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22건

  1. 2022.11.23 300년 역사를 지닌 대전에 대표적인 시골 전통마을, 무수동 무수천하마을 (안동권씨유회당종가, 광영정, 유회당 기궁재, 삼근정사)
  2. 2022.11.13 봉천동 낙성대, 관악강감찬축제, 서울둘레길5코스 관악산 구간 늦가을 나들이 (강감찬생가터, 낙성대공원, 무당골)
  3. 2022.11.03 서촌(웃대)의 숨겨진 명소를 거닐다 <필운대, 백사이항복집터, 배화여고, 필운동 홍건익가옥, 월암동> 2
  4. 2022.10.19 성북동 북쪽 끝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삼각산 정법사 (복천암터, 산사길, 북악산길)
  5. 2022.10.11 함평 모악산 용천사, 목포 갓바위 늦봄 나들이 (용천사 꽃무릇공원, 목포 달맞이공원)
  6. 2022.10.03 서울 동쪽 변두리에 숨겨진 작고 상큼한 뒷동산, 일자산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서울둘레길3코스, 둔굴)
  7. 2022.09.24 서울의 북쪽 지붕이자 우리 동네 뒷동산, 도봉산 <무수골, 우이암(관음봉), 관음암, 천축사>
  8. 2022.09.12 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운달계곡)
  9. 2022.09.04 한여름 산사 나들이, 안성 고성산 운수암 (무한성, 무양성)
  10. 2021.11.29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을 거닐다. 평창동~백사실계곡~부암동 늦가을 산책 (평창동 소나무, 응선사, 창의문)

300년 역사를 지닌 대전에 대표적인 시골 전통마을, 무수동 무수천하마을 (안동권씨유회당종가, 광영정, 유회당 기궁재, 삼근정사)

대전 무수동(무수천하마을)


' 대전 무수동 봄맞이 나들이 '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 산수유나무
▲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 산수유나무와 사당
 



 

봄이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오랜 겨울에 지친 천하만물을 따스히 어루만지던 3월
의 끝 무렵, 천하 제일의 첨단과학 대도시, 대전(大田)을 찾았다.
우선 대전과 금산(錦山) 경계에 자리한 만인산(萬仞山, 538m)과 그 품에 펼쳐진 만인산
자연휴양림(☞ 관련글 보기)을 둘러보고 다음 메뉴인 무수동(無愁洞)으로 길을 잡았다.

대전 도심의 대표 지붕인 보문산(寶文山, 457m) 서남쪽 자락에 포근히 자리한 무수동은
300년 역사를 지닌 시골 마을로 오래된 기와집과 문화유산을 풍부히 간직하고 있다. 대
전 도심에서도 가까운 곳이라 '대도시 대전에 이런 곳이 있었나?' 구미가 크게 땡겨 만
인산 후속 메뉴로 삼았는데, 그곳이 비록 대전 속이긴 하지만 산골에 묻힌 벽지라 교통
편은 그리 착하지는 못하다.
다행히 만인산에서 대전 시내로 나오는 길목에 자리한 산내동(山內洞)에서 무수동 입구
인 침산동(砧山洞)까지 대전시내버스 30번(낭월차고지↔대전역동광장, 100~110분 간격)
이 가뭄에 콩 나듯 다니고 있어 그것을 타면 조금은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만인산공원에서 대전시내버스 501번(비래동↔마전)을 타고 산내동 산내초교에서 내리니
30번 버스가 약 30분 뒤에 도착 예정이다. (미리 시간표를 확인했음) 그래서 그 시간을
억지로 죽여가며 기다리니 버스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산내동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는 죄다 도심 쪽으로 직진하나 이 버스는 보문산 남쪽 산골
마을의 교통을 책임지는 외곽 노선이라 52번 버스와 함께 대별교에서 좌회전한다.
대별교부터 무수동입구까지는 농촌과 산골, 구불구불 고갯길이 도돌이표처럼 이어져 대
도시 대전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데, 흔히 서울과 부산, 인천, 대전 같은 대도시하
면 무조건 번잡한 시가지만 생각한다. 대전 30번은 대도시에 대한 그런 뿌리 깊은 고정
관념에 경종을 주려는 듯, 대별동, 소호동, 금동, 정생동, 목달동 등 보문산 남쪽에 안
긴 산골마을을 고루고루 구경을 시켜주며 침산동 입구에 나를 내려놓는다. 여기서 동쪽
시골길(운남로)로 들어서면 무수동, 구완동으로 이어진다. (운남로는 무수동과 바깥 세
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신작로임)


▲  무수동입구(침산2교)로 마중 나온 장승들



 

♠  무수동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宗家)' 주변

▲  오늘도 평화로운 무수동의 전원 풍경

장승의 환영을 받으며 무수동으로 인도하는 운남로로 들어섰다. 무수동은 이 땅에 아주 흔한
농촌마을이지만 겉모습과 다르게 300년 이상 숙성된 대전에 흔치 않은 오래된 집성촌(集姓村)
이다. 유회당과 기궁재 등의 오래된 한옥이 여럿 남아있으며 부추와 자운영쌀을 비롯한 친환
경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어 계절별 농촌체험이 가능하다. 게다가 고추장과 된장 등 전통장류
와 떡과 한과 등 전통음식 체험까지 누릴 수 있는 대도시에서 흔치 않은 시골 전통마을로 대
전 지역에서 제법 이름을 얻고 있다. (2006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었고, 농어촌관광공
사에서 트래킹하기 좋은 농촌관광코스로 선정하기도 하였음)

보문산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무수동은 북쪽과 동쪽은 보문산으로 막혀있고, 남쪽은 구완
천이 흐르며, 서쪽은 유등천이 흐르는 다소 구석진 곳이다. 예로부터 철이 많이 나서 무쇠골,
놋골, 물쇠골, 수철리 등으로 불렸는데, 이는 우리 동네인 도봉산(道峯山) 자락 무수골과 비
슷하다. (☞ 도봉산 무수골 보러가기)

조선 숙종(肅宗) 시절, 안동권씨인 권유(權惟)가 이곳에 터를 잡고 머물렀는데, 이곳 경치에
홀딱 반한 나머지 무쇠골과 이름을 비슷하게 하여 '무수옹(無愁翁)'을 아호(雅號)로 삼았다.
즉 근심이 없는 노인네란 뜻이다. 그리고 이곳 지명 또한 걱정이 없는 마을인 '무수리'로 싹
갈아버렸으니 그만큼 이곳이 그의 근심을 제대로 털어갔던 모양이다.

권유는 자신의 마음을 앗아간 무수동 뒷산에 고이 묻혔으며, 그의 아들 권이진(權以鎭, 1668~
1734)이 부모가 묻힌 이곳으로 삶터를 옮겨 완전히 정착했다. 그는 풍수지리에 밝아 마을 뒷
산에 제당(祭堂)을 손수 지어 매년 산신제를 지냈으며, 많은 돈을 쏟아부어 유회당과 기궁재,
삼근정사 등의 집을 주렁주렁 지어 그만의 작은 세상을 연출하였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무수
동을 지키면서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유서 깊은 무수동에는 유회당 종가와 유회당, 기궁재, 여경암, 거업재, 산신당 등의 오
래된 건물과 유회당판각, 유회당 권이진가(家) 유물 일괄(대전 지방문화재자료 17호), 무수동
산신제 동계첩(洞契帖, 대전 지방민속문화재 3호) 등의 문화유산이 있다. 또한 무수동 산신제
(山神祭, 대전 지방무형문화재 19호)는 300년 묵은 마을의 공동 행사로 정초(正初)에 적당한
날을 잡아 산제당(山祭堂)이 있던 자리에서 제를 지낸다.
어수선했던 19세기 중반과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 6.25전쟁, 1960~70년대 산업화를 거치
면서 산신제는 여러 번 중단되거나 존폐의 위기를 맞았고 한때는 절에 행사를 맡기는 무책임
함까지 보였다. 그러다가 2008년 제49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출전한 인연으로 마을에서 '무
수동산신제 보존회'를 결성하여 애지중지 키우면서 대전 제일의 전통민속행사로 단단히 자리
를 잡았으며, '무수동 산신제 및 토제마짐대놀이'란 이름으로 매년 음력 1월 14일에 열고 있
다.
이들 문화유산 외에도 마을 뒤쪽 국사봉(國師峰) 정상에는 오래된 제사 유적이 남아있다. ('
국사봉 유적'이란 이름으로 대전 지방문화재자료 38호로 지정되었음) 이들은 안동권씨가 터를
잡기 이전의 유적으로 흙으로 만든 말과 분청사기, 청자 등의 자기 조각, 기와 조각이 나왔는
데, 흙으로 빚은 말이 나온 인연으로 정월대보름 전날(음력 1월 14일)에 여는 행사 이름에 '
토제마짐대놀이'란 이름을 붙였다.

무수동은 '무수천하마을'을 칭하고 있다. 이는 근래 칭한 것으로 '하늘 아래 근심 걱정이 없
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래서일까? 마을이 정말 평화로워 보인다. 게다가 애미도 몰라본다는
개발의 칼질도 이곳만큼은 제대로 마수를 뻗지 못해 시골 모습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다만 마
을 바로 남쪽으로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차량들의 소음이 적지 않게 옥의 티가
되고 있다.


▲  유회당 종가 앞에 솟은 은행나무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털린 채 애타게 봄의 손길을 원하는 그는
무수동에서 가장 늙은 나무로 300년 정도 묵었다.

▲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有懷堂 宗家) 일원 - 대전 지방유형문화재 29호

무수동입구(침산2교)에서 운남로를 따라 8분 정도 들어가면 커다란 은행나무와 함께 광영정,
연못, 사랑채와 안채를 지닌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가 마중을 한다.
이곳은 권이진이 무수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은 것으로 이후 화재로 몽땅 소실된 것을 후손
들이 1788년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은 것이다. 보문산 남쪽을 뒷배경으로 하고 구완천을 앞에
둔 배산임수(背山臨水) 자리로 이는 산과 내를 벗삼아 생활하며 청결하고 참된 선비의 경지를
추구하겠다는 생활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종가는 사랑채와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들 크기가 작다. 대신 건물과 건물 사이
의 공간을 여유롭게 배치해 뜨락만큼은 매우 넓으며, 그러다보니 집도 다소 넓게 보인다. 낮
은 잡석 기단(基壇) 위에 사랑채, 안채를 짓고, 집 앞에는 조촐하게 광영정과 연못(배회담)으
로 이루어진 정원을 두었다.
무수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현장으로 권이진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으나 옆에 새 집으로 자
리를 옮기고 기존 집은 산뜻하게 손질해 민속촌의 한옥처럼 속세에 개방했다. (건물 내부는
공개 안함)

▲  유회당 종가 사랑채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  유회당 종가 안채
'ㄱ' 모습의 7칸짜리 건물로 퇴락된 것을
근래 정비했다.


▲  노랗게 익어가는 산수유나무와 사당, 그리고 낮은 석축과 계단

사람이 떠난 종가 일대는 적막함이 가득하다. 석축 위에는 푸른 싹이 자라나 봄을 격하게 환
영하고 사당 담장 옆에는 산수유가 황금빛 피부를 드러내며 징그러웠던 겨울 제국의 종말을
알린다. 안채와 사랑채 주변에만 기와 돌담이 조금 둘러져 있을 뿐, 나머지는 뻥 뚫려있어 집
이 아닌 마을의 공공 장소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굳이 담장을 꽁꽁 두를 필요가 없을 정
도로 마을이 평화로웠다는 뜻일 것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제삿날 외에는 문을 굳게 봉하고 있다. 그 주
변은 건물도, 돌담도 없이 너른 벌판처럼 펼쳐져 있어 다소 허전해 보인다.

▲  바로 앞에서 바라본 산수유나무

▲  굳게 닫힌 사당<가묘, 家廟>


▲  유회당 종가의 연못인 배회담(徘徊潭)

종가 앞쪽에는 돌로 테두리를 다진 네모난 연못, 배회담이 고즈넉하게 누워있다. 마을 위쪽에
서 내려온 물을 가두어 못으로 삼았는데,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것을 경계하고자 남쪽에 작
게 수로를 팠다. 그 수로는 광영정의 아랫도리를 거쳐 구완천에 작게나마 물을 보탠다.
수로에는 큰 돌을 얹혀 조촐히 돌다리로 삼았으며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져 어색함이 별로 없
다. 지금은 비록 봄의 시작이라 못이 썰렁하지만 6월부터 9월까지 연꽃의 화려한 향연이 펼쳐
지며, 광영정에서 바라보는 그 풍경의 맛은 그윽하기 그지 없다.


▲  연못 남쪽에 자리한 광영정(光影亭)

연못 남쪽에는 초가 지붕을 지닌 소박한 모습의 광영정이 연못을 바라보며 한참 매뭇새를 다
듬고 있다.
이 초가 정자는 1710년에 권이진의 장남인 권형징(權泂徵)이 사당 앞에 지은 것으로 굵은 자
연석을 네 모서리에 깔아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갖춘 마루를 얹힌 다음, 초가
지붕을 얹혔다. 신발을 벗는 섬돌과 마루의 높이가 다소 높아서 어린이나 키 작은 사람들은
정자 진입에 다소 고통스러울 수 있다.

광영정이란 이름 외에도 바람을 부른다는 뜻의 '인풍루(引風樓)'와 '수월란(受月欄)', '관가
헌(觀稼軒)' 등 등 무려 4개의 풍류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정자 내부 동쪽에는 관가헌,
서쪽에는 수월란, 남쪽에는 광영정, 북쪽에는 인풍루 현판이 걸려있으며, 여기서 광영정과 연
못 이름인 배회담은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란 시구절에서 따왔다.

집안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의 조촐한 풍류 및 모임 장소로 산바람과 연못에서 불어오는 잔잔
한 바람으로 시원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으며, 바로 밑에 물이 흐르고 있고, 커다란 은행나
무도 있어 그의 그늘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피서의 성지(聖地)가 따로 없다.

* 안동권씨 유회당종가 일원 :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299-4 (운남로 65)

▲  광영정 북쪽에 걸린 '인풍루' 현판

▲  광영정 남쪽에 걸린 '광영정' 현판

▲  동쪽에서 바라본 연못(배회담)

▲  광영정 정면 - 마루의 높이가 다소 높다.


▲  남쪽에서 바라본 광영정과 지그재그로 이어진 석축 수로



 

♠  무수동 유회당, 기궁재 주변

▲  담장에 둘러싸인 유회당

유회당 종가에서 무수동 안쪽으로 2분 정도 들어가면 무수동 버스정류장과 무수동 다목적회관
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북쪽) 길(운남로85번길)로 조금 들어서면 오른쪽 산자락에 담장을 두
룬 기와집이 눈에 아른거리는데, 그 집이 무수동의 대표 고택(古宅)인 유회당(有懷堂)이다.

유회당 앞까지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 있으며, 주차장과 화장실을
갖추고 있어 이곳에 대한 대전시의 각별한 관심을 보여준다. 주차장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유회당의 정문인 솟을삼문(충효문)이 왼쪽 문을 열어 정처 없는 나그네를 맞이한다. 보통은
왼쪽 문만 열어두며 행사나 제사 때는 오른쪽 문도 개봉한다. (가운데 문은 제사 때만 가끔
열림)
내가 이곳에 이른 시간은 거의 일몰 직전 때라 관람이 어려울 것이라 여겼는데, 다행히도 문
은 열려있었다. 3월이라 보통 18시까지(겨울은 17시) 문을 열어두기 때문이다. 만약 1달 전이
었다면 문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 것이다.

▲  솟을3문으로 이루어진 유회당의 정문
충효문(忠孝門)

▲  활수담(活水潭)과 돌다리

충효문을 들어서니 그 흔한 뜨락 대신 연못이 바로 펼쳐져 있었다. 즉 충효문과 유회당 사이
에 네모난 연못을 둔 것이다. '아니 이런 구조의 양반가도 있었나?' 심히 어리둥절하며 연못
의 정체를 파악하니 그의 이름은 활수담이다. 즉 물이 사는 못이란 뜻이다. 연못에 물이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런 단순한 진리를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보다 종종
단순한 것이 나을 수 있다는 의미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일까?

연못 중앙에는 유회당으로 인도하는 돌다리를 두었는데, 근래 손질을 했는지 고색의 때가 별
로 없다. 그래도 양반가 고택 내부에서 돌다리는 흔치 않은 존재라 흥미로운 장소이다. 또한
대전의 유일한 늙은 돌다리로 그 가치는 연못에 모인 물만큼이나 차고 넘친다.
물로 가득한 연못에는 잉어를 비롯한 많은 물고기들이 꼬리를 흔들며 유유자적하고 있다. 그
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의 상태였다.


▲  연못 물고기들이 정모 현장
저들의 정모 주제는 무엇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  유회당의 상징이자 구수한 양념, 활수담의 위엄
뜨락 대신 연못과 돌다리를 두어 유회당 주변 풍경을 한껏 폼나게 꾸몄다.
역시나 돈이 많은 양반사대부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가능했지. 일반
백성이라면 어림도 없는 꿈 같은 현장이다.

▲  유회당 판각에서 바라본 활수담과 솟을대문
연못 주변 화초들이 그를 거울로 삼으며 봄으로 들뜬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계단 위에 높이 자리한 유회당

활수담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이곳의 중심 건물인 유회당이 나온다. 높게 잘 다져진 석축 위
에 자리하여 연못을 굽어보고 있는 모습이 자못 위엄이 넘쳐 보이는데, 정확히 유회당 종가가
있는 서남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
이 건물은 권이진이 지어 머물던 곳으로 그의 호인 유회당을 집 이름으로 삼았다. 여기서 유
회(有懷)는 명나라 말기 학자인 전목재(錢牧齊)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이
란 시구(詩句)에서 따온 것으로 부모에 대한 효성스러운 마음을 늘 간직하고자 그런 이름을
지었다. 또한 그의 부모인 권유 묘역 밑에 거처인 유회당과 제사를 지내는 기궁재, 시묘 건물
인 삼근정사까지 주렁주렁 지어 부모 곁에 계속 있고자 했다.

유회당은 정면 4칸, 정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정면과 양쪽에 평난간을 갖춘 툇마루가 있고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넓게 깔아 그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했다. 그리고 건물 밑에는 운치 있게
연못과 돌다리를 두어 여흥과 풍류도 고려했다. (건물 내부는 관람이 어려움)

▲  '활수담' 3자가 적힌 표석

▲  유회당 현판의 위엄

▲  유회당의 옆모습

▲  유회당의 뒷모습


▲  유회당 판각(板刻)을 머금은 장판각(藏板閣)

유회당까지 돌다리의 신세를 지기 싫다면 연못 옆구리로 돌아가는 길도 있다. 그 길로 가면
유회당의 판각을 머금은 맞배지붕의 장판각이 굳게 닫힌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유회당 판각(대전 지방유형문화재 20호)은 권이진의 체취가 깃든 글을 모아놓은 판목(246판)
으로 그의 증손자인 좌옹 권상서(左翁 權尙書, 1767~1835)가 순조(純祖, 재위 1800~1831) 시
절에 정리했다.
그 판각에는 그가 정리한 성리학 관련 문서를 비롯해 왜열도 관련 외교 문서, 청나라에 사신
으로 갔다와서 작성한 연행일기<燕行日記, 여기서 '연'은 청나라의 도읍인 연경(燕京)> 등이
담겨져 있으며, 판목이 많은 관계로 유회당 옆과 삼근정사 옆에 판각을 두어 보관했다. 허나
그들은 모두 비공개로 관람은 거의 어렵다.


▲  유회당(부) 기궁재(奇窮齋) - 대전 지방유형문화재 6호

유회당과 아랫 판각 뒷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기궁재가 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유회당
<부(附)>기궁재'임, 즉 유회당에 딸린 기궁재란 뜻>
유회당의 부속 재실(齋室)로 'ㄱ'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 건
너방, 부엌이 있으며, 별도로 돌담을 두르고 있어 집안의 특별한 공간임을 내비치고 있다. 현
재 후손들이 살고 있어 대문은 굳게 닫혀져 있으나 돌담 밖에서도 기궁재를 확인하는데 별 어
려움이 없으므로 애써 문을 부시거나 월담하지는 말자.

현재 건물은 1920년에 중건된 것으로 바로 뒷쪽 산자락에 권유와 후손들의 묘역이 있다. 허나
지금의 무수동을 일구고 유회당과 기궁재를 닦은 권이진은 이상하게도 이곳에 묻혀있지 않다.
그의 묘는 이곳에서 7~8km 떨어진 어남동 산자락에 따로 있는 것이다. 자세한 사연까지는 모
르겠으나 어남동 자리가 명당(明堂) 자리라 하여 후손들을 위해 별도로 그곳에 묘역을 일구었
던 모양이다.

▲  기궁재의 솟을대문인 상지문(尙志門)

▲  돌담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본 기궁재

▲  후손들이 머물고 있는 기궁재

▲  장판각과 삼근정사를 가리고 있는
소나무의 위엄


▲  유회당 뒤쪽에 자리한 소나무와 윗 장판각, 삼근정사

유회당 뒤쪽에는 잔디가 곱게 입혀진 언덕이 있다. 그 언덕에 소박하게 닦여진 돌계단이 있고
그 계단의 끝에 권이진의 판각을 머금은 윗 장판각과 운치가 깃든 소나무, 그리고 삼근정사가
자리해 있다.

권이진의 문집(文集)이 많다보니 2개의 장판각을 지어 보관했는데, 그 앞에는 기품이 돋보이
는 소나무가 여러 갈래로 솟아나 풍경을 잔뜩 돋군다. 대략 200년 정도 묵은 듯 싶은데, 권이
진의 후손들이 이곳을 정비하거나 제사를 지낸 기념으로 심은 듯 싶다. 그리고 소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뒤에 삼근정사가 있다.


▲  삼근정사(三近精舍)

유회당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근정사란 조그만 'ㄱ'자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권이진이 1715년에 부모 무덤을 지키는 시묘(侍墓)살이를 위해 지은 일종의 시묘소(侍墓所)로
대전에 유일하게 남은 시묘소의 흔적이다. 이곳에 시묘소를 지은 것은 바로 북쪽 담장 너머에
부모의 묘역이 있기 때문이다. 집을 묘역 밑에 짓다 보니 시묘살이는 은근 편했을 것이며, 권
력층이라 그런지 시묘살이도 참 좋은 집에서 했다.

건물의 이름인 삼근은 '부모의 묘와 담 옆을 흘러가는 시냇물, 시냇물 옆에 우거진 철쭉숲과
가까이 한다'는 뜻으로 부모의 무덤 및 자연과 가까이 지내려는 그의 의지가 담겨져 인다. 현
재는 유회당처럼 내부가 비어있으며, 이곳은 유회당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라 풀이 많아
서 매년 6월과 12월, 잡풀 제거작업을 벌여 주변을 산뜻히 손질한다.

▲  삼근정사 내부 
방 1개, 툇마루로 이루어진 아주 조촐한
모습이다. 하긴 시묘소 공간이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  밑에서 바라본 삼근정사와 돌담
삼근정사 옆에는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이 문은 뒤쪽에 자리한 권유를 비롯한
집안 사람들 묘역으로 이어진다.


삼근정사를 끝으로 유회당 경내 관람은 마무리 되었다. 기분 같아서는 동쪽 산속에 숨겨진 여
경암(餘慶庵)과 거업재(居業齋), 산신당(山神堂)까지 싹 가고 싶었으나 시간은 그것을 허용치
않았다. 이미 18시가 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곳은 여기서 2리를 더 올라가야 된다.
그들을 봐야 무수동에 깃든 문화유산을 다 보는 것인데, (산신제와 권이진가 유물, 산신제 동
제첩 등은 제외) 햇님도 벌써 칼퇴근 준비에 부산하니 땅꺼미가 내려앉는 것을 무릅쓰고 올라
가기도 좀 그렇다. 설상 올라갔다고 해도 야경 사진은 더욱 자신이 없다. 하여 나머지는 언제
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싹 넘기고 무수동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며 석양(夕陽) 따라 나의 제
자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대전 무수동 봄맞이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유회당, 기궁재 소재지 :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94 (운남로85번길 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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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 낙성대, 관악강감찬축제, 서울둘레길5코스 관악산 구간 늦가을 나들이 (강감찬생가터, 낙성대공원, 무당골)

낙성대 늦가을 나들이 (강감찬생가터, 관악 강감찬축제, 관악산 서울둘레길 5코스)


' 낙성대, 관악 강감찬축제, 서울둘레길5코스
늦가을 나들이 '

낙성대 안국사

▲  낙성대 안국사

낙성대3층석탑 관악산 무당골

▲  낙성대3층석탑

▲  관악산 무당골

 



 

늦가을이 익어가는 매년 10월 중/하순에는 강감찬 장군의 유적인 낙성대에서 '관악 강참
찬축제'가 열린다. 관악구(冠岳區) 제일의 축제로 등극한 그의 명성을 나의 침침한 망막
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축제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 그곳을 찾았다.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에서 낙성대까지는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이라고 하여도
완전 북쪽 끝에서 남쪽 끝이라 아무리 빠른 지하철로 가도 1시간 이상은 걸린다. 낙성대
역(2호선)에서 답답한 땅굴을 벗어나 낙성대로 가다가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 길을 동
쪽으로 조금 틀어 낙성대동 주택가로 들어섰다. 밀림 같은 주택가 한복판에 옛 낙성대터
(강감찬 생가터)가 있기 때문이다.



 

♠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던 유서 깊은 현장, 옛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생가터> -
 서울 지방기념물 3호

▲  수목으로 우거진 옛 낙성대 (강감찬 생가터)

지금은 '낙성대동'이란 행정동명을 쓰는 봉천동(奉天洞) 218번지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가 묻
혀 있다.
이곳은 관악구 출신으로 귀주대첩의 영웅인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흔히 낙성대하면 여
기서 남쪽으로 1리 정도 떨어진 낙성대공원과 안국사 일대를 일컬으나 원래 낙성대는 이곳이
다. 낙성대란 이름은 별이 떨어진 터란 뜻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낙성대는 절대로 이상한 대학교나 하위
권 대학교의 이름이 아니니 오해가 없기 바란다~~!>

948년 어느 날 밤, 중원대륙 왕조의 사신(使臣)으로 표현된 인물(그냥 사신으로 나오기도 함)
이 근처를 지나다가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광경에 입이 떡 벌
어진 그는 별이 떨어진 곳을 찾아가니 그곳에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자 금주(衿州,
서울 관악구와 금천구, 옛 시흥군 지역)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집이 있었다. 마침
그의 부인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이후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그를 만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곡성(文曲星)을 못
본지 오래되었는데 여기서 지금 뵈옵니다~'
하며 꾸벅 절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곡성은 도
가(道家)에서 말하는 9개의 별 가운데 학문을 관장하는 4번째 별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떨어
진 별이 문곡성이라고 하니 강감찬의 학문이 매우 뛰어났음을 문곡성을 빌려서 표현했을 것이
다.

당시 고려는 중원대륙의 후한(後漢), 진나라 등과 교류를 했는데 고려와 중원대륙의 사신, 무
역 상인들은 개경(開京) 인근 벽란도(碧瀾渡, 예성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고려의 내해(內海)
나 다름이 없는 서해바다를 오갔다. 그러니 굳이 내륙인 서울로 돌아갈 이유는 없다. 하여 개
경에서 남쪽으로 파견된 관리나 칙사(勅使)가 지나갔을 가능성이 크며,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
서 지나가지도 않았을 중원대륙 사신으로 변질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고려나 조선은 중원
대륙을 동경했고 군침을 흘렸던 것이다.
또한 별은 나라를 세운 시조(始祖)나 영웅의 탄생설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존재기도 하다. 그
들이 태어났을 때 흔히 별이 떨어졌다 하늘이 기뻐서 별을 내렸다는 식으로 탄생을 추켜세우
는 것으로 설화처럼 정말로 별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로 떨어졌다면 강감찬 집은
물론이고 그 주변은 정말 남아나지 못한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우스갯소리로 딸 수 있을
정도로 작아 보이나 그게 코앞에 다가왔을 때는 정말 답이 없는 상태가 됨>

이곳에 있었다는 강감찬 생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의 집안이 후삼국시대부터 금주 지역을 다스렸던 세력가였으니 집은 제법 컸을 것이다. 허나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집은 형편없이 녹아내리면서 생전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러다가 13세기 경,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그의 공덕과 탄생지를 알리고자 생가터에 3층석탑
을 세우니 그것이 낙성대3층석탑으로 그 탑의 영향으로 이곳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다.

이후 3층석탑 홀로 이곳을 지키다가 1974년 안국사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대신 유허비
를 세우고 나무와 꽃을 심어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다.
안국사가 조성되면서 그곳이 새 낙성대가 되었고 기존의 낙성대는 옛 낙성대가 되어 '낙성대
유지(遺址)
'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근래에 '강감찬 생가터(낙성대)'로 명칭
이 갈렸다.

