가까운 북쪽 한계선으로 1972년 안보관광지로 야심차게 조성
되었다.
임진각은 윗 사진에 나온 건물 이름이지만 그 주변을 한 덩어리로 묶어 임진각(임진각 관광지
)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임진각 국민관광지','임진각 관광지','임진각 평화누리'로 많이 불
리지만 '임진각'이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곳은 태생부터가 남북분단의 비애를 상징하는 안보 관광지라 그에 걸맞는 볼거리를 갖추었
다. 초창기에는 500만 이산가족을 위해 지은 망배단과 자유의다리, 경의선 철도중단점 표석,
종군기자비 등의 여러 조형물, 2000년에 조성된 평화의 종 등 오로지 분단의 매정한 현실을
생각하고 이산가족들의 한을 달래던 안보관광지의 역할만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더 이상 관광
객을 유혹하기가 어려웠다.
하여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3만 평의 대형 잔디 언덕을 닦고 평화누리와 바람개비를
잔뜩 심은 바람의언덕, 음악의언덕 등을 지어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했다. 기존의 남북분단의
한이 깃든 우울한 이미지에서 조금이나마 화사한 이미지로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또한 매년
9월에는 세계평화축전(DMZ평화음악회)을 개최하는데, 이제는 인기가 상당하여 이때만 되면 사
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며, 2020년 9월에는 임진강 허공을 가로질러 금지된 땅으로 아주 살짝
들어가는 임진각평화곤돌라가 개통되었다.

임진각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한식당과 빵집, 커피집, 패스트푸드점, 편의점, 기
념품점, 옥상 전망대를 지니고 있다.

* 임진각관광지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1325-2 일대 (☎ 031-953-4744)


▲  자유의다리에서 바라본 임진각

▲  임진각 옥상 무료전망대 (옥상 전망대)

임진각 옥상 전망대는 무료임을 강조하고 있다. 허나 고작 3층 높이에 불과해 보이는 범위는
그리 넓지는 못하다. 이런 전망대로 감히 돈을 받는다면 이건 염치가 없는 것이지. 그러니 '
무료' 2글자는 좀 뺐으면 좋겠다.

이곳은 초창기부터 전망대로 쓰였는데, 임진각 관광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현장이라 임진
각 일대를 훤히 조망하기에 좋다. 또한 맨눈으로 보는 조망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하고자
망원경을 넉넉히 깔아놓았는데, 그들은 오로지 500원짜리 동전만 밝히는지라 그것을 넣어야만
비로소 못생긴 눈을 뜬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두들겨 패도 깨어나지 않는다. 민통선 방향
인 북쪽과 서쪽에 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금지된 땅인 임진강 너머의 안부를
매우 궁금해 하기 때문이다.
허나 임진강 너머는 모두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겨우 강과 북쪽 땅을 가리고 앉은 산줄
기만 조망할 수 있다. 강 너머 산줄기는 비록 민통선이긴 하지만 엄연한 이 나라의 영토이니
괜히 이북 땅으로 오해하여 설레지 않도록 한다.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쪽 천하 ①
2002년에 개통된 경의선 임진강 철교와 6.25때 끊긴 옛 임진강 철교,
그들 너머로 민통선에 묶인 파주시 군내면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자유의다리와 복원된 장단역 증기기관차 주변, 임진강, 경의선 철교,
파주시 군내면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서남쪽 방향
망배단과 임진강, 그리고 무늬만 남은 파주시 장단면 지역(임진강 너머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임진강 물을 먹고 자라는 마정리 평야 (임진각 동남쪽)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⑤ 북쪽 방향
임진각 주차장과 바람의 언덕, 그리고 저 멀리 통일대교까지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⑥ 동북쪽 방향
평화랜드, 평화누리, 음악의언덕, 자유인터체인지(통일대교 남쪽) 등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⑦ 동쪽 방향
임진강역과 철도중단점 등

▲  이산가족의 한을 먹고 자란 망배단(望拜壇)

임진각 서쪽에는 이산가족의 한과 눈물을 어루만지느라 여념이 없는 망배단이 있다. 임진각이
조성된 이후 500만이 넘는 실향민들은 이곳을 찾아와 잃어버린 땅 북녘에 둔 가족과 부모를
그리워하거나 제사를 지냈다. 특히 설과 한가위(추석)에는 그들을 위해 합동 제단(祭壇)이 설
치되어 수백 명이 단체로 차례를 지냈는데, 설에 지내는 것을 연시제(年始祭), 추석에 지내는
것을 망향제(望鄕祭)라 불렀다.

이렇게 실향민들의 넋두리 현장이 된 이후, 임시 제단이 아닌 완전한 제단을 설치해줄 것을
염원하는 이들이 늘자 파주군과 내무부, 이북5도청이 5억의 돈을 들여 1985년 9월 26일 지금
의 망배단을 닦았다.
120평 대지에 제단과 향로를 두고, 중앙에 망배탑을 세웠으며, 그 좌우에 7개의 화강석 병풍
을 두어 병풍의 역할을 맡겼다. 이 병풍석에는 북쪽의 여러 문화유산과 풍물, 산천의 특징을
복합적으로 표현해 실향민의 상념을 달래주고자 배려했다.

허나 망배단 역시 남북분단이 빚은 통한의 산물이다. 그의 역할과 기능이 계속 이어질수록 이
산가족과 이 땅의 사람들의 한은 더욱 깊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속히 이 땅이 통일되어 망
배단의 역할이 완전히 끝나게 되기를 고대해본다. 그의 생명이 쓸데없이 늘어날수록 한은 정
비례로 늘고 그 생명이 끝날수록 그 한은 반비례가 된다. 하지만 빠른 통일은 힘들 것 같다.
남과 북의 위정자들이 죄다 썩어문드러졌고, 주변 오랑캐들도 우리의 통일을 반기지 않기 때
문이다. 그러니 망배단은 더욱 고개를 들 것이다.


▲  동쪽에서 바라본 자유의다리 - 경기도 지방기념물 162호

망배단 뒷쪽에는 임진각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자유의다리가 있다. 연못에 발을 담군 이 다
리는 임진각과 임진강 사이의 낮은 곳에 세워져 있는데, 원래 임진강 경의선 철교에 임시로
놓인 것을 임진각 관광지 조성 이후, 연못을 닦고 이곳으로 옮겼다.

서울과 신의주(新義州)를 잇던 경의선은 경부선(京釜線)과 더불어 2개의 철길로 이루어진 복
선(複線) 철도이다. 그러다 보니 임진강에 상행, 하행 2개의 철교가 있었으나 6.25때 폭격으
로 파괴되어 다리 기둥만 멀뚱히 남아있었다. 그렇게 다리가 파괴된 1951년 이후 경의선은 완
전 두 동강이 나버리게 된다.
이후 국군이 이곳을 탈환하면서 하행선 철교를 사람과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다리로 보수했
으며, 1953년 남한과 북한이 서로 포로를 교환할 때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나무와 철제를 혼합하여 임시 다리인 지금의 자유의 다리를 놓았다. 다리 부근 노상리 쪽자연
마을의 이름을 따서 '독개다리'라 불렀으나 북한에 잡혀간 포로 1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서
귀환했기 때문에 자유를 찾았다는 의미로 '자유의다리'라 불리게 되었다. 그 시절 포로들은
차량으로 철교까지 와서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넜다.

판문점(板門店)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더불어 6.25의 비극을 상징하는 다리로 썩 유
쾌하지 않은 역할과 의미를 지녔다. 허나 어찌하랴. 시대를 잘못 탔으니 말이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회담 대표들이 이 다리를 건너 왕래를 했으며, 이후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고, 기존 철교는 육중한 다리 기둥만 남아있다.


▲  상판이 나무로 이루어진 자유의다리

자유의다리 길이는 83m, 폭 4.5m, 높이 8m 내외로 나무를 짜맞추어 만들었는데, 힘을 많이 받
는 부분은 철재를 섞어서 사용했다. 임시로 가설된 다리라 솔직히 작품성이나 개성은 없으나
6.25시절 '자유로의 귀환'이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현장으로 그 시절을 나타내는 산증인이
다. 그래서 지방기념물의 적당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임진각에 왔다면 꼭 거닐어야 되는 다리로 임진강과 접한 서쪽은 막혀있다. 하여 다시 제자리
로 돌아와야 되며, 막힌 곳을 넘어가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그 너머는 민통선 구역이기 때문
이다. 막힌 곳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이 땅의 사람들이 달아놓은 온갖 종이와 천, 태극기 등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통일 염원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보여준다. 허나 열기가 아직은 빈약한지
휴전선을 녹이지는 못하고 있다.


▲  자유의다리의 막다른 곳 (임진강 방향)

다리는 물줄기로 끊어진 양쪽을 이어주는 존재이다. 허나 이곳은 한쪽만 열려있고, 다른 한쪽
은 막혀 있어 다리의 기능을 온전히 하지 못한다. 마치 분단된 이 땅의 현실을 상징하듯 말이
다.
다리를 건넌 이들은 여기서 강제로 발길을 돌려야 되니 그 아쉬움을 종이와 천에 담아 봉쇄된
벽에 걸어두었다. 저 막힌 곳을 뚫고 북쪽으로 뻗어 나가야 되거늘 이렇게 70년 이상 묶여있
으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  자유의다리 (막다른 곳에서 바라본 모습)

▲  장단역에서 가져온 낡은 철로

자유의 다리 북쪽에는 낡은 철로가 짧게 재현되어 있다. 이들은 민통선에 갇힌 옛 장단역(長
湍驛) 부근에 버려져 있던 레일과 침목을 가져와서 재활용한 것으로 침목 위에는 경의선의 민
통선 이북 철도역 28개(임진역, 개성역, 사리원역, 평양역, 신의주역 등)의 이름과 임진강역
부터의 운행 거리가 적혀 있어 분단의 아픔과 미답지 경의선 이북(以北) 구간에 대한 호기심
을 크게 자극시킨다.

▲  완전 고철이 되어버린 레일 변경 레버

▲  장단역 부근에서 가져온 레일과 못


▲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재현된 역 플랫폼

정말 오래간만에 발을 들인 임진각에는 눈에 익지 않은 낯설은 존재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중
에는 분단의 지독한 현실과 남북의 해묵은 악감정만큼이나 낡고 빛바랜 존재가 아른거리고 있
었으니 바로 민통선에서 가져온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앞서 언급한 철로였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 - 국가 등록문화재 78호

임진각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한 장단역 증기기관차는 자유의다리와 더불어 임진각의 6.25전쟁
상징물이다.
이 기관차는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최고 속도는 80km, 기관차 길이 15m, 폭 3.5
m, 높이는 4m이다. 산악 지형에 최적화된 화물운송용으로 국군이 38선을 넘어 신나게 북진을
하던 1950년 늦가을 한복판에 군수물자를 바리바리 싣고 개성에서 평양으로 칙칙폭폭 달리던
중, 중공 개잡것들이 북한을 돕고자 전쟁에 불법 개입하면서 황해도 평산군 한포역에서 눈물
을 머금고 바퀴를 돌렸다.
남쪽으로 후진하던 열차는 장단역에 멈춰섰는데, 북한과 중공 잡것들이 개성 부근까지 내려온
상태라 국군과 연합군은 이 열차가 그것들에게 쓰일 것이 우려되어 군수물자만 서둘러 챙기고
폭파시켰다. (당시 이 열차 기관사는 한준기) 이때 증기기관차 1량만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1953년 휴전까지 장단, 파주 지역에서 치열하게 격전이 벌어지면서 다시금 무거운 상처를 입
었다. 그렇게 하여 그의 몸에는 1,020여 개의 총탄 자국이 박혔으며, 바퀴까지 휘어져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2006년 경기도는 이 열차를 주목하고 수풀을 뒤집어 쓴 채 웅크리던 증기기관차와 파편 292점
, 레일 관련 파편 132점을 수습해 화물차를 통해 임진각 보존센터로 옮겼다. 화통에서 자라던
뽕나무도 같이 가져와 그 곁에 심었으며, 녹슨 열차를 복원하고자 포스코에 의뢰하여 철제 문
화재 보존처리 기술과 재정지원을 받아 2년 동안 정밀조사, 구조보강, 녹 제거, 보호코팅제
도포 등을 거쳐 2008년 12월 보존처리가 마무리 되었다.
이후 자유의다리 북쪽에 기관차가 머물 자리를 닦아서 2009년 6월 25일 이곳으로 옮겨 천하에
공개했으며, 이때 장단역 부근에서 가져온 레일도 일부 복원했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 구제 과정을 담은 사진
버려진 기관차를 감싸던 수풀을 모두 제거해 화물차에 싣고 통일대교를 통해
임진각으로 가져오는 과정이 담겨져 있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뒷모습
그의 이름이 '장단역 증기기관차'가 된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바로 장단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경의선의 주요 역이자 장단군(長湍郡)의 관문이던 장단역,
허나 남북분단 앞에 '장단군'이란 고을은 아작나서 사라지고
지도에서도 자취를 감추었다. (파주시에 통합됨)

▲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앞 모습
기관차 옆에 역 플랫폼을 설치하여 '임진각역'으로 삼았다. 물론 무늬만 역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기관차의 보호를 위해 일종의 지붕을 설치하여
비와 바람, 햇살로부터 그를 지킨다.

▲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임진각역 표시판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거처로 지어진 임진각역, 여기서 고려의 옛 도읍인 개성(開城)까지는 불
과 22km, 서울역에서도 겨우 75km로 천안보다도 가까운 거리이다. 허나 남북분단의 현실이 여
기서 개성까지의 체감 거리를 22억km 이상으로 늘려놓아 차라리 지구에서 떨어진 달나라로 가
는 것이 더 속이 편할 정도이다. 그만큼 개성은 우리에게 그림의 떡 같은 존재가 되었다.


▲  세월이 증기기관차 화통에 달아준 훈장, 뽕나무

50년 이상 버려졌던 증기기관차 화통에는 장대한 세월이 심어놓은 뽕나무가 감쪽같이 뿌리를
내렸다. 그 많은 자리 중에 왜 하필이면 연기가 나오는 화통에 둥지를 틀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증기기관차의 애환을 먹으며 어엿한 나무로 자라났다.

2006년 증기기관차를 수습하면서 같이 임진각으로 갖고 나와 이곳에 심었는데, 만약 열차 주
변에 뿌리를 내렸다면 이런 대접까지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제자리에 그냥 두었거나
열차 수습 과정에서 밀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증기기관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화통에 자
리를 닦은 탓에 이렇게 임진각에서 존재감도 드러내고 대우도 받는 것이다. 사람이든 무엇이
든 자리를 잘 잡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자리 하나에 팔자가 싹 바뀌니 말이다.


▲  증기기관차 주변에서 가져온 철길 레일과 파괴된 열차의 파편

▲  장단역 증기기관차 주변에서 바라본 임진강 경의선 철교

▲  통일을 꿈꾸는 평화의 종

장단역 증기기관차 북쪽에는 평화의 종을 머금은 커다란 종각(鐘閣)이 있다. 이 땅의 평화통
일을 염원하는 장소에 어울리게 '평화의 종'을 하나 장만하여 북쪽을 향해 은은한 종소리를
날려보내는데, 1999년에 조성하여 2000년 1월 1일 0시 첫 타종식을 치뤘다.
21세기 첫 날에 선보이는 종에 걸맞게 무게는 21톤이며, 높이 3.4m, 지름 2.2m로 그를 품고
있는 종각은 면적 21평, 높이 12.2m이다.

이 종은 누구든 칠 수 있으나 1회 타종에 10,000원의 돈을 줘야 된다. 타종 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며, 임진각 관리사무소(☎ 031-954-0025)에 신청하면 된다.



 

♠  임진강을 건너 금지된 땅(민통선)에 들어서다. (도라산역)

▲  경의선 남측에 최북단 역, 도라산역(都羅山驛)

임진각에 발을 들이자 제일 먼저 임진각DMZ매표소를 찾았다. 거기서 민통선 관광 신청을 받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면 되는데, 가격은 12,200원(제3땅굴 모노레일 포함, 미
포함시 9,200원)이다.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 요망)
DMZ관광코스는 제3땅굴과 도라산전망대, 통일촌직판장을 둘러보는 코스만 운영되고 있다. (평
일은 1일 10회, 주말 휴일에는 1일 12회 운행 / 매주 월요일과 주중 공휴일, 설날과 추석 당
일에는 운행하지 않음) 예전에는 도라산역도 필수로 경유했으나 지금은 가지 않으며, 허준(許
浚)묘와 해마루촌을 둘러보는 코스도 있으나 현재는 내놓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시간이 넉넉해 앞서 다뤘던 자유의다리와 장단역 증기기관차를 둘러보고 시간에
맞춰 돌아가니 민통선 내부로 우리를 안내해줄 셔틀버스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버스에는 20여 명의 관광객이 탔는데, 양이(洋夷) 여인네 2두와 중공 잡것들 여러 두 등 외국
애들도 여럿 탑승했다. 우리를 비롯한 이 땅의 사람들도 그렇고, 외국 애들도 그렇고 다들 미
지의 땅으로 탐험가는 기분 마냥 들떠있었다. 분명 대한민국 영토가 맞고, 지구의 일부긴 하
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금지된 곳을 가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자 버스는 드디어 출발했다. 임진각 북쪽 자유인터체인지에서 1번 국도(통일로)로
진입하여 임진강에 발을 담군 통일대교로 들어섰다. 다리 북쪽 끝에 이르자 검문소가 민통선
으로 들어가는 차량들을 막으며 삼엄하게 검문을 하고 있었는데, 그 검문의 정도가 대충 보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철저하게 개미새끼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살피는지라 검문 시간
이 꽤 걸렸다.
드디어 우리의 셔틀버스가 검문 받을 차례가 되자 헌병 아저씨가 차에 올라 일일히 신분증을
확인했다. 외국 애들은 여권을 보여주면 된다. 만약 신분을 증명할 어떠한 증서도 없다면 여
기서 강제 하차를 당하거나 강제 회차를 당한다.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참고로 통일대교를 건널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다리 이북에 사는 주민들과 학생, 거
기서 근무하는 군인이나 기타 근무자들, 개성공단 직원과 관계자 밖에 없으며, 차량 역시 신
고된 차량만 통행이 가능하다. 현지 주민이나 군인, 근로자 외에는 임진각에서 민통선 관광을
신청하여 셔틀버스로 이동하는 신분이 확실한 사람, 사전에 수속 절차를 밟은 단체 관광객을
태운 관광버스, 해마루촌이나 통일촌 사람들의 보증을 받은 민박이나 나들이, 업무 손님들은
그때에 한해서만 1회 출입이 가능하다.
그 외에 문산읍내(문산역)에서 대성동과 해마루촌으로 들어가는 파주시내버스 93번 시리즈를
타는 방법도 있으나 이 역시 현지 주민과 군인, 근로자가 아닌 사람은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통일대교 검문소에서 무조건 강제 하차를 당한다. 이 버스는 이 땅의 시내버스 중 민통선을
가장 깊숙히 들어간다. (판문점 직전 대성동까지 운행함)

검문이 끝나자 드디어 검문소를 통과했다. 검문소 주변은 혹시나 모를 북한의 침공에 대비해
그 넓은 도로에 장애물을 잔뜩 깔아놓아 잠시 지그재그로 움직여야 되는데, 그 구간을 지나면
통일대교 북단이다. 이제 임진강을 건너 미지의 땅, 민통선(민북선)에 완전히 들어선 것이다.
여기도 분명 우리나라가 맞는데, 왜 이렇게 낯설기만 한지. 잠시 다른 나라로 순간 이동을 당
한 기분이다. 창 밖 풍경도 이 땅에 흔한 풍경인데 말이다.

다리를 건넌 버스는 통일촌4거리를 지나 북쪽으로 1km 떨어진 3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희망로'
로 들어선다. 이 길로 들어서면 도라산역과 도라산전망대, 개성공단으로 이어지며, 쿨하게 직
진하면 대성동과 판문점으로 이어지나 아쉽게도 그곳은 가지 않는다. 관광 코스에는 없기 때
문이다.
넓게 닦여진 도로(6차선)에 비해 지나가는 차량도 별로 없어 무척 한산한데, 개성공단 검문소
직전에서 좌회전하여 도라산역 주차장에서 바퀴를 멈춘다. 운전사는 여기서 20분을 줄테니 시
간을 맞추라고 그런다. (외국어 방송 서비스나 가는 곳에 대한 설명은 일절 없음)

▲  도라산역과 통일아트 스페이스 현수막

▲  2008년 9월에 개방된 도라산평화공원
안내도

▲  한산한 도라산역 내부 (측면)

▲  도라산역 남북출입사무소

도라산역은 경의선 남측에 북쪽 종점이다. 원래는 개성을 지나 사리원, 평양, 안주, 신의주,
그리고 우리의 옛 땅인 요동반도와 요서, 하북성, 중원대륙까지 달려야 될 철로이지만 남북분
단으로 인해 문산~개성 구간이 끊겨 남과 북이 서로 다른 경의선을 가지게 되었다. 하여 경의
선 남측의 북쪽 종점은 부득불 문산역이 되었고, 임진각에 철도중단점을 설치해 고자가 되버
린 경의선을 위로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끊어진 구간에 드디어 희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문산~도라산
역 구간 복원 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2001년 문산~임진강역 구간이 개통되었고, 2002
년 2월 도라산역까지 완성되면서 경의선은 50여 년 만에 임진강을 넘어 개성 코앞까지 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 개성과도 이어지면서 반백 년 만에 경의선은 하나가 되었다.

이곳 이름이 도라산이 된 것은 부근에 도라산전망대를 품은 도라산이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마지막 제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이 고려에 항복하고 개경(開京)에 입조(入朝)를
했는데, 그는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경주) 방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고 한다. 그래서 도라(都羅)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도라산역은 어지간한 시,군 철도역에 버금가는 규모로 산뜻하게 지어졌는데, 예민한 위치에
자리한 탓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편이며, 그 큰 규모가 무색하게 무지 썰렁하다. 한때 서울
역에서 이곳까지 새마을호 열차가 운행하기도 했고, 서울~도라산, 문산~도라산 통근형 열차도
들어왔었으며, 그들을 대신해 DMZ관광열차도 들어왔다. 심지어 경의중앙선 전철 전동차도 DMZ
관광열차 대신 잠시나마 이곳까지 바퀴를 들인 적이 있었다.
허나 지금은 북한의 태클과 관광열차의 노후화 등으로 열차의 기적소리가 사라진 상태라 무늬
만 남은 철도역 신세가 되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오랫동안 끊어진 경의선을 하나로 이어 장차 통일과 대륙 진출에 대비하며
민통선 안에 근사한 역을 지은 것에 그 의미를 둔 현장이다.

* 도라산역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노상리 556


▲  도라산역 내부 (정면)

▲  통일의 피아노 - 분단의 상징으로 통일을 노래하다.
장소가 장소인만큼 그에 걸맞는 이름을 지닌 피아노. 그는 특이하게 철조망을
개조하여 피아노 현을 엮었다. 그러다 보니 소리는 일반 피아노보다 조금
못한데, 이는 현재 남북의 온전치 못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  통일을 염원하는 온갖 포스터들
우리는 잃어버린 땅이 오지게도 많다. 당장에 북한도 그렇고, 대마도(對馬島)도
그렇고, 만주와 요동, 연해주, 산동반도, 화북 일대, 그리고 왜열도까지
어느 세월에 다 찾지??

▲  도라산역 기공식 때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기념 서명이 담긴 침목

▲  침목에 쓰인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서명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시여'
도라산역 기공식이 열린 역사적인 2000년 9월 18일,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이곳을 찾아 소감을 밝히고 침목에 이렇게 서명을 남겼다.

▲  미국 부시 대통령의 기념 서명이 담긴 침목

2002년 2월 20일 미국 부시가 도라산역을 방문하여 침목에 기념 서명을 남겼다. 한글로 써야
마땅하지만 건방지게도 꼬부랑 알파벳으로 휘갈겨 썼는데, 내용은 '이 철도가 한민족을 이어
주기를 염원합니다' 이런 뜻이다. 허나 현실은 미국 양이(洋夷)나 러시아 양이, 중공 개잡것
들, 왜열도 원숭이들이 합심해서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


▲  미국 부시가 남긴 친필 서명



 

♠  북쪽을 향한 몸부림, 도라산전망대와 제3땅굴

▲  군부대 스타일로 지어진 도라산전망대(도라전망대)

도라산역은 역사(驛舍) 내부만 둘러봤다. 열차를 타는 플랫폼은 문이 잠겨있었고, 주어진 시
간도 20분에 불과해 역 북쪽에 닦여진 도라산 평화공원은 어림도 없었다.

우리의 조급한 셔틀버스는 도라산전망대로 길을 잡았다. 잠깐 희망로를 타다가 서쪽으로 난
조그만 길로 들어서 꼬불꼬불한 언덕 길을 오른다. 길 좌우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해골 마
크가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지뢰가 매설된 곳이다. 이곳 외에도 희망로 서쪽 상당수의 숲과
산도 해골마크가 염통을 건드리는 지뢰 천국이다. 특히 도라산전망대로 올라가는 고갯길 좌우
는 완전 지뢰밭이며, 전망대 주변 숲도 상당수 지뢰밭이다.
그러니 여기서 바퀴를 잘못 놀리는 날에는 완전 지뢰 밥이 되고 마니 완전 공포 특집이 따로
없다. 은근히 쫄깃해지는 염통을 부여잡고 있으니 버스는 무사히 도라산전망대 주차장에 바퀴
를 접으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비록 해발은 낮지만 'S'라인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갯길이라 만약의 실
수를 대비해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쌓인 날에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관람시간을 30분 정도 주었다. 아무래도 북쪽 땅이 바라보이는 곳이라 넉넉히 주
는 모양이다. 주차장에서 내리니 바로 군부대 스타일로 지어진 얼룩무늬의 도라산전망대(도라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은 도라산(156m) 정상부로 전망대 건물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며,
일반 관광객은 그 서쪽에 닦여진 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된다.

도라산전망대는 휴전선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최북단에 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민통선 전
망대로 기존 송악산OP(관측소)가 폐쇄되면서 1986년 이곳에 북한을 바라보는 전망대를 닦아
1987년 1월 속세에 공개되었다.
고려에 항복한 신라의 마지막 군주, 경순왕이 개경에 입조하여 늘 이곳에 올라 고향, 경주를
바라보며 눈물 짓던 곳으로 오늘날 우리들은 여기서 금지된 땅 북한을 바라본다. 아마도 경순
왕이나 우리나 바라보는 마음은 조금은 비슷할 것이다. 그리워하는 마음만큼은 같기 때문이다.

전망대의 규모는 803.31㎡로 관람석 500석, VIP실, 상황실, 주차장(30~40대) 등을 갖추고 있
으며, 이곳이 개성을 비롯한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현장이라 개성공단과 북한의 선전용 마을
인 기정동, 거대한 규모의 김일성 동상, 개성 동부와 송악산(松嶽山) 등이 바라보인다고 한다.
허나 우리가 갔을 때는 날씨도 조금 흐렸고 거기에 중공산 미세먼지까지 요란하게 점을 찍으
면서 겨우 개성 동부 지역만 확인했다.
사람들의 시력 한계를 극복하고자 망원경 34대도 깔려있는데, 임진각 옥상 전망대처럼 500원
을 요구한다. (일부는 무료임)
 
* 도라산전망대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 390-2 (제3땅굴로 308)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개성 동부 지역과 개성공단 방향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개성 동부 지역과 개성공단 방향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개성 남부 지역과 개성공단 방향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파주 장단면과 개성 남부 지역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⑤ 파주 장단면 지역 (남측 민통선)
개성공단 남북출입사무소(검문소)에서 개성공단, 개성으로 이어지는 도로(희망로)가
바라보인다. 예전에는 판문점을 거쳐 북으로 갔으나 개성공단 개발로 인해
새로운 길이 생긴 것이다. 허나 아무나 갈 수 없는 콧대 높은 도로이니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도로에 불과하다.

▲  도라산전망대 앞 휴전선 구역

도라산전망대는 2018년 10월에 기존 전망대(군부대 스타일로 지어진 건물)에서 약간 북쪽으로
신축 이전되었다.

허나 우리에게는 이런 콘크리트 전망대는 필요 없다. 그까짓 기정동과 개성 일부 지역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서로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이런 것에 경쟁하지 말고 속히 통일이 되어
서로를 완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이런 소모적인 것들에 치중해야 되
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북쪽 땅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닌 '한때 우리에게도 이런 우울한 시절이
있었구나' 추억에만 머무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  DMZ마크를 내민 제3땅굴 입구

보면 볼수록 한숨만 나오는 북쪽 땅을 20여 분 바라보고 다시 셔틀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크
게 긴장을 하며 마치 뱀 허리에 올라탄 듯 도라산을 조심조심 내려와 북쪽에 자리한 제3땅굴
로 이동했다.
제3땅굴은 땅굴 파기 전문인 북한이 남침용으로 뚫은 4개의 땅굴 중 하나이다. 3번째로 발견
되어 제3땅굴이란 단순한 이름을 달게 되었는데, 문산에서 12km, 서울에서 불과 52km로 서울
에서 가장 가까운 남침용 땅굴이다. 만약 발견되지 못했다면 자칫 상당히 예민한 상황을 맞았
을지도 모르겠다.

땅굴이 발견된 경위는 대략 이러하다. 1974년 북한에서 남침 땅굴 측량기사로 일했던 김부성
이 귀순을 했다. 그는 판문점 근처에 땅굴이 있음을 알려 주어 1975년부터 주변을 샅샅이 뒤
졌으나 3년이 넘게 발견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8년 6월 10일, 시추공 중 1개가 폭발하면서 역갱도 굴착 공사를 벌여 10월 17일
에 판문점 남쪽 4km 지점에서 땅굴을 발견했다. 땅굴 폭은 2m, 높이 2m, 깊이 73m, 총길이는
1,635m로 휴전선에서 무려 435m나 남쪽으로 들어왔으며, 임진각에서 4km, 통일촌 민가에서 겨
우 3.5km로 1시간에 최대 3만의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

땅굴이 발견되면서 휴전선 남쪽 170m 지점을 철저하게 틀어막았는데, 북한은 엉뚱하게도 남한
이 판 땅굴이라 주장하며 소심하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허나 땅굴을 뚫을 때 폭파 흔적이 남
쪽을 향해 있어 그들의 오리발을 무색하며 만들었다.
이후 땅굴 내부를 손질하여 2002년 5월 31일 민통선 관광지의 하나로 세상에 내놓았으며, 미
니열차인 평화호(모노레일)를 바깥에서 땅굴 내부까지 깔았다. 허나 수용 인원에 한계가 있어
서 2004년 지름 3m의 도보 관람로를 따로 닦았다. 또한 DMZ영상관과 상징조형물, 기념품과 간
식거리를 파는 판매장을 설치해 땅굴을 보조한다.

북한이 우리에게 던진 불쾌한 선물인 제3땅굴, 허나 이제는 DMZ명소의 백미이자 파주시의 꿀
단지로 부상하여 파주시와 국방부의 애지중지가 대단하다. 매일 수백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니
말이다. 불쾌한 땅굴이 돈을 부르는 황금 땅굴이 된 것이다.

* 제3땅굴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 1082-1 (제3땅굴로 210-358)


▲  휴전선을 435m나 돌파한 제3땅굴의 위엄

▲  제3땅굴 지하로 인도하는 평화호 모노레일

제3땅굴에서는 무려 1시간에 관람시간을 주었다. 아무래도 파주 DMZ관광지의 갑(甲)과 같은
존재이고 땅굴 내부까지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이 있어서 넉넉히 준 것이다.

이곳은 모노레일 평화호를 타고 땅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 이전에 부근에 마련된 사물함
에 속세에서 가져온 가방과 카메라 등의 소지품을 반드시 넣어두고 가야 된다. 신분증과 지갑
, 핸드폰 정도만 지참이 가능하여 부득이 모든 것을 그곳에 털어넣고 열쇠로 잠구었다. (열쇠
는 비치되어 있음) 그런 다음 별도로 마련된 안전모를 쓰고 평화호에 탑승한다.
안전모 같은 경우는 땅굴 높이가 2m라고 하지만 북쪽 인간들이 오로지 남침에 눈이 어두워 콩
을 볶듯이 판 것이기 때문에 불규칙한 높이가 많다. 하여 땅굴 내부를 거닐다 보면 여러 차례
땅굴 천정과 부딪친다. 그러니 소중한 머리를 위해서 안전모 착용은 필수이다.
또한 땅굴 내부는 사진 촬영이 통제되어 있으며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다. 그만큼 예민한 곳이
며, 휴전선 코 앞까지 들어간다.

땅굴에 대한 호기심을 품은 사람들을 가득 태운 평화호는 슬슬 기지개를 켜며 지하를 향해 느
릿느릿 이동했다. 속도는 사람 걸음과 비슷하거나 조금 느린 정도로 평화호가 들어가는 터널
은 동굴을 관광지로 닦으면서 남측에서 판 것이다. 그렇게 몇 분을 들어가면 드디어 제3땅굴
승강장에 이르고 여기서 땅굴에 임하면 된다.

속세에 개방된 땅굴 구간은 265m로 휴전선을 불과 170m 앞둔 곳까지 들어갈 수 있다. 더 들어
가고 싶지만 그곳은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고 그 너머는 세상도 눈을 돌린 공간이라 눈물을 머
금고 발길을 돌려야 된다. 땅굴 높이가 다소 들쭉날쭉하여 심심치 않게 안전모와 천장이 부딪
치는 소리가 났으며, 동굴 통로는 2명이 지나다닐 정도의 폭이라 천정만 조금 조심하면 별무
리는 없다.
그렇게 휴전선 앞까지 갔다가 돌아나오는데, 여기서 많은 이들이 아쉬워한다. 말로만 듣던 휴
전선이 코 앞이라니 저기만 넘으면 북한인데, 왜 우리는 가지를 못할까? 한숨은 커져간다. 외
국 잡것들이야 남의 나라 이야기라 상관없는 표정이지만 이 땅의 민중들의 표정은 그렇지가
않다.
땅굴 내부는 지하라 시원하며, 딱히 볼거리는 없다. 다만 평화호 타는 곳 부근에 샘터가 있는
데, 수질은 괜찮은 편이라 1모금 마셔보았다. 민통선 땅굴에서 섭취한 물 맛은 속세에서 마시
는 약수 맛과 비슷한 것 같으니 바깥 세상과 이곳이 같은 나라 땅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땅굴에서 나올 때는 걸어나올까 했으나 마침 평화호가 들어와 관광객을 쏟아내고 있어서 다시
그의 신세를 지며 바깥으로 나왔다. 다시 햇살을 보니 눈이 부시면서도 지옥에서 급히 나온
듯 너무 반가웠다. 아직 20분 정도의 시간이 있어서 땅굴 수식용으로 지어진 DMZ영상관을 둘
러보았다.
시간 관계상 영상물은 시청하지 않았고, 그곳에 전시된 제3땅굴과 휴전선 관련 전시유물, 디
오라마, 사진, 안내문만 둘러보고 나왔다. 그러니 시간이 거의 딱 맞는다.


▲  제3땅굴을 파는 북한 군인 디오라마 - 역시 땅굴의 귀재들

▲  파괴된 장단면사무소 건물에서 가져온 타일들

장단군(長湍郡)에 속해있던 장단면사무소는 6.25를 겪으면서 건물이 모두 파괴되어 겨우 지붕
만 남아있다. 그 자리 또한 민통선에 철저히 묶이면서 세상 뇌리 속에 잊혀진지 오래이다. 장
단군, 장단면이란 지명까지 더불어...


▲  판문점 모형도

6.25시절 여기서 남북이 휴전 협정을 맺었고, 이후로도 쭉 남북의 대화 창구로써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땅이 통일되는 그 순간까지 판문점의 존재는 미치도록 이 땅의 한을 키울 것이다.
제발 모형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면서..


