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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01.11 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3. 2018.05.04 봄맞이 산사 나들이 ~ 전주 근교 제일의 고찰, 완주 종남산 송광사
  4. 2012.01.11 전주한옥마을 겨울 산책 (오목대, 한벽당..)
  5. 2010.02.02 한벽청연의 현장 전주 한벽당
  6. 2010.01.27 전주사고(史庫)
  7. 2006.08.28 [전북/전주] 조선왕조의 고향, 전주 - 오목대 / 전주8경 한벽청연의 현장, 한벽당 1

전주한옥마을, 전주향교, 승암산 동고사, 문학대 겨울 나들이 (남천교, 한벽굴)

전주 겨울 나들이 (전주향교, 동고산, 문학대)



' 전북의 중심지, 전주 겨울 나들이 '

동고사에서 바라본 전주시내와 전주한옥마을
▲  동고사에서 바라본 전주시내와 전주한옥마을

전주향교 대성전

전주한옥마을 전주천동로

▲  전주향교 대성전

▲  전주한옥마을 전주천동로



 


겨울 제국이 가을을 몰아내고 강추위로 천하를 벌벌 떨게 하던 12월 한복판에 호남의 오
랜 중심지, 전주(全州)를 찾았다.
전주는 1년에 1회꼴로 발걸음을 하는 곳으로 이번에는 전주한옥마을 동남쪽에 있는 동고
산(승암봉, 기린봉)을 중심으로 둘러보기로 했다.

햇님이 아직 등청을 하지 않은 이른 아침, 서울 남부터미널로 달려가 삼례(參禮)행 직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주를 가니 전주행을 타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그날따라 전주 수요
가 오지게 많아서 다소 여유로운 삼례행을 택한 것이다. 어차피 전주행을 타나 삼례행을
타나 전주한옥마을(전주 도심)까지 시내버스를 1회 타야 되며, 삼례(완주군 삼례읍)에서
전주 도심까지 거리도 가깝고 시내버스도 한강수 흐르듯 많이 다닌다.

그렇게 3시간 여의 시간을 던져 전주한옥마을에 이르니 시장기가 요동을 친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하여 전주를 찾을 때마
다 거의 꼭 들리는 콩나물국밥집에서 이른 점심으로 뜨끈한 콩나물국밥을 섭취하고 전주
한옥마을을 가로질러 전주천으로 이동했다.
서울의 북촌(北村)한옥마을과 더불어 한옥마을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전주
한옥마을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10대부터 노인들, 다른 나라 잡것들까지 다양한 관광객들
로 거의 북새통을 이루어 이곳의 국제적인 명성을 실감케 한다.
전주의 명물 간식거리인 수제 초코파이를 하나 구입하여 입에 물고 북적거리는 전주한옥
마을을 주마등(走馬燈)처럼 흘려보내니 기와집 누각(청연루)을 이고 있는 전주천 남천교
가 반갑게 마중을 나온다.



 

♠  전주천과 남천교

▲  전주천(全州川)에 걸려있는 남천교(南川橋)

전주의 젖줄인 전주천은 임실(任實) 관촌평야에서 발원하여 전주시내를 가로질러 만경강(萬頃
江)으로 흘러가는 30km의 하천이다. 한때는 다른 도시의 하천과 마찬가지로 개발의 난도질에
사망 상태까지 갔었으나 1998년 이후 꾸준히 생태계 복원을 추진하여 살아있는 하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2002년 왜열도에서 열린 '강(江)의 날' 대회에서 생태
계를 성공적으로 복원시킨 모델로 꼽히기도 했다.

전주한옥마을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전주천에는 '남천교'란 다리가 걸려있다. 다리의 길이는
82.5m, 폭 25m로 전주천 몸매에 맞게 닦여져 있는데, 다리 가운데에는 특이하게 기와집 누각(
樓閣)까지 걸쳐 놓았다. 처음에는 한옥마을을 수식하는 용도로 최근에 지어놓은 별 의미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지나치려 했으나 알고 보니 나름 사연이 있는 곳이다.

남천교는 조선 중기 쯤에 전주천에 놓여진 돌다리로 인근의 승암산과 한벽당이 어우러져 빼어
난 경관을 자랑했다. 5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지개처럼 생겨 '다섯 무
지개다리','오홍교(五虹橋)'라 불렸고, 다리 윗도리에 용조각이 있어서 '오룡교(五龍橋)'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이들 용조각은 승암산의 화기(火氣)를 막고자 새겼다고 하며, 19세기
이후에는 5개의 창을 가진 안경을 닮았다고 하여 안경다리<안경교(眼鏡橋)>란 별명까지 추가
되었다. 이렇게 별칭이 많은 것은 그만큼 이 다리의 인기가 대단했다는 뜻이다.

1753년 다리가 유실되어 터만 남아오다가 1790년 지역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복원 공사를 벌
여 1791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남천교는 얼마나 잘 지었던지 그 모습
이 마치 하늘이 던져준 듯하고, 땅에서 불끈 솟아난 듯하여 사람이 만든 것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걸작을 자랑했지만 왜정(倭政) 시절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그 흔적 조차 남아
있지 않다가 2009년 전주시가 옛 지도에 나오는 홍예교의 모습을 참고하여 이전보다 더 크게
재현했다. 또한 다리 한복판에는 팔작지붕을 지닌 청연루(晴烟樓)를 세워 쉼터와 풍류의 장소
로 삼았다.

청연루는 남천교와 달리 오래된 사연은 잡고 있지 않다. 여기서 가까운 한벽당(寒碧堂)이 전
주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煙)의 현장으로 오랫동안 추앙을 받고 있어 그 이름을 따서
대칭적인 의미로 세웠을 뿐이다.
전주한옥마을의 새로운 명소로 여기서는 갈대와 온갖 식물, 물고기가 춤을 추는 전주천과 승
암산, 승암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동고사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남천교에서 바라본 전주천과 승암산

▲  남천교 개건비(改建碑)

청연루 옆에는 1790년 남천교 재건을 기리고자 1794년에 세운 개건비가 우뚝 자리해 있다. 네
모난 비좌(碑座)에 해서체(楷書體)로 쓰인 글씨를 머금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둥근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으로 다리의 재건 과정과 남천교 건립에 돈을 내놓은 사람들의 이름
이 적혀있다.
원래는 한벽당 우측 하천변에 있었으나 남천교가 사라진 이후, 쓸쓸히 방치되어 있던 것을 어
떤 사람이 전주교육대 교정으로 옮겨놓았다. 이후 남천교가 새로 지어지면서 다리 한복판으로
가져와 안착시켰다.

남천교의 빛바랜 일기장 같은 존재로 세월을 탄 검은 때가 자욱해 중후한 멋을 드러내고 있으
며, 비석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  잘 다듬어진 전주한옥마을 전주천동로

전주천동로는 전주한옥마을의 남쪽 끝 길로 남쪽은 전주천, 북쪽은 한옥들이 늘어서 한옥마을
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상당수 근래 지어진 어린 한옥들이라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
로 피부가 뽀송뽀송한데, 산뜻하게 정비된 그 길을 걸으면 승암산, 한벽당으로 이어지며, 중
간에 전주향교가 홍살문을 내밀며 잠시 들릴 것을 권한다.


▲  전주향교 홍살문과 하마비(오른쪽 비석)

전주향교는 원래 계획에 없었다. 비록 한참 전이긴 해도 들린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붉
은 홍살문의 차가운(?) 유혹에 이끌려 잠시 승암산을 접고 향교로 길을 틀었다.

홍살문은 쌀쌀맞게 생긴 모습 그대로 권위적인 곳을 알려주는 존재이다. 주로 왕릉과 향교(鄕
校), 서원, 지체 높은 사람의 사당, 관청 입구에 세워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향교와 관
청, 높은 이의 사당에는 홍살문 보조용으로 하마비를 옆에 두기도 한다. (하마비만 두는 경우
도 있음)
하마비의 거친 피부에는 '이곳을 지나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라!'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다른 향교의 하마비는 거의 조그만 덩치이지만 이곳 향교는 나보다 키가 크다. 아무
래도 전주가 호남의 중심 고을이자 조선 왕실의 성역(聖域)과 같은 곳이라 그에 걸맞게 향교
와 하마비를 세운 모양이다.
허나 시대가 여러 차례 바뀌면서 하마비와 홍살문의 위엄은 완전히 추락했으며, 이제는 문화
유산의 의미 밖에는 없다. 더 이상 그들의 눈치를 보며 지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위엄이 식어버린 하마비(下馬碑)
윗도리와 아랫도리 피부색이 서로 틀리다.

▲  박진 효자비(朴晉 孝子碑) -
전주시 향토문화유산 5호


홍살문을 지나 향교의 정문인 만화루를 들어서려는 찰라, 향교 담장 서쪽 끝에 조그만 기와집
하나가 손짓을 한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그 손짓을 따라가보니 '박진 효
자비'를 머금은 비각(碑閣)이었다.

효자비의 주인공인 박진은 전주박씨로 자는 내신(乃臣)이다. 부친이 중병에 걸려 고생을 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전주로 내려와 부친을 간호했는데, 낮에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도 허
리띠를 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부친이 세상을 뜨자 예법에 맞추어 장사와 제사를 치루고 3
년 동안 시묘살이까지 하여 지역 사람들의 칭송이 대단했다. 하여 조정에서는 1398년 정려비(
旌閭碑)를 세워 그의 효행을 기렸다.
1724년 후손들이 비석을 다시 중각(重刻)했으며, 1805년 후손 박필성(朴必晟)이 '전주부 효자
박진정려기'를 지어 비각 안에 걸어두었다.

향교 앞에 자리해 있어 위치도 좋으며, 향교 유생들을 위한 교육 자료로도 아주 그만이다. 하
여 그를 이곳에 둔 모양이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지는 않았음) 그 효자비를 둘러보고 만화루
를 통해 공자왈, 맹자왈이 귀를 때릴 것 같은 전주향교로 들어섰다.



 

♠  전주 지역 교육의 옛 중심지, 지방 향교 중 큰 규모를 자랑했던
전주향교(全州鄕校) - 사적 379호

▲  전주향교 대성전(大成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호

전주한옥마을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전주향교는 나라에서 각 고을마다 세운 중등교육기관으
로 1410년에 창건되었다.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으며 원래는 경기전(慶
基殿) 옆에 있었다고 전한다.

1441년 조정에서 향교 옆에 경기전를 짓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했는데, 향교에서
공부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경기전의 엄숙한 분위기를 저해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여 전주
부(全州府) 서쪽 성 밖, 화산<華山, 황화대(黃華臺)> 밑으로 내보냈다. 졸지에 경기전이란 굴
러들어온 돌에게 자리를 빼앗긴 셈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3년 전라도관찰사 장만(張晩)이 중건했는데, 전주부 성내(城內)
에서 멀다는 민원이 제기되어 향교의 위치가 잘못되었음을 조정에 알리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
크게 지었다. 이후 1654년과 1832년, 1879년, 1904년에 중수를 하였다.
향교 학생은 액내생(額內生, 정원내 교생, 양반 자제들) 90명, 액외생(額外生, 평민과 서얼로
정원외 교생) 90명 등 총 180명으로 정7품의 훈도(訓導) 1명을 두어 4서5경(四書五經)을 가르
쳤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향교의 교육 기능은 점차 사라졌으며 제사 기능
만 남게 되면서 거의 빈껍데기 신세가 되버린다.
전주향교 역시 그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해 뒤로 물러나있다가 1949년 재단법인 명륜학원(明倫
學院)을 설립하여 다시 교육에 나서기 시작했다. 1950년 4월 초급대학인 명륜대학을 설립하여
법학과와 국어한문과를 두었으니 그것이 바로 전주 최초의 대학, 전북대의 시초이다. 즉 전주
향교가 전북대의 산실인 것이다.
처음에는 향교 건물을 이용하여 대학교를 꾸렸는데, 1953년 종합대학교로 승격 인가를 받으면
서 학생 수가 폭주했다. 하여 수용에 한계를 느끼게 되자 전주 시내 북쪽에 덕진캠퍼스를 지
어 1955년 대학교를 그곳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향교는 시민을 대상으로 조촐하게 한문과 서
예, 예절 교육을 가르치고 있으며, 봄(3월)과 가을(9월)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매월 초
하루와 보름에 향을 피워 향교의 기능을 계속 지키고 있다.

경내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해 동무와 서무, 만화루, 장판각, 계성사, 양사재(養士齋),
사마재(司馬齋), 수복실(守僕室), 고직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총 99칸을 이루고 있으며, 그
장대한 규모로 인해 전라도 53고을의 수도향교(首都鄕校)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늙은 은행나무 4그루가 대성전과 명륜당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명륜당은 전국 향교
의 명륜당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힌다. 또한 계성사는 제주향교와 더불어 천하에 딱 2곳
밖에 없어 나름 희소성이 있으며, 김제향교와 나주향교와 더불어 국가 사적의 높은 지위를 누
리고 있다.

전주의 꿀단지, 전주한옥마을이 천하 굴지의 관광지로 인기를 누리면서 한옥마을 남쪽 구석에
자리한 전주향교에도 볕이 들고 있다. 이곳까지 관광/답사객들이 적지 않게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뒤쪽 부분을 제외한 대성전, 명륜당 구역을 흔쾌히 개방하고 있으며, '성균관스캔들'
,'YMCA야구단' 등의 드라마와 영화도 이곳을 거쳐갔다.
이 땅의 향교 대부분은 폐쇄일변도를 보이며 문을 굳게 잠구고 있으나 이곳은 문을 활짝 열어
살아있는 향교이자 전주한옥마을을 수식하는 관광 명소로 계속 옻칠을 하고 있다. 그런 점은
참 마음에 든다. 그럼 지금부터 은행잎 냄새가 진동하는 향교 내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 전주향교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26-3 (향교길 139, ☎ 063-288-4548)
* 전주향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전주향교의 정문인 만화루(萬化樓)

2층 누각으로 이루어진 만화루는 전주향교의 정문이다. 1866년 홍수로 붕괴된 것을 다시 지었
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중층 건물로 가운데 문은 굳게 입을 봉하고 있고, 좌/
우 문은 활짝 열려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만화루란 이름은 '공자지도 만물화생<孔子之道
萬物化生, 공자의 도(道)로 만물이 교화된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방이 훤히 뚫린 모습이라 여름에는 강의 공간으로 쓰였으며, 종종 향시(鄕試)를 보는 곳으
로 쓰이기도 했다.

▲  대성전으로 인도하는 일월문(日月門)

▲  일월문 옆 은행나무
전주시 보호수 9-1-7-1호

만화루를 지나면 솟을 삼문(三門)으로 이루어진 일월문이 나온다. 그 문을 지나면 바로 향교
의 중심인 대성전 구역으로 커다란 은행나무 3그루가 쏟아낸 은행잎이 대성전 뜨락에 가득하
여 은행잎 특유의 악취가 아주 코를 찌른다.
이처럼 향교 뜰에 은행목을 심은 것은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강의를 했던 행단(杏壇)의 고
사 때문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그 나무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유교와 관련된 공간(
향교, 서원)에서는 꼭 그것을 심었다. (선비나무라 불리기도 함)
일월문 옆 은행나무는 290여 년 묵은 것으로 대성전 은행나무 3형제 중 막내이다. (1982년 9
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50년) 키는 약 20m, 둘레 3.7m로 겨울 제국의 의해 모
든 것이 싹 털린 채 앙상한 가지를 애타게 드러내며, 봄의 해방군을 염원하고 있다. 허나 이
제 12월이니 그때까지는 무려 4달 가까이 기다려야 된다. 그 시간이 좀 고통스럽기는 하겠지
만 묵묵히 기다리면 어느새 소쩍새가 울 것이다. 내가 전주향교를 과연 갔었는지 햇갈릴 정도
로 시간은 빛의 속도로 흘러가니 말이다.


