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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등명낙가사, 정동진역


' 강릉 동해바다 나들이 (등명낙가사, 정동진) '

정동진역 동해바다

▲  정동진역 동해바다

등명낙가사 등명사지5층석탑 등명낙가사 청동오백나한상

▲  등명낙가사 등명사지5층석탑

▲  등명낙가사 청자오백나한상

 


여름 제국(帝國)과 가을의 마지막 경계선인 9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오랜만에 강
원도를 찾았다.
원래는 계획이 없었으나 정선 강원랜드에 간 후배가 요 며칠 돈을 많이 땄다며 놀러 오라
고 연락이 왔다. 그는 1~2달에 1번꼴로 그곳에 가 돈을 따기도 하고, 반대로 무지하게 잃
기도 하는데, 용케도 적정한 선을 지키며 도박에 임하여 아직 집 기둥까지는 뽑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운이 좋아 무려 7자리 수준의 돈을 땄다는 것이다. (몇 달 뒤 그 3배 이
상을 잃었다는 것은 함정. 도박은 아예 하지도 말자!)

그의 연락에 한동안 깊이 넣어두었던 역마살 기운이 탐스럽게 피어나 바로 강원도행을 결
정했다. 하여 저녁 늦게 청량리역에서 강릉으로 가는 심야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아 강
원랜드 아랫 동네인 사북으로 보냈다. 평일이라 좌석은 꽤 널널했으며, 약 3시간 20분 걸
렸다. (현재 청량리와 부전, 동대구에서 강릉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는 모두 동해역으로
단축되었으며, 강릉으로 가는 심야 무궁화호 열차도 사라짐)

해발 600~700m 고지에 둥지를 튼 사북읍(舍北邑)은 강원도 산골에 걸맞게 밤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나는 반바지에 반팔 차림으로 갔으나 만약에 대비해 긴 소매 옷을 챙겨가 그것
으로 산골 추위에 대항하며 사북역 근처 모텔에 머물던 후배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는 읍내로 나를 안내하여 소고기를 대접했는데, 사북읍내는 강원랜드 때문에 새벽 시간
임에도 문을 연 식당과 유흥시설이 꽤 많았다. 게다가 유동 인구가 산골 읍내치고는 많아
서 중소도시 부도심이나 번화가 같은 기분이다.
소주 여러 병 걸치며 배불리 밤참을 먹고 그가 잡은 모텔에서 여장을 풀어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스르륵 잠이 들었다.

즉흥적으로 이곳까지 오긴 했으나 여로(旅路)를 살찌울 정처(定處)를 딱히 정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오전부터 강원랜드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도박쟁이인 후배와 달리 나는
도박에 관심도 없다. 하여 정선(旌善)과 태백(太白) 지역의 미답처(未踏處)를 물색했으나
한결같이 교통이 좋지가 않다. (우리는 차가 없었음)
이처럼 정선과 태백 지역에서의 정처 잡기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수준이라 시야를 멀리
돌려 관동지역까지 생각하다가 오래전에 갔던 등명낙가사가 문득 머리 속에 떠오른다. 비
록 가본 곳이긴 하나 놓친 게 많아서 정동진도 살펴볼 겸, 그곳을 그날의 메뉴로 정했다.

사북에서 그곳으로 가려면 사북역에서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정동진역까지 이동해
야 된다. (현재는 동해역까지만 운행함) 강릉행 첫 열차가 10시 후반대(청량리발 열차)에
있어 그 열차를 잡아타고 백두대간의 첩첩한 산주름 속을 구불구불 돌아 확트인 동해바다
로 나아갔다.
동해역을 지나니 비로소 바다가 내 옆에서 아른거리기 시작했고, 묵호(墨湖)와 망상을 지
나 사북 출발 2시간 10분 만에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정동진역 부근 식당에서 점심
으로 해물된장찌개를 섭취했다. 포만감(飽滿感)의 행복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와 우리를
희롱하나 그 희롱을 물리치고 정동진역 버스정류장으로 가니 버스가 마침 10분 뒤에 있다.
그래서 그 10여 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강릉시내버스 112번(두산동↔모래시계공원)이
나타나 반갑게 입을 연다.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갔으나 자리는 벌써 다 찬 상태, 할 수 없이 입석으로 손잡이에 의지
해 10여 분 정도를 버텨 등명낙가사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  등명낙가사 주차장
너른 주차장 너머로 일주문과 3층석탑, 괘방산이 나란히 시야에 들어온다.


