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길목에서 찾아간 무주 적상산 나들이 ~~~ (적상호, 적상산성, 안국사...)

 


' 무주 적상산 겨울 나들이 '


▲  적상산 산정에 자리한 적상호

▲  안국사 극락전

▲  적상산사고

 


 

늦가을이 무심히 저물고 겨울이 한참 이빨을 드러내던 11월 마지막 주말에 전북 무주(茂
朱) 땅을 찾았다. 이번에는 멀리 남쪽에서 오는 일행들과 함께 하기로 했는데 서로 본거
지가 극과 극이다보니 무주터미널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도봉동 집을 나서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대전
행 고속버스를 몸을 실었다. 거의 2시간을 달려 대전(大田)에 도착, 새롭게 몸단장을 벌
인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를 타고 다시 50분을 내달려 무주의 관문인 무주
터미널에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10분 정도 대기했다가 남쪽에서 온 본대에 합류했다.

이번 무주 기행의 첫 답사지는 적상산이다. 무주시외터미널에서 동남쪽으로 6분 정도 달
리면
적상산 입구인데, 여기서 적상산으로 인도하는 서쪽 길로 들어서면 북창리(北倉里)
가 나온다. 그 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서서히 흥분을 드러내고 강원도나 함경도 고갯길에
버금가는 꼬불꼬불 고갯길로 변신하여 정신을 쏙 빼놓는다.

적상산은 단풍이 매우 곱다고 하는데, 가을이 떠나간 시점이라 단풍 구경은 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건 겨울 제국(帝國)에 설설 기고 있는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 뿐, 푸른 기운
을 가진 존재는 소나무와 전나무 밖에는 없었다.


 

♠  적상산(赤裳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적상산의 지도를 크게 바꿔놓은 산정호수, 적상호(赤裳湖)

구절양장(九折羊腸) 같은 적상산 고갯길을 어느 정도 오르면 적상터널이 나온다. 적상산의 콧
대를 피하고자 산 밑에 판 땅굴로 그 터널을 나와 세 굽이를 지나면 푸른 호수인 적상호가 나
오고 길은 비로소 진정을 되찾는다.

적상산 850m 고지에 마치 백두산(白頭山)의 천지(天池)처럼 들어앉은 적상호는 무주양수발전소
상부댐을 만들면서 조성된 인공 호수이다. 여기서 양수발전소(揚水發電所)란 심야에 남는 전기
로 밑(하부댐)에 있는 물을 위쪽 저수지로 올리고, 필요한 시기에 그 물을 떨어트려 전기를 빚
는 수력발전의 일종이다.
이 발전소는 1988년 4월에 착공해 1995년 5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시설용량은 60만kw이며, 적
상호를 담고 있는 상부댐은 높이 60.7m, 길이 287m, 저수량은 372만㎥이다.

수력발전은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멀쩡한 땅을 수장시켜야 되는 단점이 있다. 계곡을 막아 둑을
쌓고 호수를 만들면서 안국사와 적상산사고터는 제자리를 강제로 내줘야했고, 많은 숲이 억지
로 희생당해야 했다. 또한 호수와 발전소 관리를 위해 적상산의 피부를 깎아 구불구불 도로를
내면서 적상산 정상 밑까지 건방지게 차량들이 올라가게 되었다. 그 덕분에 오로지 두 발로 힘
겹게 올라야 했던 적상산 접근이 보다 쉬워졌고, 적상호는 이곳의 또 다른 볼거리로 부각되었
으며, 양수발전을 통해 무주 지역의 전기를 책임지는 중요한 곳이 되었다.

우리의 버스는 적상호를 지나 안국사 방면 서쪽 길을 조금 오르다가 900m 고지 주차장에서 육
중한 바퀴를 접었다. 절까지 버스 접근은 가능하나 차를 돌릴 공간이 없어서 멈춘 것이다. 허
나 그곳까지는 거리도 매우 가깝고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경사 또한 그리 각박하지 않아 어려운 것은 없다.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안국사 일주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  적상호에서 안국사로 올라가는 숲길

▲  안국사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절의 정문으로 앞에는 '적상산 안국사'라 쓰인 현판이, 뒤에는 '국중제일정토도량(國
中第一淨土道場)'이라 쓰인 현판이 자리해 이곳의 이름과 성격을 말해준다. 절 이름이 쓰인 현
판은 1992년에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이 썼으며, 국중제일정토도량 현판은 1995년 여산 권
갑석(如山 權甲石)이 쓴 것으로 다들 필체에 힘이 넘쳐난다.
절을 옮기면서 새로 만든 현판과 달리 문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는 고색의 기운이 약간 느껴져
문이 좀 오래된 존재임을 살짝 속삭여준다.


▲  일주문의 뒷모습

     ◀  일주문 '국중제일정토도량' 현판
이 현판은 무학대사가 안국사를 두고 '국중(國
中) 제일의 길지(吉地)'라 찬양한 설화를 참조
하여 쓴 것으로 안국(安國)과 정토(淨土)를 꿈
꾸는 안국사의 바램이 담겨져 있다.


