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권 사진,답사기'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15.10.15 주인을 구하고 숨진 의로운 개의 넋이 서린,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리석불, 해월암)
  2. 2015.09.09 호남의 소금강, 순창 강천산 (강천사, 구름다리, 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3. 2014.07.21 서해바다에 떠있는 아름다운 섬의 무리들 ~ 군산 고군산군도, 선유도 나들이 (장자도, 비응항)
  4. 2012.12.07 근대문화유산의 떠오르는 성지 ~ 군산 나들이 (왜식 사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교...)
  5. 2012.01.11 전주한옥마을 겨울 산책 (오목대, 한벽당..)
  6. 2010.02.02 한벽청연의 현장 전주 한벽당
  7. 2010.01.27 전주사고(史庫)
  8. 2010.01.23 임실 오수리석불 1
  9. 2009.10.02 발산초등학교의 문화유산들 (발산리5층석탑, 석등, 6각부도)
  10. 2009.09.29 군산 은적사

주인을 구하고 숨진 의로운 개의 넋이 서린,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리석불, 해월암)

 


' 의견(義犬)의 고장, 임실 오수 나들이 '
오수 의견비
▲  오수 사람들의 자랑, 오수 의견비


 

울 제국이 한참 위세를 부리며 천하를 핍박하던 1월 한복판에 전북 중심부에 자리한 전주
(全州)와 임실(任實)을 찾았다.

전라도의 오랜 중심지인 전주에서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오후에 임실 땅으로 넘어가 의견의
고장인 오수를 찾았다.
임실군에 속한 오수는 임실읍과 남원시(南原市) 사이에 둥지를 튼 고을로 17번 국도와 전라
선(全羅線) 열차가 고을 한복판을 관통해 교통은 제법 괜찮은 편이다.

오수에는 이곳의 자랑인 의견비가 있으며, 오수지구대 앞에는 오래된 망루가 있다. 또한 오
수 시내 서쪽을 흐르는 오수천(獒樹川) 서쪽 너머에는 오수리석불과 해월암 등의 이름 없는
명소가 숨겨져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다. 의견비를 중심으로 2시간 정도 발품을 팔면 오수에
서린 4곳의 명소를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  주인을 구하고 숨진 의로운 견공(犬公)의 넋이 서린
오수 의견비(義犬碑) - 전북 지방민속문화재자료 1호

오수터미널에서 남쪽으로 4분 정도 뚜벅거리면 왜정 때 지어진 오수망루가 나온다. 망루 부근에
의견비를 알리는 커다란 갈색 이정표가 있는데, 그의 안내를 받아 오른쪽 골목(오수3길)을 들어
서면 의견비를 품은 원동산공원(圓東山公園)이 모습을 비춘다.

의견비는 자신을 기르던 주인을 구하고 숨진 개를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주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개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여 모르는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땅에는 오수 외
에도 밀양(密陽)과 구미(龜尾, ☞ 관련글 보러가기) 등 많은 지역에서 전해오고 있으며 다른 나
라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아 인간들 마음에 잔잔한 감동의 쓰나미를 선사한다.
개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여 그 주인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기도 한다. 오수 의견비는 그런 의견을 위해 후대 사람들이 세
운 비석으로 이 땅에 전해오는 의견 관련 유적의 대명사라 할 수 있겠다.

이 땅의 의견 설화의 대표격인 오수 의견 설화는 고려 무신정권 때 활약했던 최자(滋, 1188~
1260
)의 보한집(補閑集)과 조선 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소상히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견 설화는 등장 인물의 이름과 장소만 다를 뿐, 줄거리
는 비슷하다.

때는 신라 후기인 9~10세기 경, 거령현(居寧縣, 임실군 지사면)에 김개인(金盖仁)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애지중지 기르던 개가 있었는데 어딜 가든 항상 그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김개인은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 집으로 오다가 그만 길가에 퍽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마침 부근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산불은 삽시간에 그가 벌러덩 자는 곳까지 번져왔는
데, 개는 어떻게든 주인을 깨우고자 안간힘을 썼으나 그는 꿈나라에 깊숙히 들어가 좀처럼 깨어
나지를 못했다. 하여 개는 가까운 냇가로 달려가 몸에 물을 적시고 불에 뿌리는 형식으로 진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화마(火魔)로부터 주인을 구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닌
것이다.

개는 간신히 불을 진압하여 주인을 구하는데 성공했으나 너무 체력을 소비한 나머지 쓰러져 결
국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간신히 꿈나라에서 나온 주인은 자기 옆에
쓰러져 있던 개를 보고 상황 파악을 하게 되었고, 그런 개를 껴안으며 목놓아 울었다.
나중에 그는 노래를 지어 개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친히 무덤을 만들어주고 그 옆에 자신의 지
팡이를 꽂았다. 그런데 지팡이에 그 개의 혼이라도 깃들여져 있는지 그것이 나무가 되어 무럭무
럭 자라나니 이 나무를 큰 개를 상징하는 오(獒)를 붙여 '오수(獒樹)'라 하였고, 그것이 이곳의
지명이 되었다.

그 이후, 오수 사람들은 의견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워 이를 동네의 긍지로 삼으니 지금도 그 자
랑은 여전하다. 비석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없이 마멸된 것을 1955년 4월 8일에
지금의 비석으로 새로 갈았으며, 비석에 비각을 씌우고, 주변을 정리하여 원동산공원을 닦았다.


▲  의견상과 나이 500년이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 (임실군 보호수 9-11-3호)
의견상에 늘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는 느티나무로 높이가 무려 18m에 이른다.
허나 혹독한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벌거숭이의 몸으로
제국의 시련을 견딘다.

▲  글씨의 폼이 예사롭지 않은 원동산공원 정문

의견비를 품은 원동산공원은 조그만 공원으로 오수 사람들의 포근한 휴식처이다. 정문을 들어서
면 정면으로 의견비를 간직한 비각이 보인다. 그 비각까지는 돌이 박힌 돌길이 펼쳐져 있고, 그
주변으로 여러 나무들이 공원을 아름답게 수식한다.

비각에 들어있는 의견비는 1955년에 새로 만든 것으로 비각 좌측에는 나이 500년의 오랜 느티나
무가 의견비와 의견상의 우산/양산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공원에 있는 나무 중, 제일 오래된
것으로 어쩌면 의견의 주인이 심은 나무의 후예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주인의 혼이라도 서린 듯,
언제나 비석과 의견상을 지켜주는 느티나무로 서로를 보듬은 정겨운 풍경이다.

의견비 동북쪽에는 의견의 형상이 마치 위대한 인물의 동상처럼 세워져 있는데, 예전에 왔을 때
는 그의 목에 꽃목걸이가 걸려져 있었다. 허나 지금은 겨울이라서 목걸이는 없는 상태, 이처럼
오수는 의견의 고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를 소재로 한 보신탕으로도 유명하여 나그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의견비와 동상을 만들어 의견을 기리지만 다른
쪽에서는 개를 잡아 보신탕을 끓여먹는 것이다. 어쩌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미묘한 현장이기도
하지만 의견은 어디까지나 의견이고 보신탕은 어디까지나 보신탕일 뿐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
는 쓸데없는 생각이나 비난은 없었으면 한다.

▲  공원 구석에 있는 비석군(碑石群)

▲  오수고적기실비(獒樹古蹟記實碑, 오른쪽)
, 오수의견비 문화재 표석(왼쪽)


▲  의견비각(義犬碑閣)에 담긴 의견비

▲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의견상

의견을 기리는 비석이나 무덤은 있어도 동상까지 갖춘 곳은 천하에서 오수가 거의 유일할 것이
다. 그만큼 동네 사람들의 긍지와 사랑이 대단한 것이다. 물론 사람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개
의 입장에서는 이런 것을 과연 어찌 생각하고 있을까?


※ 오수 의견비 찾아가기 (2015년 10월 기준)
* 용산역,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익산역, 순천역, 여수엑스포역에서 전라선 무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오수역 하차
* 동서울터미널에서 오수 경유 남원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떠난다.
* 전주, 남원에서 오수 방면 직행버스 이용 (1시간에 3~5회 운행)
* 오수터미널을 나와서 오수시장 방면 남쪽으로 4분 정도 걸으면 의견비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
  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1분 들어가면 의견비가 있는 원동산공원이다.
* 오수역에서 택시를 이용하거나 도보 20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는 주변 길가에 하면 됨)
① 순천완주고속도로 → 오수나들목을 나와서 오수, 남원 방면 → 남악교차로에서 우회전 → 오
   수 시내, 오수 지구대에서 좌회전 → 하나로마트에서 바로 우회전 → 오수 의견비
*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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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수 지역 명소 둘러보기

▲  임실 오수망루(獒樹望樓) - 등록문화재 188호

수 시내 한복판인 오수지구대(치안센터) 앞에는 고색의 때가 흠뻑 묻어난 붉은 피부의 돌탑이
있다. 그가 바로 이곳을 지키던 오수망루이다.

오수망루는 왜정(倭政) 말기인 194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는
12m, 하부 지름이 2.4m로 이 땅에 남아있는 망루 가운데 가장 높다. 그의 역할은 마을을 지키며
통제하고 비상 상황 또는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축조 방식은 벽돌을 원통형으로 쌓아 꼭대기에 6각형의 망대(望臺)를 두었으며, 6각의 각 면에
는 구멍을 내어 사방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망대에는 사이렌을 울리던 스피커 2개가 남아 있
으며, 망루 내부에는 지름 65cm로 벽을 따라 철제 계단이 놓여 있고, 망루 1층에는 작은 문이
있다.

2005년 국가 지정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면서 현재는 망루 내부롤 들어갈 수 없다. 얼핏
보면 공장의 굴뚝이나 교도소의 망루와도 비슷해 보이는데, 왜정부터 근래까지 오수 고을을 지
키고 통제하던 존재로 역사성과 건축학적 가치까지 지녔으며, 망루가 걸친 벽돌마다 70년 세월
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선사한다. 문화재 지정명칭은 '임실오수망루'이나 '오수망루'로 불
러도 무관하다.
* 오수망루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348-6


▲  오수리 석불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86호

오수의견비를 둘러보고 공원 정문에서 왼쪽으로 2분 정도 가면 오수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오
수천(獒樹川) 둑방길이 나온다. 둑방길에서 오른쪽(북쪽)으로 2분 가면 하천 위에 걸린 월교란
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 길은 좌우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해월암로 이
어지고, 왼쪽으로 가면 바로 관월마을인데, 그 마을로 들어서 산이 있는 서쪽으로 계속 비집고
들어가면 산림과 접한 마을 서쪽 끝으머리에 '도석사'란 조그만 절과 뾰족하게 솟은 석불이 손
짓한다. 그가 바로 관월마을의 수호신 오수리 석불이다.


▲  멀리서 본 오수리 석불

동쪽으로 관월마을과 오수 시내를 굽어보며 서 있는 오수리석불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지며, 미륵불(彌勒佛)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불상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지 못하며, 다만 믿거나 말거나 재미있는 전설이 한 토막 아련하게 전해온다.

대략 300년 전 마을 아낙네가 마을 뒷산에서 집채만한 바위가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저것좀 보소!!' 큰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바위는 뻘쭘하여 그 자리에 멈춰 섰는
데, 그 바위가 바로 오수리 석불이라는 것이다. 그 전설을 통해 아마도 산사태나 홍수로 떠밀려
왔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겠는데, 불상 주변에는 절터로 보이는 흔적이 없으므로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었던 듯 싶다. (근처 해월암에서 넘어 왔을 가능성도 있음)
하지만 불상이 입을 굳게 봉하며 비밀을 말해주려 하질 않으니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어
쨌든 산에서 내려온 석불을 받아들인 마을 사람들은 그를 정성껏 모셨는데, 만약 그가 마을 앞
까지 내려왔다면 마을이 더욱 번창하고 자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오수리 석불은 하나의 돌로 된 불상으로 아랫 부분이 땅속에 묻혀있어 맨땅 위에 서 있다. 석불
의 높이는 3.5m로 대체로 완만한 타원형이며, 얼굴은 거의 무표정해 보인다. 눈은 지그시 떠 있
고, 코는 볼록하며 입은 굳게 다물어져 미소는 보이지 않고 볼에는 살이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있고, 두 귀는 중생의 작은 소리하나 놓치
지 않으려는 듯 어깨까지 크게 늘어져 있다.

몸에 걸쳐진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두 손은 옷 안에 들어있으며, 볼록하게 표현된 소매
자락은 법의와 함께 밑으로 내려져 있다. 얼굴과 몸 뒤쪽에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등의 광
배(光背)가 새겨져 있는데, 화염무늬가 세심하게 수놓여 있다.


오늘도 묵묵히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그의 가호 덕분인지 관월마을과 오수는 그다지 큰 사
고는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불상 양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오랜 세월을 뛰어넘은 정정한 모
습으로 마을 사람들의 친근한 벗이자 정신적인 지주로 그들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석불 옆에는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현대 사찰 도석사가 자리해 있다.
* 오수리석불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550-1


▲  해월암(海月庵)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24호
해월암에서 가장 연세가 지긋한 건물로 대웅전과 달리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건물 좌측칸에는 해월암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귀뜀해준다.
 

수에서 관월교를 건너면 길이 2갈래로 갈린다. 왼쪽은 앞에서 언급한 오수리석불이 있는 관월
마을이고, 오른쪽 길은 산으로 올라가는데, 그 산길의 끝에 조그만 암자 해월암이 어미 품에 안
긴 알처럼 포근히 터를 닦았다.

오수 시내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해월암은 고려 후기인 1352년(공민왕 1년)에 해경(海
境)과 월산(月山) 두 승려가 창건했다고 하며, 1396년(조선 태조 4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절의 이름인 해월은 해경과 월산의 이름 첫 자를 딴 것
이라고 한다.

창건 이후 1556년(명종 11년)에 남원부사(南原府使)가 중건했다고 하며, 1747년에 중수가 있었
다. 1858년(철종 9년)에도 중건이 있었고, 1915년 봉인(奉仁)이 불상을 만들어 봉안하면서 절을
손질하였다. 1990년 주지 정현이 대웅전을 새로 지어 지금의 면모를 갖추었다.


▲  해월암 가는 길목에 자리한 청기와 누각
오수 사람들의 납량 피서지로 이곳에 오르면 조그만 오수 시내가 두 눈에 들어온다.


손바닥처럼 조그만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오래된 요사, 그리고 본
연당(本然堂)이라 불리는 새 요사 등 4~5동의 건물이 있다. 이중 대웅전 뒤에 자리한 옛 요사가
해월암의 유일한 옛 흔적으로 그가 '해월암'이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옛 요사는 부엌을 갖춘 방 3개짜리 기와집으로 불전(佛殿)이라기 보다는 양
반가의 기와집이나 별당(別堂), 경치가 좋은 곳에 짓는 조그만 기와집 비슷한 모습이다.

옛 요사를 가리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556년에 처음 지어졌다
고 한다. 1915년에 중수하고 1990년에 새로 지었는데,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협시한 목조(木彫) 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들은 1352년 창건 당시의
불상이라고 우기고 있으나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불상이 있는 수미단(須彌壇)은 수려하기 그지
없으며, 건물 내외부에 그려진 단청은 절의 왜소함을 능히 덮을 정도로 화려하다.
또한 1915년에 쓰여진 '해월암중수기'와 '제해월암(題海月庵)' 현판이 있는데, 제해월암은 해월
암에 대한 시문(詩文)이다. 대웅전 앞에는 석등 1쌍이 서 있으며, 그 좌측에 새 요사인 본연당
이 방금 지어진 산듯한 모습으로 승려와 신도의 숙식을 책임진다.

▲  하얀 눈기와를 지닌 해월암 대웅전

▲  해월암 본연당

대웅전을 기준으로 우측 높은 곳에 산신각이 경내를 굽어본다. 산신각(山神閣)은 정면 1칸, 측
면 1칸의 조촐한 크기로 우리에게 친숙한 산신(山神)을 비롯하여 칠성탱(七星幀)을 머금고 있다.

해월암은 오수 지역의 유일한 옛 절로 나무가 무성하여 산속 깊숙히 들어온 기분이다. 속세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고, 속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아 찾는 이는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
윽한 산중암자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적막에 잠긴 절에 지나가던 산바람이 졸고 있던 대웅전
추녀의 풍경물고기를 깨워 겨울잠에 든 절을 살포시 깨운다.
답사객의 발길이 거의 없는 탓인지 본연당에서 나온 승려가 약간 경계를 품으며 무슨 용건으로
왔냐고 묻는다. 그래서 답을 주니 그제서야 표정을 바로 고치고서는 잘 구경하라며 안으로 들어
간다. 경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웅전 앞 뜨락은 겨울 제국이 보낸 눈이 한가득 쌓여있었
고, 날씨가 조금은 풀린 탓에 눈들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조금씩 철수하고 있었다.

▲  경내를 굽어보는 칠성각

▲  산신각에서 바라본 해월암 경내


▲  해월암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

해월암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 겨울 제국의 쫓겨 햇님도 서둘러 퇴근을 재촉하고 어두
운 기운은 다시 세상을 훔치려 든다. 이리하여 의견의 고장 임실 오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마침
표를 찍는다.

