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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2.09.12 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운달계곡)
  4. 2022.07.19 신라 왕릉 나들이, 경주 괘릉 (경주 원성왕릉)
  5. 2021.03.01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일원이자 화려한 늙은 윤장대로 유명한 예천 용문사 (용문사 성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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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20.03.08 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8. 2019.12.30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9. 2019.09.04 황량함과 재건의 공존, 경주 서라벌 절터 나들이 ~~~ (감산사, 연지암, 활성리석불입상, 숭복사)
  10. 2019.07.16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봉화 오전약수와 약수탕, 석천계곡, 석천정사 여름 나들이 (휴천동 지석 및 입석)

서라벌 경주의 꿀명소, 경주 남산 나들이 <염불사지, 봉화골, 칠불암, 칠불암 마애불상군>

경주의 꿀단지, 남산 (염불사지, 칠불암 마애불상군)


    
' 서라벌 경주의 꿀단지, 남산 초여름 나들이 '


▲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남산(금오산) 산줄기

 



 

여름 제국이 봄의 하늘을 가로채며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6월의 첫 무렵, 신라(新羅)
의 향기가 지독하게 배여있는 경주 땅을 찾았다.

경주(慶州)는 거의 50번 이상 인연을 지은 곳으로 오랜 세월 구석구석 누비다 보니 이제
는 인지도가 거의 없거나 벽지에 박힌 명소들을 주로 찾고 있다. 허나 미답처(未踏處)들
이 여전히 적지 않아서 내 마음을 애태우게 하는데, 이번에는 칠불암과 신선암 등 남산(
南山)의 여러 미답처를 지우기로 했다.

경주시외터미널에서 경주좌석버스 11번(경주시외터미널~불국사~용강동)을 잡아타고 통일
전(統一殿)에서 두 발을 내렸는데, 여기서 칠불암, 신선암으로 가려면 남쪽 시골길(칠불
암길)로 들어서 남산동(南山洞)의 여러 마을(안마을, 탑마을, 안말)을 지나 1시간 10~20
분 정도 발품을 팔아야 된다.
너른 배반평야를 동쪽에, 남산을 서쪽에 둔 남산동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오늘도 평화
롭기 그지 없는데, 안마을에는 그 유명한 서출지(書出池)가, 탑마을에는 남산동삼층석탑
이 간만에 나좀 보고 가라며 손짓을 한다. 허나 그들은 이미 20대 시작점에 인연을 지은
터라 오로지 목표한 먹잇감을 향해 뛰어가는 맹수처럼 그들을 모두 흘려보냈다.


▲  옛 신라의 곡창지대, 배반평야 논두렁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양피제(讓避堤, 양기못)

양피제(양피저수지)는 배반평야에 수분을 제공하는 저수지로 연(蓮)들이 푸른 기운을 드
러내며, 곧 다가올 여름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양피제란 이름은 남산동삼층석탑 일대
로 여겨지는 양피사(讓避寺)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절이 있던 마을에 서출지가 있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이 있어 이 못을 서출지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  남산 입문 (염불사지)

▲  전(傳) 염불사(念佛寺)터

양피제에서 남쪽으로 7분 정도 가면 안말(안마을) 한복판에 누워있는 염불사터를 만나게 된다.
잘생긴 3층석탑 2기가 잔디가 입혀진 절터를 지키고 있는데, 그 북쪽에는 새로운 염불사가 둥
지를 틀며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사라진 염불사의 후예를 자처한다.

염불사는 신라 중기(8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절로 어떤 과정을 거치고 언제 어떻게
망했는지 전해오는 것이 전혀 없다. 남산 산신(山神)조차도 '염불사? 양피사? 그게 뭐임? 먹
는 거임?'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로 비밀에 감싸인 절로 남산동3층석탑 주변을 염불사터로
보는 설도 있어 현 자리도 100%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책임을 피하고자 염불사 이름 앞
에 막연히 전한다는 뜻의 전(傳)을 붙여 '전 염불사터'라 부른다.
다만 염불사 옆에 양피사가 있었다고 하므로 만약 남산동3층석탑이 염불사라 하면 이곳은 자
연히 양피사가 될 것이다.

염불사의 원래 이름은 피리사(避里寺)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피
이촌, 피리사촌)이 있는데, 그 마을에 '피리사'란 절이 있었다. 그 절에는 이상한 승려가 머
물고 있어 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우니 그 소리가 마을을 넘어 서라벌 일대에 쫘악 울려
퍼져 듣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소리가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그지 없어, 서라벌 사람들
은 그를 공경해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자 그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봉안했으며, 그가 머물던 피리사를 염
불사로 이름을 갈았다. 그랬던 염불사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의지처를 잃은 탑들의 삶도 그리 순탄치 못해 결국 앉은뱅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서로를 보듬으며 절터를 지켰지만 1973년 동탑이 강제로 불국동 구정광장으로 옮겨지
면서 서탑 홀로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러다가 2008년 동탑이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재회를
하게 되었고, 이때 탑 2기를 복원하고 절터를 손질하여 2009년 1월 15일 완료되었다.


▲  전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보물 2,193호)의 동탑

염불사터 동탑은 1973년 구정동 불국광장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그때 박정희 전대통령이 경주
를 살피러 온다는 소식에 경주 지역 관리들이 그에게 아부를 떨고자 무너진 동탑의 탑재와 인
근 도지동 이거사터(移車寺)에서 급히 소환한 3층석탑 1층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을 덧붙여
콩 볶듯이 복원하여 대통령의 순시 코스에 두었다. 그러다 보니 1층 옥개석이 2,3층 옥개석과
다소 어색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후 제자리로 옮겨야 된다는 여론이 퍼지면서 경주시는 2006년부터 이전 복원을 추진하여 염
불사터 사유지를 매입해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2008년 1월 탑을 해체하여 제자리에 다시 세웠
다.

이 탑은 커다란 바닥돌을 땅바닥에 깔고, 그 위에 2중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
힌 다음,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한 전형적인 신라 후기 탑으로 세월과 자연이 무심히 할퀴고
간 흔적들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정정함은 잃지 않고 있다. 서탑과 함께 8세기에 세워진 것으
로 여겨지며, 탑 높이는 5.85m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동탑

▲  북쪽에서 바라본 동탑


▲  염불사터 서탑

일찌감치 복원된 동탑과 달리 서탑은 옥개석을 중심으로 무거운 상처들이 적지 않다. 동탑보
다 좀 초라해 보이는 서탑, 허나 그는 사리장엄구를 봉안했던 사리공을 무려 2개씩이나 품었
던 특별한 존재였다. 보통 대부분의 탑은 사리공이 1개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 탑의 심
장이라 할 수 있는 사리공을 2개나 지녔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다.
혹시 염불사 설화에 나오는 그 승려 때문은 아닐까?

▲  북쪽에서 바라본 서탑

▲  절터에서 수습된 주춧돌과 늙은 석재들

동탑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한참 잡초를 토벌하고 있었다. 염불사터가 간만에 이발을 하는 날
인 모양이다.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석탑 형제, 한때 45년 동안 떨어져 사는 아픔이
있었으나 다시 만나 서로의 정을 속삭인다. 인간들이 무엇을 하든 자신들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런 것은 관심 밖이다.

절터 남쪽에는 이곳에서 수습된 건물 주춧돌과 석탑 부재(部材) 등 여러 석재가 놓여져 초여
름 햇살을 즐기고 있다. 그들은 한때 절 건물을 받쳐 들거나 석탑, 석등을 이루던 것들로 그
들이 입을 열면 이곳의 정체가 흔쾌히 드러날 것인데 자신들을 이 꼬락서니로 만든 인간과 세
상을 원망하듯,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 염불사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129-3


▲  남산 봉화골로 인도하는 숲길

염불사지에서 숲과 밭두렁이 적당히 섞인 시골길을 지나면 그 길의 끝에 봉화골 산길이 나온
다. 통일전 정류장에서 이곳까지는 도보 약 25분 거리로 여기서부터 온갖 불교문화유산으로
도배가 된 남산<금오산(金鰲山)>의 아늑한 품이 시작된다.

봉화골은 동남산 남쪽 끝에 자리한 깊은 골짜기로 봉화대(烽火臺)가 있어서 봉화골이란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 계곡이 깊고 소나무가 가득해 그림 같은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칠불암과
신선암 마애불 등 남산의 굴지 명소들이 깃들여져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왕래가 잦다. 현재
이 골짜기에는 절터 2곳, 불상 8기(칠불암과 신선암 마애불), 석탑 2기, 석등 4기, 비석(귀부
) 1기, 봉화대터가 전하고 있다.

산길 경사는 대체로 완만하나 일부 구간에서 흥분된 상태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이 될
정도는 아니며 자존심을 곱게 접어 묵묵히 산길에 임하면 칠불암 마애불이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와 마중을 할 것이다.


▲  소나무로 가득한 봉화골 산길 ①

▲  소나무로 가득한 봉화골 산길 ②

봉화골 계곡은 조그만 개울로 아기자기한 모습을 지녔다. 하지만 하늘이 비를 너무 짜게 내려
물이 거의 말라버린 맨바닥 상태였다. 처음에는 길인 줄 알고 다가섰더니 글쎄 가뭄에 녹초가
되버린 계곡이 아니던가.

산길을 한참 오르니 삼삼하게 우거진 대나무숲이 펼쳐진다. 이렇게 대나무숲이 있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절이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푹 숙인 대나무가 운치 있게 터널을 이룬 돌계단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칠불암이 자리해 있다.


▲  이보다 멋진 터널이 있을까? 대나무 숲길의 위엄

▲  대나무 숲길 한복판에 서다. (칠불암 직전)



 

♠  경주 남산에서 가장 덩치가 큰 불교 유적, 7개의 석불로 이루어진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마애불상군 - 국보 312호

경주 남산에는 옛 신라 사람들이 심어놓은 불교 유적이 지나치게 많이 서려있다. 절터만 무려
100곳이 넘으며 불상도 80개가 넘는다고 하니 천하에 이만한 불교 유적의 성지(聖地)는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되었겠는가.

남산에 깃든 불교 유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해발 360m 고지에 자리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다.
그는 부처골(불곡) 석불좌상(☞ 관련글 보기), 보리사(菩提寺, 미륵골) 석불좌상(☞ 관련글
보기
),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과 더불어 남산의 간판격 존재로 존재
감도 그 덩치만큼이나 커서 답사객과 산꾼의 왕래가 빈번하다.

이곳 마애불상군은 2개의 바위에 7기의 마애불(磨崖佛)을 나눠서 새긴 독특한 모습으로 동쪽
을 바라보며 병풍처럼 자리한 커다란 바위에 3존불이 깃들여져 있는데, 그 바위를 '병풍바위'
라고 부른다. 불상이 깃든 동쪽 면이 90도로 다듬어져 있고, 그 앞에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
m 정도의 석축을 쌓아 공간을 다진 다음, 4면불을 새긴 바위를 봉안했다. 보통은 바위 하나를
이용해 불상을 새기지만 이곳은 이렇게 바위 2개를 건드려 마애불상군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약 1.74m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지켜주고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3존불과 4방불

마애불 주변은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그 밑에서 그들을 바라봐
야 된다. 그러다 보니 3존불은 정면에서 온전히 마주 보기가 어려우며, (앞에 4방불이 시야를
좀 가림) 4방불 같은 경우 3존불을 바라보고 있는 서쪽 불상은 만나기가 어렵다. 허나 어찌하
랴? 국보(國寶)의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지체 높은 존재들이고 그들의 건강도 신경을 써야
되니 말이다. 그래도 보일 것은 거의 보이며, 그들을 세세히 보고 싶다면 칠불암에 협조를 구
해보기 바란다.

병풍바위에 돋음새김으로 진하게 깃들여진 3존불은 양감이 매우 풍부해 바위에서 방금 튀어나
온 듯한 모습이다. 가운데 본존불(本尊佛)은 높이 2.7m로 하늘을 향해 꽃잎을 세운 연꽃<앙련
(仰蓮)>과 밑으로 꽃잎을 내린 복련<(伏蓮)>이 새겨진 연화대좌에 위엄 있게 앉아있다. 석굴
암(石窟庵) 본존불과도 비슷한 모습으로 그 뒤쪽에는 광배(光背)가 본존불을 반짝 빛내주고
있으며, 머리는 소발(素髮)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거의 네모진 모습으로 볼살이 많으며,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나 자비로운 표정을 자아
내고 있다. 목에는 그 흔한 삼도가 없으며, 어깨는 넓고 당당하여 가는 허리와 함께 위엄 돋
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 끝이 땅을 향하게 하
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은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옷주름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본존불 오른쪽에 자리하여 본존불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협시보살(夾侍菩薩)은 연꽃이 새
겨진 연화대(蓮花臺) 위에 다소곳이 서 있다. 덩치는 본존불의 1/3 크기로 키는 약 2.1m인데,
아래로 내린 오른손에는 감로병(甘露柄)이 들어 있어 아마도 관세음보살인 모양이다. 왼손은
어깨 높이로 들고 있으며, 잘록한 허리선이 인상적으로 구슬목걸이를 두르고 있다.
본존불의 왼쪽 협시보살 역시 연화대 위에 서 있다. 오른손에 연꽃을 들고 왼손은 옷자락을
살며시 잡고 있는데, 오른쪽 협시보살과 비슷한 덩치로 코가 좀 할켜나간 것을 빼면 완전한
모습이다. 그는 아마도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3존불과 4방불(동쪽과 북쪽 상)

3존불 앞에 놓인 바위에는 4방불이 깃들여져 있다. 3존불이 주연이라면 4방불은 그들을 수식
하는 조연으로 큰 것은 높이 1.2m, 작은 것은 0.7~0.8m 정도로 3존불에 비해 규모도 작고 조
각 솜씨도 다소 떨어진다.
 
4방불 모두 보주형 두광(頭光)을 갖추며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는데, 동쪽 상은 3존불
본존불과 비슷한 모습으로 통견의(通絹衣)를 걸치고 있으며 신체 윤곽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왼손에 약합을 쥐어들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약사여래(藥師如來)로 여겨진다. 남쪽 상은 동
쪽 상과 거의 비슷하나 가슴에 표현된 띠매듭이 새로운 형식에 속하며 무릎 위 옷주름과 짧은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의 옷주름이 도식화(圖式化)되어 있다.

서쪽 불상은 동/남쪽 불상과 비슷하며 북쪽 불상은 앞서 불상과 달리 얼굴이 작다. 그들의 정
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동쪽은 약사여래, 서쪽은 아미타여래로 파악되고 있다.


▲  4방불의 동쪽 상 (약사여래상으로 여겨짐)

▲  4방불의 남쪽 상 (정체가 무엇일까?)

풍만한 얼굴과 양감이 풍부한 신체 표현, 협시보살들의 유연한 자세는 남산 삼릉골 석불좌상
과 석굴암 본존불, 굴불사(掘佛寺)터 석불과 비슷하여 8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참 올라가야 되는 깊숙한 산골에 이렇게 큰 마애불을 짓기가 참 어려웠을 것인데, 불교 앓
이와 남산 앓이가 유독 심했던 신라 서라벌 사람들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신라
의 아름다운 마애불을 편하게 느껴볼 수가 있다.
그리고 마애불이 깃든 병풍바위의 모습도 그리 예사롭지는 않아 보여 석불이 깃들기 이전에는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  칠불암 뜨락에 수습된 주춧돌들 (석등 대좌도 보임)

칠불암 뜨락에는 주춧돌과 석등 대좌(臺座), 석탑 석재들, 연꽃이 새겨진 배례석(拜禮石) 등
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마애불 남쪽에는 엉성하게 복원된 석탑과 옥개석으로 보이는 커다란
돌이 박혀있어 이를 통해 마애불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애불의 자리를 먼저 다진 다음 건물을 씌워 그들을 봉안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 건물이 법
당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의 정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다
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머물면서 대안(大安)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7세기 중/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8세기에 마애불을 구축하면서 전성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는 '봉화곡 제1사지(寺址)'란 임시 이름을 지니고 있다. (봉화골에 있는 1번째 절터
란 뜻) 비록 절집과 돌로 지어진 모든 것이 무심한 세월과 대자연에 의해 분해되고 그 일부만
아련히 남은 상태지만 마애불만은 거의 온전히 살아남아 그들이 가고 없는 빈 자리를 지킨다.


▲  장대한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칠불암 석탑

마애불과 칠불암 법당 사이에는 석탑의 옥개석으로 여겨지는 주름진 커다란 돌덩어리가 화석
처럼 박혀있다. 그 위에는 키 작은 석탑이 성치 못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신라 후기에 지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절이 사라진 이후, 세월의 거친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산산히 흩어진 것을 발견된 부재(部
材)를 되는대로 엮어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하여 다소 엉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큰 돌덩어리를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3층 탑신을 적당히 맞춰 올려 그런데로 3층석탑의 폼은
갖추었다.


▲  칠불암 인법당(因法堂)

마애불 곁에 자리한 칠불암은 1930년대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이다. 칠불암이란 이름은 3존불
과 4방불 등 7기의 석불을 간직하고 있어 칠불암이라 한 것인데, 옛 봉화곡 제1사지의 빈 자
리를 덮어주며 마애불상군을 지키고 있다.

칠불암은 법당(法堂)인 인법당과 1칸짜리 삼성각, 해우소가 전부로 인법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리가 협소하여 법당이 요사(寮舍)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의
역할까지 모두 담당하고 있는데, 내가 갔을 당시에는 서양에서 건너온 20대 비구니 양녀(洋女
)와 그를 도와주는 50대 보살(菩薩) 아줌마가 절을 지키고 있었다.

마애불을 둘러보고 법당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보살 아줌마가 구경 잘했냐며 매실차 1잔을 권
한다. 그런 것을 마다할 내가 아니라서 흔쾌히 1잔을 청했는데, 마침 날씨도 덥고 목구멍에서
도 갈증으로 불이 날 지경이라 달콤한 매실차로 더위와 갈증을 싹 진화했다. 거기에 산바람도
솔솔 불어와 더위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니 이런 것이 진정 극락(極樂)이 아닐까 싶다.
그 보살은 보통 오전에 올라와 양녀 비구니를 도우며 절을 지키거나 여러 먹거리를 만들어 준
다. 내가 갔던 날은 식혜를 만들어 절 냉장고를 채워주었다. 그렇게 절 볼일이 끝나면 오후에
속세로 내려간다. 그 외에 많은 시간은 양녀 비구니 혼자서 절을 지킨다.

