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권 사진,답사기'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2.12.29 무등산 뒷쪽에 깃든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 광주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2. 2022.01.18 광주 무등산옛길3구간, 충효동, 광주호 겨울 나들이 (풍암정, 원효계곡, 충효동요지, 충효동 왕버들군, 광주호호수생태원)
  3. 2020.03.31 광주의 남쪽 변두리, 대촌동~칠석동 둘러보기 (괘고정수, 고원희가옥, 고싸움놀이, 칠석동은행나무, 부용정)
  4. 2011.10.07 가을맞이 산사 나들이 ~ 광주 무등산 원효사 1
  5. 2005.08.03 # 봄을 찾아 떠났던 남도기행 1편 ~ 광주지역 (월계동 장고분 / 무양서원) 1

무등산 뒷쪽에 깃든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 광주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 무등산 뒷쪽에 깃든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광주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광주 환벽당

▲  환벽당

광주 취가정 담양 식영정

▲  취가정

▲  식영정

 



 

겨울 제국이 한참 위엄을 떨치던 새해의 첫 무렵, 덜 추운 날을 가려서 호남 가사문학의
오랜 성지(聖地)이자 누정(樓亭) 문화의 대명사로 추앙을 받는 환벽당과 취가정, 식영정
을 찾았다.
이들은 증암천(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광주(光州) 땅인 서쪽에 환벽당과 취가정, 그리고
전남 담양(潭陽) 땅인 동쪽에 식영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행정구역만 무심히 다를 뿐, 서
로 같은 곳이나 다름이 없다.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는 충효동 지역은 원래 담양 땅이었
음) 게다가 서로 거리도 가까워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좋다. <소쇄원(瀟灑園)도 가
까운 곳에 있음>



 

♠  사촌 김윤제의 별서로 송강 정철이 그의 후광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던 곳
광주 환벽당(環碧堂)- 국가 명승 107호

▲  충효교에서 환벽당, 취가정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환벽당길)

광주호의 동쪽 끝이자 광주와 담양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충효교 남쪽 언덕에 환벽당이 살짝
깃들여져 있다.
환벽당을 품은 언덕은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내음이 아주 그윽한데 창계천(증암천) 너머 식영
정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옛 무덤처럼 동그랗고 두툼한 모습이다. 하여 혹시 고분(古
墳)이 아닐까 살짝 의심도 하였지만 생김새가 그러할 뿐, 그냥 자연산 언덕이다. 만약 그가
진짜로 고분이었다면 진작에 무덤 흔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옛 무덤을 좋아하다
보니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렇게 보이는 모양임;;)

충효교에서 환벽당 정문까지 창계천을 따라 담백한 운치를 지닌 오솔길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
다. 그 길을 거닐며 창계천을 살짝 훔쳐보면 반석(盤石)들이 펼쳐진 예사롭지 않은 곳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곳이 '조대', 그 앞 창계천이 '용소'로 환벽당을 수식하는 구수한 양념들이
다.


▲  식영정 앞 도로(887번 지방도)에서 바라본 환벽당 언덕
장대한 고분처럼 생긴 저 언덕 정상부에 환벽당이 살포시 안겨져 있다. 창계천
수면에 환벽당 언덕이 진하게 비춰지고 있어 마치 언덕 2개가 반대꼴의
모습으로 붙어있는 것 같다.

▲  창계천 조대(釣臺), 용소(龍沼)

용소는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이 우연한 물놀이로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
1572)를 만났던 현장이다.
정철은 서울 청운동(淸雲洞)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와 양재역(良
才驛) 벽서사건(1547년)에 나란히 연루되어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아버지 정유침(鄭
惟沈)은 유배형을 당해 유배살이에 정신이 없었고 정철은 양육 관계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꼬마 시절부터 유배살이의 혹독함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다가 1551년 명종(明宗)이 원자(元子)를 얻은 기쁨에 사면령을 내리면서 비로소 지긋지긋
한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이후 어머니를 따라 할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담양 창평(昌平)
당지산(唐旨山)으로 내려가 살았다.

어머니와 적적하게 살던 정철은 어느 여름 날, 순천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 친형을 만나고
자 길을 떠났다. 여름의 한복판이라 날씨도 무덥고, 마침 지나는 길에 풍경도 괜찮은 곳이 있
어서 피서본능에 따라 풍덩 들어가 물장구를 쳤는데 그곳이 공교롭게도 이곳 용소였다.
바로 그 시각, 용소 위쪽 환벽당에서는 사촌 김윤제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꿈에 용소
에서 용 1마리가 나타나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는 청룡 1마리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함)
꿈에서 깨어나자 뭔가 찜찜하여 하인을 시켜 용소를 살펴보게 하니 마침 잘생긴 소년(정철)이
혼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꿈에 나타난 용이 아닌가 싶어 그를 소환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의 영특함
에 흠뻑 반하여 순천(順天)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고 자기 슬하에 머물러 공부를 하도록 했다.
또한 그가 17세가 되자 자기 외손녀까지 짝지어주어 외손녀사위로 삼았으며 그의 뒷바라지도
넉넉히 해주어 정철의 앞날을 닦아주었다.

정철은 그렇게 사촌의 흔쾌한 지원에 힘입어 열심히 학문과 문학을 닦았고 27세에 과거에 급
제하면서 비로소 환벽당을 나오게 된다. 용소에서 잠시 물놀이를 한 인연 덕에 그의 인생을
크게 일으켜준 스승을 만났고 거기에 부인까지 얻었으며 조선 중기 가사문학(歌辭文學)을 크
게 달군 문학가로 이름까지 날렸으니 사람의 인생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만약 그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지 않았다면 벼슬이야 어떻게든 했겠지만 지금처럼 요란하게 이
름을 날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용소와 접한 반석(盤石)은 조대라 불리는데 김윤제가 낚시를 즐겼던 곳으로 정철을 비롯해 환
벽당을 다녀간 손님들도 낚시를 했다고 전하며 식영정 부근에서 용소까지 창계천 주변은 여름
마다 배롱나무(백일홍)가 장관을 이루어 자미탄(姿媚灘)이라 불리기도 했다.


▲  바로 위에서 바라본 조대와 용소
정철이 여기서 물놀이를 하고 낚시를 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의 흔적은 창밖에 이슬처럼
남아있지 않다. 몇 겁의 세월을 견디며 이곳을 지켜온 조대, 그리고 큰 세상을
향해 흘러가는 창계천에게 정철은 기억을 못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수많은 인연의 하나일 뿐이다.

▲  늙은 쌍송(雙松)
사촌 김윤제가 정철을 만난 것을 기리고자 심었다고 전한다. 그만큼
정철이란 탐이 나는 인재를 만난 기쁨이 실로 컸던 것이다.

▲  환벽당 돌담길 (쌍송 주변)
환벽당 주위로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둘러 바깥과의 경계를 그었다.

▲  활짝 열린 환벽당 정문(대문)

▲  환벽당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닦여진 언덕 동쪽 부분


▲  수수한 모습의 환벽당

환벽당은 충효동(충효마을) 출신인 사촌 김윤제가 1540년대에 지은 별서(別墅, 별장)이다. 그
는 한참 시절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기서 휴식과 여가를 즐기며 후학을 길렀는
데, 그를 거쳐간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과 김성원(金成遠, 1525~1597) 등이 있다.

별서의 이름인 환벽(環壁)은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이 지어준 것으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
른 듯 아름다운 곳이란 뜻이다. 별서 주위로 소나무와 배롱나무, 왕벚나무, 모과나무, 대나무
등을 심고 적당히 다듬은 호남의 대표적인 별서 원림(園林)이자 누정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환벽당' 시에 환벽당의 초창기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김창흡(
金昌翕, 1653~1722)의 남유일기(南遊日記)에는 환벽당에 심어진 식물과 조경 수종이 나와있으
며, 김성원의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는 환벽당의 모습이 그림으로 남겨져 있다.
부근에 면앙정을 짓고 머물렀던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은 1563년 식영정의 시를 차운(次韻
)하면서 식영정과 환벽당이 형제의 정자라고 했으며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두고 '한 동
(증암천) 안의 세 명승'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지금은 서로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원래 같
은 동네였음) 또한 벽간당(碧澗堂)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식영정과 더불어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이자 광주호 주변의 대표 명소로 답사객의 발길이 꾸준
히 이어지고 있는데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을 비롯하여 임억령(林億齡), 조자이(趙子以), 기
대승(奇大升) 등 16~17세기 사람들이 남긴 시 현판들이 정신 사납게 걸려있다.
정철은 이곳에서 학문을 닦으면서(집은 부근 지실마을에 있었음) 김인후(金麟厚), 기대승, 임
억령(林億齡) 등을 만나 그들에게도 학문과 가사문학을 배웠으며 임진왜란 때 호남의 대표적
인 의병장인 김덕령(金德齡)은 김윤제의 종손(宗孫)으로 할아버지의 정신적인 영향을 깊게 받
았다.

이곳은 김윤제의 후손이 관리해오다가 정철의 4대손인 정수환(鄭守環)이 매입해 그의 후손들(
연일 정씨)이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환벽당 옆에 후손들이 사는 집이 있어 관리의 손길이 마를
날이 없다.
환벽당은 처음에 광주 지방기념물 1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2013년에 부근 용소와 조대,
쌍송과 한 덩어리로 묶여 국가 명승으로 승진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광주 환벽당 일
원'
)

▲  서남쪽에서 바라본 환벽당

▲  환벽당의 뒷모습

환벽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 2칸과 마루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정
각(亭閣) 형태였으나 나중에 건물을 손질하면서 지금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네모난 기단
을 다지고 그 위에 집을 올린 형태로 섬돌에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방과 마루
에서 벌러덩 눕거나 음식 섭취는 안됨)

▲  글씨가 몸을 푸는 것 같은
환벽당 현판의 위엄

▲  활짝 열린 방문과 주인이 가고 없는
비어있는 방


▲  환벽당 연못과 김윤제 집이 있었던 너른 공터

환벽당을 받쳐들고 있는 석축 밑에는 3단으로 이루어진 화계(花階)와 네모난 연못이 누워있다
. 보통 별서를 지으면 앞에 연못을 두어 경치를 돋구게 하는데 이곳 역시 그렇다. 허나 연못
밑으로는 나무 몇 그루와 허전한 공터가 전부라 마치 별서를 짓다 만 것 같은데 그 공터에는
김윤제의 집 본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연못은 본채의 후원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본채는 어느 귀신이 떼어갔는지는 모르지만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자연의 공간으로 남겨
두어 환벽당의 앞뜨락 같은 모습이 되었다.

* 환벽당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87 (환벽당길 10)


▲  환벽당에 걸린 어느 검은 피부의 현판 (해석은 알아서)

▲  환벽당 돌담길 (쌍송 방향)

▲  환벽당 돌담길의 끝 부분 (취가정 방향)



 

♠  김덕령 장군의 원통한 넋을 기리고자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정자
광주 취가정(醉歌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30호

▲  취가정으로 인도하는 돌계단

담백한 풍경의 환벽당을 둘러보고 동남쪽으로 향하는 '환벽당길'을 3분 정도 들어가면 취가정
을 품은 언덕이 나온다. 환벽당 돌계단에 비해 조금은 흥분이 덜한 돌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
끝자락에 조촐하게 생긴 취가정이 자리해 있다.

취가정은 김윤제의 종손으로 임진왜란 시절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히는 김덕령(
金德齡, 1567~1596)의 넋을 기리고자 후손인 김만식 등이 1890년에 지은 것이다. 그를 기리고
자 세운 정자일 뿐, 정작 김덕령과 관련은 없으며, 충효동과 담양 가사문학면(예전 남면) 지
역에 흩어진 정자와 별서 가운데 제일 막내로 정자의 이름인 취가는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란
뜻이다. 근처에 있는 환벽당과 식영정, 풍암정, 소쇄원 등은 모두 자연스러운 이름인데 반해
이곳은 음주와 관련된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취가정이란 이름은 김덕령이 남긴 취시가(醉時
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취시가 - 취해서 부르는 노래
此曲無人聞           이를 듣는 이 아무도 없네
我不要醉花月         꽃과 달 아래 취하는 것도 바라지 않고
我不要樹功勳         나는 공훈 세우길 바라지 않네
樹功勳也是浮雲       공을 세우는 것은 뜬 구름이요
醉花月也是浮雲       꽃과 달 아래서 취하는 것도 뜬 구름이네
醉時歌無人知         취해서 부르는 노래, 이 노래 아는 사람 없으니
我心只願長劍奉明君   내 마음 다만 긴 칼 들어 명군 받들기 원하네


김덕령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권필(權韠, 1569~1612)은 어느 날 꿈속에서 김덕령을 만났다.
참고로 이들은 서로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김덕령이 억울하게 옥사(獄舍)를 당한 것을 호소
하며 취시가를 들려주었는데 이를 들은 권필이 화답의 시를 지어 위로했다고 한다. 그리고 꿈
나라를 나와서 그의 시를 활자로 남겼고 그 시의 이름을 취해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

취시가 앞에는 서문(序文)이 쓰여 있는데,
'꿈속에서 작은 책 하나를 얻으니 바로 김덕령 장군의 시집이었다. 그 첫머리에 실린 한 편
제목이 취시가로 나도 2~3번 읽어보았는데 그 가사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꿈에서 깨어난
뒤 너무 서글퍼서 그를 위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즉 이 시는 권필이 김덕령을 만난 것이 아니라 김덕령의 시집을 읽은 것이다. 그러니 꿈나라
에서 시를 접한 것이 아니라 김덕령이 남긴 시집을 통해 이미 접한 것으로 봐야 되며 그것을
마치 꿈나라에서 받은 양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사연이야 어쨌든 권필은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강제로 생을 마감한 그를 위로하고자 다음의 시를 덧붙여 남겼다.

