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22건

  1. 2023.11.17 보석 같은 이름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금산 진악산 보석사 <1,000년 묵은 보석사 은행나무>
  2. 2023.11.06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늦가을 나들이 <정동 회화나무,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배재학당 동관>
  3. 2023.10.23 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1바퀴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 흔들바위>
  4. 2023.10.15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서울 도심의 싱그러운 공간,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늦가을 나들이 <북악스카이웨이>
  5. 2023.10.08 북한산성 내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노적사~태고사 <태고사 원증국사탑, 원증국사탑비>
  6. 2023.10.03 대청호 하류에 닦여진 문화유산의 너른 보금자리,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문산리 돌다리, 문의 문산관, 문화유물전시관>
  7. 2023.09.23 동작구의 지붕을 거닐다. 상도동 사자암~국사봉~동작충효길6코스 동작마루길 <상도근린공원, 성현드림숲공원>
  8. 2023.09.12 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서울 변두리의 이색 뒷동산, 구파발 이말산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최효원묘역, 은평둘레길3코스, 약수사>
  9. 2023.09.03 대한해협에 길쭉하게 깃든 국경의 섬, 부산 대마도 <이즈하라,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아소만>
  10. 2022.11.30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홍제천 늦가을 산책 (세검정, 석파정별당, 석파랑, 홍지문 탕춘대성,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

보석 같은 이름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금산 진악산 보석사 <1,000년 묵은 보석사 은행나무>

금산 보석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금산 보석사 ~~~
금산 보석사
 



 

겨울이 무심히 깊어가던 1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금산 보석사를 찾았다. 햇님이 막 출근
하던 7시에 건대입구역(2/7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서울을
벗어났는데, 다람쥐 챗바퀴 같은 일상과 내 인생의 99.9%를 머물렀던 서울을 잠시라도 벗
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것만큼 마음 설레는 것은 없다.

일행의 차를 타고 2시간 정도를 달려 충북 청주(淸州)의 어느 고찰을 첫 답사지로 둘러본
다음 1시간을 더 달려 인삼의 고장인 충남 금산군(錦山郡)으로 들어섰다.
금산에 왔으니 인삼(人蔘)은 구경하고 가야 후회가 없겠지. 하여 금산읍내에 있는 인삼국
제시장에서 조촐히 몸보신도 할 겸 인삼갈비탕으로 점심을 섭취했는데, 인삼이 든 갈비탕
을 먹어서 그럴까? (인삼은 별로 들어있지 않았지만 생각 외로 가격은 저렴했음;) 장거리
이동과 추위, 식곤증으로 적지 않게 지친 몸에 잠시나마 화색이 도는 것 같다. 그 기세로
이번 나들이의 2번째 메뉴로 금산읍내에서 20리 남짓 떨어진 보석사를 찾았다.



 

♠  진악산 보석사(眞樂山 寶石寺) 입문

▲  보석사 일주문(一柱門)

보석사는 20대의 한복판에 첫 인연을 지었다. 그 이후 10여 년 만에 이렇게 2번째 인연을 짓
게 되었는데, 그때도 겨울의 한복판이었고 이번에도 한겨울이다. 즉 겨울에만 이상하게 인연
이 닿아서 보석사의 겨울 풍경만 다시 복습하게 된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맞배지붕을 지닌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예전
에는 현판이 없었는데 그새 '진악산 보석사'라 쓰인 현판이 새로 돋아나 이곳의 정체를 속세
에 알린다.


▲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23호

일주문을 지나면 전나무숲길이 시작되면서 의병승장비를 머금은 1칸짜리 비각(碑閣)이 모습을
비춘다.
이 비석은 1840년 조선 조정에서 임진왜란 시절 토왜(討倭)에 힘쓰다가 전사한 영규대사(靈圭
大師)를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높이는 4m이다. '의병승장'이란 바로 영규대사를 말하는 것으
로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 비문(碑文)을 짓고, 금산군수 조취영(趙冣永)이 글씨를 썼는데,
비석 앞에 큼지막하게 쓰인 '의병승장(義兵僧將)' 4자는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가 썼
다.
비석 왼쪽 옆구리에는 창건화주(創建化主) 낙봉대인(樂峯大仁) 등 비석을 세울 때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 옆구리에는 김병주가 '의병승장' 글씨를 쓴 사실이 기
록되어 있다.

1940년에 어느 개념 없는 왜인 경찰이 애궂은 이 비석에 해코지를 하여 비각을 부시고 '의병
승장' 글씨를 망가뜨려 땅에 묻은 것을 1945년에 정요신(鄭堯臣) 등 지역 사람들이 찾아내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 비석은 다시 일어났으나 그때의 휴유증으로 글씨가 크게 훼손된 상태라
심히 안타까움을 준다.

▲  비각에 담긴 의병승장비

▲  비각 뒷쪽에 자리한 여러 비석들


▲  보석사 전나무숲길 ①

일주문에서 은행나무 전까지 전나무 숲길이 싱그럽게 펼쳐져 있다.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
은 전나무들이 고품격의 그늘과 숲내음을 베풀고 있는데, 그들이 불어주는 내음이 온갖 번뇌
로 정신이 없는 머리와 마음을 차분하게 다듬어준다.


▲  보석사 전나무숲길 ② 은행나무 방향

▲  경내 직전에 옹기종기 모인 부도탑들
고색이 낀 이들은 조선 후기 승탑(僧塔)들로 석종형(石鐘形) 승탑과
지붕돌을 지닌 승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  경내를 가리고 있는 돌담과 범종루(梵鍾樓)

보석사는 바깥에서 경내가 보이지 않게끔 담장을 꽁꽁 둘러 혹시 모를 좋지 않은 기운을 경계
한다. 경내와 바깥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범종루 밑도리를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되는데, 차
량 접근을 위해 뚫어놓은 동쪽 문으로 들어서도 된다.


▲  선원(禪院)으로 쓰이는 보석사 심검당(尋劍堂)

▲  말라버린 동그란 석조(石槽)

진악산이 베푼 물이 날개짓을 하는 극락조(極樂鳥)의 작은 입을 통해 석조를 가득 채우고 있
어야 되거늘 한겨울이라 물이 완전 말라버렸다. 그러다보니 극락조는 실업자 신세가 되어 멍
한 모습으로 석조를 바라본다. 물을 뱉어내지 않으면 저 극락조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석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금산 지역의 명산(名山)으로 추앙을 받는 진악산(732m) 남쪽 자락에 이름도 꽤 있어 보이는
보석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절은 신라 후기인 885년에 조구대사(祖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시절, 절 앞산에
금광이 있었는데, 거기서 금을 캐내 불상을 만들었다고 하며, 그 연유로 보석사란 간판을 달
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9세기 말에 창건되었는지는 의심이 가지만 경내 앞에 1,000년 이상을
헤아리는 늙은 은행나무가 있어 창건시기는 그런데로 맞는 듯 싶다.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6세기 후기에 영규대사가 이곳에 머물며 도를
닦았으며,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조헌(趙憲)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에게 공격을 당한
왜군이 화풀이로 이곳을 불질러버렸다.

이후 17세기에 중건되었으며,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지원으로 중창되어 왕실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1912년에는 전국 31본산(本山)의 하나로 전북 지역 33개 사찰을 관리하기도 했으며, 강원(講
院)까지 갖추어 많은 학승(學僧)을 배출하기도 했다. 허나 20세기 중반 이후, 31본산에서 밀
려나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그늘에 묻히게 되었다. (금산 땅은 원래 전북에 속해 있었으나
1963년에 충남으로 넘어감)
 
아담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의선각, 산신각, 요사, 심검당, 범종루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
으며, 절의 이름 유래가 되었던 금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보석처럼 비싼 돌도
이제 하나도 없지만 금산의 대표적인 늙은 절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장대한 은행나무와 대웅
전, 목조석가여래3존좌상, 의병승장비, 의선각 등의 보석 같은 지방문화재를 지니고 있어 보
석사란 이름이 전혀 아깝지가 않다. 특히 은행나무는 이곳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존재로 추
정 나이는 무려 1,000년 이상, 40m의 큰 키를 자랑한다.

* 보석사 소재지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11 (보석사1길 30, ☎ 041-753-1523)



 

♠  보석사 둘러보기

▲  보석사 대웅전(大雄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43호

보석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식 맞배지붕 집이다. 돌로
높이 다진 석축 위에 아담하게 들어앉아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명성황후의 지원으로 1882년에 재건되었다. 그때 지붕에 넣은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어 그
내용을 담은 안내문이 앞에 마련되어 있다.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존좌상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214호

대웅전은 보석사의 보물 창고 같은 곳이니 내부를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불단에는 탄탄한 금동 피부를 지닌 목조석가여래3존좌상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들을 맞
이하고 있다. 이들은 단정한 인상과 균형 잡힌 신체로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불상으
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성 관련 복장(腹臟)유물이
나 문서 등이 없어 자세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지만 17~18세기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
여래상은 오른쪽 어깨를 살포시 덮은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법의를 입고 있다.
석가여래상 좌우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있는데, 손에 연꽃
가지를 들고 있으며, 문수보살 배 부분과 양 무릎에는 꽃무늬 장식 등이 있다. 그리고 그들
뒤로 비슷한 연배로 여겨지는 후불탱이 고색의 내음을 드러내며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법당 수호를 책임지는 호법신(護法神)들이 빼곡히
담겨진 신중탱(神衆幀)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기허당(騎虛堂)
기허당은 예전 진영각(眞影閣)으로 절을 세운 조구대사와 영규대사(기허대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예전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서산대사(西山大師),
영규대사의 진영이 있었으나 모두 불의의 도난을 당하여 봉안 주체를
조구대사, 영규대사로 변경하고 새로 진영을 마련했다.

▲  영규대사(왼쪽)의 진영과 조구대사의 진영(오른쪽)

영규대사는 그의 진영이 여럿 남아있어서 그의 생전의 모습이라 여겨지지만 조구대사는 기록
도 매우 부실하여 생전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 하여 막연히 미남형으로 그려놓았다. 그래도
절 창건자인데 너무 추남처럼 그리면 좀 그렇겠지.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좋은 대상은 좋게
표현하고, 나쁜 대상은 좋지 않게 그린다. (악귀들은 다 괴물처럼 표현되고, 선하거나 친한
존재들은 모두 미남, 미인으로 표현됨)


▲  보석사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맞배지붕을 지닌 1칸짜리 산신각이 있다.
이름 그대로 산신의 거처로 건물의 높이가 낮아서 현판과 풍경물고기가
머리에 닿을 정도이다.

▲  산신각 산신탱

산신탱에는 하얀 수염의 산신 할배를 중심으로 동자 2명, 호랑이, 소나무, 산, 폭포 등이 담
겨져 있다. 다른 산신탱과 달리 호랑이가 2마리나 있어 다른 산신들보다 장사가 잘되는 모양
이다. 노동법 개정으로 호랑이들 급여도 만만치 않을텐데 말이다.


▲  나와 같은 눈 높이에 있는 산신각 풍경물고기

풍경물고기는 보통 손이 닿지도 않을 높은 위치에 매달려 있어 그야말로 그림의 풍경물고기였
다. 허나 이곳은 높이를 낮추어 바로 내 눈높이에서 딸랑딸랑 풍경 소리를 내고 있어 그를 직
접 만져볼 수도 있고 툭툭 치며 소리를 유발시킬 수도 있다.
풍경(바람방울) 밑에 달린 물고기는 푸른 하늘을 그의 바다로 삼으며 몸을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는데, 그의 눈을 보면 번쩍 떠있다. 이는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처럼 열심히 수행하라는 뜻
이다. 또한 화재를 막고자 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  의선각(毅禪閣)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29호

대웅전 맞은편에는 'ㄱ'자 모습의 의선각이 있다. 이곳은 영규대사가 머물며 수련을 하던 곳
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9세기에 중건했다. 건물에게 씌워진 '의선'은 굳은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는 뜻으로 조선 조정이 영규대사에게 내린 이름이다.
의선각 현판은 창녕위 김병주가 쓴 것이며 현재는 요사 겸 선방으로 쓰이고 있는데,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의연한 모습을 지닌 의선각 현판의 위엄

▲  경내에서 바라본 보석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365호

▲  앞에서 바라본 보석사의 자연산 보석, 은행나무

보석사에 왔다면 대웅전 내부와 더불어 꼭 살펴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이곳의 자연산
보석인 은행나무이다.
경내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이 큰 나무는 추정 나이가 무려 1,000년 이상을 헤아린다.
높이 40m(어떤 자료에는 34m), 나무둘레 10.72m(11m)로 이 땅의 은행나무 중 가장 지존으로
꼽히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은행나무(☞ 관련글 보기) 다음 수준으로 덩치가 크다.

보석사를 세운 조구대사가 제자 5명과 함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뜻에서 둥글게 6
그루를 심었다고 하며 그들이 강인한 협동심으로 점차 하나로 합쳐졌다고 전한다. 나무의 나
이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구대사의 창건시기와 그런데로 맞아떨어져 절의 신라 말기 창건설을
그런데로 뒷받침해준다.

나무가 너무 늙다 보니 위로 뻗은 가지가 땅으로 내려왔고, 다시 거기서 가지가 자라나 하늘
로 오르고 있다. 뿌리는 100여 평의 땅속에 단단히 퍼져 있으며, 뿌리에서 2~3m 높이에 싹이
수없이 돋아나 있어 그의 뜨겁고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천하를 그의 그늘로 모두 덮
어버릴 정도로 장대한 수형(樹形)을 자랑해 보석사 경내가 거의 그늘에 묻혀있다고 해도 과언
은 아니다.
너무 오래 살아서일까? 세상에 뭐그리도 걱정이 많은지 마을에 변고가 있거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미리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심지어는 24시간을 운다고도 하는데, 1945년 광복
과 6.25전쟁 때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하여 마을을 지키는 신성한 존재로 오랫동안 애지
중지되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 15일(경칩)에 보석사 승려와 석동리 마을 주민들이 은행나무
에 대신제를 지낸다.


▲  은행나무 그늘에 세워진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표석
표석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은행나무 앞에서는 일개 작은 자갈일 뿐이다.

▲  기린암(麒麟巖)

은행나무 옆에는 푸른 이끼 옷은 입은 기린암이란 바위가 있다. 여기서 기린(麒麟)은 목이 긴
상상 속의 상서로운 동물로 이곳 은행나무를 기린으로 표현한 듯 싶다. 또렷하게 새겨진 기린
암 바위글씨 밑에는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이름 3자가 빼곡히 적혀있다.


▲  보석사 옆구리를 지나는 계곡 (보석사계곡)
지금은 겨울 제국(帝國)의 눈치를 보며 바짝 엎드려 있지만 소쩍새가 우는
그때가 되면 겨울이 씌워놓은 것들을 모두 박차며 일어설 것이다.

▲  보석사를 뒤로하며 (전나무숲길)

은행나무를 끝으로 오래간만에 찾은 보석사 복습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예전에는 계곡을
따라 진악산을 아주 조금 올라가긴 했으나 남쪽 길이 한참이라 절만 살펴봤다. 다음에 만약
인연이 된다면 늦가을에 찾아와 황금색 은행잎을 휘날리는 은행나무를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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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1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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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늦가을 나들이 <정동 회화나무,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배재학당 동관>

서울 정동~덕수궁돌담길 산책



'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나들이 '

▲  덕수궁 돌담길 (서울특별시청 서소문청사 앞길)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정동(貞洞)이란 고즈넉한 동
네가 뉘어져 있다.
정동은 서울 도심의 주요 명소이자 서울 근대문화유산의 대표 성지(聖地)로 덕수궁 돌담
길과 정동길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데, 꽤 번잡한 서울 도심의 한복판이지만 나무를 머
금은 공간이 많아서 오히려 아늑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게다가 조선부터 현대까지 600년
이상의 장대한 시간이 녹아든 현장으로 역사, 문화의 향기도 정말 그윽하다. 바로 그 매
력 때문에 오랫동안 천하 사람들의 나들이, 답사 명소로 격한 사랑을 받아왔으며, 나 또
한 이곳에 퐁당퐁당 빠져 종종 발걸음을 하고 있다.



 

♠  정동 회화나무,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유관순 우물

▲  정동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3호

늦가을이 익어가던 11월의 첫 무렵, 오랫만에 정동을 찾았다. 이번에는 정동4거리(5호선 서대
문역과 서울역사박물관 중간)에서 정동길로 접근했는데, 그 길을 3~4분 정도 들어가면 야무지
게 자라난 회화나무 1그루가 마중을 나온다. 그가 정동의 오랜 터줏대감인 정동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는 정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570년 정도 묵었다. (1976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
정 나이가 520년) 서울 도심부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나무로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대자연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17m, 둘레 5.16m의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
했는데, 그 기세는 정동길을 뒤덮을 정도이다. 하지만 고된 세월에 지쳤을까? 아니면 하늘이
두려운 것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다소 구부러진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나무가 워낙 나이가 많고 수시로 오가는 차량들이 내뱉은 고약한 기운에 매일 시달리면서 한
때 수세가 많이 기울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3년 캐나다가 대사관(大使館) 건물을 신축했는
데, 그 대사관이 자칫 나무를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었으나 캐나다 양이(洋夷)들이 기특하게도
나무를 배려하여 건축 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깨어있는 모
습을 보여주면서 나무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  정동 회화나무와 캐나다대사관(왼쪽 건물)
정동의 이름 유래가 된 정릉(貞陵)부터 많은 것들이 창밖에 이슬처럼 정동을
스쳐갔지만 오직 회화나무만이 그 장대한 세월을 극복하며
정동을 지켰다.

▲  정동 회화나무 주변 정동길
회화나무의 그늘 맛을 먹고 자란 정동길, 정동길의 늦가을 풍경은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기로 명성이 높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 국가 등록문화재 3호


정동 회화나무를 지나면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두룬 이화여고가 모습을 비춘다. 정문 옆에는 붉
은 피부를 지닌 늙은 3층 건물이 눈길을 끄는데 그것이 이화학당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심
슨기념관이다.

심슨기념관은 191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3층, 건평 129.5평의 벽돌 건축물로 언더우드
가 세웠던 '예수교학당' 자리이다. 이화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근대 건축물로 조선에 머
물던 미국 사람 심슨(Sarah J. Simpson)이 사망하자 그가 남긴 재산으로 지었는데, 그를 기리
고자 그의 이름을 따서 심슨기념관(씸손기념관)이라 했다.
건물 동쪽에는 '씸손기념관'이라 쓰인 동판이 있으며 1961년과 2006년에 보수했다. 이후 내부
를 손질해 이화학당백주년 기념관으로 삼았다가 이화학당(이화여중고)의 역사를 집대성한 '이
화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화~토요일 10~17시, 월요일과 휴일은 휴관)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 5월,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 여사(Mrs. Marry F. Scranton)가 세
운 이 땅 최초의 여자학교이다. 그는 조선에 여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
교사와 현 이화여고 본관 뒷편 언덕에 올라 적당한 자리를 살피다가 그해 10월 배밭 6,120평
을 구입했다. <현재 정동 32번지 일대>
그 안에 있던 집을 모두 부시고 새로운 한옥을 착공하려고 하니 마침 선교부로부터 예산 지원
이 어렵다는 통보가 날라왔다. 하여 미국 각지에 원조를 요청하여 겨우 3,700달러의 기부금을
모아 건물을 완성했다. 처음 학교 건물은 'ㄷ'자 모양의 195.5칸에 큰 한옥으로 7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당시 서울 사람들은 그 건물을 양국관(洋國館)이라 불렀다.

그 시절 조선은 여자들 교육에는 매우 인색했다. 그래서 스크랜톤은 조선의 그런 현실을 생각
해 6명을 생각했으나 겨우 1명이 지원하는데 그쳤다. 그 1명으로 교육을 시작하면서 이화학당
의 서막은 열리게 된다.
초창기 학당에 들어온 여학생들은 이름이 없어 영어로 편의상 '1st', '2nd', '3rd' 등으로 불
렀는데, 학생이 점차 증가하면서 서수(序數)로는 적당치가 않아 '수산나','델리아' 등의 세례
명을 붙여주었다.

▲  이화여고 뜨락에 세워진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표석

▲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톤 여사의
흉상


1887년 고종은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에서 '이화학당'이
란 이름을 내렸다. '이화'란 이름은 부근에 있던 이화정(梨花亭)이란 정자에서 따왔다는 설과
이곳이 원래 배밭이었으므로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1897년 학생수가 40명을 넘자 페인(J.O Paine) 학당장(學堂長)은 기존 한옥을 부시고 2층짜리
양관인 메인홀(Main Hall)을 지어 1900년 11월 완성을 보았다. 메인홀은 'T'자형으로 900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었다.
바로 이웃에 자리한 배재학당의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메인홀을 두고 '서울 장안에서 가장 전
망이 좋은 집'이라며 찬양을 했는데, 그 건물은 6.25시절에 파괴되어 사라졌다. 하여 1970년
그 뒤쪽에 이화여고 본관을 세웠으며, 메인홀터에는 '한국 여성 신문화의 발상지'란 표석과
스크랜톤 부인의 흉상을 세웠다.

1899년 5월 학당에서 여학생을 이끌고 창의문(彰義門) 밖 세검정(洗劍亭)으로 소풍을 갔었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생 소풍이라고 한다. 그 당시 그들의 소풍은 500년에 처음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


▲  굳게 닫힌 유관순우물

이화학당하면 유관순(柳寬順) 누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했
는데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고등과 학생 5명과 몰래 기숙사 뒷담을 넘어 만세운동에 참
여했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고향인 천안 병
천으로 내려가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관했으나 왜경에 체포되어 1920년 서대문형
무소에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獄舍)하고 만다.

심슨기념관 뒤쪽에는 굳게 입을 닫은 동그란 조선 후기 우물이 있다. 학교에서는 그 우물을 '
유관순우물'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는데, 원래는 정동 사람들이 쓰던 우물이었으나 이화학당
이 들어서면서 학당 소유가 되었다. 댕기머리 여학생들이 여기서 물을 길어 식수용으로 쓰거
나 빨래를 했으며, 유관순 누님 역시 이곳에서 빨래를 했을 것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상
징적인 인물이라 그의 이름을 따서 '유관순우물'이라 했다.

지금은 죽은 우물로 뚜껑이 닫혀져 있어 물이 콸콸 치솟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유관순우물과 은행나무
한참 녹음(綠陰)에 젖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우관순우물에 그늘을 드리우며 수채화처럼 고
운 풍경을 자아낸다. 나무의 나이는 약 100년
정도로 여겨진다.


▲  늦가을에 의해 노란 머리가 되버린 이화학당 사주문(四住門)과
하마비(下馬碑)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며 지나다녔을 기와집 사주문, 지금은 문 옆에 넓은 교문이 닦
여져 있어 후문으로 물러나 있다.
사주문은 이화학당의 옛 정문으로 1923년에 전통 한옥의 사주문 형태로 지어졌다. 지금의 자
리로 이전되면서 왜식(倭式)으로 변형된 것을 1954년에 졸업생들의 흔쾌한 후원금으로 팔작지
붕 기와문으로 교체했다. 그러다가 1999년 8월 원래의 대들보와 상도리, 망와 등 일부를 사용
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문 좌우로 기와를 머리에 인 돌담이 정겹게 펼쳐져 있고 문 옆에는 조그만 비석이 세워져 있
는데, 그 비석은 아무나 세울 수 없었던 콧대 높은 하마비이다.

하마비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란 뜻이다. 조선시대 국립중등교육 기관인 향교(鄕校) 앞에 하마비가 있는
것은 보았어도 신식 학교에 그것이 있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아마도 제왕이 친히 이름을 내리
며 관심을 보인 여학교라 학교 주변 단속도 할 겸, 비석을 내린 모양이다. 이화학당은 제왕이
이름도 내려주고 하마비까지 달아준 정말로 특별한 여학교였던 것이다.

* 심슨기념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2-1 (정동길 26, ☎ 02-2175-1964)
* 이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이화학당 교문 안쪽에 누워있는 손탁호텔터 표석

이화학당 부근에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호텔(Sontag Hotel)이 있었다. 이 호텔은
러시아 사람인 손탁(孫澤, Miss Sontag)이 세웠는데, 그가 32살이던 1885년 동생의 남편인 초
대 러시아공사 베베르(Waeber. K)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1895년 친러파를 중심으로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가 결성되었는데, 그들은 손탁 집에 모여서
고종을 경복궁(景福宮)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데려오는 계획을 논의했다. 손탁과 베베르는 그
들을 적극적으로 도와 고종의 아관파천을 이끌어냈고, 그 공으로 손탁은 고종으로부터 왕실의
부속건물인 기포드(D.L. Gifford) 선교사의 한옥을 하사 받게 된다.
손탁은 자신이 쓰던 건물을 클럽으로 개조하여 외교관들의 사교장으로 만들었으며 정동구락부
의 호스티스(여주인)가 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에는 외국인을 위한 호텔이 없는지라 조정에서 1902년 2층 규모의 양관을 만들어
고종의 이쁨을 얻은 손탁에게 경영권을 주었다. 그 양관이 바로 손탁호텔<손탁빈관(孫澤賓館)
>로 내부를 서양풍으로 꾸몄다.
조선 정치가와 사업가, 서양 애들, 청나라 애들, 왜국 애들 등 다양한 사람이 이용했으며, 그
들의 숙식 및 모임 장소로 크게 호황을 누렸다. 러일전쟁 때는 영국 수상으로 유명한 처칠이
하룻밤을 묵었고, 1905년 11월에는 이토히로부미가 머물며 을사조약 체결을 위한 행동을 전개
하기도 했다.

손탁호텔은 2층은 국빈용 객실로 쓰였고, 1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과 주방, 식당, 커피샵을 갖
추고 있었는데, 특히 커피샵과 서양요리 식당은 이 땅 최초로 의미가 깊으며 외교관들을 모아
놓고 서양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여 이 땅에 처음으로 서양 영화를 소개한 현장으로 보는 견해
도 있다.

손탁은 러시아말과 조선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에도 능통해 고종 황제의 통역관으로 활동하
기도 했으며, 조선에서 24년을 머물다가 1909년 조선에서 번 막대한 재산을 싸들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의 나라인 러시아가 망했기 때문이다.
왜인 기구찌가 쓴 '한말에 등장한 여성'에서 손탁이 조선에 왔을 때는 선망 받는 30세의 꽃같
은 미모였는데, 떠날 때는 아름답던 얼굴이 파란과 비통으로 시들어 볼품이 없다고 적었다.

러시아로 돌아간 손탁은 별장을 지어 재산을 관리하려고 했는데, 동생의 권유로 재산 대부분
을 러시아은행에 예금하고 나머지는 러시아 기업에 투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
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고, 소련공산정권은 손탁의 돈을 모두 몰수해버렸다. 하여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은 손탁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을 뼈저리게 느끼며, 1925년 71세의 나이로 혼인
도 하지 못한 노처녀 상태로 사망하고 말았다.

손탁이 떠난 이후 손탁호텔은 미국인이 관리하다가 그 자리에 감리교학교가 들어섰으며, 1917
년 이화학당이 미국감리교회에서 모금한 23,060달러로 손탁호텔을 인수해 기숙사로 사용했다.
허나 1922년 호텔을 철거하여 그 자리에 프라이홀(Frey Hall)을 세움으로써 손탁호텔의 역사
는 끊기고 만다.



 

♠  구 러시아공사관터, 정동교회

▲  구 러시아공사관 - 사적 253호
(정동공원에서 바라본 3층 전망탑)


이화학당 교문 맞은편 길로 조금 들어서면 그 길의 끝 언덕 위에 하얀 피부의 날씬한 건물이
자리해 있다. 그가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우울한 현장, 러시아공사관터 3층 전망탑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두만강을 사이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일찍이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프랑스를 이용해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방법으로 러시아를 막아
볼 생각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1884년 러시아와 수교를 맺었는데, 그때 조선
측 대표는 김병시(金炳始), 러시아측 대표는 베베르(K. Waeber)였다.

조선은 1888년 덕수궁(경운궁)의 후원인 상림원(上林園) 일대를 공사관 자리로 제공했다. 러
시아는 그곳을 밀어버리고 공사관과 정교회<正敎會, 동방교회(東方敎會), 1900년에 지어짐>를
세워 서울 속에 조그만 러시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공사관은 1888년 공사에 들어가 1890년 8월 완성을 보았는데, 스위스계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
(Sabatine)이 설계했다. 르네상스식 벽돌조 건물로 공사관 본관은 'H'자형 평면으로 지어졌는
데, 남/동/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3면 모두 정면성을 지니고 있었고 각
각 면에 출입문을 내었으며, 북쪽 끝 모서리에 3층 전망탑을 두었다. 그리고 공사관 초입에 4
면이 아치로 된 개선문 형태의 정문을 두었다.