현재 이곳에는 낙성대유허비와 옛 강감찬 향나무의 뒤를 이은 160년 묵은 향나무가 있으며 나
무와 꽃이 가득해 조촐하게 소공원 역할을 한다. 강감찬 생가터라고 하지만 생가와 관련된 어
떠한 흔적도 전해오지 않으나 땅을 파보면 건물 주춧돌이나 당시 유물이 고개를 들고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이곳 일대를 재개발하거나 싹 밀어버릴 기회가 있다면 꼭 발굴조사를 벌
였으면 좋겠다.

* 강감찬 생가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낙성대동) 218-14


▲  낙성대유허비(落星垈遺墟碑)

옛 낙성대 한복판에 자리한 유허비는 3층석탑
이 새 낙성대로 옮겨감에 따라 허전한 옛 자리
를 달래고자 1974년에 세워졌다.
안국사 안에 세워진 강감찬사적비를 모델로 하
여 똑같이 만들었는데, 고개를 높이 쳐들며 엉
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거북 머리 귀부(龜趺)를
밑에 깔고 그 등에 비좌(碑座)를 만들어 '강감
찬장군 낙성대유허비'라 쓰인 비신(碑身)을 세
웠으며 그 위를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
고 다투는 모습을 담은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  낙성대유허비의 뒷모습

비석 높이는 2~3m 정도로 안국사의 강감찬사적비보다 키가 작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1997년에 다시 손질했다.


▲  강감찬 향나무

옛 낙성대의 명물로는 3층석탑과 함께 나이가 꽤 지긋했던 향나무가 있었다. 향나무는 강감찬
과 더불어 자랐다고 전해져 일명 '강감찬나무'라 불렸는데 그것이 맞다면 나이가 무려 1,100
살 가까이가 된다.
허나 실제 나이는 그 정도까지 미치지 못하며 조선시대에 강감찬을 흠모하던 지역 사람들이나
후손이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강감찬과 연관된 나무로 엮어진 것이다.
이 나무 외에도 인근 난곡(蘭谷)에 그가 심었다고 전하는 굴참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도 강감
찬나무란 별명을 지니고 있다.

낙성대 향나무는 낙성대와 강감찬을 상징하는 자연 명물로 1968년 서울시 보호수 1-23호로 지
정되었으나 1987년에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줄을 놓고 말았다. 그래서
그에게 부여된 보호수 등급은 해제되었고 죽은 몸뚱이도 문드러져 전설 속의 나무가 되었다.
이후 1996년 관악구에서 옛 낙성대를 정비하면서 향나무의 빈자리를 채울 계획을 세웠고 적당
한 나무를 찾다가 그해 11월 경기도 고양시에서 150년 묵은 향나무를 구입해 비록 씨는 다르
지만 강감찬나무의 후예로 삼있다. (나무 앞에 그와 관련된 유래를 머금은 표석이 누워있음)



 

♠  관악 강감찬축제의 현장, 낙성대 안국사 (낙성대공원)

▲  강감찬축제 공연이 열리고 있는 낙성대공원

옛 낙성대를 둘러보고 안국사가 있는 새 낙성대로 향했다. 낙성대역에서 서울대로 가는 길목
에 자리한 이곳은 1974년 6월에 조성된 것으로 크게 안국사와 낙성대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늦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공원에는 관악구의 대표 축제 '관악 강감찬축제'가 떠들썩하게 열
리고 있었다. 축제를 보고 즐기려는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데, 음악 공연과 다
양한 문화/전통 체험, 강감찬을 주제로 한 역사포럼, 장터(먹거리 장터 포함) 등이 주류를 이
룬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문화/전통 체험이 풍성해 아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 장
소로 딱 그만이다.

관악 강감찬축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자 벌이는 축제로 안국사에 제를 지내는 '낙성대 인
헌제'에서 비롯되었다. 1988년 추석(9월 20일)에 처음 시작되었으며 관악구의 예전 대표 축제
인 '관악산 철쭉제'와 통합되어 '관악 강감찬축제'로 크게 몸집이 커졌다. (관악산 철쭉제는
사실상 없어짐)
강감찬 추모제향을 시작으로 안국사와 낙성대공원 일대에서 강감찬을 주제로 한 출병식, 전승
행렬 거리 퍼레이드, 역사포험 등의 이벤트, 고려민속촌과 벽란도21, 주민화합 한마당, 다채
로운 문화/전통 체험행사, 음악회, 전시회 등이 열린다. 나는 혼자 간 터라 간단히 1바퀴 둘
러보고 안국사로 넘어갔다.


▲  안국사로 인도하는 싱그러운 숲길
저 숲길의 끝에 안국사와 강감찬전시관이 있다.

▲  강감찬전시관

안국사 앞에는 근래 닦여진 강감찬전시관이 놓여져 있다. 이곳은 강감찬 장군의 생애와 3차례
에 걸쳐 이루어진 고려와 거란(요)과의 전쟁, 그 전쟁을 최종 마무리 지은 귀주대첩(龜州大捷
)을 다루고 있는데, 전시 유물은 모두 모조품이며 해설과 디오라마 중심으로 짜여져 그 시절
의 이해를 최대한 돕고 있다. (전시관 내부는 사진 촬영 가능)


▲  강감찬이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양식의 시(왼쪽)와
강감찬의 일대기를 다룬 강감찬전(姜邯贊傳)


강감찬의 한시는 오세창(吳世昌)이 고려부터 20세기 초까지 옛 사람들의 필적을 모은 근역서
휘(槿域書彙)에 수록되어 있다. 그 부분을 복사해서 이곳에 전시한 것으로 여기서 근역은 조
선을 뜻한다. (즉 무궁화 나라)
옆구리에 놓인 강감찬전은 우기선(禹基善)이 1908년에 지은 것으로 일한주식회사에서 단행본
으로 간행했다. (그 역시 모조품)


▲  안국사의 정문인 안국문(安國門)

윤기가 철철 흐르는 청기와 맞배지붕을 지닌 안국문은 안국사의 정문이자 외삼문(外三門)이다.
사당은 안국문부터 내삼문을 거쳐 본전까지 약간 서북향(西北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지형상
에 이유도 있겠지만 강감찬이 고려 때 인물이므로 옛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바라
보게끔 서북향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개경(개성)은 여기서 서북향이다.

안국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만 왕래하는 특별한 문으로 제
향 외에는 닫아둔다. 속인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가면 되며, 계단 남쪽에
는 낙성대 안내문과 낙성대 표석이 있다.


▲  커다란 돌로 이루어진 낙성대 표석

낙성대 안내문 옆에 자리한 낙성대 표석은 낙성대가 완성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남긴 낙성대
3글자를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74년 청와대와 서울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 그를 통해 백성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충효의
지를 높이고자 그의 사당을 짓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옛날에 잘나갔던 장군의 사당이 하나
도 없던 상황. 그런 상황에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은 정말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유적인 낙성대는 3층석탑과 향나무만 있었을 뿐, 제를 지내는 어떠한 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관악산 북쪽 자락에 넓게 터를 다져 사당을 지었는데 그해 4월 11일, 상량식을 가졌고
불과 2달 만인 6월 10일에 뚝딱 완성을 보았다. 공사비는 4.5억원이 들었으며 강감찬이 국내
외적으로 크게 불안정했던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 나라가 평안해진 것처럼 나라의 평안을 염
원하는 뜻에서 사당 이름을 안국사라 하였다.

낙성대 표석 밑도리에는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셨다는 식으로 아주 딱딱하게 쓰여있어 독재시대
의 우울했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허나 어찌하랴 이 역시 이곳을 거쳐간 엄연한 역사인 것을
<사당을 지어 영웅을 기리는 것은 좋으나 그 사당을 짓게 한 이를 너무 높인 것이 옥의 티임>


▲  3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는 강감찬장군 사적비(事蹟碑)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옛 낙성대에 있는 유허비와 같은 모습이다.


안국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내삼문(內三門)이 보이고, 좌우로 3층석탑과 강감찬장군사적
비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울의 유일한 옛 시대 장군의 국립 사당이라 <민간신앙으로 지어
진 원효로 남이(南怡) 장군 사당, 보광동 김유신장군 사당은 제외> 경내가 꽤 깔끔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  낙성대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호

강감찬사적비 맞은편에는 낙성대의 오랜 상징인 낙성대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왜 이곳에 절탑이 있지?','인근 절이나 절터에서 가져온 것인가~?' 고개를 갸
우뚱하지만 그는 겉모습만 그렇지 불교와는 그리 관련이 없는 석탑이다.

이 탑은 고색의 기운이 없는 낙성대 안국사에서 유일하게 고색의 내음을 뿌리는 존재로 13세
기에 지역 사람들과 후손이 강감찬의 공덕을 기리고자 그의 생가터에 세웠다. 공덕을 기린다
고 하면 흔히 비석을 세우기 마련이나 불교 국가인 고려답게 불탑(佛塔) 모양의 탑을 세워 강
감찬을 큰 존재로 추앙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옛 금주(금천) 지역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
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가늠케 하며 지금은 금지된 도시로 묶인 개성(開城)에도 그를 위해
세운 석탑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서 석탑을 불탑이 아닌 영웅을 기리고자 세운 경우는 강감찬 외에도 경남 남해(南海)
의 정지(鄭地) 장군 석탑이 있다. 그는 14세기 말에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격퇴해
남해 백성을 구했는데 지역 백성들이 그의 전승을 기리고자 세웠다.

탑이 영락없는 불탑 스타일이라 다른 절의 탑을 가져와 이곳 상징물로 삼은 것이 아닐까 여길
수도 있지만 낙성대 주변에는 마땅한 절 흔적이 없다. 오로지 강감찬을 찬양하고자 세운 탑이
라고 봐야된다. 조성시기가 13세기인 것을 보면 그 당시 무척이나 징그러웠던 몽고(원나라)와
의 전쟁에서 거란족(요나라) 토벌의 영웅, 강감찬을 그리며 그의 혼령이 몽고를 보기 좋게 참
교육시켜 나라를 구해주길 바라는 뜻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탑 높이는 4.5m로 순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밑에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길쭉한 기단부(基壇
部)를 세운 다음, 3층 탑신(塔身)을 얹혔다. 1층 탑신에는 '강감찬 낙성대' 글씨가 새겨져 있
어 이 탑의 정체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으며 머리장식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다. 거의 800
년 이상 묵은 늙은 탑이나 아직 정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강감찬의 왕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탑은 옛 낙성대에 있었으나 1974년 제자리를 떠나 이곳에 왔으며 낙성대의 오랜 상징으로
이곳에 왔다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3층석탑이 없는 낙성대는 갈
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안국사도 그가 있기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  1층 탑신에 희미하게 새겨진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 6자

▲  푸르게 익은 낙성대 은행나무

1974년 안국사가 완공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그 기념으로 보낸 나무이다. 나무 앞에 관련 내
용이 적힌 표석이 누워있는데 '~~각하께서 ~~하사하시었다~'는 식으로 적혀있어 그 표현에 다
소 거북함을 들게 한다. 허나 역사의 산물이니 어찌하랴. 좋은 뜻에서 안국사를 세운 것은 분
명하니 이런 시대도 있었음을 알리는 뜻에서 그냥 두거나 내용을 좀 순화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표석과 나무를 뽑아버리자는 것은 절대로 아님>


▲  안국사 본전(本殿)

안국사 가장 안쪽에 자리한 본전은 말그대로 이곳의 중심 건물로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봉안
되어 있다. 가운데 칸에 그의 영정이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그의 주요 장면(탄생, 조정 출
사, 귀주대첩, 영파역에서 현종을 알현하는 모습 등)을 머금은 기록화가 걸려있는데 오직 상
상으로 그려진 것이라 그 당시와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3중으로 된 기단 위에 높이 들어앉아 서북쪽을 바라보고 선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푸른 청기와를 입혔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건축물인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본떠서 지었는데 그 무량수전의 기둥을 따라서 배흘림 기둥을 취했다.
(기둥 가운데가 볼록함)


▲  닫집 안에 봉안된 강감찬 장군의 영정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이 없으며 평소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다녀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몰라봤다고 전한다. 허나 거란 토벌의 대영웅을 그리 수수하게 그리는 것은 좀
아닌듯싶어 매우 늠름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표현했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이 1974년에 그린 것이다. 강감찬 생전의 모
습을 담은 그림이 전혀 없고 달랑 키가 작고 외모가 별로라는 내용만 있으니 나름 상상을 발
휘하여 대충 때려 맞춘 것이다. 그러니 실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월전이 그린 강감찬 영정이 그의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면서 본전에 이렇게 걸리게 되
었다. 게다가 월전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이자 친일 화가로 추잡한 경력을 남겼던
김은호(金殷鎬)의 제자라 그의 화풍을 조금은 닮은 것 같다.

이곳 영정은 1998년 1월 11일에서 12일 사이에 도난을 당했는데 관리인의 신고를 받은 관악구
청은 이를 신고하지 않고 몰래 월전을 찾아가 새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허나 고령의 나이
를 이유로 거절 당하자, 급하게 신림동에 사는 금광복이란 화가에게 영정과 똑같이 그려줄 것
을 의뢰하며 160만원을 건넸다.
그가 그림을 그려 표구점에 맡기자 구청에서 그 몰래 영정을 가져왔으며, 새로 영정을 봉안할
때 제를 지내 예를 갖춰야 함에도 그런 절차도 없이 3월에 그냥 봉안해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영정 도난 사건은 냄새를 킁킁 맡은 언론사의 취재로 7월에서야 드러나 관악구청은 두고두고
욕을 먹었는데 당시 사건을 맡은 관악경찰서도 무명 화가의 그림이라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
단하여 수사를 일찍 종결시킨 것이 드러나 둘 다 쌍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이에 관악구청 철
밥통 관계자는 좀 무안했는지 무속인이 가져간 것으로 둘러댔으나 영정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도 상상으로 근래에 그려진 영정이라 망정이지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진품이었다면 정
말 관악구청과 관악경찰서는 분노한 대중들에게 크게 털렸을 것이다.


▲  강감찬과 고려 군사들이 일군 대작품, 귀주대첩도(龜州大捷圖)

▲  거란군을 토벌하고 개선한 강감찬 장군과 고려군을 현종이
영파역(迎破驛)에서 맞이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

▲  늦가을에 잠긴 본전 뒷쪽 풍경
관악산에 접해있는 본전 뒤쪽 풍경도 제법 경치가 있으니 앞모습만
살피지 말고 뒷모습도 둘러보기 바란다.

▲  태극마크가 걸린 안국사 홍살문

▲  나른한 늦가을 오후를 깨우는
낙성대공원 분수대


▲  강감찬 장군 동상

낙성대공원 서쪽에는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있다. 1997년 10월 청
동(靑銅)으로 지은 것으로 1990년대부터 관악구 의회와 관악문화원에서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
나 돈이 딸려서 계속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서울시의 지원으로 기존 동상과는 다르게
갖은 요소를 넣어 제법 큰 규모로 건립했다.

★ 강감찬(姜邯贊) 장군(948~1031)의 생애

강감찬은 금천강씨<금주(衿州)강씨>로 금천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의 아들이다. 금천강씨는 진
주강씨에서 분파되었는데 그 시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 말에 금천 지역에 자리를 닦았으
며, 그 4세손이 바로 강궁진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이란 큰 감투를 받았다.

강감찬은 고려 초기 명장(名將)으로 이 땅의 민중들에게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
다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민중을 통해 신화처럼 미화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앞서 그의 탄
생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강궁진이 휼륭한 아들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부인에게 가는 도중 여우 부
인을 만나 그를 통해 낳은 것이 강감찬이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탄생 설화와 여우부인 이
야기는 흔히 시조나 위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설화라 순진하게 100% 믿으면 곤란하다.

강감찬의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관악구에 '은천로'란 도로가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은천동'이란 행정동명<봉천본동과 봉천9동을 통합한 동네>도 있다. 또한 그의 시호인 인헌(
仁憲)을 딴 '인헌동'이란 행정동명과 학교가 부지기수이며, 그와 관련된 명소도 적지 않아 관
악구가 완전 강감찬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30대까지 금천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며 종종 관악산에 올라가 심신을 단련
했다고 전한다. (그의 30대 중반 이전 기록이 너무 빈약함)

35살이던 성종(成宗, 재위 981~997) 시절, 개경으로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 갑과(甲科)로 급
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임명되었는데, 그를 장군이라 부르다보니
자연히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문과(文科)로 들어온 문인(文人)이었다. 허나 거란과의 싸움에
출전했고 귀주대첩을 이뤄낼 정도로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동북9성 여진정벌의 영웅인 윤관(
尹瓘)과 더불어 문무를 두루 갖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문인으로 출사한 것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 지방 세력을 때려잡고 왕권을 강화하
는 과정에서 무인들이 대거 털렸기 때문이다. 지방 세력 태반은 병사를 소유한 무인들로 그들
을 털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고 과거제도를 도입해 인재를 발
탁했는데 조선과 달리 문과만 치루었다. 그러다보니 문과를 거쳐야만 출세가 쉬웠다. 강감찬
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찌할 도리 없이 문과에 응시해야 했다.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하여 여러 재미난 설화가 전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살펴보면
① 그가 어느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부임을 했다. 그 고을의 관속(官屬)들은 그가 나이가 어
리다고 무시했는데 강감찬은 그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으라 했다.
그들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자 강감찬 왈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나를 그대들 소매 속에 넣으려고 하시오?'
호통을 치니 관속들
은 그제서야 잘못했다고 빌었다. 허나 강감찬이 35살 이후에 벼슬살이를 했으므로 나이가 크
게 맞지 않는다.

② 그가 강원도 원주(原州)로 출장을 가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객사(客舍) 옆 연못에는 개구
리들이 많아 늘 시끄럽게 울었다. 원주 수령은 강감찬이 편히 잠을 자게끔 하인을 배치해 개
구리의 입을 막게 했으나 아무리 돌팔매질에 나무로 연못 수면을 때려도 오히려 더 크게 우는
것이었다. 이를 본 강감찬은 미소를 지으며 부적을 쓰고 연못에 몰래 넣으니 개구리 울음소리
는 뚝 그쳤다.
이후 개구리 울음 소리는커녕 개구리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
당 연못 설화)

③ 그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가 충북 옥천(沃川)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곳은 모기
가 징그럽게 극성이라 백성들이 찾아와 귀주대첩 때 거란군을 쓸어버린 것처럼 모기 좀 어떻
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그가 하천으로 나와 모기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백성을 괴롭히는 행위는 용서치 못한다. 씨가 마르기 싫거든 당장 떠나라'
호통을 치니
모기들이 크게 쫄아 다음날 모두 사라졌다. 그곳은 지금도 모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옥천
청석교 설화)

④ 그가 남경(南京, 서울)을 다스리고 있을 때,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에 호랑이가 득실거
려 호환(虎患) 피해가 극성이었다. 이에 부하를 산으로 보내 승려를 데려오게 하여 그를 크게
꾸짖으니 승려가 호랑이로 변신하여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며 부하 호랑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
로 도망쳤다. (또는 강감찬이 호랑이들에게 새끼도 평생 1번 낳게 하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고 함)

1009년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하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현종(顯宗)>을
옹립한 이른바 강조의 난이 일어났다. 고려가 요동반도 일대의 강동6주(江東六州)를 점거하고
재미를 보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낸 거란<요나라> 성종(聖宗)은 강조의 난을 구실로 30만 대군
을 이끌고 친히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검차(檢車)를 이용해 그들을 여유롭게 때려잡았으나 그만 방심하
여 오히려 역전을 당하고 만다. 강조가 패하자 고려 조정은 벌통이 여러 개나 뒤집힌 듯 큰
혼란에 빠졌고 염통이 쫄깃해진 많은 신하들이 항복을 주청했으나 강감찬과 하공진(河拱辰)은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개경이 함락되었고 현종은 멀리 나주(羅州)까지 힘에 겨운 몽진을 했으나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 강감찬의 활약으로 거란은 크게 피해를 입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서북면
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등을 지냈으며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로 임명한다는 현종
의 조서(詔書)에는
'경술년(1010년) 오랑캐(거란)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숙히 쳐들어온 전란이 있었
다. 그때 강공(강감찬)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을 뻔했다'
적혀있
어 그의 공이 엄청났음을 알려준다.

1018년 거란 성종은 강동6주와 고려 굴복시키기에 대한 미련을 다시 드러냈다. 옛 조선과 고
구려, 발해의 그늘에서 오랫동안 살아갔던 거란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으킨 큰 나라, 요
나라는 10~11세기에 천하 강국으로 위엄을 날렸지만 고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와의 계속되는
전투로 상황이 넉넉치 못했다. 하여 간신히 10만 명을 정예병이라고 쥐어짜 소배압(蕭排押)을
총대장으로 삼아 고려로 보냈다.
참 지긋지긋한 거란의 3번째 침공을 맞이하여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20만 8
천의 군사를 주어 거란을 막게 했다. 그때 강감찬의 나이는 벌써 칠순이었다.

거란군이 압록강<鴨綠江, 현재 요하(遼河)로 지금의 압록강이 아님>을 넘어 고려의 영역에 들
어오자 강감찬은 재미없는 수성전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기병 1만2천을 뽑아 압
록강 하류 흥화진(興化鎭) 동쪽에 매복시켰는데, 거란군은 꼭 거치던 흥화진을 그냥 놔두고
고려군이 매복된 곳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때 강감찬은 기병을 매복시켜 호되게 후려쳤다.

여기서 2만 정도를 잃은 소배압은 자주(慈州)에서 강감찬의 부장인 강민첨(姜民瞻, ?~1021)의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개경만 점령하면 게임 끝이라는 무모한 생각에 무작정 개경으로
달려갔다. 이에 강감찬은 추격과 매복을 골고루 구사했고, 개경 점령에 눈이 뒤집힌 소배압은
개경과 가까운 신은(新恩)까지 진출했으나 식량도 부족하고 피해가 막대한 아군의 상황을 간
신히 깨닫고는 길을 돌려 열심히 줄행랑을 쳤다.

허나 그 길목에는 이미 고려군이 쫘악 깔려 열심히 그들을 털었고, 거란군이 요동반도 어딘가
로 여겨지는 귀주(龜州)까지 후퇴하자 강감찬은 귀주 벌판에 진을 치며 그들을 기다리니 이윽
고 소배압의 거란군은 병든 닭새끼처럼 귀주에 나타났다. 벌판에 진을 친 고려군을 본 소배압
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고려군과 진검 승부를 벌였다.
이에 강감찬은 그들을 크게 포위해서 잡는 작전을 펼쳤다. 기마병을 선두로 하여 보병과 사수
(射手)를 적절히 배치해 그들을 맹렬히 털었으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의 군사
도 때마침 합세하여 안그래도 힘이 딸린 거란군은 더욱 밀려 거의 전멸을 당하고 소배압은 간
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불과 수천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거
란에게는 개망신의 패배였으며 이 대승을 두고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거란의 패함이 이와 같
이 심한 적이 없었다'
고 기록을 했을 정도이다.

거란 성종은 부하를 싹 잃고 돌아온 소배압을 보자 크게 발작하여 '너가 적지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짐을 보려고 하는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여야 되나 내가 참는다'
질책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강감찬은 부하 장졸과 함께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챙겨들고 개경으로 개선했다. 현종은 너
무 기뻐서 친히 도성 밖 영파역까지 나와 연회를 베풀었으며 금으로 만든 8가지의 꽃을 그의
머리에 친히 꽂아준 뒤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축배를 들어 위로하고 찬양하니
강감찬은 '폐하의 분에 넘치는 황은(皇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의를 표했다.

현종은 그에게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책봉(
冊封)했다. 1030년에는 개경 주변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건의, 둘레 23km에 이르는 개경
도성(都城)이 구축되었으며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현종은 오히려 3일에 1번씩 입궐토록 명했다. 그랬던
현종이 그해 붕어(崩御)하고 덕종(德宗)이 제왕이 되자 1031년 6월 사직이 수용되었다.
허나 바로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83세에 나이로 장대했던 삶을 마감하니 왕은 3일 동안 조회
를 멈추고 그를 애도했으며, 인헌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특지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
國侯)를 추증(追增)했다. 이후 수태사 겸 중서령(中書令)까지 더하여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配享)되었다.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도 별볼일 없었으나 학문을 매우 좋아하고 무예와 지략, 기개가 뛰어
났다. 그리고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해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해지고 때가 묻은 허름한 옷
을 입고 다녀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일반 백성으로 오인하기 일쑤였다. 또한 엄숙한 태
도로 국사를 처리하고 국책을 결정할 때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 그 역할을 다했으며, 백성
들도 잘 보살펴 그들은 나라가 평온한 것이 강감찬의 공으로 여기고 추앙했다.

그는 고려가 한참 거란과의 싸움으로 안정되지 못한 11세기 초반, 안으로는 내정을 살피고 지
지기반이 부실했던 현종을 도왔으며, 밖으로는 거란을 토벌해 국내외적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고려를 강한 나라로 우뚝 서게 했다. 고려와의 3차례 전투에서 모두 깨지고 거기에 귀주대첩
에서 완전히 털린 거란도 이제는 힘이 딸려 더 이상 강동6주 반환과 고려 제왕의 입조(入 朝)
를 요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고려의 반격을 걱정해야될 판이었다.
고려 역시 오랜 전쟁에 지친 상태라 딱히 거란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강동6주를 완
전히 차지하지는 못했으며, '내원'과 '포주' 등 극히 일부 지역은 거란이 점거했다. 이들 지
역은 요서(遼西)나 요하 주변 지역으로 고려가 여러 번 공격했으나 거란이 굳게 수비하여 점
령하지 못했으며,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시절에 비로소 회복했다. 그리고 12세기 초까
지 압록강(요하) 가교 사건 등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양국은 별무리 없이 평화로운 외교관
계를 유지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국가가 장차 화패(禍敗)가 올 때 반드시 명현을 내시어 이를
구하시는구나. 목종(穆宗) 말년과 현종 원년에 역신(逆臣)이 난을 일으키고 거란이 내습해 안
으로는 내홍, 밖으로는 환란이 있어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공(姜公)이 없
었더라면 장차 나라가 어찌됐을지 알 수가 없다'
는 내용이 있어 그의 존재감과 공적이 얼마나
장대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는 않아 무슨 내
용의 책인지는 알 수 없으며, 그의 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데 오랫동
안 무덤의 위치를 몰라 애태우던 것을 1963년 지석(誌石)을 발견해 무덤을 복원했다.

* 낙성대 안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 (낙성대로 77 ☎ 02-877-6896)



 

♠  짧게 거닐은 관악산 서울둘레길 5코스 (낙성대~남현동)

▲  숲터널을 이루고 있는 낙성대 동쪽 산길 (서울둘레길5코스)

축제로 떠들썩한 낙성대를 둘러보니 어느덧 16시가 넘었다. 다음 정처(定處)는 딱히 정한 것
이 없어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서울둘레길5코스(이하 5코스)가 갑자기 땡겨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는 서울둘레길은 총 8코스 157km로 이루
어져 있다. 이중 5코스는 사당역에서 관악산 북쪽 자락, 낙성대, 서울대 정문, 삼성산(三聖山
) 북쪽 자락, 호암산(虎巖山) 옆구리를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13.5km의 도보길로 관악산
둘레길과도 조금 겹치는데, 관악산과 삼성산, 호암산 등 뫼 3개를 거치다 보니 오르락내리락
이 무수히 반복된다. 허나 해발도 낮고 길의 난이도도 초급으로 무난하다. 즉 사지만 멀쩡하
면 어린이도 쉽게 완주할 수 있는 코스다. (5코스 완주는 4~5시간 정도 걸림)


▲  5코스에서 바라본 관음사(觀音寺) 능선 (사당능선)

5코스는 낙성대공원을 지나간다. 안국사 남쪽 산길로 접어들면 관악산 북쪽 산자락을 지나 사
당역으로 이어지는데, 속세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해발 100~200m대를 구불구불 지나간다. 길
북쪽은 확 트여있고 딱히 시야를 방해할 뫼나 높은 존재가 없어서 낮은 높이치고는 조망도 괜
찮은 편이다.


▲  5코스에서 바라본 신림동, 봉천동 지역

▲  5코스에서 바라본 낙성대동, 사당동, 동작동, 서초구 지역
멀리 남산과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늦가을에 잠긴 5코스 산길 속으로 (무당골 서쪽)

▲  조촐하게 생긴 무당골 서쪽 계곡

▲  무당골 굴

5코스 낙성대~관음사 구간 중간 정도에 무당골이란 계곡이 있다. 이름 그대로 무당들이 굿을
했던 산악/무속신앙의 현장으로 그 현장의 중심이 바로 무당골 굴이다. 둘레길이 그 앞을 흐
르면서 그의 존재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고 나도 이렇게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호랑이가 담
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굿과 치성 장소로 바쁘게 살아와 굴 주위 피부가 온통 시커멓다. 굿/
치성에 촛불을 쓰기 때문이다. (특히 저녁과 밤에 치성 수요가 많았음)
비록 간의 기별도 안가는 얇은 수준이지만 작은 굴까지 지니고 있는데, 현재 무속행위는 통제
되어 있으나 치성이나 기도 행위는 밤을 중심으로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우리네 속세살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리라.