그 양녀는 미국 아메리카 출신으로 이 땅에 들어온 지 이제 1~2개월 밖에 안된 초보 승려이다.
하필이면 첩첩한 산골인 이곳에 먼저 배치되어 시작부터 고적한 산사(山寺)의 삶을 익히느라
고생을 한다. 게다가 우리 말도 꽤 서툴러 꼬부랑 영어를 섞어주어야 겨우 알아듣는다. 왜 그
를 칠불암에 배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산에 양이(洋夷)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지라 그들을
상대하고자 고독한 산사살이도 미리 익히게 할 겸, 배치한 모양이다.
절에 머무는 승려는 그 혼자 뿐이라 그가 이 절의 임시 주지나 다름이 없었다. 절과 마애불을
지키고 청소하고, 기도하고, 수행하고, 우리 말 공부하고, 불교 공부하고, 빨래하고, (음식은
보살 아줌마가 거의 해줌) 양이 관광객들에게 마애불 설명도 해주고, 하는 일이 많은데, 아직
은 부족한 것이 많아 보살 아줌마와 스승 승려의 지도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그 스승은 매일
전화를 하여 영어로 이리저리 코치를 해주었다. 하지만 언어 소통에 거의 문제가 없을 정도로
우리 말을 익히게 한 다음 이곳으로 보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절과 마애불을 찾은 사람들에게 꼭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 인사성도 밝은데, 마침 미국에
서온 것으로 여겨지는 양이 2명이 그에게 칠불암 마애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시로 감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마애불에 대해 크게
찬양을 벌인 모양이다.
그는 6개월 정도 이곳에서 정진을 하다가 다른 절로 옮긴다고 하며, 아무쪼록 열심히 수행하
여 큰 비구니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  맞배지붕을 지닌 1칸짜리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에 봉안된 독성탱, 칠성탱,
산신탱


▲  칠불암에서 바라본 봉화골 남쪽 능선

▲  봉화골 정상부(신선암 뒤쪽)에서 바라본 봉화골 남쪽 능선과
배반평야, 토함산(吐含山)

▲  봉화골 정상부(신선암 뒤쪽)에서 바라본 남산동과 배반평야, 낭산(狼山)


칠불암에서 보살 아줌마, 양녀 비구니와 이야기꽃 좀 피우다가 잠시 잊었던 신선암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곳은 칠불암 바로 뒤쪽 절벽으로 아무리 지척간이라고 해도 홍길동이 아닌 이상
은 각박한 산길을 7~8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그렇게 해발 400m대인 봉화골 정상부에 이르면
남산 정상과 고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펼쳐지고, 조망의 질 또한 크게 상승되어 경주 동
남부와 배반평야, 토함산 등이 흔쾌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능선길로 접어들면 신선암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하는데, 그의 안내를 받아 가파
른 길을 내려가면 그 길의 끝에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신선암 마애불이 나타난다.

이후 내용(신선암, 고위봉, 열반골)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
서 흔쾌히 마무리 짓는다.

* 칠불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36-4번지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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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C) 2024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피서의 1급 성지를 찾아서, 의성 빙계계곡 <빙계군립공원, 풍혈, 빙혈, 빙산사지5층석탑>

