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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전주 ~ 임실 역사기행 (2006년 6월 24일)'
'하편 ― 전주(全州) 지역 (오목대, 한벽당, 전주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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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위풍을 해내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

*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정벌하고 고향인 패(沛)로 돌아와 승전 연회
에서 즉흥으로 지어 부른 대풍가(大風歌),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 연회에서
저 시를 읊었다.


천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홀로 다다르니 가슴에는 시름이여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턴 부여국(夫餘國)은
누른 잎 휘휘 날려 백제성(百濟城)에 쌓였네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의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하염없이 고개 돌려 옥경(玉京, 개경)만 바라보네

* 이성계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가 착잡한 마음에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며 읊은 시


전주의 명물, 콩나물국밥으로 두둑히 배를 채우고, 한벽당으로 가던 중, 푸르른 은행나무 한 그루가 나의
발목을 붙잡고 좀처럼 놓아주지를 않는다.

▲ 녹음(綠陰)으로 가득한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고려 우왕 9년(1383년), 월당 최담(月塘 崔霮)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낙향하여 별장
을 세우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이다.
전주 지역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로 수령(樹齡) 600년, 높이 16m, 허리 둘레는 4.5m에 이른
다.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예로부터 전해와 사람들이 종종 찾아와 기원을 드리며,
나무가 있는 이 골목길을 '은행나무 길(골목)'이라 부른다.

▲ 은행나무길 표석

◀ 태조로(太祖路) 표석
은행나무와 간단히 눈인사를 나누고 기린로(17번
국도)로 나와 오목대 방면으로 가다보면 귀부와
비신(碑身)을 갖춘 태조로 표석이 나온다.

'태조로'는 오목대입구에서 경기전 방면으로통하
는 2차선 길로 여기서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이다.


♠ 태조 이성계가 종족(宗族)들을 모아 연회를 배푼 ~ 오목대(梧木臺)
-
전북 지방기념물 16호


경기전(慶基殿) 동남쪽 높다란 언덕 위에 세
워진 비석이다.
이 곳은 옛날에 오동나무와 배나무로 가득하
여 '오목대'라 하였는데1380년 태조가 종족
들을 모아연회를베풀며 새 나라를 세울 의
사를 은연중 밝혔던곳으로 유명하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가 한참 기울어져 가던 14세기 후반, 왜구(倭寇)는 고려와 명나라를 골고루 침범하
며 마구잡이 약탈을 일삼았다.
이미 망조(亡兆)가 깃든 고려 정부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나, 강화도까지 왜구의 공격을
받아, 선왕(先王)의 어진(御眞)까지 빼앗길 정도로, 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다.
다행히 최무선(崔茂宣)이 화약(火藥)을 개발, 1380년 진포(鎭浦, 금강 하류)에 짱박고 있던 왜구를 공
격하여 왜선 500척을 격파하고, 왜구 수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요행히도 목숨을 건진 수백명의 왜구 패거리는 배를 버리고 옥천, 상주 등의 내륙지역으로 침
투,고려 정부를 위협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임명하여 남쪽으로 파견하였다.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의 의제(義弟)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가, 운봉(雲峯)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왜구 패거리를 말끔히 처리하는데,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황산대
첩(荒山大捷)이다.

대승을 거두고 귀경(歸京)하던 중, 선조들의 땅인 전주에 이르러 전주 이씨 종족(宗族)들을 불러모아
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그 자리에서 이성계는 흥에 겨운 나머지 한나라 고조(高祖)의대풍가(大
風歌)를 큰 소리로 부르며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울 뜻을 은은히 내비췄다고 한다.

이성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그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는 그의 행위에 역겨움을 느끼며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 올라가 개경(開京)이 보이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는 시 한
수를 읊고는 한 숨을 쉬었다고 한다.

1900년, 고종(高宗)은 태조를 기리기 위해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웠는데, 비신(碑身)에는 '太祖高皇
帝駐蹕遺址(태조고황제 주필유지)'라 쓰여 있으며, 이는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이다.

오목대는 언덕의 이름이 아닌 거의 비석의 이름으로 굳어지다 싶이 하였는데, 비각(碑閣) 주변으로
산책 나온 동네 사람 2명이 있을 뿐, 분위기는 대체로 조용하다.

예전에 비각 주변으로 철제(鐵製)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으나, 근래에 이를 모두 철거하여 비각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오목대 동쪽 누각 ▶
오목대 동쪽으로는 시원스런 팔작지붕의 누
각 하나가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따로
주어진 이름은 없는 것 같다.

◀ 누각 내에 걸린 현판 ◀
넓직한 누각 내에는 시인,묵객들이남긴 현
판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1개만 사진에 담아왔는데현판의 내용
은 모름..

누각 난간에 걸터앉아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
며 더위를 식히면서 잠시 여유를 부려본다.

