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섬'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23.09.03 대한해협에 길쭉하게 깃든 국경의 섬, 부산 대마도 <이즈하라,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아소만>
  2. 2023.01.23 서귀포 서귀포층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제주올레길2코스 겨울 나들이 (새섬공원)
  3. 2021.05.28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신안군의 상큼한 지붕, 압해도 송공산 (송공산둘레길)
  4. 2021.02.19 북녘 황해도가 바라보이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화개산성, 화개약수, 강화나들길9코스,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
  5. 2021.01.18 우주와 은하계를 꿈꾸다.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외나로도)
  6. 2020.09.22 부산에서 가까운 우리의 옛 땅, 대마도 북부 나들이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히타까츠항, 미우다해변, 한국전망대)
  7. 2020.08.16 제주도의 아름다운 서쪽 끝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수월봉 나들이 (차귀도, 산방산탄산온천)
  8. 2020.02.05 아름다운 제주도의 서쪽 끝을 거닐다 ~~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나들이 (차귀도, 와도) 2
  9. 2019.12.30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10. 2019.07.07 민통선에 묶여있는 강화도 옆구리의 커다란 섬, 교동도 여름 나들이 ~~ (교동읍성, 교동향교, 성전약수, 화개사, 강화나들길 9코스)

대한해협에 길쭉하게 깃든 국경의 섬, 부산 대마도 <이즈하라,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아소만>

대마도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 부산 대마도 나들이 '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아소만, 와타즈미신사)

와타즈미신사 앞 도리이
▲  와타즈미신사 앞 도리이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만관교 주변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  만관교 동쪽 미우라만과
여호도(메고시마)


* 대마도의 본토는 우리나라(대한민국)이다. <본글에 나오는 본토는 우리나라를 뜻함>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대한해협에 떠있는 부산 대마도를 찾았다.
대마도는 2004년 가을부터 계속 인연을 노렸으나 태풍이 계속 초를 치면서 인연이 자꾸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해 5월에 이르러 다시 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흔쾌히 도와주어 100% 대마도 상륙 확정이다.

아침 일찍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일행들을 만나 대마도로 가는 오션플라워호(대아
고속해운)에 몸을 실었다. 배는 고요하기 그지 없는 대한해협을 유유히 가로질러 2시간
20분 만에 대마도의 주요 관문인 이즈하라<엄원(嚴原)>항에 우리를 무사히 가져다 주었
다. 드디어 대마도에 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처음 발을 들인 대마도의 첫 느낌은 본토의 어느 섬에 들어온 듯한 무척 낯익은 모습인
데, (완전 '부산광역시 대마군' 같은 기분) 그런 즐거운 흥을 회충처럼 생긴 왜열도 글
자(가나)가 건방지게 깨뜨리려 든다. (가나는 신라가 만든 이두식 글자임)

대마도<왜어(倭語)로 쓰시마, 쯔시마(つしま)>는 5개의 유인도와 102개의 무인도 등 총
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708㎢이다. 남북이 꽤 길쭉하여 제법 큰 섬으
로 다가오는데, 남북 길이가 82km, 동서 길이는 최대 18km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옛 땅의 일부로 조선 후기까지 조선의 동남쪽 끝을 맡고 있었으며, 우
리의 동남쪽 끝이자, 왜국(일본)의 서북쪽 끝으로 그 예민하고 외로운 위치 때문에 '국
경의 섬'이라 불린다.
우리 본토에서도 아주 가까워(부산에서 49~50km) 매우 저렴한 금액과 짧은 시간으로 외
국여행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잇점이 있으며, 그 매력으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
이 많은 편이다. (2017년에 70만 명이 찾았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마도는 우리가 꼭
회복해야될 땅이라는 것이다. (대마도의 역사와 지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음)

첫날은 이즈하라 시내의 여러 명소를 돌아다녔다. 만송각(반쇼가쿠)이란 왜식(倭式) 식
당에서 본토식이 가미된 대마도 토속음식인 이시야키(石燒)와 이리야키(いリやき)로 거
하게 저녁을 먹고, 바다가 바라보이는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아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즈하라에서 둘러본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에서는 둘째 날 오
전에 둘러본 곳만 다루었다.



 

♠  대마도를 2개의 섬으로 나눠버린 만관협곡과 그 협곡에 놓인
만관교(万關橋, 만제키바시)

▲  만관교(만제키바시)

대아호텔에서 대마도의 첫 저녁이자 첫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 햇살의 성화에 부시시 잠에서
깨어나 1층 온천탕(바닷물을 가져와서 끓인 것임)에서 몸을 푹 삶고 1층 식당에서 아침을 먹
었다.
아침은 본토의 밥상보다도 크게 떨어지는 왜식(倭式) 정식을 먹었는데 밥도 그렇고 반찬도 그
렇고 양이 매우 적었다. 하여 식당 직원에게 리필을 요청하니 반찬은 일절 안되고 밥만 된다
고 그런다. (반찬도 없이 어찌 밥을 먹나?) 본토 회사에서 운영하는 호텔임에도 식당 운영은
좁쌀처럼 왜열도 스타일로 하는 것이다.

아침을 먹고 객실(3층 다다니방)로 올라가 여장을 꾸리고 나오니 우리를 태울 버스가 대기하
고 있었다. 30인승 정도의 중형버스로 일행을 모두 태우자 대아호텔을 뒤로하며 이즈하라 시
내로 내려갔다.
어제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이즈하라 시내의 아침 풍경은 마치 텅 빈 영화세트장처럼 너무 적
막하여 우리가 어제 이곳을 거닐었는지도 햇갈리게 만든다.

이즈하라를 벗어난 버스는 북쪽을 향해 열심히 바퀴를 굴려 게치와 대마공항(쓰시마 야마네코
공항)의 밑도리를 지나 어느 다리 앞에서 바퀴를 멈춰섰다. 그곳이 둘째 날의 첫 답사지인 만
관교이다.


▲  만관교 서쪽 아소만

대마도(면적 708㎢) 본섬은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지금은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2개의 섬이 구분되는 곳이 바로 만관교가 있는 만관협곡(만관운하)이다.
만관월(万關越, 만관키코시)과 남쪽에 있는 대선월(大船越, 오후나코시), 북쪽의 소선월(小船
越)은 해발이 바다에 닿을 정도로 매우 낮고 대마도에서 가장 폭이 좁다.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소선월은 왜에서 신라와 당으로 보낸 사신이 지나
가던 곳이며, 대선월은 대마도 최초의 운하이나 폭이 좁음)
허나 배를 밀거나 들고 가는 식으로 운반하거나 반대쪽으로 넘어가 배를 갈아타는 식이라 불
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왜국 해군은 선박의 왕래와 대한해협의 제해권 장악을 위
해 1897년에 만관월에 삽질을 가해 1901년 운하를 완성시켰다. 그것이 바로 만관협곡(만관운
하)이며, 운하 삽질로 나온 흙과 바위는 운하 동쪽에 있는 메고시마의 육지 매립에 쓰였다.

운하의 등장으로 아소만과 마우라만(삼포만, 三浦灣)은 완전히 이어지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그 짧은 거리 때문에 배를 직접 운반하거나 한참을 돌아가야 했었다. 운하 위에는 1901년 80m
길이의 나무 다리(만관교)를 지어 운하로 끊어진 남쪽과 북쪽을 잇게 했으며, 1956년 기존의
다리를 부시고 81.6m의 새 다리를 닦았고, 1996년 현재의 다리를 새로 닦아 대마도의 북섬과
남섬을 끈끈하게 붙잡고 있다. 다리 길이는 210m, 폭 10m, 높이 25m로 2차선 도로와 뚜벅이길
을 갖추고 있다.

대마도의 중심지인 이즈하라에서 히타까츠를 비롯한 북섬으로 가거나 반대로 가는 경우 무조
건 이 다리를 건너야 된다. 주변 풍경도 그런데로 볼만하여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자리를
잡았으며 협곡 동쪽인 메고시마(여호도, 女護島) 포구로 내려가면 협곡과 다리의 전경을 싹
살펴볼 수 있다.


▲  만관교 서쪽 만관협곡 (아소만 방향)

▲  만관교 동쪽 미우라만과 메고시마 포구(왼쪽 마을),
구스보(久須保, 오른쪽 산지)

▲  만관운하를 닦은 기념으로 2005년에 세워진 개삭비(開削碑)

▲  만관교 주변(구스보, 메고시마) 지도



 

♠  대마도의 하롱베이라 불리는 아소만과 그 아소만을 굽어보는
에보시다케(烏帽子岳)전망대

▲  오로지 전망을 위해 설치된 에보시다케전망대

만관교를 짧게 둘러보고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했다. 도요타마마치(풍옥정, 豊玉町)에 이
르러 와타즈미신사 방면 길로 좌회전하여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으니 에보시다케전망대 주차
장이 마중을 나온다.

에보시다케는 해발 176m의 낮은 뫼로 와타즈미신사의 바로 뒷산이다. 그 정상에 전망대가 닦
여져 있는데 전망시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오로지 조망을 위한 공간으로 주변이 온통 낮은
산과 무성한 숲, 바다 일색이라 360도 조망이 가능하다.
이곳에 올라서면 서쪽과 서남쪽, 동쪽으로 리아스식 해안과 무수한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아
소만이 훤히 바라보이며, 그 모습이 마치 월남(越南,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비슷하다고 하여
일명 대마도의 하롱베이라 불린다. 바로 그 풍경 때문에 이 궁벽한 곳에 전망대를 닦은 것이
다.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자리를 잡은 이곳은 날씨가 좋을 때는 본토의 부산(釜山)까지 흐릿하
게 시야에 들어온다고 한다. 여기서 부산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나 공기가 깨끗한 겨울
에는 잘하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전망대 밑까지 1.5차선 크기의 도로가 닦여져 있으며 차에서 내려 각박한 산길을 조금 올라가
면 된다.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올라갈 수 있으니 이곳에 왔다면 꼭 전망대에 들려 일품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이곳은 워낙 산골벽지라 시내버스 같은 대중교통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여 풍옥정의 중심 마
을인 니이(仁位)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거나 와타즈미신사를 경유하는 투어버스(이즈하라↔
히타까츠)를 타고 걸어서 들어가야 된다.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과 사가 포구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①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②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③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④

▲  숲에 묻혀있는 에보시다케전망대 남쪽 봉우리

▲  주차장에서 바라본 에보시다케
붉은 피부의 버스는 본토 관광객을 태우고 온 버스들이다. 그들 너머로 높은 산이
보이는데 그 봉우리가 에보시다케로 그 정상에 전망대가 닦여져 있다.

▲  에보시다케 주차장에서 바라본 아소만과 사가 주변



 

♠  신라와 가야 사람들이 고향을 꿈꾸며 세웠던 도해궁이자 왜왕실의
발원지 같은 곳, 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

▲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입구

에보시다케전망대를 둘러보고 왔던 길로 나와 와타즈미신사 남쪽 숲길에서 내렸다. 여기서 무
성한 삼나무 숲길을 들어서면 와타즈미신사로 바로 이어진다.

와타즈미신사는 팔번궁신사(하치만구신사), 해신신사(가이진신사, 海神神社)와 더불어 대마도
의 대표적인 신사이다. 초대 왜왕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이며, 평안시대(平安時代, 헤이안시대
)의 율령 등이 담긴 연희식(延喜式, 엔기시키)의 신명장(神名帳, 진묘초)에도 나올 정도로 대
마도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신사이다.


▲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신사 주변은 삼나무와 대나무, 편백나무 등이 짙게 숲을 이루고 있다. 만송원의 두터운 삼나
무숲처럼 햇살이 제대로 맥을 못추는 숲길 속에 신사 도리이와 토요타마히메의 분묘 비석이
있으며, 그 숲길의 끝에 와타즈미신사 배례전이 있다.

▲  금줄이 쳐진 삼나무숲 도리이

▲  풍옥희(도요타마히메) 분묘 비석

풍옥희(豊玉姬,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는 와타즈미신사 설화에 나오는 용왕의 딸이다.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돌을 세워 비석으로 삼았는데, 그 피부에 풍옥희지분묘(豊玉姬之墳墓)
라 쓰여있다.
얼핏보면 풍옥희의 무덤으로 볼 수 있겠으나 비석에 쓰인 것과 달리 그에게 제를 지내던 제단
이었으며, 신사가 조성되기 전까지 제단으로 쓰였다. 또한 비석의 글씨 색깔이 금색으로 되어
있는데 왜열도에서 비석 글씨에 금분을 쓴 것은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년) 이후이다. 그러
니 이 비석은 그 이후에 세워진 것이 되며, 이때부터 제단이 무덤으로 둔갑된 것으로 보인다.


▲  와타즈미신사 직전 삼나무숲길

▲  금줄이 쳐진 신사 앞 돌덩어리

이곳에 신사를 짓고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지으면서 이름 없는 돌덩어리까지
의미와 이야기를 구절구절 붙여놓았다. (이 돌덩어리는 안내문이
없어서 무슨 의미의 바위인지는 모르겠음)

▲  와타즈미신사의 주인공이 봉안된 신전(神殿)
배례전 뒤쪽 높은 곳에 신전이 자리해 있다. 신전은 제삿날 외에는
공개를 하지 않는다.


와타즈미신사는 용왕의 딸인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와 하늘에서 내려온 히코호호 데미노미코
토의 사당이다. (이름도 참 징그럽게도 어렵다;;)
원래 이곳에는 신라(新羅) 또는 가야(伽倻) 사람들이 세운 사당이 있었다. 도리이가 가락국(
駕洛國)의 중심지라는 김해나 신라 서라벌(경주)을 향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신라(
또는 가야) 사람들이 조상신을 봉안한 사당을 세우면서 고향을 향해 사당과 문을 세웠다. 하
여 바다 건너에서 온 사람들이 지은 신궁이란 뜻에서 도해궁(渡海宮)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왜가 대마도를 침탈하면서 왜식 신사로 모습이 변질되었고, 신사의 설화를 적
당히 각색하면서 왜왕실의 발원지 같은 곳이 되었는데, (최초 왜왕이 가야 출신이라고 함) 이
곳에 얽힌 설화를 잠시 끄집어내보면 대략 이렇다.

하늘의 신인 다까비무스비(高皇産靈)의 외증손으로 지상에 내려온 니니기에게 히코호호테미노
미코토(이하 히코호호)란 아들이 있었다.
히코호호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다가 형에게 빌린 낚시 바늘을 바다에 빠트리고 말았는데, 그
바늘을 찾으려고 바다를 헤매다가 '시오츠라'란 신의 도움으로 용왕의 딸인 도요타마히메 노
미코토(이하 도요타마)를 만나 혼인을 하게 된다.

용궁에서 3년 동안 팔자 좋게 지내다가 문득 예전에 잃어버린 형의 낚시 바늘이 생각이 났다.
하여 장인인 용왕의 도움을 받아 그 바늘을 찾아 지상으로 올라와 형을 만났는데, 그때 도요
타마는 만삭의 몸이라 같이 나오지를 못했다. 하여 여동생인 다마요리노히메미코토(이하 다마
요리)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바다 밖으로 나와 현재 와타즈미신사 자리에서 남편을 만났다.
도요타마는 산통을 느껴 손수 해변에 집을 짓고 남편에게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면 안돼~~!'
당부를 했다.

허나 사람의 심리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 결국 훔쳐보게 되었는데, 글쎄 큰 뱀이
산고(産苦)로 정신없이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남편은 완전히 혼돈의 상태
가 되었고, 원래 모습을 들켜버린 도요타마는 너무 열받아서 막 낳은 아들을 해변에 버리고
우나자까를 메워 용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나자까는 용궁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곳을
헤집으면 문이 나타나고 메우면 사라짐)
이때 버리고 간 아들이 '우가야 후기아에즈(이하 우가야)'로 별명은 '이소라 에비스'이다.

우가야는 장성하여 작은 이모인 다마요리와 혼인했다. 서로 나이 차이가 좀 있을텐데 어쨌든
이모와 조카가 혼인을 한 것이다. 그들은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초대 왜왕(倭王)이라는
신무(神武)이다.
이 설화를 통해 왜왕족은 천신(天神)의 부계(父系)와 해신(海神)의 모계가 만나 이루어진 혈
통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곳이 왜왕실의 발원지임을 크게 어필하고 있다. 동시에 근친혼도
대놓고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신라와 고려도 근친혼이 심했음)

가야는 왜열도로 세력을 확장해 구주(九州, 규슈) 등 적지 않은 지역을 차지하여 그들 입맛에
맞는 지방 정권을 세워 통치했다. 그때 가야 본토에서 보낸 왕족이나 관리, 또는 새로운 삶터
를 꿈꾸며 건너간 가야 사람이 초대 왜왕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대마도와 꽤 유별난 인
연이 있었던 듯 싶으며 그로 인해 이곳에 그의 위패가 봉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왜가 가야와 백제, 신라에 종속되고 그들에게 오지게 영향을 받았던 과거를 싹 왜곡
하고 지우면서 왜국 중심의 역사관을 짜게 된다. 그 과정에서 초대 왜왕의 대마도 이북의 족
적은 지워졌고 이곳 신사의 봉안 주체까지 바꾸어 왜왕실의 발원지로 내세웠다. 그것도 모자
라 난데없이 천신과 해신(용왕)까지 등장을 시켜 왜왕이 그들의 자손이란 허무맹랑한 설화까
지 지어 붙였다. (현실은 가야, 신라, 백제 사람들의 후손들임)


▲  와타즈미신사 배례전(拜禮殿) 내부와 바로 앞에 걸린 색동줄
신사에 예를 표할 때는 방울이 달린 색동줄을 당기면서 방울소리를 낸다. 이는
신사에 봉안된 존재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자 함으로 이후 2번 예를
표하고 2번 박수를 친 다음 1번 절을 한다.

▲  금색으로 쓰인 봉축성혼기념비(奉祝成婚記念碑)
1993년 현재 왜왕인 덕인(德人, 나루히토)의 혼인을 기리고자 신사에서 아부용으로
세운 것이다. (덕인은 2019년 5월 부왕인 아키히토의 양위를 받아 왜왕이 됨)
왜국은 아직도 미개한 부분이 적지 않아서 날짜를 표기할 때
왜왕의 연호를 쓰는 별종 짓을 보인다.


조선 중기 이후 대마도가 왜화가 되면서 신불(神佛) 통합으로 기존 신사들이 이름이 바뀌었고
절과 마을 사당이 적지않게 신사로 강제 전환되었다. 와타즈미신사 역시 신사로 전환되었는데,
이곳 지명인 와타즈미(와타쓰미)란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어쨌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고 왜에게도 나름 의미가 있는 곳이라 신공황후(神功皇后) 개소
리나 늘어놓는 팔번궁신사보다 나은 곳이다. <신공황후 바로 이전 시절에 신라가 시마네와 야
마구치를 공격하여 왜왕 또는 그에 준하는 높은 작자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음>
게다가 신사 주위로 조엽수림(照葉樹林)이 매우 울창하며 북방계와 대륙계 식물이 해안 주변
에 섞여 있어 많은 새들이 머문다. 그래서 신사 주변 숲은 장기현(長崎縣, 나가사키) 천연기
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신사 앞에 바다(니이아소만)가 펼쳐져 있어 경관도 괜찮다.


▲  붉은 피부의 오미쿠지

저 붉은 통에 100엔 동전을 넣으면 운세가 적힌 종이가 나온다. 그 종이를 오미쿠지라 하는데
운세가 괜찮게 나왔으면 가져가도 되며, 영 좋지 않게 나왔을 때는 나무나 붉은 통 위 금줄에
묶어둔다. 그러면 신이 나쁜 운세가 좋게 되도록 빌어준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와타즈미신사
의 배때기를 불려주는 붉은 통이다.


▲  소원 나무판을 다는 곳(에마)

나무판 뒤쪽에 말이 그려져 있어 에마(畵馬)라 부른다. 소원 내용과 주소, 이름을 적어서 달
면 되는데 주소는 꼭 적어야 된다고 한다. 그래야 소원이 그 주소지로 날라가 소원성취가 된
다는 것이다.
소원을 적는 나무판은 돈을 내고 사야 되며 소원판 장사는 이곳의 짭짤한 돈줄이다.

▲  배례전 앞 1번 도리이

▲  배례전 앞 도리이와 코마이누상(拍犬)

배례전 앞 도리이 옆에는 오래된 코마이누상 1쌍이 있다. 이들은 신사를 지키는 개의 석상으
로 원래는 고려 개이다. 그것이 대마도와 왜열도로 넘어와 신사 등을 지키는 존재가 된 것이
다.
이곳 코마이누상은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둘 다 특이하게 암컷과 수컷의 생식기
를 모두 가지고 있다. 천하에 널린 개의 석상 중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암컷은 입을 다물고 있
는 모습인데, 이는 사람이 죽을 때 보통 입을 다물기 때문에 입을 닫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입을 벌리고 죽는 경우도 많음;;) 그에 반해 수컷은 침을 질질 흘리며 입을 벌리고 있다.


▲  2번 도리이에서 바라본 와타즈미신사

▲  2번 도리이

▲  땅과 바다의 경계에 자리한 3번 도리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야나 신라 사람들의 마음이 변치 않은 듯, 여전히 그들의
본거지를 향하고 있다. 이곳이 왜화가 되면서 사당은 신사로 바뀌고
이렇게 도리이까지 설치되었지만 이곳의 본마음은 여전한 것이다.

▲  와타즈미신사의 백미, 바다에 세워진 도리이들
와타즈미신사를 상징하는 풍경으로 3번 도리이 너머로 4번 도리이와
5번 도리이가 바다에 발을 담구고 있다.


와타즈미신사 앞에는 5개의 도리이가 있다. (숲속에 있는 도리이는 제외) 이렇게 도리이를 5
개를 둔 것은 5욕(五欲)으로부터 해탈하라는 의미라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3개의 도리
이는 땅에 있고, 2개는 니이아소만이라 불리는 바다에 있는데 이는 용왕이 이들 도리이를 통
해 신사로 들어오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즉 용왕을 위한 이정표이다.

바다에 설치된 도리이는 썰물 때는 거의 육지처럼 있다가 밀물 때는 도리이의 밑부분이 물에
잠기며 바다에 떠있는 모습을 보인다. 최대 2m까지 잠긴다고 하는데 바로 그 풍경이 이곳 신
사의 백미이다. 허나 내가 갔을 때는 썰물 때라 1개만 물 위에 있었다.

▲  3번 도리이에서 바라본 니이아소만

▲  신사 석조(石槽)

신사에는 물이 담긴 석조가 있다. 생김새가 본토의 샘터와 비슷하고 바가지까지 있어서 자세
한 사연을 모르면 본토 사람의 본능상 물 1모금 들이키기 쉬운데 절대로 물을 마시는 샘터가
아니다. 이곳은 신사 참배 전에 손을 씻는 곳으로 바가지에 물을 담아서 손을 씻고 입을 닦는
다. 그런 다음 참배에 임하면 된다.


▲  이소라 에비스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비늘바위)

비늘바위는 와타즈미신사의 주인공인 도요타마히메가 출산 장면을 훔쳐본 남편에게 절망하여
아들(이소라 에비스)을 버리고 용궁으로 들어갔다는 우나자까이다. 용궁으로 들어갈 때만 문
이 생긴다고 하는데 얼핏보면 설화를 끼워 맞추고자 인위적으로 만든 듯 싶으나 엄연한 자연
산 바위이다. 또한 아들인 이소라 에비스를 버린 곳이라 하여 '이소라에비스'라 부르기도 한
다.

이렇게 하여 와타즈미신사 일대를 그런데로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부근에 있는 에보시다케전
망대와 함께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했으나 2019년 9월에 신사를
관리하는 원숭이가 본토 관광객에게 무례를 범한 일이 발생하여 크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2020년 이후, 중공 잡것들이 천하에 악의적으로 퍼트린 코로나 전염병으로 대마도를 찾는 본
토 사람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다가 2022년 이후 조금씩 늘고 있는데, 와타즈미신사 원숭이
들이 여전히 주제 파악도 못하고 본토 사람들에게 계속 시건방을 떨자 요즘에는 대마도 여행
상품 대부분이 이곳을 차창(車窓) 관광으로 때우고 있다. 즉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
이다.
그나마 에보시다케전망대로 가는 길목이라 차창 관광으로 봐준 것이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그
앞을 지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본토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와타즈미신사 원숭이들만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이니 참 근시안적인 원숭이들이 아닐 수 없다. (왜열도 원숭이들은 이곳을 비
롯한 대마도에는 별로 오지도 않음)

와타즈미신사를 떠난 우리의 버스는 니이로 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별도
의 글에서(☞ 관련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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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서귀포층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제주올레길2코스 겨울 나들이 (새섬공원)

서귀포 겨울 나들이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 서귀포 겨울 나들이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과 남해바다

▲  새섬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혼인지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  혼인지

 



 

묵은 해가 극한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시작되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대륙
, 제주도(濟州島)를 찾았다.

간만에 발을 들인 제주도에서 3일 동안 미답처(未踏處)를 중심으로 정말 알뜰하게 돌아다
녔는데, 둘째 날 늦은 오후(17시)에 서귀포시내에 있는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주차장에
이르렀다.
천지연폭포는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인연을 지었던 곳이라 애써 고개를 돌리며 새섬이 있
는 남쪽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째 날은 새섬까지 소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허나
약천사(藥泉寺, ☞ 관련글 보러가기) 이후부터 하늘에 주름진 구름들이 꽉 들어차더만 새
섬방파제에 이르자 지독하게 검은 피부를 보이며 빗방울을 투하한다. 상황이 그러자 새섬
이고 나발이고 싹 내일로 내던지고 바로 시내로 나와 적당한 모텔을 잡아 일찍 휴식에 들
어갔다. (20시에 저녁을 먹으러 잠시 서귀포 시내로 나갔음)

거의 16시간 동안(10시간 정도 잤음) 꿀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10시, 새섬을 잡으러 출동
했다. 모텔 1층 로비에는 감귤의 대표 산지인 서귀포(西歸浦)에 걸맞게 감귤이 든 바구니
가 있었는데, 투숙객들은 마음껏 집어먹으면 된다. 하여 나는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딱 3
개만 집어서 밖으로 나왔다.
전날 저녁과 달리 광합성에 최적화된 아주 쾌청한 날씨로 관광객들로 벌써부터 정신이 없
는 천지연폭포 주차장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새연교와 새섬방파제, 서귀포유람선 선
착장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그들에 대한 시선을 접고 벼랑이 펼쳐진 서쪽 해안을 주목해
보자. 그곳에는 매머드(Mammoth)가 담배를 피던 시절, 옛 생물들의 흔적들이 가득 깃들여
져 있다.


▲  연외천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천지연폭포 입구
(사진 중앙에 있는 다리가 칠십리교)



 

♠  천지연폭포 남쪽 바닷가에 깃든 옛 생물들의 희미한 흔적들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西歸浦層 貝類化石産地)
- 천연기념물 195호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해변

새섬방파제 서쪽에는 주름진 벼랑과 큼직한 바위들로 가득한 해변이 있다. 얼핏 보면 평범한
해안으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이곳은 제주도에서만 발견되는 서귀포층(西歸浦層)이 형성
된 벼랑으로 30여m 높이로 약 1km 정도 펼쳐져 있다. 절벽을 따라 약 40~60m 정도 두께를 보
이고 있으며, 그의 피부와 속살에는 조개 등 많은 화석들이 들어있다.

1928년 왜인(倭人) 학자인 하라구치(原口九萬)가 발견하여 지역 이름을 따 서귀포층이라 하였
는데, 처음에는 이곳 등 일부에만 그런 지층이 확인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지하수를 캐내고
자 제주도 곳곳을 들쑤시면서 잠자고 있던 서귀포층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제주도 형성 초기
에 무수히 일어났던 화산활동으로 나온 현무암질 화산재 지층과 바다에 쌓인 퇴적암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제주도의 옛날 기후와 해수면 변동을 소상히 알려준다.