▲  1968년 1.21사태 때 체포된 김신조
31명으로 이루어진 공비 패거리 중, 유일하게 체포되었다. (29명 사살, 1명 도망)

▲  옛 경의선 측량기준석 (2003년 7월에 발견됨)

▲  옛 경의선의 흔적들 (볼트, 레일, 스파이크판, 석탄 등)
2002~2003년에 수습된 옛 경의선의 아련한 흔적들이다. (석탄은 장단역에서 수습됨)

▲  통일 염원 조형물
쪼개진 2개의 덩어리를 하나로 합치고자 하는
염원이 깃들여져 있다. 아직도 저 염원과
시도는 현재진행형~~

▲  제3땅굴을 수식하는 DMZ영상관


제3땅굴과 DMZ영상관을 둘러보고 아직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서 기념품 판매점으로 넘어가
과자와 음료수를 섭취했다. 그렇게 파주시 재정에 약간 도움을 준 다음, 시간에 맞춰 셔틀버
스에 올랐다.

우리의 버스는 도라산과 제3땅굴을 모두 뒤로 한 채,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대성동과 해마루
촌까지 모조리 둘러보고 싶지만 현실은 그러지를 못한다. 언제쯤이나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
을까? 그렇다고 버스에서 몰래 이탈하여 개인 행동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곳은 민통선이라
인원 점검이 철저하며 만약 이탈했을 경우 군인들의 수색 표적이 된다. 또한 월북 시도는 하
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땅의 현실도 시궁창이지만 저 북쪽은 더 시궁창이다. 게다가 곳곳에
지뢰밭이 도사리고 있으니 산 속을 잘못 헤매다가는 정말 큰일 난다.

버스는 통일촌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마지막 행선지인 통일촌 직판장 앞에서 그 육중한 바퀴
를 멈춰선다. 이곳은 백련리로 군내면 장단출장소 북쪽이다. 직판장 주변에는 백련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직판장이란 이름 그대로 민통선 주민들이 생산한 장단콩과 온갖 채소 등을
판매하고 있으며, 기타 간식류와 음식(콩요리 중심)도 팔고 있다. 버스가 이곳에 들른 것은
여기서 지역 특산품이나 간식 등의 소비 행위를 하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주어진 시간은 10분 정도라 마을 구경을 할 시간도 없다. 마치 다른 나라의 마을 같
은 그러나 이 땅의 흔한 시골 풍경을 지닌 백련리와 장단출장소까지 둘러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마을을 아주 조금 둘러보긴 했으나 시간 제약이 발목을 잡고 외지인이 함부로 돌아댕
기면 안되는 곳이라 새가슴처럼 바로 돌아와 음료수 하나 사먹고 차에 오른다.

참고로 파주 민통선 지역에 지역 주민들이 살고 있다. 집과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데, 나라의
예민한 곳에 살고 있어 제약은 많다. 허나 그만큼 혜택도 적지 않다. 또한 일정한 인구 수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전입이 불가능하며, 전출하는 가구가 있어야 그 수만큼 전입
이 가능하다. 그러니 은근히 특별한 동네이다. 허나 휴전선이 코 앞이니 늘 북한의 도발이라
는 폭탄을 안고 살아야 된다.

통일촌직판장을 끝으로 파주 DMZ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통일대교를 건널 때는 별 다른 검
문 절차 없이 통과시켜 주었고 다시 임진각으로 돌아왔다. 마치 오후 낮잠에서 꿈을 꾼 듯 끝
이 난 것이다.

임진각으로 돌아와 앞서 살피지 못한 바람의 언덕을 가고자 했으나 후배가 힘들다며 반대 의
사를 내세워 별 수 없이 주변만 둘러보고 임진강역으로 나왔다. 경의중앙선의 문산~임진강역
셔틀 전철을 탈까 했으나 평일은 2회, 휴일은 4회 밖에 다니지 않아서 역 앞에 있는 버스 정
류장에서 파주마을버스 058번을 타고 문산읍으로 나왔다.

058번은 노선 특성상 운천리와 장산리 일대를 정신 없이 강제투어를 시켜주고 문산읍내에 우
리를 내려놓는다. 이렇게 하여 연말 파주 민통선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임진각에 있는 경의선 철도 중단점과 증기기관차

임진각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경의선 철도 중단점을 세웠다. 허나 2001년까지 경의선 남측 종
점은 문산역으로 여기보다 더 남쪽이며, 2001년 이곳까지 개통되면서 실질적인 중단점이 되었
으나 2002년 이후 임진강 너머로 이어지면서 중단점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허나 열차를 타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곳의 북쪽 중단점이 이곳(임진강역)이니 그 의미로 질긴 목숨을 이어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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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2월 1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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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내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노적사~태고사 <태고사 원증국사탑, 원증국사탑비>

북한산 노적사, 태고사



' 북한산 산사 나들이 (노적사, 태고사) '
태고사 원증국사탑
 태고사 원증국사탑
 



 

북한산(삼각산)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명성이 높은 서울과 경기도의 주요 도시인 고양(高陽
)을 끼고 있는 수도권 제일의 자연 공원이자 이 땅의 주요 국립공원이다. 번잡한 지역에 누워
있다 보니 찾는 이가 실로 엄청나 1㎢당 탐방밀도가 무려 5만 명에 이른다. 하여 탐방밀도 부
분 세계 기네스북 1위를 거머쥐고 있다.
서울의 든든한 진산(鎭山)이자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고 있
는데, 봄을 몰아낸 여름이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오래간만에 북한산
(삼각산)을 찾았다.

오전 11시에 연신내역(3,6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
을 타고 북한산성입구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버스는 북한산과 도봉산(道峯山), 노고산(老姑山
) 산꾼들로 완전 짐짝수송을 이루었는데, 버스는 간신히 바퀴를 움직이며 시내를 빠져나와 북
한산성입구에서 승객 60% 이상을 쏟아낸다.

북한산성입구에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북한산성계곡(북한천) 하류를 따라 수구문(水口門)
터와 서암사(西巖寺)터를 지나 옛 북한동(北漢洞) 마을에 이르렀다.
북한동은 북한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둥지를 튼 산골 마을로 북한산
성이 조성되면서 형성되었다. 주로 군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으며, 마을은 북한동역사관에
서 멀리 태고사 근처까지 형성되었는데, 1930년대에는 100호 이상의 집이 존재했다.

1910년 이후, 왜정(倭政)의 고의적인 북한산성 관리 소홀과 잇따른 자연재해로 북한산성과 마
을이 크게 훼손되자 산성 안에 둥지를 틀던 5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산성(山城) 내부를 관리
했다. 당시 주민들은 나무를 땔감으로 팔거나 과실을 팔며 생계를 꾸렸는데 이중 살구와 감은
북한동의 특산품이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인근 사람들이 산성 안으로 많이 피신을 했다. 하지만 북한군이 1개 연대
를 보내 숲을 죄다 불태우며 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전쟁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
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주민들의 궁핍함을 보고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시키기로 했다. 처음에
는 대성장, 팔경정 두 곳만 식당 허가가 났으나 주민들의 항의로 인해 1974년 모든 집에 식당
허가를 내주게 된다. 그래서 식당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등산물품 가게도 생겨났다.

이후 마을은 등산/탐방객을 상대로 음식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는데, 그들의 무분별한 장사로
인해 계곡이 오염되고 자연이 훼손되는 등, 계속 말썽이 생기자 골머리를 앓은 행정당국은 북
한산의 자연 보전과 계속되는 말썽을 해소하고자 마을을 폭파시키기로 결정, 2001년부터 마을
이주 사업을 단행했다.
처음에는 반대도 많았지만 보상도 심심치 않게 해주었고 북한산성 밑에 자리까지 제공해 주면
서 북한동 마을 55가구는 모두 그곳으로 이주했다. 마을 주민들이 이렇게 고향을 떠나자 북한
산성계곡의 옥의 티를 선사했던 집들을 죄다 부시고 주변 생태계를 복원했으며, 옛 마을의 중
심지에 '북한동역사관'을 세워 세월의 저편으로 흘러간 북한동의 역사를 짧게 다루고 있다.

솔직히 마을이 없어지니 좀 허전하기는 하나 마을로 인해 크게 망가졌던 자연 경관이 활짝 피
어나니 분위기는 더 밝아진 것 같다. 대신 먹을 거리는 북한산성입구나 시내에서 미리 사와야
되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그거야 조금 부지런을 떨면 된다. 솔직히 마을은 음식과 간식 가격이
비쌌다. 그 돈으로 시내에서 2배의 양을 사오는 것이 더 이득이다.


▲  북한동 향나무 (나이 약 400년)
옛 북한동마을의 수호목으로 그에게 병이 생기면 마을 전체에 병이 생긴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의 지극정성이 대단했다. 허나 마을은 북한산(삼각산) 생태계를
위해 모두 사라지고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성밖으로 나가면서
아무도 없는 마을을 홀로 지키고 있다.



 

♠  노적봉 밑에 둥지를 튼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
~ 북한산 노적사(露積寺)


노적봉이 더없이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고
만고의 청풍이 노적봉을 불어와 맑고 밝은 기운 돌아오는구나
산영루를 던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이라 새겨져 있어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시로 진국사는
지금의 노적사이다.


북한동역사관에서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30분 정도 올라가면 중성문(中城門)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 3분 정도 가면 왼쪽에 노적사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을 내밀고, 그 길을 오르면 노적
봉(露積峰) 밑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노적사가 모습을 비춘다.

노적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712년 성능(性能)이 창건하여 진국사(鎭國寺)라 했다. 성
능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숙종(肅宗) 때 승군(僧軍)의 대장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에 임명되어 북한산성 보수공사에 참여했다. 그는 산성 안에 있는 중흥사(重興寺)와 태고사를
보수하고, 노적사<현재 상운사(祥雲寺)>와 서암사(西巖寺) 등 절 10곳을 지어 북한산 승병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또한 중흥사와 태고사에 30년간 머물면서 북한산성과 북한산(삼각산)에 있는 절, 유적, 행궁
(行宮), 관청, 기타 여러 시설 등을 정리한 '북한지(北漢誌)'를 작성하기도 했다.

창건 이후 이렇다 할 내력(來歷)도 남기지 못한 채, 감쪽 같이 사라졌는데, 아마도 중흥사(重
興寺)와 국녕사(國寧寺)가 사라진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에 화재나 자연재해로 강제로 문
을 닫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터만 아련히 남아있던 것을 1960년 승려 무위(無爲)가 여러
신도의 도움으로 절을 다시 짓고 노적봉 밑에 있다는 뜻에서 노적사라 하였다.

1977년 현 주지인 종후가 재정을 털어 절을 크게 확장시켜 삼성각과 나한전, 종각, 요사 등을
새로 세웠으며, 대웅전을 크게 손질했다. 2000년 12월에는 노적사의 오랜 내력이 인정되어
통사찰 201호
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으나, 2002년 6월 불의에 화재로 종각과 요사가 전소되
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6년 4월 종후가 히말라야산맥에 묻힌 네팔 팔탄타쉬 지하초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기증받았는데, 2009년 극락전 뒤에 3층사리탑을 세우고, 극락전을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갈았
다. 그리고 삼보당 2층을 대웅전으로 삼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나한전, 대웅전, 삼성각, 동인당 등 5~6동의 건
물이 있으며, 고색의 때는 진작에 녹아내려 소장문화재는 없다. 다만 조선 후기에 조성된 돌
사자상이 있으니 잘 찾아보기 바란다.
절 배후에는 인수봉을 닮은 노적봉이 든든한 모습으로 절을 지켜주고 있으며, 인근 태고사와
비슷하게 작고 조촐한 산사로 인적도 별로 없어 조용하고 아늑하다.
 
* 노적사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331 (대서문길 311-35 ☎ 02-353-5016)


 노적사 적멸보궁(寂滅寶宮)

경내로 들어서면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梵鍾)의 보금자리 범종
각(梵鍾閣)이 나오고, 그 범종각을 지나면 흙이 곱게 입힌 뜨락이 나온다. 그 뜨락 옆에는 2
층 건물인 대웅전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정면에 보이는 계단 끝에는 적멸보궁이 서쪽을 굽
어본다.

이곳의 법당인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多包)계 팔작지붕 건물로 1960년에 지
어졌다. 허나 공간이 좁고 퇴락하여 1986년에 증축해 지금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으며, 처음에
는 대웅전으로 삼았으나, 2007년 극락전으로 현판을 갈았고, 2009년에는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러니까 50년 동안 이름을 2번이나 바꾼 셈이다.

극락전 시절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아우른 아미타3존상으로 불단을 구성했으나 적멸보궁으로 바뀌면서
그들을 대웅전으로 옮기고 불단 뒤쪽에 창을 내어 진신사리가 담긴 3층사리탑이 보이게끔 했
다. 물론 적멸보궁이니 불단에는 그 흔한 불상도 없다. 그 외에 1987년에 그려진 지장탱, 신
중탱, 아미타후불탱 등이 내부를 구석구석 수식한다.


▲  노적사 대웅전(大雄殿)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원래 삼보당(三寶堂)이라 불렸으
나, 2층을 새롭게 손질하여 대웅전으로 삼았으며, 극락전에 있던 불상을 옮겨왔다. 1층은 승
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으며, 지하1층에는 공양간이 자리해 있다.


▲  노적사 동인당(東印堂)
예전 지장전(地藏殿)으로 지금은 요사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노적사 나한전(羅漢殿)

적멸보궁의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나한전이 나온다. 나한전은 부처와 그의 열성 제자인 나
한(羅漢)을 봉안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 그 자리에는 뒤쪽으로 물러난
삼성각이 있었다.
그러다가 2000년에 철거하여 나한전을 새로 지었으며, 건물 외벽을 수식하는 벽화는 2002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밑에는 2개의 샘터가 있는데, 노적봉이 아낌없이 베푼 샘물이 콸콸 쏟아
져 나와 중생의 목마름을 쿨하게 해결해준다.
(왼쪽 샘물은 일반인들도 마실 수 있으나, 오른쪽 샘물은 예불용으로 아무나 마실 수 없음)


▲  나한전 내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나한상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나한전 뜨락에 자리한 약사여래좌상과 지구를 든 석조미륵불

▲  성림당 월산대종사(聖林堂 月山大宗師) 기념비와 3층사리탑

나한전 뜨락 우측에는 약사여래좌상과 석조미륵불이, 좌측에는 3층사리탑과 근래에 지어진 월
산대종사 기념비가 자리한다.
석조미륵불(彌勒佛)은 원래 3층사리탑 옆에 있었으나 월산 대종사 기념비를 세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절을 빛낸 월산이 석조미륵불보다 우선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손에는 동그
란 무엇인가가 들려져 있는데,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지구를 위
/아래로 구분하는 경도와 위도가 나와있으며, 중간에 우리나라가 선명하게 새겨져 눈길을 끈
다. 마치 선서를 하듯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모습이 충주 미륵리절터에 있는 미륵리석불
(彌勒里石佛)을 연상케 한다.

 ◀  석가여래의 진신사리가 담긴 3층사리탑
별다른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노적사의 새
로운 명물로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겨져 있다.

노적사 주지인 종후는 2006년 네팔에 있는 팔
탄타쉬 지하초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선물 받았다. 그래서 2009년에 3층석탑을 만
들어 사리를 봉안했고, 그 곁에 진신사리 기
증 증명서를 세웠다.
탑의 모습은 불국사의 석가탑(釋迦塔)과 닮은
꼴로 근래 들어 이 땅에 부처의 사리를 담은
절이 크게 늘어나고 있으니 과연 어디까지가
진품인지 모르겠다.


▲  인공 바위로 이루어진 노적사 스타일의 삼성각(三聖閣)

나한전에 이르면 '경내는 이게 전부구나, 더 이상 없겠지' 싶은 마음에 발길을 돌리기가 쉽다
. 바로 나한전이 뒤를 고스란히 가렸기 때문이다. 또한 언뜻 보아도 그 뒤에는 아무 것도 없
을 것처럼 보인다. 허나 그것은 함정이다. 나한전 옆구리를 지나면 그 뒤쪽에 전혀 불전(佛殿
)으로 보이지 않는 인공 바위로 울퉁불퉁 조성된 공간이 나온다. 얼핏 봐서는 무슨 창고가 아
닐까 싶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에 '삼성각'이란 현판이 걸려있어 건물의 정체를 두고 아리
송에 빠진 중생을 깨우치게 한다.

예전에는 천막으로 크게 둘러 정말 창고나 실내 체육공간처럼 보였는데, 돈 좀 쏟아부었는지
천막을 걷어내고 인조 돌을 더덕더덕 붙여 놀이공원의 인공폭포나 놀이시설처럼 정말 어색하
게도 만들어버렸다. 차라리 조촐하게 작은 기와집을 올려 삼성각으로 삼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은데, 전혀 불전의 품격이 보이질 않는다.

원래 삼성각은 나한전 자리에 1963년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동인당으로 바뀐 지장전과 비
슷한 규모를 지녔다. 허나 그런 삼성각을 부시고 나한전을 지었는데, 그 뒤쪽에 대충 천막으
로 자리를 닦고 삼성각으로 삼았으며, 근래에 인조 돌을 덧붙여 부조화의 공간이 되버린 것이
다.


▲  석굴 같은 분위기의 삼성각 내부

삼성각 내부는 없어 보일 것 같은 외부와 달리 넓고 아늑하다. 불단에는 칠성(七星)을 비롯해
독성(獨聖, 나반존자)과 산신(山神)이 석상으로 자리해 있으며, 그들 뒤에는 커다란 돌이 비
스듬히 자리해 있는데, 그 모습이 그들을 덮칠듯 아찔해 보인다. 허공에는 중생의 소망을 한
아름씩 담은 고운 연등들이 환상적인 색채를 내며 내부를 환하게 비춘다.


▲  노적사에서 섭취한 점심공양의 위엄
흰쌀밥에 갖은 나물과 고추장을 넣고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절 공양밥이다.
밥과 함께 국도 제공되었는데, 맛도 괜찮고 노적사의 인심도 훈훈하여
배불리 먹고 갈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떡도 얻을 수 있음
(점심시간은 12~13시, 일반인도 공양 가능)



 

♠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 세운 고려 후기 고찰
북한산 태고사(太古寺)

▲  태고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암자에 내가 살지만 나도 잘 몰라
깊으디 깊고 빽빽하지만 옹색하지 않아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있을 리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 보우대사가 태고사에 머물며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수


노적사를 둘러보고 다시 북한산성계곡으로 나와서 20분 정도 오르면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태고사가 마중한다.

태고사는 1341년 원증국사(圓證國師 = 보우대사)가 창건하여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이
후 4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으며, 18세기 중반인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정비
하고 산성 안에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당시 태고사
에는 경서(經書) 출판용 목판 5,700여 매와 활자 11두(斗), 그리고 화약용 흑탄 1,600여 석이
비축되었으며, 절의 규모는 131칸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
허나 1915년 대홍수와 산사태,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4년 청암(靑岩)이 중창하
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절의 규모가 매우 조촐하여 거의 산중암자의 분위기가 진
하게 풍긴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도 700년 가까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한 북한산성 내부에
몇 안되는 전통 토박이 사찰로 자부심이 강하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위시해 산신각과 요사 등, 3~4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원증국
사탑비와 원증국사탑 등 국가 보물을 무려 2점이나 간직하고 있어 이곳의 높은 명성을 알려
준다. 그 외에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산신각 부근에 있고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늙은 귀룽나
무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차량도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깊숙한 산중이라 등산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접근이 가능한 곳이
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가까우며. 노적사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이라 산새도 감히 넘어오기 힘들고, 제아무리 번뇌라
고 해도 산이 깊고 험해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이다. 그윽한 풍경소리만이 적막에 잠긴
경내를 잔잔히 쓰다듬어주며 속세의 무거운 짐과 번뇌를 북한산성계곡에 모조리 내던지고 며
칠 조용히 안기고 싶은 그런 곳이다.

* 태고사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5 (대서문길 406 ☎ 031-384-5589)


▲  녹음(綠陰)에 잠긴 태고사 귀룽나무 ~ 고양시 보호수 17호

태고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훤칠한 키의 귀룽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귀룽나무는 이 땅
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매년 3월 말이나 4월 초에 나무 전체에 새하얀 꽃이 가득 피어난다.
태고사에 무수히 발을 들였지만 정작 하얀 꽃으로 치장된 그의 모습은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그 꽃의 자태가 마치 하얀 눈과 비슷하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약 170년, 높이 23m, 허리둘레는 2.3m에 이르며, 성하(盛夏)의 길목이라 꽃 대
신 푸른 옷을 걸치고 중생을 맞는다.


▲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를 품은 비각(碑閣)

▲  태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 보물 611호

대웅보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높다란 비각이 있는데 그 안에 태고사 제일의 보물
인 원증국사탑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둥지를 텄다. <태고사 대웅보전은 서향(西向)임>

탑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고려 후기를 주름잡던 고승(高僧)으로 1301년 귀족 가문인 홍주
홍씨(洪州洪氏) 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홍연(洪延), 어미는 정씨로 13살에 양주 회
암사(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도했다.
1325년 승과(僧科)의 하나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선수행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고 용
문산 상원사(上院寺)를 거쳐 감로사(甘露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했다. 그 이후 북한산(삼각
산) 중흥사에 들어왔고, 1341년 절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머물며 그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
歌)를 
지었다.
1346년 원나라(몽골)로 넘어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원나라 제왕인 순제(順帝)의 초청을 받아 반야경(般若經)을 강설하기도 했다.

1348년 귀국하여 광주(廣州)에 머물며 일가 친척을 죄다 이곳으로 불러 살게 했는데, 광주를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광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56년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에 머물며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 고려 불교계의 1인자가
되었으며, 이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을 주장했다.
허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신뢰하면서 보우대사를 멀리하게 되는데 신돈은 그를 심하게 견
제하여 속리산(俗離山) 암자에 연금까지 시켰다.
신돈이 사라진 이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려 했으나 자신을 박대했던 감정 때문인지 병
을 이유로 거절했다.

1381년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우왕(禑王)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임명되었으
며, 1382년 소설사(小雪寺)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81세, 법랍(法臘) 68세이다. 우왕은
그에게 원증(圓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웅장한 멋이 풍기는 이 탑비는 13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은 고
려 3은(三隱)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이색(李穡)이 썼으며, 거북 등의 귀부(龜趺)를 초석으로
삼아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를 이수(螭首)로 마무리 지었다.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높다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1980년에 복원했다. 참고로 원증국사의 탑과 탑비는 그와 인연이 깊던 용문산 사나사(舍
那寺)에도 있으며, 그의 사리를 2등분하여 태고사와 사나사에 안치했다.
<사나사 글 보러가기 ☞
글보러 가기>


▲  원증국사탑비의 귀부(龜趺)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이 씨익 밝아 보인다. 그의 왕눈이 눈과
세모난 코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배여 있으나 그의
미소 만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몸뚱이에는 푸른 이끼들이 자리도
가리지 않고 싹을 피워 귀부의 건강을 조금 위협한다.

▲  원증국사탑비의 머리 부분
비석의 머리인 이수에는 구름 무늬가 얇게 새겨져 비석의 미를 한층 끌어 올린다.

▲  2009년에 조성된 청암대종사(靑岩大宗師) 부도

원증국사탑비 곁에는 새롭게 청암대종사의 부도가 뿌리를 내렸다. 청암은 1964년 태고사를 중
건했던 승려로 지금의 태고사가 있게 한 인물이다. 그는 이곳에 머물다가 2009년에 입적했는
데, 태고사 창건주(원증국사)의 비석 옆에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기리고 있다.


▲  채색된 산신각 산신도(山神圖)

경내에서 원증국사탑으로 오르는 길목에 산신(山神)을 봉안한 산신각이 있다. 특이하게도 돌
과 바위로 지어졌으며, 건물 내부는 거의 석굴(石窟)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부는 현대
적인 조명시설이 없어 조금은 어둡다. 다행히도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촛불들의 희생이 있기
에 산신도를 보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산신도는 바위를 쪼아서 그린 벽화로 예전에는 거의 흑백 비슷했으나 나중에 채색을 했다. 색
이 입혀져서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려진 폼은 그다지 별로인 것 같다.
꼬랑지를 강하게 쳐들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모습은 제법 용맹이 깃들여져 보이며, 새하얀
긴 수염을 지닌 산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호랑이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
자(童子)가 찻잔을 들고 서 있는데, 동자라 하기에는 너무 늙어보인다. 그래서 내가 일행들에
게 우스개 소리로
'저 찻잔을 든 사람은 원래 산신이었는데, 산신들간의 경쟁에 밀려 산을 말아먹고 길거리에
나앉았다. 그래서 먹고 살려고 저 산신의 비서로 취직한 것이다'

▲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보물 749호

태고사 경내에서 산신각을 거쳐 뒤쪽(봉성암 방면)으로 2분 정도 오르면 수려한 모습의 원증
국사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앞서 언급한 보우대사의 넋이 담긴 부도탑으로 그가 입적하
자 그가 세웠던 태고사에 사리를 봉안하고 일부는 용문산 사나사로 보내 탑을 만들어 봉안했
다.

그는 열반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는데. 그도 죽기 전에야 인생무상을 뼈
저리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죽음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袋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 부도는 기존의 고려시대 부도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유명한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그 위에 마치 조그만 부도가 들어앉은 듯한 지붕돌을 두었으며,
그 위에 다시 특이한 모습의 머리 장식을 얹었다.


▲  원증국사탑과 새로운 부도탑

기단의 아랫 부분에는 정교한 꽃무늬가 잔뜩 새겨져 있으며 8각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무
늬와 꽃무늬로 가득하다. 탑의 조성 시기는 1385년 무렵으로 멋드러진 탑의 모습을 통해 고려
조정의 보우국사에 대한 신임과 제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원증국사탑만 외로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어느 승려(이름은 모르겠음)의 탑
을 원증국사탑 아래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이곳에 탑을 세울 정도면 청암대종사와 더불어 태
고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승려가 분명하다.
아래쪽 부도는 보우대사에 대한 존경과 일편단심을 표하려는 듯, 위쪽 부도를 바라보고 있으
며, 그 모습도 많이 비슷하다. 특히 충주 정토사(淨土寺) 부도탑과 상당히 비슷한데 시원스레
올려진 지붕돌의 처마가 꽤 인상 깊다.

태고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대성암과 대남문(大南門)을 거쳐 구기동(舊基
洞)으로 하산했다. 본글은 노적사와 태고사를 중심으로 다룬 글이라 그 외에 자잘한 내용은
쿨하게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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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의 매운 얼이여, 용인 능골에 넓게 자리한 정몽주선생묘 <저헌 이석형묘, 충렬서원>

용인 정몽주선생묘



' 용인 정몽주선생묘 여름 나들이 '

   

▲  정몽주 선생묘
◀ 저헌 이석형묘
▶ 정몽주 묘역 영모재
▼ 충렬서원

   

 



 

여름 제국이 절정에 치닫던 7월의 끝 무렵. 용인 능골에 자리한 정몽주선생묘를 찾았다. 이곳
은 학창시절부터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곳으로 계속해서 미루고 있다가 이번에 비로소 인연을
지었다. 도봉동(道峰洞) 누옥에서 거리가 제법 되지만 서울에서는 그런데로 가까운 곳으로 교
통편도 양호하여 넉넉잡아 3시간 이내면 충분히 접근이 가능하다.



 

♠  정몽주선생묘 입문

▲  정몽주 선생묘를 알리는 표석

능원초교(정몽주선생 묘역입구) 정류장에서 바로 동쪽에 있는 능원초교입구4거리로 나와서 4
거리를 건너 남쪽으로 가면 오산천에 걸린 포은교가 마중을 한다. 그 다리를 건너 5~6분 정도
가면 왼쪽(동쪽)에 정몽주 묘소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누워있는데, 여기서 왼쪽 길로 들어
서면 정몽주 신도비를 시작으로 그의 드넓은 묘역이 장대하게 펼쳐져 거의 왕릉을 연상케 한
다.


▲  정몽주 신도비(神道碑)

정몽주 묘역 대파노라마의 시작인 정몽주 신도비는 묘역과 함께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지형
상의 이유도 있지만 정몽주가 그렇게나 지키고자 했던 고려의 옛 국도(國都), 개경(開京)이
서쪽에 있어 후손들이 그의 심정을 헤아리고자 그렇게 배치를 한 것이다.

팔작지붕 비각 안에 담긴 신도비는 정몽주가 강제로 세상을 뜬지 300여 년이 지난 1699년에
세워졌다. 송시열(宋時烈)이 찬을 하고, 김수증(金壽增)이 글을 썼으며, 영의정 김수항(金壽
恒)이 전액(篆額)을 썼는데, 비석의 높이는 388cm, 비신(碑身)의 높이는 238cm이다. 비석이
나이를 예민하게 타다 보니 비신 뒷쪽의 글씨 상태가 영 고르지가 못하며, 비신 앞쪽에는
'皇
明 高麗守門下侍中 益陽郡 忠義伯 圃隱鄭先生 神道碑銘幷序<황명 고려수문하시중 익양군 충의
백 포은정선생 신도비명병서>'
라 쓰여 있다.
여기서 황명(皇明)은 명나라로 정몽주가 죽던 시기는 명나라 초기이다. 그냥 '고려 수문하시
중(守門下侍中)~~'으로 시작하면 정말 깔끔하겠지만 비석 제작 당시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만연했던 시절이고, 그 꼴통 사대주의자들이 신도비를 담
당하면서 비석에도 명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것이다.

우리의 장대한 역사와 강역을 아주 크게 말아먹은 우리의 최대 흑역사 조선, 그런 검은 시대
에 걸맞게 조선 위정자와 유학자들에게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 풍조가 아주 지독했으며, 그런
풍조는 무려 왜정 때까지 이어졌다.


▲  연안이씨 비각공원

정몽주 신도비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고운 피부의 비석들이 즐비한 연안이씨(延安李氏) 비각
공원이 나온다. 이들은 정몽주 묘역을 품고 있는 문수산(文秀山) 자락에 흩어진 연안이씨 선
조들의 묘비와 신도비의 내용을 번역하여 세운 것으로 10여 기의 비석이 공원을 이루고 있는
데, 그 끝에는 저헌 이석형의 신도비가 비각에 감싸인 채 장대한 세월을 머금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분명 정몽주의 영일(迎日) 정씨 묘역이 분명한데, 엉뚱하게도 연안이씨 집안의
비석이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 집안을 일으켜 세운 이석형의 묘가
정몽주 묘와 성씨를 초월하며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꽤 신선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이석형이 정몽주의 증손녀에게 장가를 든 인연 때문이다.
이후 영일정씨와 연안이씨 집안은 한집안처럼 가깝게 지냈고 두 집안의 무덤이 정몽주 묘역
주변에 서로 어울리며 자리해 있었다. 그러다가 왜정(倭政) 때 토지 소유권을 두고 다투다가
영일정씨가 승리하면서 연안이씨 무덤은 이석형과 일부 묘소를 제외하고 모두 문수산 남쪽으
로 이장되었다.
그렇다고 600년 넘게 지속된 두 집안의 정이 깨진 것은 아니다. 이석형의 묘는 아직 제자리
에 건재해 있고, 묘역 입구에 비각공원을 두는 등 여전히 허울 없이 지내고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200m 정도 들어가면 이석형의 생가 연못에 세워졌던 계일정(戒溢亭)이 재
현되어 있다. 참고로 그의 생가는 서울 연지동(蓮池洞, 종로5가 북쪽)에 있었다.


▲  저헌 이석형(李石亨) 신도비 - 경기도 지방기념물 171호

정몽주 신도비와 마찬가지로 팔작지붕 비각(碑
閣)에 소중히 감싸인 이석형 신도비는 1624년
에 대리석으로 조성되었다. 원래 이석형묘 앞
에 있었으나 비각을 씌우면서 이곳으로 이전되
었다.
비문(碑文)은 후손인 이정구(李廷龜)가 지었고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
容)이 제자(題字)를 남겼는데, 비석의 높이는
270cm 정도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주름
선이 마치 토성의 띠처럼 생긴 비신(碑身)으로
이루어져 있다.


◀  주름선이 멋드러진 이석형 신도비


▲  홍살문과 정몽주 묘역

▲  왕릉처럼 드넓은 정몽주 묘역의 위엄

정몽주 묘역은 상상 외로 무척 넓었다. 거의 조선 왕릉 수준으로 말이다. 내가 왕릉에 온 것
인지 고려 충신의 묘에 온 것인지 잠시 혼돈에 둘러싸인다. 허나 분명히 정몽주 묘역은 맞다.

그의 묘역이 이렇게 넓어진 것은 조선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다. 비록 조선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 잔인하게 없애긴 했지만 그만한 충신이 또 없다. 하여 신하들의 철저한 정
몽주 화(化)가 필요했던 터라 필요에 따라 죽였으면서 역시 필요에 따라 그를 띄워주고 묘역
에도 적지 않게 신경을 써준 것이다.
후손들은 조선 조정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씁쓸했을 것이요, 정몽주
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만, 죽은 자는 원래 말이 없는 법이다.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자를 이리 볶고 저리 볶고 저들 편리에 따라 이용하는 것이다.

정몽주 외에도 고려의 많은 충신, 그리고 고려의 마지막 무신(武臣)인 최영(崔瑩)장군도 있지
만 명성은 아무래도 정몽주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최영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로 일컬어지던 큰 인물이지만 무(武)를 경시하고 유학을 중시하던 조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정몽주가 훨씬 구미가 당긴다.

정몽주 묘역이 얼마나 드넓은지 묘역을 알리는 표석에서 그의 묘까지는 거리가 약 400m에 이
른다. 게다가 그의 아들과 후손들 묘역이 주변에 잔뜩 포진해 있고, 묘역 서쪽은 싹 밀어버렸
다. 그래서 그만큼 넓어 보이며, 거의 조선 왕릉 뺨칠 정도이다. 이곳의 지명인 능골과 능원
리는 바로 이 묘역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다. 얼마나 능처럼 넓으면 지명에 능(陵)이 다 붙었
겠는가.


▲  경모사(敬慕祠, 왼쪽)와 모현당(慕賢堂, 오른쪽)
1980년 묘역 정비 때 새로 지은 것들이다.

▲  영모재(永慕齋)
조선 후기에 지어진 정몽주 묘역의 재실(齋室)이다.

▲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백로가(白鷺歌) 시비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  단심가(丹心歌) 시비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이방원(李芳遠)이 하여가(何如歌)로 은연중 반란에 협조해 줄 것을 청하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 묘 - 경기도 지방기념물 171호

▲  밑에서 바라본 이석형묘

▲  옆에서 바라본 이석형묘

정몽주 묘역에 들어서면 가운데 언덕에 정몽주묘가 큼지막하게 자리해 있고, 그 남쪽에 증손
녀 내외인 이석형 내외의 묘와 아들인 정종성 내외묘, 북쪽에는 정몽주의 후손들 묘가 잔뜩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이석형(1415~1477)은 연안이씨 집안으로 자는 백옥(伯玉), 호는 저헌(樗軒)이다. 이회림(李懷
林)의 아들로 생모는 박언(朴彦)의 딸이다.
1441년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에 합격했고, 1442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원(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집현전부교리(集賢殿副校理)가 되어 14년
동안 집현전(集賢殿) 학사로 일했으며,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로 있던 1447년 문과 중시(重
試)에 붙어 왕명으로 북한산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했다.