▲  적상산성(赤裳山城) - 사적 146호

일주문 바로 옆에는 키 작은 돌담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져있다. 그를 알리는 안내문이 없었
다면 단순히 돌담으로 여겨 넘어가기 쉬울 정도인데, 그는 국가 지정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
는 적상산의 두툼한 갑옷, 적상산성이다.

적상산성은 적상산 고지대의 분지(盆地)를 둘러싸고 있는 절벽과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전체 길이는 8,143m, 성곽 높이는 거의 1~2m이다. 경사가 각박한 적상산의 정상 주변은
절벽에 둘러싸인 곳이라 그 절벽을 활용하다보니 성곽의 높이는 대부분 낮다. 물론 장대

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인해 무너진 것도 한몫 한다. 현재는 안국사 주변과 서문터 등
일부만 남아있으며, 문은 동/서/남/북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북문과 서문, 남문터만 남았다. 성
내부 면적은 약 214,976㎡에 이른다.

이 산성은 예전에는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축성된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설명을 했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하여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
輿地勝覽)','여지승람(輿地勝覽)'을 살펴보니 고려 초기인 거란의 2차 침공(1010년) 이전부터
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바로 거란(요)의 2차 침공 시절, 거란의 군주인 성종(成宗)은 몸소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힘겹게 점령했다. 고려 군주인 현종(顯宗)은 급히 나
주(羅州)로 몽진을 갔는데, 거란군의 남하를 우려한 인근 백성들이 이곳으로 피신을 온 것이다.
그러니 빠르면 신라 후기, 늦어도 고려 초에 성이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는 최영(崔瑩)장군이 이곳을 지나면서 산성을 보수하여 창고를 세
울 것을 건의했으며, 조선 세종 때는 최윤덕(崔潤德)도 이곳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허나 그들
의 건의는 허공의 메아리로 끝났고, 이후 다시금 주목을 받은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光海君)은 우리의 친척 민족인 여진족의 후금(後金)이 나날이 강성
해지자 압록강과 가까운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에 있던 실록과 선원록(璿源錄)의 안위가 걱정
이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던 중, 순안어사(巡按御史) 최현(崔晛)과 무주현감 이
유경(李有慶)이 바로 적상산을 추천했다.
하여 사관(史官)을 보내 적상산을 살피게 했는데, 적상산이 꽤 괜찮다는 사관의 긍정적인 보고
로 1614년 실록전을 짓고, 1618년 선조실록을 넣으면서 사고(史庫)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
상에서는 이 사고를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라 부른다.

사고를 수비하고자 헝클어진 적상산성을 손질해 4개의 문을 두었고, 성 안에 호국사(護國寺)를
세워 안국사와 함께 지키도록 했다. 사고 외에도 군기고(軍器庫), 사각(史閣), 대별관(大別館)
등의 시설을 두었다. 허나 1910년 이후 적상산사고는 폐지되었고 산성까지 버려지게 되면서 그
이후는 지금의 모습이 잘 말해준다.

산성을 1바퀴 둘러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겠지만 시간 관계상 안국사 주변의 성곽만 둘러봤다.

▲  적상산성의 이모저모

우리가 찾은 적상산(1034m)은 무주군 적상면에 위치한다. 산의 이름인 적상(赤裳)은 붉은 치마
를 뜻하는데, 산의 모습은 장쾌한 남성적인 모습이지만 이름은 의외로 여성적이다. 이는 산을
이루고 있는 붉은 피부의 바위가 마치 붉은 치마를 입은 것처럼 보여 유래되었다고 하며, 봄의
진달래, 가을의 단풍이 붉은 치마를 두룬 것처럼 보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적상산 정상부는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주봉(主峯)은 기봉으로 2번째 봉우리인 향
로봉(1025m)과 마주보고 있고, 정상 일대가 토산(土山)이라 숲이 매우 삼삼하다. 산정은 평탄
하지만 산허리까지는 거의 절벽이며, 물이 매우 풍부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요
새로 이용되었다.

산중에는 안국사와 호국사비, 적상산사고터, 적상산성 등의 문화유적을 비롯해 장도바위와 장
군바위, 처마바위, 천일폭포, 송대폭포, 안렴대(按廉臺) 등의 자연 명소가 있으며, 이중 장도
바위는 최영 장군이 적상산을 오르던 중, 바위가 건방지게 길을 막자 장도(長刀)로 내리쳐 길
을 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있다.
그리고 안렴대는 고려 초에 거란이 침공했을 때 3도 안렴사(按廉使)가 피난을 왔다고 해서 그
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하며, 정묘호란 때 안국사 승려 상훈이 혼자서 사고에 있던 조선
왕조실록을 이곳 석굴로 옮겨 잠시 보관하기도 했다.