서귀포층은 물을 통과시키지 않는 특징이 있어 물이 거의 새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서귀포층
주변은 물이 풍부하여 해안가 지층 틈새로 물이 쏟아져 나오니 이를 용천수(湧泉水)라고 부른
다. 제주도는 누수에 최적화된 현무암 피부의 땅이라 물이 넉넉치가 못한 편인데, 서귀포층은
그 문제를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대자연 형님의 소중한 선물이다.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
기 이전부터 용천수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안가에 많이 분포하고 있음)


▲  화석들이 고이 잠들어있는 서귀포층 바위들

이곳 벼랑과 바위에는 옛 생물의 화석이 무수히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매머드가 뛰어놀던 약
200~30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조개류가 상당수를 이루고 있는데, 달팽이, 전복, 우렁이 등
의 복족류와 굴족류, 완족류, 성게와 해삼, 불가사리 등의 극피동물, 산호화석, 고래와 물고
기 뼈, 상어 이빨 화석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서울대 김봉균 교수에 의해 저서성유공충(底棲性有孔蟲, 호수나 바다의 바닥을 기어다니
는 유공충) 41속 73종과 부유성유공충<浮游性有孔蟲, 플랑크톤 생활을 하는 원생동물(原生動
物)> 8속 18종 등의 미화석(微化石, 눈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미생물 화석)도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나온 화석 대부분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생물들이나 현재 서귀포 지역에서는 살지
않는 것들도 여럿 있다. 특히 조개 화석 같은 경우 이곳보다 훨씬 남쪽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들이 발견된 것을 통해 서귀포층 초창기의 바다가 지금보다 따스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옛 생물의 화석이 풍부히 담긴 탓에 1968년 국가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해변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행정당국의 오랜 직무유기로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
면서 마구잡이 화석 채취와 훼손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 근래에 벼랑 쪽으로 출입금지
안내문이 세워졌으나 그뿐이며,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보호용 난간이나 철책을 두룰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한 새섬방파제 바로 서쪽에 눈에 띄게 있음에도 천지연폭포나 새섬, 유람선에 눈이 어두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치기 일쑤이다. 그러니 새섬이나 천지연폭포를 보러왔다면 이곳도 꼭
둘러보기 바라며, 고된 세월에 지친 그들을 눈으로만 살피기 바란다. (저들을 떼거나 만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람)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홍동 707 (남성중로 43)


▲  큰 돌에 담긴 화석들
돌에 박힌 하얀 존재들이 모두 화석이다. 물고기 뼈와 조개 화석으로 저들은
죽어서 대자연의 조화를 받아 조촐하게 그들의 흔적을 남겼다.

▲  옛 수중동물의 넋이 서린 서귀포층 바위
마치 회색빛 어항 속에서 올챙이나 송사리 같은 작은 물고기들이 거니는 것 같다.

▲  다양한 화석과 고된 세월의 주름선이 뒤섞인 서귀포층 바위들 ▼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해안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

저 멀리 그림의 떡처럼 자리한 범섬은 이름 그대로 호랑이처럼 생긴 섬이다. 절벽으로 이루어
진 무인도로 고려 끝 무렵인 1374년 최영(崔瑩) 장군이 제주도에 잔류하며 저항을 하던 몽골(
원나라)의 목호(牧胡) 패거리를 최종 처리한 현장이기도 하다.


▲  제주도와 새섬을 잇는 새연교 (새섬방파제 쪽)

새섬을 가려면 무조건 새연교를 통해야 된다. 그는 2009년에 닦여진 다리로 새섬과 제주도를
끈끈하게 붙잡고 있는데, 다리 이름인 '새연'은 새섬을 잇는 연륙교의 줄임말로 알고 있었으
나 알고 보니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다리'란 의미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가장 큰 뚜벅이 전용 다리로 서귀포항의 랜드마크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이 다리
가 닦임으로써 바다의 눈치 없이 마음껏 새섬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  새섬방파제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왼쪽), 서귀포층 벼랑

▲  새연교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서귀포(서귀동) 시내



 

♠  서귀포항 앞바다에 상큼하게 떠있는 작은 섬, 새섬

▲  새섬에서 바라본 새연교와 서귀포층 벼랑

새섬은 서귀포항 앞바다에 바짝 떠있는 작은 섬으로 천지연폭포에서 흘러내려온 연외천과 남
해바다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다.
이름이 새섬이다 보니 새와 관련된 것으로 여기기 쉬우나 실상은 초가 지붕을 잇는 새(띠)가
많이 나와서 새섬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한자로는 초도(草島), 모도(毛島)라 불리며 섬
의 면적은 104,581㎡,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7.7m이다.

제주도의 심장인 한라산(漢拏山)이 폭발하면서 거기서 나온 암석이 떨어져 섬이 되었다는 전
설이 있으며, 조선 중기에 사람들이 건너가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섬으로
들어가려면 간조 때 새섬목을 건너거나 배를 이용해야 했으며, 1960년대 중반까지 사람이 살
았으나 모두 철수하여 금지된 무인도가 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 새연교가 닦이면서 도시자연공원으로 천하에 개방되었으며, 천지연폭포와 서
귀포항을 수식하는 명소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비록 속세에 개방은 되었으나 새벽 일출시
부터 22시까지만 개방한다. 그러니 21시까지는 입장해야 무난하게 서귀포항 야경(夜景)도 즐
기며 섬 1바퀴를 돌 수 있다. 또한 섬이다 보니 태풍이 오거나 해상 날씨가 영 좋지 않은 경
우에는 출입이 통제될 수 있다.


▲  새섬 산책로에서 바라본 새연교의 위엄 (바로 밑이 새섬방파제)

새연교를 건너면 섬을 1바퀴 도는 1.1km의 산책로가 나오는데, 어느 쪽으로 가던 다시 새연교
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천천히 둘러보면 최소 20~30분 정도 걸리며, 섬 북쪽은 연외천과 바다
가 만나는 서귀포항, 동쪽은 서귀포항 중심부, 서쪽과 남쪽은 푸른 바다라 주변 풍경도 아름
답다.

섬 전체는 난대림(暖帶林) 보호구역으로 나무가 울창하며, 새섬목, 담머리코지, 새섬뒤, 노픈
여, 안고상여, 섯자릿여, 자릿여, 모도리코지 등의 소소한 명소들이 있다.

* 새섬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산3-2


▲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과 황우지, 서귀포 서부 해안

▲  해안을 따라 닦여진 새섬 산책로
이곳 산책로는 흙길과 자갈길, 나무데크길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평지라 누구든
편히 거닐 수 있으며, 주변 풍경이 고와서 체감 거리가 꽤 짧게 느껴진다.

▲  난대림과 소나무 그늘 속을 지나는 새섬 산책로

▲  새섬에서 바라본 문섬

손에 잡힐 듯 진하게 아른거리는 문섬은 서귀포항에서 1.3km 떨어진 작은 무인도이다. 문섬이
란 이름은 옛날부터 유별나게 모기가 많아서 모기를 뜻하는 한자를 취해 그리된 것으로 녹도(
鹿島)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  새섬에서 바라본 서귀포항 방파제와 섶섬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존재가 파초일엽(芭蕉一葉) 자생지로 유명한 섶섬이다.

▲  새섬 동쪽에 자리한 서귀포항 중심부
서귀포항은 새섬과 새섬방파제, 문섬, 서귀포항 방파제가 포근히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항구의 입지로 아주 좋다.

▲  새섬 주변 바다의 요염한 속살

▲  새섬 북쪽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서귀포시내
(연외천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곳)

▲  새섬 북쪽 산책로

▲  새섬 서쪽에서 바라본 새연교와 서귀포층 벼랑



 

♠  제주도 시조의 혼인설화를 품고 있는 제주도의 영원한 성역
혼인지(婚姻池) - 제주도 지방기념물 17호


▲  혼인지(혼인터) 표석

새섬에 퐁당퐁당 빠져 거의 1시간을 머물다가 아쉽지만 그곳을 등지며 천지연폭포 주차장으로
나왔다. 주차장에는 시내버스 여러 대가 육중한 바퀴를 접고 쉬고들 있었는데, 서귀포시내버
스 641번(천지연폭포↔서귀포시청2청사)이 먼저 기지개를 켜며 부릉부릉 심장 소리를 낸다.
하여 그것을 타고 시내인 동문로터리로 나왔다. 시내까지 거리는 가까우나 천지연폭포는 바다
와 맞닿은 낮은 곳에 있고 시내는 그보다 훨씬 높은 언덕배기에 있어 지형적인 영향으로 버스
와 차량은 서귀포항과 서귀포초교로 다소 돌아간다.

동문로터리에서 다음 답사지인 혼인지를 가고자 제주도 간선 201번(제주버스터미널↔서귀포버
스터미널)을 잡아탔다. 혼인지까지는 40km 거리로 1시간 정도를 신나게 달려 혼인지입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한적하기 그지 없는 혼인지입구에서 혼인지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혼인지 표석이 마중을 나
온다. 제주올레길2코스(광치기해변↔온평포구, 15.2km)가 이 도로의 신세를 지며 혼인지로 가
는데, 표석에는 하얀 글씨로 '혼인지' 3자가 한문으로 쓰여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연못을
뜻하는 '池'가 아닌 터를 뜻하는 '址'가 쓰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싶어 잠시 혼돈에 빠졌으나 분명 그 혼인지가 맞다. 제주도 시조들이 혼인을 했던 터라 표석
에 그렇게 쓴 것이며, 혼인지입구에서 10분 정도 들어가면 혼인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남쪽에서 바라본 혼인지

혼인지는 500평 정도의 자연산 못으로 갈대와 수초들이 못 외곽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평
지에 누운 평범한 모습의 못이나 이곳은 제주도의 시조라는 고을나(高乙那)와 양을나(良乙那
), 부을나(夫乙那) 등 이른바 삼신인(三神人)이 장가를 가던 곳이라고 전한다. 하여 그들의
탄생설화가 깃든 삼성혈(三姓穴)과 더불어 제주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성지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연못 주변에는 제주도에서 넘쳐나는 현무암으로 낮게 담장을 둘러서 속세와 경계를 그었으며,
그 주변을 공원으로 산뜻하게 손질하여 산책로와 숲을 닦았다. 오래된 존재로는 혼인지와 삼
신인이 신방을 꾸렸다는 신방굴이 있으며, 근래에 지은 3공주 추원각과 추원비, 전통혼례관,
탐라생활사료관, 생태연못 등이 혼인지를 수식한다. 그리고 제주올레길2코스가 혼인지 설화를
흠모하며 그의 옆구리를 슬쩍 지나친다.


▲  혼인지 서쪽에 닦여진 탐방로(제주올레길2코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혼인지, 그곳에 서려있는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는 대략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300여 년 전, 고을나와 부을나, 양을나가 모흥혈(毛興穴, 삼성혈)이라는
곳에서 갑자기 솟아났다. 그들이 있기 전에는 제주도에 그 흔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죽옷을 입고 동물 사냥과 어로로 생활을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한라산에 올라가
주변을 살피다가 동쪽 바다에서 자주빛 진흙에 봉해진 오색찬란한 큰 목함(木函)이 떠내려온
것을 발견했다. 목함이 상륙한 곳은 혼인지와 가까운 온평리 연혼포(延婚浦, 갯고랑)라고 한
다.
호기심이 불끈 솟은 그들은 그곳으로 달려가 목함을 열었더니 그 안에 석함(石函)이 들어있었
고, 자주빛 옷에 붉은 띠를 두른 사자(使者)가 나타났다. 그리고 석함을 열었더니 푸른 옷을
입은 15~16세 정도의 아리따운 공주 3명과 송아지, 망아지, 오곡(五穀)의 씨앗이 있었다.


▲  늪지대 기운을 지닌 혼인지 (서쪽에서 본 모습)

이들을 데리고 온 사자는 3신인에
'나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에서 왔습니다. 우리 군주께서 공주 3명을 두었는데 혼기가 차도록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서해 높은 산(한라산)에 3명의 신인이 나와 장차 나라를 세
우려고 하나 배필이 없다는 것을 듣고 저에게 명해 세 공주를 모셔왔으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십시요~~!'
말을 끝내고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기쁨에 잠긴 3신인은 나이에 따라 공주 자매를 배필로 정해 바로 이곳 혼인지에서 혼인과 예
민한(?) 신방을 치루고 삼사석(三射石, 제주시 화북동)에서 활을 쏘아 거처할 곳을 정했다.
또한 공주가 가져온 소(송아지)와 말(망아지)을 기르고 오곡 씨앗을 뿌리니 이때부터 제주도
에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상이 혼인지에 서린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혼인지
누렇게 뜬 갈대와 수초들이 덥수룩하게 자라나 자연산 연못의
풍경을 거들어준다.


삼신인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삼성혈 구멍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이때가 4,300년 전이라고 하는
데, 우리 역사가 단군조선에서부터 4,300년 이상 묵었음을 강조하고 있어 그것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3신인이 4,300년 이상 되었다는 자료와 유물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또한 1세기 경에 한라산 대폭발로 제주도 사람과 동물들이 대부분 강제 죽음을 당했는데, 겨
우 일부가 살아남아 화산재와 용암으로 지옥이 된 제주도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때 3신인
이라 표현된 인물 3명이 사람들을 잘 이끌어 제주도 세력의 군주가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공주를 보냈다는 벽랑국에 대해서도 왜열도설과 동해(東海)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
으며, 왜열도는 공주와 오곡, 소, 말을 보낼만한 수준이 전혀 되지 못한다. 하여 동해안(경상
도나 영동지방, 함경도 등)에 있던 작은 나라나 세력으로 여겨진다. 그곳에서 바다 너머 멀리
떨어진 제주도 세력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라면 서로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탐라(耽羅)라 불리던 제주도 세력은 바닷길을 적극 이용해 4,000리의 영토를 지녔던 삼한(마
한, 진한, 변한)과 백제, 신라, 가야는 물론 멀리 중원대륙과 동남아 제국(諸國)들과도 교역
을 했었다.


▲  삼공주추원비(三公主追遠碑)
어딘지 모를 벽랑국에서 건너와 삼신인의 배필이 되어 제주도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3공주를 추모하고자 후손들이 세웠다.


벽랑국이 망하여 그 세력이 제주도로 넘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은 가축과 오곡 씨앗, 여
러 좋은 문물을 싣고 떠돌다가 제주도에 상륙했을 것이고, 제주도 세력은 그들을 받아들여 통
합 차원에서 혼인을 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농업과 목축 기술까지 챙기면서 제주도에 제대
로 된 농경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남긴 탁라가(乇羅歌)의 2번째 시
김종직이 제주도를 다녀가면서 탁라가 14수를 남겼는데, 그 2번째 시가
바로 혼인지 설화를 머금고 있다.

먼 옛날 신인이 세 곳에 도읍하셔
해돋는 물가에서 배필을 맞으셨다네
그 시절 삼성(삼신인)이 혼인했던 일은
전해내려오는 주진의 전설과 같네

▲  혼인지의 분위기를 한껏 경건하게 다듬어주는
소나무숲길 (신방굴 주변)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신방굴

혼인지에 왔다면 소나무숲에 있는 신방굴이란 자연산 굴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혼인지 연못
과 함께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산 존재로 3신인이 벽랑국 공주를 하나씩 품고 예민한(?)
첫날 밤을 보냈다는 곳이다.

굴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으나 내부가 협소하고 어둡다. 그런 곳을 1쌍도 아니고 3쌍이 좁은
곳에서 예민한 일을 치룬다는 것이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이 동물도 아니고 일명 성
진국(性進國)으로 전세계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천박한 왜열도 원숭이들도 아닌데 말이다.
하여 못 주변에 대충 집을 짓거나 자신들이 살던 집에서 예민한 첫 밤을 보냈을 것이다. 혼인
지가 3신인과 3공주가 혼인을 했던 현장이라 연못 부근에 있는 이 굴까지 설화의 현장으로 넣
었던 것이다.


▲  속세를 향해 입을 벌린 신방굴
신방굴은 땅 바로 밑에 있는 굴이다. 저런 누추한 곳에서 정말 첫날 밤을
보냈을까? 그것도 제주도 세력가와 벽랑국 세력가의 딸이 말이다.

▲  신방굴 내부로 들어서다
굴 높이가 낮으므로 굴에 절대 피해가 없도록 몸을 푹 쑥이고 들어가야 된다.

▲  어두컴컴한 신방굴 내부

▲  신방굴에서 나오는 3신인과 3공주를
재현한 사진


▲  흑백사진에 담긴 1960년대 초 온평리(혼인지마을) 혼례 모습

▲  돌담 너머로 바라본 삼공주 추원사(追遠祠)
2009년 10월에 지어진 것으로 벽랑국 3공주의 위패를 머금고 있다. 돌담 안쪽
오른쪽 건물이 추원사로 매년 6월 10일 후손들이 추원제를 지낸다.

▲  삼공주 추원사

▲  혼인지 남쪽에 세워진 정자

혼인지는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 때문에 지역 사람들의 혼인 장소 역할을 했다. 지금도 전
통혼례관을 두어 혼인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속세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명소이나
제주도에 신혼여행이나 부부여행으로 왔다면 꼭 들러볼 만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한 곳이
다.

* 혼인지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 (혼인지로 39-14, ☎ 064-710-6798)


▲  소나무와 동백꽃이 무성한 혼인지 산책로
동백이 도도한 붉은 피부를 드러내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마구 들었다 놓는다.

▲  혼인지를 마무리 짓다 (전통혼례관 주변 산책로)
혼인지 이후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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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신안군의 상큼한 지붕, 압해도 송공산 (송공산둘레길)

신안 압해도 송공산



' 압해도 송공산 봄맞이 나들이 '
송공산 남쪽 숲길
▲  송공산 남쪽 숲길



 

천하를 놓지 않으려는 욕심꾸러기 겨울 제국(帝國)과 그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정의로운 봄이 막판 다툼을 벌이던 3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신안군(新安郡)의 중
심 섬인 압해도(押海島)를 찾았다.

압해도를 가려면 우선 목포(木浦)로 가야 된다. (무안에서 들어가는 길도 있음) 동트기가
무섭게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아 남쪽으로 보냈는데, 간밤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해 눈꺼풀은 백두산보다 훨씬 무거워진 상태이다. 그 무거움에 순응하면서
자다깨다를 수 차례 반복하니 어느덧 목포에 이르렀다. (잠만큼 좋은 축지법은 없음)

점심을 먹기가 애매하여 목포역 부근에서 간식거리를 여럿 사들고 신안군내버스 130번(삼
학도↔압해도 송공항)을 타고 압해도로 들어갔다. 목포와 압해도를 철석같이 이어주는 압
해대교를 건너면 섬의 은하계로 일컬어지는 신안군 땅으로 신안 땅은 처음으로 발을 들여
본다. <바다를 제압하는 섬이란 뜻의 압해도는 면적이 48.95㎢, 인구는 약 6,000명대> 섬
으로 들어서 신안군청과 압해읍내, 대천리를 지나 송공리 상촌에서 두 발을 내렸다.

상촌마을 직전 3거리에서 송공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고 하여 찾아봤으나 딱히 보이
지가 않는다. 분명 지도에는 길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이정표도 없고 길 비슷한 것도 보
이지가 않으니 송공산이 벌써부터 나를 시험하는 모양이다. 결국 그 숨바꼭질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펼쳐진 수락길을 따라 천사섬분재공원으로 이동했다. 분재공원 옆에는 확실하게
산길이 있으니 거기서 송공산의 품으로 들어갈 요량이었다.

수락길은 송공산 남쪽을 도는 2차선 길로 한쪽에는 송공산이, 다른 한쪽에는 너른 서해바
다가 펼쳐져 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과 이제 막 겨울에서 해방되는 송공산, 그리고
푸르른 바다까지 3박자가 어우러진 착한 길로 지나가는 차량도 별로 없어 내가 이 일대를
잠시나마 장악한 기분이다. 이따금 지나는 차량이 그 흥을 깨뜨려 문제긴 하지만 워낙 고
적한 곳이라 금세 회복이 된다.


▲  오늘도 평화로운 압해도 앞바다 (수락길에서 바라본 모습)



 

♠  송공산(宋孔山) 입문

▲  1004 기둥을 내세운 천사섬분재공원(송공산분재공원) 정문

수락길을 1km 정도 들어가니 송공산의 상큼한 꿀단지인 천사섬분재공원이 마중을 나온다. 입
장료가 없다는 말이 있어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섰으나 조금은 비싼 입장료가 나의 빈약한 호
주머니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입장료의 압박에 정문 양쪽에 가로로 세워진 '1004' 기둥이 참으로 사악하게 보였다. 여기서
공원 이름인 천사(1,004)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그 천사가 아니라 신안군의 섬 갯수를 뜻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800여 개로 알려졌으나 200개가 더 추스려져 1,004개가 되면서 신안군은
천사(1,004)의 섬임을 무척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로도 20여 개의 섬이 더해지면서 대략
1,025개로 파악되고 있다. <유인도 72개, 무인도 953개> 그럼에도 천사섬의 고장임을 계속 강
조하고 있으며, 압해도와 암태면을 잇는 다리의 이름까지 천사대교라 이름을 붙여 천사(1,004
)란 이름에 지나친 집착을 보인다.

분재공원에서는 그냥 화장실(매표소 뒤쪽에 있음)만 구경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정문에서
동쪽으로 4분 가량 가면 송공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송공산 남쪽 기점)이 손을 내미니 여기서
부터 약 3시간에 걸친 송공산 더듬기가 시작된다.


▲  천사섬분재공원 앞 포구와 주차장

▲  송공산으로 들어서다. (팔각정 방면 소나무숲길)

분재공원 동쪽(송공산 남쪽 기점)에서 송공산 팔각정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시작
부터 키가 작은 소나무들이 긴 행렬로 마중을 하며 청정한 솔내음을 불어주고, 뒤를 돌아서면
서해바다가 장엄하게 나타나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에 한 줄기 해조음을 선사한다.


▲  잠깐 뒤를 돌아보는 여유 ~~ 송공산 소나무숲과 서해바다

▲  송공산 소나무숲길과 천사섬분재공원의 녹색 철책
분재공원이 엄연한 유료의 땅이라 저렇게 철책을 쳐놓아 무료의 땅과
팽팽히 경계를 그었다.

▲  소나무숲길 속으로 ~~~ ①

▲  소나무숲길 속으로 ~~~ ②

▲  소나무숲길 속으로 ~~~ ③ 팔각정 밑 부분

▲  송공산 팔각정

팔각정은 송공산 남쪽 능선 해발 170m 지점에 자리해 있다. <송공산 남쪽 기점(분재공원 동쪽
)에서 20분 정도 걸림> 이 땅에 흔한 기와집 팔각정이 아닌 8각 모습의 단출한 건물로 남쪽으
로 분재공원과 서해바다, 목포의 여러 섬들(율도, 외달도, 달리도), 해남 화원면(화원반도),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신안군의 여러 섬들이 싹 시야에 들어와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  팔각정에서 굽어본 천사섬분재공원과 서해바다

▲  확대해서 살펴본 유료의 공간, 천사섬분재공원

▲  팔각정에서 바라본 목포의 여러 섬(외달도, 달리도)과
해남 화원면(화원반도) 지역

▲  팔각정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구름 위를 거닐듯 느긋하게 이어진 능선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비로소
송공산 정상에 이른다.

▲  정상 가는 길에서 만난 돌탑
산을 찾은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얹힌 막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  정상 서쪽 능선부에 자리한 김해김씨 정재 김수영(靜齋 金守榮) 묘

정상 서쪽 직전에는 정재 김수영의 무덤이 누워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무덤 자리
만큼은 아주 기가 막히게 좋다. 산바람과 바다바람이 서로 어우러진 현장으로 조망 또한 휼륭
하며 송공산 서쪽과 남쪽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 무조건 거쳐가야 된다. 그러다보
니 산꾼의 왕래가 잦아 조금은 시끄럽긴 해도 외로움은 덜 할 것이다.


▲  송공산 정상 (해발 231m)

압해도 서부에 자리한 송공산은 압해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자 신안군의 주요 지붕의
하나이다. 북쪽과 남쪽은 바다에 접해있고, 서쪽은 송공리 들판, 동쪽은 대천리 들판과 맞닿
아 있는데 평평한 곳에 홀로 솟아 있어 제법 존재감이 커 보인다.

송공산은 산세가 조촐하고 완만하여 어디서든 30분 정도면 충분히 정상에 닿는다. 주변이 온
통 평야와 바다라 조망이 거의 독보적인 수준으로 산 허리에는 명품급 둘레길이 닦여져 있다.
정상 주변에는 옛 송공산성(宋孔山城, 신안군 향토자료 16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는데
석성과 토성(土城)으로 이루어진 230m 규모의 조그만 테뫼식 산성(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성)
이다.
축성시기는 멀리 가면 삼한시대(마한), 적당히 가면 백제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부속시설
로 우물 1기가 발견되었다. 해양대국 백제 시절에는 압해도에 아차산현(阿次山縣)이 설치되었
는데, 송공산성이 그 중심지로 보이며, 산성 동쪽 대천리 일대에서 고분 58기가 발견되어 압
해도 지방 세력이나 관리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후삼국시대에는 압해도 지방 세력인 능창<能昌, 일명 수달(水獺)>이 서남해를 주름잡고 있었
다. 그는 송공산성을 본부로 하여 전남 서남해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 진훤)의 그늘로 들어가면서 그 넓은 서남해가 싹 후백제의 영역이 된다. 허나 후
백제 조정과 서남해/나주 세력과의 갈등이 나날이 커져가자 이를 간파한 후고구려<태봉(泰封)
>의 왕건(王建)은 이간책을 구사해 나주 세력(오씨)과 서남해 상당수의 세력들이 후고구려에
붙어버렸다.
허나 압해도와 안파, 갈도, 염산 지역은 나주를 점령한 후고구려군과 그들에게 붙은 나주/서
남해 세력과 싸우며 후백제의 후방을 지켰다. 허나 910년 능창이 왕건의 수군에 대패하여 철
원(鐵原)으로 압송되면서 압해도까지 후고구려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몽골과의 전쟁이 한참이던 1256년에는 몽골 수군 70여 척이 압해도를 공격했는데, 관
군과 지역 주민들이 송공산성에서 항전하여 그들을 때려잡고 서남해를 지켰다.

이렇듯 압해도와 서남해 방어의 듬직한 요새였던 송공산성은 이후 중요성이 상실되어 역사에
서 장렬히 사라졌고 일부 흔적만 겨우 남아있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만든 것이 제
아무리 대단하다한들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모래성에 불과한 것이다.


▲  송공산 정상에서 바라본 송공리와 천사대교

압해도 서쪽 끝(송공리)과 암태도(巖泰島)를 이어주는 천사대교의 등장으로 암태도와 자은도,
추포도, 팔금도, 안좌도까지 한반도와 간접적으로 연륙되어 더 이상 불편한 해상교통에 의지
하지 않고 육상교통으로 흔쾌히 이동이 가능해졌다.


▲  송공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길
정상에서 동쪽 하산길은 경사가 잠깐 각박하다. 그 구간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완만한 산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  송공산 둘레길 빙글빙글 돌기

▲  송공산 동쪽 능선길

정상에서 동쪽으로 10여 분 내려가면 송공산 둘레길과 만나는 갈림길에 이른다. 여기서 동쪽
으로 10분을 더 내려가면 송공산 주차장(송공산 동쪽 기점)으로 원래는 정상을 찍고 주차장으
로 바로 내려가려고 했다. 허나 둘레길 북쪽 구간에 출렁다리가 있다고 하여 '이곳에도 그런
다리가 있었나~?'
호기심이 가득 피어나 계획을 조금 수정해 그곳까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허나 그곳까지만 간다는 것이 그만 둘레길을 완전히 1바퀴 돌고 말았다. 출렁다리에서 길을
접기에는 90% 아쉬워 계속 전진을 했고 생각보다 너무 잘생긴 송공산둘레길에 퐁당퐁당 빠져
버린 것이다.


▲  송공산둘레길 동북쪽 구간 ①
둘레길을 천천히 1바퀴 돌면 1시간 10~30분 정도 걸린다. 둘레길 북쪽 구간에는
출렁다리도 있고, 차마고도 비슷하게 생겨먹은 벼랑길도 있으며, 어디서든
서해바다가 바라보여 마치 1폭의 수채화 속을 거니는 기분이다.