1455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가 되었고,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던 1456년 6월 단종(端宗)
의 복위를 꾀하던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터지자 사육신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익산
(益山) 동헌(東軒)에 남긴 일로 대간(大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세조(世祖)에게 오히려 칭찬을
들으며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승진되었다.
이어 판공주목사(判公州牧使)와 한성부윤(漢城府尹, 서울시장)이 되었으며, 1460년 세조의 특
명으로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왕의 관서(關西) 지방 순행을 도와 왕으로부터 서도주인(西道主
人)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듬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1466년 팔도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가 되어 호패법(號牌法)을 조사했고, 1468년 세조가 승하
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건너가 왕의 부음을 전했다. 이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470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승진,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했으며, 1471년
에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필법이 신묘하여 집현전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治平要覽),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
여했으며, 세조 때는 사서(四書)의 구결(口訣) 작업에 참여해 논어(論語)의 구결을 주관했다.
또한 불우한 백성들을 늘 보살폈으며, 말년에는 서울 연지동 집에 계일정을 지어 시문을 지으
며 자손들을 가르쳤다. 그는 계일(戒溢)정신이라 하여 분에 넘치는 것을 자손들에게 늘 경계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신선(神仙) 같다며 칭송했다.

남긴 저서로는 대학연의(大學衍義)와 고려사에서 권계(勸戒)를 덧붙인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
輯略) 21권과 저헌집(樗軒集)이 있다. 편저로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치평요람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석헌의 부인은 정몽주의 증손녀로 정보(鄭保)의 딸이다. 1445년 1월 아들인 이혼(李混)을
낳았는데, 산후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딸을 잃은 슬픔에 눈물로
밤을 지새던 정보는 자신이 봐둔 묘자리에 딸을 안
장했는데, 이석형이 죽자 자연히 부인묘에
합장되어 당대의 명사(名士)이자 충신의 대명사인 정몽주 곁에 묻히게 된 것이다. 사연은 그
러한데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속설도 전해온다.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가 죽자, 그가 평소에 봐두던 정몽주묘 남쪽에 안장하기로 했다. 딸인
이석헌의 처(이하 정씨부인)는 그 자리가 매우 신통한 명당 자리임을 알고 자신의 아들과 손
자들을 위해 시댁에 좋은 일을 해주기로 하고, 간밤을 이용해 관을 넣을 자리에 물을 잔뜩 퍼
날라 부었다.
다음날 집안 사람들이 가보니 무덤에 물이 많은지라 그 자리를 버리고 다른 곳에 장지를 마련
해 안장했다. 아무리 명당이라도 물이 나오면 영 좋지 못한 터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보가 안
장된 이후, 친정 가족들에게 버려진 터를 우리 시댁에 주면 안되겠니 청하니 친정은 흔쾌히
그 자리를 주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속설임)

정몽주가 당대 명사이긴 하지만 그 후손들은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없었고, 마침 떠오르는
연안이씨 집안의 사위 내외를 정몽주묘 곁에 묻히는 영광을 부여함으로써 양 집안 간의 유대
감을 꾀했다. 하여 그 인연으로 두 집안은 오랜 동안 오순도순 지냈고, 서로의 집안 묘가 두
루 섞인 진풍경을 보인 것이다.
허나 왜정 때 두 집안 간의 무덤 자리를 두고 재판이 벌어졌고, 그 재판에서 영일정씨가 승소
하면서 정몽주묘역 일대는 99% 정씨 집안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연안이씨는 이석형과 일부
묘를 빼고 대부분 문수산 남쪽으로 옮겼으나 두 집안의 친목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석형묘는 정씨부인과 함께 묻힌 합장묘(合葬墓)로 이곳이 그렇게 기가 막힌 명당 자리라고
한다. 이석형 이후 집안에서 수십 명의 고위 관리가 배출되었고, 현대에 와서도 장관 3명을
배출했다. 그래서 명당에 관심있는 사람과 풍수지리가들이 자주 찾는다. 서쪽을 바라보며 자
리한 묘역은 전방이 확 트여 있고, 뒤쪽에는 문수산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어 문외한인 내가
봐도 착한 명당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 무덤은 영일정씨에서 소유하고 있으며, 연안이씨 정헌공파에서 관리하고 있다.

▲  앞에서 본 이석형묘 (봉분, 상석)

▲  고색의 때깔이 자욱한 이석형 묘표(墓表)

▲  고된 표정의 우측 문인석 2기

▲  좌측 문인석 2기


▲  뒷쪽에서 바라본 이석형묘와 전방 풍경

▲  정몽주묘에서 바라본 이석형묘

▲  이석형묘에서 바라본 정종성(鄭宗誠)과 죽산박씨 묘

원사(院事) 정종성(1374~?)은 정몽주의 맏아들로 고려 후기 9명의 효자 가운데 하나이다. 조
선 조정에서 정몽주 후손 달래기의 일환으로 여러 차례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했으며, 1437년
에 마지못해 벼슬을 받아 철원부사가 되었다.



 

♠  아 충신의 매운 얼이여..!! 충신의 영원한 성지(聖地)
정몽주선생묘(鄭夢周先生墓) -
경기도 지방기념물 1호

포은 정몽주(1337~1392)는 1337년 경북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자는 달가(達可), 호는 그
유명한 포은(圃隱)이며, 고려 중기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자 정운관(鄭云瓘)의 아들이다. 생모 이씨가 꿈에서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트렸는데, 이에 놀라 깨어난 뒤 바로 그를 낳았다고 하여 정몽란(鄭夢蘭)이라 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빼어났다고 하는데, 어깨 위에 7개의 검은 점이 북두칠성처럼 벌
여져 있었다고 하며, 9살에 생모가 낮잠을 자다가 검은 용이 뜰에 있는 배나무로 올라가는 꿈
에 놀라 급히 나가보니 배나무에 정몽란이 있었다. (위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설화임) 그래
서 이름을 몽룡(夢龍)으로 바꿨고, 관례를 치른 이후에는 정몽주로 이름을 갈았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문하에 들어가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학문에 정진했는데, 목은은 포
은에 대해 '학문은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 이
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칭찬을 했다.

1357년 감시(監試)에 붙었고, 1360년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과 수찬(修撰
), 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
사관(從事官)으로 따라가 고려의 그늘에 있던 동북 지역(길림성, 흑룡강성, 연해주 지역)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고, 전농시승(典農寺丞)과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성균박사(成均博士),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으며,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과(太常少卿
寶文閣應敎)와 성균직강(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으로 승진했다.

1372년 정몽주를 싫어했던 친원패거리의 의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
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당시 명은 고려를 크게 의식해 의도적으로 많은 무례를 범하면서
양국의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칫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가는 길도
험난해 풍랑으로 고생을 했는데, 힘들게 명나라 남경(南京)에 가니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
璋)이 태도를 달리하며 극진히 예우했다.
1376년 이인임(李仁任)의 배명친원(排明親元, 명나라를 멀리하고 원나라와 가깝게 지냄)을 반
대하다가 언양(彦陽, 울산 언양)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377년 나날이 극성을 부리는 왜구(倭寇)를 처리하고자 왜열도 규슈(九州)로 건너가 규수 지
역 지방 세력에게 왜구 단속을 요구했다. 이에 규슈 지방 세력은 흔쾌히 협조를 약조했고, 왜
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구출하여 그에게 인계했다. 그렇게 그들을 데리고 귀국하자
정몽주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급부상했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와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예의판서(禮儀判書), 예문관제학, 전
법판서,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했고,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를 따라 전라도 지역의 왜구를 토벌했다.
이성계는 정몽주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남원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싹 쓸어버리고 상경하던
중, 전주(全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전주는 그의 선조들이 살던 곳이며, 전주이씨 일족
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는 오목대(梧木臺, ☞ 관련글 보기)에서 이씨 일족을 모아 거하게 잔치를 벌였는데, 여기서
대풍가(大風歌)를 크게 불렀다. 대풍가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정벌하고
고향인 패(沛)로 돌아와 승전 연회에서 부른 시로 이를 통해 자신의 야망을 은근히 드러냈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했지만 정몽주만큼은 그 시의 의도를 파악
하고는 기분이 몹시 불쾌해졌다.
그래서 그 자리를 나와 인근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서 우국시(憂國詩)를 읊으며 착잡한 마
음을 달랬다고 한다. 어쩌면 장차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되는 비극을 이때 예견했을지도 모
른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
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를 찾은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
었으며, 1388년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추진하자 이성계를 지지하며 정벌을 반대했
다.
통한스러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를 도와 우왕을 폐했고, 1389년
에는 그와 함께 우왕의 아들인 창왕(昌王)까지 폐해 그들을 공민왕(恭愍王)의 후손이 아닌 신
돈(辛旽)의 후손으로 왜곡시키는 일에 동참했다. 또한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마지막 군주인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여 13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과 수문하시중(守門下
侍中),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 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 우문
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 등의 다양한 관직과 작위를 받았다.

이토록 이성계와 행동을 같이하며 때로는 백로가의 뜻을 저버리고 이성계 패거리와 까마귀 짓
도 하면서 나름 나라의 개혁을 갈망했으나 이성계의 세력이 나날이 커지자 고려를 뒤엎고 그
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의 예를 통해
군주가 별로면 갈아치우는 한이 있더라고 고려란 나라를 유지한 채, 개혁을 하자는 것인데,
이성계 패거리는 '고려는 이제 틀렸다. 다 갈아엎고 새로운 나라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의견
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함께 해온 이성계를 제거하여 고려 사직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고 기회를 노
렸다.

드디어 1392년 3월 때가 왔다. 공양왕의 세자(世子)인 왕석(王奭)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자 이성계가 그를 마중하러 황주(黃州)로 나갔다. 거기서 사냥을 벌이다가 그만 말에서 떨
어져 크게 다쳤는데, 정몽주는 크게 기뻐하며 대간(大諫)을 움직여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
개경에 있던 이성계 패거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정도전을 잡아 가두고 조
준과 남은(南誾) 등을 귀양 보냈다.
이성계는 아픈 몸을 이끌고 상경하다가 벽란도(碧瀾渡)에서 하룻밤 쉬려고 했는데, 아들인 이
방원이 급히 찾아와 정몽주가 일을 벌이고 있음을 알리며 서둘러 상경하자고 했다. 정몽주에
대한 신뢰가 두텁던 이성계는 무슨 소리냐며 잔소리를 했으나 이방원이 계속 권하는 것이 심
상치가 않아 가마를 타고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정몽주의 대사는 그르치게 된다. 이때
그는 3일이나 밥을 먹지 않으며 기회가 사라졌음을 안타까워 했다.

이방원은 형세가 매우 위급하므로 정몽주를 제거하자고 이성계에게 제의했다. 이에 가족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 이씨가 왕실에 충성을 바친 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데, 지금 정몽주에게 모함을 받
아 악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후세에 누가 이것을 변명하겠는가'
외치며 정몽주 제거를 모의
했다.
이때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정몽주에게 그 사실을 귀띔해
주자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찾아가 상황을 살폈다. 허나 이성계는 평소와 비슷하게 그를
대해주면서 정몽주는 지금 당장은 일을 벌이지 않겠지 싶은 방심을 하고 돌아간다.
이때 이방원이 주안상을 마련하여 그에게 술 1잔을 권했다. 포은은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정
도전과 핵심 패거리만 염두에 두었지 이방원은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설마 저 어린 것이 나
에게 무슨 짓을 하겠는가 싶었을 것이다.

이방원은 어느 정도 술을 주고 받자 지필묵(紙筆墨)을 꺼내 하여가(何如歌)를 선보이며, 그를
시험했다. 허나 시험 결과는 역시나였다.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을 하며 하여가를 무색케 만
든 것이다. 즉 포은은 이성계 패거리에게 더 이상 협조하지 않고 필요하면 죽음으로써 역모를
막겠다는 것이다.

이방원과 작별한 포은은 별다른 대비도 없이 귀가를 했다. 곧 다가올 저승사자를 눈치채지 못
했던 것이다. 정몽주 제거를 결심한 이방원은 서둘러 수하인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귀가하던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철퇴로 때려 죽였다. 그때 포은이 흘린 피가 마르지 않고 다리
에 남아있다고 하는데, 실상은 붉은색을 띠는 돌이지 그의 피가 아니다. (정몽주 띄워주기의
일환으로 윤색된 것임)
정몽주가 잔혹하게 살해되자 이성계는 크게 놀라며 이방원을 꾸짖자 그는 정몽주가 우리를 공
격하는데 어찌 가만 있겠냐며 항변을 했다. 이에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이성계는 왕을 찾
아가 정몽주가 모함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를 추종한 이들을 잡아 족치며 정몽주의 목을 개경
십자거리에 매달았다. 그리고 얼마 뒤 이성계는 그의 패거리와 함께 공양왕을 끌어내려 고려
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열었다.

정몽주는 시문에 뛰어나 단심가와 많은 한시를 남겼고,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글씨
와 작품들은 후손들이 정리하여 1439년에 간행된 포은집(圃隱集)에 담겨져 있다. 또한 지혜와
용기가 대단했고, 충효와 지조가 대단했으며, 학문을 좋아해 정도전과 함께 원나라에서 들어
온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키고 보급하여 동방성리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노력으로 이때
부터 집에서 가묘(家廟) 등을 세워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겨났으며, 의창(義倉)을
세우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의 편리를 도모했다.

고려를 지키고자 나름 충신의 매운 얼을 드높였던 포은은 이성계 패거리에게 패해 역적이 되
었고,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면서 아들은 죄다 귀양 신세가 되었다. 그의 무덤 역시 개경
인근 풍덕군(豊德郡)에 대충 썼다.

1400년 조선의 3대 군주가 된 태종(太宗) 이방원은 그동안 뜨거운 맛으로 일관했던 정몽주 일
가에 대한 태조를 180도 달리하며, 후손을 달래주고 정몽주를 띄워주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
들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은 괘씸하지만 다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그를
충신의 대명사로 드높인 것이다.
그래서 1401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했고, 이어서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으로 추봉했으며,
후손의 소망에 따라 묘를 옮길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또한 중종(中宗) 때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을 비롯한 수많은 서원에 배향되면서 대대손손 두둑한
제삿밥을 받으며 영원히 추앙을 받게 된다.

그들 야망에 도움이 안되어 때려죽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살만하니까 진정한 충신이자 성리학
의 시조라며 지나치게 띄워주는 태종의 이중적인 행태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 태종
의 입장에서도 솔직히 정몽주 스타일 즉 군주에 대한 일편단심 충신을 열망했던 것이다. 조선
이 오래간다는 보장도 없고, 늘 변수가 도사리고 있기에 정몽주 같은 충신이 나와 나라를 지
키고 망국(亡國)의 초라함을 달래달라는 주문이 담긴 것이다. 고려는 비록 망했지만 정몽주와
그를 포함한 3은(三隱)과 최영 등 많은 충신이 있기에 그 마지막은 외롭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신권(臣權)과 개혁을 강조하며, 자신을 한때 괴롭게 했던 정도전보다는 이미 없어진 정
몽주가 훨씬 이용하기가 좋았다. 그러니 죽은 정몽주를 이용해 그들 입맛에 맞게 요리한 것이
다.

풍덕군에 있던 정몽주묘는 1406년 후손들의 뜻으로 그의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기로 하고 운
구를 끌고 내려갔는데, 인근 수지 풍덕천(豊德川)에 이르자 명정(銘旌, 죽은 이의 품계, 관직
, 성씨를 기록한 기)이 갑자기 바람에 날라간 것이다. 명정을 쫓아가니 지금의 정몽주묘 자리
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연한 일도 아닌 것 같고, 그곳 자리도 좋아 보여 굳이
영천까지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무덤을 썼다고 전한다.
이후 정몽주의 아들과 손자를 비롯해 후손들이 모두 그의 곁에 묻히면서 이곳은 정몽주 일가
의 묘역이 되었고, 1517년 중종이 정몽주묘 주변 능골 일대를 후손들에게 내리면서 이곳에 완
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  이석형묘에서 바라본 정몽주묘

개경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정몽주묘는 거의 조선 왕족 묘에 버금가는 모습이다. 망주
석(望柱石) 1쌍과 상석(床石) 2기, 문인석 2쌍, 석양(石羊) 1쌍, 장명등(長明燈) 1기가 앞에
배치되어 있고, 봉분(封墳) 주위로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두고 묘
3면에 곡장(曲牆)이란 담장까지 둘러 묘의 품격과 장엄함을 높였다.
원래는 문인석 1쌍과 묘표, 상석, 봉분, 곡장이 전부였으나 1980년 이후 묘역을 크게 정비하
면서 후손들이 더 갖다 붙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때와 하얀 피부의 석물이 어색하게
공존을 하게 되었다.


▲  난간석과 호석까지 갖춘 정몽주묘

▲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 지붕돌이 인상적인 정몽주 묘표
묘표는 1517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신 앞쪽에는 '高麗 守門下侍中 鄭夢周之墓'라
쓰여 있어 고려를 위해 산화한 그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다.

▲  우측 문인석

▲  좌측 문인석

고색의 때가 만연해 문인석 1쌍은 키가 작다. 표정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정몽주의 심정과 표
정을 상징하듯 꽤 우울해 보인다. 반면 그 옆에는 근래에 세운 하얀 피부의 매끈한 문인석이
서 있는데, 키도 크고 표정도 매우 긍정적이다. 마치 정몽주를 없애고 나라를 뒤엎으며 야망
을 실현한 이성계와 이방원의 흐뭇한 표정 같은. 문인석을 세우더라도 좀 근엄한 표정이 좋았
을 것인데, 그 점이 아쉽다.


▲  정몽주묘에서 바라본 작은 천하

▲  북쪽에서 바라본 정몽주묘와 멋드러진 소나무의 위엄

▲  설곡 정보(雪谷 鄭保)와 밀양박씨 내외묘

정몽주묘 북쪽에는 후손들의 무덤이 산기슭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그중에는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의 묘가 있다.
정보는 원사 정종성의 아들로 생몰시기는 전하지 않는데, 경상도 예안(禮安)현감과 사헌부 감
찰을 지냈다. 1456년 사육신 사건이 터지자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포항 연일로 유배되었
으며, 다시 산청(山淸)으로 옮겨져 거기서 어느 해 4월 20일에 생을 마감했다.

봉분은 원래 부부가 따로 썼는데, 1982년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기면서 하나로 합쳤으며, 문
인석 2쌍과 묘표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하다.

▲  고색의 미가 담긴 설곡 정보 묘표

▲  봉분 옆에 새로 만든 정보의 새 묘표


▲  정충전(鄭忠傳)과 전주이씨 내외묘
정충전은 정몽주의 7세손으로 1606년 식년시(式年試) 2등에 합격해 관직에 진출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가 되었으나
그 외에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다.

▲  선죽교 앞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

작렬하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의 핍박에 맞서며 정몽주 묘역을 둘러보고 충렬서원으로 길을 옮
겼다. 묘역으로 갈 때는 포은교를 건너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선죽교란 다리를 통해 오포로로
나왔다. 선죽교는 포은교 서쪽 90m 지점에 있는 다리로 능원초교(정몽주선생묘역입구) 정류장
바로 뒷쪽이다.
선죽교라고 해서 개성에 있는 그곳을 옮기거나 본을 따서 만든 것은 아니며, 그냥 흔한 하천
다리로 정몽주 묘역 입구라서 그에 걸맞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니 복잡한 의미 부여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선죽교 북단에는 검은 주근깨가 자욱한 늙은 하마비가 서 있어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하
마비란 하마 서식지가 아니라 대소인원(大小人員) 모두 이곳 앞에서는 말에서 내리라는 추상
같은 뜻이다. 보통 궁궐, 관아, 향교, 서원, 왕릉. 사당, 고위 관료의 묘역 입구에 세우는데,
정몽주 묘역도 그에 해당되어 하마비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곳이 정몽주묘와 충렬서원의 중간
지점이라 이곳에 비석을 세운 모양인데, 여기서 묘와 서원이 제법 거리가 되어(묘는 도보 15
분 거리) 다른 곳에서 옮겨왔을 가능성도 있다.

말을 타고 오가는 이들을 귀찮게 했던 하마비, 허나 이제는 하마비의 눈치를 보며 말이나 차
량에서 내릴 필요는 없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의 권위도 이미 상실된 상태이며, 이제는 지
나가는 이들이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나도 그의 존재를 여기서
처음 알았다.


▲  능원리 느티나무(용인시 보호수 70호)와 정한영 효자비

▲  정한영 효자비(鄭漢永 孝子碑)

포은교와 충렬서원입구 사이에는 늙은 느티나무와 정한영 효자비가 있다. 이곳 느티나무는 나
이가 약 270년 정도로 1988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의 높이는 19.5m, 둘레 4.5m로 좌우로
가지가 길게 뻗어 있어 그늘의 면적이 제법 된다. 그 시원한 그늘 밑에 정한영 효자비가 둥지
를 틀었다.

정한영(1862~1947)은 정몽주의 19대 손으로 호는 모은(慕隱)이다. 이곳 능원리 출신으로 성품
이 바르고 효성이 지극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묘 밑인 지금의 자리에 여막(廬幕)을 짓
고 3년 동안이나 그 힘든 시묘살이를 했다.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기름진 음식을 입에 대지 않
았으며, 오로지 미음과 채소로 연명했다. 또한 부모가 준 거라면서 머리는 물론 손/발톱도 전
혀 깎지 않았다.
그 효행을 기리고자 유림에서는 이곳에 효자비를 세웠으며, 비석의 지명(誌銘)은 김세기가 쓰
고, 행장기(行狀記)는 김학열이 썼다.

* 정몽주선생묘와 저헌 이석형묘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산3 (능곡로
  45)



 

♠  정몽주를 배향한 오래된 서원 - 충렬서원(忠烈書院)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호

느티나무와 효자비를 둘러보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충렬서원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한다. 그
의 지시를 따라 오른쪽 골목길(충렬로)로 3분 정도 들어가면 그 끝 양지바른 곳에 충렬서원이
자리해 있다.

충렬서원은 1576년 이계(李棨)를 비롯한 지역 유림들이 용인에 잠든 정몽주와 조광조(趙光祖)
를 배향하고자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역 중간인 죽전(용인 수지구 죽전동)에 세운 것으로 처음
에는 죽전서원(竹田書院)이라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5년 경기도관찰사 이정구(李廷龜)가 용인현감 정종전(鄭從善) 등
과 협의하여 정몽주묘와 가까운 곳에 서원을 중건했다. 공사는 무려 3년이 걸렸으며, 사우 3
칸과 동/서재 2칸, 문루 3칸을 지어 구색을 맞추었고, 조광조의 위패를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으로 옮기면서 완전히 정몽주를 위한 서원이 되었다.

1609년 광해군은 충렬(忠烈)이란 사액을 내려 이때부터 충렬서원이라 불렸으며, 설곡 정보와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을 추가로 배향했다. 1706년 정몽주의 후손인 정제두(鄭齊斗)와 정
찬조(鄭纘祖) 등이 유림의 협조를 받아 옛터에서 조금 서쪽인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정리 사업으로 철거되었으며, 1911년 유림에서 사우를
복원하고, 1956년 강당(講堂)을 복원했다. 또한 1972년 사당을 전면 보수하고 강당과 내삼문
(內三門)을 중건했으며, 1975년 홍살문과 외삼문(外三門)을 만들었다.

이 서원의 특징이라면 교육보다는 제사의 기능을 더 강조했다는 것이다. 강당을 앞에 두고 사
당을 뒤에 두는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제사를 지낼 때는 강당까지 몽땅 제사와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  차갑게 생긴 붉은 피부의 홍살문

▲  굳게 입을 닫은 외삼문

▲  많이 한가해진 강당

▲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당

이곳은 속세에 활짝 문을 열고 있으나 내가 갔을 때는 서원 내부 사정으로 태극마크가 그려진
내삼문은 굳게 입을 닫고 있었다. 하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돌담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보
는 선에서 서원과의 인연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정몽주묘역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충렬서원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118-1 (충렬로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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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비봉산 망해암 <안양예술공원,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안양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삼성산 염불사

▲  삼성산 염불사(염불암)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염불사에서 바라본 천하 (비봉산, 안양시내, 수리산)

▲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  염불사에서 바라본 안양 지역
(비봉산, 수리산)

 



 

천하를 놓지 않으려는 욕심꾸러기 겨울 제국과 차디찬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
이 팽팽히 맞붙던 3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안양(安養)에 있는 염불사와 망해암을 찾았
다.

삼성산(三聖山, 480m) 남쪽 자락에 자리한 염불사를 가려면 안양 제일의 명소로 추앙을 받
는 안양예술공원을 거쳐야 된다. 예술공원을 가르며 안쪽으로 들어서면 염불사로 인도하는
포장길(예술공원로245번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20~25분 정도 묵묵히 오르면 염불사가 활
짝 모습을 비춘다.


▲  소나무 그늘 밑에 앉아 삼성천을 굽어보는 안양정(安養亭)
<안양사입구 동쪽에 자리함>

▲  염불사로 인도하는 숲길(예술공원로245번길)
봄의 해방군이 거의 문턱까지 이르렀지만 삼성산 숲은 여전히 겨울 속을 방황한다.
허나 소쩍새가 울 때면 저들도 겨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활짝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삼성산 남쪽 자락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절벽을 병풍처럼
두르며 안양을 굽어보고 있는 ~ 삼성산 염불사(念佛寺)

삼성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깃든 염불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삼성산에서 삼막사(三幕
寺, ☞ 관련글 보기) 다음으로 큰 절이다. 오랫동안 삼막사의 부속 암자로 있으면서 염불암(
念佛庵)이라 불렸으나 근래에 그 그늘에서 벗어나 '암(庵)'에서 '사(寺)'로 칭호를 높였다.

절의 이름은 신라 중기에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윤필(潤筆)이 이곳에 있던 토굴(土窟)에
서 불도를 닦으며 염불을 올렸다고 해서 유래된 것이라 전한다. 윤필이 이곳에 절을 짓고 수
도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하고 있으나 다들 신빙성이 없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
다.
또한 926년(또는 936년)에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치고자 삼성산 옆을 지나다가
안양사 창건설화(☞ 관련글 보기)에도 등장하는 능정(能正)이 삼성산 자락에서 좌선(坐禪)에
들어있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염불사의 전신(前身)인 안흥사(安興寺)를 세웠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 때 유물이 전혀 없고 안양사(安養寺) 창건 설화와도 상당수 비슷해 이 역시 신빙
성은 떨어진다. 1407년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왕명으로 관악산의 여러 절과 함께
중창했다고 전하는데, 경내에 500년 묵은 보리수나무가 있어 이때쯤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
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이 없다가 1857년에 이르러 청허(淸虛)와 도인(道人)이 칠성각을 세
웠다. 1904년과 1927년에 중수했으며, 1930년에는 세심루(洗心樓)를 세우고, 1932년에 산신각
, 1941년에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 그리고 1964년에 미륵불을 세우고, 1992년에 대웅전
을 옮겨 크게 중창했으며, 2000년에 나한전을, 2008년에 석조관음보살상을 지었다.

석축을 높게 다져 크고 작은 건물을 심었는데, 칠성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20세기에 지어진
것들이라 겉에서 풍기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없다. 소장문화유산은 비록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500년 묵은 보리수와 19세기에 조성된 승탑(부도) 3기, 바위에 새겨진 마애승탑(磨崖僧塔, 마
애부도) 2기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마애부도는 못봤음)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나한전, 염불전, 칠성각, 영산전, 산신각 등 약 10동
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뒷쪽에는 소나무가 솟은 멋드러진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데,
그 벼랑에도 조그만 건물과 미륵불을 주렁주렁 달아놓아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그렇다고 요
란하게 벼랑을 밀어버린 것은 아니며 약간의 손질만 가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안양예술공원에서 삼막사, 삼성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황금 길목이라 자연히 절을 둘러보는 수
요도 제법 되는 편이며, 벼랑에 닦여진 산신각과 칠성각에서 바라보는 삼성산과 안양시내 풍
경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어루만져준다.

* 염불사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2 (예술공원로245번길 150, ☎ 031-
  471-2300)

▲  옛 대웅전 자리에 세워진 염불전(念佛殿)

▲  염불전 앞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  요사(寮舍) 앞뜨락과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장독대들(왼쪽)
장독대에는 어떤 먹거리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을까? 살짝 뚜껑을
열어 그 속살을 들춰보고 싶다.

▲  염불사 대웅전(大雄殿)

돌계단을 타고 경내로 들어서면 남쪽을 굽어보는 대웅전과 염불전이 제일 먼저 모습을 비춘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그 우측 염불전 자리에 있
었는데, 1992년에 주지 성수화상이 의상과 원효, 윤필 3명의 고승이 수도를 했던 터로 여겨진
다는 현재 자리로 옮겨 크게 지었다.
현재 염불사의 사세를 보여주듯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지붕을 받치며 촘촘히 박혀있는 공포
는 그 아름다운 섬세함에 감탄이 새어 나오게 한다. 건물 주변으로 하얀 피부의 난간석을 둘
렀으며, 계단 앞에는 석사자 2기를 배치해 혹시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 대비했다.

대웅전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석가여래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
스처를 취한 석가여래 좌우로 수려한 자태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시
립(侍立)해 있는데, 이들은 1992년에 은행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며, 그들 뒤에는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웅전 좌측 석조관세음보살상

대웅전 좌측에는 2008년에 새로 지은 석조관세음보살상이 있다.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매끈한 하얀 피부를 지닌 그의 좌측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긴 지팡이를 쥐어든 지장보살(地
藏菩薩)이 관세음보살보다 훨씬 낮은 연화대(蓮花臺)에 서 있고, 우측에는 산신(山神)이 의자
에 앉아 있다. 그들 뒤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병풍처럼 들러져 있는데, 벼랑 윗쪽 소나무
사이로 독성각이 아찔하게 버티고 있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대웅전 앞뜰에는 독특한 모습을 지닌 새하얀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8각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조그만 기단을 깔고, 그 위로 부처가 새겨진 8각의 탑신(塔身)을 얹
힌 다음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했는데, 그가 있기 전에는 경내에 그 흔한 탑조차 없었다.

        ◀  염불사 보리수(菩提樹)
탑 옆에는 염불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인 보리
수가 자라고 있다.
보리수의 원래 이름은 '보디 브리크샤(Bodhivr
iksa)'로 부처가 붓다가야 보리사에 있는 보리
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불교에서
매우 애지중지하는 나무이다. 무화과와 흡사한
뽕나무과 상록수로 인도대륙 힌두교에서도 신
성시 여기는 나무이기도 하다.

보리수는 우리나라에는 그리 많지 않은 나무로
아무리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심장한
나무라고 해도 겨울 제국 앞에서는 예외가 없
다. 제국의 시련을 겪어야 되기 때문이다. 나
무를 감싸던 푸른 잎들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가지만 앙상하게 드러내며 봄의 해방군을 간절
히 염원한다.

이 나무는 15세기에 이곳에서 수도하던 승려가 심었다고 전하며, 이를 통해 적어도 조선 초기
에 염불사가 숨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500년의 장대한 나이를
먹었지만 높이 12m, 둘레 1.2m로 비슷한 나이의 다른 나무에 비해 체격은 조그만 편이며, 
양시 보호수 5-2호
의 작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나한전(羅漢殿)
염불전 뒤쪽에는 1990년대에 지어진 나한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0년에 조성된 500나한과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염불사 산신각(山神閣)

대웅전과 나한전 뒤쪽에는 기암괴석으로 그윽한 높은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염불사의
든든한 후광이자 절을 더욱 장엄하게 꾸며주는 그 벼랑에는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 영산전,
미륵불 등이 군데군데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미륵불과 칠성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마치 천
하가 내 발 밑에 펼쳐진 듯, 천하 일품을 자랑한다.

대웅전 뒷쪽 나무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제일 먼저 절벽 사이 좁은 공간에 들어앉은 산신
각을 만나게 된다. 경내를 굽어보는 산신각은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집으로 조선 후
기부터 전해오던 것을 1932년에 중수했다. 지붕은 목조이나 건물 벽은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부에는 1970년대 후반에 그려진 산신도가 걸려 있다.
이곳에 서면 경내는 물론이고 삼성산 남쪽 산줄기인 비봉산(295m)과 안양을 서쪽에서 보듬은
수리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삼성산 남쪽 산자락과 비봉산, 안양시내, 수리산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산신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  독성각(獨聖閣)

산신각에서 동쪽으로 난 조그만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벼랑 위에 조마조마하게 버티고 앉
은 독성각이 나온다. 석조관세음보살상 바로 뒷쪽 벼랑으로 경내에서 가장 궁색하고 위험한
곳에 자리해 있는데, 그 많은 자리 가운데 굳이 이곳에 힘들게 독성각을 닦았는지 의문이다.
독실한 불심(佛心)이 낳은 결과일까? 아니면 경내의 명물로 키우려는 욕심의 산물일까?

독성각은 산신각과 거의 쌍둥이꼴 모습으로 1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지붕은 목조로 이루어
져 있고 벽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물 바로 앞이 천길 낭떠러지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
다. 비록 난간이 둘러져 있긴 해도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으며 촘촘하지 못하기 때문
이다.

산신각과 비슷한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지
며, 건물 내부에는 근래에 그려진 독성탱이 걸
려있다.
독성탱에는 독성(獨聖) 할배와 동자, 사슴, 소
나무, 그의 본거지인 천태산(天台山)이 담겨져
있다.

   ◀  독성 가족의 단란함이 깃든 독성탱

산신각을 지나면 절벽에 등을 대며 남쪽을 바
라보고 선 석조미륵불이 모습을 비춘다. 1960
년에 주지인 기석화상의 꿈속에 미륵불이 나타
나 이마를 쓱쓱 어루만지며
'마애석불을 만들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라'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당시 기석은 낡고 퇴락한 염불암을 다시 일으
킬 궁리를 했었는데, 미륵불의 현신에 용기를
얻고 1964년부터 5년간 공을 들여 석불을 완성
하고 공덕비를 세웠다.
미륵불은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 위에 서 있으
며, 전체적으로 풍만한 느낌을 던진다. 머리에
는 2중으로 된 보관(寶冠)을 썼고, 얼굴은 다
소 경직되어 보이며, 입가에는 넌지시 미소가
드리워져 중생을 살짝 위로한다.
오른손으로 시무외인, 왼손으로 여원인을 취하
며 안양 시내를 굽어보는 미륵불 옆에는 산신
각과 쌍둥이 꼴인 영산전이 있다.

▲  염불사 석조미륵불

미륵불에서 더 올라가면 그 계단의 끝에 칠성
각이 수비병처럼 자리해 경내를 굽어본다.
칠성각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겉보기와 다르게 1857년에 지어져 염불사에서
가장 늙은 집이다.
벼랑 사이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앉았으나 산신
각과 독성각보다는 조금은 여유로워 정면 2칸,
측면 1칸의 구조를 지녔으며, 내부에는 1979년
에 제작된 칠성탱이 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칠성각(七星閣)


▲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펼쳐진 칠성각 칠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앞서 산신각보다 조망의 품질이
조금은 높아졌다. (그래봐야 보이는 범위는 비슷함)

▲  19세기에 조성된 염불사 부도(승탑)들

영산전에서 대웅전으로 내려가는 계단 대신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나한전 서쪽에 자리한 부도
<浮屠, 승탑(僧塔)> 3형제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부터 도일당(道日堂), 인봉당(印奉堂), 서영
당(西影堂) 탑인데,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싹 집합시킨 것이다. 그들
모두 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탑신 피부에 탑 주인과 조성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조
성 시기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단 도일당은 조성 시기 부분이 마멸됨)

▲  도일당탑

▲  인봉당탑

◀  서영당탑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왼쪽에 자리한 도일당탑은 높이 167cm로 바닥돌은 없다. 장대한 세월의 무심한 장난으로 탑이
두 동강이 난 것을 다시 붙였는데, 중간에 난 금이 그 흔적이다. 탑 중앙에는 얇게 홈을 파서
깨알처럼 글씨를 넣었으나 마멸이 심하며 탑 꼭대기에는 동그란 보주(寶珠)를 두었다.

