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반도 제일의 경승지, 아름다운 전나무숲길을 간직한 ~~~ 부안 내소사



' 부안 내소사(來蘇寺) 봄나들이 '

▲  내소사 대웅보전


봄이 나날이 흥해가던 4월의 끝 무렵에 멀리 남쪽에서 온 일행들과 부안군(扶安郡) 변산
에 자리한 내소사를 찾았다.
그날 오전에 군산 비응도(飛鷹島)에서 월명유람선을 타고 선유도(仙遊島)와 고군산군도(
古群山群島)를 1바퀴 둘러보고 비응도 인근에서 해물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바다의 만리장성이라 찬양받는 새만금방조제를 건너는데, 정말 징그
럽게 길긴 긴 모양이다. 아무리 가도가도 그 끝이 나오질 않는 것이다. 그저 서해바다와
둑방길만 지겹게 보일 뿐이다.
그렇게 방조제를 건너 부안군 땅으로 진입, 격포와 상록해수욕장을 지나 변산 남쪽에 자
리한 내소사 주차장에서 도착했다.

내소사는 주말 상춘객들로 선유도 못지 않은 높은 탐방밀도를 보인다. 이곳은 이미 예전
에 2번이나 발걸음을 했던 곳으로 슬슬 지겨울 법도 하겠지만, 나의 마음을 제대로 훔친
명소의 하나로 그곳을 모두 외울 정도로 들락거려도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  내소사 입문 (전나무숲길)

▲  내소사 일주문(一柱門)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가는 길은 다른 유명 사찰이나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식당과 가게, 민박
집들이 즐비하다. 절 밑에 형성된 마을을 3자로 사하촌(寺下村)이라고 하는데, 이 마을도 내소
사의 덕을 보는 일종의 사하촌이자 관광단지이다. 식당들은 산채비빔밥과 도토리묵, 파전, 향토
음식 등 갖은 음식과 술을 내밀며 관광객들을 진하게 유혹한다. 마치 절을 목전에 둔 속세의 마
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먹거리의 유혹을 휼륭하게 물리치고 관광단지를 지나면 내소사가 일주문을 내밀며 중생을 맞는
다. 이 문은 내소사의 정문으로 속세와 절의 경계를 가르는 역할이다.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
는 문짝은 없으며 허공처럼 뻥 뚫려 있어 부처나 관음보살 누님, 대자연 형님의 마음처럼 누구
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사람들이 일주문의 절반만 닮았다면 이 세상은 참 아름다울텐데, 신
(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고 있는 존재라 아마 안될 것이다.
내소사 일주문은 1982년에 승려 원조가 3평의 팔작지붕 건물로 만든 것으로 1984년 우암혜산이
단청을 칠하고 지금의 모습으로 고쳤다. 문 정면에는 '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라 쓰인
현판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는데, 글씨가 차분하면서도 맵시가 있어 보인다. 이 글씨는
1983년에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縣)이 쓴 것이다.

일주문 바로 너머에는 그리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중생들의 발길을 강제로 붙잡으며 그들의 호
주머니를 탐낸다. 이곳 입장료는 무려 3,000원씩이나 한다. (성인 기준)


▲  일주문 동쪽에 자리한 재미난 모습의
장승들 - 이보다 익살스러운 장승이
천하에 어디에 또 있을까? 허나 얼굴이
붉어서 밤에 본다면 조금 소름 끼칠 것 같다.

 

  700년 묵은 느티나무의 위엄
(할아버지 당산나무)

일주문 남쪽에는 하늘까지 좁게 보일 정도로 장대한 느티나무 1그루가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
운다. 그는 7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나무로 할아버지 당산나무라 불리며, 옛날부터 내소사와 입
암마을(내소사 남쪽 마을)로부터 끈끈한 숭상을 받고 있다. 반면 그의 배우자라 할 수 있는 할
머니 당산나무는 내소사 경내에 있는데, 나이가 무려 1,000년을 헤아린다.

이 느티나무에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당산제(堂山祭)가 열리고 있는데, 나무의 700년 나이를
통해 대략 고려 후기부터 제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 당산제는 오랫동안 내소사에서 제사를
주관했다는 것이 큰 특징으로 이 땅에 들어온 불교가 나름 붙임성을 발휘하며 토속신앙을 받아
들여 생긴 한국식 불교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이렇게 절에서 직접 제사를 지내다 보니 다른 당
산제와는 그 형식과 의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제사와 굿도 불교 의식을 따르고 있
다. 그래서 당산제의 이름도 절의 이름을 딴 '내소사 당산제'였다.