▲  송공산둘레길 동북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북쪽 구간 (출렁다리 이전)

▲  드디어 만난 송공산 출렁다리

송공산 출렁다리는 이 땅에 흔한 흔들다리(출렁다리) 스타일이다. 협곡 위에 걸쳐진 것으로
폭은 성인 2인분 크기이며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반응을 보여 염통을 은근히 건드
린다. 살살 건너면 다리도 살살 반응을 하지만 격하게 뛰어다니면 다리도 같이 흥분하여 출렁
출렁 파도를 친다. 바로 그런 맛으로 출렁다리나 흔들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출렁다리

▲  출렁다리 속으로~~


▲  송공산 북쪽 자락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매화도(梅花島)

▲  벼랑이 펼쳐진 송공산둘레길 북쪽 구간 ①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진 벼랑길로 바로 옆은 경사가 급한 벼랑이다. (낭떠러지 수준은 아니지
만 경사가 60도 이상 됨) 어떤 이들은 이 길을 두고 송공산의 차마고도라 부르기도 하는데 출
렁다리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구간으로 암벽과 소나무, 하늘, 바다가 서로 절묘를 이룬다.


▲  벼랑이 펼쳐진 송공산둘레길 북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바라본 송공리 지역과 천사대교

▲  송공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그 너머로
팔금도, 안좌도(安佐島)가 희미하게 모습을 비춘다.

▲  송공산 우물터 (송공산둘레길 서쪽 구간)
옛 송공산성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던 우물로 여겨진다. 지금은 물 대신
누렇게 뜬 낙엽들이 가득 들어가 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  송공산 서쪽 능선길

송공산둘레길을 동에서 서로 거의 절반(약 2.5km 정도)을 돌았다. 둘레길을 1굽이 돌 때마다
풍경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여 마치 움직이는 거대한 수채화 같다. 길이 너무 곱다보니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아 만약 늦가을이나 봄의 한복판에 왔다면 2~3바퀴를 돌았을 지도 모른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서쪽 능선길과 만나는 갈림길에 이르자 잠시 고심을 했다. 둘레길을 마저
돌면 지금까지 온 거리 만큼 더 움직여야 되고, 능선길로 진입해 정상으로 질러가면 길은 절
반 가까이 줄어든다. 어느 것이 좋을까 망설이다가 일단 능선길로 접어들기로 했다.


▲  송공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바다와 천사섬분재공원(가운데 부분)

▲  팔각정에서 남쪽 기점으로 내려가는 길 (앞서 올라왔던 길)

서쪽 능선길을 거닐던 중, 낯이 익어보이는 쉼터가 마중을 나왔다. 알고보니 앞서 남쪽 기점
에서 올라갔을 때 만났던 그 팔각정으로 어쩌다보니 산을 1바퀴 돌아 이곳으로 다시 온 것이
다.
팔각정에서 다시 정상으로 갈까 하다가 더 이상의 재방송은 별로 안땡겨 남쪽 기점(분재공원
동쪽)으로 향하는 산길을 다시 내려가다가 중간에서 잠시 작별을 했던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  다시 만난 둘레길 (둘레길 남쪽 구간)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①
송공산은 유난히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의 뫼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러다가 송공의 '송(宋)'이 소나무송(松)으로 바뀌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③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쉼터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율도, 외달도, 달리도, 해남 화원반도)

▲  송공산둘레길 동쪽 구간 ①

▲  송공산둘레길 동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동쪽 구간 ③

▲  송공산 동쪽 기점 (송공산 주차장, 등산로입구)

둘레길 남쪽 구간과 동쪽 구간 약 1.5km를 추가로 도니 다시 낯익은 곳이 마중을 한다. 정상
에서 내려와 둘레길로 진입했던 바로 그곳이다. 출렁다리만 보려고 나선 것이 일이 몇 배로
커져 이렇게 산을 1바퀴 돈 것인데 둘레길은 서남부 구간(약 1km)을 제외하고 거의 3/4를 돌
았다.
<천사섬분재공원→송공산 남쪽 기점→팔각정→송공산 정상→동쪽 능선길→둘레길 북쪽 구간(
출렁다리)→둘레길 서쪽 구간→서쪽 능선→팔각정→둘레길 남쪽 구간→동쪽 능선길 갈림길→
송공산 동쪽 기점>

동쪽 능선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7분 정도 내려가면 주차장이 있는 송공산 동쪽 기점이다. 평
일이라 주차장에는 차량 2대가 낮잠을 자고 있을 뿐, 한적하다.
여기서 목포로 나가는 150번 시내버스가 있으나 배차간격이 거의 2시간에 이르고, 차 시간도
모른다. 막연히 기다리며 희망고문을 하는 것보다 송공산입구까지 내려가 1시간 내외로 오는
130번을 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듯 싶어 기왕 벌인 발품, 10분을 더 팔았다.

송공산입구3거리까지 내려와 130번을 기다렸으나 타이밍이 영 좋지 못해 거의 50분을 기다렸
다. 때마침 바다바람까지 거세게 나를 때려대니 겨울 제국이 다시 도래한 듯, 얼마나 추웠는
지 모른다.
그렇게 피곤과 추위로 막바지 고통을 겪고 있으니 목포 130번이 다가와 입을 벌린다. 반가움
과 미움이 교차되는 그와의 만남, 그에게 나를 담아서 다시 목포시내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압해도 송공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의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송공산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 송공리


▲  송공산과 작별을 고하다. 송공산입구로 내려가는 수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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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황해도가 바라보이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화개산성, 화개약수, 강화나들길9코스,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

강화 교동도 화개산 


~~~~~  강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
(바다 너머로 멍하게 보이는 곳이 북한 땅)

화개약수 화개산 한증막

▲  화개약수

▲  화개산 한증막


 

♠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오르기 (봉수대, 화개산 정상)

▲  읍내리에서 바라본 화개산

여름 제국(帝國)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던 8월 광복절에 강화도와 황해도(黃海道) 사이에 자리
한 교동도를 찾았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별다른 정체 없이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강화도는 꿀
명소가 많다 보니 주말과 휴일에 나들이, 답사 수요가 폭발적이라 교통정체를 피하고자 아침
부터 부지런을 떤 것이다.
강화터미널에서 교동도의 발인 강화군내버스 18번(1일 11회)을 타고 송해면과 하점면, 인화리
검문소, 교동대교를 지나 황해도를 코앞에 둔 교동도(喬桐島)의 품으로 들어선다. <일반 차량
은 인화리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으나 강화군내버스 18번 승객은 받지 않음, 허나 특수 상황에
는 버스 승객도 검문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 교동도 방문객은 무조건 신분증을 지참 요망>

교동도에 들어서 읍내리에 있는 교동읍성(喬桐邑城)과 교동향교(喬桐鄕校), 화개산 남쪽 자락
에 안긴 화개사(華蓋寺)를 둘러보고 화개사 옆 산길을 따라 화개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교동
읍성과 교동향교, 화개사 부분은 이곳을 클릭한다)


▲  화개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교동평야

화개산(華蓋山, 269m)은 교동도의 대표 지붕이자 이곳에서 가장 큰 뫼이다. 교동도 동부에 홀
로 솟아있어 교동도의 대부분 지역과 강화도와 석모도, 서검도, 미법도 그리고 바다 북쪽 너
머로 황해도와 개성(開城) 땅까지 속시원히 시야에 들어와 일품 조망을 자랑한다. 이렇듯 북
녘까지 거침없이 내닫는 조망 덕에 이북 실향민들이 자주 찾아와 코앞에 보이는 북쪽을 바라
보며 넋두리를 하거나 망향제(望鄕祭)를 지내기도 했다.

화개산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성혈바위를 비롯해 화개산성, 봉수대, 효자묘, 화개사, 교동향
교, 연산군유배지, 화개약수 등 많은 문화유산과 명소가 깃들여져 있으며, 고려 후기 삼은(三
隱)의 하나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산을 방문하여
'바닷속 화개산은 푸른 하늘에 닿았는데, 산 위 옛 사당은 언제 지었는지 모르네. 제사 지낸
후 잔 마시고 이따금 북쪽을 바라보니 부소산(扶蘇山) 빛이 더욱 푸르구나'

시를 지었다. 그는 화개사에서 독서를 한 적이 있으니 그때 이 시를 지은 모양이다.

교동대교 개통 전에는 거의 교동도와 실향민들의 산으로 숨어있었으나 2014년 7월 다리가 뚫
리면서 등산객과 나들이객 수요가 크게 늘어 강화군의 새로운 꿀단지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화개산 등산은 화개사나 교동면사무소(대룡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편하다. 화개사를 기준으로
봉수대, 정상, 성혈바위, 북벽망루터, 화개산성 북쪽 성곽, 화개약수, 한증막터를 거쳐 교동
면사무소(대룡리)로 내려가면 되는데, 이 코스는 강화나들길 9코스(교동도 다을새길)의 일부
이기도 하며, 화개약수 주변에 효자묘가, 한증막터 근처에 연산군유배지가 있다. 화개사에서
정상까지는 약 30분 정도, 정상을 찍고 교동면사무소까지는 1시간 30분 내외로 걸린다.


▲  화개산 봉수대(烽燧臺) - 강화군 향토유적 29호

화개사에서 20~25분 정도 오르면 주변이 확 트인 능선에 이르고 곧바로 화개산 봉수대가 마중
을 나온다.

화개산 봉수대는 정상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사방이 확 트여있어 봉수대 자리로는 아주 명당
이다. 현재 가로 4.5m, 세로 7.2m의 석축만 남아있는데,, 불을 피우고 연기를 휘날리던 봉수
시설은 장대한 세월에 녹아 없어졌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며, 여기서 고려의 국도
(國都)인 개경이 지척이라 그 중요성이 매우 컸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覽)에는 남쪽으로 강화도 덕산봉수대에서 봉화를 받아 동쪽의 강화도 봉천산(奉天山) 봉수대
로 연락을 보냈다고 한다.

이 땅에 수많은 봉수대(봉화대)가 있었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도 남은 봉수대는 거의 없다. 고
된 세월에 지쳐 우중층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는 봉수대, 내 나이의 수십 배에 달하는 세월
을 머금고 있는 봉수대 돌은 저렇게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으나 나란 존재는 그들의 1% 인생
도 되지 못하니 참 인생은 부질 없는 것 같다.


▲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석모도, 미법도(彌法島)
하늘과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질은 더욱 높아진다.

▲  봉수대에서 정상으로 인도하는 능선길
능선길은 나무가 제법 삼삼하여 강렬한 햇살과 숨바꼭질을 하며 움직이기에 좋다.

▲  화개산 정상(269m)

봉수대에서 5~6분 정도 가면 교동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화개산 정상에 이른다. 교동도에
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제일 높은 곳으로 6각형 정자와 초소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품 조망이 펼쳐지는데, 안개와 구름을 제외하면 시야를
방해하는 존재는 그 어느 것도 없다. 허나 여기서는 북한 땅까지 바라보여 산이 높고 조망이
좋은 만큼 남북분단의 비애도 크게 만든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교동도 서부와 대룡리, 드넓은 교동평야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교동평야를 기름지게 적셔주는 고구저수지가 밑에 보이고, 바다 너머로 그 말로만 듣던 황해
도 연백군(延白郡)과 배천군 지역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철없던 어린 시절(1980~90년대)에는 어른이 되기 전에 남북통일이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어른을 한참이나 지난 지금도 통일은 커녕 아직까지도 이북 땅에 발도 들일 수가 없다.
교동도와 황해도는 3~4km로 매우 가까운 거리지만 그 체감거리는 가히 1억 광년 그 이상으로
문제는 그 거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고구저수지와 교동도 북부를 비롯해 바다 너머로 황해도 연백/배천군 지역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읍내리(사진 가운데 부분), 바다 너머로 길게 누운
석모도(席毛島)와 기장섬(오른쪽 섬)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⑤
확대해서 바라본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읍내리 지역
(사진 가운데 부분에 교동읍성이 있음)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⑥ 석모도와 상주산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⑦
석모도 북부 상주산과 강화도 서부 지역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⑧
읍내리와 남산포(사진 가운데 산), 석모도 북서부와 기장섬, 미법도, 서검도 등

           ◀  화개산 정상 표석

정상에 지어진 정자에는 산꾼들이 자리를 펴
쉬고 있었고,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어디가
북한 땅인가?','여기가 북한 땅인가?' 따지며
조망을 즐긴다.
정상의 자리란 오래 있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10분 정도 정상을 누리다가 동쪽 능선으
로 철수했다.


 

♠  화개산 내려가기 (성혈바위, 화개산성, 화개약수)

▲  성혈(星穴)바위

정상에서 서쪽 능선으로 가면 봉수대, 화개사, 효자묘(중간 갈림길에서 북쪽), 대룡리로 이어
지고, 동쪽 능선으로 가면 성혈바위, 화개산성, 화개약수로 이어진다. 성혈바위를 지나면 길
은 북서쪽으로 크게 꺾이는데, 화개약수에서 효자묘로 가는 길이 있으며, 효자묘에서 바로 올
라가면 화개사에서 올라온 길과 만난다.

동쪽 능선으로 들어서면 얼마 안가서 성혈바위라 불리는 납작한 바위가 발길을 잡는다. 하얀
금줄이 쳐진 그 안에 얕은 구멍이 여럿 찍힌 성혈바위가 있는데, 성혈이란 바위구멍 그림으로
청동기시대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성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거나 풍요, 다산(多産), 자
연 등을 숭배하는 민간신앙이나 제사 현장으로 보고 있다. 바위에 구멍을 내고 여기서 제사를
지내거나 주술행위를 했던 것이다. 이런 성혈 흔적은 자연산 바위 외에도 고인돌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  위에서 바라본 성혈바위
바위 오른쪽에 얕게 파인 동그란 자국들이 성혈이다.

▲  성혈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교동도 읍내리 동부와 석모도 상주산, 강화도 서부가 바라보인다.

▲  북벽 망루(望樓)터

성혈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북서쪽으로 크게 꺾인다. 그래서 정상 외에는 보이지 않던 북쪽의
산하가 나의 시야를 점유하게 되었고 그런 길을 조금 내려가면 북쪽을 향한 곳에 북벽망루터
가 허전하기 그지 없는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북벽망루는 화개산에 두룬 화개산성 북쪽 성벽에 세운 망루로 산성의 외성(外城)과 내성(內城
)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한다. 산성에서 2개의 망루터가 발견되었는데, 다른 하나는 여기서 북
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다들 망루를 받쳐들던 돌만 아련하게 남아있다.


▲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
바다 너머로 황해도가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고구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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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교동도 동북부 (교동대교 방면)
바다 너머로 강화도 양사면 지역이 희미하게 두 눈에 들어온다.

▲  화개산성(華蓋山城) - 강화군 향토유적 30호

북벽망루를 지나면 오른쪽(북쪽) 숲속에 초췌한 모습의 화개산성이 모습을 비춘다. 화개산의
듬직한 갑옷인 화개산성은 내성(1,013m)과 외성(1,155m)으로 이루어진 산성(山城)으로 총 길
이는 약 2,168m이다.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게 닦여졌는데, 이 산성이 언제 축성되었
는지는 화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고려 때 지어진 봉수대를 통해 고려 때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1553년에 최세운이 성을 증축했으며, 1591년 외성을 철거하여 교동읍성(지금
의 교동읍성과는 다름)을 쌓았고, 1737년 개축하여 군창(軍倉)을 두었다.

허나 19세기 이후 성은 버려졌고, 관리의 손길이 떠난 산성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의 고약한
심술이 이어지면서 성곽 대부분이 분해되어 겨우 북벽망루와 화개약수 주변, 남쪽 산자락(화
개사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  화개산의 젖, 화개약수

화개산성 안내문을 지나면 깎아지른 듯한 바위 밑에 자리한 화개약수가 마중을 한다. 교동향
교에 있는 성전약수와 더불어 화개산이 속세에 베푼 약수로 푸른 이끼가 짙게 뒤덮힌 돌에서
물이 쏟아진다. (성전약수보다 물맛이 좋음) 산에 왔으니 산의 마음도 확인할 겸, 약수를 한
모금 마셔야 되겠지.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갈증과 체내(體內)
의 체증이 싹 가시는 것 같다.
약수터에는 나무로 보호각을 만들었으며, 기둥에는 화개약수를 찬양하는 시가 적혀있으니 읊
어보면 다음과 같다.


▲  오랜 세월을 머금은 갸륵한 맛, 화개약수

'화개약수'  석천(石泉) 김흥기

얼마나 품었길래 그 먼길 돌아 졸졸 쉼없이 흐르는가
수없이 오갔을 세기의 지층을 밟고 귀뚜리 우는 밤에도
산주름 굽이치는 돌틈을 비집고 또르르 굴려오는 은빛 맨발의 낙수
허기진 산비탈 길에서 적막을 견뎌온 너, 천년 비밀의 갸륵한 맛

▲  효자묘(孝子墓) - 실상은 효자 아버지의 묘라고 함

화개약수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직진하면 한증막과 교동면사무소로 이어지고, 왼쪽 오르
막길을 오르면 낮은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진 효자묘가 나온다. 이 무덤을 지나 뒷쪽(남쪽)
산길을 오르면 화개사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서쪽 능선길과 만난다.

효자묘는 야트막한 봉분과 낮은 상석(床石)이 전부인 조그만 무덤이다. 무덤의 이름도 참 모
범적이라 부모들이 딱 좋아할만한 이름인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전하는 것이 없고 그저 막연
하게 효자묘라 불리고 있으니 그 유래는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안내문에는 삼국시대로 추정된다고 나오나 전설
내용은 거의 조선시대 스타일임> 인근 청주골에 병환중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신씨란 젊은이
가 있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으나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여 교동현 군사로 징발된 부잣집 아들을 대신
하여 군대에 들어갔다. 매일 부친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댓가로 대신 들어간 것이다.
 
신씨는 화개산성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안부를 묻고자 산 밑 고읍마을로
을 옮겼다. 마침 전쟁(또는 장거리 훈련)에 나갈 일이 있어 무탈하게 돌아오면 산성 북루(北
樓)에 해가 지기 전까지 하얀 적삼을 달기로 아버지와 약속을 했다.
무탈하게 돌아온 신씨는 약속대로 북루에 적삼을 달려고 했으나 이를 수상하게 여긴 수장(守
長)이 적삼을 빼앗고 관아로 잡아갔다. 당시 문루에 적삼 등의 깃발을 다는 것은 다른 성과
병사들에게 일종의 연락을 취하기 위함인데 수장의 허가도 없이 달려고 하니 당연히 오해를
산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약속된 시간까지 적삼은 달리지 못했고, 그 사연을 알 도리가 없는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것으로 판단해 성급하게 목숨을 끊고 만다.
신씨를 추궁하던 수장은 그 사연을 알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시신을 산성 안에 안장하고 3년
시묘를 하며 군복무를 하도록 해주었다. 또한 신씨의 효행을 기리고자 장수와 병사들이 매일
아침 무덤에 참배를 했고 참배 자국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무덤은 효자가
아닌 효자의 아버지 무덤인 것이다. 허나 효자 아버지 무덤이라 하기에는 이름이 기니 효자
신씨를 기릴 겸 효자묘라고 한 것 같다.


 

♠  화개산 마무리

▲  그림처럼 펼쳐진 화개산 서쪽 숲길 (효자묘~한증막 구간)

효자묘를 둘러보고 아름다운 숲길에 취하며 대룡리(교동면사무소)로 내려갔다. 숲이 매우 삼
삼해 제아무리 세상을 녹일 기세인 여름 햇살이라 한들 여기서는 어림도 없다.


▲  빽빽하게 우거진 화개산 숲길

▲  숲길에 달아놓은 조촐한 문
둘레길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둘레길 스타일의 문이다.

▲  화개산 한증막(汗蒸幕)

숲길을 내려가니 아주 단단하게 지어진 커다란 돌집이 마중을 나온다. 생김새를 보니 오래된
돌무덤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쪽에 문까지 나있어 마치 북극 사람들이 살던 이글루의 돌버전
같은 느낌까지 드는데, 뜻밖에도 옛날 사람들이 이용하던 한증막의 흔적이다.

한증막이란 오늘날 우리 목욕 문화의 일원인 찜질방의 옛 형태로 보면 된다. 이곳 한증막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황토를 밑에 깔고 위에 돌을 쌓아 반 동그라미 모습을 자아냈다.
둘레는 15m, 직경 4.5m, 높이 3m로 인근 냇물에 한증으로 푹 삶은 몸을 식힐 수 있도록 돌을
깐 자리가 남아있다.
돌한증막 작동 원리는 우선 마른 소나무가지 등으로 돌집 안에 불을 지펴 온도를 높인 다음
그 재를 꺼낸다. 그런 다음 무성한 생솔가지를 안에 넣어 바닥에 깔고 그 안에 들어가 땀을
충분히 낸 다음, 옆 냇물에서 몸을 식힌다. 그렇게 한증(汗蒸)을 반복하고 마지막은 목욕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지금의 찜질방과 같은 방식인 것이다.

이 한증막은 1970년대까지 절찬리에 사용되었으며, 교동도에는 이곳 외에도 수정산과 여러 곳
에 한증막을 두어 섬 사람들이 이용했으나 지금은 이곳만 남아있다. 솔직히 한증막 유적은 처
음 보는지라 참 생소하기 그지없는데, 이런 한증막 유적은 이 땅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옛
사람들의 목욕/찜질 문화를 귀뜀해주는 소중한 존재로 '국가 민속문화재'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해도 전혀 손색은 없어보인다. 그렇게 해야 이 한증막도 우리 곁에 더 오래 있을 것이 아
닌가?

* 한증막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산233


▲  냇가 옆 숲속에 터를 닦은 한증막

▲  앞에서 바라본 한증막

▲  한증으로 뜨거워진 몸을 식히던 현장
(냇가에 있음)


▲  한증막 내부로 들어가는 네모난 문

증막 문이 작아서 완전 엎드려서 들어가야 된다. 내부는 옛 무덤의 석실(石室) 같은 모습으
로 너른 공간이 있는데, 거기에 마른 가지 등을 태워 내부를 뜨겁게 달군 다음, 재를 치우고
생솔가지를 바닥에 깔아 한증(찜질)을 하였다.
안에 들어가볼까 했으나 내가 들어가면 자칫 무너질까 겁나서 이렇게 보는 선에서 욕심을 버
렸다. 게다가 버려진지 오래된 한증막이고 한여름이니 안에는 벌레들도 무지 많을 것이다.


▲  연산군유배지로 인도하는 숲길

한증막을 둘러보고 조금 내려가다보면 연산군유배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한다. 조선의 제
10대 군주인 연산군(燕山君)이 교동도로 유배를 와서 죽었으니 그 유배처가 남아있을 것이고
그 현장이 이 부근에 있던 모양이다.


▲  연산군유배지 표석 (2014년)

연산군유배지 표석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반질반질한 하얀 피부를
지녔다.
이 땅의 사람들은 연산군(1476~1506)하면 다들 폭군, 신하들 때려죽이기, 불효자, 할머니 죽
인 패륜아, 흥청망청, 기생 잡기 등 그야말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허나 그는 우리
가 생각한 것 외로 그렇게 쓰레기 군주는 아니었다.

연산군은 조선 9대 군주인 성종(成宗)과 폐비윤씨의 아들로 성종의 장자(長子)이다. 폐비윤씨
가 한 성깔 하던 여인이라 성종과 자주 마찰이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성종의 어머
니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와 성종에 의해 폐비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고, 1482년 사사(賜死)
되고 만다. 성종은 이 사실을 아들이 알까 두려워 신하들에게 100년 동안 윤씨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명했다.

연산군은 왕자 시절부터 말썽을 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그는 10년 이상 허침(
許琛)과 조지서(趙之瑞)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시문(詩文)과 음악, 악기에 매우 능했으며,
많은 시를 남겼다. 또한 효성도 지극해 부왕 성종이 중병으로 눕자 밤을 새며 간호했으며, 자
신의 생일 하례를 취소시켰다. 또한 1494년 부왕인 성종이 승하하자 삼사(三司)의 반대를 뿌
리치고 부왕의 명복을 비는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기도 했다.

1494년 왕위에 오르자 비융사(備戎司)를 설치해 갑옷과 무기를 생산하여 국방에 신경을 썼고,
두만강(豆滿江)에서 소란을 피우는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해 투항한 여진족에게 토지와 상급
을 내렸다. 또한 변방의 안정을 위해 백성들의 이주를 독려했다.
종묘 제도를 정비하고 사창과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해 물가를 안정시켜 굶주리는 백성을 구
제했으며, 호적식년(戶籍式年)을 개정해 백성의 불편을 덜었다. 그리고 '경상우도지도(慶尙右
道地圖)','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지리서와 '국조보감(國朝寶鑑)','역대제왕시문잡저(歷代
帝王詩文雜著)' 을 편찬해 제왕 수업에 귀감으로 삼았다.
또한 성종 이후 계속된 태평성대로 관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치향락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되자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 강력히 단속을 했으며, 전국에 암행어사(暗
行御史)를 풀어 지방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들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문신(文臣
)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케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다시 실시해 학
문 발달에 크게 신경을 썼다.

연산군은 신하의 눈치를 받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왕권 강화를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면
서 그 유명한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와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가 터졌고, 왕에게
불경죄를 저지른 이들이 많이 피를 보았다. 또한 어머니 윤씨의 사망 이유를 알게 되면서 다
소 이성을 잃게 된다.
이렇게 그의 패도정치(覇道政治)가 나날이 심해지자 왕을 갈아야 된다는 무리들이 조금씩 고
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주역은 바로 연산군과 가까웠던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이
었다. 성희안은 금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으로 왕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고, 박원종
은 확실치는 않지만 연산군이 그의 누이를 건드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둘은 앙심을
품고 홍경주(洪景舟)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모의했고, 1506년 9월 2일 박원종 일당은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때 왕은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반란군의 침입에 왕은 크게 당황하여 아무런 말
도 못했다고 하며, 결국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반란군에게 옥새를 내주고 말았다.

반란군은 정현왕후(貞顯王后, 성종의 계비)의 허락을 구해 왕을 동궁(東宮)에 가두고 그녀의
소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데려와 익선관(翼善冠)을 쓴 상태로 왕위에 올렸다. 그가 바로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이다. 이 사건을 세상에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부른다.

동궁에 유폐된 연산군은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을 통해 궁밖으로 추방되어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었다. 유배된지 2달 뒤인 11월 역질(疫疾)에 걸리자 중종은 약을 보냈는데, 어찌된 영
문인지 불과 며칠 만에 갑자기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기록에는 단순히 병
으로 죽었다고 나와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없는데, 이상한 것은 한겨울에 역질이란 전염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또한 중종이 보냈다는 약도 상당히 의심쩍다. 그래서 병사가 아닌 독살되었
다는 설이 강하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싸늘한 주검이 된 연산군은 교동도에 매장되었으며, 1512년 12월 부인 신씨가 남편의 무덤을
자신의 외조부 땅(서울 방학동)으로 이장해 줄 것을 청하자 중종이 이를 허락해 1513년 2월
왕자의 예로 이장되고 양주군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했다.
연산군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넣었으나 그 요구는 거절당했다
고 한다. (연산군묘 제사는 처가집인 거창신씨 집안에서 지내고 있음)

그는 왕이었음에도 그 흔한 묘호(廟號)도 받지 못했으며, 시호(諡號)도 없다. 그냥 왕자 시절
의 칭호인 연산군을 그대로 썼다. 김정국(金正國)과 유숭조(柳崇祖) 등은 그에게 시호를 올려
왕으로 추봉(追封)하고 양자(養子)를 들여 제사를 받들 것을 건의했으나 중종과 반정파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를 두고 이긍익(李肯翊)은 그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김정국 등을
높이 평가하며, 연산군의 제사가 끊긴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라 기록했다.

이렇게 죽어서도 왕의 예우를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조선이 망할 때까지 종묘(宗廟)에 배향되
지도 못했다. 또한 무덤도 능(陵)이 아닌 묘(墓)로 사대부의 무덤 수준에 머물렀으며, 그의
사초는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로 격하되었다.
이렇듯 중종과 반정파에게 철저히 매장되고 왜곡되었으며, 명종(明宗)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
면서 연산군 3글자는 부정적인 의미이자 폭군의 대명사가 완전히 찍히게 된다. 사림파는 연산
군 때 죽은 사림 계열 사람들, 즉 자신의 선배들을 의로운 인물로 추앙했고, 연산군과 그 측
근은 죄다 쓰레기로 기록하여 그것을 후손들에게 계속 주입시켰다. 이는 패배자에게 인정을
두지 않는 역사의 매정한 현실이다.
승리자는 항상 영광스럽게 포장이 되지만 패배자는 아무리 공적이 뛰어나도 승리자의 구미에
따라 철저히 왜곡되고 파괴된다. 연산군은 바로 역사의 패배자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산군이 유배살이를 했던 현장은 3곳이 비정되고 있는데, 이곳과 교동읍성 부근, 교동관아터
부근 등이다. 허나 어느 곳이 정답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태, 교동읍성 부근과
교동관아터 주변은 유배지를 알리는 비석이 있고, 내가 찾은 화개산 유배지는 표석이 있어 서
로 연산군 유배지임을 내세운다. (근래에 그 시절을 재현한 초가와 연산군 인형 등을 설치했
음)


▲  화개산 서쪽 산길 (대룡리)

▲  교동도의 서울인 대룡리

연산군유배지를 둘러보고 대룡리로 내려갔다. 나를 진하게 감싸던 숲길은 어느덧 끝나고 주변
이 확 트인 평탄한 흙길이 나를 맞이해 교동면사무소까지 쭉 인도한다.
교동면사무소에는 큼지막한 화개산 안내도가 있는데, 안내도를 보니 화개산을 남과 동, 북,
서로 완전히 1바퀴를 돌았다. 소요시간은 2시간 정도로 강화나들길 9코스인 교동도 다을새길
과 코스가 겹친다. 다을새길은 월선포에서 교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석천당~대룡리시장~
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를 두루 거쳐 다시 월선포로 돌아오는 16km의 도보길이다.

교동면사무소를 나오면 바로 교동도의 서울인 대룡리 마을이다. 마을 한복판에는 대룡시장이
있는데 시간이 흐르다가 제대로 기절한 듯, 1970~80년대 분위기를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시
장이라고 하나 가게와 음식점이 여럿 있는 짧은 거리에 불과하다.

시장 인근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목마름과 배고픔을 조금 해소하며 바깥으로 나가는 군내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에 부착된 시간표를 보니 30분 뒤에 월선포를 출발한다고 한다. 월선
포에서 대룡리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해는 아직도 여전하나 시간은 이미 17시가 넘었고, 몸도 다소 지친 상태라 더 이상 섬을 둘러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그 지루한 시간, 허나 한번 밖에 없는 그 시간을 억지로 죽여
가며 정류장에 죽치고 앉았다. 나중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교동도와의 인연은 또 있을 것
이다. 이번에 못가본 곳은 그때 인연을 지으면 될 것이요. 인연이 닿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며 억지로 인연 짓는 것도 딱히 좋지는 못하다.

시간이 되자 강화군내버스 18번이 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 친구를 만난 양 얼마나 반
갑던지. 그를 잡아타고 바다를 건너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교동도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하루 속히 남북이 통일되어 교동도
가 NLL의 동쪽 시작점, 민통선 구역이란 딱지를 떼었으면 좋겠다.

* 화개산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대룡리, 읍내리, 상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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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은하계를 꿈꾸다.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외나로도)

 