러시아공사관은 간단히 줄여 아관(俄館)이라고 하는데, 러시아를 가차자(假借字) 표현으로 아
라사(俄羅斯)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전망탑(탑)을 비롯해 공사관에 딸린 건물이 여럿 있었으나 왜정(倭政) 때 상당수 파괴되었으
며, 6.25 때 탑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이 모두 박살이 났다. 탑 역시 그때 무거운 상처를 입어
기우뚱거린 것을 1973년에 복원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의 면적은 65.2평으로 1981년 탑 동북쪽에서 지하실과 20.3m의 비밀통로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과 이웃한 미국공사관으로 속히 줄행랑을 치
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덕수궁이 황궁이 된 1897년 이후, 그 주변에 흩어진 여러 나
라 공사관과 영사관을 잇는 작은 통로를 닦아놓아 유사시에 대비했다. 그 통로는 1945년 무렵
까지 대부분 남아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모두 끊어진 상태이다.


▲  뒤쪽(북쪽)에서 바라본 러시아공사관 전망탑

우리가 보잘것없는 이 하얀 탑에 주목을 해야 되는 이유는 바로 1896년에 일어났던 아관파천
의 우울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1895년 왜가 저지른 을미사변(乙未事變) 사건으로 고종은 왜를 극히 불신하며 경복궁에서 불
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친러파였던 이범진(李範晉)과 이완용(李完用), 이윤용(
李允用) 등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신임공사 스페이어, 손탁과 함께 고종의 파천계획을 모의
하게 된다.
그들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귀비(嚴貴妃)를 통해 왕에게 접근, 친일패거리들이 왕의 폐위를
꾸미고 있으니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고종이 흔쾌히 승낙
하며 베베르와 스페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베르는 1896년 2월 공사관 수비를 이유로 인천에 머물던 러시아군함에서 포 1문과 군사 120
명을 소환하여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 준비가 끝나자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왕태자(
순종)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살짝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불이 나게
도망쳤다. 이 사건을 바로 4글자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그렇게 러시아공사관에 샛방을 튼 고종은 왜와 친했던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을 단죄했다.
그래서 김홍집, 어윤중(魚允中)을 처단하고, 김윤식(金允植)을 제주도로 귀양보내니 이에 염
통이 쫄깃해진 유길준(兪吉濬) 등 10여 명의 고위관리들은 왜열도로 줄행랑을 쳤다.
친일내각을 도려내자 친러패거리인 이범진, 박정양(朴定陽),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된 친러내각
이 들어섰다. 그들은 친일파를 역적으로 간주, 단발령(斷髮令)을 보류하고 갑오개혁과 을미개
혁(乙未改革)을 폐지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을 머물렀는데, 가까운 서대문(西大門)은 임시로 폐
쇄되었고, 정동 일대는 백성들의 통행을 일절 금했다.

▲  옆(서쪽)에서 바라본 전망탑

▲  러시아공사관터 북쪽 부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얹혀사는 동안 어전회의는 무도실에서 했으며, 대신들은 공사관 대회
의실에서 병풍으로 칸막이를 삼아 일을 보았는데 부서별로 회의를 할 때마다 병풍을 이리저리
옮겼다.
고종은 2층 만찬실을 거처로 삼았는데, 만찬실 벽에는 꽃무늬 융단이 걸려있고 천정 가운데에
7가지 촛불로 이루어진 샹들리에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동쪽 벽에는 소파 모양의 용상(龍
床)이 있었고 그 앞에는 호피(虎皮) 1장이 깔려 있었으며, 거실 서쪽 벽에는 왕의 침대가 있
고, 남쪽 벽에는 소파 세트가 있었다.
만찬실 주변 측실(側室)에는 상궁(尙宮)과 궁녀가 거처하여 왕의 시중을 들었는데, 궁녀들은
방이 따로 없어 공사관 복도에서 칸을 설치하여 지냈다.

만찬실 창 밖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대포 1문이 장착되어 있었고, 정문에서 현
관에 이르는 길에는 러시아군 100명이 수비했다. 그리고 정문 밖에는 칼을 찬 조선군이 길목
을 지켰다.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는 고종이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했으며, 명성황후의 제단까
지 마련해주는 등 왕의 가려운 부분을 알아서 긁어주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에 더욱 친밀을
보이면서 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퍼주게 되며, 그로 인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커지
게 된다.


▲  러시아공사관터 동쪽 부분
주름진 공사관터 동쪽 끝에 지하 비밀통로가 있다. 이 통로는 미국공사관
(현 미국대사관저)과 이어져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형편없이 깨지자 승리한 왜는 러시아공사관을 접수하여 러시아
공사(公使)와 러시아군 80명, 공사 직원을 죄다 러시아로 추방했으며, 인근 프랑스공사관에서
잠시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왜와 러시아가 국교를 다시 맺으면서 러시아영사관으로 쓰였으며, 1945년 이후 소련
영사관이 되었다. 허나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니콜라이 영사가 북한으로 추방되면
서 다시 빈집이 되고 만다.
이후 6.25전쟁으로 전망탑을 빼고 싹 파괴되었고, 1973년 전망탑을 복원하면서 암울했던 근대
사를 나무로 덮으려는 듯, 수양버들 등의 나무를 잔뜩 심어 정동공원을 조성했다. 이후 2009
년 독특한 모습의 하얀 피부의 정자를 공원 한복판에 닦아 지금에 이른다. (정동야행 축제 때
는 음악회 장소로 많이 쓰임)

러시아와 재수교 이후 그것들은 이곳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요구는 보기 좋
게 묵살되었다. 전망탑에서 남쪽으로 1리 남짓 떨어진 정동교회 뒤쪽에 러시아대사관이 이미
자리해 있어 그 땅을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80년 가까이 홀로 제자리를 지키고 선 하얀 피부의 3층 전망탑, 근대사의 거센 소용돌이의 현
장으로 지금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만 바로 동쪽 옆으로 높이 담장을 두룬 미국대사관
(대사관저)이 들어앉아 있고 그곳을 지키고자 전/의경들이 항시 주둔해 있어 마치 1896년 그
현장이 재현이라도 된 듯, 그리 유쾌하지가 못하다.

* 구 러시아공사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5-3


▲  정동교회(貞洞敎會) - 사적 256호

이화학당 교문에서 덕수궁 방면으로 3분 정도 가면 고색이 창연한 붉은 피부의 교회가 마중을
한다. 그가 이 땅에서 가장 늙은 교회인 정동교회(정동제일교회)이다.

정동교회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1898년에 세운 것
으로 1887년 10월 지금의 한국은행본점 부근에 마련된 배재학당 학생들의 성경 공부방에서 비
롯되었다.
이후 교인 수가 200명이 넘어서자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을 추진하게 되었
는데, (그 시절에는 남녀가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봤음) 아펜젤러는 500명 규모의 큰
서양식 예배당을 제안, 이를 실현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모금을 했다. 또한 교인들도 자체적
으로 돈을 걷어 8,000달러의 거금을 마련했다.

새 교회는 선교사 스크랜튼의 시약소(施藥所) 병원 자리의 한옥을 헐고 1895년 9월 9일 정초
식(定礎式)을 했는데, 이때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이 축사를 했다. 교회 설계는 왜인 요시
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했으며, 심의섭(沈宜燮)이 시공을 했다. 1896년 12월에 지붕을
올리고 1897년 12월 26일 교회 봉헌식을 가졌으나 최종 완공은 1898년 12월 26일에 이루어졌
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이 교회는 정동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서울 장안의 명물로 구경꾼
들로 가득했으며, 이 땅 최초의 교회란 뜻에서 'high church'라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독립협회운동과 인권운동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서재
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이승만(李承晩) 등 이름만 들어도 귀에 부쩍 익은 사람들이 이
곳의 교인으로 활동하며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을 풀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정동교회

▲  정동교회의 뒷모습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동교회를 경운궁에 집어넣고자 매입대금 34,000원 가운데 계약금 1
만원을 지불했다. 허나 나머지를 내놓지 않자 이에 뿔이 난 미국공사 알렌이 1901년 5월 나머
지 금액을 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편입 작업이 무산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115평 규모의 십자형(十字形) 건물이었으나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하지 못해 1926년
에 양쪽 날개 부분을 확장하여 삼랑식(三廊式)으로 개축하면서 175평으로 넓어졌으며, 건물의
모양도 직사각형을 이루게 되었다. 1918년에는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使)가 미국에서 구입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6.25 때 교회 건물 절반이 박살이 났으며, 파이프오르간도 이때 파괴되었다. 서울 수복 이후
바로 '예배당중수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950년 11월 23일에 복원했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
벽돌이 풍화되고 문짝이 망가지면서 교회를 새로 지어야 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오면서 철거
위기에 놓이게 된다. 허나 교단의 내분으로 차일피일 시일만 보내다가 197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뜨락에 세워진 감리교회 조선 선교(宣敎) 50주년 기념비

정동교회는 다갈색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곳곳에 아치형 창문을 두어 고딕 양식의 단순화된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돌을 다듬어서 반듯하게 쌓은 기단에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
의 솜씨가 다소 배여있다.
마치 서구의 어느 늙은 교회로 뚝 떨어진 듯한 분위기로 하루가 멀다 하고 솟아나는 으리으리
한 교회나 성당과 달리 소박한 모습에 아늑하고 정겨운 느낌이며, 비록 나와는 전혀 맞지 않
은 종교의 중심 현장이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저 안에 들어가 잠시 묵상에 잠겨보고 싶은
곳이다. 평일 낮과 토요일, 휴일에는 내부 관람이 가능하며,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가 열
린다.

* 정동제일교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3 (정동길 46, ☎ 02-753-0001)



 

  배재학당 동관(培材學堂 東館) - 서울 지방기념물 16호

▲  정면에서 바라본 배재학당 동관

정동교회에서 서소문 쪽으로 넘어가면 고개 정상부(서울시립미술관 서쪽)에 붉은 피부로 이루
어진 옛 배재학당 동관이 마중을 한다.
이 건물은 1916년에 지어진 것으로 100년의 적지 않은 나이를 지녔음에도 키다리 빌딩 속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 옆에는 배재학원 소속의 배재정동빌딩이 높이 솟아있음)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발상지이자 이 땅 최초로 벽돌로 지어진 학교 건물로 배재중
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대전)의 전신이다. 1885년 7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서울에 들어와 스크랜턴의 집을 사들여 1885년 8월, 학생 2명을 모아 가르치면서 배재학당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고종은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으로 '배재학당'
이란 이름을 하사했으며 그해 본관(1887년)이 지어졌다.

아펜젤러는 학당의 설립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
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그는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이라 쓴 학당훈(訓)을 내걸며 일반적인 교육 외
에 연설회, 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교육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
된 인쇄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인쇄시설이다.

학생수가 계속 늘자 1916년 동관을 지었고, 1923년에 서관을, 1933년 대강당을 차례대로 지어
올려 제법 면모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들 건물은 조선인 건축가 심의석이 지었다.
1984년 한참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던 강동구 고덕동(高德洞)으로 중고등학교 모두를 옮겼으며
동관만 제자리에 두어 옛 자리를 추억하는 용도로 삼았다. 서관은 고덕동으로 가져왔으나 대
강당과 본관 등은 모두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배재공원을 닦았다.


▲  배재학당 동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의 뒷모습

동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교실로 주로 이용되었다. 정면 현관과 양 측면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남아있고, 외장 및 치장 쌓기 벽돌구조도 뛰어나며 건물의 형태도 휼륭해
이 땅의 근대건축의 주요 지표로 삼을 정도이다.

학교가 강 건너로 가버린 이후, 빈 채로 두었다가 내부를 손질하여 2008년 7월 24일 배재학당
의 역사를 집대성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삼았다. 지하 1층에 사무실을 겸한 학예연구실
을 두었고, 1층에는 체험교실과 상설전시실1, 특별전시실을, 2층에는 상설전시실2, 기획전시
실을, 그리고 3층에는 세미나실과 회의실을 두었다. 이중 1,2층만 관람이 가능하며 1930년대
배재학당 교실을 재현하여 배재학당의 140년 역사를 유감없이 뿜어내고 있다.

배재정동빌딩 주변에는 1896년에 세워진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옛터를 알리는 표석과 신
교육(新敎育) 발상지를 강조하는 표석이 있으며 배재 학생들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졸업사진의
단골 촬영지로도 활약했던 늙은 향나무가 옛 교정을 지킨다.


▲  오랜 세월 배재학당을 지켜왔던 향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호

배재학당 향나무는 약 580년 숙성된 나무로 앞서 정동 회화나무보다 10년 정도 늙었다. <1972
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525년> 높이는 16.5m로 동관과 키가 비슷하며
둘레는 2.25m로 높이에 비해 날씬하다.
왜정 때 활약했던 시인 김소월(金素月)이 좋아했던 나무라고 전하는데, 미국 하버드대 매캔교
수가 1960년대 평화봉사단원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우연히 접한 소월의 주옥 같은 시에 완전
히 퐁당퐁당 빠져들었다. 하여 그의 시를 통해 한국 문학을 공부했으며 소월과 인연이 깊다는
이 향나무의 사연을 전해 듣고 그가 죽지 않도록 보살폈다.

또한 믿거나 말거나 전설도 한 토막 전해오고 있는데, 나무 상부에 박힌 못은 임진왜란 시절
에 서울을 점령한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말을 묶고자 박았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가 훤칠
하지만 그때(1592년)는 기껏해야 140살 정도의 키도 작았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겠다. 허나
이 역시 부질없는 전설일 뿐이다. (고약한 왜정이 배재학당의 기운을 누르고자 향나무에 그런
말도 안되는 전설을 붙인 것으로 여겨짐)


▲  옛 배재학당의 본관 벽돌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1887년 배재학당 본관을 지을 때 투입된 붉은 벽돌이다. 본관을 밀어버리면서
벽돌 일부를 남겨 이렇게 박물관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마침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의 빗장이 활짝 열려 있어 안으로 흔쾌히 들어가보았다. 금지된 구
역을 제외한 개방된 구역을 모두 기웃거려 보았는데, 촬영금지를 알리는 딱딱한 문구가 도처
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어 새가슴 마냥 극히 일부만 사진에 담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담고
싶지만 지나친 욕심은 늘 탈이 생기는 법이다. 그러니 가끔씩 새가슴이 되는 것도 괜찮다.


▲  고종이 1887년에 내린 배재학당 현판의 위엄
명필로 유명했던 정학교(丁學敎)가 고종의 어명을 받아 쓴 것으로 김윤식(金允植)이
학교에 전달했다. 아펜젤러는 이를 매우 감사하게 여기며
자랑스럽게 학교 간판으로 삼았다.

▲  1963년 광복절에 박정희 정권이 이 땅의 근대교육에 크게 기여한
아펜젤러에게 내린 문화훈장증(文化勳章證)

▲  1963년 광복절에 박정희 정권이 아펜젤러에게 내린
문화훈장 국민장 훈장증과 훈장

▲  배재학당 옛터의 싱그러운 변신, 배재공원

배재학당 동관과 러시아대사관 사이에는 배재공원이 달달하게 자리해 있다. 이곳은 옛 배재학
당 자리로 학교가 강동으로 이전되자 본관 등을 밀어버리고 동관 북쪽에 아담하게 공원을 닦
아 옛 정동 시절을 아련히 추억하고 있다.
공원의 동서 폭은 100m 정도로 조촐한 규모이나 회색빛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로 주변 직
장인들이 많이 의지하러 오며, 늦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정동은 도심 한복판에 박혀있지만 배재공원, 정동공원 등의 공원이 있고 덕수궁(경운궁)과 미
국대사관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게다가 정동 회화나무, 배재학당 향나무 등 500년 이상 묵
은 나무를 중심으로 가로수도 많이 심어져 있어 비록 높은 빌딩이 주변에 즐비해 도심 분위기
는 어쩔 수 없지만 번잡한 분위기는 그리 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한제국 시절과 현대, 그리고
자연이 적절히 섞인 조그만 도시나 별천지라고나 할까? 그것이 정동의 강한 매력이다.

* 배재학당 동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5 (서소문로11길 19, ☎ 02-319-5578)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배재공원

▲  늦가을 누님이 살짝 다녀간 서울시립미술관 진입로

정동교회 앞 분수대 교차로에서 박석이 입혀진 숲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옛 대법원(大法院
) 건물에 둥지를 튼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한참 때는 특별전 초청권이나 공짜표를 어디선가
구하여 여인네들과 자주 찾곤 하였는데 이제는 언제 시립미술관을 스쳤는지 기억 조차 희미하
다.

이렇게 하여 정동 늦가을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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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1바퀴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 흔들바위>

서울 안산 (안산자락길, 무악동봉수대)



' 서울 도심의 서쪽 뒷동산, 안산 '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안산 남쪽 자락

▲  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안산 남쪽 자락

안산 잣나무숲길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길

▲  안산 잣나무숲길

▲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길

 



 

봄을 몰아낸 여름 제국(帝國)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6월의 끝 무렵, 서울 도심의 서
쪽 뒷동산인 안산(鞍山)을 찾았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 깃든 봉원사(奉元寺, ☞ 관련글 보기)에서 길을 시작하여 15분 정도
숲길을 오르니 무악정이란 2층 정자가 마중을 나온다. 무악정은 근래에 지어진 8각형 정
자로 여기서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내려가면 홍제1동과 연희동(延禧洞)
으로 이어지며, 동쪽 길을 10여 분 오르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이다. 그럼 여기
서 잠시 안산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녹음에 잠긴 안산 숲길 (봉원사에서 무악정으로 오르는 길)



 

♠  안산의 지붕, 무악산 동봉수대(毋岳山 東烽燧臺)

▲  정상 입구에 자리한 무악정(毋岳亭)

서울 도심 서쪽에 누워있는 안산은 해발 295.9m의 조촐한 산이다. 대륙을 향해 뻗어가는 의주
로(義州路)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338m)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홍제천(弘濟川)을 사이에 두고 백련산(白蓮山)과 이어진다.
산의 영역은 남쪽으로 천연동(天然洞)과 북아현동(北阿峴洞), 북쪽은 홍제동과 연희동, 동쪽
은 의주로, 서쪽은 서대문구청 뒷쪽과 연세대에 이르며, 남북으로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3km
내외이다.

안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습이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싣고자 걸치는 길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된 것으로 길마재라고도 부른다. <안(鞍)은 안장을 뜻함> 모래내, 추모련, 무악산이란 이
름도 지니고 있으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서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안산에 대한
속세의 관심이 지대했다는 뜻이다.
서울의 남주작(南朱雀)인 남산(南山, 목멱산)보다는 조금 높으나 인왕산과 서울의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보다는 조금 낮으며, 이들 산과 비슷하게 덩치도 고만고만해
아무리 산행을 길게 잡아도 2시간 내외면 충분하다. 또한 바위와 벼랑이 많은 동쪽 정상부를
제외하면 산세가 완만하고 산길이 잘 닦여져 있어 누구든 부담 없이 안길 수 있으며, 조망도
일품이고 수맥도 풍부하여 20여 개의 약수터가 나그네의 목마름을 어루만진다.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인왕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서북쪽으로 둘러싼 형태로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주요 요충지이다. 하여 산을 둘러싼 다툼도 여럿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1623년에 일어났던 이괄(李适)의 난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의 주역이던 이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
으켜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
祖)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충청도 공주(公州)로 급하게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인조의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쳤는데,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
췄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사람들이 대체로 하얀 옷을 즐겨입다
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면서 도성을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까지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이때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후금(後金)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청태종(淸太
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래서 그 푸닥거리로 일
어난 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청나라군이 안산과 무악재의 눈치를 보며 서울로 진격
했고, 1950년 9월에는 인천(仁川)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고자 북한군과 격전
을 벌였다.

안산의 품으로 들어서려면 서대문구청이나 홍제천 인공폭포(연희숲속쉼터). 봉원사, 천연동,
독립문파크빌, 무악재역, 홍제1동, 한성과학고 등지에서 접근하면 된다. 또한 서대문구청에서
안산자락길이라 불리는 둘레길(7km)을 야심차게 닦아놓았는데,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
행길 10선'에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격하게 칭송을 받고 있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 지역의 주요 고찰(古刹)이자 영산재(靈山齋)의 성지(聖地)인 봉원
사가 있고, 산 동쪽 정상에는 무악산 동봉수대가 있으며, 연희숲속쉼터와 안산자락길, 메타세
콰이어숲길, 잣나무숲길 등의 명소가 준비되어 있어 지루할 틈이 거의 없다.


▲  안산 동쪽 정상 밑에 자리한 헬기장
(서쪽 정상과 동쪽 정상 사이)

▲  안산 동쪽 정상에 씌워진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지방기념물 13호

하늘과 맞닿은 안산의 지붕에는 2개의 봉우리가 봉긋 솟아있다. 이중 서쪽 봉우리가 안산 정
상으로 안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그곳에는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이 100% 통제되어 있다. 하
여 자유로운 공간인 동쪽 봉우리(동쪽 정상)가 실질적인 정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 서쪽 봉우
리보다 약간 낮을 뿐, 높이는 거의 비슷하며 바로 그 봉우리에 무악산 동봉수대(문화재청 지
정 명칭은 '무악산 동봉수대터')가 천하를 굽어보며 요새처럼 자리해 있다.

봉수대는 불을 피워 연기와 불빛을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서울로 빠르게 전달하던 것으로 주
로 산 정상에 자리를 닦았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 봉수대의 역할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고 그 봉수대를 이용한 봉수체제가 그나마 제일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비와 눈이 내려 연기가 여의치 못할 때는 봉수지기가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조선시대 봉수제(烽燧制)는 1438년에 확립되었는데, 그때 무악산(안산) 정상에 봉수대가 만들
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악산은 안산의 다른 이름으로 안산과 인왕산 경계에 자리한 무악재에
서 비롯됨)
지금은 동봉수대 1개 밖에 없지만 원래는 2개로 동,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봉수대는 조선의
제3봉수로(烽燧路)의 경유지로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시작하여 황해도(黃海道)와 파주, 고양
해포나루, 무악산 동봉수대를 거쳐 남산 훈도방(남산 목멱산 봉수대)에서 그 끝을 맺는다. 이
노선은 직봉 78곳,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그리고 서봉수대는 제4봉수로의 경유지로 황해도에
서 시작하여 경기도 해안을 따라 고양시 고봉, 무악산 서봉수대를 거쳐 남산 명래방으로 연결
되며, 직봉 71처,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이들 봉수대는 1894년 이후 봉수제가 폐지되면서 귀신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며, 그 터만 아
련히 남아 전하던 것을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동쪽 정상에 있던
동봉수대만 복원되었다. 허나 서쪽 정상에 있던 서봉수대터는 군부대가 있는 관계로 복원되지
못했다.

비록 동봉수대가 복원되긴 했으나 주위가 문화유산과 어울리지 않고 추락사고의 위험이 있다
는 문제점이 2008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하여 그때부터 2011년까지 서울시 문화재위원들
이 현장실사와 고증을 통해 화강석 성곽으로 재현하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봉수대를 부시고 2
단의 석축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봉수대를 얹혔다.
허나 이번에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이 떨어진다고 민원이 들어와 지금의 모습으로 어
색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모습이 아닌 그저 사람들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변질을
시킨 꼴이다. 굳이 좋게 포장한다면 융통성이 있고 시대에 맞게 재현된 것이 되겠지.
그러다보니 봉수대를 받치고 있는 석축과 불을 피우던 봉수대, 봉수대 주변 테두리의 돌 피부
가 확연히 차이가 나서 어색하기 그지 없다. 봉수대 석축을 이루는 돌은 고색의 기운이 약간
돌지만 봉수대와 테두리에 쓰인 돌은 하얀 피부로 파리가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맨질맨질하다.


▲  천하를 굽어보며 왕년의 향수를 달래는 봉수대
연기를 모락모락 풍기며 불빛을 날리던 왕년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안산 정상을 수식하는 장식용이자 전망대 그 이상도 아니게 되었다.

    ◀  때깔이 고운 하얀 피부의 봉수대
봉수대 가운데에 있는 네모난 창을 통해 불과
연기를 피웠는데, 그 연기는 봉수대 꼭대기를
통해 하늘로 솟구쳤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동봉수대

▲  새롭게 둘러진 봉수대 테두리

봉수대를 모자처럼 눌러쓴 안산 동쪽 정상, 그 동쪽은 바위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고,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다소 각박해 봉수대 복원 이후 추락사고의 위험이 늘 제기되었다. 하여 2011년
이후 봉수대를 새로 갈면서 주변에 하얀 피부의 테두리를 성곽처럼 두른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봉수대 모습을 다소 잃게 되었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무악재
그날따라 안개가 말썽이라 시야는 다소 흐릿했다. 이렇게 보면 인왕산이
좀 낮아보일 수 있지만 저곳이 이곳보다 무려 40m 이상 높다.
그래도 서울을 지키는 당당한 우백호가 아니던가~~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①
홍제동과 홍은동, 녹번동,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서남부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②
바로 밑으로 옛 서대문형무소를 간직한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부와 남산이 바라보인다. 안개만 아니었다면
시야가 더욱 나래를 펼쳤을 것인데 하늘의 심술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③
안산 남쪽 자락과 서울 도심부, 아현동 지역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④
안산 남쪽 자락과 봉원사, 신촌, 서대문구 지역


안산 정상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아주 휼륭하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장
안을 발 아래 두며 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뫼에 오르는 이유의 큰 하나는 바로 이런 조망
맛을 누리고자 함으로 이때만큼은 제왕도, 옥황상제도, 청와대 주인도 부럽지가 않다.
정상에서 보이는 범위는 가까이로 인왕산과 무악재, 독립문, 서울 도심부, 홍제동, 신촌, 북
한산(삼각산), 북악산(백악산)을 비롯해 멀리 서울 동부, 불암산, 아차산, 여의도, 서울 서남
부, 동작구, 강남구, 관악산과 호암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래서 왜 이곳에 봉수대를 세우고 이괄의 난(1623년)과
6.25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군사적인 요충지로 절찬리에 쓰이고 있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 무악산 동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안산에 녹아들다 (잣나무숲, 메타세콰이어숲길)

▲  가파른 벼랑을 이루고 있는 안산 북쪽 자락

안산 동쪽 정상에서 시원스러운 산바람과 조망을 누리며 20분 정도 머물렀다. 비록 하늘의 비
협조로 시야는 썩 좋지 못했으나 마치 학의 등에 올라탄 개미처럼 흐릿한 천하를 굽어보니 기
분은 즐겁다.
이곳은 예전에도 가끔씩 찾았던 곳이고 땅꺼미가 자욱한 저녁에도 침침한 두 망막을 무릅쓰고
올라가 도심 야경을 즐기며 일행들과 곡차(穀茶) 1잔 걸치기도 하였다. 지금도 1년에 서너 번
정도 찾으며 안산에 대한 나의 변치 않는 마음을 비춘다.

동쪽 정상에서 다시 무악정 방면으로 내려가면 헬기장이 있다. 여기서 길은 3갈래로 갈리는데
, 서쪽은 무악정으로, 남쪽은 안산 남쪽 능선, 그리고 북쪽은 홍제동으로 이어진다. 그중 북
쪽 길은 아직 미답(未踏)의 상태라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북쪽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각박한 경사로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바로 동쪽이 무악재와 접한 벼랑이라 각별한 주의
가 필요하다. (길 중간중간에 바위들이 있음)


▲  안산 정상 북쪽 밑에 자리한 안천약수터 주변

정상 헬기장에서 북쪽 길을 6~7분 정도 내려 가면 안천약수터가 모습을 비춘다. 안산에서 가
장 높은 곳에 자리한 약수터로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으니 물맛도 좀 특별할 것이라 여겨지
나 내가 갔을 때는 여름 가뭄으로 물은 완전히 말라버렸고, 여러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이 검
출되어 '음용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은 상태였다.
하긴 이곳만의 일이랴. 안산을 비롯해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의 많은 약수터도 비슷
한 곤란을 겪고 있어 서울 도심에서 깨끗한 자연산 물을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줄고 있다.
그만큼 서울의 건강이 나쁘게 변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샘터 주변에는 간단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이 닦여져 있으며, 동쪽에는 주름진 바위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다.

▲  깔끔하게 정비된 보람도 없이 부적합
판정을 받은 안천약수터

▲  샘터 동쪽에는 주름진 바위와 간단한
운동시설이 모여있다.


▲  안천약수터에서 바라본 무악재와 인왕산

▲  안산 북쪽 자락 숲길
인적도 없는 호젓한 산길을 혼자 거닐으니 마치 아비규환의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해탈감이라고나 할까?
비록 잠시뿐이지만..


▲  안산 메타세콰이어 북쪽 숲 직전 숲길

안천약수터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안산자락길과 홍
제동으로 바로 이어지고, 왼쪽(서쪽)으로 가면 메타세콰이어숲이 싱그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안산에는 북쪽 자락과 서쪽 자락(숲속무대 주변)에 메타세콰이어숲을 닦았는데, 이들은 안산
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아름다운 얼굴이다. 북쪽 숲은 서쪽 숲에 비해 덩치가 매우 작아
정말 순식간에 숲길이 끝나 조금은 섭섭하다. 허나 늘씬하게 솟아나 하늘을 찌르는 모습이 시
원시원하니 그것이 발음도 어려운 외래종 메타세콰이어의 매력이라 하겠다. 안산자락길은 북
쪽 숲 밑을 지나가며 서쪽 숲 한복판을 가로질러 안산을 1바퀴 휘감는다.


▲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숲길
군살 없이 쭉쭉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하늘을 가리며 우수한 그늘을 베푼다.


