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권 사진,답사기'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09.03.13 늦겨울 무진장(무주,장수) 나들이
  2. 2008.11.14 논개 누님을 만나다 ~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3. 2008.03.08 장수 논개사당(의암사) 주변
  4. 2008.03.02 장수향교
  5. 2006.08.28 [전북/전주] 조선왕조의 고향, 전주 - 오목대 / 전주8경 한벽청연의 현장, 한벽당 1
  6. 2006.08.27 [전북/임실] 오수 의견비 / 관촌 사선대, 운서정
  7. 2006.07.04 임실 오수 의견비, 사선대

늦겨울 무진장(무주,장수) 나들이


~~~~~ 전북 무진장 늦겨울 나들이 ~~~~~

무주 남대천
▲ 꽁꽁 얼어붙은 무주 남대천 (남쪽↔북쪽)
(남쪽 한편에는 2008년에 개장된 얼음썰매장이 있다)


전라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진안고원(鎭安高原)에는 무주(茂朱), 진안(鎭安), 장수(長水)
3개의 고을이 자리해 있다. 이들 지역은 간단히 줄여 '무진장'으로 통하는데 끝이 없을 정도
로 많다는 뜻의 명사 무진장(無盡藏)과는 별개의 단어이다.
'대전~통영고속도로'와 '익산~장수고속도로'의 등장으로 서울에서 3시간 정도면 거뜬히 닿는
이들 지역은 2003년 이후, 오랫동안 인연이 없다가, 2008년 억지로 인연을 만들어 발을 들이
게 되었다.


♠ 호남의 제1루로 명성이 자자했던 누각, 왜정 이후 무주군민의 노력으로 다시
이름과 고향을 되찾은, 무주 한풍루(寒風樓)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9호

무주읍을 동서로 가르는 남대천의 남쪽 당산리 언덕배기에는 무주의 소중한 보물인 한풍루가 읍
내를 굽어보며 자리해 있다.
이익공(二翼工)의 팔작지붕을 지닌 한풍루는 2층 누각으로 특이한 것은 1층은 정면 3칸, 측면 4
칸인데 반해,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측면이 2칸 적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기둥 4개의
차이일 뿐, 규모는 같다.

한풍루의 창건시기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1465년(세조 10년) 전라도관찰사 성임

(成任)이 한풍루를 다녀가면서 남긴 시가 있어 그 이전부터 누각이 숨쉬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원래는 지금의 무주우체국 자리에서 남대천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고 하는데,
객사(客舍) 앞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객사에 딸린 누각으로 여겨진다.

한풍루는 예로부터 호남 제1루로 명성이 자자했다. 수많은 문인(文人)과 묵객(墨客)들이 누각이
가라앉을 만큼 찾아와 아름다운 경관을 글로 남기며,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1465년에 다녀간
성임을 비롯하여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유순(柳洵), 16세기 후반 시문으로 이름을 날린 백호
임제(白湖 林悌) 등의 글이 '한풍루지'에 가득 실려 있다. 특히 임제는 한풍루를 호남의 삼한
(
三寒 - 남원 광한루, 전주 한벽루, 무주 한풍루)
중 으뜸으로 치켜세우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 한다.

정유재란(1597) 때 소실되어 터만 남은 상태에서 1599년 임제의 동생인 임환(林潁)이 무주현감
으로 부임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속에 형이 나타나 한풍루를 다시 지어줄 것을 부탁했
다고 한다. 한풍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친형의 부탁이라, 바로 복원공사에 들어갔는데, 공
사가 채 끝나기 전에 다른 곳으로 전임(轉任)되어 후임 현감인 남복시(南復始)에 의해 마무리가
되었다. 그후 1646년(인조 23년) 보수를 하였고, 1678년(숙종 4년)에 단청을 손질했으며, 1729
년(영조 5년)과 1783년에 중수를 하였다.

▲ 한풍루의 측면
1층(4칸)과 2층(2칸)의 기둥 수가
확연히 다르다.

▲ 한풍루 현판


호남 제1루로 무주현감도 각별히 옆구리에 끼고 살았던 한풍루는 1910년 이후, 근 60년 가까이
그야말로 고통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왜정(倭政)이 시작되면서 잠시 불교포교당과 무주보통학교 공작실 등으로 사용되다가, 안국사
주지 이철허(李澈虛)가 불하받아 관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왜인 나까야마(中山)에게 누각을 저
당잡히면서, 왜인 우수이이또에게 넘어갔으며, 우수이는 1937년 충북 영동에 사는 이명주란 사
람에게 다시 팔아먹었다. 이씨는 그가 사는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금강 변으로 누각을 옮겨왔는
데, 엉뚱하게도 이름까지 금호루(錦湖樓)로 바꿔버린다. 이렇게 하여 호남 3한의 하나로 손꼽히
던 한풍루의 존재는 점차 무주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갔다.

약 30년이 흘러 1960년대 후반, 무주면(현 무주읍)에 살던 한기문(韓基文)씨가 군민들에게 한풍
루를 되찾자고 호소하면서, 오랫동안 잊고 살던 한풍루가 관심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
윽고 '한풍루복구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1971년 3월, 100만원의 거금으
로 누각을 매입, 그 해 11월 원래 자리 맞은편인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면서 꿈에 그리던 고향에
안착하게 된 것이다.

자칫 고향과 이름까지 잃어버릴 뻔했던 한풍루는 무주군민의 노력으로 다시금 그 이름과 고향을
되찾았다. 비록 운치와 명성은 예전만 못하겠지만 누각에 오르면 무주읍내를 비롯한 주변 천하
가 훤히 바라보여 누각으로써의 기능은 그리 녹슬지 않았다. 또한 무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거
액의 성금을 모아 되찾은 지역 사람들의 애정이 가득 담긴 누각이란 점에서 그 가치는 실로 크
다 하겠다.

누각에 왔다면 누에는 꼭 올라가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야 누각의 진정한 가치와 누각을 세웠
던 옛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가 있으니 말이다. 허나 누는 아쉽게도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었다. 높이라도 낮으면 기둥을 타고 올라가 보긴 하겠는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
다. 상황이 이러니 결국 누로 오르는 것은 포기, 그냥 누 아래서 주변 풍광을 보는 것으로 만족
해야 했다.

◀ 한풍루 좌측에는 비석 5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빨간 글씨로 쓰인 이들 비석은 무주 현감
의 선정비(善政碑)와공적비(功績碑)로 무주읍
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에 수습했다.

한풍루 주변은 공원으로 조촐하게 꾸며져 있다. 넓은 잔디밭과 듬성듬성 솟아나 그늘을 드리워
주는 소나무, 나그네의 발길을 쉬어가게 해주는 벤치들, 그리고 지붕돌과 귀부도 없이 빗돌만
덩그러니 있는 오래된 비석 5기가 한풍루 주변을 멋드러지게 장식한다.
드넓게 펼쳐진 잔디밭은 넓은 초원을 보듯,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든다. 봄이나 가을에
이곳에 돗자리 깔고 도시락을 까먹으며 한숨 청하면 정말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것이다.

◀ 무주에서 만난 6.25의 아픈흔적 ~ 국민방
위군 6.25 무주수복공적비
1950년 9월 15일 UN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뒷통수를 단단히맞은 북한군은 낙동강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이때 무주군민
이 중심이 된 지역방위군은 무주읍내를공격하
여 북한군을 몰아내고 무주를 탈환한 것을 기
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한풍루 우측에는 6.25전쟁과 관련된 기념비가 여러 기 세워져 있다. 6.25전쟁 시절, 무주 지역
은 정말로 치열했던 격전지로 수천 명이 죽어나간 곳이다. 그 당시 전쟁으로 죽은 이들의 시신
과 피가 고을 전체를 뒤덮고, 산은 거의 벌거숭이가 되었다고 전한다.
한풍루 남쪽에는 무주예체문화관과 등나무운동장, 무주공설운동장 등의 군민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한풍루 찾아가기 (2009년 3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5회(8:30, 9:20, 10:40, 13:40, 14:35) 떠난다.
* 대전동부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20여 회 운행한다.
* 광주에서 1일 9회, 전주에서 1일 14회 정도 운행한다.
* 경부선 영동역에서 무주행 군내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나며 직행버스는 10회 남짓 운행.
* 무주터미널을 나오면 길 건너로 언덕이 보이는데 오른쪽 방향을 잘 살펴보면 언덕 위로 기와
가 얹혀진 누각이 하나 보일 것이다. 바로 거기
* 승용차로 갈 경우 (주차는 무주터미널 부근이나 등나무운동장에서)
① 대전~통영 고속도로 → 무주나들목 → 무주읍, 구천동 방면 → 등나무운동장입구에서 운동장
방면으로 우회전 → 한풍루
② 경부고속도로 → 영동나들목 → 영동방면 19번 국도 → 영동읍 → 학산 → 무주읍(읍내로 들
어서지 말고 남대천을 건널 것) → 등나무운동장에서 좌회전 → 한풍루
* 소재지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 1193-2


♠ 무주 고을 교육의 옛 중심지, 죽은 향교에서 벗어나 지금은
향교체험행사로 인기를 다지고 있는 ~ 무주향교(茂朱鄕校)

▲ 무주향교 대성전(大成殿)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03호

조선 정부는 지방 백성들의 교육 및 교화를 위해 전국 고을에 중등교육기관인 향교를 설치했다.
