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권 사진,답사기/강화도'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23.01.31 늦겨울 산사 나들이,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정수사 법당, 사기리분청사기요지, 사기리탱자나무, 이건창생가)
  2. 2021.02.19 북녘 황해도가 바라보이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화개산성, 화개약수, 강화나들길9코스,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
  3. 2019.07.07 민통선에 묶여있는 강화도 옆구리의 커다란 섬, 교동도 여름 나들이 ~~ (교동읍성, 교동향교, 성전약수, 화개사, 강화나들길 9코스)
  4. 2018.06.25 북한 개성 땅이 아련히 바라보이는 강화도의 북녘을 거닐다 ~~~ (연미정, 월곶돈대, 강화나들길, 강화평화전망대, 예성강)
  5. 2016.07.13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강화 석모도 보문사 (외포리, 낙가산, 눈썹바위 마애불)
  6. 2012.08.29 한여름의 강화도 나들이 (봉천산 주변, 강화읍내)
  7. 2011.08.14 연꽃의 향연 속으로 ~ 강화도 선원사 (논두렁 연꽃축제)
  8. 2009.08.19 하점면5층석탑
  9. 2009.08.18 선원사 연꽃
  10. 2009.08.16 선원사 (선원사터, 유물전시관)

늦겨울 산사 나들이,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정수사 법당, 사기리분청사기요지, 사기리탱자나무, 이건창생가)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마니산 정수사, 사기리 탱자나무, 이건창생가)



'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
(마니산 정수사, 사기리 지역)

정수사 법당

▲  정수사 법당(대웅보전)

사기리 탱자나무 이건창생가

▲  사기리 탱자나무

▲  이건창 생가

 



 

차디찬 겨울의 한복판인 2월 끝 무렵의 어느 덜 추운 날, 오랜만에 강화도(江華島)를 찾
았다.
강화도(강화군)는 늘 구미가 당기는 곳이라 그곳의 적당한 메뉴를 고르던 중, 마니산 정
수사에 딱 눈이 멈춰섰다. 그곳은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은 곳이지만 무심한 세월이 훔
쳐간 아련한 옛 추억도 잠시 곱씹을 겸 흔쾌히 그곳을 택했다. 자고로 좋은 곳은 두고두
고 찾아가는 법이다.

오전 늦게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70여km 떨어진 강화도의 동남쪽 중심지, 온수리(길
상면 중심지)에 이르니 어느덧 14시이다. 여기서 정수사까지는 강화군내버스 3번(강화터
미널↔온수리, 1일 9회)이 다니고 있는데, '늦어도 40~50분 기다리면 되겠지' 싶어 방심
을 했으나 정류장에 달린 시간표를 보니 글쎄 1시간 30분 뒤에나 차가 있는 것이다.
방심의 대가치고는 오지게 긴 시간이라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어찌 보
면 덤으로 생긴 그 시간에 늦은 점심이나 섭취하고자 적당한 식당을 찾다가 가격도 착하
고 찬도 넉넉한 뷔페식 기사식당을 발견, 그곳에서 즐겁게 배를 채웠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남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온수리 성공회성당(聖公會聖堂)
을 짧게 둘러보고 정류장으로 돌아와 나머지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강화군내버스
3번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버스는 서남쪽으로 10여 분을 달려 정수사입구에 나를 내려놓는다.



 

♠  늙은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마니산 정수사(淨水寺)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①

정수사입구에서 정수사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따라 15~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작은 포장길이 닦여져 있는데, 길 좌우로 겨울에 몽땅 털린 나무
들이 초췌한 몰골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눈이 내린 지 벌써 여러 날 되었지만, 길가에는 새하
얀 눈이 조금씩 남아 아직까지 겨울 제국(帝國)의 치하임을 강하게 일깨운다.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②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③

▲  정수사 직전 'S'라인 고갯길
저 고갯길의 끝에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아담한 산사, 정수사가 고색의
숨결을 물씬 풍기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천하의 성산(聖山)으로 오랫동안 추앙을 받는 마니산<摩尼山, 마리산, 해밯 469m> 동쪽 자락
에는 3칸짜리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정수사가 포근히 안겨져 있다.

정수사는 639년에 회정선사(懷政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마니산 참성단(塹星壇)을
참배하고 동쪽으로 내려가다가 앞이 확 트인 괜찮은 곳을 발견하고는 불제자들이 선정삼매(禪
定三昧)를 정수<精修, 정세하게 학문을 닦음>할 곳이라 격찬하며 그곳에 절을 지어 정수사(精
修寺)라 했다고 한다.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틀림)
허나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정수사 산령각 중건기(重建記
, 1903년)'와 '강도지(江都誌)'에도 창건시기를 알 수 없다고 나와있어 639년 창건설에 크게
회의감을 들게 한다. 하여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고려 전기나 몽골(원나라)과의 전쟁으로
강화도가 임시 국도(國都)가 되었던 13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23년에 법당을 새로 지었고, 1426년 함허기화(涵虛己和, 함허대사)가 절을 중창했는데, 법
당 서쪽에서 깨끗한 물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맑은 물을 뜻하는 정수사(淨水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름은 그대로 두고 한자와 뜻만 갈아치움)
1688년 절을 중수하여 상량문(上樑文)을 남겼으며<1957년에 발견됨> 1848년 비구니 법진(法眞
)과 만흥(萬興) 등이 화주(化主)가 되어 법당을 중수했다. 이때 부화주(副化主) 승려 20여 명
, 목수 165명, 지역 주민 305명이 자원하여 중창불사에 참여했다.

1878년 비구니 계흔(戒欣)이 제자 성수 등과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후불탱과 칠성탱, 독성탱
, 산신도 등을 새로 그려 봉안했는데, 금어<金魚, 그림을 그리는 승려> 용계 서익(龍係 瑞翌)
과 대허 체훈(大虛 體訓) 등이 탱화를 조성했으며 1883년 화주 근훈(根訓)이 절을 수리했다.
1888년 비구니 정일(淨一)이 수좌 연오(演梧)와 함께 시주금을 모아 관세음보살상 1위와 후불
탱 1점을 만들어 봉안했다. 정일은 여러 절과 마을을 꾸준히 돌면서 돈을 모아 1903년 산령각
을 중건하고 1905년에 법당을 수리했으며 1916년에는 불상을 개금하고 여러 불화를 봉안했다.
그 시절 정수사에 머물며 그의 불사를 목격했던 이건승(李健昇) 거사는
'뜻을 한가지로 한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이 절의 스님을 보니 남자가 여자에
미치지 못하고 사대부가 여승에 미치지 못하고 국가가 사찰에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다!'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37년 주지 김선영이 본산<전등사(傳燈寺)> 주지 김정섭과 상의해 대웅전(법당)을 나라의 보
호 건물로 추천했으며, 1942년에 쓰여진 '전등본말사지'에는 대웅전(12칸) 외에 산신각(2칸),
대방(14칸), 노전(6칸), 요사(16칸) 등이 있어 지금보다 건물이 더 풍요로웠음을 알려준다.
6.25 때는 다행히 별 피해는 없었으나 건물들이 고된 세월에 체해 나날이 퇴락하자 1957년에
법당을 중수했으며, 1974년에 소실된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이후 여러 건물을 짓거나 새로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오백나한전, 요사, 종무소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법당과 향토유적인 함허대사 승탑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19세기에 조성된 탱화들이 여럿 있고 오백나한전에는 고려 때 것으로
전하는 건칠지장보살상이 있다.
또한 절 주변에는 상사화(相思花, 꽃무릇)가 자라고 있는데 보통 붉은 상사화를 생각하기 쉬
우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노란색 상사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란 상사화는 이 땅에서도 매
우 희귀한 존재로 8월 중순에서 9월 초 사이에 10여 일 정도 반짝 꽃잎을 펼쳐 보인다.

정수사는 함허동천(涵虛洞天)과 함께 마니산(마리산)의 동쪽 기점으로 바로 북쪽 능선을 넘으
면 함허동천이다. 참성단까지는 40~50분 정도 걸리며 중간에 벼랑처럼 이어진 아찔한 바위 능
선을 지나야 된다. 비록 길이 괜찮게 닦여져 사고의 위험은 예전보다 덜하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된다.

* 정수사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467-3 (해안남로1258번길 142 ☎ 032-
  937-3611)
* 정수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정수사 법당(法堂) - 보물 161호

경내 중심에 자리한 법당(대웅보전)은 정수사의 얼굴이자 상징으로 1423년에 지어졌다. 이 땅
의 늙은 법당 중 유일하게 툇마루를 지닌 개성파 법당이자 이 땅에 별로 남지 않은 조선 초기
사찰 건축물로 그 가치가 백두산 꼭대기만큼이나 높다. (법당 덕분에 정수사의 이름값이 크게
올라갔음)

이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측면이 3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툇마루를 덧붙이면서 측면이 조금 넓어졌는데 1688년 절을 중수했을 때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
다. (1688~1689년 법당을 중수하면서 중수 관련 기록을 법당 안에 넣어둠)
절이 한참 어려웠던 시절에는 가운데 칸은 법당으로, 좌우 칸은 승려들 거처로 사용했다고 하
며, 육중한 지붕을 지탱하고자 기둥 꼭대기에 공포를 단 주심포(柱心包) 양식으로 앞/뒷면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후대에 툇마루(퇴칸)를 설치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후면 공포
는 조선 초기 양식임)

건물 천정은 사주(四周)의 귀를 약간씩 접은 우물천정이며 여러 번의 중수를 겪으면서 건물이
조금 변형되긴 했으나 대체로 조선 초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
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주위로 아미타후불탱, 칠성탱, 지장시왕도 등의 탱화들이 가득 널려있
다.


▲  옆에서 바라본 정수사 법당

▲  위에서 바라본 법당과 그의 풍만한 맞배지붕

정수사의 존재감을 크게 올려준 법당은 툇마루 앞과 옆구리에 놓인 섬돌에 신발을 벗어두고
들어가면 된다. 가운데(어칸) 문과 좌우 칸 문에는 창살이 곱게 입혀져 있는데 가운데 칸 문
에는 꽃과 꽃병이 묘사되어 있어 화사함을 더해준다.


▲  법당 가운데 문짝에 피어난 꽃창살
아름다운 꽃들이 마치 화석처럼 굳어져 문짝에 달려있는 것 같다.

▲  법당을 크게 돋보이게 만든 툇마루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법당 아미타3존상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상
아미타3존상 뒤로 1878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고 3존상
좌우로 근래 덧붙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3존상의 옆구리를 가득 채워준다.

▲  법당 칠성탱(七星幀)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 등의 7여래와 일광보살 등 칠성(七星)의
주요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  법당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지장탱)

칠성탱과 더불어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지장보살 두광(頭光) 좌우에 자리한 식구들은 특이하게도 동물 얼굴을 하고 있
는데, 지장보살 앞쪽에 선 왼쪽 동자는 등에 함을 지고 있고, 그 오른쪽 동자는 지장보살이
들어야 될 석장(錫杖)을 대신 들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런 식의 지장탱화는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  무려 1,000원을 구석에 머금은 법당 현왕탱(現王幀)

현왕탱은 관련 화기(畵記)가 없어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851년 정도로 여겨
진다. 그러니 법당을 수식하고 있는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가 된다.
현왕(現王)이란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존재로 죽은 지 3일 뒤에 심판을 진행한다고 하며 그의
판결 여부에 따라 극락이나 지옥행이 결정된다고 한다. 그는 착하게 산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
니 가급적 선하게 살아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음.
내가 아직 명부(저승)를 가본 적이 없으니;;>


▲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법당 뜨락 좌측에는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오백나한전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름 그
대로 500명의 나한(羅漢)을 머금은 건물로 근래 지어진 것인데 나한 외에 고려 때 것으로 여
겨지는 건칠(乾漆)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바다 건너 개성 땅에서 왔다고 하며 나는 법당만 생각했지 그의 존재를 알지 못
해 지나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오라는 정수사의 뜻인 모양이다. 하지
만 이곳은 이미 3번이나 인연을 지었고 아직도 지우지 못한 미답처가 천하에 수두룩해 일부러
또 찾을 생각은 별로 없다.


▲  겨울 휴업에 들어간 법당 옆 샘터
정수사의 뜻(맑은 물이 나오는 절)과 한자를 바꾸게 만든 샘터로 하얀 피부의
거북상을 짓고 그 주위를 기와돌담으로 둘러 애지중지하고 있다. 허나
겨울 제국이 물을 꽁꽁 앗아가면서 그 맑다는 샘물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과 독
성, 칠성 외에 용왕(龍王)까지 봉안되어 있어 사성각(四聖閣)이란 이름이 더 어울려 보인다.
불에 타서 쓰러진 것을 1974년에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 담긴 산신과 독성, 칠성, 용왕탱은
그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  정수사에서 바라본 천하
마니산의 벌어진 동쪽 틈 사이로 서해바다와 동검도(東檢島)가 진하게 바라보이고
그들 너머로 강화도를 거느린 인천(仁川) 본토가 흐릿하게 시야에 닿는다.


경내 서쪽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매점 겸 종무소(宗務所)가 있다. 10여 년 전 겨울에 왔을
때는 부엌을 갖춘 셀프식 찻집으로 있었는데, 절 신도와 답사꾼, 산꾼까지 누구든 들어와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찻잔과 전통차 티백, 주전자, 물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용료는
없었으며 대신 직접 물을 끓여서 차를 타 마시고 사용했던 찻잔은 씽크대에서 씻으면 된다.
그때 같이 왔던 사람과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1시간 정도 머물렀던 기억이 정말 엊
그제 같은데 그 추억은 흩어진 나날의 일부가 되었고 찻집 또한 성격이 변해 더 이상 중생들
에게 무료로 차 1잔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대신 차와 커피를 팔고 있음)

정수사의 다소 야박해진 인심과 왕년의 추억을 같이 되새기며 더 볼거리가 없나 두리번거리니
그때다 싶어 '함허대사 승탑'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나 나의 허전한 마음을 건드린다.
'정수사에 그런 존재가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오백나한전 뒤쪽
으로 가니 눈과 진흙으로 얼룩진 산길이 나오고 그 길을 조금 오르니 언덕배기에 조촐하게 생
긴 부도탑이 나를 맞이한다. 그가 바로 마니산 동쪽 자락에 진하게 흔적을 남겼던 함허대사의
승탑(부도)이다.


▲  함허대사 승탑(涵虛大師 僧塔) - 강화군 향토유적 19호

승탑의 주인인 함허대사(1376~1433)는 조선 초기 승려로 고려 때 아주 잘나갔던 충주유씨 집
안이다. (충주 출신임) 전객시사(典客寺事)를 지냈던 유청(劉聽)의 아들로 어머니는 방씨이며
법호는 득통(得通), 무준(無準), 법명(法名)은 기화(己和), 당호는 함허이다.

1396년 관악산 의상암(義湘庵, 어딘지 모름)에서 출가를 했으며 1397년 양주 회암사(檜巖寺)
에서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법요(法要)를 듣고 여러 곳을 다니다가 1404년 회암사로 돌아와
수도에 정진했다.
1406년 공덕산 대승사(大乘寺)에서 4년 동안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했고, 1410년 개성 천마
산 관음굴에서 선을 크게 진작시켰다. 1411년 절을 중수해 승속(僧俗)들을 지도했으며, 1414
년 황해도 평산(平山)의 자모산 연봉사(烟峯寺)로 자리를 옮겨 작은 방을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 짓고 '금강경오가 해설의(金剛經五家 解說誼)'를 가르쳤다.

1420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곳 사찰에 봉안된 옛 고승과 불상, 보살상에게 공양을 하
며 지내던 중, 영감암(靈鑑庵)에 있는 나옹(懶翁)의 진영(眞影)에 제사를 지내고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 꿈에서 어느 신승(神僧)이 나타나 '기화'란 이름과 '득통'이란 호를 지어주었는
데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법명과 법호(法號)로 삼았다.
1421년 세종(世宗)의 청으로 개성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면서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의 명
복을 빌어주었고, 1424년 길상산(吉祥山)과 운악산(雲岳山), 공덕산(功德山) 등을 돌아다니며
설법과 수도에 힘썼다. 그리고 1426년 정수사를 중수해 머물렀으며, 1431년 문경 봉암사(鳳巖
寺)를 중수하여 머물다가 1433년 입적하니 나이는 57세였다.

그의 사리는 그와 인연이 깊은 가평 현등사(懸燈寺), 문경 봉암사, 황해도 현봉사, 인봉사(어
딘지 모름), 정수사에 분배되었는데 정수사는 경내 뒤쪽에 그의 승탑을 만들어 두고두고 중창
자를 기리고 있다.

함허는 무학대사의 법을 이은 선가(禪家)이지만 교종(敎宗)에 대해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교학적인 경향도 크게 지니고 있다. 그의 현정론(顯正論)을 통해 그의 선사상(禪思想)에는 현
실생활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유학자들이 불교 배척을 주
창하면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유,불,도 삼교일치론은 송나라 계숭(契嵩)이 지은 '보교편(輔敎編)'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불교가 배척당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장되었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그의 열성 제자로는 문수(文秀), 학미(學眉), 달명(達明), 지생(智生), 해수(海修), 도연(道
然), 윤오(允悟) 등이 있으며,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윤
관(綸貫)' 1권,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1권 등의 저서가 있다. (그 외에 반야참문 1권
도 있으나 전하지 않음)

함허의 넋이 담긴 승탑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넓게 바닥돌을 깔고 그 한복판에 기단(
基壇)을 다진 다음 탑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옥개석(屋蓋石)은 6각형이지만 신라 후기~고려
초기 승탑의 기본 형태였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탑의 높이는 156
cm, 바닥돌까지 포함하면 164cm 정도이다. 기단부에는 연꽃 장식이 새겨져 있으며 탑은 작지
만 나름 단단하고 균형 잡힌 모습이다.



 

♠  사기리(沙器里)에서 만난 오래된 명소들

▲  사기리 분청사기요지(粉靑沙器窯址) - 강화군 향토유적 18호

함허대사 승탑을 끝으로 정수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여기서 바로 북쪽에 있는 함
허동천으로 넘어가 사기리 탱자나무와 이건창 생가로 나갈 생각이었으나 함허동천과 가까운
곳임에도 마땅한 길이 없었고 함허대사 승탑 옆으로 그곳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확신이
서질 않아서 쿨하게 그 길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정수사입구로 나왔다.

차들이 수시로 쌩쌩 지나가는 해안남로를 따라 함허동천입구와 탱자나무까지 가야 했는데 다
행히 뚜벅이를 위한 보도를 길 양쪽 사이드에 닦아놓아 차들의 눈치에서 다소 자유로워졌다. 
정수사입구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8분 정도 가니 식당과 펜션들로 즐비한 함허동천 입구
이고 다시 6분 정도 북진하니 '사기리 분청사기요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좀 보고 가라며 발
길을 붙잡는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못 이기는 척 그 이정표를 따라 야산
을 조금 오르니 분청사기요지가 폐허의 미학(美學)을 풍기며 바짝 누워있다. (도로에서도 그
존재가 보임)


 ▲  가마터 한복판에 수습된 분청사기 파편과 가마터를 이루던 석재들

이곳은 고려 말~조선 초에 한참 유행했던 분청사기를 만들던 14~15세기 가마터(요지)이다. 가
마터의 모습이 모두 파악되지는 못했으나 지금까지 발견된 규모로 보아 40mx80m 정도로 여겨
지며 깨진 분청사기 파편과 분청사기를 구울 때 쓰였던 굽받침, 가마 벽체로 여겨지는 여러
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지금은 비록 폐허의 공간으로 보잘 것은 없지만 이 가마터로 인해 마니산 동쪽 지역이 사기리
가 되었다. 즉 사기그릇을 만들던 동네란 뜻으로 왕년에는 가마터로 제법 바쁘게 살았음을 귀
뜀해준다.

* 분청사기요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224


▲  사기리 탱자나무 - 천연기념물 79호

분청사기요지를 나와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이건창생가 정류장 남쪽 들판에
키 작은 나무 하나가 진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사기리의 오랜 명물인 탱자나무로 그 앞
까지 도보길을 닦아놓아 관람객의 편의를 배려했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북방 한계선으로 늙은 탱자나무 2그루가
전하고 있다. 하나는 갑곶돈대(甲串墩臺)에, 다른 하나는 이곳 사기리로 그중 갑곶돈대(갑곶
진)가 더 북쪽이라 우리나라 탱자나무의 북쪽 끝은 갑곶진이 된다. 나무에 가시가 많아서 성
곽이나 요새에 방어용으로 많이 심기도 하는데 갑곶진 탱자나무는 바로 그 역할로 심어졌다.

사기리 탱자나무는 4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키는 3.8m이다. 2.8m 높이에서 3갈래로 갈라져 마
치 용트림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고된 세월에 지친 그를 위해 기둥을 여러 개 깔아 가지를 받쳐
들고 있으나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탱자나무는 보통 4월에 3~5cm 정도의 하얀 꽃이 피며 가을이 되면 열매가 맺으면서 노랗게 변
한다.

* 사기리 탱자나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35-10

▲  정면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서쪽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동쪽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탱자나무에서 바라본 길상산과
사기리, 선두리 들판


▲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 - 인천 지방기념물 30호

사기리 탱자나무 길 건너 북쪽에는 정겹게 토담을 두룬 초가(草家)가 하나 있다. 그 집이 조
선 후기 학자인 이건창의 생가로 'ㄱ' 모습의 9칸 안채와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닦고 3량 가구로 지은 한옥 구조의 초가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마니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이건창이 강화도에서 말년을 보냈던 19세
기 말로 여겨지며 현재 집은 1996년 강화군에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명미당(明美堂)이라
불리는데 천정에 걸린 명미당 현판은 이건창과 친분이 있던 매천 황현(梅泉 黃玹)이 쓴 것이
다. 그렇다면 이건창은 누구일까?

이건창(1852~1898)은 전주 이씨 출신으로 나중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이상학(李象學
)의 아들이다. 아명(兒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로 이곳이
그의 생가로 나와있어 여기서 태어난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원래는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이시원(李是遠)이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낼 때 거기서 태어났으며, 선대(先代)
부터 개성에서 계속 살아왔다. 그러니 '이건창 생가'가 아닌 '이건창 가옥'이나 '이건창 고택
','명미당'으로 이름을 갈아야 맞다.
할아버지에게 충의와 문학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5살에 문장을 구
사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신동 소리를 많이 들었다.

1866년 불과 14세의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응시해 4등인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나 나
이가 너무 어려 계속 대기발령 상태로 있다가 18세에 비로소 홍문관직(弘文館織)에 등용되었
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그곳 연경(燕京)에서 황각(黃珏), 장가
양(張家驤), 서보(徐郙) 등과 교유를 했다.

1875년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암행(暗行)했는데, 충청감사 조병식(趙
秉式)의 비행이 적지 않아 그의 비행을 낱낱이 캐다가 오히려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으로 유
배를 당했다. 다행히 1년 뒤에 풀려났으나 워낙 강직하고 고집이 있으며 불의를 못 보는 성격
이라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학문이나 닦으려고 했다.
허나 고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해달라'
는 친서를 보내며 출사를 권해 1880년 경기도 암행어
사가 되었다. 그는 경기도를 돌면서 관리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흉년으로 고생하는 농민들을
찾아다니며 구휼에 힘썼다. 특히 세금을 감면해주어 백성들로부터 널리 찬양을 받았으며 그를
기리는 선정비(善政碑)가 도처에 세워졌다.

▲  이건창 생가 대문 (문간채)

▲  어설프게 복원된 우물

1884년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이어 당해 무려 6년이나 상을 치렀으며 1890년 복귀하여 한성부
소윤(漢城府小尹)이 되었다.
그 시절 왜인(倭人)과 청국(淸國) 잡것들이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 가옥과 토지를 마구 사들이
고 있었는데 무능했던 조선 조정은 이를 방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이건창은 다시 팔을
걷어부치고 백성들의 집과 토지를 오랑캐들에게 팔아먹지 못하도록 법을 마련해야 된다고 건
의했다.
그러자 이홍장(李鴻章)의 부하이자 청나라 공사(公使)인 당소의(唐紹儀)가 그 내용을 듣고 발
끈하여 공문을 보내
'청국 사람과의 가옥이나 토지 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 조치를 하시
오?'
항의했다. 이에 그는
'우리가 우리 백성에게 금지시키는 건데 조약이 무슨 상관이오?'
답을 했다.
더욱 발끈한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하여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해 금지령을 포기하게
하였다. 허나 그는 꾀를 부려 오랑캐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을 다른 죄목으로 다스려 가중처벌
을 가하니 백성들은 부동산을 그들에게 팔아먹을 수가 없었고 청나라 애들도 자연히 부동산
매입이 여의치 못해 포기했다.

1891년 승지(承旨)가 되었으나 1892년 상소 사건으로 전남 보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
다. 그리고 이듬해 함흥부(咸興府)의 난민들을 다스리고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 함경도관
찰사의 죄상을 가려내 그를 파면시키며 백성들의 가려움을 긁어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고종은 지방관(地方官)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에게
'그대가 가서 잘못을 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
겁을 줄 정도였다. 그만큼 공무를 수행
하는 그의 태도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各部)의 협판(協辦), 특진관(特進
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흔쾌히 거절했으며, 1896년 황해도 해주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또
한 거절하고 버티다가 오히려 고군산도(古群山島, 고군산군도)로 유배형을 당했다. 허나 2개
월 후 특지(特旨)로 풀려났고 제2의 고향과 같은 강화도로 넘어가 학문을 하며 유유자적하다
가 1898년 44살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매천 황현이 쓴 명미당 현판의 위엄
- 글씨가 아주 큼직하다.