반면 입암마을은 내소사와 별도로 당산제를 지내는 웃뜸 서낭당이 있었다. 허나 1940년대부터
당산제를 지내지 않으면서 그 서낭당은 버려졌으며, 이후 내소사당산제를 마을 당산제로 삼아
내소사와 함께 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1990년 이후 내소사에서 마을로 당산제를 넘기면서 '입암
당산제'로 명칭이 갈렸고, 할아버지 당산을 마을의 주신(主神)으로 받들게 되었다. 제를 지낼
때는 내소사에서 승려와 여러 제물을 보내 당산제를 돕는다.
이렇게 사연이 깊은 뿌리 깊은 나무이건만 아직까지도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 등의 적당한
지정문화재 지위를 얻지 못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  전나무로 자욱한 내소사의 자랑, 전나무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내소사의 명물인 전나무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
정된 이 숲길은 천왕문까지 600m 정도 이어져 있는데,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전나무숲길에 버
금갈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봄의 신선한 내음이 가득 깃들여져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안구와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불어넣으며, 전나무가 앞다투어 베푼 산내음에 그 끈질긴
번뇌조차 제대로 털리면서 정신을 잠시나마 맑게 해준다.

절로 들어서는 길목에 이렇게 아름다운 숲길을 내민 것은 속세(俗世)
의 온갖 번뇌와 기운을 자
연의 힘을 빌려 모두 털고자 함이다. 즉 숲길을 거닐면서 속세의 망상을 숲의 기운에 의지하여
싹 지우고 절에 임하라는 주문이 담긴 것이다.


▲  보기만해도 안구가 싹 정화되는 전나무숲길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나만 두고두고 누리면 안될까?

▲  아무리 걸어도 싫증이란 것이 나지 않는 전나무숲길

나무숲길에 무한 감동을 받으며 그렇게 걷다보면 보이지 않던 내소사 경내가 천왕문을 시작으
로 슬슬 모습을 비춘다. 별로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천왕문이 바로 앞
에 있는 것이다. 체감거리는 실제 거리의 1/3정도인 200m 정도 되려나? 그만큼 숲길이 짧아 조
금은 아쉽기도 하다.

▲  네모난 연못, 연지(蓮池)
여름이 되면 연꽃의 즐거운 향연이 전나무
숲길을 더욱 아름답게 수식해줄 것이다.

▲  내소사 사적비(事蹟碑, 왼쪽)와 해안당
대종사(海眼堂大宗師, 오른쪽) 행적비


▲  천왕문 직전의 전나무숲길

▲  내소사 천왕문(天王門)

전나무숲길이 다한 곳에는 두툼한 모습의 천왕문이 경내를 가리고 서 있다. 이 문은 부처와 절
의 수호신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1986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세웠다. 현판은 일주문 현
판을 썼던 일중 김충현의 글씨이고, 주련(柱聯)에 쓰인 글귀는 해안당의 오도송(悟道頌)이다.

▲  표정이 유난히도 날카롭고 무서운 사천왕의 위엄
왼쪽부터 용을 쥐어든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보탑을 든 광목천왕(廣目天王), 비파 연주에
신이 난 다문천왕(多聞天王), 무인의 기가 넘치는 증장천왕(增長天王)

▲  옥계수가 담긴 내소사 수각(水閣)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갈증에 잠긴 목 좀 축이고 가라며 동그런 석조(石槽)가 중생을
맞는다. 절에서는 이 석조를 수각이라 부르며 예우하는데, 대자연이 내소사를 찾은 중생들에게
아낌없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봄가뭄이 극심한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 잎이 정교하게 표현되었고, 물로 넘치는 석조를 보니 술이 가득 담긴 연
꽃 무늬의 술잔을 보는 듯 하다.


▲  1,000년 묵은 느티나무(할머니 당산나무) - 부안군 보호수 9-15-2호

수각과 보종각 사이에는 내소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가 일주문 남
쪽에 있는 700년 묵은 느티나무인 할아버지 당산나무의 배우자로 할머니 당산나무라 불린다.
나이는 무려 1,000년을 헤아린다고 하며,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은 끝에
높이 20m, 둘레 7.5m의 거대한 나무로 자라났다. 내소사의 오랜 내력을 귀뜀해주는 존재로 굵직
한 기둥과 줄기에는 덧없이 깃든 오랜 세월이 잔뜩 묻어난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내소사의 내력(來歷)을 간단히 짚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 변산반도(邊山半島) 굴지의 고찰, 능가산 내소사(來蘇寺) - 전북 지방기념물 78호
변산 능가산(관음봉)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내소사는 백제 무왕(武王) 시절인 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맞다면 천하에 몇 남지 않은 백제 후기 사찰
이 된다. 허나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어 아쉽게도 신빙성은 적으며, 그나마 오래된
존재가 할머니 당산나무라 불리는 1,000년 묵은 느티나무가 고작이라 길게 잡으면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창건 당시에는 2개의 크고 작은 소래사(蘇來寺)가 있었는데, 대소래사(大蘇來寺)는 내소
사 서쪽 원암마을 뒷쪽 아차봉 밑에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관련 기록이 없어 어떻게 돌아갔는
지는 알 수 없으나 1887년 부안군에서 발행한 부안지(扶安誌)에 1870년 경오년(庚午年)에 산불
로 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소소래사(小蘇來寺)는 지금의 내소사로 대소래사와 마찬가지로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
소상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다만 고려시대에 조성된 3층석탑이 서 있고, 1414년에 조성된 봉
래루가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소래사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고려와 조
선 때도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33년에
청민선사(靑旻禪師)가 중건했는데, 이때 내소사의 제일 가는 보물인 대웅보전이 탄생했다.
1865년(고종 2년)에는 관해선사(觀海禪師)와 만허선사(萬虛禪師)가 중수하고, 1983년에 크게 중
창하여 지금에 이른다.
옛날 변산에는 내소사 외에도 선계사(仙溪寺), 실상사(實相寺), 청림사(靑林寺)등의 절이 있었
다고 하며, 이들 절을 변산 4대 명찰로 꼽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내소사만 달랑 남았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설들이 있으나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
람(東國輿地勝覽)에 소래사로 나온 것으로 봐서 그때까지는 옛 이름을 쓰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1870년 대소래사가 사라진 이후, 내소사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660년에 신라(新羅)와 함께 백제(百濟)를 공격한 당나라 장수 소정
방(蘇定方)이 이 절에 시주를 했는데, 그런 연유로 소정방이 왔다는 절, 즉 내소사로 이름이 바
뀌었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전혀 근거도 없고, 말도 되지 않으며, 소래사(蘇來寺)나 내소사(來
蘇寺)나 글 순서만 다를 뿐, 한자와 뜻은 모두 같다.

