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규하 전대통령이 인생의 ⅓을 보냈던 1970년대 2층 양옥
서교동 최규하가옥(崔圭夏 家屋) - 국가 등록문화유산 413호
▲ 최규하가옥 대문 (굳게 닫힌 왼쪽 문은 차량 통행문) |
서교동 주택가에 자리한 최규하가옥은 1972년에 지어진 2층 양옥이다. 지상으로 노출된 지하
1층과 나무가 있는 뜨락이 딸린 그림 같은 집으로 건축면적 142.68㎡, 연면적 330.05㎡ 규모
이다. 철근콘크리트와 벽돌조적(組積)의 혼합 구조로 시멘트 기와 지붕을 얹혔으며, 이 땅에
서 매우 흔한 1970년대 2층 복열형 주택이라 그리 낯설지는 않다.
최규하가 직접 집을 짓고 1973년부터 머물렀으며 국무총리와 대통령을 지냈던 1976~1980년을
제외하고 2006년 사망 때까지 무려 29년을 살았다. 그의 인생의 거의 ⅓이 이곳에 녹아든 것
이다. |
▲ 하얀 피부를 지닌 최규하가옥 |
지하층에는 방과 주방, 차고가 있으며, 1층과 2층은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 응
접실, 서재가 있다. 1982년에 응접실 일부를 증축했으며, 최규하가 와병중일 때 그의 편의를
위해 2층 안방 옆에 화장실을 만들었다.
뜨락(마당)에는 잔디가 입혀져 있고
여러 나무와 키 작은 식물이 자라고 있어 집안 풍경을 크
게 돕는다. 또한 박석(薄石)이 대문에서 현관까지 입혀져 있어 한때 잘나갔던 이곳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남산(南山) 그늘에 살던 어린 시절, 뜨락이 딸린 이런 양옥에서 살아보는 것이 정말 소원이었
는데, 20대 이후에 이곳 만큼은 아니어도 그 절반 정도 되는 집(1980년대에 지어진 준 3층 양
옥)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현재는 그 집을 매각하고 빌라에서 조용히 살고 있음) 하지만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졸부와 부잣집의 흔한 모습인 이런 집을 장만해 꼭 살아보고 싶다. (성
냥갑 아파트나
빌라보다는 이런 정원 딸린 주택이 더 좋음) |
▲ 늦가을이 깃든 최규하가옥 뜨락
파라솔과 의자는 관람객 쉼터용으로 갖다놓은 것이다. |
최규하가 사망한 이후, 그의 가족들이 머물다가 2009년 7월 서울시가 인수했으며, 내부 손질
을 거쳐 2013년 10월 5일 속세에 개방되었다.
1층과 2층을 손질하여 유족들이 흔쾌히 기증한 유품과 생활유물, 사진 등 500여 점을 전시하
고 있는데,
최규하는 검소했던 성품이라 고위 공무원을 오래 지냈음에도 옷과 생활용품이 대
부분 옛날에
쓰던 것을 계속 사용했다. 30년이 넘은 라디오와 50년이 넘은 선풍기, 재활용해
서 사용한 이쑤시개 등에서 그의 검소함과 수수함이 묻어나 있다.
게다가 좋은 집에 살고 있음에도 연탄을 고집했는데, 이는 석유파동(오일쇼크, 1973~1974) 시
절, 탄광 시찰을 다녀오고 이 땅의 탄광 산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평생 연탄보일러만
사용했다는 일화는 꽤 알려져 있다. 고위 공직자라면 적어도 이렇게 청렴해야 되는데, 오늘날
이 땅에는 그런 고위직이 거의 없어 실로 안타깝다.
마포구(麻浦區)의 새로운 꿀단지를 꿈꾸는 이곳은 천하에 개방된 몇 되지 않는 대통령집(생가
제외)으로 서울에는 이곳과 신당동(新堂洞) 박정희가옥이 100% 개방되어 있다. 그 외에 어쩌
다 빗장을 여는 이화장(梨花莊, 이승만이 살던 집)과 아직도 비공개에 머물러 있는 안국동
윤
보선(尹潽善)가옥이 있다. 이제 50여 년 묵은 이 집이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바로 대
통령이 살았던 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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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서 바라본 최규하가옥과 현관문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실내화로 갈아신고 내부를 둘러보면 된다. (신발은
실내화가
있는 신발장에 넣으면 됨) 해설사나 가옥 관리인의 안내를 받으며
둘러보면
되며, 안방 등의 방과 응접실은 통제구역이니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최규하(1919~2006)는 자는 서옥(瑞玉),
호는 현석(玄石)이다.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집안에서
할아버지에게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1928년 원주보통학교에 들어갔다. 1932년 상경하여 경성
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다녔으며, 1935년 부모의 제안으로 무려 3살 연상인 홍기(洪基)와 혼
인했다.