▲  먼지만 가득한 안채 부엌


이건창은 글씨를 아주 잘 썼는데 송나라 때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의 글씨를 많이 참조
했다. 구한말 학자인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 우리나라 역대 문장가를 추숭(追崇)할 때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9명을 선정했는데, 그 끝에 고른 이가 바로 이건창이었다.
또한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강화학파(江華學
派)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성품이 곧아 병인양요(1866년) 때 자결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따라
쇄국주의를 고집했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는데 당의통략은 파당과 문벌을 초
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다룬 책으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부모상으로 강화도에 머물던 시절에 저술한 것으로 워낙 내용이 좋아서 왜정(倭政)이 그 서적
을 바탕으로 조선은 당파싸움을 일삼다 망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비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
다. 즉 조선시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해석을 이미 조선 사람이 내린 것이라 우
기며 그것을 기정사실화 시킨 것이다.


▲  소박한 모습의 명미당(안채)

▲  명미당(안채) 마루
마루는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어 들어갈 수 있으며 운이 좋으면 양쪽 방도
들어갈 수 있다. (보통은 잠겨있음)

▲  마루 구석에 있는 빛바랜 뒤주
이건창은 저 뒤주에 담긴 쌀의 힘으로 6년에 걸친 부모상도 치르고
당의통략도 저술하고 양명학도 연구했을 것이다.

▲  이건창 생가 측백나무 - 강화군 보호수 180호

이건창 생가 앞에는 약 350년 묵은 측백나무가 솟아있다. 길 건너편 탱자나무와 비슷한 시기
에 식재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높이 10m, 둘레는 1.8m로 이건창도 그의 그늘 맛을 보며 학문
을 연구하고 여러 서적을 작성했을 것이다.


▲  이시원(李是遠)묘

이건창 생가 옆에는 토담을 사이에 두고 무덤 2기가 자리해 있는데 그중 밑에 있는 무덤이 이
건창의 할아버지인 이시원(1790~1866)의 유택(幽宅)이다.
이시원의 자는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로 개성유수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지냈는데 1866
년 병인양요가 터지고 강화도가 프랑스 양이(洋夷)들에게 어이없이 함락되자 아우 이지원과
함께 죽어서 귀신이 되어 적을 물리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 충
절로 나중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이시원 묘는 원래 길상면 길직리에 있었으나 1985년 그의 부인인 청송심씨와 함께 손자가 살
았던 이곳으로 옮겨져 합장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봉분(封墳), 호석(護石), 상석(床石), 비석
까지 싹 새롭게 갈면서 완전 최근에 닦여진 새 무덤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비석 정도는 옛 것
을 그냥 썼으면 조금이나마 고색의 기운이 있었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이건창 생가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소화하여 더 이상 욕
심도 없고 일몰이 지척이라 더 이상 둘러보기도 어렵다. 하여 그 정도로 만족하며 생가 관리
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정류장으로 나가 곧 들어선 강화군내버스 3번(강화터미널↔화도, 온수
리)을 타고 강화읍으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이건창 생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67-3 (해안남로1114번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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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황해도가 바라보이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화개산성, 화개약수, 강화나들길9코스,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

강화 교동도 화개산 


~~~~~  강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
(바다 너머로 멍하게 보이는 곳이 북한 땅)

화개약수 화개산 한증막

▲  화개약수

▲  화개산 한증막


 

♠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오르기 (봉수대, 화개산 정상)

▲  읍내리에서 바라본 화개산

여름 제국(帝國)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던 8월 광복절에 강화도와 황해도(黃海道) 사이에 자리
한 교동도를 찾았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별다른 정체 없이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강화도는 꿀
명소가 많다 보니 주말과 휴일에 나들이, 답사 수요가 폭발적이라 교통정체를 피하고자 아침
부터 부지런을 떤 것이다.
강화터미널에서 교동도의 발인 강화군내버스 18번(1일 11회)을 타고 송해면과 하점면, 인화리
검문소, 교동대교를 지나 황해도를 코앞에 둔 교동도(喬桐島)의 품으로 들어선다. <일반 차량
은 인화리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으나 강화군내버스 18번 승객은 받지 않음, 허나 특수 상황에
는 버스 승객도 검문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 교동도 방문객은 무조건 신분증을 지참 요망>

교동도에 들어서 읍내리에 있는 교동읍성(喬桐邑城)과 교동향교(喬桐鄕校), 화개산 남쪽 자락
에 안긴 화개사(華蓋寺)를 둘러보고 화개사 옆 산길을 따라 화개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교동
읍성과 교동향교, 화개사 부분은 이곳을 클릭한다)


▲  화개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교동평야

화개산(華蓋山, 269m)은 교동도의 대표 지붕이자 이곳에서 가장 큰 뫼이다. 교동도 동부에 홀
로 솟아있어 교동도의 대부분 지역과 강화도와 석모도, 서검도, 미법도 그리고 바다 북쪽 너
머로 황해도와 개성(開城) 땅까지 속시원히 시야에 들어와 일품 조망을 자랑한다. 이렇듯 북
녘까지 거침없이 내닫는 조망 덕에 이북 실향민들이 자주 찾아와 코앞에 보이는 북쪽을 바라
보며 넋두리를 하거나 망향제(望鄕祭)를 지내기도 했다.

화개산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성혈바위를 비롯해 화개산성, 봉수대, 효자묘, 화개사, 교동향
교, 연산군유배지, 화개약수 등 많은 문화유산과 명소가 깃들여져 있으며, 고려 후기 삼은(三
隱)의 하나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산을 방문하여
'바닷속 화개산은 푸른 하늘에 닿았는데, 산 위 옛 사당은 언제 지었는지 모르네. 제사 지낸
후 잔 마시고 이따금 북쪽을 바라보니 부소산(扶蘇山) 빛이 더욱 푸르구나'

시를 지었다. 그는 화개사에서 독서를 한 적이 있으니 그때 이 시를 지은 모양이다.

교동대교 개통 전에는 거의 교동도와 실향민들의 산으로 숨어있었으나 2014년 7월 다리가 뚫
리면서 등산객과 나들이객 수요가 크게 늘어 강화군의 새로운 꿀단지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화개산 등산은 화개사나 교동면사무소(대룡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편하다. 화개사를 기준으로
봉수대, 정상, 성혈바위, 북벽망루터, 화개산성 북쪽 성곽, 화개약수, 한증막터를 거쳐 교동
면사무소(대룡리)로 내려가면 되는데, 이 코스는 강화나들길 9코스(교동도 다을새길)의 일부
이기도 하며, 화개약수 주변에 효자묘가, 한증막터 근처에 연산군유배지가 있다. 화개사에서
정상까지는 약 30분 정도, 정상을 찍고 교동면사무소까지는 1시간 30분 내외로 걸린다.


▲  화개산 봉수대(烽燧臺) - 강화군 향토유적 29호

화개사에서 20~25분 정도 오르면 주변이 확 트인 능선에 이르고 곧바로 화개산 봉수대가 마중
을 나온다.

화개산 봉수대는 정상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사방이 확 트여있어 봉수대 자리로는 아주 명당
이다. 현재 가로 4.5m, 세로 7.2m의 석축만 남아있는데,, 불을 피우고 연기를 휘날리던 봉수
시설은 장대한 세월에 녹아 없어졌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며, 여기서 고려의 국도
(國都)인 개경이 지척이라 그 중요성이 매우 컸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覽)에는 남쪽으로 강화도 덕산봉수대에서 봉화를 받아 동쪽의 강화도 봉천산(奉天山) 봉수대
로 연락을 보냈다고 한다.

이 땅에 수많은 봉수대(봉화대)가 있었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도 남은 봉수대는 거의 없다. 고
된 세월에 지쳐 우중층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는 봉수대, 내 나이의 수십 배에 달하는 세월
을 머금고 있는 봉수대 돌은 저렇게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으나 나란 존재는 그들의 1% 인생
도 되지 못하니 참 인생은 부질 없는 것 같다.


▲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석모도, 미법도(彌法島)
하늘과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질은 더욱 높아진다.

▲  봉수대에서 정상으로 인도하는 능선길
능선길은 나무가 제법 삼삼하여 강렬한 햇살과 숨바꼭질을 하며 움직이기에 좋다.

▲  화개산 정상(269m)

봉수대에서 5~6분 정도 가면 교동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화개산 정상에 이른다. 교동도에
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제일 높은 곳으로 6각형 정자와 초소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품 조망이 펼쳐지는데, 안개와 구름을 제외하면 시야를
방해하는 존재는 그 어느 것도 없다. 허나 여기서는 북한 땅까지 바라보여 산이 높고 조망이
좋은 만큼 남북분단의 비애도 크게 만든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교동도 서부와 대룡리, 드넓은 교동평야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교동평야를 기름지게 적셔주는 고구저수지가 밑에 보이고, 바다 너머로 그 말로만 듣던 황해
도 연백군(延白郡)과 배천군 지역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철없던 어린 시절(1980~90년대)에는 어른이 되기 전에 남북통일이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어른을 한참이나 지난 지금도 통일은 커녕 아직까지도 이북 땅에 발도 들일 수가 없다.
교동도와 황해도는 3~4km로 매우 가까운 거리지만 그 체감거리는 가히 1억 광년 그 이상으로
문제는 그 거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고구저수지와 교동도 북부를 비롯해 바다 너머로 황해도 연백/배천군 지역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읍내리(사진 가운데 부분), 바다 너머로 길게 누운
석모도(席毛島)와 기장섬(오른쪽 섬)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⑤
확대해서 바라본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읍내리 지역
(사진 가운데 부분에 교동읍성이 있음)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⑥ 석모도와 상주산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⑦
석모도 북부 상주산과 강화도 서부 지역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⑧
읍내리와 남산포(사진 가운데 산), 석모도 북서부와 기장섬, 미법도, 서검도 등

           ◀  화개산 정상 표석

정상에 지어진 정자에는 산꾼들이 자리를 펴
쉬고 있었고,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어디가
북한 땅인가?','여기가 북한 땅인가?' 따지며
조망을 즐긴다.
정상의 자리란 오래 있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10분 정도 정상을 누리다가 동쪽 능선으
로 철수했다.


 

♠  화개산 내려가기 (성혈바위, 화개산성, 화개약수)

▲  성혈(星穴)바위

정상에서 서쪽 능선으로 가면 봉수대, 화개사, 효자묘(중간 갈림길에서 북쪽), 대룡리로 이어
지고, 동쪽 능선으로 가면 성혈바위, 화개산성, 화개약수로 이어진다. 성혈바위를 지나면 길
은 북서쪽으로 크게 꺾이는데, 화개약수에서 효자묘로 가는 길이 있으며, 효자묘에서 바로 올
라가면 화개사에서 올라온 길과 만난다.

동쪽 능선으로 들어서면 얼마 안가서 성혈바위라 불리는 납작한 바위가 발길을 잡는다. 하얀
금줄이 쳐진 그 안에 얕은 구멍이 여럿 찍힌 성혈바위가 있는데, 성혈이란 바위구멍 그림으로
청동기시대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성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거나 풍요, 다산(多産), 자
연 등을 숭배하는 민간신앙이나 제사 현장으로 보고 있다. 바위에 구멍을 내고 여기서 제사를
지내거나 주술행위를 했던 것이다. 이런 성혈 흔적은 자연산 바위 외에도 고인돌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  위에서 바라본 성혈바위
바위 오른쪽에 얕게 파인 동그란 자국들이 성혈이다.

▲  성혈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교동도 읍내리 동부와 석모도 상주산, 강화도 서부가 바라보인다.

▲  북벽 망루(望樓)터

성혈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북서쪽으로 크게 꺾인다. 그래서 정상 외에는 보이지 않던 북쪽의
산하가 나의 시야를 점유하게 되었고 그런 길을 조금 내려가면 북쪽을 향한 곳에 북벽망루터
가 허전하기 그지 없는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북벽망루는 화개산에 두룬 화개산성 북쪽 성벽에 세운 망루로 산성의 외성(外城)과 내성(內城
)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한다. 산성에서 2개의 망루터가 발견되었는데, 다른 하나는 여기서 북
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다들 망루를 받쳐들던 돌만 아련하게 남아있다.


▲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
바다 너머로 황해도가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고구저수지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교동도 동북부 (교동대교 방면)
바다 너머로 강화도 양사면 지역이 희미하게 두 눈에 들어온다.

▲  화개산성(華蓋山城) - 강화군 향토유적 30호

북벽망루를 지나면 오른쪽(북쪽) 숲속에 초췌한 모습의 화개산성이 모습을 비춘다. 화개산의
듬직한 갑옷인 화개산성은 내성(1,013m)과 외성(1,155m)으로 이루어진 산성(山城)으로 총 길
이는 약 2,168m이다.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게 닦여졌는데, 이 산성이 언제 축성되었
는지는 화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고려 때 지어진 봉수대를 통해 고려 때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1553년에 최세운이 성을 증축했으며, 1591년 외성을 철거하여 교동읍성(지금
의 교동읍성과는 다름)을 쌓았고, 1737년 개축하여 군창(軍倉)을 두었다.

허나 19세기 이후 성은 버려졌고, 관리의 손길이 떠난 산성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의 고약한
심술이 이어지면서 성곽 대부분이 분해되어 겨우 북벽망루와 화개약수 주변, 남쪽 산자락(화
개사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  화개산의 젖, 화개약수

화개산성 안내문을 지나면 깎아지른 듯한 바위 밑에 자리한 화개약수가 마중을 한다. 교동향
교에 있는 성전약수와 더불어 화개산이 속세에 베푼 약수로 푸른 이끼가 짙게 뒤덮힌 돌에서
물이 쏟아진다. (성전약수보다 물맛이 좋음) 산에 왔으니 산의 마음도 확인할 겸, 약수를 한
모금 마셔야 되겠지.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갈증과 체내(體內)
의 체증이 싹 가시는 것 같다.
약수터에는 나무로 보호각을 만들었으며, 기둥에는 화개약수를 찬양하는 시가 적혀있으니 읊
어보면 다음과 같다.


▲  오랜 세월을 머금은 갸륵한 맛, 화개약수

'화개약수'  석천(石泉) 김흥기

얼마나 품었길래 그 먼길 돌아 졸졸 쉼없이 흐르는가
수없이 오갔을 세기의 지층을 밟고 귀뚜리 우는 밤에도
산주름 굽이치는 돌틈을 비집고 또르르 굴려오는 은빛 맨발의 낙수
허기진 산비탈 길에서 적막을 견뎌온 너, 천년 비밀의 갸륵한 맛

▲  효자묘(孝子墓) - 실상은 효자 아버지의 묘라고 함

화개약수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직진하면 한증막과 교동면사무소로 이어지고, 왼쪽 오르
막길을 오르면 낮은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진 효자묘가 나온다. 이 무덤을 지나 뒷쪽(남쪽)
산길을 오르면 화개사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서쪽 능선길과 만난다.

효자묘는 야트막한 봉분과 낮은 상석(床石)이 전부인 조그만 무덤이다. 무덤의 이름도 참 모
범적이라 부모들이 딱 좋아할만한 이름인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전하는 것이 없고 그저 막연
하게 효자묘라 불리고 있으니 그 유래는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안내문에는 삼국시대로 추정된다고 나오나 전설
내용은 거의 조선시대 스타일임> 인근 청주골에 병환중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신씨란 젊은이
가 있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으나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여 교동현 군사로 징발된 부잣집 아들을 대신
하여 군대에 들어갔다. 매일 부친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댓가로 대신 들어간 것이다.
 
신씨는 화개산성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안부를 묻고자 산 밑 고읍마을로
을 옮겼다. 마침 전쟁(또는 장거리 훈련)에 나갈 일이 있어 무탈하게 돌아오면 산성 북루(北
樓)에 해가 지기 전까지 하얀 적삼을 달기로 아버지와 약속을 했다.
무탈하게 돌아온 신씨는 약속대로 북루에 적삼을 달려고 했으나 이를 수상하게 여긴 수장(守
長)이 적삼을 빼앗고 관아로 잡아갔다. 당시 문루에 적삼 등의 깃발을 다는 것은 다른 성과
병사들에게 일종의 연락을 취하기 위함인데 수장의 허가도 없이 달려고 하니 당연히 오해를
산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약속된 시간까지 적삼은 달리지 못했고, 그 사연을 알 도리가 없는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것으로 판단해 성급하게 목숨을 끊고 만다.
신씨를 추궁하던 수장은 그 사연을 알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시신을 산성 안에 안장하고 3년
시묘를 하며 군복무를 하도록 해주었다. 또한 신씨의 효행을 기리고자 장수와 병사들이 매일
아침 무덤에 참배를 했고 참배 자국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무덤은 효자가
아닌 효자의 아버지 무덤인 것이다. 허나 효자 아버지 무덤이라 하기에는 이름이 기니 효자
신씨를 기릴 겸 효자묘라고 한 것 같다.


 

♠  화개산 마무리

▲  그림처럼 펼쳐진 화개산 서쪽 숲길 (효자묘~한증막 구간)

효자묘를 둘러보고 아름다운 숲길에 취하며 대룡리(교동면사무소)로 내려갔다. 숲이 매우 삼
삼해 제아무리 세상을 녹일 기세인 여름 햇살이라 한들 여기서는 어림도 없다.


▲  빽빽하게 우거진 화개산 숲길

▲  숲길에 달아놓은 조촐한 문
둘레길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둘레길 스타일의 문이다.

▲  화개산 한증막(汗蒸幕)

숲길을 내려가니 아주 단단하게 지어진 커다란 돌집이 마중을 나온다. 생김새를 보니 오래된
돌무덤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쪽에 문까지 나있어 마치 북극 사람들이 살던 이글루의 돌버전
같은 느낌까지 드는데, 뜻밖에도 옛날 사람들이 이용하던 한증막의 흔적이다.

한증막이란 오늘날 우리 목욕 문화의 일원인 찜질방의 옛 형태로 보면 된다. 이곳 한증막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황토를 밑에 깔고 위에 돌을 쌓아 반 동그라미 모습을 자아냈다.
둘레는 15m, 직경 4.5m, 높이 3m로 인근 냇물에 한증으로 푹 삶은 몸을 식힐 수 있도록 돌을
깐 자리가 남아있다.
돌한증막 작동 원리는 우선 마른 소나무가지 등으로 돌집 안에 불을 지펴 온도를 높인 다음
그 재를 꺼낸다. 그런 다음 무성한 생솔가지를 안에 넣어 바닥에 깔고 그 안에 들어가 땀을
충분히 낸 다음, 옆 냇물에서 몸을 식힌다. 그렇게 한증(汗蒸)을 반복하고 마지막은 목욕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지금의 찜질방과 같은 방식인 것이다.

이 한증막은 1970년대까지 절찬리에 사용되었으며, 교동도에는 이곳 외에도 수정산과 여러 곳
에 한증막을 두어 섬 사람들이 이용했으나 지금은 이곳만 남아있다. 솔직히 한증막 유적은 처
음 보는지라 참 생소하기 그지없는데, 이런 한증막 유적은 이 땅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옛
사람들의 목욕/찜질 문화를 귀뜀해주는 소중한 존재로 '국가 민속문화재'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해도 전혀 손색은 없어보인다. 그렇게 해야 이 한증막도 우리 곁에 더 오래 있을 것이 아
닌가?

* 한증막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산233


▲  냇가 옆 숲속에 터를 닦은 한증막

▲  앞에서 바라본 한증막

▲  한증으로 뜨거워진 몸을 식히던 현장
(냇가에 있음)


▲  한증막 내부로 들어가는 네모난 문

증막 문이 작아서 완전 엎드려서 들어가야 된다. 내부는 옛 무덤의 석실(石室) 같은 모습으
로 너른 공간이 있는데, 거기에 마른 가지 등을 태워 내부를 뜨겁게 달군 다음, 재를 치우고
생솔가지를 바닥에 깔아 한증(찜질)을 하였다.
안에 들어가볼까 했으나 내가 들어가면 자칫 무너질까 겁나서 이렇게 보는 선에서 욕심을 버
렸다. 게다가 버려진지 오래된 한증막이고 한여름이니 안에는 벌레들도 무지 많을 것이다.


▲  연산군유배지로 인도하는 숲길

한증막을 둘러보고 조금 내려가다보면 연산군유배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한다. 조선의 제
10대 군주인 연산군(燕山君)이 교동도로 유배를 와서 죽었으니 그 유배처가 남아있을 것이고
그 현장이 이 부근에 있던 모양이다.


▲  연산군유배지 표석 (2014년)

연산군유배지 표석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반질반질한 하얀 피부를
지녔다.
이 땅의 사람들은 연산군(1476~1506)하면 다들 폭군, 신하들 때려죽이기, 불효자, 할머니 죽
인 패륜아, 흥청망청, 기생 잡기 등 그야말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허나 그는 우리
가 생각한 것 외로 그렇게 쓰레기 군주는 아니었다.

연산군은 조선 9대 군주인 성종(成宗)과 폐비윤씨의 아들로 성종의 장자(長子)이다. 폐비윤씨
가 한 성깔 하던 여인이라 성종과 자주 마찰이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성종의 어머
니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와 성종에 의해 폐비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고, 1482년 사사(賜死)
되고 만다. 성종은 이 사실을 아들이 알까 두려워 신하들에게 100년 동안 윤씨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명했다.

연산군은 왕자 시절부터 말썽을 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그는 10년 이상 허침(
許琛)과 조지서(趙之瑞)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시문(詩文)과 음악, 악기에 매우 능했으며,
많은 시를 남겼다. 또한 효성도 지극해 부왕 성종이 중병으로 눕자 밤을 새며 간호했으며, 자
신의 생일 하례를 취소시켰다. 또한 1494년 부왕인 성종이 승하하자 삼사(三司)의 반대를 뿌
리치고 부왕의 명복을 비는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기도 했다.

1494년 왕위에 오르자 비융사(備戎司)를 설치해 갑옷과 무기를 생산하여 국방에 신경을 썼고,
두만강(豆滿江)에서 소란을 피우는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해 투항한 여진족에게 토지와 상급
을 내렸다. 또한 변방의 안정을 위해 백성들의 이주를 독려했다.
종묘 제도를 정비하고 사창과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해 물가를 안정시켜 굶주리는 백성을 구
제했으며, 호적식년(戶籍式年)을 개정해 백성의 불편을 덜었다. 그리고 '경상우도지도(慶尙右
道地圖)','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지리서와 '국조보감(國朝寶鑑)','역대제왕시문잡저(歷代
帝王詩文雜著)' 을 편찬해 제왕 수업에 귀감으로 삼았다.
또한 성종 이후 계속된 태평성대로 관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치향락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되자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 강력히 단속을 했으며, 전국에 암행어사(暗
行御史)를 풀어 지방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들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문신(文臣
)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케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다시 실시해 학
문 발달에 크게 신경을 썼다.

연산군은 신하의 눈치를 받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왕권 강화를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면
서 그 유명한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와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가 터졌고, 왕에게
불경죄를 저지른 이들이 많이 피를 보았다. 또한 어머니 윤씨의 사망 이유를 알게 되면서 다
소 이성을 잃게 된다.
이렇게 그의 패도정치(覇道政治)가 나날이 심해지자 왕을 갈아야 된다는 무리들이 조금씩 고
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주역은 바로 연산군과 가까웠던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이
었다. 성희안은 금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으로 왕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고, 박원종
은 확실치는 않지만 연산군이 그의 누이를 건드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둘은 앙심을
품고 홍경주(洪景舟)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모의했고, 1506년 9월 2일 박원종 일당은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때 왕은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반란군의 침입에 왕은 크게 당황하여 아무런 말
도 못했다고 하며, 결국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반란군에게 옥새를 내주고 말았다.

반란군은 정현왕후(貞顯王后, 성종의 계비)의 허락을 구해 왕을 동궁(東宮)에 가두고 그녀의
소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데려와 익선관(翼善冠)을 쓴 상태로 왕위에 올렸다. 그가 바로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이다. 이 사건을 세상에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부른다.

동궁에 유폐된 연산군은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을 통해 궁밖으로 추방되어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었다. 유배된지 2달 뒤인 11월 역질(疫疾)에 걸리자 중종은 약을 보냈는데, 어찌된 영
문인지 불과 며칠 만에 갑자기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기록에는 단순히 병
으로 죽었다고 나와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없는데, 이상한 것은 한겨울에 역질이란 전염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또한 중종이 보냈다는 약도 상당히 의심쩍다. 그래서 병사가 아닌 독살되었
다는 설이 강하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싸늘한 주검이 된 연산군은 교동도에 매장되었으며, 1512년 12월 부인 신씨가 남편의 무덤을
자신의 외조부 땅(서울 방학동)으로 이장해 줄 것을 청하자 중종이 이를 허락해 1513년 2월
왕자의 예로 이장되고 양주군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했다.
연산군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넣었으나 그 요구는 거절당했다
고 한다. (연산군묘 제사는 처가집인 거창신씨 집안에서 지내고 있음)

그는 왕이었음에도 그 흔한 묘호(廟號)도 받지 못했으며, 시호(諡號)도 없다. 그냥 왕자 시절
의 칭호인 연산군을 그대로 썼다. 김정국(金正國)과 유숭조(柳崇祖) 등은 그에게 시호를 올려
왕으로 추봉(追封)하고 양자(養子)를 들여 제사를 받들 것을 건의했으나 중종과 반정파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를 두고 이긍익(李肯翊)은 그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김정국 등을
높이 평가하며, 연산군의 제사가 끊긴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라 기록했다.

이렇게 죽어서도 왕의 예우를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조선이 망할 때까지 종묘(宗廟)에 배향되
지도 못했다. 또한 무덤도 능(陵)이 아닌 묘(墓)로 사대부의 무덤 수준에 머물렀으며, 그의
사초는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로 격하되었다.
이렇듯 중종과 반정파에게 철저히 매장되고 왜곡되었으며, 명종(明宗)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
면서 연산군 3글자는 부정적인 의미이자 폭군의 대명사가 완전히 찍히게 된다. 사림파는 연산
군 때 죽은 사림 계열 사람들, 즉 자신의 선배들을 의로운 인물로 추앙했고, 연산군과 그 측
근은 죄다 쓰레기로 기록하여 그것을 후손들에게 계속 주입시켰다. 이는 패배자에게 인정을
두지 않는 역사의 매정한 현실이다.
승리자는 항상 영광스럽게 포장이 되지만 패배자는 아무리 공적이 뛰어나도 승리자의 구미에
따라 철저히 왜곡되고 파괴된다. 연산군은 바로 역사의 패배자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산군이 유배살이를 했던 현장은 3곳이 비정되고 있는데, 이곳과 교동읍성 부근, 교동관아터
부근 등이다. 허나 어느 곳이 정답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태, 교동읍성 부근과
교동관아터 주변은 유배지를 알리는 비석이 있고, 내가 찾은 화개산 유배지는 표석이 있어 서
로 연산군 유배지임을 내세운다. (근래에 그 시절을 재현한 초가와 연산군 인형 등을 설치했
음)


▲  화개산 서쪽 산길 (대룡리)

▲  교동도의 서울인 대룡리

연산군유배지를 둘러보고 대룡리로 내려갔다. 나를 진하게 감싸던 숲길은 어느덧 끝나고 주변
이 확 트인 평탄한 흙길이 나를 맞이해 교동면사무소까지 쭉 인도한다.
교동면사무소에는 큼지막한 화개산 안내도가 있는데, 안내도를 보니 화개산을 남과 동, 북,
서로 완전히 1바퀴를 돌았다. 소요시간은 2시간 정도로 강화나들길 9코스인 교동도 다을새길
과 코스가 겹친다. 다을새길은 월선포에서 교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석천당~대룡리시장~
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를 두루 거쳐 다시 월선포로 돌아오는 16km의 도보길이다.

교동면사무소를 나오면 바로 교동도의 서울인 대룡리 마을이다. 마을 한복판에는 대룡시장이
있는데 시간이 흐르다가 제대로 기절한 듯, 1970~80년대 분위기를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시
장이라고 하나 가게와 음식점이 여럿 있는 짧은 거리에 불과하다.

시장 인근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목마름과 배고픔을 조금 해소하며 바깥으로 나가는 군내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에 부착된 시간표를 보니 30분 뒤에 월선포를 출발한다고 한다. 월선
포에서 대룡리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해는 아직도 여전하나 시간은 이미 17시가 넘었고, 몸도 다소 지친 상태라 더 이상 섬을 둘러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그 지루한 시간, 허나 한번 밖에 없는 그 시간을 억지로 죽여
가며 정류장에 죽치고 앉았다. 나중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교동도와의 인연은 또 있을 것
이다. 이번에 못가본 곳은 그때 인연을 지으면 될 것이요. 인연이 닿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며 억지로 인연 짓는 것도 딱히 좋지는 못하다.

시간이 되자 강화군내버스 18번이 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 친구를 만난 양 얼마나 반
갑던지. 그를 잡아타고 바다를 건너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교동도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하루 속히 남북이 통일되어 교동도
가 NLL의 동쪽 시작점, 민통선 구역이란 딱지를 떼었으면 좋겠다.

* 화개산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대룡리, 읍내리, 상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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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에 묶여있는 강화도 옆구리의 커다란 섬, 교동도 여름 나들이 ~~ (교동읍성, 교동향교, 성전약수, 화개사, 강화나들길 9코스)

 