경내에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설선당, 삼성각, 무설당, 봉래루,
보종각, 봉래선원, 관음전, 벽안당 등 20동에 가까운 건물이 있으며, 청련암(淸蓮庵)과 지장암
(地藏庵) 등의 부속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고려동종, 영산회괘불탱(보물 1268호) 등 보물 3점과 3층석탑, 설
선당과 요사 등 지방문화재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백지묵서묘법연화경(보물 278호)도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서울 조계사(曹溪寺)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절 전
체는 전북 지방기념물 78호로 지정되었다.

다른 굴지의 고찰과 달리 소장문화유산이 매우 적은 편이고 절의 역사도 조선 중기 이후를 빼고
는 상당수 흐릿하지만 그에 비해 인지도는 상당히 높아 변산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변산
의 대명사와 같은 명소로 해인사(海印寺)나 순천 송광사(松廣寺)만큼이나 속세에 널리 알려졌다
. 휴일이나 피서철이 되면 찾는 중생의 발길이 전나무숲길을 가득 메우며, 대웅보전에 서린 백
의관음보살의 눈동자와 목침이 하나 덜 입혀진 부분을 찾느라 부산하다.

변산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너무 잦아 고적한 멋은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늘씬
하게 솟아 하늘을 앞다투어 가린 전나무숲을 비롯하여 삼삼한 숲과 계곡에 둘러싸여 있어 그런
데로 산사의 향기를 우려내고 있다.

※ 내소사 찾아가기 (2016년 9월 기준)
① 부안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부안행 고속버스가 5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부안행 직행버스가 1일 2회, 동서울터미널에서는 1일 6회 떠난다.
* 인천, 고양, 성남, 광주에서 부안행 직행버스가 1일 2~6회 정도 다닌다.
* 전주, 익산, 군산에서 부안행 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부안터미널에서 내소사행 군내버스가 1일 19회 정도 다니며, 직행버스가 1일 1회 다닌다.
* 정읍터미널에서 내소사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다닌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해안고속도로 → 줄포나들목을 나와서 줄포 방면 710번 지방도 → 줄포우회도로 → 영전4
   거리에서 좌회전 → 곰소 → 석포3거리에서 우회전 → 내소사 주차장

★ 내소사 관람정보
* 관람료 - 어른(대학생 포함) 3,000원 (30인 이상 단체 2,500원) / 청소년 1,500원(단체 1,000
  원) / 어린이 500원(단체 400원)
* 관람시간 : 일출 시간부터~일몰 시간까지
* 주차비(1시간 기준) - 소형차 1,000원 / 중형차 1,500원 / 대형차 2,000원
* 내소사에서는 자유롭게 머물다가는 '휴식형 템플스테이'와 사찰 체험과 여러 이벤트를 겯드린
  '프로그램형 템플스테이'를 운영한다. 휴식형은 3박 4일까지 머물 수 있으며, 새벽예불과 저
  녁예불, 공양시간, 취침시간(21시)을 꼭 지켜줘야 된다. 1박 2일은 5만원으로 하루 추가될 때
  마다 5만원씩 더 받아먹는다.
  프로그램형은 '참 나를 찾아서(2박 3일)', '트래킹 템플(2박 3일)','연밭체험, 연꽃차 만들기
  (2박 3일)','달빛 맞이 추석템플스테이(3박 4일)' 등이 있으며, 3시간만 머무는 '템플라이프'
  도 있다.
  템플스테이 신청은 내소사 홈페이지 템플스테이 부분을 참조하면 되며, 자세한 일정과 참가비
  , 일정 관련 문의는 홈페이지 참조 (문의 ☎ 063-583-3035)
* 소재지 -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내소사로 243 ☎ 063-583-7281)
* 내소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웅보전 문짝에 피어난 꽃무늬창살