의성 빙계계곡 (빙혈, 풍혈)



~~~~~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의성 빙계계곡 ~~~~~
빙계계곡 빙혈
▲  빙계계곡 빙혈
 



 

반년 가까이 세상을 지배했던 욕심꾸러기 겨울과 천하만물의 격렬한 호응을 받으며 새
로 일어선 봄이 천하를 두고 막판 자웅을 겨루던 3월의 한복판에 피서의 성지(聖地)로
유명한 의성 빙계계곡을 찾았다.

아침 일찍 일행들과 서울을 출발하여 충북의 여러 지역(진천, 보은, 영동)을 둘러보고
오후 늦게 경북으로 넘어와 어느덧 의성(義城) 땅에 이르렀다. 의성에서는 빙계계곡과
그곳에 서린 풍혈, 빙혈을 보고자 함으로 그곳에 도착하니 어느덧 18시이다.



 

♠  빙혈과 풍혈을 품은 의성 제일의 경승지,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의성 빙계계곡(氷溪溪谷) (빙계리 얼음골)

▲  빙계계곡 상류 ①

의성 빙계계곡은 이미 20여 년 전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다. 그때 빙혈과 풍혈, 빙산사지5층
석탑을 둘러보았는데, 그들은 계곡 중간인 빙산(氷山) 밑에 숨겨져 있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찾은 탓에 그들의 위치를 놓쳐 그만 계곡 상류까지 들어가버렸다. 허나 그렇게 멀리 들어온
것은 아니라서 왔던 길로 600m 정도 되돌아나가면 바로 빙혈/풍혈 입구이다.

기왕 상류까지 들어온 거 잠시 차에서 내려 상류의 깨끗한 공기도 마셔볼 겸 주변 풍경을 살
폈다. 겨울과 봄이 3월 내내 천하를 두고 다투느라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 계곡 물은 별로
없었지만 벼랑과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소나무가 우거져 그윽하게 경치를 자아내
고 있다. 그렇다면 빙계계곡은 어떤 곳일까?

빙계계곡은 말그대로 얼음 계곡이다. 밀양(密陽)의 얼음골과 비슷한 곳으로 빙계리 얼음골이
라 불리기도 하며, 대자연이 빚은 얼음 구멍과 바람 구멍이 있어 계곡 북쪽 산을 얼음산, 즉
빙산(氷山)이라 부르고, 그 곁을 흐르는 계곡을 빙계(빙계계곡, 빙계천)라고 한다.
예로부터 의성 제일의 경승지로 빙혈과 풍혈, 인암(仁岩), 의각(義閣), 수대(水碓, 물레방아)
, 빙산사지 5층석탑, 불정(佛頂, 불정봉 정상), 용추(龍湫)(용소) 등 8곳의 명소가 서려 있는
데,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 빙계8경이라 부르며, 그들 중 갑(甲)은 이곳의 얼굴이자 상징인
빙혈과 풍혈이다. 그들이 있기에 빙계계곡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 빙혈과 풍혈이 시원하게 막을 치고 있는 곳에 빙산사터가 있고, 계곡 입구에는 빙계서원이
있으며, 빙혈 부근에는 도교 사당인 태일전이 있어 승려와 선비, 도교(道敎) 신봉자들도 이곳
에 적지 않게 군침을 흘렸음을 보여준다. 그만큼 이곳은 자연이 의성 땅에 내린 특별한 선물
이다.


▲  빙계계곡 상류 ②
소나무와 벼랑, 맑은 계곡이 조화를 이루며 착한 경치를 자아낸다.


빙계 일대는 왜정 때 경북8승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으며, 여름만 되면 많은 피서객들이 몰려
와 북새통을 이룬다. 하여 의성군에서는 계곡 일대를 '빙계군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길을 정비
하고 오토캠핑장과 여러 편의시설을 닦는 등 특별히 애지중지하고 있다.

얼음과 서늘한 바람, 그리고 계곡이 한데 어우러진 피서의 완벽한 성지로 무더위에 대한 방어
력이 아주 삼엄하여 제아무리 여름 제국이라고 해도 그 방어선은 뚫지 못한다. 그러니 이곳에
서만큼은 여름 두 자를 잊어도 좋다. 빙혈과 풍혈에서 시원한 바람을 실컷 맞고 (대신 얼음은
건드리지 말자~!) 계곡에서 물놀이로 몸을 풀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꿀피서를 즐길 수 있다.


▲  누런 갈대가 덥수룩하게 자라고 있는 빙계계곡
갈대 너머로 보이는 집들 뒷쪽에 빙혈과 풍혈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  빙계계곡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 (용추 동쪽)

▲  용추 위에 걸린 구름다리

▲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용추와 빙계계곡 중류
빙계계곡에서 가장 풍경이 일품인 곳은 구름다리 주변 용추(용소)이다.
용추는 두 벼랑 사이에 자리한 깊은 못으로 나무와 해, 달 등이
그를 맑은 거울로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경북팔승 기념비<경북팔승지일(慶北八勝之一) 비석>
왜정 시절 빙계계곡이 경북8승의 하나로 크게 추앙을 받자 이를 기리고자
1934년 9월 24일에 세운 비석이다. (비석 옆면에 왜왕 연호인
소화9년 어쩌구 글씨가 있음)

▲  빙산사지(氷山寺址) 5층석탑 - 보물 327호

용추 구름다리 맞은편에 빙혈, 풍혈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들어서면 경북8승 기념비
가 나오고 그 뒷쪽에 너른 공터와 맵시가 좋은 석탑 하나가 진하게 눈짓을 보낸다. 그가 바로
빙계계곡의 오랜 유물인 빙산사지5층석탑이다.

이 탑은 돌을 벽돌 크기로 다듬어서 빚은 모전탑(模塼塔)으로 근처에 있는 탑리(塔里)5층석탑
을 모델로 하여 지었다고 한다. 비록 탑리 탑에는 미치지 못하나 나름 잘생긴 탑으로 신라 후
기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16개의 돌로 이루어진 바닥돌을 밑에 깔고 그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올린 다음 5층의 탑돌
을 얹힌 것으로 높이는 8.15m, 바닥돌 폭 4.06m이다. 1층 탑돌은 네 모서리에 각각 다른 돌로
모서리 기둥을 세우고 정면(남쪽)에 네모나게 홈을 판 감실(龕室)을 두었는데, 이곳에는 불상
을 봉안했다. 그리고 2층 이상부터 몸돌은 그 높이가 1층에 비해 절반 이상 줄어 적당하게 체
감률을 선보이고 있으며. 탑 머리에는 머리장식인 노반(露盤)이 남아있다.

지금은 이렇게 정정한 모습이지만 한때 탑의 건강 상태가 매우 심각하여 1973년에 탑을 해체
하여 복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3층 옥개석(屋蓋石)에서 석함(石函)이 나왔는데, 그 안에서
금동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그로 인해 탑의 존재와 가치가 한층 높아졌으며, 그 사리장치는
멀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빙산사지 5층석탑

▲  1층 탑돌에 있는 감실

이곳에 둥지를 틀며 5층석탑을 품고 있던 빙산사(氷山寺)는 신라 중기나 후기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진다. 허나 자세한 사적(事績)은 전하지 없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때 석탑 1층 감실에 있던 불상이 사라졌다고 하며 그가 앉아있던 좌대만 남아 빙혈 옆에 따
로 놓여져 있다.

절터의 범위는 경북8승 비석부터 빙혈까지로 보이며, 빙혈에는 도교의 태일<태일성(太一星)>
에게 제를 지내던 태일전(太一殿)이 있었다고 전한다. 건물이 꽤나 있었을 절은 잔디와 잡초
밭으로 그림이 180도 바뀌어 세월무상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으며, 5층석탑과 건물터, 주춧
돌만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언제 지어지고 무슨 사연이 깃든 절인지는 낸들 알 도리는 없으나 이곳을 완전 뒤집어 본다면
빙산사의 비밀이 조금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곳은 풍혈과 빙혈이 때에 따라 불어주는 시원한 바람과 따스한 바람이 늘 깃들여져 든든하
게 막을 형성해주니 그야말로 4계절 모두 살기가 좋은 곳이다. 하여 그들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지었던 모양이다.

* 빙산사지5층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산70


▲  잡초만 무성한 빙산사터 (탑 남쪽)

▲  대자연과 세월에 의해 무심히 헝클어진 빙산사터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과 얼음이, 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나오는
신비로운 현장, 빙계리 얼음골(빙혈, 풍혈) - 천연기념물 527호

▲  빙혈(氷穴)

빙산사터를 지나면 빙계계곡의 얼굴인 풍혈과 빙혈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한여름에는 시
원한 바람과 얼음을 내뿜고, 한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나온다는 그 신비의 현장으로 바깥 세
상과는 완전히 반대로 논다. 즉 바깥이 여름이면 속살은 겨울이나 늦가을이고, 바깥이 겨울이
면 속살은 늦봄이나 여름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들 주변을 보면 암괴(巖塊)들이 많다. 암괴
틈에 저장된 차가운 공기가 여름에 외부의 더운 공기와 만나 물방울과 얼음이 만들어지는데,
보통 입춘(立春) 무렵부터 찬 기운이 돌기 시작하여 하지 무렵까지 얼음이 언다. 그러다가 입
추(立秋)부터 얼음이 녹기 시작해 동지 무렵에는 훈훈한 기운이 감돈다.
이처럼 계절을 거역한 대자연의 신묘한 장난이 일어나는 곳은 밀양 얼음골과 진안(鎭安)의 풍
혈냉천(風穴冷泉) 정도가 고작으로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하다. 솔직히 너무 많으면 좀 의미가
없겠지. 그만큼 개체수가 적어야 이들 명소도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법이다.

▲  빙혈로 인도하는 문

▲  빙혈 내부에 걸린 태을영부 부적 돌판

빙혈은 폭 1.5m, 높이 2m, 길이 4.5m의 자연산 굴로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이곳
에서 수행을 했다고 전한다. 그때 이곳은 빙산원(氷山院)이라 불렸는데, 그의 부인인 요석공
주(瑤石公主, 무열왕의 딸)가 그를 보러 여기까지 왔다고 하며, 굴이 얼마나 깊던지 그 끝이
저승에 닿았다는 전설도 있다.

자연 상태로 있던 빙혈은 20세기 후반에 윗사진처럼 크게 손질되었는데, 인간들이 요란하게
손을 댄 탓에 얼음이 어는 것이 예전만은 못한 실정이다. 그래도 그런데로 얼음이 얼고는 있
으니 입춘 이후와 하지(夏至) 사이에 가면 꿈틀거리는 얼음을 만날 수 있다.

옛날 이곳에는 도교 사당인 태일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다보니 빙혈 내부에 '태을영부(太
乙靈符)'라는 도교 스타일의 부적 돌판을 달아서 없어진 태일전을 기리고 있는데, 태을영부란
'선한 사람은 흥하고, 악한 사람은 망하며, 다른 이들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은 살고, 손해를
끼치면 죽는다'는 내용이다. 허나 이 땅에서는 그 반대로 놀아야 흥하고 잘사니 부적의 내용
도 참 의미가 없어 보인다.


▲  얼음이 꿈틀거리는 빙혈 내부

빙혈의 속살로 들어서니 서늘한 바람이 우리를 엄습한다. 여름 제국 시절에 왔더라면 그 바람
이 참 반가웠을텐데, 3월에 왔으니 '그냥 찬 바람이구나~!' 로 감흥은 끝난다.
빙혈 안쪽에 얼음의 공간이 있는데 유리막으로 봉해져 있다. 바로 거기서 찬 바람이 나오며,
얼음 또한 꿈틀거린다. 우리가 갔을 당시는 시기가 좀 이른 탓에 얼음은 별로 없었다.

관람객들은 유리막 앞까지만 진입이 가능하며 내부는 들어갈 수 없다. 아니 빙혈의 보호를 위
해 들어가서는 절대로 안된다. 자꾸 인간들이 손과 발을 대다가는 빙혈도 발끈하여 신비의 현
상을 더 이상 못 보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  빙혈 문 옆에 깃든 글씨들
빙혈을 찬양하고 부처와 상제(上帝),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착하게 살 것을
권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빙계서원은 빙계계곡 하류에 있다.

▲  빙산사지5층석탑 감실 불좌대(佛座臺)

빙혈 옆에는 5층석탑 감실에서 가져온 불좌대가 가로로 뉘어져 있다. 임진왜란 때 빙산사가
파괴되고 감실에 있던 불상(금동불)이 사라지자 지역 사람들이 불상이 앉아있던 네모난 불좌
대를 이곳에 수습했는데, 세로로 눕히거나 절터에 두지 않고 빙혈 옆에 이렇게 가로로 뉘운
것이 꽤 이채롭다.


▲  풍혈(風穴)

빙혈과 빙산사지 사이에는 풍혈이 웅크리고 있다. 이곳은 한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한겨울
에는 따스한 바람이 부는 자연산 선풍기 겸 히터로 바위에 자연산 상태로 있던 것을 마치 석
실고분처럼 돌로 문을 내었다. 돌문 외에는 자연산 그대로로 푸른 이끼가 덥수룩하게 자라고
있어 이곳의 청정함을 보여준다.
풍혈에는 계절을 역행하는 바람 뿐 아니라 얼음도 존재하고 있어 빙혈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데, 문이 뚫려있으나 빙혈의 보호를 위해 절대 들어가면 안되며, 구멍 내부는 빙혈과 달리 좁
은 편이다.


▲  풍혈의 금지된 속살

▲  풍혈에서 꿈틀거리는 얼음

빙혈과 풍혈의 얼음은 입춘부터 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갔을 때가 3월 한복판이니 벌써부
터 저렇게 얼음이 숙성되었다. 얼음이 저리 크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올해는 무척이나 더울
것 같다.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존재들이지만 여름의 위세가 커야만 빙혈과 풍
혈도 제대로 몸을 푸니 여름과 빙혈/풍혈의 관계는 서로를 견제하면서 성장하는 사이이다.


▲  조그만 풍혈

풍혈 주변에는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바위 구멍이 여럿 있다. 앞서의 큰 풍혈이 어미 풍혈이
라면 나머지 조그만 바위 구멍들은 새끼 풍혈이라 할 수 있는데, 바위 사이에서 서늘한 바람
이 쏟아져 나와 여름 제국의 염통을 제대로 얼게 만든다.
비록 여름에 온 것은 아니지만 여름과 겨울 제국을 능히 굴복시키는 빙계계곡 얼음골의 위엄
앞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의 하나로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빙혈과 풍혈을 둘러보니 어느덧 시간은 19시가 되었다. 햇님은 그새 커텐을 치고 그만의 공간
으로 쏙 사라졌고 세상은 거의 검은 도화지로 물들어갔다.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나 충북의 여
러 지역을 거쳐 경북 의성의 빙계계곡까지 정말 배부른 나들이였다.

이렇게 바쁘게 보람찬 하루를 보내니 몸도 피곤하고 배도 고프다. 해도 졌으니 더 이상 답사
도 어려워 안동(安東)으로 바로 달려가 그곳의 명물인 안동찜닭에 곡차(穀茶) 1잔 겯드려 배
를 불리고 안동시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도 전날만큼이나 바쁜 답사 코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의성 빙계계곡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빙계계곡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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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운달계곡)

문경 운달산 김룡사



' 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

▲  문경 김룡사
 



 

여름 제국이 서서히 내리막을 보이던 8월의 끝 무렵. 문경(聞慶)에 있는 운달산 김룡사를
찾았다.
아침이 열리기가 무섭게 도봉동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점촌, 상주행 직행버스에 몸
을 실었다. 허나 아침부터 차가 오지게 막혀 무려 1시간이나 늦게 점촌(店村)에 도착했다.
그래서 김룡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간만에 차이로 놓쳤고, 다음 버스는 무려 2시간 이후에
나 있다.
하여 다른 곳을 급히 물색했으나 딱히 땡기는 대체 장소도 없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기
에도 시간이 애매하여 그냥 계획대로 다음 버스를 타고 김룡사로 들어가기로 했다.

졸지에 2시간 가까운 잉여 시간이 생겨버려 무엇을 할까 궁리했으나 답은 역시 하나 밖에
없었다. 그리 넓지 않은 점촌시내를 간단히 둘러보는 것이다. 시내에 마땅한 명소가 없어
서 점촌전통시장과 점촌역 등 시내를 돌며 중간에 편의점에서 간단히 요기도 하는 등, 억
지로 시간을 죽여가며 시내 북부에 자리한 점촌시내버스터미널로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니
김룡사행 좌석버스가 타는 곳으로 다가와 활짝 입을 연다.
드디어 시간이 되자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터미널을 출발했다. 우리의 버스는
산양과 산북을 거쳐 김룡사까지 곧게 가더니 갑자기 산골로 비집고 들어가 석봉리 지역까
지 강제투어를 시켜주어 점촌 출발 50분 만에 김룡사 종점에 이르렀다.

김룡사 종점에는 여느 유명 사찰과 마찬가지로 식당들이 가득 진을 치고 있는데, 절을 목
전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 같은 그들을 지나치면 그림 같은 숲길이 펼쳐지면서 속세(俗
世)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소독시켜준다.


▲  김룡사로 인도하는 숲길



 

♠  김룡사 숲길, 해우소

▲  녹음(綠陰)에 잠긴 김룡사 숲길

김룡사 주차장(종점)에서 김룡사로 이어지는 숲길을 10분 정도 가면 홍하문 현판을 내건 일주
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일주문 천정에 걸린 '雲達山金龍寺(운달산김룡사)' 현판은 근대 서화가로 명성이 높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것으로 문 주변에는 오래된 비석 2기 등, 비석 3기가
있다. (비석 내용은 모르겠음)


▲  홍하문(紅霞門)이라 불리는 김룡사 일주문(一柱門)과
김규진이 남긴 '운달산 김룡사' 현판

▲  일주문에서 김룡사로 인도하는 숲길
여름 제국의 강렬한 햇살도 우걱우걱 씹어먹을 정도로 숲이 울창하다.

일주문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김룡사입구 3거
리가 나온다. 여기서 김룡사는 오른쪽 전나무
숲길로 들어가면 되며, 직진하면 운달계곡(김
룡사계곡) 상류와 대성암, 양진암 등의 암자,
운달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김룡사 입구에 차곡차곡 구축된 돌탑

요즘 전국적으로 둘레길과 온갖 도보길이 크게
유행을 하면서 이곳 역시 그 유행에 호응하여
'김룡사 둘레길'을 천하에 내놓았다.
김룡사에서 대성암과 화장암, 양진암을 경유해
다시 김룡사로 돌아오는 2.6km의 산길로 그야
말로 김룡사와 산내 암자 순환 코스이다. 대성
암까지는 길이 널널하며 양진암과 화장암은 산
을 좀 타야 되지만 둘레길에 걸맞게 초급 수준
이다.

김룡사 경내 직전에는 늘씬하게 솟은 전나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루고 있다. 비록 긴 거리는
아니지만 소소하게 멋을 풍기며 김룡사에 대한
첫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한낮에도 햇님을 가려 어두울 정도로 그 숲길
을 지나면 경내를 가리고 선 보장문이 마중을
한다.


◀  김룡사를 목전에 둔 싱그러운 전나무숲길


▲  금강문(金剛門)의 역할을 하는 보장문(寶藏門)

솟을대문처럼 생긴 보장문은 김룡사의 2번째 문이다. 하지만 굳이 그의 밑도리를 지날 필요는
없다. 바로 옆에 차량을 위한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보장문은 금강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1960년대에 소실된 것을 옛 건물을 축소하여 중건했
다. 문짝에는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들의 검문을 통과하면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나오며, 그 너머로 김룡사 경내가 층층이 펼쳐진다.


▲  300년 이상 묵은 김룡사 해우소(解憂所)

보장문을 들어서 오른쪽을 보면 고색에 깃든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모습도 단촐하고 요상한
냄새까지 약간 풍기기도 하는데, 그 건물은 300년 이상 김룡사 사람들의 생리적 볼일을 묵묵
히 받아주던 해우소(뒷간)이다.
사진으로 보면 1층 같지만 엄연한 2층으로 윗층에는 볼일을 보는 공간을 남녀 구분하여 만들
었고, 밑층에는 생리적 볼일이 생산한 쾌쾌묵은 물질이 쌓여 있다. 이들 물질은 절에서 퇴비
로 사용했으나,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물질 공급도 여의치 않아 매우 한가한 처
지가 되었다.
그래도 김룡사에서 대웅전, 공루 다음으로 늙은 건물이고 사찰 해우소의 대명사로 통하는 순
천 선암사(仙巖寺) 해우소와 더불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절 뒷간이라 문화유산급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허나 아직까지 그 흔한 지방문화재 등급도 얻지 못했다. 그렇게 하기에는 다
소 껄끄럽고 예민한 냄새가 나는 공간이라 그런 것일까? 뒷간에 대한 이 땅의 사람들의 생각
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뒷간의 역사와 옛 구조를 조사하는 학자, 교수도 거의
없다고 함)


▲  주차장과 경내 밑부분 (보제루와 천왕문)

▲  범종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 천왕문(天王門)


김룡사는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 지형을 이용해 석축을 층층이 구축하고 등급에 맞게 건물
을 두었다. 석축의 높이는 2~3m 정도로 주차장에서 1단 석축을 오르면 범종각과 천왕문이며,
2단 석축을 오르면 보제루 밑도리, 그리고 3단 석축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 중심에 이른다.

▲  하얀 피부를 드러낸 석조 사천왕상
원래 나무로 만든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그 큰 것을 누가 훔쳐가서 돌로 다시
만들었다. 피부들이 너무 흰색이라 마치 하얀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모습 같은데, 끝없이 몰려드는 속세의 분진가루 같은
기운을 막느라 그리 된 모양이다.

▲  운달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연꽃 석조(石槽)

절에 왔으니 약수 한 모금은 마셔야 되겠지. 굳이 목이 마르지 않더라도 경내에 샘터가 있으
면 꼭 바가지를 깨워 마신다. 절의 인심과 산의 넉넉한 마음도 읽어볼 겸 말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마음과 오장육
부가 싹 시원해진다. 그리고 보는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물빛이 우유빛과 비슷하다는 말이 있
다. 그 이유는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와우형(臥牛形)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잠
시 김룡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운달산(雲達山) 남쪽 자락에 안긴 김룡사는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김천 직지사(直指寺)의 말사
(末寺)이다.
588년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창건해 운봉사(雲峰寺)라 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으며,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무려 1,100년 동안 마땅한 사적(事績)도
전하는 것이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심히 회의감을 품게 한다. 1624년에 혜총선사(慧總禪師)
가 중창했다는 기록이 절의 첫 중창 기록이고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가 17세기 중반에 조성
된 대웅전과 삼장탱화 정도라 빠르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늦으면 1624년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진다.

혜총이 그의 제자인 광제(廣濟)와 묘정(妙渟), 수헌(守軒)과 함께 1년 동안 공을 들여 선방,
승방, 법당 등을 완성해 혜총도장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1643년 여름, 화재로 말끔히 소실된
것을 1649년에 의윤(義允)과 무진(無盡), 태휴(太休) 등이 중수했으며, 계속 경내를 확장하여
왜정(倭政) 때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50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로 성장했다.
허나 워낙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골이라 교통이 불편하여 말사 가운데 하나인 김천 직지
사에게 그 감투를 넘기고 그의 그늘로 들어갔다. 1940년에는 요사와 범종각을 중수했으며, 이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절 이름이 운봉사에서 김룡사로 바뀐 것은 조선 후기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
하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봉사 입구인 용소(龍沼
) 부근에 살았다고 한다. 그는 매일 지극 정성으로 불공을 올렸는데, 용소에 살던 용왕(龍王)
이 그 불공에 감동을 먹어 딸을 그에게 시집 보냈다. (또는 김씨가 죄를 짓고 운달산에 숨어
살다가 신의 딸을 만나 혼인했다고 함)
그들 부부는 아들을 낳자 이름을 '김용(金龍)'이라 했으며, 나날이 집안이 번창하니 지역 사
람들은 그를 김장자(金長者)라 불렀다. 또한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던지 마을 이름도 그의 이
름을 따서 김용리라 했으며, 절 이름 또한 김용사로 갈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지원이 상당
하여 그 은혜를 기리고자 절 이름까지 그의 이름에 맞춘 모양이다.
이 전설 외에도 금선대(金仙臺)의 '금'과 용소폭포의 '용'을 따 금룡사(김룡사)로 했다는 설
도 덧붙여 전해온다.