▲  촛불 등에 그을린 흔적들이 아주 요란한 무당골 굴

▲  무당골에서 바라본 관악구의 평화로운 모습 (낙성대동, 봉천동 지역)

▲  무당골 동쪽 5코스 구간

무당골을 지나 관음사까지 욕심을 부리려고 했으나 햇님 퇴근시간이 임박했고 몸 또한 지쳐서
관음사 이전인 남현흥화브라운빌아파트(남현동)로 미련없이 내려갔다. 비록 짧게 타긴 했지만
남현동~낙성대 구간 둘레길을 오랜만에 복습했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낙성대, 관악산 서울둘레길5코스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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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웃대)의 숨겨진 명소를 거닐다 <필운대, 백사이항복집터, 배화여고, 필운동 홍건익가옥, 월암동>

서촌(웃대) 나들이 ~~~ 필운대(백사 이항복집터), 배화여고 본관과 생활관, 홍건익가옥, 월암동



' 서촌(웃대)의 숨겨진 명소를 찾아서 ~~~ (필운대, 월암동) '

필운동 홍건익가옥
▲  필운동 홍건익가옥

배화여고 본관 필운대 바위글씨

▲  배화여고 본관

▲  필운대 바위글씨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일원인 서촌(西村, 웃대)은 인왕산(仁王山) 그늘인 경복궁 서쪽과
경희궁(慶熙宮) 주변 지역을 일컫는다. 원래 서촌은 서대문과 경희궁 주변, 웃대는 경복
궁 서쪽 지역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은 거의 합쳐졌고, 요즘은 경복궁 서쪽 지역
을 주로 일컫는다.
북촌(북촌한옥마을)과 부암동, 성북동(城北洞), 북한산(삼각산), 호암산 등에 분산된 내
마음을 적지 않게 앗아간 곳으로 지겹도록 발걸음을 했으나 그 넓지 않은 동네에 미답처
(未踏處)가 일부 고개를 들고 있다. 하여 그 미답지를 지우고자 여름의 뜨거운 한복판인
7월의 끝 무렵, 오랜만에 서촌(웃대)에 발을 들였다.

서촌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사직단(社稷壇) 뒤쪽에 위치한 배화여고(배화여자대학)를 찾
았다. 그곳에는 필운대 바위글씨와 근대 건축물이 여럿 있는데 근대 건축물은 예전에 싹
인연을 지었으나 필운대는 아직 인연이 닿지 못했다.



 

♠  필운대와 배화여고의 옛 건물들

▲  필운대(弼雲臺) 바위글씨 주변

배화여고 별관 뒤쪽 바위에 '필운대' 바위글씨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이곳은 오성과 한음
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집이 있던 곳으로 원래는 행주대첩의 영웅인 권율(
權慄)장군의 별서(別墅, 별장)였으나 이항복이 그의 딸에게 장가를 든 인연으로 상속을 받았
다. <권율의 집은 근처 행촌동(杏村洞)에 있었음>

이항복은 이곳을 '필운대'라 이름 짓고 지인들과 팔자 좋게 시회(詩會)를 즐겼다. 여기서 필
운(弼雲)은 그의 호(백사, 필운, 오성) 중 하나이자 인왕산(仁王山)의 별칭이다.
1616년 광해군(光海君)은 배화여고 일대를 중심으로 크게 인경궁(仁慶宮)을 지었는데 필운대
는 그 후원으로 편입되었으며, 궁궐의 규모는 창덕궁과 예전 경복궁보다 훨씬 컸다고 전한다.
광해군의 야망이 듬뿍 담겼던 인경궁은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 이후 팔자가 180도 바뀌
어 창덕궁 건물 복원에 적지 않게 동원되었으며, 이후로도 궁궐이나 관청 건물을 중수, 복원
하거나 신축할 때마다 이곳 건물을 뜯어가면서 17세기 중반에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1813년(또는 1873년)에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외 9명이 필운대 바위에 이름을 남겼는데
이는 옛날에 사라진(인경궁 건설 때 철거된 것으로 보임) 이항복의 옛집 건립과 관련된 것으
로 여겨지며, 1889년 이항복의 후손인 월성 이유원(月城 李裕元)이 이곳을 찾아와 느낀 바를
시로 남겼다. (바위에 새겨져 있음)
필운대 주변은 살구나무가 많고 풍경이 고와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았는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도 이곳 경치에 퐁당 빠져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君歌我嘯上雲臺 - 그대는 노랫가락 읊조리고 나는 휘파람 불며 필운대에 오르니
李白桃紅萬樹開 - 오얏꽃 복사꽃 울긋불긋 나무 가득 피었구나
如此風光如此樂 - 이런 좋은 경치에 이 즐거움 또한 멋지니
年年長醉太平盃 - 세세년년 태평 술잔 가득 마시고 취하리라


▲  지금도 또렷한 필운대 바위글씨의 위엄

바위에 진하게 서린 '필운대' 바위글씨는 붉은 피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항복이 썼다고 전하
나 실은 이유원이 쓴 것으로 여겨지며 필체가 선명하여 이곳의 옛 이름과 이항복의 유적임을
아련히 알려준다.
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으나 이미 죽은 상태이며. 바위 윗쪽에는 배화여고에서 씌워놓은 테니
스장 석축으로 보기가 좀 딱하게 되었다. 그리고 글씨 옆에는 이유원과 박효관이 남긴 바위글
씨가 덤으로 달려있어 필운대의 옛 명성을 살짝 속삭여준다.

필운대 바위글씨는 '필운대'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백사 이항복 집터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9호)'로 이름이 갈렸다. 허나 바위글씨와 글씨가 안긴 바위만 있을 뿐,
집터 흔적은 완전히 말라버려 주춧돌 조차 찾아볼 수 없다.


▲  이유원이 남긴 글씨

이항복의 후손인 이유원은 1889년 이곳을 찾아 그 소감을 시로 지어 바위에 남겼다. 시를 통
해 그 시절에는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지금은 바위 앞에 학
교 건물이 있고 주변도 매우 어수선하다. 게다가 바위 또한 세월에 많이도 지쳤을까? 가끔씩
돌이 떨어지는지 '낙석주의' 푯말까지 달려있어 세월의 부질없는 흐름을 느끼게 한다.

我祖舊居後裔尋 - 내 할아버지 살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더니
蒼松石壁白雲深 - 푸른 소나무와 바위에는 흰구름이 깊이 잠겼다
遺風不盡百年久 -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오래 전해오니
父老衣冠古亦今 - 옛 어른들의 의관이 지금껏 그 흔적을 남겼구나

癸酉月城李裕元題 - 계유년 월성 이유원 지음
白沙先生弼雲臺 - 백사 이항복 선생 필운대


▲  박효관 등이 남긴 글씨

이곳을 거쳐갔던 동추(同樞) 박효관 등 9명의 이름이 하얗게 쓰여져 있다. 1813년(또는 1873
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항복 옛집 건립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  은행나무 그늘에 닦여진 배화학당(培花學堂)의 역사들
배화학당의 창시자 '조세핀 필 캠벨'의 흉상(가운데)과 리드(Dr. C.F. Reid)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비(왼쪽), 그리고 2007년에 세워진 배화학당 창립 110주년 및
대학 개교 30주년 기념비(오른쪽)


필운대와 인경궁 옛터에는 배화학당의 역사를 이어받은 배화여고와 배화여중, 배화여자대학이
한 덩어리가 되어 들어앉아있다. 대학과 여중, 여고, 거기에 유치원까지 한 울타리 안에 담긴
흔치 않은 현장으로 여중은 교내 북쪽, 여고는 교내 한복판, 그리고 나머지는 대학이 채우고
있는데, 이화학당(梨花學堂)과 더불어 이 땅에서 제일 오래된 신식학교이자 여학교로 그 내력
의 실타리를 풀어보면 대략 이렇다.

배화학당을 세운 사람은 미국 텍사스에서 건너온 남감리교 소속 여자 선교사 '조세핀 필 캠밸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1853~1920)'이다. 그는 이 땅을 찾은 최초의 여자 선교사로
1897년에 입국, 그들의 목적인 기독교 영업을 위해 조선 여인들의 교육 계몽을 벌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몸을 담았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학생들에게 선교 기금을 받아 경복궁 인근
내자동(內資洞)에 땅을 구입해 '캐롤라이나 학당'을 세우니 그것이 배화학당의 시작이다.

학교를 열자 청나라 여선교사 도라유의 도움으로 2명의 여자 아이와 3명의 남자 아이를 간신
히 모집해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여자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 기
숙사를 두어 먹이고 재웠으며 국어와 한문, 성경 등을 가르쳤다.
1902년 통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여 학생 수가 30명으로 늘어났으며, 1903년 남감리교회 여선교
부에서 경비를 지원해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증축했고, 중학교 예비과를 설치했다. 1909년 고
등과를 설치했으며, 1910년 4월 배화학당으로 이름을 갈았는데, 이때 초대 교장대리로 니콜스
(Nicolls) 여사가 취임했으며 4년제 중학과와 4년제 소학과를 병설했다.
1910년 5월 16일 고등과 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친히 축사
를 내려 그들의 졸업을 치하했으며, 그 축사는 윤치호(尹致昊)가 대독했다.

1914년 왜인 교사의 왜어(倭語) 수업을 거부했으며, 1916년 1월에 지금의 자리로 학교를 옮겨
1915년에 미리 지은 과학관 건물에 보통과/고등과/유치원을 넣었다. 이때 3년제 고등과를 4년
제로 개편하였으며, 강원도 홍천(洪川)에서 '무궁화 보급 운동'을 펼쳤던 남궁억(南宮檍)이
1910년 10월부터 8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는 교가를 작사하고 학생들에게 무궁화 13송이로
우리나라 지도와 태극기를 수놓게 하는 등,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학생들은 '독립선언문'을 배포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동참했는데, 이
는 남궁억 선생의 영향이 컸던 탓이다. 그리고 1920년에 기숙생들이 만세운동을 벌여 많은 교
사와 학생이 왜정(倭政)에 잡혀갔다.

1922년 4년제 보통과를 6년제로 바꾸고 대학 예과를 설치했으나 이듬해 폐지했으며, 1924년에
새로 교가를 지었는데 친일파로 더러운 뒷끝을 보였던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가 노래 가사
를 쓰고, 교사인 루비 리가 작곡을 했다.
1925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을 갈았으며, 1926년 캠벨기념관을 신축해 고등과가 이전
했다. 1929년 11월 광주(光州) 학생운동이 터지자 격문(檄文)을 붙이는 등, 만세운동에 동참
하여 왜정의 염통을 잠시 쫄깃하게 만들었으며, 1938년 3월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소학
교로 명칭을 갈았다.
1940년 왜정의 신사(神社) 참배 강요에 선교사들이 반발하여 모두 그들 나라로 돌아가자 경영
난으로 크게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교사 이덕봉과 이만규가 학교를 구할 사람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녀 독지가인 이민천(李閔天)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춘천과 이천, 연기(세종)
, 익산 등지의 전답과 대지 32만평을 쿨하게 기부했던 것이다.
1943년 배화여자소학교를 경성여자배화학교로 변경했으며, 1944년 7월 왜군 통신부대가 캠벨
기념관을 무단 점유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1945년 9월, 경성여자배화학교를 폐교하고 재학생을 종로국민학교로 보냈으며, 1946년 4월, 6
년제로 개편하고 배화여자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허나 1950년 6.25가 터지면서 학교는 부
산(釜山) 초량동으로 내려가 임시 교사를 마련해 운영했으며, 서울 학교는 폭격으로 상당수가
손상되고 말았다.
1951년 5월, 교육법 개정으로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개편했으며, 1977년 배화여자대학을 설
립하여 지금에 이른다.

배화학당 초창기 시절, 이화학당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워낙 남녀유별이 심하다보니 여학생
교육을 모두 여선교사들이 맡아서 했다. 단 한문은 남자 선생이 맡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
는 선생이 여학생을 마주 보며 가르치지 않고 항상 뒤로 돌아앉아 여학생의 질문에만 대답을
하거나 선생과 학생 사이에 병풍을 치고 수업을 했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안되는
일이다.


▲  배화여고 캠벨기념관(본관) - 국가 등록문화재 673호

배화여고에는 오랜 내력에 걸맞게 붉은 피부를 지닌 근대 건축물이 3동이 전하고 있다. 그들
은 본관과 생활관, 과학관으로 이중 생활관이 제일 먼저 국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었고 나
머지 2동은 뒤늦게 2017년 1월에 그 지위를 받았다.

본관(本館)으로 쓰이는 캠벨기념관은 1926년 12월 7일, 캠벨을 기리고자 세운 지상 4층(지붕
층 포함) 건물이다. 1944년 왜군 통신부대가 점거해 사용하기도 했으며 6.25 때 반파된 것을
보수했다.
1977년 대규모의 보수를 벌였으나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실내공간을 밝게하고자 창
호를 넓게 구성하고 철근콘크리트 상인방(上引枋)을 사용하는 등, 건립 당시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과학관과 더불어 이 땅의 20세기 초반 근대교육 관련 유적으로 가
치가 높다. 현재는 학교 도서관으로 살아가고 있다.


▲  캠벨기념관(본관)의 육중한 뒷모습

▲  배화여고 생활관 - 국가 등록문화재 93호

본관 동쪽 경사진 곳에는 생활관이 있다. 그는 20세기 초반(1916년 정도로 여겨짐)에 선교사
숙소로 지어진 것으로 선교사 대부분이 미대륙 출신이라 그럴까? 건물도 그들의 고향인 미대
륙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윌슨 선교사가 집으로 사용했다가 1971년 배화여고에 기증하면서 배화여고 생
활관 및 동창회관으로 쓰이고 있다. (주로 생활관으로 쓰임)

반지하+2층 규모의 건물로 반지하는 완전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거의 3층이나 다름 없다. 건
물 현관은 1층에 있으며 반지하는 비록 노출되어 있긴 하나 현관을 거쳐 내려가야 된다. 현관
앞에는 돌출된 지붕을 만들고 그 위를 발코니로 덮었으며, 건물 내부에는 홀과 계단이 있고,
그 양쪽으로 방을 두었다.
건물의 겉모습은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 붉은 벽돌을 사용했는데 지붕은 흥미롭게도 한옥의 기
와지붕을 취했다. 그래서 서양식과 우리식이 조화를 이룬 건물로 지붕에는 2개의 붉은 굴뚝을
세워 연기로 하늘을 찌른다. 허나 난방 방식도 이미 바뀐 상태라 이제는 무늬만 굴뚝이 되어
모락모락 연기를 불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생활관의 뒷모습

▲  생활관의 옆모습


▲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배화여고 과학관) - 국가 등록문화재 672호

생활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북악산 방향) 다소 빛이 바랜 붉은 피부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그가 교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라는 과학관이다.
 
배화학당이 이곳에 안착했던 1915년에 2층 규모로 지어진 것으로 1922년 3층과 지붕층(4층)까
지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초반에 보통과와 고등과, 유치원이 같이 사용하다
가 1926년 본관이 지어지면서 고등과가 빠졌으며, 현재는 과학관으로 쓰이고 있다.
앞과 뒤쪽에 출입구와 계단을 두고 그 양쪽에 교실을 배치했으며, 건물 이름은 과학관이나 배
화학당 초창기 이름인 '캐롤라이나'를 따서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이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유치원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우는 남쪽 회화나무

과학관 동쪽에는 배화여자대학에 딸린 유치원이 있는데 그 북쪽과 남쪽에 훤칠한 외모를 지닌
회화나무 2그루가 사이 좋게 유치원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남쪽 나무는 200년 정도 되었다
고 하며 북쪽 나무는 3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21m, 둘레 4.3m이다.
이들 회화나무 형제는 적당한 연륜을 지니고 있어 서울시 보호수의 자격이 충분하나 어찌된
일인지 북쪽 것만 그보다 말단인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들에
게 인간이 달아주는 한낱 훈장이나 지위 따위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매일 유치원 어린이들이
그의 그늘에서 재롱을 피우며 커가는 모습을 보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것만큼 재
미있고 행복한 볼거리가 또 어디있겠는가.

* 필운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산1-2
* 배화여고 생활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12 (배화여고 ☎ 02-724-0300)


▲  유치원 북쪽 회화나무 -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2013-60호



 

♠  서촌의 새로운 꿀단지를 꿈꾸는 필운동 홍건익(洪建翊) 가옥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3호

▲  후원에서 바라본 홍건익가옥

배화여고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경복궁역 쪽으로 내려가니 왼쪽(북쪽)에 커다란 한옥 대문이
손짓을 한다. 현대식 주택 사이에서 고풍스런 모습을 드러낸 그곳은 서촌의 새로운 꿀단지로
떠오르고 있는 개량 한옥, 홍건익가옥이다.

이 한옥은 청계천에서 장사를 하여 많은 돈을 긁어모았던 홍건익이 1936년에 지은 것으로 대
지 740.5㎡에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 등 5동의 집을 낮은 구릉을 따라 자연스럽
게 배치했다. 서울에 오래된 한옥이 즐비하나 후원에 무려 일각문(一角門)과 우물, 빙고(氷庫
)까지 갖춘 곳은 이곳이 유일해 홍건익 일가의 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역시 세상은 돈이
많고 봐야됨)

전통 한옥의 구성과 근대 개량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안채 대청마루 풍혈판에 새
겨진 팔괘 문양, 별채 화초벽에 태극 문양, 이화꽃 문양, 연꽃 문양 등의 장식용 문양도 곳곳
에 남아있다.
허나 주인이 여러 번 바뀌고 그로 인한 관리소홀로 그 아름답던 집은 거의 폐가 수준으로 쇠
퇴했으며, 증축되거나 변형된 부분도 조금 있었다. 허나 전체적으로 건축 당시의 기본 구조
및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며 서울시가 매입해 지방문화재로 삼으면서 더 이상 망가지는 꼴
은 면하게 되었다.
이후 복원공사를 벌여 2015년에 마무리가 되었으나 내부 손질로 2017년 7월에 임시 개방되었
으며 그해 9월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너무 새집처럼 변해버린 면도 있으나 인근에 있는 이상
범(李象範) 가옥(☞ 관련글 보기)과 더불어 마음 놓고 두 발을 들일 수 있는 서촌(웃대)의 몇
없는 옛 한옥이며 서촌 관광 안내 및 사랑방,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어 점차 그 역할과 기
능이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  활짝 열린 홍건익가옥 솟을대문
대문 동남쪽에 빌라가 바짝 붙어있어 대문 앞 시야가 좀 답답해 보인다. 게다가
주택들에게 꽁꽁 감싸여있어 담장은 전통식으로 재현하지 못했다.

▲  솟을대문과 대문채 (안쪽 모습)

▲  안채와 안채 대문

안채는 방과 누마루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
종종 특별전 같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
으며 내부 관람도 가능하다.
안채 동남쪽에는 행랑채가 있는데 이곳은 관리
사무소로 쓰이고 있으며, 그 옆에 작게 화장실
이 닦여져 있다.

◀  안채 안쪽

▲  열린 공간으로 거듭난 사랑채

▲  새집처럼 손질된 사랑채 내부 ①


▲  새집처럼 정비된 사랑채 내부 ②

사랑채와 안채 내부에 진열된 가구와 서적들은 홍건익 일가와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가옥을 복원하면서 갖다 둔 장식용으로 안채와 사랑채 내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관람하면 되며 나의 꼬질꼬질한 두 발을 들이기가 너무 미안할 정도로 방과 마루
가 산뜻하게 손질되어 있다.


▲  쉼터와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는 사랑채 마루
이런 곳에서 낮잠 한숨 청하거나 곡차 1잔 들이키면 정말 예술일 것 같다.

           ◀  무늬만 남은 우물
옛날에는 인왕산이 베푼 물로 넘쳐났겠지만 이
제는 그 명이 끊겨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그
러니 우물 뚜껑도 더 이상 열릴 일이 없다.

       ◀  홍건익가옥의 특별함, 별채
사랑채 뒤쪽에 자리한 별채는 여기서 나름 별
장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별채까지 둔 한옥은
별로 없는 편으로 집주인은 여기서 속세살이에
지친 심신을 다독거리거나 독서 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렸을 것이다.

▲  후원으로 인도하는 기와문(일각문)

▲  현대식으로 손질된 후원

가옥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조촐하게 후원이 닦여져 있다. 지금의 후원은 2015년
이후에 손질된 것이라 옛 모습은 거의 잃은 상태로 나무와 화초, 의자 등이 닦여져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이곳에 올라서면 가옥 경내가 훤히 두 눈에 들어오는데 집 주위로 키다리 빌라가 잔뜩 들어서
있어 은근히 좁아 보인다. 그래도 이 정도의 한옥을 건진 것이 어디랴.

          ◀  후원 뒷쪽 문 (후문)
후원 동쪽(뒷쪽)에 기와문이 있는데 그 문을
나가면 바로 환경운동연합 뜨락이다. 그 뜨락
을 통해 서촌의 주요 간선길인 필운대로와 연
결되며, 이 문을 통해 홍건익가옥으로 들어서
도 된다.


▲  필운동 회화나무 -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2013-92호

환경운동연합 뜨락에 400년 정도 묵은 회화나무가 두텁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홍건익가옥
돌담 바로 옆에 있어 가옥에도 아낌없이 그늘을 베풀고 있는데 높이 13m, 둘레 420cm로 그의
덩치와 연륜으로 보아 서울시 보호수로 삼아도 충분해 보인다. 허나 배화여자대학 유치원 주
변에 있는 회화나무처럼 말단 등급에 머물러 있으니 등급 선정 기준에 그저 고개만 갸우뚱거
린다.


▲  대문을 걸어잠구며 휴식에 들어간 홍건익가옥 (18시 폐장시간)

* 홍건익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88-1 (필운대로1길 14-4, ☎ 02-735-1374)



 

♠  서촌 끝자락에 숨겨진 늙은 바위글씨, 월암동(月巖洞)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0호

▲  월암동 바위글씨를 품은 바위

홍건익가옥을 둘러보고 일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미답처 하나를 더 지우기로 했다. 그렇
게 욕심을 부려 찾아간 곳은 송월동(松月洞)에 있는 월암동 바위글씨로 홍건익가옥에서 도보
20분 거리이다. (사직터널 고개를 넘어가야 됨)

월암동 바위글씨는 재개발로 회색빛 아파트 세상으로 강제 개조된 돈의문뉴타운 동쪽 길(송월
길) 바위에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서대문(돈의문) 바로 서쪽이자 한양도성 서쪽 바깥으로 바
위글씨가 깃든 바위는 딱 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하여 도성 밖 경승지로 바쁜 세월을 살
았던 듯 싶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바위 위쪽에 바람직하지 않게 석축을 씌워 길(송월
1길)을 냈으며, 바위 주변으로 집들이 빽빽히 들어서고 심지어 바위글씨 앞까지 집이 들어차
그를 만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러다가 재개발로 도성 밖 송월동 지역을 밀어버리면서 그를 덮던 모든 것들이 싹 걷어졌다.
바위 역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목이 떨어질 뻔했으나 다행히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험한
꼴은 면했으며, 바위 앞 아파트가 완성되고 주변이 정비되면서 마음 편히 그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  월암동 바위글씨의 위엄

이 바위글씨는 누가 썼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허나 그 필치(筆致)로 보아 명/청나라의 장필과
미불의 글씨가 유행했던 조선 중/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결구가 치밀하고 품격이 고고한 글씨
로 1656년에 작성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도 이곳 지명이 확인되고 있어 서울 장안의 옛
지명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재개발 덕에 바위 앞은 확 트였으나 바위 위쪽에 석축과 도로가 족쇄처럼 자리하여 보기에도
참 딱하다. 서울에는 개발의 칼질로 고통받는 옛 경승지와 문화유산이 너무나 많은데 이는 오
로지 개발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개발이 그들에게 씌운 굴레를 싹 제
거해 자유의 몸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허나 그런 날이 오긴 올까?)

참고로 이곳 주변에는 친일 음악가로 더러운 뒷끝을 보인 홍난파(洪蘭坡)가옥을 비롯해 권율
장군 집터를 지키는 행촌동(杏村洞) 은행나무, 딜쿠샤, 한양도성,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국립기상박물관 등의 명소들이 깃들여져 있으니 그들도 적당히 후식거리로 둘러보면 정말 배
부른 나들이, 답사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에 찾아간 서촌 나들이는 기분 좋게 막을 내린다.

* 월암동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월동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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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북쪽 끝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삼각산 정법사 (복천암터, 산사길, 북악산길)

성북동 정법사, 북악산길


' 성북동 정법사, 북악산길 5월 나들이 '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와 내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성북동(城北洞)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를 만나 최순우(崔淳雨) 옛집
과 길상사(吉祥寺) 등 성북동의 여러 단골 명소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저녁
을 먹기에는 시간도 이르고 입과 위가 섭취 준비가 덜 되어있어서 잠깐 눈요깃감을 생각
하니 번쩍 '정법사'가 뇌리 속에 스친다. 그곳은 길상사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절로
성북동을 100회 이상 들락거렸음에도 아직까지 내 손과 발이 미치지 못한 미답처였다.

정법사가 미답처(未踏處)로 버젓이 남아있던 것은 나를 흥분시킬 요소가 전혀 없는 현대
사찰로 보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에 창건된 것으로 알고 있었음) 하지만 그곳도 성
북동에 안긴 명소의 일원이라 서울 장안의 미답지를 1개라도 더 지울 겸 그곳을 찾았다.


▲  정법사 입구에 세워진 정법사 표석
표석 옆으로 놓인 계단길을 오르면 바로 정법사 경내이다. 계단길 옆에는
경사진 포장길이 있어 취향에 따라 골라가면 된다.



 

♠  성북동 꼭대기에 들어앉은 고즈넉한 산사, 조선 후기에
지어진 복천암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정법사(正法寺)

▲  정법사 대웅전과 그 주변

길상사에서 북쪽 오르막길을 7분 정도 오르면 골목(대사관로13길)이 서쪽으로 크게 구부러진
곳에 정법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성북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제일 북쪽 구석으로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
선 자락에 있으나 넓게 보면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에도 해당되어 '삼각산 정법사'를 칭
하고 있다. 18세기에 호암 체정(虎巖 體淨, 1687~1748)이 창건한 복천암(福泉庵)에서 비롯되
었다고 하는데,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비는 원찰(願刹)의 역할도 했다고 전한다.
허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감쪽같이 사라져 터만 남은 것을 1959년 건봉사(乾鳳寺) 만일
염불회(萬日念佛會)의 회주(會主)인 보광(葆光)과 석산(石山)이 가회동(嘉會洞)에 있던 건봉
사의 포교당인 정법원(正法院)을 이곳으로 옮겨와 절 이름을 정법사라 짓고 오래전에 끊긴
복천암의 뒤를 잇게 했다.
만일염불회의 고명한 염불승(念佛僧)이었던 석산이 주석하면서 염불수행의 새로운 일가를 이
루었으며, 조금씩 절을 키워나가 지금에 이른다.

아담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강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비록 옛 복천암을 계승
했다고 하나 엄연히 20세기 중반 이후에 중창된 절이라 고색의 내음은 여물지 못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비록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조선 후기에 조성된 관세음보살상과 복천암터 주
춧돌, 왜정 때 조성된 산신탱 등을 지니고 있다.

절 바로 서쪽에는 '우리옛돌박물관'이란 이색 박물관이 있는데 서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
고 있으며, 매년 5월과 9~10월에는 성북동 명소를 중심으로 성북동 야행(夜行) 축제가 성황
리에 열린다. 성북동에 있는 문화유산과 여러 명소들, 미술관, 식당, 찻집, 까페들이 거기에
동참하여 달이 기울도록 흥겨운 분위기를 이어가는데, 정법사도 거기에 동참하여 소소하게
음악회를 열거나 전통차 1잔의 여유를 선사한다.

▲  우수에 잠긴 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옛 복천암 주춧돌들 ▲

대웅전 뜨락 구석에는 옛 복천암의 주춧돌 여럿이 우두커니 서 있다. 저들은 어느 건물을 받
쳐들던 주춧돌이었을까? 크기를 봐서는 법당으로 여겨지나 저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니 그저
허공에 내뱉는 나의 부질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지금은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크지만 무
게가 없는 하늘을 막연히 이고 있다.