▲  한낮에도 거의 어두운 메타세콰이어숲의 위엄
해가 긴 여름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낮의 길이를 감소시킨다.

▲  북쪽 메타세콰이어숲에서 잣나무숲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숲길

▲  드디어 이른 안산자락길 (잣나무숲길)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에서 서쪽 산길을 고집하면 무장애길로 이루어진 안산자락길이 마중을
한다.
안산 허리를 따라 이어진 안산자락길은 이 땅에 흔한 둘레길의 하나로 '둘레길' 대신 '자락
길'을 칭하고 있는 점이 이채로운데, 총 길이는 7km로 2010년 10월부터 3단계 과정을 거쳐
2013년 12월 완성을 보았다.
총 사업비는 48억(서울시 지원 33억, 서대문구 15억)으로 노약자와 장애인, 휠체어나 유모차
의 편의를 위하여 전 구간을 무장애자락길(나무데크길, 마사토 포장길)로 싹 닦았다. 그래서
2016년 4월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의 하나로 꼽
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널리 칭송을 받기도 했다.
허나 너무 편리를 강조하다 보니 산길의 진미인 흙길이 거의 없는 것이 단점이다. 하여 흙길
을 원한다면 다른 산길을 이용하거나 자락길 안쪽에 닦여진 초록숲길을 이용해야 되며, 자락
길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시내에서 접근하려면 어느 정도 오르막길과 산길을 겪어야 만날
수 있다.

안산자락길은 연희숲속쉼터 윗쪽, 자락길전망대, 천연마당쉼터, 안산천약수터, 숲속무대, 메
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을 두루 거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순환형으로 봉원사나 천연동
뜨란채아파트, 독립문파크빌아파트, 무악재역, 기원정사, 연희숲속쉼터, 서대문구청에서 접근
하면 된다.


▲  잣내음으로 그윽한 잣나무숲길

안산자락길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잣나무숲이 진한 잣내음을 들이밀며 나타난다. 이곳은 연희
숲속쉼터와 메타세콰이어 서쪽 숲 사이에 자리해 있는데, 숲 한복판에 안산자락길이 흘러가
그림 같은 잣나무숲길을 빚어내고 있으며, 숲길의 길이는 0.3km로 메타세콰이어숲과 함께 안
산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잣내음이 가득해 상쾌한 느낌을 안겨주며, 잣나무가 베푼 산바람이 비록 약하긴 하지만 속세
의 기운과 여름의 기세를 꾸준히 털어간다. 이 숲을 지나면 바로 메타세콰이어 서쪽 숲길이
펼쳐지나 그곳은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터라 길을 접고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안산
자락길 북쪽 구간으로 방향을 돌렸다.


▲  저 자락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원스럽게 뻗어가는 잣나무숲길의 위엄

▲  잣나무숲길 남쪽 구간

서울에 대표적인 잣나무숲으로는 이곳 외에도 동작충효길 고구동산 잣나무숲과 호암산(虎巖山
) 잣나무숲이 있다. 이들이 시골에 있었다면 감흥이 덜했겠지만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 한복
판에 고스란히 박혀 있으니 그 감흥은 클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자연은 인간에게 소중하다.



 

♠  안산자락길 마무리

▲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

잣나무숲에서 잠시 자락길을 버리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넓게 잘 닦여진 안산 산책로(연희로32
길)가 나온다. 그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올라온 길로 안산자락길이 이 길의 신세를 잠시
지며 동북쪽으로 흘러가는데 그 길의 끝에서 폭이 확 줄어들면서 북쪽 전망대가 고개를 내민
다.

북쪽 전망대는 안산의 가장 북쪽 끝(모래내로 이북은 제외)으로 비록 조망의 질은 정상보다
엷어도 홍제동과 홍은동, 무악재, 탕춘대능선, 북한산(삼각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앞서 잣나무숲에서 내려온 자락길과 연희로32길이 합쳐지는 곳에서 북쪽 전망대까지 1890년대
부터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까지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100여 인의 정보가 담긴 안내문이
차례대로 걸려 있어 잠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자락길 전망대에도 일부가 있음)
이들의 안내문을 설치한 것은 안산 동남쪽 밑에 서대문독립공원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자락
길을 거닐면서 이 땅의 광명을 위해 숭고하고 거룩한 삶을 살다간 그들을 생각하고 기려보자.
그것이 안산이 우리에게 준 의무이자 숙제이다.

북쪽 전망대에서 무악재를 거쳐 독립문파크빌까지 나무로 다진 무장애데크길이 펼쳐지며, 홍
제동과 무악재에서 안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만 있었을 뿐, 무악재 옆을 가로질러 남북으
로 이어지는 산길은 원래 없었다. 그러다가 자락길이 닦이면서 발길이 어려웠던 안산 무악재
구간 접근이 가능해졌다.


▲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홍제동과 홍은동을 위시하여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자락길 북쪽 구간과 무악재 구간이 만나는 곳
길 경계에 계수기(計數機)를 설치하여 안산자락길을 이용하는
사람 수를 조용히 체크한다.

▲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북쪽 전망대에서 무악재 방면)

▲  서울에도 흔들바위가?? 귀엽게도 들어앉은 안산 흔들바위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에서 자락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가면 흔들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마
중을 한다.
커다란 암반에 바짝 붙어있는 돌덩어리가 흔들바위로 흔들바위의 대명사인 설악산 흔들바위보
다는 볼품과 위엄이 많이 떨어진다. 허나 손으로 밀면 아주 조금은 흔들거려 흔들바위의 자격
은 그런데로 갖추고 있다. 허나 대부분 사람들이 지나칠 뿐, 그를 밀어 흔들바위의 이름값을
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어 속세의 관심이 시급하다.

이 바위는 안산자락길 조성으로 발견된 것으로 암반 위에 철썩 붙은 것이 충주 미륵리절터의
공기돌바위와 비슷한 폼이다.
안산은 돌이 많은 산이라 동쪽 정상 주변과 동쪽 자락을 중심으로 바위와 벼랑이 즐비하니 이
바위 역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이 안산에 살포시 얹혀놓은 소소한 작품이다. 그 동쪽에도 잘
생긴 바위 하나가 이름도 없이 자리해 있는데, 동쪽에서 보면 거북이가 바위에 웅크리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다.

▲  흔들바위 동쪽에 있는 이름 없는 바위

▲  너와집쉼터 입구

흔들바위를 지나 무악재 쪽으로 움직이면 너와집쉼터 이정표가 마중한다. 그 이정표의 안내를
받으며 서쪽 산길을 오르면 숲속에 묻힌 너와집이 진하게 모습을 비춘다. 서울 도심에서 너와
집이라니? 흔들바위만큼이나 신선하기 그지 없는데 그는 서대문구청에서 안산자락길을 다지면
서 조촐한 여흥거리로 마련한 것으로 경상북도 산골의 너와집을 현대식으로 조금 손질하여 지
은 것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살림집은 아니라고 하며, 관리하는 사람이 매주 여러 번 찾아와 관리를 하거
나 잠깐씩 머문다. 서울에 거의 유일한 너와집으로 너와집 체험 겸 전통찻집으로 활용하는 것
이 좋을 듯 싶은데, 그냥 눈요깃감으로만 두고 있는 것이 조금 아쉽다.

집 옆에는 하얀 피부의 위성방송 안테나가 귀를 열고 있어 이런 산골까지 TV가 들어오나 놀라
울 따름이다. 허나 생각해보니 여긴 엄연한 서울 한복판이다. 지리산이나 태백산맥, 개마고원
산골이 아니다.
집 앞에는 안산이 베푼 조그만 개울이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데, 그 개울에는 나무다리가 있으
며, 집 주변에는 장독대와 너와집쉼터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안산 산골에 숨겨진 너와집
이렇게 보면 강원도나 경북의 첩첩한 산골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엄연한
서울 한복판이다. (서울 4대문이 바로 지척임)

▲  너와집 옆에 자리한 너와집쉼터

▲  너와집 샘터

▲  시원스럽게 뻗은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  무악재 서쪽 벼랑에 닦여진
자락길전망대


자락길전망대는 무악재 서쪽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닦여져 있다. 이곳은 자락길을 닦으면서 달
아놓은 공간으로 필체가 돋보이는 '자락길전망대' 현판이 인상적인데, 이 글씨는 2012년 10월
에 작성된 것으로 글씨 좌우에 도장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투구처럼 생긴 바위와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의자가 여럿 설치되어 있고, 바로 밑에
자리한 홍제동을 비롯해 홍은동과 무악재, 인왕산,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잡히나 보이
는 범위는 좁다.


▲  자락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회색빛으로 물든 홍제동과 홍은동 지역을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자락과
인왕산 일부가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자락길전망대 바위 (투구바위)
바위 이름은 아직 없으나 일부가 투구처럼 생겨서 투구바위라 불러도 손색은
없어 보인다. 자락길전망대 개설로 바위 아랫도리가 가려져서 그렇지
저 바위 자체가 장대한 바위 벼랑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자락길전망대

▲  잠깐 포장길로 안면을 바꾼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무악재 남쪽)

▲  숲속에 자리한 조그만 야외 독서실, 자락길 북까페(Book cafe)

자락길 전망대에서 무악재 구간을 넘으면 조그만 책장을 지닌 북까페가 마중한다. 이곳은 책
장과 기와 정자, 그리고 동그란 탁자와 의자 세트가 여럿 놓여져 있는데, 책은 대부분 기증받
은 것으로 누구든 기증과 독서가 가능하다. 허나 그렇다고 책을 소장용으로 가져가지는 말자.
이곳이 공용 북까페의 성격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  북까페에서 바라본 안산 정상 (가운데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

나는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 봉우리 정상(무악산 동봉수대)에 서 있었다. 허나 눈을 떠보니
나는 그 한참 밑 북까페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정상에 있던 것은 혹여 꿈속은 아닐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축지법이나 순간이동을 쓴
것일까? 산과 자락길은 그대로인데 나란 존재는 계속 바뀌니 말이다. 이렇게 보니 정말 안산
을 휘감듯 돌아다녔다.


▲  한성과학고 뒷쪽 안산자락길

▲  한성과학고 뒷쪽 안산자락길에서 바라본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

▲  안산자락길 현저동 구간

무악재를 넘은 안산자락길은 현저동(峴底洞) 구간으로 들어서면서 한성과학고와 독립문파크빌
아파트의 뒤쪽을 지나간다. 이 구간은 벼랑 일색이라 잔도(棧道)처럼 나무데크길을 길게 내었
으며, 벼랑길을 지나면 포장길이 펼쳐진다.


▲  벼랑 밑을 지나는 안산자락길 현저동 구간

안산자락길이 너무 안(安)스럽게 닦여진 탓에 움직이는 길이 정말 순식간이다. 북까페에서 한
성과학고 뒷쪽을 지나 어느덧 독립문파크빌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무데크길은 끝나고
포장길이 펼쳐져 안산 남부까지 이어지는데, 제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19시가 넘어간 상태라
햇님은 꼴딱꼴딱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뺀다. 그 사이를 비집고 어두운 땅꺼미가 자리를 피
며 천하에 어두운 물감을 물들인다.

독립문파크빌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 독립문삼호아파트 뒷쪽에서 안산자락길과 인연을 정리
하고 시내로 내려왔다. 이렇게 하여 안산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신촌동, 연희동, 홍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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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0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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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서울 도심의 싱그러운 공간,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늦가을 나들이 <북악스카이웨이>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늦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0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들과 북악산(백악산) 북악하늘길을 찾았
다. 이곳은 김신조루트로 속세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2010년에 처음 발을 들인 이래 가끔 발
걸음을 한다.

오후 2시에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서울다원학교(한용운활동터)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로 일
컬어지는 성북동(城北洞)은 내 즐겨찾기 명소의 일원으로 대부분의 명소를 지겹도록 가봤건만
갔다 오면 또 가고 싶고, 자꾸만 안기고 싶은 곳이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우정의 공원(公園)'을 지나 삼청각으로 가는 조
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의 심장부가 바로 지척이건만 그런 도심을 비웃듯 숲과 계곡이 어우
러진 전원 풍경이 도시에서 오염된 안구를 어루만진다. 길 옆에는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부
르며 흘러가는데, 이 물줄기는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간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와 약간의 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그 산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  북악산(백악산) 북악하늘길 입문

▲  도심과 성북동을 바짝 이어주는 삼청터널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도심 북쪽인 삼청동(三淸洞)을 이어주는 2차선 땅굴이다. 이곳은 성북동
의 가장 막다른 구석으로 한양도성이 흐르는 북악산(백악산)의 주능선과 북쪽 능선(북악산길)
이 갈라지는 곳이며, 산세도 칼처럼 솟은 편이라 오르기가 좀 각박한 편이다. 그런 구석에서
다른 곳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한줄기 희망을 선사한 것이 바로 삼청터널이다.

이 터널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절정을 누리던 1969년에 삽을 떠서 1970년 12월 30일 완성을 보
았다. 공사비는 총 2억 4,900만원(민자 1억 9,900만원, 시비 5,000만원)으로 당시 성북동에는
차지철을 비롯한 군사정권의 실세들이 여럿 살았는데 그들의 청와대 접근 편의와 땅값 상승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그 시절 성북동과 삼청동은 한적한 동네로 두 동네를
이을 터널의 필요성은 그다지 없었다.

터널이 뚫리자 안그래도 졸부들로 가득한 성북동의 땅값이 더욱 하늘 높이 치솟아 금싸라기
땅이 되었고, 성북동과 청와대, 서울 도심간의 접근이 편해지면서 대원각, 삼청각 등의 고급
요정과 식당이 생겨났다. 이들은 썩은내와 돈냄새가 풍기는 지배층과 부유층의 공간으로 돈을
포크레인으로 쓸어 담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산간 지방의 조촐한 터널 같은 삼청터널은 길이 302m, 폭 8.5m(2차선)로 오로지 차량만 들락
거릴 수 있다. 예전에는 권력층과 돈 많은 작자들이 주로 이용하던 터널이었지만 시대가 여러
번씩 바뀌고 성북동이 도심 속 명소로 각광을 받으면서 나들이와 드라이브 수요도 크게 늘었
다. 허나 터널도 그렇고 도로도 그렇고 확장은커녕 여전히 2차선을 고수하고 있어 휴일에는
꼬리에 꼬리를 잡고 굼벵이 속도로 버벅거리는 차량의 행렬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삼청동과 북촌(北村)으로 이어지지만 걷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억지
로 터널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한다. (벌금을 내야됨) 차라리 쿨하게 택시를 타고 넘어가던가
숙정문안내소에서 숙정문이나 말바위, 와룡공원을 넘어 북촌으로 넘어가길 바란다.


▲  삼청각(三淸閣) 정문

성북동의 가장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자리해 있
다. 이곳은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이 갈라지는 150m 고지로 도심이 바로 지척임
에도 이곳을 감싸고 흐르는 공기부터가 무척 산뜻하고 청정하다.

삼청각은 겉모습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사정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
청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는데, 1972년 7월 4일에 벌어
진 7.4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이 만찬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권력실세들의 공
간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도심
속의 전통문화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한다.

한때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고 전통문화를 즐
기며, 식사와 차 1잔, 혼인, 돌잔치 등을 가질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현장으로
이는 길상사(☞ 관련글 보기)란 절집으로 변신한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이곳은 오래된 문화유산도 아니고 비록 속세에 개방되었다고 해도 비싼 이미지는 여전히 깃들
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의 착하지 못한 음식/차 가격과 행사 비용은 서민들에게는 그리 호
락호락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서울의 허파인 북악산(백악산) 품에 포근히 안긴 곳
으로 20세기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삼청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30-115 (대사관로 3, ☎ 02-765-3000)
* 삼청각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조림 표석 - 숙정문 안내소 부근

▲  늦가을의 처절한 향연이 펼쳐진 북악산(백악산) 등산로
(홍련사와 숙정문안내소 중간)

▲  숙정문안내소

홍련사와 삼청터널 사이로 난 산길을 오르면 북악산 전면개방 조림(造林)을 기념하는 커다란
표석이 나그네를 맞는다. 그 표석을 지나면 북악산 주능선(한양도성 능선)의 주요 관문인 숙
정문안내소(☎ 02-747-2152)가 모습을 비추는데,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린다.
안내소를 지나 직진하면 숙정문(肅靖門)과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북악산 정상(342m)으로 이
어지며, 안내소 직전 왼쪽(남쪽) 길은 한양도성 북쪽 산길로 말바위와 와룡공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오른쪽(북쪽) 길이 김신조루트로 통하는 북악하늘길이다.


▲  숙정문안내소 주변 북악산(백악산) 산림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은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러다가 1968
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공비 패거리 31명이 북한산(삼각산)을 넘어 창의문을 거쳐
시내로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침투 소식을 접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
)은 경찰을 청와대 길목에 배치하고 직접 현장을 지휘했다.
드디어 공비패거리가 청와대 서쪽 청운동(淸雲洞)에 나타나자 최서장은 그들이 공비임을 눈치
채고 검문을 한다며 길을 막았다. 이에 공비들은 크게 발작하여 외투 속에 숨긴 기관단총을
꺼내 이판사판으로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총격적이 발생했고, 최서장은 불행히도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당해 쓰러지면서
'끝까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마지막 명령을 내리며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의 반격으로 공비들은 거의 벌집이 되었고 살아남은
것들은 인왕산(仁王山)과 북악산으로 도주했다. 이후 14일 동안 수색을 벌여 북악산 북쪽 능
선을 끝으로 토벌을 완료했으며, 생포된 김신조와 도주 1명을 뺀 29명을 처단했다.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뚜껑이 단단히 폭발한 박정희 전대통령은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을 완
전히 통제하여 백성들의 출입을 막고 군사 지역으로 삼았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허리에 군작
전 및 관광을 겸한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길)를 급하게 만들게 했다.

금지된 곳으로 묶인 북악산 북쪽은 41년이 지난 2009년부터 삼청각에서 말바위, 성북동과 정
릉, 평창동에서 북악스카이웨이를 잇는 산길이 속속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2010년 2월 27일
에 삼청각에서 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을 손질해 '북악하늘길'이란 간판을 걸어 속
세에 개방했다. 그중 제2산책로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루트라 하여 김신조루트란 이름으로
인기를 더하고 있으며, 북악하늘길의 백미이자 안보관광지로 가장 볼거리가 많은 산길이다.
(실제로 김신조는 이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함)

이곳이 주능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24시간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팔
팔한 시절에 공개되어 이렇게 발을 들이니 기쁘기 그지 없다. 북한이나 휴전선처럼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무려 40여 년 동안 통제되어 속인들의 발길을 금지한 탓에 북악산 북쪽의 자연은 군부대로 인
한 약간의 훼손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잘 보존되고 있다. 그리하여 생태적인 가치가 높고, 자
연경관이 우수하며, 서울 도심을 비웃듯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어 '서울 속의 비무장
지대','도심 속의 허파','도심 속의 신세계'란 별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또한 키다리 빌딩이
즐비한 서울 도심 속의 이색 장소로 한나절 나들이 코스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대부분은 통제 시절 군인들이 오가던 산길로
군사 시설과 그 당시 지어진 계단길이 줄지어 있으며, 제2산책로는 경사가 매우 각박하여 탐
방객의 편의를 위해 나무데크식 등산로를 곳곳에 만들었다.
이렇게 북악산 북쪽 능선을 개방하면서 조성된 등산로 3개는 다음과 같다.

①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 말바위쉼터 ~ 한양도성 북쪽 산길 ~ 숙정문안내소 ~ 성북천발원지
   ~ 북악팔각정 (1.4km)
② 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호경암 ~ 하늘
   전망대 ~ 북까페 ~ 하늘교 ~ 하늘마루 (2km)
③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 북까페 ~ 동마루 ~ 숲속다리 (640m)



 

♠  북악하늘길(김신조투르) 둘러보기 ①
삼청각쉼터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삼청각쉼터

숙정문안내소에서 북악하늘길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높다란 계단길이 나그네의 기를 제대로
주눅 들게 만든다. 시작부터 각박한 계단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신조루트는 이렇게 첫 이미지
에서 보이듯 계단길이 유별나게 많아 숨을 적지 않게 차게 하는데, 이건 맛보기 버전이다. 여
기서부터 지친다면 김신조루트 산책은 어렵다. 자존심을 곱게 버리고 악으로 깡으로 올라간다
면 김신조루트는 자신의 속살을 하나씩 벗겨주며 그대를 반겨줄 것이다.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삼청각쉼터가 마중을 한다. 이곳은 삼청각의 서쪽이자 뒷통수로 소
나무의 산인 북악산답게 소나무 1그루가 쉼터 중간에서 운치를 그윽하게 불어주며 솔내음과
선선한 그늘을 드리운다. 여기서 잠시 삼청각을 비롯한 좁은 천하를 굽어보고 더 올라가면 제
1산책로와 제2산책로가 갈리는 성북천발원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청각쉼터에서 바라본 천하 (삼청각과 성북동, 성북구 지역)
이제 시작 단계라 조망 범위는 매우 좁다. 허나 산길을 오르면서 하늘과
보다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높아진다.

▲  늦가을의 물감이 야드르르 번진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북악산 북쪽 능선 (삼청각쉼터와 성북천발원지 중간)

▲  성북천발원지에 자리한 수고해(水鼓蟹)다리 (가운데에 보이는 다리)

▲  성북천(城北川) 발원지

성북천은 북악산 동북쪽 자락에서 발원하여 성북동과 삼선교, 보문동, 제기동(祭基洞)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7.7km의 지방 2급 하천이다. 조그만 하천의 발원지라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儉龍沼)나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黃池)처럼 뭔가 특별하거나 요란한 것은 없으며,
계곡 수심은 매우 얕고 주변에는 하얀 피부의 바위들이 벌러덩 누워 있는 그야말로 평화로운
풍경이다.

성북구청에서 이곳을 생물 서식처로 가꾸고자 여러 식물을 심고 수질에 특별히 신경을 쓴 결
과 가재를 비롯한 여러 조그만 수중 동물들이 좀 늘어났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고자 성북천발
원지 남쪽에 있는 다리 이름을 가재가 물에서 물장구를 치는 다리란 뜻에 수고해(水鼓蟹)다리
라 하였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기존의 제1산책로로 북악팔각정과 빠르게 이어
지며, 오른쪽은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제2산책로로 호경암을 거쳐 하늘교까지 이어지는 2km의
산길이다. 이 산길은 중간중간 조망(眺望)이 괜찮은 곳에 '~~마루'와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를 닦아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  성북천발원지에서 바라본 삼청각 편운정(片雲亭)과 유하정
편운정에서 계곡을 따라 북악하늘길로 바로 접근할 수 있으나, 이 구간은
통제구간으로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길이 헝클어져 있어
조금은 거칠다.

▲  김신조루트 서마루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까지는 속절없는 세상살이처럼 고통스런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나무
데크로 지어진 서마루에 오르면 삼청각쉼터보다 1단계 높아진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의자가
넉넉히 베풀어져 있어 잠시 숨을 고르며 천하를 굽어보기에 좋다.
이곳에선 북악팔각정이 가까이에 보이며, 여기서 길은 동쪽을 향해 급하게 내리막길로 돌변한
다. 그래서 처음 온 이들은
'벌써 다 올라왔나? 이거 정말 싱거운데!' 생각을 하며 방심을 하지만 이는 북악산이 내린 일
종의 속임수이니 속지말자. 북악산이 북한산(삼각산)이나 관악산(冠岳山), 수락산(水落山) 등
서울 주변의 쟁쟁한 산들에 비해 키는 낮지만 그래도 악(岳)이 들어가는 서울의 오랜 북현무(
北玄武)이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①
소나무 너머로 성북동과 성북구, 도심 동부 지역,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강동구, 송파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악산(백악산)의 두터운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바라보인다.

▲  이름도 시원한 솔바람교

서마루에서 솔바람교까지 220m 구간은 각박한 경사의 내리막이다. 다 올라왔구나 싶겠지만 솔
바람교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흥분하여 무지막지한 오르막길로 나그네의 기를 죽인다. 내리
막길은 고난 앞에서 잠시 즐기는 여유라고나 할까..? 한라산(漢拏山)도 관음사(觀音寺) 방면
으로 한참 내려갈 때 중간에 오르막길이 나와 속인들을 좌절하게 만드는데 바로 그 이치이다.
남마루까지는 가파른 길이 계속 이어지니 방심의 늪에 빠지지 말자~~

솔바람교는 계곡 위에 걸린 나무다리로 그 이름이 순 우리말이라 정감이 참 깊다. 주변은 소
나무를 비롯해 온갖 수목이 삼삼하여 그 이름 그대로 솔바람이 나를 날려보낼 것 같다. 계곡
이라고 하지만 워낙 생긴 것이 부실하고 돌만 가득해 이곳에 올 때마다 늘 황량한 모습을 보
여주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다리를 내려오면 쉼터가 있으며 다리 북쪽 구석으로 가면 약수터가 있는데, 이곳이 김신조루
트의 유일한 샘터이다. 산에서의 약수터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라 갈증이 없어도 꼭 물
은 섭취하기 마련인데, 무심한 가을 가뭄 때문인지 수분은 이미 실종되었다. 약수터 주변은
숲이 바다를 이루고 있어 햇살이 쉽게 손을 뻗치지 못하며, 북악하늘길에서 가장 궁벽한 곳으
로 북쪽과 서쪽, 동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쪽만 가늘게 뚫려있는 고적한 곳이다.


▲  솔바람교 밑에 자리한 약수터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약수터이다.

▲  솔바람교 쉼터
이곳은 김신조루트의 중간 정도로 속세에서 간식거리를 가져왔다면 여기서
잠시 요기를 하며 쉬었다 가는 것도 괜찮다.



 

♠  북악하늘길(김신조투르) 둘러보기 ②
솔바람교 ~ 남마루 ~ 호경암

▲  솔바람교 쉼터에서 남마루로 올라가는 계단길
보기만 해도 회의가 느껴진다.


솔바람교에서 남마루까지는 다시 지독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그 거리는 약 600m 정도로 여
기가 김신조루트에게 가장 인생의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곳이다. 하긴 공비 패거리가 살아 돌
아가려는 일념으로 넘었던 곳인데 오죽 험하겠는가. 게다가 이곳은 산길도 없던 구간으로 각
박한 산세를 극복해 나무데크 계단길을 닦았으며, 적당하게 간격을 두며 쉼터를 만들어 턱까
지 밀려오는 숨을 잠시나마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그렇게 잔뜩 흥분한 산길을 오르면 남마루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은 앞서 서마루보
다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더 휼륭한 조망을 선물로 준다. 이곳 이후 흥분했던 산길은 다소
진정을 되찾으며 호젓한 산길의 기품을 서서히 회복한다.


▲  지옥 끝에 나온 극락, 남마루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성북동과 성북구, 낙산, 도심 동부 지역, 동대문구, 중랑구, 성동구,
광진구, 송파구, 강동구 지역

▲  서서히 진정되고 있는 산길 (남마루와 호경암 사이)

▲  호경암으로 오르는 계단길

▲  김신조루트의 상징물, 호경암(虎京岩)

남마루에서 360m 오르면 길 왼쪽에 상처를 가득 입은 큼직한 바위가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심을 바라보고 선 이 바위가 바로 김신조루트의 상징인 호경암으로 그가 이곳의 유명
바위가 된 것은 김신조 공비 패거리와 격전을 벌였던 남북분단의 서글픈 현장이기 때문이다.

청운동에서 우리 경찰에게 털린 김신조 패거리는 북악산을 넘어 성북동 뒷산(북악산 북쪽 능
선)으로 줄행랑을 치며 몸을 숨겼다. 39대대 2중대는 호경암 주변을 수색하던 중, 등을 보이
고 도망치는 공비 3명을 발견, 호경암에서 교전을 벌이다가 인근 구진봉 주변에서 모조리 사
살했다.
그렇게 처리된 김신조 패거리 29명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군묘지(敵軍
墓地)에 묻어주었다. 적군묘지는 6.25 때 남한 땅에서 처단된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묻은
곳으로 김신조 사건과 동해 잠수함 침투 때 처리한 공비, 그리고 1987년 KAL기를 폭파시킨 폭
파범까지 이곳에 묻혀 있다.


▲  남북분단의 비극이 안겨준 선물 아닌 선물
총탄 자국으로 가득한 호경암


북악산(백악산)이 서울 근교 경승지로 조선시대부터 왕족과 사대부들의 별장과 기와집, 바위
글씨가 즐비했던 탓에 호경암도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허나 막상 확인해보니 1968
년 때 서울을 지키던 맹호부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의 손길은 북악
산 주능선과 서쪽(부암동, 청운동), 남쪽(삼청동)에 치우쳐져 있을 뿐, 김신조루트와 북쪽 능
선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아마도 금표(禁標) 구역으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묶인 탓이 아
닐까 싶다.

