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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6.24 인왕산 그늘에 깃든 서울 도심의 꿀명소, 서촌~청운공원 나들이 <선희궁터, 옥류동 청휘각터, 백세청풍 바위글씨, 송강정철 집터> 2
  2. 2022.03.18 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인왕산둘레길 나들이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3. 2020.11.25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4. 2020.10.14 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5. 2020.04.09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에서 무지개를 보다 ~~ (숙정문에서 청운대, 백악마루, 부암동 창의문까지)
  6. 2019.12.19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까지)
  7. 2019.11.20 늦가을 서촌의 끝자락을 거닐다 [월암근린공원에서 딜쿠샤, 황학정까지]
  8. 2019.05.05 높은 산에 포근히 감싸인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홍제천~부암동 나들이 (보현산신각, 박종화가옥, 홍지문, 옥천암, 산모퉁이)
  9. 2018.12.04 시문학의 성지이자 도심 속의 상큼한 언덕, 청운동 윤동주시인의 언덕 ~~~ (윤동주소나무,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10. 2018.04.24 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인왕산 그늘에 깃든 서울 도심의 꿀명소, 서촌~청운공원 나들이 <선희궁터, 옥류동 청휘각터, 백세청풍 바위글씨, 송강정철 집터>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옛 청휘각터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  옛 청휘각터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늦가을이 막바지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에 서울 도심의 꿀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는
서촌(西村, 웃대)을 찾았다.
서촌은 원래 서대문과 경희궁(慶熙宮) 주변을 일컬었고, 경복궁 서쪽 동네는 웃대라 불
렸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이들 지역은 서촌으로 합쳐졌다. 요즘에는 경복궁(
景福宮)과 인왕산(仁王山) 사이 지역을 서촌이라 크게 부르고 있으며, 세종이 1397년에
태어난 곳이라 해서 세종마을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서촌은 가까운 북촌(北村)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부암동과 더불어 나의 마음을 계
속해서 훔치고 있는 내 즐겨찾기 명소로 한때는 북촌처럼 구석구석 누비고 다녀 안가본
골목이 없을 정도이다. 허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다른 즐겨찾기 명소들이 생겨나면
서 조금은 시들어졌다.

늦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서촌 앓이가 다시금 도지면서 오래간만에 그곳을 찾았는데, 이
번에는 신교동과 옥인동, 청운동(淸雲洞)의 일부 명소들을 복습했다. (본글에서 선희궁
터와 백세청풍 바위글씨, 청운공원 일부는 늦여름에 담은 사진을 이용했음)


▲  백세청풍 바위글씨

▲  청운공원의 늦가을 풍경



 

♠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사묘(私廟), 선희궁터 사우(祠宇)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호

서촌 북부에 자리한 신교동(新橋洞)에는 국립서울농학교가 있다. 그 학교 교정에는 고색이 깃
든 기와집이 하나 숨겨져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옛 선희궁터의 사우이다.

선희궁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년)의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신주(神主)를 봉안했
던 왕실의 사묘<私廟, 사친묘(私親廟)라고도 함>이다. 사묘란 왕후(王后) 반열에 들지 못하거
나 추존되지 못한 제왕의 생모(生母)나 친할머니를 위해 지은 사당이다.

영빈이씨는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로 1764
년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아들을 죽인 자책감에 늘 괴로워하던 영조는 영빈에게 의열(義
烈)이란 시호를 내리고, 1765년 현재 자리에 사당을 지어 의열묘(義烈廟)라 했으며, 사도세자
의 아들인 정조(正祖)는 선희궁으로 이름을 높였다.

1870년 선희궁 신주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원위치시켰으며, 1908년 순종(純
宗)이 칙령(勅令)을 내려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묘(祠廟)을 대거 정리하면서 육상궁에 통합시
키고 선희궁은 사우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했다.
그 빈터에는 1931년 제생원(濟生院) 소속 맹아부(盲兒部)가 둥지를 틀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서울농학교와 서울맹학교의 전신이다.


▲  반지하처럼 살아가고 있는 옛 선희궁터 초석

신교동교차로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서울농학교로 다가서면 길 오른쪽(북쪽)에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듯, 콘크리트 밑에 깔린 길다란 석축(石築)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선희궁을
받치던 늙은 초석들로 지금은 그 위에 학교 운동장을 깔았다.


▲  왕실 사당으로써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은 선희궁터 사우

▲  벽돌로 3면을 두룬 선희궁 사우의 뒷모습

▲  화려한 단청이 눈을 부시게 하는 사우 내부
텅 빈 내부에는 부질없는 먼지만이 가득하다.


서울농학교 안쪽에 자리한 선희궁 사우는 툇마루를 갖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정면을 제외하고 모두 벽돌로 둘렀으며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무심한 세월의 때가
아낌없이 깃들여진 기단 위에 가지런히 들어앉아 나름대로 위엄과 기품을 드러내고 있지만 한
참 후배인 키다리 학교 건물 속에 파묻혀 오히려 초라하게 다가온다.

교정에는 옛 선희궁의 식구였던 늙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는 사우 부근에, 
느티나무는 학교 정문에 있는데 정문에 있는 느티나무는 나이가 250년이 넘었다. 250년이면
선희궁과 나이가 비슷하니 아마도 선희궁을 짓고 기념 식수로 심은 듯 싶으며, 높이 16m, 둘
레는 4.3m에 이른다. 사람들의 오랜 보살핌과 세월이란 마르지 않는 양분으로 나날이 커져가
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올해도 변함없이 교정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준다.


▲  신교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7호
학교 아이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며 삭막한 속세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희망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소중한 정자나무이다.


▲  200여 년 묵은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5호
앞의 느티나무와 달리 하늘로 곧게 솟아 늘씬한 자태를 뽐낸다.

▲  서울맹학교 정문과 우당기념관 앞에 자리한 잘생긴 은행나무
나이는 약 100년대로 여겨진다. 그가 걸쳤던 황금옷의 실타래가 풀어지면서
슬슬 앙상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그 모습이 한라산(漢拏山)과
덕유산 고지대에서 볼 수 있는 구상나무와 비슷해 보인다.


* 선희궁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1-1 서울농학교 내 (필운대로 103)



 

♠  서촌의 주요 명소였던 옛 청휘각(晴暉閣)터

▲  옥인동(玉仁洞) 산자락에 깃든 청휘각터(옥인동 산47번지)

서촌의 서부를 달리는 필운대로에서 옥인동 북서쪽 주택가를 가로질러 인왕산 자락으로 향하
면 자연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골목길(옥인5길)이 나온다. 길 동쪽은 서촌 주거지, 서쪽은
숲이 무성한 인왕산으로 서촌을 비롯한 서울 도심이 훤히 바라보이고, 인왕산 숲속이라 풍경
도 뛰어나 아름다운 절경만 보면 사죽을 못쓰던 옛날 사람들의 흔적이 반드시 있을 듯싶은데,
그 예상대로 청휘각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발길을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청휘각은 인왕산 동쪽 계곡의 하나인 옥류동(玉流洞)에 있던 정자이다. 그 옥류동은 인근 청
풍계와 수성동(水聲洞)과 더불어 혼란의 20세기를 거치면서 거의 생매장을 당해 약간의 시냇
물만 남아있는 정도로 개울은 거의 사라졌지만 숲은 여전하여 옛날의 경치를 조금 간직하고
있다.
청휘각이란 '비가 개인 뒤에 맑은 햇살이 비치는 누각'이란 시적(詩的)인 뜻이다.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이곳에 집을 짓고 그 후원에 지은 누정이 바
로 청휘각으로 겸재 정선은 장동 일대(청운동 지역)의 명소 8곳을 선정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청휘각 생전의 모습이 바로 그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정선이 아니었다면 청휘각의 생
김새조차 모를 뻔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청휘각

정선이 그린 청휘각 그림을 보면 청휘각 주변은 온통 소나무를 비롯한 숲과 개울 뿐이다. 정
자 밑에는 서촌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청휘각을 후원으로 삼았다는 김수항 집은 나와있
지 않아 그 집은 진작에 사라진 모양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으로 많은 문인(文人)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청휘각은 대중적인 명
소가 되었으며, 그렇게 착했던 청휘각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인왕산 산신(山神)도 모르는 실정
이나 20세기 초반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슬쩍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방과 6.25이
후 정자 밑까지 집들이 들어차 달동네처럼 변하면서 옥류동 계곡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허나
다행히도 청휘각 주변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아직 자연 지대를 유지하고 있어 청휘각 그림에
담긴 풍경의 절반 정도는 아직 유효하다.

청휘각은 서촌에 널린 소소한 명소에 불과하나 풍경만큼은 능히 갑(甲) 수준이다. 서촌의 조
그만 보탬도 줄 겸, 그리고 잃어버린 옛 경승지를 되찾는 차원에서 그림과 관련 자료를 참조
해 청휘각을 복원했으면 좋겠다. 골목길 밑을 제외하면 모두 숲이니 잃어버린 정자를 다시 일
으킬 공간도 충분하며, 숲과 계곡도 옛 모습 그대로 재현을 시킨다면 정말 금상첨화가 될 것
이다. 


▲  청휘각터로 인도하는 옥인5길 골목길
인왕산과 가까운 옥인동 윗동네는 아직 달동네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  인왕산과 서촌(웃대) 주거지의 경계를 가르는 옥인5길 골목길

▲  옥인동에서 바라본 청운동 주택가와 북악산(백악산)



 

♠  김상용(金尙容) 집터와 정철(鄭澈) 집터

▲  김상용 집터에 남아있는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글씨

서촌의 북쪽 끝을 잡고 있는 청운동은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사이에 포근히 자리해 있다.
예로부터 절경을 자랑하던 이곳에는 늙은 바위글씨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백세청풍 바위글씨다. 바위글씨란 바위에 새긴 글씨로 어려운 말로
각자(刻子)라고 하는데, 요즘은 순수 우리말인 바위글씨로 많이 불린다.

백세청풍 바위글씨는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새긴 것이다. 지금은 달랑 4자만 남아있지
만 원래는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 8글자로 앞의 4글자는 왜정 때 영구히 지워지고 말
았다.
또한 이들 글씨의 보금자리인 바위 위에 높게 석축을 쌓고 커다란 주택을 세우면서 석축에 제
대로 깔린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 형태가 완전히 사람 발에 깔린 개미 같다. 그나마 뒤늦
게나마 바위 앞에 철책을 둘러 보호에 나서고는 있으니 문화유산 보존에 야박한 이 땅의 현실
에서는 그것으로도 다행이다. 기분 같아서는 바위를 뭉개고 있는 집들과 석축을 말끔히 지워
버려 바위에게 자유를 주고 싶을 정도이다.

바위글씨의 주인공인 김상용은 1607년 이곳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변 풍경이 수려
해 청풍각(淸風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짓고 바위에 8글자를 새겼다. 그 연유로 이곳을 흐르던
계곡이 청풍계(淸風溪)라 불리게 되었으며, 청풍계와 인근 백운동(白雲洞)의 이름을 따서 지
금의 청운동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동(壯洞)이라 불림>
서촌의 경승지이자 서울 굴지의 명소로 찬양을 받았던 청풍계는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에
왜열도 재벌인 미쓰이(三井)가 이곳을 매입하여 건물을 지으면서 개념없이 마구 아작을 내기
시작했다. 졸졸졸~ 흐르던 개울을 생매장시키고 바위를 깨뜨렸으며, 계곡에 단 1채 남았던 옛
건물인 태고정(太古亭) 마저 인부들의 숙소로 유린하면서 끝내 밀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바
위글씨까지 손을 대어 글씨의 절반을 지워버렸다.

해방 이후 이곳에는 민가들이 들어차 청풍계가 다시 돌아올 여유도 주지 않았고, 졸부들의 저
택까지 백세청풍 바위에 깔고 앉으면서 이제는 전설 속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인왕제
색도(仁王霽色圖)를 남긴 겸재 정선이 청풍계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이나 했는지 이곳의 풍경
을 여러 장의 화폭에 담으면서 옛 모습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다만 김상용의 집은 정선의 그림에 나오지 않아 겸재 이전에 사라진 모양이며, 이제는 백세청
풍 바위글씨만이 겨우 남아 그의 집터임을 아련히 귀띔해줄 따름이다.


▲  가까이서 본 백세청풍 바위글씨
옛날 글씨는 왼쪽이 아닌 오른쪽부터 읽는다. 괜히 풍청세백이라 읽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자~
 

그럼 바위에 새겨진 백세청풍은 무슨 뜻일까? 백세(百世)는 100세대를 뜻한다. 대략 1세대를
30년으로 잡으니 무려 3,000년이 된다. 쉽게 말하면 오랜 세월을 뜻한다. 청풍에서 청(淸)은
맑고 높다는 뜻이고 풍(風)은 군자의 덕과 절개를 뜻한다. 그러니까 오래도록 부는 맑은 바람
, '영원토록 변치 않는 높은 선비의 절개','대대로 맑은 가풍을 유지한다'는 의미로 그 유명
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옛 조선(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고죽국(孤竹國) 사람들로 여기까지는 별 이상
은 없다. 김상용도 선비이자 양반이므로 그런 글귀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며, 양반들에게는
이상향과 같은 내용으로 그들이 자주 쓰던 글귀였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은 지워진 대명일월은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크고 밝은 해와 달이다. 그
것도 맞긴 하지만 여기서 대명(大明)은 조선이 자존심도 버리며 지극히 섬기고 받들던 명나라
를 뜻한다. 그러니 명나라의 해와 달, 즉 명나라의 세상을 의미하며, 거기에 백세청풍까지 더
하면 명나라에 대한 절개를 지키자는 뜻이 된다.
조선의 위정자들 상당수는 명나라를 '황명(皇明)','대명(大明)' 등이라 높여 불렀다. 게다가
조선의 정치 이념이자 선비와 사대부들이 익혔던 성리학(性理學)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성리학이 문치(文治)에는 좋을지 몰라도 문을 강조하고 무(武)를 멀리하는 함정이 있고, 주희
(朱熹)가 몽골 원나라에게 완전히 구겨진 한족(漢族) 잡종들의 체면을 만회하고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을 고취시키려는 의도로 만든 학문이다. 그러다보니 조선의 위정자와 사대부들은 점
점 명에 대한 꼴사나운 사대주의에 젖게 되고 국방까지 덩달아 등한시 하면서 명나라도 한때
두려워했고 툭하면 북방 세력(여진족 등)을 초토화시켰던 조선의 군사력은 크게 떨어진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 조금 도와준 것을 가지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이
라 떠벌리며 더욱 명나라에 딸랑거렸다.

그 명나라가 1644년 풍비박산이 났으니 조선의 선비와 위정자들은 완전 어버이를 잃은 양 크
나큰 충격에 빠졌다. 물론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도 명에 대한 그리
움에 한몫 했다. 명이 사라진 이후 조선 지배층과 유생들 사이에서 '명나라를 회복해야 된다'
,'명나라의 세월로 돌아가야 된다'는 아주 거지 같은 사상이 지배적으로 형성되었는데, 바로
그때 생겨난 단어가 바로 '대명일월' 4자이다. 그들의 꼴통 사대주의로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
들을 도탄에 밀어넣은 지배층과 유학자들의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이념이 담겨 있는 것
이다.

그런데 김상용이 글씨를 새긴 것은 명이 망하기 이전이므로 '대명일월'이란 단어는 아직 두드
러지지 않은 상태다. 그가 1637년에 죽었지만 그때까지도 명은 질기게 명줄을 유지하고 있었
다. 그러면 백세청풍은 몰라도 대명일월은 다른 사람이 새겼을 가능성이 큰데,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에서 자결한 김상용을 기리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뜻에
서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의 1
인자였던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는 말이 있다.


※ 김상용(1561~1637)은 누구인가?
김상용은 안동 김씨로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이다. 1590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
하여 검열관(檢閱官)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權慄)장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승지(承旨)가 되어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으며, 서인(西人)의 일원으로 대
사성(大司成)을 비롯, 여러 외직을 거쳤다. 1623년 서인패거리가 광해군(光海君)에게 반기를
들며 창의문을 뚫고 도성을 범하는 파렴치한 반란을 일으키자<인조반정(仁祖反正)> 거기에 참
여해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라는 큰 자리를 얻었으며,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
에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었다.

1630년 나이가 70살에 이르러 조정에 사직을 청했으나 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우
의정(右議政)에 임명했다. 드디어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그는 빈궁(嬪宮)과 원손(
元孫)을 호종하여 급히 강화도로 줄행랑을 쳤다. 허나 1637년 1월 청나라군이 강화해협을 건
너 손쉽게 강화성을 점령하자 그 분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남문 문루(門樓)에 화약을 잔뜩 쌓
아 불을 질러 자살했다.

그 당시로는 드물게 76살씩이나 살았던 인물로 자살을 택한 덕에 죽어서는 충신의 대접을 제
대로 받았다. 인조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강화군 선원면에 그의 사당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선원면이란 지명은 바로 그의 호에서 유래됨>


▲  송강 정철 집터

청운초등학교 앞 자하문로 길가에는 송강 정철의 집터를 알리는 표석과 그의 시가 담긴 시비(
詩碑)들이 줄지어 있다. 정철은 조선 가사문학(歌詞文學)의 1인자로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비
롯한 그의 작품들은 초,중,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아주 지겹도록 등장해 일명 학생들과
대입 수험생들의 적이라 불리기도 하며, 국문학사에서도 큰 무게를 가진 인물이다.

※ 송강 정철(1536~1593)은 누구인가?
정철은 연일정씨로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
청(文淸)이며, 기대승(奇大升)과 김인후(金麟厚)의 제자이다.
그는 맏누이가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고, 2째 누이가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이 되면서 궁
중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나중에 명종(明宗)이 되는 경원대군(慶原大君)과 친했다. 1545년 을
사사화(乙巳士禍) 때 계림군이 연관이 되자 정철 일가는 거의 풍비박산이 나고 정철 부자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1551년 유배에서 풀려나자 그의 일가는 집안의 고향인 담양 창평(昌平)으로 집을 옮겼다. 송
강은 형이 장가를 들어 살고 있는 순천에 가다가 우연히 김윤제(金允悌)의 별장(환벽당) 밑
창계천에서 목욕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었다.
(환벽당과 창계천 관련 글 ☞ 보러가기)
그는 여기서 10년 동안 공부를 했으며, 이때 기대승 등 당대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이
(李珥)와도 교유했다.

1561년 진사시(進士試)에 붙고, 1562년 별시(別試)에 장원으로 붙으면서 전적(典籍) 등을 역
임했으며, 1566년 함경도(咸鏡道)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8년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고 도승지(承旨)로 승진했다. 하지만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으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고, 3년 동안 전라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이때 그 유명한 관동별곡(關東別曲)이 탄생했으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그리고 1585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4년을 쉬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비롯한 굴지의 작품을 남겼다.

1589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곧 이어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직접 다스리
게 되면서 라이벌인 동인 세력을 철저히 때려잡았다. 그 공로로 1590년 좌의정(左議政)이 되
었다.
1591년 광해군을 세자(世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으나 당시 선조(宣祖)는 인빈(仁嬪)김씨 소
생의 신성군(信城君)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송강의 건의에 뚜껑이 뒤집힌 선조는 그를 진주
와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를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왕의 소환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했으며, 1593년 명나라
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다. 이후 동인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떨려나 강화 송정촌(松亭村)
에 머물다가 5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조선 가사문학의 상징으로 고산 윤선도(尹善道)와 쌍벽을 이루며, 작품으로는 시조 70수
가 전한다.


▲  송강의 시비 ①
산사야음(山寺夜吟)과 함흥객사에 핀 국화

산사야음(山寺夜吟)
우수수 지는 나뭇잎 소리를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
동자승 불러 나가보랬더니
시내앞 나뭇가지에 달만 걸렸네

▲  송강의 시비 ②
백성들 교화용으로 만든 훈민가

▲  송강의 시비 ③ 사미인곡
임금을 그리며 섬기는 마음을 담은 가사이다.

▲  송강의 시비 ④ 관동별곡

▲  송강의 시비 ⑤ 성산별곡(星山別曲)


* 백세청풍 바위글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52-111
* 정철 집터 표석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123



 

♠  인왕산 중턱에 깃든 상큼한 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중턱에 넓게 자리한 청운공원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
은 공원이다. <산 전체 또는 대부분이 공원으로 지정된 남산과 안산(鞍山), 낙산공원은 제외>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새로운 꿀단지를 북쪽에 달고 있는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으로 청운
동 주택가와도 약간 거리를 둔 자연 지대이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며, 자
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로 간판을 바꾸고 북악산(백악산) 뒷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
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려간다.

청운공원은 인왕산 품에 조성된 평범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
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
원 북쪽에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닦였으며, 2014년에 이 땅 최초의 한옥 공공
도서관인 청운문학도서관이 들어서 볼거리도 크게 늘었다.
또한 이곳은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며,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꽃이 울
창하여 봄꽃 명소, 늦가을 단풍 명소로 격하게 칭송을 받는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
로35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좀 각박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
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못미쳐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
과 수성동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르는 때라 나무들이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끼와 기력을 모두 발산한 나무
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
들. 인간은 그들을 통해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  고양이 같은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
만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
지, 너무 순둥이처럼 만들어서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우습게 봤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를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인왕산 돌아파트)'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
에서 주운 돌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청운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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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인왕산둘레길 나들이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서울 도심의 우백호, 인왕산 (탕춘대성, 기차바위, 석굴암)



' 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 '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인왕산 한양도성길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  인왕산 한양도성길

▲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은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이다. 하여 그의 품을
지겹도록 오갔지만(100번은 넘게 갔음) 아직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미답처(未踏處)들이
여럿 남아있어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 하여 그들을 미답 목록에서 흔쾌히 지우고자 겨
울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보이던 11월 끝 무렵에 그곳을 찾았다.

이번 인왕산 나들이는 세검정교차로에서 첫 발을 떼었다, 거기서 세검정로를 따라 남쪽
으로 조금 가면 홍지문(弘智門)이 나오는데, 그 남쪽에 탕춘대성과 인왕산 산길(인왕산
둘레길)이 있다. 그 길이 인왕산 북쪽 기점의 하나(홍지문 기점)이자 인왕산의 가장 북
쪽 끝으로 아직 미답의 상태로 남아있었다.

홍지문 기점으로 접근하려면 세검정교차로에서 세검정길 남쪽 보도로 가거나, 홍지문
·
옥천암 정류장(홍은동에서 세검정 방향)세검정 방향)에서 보도로 접근해야 된다.



 

♠  인왕산(仁王山) 북쪽 능선과 탕춘대성(蕩春臺城)

▲  탕춘대성과 인왕산둘레길 (홍지문 기점 남쪽)

홍지문 기점 코스는 탕춘대성과 인왕산 북쪽 능선을 거쳐 기차바위로 이어진다. 시작부터 사
람들의 기를 꽉 잡으려는 듯, 경사가 각박하여 숨을 적지 않게 헐떡이게 하는데, 처음 10~15
분 정도가 좀 고통스러울 뿐, 산길은 서서히 진정을 되찾는다. 게다가 산이 크게 흥분을 보이
는 구간은 나무데크 길과 계단을 닦아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다. (중간에 가
파른 구간이 여럿 있음)
홍지문에서 기차바위를 거쳐 한양도성이 흐르는 인왕산 주능선까지 35~45분 정도 걸리며, 정
상은 거기서 10~15분 정도 추가하면 된다.

산길을 따라 이어진 빛바랜 성곽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이어주던 탕춘대성이다. 연
산군(燕山君)이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지었다는 탕춘대(蕩春臺)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겹성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 임금이 만약에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
년에 신완(申琬)이 성곽 축성을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弘濟川)에
홍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
서 10월 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고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으려고 했
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하여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백
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취소되었다.


▲  산길과 잠시 분리되는 탕춘대성
성곽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수풀을 위해 동쪽으로 짧게 우회길을 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능
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탕춘대성 인왕산 구간은 홍지문에서 북쪽 능선 사이에 남아있는데, 홍지문 기점에서 5분 정도
올라간 정도까지만 여장이 복원되어 있고 그 이남은 성곽만 남아있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홍지문 및 탕춘대성'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되어 있음>

* 탕춘대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외


▲  키 작은 돌담처럼 남아있는 탕춘대성
인왕산 쪽 탕춘대성은 거의 키가 작다. 워낙 각박한 지형에 나무도 무성하여
높이 다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최대 높이는 2~3m 정도)

▲  소나무숲에 묻힌 탕춘대성 (오른쪽 돌무더기가 성곽)
이곳 이후로는 성곽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라 흔적을 더듬기도 힘들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① <내부순환로와 홍은동 지역>

왼쪽에 부드럽게 곡선을 보인 도로가 서울 도심 주변을 챗바퀴처럼 도는 내부순환로이다. 차
량들의 통행이 빈번하여 그들이 내는 굉음이 나의 두 귀를 마구 때려댄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한산 탕춘대성 남쪽 능선>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 산줄기와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평창동 지역>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평창동(平倉洞), 신영동(新營洞) 지역은
인왕산과 북한산, 북악산(백악산)에 포근히 감싸인 분지 지형으로
마치 산악 도시나 마을 같은 아늑한 분위기이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부암동과 북악산>
사진 가운데 산속에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백사골)이
묻혀있다. 그 너머로 성북동과 더불어 이 땅의 0.1%가 산다는 졸부 마을
평창동이 곱지 않게 바라보인다.

▲  벼랑을 오르는 계단길 (인왕산 북쪽 능선)

▲  인왕산 북쪽 능선 중간쯤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북쪽 능선은 탕춘대성에서 기차바위능선 북쪽까지로 그 중간쯤에 동쪽(기차바위 방향
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철조망이 쳐진 구간이 있다. 그 철조망 안쪽이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유명한 석파정(石坡亭)을 품고 있는 서울미술관 땅이다. (철조망만 있을 뿐, 문이나 개구멍은
보이지 않았음)


▲  인왕산 북쪽 능선 중간쯤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  솔내음이 깃든 인왕산 북쪽 능선길
인왕산은 바위도 많지만 소나무도 제법 우거져 있다.