將軍昔日把金戈   장군은 지난날에 창을 잡고 나섰건만 
壯志中摧奈命何   씩씩한 뜻 중도에 꺾이니 운명을 어이하랴 
地下英靈無限恨   지하에서 영령이 품었을 무한한 한이 
分明一曲醉時歌   한 곡조 취시가 속에 분명히 드러나네


▲  취가정의 앞 모습

취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 1칸과 툇마루를 지니고 있다. 6.25때 파
괴된 것을 1955년에 중건하여 고색의 기운은 덜하며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가 쓴 취가정
현판과 송근수(宋近洙, 1818~1903)의 취가정기, 김만식과 최수화의 시 현판이 걸려있다.

취가정 주위로 굴뚝과 취시가를 머금은 표석, 후손들의 집이 있으며, 동쪽 창계천 너머로 식
영정과 소쇄원 주변이 바라보인다. (방과 마루는 들어갈 수 있으며 섬돌에 신발을 벗고 들어
가면됨, 허나 벌러덩 눕거나 음식 섭취 행위는 자제 바람)

▲  송운회가 쓴 취가정 현판의 위엄

▲  취가정 상량문(上樑文)


▲  김덕령의 취시가와 권필의 화답시를 머금은 현판

▲  적막에 사로 잠긴 취가정 주변
(왼쪽은 굴뚝, 오른쪽은 취시가를 머금은 비석)

▲  취가정 옆구리에 짧게 펼쳐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취가정의 주변 풍경을 화사하게 돋군다.

▲  겨울 제국에게 강제로 봉인을 당한 채, 소쩍새의 울음을 기다리는
충효동 논두렁 - 논두렁 너머로 무등산(無等山)이 바라보인다.


취가정을 둘러보니 벌써 17시 직전이다. 햇님은 무거워진 고개를 자꾸 꺾으려고 하고 달은 그
틈을 타 검은색 물감을 마구 뿌리며 나에게 철수를 강요한다. 허나 그런 것으로 나는 쉽게 무
너지지 않는다. 일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 부근에 있는 식영정을 그날의 마지막 스페셜
메뉴로 정하고 충효교로 나와 다리를 건너 담양 땅으로 넘어갔다.

담양 관할로 넘어가면 바로 한국가사문학관인데 그 서북쪽 언덕에 환벽당과 더불어 호남 지역
가사문학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는 식영정이 뉘어져 있다.

* 취가정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96-1 (환벽당길 42-2)



 

♠  석천 임억령의 별서이자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의 무대
담양 식영정(息影亭) - 국가 명승 57호

▲  식영정과 성산별곡 시비

환벽당과 쌍벽이자 콤비를 이루고 있는 식영정은 1560년에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
齡)을 위해 지은 것이다. 그때 자신이 머물 서하당(棲霞堂)도 옆에 같이 지었다.
그는 정철의 처외재당숙(장모의 6촌 형제)으로 김윤제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식영정을 거쳐갔
던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을 가르켜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다. <그 연
유로 식영정을 사선정(四仙亭)이란 부르기도 했음>
그들은 성산(식영정 주변)의 경치 좋은 명소 20곳을 골라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
二十詠)'을 지었는데 정철은 이곳에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롯해 하당야좌(霞堂夜坐) 1수,
소쇄원제초정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많은 시와 가사를 내놓으면서 가사문학의 산실로 일컬
어진다.

식영정이란 이름은 '그림자가 쉬어가는 정자'란 아주 문학적인 뜻으로 정철이 자주 놀러온 곳
이다. 환벽당, 송강정(松江亭)과 함께 정철과 깊게 관련된 곳이라 하여 '정송강유적'이라 부
르기도 하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방은 가
운데가 아닌 귀퉁이에 두었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깔았으며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이다.
이곳은 전남 지방기념물 1-1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2009년 '담양 식영정 일원'이란 이
름으로 국가 명승으로 승급되었다.

식영정 옆 창계천 주변에는 노자암(鸕鹚巖), 방초주(芳草洲), 서석대(瑞石臺), 자미탄, 견로
암 등의 명소가 있었으나 광주호가 조성되면서 거의 생매장을 당하거나 파괴되어 전설 속의
존재가 되버렸으며 서하당 등 식영정 주변의 건물도 모두 사라져 식영정 홀로 자리를 지켰다.
예전 2000년에 왔을 때는 식영정과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부용당, 장서각 등이 전부였는데 그
새 서하당 등을 다시 지어 주변이 조금은 채워졌다.


▲  부용당(芙蓉堂)과 연지(蓮池)
식영정에 이런 존재가 있었나 싶어 살펴보니 복원된 것이 아닌 단순히 식영정을
수식하고자 1972년에 지은 것들이다. 2칸짜리 부용당이 연못에 두 발을
담구며 혹독한 겨울살이에 지친 몸을 달랜다.

▲  서하당
1560년에 김성원이 자신의 거처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터만 남아오다가 근래에 복원되어
새롭게 솟아났다.

▲  장서각(藏書閣)과 고직사(庫直舍)
송강집(松江集) 목판을 보존하고자
1973년에 세웠다.

▲  '송강 정철 가사의 터' 비석
식영정은 정철이 성산별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던 현장이다.

▲  태극마크가 그려진 성산사 정문(삼문)

▲  성산사(星山祠)

성산사는 석천 임억령, 서창 조흡, 정철의 5대손으로 1721년부터 식영정을 지켜온 소은 정민
하(簫隱 鄭敏河), 소은의 아들인 계당 정근(溪堂 鄭根) 등 7명을 봉안한 사당이다. 수재(水災
)로 파괴된 것을 1861년 정조원(鄭祚源)이 송씨에게서 환벽당을 다시 인수하면서 그 주변에
복원했으나 곧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제 철거되어 사라진 것을 2005년 담양군에서
원래 자리였던 식영정 뒤쪽에 복원했다.

성산사 뒤에는 대나무가 두텁게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이 사각사각 풍월을 선사하며 속세에
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청각을 어루만져 준다. 그리고 숲 사이로 좁게 내려오는 계곡에서는 청
량하면서도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겨울이라 그렇지 더울 때는 밀양(密
陽) 얼음골(☞ 관련글 보기)의 차디찬 바람에 못지않다.


▲  성산사를 감싸고 있는 짙은 대나무숲

▲  성산사에서 식영정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  멋지게 잘 늙은 식영정
식영정 툇마루와 방은 접근이 가능하다. 아무리 비어있는 정자라고 해도
문화유산의 지체 높은 몸이니 그냥 구경만 하거나 툇마루에
몸을 기대어 쉬기만 하자~~!

▲  글씨가 율동을 부리는 듯한 식영정 현판의 위엄
'정'자는 연이 하늘로 오르거나 개구리가 움직이는 것 같고 '식'자는
하늘로 비상하는 비행물체를 그린 것 같다.

▲  보면 볼수록 정감이 넘치는 식영정의 뒷모습
요즘도 장작을 떼는지 아궁이 주변 피부가 다소 시커멓다.

▲  식영정 안내문에서 식영정으로 바로 이어주는 돌계단길

▲  고직사 밑에 있는 옛 건물터
고직사와 도로 사이에 조금 움푹 들어간 희미한 흔적이 있다. 식영정을
수식하던 건물터로 여겨지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식영정을 1바퀴 둘러보니 어느덧 18시이다. 더 둘러보고 싶어도 검은 기운이 자욱해지고 찬바
람까지 마치 칼처럼 찔러대니 이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어차피 그날 목적한 것을 모두 보았
고 거기에 식영정까지 덤으로 챙겼으니 여기서 길을 접어도 여한은 없다. 솔직히 눈과 다리가
쉴 겨를도 없이 많은 것을 보아서 머리가 좀 아프다.

이렇게 하여 새해 시작에 찾아간 광주 충효동, 가사문화권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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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12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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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무등산옛길3구간, 충효동, 광주호 겨울 나들이 (풍암정, 원효계곡, 충효동요지, 충효동 왕버들군, 광주호호수생태원)

광주 무등산 겨울 나들이 (풍암정, 충효동 지역, 광주호 주변)


' 광주 무등산 겨울 나들이 '

  무등산 옛길 3구간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

▲ 무등산 옛길 3구간
◀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
 ▶ 풍암정

풍암정

 



 

다사다난으로 얼룩졌던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또다시 밝았다. 새해만 되면 심리
상 긍정적인 기대감이 커지기 마련인데, 올해는 제발 만사가 형통(亨通)하기를 염원하며
시간을 가리지 않고 늘 불끈 솟는 나의 역마살 기운을 풀고자 예전부터 목말라했던 무등
산의 뒷통수(광주 금곡동, 충효동 지역)를 새해 첫 답사지로 정했다.

그나마 덜 추운 날을 가려 길을 나섰지만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1월)이라 추운 것은
여전했다. 아침 일찍 매서운 새벽 기운을 가르며 영등포역으로 넘어가 광주로 가는 누리
로<무궁화호 열차와 동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심전심이라고 견고한 무쇠덩어리 열차
도 나처럼 추운 날씨가 싫었는지 따뜻한 남쪽을 향해 불이 나게 바퀴를 굴려 4시간 만에
광주(光州) 도심에 자리한 광주역에 도착했다.

예전과 다르게 많이 초췌해진 광주역을 나와 역 동남쪽 정류장에서 무등산(無等山)의 품
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광주시내버스 1187번(덕흥동↔원효사)을 탔다. 버스 번호인 '1187
'은 광주의 진산(鎭山)인 무등산의 키 높이로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국립아시아문화전당
), 산수5거리를 두루 지나 광주에서 제일 험한 고개로 꼽히는 잣고개를 넘는다. 그 고개
를 힘겹게 넘으면 대도시 광주의 모습 대신 무등산에 묻힌 산골 풍경이 싱그럽게 펼쳐져
광주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2차선 도로(무등로)를 따라 옛 무진주(武珍州)의 성곽 유적과 은빛물
결이 출렁이는 제4수원지, 충민사(忠愍祠), 충장사(忠壯祠) 등을 차례로 지나 원효사(元
曉寺) 직전인 풍암정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풍암정 정류장은 뭔가 있을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정류장 표시판이 전부인 완전한 산골
의 한복판이다. 이거 어디로 가야되나 두리번거리니 길 건너에 무등산옛길 3구간을 알리
는 이정표가 반갑게 손짓을 보낸다.



 

♠  무등산 옛길 3구간과 풍암정

▲  사촌 김윤제 재실(齋室) 입구 비석

무등산 옛길은 광주광역시가 무등산에 닦은 도보길로 무등산 북쪽 자락의 여러 길을 잇고 엮
어서 '무등산 옛길'이란 이름으로 천하에 내놓았다. 모두 3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3구
간(장원3거리~환벽당, 11.3km)의 신세를 잠깐 졌다. 3구간은 중간에 임진왜란 시절 의병을 일
으킨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소소한 흔적이 깃든 무등산 의병길과도 만난다.

무등산 옛길로 들어서니 사촌 김윤제의 재실을 알리는 빛바랜 비석이 마중을 한다. 비석을 받
쳐든 네모난 기단석(基壇石)에는 푸른 이끼로 가득해 이곳이 청정한 곳임을 알려주는데, 인적
도 없는 옛길을 더듬어 내려가면 숲속에 묻힌 김윤제의 재실, 귀후재(歸厚齋)를 만나게 된다.
그저 나무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런 외딴 곳에 기와집이 묻혀 있으니 마치 전설에 나오는 귀
신의 집이나 폐가를 만난 기분이다.
허나 그 집은 귀신 집도, 버려진 집도 아니며 김윤제의 후손(광산김씨)이 머무는 엄연한 살아
있는 집이다.


▲  담장 너머로 바라본 귀후재

귀후재의 주인인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는 그 유명한 송강 정철(鄭澈)의 스승
으로 충효동 지역에 살면서 이른바 가사문학(歌詞文學)을 크게 일군 사람이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광주호 남쪽에 사촌의 별장이던 환벽당(環碧堂)이 있는데, 그는 거기서 어린 정철
을 발견하여 제자로 삼은 일화는 꽤 유명하다.

매년 음력 3월 3일, 후손들이 귀후재에서 제사를 지내며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라 내부 관람은
어렵다. 하지만 고색이 깃든 돌담 너머로 내부가 왠만큼 보이며 귀후재 본채는 근래 손질되어
고색의 기운은 싹 빠져버렸으나 돌담과 대문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  고색이 깃든 귀후재 대문
지붕은 새로 갈았지만 그 외에는 낡은 모습 그대로이다.

▲  무등산 옛길 3구간 (귀후재 주변)
누렇게 뜬 낙엽들이 가득 깔려 산길의 촉감을 부드럽게 해준다.

▲  무등산에서 가장 예민한 곳, 무등산 지진관측소

귀후재를 지나 편백림으로 들어서면 원효계곡 상류에서 내려온 무등산 의병길(제철유적지~치
마바위~풍암제, 3.5km)과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느긋한 숲길의 연속으로 편백림을 지나면 기
상청에서 설치한 무등산 지진관측소가 왼쪽(북쪽)에 나타난다.

무등산 지진관측소는 이 땅에서 지진 관측이 가장 잘되는 곳이다. 굴을 파고 '초광대역지진계
' 등 여러 관측 시설을 닦았는데, 이곳이 얼마나 예민한 곳인지 지구 반대편의 지진도 잡아내
며, 사람의 발소리까지 실시간 관측되어 기상청에 고스란히 제공된다. (관측소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겨울에 잠긴 무등산 옛길 3구간(무등산 의병길) - 풍암정3거리 부근

▲  풍암정으로 인도하는 대나무 길

풍암정3거리(풍암정 입구)에서 잠시 곧게 뻗은 길을 버리고 풍암정으로 인도하는 오른쪽(남쪽
)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의 끝에는 원효계곡의 백미(白眉)로 추앙을 받는 풍암정이 있는데, 무
등산 옛길 3구간이나 무등산 의병길에 발을 들였다면 풍암정은 꼭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승
)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  풍암정 옆구리로 흘러가는 청정한 원효계곡

▲  풍암정 앞 징검다리

속세에서 풍암정으로 가려면 반드시 원효계곡을 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된다. 큼지막한 돌
이 잘 놓여져 있어 통행에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수심도 얕아 설령 발을 헛디뎠다고 해도 크
게 걱정할 것은 없다.
풍암정 입구에서 무등산 옛길 3구간은 풍암정을 거쳐 풍암제 남쪽 산자락으로 이어지며, 무등
산 의병길은 좋은 길을 계속 고집하며 풍암제까지 곧게 펼쳐진다.