▲  조촐하게 꾸며진 연못과 옛 복천암의
길쭉한 주춧돌들

▲  대웅전 뜨락에 세워진 서쪽 5층석탑
(20세기 중반에 세워짐)


▲  정법사 대웅전(大雄殿)

정법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 앞에
는 뜨락이 닦여져 있고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5층석탑 2기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동쪽
탑은 벌써부터 피부가 까무잡잡하여 젊은 나이임에도 다소 늙어 보인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
보이면 그리 좋지는 않지만 문화유산과 탑, 석불은 오히려 나이가 들어 보어야 더 보기가 좋
다.
대웅전 맞은편에는 2층짜리 강당이 있어 1금당(법당) 2탑, 강당 형태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으며, 법당 안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금동관세음보살좌상과 석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  동쪽 5층석탑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탔는지 벌써부터
검은 때가 가득 끼었다.

▲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2층 강당(선방)
사진에 보이는 부분이 2층으로 1층에는
종무소와 찻집 등이 들어있다.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
성북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가까이로 성북동과
와룡공원을 비롯해 멀리 잠실, 강남 지역과 남한산성을 품은 남한산(청량산),
대모산(大母山) 산줄기까지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상 (오른쪽이 관세음보살상, 왼쪽은 지장보살상)

서로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가3존상, 그들 가운데 보관(寶冠)을 눌러
쓴 관세음보살상이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그렇다고 옛 복천암의 유물은 아니며 정법원
시절에 다른 곳에서 업어왔다고 한다. (고향은 알지 못함) 그들 뒤에는 조그만 금동 원불(願
佛)이 빼곡히 자리해 일제히 금빛을 쏘아대고 있는데 그 눈부심에 나의 침침한 두 망막이 멀
어질 지경이다.

▲  속세를 걱정하듯 바라보는 하얀 피부의
미륵불입상 (대웅전 옆)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  산신각 산신탱(山神幀)
산신각에는 산신과 독성이 봉안되어 있다. 산신탱은 1940년에 조성된 것으로
하얀 부채를 든 붉은 옷의 산신 할배와 그의 심부름꾼인 동자, 호랑이 등
산신의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산과 폭포도 그려짐)

▲  산신각 독성탱(獨聖幀)
독성 할배(나반존자)와 동자, 그의 집인 천태산(天台山)이 그려져 있다. 그림이
다소 늙어 보여 산신탱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듯싶다.

▲  주렁주렁 이어진 석조(石槽)
산사에 왔다면 목구멍도 달랠 겸, 물 1모금 마셔줘야 된다. 늦봄 가뭄에도
물이 졸졸 나와 바가지를 금세 채웠고 목구멍에 투하하니 몸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마음이 시원해진다. 역시 무더위 갈증에 들이키는
물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

▲  정법사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 부뚜막과 검은 가마솥

정법사는 부뚜막에 검은 피부의 가마솥을 두어 밥과 국을 처리하고 있었다. 저기서 숙성된
하얀 쌀밥과 국의 맛은 어떠할까? 몰래 그 뚜껑을 열어 살짝 훔쳐 먹고 싶다. 지금은 전설이
되버린 나의 단양(丹陽) 외가집에도 저런 풍경이 분명 있었는데 이제는 흔적도 없다. 오로지
지우는 것을 좋아하는 세월의 본능 앞에 그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지고 사라진 것이다.


▲  산사길에서 바라본 정법사 경내와 대웅전의 두툼한 뒷통수

* 정법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30 (대사관로13길 44, ☎ 02-762-0774)
* 정법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산사길, 북악산길(북악산로) 거닐기

▲  정법사 뒷쪽 산사길 ①

정법사 서쪽에는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절 옆구리를 지나는 산길이라 그에 어울
리게 '산사길'이란 정겨운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나는 정법사만 알고 있었지 그 길의 존재는
전혀 몰랐다. 정법사가 준 뜻밖의 선물에 무척 놀라며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질까?'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그 미지의 산사길로 발을 들였다.

정법사 옆은 나무데크길이 닦여져 있으며, 정법사 경내가 바라보이는 쉼터를 지나면 철조망
과 철책문이 나온다. 문은 탐방객을 위해 늘 열려있으나 어두울 정도로 숲이 무성하고 군사
시설이 여럿 있으며 밤에는 유해동물이 가끔씩 출현하는 경우가 있어 가급적 햇님 근무시간
에 들어가기 바란다.

철책문 이후부터 경사가 잠시 각박해진다. 게다가 나무가 삼삼해 햇살을 느끼기가 어렵다.
허나 북악산길 밑부분이라 차량 소리가 심심치 않게 두 귀를 때려대 '속세가 지척이구나~'
안도감을 준다.


▲  정법사 뒷쪽 산사길 ②

▲  산사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성북동과 도심 동부, 멀리 관악산까지)

▲  숲속다리 갈림길

정법사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길 직전인 숲속다리 갈림길에 이른다. 여기서 길은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데, 북악산길 위에 걸쳐진 숲속다리를 건너면 다모정, 북악산길 산책로와 이
어지며, 서쪽 숲길은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640m)로 그 길의 끝인 북까페에서 북악하늘길 제
2산책로(김신조루트)와 만난다. 그리고 서남쪽 숲길은 경사가 다소 있는데 그 역시 북악하늘
길 제2산책로와 이어지며 그 산책로의 정상 부분인 호경암으로 연결된다.

▲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위에
유연하게 걸쳐진 숲속다리

▲  숲속다리 남쪽 (산사길 방향)


▲  서울의 대표 하늘길이자 드라이브 코스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이 달리는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지금은 그저 평화로운 산책
드라이브 코스로 크게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의 탄생 배경은 그리 곱지 못했다. 바로 1968년
1월에 터진 1.21사태(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 패거리의 불법 침투 사건)로 뚜껑이 폭
발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서울 수비 강화를 위해 닦여졌기 때문이다.
1968년 2월, 수도 방어를 겸한 관광도로 '스카이웨이(Sky way)'계획을 발표하여 콩 볶듯이
공사에 들어가 그해 9월 28일 완성을 보았다.

북악산길은 돈암동 아리랑고개에서 북악산(백악산) 북쪽 산허리를 지나 자하문고개, 인왕산(
仁王山) 동쪽 허리를 거쳐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지는 10km의 길로 서울에 흔치 않은 산
악도로이자 천하 제일로 꼽히는 드라이브 코스이다. 자하문(창의문)을 경계로 북악산 쪽은
북악산길, 인왕산쪽은 인왕산길로 구분하기도 하며 오랫동안 차량을 위한 길로 뚜벅이들은
접근 조차 불가능했으나 둘레길, 도보길 유행에 따라 길 옆으로 산책로를 닦으면서 마음 편
히 두 다리로 거닐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길은 달랑 1번이 아니라 두고두고 걸어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
중을 듣지 않는다. 다행히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어서 내 즐겨찾기 명소로 삼아 꾸준
히 재탕하고 있으며 북악산길과 인왕산길 모두 완주했다. 이번에도 계획에는 없었지만 정법
사 옆 산사길에 홀려 그만 여기까지 오고 말았는데, 우리네 인생에는 늘 변수가 있기 마련이
다.


▲  북악산길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의 위엄
(북악산길과 정릉로10길, 대사관로가 만나는 곳 서쪽 쉼터에서 바라본 모습)

▲  북악산길에서 바라본 정릉동과 성북구, 강북구 지역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옴)

▲  찻길과 뚜벅이길이 공존하는 북악산길
지형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이렇게 나무데크길을 깔아 통행 편의를 배려했다.
뚜벅이길은 폭이 딱 2인용이며 찻길 또한 2차선이다.

▲  숲속을 가르는 북악산길

▲  동쪽으로 흘러가는 북악산길 (정릉 뒤쪽)

숲속다리에서 시작된 북악산길(북악산로) 산책은 성북구민회관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시간도
늦었고(19시가 넘었음) 뱃속도 배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이럴 때는 그저 본능에 따라 조용히
길을 접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여 성북동, 북악산길 산책은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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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10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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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모악산 용천사, 목포 갓바위 늦봄 나들이 (용천사 꽃무릇공원, 목포 달맞이공원)

함평 용천사, 목포 갓바위



' 함평 용천사, 목포 갓바위 늦봄 나들이 '
함평 용천사
▲  용천사 대웅전과 석등(오른쪽)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1박2일 일정으로 전남 서남해
지역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4시간 정도를 달려 전남 함평에 이르렀다. 함평읍내 동부
에 자리한 함평오일시장 주변에 육회비빔밥을 다루는 식당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한 곳
에 들어가 점심으로 육회비빔밥을 섭취했다. 비빔밥에는 선지국이 딸려나왔으나 그리
입맛이 맞지 않아(선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 비빔밥만 후다닥 먹고 자리를 나왔는
데, 후식용 커피로 밀려온 졸음을 단죄하고 함평(咸平) 북쪽 끝자락에 자리한 모악산
용천사로 이동했다. 그곳이 이번 나들이의 첫 답사지이다.



 

♠  꽃무릇의 성지이자 함평 제일의 고찰, 용천사(龍泉寺) 입문

▲  용천사 숲길 (주차장 직전)

모악산(母岳山) 남쪽 자락에 자리한 용천사는 산 북쪽에 있는 영광 불갑사(佛甲寺, ☞ 관련글
보기
)와 더불어 꽃무릇<상사화(相思花)>의 성지(聖地)로 유명하다. 꽃무릇은 8~9월에 황홀하
게 붉은 입술을 드러내는 아리따운 꽃으로 절 주차장(사천왕문 서쪽) 주변과 꽃무릇공원에 둥
지를 틀고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꽃무릇철이 아닌지라 꽃잎 대신 짙은 녹색 잎을 드러낸
꽃무릇이 3달 앞으로 다가온 향연을 숨죽이며 준비하고 있었다.
사천왕문 밑 주차장에는 200년 정도 묵은 큰 느티나무가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바로 그
의 고품격 그늘 덕에 이곳의 꽃무릇이 유난히도 아름답게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다.


▲  용천사의 첫 관문, 사천왕문(四天王門)

주차장에서 동쪽 계단길을 오르면 맞배지붕을 지닌 사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부처의 경호원인
4명의 천왕,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여기서 그들의 검문을 거쳐 다시 계단길을 오르면
사상루가 마중을 나온다.

▲  밑에서 바라본 사상루

▲  사상루(思想樓)의 앞 모습

사상루는 맞배지붕을 지닌 2층 건물로 1층은 통로, 2층은 강당(講堂)과 행사 장소로 쓰인다.
절 바깥에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노출되지 않도록 꽁꽁 가리고 있는데 그의 밑도리를 통
해 안으로 들어서면 꽃무릇으로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용천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용천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자.

모악산 용천사는 함평 제일의 고찰로 장성 백양사(白羊寺, ☞ 관련글 보기)의 말사(末寺)이다
. 백제 후기인 600년에 행은존자(幸恩尊者)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산 너머 불갑사에도 마라
난타(摩羅難陀) 창건설 외에 640년 행은의 창건설이 전하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시
기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645년에 각진(覺眞)이 중수했다고 전하며 1275년에 각적국사(覺積國師)가 중수했다고 하니 어
쩌면 13세기에 각적국사 또는 행은이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용천사란 이름은 대웅전 밑에
있는 용천이란 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의하면 서해로 통하는 이
샘에 용이 살다가 승천을 했다고 한다. 하여 용천이라 불리게 되었고 그 곁에 지은 절이라 자
연히 용천사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조선 세조(世祖)와 명종 때 중수를 거치면서 제법 큰 사찰의 면모를 지녔는데 '용천사 대웅전
현판단청기'에 의하면 왕년에는 무려 3,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하지만 정유재란
(1597년) 때 그 모든 것이 파괴되어 1600년에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32년 법당을 새로 짓고 1638년과 1705년에 중건을 하고 '단청기'를 남겼으며, 1938년 다시
중수를 했으나 1950년 6.25 때 북한군이 불의의 방화를 저질러 절은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만다
. 이때 석등과 해시계를 제외한 대부분의 문화유산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1964년 옛 보광전(普光殿) 자리에 대웅전과 요사채를 지었으며 1996년 대웅전을 새로 지
어 지금에 이른다.

넓직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지장전, 산신각, 사상루,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
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독특한 자태의 석등이 있다. 그 외에 6.25 때 사라졌다가
1980년 흙더미 속에서 발견된 해시계가 있는데 두께 14cm, 가로와 세로가 39cm의 정사각형 모
습으로 겨우 절반만 남아있으나 묘시(卯時, 5~7시)부터 유시(酉時, 17~19시)까지 남아있어 낮
에 사용하는데 별 지장은 없다. 그리고 18세기에 조성된 탱화가 있었으나 2000년에 도난을 당
해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정묵당(靜默堂)
요사 및 선방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의 거처로 정묵당과 마주보고 있다.


용천사는 자연물인 꽃무릇에 크게 집중하여 이제는 꽃무릇의 성지로 우뚝 섰다. 꽃무릇이 한
참일 때 꽃무릇 축제를 열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꽃무릇의 즐거운 향연을 구경한다.

* 용천사 소재지 :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415 (용천사길 209 ☎ 061-322-1822)

▲  사상루 옆에 자리한 샘터
모악산이 베푼 물이 쉼없이 쏟아져 나와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준다.

▲  지장전 지장보살입상
관세음보살 누님 못지않은 아름다운 용모로
중생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  용천사 둘러보기

▲  용천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대웅보전)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곳에는 보광
전이 있었으나 6.25때 사라졌으며 1964년 그 자리에 대웅전을 세웠다. 현재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손질된 것이다.
용천사의 강한 자신감이 담긴 건물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석가3존상과 탱화들이 봉안
되어 있으며 대웅전 앞 가운데 계단은 옛날 것으로 고색이 꽤 묻어있다. 바로 그 앞에는 '용
천'이란 샘이 누워있고, 건물을 받쳐든 석축 밑도리에는 고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기단석(
基壇石)이 가득 들어 있는데 그 윗도리에는 새 돌이 입혀져 있어 늙은 돌과 새 돌이 다소 어
색한 조화를 보인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후불탱, 닫집의 위엄

▲  고색이 깃든 대웅전 가운데 계단

▲  대웅전 그늘에 자리한 용천(龍泉)

대웅전 앞에는 절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는 용천이란 조그만 샘이 있다. 옛날 이 샘은 서해바
다로 통했다고 하는데 이곳에 살던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허나 여기서 바다까지는 30리가 넘는 거리이며, 샘 또한 작고 바닥이 바로 보일 정도로 얕다.

용천에는 물이 모여있으나 여기 물은 마시지 못하며 대신 사상루 옆구리에 동그란 석조(石槽
)를 닦아 샘터로 삼았다. 그러니 거기서 물을 마시면 된다.


▲ 툇마루를 지닌 산신각(山神閣)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의 공간이다. 건물에 단청이
입혀져 있지 않아 마치 서원이나 양반가의 기와집 같은 조금은
수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산신각 현판

▲  산신각 산신탱


▲  용천사 석등(石燈)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84호

대웅전 옆구리에는 이곳의 오랜 보물이자 상징과 같은 석등이 묘한 자태를 부리고 있다. 용천
사가 아무리 오래된 절이라고 하지만 그 장대했던 흔적이 전쟁의 참화로 싹 사라진 상태라 이
석등의 값어치는 대단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다른 석등과 완전히 차별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고 조성 관련 문신까지 새겨져 있어 그 가치는 실로 상당하다. 그러니 이곳에 왔다면 석등
은 꼭 눈여겨 살펴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는 쑥돌로 지어진 키 2.37m의 석등으로 바닥돌에 하대석(下臺石)을 놓고 그 위에 밑으로 연
꽃잎을 펼친 복련(伏蓮) 무늬를 새겼으며, 가운데 기둥<간석(竿石)> 받침 상단 네 모서리에
거북을 새겼다. 기둥은 8각으로 앞쪽에 '강희(康熙) 24년 을축(乙丑) 6월일'이란 명문이 있어
1685년 6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석등을 만든 옛 사람들의 작은 배려 덕에 그의
탄생 시기와 시주자 등의 정보를 흔쾌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화사석(火舍石)은 4각 형태로 면마다 둥근 창을 두었으며 그 밑도리에 위로 연꽃잎을 펼친 앙
련(仰蓮)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지붕돌은 팔작지붕 모습으로 마치 지붕이 그대로 돌로 굳은
듯하다.
조선시대 4각 석등 중 꽤 우수한 작품으로 크기나 짜임새가 투박하고 정감이 있으며, 다른 곳
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하여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이나 어
찌된 영문인지 아직까지 지방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석등 옆에는 시멘트가 발라진 바닥돌 위에 3층 탑신과 머리장식을 지닌 하얀 피부의 3층석탑
이 있다.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의 그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그 모습이 남원 백장암(百丈庵)에 있는 3층석탑과 조금 닮아보인다.

▲  앞에서 바라본 석등

▲  기둥에 새겨진 조성 관련 글씨들

       ◀  맞배지붕의 천불전(千佛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가여
래와 미륵불, 아미타불의 3존불과 조그만 금동
(金銅) 천불이 장엄하게 금빛 물결을 이루고
있다.
건물 현판은 정면은 물론 측면까지 내걸어 이
곳의 정체를 강하게 알려준다.

▲  천불전 내부를 가득 채운 불상들

▲  천불전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길


▲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꽃무릇들

▲  녹음(綠陰)에 잠긴 용천사를 뒤로하며

용천사를 나오면서 뭔가 10% 부족한 느낌이 들어 정신을 차려보니 글쎄 석등과 더불어 이곳의
값비싼 존재인 해시계를 빠트렸다. 분명 통제구역을 제외한 경내 상당수 부분을 살펴보았는데
해시계 같은 것은 전혀 두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신변보호를 위해 내부 공간에
꽁꽁 숨겨둔 모양이다. 그렇게 해시계와는 인연을 짓지 못하고 다음 장소로 쿨하게 넘어갔다.



 

♠  대자연이 빚은 심오한 작품이자 입암반조(笠岩返照)의 현장
 목포 갓바위 - 천연기념물 500호


▲  야경에 잠긴 갓바위 주변 (갓바위 산책로)

우리는 무안(務安)을 거쳐 호남선의 종점인 목포(木浦)로 이동했다. 하당신도시 동부에 홍어
삼합으로 이름난 식당이 있어 거기서 홍어삼합과 막걸리로 배불리 저녁을 섭취하고 근처 적당
한 모텔에 들어가 차를 세우고 여장을 풀었다.
먼 길을 오느라 여독이 두둑히 쌓여있지만 잠자리에 들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렀다.(19시) 하
여 근처에 있는 갓바위의 야경을 후식으로 보고자 택시를 잡아타고 갓바위의 동쪽 입구인 달
맞이공원으로 이동했다. 공원 남쪽에는 하당신도시와 서해바다의 경계를 긋고 잇는 해안 산책
로가 닦여져 있는데 저녁 산책과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로 제법 붐볐다.

달맞이공원에서 바다 위에 닦여진 나무데크 산책로를 들어서면 갓바위로 이어진다. 갓바위가
해안 벼랑에 있다보니 육지에서는 그의 뒷통수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배를 타고
봐야 했었지. 바로 그런 고충을 덜고자 2008년 4월에 298m 길이의 해안보행교를 닦은 것이다.
갓바위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다리 형식이지만 갓바위 앞은 수면 위에 두둥실 띄워놓은 형태라
밀물 때는 바닷물을 따라 1m 정도 육지쪽으로 올라갔다가 썰물이 지면 바닷물을 따라 내려간
다. 그러다보니 바다의 기분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게다가 조명을 설치해 통행편의
는 물론 갓바위의 환상적인 야경까지 보너스로 선사하고 있다.

이 산책로는 서쪽으로 목포자연사박물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목포해양유물전시관과 이어지
는데, 예전 갓바위와 첫 인연을 지었을 때는 서쪽으로 들어가 동쪽(하당신도시)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동쪽에서 들어와서 다시 동쪽으로 나갔다. 숙소가 동쪽 하당신도시에 있기
때문이다.


▲  바다에 떠있는 갓바위 산책로 (하당신도시 방향)

갓바위 산을 뜻하는 입암산(笠岩山) 남쪽 바닷가 벼랑에 자리한 갓바위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
을 두고 빚은 철학적인 작품이다. 허나 그의 작품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며 지금도 계속 자
연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굼벵이 속도로 손질되고 있어 몇백 년 후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
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갓바위는 갓을 쓰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여 갓바위란 단순한 이름을 지
니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감탄만 자꾸 더하게 하는 그는 2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쪽
(서쪽) 바위는 모자가 달린 외투나 옷을 껴입은 모습처럼 보여 사오정 시리즈로 유명한 귀머
거리 사오정과 비슷해 보이며, 오른쪽(동쪽) 바위는 철모를 쓴 군인 같다. 예전에야 갓처럼
보였겠지만 그동안 모진 풍파가 더해지면서 저런 모습으로 서서히 변했을 것이다. 겉으로 보
면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듯한 모습이라 사람들이 건드린 것은 아닐까 싶지만 저게 모두 순수
자연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  울퉁불퉁하고 괴상한 피부를 지닌 갓바위 동쪽 벼랑
마치 끌 같은 도구로 바위 피부를 후벼판 것 같다. 허나 저것은 모두
자연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갓바위가 이런 모습이 된 것은 이곳이 바닷물과 담수가 만나는 곳으로 암석 표면에 파도가 치
거나 안개가 끼면 소금기를 머금은 물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되풀이한다. 그 와중에 수분에 들
어있던 실리카 성분이 침전되면서 용해된 부분은 조직이 이완되고 강도가 낮아져 모자 모양의
경질부와 아랫쪽이 움푹 패인 벌집 모양의 풍화혈(風化穴)이 형성된 것이다. 파도와 해류, 바
다 바람에 의해 바위가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현장으로 다른 풍화혈에서는 찾기
힘든 희귀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삿갓이 동남쪽을 향한 것은 햇볕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곳을 물든 저녁 노을과 갓바위와 해안 벼랑에서 반사되는 노을빛이 무척 아름다워 예로부터
목포8경의 하나인 입암반조(笠岩返照)의 현장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파도와 바닷바람에
의해 바위가 이렇게도 성형이 될 수 있음을 실감나게 하는 현장으로 2009년 국가 천연기념물
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목포9경의 제3경임)


▲  입암산의 끝을 잡고 있는 갓바위의 옆 모습
바다에 돌출된 모자 끝부분을 손으로 만지면 가루처럼 뚝 부러질 것만 같다.
정말 만져보고 싶은데 위치가 저러니 그 미련을 쿨하게 접어야 된다.


▲  갓바위 형제와 수면에 비친 그들의 모습
바다에도 그들을 닮은 갓바위가 하나 더 있다.


이렇게 개성이 넘치는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붙여놓은 그럴싸한 전설 보따리가 꼭 담겨져 있
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목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갓바위 역시 그 예외는 아닌데, 그들
이 붙여놓은 전설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가 수염을 태워먹던 어느 옛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 있었
다. 그는 소금을 팔아서 생계를 꾸렸는데 살림살이는 늘 궁핍했으나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
하여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마를 날이 없었다.
허나 소금 장사로는 생계가 어려워 부득이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으나 주인은 돈도 주지도
않고 그저 부려먹기만 하는지라 1달 만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보니 심상치 않
은 기운이 있어 방문을 열어보니 글쎄 아버지의 손과 발이 이미 식어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
이 집을 비운 사이 그는 힘겹게 유지했던 숨줄을 놓은 것이다.

청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양지바른 곳에 묫자리를 잡고 관을 가지고 가던 중,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빠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설은 그냥 그렇
게만 나와있음)
이 어이없는 고통에 청년은 다시 한번 불효를 통회(痛悔)하며 울부짖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살
수 없다고 자책하며 평생 갓을 쓰고 관이 빠진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이후 그곳에 2개의
바위가 불쑥 올라왔는데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 불렀다.

다른 전설로는 부처가 나한(羅漢)을 이끌고 영산강을 건너 이곳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때 모
르고 놓고 간 삿갓이 바위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여 갓바위 대신 중바위란 이름도 지니고 있
다.
앞 전설이 효도를 소재로 한 것이라면 뒷 전설은 불교를 소재로 한 것으로 효행사상을 장려하
고자 갓바위를 이용해 어설프게 이야기를 엮은 선비들과 이곳에 오지도 않은 부처와 나한을
내세워 바위를 포교의 소재물로 삼은 승려들의 투철한 영업 정신이 교차된 현장이다.


▲  조명에 의지해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갓바위 야경의 위엄

칼퇴근의 달인, 햇님이 그만의 공간으로 쏙 사라지고 달이 어둠을 가져와 천하를 장악하자 인
간이 설치한 조명이 전기에 의지해 일제히 빛을 뿜어내며 갓바위 주변의 어둠을 몰아냈다. 그
렇게 갓바위의 환상적인 야경은 태어났다. 예전에는 낮에 봤고 이번에는 야경을 봤으니 그의
낮과 밤, 두 얼굴을 모두 본 셈이다.

바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벌써부터 설치고 있는 여름 제국(帝國)의 기운을 단죄하고 있으
며, 갓바위 앞 산책로는 수면 위에 둥둥 띄워놓은 형태라 파도에 따라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갓바위 앞으로 더 다가가 그의 피부를 만져보고 싶지만 다리를 그 자리에 고정하여 그러지도
못한다.
그렇게 갓바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21시, 다시 하당신도시로 나와 곡차 1잔 걸친 다음 숙소로
돌아가 다음 날을 위해 고된 몸을 뉘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갓바위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산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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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쪽 변두리에 숨겨진 작고 상큼한 뒷동산, 일자산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서울둘레길3코스, 둔굴)

강동구의 지붕,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둔굴, 서울둘레길3코스)



' 강동구의 지붕을 거닐다. 일자산 '
(허브천문공원, 둔굴, 서울둘레길3코스)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일자산 정상

일자산 둔굴

▲  일자산 정상

▲  일자산 둔굴

 



 

여름이 무심히 깊어가던 6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강동구의 대표 지붕인 일자산(
一字山)을 찾았다.
일자산은 서울에 버젓히 남아있는 미답처(未踏處)의 일원으로 그곳에 안겨있는 허브천문
공원과 일자산 능선길(서울둘레길3코스), 둔굴을 둘러보고자 그곳을 택했다. 허브천문공
원을 빼면 모두 인연이 없는 곳들로 아직까지도 서울 하늘 밑에는 나의 발걸음을 느끼지
못한 미답처들이 적지 않아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


▲  허브천문공원 후문(부출입구)으로 인도하는 숲길

▲  반쯤 열린 허브천문공원 후문(부출입구)



 

♠  허브식물과 천문을 한곳에 다룬 서울의 이색 명소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일자산 북쪽 끝자락에는 강동구(江東區)의 야심작, 일자산 허브천문공원이 가슴을 피며 자리
해 있다.
이곳은 원래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에서 만든 길동배수지의 윗부분이다. (길동배수지는 아직
도 있음) 강동구는 일자산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수목이 성장하기에 적합한 이곳에 공원을 조
성하고자 계획을 짰는데, 처음에는 단촐하게 화초류 중심으로 꾸미려고 하였으나 2005년 6월,
서울시 도시공원위원회에 변경계획안을 제출, 인근의 길동생태공원과 생태문화센터 등과 연계
할 수 있고 허브와 천문을 취급하는 공원으로 조성하여 2006년 9월 21일에 문을 열었다.

사람에게 매우 좋은 허브식물과 천문 관련 시설을 갖춘 공원이자 서울 최초의 허브 전문 공원
으로 면적은 25,500㎡, 사업비는 15억이 들었다. 이곳에 둥지를 튼 식물은 소나무 등의 수목
28종 4,694주(교목 254주, 관목 4,440주), 지피식물 181종<허브(herb)가 142종 32,448본, 자
생 39종 9,138본>이다. (식물 수는 나중에 증감될 수 있음)
공원은 동그란 구조를 하고 있는데, 우리 고유의 전통사상인 천,지,인(天,地,人) 삼재사상(三
才思想)에서 공간 개념을 도출해 우주공간(자미원, 태미원, 천시원, 별자리, 은하수 등)을 공
원에 반영했으며, 음양오행사상에 기초해 시설물과 수목을 배치했다.

공원 내부는 크게 허브원과 약초원, 암석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허브원은 이름 그대로 허브식
물의 공간으로 공원 중앙부에 넓게 자리해 있다. 약초원은 약용으로 쓰이는 허브를 모았으며,
암석원은 돌과 허브를 조화롭게 배치했다. 유리온실에는 120종의 허브를 화분 등에 담아 겨울
에도 허브향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공원 동쪽 끝에는 새벽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관천대(일대)가 있고, 시내를 향한 서쪽에는 
일몰을 감상하는 또 다른 관천대(월대)가 있다. 동남쪽에는 어린이를 위한 놀이 공간을 닦았
는데, 이는 옛날 궁궐에서 왕자의 거처인 동궁(東宮)을 동쪽에 배치해 햇님의 기운을 가장 먼
저 받게한 연유에서 착안한 배치라고 한다.
또한 야간에 찾는 이들을 위해 공원 바닥 곳곳에 282개의 오색 별자리 조명을 설치,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별자리를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바닥 조명은 직경 75m 천문도(天文圖)를
고스란히 공원 바닥에 옮겨놓은 것으로 동/서에 마련된 관천대(觀天臺) 위에서 바라보면 북극
성(北極星)을 비롯하여 견우와 직녀 등 다양한 별자리를 구경할 수 있다. 즉 낮에는 허브식물
공원으로, 밤에는 천문공원의 역할을 하는 2개의 얼굴을 지닌 공원이다.

