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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겨울 나들이


~~~ 광주 무등산 겨울 나들이 ~~~

무등산 증심사

▲  무등산 증심사

무등산 약사암 무등산 천제단

▲  무등산 약사암

▲  무등산 천제단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광주(光州)의 진산(鎭山)인 무등산을
찾았다.
이번 나들이는 전남/광주 쪽으로 길을 잡았는데, 적당한 정처(定處)를 물색하다가 무등
산에 안긴 증심사와 약사암에 크게 입질이 왔다. 그들은 이미 20년 전에 인연을 지었으
나 2년도 아닌 무려 20년이니 거의 새로 가는 심정이나 다름이 없다.

아침 일찍 영등포역에서 목포(木浦)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을 달려 광주의
대표 관문인 광주송정역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광주지하철 1호선을 타고 광주 땅
속을 30분을 달려 학동.증심사입구역으로 이동, 물 흐르듯 자주 있는 증심사 방면 시내
버스(버스 번호는 기억이 안남;)를 타고 증심사 종점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무등산 더듬기가 시작된다.


♠  무등산의 중심 사찰, 증심사(證心寺) 입문

▲  증심사 일주문(一柱門)

증심사 종점에서 무등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숲길(증심사길)을 20분 정도 가면 증심사 일주문
이 활짝 마중을 나온다. 길 중간에 의재 허백련(毅齊 許百鍊, 1891~1977)의 그림을 다루는 의
재미술관과 그가 살았던 춘설헌(春雪軒) 등이 오랜만에 들리라며 손짓을 하나 오로지 증심사
와 약사암 밖에는 보이지 않던 상태라 먹이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맹수처럼 싹 통과했다.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일주문에는 '무등산 증심사'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
주고 있으며, 그를 지나면 부도탑과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이 나타난다.


▲  증심사 부도전

부도전에는 부도탑(승탑) 6기(석탑 모양의 부도탑 3기 포함)와 비석(碑石) 17기가 자리해 있
다. 이들은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성된 것으로 가장 늙은 것은 1715년 5월에 조성된 월
암당(月岩堂)탑이다.
그 외에 수월당(水月堂)탑이 있으나 조성시기는 전하지 않으며, 부도전 오른쪽에는 검은 피부
의 3층석탑 3기가 있는데, 그들은 일반적인 석탑이 아닌 20세기 초에 조성된 신도들의 사리탑
이다. 일반 승탑도 아닌 3층석탑 모습이라 단단히 눈길을 끄는 그들은 1914년에 지어진 강진
최씨탑, 1919년에 지어진 조씨정행화화탑(淨行華化塔), 그리고 1927년에 지어진 '대덕화안혼
탑<大德華安魂塔. 한양조씨인 조남수(趙南洙)의 탑>'이다.


▲  고색이 역력한 월암당탑

월암당탑은 기단과 탑신(塔身), 지붕돌을 지닌 잘생긴 부도탑으로 탑신 피부에 탑의 주인<월
암당대사민성(大師敏性)>은 물론 조성시기를 속삭이는 글씨도 있어 증심사 부도전의 역사를
알려준다.
그의 밑도리에는 독특한 모습의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사람 얼굴이 있는데, 큼
직한 세모난 코와 왕방울 눈을 지녀 마치 장승의 얼굴과 비슷한 귀여운 모습이다.


