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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5.11 서울 장안에서 가장 큰 절, 수도산 삼성동 봉은사 <봉은사 목사천왕상, 법왕루, 선불당, 대웅전, 미륵대불>
  2. 2024.04.30 서울 서남쪽 끝자락에 깃든 상큼한 명소들, 푸른수목원~항동저수지~항동철길 1바퀴
  3. 2024.04.19 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봄꽃 나들이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4. 2024.04.08 정읍 봄맞이 나들이 <정읍피향정, 함벽루, 무성서원, 성황산, 한정, 송정, 동진강>
  5. 2024.03.31 첩첩한 산주름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3층 법당 대웅전을 지닌 화순 쌍봉사
  6. 2024.03.22 김포공항을 굽어보는 강서구의 대표 지붕,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둘레길, 개화산자락길, 개화산 봉수대, 미타사석불입상, 신선바위>
  7. 2024.03.11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진관동 나들이 <경천군이해룡 사패지송금비, 여기소터,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영산군 이전묘역, 숙용심씨묘표>
  8. 2024.03.01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산동반도 청도(칭따오) <절강로천주교당, 잔교와 회란각, 소어산공원, 칭따오맥주박물관>
  9. 2024.02.17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구역, 후원 돌담길 겨울 나들이 <중앙고 본관, 창덕궁 후원 뒷길, 옥류정>
  10. 2024.02.06 서라벌 경주의 꿀명소, 경주 남산 나들이 <염불사지, 봉화골, 칠불암, 칠불암 마애불상군>

서울 장안에서 가장 큰 절, 수도산 삼성동 봉은사 <봉은사 목사천왕상, 법왕루, 선불당, 대웅전, 미륵대불>

삼성동 봉은사(진여문, 법왕루, 선불당, 대웅전, 미륵대불)



' 서울에서 제일 큰 절, 삼성동 봉은사 '

오색연등으로 가득한 봉은사 대웅전 뜨락

▲  오색연등의 상큼한 물결, 봉은사 대웅전 뜨락

봉은사 판전 봉은사 영산전

▲  봉은사 판전

▲  봉은사 영산전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강남구 봉은사(奉恩寺)를 찾
았다.
강남구(江南區) 노른자위 땅에 넓게 자리한 봉은사는 20번 넘게 인연을 지은 곳으로 소
장하고 있는 지정 문화유산이 무려 20여 점이 넘는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사진에 담고
싶은 소박한 욕심에 간만에 그곳의 문을 두드렸다.

봉은사에 도착한 시간은 둥근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3시라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
'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에 따라 잠시 봉은사를 접어두고 절 동쪽에 있는 한식당에서 점
심으로 김치전골을 섭취했다.
그렇게 고기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내 똥배를 가득 채우고 봉은사로 들어선다.



 

♠  봉은사 입문

▲  봉은사의 정문인 진여문(眞如門)

봉은사는 서울에서 제일 큰 절이자 강남권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휴일을 맞이해 많은 사람들
이 나들이를 나왔는데, 양이(洋夷)를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서울에
서 외국 애들이 많이 찾는 절은 조계사, 화계사, 도선사, 길상사, 봉은사 등이 있음)

봉은사 경내로 들어서려면 진여문이란 커다란 문을 지나야 된다. 다른 절과 달리 그 흔한 일
주문(一柱門)이 없고 진여문이 그 역할을 대신 하고 있는데, 문의 이름인 진여(眞如)는 사물
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물의 본체로써 영원불멸한 것을 뜻한다. '선정능지(宣靖陵誌)'와 '
봉은사사적'에 절 창건 당시부터 있던 건물로 나오며, 봉은사가 선종(禪宗) 수사찰(首寺刹)로
크게 위엄을 부리던 시절에는 진여문과 천왕문, 해탈문의 순서대로 문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1939년 대화재로 이들은 모두 소실되었고, 급한데로 1942년 일주문을 세워 진여문의 역
할을 맡겼다. 이후 진여문 복원을 추진하면서 1982년 일주문 자리에 진여문을 세웠고 기존의
일주문은 양평에 있는 용문산 사나사(舍那寺, ☞ 관련글 보기)로 보냈다. 하여 그곳 일주문으
로 20년 정도 살아가다가 2000년대 중반 사나사가 새 일주문을 장만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진여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문으로 높이와 덩치가 그 이상으로 장대해 절을
찾은 중생들의 기를 제대로 주눅들게 한다. 문 좌우에는 작은 집을 덧붙여 목사천왕상을 2개
씩 봉안해 중생들을 검문하고 있는데, 이들은 천왕문에 있던 것으로 법왕루 건설로 천왕문이
철거되자 진여문으로 거처를 옮겼다.
진여문 현판은 봉은사 주지를 지낸 석주가 썼으며, '奉恩寺' 현판은 만해 한용운과 만당(卍堂
)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청남 오재봉(菁南 吳齋峯, 1908∼1991년)이 썼다.


▲  봉은사 목사천왕상(木四天王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0호 ▼
- 위의 것은 다문천왕(多聞天王)과 지국천왕(持國天王)
- 밑의 것은 증장천왕(增長天王)과 광목천왕(廣目天王)

진여문의 신세를 지고 있는 목사천왕상은 1746년에 조성되었다. 능창군<綾昌君, 선조의 7번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의 증손>과 상궁 박필애(朴弼愛)가 돈을 대어 만든 것으로 커다란 통나
무를 깎아 조각했는데, 두 발처럼 부분적으로 돌출되거나 추가 부분은 따로 나무를 조각해 붙
여넣었다.
그들의 갑옷과 보관(寶冠)은 붉은색, 녹색, 파란색, 황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몸통에 비
해 얼굴이 좀 커 보인다. 넙적한 얼굴에는 표정이 살아있으며, 세밀하고 정교하게 조각되었으
나 다소 경직된 무늬 등은 18세기 중반 조각 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지국천왕은 그의 애용품인 칼이 사라졌고, 광목천왕은 장대 끝의 창날이 없어지는 고통이 있
었으나 그 외에는 무탈한 모습이며, 그들의 뱃속에서 복장(腹臟) 유물이 나와 그들의 탄생시
기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하여 18세기 중반 불교 조각 연구에 좋은 사례가 되어주고 있
으고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늙은 사천왕상으로 가치가 높아 지방문화재의 감투를 쓰게 되었다.

비파를 든 다문천왕은 마치 눈썹에 눈이 얼어붙은 듯 하얀색이라 나이가 좀 들어 보이며, 지
국천왕은 두 손을 배 앞에 대고 절을 찾은 사람들에게 환영 인사를 하는 듯 하다. 증장천왕은
다소 인상을 쓴 표정으로 용의 머리를 꽉 쥐어들며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듯 두리번 바라보
고 있으며, 보관을 쓴 광목천왕은 흥이 잔뜩 오른 듯 다소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다. 표정은
각각 다르나 무서움보다는 친근함과 귀여움이 묻어난 모습이며,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꽃이 가득하여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 (진여문에서 법왕루 구간)

부처님오신날(석가탄신일)이 있는 5월을 맞이하여 봉은사는 일찌감치 연등으로 허공을 꾸미고
커다란 장엄등을 꺼내 경내 곳곳을 수식했다. 봉은사는 석가탄신일까지 약 1달 정도 장엄등과
연등 전시회를 열어 상큼한 눈요깃감을 선사하고 있는데, 햇님이 그만의 공간으로 쏙 사라지
면 연등과 장엄등은 어둠을 몰아내고자 일제히 빛을 발산해 화려한 야경을 빚어낸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조계사(曹溪寺)도 연등 전시회를 열긴 하나 봉은사가 더 장관이며, 석
가탄신일 1주 전 토요일에 열리는 연등회(燃燈會)에 많은 장엄등을 내보내 서울 도심의 저녁
을 곱게 물들인다.

진여문~법왕루 구간은 약간의 오르막길로 그 허공을 오색 연등이 황홀하게 물들였다. 백두산
보다 높은 하늘이라고 해도 이때만큼은 연등의 눈치로 하늘이 움푹 낮아진 기분이다.


▲  오색영롱한 연등의 그늘 속으로~~ (법왕루 방향)

▲  오색영롱한 연등의 그늘 속으로~~ (진여문 방향)

▲  진여문~법왕루 구간에 닦여진 조그만 개울

법왕루로 인도하는 길 서쪽에 바위와 수풀을 지닌 조그만 개울이 닦여져 있다. 무늬만 개울이
아닌 살아있는 개울로 졸졸졸~♪ 소리를 들으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귀가 싹 정화
되는 것 같다. 잠시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사(山寺)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 허나 현실
은 온갖 키다리 건물로 즐비한 강남 한복판이다.


▲  조그만 연못의 포대화상과 물고기 연등

연못 복판에 자리를 편 조그만 똥배 아저씨(포대화상) 앞에 동그란 돌통에 있다. 그 안에 동
전이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많은 이들이 소액 투자로 소망 성취라는 큰 이익을
얻고자 열심히 동전을 던진다.
돌통이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훨씬 작다 보니 골인을 시키는 것이 여간 어렵지가 않아
연못 바닥으로 가라앉은 동전도 적지 않다. 골인을 시킨 중생의 소망이 과연 성취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덕에 봉은사만 재미를 본다. 재주는 포대화상이 부리고 돈은 봉은사가 가져가
는 것이다.


▲  경내를 가리고 앉은 법왕루(法王樓)

법왕루는 봉은사 경내에서 가장 큰 기와집으로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 구역을 몽땅 가리고 있
다.
이 건물은 1997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의 공간을 위해 사천왕상의 거처인 천왕문이 희생되었으
며, 원래 법왕루였던 건물은 미륵전으로 새로 간판을 갈았다. 건물의 이름인 법왕(法王)은 법
의 왕이라는 부처를 뜻한다.
봉은사의 튼튼한 재력을 널리 과시하듯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데, 그의 밑도리를 지나
면 대웅전이 나온다. 허나 법왕루 옆구리에도 넓게 길이 있어 취향대로 대웅전으로 접근하면
된다. (나는 법왕루 밑도리로 들어가서 옆구리로 나왔음)

1층에는 종무소(宗務所)와 사무실이 있으며, 2층이 바로 법왕루의 중심으로 중생들의 돈으로
만든 3,300기의 작은 관세음보살 원불(願佛)이 가득해 장관을 이룬다. 또한 커다란 관세음보
살 누님상이 중심 법단에 자리해 있어 관음전(觀音殿)의 역할도 하고 있으며, 공간이 넓어서
사시예불과 대법회, 교육 공간으로도 쓰인다.


▲  붉은색(연등)과 금색(관세음보살상)의 화려한 조화, 법왕루 내부

▲  법왕루 관세음보살상과 조그만 원불(관세음보살)의 금빛 물결
작은 관세음보살부터 큰 관세음보살까지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로 수많은
원불이 벽에 빼곡히 들어앉았다. 그들의 일방적인 금색 광채로
두 눈이 부시다 못해 눈이 멀 지경이다.


※ 수도산(修道山) 봉은사의 내력
천하에서 가장 비싼 땅이라는 서울 강남(江南), 그 콧대 높은 강남 한복판에 자리하여 강남의
좋은 기운을 먹고 자란 봉은사는 794년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했다는 견성사(見性寺)를
그 시작으로 삼고 있다.
허나 창건 이후 700년 이상 바퀴자국이 남아있지 않으며, 본격적인 사적(事蹟)도 15세기 후반
부터나 등장을 한다. 게다가 1334년에 조성된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椀)이 가장 오래된
유물이라 창건 시기에 심히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하여 고려 초나 중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
이 크다.

원래 봉은사는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 동쪽에 있었다. 1498년 성종의 왕후인 정현왕후(貞顯
王后)는 견성사를 선릉의 원찰(願刹)로 삼아 크게 중창했으며, 이때 왕실의 은혜를 받든다는
의미로 절 이름을 봉은사로 갈았다. (명종 때 이름을 갈았다는 이야기도 있음)
1501년 연산군(燕山君)은 절에 왕패(王牌)를 하사했으며, 중종(中宗)의 3번째 왕후로 불교에
호의적이었던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는 정난정(鄭蘭貞)의 소개로 보우선사(普雨禪師)와 친
분이 두터워졌다. 하여 그가 머물던 봉은사는 크게 혜택을 보게 된다.
윤씨는 1550년 봉은사를 선종 수사찰로 삼았으며, 연산군 때 중단되었다가 중종 때 폐지되었
던 승과(僧科)를 부활시켜 봉은사에서 시험을 보게 했다. 하여 1552년 1월 그 첫 시험이 진행
되었는데, 보우가 그 감독관을 맡았으며, 먼저 예비합격자 400명을 뽑고 최종 33명을 가려서
도첩(度牒)을 내렸다. 즉 국가 공인 승려의 자격을 준 것이다. 그해 4월에는 그 유명한 서산
대사(西山大師)가 합격했으며, 1562년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이곳을 통해 세상에 데뷔했
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인 정릉 옆에 묻히고 싶은 욕심에 1562년 봉은사 자리에 정릉을 옮겼다.
대신 봉은사를 현 자리로 옮겨 크게 중창했는데, 이때 도감(都監)을 설치해 20여 동의 건물을
지으니 그 규모가 경산제찰(京山諸刹)의 으뜸이었다고 전한다. 1563년에는 순회세자(順懷世子
)의 사패를 봉안하고자 강선전(降仙殿)을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절 상당수가 파괴되었으며, 1612년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중수를 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인조(仁祖)는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봉은사 옆을 지나 남한산
성(南漢山城)으로 콩 볶듯 줄행랑을 쳤다. 이때 청나라군이 그 길을 따라오면서 절은 완전 쑥
대밭이 되고 만다.
1637년 승려 선화(禪華)와 경림(敬林) 등이 절을 일으켜 세웠으나 1665년 화재로 건물 상당수
가 잿더미가 되었으며, 1692년 선/정릉에 참배하러 갔던 숙종이 봉은사 중창 현장을 직접 둘
러보고 재물을 내려 공사를 도왔다. 1702년에는 전백(錢帛)을 하사해 중건을 마무리 지었으나
절의 규모는 문정왕후 시절보다 많이 떨어졌다.

1720년에는 450근의 범종을 주조하여 범종각(梵鍾閣)에 걸었으며, 1777년에는 삼장탱과 시왕
탱, 사자상 등을 조성하고 석가여래상 등을 개금했다. 1790년 정조는 봉은사를 비롯한 서울
주변의 5개 사찰을 규정소(糾正所)로 지정해 전국의 사찰을 관리하게 했는데 봉은사는 강원도
지역의 사찰을 담당했다.

1855년 남호영기(南湖永奇)는 화엄경판을 판각하고자 인허성유(印虛性維)와 제월보성(霽月寶
性), 쌍월성활(雙月性闊) 등과 봉은사에 간경소를 세웠다. 왕실의 내탕금(內帑金)과 사대부(
士大夫)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856년 화엄경 80권 3,479판의 경판을 만들었으며, 그 경판
을 보관하고자 판전을 지었다. 이때 화엄경 외에 별행록 1권, 천태삼은시집도 등이 간행되었
으며 봉은사에 머물던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친히 판전 현판을 썼다.

1902년 조정은 대한사찰령을 제정하여 봉은사를 비롯한 전국 14개 사찰을 수사찰로 삼았으며,
1911년 왜정은 사찰령(寺刹令)을 반포하여 봉은사를 전국 31본산(本山)의 하나로 삼아서 서울
, 경기도 지역 78개 사찰을 관할케 하였다. 그 31본산 중 1번째로 꼽히는 절이 되어 '선종갑
찰대본사 봉은사(禪宗甲刹大本山 奉恩寺)'를 내세웠으며, 서산-사명-벽암으로 계승되는 법맥
을 강조했다.

1912년 청호(晴湖)가 주지가 되었는데, 절 부근 황무지를 개간해 20만 평에 토지를 확보해 절
의 몸집을 크게 불렸다.
1925년 그 유명한 을축년 대홍수가 발생하여 한강이 범람하자 그는 승려와 신도를 모아 직접
배를 띄워 708명의 사람을 구했으며, 절의 재물을 풀어 이재민을 구호했다. 그의 도움을 받았
던 사람들은 수해구제공덕비를 세워 청호의 공덕을 기렸고, 당시 지도층 인사들이 이를 기리
는 시화를 모아 불괴비첩(不壞碑帖)을 만들기도 했다.
1939년 불의의 대화재로 판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무너지자 1941년에 태욱(泰旭)이 중창했
으며, 1950년 6.25전쟁으로 건물 상당수가 또 날라가는 피해를 입었다.

6.25전쟁이 끝나자 조금씩 절을 일으켜 세웠으며, 불교정화운동으로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
하자 봉은사는 그 밑으로 들어갔다. 1964년 대학생 수도원이 세워졌으며, 1972년 동국역경원
을 세워 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과 밭에 둘러싸인 완연한 시골로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고 접근
했다. 절을 둘러싼 산은 수도산이라 불렸으며, 그 시절에는 산사의 내음이 진했다. 허나 개발
의 칼질이 강남과 영동(영등포 동쪽에 있다고 해서 영동이라 불림) 지역에 요란하게 칼춤을
추면서 강남이란 거대한 도시가 닦여졌고, 그로 인해 뜻하지 않게 도시 속의 별천지이자 외로
운 공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강남 졸부들과 강남권, 잠실권으로 유입된 사람들이 봉은사의 고객이 되면서 절의 규
모는 더욱 커져갔고 이제는 서울 굴지의 사찰이 되었다.

넓은 경내에는 대웅전과 선불당, 영산전, 판전, 북극보전, 법왕루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으
며 1996년에 마련된 거대한 미륵대불이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인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과 청동은입사향완<현재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 있음>이 있으며, 선불당과 괘불도
등 20여 점의 서울시 지방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그 외에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불상과 보살상,
경판, 탱화 등이 수십 점 전하고 있으며, 5월에 1달 정도 연등 전시회를 열고 있다.

봉은사는 이렇듯 조선 왕실의 오랜 원찰로 번영을 누렸으며, 왜정 때는 31본산의 하나로, 현
대에 들어서는 강남 개발의 후광으로 끊임없이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다. 난개발로 인해 도시
에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으나 경내 뒷쪽인 북극보전과 영산전 구역은 숲에 묻혀있어 산
사의 내음이 조금은 남아있으며, 문화유산이 많아서 고색의 향기도 풍년이다.
또한 강남 번화가의 상큼한 오아시스 같은 곳이자 서울 지역 고찰(古刹)의 대표급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절의 새로운 샘물인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절찬리에 운영하고 있다. 단 가격
은 강남프리미엄 때문인지 다른 절보다 다소 비싸게 받는 편이다. (정기 템플스테이 1박2일
가격이 9~12만원)

* 봉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73 (봉은사로 531, ☎ 02-3218-4800)
* 봉은사 홈페이지(템플스테이 포함)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봉은사 미륵전(彌勒殿)과 그 앞에 소환된 초파일 장엄등



 

♠  봉은사 선불당, 대웅전

▲  봉은사 선불당(選佛堂)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64호

법왕루 옆구리 길로 가면 선불당이란 큰 기와집이 마중을 한다. 그는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
는 건물로 예전에는 비슷한 성격을 지닌 심검당(尋劍堂)이 있었는데, 1939년 대화재로 무너졌
다. 하여 1941년에 다시 지었는데 봉은사에서 승과를 실시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따라 승려
를 뽑는다는 뜻의 '선불당'으로 이름을 갈았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초익공(初翼工) 팔작지붕 집으로 북쪽과 서쪽, 남쪽에는 쪽마루가 길게
닦여져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건물 내부 구조는 정면 5칸으로 동서로 4칸, 남북 3칸 규
모의 큰방을 중심으로 3면이 방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에 파란색 문을 두었는데, 그 좌우
로 나무장작이 두둑히 쌓여있어 마치 겨울을 나는 산사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 내부 천장과 뒷편이 조금 변형이 되었고, 이제 80여 년 묵은 건물이나 서울에서 이런 형
태의 목조건물이 매우 드물어 봉은사의 문화유산 중 제일 먼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연등 구름으로 지붕이 지워진 선불당
선불당 쪽마루에는 잠시 쉬어가는 나그네들이 많다.

▲  하얀 연등이 으시시 하늘을 훔친 지장전(地藏殿)

선불당 북쪽에는 지장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39년 대화
재 때 소실된 것을 1941년에 중건했다. 허나 2002년 6월에 화마(火魔)의 장난으로 또 무너진
것을 2003년 겨울에 기존 12평에서 40평으로 크게 늘려 중창했다.

다른 곳은 보기만 해도 기분을 즐겁게 하는 오색 연등 일색이지만 이곳은 기분이 급히 우울해
질 정도로 하얀 연등 일색이다. 이는 이곳이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의 공간으로
영가(靈駕, 죽은 사람)들의 극락왕생을 그들에게 부탁하고자 망자를 상징하는 하얀 연등을 달
아서 그렇다.


▲  연등이 새로 하늘을 연 대웅전 뜨락과 3층석탑

봉은사의 중심인 대웅전, 그 뜨락의 허공을 오색 연등이 장악해 새로운 하늘을 만들었다. 그
러다 보니 이곳의 유일한 석탑인 3층석탑의 머리가 가려져 버렸다. 마치 자욱한 안개에 산 윗
부분이 가려진 것처럼 보이며, 하늘이 탑의 머리만큼 움푹 낮아진 기분이다. 흔히 태초(太初)
의 세계는 하늘과 땅이 바짝 붙어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자욱하게 깔린 연등 구름에 머리장식이 가려진 3층석탑은 197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석
가여래의 사리 1과가 들어있다.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히고 머리장식으
로 마무리를 지은 탑으로 신라 탑의 상징인 불국사 석가탑(釋迦塔)을 많이 닮았다. (그를 모
델로 하여 만들었음)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맵시를 자랑하며, 기단석 밑층에는
중생들이 갖다놓은 화분 꽃이 가득하다. 또한 탑 앞에는 중생이 피워놓은 향이 넘쳐나 주변
50m까지 향 냄새가 진동을 한다.


▲  정면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대웅전(大雄殿)

자욱한 연등 구름에 윗도리가 가려진 대웅전은 봉은사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
지붕 집이다. 1982년에 중창된 것으로 내부에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지방
문화재인 삼세불도와 신중도, 감로도, 삼장보살도(이것은 친견하지 못했음), 홍무25년 장흥사
명 동종 등의 문화유산이 들어있으니 여로(旅路)를 살찌울 겸, 꼭 살펴보기 바란다. 봉은사의
문화유산은 대웅전과 판전, 영산전에 대부분 집중되어 있어 이들은 이곳의 불교박물관이자 보
물 창고와 다름이 없다.


▲  뜨락 동쪽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봄바람에 펄럭이는 연등 구름

▲  홍무25년 장흥사명 동종(洪武25年 長興寺銘 銅鐘)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76호


대웅전에 발을 들여 동남쪽 구석(뜨락 방향)을 살펴보면 검은 피부의 조그만 종이 눈빛을 보
낼 것이다. 대웅전 내에 그에 대한 안내문도 없고 피부가 탱탱하여 현대 종으로 여기고 지나
칠 수 있으나 그가 바로 봉은사에서 2번째로 늙은 문화유산인 장흥사명 동종이다. (동종의 위
치는 변경될 수 있음)

이 동종은 1392년에 조성된 것으로 종 이름 앞에 붙은 홍무(洪武)는 명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
장(朱元璋)의 연호이다. 원래 장흥사에 있었으나 어찌어찌하여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데, 종
을 매다는 용뉴는 사라졌으나 몸통은 잘 남아있다. 종 밑에 연화대(蓮花臺)를 두고 구름을 탄
보살과 당좌가 각각 1개씩 새겨져 있으며, 600년이 넘은 늙은 동종임에도 건강은 양호하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229호

대웅전 같은 법당에는 법당 지킴이인 신중도(신중탱)가 꼭 들어있기 마련이다. 이곳 신중도는
1844년 7월에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세로 200.5cm, 가로 245cm의 비단 바탕에
그려졌다.
이 땅의 신중도 중 가장 큰 편으로 화면 위쪽에 구곡병(九曲屛)을 두르고, 향 우측에는 위태
천(韋太天)과 천룡팔부(天龍八部) 등의 신장(神將)을, 향 좌측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
天)을 비롯한 천부중을 빼곡히 배치하여 안그래도 침침한 두 눈을 더 어지럽게 만든다.

신중도의 주인공인 범천과 제석천은 네모난 신광(身光)을 두르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왼쪽
에는 이마에 제3의 눈이 표현된 범천이 큰 보관을 쓰고 합장을 하고 있고, 맞은편에 황금 보(
補)가 달린 옷을 입은 제석천이 옷 속에 두 손을 넣고 서 있다.
범천은 녹색, 제석천은 붉은 옷을 입고 있으며, 옷에는 아름다운 문양과 화려한 금니(金泥)가
채색되어 있다. 얼굴과 손 등에는 호분을 칠했으며, 둥근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가 단정하면서
도 원만한 모습이다.
범천 밑에는 문관 복장과 원유관(遠遊冠)과 경전을 얹은 관을 쓴 일궁천자(日宮天子)와 월궁
천자(月宮天子)가 나란히 있는데, 금색의 화려한 각대(角帶)와 금으로 장식된 보관이 천자의
위상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들 오른쪽에는 비파와 생황, 대금, 피리 등을 연주하는 주악천녀(
奏樂天女)와 향로를 들고 있는 천녀, 당번(幢幡)을 들고 있는 천녀와 동자가 있다.

그림 하단에 피리와 대금을 부는 인물들은 서로 조용히 마주보고 있으며, 위태천을 비롯한 천
룡팔부는 칼과 창을 들고 오른쪽을 향해 주악천녀의 음악을 듣는 듯하다. 위태천은 새 날개깃
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투구를 쓰고 금색의 삼지창을 들고 있으며, 그 아래로 백익선(白翼扇)
을 든 산신(山神)과 주조신(主竈神), 용왕(龍王), 주정신(主井神), 무기를 든 신장들이 서 있
다. 천부중들과 달리 얼굴은 짙은 갈색이며, 부릅뜬 눈과 무성한 턱수염을 갖추고 있어 호법
신으로서의 특징을 잘 담고 있다.

채색은 적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녹색과 흰색, 갈색, 금색 등을 함께 사용했는데, 특히 권속들
의 보관과 옷, 무기, 지물 등에 금색을 많이 사용하고 권속들의 얼굴에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환한 느낌을 준다. 음영법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호법신들의 수염과 천부중의 머리 등을
세필(細筆)로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탱화 화기(畵記)에는 상궁들의 시주로 송암당 대원(松巖堂 大園)과 월하당 세원(月霞堂 世元)
등 여러 승려들이 제작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시주한 상궁들의 이름은 거의 훼손되어 확인
이 어렵다. 이곳 신중도는 한쪽에 범천과 제석천을, 다른 한쪽에 위태천을 배치한 구도로 19
~20세기에 서울과 경기 지역 신중도에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  봉은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236호

영가(죽은 사람) 천도를 목적으로 하는 감로도는 신중도보다 등장인물이 무진장 많고 몇 배로
더 복잡한 탱화이다. (신중도는 그에 비하면 아주 양반임)
1892년에 후불탱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민두호(閔公斗)와 상궁의 시주로 금어(金魚) 한봉창엽
(漢峰瑲曄)과 혜산축연(蕙山竺衍), 홍범(弘範), 허곡긍순(虛谷亘㥧), 慧寬(혜관), 戒雄(계웅)
이 그렸으며, 그림의 크기는 세로 200cm, 가로 316.5cm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그림 상단에는 칠여래가 합장을 하며 서 있으며, 좌측에는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과 왕후장
상(王侯將相), 선왕선후(先王先后), 북채를 든 뇌신(雷神),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등이 구름 위에 서 있다. 칠여래 밑에는 제단 좌우로 높은 기둥이 서 있고 '남무백억화신불(
南無百億化身佛, 석가여래),'남무청정법신불(南無淸淨法身佛, 비로자나)','남무원만보신불(南
無圓滿報身佛, 노사나)의 삼신불번(三身佛幡)을 늘어뜨리고 온갖 꽃과 공양물을 가득 설치했
다.
제단에 이르는 돌계단 밑 좌우에 놓인 커다란 화병 안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모란이 가득 꽂혀
있어 당시(1892년) 제단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으며, 제단 우측에는 흰 천막을 치고 승려들이
나란히 모여 앉아 독경하는 모습과 작법승(作法僧)들이 큰북과 바라 등을 두드리며 의식을 행
하는 모습, 승무(僧舞)를 추는 모습, 커다란 공양물을 머리에 이거나 들고서 제단을 향해 가
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표현되었다.

그림 하단 중앙에는 서로 마주보고 꿇어앉은 1쌍의 아귀(餓鬼)가 크게 묘사되었다. 화염이 뿜
어져 나오는 입과 가는 목, 불룩한 배 등 아귀의 특징이 잘 묘사되어 있으나 얼굴 표정 등에
서 다소 희화적이다.
아귀 좌우로는 수목으로 분리된 화면 속에 한복을 입은 남녀가 춤을 추거나 싸우는 장면, 대
장간에서 일하는 장면, 악사들의 반주에 맞춰 광대가 거꾸로 서는 묘기를 부리고 초랭이가 부
채를 들고 춤추는 장면, 죽방울 놀이를 하는 장면, 무당이 굿하는 장면 등 속세의 다양한 장
면들이 묘사되었는데, 음식을 먹거나 술을 받는 모습, 물건을 파는 모습 등은 당시 장터의 모
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표현된 풍속 장면은 주로 장례나 영가 천도 등의
행사와 관련된 장면을 중심으로 표현되어 수륙화로서의 감로도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 그림 우측에는 뇌신을 표현한 화염 아래로 우산을 쓴 인물과 뱀에게 쫓기는 장면 등 '법
화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의 구제난(救濟難) 장면과 농사짓는 모
습, 공부하는 모습,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소고 등을 갖고 무리를 지어 노는 모습, 일하러
가거나 장터에 가는 모습 등의 다양한 일상생활과 죄인을 벌하는 모습, 전쟁 장면 등을 표현
하였다. 채색은 전체적으로 적색과 황색, 흰색, 청록색 등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감로도는 수국사(守國寺) 감로도(1832년)를 비롯해 수락산 흥국사 감로도(1868년), 개운사
감로도(1883년) 등 서울/경기 지역의 19, 20세기 감로도의 도상과 동일한 도상을 취하고 있는
데, 1883년에 개운사 감로도를 그린 대허 체훈(大虛 軆訓)과 천기(天機)가 봉은사 불사에 깊
이 관여한 적이 있어 그들이 사용했던 초본을 참고한 것이 아닐까 싶다.


▲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보물 1819호
후불탱인 삼세불도(三世佛圖)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234호


대웅전의 주인장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1651년에 조각승 승일(勝一)이 9명의 보조 조각승
과 함께 만든 것이다. 1689년 화재로 본존불이 소실되자 새로 조성했는데, 이는 1765년에 제
작되어 불상 뱃속에 넣은 개금발원문(改金發願文)을 통해 밝혀졌다.

명상에 잠긴 듯 조용한 모습의 가운데 본존불은 좌우협시상보다 30cm 정도 크고, 변형식 편단
우견(偏袒右肩)으로 법의를 걸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한 모습이다. 좌우 협시불인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조각적으로 우수하며, 발원문(發願文)과 개금문을 뱃속에 품고 있어 17
세기 불교 조각의 한 단면을 소상히 알려준다. 하여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3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요즘에는 복장유물이나 조성 관련 명문이 분명히 있는 경우 거의 국가 보물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센스 하나가 그들이 남긴 작품의 가치를 백두산만
큼이나 높여주는 것이다.