~~~ 우주를 꿈꾸며,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호(KSLV-1)
▲  나로호(KSLV-1)


 

겨울 제국의 차디찬 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하던 1월의 끝 무렵, 겨울의 핍박에서 잠
시 벗어나고자 일행들과 따스한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번잡한 서울을 떠나 충북과 충남, 전북의 여러 지역을 거쳐 저녁 늦게 전남 여
수(麗水)에 이르렀다. 여수는 원래 계획에 없었으나 광양(光陽) 땅에 이르다보니 바다 남
쪽에 아른거리는 여수 땅이 갑자기 땡기는 것이다. 하여 그 마음 뜻대로 이순신대교를 건
너 여수로 진입, 환상적인 야경을 보여주는 여천공단을 가로질러 여수 도심부에서 흔쾌히
1박을 청했다.
첫날의 여독이 대단했는지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 거의 9시간을 잔 것 같다. 아침 햇살
의 보챔으로 겨우 꿈나라에서 벗어나 둘째 날 여로(旅路)를 배불리 채우고자 서둘러 길을
재촉했는데 이번에는 인연이 참 지지리도 없던 고흥(高興)으로 길을 향했다. (고흥은 20
여 년 전에 잠시 스쳐 지나간 것이 전부임)

고흥의 관문인 벌교읍(筏橋邑)에 이르자 점심으로 그 지역의 별미(別味)인 꼬막정식을 섭
취했다. 10가지가 넘게 나온 반찬을 거뜬히 비우며 배를 남산처럼 불리고 고흥 땅으로 진
입, 적당한 곳을 찾다가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명소를 잠시 접어두고 21세기 스타일에 걸
맞게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으로 길을 잡았다.
그곳은 고흥읍내에서 1시간 가까이 들어가야 되는 고흥의 동남쪽 구석으로 바다를 무려 2
번(나로1대교, 나로2대교)이나 건너고 고개도 여러 번을 넘어야 되며, 내나로도(內羅老島
)란 큰 섬을 가로질러야 된다. 게다가 외나로도(外羅老島)로 들어서 15분 이상 들어가야
되니 그 길이 참 파란만장하다. 또한 거기서 나올 때도 왔던 길로 다시 나와야 되므로 외
지에서 들어가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내던져야 된다.


 

♠  외나로도에 둥지를 튼 우리나라 우주 진출의 중심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입문

▲  북쪽에서 바라본 우주과학관

외나로도 동쪽 구석인 예내리에는 우리나라 우주 개척의 중심지인 나로우주센터가 있다. 우주
진출을 향한 강인한 집념이 서린 특별한 현장으로 그 북쪽 해안에 우주 개척과 우주과학의 이
해를 돕고자 2009년 6월 12일 우주과학관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다.

동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과학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상설전시관에는 우주에서의
기본적인 운동원리와 로켓, 인공위성, 우주탐사(태양계), 달 탐사를 다루고 있으며, 기획전시
실에는 우리나라 로켓의 역사와 로켓의 실물을 다루고 있다. 3D영상관은 우주에 관한 프로그
램을 상영하고 있으며, 4D영상관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우주영상 콘텐츠와 직접 몸으
로 느끼는 체험효과를 선보이고 있다. (3D, 4D영상관은 별도 관람비가 있음)
야외전시장은 로켓광장, 포물면통신, 태양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로켓광장에는 나로호 관
련 로켓 모형을 전시하여 속인(俗人)들의 호기심을 건드리고 있으며, 매년 5월 초에는 우주를
주제로 고흥우주항공축제를 연다. (보통 어린이날을 끼고 함)
입장료는 성인 3,000원, 청소년과 어린이는 1,500원으로 과학관 내부만 적용되며, 야외전시장
과 예내리 앞바다는 무료이다. 또한 주차비도 받지 않는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어린이와 청소년을 동반한 가족 나들이 명소로 아주 좋다. 그러다보니 가
족 단위 관광객들이 거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우주과학교실
과 우주체험교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과학관 동쪽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몽돌해변(예내리 앞바
다)이 펼쳐져 자연적 운치를 더한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나로우주센터에 속한 우주과학관으로 여기서 남쪽으로 3km 이상 들어가야
나로우주센터의 중심지가 나온다. 그곳에서 로켓과 인공위성을 하늘로 날려보낸다. 허나 우주
개척의 야망이 담긴 국가의 예민한 곳이라 금지된 구역으로 굳게 잠겨 있으며, 일반인은 우주
과학관 주차장까지만 발길을 허용하고 있다. (그 이상은 못들어감)
단 나로우주센터 발사현장과 발사통제동은 고흥우주항공축제를 비롯한 일부 기간에 한해 제한
적으로 열어두고 있어 사전 예약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다. 이때는 우주과학관 관람권 구입자
에 한해 입장이 가능하며, 셔틀버스를 타고 들어간다. 발사 현장과 발사통제동은 촬영이 엄격
히 금지되어 있어 사전에 핸드폰과 카메라를 수거하며 미성년자는 반드시 보호자와 동반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또한 한국 국적 사람만 접근이 가능하므로 검은 머리 외국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 사람은 접근 불가이다.


▲  크게 펄럭이는 태극기와 나로호(오른쪽)

고색의 향기와 자연, 산, 길(둘레길, 산길), 역사가 대부분을 이루는 본인 여행기에서 이렇게
과학관을 다룬 것은 2003년 1월 국립서울과학관 이후 2번째이다. (해당 글은 분실됨) 과학 분
야(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는 학창 시절부터 관심도 매우 적었고, 그러다보니 지식의 깊
이도 밑바닥이라 시험 점수는 늘 50점 이하를 맴돌았다. (20점을 맞은 적도 있음 ㅠ) 아무리
벼락치기로 죽어라 외워도 과학 쪽은 통 효과가 없었으며 찍기 신공 또한 형편없었다.
그렇게 본인과 과학은 영 좋지 못한 궁합이라 본인의 돌머리로 비록 일부만 다루었다고 해도
본글을 풀어나가는 것이 적지 않게 고통스러웠다. 허나 오랜만에 찾은 과학관이고 언젠가 우
주도 한번 나가봐야 되기에 미리 예습 차원에서 이곳을 찾은 것이다.

내 어렸을 적에 21세기가 되면 하늘을 나는 차가 생기고, 로보트를 만들어 지구를 지키며, 인
공지능이 일상화되어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우주 여행은 지하철을 타듯 쉬워지며,
다른 행성에서 집과 도시를 짓고 사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 배웠다. 또 그런 식의 공상영화
와 만화가 홍수를 이루며 21세기만 되면 완전한 신세대가 펼쳐질 것 마냥 어린이와 10대들에
게 주입을 시켰다.
허나 21세기가 밝은지 벌써 20년이 넘었으나 하늘을 나는 자동차 그리고 우주 여행, 모두 어
림도 없다. 10년은 커녕 100년 안에도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지구에서 가까운 달 조차 마음
놓고 부리지를 못하니 말이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품고 있던 그 동심과 환상은 생각보다 더
딘 과학기술의 속도 앞에 보기 좋게 아작나고 말았으니 어릴 적 공상 속의 세상은 여전히 상
상 속에나 머물러 있다. 마치 당장이라도 우주를 잡아먹을 기세였던 오만한 인간들의 실수였
던 것이다.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소재지 :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예내리 480 (하반로 490)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061-830-8700)


▲  목성에서의 내 몸무게는?
상설전시관 1층에는 수성, 금성, 목성, 토성 기준으로 몸무게를 재는 공간이 있다.
내가 지구에서는 70kg대인데, 목성에서는 그 2배 이상인 189kg이나 나왔다.

▲  귀엽게 표현된 우리나라 우주인 인형

▲  우주에서 멋대로 보내온 선물들 ①
이들은 운석으로 우주가 우리나라로 던진 것들이다. 우주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우주과학관의 전시물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  우주에서 멋대로 보내온 선물들 ②
저들 중 왼쪽에 잘생긴 운석이 고흥군 두원에 떨어진 '두원운석'이다. 운석은
우주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고마운 존재들로 우주에서 던진 것이
전부일 정도로 희소성이 크기 때문에 금덩이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  우주선 발사를 내 손으로~~! 나로우주센터 발사통제센터 모형

나로호 발사를 주관했던 나로우주센터의 발사통제센터를 재현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
주발사체인 나로호(KSLV-1)는 2013년 1월 30일에 발사되어 탑재 위성인 나로과학위성(STSAT-
2C)이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했는데, 이를 통해 우주기술개발의 기본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이 기술을 기반으로 순수 국산 발사체인 한국형발사체(KSLV-II)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  나로우주센터 발사통제센터 모형 바깥 모습

▲  나로과학위성
2013년 1월 나로3호에 실렸던 나로과학위성의 실제 크기 모형품이다. 무게는 100kg,
크기는 763x1033x1167mm로 300km~1,500km 타원궤도에서 1년 정도 임무를 수행한다.

▲  우리별1호
이름도 상큼한 우리별1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 연구센터와 영국 써리대학이 같이 만든 것으로 1992년 8월
남미 쿠루기지에서 우주로 날려보냈다.

▲  우주인들이 먹는 우주식량들 (모형)

주로 날라간 사람들은 무엇을 섭취했을까? 그들이 우주선과 우주정거장에서 먹는 음식들이
재현되어 있다.
처음에는 분말 음식 위주로 먹었으나 점차 호박파이, 육류, 피자, 과자 등으로 종류가 확대되
었으며, 우주정거장에서 오븐 등을 통해 간단한 조리도 가능하게 되었다. 단 무중력 공간이라
음식물 찌꺼기와 물은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캔이나 튜브 같은 밀폐된 용기를 사
용해 밥을 먹는다.

 ◀  우주인 화장실 (밑에 좌식 변기가 있음)
아무리 우주라고 해도 쌀 것은 싸야 된다. 하
여 우주선과 우주정거장에 화장실을 두었는데,
무중력 공간이라 배설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면 그것들이 공간 내부를 둥둥 떠다니는 최
악의 사태가 발생할 수가 있다.
그래서 소변용 진공수거기와 대변용 수거기로
나누어서 취급하고 있는데, 강력한 흡입력으로
배설물을 빨아들여 저장탱크에서 폐기한다. 속
편하게 우주선 밖으로 배출하는 것으로 알았더
만 그게 아니었다.

       ◀  우주인 샤워실 (샤워부스)
우주에서 지구처럼 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하여 젖은 스펀지 등으로 몸을 닦거나 목욕
수건에 물을 묻혀 닦아내는 방식으로 몸을 씻
는다. 그야말로 고양이식 세수 방식이다.
머리를 감을 때는 린스 기능이 있는 샴푸를 사
용하며, 이를 닦을 때는 먹을 수 있는 치약을
사용하여 삼키거나 진공튜브로 처리한다. 샤워
부스에서 이용한 물은 폐수탱크에 연결된 진공
흡입기로 처리하며, 우주선 밖으로는 배출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주선 생활이 생각 이상으로 고통스럽
고 그나마 개선된 것이 저 정도이니 아직 우주
개척의 길은 한참이나 멀었다. 솔직히 저런 공
간에서는 하루도 지내고 싶지 않다.


▲  우주 도시(Space city) 상상모형도

언제가 될지 모를 막연한 미래에 달과 화성, 금성 등에 우주 도시를 만든다면 저런 모습이 된
다고 한다. 지구와는 대기부터가 틀리니 저런 보호막 식의 도시를 닦은 다음 태양발전소나 원
자력 발전소로 에너지를 충당하고 양극에 얼어붙어있는 드라이아이스에서 탄산가스를 만들어
산소를 추출하면 100년 안에 지구의 대기층과 비슷한 대기권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때가
되면 보호막은 싹 거둬도 될 것이다.


▲  재현된 달 표면과 우주탐사로봇

▲  한없이 착하게 쓰인 우주윤리

우주 공간은 인류 공용의 공간으로 어느 우주도, 어느 별도 영유권과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
다고 쓰여있다. 허나 저것은 어디까지나 미국과 러시아 등 우주에 조금이나마 손을 대고 있는
나라들이 편의상 만든 윤리이다. 다른 행성과 은하계의 생명들로부터 동의를 받은 것도 아니
며, 어디까지나 윤리적인 내용이라 강제구속력은 없다.
지금이야 달 하나 다루는 것도 벅찬 상태라 저 윤리가 잘 지켜지고 있지만 나중에 우주를 마
음대로 하는 세상이 오면 저것은 일개 휴지조각이 될 것이다. 지구도 그렇지만 우주에서도 강
한 것이 장땡이다. 그러니 우리도 우주 개척을 착실히 준비하여 꼭 장땡이 되어야 한다.


▲  아리랑3A호 (KOMPSAT-3A)
2015년 3월 26일 러시아 야스니 발사장에서 쏘아올린 인공위성으로 2019년
봄까지 우주에서 몸을 풀었다.

▲  아리랑위성1호 (KOMPSAT-1)

▲  아리랑위성5호 (KOMPSAT-5)


▲  호버만의 구(Hoberman Sphere)

1층과 2층이 확트인 과학관 중심부에 '호버만의 구'라 불리는 아름답고 요염하게 생긴 동그란
물체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제작된 그는 우주의 역동적인 팽창과 수축의 반복원리로 구성
되어 있는데, 우리의 우주 개발에 대한 의지와 염원이 담겨져 있으며, 우주 탄생의 신비로움,
우주 개발을 위한 도전 정신, 우주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우주의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인도하는 상징적 조형물로 삼고 있다.
호버만의 구는 평상시에는 가만히 있다가 2층에 특정 장소에 멈춰서면 율동을 부리며 움직인
다. (2층에 안내문이 있음)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마무리

▲  과학로켓 KSR-III

KSR-III은 1997년 12월부터 5년에 걸쳐 개발된 우리나라 최초의 액체연료로켓이다. 그의 추진
기관은 액체산소와 케로신을 추진제로 사용하는 지상 추력(推力) 13톤급의 액체엔진으로 가압
식 추진제 공급방식을 채택했다.
가압식 사이클은 액체연료 로켓의 연료 공급 방식 중의 하나로 기체를 이용해 추진체 탱크 내
의 추진체를 연소기로 밀어내는 방식을 말하며 구조가 간단하고 저렴해 신뢰성이 높다.


▲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 여행자인 이소연이 우주선에서 먹었던 식량과
실험도구들

▲  나로호 2차 발사 실패와 원인 규명을 위해 만든
비행종단시스템 2단 로켓


나로호 2차 발사는 2010년 6월 10일 17시 1분에 있었다. 허나 발사된 뒤 겨우 136,6초만에 1
차 진동이 생겼고, 1초 뒤인 137.3초에 내부 폭발로 보이는 2차 진동으로 원격측정이 중단되
면서 실패했다. 통신이 두절되었을 때 그의 고도는 67.73km였다.

사고 발생 원인을 파악하고자 에네르고마시 관계자들이 포함된 한,러 공동위원회가 구성되어
3번의 FTS-킥모터 연계실험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FTS 오류였음이 밝혀졌다. 이곳에 전시된
것은 FTS-킥모터 연계실험 때 사용한 것이다.


▲  우리나라의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의 위엄 (2013년 1월 30일에 발사됨)

▲  75톤급 액체로켓 개발모텔 엔진 목업
한국형발사체의 기본 엔진으로 4기를 묶어 한국형발사체의 1단에 적용하고 확대
노즐을 적용한 엔진 1기로 2단을 구성했다. 2015년부터 나로우주센터에서
지상연소시험 등의 개발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장차 국가 우주개발을
위한 핵심 부품으로 삼을 예정이다.

▲  7톤급 액체로켓 엔진 목업

▲  하얀 피부의 잘생긴 나로호와 로켓 형제들

우주과학관 내부에는 볼거리들이 많이 깔려있다. 그중에는 호기심을 흥분시키는 것들도 여럿
있으나 본인이 우주과학 지식이 일천하여 그들을 모두 다루지 못하고 겨우 일부만 본글에 끄
집어냈다.

야외전시장에는 크고 견고한 무쇠덩어리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모습으로 자리들 하고 있는데,
그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와 KSR로켓 형제들의 모조품이다. 그중 훤칠한
외모를 자랑하는 나로호는 2009년 8월 25일 1차 발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2010년 6월 10
일 또 실패했으며, 2013년 1월 30일 드디어 성공하여 우주로 날려보냈다.
나로호의 몸매는 길이 33m, 지름 2.9m, 무게 140톤으로 2단형(1단은 액체추진 로켓으로 러시
아에서 개발함, 2단은 고체추진 로켓으로 우리나라가 개발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를 우
주로 보낸 현장이 바로 나로우주센터이며, 이때 나로과학위성을 실어보냈다.


▲  나로호의 굵직한 밑도리와 KSR로켓 형제들(KSR-1, KSR-2, KSR-3)

나로호보다 키가 작은 무쇠덩어리들은 KSR시리즈의 로켓이다. 그중 KSR-1은 길이 6.7m, 지름
0.42m, 무게 1.2톤으로 1단형 무유도 고체추진 로켓이며 1993년 6월 4일 1차 발사하고, 그해
9월 1일에 2차 발사를 했다. 추진관과 구조체, 탑재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존농도 관
측장비를 포함한 탑재물을 지상에 각종 관측자료를 송신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KSR-2는 길이 11.1m, 지름 0.42m, 무게 2.02톤으로 2단형 고체추진 로켓이다. 1998년 6월 11
일에 발사되었으며, KSR-1보다 더 높은 고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리고 KSR-3
은 길이 13.5m, 지름 1m, 무게 6.1톤으로 2단형 액체추진 로켓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액체추
진엔진의 로켓으로 한국형 인공위성 발사체를 쏘아올리기 위한 기반기술 확보 차원에서 제작
되었다. 추력 13톤의 액체로켓엔진이 부탁되었으며, 탑재부와 유도조종장치, 자세조종장치,
가압용 고압가스 탱크, 연료 및 산화제탱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예내리 앞바다(몽돌해변)

우주과학관 동북쪽에는 300m 정도의 잘생긴 몽돌해변이 펼쳐져 있다. 흥미롭지만 그만큼 머리
가 아픈 우주과학관 관람으로 나의 돌머리가 지끈거리던 상태였는데, 이 해변을 보니 그 통증
이 싹 해소되는 것 같다. 역시 인간에게는 대자연이 빨간약이고, 자연만큼 좋은 것은 없다.
게다가 과학관 앞에 이렇게 좋은 자연 공간이 있으니 자리 하나는 정말 잘 잡은 것 같다.

우주과학관 앞 몽돌해변(예내리 앞바다)은 잔잔한 바다와 밟는 느낌이 좋은 몽돌, 짙게 띠를
이루며 해안을 둘러싼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곳으로 물놀이 장소로도 아주 좋다. 허나 이곳에
부여된 '~~해수욕장'이란 명칭은 없고 외나로도에서도 아주 구석진 곳이라 그냥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숨겨진 해변이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것이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이 들어서면서
과학관의 후식용으로 들렸다가는 명소가 되었다. 나로우주센터와 우주를 든든한 후광(後光)으
로 삼았으니 나로우주센터를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우주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사람이 끊길
일은 전혀 없다.


▲  부드러운 곡선미를 보이는 예내리 앞바다와 북쪽 방파제
사람들이 몽돌 해변을 사각사각 밟으며 겨울 바다의 낭만을 누린다.

▲  몽돌해변과 바다의 부드러운 만남, 그리고 그들만의 속삭임

▲  예내리 앞바다 남쪽 부분
저 산줄기 너머에 금지된 구역인 나로우주센터 중심지가 있다. 예내리 앞바다도
해변 남쪽 방파제까지만 접근이 가능하며 그 이상은 발을 들일 수 없다.


몽돌해변에서 잠시 멍 좀 때리다가 햇님의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부랴부랴 다음 답사
지로 길을 떠났다. 안그래도 겨울 제국 시절이라 낮이 짧은데 칼출근과 칼퇴근을 좋아하는 햇
님이 날씨 변화 등으로 일찍 퇴근하면 낭패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12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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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가까운 우리의 옛 땅, 대마도 북부 나들이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히타까츠항, 미우다해변, 한국전망대)

 


' 부산 대마도 나들이 '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미우다해수욕장, 한국전망대)


▲  대마도 미우다해수욕장

대마도 한국전망대

▲  한국전망대

▲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킨의 장수 은행나무)


* 대마도의 본토는 대한민국(우리나라)이다. <본글에 나오는 본토는 우리나라를 뜻함>
* 2020년 이후 부산과 대마도를 잇는 뱃편은 1도 없으며 찾는 이도 없다.
* 본글은 2019년 이전에 간 것임을 밝힌다.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대한해협에 길쭉하게 떠있는 대마도를 찾
았다.
대마도(對馬島)는 2004년부터 계속 인연을 노렸으나 그때마다 태풍이 초를 치면서 가지
를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5월에 이르러 1박2일로 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보우하사 100% 상륙 확정이다.

부산과 구주(규슈, 九州) 사이에 자리한 대마도<왜어(倭語)로 쓰시마, 쯔시마(つしま)>
는 708㎢의 덩치로 유인도 5개, 무인도 102개 등 총 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
북으로 길쭉하다보니 제법 큰 섬으로 다가오며(남북이 82km, 동서 18km) 우리가 잃어버
린 옛 땅의 일원으로 조선 후기까지 조선의 동남쪽 끝을 담당하고 있었다. 우리의 동남
쪽 끝이자, 왜국(일본)의 서북쪽 끝으로 그 예민하고 외로운 위치 때문에 '국경(國境)
의 섬'이라 불린다.
우리 본토에서도 매우 가까워(부산에서 49~50km) 저렴한 금액과 극히 짧은 시간으로 해
외여행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잇점이 있으며, 그 매력으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상당했
다. (2018년에 무려 40만 명이 찾았음) 허나 분명한 것은 대마도는 우리가 반드시 회복
해야될 땅이라는 것이다. (대마도의 역사와 지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아침 일찍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대마도로 가는 오션플라워호(대아고속해운)에 나
를 담고 2시간 20여 분을 항해하여 대마도의 중심지, 이즈하라<엄원(嚴原)>에 도착했다.
다행히 바다가 순하게 굴어 뱃길은 매우 순탄했는데 바다가 종종 격하게 흥분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그때는 배멀미 등의 고통을 각오해야 된다. (대마도 2번째 방문 때는 3m가
넘는 파도로 완전 지옥을 맛보았음;;)
처음으로 발을 들인 대마도의 첫 느낌은 뭐랄까. 본토의 어느 섬에 들어온 듯한 무척이
나 낯익은 모습이다. (완전 '부산광역시 대마군' 같은 기분) 그 즐거운 흥을 마치 회충
이나 세균처럼 생긴 못생긴 왜열도 글자(가나)가 건방지게 깨뜨리려 든다.

첫날은 도보로 이즈하라 시내를 돌아다녔다. 오후 6시까지 여로(旅路)를 듬뿍 살찌우다
가 바다가 바라보이는 이즈하라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아호텔에 여장을 풀면서 첫 날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이즈하라에서 둘러본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함)

다음 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간의 기별도 안될 정도로 적게 나온 왜식 정식을 먹고 둘
째 날을 시작했다. (밥은 리필이 되지만 반찬은 안됨)
이 날은 전용버스로 히타까쯔까지 여러 명소를 겯드리며 이동하는 일정으로 대마도를 2
개의 섬으로 나눠버린 만관교(만제키바시), 에보시다케 전망대, 와타즈미신사를 둘러보
고 대마도 북섬의 동쪽 도로인 39번 지방도(도요타마마치~사가~긴~슈시~히타까츠)를 따
라 북쪽으로 향했다.

대마도 39번 지방도는 겨우 구색만 맞춘 좁은 2차선 길로 거의 산악길 일색이라 구불구
불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굴곡을 순화하고자 일부 구간에는 터널과 다리가 닦여졌으나
아직까지도 많이 부족하여 운전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북섬 서쪽 도로인 382번 국
도(가미아카타마치 경유)도 있으나 이즈하라~히타까츠를 잇는 길은 39번 지방도가 조금
지름길이다.
하여 본토 사람을 태운 관광버스는 39번 지방도를 주로 이용을 하고 있는데, 이 구간에
는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슈시강 단풍길, 나루타키폭포 등의 명소가 있다. 이들은 대마
도 여행상품에서 많이 취급하는 것들로 우리는 그중에서 장송사 백제은행나무를 들리기
로 했다. (이즈하라~히타까츠를 왕래하는 시내버스와 투어버스는 382번 국도를 이용함)


 

  대마도 및 왜국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백제 사람이 심었다고 전하는
장송사(長松寺) 백제은행나무 <긴의 장수은행나무>

▲  동쪽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대마도의 북쪽 끝을 이루고 있는 상대마정(上對馬町, 가미쓰시마마치)의 남쪽 구석에는 '긴(
琴)'이란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름도 달랑 1글자인 그 마을에는 장송사란 작은 절이 있는데,
바로 그 뜨락에 대마도에서 가장 늙은 은행나무가 푸른빛 장대한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 높이
솟아있다.