▲  동무(東廡)와 390년 묵은 커다란 은행나무(전주시 보호수 9-1-5호)

대성전 구역은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동무, 서쪽에 서무를 두고 있다. 이들 '무'자 돌림
의 건물은 대성전에 넣지 못한 유교 성현들을 처리하고 있는데, 동무에는 공자의 주요 제자인
'비공 민손','설공 염옹','려공 단목사','위공 중유','위공 복상' 등 5명과 송조(宋朝) 6현인
'도국공 주돈이','낙국공 정이','미백 장재' 등 3명, 중원대륙<서토(西土)> 7현 중 '평음후
유약','승민백 복승','창려백 한유','문정공 이등' 등 4명, 총 12명의 위패가 들어있다.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03년에 지어졌다가 1987년 해체복원했으며, 맞은편
으로 닮은꼴 모습의 서무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동무 앞에는 390년 묵은 은행나무가 우뚝 솟
아 뜨락에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높이 30m, 둘레 5.5m에 이른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50년)


▲  서무(西廡)와 440년 묵은 은행나무(전주시 보호수 9-1-4호)

동무를 마치 동무처럼 바라보고 선 서무는 정면 9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동무와 완
전히 닮은 모습이다.
이곳에는 공자의 제자인 '운공 염경','제공 재여','서공 염구','오공 언언','영천후 전손사'
등 5명과 송조 6현인 '예국공 정호','신안백 소옹','휘국공 주희(朱熹)' 등 3명, 중원대륙(서
토)의 7현인 '선보후 복불제','강도상 동중서(董仲舒)','온국공 사마광'의 3명 등, 총 11명의
위패가 들어있다.

서무 앞에는 이곳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살짝 구부정한 모습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나이는 약 440살(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400년)로 전주향교가
이곳에 안착한 때(1603년)와 거의 비슷해 중건 기념으로 심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높이는 30
~32m, 나무둘레 10.4m의 우람한 덩치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자 '김해동'이란 사람이 암컷나
무 옆에 수컷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  전주향교 대성전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호

잘 다져진 석축 위에 들어앉아 남쪽을 향해 3줄기 계단을 짧게 늘어뜨린 대성전은 향교의 중
심 건물이다. 공자(孔子)를 비롯한 유교 성현을 봉안한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
지붕 건물인데, 1603년에 지어진 것을 1653년에 새로 지었다. 그때 이기발(李起浡, 1602~1662
)이 중건기(重建記)를 남겼으며, 이후 1907년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유교의 중심 인물인 공자를 비롯하여 맹자(孟子) 등의 성인 4명, 공자의 10대 제자<십철(十哲
)>, 송조 6현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향교의 다른 건물과 달리 홀로 전북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건물 양쪽 끝에 붉은 기둥을 별도로 설치하여 무거운 지붕을 받들게
했다.


▲  대성전 중심에 자리한 공자의 진영(眞影)
동이족(배달민족) 출신인 공자<孔子, 공구(孔丘)>는 문선왕(文宣王)이란
시호를 가지고 있으며, 유교의 1인자로 오랫동안 대접을 받아왔다.

▲  대성전에 들어있는 맹자 등의 사성(四聖)과 십철 등의 위패

▲  대성전 서쪽에 자리한 커다란 느티나무와 여러 돌덩어리들
느티나무의 나이가 약 150~200년 정도 되어 보인다. 그의 그늘에는 여러
견고한 돌덩어리들이 누워있는데, 이들은 1987년 이후 향교 건물을
손질하면서 나온 옛 석재들이다.

▲  명륜당 은행나무 (전주시 보호수 9-1-3호)

대성전 뒤쪽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에 명륜당이 있다. 그 명륜당 앞에도 오래 숙성
된 은행나무가 개골(皆骨) 상태로 마치 하늘을 원망하듯 가지를 높이 쳐들고 있다.
그는 약 420년 묵은 나무로 높이 32m, 둘레 6.6m이다. (1982년 9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
정 나이가 약 380년) 서무 은행나무보다 허리 둘레는 작지만 키도 비슷하고 나이도 그리 차이
가 나지 않으며, 대성전 주변에 있는 늙은 은행나무(3그루)와 달리 명륜당을 혼자 도맡으며
그곳의 그늘을 책임진다.


▲  향교에 흔치 않은 건물, 계성사(啓聖祠)

향교는 20세기 이후에 신설된 시,군 단위 행정구역이 아닌 이상은 전국의 주요 고을에 대부분
남아있다. 기러기의 털처럼 너무나 흔한 향교이지만 '계성사'란 건물을 지닌 향교는 오직 제
주향교와 이곳 전주향교 2곳 뿐이다.

명륜당 서쪽 담장 너머에 자리한 계성사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공자의 부친인 '제국
공 공숙량흘', 안자(晏子)의 부친인 '곡부후 안무유', 증자(曾子)의 부친인 '내무후 증점',
자사 공급(子思 孔伋)의 부친인 '사수후 공리(공자의 아들)', 맹자(孟子)의 부친인 '주국공
맹격'을 봉안하고 있다. 1741년 판관(判官) 송달보가 세웠으며, 상량문(上樑文)은 정광(正匡)
이기보가 남겼다.


▲  장판각(藏版閣)

계성사 뒤쪽에는 창고 모양의 장판각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7년
에 전주시에서 향교 소장 목판 5,059판의 보호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이들 목판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1,775판을 위시해 주자대전(朱子大全) 1,471판, 성
리대전(性理大全) 571판, 율곡전서(栗谷全書) 491판, 사기평림(史記評林) 484판, 동의보감(東
醫寶鑑) 151판, 사략(史略) 56판,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1판, 주서백선(朱書百選) 1판, 증
수무원록 언해(諺解) 53판 등이다.

하지만 이들은 향교 목판이 아닌 전라감영(全羅監營)에서 서적 간행을 위해 가지고 있던 것으
로 감영 내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899년 전라도관찰사 조한국(趙翰國)이 전주향교로
싹 보낸 것인데, 1920년 책고(冊庫)를 지어 관리하다가 장판각을 새로 지었으며, 그들의 보존
과 연구를 위해 대부분 전북대 박물관으로 보냈고, 일부는 향교 동쪽에 있는 완판본문화관에
가 있다. 하여 지금은 간단한 서적과 기물만 들어있다.
(장판각에 있었던 목판들은 '전주향교 소장 완영책판'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04
로 지정됨)

▲  향교 뒤쪽 부분

▲  향교 후문인 입덕문(入德門)

장판각과 계성사 서쪽에는 뒷간을 머금은 기와집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라 볼일
이 아주 급한 사람에게는 조금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시설만큼은 현대식으로 잘 닦여져 있어
원초적 볼일을 보는데 어려움은 별로 없다.
해우소 담장 너머로도 여러 건물이 둥지를 틀고 있어 '향교가 참 지독하게 넓구나!' 혀를 차
게 하는데, 이들은 관리인 숙소와 교육 공간으로 이용되는 건물로 통제구역으로 묶여있다. 허
나 밑에서도 거의 보이므로 굳이 통제를 뚫고 접근할 필요는 없으며, 계성사 앞에는 향교의
후문격인 입덕문이 한쪽 문짝을 열어두고 있다. (향교 사정에 따라 닫아두는 경우도 있음)


▲  날개짓을 하는 것 같은 명륜당(明倫堂)
설마 저대로 허공으로 날라가는 것은 아니겠지?


대성전 뒷통수에 자리한 명륜당은 이곳의 교육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
이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 다음으로 중요한 존재로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
는 의미이다. 특이하게도 양쪽으로 1칸씩 눈썹지붕을 이어 덧붙였는데, 이는 공간을 넓히고자
그런 것이다. 하여 큰 새가 마치 하늘을 향해 날개짓을 하는 모양 같다.

이 건물은 1603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 땅의 명륜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히고 있으며,
1904년 중수했다. '성균관스캔들','YMCA야구단'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며, 뜨락 좌우에는 동재
와 서재를 두었는데, 이는 유생들이 기숙사이다. 가까이 사는 유생들은 집에서 통학을 했겠지
만 먼 사람들은 여기서 숙식을 하였다. 기숙사 비용은 나라와 전라감영에서 모두 지원을 해주
어서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면 된다.

▲  옆에서 바라본 명륜당

▲  명륜당 동쪽에 자리한 동재(東齋)


▲  입덕문 서쪽 돌담길 (왼쪽 한옥이 전주전통문화연수원)

명륜당 주변을 둘러보고 입덕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입덕문 서쪽과 남쪽에는 돌담을 둘
러 호젓하게 돌담길을 내었는데, 이렇게 양쪽으로 돌담을 두룬 돌담길을 지닌 향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보통 한쪽만 돌담을 내기 때문이다.
돌담 북쪽은 전주향교 영역이며, 서쪽에 대나무가 우거진 한옥은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이다. 돌
담길의 길이가 우리네 인생만큼이나 짧긴 하지만 이곳의 백미(白眉)로 꼽힐 만큼 강하게 인상
에 남는다.


▲  전주향교를 뒤로하며 (입덕문 남쪽 돌담길)
왼쪽이 전주향교, 오른쪽이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이다. 서로의 성격과 연륜이
틀리다보니 돌담 또한 다른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  승암산(僧巖山) 둘러보기 (한벽굴, 동고사)

▲  한벽당 앞 전주천 (좁은목)

전주향교로 잠시 접어두었던 전주천동로를 다시 꺼내 동쪽으로 걸었다. 한벽당의 주변 풍경을
크게 말아먹은 한벽교의 밑도리를 지나면 전주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한
벽굴이 있고, 그 위쪽에 한벽청연의 현장인 한벽당이 나를 굽어보고 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한벽당이라 간만에 들릴까 했지만 그곳까지 올라가기 귀찮아서 밑에서
잠깐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한벽당 동쪽에 있다는 승암산 산길을 찾았다. 하지만 그 길이
보이지 않아서 한벽굴을 통해 북쪽으로 넘어가서 승암산으로 진입했다.


▲  열차의 기적소리가 들릴 것 같은 칙칙한 한벽굴

한벽굴은 옛 전라선(全羅線, 익산~여수) 철도의 흔적이다. 지금은 전주시내 동쪽 외곽을 얌전
히 지나가고 있지만 처음에는 전북대와 전주시청, 오목대 등 전주 도심을 거쳐 지나갔다. 이
는 시내 교통 편의도 있지만 한벽당과 태조 이성계의 설화가 깃든 오목대(梧木臺)의 정기를
자르고 욕보이려는 왜정(倭政)의 나쁜 의도가 더 컸다. 그래서 한벽당과 오목대 뒤에 땅굴을
파고 열차를 지나가게 한 것이다.

왜정의 고약한 장난에 한벽당과 오목대가 뿔이 난 것일까? 열차가 한벽굴을 지날 때마다 이상
하게도 속도가 매우 느려졌다고 한다. 하여 그때를 틈타서 많은 무임 승차객들이 열차에서 뛰
어내렸다는 것이다.
이후 전라선은 시내 동쪽으로 옮겨졌고, 한벽굴은 철도가 아닌 뚜벅이를 위한 땅굴이 되어 한
옥마을을 수식하는 명소이자 오목대, 한옥마을에서 전주천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굴에 들
어가면 한여름에도 매우 시원하며, 옛날에 사라진 열차의 기적 소리가 두 귀에 아련하게 들리
는 듯하다.


▲  한벽굴 왕년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 (인터넷에서 가져옴)

왼쪽은 전주천, 가운데는 한벽당, 오른쪽은 전라선 한벽굴이다. 한벽당은 왜정에 의해 전라선
열차로 고통을 받았고, 2000년 이후에는 한벽당 바로 앞에 신작로(기린대로)가 뚫리면서 다시
고통을 겪고 있다. 인간의 이기(철도, 도로)에 끊임없이 고통받는 한벽당의 비애..


▲  승암산

한벽굴을 지나 낙수정(樂水亭) 방면으로 가면 승암산 숲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부터 동고사
를 찾기 위한 승암산 산행이 시작되었다.

전주시내 동남부에 듬직하게 자리한 승암산(306m)의 원래 이름은 기린봉이다. 산의 형세가 마
치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麒麟)이 달(또는 여의주)을 토해내는 듯한 모습<기린토월(麒麟吐月)
>이라 하여 유래된 것으로 정상부에 중바위가 있어 승암산, 중바위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전주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뫼로 후백제(後百濟, 892~936) 시절에 지어진 동고산성과 왕궁
터가 남아있어 이곳이 후백제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동고사와 승암사 등의 오래된
절과 치명자산(致命者山) 천주교 성지를 머금고 있다.

낙수정 서쪽(무애사 앞)에서 승암산의 품으로 들어서 10여 분 오르니 동고사로 이어지는 포장
길이 나타난다. 가파른 벼랑 위에 닦인 그 길을 4분 정도 가면 대나무 숲이 나타나고 이어서
윗쪽 벼랑에 자리한 동고사가 모습을 비춘다. 여기서 남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치명
자산 성지(천주교 순교자 묘)이다.


▲  승암산에서 바라본 좁은목과 전주천 (전주천 건너편 산이 남고산)

▲  동고사로 인도하는 호젓한 숲길

▲  동고사 밑 대나무숲과 주차장(오른쪽 공간)
겨울을 잊은 푸른 대나무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낸다.

▲  동고사(東固寺)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2호

승암산 서쪽 자락 가파른 곳에 동고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전주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절(
해발 210m)로 876년에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창건하여 전주 동쪽에 있다는 뜻에서 '동고사'라
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덧붙여서 신라의 마지막 군주인 경순왕(敬順
王)의 2째 왕자 범공(梵空)이 승려가 되어 이곳에 들어와 불도를 닦으며 나라 잃은 한을 달랬
다 하나 이 역시 신빙성은 장담할 수 없다.

창건 이후에도 오랫동안 적당한 바퀴 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허주
화상(虛舟和尙)이 1844년 지금의 위치에 중창했다고 한다. 하여 어쩌면 그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이후 1946년 주지 영담 김용욱(暎潭 金容郁)이 대웅전과 요사 등 여러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현재 경내를 이루고 있는 건물과 석탑, 미륵불은 모두 그때 이후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진작
에 말라버렸으며, 대웅전과 염불원(念佛院) 등 6~7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각박한 벼랑이라 돌로 단단히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대웅전과 요사 등
여러 건물을 닦았다. 그리고 윗쪽에도 좁은 공간을 활용하여 석가여래의 사리를 머금은 석탑
과 미륵불 등을 층층이 지었고, 경내 밑에는 주차장과 돌탑을 다졌다. 절까지 차량이 마음놓
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은 괜찮은 편이나 길 서쪽이 벼랑 수준이라
바퀴를 잘 굴려야 된다.

▲  경내 밑에 자리한 샘터
여기서 물 1모금 들이키고 경내로 들어선다.

▲  서쪽을 굽어보고 있는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경내 위쪽 부분
범종각과 3층석탑, 미륵불 등

▲  석가여래의 사리가 깃든 3층석탑
(석가여래진신사리 보탑)


동고사는 오랜 내력에 비해 볼거리가 변변치 못하다. 다만 높은 벼랑에 자리하여 시내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조망만큼은 아주 끝내준다. 여기서는 전주천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를
비롯해 전주시내 상당수가 시야에 들어오며, 전주한옥마을과 전주 시내를 마음 편히 사진에
담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물론 여기서 더 위로 올라가 중바위나 정상부에 이르면 조망의
질은 더욱 높아진다.

* 동고사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10-88 (낙수정2길 103-100 ☎ 063-288-16
  26)


▲  동고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전주 시내 (바로 밑에 보이는 산이
오목대와 이목대)

▲  미륵불에서 바라본 동고사 경내
절은 비록 작고 고색의 내음 또한 모두 날라갔지만 전주 시내를 너른 뜨락으로
삼으며 그들을 굽어보니 뜨락과 조망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미륵불입상

▲  미륵불에서 바라본 동서학동과 완산구
지역 (중앙에 보이는 산이 완산공원)


▲  미륵불에서 바라본 전주 시내와 전주한옥마을(가운데 부분)

동고사를 둘러보고 중바위와 동고산성 등 승암산의 주요 메뉴를 살펴보고자 산 윗쪽으로 길을
향했다. 허나 추운 날씨에 귀차니즘까지 진하게 발동하여 그들에 대한 구미가 99% 떨어지면서
조금 가다가 길을 돌렸다. 하여 낙수정마을로 내려갔는데, 낙수정은 전주 도심이 바로 지척임
에도 산골 마을 분위기가 진하여 그야말로 도심 속의 산골마을 그 자체였다.


▲  낙수정으로 내려가는 숲길

낙수정은 전주시내버스 430번(낙수정↔백구,용지)이 들어오는데, 배차간격이 무려 2시간이 넘
는다. 허나 운이 좋게도 낙수정 종점에 그 버스가 바퀴를 접고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을 굳이 타지 않더라도 전주한옥마을과 오목대, 전동성당까지 조금 나가면 버스는 널려 있다.
승암산 일정이 너무 일찍 마무리가 되어 일몰까지 시간이 좀 있었는데, 만약을 위해 준비했던
'문학대'를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살펴보기로 했다. 그곳은 여기와 정반대인 서부신시가지 효
자동에 있는 명소로 그곳을 둘러보고 바로 삼례로 빠질 생각이었다.