 

♠  내소사 보종각, 봉래루, 설선당 주변

▲  고려 동종의 보금자리 - 보종각(寶鐘閣)

보종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할머니 당산나무 다
음으로 오래된 동종의 보금자리이다. 그래서 보배로운 종의 건물이라 하여 범종각(梵鍾閣)도 아
닌 보종각이란 낯선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범종각은 별도로 따로 있음)

이 건물은 정확히 언제 지어졌는지 귀신도 알 수 없으나 1880년경 정읍 태인(泰仁)에 있던 것을
부안군 상서면 김상기의 집으로 넘어가 누각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다시 만화동의 구병서가 구
입하여 사용했으며, 1965년 내소사 주지 원경(圓鏡)이 구입해 이곳으로 가져왔다. 처음에는 대
웅보전 앞마당에 서남향(西南向)으로 세웠으나 우암 혜산이 198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개조를
하면서 그 안에 고려 동종을 품게 하였다. 보종각 현판은 내소사 현판 담당이나 다름없는 일중
김충현이 쓴 것으로 동종을 의식했는지 글씨에 기품이 넘쳐 보인다.

▲  보종각에 소중히 안긴 내소사 동종(銅鐘) - 보물 277호

내소사 동종은 1222년(고려 고종 9년)에 제작된 것으로 내소사에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자연물 제외) 허나 이 종은 원래부터 이곳 출신이 아닌 변산 4대 명찰(名刹)의 하나였
던 청림사(靑林寺)의 것으로 그 절이 어느 순간 파괴되어 사라지고 종은 절터에 묻혀 생사마저
몰랐던 것을 1853년(철종 4년)에 김성규(金性圭)를 비롯한 동네 주민들이 발견한 것이다.

종이 발견되었을 당시, 아무리 종을 쳐도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종을 깨운 이가
그것을 갖기로 하고 각자 종을 흔들어 깨웠는데, 내소사 승려가 종을 치자 비로소 아름다운 종
소리가 울렸다고 하며, 그런 연유로 내소사에 안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동종에 대한
내소사의 소유를 정당화하고자 내소사에서 꾸민 이야기로 정황이야 어쨌든 이 종이 이곳에 오게
됨으로써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되었다.

이 동종은 높이가 103cm, 입지름 67cm로 좀 작은 편이다. 항아리를 엎은 듯한 고복형으로 종신(
鐘身)에는 상대와 하대에 모란당초문(牡丹唐草紋)이 새겨져 있고, 어깨 부분에는 이중여의두문(
二重如意頭紋)의 입상화문대(立狀花紋帶)가 배치되어 있다. 종의 정상부에는 주형(珠形)이 달린
용통(甬筒)을 두고 큰 머리의 용뉴가 있는데, 모두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종신에는 당초문의 띠 밑에 중판연화문(重瓣蓮華紋)으로 된 유곽(乳廓) 4개를 두르고 유곽 안에
당초문을 새겼으며,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표현하였다. 또 유곽 아래에는 12개의 연잎으로 장식
된 당좌(撞座)가 원좌(圓座) 밖에 있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인 종신 중앙부에는 꽃송이 위로 구
름을 표현하고 구름 위에 삼존상(三尊像)을 새겼다.

3존상 가운데 본존상은 연꽃 위에 앉아있고, 협시상(脇侍像)은 서 있으며, 모두 동그런 두광(頭
光)을 갖추었다. 그리고 구름 위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보개(寶蓋)가 있어 고려시대 범종 문양의
특징과 화려한 장엄미를 드러낸다. 또한 당좌와 당좌 사이에 종의 신상에 대한 3종류의 명문(銘
文)이 새겨져 있어 1222년에 새겨지고 1853년 이곳으로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내소사 동종은 고려 후기의 특징인 입상화문대를 갖추고 있고, 표면의 묘사 수법과 함께 정교하
고 사실적인 주조기술로 우리나라 종의 양식을 잘 계승한 것으로 꼽힌다. 그래서 일찍이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  내소사 봉래루(蓬萊樓)