삼불좌상 뒤에 듬직하게 걸린 후불탱은 삼세불도이다. 붉은 색채가 유난히 많이 느껴지는 그
는 1892년에 제작된 것으로 세로 319.7cm, 가로 291.8cm 큰 규모이나 현 삼불좌상의 후불벽(
後佛壁)보다는 폭이 좁다. 하여 그 시절 대웅전 후불벽 규모가 삼세불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
다.
그림 상단 가운데에는 석가여래, 그 좌측에 약사불, 우측에 아미타불이 삼세불을 이루고 있는
데, 보살 6구, 나한 8구, 사천왕, 화불 2구, 용왕, 용녀 등이 삼세불을 둘러싸고 있다. 석가
여래는 높은 수미단 위에 닦여진 청련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했는데, 이마 부분이 넓고
턱 부분이 다소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작으며, 육계가 뾰족하다. 신체는 좋은 편으로 왼
쪽 어깨에 붉은 대의를 걸친 후 대의 자락을 오른쪽에 살짝 걸친 변형된 통견식 착의법을 하
고 있다. 대의의 가장자리에는 화문이 있으며, 동일한 화문을 지닌 군의 윗부분이 넓은 U자형
으로 처리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고 길상좌(吉祥坐)를 취한 자세가 안정감을 준다. 약사
불과 아미타불은 석가여래의 얼굴과 착의법, 자세 등이 비슷하나 광배(光背)는 이중륜광으로
처리되었으며 두 상 모두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했다.

석가여래 밑에는 가섭존자(향우)와 아난존자(향좌)가 본존을 향해 서 있고 광배 주위로 좌우
각 3구씩 제자와 분신불이 배치되었으며, 약사불 위쪽에는 용왕, 아미타불 위쪽에는 용녀가
얼굴 부분만 표현되었다.

석가여래의 대좌 아래쪽에는 6구의 보살들이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다소 무거운 듯한 보
관에 붉은색 천의를 입고 중앙을 향해 서 있다. 정중앙의 두 보살은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이며, 옆의 보살은 머리에 붉은 해를 단 것으로 보아 일광보살, 반대쪽의 보살은 월광
보살, 가장자리의 두 보살은 특별한 표식은 없으나 아미타불의 협시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
살로 여겨진다.

화면 아래와 위 네 방향에는 사천왕이 있다. 향 우측 상단의 천왕은 비파, 하단의 천왕은 칼
을 들었으며, 향 좌측 상단의 천왕은 탑, 하단의 천왕은 각각 여의주와 용을 들고 있고, 위쪽
의 두 천왕은 화면의 중앙을, 아래쪽의 두 천왕은 바깥쪽을 향하고 있어 사방을 모두 호위하
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인 화면 구성은 1878년에 제작된 안성 청룡사(靑龍寺)의 삼세불화와 유사한데, 두 불화
는 일부 권속의 가감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본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세불의 뾰
족한 육계, 착의법을 비롯해 사이 사이에 배치된 분신불과 제자들, 사방을 호위하고 있는 사
천왕의 모습 등이 동일하며, 봉은사 삼세불화에서는 6보살이 표현된 것에 비하여 청룡사 삼세
불에서는 8보살과 두 천녀가 배치된 점이 다르다.
이처럼 두 불화가 동일한 도상을 보여주는 것은 봉은사 삼세불도를 그린 화승 중 영명 천기(
永明 天機), 금곡 영환(金谷 永煥). 덕월 응론(德月 應惀)이 청룡사 삼세불화 제작에도 참여
했기 때문이다.
채색은 붉은 색을 많이 사용했으며 청색과 흰색, 녹색, 금색 등을 함께 쓰고 있다. 특히 석가
여래의 신광 내부를 금색으로 칠한 것은 판전 비로자나후불도(1886년)와 같으며, 아미타불과
약사불의 신광 내부는 다양한 색대(色帶)로 표현해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으로 보인다. 불/보살
의 얼굴은 음영 없이 처리했으나 나한과 사천왕은 음영을 강하게 사용하였는데 다소 과장되면
서도 능숙한 음영 처리가 돋보인다. 필선은 철선묘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머리카락과 수염 등
의 묘사에서 세밀한 필치가 엿보인다.

이 불화는 인권시주(引勸施主)인 오청정월(吳淸淨月)과 민두호(閔斗鎬)를 비롯하여 여러 상궁
의 시주로 조성되었으며, 이 그림을 주관한 영명 천기가 본사질로 참여한 것으로 보아 그때는
봉은사에 머물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  봉은사 마무리

▲  영각(影閣)

대웅전 뒷쪽 언덕에는 숲이 우거져 있다. 봉은사가 '수도산 봉은사'를 칭하고 있으니 그 언덕
은 자연히 수도산이 된다. 강남 개발 이전에는 숲에 완전히 감싸인 산사였으나 개발의 칼질이
한바탕 춤을 춘 이후에는 동/서/남 3면은 회색 도시가 되었고, 경내 북쪽에만 겨우 숲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숲도 봉은사가 미륵대불을 심고 절의 덩치를 불리면서 적지 않게 살이 깎여
나갔으며, 숲 너머에는 북촌에서 넘어온 경기고등학교가 넓게 자리를 닦아서 숲의 면적은 별
로 되지 않는다.
그 숲에는 영산전과 북극보전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으며, 숲과 미륵대불 사이에 영각이 자리
하여 남쪽을 굽어본다.

영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봉은사를 열었다는 연회국사와 봉은사를 크게
키웠던 보우대사, 봉은사 승과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19세기에
화엄경판을 판각하고 판전을 세운 남호 영기, 20세기 승려인 영암, 석주 등 승려 7명의 진영
과 6.25때 전사한 호국영가 201위의 영단이 봉안되어 있다. 중심 불단에는 죽은 이를 기리는
공간에 걸맞게 지장보살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자리해 그들의 극락천
도를 책임진다.
건물의 원래 이름은 충령각(忠靈閣)으로 1967년에 7평으로 지어졌으며, 1992년 2배로 증축하
여 영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  봉은사의 자랑, 미륵대불(彌勒大佛)

영각과 판전 사이에는 봉은사의 새로운 명물이자 마르지 않는 샘인 거대한 미륵대불이 둥지를
틀고 있다.
그는 1986년 영암 큰승려가 발원하여 만든 것으로 10,000명 이상이 돈을 대어 10년에 공사 끝
에 1996년 완성을 보았다. 높이는 강남과 봉은사의 위엄에 걸맞게 23m에 이르러 서울 최대의
석불이자 천하 최대급의 미륵석불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요즘은 툭하면 큰 불상이나 보살상
이 만들어지는 세상이라 지금은 덩치 순위가 많이 내려갔을 듯) 밑에서 바라보면 정말 까마득
하게 보여 내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해 보인다.


▲  미륵전(彌勒殿)
미륵대불 앞에 자리한 미륵전은 원래 법왕루였다. 1997년에 새 법왕루를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겨 미륵대불을 보조하는 미륵전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  1칸짜리 범종각(梵鐘閣)
미륵전 서쪽에 자리한 범종각은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범종이 들어있다. 허나
그 동쪽에 종루가 새로 세워지면서 지금은 휴업 상태이다. 이제 60년도 안된
팔팔한 나이에도 벌써 강제 은퇴로 물러난 상태이니 그의 모습에
남모를 쓸쓸함이 느껴진다.


봉은사의 보물 창고인 영산전과 북극보전, 판전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
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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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4년 4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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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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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남쪽 끝자락에 깃든 상큼한 명소들, 푸른수목원~항동저수지~항동철길 1바퀴

구로구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가을 나들이



' 구로구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가을 나들이 '

푸른수목원 항동저수지

▲  푸른수목원 항동저수지

항동철길(오류선) 푸른수목원 장미원 분수대

▲  항동철길(오류선)

▲  장미원 분수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도 수목원이 있다. 바로 홍릉수목원과 서울 서
남쪽 변두리에 있는 푸른수목원이 그것이다.
구로구의 일원으로 서울의 서남쪽 끝을 잡고 있는 항동(航洞)에 자리한 푸른수목원은 이
미 2~3번 인연이 있으나 주마등(走馬燈)으로 둘러본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가을이 늦가
을로 숙성되어 가던 10월의 한복판에 겸사겸사 그곳을 찾았다.

비록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나 나는 서울의 동북쪽 끝, 푸른수목원은 서남쪽 끝
으로 완전 끝에서 끝이다. 거리만 해도 최소 34km가 넘는다. 우리 동네 전철역인 방학역
에서 1호선을 타고 70분을 달려 오류동역에서 하차, 여기서 서울시내버스 6614번(양천차
고지↔옥길지구)으로 환승하여 푸른수목원 후문에서 두 발을 내렸다.



 

♠  푸른수목원 입문 (항동저수지)

▲  활짝 열린 푸른수목원 후문

서울의 서남쪽 변두리인 항동 한복판에 서울 최초의 시립 수목원(樹木園)인 푸른수목원이 상
큼하게 누워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과 차량, 그리고 번잡한 시가지가 크게 연상
되는 서울에도 수목원이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짙은 숲으로 이루어진 국립산림과학
원 소속의 홍릉수목원과 오산(烏山)의 물향기수목원과 비슷한 푸른수목원을 가지고 있다.

푸른수목원 자리에는 지금도 건재한 항동저수지와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다. 저수지 동쪽에는
구로구(九老區)의 지붕인 천왕산(天王山, 144m)이 자리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도 그런
데로 띄고 있었다.
시골 향기 그윽했던 변두리로 조용히 묻혀있던 항동, 바로 그곳에 서울시는 수목원을 닦기로
하고 2004년 6월 30일에 수목원 기본계획용역을 실시해 같은 해 12월 30일, 수목원 실시설계
용역을 시행했다. 2005년 12월 15일 수목원 조성사업 실시계획 인가를 얻어 2006년 3월 8일까
지 토지 측량, 경계 측량, 분할 측량을 완료했으며, 4월 15일 실시계획 변경 인가를 받아 6월
16일 보상계획 공고를 하여 12월까지 수목원 토지 보상과 공사 시행을 완료했다.

2009년 10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1단계 조성 공사로 저수지 생태탐방로, 목재방틀을 설치했
으며, 2010년 9월 2단계 조성 공사에 들어갔으나 2011년 6월, 캠핑장 반영 변경 계획에 따른
시민들의 반대로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2012년 7월 17일 시민들의 제안을 받아들
여 정원 개념을 도입한 수목원으로 공원조성계획이 통과되어 2013년 3월, 3단계 조성 공사에
들어가 그해 6월 5일, 상큼한 모습으로 속세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18년 서울시 1호 공립
수목원으로 지정되었다.

수목원 면적은 103,354㎡로 2,400여 종 52만 주의 다양한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잔디마
당과 향기원, 초화원, 장미원, 암석원 등 20개의 테마공간과 북까페 등의 편의시설이 닦여져
있으며, 숲해설 등의 자연 교육 프로그램과 친환경관리의 중심인 '생태의 섬(Eco-island)'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도심 속에서 식물과 인간, 환경이 공존하고 3무(無, 농약과 무화학비료,
쓰레기 배출을 하지 않음) 운동을 실천하는 생태공간임을 내세우며 실천하고 있다.
수목원 동쪽에는 천왕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고, 북쪽은 주거지와 성공회대학교, 서쪽과 동쪽
은 들녘과 항동지구가 공존하고 있다. 수목원 남쪽에는 철길 관광지로 크게 인기를 누리고 있
는 항동철길(오류선)이 지나가며, 천왕산과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가 동쪽에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고 거닐 곳도 정말 많다. 하여 푸른수목원과 항동철길을 한 덩어리로 둘러보거나 천왕
산과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까지 보태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수목원이긴 하지만 나무가 빽빽한 그런 수목원이 아니라 정원 및 공원 같은 분위기로 정문과
후문, 2개의 쪽문(항동철길, 더불어숲길)을 통해 들어설 수 있으며, 나는 후문으로 들어가서
항동철길 쪽문으로 나왔다. 쉬는 날과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5시부터 22시까지로 이
땅의 수목원 중 이렇게 관람시간이 긴 곳은 여기 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도시와 도시 사람
들에게 최적화된 수목원이다.

* 푸른수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 81-1(연동로 240 ☎ 02-2686-3200)
* 푸른수목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장미원 ①

후문을 들어서면 바로 장미원(장미정원)이 마중을 한다. 수목원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붉은 장
미와 분홍 장미 등 천하의 온갖 장미 69종이 모여 아름다움을 견주고 있는데, 그들이 심어진
부지는 장미의 꽃잎과 푸른 잎의 모양을 따서 만들었으며, 분수대가 정원 한복판에 자리하여
경관을 크게 돕는다.


▲  장미원 ②
늦가을 장미의 향연이 한참 펼쳐져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  장미원 ③
수목원 너머로 항동지구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 도시 속의
장미공원을 보는 듯 하다.

▲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장미원 분수대

▲  더불어숲길 안내도

장미원 동쪽에는 천왕산으로 인도하는 더불어숲길 쪽문이 있다. 더불어숲길은 서울시와 구로
구청, 성공회대, 사단법인 더불어숲이 함께 조성한 짧은 숲길로 더불어숲길 쪽문에서 성공회
대 뒷쪽(천왕산 북쪽 자락) 언덕까지 이어지며 거기서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와 만난다.


▲  장미원 남쪽이자 조망원 주변 산책로

▲  항동저수지 수생식물원

항동저수지는 푸른수목원의 상큼한 거울이자 터줏대감이다. 근처의 궁동저수지(궁동저수지생
태공원)와 더불어 서울에 몇 없는 저수지로 경기도 농산물원종장의 농업용수를 위해 왜정(倭
政) 때 닦여졌다.
경기도 농산물원종장은 1917년 5월에 여기서 가까운 부천 역곡(벌응절리)에 세워진 경기도종
묘장에서 시작되었는데, 1932년 경기도 농사시험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49년에 경기도
농사기술원으로, 1957년에는 경기도농사원으로 이름이 갈렸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항동은 경기도 부천군(富川郡)에서 서울로 바뀌었으며, 서울의 지
나친 도시화로 1998년 폐지되면서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경기도 농업기술원에서 그 기능을 담
당하고 있다.

이 저수지는 농업용수 외에도 낚시터와 물놀이 장소로 바쁘게 살았는데, 겨울에는 썰매와 얼
음 낚시 명소로도 유명했다. 주변이 온통 경작지와 산이라 한때 존폐 위기까지 갔던 궁동저수
지와 달리 좋은 수질을 유지했으나 푸른수목원이 닦이면서 농업용수 제공은 중단되고 낚시와
썰매도 모두 금지되는 등, 그동안의 존재의 이유를 모두 빼앗기긴 했으나 대신 궁동저수지와
비슷한 수생식물원 및 생태저수지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저수지 동부에는 나무로 다진 생태탐방로를 닦았고 연꽃 등 수초(水草)들이 무성해 저수지의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저수지 주위로 산책로가 닦여져 있으며, 물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저수지 수중 식구들을 위해 접근을 삼가하기 바란다. 푸른수목원의 절반은 항동저수지
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곳에서 매우 비중이 크며, 그가 없는 푸른수목원은 정말 상상
할 수가 없다.


▲  저수지 위에 그물처럼 닦여진 수생식물원 생태탐방로

▲  푸르기 그지 없는 항동저수지
농업용수 제공과 낚시터, 피서지 바쁘게 살았던 그는 이제 인간의 손을
덜 받는 생태저수지로 새 삶을 누리고 있다.

▲  저수지 외곽에 삼삼하게 자라난 수초들
온갖 수초들이 저수지와 속세의 경계를 팽팽히 그으며 저수지 식구들을
지킨다.

▲  항동저수지 서쪽 산책로

▲  평화로운 모습의 항동저수지와 천왕산
천왕산은 물론 주변 나무와 하늘, 구름, 햇님, 달님까지 저수지를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항동저수지와 가까이에 보이는 옥의 티들(항동지구)

푸른수목원이 닦여졌을 때는 주변은 산과 들판이 전부인 자연의 공간이었다. (집들이 여럿 있
었음)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농촌이었으나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들어와 춤을 추면서 수목원
주변으로 회색빛 아파트들이 마구 들어서 일명 항동지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곳은 서울의 영원한 시골로 남았으면 했는데, 이 변두리까지 가만두지를 않고 자꾸 성냥갑
아파트를 올려 난개발을 일삼은 것이다. 아직 시골 들판이 좀 남아있긴 하나 그마저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 서울의 인구는 미세하게나마 줄고 있고, 전국적으로 비어있는 아파트가 즐
비하다고 하는데, 자연이 잘 남아있는 이곳까지 공간을 낭비해야 했을까? 아파트보다는 자연
공간을 크게 조성하여 푸른수목원의 확장판으로 삼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수목원과 천왕
산 일대는 숲을 중심으로 한 자연공간으로, 수목원 서쪽과 남쪽은 수목원 수식용 자연 공간과
주말농장 등의 경작지로 손질해야 했음)

▲  북쪽에서 바라본 항동저수지

▲  저수지와 습지식물원 사이 산책로



 

♠  푸른수목원 둘러보기

▲  참여정원의 평화로운 풍경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가 싹 정화되는 기분이다.

▲  가을에 푹 잠긴 붉은 단풍나무
올해의 마지막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  습지식물들의 조그만 낙원, 습지식물원

이곳은 동그란 작은 웅덩이가 여러 개 모여 이루어진 습지대(濕地帶)로 다양한 수생식물과 수
서곤충(水棲昆蟲)이 살아가고 있다. 습지대는 생태공원의 필수 요소로 오염된 물을 정화시켜
주며, 조그만 생물들의 삶터와 먹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습지를 이룬 물은 항동저수지로 흘
러가 저수지를 살찌워준다.


▲  야생화원과 계류원 주변 산책로

▲  계류원에 차려진 하얀 천막(국화정원)

계류원은 수목원 이전부터 있던 물길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다양한 수생식물이 살아가고 있
다. 그 위에는 나무다리를 닦고 천막을 씌워 국화정원으로 삼아 아름답게 꾸며진 국화와 분재
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 내용은 매달 다를 수 있음)


▲  계류원 국화정원의 학 모양 분재
학 분재 1쌍이 서로를 각별히 바라보며 정을 속삭인다. 그 앞에는 다양한
피부색의 국화들이 서로 아름다움을 견준다.

▲  불꽃처럼 화사하게 돋은 노란
국화의 위엄 (국화정원)

▲  늦가을에 점차 물들어가는 활엽수원
(闊葉樹園)


▲  활엽수원 산책로
단풍나무와 참나무, 벚나무 등의 활엽수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늦가을에는 단풍의 고운 향연을 구경할 수 있다.

▲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수목원 동쪽 끝자락에는 KB숲교육센터라 불리는 유리온실이 있다. 하얀 피부를 지닌 이 온실
은 국민은행(KB)의 후원(기부채납)으로 2015년에 지어진 것으로 시민을 위한 친환경 휴식 공
간과 체험형 생태교육공간으로 조성되었으며, 초승달 모양을 지닌 정남향 온실(溫室)로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열대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조촐하게 실내 식물원 역할을 한다.
수목원 구성원 중 유일한 실내 공간(관리사무소와 까페는 제외)으로 안으로 들어가면 조금은
더울 수 있다. (겨울에는 따스해서 좋으나 여름에는 다소 더울 수 있음)

▲  2015년 KB숲교육센터 조성 기념으로
전 서울시장 박원순이 심은 소나무

▲  열대 밀림 같은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 ①


▲  열대 밀림 같은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 ①

▲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의 조그만 문

▲  '아라우카리아'라 불리는 열대식물

▲  스코파리움호주매화(마누카)
이름도 무지하게 어렵고 생김새도 요상한 나무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고향이다. 최대 3m까지 자란다고 하며, 잎과 가지에서 오일을 추출한다.

▲  만지면 꽤 아플 것 같은 선인장 무리들
저들은 생긴 것 자체가 단단한 무기이다.

▲  벌써 휴식기에 잠긴 무궁화원
130여 종의 무궁화가 향연을 펼치는 곳이나 계절 관계로 벌써부터
휴식에 들어가 잠잠한 모습이다.

▲  무궁화원 부근에 닦여진 돌탑

▲  영국정원과 가로수


▲  영국정원과 늘씬하게 솟은 가로수들
영국(잉글랜드) 양이(洋夷) 스타일의 자연풍경식 정원의 소박함과 아름다움을
수목원 구석에 구겨 넣었다. (바로 옆에 억새원이 있음)

▲  야생화원
이 땅에 자생하는 야생화를 잔뜩 머금은 공간으로 그중에서
구절초(九節草)가 제일 많이 아른거린다.

▲  구절초의 앳되고 청초한 미소가 깃든 야생화원

▲  야생화원의 풍경 하나 (커다란 돌과 식물, 꽃들)

▲  프랑스정원(오른쪽)과 억새원(왼쪽)
영국정원이 있으니 그에 대비되는 프랑스정원도 그 옆에 구겨 넣었다.

▲  향기원
이곳에는 오감을 흥분시키는 다양한 허브식물과 약용식물, 식용식물 등이
닦여져 있다. 이들은 자원봉사자들이 정성을 들여 조성했다.

▲  항동철길 쪽문 방향

후문을 통해 푸른수목원으로 들어와 수목원 내부를 고루고루 둘러보고 항동철길 쪽문으로 나
갔다. 일몰이 턱 밑이라 흐리게 나오거나 별로인 사진이 적지 않아 수목원의 ¼> 정도의 분량
은 본글에서 쿨하게 뺐다.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별도의 글에
서 채울 생각이다. (생각에서만 멈출 수도 있음)



 

♠  서울에서 유일한 철길 명소, 항동철길(오류선)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푸른수목원 바로 남쪽에는 철길이 지나고 있다. 속세에서는 그 철길을 항동철길이라 부르는데
, 정식 명칭은 오류선(梧柳線)으로 오류동역(1호선)에서 광명시 옥길동에 있던 경기화학을 이
어주던 4.5km의 화물열차 전용 단선 철로이다. ('경기화학선'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음)

경기화학주식회사는 이 땅 최초의 비료 공장으로 1954년 옥길동에 설립되었다. (그 시절 지명
은 '부천군 소래면 옥길리') 원료와 비료 운송을 위해 1957년 9월 26일 철길을 닦기 시작해
1959년 5월 30일에 완성을 보았는데, 경기화학 외에도 한때 오류동에 있던 삼천리연탄공장과
동부제강도 이 철로의 신세를 졌다.
경기화학은 울주 온산공장으로 통합, 이전되면서 광명 공장은 문을 닫았으며, 그로 인해 열차
가 다닐 일이 거의 없어지면서 완전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동부제강과 삼천리연탄공장도 다
른 곳으로 이전됨)
그렇게 열차의 기적소리도 사라지고 열차의 바퀴자국도 녹이 슬면서 철로에는 잡초가 덥수룩
하게 끼었으며, 무쓸모급 철길로 전락했지만 주변에 천왕산공원, 푸른수목원이 조성되면서 그
들을 수식하는 철길 명소로 덕을 보게 되었고, 2014년 이후 방송매체에서 이곳을 줄기차게 홍
보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항동철길은 오류동역에서 1호선 경인선에서 살짝 갈라져 나와 서해안로와 오리로가 만나는 광
덕4거리를 지난다. 여기서부터 뚜벅이들이 거닐 수 있다. (광덕4거리~오류동역 구간은 접근
금지) 오리로11길 골목길이 바로 남쪽에 붙어있으며, 금강수목원아파트와 맞닿은 철길 북쪽에
는 짧게 숲길을 닦아놓아 눈길을 부드럽게 배려했다.
철길은 주택가의 끝인 우창굿모닝아파트를 지나면 숲에 감싸인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난다. 천
왕산 산세가 움푹 낮아진 곳에 산의 살을 파서 생긴 틈으로 그 고개를 지나면 푸른수목원 항
동철길 쪽문과 천왕산 등산로가 나온다. 그들을 지나면 푸른수목원 정문이 나오며, 항동우남
퍼스트빌까지 이동할 수 있다. 허나 그 이상은 곤란하다.
 
철길에 잡초가 덥수룩하고 골목길과 바로 붙어있어 열차도 완전히 등을 돌린 철길처럼 보이지
만 가뭄에 콩 나듯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주택가와 뚜벅이길이 바로 옆에 붙어있어 폭주는 하
지 못하고 천천히 지나가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 된다. 그것만 유념한다면 철길 산책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또한 열차가 아주 드문드문 지나가므로 산책 중에 열차를 만난다면 꼭
복권을 사보기 바란다. 그만큼 열차를 보기 힘들다.
한때 이 철길을 두고 관광지로 두느냐 안전을 위해 접근 불가로 봉인하느냐를 두고 말이 많았
으나 이제는 관광지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이 땅에 철길 명소가 여럿 있지만 서울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옛 경춘선 철길과 옛 경의
선 철길은 폐선된 철로라 제외) 게다가 주거지와 골목길 속을 거리낌없이 지나가므로 매우 친
숙하게 다가온다. 철길 주변 풍경도 주택가와 자연(천왕산, 푸른수목원)이 어우러진 모습이라
가히 싫지는 않다. 특히 우창굿모닝아파트에서 푸른수목원으로 넘어가는 나무에 감싸인 그늘
진 고갯길은 이곳의 백미로 소박한 자연 풍경을 보여준다.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오류동 방향)

▲  항동철길의 유일한 간이역(簡易驛), 항동철길역

항동철길에도 간이역이 있었다. 바로 항동철길역이 그것이다. 간이역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곳
에 바퀴를 멈추는 열차는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무늬만 역이다. 항동철길이 관광지로 뜨고 바
로 옆에 푸른수목원이 들어서면서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장식물이기 때문이다.
요즘 인기가 높은 레일바이크(Rail bike) 명소로 삼아도 좋을 듯 싶으나 화물열차가 랜덤 수
준으로 지나다녀 그것도 여의치 않다.

역무원 모자를 쓴 귀여운 개모형 옆에는 하얀 피부로 된 조그만 역명 간판이 달려있는데, 동
쪽 역은 무려 개성(開城), 서쪽 역은 해남(海南)으로 나와있다. 여기서 개성과 해남이 그렇게
나 가까웠던가? 갑자기 나의 둔한 돌머리에 혼돈이 온다. 해남은 비록 철도는 들어가지 않으
나 시외직행버스와 승용차로 언제든 갈 수 있지만 개성은 분명 우리 영역임에도 이상하게 70
년 이상 금지된 땅으로 봉해져 전혀 갈 수가 없다. 거리는 해남보다 개성이 훨씬 가까움에도
말이다. (항동철길에서 해남까지 400여km, 개성은 체감 거리가 달나라보다 훨씬 멈)

* 항동철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2동, 항동


▲  아무것도 정차하지 않는 간이역, 항동철길역 주변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오류동 방향)
철길을 닦고자 산세가 낮은 이곳을 손질했다. (나쁘게 말하면 천왕산 북쪽
산줄기를 철길로 끊어버림) 철길 좌우로 뚜벅이길이 닦여져 있는데
뚜벅이길로 가던 철길로 가던 그건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된다.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푸른수목원 방향)
항동철길을 끝으로 늦가을 초입에 벌인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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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4년 4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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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봄꽃 나들이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조선 최초의 능, 정릉



' 정릉 봄맞이 나들이 '

정릉
▲  정릉

정릉 금천교 정릉 숲길

▲  정릉 금천교

▲  정릉 숲길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어루만지던 4월의 한복판에 조선 최
초의 능인 정릉을 찾았다.
서울 장안에는 도봉산(道峯山)부터 호암산(虎巖山)에 이르기까지 봄꽃 명소들이 무지하
게 많지만 역사와 자연이 오지게 어우러진 조선시대 왕릉(정릉, 의릉, 태강릉, 선정릉,
헌인릉 등)도 봄꽃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다. 하여 간만에 왕릉 봄 산책이
나 즐길 겸, 적당한 곳을 찾다가 집에서 가까운 정릉으로 길을 잡았다. 정릉은 이미 3~
4번 인연을 지었으나 다들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  정릉(貞陵) 입문

▲  정릉 세계문화유산 표석 앞 갈림길

정릉과의 첫 인연은 중학생 시절인 1990년대 초반이다. 지금이야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인터
넷 지도가 아주 훌륭하여 지독한 길치가 아닌 이상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정릉 이정표가 있음) 그때는 이정표가 너무 부실하여 찾기가 어려웠
다.
하여 2번에 시도 끝에 정릉동 골짜기에서 태연하게 숨바꼭질을 즐기던 정릉을 찾아내 술래 신
세를 면하게 되었다. 그 시절 정릉은 지금처럼 입장료를 받던 공개 구역이었으나 인지도가 낮
아 탐방객은 별로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정릉의 존재감은 슬슬 커져갔고 탐방객도 정
비례로 늘어갔다.

정릉 정문에 이르니 매표소가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정릉이 성북구 영역이라
성북구 주민은 50%를 깎아주나 나는 도봉구 사람이라 그 혜택을 전혀 받을 수가 없어 입장료
전액을 지불하여 유료의 공간, 정릉으로 들어섰다. (도봉구는 1973년 7월 성북구에서 분리되
었음)


▲  정릉 재실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2호

정릉으로 들어서니 왼쪽(남쪽)으로 재실과 보호수로 지정된 큰 느티나무가 눈짓을 보낸다. 정
릉에는 서울의 다른 조선 왕릉에는 없는 2가지가 있어 눈길을 끄는데, 바로 보호수 나무와 약
수터이다. (약수터는 지금 사라지고 없음)
보호수는 2그루가 있는데, 재실 앞 느티나무는 나이 약 380년, 나무 둘레 360cm, 높이 21m로
정릉에 있는 나무 중 가장 크고 늙었다. 4~5월에 황록색 꽃이 핀다고 하나 봄 햇살이 정릉 구
석구석을 넓게 어루만지는 4월의 한복판임에도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꽃은커녕 잎
도 없다. 이미 다른 나무와 꽃들은 봄의 향연에 한참인데 말이다.


▲  정릉 재실(齋室)의 행랑 외곽 모습

재실은 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陵參奉)의 생활공간이자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 좌우로 창고와 하인 방, 마구간, 집사방(執事房)을 갖춘 행랑(行廊)이
나오고, 안쪽 기와문을 들어서면 제사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재실 본채가 있다.

정릉 재실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12년에 발굴조사를 벌여 2014년에
복원했다. 그러다 보니 고색은 채 여물지 못했다. 비록 복원은 되었으나 딱히 놀려두기도 뭐
하여 다례체험 등 여러 전통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대문과 다양한 공간이 있는 행랑

▲  재실과 제기고로 인도하는
안쪽 기와문

▲  2칸짜리 제기고(祭器庫)
제사도구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  재실 본채
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능을 지키는 능참봉의 거처이자
영(令)이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  관리사무소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7호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도 앞서 보호수처럼 벌거숭이 상태이다. 추정 나이 200
년, 높이 17m, 나무 둘레 320cm로 정릉에서 2번째로 크고 늙은 나무인데, 계절 감각이 둔해진
것인지 아니면 게을러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여 겨울에서 깨어나 봄의 향연에 동참했으면 좋
겠다. (느티나무는 5월 초까지도 벌거숭이인 경우가 있음)


▲  금천교(錦川橋)

정릉 중심부로 들어서려면 계곡에 걸린 금천교를 건너야 된다. (금천교가 아니더라고 계곡은
꼭 건너야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음)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聖域)의 경계 역할 및 능으로 인도하는 돌다리로 현종(재위 1659~1674)
시절 정릉을 손질하면서 지어졌다. 다리 좌우 끝에 석축을 다지고 그 사이에 묵직하게 돌기둥
을 세운 다음 길쭉한 통돌을 걸쳐 놓은 단출한 형태로 다리 피부에는 세월이 입혀놓은 고색의
때가 자욱하여 고풍스런 멋을 한층 올려준다.


▲  금천교 주변 계곡

조선 왕릉과 궁궐에는 금천의 역할을 하는 물줄기가 꼭 있기 마련이다. 정릉은 북악산길(북악
스카이웨이) 북쪽에서 발원한 계곡이 그 역할을 담당하여 정릉을 촉촉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정릉 중심부 북쪽을 거쳐 바깥으로 흐른다. 허나 정릉 동쪽에 빼곡히 들어찬 주택가로 능 정
문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한 채, 정릉천으로 흘러가며, 북한산(삼각산) 정릉계곡에서 나온 정
릉천 또한 정릉2동부터 어둠의 경로로 흐르다가 종암동(鍾岩洞)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정릉 계곡은 크기는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적당히 섞여있고 흙이 많아서 어린이들이 놀기에는
아주 좋다. 허나 문화유산인 정릉 내부이니 요란하게 노는 행위는 절대 삼가하기 바라며, 손
만 담구는 정도에서 멈춰야 될 것이다.