▲  월암당탑의 뒷모습
월암당탑 옆에는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훨씬 작은 꼬마 부도탑이 귀엽게
자리해 있다. 그는 규봉당(奎峰堂) 부도탑으로 원래 산신각 옆에 있었는데,
부도탑의 이름으로 보아 증심사의 부속암자인 규봉암과 관련이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  증심사의 2번째 문인 사천왕문(四天王門)
부도전을 지나면 맞배지붕을 지닌 사천왕의 거처, 사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  취백루(翠柏樓)

사천왕문을 지나면 담장으로 앞을 막은 취백루가 나타난다. 경내를 가리고 앉은 그는 정면 5
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누각으로 1층은 종무소(宗務所), 2층은 교육 공간인 강당
(講堂)으로 쓰인다.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무등산 산신(山神)도 모르는 실정이나 광주 출신 문인이자 의병장인
고경명(高敬命)이 1574년에 무등산을 둘러보면서 지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취백루에 올라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르면 고려 말, 늦어도 1443년 김방(金倣)에 의한 중창 때 세
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의 막바지인 정유재란(1597년) 때 파괴된 것을 1609년에 석경(釋經), 수장(修裝) 등
이 일으켜 세웠으며, 6.25시절인 1951년에 파괴된 것을 40여 년이 지난 1998년에 중건했다.

취백루란 이름은 '뜨락 앞의 잣나무'란 뜻으로 선불교(禪佛敎)의 간화선(看話禪) 수행지침서
인 무문관(無門關) 제35칙에 나오는 정전백수(庭前栢樹)에서 따왔다고 하며, 취백루 현판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의 글씨이다.

▲  범종과 사물(四物)이 담긴 1칸짜리
범종각(梵鍾閣)

▲  지장보살과 시왕(十王)의 거처인
지장전(地藏殿)


취백루 옆구리를 지나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경내 중심부가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증
심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무등산(無等山) 서쪽 품에 포근히 자리한 증심사는 광주와 무등산의 대표 고찰(古刹)이다. 숲
속 깊숙한 곳에 자리하여 산사(山寺)의 내음을 깊게 우려내는 이곳은 9세기 한복판(855~868년
사이로 여겨짐, 860년설도 있음)에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화순에 쌍
봉사(雙峯寺, ☞ 관련글 보기)를 짓고 천하 산천을 두루 살피다가 무등산에 마음이 빠져 약사
암과 증심사를 짓고 한동안 수도했다고 한다.
1094년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창했다고 전하며, 1443년 광주목사(光州牧使) '김방'이 증
심사를 크게 중창하고 오백나한과 오백전을 지었다.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1609년 석경, 수정, 도광(道光) 등이 중창했으며, 왜정(倭政) 시절
에는 한국불교의 전통임을 자부하기도 했다. 그 시절 왜정이 왜열도 조동종(曹洞宗)으로 이
땅의 불교를 희롱하려고 들자 이에 반박하며 우리나라 선종의 주류인 임제종(臨濟宗) 운동을
펼친 것이다.
6.25전쟁이 한참이던 1951년 4월 22일 저녁 9시, 개념을 상실한 공산당 공비 50여 명이 절을
공격했다. 그로 인해 오백전과 노전(사성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절의 수많
은 문화유산까지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어 사라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다행
히 오백전은 인근 주민들의 도움으로 화를 피했다.
재정 문제로 1970년에 겨우 대웅전을 지었고, 1980년대까지 계속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1998년에 취백루를 중건했다. 그리고 2008년부터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단단히 재미를 보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오백전, 지장전, 비로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지방문화재인 3층석탑과 오백전, 석조보살입상 등이 있다.
허나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석조보살입상은 다른 곳에서 전입을 온 것이므로 증심사 자체 문
화유산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또한 절 자체는 광주 문화유산자료 1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무등산하면 생각나는 이곳의 대표 절이자 무등산의 주요 관문으로 산꾼과 답사꾼, 나들이 수
요가 상당하며, 오랜 명성에 비해 그리 크지는 않은 조촐한 모습이다.

* 증심사 소재지 :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56 (증심사길 177, ☎ 062-226-0108)
* 증심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증심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6.25때 파괴된 것을 1970년에 중건했다.

         ◀  대웅전 석가여래삼존상
듬직하게 생긴 금동 피부의 석가여래를 중심으
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에 자리해
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그들 뒤로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한다.