▲  계곡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풍암정

▲  풍암정(楓巖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15호

풍암정은 원효계곡(元曉溪谷) 하류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해 있다. 좌/우 2칸, 총 4칸
의 조촐한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두텁게 기단(基壇)을 쌓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원형 기둥
을 세우고 정자 중앙에는 팔각 기둥을 세웠다.
정자 한복판에는 1명 정도 누울 수 있는 작은 방을 두고 북쪽에 문을 내었으며, 그 주변은 모
두 판자마루로 둘러 여름 별장으로는 아주 좋게 다져 놓았다. 정자의 천장은 연등 천장이며,
가운데는 우물천장으로 닦았다.

마치 신선(神仙) 세계의 축소판처럼 탐이 나는 풍경의 풍암정은 조선 중기에 활약했던 김덕보
(金德普, 1571~1627)가 지었다. 그의 호는 풍암(楓巖), 자는 자룡(子龍)으로 그에게는 애국심
이 매우 높은 형이 둘이나 있었으니 큰 형은 김덕홍(金德弘), 작은 형은 그 유명한 광주 출신
의병장인 김덕령이다.

김덕홍은 1592년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高敬命) 휘하에서 활동했다. 허나 금산(錦山
) 전투에서 고경명의 어리석음으로 크게 패하면서 제대로 몸도 풀지 못하고 전사를 하고 만다.
그리고 2째 형인 김덕령은 직접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왜군을 때려잡고 이몽학(李夢鶴)
의 난(1596년)까지 진압하는 등 공이 많았으나 선조(宣祖) 임금과 그 패거리들이 역적으로 몰
아세우면서 혹독한 고문 휴유증으로 29세의 한참 나이로 옥사(獄死)하고 만다.

큰 형은 전쟁에서 죽고 작은 형은 전공이 큼에도 권력층의 농간으로 맥없이 져버리니 김덕보
의 충격은 실로 상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썩어빠진 나라와 세상을 원망하며 은둔생활에 들어
갔다.

▲  옆에서 바라본 풍암정

▲  풍암정사(楓巖精舍) 현판

뒤늦게 형들의 공을 인정한 조정은 그를 달래며 달콤한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모두 쿨하게 거
절했다. ('장릉참봉'을 잠시 맡은 것이 전부임) 그리고 고향(충효동) 부근 원효계곡에 정자를
짓고 단풍과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란 뜻에서 풍암정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그 '풍암
'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정자 내부에는 1614년 정홍명(鄭弘溟)이 쓴 풍암기(楓巖記)와 임억령(林億齡), 안방준(安邦俊
) 등이 쓴 현판이 있으며, 고경명의 '차풍암정액(次楓巖亭額)'이란 시 현판이 있는데, 1614년
이전부터 정자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어 임진왜란 이전(1590년대)이나 1610년대 초반에 지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  풍암정 옆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들
바위들이 푸른 이끼옷을 걸치며 풍암정의 경치를 한껏 수식해준다.

▲  풍암정의 빛바랜 일기장, 1614년에 정홍명이 쓴 풍암기

풍암정은 '풍암정사'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김덕보와 친분이 있는 문인(이안눌, 안방준 등
)들이 놀러와 시문을 남겼으며 이후로도 많은 시인, 묵객들의 마루가 닳도록 찾아왔다. 현재
김덕보의 후손(광산김씨 문중)이 소유하고 있으며, 마루에는 앉거나 들어갈 수 있으나 방은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다.

* 풍암정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718 (풍암제길 117)


▲  풍암정의 탄생 시기를 한층 올려주고 있는 고경명의
차풍암정액 현판 (오른쪽 현판)

▲  곧게 뻗은 그림 같은 길, 무등산 의병길 (풍암정3거리 동쪽)

한여름이나 늦봄에 왔더라면 정자 마루에 벌러덩 누워 낮잠을 청했을 것이다. 무등산 산바람
과 원효계곡 물바람이 사이좋게 무더위를 단죄하여 낮잠 맛이 꿀맛일테니 말이다. 허나 겨울
제국의 한복판에 왔으니 마루에서 괜히 잠을 청했다가는 큰일나는 수가 있다.
그렇게 풍암정을 둘러보고 풍암정3거리로 나와 잠시 잊었던 무등산의병길을 마저 걸었다. 겨
울에 잠긴 숲길을 걷다보면 '풍암제'란 너른 호수가 은빛물결을 글썽이며 풍암정에게 빼앗겼
던 내 마음을 다시금 앗아가는데, 이 호수는 원효계곡의 물을 먹고 자라 아주 청정한 빛깔을
띄고 있다. 허나 아쉽게도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꽁꽁 묶여 있어 호수 접근은 통제되어 있다.


▲  원효계곡의 물을 먹고 자란 금지된 호수, 풍암제(楓巖堤)

▲  풍암제에서 충효동 도요지로 인도하는 길 (풍암제길)

풍암제를 지나면 무등산국립공원 경계선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그 안내문의 서쪽(풍암정
방향)이 무등산국립공원 영역, 동쪽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의 공간이다.



 

♠  무등산의 흙으로 분청사기와 백자를 빚었던 옛 가마터 유적
광주 충효동 요지(忠孝洞 窯址) - 사적 141호

▲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의 일원인 무등산 분청사기(粉靑沙器)전시실

풍암제에서 동쪽(충효동 방면)으로 10분 정도를 가면 무등산 분청사기전시실이 마중을 나온다
. 이곳은 충효동 가마터(4기)와 주변 가마터에서 발견된 분청사기와 백자를 전시하고 이들 유
적을 정리한 곳으로 가마터 자리 위에 터를 다져 1998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전시실
옆에는 충효동 2호 가마터가 보호각에 감싸여 보존되고 있는데 여기서 많은 분청사기와 백자
들이 무등산이 베푼 양질의 흙을 먹고 태어났다.

무등산 북쪽에 둥지를 튼 충효동 가마터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광주의 자
기소(瓷器所) 1곳이 고을 동쪽 이점(梨岾)에 있음>과 출토 유물의 연도를 통해 늦어도 1430년
정도, 빠르면 고려 후기(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충효동 2호 가마의 구조는 길이 20.6m, 폭 1.3m의 땅굴 모습으로 사람이 왕래하는 출입시설과
도자기를 집어넣는 번조실, 굴뚝시설를 갖추고 있으며, 진흙을 중심으로 돌을 섞어서 쌓은 형
태이다. 특히 아궁이(번조실)부터 굴뚝 부분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가마의 변화 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어준다.

여기서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생산되었는데<상감청자(象嵌靑瓷)도 일부 만들어짐> 처음에는 분
청사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분청사기는 작은 것이 주류를 이루던 백자와 달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있고 종류도 접시와 종지, 잔, 병, 항아리, 벼루, 제기 등 다양하며, 국화와 나비, 모란
, 물고기, 게, 구름 등이 분청사기 피부에 새겨졌다.
이후 백자까지 손을 대었는데, 분청사기는 박지(剝地)와 조화(彫和) 등 장식과 제작이 간단하
고 질이 조잡한 귀얄문이 주류를 이루면서 점차 쇠퇴를 하게 되었고, 반면 백자는 질이 좋은
탓에 크게 흥하면서 생산량이 늘어났다. 하여 분청사기 가마에서 백자 전문 가마로 완전히 바
뀌게 된다. (분청사기는 대체로 16세기부터 생산이 중단됨)
여기서 생산된 도자기는 왕실과 귀족들에게 주로 납품되었으며, 제작지를 알리는 내용과 제작
자의 이름, 제작시기, 수량, 관용(官用) 임을 알리는 '공(公)' 등 명문이 새겨진 백자와 분청
사기가 많이 나왔다. <'어존'이라 쓰인 한글 명문도 발견됨>

그렇게나 잘나갔던 충효동 가마는 16세기 초 정도에 돌연 폐업을 하여 사라지게 된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다른 가마와의 경쟁에서 밀리거나 흙이 고갈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
인다.
이후 터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왜정(倭政) 시절부터 광주가마, 무등산가마, 석곡면가마 등으로
불렸으며, 막연히 명품 자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전해져 왔다. 허나 딱히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방치되어 오다가 1961년에 처음 학계에 소개되었으며, 1963년에 이르러 국립중앙박
물관이 가마터의 퇴적층(堆積層) 일부를 들추면서 이곳의 성격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이 2차례에 발굴을 벌여 4기의 가마가 확인되었고 높이 3m에 퇴적
층위가 조사되었으며 분청사기가 변화하는 과정과 백자가 발전하는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
다.
그 4기 중 제일 상태가 좋은 것이 바로 이곳 2호 가마로 그 터를 손질해 특별히 보호각을 씌
우고 속세에 개방했다. 그리고 분청사기 전시실 자리에서 발견된 가마터 등 나머지 3기는 보
존을 위해 땅에 고이 묻었다. (이들 가마터 4기는 '충효동 요지'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됨)

충효동에는 이들 외에도 여러 가마터가 있으며 발견되지 않은 것도 여럿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충효동에서 가까운 담양군 가사문학면(옛 남면) 지역(광주호 주변)에도 가마터가 여럿
전하고 있어서 이 일대가 거대한 분청사기, 백자 생산지였음을 알려준다.
허나 이들 가마들은 16세기 이후 거의 버려지면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괴롭
힘 속에 모두 녹아버렸고 그나마 남은 흔적도 속세의 무관심과 도굴, 천박한 개발의 칼질 등
으로 대부분 목이 떨어졌다.


▲  온전하게 남은 분청사기의 고운 맵시
분청사기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잠깐 유행했던 도기, 자기 양식이다.

▲  분청사기 접시와 깨진 대접들

▲  분청사기 벼루와 하얀 뚜껑

분청사기 전시실은 독립적인 박물관이 아닌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소속의 전시실이다. <광주역
사민속박물관 무등산 분관으로 보면 됨> 그러다보니 규모는 작은 편이며, 충효동에서 발견된
유물 상당수는 역사민속박물관이나 광주국립박물관에 가 있고 이곳과 주변에서 나온 도기, 자
기와 복제품 등 200여 점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  장대한 세월에 의해 헝클어져 겨우 조각만 남은 분청사기 파편

▲  담양군 경상리 저수지 상류에서 발견된 경상리 유적 토기들

▲  화암마을 백자가마터에서 수습된 백자 파편들

▲  분청사기 접시와 제기(祭器, 가운데), 그리고 백자 접시 파편

▲  백자 잔(위쪽)과 깨진 대접

▲  재현된 충효동 가마의 왕년의 모습 (오른쪽이 2호 가마터)

▲  충효동 2호 가마터를 품고 있는 누런 보호각

분청사기 전시실 옆구리에는 충효동 2호 가마터를 품은 가마터 보호각이 있다. 지금이야 누런
피부의 가마터만 남아 실감도 덜하고 여기서 더 이상 도자기를 빚을 일도 없지만 그 흔적만
보더라도 예사 가마터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 잘나갔던 충효동 가마가 한낱 황량한 가마터
가 되버렸으니 세월이 참 무상할 따름이다.


▲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과 아궁이 흔적
굴뚝과 아궁이 위에는 흙을 두툼하게 씌워 땅굴 방식으로 그 속살을 가렸다.

▲  옆에서 바라본 충효동 2호 가마터

▲  충효동 2호 가마터 아궁이와 누런 퇴적층위

▲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에서 바라본 충효동, 금곡동 지역
오늘도 무등산의 뒷통수 지역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이 지역은 원래 담양군 땅이었음)


* 충효동 요지, 무등산 분청사기전시실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157 (풍암제길 14,
  ☎ 062-613-5379)



 

♠  충효동 광주호 주변 명소들

▲  충효동 왕버들 군(群) - 천연기념물 539호

충효동 요지를 둘러보고 바로 북쪽에 있는 금곡마을로 이동했다. 여기서 환벽당과 취가정, 왕
버들이 있는 충효동까지 걸어가려고 했으나 거리도 2km에 이르고 뚜벅이 길이 닦여져 있지 않
은 2차선 길(송강로)을 따라가야 되므로 차량의 눈치와 위협을 적지 않게 받아야 된다. 이 길
말고도 금곡에서 평촌 방면 매봉로를 따라 취가정, 환벽당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데, 차량의
왕래는 적지만 역시나 2km 정도를 걸어야 된다.

걷는 것이 싫다면 약간의 돈을 들여 문명의 이기(利己)인 시내버스를 타면 되지만 배차간격이
무려 50~60분에 이른다는 함정이 있다. 하여 스마트폰 버스어플을 검색해 15분 이내에 차가
오면 충효동으로 넘어가고, 그 이상을 넘거나 시내 방향 버스가 15분 이내에 오면 인연이 아
니라 여기고 쿨하게 광주 시내로 넘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6~7분 뒤에 충효동 방향 버스가 온다고 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기다리는 시간
만큼 길고 지루한 것은 없다. 초고속으로 흘러만 가는 시간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추고 싶다
면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면 된다. (퇴근시간을 기다리거나, 차를 기다리거나, 누군가를 기
다리거나 등) 그러면 그 시간만큼은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질 테니까. 허나 그 역시 부질없는
시간 장난에 불과하다.
과연 어플의 안내대로 광주시내버스 187번(충효187번, 장등동↔연천리)이 반갑게 모습을 드러
냈다. 그를 타니 불과 5분만에 충효동 동쪽 끝인 환벽당에 이르렀는데, 도보로 갔더라면 아무
리 빨라도 20분은 걸렸을 것이다.