▲  붉은 피부의 홍살문

▲  홍살문 옆에 닦여진 배위(拜位)

금천교를 건너면 길은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인다. (정면 길로 가면 관리사무소) 그 길을 들어
서면 쌀쌀맞게 생긴 붉은색 홍살문이 나타나 나그네로 하여금 절대 엄숙을 강조한다. 그는 왕
릉과 관아, 향교, 왕족과 사대부의 사당과 묘역 등 권력과 관련된 곳에 세우는 비싼 존재로
그를 들어서면 비로소 정릉 중심부에 이르게 된다.

홍살문 옆에는 돌로 다져진 네모난 배위<판위(板位)>가 누워있다. 이곳은 정릉을 찾은 제왕이
능 주인에게 절을 하는 곳으로 보통 4번 절을 했으며, 이를 국궁사배(鞠躬四拜)라고 한다. 현
재는 정릉 제향일에만 반짝 쓰이고 있어 꽤 한가해졌다.

그럼 여기서 잠시 정릉과 이곳 주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정릉 정자각 주변 (수라간, 수복방 등)

정릉은 서울의 영원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으로 정릉2동 서쪽 골짜기에 넓
게 누워있다. 능역(陵域) 동쪽과 남쪽은 정릉2동 주택가와 맞닿아있고, 북쪽은 정릉의 원찰(
願刹)이었던 봉국사(奉國寺, ☞ 관련글 보기) 남쪽에 이르며, 서쪽은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
이)과 정릉3동에 닿는다.
주택가와 매우 가깝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깊은 산골로 짙은 숲을 지니고 있으며 조촐한 계곡
과 그림 같은 숲길, 그리고 늙은 보호수도 2그루를 지녔다.

정릉의 주인은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1396)이다. 고종(高宗)
이 1897년 황제 위에 오르면서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높여졌으며, 태조는 태조고황제(太
祖高皇后)로 올려졌다. (정릉 안내문에는 '신덕고황후'라 나와있음)

신덕왕후 강씨(이하 강씨)는 곡산강씨(또는 신천강씨) 집안으로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
康允成)의 딸이다. 강씨의 숙부인 강윤충(康允忠)은 이성계의 큰아버지인 이자흥(李子興)의
사위로 두 집안은 제법 가까웠는데, 드넓은 동북면(東北面, 함경도와 길림성, 연해주 지역)
지역을 장악했던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조정에 출사하면서 강씨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때 강씨는 이성계보다 약 20살 정도 연하였다고 한다. (에구 부러워라~~)

이성계와 강씨의 첫 만남 설화는 꽤 유명한데 내용은 이렇다.
어느 평화로운 날, 사냥에 나섰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아리따
운 여인이 있었는데(아마 빨래를 했던 모양임) 그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하니 여인이 바가지
에 물을 담아 버들잎 하나를 물 위에 띄워주었다. 이성계는 이상하여 이유를 물으니
'급하게 마시면 탈이 날까봐 천천히 드시라고 그랬습니다'
답을 했다.
그 말에 이성계는 무한 감동을 먹었고, 마침 여인의 미모도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던 터
라 그녀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이다.

허나 로맨틱한 설화와 달리 강윤성은 이성계의 미래를 크게 보고 딸과의 혼인을 적극 추진했
고, 이성계 또한 개경(開京)에 마땅한 기반이 없는 상태라 사돈관계에 있고 개경 귀족들과 두
루 가까웠던 강씨 일가의 힘이 필요했다. 즉 두 집안과의 결속 강화와 미래에 대한 투자 차원
에서 혼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계는 개경에 있을 때 강씨 집에 머물렀다. 그가 요동반도에 있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
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강씨는 포천 철현(鐵峴)에 있는 전장(田莊)에 머물렀고, 만약을
대비해 동북면과 가까운 이천(伊川)의 한충(韓忠)집으로 거처를 옮겨 상황을 지켜보았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 크게 다치자 정몽주(鄭夢周)는 이
때다 싶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강씨는 이방원(李芳遠)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
으로 오게 했으며, 이방원이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살해하자
이성계가 크게 노발대발한 것을 강씨가 무마시켰다. 이렇듯 강씨는 이성계를 힘껏 도와 조선
개국을 이끌어냈으며, 이성계의 첫 부인인 한씨가 조선 건국 1년을 앞두고 세상을 뜨자 조선
의 첫 왕후<현비(顯妃)>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  비각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陵寢)

강씨는 태조와의 사이에서 경순공주(敬順公主, ?~1407)와 무안대군 이방번(撫安大君 李芳蕃,
1381~1398), 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李芳碩, 1382~1398)을 두었다. 그녀는 권력욕이 너무
커서 태조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과 연합해 태조를 설득하여 장남도 아닌 막내 이방석을
왕세자(王世子)에 앉히게 했다.
이렇게 후처 소생의 차남을 세자로 책봉하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제대로 뚜껑이 열렸다. 하
여 그들은 이방원<정안대군(靖安大君)>을 중심으로 강씨와 정도전 세력과 팽팽히 대립하게 된
다.

1396년 음력 8월 13일 강씨는 40대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크게 애통하여 도성
한복판에 능을 쓰게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 존호(尊號)를 신덕이라 했으며, 개국공신들의
건의로 공신수능제(功臣守陵制)를 받아들여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능 지킴이를 맡겼다.
또한 정릉 곁에 원찰인 흥천사(興天寺)를 크게 지어 매일 같이 찾아가 명복을 빌었으며, 흥천
사의 아침 종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아침 수라를 들었다. 그때 정릉은 덕수궁(경운궁) 북쪽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지며, 정릉 때문에 정동(貞洞)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1398년 정도전이 크게 방심한 틈을 노려서 이방간(李芳幹)과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다. 궁궐을
접수한 그들은 이복 동생인 이방번, 이방석 형제와 경순공주의 남편을 처단했고, 형제의 맏이
인 이방과(李芳果, 정종)를 왕위에 올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1차 왕자의 난이다. (경순공
주는 이후 비구니가 되었음)
그리고 1400년 이방간의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이방원은 형 이방과의 왕위를 물려받아 꿈에
그리던 옥좌(玉座)를 차지하게 된다.

이방원은 의붓어머니 강씨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태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크게
정릉을 건드리지 않았으나 1406년 정릉이 너무 넓다는 의견이 있어 정릉 100보 밖까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때 하륜(河崙) 등 권력가들이 너도나도 정릉 숲에서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니 그것이 정릉 수난의 시작이었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바로 이빨을 드러내며, 정릉 탄압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1409년 의정부(議政府)는 왕의 비위를 맞추고자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이 말이 안되며 명
나라 사신이 묵는 숙소와 가까워 도성 밖으로 옮겨야 된다고 하였다. 굳이 그런 것이 아니더
라도 도성 한복판에 능이 넓게 자리한 것도 솔직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태종은 의정부의 갸륵한 뜻을 받아들여 정릉을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곡으로 추방시켰고, 능
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지기 바쁜 광통교(廣通橋)를 돌다리로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동원했다. 이는 단순히 광통교 복구가 아닌 백성들이 정릉 석물을 밟고 지나가게 하
여 강씨를 길이길이 욕보이고자 함이었다. 또한 정자각과 일부 석물을 소환하여 태평관(太平
館, 명나라 사신의 숙소)을 짓는데 썼으며, 봉분을 깎아 무덤임을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석인
(石人)은 생매장시켰다.

능의 제례 또한 폐지되고 봄, 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으며, 서모(庶母)의 기신제(忌
晨祭)의 예에 따라 삼품관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한 후궁으로 격하시켜 후궁의 예로 제를
올리게 하였다. 강씨가 지하에서 크게 통곡을 했는지 능이 파괴되던 날, 폭우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전한다.


▲  수라간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과 소전대(燒錢臺, 밑에 보이는 석물)

태종 사후로도 정릉의 고통은 계속되었고 정릉의 존재는 속세의 뇌리 속에서 거의 잊혀져 갔
다. 겨우 후손들이 살짝살짝 제사를 챙겼을 뿐이다.
그러다가 1581년 강씨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이 선조(宣祖)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
가 엎드리면서
'소인은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國墓)에 봉사(奉
祀)하는 사람들의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 면제시켜 주십시요'
하소연했다. 즉 정릉을
지키고 있으니 군역 면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거의 잊혀졌던 정릉의 존재감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때 삼사(三司)에서는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 정릉을 회복하자는 의견을 올렸으나 수용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계
속 논의를 벌이다가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싹 마무리가 되었다.
송시열은 태종의 잘못된 조치로 정릉이 고통을 당했음을 바로 말하기가 애매해 그 시절 신하
들의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고 돌려 말하며,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있음을 지적하
여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현종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 1669년 태조의 왕후로 인정하여 종묘(宗廟)에 봉안했으며, 순원현
경(順元顯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능을 복구했다.
이때 정릉에서 강씨의 넋도 달랠 겸, 성대하게 제를 지냈는데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려서
사람들은 이를 두고 '강씨의 원한을 씻는 비'라고 하였다.

정릉 석물은 17세기 후반 것들이나 4각형 장명등(長明燈)과 혼유석(魂遊石)을 받치는 고석(鼓
石) 2개, 그리고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는 옛 정릉 것들이다. 즉 14세기 후반 것들로 조선 왕
릉에 설치된 석물 중 가장 늙은 존재들이 된다. 그리고 정자각과 비각 등은 모두 17세기 이후
것들이다.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을 이끌어냈던 강씨, 허나 지나친 권력욕으로 끝내 자식을 잃고, 남편
의 말로를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자신의 묘까지 태웠으니 인생무상, 권력무상이 따로 없
다. 왕후가 되면서 거기서 딱 절제를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게 안되었던 것이다. 물론 한씨
소생의 왕자(이방원, 이방과 등)들이 자신의 소생들을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방원 형제
들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나마 똘똘했던 막내를 세자로 세워 자식들의 불투명한 미래
를 지켜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궁궐은 그만큼 무서운 곳이니 말이다.
허나 강씨와 그의 친자식들은 결국 패배자가 되어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왔으니 역사의 패배자
가 어찌된다는 것을 아주 몸서리치게 보여준다.

정릉은 중구 정동의 지명 유래가 되기도 했지만 이곳 정릉동의 유래도 된다. 그래서 2개의 지
명이 정릉으로 인해 생겨났다.



 

♠  정릉 중심부

▲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박석이 입혀진 향로와 어로가 닦여져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참
도(參道)라고 하는데, 어로는 제왕이 걷는 길이며, 왼쪽에 조금 높은 향로<신도(神道)>는 제
향 때 향과 축문(祝文)을 들고 가는 길이다.
이곳 참도는 중간에서 'ㄱ'자로 90도 꺾이는데, 이는 지형 탓으로 정자각 정면에서 금천까지
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직선으로 홍살문을 두기에는 좀 비좁아 보인다. 하여 나름 융통성
을 발휘한 것이다.


▲  정자각(丁字閣)

참도의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정자각이 있다. 싹둑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丁'처럼 생겨서 정자각이란 쉬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자각은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제왕은 좌측 계단으로 올라가 제사를 치르고 반대쪽 우측 계
단으로 내려갔다. 건물 안에는 제향에 쓰이는 여러 상(床)들이 있는데, 거의 황색 피부를 지
니고 있다. 황색은 황제와 황후를 상징하는 색깔로 고종이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높이면서
제사상의 피부 색깔도 변하였다.

▲  신좌(神坐)
신, 즉 정릉의 주인이 제향 때 머무는
추상적인 자리이다.

▲  관세상(盥洗床)
제관이 손 씻을 물을 올려놓는 상이다.
여기서 관은 대야를 뜻한다.

▲  제물을 올려놓는 상
(정자각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  정자각 좌측 계단
왼쪽 계단은 정릉 주인의 혼과 참배를 온
제왕이, 그리고 오른쪽 계단은 신하와
아랫 사람들이 이용했다.


▲  수복방(守僕房)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측에 수복방과 비각이, 우측에는 수라간이 있다.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근무하는 건물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  정릉 비각
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의 거처이다.

▲  정릉 비석
'대한(大韓) 신덕고황후 정릉'이라 쓰여있다.

     ◀  수복방과 마주보고 있는 수라간
수복방과 비슷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제
향 때 제사 음식을 데우거나 손질하던 곳이다.
터만 아련하게 있던 것을 근래 복원하여 채워
넣었다.

능침 밑부분에 소전대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있다. 소전대란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오
로지 이곳 정릉과 태종의 헌릉(獻陵),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만 있는 희귀한 존재이다. 태
종 이후, 소전대가 사라지고 '예감'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정릉 소전대는 정릉이 이곳으로 추방되면서 같이 왔는데 오랫동안 정릉약수터 주변에 찌그러
져 있던 것을 정릉관리소 김용욱 소장이 발견하여 고증을 통해 이곳에 두었다. 정릉을 옮기는
과정에서 태종의 지시로 능 주변에 두지 않고 고의로 계곡에 처박아둔 것으로 여겨진다.
정릉의 한낱 석물에게까지 화풀이를 한 태종, 그만큼 의붓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컸던 것이며,
정릉이란 존재 자체도 그야말로 눈에 가시와 같았다.


▲  확대해서 바라본 정릉 능침

소나무숲에 감싸인 정릉 능침에는 커다란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 1기, 혼유석, 여러 석호와 석양이 배치되어 있다. 이중 장명등은 고려 양식을 이
은 14세기 후반 것이며,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 2개도 옛 정릉 출신이다.
예전에는 능 옆구리까지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통제구역으로 묶여 능침 자체를 올라갈 수
없다.


▲  정릉 북쪽 산책로에서 만난 넓적한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  봄이 깊어가는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의 젖줄인 계곡(금천)을 따라 그림 같은 산책로가 서쪽으로 이어져 있다. 이 길을 쫓아가
면 정릉 주변을 도는 2.5km의 숲길이 펼쳐지니 정릉 중심부만 살피지 말고 꼭 1바퀴 둘러보기
바란다. 즉 정릉 외곽을 도는 것으로 산책로 안팎이 모두 정릉 능역(陵域)이다.


▲  생태계가 살아있는 정릉 계곡(금천)

▲  봄 속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따뜻한 기운이 소리 없이 내리면서 푸른 잎과 온갖 꽃들이 기지개를 켠다.
그런 봄에 물들고 싶어서 저 속으로 나를 숨기러 간다.



 

♠  정릉 산책로 돌기

▲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 정자각 계곡 건너편)

정릉 숲길은 정릉 중심부와 맞닿은 북쪽 산책로만 평지이고 나머지는 모두 산길이다. 능이 첩
첩한 산골에 묻혀있기 때문에 숲길을 거닐다 보면 자연히 약간의 등산도 하게 된다. 허나 경
사가 그리 각박하지 않고 길이 잘 닦여져 있어서 두 다리만 멀쩡하면 어린이와 노인도 거뜬히
1바퀴 돈다.


▲  정릉 북쪽 산책로 (옛 정릉약수터 주변)

▲  이제는 과거가 되버린 정릉약수터(정심약수터)

정릉 서쪽에는 정릉약수터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약수터까지 갖
추고 있던 정릉에서 특별히 맛볼 수 있는 자연산 수분으로 물이 졸졸 알아서 나오는 약수가
아니라서 직접 챙겨 먹어야 된다. 능 제사에 쓰이는 물은 모두 여기서 가져왔으며, 정릉2동
사람들이 많이 물을 떠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음)


▲  서남쪽으로 꺾이는 정릉 산책로

▲  봄꽃의 마지막 물놀이 현장 (정릉 계곡)
4월 초를 짧게 주름잡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훔쳐갔던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계곡에서 생애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계곡은
저들의 인생을 정리하는 조그만 블랙홀인 모양이다.

▲  정릉 서쪽 숲길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전까지는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  지그재그 율동을 부리는 정릉 서쪽 숲길

▲  동그란 석축에 뿌리를 내린 벚꽃나무 (정릉 서남쪽 숲길)

▲  정릉 서남쪽 숲길 ①

▲  정릉 서남쪽 숲길 ②

정릉 서남쪽 끝에는 서울의 대표 지붕길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이 흐르고 있다. 정릉에
는 북악산길을 향해 2개의 소방문을 내고 있는데 이들은 업무와 비상용 문이라 관람객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하여 둘이 맞닿아 있음에도 철책을 사이에 두고 서로 금지된 땅 보듯 해야
된다. 현재 정릉은 정문으로만 통행이 가능하여 무조건 그곳으로 오가야 되는데, 북악산길도
서울의 주요 꿀명소인만큼 비상용문 하나를 따고 매표소를 두어 서로 왕래가 가능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정릉~북악산길~성북동(길상사, 삼청각, 간송미술관 등)/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부암동/북한산(삼각산)'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나들이/도보 코스가 만들어진다.

서울시청과 성북구청, 문화재청 철밥통들은 거지 같은 탁상행정으로 세금이나 빼먹지 말고 저
런 것들도 적극 검토해 추진해주었으면 좋겠다.


▲  북악산길(오른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을 지나는 차량들의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  북악산길(왼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②
북악산길을 코앞에 두고 입맛만 다셔야 되니 은근히 아쉽기만 하다.
서로를 잇는 것이 천하통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일까?

▲  정릉 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까지 올라온 숲길은 다시 내리막으로 변신한다.

▲  정릉 남쪽 숲길 ②

▲  정릉 남쪽 숲길 ③

▲  정릉 능침 바로 윗쪽 쉼터

정릉 남쪽 숲길은 중간에 3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서쪽)으로 가면 앞서 서쪽 숲길로 빠
지며,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정릉 정문, 그리고 직진(북쪽)하면 위와 같은 쉼터가 나온다.
허나 그 쉼터는 막다른 곳으로 다시 갈림길로 나와야 된다. 허나 쉼터 주변으로 철책이 없어
서 자칫 숲으로 막 내려갈 수도 있는데 여기서 북쪽 숲으로 내려가면 바로 정릉 능침이다. 능
침 주변은 금지된 구역이니 굶주린 공비들처럼 숲을 막 헤집고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냥 쉼터
에서 얌전히 쉬다가 갈림길로 그냥 사라져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정릉 남쪽 숲길에서 서쪽 숲길을 잇는 사잇길

갈림길에서 바로 정문으로 내려가기는 다소 아쉬워서 서쪽 숲길로 향하는 사잇길로 우회해서
갔다. 정릉 북쪽 산책로를 거쳐 정릉 정문을 나오면서 2시간에 걸쳐 아주 여유롭게 진행된 정
릉 봄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정릉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 87-16 (아리랑로 19길 116, ☎ 02-914-5133)
* 정릉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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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4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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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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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봄맞이 나들이 <정읍피향정, 함벽루, 무성서원, 성황산, 한정, 송정, 동진강>

정읍 피향정, 무성서원


 
' 정읍 봄맞이 나들이 (피향정, 무성서원) '

피향정 하연지

▲  피향정 하연지

무성서원 태산사 칠보 성황산 숲길

▲  무성서원 태산사

▲  칠보 성황산 숲길

 


 

차디찬 겨울 제국과 봄의 마지막 경계선인 3월의 한복판에 간만에 전북 정읍(井邑)을 찾
았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정읍으로 가는 일
반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정읍까지 들어가지 않고 그 이전인 태인(泰仁)에서 내렸다.
태인면과 칠보면의 여러 미답처를 그날의 메뉴로 정했는데, 태인터미널 뒤쪽으로 이동하
니 피향정이 하연지란 너른 못을 내밀며 마중을 나온다.
(서울에서 태인 경유 정읍으로 가는 일반고속버스가 1일 3회 운행함)



 

♠  호남 제일의 정자로 오랫동안 칭송을 받았던
피향정(披香亭) - 보물 289호

▲  서쪽에서 바라본 피향정

태인면 중심지(태창리)에 위치한 태인터미널 뒤쪽에는 아침 햇살을 머금은 피향정과 하연지(
태창지)가 나란히 자리해 단아하고 고즈넉한 모습을 풍기고 있다.
예로부터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으로 명성이 높았던 피향정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
붕 정자이다. 신라 말에 그 유명한 최치원(崔致遠)이 세웠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는 헌안왕(
憲安王) 때 태산군수(泰山郡守, 태산은 태인의 옛 이름이라고 함)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넉
넉히 베풀었다. 허나 그가 세운 것도 확실치가 않으며,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조선 광해군(光海君) 시절, 태인현감인 이지굉(李志宏)이 중건했으며, 현종 때 현감 박숭고(
朴崇古)가 증축했고, 1716년 현감 유근(柳近)이 전라감사와 호조(戶曹)의 도움을 받아 변산(
邊山)에서 나무를 베어와 현재의 규모로 중건했다. 그래서 작은 정자였던 피향정이 누각 수준
으로 커진 것이다. 허나 그에 걸맞게 루(樓)를 칭하지 않고 계속 정(亭)을 고집하고 있어 칭
호와 겉모습이 완전 따로 논다. (1974년에 단청을 새로 했음)

땅바닥에 낮게 석축을 다지고 1.42m 높이의 화강암 돌기둥 28개를 세운 다음, 그 위에 누마루
건물을 올렸는데, 정면과 뒷면 가운데 칸에 통행 편의를 위해 돌계단을 늘어뜨렸으며, 누각에
어울리도록 건물 4면이 모두 뚫려있다. 난간은 짧은 기둥으로 촘촘히 둘렀고, 건물 천장은 지
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나 천장 일부를 가리고자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 천장으로
꾸몄으며, 이곳에 퐁당퐁당 빠진 현감과 관리, 선비들이 남긴 글을 머금은 현판이 가득 걸려
있어 호남제일의 정자, 피향정의 오랜 명성을 귀띔해준다.

조선 중기 목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누각 앞뒤로 연꽃이 심어진 상연지(上蓮池)
와 하연지(下蓮池)가 있어 피향정을 아름답게 수식했으나 왜정 때 상연지가 강제 매립되면서
하연지만 남아있다. 연못에 연꽃이 그윽하게 피어나면 그 향기가 주위에 가득했는데, 거기서
피향정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 피향정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2-2 (태산로 2951)


▲  동쪽에서 바라본 피향정과 돌계단

▲  누각 바깥에 걸린 피향정 현판의 위엄

▲  누각 내부에 숨어있는 또 다른
피향정 현판

▲  누각 기능에 충실하게 지어진
피향정 내부

▲  검은 피부의 피향정 중수기


▲  피향정 동쪽에 길게 늘어선 비석들

이들 비석은 옛 태인 고을 현감과 전라도관찰사의 선정비(善政碑) 및 불망비(不忘碑)로 주변
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집합시켰다. 모두 19기로 지붕돌을 지닌 비석과 대머리 비석,
그리고 장대한 세월에게 정통으로 맞아 몸통이 날라간 가련한 비석들까지 다양한 모습과 사연
들을 간직하고 있는데, 선정비를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저 비석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아마도 상당수 비석들은 고개를 떨구겠지.


▲  피향정 서쪽에 닦여진 하연지(태창지)
하연지는 피향정의 상큼한 꿀단지로 연꽃의 보금자리이다. 연못 복판에
동그란 섬을 띄워놓아 운치를 극대화시켰다.

▲  육지와 하연지 섬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돌다리와
섬의 주인장인 함벽루(涵碧樓)


피향정 서쪽에는 누렇게 뜬 잡초 같은 것으로 가득한 너른 공간이 있다. 바로 하연지(태창지)
이다. 누런 잡초들은 모두 연꽃으로 지금은 비록 우울한 모습들을 하고 있지만 여름이 되면
연못 수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통 연꽃밭이 되어버린다. 원래 상연지와 하연지 2개의 연
못이 있어 피향정을 앞다투어 수식했으나 고약한 감성의 왜정이 상연지를 밀어버리면서 하연
지만 남게 되었다.

하연지 복판(정확히는 연못 북부)에는 동그란 작은 섬을 띄워놓았는데, 바로 그 섬에 함벽루
가 둥지를 틀어 섬의 주인 노릇을 한다. 그는 20세기에 지어진 6각형 정자로 1971년에 중수했
으며, 생김새는 완전한 정자(亭子)임에도 그 모습과 다르게 누각을 칭하고 있다. 하여 함벽루
보다는 '함벽정'이 맞다고 본다. 피향정은 나중에 증축되어 누각처럼 되었으나 여전히 '정'을
고집하고 있고, 함벽루는 정자 스타일임에도 누각을 칭하고 있으니 이곳만큼은 모든 것을 반
대로 보는 모양이다.
육지와 함벽루가 있는 섬은 돌다리가 짧게 이어져 있으며, 함벽루 내부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연꽃이 한참인 한여름에 와야 하연지의 진풍경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인데, 엉뚱하게도 3
월에 인연을 지어 연못 풍경이 참 황량하기가 그지 없다. 피향정에서 즐기는 연꽃의 향연은
정읍9경 중 제6경으로 꼽히며, 전주(全州) 덕진공원과 더불어 전북 제일로 찬양을 받는다.


▲  지붕돌을 지닌 함벽루 중수기념비(오른쪽 비석)

1971년에 함벽루를 중수한 기념으로 그해 8월에 장만한 비석이다. 그들 좌우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훨씬 작은 석인(石人, 동자석으로 여겨짐) 2기가 홀(忽)을 들고 서 있는데, 세월
을 너무 좋지 않게 탔는지 머리를 비롯한 윗도리가 완전히 아작이 나버렸다. 저들은 부근에서
수습된 것으로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  6각형 정자 모습의 함벽루
'함벽루'라 쓰고 '함벽정'이라 읽으면 딱 맞는다.

▲  서쪽에서 바라본 하연지와 함벽루 (비수기에 잠긴 하연지)

▲  태인이로비(泰仁移路碑)

하연지 서쪽 끝에는 '태인이로비'란 키다리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871년 태인현감 김인근(
金寅根)이 길을 이곳으로 이설하고 세운 것으로 높이 210cm, 두께 45cm인데, 길을 옮긴 것을
기리고자 세운 옛 비석은 여기서 처음 본다.


▲  남쪽에서 바라본 하연지와 함벽루 섬 (오른쪽에 돌다리가 있음)

피향정은 이미 대학생 시절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다. 그때는 겨울이 시작되던 11월 말이었지.
이번에는 겨울과 봄의 마지막 경계선에 왔으나 황량한 풍경은 11월 말과 비슷하다. 어쩌면 그
때와 비슷한 상황에 왔을까? 다음에 또 이곳과 인연을 짓는다면 무조건 여름에 찾고 싶다. 그
래야 피향정의 자랑인 연꽃의 향연을 제대로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피향정 다음 답사지는 칠보(七寶)에 있는 무성서원이다. 태인에서 칠보까지는 약 8km 거리로
가까운 편이나 정작 시내버스는 하루에 7~8회가 고작이다. 게다가 시간도 맞지 않아서 1시간
이나 기다려야 했지. 하여 그 시간을 때우고자 달이 지구 주위를 돌 듯 하연지를 2바퀴나 돌
았다. (하연지 둘레가 약 480m 정도임)
그렇게 돌고도 시간이 남아 터미널에서 억지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정읍시내버스 91번(신태
인터미널↔칠보) 소형 차량(카운티)이 나타나 반갑게 입을 벌린다.
버스는 겨우 나 하나만을 담고 칠보로 이동했는데, 칠보면 중심지(시산리)까지 15분 정도 걸
렸다. 신태인에서 태인, 칠보 구간은 이동 수요가 좀 있는 줄 알았더만 평일 학생 수요를 빼
면 지지리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소형 차량으로 가뭄에 콩나는 수준으로 다니는 것이다.

전북의 서남부를 이루고 있는 정읍시는 태인면과 북면까지는 평지(평야)이고 동부 지역인 칠
보, 산외, 산내 지역은 첩첩한 산골이다. 즉 태인을 경계로 정읍은 평지와 산악 지대,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  최치원을 기리는 오래된 서원, 무성서원(武城書院)
- 사적 166호

▲  무성서원의 외경 (왼쪽 2층 누각이 현가루)

칠보면 중심지(시산리)에서 바로 남쪽에 흐르는 동진강(東津江)을 건너면 무성리이다. 무성리
를 이루고 있는 마을 중 무성서원을 간직한 곳이 바로 원촌(원촌마을)으로 그곳은 무성서원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오래된 마을이다. 하여 양반과 선비들이 지어놓은 정자(10개가 있음)와
한옥, 제각(祭閣) 등이 많이 전하고 있으며, 서원도 무성서원 외에 용계서원도 지니고 있다.
게다가 향토문화사료관 등의 문화공간도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며,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歌
詞)로 유명한 상춘곡(賞春曲)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유서가 깊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내 침침한 두 눈에는 오로지 무성서원 밖에는 보이지
않아 무성서원과 서원 뒷산인 성황산에 몇몇 명소만 둘러보고 철수했다.

원촌마을 안쪽에 자리한 무성서원은 전북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신라 후기에 최치원이
태산군수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는데, 이에 감동을 먹은 지역 사람들이 그의 생사당(生祠堂)
을 세워 태산사(泰山祠)라 했다. 생사당이란 살아있는 사람에게 제를 지내는 사당으로 그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최치원이 태수로 거쳐갔던 태산고을이 과연 이곳
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음)

그렇게 시작된 태산사는 고려 말에 철거되어 사라졌으며, 1483년에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
학당(鄕學堂)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그곳이 현재 무성서원 자리이다.
1549년 신잠(申潛)의 생사당을 경내에 추가했으며, 1630년에는 정극인, 안세림(安世琳), 정언
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이 추가되었고, 1675년에는 김관(金灌)이 추가되어 총 7명의 사당
이 되었다. 최치원의 생사당으로 시작된 태산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에 유명 인사들까지
기리는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1696년 태산사와 신잠의 사당을 통합했고, 조정에 상주하여 '무성(武城)'이란 사액을 받아 무
성서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의 서슬 퍼런 서원 정리 사업 때도 살아남았으며, 면
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이 1906년 6월 토왜(討倭)를 외치며 의병을 조직했던 병오창의(丙午倡
義)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원을 이루고 있는 건물은 사당(태산사)과 현가루, 명륜당(강당), 동재(강수재), 비각 등이
있으며, 1486년 이후 제작된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院規) 등의 귀중한 서원 자료가 보
존되어 있다.

* 무성서원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원촌1길 44-12)


▲  뾰족한 붉은 살을 지닌 무성서원 홍살문
차디찬 인상의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 관리사무소와 주차장이 나오고 바로
서원 정문인 현가루가 마중을 한다.


▲  맞배지붕 비각과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 오른쪽 비석)

무성서원하면 대표적인 사건이 '병오창의'가 아닐까 싶다.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에 분
개한 최익현은 1906년(병오년) 2월 제자인 임병찬(林秉瓚)과 정읍으로 넘어와 창의를 준비했
다. 하여 그해 6월 4일 이곳 무성서원에서 유생들에게 강회(講會)를 펼치며 토왜(討倭)에 동
참할 것을 호소하여 의병을 조직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병오창의이다.
그 소식을 들은 왜군은 조선인 진위대를 파견해 시비를 걸자 최익현은 동족간의 싸움은 절대
로 안됀다며 의병을 해산했고 핵심 인물 13명이 너무 쉽게 오라를 받으면서 그의 창의는 허무
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최익현의 병오창의를 기리고자 정읍 지역 유림들이 1992년 12월 10일 병오창의기적비를
세웠다.


▲  강수재(講修齋)

병오창의기적비를 바라보고 있는 강수재는 무성서원의 동재(東齋)로 유생들의 기숙 공간이다.
원래 고사(庫舍)였던 것을 무성서원 간판을 내건 이후, 강수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서재(西
齋)인 흥학재(興學齋)도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다.
현 건물은 1887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온돌방과 마루를 갖추고 있다.