향교는 교육 외에도 정몽주(鄭夢周), 공자(孔子) 등 우리나라 및 중국 성현(聖賢)에게 제사를
지내는 향사(享祀)의 기능도 덩달아 지니고 있었다. 건물의 배치는 보통 강당인 명륜당이 앞에,
제를 지내는 대성전이 뒤쪽에 자리한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무주향교는 태조 6년(1398년) 지금보다 다소 북쪽 산자락에 지어졌다. 하지만 호랑이 때문에 학
생들의 피해가 속출하자 1692년 향로산(香盧山) 서쪽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대가 습하
여 말썽이 많으므로 1834년에 무주현감 이헌승(李憲承)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려고 했으나, 공
사 도중에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무주에 부임한 김용(金鎔)은 전 현감의 유지를
이어 이전공사에 박차를 가했으나, 불과 몇 달 만에 죽었고, 후임으로 온 김기증(金箕增) 역시
공사 도중 숨을 거두는 등, 향교 하나를 옮기는 과정에서 무려 3명의 현감이 죽어 나가면서 고
을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 3명의 뒤를 이은 이광승(李光承) 현감이 이전공사를 마무리
지어, 그들의 한을 속시원히 풀어 주었다. 그후 1876년과 1884년 2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며,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년) 이후 교육기능은 사실상 사라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향교에는 대성전과 명륜전, 동/서무를 비롯하여, 양사재(養士齋), 외삼문(外三門)과 내삼문(內
三門), 전사재(典祀齋), 교직사(校直舍)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 맹자 등 중국 성현의 위
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18명의 성현들은 대성전의 부속건물인 동무(東撫)와 서무(西
撫)에 배향하여 중국 성현과 우리나라 성현에 큰 차별을 두었다.

무주향교는 근래에 들어 초,중고생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향교체험행사를 열면서 호응이 좋다
고 한다. 향교체험은 서예와 예절, 한학, 전통놀이 등을 배우고, 향교 학생들의 복장을 입고 기
념사진을 찍으며, 제사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체험이 준비되어 있다.
솔직히 향교는 역사/답사동호회(까페)에서조차 외면을 받을 정도로 관심도가 부족하다. 이는 향
교들이 거의 껍데기만 남은 채, 죽어 있는 상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절처럼 다양한 볼거리도
없고 향교의 모습이 공산품 찍어대듯 그 모습의 그 모습이라 개성이 많이 떨어진다. 또한 늘 닫
힌 모습으로 일관하기 때문에 들어서기가 쉽지 않다.
무주향교의 향교체험행사는 향교의 단점과 폐쇄성을 극복하고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향교의 굳은 의지로 크게 평가할 만 하다. 작게는 향교를 홍보하고 크게는 향교와 관련된 전통
과 문화를 널리 알려, 인기가 상당한 사찰의 템플스테이(temple stay)나 전통한옥체험처럼 우리
전통 체험의 하나이자 짭짤한 관광상품으로 크게 발전하길 고대해 본다.

▲ 무주향교 명륜당(明倫堂)

▲ 향교체험 안내문


내가 향교를 찾았을 당시는 공교롭게도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은 체
험행사가 없는 모양이다. 적연한 분위기가 감도는 명륜당 앞뜰에는 여러 전통놀이 도구들이 어
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이다.

※무주향교 찾아가기 (2009년 3월 기준)
* 무주까지의 교통편은 앞에 한풍루 참조
* 영동역에서 무주행 군내버스(1시간 간격)를 이용할 경우, 향교3거리에서 내리면 된다.
* 무주터미널에서 남대천을 건너자마자 우측 강변길로 5분 정도 걸으면 무주대교가 나온다. 여
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향교3거리가 나오고, 길 건너로 무주향교가 있다.
* 승용차로 갈 경우 (향교 부근 길거리에 잠시 주차)
① 대전~통영 고속도로 → 무주나들목 → 무주읍, 구천동 방면 → 무주터미널 지나서 무주읍내,
영동 방향 → 무주대교를 건너면 바로 무주향교가 있는 향교3거리이다.
② 경부고속도로 → 영동나들목 → 영동방면 19번국도 → 영동읍 → 학산 → 무주읍내 방향 →
향교3거리(무주향교)
* 소재지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264-1 (☎ 063-322-4014, 324-2114)
♠ 향교체험행사는 쉬는 날 없이 연중으로 실시되며 반드시 전화로 신청해야 된다. 접수 및 문
의는 위의 전화번호 참조

▲ 굳게 빗장을 걸어잠근 무주향교
외삼문(外三門)

▲ 외삼문과 달리 활짝 열려진 대성전 앞
내삼문(內三門)


♠ 장수 3절(節)의 하나인 논개 누님이 심었다고 전하는 푸른 소나무
장수 의암송(義巖松) ~
천연기념물 397호

장수군청 현관 앞에는 '의암송'이라 불리는 오래된 소나무 1그루가 솟아나 있다. 나무의 이름인
의암(義巖)은 장수 고을 출신으로 1593년 8월 진주성에서 왜장을 껴안고 순절한 여인, 논개 누
님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논개를 비롯하여 그녀와 관련된 사당과 나무, 그가 뛰어내린 바위까지
한결같이 의로운 바위란 뜻의 '의암'이 시호(諡號)처럼 따라다닌다.

의암송은 1592년 논개가 심었다고 해서, 또는 의병을 모집하러 장수에 온 최경회(崔慶會)가 논
개와 함께 심은 것이라 전하나 확실치는 않다. 다만 고을 사람들이 관아 뜰에서 무럭무럭 자라
나는 이 나무에 논개 누님을 추모하는 뜻에서 의암송이라 부른 것이 점차 나무의 이름으로 굳어
진 것으로 보인다. 나무의 높이는 9m, 밑동둘레는 3.2m에 이른며, 나이는 대략 400년 이상일 것
으로 추정되어 그녀가 심었다는 구전이 어쩌면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살아생전의 논개 누님을 보듯, 자태 또한 매우 곱다. 논개의 혼이 깃들여져 있을 듯한 의
암송은 소나무로는 드물게 땅에서 1m부분에서 줄기가 곧게 솟아나지 못하고 왼쪽으로 꼬여 나선
형을 이루고 있으니, 마치 용이 몸을 비틀고 있는 듯 하다. 높이 3.5m부분에서는 2개의 큰 가지
가 남북 방향으로 갈라져 있으며, 그 위로 줄기가 여러 개로 갈라져 우산모양을 이룬다. 나무의
꼭대기는 군청 건물 3층과 거의 맞닿아 있다.

장수 고을을 상징하는 나무는 소나무이다. 그중에서도 의암송을 그 으뜸으로 친다. 논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장수 사람들이 그녀를 대하듯 애지중지 가꾸며 자랑으로 삼던 나무로, 옛 장수
현 관아를 대신한 장수군청 앞에 자리하여 늘 푸른 모습으로 군청을 찾은 이들의 시선을 단단히
붙잡는다.

◀ 장수군청 민원과 앞에 높다랗게 솟아난
은행나무


장수군청에는 2그루의 오래된 나무가 있다. 하
나는 의암송,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은행나무이
다.
이 나무는 1570년 장수현감을 지냈던 최경회가
현재 군청사 뒤에 있던 옹달샘 주변을 정비하
고 이를 기념하고자 심은 것이라고 하며, 나무
의 높이는 22m, 둘레는 최대 7m에 이른다. 수
령(樹齡)은 약 430년 정도로 의암송보다 약간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겨울의 제국에게 모든 걸 빼앗기며, 앙상한 가
지만 드러낸 은행나무의 모습에서 따스한 봄을
염원해본다.

※장수 의암송 찾아가기 (2009년 3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가 1일 4회(9:20, 10:40, 13:40, 14:35) 떠난다.
* 대전동부터미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 1일 9회 정도 운행
* 광주(유스퀘어)와 남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 1일 9회 운행
* 전주에서 장수행 직행버스 1일 17회 남짓 운행
* 장수시외버스터미널에서 장수군청까지 걸어서 5분 거리
* 승용차로 갈 경우 (군청 부근 길거리에 잠시 세워두면 된다)
① 대전~통영고속도로 → 익산~장수고속도로 → 장수나들목에서 장수방면 19번 국도 → 계남 →
장수읍내 → 장수군청
② 88올림픽고속도로 → 남장수나들목에서 장수방면 19번 국도 → 번암 → 장수읍내 → 장수군

* 소재지 -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176-7 장수군청 앞


♠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향교 건축물 ~ 임진왜란 때도 피해를
겪지 않은 장수향교(長水鄕校)


▲ 장수향교 대성전(大成殿) ~ 보물 272호

장수향교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지방 중등교육기관이다. 얼핏 보면 앞에 언급한 무주향교 등과
별로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장수향교에 주목한 이유는 우리나라 향교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많은 목조 건물이 병화(兵禍) 속에 사라지던 임진왜란
때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향교로도 유명하다.
왜군이 전혀 오지 못할 것 같던 장수 고을에 왜군이 들이닥친 것은 1597년, 그들은 향교 코 앞
까지 왔으나 논개 누님과 더불어 장수3절의 하나로 추앙받는 향교지기 정충복(丁忠僕)이 목숨
을 걸고 지켜댄 덕에, 창건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있는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수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년) 장수읍내 북쪽인 선창리 당곡마을에 지어진 것으로 168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명륜당, 진덕재 등의 건물이 있으며 외삼문 밖에는
정충복비가 있다.