조선 중기 가사문화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환벽당과 식영정(息影亭), 취가정(醉歌
亭)을 둘러보고 송강로 주변에 주렁주렁 자리한 여러 명소(왕버들군, 정려비각, 광주호 호수
생태원)를 살펴보았다. 환벽당과 식영정, 취가정은 내용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에서는 왕버들군과 정려비각, 광주호만 간단히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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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포로가 되버린 채, 개골(皆骨)
상태로 숨죽이고 있는 충효동 왕버들 -
왕버들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늦봄이나 여름,
가을에 와야 된다. 겨울에는 죄다 처량한
개골 상태라 거의 거기서 거기 같다.

광주호 호수생태원 진입광장 맞은편에 장대한 세월을 머금은 왕버들 3형제가 있다. 이들은 충
효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추정 나이는 약 430~450년에 이르는데, 가장 큰 것은 높이가 13m,
둘레 8.9m, 작은 것은 높이 8m, 둘레 7.2m로 키와 둘레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 덩치는 다 고
만고만하다.
이들 나무는 '김덕령나무'라 불리기도 하는데, 김덕령이 태어났을 때 집안에서 심었다고 전한
다. 하지만 단순히 그의 탄생 기념으로 심은 것은 아니며 마을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심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소나무 1그루, 매화나무 1그루, 왕버들 5그루가 한 식
구를 이루고 있었지만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다들 사라지고 지금은 왕버들 3그루만이 자리
를 지킨다.

* 충효동 왕버들군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1021


▲  충효동 정려비각(旌閭碑閣) - 광주 지방기념물 4호

왕버들 곁에는 기와집으로 된 정려비각이 자리해 있다. 이곳 출신인 김덕령과 그의 부인(흥양
이씨), 그의 형제(김덕홍, 김덕보)의 충(忠), 열(列), 효(孝)를 골고루 기리고자 1789년에 정
조 임금이 세운 것으로 정려비(旌閭碑)의 높이는 220cm, 너비 68cm이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비석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비각(碑閣) 안에 고이 깃들여져
있는데, 비각 주변에 기와 돌담을 두르고 북쪽으로 문을 냈다.

김덕령과 김덕홍은 앞서 풍암정에서 언급한 그대로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싸웠고, 김덕보
는 먼저 떠난 형들을 대신해 어머니를 잘 봉양했으며, 흥양이씨 부인은 정유재란(1597)때 담
양 추월산(秋月山)으로 피신을 갔으나 왜군의 추격으로 생포될 위기에 처하자 자결을 하였다.
그래서 충, 효, 열 3가지가 성립되어 뒤늦게나마 정려비를 받은 것이다.

비석 앞면에는 '조선국증좌찬성 충장공 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朝鮮國贈左贊成
忠壯公 金德齡 贈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라 쓰여있고, 뒷면에는 김덕령 일가의 충, 효,
열을 찬양하며 충효리의 유래를 담고 있다. 바로 이 정려비에서 충효동의 이름이 비롯된 것이
다. 비각 안에는 정려비 외에 상량문(上樑文), 중수기(重修記) 등이 걸려 있다.

* 충효동 정려비각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440 (충효샘길 7)


▲  정려비각에 소중히 담긴 김덕령 일가 정려비

▲  정려비의 빛바랜 일기장, 상량문

▲  왕버들 옆에 자리한 상징정원

상징정원은 광주의 대표 명물인 무등산 수박을 상징화하여 닦은 조촐한 공간이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무등산 수박쉼터와 수박을 형상화한 무등산 수박 토피어리, 무등산 수박밭의 고랑
을 묘사한 무등산 수박밭, 그리고 아름다운 가을꽃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존재 이유는
무등산 수박 찬양이다. (그래서 이곳의 주제도 '꽃으로 수박파티'임)


▲  무덤처럼 생긴 충효동 조산(造山) - 광주호 호수생태원 내부
충효동 사람들은 이 조산을 '말무덤'이라 부른다. 비보풍수에 따라 마을의
허한 부분을 달래고자 인공적으로 쌓은 것으로 건너편 입석(조탑)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  푸른 물결 글썽이는 광주호와 그 옆구리에 닦여진 광주호 호수생태원

광주와 전남 담양(潭陽) 경계에 자리한 광주호는 영산강(榮山江)의 주요 지류인 고서천(古西
川)에 광주댐을 닦으면서 조성된 너른 호수이다. 1974년 공사를 시작해 1976년 완성을 보았는
데, 무등산과 하늘이 거울로 삼을 정도로 풍경이 아름다우며, 주변에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 충효동 왕버들 등 쟁쟁한 명소도 즐비해 광주 외곽의 주요 명소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광주호 남쪽 충효동에는 2006년 3월에 닦여진 호수생태원이 있다. 면적은 184,948㎡로 자연관
찰원<수생식물원, 야생초화원, 암석원, 채원(菜園), 생태연못>, 습지보전지, 버드나무 군락지
, 칠성바위, 자미탄, 전망대, 관찰대, 쉼터 등이 있으며 철새를 비롯한 여러 새들이 잠시 들
리거나 살아가는 곳으로 그들의 삶도 훔쳐볼 수 있다.
관람시간은 딱히 제한은 없으나 이곳 생태환경이 너무 좋다보니 야생동물의 출현이 잦다. 하
여 일몰 이후에는 가급적 들어가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호수생태원 보호 목적도 있음)


▲  호수생태원 탐방로
탐방로 외에는 자연의 공간이니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겨울 제국의 심술로 누렇게 뜬 호수생태원

▲  호수생태원에서 바라본 담양 쪽 (소쇄원, 식영정 방면)

호수생태원은 햇님 퇴근 시간이 임박해옴에 따라 간단히 1바퀴 둘러보고 마무리를 지었다. 광
주에 발을 내린 것이 정말 1시간 전 같은데 세상은 벌써 타들어가 검은 도화지로 배경이 바뀌
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겨울 제국의 기운도 높아지고 출사도 어려우니 더 이상 둘러보는
것은 의미가 없지.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다 둘러보았으니 뿌듯하기 그지 없다.

마침 시내로 나가는 시내버스 시간이 임박하여 광주호 호수생태원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여기
서 버스 1대를 놓치면 50~60분을 꼼짝없이 강제 대기를 해야 된다. 어두워진 공간에서 추위를
견디며 1시간 가까운 시간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워 발을 재촉하여 정류장에 이르니
광주시내버스 187번이 딱 맞춰서 반갑게 다가선다. 하여 충효동과 무등산에 대한 미련을 흔쾌
히 버리고 차에 올라서니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고적한 충효동에 남기며 광주 시내로 넘
어갔다.

이렇게 하여 새해 시작부터 벌인 광주 무등산 뒷통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광주호호수 생태원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439-1 (충효샘길7 ☎ 062-613-7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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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남쪽 변두리, 대촌동~칠석동 둘러보기 (괘고정수, 고원희가옥, 고싸움놀이, 칠석동은행나무, 부용정)