버스에 올라타 지친 두 다리에게 휴식을 주고 있으니 운전사가 부릉부릉~♪ 시동을 걸며 지정
시간보다 약 5분이나 일찍 출발을 했다. 승객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런 것 같은데, 아무
리 그래도 일찍 출발은 좀 아닌 듯 싶다. (버스 시간표는 장식이 아님)
어쨌든 그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를 달려(기린대로, 오목대, 전주천 경유) 남부시장에서 내렸
다. 그런 다음 전주시내버스 61번(비전대↔전주대)으로 환승하여 전동성당, 전주시교육청, 서
신동, 서곡지구를 거쳐 서부신시가지 현대아이파크에서 하차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2분 정도
가면 문학대공원이 마중을 하는데, 서쪽은 문학대1공원, 동쪽은 문학대2공원이라 부른다. 바
로 문학대1공원 남쪽 언덕에 공원 이름의 유래가 된 문학대가 있다.



 

♠  고려 후기 대학자인 황강 이문정이 만년을 보냈던 곳
전주 문학대(文學臺) - 전북 지방기념물 24호

문학대는 1357년에 황강 이문정(黃岡 李文挺)이 낙향하여 세운 정자이다. 그는 여기서 만년을
보내며 성리학(性理學)을 강의해 후학을 길러냈고, 상소(上疏)를 통해 불교의 폐단과 나라의
잘못된 정책을 수시로 간해 이를 바로 잡게 하는 등, 멀리 고향에서도 조정 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터만 남은 것을 1824년 후손들이 중건했으며, 원래는 효자동3가 산 334
-1번지에 있었으나 서부신시가지 개발로 2006년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황강서원 뒤쪽인 황방
산 자락에 안착을 했다. 문학대 주변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완전 시골이었으나 그곳까
지 개발의 칼질이 밀려오면서 전주 시내는 서쪽으로 크게 팽창을 했다. 그래서 문학대는 한참
이나 후배인 신식 건물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문학대1공원 언덕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바닥을 돌로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는데, 건물 네 모서리에 고된 세월이 녹아든 기둥을
설치해 지붕을 받들게 했다. 문이 모조리 닫혀져 있어 내부를 살피지는 못했지만 가운데에 방
을 두고 좌우에 마루를 깐 형태이다.
문학대 앞에는 그의 후손들의 무덤이 펼쳐져 있고, 그 밑에는 이문정을 봉안한 황강서원(黃岡
書院)과 후손이 살고 있는 한옥들이 포진해 조그만 한옥마을을 자아내고 있다. 황강서원은 이
미 문이 닫힌 상태라(내가 갔을 당시 서원 관리인이 막 대문을 닫아걸었음) 굳이 살피지는 않
고 담장 너머로 대충 살피고 넘어갔다.

▲  문학대 이건(移建) 사적비와 황강 이선생
(이문정) 문학대 유적비(오른쪽)

▲  서쪽에서 바라본 문학대
마치 서적이나 목판을 보관하는 창고 같다.

▲  동쪽에서 바라본 문학대

▲  문학대의 뒷모습

문학대는 황강서원과 이문정의 후손(전주이씨)들이 사는 한옥 뒤쪽에 있어 신변에 그리 위험
은 없다. 비록 개발의 칼질에 못 이겨 이곳으로 오긴 왔지만 이곳 역시 서부신시가지에 둘러
싸인 도시 속의 외로운 섬이 되버린 상태이다.
다행히 문학대가 있는 황방산은 그 칼질에서 살아남아 그 숲을 보전할 수 있었고, 문학대 북
쪽과 동쪽은 문학대1공원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특히 공원 동부에는 개발 도중에 나온 마
전(馬田)고분군까지 갖추고 있어 사적공원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문학대에서 바라본 후손들의 묘역과 황강서원(기와집들)
그들 너머로 서부신시가지(효자동)가 바라보인다.


문학대 뒤쪽에 있는 숲길을 통해 마전고분군으로 내려갔다. 이 고분은 5세기 것으로 여겨지는
백제시대 무덤들로 5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더 있었다고 하나 죄다 도굴되어 파괴되면
서 간신히 5기만 수습하여 봉분을 복원했다.
고분 주변에 마전마을이 있어서 마전고분군이라 불리며, 조금이나마 남은 햇님의 기운에 의지
해 무심히 짙어져만 가는 땅꺼미에 저항하며 사진에 담았으나 다들 상태가 좋지 못하다. 하여
본글에서는 부득이 마전고분군은 생략한다. 사진이 엉망이니 안그래도 엉망인 내용이 더 엉망
이 될 수 밖에 없다.
문학대를 끝으로 전주 연말 나들이는 다소의 아쉬움을 뒤로 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문학대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3가 산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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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 모악산 연말 나들이 (대원사, 수왕사) '


▲  모악산 대원사

 


 

겨울 제국(帝國)의 나날이 강성해가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전북 한복판에 자리한 모
악산을 찾았다.
이번 해가 새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묵은 해가 되어 다시
금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된다. 그래서 묵은 해를 정리할 겸, 올해 마지막 답사지를 물색
하다가 모악산 대원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쿨하게 길을 잡았다.

아침 일찍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서초동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전주로 가는 직행버
스를 나를 담았다. 버스도 추위가 싫었는지 남쪽을 향해 질주하여 2시간 20분만에 전주시
외터미널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미리 점심을 먹고 움직이고자
전주(全州)에 올 때마다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콩나물국밥집(전주한옥마을 부근)에서 전주
의 명물인 콩나물국밥으로 뜨끈하게 배를 채웠다. 거기에 디저트로 주는 커피까지 섭취하
니 식곤증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순간 시샘을 벌인 듯,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비의 양
은 다행히 적었지만 나들이에서 비가 오면 이것만큼 열받는 것도 없다. 어쨌든 비의 방해
공작을 원망하며 전주시내버스 970번(송천동↔전북도립미술관)을 타고 모악산으로 이동했
다.
모악산관광단지(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귀찮게 하던 비도 다행히 그쳤으나, 하늘
이 일그러진 인상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어 언제 비나 눈이 투하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모악산 표석의 위엄


 

♠  모악산(母岳山) 입문

▲  모악산 대원사계곡(시앙골, 물레방아골) 하류

전북 한복판에 장엄하게 누워있는 모악산(794m)은 전주와 완주(完州), 김제(金堤)에 걸쳐있는
산으로 호남평야와 전북 내륙 산간지대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1971년 모악산 일대 42.44
㎢가 모악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정상 밑에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
니의 모습이라 하여 '엄뫼'라 불렸는데, 그걸 한자로 표현하여 어머니의 산이란 뜻의 모악산
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신라 후기에는 '금뫼','금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모악산의 원래
이름으로 보는 설도 있다.

신라 후기부터 세상을 구할 미륵(彌勒)의 출현을 열망하던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성지(聖地)
인 금산사(金山寺)를 비롯해 귀신사(歸信寺), 대원사, 심원암 등 굵직한 오래된 절이 안겨져
있으며, 왕년에는 80여 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종교들이 모악산을 기
반으로 여럿 생겨났는데, 증산교(甑山敎)가 그 대표적이다.
모악산은 봄 풍경이 아름다운데, 특히 금산사 입구 벚꽃길이 매우 유명하다. 하여 변산반도(
邊山半島)의 여름 풍경, 내장산(內藏山)의 가을단풍, 백양사(白羊寺)의 설경과 함께 호남4경
의 하나로 격하게 찬양을 받는다.

모악산 산행은 김제 금산사나 전주 중인동, 완주 모악산관광단지에서 시작하면 편하며, 산에
안긴 명소로는 금산사와 귀신사, 대원사, 심원암, 수왕사 등의 오래된 절과 전북도립미술관,
금산사 벚꽃길, 명당(明堂)으로 소문났으나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든다고 전하는 장군봉,
선녀폭포, 전주김씨 시조묘 등이 있다.


▲  전주김씨 세덕비(世德碑)와 전주김씨 종중공덕비(오른쪽 비석)

모악산 동쪽 자락 원기리에는 '모악산관광단지'가 넓게 터를 닦았다. 모악산을 든든한 후광(
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토속 음식을 내세운 식당과 가게(편의점),
까페, 등산용품점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관광단지 남쪽에는 전라북도에서 2004년 10월
에 세운 전북도립미술관이 자리하여 전북 지역 현대 미술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허나 미술관은 애당초 계획이 없었기에 쿨하게 통과했다. 나의 미련한 머릿속에는 오로지 모
악산과 대원사 뿐이었기 때문이다. 혹여 대원사를 보고 나올 때 시간이 남으면 들릴까도 했으
나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다.

평일이라 썰렁한 관광단지를 지나면 눈에 뒤덮힌 모악산의 설경이 나타나면서 전주김씨 세덕
비와 종중공덕비가 슬쩍 모습을 내민다.
여기서 가까운 산자락에 전주김씨 시조인 김태서(金台瑞)의 무덤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 이들
비석을 주렁주렁 닦아놓은 것인데, 김태서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4째 아들인 김은열(金殷
說)의 후손으로 그의 터전인 경주가 몽골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자 1254년에 가솔을 이끌고 전
주로 넘어와 정착했다. 이후 그는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고, 그를 시조로 한 전주김씨가 생
겨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북한이란 괴뢰 정부를 세운 김일성이 그의 후손이라는 점
이다. 1993년 손석우란 사람이 '터'란 책을 냈는데, 김일성이 시조 무덤의 지기(地氣)를 받아
북한을 세워 집권했으며, 음력 1994년 9월에 죽을 거라는 내용을 다루었다. 비록 달은 틀리지
만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자기 골로 가면서 그 책과 전주김씨 시조묘는 잠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주김씨 시조묘는 대원사로 올라가는 길목 부근에 자리해 있어 잠시 들릴까 했으나 눈의 방
해가 심해 올라가지는 못했다. 어차피 계획에도 없던 곳이다.


▲  선녀폭포(仙女瀑布)와 폭포를 품은 사랑바위

전주김씨 세덕비에서 대원사계곡(시앙골)을 옆에 끼고 산길을 오르다보면 선녀폭포와 사랑바
위가 모습을 비춘다.
선녀폭포는 높이 5m도 안되는 조그만 폭포로 볼품은 떨어지나 무려 선녀란 이름까지 지닌 것
을 보면 옛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도 앗아간 모양이다. 이런 폭포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
이로 지어놓은 전설이 있는 법, 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보름달이 뜨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선녀폭포로 내려와 목욕을 했다. 다른 유사
전설에서는 그냥 목욕만 하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목욕 외에 수왕사에 들려 약수도
마시고 모악산 신선과도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뭇꾼이 우연히 폭포 옆을 지나다 목욕 중인 선녀를 발견했고 그들의 아름
다운 자태에 미치도록 넋이 나간 그는 결국 상사병 비슷한 병을 얻어 몸저 눕게 되었다.

병으로 힘들어하던 나뭇꾼은 기왕 이 지경이 된 거 선녀의 모습을 1번만 더 보고 죽자며 보름
달이 뜬 날 폭포를 찾아와 그들을 훔쳐봤다. 그러다가 뜻밖에 한 선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
는데, 그 선녀도 나뭇꾼이 좋았는지 둘만 살짝 대원사 백자골 숲으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속
삭이며 예민한(?) 일을 벌이려는 찰라, 갑자기 뇌성병력이 그들을 내리치면서 선녀와 나뭇꾼
은 돌이 되고 말았다.
하늘의 시샘에 돌이 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떨어질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이는 듯 하다 하여
사랑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기서 치성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산길에
서 보면 폭포의 모습이 그리 실감나진 않으나, 바로 앞에서 보면 조금은 그럴싸하게 보인다.


▲  대원사계곡(시앙골)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  겨울에 잠긴 모악산 산길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털린 나무들은 숨죽이며 봄을 잉태하고 있다.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대원사계곡(시앙골)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에 묻힌 계곡도 얼음을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모악산관광단지에서 20분 정도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면 대원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시앙
골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이 놓여져 있고, 그 길을 오르면
비로소 대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대원사 직전에 걸린 크리스마스 축하 현수막

▲  대원사 경내로 인도하는 시앙골다리와 계단길


 

♠  모악산 동쪽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
대원사(大院寺)

모악산 동쪽 자락에는 고색과 숲내음이 깃든 대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겨울 제국이
내린 두터운 눈을 뒤집어쓰며 겨울 산사의 고적함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는데, 종종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추녀 밑에 달린 풍경(바람방울)이 들려주는 그윽한 풍경소리가 고요
한 경내를 살짝 어루만진다.

대원사는 670년에 보덕(普德)의 제자인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이 창건했다고 전
한다. 보덕은 고구려 승려로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開山祖)인데,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
離支)인 연개소문(淵蓋蘇文, ?~666)이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받아들이자 이를 개탄하며 백
제로 넘어갔다. 이때 신통력으로 완주 고덕산(高德山)으로 날라와 경복사(景福寺)를 세웠다고
하며, 절을 세운지 얼마 안가서 고구려가 망했다.

보덕의 제자인 일승, 심정, 대원은 경복사가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워 대원사(大原寺)
라 했다고 전한다. 보덕의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나와있지만 대원사 창건까지는 나
와있지 않아 670년 창건설(또는 660년)에 썩 신뢰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창건 시기를 입증해
줄 신라 후기 유물과 유적은 전혀 없으며, 1066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는 이야기
가 있어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74년 나옹(懶翁)이 중창을 했다고 하며, 1415년에 다시 중창을 벌였다. 그러다가 1597년 정
유재란으로 말끔히 파괴되자 1606년 부처로 추앙받는 진묵(震默)이 다시 일으켜 세웠고, 1733
년 동명 천조(東明 千照)가 중창을, 1886년에는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승려인 금곡(錦谷)과
인오 등이 중창했다. 금곡은 함수산(咸水山) 거사와 함께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내
원암(內院庵)에 있던 염불당을 가져왔다.

1950년 6.25전쟁으로 대부분이 파괴된 것을 덕운이 1959년부터 불사를 일으켜 하나씩 건물을
일으켜 세웠다. 1993년 칠성각을 부시고 요사채를 지었으며,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2001년 이후 명부전과 대웅전 수미단을 손질해 지금에 이른다.

예전에는 비록 음은 같지만 가운데 한자만 살짝 다른 대원사(大圓寺)였으나 근래 지금의 한자
로 갈렸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명부전, 나한전, 범종각, 요사 등 약 10동 정도의 건물이 조
촐한 경내를 메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삼세불좌상과 용각부도가 있고, 1606년에 조성
된 목각사자상(전북 지방민속문화재 9호)도 있었으나 1988년에 도난을 당했다. 그러다가 1999
년에 서울 가회동(嘉會洞)의 어느 화랑에서 발견되었으나 공소시효를 주장하며 돌려주지 않았
으며, 서울 인사동에 어느 작자에게 넘어가면서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99년에
지방문화재에서 정리되었음) 그 밖에 오래된 5층석탑 2기와 승탑(부도) 6기가 절의 숙성된 내
력을 알려준다.

이곳은 천하대복지(天下大福地)의 최길상(最吉祥)으로 치는 명당으로 효의 절, 어머니 절, 발
원을 이루는 기도처로 꼽히며, 특히 증산교를 세운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이
도를 깨우친 현장이기도 하다.
매년 1월 1일에는 '촛불기원 해맞이 타종제' 행사가, 4월에는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를 열
어 속세에 큰 호응을 받고 있는데, 화전축제는 이곳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매점과 찻집으로 쓰이는 소화당(笑話堂)

▲  소화당 현판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소화당이란 조그만 목조집이 마중한다. 이 건물은 불교용품과 기
념품, 커피, 전통차를 파는 매점으로 커피는 무려 3,000원대를 받는다. 건물 옆에는 잠시 쉬
어갈 수 있도록 파라솔이 달린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고, 건물 정면에는 소화당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는데, 마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상큼한 모습이다.