♠  증심사 둘러보기

             ◀  원통전(圓通殿)
다른 곳에서 넘어온 석조보살입상의 거처로 사
방이 모두 열린 건물이다. 증심사에서는 그 보
살상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로 삼았기 때문
에 집 이름도 그에 걸맞게 원통전이 되었다.


▲  증심사 석조보살입상(石造菩薩立像) - 광주 유형문화유산 14호

원통전의 주인인 석조보살입상은 잘생긴 보살상으로 원래 무등산 동쪽인 담양군 남면 정곡리
서봉사(瑞鳳寺)터에 있었다. 광주 지역 갑부로 호남은행 제2대 은행장을 지낸 현준호(玄俊鎬
, 1889~1950)가 돈을 들여 옛 전남도청 뒷쪽에 있던 대황사(大皇寺)로 옮겼으며, 그 절이 망
하자 1934년 증심사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현준호는 친일패거리 기업가로 교육과 사회는 물론 왜정이 펼치는 정책에 많은 돈을 내었다.
또한 호남은행장으로 있을 때는 직원들에게 사적으로 왜어(倭語)를 쓰는 것을 금지하는 등,
그야말로 앞뒤가 안맞는 행동을 다소 벌였다. (1950년 9월에 북한군에게 처단되었음)

이 석조보살입상은 키 2.05m로 머리에는 원통형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타원형
으로 갸름하고 우아한 기품을 드러내고 있다. 목에는 목걸이가 새겨져 있으며, 옷은 왼쪽 어
깨를 감싸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손은 왼손을 굽혀 왼쪽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편
채로 내려뜨려 오른쪽 대퇴부 바깥쪽에 붙였다. 원형의 대좌(臺座)는 상/중/하대석 및 바닥돌
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연꽃무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석조보살좌상처럼 높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으며, 세부 표현이 간
략하여 고려 초기인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시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비로전(毘盧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보물로
지정된 철불이 들어있으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그를 놓치면 증심사에서 50%를 놓친 것과 다름
이 없다.


▲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131호

비로전의 주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철불)은 증심사의 대표 보물이자 이곳에 유일한 국가 지
정문화유산이다.
검은 피부를 지닌 그는 앞서 석조보살입상처럼 다른 곳에서 온 것으로 옛 광주군 서방면 동계
리(현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었다. 그러다가 대황사로 넘어왔고, 그 절이 문을 닫자 1934년에
증심사로 이사왔다. 이때 7층석탑과 석조보살입상이 같이 넘어와 증심사의 보물을 크게 늘려
주었는데, 그들이 아니었다면 증심사는 오랜 내력에 비해 문화유산이 무지하게 빈약한 절이
되었을 것이다.

이 불상은 철로 다져진 단단한 철불(鐵佛)로 철불은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에 잠깐 등장하는
불상이다. 원래 광배(光背)와 대좌도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졌으며, 철불 본
체는 다행히 건강이 양호하다.
철불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놓았고, 정수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
이 우뚝 솟아있다.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입가에는 미소가 흐드러지
게 피어나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들을 위로한다. 몸통에 걸쳐진 법의(法衣)는 가슴을 넓게 드
러내고 있으며, 양쪽 팔에 걸쳐진 두꺼운 옷자락은 규칙적인 평행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
내린다. 그리고 손 모양은 다른 비로자나불과 달리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쥐고 있다.
통일된 균형미를 보이는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아 일찌감치 국가 보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으
며, 철불이 한참 유행하던 9세기나 10세기 것으로 여겨진다.


▲  오백전(五百殿) - 광주 유형문화유산 13호

대웅전 뒷쪽 높은 곳에는 오백전이 자리하여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
배지붕 집으로 증심사 뿐만 아니라 무등산, 그리고 광주 지역에서 가장 늙은 집이다. 특히 증
심사가 잿더미가 되었던 6.25 시절(1951년 4월) 인근 주민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행운의 건
물로 그 안에 있는 500나한상 또한 행운의 존재들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복과 행운을 빌어보
면 효과가 조금은 있지 않을까 싶다.