* 해월암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대명리 715 (☎ 063-642-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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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소금강, 순창 강천산 (강천사, 구름다리, 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 호남의 소금강, 순창 강천산(剛泉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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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다리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천산

천우폭포 숲길 구장군폭포

▲  천우폭포 숲길

▲  구장군폭포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8월 한복판에 호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격하게 찬양
받는 순창 강천산을 찾았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7시에 떠나는 전주(全州)행 직행버스를 타고 근 3시간을 달려 호남의 오
랜 중심지인 전주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잠시 숨 좀 고르다가 순창(淳昌)으로 가는 직행버스
로 다시 1시간을 내달려 고추장의 고장인 순창에 이른다.

순창에서 11시 반에 강천산(강천사)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기다리니 시간이 다되도록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이거 무단 결행이 아닌가 걱정이 들던 찰라, 버스는 딱 시간에 맞추어 슬그머
니 타는 곳으로 들어와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타고 다시 10분을 11시 40분에 강천산 종점에
도착했다.


♠  강천산(剛泉山) 들어서기

▲  강천산 관광안내소 내부의 강천산 모형도

순창읍에서 강천산으로 가는 중에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비가 조금씩 창밖에 한줄기 낙서를 휘
갈기고 있었다. 그날 기상청 날씨예보에서는 비가 온다는 내용이 없었는데 하늘이 그걸 비웃듯
선전포고도 없이 대지를 적시고 있는 것이다. 비에 대항할 장비를 하나도 갖추지 못했는데, 이
거 어찌해야 되나 난감해 하던 중, 버스는 강천산 종점에 도착해 바퀴를 접었다.

비는 그렇게 많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우산이 필요할 정도로 꾸준히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
선 제2주차장 부근에 있는 강천산 관광안내소로 피신해 비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관광안내소에는 강천산을 축소한 모형도를 비롯해 순창군 관광안내도와 관광정보, 고추장과 여
러 특산품 정보 등을 담고 있다.

순창의 제일 명소인 강천산(583,7m)은 순창 서쪽에 자리한 명산으로 산세가 수려하고 숲이 무성
하며, 폭포와 잘생긴 바위가 많아 호남의 소금강으로 일컬어진다. 1981년 1월 7일 이 땅에서 최
초로 군립공원(군청에서 지정한 공원)으로 지정된 현장이기도 하며, 강천산(왕자봉)을 비롯하여
광덕산(565m), 산성산(연대봉, 603m) 등의 봉우리를 지니고 있다. 또한 서쪽으로 담양 금성산성
과 이어져 있다.
강천산의 주요 명소로는 강천사와 삼인대, 병풍바위, 구장군폭포, 약수폭포, 천우폭포, 구름다
리, 용소 등이 있으며, 내장산, 백암산(白巖山)과 함께 가을 단풍명소로 이름 높다. 관광객 상
당수는 걷기에 별 부담이 없는 강천산계곡길을 이용해 구장군폭포나 구름다리까지 다녀오며, 넉
넉잡아 3시간 정도 걸린다.

관광안내소에서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약간의 기대를 품으며 바깥에 나가보았다. 허나 전혀 나
아진 것은 없었다. 마침 점심시간이고 하니 우선 점심밥을 먹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관광안내소 서쪽에 펼쳐진 상가촌에는 여느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식당과 기념품점, 민박집이 즐
비하다. 어느 식당이 좋을까 재고 있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마땅한 호객행위는 없었고, 다만 완
도식당 1곳만 방황하는 나를 향해 적극적으로 호객을 한다. 그 식당 주인할매가 먹고 가라고 자
꾸 손짓을 하니 마지못해 그곳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평일 점심시간이라 손님은 하나도 없었고, 그건 다른 식당도 비슷했다. 내가 추천 메뉴를 물으
니 주인할매는 산채비빔밥을 권했다. 산에 왔으니 산채 나물이 들어간 비빔밥이 제일 무난하겠
지. 혼자 먹기에도 별 부담이 없고, 음식 메뉴 가운데 가격도 제일 낮으니 말이다. 허나 그 가
격은 무려 7,000원... 그래서 그걸 달라고 주문을 하니 10분 뒤에 잘 차려진 산채비빔밥과 갖은
반찬들이 내 앞에 펼쳐진다.


▲  완도식당에서 먹은 산채비빔밥의 위엄

여러 산채나물이 버무러진 산채비빔밥을 중심으로 6가지의 정갈한 반찬과 된장국이 나왔다. 반
찬도 죄다 풀이며, 된장국에는 감자와 두부, 파만 들어있다. 주인할머니는 더 먹으라며 공기밥
1그릇을 살짝 건넨다.
시장기가 폭발하여 비빔밥과 반찬, 된장국을 싹싹 긁어먹었다. 그렇게 기분좋게 점심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다행히 빗방울도 조금은 줄어들어 그대로 강천산으로 밀고 들어갔다.


▲  강천산계곡 (공원관리소 직전)

가촌과 제1주차장을 지나니 반갑지 않은 존재가 나그네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바
로 입장료를 징수하는 공원관리소 매표소이다. 처음에는 1,000원 내외로 생각했는데, 확인해 보
니 무려 3,000원.. 학생과 군인은 2,000원씩이나 한다. 강천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郡
立公園, 1981년에 지정됨)이긴 하나 군립공원의 입장료 치고는 너무 비싼 감이 든다. 허나 입장
료를 깎을만한 마땅한 명분이 없어 3,000원의 거금을 내고 매표소를 통과했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은 지리산(智異山), 최초의 도립공원은 금오산(金烏山)임>


▲  병풍바위와 병풍폭포 (왼쪽이 중심 폭포임)
비록 두 폭포의 물줄기와 높이는 현저히 다르지만 나란히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똑같다.


공원관리소에서 씁쓸한 마음을 삼키며 안으로 들어서니 놀라운 풍경 하나가 나의 두 발을 묶는
다. 바로 병풍바위와 병풍폭포이다.
병풍바위는 그 바위 밑을 지나는 그 어떤 사람도 깨끗해진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데, 이는 강천
사에서 지어낸 말인 듯 싶다. 강천사를 목전에 둔 지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속세(俗世)의 번
뇌를 벗어던지고 들어와 해탈(解脫)을 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그런 병풍바위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아래로 쏟아지고 있는데, 이를 병풍폭포라고 한다. 폭포는
2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의 커다란 폭포가 중심폭포로 높이 40m, 물폭은 15m이다. 1분당
쏟아지는 낙수량은 5톤이라고 한다. 그 동쪽에는 가느다란 물줄기의 폭포가 있는데, 높이 30m,
물폭 5m이다. 이들은 겉으로 보면 자연산 같지만 아쉽게도 인공폭포로 2003년에 지어졌다, 그렇
다고 바위까지 인공은 아니며, 그냥 물줄기만 낸 것이다. 서쪽 폭포의 물줄기를 자세히 보면 자
연산 폭포가 아님을 눈치챌 수 있다.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폭포와 바위의 위엄, 멋드러진 풍경 앞에 앞서의 아쉬운 마음은 싹 가시
고 말았다. 구장군폭포 만큼은 아니지만 장쾌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약간의 더운 기운도 목을
붙잡고 줄행랑을 친다.

강천산은 폭포의 성지(聖地) 답게 폭포가 무지 많다. 병풍폭포를 시작으로 천우폭포, 약수폭포,
용머리폭포, 구장군폭포, 비룡폭포 등이 마치 꽃잎이 여기저기 날아가 앉은 듯 경승을 한층 돋
구고 있으며, 이중 구장군폭포가 단연 으뜸이다.

참고로 병풍폭포에서 산림욕장 데크산책로가 시작된다. 계곡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닌 산자락 숲
길로 계곡길과 적절히 거리를 두고 있으며, 전망대와 황우제골, 팔각정을 거쳐 구름다리 남쪽까
지 이어진다. 또한 강천산계곡길은 웰빙산책로로 삼아 공원관리소에서 구장군폭포까지 마음 편
히 맨발로 걸을 수 있게끔 흙길을 잘 다졌다.


▲  강천산계곡 (병풍바위와 용소 사이)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계곡물이 경쾌하게 졸졸졸~♪ 노래를 부르며
큰 세상으로 흘러간다.

▲  녹색의 진한 물결 강천산계곡 탐방로

▲  계곡에 뿌리를 내린 조그만 돌탑들
중생들의 조촐한 소망이 깃들여진 돌탑들이 계곡 물결 위에 뿌리를 내렸다.
겉으로 보면 물결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지만 겉보기와 달리 견고하여
거의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돌탑을 쌓은 이들의 소망이 굳게 이루어진 것일까?

▲  길가에서 만난 작은 폭포
가파른 바위에 한줄기 길을 내고 내려오는 조그만 폭포
속세에서 그에게 지어준 이름은 아직 없는 모양이다.

▲  무명의 폭포를 지나고 ~ 신록이 가득한 산길
저 풍경을 집으로 고이 훔쳐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현실은 그러지를 못한다. 그냥 여기서 실컷 누리고 가야 된다.

▲  현대사의 쓰라린 현장 회문산지구 전적비

원앙사육장 동쪽에는 회문산지구전적비가 초라하게 자리를 지킨다. 이 비석은 1954년 회문산에
머물던 북한군의 잔당, 빨치산을 토벌한 기념으로 세운 전적비로 현대사의 가슴 쓰린 현장이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도망치지 못한 북한군 잔당 1만 명은 지리산을 비롯해 험준한
산에 들어가 항쟁을 벌였다. 특히 지리산 일대에 머물던 빨치산이 지독하여 1953년 7월 휴전 이
후에도 그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계속되었으며, 1956년 7월 비로소 토벌이 마무리 되었다.
그 기나긴 시간 지리산과 빨치산 은거지 주변에 살던 많은 양민들이 원통한 넋이 되었으며, 거
창 양민학살사건을 비롯한 여러 학살사건이 일어나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그들 가운데 빨치산
에 적극 가담하고 도운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협박에 못이겨 국군과 빨치산 양쪽의 눈치를 보
던 순진한 백성들이었다.

전적비가 다소 외진 곳에 있어 지나치기가 쉽다. 상쾌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만나는 씁쓸한 현장
이긴 하지만 우리가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되는 그러나 다시는 재방송되서는 안되는 이 땅의 역
사이다.


♠  강천산 천우폭포(天雨瀑布)

병풍바위에서 15분 정도 올라가면 송음암이란 기암절벽이 나온다. 그 울퉁불퉁한 피부에 물줄기
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데 이를 천우폭포라고 부른다. 겉으로 보면 자연산처럼 보이지만 병
풍폭포와 마찬가지로 바위에 물줄기를 낸 인공폭포로 하늘에서 비가 오면 자연히 폭포가 이루어
진다는 뜻에서 천우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폭포 앞에는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어어 숲길이 짧게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폭포
와 계곡이 어우러져 선경(仙境)의 극치를 진하게 우려내니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다. 나 역시 이곳 풍경에 제대로 퐁당퐁당 빠져버렸다.
나무 그늘에는 폭포를 구경할 수 있도록 벤치가 여러 개 베풀어져 있으며, 강천산 명소 가운데
구장군폭포와 더불어 단연 으뜸으로 치고 싶은 곳이다.

  천우폭포 앞 메타세콰이어 숲길

여름이 이쁘게 채색을 들인 아름다운 메타세콰
이어 숲길, 늘씬한 자태로 쭉쭉 솟아나 하늘을
가린 숲길은 나그네의 마음을 다시금 들었다가
놓는다.
나무가 불어준 산내음에 속세의 번뇌를 저만치
날려 보내며 계속 길을 재촉한다. 허나 번뇌가
너무 무거워 인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천우폭포 앞 녹음이 깃든 숲길
자연과 여름이 앞다투어 깃들여진 탓인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  푸른 물감이 첨가된 듯한 용소(龍沼, 아랫용소)

강천산에는 용소라 불리는 담(潭)이 2개가 있는데, 여기는 아랫용소이다. 구름다리 부근에 있는
윗용소에는 숫용이, 이 용소에는 암용이 살았는데 세상이 혼란해지면 서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다.
물이 워낙 청정하여 밑바닥이 거의 다 보이지만 겉보기와 달리 수심이 깊어 옛날 사람들이 수심
을 재고자 명주실을 내리니 딱 한 타래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만큼 깊다. 괜히 안전 장비 없이
푸른 색의 유혹되어 무책임하게 풍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  강천사의 일주문(一柱門)인 강천문(剛泉門)

용소를 조금 지나면 강천문이라 불리는 맞배지붕 문이 중생을 맞는다. 이 문은 강천사의 일주문
으로 다른 절의 일주문보다 규모가 좀 있으며, 절의 이름 대신 강천문이라 쓰인 현판을 내걸었
다. 즉 강천사의 일주문이란 뜻이다.


♠  강천산 품에 포근히 안긴 작은 고찰 ~ 강천사(剛泉寺)

일주문을 들어서면 수해(樹海)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강천사의 조촐한 산문이 조금씩 모습을 비추
기 시작한다. 2층짜리 누각을 비롯하여 현대식으로 지어진 해우소(解憂所)와 세심당, 염화실 등
이 차례대로 나타나며, 그 다음에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이 이곳의 오랜 보물인 5층석탑과 나란
히 나타난다.

강천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강천사는 강천산 유일의 절집으로 887년 도선국사(道詵
國師)가 창건했다고 하나 근거는 없다. 1316년 덕현(德賢)이 중창하면서 5층석탑을 세웠다고 하
며, 강천산이란 이름은 이 절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1482년 신말주(申末舟, 1439~?)의 부인 설씨가 '강천사모연문(募緣文)'을 작성했는데, 바로 그
해 설씨 부인의 지원으로 중창되었다고 한다. 신말주는 세조 때 공신(功臣)인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으로 1470년 순창으로 내려와 살았다고 하며, 모연문에 따르면 옛날에 신령(信靈)이 광덕산
가운데서 명승지를 골라 그곳에 초암(草庵)을 짓고 지낸 것에서 강천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계곡처럼 흘러 절이 폐허의 지경에 이르자 중조(中照)가 서원을 내어 시주를 모아
중창했는데, 부근에 부도(浮屠)가 있으므로 절 이름을 임시로 부도암(浮屠庵)으로 갈았으며, 이
때 절은 비록 소소한 규모지만 청정한 수도처로서 유명했다고 한다. 허나 절이 다시 쇠락에 빠
지자, 증조가 신말주의 부인인 설씨의 지원을 받아 중창을 했다.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되어 1604년 소요(逍遙)대사가 중창했으며, 1760년(영조 36년)에 출판된 '
옥천군지'에는 당시 절의 부속암자로 명적암, 용대암, 연대암, 왕주암, 적지암 등 5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나와있어 지금과 달리 왕년에 꽤나 잘나갔음을 보여준다.
1855년 금용(金容)이 중창했으며, 6.25전쟁으로 완전히 쑥대밭이 된 것을 김장엽 주지가 1959년
첨성각을 짓고, 1977년 관음전, 1978년 보광전을 새로 지었다. 1992년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이
름을 갈았고,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심우당과 염화실, 세심당 등 6~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5층석탑과 모과나무가 있다. 그외에 파괴된 석등과 석주의 일부가 대웅전 뜨락에 있으며,
용소 근처에 조선시대 부도 4기가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혀 산골이 깊고 물이 맑으며, 병풍처럼 들어선 숲이 고요한 바다를 이루
고 있어 그야말로 금강산이 부럽지 않은 곳이다. 비록 옛날의 영화는 거진 다 사라지고 말았지
만 새소리와 솔바람, 산바람 소리가 전부인 그야말로 고적하고 호젓한 산사로 심술쟁이 번뇌가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로, 산새도 넘어오다 날개가 마비될 정도로 깊은 산골에 묻혀 있다.

강천사는 대웅전과 그 뜨락만 둘러보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승려들의 생활공간이고, 절이 조그
만하기 때문에 대웅전 뜨락에서도 계곡길과 나란히 한 담장 너머에서도 훤히 바라보인다.

▲  경내 동쪽에 새로 지은 2층 문루

▲  염화실과 세심당


▲  강천사 약수터

산사에 꼭 하나씩은 있는 약수터, 강천사도 예외는 아니다. 강천산이 베푼 청정한 옥계수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와 나그네의 목마름을 해소해준다. 빨간 바가지에 가득 담아 한 모금의 신세를
지니 몸 속에 낀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른다.