▲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진 향교 입구

향교 입구에는 보기만 해도 정덜미가 뚝 떨어질 것 같은 홍살문과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리란 뜻의 하마비를 세워 향교를 찾아온 이들에게 예의와 엄숙을 요구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향교와 관련된 비석들이 일렬종대로 늘어서 있고, 부강문(扶綱門)이라 불리는
솟을대문 모양의 외삼문(外三門)과 정충복비가 나온다. 외삼문은 석전대제(釋奠大祭) 등의 향
교 행사 외에는 늘 빗장을 걸어 잠그며, 평소에는 정충복비 옆으로 난 문으로 왕래하면 된다.
향교 내부는 관람이 가능하다.

▲ 외삼문 앞뜰에 세워진 비석들
좌측에 귀부와 이수를 갖춘 비석이 1686년
향교를 옮기고 세운 향교이건사적비
(鄕校移建事蹟碑)이다.

▲ 향교를 지키고 관리하는 향교재단 건물


▲ 정충복비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38호


외삼문 앞에는 홀로 향교를 지켜낸 충복 정경손(忠僕 丁敬孫)의 비석이 자리해 있다. 보통 정
충복비라 부르며 정확한 이름은 '성충복정경손수명비(聖忠僕丁敬孫竪名碑)'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 건축물, 장수 고을의 자랑 등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정충복이 아니었다면 장수향교는 정말 여느 향교와 다름없었을 것이며, 내가 굳이 찾지도 않았
을 것이다.

이 비석은 1746년(영조 22년) 장수현감 정주석(
鄭胄錫)이 향교를 수호한 정충복의 공을 추모하
고자 세웠다.

정충복은 향교를 지키던 관리인이었다. 1597년
다시금 조선에 침범한 왜군은 남원(南原)을 점
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곳곳을 유린했다. 전라도의 지붕인 무진장 역시
그 예외는 되지 못했다.

왜군이 온다는 말에 장수 사람들은 죄다 보따리
를 짊어지며 피난을 떠나고, 향교 학생과 선생,
노비들 모두 도망을 쳐버렸다. 다 떠나고 없는
향교에는 오로지 향교 관리인 정충복만이 홀로
남아 지키고 있을 뿐이다.

고을에 진입한 왜군은 향교를 불지르기 위해 향
교로 다가섰다. 정충복은 향교 뜰에 앉아 왜군
을 꾸짖기를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다. 침범하
고 싶거든 나를 죽이고 가라'

그의 꾸짖음에 단단히 쫄은 왜장은 그 용기에 감복하여 '이곳은 성전이니 침범하지 말라'는 신
표를 써주고 그냥 가버렸다. 얼마 뒤에도 다른 왜군이 장수에 침범했는데, 향교를 불지르려고
하다가, 그 신표를 보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정충복은 향교 수호의 공으로 장수호장(戶長)으로 발탁되었으며, 장수 사람들의
자랑인 장수3절의 하나로 널리 추앙 받았다. 또한 매년 음력 3월 15일 그를 기리는 제례를 지
내며, 석전대제와 기타 향교행사 때 작헌례(酌獻禮)가 거행된다.

죽음을 각오하고 향교를 지켜낸 정충복의 의기(義氣)와 용기에 감명받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
이다. 감명과 함께 존경심도 함께 일어나 고개가 절로 쑥여질 따름이다.


▲ 장수향교 명륜당(明倫堂)

아무도 없는 툇마루에 앉아 문에 귀를 기울이면 학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정충복비 옆 문으로 들어서면 고요함에 사로 잠긴 향교 경내가 펼쳐진다. 제일 먼저 나그네를
반기는 명륜당은 학생을 가르치던 건물로 불과 110년 전만 해도 학생들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
로시끄러웠을 테지만 지금은 진안고원의 차디찬 바람의 소리만이 주변을 감싸돌 뿐이다.
짚신 등의 신발로 넘쳐났을 섬돌은 먼지만이 가득하니, 아마도 옛날을 그리워 하고 있을 것아
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참으로 쓸쓸해 보인다.

▲ 향교의 서재(西齋)인 진덕재(進德齋)
서재와 동재는 향교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였다.

▲ 서재를 마주보고 있는 동재(東齋)

◀ 사마재(司馬齋)
장수 지역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들의
모임 공간이다.


▲ 별도의 담으로 주변을 둘러싼 대성전과 내삼문(內三門)


향교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대성전이다. 절로 따지면 법당(法堂)과 같은 존재로 유교 성
현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를 지내던 신성한 공간이다. 상당수의 향교는 별도의 담장을 쌓고
그 안에 대성전을 두었는데, 반드시 내삼문을 거쳐 들어가게끔 되어 있으며, 담장과 문으로 인
해 대성전의 모습이 온전히 다가오질 않는다.

장수 고을 제일의 문화유산이자 자랑인 대성전은 굳게 입을 봉한 내삼문을 지나야 된다. 명륜
당이나 동재, 서재 등은 간단히 넘어가도 되지만 대성전은 사정이 다르다. 어떻게 들어갈수
없을까 싶어 담장 주변을 살폈으나 넘어가기에는 무리이다. 담장 밖에서 대성전을 사진에담자
니 다 나오지도 않는다. 다시 내삼문 앞으로 와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근심에 잠기며, 3개의
문짝을 모두 밀어보았는데, 우측문의 문짝을 건드리니, 삐끄덕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는 것이
다. 이게 왠 떡이냐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가 대성전 앞에 다가섰다. 눈이 유난히도 많이 왔던
2003년 이후, 5년 만에 다시 찾은 장수향교 대성전, 나중에 생각해보니그때도 우측문을 열고
들어갔던 것이다.
그 당시는 향교 뜰을 하얗게 도배한 사람키 만큼이나 쌓인 눈에 기겁을 하며 대성전 앞까지 접
근을 못했는데, 지금은 다행히 눈의 방해가 없어, 대성전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600살의 노구에도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은 장수향교 대성전
건물 구석에는 화마의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조그만 소화전이 놓여져 있다.
허나 커다란 건물에 비해 손톱만큼 작은 소화전이 과연 효과적으로 화마를
퇴치할 수 있을까? 의문과 걱정이 나를 사로잡는다.


1407년에 지어진 이래, 지금까지 별탈 없이 살아온 장수향교 대성전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
정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 더 건강이 좋아 보일 정도이다. 만약 정충복이 없었
다면 대성전은 1597년 한줌의 재가 되었을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건축물의 명
예와 보물 272호의 지위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낮은 석축 위에 지어진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머리에 얹힌 건물로 문짝에
옛 태극마크가 그려져 있어, 당집 분위기도 다소 풍긴다. 지붕처마를 받치고 있는 장식구조의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몄는데, 이는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 형태라고 하며, 평방(平枋)
위로 공포 덩어리가 촘촘히 붙어있는 다포(多包)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장수향교 대성전은 다른 향교의 대성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이는 600년 전 지어
진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으로 조선 초기 향교 건축의 소중한 열쇠가 되어준
다.

※장수향교 찾아가기 (2009년 3월 기준)
* 장수까지의 교통편은 앞에 장수 의암송 참조
* 장수군청 뒤(정확히는 동쪽)에 자리해 있으며, 장수시외터미널에서 걸어서 8분 거리.
* 승용차로 갈 경우 (군청 부근이나 향교 부근 길거리에 잠시 세워두면 된다)
대전~통영고속도로 → 익산~장수고속도로 → 장수나들목에서 장수방면 19번 국도 → 계남 →
장수읍내 → 장수교에서 좌회전 → 천변길을 따라가다 장수군 의회를 지나면 왼쪽으로 장수
향교가 보인다.
② 88올림픽고속도로 → 남장수나들목 → 장수 방면 19번 국도 → 번암 → 장수읍내로 들어서
장수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 → 천변길을 따라가다 장수군 의회를 지나면 왼쪽으로 장수향교
가 보인다.
* 소재지 -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254-1 (☎ 063-351-7945)
♠ 매년 음력 2월과 8월 첫째 정일(丁日)에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내며, 장수 지역 70세 이상
노공(老公)들을 초청하여 기로연(耆老宴)을 연다.
♠ 음력 3월 15일에는 정충복을 기리는 제례를 지낸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보기)
은 2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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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09년 3월 12일부터 / 최종 수정 - 2009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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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누님을 만나다 ~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 논개 누님을 만나다 ~ 장수 의암사
(義巖祠)

논개 영정
▲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려 바친 의암 논개의 영정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수주 변영로(樹洲 卞榮魯)



▲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지는 논개


때는 1593년 7월 7월,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진주 촉석루(矗石樓)에서 왜장(倭
將)들의 진주성 점령기념 승전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강제 징발된 기생들을 하나씩 옆구리에 끼며 부어라 마셔라, 춤추자~ 흥이 오른 왜장들 중에는 진
주성 공격의 주장(主將)인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도 있었다.
술잔을 들이키며 취기를 즐기는 게야무라는 문득 강가를 바라본 순간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
다. 강가에는 왠 이름모를 아리따운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
게 단단히 눈이 도망간 게야무라는 술취한 몸뚱이를 간신히 겨누며 강가로 내려갔다. 논개는 계속
웃음을 띄워 보내며 그를 유혹하고, 게야무라는 콩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비틀비틀 그녀에게
다가선다.

논개는 가락지를 낀 팔을 벌려 그를 안으려고 하고, 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이게 왠 떡이냐 싶어
군침을 삼키며 그녀에게 안기려 든다.
