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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0.09.15 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5. 2019.04.08 늦겨울 산사 나들이, 치악산 구룡사의 은빛 설경 ~~~ (거북바위, 구룡사계곡, 구룡폭포)
  6. 2018.02.26 첩첩한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탄산약수를 찾아서,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지석묘, 춘천의 먹거리들)
  7. 2017.07.18 백두대간 한복판에 뉘어진 신비의 탄산약수,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8. 2016.07.20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미인을 닮은 아름다운 폭포, 삼척 미인폭포 (여래사, 통리협곡)
  9. 2016.06.29 한반도 배꼽 속에 숨겨진 순박한 폭포,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10. 2015.12.12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정선5일장, 아우라지)

설악산 백담사, 수렴동계곡, 영시암 겨울 나들이

설악산 백담사, 영시암, 수렴동계곡



' 설악산 겨울 나들이 (백담사, 영시암) '

백담사 백담계곡 돌탑들

▲  백담사 백담계곡 돌탑들

설악산 백담사 설악산 수렴동계곡

▲  설악산 백담사

▲  수렴동계곡


 



 

차디찬 겨울 제국의 한복판인 1월의 어느 적적한 날, 세계적인 명산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
는 설악산(雪嶽山)을 찾았다.
설악산은 거의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그의 품이 몸살이 나게 그리워지면서 이전부터 가고
싶었던 내설악(內雪岳)의 백담사로 출동했다. 허나 백담사만 보기에는 50% 허전하고 내 성
미에도 맞지 않아 영시암까지 가보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봉정암과 대청봉까지 싹 인연
을 짓고 싶었으나 산에서 지나친 욕심은 금물이다.

아침 일찍, 동서울터미널로 이동하여 백담사를 거쳐 속초(束草)로 가는 시외직행버스에 나
를 담았다. 동해바다를 향해 총알처럼 내달려 2시간여 만에 백담사입구에 도착했는데 평일
이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백담사입구에서 외가평교를 건너 12분 정도 가면 백담사 주차장과 마을버스 승차장이 마중
한다. 백담사는 길이 영 좋지 못해 일반 차량과 버스는 접근이 금지되어 있어 여기서 무조
건 차를 세우고 도보 또는 마을버스를 타야 된다.
용대리 사람들이 돈을 투자해 운영하는 이 마을버스는 백담사 주차장에서 백담사까지 운행
하는 백담사 셔틀버스로 중간에 정차하는 곳은 1도 없다. 겨울에는 보통 9시부터 17시까지
거의 20~30분 간격으로 다니며 휴일에는 증회한다. (여름에는 7시~19시까지 운행) 단 눈과
비가 내리거나 얼음이 얼면 바퀴를 접고 쉬므로 날씨를 잘 살피고 가야 뒷탈이 없으며, 강
추위가 기승일 때는 버스가 아예 안뜬다고 보면 된다.
또한 버스비가 무려 2,500원(성인 기준)이나 하여 이 땅에서 가장 비싼 마을버스에 속한다.
완전 독점 운행에 길까지 좋지가 못하니 비싸게 받는 것인데, 버스가 아니면 꼬박 2시간을
걸어야 되니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는 애시당초 주어지지 않는다. 백담사 권역을 찾는 사
람들 대부분은 마을버스를 이용하므로 설악산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그야말로 마르지 않
는 꿀샘이다.

마을버스 승차장에서 버스표를 구입하고(카드 결제 가능) 타는 곳으로 가니 버스가 바퀴를
접고 대기를 하고 있다. 만석 직전이라 서둘러 승차하니 운전사가 일일이 버스표를 수거하
고 시동을 걸어 백담사로 출발한다.
백담사로 인도하는 백담로는 백담계곡(百潭溪谷)을 따라 거의 1차선 수준으로 이어져 있는
데,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구불구불의 극치를 보여준다. 비포장 구간과 벼랑길도 상
당수 존재하여 생각 이하로 길 상태가 영 좋지 못하며, 차량 교행은 운전사들이 서로 연락
하여 적당한 곳에서 한다. 단순히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이라 쉽게 봤더만 그게 아니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백담계곡과 꼬부랑길의 정석을 보여주는 백담로에 한참 넋
이 나가 있으니 어느덧 백담사 정류장에 도착해 바퀴를 멈춰선다. 여기까지 소요시간은 15
분 정도, 거리는 7km 남짓이다.



 

♠  내설악의 중심 사찰, 백담사(百潭寺)

▲  백담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백담사 외경

백담사 정류장에서 백담계곡에 걸린 하얀 피부의 수심교(修心橋)를 건너면 바로 백담사 경내
이다. 절은 백담계곡 옆구리에 자리하여 뒤로는 내설악의 험준한 산줄기를 병풍으로 삼고 앞
에는 계곡을 방패로 삼아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 있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계곡가에 석
축을 다지고 돌담까지 둘렀다. 오랫동안 화마(火魔)로 고통받은 절이라 이렇게 2중으로 벽을
친 모양이다.


▲  속세와 백담사를 이어주는 수심교 (잠수교에서 바라본 모습)

절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은 수심교 동쪽에 있으나 백담사 정류장에서 백담사를 잇는 동선
에서 다소 비껴있어 지나치기 쉽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깜박하고 지나치
는 형편으로 그를 직접 지나는 것은 백담사 차량과 외지 차량 정도이다. 나는 일주문을 보긴
했으나 그의 아랫도리를 지나지 않았으며 사진에 담는 것도 깜박했다.

수심교를 건너면 맞배지붕을 지닌 금강문(金剛門)이 중생을 검문한다. 다소 소외된 일주문과
달리 경내로 들어서려면 꼭 거쳐야 되는 문이라 이곳의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좌우로 돌담을 둘러 혹시 모를 좋지 않은 기운을 경계한다.
금강문은 금강역사(金剛力士)의 공간으로 그 검문을 통과하면 바로 불이문(不二門)이 등장하
여 마지막으로 중생을 검문한다.

불이문을 지나면 사물(四物)의 공간인 2층짜리 범종루가 나오고, 이어서 서로 비슷하게 생긴
화엄실(華嚴室)과 법화실(法華室)이 나란히 나타난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은 종무소(
宗務所)로 여기서 화엄실은 전두환 전대통령이 1995년에 귀양살이 비슷한 은거(隱居) 생활을
했던 그 유명한 현장이다.
일명 29만원으로 악명이 높은 전두환이 이곳에 들어오게 되자 인제군 의원들은
'여기는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머물던 곳이지 죄인의 은둔지가 아니다. 그러니 나가라!
'
요구했으며, 그가 이곳에 머물 때는 절 옆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팔자 좋
게 불교와 자신을 주제로 요란하게 떠들기도 했다.
그가 잠시 서식했던 화엄실 방에는 그의 옷과 그때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맑은 물 가득한 백담사에서 유일하게 물이 흐린 곳 같다'
며 그의 흔적을 까기도 했다. 비록
노태우의 정치쇼긴 하나 과거의 잘못 좀 뉘우치라며 벽지 산사에 귀양을 보냈건만 그 보람도
없이 자신의 죄를 반성하지 않고 개짓을 일삼다 지옥으로 갔으니 실로 개탄스럽기 그지 없다.

화엄실과 법화실을 지나면 3층석탑이 나오면서 이곳의 법당인 극락보전 앞에 이르게 된다. 그
럼 여기서 잠시 백담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길쭉한 만해교육관
정면 9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백담사
에서 가장 큰 집이다. 현재 템플스테이 공간으
로 바쁘게 살고 있다.

            ◀  야광(夜光)나무
5월에 하얀 꽃을 내놓는 백담사의 상큼한 명물
로 그 꽃들이 밤에 주위를 환하게 비춰주어 야
광나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그 광경을 보려면 5월 이후에 와야 되나 엉뚱
하게도 겨울 한복판에 와서 화사한 꽃불은커녕
그 불에 몽땅 타버린 듯한 앙상한 모습만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설악산의 첩첩한 산주름 속인 백담계곡 깊숙한 곳에 그 이름도 유명한 백담사가 포근히 둥지
를 틀고 있다.
내설악의 대표 고찰이며 관문인 이곳은 647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는 여기서 한참 남쪽인 한계령(寒溪嶺) 부근 한계리에 절을 지어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하고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했다고 하는데, 자장의 창건설은 솔직히 신빙성이 없다.
690년 화재로 무너진 것을 719년에 다시 세웠는데 '심원사 사적기(尋源寺 事蹟記)'에 따르면
낭천현(狼川縣, 강원도 화천으로 여겨짐)에 있던 비금사(琵琴寺)를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그와 관련된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하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비금사 주변은 산짐승들이 많아 사냥꾼들의 발길이 잦았고, 그들로 인해 산수가 다소 더러워
졌다. 허나 비금사 승려들은 절 바깥에서 일어나는 산짐승 사냥은 전혀 모른 채, 열심히 샘물
을 길러 부처 공양에 여념이 없었다. 그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신통력을 부려 하룻밤 사
이에 대승폭포 밑 옛 한계사터로 절을 옮겨버렸다.
그 사실을 모르던 비금사 승려와 길손들은 다음날 아침 깨어보니 절은 분명 비금사이나 주변
풍경이 확 달라진 것에 크게 놀랐다. 전날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멋진 기암괴석은 물론 폭
포까지 있던 것이다. 이에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에게 관음청조(觀音靑鳥)가 날라와 '낭천의 비
금사를 옛 한계사터로 옮겼소~~!'
알려주었다.
산신령이 절을 강제로 옮기는 과정에서 절구가 떨어졌는데, 그 떨어진 곳이 춘천 부근 절구골
이라고 하며, 한계리 청동골에는 청동화로가 떨어졌다고 한다. 물론 전설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되겠으나 한계사를 중건했을 때 비금사를 옮겨 세운 것은 분명하다. 그걸 그럴싸하게 설화로
빚은 것이다.

785년 화재로 절이 파괴되었으며, 790년에 종연, 광학, 설흡 등이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에
절을 짓고 운흥사(雲興寺)라 했다. 하지만 984년에 또 불을 만나 쓰러지자 987년에 동훈, 준
희 등이 운흥사에서 북쪽으로 60리쯤 되는 곳에 절을 중건하고 심원사(深源寺)로 이름을 갈았
다.
이후 450여 년 동안 딱히 별탈이 없어 절은 비로소 기지개를 제대로 켰다. 이때 법당, 극락전
, 벽운루, 선승당. 동상실 등의 건물을 무수히 달았으며, 오세암, 봉정암, 백련암, 원명암 등
의 부속 암자를 거느렸고, 많은 고승이 찾아와 수도를 했다.

▲  교육 공간으로 쓰이는 만해당(卍海堂)

▲  화엄실(왼쪽)과 법화실(오른쪽)

1432년 오랫동안 뜸했던 화마가 다시 다녀가면서 잿더미가 되었으며, 1434년에 30리 밑에 절
을 중건하고 선구사(旋龜寺)라 했다. 이때 의준, 해성 등이 법당과 극락전, 요사채 2동을 세
웠다.
허나 1443년 화재로 또 무너지면서 1447년 한계사터에서 서쪽으로 10리(또는 1리) 정도 떨어
진 곳에 절을 세우고 영취사(靈鷲寺)라 했으며, 1455년 화재로 다시 파괴되자 1457년에 재익,
재화, 신열 등이 옛 절터 상류 20리 지점에 절을 짓고 백담사로 이름을 갈았다. 여기서 '담(
潭)'은 물이 모인 못을 뜻하는데, 그 덕분에 화마가 움찔하여 한동안 오지 않다가 1772년에
다시 찾아와 장난을 쳤다.
이때 놀란 승려들은 죄다 흩어지고 최붕(最鵬) 홀로 절터를 지키다가 1775년 태현(太賢), 태
수(太守) 등과 절을 일으켜 세우면서 옛날 이름인 심원사로 갈았다. 이후 6년 동안 법당, 향
각(香閣) 등을 세웠으며, 1783년에 현재 이름인 백담사로 이름을 바꾸게 되니 그 사연은 이렇
다.

절에 화마가 다녀갈 때마다 주지승 꿈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사람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
기이하게도 절 근처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듯한 바위가 있다. 계속되는 화재로 고통받던 주
지승은 절 이름을 바꾸려고 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大靑峯)에서
절까지 웅덩이(담) 수를 세어보라고 했다. 하여 이튿날 세어보니 딱 100개이다. 그래서 100개
의 담이란 뜻에 백담사로 이름을 갈고 현재 자리로 절을 옮기니 당분간은 평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름의 효과도 잠시, 1915년 겨울밤에 화마가 기습하여 불상과 탱화 20여 위를 제외한
건물 70여 칸(또는 160여 칸)과 경전, 범종을 모조리 날렸다.
하여 주지 인공(印空)은 오세암(五歲庵)으로 자리를 옮겼고, 강원도 일대를 돌아 1,786원 30
전을 마련하여 1919년 4월 법당 20칸과 화엄실 20칸을 마련했다. 그리고 1921년 봄에 응향각
과 사무실 등 30칸을 마련하고 종과 북까지 주조해 낙성법회를 열었다.
허나 6.25 때 총탄에 의해 절 태반이 다시 화마의 덧없는 먹이가 되고 만다. 이후 1957년 중
건했으며, 계속 불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백담사의 역사는 창건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화마와의 싸움, 화마의 희롱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 화마로 인해 잃은 것이 너무 많다. 정말 백담사는 불과 무슨 원한이 있는지 절을 완전히 날
려버린 화재만 무려 8번에 이른다. 오죽하면 절의 이름도 불과 상극인 '백담'이라 했겠는가.

▲  극락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상과 지장탱

▲  백담사의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만해 한용운은 백담사와 오세암에 머물며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십현담주해(十玄
談註解)','님의 침묵' 등을 집필했으며, 그가 남긴 서적과 유품이 만해기념관에 일부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딴 만해당, 만해교육관이 있고,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용대리에
만해마을이 있는 등, 만해와 백담사, 설악산과의 끈끈한 인연을 보여준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나한전, 만해당, 금강문, 관음전, 산령각, 무문관(無門關
)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절이 비록 오래되었다고 하나 툭하면 화마로 모두 날라가 고
색의 기운도 싹 날라갔다. 그러다 보니 소장문화유산도 국가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
상 및 복장유물이 전부이며, 오래된 3층석탑이 극락보전 뜨락에 있다.
또한 만해기념관에는 만해와 백담사 승려들의 서적과 유물이 있고 절 주변 백담계곡에는 돌탑
이 무수히 닦여져 이곳 풍경의 백미로 꼽힌다. 게다가 교통도 불편한 첩첩한 산골에 묻혀 있
어 산사의 내음이 아주 진해 속세(俗世)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머물고 싶은 충동을 일
으킨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음)

* 백담사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산62 (백담로 746 ☎ 033-462-6969)
* 백담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백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보물 1,182호

백담사에 왔다면 극락보전에 깃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꼭 친견하기 바란다. 그는 이곳의 유
일한 국가 문화유산이자 오래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백담사 법당이 그 흔한 대웅전(大雄殿) 대신 극락보전을 칭한 것은 바로 아미타여래좌상의 공
간이기 때문으로 그 좌우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고운 모습으로 자
리해 있는데, 저들은 아미타불이 적적할까봐 근래에 붙여놓은 협시보살들이다.

이곳 아미타불은 1748년에 조성된 것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였고, 머리
꼭대기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았다. 얼굴은 둥글며, 가는 눈과 작은 입,
오똑 솟은 코를 지녔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넓은 가슴과 어깨를 지니고 있으
며,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꺼운 편으로 옷주름이 곡선(曲線)으로 처리되었다. 가슴에는 'U'
자형의 중복된 주름을 보이는데 이런 주름은 조선 초기 특징을 이은 것이다.

18세기 초기 불상 중 뛰어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의 뱃속에는 고맙게도 조성 연대
를 알려주는 발원문 여러 장과 저고리 1점, 유리와 수정 등의 파편 등이 나와 안그래도 빈약
한 백담사의 문화유산을 조금 늘려주었다. 이들 유물은 아쉽게도 공개하지 않으며 오로지 아
미타불만 관람이 가능하다.


▲  백담사3층석탑
바닥돌과 기단(基壇), 3층 탑신, 약간의 머리장식을 지닌 조촐한 모습으로
조선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  만해기념관에 전시된 영환지략(瀛環志略) (전 10권)

영환지략은 1904년에 백담사 승려로 만해의 스승인 김연곡(金連谷)이 건봉사(乾鳳寺) 유학승
들로부터 얻은 세계지리서이다. 그는 이 책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계획해 먼 길을 떠났는데,
우리의 옛 땅인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친일 패거리인 일진회(一進會) 회원으로 오인을
받아 자칫 골로 갈 뻔했다.


▲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왜정(倭政) 시절 금서(禁書)의 하나로 월남(베트남)의 망국 과정을 담았다.
만해는 이 책을 애독하면서 월남의 망국과 조선의 망국을 비교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강조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의 하나인 황단삼회장 저고리 복제품

비공개인줄 알았던 복장유물의 일원인 저고리가 만해기념관에 들어있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고운 빛깔의 그를 대하니 글쎄 복제품이란 3글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3글자에 얼
마나 허탈하던지;; 복장유물 진품은 공개를 하지 않으며, 만해기념관에 있는 것들도 크게 땡
기는 것이 없어 이 정도로 마무리를 짓는다.


▲  백담사 잠수교 (백담사에서 바라본 모습)

백담사와 속세를 잇는 다리로 수심교와 잠수교 2개가 있다. 백담계곡에 높이 걸려있는 수심교
는 뚜벅이들 전용 다리이고 키가 낮은 잠수교는 차량 통행용으로 뚜벅이들도 이용이 가능하다
. 계곡이 얌전할 때는 건너가도 상관은 없으나 폭우로 계곡이 크게 흥분한 경우에는 다리가
침수되어 이름 그대로 잠수교가 된다. 그때는 무조건 수심교로 건너가야 된다.


▲  백담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잠수교와 백담사

▲  백담계곡 돌탑의 장대한 물결

백담사에 왔다면 목조아미타여래좌상도 중요하지만 백담계곡에 장엄하게 펼쳐진 돌탑의 무리
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백담사를 대표하는 풍경(백담사를 소개하는 자료나 사진에 메인으로
등장함)으로 경내 밑에서 계곡 상류 약간까지 계곡 돌밭에 수만 개가 넘는 조그만 돌탑이 닦
여져 있다.
눈과 얼음에 꽁꽁 봉해진 계곡 물줄기와 울창한 산림과 어우러진 이곳 돌탑은 중생들이 쌓은
것도 있고, 백담사에서 쌓은 것도 있는데, 그들이 쌓은 돌탑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돌탑의
거대한 공간이 되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여름이나 초가을에 폭우로 계곡이 단단히
흥분을 하면 돌탑 상당수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가기도 하나 계곡이 흥분을 가라앉기가 무섭게
돌탑이 마구 뿌리를 내리며 이전 모습을 되찾아 그야말로 '솟을 돌탑'이다.


▲  사람들의 소망을 먹고 자란 백담계곡 돌탑들

▲  돌탑과 자연석이 뒤섞인 계곡 돌밭과 얼어붙은 백담계곡
(백담사 방향)

▲  겨울 햇살이 살포시 어루만지는 백담계곡 돌탑들 (수렴동계곡 방향)



 

♠  백담사와 영시암을 이어주는 수렴동계곡(水簾洞溪谷)

▲  수렴동계곡 하류 숲길

보통 백담계곡은 영실천 물줄기 중 백담사입구에서 백담사 주변까지, 그리고 수렴동계곡은 백
담사에서 수렴동대피소 구간 물줄기를 일컫는다. 수많은 소(못)와 담, 기암괴석,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계곡으로 외설악(外雪嶽)의 천불동계곡(千佛洞溪谷)과 함께 설악산의 대표 계곡으로
추앙을 받는다.

나는 백담사 후식용으로 영시암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백담사에서 그곳까지는 약 3.5km 거리
로 1시간~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나는 걸음을 서둘러 1시간에 갔는데, 오로지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이다. 오르락 내리락이 여럿 반복되고 평탄한 길도, 나무데크 길도 이어지며, 아슬아
슬한 벼랑길도 나타나는 등,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허나 영시암~오세암, 영시암~봉정
암~대청봉 구간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  얼어붙은 수렴동계곡 하류

조선 때는 백담계곡과 수렴동계곡을 통틀어 곡연(曲淵)이라 불렀다. ('백담계곡'만 지칭하기
도 함) 설악산에 퐁당퐁당 빠졌던 옛 사람 중의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있는데, 그는
곡연을 다녀가 '곡연기(曲淵記)'를 남겼다.
그 기록에는 곡연의 길이는 수십 리에 이르며, 사방이 막혀있어 사람이 통하지 못하나 안으로
들어가면 지세가 평탄하고 넓으며 토지가 비옥해 밭을 일구어 살만하다고 했다. 또한 수석의
뛰어남은 이곳이 제일이라 치켜세웠으며, 옛 집터가 하나 있는데, 그 집은 김시습(金時習)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20세기 말까지 화전민(火田民)들이 설악산 골짜기 도처에 살았고, 백담~수렴동계곡에도 살았
으나 공원을 정비하면서 이제는 가늠하기도 어려운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  얼어붙은 계곡과 끝없이 펼쳐진 계곡 돌밭 (수렴동계곡 하류)

▲  겨울에 깊히 잠긴 수렴동계곡 산길
그윽하면서도 조금은 차가운 산바람이 나의 두 귀를 흥분시킨다. 겨울에
깊은 산골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시원하고 상큼한 산바람 소리.

▲  수렴동계곡에서 만난 설담당부도(雪潭堂浮屠)

적막한 수렴동계곡을 한참 거닐고 있으니 난데없이 늙은 승탑(부도) 하나가 발길을 붙잡는다.
이런 고적한 곳에 왠 부도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18세기 승려인 설담당의 승탑(僧塔)이다. 계
곡 길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묻혀있으나 길에서도 훤히 보이므로 정신줄을 크게 놓지 않는
이상은 지나칠 우려는 없다.
설담당은 신계 재익(新溪 載益)을 스승으로 삼아 출가한 승려로 법호는 태활(泰闊)이다. 용암
(龍岩)의 법통을 이었고 정월 지순(淨月 知淳)에게 그 법통을 전수했으며, 1781년 경상도에서
설악산 심원사를 찾아와 수행했고, 최붕을 도와 대웅전과 향각을 지었다. (1783년에 절 이름
이 백담사로 변경됨)
이후 그의 행적은 설악산 산신도 모를 정도로 묘연하며, 승탑이 있는 곳이 심원사 옛터 부근
이라 백담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보인다.

숲속에 외롭게 자리한 설담당부도는 18세기 말에 조성된 석종형(石鐘形) 탑으로 돌로 다진 네
모난 바닥돌 위에 탑을 올린 조촐한 형태이다. 엄연한 백담사의 유물로 백담사와 영시암 중간
정도에 자리해 있어 자연이 가득한 곳에 약간의 고색 기운을 선사한다.


▲  수렴동계곡 중류 산길
설담당부도를 뒤로 하며 잠시 잊었던 영시암으로 길을 재촉한다.

▲  수렴동계곡 벼랑길

▲  수목이 울창한 수렴동계곡

▲  얼음에 꽁꽁 봉해진 수렴동계곡 (영시암 직전)



 

♠  수렴동계곡 깊숙한 곳에 고적하게 자리한
설악산 영시암(永矢庵)


▲  뒷쪽에서 바라본 영시암 경내와 설악산의 깊은 산주름

머리 세었으나 마음은 한층 활기차고 몸은 말랐으되 도(道)는 더욱 살찌네
안위(安危)는 산 밖의 일이니 영원히 영시암 문 열지 않으리

'김창흡이 지은 영시암 춘첩(春帖)'

내 삶 괴로워 즐거움이 없으니 속세의 모든 일 견디기 어려워
늙어서 설악에 투신하려고 여기에 영시암을 지었네
자연을 진실로 사랑하니 바위와 연못 마음에 맞어
마음대로 해도 마땅하니 쓸쓸함도 달게 여기네

'김창흡이 지은 '암자를 얻고서'


백담사에서 1시간을 들어가니 영시암이 슬슬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 앞으로 다가선다. 나를 이
첩첩한 산골까지 부른 영시암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이 지은 집에서 그 역사
가 시작된다.
안동김씨 집안인 김창흡은 김수항(金壽恒)의 3째 아들로 성리학과 시문(詩文)에 능했다. 그는
벼슬에는 관심이 거의 없어 팔자 좋게 산수(山水)를 즐겼는데,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己
巳換局)으로 부친 김수항이 처단되고, 모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세상에 대한 염증이 심해
졌다.
하여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설악산으로 들어갔고, 백담계곡 하류에 집을 지어 3년의 공사 끝
에 1707년 완성을 보았다. 그는 그 집을 벽운정사(碧雲精舍)라 부르며 속세에 지친 몸을 기댔
으나 1708년 화재로 날려먹고 만다.
그렇게 다시 염증을 느낀 그는 더 깊숙한 곳으로 발길을 재촉, 현재 영시암 자리에 퐁당퐁당
빠져 암자를 짓고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란 뜻의 영시암이라 했다. 즉 속세를 영원히 떠나 은
거하겠다는 자신의 굳은 의지를 이름에 담은 것이다. <사대부의 집이나 별서에 '암(庵)'이란
이름을 많이 썼음>

그 시절 영시암의 모습은 김창흡이 쓴 포음집(圃陰集)의 동유기(東遊記)에 잘 나와있다. 집은
북향을 한 판자집으로 위치한 곳이 꽤 높으며, 남쪽은 복실이고 북쪽은 작은 다락이라 시원함
과 따뜻함을 갖추었다. 집에서 서남쪽 위로 200보 거리에 무청정(茂淸亭)이란 정자를 세웠는
데, 한유(韓愈)의 반곡서(盤谷序)에 나온 말에서 따왔다. 나무를 다듬지 않아 예스러운 모습
이다.

그는 거사 최춘금(崔春金)과 같이 살았는데, 1714년 10월 그가 볼일을 보러 속세로 나갔다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만다. 이에 다시 실의에 빠졌고 그의 장례를 치루고는 다시는 오
지 않을 기세를 보이며 영시암과 설악산을 떠났다.
허나 설악산을 잊지 못해 금방 다시 찾았고, 백담계곡 하류에 갈역정사(葛驛精舍)를 짓고 머
물렀다. 거기서 수렴동계곡과 영시암은 가까운 거리이나 다시는 찾지 못했으며, 그렇게 인생
을 마감하게 된다. 또한 그가 세운 영시암도, 갈역정사도 주인을 따라 모두 사라지고 만다.

1749년 인제현감 이광구(李廣矩)가 오랫동안 버려진 영시암의 자취를 찾았고, 그 자리에 유허
비(遺墟碑)를 세워 그 자리를 추억했다. 이후 승려 설정(雪淨)이 이곳에 반해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1760년 현재 영시암을 짓게 된다. 영시암은 그렇게 사대부의 거처에서 불교 사찰로
바뀌게 된 것이다. 1925년에 중건을 했으며, 근래에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비로전, 삼성각,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어 절이 갖출 건
물은 거의 지니고 있다. 오래된 문화유산은 전하지 않으나 절 앞에 수렴동계곡이 흐르고 주변
풍경이 고와 인간 세상의 풍경 같지가 않다.

이곳은 백담사에서 봉정암, 오세암, 대청봉으로 가는 길목이라 지나가는 수요가 많다. 게다가
인심도 후해 나그네들에게 믹스 커피와 뜨거운 물, 사탕 등의 간식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쉼
터를 갖추고 있어 잠시 휴식 겸 망중한에 잠기기에 좋다.

* 영시암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1720 (백담로 1125 ☎ 033-462-6677)

▲  범종 등의 사물을 지닌 2층 크기의
범종루(梵鍾樓)

▲  근래 장만한 비로자나불의 거처
비로전(毘盧殿)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건물로
칠성(치성광여래)과 독성(나반존자),
산신의 공간이다.

▲  삼성각에 봉안된 산신과 칠성, 독성

▲  팔작지붕을 지닌 선방(禪房)


▲  영시암 현판을 내건 법당(대웅전)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영시암의 중심 건물이다.

▲  금동 피부를 자랑하는 대웅전 석가여래삼존상과 지장보살상
설악산의 좋은 기운을 늘 누리고 살아서일까? 다들 표정들이 맑고 명랑하다.