비록 31본산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왕년에는 48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
은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전, 금륜전, 명부전, 보제루, 명부전, 응진전 등 무려 30여 동(부속
암자 포함)을 지니고 있어 여전히 큰 규모를 자랑한다. 부속 암자로는 대성암(大成庵)과 화장
암(華藏庵), 양진암(養眞庵), 금선대 등 4곳이 있는데, 이중 양진암은 1658년에 지어졌고, 나
머지는 18~19세기에 세워졌다. 이들 암자는 모두 비구니 도량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640호로 지정된 '영산회괘불도(靈山會掛佛圖)'와 '사료수집(史料
蒐集, 국가등록문화재 635호)','대본산 김룡사 본말사 연혁 원고(국가등록문화재 636호)'를
위시해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제상(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85호), 대웅전, 영산회상도, 석
불입상, 3층석탑, 양진암 신중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쇠북과 삼장탱화,
해우소, 노주석, 업경대, 지장탱, 시왕탱 등의 오래된 유물이 있다.
또한 1670년에 사인비구(思印比丘)가 만든 동종(김룡사 동종, 보물 11-2호)도 있었으나 1990
년대 중반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해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겨 지금은 없다.

속세의 기운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첩첩한 산골에 묻혀있으며, 절을 둘러싼 숲이 매
우 삼삼하고 바람소리와 새소리, 풍경소리,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소리의 전부일 정도로 적막
하기 그지 없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내음을 누리기에 아주 좋다. 또한 비구니 절집이라 경
내도 참 정갈하고 차분하며, 절을 둘러싼 풍경 또한 일품이라 문경8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끝으로 김룡사에는 대승사(大乘寺)의 불을 껐다는 동자승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역
시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지나치게 영리한 동자승과 그를 의심하는 어른 승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언젠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절의 요지경 갈등이나 일종의 시기심을 전설
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듯 싶다.
 
김룡사가 꽤 잘나가던 시절(고려 때라고 함)에 영리하게 생긴 동자승이 있었다. 어느 날 주지
승이 저녁에 먹을 상추를 씻어 오라고 시켰다. 하여 계곡으로 내려가 상추를 씻고 있으려니
난데없이 동쪽 산 너머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는 것이다. 그래서 상황을 살펴보니 글쎄 산너머
에 있는 대승사에서 불이 난 것이 아니던가.
대승사 승려들은 불을 잡기는커녕, 불에게 단단히 희롱을 당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어 자칫
절 하나가 화마(火魔)에게 통째로 날라갈 판이었다.

동자승은 염불을 외운 다음 물을 소쿠리에 담아 산 너머를 향해 열심히 퍼부었다. 그 물은 동
자승의 주문에 힘입어 대승사까지 태풍의 기세로 날라갔고, 한참 만에 간신히 불길이 잡혔다.
그제서야 동자승은 다시 상추를 마저 씻으려고 했으나 소쿠리로 물을 정신없이 퍼붓는 과정에
서 상추까지 죄다 날라가 거의 몇 잎밖에 남지 않았다. 하여 주지승에게 혼날까봐 걱정이 되
었으나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서둘러 절로 돌아갔다.
한편 주지승은 그를 기다리다가 지쳐 뚜껑이 제대로 폭발한 상태였다. 게다가 배도 무지 고픈
상태였으니 오죽했으랴. 그런데 동자승이 몇 잎 남지 않은 상추를 들고 헐레벌떡 왔으니 안그
래도 폭발한 뚜껑, 더 폭발하여
'왜 늦게 왔냐. 상추는 어디다 팔아먹었냐?'
역정을 내며 그의 종아리를 때렸다, 동자승은 앞
서의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냥 매를 맞고 말았다.

그날 밤, 동자승 옆에 누운 승려가 무슨 일로 매를 맞았냐며 물었다. 그래서 낮에 있던 일을
설명해주었는데, 솔직히 누가 그걸 믿겠는가? 그 말을 들은 승려는 웃기지 말라며 비웃었고,
자기 말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듯싶어 이튿날 새벽, 미련 없이 절을 떠나고 말았다.

동자승이 사라진 것을 안 승려들은 그가 대승사의 불을 껐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두고 서
로 수근거리다가 승려 하나가 대승사에 직접 갔다오기로 했다.
가보니 전날 불이 났다고 했다. 불을 끄지 못해 애태우던 중 어디선가 상추와 함께 물줄기가
날라와 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김룡사 승려들은 동자승이 비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를 찬양했다. 허나 한번 떠난 동자승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 김룡사 소재지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410 (김용길 372, ☎ 054-552-7006)



 

♠  김룡사 대웅전 주변

▲  경내 중심부를 가리고 앉은 콧대 높은 보제루(普濟樓)

보제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2층 건물로 교육이나 설법(說法)을 하는 강당(講堂)
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보통 1층 가운데 칸에 법당 등 경내 중심부로 인도하는 통로를 내나 여
기서는 모두 틀어막고 건물 옆구리에 계단을 내어 법당으로 가도록 했다.
건물이 워낙 장대한 모습이라 절 중심부를 완전히 가리고 앉았는데, 이는 경내 중심부를 외부
에 노출시키지 않고자 그리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흔히 보이는 가람 형태이다.


▲  김룡사의 중심부, 대웅전 주변

보제루 옆구리를 통해 경내 중심부로 들어섰다. 뜨락을 중심으로 정면에 법당인 대웅전이 남
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웅전 맞은편에는 보제루, 뜨락 우측에는 설선당, 좌측에는 종무소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는 해운암(解雲庵)이 있다.


▲  천하에서 가장 큰 방을 지닌 설선당(設禪堂, 경흥강원)

대웅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설선당은 예전 향응각(凝香閣)으로 경흥강원(慶興講院)이라 불리
기도 한다.
이 건물은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70평짜리 온돌방을 가지고 있는데, 장판지만 무려 120
장이 소요될 정도로 천하에서 가장 큰 방이자 최대의 강원(講院) 건물로 위엄이 자자하다. 게
다가 온돌을 때는 아궁이 또한 장대하여 어린이가 서서 들어갈 정도로 크다.
김룡사의 왕년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물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으며, 큰 승려
로 추앙을 받는 성철(性徹, 1912~1993)이 처음으로 설법을 펼쳤던 현장이기도 하다. 경흥강원
이란 현판이 측면에 걸려 있으며, 강당과 숙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조각이 아름다운 서쪽 노주석(露柱石)

▲  단촐한 모습의 동쪽 노주석

뜨락 남쪽에는 이쁘게 조각된 돌기둥 2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들의 정체는 노주석
으로 야간에 불을 피워 그 위에 올려놓거나 숯을 피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용도로 쓰였다.
절에 흔한 석등(石燈)과 서원이나 향교의 정료대(庭燎臺)와 성격이 비슷하며, 화광대(火光臺)
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데, 순 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한다.

김룡사 노주석은 서로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데, 다른 모습 만큼이나 서로 태어난 시기도 다르
다. 조각이 유난히 아름다운 서쪽 노주석은 1940년에 설선당 중수 기념으로 조성되었는데, 높
이 176cm, 불을 피우던 꼭대기 폭은 75cm로 대웅전을 향한 피부면에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글
씨 10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ㅇㅇ十五年 庚辰十月日(경진십월일)'로 앞줄 2자가 고의적으
로 뭉개져 있었다.

고약했던 왜정 때 조성된 탓에 혹시 왜왕(倭王
)의 연호가 쓰이지 않았을까 싶어 1940년 경진
년을 찾아보니 왜왕 소화(昭和) 15년이 있었다.
즉 그때 조성된 것이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입에 담기도 구역질 나는 그 연호를 지우면서
일종의 옥에 티가 되버린 것이다.
그런 점만 뺀다면 이 노주석은 제법 휼륭한 작
품이다. 연꽃봉오리가 늘씬하게 깃들여져 있고
각 면마다 조그만 연꽃잎이 앙증맞게 있다. 그
리고 밑에는 '亞' 무늬가 있다.
동쪽 노주석은 높이 179.5cm, 꼭대기 폭 75cm
로 돌기둥 윗쪽에 구름 무늬가 있다. 그는 강
희(康熙) 51년, 1712년(임진년) 3월에 조성된
것으로 서쪽 노주석보다 단촐한 모습이다.

노주석은 김룡사 외에 대승사, 봉암사(鳳巖寺)
등 문경 지역 고찰(古刹)에서 유난히 많이 나
타나고 있는데, 노주석이 있는 대신 탑이 없는
점도 특징이다. 이는 대승사에서 시작된 문경
지역 사찰만의 개성이라고 보면 될 듯 싶다.

▲  서쪽 노주석에 새겨진 글씨들
왜왕 연호가 빡빡 지워져 있다.


▲  김룡사 대웅전(大雄殿)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453호

남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2중으로 된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이 건물의 6할을 차지할 정도로 육중해 보인다. 그러다보니
건물의 규모도 꽤 크다.
17세기 중반에 지어진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기단 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기둥을 세
워 높이가 하나 같이 일정하지가 않다. 허나 기둥 모두 대웅전의 중심 쪽으로 약간씩 기울어
져 있어 안정감을 주며, 커다란 지붕 처마를 받치고자 공포(空包)를 기둥과 기둥 사이에 촘촘
하게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을 취했다.

비록 영가(靈駕)의 49재 행사로 대웅전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천정에는 천녀(天女), 비
천상(飛天像) 등 다양한 존재들이 그려져 있으며, 1644년에 조성된 삼장탱화가 좌측 벽에 걸
려있고, 성균대사(省均大師)가 그린 영산회상도가 삼세불좌상(석가여래불, 아미타불, 약사불)
의 뒤를 든든히 받쳐준다.
삼세불좌상은 1649년에 설잠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9년에 경북도청에 이들 삼세
불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하면서 불상 뱃속에서 나온 복장유물을 살펴본 결과,
1658년에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아직 삼세불은 비지정문화재임)


▲  대웅전 삼세불좌상과 영산회상도(경북 지방유형문화재 524호)

영산회상도는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비단 바탕에 그려진 탱화로 높이 5.2
m, 너비 4.3m 규모인데, 그림 가운데에 석가여래가 크게 그려져 있고, 그를 중심으로 앞에는
4위의 보살이 일렬로 있으며, 좌우로는 8위의 보살이 서 있다. 그림 상단에는 가섭존자와 아
난존자를 비롯한 10대 제자와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포함한 사자관을 쓴 건달파, 그
리고 사자관을 쓴 야차와 4명의 금강이 있으며, 하단에는 비파, 검, 용과 여의주, 탑 등의 연
장을 쥐어든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이 탱화는 제작 당시부터 이곳 대웅전 삼세불좌상의 후불벽에 꾸준히 있었다. 화기(畵記) 부
분이 훼손되어 제작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룡사사료수집'에 의하면, 1648년에 제작된 불화
들이 낡아 1803년에 적지 않은 탱화를 새로 제작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때 사불산 화승
홍안(弘眼)과 신겸(愼謙)을 중심으로 18명이 탱화 제작에 참여했다.

영산회상도에 나타난 사불산화파의 특징을 살펴보면, 측면향을 한 보살의 얼굴형은 타원형에
눈 부분은 들어가고 이마와 볼을 튀어나오게 표현했고, 채색은 홍색과 녹색을 선명하게 대비
되도록 진채(珍菜)를 사용했으며, 보살과 사천왕 등의 장신구와 지물은 돋음기법에 금을 칠했
다. 특히 존상 구성에서 지장보살이 권속으로 표현된 점이 가장 주목된다. 지장보살은 아미타
불회도에서 8대 보살로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나 19세기 전반 사불산화승들은 지장보
살을 주요 권속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김룡사 영산회상도는 조선 후기 후불도 양식을 고수하
는 한편 화면 구성과 존상 구성 및 상호 표현, 채색법 등에서 사불산화파의 특징적인 도상과
화풍이 잘 드러난 불화로 바로 그런 점 때문에 2018년 12월 뒤늦게나마 지방문화재에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측면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종무소와 선방의 역할을 하는 해운암


▲  괘불(영산회괘불도)이 담긴 길쭉한 괘불함 (대웅전 뒷쪽)

1703년에 제작된 김룡사 영산회괘불도는 국가 보물 1640호로 지정된 비싼 몸이다. 비싼 만큼
이나 만나기도 여간 힘들지가 않아 석가탄신일과 일부 행사 때만 반짝 얼굴을 드러낼 뿐이며,
대부분의 날을 괘불함 속에서 지낸다. 괘불이 워낙 큰 그림이라 그의 보금자리 또한 길쭉한데,
기분 같아서는 그 함을 열어 괘불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만 그럴 위치가 되지 못한다.

괘불의 신상이 적힌 화기에는 제작시기와 기원문, 시주자 5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김
룡사 대신 운봉사로 나와있어 18세기까지 운봉사로 불렸음을 알려준다.


▲  빛바랜 쇠북 <청동금고(靑銅金鼓)>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밥 시간과 예불 시간, 기타 주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쓰인다.



 

♠  김룡사 마무리

▲  김룡사의 창고인 공루(空樓)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98호

해운암 뒷쪽에는 고색이 제법 느껴지는 2층짜리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그는 절의 살림살이와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인 공루로 정면 4칸, 측면 1칸의 누각 형태를 취하고 있다. 1624년에 지
어져 여러 번 중건을 거쳤는데, 2층에는 1칸, 1층은 1칸, 2칸, 1칸 규모로 방이 나뉘어져 있
으며, 원래 자리를 지키면서 절 창고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런 가치가 있음에도 오랫
동안 비지정문화재에 서러움을 간직하며 살다가 2022년 6월에 이르러 경북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얻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김룡사에는 특이한 늙은 존재들이 많다. 앞서 해우소도 그렇고, 노주석도, 그리고
창고까지. 역시 김룡사가 예사롭지 않은 큰 절임을 귀뜀해준다.


▲  앞에서 바라본 공루

▲  김룡사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보금
자리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다고 하며
석가여래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해 3존
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작고 귀엽다.
16나한 또한 다들 제각각의 모습으로 옷과 얼
굴, 머리스타일, 포즈가 모두 틀리며, 그들 뒤
로 16나한도가 걸려있다.

그리고 좌우 모서리에는 신중도와 독성도가 걸
려 있는데, 독성도(獨聖圖) 같은 경우 그 주인
공이 나한의 일원인 나반존자(那畔尊者)이기
때문에 이곳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  응진전 석가3존상

▲  응진전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512호

응진전 식구 중 16나한상과 제석천 2구, 사자(使者) 2구가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이란 이름
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6나한상은 가부좌(跏趺坐)를 튼 모습으로 각자의 표정, 옷차림, 연장을 취하고 있으며, 보관
(寶冠)을 눌러쓰고 홀을 쥐어든 제석천 2구와 두건을 쓰고 두루마기를 든 사자 2구가 그 주변
에 자리한다. 이들은 1709년에 조각승 수연(守衍) 등이 조성한 것으로 수연의 스승인 승호파(
勝湖派) 양식에 기반한 17세기 말~18세기 초기 조각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  김용사 금륜전(金輪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금륜전이란 칠성각의 다른 이름이다.

▲  금륜전 식구들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
금륜전이란 이름답게 칠성(치성광여래) 식구를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산신 식구,
오른쪽에는 혼자 유유자적하는 독성이 자리해 있다. 독성탱 같은 경우
앞서 응진전에 있음에도 이곳에도 별도의 독성탱을 두었다.

▲  극락전(極樂殿)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보금자리로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아미타후불탱

▲  상선원(上禪院)

상선원은 이름 그대로 윗 선원으로 성철 등 많은 선승(禪僧)들이 머물던 곳이다. 허나 지금은
요사로 쓰이고 있으며, 고승(高僧)들의 진영(眞影) 35점과 1830년에 조성된 시왕탱, 1858년에
조성된 지장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  김룡사 경내에서 석불입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하얀 들꽃이 가득해 마치 소금이 뿌려진 듯 하다.

▲  소나무숲에 자리한 김룡사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67호

경내 동쪽 산자락에는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숨겨져 있다. 경내에서 그곳까지는 산길이 살짝
이어져 있는데, 3층석탑은 산길에서 다소 떨어진(그래봐야 길에서 다 보임) 소나무숲 바로 앞
에 외로이 떨어져 있다.

이 탑은 1709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체 높이는 2.85m이다. 바닥돌과 1층 기단, 3층 탑신(塔身)
,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으로 탑과 석불입상을 경내 중심이 아닌 경내 뒷쪽 구석
에 둔 것은 그들이 꼴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단죄하고 운달산의 촉맥(
促脈)을 보우하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유는 단순히 그것
뿐이다.
한때 이들을 천왕문 앞으로 옮기기도 했으나 절의 전통을 지키고자 1989년 10월에 다시 원위
치시켰다.


▲  석불입상으로 인도하는 계단 (사진 중앙에 석불이 있음)

▲  소나무숲에 자리한 석불입상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55호

김룡사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석불입상이 고적하게 자리해 있다. 8각형 기단 위에 연화
대좌를 깔고 그 위에 2.27m의 석불을 올렸는데, 머리에 주름선이 많이 있어 나발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평온한 모습으로 눈썹이 구부러져 있고, 눈은 가늘게 떠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
으며, 코는 약간 오똑하고, 입은 살짝 다물고 있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무엇이든
들을 자세가 되어 있다.
몸통에는 얕은 새김이 이리저리 주름선을 자아내고 있는데, 두 손에 약합 같은 것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알려준다. 그의 아랫도리는 장대한 세월에 선이 거의 지워졌다.

그는 1709년에 조성된 것으로 거의 민불(民佛) 스타일의 석불이다. 3층석탑과 함께 비보풍수
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인데, 절 자리가 와우형혈(臥牛形穴)이라 그 이름에 걸맞게 소를 모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여 당시 유행했던 약사신앙을 내세워 이곳에 석불입상(석조약사여래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덕분인까? 31본산에서 밀려난 것 외에는 절에 딱히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비보풍수
의 덕인지 그냥 운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보장문 앞에 펼쳐진 전나무숲길

이렇게 김룡사를 둘러보니 1시간 반 정도가 정말 훌쩍 가버렸다. 나름 꼼꼼하게 봤다고 여겼
으나 나중에 보니 명부전(冥府殿)을 빼먹었다. 거기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지장3존상이
있는데, 명부전이 경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보니 보기 좋게 놓친 것이다. 영산회괘불도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적이야 원래부터 만나기 어렵고 아무나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마음을 비웠지만 명부전은 늘 열려있는 공간이라 정말 곡소리를 내고 싶은 심정이다.


▲  조촐한 모습의 김룡사계곡(운달계곡)

▲  김룡사를 뒤로하며 (김룡사 숲길)

김룡사를 나와서 부속암자도 둘러보려고 했으나 버스 시간이 임박해 그만 발길을 돌렸다. 여
기서 버스 하나 놓치면 2시간 이상 강제 대기를 해야 되고 그리되면 이후 일정에 차질이 생긴
다, (이후에 들릴 곳이 있었음)
그래서 대성암 등의 부속암자는 쿨하게 포기하고 절입구에 조촐하게 펼쳐진 김룡사계곡(운달
계곡)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쉰 다음, 자리를 떴다. 명부전 목조지장3존상도 놓치고 부속 암자
들도 싹 놓쳤으니 결국 다시 와야 될 명분을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과 또 인연이 닿을지
는 솔직히 장담하기가 어렵다. 아직도 나를 못참게 하는 미답처(未踏處)들이 천하에 수두룩하
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늦여름 김룡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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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릉 나들이, 경주 괘릉 (경주 원성왕릉)

경주 괘릉



' 경주 괘릉(원성왕릉)
'
경주 괘릉(원성왕릉)
 



 

여름이 한참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한복판에 서라벌의 옛 도읍, 경주(慶州)를 찾았
다.
경주는 그 유명한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부터 이름 없는 문화유적까지 무려 160곳 이상
을 답사했다. 하지만 그렇게 다녔음에도 아직도 미답지(未踏地)가 상당하여 내 마음을 여
전히 두근거리게 하면서도 두렵게 한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적당한 곳을 물색하다가 울산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괘릉
을 찾기로 했는데, 그곳은 이미 10여 년 전에 인연을 지은 곳으로 괘릉과 그 인근에 자리
한 미답지 절터 2곳도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기로 했다.



 

♠  신라 왕릉의 백미, 경주 원성왕릉<元聖王陵, 괘릉(掛陵)>
- 사적 26호

▲  도로에서 본 괘릉 능역

괘릉 서쪽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옆에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무는 관광안내소(이하 안내소)가
있다. 주차장은 평일이라 공간의 여유가 넘치며, 안내소에는 괘릉을 맡은 해설사가 답사객이
없는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인근 문화유적 관련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괘릉 주변으로 길게 담장을 둘렀고, 삼문(三門)을 통해 괘릉 능역(陵域)으
로 들어섰다. 관람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겨울은 17시)였으며, 관람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없었다. 허나 20년 가까운 세월이 무심히 흐르면서 괘릉을 지키던 담장은 사라지고, 담장 대