 


~~~ 봄맞이 광주 대촌동, 칠석동 나들이 ~~~


▲  칠석동 은행나무


 

울 제국이 드디어 무너지고 봄이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3월의 끝 무렵, 남도의 중심
지 광주(光州)를 찾았다. 광주 지인의 초청으로 간만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자연과 문화
유산에 두루 정통하고 숲과 자연을 강의하는 교수로 꽤 저명한 분이다. 그런 이의 초청을
받았으니 본인 입장에서는 그저 영광스러울 뿐이다.

아침 일찍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여를 총알처럼 달려 광주역에 발을 내린다.
거기서 지인분 부부를 만나 전남대와 중외공원으로 이동하여 남도 매화(梅花)와 산수유를
구경하고 전남대 북쪽에서 남도 정식으로 며칠을 굶어도 끄떡없을 정도로 가득 배를 채웠
다. 그렇게 점심을 먹자 그들은 광주 답사를 시켜주겠다며 내가 희망하는 곳의 하나인 대
촌동으로 흔쾌히 인도해주었다.

대촌동(大村洞)은 광주 남구(南區)의 일원으로 도심과 가깝지만 동네 전체가 전형적인 시
골로 평야 등의 경작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아가던 시절부터
많은 문인들이 집이나 정자를 짓고 살면서 포충사와 괘고정수, 양과동정, 고씨삼강문, 칠
석동 은행나무, 부용정, 고원희가옥 등 고색의 명소를 무수히 간직하고 있다.
이중 제일 먼저 포충사를 찾았는데 이곳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으며, 여기서는
괘고정수와 고씨삼강문, 고원희가옥, 칠석동 은행나무, 부용정 등을 다루도록 하겠다.


 

♠  광산이씨 이선제(李先齊)의 후손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600년 묵은
왕버들, 괘고정수(掛鼓亭樹) - 광주 지방기념물 24호

충사 북쪽 만산마을 입구에는 괘고정수라 불리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 남부 지방은 산수유
와 매화꽃, 벚꽃 등이 이미 만발을 넘어서고 있는데, 나무들은 아직도 다 쓰러져가는 겨울의
눈치를 보며 벌거숭이 모습으로 완연한 봄을 열망한다.
처음에는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인줄 알았는데 안내문을 보니 왕버들이라고 한다. 버들 중의 왕
이라는 왕버들이 저렇게까지 자랄 수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잎이 어느 정도 붙으면
나무 구분이 가능하나 한결같이 벌거숭이 상태에서는 일반인들은 이게 느티나무인지 버들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이 왕버들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광주 원산동이 고향인 이선제(1389~1454)가 심었다고 전한다
. 나무의 나이는 550~600년 정도로 여겨지며, 높이는 15.4m, 가슴 높이 둘레가 1.7m, 수관(樹
冠) 너비는 13m 정도이다. 
이선제는 광산이씨 집안으로 자는 가부(家父), 호는 필문(
畢門)이다. 권근(權近)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419년
증광시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1423년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할 때 사관(
史官)으로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편찬한 고려사가 당시 이색(李穡), 이인복(李仁復)의 금경
록(金鏡錄)를 바탕으로 작성해 사실과 다른 것이 많음을 지적하며 원전(原典)을 따르자고 주
장했다.
1431년 집현전 부교리로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병조참의
(兵曹參議)와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 등을 거쳐 1448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후 정창손(鄭昌孫), 김종서(金宗瑞) 등과 '고려사'를 개찬(改撰)했으며 예문관(藝文
館) 제학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선제는 이 나무를 심으면서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망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과거에 붙으면 이 나무에 북을 걸고 축하 잔치를 벌였는데, 그 연유로 괘고정
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괘고정이란 정자(亭子)가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의 이름이 괘고정이다. (나중에 혼란을 막고자 나무를 뜻하는 '樹'를 붙임)


1589년 이선제의 5대손인
이발(李潑)이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연루되어 본인과 가족들이 처
단되자 나무가 비실비실 말라죽기 시작했다고 하며, 그때 이선제의 관직도 삭탈당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이발의 억울함이 밝혀졌고, 나무도 그 한을 풀었는지 이발이 죽고 300
여 년이 흐른 19세기 후반에 다시금 정신을 차리며 살아났다고 전한다. 이렇게 광신이씨 집안
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나무로 그 집안에서 애지중지 관리하고 있으며, 여기서 서북쪽으로 조
금 들어가면 이선제의 부조묘(不祖廟)와 묘역이 있어 이 일대가 이선제 집안의 성지(聖地)나
다름이 없다.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579-3


▲  옆에서 바라본 괘고정수의 위엄

▲  슬슬 기지개를 켜는 원산들
영산강의 지류인 대촌천의 물을 먹으며 올해도 풍년 예감을 꿈꾼다.


 

♠  고경명(高敬命) 집안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 - 광주 지방기념물 12호

제봉산(霽俸山, 164m) 서쪽에 자리한 압촌동(鴨村洞)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제대
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한 제봉 고경명(霽俸 高敬命, 1533~1592)이 살던 곳이다. 그의 집터에
는 그 후손이 왜정(倭政) 초기에 지은 기와집(고원희 가옥)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고경명
일가의 충절을 기리고자 나라에서 세운 고씨삼강문이 자리한다.
또한 마을을 서쪽에 품은 제봉산은 고경명의 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경명이 어린 시절 뛰어
다니던 산이라 동네와 산 일대에 온통 고경명의 체취가 진동을 한다. 근래에는 고원희 가옥의
일부를 손질해 닦은 광주콩종합센터가 호남 지역 콩의 성지(聖地)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으며,
마을 북쪽에는 광주국제영어마을이 들어서 이 땅의 아주 몹쓸 전염병인 영어 사대주의(事大主
義)에 쓸데없이 일조하고 있다.

압촌제(鴨村堤)를 바라보며 자리한 고씨삼강문은 이 땅에 흔한 정려각의 하나로 고경명과 그
의 일가의 충절을 뼛속 깊이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
등 7명의 정려(旌閭)가 봉안되어 있는데, 여기서 1충은 고경명, 3효는 그의 아들인 고종후(高
從厚), 고인후(高因厚), 손자 고부금(高傅金)이며, 2열은 고경명의 딸인 노상룡(盧尙龍)의 부
인, 질부인 고거후(高居厚)의 처 광산정씨(光山鄭氏), 1절은 고경명의 동생인 고경형(高敬兄)
이다.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북쪽으로 가다가 충남 금산
(錦山)에서 무모한 전술로 의병을 다 말아먹고 전사했다. 그의 맏아들인 고인후는 금산 전투
에서 살아남아 귀향했으며, 1593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晉州城) 전투에 참여했으나 성
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2째 아들인 고종후는 금산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했으며, 고경명의 손자인 고부금은 효자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2열에 해당되는 고경명의 딸과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는 정유재란(丁酉再
亂) 때 왜군에게 잡히자 자결했으며, 1절에 해당되는 고경형은 진주성 싸움 때 성이 함락되자
조카인 고인후와 함께 남강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것은 1595년부터로 고경명과 고경형 형제, 고종후/인후 형
제가 제일 먼저 정려되었고, 고경명의 딸이자 노상룡의 처는 1597년, 고부금은 1655년, 고거
후의 처 광산정씨는 1844년에 정려되어 바로 그해에 정려각이 지어졌다.
정려각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방에 홍살을 설치해 내부를 지키고 있고,
앞뒤 2열로 7명의 정려 현판을 달았다. 건물 밖은 돌담을 둘렀고, 바로 옆에는 고씨 집안의
제각(祭閣)인 추원각(追遠閣)이 자리해 그 집안의 자랑이자 보물인 삼강문을 지킨다.

* 고씨삼강문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산14 (압촌길66)

▲  태극마크가 그려진 고씨삼강문 정문

▲  조촐한 모습의 고씨삼강문

▲  고경형의 정려

▲  고부금의 정려

▲  고인후의 정려

▲  고종후의 정려

▲  고경명의 딸이자 노상룡의 처 정려

▲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의 정려


▲  고씨삼강문의 주인으로 추증 관직이 제일 많은 고경명 정려

▲  고씨삼강문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추원각
장흥고씨 집안의 제각(祭閣)이다.

▲  평화로운 전원 분위기의 압촌동 - 고씨삼강문과 고원희가옥, 제봉산,
광주콩종합센터 등의 명소를 간직하고 있는 시골 마을이다.

▲  고원희 가옥(광주 지방문화재자료 8호) 외경

고씨삼강문에서 동쪽으로 2분 남짓 들어가면 그 골목의 끝에 고원희가옥이란 기와집이 소나무
숲을 병풍으로 두르며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집은 이름 그대로 고원희란 사람의 주택으로 고경명의 옛 집터이기도 하다. 그의 후손들은
계속 이곳에 살았는데, 옛집이 낡아서 무너질 지경에 이르자 1917년에 고원희의 아버지인 고
종석(高琮錫)이 지금의 집을 지으면서 300년 넘게 숙성된 고색의 때는 싹 날라가고 만다. 허
나 사람도 살아야 되니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비록 집은 새로 갈았으나 고경명이
살던 옛 터전을 계속 지키고 있으니 그것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새집 이전에는 이 지방의 유서 깊은 고택(古宅)답게 건물이 꽤 많았으나 지금은 대문과 사랑
채, 안채, 곳간채, 사당 등이 남아있어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2012년 가옥의 서쪽
부분을 광주광역시와 저절로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같이 만든 광주콩종합센터에 떼어주면서 면
적이 더 줄었다.

현재 집은 고원희씨 일가가 살고 있다. 결과는 완전 시궁창이나 임진왜란 때 호남 최초의 의
병이란 타이틀을 쥐고 있는 고경명의 후손이지만 왜정과 해방, 현대(現代)라는 임진왜란보다
훨씬 험난한 세월의 흐름을 거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왜정 때는 집안에서 뜻밖에 친
일파가 나와 형제 간의 다툼이 생겼고 해방 이후에는 우익과 좌익의 대립으로 집안이 쪼개졌
다.
지금까지도 집안은 안정되지 못하여 다른 일가들은 모두 외지로 나가고 고원희 일가만 선조의
터전을 지키고 있다. 가옥 내부를 둘러보려면 그에게 허가를 받아야 되나 우리는 굳이 내부는
들어가지 않았다.

▲  고원희가옥 돌담과 대문

▲  광주콩종합센터에서 바라본 고원희가옥

집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곳간채가 나타난다. 대문 옆에는 차량을 위해 담장을 트고 완전
히 개방된 문을 냈으며, 안마당을 사이에 두며 안채가 있고 그 오른쪽에 부조묘(不祧廟)라 불
리는 사당을 두었다. 현재 가옥은 1917년에 싹 갈았지만 부조묘는 이전 것을 그대로 쓰고 있
어 여기서 그나마 오래된 건물인데, 고경명과 고종후, 고인후를 봉안하고 있다.
여기서 부조묘란 나라의 공이 있는 사람의 신위(神位)를 봉안한 특별한 사당으로 보통 조상의
신위는 4대가 지나면 무조건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된다. 허나 부조묘는 그럴 필요가 없는 불
천지위(不遷之位)의 특권을 누린다. 이런 사당은 제왕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17년에 지어졌음을 알리는 상량문(上樑文)
이 있다. 근데 골 때리는 것은 조성 시기에 대한 표현인데, '숭정기원후 오갑정사 윤이월초
구일(崇 禎紀元後 五甲丁巳 閏二月初 九日)'이라 쓰여있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의 연호이다.
명(明)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를 벌이며 아시아의 호구 약소국으로 온갖 개망신을 당하며 살
아온 조선, 단군(檀君)이 세운 조선(고조선)은 대륙까지 호령했던 큰 나라였으나 1392년에 세
워진 조선은 그 반대였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한 이후, 청나라 제왕의 연호 대신 숭정이란 연호를 계속 우려먹으며 명나
라를 쓸데없이 그리워했는데, 심지어 17세기 중반 명나라의 재건을 꿈꾸며 중원대륙 남부에서
난을 일으키다 청나라에게 개털린 남명(南明)의 제왕 영력(永歷, 1646년부터 시작됨)의 연호
까지 썼다. 물론 청나라에 반감도 명과 남명의 연호를 쓰게 하는데 한몫했다.

고종이 황제 위에 오른 1897년 이후로는 더 이상 숭정이란 이름을 쓰지 않은 줄 알았더만 왜
정 때도 그 쾌쾌묵은 숭정으로 연대(年代)를 표시한 것이다. 개화기 이후 양력(陽曆)이 들어
와 그 아니꼬운 왜왕의 연호 대신 양력이나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표시하면 될 것을 어찌하여
그 염병할 명나라 사대주의의 더러운 산물인 숭정 기원후~~~를 써야 했는가..? 집을 새로 지
었다는 고종석도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가 팽배했던 조선 후기의 그 흔한 우둔한 유생
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아니 왜정 때까지 명나라의 썩어빠진 연호를 꼭 써야 했는가? 그것을
들으니 이 집에 대한 정덜미가 싹 떨어지다 못해 칵~ 침이 뱉고 싶어진다.

* 고원희가옥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99 (압촌1길 12)

▲  차량 출입문에서 바라본 가옥 내부

▲  고원희가옥 앞쪽 돌담길과 정자


▲  담장 너머로 바라본 부조묘
고경명과 고종후, 고인후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단청을 곱게 입혀서 그런지 새 건물처럼 보인다.

▲  고원희가옥 뒤쪽 제봉산 소나무숲

고원희가옥 뒤쪽에는 소나무숲이 우거져 솔내음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이곳에는 의자와 평
상이 여럿 설치되어 있고 나무 그늘이 햇살을 막아주고 있어 소풍이나 나들이 쉼터로도 아주
좋은 곳인데, 유치원과 초등학생들의 숲/자연 학습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으며, 여기서 산길을
따라 제봉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  바람의 차디찬 소리만이 살포시 적막을 깨뜨리는 소나무숲

▲  고원희가옥 앞쪽에 자리한 연못

▲  광주콩종합센터 정문

고원희가옥 앞쪽에는 근래 지어진 네모난 정자와 키가 큰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정자 옆에
는 동그란 연못이 봄을 품고 있는데, 이 연못은 가옥을 새롭게 갈던 1917년 이후에 판 거라고
한다. 연못이긴 하나 수심이 얕으며, 개구리들이 늦잠을 자고 있는지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서 연못 너머 북쪽을 보면 고원희가옥과는 조금 다른 기와집의 무리와 장독의 행렬이 두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2011년 9월에 결성된 '저절로소비자생활협동조합'에서 광주 남구
청과 고원희 일가의 도움을 받아서 2012년 7월에 문을 연 광주콩종합센터이다. 이곳도 엄연히
고원희가옥에 딸린 토지였는데, 가옥 집주인이 흔쾌히 땅을 제공하여 기존의 기와집을 손질해
콩센터가 들어선 것이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콩과 그를 빚어서 만든 장류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데, 장류(된장, 간장)
제조 및 보관/숙성, 판매와 장독대 설치 및 제공, 콩재배와 가공 관련 교육과 훈련,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그 외에 두부만들기, 천연염색체험, 인절미/화전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도 있
어 가족 단위나 교육을 겯드린 어린이 소풍/견학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센터 동쪽에는 요즘에는 보기가 힘든 장독대들이 하나도 아니고 수백 개가 길게 늘어서 정겨
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다들 콩 장류나 음식들이 담겨져 있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다.
광주콩종합센터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해당 홈페이지로 이동됨)


▲  광주콩종합센터 장독대의 행렬 ▼


 

♠  칠석동(漆石洞)에서 만난 명소들

▲  부용정(芙蓉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13호

대촌동 남쪽에 자리한 칠석동은 옻돌마을이라 불린다. 이 땅에 흔한 시골 마을의 하나로 이곳