▲  영시암의 넉넉한 마음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해 뜨거운 물과 커피믹스, 사탕 등을 흔쾌히 제공하고 있다.
바로 앞에는 의자와 탁자를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영시암을 둘러보고 아쉽지만 여기서 길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봉정암, 오세암, 그리고 대
청봉까지 쭉쭉 올라가고 싶었지만 시간도 문제이고 거기까지 올라갈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특히 봉정암과 대청봉은 1박을 해야 무리가 없을 것이다.
봉정암과 오세암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왜 이렇게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지 '저기만 더 올라가
면 봉정암인데, 오세암인데' 너무나 아쉽다. 허나 이번 인연은 여기까지라 여기서 쿨하게 길
을 접고 영시암 이후 구간은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며 백담사로 내려왔다.


▲  빽빽하게 우거진 수렴동계곡 산길
겨울이라 그렇지 봄이나 여름, 가을에 왔으면 하늘을 보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  박석이 입혀진 수렴동계곡 산길

▲  계곡 바위에 심어진 산악신앙의 소박한 현장, 돌탑들

▲  돌탑의 거대한 세상, 백담사 옆 백담계곡

백담사로 내려왔으나 벌써 철수하기에는 50% 아쉬워 다시 백담사로 들어갔다. 마침 불교용품
파는 곳에서 절을 찾은 사람들에게 새해 기념으로 '백담사 법요집(法要集)'을 나눠주고 있어
서 기념으로 하나 챙겨왔다. (가져오긴 했으나 거의 읽지도 않은 것은 함정)

절을 나오니 속세로 나가는 마을버스가 바퀴를 접고 승객을 태우고 있다. 매표소에서 버스표
를 구입하여 버스에 탑승했고, 버스는 2/3 정도를 채우고 구불구불한 길을 10여 분 달려 백담
사 주차장에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중간에 2~3명이 탔는데 그들은 설악산국립공원 직원이었
음)
여기서 백담사입구로 나와 수도권으로 가는 시외직행버스를 타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은 설악산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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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방산면 나들이 <수입천, 직연폭포, 양구백자박물관>

양구 직연폭포, 백자박물관



' 강원도 양구 여름 나들이 '
(직연폭포, 양구 백자박물관)
양구 직연폭포
▲  양구 직연폭포
 



 

여름이 점점 깊어가던 6월의 끝 무렵, 한반도의 정중앙이자 배꼽을 자처하는 강원도 양구
(楊口) 땅을 찾았다.

양구는 거의 9년 만에 방문으로 이번이 4번째 인연인데, 양구읍내 북쪽에 있는 '양구근현
대사박물관'과 '양구 선사박물관', 선사박물관의 깜찍한 마스코트인 '가오작리 선돌', 파
로호 상류에 떠있는 '한반도섬' 등을 간만에 복습했다. 이들은 거의 한곳에 몰려 있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편하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들을 모두 둘러보고 양구 읍내로 나오니 어느덧 15시, 점점 흥분이 더해가는 여름 제국
의 기운과 10km에 가까운 행군으로 몸은 다소 지쳐 있었다. 읍내 다음으로 방산면 지역의
직연폭포와 백자박물관을 정처(定處)로 두고 있었으나 날도 덥고 피곤도 하려니와 하루에
너무 많은 것을 봐버리면 내 침침한 두 망막이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아서 마음을 싹 비
우고 철수하려고 했다.
그래서 양구시외터미널로 들어가 양구를 뜰 궁리를 하던 찰라, 방산(오미리)으로 가는 군
내버스가 나타나 나의 그런 태만에 빵빵 제동을 건다.
'그래! 오늘 죽더라도 방산면과 인연을 짓자' 마음을 고쳐먹고 그 버스에 올라 미답(未踏
)의 공간인 방산면으로 이동했다.

방산면(方山面)은 양구 지역의 서북부를 이루고 있는 고장으로 읍내에서 방산면 중심지인
현리까지 30여 분 정도 걸린다. 서쪽은 남북분단이 빚은 어이없는 작품, 평화의댐에 이르
고 북쪽은 미움의 선, 휴전선으로 막힌 외로운 곳으로 두타연(頭陀淵)이 있는 고방산리까
지는 오로지 북만 보고 달리다가 거기서부터 급격히 서남쪽으로 길이 꺾인다.

방산면사무소(현리)에서 내려 남쪽으로 가면 방산면의 대지를 적시며 파로호로 흐르는 수
입천(水入川)이 마중을 한다. 수입천은 휴전선 이북에 강제로 잡힌 수입면 청송령(靑松嶺
)에서 발원한 34.8km의 하천으로 두타연과 직연폭포 등의 걸출한 명승지를 간직하고 있으
며, 수질 또한 전방 지역의 특수로 인해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  칠전1교에서 바라본 수입천 (서쪽 방향)
방산면의 중심지인 현리 마을 남쪽을 굽이쳐 북한강으로 흘러간다.

▲  칠전교에서 바라본 칠전1교와 수입천 (서쪽 방향)

▲  칠전교에서 바라본 직연폭포 방향
멀리 보이는 다리 밑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직연폭포가 누워 있다. 물이 얼마나
맑은지 주변 나무는 물론이고 하늘과 구름, 달까지 그를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수입천이 빚은 대작품, 직연폭포(直淵瀑布)

▲  직연폭포로 인도하는 수입천 산책로

칠전교에서 수입천 산책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귀신이 놀라 도망칠 정도로 소리가 요
란한 직연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금강산(金剛山) 밑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두타연을 거쳐 흐르다가 바위가 팽팽하게 들어선 이
곳에서 격한 흥분을 보이며 빚은 폭포로 동면 팔랑폭포(八郞瀑布, ☞ 관련글 보기)와 더불어
양구 지역을 대표하는 자연산 폭포이다.
팔랑폭포처럼 높이는 낮은 편이나 폭포 주위로 주름진 암벽들이 기묘하게 펼쳐져 있어 마치
조그만 대협곡을 보는 듯 하며, 폭포수가 고인 못은 깊이가 무려 20m가 넘어 많은 물고기가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물이 바로 떨어지는 못이란 뜻의' 직소(直沼)폭포'라 불렸으나 19세
기에 양구현감을 지냈던 '김구현'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직연(直淵)'으로 이름을 갈고 인근
바위 피부에 '직연' 바위글씨를 남겼다. (그 글씨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남아있지 않음)

암벽 한복판에서 요란하게 몸을 푸는 직연폭포에는 옛 사람들이 달아놓은 그럴싸한 전설이 있
을 법도 하지만 딱히 마땅한 전설은 없다. 다만 1922년 폭포 부근 칠전리에 살던 '김왈용'이
란 사람의 6개월 된 송아지가 직연에 빠져 죽은 일이 있었는데, 3자 이상이나 되는 메기들이
그 몸뚱이를 먹어치웠다는 소름 돋는 일화가 1토막 전해온다. 1자의 크기가 30cm 정도이니 대
략 90~100cm 정도 되는 메기들이 소고기 회식을 즐긴 것이다.

폭포 위에는 다리가 닦여져 있으며, 다리 너머에는 벼랑을 깎아 지은 방산백자폭포와 전통가
마 등이 있고, 다리 북쪽에는 양구 백자박물관과 백자공원이 닦여져 있다. 백자박물관 바로
남쪽에 폭포가 있으니 이들을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된다.

* 직연폭포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칠전리


▲  층층이 주름진 암벽 사이를 패기 있게 흐르는 직연폭포

▲  대자연이 시퍼런 물감을 풀어놓은 직연폭포 못(직연)
물에 둥둥 떠있는 하얀 것은 비누 거품이 아니라 폭포에서 쏟아진 물의
자연산 거품이다. 수질이 청정하긴 하지만 워낙 깊이가 있고
시퍼런 기운이 가득해 밑바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수풀 너머로 바라본 직연
산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닌 주변에 훤히 드러난 곳이라 하늘나라 선녀 누님도
마음껏 놀러오지는 못할 것이다.

▲  직연폭포의 허공을 가르는 다리
폭포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이 다리를 이용하자. 다리 바로 밑에 폭포가
무섭게 입을 벌리며 하얀 실타래 같은 물을 풀어놓는다.

▲  다리 바로 위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의 위엄

▲  다리 남쪽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와 직연소

▲  직연폭포 동쪽 수입천

폭포 동쪽 보 너머에는 백사장이 닦여진 완만한 공간이 있다. 그곳은 수심도 얕은 편이라 어
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피서객들에게 아주 그만인 곳이다. (내가 갔을 당시 한 가족이 텐트
를 치고 놀고 있었음) 다만 주변에 깊은 곳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은 필수이다.


▲  방산백자폭포에서 바라본 직연폭포 다리와 폭포 주변

▲  방산백자폭포 앞에 축소 재현된 황포 돛배

조선시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황포돛배를 통해 양구 지역의 백토와 여러 물자를 서울과 경기
도로 수송했다. 하지만 화천댐과 춘천댐 등 여러 댐이 북한강에 걸쳐지면서 물길이 모두 막혔
고, 도로가 닦이면서 육상교통이 그 역할을 대신하니 이제는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지기가 바
쁜 추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말라버린 방산백자폭포

직연폭포 남쪽에는 또 다른 폭포인 방산백자폭포가 주름을 가득 보이며 자리해 있다. 직연폭
포가 대자연이 빚은 작품이라면 백자폭포는 인간이 지은 인공폭포로 높이만큼은 직연을 훨씬
능가하지만 나머지는 대자연 형님 작품에 모두 밀린다.
이 졸작스러운 폭포는 직연폭포 주변에 백자박물관과 백자공원, 전통가마를 닦으면서 그 수식
용으로 지은 것으로 내가 갔을 때는 물은커녕 물기조차 느낄 수 없는 우울한 상태였다. 물이
좀 흐르고 있거나 자연산 비슷하게 만들었다면 좀 봐줄 만하겠지만 꽤 어색해 보이는 주름선
만이 가득하니 주변 풍경과 너무 맞지 않는 것 같다. (서울의 홍제천인공폭포와 순창 강천산
의 여러 인공폭포를 보고 배워야 될 듯함)


▲  백자를 굽던 전통가마

백자폭포 서쪽에는 백자박물관에 딸린 전통가마가 길게 누워있다.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비바
람을 막고자 그 허공에 길쭉하게 지붕을 씌웠으며 지붕 용마루 2곳에 연기를 배출하는 장치를
달았다. (지금도 가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

양구 지역, 특히 방산면은 고려시대부터 도자기 생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도자기 제조에 필요
한 백토(白土)와 도석(陶石)이 매우 풍부한데다 백토의 질도 매우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말부터 가마터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이곳을 꽤 애지중지하
여 많은 관요(官窯)를 설치해 백자를 생산했다. 조선 초에는 분청사기(粉靑沙器), 조선 말에
는 청화백자(靑華白瓷)도 생산했으나 백자가 그 중심을 이루었으며, 양구에서 만든 백자를 '
양구백자'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양구에서 40기의 가마터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상무룡리의 9기를 빼면 모두 방산면
(장평리, 칠전리, 현리, 송현리, 오미리, 금악리)에 분포하고 있어 방산면이 그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이렇듯 풍부한 백토 덕에 반짝 흥한 것이 아닌 20세기 중반까지 600년 이상 두고두
고 도자기 산지로 위엄을 떨쳤으며 이렇게 오랫동안 도자기를 만든 현장은 천하에서 양구 방
산면이 거의 유일하다.

이곳에서 태어난 백자 등의 도자기는 한강을 통해 서울로 운송되어 상당수 왕실과 귀족들에게
납품되었는데, 서울에서 가까운 광주(廣州)에 백자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마('광주분원'이라
고 함)가 많이 설치되면서 양구와 방산 지역 가마터는 조금 한가해졌다. 그래서 지역 사람들
을 대상으로 여러 그릇과 도자기를 만들어 판매했다.
허나 나라에서는 여전히 양구 백토를 선호하여 중심 안료로 계속 인기를 누렸다. <광주 지역
수토도 적지 않게 사용했음>
양구 백토는 매년 500~550석(72~79.2톤) 정도 채굴했는데, 이를 채굴하고자 양구의 민호(民戶
) 500호가 동원되었다. 백성을 닥달하여 백토를 캐내고 거기서 괜찮은 것을 선별한 다음 한강
을 이용해 봄과 가을에 2번 운송을 했는데, 이때는 북한강 주변의 인제, 화천, 춘천, 홍천 지
역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양구 백성들도 운송에 동원되었으나 1709년 이후 빠지게 된다. 백토
채굴도 힘든데 수송까지 시켜먹으니 백성들의 고단함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의 백토를 쓰려고 했으나 광주분원을 관리하던 사옹원(司饔院)에서 양구 백
토가 아니면 그릇이 거칠어지고 흠이 생긴다고 하자 계속 양구 것을 썼다. 이후 백성들의 고
통을 덜어주고자 상정미(詳定米)를 나누어 주고 백토 값을 올려주기도 했다.

백토를 수송할 때는 보통 배 10척에 25석씩 나눠 실었으며 화천이 110석, 춘천 220석, 인제
60석, 홍천이 12석을 나누어 운반했다. 또한 가뭄으로 물이 마르거나 제때 수송하지 못하는
경우는 말을 이용해 육로로 수송하기도 했고, 수송비를 주고 민간업자에게 맡기기도 했다.


▲  누런 황토로 닦여진 전통가마



 

♠  양구백자와 방산면 가마터를 집대성한 양구 백자박물관

▲  양구 백자박물관

직연폭포 북쪽에는 양구군에서 세운 백자박물관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양구는 기초자치
단체(군청, 시청, 구청)에서 세운 군립(시립) 박물관이 다른 군(郡)이나 인구가 적은 시(市)
에 비해 아주 많은 편으로 이번 나들이는 기이하게도 양구의 군립박물관 3곳(근현대사, 선사,
백자)과 한꺼번에 인연을 지었다.
 
방산면 중심지(현리) 동남쪽에 자리한 백자박물관은 2006년 6월 27일에 문을 열었다. 2003년
박기병(현재 명예관장)이 수집한 양구백자 50여 점을 양구군에 흔쾌히 기증을 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양구백자를 취급할 박물관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어 양구백자의 대표 생산지인 방산
면 한복판에 그들을 전시하고 다룰 박물관을 세우게 되었다.
양구군은 박기병의 기증 이후 많은 이들의 문화유산과 자료 기증이 잇달아 그 방대한 자료로
근현대사박물관을 차리고, 선사박물관에 삼엽충(三葉蟲) 화석 전시실까지 닦았으며, 거기에
양구백자박물관까지 차렸으니 정말 기증 복은 많은 고장이다.

전시 유물은 50여 점 정도로 양구백자실과 도자역사문화실 등의 전시실 2개를 지니고 있으며,
전시실 외에 전기가마, 가스가마, 장작가마를 갖추어 도자기 체험을 선사하는 체험실, 양구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를 판매하는 박물관(뮤지엄) 샵, 영상실, 전통가마, 칠전리 1호 가
마터, 백자공원을 갖추고 있다.
(예전에는 입장료가 없었으나 요즘에는 어린이(8세 이상)/청소년/군인/65세 미만 성인들에게
일률적으로 3,000원을 받고 있음)


▲  백자박물관에서 직연폭포로 이어지는 하얀 길
길바닥에는 백자박물관에 걸맞게 백자 등의 도자기 파편들이 박혀있다.

▲  박물관 잔디밭에 심어진 커다란 도자기 파편들 (오래된 것들은 아님)

▲  진지하게 도자기를 빚고 있는 도공의 모형

▲  '순(順)' 글씨가 쓰인 백자 접시 파편
작살난 파편에 깨알처럼 쓰인 '순'은 태종 말엽에 잠시 있었던
'순승부(順承府)'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사진 참조)

▲  새가 나무가 그려진 백자청화수명호 (조선 중기)

▲  '구(龜)'가 쓰인 백자청화 대발 (조선 후기)
거북이처럼 장수하라는 의미에서 대발 피부에 '龜'를 넣은 것 같다.

▲  여러 자연물이 그려진 백자청화초화문호의 수수한 자태

▲  양구 백토를 먹고 자란 여러 백자들

▲  천하에서 가장 좋은 백토로 꼽히는 양구 백토의 위엄
저 하얀 가루가 바로 백자를 야무지게 해주었던 양구 백토이다. 지금도 많이 나오고
있으며, 저 백토로 양구와 방산 지역 가마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유지했다.

▲  백자박물관 바깥에 마련된 전통가마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불에 다지는 공간이다.


전시실에서 순백의 미와 몸매를 뽐내고 있는 백자들을 구경하며 일부를 사진에 살짝 담고 영
상실에서 지친 두 다리에게 잠시 자유를 주며 양구백자 관련 영상을 시청했다. 전시실 바깥에
있는 전통가마를 구경하고 백자박물관을 마무리 지었는데, 그만 칠전리 1호 가마터를 놓치고
말았다.
야무지게 본다고 했음에도 하나를 놓치고 말았으니 아직 내공이 멀었나 보다. 그 가마터는 언
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넘기고 장평리(방산면소방서) 정류장으로 나왔다. 시간은 벌써 18시
, 햇님은 여름 제국의 눈치를 격하게 보며 아직까지 퇴근을 못해 세상은 훤하다.

백자박물관을 끝으로 양구 땅에 목적한 곳을 모두 둘러보았다. 한동안은 양구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버스를 기다린 지 10여 분 뒤, 양구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가 모습을 드러
내며 내 앞에서 입을 벌린다. 그것을 타고 다시 읍내로 나가 춘천(春川)으로 나가는 직행버스
에 고된 몸을 실으며 나의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양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양구백자박물관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장평리 344 (평화로 5182 ☎ 033-480-7238)
* 양구백자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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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깊은 내륙이자 한반도의 배꼽, 양구 나들이 (양구근현대사박물관, 양구선사박물관, 파로호인공습지, 한반도섬)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가오작리 선돌, 한반도섬(파로호인공습지)



'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여름 나들이 '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한반도섬)
양구 가오작리 선돌
▲  양구 가오작리 선돌
 



 

여름이 무심히 깊어가던 6월의 끝 무렵, 한반도의 배꼽을 자처하는 강원도 양구(楊口) 땅
을 찾았다.
아침 일찍 경춘선 전철을 타고 그림처럼 펼쳐진 북한강을 벗삼으며 강원도의 중심 도시인
춘천(春川)으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발을 들인 춘천이지만 마음은 이미 양구에 넘어간 상
태라 남춘천역 인근에 있는 춘천시외터미널에서 양구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렇게 춘천을 콩 볶듯이 떠나 첩첩한 산주름 속을 50분 정도 내달려 양구읍 한복판에 자리
한 양구시외터미널에 두 발을 내린다.

이 땅에 바람직하지 않은 나쁜 선, 휴전선을 강제로 짊어지고 있는 양구 땅은 거의 8~9년
만에 방문이다. 서울보다 높은 곳에 자리한 탓에 그리 덥지는 않았으며, 공기도 확연하게
틀려 청정함마저 진하게 느껴진다. 오죽하면 양구에 오면 10년은 젊어진다고 강조까지 하
겠는가. (양구군청에서 그렇게 강조하고 있음)

양구에서는 이미 정처(定處)를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이하 근현대사박물관)'으로 예전 '양구향토사료관'
이다. 이곳은 양구터미널에서 북쪽으로 2km 거리로 '양구 선사박물관(이하 선사박물관)'
바로 남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들은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었지만 정처의 하나인 한반도
섬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동선상 들리게 되었다.
게다가 '근현대사박물관'으로 거창하게 이름까지 바꾼 '양구향토사료관'이 어찌 변했을까
궁금도 했고, 눈과 코, 입을 지닌 깜찍한 돌덩어리, 가오작리 선돌의 안부도 궁금했다.


▲  여름 가뭄으로 그림이 완전히 바뀐 파로호 인공습지 남쪽 부분


양구 읍내를 벗어나면 근현대사박물관으로 인도하는 길(함춘로) 서쪽으로 수풀로 덥수룩
한 너른 공간이 나온다. 마치 물이 나간지 오래된 황량한 수몰지대처럼 덥수룩하기 그지
없는데, 이곳이 양구군의 야심작이었던 파로호(破虜湖) 인공습지이다.
이 습지는 이 땅 최초의 인공습지로 읍내 북쪽에서 양구서천(西川)을 따라 한반도섬까지
이어지며 그 거리는 2km가 넘는다. 허나 오랜 가뭄으로 물은 몽땅 말라버렸고 물이 가고
없는 자리에는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졸지에 밀림과 초원 같은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하늘의 야박함으로 여러 달째 습지의 정체성을 잃은 이곳은 원래 파로호 물을 먹고 살던
경작지였다. 허나 무단 경작과 농약과 비료의 과다 사용, 쓰레기 투기, 흙/돌의 무단 채
취 등으로 수질이 악화되었고, 경관 또한 나날이 훼손되자 뿔이 난 양구군청에서 2007년
에 이곳을 싹 갈아엎고 서천과 한전천이 만나는 하류부에 저류보를 다진 다음, 수면공간
을 확보하고 습지를 조성해 2008년 말 완성을 보았다.
그렇게 태어난 습지의 면적은 약 163만㎡로 천하 최대급을 자랑하며 저수량은 300만㎥에
이른다. 또한 양구가 한반도의 배꼽임을 강조하고자 한반도 모양의 섬을 닦아 양구의 새
로운 꿀단지로 격하게 키우고 있다.
하천변에는 자전거길을 겸한 산책로를 내었으며, 강원외고 서쪽과 선사박물관 서쪽에 습
지 탐방로를 내었다.


▲  물이 가득 올랐던 예전 어느 겨울의 파로호 인공습지 (2008년)

▲  거대한 초원이 되버린 파로호 인공습지
물은 저 멀리 밀려나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다.

▲  정체성을 잃은 파로호 인공습지
인공습지 너머로 하리, 동수리 지역과 양구의 서쪽 지붕 사명산(四明山, 1,198m)이
시야에 들어온다.

▲  파로호 인공습지 산책로 (자전거길)
양구읍내에서 인공습지 옆구리를 따라 한반도섬까지 이어지는 호젓한 길이다.

▲  인공습지 습지식생대를 가르는 습지 탐방로 (선사박물관 서쪽)
습지에 물이 없으니 나무로 만든 습지 탐방로도 딱히 의미가 없어졌다.
그냥 들판 위에 다진 다리에 불과해진 것이다.



 

♠  양구 지역 문명시대(文明時代)의 역사와 이 땅의 근현대사를 담은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  근현대사박물관 정문 앞에 있는 쌍겨리 조형물
쌍겨리란 멍에에 소 2마리를 지어 논, 밭을 가는 것으로 1마리는 독겨리라고 한다.
쌍겨리 농법은 화전이나 단단한 땅을 갈 때 많이 이용되었다.


양구 선사박물관과 마주보고 있는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은 양구군에서 세운 군립(郡立) 박물관
으로 2002년 11월에 문을 열었다. 원래 이름은 '양구향토사료관'으로 건너편 선사박물관이 선
사시대의 양구를 다루었다면 이곳은 옛 조선(고조선)부터 20세기까지 문명시대의 양구를 다루
고 있었다.
그 시절 소장 유물은 600여 점으로 양구의 역사와 문화, 생활을 담은 작은 박물관이었으나 국
내 제1호 아리랑박사로 불리는 석우(石牛) 박민일<2011년에 10,700여 점을 기증>, 강원도민일
보 특파원을 지냈던 송광호<2012년과 2014년에 기증>, 연세대 명예교수이자 철학박사인 김형
석<2014년에 580여 점을 기증>, 독립운동가인 장준하(張俊河)의 장남이자 고려문화연구원 이
사장인 장호권 등 4명이 그들의 소장 자료와 문화유산 15,000여 점을 양구군에 흔쾌히 기증하
면서 번데기를 탈피한 나비처럼 크게 업그레이드를 하게 된다.
그 방대한 자료를 담고자 기존의 향토사료관을 2012년 7월부터 2년 동안 손질하여 2014년 9월
4일, 간판까지 바꾸어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강원도 최초의 근현대사 전문 박물관으로 박물관의 중심이 양구에서 근현대사로 맞춰졌고, 근
현대사와 기증 받은 자료의 공간이 더해져 스케일이 엄청 커졌다. 기증 유물로 인해 소장 자
료만 무려 16,000점 가까이 머금게 되었고, 눈에 착착 달라붙는 다양한 주제의 볼거리와 사라
지기가 바뻤던 옛 존재들, 과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20세기 중~후반 볼거리까지 흥미로운
것들이 많아 침침한 두 눈과 과거를 늘 그리는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박물관은 2층 규모로 '제1전시실'에는 이 땅의 근현대사를 집대성한 '역사의 휘모리', 오래된
우표와 엽서가 전시된 '엽서관','우표관','씰관'이 있고, '제2전시장'에는 우리나라 영화의
역사와 영화 관련 자료를 모든 '추억의 영화관', 아리랑 문화의 다양한 면을 다룬 '아리랑관'
, 근현대 출판의 역사를 다룬 '창간호관'이 있다.
'기획전시실'에는 박민일, 송광호, 김형석이 기증한 자료의 일부를 다루고 있으며, 근현대사
박물관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양구향토민속자료관에는 양구의 역사와 문화, 생활을 담고 있다.
그 외에 '추억의 교실','근현대사 체험의 공간','주막'이 있고, 양구 곳곳에서 수습한 비석과
연자방아, 맷돌 등의 문화유산이 뜨락을 채우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근현대사박물관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시 유물 일부를 전시관 순
서에 상관없이 다루도록 하겠음)

       ◀  초가 주막(酒幕)과 물레방아
주막에서는 국밥과 도토리묵, 메밀전병과 동동
주를 팔고 있다.
주막 앞에는 연못이 닦여져 있는데, 물레방아
가 쉬지 않고 돌아가며 연못에 물을 베푼다.

◀  양구에서 발견된 구석기/청동기시대 유물
왼쪽 돌덩어리들은 구석기 유물인 '찍개', 오
른쪽 것들은 청동기 유물인 '간돌도끼'와 '간
돌화살촉'이다.


▲  검은 피부의 신라 토기들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옛 조선(고조선)이 사라진 후, 그 땅에는 고구려(高句麗)와 부여, 낙랑,
백제, 신라, 가야 등의 수많은 나라가 생겨났다. 요녕성(遼寧省) 지역인 요동(遼東)과 요서(
遼西)에서 시작된 고구려가 오랫동안 양구를 통치했고, 6세기 중반 이후에 신라가 접수 받아
양록군(楊麓郡)으로 지명을 변경하여 400년 가까이 통치했다.
이들 토기는 양구 지역에서 나온 것들로 신라 조정에서 파견된 양록군 태수(太守)나 양구 지
역 세력가들이 사용했을 것이다.


▲  고려시대 청동 수저와 청동 사발

9세기 말, 신라의 영역이 크게 3개로 쪼개지면서 양구는 후고구려(태봉, 마진)를 세운 궁예(
弓裔)의 지배를 받는다. 이후 918년 왕건(王建)의 고려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춘주(春州,
춘천)의 속현(屬縣)이 된다.
이들 청동 수저와 그릇은 지역 세력가나 관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숟가락이 지금보다 훨씬
커 그들의 왕성했던 식성을 보여준다.


▲  푸른 꽃이 그려진 백자 청화초화문 항아리 (조선 후기)
백자 피부에 깃들여진 꽃이 무척 곱다.

▲  왜정 때 만들어진 하얀 그릇과 '양구군 함춘리 이임명' 글씨가
새겨진 검은 피부의 놋그릇

▲  1950년대 이후 양구 군인들이 사용했던 수통과 수류탄 등잔,
군용 반합과 숟가락, 피복바구니

▲  이 땅의 경제를 이끌었던 20세기 지폐들

개인적으로 오른쪽 줄의 자주색 1,000원권과 점선이 있는 10,000원권, 그리고 1980년대에 사
라진 500원권에 크게 마음이 간다. 이들을 손에 쥐며 사용했던 것이 정말 엊그제 같은데 새
지폐에게 모두 밀려나면서 대부분 불살라지고 말았다.


▲  추억이 되버린 다양한 전화카드(위)와 서민들을 희망고문시켰던
여러 복권들(아래)

▲  옛 초등학교 교과서와 가방 (1970~80년대)
나도 어렸을 적에 저런 책으로 공부를 했었지. 근데 '보건'이란
교과서는 처음 본다.