이 건물은 1443년 광주목사 김방이 지었다. 불교를 신봉했던 그는 증심사를 크게 중창했는데, 전남/광주권에서 조선 초기에 지어진 오백전은 이곳이 유일하다.
김방은 광주목사로 있던 1440년에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무등산 밑에 경양(慶陽)방죽을 만들
었다. 완성까지는 3년이 걸렸으며 동원된 연인원만 5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렇게 인원
이 많다 보니 식량 문제는 늘 골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사 현장에서 커다란 개미집이 나왔다. 김방은 개미집을 없애지 않고 그대
로 떠서 무등산 장원봉 기슭으로 옮겨 거기서 살게 해주었는데, 그때부터 개미들이 매일 밤마
다 하얀 쌀을 물어와 창고에 가져다 주었고, 그 쌀로 공사가 끝날 때까지 양식을 해결했다고
한다. 이는 개미들까지도 흔쾌히 감동을 먹을 정도로 김방의 선정(善政)이 대단했고, 지역 사
람들의 지원 또한 적지 않았음을 강조하고자 그럴싸하게 지어낸 듯 싶다.

1443년 방죽이 완성되었으나 난데없는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자 김방은 기우제를 지냈
다. 그리고 며칠 뒤, 꿈속에서 관세음보살 누님이 나타나
'가뭄을 막으려면 증심사를 중건하여 오백전을 짓고 오백나한을 봉안하시오'
현몽하자 서둘러
증심사 중창에 들어갔다.
그는 공사에 부정을 탈까 염려하여 스스로 고기를 금하였고 매일 일꾼들을 손수 격려했다. 허
나 지나친 과로로 몸이 많이 상하자 지역 사람들은 그를 위해 매일 닭을 잡아 김방에게 권하
니 그는 닭똥집 몇 점만 먹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일꾼들에게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종(世宗)의 꿈에 수백 마리의 닭들이 나타나
'광주에서 김방이란 자가 수천 명의 장정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고 역적모의를 하면서 우리
들을 수백씩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 좀 살려주세요'
하소연했다.
꿈에서 깨어난 세종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금부도사를 보내 김방을 잡아올 것을 명했
는데, 그들이 증심사 이전 홍림교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말의 발이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
는 것이다. 이에 금부도사와 군졸들이 말에서 내리려고 했으나 그들 또한 말등에서 몸이 떨어
지지 않아 내리지를 못했다.
한편 닭 꿈을 꾼 세종은 이상하게 여기며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사미승 수백 명이 무더기
로 나타났다. 그들은
'영민하신 전하(殿下)께서 어찌 미미한 닭들의 참소를 들으십니까. 김방이 매일 닭의 내장을
먹는 것은 사실이오나 그는 예전에 김제 벽골제(碧骨堤)를 중수했고 이번에는 지역 사람들을
위해 광주에 방죽을 만들었으며, 증심사를 중건하고 오백나한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금부도사를 거두어주십시요. 그렇지 않으면 나라에 큰 환란이 있을 것입니다~~!!'


세종은 깜짝 놀라 서둘러 금부도사(禁府都事)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고, 그 명을 받은 금부도
사 일행과 말은 그제서야 움직일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김방을 참소하는 무리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 혼돈의 무리를 닭대가리로 비유한 듯 싶다. 그리고 사미승은 그를 지키려는 지
역 사람과 불교 세력을 뜻할 것이다.
어쨌든 김방은 지역 안정과 지역 사람들의 평안을 위해 오백전을 지었고, 그 연유로 매년 10
~11월에 오백나한대재를 봉행한다. 이 대재는 증심사의 대표적인 행사이다.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1609년에 다시 지었으며, 석가여래상과 그의 열성제자인 오백나한상
이 빼곡히 자리해 중생들의 인사를 받는다. 만약 오백전까지 6.25때 날라갔다면 증심사는 그
야말로 고색이 95% 이상 빠진 절이 될 뻔했다.