♠  등명낙가사(燈明洛伽寺) 만월보전 주변

▲  낙가사 일주문(一柱門)과 똥배 포대화상

괘방산(掛榜山, 339m)을 뒷배경으로 삼으며 넓게 자리한 주차장을 지나면 맞배지붕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선 그는 '괘방산 등명낙가사' 현판을 내밀며 이곳의 정체
를 알려주고 있는데, 문 앞에는 똥배가 매력적인 포대화상(布袋和尙) 2기가 나란히 자리하여
해맑은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는다.

     ◀  잘생긴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비석의 알맹이인 비신(碑身)은 없고, 달랑 귀
부와 이수만 있다. 나중에 절 사적비(事蹟碑)
나 다른 용도로 쓰려고 미리 장만한 듯 싶은데
, 이수에는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반룡(이무기
) 2마리와 그들과 등진 용 2마리가 현란하게
새겨져 있다. (2006년에 왔을 때도 저렇게 있
었음)

◀  일주문 부근 3층석탑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의 매끄러운
하얀 피부의 탑으로 근래에 마련했다.


▲  이곳이 서울의 정동(正東)임을 알리는 나침판 석물
석물 피부에는 대한민국 정동이라고 쓰여있으나 정확히는 서울 동북쪽 끝자락
(도봉산, 수락산)의 정동쪽이다.

▲  등명약수 주변
(돌탑과 관세음보살상, 등명감로약수 표석)

▲  등명낙가사 등명약수

일주문 북쪽에는 이곳의 자연산 명물인 등명약수가 있다. 절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나 이
곳 약수는 좀 특별하여 무려 탄산 기운을 머금고 있다. 게다가 영산전을 짓고 500나한상이 봉
안된 이후에 발견되어 절에서는 아주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낙가사는 약수에 대한 자신감으로 국립보건원에 약수의 성분을 의뢰했는데, 철분과 황산염(黃
酸鹽), 알루미늄, 유리산도 성분이 나왔다. 이들로 인해 빈혈, 위장병, 신경통, 피부병, 부인
병에 좋다고 하며, 특히 목욕을 하면 피부병, 습진, 신경통에 아주 그만이라고 한다. 목욕까
지는 대놓고 못해도 무한 섭취는 가능하니 이곳에 왔다면 괘방산이 내린 특별한 선물인 이 약
수를 꼭 마셔보기 바란다. 나는 무려 3모금이나 마셨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도 건강을 생각
해야 될 나이에 이른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등명낙가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똥배를 쑥 내민 포대화상
납작한 모습의 포대화상이 갈림길에 자리하여 자신의 배를 쓱쓱 만져줄 것을
주문한다. 그의 배를 만지고 소원을 빌면 그것이 이루어지고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여인들의 인기가 대단하다.