신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푸른 철책이 도로와 화표석 사이에 둘러져 있다. 해설사
에게 이유를 물으니 경주시청에서 관람 편의를 이유로 담장을 철거했다고 한다.

담장 철거로 그 안에 가려진 괘릉은 그 속살을 시원히 드러냈으나 그래도 신라 후기 제왕(帝
王)의 능인데, 능을 보호하고, 능역과 속세를 가르는 담장이 필요하다 여겨진다. 특히 문화유
산 도난이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보물급의 지위를 간직한
괘릉의 석인(石人)과 석사자상, 화표석 같은 것은 아무리 무겁고 견고한 돌이라고 해도 방심
은 금물, 그들 또한 도난의 마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멋드러지게 우거진 송림(松林)에 둥지를 튼 괘릉은 북쪽에 능이 있고, 능이 바라보는 남쪽에
넓게 터를 닦아 좌우 2열로 석인 2쌍과 석사자 2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두어 서로 마주보
게 했다. 화표석 앞에는 도로가 굽이쳐 지나가는데, 이는 괘릉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키 작
은 철책을 둘러 경계로 삼았으며, 화표석과 도로 사이가 너무나 가까워 옥의 티를 진하게 풍
긴다.
도로를 길 남쪽 하천 너머로 밀어내고, 기존 도로에는 잔디와 소나무 등을 심어 능역을 확장
하고 담장을 두르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해설사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니 안그
래도 경주시에서 그럴 계획이 있다고 그런다. (계획만 있는 모양임)


▲  서쪽 석물들 (왼쪽부터 화표석, 석인들, 석사자들)

괘릉은 경주에 기러기처럼 널린 신라 고분의 하나이다. 그냥 커다란 봉분만 있던 신라왕릉이
무열왕릉(武烈王陵)에서 최초로 능비(陵碑)가 생기는데, 이는 당(唐)나라 능묘(陵墓) 양식에
군침을 흘리며 도입했기 때문이다.
신문왕릉(神文王陵)에 이르면 봉분 아랫도리에 호석(護石)을 두르면서 무덤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성덕왕릉(聖德王陵)에는 비어있던 호석 판석(板石)에 12지신상을 만들고, 무덤 주
변을 돌난간으로 두르며, 석상(石床)과 함께 석인 2쌍과 석사자 1쌍을 능 앞에 펼쳐놓는다.
거기서 더 발전한 모습이 바로 괘릉과 흥덕왕릉(興德王陵)이다. 그중에서도 괘릉이 신라 왕릉
의 백미(白眉)라 통할 정도로 완비된 능묘제도를 자랑하는데, 그래서 봉분만 달랑 있는 다른
왕릉과 달리 볼거리가 많다.

그런데 다른 왕릉은 '~~왕릉'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괘릉은 그런 이름 대신 괘릉이란 이
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여 유일하게 능호(陵號)를 가지고 있는 셈인데, 오래 전부터 흘러오
던 속설(俗說)에 따르면 무덤 자리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의 원형을 살리면서 제
왕의 관을 수면 위에 걸고, 흙을 쌓아 능을 닦았는데, 그런 연유로 걸어놓는다는 뜻의 괘릉이
되었다는 것이다.
괘릉은 신라가 망하면서 속세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누구의 능인지도 모른 채, 적당한
기록에 오르지도 못하고 버려진 것이다. 그러다가 1669년에 작성된 '동경잡기(東京雜記, 동경
은 고려 때 경주의 이름)'에 괘릉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경주부(慶州府) 동쪽 35리(당시 10리
는 5km)에 떨어진 주인을 모르는 능이라 나오면서 앞서 언급된 괘릉의 유래가 나와있다.

18세기에 이르면서 신라 왕실의 후예인 경주박씨와 경주김씨, 경주석씨들은 앞다투어 경주 땅
곳곳을 들쑤시며, 그들의 조상묘 찾기 프로젝트를 벌였다. 그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
유사(三國遺事)를 참조하여 묘를 찾았는데, 꼼꼼하게 살피지 않고 대충 기록에 나온 자리를
맞춰가면서 조상묘로 삼았다. 하여 그 시절에 이름 없던 신라 고분 20여 기가 졸지에 '~~왕릉
'이란 가면을 쓰게 된 것이다. (그중에 성덕왕릉, 흥덕왕릉, 무열왕릉 등은 99% 이상 맞음)

한편 경주김씨는 괘릉에 군침을 흘리며 신라 제왕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는 문무왕(文武王)의
능으로 삼는 어거지성을 발휘한다. 어느 기록에도 이곳이 문무왕릉이라 나오지도 않았는데 말
이다. 그들은 이곳이 문무왕릉의 허묘(墟墓)일 수 있다면서 비석을 세우고 매년 제를 올렸다
고 한다.
그렇게 문무왕릉이란 가면을 강제로 눌러 쓴 괘릉은 왜정(倭政) 때 이르러 정체성에 대한 중
대한 수정을 받게 된다. 1931년 입실소학교에서 인근 말방리 절터로 소풍을 갔는데, 거기서
깨진 비석 조각을 발견했다. 하여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달려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
總覽)'과 대조하여 비석 조각의 수수께끼를 풀었는데, 그 결과 그곳은 원성왕과 인연이 깊은
숭복사터로 밝혀졌다.
또한 비문에 괘릉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어 원성왕릉 설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허나 경주
김씨 측은 이를 끝까지 무시했으나 1968년 동해바다 대왕암이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으로
밝혀지고 언론사에서 크게 특집으로 다루면서 괘릉을 포기하게 된다.

그 이후 괘릉<전(傳) 원성왕릉>이라 불리다가 이제는 숭복사비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
록을 토대로 완전히 원성왕릉으로 99% 이상 굳어진 모양이다. 해설사도 이곳이 원성왕릉이 맞
다고 그런다. 예전에는 아리송하다는 뜻의 전(傳)을 붙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전'도 쏙 사
라져버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붕어(崩御)하자,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火葬)을 했다고 하며
, 삼국유사에는 능이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
(崇福寺)라고 한다. 마침 숭복사가 근처에 있었고, 주변에 마땅한 고분이 없으며, 최치원(崔
致遠)이 쓴 숭복사비에는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鵠寺=동곡사)가 괘릉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신하들은 원성왕에게 곡사 자리가 능 자리로 좋다고 추천했으나 왕은 거절했다. 허나 신하들
의 계속되는 설득에 곡사를 매입하여 능을 조성했으며, 절은 지금의 숭복사 자리로 옮겨져 헌
강왕(憲康王) 때 대숭복사(大崇福寺, 지금의 숭복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원성왕의 능자리 매입은 한국경제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영토 전체가 제왕의 땅
이라는 이른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돈을 주고 그 자리를 매입했기 때문
이다.
얼마의 돈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잠들 자리이고 그곳에 신라가 숭배하던 불교 사원
이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재정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괘릉의 주인인 원성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동쪽 석물들 (오른쪽부터 화표석, 석인들, 석사자들)

※ 독서삼품과로 유명한 신라 38대 군주, 원성왕<元聖王 ?~798 (재위 785~798)>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金敬信)으로 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아버지는 김효양(金孝讓)
으로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자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존했으며,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
人, 혹은 지오부인<知烏夫人>) 박씨로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올렸다. 부인은 숙정부인 김씨(
淑貞夫人 金氏)로 각간 김신술(金神述)의 딸이다.

780년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이찬 지정(志貞)의 난을 평정했으며, 그 과정에서 혜공
왕(惠恭王)이 살해되고 만다. 그래서 김양상에게 힘을 실어 재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신라
37대 군주인 선덕왕(宣德王)이다. 그 공로로 김경신은 상대등(上大等)에 올라 그 이름을 크게
떨친다.
한편 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은 세력과 덕망을 키우며 대권을 노리고 있었는데, 김
경신보다 서열도 높았고 세력 또한 컸다. 마침 선덕왕이 후사도 없이 붕어하자 중신(重臣)들
은 너도나도 김주원을 추대하기에 이르고, 김경신의 자리는 크게 위협을 받게 된다. 그와 관
련해서 재미있는 설화가 한토막 전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선덕왕 시절에 김경신은 묘한 꿈을 꿨다. 그는 일상적으로 쓰던 두건를 벗고 소립(素笠, 갓)
을 썼으며, 12줄 거문고를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그래서 점쟁이에
게 물어보니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을 잃는다는 뜻이며, 삿갓을 쓴 것은 목에 칼을 쓰는 것입니다. 12줄
거문고를 든 것은 포박되는 것이며,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영 좋지 못한 흉몽이라는 것이다. 그 말에 제대로 토라진 김경신은 종일 집에 틀어박혀있
었고. 그 와중에 그와 무척 가까운 여산(餘山)이 찾아왔다.

여산이 김경신의 주눅 든 모습에 이유를 물었다. 대답을 회피하던 김경신은 결국 꿈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그 이야기가 끝나자 갑자기 옷깃을 여미며 자신에게 큰 절을 올리는 것이다.
김경신은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여산이
'그 꿈은 공의 지위가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후일에 공이 출세하면 저를 잊지 마십시요!'
김경신이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건 무슨 소리요?'

'두건을 벗는 것은 윗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이며, 삿갓을 쓴 것은 왕관을 쓴다는 뜻입니다. 12
줄 거문고를 손에 쥔 것은 공이 왕의 12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공은 내물대왕
의 12세손이 아닙니까? 또한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물의 도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김경신은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며
'무열대왕의 6세손인 김주원이 떡 버티고 있는데, 나에게 그런 자리가 오겠소?'
'저와 공은 친분이 두텁습니다. 어찌 감히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믿어주십시요. 일단 물과 인
연을 두텁게 하기 위해 알천으로 나가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산의 권유에 따라 매일 알천(경주 시내 북쪽에 흐르는 하천)에 나가 기도를 했다. 말은 기
도이지만 아마도 중신과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고 친분을 두텁게 쌓는 작업이었을 것
이다.

785년이 되자 선덕왕이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귀족들은 서열이 제일 높고, 덕망
과 세력을 두루 갖춘 김주원을 제왕으로 추대했다. 그때 김주원은 알천 북쪽에 살고 있었고,
김경신은 남쪽에 있었다.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 왕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알천이 범람을 하
고 말았다. 중신들과 김주원은 비가 그치길 기다렸으나 폭우는 7일이나 계속 되었다. (폭우라
고 하지만 김경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그의 길을 알천에서 막은 것을 비유한 듯 싶다)
상황이 이러자 중신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늘만 쳐다보며 대책을 논의했는데
'하늘이 주원공을 원하지 않아 이런 홍수를 내린 것이 틀림없소! 상대등인 경신공은 선왕 폐
하의 아우로 덕망이 높고, 임금이 될 기상을 갖추고 있으니 그를 추대하는 것이 어떻소?'
이렇게 논의가 나오자 다시 중의를 거쳐 결국 김경신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어지럽게
내리던 큰 비는 뚝 멈추었고, 백성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반면 김주원은 알천을 건
너지도 못하고 김경신에게 왕위가 돌아갔다는 말에 격분해 강릉(江陵)으로 내려갔다.
이에 김경신은 그가 모반을 꾀할까 두려워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 달랬으나, 나중에 김
주원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이 부친의 한을 갚는다며 웅진(熊津, 공주) 일대에서 반란을 일
으켰다.

이렇게 중신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왕위에 오른 김경신은 바로 그해 아들 김인겸(金仁謙)을 태
자(太子)로 봉하고, 시조대왕<김알지(金閼智)인듯>, 태종무열왕, 문무왕, 조부(祖父)인 흥평
(興平)대왕, 부친 명덕대왕을 제사지내는 5묘를 세웠다. 또한 문무백관의 작위를 1급씩 올려
주고, 충렴(忠廉)을 상대등에, 이찬 제공(悌恭)을 시중(侍中)으로 삼았으며, 총관(摠管)이란
이름을 도독(都督)으로 바꿨다.

786년 4월, 동부 지역에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모두 상했으며, 김원전을 당나라에 보
내 조공(朝貢)을 건네자. 당나라 덕종(德宗)이 왕을 칭송하는 조서(詔書)와 함께 여러가지 선
물을 보냈다.
9월에는 도성에 기근이 심하자 곡식과 조 33,240석을 풀었으며, 10월에 33,000석을 더 풀었다
. 그리고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치자 굴압현령의 벼
슬을 내렸다.

787년 2월, 도성(都城)에 지진이 생기자 왕은 신궁(神宮)에 제를 지내고 죄수를 방면했다. 7
월에 황재(蝗災)가 들어 농사를 망쳤다.

788년 봄, 그 유명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시행했다. 독서삼품과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
傳)과 예기(禮記), 문선(文選)에 정통하며, 논어(論語), 효경(孝經)까지 두루 섭렵한 자를 상
품(上品)으로 삼고, 곡예와 논어, 효경에 밝은 자를 중품(中品), 곡예, 효경만 읽은 자를 하
품(下品)으로 삼았다. 그리고 오경(五經)과 삼사,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모두 외운 사람은
특별히 등급을 초월하여 썼다. 그 이전에는 활과 무예로 인재를 뽑았는데, 그것이 확 변한 것이다.
가을에 서쪽 지방에 한재와 황재가 들고 도적이 들끓자 사람을 보내 백성을 위무했다.

789년 1월, 한산주(漢山州)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생하자 조와 곡식을 보냈으며,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또 상했다. 9월에 자옥(子玉)을 양근현(경기도 양평) 소수(小守)로 삼자, 사람들
이 그는 문적(文籍) 출신이 아니라며 반대했으나 시중(侍中)이 그는 당나라에서 공부를 한 사
람이니 괜찮다고 권하자 왕은 그대로 시행했다.

790년 정월, 종기를 시중에 명하고,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고자 전주(全州)를 비롯한 7주의
백성을 징발해 공사에 들어갔다. 웅천주(熊川州, 공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으며, 3월에
일길찬(一吉粲) 백어를 발해(渤海)에 사신으로 보냈다. 5월에 곡식을 풀어 한산주와 웅천주
백성을 구제했다.

791년 태자 김인겸이 죽자 시호를 혜충태자(惠忠太子)라 했으며, 이찬 제공이 불만을 품고 반
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처단했다.
10월에 폭설이 도성에 내려 얼어죽는 사람이 있었으며, 시중 종기를 면직시키고 혜충태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김준옹<金俊邕, 이후 소성왕(昭聖王)>을 시중으로 삼았다. 손자를 시
중에 삼을 정도라면 원성왕도 제법 나이가 있었다는 소리이다.

792년 7월, 당나라 제왕에게 미녀를 보냈다. 8월에는 왕자 김의영(金義英)을 태자로 봉했으며
,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世强)을 상대등에 삼았다. 그리고 시중 김준옹이 병으로 면
직되자 이찬 숭빈을 시중에 삼았다.

793년 8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벼가 쓰러졌다.

794년 2월, 지진이 생겼고, 태자 김의영이 죽자 시호를 헌평태지(憲平太子)라 했다. 시중을
숭빈에서 언승으로 교체했으며, 7월에 봉은사(奉恩寺)를 창건했다. 한산주에서 하얀 까마귀를
진상했으며, 궁궐 서쪽에 망덕루(望德樓)를 지었다.

795년 정월, 손자 김준옹을 태자로 봉했다. 4월 한재가 들자 죄수를 친히 살폈으며, 8월에 서
리가 내려 곡식이 상했다.

796년 봄, 도성에 기근이 심하고 전염병이 생기자 창고의 양곡을 풀어 구제했다. 4월에 동생
인 김언승(金彦昇, 나중에 헌덕왕)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이찬 지원을 시중으로 삼았다.

797년 9월, 도성 동쪽에 황충(蝗蟲)으로 농사를 망쳤고, 홍수로 산이 무너졌다. 시중을 김삼
조로 갈았다.

798년 3월, 궁궐 남쪽 누교가 화재를 입었고,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이 부딪쳤다. 6월 한재
가 있었고, 굴자군(屈自郡, 경남 창원) 대사(大舍) 석남오(石南烏)의 아내가 3남 1녀의 쌍둥
이를 낳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29일 왕이 붕어하니 시호(諡號)를 원성(元
聖)이라 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 삼국유사에는 토함산 서
쪽 동곡사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원성왕은 신라의 마지막 성군(聖君)이자 막바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왕이다. 비록 홍수와 한재
, 서리 등의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나 농사를 망치긴 했지만 수시로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
했으며, 벽골제 등의 수리시설을 증축하여 농사의 편의를 도모했다.
그는 자식들의 명이 짧아 태자로 삼은 두 아들이 몇 년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끝내는 손자
를 태자로 삼아 후계를 잇게 했다. 게다가 아들과 손자, 동생 등 가족과 근친 가족을 주요 요
직에 앉혀 자신의 왕권강화에 주력했다. 그래서 그 덕에 신라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는 괘
릉을 만들어 편히 발 뻗고 눕게 된 것이니 그의 권력과 지지 기반이 그만큼 튼튼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당나라에 조공을 보내고, 심지어 미녀까지 보내면서 당나라에 아부를 떨었으나, 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살던 신라의 호국용(護國龍)을 몰래 물고기 3마리로 둔
갑시켜 자기네 나라로 빼돌리려 한 것을 그들을 족쳐 빼앗아왔다는 설화가 있어 당나라와 적
지 않은 충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호국용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나라
에서 무척 탐을 내거나 부담을 가진 존재가 아닐까 싶으며, 그 이후로 당에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이 없다.
또한 주목할 것은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다. <단순히 북국(北國, 발해)에 사신을 보냈
다고 했을 뿐, 자세한 건 모름>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화엄종(華嚴宗) 승려 묘정(妙正)을 내전(內殿)에 두어 늘 곁에 부렸다
고 하며, 봉은사 등의 절을 창건했다.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는지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다고 하는데,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허나 내용이
전하지 않으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자식들로는 태자로 임명되었다가 죽은 두 아들 외에 대룡부인(大龍夫人)과 소룡부인(小龍夫人
) 등 두 딸이 있었다.


▲  귀여움이 돋보이는 석사자상



 

♠  무덤치고는 볼거리가 풍부한 괘릉 ①
석인, 석사자 둘러보기 - 보물 1,427호

▲  동쪽 석물들 (오른쪽부터 화표석, 석인들, 석사자들)

괘릉 앞이라고 하지만 봉분(封墳)과는 다소 거리를 두어 화표주 1쌍과 석인 2쌍, 석사자 2쌍
이 2열로 서로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이들은 왕릉을 지키며 수식하는 석물들로 그 가치가
매우 상당하여 2009년 괘릉에서 분리하여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일괄(一括)'이란 이름으로
따로 국가 보물 1427호로 삼았다. 괘릉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 존재들로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괘릉의 존재는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  무뚝뚝하게 서 있는 동쪽 화표석

괘릉 석물 중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화표석(華表石)이라 불리는 8각형의 돌기둥이다. 무
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망주석(望柱石)이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처음에는 왕릉에서만 주로
쓰다가 점차 지배층과 민간으로 확산되었다. 그의 역할은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것으로 그의
기원은 인도 아소카왕의 석주(石柱)라고 한다.
이후 중원대륙(서토)으로 넘어가 왕릉의 화표석으로 절찬리에 세워지게 되는데, 보통 2개를
세웠다. 이후 당나라 따라하기에 분주하던 신라가 이를 가져와 괘릉에 처음으로 만들었다.
화표석을 갖춘 신라왕릉은 괘릉 외에 흥덕왕릉에도 있으며, 고려 태조(太祖)의 현릉(顯陵)에
도 등장한다.

화표석 위쪽에 얇게 솟은 부분이 있는데, 다른 조각이 있었던 듯 싶으며, 달리 두드러진 조각
이나 새김은 없다.


▲  서쪽 서역(西域) 석인

▲  동쪽 서역 석인

화표석 옆에는 이국적이면서도 조금은 무섭게 생긴 석인(石人)이 바닥돌 위에 서 있다. 서쪽
석인은 좀 덜하지만 동쪽 석인은 정말 우락부락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들은 예전에는 무
인석(武人石)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그냥 석인이라 한다.
그의 얼굴을 보면 이 땅에 흔한 얼굴은 아니며, 서역 사람을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
로 서역 무역상이나 서역 출신 무인(武人) 또는 관리로 보고 있다. 근래에는 아랍인이나 위구
르인, 소그드인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으며, 이들 석인을 내세워 신라와 서역, 아랍과의 활
발한 교류를 증명하는 존재로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처용(處容)의 예처럼 신라로 넘어와 관
리가 된 서역, 아랍인들이 많다고 함>

신라 왕릉에 석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성덕왕릉이다. 그 다음이 바로 괘릉인데, 괘릉 석인의
포즈를 가만히 보면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좀 비슷해 보인다. 오른손은 거의 가슴 앞에 대고
싸움을 뜰 기세를 취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길다란 무엇인가를 쥐고 있는데, 그곳은 몽둥이라
고 한다. 머리에는 아랍인들이 많이 쓰는 듯한 터번을 쓰고 있으며, 허리에는 복주머니가 달
려 있는데, 산낭으로 보기도 한다.


▲  서쪽 석인의 얼굴
커다란 눈과 코, 다물어진 입은 약간 구부러져 있다. 턱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는데, 마치 털을 보는 듯 하다.


서역인 옆에는 문인석(文人石)을 닮은 석인이 서 있다. 처음에는 문인석이라 불렸으나 칼과
갑옷을 착용하고 있어서 지금은 그냥 '석인'이라 부른다. 즉 문무인(文武人)을 같이 표현한
것이다. 서쪽 석인은 제법 날카로운 맵시를 지닌 위엄 돋는 인상으로 웃음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표정이나 오른쪽 석인은 다소 멀뚱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들은 앞에는 관복을 입고 뒤에는 양당개란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있다. 머리는 관을 쓰고
있는데, 벌이 새겨져 있으며, 벌은 용감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얼굴과 수염이 조금은 이국적