▲  서원의 정문인 현가루(絃歌樓)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정문 역할 외에도 시를 짓고
음악 등의 여흥을 즐기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누각의 이름인 '현가'는
거문고 등의 악기와 노래를 뜻함)

◀  무성서원의 역사를 더욱 살찌우고
있는 현가루 앞 비석들

          ◀  신용희(申瑢熙) 불망비
통정대부(通政大夫) 신용희의 공적을 기리고자
1925년에 세웠다. (서원 중수에 공적이 있음)
무성서원에는 맞배지붕 비각 4개, 비석 15기가
전하고 있어 서원의 내력을 풍성하게 돕고 있
는데, 이들 대부분은 서원 중수를 돕거나 서원
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태인현감 등의 관리와
양반사대부의 공덕비이다. (불망비도 공덕비의
일원임)


▲  무성서원 강당<명륜당(明倫堂)>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으로 공부를 하거나 시국을 논의하던 학업
공간이다. 1825년 화재를 만나 1828년에 중건했으며, 마루가 3칸, 방이 2칸 규모로 더울 때는
마루에서 교육을 했고, 추울 때는 마루 좌우에 있는 온돌방에서 교육을 했다.


▲  비각에 갇혀있는 서호순(徐灝淳) 불망비
강당(명륜당) 재건을 도운 태인현감 서호순의 공을 기리고자 1849년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23m, 폭 0.36m이다.

▲  서원 뒷쪽에 높이 자라나 1급 그늘을 선사하는 늙은 나무들
(오른쪽에 보이는 지붕은 태산사)

▲  태산사로 인도하는 내삼문(內三門)
태극마크가 그려진 가운데 문은 제향일에만 열린다. (제왕 등의 아주 높은
사람이나 사당 주인공의 혼령만 이용할 수 있는 특별한 문)

▲  무성서원의 모태이자 상징, 태산사(泰山祠)

무성서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태산사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맞배지
붕 집으로 최치원과 신잠을 비롯한 7명이 봉안되어 있는데, 기존 태산사가 고려 말에 파괴되
자 1483년 현 자리에 중건했다. 현 건물은 1844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문에는 태극마크가 문짝 하나당 2개씩 앙증맞게 그려져 있는데, 제향일을 제외하면 늘 굳게
닫혀있어 내부 관람은 어렵다. 제향은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과 8월 중정일 등 1년에 2번
열렸으나 지금은 2월 중정일에만 지낸다.


▲  서쪽에서 바라본 태산사



 

♠  성황산(城隍山)에서 만난 소소한 명소들

▲  필양사(泌陽祠)

무성서원은 오랜 명성에 비해 조촐한 규모라 관람이 생각 외로 일찍 마무리가 되었다. 피향정
에 비해 대단한 시간 도둑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은 약 13시, 무성서원 이후의 정처(定處)를 딱히 정해두지 않아서 어디를 갈까 궁리
하며 원촌마을을 거닐고 있으니 맞배지붕 사당이 잠깐 보고 가라며 애타게 손짓을 보낸다. 고
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무슨 물건인가 살펴보니 춘우정 김영상(春雨亭 金
永相, 1836~1911)의 사당인 필양사이다.

김영상은 도강김씨 집안으로 정읍시 정우면 산북리에서 태어났다. 16살에 선조들이 살던 이곳
원촌으로 이사를 했으며, 유학을 익히고 지역의 여러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 터지자 의병활동에 참여했고 최익현의 병오창의에도 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1910년 이후 왜정은 이 땅의 선비와 사대부(士大夫)를 회유하고자 돈과 작위(爵位)를 마구 뿌
렸는데, 그에게도 돈의 유혹이 뿌려졌다. 허나 그는 이를 거절하며 왜정이 내민 사령서(辭令
書)에 적힌 자신의 이름 3자까지 찢어버렸다. 이에 뚜껑이 뒤집힌 속 좁은 왜군은 불경죄(不
敬罪)를 물어 군산감옥으로 잡아갔다.
군산으로 이송 도중, 만경강(萬頃江) 사챙이 나루터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을 시도했으나
눈치 없는 왜군이 이를 구출해 실패했으며, 군산감옥에 투옥되자 단식에 들어가 겨우 8일만인
1911년 5월 9일 10시경, 7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그에게 독립유공 대통령 포상을 올려 그의 충절을 기렸으며, 1991년 8
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가로 추서되었다.
필양사는 지역 유림들이 1945년에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국가
보훈부 현충시설(관리번호 51-1-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3년 5월에 수해로 지붕이 무너
지자 복구했다. 그리고 2010년 김영상 순절 100주년을 맞이해 필양사 앞에 '애국지사 춘우정
김영상 선생 순국추모비'를 세웠으며, 사당 뒷쪽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여 경건한 분위기를 자
아낸다.

필양사를 보고 다시 길을 재촉하니 원촌마을의 뒷동산인 성황산(城隍山)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마을과 맞닿은 산 동쪽 자락에는 원촌마을 선비와 양반들이 조선 후기
와 20세기에 뿌려놓은 정자와 제각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시간도 아직 널널하고 딱히 정처도
정하지 못해 그 유혹에 푹 빠져보기로 했다.
기왕 산에 두 발을 들였으니 비록 높이는 낮지만 그 정상에 올라 천하를 한번 굽어봐야 되겠
지. 하여 정상으로 발을 움직였으나 대자연의 괴롭힘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나무들이
계속해서 길을 막는다. 몇 번을 넘었으나 이제는 더 큰 나무가 드러누워 길을 가로막는다. 얼
핏 보면 큰 태풍이 얼마 전에 다녀간 듯 보이나 이때는 태풍과 관련이 없는 3월이다. 아무래
도 작년 여름부터 쓰러진 나무들을 정읍시청 철밥통들이 제대로 치우지 않고 방치한 듯 싶다.
쓰러진 나무로 길이 엉망진창이라 계속 오르는 것은 무리가 있고 올라갈 기분도 급 저하되어
정상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산자락에 깃든 여러 정자와 기와집을 둘러보았다.


▲  한정(閒亭) - 정읍시 향토유적 1호

이름이 달랑 1자인 한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조선 중종(中宗) 시절 한
정 김약회(閒亭 金若晦)가 사화(士禍)로 시끄러운 조정이 싫어서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것으
로 자신의 호를 따서 '한정'이라 했다. 여기서 한(閒)은 한가함과 고요함을 뜻하는데, 그 이
름 그대로 주변이 고요 속에 잠겨있어 내 발자국 소리, 사진 소리가 미안할 정도이다.

김약회가 세상을 떠난 이후 전라도 유림들이 모여 학문을 나누던 현장으로 쓰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파괴되어 사라졌으며, 320여 년이 지난 1920년에 후손 김환정이 재건했다. 그러
니까 현재 한정은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1칸씩 딸려있으며, 전면과 좌우로 툇마루를 갖춘 전형적인 누정
(樓亭) 건축물이다. 


▲  시산사로 인도하는 계단길

▲  시산사(侍山祠)

이곳은 무성서원에서 병오창의를 일으킨 최익현의 사당으로 1907년에 세워졌다. 첫 이름은 태
산사(台山祠)로 왜정의 태클로 철거되었으며, 1975년에 다시 세워 시산사라 하였다. 이때 국
헌 김기술(菊軒 金箕述, 1849~1929)과 화개헌 김직술(和介軒 金直述)이 추가로 배향되었는데,
김직술은 최익현과 함께 병오창의를 일으킨 인물이다.


▲  송정(松亭)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33호

소나무 정자를 뜻하는 송정은 앞서 '한정'처럼 이름이 달랑 1글자이다. 1글자의 이름을 지닌
정자나 누각이 이 땅에 흔치가 않은데, 이곳 성황산에는 무려 2개 이상이나 있다. 아마도 이
곳에는 단순하면서도 무언가 강렬한 의미의 1글자를 선호했던 양반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곳은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 사건을 비롯하여 광해군의 정치에 쓸데없이 불만을 품은 지
역 선비들이 낙향하여 시를 읊으며 팔자 좋게 놀던 곳이다. 세상에서는 그들을 7광(狂)과 10
현(賢)이라 불렀는데, 7광은 김대림(金大林), 김응빈(金應賓), 김감(金勘), 송치중(宋致中),
송민고(宋民古), 이상형(李尙馨), 이탁(李鐸)이며, 10현은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
탁을 포함해 김관(金灌), 김정(金鼎), 김급(金汲), 김우직(金友直), 양몽우(梁夢禹)이다.

정자는 한복판에 온돌방이 있고, 마루가 방을 둘러싼 구조로 부근 숲속에 10현이 봉안된 영모
당(永慕堂)이 있다. 영모당은 1898년에 지어진 것으로 송정영당(影堂)이라 불리기도 한다.

* 송정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310 (원촌1길 12-3)

▲  파란 현판에 도도하게 쓰인
송정 두 글자의 위엄

▲  산 밑에 있는 후송정(後松亭)


후송정은 송정 밑 바위에 자리해 있다. 화개헌 김직술이 쓰러지기 직전인 송정을 대신하고자
10현의 후손 42명의 지원을 받아 1899년에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송정의 10현을 추모하는 뜻
에서 십송정(十松亭)이라 했으나 1985년 현재의 정자를 지으면서 후송정으로 이름을 갈았다.

정자의 이름인 후송은 논어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짐을 안다)'의 의미로 절개가 높은 선비의 고결한 뜻을 뜻한
다. 예전에는 정자 밑으로 개울이 흘렀으나 지금은 길이 들어서 예전과 풍경이 다소 달라졌다.


▲  산외면과 칠보면, 태인면의 산하를 두루 적시며 서해로
흘러가는 동진강


후송정을 끝으로 무성서원 후식용으로 둘러본 성황산 더듬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들 외에도
안가본 제각과 정자가 여럿 있으나 썩 내키지가 않아 적당히 둘러보고 나왔다. 그래도 한정,
시산사, 필양사, 송정, 후송정, 영모당(사진은 없음)을 둘러봤으나 거의 70% 이상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원촌마을을 뒤로 하며 서해를 향해 흘러가는 동진강을 건너 칠보면 중심지(시산리)로 나왔다.
여기서 정읍시내버스 91번을 타고 신태인읍으로 나와서 신태인역으로 이동하니 11시 이후부터
잔뜩 인상을 쓰던 하늘이 기어코 빗방울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오후 늦게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우산을 준비해 갔으나 비가 생각 외로 꽤 길게 내렸다. (저녁 늦게까지) 시간도 이제
15시 정도인데 벌써 날씨가 이러하니 어디로 가야되나 그야말로 갈팡질팡에 빠져버렸다.

신태인역에 이르니 마침 서울 용산행 무궁화호 열차가 막 기적소리를 울리며 들어온다. 콩을
볶듯 급히 표를 사들고 열차에 올랐는데, 좌석이 모두 매진되어 오랜만에 입석으로 갔다. 그
를 타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을 하면서 비가 그치길 염원했으나 비는 나를 졸래졸래 따라와 가
는 곳마다 비를 뿌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  내장산(內藏山)에서 발원하여 칠보에서 동진강과
합쳐지는 칠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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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3층 법당 대웅전을 지닌 화순 쌍봉사

화순 쌍봉사



' 늦가을 산사 나들이, 화순 쌍봉사 '

▲  쌍봉사 대웅전

'쌍봉사 삼청각에서 읊다'

시내 사이로 멋들어지게 지은 다리 누각이여
삼청이라는 글씨만 봐도 눈이 상쾌하구나
못에 비친 달은 고기들의 맑은 거울이요
구름 걷힌 산봉우리 학은 둥지를 사랑하네
금빛들에 머문 안개는 항상 서기를 드러내고
옷빛계곡에서 부는 솔바람은 언제나 차가워라
난간에 기대어 처마 밑에 흐르는 물을 다시 보니
낙화도 뜻이 있는지 잔물결 따라 쫓아가네

* 고려 명종 때 문인인 김극기(金克己)가 쌍봉사 삼청각에서
지은 시 (현재 삼청각은 없음)
 



 

늦가을이 깊어가던 10월의 끝 무렵에 광주 동남쪽에 넓게 자리한 전남 화순(和順)을 찾
았다.
오전에 일행들과 만연산(萬淵山, ☞ 관련글 보기)을 둘러보고 화순 읍내로 내려가 점심
으로 한정식을 섭취했는데, 화순에서 유명한 밥집이라 사람들로 내내 미어터져 겨우 자
리를 잡아 먹었으나 맛은 그저 그랬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운주사(雲住寺)와 더불어 화순 지역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꼽히
는 쌍봉사를 찾았는데, 쌍봉사는 화순군 남쪽 끝인 이양면 산골에 있는 절로 화순 읍내
에서 30km 이상 떨어져 있다.



 

♠  쌍봉사(雙峯寺) 입문

▲  흙탕물이 되버린 연못

쌍봉사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동그란 연못이 마중을 한다. 주차장 옆에 자리한 이 못은 소나
무가 깃든 동그란 섬을 복판에 띄워놓아 운치를 우려내고 있는데. 고려 때 김극기가 지은 시
를 통해 그 시절 삼청각과 연못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비록 삼청각은 세월의 거친 흐름
으로 형편없이 떠내려갔지만 연못은 오랫동안 살아남아 천왕문 직전에 넓게 누워있었다.
허나 관리 소홀과 주차장 조성으로 연못을 밀어버리는 우를 범했으며, 근래에 작게나마 연못
을 다시 닦았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변 공사로 연못이 뿌연 흙탕물이 되어버린
채, 나를 맞이한다. 마치 흙탕물 같은 속세와 그보다 더한 종교계를 상징하듯이...


▲  연못 바위에 걸터앉은 돌거북

평범해보이는 연못에 눈길을 진하게 끄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거북 모양의 돌이다.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돌에 걸터앉은 작은 돌거북으로 거북의 등껍질과 얼굴, 발이 묘사되어 있는
데, 전체적으로 보면 거북선처럼 보이고, 등껍질 주위로 시선을 좁히면 기어가는 거북처럼 보
여 2가지의 시각 효과를 보인다. 그는 연못을 새로 지으면서 장식용이나 비보풍수(悲報風水)
의 일환으로 설치된 듯 싶다.

          ◀  쌍봉사 천왕문(天王門)
연못을 지나면 절의 2번째 문인 천왕문이 계단
을 늘어트리며 마중을 나온다. (1번째 문인 일
주문은 연못 남쪽에 있음)
이곳은 석가여래의 경호부대인 사천왕(四天王)
의 집으로 좌우로 길게 돌담을 둘러 속세의 기
운을 경계한다.


▲  쌍봉사 대웅전(大雄殿)과 그 주변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3층 모습의 늘씬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너른 경내가 펼쳐진다.
대웅전 좌우와 뒤쪽으로 지장전, 극락전, 호성전, 나한전, 요사, 종무소 등이 포진해 있으며,
천왕문과 대웅전 사이가 거의 풀밭이라 다소 허전하게 다가온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쌍봉사
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쌍봉사는 9세기에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 798~86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825년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847년에 돌아왔는데, 화순 지역을 지나다가 이곳의 수려
한 풍경에 퐁당 반해 절을 세웠다고 한다.
허나 곡성 태안사(泰安寺, ☞ 관련글 보기)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문(桐裏
山門)을 열었던 적인선사 혜철(寂忍禪師 惠哲)이 839년 당나라에서 돌아와 쌍봉사에서 첫 하
안거(夏安居)를 지냈다는 기록이 태안사 적인선사비에 쓰여 있어 적어도 8세기나 9세기 초부
터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쌍봉사는 839년을 창건시기로 삼고 있음)
하여 실질적인 창건자는 철감선사가 아니며, 그는 신라로 돌아와 이곳에 머물면서 구산선문의
일원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고 절의 이름을 크게 날렸다.

철감선사는 절의 앞쪽과 뒷쪽 산봉우리가 2개여서 도호(道號)를 쌍봉이라 했는데, 그의 명성
을 들은 신라 경문왕(景文王)은 그를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그의 도호를 따서 절 이
름을 쌍봉사라 하였다.
철감의 열성제자였던 징효절중(澄曉折中)은 스승의 법맥을 이어받아 영월 법흥사(法興寺)에서
사자산문을 본격적으로 개창했다. 그는 891년 쌍봉사에 들려 스승인 철감선사탑비에 예를 올
렸다고 전한다.

1081년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했다고 하며,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전라도관찰사인 김방(金倣)이 돈을 내어 절을 중창했다. 조선 세조(世祖)는 쌍봉사 토지에 면
세 혜택을 주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8년에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67년과 1724년에 중창했으나 조광조(趙光祖) 등을 배향한 인근 죽수서원(竹樹書院)의 말사
로 들어가면서 매년 66가지의 봉물을 상납하느라 허리가 거의 아작날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6.25전쟁 때 대웅전과 극락전 등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984
년에 대웅전이 전소되어 쓰러지는 고통을 겪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나한전, 호성전, 극락전, 지장전, 종무소, 요사, 범종각 등 10여 동의 건
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보로 지정된 철감선사탑과 보물인 철감선사탑비와 목조지
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지방문화재인 극락전과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웅전 목
조삼존불상 등이 있다.
그 외에 조선 후기에 세워진 쌍봉사 사적비(事蹟碑)와 승탑(僧塔, 부도) 5기, 관찰사 윤웅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절 자체는 '화순 쌍봉사'란 이름으로 전남 지방기념물
247호
로 지정되어 있다.

쌍봉사는 이 땅의 승탑(僧塔, 부도) 중 우수급에 속하는 철감선사탑과 우수급 비석인 철감선
사탑비, 그리고 비록 화재로 다시 지었지만 3층 목탑 양식의 대웅전으로 유명하다. 아마 그들
이 없었다면 이곳은 그저 그런 옛 절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첩첩한 산주름 속에 푹
묻혀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며 절 앞까지 2차선 신작로가 닦여져 차량 접근성은 좋다.
단 대중교통이 영 좋지 못한 것은 함정이다.

* 쌍봉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741 (쌍산의로 459, ☎ 061-372-3765)


▲  옛 모습 그대로 재현된 대웅전 (옆에서 바라본 모습)

쌍봉사 대웅전은 3층 목탑(木塔) 스타일의 건물이다. 높이 12m의 홀쭉한 정방형 집으로 2층에
대웅전 현판이 걸려있으며, 1962년 해체수리를 했을 때, 3층 중도리에서 고맙게도 상량문(上
樑文)이 튀어나왔다. 그 문서를 통해 1690년에 중창했고, 1724년에 3번째 중창이 있었음이 밝
혀졌으나 정작 중요한 첫 조성시기와 1번째 중창 시기는 나와있지 않았다.

건물의 조성시기는 조선 중기로 여겨지며, 원래는 대웅전이 아닌 목탑이었다고 전한다. 경내
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이렇다할 탑이 없는데, 이 건물이 탑의 역할을 대신 하고 있던 것이다.
법주사(法住寺)의 5층 팔상전(八相殿)과 더불어 이 땅에 몇 없는 목탑 스타일의 건물이자 거
의 유일한 3층 목탑으로 그 가치가 대단하여 일찌감치 국가 보물 163호의 지위를 누렸다.

6.25 시절에는 절의 상당수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대웅전은 총탄이 비켜가 구사일행으로 살아
남았다. 그 큰 난리에도 살아남았건만 1984년 4월 어느 어리석은 신도가 촛불을 잘못 다룬 통
에 화마(火魔)의 부질없는 먹이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허무하게 사라진 대웅전을 다시 소환하고자 1985년 8월 복원공사를 벌여 1986년 12월 완
성을 보았으나 국가 보물의 지위는 끝내 박탈되고 말았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본래 지붕이 사각이란 것이 확인되어 기존의 팔작지붕 대신 사각의 사모
지붕으로 바꾸었으며, 상륜(相輪) 부분을 보완했다.


▲  대웅전 목조삼존불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51호

대웅전의 겉모습이 비록 3층이긴 하나 무늬만 3층이지 완전 하나의 공간이다. 내부에는 목조3
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그의 열성제자인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아난존
자(阿難尊者)가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며 서 있다. 이들은 1984년 대웅전이 화재로 무너지
면서 자칫 화마의 먹이가 될 뻔했으나, 절 부근에 있던 마을 농부가 불길을 보고 달려와 저들
을 등에 업고 탈출시키면서 화를 면했다.
이후 대웅전이 복원되자 석가여래상과 존자상을 새로 개금(改金)하고 채색하여 제자리로 옮겼
다.

석가여래의 얼굴은 거의 4각형 모습으로 꽤나 복스러워 보이는데 머리는 꼽슬인 나발이며, 눈
은 지그시 감고 있고, 붉은 입술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중생들의 고충을 빠짐없이 들으
려는듯, 귀는 크고 두꺼우며 어깨를 감싼 옷은 두툼해 보인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펴서 무릎
안쪽에 올려놓았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오른쪽 발바닥 위에 놓았다.
그의 왼쪽에는 다소 늙어보이는 가섭존자가 있는데 표정이 매우 밝고 손이 매우 두껍다. 그에
반해 아난존자는 명상에 잠긴 조금은 늙은 동자승 같은 모습이다.

이들 3존불은 1694년에 조성된 것으로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조성시기와 참여자 이름이 드러
나 있으며, 만들어진 시기가 확실해 다른 조각상의 표준이 된다. 대웅전 화재 때 중생에 의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만큼, 절과 불교의 이익을 위해 살지 말고, 중생의 고충을 위로하면서
그들을 위해 살아가기를 바란다.


▲  호성전(護聖殿)

호성전은 이 땅에서 거의 흔치 않은 T자형 맞배지붕 집으로 절 건축물 중에 T자형은 오직 이
곳 하나 뿐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제외) 앞서 대웅전처럼 매우 희귀한 형
태의 집이라 국가 지정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겠으나 아쉽게도 6.25때 파괴되어 다시 지어
진 것이라 그 자격은 떨어진다.

이 건물은 쌍봉사에 많은 혜택을 주었던 세조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로 전해진다. 허나 지금은
철감선사와 그의 사형(師兄)인 조주종심(趙州從諗, 조주대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철감은 825년 당나라로 건너가 남천보원(南泉普願. 남천선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때 조주
선사를 만났다. 조주는 철감보다 20살 연상으로 남천에게 '평상의 마음이 도(道)이다'는 말을
듣고 바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철감과 조주는 친한 선후배 관계로 10년 정도 남천의 문하에서 정진했으며, 철감이 조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므로 그들의 진영을 마련해 호성전에 봉안했다. 조주의 진영은 하북성(河
北省) 백림선사에 있는 송나라 때 판각된 그의 초상화 영인본(影印本)을 참고해 제작했을 정
도로 크게 공을 들였다.


▲  늙은 티가 너무 풍기는 조주대사의 진영와 중년의
중후함이 느껴지는 철감선사의 진영

▲  나한전(羅漢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거처이다. 6.25때 파괴된 것을 다시 세웠다.

▲  극락전(極樂殿)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66호

두툼한 맞배지붕을 지닌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조선 중
기 건물로 6.25때 대웅전과 함께 운좋게 살아남았으며, 대웅전이 1984년 화재로 무너지자 경
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란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다.
극락전 앞에는 수백 년 정도 묵은 단풍나무 2그루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 운치
를 우려내고 있는데 그들은 대웅전 화재 때 천하를 집어삼킬 정도로 강렬했던 화마의 공격으
로부터 극락전을 지킨 존재들이다. 온 몸으로 막는 과정에서 나무들은 가지를 적지 않게 잃었
으나 덕분에 극락전은 무사했다. 만약 극락전까지 허무하게 날라갔다면 경내에 오래된 건축물
은 전멸하게 된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52호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좌상은 1694년에 조성된 것이다. 그의 좌우에는 같은 시기에 조성
된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해 있었으나 1989년 8월, 어느 나쁜 손에
도난을 당해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하여 새로 협시보살상을 장만해 아미타불의 허
전한 옆구리를 채웠다.
아미타불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얼굴은 거의 네모진 큰 모습이며, 덩치도 제법
있어 보인다. 머리는 나발(꼽슬)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으며, 얼굴은 거의 무표정 같
다. 목에는 삼도가 그어져 있고 어깨를 감싼 옷의 주름은 매우 뚜렷하다. 오른손은 올리고 왼
손은 내린 모습인데, 양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걸치며 앉아있다.

대웅전의 목조삼존불상과 같은 해에 조성된 것으로 조각 형식이 비슷해 같은 사람이 만든 것
으로 여겨지며, 대웅전의 그것보다 허리가 곧고 늘씬한 모습이라 대웅전 삼존불 다음으로 조
성된 듯 싶다.



 

♠  쌍봉사 마무리

▲  지장전(地藏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의
거처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졌으나 6.25때 파괴된 것을 이후에 다시
세웠다.

▲  지장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탱

지장전에 봉안된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은 1667년경에 운혜(雲惠)를 비롯한 그의 일
파 조각승들이 조성했다. 아주 고맙게도 조성발원문이 나왔고, 쌍봉사 사적기(事蹟記)와 '능
주지 사자산 쌍봉사제전 기문집록(綾州地 獅子山 雙峰寺諸殿記 文輯錄)' 등에 조성 관련 내용
이 나와있다.
이 지장보살상의 조성시기가 밝혀지면서 해남 대흥사(大興寺) 지장시왕상, 강진 백련사(白蓮
寺) 지장시왕상, 미황사(美黃寺) 지장시왕상, 순천 동화사(桐華寺) 지장시왕상 등 운혜 계열
의 조각으로 여겨지는 조각상들의 조성 연대 추정에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며, 명계조각(冥界
彫刻)이라는 종교적 엄숙성과 17세기 불교 조각계가 추구한 대중적 평담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여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
으로 국가 보물 1,726호로 지정되었다.

얼굴이 거의 네모난 지장보살상은 양 어깨를 덮은 옷을 입고 있으며, 아미타수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서 있는데, 도명존자는 합장
인을 선보이고 있고, 무독귀왕은 가슴에 모은 두 손이 옷에 감추어져 있다. 그들 뒤로는 근래
조성된 지장탱이 있는데, 지장보살의 푸른 대머리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  의자에 앉아있는 시왕상과 불꽃을 휘날리고 있는 금강역사상

▲  경내에서 철감선사탑으로 인도하는 숲길 ①

쌍봉사에 왔다면 경내만 살피지 말고 철감선사탑과 탑비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경내에서 서
북쪽으로 난 숲길을 조금 올라가면 그 길의 끝에 쌍봉사 제일의 보물인 그들이 있다.


▲  경내에서 철감선사탑으로 인도하는 숲길 ②
늦가을이 철감선사탑과 탑비에 퐁당퐁당 반했는지 한참을 머물고 있다.

▲  철감선사탑 - 국보 57호

철감선사는 쌍봉사에 머물며 사자산문의 기초를 닦다가 868년 7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의
입적 소식을 들은 경문왕은 크게 아쉬워하며 '철감'이란 시호를 내려 탑과 탑비를 세우게 했
는데, 그가 입적한 그해에 탑과 비석이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철감의 제자들은 우수한 석공을 초빙하여 스승의 승탑을 조성했다. 비록 2.3m의 낮은 높이지
만 온갖 정성을 들여 탑의 밑도리부터 윗도리까지 조각을 했으며, 탑은 전체적으로 8각의 형
태로 8각 바닥돌 위에 기단부를 두었다. 기단부는 밑돌, 가운데돌, 윗돌 세 부분으로 이루어
져 있는데, 밑돌과 윗돌 장식이 꽤 화려하며,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8마리의 사자가 구름 위
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제각각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윗돌은 2단으로 두어 밑에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迦陵頻伽)>가
악기를 다루는 모습을 새겼다.

철감의 사리가 깃들여진 탑신(塔身)에는 8개의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
다 문짝 모양, 사천왕상, 비천상(飛天像) 등을 조각했다. 지붕돌에는 아주 현란한 조각 솜씨
가 깃들여져 있는데,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
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허나 너무 완벽하면 재미가 없는지
라 머리장식은 장대한 세월에게 싹 날라가 없어진 상태이다.

신라 후기 대표적인 승탑이자 9세기에 조성된 승탑 중 제일로 꼽히는 명작으로 1,100년의 적
지 않은 나이에도 조각이 살아있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자연과 세월도 보는 눈이 있는지 그
를 비켜간 모양이다.

▲  내 시선을 계속 잡아두고 있는 철감선사탑의 위엄

▲  철감선사탑비 - 보물 170호

탑 옆에 자리한 탑비는 철감선사의 행장을 머금은 비석이다. 용 머리의 귀부(龜趺)와 비신(碑
身),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으나 탑비에 군침을 흘린 세월이 비신을 잡아가버려 현재는 귀
부와 이수만 남은 상태다. 하여 비석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용머리의 귀부를 두었는데, 여의주를 입에 머금고 있는 모습이며,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어 앞으로 슬금슬금 기어가는 것 같다. 이수는 용조각을 생략하고 구름
무늬만 가득하다.
탑과 더불어 868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조각 수법이 휼륭해 신라 말 대표적인 탑비로
꼽힌다. 이 역시 철감을 향한 제자들의 지극정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철감선사탑비
거북이 등짐을 지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다.

▲  철감선사탑비의 옆모습

▲  철감선사탑비의 뒷모습

철감선사탑, 철감선사탑비를 끝으로 쌍봉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들에게 꽂힌 시선이
좀처럼 떼어지지를 않아서 나올 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는지 모른다.

쌍봉사 이후 내용은 생략하며 본글은 여기서 쿨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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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공항을 굽어보는 강서구의 대표 지붕,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둘레길, 개화산자락길, 개화산 봉수대, 미타사석불입상, 신선바위>

강서구 개화산(약사사, 개화산둘레길, 미타사)



'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나들이 '


▲  개화산둘레길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 숲길)

▲  약사사 석불입상

▲  미타사 석불입상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5월의 첫 무렵, 강서구(江西區)의 대표 지붕인 개화산(開花山)을
찾았다.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지만 나는 서울의 동북쪽 끝인 도봉산 그늘에 있고 개화산
은 서울의 서쪽 끝으머리인 개화동과 방화동에 있다. 서로 끝과 끝에 있어서 거리도 거
의 40km, 지하철로 가도 족히 1시간 반 이상이 걸려 그곳에 이르기 전에 거의 떡실신할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개화산을 비롯한 강서/양천 지역은 많이 가지 않는 편이다.

개화산은 즐겨찾기급 명소는 아니지만 매년 1번 정도는 가는 편이다. 자고로 좋은 곳은
1번이 아닌 두고두고 찾는 법, 이번 나들이는 방화역(5호선)에서 시작하여 약사사와 개
화산전망대, 개화산둘레길(강서둘레길1코스), 미타사, 하늘길전망대를 거쳐 방화근린공
원에서 끝을 맺었다.



 

♠  개화산 약사사(藥師寺)

▲  약사사로 인도하는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개화동(開花洞)과 방화동(傍花洞)에 걸쳐있는 뫼로 거의 평지로 이루
어진 강서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은 작고 야트막하지만 평지 속에 솟아있는 존재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일품이며,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무성하여 풍경도 아름답다. 산 동북쪽에
는 꿩고개라 불리는 치현산(雉峴山)이 이어져 있고, 북쪽에는 한강과 5호선 방화차량기지, 서
쪽은 김포평야(金浦平野), 남쪽에는 방화동과 김포국제공항이 있다.

개화산의 첫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어느 시절에 주룡(駐龍)이란 도인(
道人)이 살고 있었는데, 매년 9월 9일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
다. 이것을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 9월 9일마다 주룡산에서 술을 마심)'이라 불렀는데 그가
죽자 9월 9일마다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는 그가 죽은 자리
에서 꽃이 피어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우니 그곳이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이며, 개
화사가 있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으로 이름이 갈렸다고 전한다. 또한 주룡 설화 외에도 산 모
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는 뜻의 개화산(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산이 코끼리, 개화산과 마주보고 있는 한강 북쪽 행주산
(幸州山, 덕양산)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주고 서울에
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이라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겉모습은 작지만 속은 아주 알찬 개화산에는 많은 명소가 안겨져 있는데, 늙은 석탑과
석불을 간직한 약사사를 비롯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미타사 석불입상, 호국충혼위령비,
방화근린공원, 신선바위, 능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봉수대, 상사마을 은행나무 등이 있으며,
약수터도 많이 있었으나 그 수가 계속 줄어 이곳의 제일 가는 물이었던 약사사 약수터가 2013
년 봄에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또한 산 허리에는 강서둘레길1코스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 3.35km)이 닦여져 있는데, 조
망이 괜찮은 곳에 전망대(개화산, 아라뱃길, 신선바위)가 설치되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다만 군부대가 정상과 북쪽 자락에 있어 정상에는 발을 들일 수 없다.