▲  겨울 산사의 내음을 진하게 보여주는 대원사 경내

▲  대원사 아랫쪽 5층석탑

소화당을 지나면 바로 대웅전 뜨락이다. 정면에는 대웅전이 마주보고 있고, 오른쪽에는 요사
와 모악당, 샘터, 왼쪽에는 5층석탑과 범종각, 명부전 등이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바로 왼쪽에 보이는 5층석탑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손질하면서 4
사자5층석탑으로 성형되었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내음이 다소 떨어진다. 그 뒷쪽에는 범종(梵
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이 있다.


▲  대원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대원사의 중심 건물(법당)로 석축 위에 높이 자리해 있다. 정면
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법당치고는 매우 작은 덩치인데 1886년에 지
어졌으나 6.25때 불탄 것을 1959년 이후에 다시 지었다.
불단(佛壇)에는 목조3세불좌상과 삼신후불탱 등이 있으며, 지금은 없지만 괴목(槐木)으로 만
든 목각사자상이 있었다. 이 사자상은 진묵대사가 축생(畜生)들을 천상(天上)으로 천도하고자
만든 것이라 하며 그 위에 북을 올려놓고 쳤다고 한다. 허나 1988년 불의의 도난을 당했고 다
행히 1999년에 서울 가회동에서 발견되었으나 소유자인 이영옥이 이현수란 사람에게 팔아먹는
등 우여곡절이 심해 아직까지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대원사 목조삼세불좌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목조3세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얼굴부터 밑도
리까지 하나 같이 두텁게 생긴 이들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
사불(藥師佛)을 거느린 3세불(三世佛)로 17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석가여래와 약사불, 아미타불로 이루어진 3세불은 조선 중/후기에 많이 나타나는 불상 형태로
중앙에 자리한 석가여래는 중심 불상답게 키가 제일 크며(130cm), 좌우 불상은 116cm 정도이
다. 앞으로 조금 내민 얼굴은 다소 경직되고 딱딱한 표정으로 볼살이 많고 이마가 넓으며, 꼽
슬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수인(手印)만 서로 다를 뿐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이며, 윗도리가 아랫도리보다
다소 살이 찐 모습으로 17세기 호남에서 활동하던 조각승들의 조각 스타일이 잘 반영되어 있
다. 그들 뒤에는 화려한 색채의 삼신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원사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대웅전을 바라보
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1887년에 금곡이 지었으며, 2001년
에 중수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그를 보좌한다.

▲  명부전 10왕(시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상

▲  명부전 윗쪽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  종무소로 쓰이는 모악당(母岳堂)

▲  모악당 뒷쪽에 자리한 나한전(羅漢殿)

▲  나한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와 거울 광배

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羅漢)의 거처이다. 석가
여래의 광배(光背)가 매우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광배 테두리는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배 중앙에 거울까지 달려있어 잠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마도 그런 의
도로 거울을 갖추었을 것이다.

  나한전 석가후불탱(19세기 작)과
색채감이 돋보이는 16나한상

  모악당 옆에 자리한 샘터


  경내 윗쪽에 자리한 5층석탑

경내 뒷쪽 언덕에는 고색이 느껴지는 5층석탑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대원사는 특이하게 오
층석탑이 2기나 있는데, 법당 앞이 아닌 다들 구석에 자리해 있다. 아마도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탑은 2중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석축을 기반 삼아,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
중의 기단(基壇)과 5층의 탑신(塔身), 얇은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얹혔는데, 탑신 지붕돌이 다
소 헝클어지고, 머리 장식 상당수가 사라진 것 외에는 그런데로 상태는 괜찮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각부도 다음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대원사 아랫 승탑군(僧塔群)

5층석탑에서 경내 뒷쪽을 거쳐 북서쪽 산길을 조금 오르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승탑군(부도
군)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이란 승려의 사리를 머금은 탑으로 대원사에는 9기(또는 10기)의 오래된 승
탑이 전하고 있는데, 용각부도 1기만 제외하고 모두 조선 중/후기 것이다. 이중 대웅전 남쪽
밑에 있던 승탑 3기(또는 4기)는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태이고, 경내 윗쪽에 2개 그룹으
로 4기와 2기 등 총 6기만 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대원사는 잃어버린 것이 참 많다. 절의
초창기 역사도 그렇고, 목각사자상, 거기에 승탑까지 말이다.

  대원사 용각부도(龍刻浮屠)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1호

대원사 승탑 중의 아주 유별나게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 바로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용각부
도(용각승탑)이다.
높이 187cm의 이 승탑은 이름 그대로 용이 새겨진 것으로 옥개석 아랫부분에는 대모양의 무늬
위에 겹잎으로 된 18개의 연꽃무늬가 있으며,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가운데 부분에 여의
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2마리 용을 진하게 새겨놓았다. 승탑의 피부가 완전 흑백이라 실감
이 덜해서 그렇지 만약에 칼라였다면 진짜 용도 시샘을 했을 것이다. 용의 비늘과 피부, 구름
무늬 등이 아주 실감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무늬까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어느 고승의 승
탑으로 여겨진다. 그 고승의 덕과 업적이 대단했던지 제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저 탑을 조성해
스승의 넋을 기렸던 모양이다.

장대한 세월을 거치면서 반질반질했던 피부는 검은 피부로 대부분 타버렸고, 군데군데 주근깨
같은 것도 달려있지만 이들은 세월이 달아준 훈장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머리 장식과 기단부
가 조금 깨진 것을 보면 대부분 잘 남아있는데, 머리 장식은 다른 데서 가져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대원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제일 가는 꿀단지로 이렇게 화려한 용 문양을 지닌
승탑은 처음 본다. 그러다보니 지닌 다른 승탑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용각부도 주변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승탑 3기가 있다. 매력 만점의 용각부도에 단단히 묻
힌 탓에 그리 주목은 못받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스타일의 탑으
로 용각부도와 긴 시간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모습이 마치, 부모와 자식들 같다. 그 옆
에는 마치 버섯이나 양봉통처럼 생긴 조그만 승탑이 있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이들 탑의 주
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원사 윗 승탑군

아랫 승탑군에서 윗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윗 승탑군이 나온다. 이곳에
는 2기의 승탑이 있는데, 검은 때가 자욱한 왼쪽 탑은 기단부와 바닥돌을 갖추고 있고, 하얀
피부가 역력한 오른쪽 탑은 바닥돌 위에 바로 탑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탑의 주인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들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여기서 더 이상 올라갈 공간이 없다.
주변은 대원사 소유의 숲이며 공식 탐방로도 없기 때문이다. (비법정 탐방로만 있음)


  아랫 승탑군에서 바라본 대원사의 뒷모습

  모악산 산길과 이어진 대원사 남쪽 문

  대원사 돌담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승탑을 끝으로 대원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원래는 대원사만 보고 전주로 쿨하게 철수하
려고 했으나, 여기서 정상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물맛이 일품이라는 오래된 절, 수왕사가
있다고 하여 시간도 아직 이르고 해서 거기까지 발을 넓혀보기로 했다. 기왕 모악산의 품에
들어섰으니 그 품을 더 파고들어야 아쉬움이 없겠지. 다행히 수왕사까지는 1km 남짓이다. (산
에서 1km는 평지의 1km보다 훨씬 김)
허나 문제는 산에 눈이 많이 쌓여있고 얼음 길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 좀 되었다. 올라갈 때야 별로 문제는 안되지만 문제는 내
려올 때가 아니던가? (트래킹화를 신고 온 것이 전부임) 허나 이미 내 마음은 수왕사에 올라
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거기까지 무작정 올라가기로 했다. 내려갈 때 걱정은 나중이다.

* 대원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 (모악산길 243, ☎ 063-221-8502)


 

♠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고적한 산사
수왕사(水王寺)

  모악산 정상과 수왕사로 인도하는 눈덮힌 산길

대원사에서 수왕사까지는 산길을 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겨울이 내린 눈과 얼음이 두텁게
깔려있어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이 그리 넉넉치가 않은데, 앞만 보고 열심히 오른 끝에 해발
약 560m에 자리한 수왕사입구 쉼터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모악산 정상이고, 남쪽으로 나있는 벼랑길로 가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적한 절집, 수왕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수왕사입구 쉼터

  수왕사입구 쉼터에서 수왕사로 인도하는 벼랑길
안전한 통행을 위해 벼랑길에 철난간을 둘러 절을 찾은 이들을 배려했다.


  소박한 모습의 수왕사 경내

해발 570m 고지에 자리한 수왕사는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이곳은 약수가 유
명하여 '물왕이절','무량(無量)이절'이라 불렸는데, 680년에 완주 경천사를 지은 보덕이 수도
장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적이나 관련 역사 기록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없으며, 이곳 밑에 대원사가 있어 대원사나 금산사 승려의 참선 장소로 쓰였다가 조선 때 건
물을 심으면서 절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1125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며, 1597년 정
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탄 것을 1604년 진묵대사가 중건하여 머물렀다. 6.25전쟁이 한참인
1951년 1월 10일, 모악산 일대를 어지럽히던 공비를 토벌하고자 작전상 소실된 것을 1953년에
천석진사(千錫振師)가 다시 세웠다.

이곳은 모악산 정상 북쪽 밑으로 가파른 곳에 간신히 터를 닦은 탓에 절이 매우 단출하다. 법
당과 요사, 진묵조사전이 좁은 경내를 이루고 있으며, 근래에 새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
은 진작에 날라가버렸다. 오래된 유물도 없고, 건물도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여염집 스타일이
라 겉으로 보이는 절집 분위기도 다소 떨어진다. 게다가 첩첩한 산속에 묻혀있다보니 머무는
승려도 거의 없고 절을 찾는 신도나 산꾼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원사에 많이 의존
을 한다.
또한 수왕사는 완주 지역 전통민속주로 꼽히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 송죽오곡주(松竹五穀
酒)를 생산하는 현장으로 주지승인 벽암(碧岩)이 수왕사 약수로 직접 술을 빚는다. 그는 대한
민국 전통식품 명인 1호로 지정된 전통민속주의 장인이자 수왕사의 자랑으로 술을 멀리하는
절에서 곡차(穀茶)로 빗대 표현되는 술을 직접 만든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수왕사 법당

  법당 내부 (석가3존불과 여러 탱화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수왕사 법당은 금동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신중탱, 용왕탱
이 봉안되어 있다. 절은 작고 초라해도 법당 내부에 봉안된 존재만큼은 다른 절 못지 않은데,
바다와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이곳에 용왕탱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수왕사가 거
의 약수로 지탱하는 절이다보니 물을 관리하는 용왕(龍王)이 담긴 용왕탱을 봉안해 매일 좋은
물이 나오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법당 신중탱(왼쪽)과 용왕탱(오른쪽)

  수왕사 약수터

수왕사의 든든한 후광인 약수터는 겨울 제국의 심술로 얼음에 완전 봉해진 상태이다. 그래서
이곳의 명물인 약수를 마시지 못했지. 선녀도 와서 마신다는 물인데 이렇게 막혀버렸으니 여
기까지 온 보람이 크게 떨어진다.


  진묵조사전(震默祖師殿)

보통 절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절
을 중창한 진묵대사를 봉안한 진묵조사전을 그 자리에 두었다. 여기서만큼은 산신이나 칠성,
지장보살보다 진묵대사를 더 크게 여기기 때문이다.
바위 밑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진묵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1칸 크기의 집을 두었
는데, 그곳까지 인도하는 돌계단을 법당 옆까지 늘어뜨려놓았다.


  하늘색 두광(頭光)까지 갖춘 진묵대사의 진영

진묵(1562~1633)은 수왕사와 대원사의 중창주이자 석가여래의 소화신(小化身)으로 격하게 추
앙을 받는 고승으로 그의 흥미로운 이적과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그가 동자승이던 시절, 주지승이 그에게 향불을 피우게 하니 주지승 꿈에 제천(諸天) 등이 나
타나 '부처가 향을 피우니 우리는 받을 수 없소!' 했다는 것,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하고 무
슨 책이든 바로 다 외워버려 따로 스승이 필요 없었다는 것. 해인사에 불이 나자 소나무잎에
물을 묻혀 뿌리니 큰 비가 내려 불이 진화되었다는 것, 동네 사람들이 물고기 매운탕을 먹고
가라며 놀리자 탕이 담긴 가마솥을 번쩍 들어 다 흡입한 다음, 엉덩이를 까서 변을 누니 물고
기가 살아서 나왔다는 설화 등, 술을 흔히 곡차(穀茶)라 부르는데, 이는 그가 술을 즐겨 마시
며 곡차라고 했다는 것, 어머니의 무덤을 '무자식 천년향화지지(無子息 千年香火之地)'란 명
당에 썼다는 것 등 재미나고 신비로운 일화가 전해져 온다.

* 수왕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산13 (모악산길 246, ☎ 063-287-0485)


  수왕사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나무들이 있어서 시야는 별로)

수왕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5시가 넘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뒷쪽인 모악산 정상까
지 오르고 싶었으나 시간도 늦고 산길도 가파르며 거기에 눈과 얼음까지 덮여있으니 오를 엄
두가 나지 않는다. 아이젠이라도 있었으면 모르지만 그것도 없다. 이럴 때는 건방 떨지 말고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무조건 내려가는 것이 상책, 안그래도 수왕사까지 눈길을 뚫고 무리하게
올라온 터라 내려가는 것도 걱정인데 자꾸 일을 벌여봐야 좋을 것이 없다.

산길을 기어가듯 조심에 조심을 기하며 내려가 별탈없이 대원사에 도착했다. 여기서 관광단지
까지는 길이 완만하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다. 처음에는 대원사만 보려고 들어왔는데, 수왕
사까지 보너스로 겯드리면서 모악산에서의 일정이 다소 연장되었다.

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마침 전주시내버스 970번이 바퀴를 접고 쉬고 있어 그것을 타
고 미련없이 전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연말의 모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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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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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전주 근교 제일의 고찰, 완주 종남산 송광사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완주 송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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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만물의 희망, 봄이 혹독한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천하를 한참 해방시키던 3월
한복판에 완주(完州) 제일의 고찰로 손꼽히는 송광사를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삼례(參禮)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담고 딱 2시
간을 달려 삼례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바로 전주시내버스 350번(삼례터미널↔평화동
)을 잡아타고 호남의 오랜 중심지, 전주 시내로 들어섰다. 서울에서 바로 전주로 안가고
삼례를 거친 것은 전주행 직행버스 이용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한산한
삼례행 버스를 택했다. 어차피 삼례에서 전주는 지척 거리이다.

전주의 도심, 전동(全洞)에 두 발을 내렸으나 송광사로 가는 차 시간이 50분이나 남아있
었다. 마땅히 할 것도 없고 점심을 먹기에도 시간이 일러 중앙시장까지 쉬엄쉬엄 걸으며
시간을 억지로 죽였다. 그래도 20여 분이나 남아 정류장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기다리던 전주시내버스 806번(평화동↔앞멀)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며 입을 벌린다.
전주 806번은 거의 3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벽지 노선으로 그를 놓치면 정말 대책이 없다.
(송광사는 806번 외에도 1개 노선이 더 있으나 배차간격이 거의 절망 수준임)
버스는 모래내시장에서 노인들이 가득 타면서 거의 만석의 기쁨을 누렸고 중앙시장 출발
30분 만에 송광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진흙탕이 되버린 오도천을 건너면 송광사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짧
은 방죽의 끝에는 완주군 제일의 고찰인 송광사가 일주문을 들이밀며 중생을 맞이한다.


▲  송광사 앞을 흐르는 오도천

▲  송광사 주차장과 둑방길 나무들


 

♠  종남산(終南山) 남쪽에 들어앉은 오래된 고찰
완주 송광사(松廣寺)

▲  송광사 일주문(一柱門)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4호

송광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양쪽으로 쭉쭉 뻗은 보기만해도 정겨운 기와 돌담을 거느리고 있다.
보통 일주문은 경내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며 홀로 자리해 있지만 이곳은 경내 바로 앞에
자리하여 홀로 있는 것은 면했다. 바로 옆에는 백련다원이란 찻집이 있고, 문을 들어서면 바
로 금강문과 함께 경내 건물이 두텁게 모습을 비춘다.
일주문은 속세의 문과 달리 여닫는 문이 없어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허나 이곳
은 특이하게도 여닫는 문짝을 달았다. 문짝을 달았다고 해서 사람을 가리는 것은 아니니 어깨
를 피고 들어가도록 하자.