▲  대웅전 뜨락에 놓인 아픈 상처들 (부도탑)

풀이 곱게 입혀지고 아름드리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대웅전 뜨락에는 5층석탑과 근래에 심은
석등(石燈) 외에 석주와 6.25때 파괴되어 일부만 남은 부도와 석등 등이 초췌하게 자리를 지킨
다. 왼쪽은 조그만 부도탑으로 여겨지는데, 지붕돌과 상륜부(相輪部), 바닥돌과 탑신(塔身)의
일부만 간신히 남아있으며, 바닥돌 위에 잎이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섬세하게 남아 초라해진
자신을 위로한다.
그 동쪽에는 석주(石柱)로 보이는 기둥이 서로의 고된 몸을 기대고 있고, 그 곁에 맷돌처럼 보
이는 동그란 돌이 놓여져 있는데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  대웅전과 대웅전 뜨락 (5층석탑)

강천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61년에 지어졌다. 불
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후불탱화와 지장시왕탱, 산신탱, 칠성탱, 신중탱 등의 탱
화가 걸려있어 칠성각과 산신각 등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강천사5층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92호

대웅전 뜨락에는 보기에도 정말 안쓰러운 5층석탑이 보호철책에 둘러싸여 상처투성이의 고단한
몸을 지탱하고 있다.
이 탑은 강천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316년에 덕현
이 세웠다고 한다. 1중의 기단 위에 5층
의 탑신을 세웠는데, 1층과 2층, 3층 옥개석(屋蓋石)이 크게 깨져나갔고, 4층과 5층 탑신도 그
리 성하지가 못하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과 자연의 괴롭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6.25 때문이다. 그 전쟁은 이 땅의 민중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까지도 불구를 만든 것
이다.

탑신에는 양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옥개석에 높은 3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1층에 비해 2층 이상
이 급격히 줄어드는 점에서 신라 석탑 양식을 기본으로 부분적으로 백제 석탑 양식이 반영된 고
려 석탑으로 추정된다. 상륜부는 노반(露盤)이 사라진 채, 복발과 보륜(寶輪)이 남아있다.

대웅전 바로 앞에는 명문이 새겨진 괘불대가 3개 있는데, 그중 하나에 '乾隆八歲十五(건륭8세15
)'라고 되어 있어 1700년대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심우당(尋牛堂)
대웅전 서쪽 높다란 곳에 터를 닦고 자리한 심
우당은 선방이다. 심우당이란 이름은 선종(禪宗)
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10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되었다.


▲  삼인대(三印臺)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7호

강천사 남쪽 계곡 너머에 삼인대 비석을 품은 1칸짜리 기와집이 있다. 계곡 건너에 자리한 탓에
그의 존재와 사연을 모르는 무심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무심히 지나
가기 일쑤인데, 삼인대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燕山君)이 폐위되고 그의 아우인 중종이 익선관(翼善冠)
을 쓴 채 왕위에 올랐다. 박원종(朴元宗)을 비롯한 반정파(反正派)들은 반정에 반대한 신수근(
愼守勤)을 죽이고, 왕을 협박하여 그의 딸이자 중종의 왕비인 신씨<단경왕후(端敬王后)>를 폐위
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게 했다.

1515년 장경왕후가 후사도 없이 세상을 뜨자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
현감 유옥(柳沃) 등 3명이 비밀리에 강천산에 모여 당시로써는 큰일 날 소리인 신씨의 복위(復
位)를 주장하며, 각자의 관인(官印)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上疏)를 올리기로 결
의를 했다. 그때 그들이 관인을 걸고 맹세한 곳을 3개의 관인을 걸던 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부
르게 되었다. 허나 그들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조선의 여제(女帝)로 악명을 떨친 문
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비어있는 국모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1744년 홍여통(洪汝通), 윤행겸(尹行謙), 유춘항(遊春恒) 등 순창 선비들이 삼인대의 사연
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웠고, 대학자 이재(李縡, 1680∼1746)가 비문(碑文)을, 민우수(閔遇洙,
1694∼1756)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 1691∼1767)가 전서(篆書)를 썼다. 비각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1칸으로 비석의 높이는 157cm, 너비 80cm, 두께 23cm이다.

삼인대는 1963년부터 여러 차례 보수를 했으며, 1978년 삼인대 비석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여
옆에 검은 피부의 비석을 만들었다. 또한 1994년 지역 사람들에 의해 '삼인문화선양회'가 결성
되어 1995년부터 매년 8월 삼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  삼인대 절의탑(節義塔)
삼인대 3인방의 절의를 기리고자 근래에 쌓은 탑으로 탑 꼭대기에 하얀 돌을 심어
그 피부에 절의탑이라 새겼다.

▲  비각 안에 소중히 담긴 삼인대 비석

▲  '삼인대비'로 시작되는 비석의 좌측
글씨가 근래 새겨진 듯 매우 또렷하고 정정한 모습이다.

▲  강천사 모과나무 - 전북 지방기념물 97호

삼인대입구에는 강천사의 또 다른 오랜 보물인 모과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300년 정도 묵은 것
으로 높이 20m, 둘레 3.1m의 노거수(老巨樹)이다. 강천사 승려가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관상용
으로 인기가 좋아 5월에 홍색 꽃을 피운다. 또한 9월에는 황색의 열매가 피어 속세에 모과를 제
공한다.

나무를 살피니 녹음(綠陰)에 젖은 잎파리만 보일 뿐, 열매는 어디 숨었는지 눈에 들어오질 않는
다. 나무 주변으로 붉은 백일홍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그의 주변을 화사하게 맴돈다.


♠  강천산 구름다리와 구장군폭포

▲  윗용소
이곳에는 숫용이 살았는데, 세상이 혼란해지면 아랫용소에 암용과 함께
서로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


강천산의 중심 길이자 공원관리소부터 줄곧 하나의 길로 이어진 강천산계곡길이 윗용소에 이르
면 2갈래로 갈린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숲속데크산책로다 대나무숲길이다 해서 갈림길이 여럿 있
었지만 방향을 두고 그리 갈등은 없었는데, 여기서는 갈등이 생긴다. 이유는 여기서 용소를 건
너 직진하면 구장군폭포이고, 오른쪽 까마득한 계단길을 오르면 전망대와 구름다리로 이어지는
데, 구장군폭포와 구름다리를 모두 보고 싶기 때문이다.

푸른 물감이 흐드러진 듯, 순수함을 자랑하는 윗용소는 강천사 밑의 용소와 구별하기 위해 그렇
게 부른다. 상류에서 내려온 물이 암반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와 용소를 이루며, 여기서 잠시
비를 피하고자 20분 정도 머물렀다.

비가 어느 정도 가늘어지자 먼저 구름다리로 가기로 했다. 구름다리와 전망대까지는 0.2km라고
하지만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급해 체감거리는 0.5km 정도 되는 듯 싶다. 계단을 힘겹게
오르니 그 언덕 정상부에 마치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누각처럼 전망대가 보이고, 그 전망대로
오르니 천하일품의 조망(眺望)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 조망 앞에 조금 전의 고단함과 날씨에
대한 서운함이 싹 가셔버린다.


▲  구름다리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 구름다리와 강천산계곡

구름다리 동쪽 전망대에 발을 딛으면 주황색이 칠해진 강천산의 명물 구름다리와 장군봉, 강천
산계곡 상류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록 첩첩산중이라 보이는 범위는 좁지만 강천산계곡을 둘
러싼 여러 봉우리가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보이고, 녹음에 젖은 강천산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실감나게 둘러볼 수 있다.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구름다리와 이어지고, 동쪽으로 가면 강천산계곡으로 이어진다.
허나 여기까지 왔으니 구름다리의 아찔함과 그 위엄을 체험해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  강천산 구름다리

▲  구름다리를 건너다 - 남해대교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밑에서 올려다본 구름다리의 아찔함

강천산의 인공적 명물인 구름다리는 강천산계곡 상류 협곡에 설치되어 있다. 길이 75m, 높이 50
m로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다리가 조금씩 꿈틀거려 나그네의 염통을 제대로 오므라들게 만든다.
게다가 아래를 바라보면 아찔한 현기증에 눈을 감게 만들어 다리를 건너지 않고 꼬랑지를 내리
는 사람도 적지 않다.

다리의 길이가 75m라고 하나 실제 체감거리는 능히 100m를 넘는다. 짧은 거리를 믿고 다리를 건
너니 정말 그 아찔함에 나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생겨난다. 다리 바닥에는 4개의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는데, 그 구멍을 통해 아래가 훤히 보인다. 밑을 보면 현기증이 날 것 같
으니 천상 눈은 다리 건너편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고 양쪽 난간을 잡아
걸음을 빨리 했다.
분명 건너편이 가까이에 보이는데도 쉽사리 와 닿지가 않는다. 75m가 이렇게 길었단 말인가..?
두려운 마음이 그 거리마저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리 위에서 사진이라도 담았어야 했는데, 다리
의 아찔함에 그럴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건너 버렸다.

건너편으로 넘어가 내려가는 길을 찾았으나 지도를 잘못 봐서 올라가는 길만 있는 것으로 착각
했다. 여기서 700m 정도 오르면 신선봉(425m)이 나오는데, 나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다. 게다
가 비까지 조금씩 내리고 있어 산을 오를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 잡고 다리를
다시 건너 동쪽으로 돌아왔다. 본의 아니게 다리를 왕복한 셈이다.

동쪽 전망대로 돌아와 동쪽으로 나 있는 내리막길을 거쳐 계곡으로 내려왔다. 계곡에는 비를 피
할 수 있는 조그만 쉼터가 있는데, 여기서 구름다리의 위엄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마치 구름 위
에 떠 있는 듯한 다리, 마침 용감한 나그네 1명이 다리에서 계곡 상류를 향해 사진을 찍고 있었
다. 그 광경을 보며 그저 다리를 건너는데 급급했던 내 자신이 조금은 씁쓸해진다.


▲  구장군폭포로 인도하는 오솔길

구름다리 밑에서 계곡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산수정이란 정자와 구장군폭포가 나온다.
이 구간은 앞서의 길과는 약간은 틀리다. 계곡을 3번 정도 건너야 되는데, 지금까지는 모두 다
리가 있었지만 이 구간은 다리와 함께 두 다리에 물을 묻히며 직접 계곡을 건너는 구간도 마련
되어 있다. 다리에 물을 묻히지 않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다리를 건너면 되고, 강천산계곡길의
특징인 맨발 산책이나 계곡물을 원하면 다리 옆에 마련된 길로 물살을 헤치며 건너면 된다. 직
접 건너는 구간은 통행에 별무리가 없도록 바닥을 잘 다졌기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


▲  구장군폭포 곁에 세워진 산수정(山水亭)
구장군폭포의 명쾌한 물줄기를 보며 쉴 수 있는 정자로 근래에 지어졌다.

▲  수직으로 가파른 벼랑에 물길을 낸 구장군폭포(九將軍瀑布)

강천산계곡 산책로의 종점이라 할 수 있는 구장군폭포는 강천산의 얼굴이자 백미(白眉)이다. 강
천산에 왔다면 꼭 봐야 되는 경승지로 이곳을 눈에 넣지 않고는 강천산에 갔다고 우길 수 없다.
폭포 물줄기가 2개로 이루어져 있어(서쪽에 깎아지른 벼랑인 거북바위에도 여러 물줄기가 있음)
둘 다 구장군폭포로 생각하기 쉽지만 진품은 오른쪽 폭포이다. 왼쪽 폭포는 근래에 물줄기를 낸
인공폭포로 겉으로 보면 거의 자연산처럼 보인다.

구장군폭포는 높이가 무려 120m에 이르는 3단 폭포로 제일 윗부분은 수직으로 거의 70m 가까이
떨어져 장관을 이룬다. 그렇게 급하게 낙수(落水)한 물은 조금은 완만한 2단과 3단 부분을 거쳐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들 물이 옹기종기 모인 담을 용소라고 하며, 이곳에 모인 물은 청랭한 산
공기를 싣고 속세로 흘러간다.

폭포 맞은편에는 산수정과 여러 벤치를 두어 폭포를 구경하며 두 다리를 쉬도록 배려했고, 용소
앞에는 보다 가까이에서 폭포를 구경하도록 나무도 조망대를 만들었다. 폭포 부근에는 남근석과
사랑 관련 조각품들이 있는 공원, 강천제2호수, 수좌굴이란 자연굴이 있다. 강천제2호수는 강천
산계곡 상류에 만든 산중호수로 호수 주변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며, 강천제1호수는 강천산 입
구에 있는 강천호를 일컫는다.

구장군폭포에서 느긋한 산책로는 끝을 맺으나 그 길이 산길로 바뀌는 것일 뿐, 완전히 끝난 것
은 아니다. 여기서 계곡을 따라 15분 정도 가면 비룡폭포가 나오며, 연대암터를 지나면 금성산
성(金城山城, 사적 353호) 동문(東門)에 이른다.


▲  구장군폭포 용소

▲  구장군폭포 (오른쪽이 진품)

▲  구장군폭포 서쪽 벼랑 (거북바위)

구장군폭포는 말그대로 9명 장군의 폭포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때는 삼한(三韓)시대, 마한(馬韓) 장수 9명이 전쟁에서 패해 이곳으로 쫓겨왔다. 그들은 여기서
자결을 하여 치욕을 씻고자 했으나, 그중 1명이 '자살을 할 바에는 차라리 1명의 적이라도 더
죽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제안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장수들은 다들 힘을 얻어 다시 전장으로 나가 승리를 거뒀다고 하며, 그래서 구장
군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이야 뭐 어쨌든 이 폭포는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마냥 위엄이 상당하며, 폭포와 그를 껴안은 거북바위의 위용 또한 대단하여, 아무리
만물의 영장을 칭하며 설치는 인간을 보기 좋게 주눅들게 만든다. 인간이 아무리 대단하다 설친
들, 대자연의 작품 앞에는 그저 조그만 개미에 불과하다.


▲  구장군폭포 부근에 마련된 공원과 돌탑

▲  실로 거대한 거북바위의 위엄

구장군폭포를 둘러보고 잠깐 쉬려고 자리를 물색했는데, 산수정과 공원 벤치들은 죄다 관광객들
이 점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강천제2호수 밑으로 가서 의자에 벌러덩 누우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다리도 지치고 했으니
말이다. 잠까진 들지 않아 꿈나라까진 가지 않았지
만 강천산 자체가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세계이니 굳이 따로 꿈나라를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1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다가 강천산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가기 싫은 속세로 힘 없는 발걸
음을 옮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비룡폭포나 금성산성, 강천산 정상까지 흔쾌히 가고 싶었지만
그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구장군폭포까지였다. 강천산을 찾는 사람들 상당수는 강천산에
중심 산길인 강천산계곡길을 따라 구장군폭포까지만 보고 다시 내려간다. 구름다리를 빼고는 경
사가 급하거나 힘든 구간이 없어 그냥 계곡만 졸졸 따라가면 되며,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도
충분하다. 그래서 강천산계곡길을 맨발산책로라 부르기도 한다.
내려갈 때는 신발을 벗고 강천사까지 맨발로 걸었는데, 발에 크게 위해가 되는 곳은 없다. 계곡
에 여러 차례 발을 담구며, 흙과 부드러운 스킨쉽을 즐기니 내려가는 길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강천산 상가촌으로 내려가니 마침 속세로 나가는 직행버스가 요란하게 심장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걸 놓치면 꼼짝없이 40분 이상을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서둘러 뛰어가 그 버스를 타고 순창읍
으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호남의 호금강, 강천산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애타게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강천산 찾아가기 (2015년 8월 기준)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에서 순창행 고속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9:30~16:10)
* 광주에서 순창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이중 10회가 강천사까지 들어간다.
* 전주에서 순창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이중 2회가 강천사까지 들어간다.
* 순창터미널에서 강천사(강천산)행 직행버스가 1일 10회, 군내버스는 10여 회 다닌다. 직행버
  스는 강천산 상가촌(관광버스주차장)까지 들어가나 군내버스는 강천산입구만 스쳐 지나가며,
  강천산입구에서 강천산 상가촌까지 도보 10분 거리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호남고속도로 → 전주나들목 → 전주시내 우회도로와 27번 국도 경유 → 순창고교 교차로에
   서 우회전 → 팔덕 → 강천산입구 → 강천산
② 88올림픽고속도로 → 순창나들목 → 순창읍 → 팔덕 → 강천산입구 → 강천산

★ 강천산 관람정보 (2015년 8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3,000원 / 초,중,고생 2,000원 / 군인,전의경 1,500원 (30명 이상 단체는 500
  원 할인)
* 강천산 주요 등산코스 (여기서 매표소는 강천산 관리사무소 매표소)
① 신선봉 코스(5km, 3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름다리 → 신선봉 → 강천사 → 매표소
② 산성산 코스(9.2km, 4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장군폭포 → 운대봉 → 산성산 → 송낙
바위 → 강천사 → 매표소
③ 광덕산 코스(11.2km, 5시간) : 매표소 → 금강계곡 → 황우제골 → 광덕산 → 시루봉 → 금
성산성 동문 → 강천사 → 매표소
④ 강천산 코스(5.2km, 3시간) : 매표소 → 깃대봉 → 갈우봉 → 강천산(왕자봉) → 강천사 →
매표소
⑤ 옥호봉 코스(8.7km, 4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장군폭포 → 장군봉 → 광덕산 → 금강
계곡 → 옥호봉 → 매표소
⑥ 종주 코스(12km, 7시간) : 매표소 → 깃대봉 → 강천산(왕자봉) → 형제봉 → 송낙바위 →
금성산성 동문 → 광덕산 → 옥호봉 → 매표소
⑦ 강천산계곡(맨발산책로, 5km, 2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름다리 → 구장군폭포 → 강
천사 → 강천산매표소
* 강천산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강천산 관리사무소 ☎ 063-650-1672)
* 강천사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996 (☎ 063-652-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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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8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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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에 떠있는 아름다운 섬의 무리들 ~ 군산 고군산군도, 선유도 나들이 (장자도, 비응항)

 

' 군산 선유도,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나들이 '

▲  고군산군도

 


봄이 나날이 흥해감과 동시에 여름이 천하를 훔칠 기회를 엿보던 4월 끝 무렵에 군산 선유
도를 찾았다. 이곳은 마음 속 바구니에 담아두며 인연이 닿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
디어 그 인연이 닿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가 무섭게 집을 나서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으로 가
는 일반고속버스를 탔다. 버스는 2시간 40분 동안 열심히 바퀴를 굴려 군산 도심에 자리한
군산고속터미널에 나를 내려준다.