▲  방산초교(방산국교)를 졸업한 어떤 이의 솔직한
생활통지표와 졸업 수료증(1978년)
내 초등학교 시절(그때는 국민학교)에도 저런 생활통지표가 쓰였다. 나의
교과학습 성적표에는 늘 '양'과 '가'만 가득했었지. '수'와 '우'는
가뭄에 콩나듯 나왔던 걸로 ㅠㅠ


▲  1960년대 강원도 미인들의 위엄 (미스 강원 선발대회)
빛바랜 흑백사진에 나온 미인들, 지금은 70~80대 할머니가 되어 세상 어딘가에서
살고들 있을 것이다. 파릇파릇한 저들이 설마 백발 할머니가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  고종(高宗)이 관리를 임명하면서 내린 칙명(勅命) <광무 7년, 1903년>

▲  네모난 구멍이 파인 옛 동전들
위에 조그만 동전은 송나라(1107~1110년) 동전인 대관통보 당십전(代官通寶 當十錢)이고
밑에 3개는 조선 후기에 널리 쓰인 상평통보(常平通寶)이다.

▲  왜정 시절 결전식기(決戰食器)와 궁성요배(宮城遙拜) 전단

돌다리와 붉은색 해가 담겨진 윗 사진은 왜열도 동경(토쿄)에 있는 황거(皇居, 코쿄)이다. 황
거란 왜열도 백성들의 영원한 등골브레이커 왜왕(倭王)과 그 떨거지들이 서식하는 곳으로 20
세기 전반기 왜국 군국주의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왜정은 저런 것들을 통해 이 땅의 사람들
에게 충성과 협조를 강요했다.


▲  의친왕 이강이 1914년 초가을에 쓴 글씨 (가운데 유물)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은 고종의 5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인 장씨이다. 이곳
에 그의 글씨가 1점 전시되어 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끝없이 펼쳐진 대륙은 그 드넒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산은 솟고 물은 흐르며 온갖 경계는 높
고 낮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그 밝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구름은 모이고 달은 숨으며 온갖 물
상은 같은 것이 없다. 이것이 하늘과 땅이 크다고 하지만 오히려 아쉬운 것이 있다.

아아! 인생만사 잠시라도 그 높고 낮은 산수와 변화무쌍한 구름과 달에서 그것을 즐기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명(命)을 아는 사람은 산에 가면 산과 함께 높아지고, 물을 만나면 반드
시 물과 함께 맑아지고, 구름과 마주치면 반드시 구름과 함께 치사(致辭)하고, 달을 만나면
달과 함께 숨어서 그 오는 것에 나를 맡길 뿐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그 안은 비워두고 그 바깥은 채우며, 그 날카로운 끝을 무디게 하고 그 등지
는 것을 벗어나야 한다. 쓰이게 되면 행하여 그 능력을 팔지 않으며 버려지면 숨어서 그 몸을
치욕스럽게 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세상에 처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  김형석 교수가 기증한 조선시대 백자들
김형석은 2012년 양구에 '시와 철학의 집'을 개관한 인연으로 자신이 수집했던
백자와 청자, 서화(書畵) 등 580여 점을 양구군에 기증했다.

▲  고고한 푸른 빛을 드러낸 고려 청자들
저 청자로 마시는 차와 곡차(穀茶)의 맛은 어떠할까? 아무리 맛없는 곡차나
쓴 차라고 해도 저들을 통하면 달달한 맛으로 바뀔 것 같다.

▲  고려 상감청자(象嵌靑瓷) 사발

▲  조선 분청사기(粉靑沙器) 사발

▲  조선 백자 사발

▲  조선 후기 청화백자

▲  북한에서 넘어온 상감청자(1990년 작)

▲  빛깔이 고운 청자상감과초화문 꽃병
(1990년 북한)

양구 지역이 북한과 살을 대고 있는 현장이다보니 북한에서 넘어온 존재들이 여럿 담겨져 있
다. 이들은 송광호 기자가 시베리아와 북미대륙 등에서 수집한 것을 양구군에 기증한 것으로
북한을 코 앞에 둔 곳이라 그런지 꽤 남달라보인다.


▲  북한의 소액 화폐들 (50전, 1원, 50원짜리)

▲  북한의 중/고액 화폐들 (1원, 10원, 100원, 200원, 500원)

▲  20세기 중/후반 영화 포스터들

▲  20세기 영화포스터와 여러 잡지들

▲  조촐하게 재현된 옛 극장 출입문


▲  옛 초등학교 교실을 재현한 추억의 교실 (박물관 세미나실)

나도 저런 교실에서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는 저 의자와 책상이 딱 사
이즈에 맞았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저기에 앉아서 공부를 했는지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좁다.
그만큼 나의 면적이 넓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뚱뚱한 것은 아님)
이곳은 전시용 외에도 강연과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육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다.


▲  추억의 교실 한복판에 놓여진 난로

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겨울마다 저 난로를 교실 한복판에 두어 난방을 했었다. 담당
주번은 학교 시설물을 수리하는 곳이나 창고에서 장작을 가져와 난로에게 먹였는데, 비록 오
늘날 난방기구만은 못해도 저 난로가 몸을 푸는 동안은 그런데로 따스했던 것 같다. 가끔 난
로에 도시락을 올려서 따끈하게 덥혀서 먹기도 했고 라면을 끓여먹기도 했었지.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도시가스나 전기로 대체되었고 그로 인해 저런 난로와 장작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저 난로의 온기를 받으며 교실에서 겨울잠을 잤던 본인으로서는 조금 아
쉽기는 하지만 어찌하랴. 그것 또한 변화의 과정이거늘, 이제는 정겨운 풍물시(風物詩)가 되
어 이런 곳에서나 만날 수가 있다.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뜨락과 가오작리 선돌

▲  근현대사박물관 뜨락 (장독대, 연자방아)

햇살이 내리쬐는 근현대사박물관 뜨락에는 양구 곳곳에서 가져온 비석과 연자방아, 맷돌, 돌
절구, 항아리 등의 문화유산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양구향토사료관 시절부터
있던 것이라 꽤나 낯이 익은데, 문화유산을 기증하여 박물관을 크게 살찌운 이들을 위한 '근
현대사 자료기증 감사비'가 한쪽에 닦여져 있어 그들을 두고두고 기리고 있다.

▲  현역에서 물러나 한가로운 여생을
보내는 연자방아

▲  나무 그늘 밑에 모인 비석들


▲  서로를 보듬고 있는 조그만 비석과 석인(石人)
늦가을에 버려진 낙엽처럼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채, 뜨락의 일부가 되버린
그들의 초췌한 모습에 쓸쓸함만이 감돈다.

▲  초가3간 수복주택(收復住宅)

수복주택은 6.25전쟁 이후 미국군이 양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지어준 초가이다. 나왕목으로
지었다는 특징 외에는 일반 초가와 크게 다를 것은 없으며, 수복(양구 지역은 1953년 이전까
지 북한 치하였음) 이후에 지었다고 해서 '수복주택'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허나 새마을운동 이후 대부분 사라지고 이곳으로 이전된 2채만 겨우 살아남아 수복주택의 존
재를 아련히 전해주고 있으며, 현재는 전통공예체험 장소로 쓰이고 있다.


▲  근현대사 자료기증 감사비 (김형석 교수)
그들의 크나큰 공로가 있기에 이 첩첩한 산골에 근현대사박물관이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  양구 선사박물관의 상징, 가오작리 선돌

선사박물관 앞에는 이곳의 상징으로 꼽히는 가오작리 선돌이 있다. 바닥에 평퍼짐한 돌을 깔
고 그 위에 세운 3m의 선돌로 아랫도리는 다소 볼록하여 풍만해 보인다. 중간에는 폭이 다소
넓어졌다가 위로 갈수록 일정하게 줄어들면서 세모로 머리 부분을 마무리 지었는데, 한반도의
배꼽을 칭하는 양구의 토박이 선돌이라 그럴까? 몸매가 한반도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의 얼굴에는 동그란 두 눈과 눈썹, 세모난 코, 살짝 구부러진 입 등이 앙증맞게 새겨져 있
어 정말 깜찍하기 그지 없다. 하여 나는 그를 '선사시대의 미소'라 칭하며 내 마음 바구니에
계속 넣어두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입과 눈은 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다. 가오작리에 있던 시절, 동네 사람이나 군
인이 심심풀이로 새긴 것으로 비록 수작(秀作)은 아니나 그렇다고 졸작도 아니어서 어색함이
없이 잘 새겨 놓았다. 예전(2008년)에 비해 눈썹과 코가 진하게 표현되어 그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그도 내가 올 것을 알았는지 미리 얼굴을 다듬은 모양
이다.
그래도 어여쁜 누님처럼 긍정이 느껴지는 눈과 미소가 드리워진 입술은 여전하여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한다.

원래는 근현대사박물관과 가오작리 선돌만 보고 바로 빠지려고 하였으나 앞에서 선사박물관이
진하게 아른거리니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애써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입장료도 무료이고 시간도 아직 넉넉하니 잠깐 발을 들인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간만에 발을 들인 선사박물관도 근현대사박물관만큼이나 많이 달라져 있었는데, 마음 같아서
는 그 박물관과 뒤쪽에 있는 고인돌공원도 싹 다루고 싶으나 내용이 너무 길어지므로 본글에
서는 쿨하게 생략한다. (예전에 갔던 ☞ 양구 선사박물관 글 보러가기)

*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하리 510 (금강산로 439-51, 54 ☎
  033-480-2677)
*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양구 선사박물관



 

♠  양구 속의 조그만 섬, 소한민국이라 불리는 한반도섬

▲  들판이 되버린 파로호 인공습지 (희망의 다리 부근)

양구 근현대사박물관과 선사박물관 세트를 둘러보고 잠시 잊었던 파로호 인공습지를 마저 거
닐었다. 습지라고는 하지만 오랜 가뭄에 지쳐 물은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한 황량한 들판이 되
버리면서 습지란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정말 때를 잘못 맞춰서 온 것이다.
그런 가련한 습지를 왼쪽에 끼고 북쪽으로 가면 한반도섬이 나온다. 양구가 한반도의 정중앙
임을 강조하고자 한반도를 축소 재현하여 띄워놓은 섬으로 소한민국을 칭하고 있다. 하지만
가뭄의 악영향으로 섬의 자격을 상실한 채, 그야말로 두툼히 솟은 언덕 신세가 되버렸다. 이
곳 매력은 물에 떠있는 한반도섬 자체의 모습인데 섬은 커녕 잡초 속에 두툼히 솟은 한반도
언덕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  가뭄에게 빼앗긴 습지에도 봄은 오는가? (한반도섬 남쪽)

▲  사막처럼 되버린 인공습지 (한반도섬 동남쪽)
이곳은 잡초도 포기했나보다. 거의 맨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  인공습지 강변(뱃길나루터)에
장식용으로 놓인 옛날 배

▲  알 모양으로 생긴 소한민국 조형물


한반도섬이나 지형이 갑자기 유명세를 탄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그때 영월(寧越)에서 3면
이 강으로 둘러싸인 한반도 모양의 지형이 발견되어 크게 주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후 옥
천(沃川) 등 여러 곳에서 대자연이 빚은 비슷한 지형이 발견되어 한반도지형이란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한반도와 비슷하게 생겨먹은 자연산 지형이 천하 곳곳에 숨겨져 있어 참 신비롭기 그지 없는
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양구는 아예 한반도섬을 만들어 띄워놓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자칫
우리의 강역과 활동무대를 한반도로 국한시키는 모양새로 비춰지기도 한다. 우리는 원래 만주
와 동북3성, 연해주, 산동반도, 중원대륙 화북(華北)과 서해바다 지역, 왜열도, 유구(오키나
와) 지역까지 다스렸던 잘나갔던 민족이다.
허나 잘난 조상보다는 제삿밥도 아까운 못난 조상이 더 많아 그 넓은 땅이 모두 갈라지고 흩
어졌으며, 민족은 분열되어 겨우 좁은 한반도만 추스린 딱한 신세가 되었다. 그 한반도도 남
북으로 갈라져 남북분단의 비애를 겪고 있으며, 개양아치 같은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고
통을 받고 있다.
다음에 한반도형 섬을 닦는다면 중원대륙과 일찍이 떨어져나간 왜열도는 빼더라도 대마도(對
馬島)와 동북3성, 만주를 포함하여 통 크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중심이자 일부이지 모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양구 속의 섬, 한반도섬을 이어주는 나무데크 다리
다리 높이는 4m 정도 된다. 원래대로라면 물이 2~3m 정도는 차있어야 되는데
50cm는 커녕 물기조차도 없다.

▲  억새가 춤을 추는 한반도섬 동쪽 (양구읍내 방향)
황량한 들판을 보니 마치 드넓은 대륙이나 초원을 거니는 기분이다. 한반도섬에서
옛 조선이나 고구려 같은 대륙의 기분을 느낄 줄이야. 역시 우리에게는
이런 좁은 땅보다는 넓은 대륙이 딱 어울린다.

▲  물이 없는 다리를 건너는 기분은 사람이 없는 도심 번화가를
걷는 기분일 것이다. (서쪽에서 바라본 나무데크 다리)

▲  한반도섬 동쪽에 닦여진 푸른 독도와 울릉도

▲  울릉도의 모습
한반도섬 주변에는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가 두툼하게 닦여져 있다.
(울릉도와 독도는 접근 불가, 제주도는 접근 가능)

▲  그늘이 별로 없는 한반도섬 산책로

한반도섬은 나무와 수풀로 가득한 녹색의 섬이다.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고 다리를 쉬어갈 수
있는 쉼터도 갖추어져 있으며, 섬 복판에는 공군에서 지원받은 비행기 1대가 자리하여 조촐하
게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그리고 섬 서부에는 짚와이어(짚라인)가 있다. (짚라인은 서천 건너
편 산에서 타면 됨)

바깥에서 한반도섬으로 인도하는 길은 섬 북쪽과 동쪽, 남쪽에 있으며, 남쪽 다리는 제주도로
상징되는 섬을 경유한다. 그 외에 짚라인을 이용해 공중을 가르며 짜릿하게 들어서는 방법이
있다. (짚라인은 유료임)


▲  한반도섬 옆구리를 흐르는 양구서천
물은 섬 서쪽 서천에서만 겨우 흐르고 있었다. 물이 더 차야만 섬 주변과
인공습지를 촉촉이 어루만져줄 것인데 서천 하나로도 벅차다.

▲  양구서천과 그 너머로 보이는
공수리, 동수리 지역

▲  한반도섬의 하늘을 지키는
RF-4C 정찰기


한반도섬 한복판에는 현역에서 물러난 정찰기 1대가 매달려 있다. 미국 맥도널 더글라스사에
서 F-4C전투기를 기반으로 만든 비무장 항공정찰형 모델로 1962년 개발에 착수해 1963년 5월
에 최초로 비행을 했는데, 이 땅에는 1989년 12월 18일 3대가 수입되었고, 1990년까지 18대를
더 도입하여 항공정찰용의 역할을 수행했다.
허나 RF-16전력화에 따라 2014년 6월 30일 퇴역을 했고, 공군의 협조를 받아 이곳에 두어 한
반도섬의 조촐한 볼거리이자 휴전선을 머리에 인 양구의 현실을 일깨워주는 안보용 볼거리로
삼고 있다.


▲  한반도섬 짚라인(짚와이어)
서천 건너 산에서 짚라인을 타고 바로 이곳에 착륙을 한다.

▲  한반도섬 남쪽 끝에서 바라본 인공습지
다음에는 어설픈 섬이 아닌 완전한 한반도섬을 만나고 싶다.

▲  한반도섬에서 바라본 울릉도(오른쪽 섬)와 나무데크 다리

▲  파로호 인공습지와 한반도섬을 뒤로 하며

한반도섬을 1바퀴 둘러보고 남쪽 다리를 통해 동수리로 건너가려고 했으나 마침 다리 보수공
사로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여 할 수 없이 건너왔던 동쪽 다리를 통해 육지로 넘어왔다.
한반도섬은 이렇게 볼일이 끝나 다시 읍내로 나가야되는데, 까마득하게 보이는 읍내를 보니
정말 멀리 오긴 했다. (양구터미널까지 약 3km) 도보 외에는 딱히 길이 없어 파워 도보로 양
구 읍내와의 간격을 좁혀나갔다.

방산면에 있는 다음 행선지로 가고자 읍내로 들어섰으나 오후 더위에 몸이 제대로 지쳐서 귀
차니즘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오늘 이 정도로 충분하다 여기고 마음을 곱게 접고 철수할까 했
으나 그때 방산면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눈 앞에 나타난다. 하여 약해진 마음을 다 잡으며 그
차에 몸을 실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막을 고하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한반도섬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고대리 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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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 단종애사의 현장, 영월 청령포 '

▲  서강 너머에서 바라본 청령포


 

 

봄이 천하만물의 격한 지지를 받으며 겨울 토벌에 여념이 없던 3월의 끝 무렵에 친한 후배
와 강원도 내륙 지역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홍천(洪川)의 여러 벽지 명소를 찍고 평창(平昌)을 거쳐 영월(
寧越) 땅으로 들어섰다. 이날 최종 목적지는 충북 단양(丹陽)으로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일
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치고 오랜만에 들어온 곳이라 그냥 지나치기는 섭하다. 하여 읍내
직전에 있는 선돌을 보려고 했으나 실수로 놓쳐버려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었던 청령포를
복습하기로 했다.

청령포는 영월읍내와 무척 가까운 곳으로 주차장에 이르니 16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주차장
은 거의 만땅이다. 간신히 자리를 잡아 차량을 잠재우고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해 유료
(有料)의 땅, 청령포로 들어선다.


 

♠  하늘이 빚은 천연 감옥, 청령포(淸泠浦, 명승 50호)

▲  청령포 나룻터와 서강 너머로 보이는 청령포

입장료를 내고 서강(西江) 강변으로 내려가면 청령포 나룻터(선착장)가 나온다. 청령포는 창
살도 필요 없는 궁벽한 곳이라 섬이 아닌 육지임에도 무조건 배를 타고 건너야 된다. 나룻배
는 2척이 다니고 있는데, 평일은 보통 1척, 주말과 휴일은 2척을 굴리며, 정해진 출발 시간이
없이 사람이 어느 정도 차면 시동을 걸고 느릿느릿 청령포로 이동한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 배를 돌리기가 무섭게 맞은편 강변에 닿는다. 소요시간은 길게 늘려봐
야 3~4분 정도로 배멀미가 나올 틈도 없으며, 수면이 잔잔하고 중간 부분을 제외하면 수심도
얕다. 허나 온갖 어이없는 재해와 재난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라 너무 방
심은 하지 말자.


▲  청령포와 속세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 청령포 나룻배

▲  나룻배에서 바라본 청령포 나룻터(선착장)

청령포에 대한 설래임을 간직한 나그네를 태운 배는 180도 돌리기가 무섭게 청령포 강변에 닿
는다. 청령포 강변은 인공(人工)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산 강변으로 돌이 무지 많으며, 배를
타고 내리는 시설도 따로 없어 그냥 강변 모래벌에서 타거나 내리면 된다.


▲  별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 놓아둔 청령포 강변

▲  소나무숲에 묻힌 청령포
청령포의 핵심이자 상징인 단종 유배처가 저 송림에 묻혀있다.


청령포 강변에는 돌이 무지 많다. 그런 돌밭을 지나면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 숲속에 단종
애사의 쓰라린 현장, 단종 유배처가 깃들여져 있다.
강변에는 탐방로가 따로 닦여져 있지 않으며, 울퉁불퉁한 돌밭을 알아서 통과해 소나무숲에
안기도록 되어있다. 대신 소나무숲에는 단종어소와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까지 나무데크 탐
방로를 닦아두었다.

청령포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이곳이 솔내음이 그윽한 공간이 된 것은 단종이 유배된 인연으
로 오랫동안 금표(禁標) 구역에 묶였기 때문이다. 금표란 왕릉이나 왕족 묘역, 제왕(帝王)이
내린 땅, 나무 보호와 국가 시설 보호를 위한 금지된 땅으로 이곳에는 허가된 사람 외에는 함
부로 출입할 수 없었고, 나무 벌채도 일절 금지된다.

청령포 소나무숲은 이곳에서 가장 늙은 나무인 관음송을 시작으로 점차 숲을 이룬 것으로 여
겨지며 수십 년에서 100~400년 묵은 소나무들이 삼삼하게 우거져 하늘을 가리고 단종의 유배
처를 소중하게 품고 있다. 그럼 여기서 청령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소나무숲에 감싸인 단종어소

청령포는 단종애사(哀史)의 주요 현장이자 장릉(莊陵)과 더불어 영월에 왔다면 꼭 들려야 되
는 영월의 대표 명소이다. 이곳이 크게 유명세를 탄 것은 소년왕 단종의 유배지란 점과 하늘
의 감옥 같은 척박한 지형, 그리고 270도나 크게 굽이쳐 흐르는 서강의 환상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서강은 형제인 동강(東江)과 속히 합세해 한강을 따라 보다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만 칼처
럼 솟은 산의 낙원인 강원도의 지형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장대한 세월 동안 오로지 굴곡 노
선 직선화를 위해 청령포 뒷쪽을 열심히 쪼아댔지만 지형이 단단하여 아직까지 성과가 없다.
하지만 직선화를 향한 굳은 집념은 여전하여 지금도 직선화 프로젝트를 놓지 않고 있다.

청령포의 주인공인 단종은 조선 6대 군주로 1441년 7월 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
后) 권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휘(諱, 제왕의 이름)는 홍위(弘暐)로 1448년에 왕세손(王
世孫)에 책봉되었으며,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윤상(尹祥)에게 학문을 배웠다.
1450년 세종(世宗)이 승하하고 그의 첫 아들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은 자연히 왕세자(
王世子)가 되었으며, 문종이 늘 병을 달고 살다가 재위 2년 만인 1452년 5월 18일, 승하하자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철부지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왕을 둘러싼 권력 구도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초반
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이 단종을 보필하며 주도
권을 잡았는데,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 일부가 능력도 좋고 야망이 크니 은근히 위협이
되었다. 그중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문무(文武)가 뛰어나고 다재다능했는데, 김종서와 뜻
이 통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견제하며, 의정부(議政府)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를 추진했다.
그들의 견제에 위기를 느낀 수양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弘達孫) 등을 수하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1453년 10월, 불시에 김종서 집을 습격해 김종서를 죽이고, 왕명을 빙
자해 신하들을 모두 소환해 황보인과 조극관(趙克寬) 등을 때려죽였다. 이 사건이 그 이름 돋
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정권과 병권을 움켜쥐었고, 정인지(
鄭麟趾)와 한확(韓確) 등 자신의 측근을 정승에 앉혔다. 또한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해 왕의 이름으로 받기도 했다.
그렇게 수양의 위세가 강해지며 어린 왕 단종을 은근히 정신적으로 압박하자 의지할 데도 없
고 정신적 두려움에 염통이 쪼그라들던 단종은 결국 1455년 6일 11일, 큰숙부 수양에게 양위
의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넘겼다. 이렇게 해서라도 숙부의 칼날을 피하고 목숨을 부
지하고자 함이었다. 하여 수양은 조선 제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되었고, 단종은 상왕(上王)
으로 물러앉아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가만두질 않는다고 했던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잔뜩 반감
을 품은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 김문기(金文起) 등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은 세조
와 그의 측근을 몰아내고 단종 복위를 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다가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이 오자 세조는 그들에게 연회를 베풀기로 했는데, 그때 칼
을 들고 제왕 뒤에 서서 호위하는 운검(雲劍)의 역할을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이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세조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다. 허나 뭔가 찜찜했던 세조는 운검을 세우지
않으면서 그 좋은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이후 적당한 기회는 오지 않았고, 단종 복위에 가담한 김질(金質)은 초조하다 못해 염통이 검
게 타들어가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밀고를 해버렸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그 유명한 사
육신(死六臣) 사건이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등의 단종 복위 추진에 뚜껑이 제대로 뒤집힌 세조는 그들을
고문하고 용산 새남터로 보내 사지를 절단 내어 죽였다. 그리고 단종은 사육신 등과 밀모를
했다고 여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처를 꼼꼼히 물색하다가 육지 속의 작은 섬과도
같은 이곳 청령포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하여 1457년 6월 22일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은 강제로 유배길에 올랐고 영도교(永渡橋, 청
계7가와 청계8가 사이)까지 따라온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단장의 이별을 나누었다.
이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어득해(魚得海)가 50명의 군사를 대동해 노산군을 호종했으
며, 영월까지는 6일이 걸려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했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머물 기와집이 급하게 마련되었다. 그는 그 집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노산
대에 올라 서울과 왕비를 그리워했으며, 관음송 가지에 걸터앉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하늘이
내린 자연산 감옥, 청령포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다가 그해 가을 홍수로 청령포 상당수가 물에
잠기게 되자 영월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청령포 생활은 끝을 맺
는다.
허나 순흥(順興, 영주시 순흥면)으로 유배된 그의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부
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된통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세조는 다
시 한번 뚜껑이 열리게 된다. '노산군을 저리 두면 계속 역모가 생길 것이다' 생각한 세조는
결국 후환을 제거하고자 조카에게 사약을 보내는 비정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숙부가 보낸 쓰디쓴 사약을 들이키고 진한
피를 토하며 힘없이 쓰러지니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다.

청령포는 북과 동, 남쪽 등 전체의 ¾이 서강에 감싸여 있고, 북쪽은 급하게 솟아나 낭떠러지
를 이룬다. 서쪽은 비록 땅과 붙어있긴 하나 육육봉(六六峰)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에 막혀
있어 어지간한 독종이 아닌 이상은 넘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다. 자연히 외부와 단절된 상태
로 고적하게 살아야 했으며, 첩첩한 산주름 속에 단단히 묻힌 외로운 곳이다보니 온갖 산짐승
들이 가득해 해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을 정도였다.

그가 청령포에 있을 때,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거의 밤마다 몰래 찾아와 단종을 위로했
고,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원호(元昊)는 청령포와 가까운 제천시 송학면에 관
란정(觀瀾亭)을 짓고 매일같이 단종에게 진상할 음식과 서신을 표주박에 담아 서강에 띄워보
냈다. 그것을 청령포에 있던 단종이 받아보았고, 단종이 다시 떠내려보내면 이상하게도 강을
역류하여 관란정으로 갔다고 전한다.

때묻지 않은 강과 칼처럼 솟은 산,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 거기에 역사까지 어우러진 아름
다운 명소로 수십~수백 년 묵은 소나무 덕에 4계절 내내 솔내음이 가득하며, 비록 단종에게
청령포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겠지만 오늘날 나그네들에게는 잠시나마 정처 없는 마음을 내던
지고 싶은 아름다운 명소이다. 이런 곳에 오면 사진기도 흥분하여 작품들이 마구 나오며, 영
월의 대표 꿀단지이자 단종을 상징하는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청령포 일대는 국가 명승 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월10경 중 제2경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 68 (청령포로 133, ☎ 033-374-1317)


 

♠  청령포 둘러보기

▲  단종어소(端宗御所) 기와집

청령포 소나무숲에 들어서면 왼쪽(남쪽)에 돌담에 둘러싸인 단종어소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공간으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단종이 머물던 팔작지붕 기와집
이 있고, 동쪽에 궁녀와 시녀가 살던 초가 1동(행랑채)이 있다.
단종이 사라지자 화마(火魔)도 크게 뚜껑이 열렸는지 슬그머니 태워먹으면서 아련하게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00년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참고하여 그럴싸하게 재현했다.

기와집과 행랑채 초가에는 단종과 궁녀, 시녀, 아전을 재현한 밀납인형이 있으며, 가구와 책
장, 이불, 장독대 등을 갖다놓아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묻어나게 했다.


▲  방 3개, 부엌, 창고로 이루어진 5칸짜리 초가 행랑채
시녀와 궁녀들은 여기서 생활했는데, 한 방에 2명씩 6명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 옆에는 부뚜막 연기가 슬쩍 피어오를 것 같은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음식물과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광)가 있다.

▲  초가 행랑채와 돌담, 그리고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숲

▲  깨끗하게 정리된 시녀의 작은 방

▲  속 빈 강정처럼 놓여진 장독대

▲  바느질하는 침모(針母)의 모습
단종을 위해 침침한 눈을 극복하며
옷 수선에 여념이 없다.

▲  부뚜막으로 이루어진 부엌
나이든 시녀가 단종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단종이 비록 강원도 산골로 쫓겨났지만 전직 제왕에다가 왕족이니 그의 생활공간은 관청 건물
못지 않은 규모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 바로 그의 공간인 것이다.

단종은 햇살이 잘들어오는 남쪽 방에 푸른 도포를 입고 책을 읽는 잘생긴 도련님처럼 재현되
었는데, 바로 옆방에는 어소를 관리하고 단종의 시중을 드는 아전이 바짝 엎드려 단종에게 인
사를 올리고 있고 그 곁에는 다기(茶器)를 머금은 조그만 상이 있다.