이 은행나무는 추정 나이가 약 1,500년으로 대마도 및 왜국(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대마도가 본토의 그늘에 묻혀있던 시절부터 대마도의 부모 나무라 불렸으며, 둘레가 63.6m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상은 높이 23m, 둘레 12.5m이다.
백제(百濟) 사람이 심었다고 전해져 예로부터 백제은행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왜열도의
은행나무는 백제가 속방(屬邦)인 왜에 불교를 내리면서 함께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여
이곳 나무 역시 그 과정에서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지금은 '긴'이 작고 하찮은 마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는 대마도 북부의 관문으로 바쁘게 살았다. <신숙주(申叔舟)가 1471년에 쓴 '해동제국기(海東
諸國記)'에는 40여 호의 집이 있다고 나와있음>
장송사에 있는 나무라 하여 '장송사 백제은행나무'라 하며, 지역 이름을 따서 '긴의 장수은행
나무','긴의 대은행(銀杏木)', 왜어로는 '킨노오이쵸'라 부른다.

1798년 낙뢰를 맞아 가지가 부러지고 나무 속살이 탄 적이 있으며, 1809년에 작성된 대마기사
(對馬記事)에는 '바다에서 보면 울창하여 산과 같다'고 나와있어 낙뢰의 상처에도 그 위엄을
크게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50년 태풍 29호로 기둥나무가 아작나기도 했으나 옆에서 조그만 나무가 자라나 크게 가지를
넓히고 새 잎이 피어났다. 1990년에 열린 '국제 꽃과 초록의 박람회' 때 기획된 '신일본 명목
(名木) 100선'에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조금씩 성장을 보이고 있어 생명력만큼은 젊은
나무 못지 않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백제은행나무', 그리고 백제에서 전래되었음을 안내문에 표시했으
나 역사 왜곡의 달인, 왜국이 대마도와 우리 본토의 끈끈한 인연을 자르고자 백제 두 글자를
지워버렸다. 하여 요즘에는 '긴의 장수은행나무'로 명칭을 고정시키고 그 이름을 강요하고 있
다. (왜는 대마도가 가야와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의 영역으로 오랫동안 그들의 지배와 영향
을 받은 흔적과 기록을 왜곡하거나 지우고 있음)


▲  사람을 작은 개미로 만들어버리는 백제은행나무의 위엄

▲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을 1,500년 이상이나
꾸역꾸역 섭취한 백제은행나무의 단단한 아랫도리

▲  은행나무 그늘에 묻힌 조그만 신사와 붉은 도리이
본토의 마을 서낭당과 같은 존재로 대마도가 왜화(倭化)가 되면서 저런
신사(神社)로 변질되었다. (매년 신사에서 제사를 지냄)


대마도 뿐 아니라 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고 추앙하고 있으나 정작 국가 천연기념물이 아
닌 장기현(나가사키) 지방 천연기념물 등급에 머물러있다. (1961년에 지정되었음) 본토 같았
으면 진작에 국가 천연기념물로 삼아 크게 애지중지되었을텐데, 그보다 낮은 지방문화재 등급
에 둔 것을 보면 무슨 사연이 있는 듯 싶다. (본토와 관련된 나무이고, 대마도가 원래 본토
땅이라 문화유산 지정 등급을 일부러 낮게 매긴 모양임)


▲  장송사 법당(法堂)

백제은행나무의 후광(後光)과 그늘을 아낌없이 받고만 있는 장송사는 조동종(曹洞宗) 소속으
로 법당과 요사(寮舍)가 전부인 조그만 절이다. 겉으로 보면 20세기 사찰로 여기고 지나칠 수
있으나 무려 조선 때부터 있어온 절로 고려 현종(顯宗) 때 조성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의
인쇄 목판을 소리없이 간직하고 있다. (인쇄본은 11세기 이후에 많이 인쇄되어 보급되었으나
지금은 상당수가 왜열도에 있음)
대마도에서도 다소 외진 이런 구석탱이에 그런 존재가 숨어있다는 것이 다소 의아스러울 따름
인데, 왜구가 약탈한 것으로 보기도 하나 고려 말에 고려 조정이 왜구의 공격을 불력(佛力)으
로 막고자 왜열도와 가까운 대마도에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이 장송사로 흘러들어와 이
곳의 듬직한 보물이 된 것이다. (대장경 인쇄본은 관람 불가)

본토 관광객들이 은행나무를 보러 많이 찾고 있으나 정작 절 승려나 동네 사람들은 거의 콧배
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단순히 백제은행나무를 보러 오는 곳이라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흥분시킬 건덕지가 없다. 그냥 조용한 절과 마을이 전부이다.

▲  '일본일수령 긴의 대은행(一樹齡
琴の大銀杏)' 나무판

▲  법당에 걸린 왜열도 스타일의
조그만 종


▲  히타까츠항 (항구 서쪽)

백제은행나무를 둘러보고 가을 단풍길로 유명한 주지(舟志, 슈시)와 나루타키폭포 입구를 지
나 히타까츠(히타까쓰, 比田勝)로 이동했다.

히타까츠는 상대마정(가미쓰시마마치)의 중심 마을로 대마도 북부의 중심지이자 북쪽 관문이
다. 대마도에서 2번째로 큰 동네로 동서로 길쭉한 어촌 마을이며, 그 앞바다가 북/서/남 3면
이 육지와 접해있고 그 3면이 동쪽에서 들어온 바다를 감싸고 있어 항구로 아주 적합하다. 대
마도가 지형이 꽤 거칠다보니 항구로 크게 부릴만한 곳이 이곳과 이즈하라 정도로 외지를 잇
는 여객선은 오로지 이 두 곳에서만 뜬다.
히타까츠에서는 부산과 하카타를 잇는 여객선이 오가고 있는데, 부산까지는 1시간 10~30분 정
도 걸린다. 그러니 대마도에 일찍 상륙하고 싶다면 히타까츠를 이용하면 된다. (이즈하라는 2
시간 20분 이상 걸림)


▲  오늘도 평화로운 히타까츠항
잔잔한 파도가 이곳의 적막을 살짝 건드리고 있고 바다 속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거닐고 있다.

▲  단조로운 모습의 히타까츠항 건너편 (히타까츠항 남쪽)

▲  히타카츠 마을 (시내라고 하기에는 동네가 작음)

히타까츠 마을은 마치 한물 간 영화세트장처럼 한적하기 그지 없다. 본토에서 배가 들어오거
나 남쪽이나 한국전망대 쪽에서 본토 사람들을 실은 관광버스가 오면 히타카츠 여객터미널을
중심으로 잠깐씩 활기를 되찾다가 그들이 빠져나가면 다시 끝없는 고요 속으로 잠긴다.

이곳에는 본토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숙박업소가 여럿 있다. 게다가 본토 말을 구가하는
지역 사람들도 많아서 언어 소통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


▲  히토쓰바타고에서 먹은 왜식 우동과 유부초밥의 초라한 위엄

우리는 히타까츠 여객터미널 부근에 있는 '히토쓰바타고'란 왜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발
음도 어려운 히토쓰바타고는 왜어(倭語, 일본어)로 이팝나무를 뜻한다. 즉 이팝나무식당이다.
히타까츠에서 이름난 식당으로 우동, 회, 왜식 정식 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대마도 여행 상품
중의 히타까츠에서 점심을 먹는 일정이 있으면 이곳과 본토 사람이 하는 식당으로 많이 간다.

여기서는 우동과 유부초밥 2개, 왜식 김밥 2개, 그리고 약간의 고등어회가 차려졌다. 우동은
간의 기별도 안될 정도로 양이 적었고, 고등어회 역시 여러 명이 같이 누리기에는 양이 빈약
하여 1인당 1~2개씩 집어먹으니 이내 빈 그릇이 되었다. 반찬은 단무지와 오랜지가 전부로 저
것을 다 섭취해도 왠만한 성인 남자들은 배가 차지 않는다. 그야말로 왜열도 애들의 좁쌀 같
은 마음처럼 나온 것이다. 하긴 외딴 섬에 물가도 비싸고 이윤도 많이 남겨야되니 그렇게 좁
쌀처럼 굴어야 돈이 남을 것이다.


▲  몇 조각 나오지 않은 고등어회

대마도 주변은 고등어와 방어가 많이 잡힌다. 이곳 밥상에 올라온 저 고등어 역시 대마도 산
일 것이다. 허나 정신줄 놓은 왜국(일본) 정부가 후쿠시마(福島) 해역에서 잡은 물고기를 전
국에 저렴하게 유통시키고 있어 조금은 꺼림칙하다. 수산물 뿐 아니라 육류, 채소, 쌀, 심지
어 맥주(아사히맥주)까지 후쿠시마산을 대놓고 퍼트리고 있어 왜열도에서 음식을 섭취할 때
꼭 주의가 필요하다. (가급적이면 왜열도에 안가는 것이 좋음)


 

♠  대마도 제일의 아름다운 해변, 미우다(三字田)해수욕장

점심 후식거리로 찾아간 미우다 해변은 히타까츠에서 차로 5분 거리이다. 해변 주차장에서 확
트인 동쪽으로 가면 이국적 분위기의 미우다 해변이 쓱 나타나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을 무
심히 뒤흔든다.

미우다 해변은 미우다하마(三字田濱)라 불리기도 한다. 대마도의 이름난 해변으로 왜국 해수
욕장 100선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리 넓은 해변은 아니나 하얀색 고운 모래와 에메
랄드빛 같은 푸르른 바다, 해변을 둘러싼 산, 바로 앞에 떠있는 바위섬까지 서로 어우러져 아
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또한 히타까츠항처럼 북/서/남이 산과 접해있고, 그 3면이 동
쪽에서 들어오는 바다를 깊이 둘러싸 자연산 방파제가 되어주고 있으며, 수심도 얕아 어린이
를 동반한 물놀이 장소로 아주 좋다.
이곳은 대마도의 필수 여행지로 대마도 여행 상품에서 90% 이상 취급하고 있다. 2018년에 40
만 명이 대마도에 발을 들였다고 하니 그중 30만 이상은 이곳에 발자국을 남겼을 것이다. 게
다가 히타까츠항에서도 매우 가까워 본토 사람들이 캠핑, 피서, 낚시로 많이 찾아온다.

▲  미우다해변의 명성을 알려주는
일본100선 해수욕장 표석

▲  미우다 해변 남쪽 부분과 청초한
빛깔의 바다 ①


▲  미우다 해변 남쪽 부분과 청초한 빛깔의 바다 ②

▲  나그네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바다
여름 제국 시절에 왔다면 그 유혹에 흥분하여 무조건 풍덩했을지도 모른다.

▲  미우다 해변과 이곳의 상큼한 장식물, 바위섬
해변 바로 앞에는 작은 바위섬이 두둥실 떠있다.

▲  바위섬을 점거한 사람들

▲  대자연이 미우다에 내린 보물, 바위섬
바위섬의 이름은 아직 없다. 만약 저 섬이 없었다면 해변의 운치도 50% 이상
떨어졌을 것이며, 해변과 섬 사이에 수심도 안정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  미우다해변 북쪽 부분

▲  미우다해변의 평화로운 풍경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바다 너머로 길쭉하게 목을 내민 저곳은?

바다 너머로 길쭉하게 보이는 곳은 도노사키(전기, 殿崎)로 저곳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왜국이 자화자찬용으로 닦아놓은 '일러우호의 언덕'이 있다.

왜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그 강하다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마도에서 요행으로 때려잡
았다. 그때 영혼까지 썩 털려 방황하는 러시아군을 대마도 사람들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집으
로 데리고 와 그들을 재워주고 밥을 제공했으며 씻을 수 있게 뜨거운 물도 마련해주었다는 것
이다. 하여 왜는 그것을 엄청 강조하며 러일 우호 및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현장이라고 빡빡
우겨대고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에게는 다소 얄밉고도 씁쓸한 현장으로 몇몇 여행상품에
서는 저곳을 트래킹 명소로 들리고 있다.


 

♠  대마도 북쪽 끝에 자리한 본토 바라기
한국전망대(韓國展望臺)

▲  한국전망대(한국전망소)

미우다해변을 둘러보고 이번 대마도 나들이의 마지막 답사지인 한국전망대로 이동했다. 상대
마정 북부순환로(히타까츠~미우다~도요~와니우라~오우라~히타카츠)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가
면 한국전망대 입구가 마중을 나오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가파른 1차선 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한국전망대가 있다.

와니우라 해안 언덕 정상에 자리한 한국전망대는 대마도의 최북단(부속 섬은 제외)으로 이름
그대로 대마도의 주인인 우리나라(한국)를 바라보는 전망대이다. 1997년 5월에 세워진 것으로
그 성격에 걸맞게 본토식으로 지어졌는데, 본토의 한옥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 서울 탑골공
원에 있는 팔각정(八角亭)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으며, 건축자재도 모두 본토에서 가져왔다.

오로지 본토 바라기로 지어진 곳으로 여기서는 본토의 부산이 바라보인다. 거리는 약 50km로
날씨가 좋으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나 우리가 갔을 때는 바다 구름이 조금 낀 상태라 부산
은 커녕 영도(影島)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 날씨를 잘 맞춰서 가야 된다. 날씨에 따라 '한국
전망대'가 되느냐 단순히 '대한해협 전망대'가 되느냐 갈리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바라보는 부산의 야경(夜景)은 천하일품이라 그 야경을 찍으러 사진쟁이들의 발
걸음이 잦다. 낮에는 비록 부산이 두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밤에는 아주 지독한 흐린 날씨만
아니라면 90% 이상 부산 야경 구경이 가능하다. 여기서 부산 앞바다까지 어둠을 몰아내려는
어떠한 빛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매년 10월 말에 광안리 해변에서 열리는 부산불꽃축
제까지 여기서 구경을 할 수 있다. (밤에는 오로지 부산 지역만 야경이 환함)

▲  정면에서 바라본 한국전망대

▲  동쪽에서 바라본 한국전망대

이곳에 전망대를 세운 것은 단순히 부산이 바라보여서가 아니다. 왜정 때 대마도에 징용 등으
로 온 본토 사람들이 설과 추석에 바다 너머로 희미하게 다가오는 본토를 바라보며 망향의 한
을 달래던 곳이기 때문이다.

1997년 이곳이 지어졌을 때는 부산과 대마도가 뻔히 보임에도 서로를 잇는 뱃편이 없어 본토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한국전망대는 다소 한가했다. 그러다가 1999년 뱃편이
생겼고, 본토가 바라보이는 그 잇점 하나로 본토 사람들의 발걸음이 크게 늘면서 대마도의 필
수 관광지로 성장했다.
이곳 외에도 여기서 가까운 가미아카타마치의 좌호만(佐護灣, 사고만) 해안에도 부산을 바라
보는 조망대가 닦여져 있다. 그곳 이름은 '이국이 보이는 언덕전망대(異國の見える丘展望臺)'
로 날씨가 좋으면 능히 부산이 바라보인다. 허나 한국전망대의 위엄에 눌려 본토 사람들의 발
길은 적으며, 대마도 여행상품에서도 거의 취급을 하지 않는다.


▲  한국전망대 밑에 펼쳐진 와니우라 포구
이곳은 대마도에서 가장 북쪽 마을이다.


전망대는 2층 규모로 2층에 대마도 관련 여러 정보와 여기서 담은 부산 사진이 여럿 전시되어
있다. 허나 특별한 것은 없으며,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곳은 오로지 본토 바라기용 명소이다.
본토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부산과 대마도가 정말 가깝구나','대마도는 우리 땅','본토와 이
리 가까운데 어찌하여 원숭이들 땅이 되었나?','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해방시키자' 이런 생각
들을 많이 할 것이다.
반면 왜인들은 '한국 땅이 참 가깝다','한국을 반드시 점령하자~' 이런 생각들을 하겠지. 말
로는 대마도와 가까운 부산을 바라보는 단순한 전망대라고 하지만 속뜻은 모른다. 이래서 이
중성이 심한 왜열도 원숭이들을 늘 경계해야되며 반드시 때려잡아야된다.


▲  한국전망대에서 바라본 대한해협 (부산 방향)
저 흐릿한 수평선 너머로 부산이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오늘은
바다 구름이 너무 짙어서 조망의 품질은 이것이 전부이다.

▲  한국전망대에서 바라본 와니우라 앞바다와 해율도(海栗島, 우니지마)

앞바다에 길쭉하게 떠있는 섬은 해율도(우니지마)이다. 저곳이 대마도와 왜국에서 가장 우리
나라와 가까운 최전방으로 해상자위대 군부대를 두어 매의 눈으로 북쪽을 감시하고 있다. 나
중에 우리가 대마도를 무력으로 해방시킨다면 제일 먼저 저곳을 초토화시켜야 된다.


▲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朝鮮國 譯官使 殉難之碑)
(윗쪽 비석이 순난지비, 밑의 검은 피부의 표석이 2003년 3월 7일에 세운 것)


한국전망대 앞에는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가 있다. 돌로 크게 2중의 석단(石壇)을 쌓고 그
위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비석을 올렸는데, 비석의 이름 그대로 역관사의 순난(殉難)을 기억하
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1703년 2월 5일(양력 3월 7일) 조선 역관사 108명과 대마도 선원 4명을 태운 배가 부산포(釜
山浦)를 출발해 대마도로 향했다. 허나 대마도 코 앞인 와니아루 앞바다에서 격한 파도를 극
복하지 못하고 침몰했고, 배에 탄 112명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역관사는 오늘날 공무직 통역사로 대마도와 왜국에서는 그 108명이 모두 대마도 21대 도주(島
主)인 종의진 조문 및 새 도주가 된 종의방 취임 축하를 위해 왔다고 그런다. 허나 한 나라의
왕도 아니고 조선에 속한 변방 섬 도주 따위에 조문과 취임식에 그 많은 인원을 보낼 이유가
전혀 없다.
그때 왜열도는 지방 세력(번주)들이 중앙(에도막부)과 따로 놀던 시절이었다. 하여 규슈와 혼
슈의 많은 지방 세력들은 조선에 조공(朝貢)을 보내거나 정치적, 경제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
다. 마침 대마도주 조문과 취임 축하를 위해 역관사를 보낼 일이 있어서 그 배에 에도막부와
지역 세력들에게 파견하는 역관들까지 싹 태워서 보낸 것이다. 아무리 조선의 항해술이 우수
하다고 해도 거친 바다를 뚫고 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지라 한꺼번에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마도 직전에서 침몰하여 그 아까운 외교 인재들이 싹 변을 당한 것이다.

이후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1991년에 112개의 영석(靈石)으로 순난지비를 세웠으나 그들의
이름은 모두 애석하게도 전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가문가사료(宗家文庫史料)'에서 그들
의 이름을 머금은 묵서소책자(墨書小冊子)가 발견되었고, 그들의 300주기가 되는 2003년 3월
7일 기존 순난비 앞에 그들의 명단을 적은 표석을 세웠다.
그때 역관사의 대표는 정역(正譯)인 한천석(韓天錫)이며, 부역(副譯)은 박세량(朴世亮) 등 20
여 명, 50여 명의 중관(中官), 20여 명의 하관(下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존재는 대마
도에서 이렇게나마 남게된 것이다.

부산에서 대마도는 거리는 무척 가까우나 바다가 종종 흥분기를 보여 선박 침몰 사고가 많이
있었다. 특히 한국전망대 앞 와니우라 앞바다와 해율도 주변이 가장 말썽으로 1459년 통신사
(通信使)를 태운 배 2척이 침몰해 1명을 빼고 모두 사망한 일이 있었으며,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대마도로 적지 않게 표류해와 대마도주는 그들을 표민옥(漂民屋)에 수용하여 고향으
로 보냈다. (대마도주는 표류민들의 표민옥 숙박비를 조선 조정에 청구했음)


▲  한국전망대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산책로

한국전망대는 주변 조망까지 포함해서 20~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는 히타까츠 뱃시간 때
문에 20분 남짓 머물다 떠났지만 시간이 널널하다면 주차장 동쪽에 있는 풍포대(豊砲臺)유적
과 주차장 서쪽 언덕에 있는 조그만 신사도 같이 보기 바란다. 신사는 와니우라 마을의 서낭
당 같은 존재로 근래 지어진 작은 건물이나 대마도 해안 마을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
으며, 풍포대는 왜정 때 대마도 보호를 위해 닦여진 요새의 하나이다.


▲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우리를 옮겨줄 대아고속해운 오션플라워호

한국전망대를 끝으로 대마도 답사는 아쉽게도 마무리가 되었다. 부산행 마지막 뱃시간 때문에
미우다해변과 한국전망대에서 머문 시간이 다소 짧지만 그건 어쩔 도리가 없다. 보통 봄과 여
름, 가을에는 부산행 마지막 배가 16시대에 있고, 겨울과 초봄에는 15시대에 있는데, 그 시간
에 따라 히타카츠 주변 일정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다시 히타카츠 마을로 돌아와 여객터미널 부근에 있는 면세점(免稅店)에 들렸다. 대마도가 우
리의 옛 땅이나 지금은 외세가 불법 점거하고 있는 상태라 해외로 분류되고 있다. 해외여행에
서 면세점 방문은 필수라 이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건강식품과 화장품, 빵과 초
콜렛 등의 간식류, 기념 장식용, 담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여 대마도를 찾는 본토
사람 중에는 오로지 면세점 쇼핑 때문에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행들은 담배와 화장품, 왜식 된장인 나토 등의 건강식품을 많이 샀으나 나는 돈도 없고 딱
히 땡기는 것이 없어서 아주 저렴한 고양이 장식물을 샀다. 이른바 오른발을 들고 복을 부른
다는 고양이상이다. 가격은 400엔 정도로 기억한다.
그렇게 면세점의 호주머니를 넉넉히 채워주고 히타카츠 여객터미널로 넘어갔다. 한산한 히타
까츠 마을 거리와 달리 여객터미널은 본토로 돌아가는 본토 사람들과 부산을 찾는 대마도 애
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기서 30분 정도 대기하다가 16시 넘어서 부산으로 가는 대아고속해운의 오션플라워(Ocean
flower)호에 몸을 싣는다. 이 배는 전날 부산에서 이즈하라로 내려왔을 때 탄 배로 하루만에
다시 신세를 진다.

시간이 되자 배는 입을 모두 봉하고 미끄러지듯 대한해협으로 나간다. 다행히 파도는 잔잔했
고 여로를 너무 살찌우다보니 몸이 고단하여 40분 이상 꿈나라를 방황했다. 그렇게 1시간 10
여 분을 달려 부산항국제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다. 전날 아침에 이곳을 출발해 다음날 오후
늦게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정말 1박2일 짧기는 짧다. 하긴 인생도 짧다고 하는데 그까짓
1박2일은 정말 티끌만도 못하지.

여기서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나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2004년부터 벼르고 별러서
이제서야 건너간 대마도, 옛날 가야와 신라, 백제가 왜열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대마도와 대
한해협을 지겹도록 건너갔고 660년 이후, 백제가 망하자 수만 명의 백제 사람들이 대한해협을
거쳐 백제의 속방이자 별채인 왜로 넘어갔다.
신라는 종종 군사를 보내 대마도와 왜를 쳤고, 신라 후기에는 신라해적이라 표현된 신라 수군
과 지방 세력의 수군이 대한해협과 대마도를 오랫동안 휘젓고 다니며 크게 위엄을 과시했다.
(894년 대마도를 공격한 신라해적은 후백제 수군으로 여겨짐) 고려 현종(顯宗) 때는 발해(渤
海) 후손의 일원인 여진족 수군이 대마도와 규슈를 초토화시켰으며, 1274년과 1281년 고려와
원(몽골) 연합군 역시 대마도와 규슈를 아작냈다.
조선통신사는 왜열도와 대마도 단속을 위해 이 거친 바다를 건너갔으며, 20세기 이후에는 많
은 본토 사람들이 이 바닷길을 건너 대마도와 왜열도로 건너갔다.

다음에 대마도를 찾을 때는 꼭 여권 없이 갈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2년 뒤 방문에도 여권은
여전히 필요했다. 그만큼 대마도는 우리에게 애증의 땅이다. 휴전선 이북 회복도 급하지만 툭
하면 독도(獨島)가 지네 땅이라 개소리나 일삼는 왜국의 헛소리 대응용으로 대마도는 꼭 걸고
넘어가 반드시 우리 영역으로 해방시키기를 꿈꿔본다.
대마도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어여 우리를 왜열도 원숭이들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솔직히 왜
국도 대마도를 변두리 섬으로 여겨 크게 관심도 없고 완전 외면 수준이다. 심지어 왜열도 애
들은 대마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들도 수두룩 하다고 한다. 만약 본토 부산에 편입되면
대마도는 지금보다 훨씬 환경이 좋아지고 찾는 이가 100% 이상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 대마도
가 살려면 예전 주인에게 오는 것이 맞다. (물론 지나친 난개발은 안됨)

이렇게 하여 대마도 첫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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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아름다운 서쪽 끝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수월봉 나들이 (차귀도, 산방산탄산온천)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제주올레길12코스, 고산리유적, 수월봉)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앞쪽)와 차귀도(뒷쪽)

제주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  제주 고산리유적

▲  엉알해안


 

겨울 제국의 추위 갑질이 한참이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
濟州島)를 찾았다.

햇님보다 훨씬 일찍 김포국제공항으로 달려가 제주도로 가는 6시대 비행기에 나를 담고
1시간 정도를 움직여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늘 비행시간 50분, 활주로 방황시간
10여 분)
제주도에서 정처(定處)는 이미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제주도에
발을 딛자마자 서쪽으로 길을 잡아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15시 경, 한림읍 용수리에 이
르렀다.
용수리에서 절부암(節婦岩)을 먼저 둘러보고 그날의 주메뉴인 제주올레길12코스(용수리
~무릉리, 17.5km)에 발을 들인다. 12코스의 ⅓ 정도 되는 해안길을 따라 수월봉까지 이
동하기로 했으나 햇님의 칼퇴근 본능으로 일몰 전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물
론 가기야 하겠지만 해가 떨어지면 사진 출사도 거의 불가능해지고 속세와도 떨어진 외
진 곳이라 무서움까지 발생할 수 있다. (외딴 산길이나 제주올레길은 가급적 일몰 전에
마치는 것이 좋음) 하여 일단 수월봉 북쪽인 고산리유적을 1차 목적지로 삼고 12코스에
나를 던져놓았다.
12코스를 따라 용수마을 방사탑 2호와 생이기정 등의 조촐한 명소를 둘러보고 올레길을
1굽이 지날 때마다 포즈를 조금씩 달리하는 차귀도와 와도(누운섬)를 옆구리에 끼며 가
다보니 어느덧 당산봉에 이르렀다. 본글은 바로 당산봉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산봉 이전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부분은 ☞ 이곳을 클릭한다)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 유적)

▲  바로 밑으로 바라보이는 와도와 차귀도(遮歸島)

차귀도와 고산리, 남해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당산봉(堂山峰)은 해발 148m의 낮은 뫼이다. 지
금이야 이 땅에 흔한 뒷동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어 실감은 나지 않겠지만 수억 년 전, 화산이
내뿜은 마그마나 용암이 바닷물과 만나 격하게 이루어진 수성화산체이다.
용암이 물을 만나면 용암은 급히 식고 물은 펄펄 끓는다. 이런 냉각과 가열반응은 격렬히 일
어나 수증기를 포함한 큰 폭발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수성화산활동이라 한다. 작은 알갱이
와 수증기로 이루어진 분출은 제법 패기가 있어 이들 화산쇄설물(火山碎屑物)은 멀리까지 날
라가 퇴적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오름을 응회구(凝灰邱)나 응회환이라고 한다. 응회
구는 성산일출봉(城山日出峯)이 대표적으로 높이가 꽤 되며 응회환은 그 다음 수준으로 수월
봉, 당산봉, 송악산이 이에 해당된다.

당산봉은 산방산, 용머리와 더불어 제주도에서 제일 오래된 화산체이다. 예전 이름은 당오름
으로 산기슭에 뱀을 신으로 봉안한 차귀당이 있었는데 그 신을 '사귀(蛇鬼, 뱀신)'라고 했다.
바로 그 당집 때문에 당오름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그 사귀가 와전되어 '차귀'가
되었고, 봉우리 이름도 잠시 '차귀오름'으로 갈렸다고 전하며, 현재 이름인 당산봉은 당오름
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봉우리 정상에 넓적한 바위가 있는데 마치 닭벼슬처럼 보여 계관산(鷄冠山)이라 했다는 이야
기도 덧붙여 전해오며, 당산봉 서쪽 꼭대기에는 봉수대가 있었는데 북쪽으로 판포봉수, 남동
쪽으로 모슬봉수와 연락을 했다.