▲  인왕산 북쪽 능선 남쪽에서 바라본 홍은동과 은평구 지역
서울과 은평구의 서쪽 벽이자 서울둘레길이 흐르는 앵봉산(235m)과
봉산(烽山, 209m)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 북쪽 갈림길
여기서 부암동(성덕사)과 홍제동 개미마을, 환희사(歡喜寺)에서 올라온 길이
하나가 되어 기차바위로 이어진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의 위엄
내가 천하를 스케치하는 조물주라면 그 밑에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졸부들의
흔적을 지우개로 지워 북한산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338m)



 

♠  인왕산 기차바위와 인왕산 주능선(한양도성)

▲  인왕산의 북쪽 하늘길, 기차바위 (기차바위능선)

인왕산 바위의 갑(甲)으로 찬양받는 기차바위는 기차처럼 길쭉한 바위 능선이다. 절대 기차처
럼 생기지는 않았으며, 그저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이런 구절이 있다. 그만큼 기
차는 이 땅에서 길쭉한 존재의 대명사이다.
기차바위 능선은 약 300m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닐면 실감이 덜하겠지만
세검정초교에서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로 올라가는 길이나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에서 바
라보면 정말 단단하고 두툼한 바위임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조망은 1등급이나 양
쪽이 자비심이 없는 낭떠러지이니 난간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①
바로 앞에 부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서울 도심부는 물론 멀리 동대문구와
중랑구, 광진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강동구, 송파 지역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와 두 눈이 호사를 누린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악산(백악산)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北玄武) 북악산과 부암동, 청운동 지역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③ 인왕산 그늘에 묻힌 부암동
부암동 일대가 인왕산 그늘에 푹 잠겨 있다. 그 너머로 북악산(백악산)과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④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
인왕산 북쪽 자락과 홍은동, 홍제동, 백련산, 은평구, 앵봉산~봉산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⑤
서울 도심과 서촌(웃대), 그리고 멀리 강동, 송파, 강남 지역까지;;

▲  인왕산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기차바위 능선

기차바위를 지나면 한양도성 전까지 내리막이 펼쳐진다. 성곽 앞에 이르면 잠시 오르막이 펼
쳐지면서 계단이 나타나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한양도성이 흐르는 인왕산 주능선에 발을 들
이게 된다. (기차바위 갈림길)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인왕산 정상이며, 동쪽은 창의문(彰義門, 자하문)과 북악산(백악산)으
로 이어진다. 그날은 정상에 대한 미련이 없었고 눈 감고도 갈 정도로 익숙해진 곳이라 바로
동쪽으로 내려갔다. 정상이란 자리가 탐이 나는 자리긴 해도 그렇다고 늘 좋은 것은 아니다.


▲  기차바위 갈림길 계단 밑에서 바라본 한양도성 (여름 사진)
성벽과 여장의 피부색이 너무 차이가 난다. 성벽은 조선 때 것으로 고색의 때가
자욱한 반면, 여장은 근래에 새로 붙인 것이라 피부가 매우 하얗다.


▲  인왕산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이미 인왕산의 어깨와 목 부분까지 올라탄 상태라 조망이 가히 천하일품이다.
마치 하늘을 배회하는 큰 새의 등에 강제로 업힌 기분이다.

▲  인왕산 한양도성 북쪽 성곽길 - 창의문 방향 ①
성곽길은 계단이 좀 팍팍하여 통행이 조금 고통스러우며, 그 옆에 급한 경사를
조금 순화시킨 계단길이 있어 그 길을 많이 이용한다.


인왕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서울의 든든한 갑옷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1388년 압록강을 건너 단동(丹東) 북쪽 위화도(威化島, 현재 압록강에 있는 그 위화도가 아님
)에서 그 유명한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 그는 1394년 남경(
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서울)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
北岳山,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
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으며, 평지는 토성
(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 다시 79,400명을 콩 볶듯이 동원, 49
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축조를 마무리 지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여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해 공사에 들어갔
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정도였다고 하니 그 3배의 인원이 동원된 것이며, 이는 조선
최대의 공사로 꼽힌다.
또한 공사를 너무 닥달하여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그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
한 도성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 도성을 관리하고자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
었으며, 워낙 성곽을 단단하게 다진 덕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성
곽 보수도 1704년 숙종이 벌인 1차례가 전부이다.


▲  인왕산 한양도성 북쪽 성곽길 <창의문 방향 ②>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
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구한말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양이(洋夷)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
었다. 콜브란은 고종(高宗)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
하라며 전차(電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
淸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
나갔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제왕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하지만 문제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이다.
을사늑약 이후 왜는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
는 해괴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
(昭義門)>과 서대문<돈의문(敦義門)>은 물론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어버리면서 망국
(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중수하기 시작해 광희문과 숙정문을 손
질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
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  한양도성 여장 너머로 보이는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부암동, 평창동 지역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갈렸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
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도성을 어떤 코스로 쌓을지 고심을 했다. 그러던 어느 밤, 난데없이 큰 눈
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었다
.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 쌓인 자리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
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
이라 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허나 신라의 중심지인 서라벌에서 서울이란 말이 유래된 것으로 크게 보고 있다.


▲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비춘 서울 도심 (인왕산 한양도성 성곽길)



 

♠  인왕산 동쪽 자락에 숨겨진 작은 석굴 암자, 흔한 이름에 비해
존재감이 매우 낮은 석굴암(石窟庵)

▲  만수천약수터

기차바위 갈림길에서 성곽길을 5분 정도 내려가면 신교동(新橋洞)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슬쩍
손을 내민다. 석굴암을 가려면 여기서 성곽과 헤어져야 되기에 그를 버리고 신교동 방향으로
가다가 중간에 석굴암 입구로 이어지는 길로 빠져 2~3분 내려가니 만수천약수터가 마중을 나
온다.

만수천은 인왕산 동부의 대표적인 약수터이나 가뭄으로 물이 마르면서 부적합 주홍글씨를 받
은 상태였다. 이곳이 아무리 도심 지척이라고 해도 비가 적당히 내려주고 약수터 주변을 잘
관리하면 충분히 적합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비가 가뭄에 콩 나듯이 거의 내리지를
않으니 물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영 좋지 않은 존재들이 샘물에 활개를 치는 것이
다.
약수터 주변에는 쉼터와 간단히 몸을 풀 수 있는 운동기구들이 있으며, 커다란 바위도 여럿
포진해 있어 인왕산이 바위의 산임을 실감케 한다. 그중 북쪽에 있는 바위에는 작은 자연산
굴이 있는데,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씌웠지만 예전에는 기도나 굿을 벌이는 장소로
널리 쓰였다. 인왕산에 잘생긴 바위가 많고 기가 센 산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자 굿터로 유명했다.

▲  만수천약수터 쉼터

▲  겨울잠에 잠긴 석굴암1약수터

만수천약수터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오른쪽 길로 질러가면 석굴암약수터가 나온다. (왼쪽은 석
굴암입구 초소로 이어짐) 이 샘터는 물낭비를 줄이고자 수도꼭지를 달아 놓았는데, 이곳 역시
바가지들이 무색할 정도로 부적합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석굴암 부근에도 약수터가 있어 이
를 구분하고자 편의상 석굴암1약수터라 부르기도 한다.


▲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나무데크 계단길

석굴암1약수터에서 석굴암까지는 나무데크 계단길이 닦여져 있다. 마치 하늘로 이어진 것일까
? 계단이 얼마나 길던지 거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경사 또한 각박하여 오르는 길이
조금은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계단을 닦아놓아 길이 좀 순해진 것으로 예전에는 경사지고
울퉁불퉁한 산길에 의지해 힘겹게 올라가야 했다.
저 계단의 끝에는 하늘 대신 석굴암이 자리해 있으며, 길 중간에 조망이 괜찮은 장소(바위)가
하나 있다.


▲  서울에 석양이 진다. 석굴암 밑 바위에서 바라본 도심
이곳은 인왕산에 숨겨진 조망 포인트이다.

▲  석굴암 석굴법당

석굴암은 인왕산 정상 치마바위 동쪽 밑에 둥지를 튼 작은 석굴 암자이다. 장대하게 생긴 바
위가 석굴암의 거의 모든 것으로 그의 밑도리에는 조그만 자연산 석굴이 깃들여져 있다. 호랑
이가 담배에 호기심을 품던 머나먼 시절부터 산악신앙과 무속이 벌여지던 현장이었으며, 20세
기 중반 이후, 수성동계곡 인근에 자리한 불국사(佛國寺)에서 이곳을 접수해 굴 내부를 손질
하고 부속암자인 석굴암으로 삼았다. 암자 이름은 바로 이 석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어째 경
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관계를 따라한 느낌마저 든다.

석굴을 법당(法堂)으로 삼아 돌로 만든 석가3존상과 여러 보살상을 두었으며, 문을 남쪽과 동
쪽에 내었다. 석굴 서남쪽에는 산신각 공간이 있으며 숙식을 할 수 있는 건물이 따로 없어 불
국사에서 승려와 보살 아줌마들이 왕래하면서 이곳을 관리한다. 보통 일몰 때 불국사로 돌아
가며, 가끔 기도를 위해 절을 지키기도 한다. 허나 내가 갔을 때(17시 이후)는 경내에 아무도
없는 빈 암자 상태였다. (그래도 소중한 불전함을 지키고자 cctv를 달아놓음;;)

비록 조그만 암자이지만 여기서 동쪽과 동남쪽으로 도심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좋으며
, 그 도심을 이곳의 너른 뜨락으로 삼고 있다. 절 주위로 치마바위와 매바위, 닭바위 등 대자
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들이 많아 풍경 또한 일품이며, 석굴암 주변은
2007년 12월에 지정된 '인왕산 생태경관보전지역'의 하나로 자연경관이 아주 수려하고 소나무
와 상수리나무, 아까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또한 박새, 어치, 유리딱새, 소쩍새, 암먹부전나비, 작은주홍부전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
등 다양한 새와 곤충이 서식하고 있는 도심 속의 소중한 자연의 보고이다.


▲  석굴암 석굴법당 내부 (석가3존상)

자연산 굴을 손질한 석굴 내부는 굴의 타고난 본능상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좀
면할 정도이다. 사람은 없지만 방석과 난방기구, 선풍기 등을 갖추고 있으며, 석굴 허공에는
중생의 소망을 머금은 분홍 연등이 가득 매달려 또 다른 낮은 하늘을 이루고 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석굴암과 인왕산 치마바위

▲  산신각(山神閣)의 예전 모습
인왕산 산신의 보금자리로 어엿한 기와집이 아닌 바위 앞에
터를 다지고 가건물을 씌웠다.

▲  산신각 마애산신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산신각에는 산신(山神) 가족을 담은 마애산신도가 깃들여져 있다. 신선
처럼 생긴 산신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고양이 같은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거리고 있으며,
산신의 비서인 동자와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있다.
산신의 위엄과 진지함보다는 동네에 친근한 노인네를 다룬 것 같은 느낌으로 바위에 산신도
를 새긴 예는 서울은 물론 천하에서도 매우 흔치가 않다. 아쉽게도 20세기 후반에 제작되어
문화재적 가치는 아직 여물지 못했지만 최소 60~70년 이상 숙성되면 거뜬히 지방문화재의 자
리 하나는 따지 않을까 싶다.


▲  석굴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바위 윗쪽 네모난 구멍>

경내의 서남쪽 바위를 숨은 그림을 찾듯 눈으로 잘 더듬어보자. 그러면 바위 윗쪽에 있는 네
모난 구멍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구멍이 18~20세기에 서울 지역 사찰에서 많이 등장했던
마애사리탑으로 바위 피부에 홈을 파고 그 안에 승려나 신도의 사리함을 봉안한 간편한 사리
탑이다. 이 탑은 돈을 크게 들여 탑을 지을 필요도 없으며, 그저 바위만 있으면 된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사리탑은 불암산 학도암(鶴到庵, ☞ 관련글 보기)에 있는 것으로
19세기 초에 조성된 2기가 있으며,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 관련글 보기)에도 19세기 사리
탑 2기가 전한다. 그리고 상도동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기)과 석굴암에도 20세기 것이
있는데, 석굴암 것은 20세기 초/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는 달랑 구멍(감실)만 남아있다.

석굴암에서 치마바위와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었다. 허나 그 길은 금지된 길이
되었으며, 절 북쪽과 서쪽은 바위와 벼랑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내가 올라온 동쪽 길과 근래
속세에 개방된 남쪽 길이 전부이다.
지금은 비록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인왕산은 한때 서울에서 잘나갔던 암장(암벽장)이었다. 서
울 유일의 암장이란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는데, 석굴암에서 시작하여 치마바위 정상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코스로 1968년 1,21사태 이후 인왕산 등산이 통제되었지만 암장은 군부
대에 허가를 받으면 누구든 가능했다. 허나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불암산이 인기 암장으
로 부상했고 실내 암장까지 많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거의 잊혀졌다.


▲  천향암(天香庵) 돌문

숨겨진 볼거리가 더 없을까 싶어 경내를 더 기웃거리니 북쪽으로 가늘게 이어진 산길이 보인
다. 마치 보물을 찾으러가듯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득 품으며 그 길로 접어드니 바로 벼랑 길
(밑이 벼랑임)이 나오고 커다란 바위들이 기묘하게 서로 기대선 틈에 자연산 돌문이 나 있다.
서쪽은 그야말로 장대한 바위이고 오른쪽은 그 바위에 몸을 기댄 돌덩어리이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바위에 둘러싸인 샘터와 기도처가 나온다. 이곳을 '천향암'이라 부르는데,
이름으로 봐서는 암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가건물 같은 것으로 대충 때우다가 사라진 듯 싶으
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며 석굴암과 비슷하게 오랫동안 무속/산악신앙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
이다. 지금은 석굴암의 부속 공간으로 딱히 주제는 없으나 샘터가 있는 것으로 봐서 용왕(龍
王)을 위한 공간으로 쓰이는 듯 싶다.
조그만 샘터에는 물이 고여 있으나 원효대사가 마셨다는 해골에 고인 물처럼 상태가 그리 좋
아 보이진 않는다.


▲  암벽에 감싸인 천향암 샘터

벼랑 길은 천향암에서 뚝 끊겼다. 얼핏 보니 북쪽으로 넘어가는 암릉길이 있는 듯 싶은데, 딱
히 안내문도 없고 햇님도 슬슬 커텐을 칠 준비를 하니 감히 살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북쪽
과 서쪽, 남쪽은 암벽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동쪽만 트여있는 궁벽한 곳으로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도 석굴암 못지 않다.


▲  하늘이 지은 기묘한 돌문

서울 한복판에 이런 자연산 돌문이 있다니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인왕산을 수없이 들락거린
내가 이제서야 이곳을 오다니 그동안 인왕산을 정말 헛 다닌 모양이다. 이런 것을 두고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하는 모양이다.


▲  천향암에서 바라본 일몰녘에 서울 도심

▲  석굴암과 인왕산을 뒤로 하며 (석굴암 계단길)

천향암에서는 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된다. 바람소리와 낙엽 소리가 전부인 적막한 석굴암과
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계단길을 내려왔다. 석굴암입구에
이르니 햇님은 퇴근 본능에 따라 철수를 했고, 달님이 자리를 이어받아 검은 도화지에 가녀린
한줄기 빛을 선사한다.

이렇게 하여 연말 인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그날 목적했던 인왕산의 미답처를
모두 지우긴 했으나 그 기억 또한 흐릿한 과거의 하나로 싹 사라지니 모든 것이 참 부질없는
것 같다.

* 인왕산 석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산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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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晩秋)


 

늦가을이 그 절정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
한 자락길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길
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해 그리 힘들이지 않
고 이동할 수 있으며, 인왕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여럿 손짓해 언제든 정상 쪽으
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
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
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누릴 수 있다. 다만 오르락내리락 굴곡이 조금 있어
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완주가 가능하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인왕산자락길 (수성동 이남 구간, 택견수련터)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시원한 계곡 바람을 맞은 인왕산자락길은 다시 남쪽으로 각박한 오르막
길을 오른다. (북쪽 방향도 마찬가지임)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그렇다고 오르막길의 야성을
완전히 잠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거친 것을 조금 순하게 다듬었을 뿐이다.

그 길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인왕산길이고, 왼쪽 내리막길
이 인왕산자락길이다. 그러니 자락길을 놓치기 싫다면 무조건 왼쪽으로 붙자. 그 길을 내려가
면 서촌의 일원인 누상동(樓上洞) 주택가와 불과 몇 보 차이로 가까워지며 길은 다시 온순해
진다. 이후 이름 모를 계곡과 체육시설을 지나면 길은 다시 오르막을 보이나 그리 각박하지는
않으며, 그 길을 오르면 배드민턴장과 인왕산길이 모습을 비춘다.


▲  다시 오르막은 시작되고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방향)

▲  택견수련터로 인도하는 북쪽 계단길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남쪽에는 화장실을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있다. 청운공원 이후 가깝게 거
리를 두며 떨어져 있던 인왕산길과 인왕산자락길은 여기서 잠시 만났다가 이내 헤어진다.
쉼터 남쪽 언덕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길이 자락길로 그 계단을 오르면 자락길의 남쪽 종점
인 택견수련터가 마중을 한다.


▲  택견수련터 주변 체육시설
저 산길의 끝에 택견수련터가 깃들여져 있다.

▲  인왕산 택견수련터

황학정 뒷쪽 산자락에 자리한 택견수련터는 이름 그대로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옛날 사람들이 택견을 닦던 곳으로 알았으나 한때 끊어질 위기에 놓였던 우리 고유의
전통 무술인 택견을 지키고 널리 알렸던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 송덕기(宋德基, 1893~1987)가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송덕기는 조선의 마지막 한량이자 택견꾼으로 유명하다. 그는 1893년 1월 19일, 이곳과 가까
운 필운동(弼雲洞)에서 하급 관리인 송태희(宋泰熙)의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김씨는 잡화가게를 꾸리고 있어서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당시 필운동과 사직골, 누상동, 누하동 등 서촌(웃대) 지역은 택견의 성지로 택견을 갈고 닦
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장안 제일의 택견꾼으로 '인왕산 호랑이'라 불리던 임호(林
虎)도 있었다. 그는 지금의 배화여고 앞에 살고 있었으며, 송덕기는 12살부터 또래 동네 아이
들과 그에게 택견을 배웠다.

송덕기는 선천적으로 힘이 장사이고 운동과 무예에 소질이 상당했다. (나와 완전 반대임) 하
여 16살에 마을 택견꾼과 더불어 사직골 대표로 출전하여 유각골, 옥동, 애오개의 택견꾼과
싸워 이겼으며, 이때부터 '결련택견판(택견의 시합을 지칭하는 말)'에서 그 이름을 날리기 시
작했다. 그는 비록 체격은 작았지만 동작이 매우 날쌔어 적을 정확히 타격했으며, 특히 뛰어
오르며 쓰는 발차기는 매우 일품이라 당할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17세에 장가를 들었고, 곧 군대에 입대했으나 1주에 2~3번 정도만 출근하면 되었으므로 나머
지 시간에는 택견을 수련하여 종종 결련택견판에 나가 몸을 풀었다. 그리고 이때 이 땅에 막
소개된 축구에도 구미가 당겨 축구를 익혔다.

1910년 8월 이후, 왜정(倭政)은 우리의 상무정신이 깃든 결련택견과 온갖 택견 수련을 금지시
켜 그 맥을 끊으려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서도 계속 택견을 그만두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택견
수련도 눈치를 보고 해야될 지경이었다. 당시 그의 부모는 그가 자칫 싸움꾼이 될까봐 걱정되
어 택견 수련에 무조건 정색을 표했다고 전한다.
상황이 그러하니 택견 수련 딱 10년이 되는 22살에 잠시 택견을 접어두고 대신 활쏘기로 관심
을 돌려 황학정에서 국궁(國弓)을 닦았다. 그는 궁술(弓術)에도 꽤 소질을 보여 명궁으로 명
성을 날렸는데, 죽기 전까지 활쏘기를 즐겨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을 오래 쏜 사람이자 최초의
국궁심판으로 '한국인물도감(1982년)'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근대식 체조를 가르쳤고, '조선불교 축구단'에 선수로 스카웃되어
월급 80원을 받으며 축구 선수로 3년 동안 뛰기도 했다. 이때 매년 열리던 평양축구단과의 경
기에 참가해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축구를 그만둔 이후 30대 말까지 딱히 두드러지는 행적은 없으며, 40세 때 조선극장(인사동에
있었음)을 운영하던 매부를 도와 극장을 지키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극장 주변에서 설치던
건달들을 죄다 때려잡았고, 당시 주먹패 대장으로 유명했던 김두한(金斗漢)과도 맞짱을 뜬 적
이 있다고 한다.
이후 금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소득은 없었으며, 1951년 1.4후퇴 때 경남 밀양(密陽)으
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58년경. 경무대(청와대)의 이승구 경관이 찾아와 대통령에게 택견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
을 했다. 당시 택견은 일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맞서서 상대를 때려잡는 실전무
예라 혼자 시범을 보이기가 마땅치 않아 옛날 스승(임호) 밑에서 같이 배웠던 김성한(金成漢)
을 급히 불러 1달 정도 가르친 다음 그해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신 축하 경찰무도대회'
가 열렸던 소공동(小公洞) 유도회관에서 택견을 선보였다.
당시 권력층과 무도인들은 왜열도식 무술에 익숙해 있던 상태라 택견을 보더니 별로라며 고개
를 돌렸다. 하지만 택견에 관심이 있던 이승만은 우리 무술을 발전시켜야 된다며 당시 경무대
경호원을 가르치던 박철희에게 그를 소개해 택견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박철희는 육군사관학교 초대 태권도 교관을 지낸 사람으로 그를 자주 초청해 경호원들에게 택
견을 가르치도록 도움을 주었다.


▲  택견수련터 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에 선보
일 한국 문화로 택견을 선택했다. 그래서 제자 박철희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에서 택견 동작
을 사진 촬영했다. (당시 경복궁은 통제구역이었음)

박철희는 경무대 무도사범을 그만두고 '사단법인 택견무도원'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송덕기도
그를 전폭적으로 도왔으나 법인 설립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당시 영향력이 컸던 '수박도협회'
의 방해로 어려움에 빠졌다. 게다가 4.19와 5.16으로 나라가 계속 혼란 속에 잠겼고 법인 설
립도 계속 뜻대로 되지 않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박철희의 조교
이자 같은 사직골 토박이인 김병수가 송덕기의 1등 제자가 되었다.

김병수는 당수도의 고수로 경무대 부사범을 지냈으며, 외국어대학교에 '택견권법부'를 만들었
고, 1963년에는 효자동 오리온다방 3층에 택견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또한 영어에도 능통하여
1964년 '블랙벨트(Black Belt)'와 '가라데 일러스트레이트(Karate Illustrate)'라는 미국의
유명한 무술 잡지에 택견에 대한 기사를 기고한 적이 있다.
허나 그는 해외 진출에 더 무게를 두고 있어서 1968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고, 미국 휴
스턴에 정착해 '김수가라데'란 타이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자연무술류'라는 새로운 체계
의 과학적 무술을 창안해 동양무도인의 대표로 위엄을 날렸다.

1972년 '태권도 가을호'에 송덕기가 '살아있는 태권도인'으로 소개되면서 당시 태권도의 1인
자였던 임창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찾아가 배움을 받았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고 실생활에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금방 사람들이 나갔다.

그는 슬하에 자녀도 없고, 마땅한 제자도 없어서 이것저것 소일거리로 간신히 척박한 삶을 꾸
려나갔으나 1979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신한승이 택견을 바로 일으켜보고자 송덕기를 찾아와 택견을 배웠다. 그는 택
견이 살려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길 밖에는 없다고 여겨 문화재관리국을 수시로
찾아가 택견을 홍보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철밥통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냉대만 일삼
으며 보다 체계적인 자료를 가져오라고 소위 '갑'질을 벌였다. 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들
의 요구 양식에 맞추고 택견을 약간 변형시켜가며 해당 자료를 제출했다.
그렇게 하여 간신히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6호'의 지위를 얻으면서 택견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허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송덕기는 신한승의 그런 행동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서
로 갈라진 것이다.

송덕기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1982년부터 젊은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3년 그 역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를 기리고자 '택견계승회(현재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를 만들었다. 1984년 집 근처에 '박민태권도 도장'을 빌려 제자를
가르쳤고, 제자 중 부유했던 '최유근'의 지원으로 1986년 신촌에 '택견보존회'란 이름으로 본
격적인 택견전수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송덕기는 너무 기뻐서 매일 나와 제자를 가르쳤는데, 택견이란 존재를 매우 생소해하는 현대
인들의 무관심과 체육관을 운영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제자들의 운영 미숙으로 결국 1년도 안되
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제자들도 거의 군대에 들어가면서 죄다 흩어졌고, 1987년
에는 활까지 놓으면서 노인정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우연히 걸린 감기가 커지면서 그해 7월 22
일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9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1981년에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도예술제'에서 '무도대상(武道大賞)'을 타기도 했으며,
택견을 보존하고 전수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택견의 태반은 이미 사라졌
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택견수련터는 그가 택견을 닦았던 현장으로 그의 후학들(결련택견협
회)이 표석과 안내문을 세워 택견의 성지로 기리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체육시설이 닦
여져 있어 동네 사람들과 산꾼들이 몸을 풀고 간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몸을 푸는 수련터
의 역할은 거의 녹슬지 않은 것이다.


▲  수련터 옆 감투바위 암릉
주름진 바위가 황학정 옆구리까지 느긋하게 내리막을 이루며 펼쳐져 있고,
늦가을이 질러놓은 불(단풍)이 활활 타올라 바위 주변을 화사하게 돋군다.


수련터 옆에는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길게 누워있다. 이들 바위는 저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조촐하게 암릉을 이루며 황학정 동쪽까지 완만하게 내려간다. 그 암릉에 송덕기와 인연이
있는 감투바위가 숨겨져 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그 암릉에 두 발을 딛으면 바로 밑에 황학정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 서부와 남산이 훤히 시야
에 잡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인왕산자락길 개설로 수련터를 찾은 사람들은 늘었으나 정
작 바위의 존재감이 없어 지나치기 일쑤이다. 안내문이 없다보니 수련터 바로 옆에서 바위가
예사롭지 않은 눈짓을 보내고 있음에도 다들 지나치는 것이다.
하여 감투바위 암릉은 인적이 거의 없어 무척이나 한적해 천하 최대의 대도시인 서울 도심을
멍을 때리고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다.


▲  감투바위

사람들이 매우 좋아한다는 감투, 그 감투를 닮은 바위가 암릉 한복판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 속세에 알려지지 않은 인왕산의 비장의 바위로 송덕기가 택견 수련을 하거나 황학정에서 활
쏘기로 몸을 풀고 이곳에 걸터앉아 나라와 택견의 미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송덕기의 택견 수
련을 묵묵히 지켜봤을 그는 황학정과 사직단, 서울 도심을 늘 지켜보고 있다.


▲  감투바위의 뒷모습

바위 뒷통수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긁고 간 흔적들이 역력하다. 지금은 저런 모습이나 여
러 세대가 흘러간 이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대자연 형님의 성형(成形)
속도가 매우 느려서 그렇지 성형 실력만큼은 대자연을 따를 존재가 없다.

택견수련터 서쪽에는 인왕산길과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내려가면 윤동주문
학관부터 3.2km를 함께 한 인왕산자락길은 그 끝을 맺고 인왕산길에 합쳐진다. 소요시간은 사
진을 찍고 쉬는 시간을 합쳐서 넉넉잡아 1시간 반 정도. 경사가 좀 각박한 구간이 여럿 있지
만, 그것은 산이니까 어쩔 수 없다. 산은 산다워야 오르는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도로만 따라가는 인왕산길과 달리 상당수가 흙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득이한 구간은 나무데
크를 닦아 놓았다. 자락길을 둘러싼 숲은 무성하며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조그만 계곡들(청풍
계, 옥류동, 수성동 등)을 대부분 거쳐가면서 인왕산에도 계곡들이 꽤 숨바꼭질을 하고 있음
을 귀뜀해준다. 그 계곡들은 시내에 진입하면서 모두 강제 생매장을 당했으며, 2012년에 복원
된 수성동만 제대로 어깨를 피고 있다. (수성동 역시 조금 흐르다가 생매장 당함)
이처럼 인왕산자락길은 인왕산의 숨겨진 속살과 명소를 아낌없이 드러낸 도심 속의 보석이자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사각지대로 이번에 이렇게 인연을 지어 사각지대를 하나 지웠다.