중앙에 있는 인봉당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늘씬한 자태에 탑신을 올리고 반구형 보주로 마
무리를 지은 탑으로 높이 143cm, 조성 시기는 1816년이다. 도일당탑처럼 탑 앞쪽을 다듬어 글
씨를 넣었는데, 글씨가 아직은 선명하여 한자를 조금 안다면 알아보는데 그리 무리는 없다.
그리고 오른쪽에 자리한 서영당탑은 1810년에 조성된 것으로 바닥돌이 탑의 거의 2/3를 차지
할 정도로 무척 크고 견고하다. 자연석을 가져와서 조금 손질을 가해 바닥돌로 깔고 탑과 반
구형 보주를 올렸는데, 옆에 있는 승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들은 19세기 초반 염불사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존재이자 경내에서 보리수 다음으
로 오래된 존재로 이들 외에도 경내 부근에 바위에 새겨진 19세기 마애승탑 2기가 있으나 인
연이 닿지 못해 만나지 못했다. (그때는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음)


▲  염불사를 뒤로하며



 

♠  삼성산 남쪽 비봉산 자락에 높이 들어앉은 고즈넉한 산사
일몰 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망해암(望海庵)

▲  망해암으로 인도하는 비봉산 숲길(임곡로)

안양예술공원 남쪽에는 삼성산과 관악산의 남쪽 산줄기인 비봉산(295m)이 누워있다. 그 서쪽
자락 가파른 곳에는 망해암이란 고찰(古刹)이 안양시내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그곳에 늙
은 석불 하나가 깃들여져 있고 조망과 일몰이 천하일품이라는 풍문을 익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과는 계속 인연이 닿지 않았고, 어느 3월 첫 무렵에 이르러 억지로 인
연을 붙여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그곳을 찾았다. (삼성산 염불사와 같은 날에 간 것은 아니나
같은 지역에 있고 서로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어서 편의상 본글에 넣었음)

안양역(1호선)에서 안양마을버스 3-1번을 타고 비산1동 임곡주공아파트 종점에서 내렸다. 여
기서부터 두 다리에 의지해 오르막길(임곡로)을 올라가야 되는데, 처음에는 아파트와 학교,
주택들이 좌우에 펼쳐져 있으나, 5~6분 정도 오르면 싱그러운 비봉산 숲길이 펼쳐져 속세의
번뇌를 털어준다.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절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는데, 구불구불한 숲길을 20여
분 오르면 해발 200m 고지에 들어앉은 망해암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임곡주공아파트 종점에
서 도보 30분 정도 걸리며, 안양예술공원에서도 망해암까지 산길이 이어져 있다.


▲  일몰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망해암 종무소(宗務所)
가파른 지형을 이용해서 만든 2층 건물로 윗층에서 바라보는 조망과
일몰 맛이 아주 좋다. (윗층 바깥 통로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한 지붕 두 가족, 2층 건물
윗층은 천불전(千佛殿), 아랫층은 지장전

▲  지장전(地藏殿) 석조지장보살좌상
큰 바위를 다듬어 그의 거처를 닦았다.


망해암은 북쪽으로 안양예술공원과 삼성산이 보이고, 완전히 확 트인 서쪽으로 안양시내와 수
리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날씨가 정말 좋으면 수리산 너머로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오는데
, 서해바다가 강제로 땅으로 매립되면서 바다를 볼 기회는 많이 줄었다. 어쨌든 바다까지 보
이는 매력 때문에 절의 이름도 바다를 바라보는 절이란 뜻에 망해암이 되었으며, 여기서 바라
보는 조망과 일몰, 안양 야경(夜景)이 아주 진국이라 안양9경의 제4경이자 으뜸으로 오랫동안
찬양을 받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
大師)가 창건했다고 내세우고 있으나 신빙성은 전혀 없으며, 경내에 고려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늙은 석조여래입상이 전하고 있어 신라 후기나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07년 서울을 위협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山川氣脈)을 싹 누르고자 관악산과 삼성산 주변의
절을 중창했는데, 이때 중건의 혜택을 받았다고 전하며, 1803년에 헌경왕후(獻敬王后) 홍씨(
혜경궁홍씨)의 지원으로 중창했다. 그리고 1863년 대연화상이 증수했으며, 이후 6.25때 파괴
된 것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용화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천불전, 지장전, 종무소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고려 때 지어진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그는 용화전에 들
어있는데, 그의 보개에 1479년에 조성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그때 지어진 것으로 봤으나
석불의 감정 결과 고려 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여 보개에 쓰여진 내용은 석불 중수나 석
불 보개를 씌운 시기로 보인다.
안양과 삼성산 일대에서 꽤 늙은 석불이고, 그와 관련된 글씨를 품고 있음에도 그 흔한 지방
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가 2022년 5월에 비로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망해암과 관련해서 재미난 전설이 하나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을 대략 이렇다. 조선 세종 시절
, 남부지방에서 조세를 싣고 서울로 향하던 배가 인천 월미도(月尾島) 부근을 지나다가 거센
풍랑으로 침몰 위기에 빠졌다. 선원들은 크게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던 그때 뱃머리에서 난데없
이 승려가 나타나 혼란에 빠진 선원들을 진정시켰고, 그 사이 풍랑은 멈추었다.
선원들은 승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어느 절에서 왔는지를 물었고, 승려는 관악산 망해암에서
왔다고 답을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들은 서울에 도착해 조세 수송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그 승려에게 답례를 하고자 망해암
을 찾았다. 허나 승려는 없고 그와 비슷하게 생긴 석불만 법당에 덩그러니 있는 것이다. 하여
그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나라에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고하니 이를 가상히 여긴 세종이 매
년 공양미 1섬씩을 석불에게 보냈으며, 조선 후기까지 계속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를 통해 배로 조세나 쌀을 나르던 선원이나 관리가 절에 시주를 하며 뱃길의 안녕을 기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여기서 인천 앞 서해바다까지 바라보이니 기원을 하기에도 딱 좋다.
그들의 건의로 나라에서도 조세 수송의 안전을 위해 공양미를 보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을
픽션이란 양념을 적당히 넣어 전설로 다듬은 것이다.

* 망해암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55-1 (임곡로245, ☎ 031-443-5559)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산신, 독성, 칠성이 봉안되어 있다.

▲  석불입상의 거처인 용화전(龍華殿)
용화전 밑에는 2층 건물을 두어 요사,
선방 등으로 사용한다.


▲  용화전에 봉안된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83호

용화전에 소중히 깃든 석조여래입상은 망해암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이곳의 대표 보물이다.
이렇게 보면 어깨와 얼굴, 보개(寶蓋)만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저것은 불단 때문에 가슴 아래가
강제로 가려진 것일 뿐, 나머지 부분은 잘 남아있다. 하여 불단 옆에서 봐야 그의 가려진 옆
구리와 아랫도리 모두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6월에 건물 마루에 오랫동안 가려진 밑도리를 들춰내 그의 다리와 발, 대좌 일부를
새로 확인했음)

이 석불은 높이 3.4m로 보개 밑에 '성화(成化) 15년 4월'이라 쓰여있어 1479년 4월에 석불을
중수하거나 보개를 씌웠음을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예전에는 그때 조성된 석불로 봤으나
평가 결과 고려 초/중기 것으로 나와 안양과 삼성산 일대에서 제일 오래된 석불로 꼽힌다.
육계(무견정상)가 솟은 머리에는 둥근 모습의 보개가 씌워져 있으며, 머리와 보개는 검은색을
칠했으나 지금은 많이 지워졌다. 상호와 신체는 하얀색으로 분을 칠했으며, 나발을 갖춘 머리
는 다소 마모되었다.
머리 정면 중앙에는 계주가 있으며,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듯한 두 눈은 반쯤 떠서 아래를 보
고 있고, 입과 코는 두툼하다. 양쪽 귀는 매우 크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으로 두껍
게 처리했다.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엄지과 검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로
내렸다. 20세기 이후 조금 변형되긴 했으니 상태는 괜찮은 편으로 조성 관련 명문이 새겨진
탓에 고려와 조선 초기 석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앞서 망해암 전설에서 선원을 구한 승려의 화신으로 나오며, 조정에서도 공양미를 보내 그를
챙겨줄 정도로 그가 있기에 망해암도 이렇게 무탈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망해암에 왔다면
이 석불도 꼭 챙겨보기 바란다. 그를 놓치면 망해암의 50%를 놓친 것과 다름이 없다.

▲  옆에서 바라본 석조여래입상의 위엄
불단에 가려 보이지 않던 부분이 싹 모습을 비춘다. 약간의 변형과
세월을 탄 흔적이 좀 있으나 건강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  용화전 지킴이, 신중탱(神衆幀)

▲  망해암에서 바라본 안양시내와 수리산


▲  오늘도 해는 진다. 망해암에서 바라본 일몰

천하를 따사롭게 대피던 햇님은 퇴근시간이 다가오면서 그만의 공간으로 가고자 슬슬 휘장을
거두고, 진하게 보이던 안양시내도 그만큼 흐릿하게 다가온다. 그 틈을 타서 달님이 주관하는
어둠이 내려앉으니 사람도, 도시도, 산도 어둠을 몰아내고자 불빛을 여기저기서 발산하고 검
게 익은 안양의 산하는 그것을 얼굴에 바른다.
하여 여기서 바라보는 일몰과 조망 외에도 안양의 야경도 정말 일품인데, 이날 야경까지는 생
각이 없고 날씨도 추우므로 야경은 언제가 될지 모를 막연한 미래로 내던지고 안양예술공원으
로 쿨하게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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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정수사 법당, 사기리분청사기요지, 사기리탱자나무, 이건창생가)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마니산 정수사, 사기리 탱자나무, 이건창생가)



'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
(마니산 정수사, 사기리 지역)

정수사 법당

▲  정수사 법당(대웅보전)

사기리 탱자나무 이건창생가

▲  사기리 탱자나무

▲  이건창 생가

 



 

차디찬 겨울의 한복판인 2월 끝 무렵의 어느 덜 추운 날, 오랜만에 강화도(江華島)를 찾
았다.
강화도(강화군)는 늘 구미가 당기는 곳이라 그곳의 적당한 메뉴를 고르던 중, 마니산 정
수사에 딱 눈이 멈춰섰다. 그곳은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은 곳이지만 무심한 세월이 훔
쳐간 아련한 옛 추억도 잠시 곱씹을 겸 흔쾌히 그곳을 택했다. 자고로 좋은 곳은 두고두
고 찾아가는 법이다.

오전 늦게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70여km 떨어진 강화도의 동남쪽 중심지, 온수리(길
상면 중심지)에 이르니 어느덧 14시이다. 여기서 정수사까지는 강화군내버스 3번(강화터
미널↔온수리, 1일 9회)이 다니고 있는데, '늦어도 40~50분 기다리면 되겠지' 싶어 방심
을 했으나 정류장에 달린 시간표를 보니 글쎄 1시간 30분 뒤에나 차가 있는 것이다.
방심의 대가치고는 오지게 긴 시간이라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어찌 보
면 덤으로 생긴 그 시간에 늦은 점심이나 섭취하고자 적당한 식당을 찾다가 가격도 착하
고 찬도 넉넉한 뷔페식 기사식당을 발견, 그곳에서 즐겁게 배를 채웠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남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온수리 성공회성당(聖公會聖堂)
을 짧게 둘러보고 정류장으로 돌아와 나머지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강화군내버스
3번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버스는 서남쪽으로 10여 분을 달려 정수사입구에 나를 내려놓는다.



 

♠  늙은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마니산 정수사(淨水寺)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①

정수사입구에서 정수사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따라 15~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작은 포장길이 닦여져 있는데, 길 좌우로 겨울에 몽땅 털린 나무
들이 초췌한 몰골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눈이 내린 지 벌써 여러 날 되었지만, 길가에는 새하
얀 눈이 조금씩 남아 아직까지 겨울 제국(帝國)의 치하임을 강하게 일깨운다.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②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③

▲  정수사 직전 'S'라인 고갯길
저 고갯길의 끝에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아담한 산사, 정수사가 고색의
숨결을 물씬 풍기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천하의 성산(聖山)으로 오랫동안 추앙을 받는 마니산<摩尼山, 마리산, 해밯 469m> 동쪽 자락
에는 3칸짜리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정수사가 포근히 안겨져 있다.

정수사는 639년에 회정선사(懷政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마니산 참성단(塹星壇)을
참배하고 동쪽으로 내려가다가 앞이 확 트인 괜찮은 곳을 발견하고는 불제자들이 선정삼매(禪
定三昧)를 정수<精修, 정세하게 학문을 닦음>할 곳이라 격찬하며 그곳에 절을 지어 정수사(精
修寺)라 했다고 한다.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틀림)
허나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정수사 산령각 중건기(重建記
, 1903년)'와 '강도지(江都誌)'에도 창건시기를 알 수 없다고 나와있어 639년 창건설에 크게
회의감을 들게 한다. 하여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고려 전기나 몽골(원나라)과의 전쟁으로
강화도가 임시 국도(國都)가 되었던 13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23년에 법당을 새로 지었고, 1426년 함허기화(涵虛己和, 함허대사)가 절을 중창했는데, 법
당 서쪽에서 깨끗한 물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맑은 물을 뜻하는 정수사(淨水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름은 그대로 두고 한자와 뜻만 갈아치움)
1688년 절을 중수하여 상량문(上樑文)을 남겼으며<1957년에 발견됨> 1848년 비구니 법진(法眞
)과 만흥(萬興) 등이 화주(化主)가 되어 법당을 중수했다. 이때 부화주(副化主) 승려 20여 명
, 목수 165명, 지역 주민 305명이 자원하여 중창불사에 참여했다.

1878년 비구니 계흔(戒欣)이 제자 성수 등과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후불탱과 칠성탱, 독성탱
, 산신도 등을 새로 그려 봉안했는데, 금어<金魚, 그림을 그리는 승려> 용계 서익(龍係 瑞翌)
과 대허 체훈(大虛 體訓) 등이 탱화를 조성했으며 1883년 화주 근훈(根訓)이 절을 수리했다.
1888년 비구니 정일(淨一)이 수좌 연오(演梧)와 함께 시주금을 모아 관세음보살상 1위와 후불
탱 1점을 만들어 봉안했다. 정일은 여러 절과 마을을 꾸준히 돌면서 돈을 모아 1903년 산령각
을 중건하고 1905년에 법당을 수리했으며 1916년에는 불상을 개금하고 여러 불화를 봉안했다.
그 시절 정수사에 머물며 그의 불사를 목격했던 이건승(李健昇) 거사는
'뜻을 한가지로 한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이 절의 스님을 보니 남자가 여자에
미치지 못하고 사대부가 여승에 미치지 못하고 국가가 사찰에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다!'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37년 주지 김선영이 본산<전등사(傳燈寺)> 주지 김정섭과 상의해 대웅전(법당)을 나라의 보
호 건물로 추천했으며, 1942년에 쓰여진 '전등본말사지'에는 대웅전(12칸) 외에 산신각(2칸),
대방(14칸), 노전(6칸), 요사(16칸) 등이 있어 지금보다 건물이 더 풍요로웠음을 알려준다.
6.25 때는 다행히 별 피해는 없었으나 건물들이 고된 세월에 체해 나날이 퇴락하자 1957년에
법당을 중수했으며, 1974년에 소실된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이후 여러 건물을 짓거나 새로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오백나한전, 요사, 종무소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법당과 향토유적인 함허대사 승탑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19세기에 조성된 탱화들이 여럿 있고 오백나한전에는 고려 때 것으로
전하는 건칠지장보살상이 있다.
또한 절 주변에는 상사화(相思花, 꽃무릇)가 자라고 있는데 보통 붉은 상사화를 생각하기 쉬
우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노란색 상사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란 상사화는 이 땅에서도 매
우 희귀한 존재로 8월 중순에서 9월 초 사이에 10여 일 정도 반짝 꽃잎을 펼쳐 보인다.

정수사는 함허동천(涵虛洞天)과 함께 마니산(마리산)의 동쪽 기점으로 바로 북쪽 능선을 넘으
면 함허동천이다. 참성단까지는 40~50분 정도 걸리며 중간에 벼랑처럼 이어진 아찔한 바위 능
선을 지나야 된다. 비록 길이 괜찮게 닦여져 사고의 위험은 예전보다 덜하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된다.

* 정수사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467-3 (해안남로1258번길 142 ☎ 032-
  937-3611)
* 정수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정수사 법당(法堂) - 보물 161호

경내 중심에 자리한 법당(대웅보전)은 정수사의 얼굴이자 상징으로 1423년에 지어졌다. 이 땅
의 늙은 법당 중 유일하게 툇마루를 지닌 개성파 법당이자 이 땅에 별로 남지 않은 조선 초기
사찰 건축물로 그 가치가 백두산 꼭대기만큼이나 높다. (법당 덕분에 정수사의 이름값이 크게
올라갔음)

이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측면이 3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툇마루를 덧붙이면서 측면이 조금 넓어졌는데 1688년 절을 중수했을 때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
다. (1688~1689년 법당을 중수하면서 중수 관련 기록을 법당 안에 넣어둠)
절이 한참 어려웠던 시절에는 가운데 칸은 법당으로, 좌우 칸은 승려들 거처로 사용했다고 하
며, 육중한 지붕을 지탱하고자 기둥 꼭대기에 공포를 단 주심포(柱心包) 양식으로 앞/뒷면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후대에 툇마루(퇴칸)를 설치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후면 공포
는 조선 초기 양식임)

건물 천정은 사주(四周)의 귀를 약간씩 접은 우물천정이며 여러 번의 중수를 겪으면서 건물이
조금 변형되긴 했으나 대체로 조선 초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
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주위로 아미타후불탱, 칠성탱, 지장시왕도 등의 탱화들이 가득 널려있
다.


▲  옆에서 바라본 정수사 법당

▲  위에서 바라본 법당과 그의 풍만한 맞배지붕

정수사의 존재감을 크게 올려준 법당은 툇마루 앞과 옆구리에 놓인 섬돌에 신발을 벗어두고
들어가면 된다. 가운데(어칸) 문과 좌우 칸 문에는 창살이 곱게 입혀져 있는데 가운데 칸 문
에는 꽃과 꽃병이 묘사되어 있어 화사함을 더해준다.


▲  법당 가운데 문짝에 피어난 꽃창살
아름다운 꽃들이 마치 화석처럼 굳어져 문짝에 달려있는 것 같다.

▲  법당을 크게 돋보이게 만든 툇마루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법당 아미타3존상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상
아미타3존상 뒤로 1878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고 3존상
좌우로 근래 덧붙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3존상의 옆구리를 가득 채워준다.

▲  법당 칠성탱(七星幀)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 등의 7여래와 일광보살 등 칠성(七星)의
주요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  법당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지장탱)

칠성탱과 더불어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지장보살 두광(頭光) 좌우에 자리한 식구들은 특이하게도 동물 얼굴을 하고 있
는데, 지장보살 앞쪽에 선 왼쪽 동자는 등에 함을 지고 있고, 그 오른쪽 동자는 지장보살이
들어야 될 석장(錫杖)을 대신 들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런 식의 지장탱화는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  무려 1,000원을 구석에 머금은 법당 현왕탱(現王幀)

현왕탱은 관련 화기(畵記)가 없어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851년 정도로 여겨
진다. 그러니 법당을 수식하고 있는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가 된다.
현왕(現王)이란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존재로 죽은 지 3일 뒤에 심판을 진행한다고 하며 그의
판결 여부에 따라 극락이나 지옥행이 결정된다고 한다. 그는 착하게 산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
니 가급적 선하게 살아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음.
내가 아직 명부(저승)를 가본 적이 없으니;;>


▲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법당 뜨락 좌측에는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오백나한전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름 그
대로 500명의 나한(羅漢)을 머금은 건물로 근래 지어진 것인데 나한 외에 고려 때 것으로 여
겨지는 건칠(乾漆)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바다 건너 개성 땅에서 왔다고 하며 나는 법당만 생각했지 그의 존재를 알지 못
해 지나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오라는 정수사의 뜻인 모양이다. 하지
만 이곳은 이미 3번이나 인연을 지었고 아직도 지우지 못한 미답처가 천하에 수두룩해 일부러
또 찾을 생각은 별로 없다.


▲  겨울 휴업에 들어간 법당 옆 샘터
정수사의 뜻(맑은 물이 나오는 절)과 한자를 바꾸게 만든 샘터로 하얀 피부의
거북상을 짓고 그 주위를 기와돌담으로 둘러 애지중지하고 있다. 허나
겨울 제국이 물을 꽁꽁 앗아가면서 그 맑다는 샘물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과 독
성, 칠성 외에 용왕(龍王)까지 봉안되어 있어 사성각(四聖閣)이란 이름이 더 어울려 보인다.
불에 타서 쓰러진 것을 1974년에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 담긴 산신과 독성, 칠성, 용왕탱은
그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  정수사에서 바라본 천하
마니산의 벌어진 동쪽 틈 사이로 서해바다와 동검도(東檢島)가 진하게 바라보이고
그들 너머로 강화도를 거느린 인천(仁川) 본토가 흐릿하게 시야에 닿는다.


경내 서쪽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매점 겸 종무소(宗務所)가 있다. 10여 년 전 겨울에 왔을
때는 부엌을 갖춘 셀프식 찻집으로 있었는데, 절 신도와 답사꾼, 산꾼까지 누구든 들어와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찻잔과 전통차 티백, 주전자, 물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용료는
없었으며 대신 직접 물을 끓여서 차를 타 마시고 사용했던 찻잔은 씽크대에서 씻으면 된다.
그때 같이 왔던 사람과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1시간 정도 머물렀던 기억이 정말 엊
그제 같은데 그 추억은 흩어진 나날의 일부가 되었고 찻집 또한 성격이 변해 더 이상 중생들
에게 무료로 차 1잔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대신 차와 커피를 팔고 있음)

정수사의 다소 야박해진 인심과 왕년의 추억을 같이 되새기며 더 볼거리가 없나 두리번거리니
그때다 싶어 '함허대사 승탑'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나 나의 허전한 마음을 건드린다.
'정수사에 그런 존재가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오백나한전 뒤쪽
으로 가니 눈과 진흙으로 얼룩진 산길이 나오고 그 길을 조금 오르니 언덕배기에 조촐하게 생
긴 부도탑이 나를 맞이한다. 그가 바로 마니산 동쪽 자락에 진하게 흔적을 남겼던 함허대사의
승탑(부도)이다.


▲  함허대사 승탑(涵虛大師 僧塔) - 강화군 향토유적 19호

승탑의 주인인 함허대사(1376~1433)는 조선 초기 승려로 고려 때 아주 잘나갔던 충주유씨 집
안이다. (충주 출신임) 전객시사(典客寺事)를 지냈던 유청(劉聽)의 아들로 어머니는 방씨이며
법호는 득통(得通), 무준(無準), 법명(法名)은 기화(己和), 당호는 함허이다.

1396년 관악산 의상암(義湘庵, 어딘지 모름)에서 출가를 했으며 1397년 양주 회암사(檜巖寺)
에서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법요(法要)를 듣고 여러 곳을 다니다가 1404년 회암사로 돌아와
수도에 정진했다.
1406년 공덕산 대승사(大乘寺)에서 4년 동안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했고, 1410년 개성 천마
산 관음굴에서 선을 크게 진작시켰다. 1411년 절을 중수해 승속(僧俗)들을 지도했으며, 1414
년 황해도 평산(平山)의 자모산 연봉사(烟峯寺)로 자리를 옮겨 작은 방을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 짓고 '금강경오가 해설의(金剛經五家 解說誼)'를 가르쳤다.

1420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곳 사찰에 봉안된 옛 고승과 불상, 보살상에게 공양을 하
며 지내던 중, 영감암(靈鑑庵)에 있는 나옹(懶翁)의 진영(眞影)에 제사를 지내고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 꿈에서 어느 신승(神僧)이 나타나 '기화'란 이름과 '득통'이란 호를 지어주었는
데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법명과 법호(法號)로 삼았다.
1421년 세종(世宗)의 청으로 개성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면서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의 명
복을 빌어주었고, 1424년 길상산(吉祥山)과 운악산(雲岳山), 공덕산(功德山) 등을 돌아다니며
설법과 수도에 힘썼다. 그리고 1426년 정수사를 중수해 머물렀으며, 1431년 문경 봉암사(鳳巖
寺)를 중수하여 머물다가 1433년 입적하니 나이는 57세였다.

그의 사리는 그와 인연이 깊은 가평 현등사(懸燈寺), 문경 봉암사, 황해도 현봉사, 인봉사(어
딘지 모름), 정수사에 분배되었는데 정수사는 경내 뒤쪽에 그의 승탑을 만들어 두고두고 중창
자를 기리고 있다.

함허는 무학대사의 법을 이은 선가(禪家)이지만 교종(敎宗)에 대해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교학적인 경향도 크게 지니고 있다. 그의 현정론(顯正論)을 통해 그의 선사상(禪思想)에는 현
실생활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유학자들이 불교 배척을 주
창하면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유,불,도 삼교일치론은 송나라 계숭(契嵩)이 지은 '보교편(輔敎編)'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불교가 배척당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장되었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그의 열성 제자로는 문수(文秀), 학미(學眉), 달명(達明), 지생(智生), 해수(海修), 도연(道
然), 윤오(允悟) 등이 있으며,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윤
관(綸貫)' 1권,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1권 등의 저서가 있다. (그 외에 반야참문 1권
도 있으나 전하지 않음)

함허의 넋이 담긴 승탑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넓게 바닥돌을 깔고 그 한복판에 기단(
基壇)을 다진 다음 탑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옥개석(屋蓋石)은 6각형이지만 신라 후기~고려
초기 승탑의 기본 형태였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탑의 높이는 156
cm, 바닥돌까지 포함하면 164cm 정도이다. 기단부에는 연꽃 장식이 새겨져 있으며 탑은 작지
만 나름 단단하고 균형 잡힌 모습이다.



 

♠  사기리(沙器里)에서 만난 오래된 명소들

▲  사기리 분청사기요지(粉靑沙器窯址) - 강화군 향토유적 18호

함허대사 승탑을 끝으로 정수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여기서 바로 북쪽에 있는 함
허동천으로 넘어가 사기리 탱자나무와 이건창 생가로 나갈 생각이었으나 함허동천과 가까운
곳임에도 마땅한 길이 없었고 함허대사 승탑 옆으로 그곳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확신이
서질 않아서 쿨하게 그 길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정수사입구로 나왔다.

차들이 수시로 쌩쌩 지나가는 해안남로를 따라 함허동천입구와 탱자나무까지 가야 했는데 다
행히 뚜벅이를 위한 보도를 길 양쪽 사이드에 닦아놓아 차들의 눈치에서 다소 자유로워졌다. 
정수사입구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8분 정도 가니 식당과 펜션들로 즐비한 함허동천 입구
이고 다시 6분 정도 북진하니 '사기리 분청사기요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좀 보고 가라며 발
길을 붙잡는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못 이기는 척 그 이정표를 따라 야산
을 조금 오르니 분청사기요지가 폐허의 미학(美學)을 풍기며 바짝 누워있다. (도로에서도 그
존재가 보임)


 ▲  가마터 한복판에 수습된 분청사기 파편과 가마터를 이루던 석재들

이곳은 고려 말~조선 초에 한참 유행했던 분청사기를 만들던 14~15세기 가마터(요지)이다. 가
마터의 모습이 모두 파악되지는 못했으나 지금까지 발견된 규모로 보아 40mx80m 정도로 여겨
지며 깨진 분청사기 파편과 분청사기를 구울 때 쓰였던 굽받침, 가마 벽체로 여겨지는 여러
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지금은 비록 폐허의 공간으로 보잘 것은 없지만 이 가마터로 인해 마니산 동쪽 지역이 사기리
가 되었다. 즉 사기그릇을 만들던 동네란 뜻으로 왕년에는 가마터로 제법 바쁘게 살았음을 귀
뜀해준다.

* 분청사기요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224


▲  사기리 탱자나무 - 천연기념물 79호

분청사기요지를 나와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이건창생가 정류장 남쪽 들판에
키 작은 나무 하나가 진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사기리의 오랜 명물인 탱자나무로 그 앞
까지 도보길을 닦아놓아 관람객의 편의를 배려했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북방 한계선으로 늙은 탱자나무 2그루가
전하고 있다. 하나는 갑곶돈대(甲串墩臺)에, 다른 하나는 이곳 사기리로 그중 갑곶돈대(갑곶
진)가 더 북쪽이라 우리나라 탱자나무의 북쪽 끝은 갑곶진이 된다. 나무에 가시가 많아서 성
곽이나 요새에 방어용으로 많이 심기도 하는데 갑곶진 탱자나무는 바로 그 역할로 심어졌다.

사기리 탱자나무는 4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키는 3.8m이다. 2.8m 높이에서 3갈래로 갈라져 마
치 용트림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고된 세월에 지친 그를 위해 기둥을 여러 개 깔아 가지를 받쳐
들고 있으나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탱자나무는 보통 4월에 3~5cm 정도의 하얀 꽃이 피며 가을이 되면 열매가 맺으면서 노랗게 변
한다.

* 사기리 탱자나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35-10

▲  정면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서쪽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동쪽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탱자나무에서 바라본 길상산과
사기리, 선두리 들판


▲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 - 인천 지방기념물 30호

사기리 탱자나무 길 건너 북쪽에는 정겹게 토담을 두룬 초가(草家)가 하나 있다. 그 집이 조
선 후기 학자인 이건창의 생가로 'ㄱ' 모습의 9칸 안채와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닦고 3량 가구로 지은 한옥 구조의 초가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마니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이건창이 강화도에서 말년을 보냈던 19세
기 말로 여겨지며 현재 집은 1996년 강화군에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명미당(明美堂)이라
불리는데 천정에 걸린 명미당 현판은 이건창과 친분이 있던 매천 황현(梅泉 黃玹)이 쓴 것이
다. 그렇다면 이건창은 누구일까?

이건창(1852~1898)은 전주 이씨 출신으로 나중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이상학(李象學
)의 아들이다. 아명(兒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로 이곳이
그의 생가로 나와있어 여기서 태어난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원래는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이시원(李是遠)이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낼 때 거기서 태어났으며, 선대(先代)
부터 개성에서 계속 살아왔다. 그러니 '이건창 생가'가 아닌 '이건창 가옥'이나 '이건창 고택
','명미당'으로 이름을 갈아야 맞다.
할아버지에게 충의와 문학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5살에 문장을 구
사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신동 소리를 많이 들었다.

1866년 불과 14세의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응시해 4등인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나 나
이가 너무 어려 계속 대기발령 상태로 있다가 18세에 비로소 홍문관직(弘文館織)에 등용되었
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그곳 연경(燕京)에서 황각(黃珏), 장가
양(張家驤), 서보(徐郙) 등과 교유를 했다.

1875년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암행(暗行)했는데, 충청감사 조병식(趙
秉式)의 비행이 적지 않아 그의 비행을 낱낱이 캐다가 오히려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으로 유
배를 당했다. 다행히 1년 뒤에 풀려났으나 워낙 강직하고 고집이 있으며 불의를 못 보는 성격
이라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학문이나 닦으려고 했다.
허나 고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해달라'
는 친서를 보내며 출사를 권해 1880년 경기도 암행어
사가 되었다. 그는 경기도를 돌면서 관리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흉년으로 고생하는 농민들을
찾아다니며 구휼에 힘썼다. 특히 세금을 감면해주어 백성들로부터 널리 찬양을 받았으며 그를
기리는 선정비(善政碑)가 도처에 세워졌다.

▲  이건창 생가 대문 (문간채)

▲  어설프게 복원된 우물

1884년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이어 당해 무려 6년이나 상을 치렀으며 1890년 복귀하여 한성부
소윤(漢城府小尹)이 되었다.
그 시절 왜인(倭人)과 청국(淸國) 잡것들이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 가옥과 토지를 마구 사들이
고 있었는데 무능했던 조선 조정은 이를 방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이건창은 다시 팔을
걷어부치고 백성들의 집과 토지를 오랑캐들에게 팔아먹지 못하도록 법을 마련해야 된다고 건
의했다.
그러자 이홍장(李鴻章)의 부하이자 청나라 공사(公使)인 당소의(唐紹儀)가 그 내용을 듣고 발
끈하여 공문을 보내
'청국 사람과의 가옥이나 토지 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 조치를 하시
오?'
항의했다. 이에 그는
'우리가 우리 백성에게 금지시키는 건데 조약이 무슨 상관이오?'
답을 했다.
더욱 발끈한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하여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해 금지령을 포기하게
하였다. 허나 그는 꾀를 부려 오랑캐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을 다른 죄목으로 다스려 가중처벌
을 가하니 백성들은 부동산을 그들에게 팔아먹을 수가 없었고 청나라 애들도 자연히 부동산
매입이 여의치 못해 포기했다.

1891년 승지(承旨)가 되었으나 1892년 상소 사건으로 전남 보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
다. 그리고 이듬해 함흥부(咸興府)의 난민들을 다스리고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 함경도관
찰사의 죄상을 가려내 그를 파면시키며 백성들의 가려움을 긁어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고종은 지방관(地方官)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에게
'그대가 가서 잘못을 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
겁을 줄 정도였다. 그만큼 공무를 수행
하는 그의 태도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各部)의 협판(協辦), 특진관(特進
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흔쾌히 거절했으며, 1896년 황해도 해주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또
한 거절하고 버티다가 오히려 고군산도(古群山島, 고군산군도)로 유배형을 당했다. 허나 2개
월 후 특지(特旨)로 풀려났고 제2의 고향과 같은 강화도로 넘어가 학문을 하며 유유자적하다
가 1898년 44살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매천 황현이 쓴 명미당 현판의 위엄
- 글씨가 아주 큼직하다.

▲  먼지만 가득한 안채 부엌


이건창은 글씨를 아주 잘 썼는데 송나라 때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의 글씨를 많이 참조
했다. 구한말 학자인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 우리나라 역대 문장가를 추숭(追崇)할 때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9명을 선정했는데, 그 끝에 고른 이가 바로 이건창이었다.
또한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강화학파(江華學
派)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성품이 곧아 병인양요(1866년) 때 자결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따라
쇄국주의를 고집했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는데 당의통략은 파당과 문벌을 초
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다룬 책으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부모상으로 강화도에 머물던 시절에 저술한 것으로 워낙 내용이 좋아서 왜정(倭政)이 그 서적
을 바탕으로 조선은 당파싸움을 일삼다 망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비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
다. 즉 조선시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해석을 이미 조선 사람이 내린 것이라 우
기며 그것을 기정사실화 시킨 것이다.


▲  소박한 모습의 명미당(안채)

▲  명미당(안채) 마루
마루는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어 들어갈 수 있으며 운이 좋으면 양쪽 방도
들어갈 수 있다. (보통은 잠겨있음)

▲  마루 구석에 있는 빛바랜 뒤주
이건창은 저 뒤주에 담긴 쌀의 힘으로 6년에 걸친 부모상도 치르고
당의통략도 저술하고 양명학도 연구했을 것이다.

▲  이건창 생가 측백나무 - 강화군 보호수 180호

이건창 생가 앞에는 약 350년 묵은 측백나무가 솟아있다. 길 건너편 탱자나무와 비슷한 시기
에 식재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높이 10m, 둘레는 1.8m로 이건창도 그의 그늘 맛을 보며 학문
을 연구하고 여러 서적을 작성했을 것이다.