~~~~~  강화 교동도 나들이
~~~~~

▲  화개산 숲길

▲  교동향교

▲  교동읍성

 


 

강화도(江華島)와 황해도 사이에는 교동도란 커다란 섬이 떠있다. 예전에는 강화도 창후
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으나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1969년에 연륙된
강화도와 더불어 한반도의 어엿한 일원이 되었다. 육지(김포시)와 강화도(강화군), 강화
도와 교동도 등 바다에 놓인 다리를 2개나 건너야 되나 섬을 잇는 다리가 생김으로써 더
이상 날씨와 바다의 눈치 없이 차량으로 마음 편히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오랜 세월 목말라오던 교동도와 흔쾌히 인연을 짓고자 여름의 어
느 평화로운 날 아침, 길을 떠났다.
서울 서부와 일산신도시, 김포(金浦), 강화대교를 지나 오전 11시 반에 강화터미널에 도
착했다. 교동도 버스 시간까지는 아직 40~50분 정도 남아있어 환승시간도 연장할 겸, 강
화읍내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여럿 구입하며 시간을 때웠
다. 무더운 날씨긴 했으나 바다에 감싸인 섬이라 여름 제국의 열기(熱氣)는 그리 거세진
않았다.

드디어 교동도(喬桐島)의 새로운 빛이자 발로 등장한 강화군내버스 18번(강화터미널↔월
선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버스는 벌써부터 초만원이다. 다리 개통으로 물이 잔
뜩 오른 교동도 나들이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교동도까지 서서가야 되는가?' 우울한 마음 가득했으나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
리는 없었다. 버스 아니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사람이 빠져 다리 이전
인 인화리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교동대교 직전에는 인화리 검문소가 매의 눈으로 섬을 찾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다
리가 뚫리긴 했어도 교동도는 여전히 예민한 민통선이자 이 땅 최전방의 하나로 마치 군
사정권 시절로 강제 되감기를 당한 듯, 검문도 조금 까칠하다.
검문소에 이르면 군인아저씨의 통제에 따라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검문소에 마련된 문
서에 이름과 연락처를 쓰고 신분증 검사를 받는다. 여럿이 온 경우에는 1명만 내려 작성
하면 되나, 상황에 따라 모두 검사를 받을 수 있으니 신분증은 꼭 지참해야 뒷탈이 없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개인 차량으로 왔을 경우, 차에서 내려 신분증 검사와 이름, 연락처 등을 적고 통행증을
받는다. 통행증은 섬에서 나올 때 반환하면 된다.

승객이 많은 탓에 검문 시간이 길어져 버스는 약 7~8분 정도 그 육중한 바퀴를 멈추었다.
마치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국경선에서 출국수속을 밟는 기분이랄까?? 그 까칠한 절차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탑승하자 잠시 늘어졌던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수
평선 너머의 숨겨진 별천지로 인도할 것 같은 교동대교로 들어선다.

교동대교는 강화도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잇는 3.44km의 연륙교로 2008년 9월
에 짓기 시작했다. 원래 2012년 개통 예정이었으나 바다 갯벌에 설치된 기초 말뚝이 2011
년 중순 손상되면서 공사 기간이 다소 늘어났다. 2014년 6월 20일 임시 개통을 했고, 10
일 뒤인 7월 1일 정식 개통되어 교동도의 새로운 관문이 되었다.
공사비는 총 904억 원이 소요되었으며, 다리 밑은 서해바다와 검은 갯벌이고, 바다 북쪽
은 바로 황해도(黃海道)로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바다 다리가 바로 교동대교가 되겠다.


 

♠  교동도 입문 (교동읍성)

▲  푸르게 익어가는 교동평야 (평야 너머로 보이는 섬이 석모도)

교동대교를 건넌 버스는 봉소리와 고구저수지, 교동도의 중심인 대룡리, 교동향교가 있는 읍
내리(邑內里)를 거처 섬 동쪽에 자리한 월선포에서 바퀴를 접는다. 월선포는 교동도의 옛 관
문으로 2014년 6월까지 강화도 창후리를 잇는 뱃편이 운행했다.

※ 교동도(喬桐島)는 어떤 곳인가?
교동도는 약 47.1㎢(또는 46.9㎢)의 넓은 섬으로 논 25.89㎢, 밭 2.57㎢, 임야 11.45㎢를 지
니고 있다. 다른 섬에 비해 유독 논이 넓은 편이라 마치 육지의 너른 평야를 보는 듯 한데 이
들 논을 교동평야(喬桐平野)라 부른다. 섬에 이렇게 너른 논이 있게 된 것은 고려 말부터 자
급자족을 위해 간척사업과 경지 개척을 꾸준히 벌인 탓이다. 게다가 해발 10m 이하의 땅이 섬
의 약 ⅔를 이루고 있어 경지 개척에도 매우 용이했다.
조선과 왜정(倭政)을 거쳐 현대까지 계속 땅을 다지고 수리시설을 개량하는 등 농업에 전념했
으며, 화개산 북쪽에는 섬 호수치고는 꽤 넓은 고구저수지가 있어 교동평야의 많은 농경지를
적셔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농업에 집중한 결과,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농산물을 내놓고 있으
며, 교동도 쌀은 질이 좋기로 명성이 높다. 어느 통계를 보니 교동도에서 1년간 생산된 쌀로
교동도 사람들이 약 58년, 강화군민이 약 4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그만큼 땅이 비
옥하다. 그래서 옛날부터 섬에 부자가 많았으며, 육지 사람들에 비해 전혀 아쉬울 것이 없어
교동민국이란 말도 생겨났다. 쌀 외에 보리와 콩, 감자, 인삼, 밤, 대추, 버섯 등의 농산/임
산물도 풍부하게 나온다.

섬 동쪽에 솟은 화개산(260m)은 섬의 지붕이며, 화개산 외에는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100m 이
하의 구릉들이 여럿 솟아있다. 해안선은 서해안치고는 단조로우나, 죄다 갯벌이다. 게다가 간
만의 차가 커서 선박 출입도 썩 편하지 못하다. 월선포 등의 항구가 있으나 조그만 수준이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流氷)과 북한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으로 강화도보다 좀 춥다.

교동도 동쪽에는 그를 거느리는 강화도가 자리해 있고, 남쪽에는 역시 강화도에 속한 석모도(
席毛島)가 있다. 그리고 서쪽은 황해도 연안군(延安郡), 북쪽은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으로
모두 북한이다. 황해도 땅은 섬에서 불과 2~3km 거리에 불과해 섬 북쪽 해안과 화개산에서 뻔
히 바라보인다. 그 땅도 우리 땅이 분명하건만 그곳에는 북한이란 이상한 나라가 들어서 이렇
게 가까운 거리임에도 70년 이상 건너가질 못하고 있다.

교동도는 북방한계선(NLL)의 동쪽 시작점으로 강화도와 교동도 북쪽 바다는 남한과 북한의 완
충지대인 중립구역이다. 교동도 일대는 민통선으로 지금은 그나마 덜해지긴 했지만 출입이 썩
자유롭지 못했으며, 농업 외에는 개발이 어려워 1970~80년대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교동도의 시간까지 막아버린 것이다.

지금은 하나의 섬으로 되어있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기 이전에는 개화산과 율두산, 수정산
을 중심으로 3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교동평야에는 조수가 흘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이들 섬은 점차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지화되어 사람들이 내왕했다가 1578년에 다시 바다가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왕래하지 못했다
는 기록이 있어 후빙기(後氷期) 이후 해면 변동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교동도는 고구려 때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에 교동(喬
桐)으로 이름이 갈렸다. 이때 혈구진(穴口縣, 강화도)에 속했는데, 고려 명종(明宗) 때 감무
(監務)를 두어 섬을 통치하게 하면서 강화도에서 분리되었다.
고려의 끝 무렵인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시절에는 피폐된 수군을 재건하고 정신없이 날
뛰는 왜구(倭寇)를 때려잡고자 전라도에서 바다에 익숙한 어부와 바닷가 사람들을 징발했다.
그들에게 경작지를 주는 조건으로 강화도와 교동도로 이주시켜 수군 훈련을 시켰는데, 이때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화약을 이용해 화포(火砲) 훈련까지 병행했으며, 최무선은 단련된
그들을 데리고 1380년 금강 하류인 진포에서 왜구 500척을 때려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진포대첩(鎭浦大捷)이다.

1395년에는 만호(萬戶)와 지현(知縣)을 두었고, 이후 교동현으로 삼아 현감을 파견했다. 1629
년 경기수영(京畿水營)을 교동도로 이전하면서 강화도에 버금가는 부(府)로 승격되고 수군절
도사(水軍節度使) 겸 교동부사를 두었으며, 1633년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면서
경기도와 충청도, 황해도의 바다를 관리했다.
1777년 교동부를 현으로 낮추었다가 1779년 삼도통어사를 강화로 옮기면서 교동부 겸 방어사(
防禦使)로 승격되었으며, 1789년 삼도통어영이 다시 교동으로 돌아왔다. 1866년에도 이와 비
슷한 일이 있었고, 1884년 해방영(海防營)에 통어사가 이속되면서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조
정되었다.
1895년 행정개편으로 강화에 일시 통합되었으나 1896년 교동군으로 분리되었으며, 1914년 강
화군에 편입되어 개화면과 수정면 2개 면을 두다가 1934년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해방 당시 인구가 8,600명이었으나 6.25이후 실향민들이 북한과 가까운 이곳으로 대거 넘어오
면서 1965년에 12,443명에 달하기도 했다. 허나 민통선이라 개발도 거의 안되고 점차 낙후되
면서 인구가 감소해 현재는 3,000명대까지 떨어졌다.
6.25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강화도와 황해도를 이어주었으나 6.25이후 강화도 외에 모
두 길이 끊기면서 외로운 섬이 되었다. 게다가 민통선이라 방문도 좀 까다롭고 교동도의 이
름 3자가 천하에 그리 알려지지 못해 실향민 외에 외지인의 방문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교
동대교가 닦이면서 섬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었고, 관광객과 답사/등산/낚시 수요가 늘면
서 차량의 왕래가 폭증했다. 다리로 인해 섬은 서서히 물이 오른 것이다.

교동도에는 등산 명소로 부상하고 있는 화개산을 비롯해 교동향교, 교동읍성, 화개사, 연산군
유배지, 대룡시장 등의 명소가 있으며, 강화도 둘레길인 강화나들길 가운데 2개 코스가 섬에
닦여져 교동도에 새로운 악세사리가 되고 있다. 또한 지엄한 민통선이라 개발도 오랫동안 피
해가면서 1960~80년대 농촌마을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염원이 없어 그야말로 청정한 곳
이다.
 
섬까지 강화군내버스가 들어오지만 섬의 동부인 화개산 주변 봉소리, 대룡리, 읍내리 지역만
운행할 뿐, 그외 지역은 대룡시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거나 택시, 도보, 개인 차량을 이용해야
된다.
교동도의 중심은 대룡리로 면사무소가 있으며, 조그만 대룡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섬 서부로
갈때는 이곳에서 들어가면 된다.
육지와는 가깝지만 은근히 진입이 까칠한 곳이라 고려와 조선 때 유배지로 널리 쓰였으며 서
해바다와 예성강(禮成江), 한강이 만나는 지리적 위치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교역지로 바쁘게
살아갔다.


▲  교동읍성(喬桐邑城) - 인천 지방기념물 23호

교동도에서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교동읍성이다. 화개사입구 정
류장에서 남쪽으로 난 시골길을 조금 들어가면 장대한 세월에 형편없이 짓눌린 교동읍성과 남
문이 그 초췌한 모습을 비춘다.

교동읍성은 교동도에 경기수영이 설치된 1629년에 축성되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로 동문과
남문, 북문 등 3개의 성문을 두었으며 모두 옹성(甕城)을 둘렀다.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
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불렸는데, 1753년 여장을 고쳐 쌓았고, 1884
년에 남문을 수리했다. 바로 이 읍성(邑城) 안에 경기수영과 삼도통어영, 교동 고을의 관아가
있었다.

왜정 때 관리소홀과 왜정의 악의적인 훼손으로 동문과 북문은 쥐도새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
며, 성곽 역시 거의 앉은뱅이가 되었다. 남문은 다행히 모습은 건졌으나 1921년 폭풍우로 붕
괴된 것을 1975년에 해체,복원했으며 현재 남문과 그 좌우 성벽, 화개사입구에서 남문으로 넘
어가는 길목 등 약 300m 정도만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아있다. 제 아무리 장대했을 읍성도 결
국 세월과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모래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 교동읍성 남문(南門)

바다를 바라보고 선 남문은 문루를 상실한 채, 홍예문과 성벽, 옹성 일부만 남아있다. (최근
에 문루가 복원됨)
문 주변은 하얀 피부의 성돌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 상당수는 1975년에 복원하면서
새로 끼어 맞춘 것이다. 그 좌우에는 고색의 때로 얼룩진 성돌이 가득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  남문 서쪽 성곽과 옹성의 흔적

▲  돌담처럼 낮아진 남문 동쪽 성곽


▲  남문 앞에 웅크리고 앉은 비석의 귀부(龜趺)

남문 앞에는 비석의 일부인 조그만 귀부가 누워있다. 거북 머리와 비석을 꽂던 비좌(碑座)만
남아있는데, 정작 알맹이인 빗돌이 없어 무엇을 머금던 비석이었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아마
도 왜정 때 저 지경이 된 듯 싶은데, 교동읍성 축성/보수 관련 내용을 담은 비석으로 여겨진
다. (정답은 없음)
하지만 귀부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니 아무리 여기서 답을 내놓은들, 한낱 부질없는 메아리
에 불과하다.


▲  귀부의 뒷모습
귀엽게 표현된 꼬랑지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 같다.

▲  풍년예감~! 남문 앞에 펼쳐진 교동평야

▲  남문 안쪽

교동읍성 남문 동쪽에는 교동부 관아터와 황룡우물,  연산군(燕山君) 유배지 등의 명소가 있
다. 나는 이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남문 주변만 둘러보고 미련 없이 교동향교로 넘
어가고 말았다.
허나 늘 변명이긴 하지만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그리 아쉽지는 않다. 어차피 서울과 가까운
곳이라 나중에 다시 인연을 지으면 된다.

* 교동읍성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일원

▲  성문에 새겨진 남루(南樓) 글씨
성문의 성격과 이름을 말해준다.

▲  삼도(三道)~~ 문(門)이라 새겨진 글씨
여기서 삼도는 삼도통어영을 뜻한다.


▲  금지된 남문 안쪽 성벽
한때 잘나갔던 교동읍성은 이제 무너지는 것을 걱정해야 될 처지가 되었다.
읍성 보호를 위해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절대로 성벽을 오르지 말자~

▲  교동읍성의 아련한 흔적 (화개사입구에서 남문으로 넘어가는 길목)

▲  화개사입구 정류장에서 바라본 화개산(華蓋山)의 위엄


 

♠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로 꼽히는 교동향교(喬桐鄕校)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8호

▲  교동향교 입구에 자리한 읍내리 비석군(碑石群)

교동읍성을 둘러보고 화개산 남쪽 자락에 안긴 교동향교를 찾았다. 화개사입구 정류장에서 교
동향교와 화개사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화개산 쪽으로 1분 정도 들어가면 오래된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인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면 화개산과 화개사, 오른쪽으로 가면 교
동향교이다.

3거리에 무리를 지어 둥지를 튼 이들 비석은 총 40기로 '읍내리 비석군'이란 이름으로 살아가
고 있다. 이들은 읍내리 교동양조장 앞 비석거리에 있었는데, 1970년대에 교동도의 옛 역사를
정립한다는 뜻에서 옛 교동도의 관문인 남산포길로 옮겼다가 1991년 강화군과 교동향교 유림
들이 지금의 위치로 모두 집합시켰다.

비석 대부분이 교동도를 다스린 교동부사와 삼도통어사, 방어사(防禦使)의 선정비(善政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즉 그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인 것이다. 그들 중에 정말로 비
석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선정을 베풀고 큰 업적을 남긴 관리도 있겠으나 공덕이 쥐뿔도 없음
에도 강제로 세우게 한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
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불린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비석의 주인공이 과분에 넘치는 선정비를 누리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곳의 역사를
조금씩 머금은 교동도의 소중한 일기장으로 그들을 통해 누가 언제 이곳을 다스리고 거쳐갔는
지를 귀뜀해준다.

조선 중기와 후기, 20세기 초반에 걸쳐 지어진 비석들로 그중 앞줄에 자리한 3기는 특이하게
가로로 누워있는데, 이들은 거사대(去思臺)라 불리는 비석이다.


▲  교동향교 홍살문

비석군에서 교동향교로 가다보면 향교의 정문인 홍살문이 마중을 한다. 홍살문은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차가운 모습으로 궁궐과 관아, 향교, 왕릉 입구에 주로 세우는데 문 바로 옆에는 무
조건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가 우두커니 서 있고, 그 옆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
다. 문 앞에 바리케이드 같은 것이 쳐져 있고, 차량 출입금지를 알리는 현대판 하마비가 곁에
서 있어 차를 타고 온 이들은 주차장에서 무조건 내려서 걸어가야 된다. 그러니 하마비의 '마
(馬)'만 달라졌을 뿐, 비석의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  지엄함이 여전한 하마비의 위엄

보통 하마비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나 이곳은 '수령변장하마비(守
令邊將下馬碑)'라 쓰여 있다. 즉 수령과 변장, 그리고 그 밑은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홍살문과 하마비는 거의 빈껍데기가 되었으나 이곳 하마비의 위엄은 여전하
여 그 앞에서 차를 두고 걸어가야 된다.


▲  교동향교 외경

화개산 남쪽에 터를 닦은 교동향교는 고려 중기인 1127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화
개산 북쪽 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이 땅에 지어진 최초의 향교(鄕校)로 널리 알려져 있다.

향교란 나라에서 각 고을에 세운 중등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는 서당을 졸업한 학생들이 진
학하여 공부를 했다.
1286년에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있던 회헌 안향(晦軒 安珦)이 몽골(원나라)에 갔다가 공자(孔
子)의 초상화를 들고 귀국했는데, 배를 타고 개경(開京, 개성)으로 오다가 개경 바로 밑에 자
리한 교동도에 잠시 들려 교동향교에 그 초상화를 봉안했다고 한다. 고려 제일의 국립 교육기
관으로 지금의 서울대와 같은 국자감(國子監)까지 제치고 지역 향교에 불과한 이곳에 가장 먼
저 공자상이 봉안될 정도라면 교동향교가 당시 꽤 잘나갔던 모양이다.
그 이후 각 고을에 공자와 맹자, 최치원(崔致遠) 등 중원대륙과 신라, 고려의 주요 유교 성현
(聖賢)의 위패를 봉안한 문묘(文廟)가 설치되었다. 그러니 이 땅 최초의 향교이자 유교 성현
을 봉안한 최초의 향교란 타이틀까지 지니게 되었다. 향교 문묘는 바로 대성전으로 이때부터
교육과 제사 2가지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1741년에 지부(知府) 조호신(趙虎臣)이 읍성 북쪽인 지금의 자리로 향교를 옮겼으며, 1966년
에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무, 동/서재, 제기고, 내삼문,
외삼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향교 바깥에는 성전약수란 유명한 약수가 있다. 향교 건물은 모
두 18세기 이후 것들로 고려의 흔적은 싹 사라졌으며, 안향이 가져왔다는 공자 초상화도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방의 중등교육을 담당하던 향교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서서히 교육 기능을 잃
게 되며, 오로지 제사 기능만 남아 거의 빈껍데기가 되어버렸다.


▲  계단을 늘어뜨린 교동향교 외삼문(外三門)

향교는 조선시대에 전 고을에 설치되었다. 그러다보니 옛 고을 중심지에는 꼭 향교가 남아있
기 마련이다. 허나 향교는 고리타분한 유교의 공간이라 건물의 모습도 비슷비슷하고, 볼거리
가 풍부한 절과 달리 두 눈이 호강할만한 볼거리도 별로 없으며, 향교 상당수가 속세(俗世)에
폐쇄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어 내부 관람도 그리 쉽지가 않다. 또한 향교의 존재감도 너무
없어 나들이/답사 수요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허나 교동향교만큼은 사정이 180도 다르다. 처음에는 관람객도 거의 없는 썰렁한 향교를 생각
했으나 정작 와보니 글쎄 관람객들로 북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관람객이 많은 향교는
난생 처음이라 생소한 풍경에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교동대교 개통으로 교동도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 향교 또한 그 덕을 제대로 본 탓이지만 화개산, 교동읍성과 더불어 섬의 주요
명소이자 교동도를 소개하는 정보에도 교동향교가 크게 다뤄지고 있어 교동도에 왔다면 꼭 들
려야 되는 필수 명소로 등극을 했다.
또한 향교가 화개산 산길의 기점인 화개사와 매우 가깝고 교동읍성과 강화나들길이 지척에 있
어 위치도 좋다. 게다가 문화유산해설사도 머물고 있어 향교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으니
교동도에 왔다면 1번 꼭 들려보도록 하자.

향교는 사방을 돌담으로 둘렀다. 남쪽에 바깥과 이어지는 외삼문을 냈는데, 문 앞에는 3줄로
이루어진 돌계단이 펼쳐져 있다. 외삼문을 이루는 3개의 문 가운데 오로지 동쪽 문만 열려있
어 그 문을 통해 향교로 들어서면 된다.


▲  교동향교 명륜당(明倫堂)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명륜당이 정면을 막고 선다. 명륜당은 공자왈~맹자왈~! 공부를 하던
교육 공간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교육 기능은 이제 없어졌으니 명륜
당 또한 한가로운 신세가 되어 섬돌에 신발이 가득했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 한다.

명륜당 좌우에는 향교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다른 향교와 달리 특이하게도 '
ㄱ'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재는 향교 사무실로 쓰이고 있으며, 툇마루가 서재보다 넓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동재 옆에는 방을 따스하게 보듬던 온돌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긴장시키
던 굴뚝이 서 있는데, 그를 손질하면서 너무 시멘트로 떡칠을 한 점이 다소 아쉽다.

▲  서재(西齋)

▲  동재(東齋)

▲  무늬만 남은 동재 굴뚝

▲  굳게 닫힌 내삼문(內三門)


▲  명륜당 뒷쪽에 비뚤게 자리한 노룡암(老龍巖)

명륜당 뒷쪽에는 노룡암이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기울어진 모습으로 서있다. 그의 피부
를 가만히 살펴보면 조그만 글씨들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원래 축대에 쓰
인 돌로 교동고을 동헌터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돌의 상태상 반듯하게 세우기가 애매하
여 저리 비뚤어진 모습으로 세운 것 같다. 어차피 이 나라도 단단히 비뚤어져있으니 돌 하나
비뚤어지게 세운다고 문제될 것은 없다. 글씨만 알아보면 되니까 말이다.

노룡암은 교동고을 관아인 동헌(東軒) 북쪽 뜨락 층계 밑에 있었다. 그러니까 뜨락 석축의 일
원으로 있던 것이다. 층계 위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중 오래된 소나무가 있고, 그
밑에 축대가 있었다. 1717년에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인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 1676
~1728)이 그 축대에 늙은 용의 바위란 뜻에 '노룡암' 3자를 새겼는데, 1773년에 이봉상의 손
자인 이달해(李達海)가 이를 기리고자 석축 밑에 글을 새겼다.
1820년 통어사 이규서(李奎書)가 '호거암장군쇄풍(虎距巖將軍灑風)' 7자를 새겼는데, 이는 '
호거암장군이 풍기를 깨끗히 했다'는 뜻이며, 여기서 호거암장군은 이봉상이다. 1831년 봄에
석대로 쌓아있던 것을 1987년 교동향교로 옮겼다.

노룡암 뒷쪽 높은 곳에는 담장을 두른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으로 가려면 내삼문을 거쳐야 되
는데, 내삼문은 향사일(享祀日) 외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으므로 제기고로 우회해서 들어가면
된다. 제기고는 말그대로 제사 도구를 간직한 창고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다.


▲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  향교의 중심, 대성전(大成殿)

향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향교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이 자리해 있다. 남쪽을 바라보
고 있는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동이족 출신인 문선왕(文宣王) 공자
를 비롯해 증자(曾子), 안자(顔子), 맹자(孟子), 자사(子思) 등 초기 유교를 정립한 5명이 봉
안되어 있다.
청록색 피부를 지닌 대성전 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그 안에는 공자 등 5인의 위패와 위패를
간직한 상(床), 제사 도구 등이 들어있다. 그 앞뜨락 좌우에는 설총(薛聰)과 최치원, 정몽주,
이이(李珥) 등 신라와 고려, 조선의 유학자 20인을 봉안한 동무(東憮)와 서무(西憮)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들은 대성전의 보조 공간이다보니 대성전보다 볼품이 많이 떨어진다.

