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섬'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9.04.21 남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옛 탐라의 현장, 제주도 새해 나들이 (외도 월대, 수산리곰솔, 납읍 금산공원, 제주올레길15,16,17코스)
  2. 2019.01.17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3. 2016.07.13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강화 석모도 보문사 (외포리, 낙가산, 눈썹바위 마애불)
  4. 2014.08.05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4년 8월초 기준)
  5. 2014.07.21 서해바다에 떠있는 아름다운 섬의 무리들 ~ 군산 고군산군도, 선유도 나들이 (장자도, 비응항)
  6. 2014.01.16 부산의 상징을 거닐다 ~ 오륙도 (등대섬, 오륙도등대, 백운포)
  7. 2013.08.27 태안 서해바다 나들이 ~~~ (신진도, 마도, 서해갯벌, 안흥성...)
  8. 2013.04.11 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9. 2013.03.18 봄맞이 매화꽃 나들이 ~ 남해바다를 품은 조그만 해안공원, 통영 달아공원

남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옛 탐라의 현장, 제주도 새해 나들이 (외도 월대, 수산리곰솔, 납읍 금산공원, 제주올레길15,16,17코스)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외도 월대, 수산봉, 납읍리 금산공원)

▲  제주해협이 바라보이는 외도 해변

수산리 곰솔 납읍리 금산공원 (납읍리 난대림)

▲  수산리 곰솔

▲  납읍리 금산공원

 


 

묵은 해가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막 기지개를 켜던 1월의 첫 무렵, 사흘 일정으로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濟州島)를 찾았다.
제주도는 거의 13년 만에 방문으로 비행기나 장거리 여객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야 되는
부담감 때문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허나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수천~수만 리가 되
는 것도 아니고 고작 500km 남짓에 불과하며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 내외면 충분
히 닿는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천하를 마음대로 주유한다는 내가 제주도에게 너무나 소심하게 대한
것 같고, 이러다가는 제주도란 존재를 깜빡 잊어먹을 것만 같았다. 하여 나를 제주도에
팍 떨어트리기로 작정하고 부랴부랴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비행기표 예약밖에
는 없음)

평일 아침 6시대 비행기라 널널하게 새벽 2시에 도봉동 집을 나서 심야시내버스(N버스)
를 1회 갈아타고 다시 일반시내버스로 환승하여 5시에 김포국제공항 국내선청사에 도착
했다. (2시 50분대에 방학사거리에서 N1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종로2가로 이동 → 3시 50
분대에 N26번 시내버스를 타고 공항시장까지 이동 → 4시 50분대에 공항시장 건너편 정
류장에서 6629번을 타고 김포공항 진입)

공항은 여행 비수기인 겨울 평일임에도 이른 아침부터 제주도를 꿈꾸러 온 사람들로 거
의 북새통을 이루었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30여 분 정도 지루하게 시간을 때우다가 제
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는 그 작은 입을 닫
고 넓은 활주로를 10분 남짓 방황하다가 드디어 하늘 높이 비상한다.
제주도에 처음 발을 들였던 초등학교 시절, 김포공항에서 50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
고 있다. 그 소요시간은 여전히 유효하여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하여 바퀴를 멈출 때까지
딱 50분이 걸렸다. (보통은 활주로 방황 시간까지 포함하여 1시간~1시간 10분을 소요시
간으로 잡고 있음)

활주로 한쪽에 멈춰선 비행기에서 내려서니 공항청사로 인도하는 저상형 셔틀버스가 대
기하고 있었다. 그 버스를 타고 3분 정도를 달려 공항청사로 이동했는데 공항이 바닷가
와 가까워서 그런지 바람이 다소 매서웠다. 제주도는 여름에만 와봤지 겨울에는 처음이
다. 따뜻한 남쪽이라 별로 춥지 않을 것이라 방심을 하였으나 바닷가는 바람 때문에 오
히려 본토 이상만큼이나 추웠다. (단 내륙 쪽은 따뜻함)

제주도에서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된다. 남들은 렌
트카로 많이 이동을 하지만 난 마음 편하게 대중교통을 선택하여 돌아다녔다. 제주도는
비록 일부 노선을 제외하면 버스 배차간격은 긴 편이나 본토보다 시내버스 차비가 저렴
하고 무료환승제가 아주 휼륭해 섬 1바퀴(180km)를 기본요금(현금 1,200원, 카드 1,150
원)이면 돌 수 있다. (제주도 급행버스와 공항버스는 제외)

제주국제공항에서 첫 답사지인 외도 월대를 가고자 제주시내버스 315번(국제여객선터미
널↔수산리)을 탔다. (다른 노선들도 있으나 그것이 먼저 와서 탔음)
버스는 오랜만에 건너온 나에게 신제주 일대를 신나게 강제투어를 시켜주고 8시가 조금
넘어서 외도초교 정류장에 나를 가져다 주었다. 외도초교에서 남쪽으로 가면 광령천(光
令川)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나를 여기로 부른 월대가 있다.


 

♠  달놀이와 은어로 유명했던 제주시내 외곽 명승지
외도 월대(月臺)

▲  현무암으로 닦여진 월대

월대는 광령천(외도천)과 도근천<都近川, 수정천, 조공천>이 만나는 곳에 닦여진 명승지이다.
월대 앞을 흐르는 광령천을 따로 월대천이라 부르기도 하며, 남해바다도 이곳까지 손을 대고
있어 자연히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수심이 깊고 청정해 예로부터 은어
와 숭어, 뱀장어가 많이 노닐고 있다. (지금도 많이 서식하고 있음)

월대 주위로 하천을 따라 200~300년 숙성된 팽나무와 해송이 멋드러지게 늘어서 있는데 이곳
지형이 반달과 비슷하다고 하며, 달님이 뜰 때 주위와 어우러져 수면에 비친 달빛이 아주 예
술이라고 한다. 반달을 닮은 곳에 달빛 또한 그윽하니 이곳에 퐁당퐁당 빠진 옛 사람들은 누
대(樓臺)를 짓고 신선이 내려와 달놀이를 하던 곳이란 의미로 '월대'라 하였다.

월대는 제주도에서 가장 흔한 현무암으로 낮게 네모난 기단을 깔고, 그 위에 동그란 낮은 대
를 다져 4각형 위에 동그라미가 있는 모습처럼 되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돌로 쌓은 석대만 있을 뿐, 건물은 없으며 선비와 관리들, 지역 사람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시
를 짓고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다. 그들은 월대를 포함한 외도동(外都洞) 일대에 적당한 풍
경 8곳을 골라 외도팔경(外都八景)이라 이름 짓고 찬양을 하니 그 8경은 다음과 같다.

1. 월대피서(月臺避暑) - 월대에서의 피서
2. 야소상춘(野沼賞春) - 들이소(월대천 남쪽)에서의 봄구경
3. 마지약어(馬池躍漁) - 마지(연대입구 마이못)에서 뛰는 물고기
4. 우령특송(牛嶺特松) - 우왓동산의 큰 소나무
5. 대포귀범(大浦歸帆) - 큰 포구(조공포)로 돌아오는 돛단배
6. 광탄채조(廣灘採藻) - 넓은 여에서 해조를 캐는 모습
7. 사수도화(寺水稻花) - 절물 벼밭에 벼꽃이 핀 모습
8. 병암어화(屛岩漁火) - 병풍바위에서 고기잡이 불구경


▲  시커먼 피부의 월대 비석
비석 피부에 쓰인 '월'이 그 흔한 '月'이 아니라 거의 초승달 같은 모습이다.
(사람이나 동물의 삐뚤어진 눈처럼 보이기도 함)
비석까지도 달을 표현했으니 이곳은 그야말로 달을 찬양하는 공간이다.


월대 주변은 완전 시골이었으나 제주 시내가 동/서/남으로 크게 살을 찌우면서 그 주위로 시
가지가 형성되었다. 하여 옛날의 운치는 다소 깎이긴 했으나 월대와 광령천, 하천을 따라 늘
어선 나무들은 거의 그대로이며, 광령천 동쪽은 전원(田園) 풍경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어 월
대의 위엄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또한 제주도의 야심작인 제주올레길 17코스(제주시내 원도
심~광령, 18.1km)가 이곳을 살짝 지나가며 올레길 뚜벅이들을 인도한다.


▲  월대 주변에 자리한 키 작은 비석 4형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들은
지역 사람들의 공덕비로 기단석은 현무암으로 지어졌다.

▲  월대 해송 - 제주시 보호수 13-1-15-30(2) / 13-1-15-30(3)호

월대 옆에 제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해송 2그루가 있다. 이들은 280년 묵은 것들로(1982년 보
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50년) 지정 번호가 앞선 것을 기준으로 높이는 각각 10m와
3m, 나무둘레는 3.2m와 2m이다.


▲  월대 산책로의 평화로운 아침 풍경 (제주올레길 17코스)

▲  월대 산책로와 오래된 해송<제주시 보호수 13-1-15-30(1)호>
정면에 보이는 수형(樹形)이 좋은 소나무가 제주시 보호수인 해송으로 앞서 언급한
해송들과 나이(약 280년)가 비슷하다. 나무높이는 12m, 나무둘레 3.2m

▲  이제는 무늬만 남은 고망물(수정천)

월대가 있는 외도동에는 조부연대(煙臺)와 고인돌(지석묘), 마이못, 고망물, 수정사(水精寺)
터, 제주도에서 유일한 자갈해변인 알작지 등의 소소한 명소들이 전하고 있다.
나는 월대와 수정사터만 알고 있었지 다른 명소는 전혀 몰랐다. 여기서 덤으로 알게 된 그들
을 싹 보고 가면 좋겠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도 여의치 않았고 마음은 벌써부터 다음 행선
지를 재촉하고 있어서 월대에서 가까운 고망물만 보기로 했다. 그곳은 월대교에서 광령천 천
변길(통물길)을 따라 2~3분 정도만 가면 된다. (제주올레길 17코스가 그 길을 따라감)

고망물은 오래된 샘터로 외도동에 크게 둥지를 틀었던 수정사의 샘터로 전해진다. 그래서 수
정천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수정사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 원나라(몽고)의 황후(皇后)가 물이 잘 나
오기를 기원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몽고 왕비(또는 몽고 조정)가 그들과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머나먼 제주도에 왜 절을 세웠나 싶겠지만 그 시절 고려는 몽고의 그늘에 있었고, 몽고
는 고려의 영역이던 제주도, 함경남도, 평안도, 요동(遼東) 지역을 강제로 접수해 그들 땅에
넣어버렸다. <평안도와 요동에 동녕부(東寧府)를, 함경남도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제주
도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여 통치함>
기마병 중심인 몽고에게 말은 꽤 중요한 전투 자원으로 제주도는 말목장으로 아주 휼륭했다.
그러니 몽고의 제주도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으며, 절도 여럿 설치하여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그런 배경에서 태어난 수정사는 제주도에서 제법 덩치가 있던 절로 서귀포에 있던 법화사(法
華寺)와 함께 제주도 2대 사찰(또는 3대 사찰)로 꼽혔다. 허나 17세기 말 화마(火魔)의 먹이
가 되어 부질없이 사라졌으며, 20세기 이후에 새로운 수정사가 들어서 작게나마 옛 터를 지키
고 있다.

고망물은 늘 물이 풍부하게 나와 동네 사람들의 식수가 되었으며, 왜정(倭政) 때 지금의 모습
으로 정비하고 그 기념비를 세웠다. 여전히 물은 나오고 있으나 개발의 칼질이 주변까지 미치
면서 수질은 장담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갈증이 나더라도 이곳 물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  세월이 씌워놓은 온갖 주근깨로 범벅이 된 수정천 신축기념비
왜정 때 고망물을 손질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으로 옆구리에 조성시기가 쓰여있다.
허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서기 대신 왜왕(倭王)의 연호가 쓰여있었고,
1945년 이후 그 부분은 뜯겨졌다.

▲  고망물에서 바라본 한라산(漢拏山)의 위엄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한라산은
제주도를 빚은 장본인이자 제주도의 어머니와 같은 큰 존재이다.

▲  광령천과 바다가 만나는 외도 해변 <조공포(朝貢浦)>

고망물에서 광령천을 따라 월대를 거쳐 외도 해변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고려와 조선 때 제주
도에서 조정으로 보내는 공물선(貢物船)이 오가던 포구로 조공포라 불렸는데, 그 조공선은 도
근천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하여 도근천을 조공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늘에 점점이 떠있는 구름 밑으로 푸르기 그지없는 제주해협이 넓게 펼쳐져 있다. 혹시나 추
자도(楸子島)나 본토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 주름선이 일그러질 정도로 눈에 힘을 주고 살펴봤
으나 역시나 거리 때문인지 보이지가 않는다. 바다 파도는 조금 흥분기를 보이며 뭍을 때리고
있었고 바닷바람은 그리 춥지 않았다.


▲  외도 해변 (대원암 동쪽)
왼쪽에 보이는 돌탑은 대원암에서 만든 것이다.


외도 해변 서쪽에는 천하 유일의 해수관음보살(海水觀音菩薩) 와상(臥像)을 봉안한 대원암이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조그만 절집으로 내가 갔을 때는 와상의 존재도 전혀 몰랐
고, 그곳에는 딱히 손이 가지 않아 해변만 잠깐 기웃거리고 외도초교 정류장으로 나왔다.

* 외도 월대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외도2동 230, 240, 241일대


 

  제주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조그만 오름(봉우리)
수산봉(水山峰)과 수산리(水山里) 곰솔

▲  수산봉 충혼묘지(모감동) 기점 (제주올레길 16코스)

외도초교 정류장에서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하귀를 지나 모감동에서 내렸다. 202번은 제
주터미널에서 제주도 서쪽 일주로(애월, 한림, 고산, 대정, 화순, 중문)를 따라 서귀포 중앙
로터리(서귀포등기소)까지 가는 긴 노선으로 외도부터 다음날 찾아간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
까지 쭉 그의 신세를 졌다. (총 5번을 탔음)
이 노선은 달랑 1km를 가던, 40km를 가던, 전 구간을 가던 무조건 기본 요금이며, 제주시내버
스(300, 400번대)와 서귀포시내버스(500, 600번대), 제주시와 서귀포 외곽버스(700번대), 제
주도 장거리 간선버스(200번대)와 무료환승이 가능하다. (100번대 제주도 장거리 급행버스도
환승이 되나 약간의 차액이 나가며 구간요금 있음)

모감동 정류장 남쪽에 야트막한 산이 손짓을 하니 그곳이 수산봉이다.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일주서로)를 신호등의 도움을 받아 건너면 수산봉으로 인도하는 길이 마중을 나오는데,
제주올레길16코스(고내~광령, 15.8km)가 그 길을 따라 수산봉 남쪽까지 이어진다. 16코스는
광령에서 17코스로 간판을 갈아 월대와 제주시내로 달려가며, 고내에서는 15코스로 이름을 바
꾸고 한림읍으로 이어진다.


▲  수산봉 북쪽 산길 (1)

수산봉은 해발 122m의 낮은 뫼로 '수산봉오름','수산오름','물메오름','물메' 등의 별칭을 가
지고 있다. 옛날에는 주로 물메라 불렸는데, 이는 봉우리 정상에 못이 있어서 그렇게 불린 것
이다. (물뫼, 물메)
지금은 딱히 특별한 것이 없어보이는 평범한 뒷동산이나 그 태생은 무시무시했던 화산으로 화
산 폭발로 못과 지금의 산이 형성되었다. 이런 식의 산은 제주도에 매우 많다.

조선 때는 정상에 물메봉수를 두었는데 동쪽에 도두봉수, 서쪽으로 고내봉수와 연락을 했으며,
기우제를 지냈던 터가 있어 영산(靈山)으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해송이 울창해 솔내음이 그
윽하며 서쪽 자락에는 애월읍 충혼묘지가 닦여져 있어 호국(護國) 신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모감동(충혼묘지), 대원정사, 수산리 곰솔 등 3개가 있는데, 산이
작다보니 어디로 올라가든 10분 안에 정상부에 닿는다. 산 정상은 군부대가 있어 금지된 곳이
되었으며, 봉수대터는 그 안에 있어 관람이 어렵다.
내가 수산봉을 찾은 것은 봉우리보다는 산 남쪽에 있는 수산리 곰솔을 보고자 함이다. 그곳으
로 가려면 수산봉을 거쳐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  수산봉 북쪽 산길 (2)

▲  수산봉 북쪽 산길 (3)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해송 외에도 많은 나무들이 버젓히 푸른 옷을 걸치고 있어
겨울임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만큼 제주도는 따뜻한 남쪽이다.

▲  수산봉 정상부
바다가 바라보이는 정상부에는 쉼터용 정자와 여러 운동시설이 닦여져 있다.

▲  수산봉 남쪽 숲길

▲  수산리 곰솔 - 천연기념물 441호

수산봉 동남쪽에 곱게 늙은 곰솔이 있다. 수산저수지를 거울로 삼으며 도도한 모습을 드러내
고 있는 그는 높이 11.5m, 나무둘레 4.7m, 수관폭 26m로 4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무의 눈덮힌 모습이 마치 백곰이 물을 마시고자 웅크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 곰솔이라 불
리며 나무 껍질이 검은색이라 흑송(黑松)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바닷가에 많이 자라고 있
어 해송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지상 2.5m 높이에 원줄기가 잘려진 흔적이 있고, 거기서 4
개의 큰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호수 쪽 가지가 밑동보다 2m 정도 낮게 물가에 드리워
져 있어 나무의 자태가 곱다.

이 나무는 수산봉 밑에 마을이 지어졌을 때 그 기념으로 심어진 것이라 전하며, 수산리 사람
들은 그를 수호목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다. 나무 북서쪽에는 나무에게 당제를 지내는 맞
배지붕 당집이 있다.


▲  물을 향한 마음, 호수로 뻗은 남쪽 가지
물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갈증이 심했는지도) 나무의 남쪽 가지가
계속 호수로 손을 내밀고는 있으나 호수는 액체라 그의 손을 잡을 만한
것이 없어 서로 뻔히 보임에도 전혀 닿지를 못하고 있다.

▲  수산봉과 곰솔의 잘생긴 거울, 수산저수지

수산저수지는 현무암 피부를 지닌 제주도에서 거의 흔치 않은 저수지이다. 예전에는 유원지가
들어서 한때 시끌벅적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 흔적들이 거의 지워져 고요하다. 다만 그 고요
함을 툭하면 건드리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제주공항으로 착륙하는 비행기들이다.
이곳은 비행기들이 제주국제공항으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5분이 멀다하고 지나간다. 비록 소음
이 있긴 하나 형형색색의 비행기들이 날개를 낮추며 들어서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으며, 저렇
게 많은 비행기가 들어오고 그만큼 바깥으로 나가니 제주도의 위엄과 인기를 정말 실감케 한
다. (현재 제주공항은 거의 포화상태임)

수산봉을 넘어온 제주올레길16코스는 저수지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가며, 나는 곰솔과 당
집 주변만 둘러보고 다시 수산봉 정상부를 거쳐 모감동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  수산리 곰솔에게 제를 지내는
마을 당집

▲  곰솔 맞은편에 자리한 무덤들
현무암으로 무덤 경계를 닦았다.

* 수산봉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 수산리 곰솔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1935


 

♠  오래된 난대림을 간직한 납읍리의 상큼한 언덕
납읍 금산공원(錦山公園)


▲  납읍리 돌담길

모감동 정류장에서 다시 202번을 타고 애월을 지나 한림읍내에서 내렸다. 여기서 제주도 간선
291번(제주터미널~한림읍)으로 환승하여 금산공원을 간직한 납읍리에 두 발을 내린다.
모감동에서 여기까지 바로 가는 292번 버스가 있으나 운행횟수가 너무 적고 시간이 전혀 맞지
않아서 부득이 한림으로 돌아간 것이다. (한림읍에서 납읍리로 가는 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있음)
애월읍 납읍리(納邑里)는 제주도에서 이름난 양반 마을로 꼽힌다. 14세기에 마을이 조성된 것
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납읍을 중심으로 사방 10리 이내에 곽지, 애월, 고내, 상가, 하가, 어
음, 봉성 등 7개의 마을이 들어서 있어 그것을 아우르는 뜻에서 동네 이름에 읍을 쓴 것으로
보인다.
납읍리 지역에서 처음 사람이 산 곳은 곽남(郭南)으로 여겨진다. 그곳의 처음 이름은 곽지남
동으로 그것을 줄여 곽남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 '곰팡이','둥덩이' 등지에 사람들이 터
전을 닦으면서 마을이 확대되었다.

현재 납읍리는 본동, 서동, 중하동 등 3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동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금산공원이 있다. 제주시(북제주)에서 가장 감귤이 잘되는 동네로 제주올레길15-A코스(
한림~납읍~고내, 16.5km)가 납읍리와 금산공원 내부를 지난다.


▲  귤나무밭을 가르는 납읍리 돌담길

▲  금산공원 정문

납읍리사무소 정류장(반대편 정류장은 '납읍리')에서 납읍로2길을 따라 9분 정도 들어가면 무
성한 숲을 드러낸 금산공원이 모습을 비춘다. 납읍리사무소에 이르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양
쪽 길이 비슷하게 생겨서 햇갈리기가 쉽다. (이정표도 없음) 여기서는 무조건 서쪽(진행 방향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된다.
현무암 돌담과 귤나무, 마을 가옥이 잘 어우러진 제주도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귤나무 가지
에 감귤이 달린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어 제주도 한복판에 왔음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금산공원은 납읍리의 허파이자 아름다운 뒷동산으로 33,980㎡(약 13,000여 평) 면적에 후박나
무와 생달나무, 종가시나무, 모밀잣밤나무, 동백나무, 식나무, 아왜나무, 자금우, 마삭줄, 송
이 등 200여 종의 식물이 우거진 상록수림(常綠樹林)이다. 다른 말로는 난대림(暖帶林)이라고
도 한다. 제주시 서부에서 평지에 남아있는 유일한 상록수림으로 온난한 기후에 적합한 식물
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1년 내내 삼삼한 모습을 자랑한다.

허나 금산공원은 원래부터 숲동산은 아니었다. 옛날에는 돌만 가득한 돌언덕으로 볼품이 없었
다고 하며, 그 언덕 건너편으로 금악봉(430m)이 훤히 바라보여 마을에 화재가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금악봉이 보이지 않게끔 돌언덕에 나무를 심었고 마을
제사를 지내는 포제단을 담으면서 마을의 성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성역을 품은 숲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법칙이라, 마을에서는 나무 벌채나 식물 채취를 엄격히 금하여 숲이 마음
놓고 자라게끔 배려했으며, 숲 주위로 돌담을 둘러 속세와 숲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처음에는 숲 벌채를 금한다는 뜻으로 금산(禁山)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이름을 순화시켜 비단
뫼를 뜻하는 금산(錦山)으로 한자를 갈았다고 한다.

공원을 덮고 있는 숲은 '납읍리 난대림'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37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
으며(예전에는 천연기념물 182-4호였음) 공원 전체가 국가 천연기념물 보호 구역이라 지정된
탐방로 외에는 접근을 금하고 있다. 아무리 공원 감독이 느슨하다고 해도 자연보호를 위해 탐
방로를 벗어나거나 식물을 괴롭히는 행동, 나뭇잎과 식물을 따는 행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된
다.


