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권 사진,답사기'에 해당되는 글 2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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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2.06.20 전주한옥마을, 전주향교, 승암산 동고사, 문학대 겨울 나들이 (남천교, 한벽굴)
  3. 2021.07.13 왕궁평 벌판에 넓게 깃든 백제 후기 유적, 익산 왕궁리유적 (왕궁리5층석탑,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4. 2020.01.11 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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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7.01.21 무주의 꿀단지, 무주 머루와인동굴~덕유산 겨울 나들이 (설천봉, 덕유산리조트)
  8. 2016.12.19 겨울의 길목에서 찾아간 무주 적상산 나들이 ~~~ (적상호, 적상산성, 안국사...)
  9. 2016.09.19 변산반도 제일의 경승지, 아름다운 전나무숲길을 간직한 ~~~ 부안 내소사
  10. 2016.03.27 서해바다와 새만금을 품은 고즈넉한 바닷가 절집,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정읍 봄맞이 나들이 <정읍피향정, 함벽루, 무성서원, 성황산, 한정, 송정, 동진강>

정읍 피향정, 무성서원


 
' 정읍 봄맞이 나들이 (피향정, 무성서원) '

피향정 하연지

▲  피향정 하연지

무성서원 태산사 칠보 성황산 숲길

▲  무성서원 태산사

▲  칠보 성황산 숲길

 


 

차디찬 겨울 제국과 봄의 마지막 경계선인 3월의 한복판에 간만에 전북 정읍(井邑)을 찾
았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정읍으로 가는 일
반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정읍까지 들어가지 않고 그 이전인 태인(泰仁)에서 내렸다.
태인면과 칠보면의 여러 미답처를 그날의 메뉴로 정했는데, 태인터미널 뒤쪽으로 이동하
니 피향정이 하연지란 너른 못을 내밀며 마중을 나온다.
(서울에서 태인 경유 정읍으로 가는 일반고속버스가 1일 3회 운행함)



 

♠  호남 제일의 정자로 오랫동안 칭송을 받았던
피향정(披香亭) - 보물 289호

▲  서쪽에서 바라본 피향정

태인면 중심지(태창리)에 위치한 태인터미널 뒤쪽에는 아침 햇살을 머금은 피향정과 하연지(
태창지)가 나란히 자리해 단아하고 고즈넉한 모습을 풍기고 있다.
예로부터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으로 명성이 높았던 피향정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
붕 정자이다. 신라 말에 그 유명한 최치원(崔致遠)이 세웠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는 헌안왕(
憲安王) 때 태산군수(泰山郡守, 태산은 태인의 옛 이름이라고 함)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넉
넉히 베풀었다. 허나 그가 세운 것도 확실치가 않으며,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조선 광해군(光海君) 시절, 태인현감인 이지굉(李志宏)이 중건했으며, 현종 때 현감 박숭고(
朴崇古)가 증축했고, 1716년 현감 유근(柳近)이 전라감사와 호조(戶曹)의 도움을 받아 변산(
邊山)에서 나무를 베어와 현재의 규모로 중건했다. 그래서 작은 정자였던 피향정이 누각 수준
으로 커진 것이다. 허나 그에 걸맞게 루(樓)를 칭하지 않고 계속 정(亭)을 고집하고 있어 칭
호와 겉모습이 완전 따로 논다. (1974년에 단청을 새로 했음)

땅바닥에 낮게 석축을 다지고 1.42m 높이의 화강암 돌기둥 28개를 세운 다음, 그 위에 누마루
건물을 올렸는데, 정면과 뒷면 가운데 칸에 통행 편의를 위해 돌계단을 늘어뜨렸으며, 누각에
어울리도록 건물 4면이 모두 뚫려있다. 난간은 짧은 기둥으로 촘촘히 둘렀고, 건물 천장은 지
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나 천장 일부를 가리고자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 천장으로
꾸몄으며, 이곳에 퐁당퐁당 빠진 현감과 관리, 선비들이 남긴 글을 머금은 현판이 가득 걸려
있어 호남제일의 정자, 피향정의 오랜 명성을 귀띔해준다.

조선 중기 목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누각 앞뒤로 연꽃이 심어진 상연지(上蓮池)
와 하연지(下蓮池)가 있어 피향정을 아름답게 수식했으나 왜정 때 상연지가 강제 매립되면서
하연지만 남아있다. 연못에 연꽃이 그윽하게 피어나면 그 향기가 주위에 가득했는데, 거기서
피향정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 피향정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2-2 (태산로 2951)


▲  동쪽에서 바라본 피향정과 돌계단

▲  누각 바깥에 걸린 피향정 현판의 위엄

▲  누각 내부에 숨어있는 또 다른
피향정 현판

▲  누각 기능에 충실하게 지어진
피향정 내부

▲  검은 피부의 피향정 중수기


▲  피향정 동쪽에 길게 늘어선 비석들

이들 비석은 옛 태인 고을 현감과 전라도관찰사의 선정비(善政碑) 및 불망비(不忘碑)로 주변
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집합시켰다. 모두 19기로 지붕돌을 지닌 비석과 대머리 비석,
그리고 장대한 세월에게 정통으로 맞아 몸통이 날라간 가련한 비석들까지 다양한 모습과 사연
들을 간직하고 있는데, 선정비를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저 비석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아마도 상당수 비석들은 고개를 떨구겠지.


▲  피향정 서쪽에 닦여진 하연지(태창지)
하연지는 피향정의 상큼한 꿀단지로 연꽃의 보금자리이다. 연못 복판에
동그란 섬을 띄워놓아 운치를 극대화시켰다.

▲  육지와 하연지 섬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돌다리와
섬의 주인장인 함벽루(涵碧樓)


피향정 서쪽에는 누렇게 뜬 잡초 같은 것으로 가득한 너른 공간이 있다. 바로 하연지(태창지)
이다. 누런 잡초들은 모두 연꽃으로 지금은 비록 우울한 모습들을 하고 있지만 여름이 되면
연못 수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통 연꽃밭이 되어버린다. 원래 상연지와 하연지 2개의 연
못이 있어 피향정을 앞다투어 수식했으나 고약한 감성의 왜정이 상연지를 밀어버리면서 하연
지만 남게 되었다.

하연지 복판(정확히는 연못 북부)에는 동그란 작은 섬을 띄워놓았는데, 바로 그 섬에 함벽루
가 둥지를 틀어 섬의 주인 노릇을 한다. 그는 20세기에 지어진 6각형 정자로 1971년에 중수했
으며, 생김새는 완전한 정자(亭子)임에도 그 모습과 다르게 누각을 칭하고 있다. 하여 함벽루
보다는 '함벽정'이 맞다고 본다. 피향정은 나중에 증축되어 누각처럼 되었으나 여전히 '정'을
고집하고 있고, 함벽루는 정자 스타일임에도 누각을 칭하고 있으니 이곳만큼은 모든 것을 반
대로 보는 모양이다.
육지와 함벽루가 있는 섬은 돌다리가 짧게 이어져 있으며, 함벽루 내부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연꽃이 한참인 한여름에 와야 하연지의 진풍경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인데, 엉뚱하게도 3
월에 인연을 지어 연못 풍경이 참 황량하기가 그지 없다. 피향정에서 즐기는 연꽃의 향연은
정읍9경 중 제6경으로 꼽히며, 전주(全州) 덕진공원과 더불어 전북 제일로 찬양을 받는다.


▲  지붕돌을 지닌 함벽루 중수기념비(오른쪽 비석)

1971년에 함벽루를 중수한 기념으로 그해 8월에 장만한 비석이다. 그들 좌우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훨씬 작은 석인(石人, 동자석으로 여겨짐) 2기가 홀(忽)을 들고 서 있는데, 세월
을 너무 좋지 않게 탔는지 머리를 비롯한 윗도리가 완전히 아작이 나버렸다. 저들은 부근에서
수습된 것으로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  6각형 정자 모습의 함벽루
'함벽루'라 쓰고 '함벽정'이라 읽으면 딱 맞는다.

▲  서쪽에서 바라본 하연지와 함벽루 (비수기에 잠긴 하연지)

▲  태인이로비(泰仁移路碑)

하연지 서쪽 끝에는 '태인이로비'란 키다리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871년 태인현감 김인근(
金寅根)이 길을 이곳으로 이설하고 세운 것으로 높이 210cm, 두께 45cm인데, 길을 옮긴 것을
기리고자 세운 옛 비석은 여기서 처음 본다.


▲  남쪽에서 바라본 하연지와 함벽루 섬 (오른쪽에 돌다리가 있음)

피향정은 이미 대학생 시절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다. 그때는 겨울이 시작되던 11월 말이었지.
이번에는 겨울과 봄의 마지막 경계선에 왔으나 황량한 풍경은 11월 말과 비슷하다. 어쩌면 그
때와 비슷한 상황에 왔을까? 다음에 또 이곳과 인연을 짓는다면 무조건 여름에 찾고 싶다. 그
래야 피향정의 자랑인 연꽃의 향연을 제대로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피향정 다음 답사지는 칠보(七寶)에 있는 무성서원이다. 태인에서 칠보까지는 약 8km 거리로
가까운 편이나 정작 시내버스는 하루에 7~8회가 고작이다. 게다가 시간도 맞지 않아서 1시간
이나 기다려야 했지. 하여 그 시간을 때우고자 달이 지구 주위를 돌 듯 하연지를 2바퀴나 돌
았다. (하연지 둘레가 약 480m 정도임)
그렇게 돌고도 시간이 남아 터미널에서 억지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정읍시내버스 91번(신태
인터미널↔칠보) 소형 차량(카운티)이 나타나 반갑게 입을 벌린다.
버스는 겨우 나 하나만을 담고 칠보로 이동했는데, 칠보면 중심지(시산리)까지 15분 정도 걸
렸다. 신태인에서 태인, 칠보 구간은 이동 수요가 좀 있는 줄 알았더만 평일 학생 수요를 빼
면 지지리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소형 차량으로 가뭄에 콩나는 수준으로 다니는 것이다.

전북의 서남부를 이루고 있는 정읍시는 태인면과 북면까지는 평지(평야)이고 동부 지역인 칠
보, 산외, 산내 지역은 첩첩한 산골이다. 즉 태인을 경계로 정읍은 평지와 산악 지대,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  최치원을 기리는 오래된 서원, 무성서원(武城書院)
- 사적 166호

▲  무성서원의 외경 (왼쪽 2층 누각이 현가루)

칠보면 중심지(시산리)에서 바로 남쪽에 흐르는 동진강(東津江)을 건너면 무성리이다. 무성리
를 이루고 있는 마을 중 무성서원을 간직한 곳이 바로 원촌(원촌마을)으로 그곳은 무성서원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오래된 마을이다. 하여 양반과 선비들이 지어놓은 정자(10개가 있음)와
한옥, 제각(祭閣) 등이 많이 전하고 있으며, 서원도 무성서원 외에 용계서원도 지니고 있다.
게다가 향토문화사료관 등의 문화공간도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며,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歌
詞)로 유명한 상춘곡(賞春曲)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유서가 깊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내 침침한 두 눈에는 오로지 무성서원 밖에는 보이지
않아 무성서원과 서원 뒷산인 성황산에 몇몇 명소만 둘러보고 철수했다.

원촌마을 안쪽에 자리한 무성서원은 전북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신라 후기에 최치원이
태산군수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는데, 이에 감동을 먹은 지역 사람들이 그의 생사당(生祠堂)
을 세워 태산사(泰山祠)라 했다. 생사당이란 살아있는 사람에게 제를 지내는 사당으로 그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최치원이 태수로 거쳐갔던 태산고을이 과연 이곳
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음)

그렇게 시작된 태산사는 고려 말에 철거되어 사라졌으며, 1483년에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
학당(鄕學堂)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그곳이 현재 무성서원 자리이다.
1549년 신잠(申潛)의 생사당을 경내에 추가했으며, 1630년에는 정극인, 안세림(安世琳), 정언
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이 추가되었고, 1675년에는 김관(金灌)이 추가되어 총 7명의 사당
이 되었다. 최치원의 생사당으로 시작된 태산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에 유명 인사들까지
기리는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1696년 태산사와 신잠의 사당을 통합했고, 조정에 상주하여 '무성(武城)'이란 사액을 받아 무
성서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의 서슬 퍼런 서원 정리 사업 때도 살아남았으며, 면
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이 1906년 6월 토왜(討倭)를 외치며 의병을 조직했던 병오창의(丙午倡
義)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원을 이루고 있는 건물은 사당(태산사)과 현가루, 명륜당(강당), 동재(강수재), 비각 등이
있으며, 1486년 이후 제작된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院規) 등의 귀중한 서원 자료가 보
존되어 있다.

* 무성서원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원촌1길 44-12)


▲  뾰족한 붉은 살을 지닌 무성서원 홍살문
차디찬 인상의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 관리사무소와 주차장이 나오고 바로
서원 정문인 현가루가 마중을 한다.


▲  맞배지붕 비각과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 오른쪽 비석)

무성서원하면 대표적인 사건이 '병오창의'가 아닐까 싶다.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에 분
개한 최익현은 1906년(병오년) 2월 제자인 임병찬(林秉瓚)과 정읍으로 넘어와 창의를 준비했
다. 하여 그해 6월 4일 이곳 무성서원에서 유생들에게 강회(講會)를 펼치며 토왜(討倭)에 동
참할 것을 호소하여 의병을 조직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병오창의이다.
그 소식을 들은 왜군은 조선인 진위대를 파견해 시비를 걸자 최익현은 동족간의 싸움은 절대
로 안됀다며 의병을 해산했고 핵심 인물 13명이 너무 쉽게 오라를 받으면서 그의 창의는 허무
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최익현의 병오창의를 기리고자 정읍 지역 유림들이 1992년 12월 10일 병오창의기적비를
세웠다.


▲  강수재(講修齋)

병오창의기적비를 바라보고 있는 강수재는 무성서원의 동재(東齋)로 유생들의 기숙 공간이다.
원래 고사(庫舍)였던 것을 무성서원 간판을 내건 이후, 강수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서재(西
齋)인 흥학재(興學齋)도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다.
현 건물은 1887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온돌방과 마루를 갖추고 있다.


▲  서원의 정문인 현가루(絃歌樓)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정문 역할 외에도 시를 짓고
음악 등의 여흥을 즐기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누각의 이름인 '현가'는
거문고 등의 악기와 노래를 뜻함)

◀  무성서원의 역사를 더욱 살찌우고
있는 현가루 앞 비석들

          ◀  신용희(申瑢熙) 불망비
통정대부(通政大夫) 신용희의 공적을 기리고자
1925년에 세웠다. (서원 중수에 공적이 있음)
무성서원에는 맞배지붕 비각 4개, 비석 15기가
전하고 있어 서원의 내력을 풍성하게 돕고 있
는데, 이들 대부분은 서원 중수를 돕거나 서원
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태인현감 등의 관리와
양반사대부의 공덕비이다. (불망비도 공덕비의
일원임)


▲  무성서원 강당<명륜당(明倫堂)>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으로 공부를 하거나 시국을 논의하던 학업
공간이다. 1825년 화재를 만나 1828년에 중건했으며, 마루가 3칸, 방이 2칸 규모로 더울 때는
마루에서 교육을 했고, 추울 때는 마루 좌우에 있는 온돌방에서 교육을 했다.


▲  비각에 갇혀있는 서호순(徐灝淳) 불망비
강당(명륜당) 재건을 도운 태인현감 서호순의 공을 기리고자 1849년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23m, 폭 0.36m이다.

▲  서원 뒷쪽에 높이 자라나 1급 그늘을 선사하는 늙은 나무들
(오른쪽에 보이는 지붕은 태산사)

▲  태산사로 인도하는 내삼문(內三門)
태극마크가 그려진 가운데 문은 제향일에만 열린다. (제왕 등의 아주 높은
사람이나 사당 주인공의 혼령만 이용할 수 있는 특별한 문)

▲  무성서원의 모태이자 상징, 태산사(泰山祠)

무성서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태산사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맞배지
붕 집으로 최치원과 신잠을 비롯한 7명이 봉안되어 있는데, 기존 태산사가 고려 말에 파괴되
자 1483년 현 자리에 중건했다. 현 건물은 1844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문에는 태극마크가 문짝 하나당 2개씩 앙증맞게 그려져 있는데, 제향일을 제외하면 늘 굳게
닫혀있어 내부 관람은 어렵다. 제향은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과 8월 중정일 등 1년에 2번
열렸으나 지금은 2월 중정일에만 지낸다.


▲  서쪽에서 바라본 태산사



 

♠  성황산(城隍山)에서 만난 소소한 명소들

▲  필양사(泌陽祠)

무성서원은 오랜 명성에 비해 조촐한 규모라 관람이 생각 외로 일찍 마무리가 되었다. 피향정
에 비해 대단한 시간 도둑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은 약 13시, 무성서원 이후의 정처(定處)를 딱히 정해두지 않아서 어디를 갈까 궁리
하며 원촌마을을 거닐고 있으니 맞배지붕 사당이 잠깐 보고 가라며 애타게 손짓을 보낸다. 고
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무슨 물건인가 살펴보니 춘우정 김영상(春雨亭 金
永相, 1836~1911)의 사당인 필양사이다.

김영상은 도강김씨 집안으로 정읍시 정우면 산북리에서 태어났다. 16살에 선조들이 살던 이곳
원촌으로 이사를 했으며, 유학을 익히고 지역의 여러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 터지자 의병활동에 참여했고 최익현의 병오창의에도 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1910년 이후 왜정은 이 땅의 선비와 사대부(士大夫)를 회유하고자 돈과 작위(爵位)를 마구 뿌
렸는데, 그에게도 돈의 유혹이 뿌려졌다. 허나 그는 이를 거절하며 왜정이 내민 사령서(辭令
書)에 적힌 자신의 이름 3자까지 찢어버렸다. 이에 뚜껑이 뒤집힌 속 좁은 왜군은 불경죄(不
敬罪)를 물어 군산감옥으로 잡아갔다.
군산으로 이송 도중, 만경강(萬頃江) 사챙이 나루터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을 시도했으나
눈치 없는 왜군이 이를 구출해 실패했으며, 군산감옥에 투옥되자 단식에 들어가 겨우 8일만인
1911년 5월 9일 10시경, 7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그에게 독립유공 대통령 포상을 올려 그의 충절을 기렸으며, 1991년 8
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가로 추서되었다.
필양사는 지역 유림들이 1945년에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국가
보훈부 현충시설(관리번호 51-1-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3년 5월에 수해로 지붕이 무너
지자 복구했다. 그리고 2010년 김영상 순절 100주년을 맞이해 필양사 앞에 '애국지사 춘우정
김영상 선생 순국추모비'를 세웠으며, 사당 뒷쪽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여 경건한 분위기를 자
아낸다.

필양사를 보고 다시 길을 재촉하니 원촌마을의 뒷동산인 성황산(城隍山)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마을과 맞닿은 산 동쪽 자락에는 원촌마을 선비와 양반들이 조선 후기
와 20세기에 뿌려놓은 정자와 제각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시간도 아직 널널하고 딱히 정처도
정하지 못해 그 유혹에 푹 빠져보기로 했다.
기왕 산에 두 발을 들였으니 비록 높이는 낮지만 그 정상에 올라 천하를 한번 굽어봐야 되겠
지. 하여 정상으로 발을 움직였으나 대자연의 괴롭힘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나무들이
계속해서 길을 막는다. 몇 번을 넘었으나 이제는 더 큰 나무가 드러누워 길을 가로막는다. 얼
핏 보면 큰 태풍이 얼마 전에 다녀간 듯 보이나 이때는 태풍과 관련이 없는 3월이다. 아무래
도 작년 여름부터 쓰러진 나무들을 정읍시청 철밥통들이 제대로 치우지 않고 방치한 듯 싶다.
쓰러진 나무로 길이 엉망진창이라 계속 오르는 것은 무리가 있고 올라갈 기분도 급 저하되어
정상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산자락에 깃든 여러 정자와 기와집을 둘러보았다.


▲  한정(閒亭) - 정읍시 향토유적 1호

이름이 달랑 1자인 한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조선 중종(中宗) 시절 한
정 김약회(閒亭 金若晦)가 사화(士禍)로 시끄러운 조정이 싫어서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것으
로 자신의 호를 따서 '한정'이라 했다. 여기서 한(閒)은 한가함과 고요함을 뜻하는데, 그 이
름 그대로 주변이 고요 속에 잠겨있어 내 발자국 소리, 사진 소리가 미안할 정도이다.

김약회가 세상을 떠난 이후 전라도 유림들이 모여 학문을 나누던 현장으로 쓰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파괴되어 사라졌으며, 320여 년이 지난 1920년에 후손 김환정이 재건했다. 그러
니까 현재 한정은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1칸씩 딸려있으며, 전면과 좌우로 툇마루를 갖춘 전형적인 누정
(樓亭) 건축물이다. 


▲  시산사로 인도하는 계단길

▲  시산사(侍山祠)

이곳은 무성서원에서 병오창의를 일으킨 최익현의 사당으로 1907년에 세워졌다. 첫 이름은 태
산사(台山祠)로 왜정의 태클로 철거되었으며, 1975년에 다시 세워 시산사라 하였다. 이때 국
헌 김기술(菊軒 金箕述, 1849~1929)과 화개헌 김직술(和介軒 金直述)이 추가로 배향되었는데,
김직술은 최익현과 함께 병오창의를 일으킨 인물이다.


▲  송정(松亭)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33호

소나무 정자를 뜻하는 송정은 앞서 '한정'처럼 이름이 달랑 1글자이다. 1글자의 이름을 지닌
정자나 누각이 이 땅에 흔치가 않은데, 이곳 성황산에는 무려 2개 이상이나 있다. 아마도 이
곳에는 단순하면서도 무언가 강렬한 의미의 1글자를 선호했던 양반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곳은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 사건을 비롯하여 광해군의 정치에 쓸데없이 불만을 품은 지
역 선비들이 낙향하여 시를 읊으며 팔자 좋게 놀던 곳이다. 세상에서는 그들을 7광(狂)과 10
현(賢)이라 불렀는데, 7광은 김대림(金大林), 김응빈(金應賓), 김감(金勘), 송치중(宋致中),
송민고(宋民古), 이상형(李尙馨), 이탁(李鐸)이며, 10현은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
탁을 포함해 김관(金灌), 김정(金鼎), 김급(金汲), 김우직(金友直), 양몽우(梁夢禹)이다.

정자는 한복판에 온돌방이 있고, 마루가 방을 둘러싼 구조로 부근 숲속에 10현이 봉안된 영모
당(永慕堂)이 있다. 영모당은 1898년에 지어진 것으로 송정영당(影堂)이라 불리기도 한다.

* 송정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310 (원촌1길 12-3)

▲  파란 현판에 도도하게 쓰인
송정 두 글자의 위엄

▲  산 밑에 있는 후송정(後松亭)


후송정은 송정 밑 바위에 자리해 있다. 화개헌 김직술이 쓰러지기 직전인 송정을 대신하고자
10현의 후손 42명의 지원을 받아 1899년에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송정의 10현을 추모하는 뜻
에서 십송정(十松亭)이라 했으나 1985년 현재의 정자를 지으면서 후송정으로 이름을 갈았다.

정자의 이름인 후송은 논어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짐을 안다)'의 의미로 절개가 높은 선비의 고결한 뜻을 뜻한
다. 예전에는 정자 밑으로 개울이 흘렀으나 지금은 길이 들어서 예전과 풍경이 다소 달라졌다.


▲  산외면과 칠보면, 태인면의 산하를 두루 적시며 서해로
흘러가는 동진강


후송정을 끝으로 무성서원 후식용으로 둘러본 성황산 더듬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들 외에도
안가본 제각과 정자가 여럿 있으나 썩 내키지가 않아 적당히 둘러보고 나왔다. 그래도 한정,
시산사, 필양사, 송정, 후송정, 영모당(사진은 없음)을 둘러봤으나 거의 70% 이상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원촌마을을 뒤로 하며 서해를 향해 흘러가는 동진강을 건너 칠보면 중심지(시산리)로 나왔다.
여기서 정읍시내버스 91번을 타고 신태인읍으로 나와서 신태인역으로 이동하니 11시 이후부터
잔뜩 인상을 쓰던 하늘이 기어코 빗방울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오후 늦게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우산을 준비해 갔으나 비가 생각 외로 꽤 길게 내렸다. (저녁 늦게까지) 시간도 이제
15시 정도인데 벌써 날씨가 이러하니 어디로 가야되나 그야말로 갈팡질팡에 빠져버렸다.

신태인역에 이르니 마침 서울 용산행 무궁화호 열차가 막 기적소리를 울리며 들어온다. 콩을
볶듯 급히 표를 사들고 열차에 올랐는데, 좌석이 모두 매진되어 오랜만에 입석으로 갔다. 그
를 타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을 하면서 비가 그치길 염원했으나 비는 나를 졸래졸래 따라와 가
는 곳마다 비를 뿌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  내장산(內藏山)에서 발원하여 칠보에서 동진강과
합쳐지는 칠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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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전주향교, 승암산 동고사, 문학대 겨울 나들이 (남천교, 한벽굴)

전주 겨울 나들이 (전주향교, 동고산, 문학대)



' 전북의 중심지, 전주 겨울 나들이 '

동고사에서 바라본 전주시내와 전주한옥마을
▲  동고사에서 바라본 전주시내와 전주한옥마을

전주향교 대성전

전주한옥마을 전주천동로

▲  전주향교 대성전

▲  전주한옥마을 전주천동로



 


겨울 제국이 가을을 몰아내고 강추위로 천하를 벌벌 떨게 하던 12월 한복판에 호남의 오
랜 중심지, 전주(全州)를 찾았다.
전주는 1년에 1회꼴로 발걸음을 하는 곳으로 이번에는 전주한옥마을 동남쪽에 있는 동고
산(승암봉, 기린봉)을 중심으로 둘러보기로 했다.

햇님이 아직 등청을 하지 않은 이른 아침, 서울 남부터미널로 달려가 삼례(參禮)행 직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주를 가니 전주행을 타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그날따라 전주 수요
가 오지게 많아서 다소 여유로운 삼례행을 택한 것이다. 어차피 전주행을 타나 삼례행을
타나 전주한옥마을(전주 도심)까지 시내버스를 1회 타야 되며, 삼례(완주군 삼례읍)에서
전주 도심까지 거리도 가깝고 시내버스도 한강수 흐르듯 많이 다닌다.

그렇게 3시간 여의 시간을 던져 전주한옥마을에 이르니 시장기가 요동을 친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하여 전주를 찾을 때마
다 거의 꼭 들리는 콩나물국밥집에서 이른 점심으로 뜨끈한 콩나물국밥을 섭취하고 전주
한옥마을을 가로질러 전주천으로 이동했다.
서울의 북촌(北村)한옥마을과 더불어 한옥마을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전주
한옥마을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10대부터 노인들, 다른 나라 잡것들까지 다양한 관광객들
로 거의 북새통을 이루어 이곳의 국제적인 명성을 실감케 한다.
전주의 명물 간식거리인 수제 초코파이를 하나 구입하여 입에 물고 북적거리는 전주한옥
마을을 주마등(走馬燈)처럼 흘려보내니 기와집 누각(청연루)을 이고 있는 전주천 남천교
가 반갑게 마중을 나온다.



 

♠  전주천과 남천교

▲  전주천(全州川)에 걸려있는 남천교(南川橋)

전주의 젖줄인 전주천은 임실(任實) 관촌평야에서 발원하여 전주시내를 가로질러 만경강(萬頃
江)으로 흘러가는 30km의 하천이다. 한때는 다른 도시의 하천과 마찬가지로 개발의 난도질에
사망 상태까지 갔었으나 1998년 이후 꾸준히 생태계 복원을 추진하여 살아있는 하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2002년 왜열도에서 열린 '강(江)의 날' 대회에서 생태
계를 성공적으로 복원시킨 모델로 꼽히기도 했다.

전주한옥마을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전주천에는 '남천교'란 다리가 걸려있다. 다리의 길이는
82.5m, 폭 25m로 전주천 몸매에 맞게 닦여져 있는데, 다리 가운데에는 특이하게 기와집 누각(
樓閣)까지 걸쳐 놓았다. 처음에는 한옥마을을 수식하는 용도로 최근에 지어놓은 별 의미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지나치려 했으나 알고 보니 나름 사연이 있는 곳이다.

남천교는 조선 중기 쯤에 전주천에 놓여진 돌다리로 인근의 승암산과 한벽당이 어우러져 빼어
난 경관을 자랑했다. 5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지개처럼 생겨 '다섯 무
지개다리','오홍교(五虹橋)'라 불렸고, 다리 윗도리에 용조각이 있어서 '오룡교(五龍橋)'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이들 용조각은 승암산의 화기(火氣)를 막고자 새겼다고 하며, 19세기
이후에는 5개의 창을 가진 안경을 닮았다고 하여 안경다리<안경교(眼鏡橋)>란 별명까지 추가
되었다. 이렇게 별칭이 많은 것은 그만큼 이 다리의 인기가 대단했다는 뜻이다.

1753년 다리가 유실되어 터만 남아오다가 1790년 지역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복원 공사를 벌
여 1791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남천교는 얼마나 잘 지었던지 그 모습
이 마치 하늘이 던져준 듯하고, 땅에서 불끈 솟아난 듯하여 사람이 만든 것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걸작을 자랑했지만 왜정(倭政) 시절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그 흔적 조차 남아
있지 않다가 2009년 전주시가 옛 지도에 나오는 홍예교의 모습을 참고하여 이전보다 더 크게
재현했다. 또한 다리 한복판에는 팔작지붕을 지닌 청연루(晴烟樓)를 세워 쉼터와 풍류의 장소
로 삼았다.

청연루는 남천교와 달리 오래된 사연은 잡고 있지 않다. 여기서 가까운 한벽당(寒碧堂)이 전
주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煙)의 현장으로 오랫동안 추앙을 받고 있어 그 이름을 따서
대칭적인 의미로 세웠을 뿐이다.
전주한옥마을의 새로운 명소로 여기서는 갈대와 온갖 식물, 물고기가 춤을 추는 전주천과 승
암산, 승암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동고사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남천교에서 바라본 전주천과 승암산

▲  남천교 개건비(改建碑)

청연루 옆에는 1790년 남천교 재건을 기리고자 1794년에 세운 개건비가 우뚝 자리해 있다. 네
모난 비좌(碑座)에 해서체(楷書體)로 쓰인 글씨를 머금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둥근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으로 다리의 재건 과정과 남천교 건립에 돈을 내놓은 사람들의 이름
이 적혀있다.
원래는 한벽당 우측 하천변에 있었으나 남천교가 사라진 이후, 쓸쓸히 방치되어 있던 것을 어
떤 사람이 전주교육대 교정으로 옮겨놓았다. 이후 남천교가 새로 지어지면서 다리 한복판으로
가져와 안착시켰다.

남천교의 빛바랜 일기장 같은 존재로 세월을 탄 검은 때가 자욱해 중후한 멋을 드러내고 있으
며, 비석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  잘 다듬어진 전주한옥마을 전주천동로

전주천동로는 전주한옥마을의 남쪽 끝 길로 남쪽은 전주천, 북쪽은 한옥들이 늘어서 한옥마을
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상당수 근래 지어진 어린 한옥들이라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
로 피부가 뽀송뽀송한데, 산뜻하게 정비된 그 길을 걸으면 승암산, 한벽당으로 이어지며, 중
간에 전주향교가 홍살문을 내밀며 잠시 들릴 것을 권한다.


▲  전주향교 홍살문과 하마비(오른쪽 비석)

전주향교는 원래 계획에 없었다. 비록 한참 전이긴 해도 들린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붉
은 홍살문의 차가운(?) 유혹에 이끌려 잠시 승암산을 접고 향교로 길을 틀었다.

홍살문은 쌀쌀맞게 생긴 모습 그대로 권위적인 곳을 알려주는 존재이다. 주로 왕릉과 향교(鄕
校), 서원, 지체 높은 사람의 사당, 관청 입구에 세워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향교와 관
청, 높은 이의 사당에는 홍살문 보조용으로 하마비를 옆에 두기도 한다. (하마비만 두는 경우
도 있음)
하마비의 거친 피부에는 '이곳을 지나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라!'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다른 향교의 하마비는 거의 조그만 덩치이지만 이곳 향교는 나보다 키가 크다. 아무
래도 전주가 호남의 중심 고을이자 조선 왕실의 성역(聖域)과 같은 곳이라 그에 걸맞게 향교
와 하마비를 세운 모양이다.
허나 시대가 여러 차례 바뀌면서 하마비와 홍살문의 위엄은 완전히 추락했으며, 이제는 문화
유산의 의미 밖에는 없다. 더 이상 그들의 눈치를 보며 지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위엄이 식어버린 하마비(下馬碑)
윗도리와 아랫도리 피부색이 서로 틀리다.

▲  박진 효자비(朴晉 孝子碑) -
전주시 향토문화유산 5호


홍살문을 지나 향교의 정문인 만화루를 들어서려는 찰라, 향교 담장 서쪽 끝에 조그만 기와집
하나가 손짓을 한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그 손짓을 따라가보니 '박진 효
자비'를 머금은 비각(碑閣)이었다.

효자비의 주인공인 박진은 전주박씨로 자는 내신(乃臣)이다. 부친이 중병에 걸려 고생을 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전주로 내려와 부친을 간호했는데, 낮에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도 허
리띠를 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부친이 세상을 뜨자 예법에 맞추어 장사와 제사를 치루고 3
년 동안 시묘살이까지 하여 지역 사람들의 칭송이 대단했다. 하여 조정에서는 1398년 정려비(
旌閭碑)를 세워 그의 효행을 기렸다.
1724년 후손들이 비석을 다시 중각(重刻)했으며, 1805년 후손 박필성(朴必晟)이 '전주부 효자
박진정려기'를 지어 비각 안에 걸어두었다.

향교 앞에 자리해 있어 위치도 좋으며, 향교 유생들을 위한 교육 자료로도 아주 그만이다. 하
여 그를 이곳에 둔 모양이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지는 않았음) 그 효자비를 둘러보고 만화루
를 통해 공자왈, 맹자왈이 귀를 때릴 것 같은 전주향교로 들어섰다.



 

♠  전주 지역 교육의 옛 중심지, 지방 향교 중 큰 규모를 자랑했던
전주향교(全州鄕校) - 사적 379호

▲  전주향교 대성전(大成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호

전주한옥마을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전주향교는 나라에서 각 고을마다 세운 중등교육기관으
로 1410년에 창건되었다.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으며 원래는 경기전(慶
基殿) 옆에 있었다고 전한다.

1441년 조정에서 향교 옆에 경기전를 짓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했는데, 향교에서
공부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경기전의 엄숙한 분위기를 저해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여 전주
부(全州府) 서쪽 성 밖, 화산<華山, 황화대(黃華臺)> 밑으로 내보냈다. 졸지에 경기전이란 굴
러들어온 돌에게 자리를 빼앗긴 셈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3년 전라도관찰사 장만(張晩)이 중건했는데, 전주부 성내(城內)
에서 멀다는 민원이 제기되어 향교의 위치가 잘못되었음을 조정에 알리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
크게 지었다. 이후 1654년과 1832년, 1879년, 1904년에 중수를 하였다.
향교 학생은 액내생(額內生, 정원내 교생, 양반 자제들) 90명, 액외생(額外生, 평민과 서얼로
정원외 교생) 90명 등 총 180명으로 정7품의 훈도(訓導) 1명을 두어 4서5경(四書五經)을 가르
쳤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향교의 교육 기능은 점차 사라졌으며 제사 기능
만 남게 되면서 거의 빈껍데기 신세가 되버린다.
전주향교 역시 그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해 뒤로 물러나있다가 1949년 재단법인 명륜학원(明倫
學院)을 설립하여 다시 교육에 나서기 시작했다. 1950년 4월 초급대학인 명륜대학을 설립하여
법학과와 국어한문과를 두었으니 그것이 바로 전주 최초의 대학, 전북대의 시초이다. 즉 전주
향교가 전북대의 산실인 것이다.
처음에는 향교 건물을 이용하여 대학교를 꾸렸는데, 1953년 종합대학교로 승격 인가를 받으면
서 학생 수가 폭주했다. 하여 수용에 한계를 느끼게 되자 전주 시내 북쪽에 덕진캠퍼스를 지
어 1955년 대학교를 그곳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향교는 시민을 대상으로 조촐하게 한문과 서
예, 예절 교육을 가르치고 있으며, 봄(3월)과 가을(9월)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매월 초
하루와 보름에 향을 피워 향교의 기능을 계속 지키고 있다.

경내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해 동무와 서무, 만화루, 장판각, 계성사, 양사재(養士齋),
사마재(司馬齋), 수복실(守僕室), 고직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총 99칸을 이루고 있으며, 그
장대한 규모로 인해 전라도 53고을의 수도향교(首都鄕校)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늙은 은행나무 4그루가 대성전과 명륜당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명륜당은 전국 향교
의 명륜당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힌다. 또한 계성사는 제주향교와 더불어 천하에 딱 2곳
밖에 없어 나름 희소성이 있으며, 김제향교와 나주향교와 더불어 국가 사적의 높은 지위를 누
리고 있다.

전주의 꿀단지, 전주한옥마을이 천하 굴지의 관광지로 인기를 누리면서 한옥마을 남쪽 구석에
자리한 전주향교에도 볕이 들고 있다. 이곳까지 관광/답사객들이 적지 않게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뒤쪽 부분을 제외한 대성전, 명륜당 구역을 흔쾌히 개방하고 있으며, '성균관스캔들'
,'YMCA야구단' 등의 드라마와 영화도 이곳을 거쳐갔다.
이 땅의 향교 대부분은 폐쇄일변도를 보이며 문을 굳게 잠구고 있으나 이곳은 문을 활짝 열어
살아있는 향교이자 전주한옥마을을 수식하는 관광 명소로 계속 옻칠을 하고 있다. 그런 점은
참 마음에 든다. 그럼 지금부터 은행잎 냄새가 진동하는 향교 내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 전주향교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26-3 (향교길 139, ☎ 063-288-4548)
* 전주향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전주향교의 정문인 만화루(萬化樓)

2층 누각으로 이루어진 만화루는 전주향교의 정문이다. 1866년 홍수로 붕괴된 것을 다시 지었
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중층 건물로 가운데 문은 굳게 입을 봉하고 있고, 좌/
우 문은 활짝 열려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만화루란 이름은 '공자지도 만물화생<孔子之道
萬物化生, 공자의 도(道)로 만물이 교화된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방이 훤히 뚫린 모습이라 여름에는 강의 공간으로 쓰였으며, 종종 향시(鄕試)를 보는 곳으
로 쓰이기도 했다.

▲  대성전으로 인도하는 일월문(日月門)

▲  일월문 옆 은행나무
전주시 보호수 9-1-7-1호

만화루를 지나면 솟을 삼문(三門)으로 이루어진 일월문이 나온다. 그 문을 지나면 바로 향교
의 중심인 대성전 구역으로 커다란 은행나무 3그루가 쏟아낸 은행잎이 대성전 뜨락에 가득하
여 은행잎 특유의 악취가 아주 코를 찌른다.
이처럼 향교 뜰에 은행목을 심은 것은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강의를 했던 행단(杏壇)의 고
사 때문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그 나무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유교와 관련된 공간(
향교, 서원)에서는 꼭 그것을 심었다. (선비나무라 불리기도 함)
일월문 옆 은행나무는 290여 년 묵은 것으로 대성전 은행나무 3형제 중 막내이다. (1982년 9
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50년) 키는 약 20m, 둘레 3.7m로 겨울 제국의 의해 모
든 것이 싹 털린 채 앙상한 가지를 애타게 드러내며, 봄의 해방군을 염원하고 있다. 허나 이
제 12월이니 그때까지는 무려 4달 가까이 기다려야 된다. 그 시간이 좀 고통스럽기는 하겠지
만 묵묵히 기다리면 어느새 소쩍새가 울 것이다. 내가 전주향교를 과연 갔었는지 햇갈릴 정도
로 시간은 빛의 속도로 흘러가니 말이다.