▲  한쪽 문이 열린 서무

▲  동무 (그 옆에 제기고와 명륜당으로
내려가는 문이 있다)


▲  향교 서쪽에 있는 성전약수(成殿藥水)

교동향교에 왔다면 꼭 맛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대성전 서쪽 담너머에 있는 성전약수이
다. 이 땅에 많은 향교를 가보았지만 무려 약수터까지 갖춘 향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성전약수는 교동도 제일의 약수로 위장병과 피부병, 아토피에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게다가
향교 유생들이 이 약수 덕분에 과거에 많이 붙고 문성(文成)을 이룬 이가 많았다고 한다. 허
나 물은 평범한 맛을 지닌 약수로 특별한 것은 없으며, 과연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향
교를 수식하는 오랜 명물이자 꿀단지로 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대성전 밑에서 물이 발
원하여 성전약수라 불리니 그야말로 향교 스타일의 약수터 이름이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148 (교동남로 229-49 ☎ 032-932-9457)
* 향교 관리소에 문화유산해설사가 있다. 근무시간은 9~18시(겨울은 17시)로 휴일에는 향교에
  늘 머물러 있으며, 아침 시간과 오후 늦은 시간, 그리고 평일에 왔을 경우 관리소를 찾거나
  위의 연락처로 연락을 하면 향교 해설을 들을 수 있다.


▲  가늘게 쏟아지는 성전약수

▲  향교에 왠 하트 모양이??
성전약수 주변에 돌을 모아서 쌓은 하트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사랑이란 말을
꺼내면 당장이라도 회초리를 1대 맞을 것 같은 그런 공간에서 이런 뜻밖에
존재를 보게 될 줄이야..? 속세를 향한 교동향교의 수줍은 마음은 아닐까?

▲  서쪽에서 바라본 교동향교
향교 서쪽에는 성전약수와 화장실, 관리소, 화개사로 통하는 숲길이 있다.


 

♠  화개산 남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교동도 화개사(華蓋寺)

▲  교동향교에서 화개사로 이어지는 숲길 (교동다을새길)

교동향교 서쪽에는 화개사로 통하는 울창한 숲길이 있다. 이 숲길은 도보길 유행에 따라 강화
군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강화나들길의 일원인 강화나들길 9코스(교동다을새길)의 일원이다.

교동도에는 강화나들길 9코스와 10코스 등 2개의 길이 닦여져 있는데, 9코스는 월선포에서 교
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석천당~대룡시장~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를 거쳐 다시 월선포로
돌아오는 16km의 코스로 화개산 주변을 1바퀴 돈다. 그리고 강화나들길 10코스(교동도 머르메
가는길)는 대룡리에서 난정저수지~수정산~금정굴~애기봉~죽산포~머르메~양갑리마을회관~미곡
처리장을 경유하여 대룡리로 돌아오는 17.2km의 코스로 교동도 서쪽을 돈다. 이들은 교동도의
명물만 골라서 짜놓은 알짜배기 탐방로라 나중에 꼭 거닐고 싶다.

교동향교에서 화개사로 가는 숲길은 선녀(仙女) 누님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림 같
은 흙길이다. 나무가 촘촘해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다. 그 길을 2분
정도 가면 화개사로 오르는 포장길이 나타나며, 여기서 오르막길을 6분 오르면 교동도에서 가
장 오래된 절인 화개사가 빼꼼 모습을 비춘다.


▲  교동향교~화개사 숲길 (교동다을새길)

▲  조촐한 화개사 경내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전부임)

화개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화개사는 숲에 감싸인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서울 조계사(曹溪
寺)의 말사(末寺)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화개산 산신도 모를 정도이나 고려 후기에 목은 이
색(牧隱 李穡, 1328~1396)이 이곳에서 독서를 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있어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진사대부의 핵심인 이색이 찾았을 정도라면 지
금과는 달리 제법 이름이 있던 절임이 분명하다.

조선 후기까지 딱히 전해오는 사적(事蹟)은 없으나 1690년대에 이형상(李衡祥)이 지은 '강도
지(江都誌)'에 절 이름이 나와있고,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쓴 가람고(伽藍考)에 화정
사(火鼎寺)라는 이름으로 나와있어, 조선 중/후기에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했던 모양
이다.
왜정 때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가 되었으며, 1915년 절이 붕괴된 것을 1928년에 정운(晶雲)
이 중건했다. 1937년 이후 재정 문제로 문을 닫은 적이 있었고, 1967년 화재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근래에 다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은 진작에 말라버렸다. 지정문화재는 하나도 없으나 조선시대 승탑 1기가 있고,
200년 묵은 장대한 소나무가 서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조금이나마 속삭여준다.

화개산으로 오르는 기점의 하나로 강화나들길 9코스가 이곳을 지나가며, 정상까진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린다. 산 중턱에 위치하여 서해바다와 석모도가 바라보이며, '절간같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고적한 산사의 멋을 누릴 수 있다.


▲  화개사 승탑(僧塔)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초췌한 모습의 승탑(부도탑) 하나가 마중을 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무척 초라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겉모습과 달리 무척
값비싼 존재이다. 그러니 꼭 살펴보고 가자.
이 승탑은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탑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 동그란 탑신(塔身)과 지붕돌, 두툼히 솟은 머리장식이 전부인 간결한 모습이다. 탑 밑에는
돌과 흙으로 대충 네모나게 바닥돌을 닦았는데, 근래 닦여진 것이라 아마도 제자리는 아닌 듯
싶다.


▲  화개사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석모도

▲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 강화군 보호수 4-9-73호

근래 지어진 여염집 모습의 대웅전 앞에는 자태가 아름다운 소나무가 웅장하게 서있다. 나이
가 약 210년 정도로 높이 14m, 둘레 1.6m의 휼륭한 덩치를 지녔는데 나무가 드리운 시원한 그
늘이 조그만 경내를 거의 커버하고 있어 휼륭한 정자나무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그늘 앞
에서는 여름 제국도 슬쩍 비켜간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489-1 (교동남로 229-9, ☎ 032-932-4140)


▲  문무정(文武井)터

화개사를 둘러보고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을 조금 오르면 문무정터가 나온다. 지금이야 외마
디 전설이 되어 바람결에 사라졌지만 이곳에는 원래 동쪽에 문정(文井), 서쪽에 무정(武井)
등 2개의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문정에 물이 많으면 문관(文官)이 많이 배출되고, 무정에 물
이 많으면 무관(武官)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샘물의 물빛이 바다 건너
송가도(석모도 북부)까지 비추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곳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졌다고 한다
. 그래서 이를 해결하고자 절치부심하던 중, 노승(老僧)이 알려준 방법에 따라 소금으로 우물
을 메우니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고 한다.
송가도 사람들은 그 노승이 너무 고마워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
며, 우물은 나중에 하나로 합쳐졌다가 메워졌다. 이후 교동도에서 문관과 무관 배출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과연 문무정이 교동도 사람들의 문/무과 급제에 크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은 없으나 앞서 교동향교 성전약수와 더불어 이곳 사람들이 입신양명을 기원하고 이
를 상징하던 곳으로 보면 될 듯 싶다.


▲  정상을 향한 열망 ~ 화개산 산길 (문무정 이후)

▲  돌로 수북한 화개산 돌너덜길

섬 사람들의 출세 욕심이 담긴 문무정을 지나 화개산 정상으로 향했다. 자연이 닦아놓은 느긋
한 산길이 계속 이어져 그리 힘들지는 않는데, 삼삼하게 우거진 나무 사이로 서해바다와 석모
도 등의 섬이 바라보인다.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화개산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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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성 땅이 아련히 바라보이는 강화도의 북녘을 거닐다 ~~~ (연미정, 월곶돈대, 강화나들길, 강화평화전망대, 예성강)

 


'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연미정, 강화 평화전망대)

▲  강화 연미정

▲  월곶돈대

▲  강화평화전망대 망배단


 


강추위를 앞세우며 천하를 꽁꽁 얼리던 무심한 겨울 제국, 그 제국의 유일한 꿀연휴인 설날이 다가왔다.

이번 연휴는 다행히도 제국(帝國)의 기운이 다소 누그러들어 길을 떠나기에는 좋았다.
여 처음에는 경기도 동부로 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강화도 연미정이 격하게 땡겨 서쪽으로
쿨하게 방향을 돌렸다.

연미정은 강화도(江華島) 동북쪽 끝에 매달린 오랜 명소로 금지된 바다 너머로 역시나 금
지된 땅 북한이 바라보인다. 참으로 순진했던 어린 시절에는 내가 장성할 때쯤 되면 반드
시 통일이 될거라 기대를 했었지.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통일은 커녕 점점 절망적으로 변
해간다. 분단이 된지 벌써 70년이 넘었건만 이 상태로는 서울과 가까운 개성(開城)DMZ
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철원의 후고구려(後高句麗) 도성도 어림 없을 것이다.
그러니 비록 간의 기별도 가지 않겠지만 북녘이 바라보이는 전방을 찾아 멀리서나마 그곳
을 바라보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것이 이 땅의 개같은 현실이다.

아침 일찍 합정역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김포좌석버스 3000(강화터미널신촌로터리)
잡아탔다. 이 노선은 강화도의 오랜 발로 강화도가 연륙되기 이전부터 시외직행버스로 운
행해 왔으나 2010년 봄에 좌석(광역)버스로 전환되어 보다 저렴하게 강화도를 찾을 수 있
게 되었다.
허나 설날 연휴를 맞이하여 강화도를 찾는 나들이 수요가 폭증하여 마송(통진)부터 강화
읍내까지 허벌나게 막힌다. 인간의 이기(利己)4발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기어
가기를 반복, 강화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강화해협(江華海峽)을 겨우 건너 강화도의 관
문인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 이르러 연미정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찾았으나 그는 간발의 차이로 이미 떠나고
없는 상태, 교통체증으로 일정이 벌써부터 틀어져 버렸다. 하여 잠시 멘붕(혼란)에 빠졌
으나 곧 극복하고 마침 점심 때라 밥을 먼저 먹기로 했다.
그래서 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강화군청에서 내려 예전에 갔던 밥집을 찾았다.
허나 그 밥집은 설날 연휴를 이유로 빗장을 닫아 걸은 상태였다. 그래서 다시 멘붕된 마
음을 부여잡으며 부근에 적당한 집을 찾다가 군청 서쪽에 '흥부네집'이란 고기집이 장사
를 하고 있어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도 없이 그곳에 들어가 불고기버섯전골을 먹었다.


▲  잘 차려져 나온 불고기버섯전골과 반찬들

▲  밥도둑, 불고기버섯전골의 위엄

전골을 주문하니 김치와 멸치볶음, 게장 등으로 이루어진 밑반찬 7가지가 차려진다.
다음 불고기버섯전골이 나타나 푹푹 끓여대니 보글보글 익으면서 멋지게 숙성이 되었다.
전골에는 소고기, 당면, 여러 채소들이 육수에 버무려져 있는데 한참 시장한 상태라 목
구멍에 제멋대로 들어갈 정도로 퍼먹었고 밥도 무려 2공기나 먹었다. 그야말로 밥 도둑
이 따로 없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후식 커피를 뽑아 먹으며 밖으로 나왔다. 오늘 계획대로
연미정을 가야되나? 아니면 다른 데로 갈까? 궁리하다가 후배가 북한 땅이 보고 싶다며
택시를 타고 연미정에 가자고 그런다. 아무리 세상에 관심이 없고 지리, 역사와 철저히
담을 쌓은 후배지만 역시나 이 땅의 어쩔 수 없는 백성인가 보다.
하여 거리에서 놀고 있는 택시를 붙잡아 강화읍내 북쪽을 가로지르며 연미정으로 이동했
. 소요시간은 약 10분 정도. 그곳에 이르니 인적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예상을 뒤엎고
나들이객들이 제법 있었다.


 

♠  연미정을 품으며 강화해협을 지키는 조선 후기 해안 요새
월곶돈대(月串墩臺) - 사적 452호(강화외성)

▲  월곶돈대 조해루(朝海樓)

강화도의 동북쪽 끝으머리인 월곶리(月串里) 해변에 연미정을 품은 월곶돈대가 의연한 모습으
로 자리해 있다.
이곳은 강화해협과 한강(아리수)이 만나는 요충지로 동쪽 강화해협 너머로는 김포 문수산(
殊山), 북쪽 바다 너머로는 금지된 땅으로 묶인 개성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월곶돈대는 강화외성(江華外城)의 일원으로 17세기 이후에 축성되었다. 그렇다면 강화외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때는 13세기의 한복판, 사기급의 전투력으로 주변 나라를 닥치는데로 때려잡던 깡패 나라,
()가 고려를 잡고자 1232년부터 7차례가 넘게 공격을 해왔다. 당시 고려 조정을 주름잡던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 최우<崔瑀, 최이(崔怡)>1233년 개경(開京)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읍
을 옮겨 강도(江都)로 삼았는데, 그해부터 강화도 방어를 위해 백성을 동원해 내성(內城,
재 강화읍성)과 중성(中城)을 쌓고 강화해협에 23km의 긴 외성을 방패로 둘렀다. 외성은 적북
돈대에서 월곶리, 갑곶, 광성보를 거쳐 초지진까지 이어지며 흙으로 쌓았다. 허나 몽고에 두
손을 들던 1270년 이후 모두 버려져 앉은뱅이가 되고 만다.

조선 15대 군주 광해군(光海君)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했다.
1618년 버려진 외성을 흙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허나 병자호란(1636~1637)으로 강화도
가 청나라에게 털리자 외성 상당수가 손상을 입었고 숙종(肅宗) 시절에 돌을 이용해 다시 쌓
았다. 이때 곳곳에 돈대(墩臺)를 설치하니, 월곶돈대도 바로 그때 탄생했다.
영조(英祖) 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은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린다고 건의하여 1743
년부터 1년 동안 벽돌을 이용해 다시 손질했다.

강화외성은 문루(門樓) 6, 암문(暗門) 6, 수문(水門) 17개를 두었으며, 외성 뿐만 아니라
강화도 해변에 5개의 진, 7개의 보, 53개의 돈대를 빼곡히 설치해 섬 전체를 그야말로 요새화
하였다. 이중 돈대는 진, 보를 돕는 조그만 요새로 20명 정도의 병력이 머물렀다.

월곶돈대는 연미정 주변에 동그렇게 성을 두룬 형태로 이곳에 올라서면 한강과 강화해협,
성 남쪽 해변, 김포 문수산, 유도 등이 바라보여 여기가 보통 자리가 아님을 귀띔해준다.
리고 남쪽 해변으로 성을 내려뜨리며 조해루란 성문을 두었는데, 그가 강화외성의 주요 문루
이다.
허나 구한말 이후 강화도의 요새들은 방어의 성격이 상실되어 버려지게 되었고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조해루는 사라졌다. 겨우 연미정을 품은 돈대 중심부만 남아있었으나 그마저
도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예민한 위치로 인해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묶여있었다.
이미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 암 걸리던 시절이 되버린 2006, 그런 사실도 모르고 이곳을 찾
은 적이 있었는데 연미정을 만나려면 최소 1주 전에 관할 군부대를 찾아가 출입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만큼 까다로운 곳이었다. 그러다가 2008년 금지된 땅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고, 쓰러진 조해루를 복원해 지금에 이른다.
현재 강화외성은 국가 사적 45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월곶돈대는 그 일원으로 묶여 사적의 지
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강화도의 야심작 강화나들길 1코스인 '심도(沁都) 역사문화길(강화터
미널~연미정~갑곶돈대, 18km)'이 이곳을 지나간다. 여기서 심도란 강화도의 고려 때 이름이다.


▲  밑에서 바라본 월곶돈대와 조해루를 잇는 성곽
(중간에 보이는 비석이 황형장군 택지비)


조해루는 월곶돈대의 성문이다. 닫혀진 문을 나서면 바로 파도가 일렁이는 강화해협인데 바다
를 통해 들어오는 적을 막고자 바닷가에 성문을 둔 것이다.
장대한 세월이 감쪽같이 훔쳐갔던 조해루는 2011년 말에 복원되었으며 성문과 문루, 남쪽 성
벽 일부가 다시 지어졌다. 문루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13m, 면적 45.56로 문루를 감싸고 있
는 여장은 이곳에서 나온 오래된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성문과 남쪽 성벽은 새 성돌로 꾸며
져 서로 어색한 세월의 조화를 이룬다. 원래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성벽이 이어져야 되지만
아직 그럴 여건까지는 되지 못한다.


▲  윗쪽에서 바라본 조해루와 월곶리

▲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莊武公 黃衡將軍 宅地碑)

월곶돈대를 오르다보면 때깔이 좋은 비석 하나가 발길을 잡는다. 바로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
던 장무공 황형장군의 택지비이다.

황형(1459~1520)은 창원황씨로 자는 언평(彦平)이다. 1480년 무과(武科)와 진현시(進賢試)
급제, 상서원(尙瑞院) 판관이 되어 내승(內乘)을 겸임했으며, 1486년 무과중시에 장원해 함경
도 혜산진(惠山鎭)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
15104, 부산포(釜山浦)와 제포(薺浦, 진해), 염포(鹽浦, 울산 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
이 조선 조정에 불만을 품고 조선의 속방인 대마도(對馬島) 세력과 연합해 폭동을 일으킨 삼
포왜란(三浦倭亂)이 터지자 전라좌도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제포의 왜인을 때려잡았다. (
마도까지 쫓아가서 정벌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그 공으로 경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되었으며, 왕이 연미정 일대를 하사했다.

1512년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이 조선에 거역하며 소란을 피우자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그들
을 정벌했고, 이어 평안도와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북녘 변방을 지키다가 공조판서(工曹判書)
를 끝으로 관직에서 사퇴, 연미정이 있던 이곳에 자리를 잡고 말년을 보냈다.
1520년 그가 숨을 거두자 중종(中宗)은 크게 애통해하며 '장무공'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연미
정 주변 3만 평의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하사했다. 그의 묘는 서남쪽으로 1.5km 떨어진 학무
산 자락에 있으며, 장무사(莊武祠)에 배향되어 매년 음력 101일 자정, 제향을 올리고 있다.

연미정 주변에는 대나무가 있었는데, 황형이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올 때 가져 손수 가져와 심
은 것이라고 전한다. (안내문에는 대마도를 정벌하고 돌아올 때 가져왔다고 나옴) 또한 그는
소나무도 잔뜩 심었는데 임진왜란 때 그 나무로 수군 함선을 만들기도 했으며, 1597년 정유재
란이 터지자 선조(宣祖)가 잠시 이곳에 온 적이 있었는데, 소나무를 이용해 성책과 집을 만들
어 사람들은 황형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고 전한다. 미래를 대비하여 나무를 심은 것인지 아
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월곶돈대 남쪽 성벽에서 바라본 강화해협과 김포 문수산

강화도는 북한과 겨우 짧은 해협을 사이에 둔 가까운 곳이라 해변에는 철조망이 휴전선마냥
길게 둘러져 있다. 남북분단이 선사한 강화외성의 현대판 버전이라고나 할까? 어서 이 땅이
통일이 되어 옥의 티 같은 저 산물을 싹 걷어냈으면 좋겠다.


▲  연미정을 품은 월곶돈대

▲  월곶돈대 암문(暗門)
돈대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이다.

▲  월곶돈대 암문 안쪽
암문 바깥쪽은 동그란 홍예로, 안쪽은
네모나게 문을 지었다.


 

♠ 강화10경의 하나로 오랫동안 찬양을 받았던 경승지이자 월곶돈대의 얼굴
연미정(燕尾亭)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4호

월곶돈대 정상에는 이곳의 얼굴이자 나를 여기로 소환한 연미정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한강과 강화해협이 쿨하게 만나는 현장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한 줄기는 바로 서해로,
른 줄기는 강화해협을 이루며 남쪽으로 흐르니 그 모습이 마치 제비 꼬리와 같다하여 연미정
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연미정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귀신도 모르나 고려 23대 군주인 고종(高宗)이 구재(九齋)의 학
생들을 여기에 모아놓고 공부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고려 중기에 뿌리를 내린 것으
로 짐작된다.
이후 폐허가 된 것을 조선 중종이 다시 지어 황형에게 하사했다고 전하며, 황형은 이 일대에
집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그 인연으로 현재 연미정은 그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이 조선의 외교 정책에 격하게 불만을 품으며 압록강
을 건너 황해도까지 침공하자 이에 염통이 쫄깃해진 조선은 급하게 강화를 요구했다. 그래서
바로 이곳 연미정에서 후금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후 병자호란(1636~1637) 때 후금(後金)
서 청()으로 나라 간판을 바꾼 청나라군이 강화도를 점령하면서 정자 상당수가 파손되었다.

1744년 강화유수 김시혁이 월곶돈대를 손질하면서 연미정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891년 조동
(趙東冕)이 다시 중수했으며, 1931년 유군성(劉君星)이 보수했다. 허나 6.25전쟁으로 서남
쪽 모서리 기둥이 세 동강이 나는 등, 무거운 상처를 입은 것을 중수했으며 이때 세 동강 난
기둥은 붙여서 다시 세웠다.
1976년 강화도 국방유적을 복원하면서 현재와 같이 재생되었는데, 처음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하던 베이지색으로 기둥을 떡칠했으나 이후 색을 제거해 자연스런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서남쪽을 바라보고 선 연미정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 10개의 기둥을 돌기
둥 위에 얹힌 민도리집이다. 월곶돈대 꼭대기에 서 있어 자연히 장대(將臺)의 역할을 했으며,
정자 뒷쪽에는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병풍을 이루고 있다.

지금이야 앞바다가 금지된 바다로 묶여 오가는 배도 없는 실정이지만, 구한말까지만 해도 서
해바다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배는 연미정 밑에서 만조를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들어갔다. 그러
니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고려와 상업이 한참 성장하던 조선 후기, 연미정 주변은 대단했을 것
이다. 특히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는 흐름이 보일 정도로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며 여기서 즐
기는 달맞이는 강화10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곳이건만 남북분단이라는 가혹한 시련이 그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고, 그마
저도 철저히 금지된 곳으로 묶여 오랫동안 외롭게 남아있다가 2008년에 비로소 해방되어 자유
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달맞이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주변 해변은 여전히 금
지된 곳으로 묶여 있어 출입이 어렵다. 이 땅이 통일되는 그때 나머지도 그 빗장이 열릴 것이
.


▲  연미정과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

연미정 뒷쪽에는 겨울 제국에서 영혼까지 털린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이들은 약 510
년 묵은 것들로 2000년에 강화군 보호수 4-9-58호, 4-9-59호로 지정되었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
그들은 높이 약 22m, 둘레 4.5m4.2m로 그 장대한 나이를 거슬러 가면 황형이 이곳에 머물
던 시절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니 그가 심었던 나무가 아닐까 싶다. 연미정과 월곶돈대를 쭉
지켜온 살아있는 증인으로 연미정의 풍치를 더욱 살찌워주는 역할도 했다. 비록 겨울이라 감
흥은 덜해도 늦봄이나 여름, 늦가을에 왔다면 한층 아름다웠을 것이다.

▲  연미정의 뒷모습

▲  연미정 현판의 위엄


▲  연미정 부근의 조그만 비석
비석 피부에는 '고 공신 장무공 황형 택(故 功臣 莊武公 黃衡宅)' 이라 쓰여 있다.
즉 황형이 이곳에 살던 것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다.

▲  연미정 부근에 놓인 주춧돌 3개