왜열도로 유학을 떠나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941년에 졸업하여 만주로
넘어가 국립대동학원(國立大同學院)
정치행정반에 입학했다. 그리고 1943년 대동학원을 수료
하고 길림성(吉林省) 통양현에서 행정과장으로 일했다. 이를 두고 친일행적이 있다고 말하기
도 하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그의 행적을 매의 눈으로 살핀 결과, 영 좋지 않은 행적이 없어
서 천하에서 가장 더러운 것들만 등록되어 있다는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1945년 이후 서울로 들어와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46년 미군정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농림부 양정과장, 농지관리국
장 서리 등을 지내다가 변영태(卞榮泰)에게 발탁되어 외무부로 자리를 옮겨 통상국장이 되었
으며, 1951년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AFE)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1952년 동경 주일대표부 총영사로 부임했으며, 1959년에는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했다. 그리
고 그해 9월 귀국하여 외무부 차관이 되었고, 12월부터 외무부장관 직무대행을 겸했다.
1960년 4.19혁명이 터지자 외무부차관에서 사임하였고, 공민권(公民權) 제한 대상자로 선정되
기도 했으며, 1961년 이후, 김종필이 주도하는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63
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의 외교 담당 고문이 되었으며, 1965년부터 말레이시아 대
사로 나가 있다가 1967년 귀국하여 외무부장관이 되었다.
1971년에는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이 되었고, 1972년에는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평양
(平壤)을 방문했다. 1975년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1976년 3월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1979년에
그 유명한 10.26사건이 터져 박정희가 시해되자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
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非常戒嚴令)을 선포했다. 그리고 10월 28일 중앙정보
부장 김재규를 해임하고, 전두환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1979년 11월 6일 유신헌법(維新憲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한 뒤에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고,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
출되어 우리나라 제10대 대통령이 되었다.
허나 대통령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무지하게 우왕좌왕했고, 그 사이에 전두환이 중심
이 된 신군부 패거리들에게 영혼까지 털리면서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하여
우리나라 대통령 중 가장 재임기간이 짧은 불명예를 간직하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이 되려면
꼭 정당(政黨)을 끼기 마련인데, 그는 정당 활동을 한 것이 전혀 없으며, 말단 공무원부터 과
장, 국장,
차관, 장관,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이 된 이 땅 유일의 직업공무원 출신 대통령이
다.
1981년 4월부터 1988년 2월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고, 1991년에서 1993년까지 '민족사
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지낸 것을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손을 땠다.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2006년 10월 22일, 87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國民葬)으로 치러졌으며,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매장되었다. 박
정희 정권에서 1등수교훈장(1970년), 수교훈장 광화대장(1971년), 무궁화대훈장(1979년) 등을
받았으며, 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80년)을 받았다.
그는 무지 짧았던 대통령 재임 시절 딱히 업적도 없고 전두환의 신군부에게 탈탈 털려 국정을
어지럽힌 큰 과오가 있다. 하여 죽기 전에 신군부 반란의 숨겨진 이야기나 만행 등을 회고록
이나
인터뷰 등으로 남기지 않을까 기대도 했으나 결국 아무런 이야기도 풀지 않은 채, 가버
려 실로 아쉬움이 크다. 분명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지하게 많을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그
비밀을 고이
안고 무덤으로 들어간 것이다. |
▲ 최규하가 탔던 차 |
반지하 모습의 차고(車庫)에는 최규하와 그 가족이 탔던 검은 피부의 차량이 낮잠을 자고 있
다. 그는 1995년에 현대자동차에서 생산한 뉴그랜저로 한때 고급차의 대명사로 명성을 날리기
도 했는데, 1995년 6월 5일에 구입하여 2006년 10월까지 이용했다. |
▲ 최규하 가족이 맛있게 식사를 했던 부엌(1층)
식탁과 의자, 찬장 등은 최규하 가족이 사용했던 것이다.