▲  이시원(李是遠)묘

이건창 생가 옆에는 토담을 사이에 두고 무덤 2기가 자리해 있는데 그중 밑에 있는 무덤이 이
건창의 할아버지인 이시원(1790~1866)의 유택(幽宅)이다.
이시원의 자는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로 개성유수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지냈는데 1866
년 병인양요가 터지고 강화도가 프랑스 양이(洋夷)들에게 어이없이 함락되자 아우 이지원과
함께 죽어서 귀신이 되어 적을 물리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 충
절로 나중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이시원 묘는 원래 길상면 길직리에 있었으나 1985년 그의 부인인 청송심씨와 함께 손자가 살
았던 이곳으로 옮겨져 합장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봉분(封墳), 호석(護石), 상석(床石), 비석
까지 싹 새롭게 갈면서 완전 최근에 닦여진 새 무덤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비석 정도는 옛 것
을 그냥 썼으면 조금이나마 고색의 기운이 있었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이건창 생가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소화하여 더 이상 욕
심도 없고 일몰이 지척이라 더 이상 둘러보기도 어렵다. 하여 그 정도로 만족하며 생가 관리
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정류장으로 나가 곧 들어선 강화군내버스 3번(강화터미널↔화도, 온수
리)을 타고 강화읍으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이건창 생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67-3 (해안남로1114번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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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산사 나들이, 안성 고성산 운수암 (무한성, 무양성)

안성 운수암 (무한성)



' 한여름 산사 나들이 ~ 안성 운수암 '
운수암 대방
▲  운수암 대방
 



 

여름 제국(帝國)이 정점에 치닫던 8월의 첫 무렵, 안성(安城) 운수암을 찾았다. 수도권에
서 당일 답사로 간단히 몸을 풀 곳을 물색하다가 운수암이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길을 잡
았는데, 12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지하철과 시내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쉬엄쉬
엄 이동해 15시에 안성 서북부에 자리한 양성(안성시 양성면)에 이르렀다.

양성까지는 환승할인 시간에 맞게 무탈하게 이동했으나 여기서 공도(孔道)로 가는 시내버
스가 출발시간보다 5분 일찍 도망치면서 환승 리듬이 그만 깨져버렸다. 다음 버스는 거의
50분 뒤에나 있는 상태. 여름 제국의 무더위 핍박이 극에 달한 상태에 환승할인까지 날라
갔으니 정말로 복창이 터질 판이다.
허나 나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은 없어서 별수 없이 50분을 강제로 기다려 공도읍으
로 가는 안성시내버스 7번(안성터미널↔원곡)에 탑승, 10분을 더 달려 운수암입구인 방신
1리에서 두 발을 내렸다.



 

♠  운수암 입문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①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②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③

방신1리에서 운수암까지는 25분 정도 걸어가야 된다. 마을을 가로지르며 그늘도 거의 없는 길
을 10분 정도 가면 숲이 나타나면서 길도 그늘길로 변신하는데, 그늘이 짙게 깔려 무더위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며, 땀이 조금씩 나긴 해도 선선한 산바람 앞에 이내 산산히 사라진다.

길은 처음에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운수암이 가까워질수록 점차 각박해진다. 밑골고개
를 넘으면 주차장이 나오며, 여기서 더 오르면 그늘에 묻힌 쉼터와 약수터가 나온다. 약수터
에서 대자연이 베푼 샘물을 여러 번 떠마시며 더위와 갈증을 삼키고 길을 마저 걸으면 고갯길
의 끝에 늙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하는데, 그 느티나무에 이르면 백운산 정상부에 자리한 운수
암이 말끔히 모습을 드러낸다.


▲  운수암 느티나무
약 160년 정도 묵은 나무로 높은 키와 큰 덩치에 걸맞게 운수암 경내에
넓게 그늘을 드리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아직 그 흔한 시/군 보호수 등급도 얻지 못한 야인의 신세이다.

▲  승탑(僧塔)을 가장한 석물
느티나무 부근 수풀 속에 승탑(부도탑) 1기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영락없는 승탑이지만 현실은 경내에 흩어진
석재를 모아서 승탑 형식으로 수습한 것이다.

▲  느티나무 곁에서 바라본 운수암 경내
뿌연 연기를 내뿜은 소독차가 방금 다녀가 연기가 채 가시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소독차 연기만 보면 뭐가 그리 좋은지 열심히
달려 쫓아가곤 했는데, 이제는 무덤덤하다.


고성산(高城山, 298m)의 남쪽 봉우리인 백운산 숲속 180m 고지에 포근히 터를 다진 운수암은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로 1750년에 장씨 보살(菩薩)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의
법명(法名)은 반야명(般若明)으로 근처에 살던 청상과부였는데, 남은 여생을 부처를 봉안하며
살고자 가산을 털어서 무한성(무양성) 밖에 절을 세우려고 했다.
절을 막 짓던 날 밤, 노승(또는 부처)이 꿈에 나타나 '무한성 안에 숲이 넘어진 곳이 있으니
거기에 지으시오'
현몽했다. 그래서 다음날 성 안에 들어가 살펴보니 과연 숲이 넘어진 곳이
있어 그곳에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한 여인에 의해 창건된 운수암은 고종(高宗) 시절에 이르러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과의 인연 덕분에 크게 덕을 본다. 그의 지원으로 중건을 한 것이다. 이때 대방을
세우고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을 봉안했는데, 이곳이 어찌 대원군과 인연을 지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그가 내린 '운수암' 현판이 대방에 있다.
1873년에는 아미타회상도(현재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음)를 제작했는데, 앞서 칠성탱 등
과 함께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어 왕실과 대원군 일가의 원찰(願刹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은 불교에도 관심이 지대해 서울 화계사(華溪寺)
와 흥천사(興天寺),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등 서울 근교의 여러 절을 오가며 온갖 지원을 아
끼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비로전(처음에는 대웅전)을 지었고, 이후 쇠락하여 무너지기 직전인 것을 현암
(玄岩)이 1980년대부터 불사를 벌여 1986년에 대웅전(대웅보전)을 지었으며, 기존의 대웅전은
비로전으로 삼았다. 그리고 1996년에는 광음선원(光音禪院)을 세우고 1997년 범종각을 두었으
며, 이후에 3층석탑을 세워 경내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암자(庵子)란 이름에 걸맞게 매우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비로전, 대방, 삼성각, 광음선
원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해 대
방과 비로전 등이 있으며, 운수암 자체는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25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조성된 아미타회상도와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은 신변보호를 위해 용주사 성보
박물관에 가 있다.

거의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고, 숲이 무성하여 절을 둘러싼 기운도 청정하며, 경관이 좋고 약
소하긴 하지만 동남쪽으로 약간 전망이 트여 있다. 안성과 평택 지역의 명소로 등산과 나들이
수요가 많으며, 경내까지 포장길이 잘 닦여져 있어 차량으로도 편히 접근도 가능하다.

* 운수암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85 (성하길 80-63 ☎ 031-673-7372)


▲  삼성각에서 바라본 운수암 경내



 

♠  운수암 둘러보기

▲  대웅보전 뜨락에 세워진 6면3층석탑

운수암 경내로 들어서면 대방과 3층석탑을 시작으로 광음선원과 대웅보전 등이 차례대로 마중
을 한다.
대웅전 뜨락 중앙에 자리한 3층석탑은 1990년대 후반에 마련한 것이다. 1990년대면 지금과도
꽤 가까운 시절인데, 벌써부터 기록이 누락되거나 기억이 상실되어 막연히 1990년대 말에 세
웠다고 그런다.

수려하고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이 탑은 특이하게 6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래서 6면3층석탑
이라 부른다. 그가 있기 전에는 절에서 그 흔한 탑도 하나 없었는데, 탑을 아주 우람하게 세
워 그 허전함을 크게 달랠 수 있게 되었다.
탑의 구조는 밑에서부터 2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 상륜(相輪)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아직은 어린 탑이라 피부가 매우 하얗고 반질반질하다. 윗층 탑신에는 6마리의 석사자
를 배치해 탑신을 받쳐들며, 그 안에는 사천왕(四天王)과 관세음보살을 두었다.


▲  6면3층석탑 윗층 기단의 사자석과 사천왕상

◀  대방과 마주보는 광음선원(光音禪院)
1996년에 지어진 것으로 요사(寮舍) 및 선방
(禪房)으로 살아가고 있다.

        ◀  운수암 대웅보전(大雄寶殿)
북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
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2년에 짓기 시작
하여 1986년에 완성을 보았다. 그가 세워짐으
로써 기존의 대웅전은 비로전으로 현판을 갈았
다.


▲  운수암 석가여래좌상과 닫집

대웅보전 불단(佛壇)에는 석가여래상을 봉안했고, 그 뒷쪽에 삼신후불탱을 두었다. 그들 위에
는 붉은 피부의 닫집이 있는데, 1층은 적멸궁(寂滅宮), 2층은 법왕궁(法王宮), 3층은 내원궁(
內院宮)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극락조(極樂鳥)와 구름 등 갖은 조각을 두어 장엄함을 더했
다.

불단 좌우에는 11면관세음보살입상과 목조지장보살입상을 봉안했는데, 이들은 2001년에 조성
된 것으로 그 주변에는 삼장탱(三藏幀)과 신중탱(神衆幀)이 자리하고 있다.


▲  운수암 대방(大房)

대웅보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대방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양반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
다.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지어진 26칸 규모로 위에서 보면 'H' 모양이며, 예전에
는 법당의 역할도 겸했다. 대방은 보통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숙식/예불 편의를 위해 지어진
것으로 왕실의 지원을 받던 서울 근교 사찰의 필수 건물이었다. 이곳도 흥선대원군과 인연이
깊어 이렇게 대방을 마련했는데, 절이 서울과 멀어서 상류층 손님의 왕래가 적었다. 하여 평
시에는 운수암 승려와 신도들도 예불/숙식 장소로 사용했다.

비로전이 생기면서 법당의 짐은 덜게 되었으며, 지금은 요사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의 역
할을 하고 있다. 종무소는 건물 앞부분에 있는데, 신발을 벗고 툇마루를 거쳐 안으로 들어가
는 구조이며, 공양간은 서측에, 요사는 북측에 자리한다. 근래에 북측에 지붕을 덧붙여 내부
가 좀 넓어졌다.
정면 어칸에는 흥선대원군이 내린 '운수암' 현판이 있어 그와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며, 가
로 184cm, 세로 52cm 크기로 하얀 바탕에 푸른색으로 글씨를 썼다. 글씨체는 예서(隸書)로 3
개의 낙관이 뚜렷하다.


▲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대방 (정면에 보이는 문이 공양간임)

▲  삼성각에서 바라본 대방의 뒷모습

▲  흥선대원군이 쓴 푸른색 운수암 현판의 위엄
'庵'자가 저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
생기가 감돈다.

▲  비로전(왼쪽)과 삼성각(윗쪽)

▲  운수암 비로전(毘盧殿)

대웅보전 옆구리에는 비로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2번째로 늙은 건물인데, 건축 양식과 내부에 있었던 칠성탱과 산신탱이 1870년에 조성된 것으
로 보아 19세기 후반(1870년 또는 그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는 대웅전의 역할을 했으며, 1980년대에 불단에 봉안된 석불(비로자나불)이 마모가 심
하고 깨진 부분이 많아 땅에 묻었다고 한다. 이후 1986년에 대웅보전이 신축되자 땅속에 파묻
은 석불을 다시 꺼내 이곳에 봉안하고 건물 이름을 비로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이는데, 1986년
이면 40년도 채 되지 않는 지척의 시절임에도 이곳은 기록을 너무 남기지 않아 혼돈을 유발한
다.
불단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뒤에는 아미타회상도(아미타후
불탱)이 있으나 진품은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고 그 모조품이 대신 한다. 그 외에 현왕탱
과 신중탱이 걸려있고, 절을 세운 장씨 보살의 진영(眞影)이 걸려 있다.


▲  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02호

비로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좌상은 고려 때 석불(石佛)로 왜정 말기에 다른 곳에서 가져왔다
고 전한다.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자 옛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높이 107cm, 어깨 폭 82cm인데, 파
손된 부분이 많아서 1980년대에 땅속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6년에 다시 꺼내 비
로전의 주인으로 삼았으며, 불상의 피부와 옷이 온통 하얀 것은 땅속에 묻힌 흔적과 이전에
파손된 부분을 커버하고자 백분을 발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이나 좀 고색의 때가 감돌지
나머지는 고색의 기운도 거의 잠들었다.
그는 1986년 안성시(당시는 안성군) 향토유적 16호의 지위를 얻었으나 2006년 경기도 지방유
형문화재로 지위가 높아졌으며, 연꽃과 구름 무늬가 새겨진 화강암 대좌(臺座)까지 갖추고 있
다.

불상의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백분과 검
은색이 뒤섞여 고단해 보이는 얼굴은 통통한데, 눈과 코, 입, 귀가 선명하며, 귀는 목까지 늘
어져 중생의 소리를 경청한다. 목은 두껍고 삼도(三道)가 있었으나 훼손되었으며, 몸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섬세히 표현되었다.
두 손은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으며, 다리는 오른쪽 발을 올
려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는데, 정강이 부분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수리한 부분이 많지만
조각솜씨는 괜찮은 편이며, 다소 경직되고 도식화된 형태를 통해 고려 때 불상으로 여겨진다.

석불 뒤에는 아미타후불탱이 걸려 있는데,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제작된 것이다. 허
나 이 그림은 모조품으로 진품은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으며, 그림 화기(畵記)에는 왕과
왕비의 만수세(萬壽歲)를 기원하는 글과 대원군 일가, 명성황후(明成皇后) 일가의 시주자 명
단이 있어 운수암도 왕실 원찰(願刹)의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화기에는 '高聖山 雲峀庵'이라 쓰여있어 이름은 같지만 지금과 한자(漢字)가 1글자씩 달랐음
을 보여주며,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大明 崇禎紀元後 五癸酉閏六月二十八日(대명 숭정기원후
오계유윤육월이십팔일) ~~'이라 쓰여 있어 오래전에 망한 명나라에 대한 쓸데없는 사대주의와
그리움이 여전했음을 보여주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  현왕탱(現王幀)과 창건주 장씨 보살의 진영(오른쪽)

비로전 불단 옆에는 명부(冥府, 저승)의 왕인 현왕(現王)을 담은 현왕탱과 창건주 장씨 보살
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창건주의 진영은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전하지 않으며, 그림 상단
측면에 '伽藍刱建大化主 淸信女 般若明 張氏 眞影(가람창건대화주 청신녀 반야명 장씨 진영)'
이라 쓰여 있고, 그 앞에 단을 마련해 창건주를 기린다.

▲  비로전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

▲  삼성각 산신탱

▲  삼성각 칠성탱

▲  삼성각 독성탱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198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이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삼성각이 있기 전에는 비로전에 얹혀 살았
는데, 이곳에 있던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은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
로 진품은 모두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있고, 복제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서 그림이 꽤
선명도가 진하고 세월의 주름이 전혀 없다.



 

♠  무양성<舞陽城. 무한성(無限城)> - 안성시 향토유적 2호

▲  무한성의 북쪽 부분

조촐한 규모의 운수암을 둘러보고 절을 둘러싸고 있는 무한성(무양성)을 1바퀴 돌았다. 무한
성은 무한하다는 뜻의 성으로 성의 역사는 무한해도 규모는 그리 무한하지 못하다.
고성산 남쪽 산정(山頂)에 둥글게 닦여진 둘레 약 120m, 높이 2~4m에 조그만 퇴뫼식 산성으로
무양성(無陽城), 무양산성(舞陽山城), 무란성(舞鸞城)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다. 무란성이란
이름은 힘이 장사인 '무란'이란 여인네가 쌓았다고 해서, 그리고 무양성은 '무양'이 운수암을
지키려는 용도로 축성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 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고성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
地勝覽)에 양성현(안성시 양성면) 남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 1,305척, 성 안에 못이 하
나 있다는 기록이 있고, 1899년에 제작된 양성읍지(陽城邑誌)에 '무한성 남단 아래 고성(古城
)이 있어 옛 고을터가 완연하다'
는 내용이 있다.
성 내부에는 건물터와 많은 기와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을 통해 막연히 삼국시대(백제 또
는 신라)에 닦여진 것으로 보이며, 고려 때 증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  무한성에서 바라본 운수암

▲  무한성 서쪽 부분

무한성(무양산성)은 오랫동안 버려진 성이라 속세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해 왕년의 위엄은
자연과 세월의 집요한 시비 앞에 거의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남벽과 동벽, 내성벽,
성문터 등이 일부 남아있을 뿐인데, 아무리 옛 사람들이 철옹성처럼 만들었다고 해도 대자연
과 세월 앞에서는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

여름 제국의 뜨거운 햇살을 굴복시킬 정도로 나무와 수풀에 제대로 치여 성곽의 모습은 흐트
러졌지만 다행히 산성의 윤곽이 잘 남아있고, 성곽을 이루던 성돌도 여럿 남아있어 무한성의
존재감을 그런데로 확인할 수 있으며, 성이 들어앉은 지형은 대체로 경사가 각박해 성은 작지
만 요새지로는 아주 그만이다. 이곳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삼국시대에 조
성된 것이 맞다면 자기 밥값은 충분히 했을 것이며, 18세기에 운수암이 성내에 들어앉으면서
운수암을 지키는 소소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 무양성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산42


▲  무한성 서남쪽 부분

▲  숲길 같은 무한성 남쪽 부분

▲  경사가 각박한 무한성 남쪽 부분

▲  성문터로 여겨지는 부분

▲  무한성 남쪽 부분에서 바라본 천하 - 안성 공도읍 지역

▲  무한성 남쪽 부분에서 바라본 천하 - 독정저수지와 안성 원곡면 지역

▲  운수암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

무한성(무양산성)을 1바퀴 도니 다시 운수암이다. 무한성 성곽길은 운수암에서 시작해서 운수
암에서 끝나는 순환형 산길인 것이다.

다시 찾은 운수암에서 대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지금까지 고생한 두 다리를 어루만지며 땀을
씻었다. 솔솔 불어오는 고성산 산바람이 땀을 앗아가면서 몸도 좀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산중에 묻힌 이곳에 며칠 신세를 지고 싶지만 그럴만한 처지도 되지 못해 쿨하게 작별을 고하
며 운수암을 나온다. 올라올 때는 무더위 때문에 힘들었지만 내려갈 때는 내리막과 초저녁 기
운의 탄력을 받아 금세 운수암입구 방신1리 정류장에 이른다.

여기서 공도와 평택을 거쳐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햇으나 그러면 너무 돌아가는 것이 되
어 다시 양성으로 나왔다. 다행히 버스가 10분 만에 와서 무난히 양성까지 왔으나 용인으로
가는 용인시내버스 22-1번이 무려 40여 분 만에 오면서 다시금 환승할인이 깨져 가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비운을 겪었다. 어떻게 같은 곳에서 2번 연속 그런 고통이 생기는 것인지 여기가
그만큼 벽지 비슷한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안성 운수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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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남한산성 봄맞이 나들이 ~~~ (남한산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연무관, 개원사)

남한산성 늦겨울 나들이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개원사, 연무관)



' 남한산성 늦겨울 나들이 '

남한산 장경사
▲  남한산성 장경사

지수당

남한산성 연무관

▲  지수당

▲  연무관

 



 

차디찬 겨울 제국이 드디어 그 끝물을 보이던 3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광주(廣州) 남
한산성을 찾았다.
오전 11시에 집을 나서 지하철을 3번씩이나 갈아탄 끝에 남한산성의 서쪽 입구의 하나
인 산성역(8호선)에 이르렀다. 이 역은 해발 100m 고지에 자리해 있어 신금호역(5호선
), 만덕역(부산3호선)만큼이나 장대한 깊이를 자랑한다. 하여 역을 빠져나오는데만 한
참이 걸린다.

어두컴컴한 지하를 벗어나 산성역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성남시
내버스 52번(성남동 대형주차장↔남한산성)을 잡아탔다. 산성역에서 남한산성 내부(산
성리)로 들어가는 버스는 9번과 9-1번, 52번, 53번이 있는데, 52번은 평일에만 바퀴를
굴리는 노선으로 남한산성 안으로 바로 들어가나 배차간격이 2시간 이상이라 절망적인
수준이다. 그리고 9번은 20분대 간격이나 성남시 양지동과 은행동 지역 강제투어가 심
하다.
9-1번은 52번처럼 남한산성으로 바로 들어가나 토요일과 휴일에만 운행하며,(배차간격
은 10~20분대) 53번도 휴일에만 운행하나 배차간격이 우울하다.

남한산성 나들이객과 산꾼을 가득 머금은 버스는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구불구
불한 고갯길(남한산성로)을 지나 산성 남문<南門, 지화문(至和門)>을 통해 남한산성으
로 진입, 남한산성 종점인 산성로터리에서 두 발을 내린다.

남한산성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산성로터리에서 남한산성로를 따라 동쪽으로 15분 정
도를 가면 남한산성 동문<東門, 좌익문(左翼門)>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 장경사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남한산성 성곽길을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것은 동문 서
쪽에 있는 포장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성곽길이 조금은 지름길로 20분 정도 걸리나 경
사와 성곽길이 다소 거칠며, 포장길도 시작부터 각박한 경사로 진을 제대로 빼게 하나
장경사/망월사 갈림길 이후부터 점차 순해진다. (포장길은 25분 정도 걸림)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남한산성 동문에서 장경사, 망월사로 인도하는 각박한 포장길

▲  망월사 입구 (장경사, 망월사 갈림길)

▲  장경사, 망월사 갈림길에서
장경사를 알리는 표석



 

♠  남한산성 10개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며 살아남은
조선 중기 산사(山寺), 남한산 장경사(南漢山 長慶寺)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5호

▲  장경사 숲길 (장경사/망월사 갈림길에서 장경사 방향)

동문 서쪽 포장길을 6~7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장경사 표석과 망월사 표석이 서
로 자기네 절에 오라며 호객 행위를 벌이고 있는데, 우선 구석에 자리한 장경사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망월사에 들리기로 했다,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망월사, 오른쪽 길은 장경사로 이어
짐)

장경사 표석의 손을 들어주어 오른쪽 길로 향했지만 산길의 흥분은 여전하여 숨을 제대로 헐
떡이게 만든다. 다행히 한 굽이를 지나니 길은 서서히 진정을 되찾으며 다소 순화되었고, 다
시금 1굽이를 크게 도니 동문에서 서로 떨어졌던 남한산성 성곽길이 바로 옆에 붙는다. 여기
서 잠시 나란히 이어지다가 곧 갈라져 제 갈 길을 간다. 어디로 가든 장경사로 이어지나 빠르
게 가고 싶다면 숲길(왼쪽)로 가면 된다. 성곽길은 절 주차장 남쪽으로 이어진다.


▲  장경사 곁을 흐르는 남한산성(사적 57호) 동쪽 성곽 (북쪽 방향)

▲  남한산성 동쪽 성곽에서 바라본 한봉(漢峰, 418m)

한봉은 남한산성(청량산)을 지키는 동쪽 봉우리로 산성의 동쪽 가지 성(枝城)인 한봉성(漢峰
城)을 품고 있다. 이 성은 산성 동장대터와 벌봉(봉암성) 능선에서 한봉 정상까지 이어지며
지형이 각박해 수비에 용이하다.


▲  장경사 일주문(一柱門)

성곽길과 떨어지면 얼마 안가서 장경사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남한산 장경사' 현
판을 정면에 내밀며 절의 정체를 널리 드러내고 있는데, 다른 일주문과 달리 지붕과 현판이
달린 평방(平枋)의 높이가 너무 낮다. 그 문을 들어서면 여태까지 보이지 않던 장경사의 속살
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럼 여기서 잠시 장경사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남한산성 내에서 제일 동쪽 구석 360m 고지에 자리한 장경사는 병자호란 직후인 1638년에 창
건되었다.
1624년 전국의 승려를 소환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했는데, 공사가 끝나자 그들을 제
자리로 보내지 않고 산성에 눌러앉게 하여 산성 수비와 관리의 임무를 맡겼다. 허나 그 시절
산성 안에는 망월사와 옥정사(玉井寺) 등 2개의 절 밖에는 없어서 수용 공간이 너무 딸렸다.
그러니 승려들의 불만과 원성은 대단했다. 하여 1638년에 장경사와 개원사, 한흥사(漢興寺),
국청사(國淸寺), 천주사(天柱寺), 동림사(東林寺), 남단사(南壇寺) 등 7개의 절을 새로 지어
이들을 수용했고, 그로 인해 남한산성에는 9개의 절이 둥지를 틀게 되었다. 그중 장경사는 충
청도 출신 승려(승군)들이 머물렀다.
병자호란이 한참이던 1637년 1월 19일 청나라군이 동문 주변을 공격했는데 어영별장 이기축(
李起築)이 장경사 자리에 있다가 죽을 힘을 다해 그들을 격퇴했다. 이에 인조가 찾아와 그를
위로하고 가선(嘉善)의 품계를 더하고 완계군(完溪君)에 봉했다.

1907년 왜군이 남한산성을 찾아와 9개 사찰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모두 정리했는데, 그것들이
화약을 폭파하는 과정에서 8개의 절이 몽땅 파괴되었으나 장경사는 그나마 피해가 덜해 유일
하게 살아남았다. 하여 창건 당시의 모습과 가람 배치를 많이 유지하고 있으며, 1975년 화재
를 만나 소실된 것을 다시 중창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심향각, 삼성각, 대방, 요사, 범종각, 무심당 등 8~9동 정도의 건
물이 있으며, 이중 대웅전은 19세기 건물이나 20세기 후반에 너무 변형을 주면서 고색의 향기
는 거의 말라버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강희21년명 동종이 있는데, 이 종은 오랫동안 삼성
동 봉은사(奉恩寺)에서 객지생활을 하다가 2013년에 겨우 돌아왔다.

▲  검은 피부를 지닌 똥배 포대화상
그의 배를 어루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  경내를 가리고 앉은 무심당(無心堂)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범종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선방과 요사로 쓰이는 심향당(心香堂)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장경사는 남쪽을 제외하면 모두 산으로 막혀있다.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절이긴 하지만 가장 동쪽 외진 곳에 자리해 있고 숲에 완전 감싸인 곳이라 적막하고 고즈넉한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절간답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말이다.

법당(法堂)인 대웅전 앞에는 뜨락이 있는데, 뜨락에는 1995년에 조성된 9층석탑이 파리도 미
끄러울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다. 그 좌우에 심향당과 요사가 서로 마주보
고 있으며, 대웅전 맞은편에는 무심당이란 건물이 있는데, 예전 진남루(鎭南樓)로 근래에 지
금의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  장경사 현판을 내건 요사(寮舍)

▲  법당 뜨락에 세워진 9층사리탑


▲  장경사의 빛바랜 과거 (1958년 사진)
지금과 달리 뜨락이 좁고 동쪽 요사 건물과 대웅전이 많이 달랐음을 알려준다.

▲  장경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너무 변형을 많이 주어 옛 모습을 다소
잃었다. 1958년 사진과 비교하면 오히려 젊어진 느낌이랄까~~! 저 안에
이곳의 보물인 강희21년명 동종이 들어있으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살짝 미소를 던지고 있는 석가여래가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그들 뒤에는 붉은 색채의 후불탱이 있으며, 그 좌우로 조그만
원불(願佛)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장관을 이룬다.

▲  강희(康熙) 21년명 장경사 동종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82호

대웅전 안에는 이곳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동종이 있다. 그의 시커먼 피부에는 '강희 21년명~'
글씨가 있어 1682년 3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종이 작아 보여 거뜬히 들 수 있을
듯 싶지만 그의 무게는 300근(약 180kg)에 이르니 괜한 생각은 하지도 말자.

1907년 왜군이 장경사에서 무기를 압수하고 절을 파괴했는데 그때 동종까지 집어가 삼성동 봉
은사에 넘겨버렸다. 이후 봉은사에서 100년 이상 타향살이를 하다가 2013년 제자리로 돌아왔
으며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그는 강제로 타지로 넘어간 문화유산이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며, 그의 무사 귀환 덕분인지 2014년 6월,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의 지위를 얻
게 되었다. (종의 위치는 절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음)


▲  장경사 9층사리탑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많이도 닮은 9층사리탑은 1995년에 조성된 것으로
부처의 사리를 머금고 있다. 그 이전에는 경내에 탑이란 존재가 없어서
무척 허전했었는데, 그를 장만함으로써 허전함이 많이 가셨다.

▲  티벳 불교 스타일로 지어진 동그란 경통(經筒)

경통이란 불경을 넣어두던 통으로 티벳 불교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경통을 티벳어로 '마니
차'라고 함)
우리의 윤장대(輪藏臺)와 비슷한 것으로 손으로 저것을 돌리며 염불을 하거나 소망을 빌면 경
전을 모두 읽거나 이해한 것과 같다고 하며 소망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모르
는 까막눈이 많다보니 저런 것을 이용해 영업을 한 것이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뒷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과 칠성,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경내 밑에 닦여진 돌탑
돌탑 중앙에 일종의 감실(龕室)까지 갖추고 있어 마치 경주 첨성대(瞻星臺)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장경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22-1 (남한산성로 676 ☎ 031-743-6548)


▲  돌탑 감실을 장악한 조그만 존재들의 위엄
동자승과 돌하루방, 불상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모여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이루었다.



 

♠  남한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절, 망월사(望月寺)
- 망월사지(경기도 지방기념물 111호)

▲  가파른 곳에 세워진 망월사 일주문

장경사를 40분 정도 둘러보고 다시 갈림길(망월사, 장경사 갈림길)로 나왔다. 이번에는 장경
사 때문에 미루어둔 망월사로 길을 잡았는데, 이곳 역시 각박한 경사를 내밀고 있어 숨을 또
헐떡이게 한다. 장경사는 어느 정도 길을 오르면 흥분을 가라앉지만 망월사는 경내 끝까지 가
파른 경사의 연속이라 속세에 은근히 까칠한 모습을 보인다.

장경사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420m 고지 가파른 곳에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망월사는 남한
산성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남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
이나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면서 서울(한양)을 도읍으로 꾸밀 때, 서울에
있던 장의사(莊義寺)를 밀어버리고 그곳에 있던 불상과 금자(金字)로 된 화엄경(華嚴經), 금
솥 등을 수습해 남한산에 망월사를 지었다고 한다.
허나 불교를 신봉하던 이성계가 도성을 닦을 자리에 있었다는 장의사를 밀어버렸다는 것도 그
리 신뢰가 가지 않으며, 서울 4대문 안에는 장의사란 절도 없었다. 다만 창의문(彰義門) 바깥
인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연산군(燕山君) 때 사라진 장의사가 있어(절터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음) 거기서 가져온 것을 봉안하려고 지었거나 기존에 있던 망월사에 옮겨놓고 장의사의 뒤
를 이었다는 식으로 둔갑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처음 이름은 망월암이었다고 하며, 남한산성의 역사가 담긴 남한지(南漢誌)에는 남한산성 9개
사찰 중 가장 늙은 절로 나왔다. 또한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쓴 가람고(伽藍考)에는
망월사가 폐사(廢寺)터로 나와 18세기에 잠시 망한 것으로 보이며, 1907년 왜군이 남한산성에
있는 절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강제 폐사되고 만다.
그러다가 1990년부터 폐허의 절터에 중창불사를 일으켜 대웅보전(1994년)과 극락보전(1993년)
, 범종각(2003년), 요사 등 4~5동의 건물을 갖추었으며, 특히 대웅보전과 극락보전, 요사는
하나같이 규모가 장대하여 아직은 조촐한 절의 규모를 능히 커버하고도 남는다. 그 외에 인도
인디라 간디 수상에게서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13층 사리탑이 있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 자부하나 소장 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돌로 쌓은 축대가
곳곳에 남아있고 늙은 대형 맷돌 1기가 전할 따름이다. 또한 절터라고 해봐야 그 위에 모두
건물을 올렸기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려우며, 극락보전 자리가 옛 망월사 법당이 있던
터이다. 현재 망월사는 망월사터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부도, 비석군에서 바라본 망월사 (극락보전과 13층석탑)

망월사는 경사진 곳에 자리해 있어 석축을 다지고 건물을 주렁주렁 지어 올렸다. 그래서 밑에
서 보면 자못 웅장해 보인다. 건물은 몇 채 안되지만 대웅보전과 극락보전 등이 한 덩치를 자
랑하니 더욱 그렇다.
절 뒷쪽은 남한산성 동장대(東將臺) 쪽이나 이어지는 산길은 없으며, 각박한 경사지라 이곳도
사실상 막다른 곳이다. 하여 절을 둘러봤으면 미련 없이 다시 왔던 길로 나가야 된다.

▲  수미당 본견의 부도탑과 망월사 복원에
공헌한 이들을 기리는 공덕비들

▲  옛 법당터 자리에 우뚝 선 극락보전
(極樂寶殿) - 1993년에 지어졌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망월사 요사

▲  극락보전 아미타3존상
(아미타불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

▲  1994년에 지어진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망월사의 자랑, 13층사리탑의 위엄

대웅보전 옆구리에 세워진 13층사리탑에는 인도 인디라 간디 수상이 선물한 부처의 진신사리
가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온갖 정성을 다해 지어올린 망월사의 야심작으로 밑도리 3층은
동그란 모습, 중간의 3층은 8각형, 나머지 윗층은 4각형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조각
수법도 매우 현란하며, 최근에 조성된 탓에 피부가 매끌매끌하다.


▲  경내에서 산신각으로 인도하는 계단

▲  바위 밑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망월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산신의 보금자리인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이라 해서 번
듯한 기와집이 있는 것은 아니며, 원래 바위 밑에 그의 노천 거처를 마련했다가 석고를 이용
해 홍예 모양의 굴을 만들어 그 안에 봉안했다.
흑백 피부의 산신은 역시나 같은 피부색인 호랑이 등에 앉아 수염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그
옆에 색이 입혀진 별도의 산신상이 따로 있어 특이하게 2개의 산신상을 간직하고 있다. 허나
덩치 면에서 흑백 산신이 훨씬 우위를 점하며 정면에 앉아있고, 그에게 밀려난 칼라 산신은
뒷전에 있으니 산신 세계도 속세처럼 경쟁이 치열한 모양이다.

산신각 뒤에는 예사롭지 않은 큰 바위와 벼랑들이 포진해 있어 절이 있기 전에도 기도처나 민
간신앙의 애듯한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망월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4 (남한산성로 680, ☎ 031-747-3312)
* 망월사 홈페이지는 위의 산신각 사진을 클릭한다.



 

♠  지수당과 연무관

▲  지수당(池水堂)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4호

망월사를 둘러보고 다시 동문으로 내려와 지수당으로 이동했다. 남한산성의 조그만 꽃이라 할
수 있는 지수당은 1672년 광주부윤 이세화(李世華, 1630~1701)가 지었다.
이곳은 연못 3개와 지수당, 관어정 등 정자 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중심인 지수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정자(亭子)로 연못을 바라보며 연회를 즐길 수 있도록 사방이
뻥 뚫려 있다. 허나 20세기 이후 연못 하나는 쥐도새도 모르게 매몰되었고, 관어정 또한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말았다.


▲  지수당 느티나무 (추정 나이 250년, 높이 25m, 둘레 3.5m)

지수당 동쪽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근래 건강에 이상이 생겨 시름시름 앓던 것을 경기
도와 LG상록재단에서 외과수술을 벌이고 그의 삶터 확보를 위해 울타리를 치면서 생육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는데, 이후 예전처럼 왕년의 모습을 보이며 지수당에 시원한 그늘을 베푼다.

▲  옆에서 바라본 지수당과 연못

▲  연못 너머에서 바라본 지수당

지수당 동쪽 연못은 지수당을 중심으로 하여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지수당이 있는 대
지가 연못의 중심부로 크게 튀어나와 있어 3면에서 연못을 즐길 수 있도록 했으며, 연못 테두
리를 돌로 정연하게 다져 안정감을 주었다.


▲  동그란 섬을 띄워놓은 지수당 서쪽 연못

지수당 서쪽 연못은 네모난 모습을 하고 있다. 연못 복판에는 동그란 섬을 두둥실 띄워 풍치
를 돋구고 있으니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상징하
는 것 같다.
맨물을 드러낸 동쪽 연못과 달리 겨울 제국이 씌워놓은 두꺼운 봉인(얼음)이 입혀져 있어 봄
이 코앞에 이르렀음에도 아직까지도 겨울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연못 섬은 남한산성
의 유일한 섬으로 소나무들이 바깥 세상의 간섭을 거부하며 그들만의 작은 세상을 일구고 있
다.