▲  기와집 내부, 단종의 방

▲  책을 보며 시름을 달래는 단종

▲  시녀가 생활하던 기와집 방


▲  단종이 지은 어제시(御製詩)
단종의 한과 상처 받은 어린 마음이 잘 나타나 있어 나그네의 옷깃을 잠시
여미게 한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해매니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물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

어소 기와집 옆에는 비석을 품은 1칸짜리 비각(碑閣)이 있다. 그 안에는 1763년에 영조(英祖)
의 명으로 세운 유지비가 있는데, 이는 터만 아련하게 남은 단종어소의 위치를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62cm이다.
하얀 피부의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그 앞면에
비석의 이름이 된 '단묘재본부시유지비'라 쓰여있고, 뒷면에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
秋 涕敬書令原營竪石 地名 淸泠浦'라 쓰여있어 조성 시기와 이곳 지명을 알려준다.
여기서 황명(皇明)은 조선이 쓸개까지 내주며 엄청나게 굽신거리고 떠받들던 명나라이고, 숭
정은 명나라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숭정 무진은 1628년이다. 그때를 기준으로
계미(癸未)년이 3번이 지난 해의 가을에 세우니 그때가 1763년 가을이다. (조선의 군주와 위
정자, 선비 상당수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명에 대한 아주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일삼으며
명을 그리워하고 나라의 국력을 개판으로 만듬)
'涕敬書令原營竪石'은 원주감영에 영을 내려 슬픔과 공경으로 세웠다는 뜻이며, '지명 청령포
'는 말 그대로 이곳의 지명이 청령포임을 뜻한다.

오랫동안 홀로 단종어소터를 지키며 소나무 그늘에 있다가 2000년에 비석 주변에 어소가 복원
되면서 어소 뜨락에 있게 되었다. 물론 비석의 위치는 그대로이다.


▲  비각에 소중히 담긴 단묘재본부시유지비

▲  햇님도 맥을 못출 정도로 무성함을 자랑하는 청령포 소나무숲
아직 대낮임에도 숲속은 벌써부터 어두컴컴하다.

청령포 한복판에는 관음송이라 불리는 장대한
소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는 청령포 소
나무의 시조로 다른 소나무들보다 하늘과 더욱
맞닿아있어 그의 위치와 위엄을 실감케 한다.

관음송의 높이는 30m, 가슴높이 둘레 5.19m로
1.6m 높이에서 줄기가 2갈래로 갈린다. 다른
소나무에 비해 줄기 피부가 유난히 붉고 줄기
중간에 잔가지가 없이 매끈하게 자란 제법 아
름다운 소나무로 단종이 이 나무 줄기에 걸터
앉아 시름을 달랬다고 전한다.
지금이야 아주 큰 나무가 되어 오를 엄두도 솟
지 않지만 당시 관음송의 나이를 60~80년 정도
로 추정하고 있으니 줄기가 갈라지는 곳까지는
능히 올랐을 것이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여 살로 보고 있으며, 그
의 이름은 관세음보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고 해서
관(觀), 그의 슬픈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음(
音)을 붙여 관음송이라 했다고 한다. 이 이름
은 후대에 단종을 섬기던 영월 주민들이 지어
낸 것으로 보인다.

▲  청령포 관음송(觀音松)
- 천연기념물 349호

나라에 큰 일이 터질 때마다 나무의 피부가 검게 변해 나라의 변고를 알려주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어쩌면 단종의 혼이 깃든 나무로 여기고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  단종의 손때가 담긴 망향탑(望鄕塔)

관음송에서 북쪽 벼랑으로 가는 길이 2갈래 있다. 왼쪽으로 가면 망향탑, 오른쪽은 노산대로
북쪽 벼랑은 한 줄기로 이어져 있어 어느 곳을 먼저 오르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곳에 천연의 감옥인 청령포가 빚어져 있고 3면이 죄다 강에 막혀
있는데 그중 북쪽은 각박하게 벼랑이 형성되어 있어 나름 절경을 자아내며,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 맛이 아주 일품이다. 물론 단종에게는 이 모든 것이 지옥처럼 보였겠지만 우리 같은 나
그네들에게는 하루 머물고 싶은 천연의 명소이다.

노산대와 육육봉 사이 벼랑 위에 돌로 쌓여진 조그만 돌탑이 있다. 세상에서는 그를 망향탑이
라 부르는데, 단종이 청령포 생활을 했을 때, 궁궐과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이곳에 오를 때마
다 여기저기 흩어진 잡석을 주워 쌓았다고 한다. 청령포에서 대략 1달 가량 머물렀고 딱히 할
것도 없는 처지이니 이곳을 찾는 횟수가 꽤 많았음을 망향탑이 보여준다. 돌탑을 이루는 돌
가운데, 묵은 때가 담긴 돌은 단종의 손길이 닿았던 것으로 보이며, 하얀 피부의 돌은 근래에
얹혀진 것이다.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 철책을 둘러 탑을 보호하고 있다.

과연 단종이 직접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청령포에 남긴 유일한 흔적으로 그의 착잡한
마음을 가늠케 한다.


▲  망향탑과 노산대(소나무가 우거진 벼랑), 그리고 서강

▲  망향탑 서쪽 막다른 곳

망향탑 서쪽은 길이 막혀있다. 아주 가늘게 육육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통행이 금지
되어 있고, 양쪽이 거의 벼랑이라 오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산길 북쪽은 서강이 오랜 세월
을 두고 깎은 거의 수직 각도의 벼랑이며, 남쪽은 수직 정도는 아니지만 각박하긴 마찬가지이
다.

이곳에 전설을 남긴 단종도 이 가느다란 산길을 보며 도망칠 생각이 굴뚝 같았을 것이다. 허
나 그게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있고, 군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으며,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편하게 자란 그가 이런 산을 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렵다.


▲  망향탑에서 바라본 서강
단종의 구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서강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청령포 곁을 보듬으며 유유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 하긴 서강이 그의
사연을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부질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노산대(魯山臺)

▲  금표비에서 바라본 노산대(魯山臺)

망향탑 동쪽에 각박하게 생긴 층암절벽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노산대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저녁 노을이 질 때나 마음이 갑갑할 때 친히 올라 시름을 달래던 곳이라 전하
며, 그 연유로 노산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망향탑 못지 않게 각박한 벼랑 위에 자리해 있는데, 지금이야 탐방로가 잘 닦여져 있어 접근
하기가 쉽지만 탐방로가 없다면 결코 쉽게 오르지 못할 언덕이다. 관음송과 금표비 북쪽에 자
리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서강과 주변 풍경이 제법 일품이다.


▲  금표비와 관음송 주변 소나무숲

▲  청령포 금표비(禁標碑)

노산대를 내려와서 나룻터로 가다보면 소나무숲 그늘에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난 금표비를 만
나게 된다.
이 비석은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에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나무 벌채를 금하고자 1726년에 세
운 것으로 앞면에는 한문으로 '청령포 금표'라 쓰여 있고, 뒤면에 '동서 300척, 남북으로 490
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 또한 금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단종 시
절에도 그런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측면에 '숭정(崇禎) 99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1726년임을 알게 해준다.
비석은 30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세월의 거친 손때로 피부가 잔뜩 헝클어져 있다. 혹 단종의
사연에 비석이 크게 운 것은 아닐까?

청령포 산책은 '나룻터 → 단종어소 → 관음송 → 망향탑 → 노산대 → 금표비 → 나룻터' 순
으로 했는데, 그 반대로 해도 무관하며, 이들은 청령포의 주요 구성원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
란다.


▲  금표비 주변 소나무숲

▲  배를 타고 다시 속세로 나오다 (청령포 강변)

금표비를 둘러보고 강변으로 나오니 어느덧 17시 반이 되었다. 청령포의 빼어난 경치에 잠시
눈 호강을 누린 관광객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대기하고 있는 배에 올라탄다. 이 배가 오늘의
마지막 배는 아니며, 관람시간이 18시까지라 청령포에 단 1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운행한다.

배를 타고 잠시만에 청령포 나룻터에 도착, 졸고 있는 차량을 깨워 영월의 이웃 고을인 충북
단양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하여 청령포 나들이는 막을 고하며, 끝으로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했던 금부도사(禁府
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지은 시를 소개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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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치악산 구룡사의 은빛 설경 ~~~ (거북바위, 구룡사계곡, 구룡폭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치악산 구룡사 '

▲  구룡사 소나무 숲길


 

울 제국이 막바지에 이르던 2월 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원주에 있는 치악산 구룡사를
찾았다.
그곳을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서울에서 적은 비용에 간단히 갈만한 강원 영서/충청 지
역 명소를 물색하다가 그곳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치악산(雉岳山)은 이 땅의 국립공원의 하나로 구룡사는 치악산의 대표 관문이다. 그곳은
이미 중학교 때 인연이 있으나 그건 어언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간만에 구룡사도
둘러보고 구룡사계곡을 따라 세렴폭포까지 가보기로 했다.

아침 9시에 집 부근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경의/중앙선 전철로 환승
하여 양평역(楊平驛)에서 내렸다.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로 갈
아탔는데, 좌석이 없어서 강제 입석을 해야 했다.
원주(原州)의 관문인 원주역에 발을 내리니 바람이 칼날처럼 꽤 매섭다. 멀리 보이는 치
악산과 여러 뫼들은 겨울 제국(帝國)이 내린 하얀 옷을 반쪽씩 입고 있어 한겨울로 돌아
간 기분이다.

원주역에서 구룡사로 가는 원주시내버스 41번(관설동↔구룡사)을 타고 시내를 벗어나 변
두리로 나오니 멀리서만 보이던 하얀 눈이 바로 차창 밖에 진을 치고 있었고, 구룡사 종
점에 두 발을 내리니 여기는 시내와 달리 완전 겨울의 한복판 그 자체였다. 사방에 눈이
내려앉아 부질없는 설경(雪景)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소쩍새가 울면서 겨울잠에 잠
든 천하를 깨우고, 천하만물들은 봄 환영에 여념이 없건만 겨울이 다시금 위엄을 보이며
원상태로 돌리니 완전 다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 되었다.


▲  눈에 덮힌 구룡사 종점 주변 (학곡저수지 방향)


 

♠  구룡사 입문 (황장금표, 부도군, 거북바위)

▲  소나무가 무성한 구룡사 매표소 주변

구룡사 종점 주변에는 나들이꾼과 산꾼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
다. 날씨가 구려서 그런지 주말임에도 산꾼이 별로 없어 식당들은 대체로 썰렁하다.
치악산의 자랑인 황장목(黃腸木) 소나무가 훤칠한 키로 하늘을 훔치며, 그의 밑도리에 그늘을
드리운다. 한여름에 왔다면 정말 반가운 그늘이었겠지만, 겨울 끝 무렵이라 그 그늘이 은근히
춥다. 천하를 뒤덮은 눈구름이 잠시 개이고, 구름들 사이로 푸른 하늘과 햇살이 속살을 비추
어 이제 날씨가 개이는구나 싶었지만 그 역시 잠시 뿐이다.

식당 거리 끝에 이르니 썩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나타나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대놓고 노려본
다.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무려 2,500원, 오기 전에는 막연히 2,000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먹고 살기가 나처럼 힘든건지 무려 500원이나 높은 가격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문화유산도 별
로 없는 절이 문화재관람료란 명목으로 고액의 돈을 대놓고 뜯으려 하여 절에서 많이 통용되
었던 여러 할인안을 제시했으나 무조건 정가를 내라고 인상을 쓴다.
그냥 되돌아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다른 대체 장소를 둔 것도 아니어서 울며 겨자먹고 토하
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치루었다. (국립공원 고찰 중 법원의 판결까지 무시하며 입장료를 뜯는
절이 여럿 있음)

이유도 불분명한 소위 구룡사의 입장료삥에 불쾌한 마음을 가득 품으며 유료의 공간으로 들어
서니 바로 왼쪽에 황장금표를 알리는 안내문이 나오고, 그 안쪽 높은 곳에 황장금표가 나그네
들의 시선도 받지 못하며 보호 난간에 둘러싸인 채, 누워있다.


▲  바위에 새겨진 학곡리 황장금표(黃腸禁標) - 강원도 지방기념물 30호

황장금표는 조선 조정에서 황장목이란 소나무를 보호하고자 백성들의 출입과 벌채를 금지하는
경고 안내문이다. 황장목은 나무 수심부분의 색깔이 누렇고, 몸이 단단한 우수한 소나무로 조
선 왕실에 필요한 물건이나 궁궐 건물을 지을 때 사용했다.
이 금표는 황장목이 자라는 곳 경계 지점에 설치되었는데, 폭 110cm, 높이 47cm, 둘레 270cm
크기의 자연산 바위로 그 피부에 '황장금표' 4자가 조금은 뚜렷하게 눈을 뜨고 있다. 근래에
금(禁)과 표(標) 사이에 동(東)이란 글자가 추가로 확인되어 황장금동표(黃腸禁東標) 5글자가
되었는데, 이는 여기서 동쪽이 황장금표 구역이니 건들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 외에도 구룡사
입구 주차장 부근 도로에도 황장금표가 하나 더 있다. (땅속에 좀 묻혀 있음)

조선 초에는 전국 60개소의 황장목 봉산(封山)이 있었으며, '관동읍지(關東邑誌)'에 구룡사가
황장소봉지(黃腸所封地)라 나와있다.


▲  구룡교(龜龍橋)

황장금표를 지나 3분 정도 가면 구룡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여기서 계곡 위에 유연하게 걸린
구룡교를 건너면 소나무 등 온갖 나무로 가득한 구룡사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구룡교 난
간 양쪽 끝부분에는 용머리 장식이 달려있어 다리의 이름값을
돕는다.


▲  겨울에 잠긴 구룡교 주변 구룡사계곡

▲  북쪽을 바라보는 원통문(圓通門)

구룡교를 건너 얼마 안가면 원통문이란 이름의 일주문(一柱門)이 마중을 한다. 겨울이 채색한
하얀 지붕을 머리에 인 원통문 옆에는 차량을 위한 길이 나있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절에 왔으면 절의 정문인 일주문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속세에서 가져온 거추장스러운 번뇌를 멀리 날려줄 것을 산바람에 부탁하며 문을 들어선다.


▲  구룡사 승탑(僧塔, 부도)들

일주문을 지나 2분 정도 가면 길 오른쪽에 승탑과 비석이 어우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구
룡사 승려의 넋이 깃든 승탑의 보금자리로 모두 7기가 있는데, 이중 6기가 조선 후기에 조성
된 것이다. 조그만 몸통에 고색의 때가 자욱한 이들은 석종형(石鐘形) 승탑으로 조금씩 모습
을 달리하고 있다.
승탑 사이로 3기의 탑비(塔碑)가 있는데, 세량당 초운대사탑(洗梁堂 楚雲大師塔)과 충허당(沖
虛堂), 뇌파당(雷波堂)의 비석으로 18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조성된 것이다.


▲  무총대선사탑(武總大禪師塔)과 탑비

승탑 무리를 장식하는 승탑 중 가장 앞에 있는 있는 것이 무총대선사의 탑이다. 이곳에서 가
장 큰 승탑으로 뒤쪽에 병풍처럼 늘어선 고참 부도 6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리를 지킨다.
이 탑과 탑비는 2005년에 조성된 것으로 탑의 주인인 무총대선사는 구한말(舊韓末)에 활약했
던 승려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하늘과 땅, 사람, 귀신이 모두 분노하자 썩어빠진 권력층 타
도와 토왜(討倭)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전국적으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무총은 승병(僧兵
)을 일으켜 의승장(義僧將)으로 경상도로 내려가 승병 봉기를 시도했고, 경북 예천에서 대구
승려 성기(聖基)가 경상도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짜고 의병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를 응
징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그의 활약은 원주항일기념사업회에서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을 고증
하는 과정에서 밝혀져 뒤늦게나마 그의 승탑과 비를 만들어 그의 애국충절을 기렸다.


▲  승탑 무리와 국사단 사이에 닦여진 쉼터
숲길 한복판에 너른 공간을 닦아 쉼터 겸 식당을 두었다. 앞 공터에는 둥글게 터를
다지고 조그만 돌탑을 테두리 부분에 쌓아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  구룡사 국사단(局司壇)

쉼터를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은 차량, 오른쪽은 뚜벅이 길인데, 어느 길
로 가든 크게 상관은 없다. 차량의 왕래도 별로 없는 편이고, 어느 길로 가든 구룡사는 나오
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길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높이 터를 다지고 들어선 국사단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
은 절터를 지키는 신을 봉안한 건물로 여기서 국사(局司)는 절터를 뜻한다. 옛날부터 있던 것
으로 예전에는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이었으나 근래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덩치를 불렸다.
경내나 경내 인근에 이렇게 국사단을 둔 절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가 대표적이다.

평소에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문창살 사이로 속인들이 낸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는 수
밖에는 없는데, 어두컴컴한 내부에는 위패가 봉안되어 있을 뿐, 딱히 다른 것은 보이질 않는
다.


▲  구룡사를 지키던 거북바위

국사단을 지나서 왼쪽을 잘 살펴보면 목과 몸이 끊어진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뚜벅이길보다는 차량길로 가면 찾기가 더 쉬운데 이 바위가 구룡사의 오랜 지킴이인
거북바위이다.
구룡사에는 2개에 재미난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하나는 창건설화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거
북바위에 얽힌 설화이다. 오랫동안 절의 운을 지키고 선 바위였으나 오히려 사람들의 욕심으
로 목이 끊어져 두 동강이 난 비운의 존재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는 치악산에서 나오는 산나물 상당수를 왕실에 공납(貢納)했다. 그래서 구룡사 주
지승을 산나물 공납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삼았는데, 산에서 나온 모든 산나물은 모두 주지승
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여기서 통과된 것만 서울로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인근 사람들은 어
떻게든 심사에서 통과하고자 또는 나물값을 제대로 받고자 주지승에게 별도의 뇌물을 건넸다.
계속되는 뇌물 공세에 입이 귀까지 걸린 주지승은 욕심이 더욱 커져 돈 챙기기에 급급하였고
그로 인해 절의 이미지가 하락하여 자연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승려가 찾아왔다. 그는 절이 몰락한 것은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
라고 하면서 그 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두 귀가 솔깃해진 주지승은 바로 거북바위를 두 동강냈지만 오히려 신도의 수가 줄었
고, 수입이 줄어 문을 닫아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도 구룡사에 반감이 있거나 인근 경쟁
사찰의 승려가 거북바위가 절을 지키는 존재임을 눈치채고 절을 망하게 하고자 그런 말을 던
진 듯 싶다. 그걸 주지승이 생각도 없이 받아들여 절 지킴이 바위를 스스로 아작낸 것이다.

이후 어느 날, 도승 하나가 찾아왔다. 주지승이 넋두리를 하니 도승이
'절이 몰락한 것은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오'

그 말에 주지승이 귀를 크게 하고
'그건 무슨 말씀이오?'

그러자 도승이
'이 절은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주었소. 허나 그 바위를 동강을 내어 혈맥을
끊었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주지승이 애타게 방안을 묻자. 도승은
'거북바위는 이미 죽었으니 그를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九)에서 구(龜)로 바꾸
시오. <그 당시 절 이름은 구룡사(九龍寺)였음>'

그 연유로 지금의 구룡사(龜龍寺)로 이름이 갈렸던 것이다. 이후 절은 그런데로 흥성을 누려
치악산 제일의 사찰이라는 지위를 누리게 된다.

거북바위는 마치 거북이가 오르막을 오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하여 그의 진면목을 보고자 한
다면 거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서 보기 바란다. 그럼 정말 거북바위의 이름이
허언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원래는 목과 몸통 부분이 붙어있었으나, 생각 없는 주지승이
목을 끊어버려 지금의 비통한 모습이 되었다.


▲  하얀 소복을 걸친 구룡사 은행나무 (강원-원주-38호)

거북바위를 지나면 경내를 가리고 선 커다란 은행나무가 중생을 맞이한다. 이 나무는 추정 나
이가 약 200년 정도로 높이 19m, 가슴둘레 1.25m에 큰 나무이다. 봄이 곧 도래할 시기라 봄맞
을 준비에 부산해야 되지만 늦겨울이 내린 하얀 눈송이가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 들러 붙
어있으니 진정한 봄은 아직도 멀었다. (보통 겨울은 3월까지 감)

은행나무를 지나면 산자락에 터를 다지고 담장과 보광루 등의 여러 굵직한 건물로 속살을 가
린 구룡사 경내 밑에 이르게 된다.


 

♠  치악산 북쪽에 안긴 원주 제일의 고찰, 구룡사(龜龍寺)

치악산 북쪽 자락 소나무숲에 포근히 둥지를 튼 구룡사는 치악산에서 제일 큰 절이자 원주 지
역에서 가장 큰 절이기도 하다. 흔히 치악산에 가면 구룡사를 많이 거쳐간다. 다른 코스도 있
지만 구룡사가 가장 널리 알려졌고 교통도 괜찮기 때문이다.

구룡사는 666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구룡사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의상은 당(唐)나라에 머물며 한참 화엄종(華嚴宗)을 익히던 시절이므로 도저히 시기가 맞지가
않는다. 그는 66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670년에 귀국을 했기 때문이다. 귀국하여 신라 조정의
허가를 받아 세운 것이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의상대사 외에도 무착대사(
無着大師)란 인물이 비슷한 시기에 세웠다고 하나 이를 입증할 기
록과 유물은 전혀 없으며, 조선 초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구룡사
의 이름 3자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경내에 전하는 유물도 모두 조선 후기(18세기 이후) 것으
로 1706년에 만들어진 와당이 제일 오래된 것이다. 그러니 구룡사의 바램대로 신라는 커녕 고
려 때 지어졌을 가능성도 적어 보이며, 조선 초나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중기까지도 적당한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으며,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
圖書)에는 85칸의 건물이 있고, 절 앞에 용연(龍淵)이 있어 가뭄이 들었을 때 기도를 하면 항
상 반응이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구룡사의 제일 오래된 기록이다. 그 시절에는 보광
루나 대웅전, 승탑(부도), 삼장탱화 등이 조성되던 때이기도 하다.

1895년 이곳 승려인 총무대선사가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6.25시절에는 총탄도 비켜
가 딱히 피해가 없었다. 1966년 보광루를 해체복원하고, 1968년에 심검당과 요수를 보수했으
며, 2000년 이후에도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큰 규모를 이루게 되었다. 허나 2004
년에는 강원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대웅전이 화재로 무너져 안그래도 없는 지정
문화재가 하나 줄어들었다.

▲  구룡사 범종각(梵鐘閣)

▲  설선당과 적묵당(寂默堂)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천불전, 보광루, 설선당(종무소), 응진전, 관음전, 삼성
각, 사천왕문, 국사단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보광루를 빼면 고색의 기운은 별로 없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광루,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74호), 아
미타설법도(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160호), 금고(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161호) 등의 지방문
화재와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으며, 그 외에 삼장보살도(보물 1855호)와 용다사(龍多
寺) 동종(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33호)도 있으나 이들은 신변보호를 위해 멀리 월정사(月精
寺) 성보박물관에 가 있다.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설법도, 금고는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해 모두 지나치고 말았음)

구룡사는 하늘을 가리고 늘어선 수해(樹海) 속에 자리해 있으며, 멋드러진 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경승지로 꼽힌다. 계속되는 불사로 커다란 건물이 마구 들어서면서 예전과 달리 조촐하
고 아늑했던 멋은 좀 떨어지긴 했으나 속세(俗世)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첩첩한 산골에 위치
해 있어 번뇌를 털기에는 좋다.
고색의 기운이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재밌는 창건설화를 간직하고 있어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한다.

★ 믿거나 말거나 웃고 넘기는 구룡사 창건설화
의상대사(또는 무착대사)는 절을 세울 명당을 찾고자 치악산을 온종일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가 지금의 절자리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 이유는 이곳 동쪽으로 치악산의 주봉인 비
로봉(毘盧峯)이 있고, 다시 천지봉의 지맥(地脈)이 앞을 가로지른데다가 수려한 계곡이 흐르
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이야 메우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그
곳에 9마리에 용이 살고 있었다. 하여 의상은 연못 앞에서 한숨을 쉬며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지어야겠는데, 용이 살고 있으니 그들을 내보내야 일을 할 수 있겠군,
참 난감하구나~~'

그 말을 엿들은 용들은 뚜껑이 단단히 열려 밖으로 나와 의상에게 시비를 걸었다.
'야 땡중! 너가 우리를 내쫓을 생각인가본데,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러니
서로 내기를 하는 건 어떠냐? 우리가 이기면 너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고, 만약 너가 이기면
흔쾌히 이곳을 넘겨주겠다'
용이 의상을 깔보며 자신만만하게 내기를 제안하자 의상은 빙그레 웃으며
'너희들이 무슨 재주를 부리려고 하느냐?'
그러자 용은
'잠시 뒤에 알게 될 것이다. 각오해라'

답을 하며, 9마리가 모두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비를 쏟아 부어 순
식간에 모든 산들이 물에 잠겼다. 한참 동안이나 비를 퍼부은 용은 의상이 물에 빠져 골로 갔
을 것이라 여기고 비를 거두고 내려왔다. 허나 뜻밖에도 의상은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조그
만 배를 띄우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  경내 바깥 부분

▲  천불전(千佛殿)

부시시 잠에서 깬 의상은 그의 멀쩡한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진 용을 보며
'너희들 재주가 고작 그것뿐이냐. 실망이구나. 이제 내가 조화를 부릴 차례이니 너희들은 눈
을 크게 뜨고 잘 지켜보아라'

하면서 부적 1장을 그려 연못에 넣었다. 그러자 연못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뜨거
움을 참지 못한 용은 연못 밖으로 뛰쳐나와 한달음에 동해바다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얼마
나 다급했던지 용 8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8조각으로 쪼개어 도망을 친 것이다. (현재 구룡사
앞산은 동해를 향해 8개의 골이 패여져 있음)
그리고 나머지 용 1마리는 눈이 매우 침침해 멀리 못가고 절 남쪽 구룡소(용연)에 들어가 살
았다고 한다. 그 용은 가뭄 때 비를 빌면 비를 내려주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하며, 늦
게까지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구룡사란 이름은 바로 9마리의 용을 내쫓은 설화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구(九)가 구(龜)로 변경됨>

이 창건설화는 구룡사에서 그럴싸하게 내놓은 전설이라 곧이 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전설의 내용을 통해 현재 절 자리에 9마리의 용으로 표현된 토착 종교 세력이 있었음을 추정
해 볼 수 있다. 절의 창건주는 그 자리가 마음에 들어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내쫓으려고 했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다가 창건주의 빛나는 승리로 그들을 내쫓고 절을 세운 것을 이런저런 살
을 붙여 전설로 다듬은 것이다.

▲  구룡사 앞 산줄기

▲  구룡소

* 구룡사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 (구룡사로 500 ☎ 033-732-4800)
* 구룡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설산(雪山)이 되버린 구룡사 앞 산줄기
8마리의 용이 저 산줄기를 쪼개고 도망쳤다고 한다. 얼마나 놀랬으면 그랬을까..

▲  거대한 사천왕문(四天王門)

구룡사는 지형적인 위치로 법당을 비롯한 상당수 건물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경내 앞에 자
리한 사천왕문 역시 용들이 쪼갰다는 동쪽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 문은 부처와 절을 지
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천왕문치고는 특이하게 중층구조를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2000년 이후에 지어진 그는 겉은 2층이지만 속은 1층으로 마치 성문처럼 규모가 장대하여 속
인들을 잔뜩 주눅들게 만들며, 우리나라 천왕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  사천왕문 좌측에 자리한 보광공덕탑
(普光功德塔)

▲  사천왕문 우측의 석조미륵불상

▲  각자의 애용품을 지니며 문을 지키고 선 사천왕의 위엄
저들의 검문을 거쳐 경내로 들어선다.

▲  보광루(普光樓) -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45호

천왕문을 들어서 높이 걸린 계단을 오르면 보광루가 바로 경내를 가리며 나타난다. 이 건물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19세기 이후에 지어졌다. 누각이다보니 2층 규모로 되어있는데 아
랫층은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었으며, 윗층에는 우물마루
로 바닥을 만들고 대웅전이 있는 서쪽을 빼고 싹 벽으로 막아 동쪽으로 창문을 내고 강당(講
堂) 및 법회 공간으로 사용했다.
정면 가운데 칸인 평방(平枋)에는 치악산 구룡사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
주며, 누각 아랫층 가운데에 마련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마치 태양이 떠오르듯 천천히 위
로 솟아나 웅장한 규모를 드러낸다.
보광루 2층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멍석이 깔려져 있었다. 3명이 3달에 걸쳐 만들었다
고 전하는 이곳의 자랑으로 현재는 보호를 위해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어 관람이 어렵다.