공원 내부 뿐만 아니라 바깥에도 온갖 정성을 기울였는데, 동쪽 바깥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
복숭아나무를, 서쪽 바깥에는 느릅나무, 남쪽 바깥에는 오동나무와 매화나무, 대추나무, 북쪽
바깥에는 측백나무와 벚나무, 살구나무, 자작나무를 심었다. 이는 풍수지리사상의 사신사(四
神砂)를 표현하고자 함이며, 우주의 순환원리 중 상생원리(相生原理)에 맞게 수목배치를 하였
다.
자원봉사자들이 평일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공원에 머물고 있어 허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며, 매년 5~10월에는 작은 천문대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천문관측프로그램도 운영하
고 있다. 그리고 매년 9월 말~10월 초에는 이틀(금,토) 일정으로 '별의 별 축제'가 열려 공원
의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강동구의 꿀단지이자 일자산의 달콤한 양념으로 공원 정문은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이 있는
남쪽에 있으며 내가 오른 북쪽 길은 후문(부출입구)으로 이어진다. 만약 천호대로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후문으로 들어서면 빠르다.


▲  다양한 허브들이 공존하는 허브천문공원 내부

▲  피부색도 가지각색인 허브들 (차의 정원)
허브식물 대부분이 서양에서 건너온 것들이라 이름도 낯설고 외우기도 어려운
외래어 투성이다. 허나 그들이 서양 출신이니 어찌하겠는가?
우리 정서에 맞게 다듬고 이용하면 그만이다.

▲  보라빛 향기를 지닌 레몬베르가못(Lemon Bergamot)

원산지는 아메리카로 잎에 톡 쏘는 강한 레몬 같은 향기가 있다. 꽃잎 색깔이
분홍이나 보라색을 띠고 있으며, 샐러드나 차, 음료, 조미료에 많이 쓰인다.

▲  야로우(Yarrow)

서양톱풀로도 불리며 원산지는 유럽과 서아시아이다. 재배가 쉽고 번식력이 좋으며, 살균력과
수렴력, 지혈력이 있어 상처나 코피를 멎게 하는 작용이 있다. 또한 야로우의 생잎을 씹으면
치통을 멎게 한다고 하며, 생잎을 달인 즙은 열을 내리고 독소를 체외로 방출한다.


▲  온갖 허브향이 나래를 펼치는 천시원(天市垣)
허브들이 온갖 고운 향기를 베풀며 속세의 기운을 털어간다. 허브향이 늘 가득하니
그 향기에 취해 잠시 세상사를 놓으며 머물고 싶은 곳이다.

▲  동쪽 관천대 주변

▲  허브원 - 중앙에 볼록 나온 언덕 밑에 길동배수지가 있다.

삼재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 우주의 순환원리까지 복잡한 원리는 죄다 적용했다는 허
브천문공원, 과연 그래서일까? 공원 내부는 질서 있게 배치된 기분이며 그리 어수선해 보이지
도 않는다. 허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런 사연에 민감하지도 않고 신경쓰지도 않으며 알지도
못한다. 그저 허브식물과 공원을 즐길 뿐이다. 나도 이곳과 3번 정도 인연을 지었지만 이번에
서야 그런 원리가 깃들여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  감촉이 좋은 허브들이 옹기종기 모인 감촉정원

▲  아로마 워킹 산책로
아로마 향기를 베푸는 식물들 사이로 울퉁불퉁 길이 닦여져 있다.

▲  서로 아름다움을 견주는 남색 허브꽃과 분홍 허브꽃의 위엄

▲  콘플라워<Corn Flower, 블랙볼(Black ball)>
원산지는 유럽 동남부이다. 꽃의 높이는 30~90cm 정도로 가지가 다소 갈라지며
흰 솜털로 덮여있다. 밝은 청색의 아름다운 꽃은 정원이나 화단의 관상용으로
많이 쓰이며, 청색 안료나 잉크, 약품으로 많이 이용된다.

▲  에키네시아 화이트스완(Echinacea Whiteswan)
원산지는 북아메리카로 다년생으로 크며 성장이 빠르고 향기가 좋아 나비와
꿀벌을 잘 불러들인다. 그리고 꽃대를 잘라 포푸리나 리스를 만든다.

▲  허브천문공원 작은천문대 <관천대 = 일대(日臺)>

공원 동쪽에는 하늘을 겨낭하고 있는 '허브천문공원 작은천문대'가 있다. 식물원이나 허브정
원 같은 이곳에 천문대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어 조금 어색함은 주지만 허브식물과 천문과의
어색함을 줄여주고 그들을 한데 어우른 것이 바로 이 공원의 특징이다.
매년 7~9월 매주 목요일에 운영을 하며, 운영시간은 19시30~21시30분(7~8월 20~22시)이다. 어
두컴컴한 저녁에 천문대에 들어가 하늘을 구경하는 것으로 서울시 공공예약 홈페이지에서 미
리 예약을 해야 된다. (☞ 서울시 공공예약 홈페이지)


▲  색의정원과 공원을 동그랗게 둘러싼 남색 피부의 산책로
공원의 중심인 허브는 주로 남색 산책로 내부에, 관천대나 암석원,
작은천문대는 산책로 바깥에 두었다.

▲  허브천문공원 동쪽에서 바라본 일자산과 주차장
주차장 옆에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이 닦여져 있다.

▲  산토리나(Cotton Lavender, Gray Santolina, 오른쪽)
핑거볼 레몬제라늄(Fingerbowl Lemon Geranium, 왼쪽)

산토리나는 유럽 남부가 원산지이다. 향료 식물로 잎과 꽃에 구충과 방충 효과가 있으며, 꽃
잎을 말려도 색깔이 변하지 않아 드라이플라워로도 아주 좋다.
핑거볼 레몬제라늄은 남아프리카 출신으로 꽃이 고와 관상용으로 인기가 좋다. 특히 음식과
음료수에 향을 낼 때 많이 쓰이며, 해충을 괴롭히는 효능도 있다.


▲  태미원(太微垣)과 견본원

▲  견본원에 뿌리를 내린 허브식물들

▲  오렌지타임(Orange Balsam Thyme)
유럽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이다. 상록저목성으로 오렌지향이 진하며, 말린 잎은
샐러드나 스프, 소스 등 요리에 사용된다. 관상용으로도 널리 쓰이는 편이다.

▲  페니로얄민트(Pennyroyal Mint)
아프리카가 원산지로 상쾌한 박하향이 강하게 나며, 모기와 파리를 쫓는 구충제
역할도 한다. 즉 모기와 파리가 싫어하는 향기를 가진 허브식물이다.

▲  딜(Dill, Ameto)
미국이 원산지로 가는 실과 같은 잎을 가지고 있다. 여름에는 우산을 편 것 같은
모양의 황색 꽃을 피우며, 특유의 강한 향기가 있어 요리에 많이 쓰인다.
(잎과 종자는 모두 피클에 쓰임)

▲  애플사이다제라늄(Applecider Geranium, 왼쪽)과
솝워트(Soapwart, 오른쪽)

애플사이다제라늄(이름도 겁나 어려움)은 남아프리카가 원산지로 상큼하고 톡쏘는 향을 지녔
다. (허브차나 요리, 원예로 많이 쓰임)
그리고 솝워트는 유럽과 서아시아가 원산지로 비누로 쓰이는 다년초이다. 솝워트 추출액은 세
제, 삼푸로 사용되며, 여드름과 습진 등의 세정액으로도 효과가 있다. 개량된 관상 원예종은
꽃이 아름답고 향기가 고와 실용을 겸한 관상용으로 아주 좋다.


▲  계란꽃과 비슷하게 생긴 로먼캐모마일(Roman chamomile)
서유럽이 고향으로 다년생 꽃이다. 사과향이 나며 털모양의 줄기가 땅바닥을
기어가는 성질이 있다. 특히 아픈 식물체와 같이 심으면 그의 원기를
회복시켜주어 '식물의사'로도 불린다.

▲  에키네시아(Echinacea)
북아메리카가 고향으로 인디언들이 비상용 약으로 많이 사용했다. 꽃대를 잘라
포푸리나 리스를 만들며, 뿌리와 줄기는 면역부활제로 입증되어 에이즈
치료제로 쓰고자 연구하고 있다.

▲  공원 한복판에 봉긋 솟은 자미원
저 밑에 길동배수지가 숨겨져 있다. 언덕 위에는 별자리 조명이 닦여져 있어
저녁 때 하늘을 찌르며 조명을 비춘다. (언덕 윗쪽은 조명 보호를 위해
통행을 금하고 있음)

▲  약초용 허브로 가득한 약초원과 자미원(중앙에 솟은 언덕)

▲  시내를 바라보고 있는 관천대<월대(月臺)>

공원 서쪽에는 돌로 견고하게 다져진 관천대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일몰과 밤하늘, 시내를
구경하는 곳으로 앞서 작은천문대(일대)와 마찬가지로 천문을 담당한다. 동쪽에 계단을 닦고
사방을 난간으로 둘러 마치 제단처럼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저곳에 오르면 바로 밑으로
길동(吉洞)과 둔촌동, 천호동 지역이 작게나마 시야에 들어온다.


▲  관천대(월대)에서 바라본 허브천문공원

▲  관천대(월대)에서 바라본 허브천문공원 남쪽 (약초원, 온실)

▲  관천대(월대)에서 바라본 암석원

부출입구(후문) 바로 옆에 자리한 암석원은 돌덩어리와 허브를 같이 배치한 공간으로 다른 공
간(약초원, 허브원)보다 상당히 작은 편이다. 의자와 탁자를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유리막으로 이루어진 온실(식물원)
공원 서남쪽에는 햇살을 먹고 사는 유리온실이 있다. 120종의 허브를 화분 등에
담아 선보이고 있는데, 1년 내내 따스하여 겨울에도 허브들이
마음껏 몸을 풀며 허브향을 불어준다.

▲  바깥보다 더 무더운 온실 내부
이곳에 사는 허브들은 바깥 친구들과 달리 겨울 걱정은 안해도 된다.

▲  허브 화분들이 잔뜩 마중을 나온 허브천문공원 정문

오랜만에 인연을 지은 허브천문공원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작은천문대 주변 쉼터에 앉아 김
밥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허브향기가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어슬렁거려 정처 없는 나의
후각을 건드리니 따뜻한 허브차(Herb tea)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것을 후식으로 1잔 걸치면
아주 예술이지. 하지만 여기서는 허브차를 팔지 않으며 시각과 후각, 촉각으로만 허브를 즐겨
야 된다.

공원에 뿌리를 내린 허브식물을 본글에 모두 다루지는 못하고 일부 끌리는 존재들만 소개하였
다. 다 소개해봐야 내용만 길어질 뿐이다. 다음에 다시 이곳과 인연이 된다면 땅꺼미가 짙은
저녁에 찾아와 별자리 놀이를 해보고 싶다. (모두 낮에만 와봤음)

* 허브천문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산86일대 (☎ 02-3425-6448)



 

♠  강동구의 대표 지붕이자 남쪽 지붕, 작지만 아담하고 싱그러운
일자산(一字山) 둘러보기

▲  일자산 숲길로 들어서다 (유아숲체험장)

허브천문공원 정문을 나와 남쪽으로 내려가면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 주차장이 나온다. 이
곳 바로 서쪽에는 가족캠핑장(49면)과 오토캠핑장(8면)이 닦여져 있고, 그 주차장을 가로질러
남쪽 숲으로 들어서면 유아숲체험장이 잠깐 나타나면서 일자산의 푸른 품이 펼쳐진다. 그렇다
면 일자산은 어떤 곳일까?

일자산(134m)은 강동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뫼로 강동구와 경기도 하남시(河南市)의 경계
선 역할을 하고 있다. 위에서 보면 '一' 모습처럼 보여 일자산이란 단순한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실제로도 이 산은 남북으로 길게 '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라 해돋이 명소로도 유명하다.

산줄기는 약 5km에 이르나 허브천문공원 이북은 천호대로로 잘렸으며, 남쪽은 하남시 감북동(
서하남나들목입구 교차로 북쪽)까지 뻗는다. 1971년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숲길과 쉼터
가 조성되었으며, 강동구의 각별한 관심에 힘입어 허브천문공원과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
강동구 도시농업공원, 일자산 해맞이공원, 잔디광장 등이 닦여져 강동구의 소중한 꿀단지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또한 서울의 외곽을 가르는 서울둘레길 코스(157km) 중 서울둘레길3코스 고덕,일자산 코스(광
나루역↔수서역, 26.13km)가 이 산의 신세를 지며 남쪽과 동쪽으로 흘러간다.

일자산 잔디광장에서는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 1회씩 '강동그린웨이걷기대회'가 열려 성
황을 이루고 있으며, 산에는 딱히 문화유산은 없으나 오래된 자연산 동굴로 둔촌 이집이 피신
을 했던 둔굴이 전하고 있다.
그 외에 지금은 고된 세월에 녹아 없어졌지만 서울 유일의 탄산약수로 수도권에서 꽤 유명했
던 천호약수가 산 서쪽 자락 보훈병원 부근에 있었다. 한참 어린 시절(1980년대 초/중반) 그
곳에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는데, 그 착했던 약수는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핏줄이 끊겨 사
라지고 말았다. 그가 없어지면서 서울에서 탄산약수를 마시려면 최소 춘천과 양구, 홍천, 인
제, 평창까지 가야 된다. 기억 속의 풍물시로 아련히 잊혀진 천호약수 빈 자리의 무게가 그만
큼 커진 것이다.


▲  일자산 숲길 (서울둘레길3코스와 만나기 이전)

▲  서울둘레길3코스와 하나가 된 일자산 숲길
정면에 보이는 숲길이 서울둘레길3코스 상일동 방향이다. (오른쪽은 초이동 방향)


일자산 숲길은 유아숲체험장을 지나면서 서서히 시골 동구밭 고갯길 풍경을 자아내다가 상일
동(上一洞)에서 달려온 서울둘레길3코스와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일자산의 지붕길인 능선
길이 시작된다. 서울둘레길3코스는 일자산 능선길의 신세를 지며 둔촌습지, 배다리까지 거침
없이 흘러가며, 서울과 하남의 경계선도 이 능선의 몸을 의지하며 흘러간다. (능선 서쪽은 서
울 강동구, 동쪽은 하남시 땅)
능선길은 정상을 향해 서서히 올라가므로 길이 느긋하고 부드럽다. 산길도 잘 닦여져 있고 길
을 둘러싼 숲 또한 매우 짙어서 편한 둘레길의 정석을 보여준다.


▲  일자산 능선길, 정상 북쪽 구간 ①
능선길이 매우 부드러워 걷기에는 매우 좋다. 게다가 녹음이 짙은 숲이 숲터널을
이루며 펼쳐져 있어 여름 제국의 기운도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한다.

▲  일자산 능선길, 정상 북쪽 구간 ②

▲  일자산 능선길, 정상 북쪽 구간 ③
능선이긴 하지만 숲이 매우 삼삼해 능선길의 기분을 다소 잊게 한다.

▲  일자산 정상, 해맞이광장 (134m)

일자산 정상은 능선길과 마찬가지로 숲에 감싸여 있다. 하여 정상에서 맛볼 수 있는 일품 조
망을 누리기가 어렵다. 정상 바닥에는 큰 돌이 입혀져 있고, 주위로 낮은 돌담이 둘러져 있는
데, 강동구에서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고자 이곳을 해맞이광장으로 닦으면서
입혀놓은 것들이다.
서쪽에는 둔촌 이집의 시(詩)가 적힌 동그란 표석이 있고, 동쪽에는 1994년 해맞이광장 준공
을 기념하는 조그만 비석이 자리하여 조촐하게 눈요깃감을 선사한다.

▲  둔촌 이집의 시비
(둔촌 선생이 후손에게 이르기를...)

▲  거의 30년 세월의 때가 묻어난 1994년
해맞이광장 준공 기념비


둔촌 이집(遁村 李集, 1327~1387)은 일자산과 인연이 깊은 고려 후기 문인이다. 본관은 광주(
廣州)로 초명(初名)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이다.
그는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충목왕(忠穆王, 재위 1344~1348)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했다. 공민왕(恭愍王) 시절 당시 권력자인 신돈(辛旽)에게 제대로 찍혀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그 핍박을 피해 일자산 둔굴 등에 은신하기도 했으며, 그 고통의 시간을 후세까지 잊지 않고
자 호를 둔촌으로 갈기도 했다. <일자산을 간직한 둔촌동(遁村洞)의 이름은 바로 그의 호 '둔
촌'에서 비롯됨>
신돈이 사라지자 바로 상경하여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그만두
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시를 지으며 무척 한가롭게 지내다가 60살에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의 시는 꾸밈과 우회적 표현보다는 직서적이고 자연스러운 작품이 많으며, 임심문(任深文)
을 비롯한 문인 60여 명과 교류했다. 무덤은 성남시(城南市) 하대원동에 있는데 그의 후손들
까지 같이 묘역에 잠들어 있어 완전 집안 묘역을 이루고 있다.

정상 서쪽에는 이집의 후손에게 당부하는 시가 적힌 시비가 물결치는 파도 위에서 솟는 햇님
의 모습처럼 자리해 있는데, 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으며, 결론은 무조건 머리가 터져라 공부
하라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충고처럼 말이다.

                       독서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니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늙어서 무능하면 공연히 후회만 하게 되니
                       머리 맡의 세월은 괴롭도록 빠르기만 하느니라
                       자손에게 금을 광주리로 준다 해도
                       경서 1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느니라
                       이 말은 비록 쉬운 말이나
                       너희들을 위해서 간곡히 이르노라


▲  일자산 능선길, 정상에서 둔굴 구간 ①
저 계단 위쪽이 바로 일자산 정상이다.


▲  일자산 능선길, 정상에서 둔굴 구간 ②
정상을 벗어나면 바로 내리막길이 느긋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  일자산 능선길, 정상에서 둔굴 구간 ③

둔굴이 가까워 오면서 일자산 능선길도 다소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동쪽 풍경(하남시 감북
동)이 숲 대신 수풀과 밭으로 이루어진 확트인 공간으로 풍경이 바뀌는 것이다. 곳곳에 작은
무덤들도 여럿 보여 어둑어둑한 밤에 오면 염통도 좀 쫄깃해질 듯싶다.
비록 이곳이 하남시와 맞닿은 서울의 변두리이나 '정녕 서울 곁이 맞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싱그러운 산골 풍경을 보인다. 일자산에 이런 비경도 있었다니 이번에 인연 짓기를 참 잘한
것 같다.


* 일자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2동 /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감북동


▲  일자산 능선길에서 바라본 하남시 감북동, 감일동 지역
남한산성을 간직한 남한산(청량산)이 정면에 바라보인다.



 

♠  일자산 마무리 (둔굴)

▲  둔굴(遁窟) 입구 쉼터

일자산 정상에서 남쪽 능선을 계속 더듬으면 둔굴 입구 쉼터가 마중을 나온다. 둔굴 바로 위
쪽에 나무로 넓게 자리를 닦아 쉼터를 조성했는데, 여기서 능선길을 잠시 버리고 쉼터를 지나
아래쪽 계단을 내려가면 일자산에서 가장 구석에 자리한 일자산의 오랜 명물, 둔굴이 주름진
모습을 드러낸다.
둔굴은 능선길 서쪽 벼랑에 자리해 있어 접근하기가 넉넉치 못했는데, 바로 앞에 의자와 탁자
를 갖춘 쉼터 데크를 닦고 계단을 내면서 그 고통이 크게 줄었다. 이제는 둔굴을 바라보면서
간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허나 둔굴 주변은 난간이 둘러져 있어 굴을 보호하고 있으니
애써 들어가서 굴을 괴롭히지는 말자. 어차피 쉼터에서 둔굴의 속살까지 다 보인다.


▲  벼랑에 깃든 둔굴

둔굴은 대자연이 빚은 조그만 자연산 굴로 벼랑 밑에 자리해 있다. 굴이라고는 하지만 그 깊
이는 얕으며 윗 사진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 바로 이곳이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이집이 신
돈의 괴롭힘을 피해 잠시 숨어산 곳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산 밑까지 주거지가 들
어서고 바로 옆까지 산길이 뚫려 접근하기 쉽지만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는 워낙 외
진 곳이라 찾기가 어려워 여기서 여러 날 머무른 것으로 여겨진다.

굴의 크기는 작지만 비바람을 피해 잠시 머물기에는 적당해 보이며, 굴 속에서 고통스런 시간
을 보냈을 이집의 모습이 그런데로 상상이 간다. '이곳이 발각되는 것은 아닐까? 나라는 앞으
로 어떻게 될 것인가?' 시름에 잠겼을 그의 모습이 말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둔굴

▲  북쪽에서 바라본 둔굴

둔굴은 둔촌 이집 외에도 지역 사람들의 손때가 적지 않게 묻었을 것이다. 일자산에 사냥이나
산나물을 채집하러 갔다가 잠시 쉬거나 비를 피했을 수도 있고, 죄를 저지른 사람이 은신했을
수도 있으며, 여기서 고기 굽기 등의 취사행위를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지역 명소이
자 일자산의 명물로 존재감의 무게를 더했으니 그런 행위는 이제 없어야 될 것이다.


▲  둔굴 입구에서 바라본 하남시 감북동과 감일동, 남한산(청량산)

▲  둔굴 입구 남쪽 능선길 ①
오솔길의 진수를 보여주며 남쪽으로 구불구불 흘러간다.

▲  둔굴 입구 남쪽 능선길 ②

둔굴을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능선길(서울둘레길3코스)을 다시 잡아 남쪽으로 향했다. 이
제 딱히 잡아야될 명소는 없으며 숲길을 따라 쭉 이동하면 된다. 중간중간에 서쪽과 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손짓하나 서울둘레길3코스의 미답 구간도 조금씩 줄일 겸, 계속 능선길을 고집
했다.
동쪽으로 확트인 능선길은 다시 무성한 나무에 갇힌 숲길로 변하며, 그 상태로 둔촌습지(배다
리) 정류장까지 이어진다.


▲  둔굴 입구 남쪽 능선길 ③

▲  일자산의 남쪽 끝 내리막 길

▲  한강으로 흘러가는 감이천 (서부교에서 바라본 모습)

일자산 숲길은 둔촌습지, 배다리 정류장 북쪽에서 그 끝을 맺는다. 서울둘레길3코스도 여기서
일자산과 작별하여 서울의 동쪽 끝을 가르는 '동남로'를 따라간다. 비록 차량들 통행이 빈번
한 도로를 따라가야 되나 서울의 변두리답게 죄다 밭두렁과 논두렁, 야산 등의 시골 풍경투성
이라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차량의 눈치를 보던 서울둘레길3코스는 감이천(서부교)을 건너 효죽동입구에서 비로소 찻길을
버리고 서쪽 시골길로 들어서면서 차량 소음에서 해방된다. 그 길로 들어서면 늪지대를 간직
한 방이동(芳荑洞) 생태경관보전지역이 나온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일자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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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북쪽 지붕이자 우리 동네 뒷동산, 도봉산 <무수골, 우이암(관음봉), 관음암, 천축사>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나들이 (우이암 관음봉,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



'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
<우이암(관음봉), 도봉산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

도봉산
▲  도봉산의 위엄

우이암(관음봉)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

▲  우이암(관음봉)

▲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한복판에 서울의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39m)
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그의 그늘에 머문
지도 어언 20년이 넘었다.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아차산, 호암산 못지 않은
나의 즐겨찾기 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아 나의 마음을 꾸준히 비추고 있다.

햇님이 하늘 한복판에 걸린 12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김밥
과 간식 등을 사들고 무수천(無愁川)을 따라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산골, 무수골의 논두렁과 밭두렁, 울창한 숲길을 주마등처럼 지나 자현암
(慈賢庵)에 이르니 본격적인 산길이 펼쳐진다.

무수골의 최상류이자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인 원통사계곡을 오르다가 지독한 시장기를
잠재우고자 계곡 적당한 곳에 자리를 피고 김밥과 만두, 과자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하
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으니 모든 것이 정말 꿀맛 같은데, 대자연이 우리 몰래 음식에 꿀
을 바른 모양이다. 거기에 입가심용으로 막걸리까지 몇 잔 들이키니 정말 신선놀음이 따
로 없다.
그렇게 점심을 마치고 하늘과 더욱 가까워지려는 본능에 충실하며 계곡을 올라가면 우이
암 밑 400m 고지에 들어앉은 원통사(圓通寺)가 마중을 한다. 우이암(관음봉)을 내세우며
관음도량을 칭하는 이곳은 규모는 작지만 조망만큼은 가히 국보급이라 서울 장안에 있는
산사 중, 북한산 일선사(一禪寺) 다음급으로 최우수 조망을 자랑한다.
원통사에서 잠시 일품 조망을 누리다가 다시 출발, 이전보다 더욱 각박해진 산길을 땀을
거하게 쏟아내며 10분 정도 오르니 비로소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 도착했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우이암 정상이 아닌 바위로 이루어진 서쪽 봉우리이며,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관음봉)이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이 빚은 걸출한 작품,
암벽 등반의 성지로 추앙을 받는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긴 순 100% 바위 봉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걸작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
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하며, 이후 바람과 비 등
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그것이 지
금의 도봉산이 되었다.
하여 도봉산은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위엄을 날리고 있는데, 자운봉과 선
인봉, 만장봉, 칼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巖峰)이 즐비하다.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
의 하나로 대자연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격하
게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히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그리고 봉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
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봉우리 자체가 완전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또한 내려가는 것
도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
벽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이곳은 암벽 타기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
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
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처럼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
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굴(현
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서 머물던 승려가 발견하여 관음성지로 격하게 추켜
세웠을 것이다. 이렇게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
자 바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어 관음도량을 칭한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문구 지역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허나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
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
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이 원래 이
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지만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지역,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
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문
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와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지역(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과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만경대, 영봉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산 산줄기와 도봉1,2동,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등이 두 망막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른거
리는 속세의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
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다는 것.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히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허나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
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다. 내가 저기로 순간이동을 당
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적
당히 거리를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막걸리 1병이 남아있어 남은 행동
식과 함께 몇 잔 들이켰는데 이렇게 산 정상부에서 곡차를 걸치니 마치 구름 위에서 마시는
기분이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산바람이 땀과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
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리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마음과 두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는 것 같다.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 우이암(관음봉)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우이암능선은 도봉산의 남쪽 지붕길로 우이암에서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남쪽까지 짧게 이
어진다. 이곳에서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동쪽과 북쪽으로 서울 동북부와 의정
부, 도봉산 주능선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오봉산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이며, 특
히 능선에서 바라보는 우이암의 모습이 자못 위엄이 돋는다.

우이암의 자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서쪽 봉우리와 우이암 능선에서 보는 것이 좋다. 서쪽에
서 보는 것과 능선에서 보는 것이 서로 다른데, 마치 유럽식 투구를 쓴 장군이 비스듬히 기대
어 서울을 바라보는 모습 같으며, (하얀색 모자 달린 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듬히 기댄 모습으
로도 보임) 두건을 쓴 관세음보살이 서울을 걱정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허나 왜정의 개소리
처럼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관음봉을 우이암으로 깎아내린 왜정의 눈이 정상
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이암의 원래 이름을 속히 찾아주고, 우이암능선의 이름도 관음봉능선
으로 바꿔야됨)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도봉구, 노원구, 강북구, 중랑구, 성북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등

▲  우이암능선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봉(五峯)과 오봉능선
오봉(해발 660m)은 오봉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이령 북쪽 봉우리로 도봉산이나
송추에서 접근하면 된다. (바로 밑에 있는 우이령에서는 접근 불가)


우이암능선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서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우이암능선 전망대가 모습을 비
춘다. 능선길 서쪽 벼랑에 닦여진 이곳은 위치상 오봉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의 북쪽 뒷통
수(상장봉 등)가 바라보이는데, 특히 오봉이 잘 조망된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우이령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도봉산 주능선과 칼바위, 만장봉, 자운봉

우이암능선 전망대에서 북쪽으로 마저 내려가면 보문능선 갈림길이다. 원래는 여기서 동쪽(문
사동계곡)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오랜만에 인연 지은 도봉산 지붕길이라 욕심이 무럭무럭 솟
아났다. 하여 도봉산의 깊이를 간만에 더 누릴 겸, 지붕길(주능선)을 따라 자운봉까지 가기로
했다. 이번에 내려가면 비록 집이 코앞이라고 해도 언제 이곳에 다시 올지 장담할 수 없기 때
문이다.