지금은 자연의 공간이 되었지만 섬 중앙에는 1804년에 지어진 관어정(觀魚亭)이 있었다. 생전
의 모습을 남기지 못해 생김새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네모난 정자로 여겨지며, 지수당과 마
주보면서 서로 아름다움을 견주었다. 바깥에서 섬까지는 다리를 놓지 않고 조그만 배를 이용
해 섬을 오갔으며, 관어정이란 이름은 중원대륙(서토)의 개허접 소설인 삼국지에 지겹도록 나
오는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못에 임(臨)하여 방책을 결정하며 적을 헤아렸다는 고사
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섬으로의 접근은 거의 불가능하며, 연못 바깥에서 그림의 떡처럼 바라봐야 된다. 허나
바깥에서도 섬 내부가 훤히 보이니 굳이 깊은 연못을 무릅쓰면서까지 들어갈 이유는 없다.

* 지수당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24-1


▲  지수당 서쪽 연못과 관어정터를 품은 동그란 섬
섬 중앙에 관어정이 자리하여 동쪽에 있는 지수당을 바라보았다.

▲  연무관(演武館) - 보물 2,154호

지수당에서 산성로터리 방면으로 4~5분 가면 오른쪽 언덕(남한산초교 동쪽)에 기와집 하나가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남한산성 군사훈련장으로 살았던 연무관이다.
연무관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보기만 해도 시
원스런 팔작지붕을 날개처럼 펄럭이고 있다. 군사 훈련장이라 자못 위엄이 있는 규모로 남쪽
(앞면)은 뻥 뚫려있어 군사 훈련을 지휘하거나 감독하기에 좋다. 나머지 3면은 문이 달린 벽
으로 막혀있으나 건물 뒷쪽은 화살을 쏘거나 창검술을 익히던 곳이었으며 서쪽에는 이아(貳衙
)가 있었다.

이 건물은 1624년 남한산성을 손질했을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연무당(演武堂)
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숙종 시절에 수어사(守禦使) 김재호(金在好)가 건물을 수리하자 숙종
임금이 연병관(練兵冠)이란 편액을 내리면서 연병관 또는 연무관으로 이름이 갈렸다. 정조 때
는 수어영(守禦營)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으나 이후로도 쭉 연병관, 연무관으로 불려왔다.
장수와 군사들이 몸을 풀던 훈련장이지만 가끔씩 무과(武科)나 문과(文科)가 열리기도 했으며,
여기서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무기 시연과 주조, 야조 등의 군사
훈련도 이루어졌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면은 여러 번의 보
수공사로 지금처럼 뚫린 형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연무관은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2021년 12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
었다.

▲  연무관 현판의 위엄
1762년에 쓰인 현판으로 글씨들이 마치
군사들이 몸을 푸는 모습 같다.

▲  연무관의 뒷모습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으로
지금은 무늬만 남아있다.


▲  주춧돌만 일부 남은 이아(貳衙)터

연무관 옆에는 이아 또는 제승헌(制勝軒)이라 불리던 관청이 있었다. 1748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이아에 있던 작청(作廳)은 중간 관리층인 이방과 아전들이 남한산성과 광주부(廣州府)
관내의 행정 업무를 보던 곳이다.
관리와 민원을 넣는 백성들로 시끌시끌했을 이아는 장대한 세월(왜정 때 없어진 것으로 여겨
짐)에 녹아 없어지고 겨우 터만 희미하게 남아있으며, 그 터의 상당수는 농경지로 쓰이고 있
어 옛 기억 마저 희미하게 만든다.


▲  봄을 향한 몸부림, 연무관 느티나무 - 광주시 보호수 13호, 14호

연무관 밑에는 5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애타게 봄의 해방군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
중 광주시 보호수 13호인 나무는 추정 나이 510년(1983년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는 470년),
높이 23m, 둘레 7m이며, 광주시 보호수 14호인 나무는 추정 나이 550년(1983년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는 510년), 높이 24m, 둘레는 8.9m에 달한다.
아무리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세월을 무한리필로 씹어먹어 이렇게 장대한 나무로 성장했는데,
이들도 한때 건강의 적신호가 켜졌던 것을 2008년 LG상록재단의 보살핌으로 생육환경 개선사
업을 받아 예전의 생기를 되찾았다.
3월도 왔으니 빨리 잎을 피워야 되겠지만 겨울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앙상한
가지만이 가득하다.

* 연무관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400-1



 

♠  한때 남한산성의 중심 사찰이었던 개원사(開元寺)
- 개원사터(경기도 지방기념물 119호)

▲  개원사 일주문인 조계문(曹溪門)

연무관에서 다시 지수당 쪽으로 가다가 지수당 못미쳐에서 남쪽 길로 빠지면 개원사로 인도하
는 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절을 목전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이랄까? 온갖 음식 냄새로 사람들의 후각을 희롱하는 식당
들을 지나면 높은 키의 개원사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청량산(淸凉山) 개원사 조계문'이라
쓰인 현판을 정면에 내밀고 있어 이곳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는데, 여기서 조계문은 일주문의
이름이다.
그런 일주문을 지나면 남옹성(南甕城)으로 유혹하는 산길이 나오고, 곧이어 문짝이 달린 커다
란 문이 길을 막는다. 그 문은 천왕문으로 이 땅에 흔한 천왕문의 모습이 아닌 여닫는 문짝으
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짝에 사천왕(四天王)을 그려 넣어 그런데로 천왕문의 기능을 수행한다.
허나 방패 같은 그 문짝은 차량 통행이나 석가탄신일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열리며, 보통은
오른쪽 문짝에 조그맣게 달린 출입문으로 오가면 된다. (보통 18시까지만 열어둠)


▲  큰 문짝으로 이루어진 개원사 천왕문(天王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속세의 기운을 막고자 저렇게 문을 지은 모양이다.

▲  개원사 사적비(事蹟碑)와 절 중창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는 공덕비들

▲  구석에서 홀로 오후 햇살을 즐기는
조선 후기 석종형 부도(石鐘形 浮屠)

▲  승장조사전(僧將祖師殿)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병자호란 때 산성을
지켰던 벽암대사의 사당이다.

▲  경내 밑에 자리한 조그만 연못
절 주변 나무들이 연못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옆에 절의 내력을 담은 사적비와 절 중창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는 공
덕비 등 비석 3기가 때깔 고운 모습으로 나란히 환영을 해준다. 그들을 지나면 왼쪽 숲에 홀
로 자리한 맞배지붕 건물이 홀로 보일 것인데, 그 건물은 승장조사전으로 1624년에 승려들을
독려해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승려의 거처 해결을 위해 산성 안에 여러 절을 지었으며, 병자호
란 때 성을 지켰던 벽암대사(碧巖大師)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에 이렇게 조사전을 둔 것을 개원사가 조선 후기에 전국 승병을 지휘하던 곳이었기 때문
이다. 지금 건물은 근래 지어진 것으로 절이 비록 뒷전으로 물러나 초야에 묻힌 신세나 다름
이 없지만 한때는 천하 승병을 주름잡고 지휘하던 왕년의 영광을 고스란히 추억하고 있다.

경내 앞에 이르니 개원사 안내문과 돌에 새겨진 2기의 석불입상이 마중을 하고 그 뒤로 개원
사 건물들이 모습을 비춘다.


▲  경내 앞에 자리한 석불입상과 개원사 안내문

앞서 장경사가 남한산성의 가장 동쪽 구석에 자리해 있다면, 개원사는 가장 남쪽 구석에 자리
해 있다. 그러니까 남한산성 성내(城內)를 동에서 남으로 바쁘게 가로지른 셈이 된다.

1624년 남한산성을 보수하려고 전국의 승려들을 징발했는데, 그들에게 산성 수비와 관리의 임
무까지 떠맡기면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1638년에 7개의 절이 새로 지어졌다. 기존에 있는 2개
의 절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원사는 바로 그 7개 절의 하나로 으뜸을 연다는 절의
이름처럼 1894년까지 남한산성 본영(本營) 사찰 및 조선 승병의 총지휘소로 위엄을 떨쳤다.
그리고 전국 사찰의 승풍(僧風)을 감찰하는 규정소(糾正所)의 역할까지 도맡으면서 조선 불교
의 중심격 사찰로 명성을 누렸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의승방번(義僧防番)이 폐지되자 승병의 총지휘소, 규정
소의 감투를 강제로 내려놓게 되었으며,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왜군이 남한산성 사찰의 무기
고를 강제로 정리했을 때 개원사에 보관 중이던 화약을 처리하다가 미련하게도 절을 홀라당
태워먹어 졸지에 망하고 말았다. 허나 그것들이 실수가 아닌 고의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쓰러진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1970년에 또 큰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 1동을 제외하
고 몽땅 태워먹었다. 이후 선효화상(禪曉和尙)이 신도들과 함께 10여 년 간 불사(佛事)를 일
으켜 대각전과 요사, 범종루 등 건물 다수를 다시 세웠다.

숲에 감싸인 경내에는 법당인 대각전을 비롯해 불유각, 범종루, 승장조사전,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2차례에 걸친 대화재로 절의 장대한 역사와 유물이 죄다 흩어져 지금은 승군
들이 사용했던 유분(鍮盆) 1점과 석장(石杖). 옹기, 함지를 비롯해 석종형 부도, 조선 후기
것으로 보이는 불유각 석불입상, 조선 중기 것으로 보이는 화현전 석불좌상 등이 있다, 그리
고 군기고터와 누각터, 종각터 등의 건물터와 돌계단, 박석 등 옛 흔적이 남아 개원사의 왕년
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또한 지금은 전설이 되어 버렸지만 남한산성 사찰 중, 유일하게 대장경(大藏經)을 지닌 절로
1638년 이후부터 쭉 보관되어 왔다. 그 대장경을 실은 배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서호(西湖)
에 닿았는데, 사람은 없고 배 위에 '중원개원사간(中原開元寺刊)'이라 쓰인 책함만 있는지라
그 말을 들은 소심한 인조(仁祖)는 전국에 개원사란 절을 찾아 봉안하도록 지시했다.
허나 그 이름을 지닌 절이 오로지 남한산 개원사가 전부라 거기에 봉안했다는 거짓말 같은 전
설이 덧붙여 전해온다. 그 대장경은 금란보 10벌에 싸서 애지중지 보관했으나 1970년 화재로
모두 날라가버려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만약 살아남았다면 아무리 못해도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누렸을텐데 말이다.

현재 개원사는 개원사터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절 건물이 버젓이 있
는데도 터를 붙인 것은 대화재로 건물이 몽땅 날라가 새로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앞서
망월사도 마찬가지이다.

* 개원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98-5 (남한산성로 731-73, ☎ 031-743-
  6568)


▲  청기와를 두룬 대각전(大覺殿)
개원사의 법당으로 그 흔한 대웅전이 아닌 크게 깨닫는다는 뜻의
대각전을 칭하고 있다.
 

▲  불유각(佛乳閣)과 화현전(化現殿)

보통 불유각이라 하면 우물이나 샘터가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그런 것은 없고 조선 후기 것으
로 여겨지는 석불입상이 있다. 원래부터 이곳 석불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넉넉한 표정과 온화
한 미소를 머금고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며 중생들을 위로한다.


▲  불유각의 주인, 석불입상
피부에 검은 때가 많이 낀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늦어도 구한말
석불로 여겨진다. (확실한 정보는 없음)

▲  화현전에 봉안된 누런 피부의 석불좌상
돌에 마치 현신한 듯 진하게 자리한 석불로 조선 중기 석불로 여겨진다. 그 역시
자세한 정보는 없으며, 원래부터 이곳 석불이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이름도 참 생소한 화현전은 누런 피부를 지닌 늙은 석불좌상과 산신탱, 독성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석불좌상 뒤에는 색채가 곱게 입혀진 목조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으며 중생들이 올
린 쌀과 과일, 과자 등의 음식 제물이 가득하여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나무 조각에 색을 입힌 독성탱

▲  대각전 뜨락에 세워진 3층석탑

▲  2층 범종루

개원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턱 밑에 이르렀다. 마침 아줌마 신도가 나오
더니 곧 문닫을 시간이라고 그런다. 다시는 안와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둘러본 상태라
물론 승군이 사용했다는 조선 후기 유물들은 만나지 못했지만 그런 조그만 것들은 보기도 힘
든 존재들이니 애시당초 포기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렇게 개원사와 작별을 고하고 다시 산성리로 나와 산성로터리 서쪽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
을 구경했다. 낮이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18시부터는 어두운 기운이 적지 않게 도사리고 있는
지라 더 이상의 사진 촬영은 어려웠다. (찍어봐야 다 흐리게 나오니)
인근에 자리한 침괘정(枕戈亭)이 잠시 들렸다 가라며 꼬리를 치지만 몸도 좀 지친 상태라 남
한산성과의 그날 인연을 쿨하게 정리하고 성남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은 남한산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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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최영장군묘, 고양동누리길, 성녕대군묘 역사기행 (대자산, 경안군 및 임창군묘)

고양 최영장군묘, 대자동 나들이



' 고양 최영장군묘, 대자동 나들이 '
최영장군묘
▲  최영장군묘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고양시 대자동(大慈洞)을 찾았다.

서울에서 파주, 개성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통일로)변에 자리한 대자동은 조선 태종의 4째
아들인 성녕대군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대자사(大慈寺)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전원(田
園) 분위기 가득한 이곳에는 나를 여기로 부른 최영장군묘를 비롯하여 성녕대군묘와 온녕군
묘, 경안군묘, 임창군묘 등 늙은 무덤이 즐비해 무덤 답사의 숨겨진 성지(聖地)로 꼽힌다.


▲  겨울잠에 잠긴 대자동 들판



 

♠  고려의 마지막 보루, 풀이 자라지 않는 무덤으로 유명했던
최영장군묘(崔瑩將軍墓) - 경기도 지방기념물 23호

▲  최영장군묘로 인도하는 대양로(고양동누리길)

최영장군묘를 비롯한 대자동 지역의 무덤 답사는 1번 국도(통일로)변에 자리한 필리핀참전비
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3,6호선 불광역과 연신내역, 3호선 구파발역, 3호선 삼송역에서
벽제, 내유동, 금촌, 문산 방향 시내버스와 마을버스 이용>
필리핀참전비 동쪽에는 대자동 안쪽으로 인도하는 2차선 길(대양로)이 있는데, 고양동과 중부
대학교 고양캠퍼스로 이어지는 길로 단풍나무가 길게 가로수를 이루고 있어 늦가을에 오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특히 고양시(高陽市)가 닦은 지역 둘레길인 '고양누리길'의 '고양
동누리길(필리핀참전비~만장고개, 7.56km)'이 이 길을 거쳐 최영장군묘와 대자산으로 흘러가
며, 최영장군묘와 성녕대군묘, 고양향교, 중남미문화원, 대자산 등의 여러 명소를 끼고 있어
볼거리도 풍부하다.

대자동 산하에는 최영장군묘역을 비롯해 성녕대군과 경혜공주, 경안군, 이성군(利城君), 온녕
군(溫寧君), 임창군 등의 조선 왕족들, 김홍집(金弘集)과 김주신(金柱臣) 등의 조선 후기 인
물 등, 오래된 무덤이 즐비하다.
이곳에 이토록 옛 사람들의 무덤이 많은 것은 고려 후기 이후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
했던 탓이다. 처음에 최원직(최영의 부친)이 이곳에 묻혔고, 그 다음 최영장군이, 조선시대로
들어와서는 성녕대군이 최영장군묘 밑에 둥지를 틀기 시작해 많은 왕족과 사대부들이 대자동
산천에 비빌 구석을 마련했다. 이렇게 한 동네에서 고려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무덤을 만날 수 있어 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그만이다.

필리핀참전비에서 1km 정도 들어가면 대자동회전교차로(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무민로
로 들어서(오른쪽으로 가면 고양동) 3분 정도 가면 대자동 마을회관인데, 여기서 오른쪽 성녕
길로 7분 정도 들어가면 농가와 주차장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최영장군묘로 인도하는 대자
산 숲길이 활짝 마중을 한다.


▲  최영장군묘, 대자산 입구 (고양동누리길)

대자산(大慈山)은 고양시 대자동과 고양동(高陽洞)에 걸쳐있는 해발 210m의 나지막한 뫼이다.
최영장군과 성녕대군, 경안군 묘역을 품고 있는데, 최영장군묘 밑에서 대자산 정상부를 찍고
고양향교까지 2.5km의 숲길이 달달하게 펼쳐져 있으며, 고양동누리길이 이곳의 신세를 진다.
그 길을 7~8분 정도 들어가면 최영장군묘 안내문과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모습을 비춘다.


▲  겨울에 잠긴 대자산 고양동누리길

대자산 남쪽 자락에는 고려의 마지막 보루였던 최영장군 묘역이 포근히 자리해 있다. 묘역에
는 2기의 무덤이 있는데, 위쪽에는 그의 아버지인 최원직(崔元直)묘가 있으며, 그 밑에 최영
과 부인 문화유씨의 합장묘(合葬墓)가 자리잡고 있다.

최영(崔瑩, 1316~1388)은 워낙 유명하여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동주최씨 집안
으로 동주(東州,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사헌규정(司憲糾正)을 지낸 최원직,
어머니는 지씨이다. 그리고 그의 5대조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유청(崔惟淸, 1095~1174)
이다.

최영은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과 무예가 뛰어났으며, 윤관
(尹瓘)장군처럼 병서(兵書)를 늘 옆에 끼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는 조언을 받고 그것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하여 재물과는 담을 쌓고 살
았으며, 조선 초기 청백리(淸白吏)인 맹사성(孟思誠)에 버금갈 정도로 검소하고 강직하여 백
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  누렇게 시든 대자산 고양동누리길 (최영장군묘 안내문 직전)

청년 시절 양광도(楊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 휘하에 있으면서 왜구와의 싸움에서 많은 전공
을 세웠는데, 생포한 왜구가 꽤 되었다. 하여 그 공으로 우다치(亏達赤)에 임명되었다.

1352년 공민왕(恭愍王)의 측근이던 조일신(趙日新)이 반란을 일으키자 안우(安祐), 최원(崔源
)과 함께 이를 때려잡아 크게 존재를 드러냈다. 그 공으로 호군(護軍)에 임명되었으며, 1354
년에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그해 중원대륙<서토(西土)>에서 홍건적(紅巾賊)
이 크게 난을 일으켜 온갖 민폐를 부리자 원나라(몽골)에서 고려에 급히 원군을 요청했다. 하
여 공민왕은 최영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사 2,000명을 딸려 원나라로 파견했다.

최영은 원나라에서 살던 고려인 2만 명을 휘하에 넣었으며, 고우(高郵)를 정벌하는 등, 28번
의 전투를 벌이며 많은 공을 세웠다. 허나 이에 배가 아프던 원나라 승상 톡토(脫脫)가 참소
하면서 전쟁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1355년 회안로(淮安路, 강소성 회안시)에서 홍건적을 방어하면서 팔리장(八里莊)에서 여러 차
례 승리를 거두었으며, 사주(泗州. 강소성 우이현)와 화주(和州, 안휘성 화현)에서 홍건적들
이 8,000여 척의 배로 무더기로 회안성을 포위하자 밤낮으로 수비해 그것들을 잘 다져진 고깃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후 적들이 다시 침범하여 성을 넘으려고 하자 최영은 여러 번 창에 찔
렸음에도 친히 앞장서 적들을 무수히 때려죽이며 성을 지켰다.

그렇게 홍건적의 난에서 크게 명성을 날리며 대륙의 정세를 살피다가 귀국하여 공민왕의 명으
로 인당(印璫)과 함께 원나라(몽골)를 공격했다. 공민왕은 원나라에게 빼앗긴 요동(遼東)과
남만주 지역을 회복할 큰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 최영과 인당은 요동과 요서(遼西)의 8개의
참(站)을 점령하여 이후 추진될 공민왕의 요동정벌에 큰 발판이 된다.
또한 왕명으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 지역)를 공격하자 원나라(몽골)
의 벼슬을 지내며 쌍성 지역을 관리하던 이자춘(李子春), 이성계(李成桂) 부자가 투항하면서
쉽게 쌍성을 점령했다. 하여 고려의 영토는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길림성, 연해주 지역)까지
크게 확장되었다.


▲  최영장군묘 밑 (안내문과 묘소로 인도하는 계단)

1357년 체복사(體覆使)가 되어 서해, 평양, 니성(泥城), 강계 지역을 살폈으며, 1358년 왜구
가 400여 척의 배로 오차포(吾叉浦)를 공격하자 군사를 매복시켜 승리했다. 그리고 1359년 서
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던 중, 홍건적 패거리들이 4만의 군사로 쳐들어오자 생양역(生
陽驛), 철화현(鐵和縣), 함종현(咸從縣), 서경(西京, 평양) 일대에서 크게 격파했다.

1360년 평양윤(平攘尹) 겸 서북면순문사(西北面巡問使)가 되었는데, 전쟁의 여파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진제장(賑濟場)을 여러 곳에 설치해 양식과 종자를 나눠주면서 농사를 장려
하고 전사자의 유골을 매장해주었다.
1361년 홍건적이 다시 쳐들어와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개경을 탈환하고 그들을 때려잡았다. 그때 목을 붙잡고 도망친 홍건적은 불과 수백에 불과했
으며, 그 공으로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승진되었다.
1362년 안우, 이방실과 함께 홍건적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공신각(功臣閣)에
초상이 안치되었으며,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부모와 부인도 모두 작위를 받았다.

1363년 공민왕의 측근이던 김용(金鏞)이 반란을 일으켜 흥왕사(興王寺) 행궁(行宮)을 침범했
다. 최영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그들을 모두 처단했으며, 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이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되고 진충분의좌
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의 칭호가 내려졌으며 평리(評理)로 전임되었다.

한편 고려의 요동정벌과 반원정책에 뚜껑이 단단히 뒤집힌 원나라 기황후<奇皇后. 고려인 기
철(奇轍)의 여동생이자 원나라 순제(順帝)의 왕비>는 공민왕을 철저히 응징하려고 했다. 하여
원나라에 머물던 덕흥군<德興君, 고려 26대 군주인 충선왕(忠宣王)의 3번째 아들>을 고려 왕
으로 내세우며 최유(崔濡)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고려를 공격하게 했다.
처음에는 선주(宣州)까지 점령하며 승승장구했으나 공민왕이 최영을 도순위사로 임명해 안주
(安州)로 보내면서 상황은 크게 반전되었다. 결국 최유의 원나라군은 최영에게 크게 털려 최
유 등 일부만 간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적을 토벌하자 공민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 1필,
은 2정을 내렸다.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인 박바이에다이(朴伯也大)가 연주(延州, 평안북도 영변)를 공격하자
최영이 휘하 장수를 보내 단죄했으며, 1365년 왜구가 교동도(喬桐島)와 강화도까지 기들어와
소란을 피우자 최영이 동/서강 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동강을 지키며 왜구를 토벌
했다.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최영장군 묘역

한편 공민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신돈(辛旽)은 예전에 밀직(密直) 벼슬에 있던 김란(金蘭)이
딸을 자신에게 바치자 최영이 크게 꾸짖은 일로 인해 그에게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최영이 고봉현(高峯縣, 고양시)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그것을 구실로 왕에게 참소하니
공민왕은 그를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시켜 내쫓았다.
신돈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최영과 이구수(李龜壽) 등이 환관과 결탁해 왕과 신하를 이간시킨
다고 무고하자 왕은 신돈과 친한 이득림(李得林)을 보내어 최영을 국문케 했다. 최영은 이제
끝난 듯 싶어 거짓 자복하며 죽여달라고 청하자 마음이 약해진 왕은 3품 이상의 작위를 삭탈
하고 그의 전민(田民)을 몰수하여 유배를 보냈다.
이득림은 최영을 어떻게든 죽이려고 난리를 쳤으나 정사도(鄭思道)가 죽기를 각오하고 이득림
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이에 이득림이 신돈에게 보고하여 정사도까지 파면시켰다.

이후 1371년 다시 복귀하여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73년, 6도 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가
되어 군적(軍籍)을 작성하고 전함(戰艦)을 건조했으며, 장수들의 계급을 진급 또는 강등시키
고 죄지은 수령들을 독단으로 단죄하자 사람들의 비판이 대단했다. 또한 70살 이상 노인들부
터 차등을 두어 쌀을 징수하여 부족한 군량을 충당하자 백성들의 원성까지 자자했다.
1374년 경상도와 전라도, 양광도 도순문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를 두고 헌사(憲司)에서 예전
도순찰사로 있을 때 6도를 소란하게 했다며 반대했다. 이에 최영이 울면서 한탄하며 벼슬을
받지 않자 공민왕은 그를 비판한 대사헌 김속명(金續命) 등을 파면하고 최영에게 '진충분의선
위좌명정난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의 칭호를 내려주며 그를 달랬다.

한편 그해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임밀(林密) 등을 제주도에 보내 말 2천 필을 보내라
고 했다. 당시 제주도는 원나라의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관할로 원나라의 잔여 세력<목호(
牧胡)>들이 지방 세력과 결탁해 고려 조정의 명을 거부하며 따로 놀고 있었는데, 겨우 300필
을 보냈다는 소식에 공민왕은 제주도를 공격해 탈환하기로 했다.
그래서 최영을 총대장으로 삼아 양광도와 전라도, 경상도 도통사(都統使)로, 염흥방(廉興邦)
과 이희필(李希泌), 변안열(邊安烈), 목인길(睦仁吉), 임견미(林堅味)를 원수(元帥)로 삼아
314척의 배와 25,600명의 군사를 보냈다.

제주해협을 건널 때 태풍으로 조금 고생을 했으나 제주도에 무사히 상륙, 명월포(제주시 한림
읍)에서 목호 세력 3천여 기를 격파해 30리를 추격했다.
날이 저물자 명월포로 되돌아와 해변에서 숙영을 했는데, 목호들이 기습해 안무사(安撫使) 이
하생(李下生)을 죽였고, 목호 우두머리 3명<시데르비스(石迭里必思), 촉투부카(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保)>이 고려군을 살살 야골리며 유인하려고 했으나 최영이 이를 간파하고 즉시 정
예군을 보내 재빠르게 추격하니 적장은 유인책을 쓸 겨를도 없이 서귀포 남쪽 호도(虎島)로
줄행랑을 쳤다.
최영은 전 부령(副令) 정룡(鄭龍)을 보내 빠른 전함 40척으로 섬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정
예군을 이끌고 뒤쫓았다. 호도에 포위된 시데르비스는 처자와 일당 수십 명을 이끌고 섬 밖으
로 도망쳤으나 생포되었고, 촉투부카와 관음보는 항복을 해도 처형을 면치 못할 듯 싶어 쿨하
게 벼랑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생포된 시데르비스와 그의 아들 3명은 허리를 잘라 죽이고 자
살한 적장의 머리를 베어 조정에 바쳤다.
동도(東道)의 카치(哈赤), 시도시멘(石多時萬).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등은 수백의 무리로
끝까지 저항했으나 모두 토벌했으며, 잔당까지 모두 찾아내 죽이니 적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
다. 이렇게 목호 토벌로 금패(金牌) 9개, 은패(銀牌) 10개, 인신(印信) 30개, 말 1,000필을
노획했고, 포로들은 지역 세력에게 주었으며, 말은 여러 고을에 분산해 기르게 했다. 또한 군
율을 엄하게 하니 군사들은 벌벌 떨며 군율을 어기지 않았다.
그렇게 제주도를 토벌하고 10월에 귀환했으나 그 사이에 공민왕은 시해되고 말았다. 하여 왕
의 빈소에 들어가 제주도 토벌 경과를 보고하다가 끝내 주저앉아 통곡했다.


▲  뒷쪽에서 바라본 묘역 (제일 앞에 보이는 묘가 최원직묘)

공민왕이 시해되자 그의 큰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우왕(禑王, 1374~1388)이다. 우왕은
1375년 최영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았으며, 1376년 왕명으로 조정에서 폄직(貶職)되었던
강순룡(康 舜龍)과 정사도(鄭思道), 염흥방(廉興邦), 정몽주(鄭夢周) 등에게 관용을 베풀고자
했다.
그 결정이 내릴 당시 최영은 마침 사냥 중이라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녹사(錄事)가 관련
서류를 가져와 서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최영은 나라의 큰 일을 왜 대신(大臣)들과 합
의하지 않고 멋대로 하냐며 서명을 해주지 않았다.
또한 그의 조카사위인 판사(判事) 안덕린(安德麟)이 사사롭게 사람을 죽였는데, 최영의 권력
이 대단한 터라 어쩌지는 못하고 최영이 관장하던 순위부(巡衛府)로 보냈다. 그러자 최영은
크게 노하며 헌사(憲司)로 보내 죄값을 받도록 했다.

1376년 왜구가 충청도에 칩입했다. 연산 개태사(開泰寺)를 불지르고 조정에서 보낸 관군까지
때려잡는 등 위세가 대단하자 최영은 왕에게 출정을 요청했다. 허나 왕이 나이가 많음을 내세
우며 출정을 거부하자 2~3차례 간청하여 겨우 허가를 받았다.
최영은 급히 군사를 꾸려 왜구가 머물던 홍산(鴻山, 부여 홍산)으로 내려갔는데, 그는 좁은
험로에 의지해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허나 3면이 절벽이고 왜구의 위세가 대단하므로 장졸들
이 쉽게 나서려고 하지 않자. 최영은 정예병을 이끌고 제일 선두로 달리며 간만에 몸을 푸니
왜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며 도망치기 급급했다.
그때 적 하나가 수풀 속에 숨어 화살을 쏘아 최영의 입술을 맞추었는데, 피가 낭자하게 흐름
에도 아무 일도 없듯 화살로 그 적을 쏘아 죽이고 입술에 박힌 화살을 뺐다. 그리고 다시 왜
구 사냥에 나서 왜구 대부분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와 머리고기로 만들었다. 이 전투가 그
유명한 홍산대첩(鴻山大捷)으로 왜구들은 최영을 머리가 하얀 최만호(崔萬戶)라 부르며 매우
두려워했다.

승리의 소식을 들은 우왕은 크게 기뻐하며 백금 50냥과 의복, 술,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의
원 어백평(魚伯評)을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했다. 최영이 개경으로 개선하자 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영접했는데, 그 의장 행렬이 실로 대단했다.
왕은 그에게 시중(侍中)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최영은 시중이 되면 자유롭게 지방으로 나갈
수 없으니 왜구가 평정된 후에 받겠다고 거절했다. 이에 그를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으로 봉
하고 전쟁에 나선 장졸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1377년 왜구가 남해바다를 넘어 강화도, 김포까지 쳐들어와 소란을 피웠는데, 최영은 강화도
와 교동도가 전략적 요충지임에도 권세가들이 토지를 점유해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한다면서
사전(私田) 혁파를 건의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사전을 몰수하여 장정을 남겨 농업에 종사하
게 했다. 그리고 지역 수비를 소홀히 한 장수와 관리들의 처벌을 건의했으나 우왕은 받아들이
지 않았다.
우왕은 왜구의 침입을 우려하며 내륙지역으로 천도를 하려는 엉뚱한 계획을 했다. 이에 최영
은 반대했으나 왕은 똥고집을 부리며 철원에 궁성을 축조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태후(太
后)의 거처만 철원으로 옮기자고 건의하니 왕은 이를 받아들여 천도 해프닝은 마무리 되었다.

1378년 왜구가 다시 쳐들어 승천부(昇天府, 개경 인근)를 점령하며 장차 개경까지 쳐들어가겠
다고 위협을 했다. 최영은 이성계와 전략을 짜고 방어태세를 갖추었는데, 왜구는 오로지 최영
만 격파하면 개경을 점령할 수 있다 여기고 고려군이 진을 친 곳을 죄다 지나쳐 최영이 지휘
하는 중군(中軍)이 머물던 해풍군(海豊郡, 개경 인근)으로 진격했다.
최영은 찬성사(贊成事)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맞서 싸우다가 뒤로 빠졌는데, 그 틈에 이성계
가 기병을 이끌고 협공했다. 그때 최영이 측면에 나타나 왜구를 후려치니 왜구는 거의 전멸을
당했다. 왕은 최영의 전공을 기려 안사공신(安社公臣)으로 봉했다.
그리고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하게 되었고, 1381년 수시중(守侍中)으로 승진되
었다.


▲  약간 옆에서 바라본 최영장군묘

1381년 잠시 한양(漢陽, 서울) 천도가 논의되었는데, 최영은 서울을 빨리 옮기자며 성문도감
(城 門都監)을 설치해 5부(五部)의 정남(丁男)들을 동원해 한양 성곽을 수리했다. 허나 얼마
안가 무너지나 도감 일을 맡은 윤순(尹順) 등을 탄핵하고 성곽 수리를 중지시킨 후 귀가 조치
시켰다.
우왕은 교서를 내려 최영을 찬양하면서 최영의 아버지 묘소 주변 토지 230결과 장원정(長源亭
, 개경 근처)의 토지 50여 결을 내렸다.

계속 되는 왜구의 침략의 경상도와 강릉도(江陵道, 강원도), 전라도 지역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해졌다. 최영은 이들 3도에 시여장(施與場)을 설치해 선량한 사람을 선발하여 관리하도록
하고, 관청의 쌀로 미음과 죽을 쑤어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함선 건조를 위해 군사와
승려를 동원하여 1년 안에 130여 척을 건조했다. 함선 건조에 동원된 사람과 승려들은 불만이
대단했으나 그 배를 요충지에 분산 배치하면서 수군 군사력이 증대되었고, 그로 인해 왜구의
침입이 크게 줄었다.

1384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다. 우왕은 토지를 내렸으나 최영은 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쌀 200석을 군량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퇴직을 청했으나 우왕이 도리어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임명하자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도통사(都統使)의 직인을
반납하려고 했으나 우왕이 계속 곁에 있어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궁궐로 나가 왕에게 재상들이 백성들의 토지를 겸병하는 폐해를 극렬히 성토한 후, 겸
병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만들어 다 함께 서명하게 하고는 재상들을 둘러보며
'이후로는 다시 과거처럼 겸병할 자가 있겠소?'라고 다짐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늙어서 사리(事理)에 어두우니 내 행동이 의에 합당하지 않거든, 입을 다물지 말고 이
늙은이에게 충고해 주시오'
하였다.

최영은 이성림(李成林), 이자송(李子松) 등과 조성도감판사(造成都監判事)가 되어 수창궁(壽
昌 宮)을 축조하여 5년 만인 1384년에 완성을 보자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그러자 왕이 무엇
으로 보답할지 물어보니 최영이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하지 않고 소인배와 어울리며 사냥을 일삼으시니 소신들이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신하의 직분을 다하겠습니까?'
답을 하니 우왕은 부끄러워하며 최영을 판문하부사
(判門下府事)로 삼았다.

1386년 우왕이 서해도(西海道)로 사냥을 가자, 지봉주사(知鳳州事) 유반(柳蟠)이 왕에게 필요
한 물자를 공급한다며 백성들의 재물을 많이 뜯었다. 그러자 최영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행위
라며 그에게 장형(杖刑)을 가했다.

1387년 장방평(張方平) 등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명나라가 거절하여 요동에서 되돌아왔
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고려를 심히 두려워하며 경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병이 발
작 수준으로 심해져 고려를 더욱 자극시켰다.
좌시중(左侍中) 반익순(潘益淳)이 최영에게
'공께서는 선왕(先王)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온 나라의 신망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나라
가 위태로운데, 어찌 대책을 세우지 않습니까?'
이에 최영은
'집권자가 이익만 밝히고 악생을 거듭해 패망을 스스로 속히 불러들이고 있으니 이 늙은이가
장차 무엇을 하겠소?'
탄식했다. 그때 요동에서 넘어온 어떤 사람이 명나라가 장차 처녀와 수
재(秀才) 및 환관 각 1,000명과 소와 말 각 1,000 마리를 요구할 거라며 제보를 했다. 그 말
을 들은 최영은 '명나라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그것들을 쳐야 된다'
주장했다.