대자연이 빚은 천연의 요새이자 걸작품인 적상산은 인간의 오만으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 앞
에 강제로 성형수술을 당하는 시련을 겪는다. 바로 1988년 정상부에 무주양수발전소가 들어선
것이다. 그 발전소로 인하여 호수와 댐이 생기면서 산정의 모습은 크게 변하였고, 호수 주변에
도로를 내고 댐 동북쪽에 적상산휴게소와 전망대까지 마구 닦여지면서 적지 않은 혹을 달게 되
었다.


 

♠  적상산의 오랜 터줏대감, 적상산 사고를 지켰던 수호사찰
~ 적상산 안국사(安國寺)

▲  청하루(淸霞樓) 현판 - 송석 이도익(松石 李都翼)이 1859년에 쓴 것이다.

적상산 정상 남쪽 950m 고지에 자리한 안국사는 금산사(金山寺)의 말사(末寺)로 적상산의 유일
한 고찰(古刹)이다. 적성지(赤城誌)와 적상산안국사기(赤裳山安國寺記)에 따르면 1277년 월인(
月印)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산성과 함께 중건했는데, 이때 성 안에
는 고경사(高境寺)와 상원사(上元寺), 중원사(中元寺) 등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 후기 창건설 외에도 조선 태조 때 적상산성을 쌓으면서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어느 것
이 정답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게다가 창건 이후 16세기까지 마땅한 내력도
남기지 못해 창건 시기에 대해 다소 의구심을 품게 한다.

안국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임진왜란 시절에 승병(僧兵)
이 주둔했다고 하며, 1614년 적상산사고를 설치하면서 안국사 승려 덕웅(德雄)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적상산성을 중수하고 사고를 수비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지자 마침 사고를 지킬 승병이 하나도 없어 안국사 승려 상훈
(尙訓)이 혼자서 사고의 서적을 바리바리 싸들고 안렴대에 있는 석굴로 옮겨 보관하기도 했다.
1643년 적상산을 둘러본 이조판서 이직(李稙)은 산성의 수비가 허술하고 승병이 모두 흩어지고
없으며, 창고에 군량도 없는 등, 수비의 어려운 실정을 보고하고 승군 모집을 위해 사찰 건립
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1643년 왕명으로 호국사(護國寺)를 지어 안국사를 보조하도록 했다. 이때 전라감사 윤명
은(尹鳴殷)이 자신의 녹봉을 털어 공사비로 댔고, 승려 각명(覺明)이 일을 맡았으며 무주현감
심헌(沈憲)이 감독을 했다. 호국사란 이름은 삼장법사(三藏法師)의 경축기도(經祝祈禱)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고를 이웃한 인연으로 조정(朝廷)에서는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수호한다는 의미로 '
안국사'와 '호국사'란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 절도 그 기대에
부응코자 열심히 사고를 지켰고, 그로 인해 적상산사고는 조선 사고 중 유일하게 전쟁과 화재
를 만나지 않은 사고가 되었다.

1728년에는 괘불을 제작하였고, 1758년에는 감로탱을, 1772년에는 극락전 후불탱을 조성했으며, 1788년에 범종을 봉안해 제법 절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1864년 적상산사고를 방문한 이면광(李
冕光)의 건의로 안국사를 중수했는데 그 기념으로 안국사중수기(重修記) 현판을 남겼다. 그 현
판에
'나라에서 선사 양각(璿史兩閣)을 지어 왕조실록과 왕실의 계보를 비장(秘藏)하고 승병들로 하
여금 수호하게 하였으므로 족히 믿고 근심할 것이 없다. 이 절의 이름을 안국(安國)이라고 붙
인 것과 이 절에 소속된 작은 절을 호국(護國)이라 한 것은 대개 뜻이 있는 것이다. 안국사라
고 이름한 것은 비록 작은 절이기는 하지만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큰일을 하는 절이기
때문이다'
란 구절이 있어 조선 조정의 안국사에 대한 높은 신뢰도와 절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1872년에는 사고의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改修)했고, 1902년 사고와 안국사를 크게 중수했다.
이때 안국사는 무주에서 가장 큰 절로 성장했으며, 1910년에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
전과 산신각을 두고 그 앞에 청하루와 승방(僧房)을 세웠다.
1910년 이후 적상산사고가 왜정에 의해 폐쇄되면서 당시 안국사 주지인 친일파 승려 이철허(李
澈虛)가 선원각을 경내로 가져와서 절 건물로 부려먹었다. 1949년 여순(麗順)반란 사건 때 공
비패거리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호국사가 전소되어 비석만 남게 되었으며, 1968년 주지 유정환(
柳正煥)이 선원각을 천불전으로 손질하고 퇴락된 청하루를 철거했다.