* 인왕산자락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  옛 경희궁의 흔적이자 전통 국궁(國弓)의 성지, 황학정(黃鶴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호

▲  등과정(登科亭) 바위글씨

택견수련터에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사직단 방향)으로 내려가면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입구
(후문)가 나온다. 바로 그곳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위가 누워있는데 길 쪽에서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가면 그냥 의미없는 바위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황학정 쪽에서
보면 180도 달리 보일 것이다. 그는 옛 기록에나 남아있던 등과정의 아련한 흔적으로 황학정
방향 바위면에 '등과정' 바위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등과정은 서울 장안의 이름난 활터인 서촌5사정의 하나로 그 오사정이란 등과정과 옥동(玉洞)
등용정. 삼청동 운용정(雲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그리고 누상동 풍소정(風嘯亭)을 일
컫는다. 이중 삼청동(三淸洞)은 북촌의 일원인데, 어찌 서촌5사정에 꼽혔는지 모르겠다.
조선 때는 활쏘기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이 익혀야 될 교양의 일원으로 인식되어 오사정에는
늘 그들로 붐볐다. 무관 같은 경우는 직업상 여기서 활쏘기 연습으로 몸을 풀었고, 다른 이들
은 교양 및 수련의 일원으로 몸을 풀었던 것이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군대 무기에서 활이 제외하면서 이들 오사정은 싹 철
거되었고, 등과정만 유일하게 고종 때 새겨진 바위글씨를 흔적으로 남겨 그의 옛 자리를 귀뜀
해준다. 게다가 경희궁의 활터였던 황학정이 왜정 때 이곳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등과정을
계승하였다.


▲  황학정8경(八景) 바위글씨

황학정 후문(등과정 바위글씨)에서 황학정으로 내려가 그 뒷쪽 바위를 잘살펴보면 황학정8경
을 담은 바위글씨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위에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글씨들이 담겨져 있는데, 이들은 1928년 9월 금암 손완근(
錦巖 孫完根)이 쓴 것으로 황학정8경이란 제목을 내세웠지만 정작 황학정은 1개도 없고 모두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주변의 풍경을 다루고 있어 제목과 내용이 완전 따로 논다.
여기서 읊은 8경은 다음과 같으며, 이중 금천교와 경복궁 담장 옆 수양버들을 제외하고는 그
런데로 살아있다.

백악청운(白岳晴雲) - 구름이 맑게 갠 북악산(백악산)
자각추월(紫閣秋月) - 자하문(창의문) 문루 위에 가을 달
모암석조(帽巖夕照) - 인왕산 모자바위에 비치는 석양 빛
방산조휘(榜山朝暉) - 인왕산 바위 위의 아침 햇살
사단노송(社壇老松) - 사직단을 둘러싼 노송
어구수양(御溝垂楊) - 경복궁 담장 옆 배수로 둑의 수양버들
금교수성(禁橋水聲) - 금천교 밑을 흐르는 물소리
운대풍광(雲臺楓光) - 필운대의 단풍 광경


▲  사방이 뻥 뚫린 황학정
황학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밑에 부연을 두어 처마와
추녀의 곡선이 무척 시원스럽다. 정면 중앙에 걸린 황학정 현판은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이 쓴 것이다.


사직단 북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황학정은 이 땅에 몇 남지 않은 전통 활터이
다.
조선 말까지 서울 장안에는 서촌오사정 등 활쏘기를 닦던 사정(射亭)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대 무기에서 화살이 제외되자 서울과 전국의 많은 사정이 문을 닫았고
황학정 자리에 있던 등과정도 그 거친 흐름을 헤어나지 못해 바위글씨만 남긴 채 휩쓸려 사라
졌다.

활쏘기를 좋아했던 고종 황제는 백성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궁술(弓術)을 장려하기로 했다. 하
여 1898년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황학정을 지어 활터로 삼고 백성에게 개방하여 언제
든 활을 쏘도록 했다.
고종은 자주 황학정을 찾아 활쏘기를 했는데, 그가 사용했던 활 호미(虎尾)와 화살을 보관하
는 전통(箋筒)이 황학정에 전해 내려오다가 1993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천하에 어둠이 내리던 1910년 이후, 왜정은 망국의 황궁(皇宮)인 경희궁을 철저히 산산조각을
냈다. 1918년부터 궁궐을 밀어버리면서 주요 건물을 민간에 팔아먹었고, 1922년 황학정 자리
에 고의로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황학정까지 밀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국궁을 하
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왜정과 협상을 벌여 돈을 건네주고 그 건물을 현 자리로 가져왔다.
앞서 소개했던 택견꾼 송덕기 역시 황학정을 해체 이전했을 때 직접 참여하여 손수 건물을 해
체하고 건물 부재(部材)를 가져와 다시 재조립했다. 또한 황학정 지킴이가 되어 이곳에서 행
패를 부리거나 예의 없이 구는 사람을 혼내주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사직골 호랑이'라고 불
렀다.

1945년 이후 황학정은 전국 활터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나 6.25 때 건물이 파괴되면서 활
쏘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이후 황학정을 중수하고 한천각(閑天閣)과 국궁전시관 등 여
러 부속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전통 활터가 많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활터 기능을 수행하여 우리나라 전통 궁술의 성지
로 여전히 추앙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궁술 대회(매년 12월에 전국궁술경연대회를 개최함)와 관련 행사, 활쏘기 체험이
열리고 있으며, 평일은 물론 휴일에도 활 쏘는 이들을 자주 구경할 수 있다. 천하 제일의 신
궁(神弓)으로 추앙받는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조선 이성계(李成桂)를 꿈꾸는 궁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모습도 볼만하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궁술 체험 이벤트도 열고 있다. 아직 활
을 만져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생기면 명중률을 떠나서 쏴보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 같다.

* 황학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 (사직로9길 15-32 ☎ 02-732-1582)


▲  황학정 내부
천정에는 황학정의 내력 등이 적힌 현판 2개가 걸려 있고, 평방(平枋)에는 태극기와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이 나란히 자리한다. 황룡포를 입은 그의 어진이
여기에 걸린 이유는 황학정을 세운 그를 기리고자 함이다.

▲  이승만 전대통령이 쓴 황학정 현판의 위엄

▲  화살을 쏘는 동명성왕, 이성계의 후예들

마침 황학정 회원 4명이 활쏘기를 겨루고 있었다. 여기서 과녁까지는 약 130~150m. 평소에는
매우 가깝게 여겼던 그 거리가 여기서 보니 참 까마득하게 보인다. 남산(南山)보다 더 멀리
느껴질 정도. 보는 사람도 그러한데 활을 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들은 주황색 천을 허리에 묶었는데 이는 황학정 국궁 회원임을 뜻하는 모양이다. 정자 이름
이 누런색, 주황색 학을 뜻하기 때문이다. 과녁까지 거리도 멀고 눈도 침침하여 명중을 했는
지. 외곽에 맞췄는지. 아니면 과녁 밖으로 빗나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날라간 화살은 전
동식 미니 케이블카에 실려 황학정으로 옮겨진다.

▲  황학정으로 인도하는 길 (국궁전시관 옆)

▲  황학정 표석 (황학정 정문)


 

♠  단군성전과 행촌동 은행나무

▲  단군성전(檀君聖殿)

황학정에서 다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으로 가면 길 동쪽에 단군성전이 마중을 한다. 단군(檀
君)은 옛 조선을 세운 천하의 시조(始祖)로 그의 단군설화는 3살짜리도 모두 알 만큼 유명하
다. 허접스럽기 그지 없는 양이(洋夷)들의 그리스, 로마 설화를 능가하는 알찬 설화로 삼국유
사(三國遺事)에 그 설화가 실려 있으니 내용을 새삼스레 풀어보면 대략 이렇다.

옛날 천하를 다스리던 최고의 신,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부자가 있었다. 환웅이 하늘 아래
로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었는데,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지구를 살펴보니 삼위태
백산(三危太白山) 지역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하다 여겨져 천부인(天符印) 3개와 3,000명
의 무리를 주어 지구로 내려보냈다.
환웅은 태백산 마루 신단수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했으며, 바람과 구름, 비를 관
장하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등 신하를 거느리고 곡식과 인명(人命), 질병, 형벌, 선악(
善惡) 등 사람들의 360여 가지 일을 직접 다스렸다. 이때 굴 속에 함께 살던 호랑이와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청하니, 환웅은 쑥 1자루와 마늘 20개를 주며 이를 먹으면서 100
일 동안 햇빛을 안보면 사람이 되리라 했다.
그들은 굴에 들어가 수행을 했으나 호랑이는 이를 견디지 못해 뛰쳐나갔고, 곰은 21일을 버티
면서 여자 사람이 되니 이가 곧 웅녀(熊女)이다.

웅녀는 매일 신단수 밑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니 환웅이 잠시 남자로 변해 웅녀
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옛 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단군은 장성하여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여 옛 조선을 세우니 그때가 기원전 2,333년이
다. 우리 땅은 바로 그때를 단기(檀紀) 1년으로 삼아 지금에 이르니 무려 4,350여 년의 역사
를 지니고 있으며 단군은 무려 1,908년을 살았다고 전한다.

▲  단군성전 정문(외삼문)

▲  단군성전 뜨락 은행나무


▲  푸근한 인상의 단군왕검상 (오른쪽에 단군 영정)

※ 단군이 세운 옛 조선(고조선)
오로지 상상으로 제작된 단군상, 그리고 그의 영정,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
적이다. 단군은 옛 조선(고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하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강제로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
를 비롯하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
만주, 요서, 연해주, 산동반도를 포함한 화북(華北) 지역을 다스린 천하 대국이었다. (중원대
륙 상당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서안 등 산서성에는 옛 조선이 세운 거대한
무덤 유적이 많이 있다고 함)

조선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해 기원전 2333년 건국설도 솔직히 무리가 있다. 산
소도 아까운 식민사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
반도 북부와 요동, 남만주로 크게 축소시켰다.
옛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에 다시금 영향
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
)를 비롯한 2,000리 이상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
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쫓아내
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했다
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닐까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제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
해 사방으로 크게 영토를 넓히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리하고 그 자신감으로 섭하(涉河)를 사신으로 보내 조선을
협박했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조선의 마지막 제왕인 우거왕(右渠王)으로 한나라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
부하며 비왕(裨王, 제후왕)을 시켜 사신을 전송케 했다. 허나 섭하는 그 호의에 배은망덕하게
도 마부로 가장한 무사를 시켜 비왕을 죽이고 도망쳤다. 이에 한무제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옛
조선과 가까운 요동(지금의 요동이 아님)으로 보내 요동도위(都尉)로 삼았다.

비왕이 암살된 것에 적지 않게 뚜껑이 열린 조선은 섭하가 요동도위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
자 바로 한나라를 공격해 그 요동을 점령하고 섭하를 쳐죽었다. 그렇게 조선이 먼저 공격을
하자 한무제는 그것을 구실로 조선을 공격했다. 아마도 섭하를 떡밥으로 보내 조선을 건드리
려는 수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조선의 반격과 한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패했다. 하여 뚜껑이 단
단히 폭발한 한무제가 다시 군사를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나라군은 정비를 가다듬고 공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우거왕이 반
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하여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
선 사람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 등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여전히 말들이 많으나,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
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지역으로 보고 있다. 한사군의 하나로
유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는 낙랑군 외에 비슷한 이름에 낙랑국도 있었다고 하는데, 낙랑국
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이다.
만약 낙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
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
명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族)
으로 대표되는 조선(또는 은나라)에서 만들어 전파했다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륙에서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주변에서 일어난 홍산문명(紅山文明) 또한 조선의 찬란했던 흔
적으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
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그리고 비파형동검도 조선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 단군성전(백악전)의 역사
단군성전은 1968년 이숙봉(李淑峰) 여사의 3자매(이정봉, 이숙봉, 이희수)가 세웠다. 이후 사
단법인 현정회(顯正會)로 이관되었으며, 1973년 서울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에는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의 지원으로 성전을 개축했다.

전체 대지면적 약 800㎡, 성전 52.92㎡, 태극정문(太極旌門), 관리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건
물 색깔이 죄다 베이지색을 띄고 있는데, 이는 박정희 시절 그가 좋아하는 색으로 칠했기 때
문이다. 이곳 뿐 아니라 많은 사당과 문화유산이 그 시절 베이지색으로 색 변경을 당했다. 성
전 현판은 김응현, 홍익인간 글씨는 원중식, 내외삼문 간판은 이현종이 썼다.
또한 옛 조선이 열렸던 유서깊은 10월 3일 개천절<어천절(御天節)이라고도 함>에는 이곳에서
개천절대제전(開天節大祭典)이 성황리에 열린다. 전통제례와 전통공연, 온갖 체험행사(제례복
체험, 국궁체험 등) 등이 열리며, 일반인도 참여 가능하다.

* 단군성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28 (인왕산로 22, 현정회 ☎ 02-736-6375)


▲  단군성전 앞에 펼쳐진 늦가을 동화

단군성전 남문은 바로 사직공원(사직단)과 이어진다. 허나 평소에는 늘 닫혀있고 사직공원에
서 그곳을 이어주는 길 또한 봉쇄되어 있어 별 수 없이 인왕산길로 우회해 외삼문(外三門)으
로 들어서야 된다. 그 덕분에 사직공원~단군성전 지름길에 인적이 거의 끊기면서 사람의 발자
국 대신 노란 은행잎이 가득 쌓여 늦가을 정취를 아주 진국으로 끌어올린다.
벌써부터 겨울 제국의 보이지 않는 압박이 시작되면서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들은 나뭇잎을 하
나, 둘 땅바닥으로 털어낸다. 우리는 그 잎을 낙엽이라고 부른다. 늦가을에 어울리면서도 한
편으로는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그 이름 말이다. 은행잎이 금지된 길과 그 주변에 수북히 쌓여
이 일대는 그야말로 노란 세상을 이룬다. 마치 황금색 비단이 쫙 깔린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야 귀를 접고 누운 그들을 보면서 늦가을 분위기를 즐기지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
래하며 서서히 끝을 준비한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은행잎, 인간이 지은 건물이나 인생은 모
두 부질 없는 모양이다. 시작이야 어쨌든 그 종점은 다 같지 않던가.


▲  한양도성 밖 인왕산로1길 (인왕산, 무악동 방향)

▲  인왕산입구 한양도성 탐방로 (인왕산 방향)

단군성전 앞 교차로에서 서쪽 인왕산로1길로 들어섰다. 길 왼쪽(남쪽)은 사직동 주택가와 종
로문화체육센터가 있고, 오른쪽은 인왕산의 싱그러운 숲으로 그 산줄기는 경희궁(慶熙宮)까지
미치지만 숲은 여기서 뚝 끊기고 만다. 그러니 인왕산로1길이 속세와 자연의 팽팽한 경계선인
셈이다.
그 길을 4분 정도 가면 고색이 짙은 한양도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크게 5거리를 이루
는데, 성 밖 북쪽 길(인왕산로1길)은 무악동과 인왕산 쪽으로, 서쪽(사직로1가길)은 독립문
방면, 남쪽(송월1길)은 홍파동, 경희궁 쪽으로 이어지며, 5거리 동쪽(성곽 안쪽) 인왕산입구
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성곽길을 타면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송월1길과 한양도성 (홍파동, 경희궁 방향)

▲  사직동 한양도성 (5거리 서남쪽)
인왕산에서 내려온 한양도성은 여기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만다.
(사직동~월암근린공원 구간 성곽은 아직 복원되지 못함)

▲  은행잎의 마지막 삶터이자 정모 현장, 한양도성 여장
나무에게 버림받은 은행잎들이 딱딱한 여장 위에 모여 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여장 뿐 아니라 그 주변은 온통 황금색 은행잎의 세상이다.

▲  여장 위에 내려앉은 은행잎들

▲  행촌동(杏村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0호

사직터널 윗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의 끝을 잡은 행촌동은 조금은 빛바랜 산동네이다. 그렇
다고 옛날 달동네처럼 주황색 기와를 지닌 허름한 집들이 즐비한 그런 곳은 아니다. 온갖 빌
라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울의 흔한 동네로 그 주택가 속에 행촌동 은행나무와 권율장
군의 집터, 그리고 딜쿠샤란 명소가 숨겨져 있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약 420살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랜 터줏
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
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주택에 밀려 많이 좁아졌고,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있으나 건강은 아직 양호하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權慄)장군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
은 오래 전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들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
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
이 심은 것이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 성균관(문묘) 은
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격하게 내세우고 싶다.

▲  남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북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은행나무 그늘에 자리한 권율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
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
려주었는데 그 집이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럼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과 모악(). 시호는 충장()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시절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는 승문원정자()와 전적()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
랑(禮曹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고자 했는데, 권율은 주변
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하고 오로지 머릿수에 의지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렀으나 대부분이 칼과 창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오합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겨우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지
(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
감하고 신중하게 처신해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
순)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
진하게 된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
사(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 좀처럼 성 밖으로 나오질 않아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
수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
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
을 본 단순한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
로 그때를 이용해 유격전을 펼치며 타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바
로 서울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도망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죽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세마대 전투)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
幸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
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
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은 것이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리고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에서 왜군에게 깨진 명나라군을 도
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권율의 활약에 적지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우키타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서울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 외에 군사들을 도우러 성
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해 여러 번
위기가 있었으나 군사들은 일당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
으며,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의 새 무기도 크게 활약을 했다. 또한 밥할머
니의 행주치마 부대는 치마로 돌을 나르고 군사들의 밥을 나르는 등, 서로가 단결하니 왜군은
결국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사한 군사들의 시신을 모아 불태우고 줄행랑을 쳤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
도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
에 임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을 공격
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순천
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있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비리비리한 명나라군의 비협조
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그해 7월 인생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
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관들 때
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밥버러지 명나라군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그 외에는 모
두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이 전하고 있으며,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끄러우니 숙면이나 제대로 취하고 있
을지 모르겠다.

행촌동 은행나무를 끝으로 늦가을 한복판에 달달하게 벌였던 인왕산과 황학정, 행촌동 나들이
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딜쿠샤는 시간 관계로 사진에 담지 않고 통과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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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1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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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

▲  인왕산 (가운데 봉우리가 정상)


 

♠  인왕산(仁王山) 입문

▲  인왕산 만수천약수터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내 즐
겨찾기 뫼의 하나인 인왕산을 찾았다.
인왕산은 10대 시절 선바위 답사를 시작으로 50번 넘게 인연을 지었는데, 낮 뿐만 아니라 야
간(19시 이후)에도 적지 않게 올라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특히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서울 도심 야경(夜景)은 아주 일품으로 꼽힌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인왕산길로 들어서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방면으로 가다보면
인왕천약수터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짓을 한다. 이 코스는 인왕산에서 가장 잘나가는 약수
로 추앙을 받던 인왕천약수터를 거쳐 인왕산 능선(한양도성)으로 이어지는데 길이 좀 각박하
다. 하여 그 코스는 쿨하게 통과하고 다음에 나오는 석굴암입구(수성동계곡 상류)에서 인왕산
의 깊은 품으로 들어섰다.

석굴암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조촐한 모습의 정자가 나오면서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이름도 꽤 낯이 익은 석굴암(石窟庵)이란 석굴 암자가 나온다. 허나 그곳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사실상 막혀있어 정자 옆 북쪽 산길로 올라가야 된다. (석굴암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길
이 있긴 하나 통행 금지임)
석굴암입구 정자에서 북쪽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160m 고지에 자리한 만수천약수터가 마중
을 한다. 인왕산에 무수히 널린 약수터의 하나로 부적합 빨간줄과 양호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어 앞날이 좀 어려워 보인다. 물론 샘터 주변을 계속 관리해주고 비도 적당량 내려주면 청
색 신호가 뜨는 것은 시간문제이나 날씨 변덕도 심하고 서울 도심이 바로 코앞이라 인왕산 지
하수에도 비상이 걸렸다.

약수터 주변은 나무가 삼삼하여 하늘이란 단어를 거의 잊게 할 정도로 덩치가 큰 바위들이 주
변에 여럿 포진해 있어 약수터의 잔잔한 장식물이 되어주고 있으며, 간단한 체육시설과 의자
등이 놓여져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어가도록 배려했다.


▲  만수천약수터 주변 풍경

큰 바위 밑에는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다.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씌웠지만 예전에
는 기도나 굿 장소로 쓰였다. 인왕산이 잘생긴 바위가 많고 기가 센 산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
배 맛을 알던 시절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자 굿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굴 앞을
지나니 동굴이 내뱉은 약간 시원한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  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과 경복궁, 종로)

만수천약수터에서 갑자기 흥분한 산길을 7~8분 정도 오르면 능선(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
이른다. 이제부터는 숲속에 가려진 산길이 아닌 천하를 굽어보며 걷는 능선길이 시작되는 것
이다. 그 길을 10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이 흐르는 성곽길(인왕산 주능선)과 만나게 된다.

성곽길과 만나는 갈림길에서 오른쪽(동쪽)으로 내려가면 창의문과 부암동(付岩洞)으로 이어지
며, 왼쪽(서쪽)은 인왕산 정상이다. 우리야 정상이 목적이니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성곽길은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경사가 슬금슬금 각박해져 호흡마저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
길을 10여 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성밖 계단을 내려가면 기차바위 능선이며, 성
곽길을 고수하면 정상이다. 이미 인왕산의 어깨까지 올라탄 상태라 서울 시내가 고루고루 내
려다보여 마치 하늘을 배회하는 큰 새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올라간다.


▲  인왕산의 허리를 따라 흘러가는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  인왕산 북쪽 능선 성곽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콧대가 높은 천하 굴지의 대도시 서울이 내 발 밑에 펼쳐져 있다. 마치 이 도시가
나의 세상이 된 듯 거만한 착각이 피어올라 잠시나마 기분이 즐거워진다.
허나 현실은 마음 편히 드러누울 땅도 제대로 없다는 것.

▲  정상 북쪽 성곽길 - 저 바위 꼭대기가 인왕산 정상이다.

기차바위로 인도하는 갈림길에서 성곽길은 잠시 진정을 되찾으나 정상을 코 앞에 두고 다시금
격한 흥분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묵묵히 길을 임하면 좀처럼 닿
지 않을 것 같던 인왕산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어둠의 역사를 안고 있는 인왕산 치마바위

인왕산 정상 동쪽에 붙어있는 커다란 바위는 인왕산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치마바위이다. 병
풍처럼 넓어서 병풍바위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바위에는 중종과 단경왕후 신씨의 슬픈 사연
이 깃들여져 있다. 그 사연은 서울 장안에서 꽤 알려진 이야기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첫 부인은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의 딸인 단경왕후(端敬
王后) 신씨(1487~1557)이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 홍경주(洪景舟) 등이 반란을 일으켜 연산군(燕山君
)을 폐위시키고 그의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을 익선관(翼善冠)을 씌운 채로 급히 왕위에 올리
니 그가 곧 중종이다. <이 사건을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름>
단경왕후의 아비인 신수근은 반란파에 협조하지 않아 그 형제가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그들
에 의해 얼떨결에 왕이 된 중종은 부인을 지키고자 재빨리 왕후로 봉했으나 반란파들은 역적
의 딸을 그냥 둘 수 없다며 당장 내쫓을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왕후나 그 소
생 왕자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종은 그들을 달래고자 반정 때 몰수한 연산군 측근과 반란 비협조 인물들의 재산을 나눠주
고 기녀(妓女) 300여 명을 주며 회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유자광(柳子光)은 중종의
생모이자 대비(大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를 찾아가
'중전 신씨를 쫓아내지 않으면 임금을 내쫓겠습니다!!'

협박을 하기도 했다. 이미 반란으로 왕을 한번 갈아치웠으니 그들에게는 그런 것은 일도 아니
었다.
상황이 점점 고통스럽게 변해가자 신씨는 울면서
'소첩이 전하(殿下)를 위해 나가겠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전하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으로 인
왕산 바위에 치마를 걸어두겠사오니. 상황이 좋아지면 꼭 찾아오세요 ㅠㅠ'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경복궁을 나가 옛날에 살았던 인왕산 동쪽 본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는 매일마다 인왕산에 올라 중종과 같이 살던 시절, 자주 입었던 붉은 치마를 바위에 널었다.
그 소식을 들은 중종은 수시로 경회루(慶會樓)에 올라 치마바위를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생각
에 눈시울을 붉혔다.
반란파들은 그 꼴이 보기 싫어 서둘러 새 왕비를 맞을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장경왕후(章敬
王后) 윤씨가 새 왕비로 들어오게 된다. 또한 10여 명의 후궁까지 맞아들이면서 신씨에 대한
추억과 그녀의 존재감은 완전히 흐릿해진다.

신씨는 왕이 사직단(社稷壇)에 사직대제(社稷大祭)를 지내러 올 때를 기다려 말죽을 쑤어 사
직단 정문에서 기다렸다. 그래서 왕의 말에게 직접 먹이는 등 남편에 대한 애정을 표했지만
결국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1557년 70세의 나이로 소생도 없이 한 많은 삶을 마감
하고 만다. (중종은 1544년 56세의 나이로 승하함)
신씨가 죽자 세상에서는 치마를 널었던 병풍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으며, 소년왕 단종(端宗)
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더불어 왕실 여인들의 '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 토
막으로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치마바위 밑에는 20세기에 조성된 미륵마애불이 숨겨져 있으며, 바위 피부에는 옥의 티로 황
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와 왜왕 만세 등의 바위글씨가 요란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들 글씨
는 1939년 가을 '대일본청년단대회'가 열린 것을 기념하고자 왜정과 친일 패거리들이 지원하
여 새겨진 것으로 서울 장안 어디에서든 다 보이는 바위라 하여 이곳에 새겼다고 한다. 글씨
는 해방 이후에 죄다 쪼아 지웠으나 그 흔적은 조금씩 남아 어둠의 시절의 쓰라린 한 단면을
보여준다.


 

♠  인왕산 정상부

▲  정상 동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북쪽 자락과 북악산(백악산)
왼쪽에 보이는 바위 능선이 기차바위이다.

▲  인왕산 정상 남쪽
인왕산 정상은 오로지 남쪽으로만 진입이 가능하다. 서쪽은 성곽 바깥이고
동쪽과 북쪽은 꽤 각박한 낭떠러지기 때문이다.


인왕산은 해발 338m(또는 340m)의 바위 봉우리로 북악산(342m)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을 안쪽으로 둘러싼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개를 경계로 북악산(백악산)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통해 북한산(삼각산)과 이
어진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이란 명칭이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
제왕이 정전(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
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
롯되었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 웃대)과 사직동,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
워있으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꽤 가파르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가 작아
서 금방이면 올라갈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착시현상을 노린 인왕산의 속임수이다. 그의 품에
들어가보면 보기와 달리 넓고 장대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사직공원(사직단)과 독립문역에서 인왕산 정상까지 40~50분 정도 걸리며, 정상을 찍고 홍제동
환희사(歡喜寺)나 개미마을, 홍지문,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 보통 2시간 내외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돌산으로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와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
한 경관을 돕고 있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해 우백호
에 걸맞는 위엄을 드러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
)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해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담아
인왕산을 극찬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약수터가 제법 많아 곳곳에서 나그네의 목을 축여준
다. 하지만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급하여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
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사라져 수성동(水聲洞)계곡과 큰절골(환희사계곡)만 그나마 좀 남
아있고 청풍계(淸風溪)와 청계동천(淸溪洞天), 백운동천(白雲洞天) 등은 일부만 살아있다.