떡 안긴 순간, 논개는 그를 힘껏 껴안으며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왜장의 목
숨을 선물로 진주성 싸움에서 숨져간 군사와 백성, 그리고 남편 최경회의 곁으로 떠났던 것이다.

이상이 코 흘리게 어린애도 줄줄 외고 있다는 논개의 순절 부분이다.
논개는 임진왜란이 낳은 수많은 영웅 중의 하나이다. 비록 칼과 활을 들고 싸우진 않았고, 남자가
아닌 연약한 여인네였지만, 왜군과의 싸움에서 숨져간 이들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
진 논개의 의기와 충절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

이순신(李純臣)과 더불어 삼척동자도 다 아는 대중적인 위인~ 논개, 하지만 논개의 성씨를 비롯하
여 그녀의 생애, 신분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너무 적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진주성에서 몸을
던진 부분만 너무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과 더불어 임진왜란 시절, 조선 여인의 의기를 잘 보여준 논개는 장수지
역 3명의 의인(義人)을 뜻하는 장수 3절(節)의 하나이자, 장수 고을이 낳은 여걸(女傑)로 장수 사
람들의 자랑이다.

장수 고을에는 논개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있다. 장계면 대곡리에는 그녀가 태어나고 살았던 생가
가 복원되어 있고, 장수군청 앞에는 그녀가 심었다고 전하는 '의암송'이란 소나무가무럭무럭 자
라고 있다. 또한 읍내 동남쪽에는 그녀의 위패를 모신 사당, 의암사(義巖祠)가 있다.
그중에서 내가 문을 두드린 곳은 의암사로 이미 2003년 1월에 다녀간 바가 있다. 그럼 5년여 만에
다시 찾은 장수 의암사를 둘러봄에 앞서 논개 누님의 생애를 먼저 짚어보도록 하자.


♠ 의암 주논개(朱論介, 1574 ~ 1593)의 생애


♣ 논개의 생애가 밝혀지기까지

충의의 고장 장수가 낳은 인물, 논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21년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
寅)이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談)'이다. 하지만 논개의 집안이나 생장과정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었다.

18세기 초, 진주 사람들은 논개의 순절을 널리 알리고 기려줄 것을 나라에 건의했다. 이에 조
정에서는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에 논개의 후손을 찾아 포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병영은
영남 일대에 관문(官文)을 띄워 후손을 수소문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논개는 후손이 없음)
그 후, 논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국가차원에서 논개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에
이른다.
우선 18세기 중반 권적(權適)의 '경상우병사 증좌찬성 최공시장<慶尙右兵使 贈左贊成 崔公 諡狀
, 여기서 최공은 최경회(崔慶會)>'을 비롯하여,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호남읍지(湖南邑誌)
','동감강목(東鑑綱目)','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매천야록(梅泉野
錄)' 등의 여러 문헌과 장수, 진주 지역에 전해오는 논개 관련 이야기들, 그리고 노공(老公)들
의 증언을 통해 논개에 대한 많은 정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논개의 탄생
논개는 1574년 9월 3일 밤, 지금의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주달문(朱達文)의 외동
딸로 태어났다. 주달문은 선비로 마을에서 서당을 꾸리고 있었으며 부인은 밀양박씨이다.
논개의 집안은 '신안주씨(新安朱氏)'로 넉넉하진 못했지만 기풍이 서린 양반가의 집안이었다.
일부에서는 논개가 기생 출신으로 알고들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논개는 특이하게도 4갑술(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의 사주를 타고 태어났다고 한다. 갑
술년은 개의 해인데, 월과 일, 시(時)까지 모두 개를 상징하는 시간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주달문은 딸의 사주를 살펴보고는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며 크게 기뻐했다. 딸에게 어여쁜 이름
을 지어줄 만도 하지만 그는 계집의 이름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논개'란 이름을 지어주었
다. 그 이유는 딸을 술시에 낳았으니, 개를 낳은(놓은) 것과 같고, 그것을 거꾸로 읽으면 '놓은
개'가 된다. '놓은개'를 빨리 발음하면 '논개'로 발음되니 그 발음 그대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 순탄치 않은 논개의 어린 시절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비범했으며 효행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녀의 집안은 그런데
로 화목을 누리며 살았으나, 5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논개 모녀는 몇년동안 모진
고초를 겪는다.

의지할 곳이 없던 모녀는 같은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朱達武)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주달무는 형과 달리 거의 인간말종에 가까운 위인이라 매일 노름에 빠져 가산(家産) 말아먹기에
바뻤다고 한다. 결국 집까지 죄다 날려먹자 숙부는 풍천마을에 사는 김풍헌(金風憲)이란 사람에
게 조카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는 멀리 줄행랑을 쳤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모녀는 외가가 있는 함양 안의(安義)로 급히 피신했으나, 김풍헌의
고발로 장수 관아로 압송되고 만다.


▲ 장수 관아에서 최경회에게 재판을 받는 논개 모녀


♣ 최경회(崔慶會, 1532 ~ 1593)와의 만남
그 시절 장수현감(長水縣監)은 장차 논개의 지아비가 되는 최경회였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달
아난 숙부 주달무에게 죄가 있음이 드러나면서 논개 모녀를 무죄 방면한다.

최경회의 부인인 나주김씨는 그들이 오갈게 없는 처지임을 알고 내아(內衙)에서 지낼 것을 권했
다. 최경회 내외의 배려로 내아에서 생활하게 된 논개는 낮에는 잔심부름을 하거나, 김씨 부인
을 간호하고, 저녁에는 공부를 하였다.

몇 해가 흘러 논개의 어머니가 별세하고, 최경회의 부인마저 병으로 죽는다. 서로의 소중한 존
재를 잃은 최경회와 논개는 서로를 더욱 의지하며 같이 살게 된다. 두 세대에 버금가는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초월한 그들의 연분은 점점 커져만 가고, 결국 담양부사(潭陽府
使) 재직 중이던 1590년 혼인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 최경회의 나이는 58세, 논개는 겨우 17세
였다. (아우 부러워라 ~~
)

1591년(혹은 1590년 후반) 모친상을 당한 최경회는 3년상(喪)을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능주(綾州, 화순군 능주면)로 가면서 논개를 장수로 보냈다.

♣ 임진왜란 발생과 최경회의 죽음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최경회는 다시 장수를 찾았다. 그는 월강리 들판에 의병청(義兵聽)
을 세우고 의병을 모아 매일 훈련에 임했다. 논개는 동네 아낙들과 함께 의병들의 식사와 병영
청소, 빨래 등을 도맡아 하며 최경회를 도왔다.

그의 의병은 무주 우지치에서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격퇴시킨 것을 시작으로 산청, 김천,
성주 지역에서 계속 승리를 거둔다.
1593년 4월 조정에서는 그의 공에 대한 답례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를 재
수하였다.
최경회는 논개를 데리고 부임지인 진주로 떠났는데, 진주로 온지 채 1달도 되지 않은 1593년 6
월 19일, 왜군의 13만 대군이 진주성을 공격했다.
전쟁이 한참일 때 최경회는 성 밖으로 나가 후일을 기약하라고 하였다. 그의 권유에 논개는 밖
으로 빠져나가 외진 곳에 숨어 있으면서 전황을 살폈다.

1592년 진주성 대첩과 달리 이번에는 왜군에게 승리의 여신이 돌아가면서 성은 끝내 함락되고
만다. 6만의 관,군,민은 거진 전사하고, 최경회는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남강에 뛰어들어 장렬
한 최후를 마친다.

♣도도히 흐르는 남강 위에 한송이 꽃이 되어 떨어지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죽었다는 소식에 논개는 비통에 사로 잠겨 어찌할 바를 몰랐다.
힘겹게 진주성에 입성한 왜군은 1년 전, 김시민(金時敏)에게 당한 개망신을 만회한 기쁨을 누리
고자 7월 7일 기생들을 죄다 불러놓고 촉석루(矗石樓)에서 승전연을 열기로 하였다.


▲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

논개는 이 때가 기회다 싶어 진주 수안기생(首安妓生)
에게 기생들의 명단이 적힌 기적(妓籍)에 자신의 이름
을 넣어줄 것을 부탁하고 오로지 칠석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이 밝았다. 진주 기생의 협조를 얻어 촉석
루로 들어선 논개는 누각으로 오르지 않고, 강가 바위
쪽으로 내려갔다. (몇몇 자료에는 누각에 들어가 왜장
과 잠시 어울려 놀았다고도 함)
승리의 기쁨에 취한 왜장은 기생들의 미모와 곡차에
다시금 취하면서, 연회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만
간다.
그런 왜장 중에는 진주성 공격의 선봉이었던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란 체격이 좋은 장수가 있었다.
그는 문득 강가를 바라보니 왠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
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여인에게 단단히 눈이 도망간 게야무라는 저도 모르게 강가로 내려갔다. (진주 기생들이 논
개를 돕기 위해 내려가 보라며 부추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논개는 그를 계속 유혹하고, 그녀를 덥썩 안으려는 순간, 그의 허리를 단단히 껴앉고 남강에 몸
을 던져 최경회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뒤따르니, 그녀의 나이 불과 19살이었다.


▲ 의암사 기념관에 마련된 촉석루 배경의 기념촬영코너

♣ 그 이후
논개에게 얼떨결에 폐기처분된 게야무라의 고깃덩어리는 낙동강 하류에서 발견되어 왜국으로 수
습해 갔다고 한다. 논개의 시신 역시 부근에서 발견되어 장수 근처인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에
유택을 만들어 모셨으나, 관리소홀로 그만 무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근 300년 이상 무덤의 위치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으며 '의암사적보존회'와 향토사학자
들의 노력으로 1976년 간신히 무덤을 찾기에 이른다.