보종각과 할머니 당산나무에서 대웅보전으로 가려면 2층 규모의 봉래루를 지나야 된다. (그 옆
구리로 지나도 됨)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누각으로 강당의 역할과 법당으로 인도하는 문의 역
할을 도맡고 있는데, 1414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1823년 만세루(萬歲樓)란 이름으
로 중건되었으며, 봉래루란 현판을 별도로 달아 별칭으로 불리다가 1926년 이후 봉래루로 이름
이 완전 갈린 듯 싶다. 그와 같은 내용은 최남선(崔南善)의 '심춘순례(尋春巡禮)'에 등장하며,
실상사(實相寺)의 누각으로 1415년에 옮겨왔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봉래루 내부에는 고려 중기 대표적인 시인으로 묘청(妙淸)의 난(1095년) 때 김부식(金富軾) 패
거리에서 처단된 정지상(鄭知常)의 시를 비롯해 그의 시운(詩韻)을 차운(次韻)한 시가 현판으로
걸려있으며, 내소사만세루중건기(1821년), 변산내소사사자암중창기(1856년), 변산내소사영세불
망기(1875년) 등 36개의 현판이 내부를 가득 수식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양반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대웅전까지 들어와 예불을 올렸는데, 이에 발
끈한 내소사 승려들이 양반의 그런 무례를 막고자 봉래루 1층을 50cm 정도 낮게 설계했다고 한
다. 그래서 어른 키가 닿을 정도로 높이가 낮아지자 양반들도 더 이상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했
다고 한다. 허나 근래에 중수를 하면서 기둥을 높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말
을 타고 들어올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  내소사 범종각(梵鍾閣)
봉래루 좌측에 자리한 범종각은 1995년 주지 철산이 만든 것으로 범종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四物)의 보금자리이다. 보종각에 이미 고려시대
동종이 있지만 그의 건강을 우려해 별도로 새 범종을 만들어 봉안했다.

▲  내소사 설선당(設禪堂)과 요사(寮舍)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대웅전 뜨락 좌측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인 설선당과 요사가 있다. 두 건물은 서로 별개이지만 서
로 이어져 있어 하나의 건물처럼 보인다.
이 건물은 1640년에 청민선사가 세운 것으로 전면 중앙에 설선당을 중심으로 4면을 건물로 연결
하고, 내부에 안마당을 두어 '回'자형의 특이한 모습을 이룬다. 그리고 안마당에는 우물이 닦여
져 있어 생활의 편리를 도모했다.

설선당은 중앙에 우물천정을 배치한 구조로 동쪽 측면 1칸은 마루이고, 전면의 남쪽 2칸은 난방
을 위한 부엌으로 거대한 아궁이가 있다. 주초석은 커다란 자연석을 그대로 썼고,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설치했다.
요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거의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승방(僧房
)과 공양간, 부엌으로 쓰이며, 2층은 마루로 식량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각 칸 벽면에 환기창
을 설치했다. 이들 건물은 서로 높낮이가 다르지만 인위적으로 땅을 평평하게 다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초석만을 사용했고, 설선당 동쪽과 요사 서쪽 서까래의 일부를 잘라내고 건물의 용마
루를 끼워 지붕을 서로 맞추어 세운 점이 눈길을 끈다.

설선당 중앙에 걸린 현판은 조선 후기 명필가(名筆家)로 크게 위엄을 떨친 이광사(李匡師, 1705
~1777)가 쓴 것이라고 한다.


▲  대웅전 뜨락 쪽으로 등을 보인 설선당의 뒷모습

▲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밥과 국 생각을 간절하게 만드는
설선당 무쇠솥의 위엄

▲  무쇠솥을 끓일 때 쓰이는 장작들
아직도 나무 장작으로 밥과 국을 끓인다.

▲  설선당 무쇠솥의 보금자리
저 안에는 들어가지 말자~~ 아직 무쇠솥은
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선당과 요사는 승려들의 생활공간이다 보니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다만 설선당 현
판 우측에 유일하게 활짝 열린 문이 있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밥과 국을 끓일 때 쓰는 커다란
무쇠솥과 그것을 흥분시킬 장작들이 놓여져 지금은 많이 사라진 옛 풍물시(風物詩)를 정겹게 자
아낸다. 무쇠솥 주변은 내소사가 문을 열어 속세에 공개를 하고 있는데, 보통 무쇠솥이나 가마
솥의 크기와 절의 규모가 정비례하기 때문에 그 사세(寺勢)도 과시할 겸, 건물 외곽에 있는 이
것을 공개하는 듯 싶다. 허나 그 이상은 들어갈 수 없다.


▲  설선당 앞뜰에 심어진 조그만 산수유 나무 - 살짝 봄을 머금고 있다.

◀  벽안당(碧眼堂)
대웅보전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건물로
1911년에 관해선사가 선실(禪室)로 세웠다.
2002년에 주지 진원이 새로 지어
지금은 회주실(會主室)로 쓰인다.

▲  내소사 조사당(祖師堂)

▲  조사당에 봉안된 여러 고승들의 진영

대웅보전 우측에는 내소사를 빛낸 여러 고승(高僧)의 진영(眞影)이 봉안된 조사당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삼성각이었으나 2010년 이후 조사당으로 이름을 갈고
고승의 진영을 봉안했으며, 삼성각에 봉안된 존재들은 뒤에 따로 마련된 거처로 모두 옮겨졌다.
이 건물은 1941년에 능파가 건립한 것으로 1986년과 1993년에 우암혜산이 보수했다.