올레길12코스는 당산봉 서쪽 기슭을 지나갈 뿐, 꼭대기는 거치지 않는다. 대신 꼭대기와 당산
봉 주위를 도는 둘레길이 별도로 있어 그 길을 이용하면 완벽한 당산봉 투어가 가능하다. 시
간이 되면 당산봉도 보너스로 거닐고 싶었으나 일몰 시간을 구실로 바로 고산리 유적으로 넘
어갔다. 그때 나에게는 그저 수월봉만 보일 뿐, 당산봉 자체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당산봉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고산리


▲  오르락 내리락이 반복되는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구간

▲  드디어 시야에 들어온 수월봉과 고산리유적
바다를 향해 길쭉하게 고개를 내민 해안 언덕이 바로 수월봉이다. 사진 가운데
벌판은 고산리 유적으로 일몰은 코앞인데 아직도 길이 저만치나 남아있어
발걸음의 고삐를 더욱 조이게 한다.


당산봉을 내려가면 고산리 벌판과 함께 2차선 노을해안로가 나타난다. 제주올레길12코스는 그
길의 신세를 지며 차귀도포구(고산포구)로 이어지는데 그 포구와 엉알해안을 거쳐 수월봉으로
달려간다. 12코스를 정석대로 거쳐야 엉알해안까지 둘러볼 수 있으나 시간도 그렇고 수월봉에
너무 정신이 팔려 올레길12코스를 잠시 내버리고 고산리유적으로 바로 질러가는 편법(?)을 썼
다. 난 그때까지 수월봉 밑도리가 엉알해안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수월봉 북쪽 해안이 엉알
해안)


▲  동쪽에서 본 고산리 유적 (억새 너머 벌판이 고산리 유적임)

▲  제주 고산리(高山里) 유적 - 사적 412호

수월봉과 당산봉 사이 벌판에 고산리 유적이 넓게 누워있다. 유적의 면적은 약 98,465㎡로 풀
이 뒤덮힌 들판 수준이라 이곳이 무슨 유적인가 물음표를 던지겠지만 유적은 보존을 위해 그
밑에 고이 묻어두었으며, 유적 변두리에는 개인 경작지가 존재하고 있다.

이곳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유적으로 제주도의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적지이다. 1987년 5
월, 고산리 주민들이 흙을 채취하고자 땅을 파다가 석창과 긁개를 발견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제주대학교는 그것이 발견된 곳을 답사하여 찌르개, 긁개, 돌도끼 1점을 발견하면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고산리유적이 슬슬 깨어나게 된다.
1988년 1월, 영남대학교 대학원생인 강창화가 수월봉에서 북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서 융기
문토기 1점을 수습했다. 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 이전에 쓰이던 것으로 그때는 기원전 4,000
년 이전 것으로 파악했으나 지금은 기원전 6,000년으로 보고 있다.

1991년과 1992년 겨울,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정밀 지표조사를 벌였다. 그때 자구내포구에서
하천변을 따라 수월봉에 이르는 유물산포지를 확인했고 지번별로 약 6,000여 점의 유물을 건
졌다.
1994년 신창~무릉간 해안도로가 신설되면서 고산리 유적을 관통하게 되자 그해 6월부터 8월까
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발굴 범위는 수월봉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서 포구에 이르
는 약 200m, 폭 12m 구간으로 출토 유물은 석기와 토기 등 3,000여 점이며, 고산리식 토기라
불리는 섬유질토기의 파편이 확인되는 등 성과가 대단했다. 하여 국제학술세미나를 통해 구석
기시대 후기에서 신석기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유적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허나 유물의 절대연대자료가 부족하고 유적의 층위 분석도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경작으로 유
적과 그곳에 깃든 유물이 계속 파괴되고 고통을 받자 1997년 다시 발굴조사를 하였다. 이때는
17,000여 점의 석기와 1,900여 점의 토기를 끄집어내는 성과를 거둔다.

1998년 11월부터 1999년 2월까지 다시 조사를 벌여 170여 점의 타제석기와 토기를 발굴했으며
, 사적으로 지정될 구역 외 지역에 대한 조사를 벌여 유적의 범위를 파악했다. 그리고 이듬해
국가 사적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2012년 1구역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벌여 원형움집터 26동, 수혈유구 295기, 야외 불피던 곳
10기, 구상유구 2기, 토기류 87점, 석기류 278점을 발견했는데, 1만년 이전 것으로 파악이 되
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특히 석촉과 한쪽을 뚫은
옥귀고리 1점은 그 재료가 제주도에는 없는 것들이라 궁금증을 증폭시켰는데, 2013년 1구역을
다시 조사하여(2차 발굴조사) 주거지 7동, 수혈유구 227기, 야외 불피던 곳 3기, 구상유구 1
기, 유물 215점을 건졌고, 석촉 등의 석기가 남해안 일대 암석으로 확인되면서 전남, 경남 지
역 남해안과 교류가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4년 1구역 3차 발굴조사로 주거지 4동, 수혈유구 78기, 소토(燒土)유구 3기, 구상유구 2기
가 추가로 나왔으며, 2구역 조사에서 문화층의 잔존 범위와 지상식 주거지를 확인했다. 특히
남부지방 신석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토기인 영선동식 토기가 나왔으며, 고산리유적 거주기
간이 2,000년 이상으로 늘어났다.
2015년 1구역 4차 발굴조사로 주거지 1동, 수혈유구 19기, 소토유구 1기를 건졌으며, 화덕시
설로 추정되는 돌무지 시설을 중심으로 거의 원형으로 기둥 구멍들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나왔다. 그리고 2구역 2차 발굴조사에서도 여러 석기들이 나왔다.
이후로도 계속 조사를 벌여 지금까지 고산리유적이 쏟아낸 유물은 성형 석기 5,000여 점, 박
편 94,000여 점 등 석기 99,000여 점과 토기조각 1,000여 점 등 도합 10만여 점에 이른다.
또한 구석기 후기와 신석기 초기를 연결하는 유적이 없어 무척 애를 태웠는데 그 고통을 바로
고산리가 속시워하게 풀어준 것이다. 기원전 12,000~10,000년경 눌러떼기 수법으로 지어진 석
기와 섬유질 토기가 다량으로 나와 이 땅에서 구석기시대가 신석기시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갔
음이 드러난 것이다.
하여 시베리아와 연해주, 만주 등 우리의 옛 땅과 우리나라 등 동북아시아 신석기 초기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며, 우리나라 신석기 초기 문화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이곳이 신석기를 비롯한 옛 사람들의 터전이 된 것은 바로 옆 수월봉에서 나온 화산재가 이곳
에 덮히면서 기름지고 평평한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땅에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 여기서 터전을 일구던 신석기 사람들은 구석기 후기 시절에 수렵과 채집 집단의 석기 제
작 전통을 이어나갔고, 초보적인 형태의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나온
석기는 석재를 기초 원석으로 직접 타격하여 박편(薄片)을 만든 다음, 간접 타격 또는 눌러떼
기로 2차 가공해 제작했다.
토기는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 조각과 덧무늬토기 조각 등이 나왔고, 특히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는 제주도 스타일의 유일한 토기 형식으로 '고산리식 토기'라 불린다.
덧무늬토기는 양양 오산리 신석기시대 유적과 부산 동삼동 패총(貝塚) 등에서 나온 기하학적
태선 덧무늬토기 형식으로 옆면이 굴곡이 있는 선으로 표현되었다.

* 고산리 유적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3628,3650-1 등 (고산리유적안
  내센터 ☎ 064-772-0041)
* 고산리 유적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너른 들판 같은 고산리 유적

▲  고산리 유적에서 바라본 당산봉
내가 용수리에서 저 당산봉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유적 일대는 거의 들판으로 고산리유적안내센터와 안내문이 전부이다. 유적도 그 보존을 위해
모두 흙으로 덮어놓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유적 남부를 가로질러 가면 2차선의 신창~고산 해안도로(노을해안로)가 나온다. 그 도로는 차
귀도포구에서 나온 길로 그 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가면 수월봉입구가 마중을 한다.


 

♠  제주도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수월봉(水月峰)

▲  영산(靈山) 수월봉 표석의 위엄

수월봉입구에서 길은 5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한경면의 중심지인 고산리로 그
곳에 있는 고산6거리(고산리 중심부)까지 1.1km 거리이다. 대중교통으로 수월봉을 찾을 경우
102, 202번 등 제주도 서일주 노선을 타고 고산환승정류장(고산6거리)에서 내려 도보로 접근
하는 것이 편하다.
북쪽 길은 차귀도포구와 고산리 유적으로, 남쪽 길은 고산리 서남부, 서북쪽은 엉알해안, 서
남쪽은 수월봉이다. 당산봉을 내려와서 잠시 버려둔 제주올레길12코스를 여기서 다시 만나서
수월봉으로 같이 가게 되는데, 설마설마했던 수월봉에 일몰 바로 직전에 도착을 한 것이다.


▲  수월봉 북쪽 엉알해안 (수월봉 화산쇄설층 - 천연기념물 513호)

엉알해안 산책로는 차귀도포구 서남쪽 고산출장소에서 수월봉입구까지 이어지는 1.1km 정도의
해안 벼랑 길이다. 여기서 '엉알'이란 바닷가 언덕 밑을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로 그 이름 그
대로 벼랑 밑을 지나는 것인데, 이 벼랑이 수월봉의 백미(白眉)이다. 수월봉에 왔다면 수월봉
도 좋지만 이 벼랑길도 꼭 거닐어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엉알해안 벼랑은 제주도 화산들이 한참 몸을 풀던 시절에 당산봉과 수월봉이 수성화산활동(水
性火山活動)으로 빚어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수월봉과 당산봉은 느긋한 봉우리이나 그 밑 벼
랑은 직각에 가까운 가파른 모습이다. 특히 수월봉은 화쇄난류(火碎亂流, pyroclastic surge)
라 불리는 독특한 화산재 운반작용으로 닦여진 화산체로 화쇄난류층 종류에서 세계 최고의 수
준을 자랑한다. 하여 그와 관련된 논문과 보고서들이 수두룩하게 나와있다.

엉알해안은 수월봉 밑도리까지로 그곳까지는 산책로를 닦지 못하고 수월봉 북쪽 밑까지만 길
을 내었다. 이 산책로도 살펴봐야 했으나 일몰 압박과 코스 혼돈의 무지(無知)로 인해 가지
못하고 이렇게 수월봉 북쪽 입구만 기웃거리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  바다를 향해 고개를 내민 수월봉

▲  수월봉으로 인도하는 길 (제주올레길 12코스)

수월봉은 제주도 본토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해발 77m의 해안 언덕이다. (제주도의 서쪽 끝
은 차귀도) 북쪽과 서쪽은 절벽이고 동쪽과 남쪽은 부드러운 산세로 이루어져 있는데, 옛 사
람들이 붙여놓은 수월과 녹고 남매의 슬픈 전설이 속세에서 오염된 두 눈에 이슬을 맺히게 한
다. 수월봉이란 이름은 바로 '수월'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전설은 정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
으나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조선 중기에 수월과 녹고 남매가 홀어미를 모시고 수월봉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갑자기 중병에 걸리자 온갖 약을 구해보았으나 좀처럼 차도가 없어 애 태우던 중, 집 앞을 지
나던 승려가 그 사연을 듣고 100가지 약초를 알려주었다.
하여 수월 남매는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99가지를 구했으나 나머지 하나인 오갈피를 찾
지 못해 마을 앞 수월봉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봉우리
벼랑에서 오갈피가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오갈피에 난데없는 등장에 그들은 너무 기뻤으나
문제는 절벽 중간쯤에 있다는 것. 그래도 그것을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수월은 남동생인 녹고
의 손을 잡고 벼랑으로 내려가 그것을 뜯어 녹고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은 녹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탄성을 지르다가 그만 실수로 수월이의 손을 놓고 말았다. (또는 수월이가 벼랑을 기
어올라 오갈피를 구했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함)

수월은 그대로 벼랑 밑으로 떨어져 죽었고, 녹고는 넋을 잃고 17일 동안 누이를 부르며 울었
다. 그 눈물이 바위 틈을 거쳐 엉알해안 벼랑으로 떨어지니 세상은 그 물을 '녹고의 눈물'이
라 불렀다. (현실은 해안 절벽의 화산재 지층을 통과한 빗물이 화산재 지층 밑에 진흙으로 된
불투수성 지층인 고산층을 통과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것임) 그 사연으로 봉우리 이름이 수
월봉이 되었다고 한다.

전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성이 나름 있는 일이라 아마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짓기 좋아하는 지역 선비들이 효도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그럴싸하게 각색하여 수월
봉 전설로 내놓았을 것이다. 허나 병든 어미 때문에 아리따웠을 것으로 여겨지는 딸이 꽃도
피지 못하고 비명횡사를 했고 남동생은 누이를 죽게 했다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힘든 삶을
살았으니 그들의 팔자도 나처럼 참 박복하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차귀도(왼쪽)와 와도(오른쪽)
저들은 용수리 절부암부터 이곳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어
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주었다.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과 비슷했던 와도는
여기서 보니 그저 그런 모습으로 보인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와도(왼쪽 섬)와 엉알해안, 당산봉

▲  수월봉 지붕에 자리한 수월정(수월봉 전망대)

수월봉 정상에는 8각형 모습의 수월정과 고산기상대가 자리해 있다. 수월정 서쪽은 벼랑으로
안전펜스가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가 제주도 본토에서 중원대륙과 가까운 곳이다. 우리가 장
차 점유하고 누려야될 중원대륙이 혹여 보일까 싶어 이마에 주름선이 간드러질 정도로 두 눈
을 부릅뜨고 서쪽을 노려봤으나 대륙은 보이지 않았다. 가깝다고는 하지만 실제 거리는 엄청
나다.
바닷바람은 일몰 후광에 힘입어 얼마나 매서운지 내가 날라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
이다.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수월봉 구간을 일몰 바로 전에 도착하니 마치 수월봉을 모두 가지게
된 듯 무척 기뻤다. 허나 엉알해안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실수를 범했으니 하나를 얻고 하나
를 잃은 셈이 된다. 하여 나중에 또 와야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허나 이런 곳은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또 오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다. 


▲  수월봉 지붕 남쪽에 자리한 고산기상대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고산리 서남부와 신도리(대정읍) 지역
수월봉은 당산봉을 제외하고 주변이 온통 바다와 들판이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품격은 우수하다.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차귀도와 와도, 주름선을 진하게
보이며 뭍과 섬을 세차게 때려대는 남해바다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와도와 엉알해안, 당산봉

수월봉을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둘러보아 마음이 참 뿌듯하다. 수월
봉입구로 나오면서 앞서 지나쳤던 엉알해안을 잠시 거닐까도 했으나 땅꺼미가 자욱하여 언제
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고 고산리로 움직였다.
바람의 섬인 제주도에 걸맞게 바다 바람이 얼마나 춥고 징한지 바람을 맞은 스마트폰 밧데리
가 순식간에 70%에서 0%로 떨어져 폰이 급 기절하는 참사까지 발생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
라 다소 당황했으나 이내 진정을 되찾고 길을 재촉했다.

고산리에서 제주도 급행버스 102번을 타고 모슬포(대정)로 나가 유명한 밀면집에서 저녁으로
시원한 밀면 1그릇을 섭취했다. 거기서 폰 충전을 꾀하니 잠시 혼절했던 폰이 다시 깨어난다.
이래서 먼 길을 갈 때는 무조건 폰 충전 케이블을 가지고 간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산방산(山房山) 서북쪽에 자리한 산방산탄산온
천을 찾았다.
요즘 숙박시설의 하나인 게스트하우스(게하)가 인기라 체험이나 해볼 겸 탄산온천에 딸린 게
하에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말로만 듣던 8인용 도미토리 방에서 잠을 잤다. 숙박비도 모텔에
비해 많이 저렴했고 이곳 같은 경우는 온천 이용권 2장을 서비스로 주어 저녁과 아침에 뜨끈
한 온천물에 들어가 몸을 푹 끓이며 편하게 씻을 수 있는 잇점이 있다. 허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잔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다음날에는 돈 더 주고 마음 편하게
모텔에서 잤음)
내 듣기에는 같은 방에 자는 사람들끼리 술도 1잔 하고, 게하에서 자체적으로 저녁에 파티도
한다고 하나 파티 같은 경우 별도의 돈을 내야 되고, 몸도 완전 방전된 상태라 땡기지도 않는
다. 다행히 내가 잔 방은 딱 절반만 차서 번잡함은 별로 없었고, 다들 자는 분위기라 22시 넘
어서 잠을 청했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 첫날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별도 글에서~~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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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7월 2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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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제주도의 서쪽 끝을 거닐다 ~~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나들이 (차귀도, 와도)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절부암 주변, 제주올레길12코스)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서 바라본 와도(왼쪽)와
차귀도(오른쪽)

절부암 용수리 제주올레길12코스

▲  절부암

▲  용수리 제주올레길12코스


 

묵은 해가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막 기지개를 켜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를 찾았다.

달님이 하늘 높이 걸린 새벽 3시,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심야시내버스(N버스)를 줄
줄이 이어타 김포공항으로 이동했다. 비수기 평일임에도 제주도(濟州島)와 따뜻한 남쪽
을 꿈꾸는 사람들로 김포공항 국내선청사는 이른 아침부터 북새통을 이룬다.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 수속을 마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나를 제주도로 옮
겨줄 6시대 비행기에 몸을 담는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는 만석의 기쁨을 누리며 활주로
를 10여 분 정도 방황하다가 창공 속으로 높이 날개짓을 펼친다.
이륙 시간을 기준으로 제주공항 착륙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고 활주로 이동 시간을 포
함해 1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이 소요시간은 내가 처음 제주도에 갔던 1988년과 별로 차
이가 없다.
제주공항 서쪽 활주로에 사뿐히 착륙하니 공항청사로 인도할 셔틀버스가 넉넉히 대기하
고 있었다. 하여 그 버스에 탑승하여 3분 정도를 달려 제주공항청사로 들어선다.

제주도에 나를 떨어트리긴 했지만 이미 정처(定處)는 싹 정해둔 상태이다. 남들은 거의
렌트카를 이용해 이동을 하지만 나는 극서민이라 마음 편하게 대중교통을 택했다. 제주
도는 육지보다 시내버스 차비가 저렴하고 무엇보다 무료환승이 아주 휼륭하여 섬 1바퀴
(180km)를 기본 요금(1,250원, 카드는 1,150원)에 도는 것도 가능하다. (제주도 간선노
선인 201번과 202번을 이용하면 됨)

제주국제공항을 나와서 제주시내 서부와 애월읍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제주도 간선노
선 202번(제주터미널~고산리~서귀포등기소)을 타고 용수리 충혼묘지에서 내렸다. 202번
은 외도 월대(月臺)부터 다음날 가는 천제연폭포까지 쭉 신세를 진 노선으로 제주도 급
행버스 102번과 함께 서일주(일주서로) 구간을 책임지고 있다. (동일주는 급행 101번과
간선 201번이 맡고 있음)

정류장 바로 남쪽에 용수교차로가 있는데, 여기서 용수리포구로 인도하는 용수1길로 접
어들어 15분 정도 걸으니 이곳에 상륙했던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기리는
'성(聖)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이 잠깐 들리라며 손짓을 한다.
원래는 계획에 없던 곳이라 통과하려고 했으나 그냥 지나치기가 조금 아쉬워 여로(旅路
)를 좀 살찌울 겸, 기념관의 손짓에 응했다. 하여 그곳을 둘러보고 커피까지 기분 좋게
얻어 마시며 바로 서쪽에 자리한 용수리 포구로 이동했다.
표착기념관은 옥상을 개방하고 있는데 거기서 바라보는 차귀도와 와도, 용수리 지역 조
망이 제법 괜찮으니 꼭 누려보기 바란다.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 대한 내용은
생략함)

용수리 포구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절부암이 있는데, 바로 그곳을 시작으로 수월봉까
지 제주올레길12코스(용수리↔무릉리, 17.5km)를 거닐었다. 앞서 둘러본 명소들은 코스
요리에서 앞에 먹는 맛보기 음식이고 이번에 다룰 제주올레길 12코스는 그날의 중심 메
뉴라 할 수 있다. 
이 코스는 남해바다와 산, 해안 절벽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안 올레길로 용수리 방
사탑과 생이기정, 당산봉, 고산리 유적, 엉알해안 등의 상큼한 명소가 있으며, 바다 너
머로 차귀도와 와도가 다양한 각도로 포즈를 취해 눈과 마음이 지루할 틈이 없다.
나의 정처없는 마음을 수없이 앗아가고 놓아준 올레길 12코스, 우리집과 가까웠다면 즐
겨찾기 명소로 삼아 두고두고 누리고 싶지만 서로의 제자리가 너무나 머니 실로 아쉽다.
(내가 조물주라면 우리 동네로 그대로 옮겨오고 싶음)


▲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옥상에서 바라본 용수리 지역
저 멀리 구름에 감싸인 곳이 제주도의 심장이자 성지인 한라산(漢拏山)이다.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  용수리 포구에서 바라본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김대건이 청나라 상해에서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다가 풍랑을 만나 용수리에
표착했다. (차귀도에 먼저 표착했다고 함) 그때 타고 온 배는 복원되어
저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바닷가 언덕, 절부암(節婦岩)
- 제주도 지방기념물 9호

▲  서쪽에서 바라본 절부암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 용수리 포구에 이르면 유난히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시선을 붙잡는다.
온갖 나무와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뒤섞여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은 그 언덕은 용수리의 오랜
상징이자 나를 이 머나먼 남국(南國)으로 오게 한 절부암이다.
서쪽을 바라보고 선 절부암은 이름 그대로 절개를 지킨 부인을 기리는 바위로 다음과 같은 슬
픈 이야기가 속삭이듯 서려있다.

때는 1863년 경, 용수리에는 강사철(姜士喆)과 16살(또는 19세) 먹은 고씨 여인이 살고 있었
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여 혼인까지 했으나 살림이 영 좋지 못해 차귀도에서 대나무를 베어와
바구니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혼인 며칠 후, 강씨는 바구니를 만들 재료를 취하고자 마을 사람들과 테위(테배)를 타고 차귀
도로 건너갔다. 허나 정오가 지나면서 갑자기 강한 바람이 몰아치자 서둘러 마을로 돌아오다
가 강풍의 희롱에 제대로 흥분한 바다 파도로 배가 뒤집혀 모두 죽고 만다. (다른 이야기로는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강풍으로 침몰해 죽었다고 함)
졸지에 남편을 잃은 고씨는 크게 통곡하며 바닷가에 나가 남편의 시신을 찾을 수 있기를 절절
히 빌었다. 그렇게 3달을 빌었으나 남편의 시신은 소식이 없었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결
국 해안 절벽에 있는 팽나무에 목을 매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그때까지 행
방이 묘연하던 남편의 시신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고씨가 목을 맨 자리 밑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 해괴한 일에 지역 사람들은 중원대륙 조아(曹娥)의 일과 같다며 감탄을 했다. 여기서 조아는 조간의 딸로 그가 강을 건너다 급류에 빠져 죽자 조아는 70일 동안 아버지를 찾아 헤매다가 너무 비통하여 강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5일 뒤에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물 위에 떠올랐다고 한다.
고씨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대정(모슬포) 사람 신재우(愼哉佑)는 크게 감동을 먹고 자신이 과
거에 붙으면 고씨의 열녀비(烈女碑)를 세워주겠다고 공언했다. 하여 바다를 건너 서울로 올라
가 과거에 응시했으나 정성 부족인지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풀이 죽은 신씨는 고향으로 가다가 답답한 마음에 점집에 들렸다. 점쟁이는 한 여인이 따라다
니고 있으니 그를 잘 모시면 급제를 할 것이라 답을 했다. 허나 그 여인이 누군지 전혀 알 수
가 없었고 집에 와서도 계속 머리를 굴렸으나 딱히 떠오르는 여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고씨 부인의 이야기가 나왔다. 하여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라 그 여인이 고씨라 여겨져 고씨의 묘를 참배했다. 그리고 다시 상경
하여 과거에 응시해 드디어 급제를 하였다.
그는 대정판관(大靜判官)의 직을 제수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정에 상소하여 고씨의 열녀비를
세우는 한편, 70냥을 지원해 고씨 부부의 묘를 당산봉(고산봉) 서쪽 비탈에 합장해 매년 3월
15일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고산과 용수 마을에 100냥을 내주어 제사를 꼭 챙기도록 했으며,
고씨가 목을 맨 절벽을 절부암이라 이름 지었다.

왜정(倭政) 때는 왜정의 태클과 재정 문제로 제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마을 부인회가
돈을 모아 300평 정도의 절부암전을 마련하여 그 소출로 매년 꾸준히 제를 지낸다.


▲  북서쪽에서 바라본 절부암

절부암 언덕에는 사철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포나무, 느릅나무, 박달목서(환경부 지정 멸
종위기 야생생물 2급) 등이 모진 바닷바람을 이겨내며 우거져 있다. 예전에는 절부암 바로 앞
까지 바닷물이 넝실거렸으나 개발의 칼질이 여기까지 마수를 뻗치면서 적지 않은 변화를 강제
로 받게 되었다.
절부암 앞에 돌로 다져진 산책로가 닦여 바닷물은 서쪽으로 조금 밀려났으며, 그 앞바다에 도
로가 생기고 항구가 생겼다. 게다가 절부암 뒤쪽에도 집들이 마구 들어서 마치 도시 속에 갇
힌 외로운 공간처럼 되었다. 이곳이 대도시 한복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엄연한 시골 포
구이다. 개발의 칼질에 절부암의 공간이 다소 쪼그라든 느낌을 주며, 절부암 바로 뒷쪽에 옥
의 티를 선사하면서까지 건축 허가를 내줬어야 했는지 제주도 철밥통들에게 실로 회의감이 든
다. (무분별한 난개발로 계속 망가지고 고통받고 있는 제주도의 현실임)


▲  절부암 앞 산책로 (북쪽 방향)

▲  절부암 앞 산책로 (남쪽 방향)

산책로가 닦여진 이곳에는 층층이 주름진 바위들이 있었고 그곳까지 바닷물이 손을 내밀어 절
부암과 진한 정을 나누었다. 산책로 조성으로 절부암 접근이 좀 쉬워지긴 했으나 1980년대 절
부암 사진과 비교해보니 개발이 씌운 굴레에 단단히 갇혀있는 듯한 모습이다.


▲  절부암 제단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을 갖춘 이곳에서 절부암 제사가 이루어진다.
평소에는 먼지가 놀이터로 삼을 정도로 한가하지만 3월 15일만 되면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세월을 너무 간지나게 탄 절부암 바위들

▲  절부암 바위글씨의 위엄
감동 김응하(監董 金應河)가 글을 짓고 동수 이팔근(洞首 李八根)이 글씨를 썼다.
제주도에서 유일하다는 전서체 바위글씨로 독특한 글씨라 절부암이면서도
아닌듯한 아리송한 모습이다.

▲  신재우가 남긴 바위글씨

절부암 바위글씨 주변에는 '同治丁卯紀平三字(동치정묘기평삼자, 여기서 '동치정묘'는 1867년
)','判官愼裁佑撰(판관 신재우찬)' 바위글씨가 있다. 이들은 절부암을 있게 한 신재우의 흔적
들로 그 주변 바위에는 절부암 제사를 주관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어 절부암의
과거와 현재가 깃든 소중한 일기장 같은 곳이다.

* 절부암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41-5


▲  바다를 향해 작게 입을 벌린 용수리 포구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섬은 와도와 차귀도이다. 저들은 용수리에서
수월봉까지 다양한 각도로 아주 지겹도록 구경을 했다.