▲  인왕산 정상 바위
저 바위가 인왕산의 실질적인 정상으로 높이는 1.5m 정도 된다. 바위의 남쪽과
북쪽 피부에는 움푹 패여 하얗게 서린 곳이 많은데, 이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오가면서 생긴 상처이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이 폐쇄
되면서 선바위와 환희사 주변, 인왕산길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겨우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
다가 김영삼 정권 때 다시 속세에 개방되었다. 허나 서울 도심을 지키는 요충지라 군부대 시
설이 성곽 능선과 산자락 곳곳에 남아있어 금지된 땅이 다소 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또한 매주 월요일은 인왕산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인왕산 주능선)은 입산이 통제되며, 월요
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다음 날 통제된다. 다만 성곽 능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제한이 없
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國師堂), 치마바위,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
던 수성동계곡, 벽화로 유명해진 홍제동(弘濟洞) 개미마을,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
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
속(巫俗), 불교가 어우러진 이색 현장으로 서울 지역 무속신앙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
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
과 남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정도전(鄭道傳)은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꺾이고 만다.
이에 발끈한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
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터져 백성이 어
육이 될 것이다'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정확히는 6대) 만에 세조(世祖)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
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사대부의 억불숭유 정
책을 신랄하게 까고자 불교 쪽에서 그럴싸하게 지은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  성곽과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있는 정상 북쪽 성곽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
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인조는 서인 패거리를 이끌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로 줄
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치고자 인왕산 서쪽 안산
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말하며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다. 그리고 군사<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
들을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하니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
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다. 그 시절 백성들은 하얀 옷을 많이 입었는데, 산을 가득 메운 그
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하여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걸어잠구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다. 허나 부하에게 살해되어 결국
목없는 귀신이 되었고,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
後金)으로 도망가 청태종(淸太宗)에게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
(丁卯胡亂)이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
에 수시로 나타나 난리를 치기 일쑤였고, 심지어 종묘(宗廟)까지 침입했다. 백성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
왔으니 인왕산은 그야말로 조선 호랑이의 성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고양이만 종종 보일 뿐이다.
또한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
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
과 같은 재미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
현(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고 우는데,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린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가 지례 겁을 먹으

'엥 수진궁 귀신..? 이건 말도 안돼'
꼬리를 접고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과 인왕산 북쪽 능선

인왕산 정상에 올라서면 서울 도심과 서촌(웃대)를 비롯하여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 여의
도, 영등포구, 강서 지역, 동작구, 강남 지역, 동대문구, 성북구, 광진구, 강동 지역, 국립현
충원, 관악산, 삼성산, 호암산, 우면산, 아차산 등 많은 존재들이 고루고루 시야에 들어온다.
높이는 338m(340m)에 불과하나 조망만큼은 한라산과 백두산이 부럽지 않다.
또한 사방이 모두 트여있어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진국이며, 남산(南山)과 함께 서울 도심의
새해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다. 또한 도심이 바로 밑이라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야경 맛이 아
주 좋다. (서울 도심 야경은 인왕산을 제일로 쳐줌)

* 인왕산 정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부암동, 서대문구 홍제동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서울의 장대함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와 남산(가운데 솟은 산)
저 멀리 관악산과 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남한산까지 싹 시야에 잡힌다.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안산과 서대문구, 마포구, 여의도,
영등포, 강서 지역


 

♠  인왕산 기차바위

▲  기차바위 능선

인왕산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기차바위 갈림길로 다시 내려와 성곽길을 버리고 기차바위로
방향을 잡았다. 철계단을 타고 성 밖으로 내려가 북쪽으로 가면 인왕산의 으뜸 바위로 추앙을
받는 기차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  인왕산의 북쪽 하늘길, 기차바위 능선 (북쪽 방향)

인왕산 바위의 갑(甲)으로 칭송을 받는 기차바위는 기차처럼 길쭉한 바위 능선이다. 그렇다고
기차처럼 생기지는 않았으며, 그저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이런 구절이 있다.
그만큼 기차는 길쭉한 존재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기차바위 능선은 약 300m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닐면 실감이 덜하겠지만
세검정초교에서 북악산 백사실(백사골)로 올라가는 길이나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에서 바라
보면 꽤 두툼한 바위 능선임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조망은 1급이나 단 양쪽이 일
체의 자비도 없는 낭떠러지이니 난간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차바위 능선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시내

가까이로 북악산(백악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울 도심부부터 멀리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산줄기, 강동구 지역, 남양주와 하남, 성남 지역 산줄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와 눈 속에
서 아주 살살 녹는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남쪽 산줄기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로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부암
동과 신영동, 평창동(平倉洞),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 남쪽 산줄기가 장쾌하게 시야에 들
어온다. 이렇게 보니 서울의 한복판이 아닌 산악 지방의 소도시를 보는 기분인데, 뫼를 오르
는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조망 맛을 보기 위함이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왼쪽)과 안산(鞍山)

▲  기차바위에서 홍제동,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기차바위 능선을 지나 북쪽 갈림길에서 홍제동으로 인도하는 서쪽 길로 내려갔다. 중간에 다
시 왼쪽으로 빠져 환희사 방면으로 내려가다가 옥동약수터를 만났는데, 물이 실타래보다 적게
나오고 수질 또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은 상태라 손을 대지 않았다. 마침 약수터에 있던 노
인이
'약수터 주변 정비를 안해서 그렇지, 마셔도 괜찮다. 난 이 물을 20년 동안 마셨다'
며 괜찮다고 그런다. 허나 부적합이란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려 끝내 마시지는 않았다.

노인의 말로는 이곳을 관리하는 동네 노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다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거나 생명이 다해 거의 해체되어 관리하는 이들이 없다고 한다. 왕년에는 인왕산의 제일 가는
약수임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많이 초췌해졌다면서 서대문구청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었지만
철밥통에 걸맞게 앵무새처럼 알겠다고만 할 뿐, 약수터 관리에 그리 신경을 안쓴다고 한다.


▲  옥동약수터 주변 동굴

옥동약수터에서 잠시 두 발을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가다보니 또 다른 약수터를 만났
는데, 그 약수터는 아예 물이 말라버렸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들이 있고 그들
뒤로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는데, 그곳도 기도와 무속 행위로 말썽이 많자 아예 철조망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굴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산산이 불어와 몸을 꼬질꼬질하게 뒤덮던 땀방울을
제대로 단죄한다.

동굴을 뒤로하고 5분 남짓 내려가니 인왕산 서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비구니 산사, 환희사(歡
喜寺)가 모습을 비춘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 2개를 간직한 20세기 현대사찰로 오랜만에
발을 들일까 했으나 이미 18시가 넘어서 쿨하게 통과했다. 환희사는 18시 정도가 되면 대문을
걸어잠군다.
속세애서 절까지는 차량이 마음껏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있는데, 그 길을 5분 정도 내
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홍제원현대아파트와 인왕산현대아파트가 나온다. 이제
완전히 속세로 내려온 것이다. 두 아파트 사이를 가르는 통일로34길을 내려가니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義州路)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인왕산 나들이는 다음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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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9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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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에서 무지개를 보다 ~~ (숙정문에서 청운대, 백악마루, 부암동 창의문까지)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나들이 '

▲  북악산에 뜬 무지개

▲  숙정문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가을이 막바지 절정을 누리던 11월 중순 주말에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찾았다.

둥근 햇님이 하늘 높이 떠 있던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서울시내
버스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城北洞) 서울다원학교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성북동 종점에서 천하 여러 나라의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성북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성북로31가길)로 들어서니 숲과 계곡, 주택이 뒤섞인 전원
(田園) 풍경이 펼쳐진다. 길 왼쪽(남쪽)에는 진하게 우거진 숲과 함께 북악산이 베푼 계곡
이 졸졸졸~~♬ 흘러가며, 그 계곡은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북악산의 청정한 기운을 가득
머금으며 속세로 흘러간다.
그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함께 약간의 오르막 길이 펼쳐지
는데, 그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삼청동, 도심을 이어
주는 터널로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2차선 덩치를 고수하고 있어 주말과 휴일에는 버벅
거리는 차량의 행렬을 심심치 않게 본다.
(삼청터널은 차량 전용 터널이라 뚜벅이는 통행 금지임)

삼청터널로 향하는 길(대사관로)을 건너면 홍련사로 가는 길과 북악산으로 가는 길이 나란
히 나타난다. 허나 길이 서로 붙어있어 초행자는 자칫 햇갈리기 쉬운데, 오른쪽 평탄한 길
이 홍련사(紅蓮寺) 길이며, 왼쪽 계단길이 북악산과 김신조루트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햇
갈리지 않도록 한다.
홍련사로 가는 길은 오로지 홍련사만 이어줄 뿐이며, 절 입구에 정열적으로 타오른 단풍나
무가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저 길로 들어서면 나도 저들처럼 붉게
물드는 것은 아닐까..?


▲  늦가을이 화사하게 질러놓은 붉은 단풍이 펼쳐진 홍련사 입구(오른쪽)와
북악산, 숙정문 입구(왼쪽)


 

♠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입문

▲  북악산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직전)

북악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오르면 2007년에 북악산 개방 기념으로 조림(造林)한 것을 기
리고자 세운 표석이 있고, 그 표석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로 이어지며, 직진을 하면 바로 숙정문안내소
가 나온다.


▲  숙정문안내소

숙정문안내소는 말바위안내소, 창의문안내소와 함께 북악산 주능선(한양도성길)으로 인도하는
관문이다. 예전에는 신분증을 무조건 지참하여 출입신청서를 작성해야 했으나 2019년 4월 5일
부터 그런 것이 폐지되어 다소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허나 북악산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다보니 개방 시간에는 여전히 제한을 두어 여름(5~8월)
에는 7~19시(출입은 17시까지), 봄과 가을은 7~18시(출입은 16시까지), 겨울은 9~17시(출입은
15시까지)이다. 또한 쉬는 날도 사라져 요일 가리지 않고 접근이 가능하다.

숙정문안내소를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길이 숙정문까지 이어진다. 시작부터 힘든 길이
니 북악산이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하는데, 그 각박함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나무데크 계단길을 닦아놓았다.


▲  숙정문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이후, 초겨울)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白岳山)> -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아난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다. 이들을 내사
산(內四山)이라 부르는데, 그들 중 북악산이 맏형이며, 낙산은 막내 동생이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의 능선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구축했다. 그리고 풍수지리
에 따라 북악산을 북현무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이렇게 도성을 만들고 한강 남쪽에 있는 관악산(冠岳山, 629m)을 신하의 산이란 뜻의 조산(朝
山)으로 삼았는데, 그가 주산인 북악산보다 훨씬 높고 산세가 우람해 거의 신하가 왕을 누르
고 있는 형세였다. 게다가 관악산과 그 서쪽에 있는 호암산(虎巖山)이 각각 활활 타오르는 불
의 모습과 호랑이의 모습으로 나란히 서울을 응시하고 있어 조선 위정자들은 비보풍수(裨補風
水)의 일환으로 서울 북쪽에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가져와 서울을 지키는 듬직한 진산(鎭山)
으로 삼아 관악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했다. 북한산이 관악산보다 키도 높고 산세 또한 장대하
기 때문이다.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산으로 종로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보이는데, 오랫동안 서울을 상징
하는 산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닦고, 그 북쪽(지금의 청와
대)에는 넓게 후원을 두었다. 지금은 청와대(靑瓦臺)와 국무총리공간이 둥지를 틀어 이 땅의
정치, 행정 1번지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漢陽都城)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북
문인 숙정문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자하문)이 고색의 모습
으로 고개 중턱을 지킨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예민한 곳으로 성곽을 낀 주능선과 정상 주변은 사람들
의 발길을 통제했는데, 그래도 해방 이후에는 주능선과 북쪽 능선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으나 1968년 1.21 사건 이후 북악산 대부분이 닫힌 땅이 되고 말았다.

주능선과 조금 떨어진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
성했다.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堂)계곡 등의 계
곡이 흘렀으며, 풍경이 아름다워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
고 삼청공원과 숙정문 주변은 사대부(士大夫) 여인들의 봄꽃놀이 장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대
은암계곡 바위글씨를 비롯해 당시의 여러 문화유적이 아련히 남아있으며, 북악산 북쪽 백사골
(백사실)에는 백석동천이란 별서(別墅)유적이 전하고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무성하다보니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
다. 그들은 궁궐 후원과 북촌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가 호랑이
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북악산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
進宮)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하여 인왕산,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당임)

1968년 이후 속세에 개방을 꺼렸던 북악산은 2006년 4월 1일 홍련사에서 숙정문을 거쳐 촛대
바위까지 부분 개방되었으며, 그것도 인터넷 예약을 통해 1일 4회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후
전면 개방을 위해 쉼터와 의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어 2007년 4월 5일에 말바위에서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전 구간이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09년 북쪽 능선인 북악하늘길(김신
조루트)이 활짝 열려 시민의 품으로 들어왔는데, 이 길은 약간의 통제구역이 있긴 하지만 제
약이 심한 주능선과 달리 언제든 자유롭게 안길 수 있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조금 남아있다. 그 외에는
간간히 소나무가 목격된다. 또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있다보니 나무와 식물들이 마음 놓
고 뿌리를 내려 숲이 원시림마냥 울창하다. 게다가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
고 있으며, 수목이 무성하여 새들이 많이 산다.
그러다보니 서울 도심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허파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인왕산
과 북한산, 관악산과 더불어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
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서울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다보니 개발의 칼질 또한 그 눈치로 마음껏 칼질을 할 수는 없다.


▲  북악산 김신조루트 남마루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가운데 산줄기)과
서울 도심

※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한양도성길
2006년 4월부터 순차적으로 개방된 주능선은 창의문에서 정상을 거쳐 말바위로 이어지는 4.3
km 구간으로 숙정문 안내소와 말바위 안내소, 창의문 안내소를 통해 입장할 수 있다. (그 외
에는 출입금지) 또한 탐방구간(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을 절대로 벗어나면 안되며 도처에
군인이 지키고 서 있으니 엉뚱한 마음을 품으면 곤란하다. (말바위안내소~말바위~삼청공원/와
룡공원 구간은 완전 개방된 구간이라 시간 제한 없음)

주능선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숙정문과 1.21사태소나무,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촛대바
위, 청운대 등이며, 군사시설이 옥의 티처럼 널려 있어 북악산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실감케
한다. 만약 서울이 수도가 아니었다면 북악산은 꽤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것이다.
북악산 정상과 청운대에서는 서울 도심이 두 눈 아래로 펼쳐져 조망(眺望)이 일품이며, 숙정
문과 말바위에서는 성북동과 성북구 지역이 보이고, 한양도성을 따라 평창동(平倉洞)과 부암
동, 인왕산, 북한산이 차례대로 보여 그야말로 움직이는 조망대이다.

* 북악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삼청동 / 성북구 성북동
* 말바위안내소 (☎ 02-765-0297~8, 팩스 02-765-0296)
*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 팩스 02-747-2153)
* 창의문안내소 (☎ 02-730-9924~5, 팩스 02-730-9926)


 

♠  숙정문에서 청운대까지

▲  약간 측면에서 올려다본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 앞은 바로 각박한 산비탈이라 평평한 공간이 적어 성문을
지키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숙정문안내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숙정문이 모습을 비춘다. 이 문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으로 남대문<숭례문(崇禮門)>,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돈의문(敦義門)>과 함께
한양 4대문의 하나였다. 북대문(北大門), 북문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도성의 대문이라기 보다는 산성(山城)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진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가운데 1자만 다른 숙청문(
肅淸門)이었다. 1396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에 풍수학자인 최양선(崔
揚善)이 태종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地脈)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이들 문을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래
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거 외에도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이는 예
민한 위치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설령 이 성문을 나와도 이어지는 곳은 숲이 무성한 북악산 북쪽 산줄기와 북한산, 성북동가
고작이었다. <성북동은 동소문(東小門)을 통해 갈 수 있음>
그리고 평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다가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
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에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서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의 존
재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음양의 원리를 따지는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훨씬 컸던 것이다.

1504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이름이 갈렸
는지는 북악산 산신(山神)도 모르는 실정이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했다. 숙정문 외
에도 북정문(北靖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언제부턴가 숙정문으
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 일대가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문루는 비록 새 건물이지만 성벽을 이
루는 성돌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해 중후한 멋을 보인다.
2006년부터 다시 속세에 공개되어 제한적이긴 하지만 성문 관람이 가능해졌다. 허나 문 좌우
성곽길과 숙정문안내소 방면만 통행이 가능하며, 남쪽에는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으
나 금줄이 쳐져 있어 절대로 갈 수 없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성북동 일대가 바라보이며, 대자연이 그린 가을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를 놓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자아낸다. 높은 곳에 자리한 것
은 분명하지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고, 북쪽도 겨우 성북동과 삼청각
, 북악산 북쪽 능선이 전부라 조망은 생각보다 별로다.
매년 봄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  숙정문의 수수한 뒷모습

▲  숙정문 서쪽 협문(夾門)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눈이 시리게 맑은 가을 하늘 아래로 북악산과 북한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성북동이 바라보인다. (왼쪽에 보이는 큰 기와집이 삼청각)

▲  숙정문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가운데 기와집이 삼청각)

▲  북악산에서 만난 일곱 색깔 무지개의 위엄
비가 잠깐 오더니 이내 일곱 색깔 무지개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무지개를
본 것이 정말 몇 년 만인지 옛 친구를 만난 듯 무척 반갑고 신기했다.

▲  힘차게 뻗은 숙정문 서쪽 성벽
서울 수비를 향한 굳건한 마음이 뭉쳐 단단한 성벽이 되었다. 성곽을 따라
북악산으로 오르면 시야에 범위도 점차 넓어진다.

▲  촛대바위

숙정문 서쪽에는 촛대바위가 있다.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듯 싶은데
현실은 바위의 북쪽과 동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곳에서 보면 촛대처럼 보이지도 않아
그저 그런 바위로만 보이는데, 그를 제대로 보려면 바로 정면인 남쪽에서 봐야 되지만 남쪽은
금지된 구역이라 발을 못들이게 한다. 또한 바위 정상도 금지된 곳이니 괜히 바위 위에 올라
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우리가 촛대바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왜정(倭政)이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무식하게 쇠말뚝
을 박았던 추악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에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는데,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의
정수리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 땅의 머리 부분을 아작을 내어 이 땅을 영원히 통치하고 싶
은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으나 말뚝의 휴유증 때문일까? 이 땅은
아직도 혼돈 속에 잠겨있다. 친일매국노와 그런 것을 추종하는 잡것들이 권력과 부를 챙기고
이 땅을 이간질시켜 나라의 기본부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촛대바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까? 그때가 되면 주름진 나라 사정도 좀 펴지겠지.
(왜정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측량용이란 말도 있음)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나무 난간 너머와 바위는 감히 발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촛대바위에서 청운대로 오르는 성곽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 소나무의 푸른 물결..

▲  북악산 주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양도성
(곡장 조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도성 너머로 구름에 감싸인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인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성곽길 경사가 점점 각박해지면서 암문(暗門)이 하나 나온다. 여기서 암문
밖으로 나가서 잠시 성곽 바깥 길을 이용해야 되는데, 이는 성곽에 군사시설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길을 낸 것이다.
길 옆에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북한산, 평창동 등이 바라보여 마치 휴전선 너머
의 금지된 땅을 보는 듯 하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거
기서 다시 성곽길이 이어진다.


▲  청운대(靑雲臺) 표석 (해발 293m)

촛대바위에서 성 바깥, 안쪽을 들락거리며 2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에서 2번째로 높
은 곳인 청운대가 마중을 한다.
청운대는 푸른 구름의 지대란 뜻으로 근래에 붙여진 이름인 듯 싶다. 이곳은 공간이 넓고 의
자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으며 북쪽으로 성북동과 북한산, 남쪽으로 남산과 서울 도심이
바라보여 조망 또한 괜찮다. (도심 쪽이 괜찮음)


▲  소나무가 짧게 그늘을 드리운 청운대

▲  청운대에서 바라본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 도심과
서울의 영원한 남현무, 남산(목멱산)

▲  청운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

▲  청운대 주변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신영동, 부암동, 북한산

▲  여장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청운대를 지나면 안내문이 하나 나오는데, 그 안내문에 따라 여장을 살펴보면 글씨들이 희미
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들은 도성을 축조하면서 새긴 공사 구역 표시와 공사 담당 고
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으로 이런 것이 새겨진 성돌이 한양도성에 여럿
있다.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성곽 전 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하고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하여 지(地),
현(玄)...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
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으며, 이곳
성돌에는 의령시면(宜寧始面)이라 쓰여 있어 의령(경남) 시작 지점을 뜻한다.


▲  남북분단의 쓰라진 비극 - 1,21사태 소나무

성돌글씨 부근에는 1.21사태 소나무라 불리는 소나무가 있다. 북악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
건이 바로 1968년 김신조 공비 패거리의 서울 침공 사건인 이른바 1.21사태로 그들과 총격전
을 나눈 현장의 하나이다. 북악산에는 그와 관련된 쓰라린 장소가 많은데, 이 소나무와 호경
암이란 바위에는 총탄의 흔적이 있으며, 호경암이 있는 북쪽 능선에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길인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가 있다.
1.21사태 소나무에서 우리 군과 공비 패거리간의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그때 이 나무에 총탄
15발이 무심하게 박혔다. 이후 그 자리에 흉물스럽게 동그란 표시를 하여 남북분단의 잔인한
현실과 함께 이곳을 지키는 군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삼고 있다.

때는 1968년, 북한은 김신조 일당 31명을 보내 청와대를 공격케 했다.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파주와 양주의 여러 산과 북한산 서쪽 자락, 창의문을 거쳐 1월 21일 서울 도심까지 용케 들
어온 김신조 패거리는 청와대를 코앞에 둔 청운동(淸雲洞)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이 이끄는 경찰에게 저지를 당했다.
경찰이 검문을 한다며 그들의 길을 막자 공비들은 크게 발작하여 외투 속에 감춘 기관단총을
꺼내 먼저 공격을 가했다. 불행히도 최서장은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입어 쓰러졌고
'끝까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마지막 명령을 내리며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은 더욱 반격의 속도를 올려 공비들 상당수를 벌집
으로 만들었다. 이때 김신조를 비롯한 살아남은 공비들은 목을 붙잡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줄행랑을 쳤는데, 그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소나무 부근에서 격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북악산 북쪽 능선인 호경암에서 격전이 있었고, 1월 21일 이후 14일의 토벌 끝에 김신조
와 도주 1명을 제외한 29명을 사살했다. 도주 1명은 북한까지 도망을 친 것으로 전해지며, 처
단된 공비의 시신은 파주시 적성면 적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김신조는 투항해 이 땅 어
딘가에 살고 있다.

김신조 일당의 난입 사건을 1.21사태라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단단히 뚜껑이 폭발한 박정
희 대통령은 바로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군작전도로인 북악스카이웨이를 콩볶
듯 급히 만들게 했다. 이 예비군 창설로 인해 이 땅의 남자들은 군제대를 하고도 8년이나 예
비군 훈련을 받아야 되는 불이익을 받게 된 것이다.


▲  1,21사태 소나무의 총탄 흔적
그때 총탄이 박힌 자리에 빨간색과 흰색으로 좀 흉하게 표시를 해두었다.


북악산에 널린 수많은 소나무의 하나로 이제는 북악산의 명물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허나
좋은 뜻에서 그리 되면 모르겠지만 호경암과 함께 1.21사건 같은 영 좋지 않은 사건으로 명물
이 된 것이니 소나무 자신도 마음이 그리 편치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름이 없는 소나무처럼
조용히 묻히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안좋은 쪽으로 명물이 되었는지 나무나 사람이
나 운과 시간을 잘 만나야 된다.
게다가 호경암처럼 당시에 총탄 흔적까지 안고 있으니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70년 넘게 대치
하고 있는 남북분단의 우울한 비극을 전율이 일도록 느끼게 만든다.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창의문까지

▲  북악산 정상힌 바위 (저 바위가 실질적인 정상임)

청운대에서 10분 정도를 마저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에 이르게 된다. 백악
마루는 해발 342m로 마루란 순수 우리말로 정상을 뜻한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상 중앙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
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는 사람 키보다 2배 정도 높은 굵직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정상 남쪽에는 청운대와 마찬가지로 소나무가 가득해 그윽한 솔내음을 전해주며, 테두리 안에
서만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테두리를 넘으면 나라가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굳이 넘을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어디든 촬영이 가능하며, 북쪽으로는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
북동과 서울 동북부지역, 서쪽은 부암동과 인왕산(仁王山), 그리고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
산(南山)이 속시원히 바라보여 조망이 일품이다.

이곳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천하를 보고 있자면 그 천하가 마치 내 것이 된 듯, 잠시나마 제
왕(帝王)마냥 즐거운 기분이 밀려온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중의 시궁창..) 세계 최대의 대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만큼 조망이 좋은 곳도
없다. 또한 서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며, 오랜 세월 서울 땅을 지켜온 북
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도 느껴진다.


▲  하얀 돌로 다듬은 백악산 정상 표석

▲  소나무 너머로 바라보이는 서울 도심과 남산
중공 짱깨산 미세먼지로 조망이 영 시원치가 못하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지역
산속에 묻힌 너른 동네가 성북동이고, 그 산 너머로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등 서울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북악산 꼭대기 바위에서 바라본 정상부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북한산
북악산을 받쳐주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 북한산이 북악산을 굽어본다.
그 남쪽 산자락에는 부자 동네 평창동이 크게 둥지를 틀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인왕산을 비롯하여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과 서울/고양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봉산, 앵봉산 등)들이 바라보인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산줄기와 평창동,
그리고 북한산의 위용
북악산(삼각산) 북쪽 산줄기는 늦가을이 질러놓은 단풍에 산불마냥 활활
타오르고 있다. 너무 곱게 타올라 깜깜한 밤에도 모두 보일 것만 같다.

▲  백악쉼터에서 창의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녹음이 짙은 소나무가 아찔한 내리막길을 가려주려는 듯 가운데서 시야를 막는다.

▲  백악쉼터 부근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북악산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성곽길은 북악산에서 가장 고달픈 구간으로 각박한 속세살
이만큼이나 길이 가파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가는 것보다야 부담이 적겠지만 급하게 펼쳐진
성곽길에 아찔함마저 들 정도이다. 그리고 창의문에서 올라갈 때는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성곽길에 '이게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길인가?' 기를 제대로 질리게 만든다. 거의 30~40도 경
사의 야속한 성곽길을 올라야 되니 말이다.
그래서 등산이 딸리거나 노인과 어린이들은 가급적 숙정문이나 말바위에서 오르기를 권한다.
어차피 거기도 힘들긴 마찬가지이나 서서히 경사가 급해지는 구간이라 덜 힘들다. 창의문이
정상과 가까운 지름길이라고 해서 만만히 보면 후회한다.

정상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백악쉼터라 불리는 조촐한 쉼터가 나온다. 여기는 북악산 개방
을 위해 닦은 공간으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 이곳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쉼터 자체는
찍을 거리가 없으며 성곽과 성 밖에 펼쳐진 천하를 찍으면 된다.