▲  금산공원 정문 갈림길

원시림과 같은 공원으로 들어서면 길은 3갈래로 갈린다. 넓은 흙길로 된 중앙 숲길은 이곳의
성역인 포제청으로 이어지며, 서쪽 숲길과 동쪽 숲길은 흙길과 나무데크길이 섞여있다. 어느
길로 가든 남쪽에서 모두 만나며, 다시 정문으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공원으로 들어서는 문은
정문 1개 뿐이며, 공원 밖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즉 밭 한복판에 숲이 있는 것이다.


▲  송석대(松石臺)

정문 동쪽(진행 방향 왼쪽)에는 송석대란 높은 대가 있다. 이곳은 정헌 김용징(靜軒 金龍徵)
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1850년대 말에 그의 제자들이 지었다. 구릉지를 다듬어 3개 층으
로 겹돌을 쌓아 터를 다진 다음 반지름 4.5m의 원형 정자를 닦았는데, 현재 정자는 없고 완전
히 개방된 공간으로 있으며 매년 여름마다 애월문학회에서 시낭송회와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
어 문학 공간의 기능은 녹슬지 않았다.


▲  인상정(仁庠亭)

송석대 맞은편(정문 서쪽)에는 인상정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천문에 능했던 현일문
(玄日文)이 공부를 했던 곳으로 1889년 그의 후학들이 구릉지를 다지고 인상정이라 불리는 공
간을 지었다. 송석대처럼 정자가 없는 그냥 열린 공간으로 그 한복판에 오래된 나무가 자리하
여 고품격의 그늘을 선사한다.


▲  난대림 속에 나를 숨기다 (공원 서쪽 숲길)
아무리 따스한 남쪽이라고 해도 동남아나 아프리카가 아닌 이상은 이렇게까지
푸른 잎을 대놓고 드러내며 무성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이곳은 계절의
변화도 안중에 없는 별천지 같은 곳이다.

▲  밀림처럼 우거진 서쪽 숲길 (1)

▲  밀림처럼 우거진 서쪽 숲길 (2)

통행 편의와 식물 보호를 위해 서쪽 숲길과 동쪽 숲길 일부에 나무데크길을 닦았다.


▲  정낭이 걸쳐진 포제단(酺祭壇) 출입구

금산공원 한복판에는 돌담에 둘러싸인 포제단이 있다. 이곳은 납읍리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마을의 성역으로 서쪽에 제주도 스타일의 정낭이 있는 출입구가 있어 그곳으로 들어서면 된다.
허나 제삿날을 제외하면 정낭이 모두 걸쳐져 있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다행히 정낭이
그리 높지가 않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살짝 안으로 발을 들였다.

▲  포제청 건물
제사 때를 제외하고는 늘 적적한 모습이다.

▲  난대림에 둘러싸인 포제단 뜨락
저 끝부분에 3개의 단이 있다.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를 '납읍리 포제','납읍리 마을제'라고 하는데, 남자들이 행하는 유교적
마을제인 포제와 여자들이 하는 무속 마을제인 당굿을 같이 벌이고 있다. 예전에는 음력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춘제(春祭)를 지냈고, 7월 초정일에 추제(秋祭)를 지냈으나 20세기 중반 이
후부터는 춘제만 지내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 일이 생겨서 정월 초정일에 제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그 다음 중정일(中丁日)에 제를 지내는 융통성도 가지고 있다.
포제단으로 들어서면 남쪽(오른쪽)에 포제청이란 기와집이 있다. 이곳은 제를 지내고 준비하
는 건물로 원래는 초가였으나 최근에 기와집으로 손질했다. 북쪽(왼쪽)에는 3개의 조그만 석
단(石壇)이 누워있는데 이들 단은 손님신을 봉안한 포신단(酺神壇), 마을의 수호신을 봉안한
토신단(土神壇), 홍역이나 마마신을 봉안한 서신단(西神壇)이다.
예전에는 포신, 토신, 서신에게 모두 제를 올렸으나 홍역과 마마가 사실상 사라진 상태라 포
신과 토신에게만 제삿밥을 올린다.

이곳 제사는 '납읍리 마을제'란 이름으로 제주도 지방무형문화재 6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  현무암으로 닦여진 3개의 제단 (서신단, 토신단, 포신단)
제단 앞에는 술이나 향로 등을 두는 조그만 돌이 있고, 단 위에는 위패 역할을
하는 키 작은 돌이 세워져 있다.

▲  금산공원 동쪽 숲길 (1)

▲  금산공원 동쪽 숲길 (2)

▲  주황색 피부를 드러낸 납읍리 감귤

금산공원을 1바퀴 둘러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서쪽 숲길로 들어서 포제청을 찍고 동쪽 숲
길로 나왔으니 공원의 공개된 공간은 모두 본 셈이다. (통제구역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음)

이렇게 금산공원과의 인연을 마무리 짓고 다음 답사지로 가고자 제주도 간선 291번을 타고 한
림읍으로 나왔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금산공원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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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용궁사) '

용궁사 느티나무

▲  용궁사 느티나무

백운산 정상 백운산 산길

▲  백운산 정상

▲  백운산 산길

 


 

여름이 한참 물이 오르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인천(仁川)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를
찾았다.
영종도(永宗島)는 천하 제일의 국제공항으로 찬양을 받는 인천국제공항을 품은 큰 섬으로
공항을 닦고자 영종도와 용유도(龍游島) 사이의 너른 갯뻘을 매립하고 삼목도(三木島) 등
의 여러 섬을 엮으면서 섬이 커졌다. 하여 영종도하면 기존의 영종도 외에 용유도와 삼목
도를 포함해서 일컬으며, 이들을 묶어 영종▪용유도라 부르기도 한다.

영종도에는 백운산이란 뫼와 용궁사란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곳에 살짝 마음이 가서 겸사
겸사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공항전철(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을 타고
운서역이나 영종역에서 접근하는 것이 제일로 좋지만 운서역과 영종역은 환승할인 무적용
역이라 나 같이 서민들에게는 조금 부담이 된다. (공항전철의 영종도 구간은 수도권 환승
할인이 되지 않음)
그래서 집 앞에 있는 1호선을 쭉 타고 동인천역까지 이동하여 인천좌석버스 307번을 타고
영종도로 들어갔다. 시간도 좀 걸리고 영종도 강제투어가 조금 심하긴 하지만 환승할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조금 일찍 부지런을 떨면 된다.

영종도에 진입하여 백운산 그늘에 자리한 전소에 두 발을 내렸다. 전소는 영종동행정복지
센터와 초등학교, 고등학교, 우체국, 아파트 등을 갖춘 오래된 마을로 서쪽에는 백운산이
, 동쪽과 남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평지에 한참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고 있음)
백운산 나들이는 바로 이곳 전소에서부터 시작된다.


 

♠  전소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비석 무리들

▲  전소마을 비석 무리들

전소에서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서 백운산을 잠시 접어두고 마을 북쪽에 있는 구립하늘어
린이집을 찾았다. 그 앞에는 오래된 비석들이 3열로 각각 4기씩, 총 12기의 비석이 늘어서 있
는데, 이들은 영종도 곳곳에서 수습한 옛 영종진(永宗鎭) 첨사(僉使)의 비석으로 주로 선정비
(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가 주류를 이룬다.
선정비는 첨사의 착한 행정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고, 불망비는 첨사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 것
인데, 백성들이 진심으로 세운 것도 있겠지만 선정은 쥐뿔도 없음에도 첨사가 강제로 세운 것
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채운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종진은 조선시대에 영종도에 설치된 군사 기지로 처음에는 남양부(南陽府, 화성시 남양) 소
속이었다가 1875년 운양호(雲揚號) 사건으로 된통 당하면서 인천부(仁川府)로 넘어갔다. 이후
영종진이 폐지되면서 섬 전체가 부천군(富川郡) 소속이 되었다가 이후 옹진군(甕津郡) 관할로
바뀌었으며, 1989년 인천 중구(中區)에 편입되어 인천의 그늘에 있게 되었다.

이들 비석 중에 제일 우측에 유리막에 감싸인 조그만 철비(鐵碑)가 있는데, 그것이 나를 이곳
으로 오게한 양주성금속비(梁柱星金屬碑)이다. 돌로 만든 비석은 참 많지만 철이나 금속으로
만든 비석은 흔치가 않은 편으로 수도권에서도 철비는 이것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다보
니 다른 석비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 철비에만 자꾸 눈길이 간다.


▲  비석 무리의 홍일점, 양주성 금속비 - 인천 지방기념물 13호

이 철비는 높이 91cm, 폭 31cm, 두께 3cm로 황동(놋쇠)을 녹여서 만든 것이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영종진이 큰 피해를 입자 흥선대원군은 인천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 영
종진을 인천부 소속으로 넘겨 양주성을 영종진첨사<첨절제사(僉節制使)>로 파견했다.
양주성은 파괴된 진과 건물을 손질하고 방비를 튼튼히 했으며 전쟁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
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자 백성들은 크게 아쉬
워하며 놋그릇을 모아 1877년 9월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냥 석비(石碑)도 아닌 놋그
릇을 모아 철비를 세울 정도면 양주성의 선정이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  옆에서 바라본 비석 무리

▲  비석 무리 부근에 자리한 연자방아


▲  속세를 향해 길을 늘어뜨린 용궁사 숲길 ▼

비석 무리를 둘러보고 용궁사로 길을 향했다. 전소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용궁사로 인도하
는 숲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용궁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막길
이긴 해도 경사는 느긋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햇볕도 들어오기 힘들다.


 

♠  백운산에 안긴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 용궁사(龍宮寺)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15호

백운산(白雲山, 256m)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궁사는 개발의 칼춤 소리로 요란한 영
종도의 별천지 같은 곳이다. 바로 절 밑에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온갖 개발 소음이 난
무하지만 용궁사는 백운산의 비호로 그 소음을 거의 모르고 살 정도로 산자락에 푹 묻혀있다.

용궁사는 영종도의 몇 안되는 문화유적으로 670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원효는 그 시절 왕경<王京, 경주(慶州)>에 머물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상
대로 불교 대중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원효의 창건설은 속세살이만큼이나 참 부질
없는 소리이며, 그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다.
게다가 절에서는 1,300년 묵었다는 느티나무를 증거로 천년 고찰(古刹)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나무의 나이도 정확한 편이 아니며, 나무가 꼭 절 창건과 관련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 나무를 제외하면 오래된 것이라고 해봐야 요사와 관음전 정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된 것이 고작이다. 또한 창건 이후 19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도 남기지 못해 오랜 내력에 의
구심을 던지게 한다. 다만 백운산 봉수대 관리와 바다 조망을 구담사(舊曇寺) 승려가 담당했
는데 그 구담사가 바로 용궁사의 옛 이름이며, 옥불 전설에는 옛 이름의 하나인 '백운사(白雲
寺)'가 등장해 그것을 통해 적어도 고려나 조선 초에 조촐하게 법등(法燈)을 켰던 것 같다.

절의 사적(事蹟)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그것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과의 인연 덕분에 남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부인 민씨(閔氏)가 불
교 신자라 자연히 절 출입이 잦았다. 하여 서울과 경기도의 여러 절(화계사, 흥천사, 수락산
흥국사, 안성 운수암 등)과 흔쾌히 인연을 맺으며 기도를 하고 여러 승려와 교분을 쌓았는데,
용궁사도 그런 절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섬인데도 어떻게 인연을 지었는지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고 하
며, 1854년에 절을 중창했다. 이때 용궁사로 이름을 갈게 하면서 현판을 써주었는데 이는 관
음전 옥불이 바다 용궁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권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대원군은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약 10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용궁사와 대원군과의 인연은 요사에 걸린 그의 현판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니 창건설은
몰라도 대원군 중창설은 더 이상 왈가왈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원군 이후 딱히 적당한 내력은 없으며, 영종도가 인천에 편입되자 절과 경내에 있는 느티나
무가 인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칠성각, 용황각, 요사채 등 6~7동의 건
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수월관음도 등이 있다. 절 자체는 지방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절과 느티나무 때문
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음)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며 그렇게 깊은 골짜기는 아니지만 절을 둘
러싼 숲이 삼삼하여 바쁘게 변해만 가는 영종도에서 이곳만큼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다. 숲
이 속세의 소음을 걸러주니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윽하며, 절이 조촐한 규모라 눈에 쏙 넣
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근래에 절에서 백운산 정상을 잇는 산길을 손질하여 백운산 둘레길로 삼았는데 절을 둘러보고
둘레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백운산 정상에 이른다. 절만
둘러보고 가면 많이 허전할 것이니 백운산도 같이 겯드린다면 영종도 여로(旅路)를 더욱 알뜰
하게 꾸며줄 것이다.

※ 영종도 용궁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중구 지선 3번, 4번을 타고 용궁사입구 하차. 이 방법이 제
  일 최적이나 배차간격이 허벌나게 길고 영종역에서 서로 타는 곳이 틀리다.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203번, 598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598번은 크게 돌
  아가므로 203번이 나음)
* 서울 1호선 동인천역(4번 출구)에서 307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인천 1호선 동막역(3번 출구)에서 304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승용차
①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 금산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교차로에서 우회
   전 → 용궁사입구에서 우회전 → 용궁사 주차장
② 인천대교 → 영종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로 → 전소 → 용궁사입구에
   서 좌회전 → 용궁사 주차장
*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667 (운남로 199-1 ☎ 032-746-1361)


▲  용궁사 샘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샘터가 마중한다. 산사에 으레 있는 샘터이건만 요즘처럼 더울 때
는 보물급 문화유산보다 100배 더 반가운 존재이다.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백운산이 내린 약
수가 가득 담겨져 있는데,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해진
다.

▲  용왕의 공간, 용황각(龍皇閣)

▲  용황탱과 관음보살탱화

샘터를 지나면 석축 위에 세워진 용황각이 나온다. 용황각이란 이름은 여기서 처음 만나는데
일반적인 용왕(龍王)을 용황으로 격을 높여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을 황제로 높인 것
과 같은 이치~) 아무래도 섬이다보니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섬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우상인
용왕을 봉안한 것인데 용왕을 용황으로 높여 특별 대접을 하며 주민들의 용왕신앙을 돕고 있
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용황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밑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 샘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샘터 위에 석축(石築)을 다지고 건물을 세운 터라 주
춧돌의 키가 높으며, 북쪽에 트인 문을 통해 용황각으로 들어서면 된다. (동쪽 문 바깥은 허
공이라 추락 주의 요망)
용황각 불단에는 용황이 담긴 용황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용황의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반짝
반짝 윤을 내고 있으며, 용황탱 옆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이 그려진 탱화가 나란히 자
리해 있다.


▲  용궁사 느티나무(할아버지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9호

요사 앞에는 용궁사의 오랜 자연산 보물이자 이곳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 2그루가 넓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이들 나무 가운데 요사 동쪽에 자리한 나무는 나이가 무려 1,300년을 헤아린다고 한다. 나무
의 덩치가 참 크긴 하지만 1,300살로는 보이지 않고 훨씬 젊어보이는데, (한 600~700살 정도)
요즘 하도 거품이 많은 세상이라 나이 재측정이 필요해 보인다. 실제 예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나무로 손꼽히던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나이가 830년을 호가한다고 했지만 2013년
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다시 나이를 재본 결과 600년 정도 된 것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230년 정도의 적지않은 거품이 끼어있던 셈이다.

요사 동쪽 느티나무는 높이 20m, 나무둘레 5.63m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여기서는 할아버지
나무라 불린다. 그리고 요사 북쪽 느티나무는 할머니나무라 불리는데 덩치는 할아버지나무보
다 작으며, 그 나무보다 후대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할아버지나무는
할머니 나무쪽으로만 늘 가지를 뻗는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옛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
낙네들의 치성 장소로 애용되었는데, 절이 있기 전부터 기자(祈子) 신앙의 현장으로 널리 쓰
인 듯 싶다.
이후 절이 들어서면서 예불을 먼저 올리고 용황각 밑의 약수를 마신 다음 할아버지나무에 기
원을 하는 순서로 변경되었으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서쪽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할아버지나무)

▲  요사 북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할머니나무)


▲  용궁사 요사(寮舍)

두 느티나무 그늘에 자리한 요사는 대원군이 1854년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관음전과 더불
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
대중방(大衆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건물 동쪽에는 툇마루 2칸을 두었으며,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벽으로 막았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용궁사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용궁사로 바꿀 것을 제
안하며 친히 써준 것으로 그의 호인 석파(石坡)가 쓰여있어 대원군과의 진한 인연을 가늠케
한다. 그는 어찌하여 바다 건너 이곳까지 애써 인연을 지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흥선대원군이 1854년에 남겼다는 '용궁사' 현판의 위엄
용궁사에서 느티나무 다음으로 애지중지하는 존재로 이 현판이 없었다면
대원군 중창설도 자칫 신뢰를 잃을 뻔 했다.

▲  두목 포스가 느껴지는 묘공(猫公)의 위엄

요사에는 용궁사에서 기르는 누런 털의 묘공(고양이)이 있었다. 요사와 할배나무 주변을 순찰
하면서 여름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니 묘공 특유의 관심 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여 잠자리를 잡아서 조공(?)으로 바칠려고 했으나 이곳 잠자리는
눈치가 100단인지 하나도 잡지 못했다. 한때 외갓집이 있는 단양(丹陽) 시골의 잠자리 씨를
거의 마르게 할 정도로 잠자리를 잘 잡았는데, 이젠 나도 늙은 모양이라 오히려 그들에게 희
롱을 당할 판이다.

묘공 하나가 요사 툇마루에 앉아있다가 더운지 아랫 돌에 벌러덩 누워 강렬한 포스를 보이니
마치 두목 포스 같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내를 지키는 그들이 있기에
용궁사는 오늘도 무탈하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용황각 뒤쪽에는 가건물로 된 대웅보전이 있다. 이곳은 관음도량을 칭하는지라 정식 법당(法
堂)은 관음전으로 2000년 이후 합판으로 대웅보전을 지어 새로운 법당으로 삼았으나 건물의
볼품은 많이 떨어진다.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지장보살상,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 부분은 종무소(
宗務所)로 쓰이고 있다.

▲  포근한 인상의 석가3존불

▲  조금은 빛바랜 신중탱(神衆幀)

▲  한참 몸단장 중인 관음전(觀音殿)

▲  관음전 뒤쪽에 자리한 석조관음보살입상

요사 바로 뒤쪽에는 이곳의 법당인 관음전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관음전은 대원군
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요사와 함께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보수공사 중으로 불단에 있던 관음보살상은 칠성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으며, 김규진(金圭鎭
)이 쓴 주련(柱聯)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관음전에는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玉佛)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아련하게 전해온
다.
때는 조선 중기(또는 후기)의 어느 평화로운 날, 영종도 월촌에 어부(漁夫) 손씨(또는 윤씨)
가 살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날도
바다로 나가 그물을 치며 대어를 기대했다. 허나 원하는 물고기는 없고 왠 옥불 하나가 걸려
든 것이 아닌가? 이에 어부는 단단히 흥분하여
'물고기는 하나도 없고 왠 이런 게 걸리고 앉았냐!'
투덜거리며 옥불을 바다에 내던지고 다시 그물을 쳤다. 그런데 그물을 건져올리니 아까 옥불
이 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육두문자 요란하게 내뱉고 다시 내던졌으나 이후에도 계속 옥불
만 그물에 걸려든다. 이에 어부는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불상을 백운사(白雲寺, 지
금의 용궁사)에 넘겼다.
그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운사 앞을 말이나 소를 타고 지나가면 무조건 멈춰서 움직
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절 앞을 지날 때는 말과 소에서 내려서 지나갔으며,
불상의 영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주변에 퍼져 육지에서도 많은 이가 찾아와 불전함이 매일 터
져나갈 정도였다. 또한 불상을 발견하여 절에 넘긴 어부도 이후 풍어(風魚)를 누리면서 부자
가 되었다고 전한다.

19세기 중반 용궁사를 찾은 대원군은 이 사연을 전해듣고 불상이 바다 용궁(龍宮)에서 나왔으
니 절 이름을 용궁사로 고칠 것을 제안하며 현판을 써주었다. 그 현판이 바로 요사에 걸린 그
것이다.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은 인근을 지나다가 침몰한 배에 있던 것이거나 절이 파괴되면서 버려
져 바닷속을 방황한 불상으로 여겨진다. 그 옥불이 있었다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느티
나무 제외)이 되었을 것인데, 왜정(倭政) 때 도난을 당해 지금은 없으며, 새로 만든 조그만
관음보살상이 그 자리를 조금이나마 대신한다.


▲  날렵한 처마선이 인상적인 칠성각(七星閣)

관음전 옆에는 근래에 지어진 석조관음보살입
상과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칠성각은 칠성(七
星)을 봉안한 건물이지만 칠성 외에 산신(山神
)과 독성(獨聖)도 함께 담고 있어 삼성각(三聖
閣)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음전 중수로 그곳
에 있던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가 이곳의 신
세를 지고 있었음)

칠성각에 봉안된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은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이
제법 역력하다.

▲  다른 산신탱과 달리 꽤 젊어보이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담긴 산신탱

▲  독성과 동자가 그려진 독성탱

▲  칠성 가족을 빼곡히 머금은 칠성탱


▲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76호
관음보살상 뒤에는 수월관음도가 후불탱으로 걸려있다. 그 탱화는 1880년에 축연
(竺演)과 종현(宗現)이 그린 것으로 3폭의 비단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화폭
규모는 세로 135.5cm, 가로 174.3cm으로 가운데 화폭은 102.2cm, 향좌폭
29.3cm, 향우폭 33.5cm으로 화폭이 제일 넓다.

▲  경내 뒤쪽에 자리한 소원바위

용궁사의 다른 명물로는 소원바위가 있다. 관음전 뒤쪽 산자락에 있는 이 바위(바위라기보다
는 커다란 돌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 위에 작은 돌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자석에 붙는 듯
한 무거운 느낌이 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가볍게 돌아가면 꽝~!!) 바위 앞에 하는
요령이 적혀있는데 우선 바위 뒤쪽에 놓인 불상 앞에 조공(돈)을 바치고 (역시나 돈이다~!!)
그런 다음 생년월일과 소원을 말하며 3배를 올리고 돌을 돌리라고 나와있다.
나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절이 나보다는 경제 사정이 훨씬 좋으니~~) 그냥 소원을 빌고 3배
를 하며 돌을 돌렸다. 기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이 순간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소원이 접수된 모양이다. 하여 다시 한번 해봤는데 역시나 무거웠다. 혹여 접수 대상이 아니
더라도 돌의 무거움은 누구나 같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기분상일까? 과연 소원 성취가 이루
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를 잠시 들뜨게 한다. (허나
현실은 소원 성취 그딴거 없음~~~)


 

♠  안개 낀 백운산(白雲山)을 오르다.