▲  약사사 방면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

▲  약사사를 알리는 표석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로 들어서 약사사로 가다 보면 길 중간과 약사사 표석 전에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豊山沈氏 文靖公派 墓域,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7호)이 간만에 보고 가라
며 손짓을 보낸다. 허나 이번에는 그들에게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아서 오직 정면에 보이는 먹
이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고양이처럼 바로 약사사로 넘어갔다.

약사사 표석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봉화정과 개화산전망대로 이
어지고, 오른쪽은 약사사와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데 봉화정과 강서둘레길1코스 서쪽 구간
이 목적이라면 왼쪽 길로 가면 되고, 약사사를 거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약사사 경내

약사사 표석에서 2분 정도 들어가면 개화산의 오랜 상징인 약사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개화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이 절은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으나 앞서 언급했던 주룡선생과 관련
된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신라 때 개화산을 주름잡던 주룡이 세상을 떠나자 매년 9월 9일마다 그가 술을 마셨던 곳에서
이상한 꽃이 피었는데,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개화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설화와
1827년에 송숙옥(宋淑玉)이 쓴 '개화산약사암중건기',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를 통해
신라 때 창건된 것이라 내세우고는 있으나 신빙성이 있는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개화산약사암중건기'와 '양천읍지'는 약사사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다만
경내에 고려 때 석탑과 석불이 전하고 있어 적어도 고려 초/중기부터 법등을 켠 것으로 여겨
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는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에 개화사로 나와 예전 이름이 개화사였음을 알려준다.
절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37년 좌의정(左議政) 송인명(
宋寅明, 1689~1746)이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송씨 가문의 원찰(願刹)로 삼았는데, 그는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으나 개화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해 과거에 붙었다.
이후 재상에 오르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개화사의 덕이라며 절을 중수하고 절 밑에 불량답
(佛糧畓)을 보시했다. 또한 영조(英祖) 시절 그와 가깝게 지냈던 이병연(李秉淵)이 개화사와
송인명과의 끈끈한 사이를 '사천시초(槎川詩抄)'란 시로 표현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 가양동에 있었음)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조선 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이병연
의 시를 보고 개화사를 찾아가 그림을 남겼는데, 그는 1740년부터 5년 동안 양천현감(현령)으
로 있으면서 개화사와 소악루를 비롯한 양천의 명승지를 아낌없이 화폭에 담아 당시의 정취를
아련히 알려주고 있다.

1799년 송인명의 후손인 송백옥(宋伯玉)이 절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남겼으며 1827년 절이 퇴
락하자 처사 창선(昌善)과 청신녀(淸信女) 경자(京子)가 돈을 모아 기존 절터에서 몇 걸음 떨
어진 곳에 새롭게 자리를 파 절을 옮겼고 석불입상을 약사불로 삼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藥
師庵)으로 갈았다. <이후 약수사(藥水寺), 약사사 등으로 변경됨>

1911년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의 되었고, 1928년 주지 박원표(朴元杓)가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허나 6.25 때 개화산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그나마 세운 건물이 모두 무너졌으며
가건물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1984년 이후 대웅전과 감로당, 삼성각을 지어 지금에 이
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감로당, 삼성각, 범종각, 공양간 등 5~6동 정
도의 건물이 있으며, 크게 지어진 감로당은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주며, 석불
은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기도 수요가 제법 많다. 허나 경내에서 이들 외에는 고색의 향기는
전혀 없다.
또한 경내 밑에는 개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던 약수터가 있었는데 그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
다고 하여 중생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약수터 때문에 절의 이름이 한때 약수사가 된 적도 있
을 정도.. 허나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부적합 판정으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끝내 부
적합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3년 봄에 완전 폐쇄되고 말았다. 석불과 더불어 절의 든든한 양대
밥줄이자 아주 착했던 약수터의 퇴장은 개화산과 절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고, 이제는 추억
이나 사진에서나 끄집어 봐야 되는 흐릿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약사사는 숲에 둘러싸여 있어 산사의 향기도 그런데로 진하며, 절이 아담
하여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다. 또한 방화역에서 절까지 길이 잘 닦여있고 도보
20분 정도로 접근성도 괜찮으며, 차량으로 경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절을 둘러보고 개화산
봉화정과 강서구의 야심작인 강서둘레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을 곁드린다면 아주 영양가
만점의 나들이가 될 것이다.

* 약사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332-2 (금낭화로17길261 ☎ 02-2662-2551)
* 약사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있음)

절 정문을 들어서면 약사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3층석탑과 대웅전이 시
선을 주고 있으며, 왼쪽에 약사사 안내문과 매점, 범종각이, 오른쪽에는 주차장과 해우소, 감
로당이 자리한다.

▲  범종각(梵鍾閣)
1976년에 조성된 범종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전(佛殿)이긴 하
지만 겉모습은 거의 요사(寮舍)나 여염집 같은 분위기로 가운데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
조이다.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탱과 산신탱은 1960
년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그림이다. (삼성각 바로 옆에 공양간이 있음)


▲  감로당(甘露堂)

3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삼성각을 바라보고 선 감로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요사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甘露堂','開
花山 藥師寺' 현판은 승려 석정(石鼎)의 필체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
기에 좋으며, 벽면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혜능(慧能) 이야기, 백락천과 도림선사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다.


▲  약사사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호

대웅전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약사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창건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보물로 탑 높이는 4m이다. 땅에 바닥돌을
깔고 1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으며, 머리 장식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없어진 것을 근래에 새로 붙여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랫 부분과 전혀 다른 피부색을 보인다.

탑은 길쭉하고 홀쭉한 모습으로 기단이 1층으로 간략화 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의 밑면 받침
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어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로 서울에는 오래된 석탑이 많이 있지만 정작 토박이 옛 탑은 몇 되지
않는다. 토박이 고려 탑은 낙성대(落星垈) 3층석탑과 홍제동(弘濟洞) 5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에 있음), 그리고 이곳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왜정(倭政) 이후에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상경
한 것들이다.

▲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3층석탑
마치 하늘이 움푹 낮아진 듯, 자욱하게 낀 오색 연등이 탑의 머리와 하늘을
앗아가 버렸다. (이때가 석가탄신일 며칠 후였음)

▲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1988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을 청기와로 수를 놓아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내며 절의 왜소함을
능히 커버한다.


▲  대웅전의 붉은 닫집과 불단을 장식하는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 불단에는 1기의 석불과 7기의 불상/보살상이 있다. 그 뒤에는 조
그만 금동불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거의 3천불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금동(金
銅) 일색인 곳에 홀로 빛바랜 돌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의 큰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가 3층석탑 다음으로 경내에서 늙
은 존재로 이곳의 든든한 밥줄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석불, 나머지 금동불은 그를 위한 조
연이 된다.
비록 겉은 초라해 보일 지 몰라도 그의 가치는 그들보다 한참이나 높다. 다른 불상은 제쳐두
더라도 3층석탑과 그는 꼭 봐야만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석불 앞에는 아주 조그만 금동석가여래상이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앉아있고, 좌우
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그 옆에는 큼직한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 중생을
굽어본다. 금동불은 모두 1995년 이후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들이다.


▲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호

많은 후배급 불상/보살상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불입상은 머리에 쓴 돌갓 밑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해 고려 후기,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의 든든한 밥줄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에 일장미륵(一丈彌勒)으로 등장한다.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으나 가슴 앞에 댄 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세음보살로 여
겨지기도 하며, 불상의 투박한 모습을 통해 고려와 조선 때 온갖 모습으로 조성된 미륵불(彌
勒佛)의 일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그를 약사불(藥師佛)로 삼으면서 절 이
름을 약사암으로 갈았으며, 현재도 영험한 약사불로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 석불은 현재 위치 바로 옆에 있었던 건물에 있었는데, 밑도리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
다가 1974년 그 건물을 부시고 대웅전을 조성하면서 불상 밑에 기단석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
했다.
불상의 얼굴은 길고 넓적한데, 표정은 썩 별로이다. 경직된 인상에 두 눈은 너무 크기 때문이
다. 코는 세모로 오똑하나, 코 끝은 크게 닳아진 상태이고, 입은 그 모양만 확인이 가능하다.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의 고충을 듣기에는 별 지장은 없어 보이며, 머리에는
둥근 돌갓을 쓰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미륵불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가 얼굴에 비해 작고, 옷도 옷주름 몇 가닥이 표현된 것이 전부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꽃을 든 불상의 이미지를 주며, 밑도리는 바로 앞에 있는 금동석
가여래상과 불단에 가려져 확인이 어렵다.
썩 괜찮은 작품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존재로 소망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해 많
은 이들이 찾아와 소망과 고충을 털어놓는다. 약사사가 지금에 이른 것도 거의 그의 공이다.


▲  약사사 돌담길
약사사를 둘러보고 돌담길을 통해 개화산전망대로 이동했다.


 

♠  개화산전망대와 개화산둘레길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에서 느긋한 산길을 5~6분 오르면 개화산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전망대

개화산 북쪽 능선에 개화산전망대가 조촐히 터를 닦았다. 2011년 5월 근교산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한강과 방화대교를 비롯하여 난지도, 은평/서대문/마포구, 남산, 북
한산(삼각산), 가양동 지역이 두 눈에 바라보여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가성비가 높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①

겸재 정선은 1740년부터 5년 동안 천하에서 제일 작은 고을인 양천현(陽川縣)의 현령(縣令)을
지내면서 양천(서울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김포시 고촌읍)의 주요 명소를 그림으로 남겼
다. 이들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에 실려있어 무척이나 많
이 변해버린 양천 지역과 한강(염창동~행주산성 구간)의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있다.

개화사(약사사)는 벗인 이병연의 소개로 찾았다가 그곳 경관에 감탄하여 그림으로 남긴 것이
다. 하나는 한강에서 바라본 시점,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
다.
낙건정(樂建亭)은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별서(別墅,
별장)인 낙건정을 그린 것으로 한강 북쪽 덕양산(德陽山, 행주산) 자락에 있었다. 그리고 행
호관어(杏湖觀漁)는 행호<杏湖, 행주산 주변 한강> 주변을 담은 것으로 지금이야 그저 그런
곳이지만 그때는 양반, 귀족들의 별서/유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②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소악루(小岳樓)는 양천
고을의 중심지였던 가양동의 뒷산, 궁산(宮山) 동쪽에 있었는데, 왼쪽 하단에 소악루를 두고
탑산과 두미암, 선유봉, 와우산, 잠두봉(蠶頭峰) 등의 경강(京江) 서쪽 명소를 담았다. (현재
소악루는 궁산에 재현되어 있음)

금성평사(錦城平沙)는 양천(가양동)에서 바라본 난지도(蘭芝島)를 담은 것이다. 서울의 쓰레
기장이 되기 전에는 홍제천과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너른 저지대로 한강의 폭이
넓어져 경치가 꽤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쓰레기를 딛고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이란 거
대한 자연공원으로 거듭났다. 허나 그래봐야 순수 자연산이던 예전만은 못하다.

목멱조돈(木覓朝暾)은 목멱산(남산)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 모습을 담은 것으로 양천에서 바라
본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다. 남산 앞에는 만리동고개, 애오개(아현동), 노고산(老姑山) 등이
그려져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방화대교와 난지도, 고양시 화전 지역, 서울 서북부를 비롯해 멀리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개화산전망대 주변 너른 공터와 헬기장
공터 주변에 널린 군사시설은 군사 훈련 및 예비군 훈련지로 활용되고 있다.

▲  재현된 개화산 봉수대(烽燧臺)

조선은 총 5개의 봉수 노선<거로(炬路)라고 함>을 운영했다. 개화산봉수대는 전남 순천(順天)
에서 시작되어 서울 남산 제5봉수대에서 끝을 맺는 5번째 거로로 김포 북성산(北城山) 봉수대
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 제5봉수대로 넘겼다.

개화산봉수대는 개화산 정상에 있었다. 이곳 외에도 동북쪽 꿩고개산(치현산) 정상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를 개화산 제2봉수대라 부른다. 이들 봉수대는 1950년대까지 있었으나 6.25
전쟁 시절, 군부대가 정상 주변에 주둔하면서 싹 밀어버리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자리만 겨
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기와조각과 백자 파편, 도기 파편 등이 여럿 수습되었으며 1994년
11월에 개화산 봉수대터에 표석을 세웠다.

개화산은 한자만 달리하여 개화산(開火山)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봉수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행주산성(幸州山城), 양천고성(陽川古城, 가양동)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시절에 행주산성을 지원하던 역할을 했던 것으
로 보인다. 6.25때도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고 지금까지 군부대가 쭉 주둔하면서 그 역사를 계
속 이어간다.

강서구청에서 개화산 봉수대를 복원하고자 이
미 복원된 남산 봉수대와 안산(鞍山) 봉수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를 참조하여 2013년 11
월 재현을 했는데 원래 자리에 군부대가 들어
앉은 관계로 부득이 북쪽으로 250m 떨어진 봉
화정 맞은 편에 세웠다.
높이 2m, 둘레 4m 규모의 봉수대 2개를 지었는
데 옛날처럼 불을 피울 일도 없고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이라 딱히 볼품은 없다.

▲  봉수대 맞은편에 자리한 봉화정(烽火亭)


▲  봉화정에서 개화산숲길로 들어서다 (강서둘레길1코스)

도보길이 천하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강서구에서도 야심작을 내놓았다. 바로 강서둘레길이다.
산과 숲, 한강, 철새도래지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둘레길로 총 3코스가 있는데, 1코스는 개화
산숲길로 개화산을 1바퀴 도는 3.35km의 산길이다. 개화산 둘레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오르
락내리락이 다소 반복될 뿐, 딱히 힘든 구간은 없으며 가볍게 걸으면 60~70분 정도면 충분하
다. 중간에 여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조망의 기품을 누릴 수 있으며,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과 약사사 등의 늙은 문화유산도 만날 수 있다.
개화산숲길 외에도 '개화산자락길'도 별도로 준비되어 있다. (방원중학교~금낭화로17길~약사
사 표석~개화산전망대/하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


▲  나무데크로 이루어진 개화산숲길 (아라뱃길전망대 부근)

▲  아라뱃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라뱃길과 김포시(金浦市) 고촌읍 지역

서쪽을 향하고 있는 아라뱃길전망대는 이름 그대로 아라뱃길이나 바라보라고 만든 곳이다. 아
라뱃길은 서해바다와 한강을 잇는 운하로 2009년에 착공하여 2011년 완성을 보았는데, 여객선
과 유람선, 화물선을 서울까지 들어오게 해야 물류비용도 절감되고 관광객이 늘어난다는 바람
직하지 못한 개소리를 늘어뜨리며 억지로 만들었으나 그 기대치에 1%도 안되는 놀라운(?) 실
적을 보이며 서울과 인천의 아주 저주스러운 애물단지가 되었다.


▲  신선바위 윗쪽에서 바라본 천하
비행기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김포국제공항을 비롯해 김포평야와 부천 북부,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눈에 들어온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신선바위

개화산은 흙산이라 신선바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바위가 거의 없다. 서쪽을 향해 누워있는
이 바위는 개화산 산신(山神)이 호랑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위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산신이 과연 이곳을 거쳐갔는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다. 신선
도 결국 인간이 만든 가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이곳은 개화산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이를 두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천하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여 신선바위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호국충혼위령비(호국충혼비)와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

신선바위를 지나면 미타사로 내려가는 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 둘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 손
에 이끌려 3분 정도 내려가면 곱게 단장된 푸른 잔디밭 위에 서 있는 호국충혼위령비(이하 충
혼비)가 나타나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 충혼비는 천하에 매우 흔한 6.25 관련 기념물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한다. 6.25가 터지
자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6.25 이전에는 남한 영역이었음)을 지키던 1사단은 북한군을 감당
하지 못하고 김포를 거쳐 김포공항 부근까지 후퇴했다.
개화산에 진을 치고 김포비행장을 지키고자 장비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며 싸웠으나 설상가
상으로 탄약과 식량보급까지 끊겼다. 결국 북한군의 대량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1사단 12연
대 3대대 대대장 김무중 소령과 12연대,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해 1,100여 명이 전사하
고 말았다.
이후 호국(護國)의 신이 된 그들의 넋을 기리고자 미타사에서 1993년 12월에 충혼비를 세웠으
며, 매년 6월에 지역 주민들과 군부대 장병이 위령제를 지낸다. (11월 가을걷이 이후에도 지
낸다고 함) 바로 이 충혼비 밑이 미타사이다.



 

♠  서울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절집, 개화산 미타사(彌陀寺)

김포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 서쪽 자락에 살짝 둥지를 튼 미타사는 조그만 절이다. 서울
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절로 예전에는 약사사와 함께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내세우기도
했으나 경내에 있는 석불이 고려 말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계점과 삼국시대 창건설을 입
증할 존재가 전혀 없어 이제는 쏙 들어갔다.
또한 19세기에 '김대공'이란 사람이 석불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집안의 원
찰(願刹)로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역시나 구전에 불과하다.
그나마 확실한 것은 1924년 창건설로 절 밑에 있는 내촌마을 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집
을 지어줄 것을 청하므로 그해 4월 8일 미륵당(彌勒堂)을 세웠다는 것이다. 하여 그 이전에는
애당초 절이 없었고, 미륵불로 숭상을 받던 석불만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후 미륵당이 미타사로 발전했으나 6.25전쟁으로 모두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이후 자리
를 조금 달리하여 절을 재건했다. 1970년 승려 한지일(韓智壹)이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제자리를 떠났던 지장보살입상을 1993년에 다시 가져와 새 법당에 봉안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절 뒷쪽에 호국충혼위령비를 세워 6.25때 개화산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린다.
경내에는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과 2기의 노천 석불, 그리고 5층석탑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있다.

절이 조촐하고 숲에 둘러싸여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선사하며, 시내와 가깝지만 적당히 거리
를 두고 있다. 김포공항을 수시로 드나드는 비거(飛車)들의 소음을 빼면 정말 고즈넉한 곳으
로 개화산숲길과도 가까워 개화산 나들이 때 이곳을 곁드리며 숲길을 1바퀴 돌면 나름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미타사란 이름을 지닌 오래된 절이 3곳 있음, 보문동 미타사(☞ 관련글 보
), 옥수동 미타사(☞ 관련글 보기), 그리고 이곳 개화동 미타사>

* 미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산81-24 (개화동로13길 56-33 ☎ 02-2662-4736)

▲  따사로운 봄볕을 즐기고 있는
여염집 스타일의 미타사 법당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서쪽을 굽어보는 석불좌상


전형적인 불전(佛殿) 스타일과 거리가 좀 있어 보이는 미타사 법당은 1970년대에 중건된 것이
다. 불단에는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석가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93년에 마련된 것으로 왜정 때 석고로 조성된 지장보살입
상도 있다. (그는 친견하지 못했음)
그 보살상은 경내에서 석불입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로 참으로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
는 원래 옛 법당에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절이 파괴되자 실종되었다. 이후 인근 군부대 장교
가 부대 우물에서 불에 그을린 채 망가진 그를 수습하여 군부대에서 가지고 있다가 경주의 어
느 사찰로 넘어간 것을 1993년에 다시 찾아와 봉안했으니 무려 40년 이상 타향살이의 고통을
겪은 것이다. 아마도 6.25시절에 개화산을 점거한 북한군이 불상에 화풀이를 하며 우물에 버
린 것으로 여겨진다.


▲  미타사에서 바라본 천하
김포국제공항과 김포평야,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돌탑과 날렵한 몸매의 5층석탑(왼쪽 탑)
석불입상 뒤쪽에 경내의 유일한 석탑인 5층석탑이 있다. 그는 198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의 단골 신도인 석물 판매업자가 1995년에 기증했는데,
그로 인해 힘들지 않게 탑을 소유하게 되었다.

▲  미타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9호

이 석불은 미타사에서 미륵불로 받들고 있는 존재로 고려 후기,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모습은 다른데서는 보기 힘든 이형적(異形的)인 모습으로 밑도리에는
세월의 고된 때가 자욱한 반면, 그 윗쪽 몸통의 3/4 이상은 완전 하얀 피부라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다. 그가 서 있는 대좌(臺座)만 근래 것이지 석
불 자체는 순수 오래된 불상이다.

미타사가 있기 전부터 이곳을 지켰던 노천 석불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여
러 번 땅속에 들어갔다가 빛을 보기를 반복했다. 1924년 내촌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서 그를
위한 집이 지어졌으니 그것이 미타사의 시초로 여겨지며 요사 자리에 미륵당이란 조그만 건물
을 지어 봉안했으나 근래에 요사를 새로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때 대좌를 새로
만들어 넣었고, 예전의 헌 대좌는 석불 윗쪽에 있는 바위 밑에 있다.

석불의 모습은 개화산 동쪽 약사사의 석불좌상과 좀 비슷하다. 그는 고려 말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머리에 동그란 갓돌을 쓰고 있고, 얼굴 표정은 좀 일그러져 있다. 아마도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서 그리 된 모양이다. 얼굴은 거의 동그란 모습이며, 눈과 눈썹, 입은 선으로
처리했고, 코는 매우 오똑하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은 긴 편으로 삼도(三道)는 보이질 않으며, 몸통은 매우 길쭉하다.
두 손은 가슴 앞에 서로 교차되게 모으고 있는데, 그만의 특이한 수인(手印)으로 손가락이 꽤
두껍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을 하고 있으며, 다리와 발 등의 밑도리는 옷에 가려져
생략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로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몸통이 길며, 특이한 신체 표현과 밑도리를
생략하는 센스, 갓돌 모양의 보관(寶冠) 등에서 고려시대 큰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오랜 세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음에도 피부가 하얗고 건강도 양호하며, 약사사 석불과 함께
서울에 몇 없는 고려 말 석불이란 점이 인정되어 2008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옆에서 바라본 석불입상과 그 주변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국제공항

미타사를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개화산둘레길(개화산숲길)로 다시 진입하여 남쪽으로 조
금 가니 '하늘길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서울의 하늘길을 책임지고 있는 김포국제공항이 아주 잘 바라보이는 곳이라 그런 이름
을 지니게 되었는데, 정말로 공항 내부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공항뿐 아니라 주변 김포평
야와 인천 동북부(계양구), 부천 지역이 덩달아 두 눈으로 달려오며 국내선과 국제선 비행기
가 5분이 멀다 하고 공항을 들락거려 김포공항의 위엄을 보여준다.


▲  솔내음이 그윽한 개화산둘레길 서쪽 구간

▲  짙은 숲속을 가르는 개화산둘레길 서쪽 구간

▲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하늘길전망대를 지나 무장애숲길 남쪽 기점에서 개화산자락길로 갈아탔다. 자락길 서쪽 구간
은 하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까지로 이중 개화산둘레길과 겹치지 않는 북까페 주변 숲
길이 무장애숲길로 이루어져 있어 천하에서 가장 편한 둘레길로 칭송 받는 안산(鞍山) 자락길
못지 않은 편안함과 느긋함을 보여준다.
이런 나무데크길은 통행편의도 있지만 인간의 발길로부터 나무와 흙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
다. 그러다 보니 나무의 피해를 최소화하여 길을 닦았고 부득이 길 복판에 자리하게 된 경우
는 그냥 그 자리에 둔 채로 길을 내었다. 물론 나무가 숨을 쉴 수 있게끔 공간을 내어 그를
배려했으며, 개화산둘레길 나무데크길도 같은 방법으로 길을 내었다.


▲  시원하게 뻗은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개화산자락길 무장애숲길을 모두 거닐고 약사사 표석에서 다시 개화산둘레길(개화산 숲길)로
갈아타 방화근린공원으로 내려갔다. 이때 시간은 거의 19시, 햇님도 슬슬 퇴근 준비를 서두르
고 있고 나 역시 피곤한 상태라 여기서 출사를 마치고 쿨하게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개화산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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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진관동 나들이 <경천군이해룡 사패지송금비, 여기소터,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영산군 이전묘역, 숙용심씨묘표>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산책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숙용심씨묘표

▲  마실길 돌탑

▲  숙용심씨묘표

 



 

봄이 한참 익어가던 4월의 끝 무렵, 천하 도보길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는 북한
산둘레길을 찾았다.
이번 둘레길 나들이는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해 내시묘역길 진관동(津寬洞) 구간과 마실
길을 거쳐 은평뉴타운 제각말아파트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천하 탐방밀도 1위(1㎢당 5만
여 명)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북한산(삼각산) 탐방객의 절반 정도가 둘레길 방문자라고
하니 그 인기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진관동 구간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 입구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서울에서 제일 작은 초등학교인 북한산초교가 있다.
(거의 시골학교 분위기임)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인 내시묘역길은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공설묘지에서 진관동 방패교육대
에 이르는 3.5km의 산길이다. 북한천(北漢川)에 걸린 둘레교를 사이로 북쪽은 고양시, 남쪽은
서울 영역으로 평지와 야트막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주이씨 서흥군파묘역과 경천군 송
금비, 경주이씨묘역, 여기소터, 백화사, 중골마을 느티나무 등의 늙은 명소가 있다.

백화사 뒤쪽 산자락에 천하 최대의 내시묘역이었던 이사문 공파(李似文 公派)의 묘역이 있었
다. 바로 그 묘역 때문에 '내시묘역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그 묘역의 규모는 8,800평
으로 45기의 조선 중~후기 무덤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묘는 자헌대
부(資憲大夫)로 승전관(承傳官)을 지낸 김충영(金忠英)의 무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한
곳이 있구나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묘역은 2012년 4월 귀신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후손들이 묘역을 정리해 조경개발업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백화사까
지 길이 뚫리면서 땅값이 많이 오르자 팔았다고 전하며 후손들은 땅값으로 4.8억원을 만졌다
고 한다. 유골은 화장하여 납골당 등에 두었고 무덤에서 나온 유물 또한 후손들이 가져갔으나
무덤에 배치된 문인석(文人石)과 상석(床石) 등의 무거운 석물은 버려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얼마나 비밀리에 콩 볶듯이 했는지 동네 사람들과 백화사 승려들도 묘역이 없어진 것을 뒤늦
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 땅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녔던 그곳은 그렇게 사라져 이제는 한낱 전
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었다. 진작에 국가 사적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이런 일은 막
을 수 있었을 것인데(후손들이 문화재 등급 지정을 신청하거나 동의해야 가능함) 많은 이들의
그릇된 생각과 내시묘역에 대한 저평가, 그리고 철밥통들의 직무유기가 낳은 비극이다.
(현재는 거의 숲이 들어섬)

이제 내시묘역도 없는 내시묘역길이 되었으니 그 이름도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이는 갈비탕
에 갈비가 빠졌음에도 갈비탕을 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적당하
다고 본다. 하지만 북한산국립공원 철밥통들은 이름 변경도 귀찮다며 계속 수수방관하고 있다.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에서 경천군 송금비 구간)
숲이 워낙 삼삼하여 햇살도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긴다.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내시묘역길
산길 주변은 경주이씨 경천군파 문중 땅이라 양쪽에 철책과 나무난간을 둘러
외지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 서울시 지방기념물 35호


한산초교입구에서 내시묘역길을 따라 자연에 묻힌 민가를 여럿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들어
서게 된다. 마치 자연휴양림에 들어온 듯,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이로운
기운을 아낌없이 베풀어 속세에서 오염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그 1폭의 수채화와 같은
오솔길을 가다 보면 조그만 늙은 비석이 활짝 마중을 나온다. 그 비석이 바로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이다. (줄여서 '경천군 송금비', '경천군 송금물침비'라 불림)

경천군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서예가 겸 역관(譯官)으로 이름은 이해룡(李海龍)이다. 본관
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으로 해서체(楷書體)를 꽤 잘 썼다고 하며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한호<韓濩, 한석봉(韓石峯)>에 필적하는 명필이라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어(倭語)에 능숙해 1588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사자관(寫字官)으로
왜열도에 갔다 왔으며 많은 글씨를 그곳에 뿌리고 왔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역관으로 왜군과의 협상테이블에 참여해 화평교섭에 힘썼으며, 1595년 중
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고 1602년에는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가 되었다. 선조(宣祖)
는 왜군과의 교섭에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치하하며 그를 경천군에 봉했으며, 지금의 백화사
북쪽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광해군(光海君)은 1614년 사패지(賜牌地, 제왕으로부터 받은 땅) 적당한 곳에 송금비를 세워
주었는데, 비문에는 큼지막하게 '慶川君 賜牌定界內 松禁勿侵碑' 13자가 쓰여 있다. 그 내용
은 경천군이 하사받은 땅에서 소나무를 벌목하거나 무단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으로 뒷면에
는 '만력(萬曆) 42년 갑인(甲寅) 10월'이라 쓰여 있어 1614년 10월에 세웠음을 알려준다.

▲  조성시기가 쓰여진 송금비 뒷면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비석에 쓰인 송금(松禁)은 나라에서 필요한 목재를 확보하고자 소나무가 많은 산을 선정해 보
호하는 것으로 고려 때 시행되었다. 이곳 송금비는 조선시대 임업정책의 하나인 송금 정책을
보여주는 산증인으로 400년이 넘은 나이에도 무탈하게 잘 남아있으며 조선 임업사에서 꽤 중
요한 유적이자 천하에서 딱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가치가 무지하게 높다. 그래서 2014년 뒤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받게 되었다. 이런 비가 2기가 있다고 하나 현재는 이
곳만 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숨바꼭질 중)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철책 사이로 잠겨진 문이 보일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숲으로 살
짝 몸을 숨기면 이곳의 주인인 이해룡의 묘역을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묘역은 경주이씨 묘역이
라 불린다.
고색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풍기는 비석 주위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 3개가 마
련되어 있다. 워낙 숲속이고 평일에는 인적도 별로 없어 바람의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가 이곳
을 이루는 소리의 거의 전부이다. 북한산둘레길이 닦이면서 비로소 그 존재를 속세에 내보인
존재로 만약 둘레길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둘레길이 많
은 숨겨진 명소를 속세로 꺼내주었음)

* 경천군 송금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  경천군 송금비에서 백화사로 이어지는 내시묘역길
중간에 의상봉과 용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손을 내민다.

▲  고품격 숲길을 자랑하는 내시묘역길 (백화사 직전)

▲  중골마을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0호

경천군 송금비에서 7~8분 정도 남쪽으로 가면 백화사(白華寺) 옆구리이다. 여기서부터 전원(
田園) 분위기를 지닌 중골마을(여기소마을)이 펼쳐지는데, 마을로 들어서면 늙은 느티나무가
바로 마중을 나온다.

이 나무는 높이 19m, 둘레 4.7m의 큰 나무로 추정 나이는 210년 정도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165년) 이곳은 이사문 내시 집안이 살던 곳으로 그 후손이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오늘도 시원한 그늘을 베풀어 자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  여기소(汝其沼)터 표석

백화사입구 정류장에서 백화사로 가는 길목 초입에 여기소터 표석이 있다. 여기소는 소(못)의
이름으로 지금은 실체는 없고, 이름만 남아있는데,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북한산(삼
각산)의 산바람을 타며 아련히 전한다.

조선 숙종(肅宗)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크게 증축했을 때 지방 관리로 있다가 공사 현
장에 파견된 관리가 있었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기생은 그를 보고자 먼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으나 공사 관계자
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너무 열받은 나머지 이곳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그런 사연으로 '너의 그 사람이 잠긴 못'이란 뜻에서 '여기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공사가 끝날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섣부른 행동을 했을까? 옛말에도 급하
면 돌아가라고 했거늘, 그 속담만 얌전히 지켰으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인데 말이다. 아마
도 꽤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북한산캠핑장 주변)
내시묘역길도 그렇고 북한산둘레길은 민가와 농장, 경작지, 개인 토지를 이리저리
피해가느라 우리네 인생처럼 굴곡이 좀 크다.