▲  보광루 앞에서 바라본 사천왕문 지붕과 치악산 북쪽 줄기
잠시 맑은 하늘을 되찾더니만 곧 구름들이 몰려와 잔뜩 인상을 부린다.
그리고는 다시 폭설을 투하해 치악산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  구룡사 둘러보기

▲  대웅전(大雄殿)

보광루와 마주보고 있는 대웅전은 구룡사의 법당(法堂)으로 한때는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24
의 지위를 누렸던 존재이다. 허나 2003년 화재로 무너지면서 지방문화재의 지위가 박탈되었
으며, 이후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으나 날라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회복하지 못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봉안된 석가3존불과 신중탱, 감로탱 등
은 모두 2004년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찾을 수 없다.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나란히 3존불을 이루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석가불은 2003년 대웅전 화재에 대한 불만일까? 인상을 조금 쓴 듯 보이며 좌우 협시
불(夾侍佛)은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다.

▲  붉은 지붕의 화려한 닫집
너무 휘황찬란하여 눈이 멀 지경이다.

▲  대웅전 우측 영가단(靈駕壇)에 있는
최규하 전대통령 내외 영정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샘터
평소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사람이 샘터 주
변 네모난 공간에 다가서면 알아서 물을 쏟아
내는 21세기형(?) 자동시스템의 샘터이다.

     ◀  천불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
우에 협시해 있다. 좌우 벽에는 조그만 금동불
(金銅佛) 1,000기가 빼곡히 들어앉아 일대 장
관을 이룬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대웅전 정면이 아닌 다소 우측에 비켜 자리한 탑으로 근래에 장만했다.

▲  천불전 좌측에 놓여진 탱화 3점
저들에게 맞는 마땅한 자리가 없는지 천불전 좌측 구석에서 잉여 신세를 지내고 있다.
제일 앞에 놓인 것은 산신탱으로 흰 수염의 산신 옆에 앉은 이는 여자 산신이다.
허나 그림으로 봐서는 완전 산신 부부처럼 다가온다.

▲  천불전 뒤쪽 높다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로 칠성탱은 2000년에,
산신탱과 독성탱은 2002년에 그려졌다.

▲  산신 가족이 그려진 산신탱

▲  칠성 가족이 그려진 칠성탱

▲  소나무 밑에 앉은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

▲  관음보살의 거처인 관음전(觀音殿)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응진전(應眞殿)

대웅전 좌측 뒤쪽에 있는 관음전과 응진전은 2000년 이후에 숲을 밀어내고 일군 공간이다. 응
진전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羅漢), 그리고 조그만 500나한이 봉안되어
있으며, 나한의 모습이 우리나라 7,000만 인구만큼이나 다양하여 눈길을 끈다.


▲  응진전 석가불
석가불 좌우로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 있다.

▲  나한으로 가득한 응진전 내부


▲  고양이 같은 호랑이를 옆에 품은 나한의 위엄 <나반존자(那畔尊者)인듯?>

▲  눈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눈폭탄을 투하한다.


 

♠  치악산 마무리

▲  폭설에 시야마저 흐릿한 사천왕문 주변

절을 둘러보는 사이에 겨울의 사주를 받은 구름들이 전력을 다시 가다듬고 하늘을 가렸다. 아
직 오후 한참 시간이지만 이내 저녁처럼 어두워지고 다시 눈폭탄을 투하하면서 천하는 벌집이
몇 번이나 뒤집힌 듯, 혼란에 빠진다. 겨울 산행 장비를 갖추지 못한 나는 여기서 더 올라갈
것인지. 쿨하게 철수할 것인지를 고심해야 했다. (그날 기상청은 눈이 안온다고 예보했음;;;)

그래도 개념없이 비싼 입장료를 치르고 여기까지 왔는데, 구룡소와 선녀탕까지는 올라가야 직
성이 풀릴 듯 싶어서 사천왕문 남쪽에 있는 구룡사 기념품점에서 조금 대기를 하다가 눈의 공
세가 약간 멎은 틈을 타 다시 길을 나섰다.


▲  구룡소(九龍沼)와 구룡폭포

구룡사 기념품점에서 길을 나선지 1분도 안되어 기가 막힌 풍경이 나의 발길을 붙잡고 늘어진
다. 바로 구룡소이다. 이곳은 절 창건주에게 추방된 9마리의 용 중, 시력이 안좋은 용이 살았
다는 현장이다. 그 용은 이곳에 머물며 가뭄에 비를 내려주는 등, 좋은 일을 하다가 승천했다
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다.

소의 수심이 깊고, 색감이 아주 연해 용이 살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청정함을 자랑하며, 구
룡소 위에는 조촐한 높이의 구룡폭포가 상류의 물을 실타래처럼 흘려보내고 있다. 구룡소 주
변은 자연보호구역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계곡에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구룡소 절경에 단단히 시샘한 겨울이 눈을 날리며 그를 가리려고 한다.

▲  구룡소 옆 탐방로 (구룡사 방향)

▲  눈에 뒤덮힌 구룡사계곡 상류
봄을 알리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도 정녕 소용이 없는 것인가?

▲  치악산으로 올라가는 산길
겨울이 그린 수채화에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다. 인간의 그 잘난 언어와 문자로
감히 대자연의 작품을 표현한다는 것이 건방질 정도로 말이다.

▲  나무로 지어진 구룡자연해설센터

구룡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구룡자연해설센터가 나온다. 이곳은 치악산의 자연과 생태를 살
펴보고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자연 공부를 하는 공간으로 주변에 여러 꽃과 식물을 심어 자
연학습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겨울에 의해 완전 눈밭이 되버렸으니 현재로써는 할 것
이 없다. 잎이 피고 꽃이 자라는 3월 말 이후에나 그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될 것이다.


▲  구룡자연해설센터 주변 계곡

구룡자연해설센터에서 나의 발길은 멈추었다. 세렴폭포와 선녀탕까지 올라가고 싶었으나 날씨
도 영 좋지 못해 가고자 하는 의욕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조금은 아쉽고 여운이 좀 남지
만 어차피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언젠가는 또 오지 않겠는가?

발길을 180도 돌려 구룡사로 나올 때는 길을 좀 달리하여 계곡 동쪽에 있는 대곡야영장을 경
유했다. 야영장과 식수대는 아직도 겨울의 단잠에 빠져 깨어나질 못했다. 한없이 쏟아지던 눈
도 이젠 고갈이 되었는지 완전히 멎었고,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삐죽 속살을 드러낸다.

구룡사를 거쳐 내려오면서 앞서 언급한 거북바위를 둘러보고(올라갈 때는 어디에 있는지 몰라
서 지나쳤음) 일주문과 구룡교, 황장금표를 거쳐 구룡사 종점으로 내려오니 마침 속세로 나가
는 원주시내버스 41-1번(구룡사↔관설동)이 치악산의 청정한 기운을 가득 머금으며 떠날 준비
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에 머뭇거림도 없이 그 버스를 잡아타고 속세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치악산 구룡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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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탄산약수를 찾아서,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지석묘, 춘천의 먹거리들)



' 한겨울 춘천 나들이 '


▲  춘천 추곡약수


 

겨울 제국(帝國)의 혹독한 통치 속에서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의 막이 올랐다. 강제로 나
이 1살이 누적되니 기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한복판이다. 하여 꿀꿀한 기분도 좀 달래
고 조촐하게 몸보신도 누릴 겸, 요즘 한참 관심을 두고 있는 탄산 약수를 찾기로 했다.
탄산 약수는 태반이 강원도와 경북 산골에 묻혀 있어 서울에서 찾아가기가 그리 녹녹치가
못하다. 예전에는 서울에도 '천호약수'란 꽤 유명했던 탄산 약수가 있었지만 천박한 개발
의 칼질로 이제는 흔적도 없다. 그나마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탄산 약수는 춘천 추곡약수
, 비록 춘천(春川)이라고는 하지만 화천군과 양구군과 맞닿은 춘천의 북쪽 끝으머리에 자
리해 있다. 허나 교통편은 다른 탄산 약수와 달리 조금은 봐줄만한 편이라 흔쾌히 추곡약
수를 찾기로 하고 친한 후배와 길을 떠났다.

햇님이 하늘 중천에 걸려있던 오전 11시, 7호선과 경의중앙선, 경춘선이 만나는 상봉역에
서 그를 만나 경춘선 전철(청량리~상봉~춘천)을 타고 80여 분을 내달려 남춘천역에 두 발
을 내렸다.
남춘천역 서쪽인 온의4거리에서 추곡약수까지 들어가는 춘천시내버스 18번을 타면 되지만
시간이 전혀 맞지 않아 부득이 춘천시외터미널로 이동하여 양구(楊口)행 직행버스를 타기
로 했다. 허나 무려 50분 뒤에나 차가 있어 그 사이 점심이나 먹고자 바로 이웃에 자리한
이마트에서 늦은 점심을 때웠다.

점심을 먹고도 아직 20분이나 남아있어 터미널에서 억지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양구 경
유 속초행 직행버스가 슬그머니 타는 곳에 귀여운 얼굴을 들이민다. 그 버스를 타고 소양
강을 건너 신북읍과 천전리를 지나 우리나라 최장의 도로 터널로 등극한 배후령터널을 지
난다. 이 터널(5.1km)은 2012년 3월에 개통되었는데 터널 이전에는 뱀처럼 구불구불한 배
후령 고갯길을 힘들게 넘어야 했다.
배후령터널을 지나 화천군의 산하(간척리)를 잠시 거치다가 다시 춘천 땅으로 진입, 추곡
3거리(북산지서)에서 내렸다. 이곳은 인적도 거의 없는 첩첩한 산골로 4발 차량들의 굉음
외에는 소리라는 것이 거의 없다. 남쪽에는 소양호가 살짝 모습을 보이고 있고, 동쪽에는
양구로 인도하는 수인터널이 있으며, 동서남북 사방이 모두 산으로 막힌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 같은 지형이다.


 

♠  추곡약수 둘러보기

▲  추곡약수 가는 길 (추곡약수3거리~약수터 입구)

우리가 찾는 추곡약수는 추곡3거리에서 2km 정도 들어가야 된다. 추곡3거리 바로 동쪽에 추곡
약수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46번 국도 직선화로 무척이나 한가해진 왼쪽 길(소양호로)로 들
어선다. (직진하면 수인터널) 국도 직선화 이전에는 춘천과 양구를 오가던 차량들이 구불구불
소양호로를 이용했으나 직선 도로가 뚫리면서 차량들이 죄다 편한 새 길로 바퀴를 돌려 이제
는 추곡약수와 사명산, 소양호 상류 접근용으로 간신히 도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주말이면 그래도 추곡약수와 사명산을 찾는 차량들이 좀 있을 터인데 평일이라 차량의 왕래가
없어 2차선 도로가 무척이나 넓고 외로워 보인다. 그 길을 거의 독점하며 북쪽으로 가다보면
약수터 입구가 나오는데, 여기서 소양호로를 버리고 북쪽 추곡약수길로 진입하면 된다.


▲  추곡약수 입구로 마중나온 익살스런 장승들

▲  추곡리 물푸레나무 - 춘천시 보호수 33호

그저 산바람 소리가 전부인 고적한 추곡약수길을 걷다보면 길 왼쪽에 커다란 나무 1그루가 잠
시 나좀 보고 가라며 발목을 붙잡는다. 나무 앞에는 그의 간략한 소개가 담긴 회색 피부의 안
내문이 있어 살펴보니 춘천시 보호수로 지정된 나이 지긋한 물푸레나무이다.
겨울 제국에게 영혼까지 털려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 봄의 해방군을 기다리는 이 나무는 나
이가 약 360여 년<2009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50년>으로 높이 10m, 둘레 360cm
이다. 추곡약수를 안내하던 오랜 길잡이로 나무에 돌이나 동전을 던져 가지 사이에 딱 들어앉
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어 '아들나무'란 별명도 지니고 있다.


▲  추곡약수길 (남쪽 방향, 물푸레나무를 조금 지난 지점)

▲  추곡약수길 (북쪽 방향, 추곡약수 마을 직전)

▲  시내버스가 바퀴를 돌리는 추곡약수 정류장

물푸레나무를 지나 5분 정도 가면 추곡약수 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에는 넓은 공터와 버스 정
류장이 있는데, 춘천시내버스 18번이 여기서 바퀴를 돌려 춘천시내와 오항리로 이동한다. 그
버스를 타면 시외직행버스의 1/3가격으로 약수터 밑까지 편하게 접근할 수 있지만 1일 5회 밖
에 안다닌다는 커다란 함정이 있어 시간표를 미리 확인해야 뒷탈이 없다.


▲  추곡약수 가는 길 (마을에서 약수 방면)

▲  아련한 전설이 되버린 천연기념물 장수하늘소 발생지 비석

마을 동쪽 옆구리를 지나면 추곡약수와 사명산을 안내하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그들을 지
나면 계곡을 옆구리에 낀 오르막길이 약수까지 이어지며 약수 밑까지 계곡과 길을 따라 집이
들어서 있다. 이들 집은 상당수 추곡약수로 끓인 닭백숙을 다루는 식당으로 평일이라 손님이
없어 거의 문이 닫혀 있다.

추곡사란 조그만 절이 길 남쪽 언덕에 자리해 있고, 한때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 75호로 소양
호에 싹 털려 영원히 사라진 '춘천 장수하늘소 발생지'를 알리는 조그만 비석이 우두커니 자
리해 우수에 젖어있다.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가기 일쑤지만 이 비석은 한때 지정문화재 앞에 안내문과 함
께 세우던 것으로 소양댐이 앗아간 장수하늘소와 북산면의 산하를 잠시 생각하게 만든다. 속
세의 뇌리 속에 완전히 잊혀진 춘천의 장수하늘소 발생지는 여기서 가까운 북산면 추전리 지
역으로 비석이 이곳에 있는 것을 보면 여기도 발생지의 일원이었던 모양이다.

소양댐 건설로 추전리를 비롯한 북산면의 산하가 강제로 물에 잠기자 추전리 산중턱에 있었던
장수하늘소 발생지가 물에 묻혔고 장수하늘소는 지구의 암덩어리, 인간을 원망하며 그렇게 자
취를 감추고 말았다. (1973년 천연기념물에서 정리되었음)


▲  추곡약수 아랫약수

약수터 길 끝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추곡약수가 둥지를 틀고 있다. 사명산(四明山, 1198m)
서남쪽 자락에 자리한 이곳은 춘천에서도 가장 벽지이자 북쪽 끝으머리로 칼처럼 솟아 구름을
베게로 삼은 높은 뫼들과 소양호로 이루어진 북산면의 소중한 꿀단지이다.

추곡약수는 윗약수와 아랫약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약수는 1812년에 김원보(金元甫, 또는 강
원보)가 사명산 산신(山神)의 계시를 받아 발견했다고 전하며, 아랫약수는 약 100년 이전에
맹인 김성련(金成練)이 이곳을 지나다가(아마도 윗약수를 마시러 온 듯) 돌부리에 채여 넘어
지니 바로 그 자리에서 샘이 솟았다고 전한다.


▲  눈에 뒤덮힌 아랫약수 주변 (가운데 4각 지붕이 아랫약수,
오른쪽 주황색 지붕집은 식당)

이 약수는 보통 약수가 아닌 신비롭기 그지없는 탄산 약수로 철분과 나트륨, 탄산염, 황산염,
염소, 불소, 망간, 구리, 칼슘 등이 들어있어 물이 붉은 색을 띈다. 물은 톡 쏘는 쓴 맛으로
여기에 설탕을 타면 거의 천연사이다가 된다. 물맛은 일반 약수보다 다소 쓰지만 위장병과 빈
혈, 부인병, 신경통, 무좀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하며, 이 물로 밥을 지으면 밥이 파랗게 물
이 오르면서 일반 밥과 달리 꼬들꼬들하고 맛이 좋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이런 한약 같은 약수가 무척 싫었다. 하여 입에도 대지 않았었지. 그런
데 그 물로 지은 밥은 맛이 있어 몇 그릇을 뚝딱 비우곤 했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그렇게나
동경했던 어른이 되면서 그렇게나 싫어했던 탄산 약수는 없어서 못마실 정도로 달콤한 약수로
바뀌었다. 나이가 들면 맛도 자연히 바뀌기 마련이지만 그만큼 건강을 챙겨야되는 우울한 나
이대에 이른 것이다.


▲  김원보가 약수를 발견한 것을 기리고자 그의 후손 자매가(손녀라고
되어있음) 1992년에 만든 추곡약수 발견내력 표석

▲  추곡약수 윗약수

추곡약수는 몸보신을 위해 왔으므로 마치 달콤한 음료수를 마시듯 몇 바가지를 마셔댔다. 몸
에 좋다고 하니 두둑히 마셔야 후회가 없지. 게다가 멀리서 왔으니 그 본전은 뽑아야 된다.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지만 속이 좀 덥수룩했는데 정말 약수의 효과인지 꼬르륵 말썽을 부리
던 뱃속이 잠잠해진 것 같다. 마치 속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기분 같아서는 약수터 물이 마
르도록 더 퍼마시고 싶지만 위 용량의 한계가 있어서 더 마시진 못했다. 약수터 안내문을 보
니 1일 권장량이 1리터 이하라고 한다. (그날 아마 1.5리터는 마셨을 듯)


▲  추곡약수 윗약수 - 샘 주변이 시뻘겋다.

▲  겨울에 잠긴 추곡약수 윗계곡 (계곡은 출입 금지)
겨울 제국의 시련을 견디며 조용히 봄을 잉태한 계곡, 소쩍새가 우는 그날
거추장스런 눈과 얼음을 박차며 봄의 해방군을 맞이할 것이다.

▲  추곡사(楸谷寺) 가는 길

추곡약수 마을에서 약수로 가는 길목 남쪽 산중턱에 추곡사란 조그만 산사(山寺)가 자리해 있
다. 약수를 마시고 내려오면서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약수 하나만 보기에도 좀 허전하여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어차피 길목에 있으니 잠깐의 발품이면 충분하다.
추곡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정확한 창건 시기는 모르겠다. 원래 이름은
명도암(明道庵)이었으나 지역 이름을 따서 추곡사로 갈았다. 숲에 둘러싸인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 등이 있으며, 대웅전은 법당임에도 규모가 꽤 단출하다. 산신각도 대
웅전과 닮은 꼴이며, 대웅전 내에는 문수/보현보살을 대동한 금동석가3존불과 여러 탱화가 봉
안되어 있어 있을 것은 거의 다 갖추고 있다.

▲  간단한 모습의 추곡사 대웅전(大雄殿)

▲  추곡사 요사(寮舍)

▲  산신이 봉안된 산신각(山神閣)

▲  금빛찬란한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  밝은 색채의 산신탱 - 두광(頭光)을 갖춘 너그러운 표정의 산신과
밥을 며칠 못먹었는지 까칠한 표정을 지은 호랑이, 그리고
앳된 모습의 동자 등이 그려져 있다.

※ 춘천 추곡약수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① 춘천까지
* 청량리역, 상봉역, 망우역, 퇴계원역, 평내호평역에서 경춘선 전철을 타고 남춘천역이나 춘
  천역 하차
* 용산역, 청량리역, 상봉역, 평내호평역에서 경춘선 ITX-청춘 열차를 타고 남춘천역이나 춘
  천역 하차
* 동서울터미널, 강남 센트럴시티, 잠실역(5번 출구)에서 춘천행 직행/고속버스 이용
* 인천, 부천, 고양, 구리, 성남, 수원, 평택, 강릉, 원주, 청주, 천안, 대전(복합), 전주,
  대구(북부, 동대구), 울산, 부산에서 춘천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경춘선 남춘천역 1번 출구를 나와서 도로(영서로)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가면 온의4거리이
  다. 여기서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강남동(시외버스터미널) 정류장인데, 여기서 춘천시내버
  스 18번을 타고 추곡약수에서 내린다. <춘천시외터미널을 나와서 왼쪽(북쪽)으로 가면 온의
  4거리, 여기서 북쪽으로 길을 건너면 강남동 정류장>
  버스는 1일 5회 운행하며, 후평동에서 7:30, 9:05, 11:35, 15:40(하절기 16:35), 19시에 출
  발한다. (강남동은 15분 정도 추가)   버스 시간이 맞지 않으면 춘천시외터미널에서 양구행
  직행버스를 타고 북산지서에서 내려 2km 걷는다. (직행버스는 40~60분 간격, 춘천역 경유)
③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춘천나들목에서 양구 방면 5번 국도 → 배후령터널 → 간척3거리 → 추곡
  약수3거리에서 좌회전 → 추곡약수

* 소재지 -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추곡리 (추곡약수길 89-1)


 

♠  소양강 하류에 남아있는 청동기 유적 천전리지석묘(泉田里支石墓)
- 강원도 지방기념물 4호

추곡약수에서 조촐하게 약수 몸보신을 하며 사명산의 청정한 기운까지 누리다가 약수에 대한
미련을 애써 지운 채, 다시 추곡3거리(북산지서)로 나왔다. 그냥 춘천시내로 나갈까 하다가
추곡약수 하나로는 무척이나 허전하여 시내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천전리지석묘를 후식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마침 춘천~양구 직행버스가 천전리지석묘 근처인 춘천국유림관리소에 정차
한다.

직행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중, 그렇게나 보기 힘든 18번 시내버스가 시내에서 나와 추곡
약수로 들어갔다. 이 차는 추곡약수에서 바퀴를 돌려 다시 추곡3거리로 나왔다가 북산면사무
소가 있는 오항리로 들어가는데 그를 타면 참 저렴하게 천전리로 넘어갈 수 있지만 시내 방면
은 무려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된다. 시간은 이미 16시가 넘은 상태, 그때까지 햇님이 우리
를 기다리지 않기에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비싼 직행버스를 타야 되는데 이 직행버스도 좀
처럼 나타나질 않는다. 게다가 일몰 직전의 산골이라 칼바람이 춤을 추며 우리의 폭력성을 적
지 않게 테스트한다.
그렇게 기다린지 40분 만에 춘천행 직행버스가 짜잔 모습을 비추었다. 그의 등장에 잔뜩 일그
러진 표정은 긍정적인 표정으로 씨익 바뀌었지. 거의 비행기 이륙 수준으로 질주하는 그를 잡
아타고 간척3거리와 배후령터널을 지나 거의 20분 만에 천전리 춘천국유림관리소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천전나들목 입구 3거리인데 여기서 길 오른쪽에 천전리
지석묘를 알리는 갈색 피부의 이정표가 나온다. 그의 안내로 겨울잠에 잠긴 농산물 비닐하우
스 단지를 지나면 그 길의 끝에 천전리지석묘가 웅크리고 있다.


▲  고된 세월에 새까맣게 탄 서쪽 지석묘(고인돌)

소양강 북쪽, 천전리 경작지에 자리한 천전리지석묘(고인돌)는 2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
에 시신과 유물을 담은 돌방을 낸 다음 커다란 뚜껑돌을 씌운 탁자식이다. 이들은 세력의 우
두머리나 부족장의 무덤으로 예전에는 10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5기만 남은 상태이며, 다른 고
인돌에 비해 덩치가 작은 편이나 드물게 돌방이 잘 남아있다.

고인돌 뚜껑돌의 길이는 2.2~2.6m 정도이고, 기둥(받침돌)의 높이는 1~1.1m 정도이며, 돌방에
서 돌화살촉 3개와 대롱구슬,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돌방에는 잡석만 무성하며,
이들 고인돌을 통해 옛 조선(朝鮮)이 대륙을 호령했던 청동기시대에 춘천 지역에 조그만 세력
이 있었음을 귀뜀해준다. 이 세력은 점차 춘천 지역을 다스렸던 맥국(貊國)으로 발전하거나
혹은 그 세력에 강제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극복하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은 가련한 고인돌
천전리고인돌 형제 중 가장 덩치가 작다.

▲  검은 피부가 되버린 동쪽 고인돌들

▲  돌방을 꽁꽁 가리고 있는 동쪽 고인돌 (왼쪽에 꼬꾸라진 커다란 돌은
예전에 사라진 고인돌의 뚜껑돌)

▲  가장 동쪽 고인돌

※ 춘천 천전리지석묘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① 대중교통 (현지교통, 춘천국유림관리소 하차)
* 경춘선 남춘천역(1번 출구)에서 11, 150번 시내버스 이용 (150번은 다소 돌아감)
* 남춘천역(1번 출구)을 나와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온의4거리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길을 건
  너서 강남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11, 18, 18-1번 시내버스 이용
* 춘천역(1번 출구)에서 11, 12, 150번 시내버스 이용
* 춘천국유림관리소에서 하차하여 동쪽(소양댐)으로 200m 가면 천전리지석묘를 알리는 이정표
  가 나온다.
②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춘천나들목에서 양구 방면 5번 국도 → 천전나들목을 나와서 소양댐 방면
  좌회전 → 천전리지석묘 입구 (차는 이곳에 주차)
* 소재지 -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685-7


천전리고인돌을 보고나니 땅꺼미는 완전 짙어져 세상은 검은색 도화지가 되었다. 소양호와 칼
처럼 솟은 산들로 둘러싸인 춘천분지 특유의 칼바람과 맞서며 종일 돌아다녔더니 저녁 시장기
가 강하게 피어오른다. 저녁은 이미 정처를 정해둔 상태라 춘천의 명물인 닭갈비와 막국수,
빙어회를 내놓는 식당으로 즐비한 윗샘밭(천전리)을 버리고 춘천시내버스 13번을 타고 춘천시
내로 들어갔다.

신북읍과 소양2교, 강원도청을 차례로 지나 동부시장에서 내려 남쪽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가
니 효자동(孝子洞)에 자리한 별당막국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남부4거리 부근 약사동
으로 이전됨) 바로 이날 저녁을 처리할 집이다.
자리에 앉아 무엇을 먹을까 잠시 즐거운 고민을 벌이다가 춘천스타일에 맞게 막국수와 메밀전
병, 감자전을 주문했다. 잠시 뒤 따끈한 육수와 붉은 김치, 백김치 등 김치 2종류가 차려진다.
김치도 제법 숙성이 되서 맛이 좋았고, 백김치도 입에 잘 들어가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그리
고 바로 감자전과 메밀전병이 수줍은 듯 앞에 차려졌는데 감자전은 강원도에서 먹을 수 있는
일반적인 감자전 맛이고, 메밀전병은 정선5일장과 동해(東海) 북평5일장에서 먹던 그 맛과 비
슷하다. 전병은 거의 20덩이로 이루어져 있으며, 간장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고소하다.
이윽고 춘천스타일 음식의 제왕인 막국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막국수는 춘천을 비롯한 강원도
의 토속음식으로 국수와 계란 반토막, 돼지고기, 당근, 오이 등이 버무러져 막국수를 이루고
있다. 식당 종업원의 안내로 지정된 육수를 조금 부어서 막 비벼 먹으니 제법 맛이 살아난다.
그렇게 주문한 음식을 모두 처리하니 포만감의 행복과 식곤증이 살짝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  감자전과 메밀전병, 김치 2종류

▲  막국수의 위엄

식당을 나오니 날씨는 더욱 심술을 부려 바람이 더욱 까칠해졌다. 이제는 쿨하게 집으로 돌아
가야 될 시간, 남춘천역까지 걸어가 경춘선 전철을 타고 미련없이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춘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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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한복판에 뉘어진 신비의 탄산약수,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 탄산약수의 성지를 찾아서 ~~~

홍천 삼봉약수터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

▲  삼봉약수터



 

봄이 겨울의 잔여 세력을 토벌하며 천하평정에 열을 올리던 3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강원도를 찾았다.
이번 나들이는 후배가 차를 렌트하여 1박2일 일정으로 강원도와 충북, 경북 지역을 유람
하기로 했는데 렌트카의 장점을 최대한 뽑고자 대중교통 접근성이 매우 고통스러운 곳을
중심으로 아주 아름답게 동선을 짰다. 그래서 요즘 한참 관심을 가지고 있는 탄산약수를
먼저 찾기로 하고 적당한 약수를 물색, 홍천 삼봉약수터에 격하게 반응을 보여 그곳을 1
번 답사지로 정했다.

아침 8시, 능동(陵洞) 어린이대공원 부근을 출발하여 우선 주유소에 들어가 2일 동안 수
고를 해줄 차량에게 밥을 두둑히 먹이고 긴 여정에 들어갔다. 사람이든 차량이든 동물이
든 무조건 배불리 먹고 봐야 된다.