옛 연미정의 주춧돌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받쳐들 존재를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고적한 월곶돈대 내부 (연미정 남쪽)

▲  북한을 향하고 있는 월곶돈대 (연미정 동북쪽)

▲  월곶돈대 서북쪽과 월곶리 해변

▲  텅 비어있는 월곶돈대 포대
옛날에는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빈 자리만 허전하게 남아있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김포 문수산
강화해협 너머로 보이는 곳은 다행히도 출입이 가능한 김포 지역이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한강과 유도(留島, 가운데 섬)

안개로 흐릿한 한강에 조촐하게 떠있는 섬이 유도이다. 오랫동안 민통선에 묶인 금지된 섬으
로 옛날에 섬이 떠내려오다가 여기에 머물렀다고 해서 머무루섬이라 불렸다.
남북분단으로 인간의 발길이 끊긴 그곳에는 저어새를 비롯한 철새와 야생 동식물이 살아가고
있으며, 2008년 야생동식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북한 개성 땅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다 안개가 아주 극성이었다. 그래서 시야는 절망 수준, 그렇게 보고
싶었던 북한 땅은 한 치도 보이질 않는다. 날씨가 좋아야 바다 너머 지역이 바라보이는데 이
땅에 내려진 저주, 남북분단의 아픔을 애써 지우고 싶었는지 하늘이 안개로 바다 너머 땅을
잠시 지운 모양이다.
차라리 저 너머는 그냥 망망대해였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아쉽지나 않지. 문제는 그 너머가 금
지된 땅이라는 것. 요즘은 달나라는 물론 우주도 가는 세상이라는데, 저 너머 땅은 그 우주보
다도 가기가 힘들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월곶리 검문소와 월곶리 지역
월곶리 검문소는 신분증이 없으면 통과하기 힘든 전방의 까다로운 검문소 중
하나이다. 그러니 저곳을 지날 때는 꼭 신분증을 지참해야 뒷탈이 없다.


※ 연미정, 월곶돈대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강화읍(강화터미널)까지
* 신촌로터리(2호선 신촌역 1번 출구), 홍대입구역(2호선/경의중앙선/공항전철) 중앙차로 정
  류장, 합정역(2/6호선)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3000번 좌석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 5호선 송정역(1,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88, 3000번을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 부평역(서울1호선/인천1호선) 정류장, 부평구청역(서울7호선/인천1호선, 1번 출구 밖),
  1호선 경인교대입구역(1번 출구)에서 김포 90번 이용
* 인천2호선 마전역(1번 출구)에서 70, 700-1, 90번 이용
* 3호선 백석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96번 이용

현지교통
* 강화터미널에서 강화군내버스 10번을 타고 연미정 하차 (113회 운행)
승용차 (연미정 밑에 주차장 있음)
* 서울 -> 김포한강로/강화 방면 48번 국도 -> 통진 -> 강화대교 -> 강화읍 수협4거리에서 우
  회전 -> 연미정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


 

♠  남북분단이 빚은 서글픈 산물, 강화평화전망대(제적봉 평화전망대)

▲  강화도 최북단에 자리한 강화평화전망대

연미정을 둘러보니 어느덧 14시가 넘었다.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그렇게 소원하던 북한 땅
을 하늘의 방해로 살피지 못한 아쉬움이 컸던지 강화평화전망대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래
서 그곳을 가기로 했지. 허나 군내버스로 가려면 강화읍내에서 강제 환승을 해야 되고 더군다
나 연미정은 버스가 별로 없어 가기가 좀 우울하다. 그래서 후배의 쿨한 지원에 힘입어 택시
를 소환하여 가기로 했다.

연미정 주차장에 있는 콜택시 번호로 택시를 부르니 10분 뒤 택시가 나타나 입을 벌린다.
것을 잡아타고 강화도의 북쪽 들판을 신나게 가로질러 당산리검문소에 이른다. 당산리(堂山里
)와 평화전망대가 있는 철산리는 엄연한 민통선 구역이라 검문이 좀 까다로우며 반드시 신분
증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신분증만 있으면 통과됨)
설연휴로 통일전망대를 찾은 차량의 행렬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었는데 우리 차례가 되자 택
시 운전사는 동네 사람을 태우고 간다며 군인에게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군인은 검문도 하지
않고 쿨하게 통과시켜주었다. 일반 차량은 신분증 검사를 철저히 하지만 택시는 지역 사람들
을 주로 태우고 다니는지라 그렇게 해주는 모양이다. 어쨌든 신선한 충격을 간직하며 당산리
와 철산리를 지나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했다. 택시 요금은 16천원 정도 나왔다.


▲  강화평화전망대 입구 (왼쪽이 평화전망대, 오른쪽은 인화리,
교동도 방면)

▲  강화평화전망대의 옆모습

강화도 최북단인 제적봉(制赤峰) 정상에 강화제적봉 평화전망대(강화평화전망대)가 웅크리고
있다. 제적봉이란 '붉은 것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붉은 것은 북한을 일컫는다.

원래 제적봉은 김포(金浦) 애기봉에게 씌우려던 반공 스타일의 봉우리 이름이었다. 1966년 공
정식 제6대 해병대사령관이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박정희 전대통령이 애기봉을 방문해
그곳에 서린 애기 전설을 전해듣고는 애기봉으로 할 것을 지시하여 그 이름을 지키게 되었다.
그래서 강화와 김포 지역 전방의 여러 봉우리를 상대로 제적봉 후보감을 물색하다가 해병대가
있는 철산리 언덕을 제적봉으로 삼았다. 이를 기리고자 그의 측근인 김종필이 '제적봉' 비석
글씨를 남기며 명명식(命名式)을 거행했다.

이후 40여 년 뒤, 제적봉에 강화평화전망대를 지어 200895일 문을 열었다. 그 역시 북
한 이 바라보이는 적당한 곳에 세우는 통일전망대의 일종으로 가장 최근에 지어진 통일전망대
이다. 허나 아무리 그런 전망대에서 통일을 염원하며 북녘을 뚫어지라 바라본들, 그림의 떡이
. 분단의 한은 더해가기만 한다. 이건 어찌된 것이 통일은 커녕 분단만 더욱 고착화되고 있
으니 말이다. 그러니 남북분단이 빚은 서글픈 산물이라고나 할까? 그리 유쾌한 현장은 아니다.

여기는 다른 전망대와 달리 바다를 앞에 두고 있고<고성(高城) 통일전망대는 바다를 옆에 끼
고 있음>, 그 바다 너머로 북녘을 바라볼 수 있는데 북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바로 가까이
에서 구경할 수 있는 전망대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북한 땅까지 불과 2.3km에 불과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실제로 바다 너머 그들의 모습이 간간히 보인다. 국경을 지키는 군인, 농사를
짓는 마을 사람들, 학교에 가는 학생 등, 허나 그것도 날씨가 좋고 운이 좋아야 보이는 것이
지 보통은 보기 힘들다.

바다 너머 지역은 황해북도 개성 지역으로 날씨가 좋으면 예성강(禮成江) 포구도 시야에 잡힌
. 허나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안개가 지독해 북한 땅은 아주 흐릿하게 시야에 잡혔다. 그래서
전망대에 전시된 북녘 촬영 사진으로 그 아쉬움을 대신할 수 밖에 없었다.

전망대의 규모는 지하 1, 지상 4층으로 지하층은 군부대 전용시설이 있어 출입이 어렵고, 1
층에는 통일염원소와 휴게실, 식당, 기념품 매장이, 2층은 전시관과 전망대, 3층은 북한땅 조
망대와 옥외전망대가 있다.
바깥에는 망배단이 설치되어 실향민들의 한을 어루만지고 있으며, 군부대에서 기증받은 오래
된 전차와 제적봉 비석, 임진왜란 초기인 15928월에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이 황해도
연백에서 왜군을 크게 때려잡은 것을 기리고자 세운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등이 자리를 채
우고 있다.
연성대첩비는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모정리에 있으나 거기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강화도에 정
착하면서 양사면 연화리에 편강렬(片康烈) 의사 충렬비와 함께 세워 기리던 것을 20098
19일 이곳으로 옮겼다.

▲  1966년에 지어진 제적봉 비석
제적봉 3자는 김종필의 친필이다.

▲  편강렬 의사 충렬비(왼쪽)와
연성대첩비


▲  전망대 1층 통일염원소

통일염원소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남북통
일을 염원하며 한 글자씩 남긴 종이가 한 공간
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토록 이 땅의 민중들은 통일을 바라고 있지
만 이 땅과 북한의 더러운 권력층 작자들은 이
를 크게 바라지 않는다. 말로만 통일, 통일을
외칠 뿐, 뒤에서는 서로를 이용하며 그들의 권
력유지와 욕심 채우기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통일염원소에 글을 남긴들 딱히
소용이 없다. 결국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가게
되니 말이다.

 

◀  통일염원소를 가득 메운 민중들의
메아리


▲  2014년 여름과 가을에 이곳에서 담은 북녘 땅 사진

▲  3층 북한땅 조망실(건물 내부)에서 바라본 북한 개성 땅 ①
여기서 북한 땅까지는 겨우 2.3km이다. 날이 좋으면 저 너머가 훤히
두 눈에 들어올텐데 안개의 방해로 겨우 해안만 시야에 들어온다.

▲  3층 북한땅 조망실(건물 내부)에서 바라본 북한 개성 땅 ②

▲  3층 북한땅 조망실에 있는 개성 지역 조감도
밑부분 빨간 표시가 있는 곳이 강화평화전망대이다.

▲  북한에서 제작된 개성, 김포, 강화도 지역 지도

▲  2층에 전시된 6.25전쟁의 상징물, 녹슨 철모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흐릿하게 다가오는 개성 땅 ①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흐릿하게 다가오는 개성 땅 ②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흐릿하게 다가오는 개성 땅 ③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 (서북쪽 방향)
바다 안개 너머로 개성 땅과 예성강이 있다. 벽란도(碧瀾渡)를 품은 그 예성강이라..?
말로만 듣던 그 현장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렌다.

▲  3층 옥외전망대에 설치된 500원짜리 망원경
안개를 뚫고 북녘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500원을 넣어 잠든 망원경의 혼을 불러 모은다.
망원경의 시력이 더 좋은 탓에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바다 너머 땅도 썩 신통치 않게 보인다.

▲  북녘 실향민(失鄕民)을 위한 망배단(望拜壇)
망배단은 통일전망대의 필수 요소로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거나 북쪽에 둔
가족을 향해 인사를 하는 실향민들이 적지 않다.

▲  망배단에서 바라본 북녘 개성 땅
실향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강과 임진강이 합동으로 쏟아놓은
바닷물은 유유히 서해로 흘러갈 뿐이다.

▲  강화평화전망대의 귀염둥이(?) 전차
1971년 미국에서 생산된 전차로 길이 7.94m, 높이 3.12m, 폭 3.2m, 무게 23톤이다.
해병대에서 사용한 상륙돌격장갑차로 1975년부터 절찬리에 쓰였다가 2004년 국산
장갑차에게 자리를 넘기고 은퇴, 이곳에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노후를 보낸다.


이렇게 강화평화전망대를 둘러보고 매점에서 간단하게 간식을 사먹었다. 이곳은 북한 땅이 바
라보인다는 이유로 입장료도 비싸고, 간식이나 음식도 바깥보다 조금 더해진 가격을 받아먹는
. 민간도 아니고 강화군청에서 운영하는 공영인데 적당히좀 먹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통일
전망대 같은 것이 뭐 그리 자랑이란 말인가? 이 땅의 우울한 산물이거늘. 나중에 정말 통일이
된다면 우후죽순 들어선 통일전망대부터 싹 정리하고 상징적인 몇 개만 남겨 분단의 기념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평화전망대 입구로 나와서 강화읍내로 가는 강화군내버스 2번을 잡아타고 읍내로 나왔다.
님은 벌써 칼퇴근을 하여 천하는 어둑어둑해진 상태, 이럴 때는 그저 얌전하게 집으로 돌아가
는 것이 진리이다. 이렇게 하여 설연휴 강화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강화평화전망대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 강화읍까지 교통편은 앞의 연미정 참조
* 강화터미널에서 강화군내버스 1(19), 26(16)을 타고 평화전망대 하차, 도보
  5
* 승용차 (반드시 신분증 지참 요망) : 서울 김포한강로/강화 방면 48번 국도 통진
  강화대교 강화읍 송해3거리 당산리검문소 (검문을 거쳐 출입통제증을 받아야 됨)
  강화평화전망대

★ 강화평화전망대 관람정보 (2018년 6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2,500(20인 이상 단체 2,200) / 청소년과 군인 1,700(20인 이상 단
  1,500) / 어린이 1,000(20인 이상 단체 800) / 유아와 노인은 무료
* 관람시간 : 9~18(12~2월은 17시까지) 연중무휴, 주차비 없음
* 전망대 해설시간 : 1011, 1220, 13, 14, 15, 16
* 민통선 구역이라 자전거와 오토바이, 도보 접근은 불가하다. (무조건 군내버스나 관광버스,
  승용차, 택시로 가야 됨), 그리고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하기 바란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11-12 (전망대로 797 ☎ 032-930-7062)
* 강화평화전망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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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8년 6월 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8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강화 석모도 보문사 (외포리, 낙가산, 눈썹바위 마애불)


' 서울에서 가까운 그림 같은 섬, 그리고 그림 같은 산사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
보문사 마애석불좌상 (눈썹바위)
▲ 보문사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



 

봄이 슬슬 기지개를 켜던 4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강화도(江華島) 서쪽에 자리한 석모도
보문사를 찾았다. 원래는 강화도 1박 2일 여행으로 토요일 낮에 가서 일요일 오후에 오는
일정이나 나는 개인 사정으로 토요일에 같이 가지 않고 일요일 아침 일찍 새벽 이슬을 맞
으며 완전 후발대로 그들이 있는 강화도 황청리로 넘어갔다.

내가 서식하는 서울 도봉동(道峰洞)에서 황청리(외포리 서북쪽 동네)까지 그 장대한 거리
를 대중교통에 의지하여 9시 정도에 황청리 종점에 이르렀다. 그들이 머물던 펜션은 종점
바로 뒷쪽 언덕에서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어 찾기는 쉬웠다.
펜션에 들어서니 몇몇은 해장술이란 명목으로 아침부터 곡차(穀茶)를 걸치고 있었고 대부
분은 안에서 아침을 먹거나 TV를 보고 있었다. 물론 전날 밤샘의 위엄으로 아직도 깨어나
지 못한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침을 먹으면서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몸을 쉬게 했다.
11시가 넘자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석모도로 가고자 외포리(外浦里)로 이동을 했다. 일행
들 차량 6대 중 1대만 외포리에 두고 나머지 5대에 나눠 타서 석모도로 넘어갔는데, 일요
일이라 석모도 나들이 수요가 상당하여 외포리는 그야말로 시장통을 이루었다.

외포리와 석모도(석포리)를 오가는 여객선은 휴일 만선(滿船)의 기쁨을 톡톡히 누리며 수
시로 두 곳을 악착같이 이어준다. 이 여객선은 소형차량은 물론 대형버스, 화물차에 이르
기까지 수송이 가능하여 나들이객들이 가져온 차량을 꾸역꾸역 넣어 섬으로 보낸다.
사람이야 아무리 미어터져도 배 1척에 거의 다 실을 수 있지만 차량들은 수송능력에 한계
가 있고 섬으로 가려는 차량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어 40분 정도를 기다린 끝에야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배가 크긴 해도 차량 10대 정도 들어가면 꽉 찰 것이라 생각했는데 공간
이란 공간을 다 활용하여 차량을 구겨넣으니 거의 30대 정도 실은 듯 싶었다.
사람들은 차에 있거나 2층 객실에 있으면 되며, 석모도까지는 소리를 지르면 흔쾌히 들릴
정도로 가까워 불과 10분이면 도착한다.


 

♠ 석모도(席毛島)와 보문사 입문

▲ 외포리 포구와 잠시 작별을 고하다.

사람과 차량을 가득 머금은 배는 미련 없이 포구를 출발했다. 이렇게 보면 한반도에서 섬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화도도 엄연한 섬이므로 섬에서 섬으로의 이동이다. 다만 강화도가
2개의 다리로 한반도와 너무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보니 착각하기가 쉽다.

포구 주변에는 서해바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갯벌이 진하게 펼쳐져 여러 생명들이 삶을 의지
하고 있다. 서해바다의 보물이라 일컬어지는 갯벌은 기후 변화와 인간들의 무분별한 개발의 칼
질로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형편으로 강화도 지역 갯벌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세계적 희귀종인
저어새(가리새)가 서식하고 있어 지구에서 매우 우수한 갯뻘로 추앙을 받고 있다. 하여 강화도
를 비롯하여 석모도, 볼음도(乶音島) 지역의 갯벌을 한 덩어리로 묶어 천연기념물 419호로 삼
았으며 단일 문화유산 지정 구역으로는 이 땅에서 가장 넓다.
(면적은 약 1억 3,600만평,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강화갯벌 및 저어새번식지')


▲ 조금씩 멀어져가는 강화도, 그리고 시야를 어지럽히는 갈매기들

배가 출발하니 인근 갯벌에서 망을 보던 구공(鷗公, 갈매기)들이 몰려와 배를 포위한다. 날카
롭게 끼룩끼룩거리며 통행세를 요구하니 사람들은 준비해 온 새우깡을 던지며 그들을 달랜다.
허나 구공들이 입맛들이 변했는지 아니면 배가 불러터졌는지, 아니면 둔해졌는지 좀처럼 새우
깡을 잡지 못했다. 바다에는 그렇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떨어진 새우깡이 두둥실 무리를
이루며 떠있었다.


▲ 어느 양이(攘夷) 여인이 팔을 뻗어 새우깡으로 구공을 유혹하지만
낯설은 피부색 탓인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 통행세를 요구하며 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구공들

▲ 하늘이 온통 구공들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거니는 그들이 그저 부러울 뿐~~ ▼

외포리를 출발한지 겨우 10분 만에 석모도의 관문인 석포리 포구에 닻을 내린다. 배로 이동한
구간이 강화도와 석모도, 교동도(喬桐島) 등에 빙 둘러싸여 있어 마치 소양호, 대청호(大淸湖)
등의 너른 호수를 건넌 기분이다.
배에 담긴 사람과 차량들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쏟아져 나오면서 석포리 포구는 다시 활기를 되
찾고 강화도로 나가려는 사람과 차량들이 그들의 빈 자리를 메우면서 배는 왕복으로 만선의 기
쁨을 재현한다. 아마도 그날 여객선 회사는 소고기 회식을 거창하게 했을 것이다.

석포리에서 보문사까지는 잘 닦여진 2차선 도로를 따라 차량으로 10~15분 정도 들어가야 된다.
보문사에 이르니 주차장은 그야말로 초만원. 간신히 공간을 찾아 바퀴를 접고 보문사로 올라갈
준비를 한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는 여타 관광지와 비슷하게 보문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주막촌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들 주막은 나물튀김과 동동주를 미끼로 호객행위를 벌인다. 덕분
에 튀김과 동동주 몇 잔을 무료로 챙겨 마시며 배를 조금이나마 채운다.


▲ 보문사 일주문(一柱門)

보문사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일주문을 거쳐야 된다. 일주문 옆에는 별로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고, 문 앞에는 매표소 사람이 철통같이 입장권을 검
사하고 있다. 예전 2004년에 왔을 때는 입장료가 1,500원이었는데, 지금은 10년의 무게가 억지
로 더해져 무려 2,000원씩이나 뜯는다.
후덜덜한 입장료 앞에 경악하며 단체 할인을 요구하였으나 적정 인원(30명)이 안된다며 거절당
했다. 우리 일행은 딱 20명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 구워삶아 단체 할
인으로 표를 끊고 일주문을 들어선다.

일주문 현판에는 '낙가산 보문사(洛迦山 普門寺)'라 쓰여 있는데, 이는 서예가로 명성이 높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27~2007)의 글씨이다.


▲ 은행나무 옆에 자리한 보문사 사적비(事蹟碑)

일주문을 들어서면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길의 경사가 급해진다. 허나 그렇게 긴 거리는 아니므
로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길을 2분 정도 오르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보문사가 조금씩
모습을 끄집어내고, 담장에 둘러싸인 보문사 사적비와 거대한 은행나무가 먼저 마중을 나온다.

◀ 보문사 은행나무 - 강화군 보호수 4-9-63호

사적비 옆에 자리한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00
년에 이른다. 겨울이 저 멀리 물러가고 봄이 왔
건만 아직도 겨울의 망령에 사로잡혀 허우적거
리고 있다. 하루 빨리 파릇파릇한 은행잎을 펼
쳐보여야 될텐데 몸이 마음처럼 잘 따라주지를
못하니 보는 입장에서도 좀 안따까울 따름이다.
나무의 높이는 약 20m, 둘레는 3m에 이르며 보
문사의 정성과 아무리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세
월을 양분으로 삼아 어엿하게 성장했다.

은행나무를 지나면 천하 3대 관음성지로 명성이
자자한 보문사 경내에 이른다. 그럼 여기서 잠
시 보문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의 하나, 서해바다를 품은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석모도의 중심을 이루는 낙가산(洛迦山) 서쪽 자락, 서해바다가 잘 바라보이는 곳에 보문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보문사의 보문(普門)은 중생을 구제하려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보살행(菩薩行)이 크고 변함
이 없다는 뜻으로 동해바다의 낙산사(洛山寺), 남해바다의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과 더불
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절은 635년 회정대사(懷正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금강산(金剛山)에서 도를 닦고 강
화도 지역으로 들어와 보문사와 마니산(摩尼山)에 정수사(淨水寺)를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 당
시 강화도와 석모도는 고구려(高句麗)와 신라의 팽팽한 접경 지역으로 절을 지을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창건 이후 무려 1,100년 이상의 공백기가 있어 창건 시기에 대해 강하게
회의감을 품게 한다. 물론 관련 기록이나 유물도 없다.
다만 전국에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창건되거나 경내에 600~700년 묵은
향나무가 있어 적어도 고려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절을 지은 이는 창건설화에 나오
는 회정(懷正)으로 보인다. 그는 석모도 어민들과 섬을 좌지우지하는 세력가, 부호(富豪)들의
지원으로 절을 세운 듯 싶으며 지역 어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도우며 공
존하고 있다.

절이 창건된 이후 18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이 전해오지 않으며, 180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
소 발자국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1800년 선방(禪房)을 조성해 한영 등 여러 승려가 수행을 했
으며, 1812년 유생 홍봉장의 지원을 받아 절을 중창했다.
1867년 경산이 석굴이 나한전을 지었고, 1893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지원으로 관음전과 객실
을 지었다. 1919년 보경이 관음후불탱, 신중탱, 칠성탱, 산신탱, 현왕탱을 제작해 봉안했으며,
1920년 대원이 관음전법당(극락보전)을 중건했다. 그리고 1928년 주지 배선주가 금강산 표훈사
의 이화응과 함께 경내 뒷쪽 눈썹바위에 그 유명한 마애관음보살을 조성해 절의 듬직한 명물로
삼았다.
1935년 나한전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58년 나한전 석굴을 손질하고 1972년 관음전을 중건했
다. 1982년 동각이 석실을 확장해 여러 성상(聖像)을 봉안했으며, 1987년부터 18년 동안 와불
조성 공사를 벌여 2005년 5월 완공을 보았다. 1996년 관음전을 중창해 극락보전으로 이름을 갈
았고, 2006년 5월부터 3년 동안 오백나한을 조성하는 등 새로운 볼거리를 계속 추가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선방, 석실, 삼성각, 와불전 등 10동 정도의 건물
이 있으며 석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마애석불좌상과
석실, 맷돌, 향나무 등 지방문화재 4점을 품고 있으며, 은행나무와 향나무 등 수백 년 묵은 나
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운다.

보문사는 관음성지의 명성에다가 석실 나한상의 영험, 배를 타고 가야되는 섬 산자락에 있다는
특성, 바다가 가깝다는 매력과 서해 일몰지, 서울과 가깝다는 잇점으로 1960년 이후 수도권의
명소를 뛰어 넘어 천하 명소로 성장했으며, 강화도에 오면 꼭 들려야 직성이 풀리는 국민관광
지가 되었다. 이렇듯 석모도의 든든한 후광이자 꿀단지로 보문사가 없는 석모도는 순대가 없는
순대국밥이나 다름이 없다. 그만큼 석모도에서 보문사의 위치는 90%를 먹고 들어간다.

바다를 겯드릴 수 있는 수도권 당일 나들이 코스로 명성이 자자하며, 바다를 바라보는 이 땅에
서 몇 안되는 절로 조망 또한 일품이다.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찾아와 안기고 싶
은 절로 관음보살의 인자함과 시원스런 조망이 속세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잠시나마 보듬어 줄
것이다.
참고로 이곳은 관음성지 외에도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도 명성이 높다. 석실에 봉안된 18인의
나한상은 영험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관련 전설이 몇 개나 전해온다.