 

♠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거닐기

▲  도봉산 주능선 남쪽 구간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도봉산 주능선은 우이암능선 북쪽 보문능선갈림길에서 칼바위를 거쳐 도봉산 정상까지 이어지
는 도봉산의 진정한 지붕길이다. 서울의 최북단 지붕길이기도 하며, 서울 도봉구와 경기도 양
주시(楊州市)의 경계선 역할도 겸하고 있다.
오르락내리락이 다소 있고 바위 암릉도 적지 않으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으
며, 북쪽으로 갈수록 하늘과 점점 가까워진다. 길 좌우로 일품 조망이 펼쳐져 두 눈이 호강을
하며, 하늘의 속살도 보일 정도로 나의 위치도 높아진다.


▲  도봉산 주능선 남쪽 구간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우이암(관음봉) 서쪽 봉우리에서 곡차를 마셨다. 허나
어느새 우이암과 저만큼이나 떨어졌으니 정말 저기서 곡차를 마셨나 싶은
착각 마저 든다. 그래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모양이다.

▲  한층 더 멀어진 우이암 (오봉갈림길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도봉산 주능선(오봉갈림길 북쪽)에서 바라본 북한산 북쪽 산줄기
가운데 움푹 들어간 곳이 우이령이다.

▲  칼처럼 솟은 도봉산 칼바위
칼바위는 해발 700m의 바위 봉우리로 그 접근이 험해 옆구리에 우회길을 두었다.

▲  칼바위 남쪽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학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도봉산 정상을 향한 불굴의 집념을 품으며 주능선을 더듬으니 어느덧 칼바위 남쪽 갈림길(640
m 고지)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오봉능선과 오봉(오봉산)으로, 직진하면 칼바위와
자운봉, 동쪽은 마당바위와 문사동계곡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직진을 해야겠지만 일행 중 1명
이 심히 안좋은 상태를 보여 직진이 어렵게 되었다.
아무래도 산보다 사람이 우선이니 아쉽지만 자운봉은 불투명한 다음으로 쿨하게 미루고 주능
선을 버리고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기서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면 도봉산 종점으로 빨리 이동할 수 있다. 허나 그냥 내려가기
에는 너무나 아쉬워 일행들의 동의를 받아 조금은 돌아가지만 마당바위로 이어지는 산길을 택
했다. 이 코스는 각박한 경사지에 가늘게 길이 이어져 있는데, 동쪽은 거의 벼랑이라 통행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바위도 여러 번 넘어야 됨)
허나 벼랑길이라 능선길처럼 일품 조망은 여전히 옆에서 따라 댕긴다. 바로 그 재미로 이 길
을 거닐면 되겠다. 하지만 그리 알려진 길은 아니라서 지나가는 이는 없었다. 그야말로 우리
가 이 길을 전세를 내며 거닌 것이다.


▲  칼바위 남쪽에서 바라본 북한산(백운대, 영봉)
대자연이 초록 물결과 푸른 물결,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신선의 경지를 자아낸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붓을 휘날린들 저 모습 그대로 재현하기 힘들 것이다.

▲  마당바위 방면 산길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도봉산 남쪽 자락

▲  마당바위 방면 산길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관음암(觀音庵)의 자랑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인적이 거의 없는 마당바위 방면 산길을 10분 정도 가니 숲과 큰 바위에 묻힌 관음암이란 비
구니 암자가 살며시 마중을 한다. '어머나 도봉산에 이런 곳이 있었나?' 나의 돌머리 속에는
전혀 정보가 없는 미지의 장소로 적지 않은 놀라움을 안겨준 관음암, 그 절은 법당인 극락보
전과 삼성각 등의 목조 건물 2동과 돌로 지은 요사 등 3~4동이 전부인 조그만 암자이다.

숲에 완전히 감싸여있고 서쪽에는 큰 바위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 바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
는 곳으로 이렇게 없는 듯 자리해 있으니 절간답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암자이다. 이런 곳이
기도 올리기에도 딱 좋겠지. 비록 너무 궁벽한 곳이고 접근성 또한 좋지 못하지만 작지만 반
듯한 건물과 오백나한상까지 바위 밑에 주렁주렁 조성했으니 이런 첩첩한 산골에 어찌 이렇게
지었을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곳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태조 이성계를 위해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한다. 그가 기도를
하던 중,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이 갈라지며 미륵불(彌勒佛)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에 크게
놀란 무학이 태조에게 그 말을 전하니 그 자리에 암자를 지었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
지나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기도처나 산악신앙의 현장으로 쓰였던 것
으로 여겨진다.
현재 관음암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 못했다. 딱히
볼거리는 없으나 커다란 바위 밑에 만든 오백나한상이 아주 장관으로 비록 건물이 아닌 바위
밑 노천 공간이지만 오백나한전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다. 또한 마당바위와 칼바위를 잇는
산길이 경내를 관통해서 지나기 때문에 절은 꼭 거쳐가야 된다.

▲  맞배지붕을 지닌 관음암 삼성각(三聖閣)

▲  관음암 극락보전(極樂寶殿)

관음암은 해발 560m 고지에 자리해 있지만 워낙 숲의 위엄이 대단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요사(寮舍)에서는 보살 아줌마와 비구니의 이야기 소리가 흘러나와 '이 첩첩한 곳도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를 느끼게 한다. 산속에 별천지처럼 숨겨진 관음암, 정말 세상에서 잠
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이곳의 신세를 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관음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31 (도봉산길 92-6 ☎ 02-955-4246)


▲  마당바위와 그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산하

관음암을 벗어나 10분 정도 내려가면 하얀 피부를 지닌 너른 모습의 마당바위가 마중을 한다.
이름 그대로 마당처럼 넓은 바위로 도봉산역과 도봉산 종점에서 도봉산 정상을 향해 오를 경
우 거의 반드시 거쳐야 되는 길목이자 관음암, 문사동계곡 방면으로 갈라지는 요충지이다. 
마당바위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며 천하를 굽어보다가 동쪽 밑에 자리한 천축사로 길을 향했
다. 천축사는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마애사리탑의 존재도
확인할 겸 다시 인연을 잡았다.



 

♠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둘러보기

▲  천축사 대웅전과 만장봉(萬丈峯)

천축사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동불의 장대한 물결이 두 눈을 놀라게 한다. 거의 4~5단
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청동으로 지어진 석가여래상,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 약사여
래 등 다양한 불(佛)과 보살(菩薩)을 집합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지어진 원
불(願佛)로 근래에 조성된 것인데, 대충 헤아려봐도 108불은 넘어 보인다.

청동불/보살군상에서 1굽이를 돌면 북쪽 건너편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바라보인다. 경
내 뒷쪽에 바라보이는 바위 봉우리는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으로 이곳의 든든한 후광
(後光)이 되어준다.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담장 끝에 자리한 아담한 석조(石槽)가 모습을 비춘다. 석조란 물
을 담아두는 돌통으로 높은 산중이라 물을 아끼기 위해 수도꼭지를 달았다. 하여 물을 마시려
면 졸고 있는 수도꼭지를 반드시 움직여야 된다. (가뭄과 수질 문제로 물 섭취가 어려울 수도
있음)

▲  청동불/보살군상의 위엄

▲  담장 끝에 자리한 천축사 석조


▲  고된 세월이 느껴지는 늙은 승탑(僧塔, 부도)

석조 맞은편에는 고색의 때로 자욱한 승탑(부도)이 옥개석(屋蓋石) 등 일부만 남은 채 측은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 땅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으로 연꽃잎을 비롯하여 사
자와 코끼리 등 동물이 새겨져 있으며, 조각 수법이 수려하여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는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며, 그 옆에는 오래된 승탑의 옥개석이 덩그러니 놓여져 동병상
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천축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겨우 뚜껑(옥개석)만 남은 승탑
그의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  연등으로 머리를 가린 독성각(獨聖閣)
2002년에 조성된 독성탱과 석고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만장봉 동쪽 자락에 안긴 천축사는 도봉산 서울 구역의 대표적인 고찰(古刹)이다. 이 절은 의
상대사(義湘大師)가 673년에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는 인근 의상대(義湘臺)에서 도를 닦다
가 빼어난 산세에 감탄하여 제자를 시켜 물이 나오는 곳에 암자를 짓게 하니 맑은 샘물이 나
온다는 뜻에 옥천암(玉泉庵)이라 했다고 하며, 그것이 천축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의상은 문무왕(文武王)의 허가를 받아 부석
사(浮石寺)를 세우기 이전까지 주로 서라벌 왕경(王京)에 머물면서 화엄종(華嚴宗) 보급에 힘
쓰고 있었다.

천축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가슴을 펴는 것은 조선 태조 때이다. 의상의 창건설과 달리 신라
와 고려 때 흔적이 전혀 없고, 고려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때 영국사(寧國寺, 도봉서원
자리에 있었음)의 부속암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그러니 조선
태조 시절이나 빠르면 고려 중/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398년 태조 이성계는 1차 왕자의 난으로 단단히 뚜껑이 열려 왕위를 2째 아들인 정종(定宗)
에게 던져주고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인 도봉산 밑을 지날 때 만장봉
천축사 주변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올라 직접 그곳을 찾아가 봉우리는 하얗고 꽃은 삼문에
떨어져 길이 붉다는 시구(詩句)를 읊고 절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후 함흥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 들려 100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절을 중수했는데, 고려 후기
에 인도에서 건너온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과 이곳에 들려 '천축국(天竺國) 영축산
(靈鷲山)의 일부가 완연히 이곳에 있구나'
격찬한 일을 승려에게 듣고, 옥천암에서 천축사로
이름을 갈게 했다.

1474년(또는 1470년)에는 성종(成宗)의 명으로 절을 중창하고, 명종 시절에는 문정왕후(文定
王后)가 화류용상(樺榴龍床)을 내려 불좌(佛座)로 삼게 했다고 한다. 1812년에 경학(敬學)이
중창을 하였고, 1816년에는 김연화(金蓮花)가 불량답(佛糧沓) 15두락을 시주해 살림이 많이
좋아졌다.
1862년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 판서(判書) 김보근(金輔根), 참판(參判) 이장오 등이 불
량을 희사했으며, 1863년에는 주지 긍순(肯順)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하고, 1895
년에 화주 성암응부(星巖應夫)가 명성황후(明成皇后) 및 상궁(尙宮) 박씨 등의 시주로 후불탱
과 신중탱, 지장탱을 조성했으나 관리 소홀로 불화 대부분이 도난을 당했다.

1911년 화주 보허축전(寶虛竺典)이 관음탱과 신중탱을 봉안했고, 1931년에 주지 김용태(金瑢
泰)가 천축사로 가는 산길을 확장했으며, 1936년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바
로 그 시절에 천하 제일의 참선수행도량으로 명성이 높던 무문관이 지어졌다. 1959년에는 주
지 용태가 불사를 벌였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웅전, 독성각, 산신각을 중수했으며, 요
사와 공양간을 신축해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도봉산의 주요 비구니 사찰이자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고승들의 수행공간
인 무문관을 경내 북쪽에 두어 참선도량으로 꾸려가고 있으나 수행의 난이도가 아주 최상급이
라 도전하는 이가 드물어 그 맥이 거의 끊겼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과 산신각, 독성각, 무문관, 범종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비로자나삼신불도 및 복장유물, 비로자나삼신괘불도(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293호
), 목조석가삼존불, 마애사리탑 등 지방문화재 4점과 늙은 승탑, 천축사 편액 등
이 전한다. 또한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목조불단(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6호)이
있는데, 지금은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 가있다.

절이 각박한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곳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닦았으며, 주어진 공
간을 최대한 채운 터라 경내 확장도 여의치 않다. 그래도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치고는 그
런데로 넓은 편이다.
일요일에는 산꾼들에게 점심 공양을 제공하며, 평소에는 대웅전 1층 앞 쉼터에서 따뜻한 차와
티백차, 물을 제공한다. (차와 티백차는 알아서 마시면 됨) 그리고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에는 아침~점심 공양밥 외에 떡과 염주 등도 제공하여 석가탄신일 인심도 넉넉하다.

* 천축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9 (도봉산길 92-2 ☎ 02-954-1474)
* 천축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1979년에 금어 조정우가 그린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원통전(圓通殿)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관세음보살과 1980년에 조성된
천수천안관음탱(千手天眼觀音幀)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석굴, 옥천석굴(玉石窟庵)

원통전 좌측이자 대웅전 뒤쪽에는 높은 벼랑이 있는데, 그 밑도리에 옥천석굴이라 불리는 석
굴(石窟)이 있다. 천축사의 예전 이름인 옥천암의 유래가 된 옥천이 여기서 용솟음치고 있으
나 불공 공양 용도로만 쓰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꽁꽁 봉해둔다.

이곳은 자연산 석굴로 승려들이 오랫동안 수행을 했던 공간이다. 태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하며, 근래에 내부를 손질하여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해 약사전(藥師殿)으로
삼았다. 그리고 좌우에 조그만 감실(龕室)을 파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을 두었다.

▲  석굴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  경내 북쪽에 자리한 무문관(無門關)

천축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이곳의 상징인 무문관이다. 오로지 수행
을 위한 공간으로 1964년에 주지 정영이 새로 지었다.
건물 이름인 무문(門無)은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 길도 문도 없다는 뜻으로 부처의 설산 6년
고행을 본받아 4년 또는 6년 동안 면벽(面壁), 즉 벽만 바라보고 수행을 하는 고난의 길을 걸
어야 된다. 방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일체 금지되며, 한번 발을 들이면 무조건 4년이나 6년
을 채워야 된다. 게다가 수행 중에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해 받아야 되는 등, 수행 규범이 매
우 엄격하다. 그야말로 그 기간 동안은 '나 죽었소' 하며 인간의 삶을 포기해야 된다. 그러다
보니 수행을 통과한 승려 수가 거의 없다. 1965년과 1979년에 100여 명이 도전했으나 겨우 4
명만 통과했다.
워낙 가시밭보다 더한 곳이라 도전자가 거의 없어 시민선원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
어서 결국 문을 닫았으며, 2010년 11월 지금의 건물을 지어 다시 문을 열었다.

허나 불교의 세속화와 어려운 것을 꺼려하는 성향 때문인지 도전자가 없는 실정이라 새 건물
을 그냥 두기도 그래서 시민선방과 절의 쏠쏠한 수입원인 템플스테이(Temple stay)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천축사 편액을 머금고 있다.


▲  대웅전 목조석가삼존불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7호

경내 중앙에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건물로 꽤 우람한 모습이다. 대웅전은 원래 1812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ㄷ'자 팔작지붕인 것을 현공이 2004년에 부시고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1층은 5칸 규모의 종무소(宗務所)와 쉼터로 쓰이고, 2층에 대웅전을 두었는데, 정면 5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그 안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존재들이 있으니 꼭 눈에 넣어가지
고 가자.

화려한 닫집을 지닌 불단에는 목조석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미륵
보살과 제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로 이루어져 있는데, 푸근한 표정과 살짝 머금은 미소로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이한다.
처음에는 오래 숙성되지 않은 삼존불로 여겼으나 근래 석가여래 뱃속에서 복장(腹臟)유물이
쏟아져 나와 그들의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다. 복장유물은 불상의 중수 사실을 담은 2장의 발
원문(發願文)과 경전, 다라니 등으로 이를 통해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
~1618> 시절에 조성되어 북한산 노적사(露積寺)에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 원래부터
천축사 불상은 아니었다.
1713년 발원문에는 진열(進悅)과 영희(靈熙), 태원(太元), 처림(處林), 청휘(淸徽) 등이 불상
을 개금, 중수하여 민지사<閔漬寺, 북한산 서암사(西岩寺)>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으며, 1730
년 발원문에는 황금을 시주받아 개금불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돈암동 흥천사(興天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20세기 중반 정도에 천축사로 흘러들어와 이곳의 보물을 하나 늘려주었다.

이들 삼존불은 그리 크지 않은 중간 규모의 불상으로 조선 중기(16세기 후반~17세기 초)의 불
상 양식(또렷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 안정된 인상, 팽팽하고 풍만한 신체의 질감, 간략화되
고 형식화된 천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복장유물을 통해 조성시기와 중수에 참여한
승려 등이 밝혀져 바로 그 점 때문에 2013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요즘은 늙은 불상이나 보살상, 불화 중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내용만 나오면 거의 무조건 지
정문화재로 삼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배려가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것이
다. (발원문 하나에 국가 보물이냐 지방문화재냐, 그냥 비지정문화재냐가 갈리는 세상임)


▲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毘盧舍那三神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2호

대웅전 우측 벽에는 고색의 기운이 자욱한 비로자나삼신불도가 걸려있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불화(佛畵)는 언제 봐도 참 어렵고 난해하여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그 성격, 그림의 특성까지 다 파악하려면 그야말로 암이 걸릴 정도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그렸을까? 세상의 복잡함을 상징하고자 함일까..?

탱화 중앙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있고, 왼쪽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
), 오른쪽에는 석가여래가 자리하고 있다. 이들이 삼불도의 중심인 삼불로 목리문(木理紋, 나
무결 무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있다. 녹색을 띈 두광(頭光)과 살색의
신광(身光)을 표현해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불어넣었으며, 삼불 주변에는 제일 위에 4명의 보
살을 두었고, 좌우에 시방제불, 그 밑에 보살 2명과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을 삼불 사이
에 넣었다.
비로자나불 무릎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있고, 그림 하단의
8명 보살은 모두 동그란 두광과 모서리가 둥근 네모난 신광을 가지고 있다. 지장보살을 제외
한 모든 보살은 비슷한 모습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각자의 연장을 들고 있다.

조선 후기에 흔한 삼신불도이나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서울과 경
기도 지역에서 활약했던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 환감(幻鑑). 혜조(慧
照). 경림(璟林). 탄인(呑仁). 창오(昌悟) 등이 합심하여 제작했다.
경선당은 이곳 삼신불도처럼 전통적인 화법으로 작품을 그리면서 간혹 도상을 나름대로 변화
시켜 새로운 도상을 창출했으며, 갸름한 얼굴과 지극히 작은 이목구비의 얼굴, 꽃무늬가 새겨
진 대의, 적색, 녹색, 청색의 색조, 목리문의 표현 등의 양식적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림 오른쪽 밑에는 '臣尙宮 己酉生朴氏  尙宮己 酉生金氏 等○○奉爲 王妃殿下 辛亥生閔氏
玉體恒安 聖壽萬歲'란 명문이 있어 기유년생 상궁 박씨와 기유년생 상궁 김씨 등이 왕비전하
(명성황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고자 시주한 불화임을 알려준다.
그림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으나 그림 상단이 그을음 등으로 채색이 좀 어두워
져 있고, 화폭 상단 오른쪽이 일부 찢겨져 나갔다.


▲  천축사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5호

천축사 경내를 20분 정도 둘러보면서 주변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2016년 2월에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마애사리탑을 찾기 위함이다. 그것말고도 비로자나삼신괘불도도 있으나 괘불(掛
佛)은 석가탄신일 같은 특별한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기 때문에 평소에는 친견이 불가능
하다.

경내 주변 바위를 살펴보았지만 마애사리탑 비슷한 것도 보이질 않는다. 인근 불암산(佛巖山)
의 학도암(鶴到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절 밑에 있을 듯 싶어서 절을 나와 동쪽으로 내
려가면서 주변에 널린 바위들을 계속 살펴보던 중, 일주문 직전의 북쪽 바위 높은 곳에 수상
한 것이 눈에 아른거린다. 바로 마애사리탑이다. 천축사를 여러 번 찾았지만 마애사리탑은 이
번에 처음 인연을 짓는다.

견고한 바위 피부에 살짝 깃든 마애사리탑은 모두 2기이다. 아쉽게도 나는 1기만 확인을 했는
데, 바위 남쪽에 있는 사리탑은 사리를 넣었던 감실(龕室) 위에 '청신녀정월 영주봉안탑 정축
사월일(淸信女淨月 靈珠奉安塔 丁丑四月日)'이라 새겨져 있어 정월(淨月)의 것으로 정축년(
1817년 또는 1877년) 4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탑은 '신녀○영
영주탑 임오팔월(信女○英靈珠塔 壬午八月)'이라 쓰여 있어 임오년(1822년 또는 1882년) 8월
에 조성된 것임을 귀뜀해 준다. 이중 내가 만난 것은 남쪽 탑이다.

마애사리탑은 19~20세기에 잠시 등장하는 아주 간편한 사리탑 양식으로 부도탑을 세우기 어려
운 산사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보통 바위에 감실을 파서 사리함을 봉안하고 주변에 관련
글씨를 새기는데, 학도암 마애사리탑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곳 천축사와
안양 염불사(念佛寺)에 19세기 마애사리탑이 있고, 인왕산 석굴암(石窟庵)과 국사봉 사자암(
상도동) 등에 20세기 사리탑이 있다.


▲  최근에 지어진 천축사 일주문(一柱門)

마애사리탑을 만나기가 무섭게 천축사 일주문이 뒷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없던 존재로 그
새 새로 장만하여 이곳에 심어두었다. 문의 위치가 경사진 산길에 자리해 있는데 문 정면에는
'도봉산 천축사'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하얗게 쓰인 글씨는 마치 날라갈 것
같은 기세라 명필임이 분명해 보였다.

일주문을 벗어나니 시간은 17시 반, 여기서부터 열심히 내려가다가 금강암(金剛庵) 부근 계곡
에서 잠시 길을 멈추고 신발에 오랫동안 갇힌 꼬질꼬질한 두 발을 해방시켜 계곡에 담구었다.
계곡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졸졸졸 흐르는 물에 발을 넣으니 그동안의 피로감이 싹 가시는 듯
하다. 그리고 동시에 발에 깃든 냄새도 다소 가셨다.

그렇게 발을 정화시키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18시 반, 도봉산 종점에 이르렀다. 12시에 시작
된 도봉산 산행은 무수골과 원통사, 우이암(관음봉),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를 거쳐 도봉산
종점까지 거의 6시간 반 동안 파란만장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정상은 가지 못해 아쉽지
만 우리에게는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그때를 기약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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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운달계곡)

문경 운달산 김룡사



' 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

▲  문경 김룡사
 



 

여름 제국이 서서히 내리막을 보이던 8월의 끝 무렵. 문경(聞慶)에 있는 운달산 김룡사를
찾았다.
아침이 열리기가 무섭게 도봉동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점촌, 상주행 직행버스에 몸
을 실었다. 허나 아침부터 차가 오지게 막혀 무려 1시간이나 늦게 점촌(店村)에 도착했다.
그래서 김룡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간만에 차이로 놓쳤고, 다음 버스는 무려 2시간 이후에
나 있다.
하여 다른 곳을 급히 물색했으나 딱히 땡기는 대체 장소도 없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기
에도 시간이 애매하여 그냥 계획대로 다음 버스를 타고 김룡사로 들어가기로 했다.

졸지에 2시간 가까운 잉여 시간이 생겨버려 무엇을 할까 궁리했으나 답은 역시 하나 밖에
없었다. 그리 넓지 않은 점촌시내를 간단히 둘러보는 것이다. 시내에 마땅한 명소가 없어
서 점촌전통시장과 점촌역 등 시내를 돌며 중간에 편의점에서 간단히 요기도 하는 등, 억
지로 시간을 죽여가며 시내 북부에 자리한 점촌시내버스터미널로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니
김룡사행 좌석버스가 타는 곳으로 다가와 활짝 입을 연다.
드디어 시간이 되자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터미널을 출발했다. 우리의 버스는
산양과 산북을 거쳐 김룡사까지 곧게 가더니 갑자기 산골로 비집고 들어가 석봉리 지역까
지 강제투어를 시켜주어 점촌 출발 50분 만에 김룡사 종점에 이르렀다.

김룡사 종점에는 여느 유명 사찰과 마찬가지로 식당들이 가득 진을 치고 있는데, 절을 목
전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 같은 그들을 지나치면 그림 같은 숲길이 펼쳐지면서 속세(俗
世)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소독시켜준다.


▲  김룡사로 인도하는 숲길



 

♠  김룡사 숲길, 해우소

▲  녹음(綠陰)에 잠긴 김룡사 숲길

김룡사 주차장(종점)에서 김룡사로 이어지는 숲길을 10분 정도 가면 홍하문 현판을 내건 일주
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일주문 천정에 걸린 '雲達山金龍寺(운달산김룡사)' 현판은 근대 서화가로 명성이 높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것으로 문 주변에는 오래된 비석 2기 등, 비석 3기가
있다. (비석 내용은 모르겠음)


▲  홍하문(紅霞門)이라 불리는 김룡사 일주문(一柱門)과
김규진이 남긴 '운달산 김룡사' 현판

▲  일주문에서 김룡사로 인도하는 숲길
여름 제국의 강렬한 햇살도 우걱우걱 씹어먹을 정도로 숲이 울창하다.

일주문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김룡사입구 3거
리가 나온다. 여기서 김룡사는 오른쪽 전나무
숲길로 들어가면 되며, 직진하면 운달계곡(김
룡사계곡) 상류와 대성암, 양진암 등의 암자,
운달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김룡사 입구에 차곡차곡 구축된 돌탑

요즘 전국적으로 둘레길과 온갖 도보길이 크게
유행을 하면서 이곳 역시 그 유행에 호응하여
'김룡사 둘레길'을 천하에 내놓았다.
김룡사에서 대성암과 화장암, 양진암을 경유해
다시 김룡사로 돌아오는 2.6km의 산길로 그야
말로 김룡사와 산내 암자 순환 코스이다. 대성
암까지는 길이 널널하며 양진암과 화장암은 산
을 좀 타야 되지만 둘레길에 걸맞게 초급 수준
이다.

김룡사 경내 직전에는 늘씬하게 솟은 전나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루고 있다. 비록 긴 거리는
아니지만 소소하게 멋을 풍기며 김룡사에 대한
첫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한낮에도 햇님을 가려 어두울 정도로 그 숲길
을 지나면 경내를 가리고 선 보장문이 마중을
한다.


◀  김룡사를 목전에 둔 싱그러운 전나무숲길


▲  금강문(金剛門)의 역할을 하는 보장문(寶藏門)

솟을대문처럼 생긴 보장문은 김룡사의 2번째 문이다. 하지만 굳이 그의 밑도리를 지날 필요는
없다. 바로 옆에 차량을 위한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보장문은 금강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1960년대에 소실된 것을 옛 건물을 축소하여 중건했
다. 문짝에는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들의 검문을 통과하면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나오며, 그 너머로 김룡사 경내가 층층이 펼쳐진다.


▲  300년 이상 묵은 김룡사 해우소(解憂所)

보장문을 들어서 오른쪽을 보면 고색에 깃든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모습도 단촐하고 요상한
냄새까지 약간 풍기기도 하는데, 그 건물은 300년 이상 김룡사 사람들의 생리적 볼일을 묵묵
히 받아주던 해우소(뒷간)이다.
사진으로 보면 1층 같지만 엄연한 2층으로 윗층에는 볼일을 보는 공간을 남녀 구분하여 만들
었고, 밑층에는 생리적 볼일이 생산한 쾌쾌묵은 물질이 쌓여 있다. 이들 물질은 절에서 퇴비
로 사용했으나,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물질 공급도 여의치 않아 매우 한가한 처
지가 되었다.
그래도 김룡사에서 대웅전, 공루 다음으로 늙은 건물이고 사찰 해우소의 대명사로 통하는 순
천 선암사(仙巖寺) 해우소와 더불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절 뒷간이라 문화유산급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허나 아직까지 그 흔한 지방문화재 등급도 얻지 못했다. 그렇게 하기에는 다
소 껄끄럽고 예민한 냄새가 나는 공간이라 그런 것일까? 뒷간에 대한 이 땅의 사람들의 생각
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뒷간의 역사와 옛 구조를 조사하는 학자, 교수도 거의
없다고 함)


▲  주차장과 경내 밑부분 (보제루와 천왕문)

▲  범종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 천왕문(天王門)


김룡사는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 지형을 이용해 석축을 층층이 구축하고 등급에 맞게 건물
을 두었다. 석축의 높이는 2~3m 정도로 주차장에서 1단 석축을 오르면 범종각과 천왕문이며,
2단 석축을 오르면 보제루 밑도리, 그리고 3단 석축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 중심에 이른다.

▲  하얀 피부를 드러낸 석조 사천왕상
원래 나무로 만든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그 큰 것을 누가 훔쳐가서 돌로 다시
만들었다. 피부들이 너무 흰색이라 마치 하얀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모습 같은데, 끝없이 몰려드는 속세의 분진가루 같은
기운을 막느라 그리 된 모양이다.