▲  동무(東廡)와 390년 묵은 커다란 은행나무(전주시 보호수 9-1-5호)

대성전 구역은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동무, 서쪽에 서무를 두고 있다. 이들 '무'자 돌림
의 건물은 대성전에 넣지 못한 유교 성현들을 처리하고 있는데, 동무에는 공자의 주요 제자인
'비공 민손','설공 염옹','려공 단목사','위공 중유','위공 복상' 등 5명과 송조(宋朝) 6현인
'도국공 주돈이','낙국공 정이','미백 장재' 등 3명, 중원대륙<서토(西土)> 7현 중 '평음후
유약','승민백 복승','창려백 한유','문정공 이등' 등 4명, 총 12명의 위패가 들어있다.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03년에 지어졌다가 1987년 해체복원했으며, 맞은편
으로 닮은꼴 모습의 서무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동무 앞에는 390년 묵은 은행나무가 우뚝 솟
아 뜨락에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높이 30m, 둘레 5.5m에 이른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50년)


▲  서무(西廡)와 440년 묵은 은행나무(전주시 보호수 9-1-4호)

동무를 마치 동무처럼 바라보고 선 서무는 정면 9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동무와 완
전히 닮은 모습이다.
이곳에는 공자의 제자인 '운공 염경','제공 재여','서공 염구','오공 언언','영천후 전손사'
등 5명과 송조 6현인 '예국공 정호','신안백 소옹','휘국공 주희(朱熹)' 등 3명, 중원대륙(서
토)의 7현인 '선보후 복불제','강도상 동중서(董仲舒)','온국공 사마광'의 3명 등, 총 11명의
위패가 들어있다.

서무 앞에는 이곳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살짝 구부정한 모습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나이는 약 440살(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400년)로 전주향교가
이곳에 안착한 때(1603년)와 거의 비슷해 중건 기념으로 심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높이는 30
~32m, 나무둘레 10.4m의 우람한 덩치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자 '김해동'이란 사람이 암컷나
무 옆에 수컷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  전주향교 대성전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호

잘 다져진 석축 위에 들어앉아 남쪽을 향해 3줄기 계단을 짧게 늘어뜨린 대성전은 향교의 중
심 건물이다. 공자(孔子)를 비롯한 유교 성현을 봉안한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
지붕 건물인데, 1603년에 지어진 것을 1653년에 새로 지었다. 그때 이기발(李起浡, 1602~1662
)이 중건기(重建記)를 남겼으며, 이후 1907년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유교의 중심 인물인 공자를 비롯하여 맹자(孟子) 등의 성인 4명, 공자의 10대 제자<십철(十哲
)>, 송조 6현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향교의 다른 건물과 달리 홀로 전북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건물 양쪽 끝에 붉은 기둥을 별도로 설치하여 무거운 지붕을 받들게
했다.


▲  대성전 중심에 자리한 공자의 진영(眞影)
동이족(배달민족) 출신인 공자<孔子, 공구(孔丘)>는 문선왕(文宣王)이란
시호를 가지고 있으며, 유교의 1인자로 오랫동안 대접을 받아왔다.

▲  대성전에 들어있는 맹자 등의 사성(四聖)과 십철 등의 위패

▲  대성전 서쪽에 자리한 커다란 느티나무와 여러 돌덩어리들
느티나무의 나이가 약 150~200년 정도 되어 보인다. 그의 그늘에는 여러
견고한 돌덩어리들이 누워있는데, 이들은 1987년 이후 향교 건물을
손질하면서 나온 옛 석재들이다.

▲  명륜당 은행나무 (전주시 보호수 9-1-3호)

대성전 뒤쪽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에 명륜당이 있다. 그 명륜당 앞에도 오래 숙성
된 은행나무가 개골(皆骨) 상태로 마치 하늘을 원망하듯 가지를 높이 쳐들고 있다.
그는 약 420년 묵은 나무로 높이 32m, 둘레 6.6m이다. (1982년 9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
정 나이가 약 380년) 서무 은행나무보다 허리 둘레는 작지만 키도 비슷하고 나이도 그리 차이
가 나지 않으며, 대성전 주변에 있는 늙은 은행나무(3그루)와 달리 명륜당을 혼자 도맡으며
그곳의 그늘을 책임진다.


▲  향교에 흔치 않은 건물, 계성사(啓聖祠)

향교는 20세기 이후에 신설된 시,군 단위 행정구역이 아닌 이상은 전국의 주요 고을에 대부분
남아있다. 기러기의 털처럼 너무나 흔한 향교이지만 '계성사'란 건물을 지닌 향교는 오직 제
주향교와 이곳 전주향교 2곳 뿐이다.

명륜당 서쪽 담장 너머에 자리한 계성사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공자의 부친인 '제국
공 공숙량흘', 안자(晏子)의 부친인 '곡부후 안무유', 증자(曾子)의 부친인 '내무후 증점',
자사 공급(子思 孔伋)의 부친인 '사수후 공리(공자의 아들)', 맹자(孟子)의 부친인 '주국공
맹격'을 봉안하고 있다. 1741년 판관(判官) 송달보가 세웠으며, 상량문(上樑文)은 정광(正匡)
이기보가 남겼다.


▲  장판각(藏版閣)

계성사 뒤쪽에는 창고 모양의 장판각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7년
에 전주시에서 향교 소장 목판 5,059판의 보호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이들 목판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1,775판을 위시해 주자대전(朱子大全) 1,471판, 성
리대전(性理大全) 571판, 율곡전서(栗谷全書) 491판, 사기평림(史記評林) 484판, 동의보감(東
醫寶鑑) 151판, 사략(史略) 56판,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1판, 주서백선(朱書百選) 1판, 증
수무원록 언해(諺解) 53판 등이다.

하지만 이들은 향교 목판이 아닌 전라감영(全羅監營)에서 서적 간행을 위해 가지고 있던 것으
로 감영 내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899년 전라도관찰사 조한국(趙翰國)이 전주향교로
싹 보낸 것인데, 1920년 책고(冊庫)를 지어 관리하다가 장판각을 새로 지었으며, 그들의 보존
과 연구를 위해 대부분 전북대 박물관으로 보냈고, 일부는 향교 동쪽에 있는 완판본문화관에
가 있다. 하여 지금은 간단한 서적과 기물만 들어있다.
(장판각에 있었던 목판들은 '전주향교 소장 완영책판'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04
로 지정됨)

▲  향교 뒤쪽 부분

▲  향교 후문인 입덕문(入德門)

장판각과 계성사 서쪽에는 뒷간을 머금은 기와집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라 볼일
이 아주 급한 사람에게는 조금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시설만큼은 현대식으로 잘 닦여져 있어
원초적 볼일을 보는데 어려움은 별로 없다.
해우소 담장 너머로도 여러 건물이 둥지를 틀고 있어 '향교가 참 지독하게 넓구나!' 혀를 차
게 하는데, 이들은 관리인 숙소와 교육 공간으로 이용되는 건물로 통제구역으로 묶여있다. 허
나 밑에서도 거의 보이므로 굳이 통제를 뚫고 접근할 필요는 없으며, 계성사 앞에는 향교의
후문격인 입덕문이 한쪽 문짝을 열어두고 있다. (향교 사정에 따라 닫아두는 경우도 있음)


▲  날개짓을 하는 것 같은 명륜당(明倫堂)
설마 저대로 허공으로 날라가는 것은 아니겠지?


대성전 뒷통수에 자리한 명륜당은 이곳의 교육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
이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 다음으로 중요한 존재로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
는 의미이다. 특이하게도 양쪽으로 1칸씩 눈썹지붕을 이어 덧붙였는데, 이는 공간을 넓히고자
그런 것이다. 하여 큰 새가 마치 하늘을 향해 날개짓을 하는 모양 같다.

이 건물은 1603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 땅의 명륜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히고 있으며,
1904년 중수했다. '성균관스캔들','YMCA야구단'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며, 뜨락 좌우에는 동재
와 서재를 두었는데, 이는 유생들이 기숙사이다. 가까이 사는 유생들은 집에서 통학을 했겠지
만 먼 사람들은 여기서 숙식을 하였다. 기숙사 비용은 나라와 전라감영에서 모두 지원을 해주
어서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면 된다.

▲  옆에서 바라본 명륜당

▲  명륜당 동쪽에 자리한 동재(東齋)


▲  입덕문 서쪽 돌담길 (왼쪽 한옥이 전주전통문화연수원)

명륜당 주변을 둘러보고 입덕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입덕문 서쪽과 남쪽에는 돌담을 둘
러 호젓하게 돌담길을 내었는데, 이렇게 양쪽으로 돌담을 두룬 돌담길을 지닌 향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보통 한쪽만 돌담을 내기 때문이다.
돌담 북쪽은 전주향교 영역이며, 서쪽에 대나무가 우거진 한옥은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이다. 돌
담길의 길이가 우리네 인생만큼이나 짧긴 하지만 이곳의 백미(白眉)로 꼽힐 만큼 강하게 인상
에 남는다.


▲  전주향교를 뒤로하며 (입덕문 남쪽 돌담길)
왼쪽이 전주향교, 오른쪽이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이다. 서로의 성격과 연륜이
틀리다보니 돌담 또한 다른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  승암산(僧巖山) 둘러보기 (한벽굴, 동고사)

▲  한벽당 앞 전주천 (좁은목)

전주향교로 잠시 접어두었던 전주천동로를 다시 꺼내 동쪽으로 걸었다. 한벽당의 주변 풍경을
크게 말아먹은 한벽교의 밑도리를 지나면 전주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한
벽굴이 있고, 그 위쪽에 한벽청연의 현장인 한벽당이 나를 굽어보고 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한벽당이라 간만에 들릴까 했지만 그곳까지 올라가기 귀찮아서 밑에서
잠깐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한벽당 동쪽에 있다는 승암산 산길을 찾았다. 하지만 그 길이
보이지 않아서 한벽굴을 통해 북쪽으로 넘어가서 승암산으로 진입했다.


▲  열차의 기적소리가 들릴 것 같은 칙칙한 한벽굴

한벽굴은 옛 전라선(全羅線, 익산~여수) 철도의 흔적이다. 지금은 전주시내 동쪽 외곽을 얌전
히 지나가고 있지만 처음에는 전북대와 전주시청, 오목대 등 전주 도심을 거쳐 지나갔다. 이
는 시내 교통 편의도 있지만 한벽당과 태조 이성계의 설화가 깃든 오목대(梧木臺)의 정기를
자르고 욕보이려는 왜정(倭政)의 나쁜 의도가 더 컸다. 그래서 한벽당과 오목대 뒤에 땅굴을
파고 열차를 지나가게 한 것이다.

왜정의 고약한 장난에 한벽당과 오목대가 뿔이 난 것일까? 열차가 한벽굴을 지날 때마다 이상
하게도 속도가 매우 느려졌다고 한다. 하여 그때를 틈타서 많은 무임 승차객들이 열차에서 뛰
어내렸다는 것이다.
이후 전라선은 시내 동쪽으로 옮겨졌고, 한벽굴은 철도가 아닌 뚜벅이를 위한 땅굴이 되어 한
옥마을을 수식하는 명소이자 오목대, 한옥마을에서 전주천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굴에 들
어가면 한여름에도 매우 시원하며, 옛날에 사라진 열차의 기적 소리가 두 귀에 아련하게 들리
는 듯하다.


▲  한벽굴 왕년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 (인터넷에서 가져옴)

왼쪽은 전주천, 가운데는 한벽당, 오른쪽은 전라선 한벽굴이다. 한벽당은 왜정에 의해 전라선
열차로 고통을 받았고, 2000년 이후에는 한벽당 바로 앞에 신작로(기린대로)가 뚫리면서 다시
고통을 겪고 있다. 인간의 이기(철도, 도로)에 끊임없이 고통받는 한벽당의 비애..


▲  승암산

한벽굴을 지나 낙수정(樂水亭) 방면으로 가면 승암산 숲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부터 동고사
를 찾기 위한 승암산 산행이 시작되었다.

전주시내 동남부에 듬직하게 자리한 승암산(306m)의 원래 이름은 기린봉이다. 산의 형세가 마
치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麒麟)이 달(또는 여의주)을 토해내는 듯한 모습<기린토월(麒麟吐月)
>이라 하여 유래된 것으로 정상부에 중바위가 있어 승암산, 중바위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전주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뫼로 후백제(後百濟, 892~936) 시절에 지어진 동고산성과 왕궁
터가 남아있어 이곳이 후백제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동고사와 승암사 등의 오래된
절과 치명자산(致命者山) 천주교 성지를 머금고 있다.

낙수정 서쪽(무애사 앞)에서 승암산의 품으로 들어서 10여 분 오르니 동고사로 이어지는 포장
길이 나타난다. 가파른 벼랑 위에 닦인 그 길을 4분 정도 가면 대나무 숲이 나타나고 이어서
윗쪽 벼랑에 자리한 동고사가 모습을 비춘다. 여기서 남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치명
자산 성지(천주교 순교자 묘)이다.


▲  승암산에서 바라본 좁은목과 전주천 (전주천 건너편 산이 남고산)

▲  동고사로 인도하는 호젓한 숲길

▲  동고사 밑 대나무숲과 주차장(오른쪽 공간)
겨울을 잊은 푸른 대나무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낸다.

▲  동고사(東固寺)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2호

승암산 서쪽 자락 가파른 곳에 동고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전주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절(
해발 210m)로 876년에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창건하여 전주 동쪽에 있다는 뜻에서 '동고사'라
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덧붙여서 신라의 마지막 군주인 경순왕(敬順
王)의 2째 왕자 범공(梵空)이 승려가 되어 이곳에 들어와 불도를 닦으며 나라 잃은 한을 달랬
다 하나 이 역시 신빙성은 장담할 수 없다.

창건 이후에도 오랫동안 적당한 바퀴 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허주
화상(虛舟和尙)이 1844년 지금의 위치에 중창했다고 한다. 하여 어쩌면 그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이후 1946년 주지 영담 김용욱(暎潭 金容郁)이 대웅전과 요사 등 여러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현재 경내를 이루고 있는 건물과 석탑, 미륵불은 모두 그때 이후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진작
에 말라버렸으며, 대웅전과 염불원(念佛院) 등 6~7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각박한 벼랑이라 돌로 단단히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대웅전과 요사 등
여러 건물을 닦았다. 그리고 윗쪽에도 좁은 공간을 활용하여 석가여래의 사리를 머금은 석탑
과 미륵불 등을 층층이 지었고, 경내 밑에는 주차장과 돌탑을 다졌다. 절까지 차량이 마음놓
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은 괜찮은 편이나 길 서쪽이 벼랑 수준이라
바퀴를 잘 굴려야 된다.

▲  경내 밑에 자리한 샘터
여기서 물 1모금 들이키고 경내로 들어선다.

▲  서쪽을 굽어보고 있는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경내 위쪽 부분
범종각과 3층석탑, 미륵불 등

▲  석가여래의 사리가 깃든 3층석탑
(석가여래진신사리 보탑)


동고사는 오랜 내력에 비해 볼거리가 변변치 못하다. 다만 높은 벼랑에 자리하여 시내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조망만큼은 아주 끝내준다. 여기서는 전주천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를
비롯해 전주시내 상당수가 시야에 들어오며, 전주한옥마을과 전주 시내를 마음 편히 사진에
담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물론 여기서 더 위로 올라가 중바위나 정상부에 이르면 조망의
질은 더욱 높아진다.

* 동고사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10-88 (낙수정2길 103-100 ☎ 063-288-16
  26)


▲  동고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전주 시내 (바로 밑에 보이는 산이
오목대와 이목대)

▲  미륵불에서 바라본 동고사 경내
절은 비록 작고 고색의 내음 또한 모두 날라갔지만 전주 시내를 너른 뜨락으로
삼으며 그들을 굽어보니 뜨락과 조망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미륵불입상

▲  미륵불에서 바라본 동서학동과 완산구
지역 (중앙에 보이는 산이 완산공원)


▲  미륵불에서 바라본 전주 시내와 전주한옥마을(가운데 부분)

동고사를 둘러보고 중바위와 동고산성 등 승암산의 주요 메뉴를 살펴보고자 산 윗쪽으로 길을
향했다. 허나 추운 날씨에 귀차니즘까지 진하게 발동하여 그들에 대한 구미가 99% 떨어지면서
조금 가다가 길을 돌렸다. 하여 낙수정마을로 내려갔는데, 낙수정은 전주 도심이 바로 지척임
에도 산골 마을 분위기가 진하여 그야말로 도심 속의 산골마을 그 자체였다.


▲  낙수정으로 내려가는 숲길

낙수정은 전주시내버스 430번(낙수정↔백구,용지)이 들어오는데, 배차간격이 무려 2시간이 넘
는다. 허나 운이 좋게도 낙수정 종점에 그 버스가 바퀴를 접고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을 굳이 타지 않더라도 전주한옥마을과 오목대, 전동성당까지 조금 나가면 버스는 널려 있다.
승암산 일정이 너무 일찍 마무리가 되어 일몰까지 시간이 좀 있었는데, 만약을 위해 준비했던
'문학대'를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살펴보기로 했다. 그곳은 여기와 정반대인 서부신시가지 효
자동에 있는 명소로 그곳을 둘러보고 바로 삼례로 빠질 생각이었다.

버스에 올라타 지친 두 다리에게 휴식을 주고 있으니 운전사가 부릉부릉~♪ 시동을 걸며 지정
시간보다 약 5분이나 일찍 출발을 했다. 승객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런 것 같은데, 아무
리 그래도 일찍 출발은 좀 아닌 듯 싶다. (버스 시간표는 장식이 아님)
어쨌든 그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를 달려(기린대로, 오목대, 전주천 경유) 남부시장에서 내렸
다. 그런 다음 전주시내버스 61번(비전대↔전주대)으로 환승하여 전동성당, 전주시교육청, 서
신동, 서곡지구를 거쳐 서부신시가지 현대아이파크에서 하차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2분 정도
가면 문학대공원이 마중을 하는데, 서쪽은 문학대1공원, 동쪽은 문학대2공원이라 부른다. 바
로 문학대1공원 남쪽 언덕에 공원 이름의 유래가 된 문학대가 있다.



 

♠  고려 후기 대학자인 황강 이문정이 만년을 보냈던 곳
전주 문학대(文學臺) - 전북 지방기념물 24호

문학대는 1357년에 황강 이문정(黃岡 李文挺)이 낙향하여 세운 정자이다. 그는 여기서 만년을
보내며 성리학(性理學)을 강의해 후학을 길러냈고, 상소(上疏)를 통해 불교의 폐단과 나라의
잘못된 정책을 수시로 간해 이를 바로 잡게 하는 등, 멀리 고향에서도 조정 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터만 남은 것을 1824년 후손들이 중건했으며, 원래는 효자동3가 산 334
-1번지에 있었으나 서부신시가지 개발로 2006년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황강서원 뒤쪽인 황방
산 자락에 안착을 했다. 문학대 주변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완전 시골이었으나 그곳까
지 개발의 칼질이 밀려오면서 전주 시내는 서쪽으로 크게 팽창을 했다. 그래서 문학대는 한참
이나 후배인 신식 건물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문학대1공원 언덕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바닥을 돌로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는데, 건물 네 모서리에 고된 세월이 녹아든 기둥을
설치해 지붕을 받들게 했다. 문이 모조리 닫혀져 있어 내부를 살피지는 못했지만 가운데에 방
을 두고 좌우에 마루를 깐 형태이다.
문학대 앞에는 그의 후손들의 무덤이 펼쳐져 있고, 그 밑에는 이문정을 봉안한 황강서원(黃岡
書院)과 후손이 살고 있는 한옥들이 포진해 조그만 한옥마을을 자아내고 있다. 황강서원은 이
미 문이 닫힌 상태라(내가 갔을 당시 서원 관리인이 막 대문을 닫아걸었음) 굳이 살피지는 않
고 담장 너머로 대충 살피고 넘어갔다.

▲  문학대 이건(移建) 사적비와 황강 이선생
(이문정) 문학대 유적비(오른쪽)

▲  서쪽에서 바라본 문학대
마치 서적이나 목판을 보관하는 창고 같다.

▲  동쪽에서 바라본 문학대

▲  문학대의 뒷모습

문학대는 황강서원과 이문정의 후손(전주이씨)들이 사는 한옥 뒤쪽에 있어 신변에 그리 위험
은 없다. 비록 개발의 칼질에 못 이겨 이곳으로 오긴 왔지만 이곳 역시 서부신시가지에 둘러
싸인 도시 속의 외로운 섬이 되버린 상태이다.
다행히 문학대가 있는 황방산은 그 칼질에서 살아남아 그 숲을 보전할 수 있었고, 문학대 북
쪽과 동쪽은 문학대1공원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특히 공원 동부에는 개발 도중에 나온 마
전(馬田)고분군까지 갖추고 있어 사적공원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문학대에서 바라본 후손들의 묘역과 황강서원(기와집들)
그들 너머로 서부신시가지(효자동)가 바라보인다.


문학대 뒤쪽에 있는 숲길을 통해 마전고분군으로 내려갔다. 이 고분은 5세기 것으로 여겨지는
백제시대 무덤들로 5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더 있었다고 하나 죄다 도굴되어 파괴되면
서 간신히 5기만 수습하여 봉분을 복원했다.
고분 주변에 마전마을이 있어서 마전고분군이라 불리며, 조금이나마 남은 햇님의 기운에 의지
해 무심히 짙어져만 가는 땅꺼미에 저항하며 사진에 담았으나 다들 상태가 좋지 못하다. 하여
본글에서는 부득이 마전고분군은 생략한다. 사진이 엉망이니 안그래도 엉망인 내용이 더 엉망
이 될 수 밖에 없다.
문학대를 끝으로 전주 연말 나들이는 다소의 아쉬움을 뒤로 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문학대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3가 산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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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평 벌판에 넓게 깃든 백제 후기 유적, 익산 왕궁리유적 (왕궁리5층석탑,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익산 겨울 나들이 (왕궁리유적,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 익산 겨울 나들이 '
(왕궁리유적, 왕궁리5층석탑,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익산 왕궁리5층석탑
▲  익산 왕궁리5층석탑


 

다사다난으로 짙게 얼룩졌던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한 해가 밝았다. '올해는 정말 고
깃국 좀 먹어야 될텐데~~!' 소망하며 지방의 미답처(未踏處)를 대상으로 새해 첫 답사지
를 물색하다가 익산 왕궁리유적에 크게 구미가 당겨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햇님이 등청하기 전인 이른 아침, 도봉동 집을 나서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익산행 직행버
스에 나를 실어 익산으로 보냈다. 버스는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고속도로, 호남고속도
로를 두루 거쳐 2시간 50분에 익산시외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익산역까지 10분 정
도를 걸어서 익산시내버스 65번(동산동 동신아파트↔삼례읍)을 잡아타고 다시 30여 분을
달려 1번 국도 변에 자리한 왕궁리유적에 두 발을 내딛었다.


▲  유네스코가 달아준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왕궁리유적' 표석
익산 왕궁리 유적은 공주, 부여의 주요 백제 유적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이란 감투를 받았다.

▲  왕궁리 유적으로 인도하는 남쪽 정문


 

♠  궁궐터와 절터가 공존하는 백제 후기 유적지, 아직도 많은 비밀을 품으며
그 해답을 모두 내놓지 않는 익산 왕궁리(王宮里) 유적 - 사적 408호

▲  왕궁리 유적과 폐허의 옛터에 홀로 핀 꽃, 왕궁리 5층석탑

금마 남쪽 왕궁리에는 왕궁평(王宮坪)이라 불리던 너른 대지가 있다. 왕궁평은 왕검이, 왕금
성, 모질메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어 결코 심상치 않은 곳임을 귀뜀해주고 있는데, 익산 지역
의 역사를 다룬 금마지(金馬誌)에 마한(馬韓) 시절 조궁(朝宮)터로 왕궁평이라 불렸다는 기록
이 있어 그것을 믿고 오랫동안 마한 관련 왕궁터로 보았다.
허나 왕궁리5층석탑 외에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라 무슨 메세지를 보내려는 듯 그 석탑을 오
랜 세월 바깥에 내밀며 잠수를 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6년에 비로소 원광대 마한백제문화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땅을 파보았는데, 이때 왕궁 담장의 외곽 경계와 석탑 북측에서 금당터
가 발견되어 마한 도읍설과 함께 팽팽하게 거론되던 백제 무왕의 금마저 천도설에 따라 그때
지어진 것으로 콩 볶듯이 결론을 보았다. 그리고 석탑 주변은 왕궁 안에 지은 내불당이 있던
것으로 추정했다.

이후 다시 흙으로 덮어두어 미래로 넘겼다가 1989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다시 왕궁평을
들추었다. 이번에는 20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두고 조사를 벌였는데, 절터와 궁궐터를 비롯해
그들을 둘러싼 장방형 석성(담장), 후원터, 공방터, 대형 화장실터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그들을 조사한 결과 멀리 마한까지 갈 필요도 없이 백제 후기에서 신라 후기에 이르는 유적임
이 확인되어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 시절에 조성된 것으로 그 믿음이 크게 굳어졌다.

▲  강당터

▲  건물터

백제 무왕은 금마저(金馬渚, 익산 금마) 출신으로 백제 29대 군주인 법왕(法王. 재위 599~600
)의 아들이다. 옛부터 그의 금마저 천도설이 나돌고 있었는데, 그 증거로
① 삼국유사에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에게 보낸 국서에 백제는 금마
산(金馬山, 금마저)에서 개국했다는 내용이 있음.
②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는 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본래 백제의 금마지(今麻
只)인데 무강왕(무왕) 때 성을 쌓고 별도의 도읍을 두어 금마저라 칭했다고 씀.
③ 육조시대(六朝時代) 때 쓰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백제 무강왕이 지모밀지에
천도하여 새로 제석정사(帝釋精舍)를 지었는데, 639년(당태종 정광 13년)에 큰 뇌우가 있어
제석정사가 불탔다는 기록(여기서 지모밀지는 금마저 지모현)이 있음.

이를 통해 금마저로 도읍을 잠시 옮겼거나 일종의 별도(別都)를 세운 것으로 보이며, 그 현장
의 중심이 바로 왕궁평이다. 물론 마한의 도읍설, 고안승(高安勝)의 보덕국(報德國)설, 후백
제 도읍설도 여전히 공존하며 이곳의 수수께끼를 증폭시키고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금마저 관
련 내용이 없다. 허나 요즘에는 백제 무왕 때 처음 닦여진 궁성으로 거의 자리를 잡은 것 같
다.
사람이란 자신의 고향을 늘 그리워하고 챙기는 편이라 무왕은 비록 천도까지는 아니라도 일종
의 별궁(別宮)을 고향 부근에 조성하여 종종 머물렀고, 의자왕(義慈王) 시절이나 백제가 망한
이후 신라에 의해 기존 궁궐 건물을 대거 밀어버리고 절로 전환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구려 왕족으로 668년 이후 고구려 부흥운동을 펼치다가 실패하여 신라로 도망친 고안
승이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에게 익산 지역을 다스리는 보덕국왕으로 봉해진 바
가 있어 그의 거처로 이용되었을 수도 있으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 역시 이곳을 별궁 또는 원
찰로 삼아 종종 왕래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만큼 이곳은 매우 장엄하게 잘지어졌던 것이다.

이토록 장대했던 꿈의 현장이 언제 무상한 폐허의 터가 되었는지는 아쉽게도 기록이 없어 정
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 유적이 고려 때를 끝으로 더 이상 흔적이 나오지 않아 백성들
의 민란이 빈번했던 고려 중기(13세기)나 왜구의 침범이 극심했던 고려 후기에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곳은 탑만 드러낸 채, 땅 속에 묻혔고 막연히 왕궁평, 왕금성 등의 이름으
로 전해오다가 이제 비로소 조금씩 속살을 보이고 있다.

▲  남측 담장

▲  동측 담장

왕궁리 유적의 면적은 218,155㎡이다. 허나 북쪽으로 계속 발굴 범위를 넓히고 있고, 경작지
로 쓰이는 동쪽이 잠재적인 공간이라 이들을 모두 들추면 지금보다 훨씬 이상의 규모와 성과
가 나올 것이다. 그러니 현재 면적 21만㎡는 지금까지의 임시 성적표일 뿐이다.
왕궁터의 흔적은 용화산에서 뻗어내린 능선의 남측 끝부분(해발 40m 내외)에 자리해 있다. 언
덕을 손질하여 낮은 곳은 흙을 쌓아 다지고 그 위에 궁궐을 닦았는데, 그 주위로 폭 3m의 성
곽 또는 담장을 길게 두르니 규모가 남북 490m, 동서 240m, 둘레 1.5km로 약간 틀어진 네모꼴
이다. 담장 안쪽과 바깥에는 폭 1m의 편평한 돌을 깔아 보도(步道)로 삼았으며, 이런 시설은
궁궐을 지을 때 보통 마무리 단계에 짓는 것들이라 왕궁이 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려준다.
담장 주변에 기와조각이 즐비해 담장 상부에 기와를 얹힌 것으로 여겨지며, 궁문(宮門)은 남
측 담장에서 3곳, 서측과 동측, 남측에서 각각 1곳이 확인되었다.

왕궁 남측 전반부에는 건물을 짓고자 동서로 석축 4단을 닦았는데 남측부터 폭 75m, 45m의 대
지를 2:1:2:1의 비율로 4개로 분할해 부지를 조성했다. 부지 내에는 크고 작은 건물터 40여
곳이 나왔는데, 백제와 신라 건물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고려시대 것도 1곳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부터 신라 후기, 고려까지 길게 활용되었음을 알려준다.

백제 건물터 중, 제1석축 앞에 왕궁의 정전 또는 주요 건물로 여겨지는 대형 건물터가 확인되
었다. 이곳에서 가장 큰 규모(동서 31m, 남북 15m)로 건물 중심이 남측 중문의 중심축과 일치
하여 왕궁의 중심이 되는 건물임이 분명하다. 나머지 백제 건물터는 제1석축 뒤에 널려있다.
제4석축 동쪽이자 북측 후반부에는 후원(정원)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왕궁과 연결되는
부분에 괴석과 장대석, 하천석 등을 조합해 물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도록 지어졌으며, 정원
주변에 정자로 보이는 건물터와 제4석축 위로 연결되는 길이 발견되었다. 또한 공방터와 대형
화장실터, 석축 배수시설도 덩달아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은 왕궁 북서쪽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 왕궁에 소속된 공방으로 여겨진다.

공방터에서는 금고리, 금판 등 금제품과 유리제품, 동제품, 이들을 제련하면서 나온 도가니
등이 나왔으며, 대형 화장실은 땅을 3m 깊이로 파고 나무 기둥을 세워 발판을 만들었는데, 구
덩이에서 회충, 편충 등의 기생충알과 똥막대기가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에 정말 많은 유적이
있지만 이처럼 화장실까지 고스란히 보인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  5층석탑 남쪽 건물터

▲  5층석탑 북쪽 건물터

왕궁으로 시작된 이곳은 나중에 절로 바뀌었다. 5층석탑과 금당, 강당 등이 왕궁의 주요 건물
이 있어야 될 자리에 자리해 있고 석탑 밑에서 목탑터와 먼저 지어진 건물터가 나와서 기존의
왕궁 건물을 부시고 절을 깔았음을 보여준다. 왜 왕궁이 절로 전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의자왕이 부근에 있는 무왕의 능을 지키고자 원찰(願刹)로 삼았을 수도 있고,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기념으로 궁궐을 부시고 절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1기와 금당, 강당으로 이루어진 1금당 1탑의 가람배치로 왕궁리5층석탑을 통해 고려 때
까지 법등(法燈)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홀연히 사라져 답답한 수수께끼의 현장이
되었다. 비록 20년 넘게 발굴을 하였지만 아직도 캐내야 될 비밀이 많은 것이다.

석탑만 홀로 남긴 채 공허한 터가 되버린 왕궁평은 발굴 이후 왕궁리 유적으로 간판을 바꾸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세계문화유산의 지위를 얻어 미륵사지(彌勒寺址)와 더불어
익산의 꿀단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어 허전하기 그지 없지만 그 부족한 도화지에 지금까지 발견된 건물터 등
여러 흔적을 바탕으로 이곳의 왕년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생전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 건축 양식에 맞춰 상상의 나래를 살찌운다면 그게 바로 정
답이 될 수도 있다.

왕궁리 유적 남쪽에는 이곳의 추가 설명과 발견 유물을 머금은 왕궁리유적전시관이 있으니 같
이 둘러보기 바란다.

▲  왕궁리유적에서 발견된 거대한 항아리

▲  궁궐 남측 동쪽 문터

* 왕궁리 유적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631-30일대
* 왕궁리 유적전시관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562 (궁성로 666, ☎ 063-859-
  4631~32)
* 왕궁리유적전시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왕궁리 유적 모형도 (왕궁리유적전시관)


 

♠  왕궁리유적 둘러보기 ①

▲  남측 담장 중앙문터

거대한 수수께끼 보따리, 왕궁리 유적으로 들어서려면 남측 중앙문터를 지나야 된다. 유적을
둘러싼 담장(성곽)은 동서 약 240m, 남북 약 490m로 둘레는 약 1.5km이며, 담장의 폭은 3m 정
도로 담장 안과 바깥에 돌을 깔아 보도를 만들고 담장 경계인 석렬시설(石列施設)을 닦았다.
허나 담장의 원래 높이는 알 도리가 없어서 1m 높이로 남쪽(남측) 담장과 동쪽(동측) 담장 일
부와 담장 안쪽 보도, 바깥 보도 일부를 복원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돌을 섞어서 지은 토성(
土城) 같다.
남측 담장에서는 문터 3곳, 동/서/북쪽에서는 문터 1곳이 발견되었는데, 남측에 문을 많이 둔
것은 궁궐 건축의 주요 특징이며, 문은 복원하지 않았으나 어설프게 재현하는 것보다는 이렇
게 열려있는 모습으로 두는 것이 좋다. 답사객으로 하여금 문 모습에 대해 알아서 그려보게끔
말이다. 보통 궁궐 문은 중층(2층)이 많으니 이곳 궁문도 2층이 아니었을까 싶다.

▲  남측 담장 (중앙문터 서쪽) ▼

▲  남측 담장 (중앙문터 동쪽) ▼

▲  남측 담장 서문터

▲  남측 담장 동문터

동문은 폭 9.8m 규모로 서문, 중앙문과 달리 오래가지 못하고 없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자리에는 따로 기초 시설을 두지 않고 바로 담장을 올렸다.

▲  대형건물터

남측 담장 중앙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건물터가 마중을 한다. 현재 왕궁리유적에서 가장 큰 건
물터로 정면 31m, 측면 15m 규모인데, 규모나 건축 기법, 위치로 미루어 왕궁의 중심 건물이
거나 대규모 연회를 벌이던 건물로 여겨지며, 건물 기둥을 받치고자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점토를 다진 다음 기둥을 세운 이른바 토심(土心) 기법이 사용되었다.
건물터를 건져내어 조사를 벌인 다음, 주춧돌과 건물터 윤곽은 보호를 위해 땅 속에 고이 묻
고 땅을 두툼히 다진 다음 그 위에 잔디를 입혀 이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귀뜀해준다. (이곳
건물터는 모두 그렇게 봉해져 있음)


▲  왕궁리 유적에서 수습된 건물터 주춧돌의 보금자리
이곳을 조사하면서 발견된 건물터 주춧돌을 대형건물터 인근에 집합시켰다.
왕궁리유적에 서린 장대한 역사를 머금은 존재들로 이곳의 왕년의
모습을 비춰주는 시간의 거울이다.

▲  출입시설로 여겨지는 건물터
석축을 넘나드는 출입시설로 추정되는 건물터이다. 동서 길이 8m, 남북 약 7m,
석축 높이 0.6m 정도로 그 동쪽에도 비슷한 건물터가 있다.

▲  한참 비밀을 들춰내고 있는 굴립주 건물터와 초석 건물터

왕궁리 유적 서남부에는 서쪽 담장과 굴립주 건물터, 초석 건물터, 부엌터, 장랑형 건물터 등
다양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서쪽 담장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길쭉한 건물터 1기(건물터 37)와 남북 방향으로 긴 건물터 4
기(건물터 38, 40~42)가 나왔는데, 원형 혹은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세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굴립주 양식이다. 특히 건물터37은 다른 건물과 달리 동서로 아주 기나긴 형태로
규모는 정면 5칸(520cm), 측면 4칸이며, 북쪽 중앙에서 180cm 떨어진 곳에는 출입과 관련된
주공이 210cm 간격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건물터 주변에는 석축 배수로가 나왔다.

굴립주 건물터 주변에는 원형 초석 3매가 1.5m 간격으로 남아있는 건물터 39가 있다. 원형 초
석은 기단과 함께 기초를 조성하면서 지어진 것으로 약 50cm 떨어진 곳에 기단 석재가 빠진
흔적이 확인되어 신라 후기에 가마터가 들어서면서 파괴된 백제 건물로 여겨진다.


▲  왕궁 부엌터, 장랑형 건물터

왕궁 부엌터는 이름 그대로 왕궁의 음식을 담당하던 공간으로 철제솥 2점과 직구단경호 1점,
광견호 2점, 단경병 2점, 철제가래날 1점, 철부 1점, 숫돌 3점과 불을 땐 흔적이 발견되었다.
백제 무왕이나 의자왕이 이곳에 머물 때 제왕 부부와 왕족들에게 올릴 진수성찬을 닦던 곳으
로 건물 양식과 출토 유물을 통해 무왕~의자왕 시절 건물로 여겨진다.

장랑형(長廊形) 건물터는 길쭉한 행각(행랑)을 두룬 건물로 기단석 1매, 판형 석재 3매가 발
견되었으며, 그 규모는 정면 10칸(27.5m)으로 여겨진다. 이런 건물 양식은 백제의 별채이자
속방(屬邦)인 왜열도에 전파되어 경도(京都, 교토) 지역 궁궐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  왕궁리 석탑 서쪽 건물터

이 건물터는 규모와 원형 주춧돌을 통해 왕궁의 행정 업무를 돌보던 정청(政廳)으로 여겨진다.
정면 9칸(19.2m), 측면 4칸(11.6m)으로 내부에는 한 변의 길이가 6m인 방이 2개가 있다. 건물
주위로 백제 때 유물인 뚜껑이 있는 접시<개배(蓋杯)>와 토기, 기와파편 등이 발견되어 궁궐
시절에 절찬리에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  배수로(排水路) 흔적

왕궁리 유적에서는 물을 배출하는 배수로의 흔적도 여럿 발견되었다. 윗 사진의 배수로는 0.7
~0.8m 폭에 길이가 약 28m로 배수로 가장자리에는 잘 다듬어진 석재를 1단 높이로 잇대어 연
결해 만들었으며, 배수로 남쪽에 건물터가 자리해 있다, 현재 배수로는 발굴 결과를 토대로
재현한 것이다.