언제나 번잡한 서울 시내를 벗어나 강변북로와 경강로(6번국도)를 신나게 달려 구성포에
서 56번 국도(구룡령로)로 진입했다. 칼처럼 솟은 산 사이를 구불구불 돌아 창촌에 이르
니 동쪽으로 보이는 산 정상부에 하얀 눈이 버젓히 쌓여있어 하늘에 그만큼 가까이 왔음
을 느끼게 한다.
12시 반 정도에 드디어 삼봉약수터를 품은 삼봉자연휴양림 입구에 도착했다. 같은 홍천(
洪川) 땅임에도 홍천읍에서 무려 80여km나 떨어진 곳이니 정말 허벌나게도 멀다. 참고로
홍천군은 우리의 실지(失地, 북한과 요동, 만주, 왜열도)를 제외한 이 땅에서 가장 넓은
행정구역으로 면적이 무려 1817.96㎢에 달한다. (서울의 약 3배임)
고을 대부분이 산지로 동쪽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허리인 태백산맥이 흘러가 고산준령
을 이루며 칼처럼 솟은 뫼 사이로 적게나마 경작지가 누워있어 그곳에 주로 마을이 형성
되어 있다.

수해(樹海)에 잠긴 휴양림길을 들어서면 4동으로 이루어진 한옥지구와 제2야영장, 제1야
영장이 차례로 마중을 나오고, 주차장을 지나면 관리사무소(매표소)가 차단기로 길을 막
고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쳐다본다. 삼봉약수터를 비롯한 매표소 북쪽은 유료(有料)의 땅
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리가 없기 때문에 순순히 입장료와 주차비를 치르니 그
제서야 차단기가 씨익 웃으며 올라간다.

햇빛지구 숙박동과 황토지구 숙박동을 지나니 조촐하게 닦인 약수터 주차장이 마중을 나
온다. 차량은 여기서 더 이상 바퀴를 굴릴 수 없으며 바로 계곡 너머로 삼봉약수터가 바
라보인다. (매표소 옆 주차장에 차량을 두고 삼봉약수터까지 걸어가도 됨, 1km 거리)


▲  삼봉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와 매표소



♠  삼봉자연휴양림에 묻힌 신비의 약수, 삼봉약수터(三峯藥水)
- 천연기념물 530호

홍천에서 제일 벽지로 통하는 광원리 산골, 가칠봉 남쪽 자락 계곡에 삼봉약수터가 조용히 웅
크리고 있다.
삼봉약수는 일반 약수와는 차원이 틀린 탄산약수로 맛이 은근히 쓰다. 물 색깔이 붉어서 주변
이 온통 붉은 색을 이루고 있는데, 이 물에 설탕을 타면 천연사이다가 되고, 이 물로 밥을 지
으면 푸른색으로 꼬들꼬들 익어 맛이 좋다.

이 땅<만주와 북한 등 잃어버린 땅은 제외>의 탄산약수는 강원도와 충북, 경북 산골에 몰려있
는데, 그 수가 별로 많지 않다. 탄산약수의 대표적인 성지(聖地)로는 세계 3대 광천수(鑛泉水)
의 하나로 꼽히는 청주 초정약수가 있으며, 제법 이름이 알려진 약수로는 설악산 오색약수, 인
제 방동약수와 개인약수, 양구 후곡약수, 홍천 삼봉약수, 춘천 추곡약수, 평창 방아다리약수,
정선 화암약수, 봉화 오전약수, 청송 달기약수, 세종시 부강약수 등이 있다. 서울에도 천호약
수라고 수도권 제일의 탄산약수가 있었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숨통이 끊어진지 이미 오래
이다. (아주 어린 시절에 가본 기억이 있음)

삼봉약수를 끼고 있는 계곡 이름이 실론계곡인데, 그 이름을 따서 실론약수(實論藥水)라 불리
기도 했으며 <'실룬약수'라 하기도 했음> 가칠봉(柯七峰, 1240m)과 사삼봉(私蔘峰, 1107m), 응
복산(應伏山, 1360m) 세 봉우리 중간에 자리해 있어 삼봉약수라 부르기도 한다. <물이 나오는
구멍이 3개라 하여 삼봉이란 이야기도 있음>

수질이 매우 우수하여 우리나라 명수(明水) 100선의 하나로 격하게 칭송을 받고 있으며, 철분
과 망간, 불소, 탄산이온 등 무려 15가지의 성분이 담겨져 있어 빈혈, 당뇨병, 신경통, 위장병
에 효과가 있다고 전한다. 나 역시 위장병을 자주 달고 사는 가련한 현대인이라 어린 시절 입
에도 대지 않았던 탄산약수에 격하게 흥분을 보이면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탄산약수를 찾
아가 약수가 마르고 닳도록 본전을 뽑고 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건강을 챙길 나이가 된 것이
다.


▲  삼봉약수터

삼봉약수터는 3개의 혈(穴)로 이루어져 있다. 대자연 형님이 내린 신비의 물을 보호하고자 뚜
껑을 씌워 놓았는데 뚜껑을 열고 물을 마신 다음 다시 뚜껑으로 봉해야 된다. 어느 혈의 물을
마시든 색깔과 맛은 거의 같으며 탄산약수 특유의 약간 쓴 냄새가 조금 풍긴다. 그리고 혈 주
변은 약수의 영향으로 온통 시뻘겋다.

◀▲  신비의 물이 용솟음치는 삼봉약수터의
3개의 혈들 - 가뭄에도 거의 마를 날이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이 먼 곳까지 힘들게 왔으니 약수는 원없이 마셔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비록 물통을
준비하지 못해 서울까지 수송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몸 속에 가득 넣어 위장을 거의 탄산화시켰
다. 3개의 구멍의 물을 모두 마셨는데, 총 1.5리터는 마신 것 같다. 철부지 어린 시절에는 정
말 입에도 대기 싫었던 탄산약수였는데, 이제는 입맛이 변했는지 달콤하기까지 한다. 이런 내
모습이 과연 제대로 된 모습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었다는 쓰라린 신호일까?


▲  삼봉약수터 옆을 흐르는 계곡
때 묻지 않은 청정한 계곡으로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열목어(熱目魚)가
소리 없이 서식하고 있으며, 한여름에도 물이 차가워 5분 이상 발을 담그기가
어려울 정도로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린다.

▲  삼봉약수터 옆 이팝나무 숲속에 조성된 약수지구 숙박동

삼봉약수터를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삼봉자연휴양림은 1992년 산림청에서 조성한 국립휴양림이
다. 산골 벽지에 묻혀있어 접근성도 별로 안좋고 가는 길도 험하지만 그런 고생을 감수하고 안
긴 휴양림은 이곳이 속세인지 신선의 숨겨진 세계인지 햇갈릴 정도로 풍경이 청초하고 침엽수
와 활엽수가 절제된 조화를 이룬 숲은 매우 울창해 그동안의 고생을 싹 가시게 한다. (그래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임)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자라난 키다리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천연림을 이루고 있고, 열목어가
마음 놓고 꼬리를 흔들 정도로 계곡이 청정하며, 탄산약수의 성지로 추앙받는 삼봉약수터를 품
고 있다. 또한 이곳을 둘러싼 공기는 순수함을 자랑해 바깥 세상의 공기와는 맛과 질부터가 확
연히 틀리다. 이렇게 모든 것이 청정한 곳이니 휴양과 피서지로도 아주 휼륭하다.

휴양림에는 한옥 숙박동과 햇빛, 황토, 약수지구 등에 숙박동(객실 25개)이 있으며, 야영장 55
개, 주차장 4곳, 물놀이장 1곳이 있다. 광원리 계곡(실론계곡)이 휴양림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속세로 흐르며, 삼봉약수터 북쪽에는 숲체험코스와 숲속교실, 그리고 가칠봉 정상으로 인도하
는 산길이 닦여져 있다. 또한 첩첩한 산골에 맞게 산촌 겨울나기 놀이체험과 숲해설 프로그램,
산림문화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 삼봉약수터, 삼봉자연휴양림 찾아가기 (2017년 6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과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홍천행 직행버스 이용
* 수원, 성남, 고양(일산), 의정부, 속초, 춘천, 원주, 청주, 대전(복합), 전주, 대구(북부),
  포항, 울산, 부산(동부)에서 홍천행 직행버스 이용
* 홍천터미널에서 내면(창촌)행 직행버스가 1일 11회, 군내버스는 1일 3회 운행
* 내면(창촌)에서 목맥동, 명개리행 군내버스(1일 5회)를 타고 삼봉자연휴양림 하차
  (내면 출발시간 - 6:40, 9:00, 12:00, 16:40, 18:25)
* 승용차
① 영동고속도로 → 속사나들목을 나와서 속사, 진부 방면 → 속사3거리에서 좌회전 → 운두령
   → 자운교차로 직진 → 창촌3거리 우회전 → 창촌(내면) → 원당3거리 직진 → 삼봉자연휴
  양림입구 → 삼봉자연휴양림(삼봉약수터)
② 서울춘천고속도로 → 동홍천나들목을 나와서 홍천 방면 → 구성포교차로에서 서석 방면 56
   번 국도 → 솔치재터널 → 서석 → 율전3거리 우회전 → 창촌3거리 좌회전 → 창촌(내면)
   → 원당3거리 직진 → 삼봉자연휴양림입구 → 삼봉자연휴양림(삼봉약수터)

★ 삼봉약수터, 삼봉자연휴양림 관람정보 (2017년 6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000원(단체 800원), 청소년 600원(단체 500원), 어린이 300원(단체 200원)
  <단체는 20명 이상>
* 관람시간 : 9~18시 / 숙박시설 이용시간 : 15시~다음날 12시까지
* 주차비 : 1,500~5,000원 (1일 기준)
* 삼봉자연휴양림 예약과 이용정보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강원도 홍천군 내면 광원리 산197-1 (삼봉휴양길 276, ☎ 033-435-8536)


▲  삼봉약수터 동쪽에 자리를 닦은 황토지구 숙박동


 

♠  막국수와 운두령(雲頭嶺)

▲  홍천에서 먹은 막국수와 여러 김치들

바가지에 불이 나도록 약수를 마시고 약수터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덧 14시가 넘었다. 휴양림을
품은 가칠봉까지 올라간다면 더욱 금상첨화겠지만 애당초 휴양림보다는 몸보신을 위한 약수터
에 더 큰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약수터에만 초
롱초롱 눈빛이 갔지. 하여 약수터 주변을 살펴보는 선에서 삼봉과의 인연을 흔쾌히 마무리지었
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에 혹 인연이 닿는다면 그때는 휴양림에서 호젓한 하룻밤을 보
내고 싶다.

졸고 있는 차량을 깨워 휴양림을 벗어나 점심 장소를 물색했다. 점심 시간도 많이 지났고, 지
금까지 딱히 먹은 것도 없어 뱃속에서는 배고프다며 계속 꼬르륵 소리로 불만을 표출한다.
창촌으로 나오던 중, 어느 적당한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막국수와 백숙 등을 팔고 있
었는데, 강원도 산골에 왔다면 그곳의 토속 음식인 막국수나 전병, 메밀전, 메밀전병 등은 먹
어줘야 후회가 없다. 그래서 그곳에 차를 대고 식당에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단체 손님들로 시끌벅적했는데 안쪽 방에 자리를 잡고 막국수를 주문했다. 더
많은 것을 먹으면 좋겠지만 그날 충북 단양(丹陽)까지 먼 길을 가야되기에 위장을 너무 흥분시
키는 것도 그리 좋지는 않다. 그래서 일단은 막국수로 입가심을 하고 저녁에 황제처럼 먹기로
했다.


▲  두둑하게 나온 막국수의 위엄

막국수 주문을 하자 김치 3종류와 막국수 육수가 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
내니 드디어 주인공인 막국수가 큰 그릇에 담겨 나타난다. 김가루와 계란, 오이, 깨 등이 버무
려진 막국수는 전형적인 강원도 막국수 스타일로 거기에 육수를 넣어 먹으면 되는데 육수와 국
수도 얼큰하고 김치도 맛이 괜찮았다.
국수나 냉면이 1끼 식사로는 좀 허전하긴 하지만 이곳은 양이 많아서 그릇을 싹 비우니 뱃속이
완전 만땅이 되버렸다. 그 틈을 노려 식곤증이 스르륵 밀려와 배깔고 자라며 희롱을 하니 정말
벌러덩 눕고 싶다. 허나 갈 길이 멀기에 서비스로 제공되는 자판기 커피로 식곤증에 맞서며 오
후 단잠에 빠진 차량을 깨워 다시 부르릉 시동을 건다.

바로 단양으로 넘어가기에는 해가 아직 있어서 그 길목에 자리한 영월(寧越)에 잠시 들려 적당
한 정처(定處)를 찾기로 했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운두령이란 무지막지한 고개를 넘어
야 된다. 그는 강원도에 널린 험준한 고개의 하나로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용평면 경계에 자리
해 있으며, 그 고개를 넘으면 바로 장평과 진부, 영동고속도로로 이어진다.

운두령의 높이는 1,089m로 고개 시작부터 꼬부랑 고갯길의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며 차와 사람
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한쪽은 가파른 오르막. 반대편은 밑이 보이지 않는 아찔한 내리막
으로 특히 차량이 넘나드는 고개 가운데 정선 만항재(1,330m) 다음으로 높아 운두령의 위엄을
실감케 한다.
운두령이란 이름은 늘 구름과 안개가 넘나든다는 시적인 뜻으로 그만큼 안개가 자주 낀다. 우
리가 지나갈 때는 다행히 쾌청했으나 미칠 정도로 고갯길 굴곡이 심해 자존심을 곱게 접고 바
퀴를 순진하게 굴려야 뒷탈이 없다. 그렇게 고개에 임하면 전혀 나올 것 같지 않던 운두령 정
상에 이르게 된다.


▲  운두령 정상 (평창 방향)

▲  운두령 정상 (홍천 내면 방향)

하늘과 맞닿은 운두령 정상에는 토산품을 파는 운두령쉼터와 주차장이 있다. 하지만 차량의 통
행이 많지 않아서인지 요란한 수준은 아니며 그냥 조그만 가게 수준이다. 고개 주변에는 겨울
의 부흥을 꿈꾸는 눈들이 여전히 남아 천하를 노리고 있고, 바깥에 마련된 화장실은 그들로 인
해 초토화(?)를 당해 잠시 기능이 상실되었다. 도로 휴게소의 기본 요소인 화장실이 그 지경이
되었으니 볼일은 쉼터 주변에서 알아서 봐야 된다.

운두령은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높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장대한 높이에 비해 조망 범위
는 그리 넓지 않다. 고개 주변에는 그보다 높은 산들이 칼처럼 솟아 병풍을 이루고 있기 때문
이다. 북쪽으로는 홍천군 내면 지역, 남쪽은 평창군 용평면 지역이 바라보이며, 양 옆으로 계
방산(桂芳山, 1577.3m)의 산줄기가 흘러간다. 특히 계방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있는데, 그
길로 2시간 30분 정도 얌전하게 오르면 계방산 정상에 이른다.


▲  운두령에서 계방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

운두령에서 잠시 바퀴를 접으며 하늘과 가까운 곳의 공기를 만끽하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구불구불 고갯길을 내려와 노동리에 이르니 미친 기운을 보인 운두령
길은 이내 흥분을 가라앉는다. 그런 상태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현장 이승복(李承福)
기념관을 지나 속사(束沙)에서 우회전하여 평창(平昌) 방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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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미인을 닮은 아름다운 폭포, 삼척 미인폭포 (여래사, 통리협곡)



' 백두대간에 숨겨진 아름다운 비경,

삼척 미인폭포(美人瀑布) '

▲  미인폭포


예전 설날 연휴에 삼척(三陟) 미인폭포를 찾은 적이 있었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태백 일대에 쏟아진 지독한 눈폭탄으로 눈이 첩첩산중으로 쌓여 폭포까지 내려가지도 못
하고 폭포 남쪽 여래사에서 휴전선 너머의 북한 땅을 대하듯 바라봐야 했다.
'폭포가 바로 저 앞인데.. 7~8분만 내려가면 폭포인데..' 얼마나 서운했던지. 하지만 무
심한 폭설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폭포로 가는 길이 썩 좋은 편도 아니고 그렇다
고 겨울 산행에 걸맞는 장비도 갖추지 못한 터라 자칫 무모하게 굴었다가는 몸만 상한다.
하여 절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일단 만족하고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며 억지로
두 발을 돌렸다. (☞ 미인폭포 겨울 여행기 보러가기)

그 이후 미인폭포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며 애타게 기회를 엿보던 중, 드디어 기
회가 찾아왔다. 멀리 남동임해(南東臨海)지역의 아는 이들이 6월 끝 무렵에 단체로 그곳
으로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하여 그들에게 연락을 취해 폭포 인근 통리3거
리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다시금 찾아온 미인폭포와의 인연, 그 인연의 줄을 꽉 잡으며 아침 일찍 정동진(正東津)
으로 떠나는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싣고 거의 3시간 50분을 달려 고원의 도시 태백(太白
)의 관문, 태백역에 두 발을 내렸다. 그런 다음 태백역전에 있는 태백시외터미널에서 물
흐르듯 자주 있는 태백시내버스 4번을 타고 통리(通里)로 넘어갔는데, 아직 시간이 넉넉
하여 오랜만에 통리역을 만나보기로 했다.


 

♠  통리역에서 여래사까지

▲  영동선 통리역(通里驛) 왕년의 모습 (2012년 6월)

한때 통리의 관문이었던 통리역은 1940년 8월에 문을 열었다. 이 땅에서 2번째로 높은 곳에 자
리한 철도역으로 비록 역사(驛舍)의 규모는 작으나 태백 지역의 수많은 석탄과 화물을 취급했
고, 청량리와 동대구, 부전, 강릉으로 가는 열차가 꼬박꼬박 바퀴를 멈추었던 역이다. (새마을
호와 무궁화호 일부는 통과함)
특히 통리역에서 심포, 흥전, 나한정을 거쳐 도계로 내려가는 길은 우리나라 철길 가운데 가장
험난한 코스로 흥전과 나한정 사이에 스위치백(Switch-back) 구간을 두어 열차가 5분 정도 뒷
걸음질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통리역은 해발 680m, 통리재 밑에 자리한 도계역(삼척 도계읍)은 약 240m로 무려 440m의 해발
차이가 난다. 그러다보니 완전 하늘과 땅을 오가는 기분이다. 승객들이야 이 재미난 풍경에 신
이 나겠지만 열차와 그것을 움직이는 기관사는 그야말로 진땀을 뺀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큰
사고로 이어지는 난코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두대간의 눈칫밥을 줄이고자 1999년 12월 철
도 개량 사업에 들어갔는데, 워낙 큰 공사라 무려 12년 7개월의 대공사 끝에 2012년 6월 27일
솔안터널(16.7km)이 개통되었다. 개량사업의 99%는 바로 이 터널이다.

솔안터널은 동백산역에서 도계역으로 이어지는 이 땅 최대의 땅굴로 동백산~도계 구간 운행시
간이 36분에서 16분으로 20분이나 단축되었고, 운행거리는 19.6km에서 17.8km로, 선로 용량은
1일 30회에서 35회로 증대되어 열차 여객 및 물류 수송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개량 사업으
로 겨우 '강릉~영주' 완행 무궁화호 열차가 1회 멈추던 동백산역은 크게 덕을 보아 통리역 열
차가 거의 그대로 동백산역에 정차하게 되었다.
허나 양지가 있으면 반드시 음지도 있는 법이라 통리역은 그 반대로 개량 사업의 철저한 음지
가 되었다. 솔안터널 개통과 함께 통리역을 거치던 여객열차는 더 이상 이곳으로 바퀴를 굴리
지 않고 동백산역에서 바로 터널로 빠지기 때문이다. 하여 통리역의 여객 업무는 모두 동백산
역에 넘어갔고, 통리역은 간이 화물역으로 존재감이 크게 하락하였다.

통리역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여객 열차가 들어오지 않으니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타고 내
리던 사람들로 잠시나마 시끌벅적하던 풍경은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통
리 상권도 크게 위축되었다.


▲  통리재 정상인 통리3거리

현역에서 물러나 한가한 신세가 된 통리역을 오랜만에 둘러보고 통리3거리로 이동했다. 여기서
일행들에게 연락을 취해 도착을 알리고 차분히 기다렸다.

통리3거리는 통리재(송이재) 정상으로 해발 720m이다. 여기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도계와 삼척,
동해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가면 미인폭포와 너와집으로 유명한 신리(新里), 벽지 계곡의 진수
를 보여주는 동활계곡과 가곡천을 거쳐 동대해(東大海)가 있는 호산으로 이어진다.
하늘 아래 첫 동네다보니 구름과 안개가 가득 끼어 고개 밑 세상은 보이질 않는다. 게다가 아
무리 여름의 한복판이라고 해도 태백 지역은 여름 제국(帝國)이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한다. 그
날 서울은 거의 30도에 이르렀는데 태백은 고작 20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만큼 이곳은 첩첩
한 고산지대이다.

통리3거리에서 멀뚱히 기다린지 거의 20분 만에 남쪽 사람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내 앞에 그 육
중한 바퀴를 멈추었다. 반가운 마음을 내비추며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미인폭포 입구에 도착
했다. (통리3거리에서 미인폭포 입구까지 약 800m)
미인폭포 입구에서 여래사 사적비까지 차량들이 안심하게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 있으나
대형버스가 들어가기에는 많이 버겹다. 그래서 모두 입구에서 내려 걸어갔다.


▲  여래사로 인도하는 숲길

여래사로 가는 숲길은 늘씬하게 솟은 키다리 나무로 가득하다. 백두대간의 힘찬 기운을 무럭무
럭 먹고 자란 탓일까? 울창한 숲을 이루며 하늘을 가린 숲의 기세에 눈에 뵈는 게 없다는 여름
제국도 꼬랑지를 내리고 슬금슬금 피해간다.
숲이 베푼 선선한 바람과 숲내음은 사람들의 안구와 마음을 제대로 정화시켜주며, 길의 경사도
그렇게 각박하지 않아 그리 힘든 것은 없다.

       ◀  혜성사 사적비(慧聲寺 史蹟碑)
숲길을 6~7분 오르면 때깔이 고운 혜성사 사적
비가 마중을 한다. 혜성사는 여래사의 예전 이
름으로 바로 여기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하다.
사적비 앞에는 차량이 쉴 수 있는 주차장이 있
는데, 요즘 미인폭포 나들이 수요가 제법 늘어
나면서 관리비 명목으로 주차비를 받고 있다.
(이제는 입장료까지 받고 있음)


▲  사적비(주차장)에서 여래사로 내려가는 산길

지금이야 산길에 이렇다할 방해물이 없지만 2012년 초까지만 해도 짧게 목책이 둘러져 있었다.
절과 폭포로 내려가는 길도 오로지 여기 하나 뿐이고 길 양쪽 또한 각박한 내리막이라 목책을
꽁꽁 닫아걸면 넘어가기도 힘들다.
목책을 설치한 큰 이유는 미인폭포 관람객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폭포를 가려면 무조건 절
을 거쳐가야 되는데 절에서는 기도에 방해가 된다며 관람객들을 차갑게 대해 늘 말썽이 많았
고, 길목에 목책까지 닦아놓아 관람객의 통행까지 방해했다.
이렇게 안좋은 배경을 안고 태어난 목책은 2012년 봄에 새로 부임한 주지승이 절과 폭포를 찾
는 중생의 발걸음을 막는 것이 아니라며 싹 철거하여 예전보다는 깨끗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여래사로 내려가는 산길

사적비에서 여래사까지는 급한 벼랑을 동반한 내리막길의 숨가쁜 연속이다. 매우 가파른 경사
라 길이 지그재그로 정신없이 이어져 사람들의 혼을 다 빼놓으며, 길 옆은 거의 50~60도의 낭
떠러지이다. 특히 길이 구부러지는 부분은 거의 70~80도의 천길 낭떠러지로 동쪽 굽이 부분은
그나마 통리협곡이 가까이에 보여 덜 아찔하지만 서쪽 굽이 부분은 영동선(嶺東線) 열차도 울
고 넘었던 통리재를 비롯하여 통리재 아랫 세상(삼척시 도계읍 심포리, 흥전리)이 까마득하게
보여 염통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자칫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정말 보이지 않는 저 고개 밑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
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격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더욱 조심에 조심을 기해 내려가야 된다.


▲  서쪽 굽이 부분 - 숲 너머로 통리재가 보인다.

▲  사적비와 여래사 중간 부분 산길
관광객들을 위한 안전시설은 거의 없다. 돌다리도 두들겨 패고 건너는 심정으로
조심 조심 발을 움직이는 수 밖에는~~

▲  여래사 남쪽에 놓인 철다리

그렇게 간을 쫄깃쫄깃 구워가며 내려가니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여래사가 드디어 그 모습을 비
비추고 절 남쪽 계곡에 놓인 철다리를 건너면 여래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하늘의 감옥 같은 통리협곡에 둥지를 틀어 미인폭포의 후광을
단단히 보고 있는 고적한 절집, 여래사(如來寺)

▲  통리협곡에 둥지를 튼 여래사 (겨울 설경)

통리협곡 동쪽 비좁은 곳에 둥지를 닦은 여래사는 1960년 4월에 창건된 조촐한 산사(山寺)이다.
원래 이름은 혜성사(慧聲寺)로 근래에 이름을 갈았으며 가파른 통리재로 이어지는 서쪽을 빼고
는 동/남/북쪽이 완전히 산으로 막힌 하늘의 감옥 같은 곳이다.
처음에는 조그만 기도처로 시작했으나 미인폭포의 덕을 제대로 본 탓인지 신도가 꾸준히 늘어
나 대웅전과 삼성각 등 무려 6~7동의 건물을 갖추며 제법 발전을 보였다. 하지만 터가 협소하
고 경사가 하나같이 급한 곳이라 그런 지형의 눈치 때문에 건물 크기는 모두 작으며, 산자락을
깎지 않는 이상은 경내를 넓힐 수도 새롭게 건물을 놓을 공간도 적당치 않다.

철다리를 건너 요사의 좁은 옆구리를 지나면 경내 서쪽을 이루고 있는 요사(寮舍) 한복판에 이
르게 된다. 'ㄱ'자 모양의 요사와 '一' 모양의 요사가 바로 붙어있어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보
이는데, 이들 건물은 승려와 신도의 생활공간으로 그들 사이에 좁은 뜨락이 있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요사와 절지킴이 누렁이

좁은 산자락을 비집고 간신히 터를 다진 경내 동쪽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
여 삼성각(三聖閣)과 산령각(山靈閣), 범종각(梵鍾閣) 등이 일제히 폭포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
고 있다. 다들 조촐한 모습으로 건물 현판은 한문이 아닌 한글로 쓰인 것이 눈길을 끌며 건물
앞 뜨락은 매우 가늘고 좁다.


▲  단청이 고운 여래사 대웅전 (겨울에 찍은 사진)

▲  대웅전 옆에 자리한 범종각
범종을 비롯하여 목어(木魚)와 바깥에 매달린 법고(法鼓, 북) 등을 갖추고 있다.

▲  여의주를 머금은 목어의 위엄
미인폭포에 단단히 눈이 먼 것일까? 아니면
폭포 전설에 나오는 미인을 꿈꾸는 것일까?
눈동자가 부었다.

◀  범종각에 안긴 범종(梵鍾)
범종 피부의 여래사의 옛 이름인 혜성사가
쓰여 있다. 저 종을 심산유곡인 이곳까지
어떻게 운반해왔을까?


▲  1칸짜리 삼성각
삼성각은 보통 산신과 칠성,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나 이곳은 산신과 칠성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독성은 어디로 마실을 갔으려나..?)

▲  삼성각에 봉안된 산신탱(山神幀)과 칠성탱(七星幀)

왼쪽 산신탱에는 흰 수염의 산신 할배를 비롯하여 호랑이와 동자(童子) 등 산신 식구들이 그려
져 있다. 산신 왼쪽(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는 그의 거처인 산이 흑백으로 그려져 있어
칼라와 흑백 사진을 원근감에 맞쳐 겹쳐놓은 듯 하다.
빨간색 투성이인 오른쪽 칠성탱은 선의 미가 물씬 묻어나 여래사 탱화 중에 단연 돋보인다. 이
들은 모두 20세기 후반 것으로 시간이 100년 이상 흐르면 20세기 후반 불화 양식으로 우리나라
미술사 관련 서적에 소개될 지도 모르니 미리 눈도장을 찍어두자.