▲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한양도성길 (백악쉼터에서 정상 방향)

▲  돌고래쉼터에서 만난 돌고래바위

백악쉼터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돌고래쉼터가 나온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
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
악산을 개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면서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쉼터 주변은 촬영이 가능하나 찍을 만한 것은 돌고래바위와 성곽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
뿐이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에도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속살을 비친다.


▲  창의문 - 보물 1881호
자하문고개를 밀어 만든 신작로(新作路)에 밀려 성문으로의 기능은 다소
떨어졌으나 왕년에 도성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서울 도심과 부암동(付岩洞)을 잇는 자하문고개에 옛 한양도성의 성문인 창의문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창의문은 성밖 부암동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부르
기도 하는데,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나도 자하문이라 주로 부름)

이 문은 한양도성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인 북소문이다. 4소문은 동소문
<東小門, 혜화문(惠化門)>,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
)>, 그리고 이곳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
리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  창의문 안쪽 (도심 쪽)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지을 때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
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하는 등, 철저히 나라 일에만 문을 열었다. 허나 성
밖 부암동 지역에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과 그들의 즐겨찾기 명소가 즐비해 그들의 은밀한 통
행로로 쓰였다. 즉 국가와 높은 사람들의 전용문이었던 것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문루와 협문
하얀 추녀에 잡상(雜像)과 용머리가 걸터앉아 성문을 지킨다. 창의문이 무탈했던
것은 저들의 굳은 직업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  문루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저들의 우매한 권력투쟁과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 국제정세에 우둔함으로
얼마 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三田渡) 굴욕의 대치욕을 당하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동아시아의 호구 국가로 이리 털리고 저리 털리다가 결국
나라와 이 땅의 장대한 역사마저 잃게 된다.


창의문은 한양도성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監
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문
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오래되었을 뿐, 문루
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가 없었으며, 1958년 중수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2일, 국
가 지정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너무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
은 끝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  창의문 문루에서 바라본 창의문 안쪽

겨울 제국의 등쌀에 떠밀려 서서히 손을 놓으려는 늦가을이 잠시 이곳에 걸음을 멈추고 그의
마지막 잎새를 잔뜩 그려놓았다. 단풍이 환대하는 저 오솔길을 거닐면 나도 저들처럼 곱게 물
들지는 않을까? 황색 피부가 졸지에 다색(多色) 피부로 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신작로로 강제로 끊어진 창의문 반대쪽 언덕과 성곽
저 언덕에는 2009년에 터를 닦은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있다. 끊어진 폭은 짧지만
고개를 깊게 깎아놔서 마치 끊어진 강가 절벽을 보는 듯 하다.


오랫동안 도성 성문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나 1960년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으면서 성문의 통행 기능을 잃게 되었다. 요즘이야 산꾼과 답사꾼, 나들이꾼들로 심심치는
않겠지만 그래도 예전 같지는 못하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에
물러나 앉은 모습은 정말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문 서쪽에 신작로를 내면서 한양도성은 50m 남짓 끊어져 있다.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尹
東柱)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벽이 견우와 직
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간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
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남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하여
문루에 올라가 북쪽 전방을 뚫어지라 바라봤자 북악산길에 가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다.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혹은 닭)과 구름무늬

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
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보기 바란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
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으나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황
의 모습이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북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하늘을 향해 경쾌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추녀마루의 고운 맵시
선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이 진하게 배여난 창의문,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선이 또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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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까지)

 


'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

▲  인왕산자락길 (은행나무숲길)

▲  인왕산자락길 가온다리

▲  이빨바위

 


 

늦가을이 존재감을 진하게 드러내며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11월의 어느 평화
로운 날, 인왕산 품에 숨겨진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탐
방로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인왕산길을 따라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거의 느긋하여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지 마음 편히 거닐 수 있으며, 시내와
도 무척이나 가까워 언제든 도시로의 탈출이 가능하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들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西村, 웃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오르락 내리락 굴곡
이 다소 있어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능히 완주할
수 있으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윤동주문학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바로 앞에 붉은 뒷통수를 보인 주택들은 청운벽산빌리지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해
문학의 향기를 흩날리는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

▲  윗쪽에서 바라본 청운문학도서관

'한옥으로 지어진 도서관이 있다? 없다?'란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될까? 2014년 11월 중순
까지는 '없다'로 해야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있다'로 바뀌었으니 그 정답을
바꾼 첫 현장이 바로 청운공원에 자리한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윤동주문학관에서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로 이어지는 2차선 길(자하문로35길)을 따라 3~4분
정도 가면 왼쪽(남쪽) 밑에 근래 지어진 산뜻한 한옥들이 모습을 비춘다. 처음에는 전통체험
공간으로 여겼으나 확인해보니 종로구에서 닦은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콘크리트 건물이 진리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한옥으로 도서관을 지을 생각을 하다니 그 생각이 참 기발하다. 그 발
상 덕분에 이 땅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이란 근사하면서도 변치 않을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
다.

종로구가 '책읽는 종로만들기'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추진하면서 짜투리 공간을 활용하여 조그
만 공공도서관(일반 도서관 11곳, 문학 또는 예술로 특화된 도서관 7곳) 18곳을 지었는데 청
운문학도서관은 문학 특화 도서관으로 2014년 11월 19일에 문을 열었다.
종로구의 16번째 공공도서관으로 문학 특화 도서관이 된 것은 바로 옆에 윤동주문학관과 윤동
주시인의 언덕 등 현대 문학의 성지(聖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히 문학 특화의 목적
을 띄게 된 것이다. 그래서 종종 문학인과 명성이 있는 지식인을 초청해 문학 관련 프로그램
이나 강좌를 운영하고 있으며, 윤동주문학관과 한 덩어리를 이루며 도심 속 문향(文香)의 성
지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청운공원 한복판으로 주변이 온통 싱그러운 자연에 감싸여 풍광
이 곱다. 그러다보니 정녕 이곳이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린다. 마
치 머나먼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즐거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변 자연과 흔쾌히 어우러진 모습과 한옥의 미를 잘 드러내고 있어 '서울의 아름다운
건물 찾기 공모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건물에 쓰인 기와는 돈의문(敦義門) 뉴타운 개발로
철거된 한옥 기와 중, 괜찮은 것 3,000여 장을 추려내 재활용했다.

도서관의 규모는 734.35㎡로 본관(지하 1층, 지상 1층)과 조그만 별당으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며, 열람석 수는 115석, 소장 서적은 21,985권(2018년 1월 1일 기준)이다. 도서관 이용
방법과 책 대출 방법 등은 다른 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관련 홈페이지 참조), 10시부터
22시까지 운영을 한다. (일요일은 19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쉼)

굳이 책을 빌리거나 독서를 하지 않더라도 나들이로 잠시 들릴만하다. 주변에 청운공원과 윤
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인왕산, 부암동, 창의문, 북악산, 서촌 등의 굵직한 명소가
많고 한옥으로 지어진 매력 때문에 북촌(北村)의 필수 관광지로 꼽히는 정독도서관처럼 자연
스럽게 명소처럼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4-20 (자하문로36길 40, ☎ 070-4680-4032~3)
* 청운문학도서관 홈페이지는 아래 '남쪽에서 도서관 본관' 사진을 클릭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도서관 본관
본관 지하층 앞쪽에 주차장이 있다.

▲  운치를 더해주는 도서관 돌담


▲  청운문학도서관 본관

도서관 본관은 'ㄱ'자 모습의 팔작지붕 한옥이다. 겉으로 보면 1층 같지만 그 밑에 지하층을
품고 있어서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를 이루고 있다. 지하는 서고(書庫), 지상은 열람실 및
교육 공간으로 쓰이며, 교육이나 강좌 프로그램이 없을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책을 읽으며
문향을 즐기면 된다.


▲  온갖 화초와 동물이 새겨진 도서관 담장의 위엄
이보다 우아한 도서관 담장이 또 있을까? 전통식 고급 담장에 충실하고자
다양한 화초와 동물 문양을 넉넉히 담아 넣었다.

▲  메마른 연못에 다리를 담군 1칸짜리 별당(別堂)

본관 서쪽에는 1칸짜리 별당이 자리해 있다. 별당 옆에는 연못이 있으나 내가 갔을 당시에는
물이 없는 휴업 상태였다. 만약 연못에 물이 차있고, 연꽃까지 두둥실 떠있었다면 그 운치가
몸살나게 죽여줬을 것이다.
별당은 늘 열린 공간으로 누구든 들어가서 책을 보면 된다. 가끔 명사들을 초청해 여기서 강
연이 열리기도 한다. 허나 이곳은 엄연한 도서관의 일원이기 때문에 대놓고 낮잠을 자거나 음
식을 섭취하는 행위 등은 하지 말자.


▲  탁자만 외로이 놓여진 별당 내부
여기서 책을 읽는다면 내용이 무엇이든 머릿속으로 술술 잘 들어올 것 같다.
그만큼 독서의 명당 자리이다.

▲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 (별당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붉게 타오른 단풍이 마중을 하는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  붉은 단풍이 진하게 아른거리는 청운공원 숲길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소리 없이 내려앉으면서 내 마음도 덩달아 알록달록 물들어간다.
(청운문학도서관 서남쪽, 인왕산자락길)

▲  늦가을의 붉은 수채화 속을 거닐다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를 나오면 몸을 푸는 운동시설과 분수대가 있는 청운공원 서쪽 구
역이다. 여기서 오른쪽 산길을 오르면 인왕산자락길이 펼쳐진다. (인왕산길과도 연결됨)

청운공원은 종로구의 지붕인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를 닦은 공원으로 2007년에 인왕산 잡석
들을 모아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돌아파트)'와 2009년에 공원 동쪽을 떼서 만든 윤
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등이 있다. 2014년에는 청운문학도서관까지 지어지면서 공원
을 더욱 알차게 수식해준다.
도심보다 한층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탓에 서울 도심과 남산,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
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며,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경계에 자리해 있어 바로 밑에 펼쳐
진 도심보다 청정한 공기를 자랑한다. 또한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명소로 매년 1월 1일 아
침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이 가득해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잎이 가을의 향연을 베푼다.

청운공원 서쪽 구역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
일 2회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
는 정도이다. 가동 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
시까지이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가동 기간과 시간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음)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청운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7-4 일대


▲  꿈의 분수가 있는 청운공원 서쪽 구역, 그 너머로 서울 도심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  청운공원 서쪽 구역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  인왕산자락길 이빨바위에서 해맞이동산까지

▲  인왕산 이빨바위
그저 단단해 보이는 뚜껑돌 위에도 자연은 피어나고 있었다.
 

청운공원에서 인왕산자락길로 들어서 1굽이 지나면 이빨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검은 이빨을 드
러내며 발길을 붙잡는다.
바닥에 누운 커다란 암석과 뚜껑돌처럼 놓인 암석 중간에 마치 동물의 이처럼 생긴 부분이 있
어 눈길을 끄는데 그로 인해 이빨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자락길을 닦으면서 발굴
된 것으로 나도 그의 존재는 처음인데 사람의 틀니나 해골의 입처럼 보이기도 하며, 배가 고
파서인지 모르지만 햄버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 눈이 안경이라고 사람마다 눈에 비치는 모
습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이처럼 잘생기거나 요상하게 생긴 바위에는 꼭 믿거나말거나 전설이 있기 마련이나 눈썰미가
좋은 옛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는지 그에게 깃든 전설은 딱히 없다. 다만 자락길을
닦으면서 초반에 종로구청에서 인왕산 치마바위와 인연이 깊은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와 중
종(中宗)의 이야기를 어거지로 지어서 당당하게 안내문까지 부착했는데, 그 내용이 실로 개판
에 똥판 수준이라 말들이 많자 그 안내문을 떼어버렸다. 대신 '건강한 치아는 오복 중의 하나
! 이빨바위를 보며 건강과 평안을 빌어보십시오'
란 조그만 돌 표석을 달았다. 차라리 엉터리
전설보다는 돌 표석 안내문이 훨씬 깊이가 있어 보인다.


▲  이빨바위 남쪽 쉼터 (운동시설이 여럿 있음)

▲  소나무 숲 사이로 바라보이는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자락길을 한 굽이 넘을 때마다 서울 도심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  조그만 계곡(청풍계로 여겨짐)을 건너는 나무데크 탐방로
(청운마루와 이빨바위 사이)

인왕산은 단단하게 생긴 바위 산이라 계곡과 샘터가 거의 없을 듯 싶지만 겉보기와 달리 많은
계곡과 샘터를 지닌 부드러운 산이다. 다만 서울 도심에 자리한 탓에 개발의 칼질이 계곡을
마구 끊어버리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을 뿐이다.

인왕산 품에는 2012년에 복원된 수성동계곡을 비롯해 백운동(白雲洞), 청풍계(淸風溪), 청계
동천(淸溪洞天), 옥류동(玉流洞) 등 서울 장안의 경승지로 명성을 날렸던 계곡들이 많다. 허
나 수성동(水聲洞)을 제외하면 다들 조그만 편이며, 수성동 상류와 홍제동 환희사계곡이 그나
마 제대로 남아있다. 그 외 계곡들은 주택가 등 시가지 확장으로 모조리 강제 생매장을 당해
산 속 상류에만 여리게 물줄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인왕산자락길은 시내에서 모두 실종된 듯
보이는 인왕산 서촌(웃대) 방면 계곡들의 상류를 거의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현장으로 인왕
산을 달리 보는 계기를 선사해준다.

청운마루 직전에 이르면 넓게 닦인 나무데크 공간이 나온다. 그 밑에도 조그만 계곡이 가늘게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청풍계(淸風溪) 상류로 짐작된다.
조선 중기 인물인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청풍계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변 풍경이 수
려해 청풍각(淸風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지었다. 바로 그 건물로 인해 이곳 계곡이 청풍계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청풍계와 인근 백운동의 이름을 따서 청운동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동(
壯洞)이라 불림>

이곳 역시 주택가에 이르러서는 강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가며, 계곡 왕년의 모습
은 겸재 정선
(謙齋 鄭敾)이 그린 장동8경첩에 잘 남아있다.


▲  인왕산자락길의 구름다리인 가온다리

청풍계 추정 계곡을 건너 고개를 넘으면 '청운마루'라 불리는 나무로 다진 조망대가 있고, 바
로 조망대 정면(남쪽)에 인왕산자락길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가온다리가 펼쳐져 있다.
그는 일종의 흔들다리로 지방의 산이나 호수, 섬에서나 볼 수 있는 관광용 흔들다리가 이렇게
서울 도심에 버젓히 나타나 내 앞에 아른거리니 '서울에서 이제 흔들다리나 구름다리를 다 보
는구나~! 내가 너무 오래살았나?' 그저 충격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흔들다리의 성지인 파주 감악산(紺岳山), 원주 소금산, 청양 천장호 등 스케일이 큰 흔들다리
만은 못해도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흔들 구름다리로 흔들다리의 이름값은 하고 있으며, 이곳
이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어 눈요기도 시킬 겸, 이렇게 높이 구름다리를 닦은 것이다.

처음에는 다리 이름이 딱히 없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가온다리'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사람
의 중량과 다리를 흥분시키는 정도에 따라 흔들리는 강도가 조금씩 다르다. 가벼운 사람이 건
너면 거의 미동 정도로 흔들리고, 무게가 좀 있거나 다리를 막 건드리면 조금은 출렁거려 사
람에 따라 염통이 쫄깃해지는 짜릿함도 느낄 수 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다리 저 밑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옥류동(玉流洞)계곡으로 여겨진다. 옥
류동에는 청휘각(晴暉閣)이란 유명한 정자가 있었는데, '청휘'란 이름은 '비가 개인 뒤에 맑
은 햇살이 비추는 누각'이란 상큼한 뜻으로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집 후원에 지었다.
이후 옥류동의 대표 명소로 이름을 날렸고,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8경첩에 그 존재가 남겨져
있다.
그토록 아름답던 청휘각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흔적 조차 더듬기 어렵게 되었고, 옥류동
도 왕년의 위엄을 잃은 채, 인왕산 숲속에서나 겨우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
고보면 인왕산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상실 당했다. 게다가 서울 도
심에 자리해 있으니 그 희생의 정도는 매우 컸다.


▲  남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가온다리 남쪽에서 바라본 청운동(淸雲洞) 지역과 북악산(백악산)
그들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남쪽 줄기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  남쪽 밑 계단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청와대를 꿈꾸는 청와마루

가온다리를 건너 고개 1굽이를 넘으면 청와마루가 마중한다. 이곳은 청와대가 정면에 보이는
위치라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청와대와 함께 서촌(웃대)과 북악산(백악산), 서울 도
심부가 사이 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청와마루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북악산, 청와대

▲  숲 너머로 보이는 서울 도심 (청와마루 남쪽)

숲 사이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도심이 모습을 비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
울을 잊게 할 정도로 싱그러운 산길이나, 번잡한 도심이 늘 옆에 머물며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는다. 마치 이곳이 시골이 아닌 서울 한복판임을 잊지 말라는 듯이...


▲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행나무숲길

버드나무약수터와 청와마루 사이에는 은행나무가 조촐히 우거진 숲길이 있다. 비록 숲길의 거
리는 얼마 되지 않으나 은행잎이 황금 비단처럼 깔려 있으니 대자연 형님의 초청을 받아 잔칫
집이나 연회장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그만큼 감동의 너울은 컸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두고두
고 망막과 가슴 속에 은은히 남아 아른거렸고 그들이 그리워 이후에도 여러 번 찾아왔다.


▲  은행잎이 깔린 은행나무숲길
땅바닥에 귀를 접고 누워있는 은행잎과 온갖 단풍잎들, 우리는 그들을
우울한 이름의 두 글자 '낙엽'이라고 부른다.

▲  은행나무숲길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은행나무 숲길에서 1굽이 지나면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이 마중을 한다. 옥인동(玉仁洞) 주
민들의 체력 단련을 위해 닦여진 것으로 늦가을 절정에 잠긴 나무들이 흩날린 누런 낙엽과 은
행잎이 바닥을 잔잔히 덮으며, 흙길의 촉감을 부드럽게 해준다.


▲  샘터의 기능을 잃은 옛 버드나무약수터

버드나무약수터는 인왕산의 유명 약수로 위엄을 떨쳤던 샘터이다. 허나 부적합 판정으로 샘터
의 기능은 끊겼고, 대신 남쪽에 새로 샘터를 파서 버드나무약수터란 간판을 달았으나 그 역시
약수의 기능을 상실해 생태연못으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  좁은 샘터에서 유유자적 살고 있는 물고기들
저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좁은 샘터에 마땅한 수초도 없을텐데 말이다.

▲  늦가을도 몸을 푸는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주변

▲  약수터의 추억을 지닌 옥인동(玉仁洞) 생물서식공간

이곳은 원래 버드나무약수터로 사진에 보이는 돌거북이 인왕산이 빚은 물을 열심히 베풀고 있
었다. 허나 세월을 너무 안좋게 타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게 되었고, 끝내 딱지를 벗어나지
못하자 약수터 폐쇄 대신 여기서 나오는 물을 활용해 그 앞에 조그만 생태연못을 만들어 옥인
동 생물서식공간으로 삼았다. 그래서 조금은 어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약수터가 생태연못(생태공간)으로 거듭난 현장으로 이런 예는 천하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할
듯 싶다.


▲  버드나무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이어지는 인왕산자락길

▲  해맞이동산 북쪽 인왕산자락길


 

♠  인왕산자락길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까지)

▲  낙엽이 짙게 깔린 산들수목원약수터 해맞이동산

산들수목원약수터는 버드나무약수터와 수성동 사이에 자리해 있다. 약수터 이름치고는 좀 긴
편으로 단순히 이름만 봐서는 산들수목원에 깃든 약수터로 착각할 수 있으나 그런 이름의 수
목원은 여기에 없으며, 수목원 같은 시설도 전혀 없다. 어찌하여 속칭 낚시성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수질이 양호하여 마셔도 무리는 없다.


▲  산들수목원약수터

마침 주변에 있던 아저씨들이 인왕산에서 제
일로 물맛이 좋다며 1모금 권하길래 졸고 있
는 바가지를 깨워 마셔보았다. 약수터는 수도
꼭지로 물을 통제하고 있어 물을 마시려면 꼭
지를 돌려야 된다. 그러면 물이 쏴~ 쏟아진다. 
물을 마셔보니 딱히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
는 이 땅에 흔한 약수 맛이다.

약수터 주변에는 '해맞이동산' 표석이 있는데, 해맞이에 걸맞게 동쪽을 향하고 있다. 여기서
는 매년 1월 1일 해맞이행사가 열린다.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서촌, 남산,
그리고 푸른 하늘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곱게 자연산 터널을 이루며 산책의 흥을 돋군다.

▲  자연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수성동계곡 상류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자락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수성동계곡 상류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는 인왕산길에서 내려오는 산길과도 만나는데, 상류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
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잡석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거의 소리도 없이 흘러간다.
이곳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이기도 하며 수질이 양호해 도룡뇽,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은 계곡이나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계곡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게 하며, 산길을 따라 1분 올라가면 인왕
산길(석굴암입구)이 나오고, 반대로 2분 정도 내려가면 수성동계곡 중심부와 그를 내세운 공
원이 나온다.


▲  수성동계곡의 또다른 상류

수성동의 상류는 3개 정도 된다. 석굴암에서 오는 계곡과 그 남쪽에서 오는 계곡, 인왕천약수
터에서 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을 통해 인왕
산의 맑은 물을 접수받아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상류 계곡들은 계곡 중심부와 달리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 계곡 역시 바위
틈의 좁은 협곡을 타고 물이 내려온다. 수량이 많으면 폭포도 신이 나고 폭포 밑에도 많은 물
이 고여 조촐히 담(潭)을 이룰텐데, 가을 가뭄이 풍년 수준이라 간신히 물만 축이는 실정이다
. 물과 흙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잡초만 무성해 폭포의 위기감을 더해준다.


▲  협곡을 그리며 내려오는 수성동의 또 다른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인왕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인왕천약수터도 수성동에 물을 보태고 있었다. 이 물줄기는 거
의 90도 각도가 진 암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루며,
조그만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놀기에 아주 적당하
다.
모래 옆과 다리 주변에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조금 끼어있어 약간의 어색함을 주나 그 외
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수성동 상류의 원초적 모습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  수성동 중심으로 내려가는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물줄기)

▲  수성동 풍경을 더욱 돋보이게 꾸며주는 사모정

수성동계곡 한복판에는 이곳의 구수한 양념인 사모정이란 네모난 정자가 자리해 있다. 사모정
이란 네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달랑 1칸 크기의 아주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이다.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그는 옛날부터 이곳을 스쳐갔던 정자는 절
대 아니며 계곡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에도 정
자는 나와있지 않고,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계
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亭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풍경이 한층 더 살아
나는 것 같다. 그럼 여기서 수성동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  사모정 앞을 흐르는 수성동계곡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인왕산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서울의 주
요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 略) 등에 서
울 명승지로 절찬리에 언급된 곳이다. 이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불렀는데, 이
는 계곡에 있는 '기린교'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유래된 이
름이다.

수성동계곡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
帖), 즉 장동(壯洞) 지역에 이름난 명소 8곳을 그린 그림의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어깨를 피
고 등장한다. 여기서 장동은 효자동(孝子洞)과 청운동 일대로 북촌과 더불어 왕족과 사대부(
士大夫)들이 앞다투어 집과 별장을 지었던 금싸라기 땅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 인왕산과 북악
산이 빚은 절경이 많은데, 그중에 장동8경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수성동과 창의문, 대은암
바위글씨 정도만 남아있음)

수성동에 가장 먼저 집을 지은 귀족은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그는 계
곡 아랫쪽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는데, 나중에 창의문 북쪽에 무
계정사(武溪精舍)란 별장까지 장만했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란 그림
을 남기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넌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끼어있는 바위와 질감
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
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격하게 찬양했다.

이 계곡은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안에 자리하여 접근성 또한 아주 착했다. 그
래서 사대부 외에도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정(宋石亭)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
의 성지(聖地)로도 명성을 날렸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장안의 경승지로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은 196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하여 참으로 아름답고 착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지고 말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
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
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으며, 수성동 뿐만 아니라 도심의 많은 경승지
들이 인간의 욕심 앞에 큰 고통을 받으며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깔린 채, 40년 가까이 고통스럽게 살았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질에 빼앗
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
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우
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입주민을 싹 내보내고 2011년까지 모
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해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
철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
단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좁아진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선비와 지배층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
끼도록 했다. 그리고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추정되는 계곡 아랫쪽(기린교 동쪽)
에 관람공간을 조성해 정선의 눈으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으며,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
린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
하고 있다. 게다가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완전 옛날 모습은 아니며 여전히 비슷한 자리
(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계곡 관람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
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어 복원하면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 들어차
거의 불가능하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구역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이고, 주변 바
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안그
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음 편히 의지할 수 있
는 공간이 하나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나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고, 복원공사를 벌이는 중
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
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축내는 청계천과 달리 살아있는 계곡
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인왕산자락길은 수성동계곡 상류를 지나간다. 이번은 어디까지나 자락길이 중심이라 그가 지
나는 부분만 살폈을 뿐, 기린교를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통과했다. 수성동은 이미 20번을 넘
게 가본 곳이고 자락길 종점까지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었
다.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내용 분량 관계로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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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11월 2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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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서촌의 끝자락을 거닐다 [월암근린공원에서 딜쿠샤, 황학정까지]

 


' 서촌 늦가을 나들이 (월암근린공원에서 황학정까지) '

행촌동 은행나무

▲  행촌동 은행나무

황학정 홍난파가옥

▲  황학정

▲  친일파 홍난파 가옥

 


늦가을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서촌(西村) 지역을 찾았다. 흔히 서촌하면 경복궁(景福宮)
서쪽 일대를 일컬으나 원래는 서대문<西大門, 돈의문(敦義門)> 안쪽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웃대라 불리던 경복궁 서쪽 동네와 합쳐지면서 거대한 서촌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번 나들이는 서대문 안쪽이자 서촌의 원래 지역인 송월동(松月洞)과 홍파동(紅把洞), 행
촌동(杏村洞) 지역과 사직단(社稷壇) 주변을 느긋하게 돌아다녔다. 이미 10번 이상 인연을
지은 곳들이나 서촌(웃대)과 인왕산에 빼앗긴 마음이 좀처럼 돌아오지를 않으니 자꾸만 손
과 발이 간다.


 

♠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과 월암근린공원 주변

▲  월암(月巖)근린공원

5호선 서대문역에서 광화문 방면으로 조금 걸으면 정동4거리가 나온다. 이곳은 서울 4대문의
하나인 서대문(돈의문) 자리로 여겨지는 곳으로 여기서 왼쪽(북쪽) 길인 송월길로 조금 들어
서면 하얀 피부의 성곽(城郭)이 나타나 뭇사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 성곽은 근래에 복원
된 한양도성의 일부로 여기서 홍난파가옥까지 성곽을 겯드린 월암근린공원이 조촐하게 자리를
닦았다.