▲  강당터 서쪽에 자리한 남쪽 건물터 ①

강당터 서쪽에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한 2개의 건물터로 앞쪽 건물터는 강에서 가져온 자갈돌
을 둥글게 쌓은 동서 1칸, 남북 7칸 규모이며, 대형 항아리를 묻었던 시설이 나왔다. 그리고
뒷쪽 건물터는 불규칙한 모습으로 이들은 승려의 숙소인 승방(僧房)으로 여겨진다.

▲  강당터 서쪽에 자리한 남쪽 건물터 ②

▲  서쪽에 바라본 강당(講堂)터


▲  동쪽에서 바라본 강당터

금당터 뒷쪽에는 강당터가 넓직하게 누워있다. 강당은 설법이나 강연을 하던 교육 공간으로
정면 5칸(17.9m), 측면 4칸(12.6m) 규모이며, 이곳에서 남쪽 10m 지점에 3개의 계단 흔적이
나왔다. 부근에서 공방으로 쓰였던 흔적도 나왔으며, 잘 수습된 주춧돌과 두툼하게 솟은 건물
터만이 허전하게 남아 모든 것이 무상함을 보여준다.


▲  후원터 (유적 북부 언덕)

왕궁리 유적 북부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의 수수께끼를 밝히려는 불굴의
집념이 한참 펼쳐지는 중이라 북부 일대가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 있는데, (후원터는 2017년
7월에 개방됨) 대자연이 뿌려놓은 무성한 잡초와 나무들이 유적을 깔고 앉으며 그들을 꽁꽁
숨기고 있었지만 결국 발견되어 유적을 둘러싼 지루한 수수께끼 놀이가 진행되고 있다. 그 놀
이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인간이 이기기를 바래본다.

북부 언덕에서는 후원터와 화장실터, 공방터 등이 나왔는데. 그중 후원(後苑)터는 언덕 동북
부에 자리해 있다. 후원 남쪽과 서쪽에는 구불구불한 수로(水路)가 하나 또는 2중으로 설치되
어 있고, 또 다른 수로가 연결되어 후원 연못에 물을 공급해 주었다. 그리고 후원의 동남쪽
모서리 지점은 궁성 전각 구역에서 후원 진입용으로 뚫려 있었다.
후원 내부 남측에는 동서 방향으로 돌을 깐 보도가 있었고, 중앙에는 정면 4칸, 측면 4칸의
건물터가 나왔다. 또한 물을 보관하는 장방형의 수조시설과 물의 양을 조절하는 'ㄱ'자 형태
의 암거시설, 그리고 정원 중심 공간에서 배출된 물을 모으는 네모난 집수시설이 있다.

후원에 있던 연못은 네모난 모습으로 정원 중심 공간에 괴석과 판석(板石)을 이용해 네모난
못을 만들고 조경석과 자갈돌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궁궐터 내부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정원(
후원) 유적으로 자연과 어우러지게 만든 백제의 우수한 조경 기술을 쿨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조경 기술은 신라와 속국인 왜열도에 많은 영향을 내렸다. 물론 부여 궁남지(宮南池)
도 백제 왕궁의 후원이긴 하지만 그곳은 후원 중심의 별궁(別宮)이었다. 그러니 조금은 다르
게 봐야 된다.


▲  대형화장실1 모형도 (왕궁리유적전시관)

왕궁리 유적은 궁궐 내 후원 유적이 나온 현장으로도 유명하지만 백제시대 화장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현장으로도 가치가 높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늘 예민한 생리현상을 해소하는 공간이 있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늙은
유적에서는 그와 관련된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화장실 유적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 이름도 아름다운 화장실(뒷간),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예민
하고 껄끄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에서도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고 조사와 연구
도 부실하며 자료도 빈약하다. 그 빈약한 자료를 크게 보충해준 곳이 이곳 왕궁리이다.

유적 북부인 언덕 동북부에는 후원터가, 서북부에는 화장실터와 공방터가 발견되었는데, 화장
실터는 동서 방향으로 크기가 다른 3기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이중 가장 큰 것(대형화장실1)
은 길이 10.8m, 너비 1.8m, 깊이가 3.4m로 볼일을 보는 곳에 뒷처리용으로 쓰이는 이른바 똥
막대기가 있었다.
그 외에 목재품과 나무방망이, 백제시대 짚신, 목제칠기 뚜껑 등이 나왔으며, 특히 회충과 편
충 등의 기생충알이 나오니 이들은 대변의 흔적들로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과 질병 상태, 생활
상 등을 조금이나마 보여준다.

깊은 구덩이에 볼일을 본 잔재들은 어느 깊이에 이르면 서측 담장 밖으로 이어지는 긴 수로를
통해 밖으로 배출되며 그 과정에서 조금은 정화되어 인근 개천으로 흘러갔다. 허나 구덩이 안
쪽에 박힌 것들은 어지간해서는 잘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 위생 문제도 있고, 옷도 지금과 달
리 불편하기 그지 없으니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현대인들 입장에서는 사용하기가 좀
꺼림칙하지만 그 당시로써는 그나마 최신식 화장실이었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용했다.

이들 화장실 유적은 공방터 남쪽에 있어 공방에서 일하는 사람과 궁궐이나 절에서 잡일을 하
는 사람들과 군사들이 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처럼 칸막이가 있던 것은 아니라서 남
녀공용으로 이용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며, 3개의 화장실터 중 2개는 남자 전용, 1개는 여자 전
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공방은 남북으로 긴 2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좌측에 공방 관련 원료와 재료, 도구
들을 버리는 공간이 나왔다. 특히 공방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려는 독특한 지하 시설이 확인되
었으며, 금과 유리제품, 원재료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곳은 왕궁의 전용 공방으
로 왕족들의 사치품과 생활용품을 제작했으며, 절로 바뀐 이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  와적기단(瓦積基壇) 건물터

와적기단이란 기단 바깥을 기와로 쌓아 장식하는 것으로 6세기 중반 이후 백제에서 널리 유행
하여 부여(관북리 유적, 정림사터)와 익산에서 여럿 발견되었다. 이후 왜열도로 전파되었으며
, 이들 건물터는 백제의 건축기술과 그 변천 과정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존재이다.


▲  건물터

왕궁의 주요 건물로 여겨지는 터로 잘 다듬어진 면석을 0.8~0.9m 폭으로 세우고 내부를 진흙
으로 단단하게 다졌다. 주변에서는 길쭉하거나 둥근 형태의 폐기 구덩이가 여럿 나왔는데, 6
세기 중반 중원대륙에서 만들어진 청자파편이 나왔다.


 

♠  왕궁리유적 둘러보기 ②

▲  금당터

왕궁리유적의 한복판이자 왕궁리5층석탑 북쪽에 금당터가 누워있다. 금당(金堂)이란 절의 중
심 건물인 법당(法堂)으로 왕궁 건물을 밀어버리고 새로 지은 것으로 여겨지며, 바로 앞에 5
층석탑이 있어서 1금당 1탑 양식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  'ㄱ'자 모습의 건물터

와적기단 건물터 옆에 누워있는 건물터로 둥근 형태의 적심이 1.5m 내지 2.8m 간격으로 배치
되어 있다. 앞쪽 건물터는 너비 약 3m, 길이 약 5m 크기의 2개의 방을 지닌 구조로 인근 미륵
사지와 부여 능산리사지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발견되었는데, 궁궐 건축물로 여겨진다.


▲  남북방향 석축
경사면에 돌을 쌓고 평탄하게 땅을 다지고자 만든 것이다. 현재 길이 약 30m, 높이
0.55m 정도가 남아있으며, 궁궐 관련 건물에서 사용된 석부재(石部材)가
포함되어 있어 절을 닦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왕궁리5층석탑 북쪽 건물터

왕궁 조성을 위한 기초 시설로 여겨지는 동서 방향 석축 중간에 자리한 건물터이다. 땅을 파
고 잘 다듬은 석재를 1~2단으로 쌓아 터를 다졌는데, 한 변의 길이가 12m인 정사각형 건물로
여겨지며, 건물터 주변에 기와를 잇댄 토판(土版)을 설치하여 배수처리용으로 삼았다. 위치와
구조를 통해 절의 중요 건물로 짐작되며 조그만 주춧돌이 어지럽게 박혀져 있어 그들의 고된
세월을 느끼게 된다.


▲  왕궁리5층석탑 동쪽 건물터
여기서는 땅을 파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은 토심 구조와 나무와 흙으로 단을
쌓아 올린 토축(土築) 기단 구조, 건물 바닥을 지면에서 띄워서 지은
굴립주 구조가 발견되었다.

▲  동그란 모습의 기와 가마터
기와를 굽던 2기의 가마가 동서로 나란히 발견되었다. 기와를 굽던 아궁이와 숯,
불에 탄 흙과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앞쪽 가마터는 너비 1.7m, 길이 2.6m
규모의 반 지하식 가마로 이들은 신라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  건물터

석축을 넘나드는 출입시설로 여겨지는 건물터이다. 동서방향 석축에서 양쪽으로 면을 맞춰 돌
을 쌓았는데, 동서 길이가 약 6m, 남북이 약 4m 정도 남아있으며, 석축 서쪽에도 비슷한 건물
터가 있다. 오른쪽 건물터는 원형 주춧돌 3개와 기초시설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정면 3칸
, 측면 1칸의 건물로 여겨진다.


▲  동서 방향 1번째 석축터

석축은 왕궁 안에서 동서 방향으로 4개, 남북 방향으로 2개가 나왔다. 동서 방향의 1번째 석
축은 길이 95m, 높이 0.9m로 원래 높이는 2m 정도로 여겨지며, 석축 부근에서 토기와 기와 조
각, 중원대륙에서 건너온 청자 조각 등이 출토되어 백제 후기 왕궁의 생활상과 축조 시기 등
을 보여주고 있다.

▲  왕궁리 유적 남부 건물터

▲  유적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으로 다진
기와 기단 (와적기단을 흉내 낸 듯)


▲  왕궁리 유적의 꽃, 왕궁리 5층석탑 - 국보 289호

왕궁리 유적 한복판에는 이곳의 백미(白眉)이자 백제탑의 후예인 왕궁리5층석탑이 고운 맵시
를 드러내고 있다.
잠들어있던 왕궁리 유적을 깨웠던 장본인으로 바닥돌과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
身)을 올린 다음 그 위에 약간의 머리 장식을 얹혔는데, 기단이 파묻히고 다소 기울어져 있던
것을 1965년에 해체 수리하면서 기단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탑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으로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크고 길쭉
한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을 쌓아올려 목조탑(木造塔)의 양식을 석탑에 그
대로 펼쳐 보였다.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그 속에서 백제 때 기와조각이 발견되
기도 했으며, 발굴 중에 기단 각 면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고, 1층 지
붕돌 가운데와 탑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1965년에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
어 크게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 사리장치는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있으며,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란 이름으로 국보 123호로 지정되었다.

탑신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풍경 등의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그리고 각 층 지붕
돌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고자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사리장치를 통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옛 백제 땅(충남, 전라도)에서
고려 때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으로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을 좀 닮기도 했다. 하지만 탑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후기, 신라 후기 설도 존재하고 있어서 아직은 정체가 아리송하며,
고려 탑이 맞다면 왕궁리 유적은 적어도 고려 중기까지 절로써 밥벌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근래 유적을 손질하면서 탑 밑에서 목탑터와 건물터가 발견되어 그가 있기 전에 왕궁 건
물이 있었고, 그것을 부시고 목탑을 세웠다가 다시 부시고 그것을 닮은 석탑을 세웠음을 귀뜀
해주고 있으며, 탑의 높이는 8.5m이다. 허나 폐허의 너른 공간에 홀로 피어있다 보니 다소 장
엄하게 다가오며, 오랫동안 보물 44호라는 지위를 누렸다가 1997년 국보로 승진되었다.

▲  북쪽과 남쪽에서 바라본 왕궁리 5층석탑의 위엄
그는 고려 초기 석탑일까? 신라 후기 또는 백제 후기 탑일까? 정답은 오직 탑만이
알고 있으나 좀처럼 말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들아 알아서 풀어보셔~~!'
수수께끼를 내듯이..

▲  왕궁리 유적의 동남쪽 모서리
(남측 담장과 동측 담장이 만나는 곳)

▲  남측 담장 (동문터 동쪽)


 

♠  왕궁리유적 둘러보기 ③

▲  동측 담장 (담장 내부 보도, 배수로)

동측 담장은 폭이 3m 정도로 구간마다 돌을 쌓은 방법이 다르다. 폭 6m 정도 되는 문터와 담
장을 보호하는 시설, 보도, 배수로가 발견되었으며, 담장의 높이는 알 수 없으나 남측 담장과
비슷하게 1m 높이로 절반 남짓 거리를 복원했다. 비록 절반 남짓 정도만 복원이 되어 실감이
적겠지만 왕년에는 제법 장대한 규모였다.
최대한 발견된 돌을 이용해 담장과 보도, 배수로를 재현했으나 수량이 충분치 못해 군데군데
새 돌을 끼어 넣으면서 고색이 짙은 돌과 하얀 피부의 어린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허나 시간이 상당히 지나면 어린 돌도 늙은 돌을 닮아 고색의 빛을 낼 것이다.

▲  북쪽으로 달리는 동측 담장

▲  동측 담장 배수로 ①

▲  동측 담장 배수로 ②

▲  왕궁리유적전시관

왕궁리 유적 남쪽에는 왕궁리유적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2008년 12월 23일에 문을 연 왕궁
리유적 전문 박물관으로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1,700여 점이 담겨져 있으며, 그중 300여 점만
꺼내 전시하고 있다. 유물 외에도 유적 관련 디오라마와 모형도, 영상물 등이 유적에 대한 이
해를 흔쾌히 돕고 있으며, 왕궁리5층석탑의 옛 모습이 담긴 오래된 사진도 별도 공간에서 다
루고 있다. 또한 어린이를 위해 목판 찍기 체험 등 다양한 체험도 준비되어 있다.

유물전시관 내부를 제대로 다룬다는 것은 솔직히 무모한 행동이고 또한 사진도 몇 장 담지 않
아서 그 일부만 본글에 꺼내보도록 하겠다. 솔직히 전시관 내용과 앞서에서 길게 언급했던 왕
궁리 유적 내용은 많이 교집합을 이루니 별도로 다룰 필요는 없다.


▲  공방터 모형 (오른쪽이 대형화장실터)

▲  백제시대 소변통 - 요강의 이전
모습으로 남녀 공용이다.

▲  공방터에서 발견된 백제 금도가니

▲  왕궁리 유적에서 나온 온갖 토기들

▲  1917년 왕궁리5층석탑의 모습
(지금과 달리 기단이 묻혀 있음)


▲  왕궁리5층석탑의 흑역사, 1938년에 제작된 석탑 실측도
석탑이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처럼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다.
(기단부는 여전히 땅에 묻혀 표시되지 않았음)

▲  1965~1966년 왕궁리 5층석탑을 복원하면서 찍은 빛바랜 흑백 사진
사람과 비교해보면 석탑이 얼마나 장대한 규모인지 알 수 있다.

▲  왕궁리5층석탑 몸 속에서 나온 사리공의 모습 (1965년)

▲  왕궁리 유적 서남부 모서리 (서측 담장과 남측 담장)

왕궁리 유적 서측 담장은 1번 국도와 맞닿아 있다. 2중으로 이루어진 석축 위에 흙을 쌓은 형
태로 남측, 동측 담장과 비슷하며, 이 역시 정확한 높이를 헤아리기가 어려워 1m 정도 높이로
북서부 구역(공방, 화장실터)을 제외하고 그런데로 복원해 놓았다.

유물전시관을 포함해 왕궁리 유적을 2시간 정도 둘러보았다. 유적이 모두 속살을 드러낸 상태
가 아니라서 어디까지나 전체를 둘러본 것은 아니며 허용된 공간만 두 발을 움직였다. 완전히
가늠하기도 어려운 왕궁리 유적은 지금도 비밀 캐내기가 한참이라 나중에 온다면 지금보다 더
넓은 유적을 둘러보게 될 지도 모르고, 유적에 대한 설명도 크게 안면을 바꿀지도 모른다. 혹
시 아는가 마한부터 닦여진 왕궁터일지도?


▲  왕궁리 유적 서측 담장 (1번 국도에서 바라본 모습)


 

♠  하천을 사이에 두고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길쭉한 석불
고도리(古都里) 석조여래입상 - 보물 46호

▲  고도리 동쪽 석불

▲  고도리 서쪽 석불

금마면 중심지(동고도리)와 왕궁리 유적 중간에는 흥미롭게 생긴 고도리 석불이 있다. 왕궁리
유적을 둘러보고 그 석불을 보고자 우회 국도 신설로 무척 한가해진 옛 1번 국도를 조금 따라
가다가 새 국도 밑에 뚫린 굴다리를 지나면 너른 평야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익산천이란
하천이 나오는데, 유유히 흐르는 그 하천을 따라 북쪽으로 길을 재촉하면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고도리 석불이 뜨겁게 눈짓을 보낸다. 평야와 비닐하우스가 전부인 곳이
라 쉽게 눈에 띄며 이정표가 잘되어 있어 찾기는 쉽다.

석불이 있는 고도리는 옛 도읍을 뜻한다. 아마도 오랜 세월 마한의 도읍으로 전해오던 왕궁리
유적 부근이라 그런 거창한 이름을 지니게 된 듯 싶은데 현재는 경작지와 시골 마을로 이루어
져 있어 고도리란 이름 값을 무색케 한다.


▲  익산천 둑방길 (고도리 석불 방면)

▲  고도리 동쪽 석불

고도리 석불은 금마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익산천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약 200m 거리를 두
며 자리해 있다. 이들은 흙으로 두툼하게 닦여진 조그만 둥근 언덕 위에서 서로 애타게 마주
보고 있는데, 그들 높이는 4.24m로 어깨는 매우 좁으며, 머리에는 2중의 관(冠), 즉 네모난
관 위에 다시 네모난 관을 쓰고 있다.

네모난 얼굴에는 가는 눈과 눈썹, 짧은 코, 작은 입이 있으며, 양쪽으로 두 귀가 희미하게 달
려있다. 목은 겨우 하나의 선으로 처리해 얼굴과 몸통은 완전 붙어있으며 어깨부터 밑도리까
지는 그냥 형식적인 모습으로 손이 배 앞에 있고, 옷자락도 몇 줄의 선이 고작이다. 몸통 밑
에는 앞면을 약간 깎아서 만든 대좌(臺座)가 있으나 이 역시 몸통과 같은 돌로 되어있다.
몸통은 대체로 굴곡이 없는 매우 날씬한 사다리꼴 돌기둥으로 석불이라기 보다는 무덤의 석인
상(石人像)이나 토속적인 마을 수호상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하여 석불과 관련이 없는 존재로
보는 설도 있다.

이들은 가지각색의 석불과 마애불이 많이 등장했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그 시절에는 개성
이 강하고 거대한 모습을 자랑하지만 반면에 작품성이 다소 떨어지는 거대한 석불이 많이 등
장했다. 이 고도리 석불 역시 그런 예의 하나로 지극히 절제화되고 간략화된 거대한 석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불에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는데, 석불 중 하나는 남자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익산천이 흐르고 있어 평소에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1년에 1
번, 섣달 그믐날 밤에 개울이 꽁꽁 얼어붙으면 냇물을 건너서 서로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한다.
과연 전설처럼 그들이 움직일리는 없겠지만 마을을 지키는 남녀 수호신의 역할도 하고 있었음
을 알려준다. 즉 마을의 안녕을 위해 이렇게 그들을 배치한 것이다. 또한 왕궁리 유적과도 가
까워 그들을 알리는 이정표 역할도 했을 것이다.

▲  고도리 동쪽 석불

▲  뒷쪽에서 바라본 고도리 서쪽 석불


▲  동쪽을 바라보고 선 고도리 서쪽 석불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고도리 석불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5시가 넘었
다. 제아무리 천하에서 가장 크다는 햇님이라고 하지만 차디찬 겨울 제국(帝國)의 무한 눈치
때문에 16시가 넘으면 어둑어둑해지면서 제국의 쌀쌀한 기운이 칼처럼 불어온다. 어차피 오늘
목적한 바를 모두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무리하지 않고 나의 제자리로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익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400-2, 1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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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 모악산 연말 나들이 (대원사, 수왕사) '


▲  모악산 대원사

 


 

겨울 제국(帝國)의 나날이 강성해가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전북 한복판에 자리한 모
악산을 찾았다.
이번 해가 새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묵은 해가 되어 다시
금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된다. 그래서 묵은 해를 정리할 겸, 올해 마지막 답사지를 물색
하다가 모악산 대원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쿨하게 길을 잡았다.

아침 일찍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서초동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전주로 가는 직행버
스를 나를 담았다. 버스도 추위가 싫었는지 남쪽을 향해 질주하여 2시간 20분만에 전주시
외터미널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미리 점심을 먹고 움직이고자
전주(全州)에 올 때마다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콩나물국밥집(전주한옥마을 부근)에서 전주
의 명물인 콩나물국밥으로 뜨끈하게 배를 채웠다. 거기에 디저트로 주는 커피까지 섭취하
니 식곤증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순간 시샘을 벌인 듯,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비의 양
은 다행히 적었지만 나들이에서 비가 오면 이것만큼 열받는 것도 없다. 어쨌든 비의 방해
공작을 원망하며 전주시내버스 970번(송천동↔전북도립미술관)을 타고 모악산으로 이동했
다.
모악산관광단지(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귀찮게 하던 비도 다행히 그쳤으나, 하늘
이 일그러진 인상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어 언제 비나 눈이 투하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모악산 표석의 위엄


 

♠  모악산(母岳山) 입문

▲  모악산 대원사계곡(시앙골, 물레방아골) 하류

전북 한복판에 장엄하게 누워있는 모악산(794m)은 전주와 완주(完州), 김제(金堤)에 걸쳐있는
산으로 호남평야와 전북 내륙 산간지대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1971년 모악산 일대 42.44
㎢가 모악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정상 밑에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
니의 모습이라 하여 '엄뫼'라 불렸는데, 그걸 한자로 표현하여 어머니의 산이란 뜻의 모악산
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신라 후기에는 '금뫼','금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모악산의 원래
이름으로 보는 설도 있다.

신라 후기부터 세상을 구할 미륵(彌勒)의 출현을 열망하던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성지(聖地)
인 금산사(金山寺)를 비롯해 귀신사(歸信寺), 대원사, 심원암 등 굵직한 오래된 절이 안겨져
있으며, 왕년에는 80여 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종교들이 모악산을 기
반으로 여럿 생겨났는데, 증산교(甑山敎)가 그 대표적이다.
모악산은 봄 풍경이 아름다운데, 특히 금산사 입구 벚꽃길이 매우 유명하다. 하여 변산반도(
邊山半島)의 여름 풍경, 내장산(內藏山)의 가을단풍, 백양사(白羊寺)의 설경과 함께 호남4경
의 하나로 격하게 찬양을 받는다.

모악산 산행은 김제 금산사나 전주 중인동, 완주 모악산관광단지에서 시작하면 편하며, 산에
안긴 명소로는 금산사와 귀신사, 대원사, 심원암, 수왕사 등의 오래된 절과 전북도립미술관,
금산사 벚꽃길, 명당(明堂)으로 소문났으나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든다고 전하는 장군봉,
선녀폭포, 전주김씨 시조묘 등이 있다.


▲  전주김씨 세덕비(世德碑)와 전주김씨 종중공덕비(오른쪽 비석)

모악산 동쪽 자락 원기리에는 '모악산관광단지'가 넓게 터를 닦았다. 모악산을 든든한 후광(
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토속 음식을 내세운 식당과 가게(편의점),
까페, 등산용품점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관광단지 남쪽에는 전라북도에서 2004년 10월
에 세운 전북도립미술관이 자리하여 전북 지역 현대 미술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허나 미술관은 애당초 계획이 없었기에 쿨하게 통과했다. 나의 미련한 머릿속에는 오로지 모
악산과 대원사 뿐이었기 때문이다. 혹여 대원사를 보고 나올 때 시간이 남으면 들릴까도 했으
나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다.

평일이라 썰렁한 관광단지를 지나면 눈에 뒤덮힌 모악산의 설경이 나타나면서 전주김씨 세덕
비와 종중공덕비가 슬쩍 모습을 내민다.
여기서 가까운 산자락에 전주김씨 시조인 김태서(金台瑞)의 무덤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 이들
비석을 주렁주렁 닦아놓은 것인데, 김태서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4째 아들인 김은열(金殷
說)의 후손으로 그의 터전인 경주가 몽골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자 1254년에 가솔을 이끌고 전
주로 넘어와 정착했다. 이후 그는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고, 그를 시조로 한 전주김씨가 생
겨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북한이란 괴뢰 정부를 세운 김일성이 그의 후손이라는 점
이다. 1993년 손석우란 사람이 '터'란 책을 냈는데, 김일성이 시조 무덤의 지기(地氣)를 받아
북한을 세워 집권했으며, 음력 1994년 9월에 죽을 거라는 내용을 다루었다. 비록 달은 틀리지
만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자기 골로 가면서 그 책과 전주김씨 시조묘는 잠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주김씨 시조묘는 대원사로 올라가는 길목 부근에 자리해 있어 잠시 들릴까 했으나 눈의 방
해가 심해 올라가지는 못했다. 어차피 계획에도 없던 곳이다.


▲  선녀폭포(仙女瀑布)와 폭포를 품은 사랑바위

전주김씨 세덕비에서 대원사계곡(시앙골)을 옆에 끼고 산길을 오르다보면 선녀폭포와 사랑바
위가 모습을 비춘다.
선녀폭포는 높이 5m도 안되는 조그만 폭포로 볼품은 떨어지나 무려 선녀란 이름까지 지닌 것
을 보면 옛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도 앗아간 모양이다. 이런 폭포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
이로 지어놓은 전설이 있는 법, 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보름달이 뜨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선녀폭포로 내려와 목욕을 했다. 다른 유사
전설에서는 그냥 목욕만 하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목욕 외에 수왕사에 들려 약수도
마시고 모악산 신선과도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뭇꾼이 우연히 폭포 옆을 지나다 목욕 중인 선녀를 발견했고 그들의 아름
다운 자태에 미치도록 넋이 나간 그는 결국 상사병 비슷한 병을 얻어 몸저 눕게 되었다.

병으로 힘들어하던 나뭇꾼은 기왕 이 지경이 된 거 선녀의 모습을 1번만 더 보고 죽자며 보름
달이 뜬 날 폭포를 찾아와 그들을 훔쳐봤다. 그러다가 뜻밖에 한 선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
는데, 그 선녀도 나뭇꾼이 좋았는지 둘만 살짝 대원사 백자골 숲으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속
삭이며 예민한(?) 일을 벌이려는 찰라, 갑자기 뇌성병력이 그들을 내리치면서 선녀와 나뭇꾼
은 돌이 되고 말았다.
하늘의 시샘에 돌이 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떨어질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이는 듯 하다 하여
사랑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기서 치성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산길에
서 보면 폭포의 모습이 그리 실감나진 않으나, 바로 앞에서 보면 조금은 그럴싸하게 보인다.


▲  대원사계곡(시앙골)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  겨울에 잠긴 모악산 산길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털린 나무들은 숨죽이며 봄을 잉태하고 있다.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대원사계곡(시앙골)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에 묻힌 계곡도 얼음을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모악산관광단지에서 20분 정도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면 대원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시앙
골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이 놓여져 있고, 그 길을 오르면
비로소 대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대원사 직전에 걸린 크리스마스 축하 현수막

▲  대원사 경내로 인도하는 시앙골다리와 계단길


 

♠  모악산 동쪽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
대원사(大院寺)

모악산 동쪽 자락에는 고색과 숲내음이 깃든 대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겨울 제국이
내린 두터운 눈을 뒤집어쓰며 겨울 산사의 고적함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는데, 종종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추녀 밑에 달린 풍경(바람방울)이 들려주는 그윽한 풍경소리가 고요
한 경내를 살짝 어루만진다.

대원사는 670년에 보덕(普德)의 제자인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이 창건했다고 전
한다. 보덕은 고구려 승려로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開山祖)인데,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
離支)인 연개소문(淵蓋蘇文, ?~666)이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받아들이자 이를 개탄하며 백
제로 넘어갔다. 이때 신통력으로 완주 고덕산(高德山)으로 날라와 경복사(景福寺)를 세웠다고
하며, 절을 세운지 얼마 안가서 고구려가 망했다.

보덕의 제자인 일승, 심정, 대원은 경복사가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워 대원사(大原寺)
라 했다고 전한다. 보덕의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나와있지만 대원사 창건까지는 나
와있지 않아 670년 창건설(또는 660년)에 썩 신뢰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창건 시기를 입증해
줄 신라 후기 유물과 유적은 전혀 없으며, 1066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는 이야기
가 있어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74년 나옹(懶翁)이 중창을 했다고 하며, 1415년에 다시 중창을 벌였다. 그러다가 1597년 정
유재란으로 말끔히 파괴되자 1606년 부처로 추앙받는 진묵(震默)이 다시 일으켜 세웠고, 1733
년 동명 천조(東明 千照)가 중창을, 1886년에는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승려인 금곡(錦谷)과
인오 등이 중창했다. 금곡은 함수산(咸水山) 거사와 함께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내
원암(內院庵)에 있던 염불당을 가져왔다.

1950년 6.25전쟁으로 대부분이 파괴된 것을 덕운이 1959년부터 불사를 일으켜 하나씩 건물을
일으켜 세웠다. 1993년 칠성각을 부시고 요사채를 지었으며,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2001년 이후 명부전과 대웅전 수미단을 손질해 지금에 이른다.

예전에는 비록 음은 같지만 가운데 한자만 살짝 다른 대원사(大圓寺)였으나 근래 지금의 한자
로 갈렸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명부전, 나한전, 범종각, 요사 등 약 10동 정도의 건물이 조
촐한 경내를 메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삼세불좌상과 용각부도가 있고, 1606년에 조성
된 목각사자상(전북 지방민속문화재 9호)도 있었으나 1988년에 도난을 당했다. 그러다가 1999
년에 서울 가회동(嘉會洞)의 어느 화랑에서 발견되었으나 공소시효를 주장하며 돌려주지 않았
으며, 서울 인사동에 어느 작자에게 넘어가면서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99년에
지방문화재에서 정리되었음) 그 밖에 오래된 5층석탑 2기와 승탑(부도) 6기가 절의 숙성된 내
력을 알려준다.

이곳은 천하대복지(天下大福地)의 최길상(最吉祥)으로 치는 명당으로 효의 절, 어머니 절, 발
원을 이루는 기도처로 꼽히며, 특히 증산교를 세운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이
도를 깨우친 현장이기도 하다.
매년 1월 1일에는 '촛불기원 해맞이 타종제' 행사가, 4월에는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를 열
어 속세에 큰 호응을 받고 있는데, 화전축제는 이곳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매점과 찻집으로 쓰이는 소화당(笑話堂)

▲  소화당 현판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소화당이란 조그만 목조집이 마중한다. 이 건물은 불교용품과 기
념품, 커피, 전통차를 파는 매점으로 커피는 무려 3,000원대를 받는다. 건물 옆에는 잠시 쉬
어갈 수 있도록 파라솔이 달린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고, 건물 정면에는 소화당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는데, 마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상큼한 모습이다.


▲  겨울 산사의 내음을 진하게 보여주는 대원사 경내

▲  대원사 아랫쪽 5층석탑

소화당을 지나면 바로 대웅전 뜨락이다. 정면에는 대웅전이 마주보고 있고, 오른쪽에는 요사
와 모악당, 샘터, 왼쪽에는 5층석탑과 범종각, 명부전 등이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바로 왼쪽에 보이는 5층석탑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손질하면서 4
사자5층석탑으로 성형되었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내음이 다소 떨어진다. 그 뒷쪽에는 범종(梵
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이 있다.


▲  대원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대원사의 중심 건물(법당)로 석축 위에 높이 자리해 있다. 정면
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법당치고는 매우 작은 덩치인데 1886년에 지
어졌으나 6.25때 불탄 것을 1959년 이후에 다시 지었다.
불단(佛壇)에는 목조3세불좌상과 삼신후불탱 등이 있으며, 지금은 없지만 괴목(槐木)으로 만
든 목각사자상이 있었다. 이 사자상은 진묵대사가 축생(畜生)들을 천상(天上)으로 천도하고자
만든 것이라 하며 그 위에 북을 올려놓고 쳤다고 한다. 허나 1988년 불의의 도난을 당했고 다
행히 1999년에 서울 가회동에서 발견되었으나 소유자인 이영옥이 이현수란 사람에게 팔아먹는
등 우여곡절이 심해 아직까지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대원사 목조삼세불좌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목조3세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얼굴부터 밑도
리까지 하나 같이 두텁게 생긴 이들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
사불(藥師佛)을 거느린 3세불(三世佛)로 17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석가여래와 약사불, 아미타불로 이루어진 3세불은 조선 중/후기에 많이 나타나는 불상 형태로
중앙에 자리한 석가여래는 중심 불상답게 키가 제일 크며(130cm), 좌우 불상은 116cm 정도이
다. 앞으로 조금 내민 얼굴은 다소 경직되고 딱딱한 표정으로 볼살이 많고 이마가 넓으며, 꼽
슬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수인(手印)만 서로 다를 뿐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이며, 윗도리가 아랫도리보다
다소 살이 찐 모습으로 17세기 호남에서 활동하던 조각승들의 조각 스타일이 잘 반영되어 있
다. 그들 뒤에는 화려한 색채의 삼신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원사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대웅전을 바라보
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1887년에 금곡이 지었으며, 2001년
에 중수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그를 보좌한다.

▲  명부전 10왕(시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상

▲  명부전 윗쪽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  종무소로 쓰이는 모악당(母岳堂)

▲  모악당 뒷쪽에 자리한 나한전(羅漢殿)

▲  나한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와 거울 광배

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羅漢)의 거처이다. 석가
여래의 광배(光背)가 매우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광배 테두리는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배 중앙에 거울까지 달려있어 잠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마도 그런 의
도로 거울을 갖추었을 것이다.

  나한전 석가후불탱(19세기 작)과
색채감이 돋보이는 16나한상

  모악당 옆에 자리한 샘터


  경내 윗쪽에 자리한 5층석탑

경내 뒷쪽 언덕에는 고색이 느껴지는 5층석탑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대원사는 특이하게 오
층석탑이 2기나 있는데, 법당 앞이 아닌 다들 구석에 자리해 있다. 아마도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탑은 2중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석축을 기반 삼아,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
중의 기단(基壇)과 5층의 탑신(塔身), 얇은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얹혔는데, 탑신 지붕돌이 다
소 헝클어지고, 머리 장식 상당수가 사라진 것 외에는 그런데로 상태는 괜찮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각부도 다음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대원사 아랫 승탑군(僧塔群)

5층석탑에서 경내 뒷쪽을 거쳐 북서쪽 산길을 조금 오르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승탑군(부도
군)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이란 승려의 사리를 머금은 탑으로 대원사에는 9기(또는 10기)의 오래된 승
탑이 전하고 있는데, 용각부도 1기만 제외하고 모두 조선 중/후기 것이다. 이중 대웅전 남쪽
밑에 있던 승탑 3기(또는 4기)는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태이고, 경내 윗쪽에 2개 그룹으
로 4기와 2기 등 총 6기만 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대원사는 잃어버린 것이 참 많다. 절의
초창기 역사도 그렇고, 목각사자상, 거기에 승탑까지 말이다.

  대원사 용각부도(龍刻浮屠)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1호

대원사 승탑 중의 아주 유별나게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 바로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용각부
도(용각승탑)이다.
높이 187cm의 이 승탑은 이름 그대로 용이 새겨진 것으로 옥개석 아랫부분에는 대모양의 무늬
위에 겹잎으로 된 18개의 연꽃무늬가 있으며,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가운데 부분에 여의
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2마리 용을 진하게 새겨놓았다. 승탑의 피부가 완전 흑백이라 실감
이 덜해서 그렇지 만약에 칼라였다면 진짜 용도 시샘을 했을 것이다. 용의 비늘과 피부, 구름
무늬 등이 아주 실감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무늬까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어느 고승의 승
탑으로 여겨진다. 그 고승의 덕과 업적이 대단했던지 제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저 탑을 조성해
스승의 넋을 기렸던 모양이다.

장대한 세월을 거치면서 반질반질했던 피부는 검은 피부로 대부분 타버렸고, 군데군데 주근깨
같은 것도 달려있지만 이들은 세월이 달아준 훈장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머리 장식과 기단부
가 조금 깨진 것을 보면 대부분 잘 남아있는데, 머리 장식은 다른 데서 가져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대원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제일 가는 꿀단지로 이렇게 화려한 용 문양을 지닌
승탑은 처음 본다. 그러다보니 지닌 다른 승탑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용각부도 주변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승탑 3기가 있다. 매력 만점의 용각부도에 단단히 묻
힌 탓에 그리 주목은 못받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스타일의 탑으
로 용각부도와 긴 시간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모습이 마치, 부모와 자식들 같다. 그 옆
에는 마치 버섯이나 양봉통처럼 생긴 조그만 승탑이 있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이들 탑의 주
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원사 윗 승탑군

아랫 승탑군에서 윗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윗 승탑군이 나온다. 이곳에
는 2기의 승탑이 있는데, 검은 때가 자욱한 왼쪽 탑은 기단부와 바닥돌을 갖추고 있고, 하얀
피부가 역력한 오른쪽 탑은 바닥돌 위에 바로 탑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탑의 주인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들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여기서 더 이상 올라갈 공간이 없다.
주변은 대원사 소유의 숲이며 공식 탐방로도 없기 때문이다. (비법정 탐방로만 있음)


  아랫 승탑군에서 바라본 대원사의 뒷모습

  모악산 산길과 이어진 대원사 남쪽 문

  대원사 돌담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승탑을 끝으로 대원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원래는 대원사만 보고 전주로 쿨하게 철수하
려고 했으나, 여기서 정상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물맛이 일품이라는 오래된 절, 수왕사가
있다고 하여 시간도 아직 이르고 해서 거기까지 발을 넓혀보기로 했다. 기왕 모악산의 품에
들어섰으니 그 품을 더 파고들어야 아쉬움이 없겠지. 다행히 수왕사까지는 1km 남짓이다. (산
에서 1km는 평지의 1km보다 훨씬 김)
허나 문제는 산에 눈이 많이 쌓여있고 얼음 길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 좀 되었다. 올라갈 때야 별로 문제는 안되지만 문제는 내
려올 때가 아니던가? (트래킹화를 신고 온 것이 전부임) 허나 이미 내 마음은 수왕사에 올라
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거기까지 무작정 올라가기로 했다. 내려갈 때 걱정은 나중이다.

* 대원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 (모악산길 243, ☎ 063-221-8502)


 

♠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고적한 산사
수왕사(水王寺)

  모악산 정상과 수왕사로 인도하는 눈덮힌 산길

대원사에서 수왕사까지는 산길을 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겨울이 내린 눈과 얼음이 두텁게
깔려있어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이 그리 넉넉치가 않은데, 앞만 보고 열심히 오른 끝에 해발
약 560m에 자리한 수왕사입구 쉼터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모악산 정상이고, 남쪽으로 나있는 벼랑길로 가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적한 절집, 수왕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수왕사입구 쉼터

  수왕사입구 쉼터에서 수왕사로 인도하는 벼랑길
안전한 통행을 위해 벼랑길에 철난간을 둘러 절을 찾은 이들을 배려했다.