이라 이를 두고 위구르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서쪽 문인석의 매서운 얼굴

▲  동쪽 석사자

석인을 지나 왕릉과 좀 더 가까워지면 석사자 2쌍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정말 귀엽게도 앉아
있는데, 봉분 주변에 있던 것을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자하면 호랑이와 더불어 용맹의
대명사이지만 여기서만큼은 그것도 통하지 않는다. 얼굴하며, 앉아있는 모습하며, 꼬랑지까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게다가 석인처럼 크지도 않고 조그만하니 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  동쪽 석사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표정이 완전 '씨익~'이다.



 

♠  무덤치고는 볼거리가 풍부한 괘릉 ②
왕릉 봉분과 12지신상(十二支神像)

▲  난간석 주변에 놓여진 저 돌의 정체는 무엇일까?

괘릉 능역 가장 뒤쪽에 원성왕이 잠들어 있는 괘릉 봉분이 주변 소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두툼
히 솟아 있다. 훍으로 만든 둥근 모양의 봉토분(封土墳)으로 봉분 주위로 난간석이 둘러져 있
는데, 봉분 호석(護石)에는 12지신상이 각 방향 별로 새겨져 있다. 신라가 당나라 왕릉을 적
지 않게 참조를 했지만 12지신상 만큼은 신라의 독창적인 양식으로 12지신상을 갖춘 다른 신
라 무덤(경덕왕릉, 헌덕왕릉, 진덕여왕릉, 성덕왕릉, 김유신묘, 구정동 방형분 등)과 달리 조
각 수법이 매우 수려하고 건강상태도 좋다. 이들은 왕릉을 수호하고 꾸미는 역할을 하며, 각
자의 연장과 갑옷을 갖추고 있다.

봉분은 지름 23m, 높이 6m로 봉분을 받치는 호석은 바닥돌 위에 판석(板石)으로 된 면석(面石
)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우주석을 배치했으며, 2칸 간격으로 12지신상을 조각했는데, 성덕
왕릉은 12지신상 상당수가 훼손되었으나 이곳은 거의 멀쩡하다.
호석 밖에는 길이 110㎝, 너비 40㎝의 부채꼴 판석(板石)을 정연하게 깔아 회랑(廻廊)으로 만
들었으며, 회랑 둘레에 높이 1.7m의 돌기둥을 세워 돌난간을 둘렀다. 돌기둥은 25개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에 상하 2단으로 원공(圓孔)을 뚫어 끼웠던 관석(貫石)은 거의 유실
되었다.


▲  12지신상 ①

▲  12지신상 ②

▲  12지신상 ③

▲  12지신상 ④

▲  12지신상 ⑤

▲  12지신상 ⑥

▲  12지신상 ⑦

▲  12지신상 ⑧

▲  왕릉 앞에서 바라본 능역
몇몇 소나무들은 하늘로 곧게 솟지 못하고, 구부러지게 자라났다. 이들은
혹시 원성왕을 좌우에서 모시던 신하들의 화신(化身)은 아닐까?


괘릉을 정신없이 둘러보고 해설사가 있는 안내소로 갔다. 거기서 괘릉에 대해 이것저것 문의
하여 궁금증에 적지 않은 단비를 뿌렸는데, 그 사이 시간은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무리 햇
님의 근무시간이 가장 긴 6월이라고 하지만 괘릉 후식거리로 2곳의 절터 유적(감산사, 숭복사
)도 준비되어 있어 그들도 오늘 모두 봐야만 된다. 게다가 그들은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며
, 오로지 두 발로 찾아가야 한다.
하여 해설사에게 궁금증 해소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괘릉을 뒤로 하고 괘릉의 후식거리를
찾으러 다시 길을 떠났다.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지으며. 이후 감산사와 숭복사 관련 부분은 별도에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경주 감산사, 숭복사 관련글 보기)

* 원성왕릉(괘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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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일원이자 화려한 늙은 윤장대로 유명한 예천 용문사 (용문사 성보박물관)

예천 용문사


'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예천 용문사 '
우측 윤장대좌측 윤장대
▲  용문사의 자랑, 윤장대

용문사에 다시 오니 산이 깊어 세속의 소란함이 끊어졌네
상방(上方)에는 중의 평상이 고요하고 옛 벽에는 부처의 등불이 환하다.
한 줄기 샘물 소리는 가늘고 일천 봉우리 달빛이 나뉜다
고요히 깊은 반성에 잠겨지니 다시 이미 나의 가졌던 것까지 잃어버린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이 용문사에서 지은 시


 

♠  용문사(龍門寺) 입문

▲  회전문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증장천왕(增長天王)

▲  회전문을 지키는 사천왕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


늦가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겨울이 제국의 기틀을 닦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일행들과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예천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용문사를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찾았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
고 경내로 들어서니 일주문(一柱門)이 제일 먼저 마중을 나온다. 
 
용문사 일주문은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따르면 1608년에 시작된 대대적인 중창의 마
지막 불사로 81년 뒤인 1689년에 세울 예정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80여 년의 장대한 계획
을 세우고 중창에 임한 듯 싶다. 당시의 계획대로 81년 뒤에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공포의 조
각 수법이나 장식이 18세기 후반 양식이 강해서 1767년 대장전 중창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1938년에 보수를 했다.
문 현판에는 '소백산(小白山) 용문사'라 쓰여있어 이곳의 이름을 밝혀주며, 용문사를 직접 품
고 있는 용문산(龍門山)보다는 거리가 조금 있는 소백산을 칭하고 있으니 이는 소백산이 훨씬
명성이 높고 웅장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소백산의 영역을 좀 늘려보면 용문산도 그 범주에 들
어가기는 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삼삼한 숲길이 중생을 맞는다. 늦가을의 절정을 누렸던 나무들은 마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낸 중생 마냥 벌거숭이가 되어 겨울 제국(帝國)의 눈치를 받는다. '올해도 다
저물었구나. 이제 곧 강제로 나이 1살이 얹혀지겠군'
싶은 생각이 거친 파도처럼 몰려와 나그
네들을 잠시 우울쟁이로 만들어버린다. 숲이 아무리 청량한 바람을 불어 속세에서 꾸리고 온
번뇌를 싹 단죄한다고 해도 그런 우울한 생각까지 악성바이러스처럼 심어놓으니 심기가 별로
이다. 간신히 번뇌를 일주문 부근에 내던지고 경내로 발길을 향한다.

그렇게 길을 재촉하다보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든 용문사에는 이르나 두 발로
가는 경우에는 산사의 정취에 어울리게 오른쪽 돌계단으로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절을 다
둘러보고 나올 때는 경내 서쪽 주차장(제3주차장)을 거쳐 잘 닦여진 찻길로 내려오면 된다.

돌계단을 오르면 경내로 인도하는 2번째 관문인 회전문(回轉門)이 마중을 한다. 그는 석가여
래의 경호원인 사천왕의 보금자리로 흔히 천왕문(天王門)이라 불린다. 여기서 그들의 간단한
검문을 받고 경내로 들어서면 되는데, 사천왕의 표정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다기보다는
느긋하고 친숙한 표정 같다.


▲  용문사 해운루(海雲樓)

회전문을 지나면 바로 조급한 게단이 숨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펼쳐진다. 다행히 계단은 짧
은데, 그 계단의 끝에는 해운루가 수미산(須彌山)에 높이 선 누각 마냥 물끄러미 천왕문을 통
과한 중생을 굽어본다.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인 해운루는 경내로 향하는 3번째 관문으로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경내
를 가리고 있다. 1984년 대화재 때 불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이 누각을 지나면 대장전과 보
광명전이 정면에 나타나면서 비로소 경내에 이르게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용문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해우소에서 바라본 용문사 외경

예천군 용문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문사는 양평(楊平) 용문사, 남해(南海) 용문
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하나로 꼽힌다. 다들 쟁쟁한 역사와 보물을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한번 가려보라면 바로 예천 용문사가
단연 갑(甲)이 아닐까 싶다.
양평 용문사는 이 땅 최대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로 유명하나 6.25때 죄다 파괴되어 고
색의 깊이가 얕고, 남해 용문사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지만 고색이 깊고 문화유산이 많다.
허나 예천 용문사는 그곳의 상징이자 천하에서 거의 유일하다는 오래된 윤장대를 간직하고 있
고, 조선 중기 건물인 대장전을 비롯해 무수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성보박물관까지 따
로 장만할 정도이다. 1984년 불의의 큰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대단했을 것인데,
천하의 시샘 때문인지 화재로 많은 것을 잃었다.

예천의 대표급 관광지로 몸값을 올린 용문사는 870년에 두운선사(杜雲禪師)가 당나라에서 귀
국하여 지은 조그만 암자인 두운암(杜雲庵)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 초막을 짓고 머물고 있었는데, 920~930년경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경상도를 정벌하러 하늘재를 넘어 예천 땅을 지나다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그를 보러 찾아갔다.
허나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헤매고 있다가 어디선가 청룡(靑龍) 2마리가 바위 위에 나타나 길
을 인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용문산이라 했다고 하며, 두운을 위해 용문사를 창건
했다고 한다. 이때 절을 짓는데, 나무 둥치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이 나와 공사비로 썼
다고 전한다.
전설에 나오는 청룡은 진짜 용은 아닐테고 아마도 지역 사람들이나 지방 세력의 격한 환영을
받거나 도움을 받은 것을 과대포장하여 그렇게 표현한 듯 싶으며, 은병 16냥은 예천의 지방
세력이나 백성들의 지원을 뜻하는 것 같다.

태조는 이곳에 머물며 장차 천하를 평정하면 큰 절로 지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936
년 오랜 숙원인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자 약속대로 그해에 칙명(勅命)을 내려 절을 크게 중
건하고 매년 150석의 쌀을 내렸다. 그 쌀은 지역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충당했다.

1165년에 의종(毅宗)의 칙명으로 중수했으며, 1171년에 명종(明宗)의 태자(太子)의 태를 절의
왼쪽 봉우리에 묻으면서 창기사()로 이름을 바꾸고 축성수법회()를 열어 낮
에는 금광명경(金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의식을 항규()로 삼았다.
그 법회가 끝나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승려 500명을 불러 50일 동안 담선회()를 열었
으며, 그때 산청 단속사(斷俗寺)의 승려인 효돈()이 전등록(傳錄), 인악집(仁集), 설
두집
(雪集) 등을 강의했다.
그리고
1173년 무신정권에 대항하는 김보당(金甫當)의 난이 일어나자 3만 승재()를 여는
한편 1180∼1182년에 대법회를 열었다.

▲  용문사 보광명전

▲  용문사 명부전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많은 절들의 법등(法燈)이 간당간당하던 조선 때도 용문사는 승
승장구하여 세조(世祖)가 이곳 승려의 잡역(雜役)을 감하거나 면제하라는 교지(敎旨)를 내렸
으며, 1478년에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실을 봉안하고 1480년에 세조의 왕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중수하여 성불산(成佛山) 용문사라 했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왜군은 절 입구인 초간정(草澗亭)에서 돌아갔다
고 한다. 그 기나긴 왜란 동안 용문사에서 짚신을 짜서 전국 승군(僧軍)들에게 보급하는 한편,
승병을 훈련시켰다.
1783년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갈았으며, 1835년
에 불이 나자 열파(), 상민(), 부열() 등이 힘을 모아 1840년대에 공사를 마쳤다.

6.25때도 별 피해를 입지 않는 등, 전화(戰禍)도 피해가는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을 날렸으
나, 1984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보광명전과 해운루, 강원, 요사 등 대부분의 건물을 날리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허나 다행히도 화마(火魔)는 대장전과 윤장대, 자운루 등은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으며,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벌여 주변의 나무를 베어내고 뜨락을 넓게
다졌다.
또한 용문사와 인근 사찰의 문화유산 관리를 위해 경내 우측에 성보박물관을 세웠으며, 구식
해우소를 폐쇄하고 샤워장을 갖춘 신식 해우소를 갖추어 중생과 승려의 편의를 고려했다.


용문사에는 3가지의 믿거나 말거나 이적(異蹟)이 있는데, 하나는 태조 왕건이 두운을 찾았을
때 용이 나와 영접한 일이고, 둘째는 절을 지을 때 은병이 나와 공사비로 충당한 일이며, 3째
는 절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 지금은 없음)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할 때 4층 위로 오색구
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경내에는 오랜 내력과 명성에 걸맞게 법당(法堂)인 보광명전을 비롯해 대장전, 극락보전, 명
부전, 자운루, 원통전, 산신각, 해운루, 성보박물관 등 20동의 건물이 경내를 한가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대표 보물인 대장전과 윤장대를 위시해 세조의 감역교지,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영산회괘불탱, 천불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 국가 국보 1점과 국
가 보물 7점, 중수용문사기비 등의 약간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  영남제일강원(嶺南第一講院)

▲  성보박물관에 있는 독성상과 지장보살좌상

깊숙한 산자락에 묻혀 있어 아무리 질긴 번뇌라도 쫓아오다 제풀에 졸도하며, 절을 감싼 숲이
삼삼하여 서거정의 시처럼 속인들의 마음을 정화해 준다. 거기에 고색이 깊은 경내에 발을 들
이면 나도 모르게 속세를 잊고 잠시나마 번뇌가 끊어지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로부터 4계절이 아름다운 경승지라 선비와 문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
와 문장으로 남겼으며, 20세기에는 출세를 위해 공부하러 절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행정, 법조계, 경찰 쪽으로 크게 출세한 이들이 많아 공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다.

대장전과 자운루를 제외하고는 1984년 이후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 부분에 따라 고색의 질감이
다르다. 허나 윤장대를 비롯하여 이곳의 깊은 내력을 가늠케 해주는 늙은 유물이 많아 경북
북부권에서 영주 부석사(浮石寺) 다음 급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예전에 이곳 승려인 청
안이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란 광고 문구로 유명한 모 핸드폰 통
신사 TV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 용문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391 (용문사길 285-30 ☎ 054-655-1010)
* 용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용문사 대장전과 그 주변



 

♠  용문사 경내 둘러보기

▲  보광명전(普光明殿)과 3층석탑

해운루를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입혀진 너른 뜨락과 함께 석탑 2기를 거느린 보광명전이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중생을 맞는다.

보광명전은 대장전 다음급의 건물로 1984년 대화재로 쓰러진 것을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철조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봉안했으며, 앞뜨락에는 하얀 피부
의 맨들맨들한 석탑 2기가 나란히 솟아 있는데, 우측 탑은 5층, 좌측 탑은 3층으로 층수를 달
리했다. 둘은 높이가 조금 차이가 날 뿐, 모습이 비슷하여 층수를 같게 하고 높이를 맞췄으면
보기에도 자연스러웠을텐데, 그 점이 좀 아쉽다.


▲  성보박물관에서 바라본 보광명전 뜨락

▲  보광명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광명전 불단(佛壇)에는 이곳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이 그만의 특허 제스쳐인 지권인(智拳印)
을 선보이고 있다. 얼굴이 너무 부어있어 통통한 인상을 주는데, 그의 좌우에는 소조(塑造)
로 만든 석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이 협시(夾侍)로 자리를 지킨다. 허나 주불(主佛)보다 덩치
가 지나치게 작아 마치 어른과 아이가 앉아있는 듯 하다. 그런 불단을 둘러싸고 중생들의 소
망이 한아름 담긴 연분홍 연등이 천정을 가리며 허공을 가득 메운다.


▲  보광명전 좌측에 있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똥배하면 속인들은 만병의 근원이라며 다들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하여 똥배를 출렁이고
다니는 모습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기도 한다. 허나 포대화상만큼은 예외이다. 다 같은 똥
배인데도 말이다. 역시나 사람은 출세하거나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면 속인들이 흔히 안좋게
보는 것도 모두 좋게 보는 모양이다.
똥배는 그의 상징으로 사람들은 소원을 빌고 그의 배를 문지른다. 무척이나 두꺼운 얼굴과 축
쳐진 가슴은 그의 비만이 꽤 심각함을 여실히 보여주나 그걸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
려 두꺼우면 두꺼울 수록 그의 인기가 올라간다.


▲  진영당(眞影堂)

대장전 좌측에 자리한 진영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681년에 희인대사(希
仁大師)가 세웠다고 전한다.
진영당은 이름 그대로 용문사를 거쳐간 조사(祖師)들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건물로 1934년과
1935년에 주지 이광하가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곳에 깃든 진영들은 모두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무늬뿐인 건물의 이름과 달리 주지승의 집무실 및 종무소(宗務所)로 쓰이
고 있다.

주지승 집무실에는 목각탱화처럼 무늬가 복잡하고 현란한 의자들이 놓여있는데, 마치 부유층
집안의 거실이나 대기업 회장 사무실, 고위관료 접대실 같은 분위기라 조금은 이질감이 든다.
절에 어울리게 소박한 의자를 두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진영당 주지승 집무실

▲  용문사 명부전(冥府殿)

진영당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
낸다.
이 건물은 1682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며, 불단에는 지장보살
(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
며 양쪽에 서 있다. 그 좌우에는 시왕상(十王像)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앉아 중생을 굽어보
고 있는데, 이들은 명부전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실적(實籍)과 신경(神鏡) 등이 만
들었다고 전한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명부(저승) 식구들

▲  용문사 자운루(慈雲樓)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476호

영남제일강원 남쪽에 맞배지붕 누각인 자운루가 속세를 바라보고 있다. 이 건물은 1166년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1561년과 1621년에 중수를 했고, 1979년에 보수를 하여 지금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쓸 짚신을 만들어 보급하던 의미 깊은 현장으로 조선 중/후기 건축 기
법을 지니고 있으며, 절에서 큰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행사장이나 공양 장소로 쓰인다.

자운루 옆구리를 통해 경내를 벗어나면 바로 2층 규모의 옛 해우소가 나온다. 재래식 화장실
로 신식 해우소가 세워지면서 지금은 문을 닫아 걸고 한가로운 노후를 보낸다.


▲  용문사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영남제일강원 뒤쪽에는 보기만 해도 장맛을 돋구는 장독대들이 5열로 늘어서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저 안에는 온갖 전통 먹거리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으며 햇볕을 볼 그날을 꿈꾼다.

▲  원통전(왼쪽)과 산신각(오른쪽)

경내의 중심인 대장전과 보광명전 뒤쪽 높은 곳에 원통전(圓通殿)과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는데, 문이 가운데
칸에만 달려있다. 그 뒤쪽 높은 곳에는 1칸짜리 산신각이 원통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있는
데,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로 산령각(山靈閣)이라 불리기도 한다.


▲  보광명전, 대장전 뒤쪽 산책로

▲  극락보전(極樂寶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극락보전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건물로 1984년 이후 경내를 크게 정비할 때 장만했는데, 원래는 천불전(千佛殿)이었으나
근래에 극락보전(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아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삼았다.
허나 예전 천불전의 성격은 여전하여 하얀 피부의 조그만 불상 1,000개가 아미타3존불을 빼곡
히 둘러싸며 장관을 이룬다.


▲  극락보전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아미타3존불과 조그만 천불의 물결

▲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경내 (정면에 보광명전의 뒷통수가 보임)

▲  성보박물관 좌측에 자리한 샘터
용문산에 베푼 물이 나무로 만든 수로를 타고 석조(石槽)로 내려간다.


 

♠  용문사의 상징, 대장전(大藏殿) - 국보 328호

대장전은 용문사의 으뜸 건물이자 대표 보물이다. 만약 그와 윤장대가 없었다면 용문사를 찾
는 이는 지금보다 적었을 것이고, 명성도 다른 용문사에 비해 낮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용
문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크다. 작게는 절의 보물이나 크게는 나라의 귀한 보물로 절
에서도 그들을 특별히 옆구리에 두어 온갖 정성을 들인다. 화마(火魔)가 한바탕 할퀴고 지나
간 1984년에도 대장전은 띠끌의 피해도 없이 살아 남았으며, 그 이후 화재방지를 위해 보존처
리를 가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그만 맞배지붕 집으로 얕은 석축에 막돌 주초를 놓고 민흘
림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안과 밖을 모두 2출목(出目)으로 짜고 기둥 사이마다 공간포(空間
包)를 두었으며, 주심도리가 대들보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 지붕이 높아진 만큼 기둥이 짧아
보인다. 단청은 금단청(錦丹靑)을 입혀 내부를 화려하게 치장했으며, 천정의 반자틀에도 화려
하게 단청을 입히고 대들보와 종보 사이의 화반(花盤)에 풀무늬를, 대들보 위의 용은 물고기