▲  조사당 우측에 자리한 지장전(地藏殿)

▲  지장전 지장보살상과 도명존자(道明尊者)
, 무독귀왕(無毒鬼王)


조사당 우측에 자리한 지장전 자리에는 원래 1988년에 지어진 진화사(眞華舍)란 건물이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그 건물을 갈고 지장전을 새로 만들어 속세에 선보였는데, 예전에 삼성각이었
던 건물이 조사당으로 안면을 바꾸었고, 지장전이란 건물까지 새로 생겼으니 그저 낯설기만 하
다. 이곳에 온 것이 근 8년 만인데 절에서 돈을 꽤나 모아 이렇게 건물을 불린 모양이다.

지장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저승의 시왕(十王)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을 봉안한 건물이다.
모두 최근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이라 냄새 또한 향기롭다.


▲  삼성각 뒷쪽에 새로 자리를 마련한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기존 건물이 조사당으
로 전환되면서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다지고 그들의 거처를 닦았다. 건물은 이전 것
보다 많이 좁은 1칸 짜리로 조금 넓은 곳에 있다가 1칸 짜리에 그 3명이 들어가 앉으니 완전히
샛방살이가 따로 없을 것이다.


 

♠  내소사의 보물 창고, 대웅보전(大雄寶殿) - 보물 291호

전나무숲길은 내소사의 자랑이자 명물이 분명하다. 허나 그보다 더 비중이 큰 오래된 명물이 하
나 있다. 바로 이곳의 법당인 대웅보전(대웅전)이다. 내소사가 역사과 명성에 비해 소장 문화유
산이 빈약한 편인데, 대웅보전은 그 빈약함을 크게 극복할 정도로 이곳의 명물이자 꿀단지로 속
세에 널리 알려졌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1633년에 청민선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세워지던 시기부터 재미난 설화를 간
직하고 있어 많은 이들의 흥미를 끄는데, 특히 목침이 하나 덜 있다는 천정과 덜 그려졌다는 그
림, 눈이 따라온다는 백의관음보살 후불탱화, 문에 새겨진 꽃창살 등이 이 건물을 한층 윤이나
게 만든다. 게다가 조선 중기 대표적인 사찰 건축물로 비록 알록달록 단청(丹靑)은 지워지고 없
지만 이들 4가지의 명물로 인해 이미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자연석으로 쌓은 높은 석축 위에 낮은 기단과 별로 다듬지 않은 덤벙주초를 얹히고 그 위에 정
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대웅전을 세웠다.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多包) 양식으로 공포
가 외3출목과 내5출목으로 박혀있어 수려한 미를 더해주며, 단청이 말라버려 아쉬움은 있지만
덕분에 오래된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나 나름대로 반전을 선보인다.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을
두고 안기둥은 민흘림을 두었으며, 귀솟음과 안쏠림의 기법도 충실하여 안정감을 드러낸다.

내소사에서 다른 것은 다 흘리더라도 대웅보전과 그 내부는 꼭 둘러봐야 내소사에 갔다고 속세
에 자랑을 할 수 있다. 그만큼 이곳에서 대웅보전의 비중은 대단한 것이다. 전나무숲길이 유

하다고 하나 아직 대웅보전의 적수가 되지 못하며 대웅보전이 없는 내소사는 감히 상상할 수 조
차 없다. (전나무숲길이 없는 내소사는 그런데로 봐줄만은 함)


▲  대웅보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나란히 자리한다.


▲  대웅보전 우물천정

웅보전은 지구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꼭 내부를 둘러봐야 된다. 섬돌에 신발을 맡겨두고 안
으로 들어서 제일 먼저 고개를 위로 올려보자. 그럼 휘황찬란한 천정이 두 눈을 단단히 호강을
시킬 것이다. 천정 중앙에 자리한 우물천정은 48개 사각형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 모두 연
꽃과 극락조(極樂鳥) 등의 새가 새겨져 있다. 단청은 좀 퇴색하긴 했지만 그들의 아름다움에 전
혀 재를 뿌리지 않는다.
천정 대들보 위에는 대웅전을 지키는 용의 머리 2개가 있는데, 하나는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고
, 다른 용머리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다. 이들 외에도 10여 종의 악기가 천정과 대들보 사
이에 그려져 있는데, 천정을 장식하는 이들은 모두 부처의 설법(說法)을 듣고 기쁜 마음을 나타
내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한 바닷게 여러 마리를 두어 이곳이 해중사찰(海中寺刹)임을 상
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천정 전체를 조그만 불국토(佛國土)로 꾸민 셈이다.


▲  장엄하기 그지없는 대웅보전 천정
대들보에 몸을 기댄 용머리 하나가 물고기를 물고 아래를 굽어본다.


▲  공포(空包)덩어리로 정신이 없는 앞쪽 천정
이곳에 공포 목침이 하나 없다. 잘 살펴보기 바람~~


대웅보전에는 2가지의 재미난 설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 전설은 대웅전을 더욱
알차고 아름답게 꾸며주는 구수한 양념과 같은 존재이다.