  소박한 모습의 수왕사 경내

해발 570m 고지에 자리한 수왕사는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이곳은 약수가 유
명하여 '물왕이절','무량(無量)이절'이라 불렸는데, 680년에 완주 경천사를 지은 보덕이 수도
장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적이나 관련 역사 기록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없으며, 이곳 밑에 대원사가 있어 대원사나 금산사 승려의 참선 장소로 쓰였다가 조선 때 건
물을 심으면서 절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1125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며, 1597년 정
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탄 것을 1604년 진묵대사가 중건하여 머물렀다. 6.25전쟁이 한참인
1951년 1월 10일, 모악산 일대를 어지럽히던 공비를 토벌하고자 작전상 소실된 것을 1953년에
천석진사(千錫振師)가 다시 세웠다.

이곳은 모악산 정상 북쪽 밑으로 가파른 곳에 간신히 터를 닦은 탓에 절이 매우 단출하다. 법
당과 요사, 진묵조사전이 좁은 경내를 이루고 있으며, 근래에 새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
은 진작에 날라가버렸다. 오래된 유물도 없고, 건물도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여염집 스타일이
라 겉으로 보이는 절집 분위기도 다소 떨어진다. 게다가 첩첩한 산속에 묻혀있다보니 머무는
승려도 거의 없고 절을 찾는 신도나 산꾼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원사에 많이 의존
을 한다.
또한 수왕사는 완주 지역 전통민속주로 꼽히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 송죽오곡주(松竹五穀
酒)를 생산하는 현장으로 주지승인 벽암(碧岩)이 수왕사 약수로 직접 술을 빚는다. 그는 대한
민국 전통식품 명인 1호로 지정된 전통민속주의 장인이자 수왕사의 자랑으로 술을 멀리하는
절에서 곡차(穀茶)로 빗대 표현되는 술을 직접 만든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수왕사 법당

  법당 내부 (석가3존불과 여러 탱화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수왕사 법당은 금동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신중탱, 용왕탱
이 봉안되어 있다. 절은 작고 초라해도 법당 내부에 봉안된 존재만큼은 다른 절 못지 않은데,
바다와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이곳에 용왕탱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수왕사가 거
의 약수로 지탱하는 절이다보니 물을 관리하는 용왕(龍王)이 담긴 용왕탱을 봉안해 매일 좋은
물이 나오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법당 신중탱(왼쪽)과 용왕탱(오른쪽)

  수왕사 약수터

수왕사의 든든한 후광인 약수터는 겨울 제국의 심술로 얼음에 완전 봉해진 상태이다. 그래서
이곳의 명물인 약수를 마시지 못했지. 선녀도 와서 마신다는 물인데 이렇게 막혀버렸으니 여
기까지 온 보람이 크게 떨어진다.


  진묵조사전(震默祖師殿)

보통 절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절
을 중창한 진묵대사를 봉안한 진묵조사전을 그 자리에 두었다. 여기서만큼은 산신이나 칠성,
지장보살보다 진묵대사를 더 크게 여기기 때문이다.
바위 밑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진묵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1칸 크기의 집을 두었
는데, 그곳까지 인도하는 돌계단을 법당 옆까지 늘어뜨려놓았다.


  하늘색 두광(頭光)까지 갖춘 진묵대사의 진영

진묵(1562~1633)은 수왕사와 대원사의 중창주이자 석가여래의 소화신(小化身)으로 격하게 추
앙을 받는 고승으로 그의 흥미로운 이적과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그가 동자승이던 시절, 주지승이 그에게 향불을 피우게 하니 주지승 꿈에 제천(諸天) 등이 나
타나 '부처가 향을 피우니 우리는 받을 수 없소!' 했다는 것,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하고 무
슨 책이든 바로 다 외워버려 따로 스승이 필요 없었다는 것. 해인사에 불이 나자 소나무잎에
물을 묻혀 뿌리니 큰 비가 내려 불이 진화되었다는 것, 동네 사람들이 물고기 매운탕을 먹고
가라며 놀리자 탕이 담긴 가마솥을 번쩍 들어 다 흡입한 다음, 엉덩이를 까서 변을 누니 물고
기가 살아서 나왔다는 설화 등, 술을 흔히 곡차(穀茶)라 부르는데, 이는 그가 술을 즐겨 마시
며 곡차라고 했다는 것, 어머니의 무덤을 '무자식 천년향화지지(無子息 千年香火之地)'란 명
당에 썼다는 것 등 재미나고 신비로운 일화가 전해져 온다.

* 수왕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산13 (모악산길 246, ☎ 063-287-0485)


  수왕사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나무들이 있어서 시야는 별로)

수왕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5시가 넘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뒷쪽인 모악산 정상까
지 오르고 싶었으나 시간도 늦고 산길도 가파르며 거기에 눈과 얼음까지 덮여있으니 오를 엄
두가 나지 않는다. 아이젠이라도 있었으면 모르지만 그것도 없다. 이럴 때는 건방 떨지 말고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무조건 내려가는 것이 상책, 안그래도 수왕사까지 눈길을 뚫고 무리하게
올라온 터라 내려가는 것도 걱정인데 자꾸 일을 벌여봐야 좋을 것이 없다.

산길을 기어가듯 조심에 조심을 기하며 내려가 별탈없이 대원사에 도착했다. 여기서 관광단지
까지는 길이 완만하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다. 처음에는 대원사만 보려고 들어왔는데, 수왕
사까지 보너스로 겯드리면서 모악산에서의 일정이 다소 연장되었다.

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마침 전주시내버스 970번이 바퀴를 접고 쉬고 있어 그것을 타
고 미련없이 전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연말의 모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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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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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전주 근교 제일의 고찰, 완주 종남산 송광사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완주 송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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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만물의 희망, 봄이 혹독한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천하를 한참 해방시키던 3월
한복판에 완주(完州) 제일의 고찰로 손꼽히는 송광사를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삼례(參禮)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담고 딱 2시
간을 달려 삼례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바로 전주시내버스 350번(삼례터미널↔평화동
)을 잡아타고 호남의 오랜 중심지, 전주 시내로 들어섰다. 서울에서 바로 전주로 안가고
삼례를 거친 것은 전주행 직행버스 이용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한산한
삼례행 버스를 택했다. 어차피 삼례에서 전주는 지척 거리이다.

전주의 도심, 전동(全洞)에 두 발을 내렸으나 송광사로 가는 차 시간이 50분이나 남아있
었다. 마땅히 할 것도 없고 점심을 먹기에도 시간이 일러 중앙시장까지 쉬엄쉬엄 걸으며
시간을 억지로 죽였다. 그래도 20여 분이나 남아 정류장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기다리던 전주시내버스 806번(평화동↔앞멀)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며 입을 벌린다.
전주 806번은 거의 3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벽지 노선으로 그를 놓치면 정말 대책이 없다.
(송광사는 806번 외에도 1개 노선이 더 있으나 배차간격이 거의 절망 수준임)
버스는 모래내시장에서 노인들이 가득 타면서 거의 만석의 기쁨을 누렸고 중앙시장 출발
30분 만에 송광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진흙탕이 되버린 오도천을 건너면 송광사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짧
은 방죽의 끝에는 완주군 제일의 고찰인 송광사가 일주문을 들이밀며 중생을 맞이한다.


▲  송광사 앞을 흐르는 오도천

▲  송광사 주차장과 둑방길 나무들


 

♠  종남산(終南山) 남쪽에 들어앉은 오래된 고찰
완주 송광사(松廣寺)

▲  송광사 일주문(一柱門)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4호

송광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양쪽으로 쭉쭉 뻗은 보기만해도 정겨운 기와 돌담을 거느리고 있다.
보통 일주문은 경내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며 홀로 자리해 있지만 이곳은 경내 바로 앞에
자리하여 홀로 있는 것은 면했다. 바로 옆에는 백련다원이란 찻집이 있고, 문을 들어서면 바
로 금강문과 함께 경내 건물이 두텁게 모습을 비춘다.
일주문은 속세의 문과 달리 여닫는 문이 없어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허나 이곳
은 특이하게도 여닫는 문짝을 달았다. 문짝을 달았다고 해서 사람을 가리는 것은 아니니 어깨
를 피고 들어가도록 하자.

이 문은 맞배지붕 건물로 다른 일주문의 지붕과 달리 간결하고 가벼운 모습이다. 문 기둥 위
쪽과 기둥 사이에 공포(空包) 덩어리를 장식한 다포(多包)식이며, 기둥 앞뒤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진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준다. 문 평방(平枋)에는 '終南山 松廣寺(종남산 송광사)'
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이는 1975년에 승려 서암(瑞岩)이 쓴 것이다.
지금은 경내 앞에 있지만 원래는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나드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 문을
들어서 3km를 더 들어가야 비로소 경내에 이르렀다는 소리로 송광사 땅이 무려 그곳까지 이르
렀다고 한다. 허나 사찰 부지가 계속 줄어들면서 1814년 절과 가까운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고
1944년에 해광극인(海光克仁)이 현 위치로 옮겨 정문으로 삼았다.


▲  일주문 서쪽 돌담

송광사가 산속이 아닌 평지에 둥지를 틀다보니 돌담으로 경내를 빙 둘러 속세의 잡다한 기운
을 경계하고 있다. (서쪽 돌담에 차량 통행을 위해 문을 낸 것을 빼면 거의 돌담으로 감싸임)
고색이 짙은 돌담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시골마을의 담장 같은 정겨운 풍경이다.


▲  일주문을 들어서면 해맑은 표정의 나무 장승 1쌍이 좋은 인연임을 강조하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들의 인사에 나도 기분이 좋아지고 긴장감도 많이
풀어진다. 그들을 지나면 바로 금강문이 마중한다.


※ 완주 송광사(松廣寺)의 오랜 내력
종남산의 남쪽이자 오도천 서쪽 평지에 둥지를 튼 송광사는 신라 후기인 867년 보조국사 체징
(普照國師 體澄)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종남산 남쪽에 영험이 있는 샘물이 솟아나 그 옆에 절
을 짓고 송광사라 했다는데 이를 입증할 사료도, 그 시절 유물도 전혀 없어 창건시기에 대해
심히 회의감을 들게 한다. 백제 후기에 창건되어 백련사(白蓮寺)라 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 역
시 마찬가지이다.
고려 중기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이곳을 천태종(天台宗) 소속으로 바꾸었다고 하
며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보조국사의 창건설 말고도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점지설이 있다. 그가 이곳을 지
나다가 영천이란 우물을 발견했는데 (절터 주춧돌이 가시덤불 속에 묻혀있었고, 절터 한쪽에
영천이란 우물이 있었다고 함) 그 물을 마셔보니 그 맛이 매우 특이해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하여 이 우물로 인해 이곳에 절을 세우면 크게 될 것이라 여겼으나 당장 절을 세울 여
력이 없어 샘 주변 네 귀퉁이에 돌을 쌓아 자신이 찍어둔 자리임을 밝히고 그곳을 총총히 떠
났다.
이후 순천에서 그 유명한 송광사(松廣寺)를 세우고 머물 때, 제자들에게 '전주 인근 종남산에
괜찮은 절터가 있다. 크게 불법(佛法)이 번창할 곳이니. 그곳에 절을 세워라!'
부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뜻은 실현되지 못했다.
지눌은 고려 중기 고승(高僧)으로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다. 당시 고려 불교계의 1
인자였던 그가 마음에 들어했던 자리에 절을 세우지 못하고 지나친 것도 이상하거니와 스승의
부탁을 받은 제자들도 그 뜻을 받들지 않았다는 점도 의문스러울 뿐이다.

지눌이 지나갔다는 시절에서 400여 년을 더한 1622년에 이르자 응호(應浩)와 승명(勝明), 운
정(雲淨), 덕림(德林), 득순(得淳), 홍신(弘信) 등이 모여 현재 자리에 절을 세웠다. 재정이
여의치 못해 무려 14년 동안 공사를 벌여 1636년에 완성을 보았으며, 당시 무주 적상산(赤裳
山) 안국사(安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주지로 있던 벽암대사(碧岩大師)를 개창조(開創祖
)로 삼았다고 하니 이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로 여겨진다. 당시 절터 자리는 승명의 증조부(
曾祖父)인 이극룡(李克龍)이 기증했다고 한다.

▲  독특한 구조의 송광사 종루

▲  5층석탑 -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다고

1636년 절이 완성되자 벽암대사를 불러 50일 동안이나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전국에서 수
천 명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완성을 기념하고자 사적비를 세우고 약사전을 지었
으며, 옛날 지눌의 뜻을 받들었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송광사라 했다고 한다. (순천 송광사
가 워낙 대단한 절이라 그곳의 이름을 따고 지눌의 일화를 그럴싸하게 붙여놓은 것으로 여겨
짐) 참고로 종남산이란 이름은 보조국사가 절터를 구하고자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우물이 풍부
하게 솟은 지금의 자리를 발견하고 더 이상 남으로 내려가지 않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
다. 즉 남쪽으로 가는 것을 마쳤다는 뜻이 된다.

1640년 명부전에 소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을 만들어 봉안했으며, 1641년 왕실의 지원을 받
아 청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귀국을 기원하고자 대웅
전에 거대한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봉안했다.
1649년 사천왕상을 조성했고, 1656년에 나한전을 지었으며, 1716년에는 범종을 조성했다. 그
리고 1786년에는 왕실의 지원에 호응하고자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목조3전패를
만들고 절을 중수했다. 1813년에는 정준이 약사전을 중수하고, 절의 영역이 크게 줄어듬에 따
라 3km 밖 나드리에 있던 일주문을 조계교 인근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2층이던 대웅전이 기울
자 1층으로 개축했으며, 1814년 명부전 지장후불탱화를 조성했다.

1944년 일주문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고, 1989년에는 삼성각에 탱화를 조성했으며 1993년 대
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복장(腹臟)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2002년에
는 대웅전을 해체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고, 2003년에는 2층이던 관음전과 요사채의 위치
를 바꿨다. 그리고 2004년에 천왕문과 사천왕상을 손질했고 2013년 약사전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  소나무에 조금 가려진 나한전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겉보기와 달리 제법 터가 넓은 송광사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천왕문, 금강문, 종루, 지
장전, 극락전, 첨성각, 나한전, 삼성각, 관음전, 약사전, 요사 등 대략 16~17동에 건물을 지
니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종루, 소조사천왕상, 소조석가여래3불좌상과 복장
유물 등 국가 보물 4점과 일주문과 사적비(전북 지방유형문화재 5호), 동종, 목조3전패, 나한
전, 금강문, 벽암당부도(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44호) 등 9점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산속 평지에 자리한 절로 마을 바로 옆에 자리해있어 산사의 내음은 조금 떨어진다. 그냥 시
골에 있는 한적한 사찰 정도라고나 할까? 요사와 종무소, 세심정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오래
된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각 건물마다 문화유산이 풍부하여 그들이 풍기는 고색의 내음에 현
기증이 일어날 정도이다. 게다가 경내 서쪽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여름과 초가을에는
연꽃의 향연도 구경할 수 있다.

※ 송광사 찾아가기 (2018년 4월 기준)
① 전주까지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에서 전라선 열차(고속전철, 새마을호
  , 무궁화호, 누리로)를 타고 전주역 하차
* 여수엑스포역, 순천역, 남원역에서 전라선 열차(고속전철, 새마을호, 무궁화호, 누리로) 이
  용
*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
  가 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인천공항, 의정부, 고양(화정), 성남, 부천, 안산, 수원, 강릉, 원주, 천안, 대전(복
  합, 유성), 군산, 정읍, 남원, 광주, 목포, 순천, 대구(서부, 동대구), 경주, 포항, 부산(
  사상, 노포동), 창원(마산), 진주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전주역에서 806번 시내버스(1일 5회)를 타고 송광사 하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6번 시내버
  스를 타고 고려병원에서 하차하여 길 건너편 정류장에서 814번 시내버스(1일 11회 운행)로
  환승
* 전주고속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3-1번을 타고 모래내시장 정류장에서
  814번으로 환승, 또는 금암광장이나 전주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에서 전동, 전주한옥마을
  방면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중앙시장이나 전동성당, 남부시장 정류장에서 내려서 건너편 정
  류장에서 806, 814번 이용
③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익산포항고속도로 → 소양나들목을 나와서 진안 방면 26번 국도 → 해월1교차로에서 좌회전
  소양 방면 → 마수교를 건너 우회전 → 송광사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금강문)

▲  사자를 탄 문수동자 (금강문)

★ 송광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공짜
* 송광사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하고 있다. 자율/휴식형과 아름다운 순례길, 1박2
  일 템플스테이 등 3가지가 있으며, 자율/휴식형은 절에 머물며 휴식과 수양을 하는 것으로
  아침/저녁 예불과 공양시간만 지키면 된다. (평일은 언제나 참여 가능), 아름다운 순례길은
  전북에 있는 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성지를 걸어서 순례하는 것으로 송광사에서 1박
  2일 숙식을 한다.
*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2 (송광수만로 255-16 ☎ 063-241-8090 / 243
  -8091)
* 송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템플스테이 정보와 예약 신청 가능)


▲  금강문 안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  송광사 천왕문, 금강문

▲  금강문(金剛門)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3호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금강문이 나타나 중생의 번뇌를 검문한다. 이 문은 정면 3칸, 측면 2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부처를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보금자리이다.
문의 천정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정이며, 대웅전 방향 오른쪽 금강역사는 왼손에 칼
을 들고 싸움 태세를 취하며 약간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왼쪽 금강역사는 오른손에 뱀(아마
도 코브라일듯)을 꽉 쥐어들며 고개를 약간 틀어 오른쪽을 보고 있다. 눈을 크게 부라리며 당
장이라도 칼로 찌를 태세이지만 얼굴은 거의 해학적으로 생겨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
게 한다.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표정에 굳이 싸움을 걸지 않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돌아갈 것이다.

금강역사 옆에는 앳되고 귀여운 동자가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사자(거
의 강아지처럼 생김)에 탄 동자는 문수동자(文殊童子)이며, 작은 코끼리를 탄 보살은 보현동
자(普賢童子)로 표정이 참 천진난만하다. 저들은 저리 표정이 밝건만, 속세에 찌들어 매일 고
통받고 사는 나는 그렇지가 못하니 그 비결을 묻고 싶을 뿐이다. 저 자리에 앉으면 저렇게 변
하는 것일까? 저들이 잠시 마실 나간 사이 그들의 자리를 빼앗아 앉고 싶다.


▲  금강역사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의 위엄

▲  금강역사와 하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  금강문과 천왕문 사이에 자리한 굵직한 당간지주(幢竿支柱)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돌기둥에는 고색의 때가 역력하다.

▲  보수공사에 들어간 천왕문(天王門)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천왕문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
금자리로 보통 일주문처럼 문짝이 없지만 여기는 여닫는 문짝을 두었다.

이 문은 송광사가 한참 몸을 일으키던 1622년부터 1636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1636년에 세
워진 송광사 개창비(開創碑)에 따르면 처음부터 '문'이 아닌 '전'을 칭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또한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왼쪽 보관(寶冠) 끝 뒷면에 '順治己丑六年七月日 畢金山畵圓主造
像'이란 묵서(墨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순치6년은 1649년이다. (청나라 세조의 연호임)
하여 이를 통해 1649년에 사천왕을 만들어 봉안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왼손에 있는 보탑
(寶塔) 밑에는 '乾隆五十一年丙午五月日…新造成'이란 묵서명이 있어 1786년에 보탑을 새롭게
만들었음을 살짝 알려준다.

▲  천왕전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 보물 1225호

이들 사천왕상은 흙으로 만든 것으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천왕문이 보수공사에 들어가면서 문 주변으로 철제 담장을 둘렀고, 사천왕상 앞에 보수 관련
시설을 두면서 온전한 모습을 담기가 어려웠다. 사천왕상도 아무리 그들의 보금자리를 보수하
는 시설이라고 해도 시야를 가려 마치 철창에 갇힌 듯한 모습이니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이다.

◀  아이들을 품으며 행복에 겨워있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위엄


▲  송광사의 종루(鐘樓) - 보물 1244호

천왕문을 지나면 살이 과하게 찐 똥배 포대화상이 나온다. 똥배에다가 얼굴에 혹부리까지 잔
뜩 나있으니 성인병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을 듯 싶으나 불교의 주요 성자(聖者)의 하나로
그의 배를 문지르면 아들을 낳거나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중생들의 인기가 대단하다.

포대화상 옆에는 '十'자 모양의 묘하게 생긴 건물이 눈길을 단단히 부여잡는데 그가 바로 사
물(四物)의 보금자리인 종루이다. 송광사의 백미이자 상징으로 '十' 모양으로 생긴 탓에 예전
에는 십자각(十字閣)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정확히는 12각형으로 이런 형태에 건물은 천하에서
거의 이곳 밖에 없다. 또한 6각형 이상 건물은 오로지 궁궐이나 국가 제단에서만 세울 수 있
었는데 무려 12각형짜리가 어찌 궁궐도 아닌 절에 버젓히 세워져 있는지 딱히 전하는 사연이
없어 호기심을 크게 자극시킨다.

그는 누각 형태의 팔작지붕 건물로 1층은 2층을 받쳐들기 위한 허공일 뿐이며, 서쪽에 마련된
계단을 타고 2층에 오르면 중앙에 자리한 범종(梵鐘)을 비롯해 운판(雲版), 법고(法鼓), 목어
(木魚) 등의 사물이 매달려 있다.
이 건물은 대웅전을 1층으로 고친 1814년이나 1857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지붕을 받치
는 공포와 지붕이 절반을 넘을 정도로 커서 1층과 2층 기둥이 잘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쓸데없
는 걱정까지 들 정도이다.

▲  서쪽에서 본 종루

▲  종루 안에 들어있는 사물

종루에는 2개의 종이 걸려있다. 중앙에 자리한 것은 근래 것이고 그 북쪽(대웅전 방향)에 자
리한 것이 1716년에 조성된 동종(銅鐘)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38호이다,

종의 높이는 107cm, 아랫부분 지름은 73cm로 조그만 크기이며, 윗부분에 꽃무늬가 있고 밑에
는 방패 모양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밑에 연주형(練珠形) 돌기 60개가 둘러져 있고 9.5
cm 두께의 띠가 그 밑에 있다. 아랫부분에는 지름 6cm의 원이 8개가 새겨져 있고 그 안에 범
자(梵字)를 새겼으며, 그 밑 세로 면에 보살상을 새기고 나머지 한 면에는 전패(殿牌)를 두었
다. 전패에는 '주상삼전수만세(主上三殿壽萬歲)'라 쓰여있어 당시 숙종(肅宗)과 왕후, 대왕대
비(大王大妃)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종의 가장 밑부분에는 지름 6㎝ 정도에 보상 당초 무늬를 둘렀으며 강희 55년(1712년) 4월에
광주 무등산 증심사(證心寺)에서 만들었다는 내용과 건륭(乾隆) 34년(1769년)에 문광득의 시
주로 종을 보수했다는 내용이 있어 시주자의 인적사항을 빼곡히 적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 범
종 형태를 보여준다.


▲  송광사 극락전(極樂殿)

천왕문 동쪽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거
처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명부전(冥府殿)이었으나 1999년에 바
로 옆에 지장전을 닦으면서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
을 그곳으로 옮기고 이곳을 극락전으로 삼았다.
다른 건물과 달리 문이 중앙에만 있으며, 불단에는 아미타불과 수려한 보관을 쓴 문수보살(文
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아미타3존불을 이루고 있고 좌우 벽에는 조그만 금동불이 가
득 벽을 메우고 있는데 이들은 죽은 이들의 영가(靈駕)를 봉안한 공간이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 - 서방정토의 주인답게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 있는 존재들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는 고색의 때가 가득한 커다란 네모난 돌이 누워있다. 그 위에는 오래
된 연화대(蓮花臺)가 있는데, 그 자리에 새로 만든 하얀 피부의 석불이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인다. 이 네모난 돌은 예전 건물에 쓰였던 주춧돌로 보이며, 연화대 역시 예전에 쓰였거나
주변에서 업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잉여로 남은 이들 석재를 한쪽에 모아 자리를 만들고 새로
석불을 안치하여 그들에게도 존재의 가치를 심어주었다.
석재 뒤쪽에는 종이와 쓰레기를 태우는 굴뚝이 자리하여 서로를 의지한다.


▲  송광사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1999년에 지어졌다. 극락전에 있던 명부의 식구를 옮겨와 지장전으로 삼았으며, 소
조지장보살3존상을 비롯한 명부(저승)의 식구들은 164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들을 하나로 묶
어 '소조지장보살3존상 및 권속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8호로 지정했다.
허나 나는 어리석게도 지장전을 지나치고 말았다. 건물 주변에 그들을 알리는 문화재 안내판
이 없었기 때문이다.

▲  세심정 앞에 자리한 귀여운 돌부처
그의 포즈가 꼭 '한푼 내놔~' 그러는 것 같다.
그렇게도 돈이 궁했단 말인가?? 그 앞에
놓인 복전함이 참으로 궁색해 보인다.

▲  대웅전 동쪽 언덕의 세심정(洗心亭)
근래에 지어진 정자로 모습이 양반가의
정자나 별장 같은 분위기이다. 절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풍경~~


 

♠  송광사 나한전, 삼성각, 관음전

▲  송광사 요사(寮舍)

세심정 북쪽에 자리한 'ㄱ'자 모습의 건물은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로 예전에는 약사전(藥師
殿)으로 쓰였다. 1636년에 벽암이 세웠다고 하며, 1814년에 중수했는데, 바로 이 요사 뒤쪽에
1636년에 세워진 송광사 사적비(事蹟碑,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5호)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그는 일명 송광사 개창비라 불리기도 하는데 신익성(申翊聖)이 비문을 짓고, 선조(宣祖)의 8
번째 아들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글씨를 썼다. 이 비석 역시 그의 존재를 몰라 지나
치고 말았다.


▲  송광사 나한전(羅漢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2호

대웅전의 뒷통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선 나한전은 부처의 제자인 나한(羅漢)의 보금자리이다.
그들을 거느린 석가불을 중심으로 16나한과 오백나한(五百羅漢), 인왕상(仁王像), 동자상, 사
자상 등이 건물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데, 석가불과 16나한 뱃속에서 나온 유물 중 1656년
에 조성된 발원문이 발견되어 창건시기를 알려준다.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가운데에 문이 있는 구
조이다. 1656년에 벽암이 세웠으며 1934년에 혜광이 중수했다. 이때 중수로 서까래와 천정 등
이 조금 변형되긴 했으나 주요 부재와 천정 구성 등은 17세기 불전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나한전 목조석가여래3존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9호

나한전 석가불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뚱뚱한 어린이의 얼굴처럼 앳되고 포동포
동해 보인다. 두 귀는 중생들의 고충을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다. 그 좌우에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협시(夾侍)하고 있는데, 보통은 중앙 불상과 협시불은 간격을 짧
게 하여 바로 좌우에 두지만 여기는 기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배치한 탓에 서로 간의 거리가
길어 마치 독자적인 불상/보살상처럼 보인다.

석가3존불 외에 16나한과 500나한, 범천(梵天)과 제석(帝釋), 동자, 인왕상, 사자상, 천녀상
등 526구가 불단 주변을 빼곡히 메운다. 500나한 중 일부는 나중에 다시 석고로 틀을 만들어
복원한 것이며, 석가3존불을 비롯한 나한전 내부의 모든 존재들은 '나한전 목조석가여래3존상
및 권속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9호로 지정되었다.


▲  나한전 내부 우측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한 16나한과 하얀 피부의 조그만 500나한 등이 보인다.

▲  나한전 내부 좌측 - 존상(尊像)들이 너무 많아서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송광사 삼성각(三聖閣)

나한전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로 1980년대에 기존의 건물을 부시고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
부에는 1989년에 조성된 아주 따끈따끈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삼성각 중앙에 자리한 칠성탱

▲  산신탱과 호랑이를 탄 산신상

▲  독성탱과 윗통을 드러낸 독성상

▲  근래에 새롭게 터를 닦은 미륵불

▲  송광사 관음전(觀音殿)

▲  대웅전 뒤쪽 뜨락

종루 서쪽에 자리한 관음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2층이었다. 1층
은 밥을 먹는 공양간, 2층은 관음전으로 쓰였는데 2003년에 2층을 뚝 떼어냈다. 근래에 조성
된 관음보살상과 관음탱이 있으며, 건물 북쪽에는 매점을 겸하는 종무소가 있고 남쪽에는 공
양간 겸 요사로 쓰이는 적묵당이 있다.

대웅전과 나한전 사이에는 소공원 같은 조촐한 뜨락이 있다. 커다란 나무 그늘에 자리한 짜투
리 공간으로 예전 주춧돌과 맷돌로 쓰인 돌을 가져와 조촐하게 탁자와 의자로 삼았는데 그 모
습이 참 아기자기하다. 그리고 서쪽에는 조그만 비석이 우두커니 서 있는데 그를 알리는 안내
문도 없고 비석의 내용도 마멸이 심해 멀쩡한 두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절과 관
련된 비석이거나 승려의 탑비(塔碑)인 듯 싶다. (옛 사적비라는 말도 있음)

▲  주름잡힌 어처구니 없는 맷돌이
어엿한 탁자가 되었다.

▲  주춧돌로 보이는 커다란 돌을 탁자로
삼고 주변에 작은 돌을 배치해
의자로 삼았다.

◀  정체가 묘한 오래된 비석
얼핏 보면 내용도 없이 그냥 돌만 비석처럼
세운 것 같다.


 

♠  송광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1243호

송광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계 팔작지붕 건물로 그 규모가 상
당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상당히 주눅을 들게 만든다. 162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처음에는
2층이었다.
지금도 1층 치고는 큰데 2층이었으면 거의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에 버금가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다가 건물이 기울면서 1814년 1층으로 고쳤으며, 1857년에 중수했다.
대웅전 현판은 송광사개창비(사적비)를 썼던 선조의 8번째 아들인 의창군이 쓴 것이니 그만큼
왕실과도 인연이 깊었음을 보여준다.

대웅전은 다른 건물에 비해 가운데 칸이 조금 좁은 편이며, 건물 외벽에는 1칸당 3개의 그림
을 두어 총 48개의 그림을 두었다. 그림에는 신중과 보살, 나한도 등이 그려져 있는데, 다른
법당에서는 볼 수 없는 개성적인 구조로 문이 있는 정면은 그림의 높이가 낮다. 또한 겉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축물의 하나로 단순히 여길 수 있지만 대웅전의 매력은 바로 그 안에 있다.
송광사에서 다른 건 다 놓치더라도 대웅전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야 여기까지 들인 차비와 기
름값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건물 내부는 높은 기둥을 4개 세웠으며, 옆면의 평주(平柱)보다 뒤로 물린 다음 후불탱을 봉
안했고 그 앞에 불단을 두어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안치했다. 이 석가3불좌상은 규모가 대웅
전에 버금갈 정도로 장대하여 보는 이를 다시 한번 주눅 들게 만드니 왜 자꾸 중생의 기를 죽
이는지 모르겠다. 또한 건물 천정에는 보개(寶蓋)를 만들고 그 위에 용, 게, 거북 등을 배치
했으며, 중앙 3칸과 양쪽 구석 천정에는 주악비천(奏樂飛天)을 그린 그림 11폭이 있다. 그리
고 석가3불좌상 사이에는 왕실의 안녕을 비는 3개의 전패(殿牌)를 두었는데, 그 디자인이 매
우 현란하며, 건물 외벽에도 온갖 그림으로 치장되어 있어 그야말로 하나의 불교미술전시관을
보는 듯 하다.

대웅전 앞에는 원래 5층석탑이 있었다. 그래서 1금당 1탑 형태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근래(2008년 이후)에 미륵불 앞으로 옮겨져 조금은 허전한 형태가 되었다.


▲  대웅전 계단 옆에 고개를 내민 귀수

화마(火魔)의 예고 없는 방문을 막고자 도깨비 얼굴상(귀수)을 건물 정면에 배치했다. 도깨비
라고는 하지만 그리 무서운 표정도 아닌 일주문 장승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그를 본 화마도 자
신의 본분도 저버린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 덕분인지 아직 대웅전은 화마에게 유린된 적
이 없다. 서로를 피곤하게 하며 인상을 찡그리는 강경책보다는 적절히 웃으면서 달래는 회유
책이 한 수 위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  석련대(石蓮臺)
거북 비슷하게 생긴 석상 위에 연꽃을 두룬 석련대가 있다. 불상을 올려두는
돌받침대로 지금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세월의 먼지만 가득하다.

▲  온갖 그림으로 가득한 대웅전의 뒷모습
1칸에 3개씩 그림을 배치하여 총 48개의 그림을 두었다. 거기에 천정에 그려진
비천상의 사본 그림까지 배치해 두 눈이 심심해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  대웅전 서쪽

▲  대웅전 동쪽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약사불 쪽에서 본 모습) - 보물 1274호

▲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아미타불 쪽에서 본 모습)

신발을 벗고 대웅전으로 들어서면 건물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장대한 모습의 소조석가3불좌상
이 마중을 한다. 높이가 무려 5m가 넘는 불상이 1개도 아니고 협시불까지 3개가 있으니 주눅
의 정도는 더하다. 이 땅에 있는 소조(塑造) 불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오래된 법당
의 불상 가운데서도 제일 큰 편에 속한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
타불을 두어 석가3불좌상을 이루고 있으며 석
가불은 높이 5.5m, 무릎너비 4.05m, 무릎높이
72cm로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
고 이마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있다. 눈썹
은 무지개처럼 부드럽게 구부러져 있고, 코는
끝이 두툼하며 붉은 입술 주위에는 가늘게 수
염이 표현되어 있다. 표정은 약간 굳어보이며,
왼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다.

석가불 왼쪽의 약사불은 석가불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그의 이름에 걸맞게 왼손에 약합(藥
盒)이 들려져 있다. 높이는 석가불보다 조금
낮은 5.2m이다.

석가불 오른쪽의 아미타불도 석가불, 약사불과
비슷한 모습으로 약사불과 비슷한 높이를 유지
하고 있다.

▲  대웅전 석가불의 위엄

근래에 석가불 몸통에서 조성기(造成記)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비롯한 불경과 사리함,
복장유물을 넣는 후령통(候鈴筒) 등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조성기를 통해 이들 불상
의 조성시기와 조성배경, 만든 이를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성기에 따르면 1641년 6월 29일에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
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의 조속한 귀국을 발원하고자 조성된 것이다. 그
러다보니 왕실과 사대부, 백성들의 시주에 힘입어 저렇게 웅대한 규모의 불상이 태어난 것이
다. 또한 명나라와 청의 연호가 같이 들어있으며, 병자호란의 휴유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
지가 강하게 배여있다. 그런 연유로 태어난 탓인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조성시기가 명확한 이 땅의 흔치 않은 불상으로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
점과 함께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이란 이름으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으
며, 복장유물은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현재 김제 금산사(金山寺) 성보박물관에 가 있다.


▲  목조3전패(木造三殿牌)의 하나인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0호

▲  목조3전패의 하나인 세자저하수천추(世子低下數千秋)

▲  목조3전패의 하나인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世)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현란한 디자인의 전패 3개가 중생의 두 눈을 매혹시킨다. 약사
불 쪽에는 왕비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있고, 아미타불 쪽에는 세자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석
가불과 아미타불 사이 그늘에는 왕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숨은 듯 자리해 있다.

왕을 위한 전패는 윗쪽에 용 1마리를 새기고, 밑에 좌우에는 각각 2마리의 용을 새겼다. 왕비
와 세자의 전패는 윗쪽에 용 1마리, 밑에 각각 1마리를 두어 차별을 두었다. 좌대(座臺)도 왕
의 것은 상하에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을 조각한 것에 비해 나머지는 복련만 조각했다. 이
들은 운룡문(雲龍紋)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수려하며, 높이도 왕의 전패는 2.28m, 좌우 것
은 2.08m로 이 땅의 전패 가운데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왕의 전패 뒷쪽에는 '순치세(順治歲)'에 만든 것이라 쓰여있어 1644년에서 1661년 사이에 조
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이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귀국을 위
해 만든 것이니 효종(재위 1649~1659) 때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효종(孝宗)이 맞으면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세자인 현종이 된다. 이후 1792년 전패를 수리했다.

법당에 이렇게 왕과 왕비 등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를 두는 경우도 흔치 않은데, 그만
큼 왕실과 인연이 깊고 그들의 지원을 두둑히 입은 절임을 입증하는 유물이라 하겠다.


▲  등장인물이 104명이나 되는 신중탱(神衆幀)

대웅전 서쪽 벽에는 보기만해도 혼을 다 빼놓는 신중탱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화엄경(華嚴經)
에 나오는 104위의 신중(神衆)을 그린 것으로 다른 신중탱과는 다르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빽
빽하게 들어차 있어 도대체 누가 누군지 눈과 머리가 고통스러울 지경으로 그림 중앙에는 동진
보살과 대범천왕(大梵天王), 제석천왕(帝釋天王) 등을 배치했으며, 1925년에 종인(宗仁)과 상
오(尙旿), 현성(鉉成), 태익(泰翼), 명진(明眞), 해일(海日) 등의 화승(畵僧)이 그렸다.


▲  불단 뒷쪽에 걸린 그림들(극락구품도)

대웅전 내부는 바깥(날씨가 무지 따스했음)과 달리 시원하다. 나무로 된 방바닥은 걸을 때 마
다 삐걱삐걱 소리가 조금씩 나는데 그만큼 건물이 오래되었다는 뜻이 된다. 허나 아무리 쿵쿵
거려도 단단하게 지어졌으므로 무너질 일은 없다.

남들이 잘 안가는 불단 뒷쪽으로 가면 뒷쪽 벽에도 그림이 걸려있다. 1칸당 그림 1폭이 걸려
있어 모두 3폭이 있는데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그림마다 구분선이 있어 선을 사이에 두고
다른 내용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1폭당 3개의 그림이 있으니 총 3폭의
9개의 그림이 있는 셈이다.
불가(佛家)에서 8개의 그림은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八相圖)이다. 그럼 9개의 그림은
뭘까? 답은 바로 극락9구품(極樂九品圖)이다. 극락에 대한 9개의 장면을 담은 것으로 이들 그
림은 자세한 정보가 딱히 없어 신중탱과 비슷한 시기 또는 그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대웅전 천정에 그려진 주악천인도(奏樂天人圖) ①

불단 뒷쪽 복도를 끝으로 대웅전은 이제 다 봤구나 여겨 나름대로의 포만감으로 철수하기 쉽
다. 허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이 하늘을 우러르고 살듯이 이곳도 반드시 천정을 바라
봐야 된다. 불단 앞 천정에 7개와 좌우 천정에 각각 2개씩 모두 11개의 주악천인도가 대웅전
의 하늘을 빛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놓친다면 대웅전의 4할을 놓친거나 다름이 없다.

저들을 보면서 어찌 저 높은 곳까지 그림을 그렸는지 참으로 대단할 뿐이다. 저런 그림이 떡
하니 있으니 천정이 더욱 빛이 나 나의 보잘 것 없는 두 눈은 가히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너
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고개를 90도나 올려서 봐야 되며 워낙 어두운 곳이라 저들을 모두
사진에 담느라 고개가 뚝 부러지는 줄 알았다.


▲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주악천인도 ②

▲  주악천인도 ③

▲  주악천인도 ④ 불단 동쪽 천정

▲  주악천인도 ⑤ 불단 서쪽 천정

▲  송광사 서쪽 연지(蓮池) - 절 너머로 보이는 산이 종남산

오래된 보물이 가득한 송광사 경내를 둘러보고 서쪽으로 나왔다. 경내 서쪽에는 넓은 연못이
있는데 이들은 연꽃의 보금자리인 연지이다. 연꽃은 여름 제국과 친한 식물이라 지금은 계림
황엽(鷄林黃葉)처럼 볼품이 전혀 없으나 앞으로 3달 이내에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며 한참 와
신상담(臥薪嘗膽) 중이다.
연못 너머에 보이는 정자는 백련정(白蓮亭)으로 연꽃이 있다면 연못을 1바퀴 둘러보며 백련정
에 발을 들여보고 싶지만 아무 것도 없고 가기도 귀찮고 해서 연못 남쪽만 서성이고 말았다.