▲  용궁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백운산둘레길

용궁사에서 50분 정도를 머물다가 절을 등지며 백운산둘레길에 발을 들였다. 백운산 정상까지
오를까 말까 궁리를 하다가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용궁사와 둘레길만 보고 철수하
기에는 너무 싱거워 흔쾌히 정상까지 가기로 했다.

백운산둘레길은 영종도의 지붕인 백운산 주위를 도는 산길로 4.4km 정도 된다. 시작점은 접근
성이 좋은 용궁사에서 하는 것이 좋은데, 용궁사에서 2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둘레길과 작별하고 1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대체로
경사는 느긋한 편이다. 수목이 울창하여 햇볕이 들어올 틈이 거의 없으며 산바람도 넉넉히 불
어 땀을 제대로 털어간다. 다만 약수터가 없기 때문에 용궁사에서 물배를 채우거나 물통을 채
워 산행에 임하기 바란다.


▲  쉼터로 조성된 6각형 정자 (용궁사 부근)

▲  둘레길에 왠 연자방아?
1981년 12월에 용궁사 신도가 기증한 연자방아로 왜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이곳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절에 두거나 산 밑에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  잠시 미친 경사를 보여주는 둘레길

▲  백운산 봉수대(烽燧臺)터

둘레길과 정상 방면 산길이 갈리는 곳에 백운산 봉수대가 있었다. 이 봉수대는 서해바다의 동
태를 살피며 위급시 봉화를 피워 인천 철마산(鐵馬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알렸는데, 구담사(
용궁사) 승려(1명 또는 3명)와 봉수지기 2명이 봉수대를 지켰다고 한다.

서해를 지키던 당당한 모습의 봉수대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사라진지 오래이고 이곳과 정상
으로 가는 길목에 약간의 돌무더기가 남아있다. 여기서는 두께 1cm 정도의 경질와편 등이 나
오고 있어 봉수대의 옛 흔적을 희미하게 더듬을 수 있다.


▲  정상 동쪽에 자리한 헬기장

▲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

▲  백운산 정상 전망대

용궁사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백운산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
에는 전망대를 두어 조망(眺望)의 나래를 누리게 했는데,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안개가
자욱히 끼어 100m 전방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물급 조망을 기대하고 올라왔건만 서해바다가
빚은 안개의 심술에 그 기대는 산산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전망대에는 인천국제공항과 공항신도시, 용유도(龍游島), 서해바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
들이 보인다는 전망 안내문과 사진이 있지만 오리무중과 같은 안개가 그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려 전망 안내문이 참 무색하게 되었다.

▲  우두커니 서 있는 백운산 정상 표석

▲  백운산 정상 전망대


▲  안개 속에 몸을 가린 백운산 남쪽 봉우리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1)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2)

진한 안개에 털려 정체성을 잃은 정상 전망대를 벗어나 전소 쪽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보이는
것도 없으니 더 머물러봐야 의미도 없고, 시간도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내려갈 때는 동남쪽 전소 방향으로 내려갔는데 이 길도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안개가 자욱해
도 전방 50m 까지는 보이기 때문에 하산에 별로 무리는 없었다. 야속한 안개를 뚫고 20분 정
도 내려가니 산속에 묻힌 집이 나오고, 군사 훈련시설을 지나니 울퉁불퉁했던 흙길은 끝나고
신작로가 앞에 펼쳐진다.

신작로를 따라 시골스러운 전소마을 서쪽을 지나면 영종자이아파트와 영종국제물류고등학교가
나오고 영종동의 주요 간선도로인 운남로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영종도 백운산 나들이는 바다 안개를 뒤로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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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강화 석모도 보문사 (외포리, 낙가산, 눈썹바위 마애불)


' 서울에서 가까운 그림 같은 섬, 그리고 그림 같은 산사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
보문사 마애석불좌상 (눈썹바위)
▲ 보문사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



 

봄이 슬슬 기지개를 켜던 4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강화도(江華島) 서쪽에 자리한 석모도
보문사를 찾았다. 원래는 강화도 1박 2일 여행으로 토요일 낮에 가서 일요일 오후에 오는
일정이나 나는 개인 사정으로 토요일에 같이 가지 않고 일요일 아침 일찍 새벽 이슬을 맞
으며 완전 후발대로 그들이 있는 강화도 황청리로 넘어갔다.

내가 서식하는 서울 도봉동(道峰洞)에서 황청리(외포리 서북쪽 동네)까지 그 장대한 거리
를 대중교통에 의지하여 9시 정도에 황청리 종점에 이르렀다. 그들이 머물던 펜션은 종점
바로 뒷쪽 언덕에서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어 찾기는 쉬웠다.
펜션에 들어서니 몇몇은 해장술이란 명목으로 아침부터 곡차(穀茶)를 걸치고 있었고 대부
분은 안에서 아침을 먹거나 TV를 보고 있었다. 물론 전날 밤샘의 위엄으로 아직도 깨어나
지 못한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침을 먹으면서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몸을 쉬게 했다.
11시가 넘자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석모도로 가고자 외포리(外浦里)로 이동을 했다. 일행
들 차량 6대 중 1대만 외포리에 두고 나머지 5대에 나눠 타서 석모도로 넘어갔는데, 일요
일이라 석모도 나들이 수요가 상당하여 외포리는 그야말로 시장통을 이루었다.

외포리와 석모도(석포리)를 오가는 여객선은 휴일 만선(滿船)의 기쁨을 톡톡히 누리며 수
시로 두 곳을 악착같이 이어준다. 이 여객선은 소형차량은 물론 대형버스, 화물차에 이르
기까지 수송이 가능하여 나들이객들이 가져온 차량을 꾸역꾸역 넣어 섬으로 보낸다.
사람이야 아무리 미어터져도 배 1척에 거의 다 실을 수 있지만 차량들은 수송능력에 한계
가 있고 섬으로 가려는 차량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어 40분 정도를 기다린 끝에야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배가 크긴 해도 차량 10대 정도 들어가면 꽉 찰 것이라 생각했는데 공간
이란 공간을 다 활용하여 차량을 구겨넣으니 거의 30대 정도 실은 듯 싶었다.
사람들은 차에 있거나 2층 객실에 있으면 되며, 석모도까지는 소리를 지르면 흔쾌히 들릴
정도로 가까워 불과 10분이면 도착한다.


 

♠ 석모도(席毛島)와 보문사 입문

▲ 외포리 포구와 잠시 작별을 고하다.

사람과 차량을 가득 머금은 배는 미련 없이 포구를 출발했다. 이렇게 보면 한반도에서 섬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화도도 엄연한 섬이므로 섬에서 섬으로의 이동이다. 다만 강화도가
2개의 다리로 한반도와 너무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보니 착각하기가 쉽다.

포구 주변에는 서해바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갯벌이 진하게 펼쳐져 여러 생명들이 삶을 의지
하고 있다. 서해바다의 보물이라 일컬어지는 갯벌은 기후 변화와 인간들의 무분별한 개발의 칼
질로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형편으로 강화도 지역 갯벌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세계적 희귀종인
저어새(가리새)가 서식하고 있어 지구에서 매우 우수한 갯뻘로 추앙을 받고 있다. 하여 강화도
를 비롯하여 석모도, 볼음도(乶音島) 지역의 갯벌을 한 덩어리로 묶어 천연기념물 419호로 삼
았으며 단일 문화유산 지정 구역으로는 이 땅에서 가장 넓다.
(면적은 약 1억 3,600만평,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강화갯벌 및 저어새번식지')


▲ 조금씩 멀어져가는 강화도, 그리고 시야를 어지럽히는 갈매기들

배가 출발하니 인근 갯벌에서 망을 보던 구공(鷗公, 갈매기)들이 몰려와 배를 포위한다. 날카
롭게 끼룩끼룩거리며 통행세를 요구하니 사람들은 준비해 온 새우깡을 던지며 그들을 달랜다.
허나 구공들이 입맛들이 변했는지 아니면 배가 불러터졌는지, 아니면 둔해졌는지 좀처럼 새우
깡을 잡지 못했다. 바다에는 그렇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떨어진 새우깡이 두둥실 무리를
이루며 떠있었다.


▲ 어느 양이(攘夷) 여인이 팔을 뻗어 새우깡으로 구공을 유혹하지만
낯설은 피부색 탓인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 통행세를 요구하며 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구공들

▲ 하늘이 온통 구공들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거니는 그들이 그저 부러울 뿐~~ ▼

외포리를 출발한지 겨우 10분 만에 석모도의 관문인 석포리 포구에 닻을 내린다. 배로 이동한
구간이 강화도와 석모도, 교동도(喬桐島) 등에 빙 둘러싸여 있어 마치 소양호, 대청호(大淸湖)
등의 너른 호수를 건넌 기분이다.
배에 담긴 사람과 차량들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쏟아져 나오면서 석포리 포구는 다시 활기를 되
찾고 강화도로 나가려는 사람과 차량들이 그들의 빈 자리를 메우면서 배는 왕복으로 만선의 기
쁨을 재현한다. 아마도 그날 여객선 회사는 소고기 회식을 거창하게 했을 것이다.

석포리에서 보문사까지는 잘 닦여진 2차선 도로를 따라 차량으로 10~15분 정도 들어가야 된다.
보문사에 이르니 주차장은 그야말로 초만원. 간신히 공간을 찾아 바퀴를 접고 보문사로 올라갈
준비를 한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는 여타 관광지와 비슷하게 보문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주막촌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들 주막은 나물튀김과 동동주를 미끼로 호객행위를 벌인다. 덕분
에 튀김과 동동주 몇 잔을 무료로 챙겨 마시며 배를 조금이나마 채운다.


▲ 보문사 일주문(一柱門)

보문사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일주문을 거쳐야 된다. 일주문 옆에는 별로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고, 문 앞에는 매표소 사람이 철통같이 입장권을 검
사하고 있다. 예전 2004년에 왔을 때는 입장료가 1,500원이었는데, 지금은 10년의 무게가 억지
로 더해져 무려 2,000원씩이나 뜯는다.
후덜덜한 입장료 앞에 경악하며 단체 할인을 요구하였으나 적정 인원(30명)이 안된다며 거절당
했다. 우리 일행은 딱 20명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 구워삶아 단체 할
인으로 표를 끊고 일주문을 들어선다.

일주문 현판에는 '낙가산 보문사(洛迦山 普門寺)'라 쓰여 있는데, 이는 서예가로 명성이 높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27~2007)의 글씨이다.


▲ 은행나무 옆에 자리한 보문사 사적비(事蹟碑)

일주문을 들어서면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길의 경사가 급해진다. 허나 그렇게 긴 거리는 아니므
로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길을 2분 정도 오르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보문사가 조금씩
모습을 끄집어내고, 담장에 둘러싸인 보문사 사적비와 거대한 은행나무가 먼저 마중을 나온다.

◀ 보문사 은행나무 - 강화군 보호수 4-9-63호

사적비 옆에 자리한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00
년에 이른다. 겨울이 저 멀리 물러가고 봄이 왔
건만 아직도 겨울의 망령에 사로잡혀 허우적거
리고 있다. 하루 빨리 파릇파릇한 은행잎을 펼
쳐보여야 될텐데 몸이 마음처럼 잘 따라주지를
못하니 보는 입장에서도 좀 안따까울 따름이다.
나무의 높이는 약 20m, 둘레는 3m에 이르며 보
문사의 정성과 아무리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세
월을 양분으로 삼아 어엿하게 성장했다.

은행나무를 지나면 천하 3대 관음성지로 명성이
자자한 보문사 경내에 이른다. 그럼 여기서 잠
시 보문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의 하나, 서해바다를 품은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석모도의 중심을 이루는 낙가산(洛迦山) 서쪽 자락, 서해바다가 잘 바라보이는 곳에 보문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보문사의 보문(普門)은 중생을 구제하려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보살행(菩薩行)이 크고 변함
이 없다는 뜻으로 동해바다의 낙산사(洛山寺), 남해바다의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과 더불
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절은 635년 회정대사(懷正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금강산(金剛山)에서 도를 닦고 강
화도 지역으로 들어와 보문사와 마니산(摩尼山)에 정수사(淨水寺)를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 당
시 강화도와 석모도는 고구려(高句麗)와 신라의 팽팽한 접경 지역으로 절을 지을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창건 이후 무려 1,100년 이상의 공백기가 있어 창건 시기에 대해 강하게
회의감을 품게 한다. 물론 관련 기록이나 유물도 없다.
다만 전국에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창건되거나 경내에 600~700년 묵은
향나무가 있어 적어도 고려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절을 지은 이는 창건설화에 나오
는 회정(懷正)으로 보인다. 그는 석모도 어민들과 섬을 좌지우지하는 세력가, 부호(富豪)들의
지원으로 절을 세운 듯 싶으며 지역 어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도우며 공
존하고 있다.

절이 창건된 이후 18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이 전해오지 않으며, 180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
소 발자국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1800년 선방(禪房)을 조성해 한영 등 여러 승려가 수행을 했
으며, 1812년 유생 홍봉장의 지원을 받아 절을 중창했다.
1867년 경산이 석굴이 나한전을 지었고, 1893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지원으로 관음전과 객실
을 지었다. 1919년 보경이 관음후불탱, 신중탱, 칠성탱, 산신탱, 현왕탱을 제작해 봉안했으며,
1920년 대원이 관음전법당(극락보전)을 중건했다. 그리고 1928년 주지 배선주가 금강산 표훈사
의 이화응과 함께 경내 뒷쪽 눈썹바위에 그 유명한 마애관음보살을 조성해 절의 듬직한 명물로
삼았다.
1935년 나한전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58년 나한전 석굴을 손질하고 1972년 관음전을 중건했
다. 1982년 동각이 석실을 확장해 여러 성상(聖像)을 봉안했으며, 1987년부터 18년 동안 와불
조성 공사를 벌여 2005년 5월 완공을 보았다. 1996년 관음전을 중창해 극락보전으로 이름을 갈
았고, 2006년 5월부터 3년 동안 오백나한을 조성하는 등 새로운 볼거리를 계속 추가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선방, 석실, 삼성각, 와불전 등 10동 정도의 건물
이 있으며 석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마애석불좌상과
석실, 맷돌, 향나무 등 지방문화재 4점을 품고 있으며, 은행나무와 향나무 등 수백 년 묵은 나
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운다.

보문사는 관음성지의 명성에다가 석실 나한상의 영험, 배를 타고 가야되는 섬 산자락에 있다는
특성, 바다가 가깝다는 매력과 서해 일몰지, 서울과 가깝다는 잇점으로 1960년 이후 수도권의
명소를 뛰어 넘어 천하 명소로 성장했으며, 강화도에 오면 꼭 들려야 직성이 풀리는 국민관광
지가 되었다. 이렇듯 석모도의 든든한 후광이자 꿀단지로 보문사가 없는 석모도는 순대가 없는
순대국밥이나 다름이 없다. 그만큼 석모도에서 보문사의 위치는 90%를 먹고 들어간다.

바다를 겯드릴 수 있는 수도권 당일 나들이 코스로 명성이 자자하며, 바다를 바라보는 이 땅에
서 몇 안되는 절로 조망 또한 일품이다.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찾아와 안기고 싶
은 절로 관음보살의 인자함과 시원스런 조망이 속세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잠시나마 보듬어 줄
것이다.
참고로 이곳은 관음성지 외에도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도 명성이 높다. 석실에 봉안된 18인의
나한상은 영험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관련 전설이 몇 개나 전해온다.

※ 석모도 보문사 찾아가기 (2016년 7월 기준)
① 수도권에서 강화읍(강화터미널)까지
* 신촌역(2호선/1,4번 출구) 정류장과 홍대입구역(2호선, 경의중앙선, 공항전철/2번 출구) 중
앙차로 정류장, 합정역(2,6호선/5,10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3000번 좌석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종점 하차
* 5호선 송정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88, 3000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마두역(4번 출구), 3호선 백석역(4번 출구)에서 96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대화역(4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뒷쪽)에서 97번 시내버스를 타고 장기4거리 이후 아
무 정류장에서 강화행 시내버스로 환승 (88, 96, 3000, 90, 800번 등)
* 부평역(1호선, 인천1호선) 국민은행 앞 정류장과 부평구청역(7호선, 인천1호선/1번 출구)에
서 90번 시내버스 이용
* 인천종합터미널 건너편이나 인천터미널역(인천1호선/1번 출구), 인천시청역(인천1호선/3번
출구)에서 800번 좌석버스 이용
② 강화도에서 보문사까지
* 강화터미널에서 외포리행 군내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외포리터미널에서 도보 3분)에서 석모도행 여객선이 30분 간격으로
다니며, 주말과 휴일, 피서철에는 10~20분 내외 간격으로 오간다. 마지막 배는 3~11월은 21
시, 12~2월은 19시 정도이며 차량 수송도 가능하다. (문의 삼보해운 ☎ 032-932-6007)
* 석모도 선착장에서 보문사까지 마을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다니며, 주말과 휴일, 피서철에
는 20~30분 간격으로 증회 운행한다.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서울 → 48번 국도 → 강화터미널 → 인산3거리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 → 여객선 승선
→ 석모도 석포리 → 보문사
* 인천 → 검단 → 대곶 → 강화초지대교 → 온수리 → 화도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 → 여
객선 승선 → 석모도 석포리 → 보문사

★ 보문사 관람정보 (2016년 7월 기준)
* 입장료 : 일반 2,000원(30인 이상 단체 1,600원) / 청소년 1,500원(단체 1,200원) / 어린이
1,200원 (단체 800원)
* 주차비 : 대형 5,000원 / 소형 2,000원 (문의 ☎ 032-933-8271)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삼산남로 828번길 ☎ 032-933-8271~3)
* 보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경내에서 바라본 낙가산, 하얀 바위가 뭉쳐있는 곳에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이 있다.


 

♠ 보문사 경내 둘러보기

▲ 보문사 와불전(臥佛殿)

경내로 들어서면 범종각과 와불전, 500나한상 등이 제일 먼저 중생을 맞는다. 범종각(梵鍾閣)
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가 담긴 사물(四物)의 보금자리로 범종과 운판(雲版), 법고
(法鼓), 목어(木魚) 등이 자리를 메운다.
와불전과 오백나한(五百羅漢)은 2006년 이후에 닦여진 보문사의 새로운 명물로 와불전에는 말
그대로 누워있는 부처가 봉안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와불전의 존재를 몰라 내부를 살피지 못
했지. 그런 와불전 옆에는 하얀 피부의 500나한이 그들의 스승 부처를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있는데, 그들의 표정이 우리나라 5,000만 인구 만큼이나 가지각색이라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 새롭게 만든 500나한상과 3층석탑

▲ 극락보전에 바라본 와불전(오른쪽)과 오백나한(왼쪽)

▲ 보문사 석실(石室)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7호

보문사에는 유명한 존재가 2개가 있으니 하나는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석실이다.
이 석실은 나한상을 봉안한 공간으로 나한전(羅漢殿)으로 불리기도 한다. 649년 회정대사가 어
부들이 바다에서 건진 나한상(羅漢像)을 봉안하고자 만들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으며, 1812년
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67년(고종 4년)에 경산(京山)
이 보수했으며, 1958년 춘성(春城)이 석굴 내부를 확장, 개수했고, 1980년에 정수(靜守)가 내
부를 확장하고 불단 뒤와 옆에 석탱화를 조성했다.

우리나라의 몇 안되는 석굴사원(石窟寺院)으로 바위 밑에 난 천연동굴을 개조하여 만들었는데,
'1⌒1⌒1⌒1'모양의 3개의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30평 크기로 넓게 자리를 닦아 18나한
과 석가불, 미륵불, 제화갈라보살, 송자관음보살, 관음보살 등을 봉안했다.


▲ 석실을 가득 메운 중생들

석실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 보문사 측에서 649년이라 주장하는 어느 멀고 먼 옛날, 석모도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나갔다.
바다에 쳐놓은 그물이 평소와는 달리 꽤 무거운지라 이거 큰 것이 잡혔구나 싶어 즐거운 마음
에 힘껏 당겨보니 왠걸 이상한 괴석(怪石) 22개가 걸려든 것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사람 모습
과 비슷했다.
어부들은 기이한 석상에 허탈해하며 죄다 바다에 내던지고 다른 곳에 가서 고기를 잡았다. 허
나 거기서도 그 석상들이 그대로 걸려들었다. 어부들은 매우 놀라 그들을 바다에 내던지고 육
지로 돌아가 버렸다.

그날 밤, 어부들은 비슷한 시간에 같은 꿈을 꾸었다. 그들 꿈에 노승(老僧)이 나타나
'우리는 서천축국(인도)에서 왔다. 나와 함께 22명의 성인(聖人)이 돌배를 타고 여기까지 왔는
데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 속에 잠수해 있다가 그대들의 그물을 따라 올라왔더니 2번 씩이나 우
리를 버렸더구나. 우리는 부처의 법문과 중생의 복락(福樂)을 성취하는 길을 전하러 온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명산으로 안내해주길 바란다. 그러면 그대들의 후손까지 길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며 어부들을 인도해 보문사 앞 석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이곳
에 쉬게 해달라고 당부를 하고는 바다로 사라졌다.

어부들은 이른 아침 바다로 나와 간밤의 꿈 이야기를 나누니 글쎄 다들 같은 꿈을 꾼 것이 아
닌가? 보통 일이 아닌 듯 싶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끌고 석상을 버린 곳으로 달려
가 그물을 치니 그 석상들이 고스란히 나왔다.
어부들은 그 석상을 가지고 보문사로 가져와 꿈에서 본 석굴에 봉안했다. (또는 석상을 낙가산
으로 옮겼는데 보문사 석굴 앞에서 그들이 갑자기 무거워져 꼼짝도 하지 않자 그 석굴에 봉안
했다고 함)
석굴에서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내음이 진동했는데, 누가 다듬은 듯 석상이 앉을 좌대
(座臺)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석상을 앉히니 신비한 기운이 가득찬 듯 하였고 마을 사
람들은 일제히 그들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어부들은 그 공로로 후손들까지 잘먹고 잘살았다
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이들 나한상은 바다에서 발견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종종 불상이나 옛 사
람들의 물건이 바다나 강 속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운반이나 약
탈을 당하는 과정에서 배가 침몰하여 바다에 버려진 것을 석모도 어부가 우연히 발견하여 보문
사에 봉안한 것으로 보이며, 보문사가 해상세력 또는 석모도 어부를 위한 사찰임을 은연중 내
비추는 것 같다. 또한 근래 절에서 나한상의 석질을 조사했더니 우리나라 화강암이 아닌 인도
에서 산출되는 돌로 밝혀졌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다.