▲  차귀도(遮歸島)

손에 닿을듯 가까이 떠있는 차귀도는 0.16㎢의 조그만 섬으로 제주도의 서쪽 끝을 잡고 있다.
지실이섬, 죽도, 와도 등의 작은 섬을 거느리고 있으며, 1970년대까지 약간의 사람들이 거주
하고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 시절에 여러 번 터졌던 북한의 도발 행위(1968년 김신조 공비 패
거리 서울 침투, 1974년 공비단 추자도 침투 등)로 외딴 섬들의 안보 취약이 문제가 되자 섬
사람들을 제주도 본토로 이주시켜 무인도가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금지된 섬이 되어 완전 자연의 공간으로 남아있다가 2011년 이후 개방되어 섬
나들이가 가능해졌다.
차귀도는 고산리 차귀도 포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되며, 낚시터로도 유명하여 참돔과 돌
돔 등 다양한 물고기들이 잡힌다. (1~3월, 6~12월에 많이 잡힘~) 이번에는 그림의 떡처럼 차
귀도를 대했지만 다음에는 저곳에 꼭 발을 들이고 싶다.

차귀도 일대는 '차귀도 천연보호구역'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422호로 지정되었다.


▲  와도(臥島, 누운섬)

와도는 차귀도에 딸린 작은 바위 섬으로 용수리에서 보면 마치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으로 보
인다. 얼굴과 가슴(조금 뾰죡하게 나온 부분은 젖꼭지), 다리 부분이 제법 현실감있는 모습으
로 대자연 형님의 위대한 작품성을 느끼게 한다. 허나 용수리에서 볼 때나 그렇게 보이지 당
산봉과 고산리, 수월봉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의 와도 때문인지 그곳과 가까운 고산리에는 예로부터 과부들이 많았다
고 한다.


▲  바다에 나란히 떠서 물놀이를 즐기는 와도와 차귀도(오른쪽)

▲  용수마을 방사탑(防邪塔) 2호 - 제주도 민속문화재 8-9호

제주도에는 방사탑이라 불리는 동그란 돌탑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 흔한 서낭당이나
돌탑 스타일의 탑으로 마을의 재앙을 막고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허한 곳을 채워주는 용
도로 지어졌는데, 답, 답데, 거욱, 거왁, 답단이, 거욱대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으며, (주로
쓰이는 명칭은 '방사탑') 탑 위에는 돌하르방 모양의 돌이나 사람 얼굴 모양으로 다듬은 돌,
새 모양의 돌을 추가로 올려놓는다.

용수리포구에는 남쪽과 북쪽에 총 2개의 방사탑이 세워져 있다. 차귀도 주변은 바다가 툭하면
심술을 부려 배가 자주 좌초되었고 그때마다 죽은 이들의 시신이 마을로 밀려왔다. 하여 마을
주민들은 그런 재앙을 막고자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화성물 가까이에 있어서 화성물답, 화성물탑이라 불리기도 하며, 탑의 꼭대기에 새의 부리와
비슷하게 생긴 길쭉한 돌이 바다와 차귀도가 있는 서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새 부리 비슷하
게 생긴 돌이 놓여 있어서 '매주제기'라 불리기도 한다.
새는 예로부터 인간과 하늘을 이어주고 인간의 소리를 하늘로 전해주는 존재로 여겨져 용수리
앞바다에 사고가 없게끔 하늘에 민원을 넣는 용도로 단 것으로 보인다.

* 용수마을 방사탑2호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88-6번지

▲  가까이서 본 용수마을 방사탑 2호

▲  방사탑 주변 바닷가


 

♠  제주올레길12코스 거닐기

▲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 방사탑2호~생이기정 구간)

제주올레길 12코스는 용수리 절부암에서 무릉리까지 이어지는 17.5km의 올레길이다. 이 올레
길은 용수리에서 제주올레길 13코스(용수~저지, 15.9km)로 간판이 바뀌며 무릉리에서 제주올
레길 11코스(무릉~모슬포, 17.3km)로 이름이 바뀌어 각자의 방향으로 달려간다.
나는 12코스 구간 중 가장 꿀단지라 할 수 있는 용수리~수월봉 구간을 거닐었는데, 12코스 전
체의 ⅓ 남짓 정도 된다. 허나 일몰 시간의 압박이 내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는다. 2시간 내에
수월봉까지 가야 일몰의 눈치를 피하며 마음 놓고 사진 셔터를 누를 수 있고, 안전하게 모슬
포(摹瑟浦)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워지면 출사도 힘들고 올레길 이동도 힘들어짐)

햇님의 퇴근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일단 12코스에 나를 던지기로
하고 길에 임했다. 이 구간은 생이기정 북쪽에 이르면 고산리 유적까지는 완전 속세(俗世)와
등을 지게 되므로 적어도 고산리 유적까지는 무조건 가야 된다.
12코스 구간 중, 용수리~수월봉 구간은 해안 구간으로 당산봉을 넘어가며, 수월봉~무릉리 구
간은 내륙이다. 해안길 중 용수리 방사탑~당산봉까지는 거의 벼랑길로 키 작은 줄난간 외에는
안전시설이 없으므로 괜히 사진 찍는다고 안전선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한다. 게다가 속세와 떨
어진 외진 곳이라 가급적 일몰 전까지는 산책을 마쳐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  누렇게 뜬 억새들이 나그네를 반기는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 방사탑2호~생이기정 북쪽 구간)


12코스는 제주도의 야심작인 올레길의 일원이라 길은 잘 닦여져 있다. 방사탑2호 남쪽 구간에
는 무려 박석(薄石)까지 입혀져 있어 마치 시내 해안 공원을 거니는 기분이다.
제주도가 아무리 따뜻한 남쪽이라고 하지만 바닷바람이 얼마나 격한지 두 손이 얼어붙을 정도
이다. 그날 제주도 기온은 영상 4~9도라고 나왔으나 체감온도는 거기서 7~8도 정도는 빼야 했
을 정도이다. 너무 두꺼운 잠바까지는 아니더라도 패딩 잠바나 덜 두꺼운 잠바를 입어야 무리
가 없을 것이다. (모자 달린 잠바를 입으면 더 좋음) 대신 내륙 지역은 바닷바람의 간섭을 덜
받아 조금 따스하다.


▲  여기서도 변함없이 나와 놀아주는 와도와 차귀도
마치 양이(洋夷)들이 말하는 천지창조의 현장 같다. 와도와 차귀도가 막
빚어진 듯한 모습, 하늘은 저들을 만드느라 체력이 방전되었는지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다.

▲  가까이서 바라본 와도의 위엄

12코스를 거닐면 꼭 따라다니는 존재가 있다. 바로 차귀도와 와도이다. 이들은 수월봉까지 계
속 나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비춰준다. 절부암과 용수리포구에서는 윗 사진처럼
보였으나 올레길을 1굽이 돌 때마다 조금씩 다른 자태를 보여주며, 고산리에 이르면 누워있는
여자가 아닌 그저 평범한 바위섬으로 모습이 바뀐다. 사물과 사람을 하나의 각도가 아닌 다양
한 각도로 봐야된다는 진리를 이 올레길12코스가 몸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허나 사람은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존재들이라 그 당연하면서 단
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  해안 벼랑으로 이루어진 제주올레길12코스 (생이기정 북쪽)
이곳은 바다 낚시터로 좋은 곳이라 낚시도구를 챙기고 벼랑 밑으로
내려가는 낚시꾼이 여럿 눈에 띄었다.

▲  제주올레길 12코스 생이기정 북쪽 해안 벼랑
오른쪽에 보이는 섬은 와도와 차귀도이다.

▲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생이기정 북쪽)
인생이란 이렇게 뒤를 돌아보는 여유도 챙겨야 정신 건강에 좋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는 것도 썩 좋은 것은 아니다.

▲  저만치 멀어진 용수리

올레길 12코스 경관에 퐁당퐁당 홀리다보니 어느덧 이곳에 우두커니 선 나를 발견했다. 여기
가 용수리~수월봉 구간의 ¼ 정도 되는 곳으로 길은 한참이나 남았다. 과연 수월봉까지 일몰
직전까지 갈 수 있을까? 수월봉은 내 조급한 마음을 외면하며 아직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
고 있다.


▲  생이기정 북쪽에서 바라본 용수리 앞바다
바다 파도는 제법 패기 있는 모습으로 뭍을 때려대고, 바닷바람은 태풍 같은
기세로 홀로 거니는 나를 때려댄다. 오늘도 고통 받는 내 인생...

▲  바람개비로 정신이 없어 보이는 용수리

제주도 해안과 앞바다에는 거대한 바람개비가 많이 닦여져 있다. 제주도의 거센 바람을 활용
해 풍력발전(風力發電)을 얻고자 설치한 것인데, 바다에 설치된 것들은 해질녘이나 저녁, 흐
린 날에 보면 마치 커다란 괴물이 칼 같을 것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듯 무시무시해 보인다.


▲  슬슬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와도와 차귀도 (생이기정 북쪽)

▲  생이기정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이렇게 보니 와도가 전혀 누워있는 여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차귀도 또한
용수리에서 보이지 않던 숨겨진 남쪽 속살을 비추기 시작한다.

▲  생이기정
난간 너머로 억새들이 펼쳐져 있는데 겉으로 보면 완만해 보이지만 그건
억새가 나그네를 낚으려는 함정이다. 완만해 보이는 억새밭 너머에
천길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있으나 가급적 난간을 넘지 말자.
 

용수리 포구와 고산리 유적 중간에 '생이기정'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제주도 사투리로 새를
뜻하는 '생이'와 절벽을 뜻하는 '기정'이 합쳐진 것으로 새가 날아다니는 절벽길이란 뜻이다.
올레길에서 보면 생이기정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지만 차귀도나 바다에서 보면 꽤 높은 벼랑
으로 화산재와 용암이 바다로 흘러가 켜켜히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생이기정도 그
렇고 엉알해안과 수월봉 모두 용암이 빚은 대작품들이다.


▲  생이기정 남쪽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①
와도의 숨겨진 남쪽 속살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  생이기정 남쪽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②

▲  당산봉에서 바라본 수월봉과 고산리 유적
드디어 수월봉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다를 향해 자라 목처럼
고개를 내민 해안 언덕이 바로 그 수월봉이고, 사진 가운데 들판이 
고산리 선사유적이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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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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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강남구 봉은사 2 (사월초파일)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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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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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동천, 반계 윤웅렬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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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최순우옛집, 수연산방(상허 이태준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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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묘,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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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양 북한산성(태고사, 산영루터, 북한산성계곡)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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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물향기수목원 / 수원 팔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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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 ☞ 블로그글 보기
7 남양주

덕릉마을 산신각, 덕흥대원군 묘역

2008, 5 ☞ 블로그글 보기

8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08, 10 ☞ 블로그글 보기
9

안양

안양사, 석수동마애종, 석수동석실고분 2009, 3 ☞ 블로그글 보기
10

안성

서운산 석남사 (사월초파일)

2009, 5 ☞ 블로그글 보기
11

하남

춘궁동동사지(동사지3/5층석탑), 광주향교

2010, 2 ☞ 블로그글 보기
12

안양

삼성산 염불암, 중초사지당간지주, 안양예술공원

2010, 12 ☞ 블로그글 보기
13

양평

용문산 사나사, 사나사계곡

2011, 5 ☞ 블로그글 보기
14

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5

고양

북한산성 중성문, 노적사, 중흥사터, 봉성암,
산영루터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6

포천

반월성, 청성공원, 포천향교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17

하남

선법사(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2011, 11 ☞ 블로그글 보기
18

고양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9

고양

중남미문화원, 벽제관터

2012, 5 ☞ 블로그글 보기
20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장정리5층석탑, 고려궁터,
김상용 순절비

2012, 8 ☞ 블로그글 보기
21

이천

관고리 석불입상, 설봉공원(설봉저수지),
설봉서원, 설봉산 영월암

2012, 10 ☞ 블로그글 보기
22

양평

용문산 용문사,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23

파주

고령산 보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24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 2014, 3 ☞ 블로그글 보기
25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26

의정부

도봉산 회룡사, 석굴암, 회룡골 2015, 7 ☞ 블로그글 보기
27

고양,
서울
종로구

북한산 북한산성계곡, 태고사, 행궁터,
금위영이건기비, 금위영유영지, 경리청상창터,
대남문, 문수사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28

의왕

청계산 청계사

2016, 2 ☞ 블로그글 보기
29

강화

외포리, 석모도 보문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0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1

양주
서울

우이령길(교현리~우이동), 우이동유원지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32

인천

소래철교, 소래포구(소래어시장), 장도포대지
(댕구산), 논현포대

2017, 2 ☞ 블로그글 보기

33

수원

서호(서호공원), 항미정 2017, 6 ☞ 블로그글 보기

34

광명

광명동굴, 가학산 2017, 7 ☞ 블로그글 보기

35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2017, 11 ☞ 블로그글 보기

36

안양

안양예술공원, 안양사지,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2018, 1 ☞ 블로그글 보기

37

강화

월곶돈대, 연미정, 강화평화전망대

2018, 6 ☞ 블로그글 보기

38

과천

관악산 문원계곡,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2018, 7 ☞ 블로그글 보기

39

군포

수리산(철쭉동산,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
둘레길), 수리사, 반월호수

2018, 9 ☞ 블로그글 보기

40

인천

양주성금속비, 용궁사, 영종도 백운산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41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2019, 1 ☞ 블로그글 보기

42

강화

교동도 (교동읍성, 교동향교, 화개사, 화개산)

2019, 6 ☞ 블로그글 보기

43

화성

봉림사, 구봉산 당성

2019, 10 ☞ 블로그글 보기

 

강원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양양

낙산사, 홍련암, 오색약수, 성국사, 설악산 주전골 2004, 3

☞ 블로그글 보기

2 강릉 객사문, 오죽헌, 경포대, 굴산사터, 신복사터 2004, 6

☞ 블로그글 보기

3 평창 대관령 양떼목장 2006, 8

☞ 블로그글 보기

4

강릉
동해

경포대해수욕장, 등명낙가사, 묵호항 2006, 8

☞ 블로그글 보기

5 동해 감추사, 감추해변 2007, 2

☞ 블로그글 보기

6 태백 구문소 2007, 2

☞ 블로그글 보기

7

양구

양구 선사박물관 2010, 1

☞ 블로그글 보기

8

화천

토고미마을(산천어축제), 딴산 2011, 1 ☞ 블로그글 보기
9

화천,양구
춘천

화천 평화의댐, 세계평화의종공원,
춘천 윗샘밭

2011, 2 ☞ 블로그글 보기
10

평창

남산공원, 송학루, 노산성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1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2, 6 ☞ 블로그글 보기
12

정선

정선5일장, 봉양리뽕나무, 아우라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3

영월

보덕사, 금몽암, 낙화암, 금강정, 금강공원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4

태백

태백산 (당골, 석탄박물관, 석장승, 눈꽃축제장,
단군성전)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5

동해

추암(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 해암정,
추암조각공원, 북평5일장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6

화천

화천 산천어축제(화천읍내, 북한강) 2015, 1 ☞ 블로그글 보기
17

정선,태백

함백산, 만항재 2015, 9 ☞ 블로그글 보기
18

정선

아라리촌, 아우라지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19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0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21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2017, 6 ☞ 블로그글 보기
22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고인돌

2018, 2 ☞ 블로그글 보기
23

원주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계곡, 학곡리 황장금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충청북도 - 1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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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은
대전

보은 삼년산성
대전 동춘당 / 송애당 / 법동 석장승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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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동 영동향토민속자료전시관, 가학루, 황간향교 20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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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주

단호사, 사문리당산나무숲, 미륵리사터,
하늘재, 충주호

20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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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양

사인암, 청련암, 중선암, 북상리 시골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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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괴산

각연사 (각연사계곡)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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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홍범식고가, 개심사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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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옥천

정지용 생가(정지용문학관), 육영수생가,
죽향리초교 구교사, 죽향리사지3층석탑, 옥천성당

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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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주

낙가산 보살사, 명암약수터, 명암저수지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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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단양

북상리 시골, 사인암, 청련암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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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단양

구인사 (구봉팔문)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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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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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청남도, 세종 - 16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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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안 태화산 광덕사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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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진
태안

행담도, 꽃지해수욕장, 방포항,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암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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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전

식장산 고산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4 공주

계룡산 동학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5 공주

계룡산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용문폭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6 공주

계룡산 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7 태안

신진도(안흥외항), 마도, 안흥항, 안흥성(태국사)

2013, 8 ☞ 블로그글 보기
8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산자연휴양림)

2014, 6 ☞ 블로그글 보기

9

당진
아산

장고항, 삽교호관광지, 외암리민속마을

2015, 11 ☞ 블로그글 보기

10

예산

금오산 향천사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1

대전

계족산(계족산성, 계족산 황톳길), 장동산림욕장

2016, 10 ☞ 블로그글 보기

12

보령

성주사지, 성주천 가로수길

2017, 2 ☞ 블로그글 보기

13

서산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

2017, 12 ☞ 블로그글 보기

14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2018, 7 ☞ 블로그글 보기

15

천안

태조산 각원사, 성불사 2019, 1 ☞ 블로그글 보기

16

세종

비암사, 도깨비도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전라북도 - 15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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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안 상록해수욕장, 내소사, 곰소항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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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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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주
장수

한풍루, 무주향교
의암송, 장수향교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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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이목대), 한벽당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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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등학교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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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산

응항, 선유도, 고군산군도 일주

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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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순창

강천산(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강천사, 삼인대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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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망루, 오수리석불, 해월암

201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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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20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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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안 변산 내소사 20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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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무주 적상산(적상호, 적상산성, 적상산사고), 안국사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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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무주

무주머루와인동굴, 덕유산무주리조트(곤도라),
덕유산 설천봉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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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제 모악산 귀신사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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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완주 종남산 송광사 201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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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완주 모악산 대원사, 수왕사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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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라남도 - 14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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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성
담양
나주

장성 방울샘,
담양 관방제림 / 담양읍 5층석탑 / 석당간
나주 남고문 / 정수루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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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광 내산서원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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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주
광주

정수루, 금성관
광주 풍영정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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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천 금전산 금둔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5

순천 개운산 동화사 2010, 1 ☞ 블로그글 보기

6

순천 조계산 천자암 2010, 2 ☞ 블로그글 보기

7

장성 백암산 백양사 2011, 9 ☞ 블로그글 보기

8

광주 무등산 원효사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9

구례 지리산 천은사(천은제) 2012, 4 ☞ 블로그글 보기

10

곡성 동리산 태안사(태안사계곡) 2013, 5 ☞ 블로그글 보기

11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운암사)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2

목포

노적봉, 유달산(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갓바위

2017, 9 ☞ 블로그글 보기

13

나주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14

영광

불갑산 불갑사(꽃무릇군락지)

2019, 9 ☞ 블로그글 보기

 

대구, 경상북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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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

반월성, 석빙고, 남산 서쪽(용장사터, 천룡사터)

20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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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경 문경새재(여궁폭포, 혜국사, 주흘산, 주흘관) 20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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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달성 비슬산(유가사 / 암괴류), 현풍석빙고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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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미 의구총, 낙산리고분군, 낙산리3층석탑 200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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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천
상주

개심사지5층석탑
용화사(증촌리석불좌상/입상), 전고령가야왕릉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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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신문왕릉 2009, 7 ☞ 블로그글 보기
7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불무사)

2009, 9 ☞ 블로그글 보기
8

영덕
울진

고래불해수욕장, 후포항, 월송정, 월송해변 2011, 6 ☞ 블로그글 보기
9

달성

다람재, 도동서원, 이노정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청도

남산 낙대폭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달성

비슬산 용연사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2

예천

회룡포, 비룡산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3

경산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4

경주

효소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귀부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15

경주

남산 보리사(미륵곡 석조여래좌상) 2015, 10 ☞ 블로그글 보기
16

안동

도산서원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7

대구

팔공산 파계사, 대비암, 성전암 2016, 4 ☞ 블로그글 보기
18

경주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19

의성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문익점면작기념비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20

예천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석조여래입상과
3층석탑, 초간정(초간정 원림)

2018, 3 ☞ 블로그글 보기
21

상주

장각폭포, 오송폭포(성불사), 옥양폭포

2018, 6 ☞ 블로그글 보기
22

영주
봉화

휴천동 지석 및 입석
오전약수,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2019, 6 ☞ 블로그글 보기
23

경주

감산사, 연지암, 숭복사(숭복사터)

2019, 8 ☞ 블로그글 보기

 

부산 - 1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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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영구
강서구

광안리해수욕장, 가덕도(외양포, 대항, 세바지)

200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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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서구
서구

망상도/유주암, 송도해변, 송도해수욕장

2008, 9 ☞ 블로그글 보기
3

기장군

불광산 (장안사. 장안사계곡) 2009, 1 ☞ 블로그글 보기
4

기장군

불광산 (척판암, 백련암) 2009, 1 ☞ 블로그글 보기

5

서구
북구

내원정사, 만덕사(만덕사 당간지주), 알터유적 2009, 9 ☞ 블로그글 보기

6

금정구

금정산(금정산성, 국청사) 2011, 1 ☞ 블로그글 보기

7

금정구

금정산 미륵사, 금성동 2011, 1 ☞ 블로그글 보기

8

강서구

가덕도(가덕도등대, 외양포, 대항, 새바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9

사상구
강서구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 숲길,
범방동3층석탑, 부산경남경마공원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사하구

몰운대, 다대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남구

백운포, 오륙도 (오륙도등대, 등대섬) 2014, 1 ☞ 블로그글 보기

12

사하구
서구

승학산, 구덕문화공원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3

금정구

금정산(고당봉, 금샘), 원효암, 금정산성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4

해운대구

해운대 동백섬, 해운대해수욕장, 미포,
달맞이길, 문텐로드, 청사포, 구덕포, 송정해수욕장

2015, 7 ☞ 블로그글 보기

15

연제구

배산, 배산성터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6

기장군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황학대, 두호포구,
기장성당, 월전포구

2017, 4 ☞ 블로그글 보기

17

기장군

월전~대변 해안가, 대변항, 죽도, 연하리 해변,
오랑대, 해동용궁사

2017, 7 ☞ 블로그글 보기

 

울산, 경상남도 - 2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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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
부산

처용암
옥련선원 / 정묘사(배롱나무)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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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원 무학산(관해정), 가포해변 2006, 11

☞ 블로그글 보기

3

김해

김해 수로왕릉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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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주
사천

진주 금선암
사천읍성(산성공원), 대방진굴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5

함안
창원

함안박물관, 말산리/도항리고분군
진해 우체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6

창원

불모산 성흥사, 대장동계곡

2008, 9 ☞ 블로그글 보기
7

밀양

밀양 표충비, 무안리 향나무(홍제사) 2009, 1 ☞ 블로그글 보기
8

양산

천성산 홍룡사(홍룡폭포), 원효암 2009, 6 ☞ 블로그글 보기

9

울산 일산해수욕장, 대왕암공원 2009, 7 ☞ 블로그글 보기

10

창녕

창녕석빙고, 송현동석불좌상, 송현동고분군,
진흥왕척경비, 만옥정공원, 남지철교

2010, 5 ☞ 블로그글 보기

11

거창

수승대(귀연서원, 요수정)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2

울주
밀양

서생 나사리해변,
밀양 얼음골(천황사)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3

함양

상림공원, 한남군묘역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4

산청

목면시배유지, 배산서원, 덕천서원, 남명조식유적

2012, 9 ☞ 블로그글 보기

15

남해

호구산 용문사, 남해자생식물단지, 미국마을,
용소리/금평해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16

통영

통영 달아공원

2013, 3 ☞ 블로그글 보기

17

울주

가지산 석남사 (석남사계곡)

2013, 9 ☞ 블로그글 보기

18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9

창원

불모산 성주사 (성주사계곡)

2014, 10 ☞ 블로그글 보기

20

울주

서생포왜성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1

산청

덕양전, 전 구형왕릉, 왕산(유의태약수터,
왕산사지)

2018, 10 ☞ 블로그글 보기

 

제주도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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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외도 월대, 수산봉, 수산리곰솔, 납읍리
납읍 금산공원(납읍리 난대림)

2019, 3 ☞ 블로그글 보기


 

기타 지역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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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열도

동경 지역(긴자, 록뽕키, 우에노, 도쿄도청타워,
아사쿠사<관음사>, 신주쿠, 코쿄, 디즈니랜드)

2002, 6

☞ 블로그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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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3년 4월 이전 글은 모두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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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최종 업데이트 2019년 12월 30일

민통선에 묶여있는 강화도 옆구리의 커다란 섬, 교동도 여름 나들이 ~~ (교동읍성, 교동향교, 성전약수, 화개사, 강화나들길 9코스)

 


~~~~~  강화 교동도 나들이
~~~~~

▲  화개산 숲길

▲  교동향교

▲  교동읍성

 


 

강화도(江華島)와 황해도 사이에는 교동도란 커다란 섬이 떠있다. 예전에는 강화도 창후
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으나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1969년에 연륙된
강화도와 더불어 한반도의 어엿한 일원이 되었다. 육지(김포시)와 강화도(강화군), 강화
도와 교동도 등 바다에 놓인 다리를 2개나 건너야 되나 섬을 잇는 다리가 생김으로써 더
이상 날씨와 바다의 눈치 없이 차량으로 마음 편히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오랜 세월 목말라오던 교동도와 흔쾌히 인연을 짓고자 여름의 어
느 평화로운 날 아침, 길을 떠났다.
서울 서부와 일산신도시, 김포(金浦), 강화대교를 지나 오전 11시 반에 강화터미널에 도
착했다. 교동도 버스 시간까지는 아직 40~50분 정도 남아있어 환승시간도 연장할 겸, 강
화읍내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여럿 구입하며 시간을 때웠
다. 무더운 날씨긴 했으나 바다에 감싸인 섬이라 여름 제국의 열기(熱氣)는 그리 거세진
않았다.

드디어 교동도(喬桐島)의 새로운 빛이자 발로 등장한 강화군내버스 18번(강화터미널↔월
선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버스는 벌써부터 초만원이다. 다리 개통으로 물이 잔
뜩 오른 교동도 나들이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교동도까지 서서가야 되는가?' 우울한 마음 가득했으나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
리는 없었다. 버스 아니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사람이 빠져 다리 이전
인 인화리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교동대교 직전에는 인화리 검문소가 매의 눈으로 섬을 찾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다
리가 뚫리긴 했어도 교동도는 여전히 예민한 민통선이자 이 땅 최전방의 하나로 마치 군
사정권 시절로 강제 되감기를 당한 듯, 검문도 조금 까칠하다.
검문소에 이르면 군인아저씨의 통제에 따라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검문소에 마련된 문
서에 이름과 연락처를 쓰고 신분증 검사를 받는다. 여럿이 온 경우에는 1명만 내려 작성
하면 되나, 상황에 따라 모두 검사를 받을 수 있으니 신분증은 꼭 지참해야 뒷탈이 없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개인 차량으로 왔을 경우, 차에서 내려 신분증 검사와 이름, 연락처 등을 적고 통행증을
받는다. 통행증은 섬에서 나올 때 반환하면 된다.

승객이 많은 탓에 검문 시간이 길어져 버스는 약 7~8분 정도 그 육중한 바퀴를 멈추었다.
마치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국경선에서 출국수속을 밟는 기분이랄까?? 그 까칠한 절차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탑승하자 잠시 늘어졌던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수
평선 너머의 숨겨진 별천지로 인도할 것 같은 교동대교로 들어선다.

교동대교는 강화도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잇는 3.44km의 연륙교로 2008년 9월
에 짓기 시작했다. 원래 2012년 개통 예정이었으나 바다 갯벌에 설치된 기초 말뚝이 2011
년 중순 손상되면서 공사 기간이 다소 늘어났다. 2014년 6월 20일 임시 개통을 했고, 10
일 뒤인 7월 1일 정식 개통되어 교동도의 새로운 관문이 되었다.
공사비는 총 904억 원이 소요되었으며, 다리 밑은 서해바다와 검은 갯벌이고, 바다 북쪽
은 바로 황해도(黃海道)로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바다 다리가 바로 교동대교가 되겠다.


 

♠  교동도 입문 (교동읍성)

▲  푸르게 익어가는 교동평야 (평야 너머로 보이는 섬이 석모도)

교동대교를 건넌 버스는 봉소리와 고구저수지, 교동도의 중심인 대룡리, 교동향교가 있는 읍
내리(邑內里)를 거처 섬 동쪽에 자리한 월선포에서 바퀴를 접는다. 월선포는 교동도의 옛 관
문으로 2014년 6월까지 강화도 창후리를 잇는 뱃편이 운행했다.