후세 사람들은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바위를 '의암'이라 하였으며, '의암'은 점차 논개
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세상 사람들이 그녀에게 바친 일종의 시호(諡號)라
고나 할까..?

♠ 논개의 혼과 정신을 모신 사당, 장수 의암사(義巖祠, 논개사당)
- 전북 지방기념물 46호


의암사는 장수 고을의 자랑이자, 장수3절의 하나로 추앙받는 논개의 사당으로 장수읍의 동남쪽,
남산 자락에 자리해 있다.
의암사는 몇백년 된 오래된 사당은 아니다. 불과 50년 정도 된 곳으로, 1956년 장수 지역 유지
들이 돈을 모아 세운 것이다. 이때 부통령을 지냈던
함태영(咸台永)이 친필 휘호를 보냈으며,
친일 화가인 김은호가 자신의 마누라를 모델로 삼아 논개의 영정을 그려 바쳤다.
196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의암사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2만여 평에 대지
를 마련하여 사당을 옮겼다.

경내에는 논개생향비를 비롯하여 기념관, 의암사 등이 있으며, 사당 앞에는 '의암공원'과 '두산
제'란 호수를 만들어 군민과 관광객의 휴식처로 꾸몄다.
의암사는 장수를 찾은 관광객들이 거의 꼭 들르는 장수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이자, 장수 사람들
의 자부심이 깃든 곳으로 그들의 의암사에 대한 애정은 실로 지대하다.

※의암사 찾아가기 (2008년 11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 1일 4회 운행
* 대전동부터미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 1일 8회 운행
* 광주터미널과 남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 1일 9회 운행
* 전주에서 장수행 직행버스 1일 17회 운행
* 장수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의암사까지 걸어서 12분 거리
* 승용차로 갈 경우 (의암사 앞에 주차장이 있음)
- 대전~통영고속도로 → 익산~장수고속도로 → 장수나들목에서 장수방면 19번 국도 → 계남 →
장수읍내 → 장수교 → 의암사입구에서 좌회전 → 의암사
- 88올림픽고속도로 → 남장수나들목 → 장수 방면 19번 국도 → 장수읍내 못미쳐 의암사입구
에서 우회전 → 의암사


♣ 의암사 관람 정보(2008년 11월 기준)
* 입장료와 주차료는 무료이며, 관람시간은 9시 ~ 18시
* 매년 음력 9월 3일, 의암공원을 중심으로 장수군의 축제인 '의암 주논개 대축제'가 열린다.
축제기간은 2~3일 정도로 첫날에 의암사에서 대제(大祭)를 지낸다.
(축제 문의는 장수군청 산림문화관광과 063-350-2535)
*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 산3 (의암사 관리사무소 ☎ 063-350-2561, 351-4837)


♠ 의암사를 들어서며


▲ 의암사의 외삼문(外三門)인 숭앙문(崇仰門)


두산제와 장수읍내를 바라보고 있는 의암사에서 제일 먼저 바깥 3문인 숭앙문이 나온다. 가운데
문은 굳게 닫힌 채, 양쪽 문만 열려있는 숭앙문을 들어서면 논개의 혼이 깃든 의암사 경내가 펼
쳐진다. 가운데 문을 닫아놓는 것은 사당의 주인인 논개의 혼령만이 드나드는 문이기 때문이다.


▲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

숭앙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논개생향비가, 우측으로 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이 비석은 1846년 장수현감
정주석()이 장수가 논개의 고향임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그 후 어찌된 영문인지 땅 속에 파묻혀 있다가, 사당을 세울 때 발견되어 경내에 안착시켰다.
확실치는 않지만 왜정 시절에 왜인들이 땅에 파묻은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의암사 기념관


▲ 논개와 최경회 관련 유물과 디오라마를 갖춘 기념관

논개생향비를 마주하고 있는 팔작지붕의 기념관에는 논개 관련 유물과 서적, 생애를 다룬 디오
라마를 비롯하여, 최경회의 유물과 관련 서적, 장수 지역 동산문화재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장수 지역 사람들이 사용한 백자 등의
도기(陶器)들

▲ 그릇과 신발

▲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임진왜란과 이괄(李适)의 난, 병자호란 때
활약했던 호남 지역 사람들의 행적을 적은
기록물로 1799년에 간행되었다.

▲ 여인들이 사용한 비녀와 노리개 등의
여러 장신구들

◀ 최경회가 무주 우지치 전투에서 왜장을
죽이고 얻은 언월도(偃月刀)


♠ 의암사 경내

▲ 내삼문(內三門)인 휘광문(揮光門)

▲ 의암문(義巖門)


▲ 논개의 영정을 모신 의암사 본관


외삼문에서 의암사 본관까지는 무려 3개의 문을 거쳐야 된다. 휘광문이란 내삼문을 들어서면
길게 펼쳐진 계단길이 있는데, 그 끝에 자리한 문턱을 지나야 비로소 본관이 나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논개의 영정이 소중히 모셔져 있으며, 건물 좌측 칸에 마
련된 참배록에는 이 곳을 찾은 이들의 이름 석자가 빼곡히 적혀 있어, 논개에 대한 대중의 인
기를 보여준다. 나도 참배록에 이름을 남겼다. 논개 누님의 눈에 띄고 싶어 한자로 요란하게
쓰긴 했는데 과연 보셨을진 모르겠다.


▲ 의암사에 모셔진 논개누님의 영정(影幀)


이 곳 논개의 영정과 남원 광한루(廣寒樓)에 있는 춘향(春香)의 영정, 그리고 밀양 아랑각(阿
娘閣)의 아랑 영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분명 다른 시대에 살다간 여인들인데도 마치 세 쌍둥이
마냥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가 그린 영정인데, 그
들의 모습을 실제로 본 사람도 이 세상에 없을 뿐더러, 그들의 외모에 대해서도 그저 아리땁다
는 기록만 있을 뿐이니 그리기가 꽤 막막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의 마누라를 모델
로 삼아 그렸다는 것이다.

김은호(1892~1979)는 대한제국 마지막 어진화가(御眞畵家)로 1924년 왜열도 동경으로 넘어가
우에노(上野)미술학교에서 미술을 배웠다. 1937년부터는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하여 1945년까지
그에 걸맞는 행동을 일삼아 문제가 다소 많은 인물이다.
해방 이후 죽을 때까지 우리나라 현대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박정희 정권의 부탁으로
이순신, 권율을 비롯한 여러 위인들의 영정을 그렸다. 하지만 친일파 출신이 임진왜란 때 나라
를 지킨 이들의 영정을 그렸다는 것이 영 찝찝하다. 논개의 영정을 보면 기품과 절의(節義)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덩그러니 그려져 있을 뿐이다. 논개의 외모가 아리
따운 것은 사실이겠으나, 너무 미(美)적에만 신경을 써서 그린 듯 하다.

논개도 친일파가 자신을 그렸다는 것에 대해 지하에서 매우 속상해 하고 있을 것이다. 하루 빨
리 영정을 교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왜로부터 나라를 지킨 이들을 어째서 왜에 빌붙어 자신
의 영달을 꾀한 이가 그려야 되는가. 이건 완전 말이 되지 않는다. 친일파와 불의의 작자들이
잘처먹고 잘사는 이 나라의 안타까운 현실을 논개의 영정이 여실히 보여주는 듯 하여 마음 한
켠이 씁쓸할 따름이다.


♠ 의암사 앞에 펼쳐진 휴식공간 ~ 의암공원과 남산공원


의암사 앞에는 '두산제'란 넓다란 호수를 품에 안은 의암공원과 남산공원이 자리해 있다. 군
민과 의암사를 찾은 관광객의 휴식공간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이들 공원은 의암사 성역화 사업
으로 조성되었다.


▲ 누런 갈대가 심어진 두산제 호수


▲ 두산제 호수와 마봉산

한 폭의 그림처럼 베풀어진 두산제, 의암사 뒤에 자리한 마봉산 등의 산과 호수 주변 나무들이
잔잔한 호수를 거울 삼아 그들의 매무새를 다듬으며 그렇게 봄을 기다린다.


▲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남산공원에 어느 정자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부메랑 모양의 구름이 이채롭다.


▲ 저녁으로 먹은 전주 콩나물국밥


장수에서 논개 누님을 만나 뵙고, 진안(鎭安)을 거쳐 전라북도의 수부(首府)인 전주(全州)로
나왔다. 전주를 찾은 것은 저녁으로 콩나물국밥을 먹기 위함으로 전주에 올 때마다 꼭 국밥을
먹는다. 전주는 음식의 고장이라 전주비빔밥과 한정식, 오모가리탕, 콩나물국밥이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저렴하게 그리고 많이 먹을 수 있는 건 바로 콩나물국밥이다.