▲  쭉쭉 뻗은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  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

▲  마실길 북쪽 시작점

내시묘역이 없는 내시묘역길은 여기서 마실길로 간판을 바꾼다. 마실길은 방패교육대에서 진
관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으로 완전 평지 수준이며 북한산둘레길 구간 중 가장 짧
고 편한 길로 살랑살랑 거닐기에 아주 좋다. 하여 마실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코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숲길, 삼천사계곡, 진관사계곡, 숙용심씨묘표, 영산
군묘역, 화의군묘역, 진관동 느티나무 4형제 등의 명소가 있어 볼거리도 풍년이며 진관사(津
寬寺)와 삼천사(三千寺)도 가까워 자연과 산책을 겯드린 답사 코스로 아주 좋다.


▲  마실길 진관천 벼랑길

마실길을 들어서면 진관천 벼랑에 닦여진 나무데크길이 나온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
처럼 길을 낸 것으로 동쪽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벼랑이, 서쪽은 진관천이 삼
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물을 모두 머금으며 창릉천으로 흘러간다.


▲  수풀로 무성한 진관천(津寬川)과 벼랑길(마실길)
예전에는 이곳도 피서의 성지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요즘은 진관사계곡과
삼천사계곡 상류로 많이 넘어갔다.


진관천 벼랑을 통과한 마실길은 삼천사입구에 이른다.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늙은 마애불(
磨崖佛)을 지닌 절로 그곳이 당기면 잠시 둘레길을 놓아두고 갔다 와도 상관없다. (20~30분
정도 걸림)
삼천사입구에서 삼천사계곡 구간에는 농장과 식당이 여럿 있는데 식당 중간을 지나 삼천사계
곡을 건너야 다음 코스로 진행이 된다. 평일에는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맛있는 냄새가 아주 진
동을 하여 그 유혹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  마실길 돌탑 구간

삼천사계곡을 건너면 'S'자로 살짝 구부러진 길이 나오고 길 왼편으로 비슷하게 생긴 돌탑 4
형제가 마중을 한다. 이들 돌탑은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수식용으로 만든 것으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둘레길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준다.


▲  마실길의 오랜 터줏대감,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1호

돌탑을 지나면 울창한 모습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두 눈을 단단히 동여맨다. 그는 동
화 속 푸른 언덕이나 초원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나무로 나이는 약 170년에 이른다.
자꾸만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높이 18m, 둘레 4.2m에 큰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위치는 진관동 132-20번지로 북한산둘레길이 생기기 이전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삼천사와 진관사를 수없이 들락거린 나도
둘레길의 안내로 2012년 이후가 되어서야 그를 만났으니 앞서 경천군 송금비와 더불어 둘레길
이 캐준 소중한 보물이다.


▲  은행나무숲길 옆에 닦여진 돌탑들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숲과 돌탑이 나란히 있으니 마치 신성한 어딘가로
인도당하는 기분이다. 저곳을 지나면 신선이나 어느 영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북한산둘레길에 아름다운 풍경이 꽤 있지만 그중에서 5곳을 뽑는다면 이곳 은행나무숲길과 그
옆에 자리한 170년 묵은 느티나무를 강하게 꼽고 싶다.
이곳은 마실길의 백미(白眉)와 같은 곳으로 수목원이나 휴양림의 그림 같은 숲속길이나 산책
로를 거니는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든다. 느티나무 주변을 곱게 손질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
어 마실의 기분을 진하게 들게 했으며,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로 조촐하게 은행나무숲길을
내어 전남 담양(潭陽)의 명물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에 못지 않은 맵시를 자랑한다.

은행나무숲길은 북한산둘레길이 지나는 명소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홀린 곳으로 집으로 훔쳐
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보고 또 보고 누리고 싶다. 이런 곳에서는 정말 옛 사람들처럼 시 1수
흉내내야 운치가 나거늘, 시적(詩的) 감각이 떨어지고 인간의 하찮은 말과 언어로 자연의 아
름다움을 감히 표현하고 희롱한다는 것도 조금은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닐까 싶어 그냥 탄성만
질러본다.



 

♠ 마실길 끝에서 만난 문화유산들

▲  영산군 이전 묘역(寧山君 李恮 墓域) - 서울 지방기념물 26호

은행나무숲에서 진관사계곡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진관사로 인도하는 도로(진관길)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은 진관사로 이어지며, 서쪽은 은평한옥마을로 마실길은 바로 서쪽에 있는 3거리
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산자락을 가만히 살펴보면 무덤들
이 보일 것인데 그곳이 바로 영산군 묘역이다.

묘역에는 영산군 내외와 그의 아들인 장흥군 이상(長興君 李祥), 손자 이경의(李鏡義), 증손
자 이종(李琮) 등 4대가 묻혀있는데, 가장 위쪽이 묘역의 터줏대감인 영산군의 무덤이고, 제
일 밑이 이종의 무덤이다. 그 묘역으로 가려면 서쪽 3거리에서 마실길을 따라가다가 동쪽(오
른쪽)을 살펴보면 그곳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그 길을 오르면 된다.

묘역의 주인인 영산군 이전(1490~1538)은 조선 9대 군주인 성종(成宗)의 13번째 아들로 숙용
심씨(淑容沈氏)의 소생이자 연산군(燕山君)과 중종의 이복 동생이다. 그는 문무에 매우 능했
다고 하며 말을 매우 잘탔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 시절의 어느 날, 그는 연산군, 진성대군(晋城大君, 후에 중종)과 함께 도성(
都城) 밖 금표(禁標) 구역으로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다. 사냥을 마친 연산군은 무엇을 시험
하고자 함인지 진성대군에게
'나는 동대문으로 들어갈테니, 너는 남대문(南大門)으로 들어가라. 만약 나보다 늦게 도착하
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야!!' 이랬다.
그 말을 들은 진성대군은 크게 쫄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자, 영산군이 진성대군에게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제 말이 전하(殿下, 연산군)께서 타신 말보다 훨씬 빠르니 제
가 대신 하겠습니다'
말하면서 진성대군을 따라가니 말이 갑자기 나는 듯이 도망쳐버렸고, 도
성에 이르니 조금 후에 연산군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영산군이 나서준 덕에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끈 진성대군은 1506년 박원종(朴元宗)
과 성희안(成希顔), 홍경주(洪景舟) 등이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
에 올랐다. 후대 사람들은
'영산군은 중종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말했다고 하며 중종 자신도 연산군 시절 그에게 받
은 신세로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중종 시절 영산군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1538년 48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시호는 충
희공(忠僖公)으로 부인은 2명이 있었는데, 전처는 금릉군부인 청송심씨(金陵郡夫人 靑松沈氏)
이며, 후처는 교성군부인 경주정씨(交城郡夫人 慶州鄭氏)이다.

묘역은 북쪽과 서쪽 지형이 다소 바뀌고 신도비가 묘역 앞으로 이전된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은평뉴타운 개발의 삽질이 막 시작되던 2006년에 강제 이전될 처지에 놓였으나 다
행히 제자리를 지켰다.
16~17세기 왕족 묘역의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묘비(묘표)와 문인석, 상석(床石)의
상당수는 그 시절 것이라 가치가 상당해 2007년 2월에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
다. 또한 인근에 자리한 화의군 묘역과 달리 사당(祠堂)은 따로 없다.

▲  충희공 영산군 신도비(神道碑)
근래 마련된 신도비로 원래는 여기서
북서쪽에 있었다.

▲  이종(李琮) 내외묘와 묘비(墓碑)
영산군의 증손자인 이종의 합장묘로 근래
만든 묘비와 망주석을 지니고 있다.


▲  영산군의 손자인 이경의(李鏡義) 묘

이종 묘 바로 위에는 그의 부모이자 영산군의 손자인 이경의 내외의 무덤이 있다. 그는 창원
황씨 부인과 합장(合葬)되어 있으며 후처인 곡산노씨(谷山盧氏)는 옆에 따로 작은 무덤을 만
들었는데, 이종의 무덤과 달리 문인석도 1쌍 갖추고 있다.

▲  이경의 묘와 묘비

▲  복스러운 모습의 문인석(文人石)


▲  영산군의 아들인 장흥군 이상(長興君 李祥)의 묘

이경의 묘 바로 윗쪽에는 그의 부모이자 영산군의 아들인 이상 묘가 있다. 봉긋하게 솟아있는
왼쪽 봉분(封墳)에는 장흥군 이상, 오른쪽 봉분에는 죽산안씨 부인이 잠들어 있으며, 묘비는
근래 새롭게 만들었지만 상석과 혼유석은 16세기 모습 그대로로 고색의 때가 짙다.


▲  조촐한 모습의 영산군 묘

묘역 제일 위쪽의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하여 아들과 손자들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영산군 내
외의 무덤은 2기로 이루어져 있다. 묘비를 갖춘 왼쪽 묘는 영산군과 교성군부인 경주정씨(交
城郡夫人 慶州鄭氏)의 합장묘이고, 오른쪽은 금릉군부인(金陵郡夫人) 청송심씨의 묘이다.


▲  장대한 세월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3기의 비석

영산군묘 한쪽에는 3기의 비석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오른쪽의 작은 비석
이 초창기의 영산군묘 묘표(墓表)로 1538년에 지어졌다. 그 묘표가 노쇠하자 이수를 갖춘 비
석을 새로 장만하니 그것이 가운데에 있는 검은 피부의 비석이며, 그것 역시 세월을 예민하게
타자 지붕돌 비석을 새로 마련했다. 허나 그마저 지금 무덤 앞에 있는 비석에게 자리를 내주
고 현재 자리로 밀려나 한참이나 선배들인 비석들과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마치 3대가 나란히 기념촬영에 임하는 듯한 모습으로 오른쪽에 작은 묘표가 할아버지, 가운데
비석이 그의 아들, 그리고 지붕돌 비석이 손자 같다.


▲  영산군 옛 묘표의 이수(螭首) 부분
물결무늬 구름 사이로 이무기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장면이 담겨져 있다.

▲  영산군묘를 지키는 문인석

영산군묘는 호석(護石)이 없는 조촐한 봉분 앞에 상석과 묘표를 두고 그 앞에 장명등(長明燈)
과 문인석 1쌍을 두었다.. 홀(忽)을 쥐어들고 서로를 연모하듯 바라보는 문인석은 무려 480년
이 넘는 기나긴 세월에도 표정 하나 고치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무덤을 지킨다.

왼쪽 문인석(왼쪽 문인석 사진) 측면에는 3개의 구멍이 있다. 이들은 6.25시절에 구파발 지역
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흔적으로 북한군이 쏜 것으로 보이는 총탄 3개가 그의 몸을 가격해
저렇게 치유하지 못할 상처를 안게 되었다. 겉으로야 표정관리하며 태연하게 서 있지만 얼마
나 아팠겠는가.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될 그 전쟁은 이 땅의 사람 뿐만 아니라 말을 못하
는 저들에게도 무수한 비극을 안겼다.

* 영산군 이전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39


▲  숙용심씨묘표 주변

진관동 느티나무 3거리에서 진관사입구 교차로 방면(서쪽)으로 몇 걸음 가면 오른쪽에 '셋이
서문학관'이란 2층 한옥이 있다. 거기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낮은 철책이 둘러진 야트
막한 동산이 있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이 손을 내민다. 그 손에 이끌려 그 길을 오르
면 그 정상에 숙용심씨묘표와 제단이 있다.

숙용심씨(淑容沈氏, 1465~1515)는 성종(成宗)의 여러 후궁 중의 하나로 세조(世祖) 즉위에 큰
공을 세웠던 원종공신(原從功臣) 심말동(沈末同)의 딸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영산군을
비롯한 이성군(利城君), 경순옹주(慶順翁主), 숙혜옹주(淑惠翁主)등 2남 2녀를 두었으며, 내
명부(內命婦)의 4품인 숙원(淑媛)까지 올랐다. 1515년에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중
에 3품인 '숙용(淑容)'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심씨의 묘역은 분명 서울 근교 어딘가에 마련되었으나 그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잠겨있다.
조선시대 왕족의 무덤 중 거의 흔치 않게 무덤 위치가 날라간 것이다. 하여 산사태나 홍수 등
의 천재지변으로 갑자기 사라지거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실전(失傳)된 것으로 보이며, 그의
무덤 앞에 세웠던 묘표(묘비) 역시 500년 가까이 행방이 묘연했다.

이후 한참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 1999년 6월, 부산일보 동경지사장이자 한일역사공동연구학회
장으로 있던 최성규(崔性圭)가 우연히 왜열도 동경(東京) 미나토구(區)에 있는 '다카하시 고
레키요(高橋是淸) 기념공원'에서 이 묘비를 발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산군과 이성군파 후손들은 즉각 '묘비환원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왜국 정부
와 동경시에 묘비 반환을 요구했고, 주일(主日) 한국문화원과 한국대사관에서도 적극 그들을
도왔다. 그렇게 1년의 협상 끝에 동경시가 반환에 협조하여 2000년 6월 16일 비석이 있는 공
원에서 후손들과 미나토구청장이 반환 기념행사를 열었고, 7월 3일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허나 이 비석이 언제 어떤 경로로 왜열도로 넘어갔는지, 어찌하여 동경의 조그만 공원에 있게
되었는지는 전혀 전하는 것이 없다. 그 진실은 오직 비석만이 알 것이나 그 역시 묵비권을 행
사하고 있어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심씨의 묘역을 파괴한 왜군이 가져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비석을 되찾은 영산군과 이성군 후손들은 영산군 묘역 맞은편 북한산(삼각산)이 잘바
라보이는 언덕에 자리를 닦아 사라진 묘역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낼 제단(祭壇)을 쌓고 그 위
에 이 묘비를 안착시켰다.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 등 제사에 필요한 시설을 세워 매년 제사를
지내면서 늘 주변을 손질하는 등 각별하게 관리를 하고 있다.

심씨의 무덤은 거의 영구적으로 사라졌고 묘표에도 그 위치가 나와있지 않다. 그 묘표마저도
다른 나라로 넘어가 자칫 공원의 미아로 그렇게 썩을 뻔했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발견되어 고
국으로 돌아와 아들의 묘역을 마주보고 있는 곳에 둥지를 틀었으니 심씨도 이제 그 한을 풀고
지하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을 것이다.

숙용심씨묘표는 이런 우울한 사연으로 망향의 묘비란 별명을 지니고 있는데, 그와 함께 2005
년 겨울, 동경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서 우리나라를 통해 고향인 함경북도로 돌아간 정문
부(鄭文孚) 장군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도 다시 되찾기까지 그 과정은 가히 한 편의 영
화와 같았다. 다른 나라로 빼돌려진 문화유산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많
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야 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귀중한 유물이라 하겠다.
이들은 그래도 고국으로 돌아와 거의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이
다. 그런 케이스는 아직 흔치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의 수많은 문화유산이 고국을 꿈
꾸며 타국살이를 전전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될 것이며 언젠가는 그들을 싹 되찾아와야 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국력을 증강시켜
돈으로 밀어부치거나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되찾아오는 것이지만 우리 국력에 그것도 쉽지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구의 평화와 고토(故土) 수복을 위해 왜열도와 중원대륙, 만주를 공격하게 된
다면 그곳에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 외에 그들의 문화유산과 보물도 싹 긁어왔으면 좋겠다. 더
불어 지구 정화를 위해 오랑캐들도 싹 청소 좀 하고 말이다.


▲  유리막에 감싸인 숙용심씨묘표(서울 지방기념물 25호)
비석이 작고 이곳이 바깥이라 도난의 위험이 늘 도사린다. 하여 두껍게 유리막을
씌워 그를 보호하고 있다. 비석 입장에서는 좀 답답하겠지만 그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가 없으니 이런 걸 두고 필요악이라 하는 모양이다.


숙용심씨묘표는 비신(碑身)과 머릿돌(이수)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 비신에는 해서(
楷書)로 '숙용심씨지묘(淑容沈氏之墓)'라 쓰여 있는데, 글씨의 크기가 깨알같이 작아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보일 것이다.
비석이 꽂힌 비좌(碑座)는 특이하게 2단으로 이루어져 통비(通碑)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2단으로 된 비좌는 이 땅에서 이 묘표가 거의 유일하다. 그러니 그의 가치와 의미는 꽤 남다
른 것이다. 비좌 밑에는 연꽃잎이, 위로는 복련(覆蓮)이 새겨져 있으며 그 측면에는 안상(眼
象)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비석 뒷부분에는 앞면과 달리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다.


▲  숙용심씨묘표 이수 앞부분

이수에는 화려해 보이는 무늬들이 잔뜩 새겨져 속세에서 오염된 두 눈을 호강시킨다. 그 무늬
는 꽃잎이나 소용돌이처럼 생긴 구름무늬로 그 무늬 사이로 뿔과 수염이 달린 이무기(반룡)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얼핏 보면 좀 복잡해 보여서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살펴보면 하나, 둘 보일 것이다.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이무기의 모습이.

비석의 머릿돌(이수)에 구름무늬가 나타난 것은 조선 초부터로 이곳처럼 구름무늬와 용이 함
께 새겨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니 그만의 매력을 가진 개성이 넘치는 비석이다. 이건 지방
기념물에 둘 것이 아니라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보물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흔치
않은 사연에 2단으로 된 비좌, 그리고 구름무늬와 용이 같이 새겨진 이수까지, 겉은 조그만
비석이지만 대충 넘기기에는 그의 존재는 너무나 크다.

* 숙용심씨묘표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26


▲  구름무늬로 가득해 침침한 두 눈을 빙빙 돌게 만드는 이수의 뒷부분
구름무늬가 내소사(來蘇寺) 대웅전의 꽃창살과 많이 닮았다.

▲  2001년에 세워진 숙용심씨묘비 환원기념비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아주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허나 거의 한자 투성이에 문단 간격도
아주 각박하여 읽기가 좀 고통스럽다. (오늘도 고통받는 나의 두 망막)

이렇게 하여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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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산동반도 청도(칭따오) <절강로천주교당, 잔교와 회란각, 소어산공원, 칭따오맥주박물관>

산동반도 청도 (절강로천주교당, 잔교, 소어산공원, 칭따오맥주박물관)



' 산동반도 청도(칭따오) 여름 나들이 '

소어산공원 남조각에서 바라본 청도(칭따오) 시내
▲  소어산공원 남조각에서 바라본 청도(칭따오) 시내

절강로천주교당 잔교공원에서 바라본 잔교

▲  절강로천주교당

▲  청도 잔교

 



 

여름 제국의 위엄이 막바지에 이르던 8월의 끝 무렵, 서해바다 너머에 자리한 산동반도
<山東半島, 산동성(山東省)>를 찾았다.

중원대륙의 일원인 산동반도는 고조선(古朝鮮)과 백제(百濟),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李
正己)의 제(濟), 그리고 신라와 발해의 후손 및 여진족이 세운 금(金)이 다스렸던 우리
의 옛 영역으로 우리 귀에도 꽤 익은 동이족 출신에 공자와 맹자, 강태공(姜太公)이 활
동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또한 신라가 산동반도와 중원대륙에 많은 해안 지역을 장악하
여 큰 세력을 일구었다. <그 흔적이 신라방(新羅坊)> 그만큼 산동반도는 우리와 인연이
각별한 곳이다.
하지만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지금은 중국이라 불리는 중공(中共, 중화인민공화국
)이란 이상한 공산국가가 거저 차지하여 꿀을 빨고 있는데, 비록 남의 땅으로 전락하긴
했으나 언젠가는 반드시 되찾아 영유해야 될 땅이다.

이번 산동반도 나들이는 3박4일 일정으로 내 생애 첫 중원대륙 나들이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아침 일찍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로 이동, 일행들과 중공
국적의 산동항공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 정도를 비행해 산동성의 중심 도시인 제남(濟
南, 지난)에 도착했다.
제남 시내에서 표돌천과 대명호 등을 둘러보고 제녕(濟寧, 지닝)으로 이동하여 곡부(曲
阜, 취푸)의 공자(孔子) 유적(공묘, 공부, 공림), 추성(鄒城, 쩌우청)의 맹자(孟子) 유
적(맹묘, 맹부, 맹림)으로 둘째 날을 배불리 채우고 태안(泰安, 타이안)으로 넘어갔다.

태안에서는 중원대륙 오악(五嶽)의 중심 산인 태산(泰山, 타이산)과 대묘(岱廟, 다미먀
오)로 셋째 날 여로를 채우고 청도(靑島, 칭따오)로 이동했는데, 태산에서 청도 중심부
까지는 400km가 넘는 거리라 바로 넘어가지 않고 그 중간인 유방(潍坊, 웨이팡)시내 호
텔에서 1박을 했다. (제남과 곡부, 추성, 태산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음)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호텔 조식을 섭취하고 2시간을 더 달려 청도 시내의 중심부인 시
남구(市南區, 스난구)에 이르렀다. 바로 이곳이 이번 산동반도 나들이의 마지막 메뉴로
청도 시내에 대표적인 명소들은 상당수 시남구 지역에 몰려 있다.



 

♠  독일이 산동반도 통치 시기에 세운 20세기 초기 성당
절강로천주교당(浙江路天主教堂)

▲  절강로천주교당 입구 주변
성당으로 인도하는 길 좌우로 식당과 숙박업소,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산동반도 남쪽에 자리한 청도(칭따오)는 중공에서 4번째로 큰 항구 도시이다. 산동성의 대표
적인 항구 산업도시로 산동성 지방정부와 동등한 경제권을 지니고 있는데, 7개의 구와 5개의
시(市), 900만 정도의 인구를 지니고 있다.
역사가 나름 오래된 해안 도시로 옛 조선(고조선)과 백제, 신라, 금이 이곳을 다스렸으며, 백
제 때는 성양(城陽)이라 불렸는데, 백제 제왕이 성양태수(太守)를 임명해 파견했다는 기록이
여실히 전하고 있다. <청도시에 '성양구'가 있음> 금이 사라진 이후 작은 어촌으로 머물러 있
다가 1891년 여진족(만주족)의 청나라가 군사시설을 닦으면서 다시금 존재감을 드러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운이 좋게 승리한 왜(倭)는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으로 요동반도를 거
저 먹으려고 했으나 러시아와 독일, 영국이 태클을 건 이른바 삼국간섭(三國干涉, 1895년)으
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독일은 청나라를 도와준 대가로 1897년 청도 지역을 조차지(租
借地)로 얻게 된다.
독일은 청도를 극동 근거지로 삼이 크게 키웠고, 이곳을 발판으로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다.
청도 중심지에는 19세기 말~20세기 초반 서양식 건물이 많이 전하고 있어 일명 '중공 속의 유
럽'으로 통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독일이 이 지역을 잠깐 차지하면서 남긴 것들이다.


▲  하늘을 찌르는 절강로천주교당의 위엄

청도 중심부인 시남구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절강로(저장루)천주교당이다. 그는 절강로와
비성로가 만나는 곳 언덕에 자리한 아주 큰 성당으로 독일이 1932년에 짓기 시작해 1934년에
완성을 보았다.
그 시절 독일의 큰 자부심과 저력이 고스란히 깃든 곳으로 주황색 지붕을 지닌 쌍둥이 첨탑(
종탑)을 하늘 높이 내밀고 있는데, 강철과 벽돌의 혼합 골조로 외장은 황색 화강암으로 지었
다. 성당 면적은 2,470㎡, 본당 길이 80m, 본당 내부 천장 18m, 종탑까지 높이 56m, 탑 끝에
매달린 십자가는 4.5m로 총 높이는 60m에 이른다.
본당의 수용 인원은 1,000명으로 뒤쪽에 큰 제단이 2개 있고, 좌우 아래쪽에 대칭형으로 작은
제단 2개가 있으며, 위쪽 돔형 천장에는 아름다운 성화(聖畵)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종탑 종
루 안에는 4개의 큰 종이 있다.

중공의 천박한 개짓거리인 문화대혁명('문화대
학살'이라 읽는다) 시절에 상당 부분이 파괴되
는 고통을 겪었으며, 1980년 청도시에서 비용
을 지원하여 1981년에 복원되었다.
이때 문화대혁명(학살) 시절에 파괴된 십자가
를 찾아서 언덕에 묻었으며, 1982년 4월 부활
절에 속세에 정식 개방되어 자유의 공간이 되
었다.

▲  밑에서 바라본 절강로천주교당

 

주황색 지붕과 첨탑, 하얀색과 누런색 피부가 조화를 이루는 예술적인 성당으로 주변에 독일
이 심어놓은 서양식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하여 잠시나
마 유럽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성당 둘레로는 조약돌길이 닦여져 있으며, 청
도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봐야 되는 청도의
대표급 명소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다. 특히
신혼부부와 예비부부들이 결혼 사진을 찍는 명
소로 쓸데없이 유명한데, 우리가 갔을 때도 결
혼 사진을 찍는 중공 애들로 완전 난장판을 이
루었다.
자유의 공간인 바깥과 달리 펜스가 둘러진 성
당 안쪽과 내부는 유료의 공간이라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다. 입장료는 그리 각박한
편은 아니지만 딱히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
어서 이렇게 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성당 개방시간 8~17시, 일요일 9~17시)

◀  정면에서 바라본 절강로천주교당
성당이 얼마나 큰지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개미 떼로 만들어버린다.


▲  절강로천주교당 옆에 자리한 20세기 초기 독일 건물
천주교당 주변에는 독일이 심어놓은 건물이 즐비해 작은 유럽을 방불케 한다.



 

♠  청도의 오랜 상징물이자 19세기 근대 유적
잔교(棧橋, 짠치아오)

▲  바다를 향해 길게 팔을 뻗은 잔교

절강로천주교당을 둘러보고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중산로로 들어섰다. 이곳은 먹자골목이 크게
형성되어 있어 늘 북새통을 이루는데, 그런 인파를 비집고 10분 정도 가면 시원스런 서해바다
와 함께 청도의 오랜 상징물이자 필수 관광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잔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남구 앞바다인 회천만(匯泉灣)에 자리한 잔교는 1891년 청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면서 지어
졌다. 육지 쪽은 둑, 회란각 쪽은 다리 형태로 지어진 둑과 다리가 혼합된 형태로 1931년 해
군 전함을 정박시키고자 크게 증축되었는데, 잔교의 길이는 440m, 폭 10m로 다리 양쪽에는 난
간을 두르고 연꽃무늬 램프를 두었으며, 근처 부두에 원형 방파제가 있어 이 일대 파도를 막
아주는 역할을 했다.
청도시에서 1984년과 1998년에 전면 보수를 벌였으며, 이때 화강암을 사용해 견고하게 다지면
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둑과 다리의 폭을 넓히고 램프 12개를 설치했으며, 그
로 인해 원형을 크게 잃었다.

잔교 끝에는 황금색 유리기와를 눌러쓴 2층짜리 회란각(回瀾閣. 후이란거)이 있어 잔교의 상
큼한 장식물이 되어주고 있는데, 칭따오맥주를 보면 2층짜리 기와집이 그려져 있다. 그 기와
집이 바로 잔교 회란각이다.


▲  잔교의 어렸을 적 사진 (20세기 초/중기)

▲  잔교 해변에서 바라본 잔교와 회란각

▲  잔교 동쪽 해변(잔교공원)
잔교 주변에는 모래사장을 지닌 작은 해변이 펼쳐져 있다. 잔교를 포함한
해변 일대는 잔교공원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잔교 관광객과 해변
피서객들이 뒤엉켜 시장통을 이룬다.

▲  잔교 서쪽 해변(잔교공원)
해변 백사장은 피서삼매에 빠진 중공 애들로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오늘도 크게 고통받는 우리의 서해바다(황해바다).

▲  회란각 서쪽 둑에서 바라본 잔교

▲  회란각 동쪽 둑에서 바라본 잔교

잔교를 건너는 인파들로 잔교를 이루는 다리와 둑이 거의 무너질 지경이다. 사람이 그냥 많은
것이 아닌 너무 미치도록 많다.


▲  잔교에서 바라본 잔교공원 동쪽 해변

▲  잔교의 끝을 잡고 있는 회란각

잔교는 무료의 공간이나 정작 회란각 내부는 별도의 입장료를 뜯는다. 앞서 절강로천주교당도
그렇고 무료로 해방해도 충분한 곳을 금줄을 치고 돈을 받아먹으니 역시나 돈에 환장한 청도
시와 사이비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중공 정부답다. (회란각 내부는 딱히 볼거리도 없으며, 내
부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음)


▲  회란각 서쪽 둑

회란각 서쪽과 동쪽 둑에는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이들은 배를 정박하던 곳이나 이제
는 바다를 구경하거나 해조음을 듣는 곳으로 조용히 살아간다. 수심이 깊은 곳이나 내가 갔을
때는 수영복 차림에 지역 작자 하나가 홀로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있었다. 수영을 하
려면 잔교공원 백사장에서 하면 될 것을 굳이 이런 곳에서 요란법석을 떨어야 했는지 정말 의
문이다. 심지어 회란각 동쪽 둑에서는 살짝 소변을 보는 작자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역시나
중공 애들의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는다. (잔교 관리인도 제재를 하지 않았음)


▲  회란각 동쪽 둑

▲  회란각에서 바라본 서쪽 바다 (회천만) ①
회천만 해변에는 가지각색의 고층빌딩이 즐비하여 산동반도 제일의
항구, 산업, 해양관광도시로서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준다.

▲  회란각에서 바라본 서쪽 바다 (회천만) ②

▲  잔교 서남쪽 바다 (회천만)
바다 멀리 보이는 곳은 청도 지역의 서남쪽을 이루고 있는
황도구(黃島區, 황다오구) 지역이다.

▲  평화로운 모습의 잔교 동쪽 바다

▲  잔교공원 북쪽에서 만난 서양식 근대 건축물



 

♠  청도 중심부의 지붕이자 일품 조망 명소
소어산공원(小魚山公園, 샤오위산궁위엔)

▲  소어산공원 정문(북문)

사람들로 오지게 복잡한 잔교를 벗어나 전용버스를 타고 부근에 자리한 소어산공원으로 이동
했다.
소어산공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소어산은 해발 60m의 낮은 뫼로 청도 시남구의 대표 지붕이다.
청도 도심의 유명 명소로 늙은 명소나 특별한 볼거리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니나 청도 도심(시
남구 지역)과 앞바다(회천만)가 시원스럽게 바라보이는 일품 조망을 지니고 있다. 즉 청도 도
심과 앞바다 조망을 위해 준비된 곳이다.

남쪽으로 시남구 앞바다인 회천만(匯泉灣), 북쪽으로 팔관산(八關山)과 이어져 있으며, 예전
에는 아문산(衙門山)이라 불렸으나 1922년 산 주위로 '어산로(魚山路)'란 길이 닦이면서 작은
물고기를 뜻하는 소어산으로 이름이 갈렸다.
1984년 청도시에서 이곳에 공원을 씌워 소어산공원이라 했으며, 공원 정상에는 8각3층정자인
18m 높이의 남조각을 비롯해 벽파정, 옹취정 등의 정자가 닦여져 조촐하게 쉼터 역할을 한다.
조그만 뒷동산공원으로 조망 외에는 볼거리가 빈약하나 그럼에도 입장료를 뜯고 있으며, 관람
시간은 8시부터 17시까지이다. (관람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


▲  녹음이 깃든 소어산공원 산책로 (정문에서 남조각 방향)

▲  소어산공원에서 바라본 시남구 지역 (서쪽 방향)

중공 애들은 청도를 두고 '홍와녹수남천벽해(紅瓦綠樹藍天碧海)' 즉 붉은 지붕과 녹색 숲, 푸
른 하늘, 파란 바다의 도시라고 한다. 소어산공원에 올라서 청도 시내를 바라보면 그 말이 그
리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공원 주변으로 붉은 지붕을 지닌 집들과 푸른 숲이 꽤 포진해 있는데, 붉은 지붕의 건물 중에
는 20세기 초/중기 것도 많지만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지어진 것도 제법 된다. 이는 이곳만
의 독특한 풍경을 최대한 살리려는 청도시의 정책 때문이다.