남대문(숭례문)과 사직터널 윗쪽에서 각각 길이 끊긴 한양도성은 월암근린공원에서 짧게나마
모습을 비춘다. 허나 근래에 복원된 탓에 피부가 하얗고, 성곽 밑도리에 고색의 때를 머금은
성돌이 일부 끼어있을 뿐이다. 하여 오래된 도성(都城)의 무게감보다는 대충 닦은 촬영세트장
이나 모조품처럼 가볍게 보인다.
상황이 이리 우울하게 된 것은 왜정(倭政)이 사직터널부터 남대문 사이에 성곽을 철저하게 뭉
개버렸기 때문이다. 성곽이 가고 없는 자리에는 집과 건물이 가득 들어찼으며, 도성 복원 계
획으로 이 일대를 밀어버리면서 땅속에 묻힌 성돌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성곽을 복원
하면서 그들을 끄집어내 성돌의 역할을 다시 부여했고, 숨통이 크게 트인 성곽 서쪽에는 공원
을 닦아 휴식처로 삼았는데, 공원 이름인 월암은 인근에 있는 월암 바위글씨에서 비롯되었다.
성곽 안쪽에는 서울기상관측소와 서울시교육청이 자리해 있으며, 그 동쪽에는 경희궁(慶熙宮)
이 오욕의 세월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곽 북쪽은 주택들이 첩첩하게 들어차 재개발을 하지 않는 이상은 복원이 거의 어렵다. 사직
터널까지 200m만 다시 이으면 되는데, 현실의 벽 앞에 어림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 또한
건물과 도로 등으로 손을 대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 허나 도성 복원 계획은 끊어진 성곽이
모두 이어지는 그 순간까지 끈기를 가지고 추진된다고 하니 언젠가는 반드시 복원이 마무리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또한 안되면 그만이다.


▲  복원된 성곽 북쪽 끝(서울기상관측소)에 성곽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  서울시교육청 서쪽 성곽
경원선과 경의선 철마가 잃어버린 북쪽으로 달리고 싶듯이 한양도성은
끊어진 구간을 넘어 다시금 서울 도심을 품고 싶다.

▲  홍난파가옥과 이어진 월암근린공원 북부

▲  홍파동 홍난파가옥(洪蘭坡家屋) - 등록문화재 90호

월암근린공원 북쪽에는 붉은 피부의 벽돌과 지붕, 그리고 담쟁이덩굴까지 두룬 별장 같은 아
담한 주택이 시선을 부여잡는다. 그 집이 홍파동 홍난파 가옥이다.
이 집은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지하라고는 하지만 가파른 경사에 자리한 탓에 서쪽과 남쪽
이 바깥에 노출되어 햇볕을 보고 있으므로 거의 2층이나 다름이 없다. 이곳에는 원래 구한말
시절,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도와 항왜(抗倭) 언론을 주도했던 영국 사람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
1909년, 한국 이름은 배설(裵說)>의 집이 있었다.
배설은 1909년 5월, 심장병으로 37세란 한참 나이에 세상을 떴는데, 그에게 원한이 깊었던 왜
정(倭政)은 쪼잔한 마음을 드러내며 그의 집을 강제로 밀어버렸다. 다만 토지는 몰수하지 않
고 그의 부인인 '메리 모드 베델'(Mary Maud Bethell)이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20년대 이후,
매각한 것으로 전한다.

1920년대 후반, 이 일대가 여러 지번으로 분할되었는데, 송월동과 홍파동 지역에는 독일 양이
(洋夷)들이 많이 서식해 그들의 주택이 많이 들어섰다. 홍난파 가옥도 바로 그 과정에서 1930
년대에 태어났다. 허나 그 집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 집 자신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는데, '
불놀이'를 쓴 시인으로 친일 행적이 요란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부인, 최선복의 이
름이 먼저 올라와있다.
그 다음에 들어온 사람은 홍어길(洪魚吉)로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의 조카딸인 신수옥에게
장가들어 여기서 보금자리를 폈다. 그는 배화여학교 선생으로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했으며, 철
학박사로 서울에 철학연구사를 세웠던 한치진(韓稚振, 1901~?)이 다음 타자로 들어와 잠시 머
물렀다. 그는 1944년 왜정의 패망을 예견하는 시국답을 논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살기도
했다.
바로 그 다음에 들어온 이가 홍난파로 1935년 이 집을 사들여 말년을 보냈다. 그 연유로 홍난
파 가옥(홍난파의 집)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  골목에서 바라본 홍난파 가옥

예전에는 집 앞에 마당이 있었으나 담장을 허물고 작게 야외무대를 닦았으며, 1968년 4월 10
일에 난파기념사업회에서 세운 홍난파의 흉상이 옛 마당을 지킨다. 이 흉상은 김경승이 조각
하고, 김충현이 글씨를 썼으며, 윤석중이 흉상 기단(基壇)에 글을 새겼다. 또한 골목 쪽에는
담장과 대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담장 일부만 남았고, 1층 현관을 통하여 가옥 내부로 들어서
면 된다.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리한다.

집 지붕은 다른 서양인 선교사의 집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거실에는 양옥에서 많이 볼 수 있
는 벽난로가 있다. 현관과 이어지는 복도를 사이로 서쪽에 거실, 동쪽에 침실을 두었으며, 거
실 밑에는 지하실을 두어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던 서양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07년에 홍난파 기념관 및 소공연장으로 손질하고자 보수 공사를 벌여 1층에 있던 침실 2개
를 하나로 합쳤으며, 음향시설 등을 달아 50명 규모의 공연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유품
과 자료를 전시하여 기념관의 역할을 하도록 했고, 지하에는 시청각실까지 닦았다.

    ◀  홍난파의 그 잘난 흉상(胸像)
이 땅의 현대 음악을 발전시키고 꾸려나간 업
적만 본다면 동상도 아깝지 않겠으나 말년에
보인 추잡스런 친일 행적을 생각하면 흉상은
커녕 기념비도 아깝다. 흉상은 좀 내다버리고
기념비만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 이상은
그에게는 과분하다.

우리 귀에 무척 익은 홍난파, 그 작자는 누구일까?
홍난파(洪蘭坡, 1898~1941)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南陽)에서 태어났다. 본명
은 홍영후(洪永厚)로 난파는 일종의 호이며, 본관은 남양홍씨이다. 왜정 때 매우 잘나갔던 음
악가이자 우리 현대 음악의 중추적인 존재로 '봉선화','성불사(成佛寺)의 밤','옛 동산에 올
라' 등으로 유명하다.

5살에 서울로 올라와 1912년 YMCA 중학부에 들어갔으며, 음악에 자꾸 손과 마음이 가면서 내
면에 숨겨진 자신의 소질을 알게 된다. 그래서 1913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학교인 조선
정악전습소(朝鮮正 樂傳習所)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1918년 창가 '야구전'을 작곡, 발표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에 진학, 음
악과 문학, 미술을 배우며 문예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가 1919년 유학생들이 벌인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학업을 그만두고 귀국했다.

귀국하여 경성양악대 제1회 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린 연
주자란 기록을 세웠다. 대한매일신보 기자로도 잠깐 일하다가 1920년 '처녀혼'이란 첫 작품을
냈는데, 봉선화는 처녀혼 첫머리에 나오는 애수(哀愁)라는 곡명으로 발표된 것이다.
1922년에는 서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해 음악 교육에 나섰으며,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
악 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했다. 그리고 1926년 다시 왜열도로 넘어가 동경고등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조선음악백곡집'과 '조선동요백곡집'을 발표하고 1933년에는 '조선가요창작곡집' 등
의 작품을 냈으며, 현제명(玄濟明)과 함께 '봄노래'를 발표했다. 그 외에 바이올린독주곡인
'애수의 조선','동양풍의 무곡','로망스' 등이 있고, '관현악곡 즉흥곡','관현반주 붙은 즉흥
곡','명작합창곡집','특선가요선집' 등을 냈는데, 그는 우리나라 선율의 요소를 작곡에 반영
해 서정적인 분위기를 그려내고자 했다. 그의 의도는 그의 평론에서도 잘 나타나며, 1930년대
이후 우리나라 현대 음악 창작의 패턴을 정립한 음악가로 널리 찬양을 받았다.

1931년 바이올린을 더 배우고자 미국으로 넘어가 셔우드(Sherwood)음악대학을 다녔으며, 1933
년 졸업 기념으로 독주회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리고 경성보육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1936년 경성방송 현악단 지휘자 및 빅터레코드의 양악부장을 지냈으며, 이
영세(李永世)와 난파트리오를 조직해 실내악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1938년 경성음악전
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음악만필'을 냈으며, '백마강의 추억' 등 14곡의 가요를 나소운(
羅素雲)이란 예명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현대 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며, 주옥같은 작품으로 민중의 마음을 달랬
던 그였지만 그의 말년은 그 초심을 잃으며 추악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친일파로 노선을 바꾸
며 민중의 뒷통수를 제대로 쳤던 것이다.
1937년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회원이라는 이유로 검거된 이후, 그해 4월 조선총독부 학
무국(學務局)에서 결성된 친일단체 '조선문예회'에 가입하여 왜정 정책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였고 '지나사변(支那事變)
과 음악','희망의 아침' 등 친일 성향의 악취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끊임없이 왜정을 찬양했
다.
허나 다행히도 하늘이 보우하사 변절한지 4년 만인 1941년 8월 30일, 43살의 나이로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가 마지막 4년 동안 보여준 속절없는 친일 행적은 20~30대 시절에 일구어낸 온갖 업적과 공
로에 제대로 똥칠을 하기에 충분했다. 50년도 채우지 못한 그 짧은 인생, 무슨 영달을 더 누
려보겠다고 그 추잡함을 보였던 것일까? 그것만 아니었다면 정말 착했을 것을 심히 좋지 않은
뒷끝을 보이고 말았다.
왜정 시절 이 땅의 나약한 지식인들의 끝없는 변절과 방황, 그도 결국 그 재능과 인격 때문에
나락의 길인지도 모르고 바로 앞에 놓인 꿀에 속아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해방 이전에 한참 나이로 자체 폐기가 되었으니 나라와 민중을 배신하고 친일을 벌인
그 대가를 톡톡히 받은 것으로 보면 될까? 그렇게 홍난파에게 실망한 대중을 위로해 본다. 내 학창시절에 봉선화부터해서 그의 노래가 음악책과 문학책에 지겹도록 실려 나의 돌머리를
적지않게 아프게 했는데, 그의 친일 행적은 나의 마음까지도 심히 아프게 만든다.

그런데 홍난파 가옥에서 다루고 있는 그의 일생과 그곳에서 배부하는 홍난파 자료, 그리고 홍
난파 흉상 기둥에는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오로지 찬양 일색이다. 심지어는 '우리
는 홍난파 선생님에게 신세를 너무 많이 졌습니다~~ 홍난파 선생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
며 우리는 홍난파 선생님의 후손입니다'
라는 식의 암을 유발하는 해괴망측한 구절도 있다.
종로구청의 실수인지 아니면 난파기념사업회 작자들의 개짓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친 찬양은
오히려 역겨움과 정신건강 해악만 가져올 뿐이다. 홍난파가 어떤 인물인지는 내가 직접 겪어
보질 않아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그도 개념이 있다면 후학들의 이런 말장난에 지하에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다. 기릴 것은 기리고 깔 것은 과감히 까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홍난파의 후학들이 세운 난파기념사업회는 1968년 난파음악상을 제정해 해마다 적당한 음악인
을 골라 상을 주고 있다. 상을 받은 이는 정경화, 정명훈, 금난새, 조수미 등 이름 3자만 들
어도 거의 알법한 인물인데, 2013년에 일대 이변이 생겼다. 수상자로 선정된 작곡가 류재준씨
가 수상을 거부했던 것이다. 거부 사유는 친일파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기 싫다는 것이다. 그
의 업적은 인정하나 실수 또한 거대하다며 그의 친일행적을 꼬집은 것이다.
그의 개념찬 행동에 천하 사람들은 많은 찬사를 보냈고, 난파기념사업회는 그냥 음악가로서의
홍난파를 기리고 상을 줄 뿐이라며 말도 안되는 변명만 늘어놓다가 오히려 욕만 죽어라 얻어
먹었다.

근래에 들어 민족문화연구소는 홍난파 가옥의 이름을 변경하자며, 이곳에 살았던 여러 인물의
삶과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공간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안내문을 수정하고 가옥 내부의
공간 구성을 바꾸는 방안을 종로구에 제시했다. 비록 홍난파가 이곳에서 쓸데없이 오래 살긴
했어도 그 작자를 너무 치켜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니 홍난파 유물은 크게 줄이거나 갖
다버리고 독립운동을 했던 한치진과 홍어길을 기리는 공간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홍난파도 음악에 공이 적지 않으니 쥐꼬리만큼 기려주자. 또한 집 이름은 지역 이름만 따서 '
홍파동 가옥' 또는 '홍파동 근대 가옥'으로 바꾸는 것이 적당해보인다.
난파기념사업회도 생각이 있다면 이제 그만 난파음악상을 접고 조용히 잠수를 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게 난파의 이름에 그나마 덜 먹칠을 하는 거니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2-16 (송월1길 38) (☎ 070-8112-7901)


▲  기념관 겸 전시관으로 쓰이는 홍난파 가옥 1층 거실

온통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홍난파 가옥은 붉은 날을 제외하고 늘 속세에 열려있다. 허나 현
관문이 닫혀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문이 잠긴 줄 알고 발길을 돌리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이다.
그것이 바로 홍난파 가옥의 함정, 허나 관람시간이라면 닫힌 문 앞에서 좌절하지 말고 문 앞
에 달린 벨을 눌러보자. 그러면 안에서 관리인이 나와 문을 열어준다.

현관에 들어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탄 다음, 1층 홀로 들어간다. 1층에는 거실과 침실
2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침실 2개를 합쳐서 전시관 겸 소공연장으로 꾸몄다. 거실에는 이
집의 특징인 붉은 벽난로가 있으며, 그의 흉상과 의자, 바이올린, 피아노 등이 놓여져 음악가
의 집임을 새삼 실감케 한다.


▲  홍난파의 인생을 요약하면 위와 같다.
친일 행적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두 빠져있고 꿀발린 내용만 가득하다.
이러면 역사 왜곡을 일삼으며 민중을 우롱하는 식민사관, 친일파
후손 패거리와 다를 것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  홍난파의 그 잘난 사진과 그의 유품, 음악 문서들

▲  홍난파의 사진과 조선가요작곡집(오른쪽)

▲  왼쪽은 고향의 봄 악곡집, 가운데는 봉선화 악보, 오른쪽은
조선동요백곡집

▲  홍난파 가옥 1층 동쪽 (옛 침실 공간)
홍난파의 유품과 음악 문서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음악을 정리한 내용들이
벽을 가득 채운다. 이 공간은 소공연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  어둑어둑한 홍난파 가옥 지하
이곳은 시청각실로 쓰인다. 허나 그 횟수가 별로 없어 거의 노는 공간이다.


 

♠  행촌동(杏村洞)에서 만난 숨겨진 명소들

▲  수북하게 자란 행촌동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0호

홍난파 가옥에서 송월1길 골목길을 따라 북쪽(인왕산 방면)으로 조금 가면 근대 건축물인 딜
쿠샤와 커다란 은행나무를 만나게 된다. 이들이 있는 행촌동은 송월동과 함께 인왕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산동네로 사직터널 바로 윗쪽이다. 산동네라고 해서 주황색 지붕을 지닌 허름
한 달동네 스타일이 아닌 온갖 빌라와 주택들이 즐비한 서울에 아주 흔한 그런 동네이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약 420살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랜 터줏
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
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또한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
이 찾아와 치성을 드리는 현장으로도 바쁘게 살았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주택에 밀려 많이 좁아졌고,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건강은 양호하며, 자신의 둥지를 침범한
집들을 미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늘과 은행잎을 선사해 넉넉한 마음을 드러낸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은 옛날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들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무 때문에 동
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이 심은 것이
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 성균관(문묘) 은
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내세우고 싶다.


▲  은행나무 밑에 누운 권율 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
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
려주었으니 그 집이 바로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렇다면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과 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쟁에서 크
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와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랑(禮
曹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으나
업무상 과실로 파면되었다.
허나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경기도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
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각각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려고 했다. 이에 권
율은 주변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 오로지 머릿 수
에 의지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나 태반이 칼과 창도 제대로 못잡는 오
합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용인에 머물던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로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그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완전히 박살이 나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
지(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감하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
순 동복면)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
景)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
졌으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렇게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으며,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진되었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
사(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산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선제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이라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
수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
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 바라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을 본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로
그때를 이용해 공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서울로 줄행랑을 쳤으
며, 정예 기병 1,000명을 미리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잘 다져진 고기덩어리로 만
들었다.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
幸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
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
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었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때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惠陰嶺)에서 왜군에게 박살난 명나
라군을 도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이렇게 권율의 활약에 적지 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왜
군은 그가 있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앞서 독산성에서 크게 패한 우키타가 서
울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 외에는 군사들을 도우러
성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하다보니 여
러 번 위기가 있었으나 권율의 뛰어난 통솔력과 군사와 백성들의 강인한 협동심으로 다들 일
당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또한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
震天雷)란 신식 무기가 열심히 나래를 펼쳐 왜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왜군은 결국 1
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수천 명의 전사자 시신을 불태우며 도망을 친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
도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
에 임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밥버러지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
)을 공격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부실하여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
지 못했으며, 순천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머물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역시나 병
든 닭새끼 같은 명나라군의 비협조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7월 인생을 마
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그리고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
관들 때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군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그 외에는 모두 대승을 거
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이 1권 전하
고 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끄러우니 잠이나 편히 잘
련지 모르겠다.


▲  딜쿠샤(Dilkusha, 앨버트테일러 가옥) - 등록문화재 687호

행촌동 은행나무 서쪽에는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2층 건물이 자리해 있다. 딱 봐도 20세기 초
반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로 원형을 조금 잃긴 했으나 한참이나 후배인 건물들 사이에서 의연
함을 잃지 않으며 중후한 멋을 드러낸다.

이 건축물은 '딜쿠샤(Dilkusha)'란 생소한 이름의 건물로 1923년에 미국 사람인 알버트(앨버
트) 테일러(Albert Taylor)가 지은 것이다. 딜쿠샤는 인도 힌두어로 '이상향','행복한 마음'
을 뜻한다. 그는 금광엔지니어 및 UPI통신사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조선에 들어왔다가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세계에 알린 인물로 유명하다.
또한 독립운동가들과 어울려 그들을 도왔으며, 제암리 학살사건까지 천하에 알려 왜정은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늘 감시를 했다. 금광(金鑛)과 특파원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1923년 이곳
에 고래등 같은 2층 집을 지어 가족과 함께 지냈는데, 힌두어에도 관심이 많았는지 집 이름을
'딜쿠샤'라 하였다.

1926년 7월 26일 아침, 낙뢰를 동반한 폭우가 내렸는데, 낙뢰가 2층 굴뚝을 때리면서 화재가
발생해 2층 전부와 1층 절반이 홀라당 타버렸다. 그 불을 끄고자 서대문서와 서울 시내 소방
서들이 총출동했으나 높은 언덕 지대이고 폭우까지 심해 진화에 크게 애를 먹었다. 집에서 일
하는 사람 1명이 감전되어 정신을 잃었고, 테일러 부부가 모아둔 오래된 골동품이 많이 소실
되어 1만원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허나 테일러는 집을 보수하여 계속 그 자리에 살았다.

1941년 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서울에 살던 미국 등 연합국 국적 외국인을 서대문형무
소에 감금했는데, 이때 테일러도 6개월간 갇혔으며, 그의 부인인 메리 테일러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메리는 왜경의 지독한 감시로 식량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웃 주민들이 몰래 달
걀과 암탉, 죽은 꿩, 김치 등을 지원하면서 겨우 허기를 면했다.

1942년 왜정을 테일러 부부를 강제 추방시켰고, 집을 몰수하여 민간에 팔아먹었다. 1945년 이
후 테일러는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사망
했다. 그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겨 그 뜻에 따라 서울 합정동(合井洞) 외국인묘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에 고이 안장되었다.

6.25이후 자유당 조경국 국회의원이 집을 소유했으나 1963년 박정희 군사정권 때 압수되어 국
사 소유가 되었다. 이후 많은 서민들이 여기서 샛방살이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딜쿠샤는 자
신의 정체를 잃은 채, 막연히 왜정 시절에 세워진 근대 건축물의 하나이자 서민들이 의지하는
다세대주택으로 조용히 묻히게 된다.
그러다가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가 이 땅을 방문하면서 베일에 가려진 건물의
비밀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사연으로 딜쿠샤의 대한 팔자와 시선은 180도 확 달라졌
다. 서울시는 66년만에 서울 고향집을 찾은 브루스에게 명예시민증을 내려 그의 부친을 기렸
다.

2017년 8월 뒤늦게나마 국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었으며, 서울시와 중앙 정부는 딜쿠샤를
손질하여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에 '알버트테일러박물관'으로 세상에 내놓으려고 했
다. 허나 이곳에 불법으로 살던 세입자들이 협조를 안해주면서 지연되었으며, 서울시와 중앙
정부와의 갈등도 있어 이제는 2020년 개방을 목표로 복원공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니 2020년
이 되면 속세에 쿨하게 개방되어 딜쿠샤의 속살도 구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9 (사직로2길 17)

  장독대와 온갖 통들 사이에서 간신히 고
개를 내민 딜쿠샤 정초석(定礎石)
미국 사람이 지은 건물이다보니 정초석도 꼬
부랑 영어로 쓰여 있다.


▲  행촌동 골목길 (한양도성이 흘러가던 옛 자리)
도시에서 자란 30대 이상 사람들에게 저런 골목길의 유년(幼年) 추억은 거의 몇 권씩
서려있을 것이다. 나도 코흘리개 시절 저런 골목을 참 열심히 누볐었지.

▲  인왕산입구 한양도성 탐방로 (인왕산 방면)

월암근린공원에서 반짝 등장한 한양도성은 사직터널 윗쪽에서 다시금 고개를 든다. 인왕산로1길과 사직로1가길, 송월1길 등이 만나는 사직터널 윗쪽 고개를 지나면 도시화에 잔뜩 주눅이
든 성곽이 다시 어깨를 피며 인왕산(仁王山)으로 힘차게 흘러가는데, 성 바깥은 행촌동 주택
가, 성 안쪽은 인왕산 숲으로 각각 탐방로가 펼쳐져 있다.


 

♠  옛 경희궁의 흔적이자 전통 국궁(國弓)의 성지, 황학정(黃鶴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호


▲  사방이 뻥 뚫린 황학정
황학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밑에 부연을 두어 처마와
추녀의 곡선이 무척 시원스럽다. 정면 중앙에 걸린 황학정 현판은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이 쓴 것이다.
 

사직터널 윗쪽 고개(인왕산입구)에서 종로문화체육센터를 지나 동쪽으로 가면 사직단을 품은
사직공원 서쪽 옆구리이다. 여기서 인왕산길을 조금 타다가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사직로9길을
따라가면 길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에 황학정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한다. 그의 안내를 받아 북
쪽 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전통 활터인 황학정이 자리해 있다.

▲  황학정 표석

▲  황학정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

사직단 북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닦은 황학정은 이 땅에 몇 안되는 전통 활터이다.
조선 후기까지 서울 장안에는 활쏘기를 닦던 사정(射亭)이 많이 있었는데,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자리한 웃대(서촌)에는 등과정을 비롯해 5개의 사정<서촌5사정(西村五射亭)>이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대 무기에서 화살이 제외되자 서울과 전국의 많은 사정이 문을 닫았고
황학정 자리에 있던 등과정 역시 그 거친 흐름을 헤어나지 못하고 바위글씨만 남긴 채 휩쓸려
사라졌다.

활쏘기를 좋아하던 고종 황제는 백성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궁술(弓術)을 장려하기로 했다. 그
래서 1898년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황학정을 지어 활터로 삼고 백성들에게 개방하여
언제든 활을 쏘도록 했다.
고종은 자주 이곳을 찾아 활쏘기를 했는데, 그가 사용했던 활 호미(虎尾)와 화살을 보관하는
전통(箋筒)이 황학정에 전해 내려오다가 1993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천하에 어둠이 내리던 1910년 이후 왜정은 망국의 황궁(皇宮)인 경희궁을 철저히 산산조각을
냈다. 1918년부터 궁궐을 밀어버리면서 주요 건물을 민간에 팔아먹었고, 1922년 황학정 자리
에 고의로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황학정까지 밀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국궁을 하
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왜정과 협상을 벌였고, 돈을 주고 그 건물을 등과정 자리인 이곳으로
가져와 안착을 시켰다.

왜정 이후 황학정은 전국 활터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며, 인왕산 호랑이로 불리던 택견꾼
송덕기(宋德基)가 황학정을 지키기도 했다.
6.25 때 건물이 파괴되면서 활쏘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이후 황학정을 중수하고 한천
각(閑天閣)과 국궁전시관 등 여러 건물을 지었다. 전통 활터가 많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활터 기능을 수행하여 우리나라 전통 궁술의 성지(聖地)로 여전히 추앙을 받는다.

이곳에서는 궁술 대회(매년 12월에 전국궁술경연대회가 열림)와 관련 행사, 활쏘기 체험이 열
리고 있으며, 평일은 물론 휴일에도 활을 쏘는 이들을 자주 구경할 수 있다. 천하 제일의 신
궁(神弓)으로 추앙받는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조선 이성계(李成桂)를 꿈꾸는 궁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모습이 볼만하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궁술 체험 이벤트가 열고 있다. 아직 활
을 만져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생기면 명중률을 떠나서 한번 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황학정은 무료의 공간이나 국궁전시관은 입장료를 받는다. (종로구민은 50% 할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 (사직로9길 15-32 ☎ 02-722-1600)


▲  황학정 내부
천정에는 황학정의 내력 등이 적힌 현판 2개가 걸려 있고, 평방(平枋)에는
태극기와 고종의 어진(御眞)이 나란히 자리한다. 황룡포를 입은 그의
어진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황학정을 세운 그를 기리고자 함이다.

▲  황학정에서 바라본 과녁과 서울 도심
여기서 과녁까지는 대략 130~150m 정도 된다. 평소에는 가깝게 생각했던 그 거리가
여기서만큼은 참 까마득하게 보인다. 남산보다 더 멀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과녁이나 그 주변에 떨어진 화살은 전동식 미니 케이블카에 실어
황학정으로 운반한다.

▲  황학정8경(八景) 바위글씨

황학정 뒷쪽 바위에는 황학정8경을 노래한 바위글씨가 있다. 바위에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
에 글씨를 심었는데, 이들은 1928년 9월 금암 손완근(錦巖 孫完根)이 쓴 것으로 황학정8경이
라 제목을 내세웠지만 정작 황학정은 단 하나도 없고 모두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주변의 풍경을 다루고 있어 제목과 내용이 완전히 따로 논다. 여기서 읊은 8경은 다음과 같으
며, 이중 금천교와 경복궁 담장 옆 수양버들을 제외하고는 그런데로 살아있다.