1988년이 되자 안국사는 강제로 정든 터전을 버려야 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바로 무주양수발
전소 상부댐 건설로 안국사와 적상산사고터가 수몰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땅한 자
리를 물색하다가 적상산 정상 남쪽에 자리한 호국사터로 결정하고 1991년부터 이전 공사에 들
어가 1993년에 마무리를 지었다.
1994년 범종각을 새로 지었고, 1996년에는 3도(전북, 경북, 경남) 접경지에 위치한 이유를 들
어 대화합의 범종을 조성했다. 그리고 1998년에는 주지 원행이 동양 여러 나라에서 수집한 불
상과 불교 유물을 전시하고자 성보박물관을 만들어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또한 복
지 사업에도 손을 뻗쳐 노인복지시설인 '무우수마을'을 세웠고, 무주와 영동 지역 병원과 자매
결연을 맺어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비록 개발의 칼질에 제자리를 잃기는 했지만 구름이 창문으로 들어와 방문으로 나갈 정도로 하
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좋다. 마치 천상(天上) 세계에서 속세를 굽어보는 기분이랄까? 또
한 속세(俗世)와도 길게 거리를 두고 있어 아무리 끈질긴 번뇌(煩惱)라 한들 쫓아오다 졸도할
정도의 첩첩하고 고적한 산골이다. 차량으로 오면 접근은 다소 편하지만 길이 험해 운전에 각
별한 주의가 필요하며, 대중교통으로 갈 경우에는 내창마을에서 2시간 3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영산회괘불도를 비롯하여 극락전과 호국사비, 목조아미타3
존불상, 범종 등 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그외에 조선 후기 승탑 4기와 선원각을 개
조한 천불전, 1730년에 만든 괘불대(掛佛臺) 등이 있어 고색의 향기는 풍부하며, 법당인 극락
전을 비롯해 삼성각, 지장전, 청하루, 천불전, 성보박물관, 안국선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경내를 조촐히 메우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넓은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을 하면 호국사란 이름의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은 안국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옛 가람을 기억하고자 세운 것으로 호국사는 정확히 주
차장 일대에 있었다.
여기서 왼쪽 숲을 살펴보면 조그만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 집은 호국사의 유일한 흔
적인 호국사비(전북 지방유형문화재 85호)를 머금은 비각이다. 경내를 다 둘러보고 나올 때 보
려고 아껴두었으나 그것이 그만 화근이 되어 깜박 지나치고 말았지. 어느 곳이든 그곳에 서린
볼거리는 다 봐야 직성이 풀리는데, 이렇게 중요한 것을 놓쳤으니 다음에 또 와야 되는 구실을
만들고 말았다. 이렇게 벽지인 곳은 다시는 오지 않아도 서운치 않을 정도로 싹 돌아봐야 되는
데 또 올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 물론 인연이 또 닿으면 알아서 찾아오겠지만 말이다.

주차장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청하루가 자리해 있다. 정
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누각 건물로 수몰된 옛터에 있던 누각을 1992년에 옮긴 것이다.
1층에는 사무실과 불교용품점이 있으며, 정면에 걸린 현판은 송석 이도익이 쓴 명필이다.
그리고 지나치기는 쉽지만 청하루 안에 옛 안국사의 현판이 여럿 있다. 1627년 상훈이 사고의
서적을 옮긴 일화를 4자로 요약한 '석실비장(石室秘藏)'과 '청하루(淸霞樓)','극락전(極樂殿)
','산신각(山神閣)' 등이 있으며, 석실비장은 1902년 절을 중수했을 때 유인철이 상훈의 이야
기를 듣고 쓴 것이다.


▲  안국사 성보박물관

청하루를 들어서면 하늘 높이 자리한 안국사 경내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왼쪽을 보면 성보박
물관이 있는데, 보통 성보박물관하면 그 절의 오래된 문화유산이나 부근 절에서 맡긴 문화유산
을 전시하기 마련이나 이곳은 그와는 관련이 없는 다른 나라의 불교 유물이 주류를 이룬다.

이곳에 담긴 유물은 주지인 원행이 15년 간 여러 불교국가를 여행하면서 수집하거나 기증 받은
것들로 이들을 한데 모아 1998년에 조촐하게 성보박물관을 열었다. 중원대륙과 왜열도, 인도,
티벳, 월남, 라오스, 파키스탄 등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다양한 시대의 불상, 불화, 불
교 유물, 다기류 등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어 조그만 세계불교박물관을 이룬다.


▲  성보박물관 중앙에 자리한 철불 - 중원대륙에서 가져온 불상인 듯 하다.
불상은 수입산이지만 그가 앉은 금동대좌는 국산이다.

▲  동양 불교국가에서 가져온 온갖 불상과 불화들 ▼



▲  안국사 범종각(梵鍾閣)

성보박물관 맞은편에 자리한 범종각은 1994년에 원행이 지은 것으로 조선 후기 동종을 비롯하
여 1996년에 만든 대화합의 범종과 운판(雲版)까지 담겨져 있다. 대화합의 범종은 덕유산을 둘
러싼 3도 중생들의 대화합을 바라는 뜻에서 만든 것으로 범종각 현판은 일중(一中)거사가 썼다.