석실 내부는 마침 단체 예불 중이라 들어가지 않았다. 하여 나한의 자세한 모습까지는 확인을
하지 못했지. 그리고 나한상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하나 덧붙여 전해오니 내
용은 대략 이렇다. 아마도 나한도량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지어낸 이야기로 여겨진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동짓날, 보문사 승려들은 팥죽을 만들어 불공을 드리고자 이른 아침
부터 서둘렀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궁이에는 불이 없었고, 불을 일으킬만한 어떠한 도구도 없
어서 도저히 팥죽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보문사 아래에 살던 고씨의 집에 보문사 동자승(童子僧)이 성냥을 구하기 위해 추
운 날씨에 맨발로 찾아왔다. 고씨는 그 동승을 불쌍히 여기고 따뜻한 방으로 데려와 팥죽을 한
그릇 먹이고 성냥을 보내주었다.
몇 시간 뒤 보문사 부엌 아궁이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리면서 승려들은 신이 났고 서둘러 팥죽
을 지어 불공을 올리고 맛있게 공양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보문사 주지승이 고씨 집에 갔다. 고씨가 주지에게
'저번 동짓날. 어른 승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어린 동자승을 보냈습니까?'
주지승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네? 동자승이라니요? 우리 절에는 동자승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불씨를 얻어오라고 시키지도 않았구요'

그 말에 고씨는 발끈하여 '스님들이 거짓말도 하시오? 절에 불씨가 꺼져서 팥죽 공양을 못하게
되자 불씨를 얻으러 왔다고 했어요~~!'

고씨 집에서 돌아온 주지승은 승려들에게 고씨의 말을 전하면서 그 동자승의 정체가 과연 무엇
일까 곰곰히 생각하던 중, 우연히 석실에 들어가보았다. 그러니 왠걸 석실 한쪽 구석 나한상의
입에 팥죽이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승려들은 나한의 은혜에 감복하여 더욱 열심히 정진
했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도 동짓날이 되면 팥을 가지고 절로 올라와 팔죽을 쑤어 올리고 기도
를 했다고 한다. 그 일이 100년 동안 연례 행사처럼 계속되고 있다.


▲ 보문사 향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17호

석실 바로 앞에는 푸른 내음을 자랑하는 오래된 향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석실 나한상의 법력(
法力)을 받아서 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서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 용트림을 하는 듯한 모습으
로 그의 나이는 약 600~7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문사가 최소 600년은 넘었음을 보
여주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겨우 3.2mㄹ로 바위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렸으며, 6.25전쟁 때 폭격으로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3년 뒤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생명력 하나는 정말 끈질기다.


▲ 보문사 맷돌 - 인천 지방민속문화재 1호

향나무 앞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큰 맷돌이 놓여 있다. 여기서 어처구니는 맷돌을 돌리는 손잡
이를 말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을 돌리지를 못한다. 그래서 기가 막힐 때 사용하는 '어
처구니가 없다'
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보문사 승려들이 불공과 공양(供養)에 쓸 음식을 만들 때 사용했던 이 맷돌은 조선 후기에 화
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지름 69cm, 두께 20cm이며, 웃돌과 아랫돌이 잘 남아 있다. 지금은 현
대화된 조리기구에 제대로 밀려나 이렇게 손잡이를 잃은 채, 돌절구 등과 한가로이 남은 여생
을 보내고 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현역에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다.


▲ 맷돌 옆에 놓인 돌절구
조선 후기부터 쓰인 보문사의 음식 조리 도구로 지금은 전시/관상용이 되어
향나무 주변을 수식한다.

▲ 석실과 극락보전 사이에 들어앉은 삼성각(三聖閣)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1960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4평도 안되는 작은 건물이었다.

▲ 삼성각에 봉안된 불화들
왼쪽부터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으로 모두 1992년에 제작되었다.

▲ 보문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은 보문사의 법당으로 원래는 대웅전이었다.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하여 관음보살과 옥(玉)으로 조성된 조그만 3,000불이 봉안되어 장엄함
을 더해주고 있다.


▲ 극락보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과 3천불의 위엄

▲ 'ㄱ'자 모습의 요사(寮舍)
보문사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종무소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요사 건너편에 자리한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바다를 바라보며 자리한 오백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나한을 위한 공간은
이미 석실과 야외 500나한상이 있는데 그걸로도 모자른 것일까? 오백나한전까지
지어 올려 3대 관음성지 외에 나한도량 성지의 인지도를 더욱 견고히 했다.


 

♠ 보문사의 상징,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

▲ 오색영롱한 연등이 계단을 오르는 중생들을 격려하고 인도한다.

극락보전 옆구리에는 눈썹바위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펼쳐져 있다. 눈썹바
위와 마애석불좌상은 보문사에서 꼭 봐야되는 이곳의 얼굴로 오르기 귀찮다고 통과하는 사람들
도 종종 있는데, 이는 천지(天池)를 안보는 백두산(白頭山) 관광과 같다. 계단길이 좀 가파르
긴 해도 보문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누리고 있는 존재인만큼 꼭 올라가 보는 것이 보문사에 대
한 예의가 될 것이다.

경내에서 눈썹바위까지는 108계단도 아닌 418계단이 이어져 있다. 왜 418계단인지는 모르겠다.
오르는 길이 좀 각박해 보여도 노공(老公)들도 거뜬히 오를 정도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
이 있듯이 열심히 길을 임하면 눈썹바위 마애불이 반가이 맞이해 줄 것이다. 또한 그 앞에 훤
히 펼쳐진 서해바다는 근심덩어리로 꽉 막힌 가슴과 머리를 시원하게 트이게 할 것이다.


▲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9호

418계단 끝에 이르면 기이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거대
한 마애석불좌상이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환하게 맞이한다. 불상이 있는
바위 위쪽에는 특이하게도 암석이 눈썹처럼 앞으로 돌출되어 약 90년 동안 마애불의 우산 역할
을 해주니 덕분에 석불의 건강은 여전히 청신호이다.

이 석불은 1928년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주지였던 이화응(李華應)과 당시 보문사의 주지인 배
선주(裵善周)가 관음성지의 명성을 견고히 다지고자 의기투합하여 조성한 것으로 나이는 고작
90년 정도 밖에 안된 팔팔한 석불이다. 어둠의 시절 당시에 조성된 여러 불상 중 하나이자 가
장 규모가 큰 석불로 그의 얼굴을 보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조금은 우울해 보이
는데, 이는 1920년대 어둠의 시기를 살아야 했던 중생들의 근심어린 얼굴을 모델로 한 듯 싶다.

마애불의 정체는 관음보살로 소원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높아 바위 아래 기도처에 시주를 하려
는 사람들로 넘쳐나며, 불상 앞에 닦여진 예불장소에도 언제나 중생들로 가득하다. 게다가 서
해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어 그 풍경에 나도 모르게 매료되고 만다. 여기서 바라보는 낙조
(落照)는 김제 망해사(望海寺), 변산 월명암(月明庵)의 낙조와 버금갈 정도로 그 찬란함을 자
랑한다.

눈썹처럼 삐죽 나온 암석과 그 밑에 관음보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대자연은 저곳에 저런
멋드러진 바위를 만들었고, 20세기 초반 이 땅의 인간들은 관음보살상을 조성하여 자연과 인간
의 합작품 눈썹바위 마애불이 탄생하게 되었다. 보면 볼 수록 눈썹바위의 모습은 신기하여 절
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마애불의 높이는 약 9.2m, 폭은 약 3,3m이다. 앙련(仰蓮)으로 구성된 대좌(臺座) 위에 선정인(
禪定印)을 하며 앉아 있으며, 선정인 아래 다리는 옷에 덮여 있는 방식으로 처리했는데 현실감
이 조금은 떨어지는 것 같다. 다만 못생긴 발바닥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저 석불이 결가부좌(
結跏趺坐)로 앉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며 가슴 부분에는 특이하게도 '卍'마크가 새겨져 있어 참 이채롭
다. 둥근널쩍한 그의 얼굴은 시름에 잠긴 듯, 별로 유쾌한 인상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손 위에
는 조그만 정병(政柄)이 하나 놓여져 있으니 이는 관음보살이 좋아하는 감로수(甘露水) 병으로
물방울이 들어가기도 버겨울 정도로 정병의 크기가 너무 작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이마 가운데에는 백호가 찍혀 있고, 지그시 감은 눈, 커
다란 코, 입술, 풍만해 보이는 얼굴살, 그리고 해학적 분위기의 길쭉한 귀가 있다.

석불의 우산 역할을 하는 눈썹바위에 바다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암석 아래에 무지개 모양처럼
돋음새김이 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손길이 미친 흔적들로 무엇을 새길려고 했는지
는 잘 모르겠다. 그를 더 장엄하게 연출하고자 저곳까지 손을 댄 모험까지 감행했던 것 같다.


▲ 관음보살 옆에 새겨진 바위글씨

불상 옆에는 '造佛華應禪師'라 쓰여 있으니 즉 앞에서 언급했던 이화응 선사가 조성했음을 알
려주고 있으며, 오른쪽 글씨에는 '華嚴會上八部四王衆(화엄회상필부사왕중), 南無華嚴會上欲色
諸天衆(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 華嚴會上護法善(화엄회상호법선신중)이라 쓰여 있다.


▲ 마애석불좌상에서 바라본 천하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마애관음보살)을 둘러보고 3배를 하려고 했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향만 키고 왔다. 내려가는 길에도 눈썹바위를 향한 사람들의 물결은 여전하다.

절을 등지고 주막촌으로 내려가다가 어느 적당한 주막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런 데 와서
파전에 도토리묵도 먹어줘야 되지만 아침을 많이 먹은 탓에 간단히 산채비빔밥과 동동주로 마
무리했다.
점심을 먹으니 식곤증이 살짝 등을 두드리며 한숨 주무시라고 부추긴다. 서비스로 제공되는 커
피를 마시며 식곤증의 압박을 덜면서 잠깐이지만 석모도 보문사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시간이 시간인만큼 석포리 포구까지 가는 길은 썩 순탄치 않았다. 포구 1km를 앞두고 섬을 나
가려는 차량들로 대도시 못지 않은 극심한 정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1km가 마치 1,000km
로 마냥 늘어진 듯, 강화도로 나가는 배에 오르기까지 무려 2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 시간이
얼마나 따분하던지 속히 이곳을 탈출하기를 희망하며 잠을 억지로 청했다. 다행히 잠이 금방
와주어 기다림의 시간을 좀 덜어주었다.
허나 한참을 잔 듯 싶은데 겨우 100m 이동.. 배 2~3척이 대박 쾌재를 부르며 바깥으로 나가는
차량과 사람을 열심히 실어나르지만 힘에 겨워 보인다. 그렇게 간신히 배에 올라 멀어져 가는
석모도와 작별을 고하며, 10여 분의 짧은 항해를 마치고 외포리로 돌아왔다. 지금은 비록 배로
왕래하지만 석모도를 한반도에 더욱 단단히 묶어두고자 한참 연륙교 공사가 진행중이다. 2017
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때가 되면 더 이상 불편하게 배의 신세를 질 필요는 없게 된다.
여객선 회사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말이다.

정말 번개처럼 날아가 짧지만 재미지게 보냈던 그날 하루,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사람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긴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석모
도 보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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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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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7월 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6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4년 8월초 기준)

 

서울 - 5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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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평구 진관사, 삼천사, 북한산성 2003, 5 200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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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북구 성북동(간송미술관 / 심우장 / 성락원 / 선잠단터) 2003, 10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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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악구

관악산(낙성대유지 / 낙성대 / 봉천동 마애불) 2004, 2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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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북구 성북동(간송미술관 / 선잠단터) 2004, 10 200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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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05, 5 200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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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종로구 경복궁, 인사동 2006, 1 200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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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은평구 숙용심씨 묘표, 영산군 묘역 2006, 2 200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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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중구 덕수궁 2006, 3 200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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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중구
종로구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교회, 옛 러시아공사관터,
인사동

2006, 3 200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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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종로구 창경궁 (1) 2006, 4 20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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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종로구 창경궁 (2) 2006, 4 20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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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강남구 봉은사 1 (사월초파일) 2006, 5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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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강남구 봉은사 2 (사월초파일) 2006, 5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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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종로구
서대문구

세검정, 대원군별장, 홍지문
보도각백불

2006, 8 200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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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2008, 4 20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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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2008, 4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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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2009, 1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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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종로구

선희궁터, 청와대분수대, 청와대앞길,
경복궁신무문, 인사동

2008, 11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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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강남구

대모산 불국사 (사월초파일)

2008, 5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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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사월초파일)

2008, 5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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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이종석 별장

2008, 10 200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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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노원구 수락산 학림사 2009, 4 2009, 8 ☞ 글보러 가기

23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08, 11 2009, 12 ☞ 글보러 가기

24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08, 5 2010, 4 ☞ 글보러 가기

25

은평구 태화산 수국사 2009, 5 2010, 7 ☞ 글보러 가기

26

종로구 부암동 뒷골마을, 북악산길, 창의문 2010, 1 2011, 3 ☞ 글보러 가기

27

관악구

관악산 관음사, 효민공이경직묘역, 사당동백제요지,
구벨기에공사관

2009, 3 2011, 4 ☞ 글보러 가기

28

성북구

흥천사

2010, 5 2011, 5 ☞ 글보러 가기

29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0, 5 2011, 5 ☞ 글보러 가기

30

종로구

가회박물관, 삼청동(북촌), 인사동

2009, 8 2011, 9 ☞ 글보러 가기

31

성북구

성북동 삼청각, 홍련사, 북악산

2010, 5 2011, 10 ☞ 글보러 가기

32

도봉구

방학동 은행나무, 원당샘, 양효안맹담/정의공주묘
목서흠묘역

2009, 10 20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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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10, 1 2012, 2 ☞ 글보러 가기

34

종로구

장의사지당간지주, 세검정, 석파정별당, 홍지문

2010, 1 2012, 2 ☞ 글보러 가기

35

강서구

구암공원(광주바위), 허가바위, 허준박물관

2010, 3 2012, 3 ☞ 글보러 가기

36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이윤탁한글영비

2010, 4 2012, 4 ☞ 글보러 가기
37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1, 5 2012, 5 ☞ 글보러 가기
38

동작구

상도동 사자암

2011, 5 2012, 5 ☞ 글보러 가기
39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2010, 6 2012, 6 ☞ 글보러 가기
40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백사골)

2009, 10 2012, 8 ☞ 글보러 가기
41

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북악산길

2011, 5 2012, 9 ☞ 글보러 가기
42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 최순우옛집, 선잠단터

2010, 5 2012, 10 ☞ 글보러 가기
43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관상감관천대, 계동길, 창덕궁길,
요금문, 고희동가옥, 백흥범가옥, 빨래터

2011, 7 2013, 1 ☞ 글보러 가기
44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2, 5 2013, 4 ☞ 글보러 가기
45 종로구

석파정별당(석파랑), 부침바위터, 무계정사터,
현진건집터, 청계동천, 반계윤웅렬별장

2011, 11 20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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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종로구

재동백송, 재동초교, 백인제가옥, 북촌3경 일대,
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 안국동 윤보선가

2011, 9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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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강북구

북한산 본원정사

2012, 5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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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성북구

정릉동 경국사

2012, 5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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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종로구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2012, 7 201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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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도봉구

도봉산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서원,
광륜사)

2012, 5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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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2, 10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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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금천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1, 11 201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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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종로구

윤동주시인의 언덕(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2011, 8 20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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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종로구
중구

서울연등회 (서울연등축제)
조계사, 우정국로, 청계천, 광통교

2013, 5 201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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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종로구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2012, 5 201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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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중구

환구단(원구단), 덕수궁 대한문, 성공회 서울성당,
양이재, 구세군 중앙회관

2010, 4 201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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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인천 - 2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

글 공개시기

링크

1

부천

야인시대촬영장, 루미나리에축제 2003, 10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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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화

석모도 보문사, 매음리해변 2004, 11 200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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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화 광성보, 용두돈 2004, 11 200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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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장 2005, 8 200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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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양 북한산성(대서문, 중흥사터, 북한산행궁터) 2006, 8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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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양 북한산성(태고사, 산영루터, 북한산성계곡) 2006, 8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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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성남 망경암, 봉국사 (사월초파일) 2006, 5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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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오산
수원

오산 물향기수목원 / 수원 팔달문

2006, 11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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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 2007, 12 2008, 3 ☞ 글보러 가기

10

남양주 덕릉마을 산신각, 덕흥대원군 묘역 2006, 12 2008, 5 ☞ 글보러 가기

11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용암사) 2007, 9 2008, 10 ☞ 글보러 가기
12

안양

안양사, 석수동마애종, 석수동석실고분 2007, 11 2009, 3 ☞ 글보러 가기
13

안성

서운산 석남사 (사월초파일)

2008, 5 2009, 5 ☞ 글보러 가기
14

하남

춘궁동동사지(동사지3/5층석탑), 광주향교

2008, 10 2010, 2 ☞ 글보러 가기
15

안양

삼성산 염불암, 중초사지당간지주, 안양예술공원

2008, 11 2010, 12 ☞ 글보러 가기
16

양평

용문산 사나사, 사나사계곡

2010, 5 2011, 5 ☞ 글보러 가기
17

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

2009, 8 2011, 8 ☞ 글보러 가기
18

고양

북한산성 중성문, 노적사, 중흥사터, 봉성암,
산영루터

2008, 4 2011, 8 ☞ 글보러 가기
19

포천

반월성, 청성공원, 포천향교

2009, 8 2011, 10 ☞ 글보러 가기
20

하남

선법사(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2008, 10 2011, 11 ☞ 글보러 가기
21

고양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2008, 11 2011, 12 ☞ 글보러 가기
22

고양

중남미문화원, 벽제관터

2010, 4 2012, 5 ☞ 글보러 가기
23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장정리5층석탑, 고려궁터,
김상용 순절비

2009, 8 2012, 8 ☞ 글보러 가기
24

이천

관고리 석불입상, 설봉공원(설봉저수지),
설봉서원, 설봉산 영월암

2009, 5 2012, 10 ☞ 글보러 가기
25

양평

용문산 용문사,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2010, 11 2012, 11 ☞ 글보러 가기
26

파주

고령산 보광사

2009, 12 2013, 2 ☞ 글보러 가기
27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 2012, 3 2014, 3 ☞ 글보러 가기

 

강원도 - 18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글 공개시기

링크

1

양양

낙산사, 홍련암, 오색약수, 성국사, 설악산 주전골 2004, 2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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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릉 객사문, 오죽헌, 경포대, 굴산사터, 신복사터 2004, 6 200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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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구 양구 향토사료관, 심곡사 2004, 9 200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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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속초
고성

속초 탑공원, 고성 청간정 2005, 6 20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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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성 건봉사 2005, 6 200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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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창 대관령 양뗴목장 2006, 5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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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강릉
동해

경포대해수욕장, 등명낙가사, 묵호항 2006, 5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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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동해 감추사, 감추해변 2006, 11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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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태백 구문소 2006, 11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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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양구

양구 선사박물관 2008, 12 20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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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화천

토고미마을(산천어축제), 딴산 2010, 1 2011, 1 ☞ 글보러 가기
12

화천,양구
춘천

화천 평화의댐(세계평화의종공원), 춘천 윗샘밭 2010, 1 2011, 2 ☞ 글보러 가기
13

평창

남산공원, 송학루, 노산성

2009, 9 2011, 12 ☞ 글보러 가기
14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2, 1 2012, 6 ☞ 글보러 가기
15

정선

정선5일장, 봉양리뽕나무, 아우라지

2009, 10 2012, 7 ☞ 글보러 가기
16

영월

보덕사, 금몽암, 낙화암, 금강정, 금강공원

2009, 10 2013, 11 ☞ 글보러 가기
17

태백

태백산 (당골, 석탄박물관, 석장승, 눈꽃축제장,
단군성전)

2012, 1 2014, 2 ☞ 글보러 가기
18

동해

추암(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 해암정,
추암조각공원, 북평5일장

2012, 6 2014, 7 ☞ 글보러 가기

 

충청북도 - 10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글 공개시기

링크

1

충주

미륵리사터, 미륵리가마터

2003, 7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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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천

빈신사지 석탑, 덕주사, 덕주산성, 송계9곡

2003, 7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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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은
대전

보은 삼년산성
대전 동춘당 / 송애당 / 법동 석장승

2003, 11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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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양 구인사 2004, 12 200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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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청주 상당산성 2005, 6 200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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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동 영동향토민속자료전시관, 가학루, 황간향교 2008, 2 20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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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충주

단호사, 사문리당산나무숲, 미륵리사터,
하늘재, 충주호

2008, 9 20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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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단양

사인암, 청련암, 중선암, 북상리 시골

2009, 10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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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괴산

각연사 (각연사계곡)

2009, 11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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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홍범식고가, 개심사

2009, 11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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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청남도 - 12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글 공개시기

링크
1 서산 서산 마애3존불, 보원사터 2004, 8 20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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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산 진악산 보석사 (1) 2005, 2 200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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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금산 진악산 보석사 (2) / 진악산 자연휴양림 2005, 2 200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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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금산 칠백의총 2005, 2 200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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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안 태화산 광덕사 2008, 5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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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당진
태안

행담도, 꽃지해수욕장, 방포항,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암

2009, 3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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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전 식장산 고산사 2008, 11 2009. 11 ☞ 글보러 가기

8

공주 계룡산 동학사 2011, 2 2012. 3 ☞ 글보러 가기

9

공주 계룡산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용문폭포 2011, 2 2012. 3 ☞ 글보러 가기

10

공주

계룡산 갑사

2011, 2 2013. 2 ☞ 글보러 가기

11

태안

신진도(안흥외항), 마도, 안흥항, 안흥성(태국사)

2010, 2 2013, 8 ☞ 글보러 가기

12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산자연휴양림) 2012, 4 2014, 6 ☞ 글보러 가기

 

전라북도 - 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글 공개시기

링크

1

부안 상록해수욕장, 내소사, 곰소항 2003, 8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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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실 오수 의견비, 사선대 / 운서정 2006, 6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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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2008, 2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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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주
장수

한풍루, 무주향교
의암송, 장수향교

2008, 2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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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이목대), 한벽당 2010, 1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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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등학교

2009, 9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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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군산

응항, 선유도, 고군산군도 일주

2012, 4 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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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라남도 - 1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글 공개시기

링크

1

장성
담양
나주

장성 방울샘,
담양 관방제림 / 담양읍 5층석탑 / 석당간
나주 남고문 / 정수루

2003, 12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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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주 무양서원, 장고분 2005, 4 20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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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광 내산서원 2006, 10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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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주
광주

정수루, 금성관
광주 풍영정

2006, 10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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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순천 금전산 금둔사 2008, 11 2009, 11 ☞ 글보러 가기

6

순천 개운산 동화사 2008, 11 2010, 1 ☞ 글보러 가기

7

순천 조계산 천자암 2008, 11 2010, 2 ☞ 글보러 가기

8

장성 백암산 백양사 2009, 9 2011, 9 ☞ 글보러 가기

9

광주 무등산 원효사 2009, 9 2011, 10 ☞ 글보러 가기

10

구례 지리산 천은사(천은제) 2011, 4 2012, 4 ☞ 글보러 가기

11

곡성 동리산 태안사(태안사계곡) 2010, 4 2013, 5 ☞ 글보러 가기

 

대구, 경상북도 - 1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글 공개시기

링크

1

경주

반월성, 석빙고, 남산 서쪽(용장사터, 천룡사터)

2003, 4 20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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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주 경주읍성, 경주관아터, 옛 경주신사 2005, 11 200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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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주