※ 석모도 보문사 찾아가기 (2016년 7월 기준)
① 수도권에서 강화읍(강화터미널)까지
* 신촌역(2호선/1,4번 출구) 정류장과 홍대입구역(2호선, 경의중앙선, 공항전철/2번 출구) 중
앙차로 정류장, 합정역(2,6호선/5,10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3000번 좌석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종점 하차
* 5호선 송정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88, 3000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마두역(4번 출구), 3호선 백석역(4번 출구)에서 96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대화역(4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뒷쪽)에서 97번 시내버스를 타고 장기4거리 이후 아
무 정류장에서 강화행 시내버스로 환승 (88, 96, 3000, 90, 800번 등)
* 부평역(1호선, 인천1호선) 국민은행 앞 정류장과 부평구청역(7호선, 인천1호선/1번 출구)에
서 90번 시내버스 이용
* 인천종합터미널 건너편이나 인천터미널역(인천1호선/1번 출구), 인천시청역(인천1호선/3번
출구)에서 800번 좌석버스 이용
② 강화도에서 보문사까지
* 강화터미널에서 외포리행 군내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외포리터미널에서 도보 3분)에서 석모도행 여객선이 30분 간격으로
다니며, 주말과 휴일, 피서철에는 10~20분 내외 간격으로 오간다. 마지막 배는 3~11월은 21
시, 12~2월은 19시 정도이며 차량 수송도 가능하다. (문의 삼보해운 ☎ 032-932-6007)
* 석모도 선착장에서 보문사까지 마을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다니며, 주말과 휴일, 피서철에
는 20~30분 간격으로 증회 운행한다.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서울 → 48번 국도 → 강화터미널 → 인산3거리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 → 여객선 승선
→ 석모도 석포리 → 보문사
* 인천 → 검단 → 대곶 → 강화초지대교 → 온수리 → 화도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 → 여
객선 승선 → 석모도 석포리 → 보문사

★ 보문사 관람정보 (2016년 7월 기준)
* 입장료 : 일반 2,000원(30인 이상 단체 1,600원) / 청소년 1,500원(단체 1,200원) / 어린이
1,200원 (단체 800원)
* 주차비 : 대형 5,000원 / 소형 2,000원 (문의 ☎ 032-933-8271)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삼산남로 828번길 ☎ 032-933-8271~3)
* 보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경내에서 바라본 낙가산, 하얀 바위가 뭉쳐있는 곳에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이 있다.


 

♠ 보문사 경내 둘러보기

▲ 보문사 와불전(臥佛殿)

경내로 들어서면 범종각과 와불전, 500나한상 등이 제일 먼저 중생을 맞는다. 범종각(梵鍾閣)
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가 담긴 사물(四物)의 보금자리로 범종과 운판(雲版), 법고
(法鼓), 목어(木魚) 등이 자리를 메운다.
와불전과 오백나한(五百羅漢)은 2006년 이후에 닦여진 보문사의 새로운 명물로 와불전에는 말
그대로 누워있는 부처가 봉안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와불전의 존재를 몰라 내부를 살피지 못
했지. 그런 와불전 옆에는 하얀 피부의 500나한이 그들의 스승 부처를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있는데, 그들의 표정이 우리나라 5,000만 인구 만큼이나 가지각색이라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 새롭게 만든 500나한상과 3층석탑

▲ 극락보전에 바라본 와불전(오른쪽)과 오백나한(왼쪽)

▲ 보문사 석실(石室)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7호

보문사에는 유명한 존재가 2개가 있으니 하나는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석실이다.
이 석실은 나한상을 봉안한 공간으로 나한전(羅漢殿)으로 불리기도 한다. 649년 회정대사가 어
부들이 바다에서 건진 나한상(羅漢像)을 봉안하고자 만들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으며, 1812년
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67년(고종 4년)에 경산(京山)
이 보수했으며, 1958년 춘성(春城)이 석굴 내부를 확장, 개수했고, 1980년에 정수(靜守)가 내
부를 확장하고 불단 뒤와 옆에 석탱화를 조성했다.

우리나라의 몇 안되는 석굴사원(石窟寺院)으로 바위 밑에 난 천연동굴을 개조하여 만들었는데,
'1⌒1⌒1⌒1'모양의 3개의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30평 크기로 넓게 자리를 닦아 18나한
과 석가불, 미륵불, 제화갈라보살, 송자관음보살, 관음보살 등을 봉안했다.


▲ 석실을 가득 메운 중생들

석실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 보문사 측에서 649년이라 주장하는 어느 멀고 먼 옛날, 석모도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나갔다.
바다에 쳐놓은 그물이 평소와는 달리 꽤 무거운지라 이거 큰 것이 잡혔구나 싶어 즐거운 마음
에 힘껏 당겨보니 왠걸 이상한 괴석(怪石) 22개가 걸려든 것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사람 모습
과 비슷했다.
어부들은 기이한 석상에 허탈해하며 죄다 바다에 내던지고 다른 곳에 가서 고기를 잡았다. 허
나 거기서도 그 석상들이 그대로 걸려들었다. 어부들은 매우 놀라 그들을 바다에 내던지고 육
지로 돌아가 버렸다.

그날 밤, 어부들은 비슷한 시간에 같은 꿈을 꾸었다. 그들 꿈에 노승(老僧)이 나타나
'우리는 서천축국(인도)에서 왔다. 나와 함께 22명의 성인(聖人)이 돌배를 타고 여기까지 왔는
데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 속에 잠수해 있다가 그대들의 그물을 따라 올라왔더니 2번 씩이나 우
리를 버렸더구나. 우리는 부처의 법문과 중생의 복락(福樂)을 성취하는 길을 전하러 온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명산으로 안내해주길 바란다. 그러면 그대들의 후손까지 길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며 어부들을 인도해 보문사 앞 석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이곳
에 쉬게 해달라고 당부를 하고는 바다로 사라졌다.

어부들은 이른 아침 바다로 나와 간밤의 꿈 이야기를 나누니 글쎄 다들 같은 꿈을 꾼 것이 아
닌가? 보통 일이 아닌 듯 싶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끌고 석상을 버린 곳으로 달려
가 그물을 치니 그 석상들이 고스란히 나왔다.
어부들은 그 석상을 가지고 보문사로 가져와 꿈에서 본 석굴에 봉안했다. (또는 석상을 낙가산
으로 옮겼는데 보문사 석굴 앞에서 그들이 갑자기 무거워져 꼼짝도 하지 않자 그 석굴에 봉안
했다고 함)
석굴에서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내음이 진동했는데, 누가 다듬은 듯 석상이 앉을 좌대
(座臺)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석상을 앉히니 신비한 기운이 가득찬 듯 하였고 마을 사
람들은 일제히 그들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어부들은 그 공로로 후손들까지 잘먹고 잘살았다
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이들 나한상은 바다에서 발견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종종 불상이나 옛 사
람들의 물건이 바다나 강 속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운반이나 약
탈을 당하는 과정에서 배가 침몰하여 바다에 버려진 것을 석모도 어부가 우연히 발견하여 보문
사에 봉안한 것으로 보이며, 보문사가 해상세력 또는 석모도 어부를 위한 사찰임을 은연중 내
비추는 것 같다. 또한 근래 절에서 나한상의 석질을 조사했더니 우리나라 화강암이 아닌 인도
에서 산출되는 돌로 밝혀졌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다.

석실 내부는 마침 단체 예불 중이라 들어가지 않았다. 하여 나한의 자세한 모습까지는 확인을
하지 못했지. 그리고 나한상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하나 덧붙여 전해오니 내
용은 대략 이렇다. 아마도 나한도량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지어낸 이야기로 여겨진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동짓날, 보문사 승려들은 팥죽을 만들어 불공을 드리고자 이른 아침
부터 서둘렀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궁이에는 불이 없었고, 불을 일으킬만한 어떠한 도구도 없
어서 도저히 팥죽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보문사 아래에 살던 고씨의 집에 보문사 동자승(童子僧)이 성냥을 구하기 위해 추
운 날씨에 맨발로 찾아왔다. 고씨는 그 동승을 불쌍히 여기고 따뜻한 방으로 데려와 팥죽을 한
그릇 먹이고 성냥을 보내주었다.
몇 시간 뒤 보문사 부엌 아궁이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리면서 승려들은 신이 났고 서둘러 팥죽
을 지어 불공을 올리고 맛있게 공양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보문사 주지승이 고씨 집에 갔다. 고씨가 주지에게
'저번 동짓날. 어른 승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어린 동자승을 보냈습니까?'
주지승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네? 동자승이라니요? 우리 절에는 동자승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불씨를 얻어오라고 시키지도 않았구요'

그 말에 고씨는 발끈하여 '스님들이 거짓말도 하시오? 절에 불씨가 꺼져서 팥죽 공양을 못하게
되자 불씨를 얻으러 왔다고 했어요~~!'

고씨 집에서 돌아온 주지승은 승려들에게 고씨의 말을 전하면서 그 동자승의 정체가 과연 무엇
일까 곰곰히 생각하던 중, 우연히 석실에 들어가보았다. 그러니 왠걸 석실 한쪽 구석 나한상의
입에 팥죽이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승려들은 나한의 은혜에 감복하여 더욱 열심히 정진
했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도 동짓날이 되면 팥을 가지고 절로 올라와 팔죽을 쑤어 올리고 기도
를 했다고 한다. 그 일이 100년 동안 연례 행사처럼 계속되고 있다.


▲ 보문사 향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17호

석실 바로 앞에는 푸른 내음을 자랑하는 오래된 향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석실 나한상의 법력(
法力)을 받아서 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서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 용트림을 하는 듯한 모습으
로 그의 나이는 약 600~7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문사가 최소 600년은 넘었음을 보
여주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겨우 3.2mㄹ로 바위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렸으며, 6.25전쟁 때 폭격으로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3년 뒤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생명력 하나는 정말 끈질기다.


▲ 보문사 맷돌 - 인천 지방민속문화재 1호

향나무 앞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큰 맷돌이 놓여 있다. 여기서 어처구니는 맷돌을 돌리는 손잡
이를 말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을 돌리지를 못한다. 그래서 기가 막힐 때 사용하는 '어
처구니가 없다'
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보문사 승려들이 불공과 공양(供養)에 쓸 음식을 만들 때 사용했던 이 맷돌은 조선 후기에 화
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지름 69cm, 두께 20cm이며, 웃돌과 아랫돌이 잘 남아 있다. 지금은 현
대화된 조리기구에 제대로 밀려나 이렇게 손잡이를 잃은 채, 돌절구 등과 한가로이 남은 여생
을 보내고 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현역에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다.


▲ 맷돌 옆에 놓인 돌절구
조선 후기부터 쓰인 보문사의 음식 조리 도구로 지금은 전시/관상용이 되어
향나무 주변을 수식한다.

▲ 석실과 극락보전 사이에 들어앉은 삼성각(三聖閣)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1960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4평도 안되는 작은 건물이었다.

▲ 삼성각에 봉안된 불화들
왼쪽부터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으로 모두 1992년에 제작되었다.

▲ 보문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은 보문사의 법당으로 원래는 대웅전이었다.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하여 관음보살과 옥(玉)으로 조성된 조그만 3,000불이 봉안되어 장엄함
을 더해주고 있다.


▲ 극락보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과 3천불의 위엄

▲ 'ㄱ'자 모습의 요사(寮舍)
보문사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종무소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요사 건너편에 자리한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바다를 바라보며 자리한 오백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나한을 위한 공간은
이미 석실과 야외 500나한상이 있는데 그걸로도 모자른 것일까? 오백나한전까지
지어 올려 3대 관음성지 외에 나한도량 성지의 인지도를 더욱 견고히 했다.


 

♠ 보문사의 상징,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

▲ 오색영롱한 연등이 계단을 오르는 중생들을 격려하고 인도한다.

극락보전 옆구리에는 눈썹바위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펼쳐져 있다. 눈썹바
위와 마애석불좌상은 보문사에서 꼭 봐야되는 이곳의 얼굴로 오르기 귀찮다고 통과하는 사람들
도 종종 있는데, 이는 천지(天池)를 안보는 백두산(白頭山) 관광과 같다. 계단길이 좀 가파르
긴 해도 보문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누리고 있는 존재인만큼 꼭 올라가 보는 것이 보문사에 대
한 예의가 될 것이다.

경내에서 눈썹바위까지는 108계단도 아닌 418계단이 이어져 있다. 왜 418계단인지는 모르겠다.
오르는 길이 좀 각박해 보여도 노공(老公)들도 거뜬히 오를 정도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
이 있듯이 열심히 길을 임하면 눈썹바위 마애불이 반가이 맞이해 줄 것이다. 또한 그 앞에 훤
히 펼쳐진 서해바다는 근심덩어리로 꽉 막힌 가슴과 머리를 시원하게 트이게 할 것이다.


▲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9호

418계단 끝에 이르면 기이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거대
한 마애석불좌상이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환하게 맞이한다. 불상이 있는
바위 위쪽에는 특이하게도 암석이 눈썹처럼 앞으로 돌출되어 약 90년 동안 마애불의 우산 역할
을 해주니 덕분에 석불의 건강은 여전히 청신호이다.

이 석불은 1928년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주지였던 이화응(李華應)과 당시 보문사의 주지인 배
선주(裵善周)가 관음성지의 명성을 견고히 다지고자 의기투합하여 조성한 것으로 나이는 고작
90년 정도 밖에 안된 팔팔한 석불이다. 어둠의 시절 당시에 조성된 여러 불상 중 하나이자 가
장 규모가 큰 석불로 그의 얼굴을 보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조금은 우울해 보이
는데, 이는 1920년대 어둠의 시기를 살아야 했던 중생들의 근심어린 얼굴을 모델로 한 듯 싶다.

마애불의 정체는 관음보살로 소원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높아 바위 아래 기도처에 시주를 하려
는 사람들로 넘쳐나며, 불상 앞에 닦여진 예불장소에도 언제나 중생들로 가득하다. 게다가 서
해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어 그 풍경에 나도 모르게 매료되고 만다. 여기서 바라보는 낙조
(落照)는 김제 망해사(望海寺), 변산 월명암(月明庵)의 낙조와 버금갈 정도로 그 찬란함을 자
랑한다.

눈썹처럼 삐죽 나온 암석과 그 밑에 관음보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대자연은 저곳에 저런
멋드러진 바위를 만들었고, 20세기 초반 이 땅의 인간들은 관음보살상을 조성하여 자연과 인간
의 합작품 눈썹바위 마애불이 탄생하게 되었다. 보면 볼 수록 눈썹바위의 모습은 신기하여 절
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마애불의 높이는 약 9.2m, 폭은 약 3,3m이다. 앙련(仰蓮)으로 구성된 대좌(臺座) 위에 선정인(
禪定印)을 하며 앉아 있으며, 선정인 아래 다리는 옷에 덮여 있는 방식으로 처리했는데 현실감
이 조금은 떨어지는 것 같다. 다만 못생긴 발바닥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저 석불이 결가부좌(
結跏趺坐)로 앉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며 가슴 부분에는 특이하게도 '卍'마크가 새겨져 있어 참 이채롭
다. 둥근널쩍한 그의 얼굴은 시름에 잠긴 듯, 별로 유쾌한 인상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손 위에
는 조그만 정병(政柄)이 하나 놓여져 있으니 이는 관음보살이 좋아하는 감로수(甘露水) 병으로
물방울이 들어가기도 버겨울 정도로 정병의 크기가 너무 작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이마 가운데에는 백호가 찍혀 있고, 지그시 감은 눈, 커
다란 코, 입술, 풍만해 보이는 얼굴살, 그리고 해학적 분위기의 길쭉한 귀가 있다.

석불의 우산 역할을 하는 눈썹바위에 바다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암석 아래에 무지개 모양처럼
돋음새김이 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손길이 미친 흔적들로 무엇을 새길려고 했는지
는 잘 모르겠다. 그를 더 장엄하게 연출하고자 저곳까지 손을 댄 모험까지 감행했던 것 같다.


▲ 관음보살 옆에 새겨진 바위글씨

불상 옆에는 '造佛華應禪師'라 쓰여 있으니 즉 앞에서 언급했던 이화응 선사가 조성했음을 알
려주고 있으며, 오른쪽 글씨에는 '華嚴會上八部四王衆(화엄회상필부사왕중), 南無華嚴會上欲色
諸天衆(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 華嚴會上護法善(화엄회상호법선신중)이라 쓰여 있다.


▲ 마애석불좌상에서 바라본 천하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마애관음보살)을 둘러보고 3배를 하려고 했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향만 키고 왔다. 내려가는 길에도 눈썹바위를 향한 사람들의 물결은 여전하다.

절을 등지고 주막촌으로 내려가다가 어느 적당한 주막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런 데 와서
파전에 도토리묵도 먹어줘야 되지만 아침을 많이 먹은 탓에 간단히 산채비빔밥과 동동주로 마
무리했다.
점심을 먹으니 식곤증이 살짝 등을 두드리며 한숨 주무시라고 부추긴다. 서비스로 제공되는 커
피를 마시며 식곤증의 압박을 덜면서 잠깐이지만 석모도 보문사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시간이 시간인만큼 석포리 포구까지 가는 길은 썩 순탄치 않았다. 포구 1km를 앞두고 섬을 나
가려는 차량들로 대도시 못지 않은 극심한 정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1km가 마치 1,000km
로 마냥 늘어진 듯, 강화도로 나가는 배에 오르기까지 무려 2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 시간이
얼마나 따분하던지 속히 이곳을 탈출하기를 희망하며 잠을 억지로 청했다. 다행히 잠이 금방
와주어 기다림의 시간을 좀 덜어주었다.
허나 한참을 잔 듯 싶은데 겨우 100m 이동.. 배 2~3척이 대박 쾌재를 부르며 바깥으로 나가는
차량과 사람을 열심히 실어나르지만 힘에 겨워 보인다. 그렇게 간신히 배에 올라 멀어져 가는
석모도와 작별을 고하며, 10여 분의 짧은 항해를 마치고 외포리로 돌아왔다. 지금은 비록 배로
왕래하지만 석모도를 한반도에 더욱 단단히 묶어두고자 한참 연륙교 공사가 진행중이다. 2017
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때가 되면 더 이상 불편하게 배의 신세를 질 필요는 없게 된다.
여객선 회사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말이다.

정말 번개처럼 날아가 짧지만 재미지게 보냈던 그날 하루,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사람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긴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석모
도 보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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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강화도 나들이 (봉천산 주변, 강화읍내)

 


' 강화도 역사기행 (봉천산 주변, 강화읍내) '
강화 장정리5층석탑
▲  강화 장정리 5층석탑


강화군 하점면에 자리한 봉천산(奉天山, 291m)은 이름 그대로 하늘에 제를 올리던 곳이다. 산
정상에 고려 때 축조되어 제천의식을 거행하던 봉천대(奉天臺)가 남아있으며, 그 주변에 하음
산성(河陰山城)이 희미하게 남아 바다를 굽어본다. 산 남쪽에는 고려의 불교유산인 장정리5층
석탑과 석조여래좌상이 숨쉬고 있으며, 하음봉씨(河陰奉氏)의 시조설화가 전해지고 있어 하음
봉씨들이 특별히 옆구리에 끼며 의지하는 정신적인 고향이기도 하다.

이번에 봉천산에서 문을 두드린 곳은 장정리5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이다. 논두렁 연꽃의 현장
인 선원사(禪源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약간 여유가 있어 강
화읍내와 가까운 그곳을 찾은 것이다. 봉천대까지 오르고 싶었지만 날이 짙게 드리워져 더 이
상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강화터미널에서 하점면 방면으로 가는 강화군내버스를 타고 하점우체국에서 내리니 석탑과 석
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그의 안내로 골목길을 들어서면 바로 하점성당이 나
오고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석탑을 원한다면 왼쪽 길로 600m를 가면 되고 석불을 원한
다면 오른쪽 길로 900m를 가면 된다. 서로 가까운 위치에 자리해 있지만 각각 가는 길이 달라
서 어느 한곳을 먼저 보고 다시 이곳으로 나와 다른 곳을 가야 되는 까다로운 구조이다. 우선
은 거리가 먼 석불부터 보기로 했는데, 성당 기준으로 왕복 1.8km에 이른다.

석불까진 이정표가 친절히 베풀어져 있고 수레가 편히 바퀴를 굴리게끔 조그만 길이 포장되어
있어 찾는데 그리 어려운 것은 없다. 고요함에 잠긴 잔골마을을 지나면 산내음이 가득 깃들여
진 봉천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되고, 끝이 없어 보이는 길을 정신 없이 따라가면 그 길의 끝에
주차장이 나오면서 왼편에 담에 둘러싸인 기와집이 나온다. 바로 장정리 석조여래좌상의 보금
자리이다.


♠  하음봉씨에서 시조를 키운 할머니를 위해 만들었다는 고려시대 불상
장정리 석조여래입상(長井里 石造如來立像)
- 보물 615호

▲  석상각(石像閣) 안에 봉안된 석조여래입상

봉천산 밑에 자리한 장정리 석조여래입상(예전에는 봉천산 석조여래입상, 하점면 석조여래입상
이라 불림)은 석상각(石像閣)이란 맞배지붕 보호각 안에 소중히 담겨져 있다. 보호각은 하음봉
씨 집안에서 만든 것으로 보호각의 뒷면은 벽으로 막혀있고, 3면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못하
게 붉은 창살로 주변을 단단히 둘렀다. 외딴 곳에 자리해 관리가 어려운 석불의 보호를 위해 보
호각을 지었지만 철장에 갇혀 자유를 그리며 날개짓을 하는 새처럼, 좀 답답하게 다가온다. 최
소 앞쪽은 트게 해주어 그의 면전에 향을 피우고 예불을 올리게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

석상각을 지키는 돌담은 사람 키 정도의 높이로 정갈하게 쌓여져 있으며, 남쪽에 석불로 다가서
는 조그만 문이 있다. 돌담에 둘러싸인 석상각은 불상의 보금자리라기 보다는 당집 분위기가 진
하게 풍겨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중생들에게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나' 착각에 들게 만든다.

▲  둥글게 차려진 돌담 안에 석상각이 있다.

▲  맞배지붕의 석상각


▲  석불의 머리 부분

이 석불은 두꺼운 화강암 판석(板石)에 돋음새김으로 새겨진 것으로 얼핏보면 바위에 진하게 새
겨진 마애불(磨崖佛)로도 보인다. 높이는 2.8m이다.
민머리 스타일의 머리 위쪽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 있다. 홍예처럼 살
짝 구부러진 눈썹 밑에 살며시 뜬 눈은 오랜 세월 힙겹게 살아온 듯, 다소 흐리멍텅해 보인다.
세모 모양의 코는 불상의 코를 노린 어리석은 속인(俗人)들의 의해 평탄하게 깎아져 흔적만 남
아 세월의 상처를 여실히 드러낸다. 입술은 굳게 다물고 있는데 전체적인 인상은 조금 인상을
지은 표정 같다.
두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진 않았으나 중생들의 울부짖음을 듣기 위함일까? 토끼처럼 길다. 목에
는 삼도가 획 그어져 있으며, 얼굴 뒤로 2줄의 동그란 두광(頭光)이 그를 빛나게 수식한다.

불상의 어깨는 좀 좁은 편으로 다소 움츠려 든
모습이며, 어깨를 감싼 옷은 두껍게 표현되어
마치 추운 겨울을 인내하는 불상으로 보인다.
U자형의 옷주름은 가슴에서 무릎 부분까지 흘러
내리는데, 간략하게 처리했으며, 오른손은 허리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왼손은 가
슴 앞에 대고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다. 불상 주
위로 2줄의 신광(身光)으로 몸을 환하게 꾸미며
, 2줄 사이로 드문드문 둥근 구슬을 새겨 넣었
다. 광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있다.