▲  대화합의 범종

▲  안국사 범종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88호

우람한 대화합의 범종과 달리 그 곁에 있는 범종은 매우 조그만하여 눈길이 잠깐 가다가 만다.
보통 사찰의 종은 크기에 상관없이 허공에 달려 있지만 이건 허공은 커녕 땅바닥에 나무 막대
기를 깔고 앉아있어 안그래도 작은 종, 더 작아 보일 수 밖에 없다. 허나 작은 고추가 맵다고
겉모습은 저래도 이래뵈도 안국사의 오랜 보물의 하나이다. 오히려 대화합의 범종보다 더 눈길
을 줘야 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 범종은 1788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85cm, 구경 78cm의 작은 종이다. 4개의 유곽과 보살상
이 배치되어 있고, 종을 매달던 용뉴는 아예 사라져 바닥에 나무 막대기를 깔아 그를 받치고
있다. 그의 몸통에는 '乾隆五十三年(건륭53년) 戊申三月日(무신 3월일) 赤裳山安國寺大鍾(적상
산 안국사 대종)'과 '改鑄重(개주중)'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의 탄생 시기를 알려준다.


▲  피부가 바랜 오래된 솥

극락전 뜨락에는 그 옛날 안국사 공양간에서 모락모락 밥과 국의 연기를 피어내던 솥이 놓여져
있다. 겉으로 보면 일광욕을 하며 팔자 좋게 보이지만 현대화된 공양간에 밀려 이제는 바깥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역시 범종처럼 나무 막대기에 의지해 자리해 있는데,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피부가 완전 붉게 변했다.
절을 품은 산도 붉은 피부의 바위, 혹은 진달래와 단풍으로 산이 온통 붉다고 하여 적상산인데
솥 역시 완전히 붉게 변했으니 그 역시 적상산의 기운을 받은 모양이다. 안국사의 오랜 유물인
만큼 낡은 피부를 깨끗히 닦아주고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남은 여생 편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외국산 불상보다는 오랜 세월 안국사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나고 이곳의
음식을 책임진 저 솥이 더 가치가 높지 않을까?


 

♠  안국사 극락전 주변

▲  안국사 극락전(極樂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42호  
(앞 계단 오른쪽에 남근석이 있음)

청하루를 지나면 바로 정면에 계단을 늘어뜨리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극락전과 시선이 마주
친다. 극락전 뜨락에는 빛바랜 솥과 아주 기가 막히게 생긴 남근석이 서 있어 잠시 얼굴을 붉
히게 하는데, 보통 절로 가는 길목이나 외곽에 남근석을 둔 경우는 봤어도 법당 앞에 둔 것은
처음 본다. 절의 승려나 신도의 상당수를 이루었을 여자 신도들이 법당에 들어가면서 무슨 생
각을 했을까~~?? 절에서 아예 파계를 장려하는 듯한 인상이다.
허나 저 돌이 원래부터 안국사에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절을 이곳으로 옮길 때 주변
에서 수습한 것이 아닐까 여겨지는데, 왜 하필이면 법당 앞에 두었는지 그저 어리둥절하다. 성
기신앙의 일원이긴 해도 경내 핵심에 두기에는 좀 거시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중으로 구축된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
물이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199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잘 다듬어진 자연석 축대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썼으며, 정면에는 꽃빗살문을 칸마
다 두었다. 정면과 좌측은 4분합이나 우측은 2분합으로 협칸의 구조가 특이하며 공포를 촘촘히
박은 다포(多包) 양식으로 외부는 3출목(出目)으로 되어있으나 내부는 4출목이다. 그리고 우측
측면을 보면 단청이 채색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난 설화가 전한다.


▲  건물 우측에 단청을 하다만 부분이 있다. (사진 중앙 부분)

극락전을 지은 안국사 주지는 단청 불사를 어찌해야 될지 고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얀 도포를 입은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그리겠다고 하였다. 이에 기뻐한 주지승이 쾌히 승낙
하자 노인은
'내가 100일 동안 단청을 칠할테니 극락전에 하얀 천막을 치고 물 1그릇만 넣어주시오. 그리고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
신신당부를 했다.