 #  1번째 전설~~
청민선사가 쓰러진 내소사를 일으키고자 열심히 동분서주했던 1630년 어느 날, 청민은 어린 사
미승(沙彌僧)에게 '절 입구에 가면 목수(木手) 한 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야. 그를 모시고 오
너라'
분부를 내렸다.
사미는 그 분부에 따라 절 입구로 내려가니 초라한 옷차림의 남자 하나가 문 기둥에 기대어 꾸
벅 졸고 있는 것이다. 그가 대웅전을 짓고자 초청을 받은 목수였다. 사미는 한심하게 그를 바라
보며 잠에서 깨워 절로 데려왔다.

목수는 다음 날부터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대웅전을 지을 재목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
하게도 3년이 다 되도록 건물을 지을 생각은 안하고 나무란 나무는 죄다 목침만한 크기로 토막
을 내어 다듬는 것이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사미는 '3년 동안 목침만 깎고 앉았으니 법당은 언
제 짓나?'
한숨을 쉬며, 그 목수를 골려줄 생각으로 나무토막 하나를 몰래 집어와 감췄다.

그리고 며칠 뒤, 목수는 나무 토막 다듬는 일을 다 끝냈는지 다듬은 토막을 세기 시작했다. 그
런데 1번을 세고 나서 뭔가 이상했는지 계속해서 여러 번 세더니만 청민선사 앞에 고개를 떨구
고 눈물을 흘리며 '선사님 저는 아직 법당을 지을 인연이 안되나 봅니다 ㅠㅠ'

그 말을 들은 청민은 크게 놀라며 '법당을 지을 인연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목수 왈 '재목 하나를 덜 깎았습니다. 이런 주제에 어찌 법당을 짓는다고 하겠습니까?'
그 말을 엿듣던 사미는 '어떻게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았지?'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양심
에 가책을 느껴 숨겨두었던 나무 토막을 내밀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목수는 '부정탄 재목으
로 법당을 지을 수는 없지. 그것을 빼고 짓겠다' 그러며 그 토막을 빼놓은 채로 대웅전을 지었
다. 그래서 대웅전 천정에 목침이 있어야 될 자리 하나가 비어 있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대웅전을 지은 목수는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선사(大虎禪師)라고 한다. 하
지만 전설의 내용에 신화적인 요소가 별로 없어보여 아마도 실제로 있던 일을 그럴싸하게 다듬
어 전설화 시킨 모양이다. 대웅전을 만들고자 3년 동안 공포 목침과 꽃창살 하나하나까지 일일
이 공을 들여 만든 그 목수의 정성에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며, 그런 목수를 끝까지 믿고 격
려했던 청민선사 또한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런 대웅전의 전설을 통해 생각나는 말이 하나 있으니 바로 대기만성(大器晩成), 즉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이 건물 역시 대기만성(大器晩成)의 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
미승처럼 조급하게 굴지 않고, 천천히 정성을 들여 만든 결과 내소사의 꿀단지이자 조선 중/후
기 불교 건축물의 갑(甲)인 이 건물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  대웅보전 좌측 벽에 걸린 붉은 바탕의 지장탱

▲  온갖 호법신들로 정신이 없는 신중탱

 #  2번째 전설~~
대웅보전이 완성되자 목수는 벽화와 단청을 그릴 늙은 화공(畵工)을 추천했다. 그 화공은 청민
선사에게 단청을 그리는 100일 동안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 것을 지겹게 신신당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민은 법당을 봉쇄하여 승려들의 접근을 막았다.

한편 목침 사건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사미승은 궁금증이 일어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짓을 하는 것일까? 그래서 청민의 당부도 씹어버리고 99일 째 되는 날 또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몰래 법당으로 다가가 문틈으로 그 내부를 훔쳐본 것이다.
근데 이게 왠일인가? 화공은 온데간데 없고 황금빛 새 1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때 갑자기 천둥 같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황금새는 붓을 내던지고
종적을 감추었고 법당 앞에 쓰러진(혹은 죽어있는) 커다란 호랑이 앞에서 갑자기 청민선사가 법
문을 하고 있었다. '대호선사(大虎禪師)여! 생과 사가 둘이 아니거늘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가? 그대가 지은 이 법당은 영원히 법연을 이으리라~!' 법문을 마친 청민선사는 어디론지 사라
졌다고 한다.

어쨌든 사미 때문에 황금새는 하루를 남기고 사라지면서 대웅전 양쪽 도리에 그려져야 될 용과
선녀의 그림이 왼쪽 도리는 있고 오른쪽 도리에는 없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단청을 그린
새는 관음보살의 화현인 관음조(觀音鳥)라고 한다.
허나 이 전설은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마도 황금새로 비유된 화공이 채색(彩色)
을 하는 도중 갑작스런 일이나 절의 내부 사정으로 작업이 중단된 것이 아닐까 싶으며 혹은 화
공이 실수로 빠뜨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화공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실수도 가능
하다.

▲  대웅전 불단 뒷쪽에 그려진 거대한 백의관음보살상(白衣觀音菩薩像) ▼

기왕 대웅전에 두 발을 들였다면 불단 뒷쪽에도 한번 가보기 바란다. 시간도 얼마 안걸린다. 후
불 뒷쪽 벽을 간단하게 후불벽(後佛壁)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백의관음보살이 후불벽화(後佛壁
畵)로 장엄하게 자리하여 대웅전에서 놀란 두 눈을 또 놀라게 만든다.