이 문은 맞배지붕 건물로 다른 일주문의 지붕과 달리 간결하고 가벼운 모습이다. 문 기둥 위
쪽과 기둥 사이에 공포(空包) 덩어리를 장식한 다포(多包)식이며, 기둥 앞뒤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진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준다. 문 평방(平枋)에는 '終南山 松廣寺(종남산 송광사)'
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이는 1975년에 승려 서암(瑞岩)이 쓴 것이다.
지금은 경내 앞에 있지만 원래는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나드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 문을
들어서 3km를 더 들어가야 비로소 경내에 이르렀다는 소리로 송광사 땅이 무려 그곳까지 이르
렀다고 한다. 허나 사찰 부지가 계속 줄어들면서 1814년 절과 가까운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고
1944년에 해광극인(海光克仁)이 현 위치로 옮겨 정문으로 삼았다.


▲  일주문 서쪽 돌담

송광사가 산속이 아닌 평지에 둥지를 틀다보니 돌담으로 경내를 빙 둘러 속세의 잡다한 기운
을 경계하고 있다. (서쪽 돌담에 차량 통행을 위해 문을 낸 것을 빼면 거의 돌담으로 감싸임)
고색이 짙은 돌담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시골마을의 담장 같은 정겨운 풍경이다.


▲  일주문을 들어서면 해맑은 표정의 나무 장승 1쌍이 좋은 인연임을 강조하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들의 인사에 나도 기분이 좋아지고 긴장감도 많이
풀어진다. 그들을 지나면 바로 금강문이 마중한다.


※ 완주 송광사(松廣寺)의 오랜 내력
종남산의 남쪽이자 오도천 서쪽 평지에 둥지를 튼 송광사는 신라 후기인 867년 보조국사 체징
(普照國師 體澄)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종남산 남쪽에 영험이 있는 샘물이 솟아나 그 옆에 절
을 짓고 송광사라 했다는데 이를 입증할 사료도, 그 시절 유물도 전혀 없어 창건시기에 대해
심히 회의감을 들게 한다. 백제 후기에 창건되어 백련사(白蓮寺)라 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 역
시 마찬가지이다.
고려 중기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이곳을 천태종(天台宗) 소속으로 바꾸었다고 하
며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보조국사의 창건설 말고도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점지설이 있다. 그가 이곳을 지
나다가 영천이란 우물을 발견했는데 (절터 주춧돌이 가시덤불 속에 묻혀있었고, 절터 한쪽에
영천이란 우물이 있었다고 함) 그 물을 마셔보니 그 맛이 매우 특이해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하여 이 우물로 인해 이곳에 절을 세우면 크게 될 것이라 여겼으나 당장 절을 세울 여
력이 없어 샘 주변 네 귀퉁이에 돌을 쌓아 자신이 찍어둔 자리임을 밝히고 그곳을 총총히 떠
났다.
이후 순천에서 그 유명한 송광사(松廣寺)를 세우고 머물 때, 제자들에게 '전주 인근 종남산에
괜찮은 절터가 있다. 크게 불법(佛法)이 번창할 곳이니. 그곳에 절을 세워라!'
부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뜻은 실현되지 못했다.
지눌은 고려 중기 고승(高僧)으로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다. 당시 고려 불교계의 1
인자였던 그가 마음에 들어했던 자리에 절을 세우지 못하고 지나친 것도 이상하거니와 스승의
부탁을 받은 제자들도 그 뜻을 받들지 않았다는 점도 의문스러울 뿐이다.

지눌이 지나갔다는 시절에서 400여 년을 더한 1622년에 이르자 응호(應浩)와 승명(勝明), 운
정(雲淨), 덕림(德林), 득순(得淳), 홍신(弘信) 등이 모여 현재 자리에 절을 세웠다. 재정이
여의치 못해 무려 14년 동안 공사를 벌여 1636년에 완성을 보았으며, 당시 무주 적상산(赤裳
山) 안국사(安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주지로 있던 벽암대사(碧岩大師)를 개창조(開創祖
)로 삼았다고 하니 이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로 여겨진다. 당시 절터 자리는 승명의 증조부(
曾祖父)인 이극룡(李克龍)이 기증했다고 한다.

▲  독특한 구조의 송광사 종루

▲  5층석탑 -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다고

1636년 절이 완성되자 벽암대사를 불러 50일 동안이나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전국에서 수
천 명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완성을 기념하고자 사적비를 세우고 약사전을 지었
으며, 옛날 지눌의 뜻을 받들었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송광사라 했다고 한다. (순천 송광사
가 워낙 대단한 절이라 그곳의 이름을 따고 지눌의 일화를 그럴싸하게 붙여놓은 것으로 여겨
짐) 참고로 종남산이란 이름은 보조국사가 절터를 구하고자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우물이 풍부
하게 솟은 지금의 자리를 발견하고 더 이상 남으로 내려가지 않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
다. 즉 남쪽으로 가는 것을 마쳤다는 뜻이 된다.

1640년 명부전에 소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을 만들어 봉안했으며, 1641년 왕실의 지원을 받
아 청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귀국을 기원하고자 대웅
전에 거대한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봉안했다.
1649년 사천왕상을 조성했고, 1656년에 나한전을 지었으며, 1716년에는 범종을 조성했다. 그
리고 1786년에는 왕실의 지원에 호응하고자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목조3전패를
만들고 절을 중수했다. 1813년에는 정준이 약사전을 중수하고, 절의 영역이 크게 줄어듬에 따
라 3km 밖 나드리에 있던 일주문을 조계교 인근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2층이던 대웅전이 기울
자 1층으로 개축했으며, 1814년 명부전 지장후불탱화를 조성했다.

1944년 일주문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고, 1989년에는 삼성각에 탱화를 조성했으며 1993년 대
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복장(腹臟)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2002년에
는 대웅전을 해체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고, 2003년에는 2층이던 관음전과 요사채의 위치
를 바꿨다. 그리고 2004년에 천왕문과 사천왕상을 손질했고 2013년 약사전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  소나무에 조금 가려진 나한전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겉보기와 달리 제법 터가 넓은 송광사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천왕문, 금강문, 종루, 지
장전, 극락전, 첨성각, 나한전, 삼성각, 관음전, 약사전, 요사 등 대략 16~17동에 건물을 지
니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종루, 소조사천왕상, 소조석가여래3불좌상과 복장
유물 등 국가 보물 4점과 일주문과 사적비(전북 지방유형문화재 5호), 동종, 목조3전패, 나한
전, 금강문, 벽암당부도(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44호) 등 9점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산속 평지에 자리한 절로 마을 바로 옆에 자리해있어 산사의 내음은 조금 떨어진다. 그냥 시
골에 있는 한적한 사찰 정도라고나 할까? 요사와 종무소, 세심정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오래
된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각 건물마다 문화유산이 풍부하여 그들이 풍기는 고색의 내음에 현
기증이 일어날 정도이다. 게다가 경내 서쪽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여름과 초가을에는
연꽃의 향연도 구경할 수 있다.

※ 송광사 찾아가기 (2018년 4월 기준)
① 전주까지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에서 전라선 열차(고속전철, 새마을호
  , 무궁화호, 누리로)를 타고 전주역 하차
* 여수엑스포역, 순천역, 남원역에서 전라선 열차(고속전철, 새마을호, 무궁화호, 누리로) 이
  용
*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
  가 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인천공항, 의정부, 고양(화정), 성남, 부천, 안산, 수원, 강릉, 원주, 천안, 대전(복
  합, 유성), 군산, 정읍, 남원, 광주, 목포, 순천, 대구(서부, 동대구), 경주, 포항, 부산(
  사상, 노포동), 창원(마산), 진주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전주역에서 806번 시내버스(1일 5회)를 타고 송광사 하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6번 시내버
  스를 타고 고려병원에서 하차하여 길 건너편 정류장에서 814번 시내버스(1일 11회 운행)로
  환승
* 전주고속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3-1번을 타고 모래내시장 정류장에서
  814번으로 환승, 또는 금암광장이나 전주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에서 전동, 전주한옥마을
  방면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중앙시장이나 전동성당, 남부시장 정류장에서 내려서 건너편 정
  류장에서 806, 814번 이용
③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익산포항고속도로 → 소양나들목을 나와서 진안 방면 26번 국도 → 해월1교차로에서 좌회전
  소양 방면 → 마수교를 건너 우회전 → 송광사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금강문)

▲  사자를 탄 문수동자 (금강문)

★ 송광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공짜
* 송광사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하고 있다. 자율/휴식형과 아름다운 순례길, 1박2
  일 템플스테이 등 3가지가 있으며, 자율/휴식형은 절에 머물며 휴식과 수양을 하는 것으로
  아침/저녁 예불과 공양시간만 지키면 된다. (평일은 언제나 참여 가능), 아름다운 순례길은
  전북에 있는 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성지를 걸어서 순례하는 것으로 송광사에서 1박
  2일 숙식을 한다.
*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2 (송광수만로 255-16 ☎ 063-241-8090 / 243
  -8091)
* 송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템플스테이 정보와 예약 신청 가능)


▲  금강문 안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  송광사 천왕문, 금강문

▲  금강문(金剛門)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3호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금강문이 나타나 중생의 번뇌를 검문한다. 이 문은 정면 3칸, 측면 2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부처를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보금자리이다.
문의 천정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정이며, 대웅전 방향 오른쪽 금강역사는 왼손에 칼
을 들고 싸움 태세를 취하며 약간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왼쪽 금강역사는 오른손에 뱀(아마
도 코브라일듯)을 꽉 쥐어들며 고개를 약간 틀어 오른쪽을 보고 있다. 눈을 크게 부라리며 당
장이라도 칼로 찌를 태세이지만 얼굴은 거의 해학적으로 생겨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
게 한다.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표정에 굳이 싸움을 걸지 않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돌아갈 것이다.

금강역사 옆에는 앳되고 귀여운 동자가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사자(거
의 강아지처럼 생김)에 탄 동자는 문수동자(文殊童子)이며, 작은 코끼리를 탄 보살은 보현동
자(普賢童子)로 표정이 참 천진난만하다. 저들은 저리 표정이 밝건만, 속세에 찌들어 매일 고
통받고 사는 나는 그렇지가 못하니 그 비결을 묻고 싶을 뿐이다. 저 자리에 앉으면 저렇게 변
하는 것일까? 저들이 잠시 마실 나간 사이 그들의 자리를 빼앗아 앉고 싶다.


▲  금강역사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의 위엄

▲  금강역사와 하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  금강문과 천왕문 사이에 자리한 굵직한 당간지주(幢竿支柱)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돌기둥에는 고색의 때가 역력하다.

▲  보수공사에 들어간 천왕문(天王門)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천왕문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
금자리로 보통 일주문처럼 문짝이 없지만 여기는 여닫는 문짝을 두었다.

이 문은 송광사가 한참 몸을 일으키던 1622년부터 1636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1636년에 세
워진 송광사 개창비(開創碑)에 따르면 처음부터 '문'이 아닌 '전'을 칭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또한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왼쪽 보관(寶冠) 끝 뒷면에 '順治己丑六年七月日 畢金山畵圓主造
像'이란 묵서(墨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순치6년은 1649년이다. (청나라 세조의 연호임)
하여 이를 통해 1649년에 사천왕을 만들어 봉안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왼손에 있는 보탑
(寶塔) 밑에는 '乾隆五十一年丙午五月日…新造成'이란 묵서명이 있어 1786년에 보탑을 새롭게
만들었음을 살짝 알려준다.

▲  천왕전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 보물 1225호

이들 사천왕상은 흙으로 만든 것으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천왕문이 보수공사에 들어가면서 문 주변으로 철제 담장을 둘렀고, 사천왕상 앞에 보수 관련
시설을 두면서 온전한 모습을 담기가 어려웠다. 사천왕상도 아무리 그들의 보금자리를 보수하
는 시설이라고 해도 시야를 가려 마치 철창에 갇힌 듯한 모습이니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이다.

◀  아이들을 품으며 행복에 겨워있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위엄


▲  송광사의 종루(鐘樓) - 보물 1244호

천왕문을 지나면 살이 과하게 찐 똥배 포대화상이 나온다. 똥배에다가 얼굴에 혹부리까지 잔
뜩 나있으니 성인병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을 듯 싶으나 불교의 주요 성자(聖者)의 하나로
그의 배를 문지르면 아들을 낳거나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중생들의 인기가 대단하다.

포대화상 옆에는 '十'자 모양의 묘하게 생긴 건물이 눈길을 단단히 부여잡는데 그가 바로 사
물(四物)의 보금자리인 종루이다. 송광사의 백미이자 상징으로 '十' 모양으로 생긴 탓에 예전
에는 십자각(十字閣)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정확히는 12각형으로 이런 형태에 건물은 천하에서
거의 이곳 밖에 없다. 또한 6각형 이상 건물은 오로지 궁궐이나 국가 제단에서만 세울 수 있
었는데 무려 12각형짜리가 어찌 궁궐도 아닌 절에 버젓히 세워져 있는지 딱히 전하는 사연이
없어 호기심을 크게 자극시킨다.

그는 누각 형태의 팔작지붕 건물로 1층은 2층을 받쳐들기 위한 허공일 뿐이며, 서쪽에 마련된
계단을 타고 2층에 오르면 중앙에 자리한 범종(梵鐘)을 비롯해 운판(雲版), 법고(法鼓), 목어
(木魚) 등의 사물이 매달려 있다.
이 건물은 대웅전을 1층으로 고친 1814년이나 1857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지붕을 받치
는 공포와 지붕이 절반을 넘을 정도로 커서 1층과 2층 기둥이 잘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쓸데없
는 걱정까지 들 정도이다.

▲  서쪽에서 본 종루

▲  종루 안에 들어있는 사물

종루에는 2개의 종이 걸려있다. 중앙에 자리한 것은 근래 것이고 그 북쪽(대웅전 방향)에 자
리한 것이 1716년에 조성된 동종(銅鐘)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38호이다,

종의 높이는 107cm, 아랫부분 지름은 73cm로 조그만 크기이며, 윗부분에 꽃무늬가 있고 밑에
는 방패 모양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밑에 연주형(練珠形) 돌기 60개가 둘러져 있고 9.5
cm 두께의 띠가 그 밑에 있다. 아랫부분에는 지름 6cm의 원이 8개가 새겨져 있고 그 안에 범
자(梵字)를 새겼으며, 그 밑 세로 면에 보살상을 새기고 나머지 한 면에는 전패(殿牌)를 두었
다. 전패에는 '주상삼전수만세(主上三殿壽萬歲)'라 쓰여있어 당시 숙종(肅宗)과 왕후, 대왕대
비(大王大妃)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종의 가장 밑부분에는 지름 6㎝ 정도에 보상 당초 무늬를 둘렀으며 강희 55년(1712년) 4월에
광주 무등산 증심사(證心寺)에서 만들었다는 내용과 건륭(乾隆) 34년(1769년)에 문광득의 시
주로 종을 보수했다는 내용이 있어 시주자의 인적사항을 빼곡히 적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 범
종 형태를 보여준다.


▲  송광사 극락전(極樂殿)

천왕문 동쪽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거
처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명부전(冥府殿)이었으나 1999년에 바
로 옆에 지장전을 닦으면서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
을 그곳으로 옮기고 이곳을 극락전으로 삼았다.
다른 건물과 달리 문이 중앙에만 있으며, 불단에는 아미타불과 수려한 보관을 쓴 문수보살(文
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아미타3존불을 이루고 있고 좌우 벽에는 조그만 금동불이 가
득 벽을 메우고 있는데 이들은 죽은 이들의 영가(靈駕)를 봉안한 공간이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 - 서방정토의 주인답게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 있는 존재들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는 고색의 때가 가득한 커다란 네모난 돌이 누워있다. 그 위에는 오래
된 연화대(蓮花臺)가 있는데, 그 자리에 새로 만든 하얀 피부의 석불이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인다. 이 네모난 돌은 예전 건물에 쓰였던 주춧돌로 보이며, 연화대 역시 예전에 쓰였거나
주변에서 업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잉여로 남은 이들 석재를 한쪽에 모아 자리를 만들고 새로
석불을 안치하여 그들에게도 존재의 가치를 심어주었다.
석재 뒤쪽에는 종이와 쓰레기를 태우는 굴뚝이 자리하여 서로를 의지한다.


▲  송광사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1999년에 지어졌다. 극락전에 있던 명부의 식구를 옮겨와 지장전으로 삼았으며, 소
조지장보살3존상을 비롯한 명부(저승)의 식구들은 164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들을 하나로 묶
어 '소조지장보살3존상 및 권속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8호로 지정했다.
허나 나는 어리석게도 지장전을 지나치고 말았다. 건물 주변에 그들을 알리는 문화재 안내판
이 없었기 때문이다.