범상치 않은 노인의 말에 '명심할테니 걱정 마시오!!' 답을 하고는 궁금증을 억지로 죽여가며
불사가 잘 마무리되기를 기도했다. 허나 겨우 하루를 앞둔 99일째가 되자 주지는 궁금해서 도
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딱 하루만 참으면 정말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인데 더 참다가는 제명에
못죽어 사리만 잔뜩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 살짝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지.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천막 안에 노인은 온데간데 없고, 하얀 학이 입에 붓을 물고 단청을 하
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크게 놀란 주지의 인기척에 학은 붓을 내던지고 사라졌다. 그
래서 윗사진처럼 건물 우측의 평방과 창방 일부가 단청이 되지 않은 것이며, 그 남아있는 부분
이 딱 하루치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전설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와 부안 내소사(來蘇寺)에도 전하고 있다. 모두
일정 기간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며 단청이나 그림을 그리다가 딱 하루를 앞두고
훔쳐보는 바람에 그림을 그리던 새가 도망가 일부가 채색되지 않았다는 스토리로 말이다. 이런
전설은 일을 맡은 사람의 개인 문제나 절 내부 문제로 도중에 중단된 것을 그럴싸하게 설화로
빚은 것으로 여겨진다.
무위사 같은 경우는 관음조(觀音鳥)가 그렸다고 하는데, 안국사 주지는 학을 좋아했는지 학으
로 대체했으며 예전에는 극락전에 학 그림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채색되지 않은 달랑 하루
거리의 분량을 그냥 두고 있는 것은 그 설화의 증거물로 내세우는 동시에 학으로 상징되는 노
인이 그림을 그려준 절이라며 속세에 요란하게 홍보하려는 일종의 꼼수로 봐야 될 것이다.
어차피 전체도 아닌 일부에 불과하니 그냥 둬도 무리는 없겠지. 그래서 1% 부족한 모습으로 있
게 된 것이다. 안좋은 이유로 단청이 중단된 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은 안국사 주지의 지혜가 참
으로 돋보인다.


▲  극락전 불단을 장식한 목조아미타3존불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01호

화려하기 그지없는 극락전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세지보살(勢至
菩薩)이 아미타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나무로 만들어 개금을 한 것으로 불상은 매우 조
그만하지만 나름 미소를 띄우느라 애를 쓴다. 이들 3존불의 중심인 아미타여래는 통견의(通肩
衣)를 입고 있고, 소매자락이 발가락을 덮고 있는데, 높이 67cm, 무릎폭 43.5cm, 어깨폭 30cm
내외이다.

좌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은 옷주름이 본존불과 비슷하며, 머리에 쓴 보관(寶冠) 밑에 검은 머리
칼을 살짝 표현했는데, 귓바퀴를 1번 감아내려 어깨 위로 흘러내리게 했다. 그의 높이는 63cm,
무릎폭 35.5cm, 어깨폭 26cm 내외이다.
우측에 자리한 세지보살은 관음보살과 손모양이 대칭적이고 불의형(佛衣形) 법의를 입고 있는
데, 대체로 관음보살과 비슷한 모습이다. 높이는 61cm, 무릎폭 36.5cm, 어깨폭 24cm 정도이다.

이들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약간 구부정한 자세와 굵고
짧아진 목, 납작해진 턱과 각진 얼굴, 오똑한 코와 미소,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주름, 사실적
표현의 손 등으로 볼 때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들 뒤로 화사한 색채
의 후불탱이 병풍처럼 든든히 자리해 있는데 원래는 1772년에 제작된 탱화가 있었으나 관리소
홀로 그만 도난을 당해 1994년에 혜원(慧園)이 그린 아미타후불탱으로 땜빵한 것이다. 법당의
후불탱화면 꽤나 보는 눈이 많아 만지기도 어려울텐데 그것을 극복하고 탱화를 떼어가다니 참
대단한 도둑이 아닐 수 없다. 혹 신이 실수로 가져간 것은 아닐까?

  ◀  극락전 뒷쪽, 괘불이 담긴 길쭉한 상자
극락전 내부에는 1965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
幀)과 1995년에 만든 청동금고(靑銅金鼓)가
다. 그리고 불단 뒷쪽으로 가면 길쭉한 나무

자가 눈에 들어올 것인데, 과연 무엇이 들었

래 상자가 저래도 긴 것일까?

그 안에는 바로 18세기에 제작된 영산회괘불도
(靈山會掛佛圖)가 잠들어 있다. 괘불은 석가탄
신일이나 영산재(靈山齋) 등 아주 특별한 날에
만 만날 수 있는 귀한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이
불가능하다.
천하에 200곳이 넘는 오래된 절집을 찾아다닌
본인도 괘불을 본 횟수는 겨우 10번도 되지를
않는다. 그만큼 만나기가 힘든 존재로 1년에
고작 한손에 꼽을 정도로 외출을 하며 대부분
의 시간은 괘불함이나 금고 등에 꼼짝없이 갇
혀있어야 된다. 그것이 괘불의 운명이다.

안국사 영산회괘불도는 보물 1267호로 석가가 설법을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 주위로 다보
여래(多寶如來)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등이 자리해 있다. 괘
불의 길이는 10.75m, 폭은 7.2m의 큰 그림으로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발원하고자 만들
었으며, 18세기 중반에 경남 고성 운흥사(雲興寺)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비구 의겸(義謙)을 비
롯해 5명의 승려가 제작했다.
제작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화기(畵記)에 '?? 6년'이란 기록이 있는데, 의겸이 활동하던 시
절에 '?? 6년'이라 하면 1728년(옹정 6년)과 1741년(건륭 6년) 밖에는 없으며, 요즘은 1728년
을 제작 시기로 삼고 있다. 1792년과 1809년 그림을 수리했으며, 운흥사 괘불과 부안 개암사(
開巖寺) 영산회괘불탱과 대체로 비슷하다.