선유도 유람선이 출발하는 비응항까지는 10시 반까지 가야 된다. 남쪽에서 온 일행은 이미
도착한 상태, 군산시내에서 비응항은 시내버스 5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는데, 노선 수를 봐
서는 제법 많이 다닐 것으로 보인다. 허나 그것은 치명적인 함정. 그들은 각각 1~2시간 간
격으로 운행하고 있어 인구 28만을 지닌 도시의 시내버스치고는 다소  절망적인 수준이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시외/고속터미널을 경유하는 4개 노선의 버스 시간을 전날 확인해 두
었는데, 그새 시간표가 바뀌었는지 정보 오류인지 차가 좀처럼 오질 않는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지 뱃시간은 다가오지, 초조함으로 제대로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으며
일단 군산시내버스 상당수가 종점으로 삼는 군산대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군산대 후문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서둘러 택시를 낚아 비응도로 이동했다. 시내에서 바로 택시로 가도 되
지만 그럴 경우 막대한 요금 앞에 뒷목을 잡을 수 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택시는 나의 조급한 마음을 헤아린 듯, 비응도까지 새만금북로로 시원하게 질주했는데, 15
km 거리를 13분에 주파하는 위엄을 보인다. 허나 요금은 14,000원 약간 넘게 나와 늘 돈에
쪼들려 사는 나의 마음을 무척 쓰라리게 만들었지. 고군산군도와 선유도 때문에 이곳에 왔
는데, 그곳을 못본다면 애써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부득이 무리를 하
고 말았다.

비응도(飛鷹島)에 이르니 시간은 오히려 20분의 여유가 있다. 그래서 월명유람선 선착장까
지 안가고 비응항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상춘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선착장에서 일행들을
만나 10시 30분에 출발하는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  고군산군도 해상 유람 (비응도→선유도)

▲  만선의 꿈을 꾸는 어선들의 보금자리 ~ 비응항(飛鷹港)

고군산군도 유람선인 월명유람선은 비응항(비응도항)을 출발하여 횡경도와 방축도, 명도, 대장
도, 장자도 등을 차례대로 지나 선유도에 배를 대고 잠시 머물다가(1시간 정도 머무는 B코스와
4~5시간을 머무는 C코스가 있음) 다시 비응도로 돌아오는 코스로 비응도에서 선유도까지 약 1시
간, 나오는데 40~50분 정도 걸린다.
비응도에서 방축도와 명도를 경유하여 선유도까지 보통 30~31km 정도 되며, 고군산군도가 한반
도와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비응도와 오식도(筽篒島)가 섬에서 한반도의 일원이 되면서 서로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다. 그 이전에는 군산시내에 위치한 군산항에서 배를 타야 했는데, 꼬박 2시
간 이상 걸렸다. (지금은 1시간) 배를 대는 곳은 오로지 선유도 한곳으로 나머지 섬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나가며, 다른 섬에 발을 들이고 싶은 경우 군산여객선터미널이나 선유도에서 일
반 여객선을 이용해야 된다.
 
유람선은 2층으로 이루어진 배로 1층과 2층 모두 관광객들로 만원을 이룬다. 2층에는 간식과 음
료수, 술을 파는 매점을 비롯해 넓은 노래방 홀까지 갖추고 있는데, 배가 움직이는 내내 중/장
년층 단체객들이 노래방을 점거하며 노래를 부르고 신나게 춤판과 술판까지 벌인다. 일반 여객
선도 아닌 유람선이라 그러려니 해도 너무 지나치면 안하는 것만 못하다고 조금은 눈살을 찌푸
리게 한다. 게다가 그렇게 넋을 놓고 놀다가 만약 사고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하는지 정말 대책
이 안보인다. 물론 배가 움직이는 동안 심한 요동으로 인해 속이 울렁거리거나 현기증이 일어나
거나 심하면 멀미까지 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오가는 시간도 지루하니 그렇게라도 신나게 몸
을 움직이면 그런 것을 잠시나마 떨쳐버릴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어느 정도 선은 지켰으면 좋
겠다. (지켜서 손해볼 것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탄 배는 10시 반에 출발하는 것으로 승선이 지연되어 거의 10시 40분에 뱃고동을 울리며
미끄러지듯 비응항을 출발했다. 그렇게 한반도를 뒤로하며 고군산군도로 느릿느릿 다가선다.
우리는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파도로 인해 배가 좀 요동을 치면서 자연히 속에서 불편한
신호가 왔다. 오랜만에 배를 탄 것도 있겠지만 속이 계속 울렁거려 미칠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참으며 자리를 지키다가 결국 자리를 뜨고 1층으로 내려온다. 배를 타면서 속이 말썽을 부릴 때
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선창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쐬는 것이 매우 좋지. 1층으로 내려오니 2
층보다는 요동이 적어 불편한 속이 조금 진정이 되었고, 바깥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
내음에 심취하니 그나마 남아있던 불편함도 거의 가신다. 게다가 사진기를 꺼내 바다와 가까이
다가오는 고군산군도를 열심히 담으니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  비응도를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한반도에서 멀게만 느껴졌던
고군산군도가 그 모습을 서서히 비춘다.

▲  서해바다란 넓은 도화지에 대자연 형님이 점을 여럿 찍으니 그 점이
바로 서해바다의 꽃인 고군산군도이다.

▲  길게 드러누운 횡경도(橫境島)

고군산군도에 이르면 가장 먼저 횡경도가 마중한다. 새만금방조제가 생기기 이전에는 야미도(夜
味島)가 가장 먼저였지만 그곳이 방조제로 인해 육지와 끈끈하게 연결되면서 이제는 횡경도가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횡경도는 동서로 길쭉한 64.4만㎡의 조그만 섬으로 소횡경도를 거느리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
는 무인도로 낚시터로 유명해 낚시꾼들의 출입이 잦으며, 이 섬에 들어가려면 선유도나 야미도
에서 어선을 빌려타야 된다. 섬 중앙에는 할배바위(장자할배바위)란 바위가 있는데, 상투에 갓
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형상처럼 생겼고, 소횡경도에는 거북이가 목을 뺀 듯한 모습의 거북바
위와 등대가 있다.


▲  보다 가까워진 횡경도(왼쪽)와 소횡경도(오른쪽)

▲  등대가 있는 소횡경도 서쪽 부분 <왼쪽 벼랑이 거북바위>

▲  서남쪽에서 본 소횡경도와 횡경도
속세에서 잠시 나란 존재를 지우고 싶을 때 살짝 찾아와 아무도 모르게
며칠 정도 머물고 싶다. 아니면 내가 중심이 되는 나만의 나라를
이곳에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안될꺼야..)
 

▲  횡경도 해역에서 바라본 야미도와 신시도(新侍島)

▲  횡경도 해역에서 바라본 선유도와 관리도

▲  고군산군도의 방파제인 방축도(防築島)

횡경도를 지나면 방축도란 섬이 나타난다. 이 섬은 선유도 북쪽에 자리하여 고군산군도의 자연
산 방파제의 역할을 하는데, 그런 연유로 방축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유인도로 신라 후기에 바다의 제왕 장보고(張保皐)가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동아시
아의 드넓은 바다를 엄하게 호령하던 시절, 당나라 상인들이 신라에 가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들
어와 정착했다고 전한다. 허나 마을 뒷산에 7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어 이미 청동기시대(靑銅器時
代)부터 이 좁은 섬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섬 주변은 암석이 많고, 수심이 얕아서 조류가 거세고 파도가 강하다. 허나 낚시 장소로는 제격
이라 많은 낚시꾼들이 찾아오며 농어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그리고 해변에는 독립문바위와 시
루떡바위, 책바위 등 대자연이 빚은 여러 바위들이 포진해 섬의 아름다움을 더욱 수식해준다.


▲  방축도와 외부를 이어주는 방축도 포구
저 섬에도 잠시 두 발을 들였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방축도 해역에서 바라본 횡경도

▲  방축도 서부


▲  방축도의 명물 독립문바위가 중앙에 보인다.

방축도 서쪽 해안에 자리한 독립문바위는 조그만 돌다리나 고가도로처럼 생긴 참으로 기묘한 바
위이다. 서울의 독립문(獨立門)처럼 생겼다하여 독립문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북문바
위라 불리기도 한다. 바위 서쪽에도 산을 갖춘 섬 같은 땅이 보이는데, 겉으로 보면 별도의 섬
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방축도의 일부로 그 사이가 가늘게 이어져있다.


▲  말도(末島)와 명도(明島), 방축도의 서부
푸른 산과 바다 밖에는 안보이는 말그대로 망망대해(茫茫大海)의 고적한 섬이다.


우리를 태운 유람선은 방축도에서 남쪽으로 꺾는다. 그래서 명도와 말도는 이렇게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밝은 섬이란 뜻의 명도는 달과 해가 합쳐진 것처럼 물이 맑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사람들
이 살고 있는 아주 조촐한 섬으로 낚시터로 명성이 높으며, 섬의 야트막한 산에는 수십 가지의
각종 약초가 자라나 약산(藥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말도는 고군산군도의 종점이자 끝으로 가장 서쪽에 자리한다. 끝섬이라 불리기도 하며, 한반도
에서 고군산군도를 왕래하는 여객선의 종점으로 1909년에 지은 말도등대가 서해바다와 군산을
찾는 배들의 밤길을 밝혀준다.
이 섬은 조선 중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며, 심씨 성을 가진 판서(判書)가 귀양을 와서 밭
을 일구고 살면서 인구가 늘었다고 한다. 그가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소환된 이후, 섬 사람들
은 그의 공덕을 기리고자 영신당(靈神堂)을 지어 매년 11월에 제를 지냈으나 기독교가 이 섬을
휩쓸면서 당제(堂祭)는 끊기고 말았다.


▲  끝없는 서해바다 - 저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속인(俗人)들이
그렇게나 동경하던 극락이나 유토피아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해가 뜨고 지는 사이에 잠시 머무는 그만의 비밀 공간이 있는지도 모른다.

▲  관리도<串里島, 곶리도>

대장도 서쪽에 자리한 관리도는 곶리도라고도 한다. (어차피 한자는 같음) 원래 이름은 꽂지섬
이었다고 하는데, 섬의 모습이 전쟁에 출진한 장군들이 적의 몸에 화살을 쏘아 꽂아대는 모습이
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섬의 지형이 마치 꼬챙이처럼 생겼다
고 하여 꼭지도라고 부르다가 꼬챙이를 뜻하는 관(串)을 붙여 관리도(곶리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섬에는 완전무장한 장군의 모습 같은 투구봉, 말을 탄 무인의 모습을 한 질망봉, 승려로 이
루어진 승군(僧軍)의 모습을 한 중바위(중바우), 시루떡 모양의 시루봉 등이 있으며, 갖가지 바
위들이 섬을 수식하여 눈을 심심치 않게 한다. 섬 사람들은 대부분 전복을 양식하거나 고기잡이
로 생계를 꾸린다.

▲  관리도 해역에서 바라본 횡경도

▲  관리도 해역에서 본 선유도와 장자도


▲  장자도 서쪽에 홀로 떠있는 등대 - 등대 너머로 방축도의 동부와
동서로 길쭉한 횡경도가 보인다.

▲  대장도(大長島, 왼쪽 섬)와 장자도(오른쪽 섬)

선유도 바로 서쪽에 자리한 대장도는 남쪽으로 장자도와 이어져 있다. 이 섬은 옛날에 어떤 사
람이 섬을 1바퀴 둘러보고는 미래에 크고 긴 다리가 생길 것이라 말을 하고 섬을 떠났는데, 한
반도와의 연륙을 애타게 꿈꾸던 섬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며 섬 이름을 크고 긴 다리를 뜻하
는 대장도로 갈았다고 한다.
과연 그의 예언대로일까 대장도를 잇는 현수교(懸垂橋)가 생겨나 장자도는 물론 선유도까지 걸
어서 이동이 가능해졌고, 새만금방조제의 등장으로 고군산군도의 동쪽을 이루던 신시도와 야미
도 등이 연륙되었으며, 한반도에서 선유도를 붙들어 맬 다리 공사를 진행중이라 그것이 완성되
면 선유도는 물론 대장도까지 4발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된다. 그리되면 그야말로 크고 긴 다리
가 생기는 셈이다.

섬 동쪽에는 고군산군도에서 꽤나 이름난 장자할매바위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이를 등에 업은
형상으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바위는 못봤음)
조선시대(또는 고려시대)에 대장도에 살던 선비 부부가 있다. 남편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서울
로 과거를 보러 나갔는데, 부인은 몇달 동안 한결같이 장자봉에 올라 남편의 과거 급제를 기원
했다. 허나 남편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때를 한참이나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애가 탄 부인은
매일 아이를 업고 장자봉에 올라 남편을 실은 배가 오기를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다. 허나 과거 급제로 금의환향(錦衣還鄕)을 한 것이 아
니라 육지에서 첩실과 그를 통해 얻은 아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육지에 오랫동안 머물며 소실
까지 맞을 정도면 선비의 집안은 제법 형편이 되었던 모양이다.

남편의 일탈에 크게 뚜껑이 열린 부인은 눈물을 떨구며 뒤로 돌아서는 순간 등에 업힌 아이도
덩달아 발끈했는지 힘을 주었는데, 그 바람에 그들은 즉석에서 돌로 변했다고 한다. 한편 아내
와 아이가 그렇게 사라지자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횡경도에 들어가 그 벌로 돌이
되니 그 돌이 장자할배바위라고 한다.
이 전설은 대장도나 주변 섬에 살던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지만 순간의 실수로 어긋나버린 이
곳에 살던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은 것이 아닐까 싶다. 굳이 과거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도 육지에 일이 있어 나간 남편이 첩을 데리고 오면서 그들의 가정은 파탄이 났고 이에
발끈한 부인은 아이와 함께 장자할매바위에서 투신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아내와 자식이
죽자 발작한 남편도 횡경도에서 자살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이후 사랑하는 이와 이 바위에서 사랑을 약속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거나 말거나 속설
이 전해오며, 월명유람선은 대장도 뒷쪽으로 가기도 하고 선유도 사이인 앞쪽으로 가기도 하여
뒷쪽으로 가는 경우에는 이 바위를 만날 수 없다. 그날 운에 맡기는 수 밖에는...

그리고 대장도 남쪽에 자리한 장자도는 선유8경의 하나인 장자어화(壯子漁火)의 현장이다. 한때
멸치포구로 유명했고, 고군산군도 제일의 어항(漁港)으로 많은 배들이 심야에 장자도 앞바다에
서 고기를 잡느라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었는데, 그 배에서 비치는 불빛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
아내 '장자어화'가 된 것이다.

장자도는 옛날에 힘이 센 장사가 나왔다고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과 가재미와 장재미를 합쳐 장
자도라 했다는 설이 공존한다. 이곳 포구는 자연이 빚은 대피항으로 유명해 예전에는 고군산군
도와 서해바다에서 가장 잘나가는 섬이었다. 섬의 모습은 말 앞에 놓은 커다란 구유처럼 장자봉
이 우뚝 솟은 형국으로 서 있고, 그 앞에 선유도가 맥을 감싸안고 있어 큰 인재가 많이 나오는
지형이라고 하며, 북쪽의 대장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거의 한몸이 되었는데, 서해를 바라보는 사
자바위(사자봉)를 장자도를 지키는 바위로 여기고 있다.
섬 동쪽에는 장자대교를 통해 선유도와 이어져 있다. (차량 통행은 어려움)


▲  대장도 사자바위(사자봉)
사자나 고양이, 개가 땅바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같다. 오른쪽 봉우리에
머리에 해당되는 조형물만 갖다 붙인다면 영락없이 그 모습인데 말이다.

▲  다른 각도에서 본 대장도 사자바위(사자봉)

▲  선유도 인어등대


▲  장자도 해역에서 본 관리도와 말도, 방축도

▲  장자도와 선유도를 잇는 장자대교


♠  고군산군도의 중심지, 선유도(仙遊島)

▲  선유도선착장에서 바라본 선유대교(무녀도와 선유도를 이어줌)

고군산군도를 1시간 정도 배회한 유람선은 이 군도(群島)의 중심지이자 유일하게 상륙하는 선유
도로 들어와 선유도항(선유도여객터미널)에 고된 몸을 기댄다. 이윽고 여기서 1시간 정도 머무
니 반드시 출발시간을 지켜달라는 안내방송이 강하게 나온다. 오랜 뱃길에 심신이 지치거나 고
군산군도의 매력에 눈과 마음이 지나치게 호식(好食)을 누린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오면서 썰
렁했던 선유도항은 잠시나마 활기를 누린다.