1388년 임견미, 염흥방 등이 반란을 도모했으나 최영과 이성계에게 진압되었다. 최영은 다시
시중에 임명되었는데, 임견미와 염흥방이 등용했던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려고 했으나 이성계
가 덕과 은혜를 베풀어야 된다고 반대했으나 듣지 않았다.

우왕은 최영을 더욱 신뢰하고자 그의 늦둥이 딸을 왕비로 삼으려고 했다. 이에 최영은 눈물을
흘리며
'소신의 딸은 인물도 누추하고 측실 소생이라 제왕의 배필이 안됩니다. 만약 왕비로 삼으려고
하신다면 소신은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허나 우왕이 또 고집을 부리며 최영 집까지 찾아가 말을 하사하자 왕에게 안마와 의대를 바치
며 결국 왕의 뜻을 받아들였다. 우왕은 예전에는 최영의 곧은 성품이 싫어서 그의 집은 찾아
가지도 않았으나 이후로는 영비(寧妃, 최영의 딸)를 총애하여 자주 들렸다.

▲  최영장군묘 서쪽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 묘표(墓表)

▲  최영장군묘 동쪽 문인석과
망주석, 무민공충혼비


한편 명나라는 고려의 기를 더욱 누르고자 1387년 12월, 예전 원나라가 점령했던 철령<鐵嶺,
요동반도 심양(瀋陽) 남쪽> 이북 땅에 멋대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했다. 그리고 1388년 3월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고려로 보내 철령위 설치를 통고했다.
이때 명나라는 철령위지휘사사(鐵嶺衛指揮使司)를 봉집현(奉集縣)에 설치하고 승차(承差) 이
사경(李思敬)을 보내 철령 이북과 동쪽, 서쪽 지역은 원래 원나라(몽골) 땅이므로 그곳에 사
는 여진, 몽골, 고려, 한인(漢人)의 모든 군인은 요동에 귀속시킨다는 방을 부쳤다.

명나라의 도발에 발끈한 최영은 조정 회의를 열어 명나라 공격과 화친을 두고 의논하니 대신
들 상당수는 화친을 지지했다. 하여 일단 조림(趙琳)을 명나라에 보냈으나 명나라에서 입국을
거절하자 최영은 철령 이북 땅을 줘야 되는가 가부를 물으니 대신들 모두 안된다고 하였다.
이에 우왕은 최영과 독대하여 요동 공격이 어떠냐고 묻자 최영은 찬성했다. 그러자 이자송이
최영을 찾아가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으나 최영은 그가 임견미 패거리라 하여 곤장을 쳐
서 유배를 보냈다가 곧 죽여버렸다.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요동도사 소속 지휘(指揮) 2명과 군사 1천을 파견
해 방을 붙이고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했다. 하여 최영은 전국의 군사를 징발하고 개경 동쪽
교외에서 군대를 열병했으며, 얼마 뒤 명나라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백호(遼東百
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했다.
이에 최영은 우왕에게 보고하여 방문(榜文)을 가지고 북쪽 양계(兩界)에 온 요동기군(遼東旗
軍) 21명을 죽이고 이사경(李思敬) 등 5명을 구금시켜 감시했다. 우왕은 사냥을 내세우며 봉
주(鳳州, 황해도 봉산군)에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을 공격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이성
계가 4가지의 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했으나 최영과 우왕은 정벌을 강행했다. 드디어 고려의 대
륙을 향한 마지막 몸부림이 일어난 것이다.

우왕은 서경(西京, 평양)으로 왕림하여 군사들을 독려하고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에게 압
록강에 부교 설치를 맡겼다. 몰수한 임견미와 염흥방의 재산을 배에 실어 군수물자와 상금으
로 쓰게 했으며, 승려도 징발했다.
또한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의 총대장으로 삼고,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았다. 마침 명나라의 영향력
이 조금 미치던 요동 북부 지역에는 명나라군은 거의 없고 성 안에는 지휘 등 일부만 있었다.

최영은 왕에게 자신이 직접 출진하겠다고 했으나 왕은
'선왕께서 장군이 부재 중일 때 시해되셨소. 장군께서 가신다면 누가 짐을 지켜줄 것이고 누
구와 국정을 다스린단 말이오!'
하소연 했다.
하여 최영은 자신은 평양에서 장수들을 지휘할테니 왕에게 개경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허
나 우왕이 또 똥고집을 피우자 결국 우왕 곁에 남기로 했으니 그것이 바로 화근이었다. 최영
이 총대장이라 직접 군을 이끌고 가야 하건만 왕이 걱정되어 차마 가지 못했던 것이다.

정벌군은 군사 10만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좌,우군 38,830명 그에 딸린 인원이 11,634명, 말은
21,682필이다. 즉 5만 정도의 병력이었다. 한때 광군(光軍) 30만을 육성하고 17만의 별무반(
別武班)으로 동북쪽의 너른 땅을 종횡무진했던 고려건만 그 고려의 위엄이 그새 많이 낡았던
것이다.
또한 정벌군 출진 직후 잠시 사용했던 명나라의 홍무(洪武) 연호를 폐하고 백성 일부에게 원
나라 의복을 입게 하니 이는 명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시켜 명을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강한 의
지의 표현이었다.

정벌군은 압록강을 건너 현재 단동(丹東) 북쪽의 위화도(威化島)란 곳에 이르렀다. 이곳은 3
면이 강에 접하고 1면만 땅으로 이어진 지형인데, (신의주 압록강에 있는 그 위화도가 아님)
여름 홍수와 군량 부족 등을 이유로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회군을 청하자 최영은 직접 위화
도로 가려고 했다.
허나 우왕이 또 반대하여 가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진군을 독촉했다. 또한 최영은 몽골초원으
로 도망친 원나라의 잔여 세력과 함께 요동과 명나라를 치기로 했으나 그 세력이 완전 털린
상태라 신뢰하기 어렵고, 출진한 장수들이 딴 마음을 품지 못하게끔 그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
으려고 했으나 이 역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위화도에 머물던 정벌군의 불만이 늘어나자 그윽하게 딴 마음을 품었던 이성계는 이를 기회로
삼아 장수들을 설득해 군사를 돌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하고도 한스러운 위화도회군으로 칼
의 방향을 명나라에서 개경으로 돌렸다.

갑자기 반란군이 되어 돌아온 5만의 군사가 개경으로 들이닥치자. 나라는 그야말로 벌집을 쑤
신 듯 난리가 났다. 최영와 우왕은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왔고, 반란군은 최영을 내쫓을 것을
요구했으나 우왕은 거절했다. 그러자 반란군은 성문을 뚫고 개경에 칩입했고, 최영은 안소(安
沼)와 함께 개경을 수비했으나 군사가 얼마 없어 결국 개경은 함락되고 만다.


▲  무민공충혼비(武愍公忠魂碑)

최영과 우왕은 화원(花園)으로 피했으나 반란군이 담을 무너뜨리고 뜰로 난입하자 급히 팔각
전(八角殿)으로 피했고 결국 포위되고 만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잡고 우니 최영이 2번 절을
하고 미련 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이성계가
'이번 일은 내 본심이 아닙니다. 요동을 공격하는 것은 대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나라를 위태
롭게 하고 백성을 괴롭혀 그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최영을 바라보며 울었다.

반란군은 최영을 고봉(高峯, 고양시)으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합포(合浦, 마산)로 보냈다. 그
리고 그와 가깝던 이들을 모두 귀양을 보내고 우왕을 폐위하여 그의 어린 아들 왕창(王昌)을
왕위에 올리니 그가 고려 33대 군주인 창왕(昌王)이다.

창왕이 즉위하자 최영을 순군(巡軍)에 가두어 신문하고 다시 충주로 유배를 보냈다. 최영을
싫어하던 사람들과 반란파들은 최영의 처형을 주장했고, 반란파와 이성계 입장에서는 그의 존
재 자체가 이롭지가 않기 때문에 서둘러 개경으로 압송하여 처형시켰다.

최영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날, 개경 사람들은 자진해서 모두 철시(撤市)했으며, 개경 사
람들은 어린 아이부터 부녀자, 노인, 청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그에 대
한 민심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망나니의 칼을 받는 순간까지 최영의 말씨나 얼굴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아 마지막까지 역전 노장의 위엄을 보여주었으며, 망나니의 칼이 볼일을 끝내자
백성들의 통곡 소리는 더해 갔다.
이렇게 하여 그는 72세의 적지 않은 나이로 강제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이 길가에 버려
지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렸으며, 조정에서는 쌀과 콩, 베, 종이를 부의로 보냈
다.

이성계는 그와의 옛정 때문인지 최영의 부모가 묻힌 이곳에 그를 안장했으며, 무민(武民)이란
시호(諡號)를 올렸다. 무덤을 만들고 풀을 심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풀은 자라지 않아 풀이 돋
지 않은 무덤으로 유명했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이성계 패거리가 최영에게 부정한 짓으로 재물을 모았다고 몰아세우자, 최영은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부정을 저지른 적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며, 그
렇지 않으면 풀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유언을 남겼다.

그가 죽자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의 유언대로 봉분(封墳)에는 풀이 돋아나지 않았다. 아무리
흙을 덮고 금잔디를 심어도 잔디는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6년부터 풀이 돋아나
지금은 무성한데, 이를 두고 억울하게 죽은 최영의 한이 풀린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최영은 고려를 지킨 마지막 방패로 일생 동안 80여 회의 전쟁을 치루면서 통한의 위화도회군
을 제외하고 모두 이긴 불패(不敗)의 장수였다. (80승1패) 북쪽으로는 요동과 요서, 서쪽으로
중원대륙(서토), 동쪽은 함경도, 남쪽은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원나라(몽골)와 홍건적, 왜구
등 다양한 적과 싸워 무용(武勇)을 떨쳤으며, 조금도 두려움 없어 늘 앞장서서 적들을 때려잡
았다.
또한 청렴결백한 인물로 재산을 늘리려 하지 않았고 집이 아무리 누추해도 그에 맞춰 편안하
게 살았다. 의복과 음식은 검소했으며, 오랫동안 병권을 장악하고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뇌물
과 청탁을 받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그의 청렴함에 탄복했다. 항상 큰일에 주로 신경을 써 사
소한 일에는 구애받지 않았으며, 전쟁터에 나가서 종종 시를 짓기도 했다.
남의 의롭지 못한 행위를 보면 배척하고 질타했으며, 어떤 사람이 최영에게 벼슬을 구하자 '
너가 공장(工匠)이나 장사꾼의 일을 배웠다면 절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 했다. 이
는 권력을 잡은 자들이 뇌물이나 받아먹는 족속들이라 비꼰 것이다.

그는 공로와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천거할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은 모두 물리쳤
다.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 중 재산을 늘리고 사사로운 정으로 공직 기강을 해치는 사람이 있
으면 반드시 바로 잡고자 했는데, 이인임(李仁任)도 그에게 한마디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성품이 고지식하고 학문이 좀 부족했으며, 독단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
대부(諫大夫) 윤소종(尹紹宗)이 최영을 두고
'공은 한 나라를 뒤덮었으나 죄는 천하에 가득 찼다' 논평하니 세상 사람들이 명언이라 했다.

또한 백성을 보살피고 그들에게서 아낌없는 지지를 누리며 나라를 지킨 무인으로 진정한 무인
의 도(道)를 실천한 위인이다. 비록 반란파에게 목숨을 내주고 말았지만 백성들에게 신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으며 우리나라 토속신(土俗神)의 일원이 되었다. 무당(巫堂)이 모시는 신 중
에 최영장군은 거의 꼭 있으며, 오래된 당집을 보면 그의 그림이 있다.
또한 연평도(延坪島)를 비롯하여 부산, 남해, 추자도(楸子島) 등 해안 지역에는 그를 봉안한
사당이 많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최영이 왜구를 토벌하면서 그 지역 백성을 살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를 신으로 높여 사당을 짓고 마을과 바다의 수호신으로 떠받들었던 것이다.

후손의 지극정성 관리로 정갈하게 손질된 묘역
은 야트막한 오르막에 석축을 쌓아 터를 다지
고 그 위에 네모난 호석(護石)을 만들어 봉분
을 올렸다. 이는 고려시대 무덤 양식으로 조선
초기까지 나타나는 양식이다.

무덤의 크기는 검소하게 살았던 최영 부자에
걸맞게 작고 조촐하다. 봉분 앞에는 상석이 누
워있고, 무덤 서쪽에는 오래된 묘표가, 동쪽에
는 근래에 만든 충혼비가 자리한다.
그 앞에는 홀을 쥐어든 문인석 1쌍과 망주석 1
쌍이 자리해 있는데, 문인석은 근래 것으로 옛
날 스타일이 아닌 훤칠한 키의 듬직한 어깨,
경직된 표정, 그리고 어색하게 자라난 수염 등
은 최영장군묘와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조상의 묘를 관리하고 꾸미고 싶은 후손의 마
음이야 이해는 하지만 그런 욕심이 너무 앞선
나머지 구두를 신은 고려시대 장군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옛날 묘는 어지간해서는 있는 그
대로의 모습으로 보존하는 것이 더 가치가 클
텐데 말이다.

▲  최영장군 묘표(墓表)


▲  아들 묘역을 굽어보는 최원직 묘

묘역 윗쪽에는 최영의 아버지인 최원직의 무덤이 있다. 무덤의 모습은 아들묘와 비슷하며, 봉
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香爐石)을 세우고, 그 옆에 지붕돌 묘표(묘비)를 세웠다. 묘비에는
고색의 때가 가득하며, 무덤 뒤로는 곡장이란 담장을 둘렀고, 주변으로 소나무가 울창하여 묘
역에 그늘을 드리운다.

최원직(?~1332)은 사헌규정까지 지냈으나 아들의 명성에 너무 가려 인지도가 거의 없다. 죽음
에 임하면서 아들에게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긴 인물로 아들과 아비 모두 재
물과는 담을 쌓으며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오늘날 이 땅의 위정자들이 그들 부자(父子)의 청
렴함과 공명함을 좀 배워야될텐데 그딴 것은 애시당초 관심도 없으니 참 나라의 앞날이 오리
무중(五里霧中) 그 자체로다.

* 최영장군묘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  최영장군묘 주변에서 만난 후식거리들
(경안군 및 임창군묘역, 성녕대군묘역)

▲  경안군(慶安君) 묘

최영장군묘 입구 남쪽에는 높은 신분이 느껴지는 늙은 무덤이 있다. 경사가 급한 높은 언덕에
자리한 묘는 경안군의 무덤이고 그 밑에 누운 것은 그의 아들인 임창군(臨昌君)묘이다. 그리
고 경안군 무덤 뒷쪽 숲속에는 아들인 임성군(臨城君)의 묘가 숨겨져 있다. 즉 최영장군 묘역
처럼 부자의 묘가 한곳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경안군 묘의 우측 석물들

▲  경안군 묘의 좌측 석물들

경안군(1644~1665)은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3째 아들로 이름은 이회(李檜)이다.
그는 태어난 이듬해(1645년)에 아비를 잃고, 그 다음해(1646년)에 어머니 강빈(姜嬪)까지 사
사(賜死)되면서 졸지에 고아가 되버렸다. 이는 병자호란 삼전도(三田渡) 굴욕으로 머리가 이
상해진 인조가 청나라를 멀리하고 망한 명나라에 쓸데없이 사대(事大)의 미련을 둔 자신에게
반했다는 이유로 아들 소현세자 내외를 죽였기 때문이다. 특히 소현세자의 사망 원인은 아직
까지도 미스테리이다.
인조는 아들 내외를 처리한 것으로도 모자라 부모가 지은 죄를 갚으라며 1647년에 경안군 3형
제를 자비 없이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다. 그들 형제의 귀양살이가 혹독하여 큰 형과 2째 형은
일찍 죽고 만다.

그렇게 개쪼잔했던 인조가 1649년에 골로 가자 그의 2째 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효종(孝宗)이다. 그는 1650년 경안군을 도성(都城)에서 가까운 강화도로 옮기고
바로 교동도로 옮겼는데,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김집(金集) 등 많은 이들이 강빈의 복권
과 경안군의 석방을 줄기차게 건의하면서 1656년 악몽 같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된다.
1659년 경안군에 봉해져 팔자가 좀 좋아지나 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겪은 귀양살이의 휴유증
때문에 1665년 불과 21살의 창창한 나이에 인생의 휘장을 거뒀다. 그의 부인은 분성군부인(盆
城郡夫人) 김해허씨로 슬하에 임창군과 임성군의 아들을 두었다.

경안군 묘는 부인과 합장된 합장분(合葬墳)으로 봉분 뒤로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곡장을 둘렀
는데, 이는 근래에 만든 것이다. 묘 앞에는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가 있고, 상석과 향로
석(香爐石)을 두고, 좌우로 망주석과 조그만 동자석, 문인석을 1쌍씩 배치했다.
묘 좌측에 서 있는 검은 돌의 신도비(神道碑)는 1704년 아들 임창군이 세운 것으로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담은 이수(螭首)를 갖추었다. 비석 높이는 196cm이며, 신
도비와 석물에는 장대한 세월의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아낌없이 연출한다.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망주석과 문인석 사이에 자리한 키 작은 동자석의 모습에는 귀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  현란한 이수와 고된 세월의 때를
듬뿍 간직한 경안군 신도비

▲  이수 대신 지붕돌을 지닌
임창군 신도비


임창군(1663~1724)은 경안군의 아들로 이름은 이혼(李焜)이다. 부인은 응천군(凝川君) 부인
박씨로 경안군과 마찬가지로 부부가 합장되어 있다. 봉분 주변으로 묘비와 상석, 향로석, 망
주석, 문인석 등을 갖추었으며, 지붕돌을 갖춘 묘비가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준다. 묘비
는 1725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박사수(朴師洙)가 짓고 글씨는 임창군의 아들인 이감(李堪)
이 썼다.


▲  경안군묘 좌측에 자리한 임성군묘

임성군(1665~1690)은 경안군의 3째 아들로 이름은 이황(李滉)이다. 부인인 익성현부인(益城縣
夫人) 남양홍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주변으로 상석과 혼유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을 갖추
었다.
문인석은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져 눈길을 끈다. 세상에 훤히 모습을 드러낸 경안군과 임창군
의 묘와 달리 숲에 묻혀 있어 조금은 초라하게 다가온다. 앞의 두 묘와 달리 묘비가 봉분 앞
에 있으며, 비석의 높이는 163cm으로 앞의 묘비보다는 작다.
경안군 부자의 묘역은 경안군 및 임창군 묘역이란 이름으로 고양시 향토유적 5호로 지정되었
다.

* 경안군, 임창군 묘역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65-2


▲  성녕대군(誠寧大君) 묘역 - 고양시 향토유적 2호

경안군 묘역을 둘러보고 다시 나오면 길이 남북으로 갈라진 3거리이다. 여기서 북쪽 길(성녕
길)로 들어서면 기와집 하나가 마중을 나오는데, 그는 성녕대군묘의 재실(齋室)이다. 그 재실
을 지나 동쪽 언덕을 오르면 대자동에서 최영장군묘 다음으로 늙은 성녕대군 묘역이 활짝 모
습을 비춘다.

성녕대군(1405~1418)은 조선 태종(太宗)의 4째 아들로 이름은 이종(李種)이다. 그 유명한 양
녕대군(讓寧大君)과 효녕대군(孝寧大君),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의 친동생으로 모후는 원
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인데, 세상에 너무 크게 알려진 친형(양녕, 효녕, 충녕대군)들에 비해
인지도는 거의 없다. 워낙 잘난 형들이라 그 그늘에 가리기도 했지만 너무 일찍 죽은 것도 큰
원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행동이 의젓했으며, 글씨를 잘썼다. 하여 태종과 원경왕후가 금지
옥엽처럼 아꼈으나 그만 13살에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요절하고 만다. 태종 내외는 매우 비통
해하며 무덤 주변에 대자암이란 절을 세워 아들의 명복을 빌었으니 대자동이란 지명은 바로
대자암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녕은 창녕성씨인 성억(成抑)의 딸과 혼인을 했으며, 성녕군에 봉해졌다가 1414년 대군(大君
)에 봉해졌다. 대광보국대부(大匡輔國大夫)의 위계까지 오르기도 했는데, 만약 그가 일찍 죽
지 않았다면 충녕대군과 좋은 라이벌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태종 부부의 관심이
컸던 인물이다.

▲  성녕대군의 사당인 대자사(大慈祠)

▲  성녕대군 신도비가 담긴 비각

재실을 지나면 성녕의 사당인 대자사가 나온다.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사당 앞에는 삼문(三門)
이 있고 사당의 이름을 알리는 큼지막한 표석
이 있다.

사당 좌측에는 3개의 비석이 담긴 비각이 있는
데, 가장 우측 비석이 성녕의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왕족과 3품 이상의 고위 관리의 무덤
에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
道)로 통한다는 무덤의 동남쪽에 세운다. 이곳
역시 성녕대군의 유택(幽宅)을 기준으로 동남
쪽에 자리하여 그 법칙을 따랐다.

신도비는 보통 용머리의 귀부와 이무기가 여의
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를 갖추기 마련이나 여
기는 이수 대신 지붕돌로 비석 머리를 마무리
했다. 비신(碑身)은 경안군의 묘비처럼 검은
돌로 만들었는데, 양 옆으로 만든 화강암 우주
석에 비신을 끼워 넣은 것이 특이하다.

▲  성녕대군 신도비

이 신도비는 묘를 만들던 1418년 4월에 세운 것으로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장인인 성개
가 글씨를 썼다. 비석의 높이는 3m로 큰 편이다.


▲  원천군(原川君) 묘역 (앞쪽 무덤이 부인 한양조씨, 뒷쪽 무덤이
원천군과 백천조씨 합장묘)


대자사 뒤쪽 언덕에는 성녕대군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묘역은 보통 일반에 개방되어 있으며,
사당 옆에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묘역에는 3기의 무덤이 있는데, 모두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묘역 가장 위쪽에는 성녕대군의
무덤이 있고, 아래쪽에는 그의 양자인 원천군 내외의 무덤이 있는데, 원천군은 원래 효령대군
의 6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선(李宣)이다. 성녕이 어린 나이에 죽자 원천군을 그의 양자로 삼
아 후사를 잇게 하면서 이곳에 무덤을 쓴 것이다.

원천군 내외 묘는 근래 크게 손질되어 꽤 젊어졌는데, 그로 인해 고색의 기운이 많이 사라졌
다. 무덤은 좌우로 배치된 것이 아닌 앞뒤로 자리한 부후묘(附後墓) 형태라 각 무덤마다 묘비
와 문인석, 장명등을 따로 갖추고 있는데, 앞쪽 묘는 그의 2번째 부인인 한양조씨의 무덤이며,
뒷쪽은 원천군과 부인 백천조씨의 합장묘이다. 백천조씨가 죽자 한양조씨를 새로 부인으로 맞
아들여 묘가 2개가 된 것이다.


▲  성녕대군과 부인 성씨의 합장묘

▲  뒷쪽에서 바라본 성녕대군묘

묘역의 가장 뒷쪽이자 높은 곳에는 묘역의 주인공인 성녕대군 내외의 무덤이 자리해 있다. 앞
서 최영장군묘처럼 4각의 호석(護石)을 쌓고 그 위에 봉분을 다졌는데, 봉분 주위로 작은 석
호(石虎)와 석양(石羊)을 1쌍씩 배치했고, 묘 앞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1상을 두었다. 좌측에
는 근래에 세운 때깔이 고운 묘비를 세웠으며, 무덤 뒤쪽에는 'ㄷ' 모양의 곡장을 둘렀다.

석호와 석양은 무려 6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여기저기 상처도 많이 생겼
지만 그 모습을 알아보기에는 별 무리는 없으며, 조그만 양의 새끼와 호랑이 새끼를 보듯, 귀
여움마저 묻어나 손으로 쓱쓱 쓰다듬고 싶다. 곡장에 둘러진 석축에는 오랜 세월의 때가 수북
히 끼여 고색의 멋을 아낌없이 풍긴다.

성녕대군묘를 끝으로 최영장군묘를 중심으로 한 대자동 무덤 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성녕대군 묘역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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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 남녀근석, 안양예술공원, 석수동 석실분)

안양 삼성산 삼막사, 석수동 석실분



' 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3층석탑
▲  삼막사3층석탑
 



 

겨울 제국이 늦가을을 몰아내고 천하를 완전히 휘어잡던 12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삼성산
삼막사를 찾았다.
삼성산(三聖山, 481m)을 오르면 삼막사는 거의 거쳐가기 마련인데, 햇님이 하늘 높이 걸
려있던 12시에 서울대입구역(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6515번(양천차고지
↔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관악구청, 서울대를 지나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
다. 바로 여기서 삼막사를 찾기 위한 삼성산 산행을 시작했다.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聖地)로 꼽히는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를 지나 호암산(虎
巖山, 385m) 정상 부근에서 속세(俗世)에서 가져온 먹거리(김밥, 과일, 과자 등)로 간단
히 점심을 때웠다.
호암산 정상에서 삼성산까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삼성산 서북쪽 능선이 펼쳐져 있는
데, 능선길이 느긋하고 각박한 구간이 별로 없어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다. 장군
봉과 운동장바위, 446봉을 지나 15시에 삼성산 정상 서남쪽에 자리한 삼막사에 도착했다.


▲  경내에서 내려다본 삼막사 일주문(一柱門)



 

♠  많은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삼성산의 대표 산사,
~ 안양 삼막사(三幕寺)

▲  밑에서 바라본 삼막사 - 마치 산 위에 닦여진 요새를 보는 것 같다.

삼성산 정상(481m) 서쪽 360m 고지에 둥지를 튼 삼막사는 삼성산(三聖山)의 대표적인 고찰(古
刹)이다. 오래된 절들은 그럴싸한 창건 설화나 사연을 하나씩은 지니고 있기 마련인데, 이곳
역시 창건 설화 한 토막을 내밀고 있다.
때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시절인 677년, 신라(新羅) 불교의 핵심 인물인 원효
(元曉)와 의상(義湘), 윤필(潤筆) 3명의 고승이 삼성산에서 막(幕)을 치고 수도를 했는데, 원
효가 지은 막이 1막, 윤필은 2막, 의상은 3막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자리에 절을 세우면서 그들이 막을 지어 수행한 곳이라 하여 삼막사라 하였으며 산
이름도 삼성산이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삼성(三聖)은 3명의 성인으로 원효, 의상, 윤필을 뜻
한다. 하지만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그의 좌우를 지키는 관세음
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삼성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산 이름을 따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삼성산에는 절이 많았다. (지금도 많음)

삼성산의 이름은 그렇다쳐도 삼막사 창건설화는 어디까지나 삼막사에서 지어낸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창건 시기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상은 당나
라에서 가져온 화엄종(華嚴宗) 보급과 귀족 중심의 불교를 추구하면서 왕경(王京, 경주)과 그
가 지은 영주 부석사(浮石寺) 등 10개 사찰에 주로 머물러 있었으며, 원효 또한 불교 대중화
를 위해 민중에 뛰어들던 시기이므로 그가 지은 절은 정작 거의 없다. 그렇다면 절 이름인 '
삼막'은 어디서 나왔을까?
관음사(觀音寺)로 불리던 신라 후기 또는 고려 때, 절이 나날이 융성하여 도량의 짜임이 송나
라 소주(昭州)의 삼막사(三邈寺)를 닮아 격하게 찬양을 받았다고 한다. 하여 자연스레 삼막사
로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삼막(三幕)으로 바뀌었는데, 절에서 창건 설화를 지으면서 한자를
바꾸고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신라 고승 3명을 강제로 등장시켜 그들이 막을 치고 머물렀다고
설화를 짠 것이다. 그러니 절의 처음 이름도 '삼막'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 후기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道詵)이 절을 중건하고 불상을 봉안하여 관음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하며, 고려 태조(太祖)가 중수하여 다시 삼막사로 바꿨다고 전한다. 태조는 삼막사
남쪽에 있는 염불사(念佛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안양사(安養寺, ☞ 관련글 보러가기) 창
건 설화에도 절찬리에 등장하는데, 그가 후백제(後百濟)를 치러 갈 때, 그 길목인 삼성산에
여러 절을 짓거나 중수를 도와준 것으로 여겨진다.

1348년 나옹(懶翁)과 지공(指空)이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날렸고,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나라의 융성을 기원했는데, 1398년 왕명으로 중건했다. 그 인연으로 북
쪽에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 서쪽에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 동쪽에 불암
사(佛巖寺, ☞ 관련글 보기)와 더불어 서울을 지키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중 삼막사는 남쪽에 있으므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역할을 했는데, 그 연유로 남왈삼막(南
曰三幕)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을 질렀으나 법당이 타지 않아서 그들은 참회를 하고 철수했다고 전하
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1880년에는 의민(義旻)이 명부전을 짓고,
1881년 칠성각을 지었으며,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인 지운영(池雲英)이 절 옆에 백련
암을 지어 은거하기도 했다.

경내에는 천불전과 명부전, 망해루, 대방, 칠성각, 육관음전 등 10여 동이 있으며, 상당수의
건물이 지형상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
석탑과 명부전, 사적비, 남녀근석, 마애3존불 등이 있고, 삼귀자 바위글씨와 감로정 등의 비
지정문화재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아낌없이 대변해준다. 특히 3층석탑은 이곳에서 가장 늙
은 존재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이라 절이 적어도 고려 중기에 창건되었음을 알려준다.

삼막사는 삼성산 정상부 서쪽 요충지에 자리하여 산꾼과 답사꾼들이 많이 찾아오며, 특히 삼
성산 정상을 가거나 삼성산을 가로지를 경우 거의 꼭 거쳐야되는 황금 길목에 위치해 사람들
로 늘 북적거린다. 게다가 절까지 길이 잘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도 가능하다. (서울대와 삼
성산성지, 호압사, 경인교대, 안양예술공원에서 등산으로 1~2시간 정도 걸림)
또한 서울과 안양(安養) 도심에서 가깝고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어 조망도 괜찮으며, 공기질
이 좋을 때는 멀리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잡힌다.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4 (삼막로 478, ☎ 031-471-5978)


▲  삼막사 명부전(冥府殿)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서울대와 호압사, 호암산 주변, 경인교대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일주문에서 계단길을 오
르면 비로소 삼막사 경내에 이른다. 경내는 일주문 윗쪽에 높이 자리해 있는데, 망해루와 범
종각 등을 바깥에 내밀며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다.

경내 북부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천불전과 망해루 등 다
른 건물들이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반해 명부전은 거의 혼자 남쪽을 향하고 있다. 남
향(南向) 건물이 이 땅에서 일반적이긴 하지만 이곳만큼은 그 원칙은 서향(西向)이 진리이다.
(물론 지형적인 영향이 크지만;;)
이 건물은 1880년에 의민이 지은 것으로 1975년에 수리를 했다. 네모난 장대석(長臺石)으로
다진 기단(基壇)을 2단으로 깔고 그 위에 집을 얹혔는데, 현재 맞배지붕 건물에 흔치 않은 방
풍판(防風板)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팔작지붕인 것을 개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공포는 주심포(柱心包) 형태로 귀포의 용머리 조각 등 장식적인 요소가 많으며, 건물 내부에
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상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중 시왕상은 명부전 이상으로 늙은 보물이다.


▲  중생 구제를 염원하는 4개의 지물, 사물(四物)이 담겨진
범종루(梵鍾樓)

▲  삼막사 망해루(望海樓)

범종루와 함께 경내를 가리고 앉은 망해루는 삼막사의 얼굴과 같은 존재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중기에 지어진 것을 20세기에 중건했는데, 건물 이름 그대로 바
다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허나 인천(仁川)과 시흥(始興), 안산(安山) 지역의 갯벌이
마구 매립되어 육지가 늘어남에 따라 바다는 그만큼 멀어졌고, 대기오염도 툭하면 말썽을 부
려 이제는 공기질이 아주 좋은 날이 아닌 이상은 바다를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망해루' 이
름 값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막사는 서울을 지키는 남쪽 비보 사찰이라 선비와 관리들의 출입이 잦았는데, 그중에는 백
호 윤휴(白湖 尹鑴, 1617~1680)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시 성리학(性理學)에 쓸데없이 능했
던 송시열(宋時烈) 마저 질리게 만든 문인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년) 직전에 삼막사를 찾아 망해루에 걸터앉으며 시 1수를 지었다.

 푸른 산에 찬 기운 일어 망해루에 바람이 거세고
 강구름이 비를 불러 해는 모래톱으로 사라지네
 이때 높이 올라 바라보는 것도 우연한 충성인데
 눈 들어 산하를 보니 시름을 이길 수 없도다

허나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시가 될 줄은... 이처럼 망해루는 문인들 시에 종
종 등장했으며, 현재는 주로 강당의 역할을 맡고 있다.


▲  망해루 옆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경인교대를 비롯하여 안양 석수동, 광명 남부 지역, 시흥시,
그리고 멀리 인천 땅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이날은 아무리 인상을
쓰고 살펴도 서해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  청기와를 지닌 육관음전(六觀音殿)

명부전 옆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6명의 관세음보살이 봉안된 육관음전이 청기와 지붕을 뽐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칸을 구분 짓
는 기둥이 돌로 이루어져 있어 나름 이형(異形)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다양한 관세음보살을 모아놓은 육관음전 내부

▲  삼막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12호

육관음전과 천불전 중간 높은 곳에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기 어
려운 석축 윗쪽 바위에 높이 들어앉아 있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인데, 보통 석
탑은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나 이곳은 다소 구석진 곳에 두어 사람의 손길을 피하게 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이 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삼막사 출신인 승려 김윤후(金允
侯)가 몽골(원나라)의 제2차 침공(1232년) 때 처인성(處仁城, 용인 남쪽)에서 몽골군 우두머
리인 살리타이를 처단하여 대승을 거둔 것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살례탑'이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김윤후는 이후 충주(忠州)에서도 대승을 거두어 그 위엄을 크게 떨쳤으며, 나라에서 상장군(
上將軍) 직을 내리려고 했으나 쿨하게 거절했다.

탑의 높이는 2.55m로 조그만 편인데,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으며, 3층 탑
신은 옥개석(屋蓋石, 지붕돌)만 겨우 남은 실정이다.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며, 탑 꼭대기에는 1979년에 보수한 머리장식이 하얀 피부
를 드러내고 있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 탑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탑 뒤에는 소나
무들이 푸르름을 드러내며 탑의 우산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  감로정 석조 옆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삼막사는 육관음전이라 하여 6명의 관세음보살을 두었는데, 밖에도 마애불(磨崖佛)
비슷하게 하얀 피부의 관세음보살상을 두어 관음도량처럼 꾸몄다.

▲  감로정 석조(甘露井 石槽)

3층석탑 바로 밑에는 삼막사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감로정 석조가 누워있다. 삼성산이 베푼 감
로(甘露) 같은 약수가 늘 넘칠 정도로 쏟아져 나와 대자연 형님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주고 있
는데, 감로를 머금은 거북 모양의 석조에는 고색의 때와 주근깨가 자욱하다. 그 역시 삼막사
의 오래된 유물 중 하나로 앞쪽에 '甘露井(감로정)'이란 글씨와 1837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
주는 글씨가 있어 그의 이름과 경력을 알려준다.

거북 모양의 석조 옆에 원통형 석조는 근래 마련된 것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뚜껑이 닫힌 거
북 석조에서 직접 물을 떠다 마셨다. 지금은 옆으로 홈을 내서 물이 원통형 석조로 흘러내려
와 그것을 마시면 된다. 특히 이 석조에는 조선 정조 때 인물인 김창영(金昌永)의 탄생 설화
가 전하고 있다.