▲  금동 피부의 석가여래상과 10대 제자, 오백나한상

오백전에 깃든 오백나한(五百羅漢)은 이름 그대로 500명의 나한(羅漢)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래서 건물 이름도 오백전이다. 이들은 1443년에 김방이 만든 것으로 오백나한의 스승인 석가
여래상이 가운데에 아주 크게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석가여래의 핵심 제자인 10대 제자상이
자리한다. 그들은 500나한보다 덩치가 크다.
1기도 아니고 500나한 포함 510기 이상의 존재들이 모두 앞을 바라보니 그들의 폭풍 같은 시
선 앞에 내가 쑥쓰러울 지경이다.

▲  오백전 내부 (오백나한과 10대 제자, 석가여래상) ▲

▲  10대 제자(앞줄)와 오백나한의 장대한 물결 ▲
얼굴과 의상, 자세도 모두 제각각이라 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다. 마치
이 땅의 5,000만 인구를 상징하듯이 말이다.

▲  증심사 3층석탑 - 광주 유형문화유산 1호

오백전 뜨락에는 고색의 기운이 완연한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
하는 숫자인 1호(광주 유형문화유산 1호)의 지위를 지닌 그는 2중 기단(基壇)과 3층 탑신, 머
리장식을 지닌 3.2m의 탑으로 증심사가 세워진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져 증심사에서 가
장 늙은 존재이다.
밑층 기단에는 가늘고 긴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윗층 기단에는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 조각을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 한 돌씩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 모서리
에 기둥 모양을 두었으며, 지붕돌은 밑면 받침이 각 4단식으로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져 있다.
그리고 머리장식은 하늘을 향해 꽃잎을 펼쳐보인 앙화(仰花)만 남았으나 완전히 없는 것보다
는 한결 나아 보인다.


▲  오백전 옆 5층석탑과 7층석탑

오백전 옆구리에는 5층석탑과 7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이들 모두 오래된 것으로 5층석탑은
고려 후기, 7층석탑은 조선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5층석탑은 머리장식이 따로 없고 5층 부분이 밑 탑신과 좀 다르다. 만약 5층을 머리장식으로
보면 탑은 4층석탑이 되나 불교 석탑에는 짝수 층은 10층 외에는 없다. 그러니 5층석탑이 맞
다.
두툼한 기단과 5층 탑신으로 이루어진 5층석탑은 1933년에 해체 수리를 했는데, 탑 속에서 작
은 철불 2구와 수정 1개, 염주로 추정되는 청옥(靑玉) 23개, 금동불(金銅佛) 2구가 쏟아져 나
왔다. 그중 금동불은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으로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그들 모두
신라 후기 것으로 나중에 5층석탑 조성 기념으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

발견 이후, 증심사는 대웅전 유리상자에 발견 유물을 봉안하여 속세에 개방했으나 1948년 이
후 무등산에 공비 패거리들이 마구 설치면서 안전을 장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여 광주경
찰서에 보관을 부탁했고, 경찰서는 그들을 금고에 고이 넣어 보관했다.
허나 6.25가 터지고 광주까지 북한에게 함락되면서 유물 모두 어느 귀신이 훔쳐갔는지 싹 사
라지고 말았다. 전쟁의 혼란에서 그들을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약탈을 당했는지 아니면
파괴되어 사라졌는지는 아직까지도 알려진 것이 없으며, 6.25 때 많은 것을 잃어버린 증심사
입장에서는 그저 곡할 노릇이었다.

5층석탑 옆에 자리한 7층석탑은 1934년에 대황사에서 넘어온 것으로 연꽃과 범자가 새겨진 늘
씬한 탑이다. 경내에 3층, 5층, 7층석탑이 모두 있는 것도 특이하거니와 신라(3층석탑)와 고
려, 조선 탑을 모두 보유하고 있어 증심사의 오랜 명성을 알려준다. 현재는 3층석탑만 지방문
화재로 지정되었으며, 5층과 7층석탑은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문화재 등급을 받지 못했다.