▲  경내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  산령각에 봉안된 존재들 (산신과 단종 임금)

산령각은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이미 삼성각에 산신상과 산신탱이 있건만 따로 산령각을 만
들어 별도의 산신상과 산신탱을 봉안하고 있다. 그러니까 산신상/산신탱이 각각 2개씩 있는 것
이다. 왜 그렇게 산신으로 도배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절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혀있다보니 산
신에게 더욱 잘보이려는 의도로 그리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산신탱은 매우 오래된 듯, 꽤 빛이 바래 보이는데 적어도 50~60년 이상은 묵은 듯 싶으며, 그
옆에는 어느 선비가 백마에 탄 곤룡포(袞龍袍)를 입은 제왕에게 무언가를 바치고 있는 그림이
눈길을 끈다. 절에 왠 선비와 왕의 그림일까? 그것은 단종(端宗)과 충신 추익한(秋益漢)의 일
화를 머금은 그림이다.

단종(1441~1457)은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에게 강제로 왕위에서 떨려난 불운
의 어린 군주로 계속되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인하여 결국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
(寧越) 청령포로 유배를 오게 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영월에서 한가로운 인생을 보내고 있던 추익한은 그 소식을 듣고 자주 단종을
찾아와 문안 인사를 올렸다. 단종이 시(詩)를 좋아하니 그와 함께 시를 지으며 그와 놀아주었
고, 산에서 딴 산머루나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진상하는 등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추익한은 산에서 단종에게 줄 머루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단종이 곤룡포를 휘
날리며 백마를 타고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난데없는 그의 등장에 '이게 뭔일이지..? 유배
가 풀렸나?'
적지 않게 놀랬으나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산머루를 쓱 바치며 '전하 어디로 가십
니까?'
물었다. 그러자 단종은 '태백산에 가는 길입니다. 산머루는 처소에 갖다 두세요' 하고
는 말을 타고 사라졌다.

추익한은 '이거 내가 귀신에 홀렸나? 잘못 본 거 아닐까?' 여기다가 문득 조짐이 좋지 않아 단
종이 머물던 영월읍내 관풍헌(觀風軒)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가보니 글쎄 단종은 사약을 마시
고 이미 죽어있던 것이 아닌가 (그때가 1457년 10월 26일) 그 참담한 광경에 충격을 받은 추익
한은 크게 곡소리를 내며 결국 자살하고 만다.

단종은 이승을 떠나자 태백산으로 들어가 그곳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강제로 숨
을 거둔 단종에 대한 강원도 남부 지역 백성들의 눈물 어린 동정심은 그를 천하 제일의 성산(
聖山)인 태백산의 산신으로 만들어 길이길이 받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강원도 삼척과 정선,
영월 지역의 많은 사찰에는 단종과 추익한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을 봉안하고
있으며, 이 지역 서낭당이나 당집에서도 그 그림을 봉안하며 단종을 신으로 받든다.


▲  범종각 옆에 있는 샘터

여래사에 2번이나 발을 들였지만 샘터는 처음 본다. 그새 새로 만든 것일까? 그건 아니다. 예
전 겨울에 왔을 때는 눈에 완전히 묻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샘터는 미인폭포 계곡에서 끌어올린 맑은 물로 맛이 시원하고 달달하다.


▲  옛날 시골 부엌처럼 정겹기 그지 없는 여래사 부엌

옛날 시골 부엌을 재현한 듯 꽤나 정겨운 모습이다. 이제는 희미한 추억이 되버린 나의 단양(
丹陽) 외가 시골집도 저랬었지. 장작으로 불을 떼는 부뚜막과 쇠솥을 보니 모락모락 연기가 피
어오르는 쌀밥과 누룽지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래도 완전한 옛날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었는지
현대의 이기(利器)인 가스통과 가스레인지도 들여와 부뚜막과 함께 취사를 해결한다. 부뚜막은
여전히 나무로 불을 떼며, 식수는 미인폭포 계곡에서 파이프를 연결하여 가져온다.


▲  여래사 북쪽에 병풍처럼 들어선 미인폭포 서쪽 석벽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위대한 작품 앞에 그저 탄성만 연거푸 나올 뿐이다.
하늘을 이고 있는 석벽에는 세월이 달아놓은 주름선이 첩첩이 그어져 있다.


여래사는 인적도 거의 없는 궁색한 산간벽지로 수행하기는 참 좋은 곳이다. 삼척 땅의 가장 외
진 곳이자 숨겨진 비경인 미인폭포가 절의 듬직한 후광이 되어주고 있고, 통리협곡 안에 아슬
아슬하게 들어앉은 탓에 경치도 아주 뛰어나다. 절집의 본분인 기도와 참선을 위해 이곳을 선
택한 것도 있겠지만 폭포와 자연의 덕을 톡톡히 보려는 의도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미인폭포는 시간이 지나면 언제든지 관광지로 몸값을 올릴 수 있는 곳이라 그 앞에 미리 자리
를 맡아놓으면 관광객들은 싫든 좋든 절을 거쳐야 된다. 그러다보면 절을 찾는 발길은 미인폭
포 인기에 정비례하여 늘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수입은 늘어날 것이고 그 수입을
바탕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절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사적비까지 길을 내
어 폭포에 대한 접근성도 조금 좋아졌다. 절이 아니었으면 폭포 입구에서 실타래처럼 가느다란
산길을 쩔쩔매며 이동해야 했을 것이다. 

절을 기준으로 서남쪽 벼랑에는 등잔바위, 범바위 등이 있고, 예전에는 보석의 일종인 자마노(
紫瑪瑙)란 붉은 돌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천연기념물인 수달도 가끔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이 한적하고 청정한 벽지라는 뜻이다.


 

♠  삼척의 비경이자 통리협곡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폭포, 미인폭포

▲  여래사에서 바라본 미인폭포

통리협곡 동쪽 구석에는 백두대간의 비경인 미인폭포가 수줍은 듯 숨어있다. 여래사에서 폭포
까지는 대략 300m 거리로 폭포 양쪽으로 붉은 피부의 협곡 석벽이 대장관을 이룬다.
대자연이 오봉산(五峯山)과 백병산(白屛山) 골짜기가 만나는 곳에 협곡과 함께 빚어놓은 대작
품, 미인폭포는 높이가 50m에 이른다. 지역 이름을 따서 심포폭포()라고도 하며, 삼척
시내로 흘러가는 오십천(五十川)의 최상류이기도 하다. 암벽을 타고 내려와 산산히 부서지는
폭포수는 물안개를 이루며 오색영롱한 무지개를 자아낸다.

미인폭포를 품으며 병풍처럼 들어선 통리협곡은 일명 한국의 그랜드캐년(Grandcanyon)이라 일
컬어진다. 이 협곡은 중생대 백악기(白堊紀. 1.4억년 전~6500만년 전) 시절에 퇴적된 역암층으
로 신생대 초기에 심한 단층작용 속에서 강물에 침식돼 270m 깊이로 패여 내려갔다고 한다. 석
벽이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띠고 있는데, 이은 퇴적암이 건조한 기후에서 공기 중에 노출된 채
산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로 굵은 자갈로 된 역암과 모래로 이루어진 사암(砂巖), 진흙
이 굳은 이암(泥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발 600m 내외로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안개와 구름의 희롱이 잦은데, 이때 폭포 경치가 더욱
신비하게 보인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일몰 전과 일출 전에 폭포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면 풍년, 찬바람이 불면 흉작을 예측했다고 한다.

미인폭포는 통리협곡과 한데 어우러져 장쾌하고 남성적인 멋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물론 폭
포의 이름처럼 여성적인 아름다움도 간직하고 있다. 폭포가 여성적인 이름인 미인을 칭하고 있
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이렇게 어여쁜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미인과 관련된 전설을 안고 있
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이렇게 절경인 곳에는 옛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달아놓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여러
개씩은 서려 있기 마련이다. 폭포 위쪽 동네인 구사리(九士里)에는 옛날부터 미인이 많이 나와
미인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 인근에 미인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미인폭포에 얽힌 전설은 여럿이 전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폭포 윗쪽 동네에서 태어난 미인이 혼인을 했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재
가를 했는데, 재가를 한지 얼마 안되어 새 남편마저 죽었다. 아무래도 남편을 잡아먹는 기구한
팔자인가 보다. 그래서 신세를 너무 비관한 나머지 폭포에 뛰어내려 죽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전설에는 남편이 죽자, 재혼할 남자를 찾았지만, 예전 남편만한 사람을 찾지 못해 신세를 비관
하고 폭포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미인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의 내용을 보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이다. 폭포나 수심이 깊은 못에서 신세 한탄
으로 뛰어내린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미인이 아닌 그 반대의 여인이 뛰어내렸다
면 사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과 반대의 뜻인 추녀폭포가 되었을까? 아니면 폭포도 자존심
이 상해 그 자리를 접었을까.?

그리고 또 다른 전설로는 구사리 혹은 심포리에 살던 어느 부부가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
이가 시작부터 너무 이쁘게 생겼다고 한다. 부부는 그런 딸 때문에 신세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되어 생후 3일만에 땅에 생매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러자 폭포 속에서 용마(龍馬)가 튀
어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니 아마도 여자 아이가 용마로 환생하거나 그 아이가 장차 탈 용
마가 너무 열받아서 하늘로 날라갔던 모양이다.
폭포수가 미끄러지듯 내려와 산산히 부셔지는 석벽을 험풍암(驗豊岩)이라고 부르는데, 미인이
뛰어내릴 때 이를 지켜보던 동자승이 돌이 되었다는 동자석(童子石)이 암벽 꼭대기에 서 있다.
그 동자승은 미인의 자살을 막지 않고 멀뚱히 구경했다는 이유로 하늘에서 벌을 받은 듯 싶다.


▲  통리협곡의 붉은 석벽 (미인폭포 서쪽 석벽)

마지막으로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런 전설도 있다.
옛날 이곳에는 미인이 하나 살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날 이 땅에 흔하고 흔한 된장녀 타입으로
눈이 쓸데없이 높아 왠만한 남자들이 청혼을 해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게 꿈꾸던 이상형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많이도 흘러갔다. 청정한 물을 쏟아내는 폭포와
더불어 살았으니 시간 관념도 잊은 듯 싶으며, 미모에 대한 지나친 자만감에 자신의 모습도 살
피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다가 일기가 화창했던 어느 날, 드디어 이상형의 남자가 폭포를 지나갔다. 이에 미인은 그
에게 청혼을 했는데, 남자는 크게 발작하며 확실하진 않지만 이 정도의 말을 했던 모양이다 '
할머니! 지금 저한테 농담하는거죠?'
그 말에 미인은 '엥 이게 뭔소리인가?' 싶어 폭포수에 자
신을 비추어 보았는데, 글쎄 그 속에는 남자가 했던 말 그대로의 모습이 비춰진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크게 발작한 미인은 치마폭을 뒤집어 쓰고 폭포에 뛰어내려 죽었다고 하며, 그래서
인지 폭포의 모습이 여인이 치마를 뒤집어 쓰고 뛰어내리는 모습과도 닮았다고 한다. (그렇게
까지 보이지는 않았음)
미인이 자신의 주제 파악도 못하고 그렇게 골로 간 이후, 백산(통리 남쪽) 말구리재에서 그녀
의 배필이 될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허나 미인이 죽었다는 소식에 그 또한 발작하여 신
기(도계 북쪽 동네)에서 말과 함께 죽었다고 하며, 미인이 뛰어내릴 때 동자승이 그 모습을 구
경하다가 돌이 되었다고 한다.

▲  하얀 명주를 가늘게 늘어뜨린 듯한 미인폭포
여름 제국의 심술로 초여름 가뭄이 극심이라 폭포수의 수량이 썩 많지가 않다.


여래사 요사 북쪽에 폭포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그 문을 열고 산길을 7~8분 정도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이며 내려가면 꿈에도 그리던 미인폭포 앞에 이르게 된다. 폭포로 인도하는 산
길은 매우 가는 편으로 마치 미인의 얇은 팔이나 다리를 더듬는 것 같다. 그 길을 한 발짝 내
려갈 수록 미인폭포는 점차 가깝게 다가오면서 그 아름다우면서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다. 여래
사에서 보는 폭포와 그곳으로 내려가는 산길에서 바라보는 폭포, 그리고 바로 앞에서 보는 폭
포의 모습은 확연히 틀리게 다가오며, 폭포의 규모가 자못 장대하다보니 그 앞에 흩어진 사람
들이 개미보다 더 작게 보인다.

▲  바로 앞에서 바라본 미인폭포의 위엄

높은 벼랑에 절벽이 뚫리고 성난 물줄기가 천길 아래로 떨어져 흰 비단을 드리웠다. 폭포는 직
각을 이루며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중간에 한굽이 쉬었다가 쏟아지는 형태로 수량이
적다보니 폭포수 소리가 미녀의 목소리처럼 작기만 하다.
폭포수는 폭포 앞 못에 모이는데, 그 못의 수심이 매우 얕아 어린이들이 물놀이하기에 좋으며,
신경통에 좋다는 물맞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폭포 아랫도리 암벽에 앉아서 위에서 쉴새 없
이 쏟아지는 물을 맞으면 되니 정말 피서의 성지가 따로 없다. 미인의 기운이 담긴 폭포수로
얼굴을 씻으면 피부가 좋아진다고 하는데, 손만 씻었지 얼굴까지는 씻지 못했다.

못에 잠긴 폭포수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속세를 향해 먼 길을 떠난다. 통리협곡이라 불리는 계
곡을 타고 오십천에 합류해 동해바다로 흐르는 것이다. 계곡에는 특이한 돌들이 많이 눈에 띄
는데, 큰 암석에는 다양한 조그만 돌들이 화석처럼 박혀있다. 그 모습이 마치 콘크리트에 박힌
조그만 돌처럼 보이며, 이들은 아득한 중생대 백악기 시절의 온갖 사연을 안고 형성된 것으로
백두대간 지질학 연구에 쏠쏠한 단서를 제공한다.

폭포 앞에 이르니 시원한 물줄기와 번뇌도 싹 털어갈 정도로 청정한 산바람, 그리고 그렇게나
소망하던 폭포 앞에 내가 서있다는 현실에 정말 그곳을 떠나기가 싫었다. 폭포 앞에 작게 움막
을 짓고 아주 잠깐 속세를 등지며 폭포를 벗삼아 살고 싶은 마음도 굴뚝처럼 솟는다. 허나 이
렇게 되면 미인폭포가 나 때문에 이름을 바꿔야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미남폭포는 그렇고
추남폭포로 말이다. 그러면 폭포도 발끈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아닐까? 절이 싫으면 중
이 떠나듯이 말이다.

이곳은 통리협곡의 막다른 곳이라 마치 세상의 숨겨진 끝이나 막다른 구석에 들어선 기분이다.
여기서는 오로지 여래사를 거쳐 밖으로 나가거나 계곡을 따라 아득한 북쪽으로 내려가야 된다.


▲  폭포 밑에 마련된 조그만 못 - 수심도 얕고 돌도 매우 곱다.

▲  성나게 쏟아지는 미인폭포의 윗부분

▲  청정한 폭포수로 붉은 피부가
더욱 윤기나게 보인다.

▲  폭포 서쪽 계곡 (통리협곡)


▲  미인폭포를 등지고 다시 속세로 나가다

폭포에서 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음 일정을 위해 아쉽지만 그곳과 작별을 고했다. 힘들게 찾
아온 폭포라 쉽게 등지기가 싫어 끝까지 남다가 내가 마지막으로 철수를 했다.

폭포 관람은 수염이 지긋한 산사나이 모습의 여래사 주지승이 직접 해주었는데 그는 2012년 초
에 이곳으로 부임했다. 일행들이 모두 절로 올라오자 요사로 들어와 차 1잔 마시고 가라며 녹
차와 여러 차를 제공했다. 허나 일행 상당수가 절을 나선 상태라 차를 마신 이는 10명 정도로
요사 안으로 들어가니 온갖 가재도구와 노트북까지 있을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는 인
터넷까지 버젓히 들어와 고적한 산사에 속세의 소식을 전해주니 이 땅이 정말 인터넷 강국임을
실감케 하며, 요사 내부는 시원하여 한여름에도 선풍기를 틀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주지승이 제공한 차는 시중에서 파는 티백으로 폭포 계곡에서 끌어들인 물을 끓여 티백을 담아
우린다. 순수한 물로 우리다보니 맛도 조금은 다른 것 같다. 그렇게 차를 마시고 주지승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잠시나마 정들었던 여래사를 떠난다. 주지승도 많이 서운했던지 다음에 꼭
찾아오라며 당부를 건넨다. 

예전 겨울에 이루지 못한 미인폭포 관람을 통쾌하게 이루었지만 아직 동자석과 등잔바위, 폭포
동쪽 너머에 있는 구사리 미륵바위 등 못본 것이 참으로 많다. 그들의 정확한 위치도 모를 뿐
더러 주지승에게 문의하니 그 역시 모른다고 한다. 아마도 다음에 또 발걸음을 하라는 미인폭
포의 지극한 뜻이 아닐까 싶다.
여래사에서 사적비까지는 길이 지그재그이고 경사가 있어 내려갈 때와 달리 좀 힘들다. 사적비
까지 올라와 녹음(綠陰)이 깃들여진 숲길을 걸으며 폭포 입구로 나왔다. 입구로 나오니 우리를
태울 관광버스가 낮잠 한숨 자고 기지개를 켜며 우리를 맞는다.

그렇게 사람들을 태운 버스는 태백시내로 넘어갔다. 황지교4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들어가니 그곳에 우리가 점심을 먹을 식당이 있었다. 식당 이름은 아쉽게도 잊어먹
었는데 돌솥밥이 일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모두 돌솥으로 예약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밑반찬이 미리 맛있는 향을 풍기며 대기하고 있었고, 고기부터 생선, 강원도
산 채소까지 찬이 정말 많았다. 돌솥밥도 괜찮았지만 반찬이 더 맛있어 더 달라고 주문을 했으
나 리필로 돌아온 것은 채소 종류 뿐, 골고루 오지는 못했다.
아침부터 굶주려 폭동 직전에 있던 배를 이렇게 달래니 뱃속도 즐겁다며 쾌재를 외친다. 그렇
게 점심을 마치고 후식으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태백의 선선한 기운을 누리다가 다음 행선지
로 길을 떠났다.
 
이렇게 하여 삼척 미인폭포 초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본글의 분량
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삼척 미인폭포 찾아가기 (2016년 7월 기준)
① 철도 이용 (태백역이나 동백산역 하차)
*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태백역 하차. (평
  일은 1일 6회, 주말과 휴일은 1일 7회 운행)
* 부전역, 태화강역, 경주역, 동대구역, 안동역, 영주역에서 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동백산역 하차
② 시외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종합버스터미널(노포역)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14회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성남, 부천, 수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4~6회 운행
* 원주, 제천에서 태백으로 가는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 운행
* 강릉과 동해, 삼척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나며, 통리에서 내리면 된다.
  (통리에서 미인폭포 입구까지 도보 20분)
③ 현지교통
* 태백역전에 있는 태백시외터미널에서 구사리행 시내버스(1일 1회, 6:35분 출발)나 호산행 완
  행버스(1일 4회/ 8:30, 13시, 15:45, 19시)를 타고 미인폭포(여래사) 입구 하차, 운전사에게
  내려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미인폭포 입구에서
* 태백역이나 동백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여래사 사적비(주차장)까지 들어갈 수 있다.
④ 승용차 (여래사 사적비 앞에 주차공간이 있음, 대형버스 접근 불가)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고한 → 황지교4거리에서 좌회
  전 → 통리건널목에서 우회전(철길 건널목 건넘) → 통리3거리에서 우회전 → 미인폭포 입구
  에서 좌회전 → 여래사 주차장
* 동해고속도로 → 동해나들목에서 삼척 방면 7번 국도 → 단봉3거리에서 태백 방면 38번 국도
  → 도계 → 통리재 → 통리3거리에서 좌회전 → 미인폭포 입구에서 좌회전 → 여래사 주차장

★ 삼척 미인폭포 관람정보 (2016년 7월 기준)
* 입장료 : 1인당 1,000원 (산길 보수를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고 있음)
* 주차비 : 4시간에 1,000원 (대형은 2,000원)
* 비가 많이 내리거나 폭설이 내릴 때는 가지 않는 것이 좋다. 그만큼 험준한 곳이다.
* 미인폭포 소재지 :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
* 여래사 소재지 :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218-2 (문의재로 77-162 ☎ 033-55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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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7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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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배꼽 속에 숨겨진 순박한 폭포,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 한반도의 한복판, 강원도 양구 나들이
팔랑폭포 (팔랑계곡) '
팔랑폭포
▲  팔랑폭포 팔랑소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인 12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강원도의 첩첩한 산골이자 한반
도의 배꼽을 자처하는 양구(楊口) 고을을 찾았다.

간만에 인연을 지은 양구에 이르러 제일 먼저 읍내 북쪽에 자리한 양구선사박물관과 파
로호 습지를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다시 읍내로 나와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동면
에 있는 팔랑폭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양구시외터미널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차 시간을 점검하니 고맙게도 10분 뒤에 팔랑리로
가는 버스가 있고, 더 고마운 것은 그 버스가 팔랑폭포 앞까지 들어가는 차였다. (폭포
앞 경유 팔랑1리 목장까지는 1일 4회 운행)

드디어 팔랑리로 가는 군내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와 활짝 입을 연다. 그곳까지 버스비가
생각 외로 높았지만 나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은 없는지라 그 돈을 내고 승차했다.
게다가 폭포 앞까지 들어가주는 버스라 나에게는 좋은 셈, 다만 그 거리만큼 구간 요금
이 다소 증가했다.

버스는 10명의 사람을 싣고 읍내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구불구불 국도를 따라 동
면 지역으로 넘어갔다. 그날은 오전부터 약하게 비가 내렸는데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더
니만 충분히 쉬었는지 다시 비를 대지에 떨구며 양구의 산하를 촉촉히 어루만진다.
근심 어린 눈으로 차창 밖을 지켜보는 동안 버스는 남면(南面)을 지나 후곡약수터 입구
를 거쳐 30분 만에 동면 중심지인 임당리에 이른다. 여기서 여러 군부대를 지나 팔랑리
종점에서 해안분지(해안펀치볼)로 가는 길(453번 지방도)을 버리고 동남쪽 산골로 방향
을 틀어 3분 정도 올라가더니 뚝 멈춰선다. 여기가 바로 팔랑폭포 앞이었다.

운전사는 왜 하필이면 비오는 날에 왔냐며 한마디 건넨다. 그래서 적당한 답을 주니 폭
포는 높이가 낮고 볼품이 없다며 잘못 왔다고 그런다. 허나 그것은 내가 판단할 일이라
답은 안하고 대신 나가는 차 시간을 물어보니 약 20분 뒤(14:20분)에 있고 그 다음은 3
시간 뒤(17:40)에 있다고 한다. 허나 팔랑리(곰취 정류장)로 나오면 40분 간격으로 차
가 있으니 나와서 탈 것을 권했다.
고마움을 표하며 차에서 내리려고 하니 운전사가 비맞고 댕기지 말라며 자신이 쓰던 우
산을 흔쾌히 건네주었다. 아직까지 서려있는 시골의 넉넉한 인심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운전사에게 깊이 감사를 표했다.

차에서 내리니 바로 팔랑정(八郞亭)이란 4각형 정자와 기품이 보이는 소나무가 나를 반
긴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되겠구나 싶어 발을 떼기가 무섭게 우렁찬 물소리가 나의 귀
를 때려댄다. '아니 벌써 폭포인가? 이러면 재미없는데' 싶어서 소나무 아래 쪽을 살펴
보니 그 안쪽 계곡에 팔랑폭포가 숨어서 울고 있었다.


 

♠  오래된 소나무와 암벽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 경승지
~ 팔랑폭포(八郞瀑布)

팔랑폭포가 있는 팔랑리는 임당리와 더불어 동면의 중심격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함경도에 살
던 이학장()이란 도사()가 남쪽으로 내려와 팔랑리에 터를 일구고 살았는데, 그에게
는 유방이 무려 넷이나 달린 아내가 있었다. 그들은 4명의 쌍둥이를 낳았고, 몇 년 뒤 다시 네
쌍둥이를 낳았다고 하며, 이들 여덟 쌍둥이는 휼륭하게 성장하여 벼슬까지 했다. 그런 연유로
팔랑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팔랑의 랑(郞)은 사내를 뜻함)

팔랑1리 구석진 곳에 둥지를 툰 팔랑폭포는 폭포치고는 높이가 별로 높지는 않다. 허나 수량이
풍부하고 암벽 사이로 옥계수를 장쾌하게 쏟아내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스레 해준다.
폭포 아래로 옥계수가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팔랑소(八郞沼)는 신선(神仙) 형님과 선녀 누님이
놀다간 곳이라 전하며 그에 걸맞게 청정함을 유감없이 뽐낸다. 사방은 암벽으로 둘러싸여 신비
로운 분위기까지 더한다.
그런 폭포와 팔랑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소나무는 무려 300년의 세월을 먹은 오래된 나무
로 높이 18m, 밑동 둘레가 3.2m에 이른다.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이 걸음을 멈춰 나무에 고된
몸을 기대며 시를 지었다고 전하며,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목(神木)이나 당산나무, 당산 할머
니라 부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애지중지하고 있다.

폭포를 빚어낸 계곡은 팔랑계곡이라 불리며, 양구 곰취축제의 현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2015
년부터는 양구읍내 레포츠공원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어 다소 한가해졌다.
양구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로 한적한 산주름 속에 은둔해 있어 여름에는 피서객으로 홍수를 이
루며, 잠시 속세를 등지며 폭포를 벗삼아 지내고 싶은 곳이다.


▲  좌우로 볼록한 팔랑정(八郞亭)
정자라기보다는 조촐한 동네 사랑방 같다. 추녀에는 특이하게 풍경이 달려있어
은은한 풍경소리를 자아낸다.

▲  폭포를 바라보며 서 있는 수려한 소나무
팔랑폭포의 영원한 동반자로 300년의 장대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한 그루의
의연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로 자라났다.

  폭포 쪽에서 바라본 소나무
신령이 깃들여진 듯, 그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윗쪽에서 바라본 팔랑폭포와 팔랑소
겨울 제국이 폭포를 시샘하여 씌워놓은
얼음이 일부 남아있다.


▲  겨울비의 희롱을 받으며 장쾌하게 쏟아지는 팔랑폭포
폭포로의 접근은 안전상 통제되어 있다. 물론 요령껏 들어가면 되겠지만 겨울에는
다소 위험하므로 안전한 곳에서 폭포를 감상하기 바란다. 괜히 내려가봐야
폭포를 괴롭히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  소나무 부근에서 바라본 팔랑소
성하(盛夏)에 한복판에 왔더라면 그대로 풍덩했을지도 모른다. 소(沼)가 다소
움푹한 곳에 들어있어 폭포 위에 있는 다리나 아래쪽 다리에서는 완전히
보이지 않으며,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만 온전하게 바라보인다.

▲  폭포 윗쪽에서 바라본 팔랑소
이곳은 혹 하늘로의 승천을 꿈꾸던 용이 열심히 몸을 풀던 곳은 아닐까?

▲  겨울에 잠긴 폭포 위쪽 계곡
얼어 붙은 채 한없이 잠들어 있던 저 계곡도 소쩍새가 울때 쯤이면
기지개를 켤 것이다.

▲  폭포 아래쪽 계곡
봄을 숨죽여 잉태하며 제국의 시련을 견디고 있는 앙상한 나무들이
계곡을 거울 삼아 초췌해진 그들의 매무새를 바라본다.

▲  저 암벽 안쪽에 팔랑폭포가 숨어 있다.

▲  황량함과 적막함만이 감싸고 도는 팔랑계곡 산책로

▲  겨울 휴식에 잠긴 팔랑1리의 산야(山野)
그들이 혹 달콤한 잠에서 깰까봐 발자국 소리를 최대한 죽여가며 속세로 나온다.
아직 15시 밖에 안된 시간이지만 흐린 날씨로 인해 마치 해질녘 모습 같다.