이 괘불은 가뭄 때 밖으로 꺼내 기우제를 올리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가뭄이 심
하면 추가적으로 외출을 시켜주었으나 요즘은 석가탄신일과 특정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외출을
안시켜 준다.
비록 괘불은 못봤지만 괘불이 담긴 괘불함은 극락전에 보관하고 있어 그 함에 기도를 하는 사
람도 많으며, 높이 10m가 넘는 그 큰 그림이 과연 저 안에 다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함이 작아
보인다. (괘불함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안국사 천불전(千佛殿)

극락전 우측에는 천불전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다른 불전과 달리 조금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원래 적상산사고의 선원각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적상산사고가 버려진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선원각을 친일파 주지 이철허가 경내로 가져와서
사찰 건물로 부려먹었으며 나중에 천불전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사고 가운데 유일하게 화마(火
魔)의 희롱을 받지 않은 건물로 바로 앞에서 보면 1층으로 보이지만 엄연한 2층 구조이며, 밑
은 창고, 위는 천불전으로 쓰이고 있다. 정면 가운데 칸에 강암 송성용이 쓴 천불전 현판이 걸
려있고 좌우 측면에는 내부에 채광을 공급하는 교창이 있다.

내부에는 1995년에 조성된 석가불과 문수/보현보살을 비롯해 석고로 만든 하얀 피부의 조그만
불상 1,000기가 자리해 장관을 이룬다. 유일하게 남은 사고 건물이지만 변형이 심해 지정문화
재의 지위까지는 얻지 못했다.


◀  안국사 지장전(地藏殿)

극락전 옆에 자리한 지장전은 1992년에 원행이
세운 것으로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도명존자(道
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안국사 삼성각(三聖閣)

천불전 뒤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2년에 원행이 옮겨 세웠으며, 우리 귀에 매우 익은 산신(山神)과 칠
성(七星),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보금자리로 그중 칠성을 담은 칠성탱은 1899년 김천 봉
곡사(鳳谷寺)의 부속암자인 극락암(極樂庵)에서 우송 상수(友松 爽洙)가 조성한 것이다. 그가
그린 칠성탱은 무주읍내 북쪽에 있는 북고사(北固寺)에도 있다.


▲  삼성각에 봉안된 칠성탱  (1899년에 우송 상수가 그린 것임)

▲  안국사 부도군(浮屠群)

안국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호국사비와 천불전 내부를 살피지 못한 아쉬움과 다음 답사지에 대
한 기대를 나란히 품으며 절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한다. 그 2개를 못봤으니 다음에 또 와야되
는 빌미를 만든 것이다.

다음 답사지는 적상산사고인데, 사고로 정신없이 내려가다가 중간에 오른쪽으로 빠지는 산길을
만났다. 일행 몇몇이 그 산길로 들어가길래 '그곳에 뭐가 있나' 싶어 따라 들어가니 그 숲속에
는 안국사의 숨겨진 보물인 승탑(僧塔, 부도) 4기가 푸른 이끼 옷을 걸치며 우리를 맞이한다.

이들 승탑은 석종형(石鐘形) 탑으로 탑신(塔身)에 고맙게도 조성 시기와 탑의 주인이 적혀있다.
모두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이중 가장 오래된 것은 팔각원당형의 지붕 옥개석을 지닌 청운당
사리탑과 그 옆에 머리 부분이 여의두문(如意頭紋)의 보륜(寶輪)으로 이루어진 청운당 봉골탑(
奉骨塔)으로 1717년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 꼭대기에 연화보주를 단 승탑은 보운당(寶雲堂)의 넋이 서린 사정탑(思正塔)으
로 1753년에 조성되었으며, 그 옆의 것은 월인당(月印堂)의 영골탑(靈骨塔)으로 1750년에 세워
졌다.