백악청운(白岳晴雲) - 구름이 맑게 갠 북악산(백악산)
자각추월(紫閣秋月) - 자하문(창의문) 문루 위에 가을 달
모암석조(帽巖夕照) - 인왕산 모자바위에 비치는 석양 빛
방산조휘(榜山朝暉) - 인왕산 바위 위의 아침 햇살
사단노송(社壇老松) - 사직단을 둘러싼 노송
어구수양(御溝垂楊) - 경복궁 담장 옆 배수로 둑의 수양버들
금교수성(禁橋水聲) - 금천교 밑을 흐르는 물소리
운대풍광(雲臺楓光) - 필운대의 단풍 광경


▲  등과정(登科亭) 바위글씨

황학정 뒷쪽에서 계단을 오르면 인왕산길 직전에 등과정 바위글씨가 새겨진 큰 바위가 모습을
비춘다.
바위에 진한 문신처럼 남은 등과정은 서울 장안의 이름난 활터인 서촌5사정의 하나로 그 5사
정이란 등과정과 옥동(玉洞) 등용정. 삼청동 운용정(雲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그리고
누상동 풍소정(風嘯亭)을 일컫는다. 이중 삼청동(三淸洞)은 북촌의 일원인데, 어찌 서촌5사정
에 꼽혔는지 모르겠다.
조선시대에는 활쏘기가 사대부를 비롯한 귀족, 왕족들이 익혀야 될 교양의 하나로 인식되어 5
사정에는 늘 그들로 붐볐다. 무관 같은 경우는 직업상 여기서 활쏘기 연습으로 몸을 풀었고,
다른 이들은 교양 및 수련의 일원으로 몸을 풀었던 것이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군대 무기에서 활이 제외하면서 이들 5사정은 모두 내
리막을 걷게 되었고, 등과정만 유일하게 고종 때 새겨진 바위글씨를 흔적으로 남겨 그의 옛
자리를 귀뜀해준다. 게다가 경희궁의 활터였던 황학정이 왜정 때 이곳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
게 등과정을 계승하였다.


▲  늦가을 물감이 야드르르 번진 황학정입구 숲길 (사직공원 뒷쪽)
황학정을 끝으로 본글은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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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에 포근히 감싸인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홍제천~부암동 나들이 (보현산신각, 박종화가옥, 홍지문, 옥천암, 산모퉁이)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부암동 나들이 '


▲  인왕산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부암동


 

가을이 한참 숙성되던 9월의 끝 무렵, 친한 후배와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인 평
창동과 부암동을 찾았다.
평창동(平倉洞)하면 으리으리한 저택과 빌라가 먼저 떠올릴 정도로 서울의 대표적인 졸부
동네로 꼽힌다. 인근 성북동과 더불어 이 땅의 0.1%가 산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인
데, 이곳이 졸부의 성지(聖地)가 된 것은 북한산(삼각산)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은 빼어난
절경과 더불어 명당 자리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하여 1950년대 이후 돈 꽤나 주무
르던 졸부들이 마구 몰려와 북한산의 살을 마구잡이로 뜯어내고 할퀴며 자리를 가리지 않
고 그들의 모래성을 세운 것이다.

평창동은 북한산으로 가는 길목이라 산꾼과 나들이객 수요가 많다. 하여 졸부들만의 폐쇄
적인 공간이 되는 참상은 면했다. 허나 10초가 멀다하고 나타나는 고래등 집에 온갖 잡동
사니 생각이 다 일어나 정처 없는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허나
그렇다고 너무 주눅은 들
지는 말자~!
제아무리 철옹성 저택이라 한들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모래알 같은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
이다. 그러니 기죽지 말고 당당히 어깨를 피며 졸부들로 고통 받고 있는 평창동을 끌어안
아 보자, 또한 이곳에 서린 명당(明堂)의 기운도 조금씩 챙겨가도록 하자.

우리가
평창동을 찾은 것을 이곳에 서린 명소를 보고자 함이다. 우리 주제에 이런 모래성
을 구입하기는 완전 불가능하니 명소만 쏙 챙겨보고 이옷 동네인 부암동으로 넘어갔다.


 

♠  평창동에서 만난 명소들 (박종화 가옥, 보현산신각)

▲  평창동 박종화 가옥(朴鍾和 家屋) - 등록문화재 89호

평창동의 제일 번화가라 할 수 있는 세검정 새마을금고 주변(서울예술고등학교, 평창동주민센
터 정류장 맞은편)에서 평창11길을 따라 12분 정도 올라가면 평창동에 거의 흔치 않은 기와집
인 박종화 가옥이 마중을 나온다.

돈 냄새가 시끄럽게 진동하는 저택과 빌라 숲속에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이곳은 현대 문학가인
월탄(月灘) 박종화가 살던 집이다. 원래는 악질 친일파인 이기원(李起元, 1880~1937)이 왜정
(倭政) 초기에 동대문 부근인 충신동(忠信洞) 55-5번지에 세운 것으로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두<인(人)으로 쓰기도 아깝다>의 1두로 등재되어 있다. 또한 그의 아비인 이봉의도 왜왕에
게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부자(父子)가 아주 쌍으로 매국노로 악명을 날렸다.

1937년 6월 이기원이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지자 박종화(이하 월탄)가 이 집을 매입해
분가를 했다. 그러다가 1975년 혜화동과 동대문을 잇는 도로(율곡로)가 뚫리면서 집이 그 대
지에 포함되자 평창동으로 옮겨 원형 그대로 복원을 했다. 그는 세상을 뜨던 1981년까지 이곳
에서 늘 펜을 놓지 않았으며, 그가 간 이후에는 자손들이 살고 있다.

※ 월탄 박종화(1901~1981)의 생애
월탄은 1901년 남대문 밖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높은 벼슬을 누린 부유한 양
반가로 그의 할아버지인 박태윤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백지(白紙)와 장
지 등의 종이를 팔아 크게 돈을 불렸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인쇄소와 책방까지 차렸고, 집 사
랑채에 서당을 열어 집안과 지역 젊은이에게 한학과 신학문, 왜어(倭語)를 가르쳤다. 왜어와
신학문 같은 경우는 유능한 왜인을 초빙하여 강사로 삼았다.

월탄은 할아버지한테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배웠고, 15살에 신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청하여
1년 동안 신학문과 왜어를 배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 휘문중고교)에 3등으로 입학을 했
다. 여기서 홍사용(洪思容), 정백(鄭白) 등의 벗과 교류를 했으며, 무려 17살에 혼인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친구와 함께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만세를 불렀으며, 1920년 학교를
졸업하자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했다. 그리고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창간호
의 그의 첫 작품인 '오뇌의 청춘'과 '우윳빛 거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창작의 길에
나선다.
1922년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밀실로 돌아가다','만가' 등의 시와 '영원의 승방
몽'을 내놓았고, 1923년에는 조선 세조 때 활약했던 신숙주(申叔舟)의 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목매이는 여자'를 발표해 충신의 길이 얼마나 가시밭 길인지를 표현했다.

1924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첫 시집인 '흑방비곡'을 냈고, 이어 단편소설인 '순대국'과 '여
명','부세' 등을 차례대로 쓰면서 소설가로 변화를 꾀했다. 1936년 '금삼(錦衫)의 피','대춘
부'를 통해 역사 소설을 탁월하게 엮었으며, 1940년 '다정불심(多情佛心)'을 발표해 역사 소
설가로서 재량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1942년에는 수필집 청태집(靑苔集)을 냈으며, 왜정(倭政
)에 협력하는 나약한 지식인들이 늘어나는 세태를 비판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왜정과 거
리를 두었다.

1946년에는 동국대 교수와 서울신문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 성균관대 교수와 서울시예
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우익 진영의 대표자로 1949년 발족된 한국문학가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55년 예술원 회장이 되어 제1회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1966년 제1회 5.16민족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으로 월탄문학상을 창설, 같은 해 10월에 제1회 월탄문학상을 받았다.

1945년 이후 그의 손에서 태어난 작품은 무진장 많다. 해방과 더불어 냈던 '민족'은 왜정 시
절에 냈던 '여명','전야'와 함께 3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었고 1946년에 '홍경래(洪景來)'를,
1947년에는 '청춘승리','논개(論介)'를 냈고, 1954년에 서울신문사 사장을 그만두고 임진왜란
시리즈를 다시 쓰기 시작하여 총 946회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이후 '황진이(黃眞伊)의 역천(逆天)','벼슬길','여인천하'를 내어 인기를 모았고, 1961년 회
갑 기념으로 '월탄시선(月灘詩選)'을 출간했다. 1962년에는 '자고 가는 저 구름아','제왕3대
'를 연재했고, 1964년 '월탄삼국지(月灘三國誌)'를 한국일보에 4년 동안 연재했다.

1965년에 '아름다운 이 조국'을 중앙일보에, 1966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부산일보에 연재
했고, 1970년에 수필집인 '한자락 세월을 열고'와 기념 사화집(詞華集)인 '영원히 깃을 치는
산'을 내놓았다. 또한 1969년부터 1977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한 '세종대왕'은 우리
나라 신문 소설 가운데 가장 많은 2,456회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말년에는 '화음격음(和
音激音)'과 회고록 '역사는 흐르는데 청산은 말이 없네' 등을 냈다.

1920년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했던 그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에서의 이상 추구를 역사소
설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과 민족혼을 부각시키는데 크게 주력하
여 역사소설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월탄은 인격적으로도 꽤 대인(大人)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집안일을 하던 하인이 죽자 2일 동
안 글을 멈추고 애통해하며 직접 장례식을 치뤄주었고, 그 가족에게 많은 조위금을 건네 그들
을 위로했다. 또한 많은 문학인들과 교분을 쌓으며 술도 많이 마셨는데, 자제력이 강해 술이
취하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한 그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을 세운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외종 사촌형으로 간송의 문화 사업에도 크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부유한 환경에서 살던 그였지만 돈 많은 티를 내지 않았고, 솜버선에 한복을 입고 하얀 고무
신을 신고 다녔다. 원고 기일을 한번도 어기지 않은 성실함으로 단골 신문사와 출판사가 많았
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돈을 뜻하는 '전(錢)에 창을 뜻하는 과(戈)가 2개나 들어있으니 조
심해야 된다'며 물질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광주(光州)에 내려가면 제일 먼저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을 찾아 묵념을 했고, 인천(仁川) 자유
공원에 갔을 때 동행한 문인들이 맥아더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자 왜 다른 나라 사람 동상에
서 사진을 찍냐며 일행을 나무란 일화는 유명하다.

현대 문학의 산실이었던 박종화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별채, 너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누마루를 조수루(釣水樓,
棗樹樓)라 부르며 여기서 '금삼의 피','대춘부','자고가는
저 구름아','세종대왕','아랑의 정조' 등 굵직굵직한 작품을 써내렸다. 그래서 월탄 외에 조
수루주인(釣水樓主人)이란 호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집은 후손들이 살고 있어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다.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자존심을 곱
게 접고 발길을 접어야 했지. 벨을 눌러 간곡하게 관람을 청해도 되겠지만 그럴 의지와 배짱
까지는 없었고, 박종화에 대해서도 딱히 관심이 없다. 붉은 담장 너머로 다는 아니지만 지붕
과 부연이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으니 그 정도로도 족하다.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안으로 들어갈 인연이 생긴다면 그때 자세히 살펴봐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128-1 (평창11길 80)


▲  굳게 잠긴 박종화 가옥 대문

▲  기품이 돋보이는 박종화 가옥 내부 (문화재청 사진)

▲  보현산신각 입구 (입구에 큰 바위가 있음)

박종화 가옥에서 오르막길(평창11길)을 4~5분 정도 오르면 평창동의 지붕인 평창길이 나온다.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평창마을길도 신세를 지고 있는 그 평창길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보현산신각을 알리는 안내문과 함께 고래등 같은 큰 바위가 마중을 한다.

덩굴옷을 걸친 그 바위 밑도리에는 기도처로 쓰이던 조그만 굴이 있다. 보현산신각을 보조하
던 공간으로 산신(山神) 할배가 소원을 잘 들어주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무당과 중생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렸다. 지금은 햇살도 들어오기 힘든 지하 아닌 지하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앞
이 확 트인 공간으로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평창동에 졸부들이 들어와 주
거지가 마구 형성되면서 바위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그 앞에 골목을 내어 시야를 가로 막았다.


▲  고래등 같은 보현산신각 바위의 뒷모습

▲  평창동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호

큰 바위 옆구리를 지나면 의자가 여럿 설치된 조촐한 그늘 쉼터가 나온다. 그 너머로 조그만
석성(石城) 같은 돌담을 두룬 아주 조그만 기와집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집이 평창동의
오랜 명소이자 신앙터인 보현산신각이다.

해발 180m 고지 숲속에 자리한 보현산신각은 이 땅에 흔하고 흔한 산신 제당이다. 보현봉 남
쪽 자락에 안겨 있어 '보현산신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북한산 산신각'이라 불리기
도 한다. 평창동 주민들이 동제(洞祭)를 지내던 곳으로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
난 무속(巫俗) 장소였는데, 지금은 무척 한가해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안에 잘나가던
무속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굿을 벌였다. 굿은 산신각 안에서 하지 않고 산신각 옆이나 입구
에 있는 바위에서 했으며 '산신각(보현산신각)에 올라갔다 왔다'란 말은 그 시절 잘나가던 무
당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산신각은 원래 남산신각(男山神閣)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북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대략 조선 후기로 여겨진다. 지금은 건물 1동이 전부이지만 예전에는 근처에 여산신각(女山神
閣)과 부군당(府君堂), 부군당에 딸린 신목(神木)이 있어 이 일대가 평창동 사람들의 신앙터
로 무척 애지중지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일에 동네 노인들이 돈을 모아 이곳에서 유교식으로
당제를 지냈으며, 제물을 집집마다 분배하여 뒷풀이를 했다.
허나 부군당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녹아 없어지고 여산신각도 1974년에 불에 타 없어지면
서 이 산신각에 통합되었다.

산신각은 나무로 만든 맞배지붕 건물로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매우 조촐한 당집이다. 굳게 잠
긴 내부에는 가로 97cm, 세로 108cm 크기의 여산신도(원래 여산신각에 있었음)가 봉안되어 있
는데, 산신은 청색 도포(道袍)를 입고 관을 썼으며, 왼손에 우선(羽扇)을 들었다. 뒤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엎드려 있고, 왼편에는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무릎을 꿇고 천도복
숭아 3개를 든 쟁반을 들고 있다.
그런데 보통 산신하면 할배 산신을 받들기 마련이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할매 산신을 주인공으
로 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산신각과 산신도(山神圖)를 두었으며, 여산신각이 없어지자 이곳
에 통합하여 주인으로 삼았다. 특히 여산신도는 천하의 유일한 유물로 가치가 높은데, 1923년
8월 24일에 김예안당(金禮安堂)이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 그때 기존의 그림을 버리고 새로 그
린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종이 있는데, 막연히 정유년(丁酉年)이라 새겨져 있어 1897년 또는 1837
년으로 여겨지나 확실한 답은 아니다.

이곳은 흔한 산신각의 하나이지만 여산신을 봉안한 귀중한 신앙 유물로 산신을 받드는 산악신
앙(山岳信仰)과 마을 동제(洞祭)가 어우러진 현장이자 무속 신앙의 현장이다. 그래서 그 가치
를 인정받아 일찌감치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541-1


▲  석축 위에 자리한 보현산신각
산신각과 그곳을 둘러싼 돌담 대문은 동제 외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여기서는 열려라 참깨를 외쳐도 소용이 없음~~!

▲  보현산신각의 옆면

▲  위에서 바라본 보현산신각

▲  보현산신각 옆 돌담 계단길 - 돌담은 산신각 보호를 위해 근래에 씌운 것으로
돌담 대신 기와를 얹힌 흙담으로 했으면 더 정겹지 않았을까 싶다.


 

♠  홍제천(弘濟川)에서 만난 명소들 (홍지문, 옥천암)

▲  홍지문(弘智門)과 탕춘대성(蕩春臺城)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평창동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부암동(付岩洞)으로 넘어오면 세검정교차로(상명대입구)가 나온
다. 여기서 홍은동(弘恩洞)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곽이 마
중을 나온다. (세검정교차로에서도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검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
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 임금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에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줄행랑을 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신완(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
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에 홍
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월 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
선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이다. 원래는 북한산성까
지 싹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
능선,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모두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
능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서쪽(홍은동)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과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인왕산과 북한산의 경계가 되는 홍제천 협곡에 지어진 것으로 탕춘대
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
(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살아온 홍지문은 1921년 1월에 지붕에 쌓인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홍제천의 물을 흘려보내는 오간
대수문(五間大水門)까지 모두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년 7월에 복원되었
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
원할 때 새로 끼어넣은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을 금지 구역으로 삼았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방면 성곽 3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뒷쪽에서 접근해야 된다.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놓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에는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검정과 옥
천암은 물론 멀리 홍제천인공폭포와 사천교, 한강까지 연결된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  북한산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탕춘대성 (탕춘대능선 남쪽 끝)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하는 경우
에는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 
하다.


▲  홍제천 건너에서 바라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홍지문에서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면 하얀 암반을 앞에 내밀며 큰 바위에 살포
시 깃든 하얀 피부의 커다란 불상이 크게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바로 상서로운 관세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 백불'이라
많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 홍제천변에 있어서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
가 된 19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과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
불'은 구한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절,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참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한
문이 있는데, 바로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으
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이,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보도각에 깃든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로 고려 말에 조
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작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
과 비슷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같은
사람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의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의 관음굴 석조보살반가상과 비교되는 고
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운 왜군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
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모두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
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에서
일어났던 권율 장군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까
지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胡粉,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으로 불상 전체를 하얗게 도배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의 소유자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
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뒷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마애불로 명성이 높았다.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영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
이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철썩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
과 동전이 적지 않게 보인다. (동전은 옥천암에서 부수입거리로 계속 수거하고 있어서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을 것
이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져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시내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온통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모두
하얀색이었으나 이후 금색으로 갈았고 2016년 이후에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
리고 귀걸이까지 정말 관세음보살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
로 중생들의 소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
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一'자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보살상의 몸을 덮고 있
는 옷 주름은 세세히 묘사되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아 보인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기도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접수만
하느라 힘도 제법 들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하며 소
망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는 모
르지만 그 정성이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
절히 기원해 본다.


▲  백불 옆에 자리한 옥천암(玉泉庵)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세음보살이라 자연
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
서의 자부심이 대단한지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해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 탄산약수가 아닐까?
)이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
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진작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
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藏義寺, 세
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가 1396년에 태조의 도움으로 세웠
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질없는 답이
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다.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을 지으면서 삼성각의 기능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년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달았다.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절 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속세의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문화유산이 없
고 주택가와 접해 있어 산사의 내음은 좀 떨어진다.

* 옥천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  부암동 산모퉁이까페

▲  언덕에 자리한 산모퉁이

창의문(자하문)에서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부암동 산복도로(백석동길)
를 10분 정도 오르면 아담하게 수식된 별장 같은 산모퉁이 까페가 모습을 비춘다. 서울 도심
과 인왕산이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에 뿌리를 내린 이 까페는 갤러리를 갖춘 갤러리까페로 2007
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이곳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원래는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목인박물관 유물의 수장고
이자 작업실이었다. 그러다가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절찬리에 쓰이면서 세상에 주목을 받
았고<그 드라마에서 '최한성'이란 인물의 집으로 나왔음> 시청자들로부터 누구나 찾을 수 있
는 공간으로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면서 목인박물관장은 갤러리를 갖춘 까페로 꾸며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니까 그 드라마의 후광(後光)으로 어두컴컴했던 창고가 새로운 명소이자 돈을
쓸어 담는 꿀단지로 찬란한 변신을 한 것이다.

많은 까페가 서양식 이름을 쓰는데 반해 이곳은 순수한 우리말인 '산모퉁이'를 까페의 이름으
로 삼았다. 그래서 적지 않게 정감이 간다. 산모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산모퉁이에 자
리해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  산모퉁이 2층 라운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까페 정원에는 문인석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석인상과 동물 모양의 석상(
石像), 조그만 자동차 모형과 옛날 디자인의 노란색 자동차가 뜨락을 채우고 있다. 지하 1층
은 갤러리로 아시아 곳곳에서 가져온 예술품이 진열되어 있어 조그만 미술관을 이룬다. 물론
여기서도 차를 마실 수 있다.

1층에는 카운터가 있으며, 여기서 차를 주문하면 된다. 1층과 2층은 차를 마시는 라운지로 2
층 옥상에는 조망이 일품인 야외데크가 있어 산 아래 펼쳐진 부암동의 전원 풍경과 창의문 너
머로 펼쳐지는 서울 도심을 바라보며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특히 햇님이 휘장을 치
고 몸을 숨기는 밤에는 서울의 숨막히는 야경(夜景)을 즐길 수 있으며, 분위기를 강조한 까페
라 청춘남녀의 발길도 빈번하다.

이곳에서 파는 것은 커피류와 홍차, 쿠키, 케익 등으로 유명세 때문인지 시중보다 가격은 조
금 비싸다. 얄미운 수준의 가격이지만 이곳의 명성과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은 물처럼
끊기지가 않는다. (영업시간 11시~22시)


▲  까페 뜨락에 놓인 산모퉁이의 모델, 노란 자동차

까페 앞뜨락에는 이곳에 모델이자 상징인 노란 자동차가 바퀴를 접고 쉬고 있다. 드라마에 나
온 차량으로 까페를 찾은 사람들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데, 저 차량을 보는 순간 우리나라가
아닌 20세기 초반 유럽이나 미대륙의 어느 별장이나 집에 들어선 기분이다. 차 하나의 이렇게
기분이 달라지다니 까페 주인의 미적 감각이 대단하다 여겨진다.


▲  까페 현관에 자리한 2마리의 동물상
호랑이로 보이는 저들의 표정은 너무 익살스럽고 밝은 모습이다. 까페의
수입도 상당할 것이니 그래서 기분이 좋은가 보다.

▲  말 모양의 석상 2기

▲  문인석(文人石) 2기와 조그만 장난감 차

▲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 소품과
촬영 장면을 담은 그림 4장

▲  지하1층 현관에 있는 자태가
고운 호랑이상


▲  산모퉁이에서 일행들과 마신 커피들의 집합

커피에는 거품으로 꽃을 비롯한 다양한 문양을 넣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 문양이 아름
다워 후루룩 마시기에 아까운 마음도 들지만 우리네 인생살이가 바로 저 거품의 문양처럼 부
질이 없다. 문양이 아름답다 한들 얼마나 가겠는가? 흐트러지면 형편없이 사라지는 것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97-5 (☎ 02-391-4737)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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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의 성지이자 도심 속의 상큼한 언덕, 청운동 윤동주시인의 언덕 ~~~ (윤동주소나무,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윤동주 시인의 언덕(청운공원) ~~~

▲  윤동주시인의 언덕 소나무


 

♠  청운공원에 마련된 새로운 명소, 문향(文香)이 깃든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세워진 서시 시비(詩碑)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서울 도심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자하문(紫霞門)고개 정상에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도심
을 굽어보고 있다.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남쪽에 둥지를 튼 이곳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공원이자 인왕산 동쪽 자락에 조성된 청운공원(淸雲公園)의 일부로 2009년 6월,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고자 공원에서 가장 높은 북쪽에 조촐하게 자리를 닦았다.
언덕의 이름이 그의 이름에 걸맞게 매우 시적(詩的)이면서도 서정적이라 가슴에 꽤 와닿는데
그 이름은 '윤동주 문학사상선양회'의 회장을 맡았던 박영우씨가 지은 것이다.

윤동주 언덕이라 하여 크게 특별한 것은 없다. 높다란 언덕에 잔디를 입히고, 소나무와 여러
키 작은 나무를 심었으며, 윤동주의 시를 머금은 비석을 여럿 세운 그저 평범한 공원이다 성
곽과 소나무 사이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바람에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이 정화되며,
앞뒤로 보이는 조망(眺望)도 가히 명품이다. 게다가 공원의 분위기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절로
시 한 수 읊고 싶은 마음을 솟구치게 하는 그야말로 시상(詩想)의 공간이다. <언덕의 이름도
시상을 크게 적지 않게 돋구고 있음>

이곳이 윤동주의 언덕이 된 사연은 대략 이렇다.
윤동주는 1941년 누상동(樓上洞)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연희전문대학(현 연세대) 후배
인 정병욱(鄭炳昱)과 하숙생활을 했다. 그는 하숙집에서 가까운 자하문고개와 지금의 청운공
원 일대를 수시로 찾아와 시를 짓고 구상을 했다고 하는데, '별헤는 밤'과 '서시'를 바로 이
언덕에서 지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협조를 얻
어 언덕을 조성한 것이다.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고자 했는데, 그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바로 서
시로 출간까지는 하지 못하고, 3부를 필사하여 이양하(李敭河)와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했다.
이후 세상이 좀 진정되면서 정병욱이 보관하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  윤동주의 초상화 -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초상화한 것이다.

※ 윤동주(1917~1945년)의 간략한 생애
윤동주는 왜정 때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이름 3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고
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서시를 비롯한 그의 굵직한 작품들이 정말 지겹게 나오니 말이다.
지금도 이름이 또렷한 윤동주는 1917년 12월, 두만강(豆滿江) 이북인 북간도(北間島) 명동촌(
明洞村)에서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학교를 다니던 중 용정(龍井)으로 이사를 가면
서 1933년 그곳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1935년 본토로 넘어와 평양 숭실(崇
實)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왜정(倭政)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다
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문과에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했는데, 학교 기숙사의 식사
가 부실해지면서 후배 정병욱과 누상동에 하숙집을 얻어 잠시 살다가 그해 5월 그믐날에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고자 옥인동을 기웃거리던 중,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있던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래서 혹시나해서 그 집을 찾아가니 문패에는 '김송(金松)'이라 쓰여 있었다. 마침 그는 소
설가 김송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 김송?' 생각하며 문을 두드리니 글쎄 그 김송이 나
타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송 집에서 4개월 정도(1941년 5월~9월) 하숙을 했으며, 저녁 식사가 끝나면 김
송 가족과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거나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로는 성악가인
김송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

김송 집에 머무는 동안 인근 자하문고개를 수시로 올라가 시를 구상했다고 하며 그 현장이 바
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다. 또한 이때 많은 시가 쓰여졌는데, 마음을 주고 받는 후배가 곁에
있었고, 자신이 존경하는 이의 집에 머물며 그의 가족에게 호의를 받으니 마음도 즐겁고 덩달
아 작품 구상도 잘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붓과 머리가 흥분하여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자명
한 것이다.

1941년 9월, 김송과 작별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東京) 릿쿄(敎)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으
며, 1942년 도시샤대학(同學) 영문과로 자리를 옮겼다. 허나 1943년 7월 학업을 멈추고
잠시 고향으로 가려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왜경에 급히 체포되었다.
왜경은 그에게 변론의 기회도 제대로 안주고 무조건 징역 2년형을 때려 후꾸오카 형무소에 집
어넣었는데 거기서 잔인한 생체 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회
한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목격담에 따르면 그는 정체를 아리
송한 주사를 계속 강제로 맞았다고 하니, 결국 왜국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천재시인 윤동주는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강제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조부(祖父)의 영향으로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동생인 윤일주(
)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은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지식인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5살에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첫 작품은 '삶과 죽음'과 '초한대'이다. 이후 '병아리(
1936년 11월)','빗자루(1936년 12월)','오줌싸개 지도(1937년 1월)','무얼 먹구사나(1937년 3
월)','거짓부리(1937년 10월)' 등을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카톨릭소년' 잡지에 소개했
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를 냈고, 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실었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가 1946년 경향신문에 실렸다.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
려고 했으나 내지 못하고 대신 3부를 필사해 정병욱과 이양하에게 1부씩 주었다. 바로 그 시
집의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그 유명한 서시로 해방 이후 1948년에 이르러 정병욱과 윤
일주에 의해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와 성년 이후의 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소년기에 쓰여진
시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대체로 어린 시절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
다. 대표작으로는 '겨울'과 '버선본' 등이 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자아성
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왜정 시절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시가 주류를 이루니 '서
시','자화상','또 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 시로 어둠의 시절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
면 세계를 표현했다.