▲  푸른 기와지붕을 눌러쓰며 천하를
굽어보는 벽파정(碧波亭)

▲  녹색 지붕을 지닌 옹취정(擁翠亭)과
'ㄷ'구조의 회랑

      ◀  하늘 높이 솟은 남조각(覽潮閣)
소어산 정상에 자리한 남조각은 3층8각의 기와
건물로 높이는 18m이다. 소어산공원의 상징적
인 존재로 3층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저곳에
서 바라보는 조망이 아주 일품이니 꼭 올라가
보자.


▲  남조각에서 바라본 회천만과 청도제1해수욕장
같은 서해바다임에도 우리 본토는 갯벌과 조석 간만의 차이가 커서 종잡을 수가
없지만 산동반도 해변은 우리의 동해/남해바다 같은 모습이다.

▲  확대해서 바라본 청도제1해수욕장 주변
부산 해운대나 광안리 해변의 축소판 같다.

▲  남조각 조망 중 가장 백미로 통하는 서쪽 방향 (잔교 방향)
붉은 지붕 집들로 가득한 언덕 너머로 회천만과 잔교, 시남구의
키다리 빌딩들이 앞다투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빨간 지붕의 물결, 남조각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팔관산 방향)

▲  남조각에서 바라본 동쪽 방향 (바로 밑에 보이는 정자는 옹취정)

▲  남조각에서 바라본 서남쪽 방향
회천만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황도구(황다오구) 지역이다.

◀  옹취정 벽에 새겨진 물고기 형상
소어산이란 작은 물고기를 뜻한다. 하여
산 이름에 걸맞게 물고기 2마리를
귀엽게 포장하여 새겼다.

▲  남조각에 걸린 그림 같은 사진
남조각에서 바라본 잔교와 회천만 주변
풍경이다.

▲  소어산공원을 마무리 짓다
(소어산공원 정문 안쪽)



 

♠  청따오맥주의 생산 현장이자 천하 제일의 맥주박물관
칭따오맥주박물관<비주박물관(啤酒博物館)>

▲  칭따오맥주박물관으로 살아가고 있는 옛 공장 건물

소어산공원을 둘러보고 시남구 북부에 자리한 칭따오맥주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원래는 팔대관
(八大關, 빠따관)을 가려고 했으나 기왕 칭따오맥주의 고장인 청도에 왔으니 칭따오맥주박물
관을 보자는 의견이 커서 그곳으로 변경했다.

천하 맥주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칭따오맥주는 맥주 전문가인 독일 애들이 만든 것으로 1903
년 청도에 붉은 피부의 맥주공장을 세워 독일식의 맥주를 내놓은 것이 그 시작이다. 독일은
그들의 맥주 제조기술을 이곳에 아낌없이 풀어놓았는데, 맥주 제조에 필요한 물은 청도 시내
동쪽에 있는 노산(崂山, 라오산)의 지하 100m에서 소환했다.
독일이 물러나면서 맥주공장은 중공이 거저 꿀꺽했으며 그들의 맥주 제조기술까지 꿀꺽해 단
단히 재미를 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중공은 땅부터 해서 거의 모든 것을 거저 꿀꺽했다. 그
러면서도 하는 짓거리는 완전 소인배보다 더하니 그 너른 땅덩어리가 아깝다.

2001년에 기존의 맥주공장을 손질해 칭따오맥주박물관을 열었는데, 청도의 대표 명소이자 천
하 맥주박물관의 대표 성지(聖地)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으며, 칭따오맥주의 100년 역사와 문
화, 생산공예, 다기능구역 등 3개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미니어처 등으로 맥주 제조
과정과 여러 제조 장비들, 세계 여러 나라의 맥주를 다루고 있다.

맥주박물관은 유료 공간으로 비싼 입장료를 뜯고 있으며, 관람객들에게는 칭따오맥주와 안주
를 무료로 제공하나 양은 매우 적다. 그리고 맥주를 빚으면서 만든 찌꺼기 같은 것도 주는데
맛이 좋다.
매년 8월 중순에는 2주 정도 칭따오 맥주축제가 열리는데, 이때 세계 20여 개 맥주회사가 참
여하며, 다양한 공연과 불꽃놀이, 맥주마시기 대회 등이 열린다.

그렇게 명성이 자자한 맥주이건만 2023년 가을, 공장 일꾼이 맥주 제조 현장에 수시로 소변을
갈긴 사실이 드러나 온 천하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로 인해 칭따오맥주는 소비량이
폭풍 감소했고, 이미지도 완전 개판에 똥판 수준이 되었다.
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 칭따오맥주도 가끔 찾는 편이었는데, 그 사건으로 칭따오맥주를
쓰레기 맥주로 간주해 내 데이터에서 완전히 지웠다. 아무리 맥주가 고프더라도 속세에 크게
실망감을 준 그런 맥주를 절대로 가깝게 대하면 안된다.

▲  칭따오맥주 공장 건물

▲  유럽식으로 산뜻하게 지어진
칭따오맥주 공장 본관

 ▲  맥주박물관 앞에 있는 재미난 조형물

▲  칭따오맥주박물관 현관에 걸린
청도비주(청도맥주) 간판


▲  1903을 강조한 옛 공장 건물 (1903은 칭따오맥주의 탄생 연도)

맥주박물관으로 살아가는 옛 공장 건물은 붉은 피부의 벽돌집으로 푸른 담쟁이덩굴을 걸치고
있어 고색의 내음을 크게 풍긴다. 박물관이긴 하나 맥주공장의 역할도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


▲  1930년대 맥주 제조 과정 (맥주박물관 내부)

▲  칭따오맥주병 제조 과정

▲  맥주박물관 전시실 내부


▲  지금도 한참 움직이고 있는 맥주박물관 내부 맥주병 가동 공간
여기서 생산된 맥주병은 소변 사건으로 얼룩진 칭따오맥주를 머금고
중원대륙은 물론 다른 나라로 팔려나간다.

▲  무수히 생산되는 칭따오맥주의 위엄 ①

▲  무수히 생산되는 칭따오맥주의 위엄 ②

▲  칭따오맥주박물관 쉼터

맥주박물관 관람의 마지막 공간은 술집 스타일의 쉼터이다. 이곳에 이르면 칭따오맥주와 안주
를 벼룩의 간 수준으로 제공하는데, 더 먹고 싶다면 돈을 건네고 사먹어야 된다. (칭따오맥주
병과 캔맥주를 판매하고 있음)
박물관 내부는 사람이 오지게 많고, 공간이 다소 어두웠으며, 관람시간을 너무 촉박하게 줘서
사진에 별로 담지 못했다. 그 점이 실로 안타까웠지만 나에게는 일정을 조정할 칼자루가 없었
다.

쉼터에서 맥주와 안주를 간단히 들고 콩 볶듯이 밖으로 나와 1시간 남짓 머문 칭따오맥주박물
관과 작별을 고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자 전용버스를 타고 시남구 동부에 있는 경복궁(景福宮
, 징후공)이란 한식당으로 이동했는데, 제남에 도착한 첫날부터 오늘까지 4일 동안 호텔뷔페
를 포함해 중원대륙 음식을 섭취했다. 음식의 절반 이상은 입맛에 맞아서 둘째 날까지는 열심
히 잘 먹었으나 셋째 날부터는 느끼하고 물려서 정말 먹기가 싫었다. 솔직히 냄새도 맡기 싫
을 정도였지. 하여 셋째 날 저녁과 넷째 날 호텔 조식은 거의 대충 먹었다.
그런 상태에서 경복궁에서 먹은 한식은 그야말로 빛과 소금이었다. 여기서는 김치찌개와 파전
을 먹었는데, 반찬도 우리가 흔히 먹는 것들이 나왔다. 중원대륙 음식에 제대로 지쳐있던 차
에 얼마나 입맛에 착착 맞았는지 밥을 무려 2그릇이나 비웠고, 반찬도 싹싹 긁어먹었다. 여기
서 먹은 한식으로 몸이 완전히 해독이 된 기분이다.


▲  한식당 경복궁에서 섭취한 칭따오맥주

즐겁게 점심을 먹고 시남구 시내를 가로질러 청도공항으로 이동했다. (중간에 공항 근처 상가
에 잠시 들려 쇼핑을 했음) 이제 청도 시내를 비롯한 3박4일에 걸친 산동반도 나들이는 그 종
점에 이른 것이다.
청도공항에 이르러 4일 동안 길잡이를 해준 조선족 가이드와 작별을 고하고 각자의 짐을 챙겨
공항청사로 들어가 출국수속을 거치고 우리 본토로 옮겨줄 비행기를 기다린다. 3박4일이 정말
찰라처럼 흘렀지만 이제는 산동반도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보다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 뿐이다. 다음날 바로 일상으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18시대에 인천공항으로 가는 산동항공 비행기를 예약했는데, 인천공항을 비롯한 수도
권에 태풍으로 인해 큰 비가 내려 비행기 운행에 비상이 생겼다. 내가 없는 사이에 남쪽에서
태풍이 올라와 비행기 길에 훼방을 놓았던 것이다. 하여 17시 이후부터 비행기는 제시간에 뜨
지 못하고 계속 지연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1~2시간이면 되겠지 싶었다. 허나 그 시간대를 넘
어 21시가 넘었고, 계속 delay된다는 안내방송만 연거푸 나온다. (청도공항 안내방송은 우리
본토 방향 비행기에 한해 중공말, 영어, 우리말 순으로 해주었음)
그런 상황에 산동항공 잡것들은 기다림에 지친 승객들에게 저녁밥도 제공하지 않는 등, 서비
스 개판으로 일관하자 승객들이 크게 항의하니 그제서야 저녁거리를 제공한다. 저녁은 느끼한
중원대륙 음식인데 먹기가 싫었다. 다행히 일행들이 컵라면을 구해와 그 컵라면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 저녁을 때웠고, 나머지는 쿨하게 버렸다.

그렇게 공항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며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만 애타게 기다리다가 자정이
넘어서 새벽 1시에 드디어 비행기가 준비되어 승객들을 태웠다. 무려 7시간이나 지연을 먹은
것이다.
승객을 태운 산동항공 비행기는 청도공항을 이륙, 서해바다를 가로질러 1시간 정도를 비행해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활주로에 바퀴를 내렸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으나 시간은 새벽 2
시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서울로 넘어가는 심야공항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시간이 거의 임박했다. 하여
그것을 타고자 일행들과 서둘러 작별하고 입국수속을 서둘러 마친 다음, 인천국제공항 제1터
미널로 나와 서울로 가는 서울공항버스 N6001번(인천국제공항↔서울역)을 타고 서해바다와 한
강을 건너 4일만에 서울 도심으로 진입, 서울역에 두 발을 내렸다. 앞서 비행기에서 밤참거리
로 기내식을 주었는데, 중원대륙 음식은 손도 대지 않고 가져왔다가 서울역 정류장에서 쓰레
기통에 버렸다.
서울역에서 서울N16번(도봉산↔온수동) 시내버스를 타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니 시간은 새벽
6시, 원래대로라면 자정 이전에 도착하여 꿀잠을 자고 있어야 했는데, 오지게도 늦었다.
이렇게 하여 산동반도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 그곳에 갈 때는 남의 땅
산동반도가 아닌 우리 땅 산동반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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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4년 2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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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구역, 후원 돌담길 겨울 나들이 <중앙고 본관, 창덕궁 후원 뒷길, 옥류정>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창덕궁 후원 뒷길



'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후원 뒷길
겨울 나들이 '

창덕궁 신선원전, 의효전

▲  창덕궁 신선원전, 의효전 구역

▲  중앙고등학교 (본관 주변)

▲  창덕궁 후원 돌담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끝 무렵, 북촌(北村)에 자리한 중앙고등학교와 창덕궁 후
원 뒷길을 찾았다.
북촌과 창덕궁 후원 뒷길은 내 즐겨찾기 명소로 매년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고 있다. 이
미 지겹도록 복습을 한 곳이지만 자꾸만 손과 발이 가니 그들에게 단단히 중독된 모양이
다.
마침 며칠 전 겨울 제국(帝國)이 서울에 눈폭탄을 투하했는데 그들의 설경(雪景)이 갑자
기 당겨 눈이 녹을새라 부랴부랴 사진기를 챙겨들고 북촌으로 달려갔다. (본글에서는 중
앙고와 창덕궁 신선원전, 창덕궁 후원 뒷길만 다루겠음)



 

♠  북촌의 한류 명소이자 늙은 근대 건축물을 여럿 간직한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

▲  교문 옆에 자라난 계동(桂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512호

창덕궁과 맞닿은 북촌의 동북쪽 끝자락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고등학교(중앙중고교)가
자리해 있다.
이곳은 100년 이상 숙성된 학교로 왜정(倭政) 시절과 1940~1970년대에 유명인사를 많이 배출
했던 현장이다. 또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을 3개나 간직하고 있고, 비록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문학박물관이란 박물관까지 보유했으며, 창덕궁의 금지된 구역인 신선원전(新璿
源殿) 구역을 유일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21세기 이후 전파를 타고 한류
관광지로 격하게 뜨면서 북촌의 필수 명소로 성장했다.

북촌의 주요 골목길인 계동길의 북쪽 끝인 중앙고 교문은 언덕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인왕산(
仁王山)을 가리고 선 높은 고개를 넘으면 북촌로로 이어지며, 그 중간에 가회동11번지로 이어
지는 조그만 골목길이 가늘게 손을 내밀고 있다. 동쪽에도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은 고개가
버티고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원서동(苑西洞)과 창덕궁길로 이어진다.

교문 바로 안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큼직한 은행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앙상한 가지
를 드러내며 나처럼 추운 시절을 원망하는 그는 높이 20m, 가슴둘레 3.1m의 훤칠한 나무로 오
랜 세월 계동 지역의 수호신으로 숭상을 받아왔다. 하여 매년 가을, 지역 사람들은 오곡백과(
五穀百果)를 차려 당제(堂祭)를 지냈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 개관을 기념하고자 이 나무
를 삼목이식을 하는 등, 나름 의미가 깊은 나무이다.
나무 옆에는 1941년에 지어진 수위실이 있으며, 언덕진 길을 오르면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수
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햇님처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교문을 들어서면 학교 건물 사이로 운동장이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운동장 대신 콘크리
트로 다진 너른 뜨락이 닦여져 있으며, 그 공간 복판에 넓고 동그랗게 자리를 다져 테두리에
얕게 난간석을 두르고 그 안에 잔디를 깔아 그 핵심부에 학교를 일으켜 세운 인촌 김성수(仁
村 金性洙)의 동상을 세웠다.
또한 본관의 모습이 고려대학교 본관과 많이도 닮았고, 본관 주변 풍경은 여기가 고등학교가
아닌 고려대나 서양의 명문 대학교에 들어선 기분을 진하게 들게 만든다. 기존에 생각하고 있
던 고등학교의 모습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겉모습이 이러하니 누가 여길 고등학교라
보겠는가? 그냥 사진만 보면 오래된 대학교나 서구의 명문 학교라고 봐도 이상할 것은 없다.

본관 서쪽에는 원파도서관이, 동쪽 높은 곳에는 강당이 있으며, 본관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고색이 깊은 서관과 동관이 나란히 나타나고 그 북쪽을 가린 신관(新館)을 지나면 비로
소 인조 잔디를 깐 축구장 겸 운동장이 나타난다. 운동장 북쪽에 보이는 건물은 중앙중학교이
며 운동장 동쪽 밑에 신선원전과 의효전이 뉘여져 있다.

* 중앙고등학교의 간략한 역사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6월 1일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세운 기호학교(畿湖學校)에서 비롯
되었다.
1910년 9월 흥사단(興士團)에서 운영하던 융희(隆熙)학교와 통합되었는데 그때 교장은 서유견
문(西遊見聞)으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이었다. 이후 기호학회는 호남, 교남, 서북 등 여러
학회와 통합해 중앙학회로 간판을 바꾸고 학교 이름 또한 중앙학교로 갈았으며, 1915년 4월에
김성수가 이를 인수했다.

1916년 이 땅 최초로 보트를 도입하여 수상스포츠인 조정부를 설치했으며, 1917년 웅원(雄遠,
높은 이상), 웅견(雄堅, 굳은 의지), 성신(誠信, 성실한 행동)을 학교의 3대 교훈(校訓)으로
삼고 교목(校牧)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무궁화꽃으로 삼았다.
1917년 12월 김성수의 큰아버지인 김기중(金祺中)이 교사(校舍)를 지으면서 현재 자리로 학교
를 이전했다. 원파 김기중은 김성수 이상이나 중앙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919년에는 교장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가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3.1운동을 계획
했으며 백두산을 상징하는 백산(白山)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왜정의 방해로 1921
년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보)로 개명했다.
1921년 4월 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본관과 서관, 동관을 세웠고, 1926년에는 6.10만세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1934년 12월 원인이 아리송한 화재로 본관이 무너지자 그 남쪽에 다시 본관을 만들어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으며 1941년에는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대강당을 지었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앙중학교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39년 왜정이 무궁화 모표를
폐지하라고 하자 월계관으로 임시로 모표를 바꾸기도 했다. 1940년에는 중앙고보 역사 교사인
최복현이 4학년 학생 5명과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을 목적으로 '5인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1941년 한 학생의 연락 편지가 왜경에 발각되어 최복현과 관련 학생 모두 함흥교도소로 끌려
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이라고 한다.
그때 최복현은 재판정에서
'내 수업을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나를 처벌하고 학생들은 풀어달라'

호소하여 학생들은 3달 뒤 풀려나고 최선생은 2년 후 석방되었다.

1946년 9월, 6년제 중학교로 변경되고, 1950년 4월 대한교육법으로 4년제로 변경되면서 3년제
고등학교를 병설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꾸리게 되었다. 1960년 4.19시절에는
학교 학생들이 4.19시위에 동참했으며, 1964년에는 고려중앙학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1966년 신관을 짓고 김성수의 동상을 세웠으며, 1973년 신선원전과 인접한 운동장 동쪽에 축
대를 쌓아 운동장을 넓혔다. 1981년 학교 본관과 동관, 서관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
유산을 보유한 학교가 되었으며 1986년 6월 7일 교우의 날을 정해 행사를 거행했다.

1992년 2월 원파기념관을 세웠고,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박물관을 개관하
면서 이 땅의 고등학교 중 최초로 박물관을 소유한 학교가 되기도 했다. 또한 주변 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전파를 타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북촌의
한류 관광지로 존재감을 크게 살찌웠다.
(예전에는 일요일과 공휴일에 학교를 개방했으나 2020년 이후에는 거의 개방하지 않음)
 
* 중앙고등학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1 (창덕궁길 164, ☎ 02-742-1321~2)
* 중앙고등학교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6.10만세 기념비 (뒤쪽 건물은 원파도서관)

본관 뜨락 서쪽에는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6.10만세 기념비가 3.1운동 책원비가 있는 동
쪽을 바라보고 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붕어(崩御)하자 중앙고보 학생
을 중심으로 격문(檄文) 3만장을 인쇄하여 주변 학교에 뿌렸다. 그리고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인 6월 10일, 황제의 대여(大輿)가 종로3가 단성사(團成社)를 지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매와 태극기를 군중에
게 뿌려 이른바 6.10만세 운동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 기념비는 6.10만세운동의 67주년이 되는 1983년 6월 10일 중앙고등학교 동우회와 동아일보
사가 합심하여 세웠다.


▲  중세시대 유럽 성처럼 생긴 원파도서관 (옛 인문학박물관)

본관 서쪽에는 서양식 건물인 원파도서관이 있다. '원파'는 학교를 크게 일으킨 김성수의 큰
아버지인 김기중의 호로 이곳에는 2008년 6월에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문을 열었던 인문학박
물관이 야심 차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는 이 땅에서 거의 유일하게 고등학교에 차려진 박물관으로 그 이름 그대로 인문학(人文學)
자료를 풍부하게 머금고 있었으며 북촌의 다른 민간 박물관과 달리 입장료도 저렴하여 참으로
착한 박물관이었다. (어른 입장료가 1,000원이었음) 허나 이 땅의 인문학이 몰락했음을 상징
하듯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창밖에 빗방울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2010년과 2011년에 2
번 관람을 했음)


▲  본관 주변에 세워진 계원 노백린(桂園 盧伯麟) 집터 표석

이곳에는 대한제국 고위 무관이자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했던 노백린(1875~1926) 장군의 집
이 있었다.
그는 문무(文武)에 출중했고 기개가 높았으며 공군의 중요성을 깨달아 미대륙에서 최초로 한
인(韓人) 비행학교를 세워 독립군 공군을 양성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넘어와서 국무총리,
참모총장 등을 지냈으며 특히 군사 부분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허나 1926년 1월 22일, 상해(上海) 프랑스 조계지(租界地)의 양옥 단칸방에서 조국의 독립을
누리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앙고를 일구었으나 친일파로 구린 모습을
보였던 김성수는 무려 64살씩이나 살았음)


▲  3.1운동 책원비(策源碑)

본관 뜨락 동쪽에도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3.1운동 책원비가 자리해 6.10만세 기념비가
있는 서쪽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

3.1운동 발생 2달 전인 1919년 1월 왜열도 동경(東京)에서 유학을 하던 송계백(宋繼白. 1896~
1920)이 중앙학교 숙직실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곳 교사인 현상윤(玄相允, 1893~1950)에게
사각모에 담긴 비단에 쓰여진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네며,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살
짝 알렸다.
현상윤은 그것을 교장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급히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들은 크게 감동을
먹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작성하고 3.1
운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바로 이를 기념하고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에서 세
웠다.


▲  창립30주년 기념관 (대강당)
본관 동쪽 높은 곳에 자리한 대강당은 1941년 11월 창립30주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  중앙고등학교 본관 - 사적 281호

고려대 본관과 많이도 닮은 중앙고 본관은 콘크리트 철근의 2층 석조 건물로 1935년에 삽을
떠서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원래는 동관과 서관 사이에 있었으나 1934년 화재로 무너지
자 현 위치에 더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었다.

왜정 때 건축가인 박동진이 서구 학교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설계하고 건축한 길다란 'H'형태
의 건축물로 지붕 부분을 포함하면 가히 3층 규모인데, 그 시절 이 땅의 사람들이 세운 큰 건
물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건물 중앙에는 4층의 중앙탑을 높이 세워 본관의 위엄을 드높였고, 벽면은 돌을 질서 있게 쌓
아올렸다. 그래서 그 모습이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서양 학교나 중세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거기에 담쟁이덩굴까지 걸치고 있으니 고색과 중후한 멋까지 마음껏 드러낸다.
학교가 이렇게 크고 잘 나갔으니 왜정 때 이곳을 다녔던 학생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했을 것
이다. 비록 왜정의 눈치를 보며 살던 우울한 시기이나 여기서만큼은 왜인들도 오히려 부러운
눈빛으로 학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현재 1층 중앙은 학교 행정공간으로, 나머지는
교실로 쓰이고 있으며, 근대 초기 양식으로 만
들어진 민족 교육의 현장이자 민간학교의 건물
로 유서가 깊다. 또한 20세기 중/후반 유명 인
사들이 많이 나온 현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널린 학교 건물보다 더욱 정감이
가며, 저 건물에 들어가면 절로 책을 펴고 공
부에 임할 정도로 면학 분위기도 진하게 나온
다. 나도 이곳에서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사
는 곳이 엉뚱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하긴 이곳
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워낙 타고난 돌머리
라 효과가 얼마나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  본관의 뒷모습
마치 중세시대 건축물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  본관 뒤쪽에 숨겨진 빛바랜 종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중앙고보 시절부터 수업시간과 점심시간, 수업 종료 시간마다 땡땡땡~~♬ 종소리를 내며 학생
과 교사들을 분주하게 했던 위엄 돋는 종이었으나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나 이곳의 옛 유물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왕년에는 몸을 흔들며 학교를 움직이는 큰 손이었건만 이제는 종소리를 울릴 일도 없으니 그
의 피부에는 그저 하얀 먼지만 가득할 뿐이며, 가끔 관광객들이 호기심 삼아 그를 흔들어 주
변의 적막을 살짝 깨뜨리곤 한다. (나도 몇 번 쳐봤음~) 그렇게 울려 퍼진 종소리는 예나 지
금이나 늘 비슷한 목소리이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치지는 말자!)


▲  왕년을 생각하며 우수에 잠긴 종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뒤로 나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허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저 장대한 세월에 잠깐씩 몸을 담굴 뿐이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천하만물의 운명이다.

▲  중앙고등학교 서관(西館) - 사적 282호

본관 뒤쪽에는 붉은 피부의 비슷한 모습을 지닌 서관과 동관이 있다. 서관은 1921년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2층 붉은 벽돌집으로 (지붕을 포함하면 3층) 'T'자형 구조이다. 본관과는 분위기
가 사뭇 다른데, 뾰족한 아치형 창틀, 가파른 고딕식 지붕, 그리고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엇
물려 지어 20세기 초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벽돌이 고색의 향기를 더욱 우려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조선소년군 창설과 6.10만세운동
,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는 교실로 살아간다.


▲  중앙고등학교 동관(東館) - 사적 283호

서관과 마주하고 있는 동관은 1923년 10월에 지어진 2층 붉은 벽돌 건물이다. (지붕을 포함하
면 3층) 건물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은 서관과 비슷하며 여전히 교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신관에서 바라본 동관

▲  동관의 뒷모습


▲  선비의 모습으로 지어진 원파 김기중(金祺中) 동상

동관과 서관 사이에는 원래 본관이 있었다. 허나 1934년 화재를 만나 건물이 주저앉으면서 남
쪽으로 자리를 옮겨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본관의 강제 이전으로 비게 된 공간에는 소나무를 심어 조촐히 정원을 닦았는데 그 복판에 원
파(圓坡) 김기중(1859~1933)의 동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김성수와 더불어 중앙학교를 일으킨
인물로 김성수의 바로 큰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양복스타일의 김성수 동상과 달리 전
형적인 선비 스타일로 동상을 지어 그를 기린다.

김기중은 1886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1904년 용담(龍潭, 전북 진안) 군수(郡守)를 지내기도
했다. 1906년 정3품에 올랐으나 멸망의 끝으로 달려가는 나라꼴에 한숨을 쉬며 민중계몽을 위
해 교육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여 1908년 재산을 털어 영신(永新)학교를 세웠으며 왜열도
로 건너가 그곳의 교육 제도를 직접 살폈고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 1921
년 다시 재산을 털어 지금의 자리에 교사를 만들면서 중앙학교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32년 아우 김경중(金暻中)과 보성전문(고려대)을 인수하고 민립대학을 꿈꾸던 조카(김성수)
에게 운영을 넘겼으며 그 이듬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허나 그때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10년을 더 살았다면 친일파로 노선을 바꾼 조카에게 크게 실망
하여 피가 꺼꾸로 솟았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결국 그 잘난 조카가 큰아버지의 민족교육 사업
에 적지 않게 똥칠을 했다.


▲  신관 앞에 뿌리를 내린 히말리야시다나무 (종로구 2013-43호)
본관을 조금 닮은 신관 앞에는 어려운 이름처럼 이색적으로 생긴 히말리야시다나무가
조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높이 13m, 둘레 190cm 정도로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아마도 왜정 때 학교 행사 기념으로 심은듯싶다.

▲  옛 숙직실터에 새로 지은 삼일기념관(三一記念館)

대강당 뒤쪽에는 삼일기념관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기와집이 있다. 네모나게 다져진 석축
위에 계단을 늘어뜨리며 들어앉은 이 건물은 김성수가 1917년에 지은 교장 사택 겸 숙직실(宿
直室)을 복원한 것으로 원래는 대강당 정문 앞에 있었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학교를 찾아와 이곳 숙직실에서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
윤에게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을 처음으로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했다,
즉 3.1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유서 깊은 현장인 것이다.

그 숙직실은 1941년 지금의 강당을 만들면서 철거되었는데 아마도 그런 사연을 알아챈 왜정의
강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73년 지금 자리에 다시 지어 3.1기념관으로 삼았다.
기념관 앞에는 어디서 업어온 문인석이 홀(忽)을 쥐어들고 서 있으며, 건물 뒤로 담장과 울창
한 수목이 보이는데 그곳이 동궐인 창덕궁이다.


▲  겨울에 푹 잠긴 중앙고 산책로 (신관, 동관 옆길)

▲  눈에 뒤덮힌 중앙중고교 운동장과 새 건물로 이루어진 중앙중학교
운동장을 경계로 남쪽은 중앙고등학교, 북쪽은 중앙중학교로 이루어져 있다.



 

♠  중앙고 운동장에서 바라본 창덕궁 신선원전(昌德宮 新璿源殿)
- 사적 122호


▲  비공개로 사람의 손때마저 희미해진 신선원전

중앙고에 왔다면 꼭 살펴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창덕궁의 숨겨진 속살인 신선원전이다.
그렇다고 신선원전이 중앙고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만약 그들이 교정에 있었다
면 중앙고가 지금의 자리에 속시원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중앙고를 둘러보고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축구장 골대가 있는 너른 운동장이 나온다. 운동
장 북쪽에는 중앙중학교가 있고, 그 뒤에 삼삼하게 우거진 산이 있는데, 이는 와룡산(臥龍山)
으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의 동쪽 끝자락이다. 운동장 서쪽은 가회동(嘉會洞) 주택가로 막
혀있고 동쪽은 철책이 높이 쳐져 있는데, 그 너머로 숲이 펼쳐져 있다.
중앙고 본관이 주는 착시현상을 간파하고 서관과 동관을 거쳐 이곳까지 용케 들어온 사람들도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 착시현상에 빠져 본관 앞만 맴돌다가 나가버림) 상당수 운동장만 보
고는 발걸음을 돌린다.
운동장 동쪽에 철책이 있고 마땅한 안내문도 없으니 비록 밑에 수상한 기와집들이 널려있어도
그냥 통과하는 것이다. 허나 그런 생각은 중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창덕
궁의 비공개 구역인 신선원전, 의효전이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중 유난히 통제구역이 많았던 창덕궁,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21세기 이후 후원(後苑) 상당수와 낙선재(樂善齋)를 공개하고 있지만 아직도 숨겨진 부분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신선원전과 의효전 구역은 여전히 대문을 굳게 잠그며 공개를 꺼리고 있
으며, 그런 사유로 이곳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후원 숲속에서 조용히 속살을 가린 채, 숨바꼭질을 즐기는 신선원전은 중앙고 운동장에서만큼
은 자존심을 곱게 접으며 그 속살을 일정 부분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운동장이 그곳보다 지
대(地臺)가 높기 때문이다. 다만 철책을 통해서 봐야 된다는 한계점이 있다.

중앙고는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중앙고가 창덕궁 궁역(宮域)보다 조금 지
대가 높긴 하지만 담장이 걸쳐진 곳<운동장 부분 제외>만큼은 교내보다 높으며 민가(民家)의
담장도 아닌 지체 높은 궁궐의 담장이라 감히 건드리기도 그렇다. 허나 운동장만큼은 사정이
달라 운동장이 신선원전과 궁궐 담장보다 더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있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1973년 운동장을 넓히고자 축대를 높이 다졌기 때문인데, 철조망을 높이 친 것은 자칫 월담을
하거나 운동 도중 공이 넘어가 그곳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을 막고자 함이다.

일개 학교의 운동장이 궁궐 사당보다 높이 떠있다는 것이 다소 신선하고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국제적인 호구 짓을 일삼다가 거하게 쪽박을 찬 옛 제국의 잔재물이라고 해도 이렇게
까지 해야 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허나 학교 입장에서는 여기 말고는 운동장을 다질 땅
이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  신선원전의 옆 모습

▲  신선원전의 두툼한 뒷모습

신선원전 자리에는 원래 대보단(大報壇)이 있었다. 조선은 명(明)의 충직한 제후국(諸侯國)이
라 명이 망하자 옛 명나라의 제왕을 기리고 그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아주 꼴사나는 이유로 숙
종(肅宗) 때 대보단을 만든 것이다.
대보단에는 고려와 조선을 지극히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과 식량을 과하게 보내주어 조선천자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신종(神宗), 그리고 명
나라를 완전히 끝장낸 마지막 군주, 의종(毅宗)의 위패를 봉안해 매년 국가 재정을 축내며 제
사를 지냈다.