괘방산 동쪽에 자리하여 동대해(東大海)를 바라보고 있는 등명낙가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
으로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말사(末寺)이다. 정식 이름은 '등명낙가사'이나 3자로 줄여서
'낙가사(洛伽寺)'라 부르기도 한다.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시절,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고 전
한다. 그는 절을 짓고 수다사(水多寺)라 이름 지었는데, 그 시절 강릉 지역은 고구려(高句麗,
고구리)의 공격에 늘 고통을 받고 있어서 부처의 힘으로 이를 막고자 절을 짓고 석탑 3기를
마련해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그가 이곳에 머물던 중, 꿈속에서 당나라 오대산(五臺山) 북대(北臺)에서 만났던 승려가 나타
'내일 저 큰 소나무 밑에서 꼭 봅시다!' 그랬다. 하여 다음날 그 자리에 갔더니 그곳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했다고 한다.
과연 자장이 창건했는지는 심히 회의적이나 그는 신라 불교의 1인자로 위엄을 날렸다가 원효(
元曉)에게 밀려나 변방 산골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가 말년을 보낸 곳을 강원도로 보고 있는
데, 그런 연유로 강원도에는 그가 창건했다고 우기는 절이 꽤 많다.
신라 후기에 병화(兵火)로 파괴된 것을 고려 초에 중창하여 등명사(燈明寺)라 했다. 12세기에
활동했던 문인 김극기(金克己)는 이곳을 찾아
'불법의 높은 길이 푸른 연봉에 둘러있고, 층대 위에 높은 사전(寺殿)은 겹겹이 공중에 솟아
있다. 그윽한 숲은 그늘을 만들어 여름을 맞이하고, 늦게 핀 꽃은 고운 빛을 머금으며 봄을
아름답게 하여 봉우리의 그림자에 걸렸고, 절에서 울리는 북소리는 골짜기에서 부는 바람을
전한다'
고 했으며, 이승휴(李承休) 등 많은 문인들이 이곳에서 해돋이를 구경하거나 풍경을
찬양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강릉부 동쪽 30리에 이 절이 있다고 나와있는데, 풍
수지리적으로 이곳이 강릉도호부(江陵都護府)에서 암실(暗室)의 등화(燈火)와 같은 위치에 자
리해 있고, 여기서 공부하는 수학도(修學徒)가 3경에 산에 올라가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
가 빠르다고 해서 등명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절 부근에는 고려성터(高麗城址)가 있는데, 고려 때 등명사의 주요 물품들을 보관하고자
창고를 짓고 고려성을 쌓았다고 한다. (성 둘레는 1km) 이를 통해 절 규모가 따로 성곽(城郭)
까지 둘 정도로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  파괴된 석탑의 잔재들
지붕돌과 탑신 등이 헝클어진 모습으로 구석에 모여있다. 낙가사에는 만월보전
5층석탑 외에 함포 사격으로 파괴된 탑이 있는데, 탑에서 고색이 격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그 탑의 잔재들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잘나갔던 등명사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갑자기 풍비박산이 나 사라지고 만다. 그 시절
어느 왕이 안질(眼疾)이 유독 심해 점술가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는데, 그는 동해 정동(正東)의
큰 절에서 보내는 쌀물이 동해로 흘러가 동해 용왕(龍王)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하였다. 그 말
에 왕은 사람을 보내 원산(元山)에서부터 배편을 이용해 의심되는 절을 찾다가 등명사가 딱
정동쪽이므로 가차 없이 때려부셨다는 것이다.
또한 등명사가 서울 정동쪽에 있어 궁궐에서 받아야 될 일출을 늘 먼저 받으므로 정동쪽 등불
을 꺼야 조선에서 불교가 망한다는 주장에 따라 부셨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병화로 파괴되었
다는 설도 있다. (왜군은 동해바다를 장악하여 강원도와 함경도까지 치고 올라갔음)

이후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하다가 1956년에 이르러 경덕 영해당(景德 靈海堂)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는 절터에 있던 10여 채의 민가를 사들여 극락전을 지었으며, 관세음보살이 머물던
보타낙가산의 이름과 등명사의 이름을 합쳐 등명낙가사라 하였다.
1977년 영산전을 짓고 청자오백나한상을 봉안했으며, 1982년에 청우(淸宇)가 극락전, 약사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를 건립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극락보전과 영산전, 만월보전, 안심당, 요사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
산으로는 5층석탑이 있다. 그는 자장이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3개의 탑의 하나라고 하는
데, 현실은 고려 때 탑이며, 다른 탑은 함포사격으로 파괴되어 터만 남아있고, 다른 것은 바
다에 있는 수중탑으로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영산전에는 이곳의 자랑인 청자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일주문 북쪽에는 탄산 기운이
있는 등명약수가 있어 나그네들의 목마름을 아낌없이 해소해준다.

이제는 기억 조차 흐릿한 2006년 5월, 별 의미도 없는 것들과 이곳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는 만월보전 구역만 봤다. 영산전과 청자오백나한상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만
월보전 구역과 영산전 구역이 조금 떨어져 있어 잘 살피지 않으면 만월보전 구역이 이곳의 전
부인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다. 그러니 등잔 밑도 잘 살펴 영산전 구역도 꼭 살펴보기 바란다.

* 등명낙가사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산17 (괘방산길 16 ☎ 033-
  644-5337)


▲  등명사지 5층석탑 - 강원도 유형문화유산 37호

만월보전 뜨락에는 옛 등명사의 흔적인 5층석탑이 고색의 기운을 드러내고 있다. 그를 중심으
로 만월보전와 요사(寮舍) 등의 건물이 사방(四方)에 자리하여 그를 둘러싼다.