▲ 1층 응접실 |
이곳은 최규하가 손님을
맞이하던 곳으로 평소에는 라디오나 TV, 신문을 보거나 가족들과 이
야기를 나누었다. 의자 주위로 외국과 온갖 단체에서 받은 선물과 기념품, 그의 손때가 깃든
여러 물건들이 놓여져 있다. |
▲ 응접실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최규하의 빛바랜 사진들
최규하를 엿먹였던 전두환도 1988년 이곳을 찾았다. 전두환에게 참으로 할말이
많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들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 응접실에 있는 여러 그릇과 도자기들
저들은 외국을 비롯해 여기저기서 선물로 받은 것들이다.
▲ 최규하가 사용했던 담배함과 재떨이
▲ 유근유공(惟勤有功)과 난이 그려진 하얀 그릇들 |
'유근유공'은 명심보감(明心寶鑑) 정기편에 나오는 말로 앞부분인 범희무익(凡戱無益)이 빠져
있는데, 그 뜻은 놀기만 하면 아무런 이득이 없고 오직 부지런해야 공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
이다. 최규하가 매우 좋아했던 말로 자녀 교육의 지침으로 삼기도 했다. |
▲ 최규하 부인이 쓰던 방 |
침대와 여러 가구, 옷장으로 이루어진 방으로 원래는 딸의 생활공간이다. 딸이 시집을 가면서
부인이 사용했으며, 부인이 쓰던 재봉틀과 바느질 도구 등이 남아있다. 국무총리 부인에 영부
인까지 지낸 몸이나 남편처럼 소박하고 서민적인 스타일로 직접 살림을 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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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하 부인이 사용했던 늙은
재봉틀의 위엄 |
▲ 최규하가 입었던 양복과 구두,
양복 관련 물건들 |
▲ 최규하가 사용했던 소지품과 허리띠
(손수건, 집열쇠, 성냥, 수첩 등)
▲ 최규하가 쓰던 한산도 담뱃갑과 담배, 염주, 썬글라스 등
▲ 최규하 부인이 쓰던 안경과 책, 손가방, 신분증 등
▲ 최규하의 자녀와 손자, 손녀들이 그에게 보낸 편지와 가족
사진
최규하는 부인과 자녀, 손자(손녀) 사랑이 대단했던 따뜻한 남자였다고 전한다.
▲ 최규하를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장관급)에 위촉한다는 위촉장(1971)과
국무총리 임명장(1976년)
▲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權限代行) 프로필 문서
▲ 최규하가 받았던 1980년대 어느 10월의 연금 명세서
연금으로 매달 1,159,000원을 받았다. 현재로 따지면 거의
1,000만원이 넘는 고액이다.
▲ 최규하를 국무위원에 임명하고 외무부장관에 보한다는
임명장(1967년)
▲ 최규하의 2층 서재
최규하가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 책장, 전화기, 50년 이상 썼다는 선풍기,
잠을 자는 공간, 메모지 등이 서재를 구석구석 채우고 있다.
▲ 무뚝뚝해보이는 최규하 영정과 곱게 한복을 차려 입은
부인 홍기의 영정
▲ 타워호텔 시계와 볼펜 |
1969년 1월 23일, 미국 해군 함정 푸에블로호(Pueblo)가 북한에게 털려 납치된 그 유명한 사
건이
발생하자 뚜껑이 폭발한 미국 대통령이
국무장관인 밴스를 특사로 우리나라에 파견했다.
그때
외무부장관이던 최규하는 그와 타워호텔(현재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에서 철야회담을
벌였는데, 그때 호텔에서 쓰던 볼펜과 타워호텔 글씨가 쓰인 시계를 기념품으로 가져왔다.
시계는 약효과가 떨어져 오래전 10시 17분에서 뚝 멈춰선 상태이며, 이름이 복잡하게 바뀐
타
워호텔의 옛 유물로도 가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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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하 내외가 생활했던 2층 안방
최규하가 와병중일 때 그의 생리 편의를
위해 안방 옆에 화장실을 만들었다. |
▲ 현재 시간을 알려주고 있는 평범한 시계 |
이 시계는 소아마비 아동들에게 시계 수리 기술을 가르치는 사랑의집에서 선물한 것이다. 사
랑의집이 1980년 5월 최규하 부인의 도움을 받아 작업실을
갖춘 교육장을 마련했는데, 그 은
혜를 기리고자 조촐하게 시계를 만들어 선물했다.
시계는 40년이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시계가 힘이 빠지거나 졸도하
면 건전지만 갈면 되니까)
* 최규하 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467-5 (동교로15길10, ☎
02-3144-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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