이 백의관음보살은 대웅전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우리나라에 있는 후불벽화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대웅전 내부 그림을 그렸다는 황금새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전하는데, 자세히 보면
인간의 솜씨를 뛰어넘은 성스러운 모습 그 자체이다.
그의 눈을 애타게 바라보며 좌우로 왔다갔다 하면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인
다고 하는데,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사연을 아
는 이들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열심히 그 앞을 서성인다. 나도 오랜만에 그의 눈동자를 보며 열
심히 걸었으나 눈동자가 정말 따라오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쫓아오는 것 같기는
한데 정작 잘 살펴보면 그의 시선은 정면에 가 있다.

그가 그려진 후불벽은 좀 어둡고 좁은 공간이다. 왜 이런 법당의 후미진 뒷자리에 그려진 것일
까? 이를 두고 관음보살의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대웅전의
구조가 반야용선형(般若龍船形)으로 피안(彼岸)의 세계를 향해 앞으로 나가는 형태라서 그 배에
올라타지 못하고 어둠에서 허우적거리는 가련한 중생을 위해 관음보살 누님을 고해(苦海)를 향
해 있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세한 것은 그림을 그린 황금새나 화공만이 알 것이다. 어
쨌든 내소사의 명물 중 하나로 대웅전과 별개로 보물로 지정해도 손색은 없어 보인다. 전남 강
진에 있는 무위사(無爲寺) 극락전(極樂殿)의 벽화도 따로 구곱와 보물로 지정하지 않았던가..?


▲  대웅보전 문짝에 피어난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꽃창살무늬

대웅전 문짝에는 흑백모드의 연꽃과 국화꽃 등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 안그래도 놀란 눈을 더욱
안절부절 못하게 만든다. 이들은 문에 새겨진 꽃창살로 부처가 설법을 할 때 꽃이 우수수 떨어
진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정면 문짝마다 꽃들이 가득 수를 놓으니 완전 화사한 꽃밭이다. 비록
그들에게 입힌 색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 앞에 죄다 씻겨 내려가 원초적인 나무색이 되었지만 워
낙 정교하게 만들어진 탓에 그 수수함도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섬세하게 만들어진 꽃창살 꽃잎에 진짜 꽃들의 시샘이 대단했던 것일까? 그 주변에 자연산 꽃은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그들이 배가 아파 바람을 타고 멀리 가버린 모양이다.

 내소사3층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24호

대웅전 뜨락에는 고색이 드러난 조그만 3층석탑
이 서 있다. 그를 통해 내소사의 가람배치는 1
금당(金堂) 1탑 형식 임을 알 수 있는데, 정면
이 아닌 약간 우측에 자리해 있다.
이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
身)을 얹히고 다시 상륜(相輪)을 올린 형태로
고려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까 할머니 당산나무와 다른 곳에서 가져온 동종
을 빼면 이 탑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순수 내
소사의 유물인 셈이다.

탑의 높이는 3.46m, 폭 1.43m로 기단과 탑신부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경사가 급해 보
이는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
었고, 탑 꼭대기에는 노반(露盤)을 비롯해 크고
작은 석재 2개로 상륜부를 이루고 있다.


▲  내소사를 등지고 다시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가다 (천왕문 앞 숲길)

이렇게 간만에 발걸음을 한 내소사를 구석구석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일행들
도 대부분 빠져나간 상태라 서둘러 내소사를 등지며, 전나무숲길을 거쳐 다시 주차장으로 나왔
다. 통제구역을 빼고는 죄다 둘러본 터라 그렇게 아쉬울 것은 없다.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는 내소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속세로 나간다. 일행들과 나는 행
선지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내소사와 가까운 곰소에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들이 간 이후, 곰소정류장에서 부안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기다렸는데, 잠시 방심한 사이 바로
앞에서 차를 놓쳤다. 다음 차는 30분 뒤에나 있어서 마침 정류장에서 바퀴를 접고 쉬고 있는 정
읍행 직행버스(내소사에서 출발함)를 잡아탔다.
정읍까지 버스비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100원 단위까지 나왔는데 버스표를 파는 가게가 그
날 문을 닫았고, 내 수중에는 100원 단위의 잔돈이 없었다. 버스 운전사 역시 잔돈을 갖추지 못
해 잔돈을 준비하여 타라고 성화를 낸다. 마침 차 출발시간이 다되어 다음 것을 타겠다고 그러
니 기다릴테니 건너편 편의점에서 돈을 바꿔오라 그런다. 그래서 편의점에서 돈을 바꿔와 차비
를 내는 난리를 피우며, 그 버스를 타고 정읍(井邑)으로 나갔다.

정읍에서 서울로 가는 일반고속버스를 타고 미련없이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니 이렇게 하여 내소
사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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