승탑들이 모두 높이 1.3m 미만의 조그만 탑으로 불교의 쇠퇴기이다 보니 신라나 고려처럼 장엄
한 부도는 기대하기 힘들다. 그나마 승탑 주인의 제자들이 정성을 다해 저 정도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딱히 이정표가 없어 지나치기 쉬우며, 이들도 원래 수몰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  호젓한 분위기의 안국사 숲길 (안국사에서 속세 방향)


 

♠  조선 왕실의 보물 창고, 조선 후기 주요 사고(史庫)의 하나였던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 전북 지방기념물 88호

적상호 서쪽 언덕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2층 기와집 2동이 적상호를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근
래에 복원된 적상산사고로 원래는 적상호에 있었다. 양수발전소 건립으로 이들 보금자리가 강
제로 묻히게 되자 사고터 주춧돌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와 선원각과 실록각을 복원했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 광해군 시절, 우리의 옛 땅인 만주에 또아리를 튼 후금(後金)이 나날이 강
성해지면서 북방에 자리한 묘향산사고에 담긴 왕실 서적과 보물의 안위가 크게 위협을 받자 다
른 장소로 실록을 옮겨야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마침 순안어사 최현과 무주현감 이유경이 적
상산을 강하게 추천하자 사관을 보내 현지를 살펴보게 했는데, 아주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 그
래서 즉시 적상산성을 수리하고 1614년 실록전을 세우면서 적상산사고가 탄생했다. 1618년 9월
묘향산에 있던 실록을 이곳으로 옮기기 시작하여 1633년 마무리를 지었다.

1641년에는 선원각을 세워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면서 완전한 사고가 된다. 1636년 병자호란
으로 강화도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의 실록이 손실되자. 이를 보완하고자 적상산 사고에 담긴
실록을 참조하여 작업을 했다. 이때 3도 유생 300명이 동원되었다.
적상산사고를 수호하고자 1643년 왕명으로 호국사를 세워 안국사와 함께 사고 수비에 전념토록
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안국사 승려 상훈이 사고의 서적을 안렴대로 대피시키기도 했다.

1872년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며, 1902년에 다시 개수를 벌였으나 1910년 왜정이 적상산
사고에 담긴 모든 서적을 서울로 가져가면서 사고는 방치되고 만다. 선원각은 안국사 주지 이
철허가 경내로 가져가 불당으로 부리면서 살아남았으나 나머지 건물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만큼 완전하게 방치된 것이다.

사고에는 선원각, 실록전을 기본으로 하여 승장청(僧將廳), 군기고, 화약고, 수사당, 문루 등
이 있었으며, 그 흔적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1992년 무주양수발전소 건립으로 그 자리마저 빼앗
기게 된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흔적을 옮겼고, 1997년에 선원각, 1998년에 실록각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적상산사고는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은 '
적상산사고지 유구(遺構)'이다.

선원각과 실록각은 2층식 창고 형태로 지어졌다. 1층은 허공에 떠 있는 형태로 기둥이 2층을
받치고 있으며, 2층이 바로 서고이다. 이는 혹시나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의 방문이나 습기
의 침투, 이 땅을 망치고 있는 쥐들의 공격을 막고 서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함이다. 이
런 식의 창고는 고구려(高句麗)의 창고 건물인 부경에서 비롯되었는데, 우리나라는 물론 왜열
도까지 전파된 국제적인 건축 양식이다.

건물 2층에는 조선왕조실록과 사고, 무주 고을에 관한 설명문과 디오라마, 모형도, 유물 등이
담겨져 있는데, 관람을 원할 경우 적상산사고를 관리하는 문화재해설사한테 요청하면 된다. 건
물은 모두 새것이라 고색의 기운이 피어나기에는 아직도 멀었지만 이곳에서 푸른 물결의 적상
호가 바라보여 호수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에 마음이 시원해진다.

▲  선원각(璿源閣)

▲  실록각(實錄閣)

▲  실록각 1층 마루

▲  적상산사고 정문

적상산사고를 간단하게 둘러보고 버스에 올라타 적상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무주머루와인동굴
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글의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한다.

※ 적상산 (적상산성, 안국사, 적상산사고)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무주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광주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6~7회, 전주에서는 1일 14회 떠난다.
* 영동역(경부선)에서 무주행 군내버스가 1일 12회 운행한다.
② 현지교통
* 무주터미널에서 내창행 군내버스 이용 (1일 2회, 11:40, 16:30분)  내창에서 적상산사고까지
  도보 2시간 10분 (무주터미널에서 안국사까지 택시로 접근 가능)
* 무주터미널에서 적상, 안성, 장계, 안천 방면 군내버스(20~50분 간격)를 타고 사천리(서창탐
  방지원센터 입구)에서 하차. 적상산 안국사까지 등산 약 2시간 20분 소요 (사천리→서창탐방
  지원센터→장도바위→서문터→향로봉→안국사
  <등산 출입 시간(서창탐방지원센터 기준) 4~10월은 4~15시, 11~3월은 5~14시, 그 외에 시간
  은 출입 불가>
③ 승용차 (안국사까지 접근 가능)
* 대전~통영고속도로 → 무주나들목을 나와서 무주방면 우회전 → 무주1교차로에서 우회전 →
  적상산입구에서 우회전 → 북창리 → 적상호 → 적상산 안국사

* 적상산 주차비 : 승용차 2,000~5,000원, 버스 6,000~7,500원 (안국사 주차장은 무료)
* 안국사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산184-1
(☎ 063-322-6162)
* 적상산성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괴목리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6년 12월 1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6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