▲  선유도항에 몸을 기댄 월명유람선

선유도는 고군산군도의 중심 섬으로 예전에는 군산도(群山島)라 불렸다. 섬 북쪽에 있는 봉우리
의 형태가 마치 2명의 신선(神仙)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후대에 신
선이 머무는 섬이란 뜻의 선유도란 고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섬의 면적은 2.13㎢로 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원래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것을
바다가 실어다준 흙과 모래로 하나의 섬이 되었다. 고려 때는 송(宋)나라와 동남아의 여러 제국
(諸國)을 오가는 중간 기항지로 관청을 두어 그들의 편의와 상거래를 관리했고, 조선 초기에 수
군기지인 군산진(群山鎭)을 두어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파견했다. 군산진은 조선 세종(世宗
) 때 지금의 군산시내로 이전되면서, 군산이란 이름도 같이 따라갔는데, 선유도와 주변 섬들은
옛 군산이 있던 곳이라 하여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597년에는 천하의 영원한 해신(海神),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진도 울돌목에서 불과 13척의 형
편없는 전력으로 서해바다로 진출하려는 왜선 330여 척을 맞아 분전 끝에 31척을 격파하고 92척
을 사용 불능으로 만들었으며, 18,000여 명의 왜군을 물고기 밥으로 만든 이른바 명량대첩(鳴梁
大捷)의 위업을 이루었는데, (아군의 피해는 왜군의 1%도 안될 정도로 매우 가벼운 수준, 이순
신이 탄 대장선에서 2명 전사, 3명 부상 / 다른 배도 비슷한 수준) 그 대첩을 치르고 잠시 몸을
추스리고자 선유도까지 올라왔다. (1597년 9월 21일)
그는 선유도에 이르자 몸살로 고생을 했으며, 거기에 태풍까지 몰려와 12일 정도 머물렀다. 그
리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완도 고금도(古今島)에 주둔하며 원균(元均)이 말아먹은 조선 수군
을 빛나게 재건했다.

선유도에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선유8경이 있다.
1. 선유도 해변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아름다움, 선유낙조(仙遊落照)
2. 가늘고 긴 선유도해수욕장의 명사십리(明沙十里)
3, 선유도로 유배를 온 충신들이 매일같이 올라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망주봉(望主峰), 특히 여
   름에 큰 비가 오면 망주봉에서 일시적으로 7~8개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지니 이것을 망주
   폭포(望主瀑布)라고 한다.
4, 선유도 모래사장을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내려 앉는 기러기처럼 생겼다 하여 평사낙안(平沙
   落雁)
5. 무녀도(巫女島)에 속한 3개의 무인도가 풍기는 아름다운 모습, 삼도귀범(三道歸帆)
6. 장자어화 (자세한 것은 앞의 장자도 부분 참조)
7. 신시도에 있는 월영봉(月影峰, 199m)의 가을 단풍이 매우 곱다고 하여 월영단풍(月影丹楓)
8. 방축도와 말도 등 12개 섬이 마치 투구를 쓴 군사들이 도열한 모습과 같다고 하여 무산12봉(
   巫山十二峰)


선유도는 명사십리로 유명한 선유도해수욕장을 비롯하여 망주봉, 옥돌해수욕장, 몽돌해수욕장,
수군절제사 선정비(善政碑) 등의 명소가 있으며, 선사시대의 아련한 흔적인 패총(貝塚, 조개더
미)도 있다. 또한 섬마을답게 오룡묘제, 장생제, 수신제 등의 마을 제사와 풍습이 있었으나 지
금은 모두 사라져 아쉬움을 건네며, 주변 섬과는 다리로 이어져 있는데, 동쪽으로 무녀도, 서쪽
으로는 장자도, 대장도와 이어져 있어 배가 아닌 두 다리나 자전거로 둘러볼 수 있다.

한반도와 선유도를 이어주는 나루터는 2곳으로 선유대교 북쪽에 자리한 선유도항이 가장 크다.
여기서는 월명유람선을 비롯하여 군산을 오가는 여객선이 운행하며, 망주봉 동쪽 선유3구 선착
장에서는 야미도에서 출발한 새만금유람선이 오간다. 허나 선유도를 한반도에 단단히 붙들고자
현재 연륙교를 짓고 있어 그것이 완성되면 선유도까지 편히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되며, 그때가
되면 군산에서 시내버스와 시외버스가 들어와 교통이 보다 좋아질 것이다.
허나 그로 인해 오랫동안 한반도와 고군산군도를 이어주던 해상교통의 희생은 어쩔 도리가 없어
군산을 오가는 여객선과 유람선의 노선 조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  선유도항 주변

선유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 선유도항은 여객선표를 구입하는 매표소를 비롯하
여 식당 몇 곳이 전부이다. 선유1구 마을과 선유2구 마을의 중간 지점이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골프장에서 많이 보이는 카트(Cart) 수십 대가 대기를 타면서 하얀 물결을 이루는데,
이들은 선유도와 무녀도에서 숙박업소나 식당을 하는 이들이 가지고 온 것으로 배를 타고 들어
온 관광객들에게 이거 타고 섬 1바퀴 돌라며 강하게 유혹의 메세지를 건넨다. 이곳에서 주어진
시간은 달랑 1시간, 아무리 선유도가 작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 두 다리에 의지해 돌아다닐 수
있는 범위는 좁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많이들 카트에 올라타는데, 대부분 4인승에서 8인승이
다. 카트는 대부분 카트 주인이 직접 운전하지만, 키를 맡겨 돌고 싶은 곳을 돌라고 하는 경우
도 있다. 물론 돈을 더 줘야 된다. 카트 승차비는 카트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보통 5천원 정도
한다.

우리 일행도 카트의 신세를 많이 졌는데, 나도 일행에 끼어 8인승 카트에 올라탔다. 카트 주인
은 식당/펜션을 하는 아줌마로 선유도해수욕장을 비롯한 선유도 북부를 1바퀴 구경시켜주었다.
코스는 선유도항 → 선유도해수욕장 → 망주봉 주변 1바퀴 → 선유3구 선착장 → 선유도해수욕
장 → 선유도항으로 딱 1시간에 맞는 코스였다. 길의 폭은 선유도항 주변을 빼고는 카트 2대가
교행하기에 적당할 정도로 좁았다.
선유도를 돌면서 선유도해수욕장이나 중간에 내려서 발자국을 남길 시간은 없었고, 오로지 카트
만 타고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몽돌해수욕장과 옥돌해수욕장, 장자도와 무녀도도 가고 싶었
지만 시간이 없으니 그건 어렵다. 배가 떠나면 한반도로 나가기가 힘들어진다.


▲  선유도항 주변 갯벌

▲  부드러운 곡선의 선유도해수욕장

선유도항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고군산군도의 아름다운 입술인 선유도해수욕장이 누워있다. 명
사십리(明沙十里)란 걸쭉한 별명까지 지닌 이곳은 약 1.5km의 백사장으로 10리는 커녕 5리도 안
되는 길이다. 서해에 있는 다른 해변과 마찬가지로 수심이 매우 얕아 바다로 100m를 나가도 겨
우 허리에 닿을까 말까 하며, 해가 그만의 공간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붉게 타오르는 낙조가
대장관을 이루어 선유8경의 하나인 선유낙조의 현장으로 명성이 높다.

물이 빠졌을 때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래톱 끝까지 갈 수 있으며, 둑방 건너편에 긴 자갈밭
이 펼쳐져 선유도해수욕장의 아름다움을 진하게 수식시킨다. 바다낚시와 갯벌체험, 모터보트,
바나나보트 등을 탈 수 있고, 샤워장과 뒷간, 방갈로, 파출소와 보건소, 숙박시설 등이 주변에
있어 여름 피서지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  여유로운 풍경의 선유도해수욕장 - 바다 건너로 진하게 보이는 산은
장자도의 지붕인 장자봉이다.


▲  선유도해수욕장 북쪽

▲  선유도해수욕장에서 선유3구로 가는 길

▲  바위산인 망주봉
(望主峰, 152m)

선유도해수욕장 동북쪽에 자리한 망주봉은 선유도해수욕장과 더불어 선유도의 소중한 꿀단지이
다. 2개로 이루어진 바위 봉우리로 조선시대에 이곳으로 귀양 온 충신들이 매일 같이 올라 서울
에 있는 군주를 그리워했다고 하여 주군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주봉이 되었다.
평소에는 그저 조용한 바위 봉우리지만 비가 많이 쏟아지면 산으로 떨어진 빗물이 암벽을 타고
약 7~8개의 물줄기를 이루며 아래로 떨어진다. 그 모습이 폭포와 같아서 망주폭포(望主瀑布)라
고 부른다. 그러니까 비가 많이 올 때만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폭포인 셈이다.


▲  선유도항에서 바라본 망주봉의 위엄


♠  고군산군도 마무리

▲  선유도를 떠나다

선유도를 항아리 겉돌 듯 둘러보고 유람선으로 돌아왔다. 떠날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짧은
자유시간을 이용해 선유도 곳곳으로 흩어진 상춘객들도 일제히 돌아와 선착장 주변은 다시 북새
통을 이룬다. 이번에도 늦게 온 몇몇 사람들 때문에 지정 시간보다 15분 정도 늦게 선유도를 출
발했다.

우리는 선유도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2층에 자리를 잡았는데, 한반도로 돌아가는 길은 대략
50분 정도 걸린다. 선유도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너울로 배가 조금 들썩였으나 이미 몸
에 익숙해진 터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피곤이 물결처럼 밀려와 나를 희롱하니 슬슬 졸리
기 시작한다. 허나 이제 언제 올지 모를 고군산군도와의 작별이 너무 아쉬워 갑판으로 나가 점
점 멀어져가는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의 뒷모습을 열심히 사진에 담았다. 시원하게 느껴졌
던 바닷바람도 이제는 차갑게 다가온다.


▲  선유도 선유3구 선착장 - 야미도에서 오는 새만금유람선이 주로 이용한다.

▲  조금씩 작아지며 흐릿한 점이 되어가는 고군산군도의 식구들

▲  새만금방조제로 한반도의 일원이 된 신시도(新侍島)

선유도를 가리고 선 신시도는 새만금방조제가 섬 동부를 지나가면서 한반도의 어엿한 일원이 되
었다.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면적이 4.25㎢에 이르며, 삼국시대 초반에 가락국(駕洛國
)에서 건너온 김해김씨 일가가 청어를 잡기 위해 제일 먼저 들어와 살았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
은 없다.
신라 후기에는 천하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옥구 자천대(紫泉臺)에 머물러 있다가 신시도
에 우뚝 솟은 월영산(月影山,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음)을 보고 천하 명산(名山)이라고 크게 칭
송했다. 그리고 그곳이 급히 땡겼는지 풍선(風船)을 타고 신시도로 건너가 그 봉우리에 단을 쌓
고 거처를 세워 산 이름을 월영봉(199m)이라 했다.
그는 여기서 매일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글을 읽는 소리가 어찌나 낭랑하던지 바다 건너 당나
라 상해(上海)까지 들렸다고 전한다. 물론 글 읽는 소리가 바다 건너 대륙에서까지 들렸다는 것
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나 그가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것은 사실인 듯 싶다.

신시도의 기둥인 월영봉은 선유8경의 하나인 월영단풍의 현장으로 단풍에 물든 월영봉의 자태가
마치 1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신시도란 이름은 왜정 때 지어진 것으로 새만금방조제가 지나
는 동쪽 대각산(187m)에 전망대가 세워져 있고, 그 전망대를 통해 대각산으로 올라가 고군산군
도와 새만금 일원을 두 눈에 조망할 수 있다.


▲  유람선이 남긴 하얀 물보라 자국 ▼

유람선은 푸른 도화지에 물보라를 튀기면서 요란하게 지나간 자국을 남긴다. 허나 그 자국은 이
내 일체의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다시 원래의 푸른 도화지로 되돌아간다. 나를 비롯해 배에 탄
사람들 모두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에 열심히 다녀간 흔적을 남겼지만 결국은 사진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이다.


▲  야미도(夜味島)와 신시도 사이 해역 - 그 사이로 바다의 만리장성이라
자화자찬하는 새만금방조제가 희미하게 보인다.

▲  야미도와 횡경도 사이에 외롭게 뜬 조그만 바위섬, 계도(鷄島, 닭섬)
이렇게 봐서는 닭처럼 생겼는지 꿩처럼 생겼는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  새만금방조제에 붙어있는 야미도

야미도는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한반도와 가까운 섬으로 군산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제일 처음 들
렸던 곳이다. 지금은 새만금방조제로 한반도의 일원이 되면서 신시도와 함께 편히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섬은 밤나무가 많아 밤섬이라 불렸는데, 왜정(倭政)이 이 섬 이름을 지을 때 밤나무를 뜻하
는 율(栗)을 안쓰고 무식하게도 밤을 깜깜한 밤으로 해석해서 야(夜)을 썼다. 그리고 밤은 맛있
다고 하여 맛있다는 뜻의 미(味)를 붙여 본래 섬과는 맞지도 않은 엉터리 이름인 야미도란 이름
을 지니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섬 이름을 뜯어고쳐야 되지 않을까?)
섬 서쪽은 고군산군도가 점점이 떠 있는 서해바다, 오른쪽은 새만금방조제에 갇혀버린 새만금호
로 근래에 일출/일몰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선유도를 출발하여 근 50분 만에 비응항으로 귀항했다. 배가 항구에 몸을 대기가 무섭게 상춘객
들이 우루루 육지로 몰려나오고 선착장에서 애타게 다음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들의 빈 공
간을 채워주면서 배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로 선유도로 뜰 준비를 한다.
우리는 관광버스에 올라타 새만금북로 주변에 있는 해물탕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지루할 정도
로 긴 새만금방조제를 넘어 부안 내소사(來蘇寺)로 넘어갔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고군산군도 선유도 찾아가기 (2014년 7월 기준)
ⓘ 군산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행 고속버스가 15~2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군산행 직행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부천, 성남, 수원, 오산, 천안, 청주, 대전(복합), 익산, 광주, 목포, 대구(서부
  ), 부산(노포동), 창원(마산)에서 군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평택역, 천안역, 대천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군산역
  하차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운행)
② 군산시내에서 배타는 곳까지
* 연안여객터미널 : 군산역과 군산시외고속터미널에서 7, 85번 시내버스 이용 (2노선 모두 1시
  간 간격으로 운행하며, 군산역에서 7번은 매시 25분, 85번은 매시 40분에 출발)
* 비응항(월명유람선) : 군산역에서 7, 85번 시내버스를 타거나 군산시외터미널에서 7, 8, 85번
  시내버스를 타고 비응항 종점 하차 (91번은 시외터미널 남쪽 팔마광장에서 승차)
③ 선박편
* 비응항 월명유람선(☎ 063-445-2240)에서 선유도행 유람선이 운항한다. 코스는 3시간짜리 B코
  스(2만원)와 6~7시간짜리 C코스(3만원)가 있으며, 유람선 출항시간과 요금, 전화예약은
  ☞ 월명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 군산연안여객터미널(☎ 063-462-4000)에서 선유도행 여객선이 1일 3~4회 다닌다. 주말과 피서
  철에는 대폭 증회하며, 자세한 출발시간표와 요금 문의는 위의 월명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 야미도 새만금유람선 선착장(063-464-1919)에서 선유도행 유람선이 1일 3~4회 다닌다. 코스는
  선유도에서 1시간 정도 머무는 B코스와 3~4시간 머무는 C코스가 있다.
  운항시간과 요금, 예약은 ☞ 새만금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④ 배타는 곳까지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비응항(월명유람선)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옥녀교차로 우회전 → 구 해양경찰서 4거리 우회전 → 대왕제지3거리 좌회전 → 연
  안여객선터미널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신시도입구3거리 좌회전 → 새만금방조제 → 야미도 새만금유람선

* 선유도해수욕장은 7월 초/중순에 개장하여 8월 하순까지 해수욕 손님을 맞는다.
* 선유도와 고군산군도 관련 자세한 정보는 ☞ 군산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참조 (월명유람선과
  새만금유람선 홈페이지를 참조해도 된다)
* 선유도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군 옥도면 선유도리 (문의 ☎ 063-454-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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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4년 7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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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산의 떠오르는 성지 ~ 군산 나들이 (왜식 사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교...)

 


♠ 근대 문화유산의 성지 ~ 전북 군산(群山) 나들이 ♠
군산 은적사
▲  군산 은적사


무더위와 장마로 천하를 주름잡은 여름의 제국과 여름으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가을
이 팽팽히 맞서던 9월 하순에 인구 40만을 꿈꾸며 열심히 꿈틀거리는 서해안의 주요 항구
도시 군산을 찾았다.
집(도봉동)에서 온양온천역까지는 매우 저렴하지만 그만큼 굼벵이인 1호선 전철을 이용했
고(3시간 소요), 온양온천에서 군산까지는 값은 비싸지만 조금은 빠르고 안락한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했다.