그는 바닥돌과 2층 기단(基壇), 5층 탑신(塔身), 머리 장식으로 이루어진 잘생긴 탑으로 기단
의 맨 윗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석재 일부 모서리를 직각 대신 곡선으로 처리했다.
1층 탑신은 넓게 지어졌으나 2층부터 5층까지는 지붕돌을 따닥따닥 배치하여 탑신이 없는 것
처럼 보인다. 1층 탑신과 지붕돌은 별도의 돌로 지어졌지만 2층부터는 같은 돌로 만들었으며,
지붕돌 밑면 받침과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져 있다. 그리고 1층 탑신에는 감실(龕室)과 자물
쇠 조각을 두었고, 탑 머리장식에는 지붕 모양의 노반과 연꽃잎이 하늘로 향한 앙련(仰蓮)이
있으며, 탑 앞에는 세월을 검게 탄 배례석(拜禮石)이 놓여져 있다.

지붕돌 귀퉁이와 탑 일부에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있으나 대체로 건강 상태는 양
호하다. 절을 세운 자장이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자 세웠다고 하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
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 외에 2기의 탑이 더 있다고 하나 1기는 함포사격으로 파괴되어 잔해
만 남아있고, 수중탑이라 불리는 다른 탑은 바다가 가져가버려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탑은 등명낙가사 경내에 있으나 '등명낙가사 5층석탑'이라 하지 않고, '등명사지5층석탑'이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등명낙가사가 옛 등명사의 뒤를 이었건만 이름이 현
실과 좀 따로 노는 것 같다.

▲  북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  남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  만월보전(滿月寶殿)과 등명사지5층석탑
만월보전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의 거처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  만월보전 약사여래삼존상
왼손에 약합을 쥐어든 약사여래 좌우로 고운 자태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들만의 물건과 자세를 취하며 자리해 있다.

▲  만월보전 구석에 자리한 조그만 존재들
붉은 피부의 관세음보살상과 하얀 피부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검은
피부의 불상 머리, 관세음보살좌상 등

▲  만월보전 구역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경내에서 바다까지 거의 1리 거리)


♠  등명낙가사 영산전 구역

▲  낙가사 극락보전(極樂寶殿)

만월보전 구역 서남쪽 숲속에는 영산전 구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 구역에는 극락보전, 영
산전, 삼성각, 공양간 등이 포진해 있는데, 영산전의 청자오백나한상이 이 구역의 백미(白眉
)라 할만하다.

극락보전(극락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서방정토(西方
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공간으로 그 옆구리에 영산전이 1단계 높이 자리해 동
해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경내의 주요 건물(만월보전, 대웅전, 영산전)은 한결같이 바다가
있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공간이다.

▲  불이문(不二門)
영산전 구역의 정문과 같은 존재로 절
중심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문이다.


▲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석가여래상과 이곳의 꿀단지인 청자로 다져
진 오백나한상과 청자석가여래상이 봉안되어 있다. 1977년에 지어진 건물로 1982년에 영산전
낙성식을 가졌다.
내가 등명낙가사를 다시 찾은 것은 예전에 이곳을 놓친 우를 씻고자 함인데, 이렇게 영산전
앞에 서게 되었다.


▲  청자오백나한(五百羅漢)상

청자오백나한은 한결같이 청자색 피부를 지니고 있다. 은은하면서도 고품격이 느껴지는 피부
색으로 속인들의 시각을 제대로 홀리는 그들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이북 출신 승려 고경
덕(高景德)과 손경산(孫京山)이 발원하여 조성되었다.
그들은 오백나한의 힘으로 남북통일을 이루고 싶다며 뜻을 모았고, 인간문화재인 해강(海岡)
유근형을 초청해 그 작업을 맡겼다.

해강은 고려청자 비법 그대로 조성하여 3년 6개월 동안 갖은 정성을 들여 1977년 10월 완성을
보았다. 오백나한 조성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와 많은 정부고위층 인사들이 돈을 내어 남북통
일의 염원을 담았으며,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곳의 꿀단지인 청자오백나한상이다.
허나 남북통일은 이루어지기는커녕 아직도 요원하니 중생들의 뜻을 외면하며 직무유기를 일삼
는 청자오백나한상이 얄미워진다. 적어도 태어난 이유와 밥값은 해야 되지 않을까?

▲  청자색 물결을 이루고 있는 청자오백나한상의 위엄

오백나한 모두 같은 모습은 거의 없고 모두 제각각의 모습을 지녔다. 정면으로 쏠리는 500기
가 넘는 저들의 시선이 얼마나 부담스럽던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마치 저들
앞에 서서 이야기나 가이드를 하는 기분이랄까? 나의 깜짝 등장이 그들 마음에 들었는지 모
르겠다.