 

◀  벼랑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낮은 벼랑에 매달린 산신각은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산신의 거처이다.


▲  증심사에서 약사암으로 인도하는 증심사계곡길

증심사를 고루고루 둘러보고 약사암으로 향했다. 그곳까지는 계곡을 따라 이어진 숲길을 조금
올라가면 되는데, 계곡은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적당히 섞인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지금은 비록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나 봄의 해방군이 도래하는 3월이
되면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깨어날 것이다.


▲  겨울에 깊숙히 잠긴 증심사계곡

▲  어느 갈림길
여기서 왼쪽 오르막길로 가면 당산나무와 천제단으로 이어지고, 오른쪽 길은
약사암으로 이어진다. 일단 약사암 볼일을 마치고 여기로 나와 왼쪽
오르막길을 통해 천제단까지 접근했다.


♠  무등산 약사암(藥師庵)과 천제단

▲  약사암 일주문

증심사계곡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전혀 나올 것 같지 않던 약사암이 일주문을 내밀며 그 모습
을 드러낸다. 팔작지붕을 지닌 일주문에는 '무등산 약사사(藥師寺)' 현판을 내걸며 이곳의 정
체를 알려주고 있는데, 약사사는 약사암의 다른 이름이다.

새인봉 밑에 둥지를 튼 약사암은 철감선사가 860년경에 세워 인왕사(仁王寺)라 했다고 한다.
증심사보다 먼저 지어졌다고 하며, 1306년에 절을 중수하면서 약사암으로 이름을 갈았다.
1856년 전라도관찰사 주석면(朱錫冕)의 지원으로 성암, 학산이 중건했으나 6.25 때 공비들의
공격으로 싹 파괴되고 말았다. 1974년부터 중창불사에 들어가 법당과 요사(寮舍)를 하나로 연
결하는 'ㄱ' 구조의 집을 지었으며, 1979년 현재의 대웅전을 짓고 운림선원과 요사채, 강원
등을 지었다. 그리고 1983년에 일주문을 장만하여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나한전, 운림선원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국가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
래좌상과 창건 당시 것이라는 3층석탑이 전한다. 또한 약사암 자체는 광주 문화유산자료 2호
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암자를 칭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증심사의 부속 암자는 아니며, 절 이름 그대로 약사여래를 중
심으로 한 약사도량(藥師道場)을 지향하고 있다.

* 약사암 소재지 :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11 (증심사길160번길 89, ☎ 062-222-9844)


▲  약사암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79년에 지어졌다. 저 안에 이곳의
대표 보물인 석조여래좌상이 들어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  약사암 3층석탑

대웅전 뜨락에는 작게 솟은 3층석탑이 있다, 창건 당시인 9세기 것이라고 전하며, 1층 기단과
3층 탑신, 머리장식을 지닌 단출한 모습으로 1970년대 이후에 현재 모습으로 손질되었다. 지
붕돌과 머리장식에는 고색의 때가 자욱하며, 무척 오래된 존재임에도 지정문화재 등급은 받지
못했다.


▲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 보물 600호

대웅전 불단에는 단단한 체격에 석조여래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그는 신라 후기(9세기)에 조
성된 것으로 정체는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이다. 보통 약사여래의 거처는 약사전(藥師殿)을
칭하기 마련이나 이곳은 대웅전을 칭하고 있으며, 절 이름 또한 약사암(약사사)이다. 게다가
절의 제일 가는 보물도 약사여래상이라 그를 중심 존재로 삼으며 약사도량을 칭하고 있다.

거친 화강암 석재를 다듬어 만든 것으로 1,000년이 넘는 나이에도 나보다 무탈한 모습을 지녀
그의 건강비결이 사뭇 궁금해진다. 동그란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표현되었고,
약간 숙인 얼굴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다. 또한 눈 위는 하얀 피부이나 아래는 세월의 때가
자욱하다.