장항선(長項線, 천안~장항) 직선화와 익산 연장으로 군산 도심에 자리한 군산역은 화물만
을 다루는 화물역으로 바뀌고, 금강하구둑 남쪽 시내 외곽에 새롭게 군산역을 세워 군산(
群山)을 찾은 손님들을 맞이한다.

군산역은 시내 변두리에 자리한 터라 역 건물 외에는 허허벌판이다. 역 앞에는 택시와 시
내버스 몇몇만이 졸고 있을 뿐, 열차의 기적소리가 무안할 정도로 정적만이 감돈다. 30분
을 기다려 시내로 나가는 군산시내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동국사를 찾았다.


♠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왜식(倭式) 사찰이자 어둠의 시절
이 땅에 침투한 왜식 불교의 쓰라린 화석 - 동국사(東國寺)


▲  동국사 대웅전(大雄殿) - 등록문화재 64호

군산 도심인 금광동에는 특이한 모습의 절집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나라 유일의 왜식(倭式) 사
찰인 동국사이다. 이곳은 마치 왜열도의 오사까나 나라, 교토(京都)의 어느 절집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물씬 풍기게 하는데, 그럼 어찌하여 왜식 절집이 군산 한복판에 건방지게 박혀 있는 것
일까?

때는 19세기 후반, 왜국(倭國)은 호남평야(湖南平野)에 군침을 질질 흘리며 그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군산을 개항할 것을 대한제국(大韓帝國)에 요청했다. 그들의 징징거림에 마지못해 군산을
개방하자 왜인들이 밀물처럼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 왜식 불교도 덩달아 들어와 절과 포교원을
세웠다. 동국사는 바로 그 시류를 타고 1909년 왜인 승려 내전불관(內田佛觀)이 왜인 일조통(一
條通)의 집을 빌려 만든 포교소에서 시작된다.
1913년 승려 우치다(內田)가 군산 왜인들의 지원을 받아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겨 금강선사(錦
江禪寺)라 이름 짓고 본당(本堂)과 고리(庫裡)를 만드니 그것이 지금의 동국사 대웅전이다. 이
절은 왜국 조동종(曹洞宗) 소속이었다.

왜열도에 불교가 들어간 것은 6세기 중엽으로 백제(百濟)의 중흥을 꿈꾸며 동분서주하던 성왕(
聖王, 523~554)이 속방(屬邦)인 왜열도를 교화시키고 백제와 왜의 일체를 견고히 하고자 불교를
보냈다. 많은 백제 승려와 건축공들이 왜로 건너가 불교를 전파하고, 백제의 주요 건축양식이던
하앙식(下昻式) 건물의 절을 많이 지었는데, 그것이 점차 왜국 건축양식의 중심이 되었다.
허나 세월이 흘러 19세기 이후 왜가 조선을 월등히 앞서게 되면서 상황은 뒤바뀌게 된다. 1876
년 군사력으로 어거지성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성사시킨 왜국은 유리한 입장에서 조선에
활발히 진출을 벌이는데, 그 과정에서 왜국 불교까지 들어와 조선 불교를 위협하며, 왜식 사찰
까지 들어서게 된 것이다.

1913년 본당을 세운 이후, 1919년 범종과 범종각을 만들었고 1921년에 대문 돌기둥을 만들었다.
1932년 개축을 벌였으며, 1945년까지 왜인이 관리했으나, 해방 이후 그들의 땅으로 쫓겨나고 미
군정(美軍政)에 몰수되었다가 우리나라 정부에 넘어갔다.
1955년 전북종무원에서 매입하여 대웅전으로 삼았으며, 1970년 승려 남곡이 동국사로 이름을 갈
았다. 여기서 동국은 '해동대한민국(海東大韓民國)'의 약자로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에 이 절을
증여해 현재 선운사(禪雲寺)의 말사(末寺)로 있다.

왜정(倭政) 때 지어진 왜식 절은 해방과 더불어 죄다 박살이 났으나 이곳만은 운이 좋게도 살아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우리나라 유일의 왜식 사찰이자 어둠의 시절을 상징하는 뼈아픈
역사의 흔적으로 남게 되었다. 근래에 들어 군산시에서는 군산시내에 흩어진 근대문화유산을 정
비하고 야무지게 홍보하면서 동국사는 군산 지역 근대문화유산의 성지(聖地)이자 군산에서 꼭
가봐야 되는 주요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혹자(或者)는 그런 것을 뭐하러 남기냐 반문하겠지만 엄연히 이 땅을 거쳐간 역사의 흔적이다.
무작정 밀어버릴 것이 아니라 가치가 있는 것은 보존하여 후대의 경계로 삼고 문화유산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동국사 하나 밀어버린다고 왜정 35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국사는 왜식 건물인 대웅전(요사 포함)과 범종각 그리고 근래에 지어진 1층 건물이 전부이다.
대웅전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좌측으로 요사(寮舍)와 이어져 완전히 하나의 커다란 건물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한 건물 안에 대웅전과 요사가 모두 들어있는 셈이다.

대웅전 본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방형 단층팔작지붕 건물로 왜국 에도시대(江戶時代) 건
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우리나라 절집과 달리 단청(丹靑)이 없어 밋밋하고 소박한 느낌을 선사
하며, 건물 꼭대기의 용마루는 우리나라 건물과 달리 일직선을 이룬다. 건물의 거의 절반 이상
을 차지하고 있는 지붕은 그 높이가 상당하여 비례도 안맞아 보이고, 다소 육중해 보인다. 건물
의 아랫도리가 저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  요사로 쓰이는 대웅전의 좌측 부분

대웅전과 이어진 요사는 본전과 달리 지붕이 2겹으로 되어 있다. 본전과 요사 사이로 움푹 들어
간 부분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건물의 전체적인 모습은 거의 '工' 구조이다.

▲  대웅전의 뒷부분

▲  대웅전의 좌측 요사의 뒷부분

▲  대웅전 본전과 요사를 잇는 복도

▲  대웅전 본전 내부


▲  왜식 건물의 방 구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종무소(宗務所)

▲  동국사 소조석가여래3존상 - 보물 1718호

대웅전 불단(佛壇)에는 동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석가3존불이 유리에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나무로 틀을 짜고 진흙으로 빚어서 만든 소조불(塑造佛)로 원래는 김제 금산사 대장전(
大藏殿)에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이곳으로 넘어왔는데, 그 사유는 분명치가 않다.

1650년(효종 1년)에 조성된 조선 중기 불상으로 금동(金銅)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가섭존
자(迦葉尊者)와 아난존자(阿難尊者)가 협시(夾侍)해 있다. 보통은 관음보살(觀音普薩)이나 보현
보살(普賢菩薩) 등의 보살이 그를 협시하는데 반해 여기는 그의 제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
는 것이 특징이다.
환한 표정의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석가불은 통견의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으며,
그들 뒤로 고운 빛깔의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또한 그들 배에서 나온 복장(腹臟)유
물은 한지 다발과 사용하지 않은 한지(韓紙), 묵서 발원문, 묘법연화경과 보협인경 목판본 등의
전적(傳籍)류, 은제 후령통, 직물류, 곡식과 약초류 등 373점으로 불상 조성 당시의 상황을 밝
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들은 불상과 한 덩어리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리 유쾌하지 못한 시절에 지어진 왜식 절집, 그리고 거기서 만난 조선 중기 불상, 마치 우리
나라에서 빼돌린 불상을 봉안한 왜국에 어느 절집 같은 기분이다. 다행히도 우리 땅이라 망정이
지 실제 왜열도였다면 부아가 치밀어 유리를 박살냈을지도 모른다.

▲  대웅전 앞에 자리를 튼 귀여운 동자 모습의 보살상들 (지장보살로 여겨짐)

 ◀  왜식으로 지어진 조그만 범종각(梵鍾閣)
동국사 경내 맨우측에는 1919년에 지어진 범종
각이 있다. 네모난 석대(石臺)를 만들고 그 위
에 자리한 범종각에는 같은 시기에 왜국 교토에
서 조성된 쥐꼬리만한 범종이 걸려있다.
우리나라의 범종각과 달리 그 모습이 작고 범종
도 장난감만해 풍채가 좋은 우리나라 종과는 확
연한 차이를 보인다.


▲  범종각에 걸린 작은 범종

범종의 주요 부분인 유곽의 유두(乳頭)가 우리나라와 달리 25개나 된다. 종 피부에는 왜왕(倭王
)을 찬양하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종이 작아서 부처의 메세지가 속세에 제대로 울려퍼
질련지 모르겠다. 범종보다는 거의 장난감종이나 식사시간을 알릴 때 치는 종으로 더 적당해 보
인다.

▲  범종각을 둘러싼 조그만 보살상 36기

범종각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싼 석조보살상은 1917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 모습이 정말로 제각각
이다. 왼쪽 사진의 보살은 마치 몸이라도 푸는 듯한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이국
적인 그들의 모습에 눈길이 좀처럼 떼어질 줄을 모른다.

※ 동국사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행 고속버스가 15~20분 간격으로 떠나며, 동서울터
  미널에서 50~90분 간격, 남부터미널에서는 1일 3회 떠난다.
* 용산역,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대천역에서 장항선 열차가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부천, 성남, 수원, 천안, 대전(동부/유성), 청주, 전주, 익산, 광주, 대구(서부)
  , 부산(동부)에서 군산행 직행버스 이용
* 군산역과 군산시외/고속터미널 앞, 터미널 남쪽 팔마광장에서 명산4거리(대학로) 경유 군산대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명산4거리 하차, 버스는 자주 다닌다.
* 명산4거리에서 도보 2분. 이정표가 명산4거리와 절입구에 있어 찾기는 쉽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절 주변 골목에 주차 요망)
① 서해안고속도로 → 동군산나들목 → 대야교차로에서 21번 외곽국도로 우회전 → 군산대교차
   로에서 대학로로 우회전 → 명산4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바로 나오는 4거리에서 동국사길로 좌
   회전 → 동국사
② 서해안고속도로 → 군산나들목을 나와 군산 방면으로 직진 → 미원동4거리에서 우회전 → 명
   산4거리 직진하여 바로 나오는 4거리에서 동국사길로 좌회전 → 동국사
*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금광동 135-1 (☎ 063-462-5366)
* 동국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동국사 뒤쪽에 병풍처럼 둘러진 대나무밭
산바람이 불면서 대나무의 향연이 그윽히 울려 펴진다.


♠  군산시내에 자리한 아늑한 산사 ~ 설림산 은적사(雪琳山 隱寂寺)

▲  슬슬 가을을 준비하는 은적사 외곽의 나무들

군산시내 서남쪽에는 설림산(115.8m)이란 조그만 산이 누워있다. 그 산의 남쪽 자락에는 군산에
서 가장 큰 절인 은적사가 조용히 또아리를 틀어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보듬는다. 절의 이름
인 은적(隱寂)은 해탈을 위해 은거하며 수도에 정진한다는 뜻으로 지금은 시가지에 둘러싸여 은
적이란 이름이 조금은 무색해진 것 같다.

은적사는 613년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나 그 당시 군산은 엄연한 백
제 땅으로 당시 백제를 다스리던 군주는 무왕(武王)이었다. 그 시절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는 정
말로 험악하기 그지 없었지. 상황이 그러한데 아무리 원광이 신라에 이름난 승려라 할지라도 적
국에 절을 세우는 건 어림도 없었을 것이며, 백제 또한 적국의 승려가 설치는 것을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원광국사의 창건설은 신빙성이 없다.

그리고 7세기 중반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하나 있다. 그 설에 의하면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해 백
제를 공격하던 660년 여름,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13만 대군을 이끌고 금강 하류인 설
림산 부근 천방산(千房山) 아래에 상륙했다. 그런데 안개가 자욱하여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해
지자 산에 올라 안개를 치워주면 이 산에 천사(千寺)를 지어 바치겠다며 산신에게 기도를 올렸
다. 그랬더니만 감쪽같이 안개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을 지을 자리를 물색했으나 워낙 지세가 협소하여 부득이 주춧돌 1,000개를 여러 곳에
놓고 1개의 절만 지어 천방사(千房寺)라 했다고 한다. 그것이 은적사의 전신(前身)이라는 것이
다. 허나 당나라군이 백제를 접수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힘겹게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에 무슨
여력으로 절을 짓겠는가? 이 역시 가능성이 없다. 결론은 창건 시기는 모른다는 것.

어쨌든 창건 이후 952년(광종 3년)에 정진(靜眞)국사가 중건했고, 1373년(공민왕 22)에 나옹(奈
翁)대사가 중수했다고 한다. 그 이후 1781년에 보경(寶鏡)선사가 중수했으며, 1937년과 1947년
에 중수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절의 내력 가운데 그나마 조선 이후만 신뢰도가 높을 뿐, 그 이
전은 증거물이 전혀 없다.

▲  은적사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구분짓은
문으로 문 밖은 소룡동 주택가이다.

▲  은적사 극락전(極樂殿)
대웅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큰 건물로
2000년에 세워졌다.


▲  은적사 지장전(地藏殿)
명부전을 부시고 만든 2층 건물로 그 모습이
금산사 미륵전(彌勒殿)의 축소판 같다.


▲  은적사 천왕문(天王門)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일주문을
지나면 주차장과 함께 모습을 비춘다.


1980년까지 태고종(太古宗) 소속으로 있다가 그 이후 조계종(曹溪宗)으로 전환했다. 1989년 삼
성각이 불타서 없어지고, 1991년 은적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지방문화재인 산신각(山神閣
)이 방화로 사라지는 불행을 겪었다. 1993년에는 명부전(冥府殿)을 부시고 그 자리에 2층의 지
장전을 세우는 한편 조선 중기에 지어졌다고 하는 대웅전을 해체하여 지금처럼 몸집을 늘렸다.
1994년 성우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계속 불사를 벌여 200평에 불과하던 경내가 무려 4,000평으로
확장되었다.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극락전, 범종각, 화엄회, 교육관 등 8~9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대부분 1980년대 이후 건물이라 고색의 흔적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죄
다 씻겨가 버렸다.
대웅전 뜨락에는 석가탑(釋迦塔)을 빼어닮은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가을 햇살을 즐긴다. 이곳
에는 예전에 선종암(善宗庵)에서 가져온 오래된 3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디로 마실을 갔
는지 보이질 않는다. 설마 그 낡은 탑이 이 탑으로 둔갑된 것은 아니겠지? 선종암은 설림산 북
쪽에 있던 암자로 왜정 때 상수도 수원지 공사로 절이 파괴되면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장전 옆에는 교육관과 2층 규모의 어린이집이 있는데, 어린이집은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으며, 경내 뜨락에는 잔디가 곱게 깔려 깨끗하고 정갈한 분위기를 풍긴다. 일주문 옆에는 조
그만 찻집이 있어 잠시 발을 멈추고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도 누릴 수 있다.

▲  은적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 팽나무
나이가 약 260년으로 나무의 높이가 20m,
둘레가 2.5m에 이른다. 3m 지점에서
가지가 3개가 갈라져 장관을 이룬다.
군산시 보호수 9-2-21-2호

▲  대웅전 뜨락의 지장보살상(地藏菩薩)
왼손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 대신
약사여래의 약합(藥盒) 같은 무엇인가가
조심스레 들려져 있다.


은적사에 있는 오래된 흔적으로는 나이 260년을 헤아린 거대한 팽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그
나마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 조선 중기에 세워졌다는 대웅전은 1980년에 새로 지었으
니 고색의 기운은 애당초 말라버렸고, 그 대웅전에는 이곳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인 석가여래3존
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것도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닌 김제 금산사(金山寺) 인근 절에서 20
세기 초반 경에 가져온 것이다.
이 불상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夾侍)한 3존불로 1629년(인조
6년)에 조성된 것이다. 현재는 금동으로 도금을 했으며, 개금(改金)할 때 '다라니경' 등의 복장
물(腹臟物)이 나왔다고 하나 현재는 없다.


▲  은적사 대웅전(大雄殿)과 3층석탑
대웅전은 1980년에 중수한 것으로 원래 건물은 조선 중종 때 중창된 것이라 전한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3존불를 비롯하여 1991년에 불타버린
산신각에서 옮겨온 칠성탱(七星幀)과 산신탱(山神幀), 독성상(獨聖像) 등이
봉안되어 있다.

▲  은적사 석가여래3존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84호
조선 중기 불상으로 화려한 닫집과 고운 색깔의 후불탱화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찬란함의 극치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  대웅전 우측 부분의 불화들
왼쪽부터 산신탱. 칠성탱, 독성상(獨聖像)

▲  대웅전 좌측 부분의 불화들
신중도(神衆圖)와 영산회상도


▲  대웅전 좌측 언덕에 지어진 거대한 석불입상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취하며 지그시 군산시내를 굽어본다.

군산시내에서 나름 오래된 터줏대감 사찰이지만 동국사에 크게 밀려 외지 관광객은 그리 없다.
관광 수요를 부를 만한 매력도 거의 없고, 보물도 빈약하니 그런 것이다. 게다가 주택가가 절
밑에까지 밀려와 은적이란 이름도 조금 무색하다. 허나 자리가 좋아 학의 품에 안긴 알처럼 포
근하고 아늑함이 밀려오는 도시 속에 조촐한 오아사스 같은 곳이다.
 