▲  청자로 조성된 석가여래좌상
청자 불상은 여기서 처음 본다. 오백나한상의 우두머리답게 덩치도 그들보다
크지만 탐스럽게 생긴 그를 지키고자 특별히 유리막을 씌워놓았다.

▲  영산전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千手千眼觀世音菩薩圖)
마치 공작새의 꼬랑지처럼 생긴 커다란 광배(光背)를 지니고 있다.

▲  금동 피부를 지닌 영산전 석가여래삼존상

피부 색깔은 청자오백나한상과 청자석가여래상 같은 청자색 피부들보다 더 빛나고 화려할지
모르나 낙가사에서 적극 키워주고 있는 명물이 청자오백나한상이고 이 땅에 흔치 않은 존재들
이라 그들보다 훨씬 작게 다가온다. 차라리 금동석가삼존상도 청자로 싹 만들어 청자 피부로
통일을 시켰으면 어땠을까? 통일의 의미도 살리고 말이다.


▲  영산전 구역 5층석탑

영산전 구역에는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을 닮은 5층석탑이 맵시를 뽐내고 있다. 낙
가사는 옛 등명사지 탑 외에도 새 탑 2개를 더 지니고 있어 탑이 유독 많은데, 아마도 사라진
옛 탑 2개를 대신하고자 세운 듯 싶다.

이렇게 영산전 구역까지 싹 둘러보고 기분 좋게 낙가사 경내를 나왔다. 시간이 되면 괘방산도
올라가 동대해를 바라보고 싶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이 문제이다. 후배는 강원랜드에 가서
도박을 해야 된다면서 다시 사북으로 돌아가자고 그런다. 이날 주메뉴인 등명낙가사를 보았으
니 나로써는 반대할 이유도 없고, 딱히 후속 정처도 없다.
어쨌든 사북으로 가려면 무조건 정동진역으로 나가야 되는데, 강릉 시내 방향과 정동진역 방
향 시내버스는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때마침 112번 버스가 나타나 그를 타고 미련 없
이 정동진역으로 나왔다.


♠  바닷가에 자리한 천하에 흔치 않은 역, 정동진역(正東津驛)

▲  옛 정동진역 건물 (옆에 새 역사 건물이 있음)

정동진역에 오니 사북으로 가는 열차가 1시간 뒤에 있다. 하여 열차표를 구입하고 철도역 중
흔치 않게 관광지로 바쁘게 살고 있는 정동진역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은 열차로 지나가기만
했지 이렇게 두 발을 들인 것은 처음이다.

정동진역은 동해바다의 이름난 명소이자 이 땅 유일의 바닷가 철도역으로 꽤 유명하다. 지구
를 모두 통틀어도 바닷가 철도역은 거의 없어 그 희소성이 매우 큰데 그 존재 자체로 관광지
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이곳은 영동선(嶺東線) 철도역의 하나로 1962년 11월 6일 보통역으로 문을 열었다. 역 건물은
1962년 11월 11일 준공되어 여객과 화물을 취급했는데, 강릉광업소 등 인근 탄광에서 캐낸 것
들을 수송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석탄 사업이 사양화에 접어들고 지역 인구 또한
줄어들면서 수요가 크게 떨어졌다. 겨우 비둘기호 열차(2000년에 모두 없어짐)나 비둘기호를
대체하던 통근형 통일호 등 완행열차만 겨우 바퀴를 멈춰섰을 뿐이다. 이 상태로는 역이 없어
져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급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허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1995년 SBS에서 방영했던 인기드라마 '모래시계'
가 이곳을 거쳐가면서 이곳의 우울했던 처지가 180도 달라졌다. 그 드라마에 정동진역이 절찬
리에 등장하면서 관광명소로 급 부상하게 된 것이다. 또한 천하에 흔치 않은 바닷가 철도역이
란 매력과 해돋이 명소, 아름다운 풍경 또한 이곳을 격하게 수식하면서 관광객들이 폭풍처럼
밀려들었고, 주말과 휴일에는 거의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상황이 이러자 무궁화호 열차도 이곳에 모두 정차를 했고, 나중에는 새마을호도 이곳에 숟가
락을 얹혔다. (현재는 서울역~청량리역~동해역을 운행하는 별로 빠르지도 않은 KTX-이음 열차
와 강릉역~동해역 누리로 열차만 운행하고 있음)
1996년 1월 여객 취급 업무를 잠시 멈추고 역 건물을 새로 손질했으며, 주변을 손질해 1997년
3월 15일 업무를 재개했다. 예전에는 열차에서 동쪽으로 내리면 바로 정동진 해변으로 접근이
가능했는데, 해변과 역 사이로 레일바이크를 닦으면서 철책을 둘러 이제는 정동진역을 나와서
빙 돌아가야 해변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곳이 정동진이라 불리게 된 것은 서울의 정동쪽(정확히는 서울 동북부 지역)이기 때문이다.
하여 지역 이름도 정동진리이다.