▲  세심정 앞에 자리한 귀여운 돌부처
그의 포즈가 꼭 '한푼 내놔~' 그러는 것 같다.
그렇게도 돈이 궁했단 말인가?? 그 앞에
놓인 복전함이 참으로 궁색해 보인다.

▲  대웅전 동쪽 언덕의 세심정(洗心亭)
근래에 지어진 정자로 모습이 양반가의
정자나 별장 같은 분위기이다. 절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풍경~~


 

♠  송광사 나한전, 삼성각, 관음전

▲  송광사 요사(寮舍)

세심정 북쪽에 자리한 'ㄱ'자 모습의 건물은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로 예전에는 약사전(藥師
殿)으로 쓰였다. 1636년에 벽암이 세웠다고 하며, 1814년에 중수했는데, 바로 이 요사 뒤쪽에
1636년에 세워진 송광사 사적비(事蹟碑,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5호)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그는 일명 송광사 개창비라 불리기도 하는데 신익성(申翊聖)이 비문을 짓고, 선조(宣祖)의 8
번째 아들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글씨를 썼다. 이 비석 역시 그의 존재를 몰라 지나
치고 말았다.


▲  송광사 나한전(羅漢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2호

대웅전의 뒷통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선 나한전은 부처의 제자인 나한(羅漢)의 보금자리이다.
그들을 거느린 석가불을 중심으로 16나한과 오백나한(五百羅漢), 인왕상(仁王像), 동자상, 사
자상 등이 건물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데, 석가불과 16나한 뱃속에서 나온 유물 중 1656년
에 조성된 발원문이 발견되어 창건시기를 알려준다.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가운데에 문이 있는 구
조이다. 1656년에 벽암이 세웠으며 1934년에 혜광이 중수했다. 이때 중수로 서까래와 천정 등
이 조금 변형되긴 했으나 주요 부재와 천정 구성 등은 17세기 불전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나한전 목조석가여래3존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9호

나한전 석가불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뚱뚱한 어린이의 얼굴처럼 앳되고 포동포
동해 보인다. 두 귀는 중생들의 고충을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다. 그 좌우에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협시(夾侍)하고 있는데, 보통은 중앙 불상과 협시불은 간격을 짧
게 하여 바로 좌우에 두지만 여기는 기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배치한 탓에 서로 간의 거리가
길어 마치 독자적인 불상/보살상처럼 보인다.

석가3존불 외에 16나한과 500나한, 범천(梵天)과 제석(帝釋), 동자, 인왕상, 사자상, 천녀상
등 526구가 불단 주변을 빼곡히 메운다. 500나한 중 일부는 나중에 다시 석고로 틀을 만들어
복원한 것이며, 석가3존불을 비롯한 나한전 내부의 모든 존재들은 '나한전 목조석가여래3존상
및 권속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9호로 지정되었다.


▲  나한전 내부 우측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한 16나한과 하얀 피부의 조그만 500나한 등이 보인다.

▲  나한전 내부 좌측 - 존상(尊像)들이 너무 많아서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송광사 삼성각(三聖閣)

나한전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로 1980년대에 기존의 건물을 부시고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
부에는 1989년에 조성된 아주 따끈따끈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삼성각 중앙에 자리한 칠성탱

▲  산신탱과 호랑이를 탄 산신상

▲  독성탱과 윗통을 드러낸 독성상

▲  근래에 새롭게 터를 닦은 미륵불

▲  송광사 관음전(觀音殿)

▲  대웅전 뒤쪽 뜨락

종루 서쪽에 자리한 관음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2층이었다. 1층
은 밥을 먹는 공양간, 2층은 관음전으로 쓰였는데 2003년에 2층을 뚝 떼어냈다. 근래에 조성
된 관음보살상과 관음탱이 있으며, 건물 북쪽에는 매점을 겸하는 종무소가 있고 남쪽에는 공
양간 겸 요사로 쓰이는 적묵당이 있다.

대웅전과 나한전 사이에는 소공원 같은 조촐한 뜨락이 있다. 커다란 나무 그늘에 자리한 짜투
리 공간으로 예전 주춧돌과 맷돌로 쓰인 돌을 가져와 조촐하게 탁자와 의자로 삼았는데 그 모
습이 참 아기자기하다. 그리고 서쪽에는 조그만 비석이 우두커니 서 있는데 그를 알리는 안내
문도 없고 비석의 내용도 마멸이 심해 멀쩡한 두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절과 관
련된 비석이거나 승려의 탑비(塔碑)인 듯 싶다. (옛 사적비라는 말도 있음)

▲  주름잡힌 어처구니 없는 맷돌이
어엿한 탁자가 되었다.

▲  주춧돌로 보이는 커다란 돌을 탁자로
삼고 주변에 작은 돌을 배치해
의자로 삼았다.

◀  정체가 묘한 오래된 비석
얼핏 보면 내용도 없이 그냥 돌만 비석처럼
세운 것 같다.


 

♠  송광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1243호

송광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계 팔작지붕 건물로 그 규모가 상
당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상당히 주눅을 들게 만든다. 162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처음에는
2층이었다.
지금도 1층 치고는 큰데 2층이었으면 거의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에 버금가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다가 건물이 기울면서 1814년 1층으로 고쳤으며, 1857년에 중수했다.
대웅전 현판은 송광사개창비(사적비)를 썼던 선조의 8번째 아들인 의창군이 쓴 것이니 그만큼
왕실과도 인연이 깊었음을 보여준다.

대웅전은 다른 건물에 비해 가운데 칸이 조금 좁은 편이며, 건물 외벽에는 1칸당 3개의 그림
을 두어 총 48개의 그림을 두었다. 그림에는 신중과 보살, 나한도 등이 그려져 있는데, 다른
법당에서는 볼 수 없는 개성적인 구조로 문이 있는 정면은 그림의 높이가 낮다. 또한 겉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축물의 하나로 단순히 여길 수 있지만 대웅전의 매력은 바로 그 안에 있다.
송광사에서 다른 건 다 놓치더라도 대웅전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야 여기까지 들인 차비와 기
름값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건물 내부는 높은 기둥을 4개 세웠으며, 옆면의 평주(平柱)보다 뒤로 물린 다음 후불탱을 봉
안했고 그 앞에 불단을 두어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안치했다. 이 석가3불좌상은 규모가 대웅
전에 버금갈 정도로 장대하여 보는 이를 다시 한번 주눅 들게 만드니 왜 자꾸 중생의 기를 죽
이는지 모르겠다. 또한 건물 천정에는 보개(寶蓋)를 만들고 그 위에 용, 게, 거북 등을 배치
했으며, 중앙 3칸과 양쪽 구석 천정에는 주악비천(奏樂飛天)을 그린 그림 11폭이 있다. 그리
고 석가3불좌상 사이에는 왕실의 안녕을 비는 3개의 전패(殿牌)를 두었는데, 그 디자인이 매
우 현란하며, 건물 외벽에도 온갖 그림으로 치장되어 있어 그야말로 하나의 불교미술전시관을
보는 듯 하다.

대웅전 앞에는 원래 5층석탑이 있었다. 그래서 1금당 1탑 형태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근래(2008년 이후)에 미륵불 앞으로 옮겨져 조금은 허전한 형태가 되었다.


▲  대웅전 계단 옆에 고개를 내민 귀수

화마(火魔)의 예고 없는 방문을 막고자 도깨비 얼굴상(귀수)을 건물 정면에 배치했다. 도깨비
라고는 하지만 그리 무서운 표정도 아닌 일주문 장승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그를 본 화마도 자
신의 본분도 저버린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 덕분인지 아직 대웅전은 화마에게 유린된 적
이 없다. 서로를 피곤하게 하며 인상을 찡그리는 강경책보다는 적절히 웃으면서 달래는 회유
책이 한 수 위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  석련대(石蓮臺)
거북 비슷하게 생긴 석상 위에 연꽃을 두룬 석련대가 있다. 불상을 올려두는
돌받침대로 지금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세월의 먼지만 가득하다.

▲  온갖 그림으로 가득한 대웅전의 뒷모습
1칸에 3개씩 그림을 배치하여 총 48개의 그림을 두었다. 거기에 천정에 그려진
비천상의 사본 그림까지 배치해 두 눈이 심심해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  대웅전 서쪽

▲  대웅전 동쪽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약사불 쪽에서 본 모습) - 보물 1274호

▲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아미타불 쪽에서 본 모습)

신발을 벗고 대웅전으로 들어서면 건물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장대한 모습의 소조석가3불좌상
이 마중을 한다. 높이가 무려 5m가 넘는 불상이 1개도 아니고 협시불까지 3개가 있으니 주눅
의 정도는 더하다. 이 땅에 있는 소조(塑造) 불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오래된 법당
의 불상 가운데서도 제일 큰 편에 속한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
타불을 두어 석가3불좌상을 이루고 있으며 석
가불은 높이 5.5m, 무릎너비 4.05m, 무릎높이
72cm로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
고 이마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있다. 눈썹
은 무지개처럼 부드럽게 구부러져 있고, 코는
끝이 두툼하며 붉은 입술 주위에는 가늘게 수
염이 표현되어 있다. 표정은 약간 굳어보이며,
왼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다.

석가불 왼쪽의 약사불은 석가불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그의 이름에 걸맞게 왼손에 약합(藥
盒)이 들려져 있다. 높이는 석가불보다 조금
낮은 5.2m이다.

석가불 오른쪽의 아미타불도 석가불, 약사불과
비슷한 모습으로 약사불과 비슷한 높이를 유지
하고 있다.

▲  대웅전 석가불의 위엄

근래에 석가불 몸통에서 조성기(造成記)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비롯한 불경과 사리함,
복장유물을 넣는 후령통(候鈴筒) 등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조성기를 통해 이들 불상
의 조성시기와 조성배경, 만든 이를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성기에 따르면 1641년 6월 29일에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
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의 조속한 귀국을 발원하고자 조성된 것이다. 그
러다보니 왕실과 사대부, 백성들의 시주에 힘입어 저렇게 웅대한 규모의 불상이 태어난 것이
다. 또한 명나라와 청의 연호가 같이 들어있으며, 병자호란의 휴유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
지가 강하게 배여있다. 그런 연유로 태어난 탓인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조성시기가 명확한 이 땅의 흔치 않은 불상으로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
점과 함께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이란 이름으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으
며, 복장유물은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현재 김제 금산사(金山寺) 성보박물관에 가 있다.


▲  목조3전패(木造三殿牌)의 하나인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0호

▲  목조3전패의 하나인 세자저하수천추(世子低下數千秋)

▲  목조3전패의 하나인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世)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현란한 디자인의 전패 3개가 중생의 두 눈을 매혹시킨다. 약사
불 쪽에는 왕비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있고, 아미타불 쪽에는 세자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석
가불과 아미타불 사이 그늘에는 왕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숨은 듯 자리해 있다.

왕을 위한 전패는 윗쪽에 용 1마리를 새기고, 밑에 좌우에는 각각 2마리의 용을 새겼다. 왕비
와 세자의 전패는 윗쪽에 용 1마리, 밑에 각각 1마리를 두어 차별을 두었다. 좌대(座臺)도 왕
의 것은 상하에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을 조각한 것에 비해 나머지는 복련만 조각했다. 이
들은 운룡문(雲龍紋)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수려하며, 높이도 왕의 전패는 2.28m, 좌우 것
은 2.08m로 이 땅의 전패 가운데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왕의 전패 뒷쪽에는 '순치세(順治歲)'에 만든 것이라 쓰여있어 1644년에서 1661년 사이에 조
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이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귀국을 위
해 만든 것이니 효종(재위 1649~1659) 때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효종(孝宗)이 맞으면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세자인 현종이 된다. 이후 1792년 전패를 수리했다.

법당에 이렇게 왕과 왕비 등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를 두는 경우도 흔치 않은데, 그만
큼 왕실과 인연이 깊고 그들의 지원을 두둑히 입은 절임을 입증하는 유물이라 하겠다.


▲  등장인물이 104명이나 되는 신중탱(神衆幀)

대웅전 서쪽 벽에는 보기만해도 혼을 다 빼놓는 신중탱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화엄경(華嚴經)
에 나오는 104위의 신중(神衆)을 그린 것으로 다른 신중탱과는 다르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빽
빽하게 들어차 있어 도대체 누가 누군지 눈과 머리가 고통스러울 지경으로 그림 중앙에는 동진
보살과 대범천왕(大梵天王), 제석천왕(帝釋天王) 등을 배치했으며, 1925년에 종인(宗仁)과 상
오(尙旿), 현성(鉉成), 태익(泰翼), 명진(明眞), 해일(海日) 등의 화승(畵僧)이 그렸다.


▲  불단 뒷쪽에 걸린 그림들(극락구품도)

대웅전 내부는 바깥(날씨가 무지 따스했음)과 달리 시원하다. 나무로 된 방바닥은 걸을 때 마
다 삐걱삐걱 소리가 조금씩 나는데 그만큼 건물이 오래되었다는 뜻이 된다. 허나 아무리 쿵쿵
거려도 단단하게 지어졌으므로 무너질 일은 없다.

남들이 잘 안가는 불단 뒷쪽으로 가면 뒷쪽 벽에도 그림이 걸려있다. 1칸당 그림 1폭이 걸려
있어 모두 3폭이 있는데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그림마다 구분선이 있어 선을 사이에 두고
다른 내용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1폭당 3개의 그림이 있으니 총 3폭의
9개의 그림이 있는 셈이다.
불가(佛家)에서 8개의 그림은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八相圖)이다. 그럼 9개의 그림은
뭘까? 답은 바로 극락9구품(極樂九品圖)이다. 극락에 대한 9개의 장면을 담은 것으로 이들 그
림은 자세한 정보가 딱히 없어 신중탱과 비슷한 시기 또는 그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대웅전 천정에 그려진 주악천인도(奏樂天人圖) ①

불단 뒷쪽 복도를 끝으로 대웅전은 이제 다 봤구나 여겨 나름대로의 포만감으로 철수하기 쉽
다. 허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이 하늘을 우러르고 살듯이 이곳도 반드시 천정을 바라
봐야 된다. 불단 앞 천정에 7개와 좌우 천정에 각각 2개씩 모두 11개의 주악천인도가 대웅전
의 하늘을 빛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놓친다면 대웅전의 4할을 놓친거나 다름이 없다.

저들을 보면서 어찌 저 높은 곳까지 그림을 그렸는지 참으로 대단할 뿐이다. 저런 그림이 떡
하니 있으니 천정이 더욱 빛이 나 나의 보잘 것 없는 두 눈은 가히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너
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고개를 90도나 올려서 봐야 되며 워낙 어두운 곳이라 저들을 모두
사진에 담느라 고개가 뚝 부러지는 줄 알았다.


▲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주악천인도 ②

▲  주악천인도 ③

▲  주악천인도 ④ 불단 동쪽 천정

▲  주악천인도 ⑤ 불단 서쪽 천정

▲  송광사 서쪽 연지(蓮池) - 절 너머로 보이는 산이 종남산

오래된 보물이 가득한 송광사 경내를 둘러보고 서쪽으로 나왔다. 경내 서쪽에는 넓은 연못이
있는데 이들은 연꽃의 보금자리인 연지이다. 연꽃은 여름 제국과 친한 식물이라 지금은 계림
황엽(鷄林黃葉)처럼 볼품이 전혀 없으나 앞으로 3달 이내에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며 한참 와
신상담(臥薪嘗膽) 중이다.
연못 너머에 보이는 정자는 백련정(白蓮亭)으로 연꽃이 있다면 연못을 1바퀴 둘러보며 백련정
에 발을 들여보고 싶지만 아무 것도 없고 가기도 귀찮고 해서 연못 남쪽만 서성이고 말았다.

참고로 연지 너머 경내 북쪽 산자락에 부도군(浮屠群)이 있다. 부도(승탑) 16기와 비석 2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에는 절을 세우는데 크게 공헌한 벽암당(碧巖堂)의 승탑이 있다. 이 승
탑은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44호로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송광사에서 놓친 것이 도대체 몇 개인지...)