에는 무려 3가지의 오래된 명물이 전하고 있다. 그 명물이란 은행나무와 부용정, 고싸움놀이
로 이중 은행나무는 광주에서 가장 늙은 나무이며, 부용정은 광주에서 가장 먼저 향약이 시행
된 곳이다. 그리고 고싸움은 남도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들 명소는 하칠석마을에 있는 고싸움놀이테마파크(공원)에 몰려있어 속 편하게 한 덩어리로
둘러보면 되며, 부용정과 은행나무 외에 고싸움놀이와 관련된 고싸움놀이전수관, 고싸움놀이
4D영상체험관 등이 있어 남도 고싸움의 성지(聖地) 역할도 겸한다.


▲  옆에서 본 부용정과 부용정석비

고싸움놀이테마파크(이하 고싸움공원) 동쪽에 자리한 부용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건물이다. 보통 오래된 정자들이 팔작지붕을 취한데 반해 여기는 맞배지붕을 지녀 정자보
다는 누각이나 당(堂)을 칭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인데, 특이하게도 공포 덩어리가
없는 민도리식으로 12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2단의 석축 위에 자리해 자못 웅장해
보이며, 내부를 가리는 벽이 없어 사방이 뻥 뚫려있다.

이 정자는 1418년에 이 동네 출신인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세웠다. 그는 광산(광주)
김씨로 증참판을 지낸 김거안(金巨安)의 아들이며, 호는 부용이다. 그래서 정자 이름도 부용
정이 되었다.
고려 우왕 때는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를 지냈는데, 전라도에 침투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만호(突山萬戶)가 되었으며, 조선으로 세상이 바뀌면서 1394년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
使) 김빈길(金賓吉), 만호 김윤검(金允劒) 등과 왜선 3척을 잡은 공으로 태조 이성계에게 활
과 화살, 은기(銀器) 등을 하사 받았다. 1406년에는 전라도수군단련사(全羅道水軍團撫使)로서
왜선 1척을 잡았고, 1407년에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이추(李推)와 대호군(大護軍) 강원길
(姜元吉)과 함께 요동에서 넘어온 피난민을 압송해 돌려보냈다.
이후 경기수군도절제사와 충청전라도수군도체찰추포사(忠淸全羅道水軍都體察追捕使)를 역임했
으며, 1411년 충청도수군절제사로 승진했으나 병으로 인해 벼슬을 사양했다. 이듬해에는 전라
도수군절제사가 되었고, 1418년 황해도관찰사를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는 고향인 칠석동에서 부용정을 짓고 여씨(呂氏)의 남전향약(南田鄕約)과 주자(朱子)의 백
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참조하여 향약을 만들어 고향의 풍속을 단속했는데, 이는 광주 향약
좌목(鄕約座目)의 유래가 되었다. 즉 광주에서 가장 먼저 향약이 시작된 곳인 셈이다. 고향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는 한편, 이시원(李始元), 노자정(盧自亭) 등과 학문을 논하며 아주 한
가롭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용정은 김문발이 세상을 뜬 이후에도 이 지역의 이름있는 명소로 남아서 양응정(梁應鼎)과
고경명(高敬命), 이안눌(李安訥), 박제형(朴濟珩) 등 지역의 명사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남긴
편액이 무수히 장식되어 있으며, 정자 옆에는 부용정의 내력이 소상히 담긴 부용정석비가 자
리해 있는데, 이는 1984년에 세워진 것이다.
막힘이 하나도 없이 사방이 뚫려 있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마루 형태라 여름 제국 시절에
는 완전 극락과 같은 곳이다. 바람도 솔솔 불어오니 이곳에서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바
둑을 두면 정말 꿀맛이 따로 없을 것이다. 다만 겨울 제국 시절에는 지옥이다.

▲  고싸움놀이테마파크(공원) 표석

▲  돌담 안에 담긴 널뛰기


▲  칠석동 은행나무 - 광주 지방기념물 10호

고싸움공원 남쪽에는 앞서 괘고정수를 능가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자리해 있다. 덩치가 얼마
나 크던지 그의 앞에서는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대자
연 형님의 위대한 힘과 철도 녹여 먹을 정도의 장대한 세월이 그를 산만한 덩치로 만든 것이
다.

나무의 나이는 65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예전에는 8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알려졌
다. 그러다가 요즘은 650년 정도로 자리를 잡은 듯 싶다. 이 땅에 널린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
와 달리 태반이 사람이 심은 것으로 부용정의 주인인 김문발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한 토막 전
해오기 때문이다. 그는 14세기 중반에서 15세기 초반 걸쳐 살던 사람이니 그가 심은 것이 맞
다면 600년~650년 정도가 된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세월을 수백 년이나 꾸역꾸역 섭취하여 그의 키는 26m에 이르며, 7m
높이에서 가지가 무수히 갈라져 나와 큰 나무의 위엄을 제대로 과시한다. 그의 전체 둘레는
13.3m, 수관의 너비는 동서 30m, 남북 26m로 광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나무로 꼽힌다.

예로부터 칠석동 옻돌마을 사람들이 서낭나무로 받들어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당산제(堂山祭)를
지낸다. 이 나무는 할머니당산, 그리고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들판에 할아버지 당산이라 불리
는 소나무가 있는데, 보통은 같은 종류의 나무를 노부부나 부부로 삼지만 여기는 서로 다른
나무를 노부부로 삼은 것이 특징이다. 나이와 덩치, 명성이 할머니 당산인 은행나무가 압도적
으로 우세해 할아버지 당산 소나무는 당산제 외에는 관심도 거의 못받는 우울한 실정이다. (
우리도 할아버지 당산은 안갔음)
은행나무는 귀신이 좋아하는 나무의 하나라 옛 사람들은 늙어보이는 나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고려 후기부터 마을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고마운 존재로
이곳 사람들의 은행나무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대보름날 당산제가 끝나면 다음날 16일부터 마을을 동서로 상촌(上村)과 하촌(下村)으로 나누
어 고싸움놀이를 벌인다. 현재 칠석동은 상칠석, 하칠석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바로 여기서 비
롯되었다. 이때 고싸움에 쓰이는 고는 제일 먼저 이 나무를 돌아야 된다. 그러니까 칠석동 고
싸움놀이는 은행나무에서 그 서막을 여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전주이씨와 김문발의 광산김씨가 오랫동안 터를 일군 마을로 평야지대에 자리해 있
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이곳은 와우(蝸牛) 형국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소가 매우 사나워 이리
저리 날뛰므로 고삐를 매어두고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하여 풍수상 부실한 부분을 커
버해주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  꽤나 굵직해진 은행나무 밑도리의 위엄
1그루가 아니라 여러 그루가 한 지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무 앞에는 상석이 놓여져 있으며, 여기서 당산제를 지낸다.

▲  나무에 칭칭 감겨진 금줄

나무가 아직은 정정하다고 해도 늙은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600년 이상의 노구를 지탱하기
힘들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지구의 중력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세월보다 무거운 것은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가 없을 따름이지 세월의
무게는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  고싸움놀이4D영상체험관에 재현된 고싸움놀이의 위엄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고싸움놀이4D영상체험관(이하 영상체험관)에 잠시 발을 들
였다.
이곳은 남도의 명물 고싸움놀이에 대한 온갖 자료와 영상, 디오라마 등을 담고 있는데, 단순
한 보여주기를 떠나 4D영상관과 4D입체게임 등 최첨단의 신선한 아이템을 준비해 민속놀이에
대한 관심이 적은 어린이와 젊은층을 겨낭한 점이 눈에 띈다. 그냥 이 땅에 흔한 박물관이나
체험관처럼 만들면 주목도 못받고 묻힐 우려가 크니 광주시에서 아주 통 크게 체험관을 지른
것이다.
 
영상관에서는 4D영상으로 고싸움 놀이를 아주 실감나게 시청할 수 있으며, 칠석마을 사람들이
이곳 풍수의 허한 부분을 커버하고자 은행나무를 심고 고싸움놀이를 하는 내용도 소상히 나온
다. 영상체험관은 관람, 입장은 공짜이나 영상관만큼은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시청 시간은
20분 정도이다. (상영시간은 문의 요망)
그리고 4D입체게임은 우리나라 최초의 리얼타임 입체 영상게임으로 2팀으로 나누어 승패를 가
른다. (자세한 것은 안해봐서 모름) 또한 고라이더라는 코너는 고싸움 관련 O,X 퀴즈를 풀어
90점 이상이면 고라이더를 공짜로 태워준다. 고라이더는 고의 제일 높은 부분에 올라타는 것
이다.

2층은 일반적인 전시실로 '고싸움놀이 현장체험' 코너에서는 고싸움놀이를 재현한 거대한 디
오라마가 있으며, 여기서 퍼즐게임을 통해 고싸움에 등장하는 인물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속의 고싸움 놀이'는 우리의 옛 땅인 왜열도와 중원대륙, 그리고 인도 등 다른 나라의 고싸움
놀이를 집대성했고, '당산제는 어떻게 지내나요?' 코너는 고싸움 캐릭터인 고동이와 고순이와
함께 고싸움놀이 당산제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 외에 '고싸움놀이 노래시설'에서는 고싸움놀이에 등장하는 소리(원음)를 들을 수 있다. 그
렇다면 고싸움 놀이는 무엇일까?

'광주 칠석 고싸움놀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남도의 주요 민속놀이로 광주 칠
석동이 그 중심이다. 매년 음력 정월 10일경부터 2월 초하루까지 20일 정도 펼쳐지는데, 은행
나무와 할아버지 당산 소나무에 당산제를 지내는 정월 대보름날이 절정이다.
고싸움의 고는 옷고름, 고맺음, 고풀이란 뜻으로 노끈 한 가닥을 길게 늘여 둥그런 모양으로
맺은 것이다. 그래서 고싸움이란 놀이에서 사용하는 고가 서로 싸움을 벌인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싸움의 유래에 대해서는 딱히 전하는 기록은 없으며, 믿거나 말거나 속설에 따르면 땅의 거
센 기운을 누르고자 사람들을 동원해 땅을 밟는 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매우 가
까운 나주 남평(南平) 지방에서는 1950년대까지 활발하게 놀이를 진행했으며, 장흥과 강진,
영암 지방에서도 줄다리기 이전에 고싸움을 벌인 것으로 보아 줄다리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
다. 줄다리기와 고싸움은 놀이의 시기가 같고, 칠석의 상촌은 남자, 하촌은 여자를 상징해 여
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여기는 것은 다른 줄다리기나 남녀 성대결 민속 놀이와 비슷하다.
허나 고싸움은 지휘자가 고 위에 올라가 게임을 지휘하며 하루도 아닌 20일 정도 격렬하게 진
행되는 점은 기존 줄다리기와는 다르다.

고싸움놀이의 구성은 상촌인 우대미와 하촌인 아랫대미가 너비 2m 이상의 골목길을 경계선으
로 나뉜다. 편단은 줄을 타고 싸우는 우두머리인 '줄패장', 고를 메는 '몰꾼', 고의 몸과 꼬
리를 잡는 꼬리줄잡이이며, 응원단으로 농악대, 깃발잡이, 횃불잡이 등이 있다.
승부는 상대방의 고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땅에 닿게 함으로써 결정이 나는데 이때 농악과 함
께 기수(旗手)와 횃불이 동원되어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다. 만약 승부가 나지 않으면 고를
풀어 그 줄로 2월 초하룻날에 줄다리기로 최종 결판을 내기도 한다. 고싸움은 우리나라 민속
놀이 중 가장 패기가 높고 격렬한 남성적인 놀이로 강인한 협동심과 줄패장의 지휘력이 중요
하다. 고 위에 탄 줄패장의 지휘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화끈한 민속놀이로 인기를 누렸던 고싸움은 왜정 이후 시들시들해지다가 1945년을 전
후해서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동네에 뜻 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다시 재현되었으며,
1969년 10월 대구에서 열린 제10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고싸움의 위
엄을 천하에 드러냈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선보여 대단한 관심을 받았으며, 광주
시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고싸움의 성지인 칠석동에 고싸움전수회관과 영상체험관, 테마공
원을 만들어 고싸움을 천하에 알리고 보존하는데 힘쓰고 있다.
처음 칠석동에 왔을 때 단순히 은행나무와 부용정만 생각했지 고싸움놀이는 크게 생각을 안했
는데, 이렇게 영상체험관을 살펴보고 본글을 작성하면서 고싸움에 대한 관심에 조금 불이 짚
여졌다. 고싸움놀이는 정월대보름에 주로 열린다고 하니 그때를 노려 고싸움의 실감나는 현장
을 구경하러 가야겠다.

* 고싸움놀이테마공원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 619, 996일대 (☎ 062-607-2340,46)



고싸움놀이 영상체험관을 끝으로 광주 대촌동 투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때 시간은 16시, 햇

님이 퇴근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지만 오늘 너무 많은 곳을 둘러봐서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게다가 투어를 시켜준 이들도 피곤한 상태, 여기서 더 본다면 이건 과식이다.
하여 미련 없이 그들이 사는 봉선동으로 넘어와 커피집에서 커피 1잔의 여유를 누린 다음, 인
근 지하철역인 소태역(광주1호선)에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광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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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3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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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맞이 산사 나들이 ~ 광주 무등산 원효사

' 광주 무등산 원효사(無等山 元曉寺) '

▲ 원효암에서 바라본 무등산 동쪽 줄기


여름의 제국(帝國)이 슬슬 그 기세가 꺾이던 9월 첫 주말, 호남의 수부(首府)이자 우리나
라의 5번째 도시인 광주(光州)를 찾았다. 거의 3년 만에 발걸음을 한 광주,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광주를 한번도 찾지 않은 무심함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 일어난다. 앞으로는 부
산(釜山)만큼이나 자주 찾으리라 다짐을 하며 찾은 이번 광주 나들이에서 문을 두드린 곳
은 무등산 북쪽에 둥지를 튼 원효사이다. 원래는 다른 곳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광주에
발을 내리자 돌연 원효사로 목적지가 바뀌었다.

광주의 주요 관문인 광천터미널에서 원효사(무등산장)까지 들어가는
광주시내버스 1187번
(광천동↔원효사)
을 탔다. 광주역과 옛 도청(문화전당역), 산수5거리를 지나 구불구불 고
갯길의 진수를 보이는 작고개를 오른다. 이 고개는 사방(四方)으로 몸집을 불려가는 광주
시내의 동쪽 확장을 막으면서 속세(俗世)와 자연세계의 경계 역할을 한다. 고개를 넘으면
비로소 무등산의 포근한 품에 안기게 되며, 고개 정상에 마련된 무등산전망대에 올라서면
인구 150만을 지닌 남도(南道)의 웅도(雄都) 광주시내가 시원스레 두 눈에 다가온다.

고개에 오르면 대도시 광주의 풍경 대신 자연에 묻힌 전원(田園) 풍경이 펼쳐진다. 옛 무
진주(武珍州)의 고성(古城)과 은빛물결이 출렁이는 제4저수지, 충민사, 충장사 등의 다양
한 볼거리가 눈과 마음을 제대로 호강시킨다. 충장사(忠壯祠)에서 오른쪽 길로 방향을 틀
어 4리를 들어가면 그제서야 산중에 자리한 원효사 종점에 이른다.

원효사 종점은 증심사(證心寺) 지구와 달리 주막 몇집과 주차장 외에는 별다른 시설은 없
다. 그래서인지 사람은 많지만 별로 번잡하지가 않아서 좋다. 종점에서 내려 서쪽을 두리
번거리면 속세와 불계(佛界)를 구분짓는 일주문이 보인다. 그 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원효
사의 산문에 이르며, 절까지는 수레가 마음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도로가 깔려 있다.


▲ 원효사 일주문(一柱門)

문이라고는 하지만 지붕과 공포를 받치는 기둥만이 있을 뿐 여닫는 문짝이 없다. 등산객과
답사객, 부자와 서민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맞아들이는 일주문은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의