그는 비록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우
리나라 뿐 아니라 왜열도와 중원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그가 다닌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많은 이
들이 헌화를 하고 그를 기린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 문학계
의 큰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간도 용정으로 가져와 묘를 썼다. 허나 그 무덤도 한때 위
치를 몰라 방황하다가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왜인 교수의 노력으로 간신히 묘비를 찾았
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대륙의 공산당 정부가 국교를 맺자 가족들은 봉분을 단장하고 묘비
도 새로 세웠으며, 그의 명동촌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윤동주 관련 단체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윤동주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는 굵직한 시인들이 꽤 많지만 윤동주만큼 인기와 사랑이 대단한 시인도 손에 꼽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비록 왜의 잔악무도한
만행으로 일찍 눈을 감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 길이길이
깃들여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영원한 문학신(文學神)이다.


▲  언덕 정상에 박힌 윤동주시인의 언덕 표석

윤동주시인의 언덕은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길 듯한 느긋한 언덕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현실은 조금 가파른 언덕이다. 서울을 지키는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이 만
나는 자하문고개에 있다보니 그런 것인데, 고갯길에서 언덕 동쪽으로 오르는 길이 경사가 좀
각박하지만 지름길이며, 윤동주문학관 뒷쪽으로 오르는 길과 청운공원으로 가는 길(자하문로
35길)을 이용하는 것이 언덕의 날카로운 기세를 피하기가 좋다.


▲  늦가을 햇살 속에 한가롭게 졸고 있는 야외 공연장

푸른 잔디와 나무들이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 언덕 정상에는 언덕의 이름을 드러낸 두툼하게
생긴 표석이 누워있고, 조그만 야외 공연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윤동주 시 낭송회와 백일장,
문예 관련 여러 행사와 공연이 열린다.


▲  시비 앞면을 장식하는 '서시'

▲  시비 뒷면을 장식하는 '슬픈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초기에 쓴 것으로 어둠의 시절
속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슬픈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흰색은 백의민족인 우리를 뜻한다고 하며,
삶과 밝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언덕 정상 남쪽에는 서시가 적힌 커다란 시비가 있는데, 대부분은 앞면만 보고 지나친다. 허
나 뒤에도 시가 숨겨져 있으니 시비의 속임수에 속지 말자. 뒤에 새겨진 시는 슬픈족속이다.


▲  늦가을도 잠시 길을 멈춘 윤동주 시인의 언덕 북쪽 산책로
<오른쪽에 보이는 건 한양도성(사적 10호)>


언덕 북쪽에는 옛 한양도성의 성곽(城郭)이 길게 둘러져 있다. 이 언덕은 성곽 안쪽으로 성곽
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서쪽으로 인왕산과 이어지나 인왕산길로 잠깐 끊기며, 동쪽으로 자하
문과 이어지지만 문 서쪽에 언덕을 깎고 자하문로를 뚫으면서 서로가 끊겨버렸다. 그래서 윤
동주 언덕의 성곽은 양쪽이 끊어진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소나무 (윤동주 소나무)

언덕 성곽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청한 소나무 1그루가 마치 성곽을 지키는 군사처럼 서 있
다. 나무 곁에 서면 성곽 여장 너머로 도성 밖 경승지이자 도심 속의 전원(田園)마을인 부암
동과 평창동(平倉洞)이 앞다투어 두 눈 아래 펼쳐지고 그 너머로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
(삼각산)이 든든한 모습으로 서울을 살핀다.

이 나무는 윤동주가 시를 구상하던 곳이라고 하며, 일명 윤동주 소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흔
히 볼 수 있는 소나무지만 어둠의 시절, 민족을 향한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그의 얼이 깃들여
진 듯 청초하고 고고해 보이며,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주변을 보는 모습도 예사롭지가 않아 보
인다. 정말 그가 저 나무 그늘에서 시를 구상했는지 낮잠만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윤동주 언덕
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나무로 나름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천하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부암동과
홍지동(弘智洞) 일대, 그리고 저 멀리 북한산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인왕산길

▲  윤동주 영혼의 터

야외공연장에서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 잔디밭을 유심히 살펴보면 땅에 박힌 표석
이 하나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표석은 윤동주 영혼의 터로 서시 시비의 뒷면처럼 많이들 지
나치는데, 이곳은 간도 용정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뿌린 곳으로 그 위에 표
석을 박았다. 즉 그의 소소한 가묘(假墓)가 되는 셈이다. 영혼의 터라고 하니 조금은 오싹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그만큼 근사한 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서시정(序詩亭)

언덕 서쪽 밑에는 서시정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정자가 도심을 굽어보고 있다. 2009년 언
덕을 꾸미면서 지은 것으로 윤동주의 서시를 따서 서시정이라 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정자로 이곳에 몸을 들여 남쪽을 보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심장부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특히 야경이 멋짐)


 

♠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시민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웃대)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청운공원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
은 공원이다. <산 전체 또는 대부분이 공원으로 지정된 남산과 안산(鞍山), 낙산공원은 제외>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새로운 꿀단지를 동쪽에 달고 있는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으로 청운
동 주택가와도 약간 거리를 둔 자연 지대이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가며 자
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로 간판을 갈고 북악산 뒷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
려간다.

청운공원은 평범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원 동쪽에 윤동주시인
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들어서면서 예전보다 인기가 늘어졌다. 윤동주언덕도 엄연히 청운
공원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공원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
데로 일품이며, 북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
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
들이 울창하여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
잎이 늦가을의 향연을 베푸는 도심 속 경승지이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교통편은 아래 윤동주문학관 참조)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로35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좀 각박
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못미쳐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
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과 수성동(水聲洞)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루던 때라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끼와 기력을 모두 발산하는 나무들과 죽
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들.. 인간은 그
들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 서부 (오른쪽에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꿈의 분수')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청운공원 서쪽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일 2
번 정도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
주는 정도이다. 가동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
시까지이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가동 시간은 변경될 수 있음)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
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남쪽에 자리한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
만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
지 너무 순둥이처럼 만들어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씹
어먹었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인데 그들을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인왕산 돌아파트)'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
에서 주운 돌들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윤동주 언덕 밑에 자리한 윤동주문학관

▲  화려한 나비를 꿈꾸는 윤동주 문학전시관(윤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밑이자 자하문고개 정류장 부근에 시인 윤동주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
이 심플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곳에는 원래 청운동 수도가압장 건물이 있었는데 빈 채로 버려져 있던 것을 2009년 윤동주
의 언덕을 만들면서 우선 급한데로 문학관으로 손질하여 정신적 영혼의 가압장이 되었다. 속
은 문학관일지 몰라도 겉은 문학과는 담을 쌓은 우울한 모습이었는데,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에서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오랜 번데기 생활 끝에 2012년 7월 25일 지금의 모습
으로 화려하게 태어났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11년 3월로 그해 연말까지 여러 번 발걸음을 했는데, 당시 내
부는 좀 어수선했다. 공개시간이 있긴 하지만 평일에는 일찌감치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으며,
처음에는 정문 옆에 조그만 문으로 입장을 해야 했다. 그런 공간이 이제는 윤동주를 닮은 세
련된 문학적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번데기를 탈피한 이 문학관은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 부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으며 우
리나라 현대건축 Best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나비로 태어난
셈이다. (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았고, 2015년에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됨)

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있는데, 제1전시실(시인채)에는 윤동주의 손때가 진하게 담
긴 친필 원고와 온갖 문서와 서적들, 사진, 윤동주 모교의 의자와 등사기(謄寫機), 떡판 등
그의 유품 133점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열린우물)은 옛 가압장의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
하여 중정(中庭)으로 만들어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3전시실(닫힌
우물)은 물탱크를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그 안에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담은 동영상을
상영한다. 그 외에 '별뜨락'이란 쉼터를 만들어 서울 도심을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문학관에 진열된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주목을 끄는 존재가 하나 있는데, 그건 그의 생가에서
가져온 나무 우물이다. 우물의 목판은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회장인 박영우씨가 직접 간도 용
정에서 가져온 것으로 땅을 깊게 파고 그 우물을 보호하고자 나무 판을 4단으로 얹힌 점이 특
징이며, 이곳에 안착한 우물은 이제 우물 기능은 상실되고 무늬만 남은 늙은 우물이 되었다.
전시관 안이다보니 깊게 땅을 뚫을 수도 없고, 마땅한 수맥도 없기 때문이다.


▲  윤동주문학관에 진열된 그의 유품과 초상화들 (2012년 이전)

▲  윤동주의 모교에서 가져온 조그만 의자 (2012년 이전)

요즘 초등학교에서 저런 나무 의자를 쓸까? 내 초등학교 시절(1~3학년)까지만 해도 저거와 똑
같은 의자에 앉았는데, 기억도 흐릿한 그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해준 정겨운 의자이다.


▲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윤동주가 교토 도시샤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학교 친구들과 우지강<우지천(宇治川), 요도가와
강> 강변으로 마실을 나가 찍은 사진이다. 이때 왜인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자 그
는 아리랑을 우수에 찬 모습으로 불렀다고 한다.
허나 그때까지만 해도 윤동주나 그의 친구들이나 그것이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
다. 얼마 뒤 그는 왜경에 끌려가 후꾸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비온 뒤 잠깐 모습을 드
러낸 무지개처럼 짧은 인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그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친구들은 크게 통곡하며 그를 애도했다.


▲  윤동주 생가에서 수습해온 나무 우물
우물 위에 두룬 나무판을 가져와 복원한 것이다. 대략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져 중후한 멋을 풍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찾아가기 (2018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
  동주 문학관)에서 하차, 길 건너편에 윤동주문학관과 언덕이 있다.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윤동주문학관 관람정보 (2018년 11월 기준)
* 문학관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은 쉼)
*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관람시간 제한이 없는 열린 공간이다.
* 입장료 없음. 문학관 해설사 운영
* 매년 5월에 윤동주문화제가 열린다. (시낭송회와 백일장, 윤동주상 시상식, 문학콘서트, 문
  학둘레길 걷기대회 등의 행사가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3-100 (창의문로 119 ☎ 02-2148-4175)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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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1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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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부암동 산책 '

▲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하
게 들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付岩洞)이 포근히 안
겨져 있는데서울 도심과는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라 '
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의구심을 던질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분위기
를 지니고 있다.

부암동은 3개의 뫼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세검정로와 자하문로를 중심으로 가늘게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을 뿐, 6층을 넘는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대부분 정원이 딸린
주택이거나 빌라들이며, 밭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특히 산자락에 터전을 일군 집들은 지
방의 시골 마을이나 산골 읍내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진하게 선사한다.
도심이 바로 코 앞임에도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지정학적 위치로 오랜 세월 개발제
한에 묶인 탓이다.
이렇듯 도심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와 그곳에 깃든 아름다운 풍경으로 조선 초부터 양반사
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자연에 동화되어 살고 싶었던 그
들의 팔자 좋은 바램은 부암동 곳곳에 그림 같은 경승지와 흔적을 빚어놓았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부암동에는 오래된 볼거리가 풍부해 옛 것과 자연에 목말라하는 나그네를 유
혹한다. 북악산 북쪽 백사골(백사실)에는 옛 별서(別墅) 유적인 백석동천(白石洞天)이 숨
겨져 있고, 백사골 상류에는 도심 속 두메산골로 통하는 뒷골마을(능금마을)이 강원도 산
간의 분위기를 선사하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현장이자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
없는 야망이 서린 무계정사터,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구한말에 지어진 반
계 윤웅렬 별장, 인왕산 자락의 경승지인 청계동천(淸溪洞天), 석파정의 별당과 순정효황
후의 집이 하나로 묶여진 석파랑 등이 있다.
그 외에 응선사 산신도(山神圖), 성불사 금동보현보살좌상 등의 불교문화유산이 있고,
울미술관,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등의 미술관, 산모퉁이 등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와 찻
, 온갖 식당들로 즐비하다.

부암동 북쪽으로 흘러가는 홍제천(弘濟川)1970년대까지 서울 시민들의 소풍, 피서지로
각광을 받던 곳으로 세검정, 장의사(藏義寺)터 당간지주(幢竿支柱), 춘원 이광수(春園 李
光洙)의 별장터, 탕춘대성과 홍지문이 있다. 또한 서쪽으로 조금 확장하면 옥천암과 그곳
에 깃든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이 있다.
서울 장안에서 4대문 안을 제외하고 문화유적과 볼거리가 많이 산재한 동네로 넉넉잡아 5
~6시간 정도면 상당수의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상의 시간을 던져 더 많은 곳
을 더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도 좋다.

부암동은 나의 즐겨찾기의 1곳으로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봄의 한
복판을 맞이하여 다시 부암동으로 들어가 홍제천을 따라 여러 명소를 흔쾌히 사진에 담았
고 그 명소를 요리하여 이렇게 글로 다시 내놓는다.


 

♠  도성 밖 경승지이자 시민들의 소풍/피서지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던,
허나 개발의 칼질로 이제는 이름만 남은, 세검정
(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

신영동3거리에서 홍은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멋드러진 바위에 걸터앉아 홍제천을 바라
보고 선 단아한 모습의 세검정이 마중을 한다.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연산군이 1506년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좌
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옆으로 긴 누각을 세우니 그것이 세검정의 시작이
라고 한다. 물론 그때는 세검정이라 불리지 않았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
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
해군의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그들은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자하문(창의문)을 뚫
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로 옹
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
하고 칼을 씻었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肅宗)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다시 세웠다고 하며 영
조 시절인 1748년 총융청(摠戎廳)이 탕춘대 자리로 이전되면서 현재의 세검정이 지어졌다. (
이때 새로 정자를 지었다고 함)
이후 이곳은 자하문 밖(자문 밖) 경승지로 명성을 누렸는데 1749년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이 벗 25명과 여기서 봄놀이를 가졌으며, 1790년 정조 임금이 연융대(鍊戎臺)에서 활쏘기 시
험을 참관하고 세검정에 들렸다가 정자에 걸린 영조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을 보고 시를 남기
니 내용은 이렇다.

군사 정돈하는 뜻으로 이 정자에 임어(臨御)하니
북한산 높은 하늘에 뿔피리 소리도 맑구나
사랑스럽다 근원이 있는 샘물은 매우 힘차서
시원한 물 한줄기에 온 산이 쩡쩡 울리네

1791년 여름,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이곳을 다녀가 세검정의 명물인 물구경을 했다. 1941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 겸재 정선(謙齋 鄭敾)'세검정도'
참조하여 복원했다. <세검정은 '세검정터'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4로 지정되어 있음>

▲  옆에서 바라본 세검정

▲  세검정의 뒷모습

세검정은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
림 같은 현장이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채취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아왔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 특히 1899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여학생
들이 여기로 소풍을 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스도인 화
'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자하문) 밖으
로 화류(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
..'

왜정(倭政) 이후,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과 홍
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온 동네에 진동했
.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질
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하여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
기 나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했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
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현재 세검정은 그 뒷통수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아직도 덜 걸러진 홍제천의
쾌쾌한 냄새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 홍제천이 예전보다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린
내는 여전하며 하천 너머로 주택들이 가득해 옛날의 운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긴 서울 땅
에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거나 고립된 경승지가 어디 한둘이랴. 너무 사람과 개발만
생각하여 일을 저지르다보니 옛 경승지와 자연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  세검정의 오랜 단짝,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적한 반석(磐石)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시대에 사초를 깨
끗히 세초(洗草)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조선왕조실록의 모태가 되는 사초(史草)를 실록(實錄)으로 편찬한 다음, 사초에 적힌
글씨를 물로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이다. 그것을 마치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
)을 가졌는데 이때 바위에 햇빛을 가리는 천막인 차일(遮日)을 치며 잔치를 했다. 하여 차
일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차일암에는 차일 기둥을 세우고자 파놓은 구멍들이 있으며 오랫동안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었다. 무더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
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이나 주변 환경이 고약하게 변한 탓에 이제는 그러기가 곤란해졌
. 비록 인간들이 주변에 씌워놓은온갖 굴레들은 어쩌지 못해도 홍제천의 수질만큼은 더 깨
끗하게 거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도 여전히 어려운 모양이다.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따라 동쪽으로 200m 남짓의 산책로가 닦여져 있으며, 그 길의 끝에는 간
단하게 몸을 풀 수 있는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근래 세검정 밑에서 세검1교 밑도
리로 징검다리가 놓였는데, 그 다리를 통해 홍제천 옆 산책로를 따라 홍지문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 다만 물이 아직 깨끗하지 않으니 손이나 발은 담구지 말자.


▲  늦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세검정 산책로

▲  세검정 동쪽 홍제천 산책로
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부암동의 꿀단지, 백사실계곡(백사골)이 숨겨져 있다.


세검정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을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로 244)

         ◀  탕춘대(蕩春臺)터 표석
탕춘대는 1506년 연산군이 세운 누대(樓臺)
홍제천 바위에 자리했다. (표석은 그 위치가
아님) 이후 영조 시절에 여기서 군사를 훈련시
키면서 연융대(鍊戎臺)로 이름이 갈렸다.
(세검정 동쪽 길가)

         ◀  탕춘대 한지마을터 표석
조선 때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
) 소속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다. (세검정초
교 정류장 부근)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기와집,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

세검정을 둘러보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상명대입구인 세검정교차로이다. 여기서 서남쪽 길 건
너편으로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 집이 석파정 별당
을 품고 있는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이다.

지금은 비록 식당이지만 원래는 서예가이자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
, 1903~1981)의 별서였다.
그는 1945년 왜열도로 건너가 왜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가 가지고 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의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를 천신만고 끝에 받아온 인물로 유명하며, 6.25시절 서울을 점령
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
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문화유산의 강제 북송을 막아내기도 했다.

소전은 금수저 출신(전남 진도 대지주의 아들임)으로 1963년 이곳에 별서를 지었다. 집을 새
로 짓지 않고 도심에 있던 김옥균(金玉均) 가옥, 박영효(朴泳孝) 가옥, 이완용(李完用) 별장,
기생 나합(羅閤) 양씨의 집 등의 한옥을 구입하여 그 자재로 집을 지었다. 또한 태평로 확장
으로 덕수궁(경운궁)의 동쪽 돌담이 철거되었을 때 이를 모두 매입해 석파랑 돌담과 정원 축
대를 쌓을 때 사용했는데 자그마치 트럭 30대 분이었다고 한다. (운현궁 돌담도 사들였음)

그의 별서는 1969년 완성을 보았으며, 1958년에 매입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옥인
(玉仁洞) 집을 별서 북쪽에 두고, 같은 해에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石坡亭)에서 가져
온 별당은 뒤쪽에 두었다. 또한 당시로는 그리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
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재력이 엄청났음을 보여준다,

자기의 별서를 조그만 한옥 전시장으로 꾸민 소전은 1981년 세상을 떴고 그의 후손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주인이 바뀌면서 비싼 한정식당으로 바뀌었다. 석파정 별당의 이름을 따서 석
파랑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오랫동안 손님 외에는 내부 접근이 어려웠으나 2000년대 이후 빗
장이 열려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이곳은 부암동의 주요 명소로 크게 존
재감을 드러내어 사진쟁이와 답사객의 발길이 늘고 있다. 허나 이곳은 엄연히 개인 식당이기
때문에 별당을 비롯한 건물 내부는 마구 들어가서는 안되며, 18시나 일몰 이후에는 식당 영업
을 위해 관람을 가급적 피해주기 바란다.


▲  석파랑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자 형태로 3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가운데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며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속살을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
개되었다. (서울미술관 개장으로 개방됨)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법칙에 따라 별
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나 서로 떨어진지 60년이 넘은 상태고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소유, 석파정에서 떨어져 나온 별당
은 석파랑 소유임>


▲  석파정 별당 쪽마루와 섬돌
대청방 문을 살며시 열면 그 안에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섬돌에 신발들이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방에서 사람들이 한정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대원군의 별
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아직 방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음)
별당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에서 접근하거나 석파랑 전용 주차장에서 스톤힐로 이
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


▲  석파랑 본채 동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과 스톤힐 정문

별당 옆에 조성된 돌계단과 돌문, 성곽처럼 다져진 석축은 석파랑에서 스톤힐이란 건물을 지
으면서 닦은 것들이다. 스톤힐(Stone hill)은 이탈리안 음식과 와인을 취급하는 식당으로 전
통과 고풍스런 멋이 깃든 석파랑과 완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데, 그 옆에 빨간 피부
를 지닌 홍지동 산신각이 있다.
돌의 언덕을 뜻하는 '스톤힐'에 걸맞게 하얀 돌로 그 길목을 꾸민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하지
만 소나무가 무성한 주변 풍경과는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으며, 스톤힐을 만들면서 석파정 별
당의 석축까지 진하게 다져놓아 마치 성곽 위에 집처럼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  150년 이상 묵은 석파랑 감나무 (가운데 나무)

▲  활짝 열린 석파랑 대문(정문)
지금은 모두에게 개방된 착한 문이지만 예전에는 비싼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만 입을 벌리는 차가운 문이었다.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본채는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뜨락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 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
1898년 경복궁에 세운 것인데 심술 고약한 왜정이 이를 매각하자 소전이 매입하여 옮겨놓
은 것이다.
비록 제자리는 잃었지만 소전 덕분에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궁궐 건축물의 고품격이 고
스란히 배여있다. 그리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뜨락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
으며 조그만 절구통과 다양한 석물, , 나무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  석파랑의 중심인 본채
최대 50명까지 밥 손님 수용이 가능하며, 석파랑의 값비싼 한정식을 지어내는
부엌이 이곳에 들어있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세검정교회) 하차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서 1711, 7016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시내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
  3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랑 본채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자하문로 309,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침(붙임)바위는 부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유명한 바위이다. 바위 피부에 난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거나 바위에 붙인 돌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돌이 척 붙으면 아들을 낳
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와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애뜻한 현장으로 바
위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에 무참히 난도
질을 당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위터에 표석을 세워 그가 있던 자리임을 아련하
게 전해줄 따름이며, 세검정교차로 공원에 그를 추억하는 표석을 세웠다. 허나 아무리 그런다
고 강제로 사라진 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도시화
의 거친 물결과 인간의 욕심으로 많은 바위가 세월의 저 편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말았다.
런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
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버렸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며 도성의 수비력을 높였던
탕춘대성과 홍지문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


▲  고된 세월의 때와 하얀 피부가 공존하는 홍지문

석파랑을 둘러보고 홍은동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
곽이 마중을 나온다. (석파랑 옆 세검정교차로에서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세검
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
서 서성(西)으로도 불리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세우려고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8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
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을 거
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
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싹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능
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홍제천의 물을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오간대수문 (동쪽 모습)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홍제천은 저 문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간다. 마치 냇물 위에
5개의 무지개를 보듯, 유연하게 구부러진 홍예의 곡선이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은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
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지내온 홍지문은 19211, 지붕에 쌓인 세월의 장대한 무게를 감당하
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지 홍수로 싹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7월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은 금지 구역이 되었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쪽 성곽 2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주변으로 돌아가야 된다. 또한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닦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홍제천 북쪽에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
검정과 옥천암까지 이어진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弘恩洞)이다.


 홍지문의 야경 (홍지문의 앞 모습)
홍지문은 더 이상 서울 수비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과 관광지의 의무와 성격만 지니고 있으며,
문은 24시간 열어두고 있다.

 홍지문 천정을 장식하고 있는 고운
빛깔의 와운문(渦雲紋)

▲  홍체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의
북쪽 홍예문들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한 경우에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홍지문 찾아가기 (2018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북한산 끝자락 홍제천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고려 후기에
조성된 거대한 하얀 마애불을 간직한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홍제천 남쪽에서 바라본 옥천암 (왼쪽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이 옥천암)

홍지문에서 한강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다보면 하
얀 암반이 일품인 하천 건너로 하얀 피부의 커다란 마애불상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명물이자 상서로운 관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백불'로 많
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
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홍
제천변에 있어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가 된 19
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불'은 구한
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
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암자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정말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
한 문이 있는데, 그가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
으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의 일원으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과 비슷
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고려 후기에
같은 사람이나 지역 세력가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에 있는 관음굴 석조보살반
가상과 비교되는 고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은 왜군들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보기좋게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
에서 일어났던 권율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
으로 불상을 하얗게 도배를 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옆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인해 예로부터 영험이 깊은 석불로 명성이 높았
.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이
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과 동전
이 적지 않다. (절에서 동전을 계속 수거하고 있어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
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도심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금
색으로 되어있다가 2016년 이후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 건 귀걸이
까지 정말 관음보살 누님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
들의 소원과 고충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는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며 고민거리를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들어주느라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닐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
로 그들을 맞이해 고충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
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성이 부디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  조그만 기와문을 지나면 조촐한 옥천암 경내가 펼쳐진다.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음보살이다보니 자
연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이 땅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서의 자
부심이 대단하여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시켜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시 탄산약수가 아닐까?)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전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
藏義寺, 세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1396년에 태조의 도
움으로 세웠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
질없는 메아리이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이 지어지면서 삼성각의 기능
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었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
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지었다.

북한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사세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자락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유산이 없고 주택가와 접해 있
어 고색과 산사의 내음이 크게 말라버렸다.

▲  요사의 기능도 겸하고 있는 설법전
옥천암 뜨락에도 변함없이 늦가을이 찾아와
이렇게 고운 작품을 남겼다.

▲  옥천암의 법당인 수덕전(修德殿)
수덕전과 설법전은 그 사이에 조그만 벽돌집
을 만들어 거의 하나로 이어져 있다.


▲  수덕전 아미타여래좌상

옥천암은 관음도량이라 보도각 백불이 중심 불상이나 법당에는 따로 아미타불(아미타여래좌상
)을 봉안했다. 불단에는 아미타불 홀로 있으며,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은 없다. 불상 주위로
석가후불탱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의 불화가 수덕전 내부
를 진하게 수식하고 있는데, 그중 독성탱화가 1954년에 제작된 것으로 백불을 제외하고 제일
오래되었다.


▲  왜식(倭式)으로 지어진 옥천암 5층석탑
5층석탑은 예전에 수덕전 정면 우측에 있었으나 담장 쪽으로 옮겨졌다. 날씬하게
솟은 석탑의 탑신(塔身)에는 조그만 구멍이 무수히 뚫려있어 내부가 보인다.


▲  수덕전 우측에 세워진 키 작은 석등과 3층석탑
사람 키보다 작은 석탑은 2,3층 탑신이 없어지고 지붕돌만 남아있는데 조금 오래되어
보인다. 예전(2010년 이전)에는 그가 없었으나 근래에 주변에서 가져온 모양이다.
(탑의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음)

◀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만에 외출을 나온 옥
천암 괘불(掛佛)의 위엄
청아한 색채로 그려진 이 괘불은 근래에 조성
된 것이다. 이전 시대의 괘불보다 키와 덩치는
작지만 담길 것은 모두 담겨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간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와
중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
로 차려진 제물에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옥천암을 끝으로 부암동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워낙에 많이 찾았던 곳이라 마치
우리 동네처럼 친근한 곳이다. (부암동은 나를
기억이나 해줄까?)

▲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와 징검다리

▲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옥천암(보도각 백불)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유원하나아파트 하차 도보 2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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