평판적이고 선으로 조각된 경향이 강한 불상으
로 단순화, 생략화 되는 점은 시대가 내려가는
것을 말해준다고 한다. 도드라진 얼굴과 짧은
목, 움츠린 어깨, 형식적인 옷주름은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장정리 석조여래입상은 하음봉씨 집안과 인연이 깊다. 전설에 따르면 하음봉씨 시조인 봉우(奉
佑)의 5대손인 봉천우(奉天佑)가 정승에 오르면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자 봉은사(奉恩寺)를 짓
고, 시조 봉우를 거둬서 기른 할머니를 위해 그들 집안의 성지(聖地)인 봉천산에 5층석탑과 이
석불을 만들어 매년 제를 올렸다고 전한다.

※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찾아가기 (2012년 8월 기준)
* 5호선 송정역(1번 출구), 9호선 염창역(2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강화행 88번 시내버스
  와 3000번 좌석버스 이용
* 2호선 신촌역(1번 출구는 현대백화점 가변 정류장, 4번 출구는 신촌역 가변 정류장), 2호선/
  공항철도 홍대입구역(2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3000번 좌석버스 이용
* 인천터미널(인천1호선 인천터미널역 1번 출구)에서 70, 700, 800번 버스 이용 (800번이 제일
  빠름)
* 1호선 동암역(2번 출구)에서 700번 버스, 1호선/인천1호선 부평역과 부평시장역(인천 1호선,
  2번 출구)에서 90번 시내버스 이용
* 일산 대화역(3호선/1,3번 출구 중간)과 마두역(3호선) 중앙차로 정류장, 백석역(3호선) 중앙
  차로 정류장에서 96번 시내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이나 강화군청 하차
* 강화터미널 내부와 강화군청에서 강화군내버스 1, 23번을 타고 석조여래입상에서 하차, 도보
  7~8분, 강화 1번은 60~120분 간격으로 다니며, 시간이 안맞으면 하점면 경유 창후리, 외포리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하점우체국에서 내리면 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석불까지 이정표가 잘 되어있으며, 차량 접근 가능)

① 서울 → 김포 → 강화대교 → 강화읍내 → 강화지석묘 →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② 서울, 인천 → 양곡 → 초지대교 건너서 우회전 → 해안도로 → 강화역사관 → 강화읍내 →
   강화지석묘 →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22


▲  석불을 보고 나오는 길에 바라본 고려산(高麗山)


♠  이름없는 절터를 홀로 지키는 고독한 석탑
강화 장정리 5층석탑
- 보물 10호

석조여래입상을 둘러보고 다시 하점성당으로 나와 석탑을 알리는 우측길로 들어가면 녹음이 깃
들여진 길 끝자락에 장정리5층석탑(예전에는 하점면5층석탑이라 불렸음)이라 불리며 살아가는
조촐한 석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솔내음이 자욱한 소나무 숲속에 홀로 자리한 고독한 탑으로 산새의 노래소리와 바람의 소리만이
탑 주변에 서린 적막을 조심스레 건드릴 뿐이다. 앞의 석불과 마찬가지로 봉천산에 안긴 소중한
보물로 탑 아래까지 조그만 포장길이 놓여 있고, 작은 주차장과 화장실이 준비되어 답사객의 편
의를 제공한다.

이름도 없고 흔적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절터를 홀로 지키는 이 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
로 하음봉씨 집안에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자 세웠다는 봉은사(奉恩寺)가 있었다고 전하나 확
인할 길은 없다. 탑 주변에는 주춧돌만 약간 있을 뿐, 절터의 규모와 가람(伽藍) 구조는 알 수
없다. 탑의 이름은 탑이 있는 장정리의 이름을 막연히 딴 것이다.


▲  고독을 즐기는 장정리 5층석탑
별 꾸밈이 없는 조촐한 모습에 은근히 정감이 간다.


탑은 1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형태로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것을 1960
년에 수습하여 다시 세웠다. 허나 옥개석의 귀퉁이가 많이 깨졌고, 3층과 4층은 탑신이 없어지
고 옥개석(屋蓋石)만 남아있으며, 5층과 머리장식은 아예 형체도 없이 사라진 상태라 보는 이의
마음을 안스럽게 한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세월의 무정한 장난이 탑을 그 지경으로 만
든 것이다. 역시 인간이 만든 것은 그들 앞에선 일개 장난감도 되지 못한다.
1층 탑신은 2개의 돌을 다듬어서 맞춘 것이며, 2층 탑신은 1층에 비해 크기가 지나치게 줄어 비
례감을 크게 떨어뜨린다. 옥개석의 추녀는 탑이 무너지면서 깨져버려 추녀마루의 치켜오른 정도
를 알 수 없다.

탑에 별다른 장식이 없어 볼품은 좀 떨어지지만 수수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없어지고 훼손된 부
분이 많고 전체적인 균형이 많이 떨어지며 육중한 느낌을 주어 보물 10호란 자리가 과분해 보이
기도 한다. 그리고 탑의 모습이 보물 5호의 지위에서 지방문화재로 떨어진 안양(安養)에 있는
중초사지(中初寺址) 3층석탑과도 좀 비슷해 보인다.

※ 장정리5층석탑 찾아가기 (2012년 8월 기준)
* 교통편은 앞의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참조
* 승용차로 갈 경우 (장정리에서 석탑까지 이정표가 잘 되어있으며, 차량 접근 가능)
① 서울 → 김포 → 강화읍내 → 강화지석묘 → 하점우체국 우회전 → 장정리5층석탑
② 서울, 인천 → 양곡 → 초지대교 건너서 우회전 → 해안도로 → 강화역사관 → 강화읍내 →
   강화지석묘 → 하점우체국 우회전 → 장정리5층석탑

* 석탑에서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봉천산 정상이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93


♠  고려의 대몽(對蒙)항쟁 의지가 굳게 담겨진 38년 강도(江都)의 중심지
강화 고려궁터(高麗宮址) -
사적 133호

▲  잡초만 가득한 고려궁터

▲  고려궁터 외규장각(外奎章閣)

강화도의 서울인 강화읍내 북쪽 야트막한 산자락에 옛 고려궁터가 읍내를 바라보고 있다. 13세
기 중반, 천하의 패자를 꿈꾸며 주변 나라를 거침없이 사냥한 몽골(몽고)은 고려에게 자신들의
천하(天下)에 들어올 것을 요구한다. 안그래도 몽고가 시덥지 않던 고려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
했다.
그러다가 1231년 몽고사신 저고여 일행이 압록강(鴨綠江) 부근에서 피살된 사건으로 몽고는 고
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고려 vs 몽고의 38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시작되었다.
 
고려의 실권자이자 최씨정권의 2번 째 우두머리인 최우(崔瑀, 최충헌의 장자)는 몽고와 전쟁을
선언하고 1232년 6월, 고종(高宗)에게 강화도로의 천도를 상주(上奏)한다. 그래서 왕실과 관리
들, 백성들 모두 반강제로 끌고가 개경(開京)을 버리고 급히 강화도로 천도하게 된다.

최우는 이 기회에 강화도를 임시가 아닌 새로운 도읍으로 삼을 생각으로 강화도를 강도(江都)라
하였으며, 그 규모를 개경에 걸맞게 하고자 백성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강도 건설을
추진하였다. 우선 내성(內城)을 쌓고 그 안에 궁궐과 사찰, 사직단(社稷壇), 태묘(太廟, 종묘)
등을 큰 규모로 건립하여 1234년 궁궐이 완성되었다.
궁궐의 정문은 개경 궁궐과 마찬가지로 승평문(昇平門)이라 하고, 양쪽으로 누각(樓閣) 형태의
문 2개를 달았으며, 동쪽에 광화문(光化門)을 두고, 궁궐 뒤쪽 산을 송악산(松嶽山)이라 했다.
그리고 내성(內城)이 완공되자, 곧바로 외성(外城)을 축성했다.

전쟁이 예상외로 길어지자 1259년 비상용으로 마니산 부근에 흥왕이궁(興王離宮)을 세우고 정족
산(鼎足山)과 선원사 부근에 행궁(行宮)을 지었으며, 부처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은 생각에 선원
사(禪源寺)를 건립하고 한국 불교문화의 정수인 '8만대장경'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허나 그정도
로 몽고의 파상적인 공격을 잠재울 순 없었다.

고종의 뒤를 이어 재위에 오른 원종(元宗)은 더 이상 전쟁이 무모하다고 판단하여 1270년 몽고
와 화의(和議)를 맺고 38년에 걸친 전쟁을 종결시킨다. 화의를 맺은 후에도 몽고는 40년씩이나
자신들에게 대항한 고려의 저력이 두려운지 개경으로 완전히 환도(還都)할 것과 강화도의 궁궐
을 모조리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30여 년 동안 정들었던 강도의 왕궁이 모두 철거되면
서 강도 시대는 그 끝을 맺는다. 허나 적군에 의해 강제로 불탄 것이 아닌 비록 몽고의 요구에
따른 것이긴 해도 고려 정부가 자체적으로 허문 것이니 험한 꼴을 무수히 당했던 조선시대보다
는 그나마 낫다.

고려궁터가 아비지옥의 치욕스러운 꼴을 당한 것은 동아시아의 호구국가나 다름없던 약소국 조
선시대에 일이다. 그것도 외침(外侵)으로 1번도 아닌 2번씩이나 말이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
反正)으로 재위에 오른 무능한 인조와 그를 옹립한 서인패거리는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이
곳에 행궁을 지었다. 허나 전쟁준비도 행궁 짓는 선에서 끝난지라 정작 병자호란(1636~1637년)
때 강화도를 공격한 청나라군에 의해 죄다 잿더미가 되고 만다. 그 이후 그 자리에 강화부 관청
이 들어섰고, 1782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세워 국가의 주요 서적 350권을 보관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강화도를 공격한 프랑스 패거리가 아주 손쉽게 강화부를
점령하면서 외규장각에 있던 직지심경(直指心經) 등의 서적 대부분이 털렸으며, 그것도 모자라
외규장각과 관청 건물 대부분을 불질러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왕실 관련 보물 99점과 서적
5,000권이 어이없이 한줌의 재로 사라지고 만다.


1976년 강화도 전적지 정화사업에 따라 정비되었으며 개경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넓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궁터는 그 일부인 지금의 궁터와 당시 기단(基壇), 돌계단 등이 남아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땅 속에 묻혀 당장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궁터 남쪽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강화부 관청 2동(명위헌, 이방청)과 강화동종(銅鍾), 근래에 복원된 외규장각 등이 대머리처럼
허전한 궁터를 듬성듬성 덮어준다.

※ 고려궁터 찾아가기 (2012년 8월 기준)
* 강화도까지의 교통편은 앞의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참조
* 일산신도시(대화역, 마두역, 백석역)나 김포(고촌, 김포시내, 마송)에서 오는 96번 시내버스
  를 타거나 인천터미널과 동암역(검암역 입구, 검단)에서 700번을 탈 경우 강화군청에서 내려
  왼쪽으로 가면 고려궁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 강화터미널에서 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하점면, 송해면, 외포리 방면 버스)를 타고 강화군
  청에서 하차, 또는 도보로 이동 (강화터미널에서 고려궁터입구까지는 도보 15분, 궁터입구에
  서 고려궁터까지는 도보 7분
* 승용차로 갈 경우
① 서울 → 김포 → 강화대교 → 강화읍내 → 고려궁터
② 서울, 인천 → 양곡 → 초지대교 건너서 우회전 → 해안도로 → 강화역사관 → 강화읍내 →
   고려궁터

★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900원(30인 이상 단체 700원) / 청소년 이하 600원 (30인 이상 단체 500원)
* 고려궁터 앞에 주차장이 있으며, 주차비는 공짜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
* 고려궁터 주변 관광지 - 김상용 순절비, 용흥궁(龍興宮), 강화 성공회성당, 왕자샘, 강
  화산성 북문/서문/남문, 석수문, 연무당터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북문길 42) <☎ 032-930-7078~9>


▲  고려궁터의 정문 승평문(昇平門)

승평문은 옛 고려궁터의 정문으로 개경에 있던 궁궐의 정문 이름을 따왔다. 비록 개경의 그것에
는 훨씬 못미치지만 삼문(三門)으로 다시 태어난 승평문은 마치 제왕이 아래를 바라보듯 작지만
위엄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굽어 본다. 계단을 오를 때는 계단의 좌측 부분을 이용하기 바란다.


▲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의 동헌(東軒)인 명위헌(明威軒)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5호

승평문을 들어서면 길이 2갈래로 갈라지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길쭉한 모습의 명위헌이
나온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고려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강화도를 다스
리던 강화유수(留守)가 집무를 보던 곳으로 건물의 크기를 통해 강화고을의 규모와 위치가 생각
외로 상당했음을 가늠케 한다.

이 건물은 1638년(인조 15년)에 세워졌으며, 1769년에 유수 황경원(黃景源)이 동헌 이름을 현윤
관(顯允館)이라 했다. 1866년 병인양요로 피해를 입어 다시 지었으며, 1976년 고려궁터를 정비
하면서 건물의 기둥을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하는 베이지색으로 모조리 떡칠을 했으나, 그 이후
원래의 색깔로 다시 칠했다.

높다랗게 걸려있는 '명위헌(明威軒)'과 '이관당(以寬堂)' 현판은 18세기 초반의 문장가 윤순(尹
淳)이 쓴 것으로 마치 글씨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으며, 건물의 장대한 규모는 답사객을 압
도하기에 충분하다.


▲  명위헌 중앙 부분
강화유수가 이방(吏房)을 비롯한 여러 하급 관리들을 소환해 고을의 일을
논하는 모습을 재현했다.

▲  명위헌 우측 부분 - 강화유수가 공무(公務)를 보던 방이다.
▲  병인년의 쓰라린 상처를 간직한 외규장각(外奎章閣)
잔디만 무성히 입혀진 황량한 옛 궁터를 외규장각이 보듬고 있다.
 저 건물도 없었다면 그 허전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1753년 강화유수 신사(申思)는 객사 동쪽에 내책고(內冊庫)를 세워 강화부의 서적을 보관했다.
허나 보관할 책은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늘어나고 그 수용능력이 한계점에 이르자 1782년 정조의
왕명에 따라 연초헌(燕超軒)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외규장각을 세워 직지심경을 비롯한 강화도
일대에 전하는 주요 서적과 선원록(璿源錄)을 비롯한 왕실의 주요 서적 및 보물<어필(御筆), 옥
인(玉印), 의궤(儀軌)..)을 옮겨와 보관하였다.
 
1866년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 패거리는 이곳에 있던 서적 297권과 여러 보물들을 말끔히 약탈
하고 외규장각을 비롯한 강화부 소속 관청을 모조리 불질렀는데, 그 과정에서 왕실 관련 보물
99점과 서적 5,000권이 무정하게도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은 것은 2003년
에 새로 지었다.

이곳에 있던 직지심경(直指心經)을 비롯한 서적과 보물은 대부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가 있
다. 1990년대 후반, 김영삼 정권은 고속전철을 만드려는 욕심에 프랑스제 고속전철을 도입하기
로 했는데, 프랑스는 그 대가로 직지심경을 비롯한 병인년에 약탈한 보물을 돌려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허나 신뢰가 안가는 야만족속들이다 보니 겨우‘휘경원소감의궤(徽慶園少監儀軌)’1권
만을
돌려주었을 뿐 아직까지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병인양요 당시 강제로 유출된 보물들은 팔자에도 없는 타국살이를 하며 고향을 그리워할텐데 그
들의 귀국이 과연 언제가 될련지는 장담을 할 수 없다. 그것을 돌려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라
를 부강하게 만들어 프랑스를 아주 통쾌하고 짜릿하게 밟아버리는 것이다. 그때 프랑스의 베르
사유궁전과 개선문, 에펠탑을 말끔히 불지르거나 부셔버리고, 박물관과 온갖 사원도 싹 털어버
리면 좋을텐데, 그만 위치가 안좋아 강대국에 둘러싸여 눈치만 보는 조그만 나라의 더러운 처지
다보니 그 꿈도 참 먼 세상의 이야기 같다. 유감스럽지만 내 세대에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국가간의 약속인 만큼 직지심경이라도 우선 고스란히 돌려주면 좋겠구먼, 역시 프랑스 야만족들
은 매가 약인 것일까? 시대를 잘 타 강대국이 되어 세계 곳곳에 민폐를 끼치며 실컷 해먹었으면
이제는 그 잘못을 뉘우치고 베푸는 모습도 보이기 바란다. 너무 과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곳을 프랑스 떨거지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  강화부종각(江華府鐘閣)


▲  강화동종(江華銅鍾) - 보물 11-8호

궁터 서쪽에는 강화동종(銅鍾)의 보금자리인 종
각(鐘閣)이 있다. 빛바랜 다이어리처럼 소중히
담겨진 이 종은 1711년(숙종 37년) 강화유수 윤
지완(尹趾完)의 시주로 주조된 것으로 사인비구
(思印比丘)가 만든 8개의 동종 중에서 가장 오
래된 것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승려로 손재주가 매우 뛰어
나 장인으로도 크게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천하에 8개의 동종을 남겼는데. 강화동종을 비
롯하여 서울 화계사(華溪寺) 동종, 홍천 수타사
(壽陀寺) 동종, 포항 보경사(寶鏡寺) 동종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 종은 불교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목적
과 달리 강화읍성 성문의 개폐(開閉)를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강화동종은 18세기까지 절찬리에 쓰였던 고려 범종의 양식에서 새로운 조선 후기 양식으로 변화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로띠를 종의 중앙부분에 두른 특이한 형태로 종의 위, 아래를 구
분하였다. 종의 윗부분에는 4개의 유곽(乳廓)을 만들고, 그 안에 연꽃으로 표현된 9개의 유두(
乳頭)를 두었다. 종의 아랫부분에는 긴 문장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그 명문에는 종과
관련된 주요 내용들이 상세히 적혀 있다.

강화읍성이 아비규환이 되었던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패거리들은 이 종까지 군침을 흘리며 물고
가려고 했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도 무거운 탓에 가져가기가 힘들어서 그런 것 같다. 종의 무게는 무려 4톤(3,912kg) 높이는 198
cm, 지름은 138cm로 조선 후기 동종에서 가장 크다. 이 종과 종각은 처음에 남문(南門) 부근에
있던 것을 김상용 순절비 부근으로 옮겼다가 1977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종의 건강상태는 양호하여 종을 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은은한 종소리에 내 귀와 마음을 맡
겼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타종은 통제되어 있다. 종각으로 들어가는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조차 없다.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은 '사인비구 제작 동종 - 강화동종'으로 현재는 하점면 강화지석묘 서쪽
에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에 가 있다.


▲  강화유수부 이방청(吏房廳)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6호

종각 남쪽에 자리한 이방청은 법과 군무(軍務)를 제외한 대부분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관청이
다. 1654년(효종 5년) 강화유수 정세규(鄭世規)가 세웠으며, 1783년(정조 7년) 강화유수 김노진
(金魯鎭)이 청사 내부를 보수하고 건물 이름을 괘홀당(掛忽堂)이라 하였다. 왜정 이후 1972년까
지 강화군 등기소로 쓰이다가 1974년 기와를 손질 했으며, 1977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ㄷ' 형태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온돌방 8칸, 마루방 12칸, 부엌 1칸 등 총 21칸의 커다란 집
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서 잠시 아픈 다리를 쉬게할 수 있다. 건물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으
며. 그저 텅 빈 방만이 즐비할 뿐. 적막만이 한없이 감돈다. 거기에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서서
히 어둠이 잠기니 거의 폐가처럼 음산함까지 느낄 정도이다.


▲  김상용 순절비(金尙容 殉節碑) - 인천 지방기념물 35호

읍내에서 고려궁터로 가는 길목에 비각 하나가 '잠깐 나좀 보고 가소' 하며 발걸음을 붙잡는다.
앞서 고려궁터에는 40년 몽고 전쟁의 휴유증과 병인양요의 아픈 상처가 있다면 이 비석에는 병
자호란(丙子胡亂)의 가슴 쓰린 상처가 담겨져 있다.

비석의 주인공인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은 안동 김씨로 자는 경택(). 호는 선원()
이다. 1590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검열관(檢閱官)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시절에는 권율(
權慄) 장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승지(承旨)가 되어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 황제에게 굽신거렸으며, 서인(西
人)의 주요 멤버로 대사성(大司成)을 비롯, 여러 외직을 거쳤다. 1623년 서인패거리가 광해군(
光海君)에게 반기를 들며 반란을 일으킨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해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한 자리를 얻었으며,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에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었다.
1630년 나이가 70에 이르러 조정에 사직을 청했으나 인조는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우의
정(右議政)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그는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을 호종하여 급히
강화도로 도망쳤다. 허나 1637년 1월 청나라군이 강화해협을 건너 손쉽게 강화성을 점령해버리
자 그 분함을 삼키지 못하고 남문 문루(門樓)에 화약을 잔뜩 쌓아 불을 질러 자살하고 말았다.

병자호란은 어리석게도 국제정세를 무시하며 청나라(후금)를 배척하고, 임진왜란 때 원군이랍시
고 민폐나 잔뜩 끼친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며 지극한 사대(事大)로 영원
한 명나라의 그늘로 남고자 했던 어리석은 조선 지배층이 일으킨 큰 화이다. '명나라 만세, 후
금 꺼져!!'
를 외쳤으면 후금의 공격에 철저하게 대비라도 해야 되건만 성리학(性理學)에 목숨걸
며 국방을 게을리한 무능한 조선 지배층에게는 그딴 개념도 없었던 것이다. 김상용도 그런 정책
을 지지한 서인 패거리의 일원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음을 죽기
전에 깨닫기나 했을까..?
그 당시로는 흔치 않게 76년씩이나 살았던 인물로 포로가 되기 싫어 자살을 택한 탓에 죽어서도
충신의 대접을 받았다. 인조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선원면에 그의 사당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선원면이란 이름은 그의 호에서 유래됨)

비각에는 현재 비석이 2기가 있는데 왼쪽에 구름무늬가 새겨진 비석이 1700년에 당시 강화유수
였던 김창집(金昌集, 김상용의 종증손)이 세운 것이다. 허나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비석의 건
강이 악화되자 1834년에 7대손인 김매순(金邁淳)이 지붕돌을 얹힌 새 비석을 세우고 옛 비석을
비각 밑에 묻었으며, 1976년 고려궁터 진입로 공사로 비각을 옮길 때 우연히 발견되어 부부처럼
나란히 세워놓게 된 것이다.

~~ 이리하여 강화도 역사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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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향연 속으로 ~ 강화도 선원사 (논두렁 연꽃축제)

' 강화도 선원사(禪源寺) 연꽃 나들이 '
선원사 수련
▲ 선원사 논두렁에 피어난 수련


여름의 제국(帝國)이 절정에 이르는 7월에는 연꽃이 천하를 곱게 수 놓는다. 연꽃의 절정기에
맞쳐 연꽃을 테마로 한 지역축제가 곳곳에서 열리는데, 강화도(江華島)의 선원사 연꽃축제 역
시 그중에 하나이다.

2003년부터 시작된 선원사의 연꽃축제는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하여,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
많은 이들이 찾아오면서 이제는 강화도 굴지의 축제로 굳게 자리매김하였다. 초반에는 논두렁
연꽃축제라 불렸으나 2009년부터 연음식을 테마로 내건 세계연꽃음식축제로 이름을 갈았다.논
두렁에 주렁주렁 피어난 아름다운 연꽃들의 향기가 천하 곳곳을 누비면서 많은 중생을 이곳으
로한없이 유혹한다.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선원사, 강화도로 폭풍처럼 밀려가는 피서객들로 집에서 선원사까지 무
려 4시간 반의 시간을 길거리에 내던져야 했다. 거리는 길게 잡아야 70km 정도인데, 체감거리
는 그 배가 넘는 서울~대전보다 훨씬 멀었던 것이다.

강화도와 한반도 사이를 가르는 강화해협(江華海峽)울 건너 강화도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강
화터미널에서 선원사로 가는 무료셔틀버스를 기다린다. 축제안내문에는 5~10분 간격이라 되어
있는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20여 분을 기다려서야 차를 탈 수 있었다. 그나마 버스
비가 공짜라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논두렁 연꽃의 향기가 그윽한 선원사로 들어선다.

선원사를 지나는 2차선 도로와 주변 농로(農路)는 관광객들이 끌고 온 수레들로 가득하다. 절
에 마땅한 주차장이 없으니 수레들이 도로변을 잔뜩 점거한 것이다. 안그래도 길도 좁은 마당
에 도로 양쪽으로 수레들이 주인을 기다리며 바퀴를 놓고 쉬고 있으니 선원면사무소에서 절까
지 들어가는 1km 구간이 여간 짜증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연꽃축제 때마다 되풀이 되
는 것으로 선원사과 강화군청의 적절한 조치가 요구된다.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선원사
의 내력에 대해 간추려보도록 하자.


♠ 팔만대장경을 제조하며 항몽(抗蒙)의 의지를 다진 곳, 폐허 속에서 한 송이의