바위 밑에는 이곳이 격전지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는데, 1998년 1월 호경암 주변에서 복무하
는 군장병들의 애국심과 경각심을 돋게 하려고 안내문을 설치했다고 하며, 바위 피부에는 당
시 총격전으로 생긴 50여 발의 탄흔이 진하게 남아 그 시절 긴장되고 숨막히던 상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그런 악연으로 북악산의 이름 없는 바위는 김신조 사건의 격전지로 이들을 격퇴한 부대 이름
을 따서 호경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고, 이곳이 개방되면서 북악산의 새로운 명물이자 이
땅의 비극적인 현실을 담고 있는 산증인으로 몸값과 이름을 크게 올리고 있다. 좋은 쪽으로
이름을 높여야지 영 좋지 않은 쪽으로 높이고 있으니 바위 자신도 어이가 없을 것이다. 바위
를 보면 표정이 조금은 굳어져 있는데, 이 땅이 통일이 되면 그의 표정도 씨익~ 펴지지는 않
을까.


▲  이 땅의 비극은 저렇게 깊었다 - 바위에 박힌 탄흔

▲  호경암 표석
표석이 박힌 호경암 정상에 올라서면 지금까지의 조망을 훨씬 뛰어넘는
국보급의 조망이 발 밑에 펼쳐진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①
북악산 일대와 성북동, 서울 도심, 남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성북동과 정릉동, 성북구, 강북구, 중랑구, 성동구, 광진구 등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③
평창동과 구기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형제봉 등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호경암에서 하늘전망대로 내려가는 길
호경암을 지나면 더 이상 오르막길은 나오질 않는다. 늦가을에 물들어가는
잔잔한 숲길만이 조용히 사색을 도울 뿐~



 

♠  북악하늘길(김신조투르) 마무리

▲  김신조루트 북쪽에 자리한 하늘전망대

호경암에서 4~5분 정도 가면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지금까지 나온 '~~마루'
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조망도 괜찮은 편으로 전망대 이름은 북악하늘길에서 따왔지만 그만큼
하늘과도 가까운 곳이다 보니 이름이 그런데로 잘 어울린다.

서마루부터 호경암까는 성북동과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서울 도심, 남산 등의 남쪽과 성북
구와 중랑구, 동대문구, 광진구 등 동쪽이 주로 보였다. 허나 호경암을 경계로 능선 남부에서
북부로 넘어왔기 때문에 하늘전망대부터는 그와는 반대인 북쪽으로 파노라마가 바뀌면서 평창
동과 구기동, 정릉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를 위시해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의 대표 졸부 동네인 평창동을 비롯해 부암동과 구기동, 탕춘대능선,
북한산 서부가 거침없이 시야에 박힌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정릉동과 길음동, 성북구, 강북구 일대는 물론 멀리 도봉구와 노원구,
수락산~불암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성북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구리시 지역 등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산줄기와 형제봉

▲  솔내음이 그윽한 북까페

하늘전망대에서 북쪽으로 110m 가면 북까페라 불리는 소나무숲이 마중을 한다. 이곳에는 책장
과 의자가 있어 자연을 벗삼아 책을 읽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북한산과 북악산의 산바람
이 교차하는 곳이라 독서도 무지 잘될 것 같다. 그런데 북까페보다는 '독서마당'이나 '소나무
책방','솔내음책방','사색의 공간'으로 이름을 지었으면 훨씬 부드럽지 않을까 싶다. 다른 곳
은 '~~마루(마루는 정상을 뜻하는 순 우리말)'나 '하늘전망대' 등의 우리말을 쓰면서 왜 이곳
만큼은 두 귀에 거북한 영어로 지었을까?

북까페 책장은 달랑 하나로 책은 많이 담겨져 있으나 상당수는 어린이와 청소년 책이거나 소
설이다. 집에 버려둔 책이 있다면 썩혀두지 말고 이곳에 기증하는 것도 공익 차원에서 괜찮을
것이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까페를 등지고 북쪽으로 직진하면 하늘교가 나오고, 북
까페를 가로지르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가 시작된다.


▲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동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정릉동과 길음동을 위시해 성북구와 강북구, 도봉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북까페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이다. 이 구간은 북악산길 남쪽으로
중간에 호경암으로 가는 샛길이 있으며, 오르락 내리락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숲속다리를 지
난 체육공원에서 그 막을 내리는 1리 정도의 짧은 산길이다.

산길 중간에 동마루라 불리는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
남쪽 자락을 비롯해 정릉동과 길음동, 성북구와 강북구, 도봉구 등이 훤히 바라보이며, 대자
연이 여기저기 채색한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를 놓으며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  체육공원에서 마무리를 짓는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동쪽 종점

동마루에서 북악산길에 걸린 숲속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넘어가면 체육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동네 주민과 산꾼들이 간단히 몸을 풀 수 있게끔 다양한 운동 기구가 닦여져 있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인 하늘마루와 하늘교가 나오며, 그 직전에 형제봉과
북한산둘레길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그리고 하늘마루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북악팔각정과
부암동, 창의문,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반면 동쪽으로 가면 북악정과 성북구민회관, 아리랑고개, 정릉동 방면으로 통하며, 중간에 국
민대나 배밭골, 길상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우리는 북악산길을 옆구리에 끼며 해가 뜨는
동쪽으로 가다가 북악정에서 성북동으로 진입하여 길상사를 거쳐 속세로 내려왔다.


▲  북악스카이웨이4교
여기서 직진하면 아리랑고개, 성북구민회관으로 이어지며, 아래로 내려가
북쪽으로 가면 국민대와 정릉, 남쪽은 성북동과 길상사으로 연결된다.
이들 모두 2차선 길이지만 보기와 달리 차량의 왕래가 제법 잦다.


41년 만에 속세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과 김신조루트, 비록 남북분단의 상처가 서린 서글픈 현
장이지만 서울 도심 속의 허파이자 달달한 명소로 자연이 잘 보존되고 경관도 아름다운 보석
같은 곳이다. 이곳은 마치 미지의 땅에 들어온 듯한 신선한 기분이었고, 서울 땅에서 안가본
곳이 거의 없는 나에게도 꽤 서름한 곳이라 길을 거닐면서도 무엇이 나올까? 늘 마음이 두근
거렸다.
이렇게 하여 도심 속의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정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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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9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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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내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노적사~태고사 <태고사 원증국사탑, 원증국사탑비>

북한산 노적사, 태고사



' 북한산 산사 나들이 (노적사, 태고사) '
태고사 원증국사탑
 태고사 원증국사탑
 



 

북한산(삼각산)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명성이 높은 서울과 경기도의 주요 도시인 고양(高陽
)을 끼고 있는 수도권 제일의 자연 공원이자 이 땅의 주요 국립공원이다. 번잡한 지역에 누워
있다 보니 찾는 이가 실로 엄청나 1㎢당 탐방밀도가 무려 5만 명에 이른다. 하여 탐방밀도 부
분 세계 기네스북 1위를 거머쥐고 있다.
서울의 든든한 진산(鎭山)이자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고 있
는데, 봄을 몰아낸 여름이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오래간만에 북한산
(삼각산)을 찾았다.

오전 11시에 연신내역(3,6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
을 타고 북한산성입구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버스는 북한산과 도봉산(道峯山), 노고산(老姑山
) 산꾼들로 완전 짐짝수송을 이루었는데, 버스는 간신히 바퀴를 움직이며 시내를 빠져나와 북
한산성입구에서 승객 60% 이상을 쏟아낸다.

북한산성입구에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북한산성계곡(북한천) 하류를 따라 수구문(水口門)
터와 서암사(西巖寺)터를 지나 옛 북한동(北漢洞) 마을에 이르렀다.
북한동은 북한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둥지를 튼 산골 마을로 북한산
성이 조성되면서 형성되었다. 주로 군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으며, 마을은 북한동역사관에
서 멀리 태고사 근처까지 형성되었는데, 1930년대에는 100호 이상의 집이 존재했다.

1910년 이후, 왜정(倭政)의 고의적인 북한산성 관리 소홀과 잇따른 자연재해로 북한산성과 마
을이 크게 훼손되자 산성 안에 둥지를 틀던 5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산성(山城) 내부를 관리
했다. 당시 주민들은 나무를 땔감으로 팔거나 과실을 팔며 생계를 꾸렸는데 이중 살구와 감은
북한동의 특산품이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인근 사람들이 산성 안으로 많이 피신을 했다. 하지만 북한군이 1개 연대
를 보내 숲을 죄다 불태우며 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전쟁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
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주민들의 궁핍함을 보고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시키기로 했다. 처음에
는 대성장, 팔경정 두 곳만 식당 허가가 났으나 주민들의 항의로 인해 1974년 모든 집에 식당
허가를 내주게 된다. 그래서 식당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등산물품 가게도 생겨났다.

이후 마을은 등산/탐방객을 상대로 음식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는데, 그들의 무분별한 장사로
인해 계곡이 오염되고 자연이 훼손되는 등, 계속 말썽이 생기자 골머리를 앓은 행정당국은 북
한산의 자연 보전과 계속되는 말썽을 해소하고자 마을을 폭파시키기로 결정, 2001년부터 마을
이주 사업을 단행했다.
처음에는 반대도 많았지만 보상도 심심치 않게 해주었고 북한산성 밑에 자리까지 제공해 주면
서 북한동 마을 55가구는 모두 그곳으로 이주했다. 마을 주민들이 이렇게 고향을 떠나자 북한
산성계곡의 옥의 티를 선사했던 집들을 죄다 부시고 주변 생태계를 복원했으며, 옛 마을의 중
심지에 '북한동역사관'을 세워 세월의 저편으로 흘러간 북한동의 역사를 짧게 다루고 있다.

솔직히 마을이 없어지니 좀 허전하기는 하나 마을로 인해 크게 망가졌던 자연 경관이 활짝 피
어나니 분위기는 더 밝아진 것 같다. 대신 먹을 거리는 북한산성입구나 시내에서 미리 사와야
되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그거야 조금 부지런을 떨면 된다. 솔직히 마을은 음식과 간식 가격이
비쌌다. 그 돈으로 시내에서 2배의 양을 사오는 것이 더 이득이다.


▲  북한동 향나무 (나이 약 400년)
옛 북한동마을의 수호목으로 그에게 병이 생기면 마을 전체에 병이 생긴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의 지극정성이 대단했다. 허나 마을은 북한산(삼각산) 생태계를
위해 모두 사라지고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성밖으로 나가면서
아무도 없는 마을을 홀로 지키고 있다.



 

♠  노적봉 밑에 둥지를 튼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
~ 북한산 노적사(露積寺)


노적봉이 더없이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고
만고의 청풍이 노적봉을 불어와 맑고 밝은 기운 돌아오는구나
산영루를 던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이라 새겨져 있어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시로 진국사는
지금의 노적사이다.


북한동역사관에서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30분 정도 올라가면 중성문(中城門)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 3분 정도 가면 왼쪽에 노적사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을 내밀고, 그 길을 오르면 노적
봉(露積峰) 밑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노적사가 모습을 비춘다.

노적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712년 성능(性能)이 창건하여 진국사(鎭國寺)라 했다. 성
능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숙종(肅宗) 때 승군(僧軍)의 대장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에 임명되어 북한산성 보수공사에 참여했다. 그는 산성 안에 있는 중흥사(重興寺)와 태고사를
보수하고, 노적사<현재 상운사(祥雲寺)>와 서암사(西巖寺) 등 절 10곳을 지어 북한산 승병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또한 중흥사와 태고사에 30년간 머물면서 북한산성과 북한산(삼각산)에 있는 절, 유적, 행궁
(行宮), 관청, 기타 여러 시설 등을 정리한 '북한지(北漢誌)'를 작성하기도 했다.

창건 이후 이렇다 할 내력(來歷)도 남기지 못한 채, 감쪽 같이 사라졌는데, 아마도 중흥사(重
興寺)와 국녕사(國寧寺)가 사라진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에 화재나 자연재해로 강제로 문
을 닫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터만 아련히 남아있던 것을 1960년 승려 무위(無爲)가 여러
신도의 도움으로 절을 다시 짓고 노적봉 밑에 있다는 뜻에서 노적사라 하였다.

1977년 현 주지인 종후가 재정을 털어 절을 크게 확장시켜 삼성각과 나한전, 종각, 요사 등을
새로 세웠으며, 대웅전을 크게 손질했다. 2000년 12월에는 노적사의 오랜 내력이 인정되어
통사찰 201호
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으나, 2002년 6월 불의에 화재로 종각과 요사가 전소되
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6년 4월 종후가 히말라야산맥에 묻힌 네팔 팔탄타쉬 지하초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기증받았는데, 2009년 극락전 뒤에 3층사리탑을 세우고, 극락전을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갈았
다. 그리고 삼보당 2층을 대웅전으로 삼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나한전, 대웅전, 삼성각, 동인당 등 5~6동의 건
물이 있으며, 고색의 때는 진작에 녹아내려 소장문화재는 없다. 다만 조선 후기에 조성된 돌
사자상이 있으니 잘 찾아보기 바란다.
절 배후에는 인수봉을 닮은 노적봉이 든든한 모습으로 절을 지켜주고 있으며, 인근 태고사와
비슷하게 작고 조촐한 산사로 인적도 별로 없어 조용하고 아늑하다.
 
* 노적사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331 (대서문길 311-35 ☎ 02-353-5016)


 노적사 적멸보궁(寂滅寶宮)

경내로 들어서면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梵鍾)의 보금자리 범종
각(梵鍾閣)이 나오고, 그 범종각을 지나면 흙이 곱게 입힌 뜨락이 나온다. 그 뜨락 옆에는 2
층 건물인 대웅전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정면에 보이는 계단 끝에는 적멸보궁이 서쪽을 굽
어본다.

이곳의 법당인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多包)계 팔작지붕 건물로 1960년에 지
어졌다. 허나 공간이 좁고 퇴락하여 1986년에 증축해 지금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으며, 처음에
는 대웅전으로 삼았으나, 2007년 극락전으로 현판을 갈았고, 2009년에는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러니까 50년 동안 이름을 2번이나 바꾼 셈이다.

극락전 시절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아우른 아미타3존상으로 불단을 구성했으나 적멸보궁으로 바뀌면서
그들을 대웅전으로 옮기고 불단 뒤쪽에 창을 내어 진신사리가 담긴 3층사리탑이 보이게끔 했
다. 물론 적멸보궁이니 불단에는 그 흔한 불상도 없다. 그 외에 1987년에 그려진 지장탱, 신
중탱, 아미타후불탱 등이 내부를 구석구석 수식한다.


▲  노적사 대웅전(大雄殿)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원래 삼보당(三寶堂)이라 불렸으
나, 2층을 새롭게 손질하여 대웅전으로 삼았으며, 극락전에 있던 불상을 옮겨왔다. 1층은 승
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으며, 지하1층에는 공양간이 자리해 있다.


▲  노적사 동인당(東印堂)
예전 지장전(地藏殿)으로 지금은 요사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노적사 나한전(羅漢殿)

적멸보궁의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나한전이 나온다. 나한전은 부처와 그의 열성 제자인 나
한(羅漢)을 봉안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 그 자리에는 뒤쪽으로 물러난
삼성각이 있었다.
그러다가 2000년에 철거하여 나한전을 새로 지었으며, 건물 외벽을 수식하는 벽화는 2002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밑에는 2개의 샘터가 있는데, 노적봉이 아낌없이 베푼 샘물이 콸콸 쏟아
져 나와 중생의 목마름을 쿨하게 해결해준다.
(왼쪽 샘물은 일반인들도 마실 수 있으나, 오른쪽 샘물은 예불용으로 아무나 마실 수 없음)


▲  나한전 내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나한상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나한전 뜨락에 자리한 약사여래좌상과 지구를 든 석조미륵불

▲  성림당 월산대종사(聖林堂 月山大宗師) 기념비와 3층사리탑

나한전 뜨락 우측에는 약사여래좌상과 석조미륵불이, 좌측에는 3층사리탑과 근래에 지어진 월
산대종사 기념비가 자리한다.
석조미륵불(彌勒佛)은 원래 3층사리탑 옆에 있었으나 월산 대종사 기념비를 세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절을 빛낸 월산이 석조미륵불보다 우선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손에는 동그
란 무엇인가가 들려져 있는데,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지구를 위
/아래로 구분하는 경도와 위도가 나와있으며, 중간에 우리나라가 선명하게 새겨져 눈길을 끈
다. 마치 선서를 하듯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모습이 충주 미륵리절터에 있는 미륵리석불
(彌勒里石佛)을 연상케 한다.

 ◀  석가여래의 진신사리가 담긴 3층사리탑
별다른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노적사의 새
로운 명물로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겨져 있다.

노적사 주지인 종후는 2006년 네팔에 있는 팔
탄타쉬 지하초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선물 받았다. 그래서 2009년에 3층석탑을 만
들어 사리를 봉안했고, 그 곁에 진신사리 기
증 증명서를 세웠다.
탑의 모습은 불국사의 석가탑(釋迦塔)과 닮은
꼴로 근래 들어 이 땅에 부처의 사리를 담은
절이 크게 늘어나고 있으니 과연 어디까지가
진품인지 모르겠다.


▲  인공 바위로 이루어진 노적사 스타일의 삼성각(三聖閣)

나한전에 이르면 '경내는 이게 전부구나, 더 이상 없겠지' 싶은 마음에 발길을 돌리기가 쉽다
. 바로 나한전이 뒤를 고스란히 가렸기 때문이다. 또한 언뜻 보아도 그 뒤에는 아무 것도 없
을 것처럼 보인다. 허나 그것은 함정이다. 나한전 옆구리를 지나면 그 뒤쪽에 전혀 불전(佛殿
)으로 보이지 않는 인공 바위로 울퉁불퉁 조성된 공간이 나온다. 얼핏 봐서는 무슨 창고가 아
닐까 싶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에 '삼성각'이란 현판이 걸려있어 건물의 정체를 두고 아리
송에 빠진 중생을 깨우치게 한다.

예전에는 천막으로 크게 둘러 정말 창고나 실내 체육공간처럼 보였는데, 돈 좀 쏟아부었는지
천막을 걷어내고 인조 돌을 더덕더덕 붙여 놀이공원의 인공폭포나 놀이시설처럼 정말 어색하
게도 만들어버렸다. 차라리 조촐하게 작은 기와집을 올려 삼성각으로 삼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은데, 전혀 불전의 품격이 보이질 않는다.

원래 삼성각은 나한전 자리에 1963년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동인당으로 바뀐 지장전과 비
슷한 규모를 지녔다. 허나 그런 삼성각을 부시고 나한전을 지었는데, 그 뒤쪽에 대충 천막으
로 자리를 닦고 삼성각으로 삼았으며, 근래에 인조 돌을 덧붙여 부조화의 공간이 되버린 것이
다.


▲  석굴 같은 분위기의 삼성각 내부

삼성각 내부는 없어 보일 것 같은 외부와 달리 넓고 아늑하다. 불단에는 칠성(七星)을 비롯해
독성(獨聖, 나반존자)과 산신(山神)이 석상으로 자리해 있으며, 그들 뒤에는 커다란 돌이 비
스듬히 자리해 있는데, 그 모습이 그들을 덮칠듯 아찔해 보인다. 허공에는 중생의 소망을 한
아름씩 담은 고운 연등들이 환상적인 색채를 내며 내부를 환하게 비춘다.


▲  노적사에서 섭취한 점심공양의 위엄
흰쌀밥에 갖은 나물과 고추장을 넣고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절 공양밥이다.
밥과 함께 국도 제공되었는데, 맛도 괜찮고 노적사의 인심도 훈훈하여
배불리 먹고 갈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떡도 얻을 수 있음
(점심시간은 12~13시, 일반인도 공양 가능)



 

♠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 세운 고려 후기 고찰
북한산 태고사(太古寺)

▲  태고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암자에 내가 살지만 나도 잘 몰라
깊으디 깊고 빽빽하지만 옹색하지 않아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있을 리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 보우대사가 태고사에 머물며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수


노적사를 둘러보고 다시 북한산성계곡으로 나와서 20분 정도 오르면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태고사가 마중한다.

태고사는 1341년 원증국사(圓證國師 = 보우대사)가 창건하여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이
후 4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으며, 18세기 중반인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정비
하고 산성 안에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당시 태고사
에는 경서(經書) 출판용 목판 5,700여 매와 활자 11두(斗), 그리고 화약용 흑탄 1,600여 석이
비축되었으며, 절의 규모는 131칸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
허나 1915년 대홍수와 산사태,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4년 청암(靑岩)이 중창하
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절의 규모가 매우 조촐하여 거의 산중암자의 분위기가 진
하게 풍긴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도 700년 가까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한 북한산성 내부에
몇 안되는 전통 토박이 사찰로 자부심이 강하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위시해 산신각과 요사 등, 3~4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원증국
사탑비와 원증국사탑 등 국가 보물을 무려 2점이나 간직하고 있어 이곳의 높은 명성을 알려
준다. 그 외에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산신각 부근에 있고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늙은 귀룽나
무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차량도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깊숙한 산중이라 등산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접근이 가능한 곳이
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가까우며. 노적사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이라 산새도 감히 넘어오기 힘들고, 제아무리 번뇌라
고 해도 산이 깊고 험해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이다. 그윽한 풍경소리만이 적막에 잠긴
경내를 잔잔히 쓰다듬어주며 속세의 무거운 짐과 번뇌를 북한산성계곡에 모조리 내던지고 며
칠 조용히 안기고 싶은 그런 곳이다.

* 태고사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5 (대서문길 406 ☎ 031-384-5589)


▲  녹음(綠陰)에 잠긴 태고사 귀룽나무 ~ 고양시 보호수 17호

태고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훤칠한 키의 귀룽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귀룽나무는 이 땅
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매년 3월 말이나 4월 초에 나무 전체에 새하얀 꽃이 가득 피어난다.
태고사에 무수히 발을 들였지만 정작 하얀 꽃으로 치장된 그의 모습은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그 꽃의 자태가 마치 하얀 눈과 비슷하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약 170년, 높이 23m, 허리둘레는 2.3m에 이르며, 성하(盛夏)의 길목이라 꽃 대
신 푸른 옷을 걸치고 중생을 맞는다.


▲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를 품은 비각(碑閣)

▲  태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 보물 611호

대웅보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높다란 비각이 있는데 그 안에 태고사 제일의 보물
인 원증국사탑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둥지를 텄다. <태고사 대웅보전은 서향(西向)임>

탑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고려 후기를 주름잡던 고승(高僧)으로 1301년 귀족 가문인 홍주
홍씨(洪州洪氏) 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홍연(洪延), 어미는 정씨로 13살에 양주 회
암사(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도했다.
1325년 승과(僧科)의 하나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선수행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고 용
문산 상원사(上院寺)를 거쳐 감로사(甘露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했다. 그 이후 북한산(삼각
산) 중흥사에 들어왔고, 1341년 절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머물며 그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
歌)를 
지었다.
1346년 원나라(몽골)로 넘어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원나라 제왕인 순제(順帝)의 초청을 받아 반야경(般若經)을 강설하기도 했다.

1348년 귀국하여 광주(廣州)에 머물며 일가 친척을 죄다 이곳으로 불러 살게 했는데, 광주를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광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56년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에 머물며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 고려 불교계의 1인자가
되었으며, 이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을 주장했다.
허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신뢰하면서 보우대사를 멀리하게 되는데 신돈은 그를 심하게 견
제하여 속리산(俗離山) 암자에 연금까지 시켰다.
신돈이 사라진 이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려 했으나 자신을 박대했던 감정 때문인지 병
을 이유로 거절했다.

1381년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우왕(禑王)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임명되었으
며, 1382년 소설사(小雪寺)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81세, 법랍(法臘) 68세이다. 우왕은
그에게 원증(圓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웅장한 멋이 풍기는 이 탑비는 13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은 고
려 3은(三隱)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이색(李穡)이 썼으며, 거북 등의 귀부(龜趺)를 초석으로
삼아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를 이수(螭首)로 마무리 지었다.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높다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1980년에 복원했다. 참고로 원증국사의 탑과 탑비는 그와 인연이 깊던 용문산 사나사(舍
那寺)에도 있으며, 그의 사리를 2등분하여 태고사와 사나사에 안치했다.
<사나사 글 보러가기 ☞
글보러 가기>


▲  원증국사탑비의 귀부(龜趺)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이 씨익 밝아 보인다. 그의 왕눈이 눈과
세모난 코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배여 있으나 그의
미소 만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몸뚱이에는 푸른 이끼들이 자리도
가리지 않고 싹을 피워 귀부의 건강을 조금 위협한다.

▲  원증국사탑비의 머리 부분
비석의 머리인 이수에는 구름 무늬가 얇게 새겨져 비석의 미를 한층 끌어 올린다.

▲  2009년에 조성된 청암대종사(靑岩大宗師) 부도

원증국사탑비 곁에는 새롭게 청암대종사의 부도가 뿌리를 내렸다. 청암은 1964년 태고사를 중
건했던 승려로 지금의 태고사가 있게 한 인물이다. 그는 이곳에 머물다가 2009년에 입적했는
데, 태고사 창건주(원증국사)의 비석 옆에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기리고 있다.


▲  채색된 산신각 산신도(山神圖)

경내에서 원증국사탑으로 오르는 길목에 산신(山神)을 봉안한 산신각이 있다. 특이하게도 돌
과 바위로 지어졌으며, 건물 내부는 거의 석굴(石窟)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부는 현대
적인 조명시설이 없어 조금은 어둡다. 다행히도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촛불들의 희생이 있기
에 산신도를 보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산신도는 바위를 쪼아서 그린 벽화로 예전에는 거의 흑백 비슷했으나 나중에 채색을 했다. 색
이 입혀져서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려진 폼은 그다지 별로인 것 같다.
꼬랑지를 강하게 쳐들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모습은 제법 용맹이 깃들여져 보이며, 새하얀
긴 수염을 지닌 산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호랑이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
자(童子)가 찻잔을 들고 서 있는데, 동자라 하기에는 너무 늙어보인다. 그래서 내가 일행들에
게 우스개 소리로
'저 찻잔을 든 사람은 원래 산신이었는데, 산신들간의 경쟁에 밀려 산을 말아먹고 길거리에
나앉았다. 그래서 먹고 살려고 저 산신의 비서로 취직한 것이다'

▲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보물 749호

태고사 경내에서 산신각을 거쳐 뒤쪽(봉성암 방면)으로 2분 정도 오르면 수려한 모습의 원증
국사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앞서 언급한 보우대사의 넋이 담긴 부도탑으로 그가 입적하
자 그가 세웠던 태고사에 사리를 봉안하고 일부는 용문산 사나사로 보내 탑을 만들어 봉안했
다.

그는 열반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는데. 그도 죽기 전에야 인생무상을 뼈
저리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죽음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袋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 부도는 기존의 고려시대 부도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유명한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그 위에 마치 조그만 부도가 들어앉은 듯한 지붕돌을 두었으며,
그 위에 다시 특이한 모습의 머리 장식을 얹었다.


▲  원증국사탑과 새로운 부도탑

기단의 아랫 부분에는 정교한 꽃무늬가 잔뜩 새겨져 있으며 8각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무
늬와 꽃무늬로 가득하다. 탑의 조성 시기는 1385년 무렵으로 멋드러진 탑의 모습을 통해 고려
조정의 보우국사에 대한 신임과 제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원증국사탑만 외로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어느 승려(이름은 모르겠음)의 탑
을 원증국사탑 아래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이곳에 탑을 세울 정도면 청암대종사와 더불어 태
고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승려가 분명하다.
아래쪽 부도는 보우대사에 대한 존경과 일편단심을 표하려는 듯, 위쪽 부도를 바라보고 있으
며, 그 모습도 많이 비슷하다. 특히 충주 정토사(淨土寺) 부도탑과 상당히 비슷한데 시원스레
올려진 지붕돌의 처마가 꽤 인상 깊다.

태고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대성암과 대남문(大南門)을 거쳐 구기동(舊基
洞)으로 하산했다. 본글은 노적사와 태고사를 중심으로 다룬 글이라 그 외에 자잘한 내용은
쿨하게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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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9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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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 하류에 닦여진 문화유산의 너른 보금자리,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문산리 돌다리, 문의 문산관, 문화유물전시관>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겨울 나들이 '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  전망대에서 바라본 문의문화재단지

문산리 돌다리 청주 관정리 고가

▲  문산리 돌다리

▲  청주 관정리 고가

 



 

차디찬 겨울 제국(帝國)이 속절없이 깊어가던 2월의 첫 무렵, 청주 문의면에 자리한 문의
문화재단지를 찾았다.
햇님이 출근하기가 무섭게 충북의 중심 도시인 청주(淸州)로 넘어가 청주시외터미널 부근
기사식당에서 일찌감치 점심을 섭취하고 청주시내버스 311번(비하동↔문의)을 타고 문의(
文義)로 이동했다.

대청호(大淸湖) 중류 부분에 자리한 문의는 청주시의 일원으로 문의면의 중심지는 미천리
이다. 오랫동안 독자적인 고을을 유지했던 지역으로 1895년 문의현(縣)에서 문의군(郡)으
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 청원군(淸原郡)의 일부로 통합되면서 청주의 일부로 완전히 묻히
고 말았다. (2014년 7월, 청원군이 청주시에 통합되면서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이 됨)
1983년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의 중심지인 문산리(文山里)가 수몰되자 양성산 밑인 미천리
(米川里)에 작은 도시를 지어 이전했으며, 문의의 산하가 적지 않게 대청호에 희생되면서
주민 절반이 정든 고향을 등지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180도 이상 성형된 문의면은
첩첩한 산주름과 너른 호수가 어우러진 그야말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의 고장이 되었으며,
1983년에 지어진 대통령의 별장인 청남대(淸南臺)가 문의면 남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청주의 새로운 꿀명소로 크게 애지중지되고 있다.