참고로 연지 너머 경내 북쪽 산자락에 부도군(浮屠群)이 있다. 부도(승탑) 16기와 비석 2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에는 절을 세우는데 크게 공헌한 벽암당(碧巖堂)의 승탑이 있다. 이 승
탑은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44호로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송광사에서 놓친 것이 도대체 몇 개인지...)


▲  연못 남쪽에 있는 고인돌

연못 남쪽에는 엉뚱하게도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지석묘) 1기가 누워있다. 2개의 돌을 기
둥으로 삼아 뚜껑돌을 얹힌 형태로 이런 고인돌을 북방식(北方式) 고인돌이라고 한다. 하지만
북방식과 남방식이 북쪽과 남쪽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퍼져 있어 그것을 나누는 의미는 거의
퇴색되었다.

거의 우리 민족의 특허 유물이나 다름없는 고인돌을 간직한 절은 천하에서 이곳이 유일할 듯
싶다. (내가 가본 300곳이 넘는 절집 중에서 오직 이곳이 유일함~) 그에 대한 자세한 신상은
모르겠지만 이곳에 원래부터 있던 터줏대감으로 여겨지며, 이것 외에도 여러 기가 있던 것으
로 보인다. 허나 지금은 오로지 그만 살아남아 돌이킬 수 없는 머나먼 옛날을 그리워한다.


▲  경내 남쪽에 깔린 정갈한 돌담길

이렇게 송광사를 1시간 반 동안 둘러보니 시간은 13시가 넘었다. 비록 놓친 것이 다수 있어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지만 이건 나의 무지에 따른 소산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아무래도 다음
에 또 오라는 송광사의 뜻인 모양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함)
이렇게 하여 봄맞이 송광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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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이름을 지녔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지닌 고색의 절집, 김제 모악산 귀신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김제 모악산 귀신사 '

귀신사 대적광전
▲  귀신사 대적광전

귀신사 3층석탑

귀신사 승탑(부도)

▲  귀신사 3층석탑

▲  귀신사 승탑(부도)


 

겨울 제국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의 첫 무렵에 전북 전주와 김제 지역을 찾았다.
날 전주(全州)에서 친한 후배의 여동생이 시집을 가게되서 그의 요청에 따라 하객 입장으
로 가게 된 것인데 그렇다고 그 여동생과 아는 사이도 아니다. 아무리 후배의 피붙이라고
해도 엄연히 모르는 사람이라 여러 날을 두고 궁리하다가 의리상 가주기로 했다.

서울이 본거지인 신부측에서는 하객 수송을 위해 관광버스 2대를 대절했다. 1대는 가족과
친척들을, 다른 1대는 친척 이외에 사람들을 태웠는데, 8시 반에 발산역(5호선)에서 출발
한다고 하여 아침 일찍 길을 서둘렀다. 허나 일부가 늦게 오면서 9시가 좀 지나서야 버스
는 두툼한 바퀴를 움직였다.
신부 예식 시간은 13시로 교통 정체가 없는 이상은 3시간 내외면 충분히 전주에 도달한다.
다행히 별다른 정체는 없어서 정안휴게소 휴식을 포함하여 3시간 20분 정도 걸렸으며,
배 집안에서 마련한 떡과 귤, 과자, 음료수로 아침을 때웠다.

전주 혼인식장(전주역 부근)에 이르니 주말이라 꽤 북새통이다. 아직 시간이 있어 푸짐하
게 나온다는 점심을 잔뜩 기대하며 시간을 억지로 흘려보내다가 시간이 되자 준비한 축의
금을 내고 혼인식을 관람했다. 허나 나의 돌머리 속에는 혼인식은 온데간데 없고 온통 점
심 생각 뿐이었다.
드디어 지루한(?) 예식이 끝나자 윗층 피로연(披露宴) 장소로 이동했다. 점심은 뷔페식으
로 찬이 매우 풍성해 나의 마음을 너무 기쁘게 했는데, 뷔페의 기본 메뉴인 밥, 고기,
, 나물, 채소류를 비롯해 온갖 초밥과 튀김, , 탕과 국수류(설렁탕과 우동, 잔치국수
), 다양한 디저트, 식혜와 맥주 등 먹을거리가 잔뜩 깔려 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원없이 먹고 싶었으나, 위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주어
진 위의 공간을 적절히 활용하여 여러 먹거리르 섭취했고, 저녁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배가 채워지자 두 손에 꽉 쥐고 있던 수저를 비로소 놓아주었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 탈
이 났음 ㅠ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14시 반이 넘었다. 후배는 15시에 하객을 태우고 귀경한다며 어
여 타라고 했으나 오랜만에 전주까지 온 거 그냥 올라가면 좀 섭하다. 이미 정처(定處)
정해둔 상태라 아쉽지만 여기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며 단독 행동에 들어갔다.


 

♠  이름도 무시무시한 귀신사를 찾아서

▲  청도리에서 귀신사로 가는 마을길

전주에서 정해둔 정처는 전주시내 남쪽에 있는 남고산성(南固山城)과 금산사(金山寺)로 넘어
가는 길목에 자리한 김제 귀신사이다. 마음 같아서는 다 보고 싶지만 해도 얼마 남지 않았고
서로 거리도 멀어 무조건 하나를 택해야 된다.
후배 가족과 작별하고 전주역 정류장에 발을 멈출 때까지만 해도 전주에 왔으니 전주의 명소
를 보는 것이 어울릴 듯 싶어 남고산성에 크게 무게를 두었었다. 허나 시간이 벌써 16시 직전
이라 지금 열심히 가더라도 그곳에서 강제로 일몰을 맞게 된다. 땅꺼미가 짙어지면 야간 렌즈
나 삼각대가 없는 이상은 사진 담기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남고산성을 내버리고 전주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지만 많이 걸을 필요가 없는 귀신사에 무게를 100% 얹혔다. (전주 경계에서 겨우
2km 거리임)

전주역에서 귀신사를 가려면 전주시내버스 79(전주역금산사)을 타면 된다. 배차간격은 거
25분 정도로 전주시외터미널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한옥마을, 풍남문, 효자동, 삼천동을
거쳐 강원도에 버금가는 고개를 하나 넘으면 행정구역은 전주에서 김제로 갈리면서 귀신사가
있는 청도리(淸道里)에 이른다.

모악산(母岳山) 북서쪽 자락에 안긴 청도리는 조선시대 때 관리와 나그네들의 숙식을 제공하
던 국립 숙박시설, 청도원(淸道院)이 있던 곳이라 하여 청도원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
은 절 밑에 형성된 마을인 사하촌(寺下村)으로 절은 바로 마을 북쪽에 자리해 있으며 오래 걸
을 것도 없이 청도리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4~5분이면 충분히 닿는다.

청도리에서 귀신사로 가는 길은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도리 정류장에서 농가와 경작지
사이로 난 마을길(청도5)을 따라 가는 것이고, 다른 것은 청도리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180m
떨어진 귀신사입구에서 서쪽 길(청도6)로 방향을 튼다. (전주에서 넘어온 경우는 우회전,
김제는 좌회전) 후자의 경우는 차량을 위해 포장도로가 닦여져 있으며 나는 버스로 왔기 때문
에 정류장과 바로 이어진 마을길을 이용했다.
이제는 흩어진 전설이 되버린 충북 단양(丹陽)의 외가집을 가는 기분처럼 시골 분위기가 그윽
하게 깔린 마을길은 아직 겨울 제국의 치하라 황량하기 그지 없지만 봄의 기운이 슬며시 들어
와 조금씩 녹색 기운을 뿌리며 아직은 거대한 겨울 제국에 대항한다.


▲  귀신사 경내로 인도하는 아랫 돌계단

마을길 끝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진 헝클어진 돌계단이 언덕에 기대어 있다. 그 계
단을 오르면 경내 주차장에 이르는데 돌계단 밑에는 2개의 돌기둥이 우두커니 서 있다.
속세의 민가는 이 계단 앞에서 끝이 나면서 자연히 속세와 절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는데
속세의 일부가 되버린 계단 앞은 원래 귀신사의 영역이었다. 옛날에는 경내 외곽에서 중심으
로 인도하는 계단이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절이 참 작구나 싶겠지만 귀신사의 왕년의 위엄을
잘 보여주는 존재로 세월의 줄기찬 태클에 조금은 비뚤어진 모습을 하게 되었다. 허나 지금의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다.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나 있고, 계단의 기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괜히 복원한답시고 딱딱 맞춘다면 그 모습도 꽤 어색할 것 같다.


▲  귀신사 경내로 인도하는 윗 돌계단

아랫 돌계단을 올라 주차장을 지나면 윗 돌계단이 나온다. 아랫 계단과 달리 질서정연한 모습
으로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그 계단 너머는 귀신사의 중심으로 주요 건물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귀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번째 돌계단에서 바라본 청도리(청도원) 마을과 모악산

전북 서부의 주요 명산(名山)으로 추앙받는 모악산(794m) 북서쪽 자락에 귀신사(歸信寺)가 포
근하게 자리를 닦았다. 포근한 분위기와 달리 절 이름은 천하에서 가장 후덜덜한 이름으로 사
연을 모르는 이들은 다들 그 귀신(鬼神)인줄 알고 놀라워하거나 오금을 지려한다. 혹자(或者)
는 귀신이 나오는 절로, 다른 혹자는 귀신을 모신 사당 성격의 절로 여기기도 한다. 허나 이
름을 이루고 있는 한자는 그 귀신이 아닌 믿음이 돌아온다는 뜻의 귀신(歸信)이니 괜히 겁을
먹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귀신사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후기 창건설<법왕(法王, 재위 599~600) 시절로 여겨짐>
과 신라 중기 의상대사(義湘大師) 창건설이 있다.
백제 후기 창건설은 17세기에 활약한 자수무경(子秀無竟, 1664~1737)이 쓴 '무경집(無竟集)'
에 백제의 원당(願堂)으로 창건되었다고 나오며, 경내 뒤쪽에 자리한 석수(石獸)는 백제 왕실
의 자복사찰(資福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란 견해가 있다. 게다가 인근에 백제 후기 사
찰인 금산사가 있어 비슷한 시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열어두고 있다.
그리고 신라 중기 창건설은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인데 당시 이름은 국신사(國信寺.
또는 國神寺)였다고 한다. 허나 정작 백제 때 유물은 없으며, 3층석탑이 창건 당시(6~7세기)
에 것이라고 우기고는 있으나 탑의 양식을 보아 고려 때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외에 탑과 석등
, 주춧돌 일부가 신라 후기 것이다. 또한 최치원(崔致遠, 857~?)이 이곳에 머물며 당나라 법
장화상의 일대기를 적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신라 후기(8
기 이후)에 법등(法燈)을 켠 것으로 여겨진다.

1120년대에는 원명국사(圓明國師 1090-1141)가 절을 중창했는데, 그 시절에는 구순사(口脣寺
또는 狗脣寺)로 불렸다고 한다. 이는 절 주변이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
지형이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없다.
고려 후기인 1376년 왜구(倭寇) 패거리 300명이 귀신사에 들어앉아 갖은 민폐를 부리며 머물
렀는데 이를 병마사(兵馬使) 유실(柳實)이 격퇴했다. 이를 통해 수백 명이 머물 정도로 건물
이 즐비했던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년에는 부속 암자만 8개에 이르렀다고 하며,
적광전은 2층 규모였다고 하니 금산사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허나 조선으로 천하가 바뀌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란 장애물 앞에 절은 심히 좌절을 겪게 된
. 생육신(生六臣)의 하나인 김시습(金時習)이 이곳을 방문해 지은 '귀신사허(歸信寺墟)'
시문에 '~~탑은 무너지고 비석은 끊어져 있다'는 내용이 있어 절의 우울한 상태를 알 수 있으
, 시문 제목에 귀신사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이름이 바뀌었
음을 알려준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승병(僧兵)을 양성했다고 전하며 정유재란(1597) 때 절이 모두 파괴되어
쓰러진 것을 1601년 이곳을 지나던 염화, 신허가 전각을 여럿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24년 승려 덕기가 대대적인 중창을 벌였는데, 이때 옛터가 아닌 새로운 곳에 중창을 했다고
한다. 하여 3층석탑과 석수가 있는 경내 북쪽 언덕이 옛터의 중심지로 여겨진다. 대적광전에
있는 소조비로자나3존불을 비롯하여 미륵보전, 시왕전, 천왕문 등이 이때 세워졌으며, 귀신사
가 남긴 가장 오래된 문서인 상량문(上樑文)1633년에 작성되었는데 이를 통해 덕기의 중창
불사가 1633년에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승려 도헌(道軒)이 나한전이 없음을 안타
깝게 여겨 나한전(羅漢殿)을 짓고, 나한전의 주요 식구 25위를 봉안했다.

1657년 비바람으로 전각이 퇴락하자 1657년 대웅전 등을 중수했으며, 1707년과 1715년에 두감
이 대웅전과 팔상전을 새로 짓고 1716년에 팔상전에 불상을 봉안했다. 1873년에는 춘봉(春峰)
이 중창했으며, 1884년 명부전을 중수하고 1914년에 명부전 기와를 개수했다. 그리고 1927
에 명부전, 1934년에 대적광전을 수리했으며, 2005년에 대적광전을 해체/수리했다.

▲  귀신사 3층석탑

▲  대적광전 소조비로자나3존불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영산전, 요사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과 소조비로자나3존불을 비롯해 3층석탑,
, 승탑(부도)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특히 부도는 경내에서 300m나 떨어진 마을 남쪽 밭
두렁에 홀로 있어 귀신사의 영역이 이곳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며, 경내 서쪽에는 신라 후기부
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를 망라한 석탑과 석등의 부재(部材), 건물의 주춧돌 등이
널부러져 있고 경내 직전의 돌계단 2개도 세월에 제법 숙성된 것이다.

모악산 북서쪽 자락에 안겨 있지만 마을 바로 뒤쪽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기운은 조금
떨어진다. 허나 옛터인 경내 북쪽 언덕에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조금은 무시무시한 이름
과 달리 고즈넉하고 조촐한 분위기로 외형만 지나치게 추구하는 상당수의 큰 절집과 달리 은
근히 정감이 간다. 또한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정갈하고 깔끔하기 그지 없다.

지금은 금산사보다 별볼일 없는 신세이지만 왕년에는 금산사보다 훨씬 잘나갔던 귀신사, 이곳
도 제대로된 학술/발굴조사를 벌여 경내 북쪽과 청도리 마을, 경작지 일대에 잠들어있는 귀신
사의 숨겨진 과거를 싹 들추었으면 좋겠다.

김제 귀신사 찾아가기 (201711월 기준)
대중교통 (전주 경유)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순천역, 여수엑스포역에서 전라선
  열차를 타고 전주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는
  30분 간격으로 떠나며,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고양(화정, 백석), 의정부, 안양, 부천, 성남, 수원, 용인, 평택, 천안, 청주, 대전
  (복합, 유성, 대전청사), 군산, 남원, 광주, 목포, 순천, 대구(서부, 동대구), 경주, 포항,
  울산, 부산(사상, 노포동), 창원(마산), 진주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전주역 광장과 전주시외터미널, 전주고속터미널에서 전주시내버스 79번을 타고 청도리 하차
  , 도보 5
대중교통 (김제 경유)
* 용산역,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광주송정역, 나주역, 목포역에서 호남선 열
  차를 타고 김제역 하차 <고속전철(KTX, SRT) 이용시 익산역이나 정읍역에서 무궁화호나 새
  마을호, 누리로 열차로 환승>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김제행 고속버스가 17, 동서울터미널에서 김제
  행 직행버스가 16회 떠난다.
* 인천, 성남, 대구(서부)에서 김제행 직행버스 이용
* 김제역(역전치안센터 건너편)과 김제시외/고속터미널 건너편에서 금산사를 거쳐 청도리로
  가는 김제시내버스 5번이 16회 있다. (김제역 기준 6:40, 8:18, 12:13, 14:33, 15:33,
  17:18) 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금산사로 가는 5, 5-1번 시내버스(120여 회 운행)를 타고
  금산사에서 전주 79번 버스로 환승하기 바란다.
승용차 (경내 밑에 주차장 있음)
* 호남고속도로 금산사나들목을 나와서 금산사 방면 712번 지방도 성암4거리에서 좌회
  월평4거리에서 좌회전 팥정이4거리에서 좌회전 백오동3거리에서 좌회전
  도리(귀신사입구) 귀신사

* 입장료와 주차비 없음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 (청도640, ☎ 063-548-0917)


 

♠  귀신사 대적광전, 명부전 주변

▲  선방(禪房)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요사(寮舍)

귀신사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잔잔히 입혀진 뜨락이 펼쳐지면서 바로 정면에 대적광전이 진하
게 모습을 드러낸다. 뜨락 오른쪽에는 요사(선방)가 있고, 왼쪽에는 석탑과 석등의 부재,
돌을 수습한 공간과 영산전이 있으며, 대적광전 좌측에는 명부전과 석수, 3층석탑으로 인도
는 계단이 있다.

요사는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승려의 생활공간이다. 그 북쪽에는 장독대가
식을 숙성시키며 질서정연하게 들어서 있는데 잘익은 김치나 고추장 생각을 참 간절하게 만
. 저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살짝 뚜껑을 열어 속살을 들춰내고 싶다.
그리고 요사 남쪽에는 견공(犬公)의 보금자리가 있는데, 하얀 털의 백구이다. 처음에는 조용
있더니만 그들을 넌지시 바라보니 은근히 멍멍거리며 구박을 준다. 나는 밤손님이나 화마(
火魔)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분 나쁘게 생긴 편도 아닌데 왜 그리 눈치를 주는 걸까? 마음 같
아서는
확 몸보신용으로 때려잡고 싶지만 나는 이곳을 잠깐 스쳐 지나가는 존재라 그냥 눈감
아주었다
. 마침 요사에서 비구니가 나와 그들을 다독거리니 그제서야 꼬랑지를 내리고 눈을
내린다
.

◀  숙성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귀신사 장독대들


▲  귀신사 영산전(靈山殿)

대적광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
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이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그의 1급 제자인 아난존자(阿難尊者)와 가섭존자(迦葉尊者)가 양쪽에 자리
해 있으며, 그 좌우로 각각 8명씩 16명의 나한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각각 1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들 끝에는 인왕상(仁王像)이 금강역사 못지 않은 위엄 넘치는 포즈로 혹여
문을 두드릴지 모를 악의 기운을 경계한다.


▲  영산전 석가불과 아난/가섭존자

▲  16나한의 우측 나한(羅漢)과 인왕상

▲  16나한의 좌측 나한(羅漢)과 인왕상

    장식용으로 놓인 동그란 석조(石槽)
보름달을 닮은 이쁘장한 석조에는 물이 한가득
담겨져 있다. 절에 왔으면 물 한모금 마셔줘야
되지만 떠마실 바가지도 없고, 수질도 세속화된
종교 마냥 탁해보여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여 이곳에선 물을 마시지 못했으니 이런걸 보
고 그림의 떡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  경내 서쪽에 수습된 석탑과 석등 잔재, 건물 주춧돌 무리들

영산전 뜨락에는 석탑과 석등의 잔재, 건물 주춧돌 등이 덩어리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신라 후기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넓은 시대를 아우른 것들로 귀신사의 잃어버린 영화를 잘 보
여주는 유물들이다.
세월의 흐름이 귀신사에게는 꽤나 거칠었는지 숱하게 파괴되고 중창됨을 겪으면서 기존의 많은
건물과 석물들이 가루가 되어 저렇게 암담한 신세가 되었다. 이들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역력하며 깨진 탑재를 모아 한쪽에 엉성하게 석탑을 엮어 놓았다.

▲  길다란 주춧돌에 피어난 1송이 연꽃무늬

▲  우리나라처럼 두 동강이 난 돌덩이
(무엇에 쓰던 물건인고?)

 ◀ 조각난 탑재를 모아서 엮은 소소한 석탑
탑 옥개석에는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심어놓은
조그만 돌탑들이 무럭무럭 뿌리를 내렸다.


▲  귀신사 대적광전(大寂光殿) - 보물 826

귀신사의 법당인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정면 5,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 건물과 그 안에 담겨진 소조비로자나3불좌상은 귀신사의 왜소함
을 능히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값어치가 높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이 입혀져 있지 않아 수수하면서도 좀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주
고 있는데 '귀신사 중수기'에 따르면 원래 2층이었다고 하며, 17세기 초에 1층으로 다시 지었
다고 한다. 2층 이상의 불전(佛殿)은 그리 흔치가 않은 것인데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다 수염
을 태워먹던 시절부터 2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귀신사가 결코 예사롭지 않은 절임을 느끼
게 한다.

정면 가운데 칸(어칸)이 좌우 칸보다 조금 넓은 형태로 이는 조선 후기 건축물에서 많이 나오
는 모습이다. 가운데 칸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고, 나머지는 어칸보다 좀 작게 해서 창문처
럼 한 것이 특징이다. 정면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고 오른쪽과 왼쪽 끝 칸은 벽으
로 만든 것 또한 그만의 특징이다. 기둥 지붕에는 공포 덩어리가 장식되어 있는데 기둥과 기
둥 사이에도 1개씩을 짜놓아 다포(多包) 양식임을 알 수 있으며, 공포도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아 나무의 원초적인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

건물 내부의 가구(架構)는 천정을 높이고자 고주(高柱)의 몸 중간에 보를 꽂아 그 끝이 평주(
平柱) 위에 얹히게 했고, 그 보 위에 다시 보를 얹어 고주 위에 얹혔다. 이는 봉안된 불상이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불상 머리 옆에 보가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는 원래 2
(중층)이었던 것을 1층으로 다시 지을 때 고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1823년과 1934
에 중수를 벌였으며, 2005년 해체/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17세기에는 이 건물과 비슷한 구조의 다포계 맞배지붕 불전이 많이 지어졌는데, 논산 쌍계사(
雙磎寺) 대웅전, 고창 선운사(禪雲寺) 대웅보전, 경주 기림사(祇林寺) 대적광전이 대표적이다.
귀신사 대적광전은 이들보다 규모는 좀 작지만 내부에 고식이 남아있고 전면을 벽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  소조비로자나3존좌상(塑造毘盧舍那尊坐像) - 보물 1516

귀신사에 왔다면 이곳의 꽃이자 꿀단지인 대적광전 내부는 꼭 둘러봐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조그만 불상이겠지 싶어 건물 좌측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으나
내 머릿 속에 그려진 조그만 불상은 온데간데 없고 허벌나게 큰 불상이 하나도 아닌 3개씩이
나 나란히 대좌(臺座)에 앉아 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위엄에 제대로 놀라 입이 벌어지더니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는다. 겉으로 보인 귀신사
의 모습이 아무리 초라하다 한들 이들 앞에서는 그런 생각도 보기좋게 36계를 치고 만다.

이들 불상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소조불로 합장인(合掌印) 비슷한 제스쳐의 지권인(智拳
)을 취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약사여래(藥師如來)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배치했다. 그들은 건물이 터질 정도로 대단한 위엄을 간직하고 있어 왠
만한 강심장도 뒷걸음을 치게 만드는데 이런 큰 불상이 17~18세기에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이런 큰 불상이 유행처럼 생겨난 것은 억불숭유로 쇠퇴를 걷던 불교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
직하여 나라를 지키자 조정에서는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정책을 다소 바꾸게 된다. 하여 차별
과 탄압을 줄여주었고 주요 요새(남한산성, 북한산성, 무주 적상산성, 부산 금정산성)에 절을
지어 승병들을 배치했다. 또한 왕실과 사대부가 왕실과 집안의 안녕을 위해 시주를 넉넉히 하
면서 많은 불사가 벌어졌는데, 불교 입장에서는 쇠퇴한 불교를 중흥시키는 안성맞춤의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니 중흥에 대한 자신감이 이런 큰 불상으로 표현된 것이며, 왕실과 사대부의
비위도 맞추고자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제스쳐도 많이 취했다. 그래서 유난히 조선 후기에는 왕
과 왕비, 세자, 대왕대비의 복을 비는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웅대한 덩치에 비해 얼굴에는 나름 인자한 표정이 깃들여져 그들에 놀란 중생을 진정시킨다.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며,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 밑으로 두 눈은 살며시 뜨고 있다.
코는 오똑하게 솟았고, 붉은 입술은 조그만하지만 엷게 미소를 피우고 있다. 입술 주변에는
검은 수염이 칠해져 있고, 볼살은 매우 두툼하다. 양쪽에 달린 두 귀는 중생의 소망을 모두
접수하는 안테나가 되어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허리가 긴 장신형(長身形)으로 품격 높은 불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1째 마디에
뻗은 지권인의 특이한 표현은 명나라 비로자나불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인(手印)이라고 한다.
또한 허리가 긴 장신형도 명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라고 하며 이렇게 명나라 양식을 양분으로
하여 조선 후기 불상의 또다른 종류를 이루었다.

이들 불상은 귀신사가 쓰러진 몸을 한참 일으키던 1624년에서 1633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1633년에 작성된 상량문에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와있으며 자수무경의 기
록에는 1624년에 중건된 것으로 나와 그 사이가 맞을 것이다. 불상 뒤에는 각자 그에게 걸맞
은 후불탱화가 걸려있는데, 이들은 1983년에 주지 유견성(柳見星)이 그린 것이다.

▲  소조비로자나3존좌상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

▲  금색 피부의 화려한 문양을 지닌 전패
(殿牌)와 종이학을 담은 유리통

▲  대적광전 신중탱(神衆幀)

▲  대적광전 산신탱(山神幀)

         ◀  대적광전 독성탱(獨聖幀)
대적광전에는 법당의 청정함을 위해 필수로 배
치하는 신중탱을 비롯하여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탱, 독성(나반존자) 할배를 담은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경내에는 아직 산신과 독성을 위한 보금자리가
따로 없다보니 이렇게 법당에서 샛방살이를 하
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조성시기는 화기(畵記
)가 없어 알 수 없으나 19세기 후반이나 20
기 초반으로 여겨진다.


▲  귀신사 명부전(冥府殿)

대적광전과 요사 뒤쪽에는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
선 후기에 세워져 여러 차례 수리를 했으나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롭게 지은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비롯해 도명존자(道明尊者)와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의 주요 식구들과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봉안되어 있다.

◀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저승의 시왕들


 

♠  귀신사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유물들

▲  귀신사의 옛 중심지였던 북쪽 언덕 (석탑과 석수)

대적광전과 명부전 뒤쪽에는 북쪽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귀신사
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3층석탑과 석수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 왔다면 대적광전 내부와 더
불어 이곳 유물도 꼭 살펴봐야 뒷탈이 없다. 그만큼 이곳에서 중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전 귀신사의 중심은 바로 이곳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된 귀
신사는 1624년부터 1633년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중창을 벌였는데 그때 새 자리에 중창을 했
. 그 새로운 자리는 현재 대적광전과 명부전이 있는 언덕 남쪽이며, 이전 자리는 바로 이곳
북쪽 언덕이다. 아직까지는 옛터에 이렇다할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옛터의 자세한
것은 그리 알려진 것은 없으며 석탑과 석수, 사적비 등이 옛터를 지키고 있다. (언덕 북쪽은
대나무가 무성하며, 동쪽은 민가와 경작지가 있음)

옛터 식구의 대표격인 석탑은 화강암으로 다진 4.5m 높이의 조촐한 탑으로 절에서는 창건 당
시인 백제 후기 또는 7세기 중반 탑으로 우기고 있으나 확인 결과 고려 때 탑으로 판명이 났
. 현재 이 땅에 남아있는 삼국시대 탑은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 부여 정림사지(
林寺址) 5층석탑, 경주 분황사(芬皇寺) 석탑 등 3기가 고작이다. (고구려와 부여는 석탑이 아
예 없음)
백제 탑의 상징인 정림사지 5층석탑을 많이 닮은 고려 탑으로 1층 탑신(塔身) 이후 급격하게
줄어드는 체감율은 미륵사지 석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는 유난히 옛 백제
땅인 충남, 전라도 지역에 정림사지 탑을 닮은 백제 탑의 후예가 많이 등장하는데 백제를 그
리워하는 지역 백성들의 마음과 지역 색채가 강했던 고려 석탑, 불상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이 탑은 바닥돌 위에 여러 개의 돌을 맞추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 탑신을 올렸다. 탑신
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했고,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처마가 평행을 이루다가 귀퉁이에
서 아주 살짝 들려져 있다. 1층 탑신은 매우 크지만 2층부터 확 줄어드는 모습이며, 탑 꼭대
기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네모난 받침돌인 노반(露盤)이 남아있다.


▲  귀신사 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2


▲  귀신사 석수(石獸)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4

3층석탑 옆에는 석수라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돌조각이 하나 있다. 웅크리고 앉은 사자의 등
짝에 묘하게 생긴 날씬한 돌기둥이 혹처럼 솟아 하늘을 받들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끝부분이
참 낯이 있다. 이 돌기둥은 바로 남근석(男根石)으로 불교의 상징 동물의 하나인 사자(獅子)
와 남근 숭배<또는 성기(性器) 신앙>가 어우러진 아주 기묘한 석물로 이 땅에서는 오로지 이
곳에서만 있는 희소성 100%의 물건이다.

사자상은 머리를 치켜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오랜 세월의 태클로 좀 헝클어지긴 했지만
알아보는데는 아직 지장은 없다. 그의 등에 곧게 서 있는 남근석은 2단으로 되어있는데, 아랫
부분은 윗부분보다 굵으며 대나무 같이 엷은 마디를 두었다. 그리고 윗부분은 아랫부분보다
굵기가 절반 정도 얇으며, 그 끝부분은 남근의 끝부분과 비슷하게 조각했다.

이 석수는 천하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 석물로 왜 귀신사에 이런 것을 두었는지는 2
지 설이 있다. 하나는 풍수지리상 이곳이 구순혈(狗脣穴)이란 좋지 않은 형상이라 하여 그 터
를 누르고자 세웠다는 것이며, 다른 설은 백제 왕실의 내원사찰(內願寺刹)로 남근을 갖춘 사
자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참고로 남근석을 둔 절은 백제의 내원사찰 뿐이라고 한다. 하여 이
석수를 근거로 귀신사가 백제 후기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것.
석수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백제나 신라가 아닌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돌사자의 길이는 158cm, 높이 62cm, 남근석은 아랫부분의 높이 72cm, 윗부
분은 40cm이다.

석수란 이름은 돌로 만든 동물상이란 뜻이다. 단순히 남근석만 있다면 남근석이라 부르면 되
겠지만 사자까지 있으니 이들을 어우른 마땅한 이름이 없어 부르기 쉽게 '석수'라 칭한듯 싶
.

▲  귀엽게 앉아있는 석수

▲  석탑 주변에 놓인 옛터의 주춧돌


▲  귀신사 사적비(事蹟碑)
귀신사의 내력을 담은 비석으로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옛터 뒤쪽에는 대나무가
무성해 산바람이 한바탕 지나갈 때마다 사각사각 하모니 소리를 들려준다.

▲  귀신사 앞 해탈교 (귀신사입구 방면)

귀신사의 오랜 보물을 품고 있는 경내 북쪽 언덕을 둘러보고 다시 경내로 내려왔다. 이리하여
귀신사를 다 둘러본 것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그건 함정이다. 아직 못본 것이 하나 있기 때문
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마을 남쪽 경작지 한복판에 홀로 떨어진 승탑(부도)이다.
기왕 여기까지 먼 발걸음을 했으니 다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싹 다 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경내 경비실을 찾아 부도의 위치를 물으니 마을 남쪽 경작지에 있다고 그런다. 그래서 이번에
는 마을길 대신 찻길을 통해 해탈교를 건너 전주~금산사 지방도로 나가 남쪽으로 걸어갔다.
경내에서 부도까지는 기껏해야 1리 남짓이며, 경내 북쪽 언덕에서 보이는 범위 안에 들어있다.
게다가 도로에서도 바라보이니 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기는 매우 쉽다.


▲  귀신사 승탑(부도)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3

▲  북쪽에서 바라본 부도

▲  남쪽에서 지켜본 부도

귀신사 부도는 경내에서 0.3km 정도 떨어진 마을 서남쪽 경작지 한복판에 고적하게 자리해 있
.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탑신과 지붕돌은 팔각을 취하고 있으며, 누구의 넋이 서린 승탑(
僧塔)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경내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왕년의 귀신사가 이곳
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우리가 옛 조선과 고구려, 백제, 발해의 옛 땅과 영광을 생각
하듯 귀신사 승려들도 이 부도와 옛터를 통해 귀신사의 영광을 뼈저리게 생각할 것이다.

부도의 높이는 2.5m로 기단부와 탑신,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비례가 별로 맞지가
않고 모습도 소박하다. 기둥처럼 길쭉한 기단 가운데 받침돌은 여러 겹의 연꽃을 두른 윗받침
돌을 받치고 있고, 그 위에 탑신의 몸돌과 귀퉁이가 치켜 올려진 지붕돌을 얹혔다. 그리고 그
위를 동그란 공 모양의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서 절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 귀신사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며 적어도 부도까지가 귀
신사의 영역이었으니 청도리 마을 상당수는 절의 영역이 된다. 그렇게나 잘 나가던 귀신사가
쇠퇴하면서 경내 중심을 제외한 부분이 모두 속세로 떨어져 나가 청도리 마을을 이루게 된 것
이다.

부도를 끝으로 귀신사 관람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서울로 갈 때는 전주가 아닌 김제(金堤)
를 거쳐가고 싶은데 이곳이 김제 땅임에도 김제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가뭄에 콩 나듯 다니고
오히려 전주시내버스가 더 많이 다닌다.
하여 별로 기대하지 않고 청도리 정류장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김제로 나가는 시간을 물어보니
왠걸 15분 뒤에 버스가 있다고 그런다. 내가 운과 복이 참 지지리도 없는 인간인데 이때만큼
은 용케도 운이 좀 맞아 떨어졌다. 평소에도 그렇게 운이 좀 맞으면 얼마나 좋을꼬? 차 시간
이야 안맞으면 전주로 나가면 그만이 아니던가?

정류장에 들어가 15분의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김제시내버스 5번이 슬그머니 들어온다.
이 버스는 청도리 마을회관 앞에서 잠시 바퀴를 접고 쉬다가 출발시간이 되면 외마디 부릉소
리를 남기고 김제로 나간다.
시내로 갈 때는 금산사를 거쳐서 가는데 폭주하는 전주버스와 달리 김제버스는 너무 기어가서
김제역까지 금산사와 원평 대기시간을 포함하여 45분 정도 걸렸다. 그렇게 지루하게 달려 도
착한 김제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열차에 고된 몸을 싣고 도돌이표처럼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귀신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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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의 꿀단지, 무주 머루와인동굴~덕유산 겨울 나들이 (설천봉, 덕유산리조트)

 


' 무주 머루와인동굴, 덕유산 나들이 '

▲  덕유산 설천봉


 

늦가을이 힘없이 쓰러지고 겨울이 한참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11월 끝자락에 전북 동북부
끝으머리에 자리한 무주(茂朱) 땅을 찾았다. 이번 나들이는 멀리 동남쪽에서 온 일행들과
함께 하였는데, 무주터미널에서 그들에게 합류하여 같이 움직였다.

무주에서 제일 먼저 인연을 지은 곳은 덕유산 북서쪽에 자리한 적상산(赤裳山, 1,034m)이
다. 그곳에 안긴 안국사(安國寺)와 적상산성(赤裳山城),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적상호
수를 둘러보고 (☞ 관련글 보러가기) 뱀처럼 구불구불한 고갯길(산성로)을 다시 내려오다
가 적상산 고개 밑에 자리한 무주머루와인동굴에서 잠시 바퀴를 멈추었다.


 

♠  무주의 새로운 꿀단지, 머루와인이 아낌없이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 무주머루와인동굴

▲  무주머루와인동굴 매표소

적상산 북쪽 450m 고지에 무주머루와인동굴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1988년 이후 적상산의 지도
를 크게 흔들어 놓은 무주양수발전소 건설 당시에 굴착 작업용으로 뚫어놓은 인공 동굴로 무주
양수발전소 상부댐, 적상호와 더불어 인간이 적상산에 남긴 혹이다.

1995년 발전소가 완성된 이후에는 쓸모가 없어 거의 버려졌는데, 무주군청에서 동굴 활용을 두
고 머리를 굴리다가 머루 재배 농가를 위해 머루로 만든 머루주의 숙성 장소로 사용하기로 하
였다. 하여 2007년 한국수력원자력으로부터 임대를 받아 내부를 상큼하게 손질하여 무주머루와
인동굴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처음에는 머루와인(머루주)을 숙성시키는 숙성고로 쓰였으나 이곳을 관광지로 널리 개방하면서
완전 대박을 쳤다. 위치도 적상산이나 무주리조트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수요 확보에도 어렵지
않았고, 이곳을 찾는 발길이 늘어나는 만큼, 머루와인의 인기도 치솟으면서 무주의 소중한 꿀
단지로 등극한 것이다.

이 동굴의 몸매는 길이 579m로 이중 290m만 개방하고 있다. 높이 4.7m, 폭 4.5m로 넓은 편이며,
비록 인공 땅꿀이긴 하지만 동굴은 동굴인지라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스하다. 또한 연
평균 기온은 13~14도로 머루주를 숙성시키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머루주의 발효
온도는 18도, 보관 온도는 12도, 평균 일교차가 18도가 되야 맛이 좋다고 함)


▲  머루와인동굴 앞을 지키는 머루장승부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들고 안으로 들어서면 동굴 앞에 재미나게 생긴 갈색 피부의 머루장승
부부가 하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우리를 맞이한다. 이들은 동굴 수식용으로 여기서는 머루장
승부부로 통하는데, 그들에게 적당한 정체성과 주제를 붙여주어 동굴 나들이의 달달한 재미를
더해준다.
비록 장승을 칭하고 있지만 그 흔한 장승의 모습이 아닌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석상 같은 모습
으로 너무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나그네들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게 한다.

이들 가운데 왼쪽에 하늘색 머리를 가진 이는 남편으로 머루와인을 즐겨 마셔 노화가 늦게 진
행되었다고 한다. 나이는 50대 후반이라고 하나, 실제 나이는 90세라는 설이 있다고? 그는 과
묵하지만 바람기가 많다고 하며 정력도 무지 대단하다고 한다.
그리고 오른쪽 노란 머리는 부인으로 50대 초반이라고 한다. 머루와인을 즐기는 탓에 기억력이
매우 좋아 남편의 외도 횟수와 장소를 모두 기억한다고 하며, 애교의 본좌라고 한다. 지금이야
허허 웃지만 시간이 몇 갑절 흐르면 그들에게 부여한 주제는 한토막 전설로 승화될 것이다. 이
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결국은 머루와인 찬양이다.


▲  머루와인동굴 정문 (비밀의문)

머루장승부부를 지나면 '머루와인 비밀의 문'이라 이름 붙여진 동굴 정문이 나온다. 문 위쪽에
는 두툼한 코와 온갖 주름 곡선이 자욱한 얼굴이 있는데, 좌우로 가늘게 뜬 눈도 보인다. 이
얼굴은 이곳을 지키는 머루정령으로 동굴 관람객에게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려주며, 머루와인
숙성의 신비스러운 기운을 불어넣는 용으로 주제를 잡았다. 성격은 좀 더럽지만 책임감과 인내
력이 강하다고 한다.