마음이자 대자연의 마음이다. 신(神)과 동물들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하여 만물의 영장을
외람되게 칭하는 인간들이 일주문의 마음을 절반만이라도 닮는다면 이 세상은 정말로 아름
다울 것이다.

▲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돌탑

▲ 원효사 부도군(浮屠群)

일주문을 지나 4분 정도 오르면 커다란 돌탑과 부도군이 나온다. 이름없는 중생들이 그들의
조그만 소망을 담으며 차곡차곡 올려놓은 돌이 이제는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으며, 지금도
계속 자라고 있다. 돌탑 좌측에는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그들을 기리는 탑비가 심어
진 부도군이 있는데, 부도는 총 6기로 가운데 탑은 1927년 절을 중수한 원담화상(圓潭和尙)
의 탑이다.


▲ 원효사를 100m 앞두고

도군을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원효사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직
진을 하면 원효사의 정문인 회암루가 나오며, 왼쪽은 무등산으로 오르는 산길로 원효사 후문
과 이어진다. 어디로 가든 상관은 없으나 직진이 더 빠르다.
그럼 여기서 잠시 원효사의 내력(來歷)을 간추려보도록 하자.


♠ 신라 후기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무등산의
주요 사찰로 성장한 ~ 무등산 원효사(元曉寺)

원효사는 광주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무등산(無等山, 1187m)의 북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오랜
산사(山寺)이다. 7세기 중반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그런 이유로 절의 이
름도 원효사이다. 허나 원효는 무열왕(武烈王, 재위 654~661)부터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 시절까지 신라 불교의 1인자로 거의 왕경(王京, 경주)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그 시절 광주는
옛 백제(百濟) 땅으로 백제부흥군의 활동지역이었다. 비록 660년에 백제가 나당(羅唐)연합군에
게 멸망하고 말았지만 백제의 땅이 신라의 그늘에 제대로 들어오기까지 많은 세월을 필요로 했
다. 그런 상황에 어찌 원효가 이런 위험지역까지 와서 절을 세웠겠는가..? 게다가 1980년 절을
발굴하면서 8~9세기에 만들어진 청자파편과 금동불상이 나와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음을 보여주
며,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4~1339) 시절에 중창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조헌(趙憲)과 의기투합한 영규대사(靈圭大師)
가 수도했으며, 1597년 증심사를 중창한 승려 석경
(釋經)이 중창했다. 1636년 신원이 중수하고
다음해에 32불을 조성했다. 1789년과 1802년에 선방과 법당을 새로 짓고 1831년 단청불사를 벌
였다. 1894년에는 학산대사(鶴傘大師)가 관아(官衙)
에 절 중수를 호소하여 공사비를 지원받고,
지역 유지의 도움으로 절을 중건했다고 한다.

왜정(倭政) 때는 1927년 원담화상이 중수하고 그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상당한 규모를
지니게 되었다. 허나 6.25전쟁 때 모조리 소실되면서 수백 년을 일구었던 가람이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다만 전쟁 이전 이곳을 찾은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이 쓴 심춘순례
(尋春巡禮)
에 왕년의 원효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법당과 범절이 당당한 일사(一寺)의 풍모를 갖췄다. 본존(本尊)인 석가여래상이 거룩하시고 사
자의 등에다 지운 대법고는 다른데서는 못 보던 것이다. 법당 오른편에 있는 영자전(影子殿)에
는 정면에 달마(達磨)로부터 원효. 청허(淸虛) 내지 서월(瑞月)까지의 초상화를 걸고 따로 영조
50년 갑오(1774)에 담양 서봉사(瑞鳳寺)에서 모셔 온 원효의 초상화를 걸었다. 나한전, 명부전,
선방, 칠성각 같은 것이 다 있고 불상도 볼만하니, 그래도 원효의 창사 이래 오랫동안 명찰(名
刹)이던 자취가 남아 있다'


▲ 6.25전쟁의 가슴시린 상처 ~ 5층석탑 (대웅전 좌측 석축)

1954년 대웅전을 다시 지으면서 주춧돌 밑에서 고려 때 만들어진 금동비로자나불이 발견되어 모
셨으나 그만 1974년에 도난을 당했다. 1980년 법타가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를 세웠으며, 그 과
정에서 원효사의 찬란했던 옛 유물 수백 점이 앞다투어 쏟아져 나와 발굴조사를 벌였다. 1992년
개산조당과 종각, 회암루를 지어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비록 고색(古色)의 내음은 형편없이 씻겨 내려갔고, 절의 규모도 조촐하지만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무등선원, 회암루, 약사전 등 10여 동에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운다. 소장문화유산으로
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동부도(광주 지방유형문화재 7호, 아쉽게도 만나지 못함)와 만수사에서
가져온 동종이 있으며, 1980년에 발굴된 유물 가운데 32점(금동,청동불상 12점, 소조불두(塑造
佛頭) 18점, 동경(銅鏡) 2점)은 광주 지방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가
있다.

깊은 산골에 자리하여 산사의 그윽함과 여유로움, 자연의 내음을 듬뿍 선사하며, 속세의 오염된
마음과 머리를 정화시키기에 그만인 곳이다. 특히 경내로 들어서는 회암루는 속인(俗人)들에게
활짝 개방되어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야기꽃이 쉬엄없이 피어나는 쉼터로 이곳에
서는 누각이 바라보는 정면(동쪽)으로 의상봉과 윤필봉, 누에봉이 바라보인다. 회암루에 앉아
풍경물고기의 잔잔한 음악소리와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지배하는 번뇌를 시원하
게 털어버는 것은 어떨까?

※ 원효사 찾아가기 (2011년 10월 기준)
* 광주(광천동)터미널, 광주역(동측), 지하철 금남로5가역(1번 출구), 금남로4가역(2번 출구),
산수5거리에서 1187번 시내버스 이용 (15~25분 간격)
* 주말, 휴일에는 1187-1번 시내버스(원효사↔산수5거리)가 임시 운행된다. (60~80분 간격, 1일
10회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원효사까지 접근 가능)
① 광주시내 → 산수5거리 → 지산유원지입구 → 제4수원지 → 충장사입구에서 우회전 → 원효
사종점 → 원효사 주차장

★ 원효사 관람정보
* 원효사의 오랜 보물인 동부도는 대웅전 뒤쪽 산에 있다. 절 뒷문으로 나가면 오른쪽으로 작은
산길이 나 있는데, 그 길로 가면 동부도가 나온다. 이정표가 따로 없으므로 지나치기 쉽다.
* 원효사에서 늦재를 넘어 증심사로 내려갈 수 있으며, 사양능선과 용추3거리를 거쳐 입석대까
지 4시간 소요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846 (☎ 062-262-0321)

▲ 개산조당 뒤쪽에 조그만 석불입상
허전한 머리와 오른손에 쥐어든 지팡이는
그가 지장보살(地藏菩薩)임을 알려준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靈山殿)
예전에는 삼성각(三聖閣)의 기능을 하던
성산각(星山閣)이었다.


♠ 작지만 알차 보이는 원효사 둘러보기


▲ 절을 찾은 중생들의 포근한 휴식처 ~ 회암루(檜巖樓)

보통 외부에서 절 경내로 들어서려면 2층 규모의 누각 비슷한 건물을 지나야 되는데, 원효사는
회암루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1층은 뻥뚫린 공간으로 가운데에 경내로 올라서는 계단이 있으
며, 계단을 내딛으면 대웅전이 정면에 나타난다. 2층은 넓은 다락으로 거의 강당(講堂)의 역할
을 하고 있는데, 일반에게 개방되어 휴일에는 쉬었다 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기둥에 기대거나 난간에 걸터앉아 조망(眺望)을 즐기는 사람들, 간혹
벌러덩 누워 꿈나라를 청하는 이들까지, 정말로 정겨운 풍경이다. 원효사를 찾은 그들에게는 이
곳은 그야말로 조그만 극락이다.


▲ 개산조당 우측에 자리한 무등산 호랑이상
호랑이는 산신(山神)의 심부름꾼이자 애완동물로 속인(俗人)들에게는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돌에 새겨진 무등산 호랑이는 그에 걸맞는 용맹과 무서움은 온데간데
없고 호랑이의 탈을 쓴 귀여움이 묻어난 고양이를 보는 듯 하다.


▲ 조촐하고 간결한 모습이 인상적인 개산조당(開山祖堂)
정면 1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효사를 세웠다는 원효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개산조당에 담겨진 만수사 동종(萬壽寺銅鍾)
- 광주 지방유형문화재 15호
개산조당에는 300년 된 빛바랜 조그만 종이 소
중히 담겨져 있다. 이 종은 1710년 담양 추월산
(秋月山)에 있는 만수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주
상삼전하(主上三殿下)'란 명문이 있어 왕실의
안녕을 빌고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종의 아랫
부분에는 1954년 대웅전 중수를 도운 시주자 명
단이 적혀 있으며, 윗 부분에는 '옴'으로 발음
되는 범자(梵字)를 새겼다. 9개의 유두(乳頭)가
있는 4개의 유곽 사이로 보살입상을 배치했다.


▲ 대웅전 뜨락에 지장보살상과 금강역사(金剛力士)

자비로운 인상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로 부처의 경호원인 금강역사(金剛力士) 2인이 서로
반대의 방향을 주시하며 위엄이 서린 표정으로 지장보살과 절을 지킨다. 그런데 이들은 경내의
한복판인 여기보다는 경내 한켠에 자리를 두는 것이 더 적당할 듯 싶다. 배치상으로도 조금은
어색해 보인다.


▲ 명부전(冥府殿)
개산조당과 영산전 사이에 자리한 건물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명부(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그러고보니 원효사는 지장보살상이 유난히도 많다.


▲ 원효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1981년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3존불이 모셔져 있다. 법당
뜨락에는 부처를 상징하는 석탑을 세우기 마련이나 원효사는 그런 것이 없다.


▲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3존불
조금 두툼해 보이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수려한 보관(寶冠)을 자랑하며 자리를 지킨다.

6.25전쟁의 처참한 흔적 ~ 대웅전 좌측 석
축에 힘겹게 기댄 5층석탑

대웅전 뒤쪽과 좌측에는 법당을 만들고자 쌓은
오래된 석축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좌측 석
축에는 보기에도 안쓰러운 만신창이의 5층석탑
이 힘겹게 석축에 기대며 옛날을 그리워한다.

6.25이전에는 대웅전 뜨락에 당당하게 서 있었
으나 전쟁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어 쓰러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저 자리에 둔 것이다. 옥개석(屋
蓋石)과 탑신(塔身), 기단(基壇)까지 전흔(戰痕
)이 지독하게 서려 그날의 아비규환을 짐작케
만든다. 1층 탑신에는 탑을 위로하려는 듯 중생
이 쌓아놓은 돌탑이 가득하며, 탑 옆에는 옛 주
춧돌과 석등이 심어져 있던 대석(臺石) 등이 나
란히 놓여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약사전(藥師殿)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보금자리로
예전에는 성보각(聖寶閣)으로 쓰였다.


▲ 무등산의 옥계수로 마를 날이 없는 감로정(甘露井)

▲ 감로정 동자상(童子像)

감로정에는 달고 맛있는 이슬과도 같은 옥계수가 콸콸 쏟아져 나와 중생의 목마름을 제대로 해
소시켜준다. 가뭄에도 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이곳의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달던지 몸속의 때와
번뇌가 제대로 씻겨내려간 듯, 마음이 시원하다. 감로정에는 머리를 둘로 묶은 귀여운 동자상이
자신의 물병을 석조에 쏟아 붇느라 여념이 없다. 물병은 분명 작은데 그 안에서는 쉼도 없이 물
이 쏟아져 나오니 정말 요술 물병이 따로 없다. 그 주변으로 파란 바가지들이 돌에 기대 약간의
달콤한 휴식을 즐긴다.


▲ 회암루 앞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부드러운 곡선

이렇게 하여 작지만 알찬 원효사 경내를 모두 둘러보았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곳의 오랜 보
물인 동부도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를 보기 위해 절을을 나와서도 경내 주변을 한참이나 두
리번거렸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동부도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은 정말 무등산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그 아쉬움을
힘겹게 삼키며 원효사와 작별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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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을 찾아 떠났던 남도기행 1편 ~ 광주지역 (월계동 장고분 / 무양서원)


' 봄을 찾아 떠났던 남도 기행 (2005년 4월 5일)'
'상편 ― 신도시에 숨겨져 있는 옛 유적들 (광주광역시)'


♠ prologue
길고 긴 겨울이 지나고 이제 바야흐로 2005년의 봄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나 춘분(春分)이 지나고 4월에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겨울의 잔여 세력들이 다시
겨울의 제국을 꿈꾸며 계속해서 반란을 부리는 통에 정작 봄은 우리 곁으로 다가오지도 못하고
저 멀리서 맴돌 뿐이다.
그러다 보니 따뜻해야 할 시기임에도 여전히 두꺼운 외투를 입고 다녀야 됨은 물론 3월 중~하순까지
눈이 버젓히 내리고 꽃과 나무의 잎이 피어날 시기임에도 좀처럼 그들이 피어나지를 못하니
이러다가는 정말 봄이란 존재가 완전히 망각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이상하리 만큼 추운 날씨 속에서도 식목일은 바로 다음 날로 성큼 다가왔고 그 날, 남도(南道)라
불리는 광주와 전라도 지역을 오랜만에 가보기로 하였다.

4월 4일 월요일 저녁, 일과 공부로 파김치가 되버린 몸뚱아리를 억지로 이끌며 사람들로 가득한
천안(天安) 방면 전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천안역에 이르러서 0시 14분에 광주(光州)로 가는 입석표를 사들고 조용히 그 시간을 기다리니
이윽고 4월 5일 새벽 0시 15분, 용산을 출발하여 광주로 가는 심야 무궁화호 열차가 천안역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수면실과 다름 없었던 객차 안에서 입석으로 가면서 주요 역을 정차할 때마다 틈틈히 빈자리를
노렸으나 자리가 좀처럼 빠지질 않는다. 김제를 지나서야 겨우 자리 하나를 차지하여 앉아
갈 수가 있었지.

새벽 3시 24분, 열차의 마지막 역인 광주역에 도착, 닭이 울 때까지 역사(驛舍) 맞이방에서
자리 2개를 떡하니 차지하며 약 3시간 동안 열심히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잠이 잘 오던지 머리를
의자에 기대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버렸지. 얼마나 피곤했으면 그렇게 잠이 들었을까..

어느덧 식목일의 여명은 밝아오고 아침 7시 경에 잠에서 깨어나 부근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는 전날(4일) 계획했던 식목일 답사 일정에 따라 제일 먼저 첨단지구라 불리는 광주서북쪽의
신도시를 찾아갔다.

첨단지구에는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문화유산 2곳이 숨어 있는데 하나는 서원(書院),
다른 하나는 특이한 구조의 오래된 무덤들로 내가 그 곳을 선택한 이유는 별로 특별한 것은 없다.
그냥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니까..

* 이번 답사 코스
' 서울
→ 천안역 → 광주역 → 무양서원 → 월계동 장고분 → 담양읍 → 관어공원,관어정 →
관방제림, 담양향교, 죽녹원 입구 →
순창읍 → 순창향교/단성전 → 순창객사/정려비와 효자비 → 서울 '

* 본 글은 상,중,하 3부로 나눠서 작성했습니다.
* 본 글에 사용한 글씨체는 굴림체, 돋음체, 바탕체입니다.
* 인라인 프레임 형태가 불편하여 따로 익스플로어 창으로 보고자 할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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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시 속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기와집 ~ 무양서원(武陽書院)
첨단지구의 서남쪽 월계동에 있는 무양공원, 그 공원의 서쪽자락 양지 바른 곳에는 '무양서원'이라
불리는 조그만 서원이 자리해 있다.
이 서원은 1927년, 탐진최씨(耽津崔氏) 문중에서 유림(儒林)들의 도움을 받아 세웠으며 광주 지역
유교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서원의 이름인 무양(武陽)은 광주의 옛 이름인 무진주(武珍州)의 양지(볕)에 있다는 뜻인 무진지양