문의 종점(미천리)에서 문의문화재단지까지는 도보 10~15분 거리로 문의대교 방면으로 가
는 시내버스를 타면 편하지만 배차간격이 오지게 길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어차피 거리도 짧다.



 

♠  대청댐이 빚은 산물이자 옛 문의 고을의 소소한 재현,
문의문화재단지(文義文化財團地) 입문

▲  문의문화재단지 입구에 마련된 하트 포토존(Photo Zone)

문의문화재단지(이하 문화재단지) 북쪽 밑에는 주차장이 넓게 닦여져 있다. 주차장에서 문화
재단지까지 오르막길이 느긋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 시작점에 긍정의 아이콘인 하트 모양의
조형물이 마중을 나와 내 기분을 썩 좋게 해준다. 하트 모형 앞/뒤로 의자가 닦여져 있는데,
하트와 문화재단지 오르막길을 배경으로 하는 포토존(사진 찍기 장소)의 역할을 맡고 있다.

문화재단지에 대한 첫 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는 하트 모형을 지나 2분 남짓 오르면 그 길
의 끝에 성문(城門) 모양의 문화재단지 정문이 길을 막는다. 이곳의 뒷산인 양성산(養性山,
378m)의 이름을 따서 정문 이름을 양성문(養性門)이라 했는데, 그 좌우로 성곽을 짧게 펼쳐놓
아 마치 옛 문의고을 읍성(邑城)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허나 이들은 옛 것이 아닌 문화재단지
를 지키는 울타리로 1997년에 지어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채 여물지도 못했다.

양성문에는 매표소가 있으니 입장료가 무려 1,000원이나 한다. 허나 내게는 꿩 대신 닭을 고
를 권한 조차 없어서 그 돈을 지불하고 유료(有料)의 땅으로 들어섰다.


▲  문의문화재단지 정문인 양성문 (왼쪽 창구가 매표소)

대청호가 바라보이는 양성산 동쪽 자락에 문의문화재단지가 넓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대청
댐으로 인해 강제로 제자리를 잃은 문의 지역 문화유산과 청주 각지에서 기증을 받거나 개발
의 칼질로 보금자리를 잃은 문화유산을 수습해놓은 현장이다. 좋게 말하면 청주의 역사와 문
화유산을 모은 전통문화의 현장이고, 우울하게 말하면 집을 잃고 오갈 데가 없는 문화유산을
수습한 그들의 피난처이다.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의 적지 않은 곳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심지어 문의면 중심지인 문산리
까지 강제 잠수를 타게 되었으니 이곳의 심각한 상황을 알만하다. 그래서 수몰지에 있던 문화
유산을 문의면의 새 중심지인 미천리 일대로 수습했는데, 다들 서로 떨어져 있어 관리에 어려
움이 생기자 이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1997년 지금의 자리에 터를 닦기 시작해 1999년에 최종
완성을 보았다.

이렇게 댐 건설로 수몰 지역에서 가져온 문화유산을 모아놓은 곳으로 충주댐이 빚은 제천(提
川)의 청풍문화재단지, 안동댐이 빚은 안동(安東)의 안동민속촌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산업화를 위한 개발의 칼질이 빚어낸 산물로 전기 생산과 물 관리를 위해 댐을 만들면서 사람
과 문화유산 모두 제자리에서 발을 떼도록 만들었다.
수몰 지역 실향민과 마찬가지로 제자리를 잃은 비극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들을 한곳에 모아놓
아 일종의 문화재단지나 민속마을을 만드니 짧은 시간에 그 지역에 주요 문화유산과 역사를
둘러볼 수 있으며, 관리와 보존에도 용이하다. 그러니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는 것이다.

문의문화재단지는 금강(錦江)을 앞에 두고 양성산을 뒤에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로 수몰 지역에서 가져온 문화유산과 청주 각지에서 옮겨온 문화유산까지 흡수하여 청주
제일의 문화유산 집합지로 성장했다. 게다가 청주의 역사와 동산(動産) 문화유산을 담은 문화
유물전시관과 현대 미술을 다룬 대청호미술관까지 갖추고 있어 청주의 문화와 역사, 예술의
새로운 중심지이며, 산과 호수를 옆구리에 낀 하늘도 반한 명소로 이곳의 값어치를 크게 불리
고 있다.

문화재단지에는 옛 문의군의 객사인 문산관을 비롯해 문산리 돌다리, 노현리 고가, 부강리 고
가, 관정리 고가 등의 지방문화재와 고인돌, 옛 비석, 효자각, 충신각, 학소리 유적 등이 있
다. 그 외에 양반가, 주막집, 토담집, 성황당, 돌탑, 성문과 성곽 등을 재현했으며, 문화유물
전시관에는 청주의 선사시대와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유물과 역사를 담았다. 또한 애국지사
조형물과 조각공원, 대청호미술관 등이 아낌없이 닦여져 있어 볼거리가 그야말로 풍년을 이룬
다.

* 문의문화재단지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산리 산6-1 (대청호반로 721,
  ☎ 043-201-0915)
* 문의문화재단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돌탑 무리들
양성문을 지나 문화재단지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돌탑들이 마중을 한다.

▲  아들을 기원하던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상징물, 기자석(祈子石)
<실물이 아닌 재현된 것임>


▲  문의면의 산하를 적지 않게 집어 삼킨 하늘빛 대청호

문의면의 옛 중심지인 문산리 마을은 저 호수 속에 고이 잠겨 있다. 대청호에 터전을 빼앗긴
실향민들은 저 호수의 물을 모두 빼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라 고향에 대
한 향수 또한 호수의 수심만큼이나 깊을 것이다. 뻔히 바라보이는 저 호수 속에 고향을 묻었
으니 말이다.

▲  대청호를 바라보고 선 초정(草亭)

▲  서덕길 효자각(徐德吉 孝子閣)

서덕길 효자각은 문의 출신 효자(孝子)로 이름이 높은 서덕길(1599~1658)의 효행을 기리고자
그가 살았던 문의면 도원리 마장마을에 1706년 나라에서 지어준 1칸짜리 정려각(旌閭閣)이다.
그의 후손(이천서씨)들이 계속 관리하고 있었으나 1997년 이곳에 의탁되면서 문화재단지의 일
원이 되었다.


▲  청주 각지에서 수습된 고인돌(지석묘)들

서덕길 효자각 맞은편에는 3기의 고인돌이 바짝 엎드려 있다. 이들은 미원면 수산리와 내수읍
학평리, 문의면 가호리 아득이마을에서 가져온 것들로 이중 아득이마을 고인돌만 1997년 4월
수몰지에서 가져온 것이고, 학평리 고인돌은 1997년 5월에, 수산리 고인돌은 같은 해 7월 관
리상의 이유로 제자리를 떠나 이곳에 안착했다.
이들은 옛 조선이 천하에 크게 위엄을 날렸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지역 세력가의 무덤
으로 학평리 고인돌은 마을 사람들이 개석(蓋石, 뚜껑돌)을 제단(祭壇)으로 삼아 매년 정월대
보름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모두 개석만 남아있는 상태로 개석을 받치는 기둥과 석실(돌방
)은 없어졌다.


▲  청주 관정리 고가(官井里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38호

고인돌 무리 옆에는 초가 돌담을 두룬 고색의 초가집이 자리해 있다. 낭성면 관정리에 '신방
호'란 사람의 집으로 청주시(청원군)가 인수하여 1994년 이곳으로 가져왔는데, 전형적인 중부
지방 초가로 'ㅡ' 형태의 안채와 대문이 있는 광채로 이루어져 있다.
사주문(四柱門) 같은 경우에는 원래 담장 사이에 있었으나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광채와 함께
설치하여 약간의 변화를 주었으며, 안채 뒷쪽에는 장독대들이 놓여져 있고, 안채에는 전통 체
험이나 혼인식 때 쓰이는 가마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  무늬만 남은 관정리 고가 장독대들

▲  관정리 고가 안채에 들어앉은 가마


▲  초가 주막(酒幕)
1995년에 지어진 중부지방 스타일의 초가 주막이다. 예천(醴泉)의 삼강주막처럼
전통 주막으로 활용하면 좋을듯 싶은데, 음료수 자판기만 한쪽에
설치되어 있을 뿐, 그냥 묵혀두고 있다.

▲  1998년에 지어진 민화정(民和亭)

▲  민화정 현판의 위엄
옛날 문의 고을에 있었던 '민화루'에서 이름을
따왔다. <김수온(金守溫, 1409~1481)이
누각 이름을 지음>



 

♠  문화유물전시관 주변

▲  문의문화재단지 문화유물전시관

문화유물전시관(유물전시관)은 대청호로 제자리를 잃은 문의 지역의 문화유산과 청주 각지에
서 가져온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문화유산을 머금고 있다.
(전시관 유물은 일부만 사진에 담았으며, 그 일부만 본글에 꺼냈음)


▲  구석기 사람들의 두루봉동굴 생활 모습

청주에는 천하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구석기 유적이 있다. 바로 문의면 노현리에 있는 두루봉
동굴이다. 중고등학교 국사책은 물론 온갖 국사 관련 수험서, 참고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존재
로 그의 이름 5자만 외우고 있으면 선사시대 관련 문제 하나는 그냥 따놓은 것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그 시대에서 비중이 큰 존재이다. 특히 이 땅에서 유일하게 구석기 사람의 뼈가 발견
되었으며, 지금은 사라진 8종의 동물 뼈도 발견되는 등, 그 시절의 다양한 흔적과 유물이 쏟
아져 나와 머나먼 구석기시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나도 그의 존재를 익히 듣고 있던 터라 그의 안부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발굴 이후 개발의
칼질(석회석 광산)에 완전히 아작이 난 상태였다. 겨우 흔적 일부만 간신히 고개를 들고 있을
뿐으로 그들이 발견된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석회석 채석장이 계속 둥지를 틀며 동굴
주변의 살을 깎아내고 있었다.
다채로운 유물이 쏟아져 나온 구석기시대의 소중한 보고(寶庫)가 어찌하여 개발의 칼질에 난
도질을 당하도록 방치가 되었는지 심히 개탄스럽기 그지 없다. 하긴 우리 역사를 축소 왜곡하
느라 급급한 더러운 식민사관 쓰레기들이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니 오죽할까.
(두루봉동굴에서 나온 유물과 흥수아이의 해골, 복원된 전신상은 청주 충북대박물관에 있음)


▲  꽃을 사용했던 구석기 사람들의 장례 풍습

두루봉동굴 중에는 흥수동굴이란 가지 굴이 있다. 이곳에서는 약 40,000년 전 구석기 후반에
살았던 사람의 뼈가 나와 천하 고고학계를 잔뜩 흥분시켰는데, 그 해골을 검사한 결과, 어린
이로 파악이 되었다. 그래서 그 해골을 '흥수아이'로, 동굴을 '흥수동굴'이라 이름지었는데,
이는 그 동굴을 처음 발견한 석회석 광업소 현장소장인 '김흥수'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렇게 수만 년 묵은 해골이 미라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있던 것은 이곳이 알칼리(Alkali)성
석회암 지대라 그렇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 동굴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 동굴을 앞장서서 아작을 냈다는 것이다. 그
러니 지금이라도 그 동굴과 해골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파괴한 이들의 이름을
달아주는 것은 동굴과 구석기 해골에 대한 예의가 아닐터, 아주 쉽게 지역 이름(문의면 노현
리)을 따서 노현동굴, 노현아이라고 하면 어떨까.

흥수아이 해골이 발견된 곳에서는 매장 흔적이 나왔는데, 납작한 석회석 판자돌을 놓고 흙을
덮은 다음, 그 위에 시신을 두었다. 이를 통해 시신을 아무 데나 버리거나 방치한 것이 아닌
나름 형식을 갖추어 매장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해골 주변의 흙을 분석해보니 가슴뼈 부분에서 많은 양의 국화과 꽃가루가 나왔다. 이는
국화꽃을 죽은 이에게 바치며 애도했음을 보여주며, 국화가 만발했던 가을에 아이가 죽었음을
수만 년이 지난 우리에게 살짝 속삭여준다. 물론 구석기인의 장례 문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
견이 분분하나 흥수아이를 통해 그들도 매장 형식을 갖추고 꽃으로 애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꽃을 좋아하고 또한 그것으로 애도를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원초
적 본능인 모양이다.


▲  목이 사라진 오송읍 쌍청리 석불
쌍청리 봉도리마을 이상현씨 집 뒷쪽에 있던 석불로 199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높이 95cm, 어깨 폭 34cm으로 고려 때 석불로 여겨진다.

▲  옛 사람들의 낙서판, 주역석(周易石)

주역석은 선비나 사대부(士大夫)가 태극과 팔괘를 중심으로 자연의 생성원리를 밝히며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살겠다는 희망사항을 새긴 바위 낙서판이다. 그 내용이 주역(周易)과 일치하여
주역석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남이면 부용외천리에서 가져온 것으로 돌판 윗쪽과 사방
모서리에도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그야말로 돌판 전체를 주역의 내용으로 빼곡히 도배를 한
것인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대략 이렇다.
'오랜 세월 음(陰)은 세상을 열고, 양(陽)은 세상을 감싼다. 음과 양은 세상의 모든 원리를
내포하고 팔괘도(八卦圖)가 이들을 맑게 한다' (한문은 생략함)


▲  태함(胎函)
조선 왕족의 태를 머금은 석물로 낭성면 무성리 태봉산에 있던 영조(英祖)의
태함으로 여겨진다.

▲  옛 사람들의 큼직한 수저들 - 오늘날 숟가락보다 훨씬 크다.

▲  고려, 조선시대 기와들

▲  괴산 외사리에서 출토된 와당(瓦當)들

▲  백제 와당들

▲  어처구니를 잃은 늙은 맷돌

문화유물전시관에 전시된 기와(와당)는 모두 청주 지역 사람들이 기증한 것이다. <옥산면 출
신인 재단법인 간송문화재단의 고(故) 권태성, 부강면(원래 청원군이었으나 지금은 세종시 관
할)의 전상복, 문의면 괴곡리에 박승인 등>
멀리 백제부터 가까이는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기와들이 시대를 초월하며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데, 이중 괴산 외사리 와당은 그 유명한 산막이옛길(☞ 관련글 보기)
이 있는 외사리 절터에서 수습된 것이다.


▲  청주 문산리 돌다리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22호

유물전시관 앞에는 오래된 돌다리가 놓여져 있다. 그를 위해 작게 연못을 파고 다리를 두었는
데, 겨울 제국이 씌워놓은 두터운 얼음이 연못을 꽁꽁 봉해버렸다.

이 돌다리는 원래 문산리 문의초교 정문 남쪽에 있던 것으로 다리 양식으로 보아 고려 때 조
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리의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헌종(憲宗) 때 편찬된 '충청도읍지'
로 다리 상판은 2.5x0.3~0.9m 규모의 화강석과 청석 10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주(石柱)는
1.3m의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상판 장대석(長臺石)은 장축(長軸)을 남북으로 하여 2매씩 연
결하고 동서로 5매씩 연접해 마루식으로 만들었다. 남북 장축 중간에는 동서로 교각을 두었으
며, 석재는 일정한 크기가 아닌 거칠게 다듬었다.
다리의 구조는 하부에 석주를 세우지 않고 통돌을 사용해 교각의 역할을 하게 하였고, 멍에석
을 설치하고 상부에 넓은 석재를 덮었다. 교각에는 '乙卯二月(을묘이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어느 을묘년 2월에 다리가 조성되거나 보수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산리 일대가 대청호에 희생되자 1980년 문산관과 함께 미천리로 이전되었다가 2002년 3월에
이곳에 들어왔다. 그래도 돌다리인지라 그의 체면을 위해 연못까지 깔아주었으니 비록 그 길
이는 짧아도 다리의 역할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다리 통행 가능)


▲  아직도 튼실한 문산리 돌다리 (옆에서 바라본 모습)

▲  오창에서 이곳으로 밀려난 학소리 유적 (I유적 1호 집자리)

돌다리 남쪽에는 학소리 유적을 품은 보호각이 있다. 같은 청주 땅이긴 해도 이곳과는 완전히
반대편인 오창면 학소리 불당산(해발 246m) 동남쪽 자락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청동기시대 집
터 4기, 석관묘 7기, 토광묘(土壙墓) 19점, 석기류 10점, 청동류 14점, 철기류 40점, 옥석(玉
石)류 15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소중한 옛 흔적을 내비친 학소리 유적이 제자리를 두고 머나먼 이곳으로 내려온 이유
는 510번 지방도 우회도로가 바로 유적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개발이 우선인 이 땅의
현실에서 아무리 엄청 늙은 유물과 유적이 쏟아져 나와도 개발의 칼질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
한 존재라 신작로(新作路)에게 자리를 모두 내주고 겨우 I유적 1호 집자리만 이곳으로 넘어왔
다. (나머지는 모두 밀어버림) 그래도 두루봉동굴처럼 개발의 칼질에 완전히 아작나는 꼴은
면했으니 그것으로도 다행이라 하겠다.


▲  남쪽에서 바라본 오창 학소리 I유적 1호 집자리

▲  옛 문의 고을의 비석들

이들 비석은 문의 고을 현감(縣監)과 이곳을 다녀갔던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의 공덕비, 선정
비(善政碑)들로 문의 고을의 오랜 내력을 알려준다. 장대한 세월이 달아준 검은 주근깨와 얼
룩진 피부가 고색의 내음을 진하게 선사해주는데, 원래 문산리와 미천리 일대에 흩어져 있던
것을 대청댐 건설로 모두 미천리 일대로 집합시켰다가 1997년 4월 이곳으로 옮겼다.
저중에는 정말로 비석을 받을만한 사람도 있겠지만 마땅한 선정(善政)도 없음에도 억지로 챙
긴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 자신
의 배때기를 채우는 지방 관리가 적지 않았다.


▲  동그란 석조(石槽)로 이루어진 샘터
문의문화재단지를 닦으면서 만든 산사(山寺) 스타일의 석조 샘터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목을 무한리필로 아낌없이 축여준다. 석조 피부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어 잠시 고적한 산사의 샘터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김선복 충신각(金善復 忠臣閣)

샘터 옆에 자리한 김선복 충신각은 임진왜란 시절 중봉 조헌(重峯 趙憲)을 따라 왜군과 싸웠
던 김선복(1571~1592)의 충절을 기리고자 조선 후기에 문의면 동동리 정가울에 세운 것이다.

김선복은 조헌의 수하로 불과 21살 나이에 청주성 공격에 참전해 공을 세웠으나 그가 무리하
게 벌인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그때 불과 700여 명으로 왜군 15,000명과 무
작정 싸웠으니 딱히 계략을 쓰지 않는 이상은 그야말로 불가능했다.

충신각은 1칸짜리 팔작지붕 건물로 김선복의 후손(의성김씨)들이 관리하여 오다가 1997년 이
곳에 의탁했다.



 

♠  부강리 고가, 문산관 주변

▲  양반가옥

김선복 충신각 옆에는 잘 지어진 기와집(양반가옥)이 있다. 1994년 문화재단지 수식용으로 지
어진 것으로 중부지방 양반 한옥을 재현했는데,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가묘, 광채 등을 갖
추고 있으며, 집 안에 별도의 담장을 둘러 사랑채와 안채, 가묘를 두었다.

▲  양반가옥 안쪽에 자리한 사랑채와 안채

▲  집 주인의 생활공간인 사랑채

▲  3대 조상까지 제를 지내던 가묘(家廟)

▲  벽에 붙여진 부적


▲  부강리 고가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21호

문산관 밑에는 부강리(현재 세종시 부강면 부강리)에서 옮겨온 늙은 기와집이 있다. 집은 안
채와 광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채가 원래 집으로 1995년 집 주인이 청원군(청주시)에 집을
내놓으면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그 이후에 돌기와집 형태의 광채를 새로 덧붙여 지금의 모
습을 이루게 되었다.

▲  부강리 고가 안채

▲  안채 툇마루

제아무리 잘 만든 집이라 해도 사람이 살지 않
으면 금방 망가지기 마련이다. 집은 좋든 싫든
사람의 손때를 타야 별탈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문화재단지에서 노후를 보내게 되어 그
리 망가질 일은 없겠지만 그냥 저리 장식용으
로 두는 것보다는 전통 가옥 체험이나 민박용
으로 활용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호수가 바라
보이는 언덕에 그림처럼 자리한 늙은 한옥에서
의 하룻밤 체험도 괜찮아 보인다.

▲  뒷쪽에서 바라본 부강리 고가

 


▲  오호라 통제라.. 몸단장으로 몸을 가린 매정한
'문의 문산관(文山館)'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49호


문화재단지 가장 윗쪽에는 문의고을의 객사(客舍)였던 문산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가
장 존재감이 큰 건물이나 유감스럽게도 내가 갔을 때는 몸을 꽁꽁 가리며 한참 몸단장 중이었
다. (기와 교체 및 좌익사 보수공사) 그래서 그의 온전한 모습을 구경하지 못했지. 가는 날이
문 닫는 날이라고 진짜 날 하나는 기가 막히게 못 맞췄다.

나를 상심케 만든 문산관은 제왕의 전패(殿牌)를 봉안하여 지방 관리들이 매월 2회 예를 올리
는 공간이자 조정에서 출장을 나온 관리의 숙식을 제공하던 객사이다. 건물 구조는 가운데에
3칸짜리 정당(正堂)을 두고 그 좌측에 4칸, 우측에 3칸 건물을 날개처럼 덧붙이니 이것을 익
사(翼舍)라고 하여 좌익사, 우익사라 불렀다. 그래서 문산관은 정면이 10칸 규모가 된다. 정
당에는 전패가 담겨져 있는데, 벽돌로 바닥을 깔았으며, 숙소로 사용된 좌/우익사는 우물마루
를 깔았다.

이 건물은 1666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지붕 암막새 기와에 '擁正六年 戊申四月(옹정
6년 무신4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1728년 4월에 중건되었음을 살짝 알려준다. 허나 1910
년 이후 왜정(倭政)은 문의 고을의 관청 건물을 싹 밀어버리고 달랑 문산관만 생색내듯 남겨
두었는데, 그마저도 문의국민학교(문의초교) 건물로 변질시켜 망국(亡國) 관청의 건물을 욕보
였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 문의초교 건물로 쓰였으며, 대청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이전 비용(3,000만원)이 여의치 않아 이전 대책도 딱히 세우지 않으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 대책이 마련되어 1979년 문의향교 옆으로 이전되었으며, 이때 앞서 언급했던 문산리
돌다리를 문산관 앞에 놓았다. 이후 1997년 지금의 자리에 안착했다.

객사 건물은 전주 고을 객사인 풍패지관(豊沛之館)과 비슷한 모습으로 비록 규모와 양식면에
서는 그보다 떨어지지만 이 땅에 흔치 않은 객사 건물 형식으로 문의 고을의 위상을 보여준다.


▲  옆에서 바라본 문의 문산관
원래 공사기간은 20일 전까지였는데 무슨 영문인지 아직까지도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문산관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  흑백사진에 담긴 문산관의 흑역사
문산관을 가린 임시 담장에는 문산관의 현재와 과거 사진을 걸어두었다. 과거 사진
중에는 1978년 사진도 있는데, 오랫동안 초등학교 건물로 쓰이면서
원형을 많이 잃었던 흑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  문산관 보수 공사에 투입된 기와들
저들이 모두 지붕 위에 올라가야 끝나는데
아직도 저만큼이나 남아있었다.

▲  문화재단지 전망대로 인도하는 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  문화재단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전망대

문산관에서 박석이 입혀진 남쪽 오솔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전망대가 있다. 문산관과 더불
어 문화재단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현장으로 이곳에 오르면 문화재단지 일대와 대청호,
그 너머 산줄기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문의문화재단지
높은 곳에서 옛 문의 고을을 굽어보는 기분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문의문화재단지와 대청호

▲  전망대에서 바라본 노현리 고가(왼쪽 'ㄱ'자 집)와
옹기전수관 (오른쪽 기와집)

▲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청호미술관 주변과 대청호



 

♠  문의문화재단지 마무리

▲  여막(廬幕)

전망대와 양반가옥 사이에는 초가 지붕을 지닌 돌집이 있다. 옛날식 창고인가 싶어서 살펴보
니 여막이라 불리는 집이다. 여막이란 무덤 부근에 지어놓고 상주(喪主)가 상을 마칠 때까지
머물던 집을 일컫는다.
문화재단지가 제자리를 잃은 문화유산의 보금자리긴 하지만 민속촌의 역할도 겸하고 있어서
문화재단지를 닦으면서 초가, 기와집, 돌탑 등을 새로 지어놓아 이 여막도 그런 것인줄 알았
는데 알고 보니 나름 사연이 있는 집이었다.
강내면 연정리 한양조씨 집안인 조육형과 그의 아버지인 조병천이 20세기 한복판에 대를 이어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신문과 방송에 크게 대서특필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의 효행을
기리고자 그들이 사용했던 여막을 재현한 것이다. 물론 그 옆에 무덤도 그대로 재현했다.

조병천(趙炳天) 같은 경우는 1957년 그의 아버지가 별세하자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무려 3년
씩이나 생식(生食)을 하며 시묘살이를 했다. 그 이후 무덤 일대에 공단이 들어서자 부득이하
게 다른 곳으로 무덤을 옮겼는데, 이때 또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  조병천의 시묘생활 모습

▲  조병천의 아들인 조육형의 시묘생활 모습

▲  여막 안에 재현된 시묘살이 모습
3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그 3년 동안 저렇게 살았다고 한다.

▲  조병천이 시묘살이 때 신었던 짚신과
가죽가방

▲  여막 옆에 재현된 무덤


▲  노현리(蘆峴里) 고가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20호

여막 밑이자 옹기전시관 이웃에는 기와집과 초가를 모두 지닌 노현리 고가가 자리해 있다. 이
집은 원래 강릉김씨 김승지의 종가(宗家)로 나중에 연안이씨 집안인 괴정 이현승(槐庭 李顯承
)에게 넘어갔으며, 그의 손자인 이양훈이 1993년 문의문화재단지에 집을 넘겼다.
안채는 'ㄱ'자 구조의 기와집이며, 광과 사주문 측간(厠間)은 초가로 되어 있어 기와집과 초
가가 서로 어우러진 공간이 되었다.


▲  윗쪽에서 바라본 노현리 고가와 대청호

▲  초가로 이루어진 측간

▲  양반가의 기품이 느껴지는 안채

▲  옹기전수관 뒷쪽에 재현된 옹기 가마터

▲  옹기전수관 앞길


▲  애국지사 일곱 분의 상

대청호미술관 맞은편에 왜정 시절 독립운동을 벌였던 청주 지역 애국지사 7인의 상(像)이 봉
안되어 있다. 그 7명의 위인(偉人)은 신석구(申錫九, 1875~1950), 권병덕(權秉悳, 1867~1944
), 한봉수(韓鳳洙, 1883~1972),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신
규식(申圭植, 1880~1922), 신홍식(申洪植, 1872~1937)으로 이중 단채 신채호 선생(대전 어남
동 출생)을 제외하고 모두 청주 출신이다.
애국지사 7인은 모두 앉아있는 모습으로 나그네로 하여금 잠시 마음을 숙연케 한다. 이 땅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그들이지만 정작 이 나라는 아직도 친일매국노의 후손
과 친일 잡것들의 손에 감싸여 종잡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으니 저들도 지하에서 통곡을 하
고 있을 것이다.


▲  청주시립 대청호미술관 표석과 조각공원 표석

문화재단지 가장 남쪽에는 청주시립 대청호미술관이 자리해 있다. 2004년 10월 2일 문을 열었
으며, 충북 최초의 공립미술관으로 청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3개의 전시관과 야외조각공원
을 갖추고 있으며, 기와집을 얹힌 3층 꼭대기에는 라운지룸과 전망대가 있다. 부지 면적은
4,900㎡, 건물 연면적은 1,411㎡의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입장료는 문의문화재단지 관람
료에 포함되어 있으며, 관람시간 역시 문화재단지와 같다.

따스한 미술관 내부로 들어서 3개의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죄다 추상 미술 일색이었는데, 무
슨 내용인지는 봐도 모르겠다. 옛날 미술은 다소 흥미가 가는데 현대 미술은 그리 정도 가지
않고 내 체질에도 맞지 않다. 하여 주마등(走馬燈)처럼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야외조각공원(
대청호조각공원)을 간단히 살펴보고 자리를 떴다.

* 청주시립 대청호미술관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산리 산6-1 (대청호반로 721,
  ☎ 043-201-0910~14)


▲  대청호미술관에서 양성문으로 바로 이어지는 산책로

▲  양성문에서 바라본 대청호
호수에 떠있는 존재는 인공수초 재배섬이다.

▲  문의문화재단지를 뒤로 하며

작지만 볼거리가 많았던 문화재단지를 2시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비록 문산관
이 몸을 가리며 몸단장 중이라 그의 모습을 살피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 외에 어지간한
것들은 죄다 살펴보았으니 그것으로도 배가 부르다.