※ 은적사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군산역과 군산시외/고속터미널에서 소룡4거리 경유 군산대, 비응도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은
  적사(1,2,4,5,7,8,85번)나 월명여중(3,7,50,60,80번 계열 시내버스)에서 내려 도보 10분. 소
  룡초교 뒤에 절이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에 주차장 있음)
① 서해안고속도로 → 동군산나들목 → 대야교차로에서 21번 외곽국도로 우회전 → 공항교차로
   에서 산북로로 우회전 → 소룡4거리 직진 → 은적사입구에서 설림3길로 우회전 → 은적사
*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소룡동 1332 (☎ 063-466-4526~8)


♠  왜정의 수탈과 착취의 쓰라린 흔적 ~
발산초등학교에서 만난 문화유산들

군산시내에 있는 은적사와 동국사를 둘러보고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발산초등학교를 찾았다. 이
곳에는 발산리 석등과 5층석탑을 비롯하여 문화유산 30여 점이 깃들여 있어 군산의 조촐한 보물
창고이자 노천박물관 같은 곳이다.

이곳에 이토록 많은 문화유산이 서린 것은 학교 교장이나 선생이 수집하거나 옛 절터가 있어서
가 아니다. 바로 왜정 때 이곳에 대농장을 꾸리며 조선인을 착취한 어느 왜인 지주가 악착같이
수집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던 대한제국 시절, 호남평야(湖南平野)에 잔뜩 눈독을 들인 왜
국은 평야와 가까운 군산을 개항할 것을 대한제국에 요구했다. 개항이 이루어지자 많은 왜인들
이 군산에 몰려와 말뚝을 박았는데, 그중에 시마다니(嶋谷) 야소야(이후 시마다니)도 있었다.

시마다니는 야마구찌(山口)현 구카군 출신으로 주조업(酒造業)으로 어느 정도 돈을 주무르고 있
었다. 군산이 개항되자 호남평야에서 술의 원료인 쌀을 저렴하게 공급 받고자 군산으로 건너와
70,000원의 자금을 쏟아부어 임피면과 개정면 지역의 땅을 사들여 1903년 12월, 486정보의 농장
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의 발산초등학교에 대저택을 지었는데, 1910년 이후 전북과 전남, 충남
에서 적당한 문화유산을 빼돌려 저택의 정원을 채웠다. 또한 동산문화재에도 검은 마음을 품어
막대한 문화유산을 빼돌렸으며, 그것을 안심하게 보관하고자 3층 규모의 거대한 콘크리트 금고
를 만들었다.

군산 지역 농민을 가득 쥐어짜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마다니, 그러나 1945년 그들이 신으로 받
들던 왜왕이 미국에게 살려달라고 구차하게 꼬랑지를 내리면서 왜국은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38도 이남을 장악한 미국은 조선에 거주하는 왜인들에게 1946년 봄까지 무조건 그들 나라로 꺼
질 것을 명했다. 또한 1인당 가지고 갈 수 있는 돈은 1,000엔으로 한정시켰다. 상황이 이러자
조선에서 떵떵거리고 살던 왜인들은 그야말로 쪽박을 차게 생겼다. 그동안 긁어모은 것이 얼만
데 고작 1,000엔이란 말인가? (왜열도에 살던 조선인은 귀국 희망자에 한해 1,000원까지 소지하
고 귀국할 수 있었음) 시마다니 역시 꼴통이 터질 정도로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여기서 벌어
들인 막대한 재산을 포기하고 가는 것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껏 생각한 것이 한국에 귀화 요청, 귀화를 허락해달라며 미군정에 징징거렸으나 결국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방 2개만을 간신히 지닌 채 1946년 봄, 부산에서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꼬
랑지를 축내린 늙은 개처럼 통쾌히 추방되고 만다. 결국은 재산의 5%도 건지지 못한 채, 개쫓겨
나듯 돌아감 셈이다. 그 이후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시마다니의 농장과 문화유산은 미군정이 모두 몰수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넘겼다. 동산문화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으며, 그의 집은 때려부시고 1947년 그 자리에 발산초등학교를 세웠다.
허나 정원을 수식하던 문화유산은 태반이 고향을 알지 못해 돌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눌러앉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이들을 정성껏 보호하고 관리하여 보존상태가 좋으며 어린이들의
살아있는 역사, 문화유산 공부에도 크게 활용되고 있다.

왜정 때 왜인 농장에서 소작농(小作農)으로 일하던 농민들은 왜인 지주에서 생산량의 무려 50~
70%를 지세(地稅)로 뜯겨 늘 굶주림에 허덕였다. 쌀과 돈을 꾸더라도 그 이자가 엄청나 갚느라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  이곳에 말뚝을 박은 욕심꾸러기 왜인의 부질없는 욕심의 현장
개정면 구 일본인농장 창고(금고) - 등록문화재 182호

조촐하게 꾸며진 시골학교인 발산초등학교는 석조문화유산 말고도 관심을 끄는 건물이 하나 있
다. 바로 시마다니가 귀중품을 보관하던 3층짜리 창고가 그것이다. 다소 흉물스럽게 남아있는
이 건물은 밤에는 정말 귀신들이 나와 잔치를 벌일 정도로 음침해 보인다.

이 창고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3층 건물로 외벽은 그 당시 흔했던 벽돌 대신 콘크리트 몰탈의
거푸집 공법으로 만들어 내부의 각 층을 구분하는 나무 마루바닥을 만들었다. 그리고 외부로 난
창에는 쇠창살을 달고 철문으로 2중의 방범장치를 만들었다. 또한 출입문에는 커다란 미국제 금
고문을 달았다. 이렇게 무식하게 큰 금고까지 둘 정도면 시마다니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그렇게나 떵떵거리며 지역 주민들을 쥐어짜던 그는 1945년 왜국의 패망으로 애지중지하던 보물
과 재산을 챙기지도 못하고 거지꼴로 추방되었으니 결국 지나친 욕심이 그런 화를 부른 것이리
라. 그 이후 6.25 때는 군산을 점령한 북한군이 군산 지역 우익인사들을 이곳에 가두고 괴롭히
기도 했다.

시마다니는 통쾌하게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과 흔적은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진하게 남아 어둠의
시절의 쓰라린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악명 높은 이름은 이곳을 찾은 이들로부터 두고두고
회자되며 손가락질을 받고 있으니 자신의 이름 4자는 참 제대로 떨치고 간 셈이다. 이 금고와
발산초교, 이곳의 문화유산이 있는 이상은 그의 이름은 영원히 묻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초등학교 뒤쪽에 공원처럼 꾸며진 석조문화유산의 보금자리
시마다니 창고와 달리 잠시 발을 쉬고 싶은 아늑한 쉼터이다.


▲  어느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을 지켰을 양석(羊石)과 망주석(望柱石),
그리고 다양한 모습의 문인석(文人石)과 귀부(龜趺), 이수(螭首)를 갖춘 비석들

발산초등학교 뜨락을 가득 메운 저들의 고향은 대부분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시마다니가 마구잡
이로 빼돌리면서 자신의 고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자신이 어디서 왔는
지를 망각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며 처지가 비슷한 여러 석물과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 초등학
교의 뒤뜰을 가득 메운다. 적어도 어디서 가져왔는지 기록이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것이
나라 잃은 문화유산의 얄미운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  사대부의 무덤에서 가져온 다양한 형태의 장명등(長明燈)들, 그들 사이로
군계일학(群鷄一鶴)인 발산리 석등의 위엄이 단연 돋보인다.

▲  발산리 석등(鉢山里 石燈) - 보물 234호

발산초등학교의 문화유산 중 단연 으뜸은 발산리 석등이 아닐까 싶다. 신라 후기 혹은 고려 초
기에 조성된 아름다운 석등으로 건강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특히 기둥에 하늘을 향해 힘차게 비
상(飛上)하는 용이 진하게 새겨져 있는데, 마치 번개가 내리치는 구름 속을 헤엄치는 용을 보는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형태의 석등은 오로지 이것이 유일하여 그만큼 가치가 상당한 보물
이다.
원래는 전주 부근인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鳳林寺)터에 있던 것을 시마다니의 눈에 찍혀
이곳에 끌려오게 된 것이다. 아무리 미술에 문외한이라 해도 저렇게 섬세하고 수려한 석등에 혹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석등을 받치는 바닥돌과 하대석(下臺石)은 같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동그
란 하대를 두었는데, 아래로 잎을 펼친 복련(伏蓮)이 8개로 새겨져 있다. 석등의 기둥인 간석(
竿石)은 원통형으로 아래서 위까지 용무늬가 실감나게 새겨져 있다. 화사석을 받치는 상대석(上
臺石)은 8각으로 8개의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등의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4각의 네 모서
리를 둥글게 다듬어서 8각을 이루게 했는데, 창 사이로 특이하게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화사석의 지붕돌은 8각으로 모서리 선이 선명하며, 지붕돌의 위쪽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장식 받침대를 두었으나 보주(寶珠) 등의 머리장식은 없다.

화사석의 사천왕상이나 지붕돌의 양식 등은 보아 신라 후기 양식을 띄고 있지만 받침부분의 기
둥이 4각으로 변하고 화사석 역시 4각을 닮은 8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8각에서 4각으로 변하는
중간단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석등의 조성 시기는 빠르면 신라 후기 늦어도 고려
초기로 여겨지며, 높이는 2.5m이다.


▲  발산리석등의 화사석(火舍石)
화사석 창 사이로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보존상태는 그런데로
괜찮지만 저렇게 봐서는 어느 천왕인지는 쉽사리 구별이 가질 않는다.

◀  발산리석등의 기둥(간석)과 하대석

아래로 향해 늘어진 복련의 잎은 마치 고무신을
나란히 얹어놓은 듯 하다. 기둥에는 거대한 용
이 기둥을 휘감으며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 섬세
하게 표현되었다

▲  맵시가 일품인 발산리5층석탑 - 보물 276호

발산초등학교의 석조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키가 큰 발산리5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탑
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이다. 원래는 앞의 석등과 더불어 봉림사터에 있던 것
을 석등과 함께 이곳으로 끌려왔다. 5층석탑이긴 하지만 5층 부분은 없어지고 지금은 4층만 남
아 있으며, 탑 위의 상륜부(相輪部)는 후에 만든 것이다. 탑이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고 맵시가
고우며, 고려 탑의 아름다움을 진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  6각부도(왼쪽)와 2층과 3층 탑신을 상실한 3층석탑(가운데)
그리고 키 작은 부도(오른쪽)

◀ 발산리6각부도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85호
흡사 삿갓을 쓴 나그네같은 이 6각부도는 시마
다니가 소재를 알 수 없는 절터에서 가져온 것
이다.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
도는 우리나라에 거의 없는 6각형 부도로 균형
잡힌 몸매에 조각 수법도 대단하다. 우리나라에
6각형 불교 조형물이 등장한 것은 고려 중기로
송나라의 6각형 석물을 보고 따라한 것이 그 시
초이다.

바닥돌 위에 6각의 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 6각
의 중대석을 두었다. 6각의 탑신에는 2개의 문
비를 새겼으며, 탑신 지붕에는 기와를 선명하게
조각했다. 탑의 높이는 1.7m로 작고 단촐하지만
고려 부도(浮屠)의 아름다움이 깃들여진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 발산초등학교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군산시외/고속터미널 남쪽 팔마광장5거리 농협앞에서 개정, 대야 방면 21, 22, 23, 30번 계열
  시내버스를 타고 발산육교에서 하차, 여기서 건너편으로 길을 건너 개정면사무소 방면으로 7
  분 정도 걸으면 발산초교이다. (이정표가 있으므로 찾기는 쉬움)
* 군산역에서 발산초교까지는 7km 거리로 가까우나 바로 가는 시내버스가 없다. 버스로 갈 경우
  시내로 나가는 버스 아무거나 잡아타고 군산시청이나 시외터미널에서 개정, 발산 방면 시내버
  스로 환승해야 된다. 허나 군산역에서 택시로 가면 10분 이내에 도착한다.
* 익산역이나 익산터미널, 원광대병원에서 20번 시내버스를 타고 대야4거리에서 21, 22, 23, 30
  번 계열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발산 하차 / 대야에서 86, 87번 버스를 탔을 경우에는 발산초교
  (개정면사무소)에서 내린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는 개정면사무소나 학교 주변에 하면 됨)
① 서해안고속도로 → 동군산나들목을 나와서 대야 방면으로 우회전 → 대야 → 발산초교 입구
   에서 우회전 → 발산초교
* 발산초등학교는 늘 개방되어 있다. (개방 시간은 아침부터 저녁 8~9시까지)
*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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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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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겨울 산책 (오목대, 한벽당..)


' 호남의 오랜 중심지 ~ 전주 나들이 (전주한옥마을 명소들) '
전주 한벽당
▲ 한벽청연의 현장, 전주 한벽당(寒碧堂)


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위풍을 해내(海內)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

*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정벌하고 고향인 패(沛)로 돌아와 승전 연회
에서 즉흥으로 지어 부른 대풍가(大風歌), 태조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 연회에서
저 시를 읊었다.

천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홀로 다다르니 가슴에는 시름이여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턴 부여국(夫餘國)은
누른 잎 휘휘 날려 백제성(百濟城)에 쌓였네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의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하염없이 고개 돌려 옥경(玉京, 개경)만 바라보네

* 이성계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가 착잡한 마음에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읊은 우국시(憂國詩)



조선왕실의 영원한 성역 경기전(慶基殿)과 인근에 있는 호남 최초의 성당인 전동성당(全洞聖堂
)을 오랜만에 둘러보고 전주한옥마을의 중심을 가르는 태조로(太祖路)을 지나 한옥마을 동쪽에
솟아난 오목대를 찾았다. 서울의 인사동(仁寺洞) 골목과 거의 비슷하게 꾸며진 태조로는 찻집,
주막, 다양한 공예관 등이 즐비하여 인사동과 북촌골목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다.

공예품전시관을 지나면 한지관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목대로 오르는 나무 계단길이
있다. 계단길 외에도 공예품전시관 주차장에서 직진하여 500년 묵은 당산나무를 거쳐 오목대의
서남쪽 허리로 오르는 길도 있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계단을 3분 정도 오르면 이성계가 대풍가를 불렀다는 현장 오목대이다.


♠ 태조 이성계가 종족(宗族)들을 모아 연회를 배풀며 새 왕조의 개창을
암시했다는 현장, 오목대(梧木臺) -
전북 지방기념물 16호

전주한옥마을 동쪽 높다란 언덕 꼭대기에 둥지를 튼 오목대는 1380년 이성계가 전주이씨 종족들
을 모아연회를베풀며 새로운 나라를 세울 의사를 은연중 밝혔던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
날에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런 사연으로 오목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가 끝없이 기울어 가던 14세기 후반, 왜구(倭寇)는 고려와 명나라를 침범하
여 마구잡이 약탈을 일삼았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개경(開京)에서 가까운 강화도까지 쳐
들어와 선왕(先王)의 어진(御眞)까지 약탈해갈 정도였다. 고려 정부는 왜구를 때려잡고자 안간
힘을 썼으나 충렬왕(忠烈王) 이후 몽고의 통제로 강력했던 고려의 해군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토벌에 적지 않은 고생을 겪었다. 다행히 최무선(崔茂宣)이 화약(火藥)을 개발하여 1380년 진포
(鎭浦, 금강 하류)에서 왜구를 500척을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면서 상황이 다
소 반전이 된다.
하지만 그때 요행히도 목숨을 건진 왜구 잔당들은 배를 버리고 옥천, 상주 등 내륙지역으로 줄
행랑을 치면서고려 정부를 끊임없이 위협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三道
都巡察使)로 임명하여 남쪽으로 파견했다.

이성계는 여진족(女眞族)인 의제(義弟)인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가, 남원 운봉(
雲峯) 지역에 진을치고 있던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왜구 패거리를 죄다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렸는데. 이 전투가 그 빛나는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대승을 거두고 귀경(歸京)하던 중, 선조들의 땅인 전주에서 전주 이씨 종족(宗族)들을 불러모
아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흥에 겨운 나머지 한나라 고조(高祖)의대풍가
(大風歌)를 큰 소리로 부르며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뜻을 은은히 내비췄다고 한다.
이성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그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는 그의 행위에 적지 않은 역
겨움을 느끼고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말을 달려 단숨에 남천(南川, 전주천 상류)
을 건너 인근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서 말을 멈추고 개경(開京)이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시(憂國詩) 한수를 읊고는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이후 이성계는 1388년 조정의 명을 거역하고 압록강 위화도(威化島)에서 명나라를 향해야 할 창
을 개경으로 돌렸다. 개경(開京)을 점령하여 정몽주와 최영(崔瑩) 등 고려의 보루(堡壘)들을 죽
이고 끝내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다.

1900년 고종(高宗)은 그런 자랑스러운 조상, 태조를 기리고자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웠다. 비
신(碑身)에는 '太祖高皇帝駐蹕遺址(태조고황제 주필유지)'라 쓰여 있는데, 이는 고종의 친필이
라고 한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원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이다.

전주한옥마을을 묵묵히 굽어보는 오목대는 한옥마을과도 길이 이어져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된다.
허나 이곳까지 오르는 답사객은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서 한옥마을과 달리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하다.