단돈 4,000원(2008년 2월 기준)에 콩나물과 해산물, 밥이 듬뿍 말아져 있는 국밥을 비롯하여
호남의 인심이 돋보이는 맛깔스런 반찬들(장조림, 김, 깍두기, 젓갈, 계란) 거기에 밥 1공기
가 따로 더 나온다. 솔직히 국밥 1그릇으로도 배가 차는데 정말 뱃가죽 두둑히 채우기에는 안
성맞춤이며 목구멍과 혀가 즐거워 비명을 지를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본 글은 대단원의 막을 고하며 끝으로 논개를 너무 미화했다는 식의 헛소리는 정
중히 사절한다. ~~~


* 답사, 촬영 일시 - 2008년 2월 21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8년 3월 8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8년 3월 12일
* 숙성기간 ~ 2008년 3월 12일 ~ 2008년 11월 12일
* 공개일 - 2008년 11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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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논개사당(의암사) 주변



















장수향교



































[전북/전주] 조선왕조의 고향, 전주 - 오목대 / 전주8경 한벽청연의 현장, 한벽당


' 전북 전주 ~ 임실 역사기행 (2006년 6월 24일)'
'하편 ― 전주(全州) 지역 (오목대, 한벽당, 전주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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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위풍을 해내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

*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정벌하고 고향인 패(沛)로 돌아와 승전 연회
에서 즉흥으로 지어 부른 대풍가(大風歌),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 연회에서
저 시를 읊었다.


천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홀로 다다르니 가슴에는 시름이여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턴 부여국(夫餘國)은
누른 잎 휘휘 날려 백제성(百濟城)에 쌓였네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의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하염없이 고개 돌려 옥경(玉京, 개경)만 바라보네

* 이성계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가 착잡한 마음에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며 읊은 시


전주의 명물, 콩나물국밥으로 두둑히 배를 채우고, 한벽당으로 가던 중, 푸르른 은행나무 한 그루가 나의
발목을 붙잡고 좀처럼 놓아주지를 않는다.

▲ 녹음(綠陰)으로 가득한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고려 우왕 9년(1383년), 월당 최담(月塘 崔霮)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낙향하여 별장
을 세우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이다.
전주 지역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로 수령(樹齡) 600년, 높이 16m, 허리 둘레는 4.5m에 이른
다.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예로부터 전해와 사람들이 종종 찾아와 기원을 드리며,
나무가 있는 이 골목길을 '은행나무 길(골목)'이라 부른다.

▲ 은행나무길 표석

◀ 태조로(太祖路) 표석
은행나무와 간단히 눈인사를 나누고 기린로(17번
국도)로 나와 오목대 방면으로 가다보면 귀부와
비신(碑身)을 갖춘 태조로 표석이 나온다.

'태조로'는 오목대입구에서 경기전 방면으로통하
는 2차선 길로 여기서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이다.


♠ 태조 이성계가 종족(宗族)들을 모아 연회를 배푼 ~ 오목대(梧木臺)
-
전북 지방기념물 16호


경기전(慶基殿) 동남쪽 높다란 언덕 위에 세
워진 비석이다.
이 곳은 옛날에 오동나무와 배나무로 가득하
여 '오목대'라 하였는데1380년 태조가 종족
들을 모아연회를베풀며 새 나라를 세울 의
사를 은연중 밝혔던곳으로 유명하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가 한참 기울어져 가던 14세기 후반, 왜구(倭寇)는 고려와 명나라를 골고루 침범하
며 마구잡이 약탈을 일삼았다.
이미 망조(亡兆)가 깃든 고려 정부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나, 강화도까지 왜구의 공격을
받아, 선왕(先王)의 어진(御眞)까지 빼앗길 정도로, 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다.
다행히 최무선(崔茂宣)이 화약(火藥)을 개발, 1380년 진포(鎭浦, 금강 하류)에 짱박고 있던 왜구를 공
격하여 왜선 500척을 격파하고, 왜구 수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요행히도 목숨을 건진 수백명의 왜구 패거리는 배를 버리고 옥천, 상주 등의 내륙지역으로 침
투,고려 정부를 위협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임명하여 남쪽으로 파견하였다.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의 의제(義弟)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가, 운봉(雲峯)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왜구 패거리를 말끔히 처리하는데,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황산대
첩(荒山大捷)이다.

대승을 거두고 귀경(歸京)하던 중, 선조들의 땅인 전주에 이르러 전주 이씨 종족(宗族)들을 불러모아
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그 자리에서 이성계는 흥에 겨운 나머지 한나라 고조(高祖)의대풍가(大
風歌)를 큰 소리로 부르며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울 뜻을 은은히 내비췄다고 한다.

이성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그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는 그의 행위에 역겨움을 느끼며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 올라가 개경(開京)이 보이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는 시 한
수를 읊고는 한 숨을 쉬었다고 한다.

1900년, 고종(高宗)은 태조를 기리기 위해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웠는데, 비신(碑身)에는 '太祖高皇
帝駐蹕遺址(태조고황제 주필유지)'라 쓰여 있으며, 이는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이다.

오목대는 언덕의 이름이 아닌 거의 비석의 이름으로 굳어지다 싶이 하였는데, 비각(碑閣) 주변으로
산책 나온 동네 사람 2명이 있을 뿐, 분위기는 대체로 조용하다.

예전에 비각 주변으로 철제(鐵製)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으나, 근래에 이를 모두 철거하여 비각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오목대 동쪽 누각 ▶
오목대 동쪽으로는 시원스런 팔작지붕의 누
각 하나가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따로
주어진 이름은 없는 것 같다.

◀ 누각 내에 걸린 현판 ◀
넓직한 누각 내에는 시인,묵객들이남긴 현
판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1개만 사진에 담아왔는데현판의 내용
은 모름..

누각 난간에 걸터앉아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
며 더위를 식히면서 잠시 여유를 부려본다.

▲ 정면에서 바라본 오목대 누각

~~ 오목대 찾아가기 ~~
* 전주역, 전주시외터미널에서 평화동, 관촌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전동성당에서 하차, 도보 10분
* 병무청 방면 시내버스로 병무청에서 하차하여 도보 10분
* 오목대 앞까지 시내버스가 다니긴 하지만, 운행횟수가 극히 적으므로, 위에 방법으로 가기를 권함,
* 오목대 부근 주차장소는 마땅치 않음..
* 관람료 없음 / 관람시간 제한 없음


▲ 옛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전라선(全羅線) 터널
한벽당 뒤쪽으로는 예전 전라선 열차가 지나던 터널이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열차의 기적소리가 시끄럽게 들릴 것 같은 이 터널은 전라선이 외곽으로 이전되
면서 철로는 사라졌으며, 지금은 사람들만 통행하고 있다.

◀ 월당 선생 찬시비(讚詩碑)
앞서에 언급했던 600년 은행나무의 주인공,월당
최담 선생의 찬시비이다.


♠ 전주 8경의 한 곳, 한벽청연(寒碧晴烟)의 현장 ~ 한벽당(寒碧堂)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5호


오목대에서 가까운 전주천(全州川)변 바위에 들어앉은 정자로 전주 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烟)
의 현장이다.

이 곳은 1400년월당 최담(崔霮) 선생이 낙향하여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월당루(月塘樓)라 하였으나 후에 '벽옥
한류(碧玉寒流)'란 시귀에서 '한벽(寒碧)'2글자를 따와
'한벽당'이라 하였다.
한벽당은 전주 뿐만 아니라 호남지역의 명승지로 예로
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들던 곳이
다.

바위 위에 오묘히 들어앉아 전주천을 바라보는 그의 모
습은 가히 단아함 그 자체이나, 그 뒤로 전라선철마가
달리면서부터 운치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 1990년대
이후, 바로 옆으로 17번 우회국도가 생기면서 예전에
그림 같은 풍경은 많이 손상되어 버렸다.

비록 정자와 주변 나무, 바위는 온전하지만, 문명의 이
기(利器)라는 4발 달린 수레들이 그 옆으로 밤낮을 가리
지 않고 지나가니 예전의 시를 읊고 낮잠을 즐기던 그
고즈넉한 분위기는 이제 옛 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 한벽당 기적비(紀蹟碑)◀

◀ 나무 사이로 고개를 내민 한벽당 ◀

바위를 의지하며 베풀어진 돌계단을 사뿐사뿐
오르면단아한 모습의 한벽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한벽당은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있으며 안에는
시인,묵객들이 걸어놓은 현판들로 눈이 어지러
울 지경이다.

◀ 한벽당 내에 걸려진
한벽당 현판(懸板)

▲ 한벽당 기와수막새에 들어앉은 용
수박새에 특이하게도 용 계통으로 보이는 동물이 새겨져 있다.
양반 사대부가 별장으로 세운 정자의 기와에 왜 저런 화려한 동물들이
들어앉아 있는 것일까?

▲ 한벽당에서 바라본 전주천 주변 풍경
강을 꿈꾸는 전주천은 오늘도 그렇게 유유히 흘러만 간다.

▲ 한벽당 바로 옆으로 뚫린 17번 국도
누각에 앉아 있으면 들리는 소리라곤 17번 국도를 질주하는 수레들의 요란한 굉음들 뿐..
상황이 이러니 어찌 차분하게 사색에 잠겨 있을 수 있겠는가..?


한벽당은 2001년 여름, 전주에 외가(外家)를 둔 친구와 같이 온 적이 있었다.
그 때는 한벽당을 끼고 도는 전주천의 수위가 낮아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와서, 너도나도 천(川)에 들어가
발을 담구고, 개구쟁이 어린이들은 온몸을 내던지며, 물과 찐한 스킨쉽을 즐겼지.. 우리는 여벌의 옷이 없어
그냥 다리와 발만 실컷 담구고..