※ 팔랑폭포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양구행 직행버스가 2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춘천과 홍천에서 양구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양구터미널을 나와서 길 건너 오른쪽에 군내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팔랑리 방면 군내버
  스가 4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그중에서 폭포를 경유하여 목장(팔랑1리)까지 가는 버스가 1
  일 4회 있다. (양구 기점 출발 8시50분, 13시30분, 16시50분, 19시30분)
* 목장행을 탔을 경우 팔랑폭포에서 내리면 바로 폭포이며, 팔랑리와 해안행 버스를 탔을 경우
  는 곰취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도보 20분
* 승용차편 (폭포 부근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 → 서울양양고속도로 → 동홍천나들목을 나와서 인제 방면 → 신남교차로에서 신남 방
   면 → 신남3거리에서 좌회전 → 용하3거리에서 우회전 → 가오작리 → 동면 → 팔랑리 →
   팔랑폭포

* 폭포 주변에 민박집과 펜션이 여러 채 있다.
*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동면 팔랑1리


 


겨울비가 오는 촉촉한 날의 문을 두드린 팔랑폭포, 안개가 아련하게 폭포와 소나무 주변
을 감싸고 있으니 오늘이 아마도 신선과 선녀의 폭포 방문 날인 모양이다. 맑은 날과 휴
일에는 인간들로 가득해 오기가 그러니 비가 오고 한가로운 평일을 골라 이곳을 살짝 다
녀가는 모양이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 놀고 싶은 마음 가득하지만 인간이 어찌 눈에 보
이지도 않는 그들과 놀 수 있겠는가?
겨울 제국에 무한으로 잠긴 채, 내년에 다가올 봄을 잉태한 폭포와 계곡, 팔랑리의 풍경
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온다. 시간과 여건이 된다면 부근에 있는 팔랑민속관과 독
립지사 동창률(董昌律) 선생의 묘역도 가보고 싶었으나 비도 계속 오고 슬슬 저물어 갈
시간이라 쿨하게 발을 돌렸다.

폭포에서 팔랑리 곰취 정류장까지는 1.3km 정도로 걷기에는 그리 무리는 없다. 종점 주
변은 민가와 키 작은 2~3층 건물이 여럿 형성되어 있고 마을 주변에는 군부대가 가득해
이곳이 어쩔 수 없는 전방 임을 느끼게 한다. 어여 이북(以北)을 회복해야 외로운 전방
신세를 면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이북도 속히 찾아야 되고 주변 나라에 빼앗긴 그 엄청
난 실지(失地)도 모두 회복하여 우리의 경계를 다시 정해야 되거늘, 이북은 커녕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도 못건지고 있으니 참으로 기약이 없다.

팔랑리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다시 양구읍내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덧 16시, 햇님도 퇴
근 직전이라 더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없어서 미련 없이 시외터미널에서 춘천행 직행버
스를 타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의 정중앙 양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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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정선5일장, 아우라지)

 


' 강원도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아우라지) '
아라리촌 연자방아
▲  아리리촌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연자방아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처럼 가을이 알차게 익어가던 추석 연휴, 강원도의 지붕인
정선(旌善)을 찾았다.
서울의 동쪽 철도 관문인 청량리역에서 선물보따리를 바리바리 짊어지며 고향으로 떠나는
귀성객에 섞여 강릉(정동진)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싣는다. 다행히 좌석이 있어
서 입석으로 가는 것은 면했다.

거의 3시간을 달려 하늘과 지척인 정선 땅에 진입, 정선의 남쪽 관문이자 태백선(太白線)
과 정선선이 갈리는 민둥산역에 두 발을 내린다. 이곳은 예전 증산역(甑山驛)으로 2009년
9월 민둥산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 이유는 증산마을 북쪽에 억새로 유명한 민둥산(1118m)
이 있어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그리 한 것이다. 허나 역 이름만 바뀌었지 마을 이름은 그
대로 증산이다.
태백선에서 사라진 새마을호 열차도 무조건 정차했던 정선 고을의 큰 마을이자 석탄 산지
였던 증산, 지금은 민둥산을 간판으로 내걸며 인근 태백(太白)과 영월처럼 관광지로 화려
한 도약을 꿈꾼다.

칼처럼 솟은 산 사이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증산은 하늘과도 불과 3자의 거리 만큼이나 가
까워 아랫 세상과는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그날은 날씨가 조금 더웠는데 고원지대라
조금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역전으로 나가니 마침 정선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벌리며 대기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가 없기에 무조건 그를 잡아탔다.

강원도의 지붕답게 높이 솟은 뫼 사이로 길은 구불구불 흘러간다. 근래에 도로가 많이 정
비되어 길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 대가로 정선에 아름다운 산하(山河)는 적지않게 상
처를 입어야 했다. 역시 강원도의 길은 제대로 토할 정도로 구불구불한 길이 매력인데 말
이다.

증산을 출발하여 40분 만에 정선군의 서울인 정선읍내에 들어섰다. 읍내에 들어서면서 바
로 정선아라리촌이 길 옆으로 지나간다. 그곳의 존재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원래는 계
획에 없던 곳이라 지나치려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절대로 못지나친다고 결국 정선
역 입구에서 내려서 오던 방향을 거슬러 내려와 아리리촌의 문을 두드렸다.

 


♠  정선 지역의 전통 가옥과 풍습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강원도 스타일의
 민속촌 ~ 정선 아라리촌

▲  대문을 활짝 열어 나그네를 맞이하는 아라리촌 정문

정선읍내 동쪽 조양강(朝陽江) 강변에 터를 닦은 아라리촌은 세월의 저편으로 무심히 사라져가
는 정선의 옛 가옥을 붙잡아 재현한 민속촌이다.
정선군청에서 많은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라리촌은 2004년 10월 7일 문을 열었으며, 면
적이 34,720㎡에 이른다. 전통기와집(1동)과 굴피집(3동). 초가(1동), 너와집(1동), 저릅집(1동
), 돌집(1동), 귀틀집(1동) 등 전통가옥 9동과 주막, 농기구 공방(工房) 1동, 육모정, 초정, 서
낭당 등의 건물이 있으며, 디딜방아와 연자방아, 통방아, 장승, 고인돌, 그네 등이 민속촌 곳곳
을 수식한다.
또한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쓴 양반전(兩班傳)을 테마로 하여 양반전의 주요 장면을 재현한 조
형물 10여 개가 곳곳에 배치되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양반전은 한문소설로 그 배경이 바
로 정선이다. 중/고등학교 국어/문학 시간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이 소설은 조선 후기 몰
락하는 양반 계급의 위선과 무능력을 풍자한 것으로 쌀을 갚지 못한 가난한 양반과 양반을 꿈꾸
는 부자, 그리고 그들을 중재하는 정선현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아라리촌은 이런 볼거리 외에도 민속촌 주막에서 토속 음식인 곤드레밥과 순두부, 메밀 관련 음
식을 사먹을 수 있으며, 가격은 다소 밉지만, 1일 숙박체험도 가능하다. 그리고 민속촌 서쪽으
로 정선의 대지를 촉촉히 어루만지는 조양강과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가 놓여 있으며, 강 너
머로 칼처럼 솟은 산 사이에 둥지를 튼 정선읍내가 바라보인다.

양반전 디오라마 등을 빼고는 여타 민속마을과 별 다를 것은 없으나, 강원도 고원지대에 가옥과
생활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현장으로 정선에 왔다면 꼭 둘러볼만하며, 넉넉잡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정선의 과거가 담겨진 아라리촌을 둘러보도록 하자.

▲  청동기시대 지배자의 무덤인 고인돌
옛것이 아닌 모형이다.

▲  6각형 모양의 정자 육모정


※ 정선 아라리촌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①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정선행 직행버스가 1일 9회 떠난다.
* 청량리역에서 매일 8시 20분에 정선,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운행한다. 원주역과 제천
  역, 영월역, 민둥산역을 경유하며, 일반 여객열차가 아닌 관광열차기 때문에 운임이 좀 비싸
  다. (청량리역에서 정선역까지 어른 26,100원)
* 민둥산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1일 2회 떠난다. <11:25(청량리발 열차), 15:15>
* 청량리역에서 강릉(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민둥산역에서 정선행 군내버스(1일 7회)를
  타고 아라리촌(여성회관) 하차
* 원주, 강릉, 제천에서 정선행 직행버스 이용
* 정선시외터미널에서 동면(화암), 증산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아라리촌(여성회관) 하차
* 정선역에서 도보 25분, 또는 택시 이용
② 승용차편 (주차장 있음)
* 영동고속도로 → 진부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정선방면 59번 국도 → 나전3거리에서 우회
  전 → 정선제2교 4거리에서 좌회전 → 봉양5리 교차로에서 증산 방면 우회전 → 아라리촌

★ 아라리촌 관람정보 (2015년 12월 기준)
* 입장료 : 3,000원(정선군 아리랑상품권을 지급함)
* 주차비 공짜
*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
* 공예 체험 : 정선 5일장(2,7,12,17,22,27일)과 주말에 도자기공예, 칠보공예, 컨츄리공예 체
  험 이벤트가 열린다. 체험비는 3,000~9,000원 정도 (겨울에는 안함)
* 아리랑학당에서 정선아리랑 소리체험을 받을 수 있다. 4~11월에 운영하며, 체험비는 무료
*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애산리 560 일대 (애산로 37, ☎ 033-560-2059)
* 아라리촌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옛 정선을 거닐다 ~ 아라리촌 둘러보기

▲  아라리촌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길이 나온다.
여기서 직진을 하던 오른쪽으로 가던 상관은 없으나 나는 오른쪽길로 들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  가장 먼저 만난 양반전 조형물 (양반전 조형물 1)

정선의 어느 가난한 양반이 살았다. 그는 독서를 좋아하고 정직한 성격으로 정선에 부임하는 군
수(郡守)들이 무조건 찾아가 인사를 할 정도로 유명했다. 허나 살림이 어려워 매년 관아의 쌀을
빌려 목구멍에 풀칠을 했는데, 계속 빌리기만 했지 갚지를 못해 그 양이 어느덧 1,000섬을 넘었
다.
그렇게 정선 사또와 관원들이 오랫동안 쉬쉬하고 넘어갔으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강원
도 관찰사(觀察使, 도지사)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관찰사는 이에 노발대발하며 정선군수를 닥달
해 양반에게 빌려준 쌀을 받아낼 것을 명령했다.


▲  전통와가 ~ 양반 가옥으로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  이름도 생소한 굴피집

굴피집은 강원도 정선, 양양, 평창에서 많이 나타나는 원시형 산간지방 가옥으로 참나무(상수리
나무) 껍질인 굴피를 지붕에 씌우면 집의 보온이 잘되고 습기를 제대로 차단해 준다. 그래서 겨
울에는 매우 춥고 여름에는 비가 많은 곳에 적당하다.


▲  굴피집에 있는 양반전 조형물 (양반전 조형물 2)

정선현감은 양반에게 당장 쌀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며 최후 통첩을 하였다. 아무리 조선
의 중심 계층이고 지체높은 양반이라 할지라도 관청에서 빌린 쌀을 한 톨도 갚지 않고 무대책으
로 일관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가 없었다.

통첩을 받은 양반은 땅에 힘없이 주저앉아 어찌할 바를 모른다. 축 쳐진 그를 바라보는 마누라
는 팔짱을 끼며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징하게 바가지를 긁는다. '영감~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이
요~!! 무슨 말 좀 해보시오!!'


▲  양반과 부자 상인의 거래 (양반전 조형물 3)

현감의 최후통첩에 제대로 울상이 된 양반에게 희소식이 하나 날라왔다. 바로 옆집에 사는 부자
가 그 환곡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것이다. 그 부자는 평민으로 평소 양반을 꿈꾸며 살았다. 마침
옆집 양반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면서 이때다 싶어 자신이 환곡을 처리해줄 터이니 대신 양반의
신분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의 제안에 양반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감옥에 끌려가게 될 판에 그까짓 양반 자리가 무슨
소용이랴, 당장 발등에 붙은 불조차 끄기도 벅찬데 말이다. 그래서 부자의 거래를 흔쾌히 받아
들이고 양반의 신분을 그에게 넘겼다.


▲  현감에서 절을 하는 양반 (양반전 조형물 4)

부자와 거래를 성사시킨 후, 양반은 길을 가다가 현감을 만났다. 그런데 그에게 갑자기 넙죽 절
을 하는 것이었다. 양반이나 현감이나 거의 같은 양반계급이기 때문에 아무리 벼슬이 높다고 해
도 절은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 된다.
현감은 화들짝 놀라며 '아니 왜 이러시오. 일어나시오' 그를 일으켜 세우며 절을 한 연유를 물
었다. 이에 양반은 옆집 부자에게 양반의 신분을 팔았다면서 그 사연을 털어놓았다.


▲  아라리촌 북쪽에 자리한 소박한 모습의 초정(草亭)과
읍내 곳곳에서 수습해온 오래되지 않은 비석들

▲  가까이서 바라본 8각형 모양의 초정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초가 정자, 소박하고 단촐한 멋이 돋보인다.
이곳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및 길손님의 휴식처 역할을 하였다.

▲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단잠에 빠진 그네

▲  아라리촌 둑방길에서 바라본 정선읍내와 조양강
읍내 뒤로 보이는 높고 웅장한 산이 정선읍의 진산(鎭山)인 비봉산(飛鳳山)이다.

▲  강바람이 살랑살랑 귀를 간지럽히는 조양강 산책로

▲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언제나 싱글벙글인 장승 3형제

뻐드렁니와 풀어진 눈을 드러내 보이며 밝은 표정으로 나그네를 맞는 장승, 장승은 마을의 안녕
을 지키고, 이정표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보통 마을 입구에 세우며, 그들 몸통에는 그들의 정체
가 쓰여져 있다.


▲  아라리촌에 살포시 찾아온 가을

▲  주막 옆에 자리한 농기구 공방
▼  공방 내부 (왼쪽은 농기구를 불에 달구어 만들던 곳, 오른쪽은
농기구와 농사와 관련된 도구들이 진열된 공간)


▲  양반이란 실체에 대경실색하는 부자 (양반전 조형물 5)

양반의 신분을 산 부자는 현감에게 이를 인정하는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현감은
그 문서를 만들어 주면서 양반이 지켜야 될 행동과 권리를 설명했다. 행동은 그야말로 겉치례가
상당수였으며, 권리는 그야말로 백성들을 쥐어짜고 착취하는 도둑 수준이었다. 그것을 모두 들
은 부자는 기쁨의 표정은 싹 사라지고 표정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이고~ 그런 것이 양반이라면 차라리 안하고 말겠소~~!!'
양반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다시는 양반 타령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  파전에 동동주 1잔 들이키고 싶은 아라리촌

아라리촌에는 주막이 장사를 하고 있다. (겨울에는 안함) 초가 주막에는 산채정식, 곤드레밥 등
을 팔며, 굴피집 주막에는 순두부와 메밀콩국수, 칼국수 등을 파는데, 가격은 조금은 미운 수준
이다. 이런 곳에 왔으면 바깥에 차려진 마루에 걸터앉아 동동주 1잔에 파전 하나 걸쳐야 기분이
나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  이제는 굳어버린 화석처럼 아련히 남은 외겨리
외겨리는 소 1마리로 전답에 쟁기질을 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2마리로
하는 것을 '쌍겨리'라고 하며 척박한 산간지대 전답에서 많이 쓰였다.


▲  양반의 특혜에는 상민을 괴롭히는 몹쓸 것도 있다. (양반전 조형물 6)

현감이 말한 양반의 특혜 중에 양반이 상민의 코에 잿물을 들이붓고 머리채를 잡아 댕기며 수염
을 희롱하더라도 상민은 감히 원망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  이름도 외우기 쉬운 돌집
돌집은 정선 지역에서 많이 지어진 가옥 형태로 안방과 윗방, 사랑방, 도장방 그리고
정지와 외양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집은 얇은 판석을 두께 2cm 정도의 돌기와로
지붕을 덮어 올린 집으로, 주로 정선 지역 산지에서 나오는
청석맥을 파내 사용했다.

▲  벌거숭이 모습이 부끄러웠던지 덩굴을 걸친 돌담장

▲  산간지역에서 많이 지어진 귀틀집

귀틀집은 껍질을 벗긴 통나무를 '井' 모양으로 쌓아 벽을 만들고, 나무 틈새는 진흙으로 채웠다.
눈이 많이 와도 견딜 수 있고, 온도 유지가 용이하며, 간편하게 지을 수 있어 나무가 풍부한 산
간지대에서 많이 선호된 가옥이다.


▲  밥 생각을 간절하게 하는 귀틀집 부엌

▲  투박한 모습의 너와집

너와집은 귀틀집과 더불어 산간지대를 주름잡았던 집이다. 200년 이상 된 소나무 토막을 쪼깬
널판으로 지붕을 이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랑방과 대청, 부엌, 봉담, 외양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는 정선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화티'가 있는데, 이는 부뚜막 귀퉁이에 진흙을 쌓아 2개
의 구멍 중 위쪽은 불을 피워 음식을 하거나 내부를 밝히고, 아래쪽은 불씨 보관용으로 쓰였다.


▲  일반 초가와 비슷한 저릅집

저릅집은 정선과 삼척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초가로 대마의 껍질을 벗기고 줄기를 이엉으로
이은 집이다. 다른 말로 겨를집이라고도 한다.

       ◀  통방아가 담겨진 삼각형 건물
통방아는 '물방아','벼락방아'라고도 한다. 확(
곡식을 넣는 돌통), 공이(찧는 틀), 수대 등으
로 이루어져 있는데. 3~5㎝ 정도의 커다란 통나
무를 이용하여 앞쪽에는 공이를 박고, 뒤쪽에는
물이 담길 수 있도록 구이통을 팠다. 그리고 귀
대를 통해 구이통 속으로 흘러 들어온 물에 의
해 공이가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확에 있는 곡식
을 찧게 된다.


▲  물레방아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물레방아는 흔히들 우리 고유의 것으로 알고 있다. 허나 그것은 조
선 후기에 청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앞서 양반전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이 청에 사신으로 갔다
가 물레방아의 위력에 반해 그것을 연구하였다.
이후 안의(安義, 경남 함양)현감이 되자 안의 북쪽 용추계곡에서 물레방아를 시범 운영을 하였
으니 그것이 바로 이 땅 최초의 물레방아이며, 용추계곡은 우리나라 물레방아의 탄생지가 되었
다. 그 이후 전국으로 빠르게 보급되어 농업 생산력의 흔쾌한 증진을 가져왔다.


▲  돌탑과 장승
마을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승과 돌탑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의 기능과
마을을 알리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였다.

▲  서낭당(성황당)

서낭당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성황신(城隍神)의 보금자리로 시골 마을에는 꼭 1개씩은 있다.
보통은 마을 입구나 이웃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세웠으며 지금도 성황제(城隍祭)를 지내
는 마을이 많다. 당 주위에는 금줄과 돌담을 둘러 잡인의 출입을 금하며, 장승이나 돌탑을 주변
에 세웠다. 마을에서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곳이다 보니 이곳에 대한 정성은 정말 대단했다.


▲  서낭당에 모셔진 성황신도(城隍神圖)

성황신도는 하나지만 각각 다른 모습의 성황신 2인이 담겨져 있다. 그들 머리 뒤로 공통적으로
금색의 동그란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광배(光背)의 일종인 두광(頭光)이다. 푸근한 인상이
매력적인 왼쪽 성황신은 하얀 옷을 걸치고 있는데, 오른손에 지팡이, 왼손에 산삼을 거머쥐며
서 있다. 빨간 옷은 입은 오른쪽 성황신도 왼쪽만큼이나 인자함이 깃든 표정으로 있는데, 오른
손에 지팡이를, 왼손으로 귀여움이 묻어난 호랑이를 살짝 어루만지고 있다.
산신과 호랑이 외에 동자와 나무, 산 등이 담겨져 있어 산신도(山神圖)와 비슷하다.

이렇게 하여 양반전과 정선의 옛 모습을 담은 아라리촌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  느긋하게 팔자걸음을 걷는 양반 (양반전 조형물 7)
현감이 부자에게 말한 양반의 겉치례 중에는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야
되는 내용도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은 정선 5일장이었다. 그래서 읍내로 넘어가 장터의 중심지인 중앙시
장에서 간단하게 메밀전병과 메밀전을 사먹고 여량, 아우라지로 가고자 정선터미널로 이동했다.
정선 땅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험준한 산악지대라 교통이 매우 좋지가 못하다. 강원도 안에서
도 매우 첩첩한 산골이라 평창, 영월과 더불어 산다삼읍(山多三邑)이라 일컬어진다.

정선터미널에서 그나마 많이 있는 강릉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를 타고 정선의 험준한 산하를
넘어 25분 만에 여량면(餘糧面)의 중심지인 여량에 이르렀다. 여량은 말그대로 식량의 여분이
있다는 뜻으로 험한 산골임에도 너른 들과 논이 있어 논농사가 가능했다. 그래서 식량이 남을
정도로 풍족했다고 전한다.

여량정류장에서 북쪽으로 가면 정선선의 실질적인 종점인 아우라지역이 나온다. 정선선의 종점
은 여기서 7.2km를 더 들어가야 되는 구절리(九切里)역이지만, 관광열차는 아우라지에서 바퀴를
접고 더 이상 들어가지 않으며, (무궁화호 열차는 폐선되고 비싼 관광열차가 대신 들어옴) 대신
레일바이크(Railbike)가 그 구간을 쑤시고 다닌다.

아우라지역은 원래 여량역이었으나 2000년에 아우라지로 간판을 갈았다. 이 역은 현재 역무원이
없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역건물과 플랫폼, 철로가 전부이다. 역과 철로시설을 보호하는 담장도
없이 사방이 개방된 형태로 자유롭게 역 내부를 거닐 수 있으며, 하루에 2번 외부세계를 이어주
는 정선아리랑열차가 운행된다.

아우라지역을 지나면 두 물줄기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곳, 아우라지가 바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정선선 아우라지역 ~ 조촐한 간이역의 모습이 너무나 정겹다.


♠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이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정선의 제일가는 명승지, 아우라지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가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몰려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 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리라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읍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여량에는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알려진 아우라지가 있다. 이
곳은 평창군 도암면에서 발원한 송천(松川)과 삼척시 하장면에서 발원한 골지천(骨只川)이 만나
는 곳으로 두 물줄기가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뜻에서 아우라지라 불린다. 여기서 하나가 된 물줄
기는 조양강으로 간판을 바꾸고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구름을 허리에 두르며 칼처럼 솟아난 높은 산과 시리도록 맑은 두 물줄기가 합쳐진 곳이라 경관
이 한 폭의 수묵담채화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여량에서 강을 건널 때는 나룻배를 타
야 했으며, 섶다리를 따로 만들어 통행하기도 했으나 장마철만 되면 떠내려가기가 바쁘니 자연
히 나룻배의 의존도는 컸다. 강의 수심은 그리 깊지는 않아 두 다리로 건너도 무관하지만 그렇
다고 1년 내내 그렇게 건널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허나 아우라지가 정선5일장만큼이나 유명해지면서 정선군은 푸른 산과 맑은 강, 강변을 가득 메
운 자갈돌, 푸른 하늘과 구름 밖에 없던 이곳을 열심히 꾸미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꾸
민 것은 아니다. 골지천에 여량교(餘糧橋)란 다리를 놓고, 그 너머에 여송정(餘松亭)이란 2층
정자를 지었으며, 거기서 송천 너머까지 소박하게 징검다리를 놓아 조금은 돌아가긴 하지만 이
제는 배에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허나 나룻배는 이곳 아우라지의 상징, 그것을 없애는 것
은 갈비탕에서 갈비를 빼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관광용으로 남겨두어 호기심 가득한 관광
객을 실어나른다. 배삯은 편도 500~1,000원으로 저렴하다. (배삯은 변경될 수 있음)

이곳으로 흘러드는 송천을 양수(陽水), 골지천을 음수(陰水)라 하여 장마 때 양수가 많으면 대
홍수가 예상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옛말이 전해오며, 남한강 1천리 길을 따라 목
재를 운반하던 뗏목 시발점으로 각지에서 모여둔 뗏꾼의 아라리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특히 정
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유명한데, 그 애달픈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옛날 여량에 혼인을 약속한 남녀가 있었다. 총각은 뗏사공으로 나무를 팔아 돌아오면 처녀와 혼
인하기로 다짐을 하고 조양강에 배를 띄워 아우라지를 떠났다. 하지만 총각은 1년이 가도 2년이
가도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도 가는 도중에 드센 여울에서 배가 뒤집혀 목숨을 잃은 듯 싶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점 절망적으로 변했다. 아우라지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처녀는 결국 아우라지
강에 몸을 던져 죽고 만다. 그녀가 그를 기다리며 애절한 마음을 적어 읆은 것이 바로 정선아리
랑의 시초라는 것이다. 이 전설 외에도 장마로 인해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남녀의 한
스러운 마음을 담은 것이 아리랑의 가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던 아우라지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자 여송정을 세우고, 그 옆에
처녀상을 1987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것은 1999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또한 아우라지비를 세워
이곳이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임을 아련히 전한다.
그리고 속세에 거의 알려지진 않았지만 2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아우라지 자갈밭에서 신석기시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물은 어디 박물관이나 발굴을 주관한 대학교 수장고에서 잠
을 자고 있겠지만, 유적은 발굴 이후 사라져 지금은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다. 이들 유적과 유
물을 통해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살짝 알려준다.


▲  아우라지역에서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왕재산(997m)

▲  단장의 사연을 담은 아우라지 노래비

▲  아우라지의 명물값을 톡톡히 하는 나룻배
예전에는 뱃사골이 직접 노를 저어서 배를 움직였으나, 지금은 강을 가로지른
굵은줄을 잡으며 배를 움직인다.


강 건너편까지 다리가 놓여져 굳이 돈 주고 느림보 나룻배를 이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우라지
의 상징이자 이 세상에서 자꾸만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정겨운 풍물의 하나이다. 시멘트 다리에
떠밀려 나룻배는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이제는 손에 꼽을 정도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다.


▲  평창에서 온 송천이 삼척에서 온 골지천과 하나가 되는 현장 ~ 아우라지

▲  조양강의 북쪽과 남쪽을 끈끈하게 붙들어 맨 여량교

초승달이 아우라지의 물을 뜨려는 달나라 토끼의 조정으로 인간 세상으로 깊히 내려오다가 그만
다리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는 것 같다.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는
아우라지의 풍경은 정말 집으로 살며시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보고 싶다. 이곳을 지나던 조
각구름도 아우라지의 풍경에 홀딱 반했는지 갈 길을 멈추고 한없이 머물고 있다.

▲  측면에서 본 초승달 모형
마치 날카로운 칼날을 보는 듯 하다.
저기에 손을 댔다가는 피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  아우라지의 명물, 아우라지 처녀상
오늘도 기약없는 님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녀의
모습에 처절함과 비장함이 엿보인다.


▲  아우라지를 굽어보는 여송정
1997년 주민들이 모든 1억원으로 지은 정자로 여량과 송천의 앞글자를 따서
여송정이라 하였다. 정선아리랑 설화에 나오는 총각은 여량에, 처녀는
송천 건너에 살았다고 전한다.

▲  송천을 따라 이어진 여송정 옛길
2010 정선비전 100대 시책사업의 하나로 조성된 길로 옛날부터 이곳
주민들이 이용하던 길이다.

▲  여송정에서 바라본 조양강, 그리고 정선의 산하
저 강물에 이 몸 하나 의지할 조그만 조각배를 띄우고
서울까지 흘러가 보고 싶다. 물론 위험한 짓이지만 ~~

▲  조양강 자갈밭에 조성된 돌탑들
이 주변에서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아우라지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아쉽지만 내가 있어야 될 서울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다. 원래는 나전과 진부를 거쳐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아우라지역에 청
량리로 가는 열차가 대기하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아우라지에서 잠시 머문 열차는 17시 10분 외마디 기적소리로 이곳의 정적을 살짝 깨뜨리며 첩
첩한 산주름에 묻힌 아우라지를 떠난다. 이리하여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
을 걷는다.

※ 정선 아우라지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청량리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매일 8시 20분에 떠난다. (민둥산역 경유)
* 민둥산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매일 2회 떠난다. (11:25, 15:15)
* 강릉에서 정선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를 타고 여량 하차
* 정선터미널에서 강릉행 직행버스나 여량, 임계 방면 군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갈 경우 (주차장 있음)
① 영동고속도로 → 진부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정선방면 59번 국도 → 나전3거리에서 임계
   방면으로 좌회전 → 나전 → 아우라지
*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레일바이크를 이용할 수 있다. 거리는 7.2km로 동절기에는 1일
  4회(8:40, 10:30, 13:00, 14:50), 하절기에는 16:40분이 추가되어 1일 5회 다닌다. 이용요금
  은 2인승 25,000원, 4인승은 35,000원이며, 10대 이상 단체 예약시는 10% 할인된다. 레일바이
  크 예약 및 자세한 정보는 ☞ 여기를 클릭한다 (문의 ☎ 033-563-8787)
*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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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2월 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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