▲  운달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연꽃 석조(石槽)

절에 왔으니 약수 한 모금은 마셔야 되겠지. 굳이 목이 마르지 않더라도 경내에 샘터가 있으
면 꼭 바가지를 깨워 마신다. 절의 인심과 산의 넉넉한 마음도 읽어볼 겸 말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마음과 오장육
부가 싹 시원해진다. 그리고 보는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물빛이 우유빛과 비슷하다는 말이 있
다. 그 이유는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와우형(臥牛形)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잠
시 김룡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운달산(雲達山) 남쪽 자락에 안긴 김룡사는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김천 직지사(直指寺)의 말사
(末寺)이다.
588년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창건해 운봉사(雲峰寺)라 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으며,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무려 1,100년 동안 마땅한 사적(事績)도
전하는 것이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심히 회의감을 품게 한다. 1624년에 혜총선사(慧總禪師)
가 중창했다는 기록이 절의 첫 중창 기록이고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가 17세기 중반에 조성
된 대웅전과 삼장탱화 정도라 빠르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늦으면 1624년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진다.

혜총이 그의 제자인 광제(廣濟)와 묘정(妙渟), 수헌(守軒)과 함께 1년 동안 공을 들여 선방,
승방, 법당 등을 완성해 혜총도장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1643년 여름, 화재로 말끔히 소실된
것을 1649년에 의윤(義允)과 무진(無盡), 태휴(太休) 등이 중수했으며, 계속 경내를 확장하여
왜정(倭政) 때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50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로 성장했다.
허나 워낙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골이라 교통이 불편하여 말사 가운데 하나인 김천 직지
사에게 그 감투를 넘기고 그의 그늘로 들어갔다. 1940년에는 요사와 범종각을 중수했으며, 이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절 이름이 운봉사에서 김룡사로 바뀐 것은 조선 후기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
하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봉사 입구인 용소(龍沼
) 부근에 살았다고 한다. 그는 매일 지극 정성으로 불공을 올렸는데, 용소에 살던 용왕(龍王)
이 그 불공에 감동을 먹어 딸을 그에게 시집 보냈다. (또는 김씨가 죄를 짓고 운달산에 숨어
살다가 신의 딸을 만나 혼인했다고 함)
그들 부부는 아들을 낳자 이름을 '김용(金龍)'이라 했으며, 나날이 집안이 번창하니 지역 사
람들은 그를 김장자(金長者)라 불렀다. 또한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던지 마을 이름도 그의 이
름을 따서 김용리라 했으며, 절 이름 또한 김용사로 갈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지원이 상당
하여 그 은혜를 기리고자 절 이름까지 그의 이름에 맞춘 모양이다.
이 전설 외에도 금선대(金仙臺)의 '금'과 용소폭포의 '용'을 따 금룡사(김룡사)로 했다는 설
도 덧붙여 전해온다.

비록 31본산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왕년에는 48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
은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전, 금륜전, 명부전, 보제루, 명부전, 응진전 등 무려 30여 동(부속
암자 포함)을 지니고 있어 여전히 큰 규모를 자랑한다. 부속 암자로는 대성암(大成庵)과 화장
암(華藏庵), 양진암(養眞庵), 금선대 등 4곳이 있는데, 이중 양진암은 1658년에 지어졌고, 나
머지는 18~19세기에 세워졌다. 이들 암자는 모두 비구니 도량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640호로 지정된 '영산회괘불도(靈山會掛佛圖)'와 '사료수집(史料
蒐集, 국가등록문화재 635호)','대본산 김룡사 본말사 연혁 원고(국가등록문화재 636호)'를
위시해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제상(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85호), 대웅전, 영산회상도, 석
불입상, 3층석탑, 양진암 신중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쇠북과 삼장탱화,
해우소, 노주석, 업경대, 지장탱, 시왕탱 등의 오래된 유물이 있다.
또한 1670년에 사인비구(思印比丘)가 만든 동종(김룡사 동종, 보물 11-2호)도 있었으나 1990
년대 중반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해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겨 지금은 없다.

속세의 기운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첩첩한 산골에 묻혀있으며, 절을 둘러싼 숲이 매
우 삼삼하고 바람소리와 새소리, 풍경소리,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소리의 전부일 정도로 적막
하기 그지 없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내음을 누리기에 아주 좋다. 또한 비구니 절집이라 경
내도 참 정갈하고 차분하며, 절을 둘러싼 풍경 또한 일품이라 문경8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끝으로 김룡사에는 대승사(大乘寺)의 불을 껐다는 동자승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역
시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지나치게 영리한 동자승과 그를 의심하는 어른 승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언젠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절의 요지경 갈등이나 일종의 시기심을 전설
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듯 싶다.
 
김룡사가 꽤 잘나가던 시절(고려 때라고 함)에 영리하게 생긴 동자승이 있었다. 어느 날 주지
승이 저녁에 먹을 상추를 씻어 오라고 시켰다. 하여 계곡으로 내려가 상추를 씻고 있으려니
난데없이 동쪽 산 너머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는 것이다. 그래서 상황을 살펴보니 글쎄 산너머
에 있는 대승사에서 불이 난 것이 아니던가.
대승사 승려들은 불을 잡기는커녕, 불에게 단단히 희롱을 당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어 자칫
절 하나가 화마(火魔)에게 통째로 날라갈 판이었다.

동자승은 염불을 외운 다음 물을 소쿠리에 담아 산 너머를 향해 열심히 퍼부었다. 그 물은 동
자승의 주문에 힘입어 대승사까지 태풍의 기세로 날라갔고, 한참 만에 간신히 불길이 잡혔다.
그제서야 동자승은 다시 상추를 마저 씻으려고 했으나 소쿠리로 물을 정신없이 퍼붓는 과정에
서 상추까지 죄다 날라가 거의 몇 잎밖에 남지 않았다. 하여 주지승에게 혼날까봐 걱정이 되
었으나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서둘러 절로 돌아갔다.
한편 주지승은 그를 기다리다가 지쳐 뚜껑이 제대로 폭발한 상태였다. 게다가 배도 무지 고픈
상태였으니 오죽했으랴. 그런데 동자승이 몇 잎 남지 않은 상추를 들고 헐레벌떡 왔으니 안그
래도 폭발한 뚜껑, 더 폭발하여
'왜 늦게 왔냐. 상추는 어디다 팔아먹었냐?'
역정을 내며 그의 종아리를 때렸다, 동자승은 앞
서의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냥 매를 맞고 말았다.

그날 밤, 동자승 옆에 누운 승려가 무슨 일로 매를 맞았냐며 물었다. 그래서 낮에 있던 일을
설명해주었는데, 솔직히 누가 그걸 믿겠는가? 그 말을 들은 승려는 웃기지 말라며 비웃었고,
자기 말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듯싶어 이튿날 새벽, 미련 없이 절을 떠나고 말았다.

동자승이 사라진 것을 안 승려들은 그가 대승사의 불을 껐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두고 서
로 수근거리다가 승려 하나가 대승사에 직접 갔다오기로 했다.
가보니 전날 불이 났다고 했다. 불을 끄지 못해 애태우던 중 어디선가 상추와 함께 물줄기가
날라와 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김룡사 승려들은 동자승이 비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를 찬양했다. 허나 한번 떠난 동자승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 김룡사 소재지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410 (김용길 372, ☎ 054-552-7006)



 

♠  김룡사 대웅전 주변

▲  경내 중심부를 가리고 앉은 콧대 높은 보제루(普濟樓)

보제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2층 건물로 교육이나 설법(說法)을 하는 강당(講堂)
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보통 1층 가운데 칸에 법당 등 경내 중심부로 인도하는 통로를 내나 여
기서는 모두 틀어막고 건물 옆구리에 계단을 내어 법당으로 가도록 했다.
건물이 워낙 장대한 모습이라 절 중심부를 완전히 가리고 앉았는데, 이는 경내 중심부를 외부
에 노출시키지 않고자 그리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흔히 보이는 가람 형태이다.


▲  김룡사의 중심부, 대웅전 주변

보제루 옆구리를 통해 경내 중심부로 들어섰다. 뜨락을 중심으로 정면에 법당인 대웅전이 남
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웅전 맞은편에는 보제루, 뜨락 우측에는 설선당, 좌측에는 종무소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는 해운암(解雲庵)이 있다.


▲  천하에서 가장 큰 방을 지닌 설선당(設禪堂, 경흥강원)

대웅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설선당은 예전 향응각(凝香閣)으로 경흥강원(慶興講院)이라 불리
기도 한다.
이 건물은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70평짜리 온돌방을 가지고 있는데, 장판지만 무려 120
장이 소요될 정도로 천하에서 가장 큰 방이자 최대의 강원(講院) 건물로 위엄이 자자하다. 게
다가 온돌을 때는 아궁이 또한 장대하여 어린이가 서서 들어갈 정도로 크다.
김룡사의 왕년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물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으며, 큰 승려
로 추앙을 받는 성철(性徹, 1912~1993)이 처음으로 설법을 펼쳤던 현장이기도 하다. 경흥강원
이란 현판이 측면에 걸려 있으며, 강당과 숙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조각이 아름다운 서쪽 노주석(露柱石)

▲  단촐한 모습의 동쪽 노주석

뜨락 남쪽에는 이쁘게 조각된 돌기둥 2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들의 정체는 노주석
으로 야간에 불을 피워 그 위에 올려놓거나 숯을 피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용도로 쓰였다.
절에 흔한 석등(石燈)과 서원이나 향교의 정료대(庭燎臺)와 성격이 비슷하며, 화광대(火光臺)
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데, 순 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한다.

김룡사 노주석은 서로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데, 다른 모습 만큼이나 서로 태어난 시기도 다르
다. 조각이 유난히 아름다운 서쪽 노주석은 1940년에 설선당 중수 기념으로 조성되었는데, 높
이 176cm, 불을 피우던 꼭대기 폭은 75cm로 대웅전을 향한 피부면에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글
씨 10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ㅇㅇ十五年 庚辰十月日(경진십월일)'로 앞줄 2자가 고의적으
로 뭉개져 있었다.

고약했던 왜정 때 조성된 탓에 혹시 왜왕(倭王
)의 연호가 쓰이지 않았을까 싶어 1940년 경진
년을 찾아보니 왜왕 소화(昭和) 15년이 있었다.
즉 그때 조성된 것이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입에 담기도 구역질 나는 그 연호를 지우면서
일종의 옥에 티가 되버린 것이다.
그런 점만 뺀다면 이 노주석은 제법 휼륭한 작
품이다. 연꽃봉오리가 늘씬하게 깃들여져 있고
각 면마다 조그만 연꽃잎이 앙증맞게 있다. 그
리고 밑에는 '亞' 무늬가 있다.
동쪽 노주석은 높이 179.5cm, 꼭대기 폭 75cm
로 돌기둥 윗쪽에 구름 무늬가 있다. 그는 강
희(康熙) 51년, 1712년(임진년) 3월에 조성된
것으로 서쪽 노주석보다 단촐한 모습이다.

노주석은 김룡사 외에 대승사, 봉암사(鳳巖寺)
등 문경 지역 고찰(古刹)에서 유난히 많이 나
타나고 있는데, 노주석이 있는 대신 탑이 없는
점도 특징이다. 이는 대승사에서 시작된 문경
지역 사찰만의 개성이라고 보면 될 듯 싶다.

▲  서쪽 노주석에 새겨진 글씨들
왜왕 연호가 빡빡 지워져 있다.


▲  김룡사 대웅전(大雄殿)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453호

남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2중으로 된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이 건물의 6할을 차지할 정도로 육중해 보인다. 그러다보니
건물의 규모도 꽤 크다.
17세기 중반에 지어진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기단 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기둥을 세
워 높이가 하나 같이 일정하지가 않다. 허나 기둥 모두 대웅전의 중심 쪽으로 약간씩 기울어
져 있어 안정감을 주며, 커다란 지붕 처마를 받치고자 공포(空包)를 기둥과 기둥 사이에 촘촘
하게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을 취했다.

비록 영가(靈駕)의 49재 행사로 대웅전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천정에는 천녀(天女), 비
천상(飛天像) 등 다양한 존재들이 그려져 있으며, 1644년에 조성된 삼장탱화가 좌측 벽에 걸
려있고, 성균대사(省均大師)가 그린 영산회상도가 삼세불좌상(석가여래불, 아미타불, 약사불)
의 뒤를 든든히 받쳐준다.
삼세불좌상은 1649년에 설잠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9년에 경북도청에 이들 삼세
불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하면서 불상 뱃속에서 나온 복장유물을 살펴본 결과,
1658년에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아직 삼세불은 비지정문화재임)


▲  대웅전 삼세불좌상과 영산회상도(경북 지방유형문화재 524호)

영산회상도는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비단 바탕에 그려진 탱화로 높이 5.2
m, 너비 4.3m 규모인데, 그림 가운데에 석가여래가 크게 그려져 있고, 그를 중심으로 앞에는
4위의 보살이 일렬로 있으며, 좌우로는 8위의 보살이 서 있다. 그림 상단에는 가섭존자와 아
난존자를 비롯한 10대 제자와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포함한 사자관을 쓴 건달파, 그
리고 사자관을 쓴 야차와 4명의 금강이 있으며, 하단에는 비파, 검, 용과 여의주, 탑 등의 연
장을 쥐어든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이 탱화는 제작 당시부터 이곳 대웅전 삼세불좌상의 후불벽에 꾸준히 있었다. 화기(畵記) 부
분이 훼손되어 제작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룡사사료수집'에 의하면, 1648년에 제작된 불화
들이 낡아 1803년에 적지 않은 탱화를 새로 제작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때 사불산 화승
홍안(弘眼)과 신겸(愼謙)을 중심으로 18명이 탱화 제작에 참여했다.

영산회상도에 나타난 사불산화파의 특징을 살펴보면, 측면향을 한 보살의 얼굴형은 타원형에
눈 부분은 들어가고 이마와 볼을 튀어나오게 표현했고, 채색은 홍색과 녹색을 선명하게 대비
되도록 진채(珍菜)를 사용했으며, 보살과 사천왕 등의 장신구와 지물은 돋음기법에 금을 칠했
다. 특히 존상 구성에서 지장보살이 권속으로 표현된 점이 가장 주목된다. 지장보살은 아미타
불회도에서 8대 보살로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나 19세기 전반 사불산화승들은 지장보
살을 주요 권속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김룡사 영산회상도는 조선 후기 후불도 양식을 고수하
는 한편 화면 구성과 존상 구성 및 상호 표현, 채색법 등에서 사불산화파의 특징적인 도상과
화풍이 잘 드러난 불화로 바로 그런 점 때문에 2018년 12월 뒤늦게나마 지방문화재에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측면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종무소와 선방의 역할을 하는 해운암


▲  괘불(영산회괘불도)이 담긴 길쭉한 괘불함 (대웅전 뒷쪽)

1703년에 제작된 김룡사 영산회괘불도는 국가 보물 1640호로 지정된 비싼 몸이다. 비싼 만큼
이나 만나기도 여간 힘들지가 않아 석가탄신일과 일부 행사 때만 반짝 얼굴을 드러낼 뿐이며,
대부분의 날을 괘불함 속에서 지낸다. 괘불이 워낙 큰 그림이라 그의 보금자리 또한 길쭉한데,
기분 같아서는 그 함을 열어 괘불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만 그럴 위치가 되지 못한다.

괘불의 신상이 적힌 화기에는 제작시기와 기원문, 시주자 5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김
룡사 대신 운봉사로 나와있어 18세기까지 운봉사로 불렸음을 알려준다.


▲  빛바랜 쇠북 <청동금고(靑銅金鼓)>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밥 시간과 예불 시간, 기타 주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쓰인다.



 

♠  김룡사 마무리

▲  김룡사의 창고인 공루(空樓)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98호

해운암 뒷쪽에는 고색이 제법 느껴지는 2층짜리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그는 절의 살림살이와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인 공루로 정면 4칸, 측면 1칸의 누각 형태를 취하고 있다. 1624년에 지
어져 여러 번 중건을 거쳤는데, 2층에는 1칸, 1층은 1칸, 2칸, 1칸 규모로 방이 나뉘어져 있
으며, 원래 자리를 지키면서 절 창고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런 가치가 있음에도 오랫
동안 비지정문화재에 서러움을 간직하며 살다가 2022년 6월에 이르러 경북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얻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김룡사에는 특이한 늙은 존재들이 많다. 앞서 해우소도 그렇고, 노주석도, 그리고
창고까지. 역시 김룡사가 예사롭지 않은 큰 절임을 귀뜀해준다.


▲  앞에서 바라본 공루

▲  김룡사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보금
자리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다고 하며
석가여래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해 3존
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작고 귀엽다.
16나한 또한 다들 제각각의 모습으로 옷과 얼
굴, 머리스타일, 포즈가 모두 틀리며, 그들 뒤
로 16나한도가 걸려있다.

그리고 좌우 모서리에는 신중도와 독성도가 걸
려 있는데, 독성도(獨聖圖) 같은 경우 그 주인
공이 나한의 일원인 나반존자(那畔尊者)이기
때문에 이곳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  응진전 석가3존상

▲  응진전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512호

응진전 식구 중 16나한상과 제석천 2구, 사자(使者) 2구가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이란 이름
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6나한상은 가부좌(跏趺坐)를 튼 모습으로 각자의 표정, 옷차림, 연장을 취하고 있으며, 보관
(寶冠)을 눌러쓰고 홀을 쥐어든 제석천 2구와 두건을 쓰고 두루마기를 든 사자 2구가 그 주변
에 자리한다. 이들은 1709년에 조각승 수연(守衍) 등이 조성한 것으로 수연의 스승인 승호파(
勝湖派) 양식에 기반한 17세기 말~18세기 초기 조각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  김용사 금륜전(金輪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금륜전이란 칠성각의 다른 이름이다.

▲  금륜전 식구들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
금륜전이란 이름답게 칠성(치성광여래) 식구를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산신 식구,
오른쪽에는 혼자 유유자적하는 독성이 자리해 있다. 독성탱 같은 경우
앞서 응진전에 있음에도 이곳에도 별도의 독성탱을 두었다.

▲  극락전(極樂殿)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보금자리로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아미타후불탱

▲  상선원(上禪院)

상선원은 이름 그대로 윗 선원으로 성철 등 많은 선승(禪僧)들이 머물던 곳이다. 허나 지금은
요사로 쓰이고 있으며, 고승(高僧)들의 진영(眞影) 35점과 1830년에 조성된 시왕탱, 1858년에
조성된 지장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  김룡사 경내에서 석불입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하얀 들꽃이 가득해 마치 소금이 뿌려진 듯 하다.

▲  소나무숲에 자리한 김룡사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67호

경내 동쪽 산자락에는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숨겨져 있다. 경내에서 그곳까지는 산길이 살짝
이어져 있는데, 3층석탑은 산길에서 다소 떨어진(그래봐야 길에서 다 보임) 소나무숲 바로 앞
에 외로이 떨어져 있다.

이 탑은 1709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체 높이는 2.85m이다. 바닥돌과 1층 기단, 3층 탑신(塔身)
,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으로 탑과 석불입상을 경내 중심이 아닌 경내 뒷쪽 구석
에 둔 것은 그들이 꼴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단죄하고 운달산의 촉맥(
促脈)을 보우하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유는 단순히 그것
뿐이다.
한때 이들을 천왕문 앞으로 옮기기도 했으나 절의 전통을 지키고자 1989년 10월에 다시 원위
치시켰다.


▲  석불입상으로 인도하는 계단 (사진 중앙에 석불이 있음)

▲  소나무숲에 자리한 석불입상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55호

김룡사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석불입상이 고적하게 자리해 있다. 8각형 기단 위에 연화
대좌를 깔고 그 위에 2.27m의 석불을 올렸는데, 머리에 주름선이 많이 있어 나발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평온한 모습으로 눈썹이 구부러져 있고, 눈은 가늘게 떠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
으며, 코는 약간 오똑하고, 입은 살짝 다물고 있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무엇이든
들을 자세가 되어 있다.
몸통에는 얕은 새김이 이리저리 주름선을 자아내고 있는데, 두 손에 약합 같은 것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알려준다. 그의 아랫도리는 장대한 세월에 선이 거의 지워졌다.

그는 1709년에 조성된 것으로 거의 민불(民佛) 스타일의 석불이다. 3층석탑과 함께 비보풍수
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인데, 절 자리가 와우형혈(臥牛形穴)이라 그 이름에 걸맞게 소를 모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여 당시 유행했던 약사신앙을 내세워 이곳에 석불입상(석조약사여래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덕분인까? 31본산에서 밀려난 것 외에는 절에 딱히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비보풍수
의 덕인지 그냥 운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보장문 앞에 펼쳐진 전나무숲길

이렇게 김룡사를 둘러보니 1시간 반 정도가 정말 훌쩍 가버렸다. 나름 꼼꼼하게 봤다고 여겼
으나 나중에 보니 명부전(冥府殿)을 빼먹었다. 거기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지장3존상이
있는데, 명부전이 경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보니 보기 좋게 놓친 것이다. 영산회괘불도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적이야 원래부터 만나기 어렵고 아무나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마음을 비웠지만 명부전은 늘 열려있는 공간이라 정말 곡소리를 내고 싶은 심정이다.


▲  조촐한 모습의 김룡사계곡(운달계곡)

▲  김룡사를 뒤로하며 (김룡사 숲길)

김룡사를 나와서 부속암자도 둘러보려고 했으나 버스 시간이 임박해 그만 발길을 돌렸다. 여
기서 버스 하나 놓치면 2시간 이상 강제 대기를 해야 되고 그리되면 이후 일정에 차질이 생긴
다, (이후에 들릴 곳이 있었음)
그래서 대성암 등의 부속암자는 쿨하게 포기하고 절입구에 조촐하게 펼쳐진 김룡사계곡(운달
계곡)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쉰 다음, 자리를 떴다. 명부전 목조지장3존상도 놓치고 부속 암자
들도 싹 놓쳤으니 결국 다시 와야 될 명분을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과 또 인연이 닿을지
는 솔직히 장담하기가 어렵다. 아직도 나를 못참게 하는 미답처(未踏處)들이 천하에 수두룩하
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늦여름 김룡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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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산사 나들이, 안성 고성산 운수암 (무한성, 무양성)

안성 운수암 (무한성)



' 한여름 산사 나들이 ~ 안성 운수암 '
운수암 대방
▲  운수암 대방
 



 

여름 제국(帝國)이 정점에 치닫던 8월의 첫 무렵, 안성(安城) 운수암을 찾았다. 수도권에
서 당일 답사로 간단히 몸을 풀 곳을 물색하다가 운수암이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길을 잡
았는데, 12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지하철과 시내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쉬엄쉬
엄 이동해 15시에 안성 서북부에 자리한 양성(안성시 양성면)에 이르렀다.

양성까지는 환승할인 시간에 맞게 무탈하게 이동했으나 여기서 공도(孔道)로 가는 시내버
스가 출발시간보다 5분 일찍 도망치면서 환승 리듬이 그만 깨져버렸다. 다음 버스는 거의
50분 뒤에나 있는 상태. 여름 제국의 무더위 핍박이 극에 달한 상태에 환승할인까지 날라
갔으니 정말로 복창이 터질 판이다.
허나 나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은 없어서 별수 없이 50분을 강제로 기다려 공도읍으
로 가는 안성시내버스 7번(안성터미널↔원곡)에 탑승, 10분을 더 달려 운수암입구인 방신
1리에서 두 발을 내렸다.



 

♠  운수암 입문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①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②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③

방신1리에서 운수암까지는 25분 정도 걸어가야 된다. 마을을 가로지르며 그늘도 거의 없는 길
을 10분 정도 가면 숲이 나타나면서 길도 그늘길로 변신하는데, 그늘이 짙게 깔려 무더위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며, 땀이 조금씩 나긴 해도 선선한 산바람 앞에 이내 산산히 사라진다.

길은 처음에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운수암이 가까워질수록 점차 각박해진다. 밑골고개
를 넘으면 주차장이 나오며, 여기서 더 오르면 그늘에 묻힌 쉼터와 약수터가 나온다. 약수터
에서 대자연이 베푼 샘물을 여러 번 떠마시며 더위와 갈증을 삼키고 길을 마저 걸으면 고갯길
의 끝에 늙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하는데, 그 느티나무에 이르면 백운산 정상부에 자리한 운수
암이 말끔히 모습을 드러낸다.


▲  운수암 느티나무
약 160년 정도 묵은 나무로 높은 키와 큰 덩치에 걸맞게 운수암 경내에
넓게 그늘을 드리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아직 그 흔한 시/군 보호수 등급도 얻지 못한 야인의 신세이다.

▲  승탑(僧塔)을 가장한 석물
느티나무 부근 수풀 속에 승탑(부도탑) 1기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영락없는 승탑이지만 현실은 경내에 흩어진
석재를 모아서 승탑 형식으로 수습한 것이다.

▲  느티나무 곁에서 바라본 운수암 경내
뿌연 연기를 내뿜은 소독차가 방금 다녀가 연기가 채 가시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소독차 연기만 보면 뭐가 그리 좋은지 열심히
달려 쫓아가곤 했는데, 이제는 무덤덤하다.


고성산(高城山, 298m)의 남쪽 봉우리인 백운산 숲속 180m 고지에 포근히 터를 다진 운수암은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로 1750년에 장씨 보살(菩薩)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의
법명(法名)은 반야명(般若明)으로 근처에 살던 청상과부였는데, 남은 여생을 부처를 봉안하며
살고자 가산을 털어서 무한성(무양성) 밖에 절을 세우려고 했다.
절을 막 짓던 날 밤, 노승(또는 부처)이 꿈에 나타나 '무한성 안에 숲이 넘어진 곳이 있으니
거기에 지으시오'
현몽했다. 그래서 다음날 성 안에 들어가 살펴보니 과연 숲이 넘어진 곳이
있어 그곳에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한 여인에 의해 창건된 운수암은 고종(高宗) 시절에 이르러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과의 인연 덕분에 크게 덕을 본다. 그의 지원으로 중건을 한 것이다. 이때 대방을
세우고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을 봉안했는데, 이곳이 어찌 대원군과 인연을 지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그가 내린 '운수암' 현판이 대방에 있다.
1873년에는 아미타회상도(현재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음)를 제작했는데, 앞서 칠성탱 등
과 함께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어 왕실과 대원군 일가의 원찰(願刹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은 불교에도 관심이 지대해 서울 화계사(華溪寺)
와 흥천사(興天寺),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등 서울 근교의 여러 절을 오가며 온갖 지원을 아
끼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비로전(처음에는 대웅전)을 지었고, 이후 쇠락하여 무너지기 직전인 것을 현암
(玄岩)이 1980년대부터 불사를 벌여 1986년에 대웅전(대웅보전)을 지었으며, 기존의 대웅전은
비로전으로 삼았다. 그리고 1996년에는 광음선원(光音禪院)을 세우고 1997년 범종각을 두었으
며, 이후에 3층석탑을 세워 경내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암자(庵子)란 이름에 걸맞게 매우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비로전, 대방, 삼성각, 광음선
원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해 대
방과 비로전 등이 있으며, 운수암 자체는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25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조성된 아미타회상도와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은 신변보호를 위해 용주사 성보
박물관에 가 있다.

거의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고, 숲이 무성하여 절을 둘러싼 기운도 청정하며, 경관이 좋고 약
소하긴 하지만 동남쪽으로 약간 전망이 트여 있다. 안성과 평택 지역의 명소로 등산과 나들이
수요가 많으며, 경내까지 포장길이 잘 닦여져 있어 차량으로도 편히 접근도 가능하다.

* 운수암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85 (성하길 80-63 ☎ 031-673-7372)


▲  삼성각에서 바라본 운수암 경내



 

♠  운수암 둘러보기

▲  대웅보전 뜨락에 세워진 6면3층석탑

운수암 경내로 들어서면 대방과 3층석탑을 시작으로 광음선원과 대웅보전 등이 차례대로 마중
을 한다.
대웅전 뜨락 중앙에 자리한 3층석탑은 1990년대 후반에 마련한 것이다. 1990년대면 지금과도
꽤 가까운 시절인데, 벌써부터 기록이 누락되거나 기억이 상실되어 막연히 1990년대 말에 세
웠다고 그런다.

수려하고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이 탑은 특이하게 6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래서 6면3층석탑
이라 부른다. 그가 있기 전에는 절에서 그 흔한 탑도 하나 없었는데, 탑을 아주 우람하게 세
워 그 허전함을 크게 달랠 수 있게 되었다.
탑의 구조는 밑에서부터 2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 상륜(相輪)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아직은 어린 탑이라 피부가 매우 하얗고 반질반질하다. 윗층 탑신에는 6마리의 석사자
를 배치해 탑신을 받쳐들며, 그 안에는 사천왕(四天王)과 관세음보살을 두었다.


