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렬(郭京烈, 1901~1968)은 현풍곽씨로 김제 진봉면에서 태어났다. 봉수(奉守)란 이름도 가지 고 있으며, 1915년 박상진(朴尙鎭)과 채기중(蔡基中) 등이 광복단(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 鮮國權恢復團)을 통합해 대구(大邱)에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자 불과 14세에 어린 나이로 가담해 독립 활동에 뛰어들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해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여러 혁명 기지를 확보하여 폭동을 일으켜 왜정(倭政)을 몰아낼 생각을 했다. 허나 친일 부호(富豪)들이 협조를 해주지 않 고 자신의 뱃대기만 불리자 친일 부호 처단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이에 곽경렬은 유장렬( 柳璋烈), 한훈(韓焄) 등과 친일 반역자를 처리하는 행형부(行刑部)의 요원이 되어 전남 지역 친 일 부호를 여럿 처단했으며, 오성(烏城)의 헌병 분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했다. 1916년 왜경의 추격으로 잠시 만주로 넘어갔다가 다시 들어와 활동했으며, 1918년 친일파로 방 향을 바꾼 밥버러지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드러나면서 다시 은신했다. 1919년에는 전북 옥구군 대야면에서 김영순의 지원을 받아 27원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계 속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가 1924년 왜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926년 전주지방 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29년 4월 1일 전주감옥에서 출소했으나 왜정의 잔인한 고문에 몸이 상하여 더 이상 독립활동 을 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거하고 말았다. 마음에서는 늘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으나 몸이 만신 창이가 되었으니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조용히 지내다가 1968년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1982년 이 땅의 정부는 그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어 뒤 늦게나마 그의 애국 정신을 기렸다. 또한 지원금을 보내 무덤에 상석(床石)과 비석(碑石), 망주 석(望柱石)을 갖추게 했으며, 봉분(封墳)에 호석(護石)을 둘렀다.
그의 묘역은 망해사로 가는 길목에 있으므로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잠시 발길을 멈추고 무덤 앞에 옷깃을 여미는 예를 보이기 바란다. 바로 길가에 있으니 시간도 크게 잡아먹지 않는다. 다만 무 덤 주변에 마땅한 안내문도 없고, 그냥 '애국지사 곽경렬 선생 묘소'임을 알리는 표석이 전부라 자세한 사연을 알지 못하여 지나치기가 쉽다. |
바람길과 갈리는 3거리에서 망해사로 내려가면 길 왼쪽에 제일 먼저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부도 4기를 만나게 된다. 이 부도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가운데가 볼록한 석종형(石鐘形)부도이다. 마치 대추처럼 생긴 것이 크기도 조촐하여 참 귀여운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청심당(淸心堂), 만화당( 萬化堂), 심월당(心月堂), 덕유당(德有堂) 등 망해사에서 활동했던 승려의 승탑(僧塔)이다. 이 중 1기는 너무 작아 포도알처럼 보이며, 나머지는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부도의 형태는 땅바닥 에 자연석을 활용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대추 모양의 탑신을 얹힌 다음, 모자처럼 생긴 지붕 돌을 올렸다. |
부도군을 지나면 볼일을 보며 근심을 터는 해우소(解憂所)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철난간 너 머로 물줄기가 보이는데, 그가 바로 서해바다이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다 안개가 오 리무중(五里霧中)을 이루고 있어 시야가 완전 꽝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망해사의 내력을 살펴 보도록 하자.
※ 속세를 등지고 서해 바닷가에 자리한 고찰, 김제 망해사(望海寺)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절이 별처럼 많이 흩어져 있다. 허나 바닷가에 자리한 절은 정말 손에 꼽 을 정도인데, 서해바다 같은 경우에는 이곳 망해사가 유일하다. 물론 안면도(安眠島)에 있는 안 면암(安眠庵, ☞ 관련글 보러가기)도 바닷가에 있지만 내력이 무지 짧아 고찰에 끼지 못한다. 그외에 남해바다에는 여수 향일암(向日庵)이 있고, 동대해(東大海)에는 양양 낙산사(洛山寺)와 홍련암(紅蓮庵), 휴휴암(休休庵), 동해 감추사(甘湫寺), 부산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 등이 있 다.
망해사란 절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은 642년(의자왕 원년) 부설(浮雪)이 창건 했다고 전한다. (다른 자료에는 671년이라고 나옴) 허나 안타깝게도 신뢰도는 떨어지며, 754년 (경덕왕 23년)에 당나라 승려인 통장(通藏)법사<또는 중도법사(中道法師), 도장(道藏)법사>가 세웠다는 설도 있으나, 이름만 서로 다를 뿐 같은 인물로 여겨는 설도 있다. 허나 이 역시 확실 한 것은 아니다.