노서동 고분군, 노동동 고분군 2005, 11 200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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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동 제비원 석불, 옥동3층석탑 2005, 12 200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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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주 성산관, 쌍충사적비, 성밖숲, 성산동 고분군 2006, 3 200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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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주
대구

성산동 고분군, 경상감영공원 2006, 3 200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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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경 문경새재(여궁폭포, 혜국사, 주흘산, 주흘관) 2006, 10 20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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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달성 비슬산(유가사 / 암괴류), 현풍석빙고 2006, 10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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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구미 의구총, 낙산리고분군, 낙산리3층석탑 2008, 2 200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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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예천
상주

개심사지5층석탑
용화사(증촌리석불좌상/입상), 전고령가야왕릉

2007, 12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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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신문왕릉 2008, 7 2009, 7 ☞ 글보러 가기

12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불무사) 2008, 7 2009, 9 ☞ 글보러 가기

13

영덕
울진

고래불해수욕장, 후포항, 월송정, 월송해변 2009, 6 2011, 6 ☞ 글보러 가기

14

달성

다람재, 도동서원, 이노정 2009, 7 2012, 12 ☞ 글보러 가기

15

청도

남산 낙대폭포 2011, 6 2013, 7 ☞ 글보러 가기

16

달성

비슬산 용연사 2011, 3 2014, 2 ☞ 글보러 가기

17

예천

회룡포, 비룡산 2011, 11 2014, 7 ☞ 글보러 가기

 

부산 - 1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글 공개시기

링크
1

해운대구

해운대해수욕장, 장산(폭포사 / 장산폭포) 2005, 4 20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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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구
연제구

부산근대역사관, 연산동고분군

2006, 4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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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영구
강서구

광안리해수욕장, 가덕도(외양포, 대항, 세바지)

2007, 2 200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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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서구
서구

망상도/유주암, 송도해변, 송도해수욕장

2007, 7 2008, 9 ☞ 글보러 가기
5

기장군

불광산 (장안사. 장안사계곡) 2007, 11 2009, 1 ☞ 글보러 가기
6

기장군

불광산 (척판암, 백련암) 2007, 11 2009, 1 ☞ 글보러 가기

7

서구
북구

내원정사, 만덕사(만덕사 당간지주), 알터유적 2008, 8 2009, 9 ☞ 글보러 가기

8

금정구

금정산(금정산성, 국청사) 2009, 4 2011, 1 ☞ 글보러 가기

9

금정구

금정산 미륵사, 금성동 2009, 4 2011, 1 ☞ 글보러 가기

10

강서구

가덕도(가덕도등대, 외양포, 대항, 새바지) 2009, 7 2012, 7 ☞ 글보러 가기

11

사상구
강서구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 숲길,
범방동3층석탑, 부산경남경마공원

2009, 4
2009, 6

2012, 12 ☞ 글보러 가기

12

사하구

몰운대, 다대포

2011, 6

2013, 7 ☞ 글보러 가기

13

남구

백운포, 오륙도 (오륙도등대, 등대섬)

2010, 6

2014, 1 ☞ 글보러 가기

 

울산, 경상남도 - 22개

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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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
부산

처용암
옥련선원 / 정묘사(배롱나무)

2003, 8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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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해
부산

은하사, 수로왕비능, 구지봉, 초선대, 봉황동 유적
다대포(몰운대)

2004, 1 200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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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창원 창원 불곡사 2005, 4 20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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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거제
통영

학동해변, 옥포대첩비, 한산도 2005, 10 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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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통영 한산도 제승당 2005, 10 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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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창원 무학산(관해정), 가포해변 2006, 4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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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해

김해 수로왕릉

2006, 4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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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진주
사천

진주 금선암
사천읍성(산성공원), 대방진굴항

2007, 1 2008, 1 ☞ 글보러 가기
9

함안
창원

함안박물관, 말산리/도항리고분군
진해 우체국

2007, 1 2008, 1 ☞ 글보러 가기
10

창원

불모산 성흥사, 대장동계곡

2007, 7 2008, 9 ☞ 글보러 가기
11

밀양

밀양 표충비, 무안리 향나무(홍제사) 2007, 11 2009, 1 ☞ 글보러 가기
12

양산

천성산 홍룡사(홍룡폭포), 원효암 2008, 10 2009, 6 ☞ 글보러 가기

13

울산 일산해수욕장, 대왕암공원 2008, 8 2009, 7 ☞ 글보러 가기

14

창녕

창녕석빙고, 송현동석불좌상, 송현동고분군,
진흥왕척경비, 만옥정공원, 남지철교

2008, 9 2010, 5 ☞ 글보러 가기

15

거창

수승대(귀연서원, 요수정)

2008, 10 2011, 7 ☞ 글보러 가기

16

울주
밀양

서생 나사리해변,
밀양 얼음골(천황사)

2010, 7 2011, 7 ☞ 글보러 가기

17

함양

상림공원, 한남군묘역

2009, 7 2012, 7 ☞ 글보러 가기

18

산청

목면시배유지, 배산서원, 덕천서원, 남명조식유적

2008, 10 2012, 9 ☞ 글보러 가기

19

남해

호구산 용문사, 남해자생식물단지, 미국마을,
용소리/금평해변

2009, 11 2012, 11 ☞ 글보러 가기

20

통영

통영 달아공원

2011, 3 2013, 3 ☞ 글보러 가기

21

울주

가지산 석남사 (석남사계곡)

2010, 7 2013, 9 ☞ 글보러 가기

22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2010, 10 2013, 11 ☞ 글보러 가기

 

제주도 지역 - 2개

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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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서해바다, 한라산(성판악 / 사라악 / 진달래밭) 2005, 8 200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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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주 한라산(백록담 / 탐라계곡), 서해바다 2005, 8 200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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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지역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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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열도

동경 지역(긴자, 록뽕키, 우에노, 도쿄도청타워,
아사쿠사<관음사>, 신주쿠, 코쿄, 디즈니랜드)

2002, 5 20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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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개된 글 중에서 하자가 없는 글들만 선정해서 지역별로 모았습니다.
2. 2003년 5월 이전(2개 제외) 글과 아직 공개되지 않은 답사기는 제외했습니다.
3. 답사기 내용과 사진을 전체 혹은 일부 퍼갈 경우, 반드시 출처와 원작자(박융) 이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사진이 일부 혹은 모조리 뜨지 않는 글들(주로 2004 ~ 2005년판)이 꽤 많습니다. 이 점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5. 공개된 글 중, 추후 업데이트 판이 나올 경우, 이전 판은 모음집에서 삭제 될 수 있으며 2개 이상의 시리즈로
작성된 글 중 본인 필요에 따라 1개나 2개로 통폐합 정리될 수 있습니다.
6. 지역 별로 분류했으나 지역이 2개 이상 겹치는 글은 먼저 간 곳을 기준으로 분류했습니다.

 

서해바다에 떠있는 아름다운 섬의 무리들 ~ 군산 고군산군도, 선유도 나들이 (장자도, 비응항)

 

' 군산 선유도,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나들이 '

▲  고군산군도

 


봄이 나날이 흥해감과 동시에 여름이 천하를 훔칠 기회를 엿보던 4월 끝 무렵에 군산 선유
도를 찾았다. 이곳은 마음 속 바구니에 담아두며 인연이 닿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
디어 그 인연이 닿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가 무섭게 집을 나서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으로 가
는 일반고속버스를 탔다. 버스는 2시간 40분 동안 열심히 바퀴를 굴려 군산 도심에 자리한
군산고속터미널에 나를 내려준다.

선유도 유람선이 출발하는 비응항까지는 10시 반까지 가야 된다. 남쪽에서 온 일행은 이미
도착한 상태, 군산시내에서 비응항은 시내버스 5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는데, 노선 수를 봐
서는 제법 많이 다닐 것으로 보인다. 허나 그것은 치명적인 함정. 그들은 각각 1~2시간 간
격으로 운행하고 있어 인구 28만을 지닌 도시의 시내버스치고는 다소  절망적인 수준이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시외/고속터미널을 경유하는 4개 노선의 버스 시간을 전날 확인해 두
었는데, 그새 시간표가 바뀌었는지 정보 오류인지 차가 좀처럼 오질 않는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지 뱃시간은 다가오지, 초조함으로 제대로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으며
일단 군산시내버스 상당수가 종점으로 삼는 군산대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군산대 후문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서둘러 택시를 낚아 비응도로 이동했다. 시내에서 바로 택시로 가도 되
지만 그럴 경우 막대한 요금 앞에 뒷목을 잡을 수 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택시는 나의 조급한 마음을 헤아린 듯, 비응도까지 새만금북로로 시원하게 질주했는데, 15
km 거리를 13분에 주파하는 위엄을 보인다. 허나 요금은 14,000원 약간 넘게 나와 늘 돈에
쪼들려 사는 나의 마음을 무척 쓰라리게 만들었지. 고군산군도와 선유도 때문에 이곳에 왔
는데, 그곳을 못본다면 애써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부득이 무리를 하
고 말았다.

비응도(飛鷹島)에 이르니 시간은 오히려 20분의 여유가 있다. 그래서 월명유람선 선착장까
지 안가고 비응항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상춘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선착장에서 일행들을
만나 10시 30분에 출발하는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  고군산군도 해상 유람 (비응도→선유도)

▲  만선의 꿈을 꾸는 어선들의 보금자리 ~ 비응항(飛鷹港)

고군산군도 유람선인 월명유람선은 비응항(비응도항)을 출발하여 횡경도와 방축도, 명도, 대장
도, 장자도 등을 차례대로 지나 선유도에 배를 대고 잠시 머물다가(1시간 정도 머무는 B코스와
4~5시간을 머무는 C코스가 있음) 다시 비응도로 돌아오는 코스로 비응도에서 선유도까지 약 1시
간, 나오는데 40~50분 정도 걸린다.
비응도에서 방축도와 명도를 경유하여 선유도까지 보통 30~31km 정도 되며, 고군산군도가 한반
도와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비응도와 오식도(筽篒島)가 섬에서 한반도의 일원이 되면서 서로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다. 그 이전에는 군산시내에 위치한 군산항에서 배를 타야 했는데, 꼬박 2시
간 이상 걸렸다. (지금은 1시간) 배를 대는 곳은 오로지 선유도 한곳으로 나머지 섬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나가며, 다른 섬에 발을 들이고 싶은 경우 군산여객선터미널이나 선유도에서 일
반 여객선을 이용해야 된다.
 
유람선은 2층으로 이루어진 배로 1층과 2층 모두 관광객들로 만원을 이룬다. 2층에는 간식과 음
료수, 술을 파는 매점을 비롯해 넓은 노래방 홀까지 갖추고 있는데, 배가 움직이는 내내 중/장
년층 단체객들이 노래방을 점거하며 노래를 부르고 신나게 춤판과 술판까지 벌인다. 일반 여객
선도 아닌 유람선이라 그러려니 해도 너무 지나치면 안하는 것만 못하다고 조금은 눈살을 찌푸
리게 한다. 게다가 그렇게 넋을 놓고 놀다가 만약 사고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하는지 정말 대책
이 안보인다. 물론 배가 움직이는 동안 심한 요동으로 인해 속이 울렁거리거나 현기증이 일어나
거나 심하면 멀미까지 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오가는 시간도 지루하니 그렇게라도 신나게 몸
을 움직이면 그런 것을 잠시나마 떨쳐버릴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어느 정도 선은 지켰으면 좋
겠다. (지켜서 손해볼 것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탄 배는 10시 반에 출발하는 것으로 승선이 지연되어 거의 10시 40분에 뱃고동을 울리며
미끄러지듯 비응항을 출발했다. 그렇게 한반도를 뒤로하며 고군산군도로 느릿느릿 다가선다.
우리는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파도로 인해 배가 좀 요동을 치면서 자연히 속에서 불편한
신호가 왔다. 오랜만에 배를 탄 것도 있겠지만 속이 계속 울렁거려 미칠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참으며 자리를 지키다가 결국 자리를 뜨고 1층으로 내려온다. 배를 타면서 속이 말썽을 부릴 때
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선창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쐬는 것이 매우 좋지. 1층으로 내려오니 2
층보다는 요동이 적어 불편한 속이 조금 진정이 되었고, 바깥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
내음에 심취하니 그나마 남아있던 불편함도 거의 가신다. 게다가 사진기를 꺼내 바다와 가까이
다가오는 고군산군도를 열심히 담으니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  비응도를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한반도에서 멀게만 느껴졌던
고군산군도가 그 모습을 서서히 비춘다.

▲  서해바다란 넓은 도화지에 대자연 형님이 점을 여럿 찍으니 그 점이
바로 서해바다의 꽃인 고군산군도이다.

▲  길게 드러누운 횡경도(橫境島)

고군산군도에 이르면 가장 먼저 횡경도가 마중한다. 새만금방조제가 생기기 이전에는 야미도(夜
味島)가 가장 먼저였지만 그곳이 방조제로 인해 육지와 끈끈하게 연결되면서 이제는 횡경도가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횡경도는 동서로 길쭉한 64.4만㎡의 조그만 섬으로 소횡경도를 거느리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
는 무인도로 낚시터로 유명해 낚시꾼들의 출입이 잦으며, 이 섬에 들어가려면 선유도나 야미도
에서 어선을 빌려타야 된다. 섬 중앙에는 할배바위(장자할배바위)란 바위가 있는데, 상투에 갓
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형상처럼 생겼고, 소횡경도에는 거북이가 목을 뺀 듯한 모습의 거북바
위와 등대가 있다.


▲  보다 가까워진 횡경도(왼쪽)와 소횡경도(오른쪽)

▲  등대가 있는 소횡경도 서쪽 부분 <왼쪽 벼랑이 거북바위>

▲  서남쪽에서 본 소횡경도와 횡경도
속세에서 잠시 나란 존재를 지우고 싶을 때 살짝 찾아와 아무도 모르게
며칠 정도 머물고 싶다. 아니면 내가 중심이 되는 나만의 나라를
이곳에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안될꺼야..)
 

▲  횡경도 해역에서 바라본 야미도와 신시도(新侍島)

▲  횡경도 해역에서 바라본 선유도와 관리도

▲  고군산군도의 방파제인 방축도(防築島)

횡경도를 지나면 방축도란 섬이 나타난다. 이 섬은 선유도 북쪽에 자리하여 고군산군도의 자연
산 방파제의 역할을 하는데, 그런 연유로 방축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유인도로 신라 후기에 바다의 제왕 장보고(張保皐)가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동아시
아의 드넓은 바다를 엄하게 호령하던 시절, 당나라 상인들이 신라에 가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들
어와 정착했다고 전한다. 허나 마을 뒷산에 7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어 이미 청동기시대(靑銅器時
代)부터 이 좁은 섬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섬 주변은 암석이 많고, 수심이 얕아서 조류가 거세고 파도가 강하다. 허나 낚시 장소로는 제격
이라 많은 낚시꾼들이 찾아오며 농어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그리고 해변에는 독립문바위와 시
루떡바위, 책바위 등 대자연이 빚은 여러 바위들이 포진해 섬의 아름다움을 더욱 수식해준다.


▲  방축도와 외부를 이어주는 방축도 포구
저 섬에도 잠시 두 발을 들였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방축도 해역에서 바라본 횡경도

▲  방축도 서부


▲  방축도의 명물 독립문바위가 중앙에 보인다.

방축도 서쪽 해안에 자리한 독립문바위는 조그만 돌다리나 고가도로처럼 생긴 참으로 기묘한 바
위이다. 서울의 독립문(獨立門)처럼 생겼다하여 독립문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북문바
위라 불리기도 한다. 바위 서쪽에도 산을 갖춘 섬 같은 땅이 보이는데, 겉으로 보면 별도의 섬
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방축도의 일부로 그 사이가 가늘게 이어져있다.


▲  말도(末島)와 명도(明島), 방축도의 서부
푸른 산과 바다 밖에는 안보이는 말그대로 망망대해(茫茫大海)의 고적한 섬이다.


우리를 태운 유람선은 방축도에서 남쪽으로 꺾는다. 그래서 명도와 말도는 이렇게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밝은 섬이란 뜻의 명도는 달과 해가 합쳐진 것처럼 물이 맑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사람들
이 살고 있는 아주 조촐한 섬으로 낚시터로 명성이 높으며, 섬의 야트막한 산에는 수십 가지의
각종 약초가 자라나 약산(藥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말도는 고군산군도의 종점이자 끝으로 가장 서쪽에 자리한다. 끝섬이라 불리기도 하며, 한반도
에서 고군산군도를 왕래하는 여객선의 종점으로 1909년에 지은 말도등대가 서해바다와 군산을
찾는 배들의 밤길을 밝혀준다.
이 섬은 조선 중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며, 심씨 성을 가진 판서(判書)가 귀양을 와서 밭
을 일구고 살면서 인구가 늘었다고 한다. 그가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소환된 이후, 섬 사람들
은 그의 공덕을 기리고자 영신당(靈神堂)을 지어 매년 11월에 제를 지냈으나 기독교가 이 섬을
휩쓸면서 당제(堂祭)는 끊기고 말았다.


▲  끝없는 서해바다 - 저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속인(俗人)들이
그렇게나 동경하던 극락이나 유토피아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해가 뜨고 지는 사이에 잠시 머무는 그만의 비밀 공간이 있는지도 모른다.

▲  관리도<串里島, 곶리도>

대장도 서쪽에 자리한 관리도는 곶리도라고도 한다. (어차피 한자는 같음) 원래 이름은 꽂지섬
이었다고 하는데, 섬의 모습이 전쟁에 출진한 장군들이 적의 몸에 화살을 쏘아 꽂아대는 모습이
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섬의 지형이 마치 꼬챙이처럼 생겼다
고 하여 꼭지도라고 부르다가 꼬챙이를 뜻하는 관(串)을 붙여 관리도(곶리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섬에는 완전무장한 장군의 모습 같은 투구봉, 말을 탄 무인의 모습을 한 질망봉, 승려로 이
루어진 승군(僧軍)의 모습을 한 중바위(중바우), 시루떡 모양의 시루봉 등이 있으며, 갖가지 바
위들이 섬을 수식하여 눈을 심심치 않게 한다. 섬 사람들은 대부분 전복을 양식하거나 고기잡이
로 생계를 꾸린다.

▲  관리도 해역에서 바라본 횡경도

▲  관리도 해역에서 본 선유도와 장자도


▲  장자도 서쪽에 홀로 떠있는 등대 - 등대 너머로 방축도의 동부와
동서로 길쭉한 횡경도가 보인다.

▲  대장도(大長島, 왼쪽 섬)와 장자도(오른쪽 섬)

선유도 바로 서쪽에 자리한 대장도는 남쪽으로 장자도와 이어져 있다. 이 섬은 옛날에 어떤 사
람이 섬을 1바퀴 둘러보고는 미래에 크고 긴 다리가 생길 것이라 말을 하고 섬을 떠났는데, 한
반도와의 연륙을 애타게 꿈꾸던 섬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며 섬 이름을 크고 긴 다리를 뜻하
는 대장도로 갈았다고 한다.
과연 그의 예언대로일까 대장도를 잇는 현수교(懸垂橋)가 생겨나 장자도는 물론 선유도까지 걸
어서 이동이 가능해졌고, 새만금방조제의 등장으로 고군산군도의 동쪽을 이루던 신시도와 야미
도 등이 연륙되었으며, 한반도에서 선유도를 붙들어 맬 다리 공사를 진행중이라 그것이 완성되
면 선유도는 물론 대장도까지 4발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된다. 그리되면 그야말로 크고 긴 다리
가 생기는 셈이다.

섬 동쪽에는 고군산군도에서 꽤나 이름난 장자할매바위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이를 등에 업은
형상으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바위는 못봤음)
조선시대(또는 고려시대)에 대장도에 살던 선비 부부가 있다. 남편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서울
로 과거를 보러 나갔는데, 부인은 몇달 동안 한결같이 장자봉에 올라 남편의 과거 급제를 기원
했다. 허나 남편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때를 한참이나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애가 탄 부인은
매일 아이를 업고 장자봉에 올라 남편을 실은 배가 오기를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다. 허나 과거 급제로 금의환향(錦衣還鄕)을 한 것이 아
니라 육지에서 첩실과 그를 통해 얻은 아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육지에 오랫동안 머물며 소실
까지 맞을 정도면 선비의 집안은 제법 형편이 되었던 모양이다.

남편의 일탈에 크게 뚜껑이 열린 부인은 눈물을 떨구며 뒤로 돌아서는 순간 등에 업힌 아이도
덩달아 발끈했는지 힘을 주었는데, 그 바람에 그들은 즉석에서 돌로 변했다고 한다. 한편 아내
와 아이가 그렇게 사라지자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횡경도에 들어가 그 벌로 돌이
되니 그 돌이 장자할배바위라고 한다.
이 전설은 대장도나 주변 섬에 살던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지만 순간의 실수로 어긋나버린 이
곳에 살던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은 것이 아닐까 싶다. 굳이 과거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도 육지에 일이 있어 나간 남편이 첩을 데리고 오면서 그들의 가정은 파탄이 났고 이에
발끈한 부인은 아이와 함께 장자할매바위에서 투신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아내와 자식이
죽자 발작한 남편도 횡경도에서 자살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이후 사랑하는 이와 이 바위에서 사랑을 약속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거나 말거나 속설
이 전해오며, 월명유람선은 대장도 뒷쪽으로 가기도 하고 선유도 사이인 앞쪽으로 가기도 하여
뒷쪽으로 가는 경우에는 이 바위를 만날 수 없다. 그날 운에 맡기는 수 밖에는...

그리고 대장도 남쪽에 자리한 장자도는 선유8경의 하나인 장자어화(壯子漁火)의 현장이다. 한때
멸치포구로 유명했고, 고군산군도 제일의 어항(漁港)으로 많은 배들이 심야에 장자도 앞바다에
서 고기를 잡느라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었는데, 그 배에서 비치는 불빛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
아내 '장자어화'가 된 것이다.

장자도는 옛날에 힘이 센 장사가 나왔다고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과 가재미와 장재미를 합쳐 장
자도라 했다는 설이 공존한다. 이곳 포구는 자연이 빚은 대피항으로 유명해 예전에는 고군산군
도와 서해바다에서 가장 잘나가는 섬이었다. 섬의 모습은 말 앞에 놓은 커다란 구유처럼 장자봉
이 우뚝 솟은 형국으로 서 있고, 그 앞에 선유도가 맥을 감싸안고 있어 큰 인재가 많이 나오는
지형이라고 하며, 북쪽의 대장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거의 한몸이 되었는데, 서해를 바라보는 사
자바위(사자봉)를 장자도를 지키는 바위로 여기고 있다.
섬 동쪽에는 장자대교를 통해 선유도와 이어져 있다. (차량 통행은 어려움)


▲  대장도 사자바위(사자봉)
사자나 고양이, 개가 땅바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같다. 오른쪽 봉우리에
머리에 해당되는 조형물만 갖다 붙인다면 영락없이 그 모습인데 말이다.