▲  6면3층석탑 윗층 기단의 사자석과 사천왕상

◀  대방과 마주보는 광음선원(光音禪院)
1996년에 지어진 것으로 요사(寮舍) 및 선방
(禪房)으로 살아가고 있다.

        ◀  운수암 대웅보전(大雄寶殿)
북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
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2년에 짓기 시작
하여 1986년에 완성을 보았다. 그가 세워짐으
로써 기존의 대웅전은 비로전으로 현판을 갈았
다.


▲  운수암 석가여래좌상과 닫집

대웅보전 불단(佛壇)에는 석가여래상을 봉안했고, 그 뒷쪽에 삼신후불탱을 두었다. 그들 위에
는 붉은 피부의 닫집이 있는데, 1층은 적멸궁(寂滅宮), 2층은 법왕궁(法王宮), 3층은 내원궁(
內院宮)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극락조(極樂鳥)와 구름 등 갖은 조각을 두어 장엄함을 더했
다.

불단 좌우에는 11면관세음보살입상과 목조지장보살입상을 봉안했는데, 이들은 2001년에 조성
된 것으로 그 주변에는 삼장탱(三藏幀)과 신중탱(神衆幀)이 자리하고 있다.


▲  운수암 대방(大房)

대웅보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대방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양반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
다.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지어진 26칸 규모로 위에서 보면 'H' 모양이며, 예전에
는 법당의 역할도 겸했다. 대방은 보통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숙식/예불 편의를 위해 지어진
것으로 왕실의 지원을 받던 서울 근교 사찰의 필수 건물이었다. 이곳도 흥선대원군과 인연이
깊어 이렇게 대방을 마련했는데, 절이 서울과 멀어서 상류층 손님의 왕래가 적었다. 하여 평
시에는 운수암 승려와 신도들도 예불/숙식 장소로 사용했다.

비로전이 생기면서 법당의 짐은 덜게 되었으며, 지금은 요사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의 역
할을 하고 있다. 종무소는 건물 앞부분에 있는데, 신발을 벗고 툇마루를 거쳐 안으로 들어가
는 구조이며, 공양간은 서측에, 요사는 북측에 자리한다. 근래에 북측에 지붕을 덧붙여 내부
가 좀 넓어졌다.
정면 어칸에는 흥선대원군이 내린 '운수암' 현판이 있어 그와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며, 가
로 184cm, 세로 52cm 크기로 하얀 바탕에 푸른색으로 글씨를 썼다. 글씨체는 예서(隸書)로 3
개의 낙관이 뚜렷하다.


▲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대방 (정면에 보이는 문이 공양간임)

▲  삼성각에서 바라본 대방의 뒷모습

▲  흥선대원군이 쓴 푸른색 운수암 현판의 위엄
'庵'자가 저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
생기가 감돈다.

▲  비로전(왼쪽)과 삼성각(윗쪽)

▲  운수암 비로전(毘盧殿)

대웅보전 옆구리에는 비로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2번째로 늙은 건물인데, 건축 양식과 내부에 있었던 칠성탱과 산신탱이 1870년에 조성된 것으
로 보아 19세기 후반(1870년 또는 그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는 대웅전의 역할을 했으며, 1980년대에 불단에 봉안된 석불(비로자나불)이 마모가 심
하고 깨진 부분이 많아 땅에 묻었다고 한다. 이후 1986년에 대웅보전이 신축되자 땅속에 파묻
은 석불을 다시 꺼내 이곳에 봉안하고 건물 이름을 비로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이는데, 1986년
이면 40년도 채 되지 않는 지척의 시절임에도 이곳은 기록을 너무 남기지 않아 혼돈을 유발한
다.
불단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뒤에는 아미타회상도(아미타후
불탱)이 있으나 진품은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고 그 모조품이 대신 한다. 그 외에 현왕탱
과 신중탱이 걸려있고, 절을 세운 장씨 보살의 진영(眞影)이 걸려 있다.


▲  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02호

비로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좌상은 고려 때 석불(石佛)로 왜정 말기에 다른 곳에서 가져왔다
고 전한다.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자 옛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높이 107cm, 어깨 폭 82cm인데, 파
손된 부분이 많아서 1980년대에 땅속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6년에 다시 꺼내 비
로전의 주인으로 삼았으며, 불상의 피부와 옷이 온통 하얀 것은 땅속에 묻힌 흔적과 이전에
파손된 부분을 커버하고자 백분을 발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이나 좀 고색의 때가 감돌지
나머지는 고색의 기운도 거의 잠들었다.
그는 1986년 안성시(당시는 안성군) 향토유적 16호의 지위를 얻었으나 2006년 경기도 지방유
형문화재로 지위가 높아졌으며, 연꽃과 구름 무늬가 새겨진 화강암 대좌(臺座)까지 갖추고 있
다.

불상의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백분과 검
은색이 뒤섞여 고단해 보이는 얼굴은 통통한데, 눈과 코, 입, 귀가 선명하며, 귀는 목까지 늘
어져 중생의 소리를 경청한다. 목은 두껍고 삼도(三道)가 있었으나 훼손되었으며, 몸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섬세히 표현되었다.
두 손은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으며, 다리는 오른쪽 발을 올
려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는데, 정강이 부분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수리한 부분이 많지만
조각솜씨는 괜찮은 편이며, 다소 경직되고 도식화된 형태를 통해 고려 때 불상으로 여겨진다.

석불 뒤에는 아미타후불탱이 걸려 있는데,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제작된 것이다. 허
나 이 그림은 모조품으로 진품은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으며, 그림 화기(畵記)에는 왕과
왕비의 만수세(萬壽歲)를 기원하는 글과 대원군 일가, 명성황후(明成皇后) 일가의 시주자 명
단이 있어 운수암도 왕실 원찰(願刹)의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화기에는 '高聖山 雲峀庵'이라 쓰여있어 이름은 같지만 지금과 한자(漢字)가 1글자씩 달랐음
을 보여주며,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大明 崇禎紀元後 五癸酉閏六月二十八日(대명 숭정기원후
오계유윤육월이십팔일) ~~'이라 쓰여 있어 오래전에 망한 명나라에 대한 쓸데없는 사대주의와
그리움이 여전했음을 보여주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  현왕탱(現王幀)과 창건주 장씨 보살의 진영(오른쪽)

비로전 불단 옆에는 명부(冥府, 저승)의 왕인 현왕(現王)을 담은 현왕탱과 창건주 장씨 보살
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창건주의 진영은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전하지 않으며, 그림 상단
측면에 '伽藍刱建大化主 淸信女 般若明 張氏 眞影(가람창건대화주 청신녀 반야명 장씨 진영)'
이라 쓰여 있고, 그 앞에 단을 마련해 창건주를 기린다.

▲  비로전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

▲  삼성각 산신탱

▲  삼성각 칠성탱

▲  삼성각 독성탱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198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이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삼성각이 있기 전에는 비로전에 얹혀 살았
는데, 이곳에 있던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은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
로 진품은 모두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있고, 복제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서 그림이 꽤
선명도가 진하고 세월의 주름이 전혀 없다.



 

♠  무양성<舞陽城. 무한성(無限城)> - 안성시 향토유적 2호

▲  무한성의 북쪽 부분

조촐한 규모의 운수암을 둘러보고 절을 둘러싸고 있는 무한성(무양성)을 1바퀴 돌았다. 무한
성은 무한하다는 뜻의 성으로 성의 역사는 무한해도 규모는 그리 무한하지 못하다.
고성산 남쪽 산정(山頂)에 둥글게 닦여진 둘레 약 120m, 높이 2~4m에 조그만 퇴뫼식 산성으로
무양성(無陽城), 무양산성(舞陽山城), 무란성(舞鸞城)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다. 무란성이란
이름은 힘이 장사인 '무란'이란 여인네가 쌓았다고 해서, 그리고 무양성은 '무양'이 운수암을
지키려는 용도로 축성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 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고성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
地勝覽)에 양성현(안성시 양성면) 남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 1,305척, 성 안에 못이 하
나 있다는 기록이 있고, 1899년에 제작된 양성읍지(陽城邑誌)에 '무한성 남단 아래 고성(古城
)이 있어 옛 고을터가 완연하다'
는 내용이 있다.
성 내부에는 건물터와 많은 기와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을 통해 막연히 삼국시대(백제 또
는 신라)에 닦여진 것으로 보이며, 고려 때 증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  무한성에서 바라본 운수암

▲  무한성 서쪽 부분

무한성(무양산성)은 오랫동안 버려진 성이라 속세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해 왕년의 위엄은
자연과 세월의 집요한 시비 앞에 거의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남벽과 동벽, 내성벽,
성문터 등이 일부 남아있을 뿐인데, 아무리 옛 사람들이 철옹성처럼 만들었다고 해도 대자연
과 세월 앞에서는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

여름 제국의 뜨거운 햇살을 굴복시킬 정도로 나무와 수풀에 제대로 치여 성곽의 모습은 흐트
러졌지만 다행히 산성의 윤곽이 잘 남아있고, 성곽을 이루던 성돌도 여럿 남아있어 무한성의
존재감을 그런데로 확인할 수 있으며, 성이 들어앉은 지형은 대체로 경사가 각박해 성은 작지
만 요새지로는 아주 그만이다. 이곳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삼국시대에 조
성된 것이 맞다면 자기 밥값은 충분히 했을 것이며, 18세기에 운수암이 성내에 들어앉으면서
운수암을 지키는 소소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 무양성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산42


▲  무한성 서남쪽 부분

▲  숲길 같은 무한성 남쪽 부분

▲  경사가 각박한 무한성 남쪽 부분

▲  성문터로 여겨지는 부분

▲  무한성 남쪽 부분에서 바라본 천하 - 안성 공도읍 지역

▲  무한성 남쪽 부분에서 바라본 천하 - 독정저수지와 안성 원곡면 지역

▲  운수암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

무한성(무양산성)을 1바퀴 도니 다시 운수암이다. 무한성 성곽길은 운수암에서 시작해서 운수
암에서 끝나는 순환형 산길인 것이다.

다시 찾은 운수암에서 대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지금까지 고생한 두 다리를 어루만지며 땀을
씻었다. 솔솔 불어오는 고성산 산바람이 땀을 앗아가면서 몸도 좀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산중에 묻힌 이곳에 며칠 신세를 지고 싶지만 그럴만한 처지도 되지 못해 쿨하게 작별을 고하
며 운수암을 나온다. 올라올 때는 무더위 때문에 힘들었지만 내려갈 때는 내리막과 초저녁 기
운의 탄력을 받아 금세 운수암입구 방신1리 정류장에 이른다.

여기서 공도와 평택을 거쳐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햇으나 그러면 너무 돌아가는 것이 되
어 다시 양성으로 나왔다. 다행히 버스가 10분 만에 와서 무난히 양성까지 왔으나 용인으로
가는 용인시내버스 22-1번이 무려 40여 분 만에 오면서 다시금 환승할인이 깨져 가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비운을 겪었다. 어떻게 같은 곳에서 2번 연속 그런 고통이 생기는 것인지 여기가
그만큼 벽지 비슷한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안성 운수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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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을 거닐다. 평창동~백사실계곡~부암동 늦가을 산책 (평창동 소나무, 응선사, 창의문)

늦가을 평창동, 부암동 나들이



' 서울 도심 속의 두멧골, 평창동~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
부암동에서 만난 늦가을 풍경
▲  부암동에서 만난 늦가을 풍경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어루만지던 11월 첫 무렵, 늦가을 풍경을 즐기고자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평창동(平倉洞)~부암동(付岩洞) 지역을 찾았다.

평창동은 성북동(城北洞), 한남동(漢南洞)과 더불어 서울의 1급 부자 동네로 이 땅의 0.1
%가 산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들의 고래등 저택과 고급빌라들이 즐비하다. 이
곳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사이에 깃든 산골로 경관이 아름답고 녹지 비율이
높으며,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다. 게다가 명당 중에서 아주 최고로 친다는 대부대귀
(大富大貴)의 명당인 교쇄명당의 자리라고 한다.
교쇄명당(交鎖明堂)이란 톱니바퀴가 엉키듯 교차하면서 혈(穴)을 감싸주는 명당으로 북한
산과 북악산이 서로 잘 교차하면서 에워싸는 명당을 말한다. 그래서 돈 꽤나 만지는 것들
과 권력층들이 그 냄새를 킁킁 맡고 몰려들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이다.

내가 평창동을 찾은 것은 북한산과 북악산의 소중한 살을 난도질하며 들어앉은 졸부의 고
래등 집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그곳에 깃든 오래된 소나무와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부암
동을 거닐고자 함이다. 이들은 내가 믿고 가는 즐겨찾기 명소들로 백사실계곡과 부암동은
1년에 3~4회 이상은 꼭 찾는다.


▲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으로 파고드는 평창8길 골목길



 

♠  북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늙은 소나무, 평창동 소나무

▲  평창동 소나무 앞 오솔길 (백사실 능선 방향)

평창동 소나무를 찾으려면 화정박물관에서 묘각사(妙覺寺)로 인도하는 '평창8길' 골목길로 들
어서면 된다. 박물관 남쪽 주택가를 지나면 숲에 감싸인 오르막길이 늦가을 정취를 솔솔 불어
대는데, 그 골목길 끝에 외딴 두멧골처럼 자리한 주택들이 보일쯤 해서 오른쪽(서쪽)으로 백
사실(백사골)로 인도하는 오솔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둥근 햇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한 숲에 감싸인 그 오솔길은 평창동에서 백사실을 이어주
는 지름길로 동네 사람들과 아는 사람들만 기웃거리는 도심 속의 숨겨진 숲길이다. 콘크리트
포장도 씌우지 않은 흙길로 길 남쪽에는 밭과 양봉까지 펼쳐져 있어 이곳이 정녕 서울 한복판
인지? 머나먼 지방의 산골인지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그런 밭과 평창동 너머로 북한
산(삼각산) 남쪽 줄기가 시샘을 하듯 이곳을 쳐다본다.

그 오솔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3~4m 높이로 닦인 석축이 비슷한 높이로 길게 이어져 있어 옛
산성(山城)이 아닐까 싶은 기대감을 안긴다. 허나 그 석축은 산성도 아니고 건물터 등의 문화
유적도 아니다.
자세한 사연까지는 모르겠으나 군부대나 체육시설 등을 만들면서 넓게 땅을 다지고 석축을 쌓
은 것으로 지금은 배드민턴장과 쉼터가 있어 동네 주민들의 조촐한 휴식처 역할을 한다. 바로
저 안에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  석축 윗쪽에 넓게 터를 다진 배드민턴장

▲  평창동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7호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평창동 소나무는 280년 정도 묵은 늙은 나무이다. 그의
신상이 간단히 적힌 안내문에는 보호수 지정일 기준으로 230년이라 나와있는데, 그가 보호수
로 지정된 것은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인 1968년 7월 3일이다. 그 이후 50여 년이 무심하게
흘렀으니 약 280년(길게 잡으면 290년) 정도로 보면 된다.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세월을 든든한 양분으로 삼아 높이 13m, 둘레 2.24m의 어엿하고 기품 넘
치는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생김새가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정2품송(正二品松)과 좀 비슷
하여 그리 낯설지는 않은 모습이다.

서울에서 100~150년 이상 묵은 나무 중, 소나무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은행나무와 느티나
무, 회화나무, 향나무가 대부분을 이룬다. 특히 보호수(保護樹)나 문화재로 지정된 소나무는
서울에서 이곳과 여기서 가까운 석파정(石坡亭) 소나무 정도이며 서울에서 가장 늙은 소나무
라 봐도 무리는 없다.

▲  서쪽에서 바라본 평창동 소나무

▲  오솔길에서 올려다본 소나무

하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까?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30~40도 정도 고개를 숙였다. 벼도 익으
면 고개를 숙인다고 이 나무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고개를 꺾은 모양이다. 그만큼 숙
성될수록 겸손을 차리라는 대자연 형님의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은 아닐까 싶다. 자연물은 그
뜻을 받들고 잘 지키는데,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며 지구와 자연에
갖은 민폐를 아끼지 않는 인간들은 왜 단순한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인간은 신
이 아닌 늘 애매한 존재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 평창동 소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248-1


▲  서쪽에서 바라본 소나무와 배드민턴장

평창동 소나무와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다시 오솔길로 나왔다. 배드민턴장 서쪽 끝이 바로
오솔길과 연결되어 있지만 철책으로 막혀있어 홍길동이 아닌 이상은 넘어가기가 힘들고, 소나
무 남쪽 3~4m 높이의 석축에서 오솔길로 뛰어내리기도 좀 그렇다. 그래서 급하면 돌아가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나갔다.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백사실 방향)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평창동 화정박물관 방향)

오솔길을 거닐면 백사실 동쪽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온다. 벌써부터 누렇게 뜬 낙엽이 주
변에 잔뜩 쌓여 있는데,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단풍도 그리 많이 남지가 않았다. 아직은 늦가
을의 한복판이라 방심하고 있었건만 겨울 제국(帝國)의 보이지 않는 마수는 벌써부터 내 곁에
다가와 밑작업을 하고 있었다.

귀를 접고 쓸쓸히 누운 낙엽을 보니 올해도 이제 다되었구나~! 싶은 우울감이 밀려온다. 늦가
을과 연말에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이 기분, 허나 산바람이 살포시 나를 스치면서 그 우울감
을 조금이나마 털어간다. 오늘은 그저 나들이와 출사에만 열중하라는 듯이...


▲  소나무가 무성한 백사실 동쪽 능선

백사실 동쪽 능선은 북악산길에서 시작되어 백사실약수터, KT기지국, 평창동조망점까지 내려
가듯 이어진다. 백사실의 동쪽 지붕으로 중간중간에 현통사와 백사실(백석동천), 평창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을 늘어뜨렸으며, 소나무를 비롯한 갖은 나무들이 짙게 우거져 있다.


▲  울퉁불퉁 이어진 백사실 동쪽 능선길

▲  백사실 백석동천 별서터 서쪽 계곡

백사실 동쪽 능선을 조금 올라가면 백석동천으로 인도하는 길이 오른쪽(서쪽)에 나타난다. 그
길을 내려가면 바로 19세기에 조성된 백석동천(白石洞天) 별서유적으로 별서의 안채터와 사랑
채터가 마중을 하며, 이어서 동그란 연못과 6각형 정자터, 백사실계곡(백사골)이 나타난다.
백사실계곡은 북악산(백악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과
백사실(백석동천), 현통사, 백사폭포를 거쳐 홍제천(弘濟川)으로 흘러가는 작은 계곡이다. 서
울 도심에 몇 안되는 제대로 남은 자연산 계곡으로 개구리와 맹꽁이, 도룡뇽 식구가 서식하고
있으며, 푸른 이끼가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리는 청정한 곳이라 이곳에서만큼은 잠시 서울을 잊
어도 좋다. 서울이 아닌 머나먼 산골이라고 우겨도 손색이 없으니 말이다.
(백석동천 별서터와 백사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는 생략하며 따로 별도의 글을 링크
함 ☞ 관련글 보기)


▲  백석동천 별서터 서쪽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는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금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의 칩
입이 빈번해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에서 계곡을 피해 백사실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을 정비
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솟대 돌탑을 지나면 황금잎 흩날리는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면 갈림길
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백사실 상류와 능금마을, 북악산길로 이어지고, 오른
쪽(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와 백사실 남쪽 입구(응선사, 부암동)로 이어진다.


▲  백사실 소나무숲 (백석동천 별서터에서 능금마을, 부암동 방향)
솔내음이 그윽한 소나무 그늘에 의자 등의 쉼터가 닦여져 있다.

▲  백사실 소나무숲 (능금마을과 부암동 방향 갈림길 직전)

▲  백사실 남쪽 입구 산길

백사실(백석동천)에서 백사실 남쪽 입구로 오르는 남쪽 길은 경사가 완만하다. 백석동천 바위
글씨를 지나 느긋하게 이어진 숲길을 오르면 그동안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햇님과 푸른 하
늘이 방긋 모습을 비춘다.
그들과 함께 부암동 주택들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오는데, 남쪽 입구 양쪽에는 고급지게 지어
진 양옥이 위세를 뽐낸다. 부암동도 부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은근히 고급 주택이 많다.


▲  늦가을이 짙게 서린 백사실 남쪽 입구
백사실 안쪽은 늦가을의 농도가 많이 떨어졌지만 이곳은 아직 그 농도가 진하다.



 

♠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  부암동 응선사(應禪寺) - '응선사' 현판을 내건 문이 일주문이다.

백사실 남쪽 입구에는 응선사란 조그만 절이 둥지를 틀고 있다. 그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
어진 현대 사찰로 대웅전과 일주문(一柱門)으로 쓰이는 기와집이 전부인데, 대웅전은 겉으로
보면 1층 같지만 그 밑에도 공간이 있어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공양간 등으로 쓰이고 있
으며 대웅전 앞에는 불교용품과 전통차를 파는 공간과 쉼터가 있다. (상황에 따라 차 시음도
가능함)

내가 법등(法燈)의 역사도 무지 짧은 응선사를 기웃거린 것은 대웅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산신도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백사실을 드나들던 예전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외
부인에게 조금 까칠하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계속 방문을 미루다가 이번에 한번 들려 보았다.


▲  문짝이 달린 일주문에서 바라본 응선사 내부 (쉼터와 불교용품 매점)

▲  응선사 대웅전에 걸린 산신도(왼쪽)와 칠성도, 신중도(오른쪽)

▲  응선사 산신도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4호

산신도는 대웅전 동쪽 벽에 칠성도(七星圖), 신중도(神衆圖)와 나란히 걸려있다. 그들 가운데
자리한 칠성도는 근래에 조성된 것이고, 호법신(護法神)들이 정신 없이 담긴 신중도는 산신도
만큼이나 늙어보여 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신중도와 산신도는 모두 다른 곳
에서 업어온 것으로 법등의 역사가 짧은 이곳의 소중한 꿀단지이다.

산신도는 1914년 음력 10월 8일에 조성된 것으로 이제 100년이 조금 넘었다. 처음에는 경성부
(서울) 고양군 삼각산 안양암(安養庵)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안양암은 종로구 창신동(
昌信洞)의 안양암으로 짐작된다. (이곳은 '삼각산 안양암'을 칭하고 있음) 그런데 '고양군'이
란 3글자가 마음에 영 걸려 북한산(삼각산) 어딘가에 있던 절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연응 정순(淵凝 淨旬)을 증명으로 하고 양학 효신(養鶴 孝信)이 별좌(別座) 겸 화주(化主)가
되어 조성했는데, 금호 약효(錦湖 若效)와 향암 성엽(香庵 性曄), 연암 경인(蓮庵 敬仁) 등 3
명의 화승이 제작에 참여했다.

그림에는 주인공인 산신 할배를 비롯해 호랑이와 동자 4명, 소나무, 폭포, 산 등이 그려져 있
는데, 붉은 도포를 입은 산신은 금색의 옷잠이 꽂힌 족두리 같은 것을 쓰고 왼손에는 파초선(
芭蕉扇)을 들고 있다. 산신 뒤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귀여운 모습으로 꼬랑지를 살랑
거리고 있고, 산신 좌우에는 비서인 동자 4명이 복숭아나 공양물 등의 물건을 들고 있다.
그림 밑부분에는 붉은 색으로 된 화기(畵記)가 있어 제작 시기와 제작자, 최초 봉안 장소, 시
주자 명단 등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바로 이 화기를 통해 20세기 초반 산신도의 양식과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화기를 남겨준 제작자의
소소한 배려가 그림의 가치를 높여준 것이다.

그림 제작에 참여한 승려 중 금호 약효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서 활동했던 화승으로 70여 점의 그림이 남아있다. 그는 단아한 불신(佛身)과 섬세한 인물 묘
사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이 산신도에도 그의 스타일이 깃들여져 있었다.

* 응선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95-13 (백석동길 227 ☎ 02-396-2476)


▲  부암동의 지붕길, 백석동길(부암동 산복길) - 응선사 남쪽

응선사 앞을 지나는 골목길은 부암동의 지붕길인 '백석동길'이다. 이는 백석동천에서 따온 이
름으로 창의문교차로에서 산모퉁이와 응선사를 거쳐 AW컨벤션센터(하림각) 건너편까지 이어지
는데, 그중 창의문~산모퉁이~응선사 구간을 나는 부암동 산복길이라 부른다.
이 길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길이기도 한데, 부산(釜山)의 산복길보다는 좀 못해도 나름 아
름다운 굴곡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지대가 높아 부암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이며, 그 너머로
인왕산(仁王山)이 가까이에 아른거린다. 비록 산동네긴 해도 서민과 가난이 연상되는 달동네
와는 완전히 차원이 틀리며, 개성이 강한 집들이 많고, 아름다운 뜨락이나 정원을 갖춘 집도
적지 않다.
게다가 길 주변에 숲과 나무도 우거져 있고, 밭도 있으며, 바로 뒤에 북악산(백악산)이 든든
한 후광처럼 자리해 부암동을 보듬고 있어 1폭의 수채화나 풍경화 같은 모습을 자아낸다.

이처럼 이곳이 서울 도심 지척임에도 산골마을 풍경을 진하게 지니고 있는 것은 나라의 예민
한 부분을 많이 품은 북악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미도 몰라본다는 천박한 개발의 칼
질도 마음 놓고 칼춤을 추지 못한다. 건물을 지어도 다 낮게 지을 수 밖에 없고, 가파른 산자
락이라 집을 지을 공간도 그리 넉넉치 못하다.
허나 요즘 들어 부암동이 관광지로 뜨면서 산복길 주변에 새로 지어진 집이나 리모델링을 하
는 집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상당수 집이 까페나 식당, 미술관 등의 상업 목적임) 다행
히 그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고 예민한 북악산 주변의 특성상 크게 개발될 일은 없지만 그저
돈 욕심으로 일어난 소소한 변화가 계속 이루어지다 보면 그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 나는 지
금의 산복길 풍경이 너무 좋은데, 지금 선에서 더 이상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 갈림길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응선사, 동쪽으로 가면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백사실을
가고자 한다면 어느 길로 가든 크게 상관은 없지만 능금마을 방면이
조금 지름길이다.

▲  잠시 서울을 잊고 산골 마을을 거니는 기분
부암동 산복길 (산모퉁이 부근)

▲  부암동 산복길 (산모퉁이, 은행나무숲 직전)

▲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행나무 숲길 (백석동1길)

부암동 산복길을 따라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쪽으로 가다보면 정면에 북악산이 보이면서 길
이 크게 선을 그리며 동쪽(왼쪽)으로 구부러진다. 그쯤에 조촐히 우거진 은행나무숲이 있는데
, 숲 옆에 내려가는 숲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얼핏 보면 끊어진 길처럼 보이나 저 밑에 보이
는 주택가까지 엄연히 이어진 길로 '백석동1길'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능금마을이나 백
사실계곡(백석동천, 백사골), 산모퉁이에서 창의문으로 내려갈 때 산복길(백석동길)로 쭉 가
는 것보다 이 길로 갈아타면 조금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산복길 길가에 소소하게 우거진 은행나무숲은 황금빛 은행잎을 흩날리며, 늦가을의 향연을 즐
기고 있다. 은행잎은 노란색의 정석을 보여주며 한참 물이 올라 있고, 주변 숲과 어우러져 눈
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절경을 자아낸다. 이것이 진정한 늦가을의 풍경이지. 아직은 은행잎이
많이 붙어있지만 이제 10여 일만 지나면 거의 7~8할 이상은 낙엽으로 추락될 것이다.
늦가을의 커텐을 열었던 은행나무는 죽음 앞에 처절한 아름다움을 불사르며 슬슬 늦가을의 막
을 닫을 준비를 한다.


▲  늦가을이 소리없이 깃든 부암동 산복길 은행나무 숲
숲은 매우 작지만 은행잎의 농도는 넓고 진하다.

▲  밑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숲길 (백석동1길)

은행나무숲 남쪽에는 밭이 펼쳐져 있다.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포근히 깃든 부암동
에는 산자락 곳곳에 밭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데, 특히 능금마을(뒷골마을) 같은 곳은 오이
나 상추, 배추, 여러 과일을 심어서 시내에 내다팔고 있다.
서울하면 그저 키다리 빌딩과 번잡한 거리, 수많은 인파와 차량들만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
들에게는 다소 충격과 공포와 같은 풍경이라 적응이 가질 않겠지만 서울 안에도 논과 밭, 과
수원이 제법 많다. 다만 그들이 그릇된 고정관념에 빠져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당장 도심과
가까운 부암동과 평창동, 서촌 서쪽, 성북동만 가도 그런 고정관념에 망치질을 할 수 있다.


▲  늦가을이 그린 한 폭의 수채화
감나무와 밭두렁이 어우러진 부암동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

▲  백석동1길 윗쪽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  늦가을 절정에 잠긴 창의문(자하문) 안쪽 숲길
평창동~부암동 나들이는 창의문에서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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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1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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