고려 때에는 1073년(문종 27년)에 심월(心月)대사가, 1371년에는 지각(知覺)선사가 중창했다고 하며,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절이 무너져 바다에 가라앉았다고 한 다. 그러다가 1624년 경(또는 1589년 경)에 김제 출신 고승인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절을 일으 켜 세웠다. 이때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악서전(낙서전)이 지어졌다.
진묵대사는 해인사(海印寺)의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했다는 이야기부터 물고기를 끓인 죽을 먹 고 대변을 보면서 그들을 환생시킨 이야기까지 정말 많은 이적(異蹟)과 재치를 남긴 고승으로 유명한데, 이곳에도 그의 설화가 하나 전해온다. 진묵이 망해사에고 머물 때, 바닷가에서 굴을 따서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놀라서 '왜 승려가 육식을 하시오?' 그러자 진묵이 '이것은 굴이 아니고 석화(石花)요' 답했다고 한다. 참 고로 굴을 석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어원이 진묵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만화(萬化, 1850~1919)와 심월(心月)이 절을 중창하고 불도를 닦았으며, 1915년 에 계산(桂山)이 중창했다. 1933년에는 주지 김정희가 악서전을 중수하고 보광명전(普光明殿)과 칠성각을 신축했으며, 1977년에 요사와 망해대를 짓고, 악서전, 보광명전을 중수했다. 1984년에는 기존의 보광명전과 칠성각을 부시고, 그 자리에 대웅전(大雄殿)을 지었는데, 나중에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1986년에는 악서전을 해체 복원하였고, 1989년에 범종각을 지었으며, 1991년에 극락전을 중수했다.
그리 넓지 않은 조촐한 크기의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악서전과 삼성각, 종 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요사를 빼고는 모두 바다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이 이곳의 특징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팽나무와 악서전이 있으며, 이들 모두 조선 중기 것이다. (이전 시대 유물은 없음) 또한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바닷가에 있 어 섬들을 바라볼 수 있고, 서해 일몰을 구경할 수 있는 경승지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 다. (창건 시절부터 망해사로 불린 듯 함)
바닷가 언덕에 자리해 있어 파도 소리가 번뇌에 잠긴 정신을 깨워주며, 파도 소리와 풍경 소리, 발자국 소리가 전부인 고요한 절이다. 게다가 높이는 바다에 닿을 정도로 낮지만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조금은 서려있다. 또한 이곳에서 보는 저녁 일몰은 번뇌가 녹아버릴 정도로 대장관이 며, 바다에 점처럼 그려진 섬들까지 이곳의 풍경을 한몫 거들고 있으니 조물주(造物主)도 시샘 을 할 지경이다. 허나 1990년대부터 시작된 새만금 사업으로 망해사 앞바다는 크게 수정될 위기에 처했다. 새만 금 개발 계획을 보면 절 앞바다를 메워 거의 강처럼 만든다고 한다. 그리되면 바닷가 절이 아 닌 강가의 절이 되며 수평선 너머로 펼쳐진 너른 바다를 더 이상 못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절 풍경도 크게 손상될 것이고,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의 절의 이름마저 무색하게 된다. 인간들 의 무분별한 개발에 망해사의 경관은 물론이고 군산(群山)에서 김제 앞바다를 거쳐 부안(扶安) 에 이르는 바다와 갯뻘 대부분이 강제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망해사를 중심으로 서해바다를 향해 솟은 야트막한 산자락에 새만금바람길이 조성되었다. 절을 둘러보고 후식으로 바람길을 따라 서쪽인 심포항이나 동쪽인 진봉면사무소 방면으로 걷는 것도 괜찮다. 망해사가 거의 중간이고 길도 험하지 않아 1시간 반 정도면 충분히 서쪽 끝과 동쪽 끝 에 닿는다. 바다가 늘 옆에 있어 바다내음과 산내음에 마음마저 즐거워지는 길이다.
※ 김제 망해사 찾아가기 (2016년 3월 기준) ① 김제까지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광주역, 광주송정역, 목포역에서 호남선 열차 를 타고 김제역 하차 (고속전철은 정차 안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김제행 고속버스가 1일 4회 떠나며, 동서울터미널에서 김제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떠난다. * 인천, 성남, 전주, 익산, 군산에서 김제행 직행버스 이용 (군산에서 올 경우에는 만경에서 내 리면 편함) ② 현지 교통 * 김제역(김제역3거리 북쪽, 김제역1승강장)과 김제시외고속터미널 앞에서 김제시내버스 18, 19 번을 타고 망해사 하차. 두 노선 합쳐서 1일 20회 운행(주말, 휴일에는 14회)하며 만경정류장 을 경유한다. * 망해사 정류장에서 망해사까지 도보 7~8분 ③ 승용차 (경내에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공짜) * 서해안고속도로 → 서김제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만경3거리 직진 → 만경4거리 좌회전 → 진봉 → 망해사입구에서 우회전 → 망해사 (경내까지 진입 가능)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 (심포10길 94 ☎ 063-545-43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