▲  다른 각도에서 본 대장도 사자바위(사자봉)

▲  선유도 인어등대


▲  장자도 해역에서 본 관리도와 말도, 방축도

▲  장자도와 선유도를 잇는 장자대교


♠  고군산군도의 중심지, 선유도(仙遊島)

▲  선유도선착장에서 바라본 선유대교(무녀도와 선유도를 이어줌)

고군산군도를 1시간 정도 배회한 유람선은 이 군도(群島)의 중심지이자 유일하게 상륙하는 선유
도로 들어와 선유도항(선유도여객터미널)에 고된 몸을 기댄다. 이윽고 여기서 1시간 정도 머무
니 반드시 출발시간을 지켜달라는 안내방송이 강하게 나온다. 오랜 뱃길에 심신이 지치거나 고
군산군도의 매력에 눈과 마음이 지나치게 호식(好食)을 누린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오면서 썰
렁했던 선유도항은 잠시나마 활기를 누린다.


▲  선유도항에 몸을 기댄 월명유람선

선유도는 고군산군도의 중심 섬으로 예전에는 군산도(群山島)라 불렸다. 섬 북쪽에 있는 봉우리
의 형태가 마치 2명의 신선(神仙)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후대에 신
선이 머무는 섬이란 뜻의 선유도란 고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섬의 면적은 2.13㎢로 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원래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것을
바다가 실어다준 흙과 모래로 하나의 섬이 되었다. 고려 때는 송(宋)나라와 동남아의 여러 제국
(諸國)을 오가는 중간 기항지로 관청을 두어 그들의 편의와 상거래를 관리했고, 조선 초기에 수
군기지인 군산진(群山鎭)을 두어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파견했다. 군산진은 조선 세종(世宗
) 때 지금의 군산시내로 이전되면서, 군산이란 이름도 같이 따라갔는데, 선유도와 주변 섬들은
옛 군산이 있던 곳이라 하여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597년에는 천하의 영원한 해신(海神),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진도 울돌목에서 불과 13척의 형
편없는 전력으로 서해바다로 진출하려는 왜선 330여 척을 맞아 분전 끝에 31척을 격파하고 92척
을 사용 불능으로 만들었으며, 18,000여 명의 왜군을 물고기 밥으로 만든 이른바 명량대첩(鳴梁
大捷)의 위업을 이루었는데, (아군의 피해는 왜군의 1%도 안될 정도로 매우 가벼운 수준, 이순
신이 탄 대장선에서 2명 전사, 3명 부상 / 다른 배도 비슷한 수준) 그 대첩을 치르고 잠시 몸을
추스리고자 선유도까지 올라왔다. (1597년 9월 21일)
그는 선유도에 이르자 몸살로 고생을 했으며, 거기에 태풍까지 몰려와 12일 정도 머물렀다. 그
리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완도 고금도(古今島)에 주둔하며 원균(元均)이 말아먹은 조선 수군
을 빛나게 재건했다.

선유도에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선유8경이 있다.
1. 선유도 해변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아름다움, 선유낙조(仙遊落照)
2. 가늘고 긴 선유도해수욕장의 명사십리(明沙十里)
3, 선유도로 유배를 온 충신들이 매일같이 올라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망주봉(望主峰), 특히 여
   름에 큰 비가 오면 망주봉에서 일시적으로 7~8개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지니 이것을 망주
   폭포(望主瀑布)라고 한다.
4, 선유도 모래사장을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내려 앉는 기러기처럼 생겼다 하여 평사낙안(平沙
   落雁)
5. 무녀도(巫女島)에 속한 3개의 무인도가 풍기는 아름다운 모습, 삼도귀범(三道歸帆)
6. 장자어화 (자세한 것은 앞의 장자도 부분 참조)
7. 신시도에 있는 월영봉(月影峰, 199m)의 가을 단풍이 매우 곱다고 하여 월영단풍(月影丹楓)
8. 방축도와 말도 등 12개 섬이 마치 투구를 쓴 군사들이 도열한 모습과 같다고 하여 무산12봉(
   巫山十二峰)


선유도는 명사십리로 유명한 선유도해수욕장을 비롯하여 망주봉, 옥돌해수욕장, 몽돌해수욕장,
수군절제사 선정비(善政碑) 등의 명소가 있으며, 선사시대의 아련한 흔적인 패총(貝塚, 조개더
미)도 있다. 또한 섬마을답게 오룡묘제, 장생제, 수신제 등의 마을 제사와 풍습이 있었으나 지
금은 모두 사라져 아쉬움을 건네며, 주변 섬과는 다리로 이어져 있는데, 동쪽으로 무녀도, 서쪽
으로는 장자도, 대장도와 이어져 있어 배가 아닌 두 다리나 자전거로 둘러볼 수 있다.

한반도와 선유도를 이어주는 나루터는 2곳으로 선유대교 북쪽에 자리한 선유도항이 가장 크다.
여기서는 월명유람선을 비롯하여 군산을 오가는 여객선이 운행하며, 망주봉 동쪽 선유3구 선착
장에서는 야미도에서 출발한 새만금유람선이 오간다. 허나 선유도를 한반도에 단단히 붙들고자
현재 연륙교를 짓고 있어 그것이 완성되면 선유도까지 편히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되며, 그때가
되면 군산에서 시내버스와 시외버스가 들어와 교통이 보다 좋아질 것이다.
허나 그로 인해 오랫동안 한반도와 고군산군도를 이어주던 해상교통의 희생은 어쩔 도리가 없어
군산을 오가는 여객선과 유람선의 노선 조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  선유도항 주변

선유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 선유도항은 여객선표를 구입하는 매표소를 비롯하
여 식당 몇 곳이 전부이다. 선유1구 마을과 선유2구 마을의 중간 지점이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골프장에서 많이 보이는 카트(Cart) 수십 대가 대기를 타면서 하얀 물결을 이루는데,
이들은 선유도와 무녀도에서 숙박업소나 식당을 하는 이들이 가지고 온 것으로 배를 타고 들어
온 관광객들에게 이거 타고 섬 1바퀴 돌라며 강하게 유혹의 메세지를 건넨다. 이곳에서 주어진
시간은 달랑 1시간, 아무리 선유도가 작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 두 다리에 의지해 돌아다닐 수
있는 범위는 좁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많이들 카트에 올라타는데, 대부분 4인승에서 8인승이
다. 카트는 대부분 카트 주인이 직접 운전하지만, 키를 맡겨 돌고 싶은 곳을 돌라고 하는 경우
도 있다. 물론 돈을 더 줘야 된다. 카트 승차비는 카트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보통 5천원 정도
한다.

우리 일행도 카트의 신세를 많이 졌는데, 나도 일행에 끼어 8인승 카트에 올라탔다. 카트 주인
은 식당/펜션을 하는 아줌마로 선유도해수욕장을 비롯한 선유도 북부를 1바퀴 구경시켜주었다.
코스는 선유도항 → 선유도해수욕장 → 망주봉 주변 1바퀴 → 선유3구 선착장 → 선유도해수욕
장 → 선유도항으로 딱 1시간에 맞는 코스였다. 길의 폭은 선유도항 주변을 빼고는 카트 2대가
교행하기에 적당할 정도로 좁았다.
선유도를 돌면서 선유도해수욕장이나 중간에 내려서 발자국을 남길 시간은 없었고, 오로지 카트
만 타고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몽돌해수욕장과 옥돌해수욕장, 장자도와 무녀도도 가고 싶었
지만 시간이 없으니 그건 어렵다. 배가 떠나면 한반도로 나가기가 힘들어진다.


▲  선유도항 주변 갯벌

▲  부드러운 곡선의 선유도해수욕장

선유도항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고군산군도의 아름다운 입술인 선유도해수욕장이 누워있다. 명
사십리(明沙十里)란 걸쭉한 별명까지 지닌 이곳은 약 1.5km의 백사장으로 10리는 커녕 5리도 안
되는 길이다. 서해에 있는 다른 해변과 마찬가지로 수심이 매우 얕아 바다로 100m를 나가도 겨
우 허리에 닿을까 말까 하며, 해가 그만의 공간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붉게 타오르는 낙조가
대장관을 이루어 선유8경의 하나인 선유낙조의 현장으로 명성이 높다.

물이 빠졌을 때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래톱 끝까지 갈 수 있으며, 둑방 건너편에 긴 자갈밭
이 펼쳐져 선유도해수욕장의 아름다움을 진하게 수식시킨다. 바다낚시와 갯벌체험, 모터보트,
바나나보트 등을 탈 수 있고, 샤워장과 뒷간, 방갈로, 파출소와 보건소, 숙박시설 등이 주변에
있어 여름 피서지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  여유로운 풍경의 선유도해수욕장 - 바다 건너로 진하게 보이는 산은
장자도의 지붕인 장자봉이다.


▲  선유도해수욕장 북쪽

▲  선유도해수욕장에서 선유3구로 가는 길

▲  바위산인 망주봉
(望主峰, 152m)

선유도해수욕장 동북쪽에 자리한 망주봉은 선유도해수욕장과 더불어 선유도의 소중한 꿀단지이
다. 2개로 이루어진 바위 봉우리로 조선시대에 이곳으로 귀양 온 충신들이 매일 같이 올라 서울
에 있는 군주를 그리워했다고 하여 주군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주봉이 되었다.
평소에는 그저 조용한 바위 봉우리지만 비가 많이 쏟아지면 산으로 떨어진 빗물이 암벽을 타고
약 7~8개의 물줄기를 이루며 아래로 떨어진다. 그 모습이 폭포와 같아서 망주폭포(望主瀑布)라
고 부른다. 그러니까 비가 많이 올 때만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폭포인 셈이다.


▲  선유도항에서 바라본 망주봉의 위엄


♠  고군산군도 마무리

▲  선유도를 떠나다

선유도를 항아리 겉돌 듯 둘러보고 유람선으로 돌아왔다. 떠날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짧은
자유시간을 이용해 선유도 곳곳으로 흩어진 상춘객들도 일제히 돌아와 선착장 주변은 다시 북새
통을 이룬다. 이번에도 늦게 온 몇몇 사람들 때문에 지정 시간보다 15분 정도 늦게 선유도를 출
발했다.

우리는 선유도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2층에 자리를 잡았는데, 한반도로 돌아가는 길은 대략
50분 정도 걸린다. 선유도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너울로 배가 조금 들썩였으나 이미 몸
에 익숙해진 터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피곤이 물결처럼 밀려와 나를 희롱하니 슬슬 졸리
기 시작한다. 허나 이제 언제 올지 모를 고군산군도와의 작별이 너무 아쉬워 갑판으로 나가 점
점 멀어져가는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의 뒷모습을 열심히 사진에 담았다. 시원하게 느껴졌
던 바닷바람도 이제는 차갑게 다가온다.


▲  선유도 선유3구 선착장 - 야미도에서 오는 새만금유람선이 주로 이용한다.

▲  조금씩 작아지며 흐릿한 점이 되어가는 고군산군도의 식구들

▲  새만금방조제로 한반도의 일원이 된 신시도(新侍島)

선유도를 가리고 선 신시도는 새만금방조제가 섬 동부를 지나가면서 한반도의 어엿한 일원이 되
었다.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면적이 4.25㎢에 이르며, 삼국시대 초반에 가락국(駕洛國
)에서 건너온 김해김씨 일가가 청어를 잡기 위해 제일 먼저 들어와 살았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
은 없다.
신라 후기에는 천하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옥구 자천대(紫泉臺)에 머물러 있다가 신시도
에 우뚝 솟은 월영산(月影山,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음)을 보고 천하 명산(名山)이라고 크게 칭
송했다. 그리고 그곳이 급히 땡겼는지 풍선(風船)을 타고 신시도로 건너가 그 봉우리에 단을 쌓
고 거처를 세워 산 이름을 월영봉(199m)이라 했다.
그는 여기서 매일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글을 읽는 소리가 어찌나 낭랑하던지 바다 건너 당나
라 상해(上海)까지 들렸다고 전한다. 물론 글 읽는 소리가 바다 건너 대륙에서까지 들렸다는 것
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나 그가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것은 사실인 듯 싶다.

신시도의 기둥인 월영봉은 선유8경의 하나인 월영단풍의 현장으로 단풍에 물든 월영봉의 자태가
마치 1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신시도란 이름은 왜정 때 지어진 것으로 새만금방조제가 지나
는 동쪽 대각산(187m)에 전망대가 세워져 있고, 그 전망대를 통해 대각산으로 올라가 고군산군
도와 새만금 일원을 두 눈에 조망할 수 있다.


▲  유람선이 남긴 하얀 물보라 자국 ▼

유람선은 푸른 도화지에 물보라를 튀기면서 요란하게 지나간 자국을 남긴다. 허나 그 자국은 이
내 일체의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다시 원래의 푸른 도화지로 되돌아간다. 나를 비롯해 배에 탄
사람들 모두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에 열심히 다녀간 흔적을 남겼지만 결국은 사진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이다.


▲  야미도(夜味島)와 신시도 사이 해역 - 그 사이로 바다의 만리장성이라
자화자찬하는 새만금방조제가 희미하게 보인다.

▲  야미도와 횡경도 사이에 외롭게 뜬 조그만 바위섬, 계도(鷄島, 닭섬)
이렇게 봐서는 닭처럼 생겼는지 꿩처럼 생겼는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  새만금방조제에 붙어있는 야미도

야미도는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한반도와 가까운 섬으로 군산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제일 처음 들
렸던 곳이다. 지금은 새만금방조제로 한반도의 일원이 되면서 신시도와 함께 편히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섬은 밤나무가 많아 밤섬이라 불렸는데, 왜정(倭政)이 이 섬 이름을 지을 때 밤나무를 뜻하
는 율(栗)을 안쓰고 무식하게도 밤을 깜깜한 밤으로 해석해서 야(夜)을 썼다. 그리고 밤은 맛있
다고 하여 맛있다는 뜻의 미(味)를 붙여 본래 섬과는 맞지도 않은 엉터리 이름인 야미도란 이름
을 지니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섬 이름을 뜯어고쳐야 되지 않을까?)
섬 서쪽은 고군산군도가 점점이 떠 있는 서해바다, 오른쪽은 새만금방조제에 갇혀버린 새만금호
로 근래에 일출/일몰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선유도를 출발하여 근 50분 만에 비응항으로 귀항했다. 배가 항구에 몸을 대기가 무섭게 상춘객
들이 우루루 육지로 몰려나오고 선착장에서 애타게 다음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들의 빈 공
간을 채워주면서 배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로 선유도로 뜰 준비를 한다.
우리는 관광버스에 올라타 새만금북로 주변에 있는 해물탕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지루할 정도
로 긴 새만금방조제를 넘어 부안 내소사(來蘇寺)로 넘어갔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고군산군도 선유도 찾아가기 (2014년 7월 기준)
ⓘ 군산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행 고속버스가 15~2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군산행 직행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부천, 성남, 수원, 오산, 천안, 청주, 대전(복합), 익산, 광주, 목포, 대구(서부
  ), 부산(노포동), 창원(마산)에서 군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평택역, 천안역, 대천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군산역
  하차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운행)
② 군산시내에서 배타는 곳까지
* 연안여객터미널 : 군산역과 군산시외고속터미널에서 7, 85번 시내버스 이용 (2노선 모두 1시
  간 간격으로 운행하며, 군산역에서 7번은 매시 25분, 85번은 매시 40분에 출발)
* 비응항(월명유람선) : 군산역에서 7, 85번 시내버스를 타거나 군산시외터미널에서 7, 8, 85번
  시내버스를 타고 비응항 종점 하차 (91번은 시외터미널 남쪽 팔마광장에서 승차)
③ 선박편
* 비응항 월명유람선(☎ 063-445-2240)에서 선유도행 유람선이 운항한다. 코스는 3시간짜리 B코
  스(2만원)와 6~7시간짜리 C코스(3만원)가 있으며, 유람선 출항시간과 요금, 전화예약은
  ☞ 월명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 군산연안여객터미널(☎ 063-462-4000)에서 선유도행 여객선이 1일 3~4회 다닌다. 주말과 피서
  철에는 대폭 증회하며, 자세한 출발시간표와 요금 문의는 위의 월명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 야미도 새만금유람선 선착장(063-464-1919)에서 선유도행 유람선이 1일 3~4회 다닌다. 코스는
  선유도에서 1시간 정도 머무는 B코스와 3~4시간 머무는 C코스가 있다.
  운항시간과 요금, 예약은 ☞ 새만금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④ 배타는 곳까지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비응항(월명유람선)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옥녀교차로 우회전 → 구 해양경찰서 4거리 우회전 → 대왕제지3거리 좌회전 → 연
  안여객선터미널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신시도입구3거리 좌회전 → 새만금방조제 → 야미도 새만금유람선

* 선유도해수욕장은 7월 초/중순에 개장하여 8월 하순까지 해수욕 손님을 맞는다.
* 선유도와 고군산군도 관련 자세한 정보는 ☞ 군산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참조 (월명유람선과
  새만금유람선 홈페이지를 참조해도 된다)
* 선유도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군 옥도면 선유도리 (문의 ☎ 063-454-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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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4년 7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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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상징을 거닐다 ~ 오륙도 (등대섬, 오륙도등대, 백운포)

 


' 부산의 상징, 오륙도(五六島)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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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륙도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영도와 조도 백운포 방파제

▲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영도와 조도

▲  백운포 방파제


여름의 제국(帝國)이 봄을 몰아내고 한참 성하(盛夏)의 기반을 닦던 6월 중순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인 부산(釜山)을 찾았다.
광안리 해변과 가까운 광안동(廣安洞)의 친한 형님 집에 여장을 풀고 달이 기울도록 회포(懷
抱)를 풀다가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오전, 간단한 차림으로 오륙도와 백운
포를 찾았다. 광안역에서 백운포까지는 거리도 가깝고 부산시내버스 39번(기장읍 교리↔용호
동)이 바로 앞에까지 데려다주니 접근성은 참 좋다.

백운포(白雲浦)는 용호동 남쪽 해안으로 체육공원과 남구국민체육센터, 해군기지가 있고, 서
쪽에는 숲이 무성한 신선대(神仙臺)가 있다. 신선대는 태종대(太宗臺)에 버금가는 해안 경승
지로 유명했으나 신선대컨테이너터미널과 항구 조성으로 옛날의 운치가 많이 녹아내렸다.


▲  백운포에서 바라본 오륙도

▲  백운포 방파제
백운포 둑방에는 많은 강태공(姜太公)들이 월척을 꿈꾸며 낚시삼매에 빠져있고
한국해양대를 품은 조도(朝島)와 영도 태종대가 그리 멀지 않게 바라보인다.


▲  수레들로 가득한 오륙도선착장 주차장


♠  부산의 아담한 상징, 오륙도(五六島)에 들어서다 - 명승 24호

▲  오륙도 - 명승 24호
(가장 왼쪽부터 방패섬과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

▲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천하

용호동 앞바다 부산만(釜山灣)에 두둥실 떠 있는 오륙도는 6개로 구성된 바위섬이다. 그렇다면
6개의 섬이란 뜻의 육도(六島)라 불려야 맞는 것 같은데 왜 5와 6을 같이 붙인 오륙도가 된 것
일까? 이는 섬의 구성원인 방패섬과 솔섬 때문이다. 이들은 썰물 때는 하나의 섬이 되지만 밀물
때는 엄연히 2개의 섬으로 나눠진다. 이렇게 기가 막힌 자연의 눈속임으로 하루에 2번씩 5개의
섬이 되었다가 6개의 섬이 되는 것인데, 그래서 그 이름도 오륙도가 된 것이다.

오륙도는 12만년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와 이어진 조그만 반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장대한 세
월이 흐르면서 거센 파도의 시달림에 따른 침식작용으로 한반도와 분리되었으며, 그마저도 내버
려두지를 않아 5~6개의 섬으로 쪼개졌다. (선착장 부근 지질과 방패섬의 지질적 구성이 동일하
여 옛날에 서로 이어져 있었음을 보여줌)


오륙도
란 이름은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 산천조(東萊府誌 山川條)에 '오륙도는 절영도(絶影
島, 영도) 동쪽에 있다. 봉우리와 뫼의 모양이 기이하고 바다 가운데 나란히 서 있으니 동쪽에
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되어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기록이
있어 조선 말 이전부터 오륙도라 불렸음을 보여준다.
 
섬의 구성원을 보면 육지와 가장 가까운 방패섬은 거센 바람과 파도를 막아준다는 뜻이며, 방패
섬과 거의 한몸인 솔섬은 섬 꼭대기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방패섬
과 솔섬을 합쳐서 '우삭도'라 부르기도 한다.
그 다음 수리섬은 갈매기를 노려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곳이란 뜻이며, 송곳섬은 작고 뾰족하게
생겨서, 굴섬은 오륙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커다란 굴이 있는데, 천정에서 흐르는 물로 능히 1
명 몫의 식수는 해결할 수 있다고 하여 굴섬이라 부른다.
등대섬은 오륙도 형제 가운데 가장 한반도에서 먼 섬으로 선착장에서 1km 해상에 있는데, 오륙
도등대를 달고 있어서 등대섬이라 불린다. 예전에는 섬에 평탄한 곳이 있어서 밭섬이라 불렸으
며, 등대 직원과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어 오륙도 유일의 유인섬이다.


오륙도 부근은 조류가 무지 빨라 이곳을 지나던 뱃사람들은 공양미(供養米)를 바다에 던져 해신
(海神)을 달랬다고 한다. 근래까지 용신제(龍神祭)를 지내기도 했으며, 신라 후기에는 동아시아
바다를 점유한 해상왕 장보고(張保皐)가 오륙도 앞 항로를 이용하기도 했다.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단골 소재로 많은 시와 노래에 등장했으며, 그중에서 노산 이은상(李殷
相)의 오륙도란 시가 유명하다. 부산을 드러내는 오랜 상징이자 관문으로 동해바다와 왜열도에
서 부산항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오륙도의 눈치를 보며 지나야 된다.

오륙도는 부산의 대표적인 명소이자 섬이지만 낚시터로도 명성이 높아 섬만 둘러보고 가는 관광
객에 비해 낚시꾼의 비중이 매우 높다. 오륙도 식구를 비롯하여 오륙도일자(一字)방파제(북항방
파제)에는 굳은 날씨를 제외하고는 늘 낚시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한반도에서 오륙도에 가려면 일단 용호동 오륙도선착장으로 가야된다. 거기서 오륙도를 이어주
는 유람선을 타면 되는데, 일정한 운항시간표는 없다. 대체로 30~50분 간격으로 다니며 휴일에
는 거의 20~30분 간격으로 자주 뜬다. 운항노선은 선착장을 출발하여 오륙도일자방파제를 먼저
들른 다음 등대섬과 굴섬, 수리섬, 방패섬을 두루 돌고 육지로 돌아온다. (운항순서는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음)
일반 관광객은 오륙도등대가 있는 등대섬에서 많이 승/하선을 하지만 낚시꾼들은 등대섬을 포함
해 배가 다니는 모든 섬과 방파제에서 승/하선을 한다. 등대섬과 방파제에는 배를 대는 공간이
있어 거기서 타면 되지만 나머지 섬은 따로 들리는 곳이 없다. 손을 흔들어 승차 의지를 밝히면
그 부근에 세워준다. 섬과 방파제를 찾은 사람들은 배가 끊기기 전에 나와야 되며, 그렇지 않으
면 섬에서 강제로 1박을 보내야 된다. 운항시간은 일출 30분 전부터 일몰 30분 후까지이다.