※ 교동도(喬桐島)는 어떤 곳인가?
교동도는 약 47.1㎢(또는 46.9㎢)의 넓은 섬으로 논 25.89㎢, 밭 2.57㎢, 임야 11.45㎢를 지
니고 있다. 다른 섬에 비해 유독 논이 넓은 편이라 마치 육지의 너른 평야를 보는 듯 한데 이
들 논을 교동평야(喬桐平野)라 부른다. 섬에 이렇게 너른 논이 있게 된 것은 고려 말부터 자
급자족을 위해 간척사업과 경지 개척을 꾸준히 벌인 탓이다. 게다가 해발 10m 이하의 땅이 섬
의 약 ⅔를 이루고 있어 경지 개척에도 매우 용이했다.
조선과 왜정(倭政)을 거쳐 현대까지 계속 땅을 다지고 수리시설을 개량하는 등 농업에 전념했
으며, 화개산 북쪽에는 섬 호수치고는 꽤 넓은 고구저수지가 있어 교동평야의 많은 농경지를
적셔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농업에 집중한 결과,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농산물을 내놓고 있으
며, 교동도 쌀은 질이 좋기로 명성이 높다. 어느 통계를 보니 교동도에서 1년간 생산된 쌀로
교동도 사람들이 약 58년, 강화군민이 약 4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그만큼 땅이 비
옥하다. 그래서 옛날부터 섬에 부자가 많았으며, 육지 사람들에 비해 전혀 아쉬울 것이 없어
교동민국이란 말도 생겨났다. 쌀 외에 보리와 콩, 감자, 인삼, 밤, 대추, 버섯 등의 농산/임
산물도 풍부하게 나온다.

섬 동쪽에 솟은 화개산(260m)은 섬의 지붕이며, 화개산 외에는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100m 이
하의 구릉들이 여럿 솟아있다. 해안선은 서해안치고는 단조로우나, 죄다 갯벌이다. 게다가 간
만의 차가 커서 선박 출입도 썩 편하지 못하다. 월선포 등의 항구가 있으나 조그만 수준이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流氷)과 북한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으로 강화도보다 좀 춥다.

교동도 동쪽에는 그를 거느리는 강화도가 자리해 있고, 남쪽에는 역시 강화도에 속한 석모도(
席毛島)가 있다. 그리고 서쪽은 황해도 연안군(延安郡), 북쪽은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으로
모두 북한이다. 황해도 땅은 섬에서 불과 2~3km 거리에 불과해 섬 북쪽 해안과 화개산에서 뻔
히 바라보인다. 그 땅도 우리 땅이 분명하건만 그곳에는 북한이란 이상한 나라가 들어서 이렇
게 가까운 거리임에도 70년 이상 건너가질 못하고 있다.

교동도는 북방한계선(NLL)의 동쪽 시작점으로 강화도와 교동도 북쪽 바다는 남한과 북한의 완
충지대인 중립구역이다. 교동도 일대는 민통선으로 지금은 그나마 덜해지긴 했지만 출입이 썩
자유롭지 못했으며, 농업 외에는 개발이 어려워 1970~80년대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교동도의 시간까지 막아버린 것이다.

지금은 하나의 섬으로 되어있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기 이전에는 개화산과 율두산, 수정산
을 중심으로 3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교동평야에는 조수가 흘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이들 섬은 점차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지화되어 사람들이 내왕했다가 1578년에 다시 바다가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왕래하지 못했다
는 기록이 있어 후빙기(後氷期) 이후 해면 변동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교동도는 고구려 때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에 교동(喬
桐)으로 이름이 갈렸다. 이때 혈구진(穴口縣, 강화도)에 속했는데, 고려 명종(明宗) 때 감무
(監務)를 두어 섬을 통치하게 하면서 강화도에서 분리되었다.
고려의 끝 무렵인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시절에는 피폐된 수군을 재건하고 정신없이 날
뛰는 왜구(倭寇)를 때려잡고자 전라도에서 바다에 익숙한 어부와 바닷가 사람들을 징발했다.
그들에게 경작지를 주는 조건으로 강화도와 교동도로 이주시켜 수군 훈련을 시켰는데, 이때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화약을 이용해 화포(火砲) 훈련까지 병행했으며, 최무선은 단련된
그들을 데리고 1380년 금강 하류인 진포에서 왜구 500척을 때려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진포대첩(鎭浦大捷)이다.

1395년에는 만호(萬戶)와 지현(知縣)을 두었고, 이후 교동현으로 삼아 현감을 파견했다. 1629
년 경기수영(京畿水營)을 교동도로 이전하면서 강화도에 버금가는 부(府)로 승격되고 수군절
도사(水軍節度使) 겸 교동부사를 두었으며, 1633년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면서
경기도와 충청도, 황해도의 바다를 관리했다.
1777년 교동부를 현으로 낮추었다가 1779년 삼도통어사를 강화로 옮기면서 교동부 겸 방어사(
防禦使)로 승격되었으며, 1789년 삼도통어영이 다시 교동으로 돌아왔다. 1866년에도 이와 비
슷한 일이 있었고, 1884년 해방영(海防營)에 통어사가 이속되면서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조
정되었다.
1895년 행정개편으로 강화에 일시 통합되었으나 1896년 교동군으로 분리되었으며, 1914년 강
화군에 편입되어 개화면과 수정면 2개 면을 두다가 1934년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해방 당시 인구가 8,600명이었으나 6.25이후 실향민들이 북한과 가까운 이곳으로 대거 넘어오
면서 1965년에 12,443명에 달하기도 했다. 허나 민통선이라 개발도 거의 안되고 점차 낙후되
면서 인구가 감소해 현재는 3,000명대까지 떨어졌다.
6.25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강화도와 황해도를 이어주었으나 6.25이후 강화도 외에 모
두 길이 끊기면서 외로운 섬이 되었다. 게다가 민통선이라 방문도 좀 까다롭고 교동도의 이
름 3자가 천하에 그리 알려지지 못해 실향민 외에 외지인의 방문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교
동대교가 닦이면서 섬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었고, 관광객과 답사/등산/낚시 수요가 늘면
서 차량의 왕래가 폭증했다. 다리로 인해 섬은 서서히 물이 오른 것이다.

교동도에는 등산 명소로 부상하고 있는 화개산을 비롯해 교동향교, 교동읍성, 화개사, 연산군
유배지, 대룡시장 등의 명소가 있으며, 강화도 둘레길인 강화나들길 가운데 2개 코스가 섬에
닦여져 교동도에 새로운 악세사리가 되고 있다. 또한 지엄한 민통선이라 개발도 오랫동안 피
해가면서 1960~80년대 농촌마을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염원이 없어 그야말로 청정한 곳
이다.
 
섬까지 강화군내버스가 들어오지만 섬의 동부인 화개산 주변 봉소리, 대룡리, 읍내리 지역만
운행할 뿐, 그외 지역은 대룡시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거나 택시, 도보, 개인 차량을 이용해야
된다.
교동도의 중심은 대룡리로 면사무소가 있으며, 조그만 대룡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섬 서부로
갈때는 이곳에서 들어가면 된다.
육지와는 가깝지만 은근히 진입이 까칠한 곳이라 고려와 조선 때 유배지로 널리 쓰였으며 서
해바다와 예성강(禮成江), 한강이 만나는 지리적 위치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교역지로 바쁘게
살아갔다.


▲  교동읍성(喬桐邑城) - 인천 지방기념물 23호

교동도에서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교동읍성이다. 화개사입구 정
류장에서 남쪽으로 난 시골길을 조금 들어가면 장대한 세월에 형편없이 짓눌린 교동읍성과 남
문이 그 초췌한 모습을 비춘다.

교동읍성은 교동도에 경기수영이 설치된 1629년에 축성되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로 동문과
남문, 북문 등 3개의 성문을 두었으며 모두 옹성(甕城)을 둘렀다.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
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불렸는데, 1753년 여장을 고쳐 쌓았고, 1884
년에 남문을 수리했다. 바로 이 읍성(邑城) 안에 경기수영과 삼도통어영, 교동 고을의 관아가
있었다.

왜정 때 관리소홀과 왜정의 악의적인 훼손으로 동문과 북문은 쥐도새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
며, 성곽 역시 거의 앉은뱅이가 되었다. 남문은 다행히 모습은 건졌으나 1921년 폭풍우로 붕
괴된 것을 1975년에 해체,복원했으며 현재 남문과 그 좌우 성벽, 화개사입구에서 남문으로 넘
어가는 길목 등 약 300m 정도만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아있다. 제 아무리 장대했을 읍성도 결
국 세월과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모래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 교동읍성 남문(南門)

바다를 바라보고 선 남문은 문루를 상실한 채, 홍예문과 성벽, 옹성 일부만 남아있다. (최근
에 문루가 복원됨)
문 주변은 하얀 피부의 성돌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 상당수는 1975년에 복원하면서
새로 끼어 맞춘 것이다. 그 좌우에는 고색의 때로 얼룩진 성돌이 가득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  남문 서쪽 성곽과 옹성의 흔적

▲  돌담처럼 낮아진 남문 동쪽 성곽


▲  남문 앞에 웅크리고 앉은 비석의 귀부(龜趺)

남문 앞에는 비석의 일부인 조그만 귀부가 누워있다. 거북 머리와 비석을 꽂던 비좌(碑座)만
남아있는데, 정작 알맹이인 빗돌이 없어 무엇을 머금던 비석이었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아마
도 왜정 때 저 지경이 된 듯 싶은데, 교동읍성 축성/보수 관련 내용을 담은 비석으로 여겨진
다. (정답은 없음)
하지만 귀부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니 아무리 여기서 답을 내놓은들, 한낱 부질없는 메아리
에 불과하다.


▲  귀부의 뒷모습
귀엽게 표현된 꼬랑지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 같다.

▲  풍년예감~! 남문 앞에 펼쳐진 교동평야

▲  남문 안쪽

교동읍성 남문 동쪽에는 교동부 관아터와 황룡우물,  연산군(燕山君) 유배지 등의 명소가 있
다. 나는 이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남문 주변만 둘러보고 미련 없이 교동향교로 넘
어가고 말았다.
허나 늘 변명이긴 하지만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그리 아쉽지는 않다. 어차피 서울과 가까운
곳이라 나중에 다시 인연을 지으면 된다.

* 교동읍성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일원

▲  성문에 새겨진 남루(南樓) 글씨
성문의 성격과 이름을 말해준다.

▲  삼도(三道)~~ 문(門)이라 새겨진 글씨
여기서 삼도는 삼도통어영을 뜻한다.


▲  금지된 남문 안쪽 성벽
한때 잘나갔던 교동읍성은 이제 무너지는 것을 걱정해야 될 처지가 되었다.
읍성 보호를 위해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절대로 성벽을 오르지 말자~

▲  교동읍성의 아련한 흔적 (화개사입구에서 남문으로 넘어가는 길목)

▲  화개사입구 정류장에서 바라본 화개산(華蓋山)의 위엄


 

♠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로 꼽히는 교동향교(喬桐鄕校)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8호

▲  교동향교 입구에 자리한 읍내리 비석군(碑石群)

교동읍성을 둘러보고 화개산 남쪽 자락에 안긴 교동향교를 찾았다. 화개사입구 정류장에서 교
동향교와 화개사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화개산 쪽으로 1분 정도 들어가면 오래된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인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면 화개산과 화개사, 오른쪽으로 가면 교
동향교이다.

3거리에 무리를 지어 둥지를 튼 이들 비석은 총 40기로 '읍내리 비석군'이란 이름으로 살아가
고 있다. 이들은 읍내리 교동양조장 앞 비석거리에 있었는데, 1970년대에 교동도의 옛 역사를
정립한다는 뜻에서 옛 교동도의 관문인 남산포길로 옮겼다가 1991년 강화군과 교동향교 유림
들이 지금의 위치로 모두 집합시켰다.

비석 대부분이 교동도를 다스린 교동부사와 삼도통어사, 방어사(防禦使)의 선정비(善政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즉 그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인 것이다. 그들 중에 정말로 비
석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선정을 베풀고 큰 업적을 남긴 관리도 있겠으나 공덕이 쥐뿔도 없음
에도 강제로 세우게 한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
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불린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비석의 주인공이 과분에 넘치는 선정비를 누리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곳의 역사를
조금씩 머금은 교동도의 소중한 일기장으로 그들을 통해 누가 언제 이곳을 다스리고 거쳐갔는
지를 귀뜀해준다.

조선 중기와 후기, 20세기 초반에 걸쳐 지어진 비석들로 그중 앞줄에 자리한 3기는 특이하게
가로로 누워있는데, 이들은 거사대(去思臺)라 불리는 비석이다.


▲  교동향교 홍살문

비석군에서 교동향교로 가다보면 향교의 정문인 홍살문이 마중을 한다. 홍살문은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차가운 모습으로 궁궐과 관아, 향교, 왕릉 입구에 주로 세우는데 문 바로 옆에는 무
조건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가 우두커니 서 있고, 그 옆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
다. 문 앞에 바리케이드 같은 것이 쳐져 있고, 차량 출입금지를 알리는 현대판 하마비가 곁에
서 있어 차를 타고 온 이들은 주차장에서 무조건 내려서 걸어가야 된다. 그러니 하마비의 '마
(馬)'만 달라졌을 뿐, 비석의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  지엄함이 여전한 하마비의 위엄

보통 하마비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나 이곳은 '수령변장하마비(守
令邊將下馬碑)'라 쓰여 있다. 즉 수령과 변장, 그리고 그 밑은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홍살문과 하마비는 거의 빈껍데기가 되었으나 이곳 하마비의 위엄은 여전하
여 그 앞에서 차를 두고 걸어가야 된다.


▲  교동향교 외경

화개산 남쪽에 터를 닦은 교동향교는 고려 중기인 1127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화
개산 북쪽 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이 땅에 지어진 최초의 향교(鄕校)로 널리 알려져 있다.

향교란 나라에서 각 고을에 세운 중등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는 서당을 졸업한 학생들이 진
학하여 공부를 했다.
1286년에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있던 회헌 안향(晦軒 安珦)이 몽골(원나라)에 갔다가 공자(孔
子)의 초상화를 들고 귀국했는데, 배를 타고 개경(開京, 개성)으로 오다가 개경 바로 밑에 자
리한 교동도에 잠시 들려 교동향교에 그 초상화를 봉안했다고 한다. 고려 제일의 국립 교육기
관으로 지금의 서울대와 같은 국자감(國子監)까지 제치고 지역 향교에 불과한 이곳에 가장 먼
저 공자상이 봉안될 정도라면 교동향교가 당시 꽤 잘나갔던 모양이다.
그 이후 각 고을에 공자와 맹자, 최치원(崔致遠) 등 중원대륙과 신라, 고려의 주요 유교 성현
(聖賢)의 위패를 봉안한 문묘(文廟)가 설치되었다. 그러니 이 땅 최초의 향교이자 유교 성현
을 봉안한 최초의 향교란 타이틀까지 지니게 되었다. 향교 문묘는 바로 대성전으로 이때부터
교육과 제사 2가지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1741년에 지부(知府) 조호신(趙虎臣)이 읍성 북쪽인 지금의 자리로 향교를 옮겼으며, 1966년
에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무, 동/서재, 제기고, 내삼문,
외삼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향교 바깥에는 성전약수란 유명한 약수가 있다. 향교 건물은 모
두 18세기 이후 것들로 고려의 흔적은 싹 사라졌으며, 안향이 가져왔다는 공자 초상화도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방의 중등교육을 담당하던 향교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서서히 교육 기능을 잃
게 되며, 오로지 제사 기능만 남아 거의 빈껍데기가 되어버렸다.


▲  계단을 늘어뜨린 교동향교 외삼문(外三門)

향교는 조선시대에 전 고을에 설치되었다. 그러다보니 옛 고을 중심지에는 꼭 향교가 남아있
기 마련이다. 허나 향교는 고리타분한 유교의 공간이라 건물의 모습도 비슷비슷하고, 볼거리
가 풍부한 절과 달리 두 눈이 호강할만한 볼거리도 별로 없으며, 향교 상당수가 속세(俗世)에
폐쇄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어 내부 관람도 그리 쉽지가 않다. 또한 향교의 존재감도 너무
없어 나들이/답사 수요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허나 교동향교만큼은 사정이 180도 다르다. 처음에는 관람객도 거의 없는 썰렁한 향교를 생각
했으나 정작 와보니 글쎄 관람객들로 북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관람객이 많은 향교는
난생 처음이라 생소한 풍경에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교동대교 개통으로 교동도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 향교 또한 그 덕을 제대로 본 탓이지만 화개산, 교동읍성과 더불어 섬의 주요
명소이자 교동도를 소개하는 정보에도 교동향교가 크게 다뤄지고 있어 교동도에 왔다면 꼭 들
려야 되는 필수 명소로 등극을 했다.
또한 향교가 화개산 산길의 기점인 화개사와 매우 가깝고 교동읍성과 강화나들길이 지척에 있
어 위치도 좋다. 게다가 문화유산해설사도 머물고 있어 향교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으니
교동도에 왔다면 1번 꼭 들려보도록 하자.

향교는 사방을 돌담으로 둘렀다. 남쪽에 바깥과 이어지는 외삼문을 냈는데, 문 앞에는 3줄로
이루어진 돌계단이 펼쳐져 있다. 외삼문을 이루는 3개의 문 가운데 오로지 동쪽 문만 열려있
어 그 문을 통해 향교로 들어서면 된다.


▲  교동향교 명륜당(明倫堂)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명륜당이 정면을 막고 선다. 명륜당은 공자왈~맹자왈~! 공부를 하던
교육 공간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교육 기능은 이제 없어졌으니 명륜
당 또한 한가로운 신세가 되어 섬돌에 신발이 가득했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 한다.

명륜당 좌우에는 향교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다른 향교와 달리 특이하게도 '
ㄱ'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재는 향교 사무실로 쓰이고 있으며, 툇마루가 서재보다 넓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동재 옆에는 방을 따스하게 보듬던 온돌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긴장시키
던 굴뚝이 서 있는데, 그를 손질하면서 너무 시멘트로 떡칠을 한 점이 다소 아쉽다.

▲  서재(西齋)

▲  동재(東齋)

▲  무늬만 남은 동재 굴뚝

▲  굳게 닫힌 내삼문(內三門)


▲  명륜당 뒷쪽에 비뚤게 자리한 노룡암(老龍巖)

명륜당 뒷쪽에는 노룡암이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기울어진 모습으로 서있다. 그의 피부
를 가만히 살펴보면 조그만 글씨들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원래 축대에 쓰
인 돌로 교동고을 동헌터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돌의 상태상 반듯하게 세우기가 애매하
여 저리 비뚤어진 모습으로 세운 것 같다. 어차피 이 나라도 단단히 비뚤어져있으니 돌 하나
비뚤어지게 세운다고 문제될 것은 없다. 글씨만 알아보면 되니까 말이다.

노룡암은 교동고을 관아인 동헌(東軒) 북쪽 뜨락 층계 밑에 있었다. 그러니까 뜨락 석축의 일
원으로 있던 것이다. 층계 위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중 오래된 소나무가 있고, 그
밑에 축대가 있었다. 1717년에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인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 1676
~1728)이 그 축대에 늙은 용의 바위란 뜻에 '노룡암' 3자를 새겼는데, 1773년에 이봉상의 손
자인 이달해(李達海)가 이를 기리고자 석축 밑에 글을 새겼다.
1820년 통어사 이규서(李奎書)가 '호거암장군쇄풍(虎距巖將軍灑風)' 7자를 새겼는데, 이는 '
호거암장군이 풍기를 깨끗히 했다'는 뜻이며, 여기서 호거암장군은 이봉상이다. 1831년 봄에
석대로 쌓아있던 것을 1987년 교동향교로 옮겼다.

노룡암 뒷쪽 높은 곳에는 담장을 두른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으로 가려면 내삼문을 거쳐야 되
는데, 내삼문은 향사일(享祀日) 외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으므로 제기고로 우회해서 들어가면
된다. 제기고는 말그대로 제사 도구를 간직한 창고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다.


▲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  향교의 중심, 대성전(大成殿)

향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향교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이 자리해 있다. 남쪽을 바라보
고 있는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동이족 출신인 문선왕(文宣王) 공자
를 비롯해 증자(曾子), 안자(顔子), 맹자(孟子), 자사(子思) 등 초기 유교를 정립한 5명이 봉
안되어 있다.
청록색 피부를 지닌 대성전 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그 안에는 공자 등 5인의 위패와 위패를
간직한 상(床), 제사 도구 등이 들어있다. 그 앞뜨락 좌우에는 설총(薛聰)과 최치원, 정몽주,
이이(李珥) 등 신라와 고려, 조선의 유학자 20인을 봉안한 동무(東憮)와 서무(西憮)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들은 대성전의 보조 공간이다보니 대성전보다 볼품이 많이 떨어진다.

▲  한쪽 문이 열린 서무

▲  동무 (그 옆에 제기고와 명륜당으로
내려가는 문이 있다)


▲  향교 서쪽에 있는 성전약수(成殿藥水)

교동향교에 왔다면 꼭 맛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대성전 서쪽 담너머에 있는 성전약수이
다. 이 땅에 많은 향교를 가보았지만 무려 약수터까지 갖춘 향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성전약수는 교동도 제일의 약수로 위장병과 피부병, 아토피에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게다가
향교 유생들이 이 약수 덕분에 과거에 많이 붙고 문성(文成)을 이룬 이가 많았다고 한다. 허
나 물은 평범한 맛을 지닌 약수로 특별한 것은 없으며, 과연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향
교를 수식하는 오랜 명물이자 꿀단지로 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대성전 밑에서 물이 발
원하여 성전약수라 불리니 그야말로 향교 스타일의 약수터 이름이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148 (교동남로 229-49 ☎ 032-932-9457)
* 향교 관리소에 문화유산해설사가 있다. 근무시간은 9~18시(겨울은 17시)로 휴일에는 향교에
  늘 머물러 있으며, 아침 시간과 오후 늦은 시간, 그리고 평일에 왔을 경우 관리소를 찾거나
  위의 연락처로 연락을 하면 향교 해설을 들을 수 있다.


▲  가늘게 쏟아지는 성전약수

▲  향교에 왠 하트 모양이??
성전약수 주변에 돌을 모아서 쌓은 하트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사랑이란 말을
꺼내면 당장이라도 회초리를 1대 맞을 것 같은 그런 공간에서 이런 뜻밖에
존재를 보게 될 줄이야..? 속세를 향한 교동향교의 수줍은 마음은 아닐까?

▲  서쪽에서 바라본 교동향교
향교 서쪽에는 성전약수와 화장실, 관리소, 화개사로 통하는 숲길이 있다.


 

♠  화개산 남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교동도 화개사(華蓋寺)

▲  교동향교에서 화개사로 이어지는 숲길 (교동다을새길)

교동향교 서쪽에는 화개사로 통하는 울창한 숲길이 있다. 이 숲길은 도보길 유행에 따라 강화
군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강화나들길의 일원인 강화나들길 9코스(교동다을새길)의 일원이다.

교동도에는 강화나들길 9코스와 10코스 등 2개의 길이 닦여져 있는데, 9코스는 월선포에서 교
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석천당~대룡시장~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를 거쳐 다시 월선포로
돌아오는 16km의 코스로 화개산 주변을 1바퀴 돈다. 그리고 강화나들길 10코스(교동도 머르메
가는길)는 대룡리에서 난정저수지~수정산~금정굴~애기봉~죽산포~머르메~양갑리마을회관~미곡
처리장을 경유하여 대룡리로 돌아오는 17.2km의 코스로 교동도 서쪽을 돈다. 이들은 교동도의
명물만 골라서 짜놓은 알짜배기 탐방로라 나중에 꼭 거닐고 싶다.

교동향교에서 화개사로 가는 숲길은 선녀(仙女) 누님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림 같
은 흙길이다. 나무가 촘촘해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다. 그 길을 2분
정도 가면 화개사로 오르는 포장길이 나타나며, 여기서 오르막길을 6분 오르면 교동도에서 가
장 오래된 절인 화개사가 빼꼼 모습을 비춘다.


▲  교동향교~화개사 숲길 (교동다을새길)

▲  조촐한 화개사 경내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전부임)

화개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화개사는 숲에 감싸인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서울 조계사(曹溪
寺)의 말사(末寺)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화개산 산신도 모를 정도이나 고려 후기에 목은 이
색(牧隱 李穡, 1328~1396)이 이곳에서 독서를 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있어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진사대부의 핵심인 이색이 찾았을 정도라면 지
금과는 달리 제법 이름이 있던 절임이 분명하다.

조선 후기까지 딱히 전해오는 사적(事蹟)은 없으나 1690년대에 이형상(李衡祥)이 지은 '강도
지(江都誌)'에 절 이름이 나와있고,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쓴 가람고(伽藍考)에 화정
사(火鼎寺)라는 이름으로 나와있어, 조선 중/후기에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했던 모양
이다.
왜정 때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가 되었으며, 1915년 절이 붕괴된 것을 1928년에 정운(晶雲)
이 중건했다. 1937년 이후 재정 문제로 문을 닫은 적이 있었고, 1967년 화재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근래에 다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은 진작에 말라버렸다. 지정문화재는 하나도 없으나 조선시대 승탑 1기가 있고,
200년 묵은 장대한 소나무가 서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조금이나마 속삭여준다.

화개산으로 오르는 기점의 하나로 강화나들길 9코스가 이곳을 지나가며, 정상까진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린다. 산 중턱에 위치하여 서해바다와 석모도가 바라보이며, '절간같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고적한 산사의 멋을 누릴 수 있다.


▲  화개사 승탑(僧塔)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초췌한 모습의 승탑(부도탑) 하나가 마중을 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무척 초라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겉모습과 달리 무척
값비싼 존재이다. 그러니 꼭 살펴보고 가자.
이 승탑은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탑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 동그란 탑신(塔身)과 지붕돌, 두툼히 솟은 머리장식이 전부인 간결한 모습이다. 탑 밑에는
돌과 흙으로 대충 네모나게 바닥돌을 닦았는데, 근래 닦여진 것이라 아마도 제자리는 아닌 듯
싶다.


▲  화개사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석모도

▲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 강화군 보호수 4-9-73호

근래 지어진 여염집 모습의 대웅전 앞에는 자태가 아름다운 소나무가 웅장하게 서있다. 나이
가 약 210년 정도로 높이 14m, 둘레 1.6m의 휼륭한 덩치를 지녔는데 나무가 드리운 시원한 그
늘이 조그만 경내를 거의 커버하고 있어 휼륭한 정자나무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그늘 앞
에서는 여름 제국도 슬쩍 비켜간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489-1 (교동남로 229-9, ☎ 032-932-4140)


▲  문무정(文武井)터

화개사를 둘러보고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을 조금 오르면 문무정터가 나온다. 지금이야 외마
디 전설이 되어 바람결에 사라졌지만 이곳에는 원래 동쪽에 문정(文井), 서쪽에 무정(武井)
등 2개의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문정에 물이 많으면 문관(文官)이 많이 배출되고, 무정에 물
이 많으면 무관(武官)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샘물의 물빛이 바다 건너
송가도(석모도 북부)까지 비추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곳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졌다고 한다
. 그래서 이를 해결하고자 절치부심하던 중, 노승(老僧)이 알려준 방법에 따라 소금으로 우물
을 메우니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고 한다.
송가도 사람들은 그 노승이 너무 고마워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
며, 우물은 나중에 하나로 합쳐졌다가 메워졌다. 이후 교동도에서 문관과 무관 배출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과연 문무정이 교동도 사람들의 문/무과 급제에 크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은 없으나 앞서 교동향교 성전약수와 더불어 이곳 사람들이 입신양명을 기원하고 이
를 상징하던 곳으로 보면 될 듯 싶다.


▲  정상을 향한 열망 ~ 화개산 산길 (문무정 이후)

▲  돌로 수북한 화개산 돌너덜길

섬 사람들의 출세 욕심이 담긴 문무정을 지나 화개산 정상으로 향했다. 자연이 닦아놓은 느긋
한 산길이 계속 이어져 그리 힘들지는 않는데, 삼삼하게 우거진 나무 사이로 서해바다와 석모
도 등의 섬이 바라보인다.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화개산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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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6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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