연꽃처럼 다시 태어난 고려시대 사찰, 선원사(禪源寺)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는 고려시대 사찰인 선원사의 옛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지금의 선원
사는 옛터 아래쪽에 자리해 있는데 발굴 이후 복원된 선원사의 거대한 옛터를본다면정말로 입
이 다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선원사가 세워지던 시기는 고려가 한참 천하 제일의 강국, 몽고와 힘겹게 맞짱을 벌이던 13세기
중반이다. 몽고는 1232년부터 약 40년 동안 6차례에 걸쳐 고려를 공격했는데, 그 시절 고려의
실권자는 최씨정권의 2번째 우두머리인 최우(崔瑀)였다. 최우는 최충헌(崔忠獻)의 맏아들로 몽
고가 바다에 취약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고종(高宗, 재위 1213~1259)을 앞세워 국도(國都)를 강
화도로 옮겼다. <이후로 강화도는 강도(江都)라 불리게 됨> 허나 고려만큼이나 몽고의 공격도
점점 끈질겨지면서 최우는 부처의 힘이라도 빌려볼 요량으로 나라의 재정과 자신의 가산(家産)
을 쏟아부어 1245년 선원사를지었다.

드디어 절이 완성되던 날, 성대한 낙성회(落成會)가 열리고 진명국사(眞明國師)를 비롯한 승려
3천명이 초대되었다고 하니 전시(戰時)에 어울리지않게 얼마나 호화찬란했는지 가히 짐작이
갈 것이다. 이처럼 최우가 어려운 사정에도 대불사(大佛事)를강행한것은 겉으로는 불교의 힘
을 빌려 몽고를 토벌하자는 의도도 있지만 속뜻은 자신의 권력을지키고 과시하기 위함일 것이
다. 강화도 마저 몽고에게 절단이 나면 최씨정권은 그날로 아작나기 때문에 어떻게든 발악을
할 필요가있었던 것. 선원사는 그 발악의 일환으로 세워진것이다.

최우는 친분이 있는 진명국사를절의 주지로앉
혔으며 1246년 고종이 친히 절에 행차하였다.
선원사의 규모는 지금보다 더 광대했으며 강화
도의사찰중 단연 으뜸이었다고 전한다. 거기
에 최씨 정권의 막대한시주로 절에 있는 5백
불상 모두 순금(純金)을입혔다고 하니, 절의
화려함은 가히극치를 이루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바로 이곳에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만들어지고 보관되었다는 것이다.

최우의 지시로 10여 년에 걸쳐 81,000장이 넘는
대장경판(大藏經板)이 만들어졌으며 1398년까지
선원사에서 보관했다. 1290년 충렬왕(忠烈王)은
거란의공격으로 선원사에서 몇달 머문 적이 있
으며 고려가 망할 때까지 고려 정부로부터 막대
한지원을 받으면서 고려 최대의 사찰로 아낌없
는 번영을누렸다.

▲ 절터에서 나온 보상화문전(寶相華紋塼)

조선이 개국되고 1398년 5월, 태조(太祖)의 명
으로 선원사의 대장경판을 모두 서울로옮겼는
데태조가 친히 용산(龍山)까지 나와대장경판
을 맞이했다고 한다. 경판은 곧바로 합천 해인
사(海印寺)로옮겨졌다. 허나 그 이후로 어찌
된 영문인지선원사에 대한 기록은더 이상 나
오지 않는다. 언제 어떻게 법등(法燈)이 꺼졌
는지는 현재로써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주춧돌을 외부에 드러낸
채 황량하게 남아오다가1976년발굴조사가 이
루어졌으며, 1977년 절터가 사적 259호로지정
되기에 이른다.

1993년 절터 아래에 조그만 전각을 세워 600년
동안끊어진 선원사의 유지를 다시 이었으며,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인천광역시의 지원으로
절터를 발굴하여 초석과건물터 등을복원하였
다. 경내에는 2층으로 된 큰법당과 요사 등이
있을 뿐, 아직까지는 절집의 면모를 완전히 갖
추지 못했다.


▲ 선원사의 초대 주지 진명국사의 진영(眞影)

절터 외에 마땅한 매력이 없던 선원사는 논두렁 연꽃축제과 우보살(2010년 구제역으로 살해됨)
을 명물로 내걸며 열심히 동분서주를 벌인 끝에 강화도의 주요 관광지로 연꽃축제는 이 지역의
대표 축제로 성장했으며, 연꽃이 탐스럽게 열리는 여름에는 속인들로 그야말로 발디딜 틈이 없
을 지경이다.

폐허 속에서 한 송이의 연꽃처럼 다시 태어난 선원사, 지금의 선원사는 어디까지나 지금의 모습
일 뿐이다. 600년 전의 모습을 꿈꾸며 계속해서 천천히 복원 불사를 진행하고 있는 선원사는 절
과 속세를 이어주는 도로를 중심으로 서쪽에 절과 절터, 동쪽에 논두렁 연꽃이 자리해 있다.

※ 선원사 찾아가기 (2011년 8월 기준)
* 신촌5거리/신촌현대백화점 중앙차로 정류장(2호선 신촌역 1,4번 출구)에서 강화행 3000번 좌
석버스가 10~15분 간격으로 떠난다.
* 송정역(5호선, 1번 출구)에서 8, 88, 3000번 시내버스 이용
* 인천터미널역(인천1호선, 1,4번 출구 중간)에서 700, 800번 버스 / 동암역(1호선, 2번 출구)
에서 700번 버스 / 부평역, 부평시장에서 90번 버스 이용
* 일산 대화역(3호선, 4번 출구)에서 80번 버스 / 일산 마두역(3호선)과 백석역 중앙차로 정류
장에서 96번 버스 이용 (일산에서는 대화역에서 80번 타는 것이 제일 빠름)
* 강화터미널에서 선원사, 더러미행 12, 13번 군내버스가 1일 12회 운행(휴일 11회)
* 연꽃축제 기간에는 무료셔틀버스가 운행되며
'강화터미널(내부)→선원사→강화역사관주차장→
강화터미널'
을 10~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운행을 안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절에 문의 요망)

* 승용차로 갈 경우

① 서울 → 김포 → 강화대교 → 다리 건너서 강화역사관으로 좌회전 → 해안도로 →선원사 이
정표를보고 우회전 → 선원사
② 서울, 인천 → 양곡 → 초지대교 건너서우회전→ 해안도로 → 선원사 이정표를 보고 좌회
전 →선원사

★ 선원사 관람정보
* 주차공간이 충분치 않으므로 축제기간에는 강화역사관 주차장에 수레를 세우고 가급적 셔틀버
스 이용을 권한다.
* 연꽃음식축제는 보통 매년 7월 말~8월 초에 열리며 다양한 연꽃관련 음식을 맛볼 수 있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692-5 (☎ 032-933-8985)
* 선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누른다.


한참 절정을 누리는 홍련


♠ 선원사 큰법당 주변

▲ 동그란 통 안에 담겨진 앙증맞은 모습의 연잎들
저걸 보며 아비규환의 속세가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절에 생뚱맞게 왠 대포(?)

논두렁 연꽃을 뒤로하고 절 경내로 들어서면 지장보살 부근 우측에 대포가 놓여져 중생의 시선
을 끈다. 선원사를 지키던 대포일까? 아무리장식용이라고는 하지만 부처의 자비를 강조하는 절
에 어찌무시무시한 대포가 있단말인가?다소 생뚱맞을 따름이다. 그도 혹연꽃을 보고자 부근
돈대(墩臺)에서열심히 두 바퀴를 굴려 여기까지온 것은 아닐까? 울산바위처럼 완전히 그 자리
에 정착한 모양이다.


▲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 <2006년 촬영>

대포를 지나면 높다란 연화대(蓮花臺)위에 자리
한 지장보살이 중생을 맞는다. 오른손에는 육환장(六環杖)을 왼손에는 조그만 합(盒)을 쥐어들
며 연꽃의 향기를 따라 동쪽을 지그시 바라본다
.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거리는 연화대에는 사람
들의 사진이 군데군데 보이는데 이는 그들의 극
락왕생을 빌고자 단 것이다.

지장보살 뒤에는 둥그런 석조(石槽)와 윤장대가
나란히 있으며 못생긴 용머리가 뿜어준 옥계수
가 부처의 넉넉한 마음마냥 커다란 석조를 한가
득 채운다. 물은 석조에서에만족하지 않고 아
래 조그만 석조로 떨어지고 거기서 다시 아래로
떨어져 연꽃 논두렁으로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 지장보살상 연화대 아래에 자리한
원숭이들

지장보살상 밑에는 귀여움이 묻어난 4개의 원숭이 조각이 있다. 보살마냥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
위에 서 있는 이들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눈을 가리거나, 귀를 막거나, 두 손을 번쩍 들
며 만세를 외치는 모습이다. 그럼 이들의 자세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냥 눈요기나
하라고 가져다 놓은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우선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말을 하지 말
라는 뜻이다. 악한 말을 할 바에는 차라리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 좋다. 눈을 가린 원숭이는 나
쁜 것을 보지 말란 뜻이며, 귀를 막은 원숭이는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의미다. 끝으로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는 속세에 대한 해탈의 환희를 표현한 것 같다.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를 제외한 원숭이는 속인(俗人)들에게 중요한 충고 3가지를 자세로써 보여
주고 있다. 나쁜 것을 말하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정말 극락처럼 아름다
울텐데 사람은 동물과 신(神) 중간에 위치한 어정쩡한 존재라 좀처럼 지키려고 들질 않는다. 원
숭이의 메세지를 가슴 깊이 새기며 절터로 다가선다.


▲ 언제나 물로 가득한 둥그런 석조


▲ 윤장대(輪藏臺)

불가(佛家)의 최대 사치품으로 일컬어지는 윤장
대는원래는 책을 넣어두던 서고(書庫)라고 한
다. 윤장대를 돌리며 소망을 빌면 그 안에 넣어
둔 불서(佛書)의 내용을 모두 이해한 것과 같다
며 동시에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사람들은
윤장대를 한 바퀴씩 돌려보곤한다. 물론 나도
손잡이를 잡고 열심히 돌렸지. 소원을 빌면서..
영차영차~~

그러면 정말 한 바퀴를 돌리면 불서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그건 당연히 말이
안되지. 하지만 그 어려운 불서를일일이 보고
깨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울뿐더러 옛날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전 인구의 9할을차지하던 시기
였으니 그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과정에
'윤장대를 돌리면 불경을 모두 이해 한 것과
같으며 소망도 이루어진다'
고 하면서 불교의 대
중화를 꾀했던것이다.


▲ 문들이 정신없이 열려있는 선원사 큰법당

선원사의 큰법당은 2층 규모로 아랫층은 유물전시관으로 2층은 법당으로 쓰인다. 법당 주변으로
연분홍 연등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4월초파일 분위기를 진하게 연출한다. 법당 안에는 석가3존불
과 신중도, 고(故)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연꽃축제를 벌일 때는 첫날에
꼭 박대통령 내외에게 추모제를 올리는데 그 이유는 1976년 절터를 발굴하고 절을 일으켜 세웠
을 때 그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라 한다.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며 중생을
바라보는 석가3존불

▲꽉차 보이는 신중도(神衆圖)를 사이에
두고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부인 육영수
(陸英修) 여사의 영정이 나란히 자리한다.


▲ 거대한 돌절구 2기

선원사가 파괴되고, 땅 속에 오랫동안묻혀 있다가 절터를 발굴하면서 다시금빛을 보게 된 돌
절구들.지금은 그저 전시용의 일부로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지만 선원사의 왕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려주는 산증인들이다.


♠ 선원사의 800년 역사와 향기가 담겨진 유물전시관

큰법당 1층에는 선원사 800년 역사의 모든 것이 담겨진 유물전시관이 있다. 전시관에는 절터에
서 출토된 일부 유물이 사람들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으며,전시관 동쪽 구석에는 기념품 가게
가 있는데, 연꽃으로 유명한 절집이라 연잎과 뿌리 등으로 만든 연근차와 차의 티백, 씨앗, 연
꽃 모양의 장식품 등을 팔고 있다.

전시관 내부는 에어컨의 아낌없는 냉풍으로 매우 시원하다. 밖은 거의 33도에 육박하는 찜통..
그래서 그런지 실내로 들어온 사람들은 좀처럼 나갈 줄을 모른다.


▲ 옥등명문(玉燈銘文)
1341년(충혜왕 2년), 삼한국대부인 이씨가 선원사에 시주한 옥으로 만든 등잔(燈盞),
등잔 속에 비친 동그란 존재는 해도 아니고 달도 아닌 천정에 있는 전등이다.
저 고운 옥등을 한번 어루만져봤으면 소원이 없으련만.. 역시 그림의 떡인가 보다.

▲ 어처구니가 없는 맷돌

'어처구니'란 맷돌의 손잡이로 궁궐 건축물이나 성문 추녀에 다는 잡상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맷돌은 절이 파괴될 무렵, 어처구니를 상실한것으로 보이며, 오랫동안 차가운 땅속에 묻혀 있
던 것을 2001년 발굴을 통해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다.

맷돌의 새하얀 피부에는 잎줄기 하나가 화석(化石)마냥 들어앉아 있는데 마치 하얀 눈 속에서
피어난 한줄기 새싹을 보는 것 같다.


▲ 절터에서 발견된 수막새 기와
저 보잘 것 없는 깨진 기와 속에도 한 송이에 아름다운 꽃이 피여 있었다.

▲ 철로 만든 고려시대 발우(鉢盂)

승려들이 식기(食器)로 사용한 발우로 그릇일부가 깨져서 나갔다.발우 옆에는 절터에서 나온
깨진 매병(梅甁)과 잔이 놓여져 서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이웃이 되었다.

▲ 절터에서 나온 청자(靑瓷) 파편들

청자의 나라답게 이곳에서도 많은 청자파편이 나왔다.저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면
정말로화려했을 텐데..비록 깨져버린 조그만 파편이지만 그들에게는아직도 청자의 아름다움
이 물씬 배여 있었다.


▲ 절터에서 출토된 어룡(魚龍)형 장식기와
물고기와 용의 지느러미 모양의 독특한 장식기와가 선원사의 지붕을 덮고 있었다.


♠ 장대한 세월에 묻힌 선원사의 옛터를 거닐다 - 사적 259호

청기와와 어룡기와로 지붕을 수식하며 순금으로 된 5백 불상이 있었다고 하는 선원사, 이제 수
백 년의 기나긴 침묵을 깨고 다시 우리에게 속살을 드러낸 선원사터는 정말 거대하다. 아직 조
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주변 야산과 마을까지 뒤적거린다면 상상 이상의 선원사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파괴의 쓰라린 과정을 거치고 수백 년이 흘러 그 자리에 연꽃으로 다시금 화
려한 창조를 꿈꾼다.

선원사터의 가람배치는 동쪽을 바라보는 동향(東向)으로 회랑 ~ 중문 ~ 금당 ~ 장경각(?) 순으
로 배치되어 있다. 끝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져 제일 위쪽에서는 절터 내부는 물론 연꽃 논두
렁까지 바라보인다.금당 앞에는 으레 세우는 탑의 흔적이 아직 나오질 않아 탑은 없었던 모양
이다.

조그만 선원사 경내와 길 건너편 연꽃 논두렁은 사람들로 만원이나 절터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크게 대조를 보인다. 다들 연꽃과 음식축제에 눈이 어두워 절터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절터는 발굴 결과를 토대로 주춧돌과 계단, 석축 등을 때깔이 좋은 하얀 돌로 복원한 것으로 그
위로그 시절에 맞는 건물만 고증에 맞게 세워준다면 선원사의 부활은 이제 시간문제일것이다.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파괴되었는지 절터는 지금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마도아픈 추
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넓은 절터를 둘러보면서 절의 주요 폐사(廢寺)요인
자연
재해, 화재, 방화, 전쟁
을 하나씩 접목시키며 절이 파괴되던그날의 아비규환을 상상해 본다.


▲ 절터로 들어서는 1번째 계단

2001년 발굴 이후, 복원된 계단으로 높이가 거의 4m에 이른다. 개성 만월대(滿月臺)의 옛 고려
왕궁의 거대한 계단을 축소해 놓은 듯한 모습으로 계단을 오르면 옛 영화로움을 간직한 선원사
의 옛터가 만주벌판처럼 시원스레 펼쳐진다.


▲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2번째 계단)

▲ 우측 회랑(回廊)터 ~ 곱게 입힌 잔디가 예전의 회랑을 대신한다.

▲ 허전함만이 감도는 좌측 회랑터

▲ 금당으로 오르는 3번째 계단
계단 앞에는 조그만 다리가 놓여져 있고, 좌우로 물이 흐르는 수로(水路)가
놓여져 있다.

▲ 금당으로 오르는 3번째 계단 (좌측에서 바라본 모습)

▲ 바로 옆에서 바라본 금당(金堂)터

▲ 우측 윗부분에서 바라본 금당(金堂)터

▲ 제일 위쪽 건물터에서 굽어본 금당터

선원사의 금당은 특이하게 '十'자를 좌우로 길게 부풀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좌우의 길이가 약
15~20m에 이르는 거대한 불전이었다. 마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최씨 정권의 권위를 과시라
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허나 지금은 이렇게 잡초만이 가득하니 그들이내세웠던 권위와 화려함
은 역시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인간의 창조물은 아무리 거대하고 수려해도 자연 앞에서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할 뿐..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같은실수를 되풀이하니 그래
서 사람은 절대로신(神)이 될 수 없는 모양이다.

금당터 가운데에 두툼하게 솟아난 부분에는 부처를모신 불단(佛壇)이 있었다.


▲ 금당터에 놓인 동그란 주춧돌


▲ 금당터 좌측 부분


▲ 금당터 우측 부분

▲ 금당터 우측 부분의 수로

▲ 절터의 가장 위쪽으로 안내하는 4번째 계단

금당보다 더 높은 곳에 그보다 더 중요한 전각이 있었는데, 그 건물의 정체는 8만 대장경을 보
관했던 장경각(藏經閣)으로 여겨진다. 실례로 해인사(海印寺)의 경우에도 법당인 대적광전(大寂
光殿) 위에 8만대장경의 보금자리인 장경판고(藏經板庫)를 두었다.


▲ 장경각터로 여겨지는 건물터

▲ 잔잔한 잡초로 옛터를 따스하게 보듬은 장경각터 우측 부분
2007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여 주춧돌과 건물터를 정리하였다.

선원사터를 비롯한 선원사 경내를 천천히 둘러보고 연꽃축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매불망
그리던 그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얼마나 흥분이 되던지. 나의 두 다리도 그들이 빨리 보고 싶은
듯, 나의 통제를 무시하며 엄청난 속보(速步)로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 간다.


▲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의 일부가 되버린 선원사 우보살

절터 아래에는 특이하게도 소들의 공간인 외양간이 자리해 있다.절에서 이렇게 외양간을 접한
적은 솔직히 처음이라 그저 낯설기만 한데, 그 안에는 우보살, 신우보살, 광양우보살이라불리
는 우공(牛公)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이들이 우보살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과 이곳에 들어오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2003년 어느 날, 선원사 주지 성원은 꿈 속에서 목탁소리를 내는 소를 만났다. 몹시 의아해하면
서 시간을 보내던 중, 전남 곡성(谷城, 경남 고성이란 말도 있음)에서 목탁소리를 내는 소가 있
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래서 바로 그곳으로달려가 소 주인과 협상하여 그 소를 사려고 했으나, 주인이 팔려고 하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몹시 난처해하던 중, 그 옆집에서 목탁소리를 내는 송
아지를 밴 2살짜리 소를 발견하고 아는 승려에게 급히 1,000만원을 빌려 값을 치르고 선원사로
데려와 우보살이란 법명(法名)을 주었다. 그리고 2004년에는 목탁소리를 내는 소 2마리를 데리
고 와 각각 '신우보살','광양우보살'이란 이름을 주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아무 때나 목탁소리를 낼까? 그건 아니다. 사람들이 반말을 하면 꿈쩍도 안하
다가 합장을 하며 존대말을 하면 혀를 입천장에 부딪쳐 목탁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또한 승려가
염불을 외우고 목탁을 치면 그 소리를 따라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불심(佛心)이 상당한
소 같기도 한데 그가 왜 난데없이 목탁소리를 내는지는 소가 이야기를 해주질 않아 그저 기이할
따름이다. 우보살을 2006년 이후 2번이나 친견했으나 그들의 특기인 목탁소리는 아직까지 듣지
도 못했다.

현재 외양간에는 우보살은 없다. 2010년 4월 공포의 구제역이 강화도를 유린하면서 강화도의 수
많은 소들이 인간에게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강제로 죽임을 당했는데, 선원사 우보살 역시 살생
리스트에 오르면서 많은 이들이 그들을 살리고자 발벗고 나섰다. 하지만 4월 12일 광양우보살을
제외한 우보살과 신우보살의 코가 마르면서 입가에 거품이 나는 구제역 증상이 나타났고, 결국
수의과학검역원에서 이들을 모두 죽이기로 결정하고 13일 외양간에서 끌어냈다.
그때 소들이 완강히 저항을 하여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하는데, 보다 못한 주지 성원이 슬픔을
억누르고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설득을 하니 그제서야 모든 것을 체념하듯 순순히 외양간을 나
섰다. 그리고 뒷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본 성원은
'부처보다 인기가 좋았고, 선원사에 가장 힘이 되는 우보살이었기에 가족을 잃은 마음이다. 동
물로 태어나 할 일을 다 했기에 다음 생애엔 꼭 사람으로 태어나길 기원한다'
애써 슬픔을 감추었으며, 죽은지 49일이 되는 5월 31일에 49재를 지내 그들의 혼을 위로했다.

시골에서 평범한 소로 지내던 그들이 목탁소리 하나로 졸지에 선원사의 명물이 되어 보살의 칭
호까지 받으며, 호사를 누리고 살다가 구제역으로 생을 마감했으나 소나 인간이나 인생은 한줌
의 흙처럼 부질없는 모양이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饗宴)
선원사 논두렁 연꽃

선원사 연꽃 논두렁은 원래 논으로 연꽃의 보금자리로 꾸미면서 연꽃 명승지로 크게 주목을 받
고 있다. 2003년부터 선원사 논두렁 연꽃축제가 시작되어 2009년에는 세계연꽃음식축제로 이름
을 갈았다. 연꽃의 그윽한 향기가 가득 피어오르는 이곳에서는 연을 소재로 한 음식(파전, 국수
, 냉면, 도토리묵, 팔빙수, 아이스크림)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
과 왜국, 스리랑카, 방글라데시의 연음식까지 선보인다. 그 외에 도자기 체험과말타기 체험,
다도 체험 등의 여러 체험코너와 공연단과유명 트롯트 가수들의 축하공연, 레크레이션 등의 행
사가 축제기간 내내 계속 이어져 선원사와 조용하던 시골마을 지산리가오랜만에 활기를 띈다.

놀라운 자정능력을 가진 연꽃은 중생을 구하고 세상을 아름다운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만들고자
하는 부처의 마음이자 그의 화신이다.
연꽃은 아침에 보는 것이 제일 아름답다고 하는데, 1박을
하지 않는 이상은 이른 아침에 여기까지 오기는 힘들다. 수많은 사람과 연꽃으로 복잡하게 뒤엉
킨 연꽃 축제장. 그럼 지금부터 연꽃축제의 주인공. 연꽃들의 즐거운 향연을 감상해보자.


연꽃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들 - 촛불을 켜라, 연꽃이 되었구나

연잎에 담겨진 백련

논두렁을 아름답게 수식했을 연꽃들이 하나,둘 고개를 떨구며 사라져 간다. 고개가 꺾여 잎이
흐트러진 어느 백련이 초라한 몰골로 주변 연잎에 마지막 보금자리를 꾸몄다. 화려함이 사라진
그들의 마지막 모습에 숨쉬며 사는 것에 대한 부질없음이 진하게 다가와 마음이 울적하다.


▲ 논두렁에 두둥실 떠 있는 연꽃잎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걸터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무성하게 자란 논두렁 연꽃잎 ~ 연꽃의 거대한 밀림이다.



▲ 끝없이 펼쳐진 연꽃 논두렁 (2장)

논두렁 사이로 베풀어진 흙길을 거니는 기분은 마치 늪지대 사이를 걷는 기분이랄까..? 선원사
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독특한 길이다.단 길의 폭이 좁아 두 사람이 서로지나갈 경우 자칫 논
두렁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기 바란다.


▲ 승마체험을 즐기는 사람들
말을 타며 연꽃 논두렁을 거니는 기분은 어떨까? 이곳의 승마체험은
조그만 백련 논두렁 2바퀴 도는 것이 전부며 이용료가 거의 1만원이다.


▲ 굳게 입을 다문 백련
인생의 최대 절정기를 누리고 이제 곧 갈 준비를 하는 홍련들.
자신들을 보러 온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변함없이 아름다운 모습을 선사해 보인다.

▲ 어서 꽃잎을 펼쳐보여야 될텐데,
그러나 몸은 그의 마음처럼 잘 따라주질 않는다.

▲ 홍련의 연분홍물결

▲ 연분홍 아름다운 홍련 ~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진 심청이 환생하는 것일까?
보기만 해도 가슴이 콩닥콩닥..

▲ 순백의 백련들

▲ 다소 우울해 보이는 어느 백련
동지들도 하나, 둘 그렇게 지고, 자신도 곧 꽃잎을 접어야 되는 현실에
심기가 편치 않은 모양이다.

▲ 백련과 그 너머로 보이는 먹거리 행사장

▲ 어여쁜 자태를 뽐내는 홍련

▲ 바람에 휘날리며 저물어가는 성하(盛夏)를 아쉬워하는 연꽃들


▲ 논두렁 연꽃 곁에 영원히 머물고파 ~ 석불좌상(石佛坐像)

축제 공연장 서쪽, 논두렁 가운데에 떠 있는 동그란 섬에 6각형의 정자가 있는데 그 안에 조그
만 석불이 연화대(蓮花臺) 위로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다. 더운 여름날 답답한 법당에서
나와 이렇게 밖에 있으니 얼마나 시원할까.? 게다가 아름다운 연꽃들이 바로 곁에서 향기를내
뿜으니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 8월부터 가을까지 연지를 주름잡는 수련(垂蓮)

연꽃 논두렁은 공연 세트장을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북쪽은 백련과 홍
련의보금자리, 그 남쪽은 수련의 보금자리이다.수련은 보통 8월에 피어나 10월까지 서식하며,
오전 10 ~ 12시에 잎을 펼쳐보여 오후 4 ~ 6시에 잎을오므리고 잠을 잔다. 그래서 수련(垂蓮)
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 고운 자태의 청자 찻잔이 떠 있는 듯한 수련
슬슬 고개를 떨구는 홍련과 백련과 달리 수련의 표정은 한없이 밝기만 하다.


▲ 슬슬 전성기를 준비하는 수련

인생의 절정기로 향하는 수련들.. 자신들을 보러 온 사람들을 위해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모습을 선사해 보인다. 그러나 10월이 되면 저들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하나, 둘 쓸쓸히 지고 말겠지.. 다시 내년을 기약하면서..
이렇게 하여 선원사 연꽃여행은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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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11년 8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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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점면5층석탑



















선원사 연꽃































선원사 (선원사터, 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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