햇님의 퇴근까지 시간이 넉넉하여 문화재단지 뒷산인 양성산과 그곳에 깃든 양성산성을 보고
자 했으나 산을 타기가 귀찮아서 몇 발자국 만에 그만두었다. 그들은 모두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미루고 문의(미천리) 중심지로 나와 동네마트에서 과자, 음료수를 사먹으며 허기진
배를 달래다가 문의 중심지 뒷쪽(서쪽)에 자리한 문의향교(文義鄕校,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94
)를 찾았다.
향교는 늘 그렇듯이 모든 문이 굳게 봉해져 있어 낮은 돌담 너머로 향교의 구성원인 대성전(
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 등을 구경했다. 게다가 사진도 별로라 여기서는 빼도록 하겠다.

이렇게 하여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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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의 지붕을 거닐다. 상도동 사자암~국사봉~동작충효길6코스 동작마루길 <상도근린공원, 성현드림숲공원>

상도동 사자암, 국사봉, 동작충효길(동작마루길)



' 동작구 사자암, 국사봉, 동작마루길 봄나들이 '

▲  국사봉 정상

▲  사자암 단하각

▲  동작마루길 (상도근린공원)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어느 따사로운 주말, 오래간만에 상도동(上道洞) 사자암을
찾았다. 사자암을 비롯하여 미답처(未踏處)인 국사봉 정상과 동작충효길6코스(동작마루길
)를 싹 둘러보고자 찾은 것으로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2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1호선을 타고 한강을 넘어 노량진역에서 두 발을 내렸다.

노량진역에서 동작구 마을버스 02번(사자암-노량진역)을 추가로 탑승하여 상도3동 뒤쪽에
자리한 사자암 종점에서 내렸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왼쪽(남쪽)으로 오르막 숲
길이 나타나니 바로 그 길의 끝에 국사봉 사자암이 걸려있다.


▲  사자암 오르막길 ①
오색 연등이 푸른 허공을 희롱하며 중생들을 사자암으로 인도한다.
만약 길이 햇갈린다면 그저 연등만 믿고 올라가면 된다.

▲  사자암 오르막길 ②



 

♠  국사봉 그늘에 둥지를 튼 아늑한 고색의 암자
상도동 사자암(獅子庵)

▲  사자암 일주문(一柱門)

상도동의 듬직한 뒷산인 국사봉(國思峰, 186.3m) 북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은 사자암은 조
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396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옮기고자 무학을 미리 보내 풍수지리를 살피게
했는데, 만리현(만리동)이 밖으로 도망가는 백호(白虎)의 형상이고, 호암산(虎巖山)은 북쪽으
로 달리는 호량이의 형국이라 풍수상 서울에게는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여 그 기세를 막
고자 호암산에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의 호압사(虎壓寺, ☞ 관련글 보기)를 짓고 사자 형상인
국사봉에 사자암을 세우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는 것이다.
허나 무학의 창건설은 딱히 근거와 유물은 없는 실정이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가 17세
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다. 하여 빠르면 15세기 정도, 늦어도
16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호압사와 함께 서울을 지키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
로 세워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만큼 옛 사람들에게 있어 풍수지리는 절대 진리나 다름이
없었다. 참고로 절 이름인 사자암은 국사봉 바위가 사자처럼 생겨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어쨌든 창건 이후 300년 이상이나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다가 18세기 한복판에 이르러 비
로소 제대로 된 활자 기록이 등장한다.
1726년 숙종의 6째 아들 연령군(延齡君, 1699~1719)의 부인 서씨가 너무 일찍 죽은 남편의 명
복을 빌고자 극락보전 아미타불(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했으며, 1846년
에 지장탱과 신장탱을 조성하고 1880년에는 현왕탱을 봉안했다.
1910년 경암(敬庵)이 극락전과 산신각, 요사채를 중수했으며, 1936년 성월이 극락전을 보수했
다. 그리고 1977년 원명이 주지로 부임하여 조실당(祖室堂)을 짓고, 1985년에 극락보전과 단
하각, 수세전, 요사 2동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단하각과 수세전, 강당 등 7~8동 정도의 건물을 지
니고 있으며 절이 들어앉은 자리가 협소하여 극락보전 뒤쪽 가파른 언덕에 단하각과 수세전을
닦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신중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0호),
영산회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8호), 현왕도(
울 지방유형문화재 289호), 목조보살좌
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50호)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중 신중도와 목조아
미타여래좌상만 속세에 공개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친견이 극히 어렵다. 다만 영산회괘불도(
靈山會掛佛圖, 1909년 작)는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는 편이다.


▲  사자암에서 바라본 아담한 천하 (상도동, 대방동, 여의도 지역)

상도동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숲속에 진하게 묻혀있던 산사였다. 허나 1960년대 이후 서울 인
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그로 인해 서울의 몸집이 지나치게 커짐에 따라 변두리인 이곳까지
거친 밀물처럼 집들이 들어찼다. 다행히 개발의 칼질이 사자암 앞에서 그 꼬랑지를 내리면서
사자암과 국사봉 윗도리는 자연의 공간으로 남게 되었고 사자암은 이렇게 자연(국사봉)과 속
세의 경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비록 옛날만큼의 운치는 아니어도 국사봉의 푸른 숲이 절을 남쪽에서 감싸고 있어 산사(山寺)
의 내음은 변함이 없다. 절을 이루는 건물은 근래에 지어진 것들이라 겉으로 우러나오는 고찰
의 내음은 말라버렸지만 신중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통해 오랜 내력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시내와도 무척이나 가까워 접근성도 괜찮다. 게다가 암(庵)이란 이름에 걸맞게 절
의 크기도 조촐하여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도 없다.


* 사자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3동 280 (국사봉1길 235-14 ☎ 02-825-1046)


▲  사자암 강당(講堂, 설법전)

사자암 경내로 들어서니 조금은 모를 답답함이 밀려온다. 터가 좀 작다보니<그래도 우리집보
다는 오지게 넓음> 그 좁은 공간에 건물을 꾸역꾸역 심어 여백의 미가 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극락보전도 강당과 좁은 간격을 두고 자리해 있어 탑이나 석등을 세울 공간도 마땅치 않다.

극락보전 맞은편에 자리한 강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교육과 행사 공간으로 대방(大房), 설법전(說法殿)으로 불리며 종무소(宗務所)와 선
방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연등이 허공을 가르고 있는 강당 뒷쪽

▲  공양간을 지닌 동쪽 요사와 그 뒤쪽에 자리한 단하각 (오른쪽 건물)

▲  공양간에 담긴 조왕탱화(竈王幀畵)

사자암 공양간에는 부엌지킴이인 조왕신<竈王神 = 조왕(竈王), 조왕대신(竈王大神)>이 그려진
조왕탱이 있다.
조왕이란 이 땅 고유의 신으로 부엌을 지키는 존재이다. 부엌을 관리하던 여인네들이 주로 숭
상했는데 불교가 산신과 칠성 등의 민간신앙을 거의 흡수하면서 조왕 역시 호법신중(護法神衆
)의 일원으로 스카웃되어 그 모습도 다른 신과 보살에 못지 않게 화려하게 변신했다. 하지만
기존의 호법신중과 조왕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 별도의 조왕탱으로 독립했다고 하며 그 성
격을 고려해 주로 요사나 공양간에 둔다.

조왕탱을 보면 제왕(帝王)의 복장을 한 조왕신이 수염을 어루만지며 조식취모(造食炊母)가 바
치는 후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노란 천이 깔려 고급진 이미지를 주는 책상에는 서적과 찻잔이
놓여져 있고, 그의 왼쪽에는 땔감 조달을 담당하는 담자역사(擔紫力士)가 항아리와 도끼를 들
고 서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공양간을 관리하는 조식취모라 불리는 여자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과일 쟁반을 조왕신에게 바친다.

부엌지킴이가 남자란 것이 매우 눈길을 끄는데, 조왕신이 꼭 남자만 있는 것은 아니며 속세에
서는 조왕할머니를 조왕신으로 많이 받들고 있다.

   ◀  범종(梵鍾)의 거처인 사자후(獅子吼)
극락보전 우측에는 범종의 보금자리인 범종각
이 있다.
범종은 1987년에 조성했고, 범종각은 1985년에
미리 지은 것으로 사자암에서는 범종각을 '사
자후'란 꽤 낯선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
는 모든 사람이 깨달음의 길에 오를 수 있도록
원음(圓音)의 사자후를 토하란 의미라고 한다.
또한 절의 창건 설화와 절의 이름도 그가 사자
후란 이름을 지니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강당과 마주하며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극락보전은 사자암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10년에 중건했으며, 1936년과 1985년에도 손질을 했다.
건물 안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3존상을 비롯해 신중도, 지장목각탱 등이 들어있으며 바
깥 벽에는 심우도와 달을 보면서 자신의 본성을 찾아서 본다는 간월견성(看月見性), 그리고
팔을 싹둑 잘라 믿음을 강하게 비췄다는 혜가대사(慧可大師)의 이야기를 다룬 벽화가 있다.


▲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6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머리가 유난히도 큰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장, 아미타불(목조아미타여
래좌상)이 온후한 표정을 머금으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그의 좌우로 녹색머리의 지장보살(地
藏菩薩)과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이 자리하여 아미타3존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 뒤로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에서 설법을 하는 장면을 담은 붉은 색채의 아미타후불탱이 든
든히 자리해 있다.

이곳 아미타불은 사자암에서 가장 늙은 보물로 예전에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 허나 근래 재평가를 해보니 17세기 초에 조각승인 현진(玄眞)이나 그의 제자들이 만든 것으
로 파악되고 있다. 다만 불상의 내력을 밝혀주는 복장 발원문(發願文)이나 유물이 없어 더 자
세한 것은 알 수 없으며, 17세기 초반 현진의 조각적 특징을 잘 갖추고 있고, 보존 상태도 양
호한 편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그는 키 108cm로 1726년에 연령군의 부인 서씨가 세상을 떠난
남편과 다시 만날 것을 꿈꾸며 절에 돈을 대어 불상에 금칠을 했다. 1974년에 연화개금을 하
였고, 1980년에 다시 개금(改金)을 했는데, 몸을 가린 대의(大衣)의 옷주름은 배 아래 부분에
서 크게 'U'자형을 그리고 있고 두툼한 옷주름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얼굴과 머리 부분이
다소 커 보인다.
머리 중앙에는 육계(무견정상)가 두툼히 솟아있고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
는데 두 손은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  사자암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7호

아미타3존상 좌측에는 신중도가 액자에 고이 담겨져 있다. 이 탱화는 1846년에 조성된 것으로
불교를 지키는 호법신장들이 정신없이 담겨져 있어 그야말로 혼을 빼놓는다.

그림을 살펴보면 금강저(金剛杵)를 든 위태천(韋太天) 동진보살이 그림 상단 오른쪽에 독수리
깃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다. 연꽃가지를 든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은 화면의 상단 좌
측 중앙에 두고 토속신을 곳곳에 배치했으니 이는 기존의 토속신을 받아들여 성장한 우리나라
불교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가로 223cm, 세로 162cm의 크기로 지포(紙布) 위에 그려졌으며,
그림을 그린 이는 송은당 수찬(松隱堂 守讚)이다.

사자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가 4점씩이나 되건만 속시원히 공개된 것은 신중도가 거의
유일하며 이번에도 신중도 밖에는 친견하지 못했다.


▲  단하각(丹霞閣)

공양간(동쪽 요사) 뒤쪽 언덕에는 이름도 낯선 단하각과 수세전이 높게 터를 잡아 경내를 굽
어본다. 이들은 정면과 측면이 달랑 1칸인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서로 비슷하게 생겼다.

단하각은 1910년에 중수했다고 하며, 현재 건물은 1985년에 원명이 중건한 것으로 우리에게
꽤 익숙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다. 그러니까 산신각과 독성각의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보면 되겠다.


▲  단하각 산신탱(왼쪽)과 독성탱(오른쪽)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들로 세월의 때가 좀 끼어서 그럴까.
조금은 늙어 보인다.

▲  수세전(壽世殿)

단하각과 비슷하게 생긴 수세전은 인간의 목숨과 수명, 무병장수를 관장하는 칠성(七星)의 거
처이다. 보통 칠성(치성광여래)을 봉안한 건물을 칠성각이라 부르지만 여기서는 그 흔한 이름
대신 인간의 수명을 뜻하는 수세전을 이름으로 취해 좀 튀어보이게 했다.

이 건물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내부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칠성탱이 있으며, 앞서 산신과
독성이 봉안된 단하각처럼 '각'을 칭하지 않고 '전'을 칭하고 있어 칠성이 그들보다 1단계 높
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보다 '전'이 격이 더 높음)


▲  단하각 앞에 멋드러지게 솟은 소나무의 위엄

▲  사자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일주문 직전에서 나무가 우거진 산자락(남쪽)을 보면 산비탈에 누운 커다란 바위가 여럿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중 일주문과 가장 가까운 바위를 잘 살펴보면 그 한복판에 네모나게 다져진
홈과 구멍이 마치 바위의 눈 같은 모습으로 시야에 보일 것이니 그가 바로 마애사리탑으로 그
주변에도 1기가 더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마애사리탑이란 바위에 네모지게 홈을 다지고 그 윗도리에 감실(龕室)을 내어 사리나 유골 등
을 넣어둔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 승탑(僧塔, 부도)의 모습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쉽게 말하
면 바위에 새긴 사리 보관함으로 보면 된다. 이런 사리탑은 18~20세기에 나타나는 양식으로
그럴싸한 승탑(부도)을 짓기 어려운 절에서 절 주변 바위를 이용해 사리탑을 다졌다. 그저 바
위와 그의 피부를 파고 다듬는 도구만 있으면 되니 아주 쉽고 간편하다. (그런 사리탑을 강제
로 문신처럼 지녀야 되는 바위는 좀 고통스러울 듯)

사자암 마애사리탑은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승려의 유골함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정
보가 없음;) 관련 명문이 새겨진 18~19세기 것과 달리 조그만 감실과 홈만 있어 조금은 빈약
하다.


▲  가까이서 바라본 조촐한 마애사리탑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소소한 마음 같다.

▲  하얀 글씨가 칠해진 또 다른 마애사리탑 (20세기 중~후반)



 

♠  동작구의 지붕, 국사봉(國師峰)의 감성을 누리다.

▲  사자암에서 국사봉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사자암을 20분 정도 둘러보고 마애사리탑 옆에 있는 산길을 통해 국사봉으로 들어섰다. 사자
암이 상당한 위치라 넉넉잡아 10분 정도면 손쉽게 정상에 이르는데 각박한 속세살이와 달리
경사도 별로 급하지 않고 숲 또한 무성하여 시원한 기운이 주변에 감돈다. 어느 정도 오르면
능선에 이르게 되며 능선에 발을 올리기가 무섭게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  태극기가 휘날리는 국사봉 정상

국사봉(186.3m)은 동작구(銅雀區)의 대표 지붕이자 서쪽 지붕이며, 관악구(冠岳區)의 북쪽 지
붕으로 동작구 상도동과 관악구 봉천동(은천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삼성산(三聖山)의 한
지맥이 북쪽으로 달려가 그 끝에 용솟음친 산으로 산줄기가 동서로 이어져 있으며, 동쪽은 국
립서울현충원을 품은 공작봉(서달산)과 연결된다.

국사봉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하고 있는데, 태종(太宗)의 장자인 양녕대군(讓寧
大君)이 이곳에 올라 멀리 서울과 경복궁(景福宮)을 바라보며 나라와 자신의 아우인 세종(世
宗, 충녕대군)을 걱정했다고 해서 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의 국사봉(國思峰)이 되었다고 하며,
무학대사가 산 북쪽에 사자암을 세웠는데 태조(이성계)가 그를 국사(國師)에 버금가게 대우했
다고 해서 국사봉이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국사봉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두 설 모두 공통되게 서울과 나
라를 걱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사자암은 서울을 지키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세웠다고 함
> 비슷한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국사봉 정상에는 천하 제일의 국기, 태극기가 열심히 휘날리고 있고, 국사봉 표석과 삼각점,
운동시설, 쉼터 등이 닦여져 있다. 서북쪽 자락에는 사자암이, 동북쪽 자락에는 양녕대군 묘
역이 있으며, 동작구의 야심작인 동작충효길의 6번째 코스, 동작마루길(4.8km, 신대방3거리역
↔현충원 상도출입문)이 이 산의 신세를 지며 동서로 흘러간다.
높이는 낮지만 동작구와 관악구 사이에 봉긋 솟아 싱그러운 쉼터가 되어주고 있으며, 숲이 매
우 짙고 산세가 완만하여 산책 코스로도 아주 좋다. 그러다보니 동네 사람들의 왕래와 관심이
높아 휴일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비록 동네 뒷동산이자 지역 명소의 한계를 극복
하진 못했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서울의 이름난 뒷동산으로 거듭나리라 믿는다. 그만큼
싹수가 충분한 뫼이다.

* 국사봉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 관악구 봉천동


▲  국사봉 정상과 삼각점(三角點), 그리고 푸르른 봄하늘

▲  국사봉 정상에서 서쪽(신대방3거리역) 방향 능선길 (동작마루길)

▲  국사봉 정상에서 동쪽(능고개)으로 내려가는 능선길 (동작마루길)

국사봉 정상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조망은 별로이다. 허나 나무들 사이로 동작구 서부와 관
악구 북부, 관악산 등이 시야에 들어와 그런데로 높이값은 한다.

나는 국사봉 동쪽 능선을 따라 능고개 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이 길은 동작마루길의 일원으
로 동작구의 지붕길<동시에 관악구의 북쪽 지붕길>인데, 인간이 무심히 그어놓은 관악구와 동
작구의 경계선을 따라가거나 서로 넘나든다.


▲  진달래가 연분홍 미소를 드리우는 국사봉 동쪽 능선길 (정상 방향)

▲  약간 흥분된 경사를 보이는 국사봉 동쪽 능선길 (능고개 방향)

▲  숲터널을 이루는 국사봉 동쪽 숲길 (능선길 주변)

▲  국사봉 생태연못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 계단길 (능고개)

▲  능고개에 자리한 국사봉 생태연못
부처꽃과 노랑꽃창포, 부들, 고랭이, 사초류, 버들류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연못 한복판에는 작게나마 바위섬까지 띄워놓아
살며시 운치를 더한다.

▲  능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국사봉의 위엄

국사봉 동쪽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능고개이다. 상도4동 양녕대군묘역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
는 고개로 지금은 그 밑에 4차선 국사봉터널이 뚫리면서 조금 한가해졌지만 고갯길의 기능은
크게 녹슬지 않았다. 국사봉과 상도근린공원, 동작마루길을 가려면 이 고개를 이용해야 되며,
국사봉중학교와 여러 아파트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능고개라고 해서 이곳에 왕릉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제왕이 될 뻔했던 양녕대군의 사당<지덕사
(至德祠)>과 묘역이 있어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양녕대군의 묘역만 국사봉에 있고
사당인 지덕사(至德祠)는 서울역 동쪽(도동)에 있었으며, 후손들은 지덕사 주변에 모여 살았
다. 처음에야 잘들 살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가산이 거덜나고 살림이 궁핍해져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겨울 날, 노승이 지덕사 앞을 지나다가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했다. 집주인은 흔
쾌히 방을 제공하고 자신이 먹을 죽까지 끓여서 대접을 했다. 다음날 그 사실을 안 노승은 크
게 감동을 먹고 답례를 하겠다며 주인을 데리고 지금의 능고개 자리로 데려가
'죽거든 이곳에 묘를 쓰시오' 알려주었다. 즉 기가 막힌 명당 자리를 잡아준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 집주인이 죽자 그 고개에 무덤을 쓰니 그 이후부터 자손이 번창하고 가세가 크게
살아났다고 한다. (지금도 양녕대군의 후손들은 잘나가고 있음)


▲  능고개 동쪽 능선길 (상도근린공원, 동작마루길)

▲  능고개 동쪽 능선길에서 만난 오리 솟대들
오리는 예로부터 인간 세계와 하늘을 이어주는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신성한 구역을 상징하는 솟대 기둥에 오리 등의 새 모양을
달아 하늘과의 소통을 꿈꾸었다.

▲  상도근린공원 정상에 심어진
4각형 정자

▲  상도근린공원 유아숲체험장 부근
동작마루길


▲  잘 닦여진 상도근린공원 동작마루길 (구암중교 뒤쪽)

▲  상도근린공원 생태터널 (상도로50길)

▲  구암고등학교 뒤쪽 동작마루길
키다리처럼 솟은 고등학교 건물이 그늘을 드리워준다.

▲  구암고등학교 뒤쪽 동작마루길 계단길 (성현드림숲공원 방향)

▲  푸르게 우거진 성현드림숲공원 서쪽 숲

▲  성현드림숲 향기정원 산책로

▲  성현드림숲과 하늘 높이 솟은 관악드림타운 아파트와의 어색한 조화
(철조망 바로 옆이 낭떠러지임)


능고개 동쪽 능선이자 관악드림타운 뒤쪽 산자락에는 성현드림숲공원이 닦여져 있다. 이곳은
무허가 달동네 판자집과 교회 등이 30년 이상 지저분하게 들어섰던 현장으로 2014년 관악구청
과 산림청, 지역 사람들이 협력해 그것들을 싹 밀어버리고 숲과 꽃밭을 다지면서 우울한 풍경
에서 싱그러운 풍경으로 180도 확 달라진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곳 이름을 두고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성현드림숲'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성현(聖賢)은 이
곳의 행정동명인 '성현동'으로 그 성현이란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姜邯瓚) 장군을 상징한다.
그리고 드림(dream)은 꿈을 뜻하는 꼬부랑 영어이다. 드림 대신 '성현꿈의숲','성현동 꿈의숲
'으로 했으면 참으로 크고 아름다웠을 것인데, 굳이 해괴망측한 영어로 해야 했는지 관련자들
의 대가리 속이 참으로 궁금해진다. 이 또한 이 땅의 아주 몹쓸 영어 사대주의의 더러운 폐해
이리라..

성현드림숲 남쪽에는 관악드림타운이 회색빛을 풍기며 들어차 있는데 산자락을 요란하게 깎아
서 다졌다. 하여 아파트와 접한 남쪽은 거의 아찔한 벼랑으로 이루어져 안전을 위해 철조망이
높게 펼쳐져 있다. 또한 아파트가 너무 밀착되어 있다 보니 공원에서 떠드는 소리가 아파트에
고스란히 퍼져 아파트 주민들에게 소음의 고통을 선사할 수 있다. 그러니 저녁이나 밤에 산책
할 경우 가급적 조용하게 하자.

성현드림숲을 끝으로 사자암에서 시작된 동작마루길(동작충효길6코스)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마음 같아서는 현충원 상도출입문까지 가고 싶지만 몸도 지쳤고, 두 눈도 지쳤고, 카메라도
지쳤고, 햇님의 퇴근시간 또한 임박하여 여기서 깔끔하게 철수했다.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고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비록 자주는 아니어도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너무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 성현드림숲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1712-6 (성현로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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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서울 변두리의 이색 뒷동산, 구파발 이말산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최효원묘역, 은평둘레길3코스, 약수사>

구파발 금성당, 이말산



' 구파발 이말산 봄나들이 '

이말산 조선시대 무덤군
▲  이말산 조선시대 무덤군

금성당 이말산 숲길

▲  금성당

▲  이말산 숲길

 



 

봄이 겨울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4월의 한복판에 서울의 서남쪽 끝
으머리를 잡고 있는 구파발을 찾았다.

구파발(舊把撥)은 서울 서북부 교통의 요충지로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골스런 모습
을 여실히 지니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구파발과 진관동 지역의 전원(田園) 풍경을 좋아했
고 그런 풍경이 쭉 유지되기를 바랬지만 개발 지상주의가 지배적인 이 땅의 현실 앞에 결
국 아파트 일색의 은평뉴타운으로 강제 성형을 당하고 말았다.

비록 구파발 주변에서 밭두렁과 논두렁 등의 경작지와 시골 풍경은 많이 사라졌으나 은평
뉴타운을 둘러싼 이말산과 북한산(삼각산), 앵봉산은 크게 건드리지 않아 산 속의 조그만
도시 같은 아늑한 분위기를 준다. 게다가 못자리골천, 구파발천 등의 짧은 하천이 뉴타운
내부를 흘러가고 뉴타운 북쪽에는 창릉천(昌陵川)이 흐르고 있어 은근히 배산임수(背山臨
水)의 형태까지 보인다. 그 뉴타운 한복판에 이말산이 자리해 뒷동산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남쪽 자락에 조선 후기 무속신앙의 현장인 금성당이 있다. 이번 나들이는 바로 금성당
과 이말산을 잡으러 간 것이다.



 

♠  서울에 숨겨진 옛 무속신앙의 현장, 조선시대 굿당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금성당(錦城堂) - 국가 민속문화재 258호

▲  서쪽에서 바라본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의 외경

이말산 남쪽 자락이자 은평뉴타운 우물골 2단지 한복판에 기와집 일색의 금성당이 있다. 회색
피부의 밋밋한 아파트 숲에서 고고한 전통 한옥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곳은 거의 새집처럼
보이지만 이래봬도 19세기 말에 지어진 무속신앙용 기와집으로 그 성격에 걸맞게 샤머니즘박
물관까지 겸하고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금성당은 세종의 6번째 아들인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을 주신(主
神)으로 봉안한 당집이다. 그래서 집 이름도 금성당을 칭하고 있는데, 금성대군은 2번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한 것에 잔뜩 불만을 품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순흥부(順興府, 경북 영주시 순흥면)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도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작당하다가 또 발각되어 형이 보낸 쓰디쓴
사약 1사발을 들이키고 죽게 된다. 그때 이보흠도 처단되었으며, 순흥 백성들까지 복위에 가
담했다는 이유로 대부분 학살을 당하면서 순흥 지역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순흥
고을도 강제로 폐쇄되어 풍기, 영주에 임시 통합됨)

이후 백성들 사이에서 금성대군과 단종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생겨났고 제와 굿을 지내 그들
의 넋을 달래주었다. (강원도 남부 지역은 단종을 산신으로 추앙하고 있음) 그러다보니 자연
히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무당들은 영업 차원에서 금성대군을 영험한
신으로 영입하기에 이른다. 서울에서는 진관동(津寬洞)과 망원동(望遠洞), 월계동(月溪洞)의
각심절마을에 그를 위한 금성당이 지어져 서울 토속신의 하나로 굳게 자리를 잡았다.

허나 20세기 중반 이후 무속신앙의 쇠퇴와 개발의 칼질로 망원동과 월계동 금성당이 1970년대
에 사라졌으며, 진관동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인 탓에 다행히 살아남아 계속 굿당의 역할을 수
행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구파발 지역에 은평뉴타운이 닦이게 되면서 퇴락된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철밥통 행정당국과 개발업자의 의해 가루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다행히 양종승 박사
와 뜻있는 이들이 금성당 구명에 나서면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게 되었고, 금성당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문화재청이 2008년 중요민속자료(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개발의 칼질
로부터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다.

한때 서울시는 그를 은평뉴타운 밖으로 내보내 복원하려고 했으나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그
를 옮기는 것이 영 바람직하지 않아 제자리에 2010년 복원, 정비하고 주변에 작은 공원을 닦
아서 세상에 내놓았다.
비록 복원되어 개방은 되었으나 굿당의 역할은 이미 상실된 상태라 민속촌 한옥처럼 거의 무
늬만 남은 한가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2016년 5월, 그런 금성당에게 활력을 주는 일이 생
겼다. 바로 양종승 박사가 세운 샤머니즘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양종승은 2013년 5월 사재를 털어 정릉동 국민대 남쪽에 샤머니즘박물관을 세웠다. 그는 우리
나라와 중원대륙, 히말리야, 몽골의 무속 유물 2만여 점을 보유하고 있었고 샤머니즘 관련 서
적과 영상/음향자료도 넉넉히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금성당을 없애려는 철밥통과 개발업자들을
보기 좋게 참교육시켜 금성당 보존에 크게 공헌을 한 이력이 있어 은평구청은 그에게 금성당
으로 옮길 것을 제안, 그에 따라 박물관을 이곳으로 가져와 금성당의 완전한 지킴이가 된 것
이다.
무속신앙의 현장과 그 신앙을 다루는 전시/교육 공간까지 그에 걸맞는 두 얼굴을 지닌 의미가
깊은 현장으로 보유한 유물은 많지만 공간이 매우 좁아서 극히 일부만 꺼내 본채, 행랑, 안채
, 본채 뜨락 등에 전시하고 있다.