▲  연못 남쪽에 있는 고인돌

연못 남쪽에는 엉뚱하게도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지석묘) 1기가 누워있다. 2개의 돌을 기
둥으로 삼아 뚜껑돌을 얹힌 형태로 이런 고인돌을 북방식(北方式) 고인돌이라고 한다. 하지만
북방식과 남방식이 북쪽과 남쪽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퍼져 있어 그것을 나누는 의미는 거의
퇴색되었다.

거의 우리 민족의 특허 유물이나 다름없는 고인돌을 간직한 절은 천하에서 이곳이 유일할 듯
싶다. (내가 가본 300곳이 넘는 절집 중에서 오직 이곳이 유일함~) 그에 대한 자세한 신상은
모르겠지만 이곳에 원래부터 있던 터줏대감으로 여겨지며, 이것 외에도 여러 기가 있던 것으
로 보인다. 허나 지금은 오로지 그만 살아남아 돌이킬 수 없는 머나먼 옛날을 그리워한다.


▲  경내 남쪽에 깔린 정갈한 돌담길

이렇게 송광사를 1시간 반 동안 둘러보니 시간은 13시가 넘었다. 비록 놓친 것이 다수 있어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지만 이건 나의 무지에 따른 소산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아무래도 다음
에 또 오라는 송광사의 뜻인 모양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함)
이렇게 하여 봄맞이 송광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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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8년 4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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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겨울 산책 (오목대, 한벽당..)


' 호남의 오랜 중심지 ~ 전주 나들이 (전주한옥마을 명소들) '
전주 한벽당
▲ 한벽청연의 현장, 전주 한벽당(寒碧堂)


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위풍을 해내(海內)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

*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정벌하고 고향인 패(沛)로 돌아와 승전 연회
에서 즉흥으로 지어 부른 대풍가(大風歌), 태조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 연회에서
저 시를 읊었다.

천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홀로 다다르니 가슴에는 시름이여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턴 부여국(夫餘國)은
누른 잎 휘휘 날려 백제성(百濟城)에 쌓였네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의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하염없이 고개 돌려 옥경(玉京, 개경)만 바라보네

* 이성계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가 착잡한 마음에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읊은 우국시(憂國詩)



조선왕실의 영원한 성역 경기전(慶基殿)과 인근에 있는 호남 최초의 성당인 전동성당(全洞聖堂
)을 오랜만에 둘러보고 전주한옥마을의 중심을 가르는 태조로(太祖路)을 지나 한옥마을 동쪽에
솟아난 오목대를 찾았다. 서울의 인사동(仁寺洞) 골목과 거의 비슷하게 꾸며진 태조로는 찻집,
주막, 다양한 공예관 등이 즐비하여 인사동과 북촌골목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다.

공예품전시관을 지나면 한지관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목대로 오르는 나무 계단길이
있다. 계단길 외에도 공예품전시관 주차장에서 직진하여 500년 묵은 당산나무를 거쳐 오목대의
서남쪽 허리로 오르는 길도 있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계단을 3분 정도 오르면 이성계가 대풍가를 불렀다는 현장 오목대이다.


♠ 태조 이성계가 종족(宗族)들을 모아 연회를 배풀며 새 왕조의 개창을
암시했다는 현장, 오목대(梧木臺) -
전북 지방기념물 16호

전주한옥마을 동쪽 높다란 언덕 꼭대기에 둥지를 튼 오목대는 1380년 이성계가 전주이씨 종족들
을 모아연회를베풀며 새로운 나라를 세울 의사를 은연중 밝혔던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
날에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런 사연으로 오목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가 끝없이 기울어 가던 14세기 후반, 왜구(倭寇)는 고려와 명나라를 침범하
여 마구잡이 약탈을 일삼았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개경(開京)에서 가까운 강화도까지 쳐
들어와 선왕(先王)의 어진(御眞)까지 약탈해갈 정도였다. 고려 정부는 왜구를 때려잡고자 안간
힘을 썼으나 충렬왕(忠烈王) 이후 몽고의 통제로 강력했던 고려의 해군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토벌에 적지 않은 고생을 겪었다. 다행히 최무선(崔茂宣)이 화약(火藥)을 개발하여 1380년 진포
(鎭浦, 금강 하류)에서 왜구를 500척을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면서 상황이 다
소 반전이 된다.
하지만 그때 요행히도 목숨을 건진 왜구 잔당들은 배를 버리고 옥천, 상주 등 내륙지역으로 줄
행랑을 치면서고려 정부를 끊임없이 위협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三道
都巡察使)로 임명하여 남쪽으로 파견했다.

이성계는 여진족(女眞族)인 의제(義弟)인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가, 남원 운봉(
雲峯) 지역에 진을치고 있던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왜구 패거리를 죄다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렸는데. 이 전투가 그 빛나는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대승을 거두고 귀경(歸京)하던 중, 선조들의 땅인 전주에서 전주 이씨 종족(宗族)들을 불러모
아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흥에 겨운 나머지 한나라 고조(高祖)의대풍가
(大風歌)를 큰 소리로 부르며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뜻을 은은히 내비췄다고 한다.
이성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그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는 그의 행위에 적지 않은 역
겨움을 느끼고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말을 달려 단숨에 남천(南川, 전주천 상류)
을 건너 인근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서 말을 멈추고 개경(開京)이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시(憂國詩) 한수를 읊고는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이후 이성계는 1388년 조정의 명을 거역하고 압록강 위화도(威化島)에서 명나라를 향해야 할 창
을 개경으로 돌렸다. 개경(開京)을 점령하여 정몽주와 최영(崔瑩) 등 고려의 보루(堡壘)들을 죽
이고 끝내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다.

1900년 고종(高宗)은 그런 자랑스러운 조상, 태조를 기리고자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웠다. 비
신(碑身)에는 '太祖高皇帝駐蹕遺址(태조고황제 주필유지)'라 쓰여 있는데, 이는 고종의 친필이
라고 한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원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이다.

전주한옥마을을 묵묵히 굽어보는 오목대는 한옥마을과도 길이 이어져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된다.
허나 이곳까지 오르는 답사객은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서 한옥마을과 달리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하다.

예전에 비각 주변으로 철제(鐵製) 담장이 둘러져 있었으나, 근래에 이를 모두 철거하여 비각 앞
까지접근이 가능하며 비각 좌우로 멋드러지게 가지를 올린 나무 여러 그루가 비석을 호위한다.


▲ 고종이 세운 비석을 소중히 품에 안은 오목대 비각

▲ 오목대 동쪽에 마련된 누각(樓閣)

오목대 동쪽에는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 누각이 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1970년대 이후에 만든 것으로 누각의 이름은 따로 없고 그냥 오목대나 오목대 누각이라고 부르
면 된다. 이성계가 오목대에서 전주이씨 종족을 모아 연회를 베풀 때 이곳에는 누각이나 정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거나 막사(幕舍)를 만들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누각은 이성계가 연회를 베풀던 장소를 상징하여 만든 것으로 시인 묵객들이 남긴 시액(詩額
)들이 어지럽게 누각 평방(平枋)위에 걸려 있다. 그중에서도 이성계가 읊었다는 대풍가 시액이
나그네의 눈길을 잡아맨다. 대풍가는 한글과 한문 버전이 따로 걸려있다. 시문의 내용을 중얼거
리듯 읊으며 누각 난간에 걸터앉아 잔잔히 불어오는 그리 차갑지 않은 겨울바람을 즐겨본다.


▲ 대풍가 한문버전

▲ 대풍가 한글버전

집안 종족들과 회포를 풀며 술에 거하게 취한 이성계가 어떤 태도로 저 시를 읊었는지 가히 상
상이 간다. 으뜸석에 앉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종족과 부하장수를 바라보며 자신이 황제
가 된 양 가슴을 크게 피며 거만하게 대풍가를 읊었을 것이다. 종족과 부하장수는 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을 것이고, 그 광경에 속이 단단히 뒤틀린 정몽주는 술잔을 상에 쾅 내려놓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한옥마을

예로부터 전주의 중심부인 풍남동(豊南洞)과 교동(校洞) 일대에 넓게 조성된 전주한옥마을은 서
울의 북촌(北村)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2곳 밖에 없는 대규모 한옥밀집지역이다. 전주시의 꾸준
한 홍보와 정비사업으로 전주의 대표적인 명소로 부상하여 많은 답사객들이 찾아온다.


전주한옥마을은 총면적이 76,320평에 이르며, 약 900여 채의 전통한옥이 모여있다. 대부분이 왜
정(倭政) 이후에 지어진 한옥으로 100년 이상 된 집은 거의 없다. 이곳에 기와집이 많이 뿌리를
내린 것은 왜정이 전주부(全州府)의 중심이던 전주성(全州城)을 말끔히 부시고 도로를 뚫으면서
성 밖에 사던 왜인들이 성 안으로 마구잡이로 기어들어와 물을 흐려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크게 반발한 전주 사람들은 전주를 지키고자 너도나도 한옥을 지어 살면서 거대한 한옥마
을이 된 것이며, 왜정 때 한옥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향수가 진하게 서린 고풍(古風
)스러움을 선물하고 있다. 몇몇 한옥은 북촌의 한옥처럼 문화공간이나 공예관, 찻집, 식당, 민
박집이나 한옥체험장, 전통체험관 등으로 탈바꿈하여 나그네의 호기심을 부드럽게 자극시킨다.


▲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한옥마을 동쪽
(공예품전시관과 한지관 등이 정면에 보인다)

▲ 오목대와 이목대를 잇는 구름다리 (오목교)

▲ 오목교 건너편에 바라본 오목교와 오목대

오목대 동쪽에는 남원(南原)으로 달리는 17번 국도(기린로)가 뚫려있다. 전주 도심을 우회하는
간선도로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여 수레의 굉음이 귀를 진하게 때려댄다. 길 건너편 동쪽에는
이목대가 있는데, 도로 위에 육교 같은 다리를 놓아 오목대와 이목대를 이어주고 있다. 다리의
이름은 '오목교'로 '구름다리'라고도 불린다. 겉으로 보면 도로로 단절된 양쪽을 이어주는 육교
로 생각하고 지나치기 일쑤지만 이 다리에도 깊은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원래 오목대와 이목대는 하나의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왜정이 1931년 전라선(全羅
線) 철도를 내면서 오목대와 이목대를 잇던 산줄기를 싹둑 끊어버렸다. 전라선이 개통된 이후,
이곳에서는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남원에서 전주로 올라오는 열차가 이곳만 지나면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다. 그 틈을 노려 무임승차로 열차에서 뛰어내린 사람
이 많았다고 한다.
혈맥(血脈)의 단절로 기차의 속도로 느려진다고 여긴 전주 유림들은 오목대와 이목대를 연결시
켜야 된다고 민원을 넣어 1960년경에 오목교를 설치했는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기차의 속도
가 빨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 전라선이 동쪽으로 이설되면서 오목교는 철거되고, 옛 전라선 자리에 기린로가 놓이면
서 1987년 지금의 오목교를 만들었다. 오목교는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는 승암산(僧巖山)의 산줄
기가 단절되어 사고가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 오목대를 마주보는 이목대(梨木臺)

오목교 구름다리를 건너면 이목대라 불리는 비각이 나그네를 맞는다. 이곳은 오목대와 마찬가지
로 비석과 그것을 품에 안은 비각이 전부이다. 오목대가 오동나무가 많은 곳이라면 이목대는 배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던 언덕이었다. 그래서 이목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목대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의 유허(遺墟)로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

) 시절부터 후손들이 살던 곳이라 전한다. 이안사는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고려를 등지
고 원나라 땅인 함경도(咸鏡道)로 넘어가 새롭게 터를 일구었다. 태조는 그를 목조(穆祖)라 추
존했으며, 1900년 고종 황제가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碑文)에는 '목조대왕구거유지(

)'라 쓰여 있다. 비문은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완산지(完山誌)'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는 이안사와 관련된 몇가지 설화가 적혀있는데,
그는 발산(鉢山) 남쪽 장군수(將軍樹)란 나무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진법(陣法) 놀이를
했다고 하는데, 그 현장이 바로 이목대라고 한다. 아마도 집 앞에서 그 흔한 전쟁놀이를 했던
모양이다. 또한 호운암(虎隕岩) 설화도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비각에 제대로 갇힌 듯 답답해 보이는 이목대 비석

어느날 이안사는 애들을 이끌고 병풍리 좁은목에 놀러 갔다가 비를 만났다. 그들은 급히 근처에
있는 바위굴 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호랑이 1마리가 굴 입구에 나타났다.
호랑이는 당장이라도 덮칠 기세로 으르렁거려 분위기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애들은 무서움에 질질 짜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안사가 침착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호랑이가 한꺼번에 우리를 물지를 못할 것이다. 기껏 해봐야 한 사람 밖
에는 물어가지 못해. 그러니까 우리 모두 웃옷을 벗어 던져서 호랑이가 무는 옷의 주인이 모두
를 대신해서 호랑이한테 가도록 하자'
그 말을 들은 애들은 더욱 겁을 먹으며 말했다.
'우리 가운데 형이 제일 나이가 많으니 형부터 던져봐요~'
'좋아. 내가 먼저 던질테니 호랑이가 내 옷을 받아 물면 내가 흔쾌히 호랑이한테 가겠다'
그러면서 웃옷을 벗어 호랑이에게 던졌다. 그러자 호랑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옷을 덥석
물고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안사는 속으로 '아오 젠장~~'을 수없이 중얼거리며 약속대로 호랑이 앞으로 다가섰다. 그래도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눈을 감으며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나갔다.
굴 밖으로 나가니 갑자기 천둥이 콰당치면서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호랑이는 보이
지 않고, 굴은 무너져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즉 그는 살고 나머지 애들은 굴에 갇
혀 죽은 것이다.

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에게 왕기(王氣)가 깃들여져 산신령이 호랑이로 변해 그를 살려낸 것이
라 여겼다. 이 설화는 태조 이후에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차원에서 생겨나거나 윤색
된 설화일 뿐이다. 태조 왕건에게도 이와 비슷한 설화가 있으니 제왕에게는 꼭 갖춰야 될 설화
인 모양이다.
이목대는 오목대와 한덩어리로 묶여 전북 지방기념물 16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오목대, 이목대 찾아가기 (2012년 1월 기준)
① 서울과 주요 지역에서 전주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15분 간격으로 떠나며,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있다.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에서 여수행 전라선 열차를 타고 전주역 하차
* 고양, 의정부, 인천, 부천, 안양, 수원, 안산, 대전(유성, 서대전), 군산, 광주, 순천, 대구
(서부). 울산, 부산, 창원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여수(엑스포)역, 순천역, 남원역에서 익산, 용산행 전라선 열차 이용
② 전주 현지 교통
* 전주역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남부시장이나 풍남문을 경유하
는 시내버스를 타고 전동성당(한옥마을) 하차. 이들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는 물 흐르듯 빈번하
게 다니므로 교통은 편하다. 전동성당 정류장에서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가면 풍남
문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길을 건너 태조로(太祖路)로 진입하여 7분 정도를 가면
언덕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그 언덕 정상에 바로 오목대가 있다.
* 전주역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병무청 방면 시내버스로 병무청
에서 하차하여 기린로를 따라 남쪽으로 도보 15분
* 금암광장에서 429번(1일 12회), 486번(1일 18회) 시내버스를 타면 오목대 앞까지 간다. 허나
차가 별로 없고, 전주교대와 좁은목으로 삥 돌아서 가므로 교통편이 좋은 전동성당에서 내려
걷는 것이 속 편하다.
* 오목대에서 전주한옥마을과 반대방향(동쪽)을 보면 기린로란 큰 도로가 있다. 도로 위에 걸린
오목교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이목대 비각이다.
③ 승용차
* 호남고속도로 → 순천~완주고속도로 → 동전주나들목을 나와서 전주 방면 → 인후동(모래내)
→ 기린로 → 오목대
* 호남고속도로 → 전주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조촌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기린로 직진 →
오목대
* 오목대 부근 주차장소는 공예품전시관이나 한벽당 부근 전통문화센터에 하면 된다.
* 관람료 없음 / 관람시간 제한 없음
*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1-3


♠ 전주8경의 한 곳, 한벽청연(寒碧晴烟)의 현장
한벽당(寒碧堂)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5호

한벽당은 전주천변 가파른 바위에 터를 닦아 들어앉은 정자로 전주 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
晴烟)의 현장이다.
승암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전주천을 뜰로 삼은 이곳은 1404년월당 최담(月塘 崔霮)
이 낙향하여 지은별장으로 처음에는 그의 호를 따서 달의 연못이란 뜻에 월당루(月塘樓)라 하
였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벽당으로 이름을 갈았는데, 후대 사람이 '벽옥한류(碧
玉寒流)'란 시귀에서 '한벽(寒碧)' 2글자를 따와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
모의 팔작지붕 정자로 동쪽에 따로 별채를 두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전주 뿐만 아니라 호남지역의 명승지로 많은 시인,묵객들이 구름처럼 찾아들
던 곳이다. 또한 상관계곡의 물줄기와 의암, 은석 등 여러 작은 골짜기의 물이 합쳐져 한벽당
앞으로 흐르는데, 옛 사람들은 그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와 같다고 시를 지었으며,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8경의 으뜸으로 삼았다.