를 몰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천정 곳곳을 화려하게 수식해 건물의 품격을 드높였다.

이렇게 화려한 대장전은 1173년에 자엄대사(資嚴大師)가 세웠다고 한다. 허나 그때 세워진 대
장전이 지금의 건물은 아니다. 자엄은 인도의 고승인 구담(瞿曇)이 대장경(大藏經)을 용궁(龍
宮)에 소장했다는 옛 이야기에 따라 용이 나타났다고 하는 용문사에 나라의 호국(護國)을 기
원하고자 대장경을 보관하고 건물 이름을 대장전이라 했으며, 나중에 그런 연유를 잘 상징하
고자 천정에 용과 물고기 장식을 만든 것이다.

그 이후 1467년과 1534년, 1597년, 1665년(또는 1670년)에 중수했으며, 1684년에 아미타3존불
과 목각탱화를 만들어 봉안했다. 그리고 1767년에 중수를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
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해체수리를 하면서 19세기에도 보수가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기단 공
사를 위해 간이시굴조사를 벌이던 중, 현재 기단 속에서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이 모습을 드러
냈는데, 이는 대장전의 창건 당시의 흔적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중앙 뒷쪽에 불단을 두고 그 좌우에 윤장대를 1개씩을 설치
해 서적을 두었다. 내부 구조 양식은 조선 중기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으나, 외부는 고려
건축양식을 띄고 있는데, 가까운 안동의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과도 좀 비슷해 보이
기도 한다.

▲  우측에서 본 대장전

▲  좌측에서 본 대장전


▲  붉은 무늬 현판에 쓰여진 대장전 3글자의 위엄

▲  온갖 무늬가 그려진 대장전 우물천정

▲  대장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 보물 989-1호
뒤에 보이는 후불탱화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 보물 989-2호


용문사 대장전하면 다들 윤장대가 생각날 것이다. 허나 윤장대보다 명성과 시대가 조금 떨어
지지만 불단을 지키고 앉은 목조아미타3존상과 그 뒤에 걸린 아미타후불탱화도 그에 못지 않
은 귀중한 보물이다.

두툼한 붉은 방석에 앉아 중생을 위로하는 아미타3존상은 나무로 만들어 금색 피부를 입힌 것
으로 아미타불이 자비로운 인상으로 가운데에 앉아있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
菩薩)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그 좌우를 지킨다. 뒤에 있는 후불탱화와 더불어 17세
기 후반 숙종(肅宗) 시절에 조성된 것이다.

그들 뒤로 목각아미타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는데, 그는 1684년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나
라에 널린 목각후불탱 가운데 가장 늙은 것이다. 후불탱화가 너무 화려해 가히 눈이 부실 지
경으로 기본 구조는 상하가 긴 직사각형이지만 더듬이처럼 생긴 하얀색의 구름무늬 광선을 표
현하여 금색과 흰색의 어색한 조화를 이루며 탱화의 수려함을 더욱 돋게 만든다.

탱화 중앙에 본존불은 얼굴을 앞으로 숙여 속세를 살피고 있으며,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
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
을 구분했다.

본존불을 둘러싼 나머지 불상은 상,중,하 3줄로 배치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
좌(臺座) 좌우로 2구씩 1렬로 서 있으며,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각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었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인 아난(阿難
)과 가섭(迦葉)을 배치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본존불과 보살상 사이
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하여 여백을 빼곡히 채웠는데, 너무 빼곡하여 솔직히 눈이 어지럽
다. 또한 탱화를 지탱하고 있는 양쪽 나무 기둥에는 용무늬 같은 것이 새겨져 장엄함을 드러
낸다.

▲  용문사 윤장대(輪藏臺) - 국보 328호

용문사에 왔다면 대장전에 깃든 윤장대는 꼭 한번 만져봐야 된다. 예전에는 돌리는 것도 가능
했으나 이제는 연로한 탓에 돌릴 수는 없고, 대신 성보박물관에 마련된 윤장대를 돌리면 된다.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1개씩 배치되어 있는데, 이 땅의 수많은 고찰 가운데 유일하게 있는
늙은 윤장대로 그 명성이 저승에까지 전해졌는지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꾸중을 듣는다
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도 있다.

윤장대는 원래 서적이나 장경판(藏經板)을 넣어두던 일종의 장경각(藏經閣)이다. 장경각은 쉽
게 말하면 책장이다. 법회 때는 경전을 넣고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염불을 했는데, 옛날에는
일반 백성들 상당수가 까막눈이었고, 설령 한자(漢字)를 알아도 불교 경전이 좀체 어려운 것
이 아니다. 하여 '윤장대를 1번 돌리면 경전을 1번 읽은 것과 같다 /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
다 / 소망이 이루어진다 /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혼난다'
는 식으로 속인들에게 영업을
했던 것이다.

이들 윤장대는 높이 4.2m, 둘레 3.37m 크기로 양쪽에는 손잡이가 있어 그를 잡고 돌리면 되며,
기둥을 마루 밑에 있는 문둔테에 박아 회전식으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8각원당형의 굴도리식
모양의 책장을 만들었다. 책장을 여닫는 문은 8개로 우측 윤장대의 문창살은 가지각색의 문양
으로 아름다움을 더하며, 좌측 윤장대는 그냥 소박한 빗살로 서로 대조를 이루는데, 이는 음
양의 조화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또한 문 위쪽에는 연꽃과 보살 등이 그려져 있어 안그래도
포식하는 두 눈을 더욱 배부르게 만든다.

윤장대의 조성시기는 1190년이라고 하며, 두운이 절을 세울 때 용궁에 보관된 대장경을 보관
하고자 대장전에 윤장대를 만들고 7일 동안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윤장대 때문
에 그를 간직한 건물 이름이 대장전이 된 것이다.


▲  좌측 윤장대 윗부분

▲  우측 윤장대 윗부분

지붕과 촘촘하게 짜여진 공포덩어리는 그가 그냥 책장이 아닌 법당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던
져주며 좌측 윤장대의 처마와 공포는 금을 칠한 듯, 너무나 화사하다. 이렇듯 윤장대는 세밀
하고 뛰어난 조각품으로 우리나라 불교 미술의 또 다른 정화이다.

      ◀  책이 담긴 윤장대 가운데 부분
대장전 윤장대는 돌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그걸 무시하고 억지로 돌리려고 해도, 밑에 단
단하게 고정을 시켜버려 돌려지지도 않는다.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내 책장으로 삼고 싶
은 윤장대, 나중에 윤장대 모양의 책장을 하나
만들어 대리만족으로 옆에 두고 싶다.

(대장전은 원래 국가 보물 145호, 윤장대는
가 보물 684호
였으나 2019년 12월 '용문사 대
장전과 윤장대'란 이름으로 국보 328호로 특진
되었음)


 

♠  용문사의 보물을 간직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경내 서쪽에는 용문사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성보박물관이 넓게 터를 닦았다. 2010년에 문
을 연 이곳은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용문사의 보물을 비롯해 주변 사찰에서 맡긴 문화유
산 등 315점이 전시/보관되고 있다. 내부 촬영은 상업성이 아니라면 가능하며, 대장전과 더불
어 필수로 봐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는 윤장대를 돌리는 코너도 있으니 꼭 살펴
보길 권한다.
마음 같아서는 박물관의 유물을 모두 다루고 싶으나 내용이 너무 길어질 수 있어 일부 중요한
유물만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른 유물은 직접 가서 눈에 담기 바란다.
 
* 성보박물관(☎ 054-655-8695) 관람시간은 9:30~17:30 (11~2월에는 10시부터 17시까지) 매주
  월요일과 설날, 추석연휴는 문을 닫아걸고 쉰다.

       ◀  영산회괘불탱 - 보물 1445호
괘불은 석가탄신일이나 주요 법회 때만 잠깐씩
등장하는 비싼 존재이다. 이 괘불은 1705년에
승려 92명과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조성되었는
데, 석가여래가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
華經)을 설법하는 영산회를 표현했다.
초록색 두광(頭光)을 갖춘 석가여래 좌우에 붉
두광을 두룬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리해
있으며, 그 위에 석가여래의 제자인 아난과 가
섭이 합장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림 하단에는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고, 테두리
하단부에 그림과 관련된 화기(畵記)가 있다.
이 괘불의 특징이라면 그림 상단에 하늘색 바
탕으로 하늘을 표현한 점과 석가여래가 연꽃가
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다른 괘불과는 다른 새
로운 모습이다.


▲  용문사 천불도(千佛圖) - 보물 1644호

이곳 성보박물관의 탱화 중 크게 두드러지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천불도가 아닐까 싶다. 천
불을 봉안한 천불전이란 건물은 많이 있지만 정작 천불을 그린 늙은 그림은 천하에 딱 2개 밖
에 없는 희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탱화는 1709년에 화승(畵僧) 도문(道文)과 설잠(雪岑), 계순(戒淳), 해영(海英) 등이 제작
한 것으로 붉은 바탕에 조그만 1,000개의 불상을 질서정연하게 그려넣었다. 이 땅에 전해오는
천불도는 1754년에 그려진 선운사(禪雲寺) 천불도 5폭과 이곳 용문사가 전부로 18세기 초기
천불신앙(千佛信仰)과 당시의 불화 양식을 잘보여준다고 하여 국가 보물로 대접받고 있다.


▲  극락암 지장시왕탱 (1812년 제작)
용문사의 부속 암자인 극락암에서 가져온 그림으로 중앙에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명부(저승)의 시왕(十王)과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극락암 지장시왕탱 복장 발원문(發願文)과 복장유물

▲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동자입상(童子立像)과 사자입상(使者立像)

동자입상은 용문사 명부전에 있던 것으로 시왕의 심부름을 하는 비서이다. 원래 동자상 10개
가 각각 시왕(十王) 곁에 있었으나 관리소홀로 지금은 달랑 1개만 남아 성보박물관으로 옮겼
다.
오른쪽 눈에 안타깝게도 크게 금이 가서 애꾸눈처럼 되었지만 동자에 걸맞게 그의 표정에는
귀여운 티가 배여 있으며 양손에는 시왕의 물건을 들고 있는데, 물건을 숨기며 장난을 칠 것
같은 천진난만함이 묻어나온다.

동자입상 옆에는 응진전에서 가져온 사자상(使者像)이 나란히 서 있는데, 동자상과 달리 머리
에 모자를 쓰고 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조그만 독성좌상(獨聖坐像)

독성이 그려진 독성도(獨聖圖)는 많이 봐왔지만 늙은 독성상은 흔치 않다. 이 독성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塑造像)으로 원래 응진전 내부 정방형 감실(龕室)에 홀로 봉안되어 있었다.
왼손에는 게이트볼에서 공을 칠 때 쓰는 것과 비스므리하게 생긴 긴 장대를 들고 있는데, 조
선 후기에 신경대사가 시왕상과 금당의 판불(板佛)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여 승려들이 축수
전(祝壽殿) 서쪽에 별도로 감실(龕室)을 만들어 신경대사의 진영을 안치했다는 기록이 '속용
문사적기'에 나와있어 그의 상이라는 의견도 있다.


▲  너그러운 표정의 지장보살좌상

독성상 옆에 자리한 지장보살좌상은 원래 강원(講院)에 있었다. 15~16세기에 나무로 만든 목
불(木佛)로 도금을 입혔으며,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지그시 눈을 감은 둥근 얼굴에는 온화함
이 물씬 배여나와 중생들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목에는 화려한 목걸이가 있는데, 두건과 수인
(手印)이 아니라면 관세음보살 누님으로 착각하고도 남을 모습이다.

강원 불단에 있던 그는 1984년 대화재로 강원이 불타면서 응진전으로 옮겨졌으며, 화재로 인
해 어깨 부분과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에 그을음이 생겨 당시의 참담함을 증언한다. 다행
히도 재빨리 구조한 탓에 이렇게 살아있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  봉인사(奉印寺) 부도암(浮屠庵) 신중탱 복장낭(腹臟囊, 복장주머니)과
복장물

봉인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사릉(思陵) 인근에 있는 절로 광해군(光海君) 시절부터 왕실의 원
찰(願刹)로 지원을 받았다. 1867년 상궁의 시주로 신중탱과 복장물을 만들었는데, 1887년 봉
인사가 불에 타면서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 용문사에 안착하
게 되었다.
복장주머니에는 한글로 쓰인 발원문이 있으며, 이 주머니에서 각종 다라니경과 약초, 금과 은
이 나오기도 했다.


▲  전패(殿牌)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전패로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으나 경내에 1884년 6월에 궁궐 상궁(尙
宮)의 지원으로 만든 탱화가 있어 그 시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패 중앙의 붉은 부분에는 '황실삼전하수만세(皇室三殿下壽萬歲)'라 쓰여 있어 제왕(帝王)의
장수를 기원하는 전패임을 보여주며, 여기서 삼전하는 당시 제왕인 고종과 명성황후, 세자 순
종(純宗)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돋보이는 것은 왕실이 아닌 황실로 썼다는 것이다. 하여 고종
이 황제를 칭한 1897년 이후에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제왕을 폐하(陛下)가 아닌 전하로
칭하고 있어 앞뒤가 맞지를 않는다.

이 전패는 8각형의 높은 대좌(臺座) 위에 패를 올렸으며, 발원 내용을 적은 가운데 부분에는
연화좌(蓮花座) 위에 화려한 꽃장식을 채웠다. 머리 부분에는 2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채
색은 좀 희미해졌지만 용과 꽃무늬 장식을 갖춘 화려한 모습으로 왕실을 위한 전패임을 알려
준다. 그리고 조선 때 만들어진 전패나 위패(位牌), 불패(佛牌)는 많지만 이렇게 대좌부터 머
리까지 완벽하게 남은 것은 흔치 않다.

             ◀  업경대(業鏡臺)
조선 후기에 나무로 만들어 채색을 입힌 것으
로 저승의 염라대왕이 심판할 때 쓰는 거울이
라고 한다. 거울을 보면 생전의 죄업이 싹 비
친다고 하며, 그 경량에 따라 지옥으로 갈지,
극락으로 갈지가 정해진다고 한다.
이 업경대는 원래 명부전에 있었는데, 아랫부
분을 수미산(須彌山) 형태로 조각했다. 이는
죄업(罪業)을 쌓지 않고 깨달음을 통해 극락으
로 갈 수 있다는 업경(業鏡)의 상징성을 강조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죄업을 비추는 거울
인 업경은 불꽃 형태로 조각된 원형의 놋쇠로
만들었다.
나도 만약 저세상에 가서 업경대를 본다면 과
연 어떻게 나올까? 궁금함보다는 왠지 두려움
이 앞선다.


▲  화엄칠조탱(華嚴七祖幀) - 19세기 탱화

화엄7조탱은 화엄종(華嚴宗)의 정통을 계승한 7명의 승려를 담은 탱화이다. 다들 열심히 화엄
경책을 보고 있는데, 모두 머리에 초록색 두광(頭光)을 지니고 있어 그들을 높이고 있다.
화엄7조는 인도의 마명(馬鳴, 50~150)부터 시작하여 용수(龍樹, 150~250), 중원대륙의 법순두
순(法順杜順. 557~640), 지상지엄(至相智儼, 602~668),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청량징
관(淸凉澄觀. 738~839),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로 그들을 순서에 따라 배치했다.

상단 중앙에는 마명이, 그 좌측에는 용수가 앉아있고, 우측에는 두순을 앉혀 3명이 기나긴 세
월을 뛰어넘어 같은 경상에 앉아있다. 그 옆에 지엄과 현수가 있으며, 하단 좌우에 막내인 청
량과 종밀이 따로 앉아있다. 용수와 마명은 후대에 보살로 격이 높아져, 보살의 얼굴처럼 표
현되었으며, 다른 조사들은 거의 비슷비슷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킨다. 조사 옆에는 그들의 법
호(法號)와 생애를 함축한 글이 적혀있으며, 각자의 저서가 놓여져 있다.
그래서 마명이 앉은 경상에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있고, 종밀의 경상에는 '대방광불
원각경(大方廣佛圓覺經)'이 놓여 있다. 또한 마명 앞에는 앞발을 들어 힘차게 달려가는 말이
그려져 눈길을 끈다.

이 탱화는 원래 진영각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화엄종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7조탱이 제작되어
봉안된 것은 용문사가 유일하다. 또한 19세기 화엄사상을 중시했던 용문사의 노선이 잘 반영
되어 있다.


▲  묘법연화경 변상도(妙法蓮華經 變相圖) - 조선 후기

▲  묘법연화경 권제1
1635년에 인쇄된 것으로 용문사에는 묘법연화경 27책이 전하고 있다.

▲  대장전기일록(大藏殿忌日錄)
대장전에서 사용한 서적으로 용문사 승려들이 그들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  문수사리설마가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說摩訶般若波羅密經)과
백유경(百喩經) 1,2,3,4권
기나긴 이름부터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반야바라밀경과 백유경은
고려 고종 때 간행된 8만대장경에 수록된 경전의 하나로 여기의 것은
조선 후기에 간행되었다.

▲  고색의 때가 자욱한 감역교지(減役敎旨) - 보물 729호

감역교지(면역사패교지)는 1457년 8월 14일에 세조가 용문사에 내린 교지이다. 큰아버지인 효
령대군(孝寧大君, 세종의 둘째 형)과 함께 불교를 믿었던 세조는 용문사를 비롯하여 여러 절
에 교지를 내려 승려의 잡역을 면제시켜주는 한편,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교지에

'경상도 예천 용문사를 경상도 감사와 예천 수령에게 이미 알린데로 더욱 살펴 한층 완호(完
護)하고 잡역을 영구히 면제해줄 것'
이란 내용과 함께 국왕의 친필 수결(手決)이 있으며, 교
지를 담던 봉투에는 '교지함(敎旨函)','어압(御押)'이라 적혀 있다. 그리고 천안 광덕사(廣德
寺)와 화순 쌍봉사(雙峯寺)에도 비슷한 시기에 교지를 내렸는데, 용문사보다 4일 전에 내린
것이다. 허나 대상 사찰명과 발급일자만 틀릴 뿐, 문장과 체제는 똑같다.


▲  용문사를 빛낸 고승들의 진영(眞影)
절을 창건했다는 두운선사를 비롯해 고승 16명의 진영이 걸려있다. 이들은
원래 진영각에 있던 것으로 보관을 위해 성보박물관 지하로 옮겨졌다.

▲  경내에서 제3주차장으로 인도하는 돌담길
(밑에서 본 모습,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성보박물관)


성보박물관을 끝으로 2시간에 걸친 용문사 관람은 정말 배부르게 마무리가 되었다. 경내에서
속세로 나갈 때는 돌계단이 있는 회전문 대신 제3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담장(토담)길과 숲길을
거쳐 일주문 옆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담장길에는 아무렇게나 생긴 큼직한 박석이 깔려 토
담과 함께 한줄기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근처에서 우두커니 있던 번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다시 절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들을 강제로 껴앉고 나의 제자리로 향했다. 이래서
정말 해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리하여 윤장대로 빛나는 고찰, 용문사 관람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예천 용문사를 끝으로
우리나라 3대 용문사는 모두 인연을 지은 셈인데, 이들 용문사 중 가장 작성하기 힘들었던 곳
이 예천 용문사가 아닐까 싶다. (작성하기 쉬운 곳은 양평 용문사)
(양평 용문사 ☞ 보러 가기  / 남해 용문사 ☞ 보러 가기)


▲  일주문으로 내려가는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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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 주왕산 늦가을 나들이 '
(절골, 가메봉, 용연폭포, 용추폭포, 주왕계곡)

▲  대전사에서 바라본 주왕산

▲  용추폭포

▲  절골계곡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기 시작하던 10월의 한복판에 늦가을 단풍 성지로 격
하게 추앙받고 있는 청송(靑松) 주왕산을 찾았다.
주왕산은 대자연이 경북 한복판에 빚은 크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호남 내장산(內藏山)에 버
금가는 단풍의 대표 성지(聖地)이다. 서울에서 약 600리(옛 10리는 약 5km) 거리로 당일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좀 넉넉하게 무박 2일 코스로 다녀왔다.

토요일 저녁 10시, 신도림역(1,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준비된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주
왕산이 있는 동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늦가을 단풍의 화려한 향연과 아직까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주왕산에 대한 강한 설
레임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검은 도화지가 되버린 차창 밖만 열심히 바라보며 나름대
로 주왕산을 그려본다. 말로만 듣던 주왕산의 실물은 어떠할까?? 단풍은 제법 물이 올랐겠
지? 대전사까지 모두 볼 수 있을까? 등등...

서울을 출발하여 약 5시간 30분 만에 주왕산 남쪽 끝에 자리한 주산지 주차장(상이전마을)
에 이르렀다. 아직 새벽 어둠에 잠긴 주차장에는 천하 곳곳에서 산꾼과 나들이꾼을 바리바
리 싣고 온 관광버스로 가득한데,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주차장 모퉁이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먹었다.
밥과 반찬을 가져온 이들이 많았고, 취사 도구까지 가져와 라면과 찌개, 오뎅탕 등을 해먹
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렇게 갖은 먹거리들이 모두 모이니 그야말로 출장 뷔페가 따로 없
으며, 주차장 옆에는 식당을 겸한 가게가 환하게 불을 켜며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을 때우고 4시 30분에 다시 버스를 타고 서쪽에 자리한 절골교로 이동했다. 그
림 같은 비경을 자랑하는 주산지(注山池)도 봤으면 좋으련만 그곳은 일정에 없었기 때문에
공간의 여유가 있는 주산지 주차장에서 아침만 먹고 바로 철수한 것이다.
절골교에서 모두 버스에서 내려 절골탐방지원센터까지 12분 정도 걸었다. 여기서 주왕산의
빗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5시, 빗장이 열리기가 무섭게 주왕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주왕산 절골, 가메봉, 사창골

▲  주왕산 뒷쪽에 숨겨진 절골

절골(절골계곡)은 주왕산 동남쪽에 깃든 계곡으로 주왕산 뒷통수에 해당된다. 주산천(注山川)
의 상류로 골짜기가 꽤 깊고 숲이 울창하며,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골이라 불린다. 계
곡 길이는 8km로 주왕산 동쪽 대관령(731m)에서 발원한 갈전골(갈절골)과 신술골이 한데 모여
절골을 이룬다.
삼삼한 숲에 포근히 감싸여 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피해갈 정
도로 시원하다. 계곡은 물이 풍부하고 기암괴석과 반석, 간간히 나오는 조그만 폭포가 운치를
더해주며. 상류로 올라갈수록 풍경의 질이 높아지니 꼭 상류(대문다리)까지는 오르기 바란다.
  
절골코스는 절골탐방지원센터에서 계곡을 따라 펼쳐지는데 여러 차례 계곡을 건너야 된다. 반
듯한 다리 대신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으나 부실한 곳이 적지 않아 자칫 물에 빠지기 쉽다. 하
지만 수심이 얕아 그리 위험은 없으며, 계곡 트래킹 및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절골은 인근 주산지와 함께 '내주왕계곡'이라 불리며, 풍경이 고와 주왕계곡(周王溪谷) 못지
않다. 계곡을 옆에 끼고 상류로 올라가다가 대문다리를 지나서부터 계곡과 서서히 멀어지며,
산길 경사도 점차 각박해져 깔딱 직전까지 이른다. 그렇게 각박한 산길을 오르면 가메봉 동쪽
갈림길에 이르고, 여기서 서쪽 능선길로 가면 가메봉이다.

* 절골탐방지원센터 → 대문다리 → 가메봉 (3시간 20~30분 소요)


▲  고요함에 잠긴 절골 (절골 중류)
늦가을 향연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계곡을 거울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벼랑 사이를 흐르는 절골

▲  늦가을 채색이 짙은 절골 상류