* 정동진역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303 (정동역길 17, ☎ 1544-778
  8)


▲  정동진역 열차타는 곳

▲  건널목에서 바라본 정동진역 선로와 승강장 (강릉 방향)

▲  건널목에서 바라본 정동진역 선로 (동해 방향)

평일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동진역과 해변에 있었다. 10대부터 등산복으로 무장한 노인
들까지 연령층도 다양한데 이제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어 외국인 관광객들도 제법 눈에 들어온
다. 평일에도 이 정도이니 주말과 휴일에는 그야말로 시장통이며, 1월 1일에는 수 만의 사람
들이 해돋이를 보러 구름처럼 몰려온다. 이때는 정동진역으로 인도하는 도로(헌화로, 율곡로)
가 하루 종일 버벅거려 차로 접근하기가 매우 힘들다.

정동진역 자체가 관광지가 되고 일품 경관을 자랑하다 보니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
다 보니 위험천만하게 셀카를 찍으려는 사람이 많아 역에서도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여객
열차가 1일 20여 회 운행하고 있고, 화물열차도 적지 않게 경적을 울리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승강장과 철길 건널목, 역사 주변에서만 얌전히 사진을 찍기 바라며, 선로에 들어가서
찍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란다.


▲  누런 피부의 정동진역 표석
그 생김새가 물고기나 붕어빵처럼 생겼다.

▲  정동진역의 명물, 모래시계 소나무 (고현정 소나무)

모래시계 소나무는 동대해의 해풍을 먹고 자란 40여 년 묵은 해송(海松)으로 고현정 소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모래시계(1994)에서 고현정이 소나무 앞에 서 있었는데, 그 연유로 고현정 소
나무라 오랫동안 불리게 된 것이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새싹 수준의 나무로 드라마에 등장한
인연으로 정동진역의 스타급 명물이 되었으며, 관광객들의 사진 모델이 되어주느라 정신이 없
다.


▲  모래시계 소나무를 소개하는 표석 (소나무 앞에 있음)
현 소나무의 10대 시절 앳된 모습이 담겨져 있다. 저랬던 나무가
지금은 어엿한 해송으로 성장했다.

▲  정동진역에 있는 여러 조각품과 해송들

▲  바다와 해변과의 끊임없는 속삭임, 정동진역 앞바다
이렇게 보니 지구가 정말 둥글기는 둥글다.

▲  정동진 앞바다(남쪽 방향)와 레일바이크 선로

정동진역 내에서 바로 코 앞에 아른거리는 해변으로 가려면 역 건물을 나와서 빙 돌아가야 된
다. 반대로 해변에서 정동진역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는 바로 역에서 접근이 가능했음) 
영동선 선로와 해변 사이에 별도로 선로를 닦아 요즘 꿀단지로 뜨고 있는 레일바이크로 쓰고
있는데, 옛 정동진역 건물에서 레일바이크 신청을 받고 있다. 사람들이 페달을 이용해 레일바
이크로 북쪽으로 이동하면 이를 수거하는 열차가 한꺼번에 그들을 싣고 남쪽으로 가져온다.


▲  정동진 앞바다(북쪽 방향)와 레일바이크 선로
레일바이크와 정동진역 승강장 사이로 낮게 철책을 둘러 서로의 접근을
막고 있다. 예전에는 왼쪽에 보이는 계단을 통해 해변으로 내려갔다.

▲  평화로운 풍경의 정동진 앞바다
속세에서 늘 오염되고 상처받는 안구와 마음이 잠시나마 정화되는 것 같다.


정동진역을 50분 정도 고루고루 둘러보며 사진에 담으니 어느덧 열차 시간이 되었다. 벌써 그
시간이 되었나 싶을 정도로 시간이 순식간에 가버리니 정동진역 풍경이 그야말로 시간 도둑인
셈이다. 강릉에서 청량리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역으로 미끄러지듯 들어
왔고, 우리를 그 속에 담아 다시 사북으로 보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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