그러나 근래에 전주천을 정화하면서, 수위가 높아져 물로 풍덩 들어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 전주천 징검다리

수양버들이 시원스런 전주천 길을 걷다보면 '비빔밥', '콩나물국밥'과 더불어 전주 지역의 별미(別味) '오모
가리탕' 주막촌이 나온다.
오모가리탕이란 뚝배기에 쏘가리, 메기, 모래무지 등의 민물고기와 풋고추, 파, 당면 등을 넣고 온갖 양념으로
범벅을 하여 끊인 일종의 생선 매운탕으로, 한벽당에서 전주교(남부시장)까지 그 음식을 취급하는 주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몇몇 집은 벌써 매스컴을 요란하게 타기도 하였지,

더운 여름날, 이 곳에서 매물탕의 매운 맛에 땀도 흘리고, 거기에 전주천에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후식 삼아
땀을 식히면서, 지인들과 곡차(穀茶)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이렇게 하여 전주, 임실 역사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6월 24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7월 11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7월 13일
* 상편 숙성기간 - 2006년 7월 15일 ~ 8월 26일
* 공개일 - 2006년 8월 27일부터

Copyright (C) 2006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

[전북/임실] 오수 의견비 / 관촌 사선대, 운서정


' 전북 전주 ~ 임실 역사기행 (2006년 6월 24일)'
'상편 ― 임실(任實) 지역 (의견비, 사선대, 운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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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상, 하 2부로 나누어 작성했습니다.


♠ 주인을 구하고 숨져간, 충의로운 견공(犬公)의 넋이 서린 ~
오수 의견비(義犬碑) - 전북 지방민속자료 1호

주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개의이야기는 워낙에 유명하
여 아마 모르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오수 외에도 밀양(密陽) 등 많은 지역에
이러한 개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으며, 다른 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개는 자신을 기르던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여, 그 주인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신
의 목숨까지 내던지기도 한다.
오수의 의견비는 그런 의견을 기리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세운
비석으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의견 관련 유적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의견 스토리의 대표격인 오수의 의견 스토리는 조선
초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9 ~ 10세기 경, 거령현(居寧縣, 임실군 지사면)에 김개인(金盖仁)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애지중
지 기르던 개 1마리가 있었는데 어딜 가든 항상 그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김개인은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 집으로
오다가 그만 길가에 퍽~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마침 부근
산에서산불이 일어났다.
산불은 삽시간에 그가 벌러렁 자는 곳까지 번져오고, 개는
주인을 깨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워낙에 깊게 잠든탓에
좀처럼 깨어나지를 못한다.
다급해진 개는 주인을 구하기 위해 부근 냇가로 달려가 온몸
에 물을 적셔 주인을 위협하는 불과 사투를 벌였다. 냇가를
수백 번 왔다갔다하며, 주변까지 침투한 불길을 간신히 진압
했으나 한꺼번에 젖먹던 힘까지 모두 소비한 탓에 기진맥진
쓰러지고, 결국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몇 시간 뒤, 간신히 잠에서 깨어난 그는 자기 옆에 쓰러져 있던 개의 모습을 보고는 모든 상황을알게
되었고, 그런 개를 껴앉으며 목놓아 울었다.

나중에 그는 노래를 지어 개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친히 무덤을 만들어주고, 그 옆에 자신의 지팡이를
꽂았다.그런데 지팡이에 그 개의 혼이라도 서렸는지, 그것이 나무가 되어무럭무럭 자라나니, 이 나무를
큰 개를 상징하는 오(獒)를 붙여 '오수(獒樹)'라 하였고, 그것이 이 지역의 지명이 되었다.

그 이후, 오수 사람들은 의견을 위해 비석을 세웠으며 이를 동
네의 긍지로 삼으니, 지금도 그 자랑은 여전하다. 지금의 비석
은 1955년에 새로 만들었다.
비록 말 못하는 미천한 동물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몸을 불사르
며 주인을구한 의견 스토리는 점점 험악해져만가는 이 세상에
잔잔한감동을 주는 소중한 옛날 이야기이다.

이름이 전해오지 않는 그 의견에게 머리를 숙여 삼가 경의를
표하면서... ~~~ !!

* 오수 의견비 찾아가기 (2006, 9월 현재)
- 전주, 남원에서 오수 방면 직행버스 이용, 오수터미널에서
남쪽(남원 방면)으로 도보 10분, 길가에 이정표가 있으므로
찾기는 쉽다.
- 전라선 오수역(오수 시내에서 약간 떨어져 있음)에서 도보
20분, '오수역 → 오수터미널 → 의견비'
- 차량 주차는 부근 길가에 알아서 할 것.
- 입장료 없음, 관람시간 제한 없음


▲ 원동산공원 정문과, 오래된 느티나무
오수 주민들의 강한 긍지가 서린 의견비, 그리고 그 비석(碑石)과 의견상(像)을 품고 있는 오수 주민들
의 조그마한 휴식처, 원동산공원(圓東山公園)으로 들어서니 마침 점심시간이라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
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원 남쪽 정자(亭子)에는 노공(老公) 2명이 한참 꿈나라 투어를 즐기고 있고, 정말
로한가롭고 평온한 분위기 그 자체이다.

정문에서 의견비는 정면으로 바로 보인다.
의견비까지 큰 돌이 질서정연히 박힌 돌길이 펼쳐
져 있고, 그 주변으로 아름드리 나무들이 의견에
대해 존경을 표하듯, 푸르른 모습으로 시립(侍立)
해 있다.

날씨가 더워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 쬐었지만 공원
을 뒤덮은 나무들로 햇빛이 좀처럼 뚫고 들어오지
못해, 매우 시원하다.

◀ 원동산공원 정문에서 바라본 의견비 ◀



▲ 공원 구석에 있는 비석군(碑石群)

◀ 오수고적기실비(獒樹古蹟記實碑)


공원의 끝에는 의견비가 북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이 비석은 1955년에 새로 만들었지만, 나이에 비해
비석이 너무 늙어보인다. 비문(碑文)을 제대로 확인하기어려울 정도로.. 주인을 구한 개의 이야기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으나 정작 그 이야기의 근원(根源)이라 할 수 있는 이 곳에 대
한 관리와 관심은 너무 소홀한 것 같다.

◀ 오수 느티나무
수령(樹齡) - 500년
보호수 지정번호 - 9-11-3호
나무높이 - 18m

의견상(義犬像) ▶

의견비의 오른쪽에는 수령 500년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의견비와 의견상의 우산 및 양산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공원에 있는 나무 중, 제일 오래된 것으로 어쩌
면 혹 의견의 주인이 심은 나무의 후예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주인의 혼이라도 서린 듯, 언제나 비석과
의견상을 비와 눈, 바람, 자외선으로부터 지켜
주는 느티나무.

의견비 동북쪽에는 의견의 형상이 마치 위대한
인물의 동상처럼 세워져 있는데, 그의 목에는

꽃목걸이가 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이는 동네 사람들이 걸어준 것으로, 그 개에 대한 존경과 자랑이
가히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1시, 쉬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사라져가고, 노공(老公) 일부만이 남아 시원한
그늘 밑에 자리를 잡고 계속 이야기 꽃을 피우거나 낮잠을 청한다. 나도 잠시 벤치에 앉아 두 다리를 쉬
게 하였지.
공원에서 약 40분 정도를 그렇게 머물러 있다가, 다음 행선지인 관촌을 향해 다시 길을 재촉했다.


♠ 4명의 신선과 4명의 선녀가 어울려 놀았다는 경승지 ~ 사선대(四仙臺)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시작된 두꺼비의 강, 섬진강
(蟾津江)이 베풀어놓은 자연 경승지로 섬진강의 사선대
부분을 보통 오원강(烏院江)이라 부른다.

사선대는 신선이 놀다 갈 정도로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이런 곳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신선과 선녀 등을 주제로
하여만든 옛날 이야기가 하나, 둘 서려있기 마련이다.

약 3천년 전의 어느 따스했던 봄날, 마이산과 운수산(雲
水山)에 살고 있던 4명의 신선(神仙)이 부근을 주유(周
瑜)하던 중, 이 곳의 아름다운 경관에 흠뻑 반하여 신선
의 체통이고 뭐고 다 벗어던지고 바로 강물로 풍덩들어
가 어린아이처럼 물놀이를 즐겼다.
한참 놀고 있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4명의 선녀(仙女)가
내려오니 '오~ 왠 떡이냐?' 싶어, 그들에게 같이 놀자고
제안, 이들은 서로 어울려 물놀이를 즐겼다.
잠시 뒤, 어디서 까마귀들이 몰려와 주제(?)넘게도 '야~
우리도 같이 놀자. 까악까악~'
거리며 그들과 어울려
같이 놀았다.

그 후, 신선과 선녀는 하늘로 승천했다고 하는데, 그런
연유로 이 곳을 '사선대'라 부르게 되었고, 까마귀도 같
이 놀았다고 하여, 강 이름을 오원강이라 하였다.

사선대의 전설에왜 까마귀까지 등장시켰는지는 모르겠지
만, 푸른 섬진강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 절벽 위에 그림
처럼 솟아난 운서정(雲棲亭). 그리고 무성한 숲 등이 한
데 어우러져 그림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으며, 근래에
는 국제조각공원과연못 등이 새로 조성되어, 사선대의
아름다움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사선대는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인근 전주, 익산, 남원권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이다.