체구는 당당한 편으로 어깨선이 급한 경사를 이루어 약간 쳐져 보이며, 허리는 가늘게 표현되
어 가슴 쪽의 양감이 풍부해 보인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은 가슴 앞에서 1번 접었고, 몸에 얇게 밀착되어 윗도리의 굴곡을 잘
드러내준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
으며, 두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을 보이며 앉아있다. 무릎이 좀 넓어 보이며,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는 연꽃무늬가 있는 8각형인데, 각각 1개의 돌로 상/중/하대를 이루고 있다.
대좌와 불상의 높이 비례가 1:1을 보이고 있어 경주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의 특징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  운림선원(雲林禪院)
요사와 선방, 종무소의 역할을 하는 건물로
약사암에서 제일 큰 집이다.

▲  강원(講院)
요사와 교육공간으로 운림선원과 마주
보고 있다.

              ◀  나한전(羅漢殿)
대웅전 뒷통수에 자리한 나한전은 석가여래와
오백나한의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
배지붕 집이다.

◀  나한전 석가여래삼존상과 조그만
오백나한상들


▲  무등산 당산나무(느티나무) - 광주시 보호수 1982-3호

증심사보다 더 조촐한 약사암을 둘러보니 아직 일몰까지 여유가 넉넉하다. 하여 여로(旅路)를
한층 더 살찌울 겸, 증심사~약사암 구간 중간에서 손짓하던 당산나무로 넘어갔다.
증심사로 내려가다가 중간에 당산나무와 천제단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이 있는데, 그 길을 오
르면 겨울 제국에게 영혼까지 털려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큰 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가 여기
서 오랫동안 당산나무로 살아온 느티나무이다.

그는 약 500년 묵은 것으로 높이 약 20m, 둘레는 4.8m이다. 증심사 밑 신림마을의 당산나무로
예전에는 나무 주위에 보리밥집이 있어서 이곳을 지나는 이들이 요기를 하며 쉬어갔다.
2007년 5월 19일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무등산을 올랐는데, 증심사입
구에서 장불재까지 3.5km를 이동하면서 여기서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며 쉬어간 인연이 있다.
그때 노무현이 거닌 산길(증심사입구~장불재)은 시민들의 제안으로 2011년 11월 15일 '무등산
노무현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으며, 무등산국립공원과 노무현재단이 서로 협력해 무등산의
자연생태계 보전과 환경유지에 힘을 쓰고 있다.


▲  당산나무(느티나무) 주변 쉼터인 송풍정(松風亭)

당산나무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광주에서 화순 동복, 이서 방면으로 빠르게 넘
어가는 길목이었다. 그 시절 나그네들은 당산나무 밑에서 많이 쉬어갔으며, 지금도 산꾼들이
많이 쉬는 곳이라 쉼터의 역할은 여전하다. 근래 당산나무 주변에 의자와 탁자를 갖춘 송풍정
이란 쉼터가 닦였는데, 그 이름은 길손들이 솔바람과 함께 쉬어가는 길목이란 뜻이다.
비록 정자를 칭하고 있으나 흔히 생각하는 정자의 모습이 아닌 쉼터의 모습이라 이름과 현실
에서 적지 않은 혼란이 온다. 하여 송풍정 대신 속편하게 '당산나무쉼터'라고 지었으면 이름
과 모습도 잘 어울리고 이름도 딱 맞았을 것이다.


▲  당산나무에서 천제단으로 인도하는 숲길 ①

당산나무에 이르니 천제단 이정표가 가까운 거리를 내세우며 강렬하게 눈짓을 보낸다. 무등산
에 천제단이라? 호기심이 강하게 피어나 일단 가보기로 했다. 그곳까지는 10여 분 정도 올라
가야 되는데, 길은 그리 각박하지 않으며 신성한 곳으로 인도하는 길이라 그런지 소나무가 빽
빽해 그들이 베푼 솔내음으로 몸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기분이다.