동해바다와 남해바다가 만나는 공간에 자리한 오륙도는 가까이로 신선대와 백운포를 비롯해 조
도와 영도, 태종대가 보이며, 동구(東區), 해운대 일대가 두 눈에 박힌다. 태종대와 더불어 부
산의 해금강(海金剛)으로 전혀 손색이 없으며, 예전에는 부산 지방기념물 22호였으나 2007년 문
화재청 지정 명승 24호로 승진되었다.

▲  방패섬

▲  수리섬과 송곳섬

▲  굴섬

▲  송곳섬

※ 오륙도 찾아가기 (2014년 1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경성대부경대역(5번 출구를 나와서 부경대 방면)에서 27, 131번 시내버스를
  타고 오륙도SK뷰 후문에서 하차, 오륙도 선착장까지 도보 5분
* 부산지하철 1호선 부산역(10번 출구)에서 27번 시내버스 이용
* 오륙도 선착장에서 오륙도 유람선이 일출 30분 전부터 일몰 30분 후까지 운항한다. 2척이 운
  항하며, 운임은 어른 1만원, 어린이는 5천원이다. (유람선 문의 ☎ 051-626-8953)
*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산936~941


▲  선착장 주변 풍경

▲  선착장 서쪽 풍경

오륙도선착장을 비롯한 오륙도SK뷰아파트 주변은 2008년까지만 해도 용호농장과 조그만 마을이
전부인 도심 속 시골이었다. 마을 북쪽에는 이기대를 품은 장산봉이 있고, 오륙도와 이기대, 신
선대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해안 풍경의 갑(甲)을 자랑하던 곳이다.
개발의 칼질은 정말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평화롭던 현장이었는데, 개발의 물결이 소리소문도
없이 밀려오면서 마을과 농장, 숲을 아작 내고 거대한 옥의 티인 아파트가 무차별 솟아났다. 그
리고 선착장 입구까지 넓은 신작로(新作路)가 들어섰으며, 개발의 칼질이 여기저기 난도질을 하
면서 아름다운 풍경에 적지 않은 손상을 주었다. 굳이 여기까지 밋밋한 회색빛 고층아파트를 심
어 오륙도를 눌러야 했는지 관계 당국 철밥통들의 수준이 참 의심된다. 그냥 산듯하게 공원으로
꾸며 태종대나 암남공원에 버금가는 해안 관광지로 꾸미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오륙도를 제
외하고는 주변이 너무 다르게 변질되어 버린 것이 안타깝다.


▲  바위를 희롱하며 하얀 물보라를 자아내는 바다

오륙도선착장 주변은 오륙도를 찾은 탐방객과 낚시꾼들로 북새통이다. 그들이 끌고 온 수레들로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고, 바닷가와 선착장, 주차장 주변에는 해산물을 파는 길거리 행상들로 조
그만 먹거리촌을 이룬다.

선착장 매표소에서 오륙도 뱃표를 구입하니 어른 1인당 무려 10,000원씩이나 한다. 운임은 왕복
요금으로 섬과 방파제에서 다시 한반도로 나올 때는 그냥 타면 된다. 뱃표를 사들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배를 기다리는데, 오륙도 덕분에 정말 간만에 바닷배를 타본다.


▲  한반도와 오륙도를 이어주는 오륙도 유람선
낚시꾼과 관람객들의 소중한 발이다.

10분 정도 기다리니 드디어 배가 선착장에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방파제와 오륙도에서 주섬주섬
태운 사람들이 말끔히 내리자 선장의 안내로 관광객과 낚시꾼들이 승선을 한다. 그렇게 약 20여
명의 승객을 태운 배는 승선이 끝나자 바로 뱃고동을 울리며 바다로 향한다. 우리는 갑판으로
나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수시로 모습을 달리하는 바다와 오륙도를 열심히 사진에 담았다.

배는 코앞에 보이는 오륙도를 등 뒤에 두고 서쪽에 있는 오륙도일자방파제(북항방파제)로 먼저
갔다. 섬처럼 떠 있는 길다란 방파제에는 이미 강태공들로 자리가 없을 지경인데, 여기서는 오
륙도보다 영도가 더 가깝게 보인다.
방파제에서 볼일을 마친 배는 잠시 잊었던 오륙도로 방향을 돌려 오륙도의 핵심이자 가장 남쪽
인 등대섬에 뱃머리를 댄다. 여기서 낚시꾼을 제외한 관광객이 죄다
내렸다.


▲  잠시 뒤를 바라보는 여유 - 오른쪽 벼랑에 오륙도 스카이워크라는
새로운 명물이 생겼다. (내가 갔을 당시에는 그딴 것은 없었음)


♠  부산의 조그만 해금강, 오륙도 둘러보기

▲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방패섬과 솔섬 (우삭도)
육지와 제일 가깝지만 수영으로 가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일자방파제
다음으로 낚시꾼들이 제일 많이 포진한 곳으로 방패섬 앞부분에
넓고 평탄한 곳이 있어 안전하게 낚시하기에 좋다.

▲  유람선에서 바라본 방패섬(왼쪽)과 솔섬(오른쪽)
썰물 때라 둘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솔섬은 머리 꼭대기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솔섬이라 불리는데, 온갖 풍우를 겪으며 의연함을
잃지 않은 키 작은 소나무의 패기가 무척 돋보인다.

▲  오륙도 인근의 옥의 티, 오륙도SK뷰아파트
허허벌판에 무책임하게 세운 도시처럼 보인다. 저 아파트를 지울 수 있다면
이기대를 품은 장산봉이 속 시원히 미소를 보일텐데..

▲  오륙도와 한반도 사이로 아련하게 보이는 저곳은
해운대 지역이다.

▲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사이로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이 포근히 둥지를 닦았다.

▲  오륙도일자방파제(북항방파제)
방파제는 배를 대는 곳이 마련되어 있어 거기서 여기서 승/하선을 하면 된다.
방파제 너머로 조도와 영도 일대가 바라보인다.

▲  두 푸른색의 만남
아무리 천재화가가 그린다고 해도 결코 나오기 힘든 자연의 색깔~~
사람이 만든 색깔이 어찌 대자연이 만든 천연의 물감만 하리?

▲  오륙도일자방파제에서 바라본 오륙도
오륙도선착장에서 그렇게나 가까이 보이던 오륙도와 저만치나 떨어져 버렸다.

▲  수리섬(왼쪽)과 송곳섬
수리섬은 독수리들이 갈매기 사냥을 위해 모여드는 곳이라 하며, 송곳섬은
작고 뾰족하게 생겨서 불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수리섬은 낚시를
원할 경우 배를 세워주지만 가파른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낚시 장소로는 위험하다.

▲  송곳섬과 굴섬
굴섬은 오륙도 형제 가운데 가장 큰 섬으로 한 사람 몫의 식수가 나오는
커다란 굴이 있어서 굴섬이라고 한다. 섬 대부분이 깎아지른 절벽이라
배는 섬 서쪽에만 잠깐 멈춰준다.


▲  송곳섬의 위엄
바다가 오랜 세월을 빚은 대작품 앞에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찍기 밖에는 없었다.


▲  수리섬 쪽에서 바라본 굴섬
굴섬은 발디딜 평평한 곳이 없는 각박한 경사의 바위섬이다. 허나 그런
척박한 섬에도 불구하고 월척을 꿈꾸는 낚시꾼들의 발길은 막지 못한다. 
비록 위험하긴 하지만 방패섬이나 백운포보다는 인적이 적고
수심이 깊으니 월척의 확률은 그만큼 높아진다.

▲  도시와 바다가 어우러진 부산의 자화상과
굴섬에 뱃머리를 대고 낚시꾼을 태우는 유람선


♠  오륙도등대(五六島燈臺)와 등대섬 둘러보기

▲  오륙도등대와 등대섬

등대섬은 오륙도의 백미로 오륙도등대를 품고 있다. 예전에는 정상에 평탄한 곳이 있어서 밭섬
이라 불렸는데 지금은 등대섬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명함을 내밀고 있다. 아무래도 등대가 있으
니 자연히 등대섬으로 강하게 각인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오륙도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한 등대섬 꼭대기에 등대(燈臺)가 둥지를 튼 것은 1937년이다. 그
해 11월 최초 점등을 했으며, 1971년에는 무신호(전기폰)를 설치했고, 1998년 등탑(燈塔)을 개
량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크게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래서 마치 섬을 누르고 앉은 거대한 요새처
럼 다가온다. 그해 12월에는 등명기(燈明機)를 개량했으며, 등대 높이는 53.35m, 면적은 3,416
㎡이다.
예전 오륙도등대 사진을 보면 야트막한 하얀 등대건물이 마치 둥지에 새가 앉은 듯 사뿐한 모습
이었으나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규모도 커지고 등탑의 높이도 상당해져 오히려 섬을 능가하는 수
준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예전보다 주변 풍경과의 어울림이 좀 떨어져 보인다.
 
유람선이 등대섬 뱃터에 머리를 대자 우리는 섬에 상륙했다. 뱃터는 승/하선이 가능하도록 벼랑
아랫쪽에 설치된 것으로 여기서 등대까지는 계단을 올라야 된다. 계단 중간에는 섬의 동쪽 해변
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며, 거기서 굴섬의 남쪽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등대는 가운데 전망대까지만 오를 수 있는데, 등탑은 출입금지이며, 현재 해양항만청 소속 등대
직원들이 2인1조로 3박4일 간격으로 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속세와 무척 가깝긴 해도 배를 타
고 들어가야 되는 엄연한 외딴섬이니 이곳 등대지기도 외로운 신세를 면할 수는 없다.


▲  등대섬 뱃터에서 등대로 오르는 꼬불꼬불 계단길
길이 각박하고 계단 밑은 바닷물이 넝실거리는 벼랑이므로 절대 주의해야 된다.

▲  등대섬 동쪽에서 바라본 굴섬의 옆구리

바다 파도가 허구헌날 오륙도를 쪼아대며 심술을 부리니 육지에서 떨어져 나가고 다시 5,6개의
섬으로 조각난 것이 십분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파도가 저리 보면 약하고 부드러운 것처럼 보여
설마 바위의 피부를 깎겠나 싶지만 띠끌 모아 태산이라고 저런 파도가 1~2번도 아닌 무량의 세
월 동안 친다고 생각해보라. 그 파도 앞에 성할 수 있는 것은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


▲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백운포와 신선대

▲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부산시내 (영도와 중구 일대)
하늘을 수놓은 구름의 모습이 가히 예술이다.

▲  지적측량기준점

▲  지적측량기준점에 적힌 내용들

▲  부산 앞바다를 밝히는 등탑
등탑의 높이는 27.55m에 이른다.

▲  조망이 일품인 등대 전망대에
마련된 8각형 쉼터


▲  등대 전망대에서 굽어본 천하
바다 한가운데로 오륙도일자방파제(북항 방파제)가 보이며, 그 뒤로 건물숲을
이루고 있는 동구와 중구 일대가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  등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영도와 조도
왼쪽에 길게 누운 산이 태종대이다. 오륙도를 품은 용호동에서 영도까지는
육상으로 가면 제법 거리가 되지만 바다로 가면 정말 지척이다.
(오륙도에서 영도까지는 4km 남짓)

▲  망망대해에 뜬 외로운 배 1척

▲  오륙도등대의 위엄 ▼


▲  우리가 탈 배가 굴섬 인근으로 오고 있다.

오륙도와 바다의 아름다움에 취해 등대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등대 관리인이 다들 어디로
갔는지 얼굴을 거의 내밀지 않아 전망대와 후미진 곳에서 요란하게 판을 벌이며 밥과 술을 먹는
이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그들을 수용하거나 간단하게 차 1잔, 간식 1끼 때울 수 있
는 매점이나 까페 같은 것이 있었다면 돈도 좀 벌고, 관광객들도 간단하게 출출함을 달랠 수도
있고, 아무데서나 음식판을 벌이며, 거기서 버려지는 쓰레기도 줄일 수 있고, 정말 금상첨화였
을텐데, 등대의 생각은 아직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예전 가덕도(加德島)등대(☞ 관련글 보러가기) 이후 2번째 등대 방문인 오륙도 등대, 기분 같아
서는 속세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며칠 머물고 싶었다. 허나 내가 있어야될 곳은 이런 외
딴섬이 아닌 속세이다. 고독한 등대지기가 될 여유도 없이 한반도로 나가는 유람선이 다가와 승
선을 보챈다. 그래서 속세에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몸을 싣고 등대와 오륙도와의 인연을 모두
정리하며 육지로 나왔다.

대자연의 시리도록 아름다운 작품을 감히 인간의 하찮은 말과 단어를 빌려 표현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어쩌면 자연에 대한 불경죄인지도 모르며,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는 단어가 없을
수도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 훨씬 이상으로 알차고 아름다운 섬이자 남해와 동해의 위대한 합
작품, 오륙도 나들이는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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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1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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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서해바다 나들이 ~~~ (신진도, 마도, 서해갯벌, 안흥성...)

 


' 태안(泰安) 서해바다 나들이 '
신진도 갯벌
▲  신진도 갯벌


천하를 꽁꽁 버무리던 겨울 제국의 위엄이 잠시 느슨해진 2월 중순에 태안반도(泰安半島)
에 중심인 충남 태안(泰安)을 찾았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태안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약 2시간을 달려 태안의 관문인 태안
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신진도(마도)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다시 40여 분을 달
려 신진도(新津島) 포구에 두 발을 내린다.


♠  안흥 앞바다에 떠 있는 그림 같은 섬
한반도와 다리 하나로 이어진 신진도(新津島)

▲  안흥항에서 바라본 신진도 동쪽

▲  한반도와 신진도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신진대교

신진도는 태안반도의 일부를 이루는 정죽반도(程竹半島) 서쪽 끝으머리에 달려있다. 안흥과 마
주보고 있는 이 섬은 원래 안흥과 이어진 육지라고 하는데, 자연의 위대한 힘에 강제로 섬으로
분리되면서 나루터가 새로 생기는 통에 신진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신진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성종(成宗) 시절로 해안 방비를 위해 만호청(萬戶廳)을
이곳에 설치했다고 하며, 고려와 남송(南宋)을 오가는 고려 사신과 남송 사신이 이곳에서 잠시
닻을 접고 산제(山祭)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섬은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은 후망봉(後望峰)이란 봉우리로 높이가 132m
이다. 섬의 둘레는 약 7km이며, 태안반도와 마주하는 동쪽은 물굽이가 크게 들어와있고, 동남부
해안은 해식애(海蝕崖)를 이룬다.
푸른 송림과 기암괴석, 그리고 자연의 보고(寶庫)인 갯벌이 어우러진 이곳에 개발의 물결이 밀
려온 것은 1979년이다. 1978년 안흥항이 1종항구로 지정되었는데, 안흥항이 좁아서 총 222억원
을 들여 신진도와 마도, 부억도를 연결하여 외항(外港)을 조성해 어업전진기지로 삼았다. 1989
년 58,000평을 매립 3만평에 배후지를 조성하여 숙박시설과 식당을 만들었다.

1995년에는 한반도와 신진도를 잇는 신진대교(新津大橋)가 개통되어 다시 한반도의 어엿한 일부
가 되면서 더 이상 바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수레와 두 다리로 편히 오갈 수 있게 되었으며,
, 다리의 개통으로 정죽반도 서쪽 끝이 안흥에서 신진도를 거쳐 마도까지 연장되었다. 신진도와
마도는 1987년 7월 방파제가 축조되어 서로 끈끈하게 이어졌고, 썰물 때는 안흥과 신진도 사이
에 바닷길이 열리기도 한다.
섬을 이루는 마을은 섬 북서쪽의 신진마을과 동쪽 아래목마을이 있으며,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한다. 주요 수산물은 멸치와 삼치, 우럭 등이 있으며, 일부는 양식업(養殖業)도 한다. 신진
도항은 신진항, 안흥외항으로도 불리며, 2종항구로 800여 척의 어선을 수용할 수 있다.

신진도는 딱히 명소나 해수욕장은 없지만 신진도항 뒤쪽에 솟은 후망봉에 오르면 신진도항과 마
도, 안흥항을 비롯하여 가의도(賈誼島)와 정족도, 목개도 등 망망대해(茫茫大海)에 그려진 조그
만 섬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조망(眺望)이 천하일품이다. 또한 물고기가 잘 잡혀 바다낚시터로도
명성이 높으며, 민박과 모텔, 해수탕 등 숙박시설과 편의시설이 많고 조개구이와 생선회 등을
취급하는 식당이 많아 1박2일 야유회 등으로 놀러오기 적당하다.
비록 한반도와 이어진 가까운 섬으로 외딴섬의 내음은 많이 씻겨내려갔지만 대신 언제든지 편하
게 안길 수 있는 장점이 섬의 관광 가치를 높여주었다.

신진도 서쪽에 자리한 마도(馬島)는 그 모습이 달리는 말과 비슷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으로 마
섬, 말섬 등으로 불린다. 면적은 0.25㎢로 매우 작으며, 안흥8경의 하나인 마도기암(奇巖)이 있
는 곳이다. 약 20세대의 주민이 거주하며 신진도와 마찬가지로 어업과 숙박업으로 생계를 꾸린
다. 바다낚시로 유명하여 참조기와 새우, 갈치 등이 많이 잡히며, 신진도와 이어주는 방파제 서
쪽에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유물과 조개더미가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산지
에는 보리수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하며, 태안에서 신진도행 군내버스가 마도 포
구까지 들어간다.

※ 신진도, 마도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 남부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태안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강남은 1
  일 11회, 남부터미널은 30~4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은 1일 4회 운행)
* 인천, 부천, 수원, 안양, 성남, 고양, 대전(동부), 천안, 아산, 군산, 공주에서 태안행 고속/
  직행버스 이용
* 태안터미널에서 신진도(마도)행 군내버스가 1일 19회 운행한다. (20시 막차는 신진도주차장까
  지만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해안고속도로 → 서산나들목에서 서산방면 32번 국도 → 태안군청 → 장산교차로에서 안흥
   방면 603번 지방도 → 신진대교 → 신진도, 마도

* 서해의 해금강(海金剛)으로 일컬어지는 안흥8경의 현장을 1바퀴 도는 안흥유람선(☎ 041-674-
  1603)이 신진도항에서 출발한다. 운행코스는 5가지로 사자바위와 가의도, 독립문바위, 정족도
  , 목개도 등을 돌며 소요시간은 1시간에서 3시간 정도이다. 비정기선으로 30명(또는 60명) 정
  도가 모이면 출발한다. 자세한 운행정보는 이곳을 클릭
*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신진도리


▲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을 다독거리는 신진도항(안흥외항)
신진도항은 새우깡의 제왕 갈매기를 몰고 다니는 어선들로 늘 부산하다.


▲  신진도항에 정박한 어선을 보호하는 방파제가 보인다.
왼쪽 방파제에는 빨간 등대가 오른쪽에는 하얀 등대가 나란히 자리하여
바다의 밤길을 비춘다.

▲  빨간 등대가 있는 방파제 왼쪽 언덕은 부억도의 옛 흔적이다.
부억도는 마도와 더불어 신진도 주변을 장식하던 섬이었으나
신진도항을 만들면서 신진도의 일부로 흡수되고 말았다.

▲  포구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어선들

▲  신진도항 북쪽에서 바라본 마도의 모습

▲  신진도와 마도를 이어주는 방파제길 ▼
갯벌을 메꾸고 돌을 차곡차곡 얹혀 두 섬을 하나처럼 끈끈하게 이어준다.


▲  마도에서 바라본 신진도항

▲  신진도 북쪽 갯벌
갯벌은 서해바다의 매력이자 자연의 보고이다. 그런 갯벌이 인간의 의해 계속 축소되고
사라지고 있으니 이러다가 갯벌이란 단어가 낯설어지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그날이 되면 인간들도 감히 무탈하지는 못할 것이다.

▲  마도 갯벌에 고단한 몸을 기대며 휴식을 취하는 어선들

▲  신진도와 마도를 잇는 방파제에서 바라본 신진도항
마을 뒤쪽에 보이는 산이 신진도의 진산(鎭山)인 후망봉(132m)

신진도와 마도는 딱히 흥미가 나질 않았다. 신진도항 남쪽 방파제와 후망봉을 비롯해 신진도와
마도 구석구석을 살펴야 도리겠지만 별로 땡기지도 않고 그렇게 하기도 귀찮았다. 그래서 1시간
정도 머물고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인연에 내던지며 육지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
고 안흥항으로 넘어갔다.


▲  안흥항과 신진대교

안흥항(안흥내항)은 정죽반도 끝에 자리한 항구로 서해 중부의 중심 어항(漁港)이자 충남의 대
표적인 항구이다. 백제(百濟) 때부터 항구의 역할을 했다고 하며, 백제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5
세기 이후 이곳을 중원대륙 진출의 주요 기지로 삼으면서 많은 무역선과 수군이 들락거렸다.

안흥항의 확장을 위해 신진도에 외항이 조성되면서 많은 어선들이 그곳으로 터를 옮기면서 예전
에 비해 많이 한가해졌다. 그 이후로 안흥항은 내항(內港), 신진도항은 외항으로 불린다. 허나
여전히 어항의 역할은 녹슬지 않았으며, 신진도항도 엄연히 따지만 안흥항의 확장판이다.

이곳은 바다낚시터로 명성이 높아 많은 강태공(姜太公)들이 월척을 꿈꾸며 찾아온다. 항구 앞바
다는 수심이 60~70m에 이르러 우럭이 많이 잡히며 우럭낚시의 본산으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서
해의 해금강으로 불리는 안흥8경의 현장이 안흥 앞바다에 보석처럼 박혀있으며, 안흥 뒷산에 조
선 중기에 축성된 안흥성이 남아있다.


▲  안흥항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서해바다의 넓은 가슴
저 바다에 조그만 배를 띄우고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극락의 세계를 찾아 떠나고 싶다.


♠  서해바다를 지키고자 조선 중기에 축성된 성곽 ~ 안흥성(安興城)
충남 지방기념물 11호

▲  안흥성 북문인 감성루(坎城樓)

안흥성은 1655년(효종 6년)에 축성된 석성(石城
) 겸 산성(山城)으로 태안8경의 2경으로 꼽히는
명승지이다.
효종 시절에 김석견(金石堅)이 서해안을 방어하
고자 안흥진성(安興鎭城)의 축성을 강하게 건의
하자 효종(孝宗)은 지경연사(知經筵事) 이후원(
李厚源)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에 이후원이
'안흥은 바다를 낀 천연의 요새로 군사를 주둔
하고 양곡을 저장하면 안으로 강도(江都)의 표
리(表裏)가 되고 밖으로는 호남과 영남을 통제
할 수 있습니다'

▲  감성루(북문)의 뒷모습

그 말을 들은 효종은 옳거니 여기며 바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게 명을 띄워 안흥성을
쌓게 했는데, 이때 인근 19개 고을의 정남(丁男, 16~60세 남성)이 징발되었다.