※ 사선대, 운서정 찾아가기 (2006, 9월 기준)
* 전주에서 - 전주시내버스 711번, 752번 / 임실 202번, 203번 이용, 관촌터미널 하차, 도보 10분
전주시내버스 711번 <기린중 ~ 전주역 ~ 시외,고속터미널 ~ 동부시장 ~ 관촌, 1시간 간격>,
전주시내버스 752번 <서곡지구 ~ 금암광장 ~ 전주시청 ~ 동부시장 ~ 관촌, 15 ~ 30분 간격>,
임실군내버스 202번 / 203번 <병무청, 풍남동 ~ 한벽당 ~ 관촌 ~ 임실, 30 ~ 60분 간격>

* 임실에서 - 임실터미널, 임실역에서 관촌 방면 군내버스 이용.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운행

- 호남고속도로 전주나들목 -> 전주 -> 17번국도 -> 관촌 -> 사선대
- 88올림픽고속도로 남원나들목 -> 17번국도 직진(오수, 임실역) -> 사선대

* 입장료 없음 / 관람시간 제한 없음
* 야영 가능


◀ 섬진강 위에 걸쳐진 저 다리를
건너 사선대 관광지로 들어선다.

◀ 나무로 무성한 사선대 절벽 위로
'운서정'이 들어앉아 있다.


신선들이 물놀이를 했을 맑은 섬진강 강물을 바라보며 사선대 관광지로 들어선다.
한가로이 주말 오후를 즐기고 있는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들이 종종 눈에 띌 뿐, 대체로 분위기는 조용하
다.

연꽃과 개구리가 졸고 있는 연못을 지나면 근래에 조성된 사선대 국제조각공원이 나오는데. 이 곳에는
국제대회에 출품된 많은 미술품들이 그 자태를 뽐내며 나들이 손님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 사선대 국제조각공원 표석


▲ 국제조각공원의 어느 하얀 돌조각

▲ 사선대에서 놀고 갔다는 4명의 선녀를
표현하였다.

조각공원을 둘러보고, 연못 건너 절벽 위에 솟아난 운서정으로 가기 위해 길을 찾았으나, 길이 쉽게 나
타나질 않는다.
다른 유원지와 마찬가지로 사선대 관광지 남쪽 부분에는 주막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찾는 이들이
별로 없어 한결같이 썰렁함이 감돈다.

주막촌 안쪽에서 연못 내, 섬으로 통하는 돌다리를 발견했는데, 그 길이 혹 운서정으로 통하는 길인 것
같아서 한번 건너 보았다.

▲ 연못 위에 살짝 걸린 돌다리 -
사선대에서 운서정으로 가려면 반드시
저 다리를 건너야 된다.

▲ 철제 다리 -
돌다리를 건너면 연못 위에 두둥실 뜬 섬에 이르게
되는데, 그 섬에서 다시 철제다리를 건너야 운서정
으로 한발짝 다가설 수 있다.

이렇게 다리 2개를 건너면 운서정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길이 나온다.
계단을 하나, 둘 밟아 가며, 어느 정도 오르니 계단 대신, 평탄한 흙길이 펼쳐지고, 흙의 촉촉함을온
몸으로 느끼며, 그렇게 가다보면 운서정으로 통하는 1차선 크기의 숲길이 나온다.
운서루까지 이렇게 길이 잘 닦여져 있다니? 내심 놀라운 눈치를 보이며 동화, 영화 속 풍경 같은 숲길을
그렇게 거닐어 본다.
길의 경사는 거의 완만하여 더운 날 걸어가기에는 별로 무리는 없다.

한 5분 정도 올라갔을까? 그제서야 아래에서 목아프게 바라봤던 운서루가 바로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
낸다. 그런데 그 우측에 기와집이 있어, 처음에는 정자를 관리하는 문중 재실(齋室)로 생각했으나. 이는
정답이 아니었다.

◀ 운서정으로 가는 숲길


♠ 사선대의 꽃, 그러나 지금은 절의 부속 건물이 되어버린 ~
운서정(雲棲亭)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35호


사선대 언덕 꼭대기에 들어앉은 정자로 1928년 관촌 지역에 부호(富戶) 김승희(金昇熙)가 그의 부친
(父親)을 추모하기 위해 쌀 300석을 들여 세웠는데 정자 아래로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세우고
일반 기와집의 대문을 갖추었다.

이 곳은 왜정(倭政) 때, 우국지사들이 모여 나라잃은서러움을 달랬던 곳으로 유명하며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운치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운서정에 오르면 사선대 공원과 오원강, 관촌시내가 한눈에 바라보이며, 사선대의 꽃으로 전주, 임실
지역의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승지이다.

지금은 이상하게도 정자 아래로 사선사(四仙寺)라는 절이 들어앉아, 동재와 서재는 모두 절의불전(佛
殿)으로 철저히 둔갑되었다.
운서정 역시 사원의 누각(樓閣)으로 변해버려 추녀 밑으로 풍경(風磬)을 대롱대롱 달고 있으며 천정에
는 용머리까지 갖다 붙어, 기존의 모습을 약간 잃어 버린 경향은 있으나, 대체적으로 1928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 천정에 매달린 용머리 2개 ▶

사방(四方)이 시원스레 뚫린 정자 내(內)로
들어서니 가운데 천정으로 용머리 2개가 사
이 좋게 여의주(如意珠) 1개씩을 굳게 물고
있다.

여의주는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데 반드시 필
요한 구슬로 그들은 입을 아래로 향하고 있
어 자칫 실수로 그것을 아래로 떨어트리는
것은 아닌가심히 걱정이 된다.

◀ 운서정 추녀 밑에 매달린 풍경물고기 ◀
정자(亭子)에 왜 난데없이 풍경물고기가 달려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아래 '사선사'라는 절이 운서정을 관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별장용으로 세워진 정자에서 이렇게 풍경물고기를
만나니 반가움보다는 왠지모를 어색함만이 가득하다.

▲ 운서정에서 바라본 사선대 공원, 오원강, 관촌시내
사선대를 찾아온 사람들 중에서 솔직히 운서정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거의 1/3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거의 나 혼자 독차지해버린 운서정, 난간에 몸을 의지하며 잠시 발 아래 펼쳐진 천하를 바라본다.
보이는 범위라고 해봤자, 사선대 관광지와 오원강, 멀리 관촌시내가 전부..

◀ 빨래만이 가득한 사선사 선방(禪房)
운서정 아래에 들어앉은 절로 경내 분위기는
완전 고요함 그 자체..

◀ 보 사이로 오묘히 들어앉은 하얀 토끼 -
토끼는 거북이와 더불어 극락정토(極樂淨土)
를 구현하는 존재라고 한다.

▲ 사선사 정문

운서정과 더불어 사선사도 이렇게 보너스로 둘러보고, 다시 사선대 관광지로 내려왔다.
사선대 일대를 다시 이리저리 둘러보고, 관촌시내로 나오니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
아직 점심도 못먹은 상태라, 시장기가 매우 상당하다. 이제 임실 땅에서의 볼 일도 다~ 끝났으니 전주
로 바로 넘어가서 신나게 배만 불리면 된다.

전주에 이르러 홍지서적 부근에 있는 콩나물국밥집을 찾았다. 이 곳은 2004년초부터 전주에 올 때마
다 꼭 들리는 집으로, 전주의 명물인 콩나물국밥을 맛있게 다루는 전문점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상호가 변경되는 통에, 처음에는 약간 헤맸다. 결국 찾았지만..

점심시간과 저녁시간 사이라, 주막 내에는 겨우 2명의 손님만이 있을 뿐.. 선풍기와 가까운 곳에자리
를 잡고, 콩나물국밥을 기다린다.

▲ 콩나물국밥 정식

주문하고 10분 뒤, 맛깔스러운 국밥 정식이 내 앞에 떡하니 차려진다.
국밥 안에는 1그릇 정도의 밥이 이미 들어있는데, 따로 공기밥 1그릇을 더 준다.
거기에 비싼 소고기의 장조림과 송송(깍두기), 김치, 젓갈, 김, 계란까지 정말로 눈과 코, 입이 황홀
지경에 빠져버린다.
거기에 김은 얼마나 많은지 혼자 다 먹기도 힘에 부칠 지경. 나야 뭐 다 먹어 치웠지만..
국밥 안에는 오징어 등의 해산물이 헤엄을 치고, 이 곳의 명물인 계란 요리는 흰자 위로 노른자가
연꽃 마냥 두둥실 떠 있으니. 맛 또한 목구멍이 즐거워 비명을 지를 지경이다.

여기서 이렇게 한 끼를 해결하면 가히 하루를 버틸 수 있다. 솔직히 양이 너무 많아서 적게 먹는 사람
이나 여자들은 좀 남기는 편. 그렇다면저렇게 먹고 가격은 과연 얼마일까? 2004년 초에는 3500원에
해결되었으나, 그 후반부터 4000원으로 인상, 지금까지 그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정말 5000원을 줘도
아깝지 않은 작품으로 배고프다며 원성만 잔뜩 부린 배의 불만을 이렇게 잠재우고 경기전(慶基殿)옆
돌담길을 지나 전주천(全州川)으로 향했다.

~~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6월 24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7월 4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7월 11일
* 상편 숙성기간 - 2006년 7월 12일 ~ 8월 25일
* 공개일 - 2006년 8월 25일부터

Copyright (C) 2006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

임실 오수 의견비, 사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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