▲  머루와인동굴 통로

비밀의 문을 들어서면 동굴 통로가 일직선으로 펼쳐진다. 양쪽 벽에 휘날리는 모습의 등을 비
롯하여 내부를 밝히는 다양한 등을 두어 심봉사 같은 장님이 아닌 이상은 통행에 지장은 없다.
통로 양쪽에는 무주 고을의 풍경 사진과 옛날 사진들이 배열되어 있다.


▲  통로 중간 - 머루와인과 머루에 대한 정보를 머금은 온갖 안내문들이
오른쪽 벽을 가득 메운다.

▲  통로 좌우에 배열된 사진들 (무주 풍경 사진)

▲  동굴 광장 직전

▲  와인 시음 현장인 동굴 광장

동굴 정문(비밀의 문)에서 3~4분 정도 들어가면 동굴 광장에 이른다. 이곳은 와인을 테마로 한
공간으로 여기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왼쪽 코너로 가 와인잔을 받기 바란다. 와인잔은 1명당 1
개씩 제공되며 집으로 가져가도 상관없다. (동굴 입장료에 와인잔과 와인 시음 비용이 포함되
어 있음)
와인잔을 받으면 우선 잔의 상태를 확인하기 바란다. 간혹 부실한 잔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래가 약간 깨진 잔을 받았는데 교환을 요청하니 바로 다른 잔으로 바꿔준다. 그렇게 교
환을 당한 부실한 잔은 와인잔 담당자가 아무 미련도 없이 옆으로 던져 깨뜨렸다. (그 현장에
는 그렇게 깨진 와인잔이 가득했음, 잔을 어떻게 만들길래 부실 잔이 그리 많은 걸까?)

와인잔을 들고 반대쪽 와인바로 가면 머루와인을 주는데, 보통 3종류를 준다. 첫 잔을 마시고
다음 칸으로 가면 다른 와인을 주며, 1번 정도는 리필을 해준다. (줄이 길다면 그냥 1잔만 마
시기 바람) 술이 싫다면 머루 아이스바나 머루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된다. 허나 이들은 따로
돈을 줘야 된다.

       ▲  와인바의 명물 오줌누는 아이
머루장승 부부의 늦둥이 아들로 5살이라고 한다
. (영원한 5살) 자랑스럽게 거시기를 내밀고 소
변에 임하는 모습이 참 패기가 넘쳐 보인다.

▲  문이 닫힌 통제 구간에는 머루와인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다 (윗 사진)

▲  와인 시음 현장인 와인바 (밑 사진)


▲  와인동굴 통로 (밖으로 나가는 방향) ▼

머루장승부부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동굴 주변 물레방아에 있는 연인상이 그 딸이라고 한다.
상대방 남자하고는 무려 나이트클럽 부킹에서 만났다고 하며 (좀 건전한 걸루 하지 ㅋㅋㅋ) 그
들은 포석정 물레방아에서 주로 데이트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에 그들의 상을 두었다고?
머루장승부부는 그들의 교제를 반대하고 있으며, 딸은 23세, 상대남은 27세라고 한다.


동굴 관람은 와인 마시고, 사진을 찍고 하다 보면 보통 20~30분 정도 걸린다. 휴일에 관광객이
폭주하는 경우에는 와인이 일찍 동날 수가 있어 휴일이나 성수기에는 가급적 빨리 가야 뒷탈이
없다.

※ 무주머루와인동굴 찾아가기 (2017년 1월 기준)
무주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광주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정도, 전주에서는 1일 14회 떠난다.
* 영동역(경부선)에서 무주행 군내버스가 50~7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② 현지교통
* 무주터미널에서 내창행 군내버스 이용 (1일 2회, 11:40, 16:30) → 내창에서 도보 40분 (무
  주터미널에서 택시로 접근 가능)
③ 승용차
* 대전~통영고속도로 → 무주나들목을 나와서 무주방면 우회전 → 무주1교차로에서 우회전 →
  적상산입구에서 우회전 → 북창리 → 적상분소 → 무주머루와인동굴

★ 무주머루와인동굴 관람정보 (2017년 1월 기준)
* 입장료 : 2,000원 (20인 이상 단체 1,800원) <미취학 아동, 국가/독립유공자와 그 가족은 무
  료>
* 관람시간 : 10:00~17:30 (12~3월은 10:40~16:30) / 매주 월요일 휴관(성수기는 개관함)
* 와인족욕 이용료 : 성인 3,000원 / 만7세 미만 2,500원 (10:00~16:30, 12~3월은 10:30~15:30)
* 소재지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산119-5 (산성로 359, ☎ 063-322-4720)
* 무주머루와인동굴 홈페이지는 ☞ 여기를 클릭한다.



무주 머루와인동굴에서 잠시 머루주의 달콤한 향기에 빠져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무주덕유

산리조트(이하 덕유산리조트)로 이동했다.
북창리와 무주양수발전소 하부댐이 있는 무주호, 괴목리, 구천동터널을 차례로 지나 온갖 식당
과 숙박업소, 스키용품 가게로 즐비한 덕유산리조트입구 심곡리에서 잠시 길을 멈추고 두부 음
식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여기서는 두부전골을 먹었는데, 맛도 제법 괜찮다. 게다가 시장기가 진하게 발동해 밥을 2그릇
이나 해치우고 전골과 반찬도 싹싹 긁어먹고 나서야 겨우 손이 멈춘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점심
을 마치고 덕유산리조트로 진입하여 곤도라(Gondola) 승강장이 있는 설천하우스를 찾았다.


 

♠  덕유산리조트 곤도라를 타고 덕유산 설천봉(雪川峰)으로 오르다~~

▲  덕유산리조트 설천하우스

덕유산리조트는 덕유산 정상 북쪽 산자락에 넓게 들어앉은 대규모 휴양시설이다. 스키와 보드
등 겨울레포츠의 성지(聖地)로도 아주 명성이 높은데, 스키장을 비롯, 수영장과 골프장, 눈썰
매장, 호텔 등을 갖추고 있다. 리조트 내부가 매우 넓어서 내부를 이동할 때 차량과 셔틀버스
를 이용해야 될 정도이며, 곤도라 승강장이 있는 설천하우스는 리조트 동부에 자리해 있다.

이곳 리조트의 중심인 스키장은 덕유산의 피부를 싹 밀고 만든 것으로 덕유산 정상 북쪽 봉우
리인 설천봉까지 펼쳐져 있다. 설천봉이나 그 중간까지 곤도라나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스키나
보드로 내려오는 것이다.
겨울 레포츠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지나치게 넓은 공간을 잡아먹는 스키장이나 골프장이 너무
남발되고 있어 이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나라가 미대륙이나 시베리아 벌판, 중원대륙,
호주대륙 정도 되면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매우 좁고 좁은 현실이라 그런 것들을 몇 개 만들
면 국토가 거의 꽉찰 지경이다. 게다가 그들로 인해 자연도 적지 않게 파괴되고 있으니 지구와
후손들을 위해 한번 생각을 해봐야 될 문제이다.

나무로 삼삼해야 될 산자락이 스키장으로 벌거숭이 임금처럼 된 현장을 보니 인간이 오로지 그
들의 부질없는 취미를 위해 너무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덕유산에 희귀
한 동/식물이 많고, 전나무의 일종인 구상나무의 대규모 자생지인데, 스키장과 리조트로 인해
적지 않은 자연이 고통을 받게 된 것이다.
흔히 말하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 우리는 친구라는 구호. 실은 자연과 지구의 최대 적은 인간
이다. 그 인간이 전기를 만든답시고 적상산에 양수발전소와 적상호란 혹을 붙였고, 덕유산에는
그보다 더 큰 덕유산리조트와 스키장을 붙였다. 더 이상 대자연 형님의 콧털을 건드리지 않았
으면 좋으련만, 이러다 정말 그의 대보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덕유산리조트 곤도라는 케이블카와 비슷한 것으로 설천하우스(해발 700m)와 설천봉 정상(1520m
)을 이어준다. 무려 해발 800m를 뛰어넘는 이 곤도라는 선로 길이 2.659m, 속도는 초속 5m, 소
요시간은 약 20분, 곤도라 1대당 정원은 8명이다.
그의 등장으로 덕유산 정상까지 2시간 이상 힘들게 올라야 되는 수고로움이 크게 줄었으며, 설
천봉에서 정상(향적봉)까지는 달랑 20분 정도만 오르면 된다. 허나 정상의 접근성이 너무 쉬워
지면서 사람들의 방문이 크게 늘어났고, 그로 인해 향적봉과 설천봉 구간의 자연이 크게 망가
졌다. 곤도라가 다니는 구간 역시 스키장으로 인해 망가지긴 마찬가지, 2012년 5월부터 2개월
간 설천봉~향적봉 구간의 자연을 복원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땜방용에 불과하다.


▲  설천하우스에서 바라본 곤도라 승강장과 덕유산 설천봉

▲  스키장에 인공눈을 뿌려 슬슬 겨울 장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곳은 인공눈이지만 곤도라를 타고 윗세상으로 올라가면 거기는 진짜
눈이 기다리고 있다.

▲  스키장 인공눈밭을 누비는 관광객들

▲  곤도라 타는 곳

▲  설천봉으로 인도하는 곤도라 승강장

▲  좁은 곤도라에서 바라본 스키장

곤도라를 타는 줄이 조금 길었지만 거의 20초에 1대씩 빗자루 배차를 하는 지라 오래 기다리지
않고 탑승했다. 초속 5m로 사람의 뛰는 속도와 거의 비슷해 처음에는 이 속도로 설천봉까지 언
제 올라가나 싶었다. 하지만 금세 설천하우스가 작은 점이 되어 흐릿해지고 대신 푸른 하늘이
점점 가까워진다. 밑에는 아직 늦가을인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서서히 겨울로 변하여
눈쌓인 풍경이 펼쳐진다.

곤도라에서 정면을 보면 바로 앞에 가파른 오르막이 있어 덜하지만 뒤를 보면 정말 까마득하게
펼쳐지는 풍경에 두 눈이 어지럽다. 그렇게 곤도라를 20분 타면 설천봉에 도착한다.


▲  설천봉 정상

설천봉(1520m)은 덕유산 정상 북쪽에 자리한 봉우리로 덕유산리조트 스키장의 윗쪽 시작점이다.
설천봉에서 내려가는 스키와 보드 코스는 경사가 꽤 각박해 상급 코스로 치며 스키철에는 곤도
라 외에 별도로 리프트도 운행한다.

설천봉 정상에는 마치 요새처럼 생긴 휴게소가 있는데, 식당과 편의점을 갖추고 있다. 허나 물
가는 속세에 비해 1.5~2배 이상 비싸다. 음료 역시 산의 높이만큼 비싸게 받는다. 그래도 사먹
는 사람이 적지 않아 장사는 쏠쏠해 보인다. 편의점은 비록 할인카드에 의지해 할인을 해도 시
중의 같은 편의점보다 비싼 건 마찬가지다.

▲  설천봉에 자리한 3층 기와집

▲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오르는 산길

설천봉휴게소 남쪽에는 8각형을 띈 3층짜리 기와집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기와집이 설천봉의
실질적인 꼭대기로 겉으로 보면 하늘에 제를 지내는 원구단이나 천단(天壇)처럼 신성한 건물로
보인다. 허나 저것은 이곳이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그 분위기에 어울리게끔 만든 장식용 건물
에 불과하다. 그래도 그냥 휴게소만 있는 것보다는 저거라도 있으니 정상 풍경이 조금 신비롭
게 다가오며, 덕유산리조트 관련 관광자료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곳의 간판과 같은 존재이다.

설천봉까지 올라온 일행들은 가득 쌓인 눈과 미끄러운 산길에 기겁을 하여 대다수 휴게소 주변
에서 길을 멈추었다. 향적봉까지 편히 가게끔 길이 정비되어 있기는 해도 눈빙판길까지 개선된
것은 아니다. 나도 향적봉까지 가려고 했지만 생각 외로 미끄러운 그 길을 오르기가 겁이 났다.
아무리 팔팔한 30대라고 해도 20대는 아니며, 나도 이제 몸을 사려야 된다. 자칫 미끄러지면
큰일난다. 향적봉까지 간 일행은 1/3 정도인 10여 명, 그중 1명이 내려오는 중 크게 미끄러져
응급차 신세를 졌다.

눈길에 단단히 꼬리를 접고 설천봉으로 도로 내려가 그곳에서 계속 머물렀다. 덕유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향적봉(1614m)이 바로 코앞이건만 가지 못하는 한이 오죽하랴. 결국 다음에 다
시 와야될 명분만 만들고 말았다. 하긴 이렇게 좋은 명소를 1번만 오는 것도 솔직히 섭섭하지.
집에서 가까우면 두고두고 옆구리에 끼고 싶다.


▲  향적봉으로 잠깐 오르는 길에 바라본 설천봉
설천봉 정상을 장식하고 있는 3층 기와집이 꽤 신비롭게 보인다.
마치 높은 존재가 하늘에 제를 지내는 공간처럼 말이다.

▲  가깝고도 먼 덕유산 향적봉
20분 거리란 말에 많이 주저했지만 결국 몸을 사리는 쪽으로 기울었다.
허나 돌리는 발길이 너무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  설천봉 정상을 장식하는 3층 기와집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이 꽤 일품이다.

▲  힘차게 남쪽으로 달려가는 덕유산 산줄기

▲  설천봉에서 바라본 천하 (무주 안성면 지역)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타 천하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천상(天上)세계가
보일 정도로 하늘과 맞닿은 곳이니 조망의 품질도 꽤 우수하다.

▲  설천봉에서 바라본 천하 (무주 안성면 지역)

▲  설천봉휴게소 옥상에 조그만 기와집이 있어 마치
성곽 위에 세운 망대 같다.

▲  설천봉에서 만난 구상나무들

구상나무(Korean Fir)는 제주도 한라산(漢拏山)이 원산지로 한라산과 지리산(智異山), 덕유산
에 많이 살고 있다.
이 나무는 전나무의 일종으로 우리나라 토종 나무인데, 서양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많이 애용
되고 있는 나무가 바로 구상나무이다. 지구촌에 퍼진 구상나무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식재된 것
으로 공룡을 깨끗히 말아잡순 빙하기(氷河期)를 견딘 강인한 나무이기도 하다. 허나 아무리 강
한 나무라고 해도 빙하기의 후예인 겨울 제국 앞에 모든 것이 털린 상태라 정말 빙하기를 이긴
나무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앙상하기 그지 없다.


▲  설천봉에서 바라본 천하 (구천동, 무풍면 방면)

▲  설천봉 정상 동쪽 부분

▲  설천봉과 밑 세상을 이어주는 곤도라

향적봉을 찍고 내려오는 일행을 기다리느라 1시간 정도 설천봉에 머물렀다. 하늘의 속살이 보
일 정도의 고지대라 바람이 무척 패기가 있어 휴게소에 들어가 30분 정도 추위를 녹이고 있으
니 그곳에 갔던 사람들이 모두 내려왔다.
그래서 덕유산을 뒤로 한 채, 다시 곤도라에 의지해 밑 세상으로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올라
갈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속도로 움직여 소요시간은 비슷하며, 밑이 까마득하게 보여 언제 내
려가나 싶었으나 점처럼 작았던 밑의 여러 시설(설천하우스 등)이 점점 커지고 대신 설천봉은
한줄기 점이 되어 사라지면서 무탈히 설천하우스에 도착했다.

이렇게 짧게나마 덕유산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구천동터널과 적상산입구를 거쳐 무주터미널로
나왔다. 여기서 아쉽지만 일행들과 쿨하게 작별을 고하며 충북 영동(永同)으로 가는 군내버스
를 타고 40여 분을 달려 영동역으로 넘어갔다. 여기서 서울행 누리로 열차(무궁화호의 별종격
열차)에 고된 몸을 담고 북쪽으로 달려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번개처럼 날라가 재미나게 보냈던 그날 하루,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이들이 보고 싶
은 마음에 비록 한참이나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겨 그날을 추억해본다.
이렇게 하여 겨울맞이 무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무주 덕유산리조트 찾아가기 (2017년 1월 기준)
* 무주까지 가는 방법은 앞에 무주머루와인동굴 참조
* 무주시외터미널에서 구천동으로 가는 직행버스(1일 11회)나 군내버스(1일 5회)를 타고 덕유
  산리조트(리조트3거리)에서 하차. 리조트 방면으로 2분 걸어가면 '생두부촌'이란 식당이 있
  다. 그 앞에서 리조트행 무료셔틀버스 이용 (1일 20여 회 운행)
* 무주읍내(제일의원, 산림조합)에서 리조트행 무료셔틀버스 이용 (1일 6회 운행, 아침 2회는
  시장4거리, 반딧불주유소, 군민회관 경유)
* 설천면(면사무소 앞)과 구천동(관리공단 밑 주차장)에서 리조트행 무료셔틀버스 이용 (설천
  에서는 1일 9회, 구천동에서는 1일 10여 회)
* 서울 종합운동장(2,9호선 종합운동장역 7번 출구 밖 150m 지점)에서 덕유산리조트행 정기셔
  틀버스가 1일 1회 떠난다. (비수기에는 주말만 운행하며 자세한 운행 정보는 덕유산리조트
  홈페이지 참조)

★ 덕유산리조트 곤도라 관람 정보 (2017년 1월 기준)
* 이용요금 : 어른 편도 11,000원, 왕복 15,000원 / 어린이 편도 7,700원, 왕복 11,000원 (리
  조트 회원은 30% 할인)
* 곤도라 설천봉행은 대체로 9시부터 17:30분까지, 리조트행은 16:30~18시까지 운행한다. 4계
  절마다 운행시간이 다르므로 자세한 운행시간은 덕유산리조트 홈페이지 곤도라 부분을 참조.
* 덕유산리조트 설천하우스 소재지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 1287-5 (만선로 185)
* 덕유산리조트 문의 ☎ 063-322-9000
* 덕유산리조트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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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길목에서 찾아간 무주 적상산 나들이 ~~~ (적상호, 적상산성, 안국사...)

 


' 무주 적상산 겨울 나들이 '


▲  적상산 산정에 자리한 적상호

▲  안국사 극락전

▲  적상산사고

 


 

늦가을이 무심히 저물고 겨울이 한참 이빨을 드러내던 11월 마지막 주말에 전북 무주(茂
朱) 땅을 찾았다. 이번에는 멀리 남쪽에서 오는 일행들과 함께 하기로 했는데 서로 본거
지가 극과 극이다보니 무주터미널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도봉동 집을 나서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대전
행 고속버스를 몸을 실었다. 거의 2시간을 달려 대전(大田)에 도착, 새롭게 몸단장을 벌
인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를 타고 다시 50분을 내달려 무주의 관문인 무주
터미널에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10분 정도 대기했다가 남쪽에서 온 본대에 합류했다.

이번 무주 기행의 첫 답사지는 적상산이다. 무주시외터미널에서 동남쪽으로 6분 정도 달
리면
적상산 입구인데, 여기서 적상산으로 인도하는 서쪽 길로 들어서면 북창리(北倉里)
가 나온다. 그 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서서히 흥분을 드러내고 강원도나 함경도 고갯길에
버금가는 꼬불꼬불 고갯길로 변신하여 정신을 쏙 빼놓는다.

적상산은 단풍이 매우 곱다고 하는데, 가을이 떠나간 시점이라 단풍 구경은 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건 겨울 제국(帝國)에 설설 기고 있는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 뿐, 푸른 기운
을 가진 존재는 소나무와 전나무 밖에는 없었다.


 

♠  적상산(赤裳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적상산의 지도를 크게 바꿔놓은 산정호수, 적상호(赤裳湖)

구절양장(九折羊腸) 같은 적상산 고갯길을 어느 정도 오르면 적상터널이 나온다. 적상산의 콧
대를 피하고자 산 밑에 판 땅굴로 그 터널을 나와 세 굽이를 지나면 푸른 호수인 적상호가 나
오고 길은 비로소 진정을 되찾는다.

적상산 850m 고지에 마치 백두산(白頭山)의 천지(天池)처럼 들어앉은 적상호는 무주양수발전소
상부댐을 만들면서 조성된 인공 호수이다. 여기서 양수발전소(揚水發電所)란 심야에 남는 전기
로 밑(하부댐)에 있는 물을 위쪽 저수지로 올리고, 필요한 시기에 그 물을 떨어트려 전기를 빚
는 수력발전의 일종이다.
이 발전소는 1988년 4월에 착공해 1995년 5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시설용량은 60만kw이며, 적
상호를 담고 있는 상부댐은 높이 60.7m, 길이 287m, 저수량은 372만㎥이다.

수력발전은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멀쩡한 땅을 수장시켜야 되는 단점이 있다. 계곡을 막아 둑을
쌓고 호수를 만들면서 안국사와 적상산사고터는 제자리를 강제로 내줘야했고, 많은 숲이 억지
로 희생당해야 했다. 또한 호수와 발전소 관리를 위해 적상산의 피부를 깎아 구불구불 도로를
내면서 적상산 정상 밑까지 건방지게 차량들이 올라가게 되었다. 그 덕분에 오로지 두 발로 힘
겹게 올라야 했던 적상산 접근이 보다 쉬워졌고, 적상호는 이곳의 또 다른 볼거리로 부각되었
으며, 양수발전을 통해 무주 지역의 전기를 책임지는 중요한 곳이 되었다.

우리의 버스는 적상호를 지나 안국사 방면 서쪽 길을 조금 오르다가 900m 고지 주차장에서 육
중한 바퀴를 접었다. 절까지 버스 접근은 가능하나 차를 돌릴 공간이 없어서 멈춘 것이다. 허
나 그곳까지는 거리도 매우 가깝고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경사 또한 그리 각박하지 않아 어려운 것은 없다.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안국사 일주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  적상호에서 안국사로 올라가는 숲길

▲  안국사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절의 정문으로 앞에는 '적상산 안국사'라 쓰인 현판이, 뒤에는 '국중제일정토도량(國
中第一淨土道場)'이라 쓰인 현판이 자리해 이곳의 이름과 성격을 말해준다. 절 이름이 쓰인 현
판은 1992년에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이 썼으며, 국중제일정토도량 현판은 1995년 여산 권
갑석(如山 權甲石)이 쓴 것으로 다들 필체에 힘이 넘쳐난다.
절을 옮기면서 새로 만든 현판과 달리 문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는 고색의 기운이 약간 느껴져
문이 좀 오래된 존재임을 살짝 속삭여준다.


▲  일주문의 뒷모습

     ◀  일주문 '국중제일정토도량' 현판
이 현판은 무학대사가 안국사를 두고 '국중(國
中) 제일의 길지(吉地)'라 찬양한 설화를 참조
하여 쓴 것으로 안국(安國)과 정토(淨土)를 꿈
꾸는 안국사의 바램이 담겨져 있다.


▲  적상산성(赤裳山城) - 사적 146호

일주문 바로 옆에는 키 작은 돌담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져있다. 그를 알리는 안내문이 없었
다면 단순히 돌담으로 여겨 넘어가기 쉬울 정도인데, 그는 국가 지정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
는 적상산의 두툼한 갑옷, 적상산성이다.

적상산성은 적상산 고지대의 분지(盆地)를 둘러싸고 있는 절벽과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전체 길이는 8,143m, 성곽 높이는 거의 1~2m이다. 경사가 각박한 적상산의 정상 주변은
절벽에 둘러싸인 곳이라 그 절벽을 활용하다보니 성곽의 높이는 대부분 낮다. 물론 장대

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인해 무너진 것도 한몫 한다. 현재는 안국사 주변과 서문터 등
일부만 남아있으며, 문은 동/서/남/북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북문과 서문, 남문터만 남았다. 성
내부 면적은 약 214,976㎡에 이른다.

이 산성은 예전에는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축성된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설명을 했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하여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
輿地勝覽)','여지승람(輿地勝覽)'을 살펴보니 고려 초기인 거란의 2차 침공(1010년) 이전부터
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바로 거란(요)의 2차 침공 시절, 거란의 군주인 성종(成宗)은 몸소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힘겹게 점령했다. 고려 군주인 현종(顯宗)은 급히 나
주(羅州)로 몽진을 갔는데, 거란군의 남하를 우려한 인근 백성들이 이곳으로 피신을 온 것이다.
그러니 빠르면 신라 후기, 늦어도 고려 초에 성이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는 최영(崔瑩)장군이 이곳을 지나면서 산성을 보수하여 창고를 세
울 것을 건의했으며, 조선 세종 때는 최윤덕(崔潤德)도 이곳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허나 그들
의 건의는 허공의 메아리로 끝났고, 이후 다시금 주목을 받은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光海君)은 우리의 친척 민족인 여진족의 후금(後金)이 나날이 강성
해지자 압록강과 가까운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에 있던 실록과 선원록(璿源錄)의 안위가 걱정
이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던 중, 순안어사(巡按御史) 최현(崔晛)과 무주현감 이
유경(李有慶)이 바로 적상산을 추천했다.
하여 사관(史官)을 보내 적상산을 살피게 했는데, 적상산이 꽤 괜찮다는 사관의 긍정적인 보고
로 1614년 실록전을 짓고, 1618년 선조실록을 넣으면서 사고(史庫)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
상에서는 이 사고를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라 부른다.

사고를 수비하고자 헝클어진 적상산성을 손질해 4개의 문을 두었고, 성 안에 호국사(護國寺)를
세워 안국사와 함께 지키도록 했다. 사고 외에도 군기고(軍器庫), 사각(史閣), 대별관(大別館)
등의 시설을 두었다. 허나 1910년 이후 적상산사고는 폐지되었고 산성까지 버려지게 되면서 그
이후는 지금의 모습이 잘 말해준다.

산성을 1바퀴 둘러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겠지만 시간 관계상 안국사 주변의 성곽만 둘러봤다.

▲  적상산성의 이모저모

우리가 찾은 적상산(1034m)은 무주군 적상면에 위치한다. 산의 이름인 적상(赤裳)은 붉은 치마
를 뜻하는데, 산의 모습은 장쾌한 남성적인 모습이지만 이름은 의외로 여성적이다. 이는 산을
이루고 있는 붉은 피부의 바위가 마치 붉은 치마를 입은 것처럼 보여 유래되었다고 하며, 봄의
진달래, 가을의 단풍이 붉은 치마를 두룬 것처럼 보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적상산 정상부는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주봉(主峯)은 기봉으로 2번째 봉우리인 향
로봉(1025m)과 마주보고 있고, 정상 일대가 토산(土山)이라 숲이 매우 삼삼하다. 산정은 평탄
하지만 산허리까지는 거의 절벽이며, 물이 매우 풍부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요
새로 이용되었다.

산중에는 안국사와 호국사비, 적상산사고터, 적상산성 등의 문화유적을 비롯해 장도바위와 장
군바위, 처마바위, 천일폭포, 송대폭포, 안렴대(按廉臺) 등의 자연 명소가 있으며, 이중 장도
바위는 최영 장군이 적상산을 오르던 중, 바위가 건방지게 길을 막자 장도(長刀)로 내리쳐 길
을 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있다.
그리고 안렴대는 고려 초에 거란이 침공했을 때 3도 안렴사(按廉使)가 피난을 왔다고 해서 그
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하며, 정묘호란 때 안국사 승려 상훈이 혼자서 사고에 있던 조선
왕조실록을 이곳 석굴로 옮겨 잠시 보관하기도 했다.

대자연이 빚은 천연의 요새이자 걸작품인 적상산은 인간의 오만으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 앞
에 강제로 성형수술을 당하는 시련을 겪는다. 바로 1988년 정상부에 무주양수발전소가 들어선
것이다. 그 발전소로 인하여 호수와 댐이 생기면서 산정의 모습은 크게 변하였고, 호수 주변에
도로를 내고 댐 동북쪽에 적상산휴게소와 전망대까지 마구 닦여지면서 적지 않은 혹을 달게 되
었다.


 

♠  적상산의 오랜 터줏대감, 적상산 사고를 지켰던 수호사찰
~ 적상산 안국사(安國寺)

▲  청하루(淸霞樓) 현판 - 송석 이도익(松石 李都翼)이 1859년에 쓴 것이다.

적상산 정상 남쪽 950m 고지에 자리한 안국사는 금산사(金山寺)의 말사(末寺)로 적상산의 유일
한 고찰(古刹)이다. 적성지(赤城誌)와 적상산안국사기(赤裳山安國寺記)에 따르면 1277년 월인(
月印)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산성과 함께 중건했는데, 이때 성 안에
는 고경사(高境寺)와 상원사(上元寺), 중원사(中元寺) 등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 후기 창건설 외에도 조선 태조 때 적상산성을 쌓으면서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어느 것
이 정답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게다가 창건 이후 16세기까지 마땅한 내력도
남기지 못해 창건 시기에 대해 다소 의구심을 품게 한다.

안국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임진왜란 시절에 승병(僧兵)
이 주둔했다고 하며, 1614년 적상산사고를 설치하면서 안국사 승려 덕웅(德雄)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적상산성을 중수하고 사고를 수비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지자 마침 사고를 지킬 승병이 하나도 없어 안국사 승려 상훈
(尙訓)이 혼자서 사고의 서적을 바리바리 싸들고 안렴대에 있는 석굴로 옮겨 보관하기도 했다.
1643년 적상산을 둘러본 이조판서 이직(李稙)은 산성의 수비가 허술하고 승병이 모두 흩어지고
없으며, 창고에 군량도 없는 등, 수비의 어려운 실정을 보고하고 승군 모집을 위해 사찰 건립
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1643년 왕명으로 호국사(護國寺)를 지어 안국사를 보조하도록 했다. 이때 전라감사 윤명
은(尹鳴殷)이 자신의 녹봉을 털어 공사비로 댔고, 승려 각명(覺明)이 일을 맡았으며 무주현감
심헌(沈憲)이 감독을 했다. 호국사란 이름은 삼장법사(三藏法師)의 경축기도(經祝祈禱)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고를 이웃한 인연으로 조정(朝廷)에서는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수호한다는 의미로 '
안국사'와 '호국사'란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 절도 그 기대에
부응코자 열심히 사고를 지켰고, 그로 인해 적상산사고는 조선 사고 중 유일하게 전쟁과 화재
를 만나지 않은 사고가 되었다.

1728년에는 괘불을 제작하였고, 1758년에는 감로탱을, 1772년에는 극락전 후불탱을 조성했으며, 1788년에 범종을 봉안해 제법 절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1864년 적상산사고를 방문한 이면광(李
冕光)의 건의로 안국사를 중수했는데 그 기념으로 안국사중수기(重修記) 현판을 남겼다. 그 현
판에
'나라에서 선사 양각(璿史兩閣)을 지어 왕조실록과 왕실의 계보를 비장(秘藏)하고 승병들로 하
여금 수호하게 하였으므로 족히 믿고 근심할 것이 없다. 이 절의 이름을 안국(安國)이라고 붙
인 것과 이 절에 소속된 작은 절을 호국(護國)이라 한 것은 대개 뜻이 있는 것이다. 안국사라
고 이름한 것은 비록 작은 절이기는 하지만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큰일을 하는 절이기
때문이다'
란 구절이 있어 조선 조정의 안국사에 대한 높은 신뢰도와 절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1872년에는 사고의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改修)했고, 1902년 사고와 안국사를 크게 중수했다.
이때 안국사는 무주에서 가장 큰 절로 성장했으며, 1910년에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
전과 산신각을 두고 그 앞에 청하루와 승방(僧房)을 세웠다.
1910년 이후 적상산사고가 왜정에 의해 폐쇄되면서 당시 안국사 주지인 친일파 승려 이철허(李
澈虛)가 선원각을 경내로 가져와서 절 건물로 부려먹었다. 1949년 여순(麗順)반란 사건 때 공
비패거리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호국사가 전소되어 비석만 남게 되었으며, 1968년 주지 유정환(
柳正煥)이 선원각을 천불전으로 손질하고 퇴락된 청하루를 철거했다.

1988년이 되자 안국사는 강제로 정든 터전을 버려야 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바로 무주양수발
전소 상부댐 건설로 안국사와 적상산사고터가 수몰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땅한 자
리를 물색하다가 적상산 정상 남쪽에 자리한 호국사터로 결정하고 1991년부터 이전 공사에 들
어가 1993년에 마무리를 지었다.
1994년 범종각을 새로 지었고, 1996년에는 3도(전북, 경북, 경남) 접경지에 위치한 이유를 들
어 대화합의 범종을 조성했다. 그리고 1998년에는 주지 원행이 동양 여러 나라에서 수집한 불
상과 불교 유물을 전시하고자 성보박물관을 만들어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또한 복
지 사업에도 손을 뻗쳐 노인복지시설인 '무우수마을'을 세웠고, 무주와 영동 지역 병원과 자매
결연을 맺어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비록 개발의 칼질에 제자리를 잃기는 했지만 구름이 창문으로 들어와 방문으로 나갈 정도로 하
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좋다. 마치 천상(天上) 세계에서 속세를 굽어보는 기분이랄까? 또
한 속세(俗世)와도 길게 거리를 두고 있어 아무리 끈질긴 번뇌(煩惱)라 한들 쫓아오다 졸도할
정도의 첩첩하고 고적한 산골이다. 차량으로 오면 접근은 다소 편하지만 길이 험해 운전에 각
별한 주의가 필요하며, 대중교통으로 갈 경우에는 내창마을에서 2시간 3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영산회괘불도를 비롯하여 극락전과 호국사비, 목조아미타3
존불상, 범종 등 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그외에 조선 후기 승탑 4기와 선원각을 개
조한 천불전, 1730년에 만든 괘불대(掛佛臺) 등이 있어 고색의 향기는 풍부하며, 법당인 극락
전을 비롯해 삼성각, 지장전, 청하루, 천불전, 성보박물관, 안국선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경내를 조촐히 메우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넓은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을 하면 호국사란 이름의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은 안국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옛 가람을 기억하고자 세운 것으로 호국사는 정확히 주
차장 일대에 있었다.
여기서 왼쪽 숲을 살펴보면 조그만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 집은 호국사의 유일한 흔
적인 호국사비(전북 지방유형문화재 85호)를 머금은 비각이다. 경내를 다 둘러보고 나올 때 보
려고 아껴두었으나 그것이 그만 화근이 되어 깜박 지나치고 말았지. 어느 곳이든 그곳에 서린
볼거리는 다 봐야 직성이 풀리는데, 이렇게 중요한 것을 놓쳤으니 다음에 또 와야 되는 구실을
만들고 말았다. 이렇게 벽지인 곳은 다시는 오지 않아도 서운치 않을 정도로 싹 돌아봐야 되는
데 또 올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 물론 인연이 또 닿으면 알아서 찾아오겠지만 말이다.

주차장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청하루가 자리해 있다. 정
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누각 건물로 수몰된 옛터에 있던 누각을 1992년에 옮긴 것이다.
1층에는 사무실과 불교용품점이 있으며, 정면에 걸린 현판은 송석 이도익이 쓴 명필이다.
그리고 지나치기는 쉽지만 청하루 안에 옛 안국사의 현판이 여럿 있다. 1627년 상훈이 사고의
서적을 옮긴 일화를 4자로 요약한 '석실비장(石室秘藏)'과 '청하루(淸霞樓)','극락전(極樂殿)
','산신각(山神閣)' 등이 있으며, 석실비장은 1902년 절을 중수했을 때 유인철이 상훈의 이야
기를 듣고 쓴 것이다.


▲  안국사 성보박물관

청하루를 들어서면 하늘 높이 자리한 안국사 경내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왼쪽을 보면 성보박
물관이 있는데, 보통 성보박물관하면 그 절의 오래된 문화유산이나 부근 절에서 맡긴 문화유산
을 전시하기 마련이나 이곳은 그와는 관련이 없는 다른 나라의 불교 유물이 주류를 이룬다.

이곳에 담긴 유물은 주지인 원행이 15년 간 여러 불교국가를 여행하면서 수집하거나 기증 받은
것들로 이들을 한데 모아 1998년에 조촐하게 성보박물관을 열었다. 중원대륙과 왜열도, 인도,
티벳, 월남, 라오스, 파키스탄 등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다양한 시대의 불상, 불화, 불
교 유물, 다기류 등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어 조그만 세계불교박물관을 이룬다.


▲  성보박물관 중앙에 자리한 철불 - 중원대륙에서 가져온 불상인 듯 하다.
불상은 수입산이지만 그가 앉은 금동대좌는 국산이다.

▲  동양 불교국가에서 가져온 온갖 불상과 불화들 ▼



▲  안국사 범종각(梵鍾閣)

성보박물관 맞은편에 자리한 범종각은 1994년에 원행이 지은 것으로 조선 후기 동종을 비롯하
여 1996년에 만든 대화합의 범종과 운판(雲版)까지 담겨져 있다. 대화합의 범종은 덕유산을 둘
러싼 3도 중생들의 대화합을 바라는 뜻에서 만든 것으로 범종각 현판은 일중(一中)거사가 썼다.

▲  대화합의 범종

▲  안국사 범종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88호

우람한 대화합의 범종과 달리 그 곁에 있는 범종은 매우 조그만하여 눈길이 잠깐 가다가 만다.
보통 사찰의 종은 크기에 상관없이 허공에 달려 있지만 이건 허공은 커녕 땅바닥에 나무 막대
기를 깔고 앉아있어 안그래도 작은 종, 더 작아 보일 수 밖에 없다. 허나 작은 고추가 맵다고
겉모습은 저래도 이래뵈도 안국사의 오랜 보물의 하나이다. 오히려 대화합의 범종보다 더 눈길
을 줘야 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 범종은 1788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85cm, 구경 78cm의 작은 종이다. 4개의 유곽과 보살상
이 배치되어 있고, 종을 매달던 용뉴는 아예 사라져 바닥에 나무 막대기를 깔아 그를 받치고
있다. 그의 몸통에는 '乾隆五十三年(건륭53년) 戊申三月日(무신 3월일) 赤裳山安國寺大鍾(적상
산 안국사 대종)'과 '改鑄重(개주중)'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의 탄생 시기를 알려준다.


▲  피부가 바랜 오래된 솥

극락전 뜨락에는 그 옛날 안국사 공양간에서 모락모락 밥과 국의 연기를 피어내던 솥이 놓여져
있다. 겉으로 보면 일광욕을 하며 팔자 좋게 보이지만 현대화된 공양간에 밀려 이제는 바깥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역시 범종처럼 나무 막대기에 의지해 자리해 있는데,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피부가 완전 붉게 변했다.
절을 품은 산도 붉은 피부의 바위, 혹은 진달래와 단풍으로 산이 온통 붉다고 하여 적상산인데
솥 역시 완전히 붉게 변했으니 그 역시 적상산의 기운을 받은 모양이다. 안국사의 오랜 유물인
만큼 낡은 피부를 깨끗히 닦아주고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남은 여생 편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외국산 불상보다는 오랜 세월 안국사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나고 이곳의
음식을 책임진 저 솥이 더 가치가 높지 않을까?


 

♠  안국사 극락전 주변

▲  안국사 극락전(極樂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42호  
(앞 계단 오른쪽에 남근석이 있음)

청하루를 지나면 바로 정면에 계단을 늘어뜨리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극락전과 시선이 마주
친다. 극락전 뜨락에는 빛바랜 솥과 아주 기가 막히게 생긴 남근석이 서 있어 잠시 얼굴을 붉
히게 하는데, 보통 절로 가는 길목이나 외곽에 남근석을 둔 경우는 봤어도 법당 앞에 둔 것은
처음 본다. 절의 승려나 신도의 상당수를 이루었을 여자 신도들이 법당에 들어가면서 무슨 생
각을 했을까~~?? 절에서 아예 파계를 장려하는 듯한 인상이다.
허나 저 돌이 원래부터 안국사에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절을 이곳으로 옮길 때 주변
에서 수습한 것이 아닐까 여겨지는데, 왜 하필이면 법당 앞에 두었는지 그저 어리둥절하다. 성
기신앙의 일원이긴 해도 경내 핵심에 두기에는 좀 거시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중으로 구축된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
물이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199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잘 다듬어진 자연석 축대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썼으며, 정면에는 꽃빗살문을 칸마
다 두었다. 정면과 좌측은 4분합이나 우측은 2분합으로 협칸의 구조가 특이하며 공포를 촘촘히
박은 다포(多包) 양식으로 외부는 3출목(出目)으로 되어있으나 내부는 4출목이다. 그리고 우측
측면을 보면 단청이 채색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난 설화가 전한다.