▲ 정면에서 바라본 오목대 누각

~~ 오목대 찾아가기 ~~
* 전주역, 전주시외터미널에서 평화동, 관촌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전동성당에서 하차, 도보 10분
* 병무청 방면 시내버스로 병무청에서 하차하여 도보 10분
* 오목대 앞까지 시내버스가 다니긴 하지만, 운행횟수가 극히 적으므로, 위에 방법으로 가기를 권함,
* 오목대 부근 주차장소는 마땅치 않음..
* 관람료 없음 / 관람시간 제한 없음


▲ 옛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전라선(全羅線) 터널
한벽당 뒤쪽으로는 예전 전라선 열차가 지나던 터널이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열차의 기적소리가 시끄럽게 들릴 것 같은 이 터널은 전라선이 외곽으로 이전되
면서 철로는 사라졌으며, 지금은 사람들만 통행하고 있다.

◀ 월당 선생 찬시비(讚詩碑)
앞서에 언급했던 600년 은행나무의 주인공,월당
최담 선생의 찬시비이다.


♠ 전주 8경의 한 곳, 한벽청연(寒碧晴烟)의 현장 ~ 한벽당(寒碧堂)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5호


오목대에서 가까운 전주천(全州川)변 바위에 들어앉은 정자로 전주 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烟)
의 현장이다.

이 곳은 1400년월당 최담(崔霮) 선생이 낙향하여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월당루(月塘樓)라 하였으나 후에 '벽옥
한류(碧玉寒流)'란 시귀에서 '한벽(寒碧)'2글자를 따와
'한벽당'이라 하였다.
한벽당은 전주 뿐만 아니라 호남지역의 명승지로 예로
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들던 곳이
다.

바위 위에 오묘히 들어앉아 전주천을 바라보는 그의 모
습은 가히 단아함 그 자체이나, 그 뒤로 전라선철마가
달리면서부터 운치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 1990년대
이후, 바로 옆으로 17번 우회국도가 생기면서 예전에
그림 같은 풍경은 많이 손상되어 버렸다.

비록 정자와 주변 나무, 바위는 온전하지만, 문명의 이
기(利器)라는 4발 달린 수레들이 그 옆으로 밤낮을 가리
지 않고 지나가니 예전의 시를 읊고 낮잠을 즐기던 그
고즈넉한 분위기는 이제 옛 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 한벽당 기적비(紀蹟碑)◀

◀ 나무 사이로 고개를 내민 한벽당 ◀

바위를 의지하며 베풀어진 돌계단을 사뿐사뿐
오르면단아한 모습의 한벽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한벽당은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있으며 안에는
시인,묵객들이 걸어놓은 현판들로 눈이 어지러
울 지경이다.

◀ 한벽당 내에 걸려진
한벽당 현판(懸板)

▲ 한벽당 기와수막새에 들어앉은 용
수박새에 특이하게도 용 계통으로 보이는 동물이 새겨져 있다.
양반 사대부가 별장으로 세운 정자의 기와에 왜 저런 화려한 동물들이
들어앉아 있는 것일까?

▲ 한벽당에서 바라본 전주천 주변 풍경
강을 꿈꾸는 전주천은 오늘도 그렇게 유유히 흘러만 간다.

▲ 한벽당 바로 옆으로 뚫린 17번 국도
누각에 앉아 있으면 들리는 소리라곤 17번 국도를 질주하는 수레들의 요란한 굉음들 뿐..
상황이 이러니 어찌 차분하게 사색에 잠겨 있을 수 있겠는가..?


한벽당은 2001년 여름, 전주에 외가(外家)를 둔 친구와 같이 온 적이 있었다.
그 때는 한벽당을 끼고 도는 전주천의 수위가 낮아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와서, 너도나도 천(川)에 들어가
발을 담구고, 개구쟁이 어린이들은 온몸을 내던지며, 물과 찐한 스킨쉽을 즐겼지.. 우리는 여벌의 옷이 없어
그냥 다리와 발만 실컷 담구고..
그러나 근래에 전주천을 정화하면서, 수위가 높아져 물로 풍덩 들어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 전주천 징검다리

수양버들이 시원스런 전주천 길을 걷다보면 '비빔밥', '콩나물국밥'과 더불어 전주 지역의 별미(別味) '오모
가리탕' 주막촌이 나온다.
오모가리탕이란 뚝배기에 쏘가리, 메기, 모래무지 등의 민물고기와 풋고추, 파, 당면 등을 넣고 온갖 양념으로
범벅을 하여 끊인 일종의 생선 매운탕으로, 한벽당에서 전주교(남부시장)까지 그 음식을 취급하는 주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몇몇 집은 벌써 매스컴을 요란하게 타기도 하였지,

더운 여름날, 이 곳에서 매물탕의 매운 맛에 땀도 흘리고, 거기에 전주천에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후식 삼아
땀을 식히면서, 지인들과 곡차(穀茶)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이렇게 하여 전주, 임실 역사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6월 24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7월 11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7월 13일
* 상편 숙성기간 - 2006년 7월 15일 ~ 8월 26일
* 공개일 - 2006년 8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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