예전에 비각 주변으로 철제(鐵製) 담장이 둘러져 있었으나, 근래에 이를 모두 철거하여 비각 앞
까지접근이 가능하며 비각 좌우로 멋드러지게 가지를 올린 나무 여러 그루가 비석을 호위한다.


▲ 고종이 세운 비석을 소중히 품에 안은 오목대 비각

▲ 오목대 동쪽에 마련된 누각(樓閣)

오목대 동쪽에는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 누각이 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1970년대 이후에 만든 것으로 누각의 이름은 따로 없고 그냥 오목대나 오목대 누각이라고 부르
면 된다. 이성계가 오목대에서 전주이씨 종족을 모아 연회를 베풀 때 이곳에는 누각이나 정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거나 막사(幕舍)를 만들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누각은 이성계가 연회를 베풀던 장소를 상징하여 만든 것으로 시인 묵객들이 남긴 시액(詩額
)들이 어지럽게 누각 평방(平枋)위에 걸려 있다. 그중에서도 이성계가 읊었다는 대풍가 시액이
나그네의 눈길을 잡아맨다. 대풍가는 한글과 한문 버전이 따로 걸려있다. 시문의 내용을 중얼거
리듯 읊으며 누각 난간에 걸터앉아 잔잔히 불어오는 그리 차갑지 않은 겨울바람을 즐겨본다.


▲ 대풍가 한문버전

▲ 대풍가 한글버전

집안 종족들과 회포를 풀며 술에 거하게 취한 이성계가 어떤 태도로 저 시를 읊었는지 가히 상
상이 간다. 으뜸석에 앉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종족과 부하장수를 바라보며 자신이 황제
가 된 양 가슴을 크게 피며 거만하게 대풍가를 읊었을 것이다. 종족과 부하장수는 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을 것이고, 그 광경에 속이 단단히 뒤틀린 정몽주는 술잔을 상에 쾅 내려놓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한옥마을

예로부터 전주의 중심부인 풍남동(豊南洞)과 교동(校洞) 일대에 넓게 조성된 전주한옥마을은 서
울의 북촌(北村)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2곳 밖에 없는 대규모 한옥밀집지역이다. 전주시의 꾸준
한 홍보와 정비사업으로 전주의 대표적인 명소로 부상하여 많은 답사객들이 찾아온다.


전주한옥마을은 총면적이 76,320평에 이르며, 약 900여 채의 전통한옥이 모여있다. 대부분이 왜
정(倭政) 이후에 지어진 한옥으로 100년 이상 된 집은 거의 없다. 이곳에 기와집이 많이 뿌리를
내린 것은 왜정이 전주부(全州府)의 중심이던 전주성(全州城)을 말끔히 부시고 도로를 뚫으면서
성 밖에 사던 왜인들이 성 안으로 마구잡이로 기어들어와 물을 흐려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크게 반발한 전주 사람들은 전주를 지키고자 너도나도 한옥을 지어 살면서 거대한 한옥마
을이 된 것이며, 왜정 때 한옥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향수가 진하게 서린 고풍(古風
)스러움을 선물하고 있다. 몇몇 한옥은 북촌의 한옥처럼 문화공간이나 공예관, 찻집, 식당, 민
박집이나 한옥체험장, 전통체험관 등으로 탈바꿈하여 나그네의 호기심을 부드럽게 자극시킨다.


▲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한옥마을 동쪽
(공예품전시관과 한지관 등이 정면에 보인다)

▲ 오목대와 이목대를 잇는 구름다리 (오목교)

▲ 오목교 건너편에 바라본 오목교와 오목대

오목대 동쪽에는 남원(南原)으로 달리는 17번 국도(기린로)가 뚫려있다. 전주 도심을 우회하는
간선도로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여 수레의 굉음이 귀를 진하게 때려댄다. 길 건너편 동쪽에는
이목대가 있는데, 도로 위에 육교 같은 다리를 놓아 오목대와 이목대를 이어주고 있다. 다리의
이름은 '오목교'로 '구름다리'라고도 불린다. 겉으로 보면 도로로 단절된 양쪽을 이어주는 육교
로 생각하고 지나치기 일쑤지만 이 다리에도 깊은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원래 오목대와 이목대는 하나의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왜정이 1931년 전라선(全羅
線) 철도를 내면서 오목대와 이목대를 잇던 산줄기를 싹둑 끊어버렸다. 전라선이 개통된 이후,
이곳에서는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남원에서 전주로 올라오는 열차가 이곳만 지나면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다. 그 틈을 노려 무임승차로 열차에서 뛰어내린 사람
이 많았다고 한다.
혈맥(血脈)의 단절로 기차의 속도로 느려진다고 여긴 전주 유림들은 오목대와 이목대를 연결시
켜야 된다고 민원을 넣어 1960년경에 오목교를 설치했는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기차의 속도
가 빨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 전라선이 동쪽으로 이설되면서 오목교는 철거되고, 옛 전라선 자리에 기린로가 놓이면
서 1987년 지금의 오목교를 만들었다. 오목교는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는 승암산(僧巖山)의 산줄
기가 단절되어 사고가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 오목대를 마주보는 이목대(梨木臺)

오목교 구름다리를 건너면 이목대라 불리는 비각이 나그네를 맞는다. 이곳은 오목대와 마찬가지
로 비석과 그것을 품에 안은 비각이 전부이다. 오목대가 오동나무가 많은 곳이라면 이목대는 배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던 언덕이었다. 그래서 이목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목대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의 유허(遺墟)로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

) 시절부터 후손들이 살던 곳이라 전한다. 이안사는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고려를 등지
고 원나라 땅인 함경도(咸鏡道)로 넘어가 새롭게 터를 일구었다. 태조는 그를 목조(穆祖)라 추
존했으며, 1900년 고종 황제가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碑文)에는 '목조대왕구거유지(

)'라 쓰여 있다. 비문은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완산지(完山誌)'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는 이안사와 관련된 몇가지 설화가 적혀있는데,
그는 발산(鉢山) 남쪽 장군수(將軍樹)란 나무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진법(陣法) 놀이를
했다고 하는데, 그 현장이 바로 이목대라고 한다. 아마도 집 앞에서 그 흔한 전쟁놀이를 했던
모양이다. 또한 호운암(虎隕岩) 설화도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비각에 제대로 갇힌 듯 답답해 보이는 이목대 비석

어느날 이안사는 애들을 이끌고 병풍리 좁은목에 놀러 갔다가 비를 만났다. 그들은 급히 근처에
있는 바위굴 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호랑이 1마리가 굴 입구에 나타났다.
호랑이는 당장이라도 덮칠 기세로 으르렁거려 분위기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애들은 무서움에 질질 짜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안사가 침착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호랑이가 한꺼번에 우리를 물지를 못할 것이다. 기껏 해봐야 한 사람 밖
에는 물어가지 못해. 그러니까 우리 모두 웃옷을 벗어 던져서 호랑이가 무는 옷의 주인이 모두
를 대신해서 호랑이한테 가도록 하자'
그 말을 들은 애들은 더욱 겁을 먹으며 말했다.
'우리 가운데 형이 제일 나이가 많으니 형부터 던져봐요~'
'좋아. 내가 먼저 던질테니 호랑이가 내 옷을 받아 물면 내가 흔쾌히 호랑이한테 가겠다'
그러면서 웃옷을 벗어 호랑이에게 던졌다. 그러자 호랑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옷을 덥석
물고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안사는 속으로 '아오 젠장~~'을 수없이 중얼거리며 약속대로 호랑이 앞으로 다가섰다. 그래도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눈을 감으며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나갔다.
굴 밖으로 나가니 갑자기 천둥이 콰당치면서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호랑이는 보이
지 않고, 굴은 무너져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즉 그는 살고 나머지 애들은 굴에 갇
혀 죽은 것이다.

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에게 왕기(王氣)가 깃들여져 산신령이 호랑이로 변해 그를 살려낸 것이
라 여겼다. 이 설화는 태조 이후에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차원에서 생겨나거나 윤색
된 설화일 뿐이다. 태조 왕건에게도 이와 비슷한 설화가 있으니 제왕에게는 꼭 갖춰야 될 설화
인 모양이다.
이목대는 오목대와 한덩어리로 묶여 전북 지방기념물 16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오목대, 이목대 찾아가기 (2012년 1월 기준)
① 서울과 주요 지역에서 전주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15분 간격으로 떠나며,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있다.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에서 여수행 전라선 열차를 타고 전주역 하차
* 고양, 의정부, 인천, 부천, 안양, 수원, 안산, 대전(유성, 서대전), 군산, 광주, 순천, 대구
(서부). 울산, 부산, 창원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여수(엑스포)역, 순천역, 남원역에서 익산, 용산행 전라선 열차 이용
② 전주 현지 교통
* 전주역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남부시장이나 풍남문을 경유하
는 시내버스를 타고 전동성당(한옥마을) 하차. 이들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는 물 흐르듯 빈번하
게 다니므로 교통은 편하다. 전동성당 정류장에서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가면 풍남
문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길을 건너 태조로(太祖路)로 진입하여 7분 정도를 가면
언덕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그 언덕 정상에 바로 오목대가 있다.
* 전주역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병무청 방면 시내버스로 병무청
에서 하차하여 기린로를 따라 남쪽으로 도보 15분
* 금암광장에서 429번(1일 12회), 486번(1일 18회) 시내버스를 타면 오목대 앞까지 간다. 허나
차가 별로 없고, 전주교대와 좁은목으로 삥 돌아서 가므로 교통편이 좋은 전동성당에서 내려
걷는 것이 속 편하다.
* 오목대에서 전주한옥마을과 반대방향(동쪽)을 보면 기린로란 큰 도로가 있다. 도로 위에 걸린
오목교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이목대 비각이다.
③ 승용차
* 호남고속도로 → 순천~완주고속도로 → 동전주나들목을 나와서 전주 방면 → 인후동(모래내)
→ 기린로 → 오목대
* 호남고속도로 → 전주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조촌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기린로 직진 →
오목대
* 오목대 부근 주차장소는 공예품전시관이나 한벽당 부근 전통문화센터에 하면 된다.
* 관람료 없음 / 관람시간 제한 없음
*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1-3


♠ 전주8경의 한 곳, 한벽청연(寒碧晴烟)의 현장
한벽당(寒碧堂)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5호

한벽당은 전주천변 가파른 바위에 터를 닦아 들어앉은 정자로 전주 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
晴烟)의 현장이다.
승암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전주천을 뜰로 삼은 이곳은 1404년월당 최담(月塘 崔霮)
이 낙향하여 지은별장으로 처음에는 그의 호를 따서 달의 연못이란 뜻에 월당루(月塘樓)라 하
였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벽당으로 이름을 갈았는데, 후대 사람이 '벽옥한류(碧
玉寒流)'란 시귀에서 '한벽(寒碧)' 2글자를 따와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
모의 팔작지붕 정자로 동쪽에 따로 별채를 두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전주 뿐만 아니라 호남지역의 명승지로 많은 시인,묵객들이 구름처럼 찾아들
던 곳이다. 또한 상관계곡의 물줄기와 의암, 은석 등 여러 작은 골짜기의 물이 합쳐져 한벽당
앞으로 흐르는데, 옛 사람들은 그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와 같다고 시를 지었으며,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8경의 으뜸으로 삼았다.

바위 위에 교묘히 둥지를 틀어 전주천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가히 단아함 그 자체이나, 1931
년 뒤쪽 바위에 전라선 철마가 땅굴을 파고 달리면서부터 운치가 서서히 녹슬기 시작했다. 전라
선은 그나마 훨씬 동쪽으로 이설되어 더 이상 시끄러운 기적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정자 바로 앞에 기린로란 넓은 신작로가 생기면서 그림 같은 풍경은 많이 손상되어 버
렸다. 비록 정자를 비롯하여 주변 숲과 바위는 온전하지만, 문명의 이기(利器)라는 4발 달린 수
레들이 그 옆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나가니 예전의 시를 읊고 낮잠을 즐기던 그고즈넉한
분위기는 이제 옛 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 승암산 서쪽 바위에 또아리를 튼 한벽당

한벽당은 기린로가 지나는 한벽교 바로 옆에 있고 정자로 오르는 계단은 바로 다리 밑에 있다.
허나 한벽교에서는 보기와는 달리 그곳으로 가는 길이 없어 접근이 불가하고 무조건 전주천 산
책로로 내려가야 된다. (이목대와 다리 중간에 옛 전라선 터널을 이용하거나 한벽교 북단 서쪽
으로 내려가면 됨)

한벽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한벽교 바로 밑에 있어 운치가 상당히 떨어지는데, 바위를 의지하며
베풀어진 돌계단을 사뿐사뿐오르면차분하고 단아한 모습의 한벽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정자
안으로 발을 들일 때는 신발을 섬돌에 두고 맨발로 들어서야 되며, 내부에는 시인,묵객들이 걸
어놓은 현판들로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이경전(), 이경여(

), 이기발(), 김진상() 등 19명의 문인들이 한벽당에 올라 지은 시문이 전해
오고 있어 당시의 풍류를 느끼게 한다.

누각에 앉아 전주천을 중심으로 좁게 보이는 천하를 바라보고 있으면 들리는 소리라곤 17번 국
도를 질주하는 수레들의 요란한 굉음들 뿐이다.상황이 이러니 어찌 옛날처럼 차분하게 사색에
잠겨 있을 수 있겠는가..? 문명의 이기에 희생된 한벽당의 풍경은 서울 세검정(洗劍亭)과 다를
것이 없다. (서울 세검정 관련 답사기 ☞
보러가기)

▲ 별채를 좌측에 품은 한벽당 전경

▲ 한벽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계단 바로 위가 기린로가 지나는 한벽교이다.


▲ 한벽당 기적비(紀蹟碑)
한벽당의 내력을 소상히 적은 비석이다.

▲ 전주천 산책로에서 쳐다본 한벽당
나는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90도로 그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프지만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래를 굽어보며 전주천과 나그네를 바라본다.

▲ 한벽당 내부에 걸린 현판
필체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한벽당 3글자, 누구의 글씨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한벽당에는 내부에도 정자의 이름을 알리는 현판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 한벽당 내부에 걸린 여러 시액(詩額)들
한벽당을 침이 마르도록 예찬하는 옛 사람들의 시문들
시문의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깨알같은 글씨가 무수히 담긴 한벽당 중수기(重修記)

▲ 어여쁜 꽃단청이 그려진 한벽당 천정

샹들리에가 아름답다 한들 저 천정에 그려진 화사한 꽃그림만 할까? 굳이 불을 밝히는 등이 없
어도 앙증맞게 피어난 꽃잎으로 한밤에도 환할 것 같다. 거기에 전주천에 뜬 달님까지 한벽루
를 비추며 조명을 자처하니 굳이 현대식 조명시설은 필요없을 것이다.


▲ 한벽당 밑 바위에 진하게 새겨진 바위글씨
○화담(?花潭)이라 쓰여 있다. 앞 글자는 '도'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음

▲ 한벽당 바로 앞을 지나는 전주~남원 17번 국도 (기린로)

▲ 기적소리의 추억이 서린 옛 전라선 터널
한벽당 뒤쪽에는 옛 전라선 열차가 지나다니던 터널이 남아 있다. 열차의 기적소리와
굉음이 아련하게 들려올 것 같은 이 터널은 전라선이 시내 외곽으로 이전된 이후
사람들만 통행하고 있다. 수레는 통행 불가

▲ 겨울에 잠긴 전주의 젖줄 전주천

전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전주천은 겨울제국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숨을 죽여 봄을 잉태하고
있다.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 오면 거추장스러운 얼음과 눈을 박차며 눈을 깰 것이다.

◀ 전라선 옛 터널 앞에 있는 월당 선생 찬시
비(讚詩碑)
한벽당을 세운최담 선생의 찬시비이다. 최담
은 조선개국공신으로 1402년 전주로 낙향하여
별장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한벽당은 그의 작
품이다.

한벽당 찾아가기 (2012년 1월 기준)
*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429, 486번 시내버스를 타고 한벽당 하차, 허나 배차간격
이 무지 길다. (429번은 1일 12회, 486번은 1일 18회 운행)
* 전주역,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빈번하게 다니는 남부시장, 교도
소, 상관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남부시장 하차, 버스에서 내려 왼쪽으로 걸으면 바로 전주천
과 싸전다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둑방길을 15분 정도 걸으면 한벽교를 지나서 한벽당이 모
습을 비춘다. 가는 중에 전주향교와 동헌(東軒), 강암서예관이 있으며, 전주향교를 지나면 전
주의 별미(別味)인 오모가리탕을 취급하는 주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725, 752, 782, 78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좁은목 하차, 좁
은목4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전주천 다리(한벽교)를 건너면 한벽당이 보인다.
* 주차는 전통문화센터를 이용하면 된다. (오목대 부근의 공예품전시장도 괜찮음)
* 오목대에서 이목대를 거쳐 남쪽으로 도보 10분 거리
*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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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2년 1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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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청연의 현장 전주 한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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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산초등학교의 문화유산들 (발산리5층석탑, 석등, 6각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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