▲  당산나무에서 천제단으로 인도하는 숲길 ②

▲  솔내음이 진한 천제단 산길

▲  소나무숲 그늘에 묻힌 무등산 천제단(天祭壇)

약사암 동북쪽 외딴 소나무숲에 천제단이 외롭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이곳은 증심사 경내
에서 중머리재로 인도하는 산길 옆 숲으로 이름 그대로 하늘에 제를 지내던 제단이다.
소나무숲에 푹 묻혀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은 신라 때부터 전해오던 아주 유서 깊은
곳이다. 천제당(天祭堂)이라 불리기도 하며, 신라 때는 소사(小祀), 고려 때는 국제(國祭)를
지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무등산신사(無等山神社)로 등장한다. <광
주 동쪽 10리에 있다고 나옴>
1872년에 그려진 지방지도(地方地圖) '광주편'에는 증심사 상원암 위쪽 15리에 천제단이 그려
져 있다. 원래 위치는 입석대(立石臺)로 점차 속세와 가까운 곳으로 내려와 이곳에 안착을 한
것이다.
왜정 때 조선총독부가 주변 땅을 소유하면서 천제단을 천박하게 파괴시켰으며, 이를 보다 못
한 광주청년회가 돈을 모아 이 일대를 사들여 현재처럼 작게 복원했다.

증심사 밑에 자리를 잡은 의재 허백련은 천제단을 민족의 제단으로 신성시 여겨 제단을 복원
하고 단군성전(檀君聖殿)을 세우고자 '무등산개천국건립위원회'를 발족해 기공식까지 가졌다.
허나 모두 이루지는 못했으며, 허백련이 조직한 연진회(鍊眞會)와 광주민학회를 중심으로 개
천절마다 개천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또한 매년 초에는 광주 지역 등산모임과 산악회에서 여
기서 많이 시산제(始山祭)를 지내 제사 공간의 역할은 여전하다.

이곳은 다소 구석진 곳이라 평소에는 인적이 별로 없으며, 유서가 깃든 곳임에도 아직 그 흔
한 지방문화재 등급 조차 받지 못했다. 최소한 지방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주변을 정비해
이곳의 의미와 허백련의 뜻을 절반이라도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 무등산 천제단 소재지 :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132-10


▲  봉황대(鳳凰臺) 돌탑

인적이 없는 천제단에서 청정한 향기를 마음껏 누리고 하산을 서둘렀다. 마음 같아서는 중머
리재나 무등산 정상부까지 올라가고 싶었지만 늘 그렇듯이 시간이 문제다. 이제 일몰까지 2시
간 남짓 남은 상태라 더 이상 올라가는 것은 무리이며 무등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하여 이
럴 때는 욕심을 버리고 무조건 내려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증심사로 내려가는 중간에 봉황대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곳은 해발 491m 고지로 '대(臺)'라
고 해서 산봉우리나 전망대, 정자 같은 곳은 아니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커다란 돌
탑과 쉼터가 전부이다. 보통 생각하는 '대'하고는 많이 틀리다. 송풍정도 그렇더니만 봉황대
까지 그러니 그 이유가 궁금하다. 아마도 이곳은 봉황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 모양이다.


▲  봉황대 표석 주변

▲  증심사 직전 대나무숲길

증심사 뒤쪽에 이르면 무성한 대나무숲이 마중을 한다. 호젓하게 자연산 터널을 이루고 있는
대나무숲을 지나면 바로 증심사가 모습을 비추며, 그를 지나치면 의재미술관이 나온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미술관을 마지막 후식거리로 살펴볼까 했으나 벌써 문을 걸어잠군 상태
이다. 게다가 햇님의 퇴근 빈틈을 노려 땅꺼미도 슬슬 피어오르고 겨울 제국의 기운도 서서히
매워진다. 하여 무등산을 뒤로 하며 광주시내로 나와 나의 제자리로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무등산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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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4년 10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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