안흥성의 본래 이름은 안흥진성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안흥성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종3품
무관인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주둔하여 성을 지켰다. 1894년 동학운동(東學運動)이 일
어나자 동학군(東學軍)과 관군과의 싸움으로 성내(城內)의 건물과 문루가 상당수 파괴되었으며,
동학군이 진압된 이후 성은 버려져 방치되었다. 그 이후 성내 건물은 모두 파괴되고 그 자리에
는 마을이 들어섰다.

성의 둘레는 1,714m, 높이는 3~4m이며, 동문<수성루(壽城樓)>과 서문<수홍루(垂虹樓)>, 남문<복
파루(伏波樓)>, 북문<감성루(坎城樓)>의 4문을 두었다. 허나 지금은 북문만 문루(門樓)가 남아
있으며, 나머지는 성문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성곽(城郭)은 북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진
하게 남아있으며, 성곽의 방어시설인 여장은 모두 분실되었다. 북문은 바다에 접해있어 지대가
낮으나 서문과 남문, 동문은 산등성이에 자리해 있으며, 북문에서 동문과 서문으로 가는 성곽은
경사가 급하다.
서문에 이르면 쪽빛의 서해바다가 눈과 마음을 시리게 만들며, 여기서 산을 내려가면 바로 안흥
항으로 이어진다. 동문을 지나면 산과 논, 바다가 어우러진 태안 정죽리의 산하가 거침없이 펼
쳐지는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의 경사가 다소 급해 내려갈 때 주의가 필요하다.


▲  안흥앞바다를 굽어보는 서문(수홍루)
문루인 수홍루는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녹아 없어지고 성문만 남았다.
고색의 떼가 잔뜩 낀 성곽은 수천년 묵은 고고학 유적지를 연상케 한다.

▲  서문 북쪽 성곽

▲  서문 안쪽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서 차곡차곡 쌓인 성곽은 주먹처럼 조그만 돌부터 성인 남자의 몸집만한
커다란 돌까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꽉 여물어져 있다. 고색의 무게가 진하게 입혀진 성곽에는
수풀이 무성히 자라 허전한 윗부분을 마치 대머리를 덮듯 따스하게 덮어준다. 딱딱한 성돌에는
이곳의 청정함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이끼가 여기저기 뿌리를 내리며 기생을 한다. 맨돌에도 식
물이 살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의 위대함에 그저 입만 벌어질 뿐이다.
수천 명의 사람을 동원하여 만든 안흥성, 돌로 쌓아서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지만 자연 앞에서는
역시나 장난감 성에 불과하다. 동학운동 이후 버려진 성은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해 이렇게
황량하게 변한 것이다. 사람이 만든 것은 그것이 집이든 성이든 사람의 손길이 꾸준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천하제일의 고구려 성이라도 자연 앞에 무책임하게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
제이다.


▲  성돌에 낀 오랜 세월의 주름살
이끼 등의 지의류(地衣類)가 성돌에 뿌리를 내려 그들만의 조그만 나라를 꾸린다.

▲  옛 수홍루의 기와조각이 하나의 화석(化石)이 되어 땅에 박혀있다.

▲  서문에서 바라본 안흥앞바다 (서해바다)
성내마을 사람들은 안흥으로 갈 때 서문을 거쳐간다.

▲  안흥성이란 둥지에 포근히 안긴 성내마을

성내 한복판에는 성내마을이 포근히 자리해 있는데, 20호 정도가 산다. 마을 서쪽은 밭이 약간
펼쳐져 있고, 남쪽은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을 금하는 철조망이 눈을 심히 불편하게 한다. 마을
동북쪽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태국사란 조그만 절이 터를 닦았다.


▲  동문에서 바라본 천하 (정죽리 일대)

성내 한복판에는 성내마을이 포근히 자리해 있는데, 20호 정도가 산다. 마을 서쪽은 밭이 약간
펼쳐져 있고, 남쪽은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을 금하는 철조망이 눈을 심히 불편하게 한다. 마을
동북쪽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태국사(泰國寺)란 조그만 절이 터를 닦았다.


▲  안흥성의 동문(수성루)

동문은 서문과 마찬가지로 문루는 녹아 없어지고 뻥뚫린 성문만 있다. 그래도 서문에 비해서는
성문의 천정이 매우 두텁다. 성문 사이로 산과 논이 어우러진 정죽리의 산하가 눈에 들어온다.


▲  동북쪽 성벽에 터를 일군 태국사(泰國寺) - 전통사찰 47호

태국사는 법당과 요사가 전부인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절로 특이하게 성벽 위에 둥지를 틀었다.
이 절은 백제 무왕(武王)이 국태보안(國泰保安)을 빌고자 634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절
이름도 태국사라고 하는데, 관련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편할 것
이다.

조선 세종(世宗) 때에는 명(明)나라 사신의 무사항해를 빌고자 세종의 명으로 중창했다고 하나
명나라 사신이 굳이 이곳을 지나갈 이유가 없으니 그 또한 신뢰가 떨어지며, 임진왜란 때는 승
병이 주둔했다고 한다. 1894년 동학군과 관군의 싸움으로 안흥성이 피해를 입자 그때 절도 파괴
되어 오랫동안 흔적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1982년에 비로소 중창되었다.
고색의 내음은 매서운 세월의 태풍 앞에 모조리 흩날리면서 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다만 오
랜 내력이 인정되어 충청남도에서 전통사찰로 지정했다.

안흥성 동북쪽 높은 산자락에 자리해 있고 나무가 별로 없어 산사의 내음은 많이 떨어지나 성내
에서 제법 높은 곳에 있다보니 조망은 제법 괜찮다. 허나 경내에는 그 흔한 석탑이나 승탑 등의
석물은 없어 맞배지붕을 지닌 법당이 아니었다면 그냥 개인 주택으로 오인하기가 쉽다.

태국사를 둘러보니 마도를 출발하여 태안으로 가는 버스시간이 5분도 남질 않았다. 그걸 놓치면
꼼짝없이 1시간 이상을 허공에 내던져야 된다. 그러면 천상 안흥성을 또 1바퀴 돌아야 되겠지. 
절에서 북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제법 비탈진 길인데, 그 길을 정신없이 내달려 간신히 버스를
잡아타고 속세로 나갔다.

안흥성은 태안8경의 하나로 꼽히는 태안의 주요 관광지긴 하지만 편의시설과 두 발을 쉴 수 있
는 휴식처가 없다. 게다가 성곽길이 제대로 정비되어있지 않아 성곽을 돌 경우 걸음에 조심을
요한다.

▲  태국사 법당(法堂)

▲  태국사 요사(寮舍)

※ 안흥성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태안터미널에서 신진도(마도)행 군내버스를 타고 죽리(성안)에서 하차하면 바로 북문이다. 안
  흥에서 내릴 경우 산길을 이용하여 서문으로 오를 수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해안고속도로 → 서산나들목에서 서산방면 32번 국도 → 태안군청 → 장산교차로에서 안흥
   방면 603번 지방도 → 안흥성
*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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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 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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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종로구 내부 (북악산~인왕산 줄기 남쪽)
1. 경복궁
2. 국립고궁박물관 (경복궁 남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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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서울 종로구 외곽 (북악산~인왕산 줄기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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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평창동 박종화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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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북한산둘레길 평창마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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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자하미술관

 

 

 3. 서울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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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덕수궁돌담길
 3. 서울시립미술관
 4. 옛 러시아공사관터와 정동공원
 5. 중명전

 6. 배재학당역사박물관

 7. 이화여고박물관과 유관순우물

 8. 정동교회

 9. 서울광장

 10. 서울도서관 (옛 서울시청사)

 11. 서울시청 신청사

 12. 환구단 (황궁우)

 13. 명동거리

 14. 명동성당

 15. 남대문시장

 

 16. 남대문(숭례문)

 17. 서울역 (문화역 서울284)

 18. 약현성당

 19. 손기정공원 (손기정월계관수)

 20. 화폐금융박물관 (한국은행본관)
 21,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22. 남산 와룡묘

 23. 남산N서울타워

 24. 남산 정상 주변 (봉수대, 팔각정)

 25. 남산골한옥마을

 26. 동대문쇼핑타운

 27. 동대문역사문화공원
 28. 장충단공원

 29. 신당동 떡복기골목

 30. 신당동 중앙시장


 31. 금호산 (금호산 벚꽃축제)

 32. 광희문(수구문)

 33. 대한성공회성당 서울교구, 경운궁 양이재

 

 4. 서울 강북 서부 (은평, 서대문, 마포, 용산구)
 1. 북한산 삼천사 (삼천리골)
 2. 북한산 삼천사지 (삼천사에서 등산 2km)

 3. 북한산 진관사

 4. 진관사계곡

 5. 숙용심씨묘표

 6. 영산군묘역

 7.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내시묘역은 없음)

 8. 경천군송금물침비 (내시묘역길 중간에 있음)

 9. 북한산성 대서문

 10. 북한산둘레길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11. 북한산둘레길 구름정원길

 12. 북한산 불광사계곡

 13. 금성당

 14. 금암문화공원 (금암기적비)

 15. 인조별서유기비

 

 16. 수국사

 17. 백련산 백련사

 18. 불광천 (불광천길)

 19. 옥천암 마애좌상 (보도각백불)

 20. 인왕산 환희사

 21. 홍제동 개미마을

 22. 안산(鞍山)

 23. 안산 무악봉 동봉수대터

 24. 봉원사 (연꽃축제)

 25. 서대문역사공원 (옛 서대문형무소)

 26. 독립문과 영은문주초

 27. 인왕산 선바위, 국사당

 28. 연세대 근대건축물 (언더우드관, 스팀슨관 등)

 29. 신촌거리

 30. 홍대거리


 31. 효창공원

 32. 용문동 남이장군 사당 (남이장군제)
 33. 원효로성당

 34. 전쟁기념관

 35. 이태원거리

 36. 남산야외식물원

 37. 용산가족공원

 38. 국립중앙박물관

 39. 공덕동, 마포 먹자골목

 40. 절두산성지와 잠두봉

 

 41. 양화진외국인묘역

 42. 망원정

 43. 평화의공원과 난지연못

 44. 월드컵경기장 주변

 45.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

 46. 난지캠핑장

 47, 무악재 고갯길

 48. 삼성미술관리움

 49. 화의군묘역

 

 5. 서울 강북 동부 (동대문, 성북, 성동, 광진, 중랑구)
 1. 선농단 (선농대제)

 2. 세종대왕기념관
 3. 영휘원과 숭인원
 4. 홍릉수목원

 5. 고려대박물관

 6. 동망봉

 7. 보문사

 8. 개운사

 9. 보타사

 10. 개운산공원

 

 11. 삼군부총무당 (삼선어린이공원)

 12. 최순우옛집

 13. 돈암장

 14. 선잠단터

 15. 간송미술관

 16. 성북동 성락원

 17. 길상사

 18. 성북동 이종석별장

 19. 수연산방

 20. 성북구립미술관

 

 21. 심우장

 22. 삼청각

 23. 북악산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24. 정릉

 25. 봉국사

 26. 경국사

 27. 정릉계곡

 28. 북한산둘레길 솔샘길

 29. 경동시장과 약령시장

 30. 서울풍물시장

 

 31. 서울숲

 32. 수도박물관

 33. 뚝섬

 34. 화양리느티나무

 35. 어린이대공원

 36. 아차산생태공원

 37. 아차산 홍련봉보루유적
 38. 아차산성과 아차산 보루유적

 39. 용마폭포공원

 40. 서울시립대, 배봉산공원

 

 41. 의릉

 42. 망우리공원 (망우리묘지)

 43. 중랑캠핑숲

 44. 봉화산 (봉화대)

 45. 살곶이다리

 

 6. 서울 강북 북부 (강북, 도봉, 노원구)
 1. 북한산 화계사
 2.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3. 조병옥박사묘

 4. 북한산 본원정사

 5. 북한산 구천폭포

 6. 4.19국립민주묘지

 7.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8. 우이동 솔밭공원

 9. 북한산 소귀천계곡

 10. 북한산 도선사

 

 11. 봉황각

 12. 손병희선생묘

 13. 우이령길 (우이동~우이동유원지~우이령)

 14. 북서울꿈의숲

 15. 초안산공원 (초안산조선시대분묘군)

 16. 옹기민속박물관

 17. 연산군묘

 18. 방학동은행나무와 원당샘

 19. 양효공안맹담과 정의공주묘역

 20. 북한산둘레길 소나무숲길

 

 21. 도봉산둘레길 (우이동~무수골~도봉산입구)

 22. 중랑천 (중랑천둑방길)

 23. 도봉산 무수골

 24. 도봉산 도봉서원

 25. 도봉산 천축사

 26. 도봉산 만월암

 27. 도봉산 우이암 봉우리

 28. 도봉산 만장봉, 자운봉

 29. 창포원

 30. 수락산 벽운동계곡


 31. 수락산 정상

 32. 수락산 학림사

 33. 불암산 (불암산성, 불암산둘레길)

 34. 불암산 학도암

 35. 이윤탁한글영비 (한글고비)

 36. 태릉 (조선왕릉전시관)

 37. 강릉 (태릉 동쪽, 제한관람)

 38.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39. 화랑대역

 40. 태릉이스턴캐슬공원 (옛 태릉푸른동산)

 

 7. 서울 강서 (강서, 양천, 구로, 영등포, 금천구)
 1. 강서습지생태공원
 2. 개화산 약사사 (개화산)
 3. 개화산 미타사

 4. 서남물재생센터공원

 5. 겸재정선기념관

 6. 양천향교

 7. 궁산공원 (옛 양천고성터)

 8. 허준박물관

 9. 구암공원, 허가바위

 10. 안양천 (안양천 둑방길)


 11. 우장산공원

 12. 서서울호수공원

 13. 궁동 정선옹주묘역

 14. 궁동저수지생태공원

 15. 오류동 류순정, 류홍묘역

 16. 선유도공원

 17. 여의도 여의도둑방길 (여의도 벚꽃축제)

 18. 여의도공원
 19. 63빌딩

 20. 샛강생태공원

 

 21. 가산(가리봉)로데오거리

 22. 금천아트캠프, 금천구청역~독산역 벚꽃거리

 23. 시흥동 은행나무 (은행나무4거리)

 24. 호암산 호압사

 25. 관악산둘레길 호암산 구간

 26. 호암산성터와 한우물, 석구상 (불영암)

 27. 호암산 칼바위

 

 8. 서울 강남 (동작, 관악, 강남, 서초구)
 1. 사육신묘
 2. 흑석동 효사정
 3. 상도동 양녕대군묘역
 4. 국사봉 사자암 (국사봉)
 5. 보라매공원
 6. 신림동 굴참나무

 7. 난곡 강사상/강홍립(진주강씨)묘역, 신도비

 8. 삼성산성지
 9. 관악산 (관악산 철쭉제)

 10. 관악산 둘레길 (사당~낙성대~삼성산성지 구간)

 11. 낙성대
 12. 봉천동마애미륵불
 13. 사당동 임당 정공신도비 (동래정씨묘역)

 14. 효간공 이정영 묘역

 15. 관악산 관음사

 16. 구 벨기에공사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17. 국립서울현충원

 18. 호국지장사
 19. 동작충효길 (동작구 둘레길)
 20. 잠실뽕나무 (잠원동)

 

 21. 강남역거리

 22. 도산공원

 23. 봉은사

 24. 삼성역 코엑스 (코엑스 아쿠아리움)

 25. 선정릉

 26. 효령대군묘역

 27. 우면산

 28.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29. 양재시민의숲

 30.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31. 양재천

 32. 구룡산

 33. 대모산

 34. 대모산 불국사

 35. 헌인릉

 36. 광평대군묘역

 37.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38. 한국자수박물관

 39. 호림박물관

 

 9. 서울 강동 (송파, 강동구)
 1. 잠실종합운동장

 2. 석촌호수

 3. 잠실롯데월드

 4. 삼전도비

 5. 석촌동고분군

 6. 방이동고분군

 7. 오금공원

 8.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9. 한성백제박물관

 10. 방이동 생태학습관

 

 11. 풍납토성

 12. 암사동 선사유적지

 13. 일자산 (일자산 해맞이공원, 둔굴)

 14.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

 15. 길동자연생태공원
 
16. 고덕산 (고덕산림욕장, 강동그린웨이, 광주부원군묘역)

 17. 성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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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여행도서] 여행책의 백미, '남한 명승비경 79곳'

"예예원출판사(드라이브사)"에서 만든 "남한 명승비경 79곳" 책을 추천합니다.
이 책은 수도권부터 강원,충청,경상,전라도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산,계곡, 폭포 등의

명소 79곳을 소개하는 책으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지도가 잘 나와있습니다.

특히 여름휴가철이나 계곡,폭포,명승비경 여행에는 아주 요긴한 책이지요.

책에 실려있는 사진들은 전문사진작가가 찍었다고 하며, 사진은 정말 괜찮습니다.
일부는 사진대회에도 출품하여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하며 여러 번 언론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단점이 딱 하나 있다면 숲,계곡,폭포 주변 음식점, 숙박업소에 대한 정보가

약간 미흡한 점인데, 그건 별로 신경쓸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만큼 명승지 관련 설명과

사진,정보가 풍부하니까 말이죠.


이 책은 현재 왠만한 유명서점,대형서점에서 판매되고 있구요.
저도 이책 1권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계곡 등에 갈때 이 책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남한 명승비경 79곳"입니다.
가격은 13000원..

한번 봐보세요.  저도 여기서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
후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노련한 여행/사진 전문가가 만든 책이니까요.

 
 

 

 

봄맞이 매화꽃 나들이 ~ 남해바다를 품은 조그만 해안공원, 통영 달아공원

 


' 통영 달아공원 봄맞이 나들이 '
통영 달아공원
▲  관해정에서 바라본 달아전망대


겨울 제국의 차디찬 위엄이 서서히 누그러들던 3월 초에 통영 미륵도(彌勒島) 남단에 자리한 달
아공원을 찾았다. 이곳이 통영에서 그렇게나 유명한 곳이라고 찬양을 해서 부산에 내려온 김에
1번 가보기로 했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확인도 할 겸 말이다.

달아공원은 남대해(南大海)가 바라보이는 해안 언덕에 터를 다진 공원이라 주변 바다와 섬이 거
침없이 두 눈에 들어와 조망 하나는 그럭저럭 큰 점수를 줄 만하다. 게다가 좌우로 바다를 끼고
있어 일출과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다는 것도 이곳의 큰 매력, 허나 그것 뿐인거 같다. 기대
가 너무 컸는지는 모르지만 좀 허탈하더군. 또한 바닷가에 있음에도 정작 바다로 내려가는 길은
없다. (군부대로 통제됨) 

공원의 이름인 달아(達牙)는 이곳의 지명으로 지형이 코끼리의 어금니와 닮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그거 외에도 임진왜란 때 아기(牙旗)를 꽂은 전선(戰船)이 당포(唐浦)에 도달(到
達)했다 하여 달아라 했다는 설도 있으며, 지금은 달을 구경하기 좋은 곳이란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현재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일원으로 한려해상 동부사무소의 관리를 받고 있으며, 1973년 북한
여간첩이 침투한 남북분단의 시린 현장이기도 하다. 이곳으로 침투한 간첩은 1974년 2월 대전(
大田)에서 주민신고로 꼬리가 잡혔다.

속세와 이곳을 잇는 달아공원 정류장에서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1997년에 지어진 관해정이란 정
자가 나오고, 정자를 지나면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달아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가 있다. 그
주변에는 산책로가 있으며, 그것이 달아공원의 전부이다. 허나 조망 하나는 일품이므로 수레를
끌고 부근을 지날 일이 있다면 잠시 들려 쉬어갈 만하다.


♠  달아공원(達牙公園) 둘러보기

▲  달아공원 입구 (관리사무소 부근)

▲  저 고개를 넘으면 바다가 나온다.
산책로 주변 나무들은 겨울의 압제(壓制)에서 깨어나 봄맞이에 여념이 없다.

▲  달아공원 관해정(觀海亭)
정면과 측면이 1칸인 조촐한 크기로 그의 이름처럼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이다.
이곳에 오르면 남해바다가 베푼 해조음에 청각이 정화되고 시원히 불어오는
바다바람에 마음과 생각마저 아낌없이 정화된다.

▲  달아전망대 서쪽 산책로
공원을 뒤덮은 잔디는 아직도 겨울제국의 눈치를 보느라 여전히 누런색을 고수한다.

▲  달아전망대 동쪽 산책로
전망대 주변 산책로는 전망대를 가운데에 끼고 순환하는 형태이다.

▲  달아전망대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이렇게 보니 큰 산이나 요새, 하늘에 떠 있는 전망대나
망대(望臺)를 보는 듯 자뭇 웅장해 보인다. 이런게 바로 착시현상이겠지~~

▲  달아전망대에서 바라본 공원 북쪽과 관해정

▲  달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대자연이 빚어놓은 섬들이 미륵도 주변에 노니는 모습이 매우 정겹고 한가롭다.
여기서는 곤리도와 추도, 사량도 등이 보인다.

▲  달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용초도와 비진도, 오곡도, 한산도(閑山島) 등이 보인다.

▲  달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용초도와 비진도, 오곡도 등이 보인다.

▲  달아공원의 꼬리 부분
소나무로 무성한 공원의 꼬리는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접근이 통제되어있다.
접근 통제를 알리는 경고문을 무시하고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달아공원에서 만난 순백의 아름다움, 매화꽃
봄 해방군의 선봉인 매화꽃이 미륵도에 상륙하여 달아공원을 하얗게 물들인다.
그해 처음으로 만난 봄꽃으로 그들을 대하니 '벌써 봄이 왔구나~' 싶어
매화가 엿들을 정도로 나의 마음이 설레고 두근거린다.


※ 달아공원 찾아가기 (2013년 3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통영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강남고속터미널에서 통영행 고속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서부터미널에서 통영행 직행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다닌다. (남마산 경유와 거가대교
  경유 2가지가 있음)
* 대전동부터미널에서 통영행 직행버스가 1~2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통영행 직행버스 40~50분 간격으로 운행
* 광주와 울산, 진주, 창원, 마산(남부)에서 통영행 직행버스 이용
* 통영터미널에서 척포로 가는 통영시내버스 530번을 타고 달아공원 하차 (15~70분 간격) 그외
  에 513번(거제대교), 536번(황리임중) 시내버스도 있으나 터미널을 경유하지 않으며, 각각 1
  일 2~3회 밖에 운행안함 (서호시장, 무전동 경유)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장 있음)
① 대전통영고속도로 → 통영나들목을 나와서 통영시내 방면 → 통영시내 → 통영대교를 건너
   우회전 → 산양읍 → 달아공원
② 부산 → 거가대교 → 고현 → 거제대교 → 통영시내 → 통영대교를 건너 우회전 → 산양읍
   → 달아공원

* 공원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소재지 -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연화리114 (문의 ☎ 055-649-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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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3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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