▲  삼막사의 법당 역할을 하는 천불전(千佛殿)

육관음전 못지 않게 청기와 지붕을 드러내고 있는 천불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역시나 서쪽을 향하고 있다.
천불전이란 이름 그대로 1,000개의 조그만 불상을 지니고 있는데, 그 모습이 이 땅의 7천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이다. 귀찮아서 건물 내부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지만 현재 법당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건물 뒷쪽에는 원효가 수행했다고 전하는 토굴(土窟)이 있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종무소(宗務所) 옆 쉼터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아직까지 남은
식량이 있어서 커피와 과자 등을 꺼내 잠시나마 조촐한 향연을 즐긴다. 서쪽 전방에 펼쳐진
일품 조망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으며,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
람은 번뇌와 온갖 상념을 싹 털어간다. 그렇게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다가 삼막사의
나머지 부분을 보고자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보통 천불전과 명부전, 육관음전, 3층석탑이 있는 경내가 삼막사의 전부로 착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삼막사의 함정이다. 아직 사적비와 삼귀자, 마애불, 남녀근석 등의 문화유산이 남아있
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을 지나치면 삼막사의 절반 밖에는 못보는 것이다. 기왕 여기까지
올라온 거 말끔하게 보고 가는 것이 좋으며, 그것이 삼막사에 대한 작은 예의가 될 것이다.
사적비와 삼귀자는 경내와 가까운 곳에 있으며, 마애불과 남녀근석(칠성각 구역)은 5~6분 정
도 산을 타야 된다.


▲  삼막사 사적비(事蹟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으로 길을 접어들면 바로 왼쪽 높은 곳에 빛바랜 비석 하나가 눈에 아른
거릴 것이다. 그는 삼막사의 일기장인 사적비로 네모난 비좌(碑座)와 비신(碑身), 지붕돌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인데, 삼막사 창건 설화부터 조선 후기까지 내력이 적혀있으나 아쉽게도
비문(碑文) 상당수가 훼손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다만 관악산맥 삼성산 밑에 있다는 것과 절 이름이 삼막사로 향로봉이 왼쪽에 있다는 것, 사
적비를 1707년에 세웠음을 알리는 내용만 간신히 확인이 가능하다.


▲  산신각 - 바위에 새겨진 마애 산신탱

사적비를 지나면 바위에 깃든 산신탱이 마중을 한다. 지팡이를 든 대머리 산신 할배를 중심으
로 동자와 호랑이, 소나무, 구름, 햇님 등을 담았는데, 색을 입히지 않아서 윗쪽을 제외하면
모두 하얀색이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말이다.
이렇게 산신탱을 닦고 그 주변을 노천식 산신각(山神閣)으로 삼았는데, 산신탱 앞에는 중생들
이 올린 막걸리와 사탕, 과자, 떡 등이 가득하여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삼귀자(三龜字) 바위글씨를 머금은 바위

예전에는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으로 가려면 무조건 사적비와 삼귀자 앞을 지나가야 했다. 허
나 지금은 질러가는 길이 생겨서 그들 앞을 굳이 지나갈 필요는 없어졌으나 그들은 삼막사의
오랜 보물들이니 이곳이 초행이라면 꼭 살펴보기 바란다.

산신탱을 지나치면 기묘하게 생긴 삼귀자 바위글씨가 발목을 붙잡는다. 바위 피부에 쓰인 글
씨는 모두 거북 귀(龜)로 그 글씨를 전서체 등 다양한 모습으로 디자인하여 새긴 것인데, 오
른쪽 글씨는 그나마 귀자 비슷하게 생겼으나 무슨 부적 분위기가 나고, 가운데 글씨는 엉금엉
금 기어가는 거북이(또는 무당벌레) 모습 같으며, 왼쪽 글씨 또한 거북이를 닮았다.
이들 삼귀자는 종두법(種痘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의 친형 지운영(地雲英, 1852~1935)
이 이곳에 소박하게 백련암(白蓮庵, 지금은 남아있지 않음)을 짓고 은거했을 때 쓴 것으로 지
석영이야 워낙 인지도가 높아 삼척동자도 다 알지만 그에게 형이 있었다는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지운영은 여기서 관세음보살 누님을 친견하는 꿈을 꾸고 너무 기뻐 새겼다고 하며, 삼귀자 이
웃 바위에 '관음몽수장수 영자(觀音夢授長壽 靈字)'라 해서 그 소감을 밝혔다.

삼귀자 글씨의 크기는 왼쪽부터 높이 74cm, 77cm, 86cm이며, '불기(佛紀) 2947년 경신중양 불
제자 지운영'이란 글씨가 있어 1920년에 그가 썼음을 귀띔해 준다. 그리고 옆 바위에는 시주
자 명단이 적힌 명문이 있다.


▲  거북귀(龜)의 화려한 변신, 삼귀자(3개의 거북귀) 바위글씨의 위엄
명필가는 이렇게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악필가는 살아있는 글씨마저
죽여버린다.

▲  삼귀자 안내문 뒷쪽 바위에 새겨진 시주자 명단 바위글씨



 

♠  삼막사 마무리

▲  칠성각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 ①

삼막사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까지는 5~6분 정도 발품을 팔아야 된다. 그만큼 외딴 곳에 떨어
져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까지는 돌로 길을 잘 닦아놓아 통행에 어려움은 없으며, 혹시나
엉뚱한 길로 빠질까봐 연분홍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안내하고 있다.


▲  칠성각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 ②

▲  삼막사 남녀근석(남근석) - 경기도 지방민속문화재 3호

삼막사 경내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 칠성각 구역에 이르면 아주 재미있게 생긴 바위가 마
중을 한다. 바로 삼막사의 백미이자 이곳에서 꼭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남근석(男根石)과 여근
석(女根石)이다.
이들은 2개의 바위로 남쪽에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남근석이, 북쪽에는 여인네의 은밀한
부분을 닮은 여근석이 누워있는데,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특히나 여근
석은 그 부분과 너무 닮아서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렇게 거시기하게 생긴 돌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이른바 성기신앙(性器信仰)
의 대상으로 격하게 숭배를 받았다. 이 바위를 만지며 기원을 하면 아들 낳기와 출산에 효험
이 있다고 전해져 석가탄신일과 7월 칠석에는 많은 사람들(특히 아줌마들)이 찾아온다.
남근석의 높이는 1.5m, 여근석은 1.1m로 삼막사는 이 바위를 매우 애지중지 다루고 있다. 여
자를 멀리해야 되는 절간에서 예민하게 생긴 바위를 옆구리에 끼고 있다는 점이 참 이채롭기
까지 하는데, 이는 모두 절의 인지도와 수입을 위해 그리 한 것이다. 그리고 18세기에는 그들
옆에 마애불을 세우고 칠성각을 세워 칠성신앙까지 어우러진 현장으로 만들었다.


▲  대자연 형님의 심술궂은 작품, 여근석

▲  바로 앞에서 바라본 여근석의 위엄
앞이나 옆이 아닌 바로 위에서 보면 기가 막히게 실감이 난다. 마치 그 모습 그대로
돌로 굳어버린 듯한 느낌. 나는 쑥쓰러워서(?) 위에서 사진을 담지 않고
약간 옆에서 살짝(?) 담았다. 이거 좀 무안해서 말이지 ~~~!

▲  바위에 씌워진 삼막사 칠성각(七星閣)

칠성각은 바위에 깃든 마애3존불의 거처로 1881년에 지어졌다. 바위와 마애불에 맞게 짓다 보
니 지붕이 2겹이 되어버렸는데, 마애불이 바라보는 서쪽에 문과 성인 키 정도의 계단을 내었
다. 전실(前室)처럼 자리한 건물 내부는 마치 석굴(石窟) 마냥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중
생들이 달아놓은 조그만 인등(引燈)이 강인한 협동심을 드러내며 내부를 환하게 수식한다.


▲  삼막사 마애3존불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4호

칠성각에 담긴 마애3존불은 칠성(치성광여래)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
보살(月光菩薩)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존재를 칠성이라 한 것은 건물 이름이 바로 칠성각
이기 때문이다. 건물이 칠성각인데 엉뚱한 존재가 중심에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들은 연화좌(蓮花座)에 앉아있는데, 보관(寶冠)을 눌러쓴 양쪽 보살상은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고 있으며, 칠성은 두 손을 가부좌(跏趺坐)를 튼 무릎 위에 대고 보륜(寶輪)를 들고 있
다.
수인(手印)을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얼굴부터 옷주름까지 진하게 남아있어
형태를 알아보는데 문제는 없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가슴에는 내의의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마애불 밑에는 고맙게도 '乾隆二十八年癸未八月日化主悟心'이란 명문이 있어 1763년 계미년 8
월에 화주(化主) 오심이 조성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 땅에 칠성을 담은 그림(칠성탱, 칠
성도)은 많지만 이렇게 바위에 마애불로 새긴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또한 조성 관련 명
문까지 새겨져 있어 당시 마애불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어준다.

마애3존불의 눈, 입, 귀, 눈썹이 매우 선명하나 코는 닳아져 형태만 남아있다. 이는 그 코를
갈아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아낙네들이 그의 코를 마구 갈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성
기신앙의 현장이 옆에 있으니 그 현상은 심했으리라, 그렇게 중생들에게 코까지 떼였으니 마
애불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마애불이 누구를 위해 있는가? 바로 중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 중생을 위해 기꺼이 코 하나 내놓는 것은 그들의 임무이며, 코는 나중
에 새로 달아도 된다.


▲  칠성각을 뒤로하며



 

♠  삼성산 서남쪽 능선에 숨겨진 아주 늙은 무덤,
석수동 석실분(石室墳) - 경기도 지방기념물 126호

이렇게 삼막사를 고루고루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 햇님도 이제 고개가 아픈지 슬슬 지
평선 너머로 내려앉을 준비를 한다.
염불사(염불암)를 둘러보고 안양예술공원으로 내려갔는데, 일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 삼
성산의 숨겨진 명소이자 은자(隱者)인 석수동 석실분을 이날의 마지막 메뉴로 둘러보기로 했
다.

석수동 석실분은 안양예술공원 공영주차장 뒷쪽에 있는 석수동 마애종(磨崖鍾)을 기준으로 삼
아서 찾는 것이 편하다. 마애종에서 서쪽 길(예술공원로117번길)로 들어가면 막다른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예술공원로 117번길)로 접어들면 안양노인전문요양원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 쭉 올라가면 된다. 이곳은 옛날
에 광산이 있던 곳으로 마을의 밥줄이던 광산이 없어지면서 가옥 몇 채와 폐광의 흔적만 황량
하게 남아 늦은 시간에 오면 으시시함까지 느끼게 한다.

석실분을 알리는 이정표는 다행히 넉넉하게 닦여져 있어 길을 잃을만하면 나타나 길을 비춰준
다. 심지어 무덤 50m 전까지도 이정표가 있다. (석수동 마애종에서 도보 20분 거리)

▲  돌탑 위에 피어난 석실분 이정표

▲  석실분으로 인도하는 산길

▲  북쪽에서 바라본 석실분

▲  동쪽에서 바라본 석실분

석수동 석실분은 삼성산 서남쪽 능선 300m 고지에 둥지를 튼 삼국시대 무덤이다. 보통 고구려
무덤들은 흙무덤과 돌무덤(4세기 이후) 중심으로 주로 평지에 널려있고, 백제 무덤은 거의 흙
무덤 중심으로 바깥은 흙으로, 안은 돌로 돌방(석실)을 만든 구조인데, 대체로 평지와 언덕을
선호했다. (백제 돌무덤도 석촌동고분군을 비롯해 일부 남아있음) 그리고 신라 무덤은 흙으로
다지고 안에 돌방을 넣은 형태로 평지와 언덕을 선호했고, 가야는 특이하게 산자락이나 능선
을 주로 선호했다.

우리가 찾은 석수동 석실분은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가야 무덤이 아닐까 싶지만. 가야의 무덤
은 아니다. 가야(伽倻)의 영역은 경기도에 이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막연히 삼국시대 무덤
으로만 여겨질 뿐, 정확한 조성 시기와 무덤 주인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
으나 무덤 안에 석실을 다지고 윗도리에 흙으로 봉분(封墳)을 씌웠으며, 바깥과 석실(石室)을
잇는 연도(羨道)가 없는 횡혈식고분(橫穴式古墳)인 것으로 보아 6~7세기 이후 신라 무덤으로
여겨진다.
비록 봉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심술쟁이 자연의 손길, 일확천금을 노린 도굴꾼의 검
은 마수로 오래 전에 녹아 없어졌지만 석실까지 갖춘 규모와 안양시내를 바라보는 산자락에
자리한 점으로 보아 안양 지역을 다스리던 관리나 지방 세력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왜 하필이면 이런 첩첩한 산능선에 무덤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양사 동쪽 산자락에도 늙은
고분이 1기 있다고 하며(이곳은 확인하지 못했음), 지형 조건을 통해 조그만 고분이 더 숨겨
져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허나 아직까지 이 무덤을 포함하여 주변을 싹 뒤집지는 못했다.

무덤은 산 정상부를 향해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옛날에 이미 도굴을 당한 상태라 발견된
유물은 없다. 들리는 풍문에는 여기서 금관(金冠)과 금귀걸이가 나왔다고 전하는데, 진위 여
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히 높은 인물의 무덤임이 틀림없다.

흙으로 다진 봉분은 무참히 벗겨나가 흔적은 없으며, 석실과 석실 천정을 이루던 거대한 판석
(板石)이 대머리처럼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태이다. 석실 내부는 길이가 3.4~4.5m, 폭 1.5~1.7
m, 높이 85~100cm이며,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서 동/서/북벽을 쌓았고, 남쪽 벽은 커다란 판
석 1매로 축조했다. 그리고 3개의 넓다란 판석으로 석실을 덮었는데, 가운데 판석이 파괴되어
무덤의 속살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연도가 생기기 이전 형태로 여겨지며, 조선총독부가
1942년에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흥군(始興郡)
35. <고분>,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의 후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여기서 귀부는 안양사 귀부로 여겨지나 확실치는 않
음)

▲  세상을 향해 입을 벌린 석실분

▲  돌로 다져진 석실분 내부 ①

◀  돌로 다져진 석실분 내부 ②

무덤 내부는 문화유적 보호 차원에서 들어가면 안되지만, 이미 뚜껑이 열린 상태라 살짝 들어
가 볼 수 있다. 하지만 깊이가 1.5m 정도로 깊고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없어 다리에 무리가
없도록 조심을 기해 내려가야 된다.

주인도 오래전에 떠나버린 무덤 내부는 상석(床石)처럼 놓인 돌을 빼고는 텅 비어 있다. 무덤
이라기보다는 임시 거처나 아지트 같은 기분이다. 소름이 끼치는 무덤의 속살이지만 이곳을
알리는 문화유산 안내문이 없고, 옛 고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이게 무덤인지 군사시설인지,
숨겨진 아지트인지 헷갈릴만하다. 누가 이런 곳에 무덤을 쓸 것이라 생각을 하겠는가. 죽어서
도 권력과 부귀를 누리고 싶었던 옛날의 어느 부질없는 망족(望族, 귀족)의 욕심이 이 무덤을
탄생시켰고, 그 욕심에 대한 혹독한 대가로 사람과 자연, 세월에 의해 여러 차례 털리고, 파
괴되는 비운을 맞으며 '내가 과연 무덤일까?' 이곳의 성격마저 크게 흔들어 놓았다.

햇살이 조금씩 내려앉은 석실 내부는 오싹하기는 커녕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다. 학우봉과 삼
막사 방면으로 산길이 나있지만 다소 외진 숨겨진 곳이라 이곳을 지나는 산꾼의 수요는 별로
없으며 석실분 내부는 포근하고 비바람을 피하기에 좋아 간단한 먹거리나 손전등을 갖춘다면
염치불구하고 하룻밤 살짝 머물고 싶은 곳이다. 물론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그리해서는 안되
지만 정말 나만의 비밀 공간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간다.


▲  석수동 석실분에서 바라본 천하, 안양시내
멀리 바라보이는 산은 안양을 서쪽에서 감싸는 수리산이다.


무덤 밖에서 눈 아래로 펼쳐진 속세를 바라보며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수리산과 삼성산 사
이에 둥지를 튼 안양시내를 바라보니 그곳이 나의 영지(領地)인양 거만한 착각에 마음이 잠시
즐거워진다. 무덤 주인도 아마 그런 것 때문에 노비와 백성들을 닥달하여 이곳에 무덤을 쓴
것은 아닐까?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그만의 공간으로 가고자 슬슬 휘장을 거두고, 진하게 보이던 안양시내
도 그만큼 흐릿하게 다가온다. 어둠이 내려앉으니 사람도, 도시도, 산도, 어둠을 몰아내고자
불빛을 여기저기서 발산하면 검게 익은 안양의 산하는 그것을 얼굴에 바르며, 환상적인 야경
을 선보인다. 안양의 야경을 제대로 누리고 싶다면 안양예술공원 남쪽 산자락에 자리한 망해
암(望海庵)도 좋지만 석수동 석실분도 엄지를 강하게 치켜들며 추천하고 싶다.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산236-9


▲  석수동 석실분에서 맞이한 일몰
이렇게 하여 삼성산, 삼막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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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산사 나들이, 남양주 불암산 불암사

불암산 불암사



~~~~~  한여름 산사 나들이, 불암산 불암사
~~~~~
불암산 불암사
▲  평화로운 불암사 경내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속절없이 더해가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친한 후배와 정말
간만에 불암산(佛巖山) 불암사를 찾았다.
햇님이 한참 허공 복판에 머물던 15시에 석계역(1/6호선)에서 그를 만나 간단히 요기를 하
고 서울시내버스 1155번(석계역↔청학리)을 잡아타고 불암산의 남쪽 관문인 불암동(佛巖洞
)에서 두 발을 내렸다.



 

♠  불암사(佛巖寺) 입문

▲  불암사 일주문(一柱門)

불암산(508m)은 서울 근교의 주요 명산(名山)으로 등산/나들이 수요가 엄청나다. 불암산 밑도
리에 터를 닦은 불암동은 일찌기 불암사의 사하촌(寺下村)으로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산꾼과
나들이꾼, 군부대 면회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온갖 식당과 갈비집이 가득해 거의 먹거리촌
이 되었다.
절을 목전에 둔 속세(俗世)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식당의 진한 유혹으로 코가 아주 정
신을 못차린다. 간신히 그 유혹을 뿌리치며 길을 걸으니 불암사 일주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하고, 길을 따라 징하게 이어지던 식당의 행렬도 여기서 뚝 그친다.

1994년에 세워진 일주문의 현판에는 '천보산(天寶山) 불암사'라 쓰여있는데, 천보산은 불암산
의 다른 이름으로 조선 세조(世祖)가 산의 수려한 모습에 감동을 먹고 내린 이름이라고 한다.
불암산이란 이름은 산 정상을 이루는 바위가 마치 비구니의 모자를 쓴 부처의 모습이라 하여
유래된 것이니 산 이름이 그야말로 불교 스타일이다. 그리고 필암산(筆岩山)이란 별칭도 가지
고 있으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이름이다.


▲  불암사로 인도하는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깥보다 더욱 짙은 숲길이 펼쳐진다. 여름 제국의 기운을 먹고 자라 녹음
(綠陰)의 질감도 매우 깊은데, 잔잔한 산바람에 번뇌를 강제로 떠맡기며 계속 길을 가면 불암
사 경내가 슬슬 모습을 비춘다.


▲  물줄기가 춤추는 작은 연못 (사적비 옆)

▲  불암사의 빛바랜 일기장, 사적비(事蹟碑)

경내를 가리고 선 제월루 앞에 이르면 사적비와 수초(水草)를 머금은 아기자기한 연못이 마중
을 한다.
고색의 내음이 아낌없이 서린 사적비는 1731년에 세워진 것으로 왕실과 가까운 절의 위상을
보여주듯, 공조판서(工曹參判) 이덕수(李德壽)가 글을 짓고,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
인 조명교(曹命敎)가 썼다. 불암사의 창건과 중건을 다룬 사적(事蹟)을 비롯해 1728년에 거사
각신(覺信)과 정인(淨仁)이 맹세 발원하여 보시한 돈으로 근기(近畿, 수도권) 지역에 전토를
마련해 절이 피폐하지 않도록 하였음을 다룬 내용도 적혀있다.

비신(碑身)과 지붕돌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으로 지붕돌에는 세월이 달아준 검은 주근깨가
역력해 고색의 멋을 진하게 풍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불암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 근교 4대 명찰의 하나, 불암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불암사
불암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이다. 824년에 지증대
사(智證大師)가 창건했다고 하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연 지
선(智詵)이 창건했다고도 하나 관련 자료와 유물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거의 없다. 이후 9세
기 말에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중건했다고 하며, 조선 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수했다고
전한다.

세조(재위 1455~1468)는 서울 주변 동서남북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절을 하나씩 선정했는데,
서쪽에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 북쪽에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 남쪽에 삼
성산 삼막사(三幕寺), 그리고 동쪽에 불암사를 선택했다. 그로 인해 동불암(東佛巖)이라 불리
기도 했으며, 서울 근교 4대 명찰(名刹)의 하나로 널리 존재를 알렸다.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시절에 중건을 했고, 영조(英祖) 말년에 거의 망하기 직전에 이
른 것을 승려 명관(明瓘)이 크게 중수했다. 1731년에 왕실의 지원으로 사적비를 세워 불암사
의 내력을 기록했으며, 1782년 보광명전과 관음전을 중수하고 제월루를 세웠다.
1844년에 중수를 했고, 춘봉(春峯)이 향로전을 다시 지었으며, 1855년에 혜월(慧月) 등이 중
수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독성각과 산신각, 동축당(東竺堂)을 세웠다.

6.25때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 피해를 없었으며, 1959년에 만허(滿虛)가 칠성각을 중수하
고, 낡거나 협소한 건물을 죄다 다시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1989년 타이(태
국)와 스리랑카에서 부처의 사리를 기증받아 5층 진신사리탑을 세웠으며, 1991년에 화재로 관
음전이 무너지자 1992년에 다시 지었고, 1996년에 협소하던 동축당을 부시고 그 목재를 포천
보문사(普門寺)에 선물하여 그곳 대웅전 불사에 쓰게 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 약사전, 제월루, 지장전, 칠성각,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
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 591호로 지정된 석씨원류응화사적 목판(釋氏源流應化事蹟
木板)이 있으나<여기서 석씨(釋氏)는 석가모니를 뜻함> 현재는 연구와 보호를 위해 서울 불교
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된 '불암사 경판'이 전하고
있는데, 이 경판은 1635년부터 1795년까지 간행된 것으로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밖에 보물로 지정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1895년에 제작된 괘불도(掛佛圖, 경기도 지방유형
문화재 315호
), 석가삼존십육나한도, 목조석가여래좌상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사적비와
지장시왕탱, 칠성탱 등 오래된 비지정 문화유산이 있다.

속세와 가깝긴 하나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어 산사의 내음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고색
의 내음은 거의 말라버렸지만 사적비와 여러 늙은 문화유산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충분히
가늠케 해준다.

끝으로 불암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6.25시절에 활약했던 '호랑이' 유격
대이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육사 1,2기 생도들은 포천(抱川)과 서울 노원구 지역에서 북한군과 싸
웠으나 패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그중 육사 생도 13명(1기 10명, 2기 3명)은 후퇴하지
않고 국군 7명과 의기투합하여 불암산 정상과 석천암 주변 바위 동굴에 은신했다. 그들은 암
호명 '호랑이'란 유격대를 결성했는데, 불암사 주지승 윤응문과 석천암(石泉庵) 주지승 김한
구가 그들을 크게 도와주었다.

허나 호랑이 유격대는 겨우 20명이고 서울과 경기도 지역이 북한군에게 새카맣게 점령된 상태
이다. 하여 산에 은둔하여 치밀하게 기회를 노려 총 4차례에 기습전을 전개했는데, 7월 11일
불암산과 가까운 퇴계원 보급소를 습격해 적 30여 명을 죽이고 기름 50드럼을 폭파하면서 그
들의 첫 작품을 근사하게 치루었다.
7월 31일, 창동(倉洞) 수송부대를 습격해 6명을 죽이고, 보급차량 다수를 폭파했으며, 8월 15
일에는 북한군 훈련소를 기습해 50여 명을 사상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9월 21일에 북
한군에게 끌려가는 주민 100여 명을 남양주 내곡리에서 구출하고 적 수십 명을 죽였다. 하지
만 적들의 반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19명이 장렬히 전사했으며, 강원기 생도(육사 1기)는
중상을 입고 피신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며칠 안가서 결국 눈을 감고 만다.
딱 7일만 더 버텼다면 서울 수복의 기쁨을 누렸을텐데. 하늘도 참 야속했다. 그러고보면 이
땅의 하늘은 정의로운 사람에게만 화를 주고,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만 주로 복을 주니 참 하
늘값을 제대로 못한다. 그런 하늘은 우리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다.

* 불암사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797 (불암산로 190 ☎ 031-527-8345)
* 불암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동자승에게 둘러싸인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과 깨알 같은 불전함



 

♠  불암사 둘러보기 (대웅전 주변)

▲  불암사 제월루(霽月樓)

경내를 가리고 선 제월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짜리 집이다. 1782년에 지어졌다고 하나
현재 건물은 근래에 다시 지은 것이며, 정면에 걸린 불암사 현판은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이 70세 때 쓴 것이다.
1층은 종무소(宗務所)와 기념품 가게가 있고, 2층은 강당(講堂)으로 쓰이고 있는데, '차가람'
이란 현판을 내건 개방된 공간으로 누구든 들어와 잠시 두 발을 쉬거나 차 1잔, 독서의 여유
를 누릴 수 있다. 책장과 평상, 방석, 선풍기, 난로, 자판기 커피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여
름에는 산바람이 솔솔 기웃거려 시원하다.


▲  제월루 2층 내부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대웅전 뜨락과 제월루(왼쪽)

▲  툇마루를 갖춘 약사전(藥師殿)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의 거처로 가운데 3칸은 약사전,
좌우 1칸씩 2칸은 요사(寮舍)로 쓰이는 복합적인 건물이다.

▲  약사전을 마주보며 툇마루를 내민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 누님의 거처로 1991년에 불탄 것을 1992년에 다시 지었다.
정면 3칸은 관음전, 나머지 2칸은 종무소와 요사로 쓰인다.

▲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상(보물 2,003호)과 천수천안관음보살탱

관음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649년에 무염(無染), 성수, 심인, 상림, 경성 등 5명의
조각승이 합심하여 만들었다. 보살상의 뱃속에에서 아주 고맙게도 조성발원문과 중수발원문이
나와 그의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는데, 원래는 전북 대둔산(大芚山) 묘련암(妙蓮庵)에 봉
안하고자 제작되었다. 허나 1900년 무렵 불암사에서 만일회(萬日會)가 열리면서 살짝 이곳으
로 옮겨진 것으로 여겨지며, 1907년 개금 중수했다.

보살상의 높이는 67cm으로 연꽃과 불꽃문양이 장식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가사
는 2벌을 겹쳐서 입은 이중착의법으로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렸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적당하
고 신체의 자연스런 양감이 돋보이는데, 얼굴은 이마가 넓으며, 턱 부분은 좁아서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날렵하고 갸름하게 처리된 턱 선, 높게 돌출된 코, 자비로운 인상에 실
재감 있는 이목구비의 표현 등은 아담하고 현실적인 조형미를 추구했던 무염의 불상/보살상
스타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보살상은 2018년 10월에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는데, 그의 뱃속에서 나온
조성발원문 1점과 후령통 1점, 중수발원문 1점도 같이 지정되었다.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
상'이란 이름으로 지정됨) 그가 보물로 지정된 것은 그의 조성 시기와 조성 승려, 봉안처 등
을 알려주는 발원문 덕분이다.


▲  대웅전 뜨락에 세워진 3층석탑과 천진불(天眞佛)
그 주변(사진 오른쪽)에 포대자루를 맨 포대화상이 서 있다.

▲  3층석탑 옆에 핀 한 송이 백련(白蓮)
저 안에서 심청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잘익은 백련 앞에 내 마음은 콩닥콩닥~~♪

▲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불암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불단에는 석가3
존상을 봉안했는데, 그 뒤로 1907년에 보암긍법, 범화윤익, 법연 등이 그린 아미타후불탱이
걸려있다. 그리고 1982년에 그려진 천불탱과 2001년에 조성된 신중탱, 감로탱 등이 법당 내부
를 장엄하게 꾸며준다.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48호)과 석가3존상

대웅전 불단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조그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석가3존
상을 이루고 있다.

목조석가여래상은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1743년에 개금(改金)을 했다는 기
록이 전하고 있다. 그때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和平翁主)가 시주자로 참여하여 왕실과 크게
관련이 있는 불상임을 알려준다.
불상의 상체가 길고 무릎의 높이가 낮아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네모난 얼굴은 양쪽
볼이 두꺼우며, 반쯤 뜬 눈에 우뚝한 콧날과 작은 입술을 지녔다. 머리는 나발로 무견정상(無
見頂相, 육계)이 솟아있으며, 정수리와 이마 사이에 원통형과 반달 모양의 상투 매듭 구슬이
뚜렷하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취했고, 왼손
은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옷자락이 다소 두터워 신체의 양감이 드러나지 않는데, 옷자락은 몇 가닥의 깊은 골주름을 그
리며 좌우로 뻗었으며 그 끝자락은 대좌 위로 드리워져 물결 모양의 부채살처럼 마무리가 되
었다.

그의 좌우에 자리한 문수/보현보살은 근래 만들어 붙인 것이며, 그들 뒤에는 1907년에 그려진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는데,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
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유희좌(遊戱坐)로 앉아있다.

그들 좌우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든 지장보살과 화려한 보관(寶冠)을 쓴 관세음보살이 한 자
리씩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 뒤에는 붉은색과 하얀 색으로 이루어진 천불탱이 걸려있다.



 

♠  불암사 마무리

▲  한 지붕 다 가족을 이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칠성각은 1959년에 중수된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다. 특이
하게 각 칸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가운데는 칠성각, 그 좌우는 산신각(山神閣), 신통전(神通殿
) 현판을 내밀고 있는데, 그냥 속편하게 그들을 모두 아우른 삼성각(三聖閣)을 칭하면 될 것
을 괜히 복잡하게 현판만 주렁주렁 달고 있다.
칠성과 산신, 독성(獨聖, 나반존자) 외에 16나한과 지장시왕탱, 석가여래상도 봉안되어 있어
완전 한지붕 다가족을 이루고 있으며, 이중 칠성탱과 16나한도, 지장시왕탱은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다.


▲  석가삼존16나한도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16나한도는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을 담은 탱화이다. 그림 중앙에 석가여래가 있
고, 그 밑에 조그만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있으며, 그 주위로 16명의 나한(羅漢)이 각자
의 스타일을 드러내며 그려져 있는데. 특이한 점은 나한이 모두 독자적인 칸을 지니며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할 구도법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많이 나타
나는 불화 양식으로 한 화면에 이렇게 구획을 만들어 16나한을 모두 넣은 것은 불암사만의 독
창적 특징이다.

이 탱화는 1897년에 경선응석(慶船應釋), 명응환감(明應幻鑑), 보암긍법(普庵肯法), 범화윤익
(梵華潤益), 설암재오(雪庵在悟), 운조(雲祚) 등이 그린 것으로 고색의 기운을 제법 풍기고
있으며, 그 앞에는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다.


▲  유리막에 갇힌 독성상
동자승처럼 귀여운 조그만 독성상이 방석 위에 앉아있다. 다른 절과
달리 독성상만 있을 뿐, 독성탱은 없다.

▲  칠성각의 주인 자리를 차지한 석가3존상과 칠성탱(뒤에 있는 그림)

칠성각 중앙 불단에는 석가여래상이 문수/보현보살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그 뒤에는 칠성 가
족을 머금은 칠성탱이 석가여래의 후불탱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는 경내에서 가장 늙은 탱화
로 1855년에 퇴운주경(退雲周景), 창엽(瑲曄), 환익(幻益), 민수(旼修), 긍섭(肯攝), 법인(法
仁) 등이 그렸다.
그림 중앙 윗쪽에는 치성광여래가 하얀 사슴이 끄는 수레에 타고 있고, 그 밑에 황색 대의를
걸친 자미대제(紫微大帝)가 있다. 그 옆에는 칠성원군(七星元君)이, 그 뒤로는 일광보살(日光
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좌우보필성(左右輔弼星), 육성(六星)이 있다. 다시 그 주위로
남두칠성(南斗七星)과 칠성여래(七星如來)가 자리해 있고, 머리에 별을 이고 있는 28숙(宿)이
시립해 있다. 등장인물이 많아 좀 복잡하나 인물이 위로 가면서 작아지는 원근적인 표현을 하
고 있다.


▲  산신탱과 산신상
붉은 옷을 걸친 수염 지긋한 산신 할배가 중앙에 앉아있고, 그 옆에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앉아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첩첩하게 주름진 산줄기, 학 등이 탱화를 가득 채워준다.

▲  밝은 색채의 지장시왕탱

산신탱 옆에 자리한 지장시왕탱은 1890년에 완송종현(琓松宗顯), 혜조(慧照), 보암긍법(普庵
肯法), 등한(等閑) 등이 제작한 것이다.
연화좌(蓮花座)에 앉은 지장보살은 오른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고, 왼손은 결가부좌(結跏
趺坐)한 두 발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그 좌우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비롯한 시왕(十王)과 판관(判官), 사자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어두운 곳에 사는 존재들이지만 밝은 색채를 주로 사용하여 밝은 느낌을 크게 준다. 저승도
나름 살만한 곳이구나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  하얀 연등을 두룬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불암사의 보물인 석씨원류응화사적책
판과 경판을 머금던 장경각(藏經閣)이었다. 허나 석씨원류가 서울로 옮겨지고(현재는 불교중
앙박물관에 있음) 경판 또한 별도의 장소로 이전되면서 빈 공간이 되었다가 2004년에 내부를
손질하여 지장전으로 삼았다.
불단에는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로 이루어진 지장3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모두 금
동으로 되어 있다. 그 뒤에는 아미타후불탱이 자리하고 있고, 그 좌우 감실(龕室)에는 16명의
나한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앉아있다.


▲  마애3존불과 12지신상

경내 뒷쪽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여럿 있다. 이중 적당한 바위를 손질하여 마애3존불과 세존진
신사리탑을 세웠는데, 그중 사리탑을 세운 바위에 부처바위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경내에서 마애불로 인도하는 길목에는 돌로 만든 12지신상이 좌우로 6개씩 늘어서 있어 나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그들의 검문을 받으면 바위에 하얗게 새겨진 마애3존불 앞에 이
르게 된다.
이 마애불은 1973년에 조성된 것으로 마치 바위에서 그대로 현신한듯 자리해 있는데, 중앙에
는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나란히 취한 미륵불이 있고, 그 좌우에 정병(政柄)과 연꽃을 든 관세
음보살과 금강저(金剛杵)란 무기를 쥔 보살상이 있다.


▲  12지신상의 하나인 말상 (내가 말띠라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하얗고 매끈하다.

▲  바위에 선명하게 자국을 낸 마애3존불

▲  부처바위 위에 세워진 5층 세존진신사리탑(世尊眞身舍利塔)

마애3존불이 새겨진 바위 뒷쪽에 부처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부처의 사리를 머금은 5층석탑
이 장대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 석탑은 1989년 타이(태국)와 스리랑카에서 얻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자 세운 것으
로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을 얹히고, 보륜(寶輪) 등의 상륜부(相輪部)까지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2층 기단에는 팔부중(八部衆)을 새겼고, 1층 탑신에는 동쪽에 여래상을 조
각했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절도 거의 30년 만에 발걸음을 한 나
만큼이나 적지 않게 변해있었는데, 다시 안와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구석구석 경내를 살폈다.
이제 이곳을 나오면 언제 또 이곳에 오려나? 가깝지만 참 인연이 잘 닿지 않는다. 불암산은
가끔씩 찾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불암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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