▲  금성당 대문 (대문채)

▲  본채와 안채 경계에 놓인 오리 솟대

금성당은 인왕산(仁王山), 평창동(平倉洞) 보현산신각과 더불어 서울 지역 무속신앙의 성지(
聖地)로 1880년대 이전에 지어졌다. 지역 주민과 무당들이 무속신앙을 벌이고자 지은 공간으
로 조선 때 무악재에서 구파발까지 많은 무속 당집이 있었는데 서울로 들어오는 명/청나라 사
신과 반대로 중원대륙으로 가는 조선 사신의 안녕을 빌고 악의 기운을 없애는 의미에서 굿을
지냈다. 그러다보니 금성당은 나라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금성대군의 생일인 음력 3월 24일에 마을의 대동단결과 나라의 안녕을 위한 당굿을 열어 그의
넋을 기렸으며 왕년에는 서대문과 왕십리 등 서울의 유명한 무속인과 악사들이 문턱이 마르고
닳도록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뉴타운 개발 이전까지 당지기가 집을 지켰고 굿판도 계
속 이루어졌다.

금성당의 구조는 본채와 안채, 아래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금성대군과 여러 신
이 봉안되어 있고, 동쪽에 'ㄱ'자의 안채를 두어 금성당을 관리하는 당지기와 시봉자(侍奉者)
가 생활했다. 안채는 중부지방의 흔한 기와집 형태이나 동쪽 방을 '田'자 형태로 크게 지은
것은 금성당만의 특징이다.
본채에 있던 무신도<巫信圖, 금성도(금성대군의 영정)>와 무구(巫具)류, 제사도구 등은 보존
처리를 위해 서울역사박물관에 가 있으며 불화(佛畵)의 명가로 유명한 만봉(萬奉)의 제자 조
영희가 그린 금성도의 복사본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금성당 본채와 행랑채

대문채를 들어서면 왼쪽(북쪽)에 본채와 행랑이 있다. 본채는 마루로 이루어져 있어 굿과 제
사를 지내기에 좋으며, 대청 뒤쪽에는 벽감(壁龕)을 두어 금성대군(금성님) 등을 봉안했다.
현재 금성도(금성님) 등 이곳의 오랜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가 있으며, 샤머니즘박물관 유
물과 금성도 사본이 본채와 행랑채에 담겨져 있다. 허나 그들 내부는 매주 목/금(10~17시)에
만 잠깐씩 문이 열리며, 금성당 건물과 뜨락, 안채 서쪽과 마루에 놓인 유물들은 요일에 상관
없이 관람이 가능하다. (금성당 입장은 보통 17시까지, 입장료 없음)

나는 그런 사연을 알지 못한 채, 온 터라 전시 유물은 만나지 못했다. 금성당은 매주 문이 열
려있지만 정작 박물관의 중심인 본채와 행랑 내부는 1주에 딱 이틀만 만날 수 있는 비싼 존재
였던 것이다. 하여 여러 달 이후 금요일에 다시 인연을 지어 내부 유물까지 싹 살폈다.


▲  굳게 닫혀진 금성당 행랑채와 본채

▲  안채 서쪽에 기대어 선 샤머니즘박물관의 무속 유물들
개성 넘치게 생긴 저 작은 존재들은 몽골이나 히말리야, 티벳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  'ㄱ'자 모습의 금성당 안채

본채 맞은편에는 아래채가 있다. 현재 관리사무실로 쓰이고 있는데 그 옆구리를 지나 동쪽으
로 가면 안채 뜨락과 안채 정면이 모습을 보인다.
안채는 금성당을 관리하는 당지기와 시봉자가 머물던 공간으로 지금은 박물관 사무실과 자료
실(교육실), 박물관 전시공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허나 그날은 박물관 공개일이 아니므로 전
시 공간으로 쓰이는 부엌 등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민속유물이 있는 마루만 개방되어
있다. 그러니 그날 만난 박물관 유물은 안채 마루와 안채 서쪽 벽에 있는 석조 유물 뿐이다.

▲  금성당 아래채(왼쪽)와 대문채

▲  도자기와 여러 민속유물이 놓인
안채 마루 (왼쪽이 박물관 사무실)


▲  안채 뒤쪽 장독대와 부뚜막, 그리고 낡은 가마솥

안채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장식용으로 놓여진 장독대들이 있다. 그 옆에 부뚜막이 있
는데 금성당이 바쁘게 움직이던 시절, 부엌과 여기서 음식을 했으며, 누렇게 뜬 저 가마솥을
거쳐간 음식과 국거리는 동해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많았다. 허나 이제는 은퇴하여 뒷방 마님
처럼 아주 잉여로운 신세가 되었다.


▲  안채 뒤쪽 (굴뚝과 돌로 다져진 화단)
금성당은 보이지 않는 뒷통수 부분도 적지 않게 신경을 썼다. 화단을 닦아서
나무와 꽃을 심었고, 본채 뒤쪽에는 샤머니즘박물관에서 수집한 여러
스타일의 장독대들이 놓여져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  본채 뒤쪽에 가득 널린 장독대들 ①

▲  본채 뒤쪽에 가득 널린 장독대들 ②

▲  봄이 내려앉은 금성당 동쪽 돌담

▲  금성당 본채의 뒷모습

금성당 주변은 아늑하게 공원이 닦여져 있다. 그 좌우로 은평뉴타운 우물골2단지가 가득 들어
앉아 아파트 속의 이색 공간을 자아내고 있는데 다른 아파트단지와 달리 녹지 공간이 많고 바
로 뒤에 이말산이 있어 주변이 그리 번잡해 보이지는 않는다.

* 금성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75-836 (진관2로 57-23, ☎ 02-389-6522)
*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조선시대에 거대한 공동묘지 속으로, 이말산(莉茉山)

▲  최효원 묘역 (해주최씨와 남양홍씨 묘역)

금성당을 둘러보고 이말산의 품으로 들어서고자 은평메디텍고등학교(은평공고) 뒤쪽으로 이동
했다. 그 구석에도 아파트(우물골2단지 7블록)들이 들어차 있는데 그 동쪽 산자락을 올라서니
말끔한 모습의 최효원 묘역이 마중을 나온다.

묘역의 주인공인 최효원(崔孝元, 1638~1672)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아버지이
다. 숙빈최씨와 영조는 많이들 알지만 정작 그들의 뿌리인 최효원은 인지도가 극 밑바닥이라
아는 이가 적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그는 해주최씨 집안으로 자는 의경(義敬)이며, 아버지는 최태일(崔泰逸), 어머지는 평강장씨(
平康張氏)이다. 남양홍씨인 홍계남의 딸과 혼인했으며, 무관으로 관직에 진출해 선략장군 행
충무위 부사과(宣略將軍 行忠武衛 副司果, 종6품)까지 지내다가 34살에 사망했다.
그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여 막내딸은 궁궐 무수리로 들어갔다. 그
녀는 숙종의 왕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잠시 폐위의 고통을 받자 눈물을 흘리며 그의 복귀
를 빌었는데, 그 모습이 우연히 숙종의 눈에 띄면서 예민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 인
연으로 연잉군<延礽君, 영조>를 낳게 되었고 희빈장씨의 모진 구박을 이겨내면서 숙빈최씨로
승급된다.

1734년 영조는 외할아버지인 최효원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면서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손질했다. 딸과 외손주 덕분에 그의 존재와 무덤이 적게나마 호강을 누리게 된 것이다.


▲  최효원과 남양홍씨 합장묘 (오른쪽이 홍계웅 묘, 왼쪽이 홍계남묘)

최효원묘는 묘비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1쌍을 지니고 있다. 예전에
는 양석(羊石)도 1쌍 있었으나 1988년경 어느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이 그 무거운 돌덩이를
훔쳐가 버렸다.
묘비는 지붕돌을 갖춘 2면비로 내용은 영조가 친히 쓴 것이며 글씨는 당시 명필로 꼽히던 서
평군 이요(西平君 李橈)가 썼다. 이요는 왕족 출신으로 학문이 깊고 음악과 글씨에 능했는데,
영조(英祖)의 신임이 두텁자 부정하게 재산을 모아 사치향락을 일삼기도 했다.

최효원 묘역에는 총 6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뿐 아니라 장인(홍계남)
과 처남(홍계웅)의 묘도 같이 있다. 이는 최효원이 처가 묘역에 묻히면서 두 집안(해주최씨+
남양홍씨)이 같이 있게 된 것으로 장인과 처남 무덤 사이에 아주 눈에 띄도록 큼지막하게 자
리해 있어 딸과 외손주의 덕을 톡톡히 봤음을 알려준다. (최효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묘는
여기서 가까운 불광2동에 따로 있음)
이들 무덤은 묘비부터 상석, 향로석, 망주석까지 대체로 17~18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후손들의 정성이 너무 과한 탓에 무덤 밑도리에 20세기 스타일의 호석(護石)이 둘러져
옛 무덤으로서의 멋이 다소 떨어졌다. 윗도리는 17~18세기 옷인데 밑에는 20세기 옷을 입혀놓
았으니 그게 어디 어울리겠는가?

* 최효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85

      ◀  홍계웅(洪繼雄)과 김화김씨 묘
홍계웅은 홍계남의 아들로 최효원의 처남이자
숙빈최씨의 외삼촌이 된다. 최효원보다 낮은
봉분(封墳)과 머리가 둥근 묘비, 그리고 상석
이 전부인 단출한 모습이다.

      ◀  최수강(崔壽崗)과 김해김씨 묘
최수강은 최효원의 손자이자 최후의 아들로 영
조 시절에 무관을 지냈다. 왼쪽 비석은 최수강
의 아들인 최진해(崔鎭海)와 해풍김씨의 묘비
이다.

▲  늘씬하게 생긴 최수강 묘비

▲  최후(崔厚) 묘비


▲  최후와 순흥안씨 묘
최후는 최효원의 아들이자 숙빈최씨의 오라버니로 외할아버지(홍계남) 무덤 바로
앞에 있다. 묘비와 상석, 향로석, 망주석까지 갖추고 있어 최효원 묘 못지
않은 규모를 지녔다.

▲  최효원의 장인인 홍계남(洪繼男) 묘비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탄 것일까? 다른 비석에 비해 피부가 너무 검다.

▲  장대한 세월에게 목을 빼앗긴 가련한 동자석(童子石)

최효원 묘역을 둘러보고 본격적으로 이말산 더듬기를 시작했다. 이말산은 구파발역 동쪽에 자
리한 해발 132.7m의 야트막한 뫼로 군부대가 있는 북쪽 끝을 제외하고 모두 은평뉴타운에 감
싸여 있어 자연히 은평뉴타운의 포근한 뒷동산이 되었다.

산의 이름은 말리화(茉莉花)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리(이말)는 말리화
차, 쟈스민차, 향편으로도 불리며 말리화의 향을 잎차에 스며들게 하여 만든 것이 화차(花茶)
가 된다.
허나 말리화차가 외래종인 것을 감안하면 이 산에 정말 그것이 많았는지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말리화를 재배하는 공간이 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말산에 안긴 무덤 중
숙종~영조 시절에 활동했던 이영수의 묘가 있는데 그 묘비에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다른 이말산
(李末山)이라 쓰여 있어 말리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에 회의감을 던지게 한다.
그런데 영조 시절 무덤인 이세철 묘비와 홍세태(洪世泰)의 묘지명(墓誌銘) 등에는 이말산(茉
莉山)이라 나와있어 18세기부터 한자가 슬쩍 바뀐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두(吏讀)처럼 순
우리말을 한자의 음만 가져와 표기한듯싶다. 참고로 지금 이말산에는 말리화는커녕 비슷한 꽃
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말산은 1977년 진관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시민공원의 역할을 했으나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꾸며진 것은 은평뉴타운 개설 이후이다. 둘레길 유행에 따라 은평구는 그 산에 은평둘레길3코
스인 이말산 묘역길(거리 2.7km)을 닦았는데 그 길은 구파발역에서 이말산 주능선을 가로질러
은평한옥마을까지 이어진다.


▲  묘비와 상석만 덩그러니 남은 무덤
무덤 봉분은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밀어버리면서 졸지에 산길이 되어버렸다.


조선 때는 한양도성(서울) 밖 10리 이상부터 무덤을 쓸 수 있었는데, 북서쪽은 이말산, 북동
쪽은 초안산(楚安山, 도봉구 창동, 노원구 월계동 ☞ 관련글 보러가기)이 그 적격지였다. 게
다가 이들은 앞뒤로 하천이 흘러 은근히 배산임수의 형세를 이루고 있어 무덤 선호지로 인기
가 대단했다.
그러다보니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자인 은언군(恩彦君) 같은 왕족부터 해서 양반사대부, 중
인, 상궁, 내시,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이말산에 뼈를 묻으면서 지금까지
수습된 무덤만 1,700여 기에 달한다. (은언군묘는 파괴되어 사라짐) 이중 무연고가 313기, 나
머지는 연고가 있으며, 묘비와 문인석, 망주석, 상석 등의 석물도 13종 1,488기가 확인되어
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이자 살아있는 조선시대 무덤 박물관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비슷한 성격의 초안산은 조선시대 무덤들이 몰려있는 곳을 중심으로 국가
사적으로 애지중지되고 있고, 각심절 마을에 있는 정간공 이명(貞簡公 李蓂) 묘역은 지방문화
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나 이말산은 그보다 무덤도 더 많고 그에 못지 않은 가치를 지녔음에
도 어떠한 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초안산과 더불어 내시(내관) 무덤이 많은 곳으로 꼽히며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무덤
과 무덤 석물이 공존하고 있어 무덤 답사지로는 아주 좋다. 또한 산 곳곳에 무덤이 널려있고
심지어 산길에도 파괴된 무덤의 잔해들이 즐비해 산책의 흥미를 유발시키며 여름에는 납량(納
凉) 놀이를 벌이기에도 좋다. 어두컴컴한 산길을 걷다가 갑자기 무덤이나 인상을 쓴 문인석,
동자석이 툭 튀어나온다면 정말로 염통이 제대로 수축될 것이다.


▲  낙엽에 묻혀 고통받고 있는 상석과 향로석
저런 꼴을 보면 무덤을 쓰는 것도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후손의 관리가
끊기면 바로 게임 끝나는 것임)

▲  세상을 등지며 꺼꾸로 엎어진 문인석(文人石)
자신을 살피지 않는 무심한 세월과 세상에 대한 원망의 표현일까? 얼굴을
땅에 묻고 세상을 등진 채, 엎어져 있다.

▲  봄이 뿌려지고 있는 이말산 산길 (이말산 동남쪽 자락)

▲  나란히 목을 잃은 동자석들 ①
망나니의 칼과 세월의 칼날은 모두 목만 취하는 모양이다. 이 세상에 목을 취해야
될 썩은 작자와 무리들이 적지 않거늘 왜 그들은 건드리지 않고
죄없는 저들만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  나란히 목을 잃은 동자석들 ②

▲  이말산 능선길 (북쪽 방향)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①

이말산은 흙산이라 산길과 능선길이 거의 부드럽다. 산세도 일부를 제외하면 느긋한 편으로
구파발역(3호선)과 진관동주민센터, 진관초교, 약수사, 연화사, 우물골2단지7블록, 삼천사/
진관사입구 정류장 등에서 접근하면 되며, 구파발역에서 산의 동북쪽 끝 봉우리까지 30~40분
이면 충분하다. (거기서 부근으로 하산하면 40~50분이면 끝)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②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③
산길 주위로 방치된 옛 무덤들이 적지 않다. 하여 밤에 오면(달이 뜨지 않은
밤이나 비오는 날 밤) 염통이 제대로 쫄깃해질 것 같다.

▲  흙과 나무에 깔린 무덤 상석

▲  머리가 덥수룩한 옛 무덤들
묘비는 사라졌지만 상석과 향로석은 잘 남아있다.

▲  이말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족두리봉
북한산이 남성적인 뫼라면 이말산은 귀여운 여동생 같은 작고 아늑한 뫼이다.



 

♠  이말산 마무리

▲  무덤이 떼거지로 나타나다 (묘비 1기와 상석 6기)

이말산 동북쪽 끝 봉우리에는 네모난 쉼터와 약간의 운동시설이 있다. 여기서 북쪽과 동쪽은
군부대로 막혀있어 서쪽(진관초교)으로 내려가거나 남쪽 능선길로 돌아나가야 되는데, 일몰까
지는 아직 여유가 넘쳐 남쪽 길로 다시 나가면서 옛 무덤들을 보물찾기 하듯 더 찾아보기로
했다.
남쪽을 바라보며 능선길을 거닐다 보니 앞서 보이지 않던 무덤들이 쏙쏙 시야에 걸려든다. 특
히 제각말5-3단지 뒤쪽인 동쪽 산자락에 여러 기가 몰려있는 무덤군들이 여럿 나타나 나에게
적지 않은 흥분감을 주었다. 역시 한쪽 방향으로만 향하면 놓치는 것이 많은 법이다.


▲  이말산 동쪽 자락 무덤군
대부분 묘비(묘표)를 지니고 있다. 그들 중 1기는 문인석까지 지니고 있어
잘나가던 집안의 묘역임을 알려준다. (누구 묘역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음)

▲  장대한 세월에 꼬꾸라진 묘비
그를 거느렸던 무덤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묘비만 뿌리가 뽑힌 채,
자빠져 있다. 무덤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저 꼬라지가 되어 버리니
굳이 많은 돈을 들여 사후(死後) 흔적을 남기는 것도 다 부질없다.

▲  장대한 세월에게 제대로 깨지고 요절난 묘비들

▲  칠원윤씨 윤용(尹鎔) 묘역

윤용은 16~17세기 인물로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631년 이곳에 무
덤을 썼으며<묘비에는 이곳 지명이 '양주군 신혈리 택사(神穴里 澤寺)'로 나옴> 부인 예안이
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다. 묘비(묘표)와 상석, 조그만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을 갖추
고 있으며, 후손들의 손길이 여전하여 호석도 새로 갖추었다.


▲  칠원윤씨 윤응린(尹應麟), 하동정씨 부부묘
윤응린은 16~17세기 인물로 자헌대부 형조판서를 지냈다. 비석과 호석은
20세기에 후손들이 새로 갈아넣은 것들이라 장대한 시간의 무게는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  칠원윤씨 윤용, 윤응린 묘역 전경

▲  상선(尙膳) 노윤천(盧允千) 묘역

노윤천은 16세기에 활동했던 내시(내관)이다. 1545년 명종(明宗) 즉위 때 승전색(承傳色)으로
써 왕명을 전달한 공이 있어 그해 8월, 가자(加資)되었으며 1546년 1월, 위사원종공신(衛社原
從功臣)에 책록되기도 했다.
세월의 불도저 같은 흐름 앞에 무덤 봉분은 사라지고 묘표(묘비)와 상석, 문인석 1기가 남아
있으며, 향우측에 비슷한 모습의 묘표가 있어 이곳이 그의 선영(先塋)이었음을 알려준다. 묘
비는 피부가 많이 손상되어 대부분의 글씨는 확인할 수 없다.

▲  무심한 세월 속에서도 표정 하나
잃지 않은 노윤천 묘역 문인석

▲  정체성을 잃은 어느 상석
무덤 상석이 졸지에 잠깐 쉬었다 가는
산길 쉼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  녹음이 짙어가는 이말산 서쪽 능선길
능선길을 거닐며 무덤과 석물을 찾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 이번 이말산 더듬기에서
대략 찾아낸 무덤만 어림잡아 200기는 넘을 것이다.


▲  방공호 시설이 있는 이말산 정상

이말산 정상은 산 서쪽 부분에 있다. 정상(132.7m)은 평평한 넓은 공간으로 방공호 등의 군사
시설이 있으나 이곳이 공원으로 해방되면서 버려진 상태이며 은평뉴타운과 앵봉산, 북한산 향
로봉 등이 시야에 보이나 수목(樹木)이 울창하여 조망의 깊이는 별로이다.


▲  소탈한 모습의 이말산 정상 표목(標木)

▲  개나리들이 격하게 반겨주는 약수사 방면 산길 ▼



▲  이말산 서북쪽 자락에 있는 약수사(藥水寺)

이말산 정상에서 구파발역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깜찍하게 손짓하는 개나리들에게 마음이 끌
려 약수사로 길을 틀었다.
4~5분 정도 내려가니 산과 아파트 경계에 자리한 약수사가 마중을 나온다. 이 절은 고색이 아
직 여물지도 못한 20세기 후반 현대 사찰로 20여 일 정도 남은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을
위해 벌써부터 연분홍 연등으로 경내를 곱게 다듬은 상태였다. 그 오색 연등에 순백 벚꽃까지
어우러져 조촐하게 별천지를 구가하고 있어 이말산에서 많은 것을 보고 담느라 힘겨운 두 눈
의 피로감을 크게 덜어준다.


▲  오색 연등으로 정신이 없는 약수사 경내
약수사를 끝으로 4월 한복판에 찾아간 이말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이말산, 진관근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74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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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해협에 길쭉하게 깃든 국경의 섬, 부산 대마도 <이즈하라,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아소만>

대마도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 부산 대마도 나들이 '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아소만, 와타즈미신사)

와타즈미신사 앞 도리이
▲  와타즈미신사 앞 도리이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만관교 주변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  만관교 동쪽 미우라만과
여호도(메고시마)


* 대마도의 본토는 우리나라(대한민국)이다. <본글에 나오는 본토는 우리나라를 뜻함>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대한해협에 떠있는 부산 대마도를 찾았다.
대마도는 2004년 가을부터 계속 인연을 노렸으나 태풍이 계속 초를 치면서 인연이 자꾸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해 5월에 이르러 다시 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흔쾌히 도와주어 100% 대마도 상륙 확정이다.

아침 일찍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일행들을 만나 대마도로 가는 오션플라워호(대아
고속해운)에 몸을 실었다. 배는 고요하기 그지 없는 대한해협을 유유히 가로질러 2시간
20분 만에 대마도의 주요 관문인 이즈하라<엄원(嚴原)>항에 우리를 무사히 가져다 주었
다. 드디어 대마도에 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처음 발을 들인 대마도의 첫 느낌은 본토의 어느 섬에 들어온 듯한 무척 낯익은 모습인
데, (완전 '부산광역시 대마군' 같은 기분) 그런 즐거운 흥을 회충처럼 생긴 왜열도 글
자(가나)가 건방지게 깨뜨리려 든다. (가나는 신라가 만든 이두식 글자임)

대마도<왜어(倭語)로 쓰시마, 쯔시마(つしま)>는 5개의 유인도와 102개의 무인도 등 총
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708㎢이다. 남북이 꽤 길쭉하여 제법 큰 섬으
로 다가오는데, 남북 길이가 82km, 동서 길이는 최대 18km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옛 땅의 일부로 조선 후기까지 조선의 동남쪽 끝을 맡고 있었으며, 우
리의 동남쪽 끝이자, 왜국(일본)의 서북쪽 끝으로 그 예민하고 외로운 위치 때문에 '국
경의 섬'이라 불린다.
우리 본토에서도 아주 가까워(부산에서 49~50km) 매우 저렴한 금액과 짧은 시간으로 외
국여행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잇점이 있으며, 그 매력으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
이 많은 편이다. (2017년에 70만 명이 찾았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마도는 우리가 꼭
회복해야될 땅이라는 것이다. (대마도의 역사와 지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음)

첫날은 이즈하라 시내의 여러 명소를 돌아다녔다. 만송각(반쇼가쿠)이란 왜식(倭式) 식
당에서 본토식이 가미된 대마도 토속음식인 이시야키(石燒)와 이리야키(いリやき)로 거
하게 저녁을 먹고, 바다가 바라보이는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아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즈하라에서 둘러본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에서는 둘째 날 오
전에 둘러본 곳만 다루었다.



 

♠  대마도를 2개의 섬으로 나눠버린 만관협곡과 그 협곡에 놓인
만관교(万關橋, 만제키바시)

▲  만관교(만제키바시)

대아호텔에서 대마도의 첫 저녁이자 첫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 햇살의 성화에 부시시 잠에서
깨어나 1층 온천탕(바닷물을 가져와서 끓인 것임)에서 몸을 푹 삶고 1층 식당에서 아침을 먹
었다.
아침은 본토의 밥상보다도 크게 떨어지는 왜식(倭式) 정식을 먹었는데 밥도 그렇고 반찬도 그
렇고 양이 매우 적었다. 하여 식당 직원에게 리필을 요청하니 반찬은 일절 안되고 밥만 된다
고 그런다. (반찬도 없이 어찌 밥을 먹나?) 본토 회사에서 운영하는 호텔임에도 식당 운영은
좁쌀처럼 왜열도 스타일로 하는 것이다.

아침을 먹고 객실(3층 다다니방)로 올라가 여장을 꾸리고 나오니 우리를 태울 버스가 대기하
고 있었다. 30인승 정도의 중형버스로 일행을 모두 태우자 대아호텔을 뒤로하며 이즈하라 시
내로 내려갔다.
어제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이즈하라 시내의 아침 풍경은 마치 텅 빈 영화세트장처럼 너무 적
막하여 우리가 어제 이곳을 거닐었는지도 햇갈리게 만든다.

이즈하라를 벗어난 버스는 북쪽을 향해 열심히 바퀴를 굴려 게치와 대마공항(쓰시마 야마네코
공항)의 밑도리를 지나 어느 다리 앞에서 바퀴를 멈춰섰다. 그곳이 둘째 날의 첫 답사지인 만
관교이다.


▲  만관교 서쪽 아소만

대마도(면적 708㎢) 본섬은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지금은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2개의 섬이 구분되는 곳이 바로 만관교가 있는 만관협곡(만관운하)이다.
만관월(万關越, 만관키코시)과 남쪽에 있는 대선월(大船越, 오후나코시), 북쪽의 소선월(小船
越)은 해발이 바다에 닿을 정도로 매우 낮고 대마도에서 가장 폭이 좁다.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소선월은 왜에서 신라와 당으로 보낸 사신이 지나
가던 곳이며, 대선월은 대마도 최초의 운하이나 폭이 좁음)
허나 배를 밀거나 들고 가는 식으로 운반하거나 반대쪽으로 넘어가 배를 갈아타는 식이라 불
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왜국 해군은 선박의 왕래와 대한해협의 제해권 장악을 위
해 1897년에 만관월에 삽질을 가해 1901년 운하를 완성시켰다. 그것이 바로 만관협곡(만관운
하)이며, 운하 삽질로 나온 흙과 바위는 운하 동쪽에 있는 메고시마의 육지 매립에 쓰였다.

운하의 등장으로 아소만과 마우라만(삼포만, 三浦灣)은 완전히 이어지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그 짧은 거리 때문에 배를 직접 운반하거나 한참을 돌아가야 했었다. 운하 위에는 1901년 80m
길이의 나무 다리(만관교)를 지어 운하로 끊어진 남쪽과 북쪽을 잇게 했으며, 1956년 기존의
다리를 부시고 81.6m의 새 다리를 닦았고, 1996년 현재의 다리를 새로 닦아 대마도의 북섬과
남섬을 끈끈하게 붙잡고 있다. 다리 길이는 210m, 폭 10m, 높이 25m로 2차선 도로와 뚜벅이길
을 갖추고 있다.

대마도의 중심지인 이즈하라에서 히타까츠를 비롯한 북섬으로 가거나 반대로 가는 경우 무조
건 이 다리를 건너야 된다. 주변 풍경도 그런데로 볼만하여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자리를
잡았으며 협곡 동쪽인 메고시마(여호도, 女護島) 포구로 내려가면 협곡과 다리의 전경을 싹
살펴볼 수 있다.


▲  만관교 서쪽 만관협곡 (아소만 방향)

▲  만관교 동쪽 미우라만과 메고시마 포구(왼쪽 마을),
구스보(久須保, 오른쪽 산지)

▲  만관운하를 닦은 기념으로 2005년에 세워진 개삭비(開削碑)

▲  만관교 주변(구스보, 메고시마) 지도



 

♠  대마도의 하롱베이라 불리는 아소만과 그 아소만을 굽어보는
에보시다케(烏帽子岳)전망대

▲  오로지 전망을 위해 설치된 에보시다케전망대

만관교를 짧게 둘러보고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했다. 도요타마마치(풍옥정, 豊玉町)에 이
르러 와타즈미신사 방면 길로 좌회전하여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으니 에보시다케전망대 주차
장이 마중을 나온다.

에보시다케는 해발 176m의 낮은 뫼로 와타즈미신사의 바로 뒷산이다. 그 정상에 전망대가 닦
여져 있는데 전망시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오로지 조망을 위한 공간으로 주변이 온통 낮은
산과 무성한 숲, 바다 일색이라 360도 조망이 가능하다.
이곳에 올라서면 서쪽과 서남쪽, 동쪽으로 리아스식 해안과 무수한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아
소만이 훤히 바라보이며, 그 모습이 마치 월남(越南,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비슷하다고 하여
일명 대마도의 하롱베이라 불린다. 바로 그 풍경 때문에 이 궁벽한 곳에 전망대를 닦은 것이
다.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자리를 잡은 이곳은 날씨가 좋을 때는 본토의 부산(釜山)까지 흐릿하
게 시야에 들어온다고 한다. 여기서 부산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나 공기가 깨끗한 겨울
에는 잘하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전망대 밑까지 1.5차선 크기의 도로가 닦여져 있으며 차에서 내려 각박한 산길을 조금 올라가
면 된다.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올라갈 수 있으니 이곳에 왔다면 꼭 전망대에 들려 일품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이곳은 워낙 산골벽지라 시내버스 같은 대중교통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여 풍옥정의 중심 마
을인 니이(仁位)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거나 와타즈미신사를 경유하는 투어버스(이즈하라↔
히타까츠)를 타고 걸어서 들어가야 된다.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과 사가 포구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①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②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③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④

▲  숲에 묻혀있는 에보시다케전망대 남쪽 봉우리

▲  주차장에서 바라본 에보시다케
붉은 피부의 버스는 본토 관광객을 태우고 온 버스들이다. 그들 너머로 높은 산이
보이는데 그 봉우리가 에보시다케로 그 정상에 전망대가 닦여져 있다.