(武珍之陽)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곳은 탐진최씨의 시조(始祖)인 최사전(全, 고려 중기 때 인물)을 비롯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여진족을 정벌했던 최윤덕(崔潤德) 장군금남 최부(錦南 崔溥) 등 문중의 유명한 인물 3명과
광주권 출신 인물로 미암일기(眉巖日記)의 저자(著者)인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충렬공 나덕헌
(忠烈公 羅德憲)
등을 배향(配享)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陰曆) 9월 6일에 제사를 지낸다.

서원에는 사당인 무양사(武陽祠)와 강당으로 쓰이는 이택당(以澤堂)을 비롯하여 성지재(誠之齋),
낙호재(樂乎齋) 등의 서재가 있으며, 현재 탐진최씨 문중에서 이 서원을 소유, 관리하고 있다.

무양서원은 광주광역시 지방문화재자료 3호.

※ 무양서원 찾아가기 (2005년 8월 현재)
* 광주시내버스 1,25,35,88,120,771번 이용, 무양서원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 3분
* 서원 앞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다.

▲ 무양서원 뒷쪽 담장
담장 주변으로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원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 담장너머에서 바라본 무양서원
인적이 없는 쓸쓸한 분위기의 서원 경내(境內),
오직 봄의 따스한 햇살만이 썰렁한 서원 내부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다.

▲ 서원 동쪽에 있는 제단(祭壇)
무양서원에서 배향(配享)하는 5명(
최사전, 최윤덕, 최부, 유희춘, 나덕헌)의 제단으로
제단 위에는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5기가 세워져 있다.

이 곳은 제향을 올릴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철문으로 굳게 닫혀져 있다.

▲ 조촐한 분위기의 제단(祭壇)
담장 너머로 본 것이라 어느 것이 누구의 비석인지는 모르겠다.

◀ 탐진최씨 선조 제단에 세워진 비석
때깔좋은 검은색의 비문에는 '耽津崔氏先祖
四世五位壇庭碑'라 쓰여 있어 이곳이 그들
문중의 신성한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 무양서원 이택당(以澤堂)
서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보통 삼문(三門)이나 누문(樓門)등의 출입문이 있으나
이 곳은 특이하게도 강당(講堂)으로 쓰이는 이택당이 정면에 딱 자리해 있다.

서원 내부로 들어가려면 이택당 양쪽으로 있는 합의문(合義門), 합인문(合仁門)
등의 2개의 문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처음에 이 서원을 둘러보면서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문이 없네 도대체 들어가는 문이 어디야?"
하며 어리둥절하였지.
그러다가 이택당 양쪽으로 조그만 쪽문을 발견했는데 그 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 이택당(以澤堂)에 걸려있는 '武陽書院' 현판

◀서원 내부로 들어서는 합인문(合仁門) -
태극마크가 새겨진 저 문은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 열어
보려고 나름대로 용을 써 보았으나 문은
나의그런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혀
꿈쩍도 하질 않는다.
나를 거부하며 굳게 입을 다문 저 문을
바라보며얼마나 허탈하던지, 여기서 이만
발걸음을돌려야 했다.
 

 

▲ 담장 밖에서 바라본 무양서원
삼문(三門) 너머에 무양서원의 정전(正殿)이라 할 수 있는 무양사가 있다.

◀서원 앞에 높이 자라난 나무 -
서원을 세웠을 때 기념으로 심었던
나무로 생각된다. 어느덧 봄이
다가왔건만 나무는 아직도 겨울의
망령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한다.

서원 안에 피어난 동백꽃들
 

▲ 무양공원에서 만난 개나리꽃
무양서원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잠깐 만난 개나리꽃들,
그들은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치 잘 익은 벼처럼,,
자연 앞에서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의 자세를 보이는 개나리들.

이맘 때면 벌써 개나리가 전국을 뒤덮고도 남을 시기이건만 서울 지역을 비롯한
중부지방은 아직도 개나리가 피어나질 못했다.(4월 5일 기준)

2005년 들어와서 처음으로 만난 개나리의 무리들..

 


♠ 옛 백제, 마한사람들의 무덤, 1500년 전의 수수께끼를 간직한 체
말 없이 누워있는 특이한 형태의 무덤 ~ 월계동 장고분(長鼓墳)
무양서원을 둘러보고 다시 버스가 다니는 대로(大路)로 나와서 비아동 쪽으로 3분 정도 걷다보면
'장고분4거리'라 불리는 4거리가 나온다.
그 사거리 북서쪽에 제법 넓은 공원이 하나 있는데 그 공원에 특이한 모습의 거대한 고분(古墳) 2기가
따사로운 봄햇살을 즐기며 누워있으니, 바로 장고분이라 불리는 옛 무덤들이다.

장고분에서 장고(長鼓)는 우리 전통 음악에 많이 등장하는 장고를 말하는데 이 무덤이 마치 그 장고와
비슷하다 하여 후대 사람들은 이를 '장고분'.'장고형고분'이라 부르고 있고 고분 주변에 있던 마을
(지금은 첨단지구 신도시로 변해버림) 이름 또한 '장구마을'이라 하였다,

이 고분의 조성시기는 발굴조사결과 대략 4~5세기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그 시기는 백제(百濟)가
전라남도에 남아 있던 마한연맹(馬韓聯盟)의 잔여세력을 때려잡고 국력을 대내외로 급속히 팽창시키던
시기였다.

이 고분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아직 속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현재 그 의문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대체로 (나의 의견도 포함)
1. 이 지역을 다스렸던 마한연맹의 어느 소국(小國)의 지배층 무덤
2. 백제에 투항한 이 지역 지배층의 무덤,
3. 백제정부에서 지방관리로 파견한 왕족, 귀족들의 무덤
4. 백제정부의 명령 혹은 필요에 의해 소환된 왜인(倭人, 여기에는 왜열도로 진출한 백제인, 그의
후손들도 포함)들의 무덤 <KBS 역사스페셜에서 주장한 내용>
5. 전남지역을 다스렸던 왜국 관리의 무덤 (왜국 사학자 다수가 주장하는 내용..)

이 무덤은 네모와 둥그런 모습이 혼합되어 있는 형태로 이런 형태의 무덤은 오직 영산강(榮山江) 유역
광주, 함평, 나주, 해남―
에서만 발견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14기 정도가 발견되었다.
이런 무덤 양식은 고대(古代) 왜국(倭國)에서 주류를 이루며 만들어졌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비슷한 양식으로 이를 두고 왜국에서는 "전방후원분은 우리 왜국만의 독특한 무덤 형태이다.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발견되는 이들 무덤으로 미루어 볼 때 왜국 야마토조정이 일찍이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지배했음(임나일본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라고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심지어
왜국 역사교과서에도 이런 내용을 실었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러나 4~5세기 이전 왜국의 수준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진출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백제(百濟), 가야(伽倻) 사람들이 대거 왜열도로 진출하여 기존의 토착민을 때려잡고 그들을 자신들에
맞게 동화시키면서 왜열도를 다스리던 시기라 할 수가 있다.
현재 왜왕(倭王)도 백제와 가야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후손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 나라(백제, 가야..)
에서 건너간 사람들 중에 자신의 힘으로 혹은 그들 나라의 지원으로 왜왕이 된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영산강 유역에 남아 있는 이들 장고분의 기원은 현재로써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주류를 이루며
만들어졌던 둥그런 무덤(圓墳)과 네모난 무덤(方墳)의 형태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라 하며 그것이
백제와 가야 등이 왜열도를 점유(占有)해 가는 과정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혼합형태는 이상하게도 왜국에서 크게 유행, 발전하면서 왜왕(倭王)과 지배층들의 무덤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이 무덤은 마한, 가야의 무덤 양식이 왜국으로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왜정(倭政) 때 왜인들이
도굴하여 파괴한 것을 1990년대에 전남대에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이 때 금귀고리, 쇠화살촉,
여러 모습의 토기조각, 유리구슬, 동그란 모습의 토기 등 유물 수십 점이 1500년의 기나긴 잠을 깨고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전남대 박물관에 있음)

지금의 고분은 발굴 이후에 복원되었으며 첨단지구 신도시 조성에 따라 무덤을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면서 이 지역 사람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월계동 장고분은 광주 지방기념물 20호로 지정되었다.

※ 월계동 장고분 찾아가기
* 무양서원에서 도보 5분 거리,
* 광주시내버스 1,25,35,88,120,771번 이용, 라인아파트에서 하차,
* 광주 광산구마을버스 75번 이용, 장고분4거리에서 하차,
* 주차장은 없음

▲ 장고분 공원
장고분 2기를 중심으로 제법 넓직한 공원이 꾸며져 있다.
따사로운 휴일 오전이건만 공원 안에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 누워있는 장고분(동쪽 무덤)
소나 고양이가 누워있는 듯한 모습의 장고분,

▲ 장고분의 서쪽 무덤
이렇게 보면 마치 고분 2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기로
무덤 하나가 거대한 언덕을 이루고 있다.

▲ 장고분 동쪽 무덤의 주구(周構)와 갈대 (1)
장고분 주변으로 물이 고여있는 해자 같은 것이 있는데 그 해자를 주구(周構)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저렇게 호(濠, 해자)를 갖춘 고분이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새로운 것을 보게 되니 여기 오기를 참 잘한 것 같다.
솔직히 '장고분'이라 하여 그냥 우리나라에 일반적으로 널려있는
그런 것을 생각했거든..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도 주구를 갖춘 옛 무덤이 보령, 나주, 광주 등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이들 조성시기는 대체로 철기시대로 이런 무덤 양식은
왜국으로 전파되어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주구를 판 이유는 무덤을 높다랗게 세우기 위해 주변 땅을 파는데
그 파인 부분을 그냥 방치하기 뭐해서 그 부분에 물을 채운 것이다.
물론 무덤을 지키기 위한 목적도 들어 있다.
그러나 저런 주구(호)도 도굴꾼의 마수(魔手)를 막지는 못했지.

▲ 장고분 동쪽 무덤의 주구와 갈대 (2)
오랜 기간 비가 오지 않아서 주구에는 물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가득 차 있는 갈대들의 위세에 눌려 감히 고분으로 접근하지를 못하고
멀리서만 이렇게 바라볼 뿐이다.

▲ 장고분 서쪽 무덤의 북쪽 주구
여기는 그래도 물이 많이 고여 있다.
웅덩이의 깊이를 보니 대략 1m는 넘어보여 비가 많이 온다면
주구는 완전히 물로 가득차 마치 물에 떠 있는 무덤처럼 보일 것이며
그러인해 무덤으로 접근하기가 더욱 어려워 질 것이다.
주구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갈대들은 무덤을 지키다 지친 듯 다들 쓰러져 있다.

▲ 장고분 서쪽 무덤의 남쪽 주구
북쪽 주구와 달리 여기는 많은 갈대들이 자라나고 있다.
수량이 별로 없는 저 물에 의지해 힘겹게 살아가며 무덤을 지키는 갈대의 무리들,

▲ 장고분 서쪽 무덤의 모습
무덤의 동쪽 부분에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고
무덤의 능선에는 사람들이 많이 자닌 듯, 길이 파여져 있다.

▲ 장고분 서쪽 무덤 석실(石室) 입구
무덤을 발굴 복원하면서 무덤 내(內) 석실을 구경할 수 있도록
저렇게 입구 부분을 만들어 놓았다.

장고분의 석실 내부를 구경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인데
저 곳으로 접근하려면 어떻게 가야 될까.
마치 창이나 칼을 들고 서 있는 병사들처럼 경계의 눈빛을 보이는
저 갈대들을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
저 곳으로 가고는 싶은데. 그래서 무덤을 한바퀴 둘러보며
경계가 허술한 곳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석실로 가는 길을 찾았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음을 보여 주듯, 무덤 능선으로 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이 곳만은 유일하게 갈대와 주구의 영향력이 미치지를 못한다.
아마도 고분을 복원하면서 사람들이 고분과 석실을 직접 답사할 수 있도록
무덤 한쪽 구석에 저렇게 무덤으로 접근하는 길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석실로 가는 길은 처음에는 완만하나 석실에 다가 갈수록 경사가 심해지면서
잘못하면 웅덩이로 미끄러질 수 있으니 조심하기 바란다.

드디어 고분의 석실입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입구는 저렇게 철문이 굳게 닫혀져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문 밖에서 석실 내부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무덤 안을 살펴보자.. (1)
이 무덤은 횡혈식(橫穴式) 무덤, 즉
굴식돌방무덤으로 무덤 내부로 들어가는
연도를 만들고 그 안에 돌방, 즉 석실
(石室)을 만들어 시신이 든 관(棺)을
안치했다.
어두 컴컴한 석실에는 관을 안치했던
석대(石臺)만 하나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으며, 봄의 햇살이 무덤 내부를 환하게
비춰주고 있어 석실 내부를 그런데로
살펴볼 수 있었다.

▲ 무덤 안을 살펴보자 (2)
석실 안에서는 석빙고(石氷庫)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철문을 만져보니 얼음을 만지듯 차갑고, 석실 바닥에는 온갖 벌레들이 이리저리 유람을 한다.

약 20분 동안 석실 내부를 뚫어지라 바라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천수백년 전, 이 지역의 어느 지배층 혹은 귀족의 무덤으로 그들의 권위(權威)와
호화스러움으로 가득했을 무덤 내부, 그러나 이제는 조그만 돌맹이들과 벌레들의 세상이 되었을 뿐,
그 화려함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아무리 군주나 절대권력자라도 죽으면 그저 썩어빠진 뼈다귀에 불과하거늘 저렇게 무덤을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아무리 자신의 존재가 대단했어도 지금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의 호화스러움을
보여주는 무덤의 부장품(副葬品) 역시 옛날에 이미 도굴을 당한 상태인데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석실 내부는 죽어서까지 자신의 존재와 권위. 위대함을 내세우고자 했던 인간들의 허황된
욕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나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뒤덮힌 장고분, 그 무덤의 주인공 혹은 정확한 시대가 밝혀지는 날이
과연 올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간직한 체 오리무중
(五里霧中)을 헤매고 있는 마한, 백제의 숨겨진 역사를 풀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게 월계동 장고분을 약 30분 동안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0시가 넘어버렸다.
첨단지구에서 이렇게 목적지 2곳을 별다른 헤매임 없이 둘러보게 되어 참으로 뿌듯하다.

첨단지구에서의 볼 일을 이렇게 마치고 이제 어디로 가야 될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본다.
극락강역 부근에 있는 '풍영정'이란 조선시대 정자(亭子)를 찾아갈까 아니면 소쇄원(瀟灑園),
광주호 지역을 갈까? 아니면 계획대로 담양 관방제림으로 갈까? 결국 결론은 나와버렸다.
담양 관방제림으로 가기로..
 

~~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5년 4월 5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4월 25일
* 상편 수정,보완,편집 ~ 2005년 4월 25일 ~ 8월 3일
* 공개일 - 2005년 8월 3일부터

* 중,하편은 각각 8월 4일에 공개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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