▲  건물 우측에 단청을 하다만 부분이 있다. (사진 중앙 부분)

극락전을 지은 안국사 주지는 단청 불사를 어찌해야 될지 고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얀 도포를 입은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그리겠다고 하였다. 이에 기뻐한 주지승이 쾌히 승낙
하자 노인은
'내가 100일 동안 단청을 칠할테니 극락전에 하얀 천막을 치고 물 1그릇만 넣어주시오. 그리고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
신신당부를 했다.

범상치 않은 노인의 말에 '명심할테니 걱정 마시오!!' 답을 하고는 궁금증을 억지로 죽여가며
불사가 잘 마무리되기를 기도했다. 허나 겨우 하루를 앞둔 99일째가 되자 주지는 궁금해서 도
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딱 하루만 참으면 정말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인데 더 참다가는 제명에
못죽어 사리만 잔뜩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 살짝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지.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천막 안에 노인은 온데간데 없고, 하얀 학이 입에 붓을 물고 단청을 하
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크게 놀란 주지의 인기척에 학은 붓을 내던지고 사라졌다. 그
래서 윗사진처럼 건물 우측의 평방과 창방 일부가 단청이 되지 않은 것이며, 그 남아있는 부분
이 딱 하루치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전설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와 부안 내소사(來蘇寺)에도 전하고 있다. 모두
일정 기간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며 단청이나 그림을 그리다가 딱 하루를 앞두고
훔쳐보는 바람에 그림을 그리던 새가 도망가 일부가 채색되지 않았다는 스토리로 말이다. 이런
전설은 일을 맡은 사람의 개인 문제나 절 내부 문제로 도중에 중단된 것을 그럴싸하게 설화로
빚은 것으로 여겨진다.
무위사 같은 경우는 관음조(觀音鳥)가 그렸다고 하는데, 안국사 주지는 학을 좋아했는지 학으
로 대체했으며 예전에는 극락전에 학 그림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채색되지 않은 달랑 하루
거리의 분량을 그냥 두고 있는 것은 그 설화의 증거물로 내세우는 동시에 학으로 상징되는 노
인이 그림을 그려준 절이라며 속세에 요란하게 홍보하려는 일종의 꼼수로 봐야 될 것이다.
어차피 전체도 아닌 일부에 불과하니 그냥 둬도 무리는 없겠지. 그래서 1% 부족한 모습으로 있
게 된 것이다. 안좋은 이유로 단청이 중단된 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은 안국사 주지의 지혜가 참
으로 돋보인다.


▲  극락전 불단을 장식한 목조아미타3존불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01호

화려하기 그지없는 극락전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세지보살(勢至
菩薩)이 아미타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나무로 만들어 개금을 한 것으로 불상은 매우 조
그만하지만 나름 미소를 띄우느라 애를 쓴다. 이들 3존불의 중심인 아미타여래는 통견의(通肩
衣)를 입고 있고, 소매자락이 발가락을 덮고 있는데, 높이 67cm, 무릎폭 43.5cm, 어깨폭 30cm
내외이다.

좌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은 옷주름이 본존불과 비슷하며, 머리에 쓴 보관(寶冠) 밑에 검은 머리
칼을 살짝 표현했는데, 귓바퀴를 1번 감아내려 어깨 위로 흘러내리게 했다. 그의 높이는 63cm,
무릎폭 35.5cm, 어깨폭 26cm 내외이다.
우측에 자리한 세지보살은 관음보살과 손모양이 대칭적이고 불의형(佛衣形) 법의를 입고 있는
데, 대체로 관음보살과 비슷한 모습이다. 높이는 61cm, 무릎폭 36.5cm, 어깨폭 24cm 정도이다.

이들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약간 구부정한 자세와 굵고
짧아진 목, 납작해진 턱과 각진 얼굴, 오똑한 코와 미소,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주름, 사실적
표현의 손 등으로 볼 때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들 뒤로 화사한 색채
의 후불탱이 병풍처럼 든든히 자리해 있는데 원래는 1772년에 제작된 탱화가 있었으나 관리소
홀로 그만 도난을 당해 1994년에 혜원(慧園)이 그린 아미타후불탱으로 땜빵한 것이다. 법당의
후불탱화면 꽤나 보는 눈이 많아 만지기도 어려울텐데 그것을 극복하고 탱화를 떼어가다니 참
대단한 도둑이 아닐 수 없다. 혹 신이 실수로 가져간 것은 아닐까?

  ◀  극락전 뒷쪽, 괘불이 담긴 길쭉한 상자
극락전 내부에는 1965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
幀)과 1995년에 만든 청동금고(靑銅金鼓)가
다. 그리고 불단 뒷쪽으로 가면 길쭉한 나무

자가 눈에 들어올 것인데, 과연 무엇이 들었

래 상자가 저래도 긴 것일까?

그 안에는 바로 18세기에 제작된 영산회괘불도
(靈山會掛佛圖)가 잠들어 있다. 괘불은 석가탄
신일이나 영산재(靈山齋) 등 아주 특별한 날에
만 만날 수 있는 귀한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이
불가능하다.
천하에 200곳이 넘는 오래된 절집을 찾아다닌
본인도 괘불을 본 횟수는 겨우 10번도 되지를
않는다. 그만큼 만나기가 힘든 존재로 1년에
고작 한손에 꼽을 정도로 외출을 하며 대부분
의 시간은 괘불함이나 금고 등에 꼼짝없이 갇
혀있어야 된다. 그것이 괘불의 운명이다.

안국사 영산회괘불도는 보물 1267호로 석가가 설법을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 주위로 다보
여래(多寶如來)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등이 자리해 있다. 괘
불의 길이는 10.75m, 폭은 7.2m의 큰 그림으로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발원하고자 만들
었으며, 18세기 중반에 경남 고성 운흥사(雲興寺)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비구 의겸(義謙)을 비
롯해 5명의 승려가 제작했다.
제작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화기(畵記)에 '?? 6년'이란 기록이 있는데, 의겸이 활동하던 시
절에 '?? 6년'이라 하면 1728년(옹정 6년)과 1741년(건륭 6년) 밖에는 없으며, 요즘은 1728년
을 제작 시기로 삼고 있다. 1792년과 1809년 그림을 수리했으며, 운흥사 괘불과 부안 개암사(
開巖寺) 영산회괘불탱과 대체로 비슷하다.

이 괘불은 가뭄 때 밖으로 꺼내 기우제를 올리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가뭄이 심
하면 추가적으로 외출을 시켜주었으나 요즘은 석가탄신일과 특정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외출을
안시켜 준다.
비록 괘불은 못봤지만 괘불이 담긴 괘불함은 극락전에 보관하고 있어 그 함에 기도를 하는 사
람도 많으며, 높이 10m가 넘는 그 큰 그림이 과연 저 안에 다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함이 작아
보인다. (괘불함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안국사 천불전(千佛殿)

극락전 우측에는 천불전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다른 불전과 달리 조금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원래 적상산사고의 선원각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적상산사고가 버려진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선원각을 친일파 주지 이철허가 경내로 가져와서
사찰 건물로 부려먹었으며 나중에 천불전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사고 가운데 유일하게 화마(火
魔)의 희롱을 받지 않은 건물로 바로 앞에서 보면 1층으로 보이지만 엄연한 2층 구조이며, 밑
은 창고, 위는 천불전으로 쓰이고 있다. 정면 가운데 칸에 강암 송성용이 쓴 천불전 현판이 걸
려있고 좌우 측면에는 내부에 채광을 공급하는 교창이 있다.

내부에는 1995년에 조성된 석가불과 문수/보현보살을 비롯해 석고로 만든 하얀 피부의 조그만
불상 1,000기가 자리해 장관을 이룬다. 유일하게 남은 사고 건물이지만 변형이 심해 지정문화
재의 지위까지는 얻지 못했다.


◀  안국사 지장전(地藏殿)

극락전 옆에 자리한 지장전은 1992년에 원행이
세운 것으로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도명존자(道
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안국사 삼성각(三聖閣)

천불전 뒤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2년에 원행이 옮겨 세웠으며, 우리 귀에 매우 익은 산신(山神)과 칠
성(七星),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보금자리로 그중 칠성을 담은 칠성탱은 1899년 김천 봉
곡사(鳳谷寺)의 부속암자인 극락암(極樂庵)에서 우송 상수(友松 爽洙)가 조성한 것이다. 그가
그린 칠성탱은 무주읍내 북쪽에 있는 북고사(北固寺)에도 있다.


▲  삼성각에 봉안된 칠성탱  (1899년에 우송 상수가 그린 것임)

▲  안국사 부도군(浮屠群)

안국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호국사비와 천불전 내부를 살피지 못한 아쉬움과 다음 답사지에 대
한 기대를 나란히 품으며 절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한다. 그 2개를 못봤으니 다음에 또 와야되
는 빌미를 만든 것이다.

다음 답사지는 적상산사고인데, 사고로 정신없이 내려가다가 중간에 오른쪽으로 빠지는 산길을
만났다. 일행 몇몇이 그 산길로 들어가길래 '그곳에 뭐가 있나' 싶어 따라 들어가니 그 숲속에
는 안국사의 숨겨진 보물인 승탑(僧塔, 부도) 4기가 푸른 이끼 옷을 걸치며 우리를 맞이한다.

이들 승탑은 석종형(石鐘形) 탑으로 탑신(塔身)에 고맙게도 조성 시기와 탑의 주인이 적혀있다.
모두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이중 가장 오래된 것은 팔각원당형의 지붕 옥개석을 지닌 청운당
사리탑과 그 옆에 머리 부분이 여의두문(如意頭紋)의 보륜(寶輪)으로 이루어진 청운당 봉골탑(
奉骨塔)으로 1717년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 꼭대기에 연화보주를 단 승탑은 보운당(寶雲堂)의 넋이 서린 사정탑(思正塔)으
로 1753년에 조성되었으며, 그 옆의 것은 월인당(月印堂)의 영골탑(靈骨塔)으로 1750년에 세워
졌다.

승탑들이 모두 높이 1.3m 미만의 조그만 탑으로 불교의 쇠퇴기이다 보니 신라나 고려처럼 장엄
한 부도는 기대하기 힘들다. 그나마 승탑 주인의 제자들이 정성을 다해 저 정도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딱히 이정표가 없어 지나치기 쉬우며, 이들도 원래 수몰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  호젓한 분위기의 안국사 숲길 (안국사에서 속세 방향)


 

♠  조선 왕실의 보물 창고, 조선 후기 주요 사고(史庫)의 하나였던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 전북 지방기념물 88호

적상호 서쪽 언덕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2층 기와집 2동이 적상호를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근
래에 복원된 적상산사고로 원래는 적상호에 있었다. 양수발전소 건립으로 이들 보금자리가 강
제로 묻히게 되자 사고터 주춧돌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와 선원각과 실록각을 복원했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 광해군 시절, 우리의 옛 땅인 만주에 또아리를 튼 후금(後金)이 나날이 강
성해지면서 북방에 자리한 묘향산사고에 담긴 왕실 서적과 보물의 안위가 크게 위협을 받자 다
른 장소로 실록을 옮겨야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마침 순안어사 최현과 무주현감 이유경이 적
상산을 강하게 추천하자 사관을 보내 현지를 살펴보게 했는데, 아주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 그
래서 즉시 적상산성을 수리하고 1614년 실록전을 세우면서 적상산사고가 탄생했다. 1618년 9월
묘향산에 있던 실록을 이곳으로 옮기기 시작하여 1633년 마무리를 지었다.

1641년에는 선원각을 세워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면서 완전한 사고가 된다. 1636년 병자호란
으로 강화도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의 실록이 손실되자. 이를 보완하고자 적상산 사고에 담긴
실록을 참조하여 작업을 했다. 이때 3도 유생 300명이 동원되었다.
적상산사고를 수호하고자 1643년 왕명으로 호국사를 세워 안국사와 함께 사고 수비에 전념토록
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안국사 승려 상훈이 사고의 서적을 안렴대로 대피시키기도 했다.

1872년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며, 1902년에 다시 개수를 벌였으나 1910년 왜정이 적상산
사고에 담긴 모든 서적을 서울로 가져가면서 사고는 방치되고 만다. 선원각은 안국사 주지 이
철허가 경내로 가져가 불당으로 부리면서 살아남았으나 나머지 건물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만큼 완전하게 방치된 것이다.

사고에는 선원각, 실록전을 기본으로 하여 승장청(僧將廳), 군기고, 화약고, 수사당, 문루 등
이 있었으며, 그 흔적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1992년 무주양수발전소 건립으로 그 자리마저 빼앗
기게 된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흔적을 옮겼고, 1997년에 선원각, 1998년에 실록각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적상산사고는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은 '
적상산사고지 유구(遺構)'이다.

선원각과 실록각은 2층식 창고 형태로 지어졌다. 1층은 허공에 떠 있는 형태로 기둥이 2층을
받치고 있으며, 2층이 바로 서고이다. 이는 혹시나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의 방문이나 습기
의 침투, 이 땅을 망치고 있는 쥐들의 공격을 막고 서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함이다. 이
런 식의 창고는 고구려(高句麗)의 창고 건물인 부경에서 비롯되었는데, 우리나라는 물론 왜열
도까지 전파된 국제적인 건축 양식이다.

건물 2층에는 조선왕조실록과 사고, 무주 고을에 관한 설명문과 디오라마, 모형도, 유물 등이
담겨져 있는데, 관람을 원할 경우 적상산사고를 관리하는 문화재해설사한테 요청하면 된다. 건
물은 모두 새것이라 고색의 기운이 피어나기에는 아직도 멀었지만 이곳에서 푸른 물결의 적상
호가 바라보여 호수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에 마음이 시원해진다.

▲  선원각(璿源閣)

▲  실록각(實錄閣)

▲  실록각 1층 마루

▲  적상산사고 정문

적상산사고를 간단하게 둘러보고 버스에 올라타 적상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무주머루와인동굴
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글의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한다.

※ 적상산 (적상산성, 안국사, 적상산사고)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무주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광주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6~7회, 전주에서는 1일 14회 떠난다.
* 영동역(경부선)에서 무주행 군내버스가 1일 12회 운행한다.
② 현지교통
* 무주터미널에서 내창행 군내버스 이용 (1일 2회, 11:40, 16:30분)  내창에서 적상산사고까지
  도보 2시간 10분 (무주터미널에서 안국사까지 택시로 접근 가능)
* 무주터미널에서 적상, 안성, 장계, 안천 방면 군내버스(20~50분 간격)를 타고 사천리(서창탐
  방지원센터 입구)에서 하차. 적상산 안국사까지 등산 약 2시간 20분 소요 (사천리→서창탐방
  지원센터→장도바위→서문터→향로봉→안국사
  <등산 출입 시간(서창탐방지원센터 기준) 4~10월은 4~15시, 11~3월은 5~14시, 그 외에 시간
  은 출입 불가>
③ 승용차 (안국사까지 접근 가능)
* 대전~통영고속도로 → 무주나들목을 나와서 무주방면 우회전 → 무주1교차로에서 우회전 →
  적상산입구에서 우회전 → 북창리 → 적상호 → 적상산 안국사

* 적상산 주차비 : 승용차 2,000~5,000원, 버스 6,000~7,500원 (안국사 주차장은 무료)
* 안국사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산184-1
(☎ 063-322-6162)
* 적상산성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괴목리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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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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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6년 12월 1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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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반도 제일의 경승지, 아름다운 전나무숲길을 간직한 ~~~ 부안 내소사



' 부안 내소사(來蘇寺) 봄나들이 '

▲  내소사 대웅보전


봄이 나날이 흥해가던 4월의 끝 무렵에 멀리 남쪽에서 온 일행들과 부안군(扶安郡) 변산
에 자리한 내소사를 찾았다.
그날 오전에 군산 비응도(飛鷹島)에서 월명유람선을 타고 선유도(仙遊島)와 고군산군도(
古群山群島)를 1바퀴 둘러보고 비응도 인근에서 해물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바다의 만리장성이라 찬양받는 새만금방조제를 건너는데, 정말 징그
럽게 길긴 긴 모양이다. 아무리 가도가도 그 끝이 나오질 않는 것이다. 그저 서해바다와
둑방길만 지겹게 보일 뿐이다.
그렇게 방조제를 건너 부안군 땅으로 진입, 격포와 상록해수욕장을 지나 변산 남쪽에 자
리한 내소사 주차장에서 도착했다.

내소사는 주말 상춘객들로 선유도 못지 않은 높은 탐방밀도를 보인다. 이곳은 이미 예전
에 2번이나 발걸음을 했던 곳으로 슬슬 지겨울 법도 하겠지만, 나의 마음을 제대로 훔친
명소의 하나로 그곳을 모두 외울 정도로 들락거려도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  내소사 입문 (전나무숲길)

▲  내소사 일주문(一柱門)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가는 길은 다른 유명 사찰이나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식당과 가게, 민박
집들이 즐비하다. 절 밑에 형성된 마을을 3자로 사하촌(寺下村)이라고 하는데, 이 마을도 내소
사의 덕을 보는 일종의 사하촌이자 관광단지이다. 식당들은 산채비빔밥과 도토리묵, 파전, 향토
음식 등 갖은 음식과 술을 내밀며 관광객들을 진하게 유혹한다. 마치 절을 목전에 둔 속세의 마
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먹거리의 유혹을 휼륭하게 물리치고 관광단지를 지나면 내소사가 일주문을 내밀며 중생을 맞는
다. 이 문은 내소사의 정문으로 속세와 절의 경계를 가르는 역할이다.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
는 문짝은 없으며 허공처럼 뻥 뚫려 있어 부처나 관음보살 누님, 대자연 형님의 마음처럼 누구
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사람들이 일주문의 절반만 닮았다면 이 세상은 참 아름다울텐데, 신
(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고 있는 존재라 아마 안될 것이다.
내소사 일주문은 1982년에 승려 원조가 3평의 팔작지붕 건물로 만든 것으로 1984년 우암혜산이
단청을 칠하고 지금의 모습으로 고쳤다. 문 정면에는 '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라 쓰인
현판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는데, 글씨가 차분하면서도 맵시가 있어 보인다. 이 글씨는
1983년에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縣)이 쓴 것이다.

일주문 바로 너머에는 그리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중생들의 발길을 강제로 붙잡으며 그들의 호
주머니를 탐낸다. 이곳 입장료는 무려 3,000원씩이나 한다. (성인 기준)


▲  일주문 동쪽에 자리한 재미난 모습의
장승들 - 이보다 익살스러운 장승이
천하에 어디에 또 있을까? 허나 얼굴이
붉어서 밤에 본다면 조금 소름 끼칠 것 같다.

 

  700년 묵은 느티나무의 위엄
(할아버지 당산나무)

일주문 남쪽에는 하늘까지 좁게 보일 정도로 장대한 느티나무 1그루가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
운다. 그는 7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나무로 할아버지 당산나무라 불리며, 옛날부터 내소사와 입
암마을(내소사 남쪽 마을)로부터 끈끈한 숭상을 받고 있다. 반면 그의 배우자라 할 수 있는 할
머니 당산나무는 내소사 경내에 있는데, 나이가 무려 1,000년을 헤아린다.

이 느티나무에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당산제(堂山祭)가 열리고 있는데, 나무의 700년 나이를
통해 대략 고려 후기부터 제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 당산제는 오랫동안 내소사에서 제사를
주관했다는 것이 큰 특징으로 이 땅에 들어온 불교가 나름 붙임성을 발휘하며 토속신앙을 받아
들여 생긴 한국식 불교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이렇게 절에서 직접 제사를 지내다 보니 다른 당
산제와는 그 형식과 의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제사와 굿도 불교 의식을 따르고 있
다. 그래서 당산제의 이름도 절의 이름을 딴 '내소사 당산제'였다.

반면 입암마을은 내소사와 별도로 당산제를 지내는 웃뜸 서낭당이 있었다. 허나 1940년대부터
당산제를 지내지 않으면서 그 서낭당은 버려졌으며, 이후 내소사당산제를 마을 당산제로 삼아
내소사와 함께 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1990년 이후 내소사에서 마을로 당산제를 넘기면서 '입암
당산제'로 명칭이 갈렸고, 할아버지 당산을 마을의 주신(主神)으로 받들게 되었다. 제를 지낼
때는 내소사에서 승려와 여러 제물을 보내 당산제를 돕는다.
이렇게 사연이 깊은 뿌리 깊은 나무이건만 아직까지도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 등의 적당한
지정문화재 지위를 얻지 못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  전나무로 자욱한 내소사의 자랑, 전나무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내소사의 명물인 전나무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
정된 이 숲길은 천왕문까지 600m 정도 이어져 있는데,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전나무숲길에 버
금갈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봄의 신선한 내음이 가득 깃들여져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안구와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불어넣으며, 전나무가 앞다투어 베푼 산내음에 그 끈질긴
번뇌조차 제대로 털리면서 정신을 잠시나마 맑게 해준다.

절로 들어서는 길목에 이렇게 아름다운 숲길을 내민 것은 속세(俗世)
의 온갖 번뇌와 기운을 자
연의 힘을 빌려 모두 털고자 함이다. 즉 숲길을 거닐면서 속세의 망상을 숲의 기운에 의지하여
싹 지우고 절에 임하라는 주문이 담긴 것이다.


▲  보기만해도 안구가 싹 정화되는 전나무숲길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나만 두고두고 누리면 안될까?

▲  아무리 걸어도 싫증이란 것이 나지 않는 전나무숲길

나무숲길에 무한 감동을 받으며 그렇게 걷다보면 보이지 않던 내소사 경내가 천왕문을 시작으
로 슬슬 모습을 비춘다. 별로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천왕문이 바로 앞
에 있는 것이다. 체감거리는 실제 거리의 1/3정도인 200m 정도 되려나? 그만큼 숲길이 짧아 조
금은 아쉽기도 하다.

▲  네모난 연못, 연지(蓮池)
여름이 되면 연꽃의 즐거운 향연이 전나무
숲길을 더욱 아름답게 수식해줄 것이다.

▲  내소사 사적비(事蹟碑, 왼쪽)와 해안당
대종사(海眼堂大宗師, 오른쪽) 행적비


▲  천왕문 직전의 전나무숲길

▲  내소사 천왕문(天王門)

전나무숲길이 다한 곳에는 두툼한 모습의 천왕문이 경내를 가리고 서 있다. 이 문은 부처와 절
의 수호신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1986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세웠다. 현판은 일주문 현
판을 썼던 일중 김충현의 글씨이고, 주련(柱聯)에 쓰인 글귀는 해안당의 오도송(悟道頌)이다.

▲  표정이 유난히도 날카롭고 무서운 사천왕의 위엄
왼쪽부터 용을 쥐어든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보탑을 든 광목천왕(廣目天王), 비파 연주에
신이 난 다문천왕(多聞天王), 무인의 기가 넘치는 증장천왕(增長天王)

▲  옥계수가 담긴 내소사 수각(水閣)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갈증에 잠긴 목 좀 축이고 가라며 동그런 석조(石槽)가 중생을
맞는다. 절에서는 이 석조를 수각이라 부르며 예우하는데, 대자연이 내소사를 찾은 중생들에게
아낌없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봄가뭄이 극심한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 잎이 정교하게 표현되었고, 물로 넘치는 석조를 보니 술이 가득 담긴 연
꽃 무늬의 술잔을 보는 듯 하다.


▲  1,000년 묵은 느티나무(할머니 당산나무) - 부안군 보호수 9-15-2호

수각과 보종각 사이에는 내소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가 일주문 남
쪽에 있는 700년 묵은 느티나무인 할아버지 당산나무의 배우자로 할머니 당산나무라 불린다.
나이는 무려 1,000년을 헤아린다고 하며,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은 끝에
높이 20m, 둘레 7.5m의 거대한 나무로 자라났다. 내소사의 오랜 내력을 귀뜀해주는 존재로 굵직
한 기둥과 줄기에는 덧없이 깃든 오랜 세월이 잔뜩 묻어난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내소사의 내력(來歷)을 간단히 짚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 변산반도(邊山半島) 굴지의 고찰, 능가산 내소사(來蘇寺) - 전북 지방기념물 78호
변산 능가산(관음봉)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내소사는 백제 무왕(武王) 시절인 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맞다면 천하에 몇 남지 않은 백제 후기 사찰
이 된다. 허나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어 아쉽게도 신빙성은 적으며, 그나마 오래된
존재가 할머니 당산나무라 불리는 1,000년 묵은 느티나무가 고작이라 길게 잡으면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창건 당시에는 2개의 크고 작은 소래사(蘇來寺)가 있었는데, 대소래사(大蘇來寺)는 내소
사 서쪽 원암마을 뒷쪽 아차봉 밑에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관련 기록이 없어 어떻게 돌아갔는
지는 알 수 없으나 1887년 부안군에서 발행한 부안지(扶安誌)에 1870년 경오년(庚午年)에 산불
로 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소소래사(小蘇來寺)는 지금의 내소사로 대소래사와 마찬가지로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
소상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다만 고려시대에 조성된 3층석탑이 서 있고, 1414년에 조성된 봉
래루가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소래사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고려와 조
선 때도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33년에
청민선사(靑旻禪師)가 중건했는데, 이때 내소사의 제일 가는 보물인 대웅보전이 탄생했다.
1865년(고종 2년)에는 관해선사(觀海禪師)와 만허선사(萬虛禪師)가 중수하고, 1983년에 크게 중
창하여 지금에 이른다.
옛날 변산에는 내소사 외에도 선계사(仙溪寺), 실상사(實相寺), 청림사(靑林寺)등의 절이 있었
다고 하며, 이들 절을 변산 4대 명찰로 꼽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내소사만 달랑 남았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설들이 있으나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
람(東國輿地勝覽)에 소래사로 나온 것으로 봐서 그때까지는 옛 이름을 쓰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1870년 대소래사가 사라진 이후, 내소사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660년에 신라(新羅)와 함께 백제(百濟)를 공격한 당나라 장수 소정
방(蘇定方)이 이 절에 시주를 했는데, 그런 연유로 소정방이 왔다는 절, 즉 내소사로 이름이 바
뀌었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전혀 근거도 없고, 말도 되지 않으며, 소래사(蘇來寺)나 내소사(來
蘇寺)나 글 순서만 다를 뿐, 한자와 뜻은 모두 같다.

경내에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설선당, 삼성각, 무설당, 봉래루,
보종각, 봉래선원, 관음전, 벽안당 등 20동에 가까운 건물이 있으며, 청련암(淸蓮庵)과 지장암
(地藏庵) 등의 부속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고려동종, 영산회괘불탱(보물 1268호) 등 보물 3점과 3층석탑, 설
선당과 요사 등 지방문화재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백지묵서묘법연화경(보물 278호)도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서울 조계사(曹溪寺)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절 전
체는 전북 지방기념물 78호로 지정되었다.

다른 굴지의 고찰과 달리 소장문화유산이 매우 적은 편이고 절의 역사도 조선 중기 이후를 빼고
는 상당수 흐릿하지만 그에 비해 인지도는 상당히 높아 변산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변산
의 대명사와 같은 명소로 해인사(海印寺)나 순천 송광사(松廣寺)만큼이나 속세에 널리 알려졌다
. 휴일이나 피서철이 되면 찾는 중생의 발길이 전나무숲길을 가득 메우며, 대웅보전에 서린 백
의관음보살의 눈동자와 목침이 하나 덜 입혀진 부분을 찾느라 부산하다.

변산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너무 잦아 고적한 멋은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늘씬
하게 솟아 하늘을 앞다투어 가린 전나무숲을 비롯하여 삼삼한 숲과 계곡에 둘러싸여 있어 그런
데로 산사의 향기를 우려내고 있다.

※ 내소사 찾아가기 (2016년 9월 기준)
① 부안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부안행 고속버스가 5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부안행 직행버스가 1일 2회, 동서울터미널에서는 1일 6회 떠난다.
* 인천, 고양, 성남, 광주에서 부안행 직행버스가 1일 2~6회 정도 다닌다.
* 전주, 익산, 군산에서 부안행 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부안터미널에서 내소사행 군내버스가 1일 19회 정도 다니며, 직행버스가 1일 1회 다닌다.
* 정읍터미널에서 내소사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다닌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해안고속도로 → 줄포나들목을 나와서 줄포 방면 710번 지방도 → 줄포우회도로 → 영전4
   거리에서 좌회전 → 곰소 → 석포3거리에서 우회전 → 내소사 주차장

★ 내소사 관람정보
* 관람료 - 어른(대학생 포함) 3,000원 (30인 이상 단체 2,500원) / 청소년 1,500원(단체 1,000
  원) / 어린이 500원(단체 400원)
* 관람시간 : 일출 시간부터~일몰 시간까지
* 주차비(1시간 기준) - 소형차 1,000원 / 중형차 1,500원 / 대형차 2,000원
* 내소사에서는 자유롭게 머물다가는 '휴식형 템플스테이'와 사찰 체험과 여러 이벤트를 겯드린
  '프로그램형 템플스테이'를 운영한다. 휴식형은 3박 4일까지 머물 수 있으며, 새벽예불과 저
  녁예불, 공양시간, 취침시간(21시)을 꼭 지켜줘야 된다. 1박 2일은 5만원으로 하루 추가될 때
  마다 5만원씩 더 받아먹는다.
  프로그램형은 '참 나를 찾아서(2박 3일)', '트래킹 템플(2박 3일)','연밭체험, 연꽃차 만들기
  (2박 3일)','달빛 맞이 추석템플스테이(3박 4일)' 등이 있으며, 3시간만 머무는 '템플라이프'
  도 있다.
  템플스테이 신청은 내소사 홈페이지 템플스테이 부분을 참조하면 되며, 자세한 일정과 참가비
  , 일정 관련 문의는 홈페이지 참조 (문의 ☎ 063-583-3035)
* 소재지 -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내소사로 243 ☎ 063-583-7281)
* 내소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웅보전 문짝에 피어난 꽃무늬창살


 

♠  내소사 보종각, 봉래루, 설선당 주변

▲  고려 동종의 보금자리 - 보종각(寶鐘閣)

보종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할머니 당산나무 다
음으로 오래된 동종의 보금자리이다. 그래서 보배로운 종의 건물이라 하여 범종각(梵鍾閣)도 아
닌 보종각이란 낯선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범종각은 별도로 따로 있음)

이 건물은 정확히 언제 지어졌는지 귀신도 알 수 없으나 1880년경 정읍 태인(泰仁)에 있던 것을
부안군 상서면 김상기의 집으로 넘어가 누각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다시 만화동의 구병서가 구
입하여 사용했으며, 1965년 내소사 주지 원경(圓鏡)이 구입해 이곳으로 가져왔다. 처음에는 대
웅보전 앞마당에 서남향(西南向)으로 세웠으나 우암 혜산이 198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개조를
하면서 그 안에 고려 동종을 품게 하였다. 보종각 현판은 내소사 현판 담당이나 다름없는 일중
김충현이 쓴 것으로 동종을 의식했는지 글씨에 기품이 넘쳐 보인다.

▲  보종각에 소중히 안긴 내소사 동종(銅鐘) - 보물 277호

내소사 동종은 1222년(고려 고종 9년)에 제작된 것으로 내소사에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자연물 제외) 허나 이 종은 원래부터 이곳 출신이 아닌 변산 4대 명찰(名刹)의 하나였
던 청림사(靑林寺)의 것으로 그 절이 어느 순간 파괴되어 사라지고 종은 절터에 묻혀 생사마저
몰랐던 것을 1853년(철종 4년)에 김성규(金性圭)를 비롯한 동네 주민들이 발견한 것이다.

종이 발견되었을 당시, 아무리 종을 쳐도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종을 깨운 이가
그것을 갖기로 하고 각자 종을 흔들어 깨웠는데, 내소사 승려가 종을 치자 비로소 아름다운 종
소리가 울렸다고 하며, 그런 연유로 내소사에 안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동종에 대한
내소사의 소유를 정당화하고자 내소사에서 꾸민 이야기로 정황이야 어쨌든 이 종이 이곳에 오게
됨으로써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되었다.

이 동종은 높이가 103cm, 입지름 67cm로 좀 작은 편이다. 항아리를 엎은 듯한 고복형으로 종신(
鐘身)에는 상대와 하대에 모란당초문(牡丹唐草紋)이 새겨져 있고, 어깨 부분에는 이중여의두문(
二重如意頭紋)의 입상화문대(立狀花紋帶)가 배치되어 있다. 종의 정상부에는 주형(珠形)이 달린
용통(甬筒)을 두고 큰 머리의 용뉴가 있는데, 모두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종신에는 당초문의 띠 밑에 중판연화문(重瓣蓮華紋)으로 된 유곽(乳廓) 4개를 두르고 유곽 안에
당초문을 새겼으며,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표현하였다. 또 유곽 아래에는 12개의 연잎으로 장식
된 당좌(撞座)가 원좌(圓座) 밖에 있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인 종신 중앙부에는 꽃송이 위로 구
름을 표현하고 구름 위에 삼존상(三尊像)을 새겼다.

3존상 가운데 본존상은 연꽃 위에 앉아있고, 협시상(脇侍像)은 서 있으며, 모두 동그런 두광(頭
光)을 갖추었다. 그리고 구름 위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보개(寶蓋)가 있어 고려시대 범종 문양의
특징과 화려한 장엄미를 드러낸다. 또한 당좌와 당좌 사이에 종의 신상에 대한 3종류의 명문(銘
文)이 새겨져 있어 1222년에 새겨지고 1853년 이곳으로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내소사 동종은 고려 후기의 특징인 입상화문대를 갖추고 있고, 표면의 묘사 수법과 함께 정교하
고 사실적인 주조기술로 우리나라 종의 양식을 잘 계승한 것으로 꼽힌다. 그래서 일찍이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  내소사 봉래루(蓬萊樓)

보종각과 할머니 당산나무에서 대웅보전으로 가려면 2층 규모의 봉래루를 지나야 된다. (그 옆
구리로 지나도 됨)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누각으로 강당의 역할과 법당으로 인도하는 문의 역
할을 도맡고 있는데, 1414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1823년 만세루(萬歲樓)란 이름으
로 중건되었으며, 봉래루란 현판을 별도로 달아 별칭으로 불리다가 1926년 이후 봉래루로 이름
이 완전 갈린 듯 싶다. 그와 같은 내용은 최남선(崔南善)의 '심춘순례(尋春巡禮)'에 등장하며,
실상사(實相寺)의 누각으로 1415년에 옮겨왔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봉래루 내부에는 고려 중기 대표적인 시인으로 묘청(妙淸)의 난(1095년) 때 김부식(金富軾) 패
거리에서 처단된 정지상(鄭知常)의 시를 비롯해 그의 시운(詩韻)을 차운(次韻)한 시가 현판으로
걸려있으며, 내소사만세루중건기(1821년), 변산내소사사자암중창기(1856년), 변산내소사영세불
망기(1875년) 등 36개의 현판이 내부를 가득 수식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양반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대웅전까지 들어와 예불을 올렸는데, 이에 발
끈한 내소사 승려들이 양반의 그런 무례를 막고자 봉래루 1층을 50cm 정도 낮게 설계했다고 한
다. 그래서 어른 키가 닿을 정도로 높이가 낮아지자 양반들도 더 이상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했
다고 한다. 허나 근래에 중수를 하면서 기둥을 높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말
을 타고 들어올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  내소사 범종각(梵鍾閣)
봉래루 좌측에 자리한 범종각은 1995년 주지 철산이 만든 것으로 범종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四物)의 보금자리이다. 보종각에 이미 고려시대
동종이 있지만 그의 건강을 우려해 별도로 새 범종을 만들어 봉안했다.

▲  내소사 설선당(設禪堂)과 요사(寮舍)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대웅전 뜨락 좌측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인 설선당과 요사가 있다. 두 건물은 서로 별개이지만 서
로 이어져 있어 하나의 건물처럼 보인다.
이 건물은 1640년에 청민선사가 세운 것으로 전면 중앙에 설선당을 중심으로 4면을 건물로 연결
하고, 내부에 안마당을 두어 '回'자형의 특이한 모습을 이룬다. 그리고 안마당에는 우물이 닦여
져 있어 생활의 편리를 도모했다.

설선당은 중앙에 우물천정을 배치한 구조로 동쪽 측면 1칸은 마루이고, 전면의 남쪽 2칸은 난방
을 위한 부엌으로 거대한 아궁이가 있다. 주초석은 커다란 자연석을 그대로 썼고,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설치했다.
요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거의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승방(僧房
)과 공양간, 부엌으로 쓰이며, 2층은 마루로 식량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각 칸 벽면에 환기창
을 설치했다. 이들 건물은 서로 높낮이가 다르지만 인위적으로 땅을 평평하게 다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초석만을 사용했고, 설선당 동쪽과 요사 서쪽 서까래의 일부를 잘라내고 건물의 용마
루를 끼워 지붕을 서로 맞추어 세운 점이 눈길을 끈다.

설선당 중앙에 걸린 현판은 조선 후기 명필가(名筆家)로 크게 위엄을 떨친 이광사(李匡師, 1705
~1777)가 쓴 것이라고 한다.


▲  대웅전 뜨락 쪽으로 등을 보인 설선당의 뒷모습

▲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밥과 국 생각을 간절하게 만드는
설선당 무쇠솥의 위엄

▲  무쇠솥을 끓일 때 쓰이는 장작들
아직도 나무 장작으로 밥과 국을 끓인다.

▲  설선당 무쇠솥의 보금자리
저 안에는 들어가지 말자~~ 아직 무쇠솥은
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선당과 요사는 승려들의 생활공간이다 보니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다만 설선당 현
판 우측에 유일하게 활짝 열린 문이 있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밥과 국을 끓일 때 쓰는 커다란
무쇠솥과 그것을 흥분시킬 장작들이 놓여져 지금은 많이 사라진 옛 풍물시(風物詩)를 정겹게 자
아낸다. 무쇠솥 주변은 내소사가 문을 열어 속세에 공개를 하고 있는데, 보통 무쇠솥이나 가마
솥의 크기와 절의 규모가 정비례하기 때문에 그 사세(寺勢)도 과시할 겸, 건물 외곽에 있는 이
것을 공개하는 듯 싶다. 허나 그 이상은 들어갈 수 없다.


▲  설선당 앞뜰에 심어진 조그만 산수유 나무 - 살짝 봄을 머금고 있다.

◀  벽안당(碧眼堂)
대웅보전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건물로
1911년에 관해선사가 선실(禪室)로 세웠다.
2002년에 주지 진원이 새로 지어
지금은 회주실(會主室)로 쓰인다.

▲  내소사 조사당(祖師堂)

▲  조사당에 봉안된 여러 고승들의 진영

대웅보전 우측에는 내소사를 빛낸 여러 고승(高僧)의 진영(眞影)이 봉안된 조사당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삼성각이었으나 2010년 이후 조사당으로 이름을 갈고
고승의 진영을 봉안했으며, 삼성각에 봉안된 존재들은 뒤에 따로 마련된 거처로 모두 옮겨졌다.
이 건물은 1941년에 능파가 건립한 것으로 1986년과 1993년에 우암혜산이 보수했다.