▲  에보시다케 주차장에서 바라본 아소만과 사가 주변



 

♠  신라와 가야 사람들이 고향을 꿈꾸며 세웠던 도해궁이자 왜왕실의
발원지 같은 곳, 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

▲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입구

에보시다케전망대를 둘러보고 왔던 길로 나와 와타즈미신사 남쪽 숲길에서 내렸다. 여기서 무
성한 삼나무 숲길을 들어서면 와타즈미신사로 바로 이어진다.

와타즈미신사는 팔번궁신사(하치만구신사), 해신신사(가이진신사, 海神神社)와 더불어 대마도
의 대표적인 신사이다. 초대 왜왕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이며, 평안시대(平安時代, 헤이안시대
)의 율령 등이 담긴 연희식(延喜式, 엔기시키)의 신명장(神名帳, 진묘초)에도 나올 정도로 대
마도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신사이다.


▲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신사 주변은 삼나무와 대나무, 편백나무 등이 짙게 숲을 이루고 있다. 만송원의 두터운 삼나
무숲처럼 햇살이 제대로 맥을 못추는 숲길 속에 신사 도리이와 토요타마히메의 분묘 비석이
있으며, 그 숲길의 끝에 와타즈미신사 배례전이 있다.

▲  금줄이 쳐진 삼나무숲 도리이

▲  풍옥희(도요타마히메) 분묘 비석

풍옥희(豊玉姬,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는 와타즈미신사 설화에 나오는 용왕의 딸이다.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돌을 세워 비석으로 삼았는데, 그 피부에 풍옥희지분묘(豊玉姬之墳墓)
라 쓰여있다.
얼핏보면 풍옥희의 무덤으로 볼 수 있겠으나 비석에 쓰인 것과 달리 그에게 제를 지내던 제단
이었으며, 신사가 조성되기 전까지 제단으로 쓰였다. 또한 비석의 글씨 색깔이 금색으로 되어
있는데 왜열도에서 비석 글씨에 금분을 쓴 것은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년) 이후이다. 그러
니 이 비석은 그 이후에 세워진 것이 되며, 이때부터 제단이 무덤으로 둔갑된 것으로 보인다.


▲  와타즈미신사 직전 삼나무숲길

▲  금줄이 쳐진 신사 앞 돌덩어리

이곳에 신사를 짓고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지으면서 이름 없는 돌덩어리까지
의미와 이야기를 구절구절 붙여놓았다. (이 돌덩어리는 안내문이
없어서 무슨 의미의 바위인지는 모르겠음)

▲  와타즈미신사의 주인공이 봉안된 신전(神殿)
배례전 뒤쪽 높은 곳에 신전이 자리해 있다. 신전은 제삿날 외에는
공개를 하지 않는다.


와타즈미신사는 용왕의 딸인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와 하늘에서 내려온 히코호호 데미노미코
토의 사당이다. (이름도 참 징그럽게도 어렵다;;)
원래 이곳에는 신라(新羅) 또는 가야(伽倻) 사람들이 세운 사당이 있었다. 도리이가 가락국(
駕洛國)의 중심지라는 김해나 신라 서라벌(경주)을 향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신라(
또는 가야) 사람들이 조상신을 봉안한 사당을 세우면서 고향을 향해 사당과 문을 세웠다. 하
여 바다 건너에서 온 사람들이 지은 신궁이란 뜻에서 도해궁(渡海宮)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왜가 대마도를 침탈하면서 왜식 신사로 모습이 변질되었고, 신사의 설화를 적
당히 각색하면서 왜왕실의 발원지 같은 곳이 되었는데, (최초 왜왕이 가야 출신이라고 함) 이
곳에 얽힌 설화를 잠시 끄집어내보면 대략 이렇다.

하늘의 신인 다까비무스비(高皇産靈)의 외증손으로 지상에 내려온 니니기에게 히코호호테미노
미코토(이하 히코호호)란 아들이 있었다.
히코호호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다가 형에게 빌린 낚시 바늘을 바다에 빠트리고 말았는데, 그
바늘을 찾으려고 바다를 헤매다가 '시오츠라'란 신의 도움으로 용왕의 딸인 도요타마히메 노
미코토(이하 도요타마)를 만나 혼인을 하게 된다.

용궁에서 3년 동안 팔자 좋게 지내다가 문득 예전에 잃어버린 형의 낚시 바늘이 생각이 났다.
하여 장인인 용왕의 도움을 받아 그 바늘을 찾아 지상으로 올라와 형을 만났는데, 그때 도요
타마는 만삭의 몸이라 같이 나오지를 못했다. 하여 여동생인 다마요리노히메미코토(이하 다마
요리)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바다 밖으로 나와 현재 와타즈미신사 자리에서 남편을 만났다.
도요타마는 산통을 느껴 손수 해변에 집을 짓고 남편에게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면 안돼~~!'
당부를 했다.

허나 사람의 심리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 결국 훔쳐보게 되었는데, 글쎄 큰 뱀이
산고(産苦)로 정신없이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남편은 완전히 혼돈의 상태
가 되었고, 원래 모습을 들켜버린 도요타마는 너무 열받아서 막 낳은 아들을 해변에 버리고
우나자까를 메워 용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나자까는 용궁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곳을
헤집으면 문이 나타나고 메우면 사라짐)
이때 버리고 간 아들이 '우가야 후기아에즈(이하 우가야)'로 별명은 '이소라 에비스'이다.

우가야는 장성하여 작은 이모인 다마요리와 혼인했다. 서로 나이 차이가 좀 있을텐데 어쨌든
이모와 조카가 혼인을 한 것이다. 그들은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초대 왜왕(倭王)이라는
신무(神武)이다.
이 설화를 통해 왜왕족은 천신(天神)의 부계(父系)와 해신(海神)의 모계가 만나 이루어진 혈
통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곳이 왜왕실의 발원지임을 크게 어필하고 있다. 동시에 근친혼도
대놓고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신라와 고려도 근친혼이 심했음)

가야는 왜열도로 세력을 확장해 구주(九州, 규슈) 등 적지 않은 지역을 차지하여 그들 입맛에
맞는 지방 정권을 세워 통치했다. 그때 가야 본토에서 보낸 왕족이나 관리, 또는 새로운 삶터
를 꿈꾸며 건너간 가야 사람이 초대 왜왕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대마도와 꽤 유별난 인
연이 있었던 듯 싶으며 그로 인해 이곳에 그의 위패가 봉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왜가 가야와 백제, 신라에 종속되고 그들에게 오지게 영향을 받았던 과거를 싹 왜곡
하고 지우면서 왜국 중심의 역사관을 짜게 된다. 그 과정에서 초대 왜왕의 대마도 이북의 족
적은 지워졌고 이곳 신사의 봉안 주체까지 바꾸어 왜왕실의 발원지로 내세웠다. 그것도 모자
라 난데없이 천신과 해신(용왕)까지 등장을 시켜 왜왕이 그들의 자손이란 허무맹랑한 설화까
지 지어 붙였다. (현실은 가야, 신라, 백제 사람들의 후손들임)


▲  와타즈미신사 배례전(拜禮殿) 내부와 바로 앞에 걸린 색동줄
신사에 예를 표할 때는 방울이 달린 색동줄을 당기면서 방울소리를 낸다. 이는
신사에 봉안된 존재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자 함으로 이후 2번 예를
표하고 2번 박수를 친 다음 1번 절을 한다.

▲  금색으로 쓰인 봉축성혼기념비(奉祝成婚記念碑)
1993년 현재 왜왕인 덕인(德人, 나루히토)의 혼인을 기리고자 신사에서 아부용으로
세운 것이다. (덕인은 2019년 5월 부왕인 아키히토의 양위를 받아 왜왕이 됨)
왜국은 아직도 미개한 부분이 적지 않아서 날짜를 표기할 때
왜왕의 연호를 쓰는 별종 짓을 보인다.


조선 중기 이후 대마도가 왜화가 되면서 신불(神佛) 통합으로 기존 신사들이 이름이 바뀌었고
절과 마을 사당이 적지않게 신사로 강제 전환되었다. 와타즈미신사 역시 신사로 전환되었는데,
이곳 지명인 와타즈미(와타쓰미)란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어쨌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고 왜에게도 나름 의미가 있는 곳이라 신공황후(神功皇后) 개소
리나 늘어놓는 팔번궁신사보다 나은 곳이다. <신공황후 바로 이전 시절에 신라가 시마네와 야
마구치를 공격하여 왜왕 또는 그에 준하는 높은 작자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음>
게다가 신사 주위로 조엽수림(照葉樹林)이 매우 울창하며 북방계와 대륙계 식물이 해안 주변
에 섞여 있어 많은 새들이 머문다. 그래서 신사 주변 숲은 장기현(長崎縣, 나가사키) 천연기
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신사 앞에 바다(니이아소만)가 펼쳐져 있어 경관도 괜찮다.


▲  붉은 피부의 오미쿠지

저 붉은 통에 100엔 동전을 넣으면 운세가 적힌 종이가 나온다. 그 종이를 오미쿠지라 하는데
운세가 괜찮게 나왔으면 가져가도 되며, 영 좋지 않게 나왔을 때는 나무나 붉은 통 위 금줄에
묶어둔다. 그러면 신이 나쁜 운세가 좋게 되도록 빌어준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와타즈미신사
의 배때기를 불려주는 붉은 통이다.


▲  소원 나무판을 다는 곳(에마)

나무판 뒤쪽에 말이 그려져 있어 에마(畵馬)라 부른다. 소원 내용과 주소, 이름을 적어서 달
면 되는데 주소는 꼭 적어야 된다고 한다. 그래야 소원이 그 주소지로 날라가 소원성취가 된
다는 것이다.
소원을 적는 나무판은 돈을 내고 사야 되며 소원판 장사는 이곳의 짭짤한 돈줄이다.

▲  배례전 앞 1번 도리이

▲  배례전 앞 도리이와 코마이누상(拍犬)

배례전 앞 도리이 옆에는 오래된 코마이누상 1쌍이 있다. 이들은 신사를 지키는 개의 석상으
로 원래는 고려 개이다. 그것이 대마도와 왜열도로 넘어와 신사 등을 지키는 존재가 된 것이
다.
이곳 코마이누상은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둘 다 특이하게 암컷과 수컷의 생식기
를 모두 가지고 있다. 천하에 널린 개의 석상 중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암컷은 입을 다물고 있
는 모습인데, 이는 사람이 죽을 때 보통 입을 다물기 때문에 입을 닫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입을 벌리고 죽는 경우도 많음;;) 그에 반해 수컷은 침을 질질 흘리며 입을 벌리고 있다.


▲  2번 도리이에서 바라본 와타즈미신사

▲  2번 도리이

▲  땅과 바다의 경계에 자리한 3번 도리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야나 신라 사람들의 마음이 변치 않은 듯, 여전히 그들의
본거지를 향하고 있다. 이곳이 왜화가 되면서 사당은 신사로 바뀌고
이렇게 도리이까지 설치되었지만 이곳의 본마음은 여전한 것이다.

▲  와타즈미신사의 백미, 바다에 세워진 도리이들
와타즈미신사를 상징하는 풍경으로 3번 도리이 너머로 4번 도리이와
5번 도리이가 바다에 발을 담구고 있다.


와타즈미신사 앞에는 5개의 도리이가 있다. (숲속에 있는 도리이는 제외) 이렇게 도리이를 5
개를 둔 것은 5욕(五欲)으로부터 해탈하라는 의미라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3개의 도리
이는 땅에 있고, 2개는 니이아소만이라 불리는 바다에 있는데 이는 용왕이 이들 도리이를 통
해 신사로 들어오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즉 용왕을 위한 이정표이다.

바다에 설치된 도리이는 썰물 때는 거의 육지처럼 있다가 밀물 때는 도리이의 밑부분이 물에
잠기며 바다에 떠있는 모습을 보인다. 최대 2m까지 잠긴다고 하는데 바로 그 풍경이 이곳 신
사의 백미이다. 허나 내가 갔을 때는 썰물 때라 1개만 물 위에 있었다.

▲  3번 도리이에서 바라본 니이아소만

▲  신사 석조(石槽)

신사에는 물이 담긴 석조가 있다. 생김새가 본토의 샘터와 비슷하고 바가지까지 있어서 자세
한 사연을 모르면 본토 사람의 본능상 물 1모금 들이키기 쉬운데 절대로 물을 마시는 샘터가
아니다. 이곳은 신사 참배 전에 손을 씻는 곳으로 바가지에 물을 담아서 손을 씻고 입을 닦는
다. 그런 다음 참배에 임하면 된다.


▲  이소라 에비스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비늘바위)

비늘바위는 와타즈미신사의 주인공인 도요타마히메가 출산 장면을 훔쳐본 남편에게 절망하여
아들(이소라 에비스)을 버리고 용궁으로 들어갔다는 우나자까이다. 용궁으로 들어갈 때만 문
이 생긴다고 하는데 얼핏보면 설화를 끼워 맞추고자 인위적으로 만든 듯 싶으나 엄연한 자연
산 바위이다. 또한 아들인 이소라 에비스를 버린 곳이라 하여 '이소라에비스'라 부르기도 한
다.

이렇게 하여 와타즈미신사 일대를 그런데로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부근에 있는 에보시다케전
망대와 함께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했으나 2019년 9월에 신사를
관리하는 원숭이가 본토 관광객에게 무례를 범한 일이 발생하여 크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2020년 이후, 중공 잡것들이 천하에 악의적으로 퍼트린 코로나 전염병으로 대마도를 찾는 본
토 사람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다가 2022년 이후 조금씩 늘고 있는데, 와타즈미신사 원숭이
들이 여전히 주제 파악도 못하고 본토 사람들에게 계속 시건방을 떨자 요즘에는 대마도 여행
상품 대부분이 이곳을 차창(車窓) 관광으로 때우고 있다. 즉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
이다.
그나마 에보시다케전망대로 가는 길목이라 차창 관광으로 봐준 것이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그
앞을 지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본토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와타즈미신사 원숭이들만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이니 참 근시안적인 원숭이들이 아닐 수 없다. (왜열도 원숭이들은 이곳을 비
롯한 대마도에는 별로 오지도 않음)

와타즈미신사를 떠난 우리의 버스는 니이로 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별도
의 글에서(☞ 관련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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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홍제천 늦가을 산책 (세검정, 석파정별당, 석파랑, 홍지문 탕춘대성,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부암동 늦가을 산책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

홍지문과 탕춘대성

▲  홍지문과 탕춘대성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세검정

▲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세검정

 



 

종로구 북부에 자리한 부암동(付岩洞)은 북한산(삼각산)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에 포
근히 감싸인 산골 분지이다. 전원(田園) 분위기가 진하여 여기가 과연 서울 한복판이 맞
는지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자연과 어우러진 늙은 경승지(세검정, 홍지문. 백
석동천 등)는 물론 미술관 등의 문화공간(환기미술관, 서울미술관, 자하미술관 등)도 풍
부하여 나들이의 깊이와 재미를 더해준다.
바로 그런 매력 때문에 한참 전인 20대의 한복판에 부암동과 백석동천(백사실계곡)에 퐁
당퐁당 빠져버렸고, 이후 1년도 거르지 않고 매년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여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사계절 가운데 가장 처절하게 아름답다는 늦가을이 서서히 희미해져 가던 11월 한복판에
어느 볕 좋은 날, 늦가을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과 자연산 망막에 하나라도 더 담고자 간
만에 부암동을 찾았다. 이때가 지나면 가을 단풍은 90% 이상 지게 된다. 하여 후회가 없
도록 열심히 늦가을의 바퀴자국을 남겨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늦가을 풍경은 4계절 가운데 으뜸이다.



 

♠  서인 패거리들이 반역(인조반정)을 꿈꾸며 칼을 씻던 곳, 도성 밖
경승지이자 서울 시민들의 소풍/피서지로 인기를 누렸던
세검정(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호

신영동3거리에서 상명대, 홍은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으면 큰 바위에 걸터앉아 홍제천(弘濟
川)을 바라보고 선 단아한 모습의 세검정이 마중을 나온다.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말들이 많다. 연산군이
1506년에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그 부속 정자로 세웠다는 설도 있고, 숙종(肅宗) 시절
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둘
다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연산군 때 세워진 탕춘대 부속 정자가 세검정의 전신(前
身)이 아닐까 싶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
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
해군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혹은 칼을 갈고 날을
세웠다고 함)
그들은 역촌동(驛村洞)에 별서를 짓고 살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창의문(彰義門
)을 뚫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
로 옹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하고 칼을 씻었던(또는 갈았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했
다고 전한다.

1748년 정자를 일부 수리했으며, 1941년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
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세검정은 '세검정터'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4호로 지정되어 있음)

▲  옆에서 바라본 세검정

▲  세검정의 뒷모습

세검정은 주변 풍경과 조화를 꾀하며 지어진 정자로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등의 잘
생긴 바위들 그리고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림 같은 현장이다. 그
러다보니 도성 밖 경승지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도 이곳을 찾아와 세검정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
서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뜯어와 조성했다.

구한말(舊韓末)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들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아왔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을 소풍지로 삼았다. 특히 1899년 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 여학생들이 여기로 소풍을 나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
스도인 화보'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 밖으로 화류(
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라..'

왜정(倭政) 이후, 서울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
과 홍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동네에 진동
했다.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대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
질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과 신영동 지역에 들이닥친 것이다.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기 나
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하였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
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현재 세검정은 뒷통수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아직도 덜 걸러진 홍제천의 쾌
쾌한 냄새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 홍제천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린
내는 여전하며 하천 너머로 주택들이 가득해 옛날의 운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긴 서울 땅
에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거나 고립된 경승지가 어디 한둘이랴. 너무 사람과 개발만
생각하여 일을 저지르다보니 옛 경승지와 자연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  세검정의 오랜 단짝,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직한 반석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 때 사초를 깨끗히 세
초(洗草)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사초(史草) 등에 적힌 글씨를 물로 빡빡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으로 그
것을 마치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宴)을 벌였다. 사초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모태
가 되는 데이터로 제왕이 죽으면 바로 사초를 정리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차일암은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었다. 무더
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로 근래에 여기서 세검1교 밑도
리로 징검다리가 놓였는데, 그 다리를 통해 홍제천 산책로를 따라 홍지문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다.


▲  늦가을이 잔잔히 깃든 세검정 산책로

▲  세검정 동쪽 홍제천 산책로
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  세검정 동쪽 산책로(세검정성당 건너편)에서 바라본 세검정
세검정 너머로 상명대와 탕춘대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세검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로 244)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한옥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  석파랑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세검정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상명대입구인 세검정교차로이다. 여기서 서남쪽 길 건너편으
로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 집이 석파정별당을 품고
있는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이다.

지금은 비록 식당이지만 원래는 서예가이자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
馨, 1903~1981)이 살았던 곳이다.
그는 6.25시절 서울을 점령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리
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문화유산의 강제 북송을 막아냈으
며 <자세한 내용은 ☞ 간송미술관 글 참조> 왜열도로 넘어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
堂歲寒圖, 국보 180호)를 천신만고 끝에 품에 안고 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소전의 집은 새로 지은 것이 아닌 조선 후기 한옥을 옮겨온 것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옥인동(玉仁洞) 집을 1958년에 매입하여 가져왔다. 이때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이자 바로 근처에 자리한 석파정(石坡亭)에서 별당까지 떼어와 집
뒤쪽에 두었다. 또한 운현궁(雲峴宮)과 덕수궁(경운궁)에서도 돌담과 한옥을 사들였으니 그의
재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당시로는 그리 흔치 않았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
고 있었다고 함)
소전이 1981년 세상을 뜨자 집은 다른 이에게 넘어가 비싼 한정식당으로 바뀌었으며, 석파정
의 이름을 따서 석파랑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오랫동안 손님 외에는 내부 접근이 어려웠으나
2000년대 이후 해방되어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이곳은 부암동의 주요 명
소로 성장하여 사진쟁이와 답사객의 발길이 나날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개인이
운영하는 식당이기 때문에 답사와 출사를 한답시고 별당 등 건물 내부로 마구 들어가서는 안
된다.


▲  석파랑 본채 북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3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가운데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며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속살을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
개되었다. (서울미술관 개장으로 개방됨)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법칙에 따라 별
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서로 소유자가 달라서 이 또한 쉽지가 않을 것
이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소유, 석파정에서 떨어져 나온 별당은 석파랑 소유>


▲  석파정 별당 쪽마루와 섬돌
대청방 문을 살며시 열면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섬돌에 신발들이 가득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방에서 사람들이
한정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대원군의 별
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의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아직 방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음)
별당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으로 접근하거나 석파랑 전용 주차장에서 스톤힐로 이
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


▲  150년 이상 묵은 석파랑 감나무 (가운데 나무)

별당 옆에 조성된 돌계단과 돌문, 성곽처럼 다져진 석축은 석파랑에서 스톤힐이란 건물을 지
으면서 닦은 것들이다. 스톤힐(Stone hill)은 이탈리아 음식과 술을 취급하는 식당으로 석파
랑 주인의 딸이 운영하고 있는데, 전통과 고풍스런 멋이 깃든 석파랑과 180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그 옆구리에는 홍지동 산신당이 있다.
돌의 언덕을 뜻하는 '스톤힐'에 걸맞게 하얀 돌로 그 길목을 꾸민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하지
만 소나무가 무성한 주변 풍경과는 썩 어울려 보이지 않으며 스톤힐을 만들면서 석파정 별당
의 석축까지 진하게 다져놓아 마치 성곽 위에 집처럼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  활짝 열린 석파랑 대문(정문)
이곳에서 밥을 먹지 않더라도 사진쟁이와 답사객들에게 석파정 별당과 뜨락을
흔쾌히 개방하고 있다. 허나 예전에는 비싼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만 입을 벌리던 차가운 문이었다.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본채는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호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뜨락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자
1898년 경복궁에 세운 것으로 궁궐 건축물의 고품격이 고스란히 배여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뜨락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조그만 절구통과 다
양한 석물, 꽃, 나무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  석파랑의 중심인 본채
최대 50명까지 밥 손님 수용이 가능하며, 석파랑의 값비싼 한정식을
지어내는 부엌이 이곳에 들어있다.

▲  석파랑 본채 뒤쪽에 숨겨진 붉은 장독대들
저들 속살에는 무엇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까? 한번 들춰보고 싶다.
한정식당이니 고추장이나 김치, 간장 같은 것이 들어있을 것이다.

▲  석파랑 뒤쪽에 자리한 홍지동(弘智洞) 산신당

석파랑 뒤쪽이자 스톤힐 옆에는 붉은 피부 벽에 푸른 기와를 지닌 조그만 집이 있다. 얼핏보
면 창고처럼 보여 그냥 지나쳐도 아쉬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문 위에 걸린 '산신당' 현판이
보여주듯 홍지동의 안녕을 오랫동안 지켜주던 산신당이다.

세검정 주변 동네(신영동, 홍지동, 부암동)에는 4개의 산신당이 전하고 있다. 그중 석파랑 뒤
쪽 산신당은 홍지동을 담당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8월 1일 동네 사람들이 산신제를 지낸다.
특이한 것은 나머지 산신당도 같은 날 제를 지낸다는 것이다. 굳게 닫힌 당집 안에는 산신 부
부가 그려진 그림이 봉안되어 있으며, 오로지 제사날과 일부 날(청소하는 날 정도)에만 잠깐
씩 열어두고 있어 평소에는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다.

산신당 주변은 나무와 풀만 있었으나 주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석파랑이 산신당 바로 옆에 스
톤힐을 지으면서 보기가 좀 딱하게 되었다. 한때는 동네 성지(聖地)나 다름 없던 산신당의 존
재감이 크게 하락한 지금의 세태를 보여주듯이 말이다. 허나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
다고 스톤힐 덕분에 계단이 닦이면서 접근성 하나는 좋아졌다.

* 석파정별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2 (자하문로 309, 석파랑 ☎ 02-395-
  2500)


▲  세월 속으로 사라진 부침바위를 추억하는 표석

부침(붙임)바위는 부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유명한 바위이다. 바위 피부에 난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거나 바위에 붙인 돌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돌이 척 붙으면 아들을 낳
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로 한때 북새통을 이루
었다.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애듯한 현장으로 바
위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에 무참히 난도
질을 당해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위터에 표석을 세워 그가 있던 자리임을
아련하게 전해줄 따름이며, 세검정교차로 공원에 그를 추억하는 표석을 세웠다. 허나 아무리
그런다고 강제로 사라진 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서울 땅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도
시화의 거친 물결과 인간의 욕심으로 많은 바위가 세월의 저 편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말았으
니 실로 안따깝기 그지없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을 이어주며 도성의 수비력을 높였던 탕춘대성
(蕩春臺城)과 홍지문(弘智門)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석파랑을 둘러보고 홍은동(弘恩洞)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곽이 마중을 나온다. (석파랑 옆 세검정교차로에서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이어주던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세검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
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 신완(
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
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을 먼저 닦
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월 6일에 일
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
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북쪽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
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
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하여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싹 취소
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의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
에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그래서 홍
지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
대능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잘 남아있다.


▲  홍지문의 당당한 앞 모습
홍지문은 더 이상 서울 수비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과 관광지의 의무와 성격만 지니고 있으며,
문은 24시간 열어두고 있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홍제천 협곡에 지어진 것으로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탕춘대능
선에 있는 암문은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
데, 200년 이상 별탈 없이 살아왔으나 1921년 1월에 지붕에 쌓인 세월의 장대한 무게를 감당
하지 못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에는 홍제천의 물을 흘려
보내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까지 홍수로 모두 떠내려가면서 터만 겨우 남아오다가 1977년
7월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있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을 금지 구역으로 삼았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방향 성곽 300m
정도가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주변으로 돌아가야 된다. 그리
고 문 남쪽으로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잠깐 단절되어 있으나 그 길을 넘으면 성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닦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홍제천 변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
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  홍지문의 뒷모습

   ◀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
하다.

▲  홍체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의
북쪽 홍예문들

▲  오간대수문 북쪽 끝 홍예문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두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근래 홍제천 산책로
가 닦이면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다 보니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
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하는
경우에는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홍지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하얀 피부를 지닌 거대한 고려시대 마애불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호

 홍제천 남쪽에서 바라본 옥천암 (왼쪽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이 옥천암)

홍지문에서 한강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를 가면 홍제
천변 커다란 바위에 깃들여진 하얀 피부의 커다란 불상이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명물이자 상서로운 관세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 백불(普渡
閣 白佛)'로 많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
얀 마애불과 바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 홍제천변에 있어서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
가 된 19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과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
불'은 구한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암자인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작은 문이 있는데, 바로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
운 현장으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이,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자리
한다.


 보도각에 깃든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늙은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딱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과 비
슷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한 고려 후기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의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
(開城)에 있는 관음굴 석조보살반가상과 비교되는 고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
로 평가되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고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은 왜군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완전히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
에서 일어났던 권율 장군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까
지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胡粉,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으로 불상을 하얗게 도배를 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는다.

 보도교에서 바라본 보도각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보도교 끝에 자리한 맞배지붕 일주문


백불의 높이는 5m 정도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깊은 석불로 명성이 높았
다.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이
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과 동전
이 적지 않다. (동전은 계속 수거하고 있어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에 깃들
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앞에는 나무데크로 지어
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서울 근교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
어지면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모두
하얀색이었으나 이후 금색으로 칠했고, 2016년 이후 주황색으로 바뀌었음) 오른손에 걸린 팔
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 건 귀걸이까지 정말 관세음보살 누님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거
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들의 소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 들어줄 것만 같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뒷모습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두 눈은 '一'자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고, 긴 머리카락은 어깨
까지 닿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 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다소
맞지 않는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
을 접수하느라 힘도 제법 들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
하며 소망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성이 부디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
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  백불 옆에 자리한 옥천암

백불 동쪽에는 그를 후광으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하고 있다. 백불이 관세음보살이라 자연히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남해 보리
암(菩提庵),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서의 자부심
이 대단한지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시켜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시 탄산약수가 아닐까?)이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을 뜻하는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전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
는 홍제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 전해오는 것은 없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
藏義寺, 세검정초교 일대에 있었음)가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가 1396년에 태조 이성계의 도움으로 세웠다는 소림사
(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질없는 메아리이다.

이곳의 사적(事績)이 본격적인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다.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을 지으면서 삼성각의 기능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년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닦고, 1998년에 일주문을 지었다.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경내 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주택가가 붙어있고 뒤쪽(북쪽)과 서쪽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옥천암은 내부까지 들어가지 않고 백불을 보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지금까지 적지 않게
인연을 지었던 곳이고 경내는 백불 외에는 딱히 나를 흥분시킬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을 끝으로 늦가을에 벌인 부암동 늦가을 만행(漫行)은 흩어진 나날의 일
부가 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옥천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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