창덕궁에 선원전(璿源殿)이 지어진 것은 1656년이다. 이때 경덕궁(敬德宮, 경희궁)에 있던 경
화당(景華堂)을 인정전(仁政殿) 서쪽으로 옮겨 제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선원전으로 삼
았는데<이를 구(舊)선원전이라고 부름> 1921년 왜정이 대보단을 때려부시고 덕수궁(경운궁)에
있던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구선원전과 덕수궁(경운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과 관련 유
물도 거의 옮겨와 신선원전이라 하였다. (이전의 선원전과 구분하고자 그리 이름을 지었음)

이곳에는 태조에서 순종에 이르기까지 제왕 12명의 어진 48본이 봉안되었으며, 어진을 걸어두
던 12개 감실(龕室)은 1900년대 의궤도설(儀軌圖說)과 일치해 왕실의 전통적인 법식을 충실히
따랐음을 보여준다.
어진은 6.25가 터지자 서둘러 부산(釜山)으로 옮겼지만 대부분 관리소홀로 화마(火魔)의 먹이
가 되었으며, 제례에 쓰였던 의장물 상당수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남아있던 노부(鹵簿, 제
왕이 나들이할 때 갖추던 의장물) 등 대부분의 유물은 2002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용상(龍床)과 오봉도(五峯圖), 모란이 그려진 병풍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들 유물은
19~20세기 궁중 미술의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감실과 당가(唐家), 용상 등 가구와 시설
물은 주칠(朱漆)이 아닌 황색(黃色)으로 칠했다.

신선원전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사당이란 점 때문에 여전히 비공개를 고집하고 있다. 하여 이
곳에서만큼은 거의 인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사람의 손때마저 보이질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고요하기만 한 신선원전, 이곳이 과연 시끌벅적한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
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거기에 사당이라 그런지 종묘(宗廟)에서 느낄 수 있는 엄숙함도 적지
않게 배여 나온다. 다행히 늦게나마 이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년 동안 조사하여 '최후의 진전(眞殿) 창덕궁 신선원전'이란 도록을 발간하기도 했다.

신선원전은 의효전(懿孝殿)과 재실(齋室), 수직사(守直舍), 몽답정(夢踏亭), 괘궁정(掛弓亭),
진설청(眞說廳) 등을 거느리고 있으며 이들은 신선원전 권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창덕궁 후원
에서 신선원전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으며, 원서동 빨래터에 있는 외삼문(外三門)은 이곳의 정
문이다.


▲  신선원전 남쪽에 자리한 의효전(懿孝殿)

신선원전 남쪽에 있는 의효전은 원래 덕수궁(경운궁)에 있었다. 1904년 순종의 왕비인 순명효
황후(純明孝皇后)의 혼전(魂殿)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1921년 덕수궁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
길 때 덩달아 따라왔다.

사진에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의효전 옆에는 몽답정(夢踏亭)과 몽답지(夢踏池)란 작은 연못
이 있다. 몽답정은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지냈던 김성응(金聖應, 1699~
1764)이 지은 것으로 영조(또는 숙종)가 꿈속에서 이 정자를 찾았다고 하여 꿈에서 발걸음을
했다는 뜻의 몽답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조도 몽답정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창덕
궁과 창경궁의 도면인 동궐도(東闕圖)에는 그의 존재가 나와있지 않아서 원래 이곳에 있던 것
은 아닌 듯싶다.


▲  중앙중고 운동장에서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괘궁정(掛弓亭)

신선원전 구역에서 그나마 제일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존재가 괘궁정이다. 이곳은 돌담이 운동
장 축대 밑으로 막 내려가는 비탈진 곳에 있으며, 중앙고 축구부 휴게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다.

괘궁정은 1849년에 지어진 것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 북영(北營)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
던 곳이라고 한다. 정자의 이름인 괘궁(掛弓)은 활을 걸어둔다는 뜻으로 왕실에서 종묘만큼이
나 애지중지했던 대보단 바로 옆에 활쏘기 연습을 하는 정자를 만든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게다가 정자의 모습을 보면 일반 병사들이 연습을 했다기보다는 훈련대장 등 상위 등
급의 무관들이 활 연습을 하거나 군영(軍營)을 바라보는 용도로 사용했을 듯 싶다.
북영의 군사들은 제왕의 호위를 담당하는데, 제왕이 궁궐을 옮기면 북영 본부도 같이 옮긴다.
제왕이 창덕궁에 머무는 경우에는 궁궐에서 다소 구석인 대보단 인근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괘궁정은 달랑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정자
를 지었다. 얼마나 인적이 없는지 수북히 깔린 눈에 사람 발자국은커녕 새 발자국도 없으며,
정자에 정적만 감도니 언제 사람이 들어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제 찾
아올지 모를 화마에 대비하여 소화기가 한쪽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운동장 철조망을 통해 신선원전 일대를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보듯 구경했지만 언
젠가는 쿨하게 해방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반드시 그래야 됨~) 그때가 되면 까치발처럼 힘들
게 구경해야 되는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 창덕궁 신선원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 (창덕궁5길 22-4)



 

♠  서울 도심 뒷통수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중앙중고 후문과 창덕궁 돌담

창덕궁 돌담이 이어진 중앙중학교 동쪽 길을 오르면 고려사이버대학교가 나온다. 이들은 중앙
중고와 함께 고려대학교 계열로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서쪽)은 북촌과 삼청동으
로 이어지며, 돌담이 펼쳐진 오른쪽(동쪽) 길이 바로 창덕궁 후원 뒷길이다. 사이버대학교 갈
림길이 중앙중고의 후문으로 정문과 달리 문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동쪽 길로 들어서면 길이 서서히 흥분을 하면서 경사를 이루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진 창
덕궁 돌담이 궁궐 돌담의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오른쪽으로 따라붙는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다. 또한 돌담 너머로 삼삼하게 우거진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면서 도심
의 속된 기운을 정화시킨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고려사이버대학 동쪽)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넘어가는 길이
과연 있을까??' 
주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길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
이다.


▲  눈을 뒤집어쓰며 층층이 이어진 창덕궁 후원 돌담 (수구문 주변)

창덕궁 후원을 속세로부터 열심히 가리고자 지형을 이용하여 높이 돌담을 둘렀다. 지형이 낮
은 곳은 돌담 너머로 후원의 속살이 일부 보이기도 하나 보이는 것은 그저 숲밖에 없다.


▲  북악산(백악산)의 수분을 받아들이는 후원 수구문(水口門)

창덕궁 후원에는 연못이 참 많다. 그 연못을 살찌우는 물은 바로 북악산이 베푼 것으로 그가
내린 물이 이 수구문을 거쳐 후원으로 들어가 후원 곳곳에 물을 공급한다. 가뭄이 극성일 때
는 수구문도 흐르는 물이 거의 없어 한가하지만, 비가 많이 내릴 때는 수구문 철창을 녹여버
릴 정도로 물이 들어온다.


▲  석양이 지는 수구문 주변 후원 돌담

▲  후원 뒷길의 전환점(너른 공터) - 여기서부터 좁은 산길로 변한다.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릴 수 있을 정도에 후원 뒷길은 옥류정 입구의 너른 공터에서 끝
이 난다. 여기서 길은 산길로 180도 돌변하며, 차량은 더 이상 바퀴를 들일 수 없다.
너른 공터를 지나면 근래 지은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길은 2개로 갈리는데, 오
른쪽은 후원 돌담을 따라 성균관대 내부로 이어지며, 왼쪽은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
점(종로구 마을버스 02번 종점)으로 이어진다.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은 북촌 권역에서 성균관대와 대학로를 빠르게 이어주는 도심
의 상큼한 뒷길로 아는 이가 별로 없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한적하고 고즈넉하다. 내가 좋
아하는 길의 일원이기도 한데, 다만 가로등 시설이 부족해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꽤 어둑어
둑해진다.


▲  옥류정으로 향하는 짧은 산길과 눈에 묻힌 계곡

옥류정으로 인도하는 짧은 산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그 옆에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눈에 묻혀있는데, 그는 북악산의 동쪽을 이루고 있는 와룡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적
지 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다소 옥의 티이다.


▲  옥류정에서 창덕궁 후원 뒷길로 내려가는 길
이렇게 보니 정말 첩첩한 산주름에 푹 묻힌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서울 도심 한복판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  북악산 와룡산 밑에 자리한 옥류정(玉流亭)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옥류정, 그 어여쁜 이름 마냥 후원 뒷쪽에 숨겨진 오래된 경승지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1956년에 지어진 8각형 모습의 현대식 정자(亭子)이다. 그래도 후원
뒤쪽에 자리한 위치상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래된 사연을 머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런 것은
일절 없었다. 위치와 정자의 이름이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설레게 만든 것이다.

이곳은 와룡산 밑으로 바로 동쪽 언덕에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 있으며, 북쪽 높은 곳에는
와룡공원길이 흘러간다. 와룡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옥류정에서 잠시 묻혔다가 남쪽 연못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정자 이름이 옥류정이 된 것은 북악산(백악산)의 맑은 계곡이 옆구
리에 흘러서 붙여진 이름 같기도 하고, 계곡이 후원 옥류천(玉流川)과도 살짝 이어져 있어 그
렇게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 정자 정면에는 푸른 피부로 쓰여진 옥류정 현판이 걸려있는데,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아주 명필급이다.

옥류정은 숲에 둘러싸인 구석이라 늘 그늘이 머물고 있으며, 주변 경치는 좋지만 와룡공원길
이 바로 뒷쪽이라 차량들의 굉음이 수시로 두 귀를 때린다. 그래도 숲바람과 산바람이 교차하
는 곳이라 한여름에는 더위를 잊기에 좋다.


▲  후원 뒷길 고개
여기서는 창덕궁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는데, 이곳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이다.


창덕궁 후원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고려사이버대학교)에서 후원 뒷쪽 돌담길을 따라 성균관대
로 이어지는 1리 남짓의 짧은 고갯길이다. 감사원에서 성북동을 이어주는 와룡공원길 밑부분
으로 서울 도심에서 그리 흔치 않은 조촐한 오솔길이다.
이곳은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걸쭉하게 그려진 수채화의 일부처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돌담 너머로 후원의 청정한 숲이 펼쳐져 있고 돌담길 주변 역시 나
무들이 가득하니 그 아름다움의 농도는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다.


▲  후원 뒷길 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창덕궁의 뒷통수인 후원 뒷길 고개는 돌담 바로 옆구리라 돌담을 만지면서 갈 수 있다. 그 고
개를 넘으면 급하게 펼쳐진 울퉁불퉁한 산길이 나오고, 돌담 너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
원이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바로 성균관대 건물이 보이는데, 그 산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른다.
서울에 있는 궁궐 돌담길 중 가장 호젓하고 담백한 길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을 격하게 추천하
고 싶다. 그만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길이다.


▲  잊혀진 제국의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며 흘러가는
창덕궁 후원 돌담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고 있는 후원 돌담은 새로 손질한 부분이 여기저기 있어 오
래된 것과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적지 않다. 허나 그것은 세월이 해결해줄 것이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은 창덕궁 관람료에 후원 관람료까지 얹혀야 들어갈 수 있는 비싼 공
간으로 성균관대 대운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장식하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보이며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도 시야에 들어온다.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지금까지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과 바위길이 밋밋한 시멘
트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담과 철책이 생기면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
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만 보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이렇게 하여 겨울 한복판에 찾아간 북촌~창덕궁 후원 뒷길 눈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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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경주의 꿀명소, 경주 남산 나들이 <염불사지, 봉화골, 칠불암, 칠불암 마애불상군>

경주의 꿀단지, 남산 (염불사지, 칠불암 마애불상군)


    
' 서라벌 경주의 꿀단지, 남산 초여름 나들이 '


▲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남산(금오산) 산줄기

 



 

여름 제국이 봄의 하늘을 가로채며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6월의 첫 무렵, 신라(新羅)
의 향기가 지독하게 배여있는 경주 땅을 찾았다.

경주(慶州)는 거의 50번 이상 인연을 지은 곳으로 오랜 세월 구석구석 누비다 보니 이제
는 인지도가 거의 없거나 벽지에 박힌 명소들을 주로 찾고 있다. 허나 미답처(未踏處)들
이 여전히 적지 않아서 내 마음을 애태우게 하는데, 이번에는 칠불암과 신선암 등 남산(
南山)의 여러 미답처를 지우기로 했다.

경주시외터미널에서 경주좌석버스 11번(경주시외터미널~불국사~용강동)을 잡아타고 통일
전(統一殿)에서 두 발을 내렸는데, 여기서 칠불암, 신선암으로 가려면 남쪽 시골길(칠불
암길)로 들어서 남산동(南山洞)의 여러 마을(안마을, 탑마을, 안말)을 지나 1시간 10~20
분 정도 발품을 팔아야 된다.
너른 배반평야를 동쪽에, 남산을 서쪽에 둔 남산동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오늘도 평화
롭기 그지 없는데, 안마을에는 그 유명한 서출지(書出池)가, 탑마을에는 남산동삼층석탑
이 간만에 나좀 보고 가라며 손짓을 한다. 허나 그들은 이미 20대 시작점에 인연을 지은
터라 오로지 목표한 먹잇감을 향해 뛰어가는 맹수처럼 그들을 모두 흘려보냈다.


▲  옛 신라의 곡창지대, 배반평야 논두렁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양피제(讓避堤, 양기못)

양피제(양피저수지)는 배반평야에 수분을 제공하는 저수지로 연(蓮)들이 푸른 기운을 드
러내며, 곧 다가올 여름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양피제란 이름은 남산동삼층석탑 일대
로 여겨지는 양피사(讓避寺)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절이 있던 마을에 서출지가 있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이 있어 이 못을 서출지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  남산 입문 (염불사지)

▲  전(傳) 염불사(念佛寺)터

양피제에서 남쪽으로 7분 정도 가면 안말(안마을) 한복판에 누워있는 염불사터를 만나게 된다.
잘생긴 3층석탑 2기가 잔디가 입혀진 절터를 지키고 있는데, 그 북쪽에는 새로운 염불사가 둥
지를 틀며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사라진 염불사의 후예를 자처한다.

염불사는 신라 중기(8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절로 어떤 과정을 거치고 언제 어떻게
망했는지 전해오는 것이 전혀 없다. 남산 산신(山神)조차도 '염불사? 양피사? 그게 뭐임? 먹
는 거임?'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로 비밀에 감싸인 절로 남산동3층석탑 주변을 염불사터로
보는 설도 있어 현 자리도 100%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책임을 피하고자 염불사 이름 앞
에 막연히 전한다는 뜻의 전(傳)을 붙여 '전 염불사터'라 부른다.
다만 염불사 옆에 양피사가 있었다고 하므로 만약 남산동3층석탑이 염불사라 하면 이곳은 자
연히 양피사가 될 것이다.

염불사의 원래 이름은 피리사(避里寺)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피
이촌, 피리사촌)이 있는데, 그 마을에 '피리사'란 절이 있었다. 그 절에는 이상한 승려가 머
물고 있어 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우니 그 소리가 마을을 넘어 서라벌 일대에 쫘악 울려
퍼져 듣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소리가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그지 없어, 서라벌 사람들
은 그를 공경해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자 그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봉안했으며, 그가 머물던 피리사를 염
불사로 이름을 갈았다. 그랬던 염불사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의지처를 잃은 탑들의 삶도 그리 순탄치 못해 결국 앉은뱅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서로를 보듬으며 절터를 지켰지만 1973년 동탑이 강제로 불국동 구정광장으로 옮겨지
면서 서탑 홀로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러다가 2008년 동탑이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재회를
하게 되었고, 이때 탑 2기를 복원하고 절터를 손질하여 2009년 1월 15일 완료되었다.


▲  전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보물 2,193호)의 동탑

염불사터 동탑은 1973년 구정동 불국광장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그때 박정희 전대통령이 경주
를 살피러 온다는 소식에 경주 지역 관리들이 그에게 아부를 떨고자 무너진 동탑의 탑재와 인
근 도지동 이거사터(移車寺)에서 급히 소환한 3층석탑 1층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을 덧붙여
콩 볶듯이 복원하여 대통령의 순시 코스에 두었다. 그러다 보니 1층 옥개석이 2,3층 옥개석과
다소 어색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후 제자리로 옮겨야 된다는 여론이 퍼지면서 경주시는 2006년부터 이전 복원을 추진하여 염
불사터 사유지를 매입해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2008년 1월 탑을 해체하여 제자리에 다시 세웠
다.

이 탑은 커다란 바닥돌을 땅바닥에 깔고, 그 위에 2중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
힌 다음,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한 전형적인 신라 후기 탑으로 세월과 자연이 무심히 할퀴고
간 흔적들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정정함은 잃지 않고 있다. 서탑과 함께 8세기에 세워진 것으
로 여겨지며, 탑 높이는 5.85m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동탑

▲  북쪽에서 바라본 동탑


▲  염불사터 서탑

일찌감치 복원된 동탑과 달리 서탑은 옥개석을 중심으로 무거운 상처들이 적지 않다. 동탑보
다 좀 초라해 보이는 서탑, 허나 그는 사리장엄구를 봉안했던 사리공을 무려 2개씩이나 품었
던 특별한 존재였다. 보통 대부분의 탑은 사리공이 1개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 탑의 심
장이라 할 수 있는 사리공을 2개나 지녔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다.
혹시 염불사 설화에 나오는 그 승려 때문은 아닐까?

▲  북쪽에서 바라본 서탑

▲  절터에서 수습된 주춧돌과 늙은 석재들

동탑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한참 잡초를 토벌하고 있었다. 염불사터가 간만에 이발을 하는 날
인 모양이다.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석탑 형제, 한때 45년 동안 떨어져 사는 아픔이
있었으나 다시 만나 서로의 정을 속삭인다. 인간들이 무엇을 하든 자신들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런 것은 관심 밖이다.

절터 남쪽에는 이곳에서 수습된 건물 주춧돌과 석탑 부재(部材) 등 여러 석재가 놓여져 초여
름 햇살을 즐기고 있다. 그들은 한때 절 건물을 받쳐 들거나 석탑, 석등을 이루던 것들로 그
들이 입을 열면 이곳의 정체가 흔쾌히 드러날 것인데 자신들을 이 꼬락서니로 만든 인간과 세
상을 원망하듯,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 염불사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129-3


▲  남산 봉화골로 인도하는 숲길

염불사지에서 숲과 밭두렁이 적당히 섞인 시골길을 지나면 그 길의 끝에 봉화골 산길이 나온
다. 통일전 정류장에서 이곳까지는 도보 약 25분 거리로 여기서부터 온갖 불교문화유산으로
도배가 된 남산<금오산(金鰲山)>의 아늑한 품이 시작된다.

봉화골은 동남산 남쪽 끝에 자리한 깊은 골짜기로 봉화대(烽火臺)가 있어서 봉화골이란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 계곡이 깊고 소나무가 가득해 그림 같은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칠불암과
신선암 마애불 등 남산의 굴지 명소들이 깃들여져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왕래가 잦다. 현재
이 골짜기에는 절터 2곳, 불상 8기(칠불암과 신선암 마애불), 석탑 2기, 석등 4기, 비석(귀부
) 1기, 봉화대터가 전하고 있다.

산길 경사는 대체로 완만하나 일부 구간에서 흥분된 상태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이 될
정도는 아니며 자존심을 곱게 접어 묵묵히 산길에 임하면 칠불암 마애불이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와 마중을 할 것이다.


▲  소나무로 가득한 봉화골 산길 ①

▲  소나무로 가득한 봉화골 산길 ②

봉화골 계곡은 조그만 개울로 아기자기한 모습을 지녔다. 하지만 하늘이 비를 너무 짜게 내려
물이 거의 말라버린 맨바닥 상태였다. 처음에는 길인 줄 알고 다가섰더니 글쎄 가뭄에 녹초가
되버린 계곡이 아니던가.

산길을 한참 오르니 삼삼하게 우거진 대나무숲이 펼쳐진다. 이렇게 대나무숲이 있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절이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푹 숙인 대나무가 운치 있게 터널을 이룬 돌계단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칠불암이 자리해 있다.


▲  이보다 멋진 터널이 있을까? 대나무 숲길의 위엄

▲  대나무 숲길 한복판에 서다. (칠불암 직전)



 

♠  경주 남산에서 가장 덩치가 큰 불교 유적, 7개의 석불로 이루어진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마애불상군 - 국보 312호

경주 남산에는 옛 신라 사람들이 심어놓은 불교 유적이 지나치게 많이 서려있다. 절터만 무려
100곳이 넘으며 불상도 80개가 넘는다고 하니 천하에 이만한 불교 유적의 성지(聖地)는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되었겠는가.

남산에 깃든 불교 유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해발 360m 고지에 자리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다.
그는 부처골(불곡) 석불좌상(☞ 관련글 보기), 보리사(菩提寺, 미륵골) 석불좌상(☞ 관련글
보기
),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과 더불어 남산의 간판격 존재로 존재
감도 그 덩치만큼이나 커서 답사객과 산꾼의 왕래가 빈번하다.

이곳 마애불상군은 2개의 바위에 7기의 마애불(磨崖佛)을 나눠서 새긴 독특한 모습으로 동쪽
을 바라보며 병풍처럼 자리한 커다란 바위에 3존불이 깃들여져 있는데, 그 바위를 '병풍바위'
라고 부른다. 불상이 깃든 동쪽 면이 90도로 다듬어져 있고, 그 앞에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
m 정도의 석축을 쌓아 공간을 다진 다음, 4면불을 새긴 바위를 봉안했다. 보통은 바위 하나를
이용해 불상을 새기지만 이곳은 이렇게 바위 2개를 건드려 마애불상군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약 1.74m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지켜주고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3존불과 4방불

마애불 주변은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그 밑에서 그들을 바라봐
야 된다. 그러다 보니 3존불은 정면에서 온전히 마주 보기가 어려우며, (앞에 4방불이 시야를
좀 가림) 4방불 같은 경우 3존불을 바라보고 있는 서쪽 불상은 만나기가 어렵다. 허나 어찌하
랴? 국보(國寶)의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지체 높은 존재들이고 그들의 건강도 신경을 써야
되니 말이다. 그래도 보일 것은 거의 보이며, 그들을 세세히 보고 싶다면 칠불암에 협조를 구
해보기 바란다.

병풍바위에 돋음새김으로 진하게 깃들여진 3존불은 양감이 매우 풍부해 바위에서 방금 튀어나
온 듯한 모습이다. 가운데 본존불(本尊佛)은 높이 2.7m로 하늘을 향해 꽃잎을 세운 연꽃<앙련
(仰蓮)>과 밑으로 꽃잎을 내린 복련<(伏蓮)>이 새겨진 연화대좌에 위엄 있게 앉아있다. 석굴
암(石窟庵) 본존불과도 비슷한 모습으로 그 뒤쪽에는 광배(光背)가 본존불을 반짝 빛내주고
있으며, 머리는 소발(素髮)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거의 네모진 모습으로 볼살이 많으며,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나 자비로운 표정을 자아
내고 있다. 목에는 그 흔한 삼도가 없으며, 어깨는 넓고 당당하여 가는 허리와 함께 위엄 돋
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 끝이 땅을 향하게 하
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은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옷주름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본존불 오른쪽에 자리하여 본존불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협시보살(夾侍菩薩)은 연꽃이 새
겨진 연화대(蓮花臺) 위에 다소곳이 서 있다. 덩치는 본존불의 1/3 크기로 키는 약 2.1m인데,
아래로 내린 오른손에는 감로병(甘露柄)이 들어 있어 아마도 관세음보살인 모양이다. 왼손은
어깨 높이로 들고 있으며, 잘록한 허리선이 인상적으로 구슬목걸이를 두르고 있다.
본존불의 왼쪽 협시보살 역시 연화대 위에 서 있다. 오른손에 연꽃을 들고 왼손은 옷자락을
살며시 잡고 있는데, 오른쪽 협시보살과 비슷한 덩치로 코가 좀 할켜나간 것을 빼면 완전한
모습이다. 그는 아마도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3존불과 4방불(동쪽과 북쪽 상)

3존불 앞에 놓인 바위에는 4방불이 깃들여져 있다. 3존불이 주연이라면 4방불은 그들을 수식
하는 조연으로 큰 것은 높이 1.2m, 작은 것은 0.7~0.8m 정도로 3존불에 비해 규모도 작고 조
각 솜씨도 다소 떨어진다.
 
4방불 모두 보주형 두광(頭光)을 갖추며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는데, 동쪽 상은 3존불
본존불과 비슷한 모습으로 통견의(通絹衣)를 걸치고 있으며 신체 윤곽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왼손에 약합을 쥐어들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약사여래(藥師如來)로 여겨진다. 남쪽 상은 동
쪽 상과 거의 비슷하나 가슴에 표현된 띠매듭이 새로운 형식에 속하며 무릎 위 옷주름과 짧은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의 옷주름이 도식화(圖式化)되어 있다.

서쪽 불상은 동/남쪽 불상과 비슷하며 북쪽 불상은 앞서 불상과 달리 얼굴이 작다. 그들의 정
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동쪽은 약사여래, 서쪽은 아미타여래로 파악되고 있다.


▲  4방불의 동쪽 상 (약사여래상으로 여겨짐)

▲  4방불의 남쪽 상 (정체가 무엇일까?)

풍만한 얼굴과 양감이 풍부한 신체 표현, 협시보살들의 유연한 자세는 남산 삼릉골 석불좌상
과 석굴암 본존불, 굴불사(掘佛寺)터 석불과 비슷하여 8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참 올라가야 되는 깊숙한 산골에 이렇게 큰 마애불을 짓기가 참 어려웠을 것인데, 불교 앓
이와 남산 앓이가 유독 심했던 신라 서라벌 사람들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신라
의 아름다운 마애불을 편하게 느껴볼 수가 있다.
그리고 마애불이 깃든 병풍바위의 모습도 그리 예사롭지는 않아 보여 석불이 깃들기 이전에는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  칠불암 뜨락에 수습된 주춧돌들 (석등 대좌도 보임)

칠불암 뜨락에는 주춧돌과 석등 대좌(臺座), 석탑 석재들, 연꽃이 새겨진 배례석(拜禮石) 등
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마애불 남쪽에는 엉성하게 복원된 석탑과 옥개석으로 보이는 커다란
돌이 박혀있어 이를 통해 마애불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애불의 자리를 먼저 다진 다음 건물을 씌워 그들을 봉안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 건물이 법
당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의 정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다
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머물면서 대안(大安)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7세기 중/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8세기에 마애불을 구축하면서 전성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는 '봉화곡 제1사지(寺址)'란 임시 이름을 지니고 있다. (봉화골에 있는 1번째 절터
란 뜻) 비록 절집과 돌로 지어진 모든 것이 무심한 세월과 대자연에 의해 분해되고 그 일부만
아련히 남은 상태지만 마애불만은 거의 온전히 살아남아 그들이 가고 없는 빈 자리를 지킨다.


▲  장대한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칠불암 석탑

마애불과 칠불암 법당 사이에는 석탑의 옥개석으로 여겨지는 주름진 커다란 돌덩어리가 화석
처럼 박혀있다. 그 위에는 키 작은 석탑이 성치 못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신라 후기에 지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절이 사라진 이후, 세월의 거친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산산히 흩어진 것을 발견된 부재(部
材)를 되는대로 엮어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하여 다소 엉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큰 돌덩어리를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3층 탑신을 적당히 맞춰 올려 그런데로 3층석탑의 폼은
갖추었다.


▲  칠불암 인법당(因法堂)

마애불 곁에 자리한 칠불암은 1930년대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이다. 칠불암이란 이름은 3존불
과 4방불 등 7기의 석불을 간직하고 있어 칠불암이라 한 것인데, 옛 봉화곡 제1사지의 빈 자
리를 덮어주며 마애불상군을 지키고 있다.

칠불암은 법당(法堂)인 인법당과 1칸짜리 삼성각, 해우소가 전부로 인법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리가 협소하여 법당이 요사(寮舍)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의
역할까지 모두 담당하고 있는데, 내가 갔을 당시에는 서양에서 건너온 20대 비구니 양녀(洋女
)와 그를 도와주는 50대 보살(菩薩) 아줌마가 절을 지키고 있었다.

마애불을 둘러보고 법당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보살 아줌마가 구경 잘했냐며 매실차 1잔을 권
한다. 그런 것을 마다할 내가 아니라서 흔쾌히 1잔을 청했는데, 마침 날씨도 덥고 목구멍에서
도 갈증으로 불이 날 지경이라 달콤한 매실차로 더위와 갈증을 싹 진화했다. 거기에 산바람도
솔솔 불어와 더위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니 이런 것이 진정 극락(極樂)이 아닐까 싶다.
그 보살은 보통 오전에 올라와 양녀 비구니를 도우며 절을 지키거나 여러 먹거리를 만들어 준
다. 내가 갔던 날은 식혜를 만들어 절 냉장고를 채워주었다. 그렇게 절 볼일이 끝나면 오후에
속세로 내려간다. 그 외에 많은 시간은 양녀 비구니 혼자서 절을 지킨다.

그 양녀는 미국 아메리카 출신으로 이 땅에 들어온 지 이제 1~2개월 밖에 안된 초보 승려이다.
하필이면 첩첩한 산골인 이곳에 먼저 배치되어 시작부터 고적한 산사(山寺)의 삶을 익히느라
고생을 한다. 게다가 우리 말도 꽤 서툴러 꼬부랑 영어를 섞어주어야 겨우 알아듣는다. 왜 그
를 칠불암에 배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산에 양이(洋夷)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지라 그들을
상대하고자 고독한 산사살이도 미리 익히게 할 겸, 배치한 모양이다.
절에 머무는 승려는 그 혼자 뿐이라 그가 이 절의 임시 주지나 다름이 없었다. 절과 마애불을
지키고 청소하고, 기도하고, 수행하고, 우리 말 공부하고, 불교 공부하고, 빨래하고, (음식은
보살 아줌마가 거의 해줌) 양이 관광객들에게 마애불 설명도 해주고, 하는 일이 많은데, 아직
은 부족한 것이 많아 보살 아줌마와 스승 승려의 지도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그 스승은 매일
전화를 하여 영어로 이리저리 코치를 해주었다. 하지만 언어 소통에 거의 문제가 없을 정도로
우리 말을 익히게 한 다음 이곳으로 보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절과 마애불을 찾은 사람들에게 꼭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 인사성도 밝은데, 마침 미국에
서온 것으로 여겨지는 양이 2명이 그에게 칠불암 마애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시로 감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마애불에 대해 크게
찬양을 벌인 모양이다.
그는 6개월 정도 이곳에서 정진을 하다가 다른 절로 옮긴다고 하며, 아무쪼록 열심히 수행하
여 큰 비구니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  맞배지붕을 지닌 1칸짜리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에 봉안된 독성탱, 칠성탱,
산신탱


▲  칠불암에서 바라본 봉화골 남쪽 능선

▲  봉화골 정상부(신선암 뒤쪽)에서 바라본 봉화골 남쪽 능선과
배반평야, 토함산(吐含山)

▲  봉화골 정상부(신선암 뒤쪽)에서 바라본 남산동과 배반평야, 낭산(狼山)


칠불암에서 보살 아줌마, 양녀 비구니와 이야기꽃 좀 피우다가 잠시 잊었던 신선암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곳은 칠불암 바로 뒤쪽 절벽으로 아무리 지척간이라고 해도 홍길동이 아닌 이상
은 각박한 산길을 7~8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그렇게 해발 400m대인 봉화골 정상부에 이르면
남산 정상과 고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펼쳐지고, 조망의 질 또한 크게 상승되어 경주 동
남부와 배반평야, 토함산 등이 흔쾌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능선길로 접어들면 신선암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하는데, 그의 안내를 받아 가파
른 길을 내려가면 그 길의 끝에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신선암 마애불이 나타난다.

이후 내용(신선암, 고위봉, 열반골)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
서 흔쾌히 마무리 짓는다.

* 칠불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36-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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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4년 1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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