▲  조사당 우측에 자리한 지장전(地藏殿)

▲  지장전 지장보살상과 도명존자(道明尊者)
, 무독귀왕(無毒鬼王)


조사당 우측에 자리한 지장전 자리에는 원래 1988년에 지어진 진화사(眞華舍)란 건물이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그 건물을 갈고 지장전을 새로 만들어 속세에 선보였는데, 예전에 삼성각이었
던 건물이 조사당으로 안면을 바꾸었고, 지장전이란 건물까지 새로 생겼으니 그저 낯설기만 하
다. 이곳에 온 것이 근 8년 만인데 절에서 돈을 꽤나 모아 이렇게 건물을 불린 모양이다.

지장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저승의 시왕(十王)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을 봉안한 건물이다.
모두 최근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이라 냄새 또한 향기롭다.


▲  삼성각 뒷쪽에 새로 자리를 마련한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기존 건물이 조사당으
로 전환되면서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다지고 그들의 거처를 닦았다. 건물은 이전 것
보다 많이 좁은 1칸 짜리로 조금 넓은 곳에 있다가 1칸 짜리에 그 3명이 들어가 앉으니 완전히
샛방살이가 따로 없을 것이다.


 

♠  내소사의 보물 창고, 대웅보전(大雄寶殿) - 보물 291호

전나무숲길은 내소사의 자랑이자 명물이 분명하다. 허나 그보다 더 비중이 큰 오래된 명물이 하
나 있다. 바로 이곳의 법당인 대웅보전(대웅전)이다. 내소사가 역사과 명성에 비해 소장 문화유
산이 빈약한 편인데, 대웅보전은 그 빈약함을 크게 극복할 정도로 이곳의 명물이자 꿀단지로 속
세에 널리 알려졌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1633년에 청민선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세워지던 시기부터 재미난 설화를 간
직하고 있어 많은 이들의 흥미를 끄는데, 특히 목침이 하나 덜 있다는 천정과 덜 그려졌다는 그
림, 눈이 따라온다는 백의관음보살 후불탱화, 문에 새겨진 꽃창살 등이 이 건물을 한층 윤이나
게 만든다. 게다가 조선 중기 대표적인 사찰 건축물로 비록 알록달록 단청(丹靑)은 지워지고 없
지만 이들 4가지의 명물로 인해 이미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자연석으로 쌓은 높은 석축 위에 낮은 기단과 별로 다듬지 않은 덤벙주초를 얹히고 그 위에 정
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대웅전을 세웠다.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多包) 양식으로 공포
가 외3출목과 내5출목으로 박혀있어 수려한 미를 더해주며, 단청이 말라버려 아쉬움은 있지만
덕분에 오래된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나 나름대로 반전을 선보인다.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을
두고 안기둥은 민흘림을 두었으며, 귀솟음과 안쏠림의 기법도 충실하여 안정감을 드러낸다.

내소사에서 다른 것은 다 흘리더라도 대웅보전과 그 내부는 꼭 둘러봐야 내소사에 갔다고 속세
에 자랑을 할 수 있다. 그만큼 이곳에서 대웅보전의 비중은 대단한 것이다. 전나무숲길이 유

하다고 하나 아직 대웅보전의 적수가 되지 못하며 대웅보전이 없는 내소사는 감히 상상할 수 조
차 없다. (전나무숲길이 없는 내소사는 그런데로 봐줄만은 함)


▲  대웅보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나란히 자리한다.


▲  대웅보전 우물천정

웅보전은 지구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꼭 내부를 둘러봐야 된다. 섬돌에 신발을 맡겨두고 안
으로 들어서 제일 먼저 고개를 위로 올려보자. 그럼 휘황찬란한 천정이 두 눈을 단단히 호강을
시킬 것이다. 천정 중앙에 자리한 우물천정은 48개 사각형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 모두 연
꽃과 극락조(極樂鳥) 등의 새가 새겨져 있다. 단청은 좀 퇴색하긴 했지만 그들의 아름다움에 전
혀 재를 뿌리지 않는다.
천정 대들보 위에는 대웅전을 지키는 용의 머리 2개가 있는데, 하나는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고
, 다른 용머리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다. 이들 외에도 10여 종의 악기가 천정과 대들보 사
이에 그려져 있는데, 천정을 장식하는 이들은 모두 부처의 설법(說法)을 듣고 기쁜 마음을 나타
내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한 바닷게 여러 마리를 두어 이곳이 해중사찰(海中寺刹)임을 상
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천정 전체를 조그만 불국토(佛國土)로 꾸민 셈이다.


▲  장엄하기 그지없는 대웅보전 천정
대들보에 몸을 기댄 용머리 하나가 물고기를 물고 아래를 굽어본다.


▲  공포(空包)덩어리로 정신이 없는 앞쪽 천정
이곳에 공포 목침이 하나 없다. 잘 살펴보기 바람~~


대웅보전에는 2가지의 재미난 설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 전설은 대웅전을 더욱
알차고 아름답게 꾸며주는 구수한 양념과 같은 존재이다.

 #  1번째 전설~~
청민선사가 쓰러진 내소사를 일으키고자 열심히 동분서주했던 1630년 어느 날, 청민은 어린 사
미승(沙彌僧)에게 '절 입구에 가면 목수(木手) 한 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야. 그를 모시고 오
너라'
분부를 내렸다.
사미는 그 분부에 따라 절 입구로 내려가니 초라한 옷차림의 남자 하나가 문 기둥에 기대어 꾸
벅 졸고 있는 것이다. 그가 대웅전을 짓고자 초청을 받은 목수였다. 사미는 한심하게 그를 바라
보며 잠에서 깨워 절로 데려왔다.

목수는 다음 날부터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대웅전을 지을 재목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
하게도 3년이 다 되도록 건물을 지을 생각은 안하고 나무란 나무는 죄다 목침만한 크기로 토막
을 내어 다듬는 것이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사미는 '3년 동안 목침만 깎고 앉았으니 법당은 언
제 짓나?'
한숨을 쉬며, 그 목수를 골려줄 생각으로 나무토막 하나를 몰래 집어와 감췄다.

그리고 며칠 뒤, 목수는 나무 토막 다듬는 일을 다 끝냈는지 다듬은 토막을 세기 시작했다. 그
런데 1번을 세고 나서 뭔가 이상했는지 계속해서 여러 번 세더니만 청민선사 앞에 고개를 떨구
고 눈물을 흘리며 '선사님 저는 아직 법당을 지을 인연이 안되나 봅니다 ㅠㅠ'

그 말을 들은 청민은 크게 놀라며 '법당을 지을 인연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목수 왈 '재목 하나를 덜 깎았습니다. 이런 주제에 어찌 법당을 짓는다고 하겠습니까?'
그 말을 엿듣던 사미는 '어떻게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았지?'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양심
에 가책을 느껴 숨겨두었던 나무 토막을 내밀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목수는 '부정탄 재목으
로 법당을 지을 수는 없지. 그것을 빼고 짓겠다' 그러며 그 토막을 빼놓은 채로 대웅전을 지었
다. 그래서 대웅전 천정에 목침이 있어야 될 자리 하나가 비어 있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대웅전을 지은 목수는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선사(大虎禪師)라고 한다. 하
지만 전설의 내용에 신화적인 요소가 별로 없어보여 아마도 실제로 있던 일을 그럴싸하게 다듬
어 전설화 시킨 모양이다. 대웅전을 만들고자 3년 동안 공포 목침과 꽃창살 하나하나까지 일일
이 공을 들여 만든 그 목수의 정성에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며, 그런 목수를 끝까지 믿고 격
려했던 청민선사 또한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런 대웅전의 전설을 통해 생각나는 말이 하나 있으니 바로 대기만성(大器晩成), 즉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이 건물 역시 대기만성(大器晩成)의 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
미승처럼 조급하게 굴지 않고, 천천히 정성을 들여 만든 결과 내소사의 꿀단지이자 조선 중/후
기 불교 건축물의 갑(甲)인 이 건물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  대웅보전 좌측 벽에 걸린 붉은 바탕의 지장탱

▲  온갖 호법신들로 정신이 없는 신중탱

 #  2번째 전설~~
대웅보전이 완성되자 목수는 벽화와 단청을 그릴 늙은 화공(畵工)을 추천했다. 그 화공은 청민
선사에게 단청을 그리는 100일 동안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 것을 지겹게 신신당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민은 법당을 봉쇄하여 승려들의 접근을 막았다.

한편 목침 사건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사미승은 궁금증이 일어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짓을 하는 것일까? 그래서 청민의 당부도 씹어버리고 99일 째 되는 날 또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몰래 법당으로 다가가 문틈으로 그 내부를 훔쳐본 것이다.
근데 이게 왠일인가? 화공은 온데간데 없고 황금빛 새 1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때 갑자기 천둥 같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황금새는 붓을 내던지고
종적을 감추었고 법당 앞에 쓰러진(혹은 죽어있는) 커다란 호랑이 앞에서 갑자기 청민선사가 법
문을 하고 있었다. '대호선사(大虎禪師)여! 생과 사가 둘이 아니거늘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가? 그대가 지은 이 법당은 영원히 법연을 이으리라~!' 법문을 마친 청민선사는 어디론지 사라
졌다고 한다.

어쨌든 사미 때문에 황금새는 하루를 남기고 사라지면서 대웅전 양쪽 도리에 그려져야 될 용과
선녀의 그림이 왼쪽 도리는 있고 오른쪽 도리에는 없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단청을 그린
새는 관음보살의 화현인 관음조(觀音鳥)라고 한다.
허나 이 전설은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마도 황금새로 비유된 화공이 채색(彩色)
을 하는 도중 갑작스런 일이나 절의 내부 사정으로 작업이 중단된 것이 아닐까 싶으며 혹은 화
공이 실수로 빠뜨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화공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실수도 가능
하다.

▲  대웅전 불단 뒷쪽에 그려진 거대한 백의관음보살상(白衣觀音菩薩像) ▼

기왕 대웅전에 두 발을 들였다면 불단 뒷쪽에도 한번 가보기 바란다. 시간도 얼마 안걸린다. 후
불 뒷쪽 벽을 간단하게 후불벽(後佛壁)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백의관음보살이 후불벽화(後佛壁
畵)로 장엄하게 자리하여 대웅전에서 놀란 두 눈을 또 놀라게 만든다.

이 백의관음보살은 대웅전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우리나라에 있는 후불벽화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대웅전 내부 그림을 그렸다는 황금새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전하는데, 자세히 보면
인간의 솜씨를 뛰어넘은 성스러운 모습 그 자체이다.
그의 눈을 애타게 바라보며 좌우로 왔다갔다 하면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인
다고 하는데,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사연을 아
는 이들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열심히 그 앞을 서성인다. 나도 오랜만에 그의 눈동자를 보며 열
심히 걸었으나 눈동자가 정말 따라오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쫓아오는 것 같기는
한데 정작 잘 살펴보면 그의 시선은 정면에 가 있다.

그가 그려진 후불벽은 좀 어둡고 좁은 공간이다. 왜 이런 법당의 후미진 뒷자리에 그려진 것일
까? 이를 두고 관음보살의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대웅전의
구조가 반야용선형(般若龍船形)으로 피안(彼岸)의 세계를 향해 앞으로 나가는 형태라서 그 배에
올라타지 못하고 어둠에서 허우적거리는 가련한 중생을 위해 관음보살 누님을 고해(苦海)를 향
해 있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세한 것은 그림을 그린 황금새나 화공만이 알 것이다. 어
쨌든 내소사의 명물 중 하나로 대웅전과 별개로 보물로 지정해도 손색은 없어 보인다. 전남 강
진에 있는 무위사(無爲寺) 극락전(極樂殿)의 벽화도 따로 구곱와 보물로 지정하지 않았던가..?


▲  대웅보전 문짝에 피어난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꽃창살무늬

대웅전 문짝에는 흑백모드의 연꽃과 국화꽃 등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 안그래도 놀란 눈을 더욱
안절부절 못하게 만든다. 이들은 문에 새겨진 꽃창살로 부처가 설법을 할 때 꽃이 우수수 떨어
진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정면 문짝마다 꽃들이 가득 수를 놓으니 완전 화사한 꽃밭이다. 비록
그들에게 입힌 색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 앞에 죄다 씻겨 내려가 원초적인 나무색이 되었지만 워
낙 정교하게 만들어진 탓에 그 수수함도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섬세하게 만들어진 꽃창살 꽃잎에 진짜 꽃들의 시샘이 대단했던 것일까? 그 주변에 자연산 꽃은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그들이 배가 아파 바람을 타고 멀리 가버린 모양이다.

 내소사3층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24호

대웅전 뜨락에는 고색이 드러난 조그만 3층석탑
이 서 있다. 그를 통해 내소사의 가람배치는 1
금당(金堂) 1탑 형식 임을 알 수 있는데, 정면
이 아닌 약간 우측에 자리해 있다.
이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
身)을 얹히고 다시 상륜(相輪)을 올린 형태로
고려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까 할머니 당산나무와 다른 곳에서 가져온 동종
을 빼면 이 탑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순수 내
소사의 유물인 셈이다.

탑의 높이는 3.46m, 폭 1.43m로 기단과 탑신부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경사가 급해 보
이는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
었고, 탑 꼭대기에는 노반(露盤)을 비롯해 크고
작은 석재 2개로 상륜부를 이루고 있다.


▲  내소사를 등지고 다시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가다 (천왕문 앞 숲길)

이렇게 간만에 발걸음을 한 내소사를 구석구석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일행들
도 대부분 빠져나간 상태라 서둘러 내소사를 등지며, 전나무숲길을 거쳐 다시 주차장으로 나왔
다. 통제구역을 빼고는 죄다 둘러본 터라 그렇게 아쉬울 것은 없다.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는 내소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속세로 나간다. 일행들과 나는 행
선지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내소사와 가까운 곰소에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들이 간 이후, 곰소정류장에서 부안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기다렸는데, 잠시 방심한 사이 바로
앞에서 차를 놓쳤다. 다음 차는 30분 뒤에나 있어서 마침 정류장에서 바퀴를 접고 쉬고 있는 정
읍행 직행버스(내소사에서 출발함)를 잡아탔다.
정읍까지 버스비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100원 단위까지 나왔는데 버스표를 파는 가게가 그
날 문을 닫았고, 내 수중에는 100원 단위의 잔돈이 없었다. 버스 운전사 역시 잔돈을 갖추지 못
해 잔돈을 준비하여 타라고 성화를 낸다. 마침 차 출발시간이 다되어 다음 것을 타겠다고 그러
니 기다릴테니 건너편 편의점에서 돈을 바꿔오라 그런다. 그래서 편의점에서 돈을 바꿔와 차비
를 내는 난리를 피우며, 그 버스를 타고 정읍(井邑)으로 나갔다.

정읍에서 서울로 가는 일반고속버스를 타고 미련없이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니 이렇게 하여 내소
사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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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와 새만금을 품은 고즈넉한 바닷가 절집,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 서해바다와 새만금을 품은 고즈넉한 절집, 김제 망해사 '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  새만금바람길



제국(帝國)의 부흥을 노리는 겨울의 잔여 세력과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이 팽
팽히 맞서던 3월의 어느 날, 호남의 곡창지대인 전북 김제(金堤)를 찾았다.

해가 아직 솟지도 않은 새벽 5시, 아침에 차디찬 공기를 가르며 집을 나섰다. 좌석은 불편
하지만 매우 저렴한 1호선 전철에 몸을 싣고 천안역까지 쭉 내려간 다음, 바로 목포(木浦)
행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10시 30분 정도에 김제역에 도착했다.

김제에 이르니 불청객 하나가 나의 미간을 잠시 찌푸려지게 했다. 바로 비이다. 비록 가랑
비 수준이라 애교로 넘길 만 했지만 나들이에 비가 오는 것만큼 짜증나는 것은 없다. 그날
기상청 정보에는 새벽에 비가 그치고 차차 맑아진다고 했으나 아직도 비가 오고 있으니 역
시나 기상청의 날씨 적중률은 아무도 못말린다.
비가 속히 그치길 고대하며 거전리로 가는 김제시내버스 19번을 타고 50여 분을 달려 망해
사에 발을 내리니 하늘도 그새 지쳤는지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않았다. 대신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본다.


 

♠  망해사 입문 (곽경렬 묘소, 망해사 부도)

▲  망해사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망해사 입구에서 절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니 푸른 소나무들이 숲길을 이루며
운치를 진하게 드러낸다. 망해사는 절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는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하
여 숲길이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나무가 베푼 솔내음이 바다내음과 어우러져 속세에서 염치없이 따라온 번뇌를 싹 털어가니 잠
시나마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허나 번뇌가 해보다 무거워 멀리 가지는 못하고 절 입구에 우
두커니 매달려 기다리고 있고, 사람들도 절을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속세(俗世)의 야성
을 되찾으니 해탈(解脫)은 정녕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소나무 숲길을 5분 정도 들어가니 길 바로 왼쪽에 애국지사 곽경렬(郭京烈)의 묘역이 나의 발길
을 멈추게 한다. 여기서 처음 들어보는 이름, 곽경렬, 그는 과연 누구일까?


▲  곽경렬 선생 묘역

곽경렬(郭京烈, 1901~1968)은 현풍곽씨로 김제 진봉면에서 태어났다. 봉수(奉守)란 이름도 가지
고 있으며, 1915년 박상진()과 채기중() 등이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
)을 통합해 대구(大邱)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자 불과 14세에 어린
나이로 가담해 독립 활동에 뛰어들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해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여러 혁명 기지를 확보하여
폭동을 일으켜 왜정(倭政)을 몰아낼 생각을 했다. 허나 친일 부호(富豪)들이 협조를 해주지 않
고 자신의 뱃대기만 불리자 친일 부호 처단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이에 곽경렬은 유장렬(
), 한훈() 등과 친일 반역자를 처리하는 행형부(行刑部)의 요원이 되어 전남 지역 친
일 부호를 여럿 처단했으며, 오성()의 헌병 분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했다.
1916년 왜경의 추격으로 잠시 만주로 넘어갔다가 다시 들어와 활동했으며, 1918년 친일파로 방
향을 바꾼 밥버러지 이종국()의 밀고로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드러나면서 다시 은신했다.
1919년에는 전북 옥구군 대야면에서 김영순의 지원을 받아 27원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계
속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가 1924년 왜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926년 전주지방
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29년 4월 1일 전주감옥에서 출소했으나 왜정의 잔인한 고문에 몸이 상하여 더 이상 독립활동
을 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거하고 말았다. 마음에서는 늘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으나 몸이 만신
창이가 되었으니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조용히 지내다가 1968년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1982년 이 땅의 정부는 그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어 뒤
늦게나마 그의 애국 정신을 기렸다. 또한 지원금을 보내 무덤에 상석(床石)과 비석(碑石), 망주
석(望柱石)을 갖추게 했으며, 봉분(封墳)에 호석(護石)을 둘렀다.

그의 묘역은 망해사로 가는 길목에 있으므로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잠시 발길을 멈추고 무덤 앞에
옷깃을 여미는 예를 보이기 바란다. 바로 길가에 있으니 시간도 크게 잡아먹지 않는다. 다만 무
덤 주변에 마땅한 안내문도 없고, 그냥 '애국지사 곽경렬 선생 묘소'임을 알리는 표석이 전부라
자세한 사연을 알지 못하여 지나치기가 쉽다.

▲  곽경렬 선생 묘소를 알리는 표석

▲  뒤에서 본 곽경렬 묘소

곽경렬 묘소 아랫쪽 산비탈에는 누런 옷을 입은 무덤들이 즐비하다. 이곳은 망해사의 사하촌(寺
下村)인 명동마을의 공동묘지로 절로 가는 길목에 이렇게 백성들의 무덤이 1~2기도 아니고 무더
기를 이루는 광경은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소나무 그늘 밑에 옹기종기 둥지를 튼 묘역이 은근
포근해 보이기도 한다.

곽경렬 묘소를 둘러보고 다시 2분 정도 길을 재촉하면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망해사에 이르게 되는데, 망해사를 외면하고 그냥 직진하면 새만금바람길이 펼쳐진다. 이
바람길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진봉면사무소에서 망해사를 거쳐 거전리로 이어지며, 생
각치도 못하게 보랏빛처럼 등장한 바람길에 군침이 가득 돌았지만 망해사를 목표로 하고 왔으니
일단 그곳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  고색의 때를 간직한 망해사 부도(浮屠) 4기

바람길과 갈리는 3거리에서 망해사로 내려가면 길 왼쪽에 제일 먼저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부도
4기를 만나게 된다.
이 부도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가운데가 볼록한 석종형(石鐘形)부도이다. 마치 대추처럼
생긴 것이 크기도 조촐하여 참 귀여운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청심당(淸心堂), 만화당(
萬化堂), 심월당(心月堂), 덕유당(德有堂) 등 망해사에서 활동했던 승려의 승탑(僧塔)이다. 이
중 1기는 너무 작아 포도알처럼 보이며, 나머지는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부도의 형태는 땅바닥
에 자연석을 활용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대추 모양의 탑신을 얹힌 다음, 모자처럼 생긴 지붕
돌을 올렸다.

▲  가까이서 본 부도 - 모자를 쓴 사람의 얼굴이나 허수아비 얼굴처럼 보인다.


▲  해우소 부근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새만금)
날씨가 흐리고 바다 안개가 자욱해 시야가 속세처럼 좋지 못하다.

▲  바닷가 사찰, 망해사 경내에 이르다.

부도군을 지나면 볼일을 보며 근심을 터는 해우소(解憂所)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철난간 너
머로 물줄기가 보이는데, 그가 바로 서해바다이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다 안개가 오
리무중(五里霧中)을 이루고 있어 시야가 완전 꽝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망해사의 내력을 살펴
보도록 하자.

※ 속세를 등지고 서해 바닷가에 자리한 고찰, 김제 망해사(望海寺)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절이 별처럼 많이 흩어져 있다. 허나 바닷가에 자리한 절은 정말 손에 꼽
을 정도인데, 서해바다 같은 경우에는 이곳 망해사가 유일하다. 물론 안면도(安眠島)에 있는 안
면암(安眠庵, ☞ 관련글 보러가기)도 바닷가에 있지만 내력이 무지 짧아 고찰에 끼지 못한다.
그외에 남해바다에는 여수 향일암(向日庵)이 있고, 동대해(東大海)에는 양양 낙산사(洛山寺)와
홍련암(紅蓮庵), 휴휴암(休休庵), 동해 감추사(甘湫寺), 부산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 등이 있
다.

망해사란 절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은 642년(의자왕 원년) 부설(浮雪)이 창건
했다고 전한다. (다른 자료에는 671년이라고 나옴) 허나 안타깝게도 신뢰도는 떨어지며, 754년
(경덕왕 23년)에 당나라 승려인 통장(通藏)법사<또는 중도법사(中道法師), 도장(道藏)법사>가
세웠다는 설도 있으나, 이름만 서로 다를 뿐 같은 인물로 여겨는 설도 있다. 허나 이 역시 확실
한 것은 아니다.

고려 때에는 1073년(문종 27년)에 심월(心月)대사가, 1371년에는 지각(知覺)선사가 중창했다고
하며,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절이 무너져 바다에 가라앉았다고 한
다. 그러다가 1624년 경(또는 1589년 경)에 김제 출신 고승인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절을 일으
켜 세웠다. 이때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악서전(낙서전)이 지어졌다.

진묵대사는 해인사(海印寺)의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했다는 이야기부터 물고기를 끓인 죽을 먹
고 대변을 보면서 그들을 환생시킨 이야기까지 정말 많은 이적(異蹟)과 재치를 남긴 고승으로
유명한데, 이곳에도 그의 설화가 하나 전해온다.
진묵이 망해사에고 머물 때, 바닷가에서 굴을 따서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놀라서 '왜
승려가 육식을 하시오?'
그러자 진묵이 '이것은 굴이 아니고 석화(石花)요' 답했다고 한다. 참
고로 굴을 석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어원이 진묵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만화(萬化, 1850~1919)와 심월(心月)이 절을 중창하고 불도를 닦았으며, 1915년
에 계산(桂山)이 중창했다. 1933년에는 주지 김정희가 악서전을 중수하고 보광명전(普光明殿)과
칠성각을 신축했으며, 1977년에 요사와 망해대를 짓고, 악서전, 보광명전을 중수했다.
1984년에는 기존의 보광명전과 칠성각을 부시고, 그 자리에 대웅전(大雄殿)을 지었는데, 나중에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1986년에는 악서전을 해체 복원하였고, 1989년에 범종각을 지었으며,
1991년에 극락전을 중수했다.

그리 넓지 않은 조촐한 크기의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악서전과 삼성각, 종
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요사를 빼고는 모두 바다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이 이곳의 특징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팽나무와 악서전이 있으며, 이들 모두 조선 중기 것이다.
(이전 시대 유물은 없음) 또한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바닷가에 있
어 섬들을 바라볼 수 있고, 서해 일몰을 구경할 수 있는 경승지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
다. (창건 시절부터 망해사로 불린 듯 함)

바닷가 언덕에 자리해 있어 파도 소리가 번뇌에 잠긴 정신을 깨워주며, 파도 소리와 풍경 소리,
발자국 소리가 전부인 고요한 절이다. 게다가 높이는 바다에 닿을 정도로 낮지만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조금은 서려있다. 또한 이곳에서 보는 저녁 일몰은 번뇌가 녹아버릴 정도로 대장관이
며, 바다에 점처럼 그려진 섬들까지 이곳의 풍경을 한몫 거들고 있으니 조물주(造物主)도 시샘
을 할 지경이다.
허나 1990년대부터 시작된 새만금 사업으로 망해사 앞바다는 크게 수정될 위기에 처했다. 새만
금 개발 계획을 보면 절 앞바다를 메워 거의 강처럼 만든다고 한다. 그리되면 바닷가 절이 아
닌 강가의 절이 되며 수평선 너머로 펼쳐진 너른 바다를 더 이상 못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절 풍경도 크게 손상될 것이고,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의 절의 이름마저 무색하게 된다. 인간들
의 무분별한 개발에 망해사의 경관은 물론이고 군산(群山)에서 김제 앞바다를 거쳐 부안(扶安)
에 이르는 바다와 갯뻘 대부분이 강제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망해사를 중심으로 서해바다를 향해 솟은 야트막한 산자락에 새만금바람길이 조성되었다. 절을
둘러보고 후식으로 바람길을 따라 서쪽인 심포항이나 동쪽인 진봉면사무소 방면으로 걷는 것도
괜찮다. 망해사가 거의 중간이고 길도 험하지 않아 1시간 반 정도면 충분히 서쪽 끝과 동쪽 끝
에 닿는다. 바다가 늘 옆에 있어 바다내음과 산내음에 마음마저 즐거워지는 길이다.

※ 김제 망해사 찾아가기 (2016년 3월 기준)
① 김제까지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광주역, 광주송정역, 목포역에서 호남선 열차
  를 타고 김제역 하차 (고속전철은 정차 안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김제행 고속버스가 1일 4회 떠나며, 동서울터미널에서
  김제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떠난다.
* 인천, 성남, 전주, 익산, 군산에서 김제행 직행버스 이용 (군산에서 올 경우에는 만경에서 내
  리면 편함)
② 현지 교통
* 김제역(김제역3거리 북쪽, 김제역1승강장)과 김제시외고속터미널 앞에서 김제시내버스 18, 19
  번을 타고 망해사 하차. 두 노선 합쳐서 1일 20회 운행(주말, 휴일에는 14회)하며 만경정류장
  을 경유한다.
* 망해사 정류장에서 망해사까지 도보 7~8분
③ 승용차 (경내에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공짜)
* 서해안고속도로 → 서김제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만경3거리 직진 → 만경4거리 좌회전 →
  진봉 → 망해사입구에서 우회전 → 망해사 (경내까지 진입 가능)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 (심포10길 94 ☎ 063-545-4356)

▲  망해사 악서전

▲  망해사 삼성각


 

♠  조촐한 망해사 둘러보기

▲  망해사 팽나무 - 전북 지방기념물 114호

경내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2그루 있다. 그중 하나가 요사 앞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조선
인조(또는 선조 때인 1589년) 때 진묵대사가 악서전을 짓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이는 대략 400년 정도가 된다. 나무의 높이는 17m, 가지 길이 동서 16.7m, 남북 17m이
며, 다른 팽나무는 악서전 옆에 있는 것으로 높이 21m, 가지 길이 동서 24.8m, 남북 22m이다.

이들 나무는 중창 기념으로 심은 것도 되지만 수시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봄마다 문을 두드리
는 황사 바람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절이 바닷가에 있어 일몰도 배부르게 볼 수 있고 경
관도 아름답지만 대신 바람과 태풍에는 무지 취약하기 때문이다.

팽나무는 겨울 제국에게 모든 걸 털리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채, 제국의 혹독한 시련을 말없
이 견디고 있다. 이제 봄도 상륙했으니 조만간 겨울의 망령에서 완전히 해방이 될 것이다.

▲  망해사 요사(寮舍)

▲  팽나무 쪽에서 본 요사

팽나무 부근에 자리한 요사는 1997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ㄱ'자 건물이다. 요사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공양간과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바다를 향한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1989년에 세워진 것으로 너른 바다에 은은한 종소리를 울려 보낸다. 요즘은 새만금 사
업으로 인해 잔뜩 격앙된 서해바다와 갯벌 식구, 사업을 찬성 또는 반대하는 사람들을 달래주느
라 종을 33번 쳐도 모자를 듯 싶다. 종은 계속 바다에 종소리를 실어보내고 싶건만 그 바다가
없어지면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


▲  망해사 극락전(極樂殿)

바다가 있는 북쪽을 굽어보는 극락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원래는 대웅전이었다. 1984년에 보광명
전과 칠성각을 부시고 그 자리에 만든 것으로 1991년에 중수했으며, 이후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
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3존불
이 봉안되어 극락전의 이름값을 하고 있으며, 지장보살과 지장시왕탱, 아미타후불탱, 진묵대사
의 초상 등이 건물 내부를 수식한다.


▲  망해사 악서전(樂西殿)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28호

극락전 옆에는 담장을 두른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악서전(낙서전)이 있
다. 악서전 옆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나 악서전을 바다 바람으로부터 지켜준다.

이 건물은 1624년(또는 1589년)에 진묵대사가 지은 것으로 전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ㄱ'자
형 팔작지붕 건물로 기둥 위에 공포를 얹힌 주심포(柱心包) 식이다. 4개의 주련이 걸려있으며,
단청(丹靑)이 칠해져 있으나 색이 많이 바랜 상태이다. 1933년과 1977년에 수리를 했으며, 1986
년에 해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내부에는 절을 거쳐간 승려들의 진영(眞影)과 석가3존불이
봉안된 불단이 있으며, 그 뒤에는 아미타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다.

악서전(발음에 따라 낙서전)이란 이름은 서해바다를 즐긴다는 뜻으로 자연 속에 있기를 좋아했
던 팔자 좋은 사대부(士大夫)의 집 이름 같다. 처음에는 승려의 거처 및 법당의 역할을 겸했으
나, 지금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수행처로 쓰여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그래서 키는 작
지만 토담을 주위로 둘렀고 사립문은 늘 닫혀있다.
기둥의 모양은 불규칙하고 자연의 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했으며, 건물 크기는 작지만 평온한 분
위기를 간직하여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허나 그 충동을 억제하고 담
장 너머에서 열나게 사진에 담는 선에서 악서전에 대한 욕구를 잠재웠다.


▲  낙서전과 팽나무, 범종각

▲  범종각 옆 샘터
망해사의 샘물이 치솟던 곳으로 범종각 옆에 땅을 파고 돌로 단단하게 석축을 엮어
샘터로 내려가는 계단을 마련했다. 현재는 겉모습만 남은 죽은 샘터로
우물 안에는 물이 가득 고여있으나 마실 수는 없다.
(절에서는 삼성각 부근에 별도의 물탱크를 두어 식수를 해결함)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삼성각이 둥지를 트며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이 건물은 제일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극락전 위쪽에 터를 다지고 계단을 내었다.
삼성각에는 산신탱과 독성탱,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들은 원래 칠성각에 있었으나 철거
되면서 오랫동안 극락전에 얹혀 살았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불화(佛畵)같은 이미지의 칠성탱

◀  여인처럼 다소곳이 앉아있는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그려진 독성탱


▲  망해사 뜨락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절에 들어왔을 때보다는 시야가 조금은 좋아졌지만 바다 건너는 여전히 안개에 감싸여 있다. 뜨
락과 해안 사이에는 텃밭을 닦아 여러 채소를 기르고 있으며, 바다 쪽에는 철책이 금줄처럼 둘
러져 있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일반인 출입 통제 구역임)


 

♠  새만금바람길 산책 (심포항, 거전리)

▲  새만금바람길 (망해사 부근)

해사를 25분 정도 둘러보고 새만금바람길로 이동했다. 새만금바람길은 진봉면사무소에서 진봉
방조제, 전선포, 망해사, 두곡서원 뒤쪽, 심포항, 봉화산봉수대를 거쳐 거전리로 이어지는 10km
의 산책로이다. 요즘 산이나 특정 지역을 도는 둘레길이 크게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이 바람길
역시 상큼하게 등장한 도보길 유행에 따라 김제시청에서 야심차게 닦은 것이다.

진봉방조제와 심포항 부분을 제외하고는 바닷가에 솟은 야트막한 산줄기의 산길이며, 길을 손질
하고 이정표를 설치했다. 그리고 새만금의 이름을 따서 새만금바람길이라 했으니 그 흔한 둘레
길 대신 바람길을 칭한 것이 이채롭다.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낯선 까닭에 사람들의 발길은 별로
없으나 차차 김제 지역의 꿀단지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럴 싹수가 충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바람길 거리가 10km라 좀 길어보이지만 산길의 소나무가 무성하고 서해바다도 바로 옆에 바라보
여 산내음과 바다내음에 마음이 상쾌해진다. 그런 길에 열중하여 걷다 보면 정말 거리가 모자를
정도이다. 소요시간은 2~3시간 정도로 약간 가파른 구간이 몇 있을 뿐, 그외에는 그냥 이 땅에
흔한 둘레길 수준이다.


▲  망해사 전망대

망해사는 바람길의 중간 정도로 나는 심포항 쪽으로 이동했다. 보도블록이 깔린 바람길로 접어
들면 곽경렬 선생의 추모비가 나오고, 그 비석을 지나면 흙길로 변신한다. 흙의 촉촉한 기운을
느끼며 걷다보면 곧 망해사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 전망대는 3층 규모로 꼭대기에 올라서면 새만금 개발로 혼돈한 서해바다가 두 눈에 바라보인
다. 그리 부담없이 지어진 전망대라 딱히 다른 시설은 없으며, 전망대에 올라 잠시 천하를 조망
(眺望)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솔내음이 진동하는 소나무 숲길이 펼쳐진다.


▲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서해바다

▲  모습을 드러낸 심포항(深浦港)

망해사에서 바람길을 따라 1.5km 정도 가면 심포항이 모습을 드러낸다. 심포항은 진봉면 심포리
(深浦里) 바닷가에 둥지를 튼 어촌으로 만경강(萬頃江) 최하류에 자리해 있다.
심포항은 한때 100여 척이 넘는 어선이 드나들던 큰 어항(漁港)으로 갯벌이 넓게 펼쳐져 조개의
집산지 및 체험 장소로 명성이 높았다. 허나 새만금 공사와 연안 어업의 쇠퇴로 인해 왕년의 모
습은 크게 꺾인 상태이며, 수천만 평을 자랑하던 갯벌은 새만금 개발 앞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
고, 포구 앞바다는 거의 담수호(淡水湖) 수준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어촌의 분위기가 남아있어 조개류나 생선 등을 구입할 수 있으며, 조개구이와 해
물칼국수, 해산류를 파는 식당과 민박 등의 숙박업소도 여럿 자리해 있다. 또한 심포항은 일몰(
日沒)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전국적인 일몰 명승지로 유명하다.


▲  한가로운 심포항 동쪽 부분

▲  바닷가에 몸을 기대며 단잠에 빠진 어선들
새만금 개발이 완료되면 저 어선들의 미래는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  심포항 중간 부분

▲  심포항 서쪽 부분

심포항은 주말 오후임에도 한가롭기 그지없다. 어항이 동서로 긴 편인데, 핵심은 바로 서쪽 부
분이다. 이곳에는 식당과 조그만 어시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인적이 드문 동쪽 부분과 달리 사
람들이 제법 몰려있었다. 식당에도 사람들이 절반 정도 차 있는 상태였고, 상인들과 가격을 흥
정하는 사람도 눈에 띈다.

심포항에서 바람길은 봉화산 산자락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길을 잘못 들었다. 괜히 바람길을
고집하다가 바람맞을까 염려되어 여기서 쿨하게 바람길을 접고 버스가 다니는 지평선로로 나왔
다. 심포항에서 지평선로 안하3거리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이다.
아직은 버스 시간이 있어서 거전리 방향으로 더 걷다가 거전리 입구인 길곤마을에서 길을 멈추
고 버스정류장에 들어가서 쉬었다.


▲  푸른 싹이 돋아난 김제평야의 위엄(거전리 방향)
올해 처음으로 본 푸른 싹들이다.

▲  풍년을 미리 예감하는 김제평야 (내륙 방향)

버스정류장에서 호남평야(湖南平野)의 일부인 김제평야를 보니 정말 넓기는 넓다. 지평선 너머
까지 끝없이 펼쳐져 마치 대륙의 농경지를 보는 듯 하다. 아직은 겨울 제국에서 해방되지 못한
평야 바깥 세상과 달리 평야에는 푸른 싹이 돋아나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이 올해 처음으
로 본 푸른 새싹이었다.
이제 봄이 턱밑까지 오긴 했구나 실감을 하고 있으려니 남쪽에서 날아온 한 무리의 철새들이 오
랜 비행에 지쳤는지 우루루 평야에 착륙한다. 그리고 잠시 쉬더니 북쪽으로 힘찬 날개짓을 하며
길을 떠났다. 나도 북쪽으로 가야되는데 흔쾌히 태우고 가면 안될까?
손짓을 했지만 내가 저들보다 무거우니 현실은 불가능하다. 괜히 화물 초과 수송으로 저들에게
항공법 위반 벌금을 물리면 나로써도 면목이 없을 뿐이다.

그렇게 버스를 기다리니 거전리에서 맨몸으로 나오는 김제시내버스 19번이 다가온다. 버스에 올
라 만경까지 간다고 하니 같은 행정 구역에 가까운 거리임에도 구간 요금을 징수한다. 허나 나
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은 없었다. 그 버스가 아니면 걸어가거나 지나가는 차량을 잡아타
야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만경(萬頃)에서 익산(益山)으로 넘어갈 요량이었으나 버스가 너무 기어가서 만경까지
무려 23분씩이나 걸렸다. 그래서 간만에 차이로 익산시내버스 15번(원광대↔만경)을 놓치고 말
았지. 운행 시간을 너무 널널하게 짠 느림보 김제버스 때문에 결국 만경에서 1시간 강제 체류를
하게 되었다.
1시간에 긴 시간을 억지로 흘려보내며 익산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지만 시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어진 터라 이후 일정을 다음으로 넘기고 익산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내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김제 망해사 나들이는 약간의 여운을 남기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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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드립니다. 다만 다음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은 간격 늘어짐이 없이 정상적으
   로 나오고 있으니 블로그글을 보셔도 됩니다.
 * 공개일 - 2016년 3월 2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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