바위 위에 교묘히 둥지를 틀어 전주천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가히 단아함 그 자체이나, 1931
년 뒤쪽 바위에 전라선 철마가 땅굴을 파고 달리면서부터 운치가 서서히 녹슬기 시작했다. 전라
선은 그나마 훨씬 동쪽으로 이설되어 더 이상 시끄러운 기적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정자 바로 앞에 기린로란 넓은 신작로가 생기면서 그림 같은 풍경은 많이 손상되어 버
렸다. 비록 정자를 비롯하여 주변 숲과 바위는 온전하지만, 문명의 이기(利器)라는 4발 달린 수
레들이 그 옆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나가니 예전의 시를 읊고 낮잠을 즐기던 그고즈넉한
분위기는 이제 옛 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 승암산 서쪽 바위에 또아리를 튼 한벽당

한벽당은 기린로가 지나는 한벽교 바로 옆에 있고 정자로 오르는 계단은 바로 다리 밑에 있다.
허나 한벽교에서는 보기와는 달리 그곳으로 가는 길이 없어 접근이 불가하고 무조건 전주천 산
책로로 내려가야 된다. (이목대와 다리 중간에 옛 전라선 터널을 이용하거나 한벽교 북단 서쪽
으로 내려가면 됨)

한벽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한벽교 바로 밑에 있어 운치가 상당히 떨어지는데, 바위를 의지하며
베풀어진 돌계단을 사뿐사뿐오르면차분하고 단아한 모습의 한벽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정자
안으로 발을 들일 때는 신발을 섬돌에 두고 맨발로 들어서야 되며, 내부에는 시인,묵객들이 걸
어놓은 현판들로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이경전(), 이경여(

), 이기발(), 김진상() 등 19명의 문인들이 한벽당에 올라 지은 시문이 전해
오고 있어 당시의 풍류를 느끼게 한다.

누각에 앉아 전주천을 중심으로 좁게 보이는 천하를 바라보고 있으면 들리는 소리라곤 17번 국
도를 질주하는 수레들의 요란한 굉음들 뿐이다.상황이 이러니 어찌 옛날처럼 차분하게 사색에
잠겨 있을 수 있겠는가..? 문명의 이기에 희생된 한벽당의 풍경은 서울 세검정(洗劍亭)과 다를
것이 없다. (서울 세검정 관련 답사기 ☞
보러가기)

▲ 별채를 좌측에 품은 한벽당 전경

▲ 한벽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계단 바로 위가 기린로가 지나는 한벽교이다.


▲ 한벽당 기적비(紀蹟碑)
한벽당의 내력을 소상히 적은 비석이다.

▲ 전주천 산책로에서 쳐다본 한벽당
나는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90도로 그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프지만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래를 굽어보며 전주천과 나그네를 바라본다.

▲ 한벽당 내부에 걸린 현판
필체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한벽당 3글자, 누구의 글씨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한벽당에는 내부에도 정자의 이름을 알리는 현판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 한벽당 내부에 걸린 여러 시액(詩額)들
한벽당을 침이 마르도록 예찬하는 옛 사람들의 시문들
시문의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깨알같은 글씨가 무수히 담긴 한벽당 중수기(重修記)

▲ 어여쁜 꽃단청이 그려진 한벽당 천정

샹들리에가 아름답다 한들 저 천정에 그려진 화사한 꽃그림만 할까? 굳이 불을 밝히는 등이 없
어도 앙증맞게 피어난 꽃잎으로 한밤에도 환할 것 같다. 거기에 전주천에 뜬 달님까지 한벽루
를 비추며 조명을 자처하니 굳이 현대식 조명시설은 필요없을 것이다.


▲ 한벽당 밑 바위에 진하게 새겨진 바위글씨
○화담(?花潭)이라 쓰여 있다. 앞 글자는 '도'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음

▲ 한벽당 바로 앞을 지나는 전주~남원 17번 국도 (기린로)

▲ 기적소리의 추억이 서린 옛 전라선 터널
한벽당 뒤쪽에는 옛 전라선 열차가 지나다니던 터널이 남아 있다. 열차의 기적소리와
굉음이 아련하게 들려올 것 같은 이 터널은 전라선이 시내 외곽으로 이전된 이후
사람들만 통행하고 있다. 수레는 통행 불가

▲ 겨울에 잠긴 전주의 젖줄 전주천

전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전주천은 겨울제국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숨을 죽여 봄을 잉태하고
있다.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 오면 거추장스러운 얼음과 눈을 박차며 눈을 깰 것이다.

◀ 전라선 옛 터널 앞에 있는 월당 선생 찬시
비(讚詩碑)
한벽당을 세운최담 선생의 찬시비이다. 최담
은 조선개국공신으로 1402년 전주로 낙향하여
별장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한벽당은 그의 작
품이다.

한벽당 찾아가기 (2012년 1월 기준)
*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429, 486번 시내버스를 타고 한벽당 하차, 허나 배차간격
이 무지 길다. (429번은 1일 12회, 486번은 1일 18회 운행)
* 전주역,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빈번하게 다니는 남부시장, 교도
소, 상관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남부시장 하차, 버스에서 내려 왼쪽으로 걸으면 바로 전주천
과 싸전다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둑방길을 15분 정도 걸으면 한벽교를 지나서 한벽당이 모
습을 비춘다. 가는 중에 전주향교와 동헌(東軒), 강암서예관이 있으며, 전주향교를 지나면 전
주의 별미(別味)인 오모가리탕을 취급하는 주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725, 752, 782, 78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좁은목 하차, 좁
은목4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전주천 다리(한벽교)를 건너면 한벽당이 보인다.
* 주차는 전통문화센터를 이용하면 된다. (오목대 부근의 공예품전시장도 괜찮음)
* 오목대에서 이목대를 거쳐 남쪽으로 도보 10분 거리
*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15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은 2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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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글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 공개일 - 2012년 1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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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청연의 현장 전주 한벽당












전주사고(史庫)
















[전북/전주] 조선왕조의 고향, 전주 - 오목대 / 전주8경 한벽청연의 현장, 한벽당


' 전북 전주 ~ 임실 역사기행 (2006년 6월 24일)'
'하편 ― 전주(全州) 지역 (오목대, 한벽당, 전주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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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위풍을 해내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

*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정벌하고 고향인 패(沛)로 돌아와 승전 연회
에서 즉흥으로 지어 부른 대풍가(大風歌),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 연회에서
저 시를 읊었다.


천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홀로 다다르니 가슴에는 시름이여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턴 부여국(夫餘國)은
누른 잎 휘휘 날려 백제성(百濟城)에 쌓였네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의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하염없이 고개 돌려 옥경(玉京, 개경)만 바라보네

* 이성계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가 착잡한 마음에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며 읊은 시


전주의 명물, 콩나물국밥으로 두둑히 배를 채우고, 한벽당으로 가던 중, 푸르른 은행나무 한 그루가 나의
발목을 붙잡고 좀처럼 놓아주지를 않는다.

▲ 녹음(綠陰)으로 가득한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고려 우왕 9년(1383년), 월당 최담(月塘 崔霮)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낙향하여 별장
을 세우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이다.
전주 지역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로 수령(樹齡) 600년, 높이 16m, 허리 둘레는 4.5m에 이른
다.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예로부터 전해와 사람들이 종종 찾아와 기원을 드리며,
나무가 있는 이 골목길을 '은행나무 길(골목)'이라 부른다.

▲ 은행나무길 표석

◀ 태조로(太祖路) 표석
은행나무와 간단히 눈인사를 나누고 기린로(17번
국도)로 나와 오목대 방면으로 가다보면 귀부와
비신(碑身)을 갖춘 태조로 표석이 나온다.

'태조로'는 오목대입구에서 경기전 방면으로통하
는 2차선 길로 여기서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이다.


♠ 태조 이성계가 종족(宗族)들을 모아 연회를 배푼 ~ 오목대(梧木臺)
-
전북 지방기념물 16호


경기전(慶基殿) 동남쪽 높다란 언덕 위에 세
워진 비석이다.
이 곳은 옛날에 오동나무와 배나무로 가득하
여 '오목대'라 하였는데1380년 태조가 종족
들을 모아연회를베풀며 새 나라를 세울 의
사를 은연중 밝혔던곳으로 유명하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가 한참 기울어져 가던 14세기 후반, 왜구(倭寇)는 고려와 명나라를 골고루 침범하
며 마구잡이 약탈을 일삼았다.
이미 망조(亡兆)가 깃든 고려 정부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나, 강화도까지 왜구의 공격을
받아, 선왕(先王)의 어진(御眞)까지 빼앗길 정도로, 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다.
다행히 최무선(崔茂宣)이 화약(火藥)을 개발, 1380년 진포(鎭浦, 금강 하류)에 짱박고 있던 왜구를 공
격하여 왜선 500척을 격파하고, 왜구 수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요행히도 목숨을 건진 수백명의 왜구 패거리는 배를 버리고 옥천, 상주 등의 내륙지역으로 침
투,고려 정부를 위협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임명하여 남쪽으로 파견하였다.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의 의제(義弟)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가, 운봉(雲峯)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왜구 패거리를 말끔히 처리하는데,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황산대
첩(荒山大捷)이다.

대승을 거두고 귀경(歸京)하던 중, 선조들의 땅인 전주에 이르러 전주 이씨 종족(宗族)들을 불러모아
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그 자리에서 이성계는 흥에 겨운 나머지 한나라 고조(高祖)의대풍가(大
風歌)를 큰 소리로 부르며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울 뜻을 은은히 내비췄다고 한다.

이성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그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는 그의 행위에 역겨움을 느끼며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 올라가 개경(開京)이 보이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는 시 한
수를 읊고는 한 숨을 쉬었다고 한다.

1900년, 고종(高宗)은 태조를 기리기 위해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웠는데, 비신(碑身)에는 '太祖高皇
帝駐蹕遺址(태조고황제 주필유지)'라 쓰여 있으며, 이는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이다.

오목대는 언덕의 이름이 아닌 거의 비석의 이름으로 굳어지다 싶이 하였는데, 비각(碑閣) 주변으로
산책 나온 동네 사람 2명이 있을 뿐, 분위기는 대체로 조용하다.

예전에 비각 주변으로 철제(鐵製)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으나, 근래에 이를 모두 철거하여 비각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오목대 동쪽 누각 ▶
오목대 동쪽으로는 시원스런 팔작지붕의 누
각 하나가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따로
주어진 이름은 없는 것 같다.

◀ 누각 내에 걸린 현판 ◀
넓직한 누각 내에는 시인,묵객들이남긴 현
판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1개만 사진에 담아왔는데현판의 내용
은 모름..

누각 난간에 걸터앉아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
며 더위를 식히면서 잠시 여유를 부려본다.

▲ 정면에서 바라본 오목대 누각

~~ 오목대 찾아가기 ~~
* 전주역, 전주시외터미널에서 평화동, 관촌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전동성당에서 하차, 도보 10분
* 병무청 방면 시내버스로 병무청에서 하차하여 도보 10분
* 오목대 앞까지 시내버스가 다니긴 하지만, 운행횟수가 극히 적으므로, 위에 방법으로 가기를 권함,
* 오목대 부근 주차장소는 마땅치 않음..
* 관람료 없음 / 관람시간 제한 없음


▲ 옛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전라선(全羅線) 터널
한벽당 뒤쪽으로는 예전 전라선 열차가 지나던 터널이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열차의 기적소리가 시끄럽게 들릴 것 같은 이 터널은 전라선이 외곽으로 이전되
면서 철로는 사라졌으며, 지금은 사람들만 통행하고 있다.

◀ 월당 선생 찬시비(讚詩碑)
앞서에 언급했던 600년 은행나무의 주인공,월당
최담 선생의 찬시비이다.


♠ 전주 8경의 한 곳, 한벽청연(寒碧晴烟)의 현장 ~ 한벽당(寒碧堂)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5호


오목대에서 가까운 전주천(全州川)변 바위에 들어앉은 정자로 전주 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烟)
의 현장이다.

이 곳은 1400년월당 최담(崔霮) 선생이 낙향하여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월당루(月塘樓)라 하였으나 후에 '벽옥
한류(碧玉寒流)'란 시귀에서 '한벽(寒碧)'2글자를 따와
'한벽당'이라 하였다.
한벽당은 전주 뿐만 아니라 호남지역의 명승지로 예로
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들던 곳이
다.

바위 위에 오묘히 들어앉아 전주천을 바라보는 그의 모
습은 가히 단아함 그 자체이나, 그 뒤로 전라선철마가
달리면서부터 운치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 1990년대
이후, 바로 옆으로 17번 우회국도가 생기면서 예전에
그림 같은 풍경은 많이 손상되어 버렸다.

비록 정자와 주변 나무, 바위는 온전하지만, 문명의 이
기(利器)라는 4발 달린 수레들이 그 옆으로 밤낮을 가리
지 않고 지나가니 예전의 시를 읊고 낮잠을 즐기던 그
고즈넉한 분위기는 이제 옛 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 한벽당 기적비(紀蹟碑)◀

◀ 나무 사이로 고개를 내민 한벽당 ◀

바위를 의지하며 베풀어진 돌계단을 사뿐사뿐
오르면단아한 모습의 한벽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한벽당은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있으며 안에는
시인,묵객들이 걸어놓은 현판들로 눈이 어지러
울 지경이다.

◀ 한벽당 내에 걸려진
한벽당 현판(懸板)

▲ 한벽당 기와수막새에 들어앉은 용
수박새에 특이하게도 용 계통으로 보이는 동물이 새겨져 있다.
양반 사대부가 별장으로 세운 정자의 기와에 왜 저런 화려한 동물들이
들어앉아 있는 것일까?

▲ 한벽당에서 바라본 전주천 주변 풍경
강을 꿈꾸는 전주천은 오늘도 그렇게 유유히 흘러만 간다.

▲ 한벽당 바로 옆으로 뚫린 17번 국도
누각에 앉아 있으면 들리는 소리라곤 17번 국도를 질주하는 수레들의 요란한 굉음들 뿐..
상황이 이러니 어찌 차분하게 사색에 잠겨 있을 수 있겠는가..?


한벽당은 2001년 여름, 전주에 외가(外家)를 둔 친구와 같이 온 적이 있었다.
그 때는 한벽당을 끼고 도는 전주천의 수위가 낮아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와서, 너도나도 천(川)에 들어가
발을 담구고, 개구쟁이 어린이들은 온몸을 내던지며, 물과 찐한 스킨쉽을 즐겼지.. 우리는 여벌의 옷이 없어
그냥 다리와 발만 실컷 담구고..
그러나 근래에 전주천을 정화하면서, 수위가 높아져 물로 풍덩 들어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 전주천 징검다리

수양버들이 시원스런 전주천 길을 걷다보면 '비빔밥', '콩나물국밥'과 더불어 전주 지역의 별미(別味) '오모
가리탕' 주막촌이 나온다.
오모가리탕이란 뚝배기에 쏘가리, 메기, 모래무지 등의 민물고기와 풋고추, 파, 당면 등을 넣고 온갖 양념으로
범벅을 하여 끊인 일종의 생선 매운탕으로, 한벽당에서 전주교(남부시장)까지 그 음식을 취급하는 주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몇몇 집은 벌써 매스컴을 요란하게 타기도 하였지,

더운 여름날, 이 곳에서 매물탕의 매운 맛에 땀도 흘리고, 거기에 전주천에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후식 삼아
땀을 식히면서, 지인들과 곡차(穀茶)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이렇게 하여 전주, 임실 역사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6월 24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7월 11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7월 13일
* 상편 숙성기간 - 2006년 7월 15일 ~ 8월 26일
* 공개일 - 2006년 8월 27일부터

Copyright (C) 2006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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