너른 반석과 조촐한 폭포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돕는다.

▲  가메봉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바라본 주왕산 남쪽 줄기
산 아랫도리와 중간 도리는 단풍의 향연이 한참이나 해발 700m 이후로는 벌써부터
앙상한 분위기를 자아내 올해도 거의 저물었음을 실감케 한다.

▲  주왕산 가메봉(882m) 바위와 그 너머로 보이는 왕거암

가메봉은 주왕산 구역에서 두수람(923m), 왕거암(907m)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다. 주왕산 동
쪽에 자리한 가메봉은 넓직한 바위로 이루어져 동쪽과 남쪽, 서쪽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으
며, 하늘에서 가까운 봉우리이나 칼처럼 솟은 뫼에 꽁꽁 둘러싸여 있어 조망의 질은 그리 시
원치 못하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행동식을 섭취하고 주왕계곡으로 내려갔다. (일부는 칼등고개를 경유하
여 주왕산 정상으로 이동)


▲  가메봉에서 바라본 천하 (주왕산 남쪽)
가메봉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  가메봉에서 주왕계곡, 사창골로 내려가는 산길


 

♠  주왕산 사창골, 용연폭포

▲  사창골 상류

가메봉에서 울퉁불퉁한 산길을 20~30분 정도 내려가면 사창골이 슬쩍 모습을 비춘다. 가메봉
북쪽에서 발원하여 주왕계곡으로 흘러가는 사창골은 숲이 매우 삼삼하고 바위와 소(沼)가 많
아 절골 못지 않은 고운 매력을 드러내고 있으며, 후리메기3거리를 지나 40~50분 정도 내려가
면 주왕계곡이 모습을 비춘다.


▲  동그랗게 자리를 닦은 조그만 소(못)
해가 지고 밤이 되면 하늘에서 선녀 누님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지는 않을까? 그러고 보니 못의 사이즈도 선녀 누님에 걸맞게
아담하다.

▲  너른 반석과 조그만 폭포
계곡 주위로는 낙엽이란 쓸쓸한 꼬리표를 단 단풍들이 귀를 접고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있다.

▲  풍덩 스킨쉽을 하고 싶은 동그란 소
사창골 냇물은 여기서 숨 좀 고르다가 다시 종점 없는 길을 재촉한다.

▲  사창골 하류 산길
사창골 산길은 하류에 이르러 잠시 계곡과 멀어지고 벼랑길로 돌변한다.
벼랑 밑에는 사창골이 빚은 절구폭포가 있으며, 벼랑길을 지나면
주왕계곡에 이르게 된다.

▲  주왕계곡 용연폭포(龍淵瀑布, 제3폭포)

주왕계곡(주왕천계곡, 주방천계곡)은 주왕산(720m)의 중심 계곡으로 '내주왕계곡'이라 불리기
도 한다. 주왕산 동쪽에서 발원한 큰골에서 시작하여 주왕산 심장부를 구비구비 돌다가 대전
사를 지나서 주방천(周房川)이란 이름으로 속세로 흘러간다.
용연폭포와 용추폭포, 시루봉, 학소대, 급수대 등 대자연이 빚은 온갖 작품이 가득해 눈을 부
시게 하며, 특히 용추폭포 주변은 주왕산의 모든 것을 긁어모은 것처럼 대장관을 이룬다.
깊은 산골에 숲이 울창하고, 계곡 좌우는 높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협곡이 적지 않은데, 그런
계곡을 둘러싸고 600m가 넘는 많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그래서 주왕산을 석병
산(石屛山)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험한 지형을 지닌 탓에 예로부터 산적들이 많았고, 난리가
날 때마다 이곳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특히 바위 봉우리가 많아 설악산,
월출산(月出山)과 더불어 이 땅의 3대 암산(岩山)으로 격하게 꼽히기도 하며, 경북의 금강(金
剛)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신라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의 족자(簇子)이자 원성왕(元聖王)에게 밀린 김주원(金周
元)이 머물렀다고 해서 주방산(周房山)이라 불렸는데, 이후 그는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
졌다. 하여 그 연유로 주왕산으로 이름이 갈린 것으로 보이며, 고려 후기에 나옹화상이 그리
바꾸자고 해서 이름이 갈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다른 유래로는 당나라 사람인 주도(周鍍)가 8세기 후반,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을 칭하며
진나라 재건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당나라군에게 보기 좋게 털렸다. 그래서 요동을 거쳐
신라로 도망, 주왕산이 험하다는 풍문을 듣고 그곳에 들어가 주변을 약탈하며 후일을 도모하
다가 당나라의 토벌 요청을 받은 신라에게 털리고 자신은 잡혀 처단되었다. 그래서 주왕산이
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 전설은 마땅한 기록도 없고 역사적인 근거가 없으며, 조선 때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
대주의(事大主義)에 젖은 지역 유생들이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명나라가 있던 중원대륙과
청송의 명산인 주왕산을 연결시켜 지역의 자부심을 어떻게든 높이려고 머리를 싸맸던 유생들
의 그릇된 생각이 지어낸 산물인 것이다.

주왕계곡은 '청송 주왕산 주왕계곡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11호로 지정되었다.


▲  용연폭포의 위엄 (윗폭포)

주왕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연폭포는 제3폭포, 쌍폭, 용폭이라 불리기도 한다. 예전에는 간단
하게 제3폭포라 불렸으며, 2단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폭포가 위엄을 자랑하며 하얀 실타래 같
은 물줄기를 밑으로 뽑아낸다. 폭포 밑에는 푸른 못이 펼쳐져 있는데, 영덕 강구항 앞바다와
이어져 용이 머물렀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다. 그래서 용연폭포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
다.
윗폭포 옆에는 얕게 파인 3개의 동굴이 있어 폭포의 경관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주며, 물소리
가 우렁차 귀신도 도망을 칠 정도이다. 못 남쪽에는 탐방로와 조망대가 있는데, 사람들이 폭
포를 구경하느라 금방금방 빠지지를 않아 정체가 심하다. 그만큼 폭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제
대로 앗아간 것이다. 우리도 폭포를 구경하느라 한동안 발을 움직이지 못했지. 대자연의 기묘
한 작품 앞에 우리가 할 일이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촬영 뿐이다.

▲  용연폭포 옆에 패인 3개의 동굴

▲  푸르게 익은 용연폭포 못 (윗폭포)


▲  용연폭포 아랫폭포
아랫폭포도 윗폭포 못지 않은 장쾌함을 보여준다. 이곳은 못 바로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주왕계곡의 백미, 절구폭포~용추폭포

▲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사창골 협곡

용연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가면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협곡이 마중을 한다
. 앞서 사창골 산길의 아랫쪽으로 사창골의 하류이기도 한데, 그 협곡을 5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절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절구폭포 (제2폭포)

바위 너머 윗쪽에서 2단으로 쏟아지는 절구폭포는 제2폭포라 불리기도 한다. 응회암(凝灰巖)
에 주로 생성되는 절리(암석이 갈라진 틈)에 의해 생긴 폭포로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윗폭
포 밑에는 선녀탕(仙女湯)이 수줍은 듯 숨겨져 있으며, 아랫 폭포 밑에는 수심이 얕은 못이
형성되어 있어 물놀이 장소로 아주 그만이다.
이곳은 사창골 하류로 폭포 주변이 모두 벼랑으로 막혀 길이 없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나가야
된다. 전쟁 때 만약 이곳으로 몰린다면 정말 몰살을 각오해야 될 정도로 궁벽한 곳이나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물이 시리도록 맑아서 내 즐겨찾기 명소로 살짝 숨기고 싶다. 현재 선녀탕과
윗폭포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얌전히 아랫폭포 앞에서만 머물기 바란다.


▲  옆에서 바라본 절구폭포

▲  병풍바위

절구폭포를 둘러보고 주왕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주변 풍경이 서서히 흥분을 하면서 나도 모르
게 장대한 벼랑에 감싸이게 된다. 그 벼랑은 병풍바위로 계곡 양쪽으로 거의 직각으로 솟은
낭떠러지가 병풍처럼 둘러져 그야말로 하늘만 보이는데, 벼랑 밑에는 옥처럼 맑은 주왕계곡이
청정함을 자랑하며 힘차게 흐르고 있다.
발을 전혀 들일 수도 없을 이런 험지에 인간들은 산천유람 욕구를 위해 마구 탐방로를 내었는
데, 벼랑 밑부분에는 혹시나 모를 대자연의 테러(낙석)에 대비해 지붕까지 둘렀다. 주왕산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웅장한 멋을 지닌 병풍바위 밑에는 제1폭포라
불리는 용추폭포가 달려있는데, 이곳 풍경은 가히 압권이라 앞서 제2폭포, 제3폭포를 능가한
다.
대자연의 위대한 작품에 혼이 탈탈 털린 속인들은 사진을 찍고 풍경을 구경하느라 좁은 탐방
로는 늘 정체를 빚어 행렬이 다소 버벅거리는데, 풍경이 풍경인지라 정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게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들의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아무리 여름 제국이 무더위 갑질로 천하를 뜨겁게 달구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을 정도로
무더위를 잊게 한다. 벼랑에 감싸여 햇살도 마음 놓고 착륙을 못하고, 계곡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주니 땀이 붙어있을 재간이 없다.

용추폭포 윗쪽에는 선녀탕이 있고, 그 위에 구룡소(九龍沼)가 있으며, 탐방로 밑은 계곡과 벼
랑으로 되어있어 계곡과 폭포로의 접근은 통제되어 있다.


▲  대륙의 협곡 같은 병풍바위의 위엄
협곡 사이로 탐방로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다. 이렇게 보니 주왕산의 옛 이름인
석병산(石屛山)이란 이름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  용추폭포 구룡소
수심도 깊고 지형도 각박한 이곳에 9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  구룡소와 용추폭포 사이에 자리한 선녀탕
선녀 누님들이 들어가기에는 수심이 좀 깊다. 하늘나라 선녀들은
키가 나무만 했던 것일까?

▲  용추폭포(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와 달리 폭포의 정면 모습을 담을 수가 없다. 그만큼
이곳은 칼처럼 솟은 벼랑 밑에 무섭게 펼쳐진 첩첩한 협곡이다.
그나마 탐방로가 닦여져 있으니 이 정도로라도 보는 것이다.

▲  가까이에 있으나 그림의 떡처럼 보이는 용추폭포 밑 동그란 못

▲  벼랑 사이로 각박하게 이어진 병풍바위 협곡 (서쪽 부분)


 

♠  주왕산 마무리

▲  주름선이 인상적인 시루봉 ▲

병풍바위 협곡을 지나면 계곡을 건너는 학소교가 나온다. 다리 옆에는 홀로 솟은 날씬한 돌기
둥이 손짓을 하는데, 그 돌기둥이 시루봉이다.
시루봉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그 모습이 떡을 찌는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바위 피부에는 주름선이 많은데 옆에서 보면
어두운 표정을 지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여 신비감을 더한다. 완전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무장된 천험의 돌기둥이라 접근은 정말 어림도 없어 보이는데, 저 봉우리 위에는 주왕산 산신
이나 신선만의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의 숨겨진 보물이라도? 그러니까 대자연
이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게끔 저렇게 깎아 놓았을 것이다.

이런 절경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붙여놓은 전설이 하나씩은 꼭 있기 마련, 그 내용
은 대략 이렇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 한 도사가 바위 위에 올라가 열심히 도를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신선 2명이 하늘에서 내려와 도사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바위 밑에 불을 지폈는데,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며 봉우리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이게 끝임.


▲  시루봉 밑 주왕계곡


▲  학소대(鶴巢臺)

시루봉 맞은편에는 학소대라 불리는 커다란 낭
떠러지가 장대한 모습을 자랑하며 시루봉과 자
웅을 겨룬다.

계곡 바로 옆에 직각으로 높이 솟아있어 그 장
엄함에 주눅을 들게 만드는데, 시루봉 마냥 낭
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철옹성 마냥 범접하기
가 어려워 보인다.
절벽 꼭대기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 세상
을 굽어보고 있으며, 학소대의 덩치가 대단하
여 주변 계곡에 늘 그늘을 드리운다.
옛날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이 무리를 지
어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 불리며, 그 학소대
밑에 도승(道僧)이 절을 짓고 살았는데, 꿈에
신선이 나타나 빨리 피하라고 재촉하므로 밖으
로 나오니 위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져 절을 덮
쳤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온
다.


▲  인간이 만든 비루한 작품, 학소교 (학소대 밑)
대자연의 걸쭉한 작품을 쭉 보다가 인간이 만든 콘크리트 다리를 보니 정말로
못봐주겠다. 아무리 아치형으로 만들어도 거기서 거기임..

▲  급수대(汲水臺)

학소대를 지나면 육중한 바위 봉우리인 급수대가 모습을 비춘다. 그 역시 낭떠러지로 이루어
진 30여m의 주상절리(柱狀節理) 바위로 옛날 주왕의 군사들이 바위 위에 무자위를 설치해 계
곡 물을 위로 소환했다는 전설이 있어 급수대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주왕의 전설도
거짓이며 급수대의 전설 또한 거짓이다.


▲  주왕계곡 북쪽에 솟아난 벼랑 (이름은 모르겠음)

▲  자하성(紫霞城)터

급수대를 지나 계곡 하류(대전사)로 계속 길을 재촉하면 길 오른쪽에 자하성터가 초췌한 몰골
로 마중을 한다.
자하성은 주왕굴을 중심으로 하여 지형을 이용해 쌓은 산성(山城)으로 주방산성, 주왕산성이
라 불리기도 한다. 주왕이 신라군을 막고자 쌓았다고 하나 현실은 삼국시대 또는 고려 때 축
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곳을 거쳐 갔다는 신라 왕족 김주원이 자신에게 돌아올 왕위를
가로챈 김경신(원성왕)을 크게 원망하며, 여기서 잠시 딴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 싶다. 허나
그 마음도 부질 없음을 깨달았는지 강릉(명주)으로 내려가 거기에 둥지를 틀었다.

성 둘레는 12km에 이르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끊임없는 태클과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
다 무너지고 지금은 일부만 겨우 남아 있다. 그 모습도 돌무더기처럼 남아있어 자하성터 안내
문이 없었다면 그냥 자연산 돌무더기로 지나쳐도 이상할 것이 없다.


▲  주왕계곡의 흥미로운 존재, 아들바위

자하성터를 지나면 계곡 냇가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아들바위를 만나게 된다. 덩치가 큰 네
모난 바위가 다소 기운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겉모습은 딱히 유별난 것은 없으며, 그냥 계
곡에 놓인 커다란 바위 정도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신비한 존재로 각인되어 옛날부터 아들바위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의 오랜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아들 선호 사상이 빚은 산물이라고나 할까? 냇가 한복판
에 저런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돌을 던졌을 것이고, 바위 위에 얹혀지면
마치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것이 점차 확장되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이
야기까지 생겨난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바위와 달리 여기서는 그냥 던지면 안된다. 바위를 등지고 다리 가랑이 사이로
돌을 던져 바위에 골인을 해야 아들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냥 왼팔로 던져 골인을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새 수법이 바뀐 모양이다. 어쨌든 오랜 세월 사람들이 던질 돌이 바위
위에 수북히 쌓여 그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잠시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 (주왕계곡 하류와 주왕산 산줄기)

▲  주왕계곡 하류 (대전사 동쪽)

▲  주왕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대전사

주왕산에 들어서면서 시간이 되면 주왕굴과 대전사(大典寺)까지 말끔히 둘러보려고 했다. 주
왕산 상의주차장까지 13시까지 모이기로 해서 시간이 좀 넉넉할 줄 알았는데 벌써 12시 반이
넘어버렸다. 상의주차장까지는 앞으로도 30분을 더 가야 된다. 그러니 이들을 제대로 볼 시간
이 없는 것이다.
하여 산을 좀 타야 되는 주왕굴은 다음으로 미루고 상의주차장 직전 길목에 있는 대전사라도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이 절은 신라 후기에 창건된 오래된 절로 주왕산의 터줏대감격 존재인
데, 문화유산이 여럿 있어서 사진에 모두 담고 싶었다. 허나 시간 부족이란 현실 앞에 경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쳐야 했다.
그렇다고 무리를 해서 보는 것도 단체 활동에 대한 예의는 아니며, 너무 시간에 쫓기듯이 보
느니 쿨하게 다음으로 넘기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하지만 얼마나 아쉽던지 아무리 다음에
오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 다음이란 것이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이다. 서울에서 제
법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전사를 지나니 바로 주왕산의 대표 관문인 상의 매표소이다. 이곳은 대전사 때문에
문화재 관람료란 명목으로 입장료를 뜯고 있는데, 매표소 사람들의 눈빛에는 어느 누구도 그
냥 들여보내서는 안된다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다. 그 돈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주왕산 상의(대전사)매표소만 입장료를 징수함, 나머지(절골, 월외리 등)는 입장료 없음>

상의매표소를 지나니 다른 유명 산과 마찬가지로 먹거리촌이 징하게 펼쳐진다. 도토리묵과 파
전, 송이, 동동주, 산채비빔밥, 백숙 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서둘러 길을 재촉하려는 찰라 낯
익은 얼굴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적지 않은 일행들이 거기서 동동주 1잔에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늦을까봐 대전사 등 많은 것을 두고 왔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산행
뒤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럴줄 알았다면 대전사라도 제대로 보고 오는 건데
갑자기 기분이 허탈해진다.
상황이 뭐 그리 되었으니 다시 대전사로 가기는 틀렸고, 일행들과 어울려 주왕산의 명물인 송
이와 도토리묵, 동동주 1잔을 걸치며 같이 상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  상의주차장에서 바라본 주왕산과 주왕계곡

상의주차장에 도착하니 13시 20분, 늦게 오는 사람들이 속출하여 13시 40분이 되어서야 출발
을 했다. 주차장에는 산꾼과 나들이꾼을 태운 관광버스와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었고 그에 아
랑곳하지 않고 차량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어온다. 그러나보니 들어오는 길은 정체가 대단하여
많은 차량들이 마을 밑에 차를 대고 걸어오기도 했다.

주왕산을 벗어난 우리는 안동(安東)으로 넘어갔다. 안동댐 주변에 자리한 식당에 들어가 안동
의 토속 음식인 헛제사밥 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헛제사밥 정식은 일반적인 제삿상
음식과 비슷하다.
헛제사밥의 유래는 조선 때 유생들이 배가 고프거나 비싼 음식을 먹고 싶어서 성현(聖賢)들에
게 제사를 지낸다고 거짓말을 치고 노비와 주변 백성들을 닥달하여 만들게 한 음식상으로 '헛
'이란 접두어를 붙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음식상이 이제는 안동의 대표 밥상이 되
어 전국에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이곳 헛제사밥 정식은 나물이 버무려진 놋쇠 그릇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인데, 제사 때 쓰는 국
과 간고등어, 전, 떡, 잡채 등이 정식을 이룬다. 맛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 순식간에 밥과 반
찬을 비우고, 술도 여러 잔 마시니 졸음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식당 남쪽에 자리한 낙동강(落東江)과 월영교에서 잠시 소화 좀 시키다가
16시 30분에 출발했다. 아무리 목적지가 주왕산이라고 해도 마지막 종점은 결국 집이다. 서울
까지는 4시간 정도 걸렸으며, 피곤한 탓에 자다깨다를 무한으로 반복했다.

정말 번개처럼 날라가 재미나게 보냈던 무박 2일,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이들이 보고 싶
은 마음에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긴다. 다소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아쉬움은
다음이란 인연을 잡아 해결하면 될 것이다.

* 절골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주산지리
* 주왕계곡(용연폭포, 용추폭포 등)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의리
* 주왕산국립공원(☎ 054-870-5300)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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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0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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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 예천 삼강주막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 힘겹게 겨울 제국을 몰아내며 천하 해방에 열을 올리던 3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이틀 일정으로 강원도 내륙과 충북 동부, 경북 서북부 지역을 돌았다.
강원도 홍천과 평창, 영월 지역을 둘러보고 충북 땅으로 넘어가 내 시골인 단양(丹陽) 외
가쪽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사촌들과 늘어지게 회포를 풀었다. 오랜만에 찾은 시골
이지만 다음 날도 갈 길이 멀기에 나머지 회포는 불투명한 미래로 넘기고 아침 10시에 콩
볶듯 길을 나섰다.

간만에 단양에 왔으니 단양 명소는 1곳 가줘야 서운함이 덜하겠지? 하여 단양팔경의 일원
인 사인암(舍人岩)을 둘러보고 바로 경북 땅으로 넘어갔다. 사인암에서 방곡을 거쳐 남쪽
으로 내려가면 바로 경북 문경(聞慶)으로 이어진다.

경북으로 갈아타면서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한때 천하의 주목을 격하게 받았던 삼강
주막을 가기로 했다. 그밖에 예천 명봉사(鳴鳳寺)와 문경 김룡사(金龍寺) 등도 뜨겁게 거
론이 되기는 했으나 이미 절을 여럿 들린 터라 바로 삼강주막으로 총알처럼 이동했다.
(강원도와 단양 사인암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이 땅에 마지막 옛날 주막, 이제는 예천 제일의 꿀단지로 부상한
삼강주막(三江酒幕) - 경북 지방민속문화재 134호

낙동강(洛東江)과 내성천(乃城川), 금천 3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예천 삼강(三江)포구에 이 땅
의 마지막 전통 주막으로 추앙받고 있는 삼강주막이 있다. 지붕과 집이 온통 누런 피부로 이
루어진 초가(초가집)로 싸리나무 담장으로 둘러진 초가가 진짜 삼강주막이며, 나머지는 예천
군에서 이곳을 관광지로 격하게 띄울 때 새로 닦아놓은 것들이다.

삼강포구(삼강나루)는 안동과 의성, 청송, 군위, 영천, 대구, 경주, 울산 등 경북 내륙과 경
남 동부 지역에서 서울로 갈 때 거의 거쳐가야 된다. 그러다보니 일찌감치 교통 요충지로 성
장하여 상인과 나그네들을 위한 숙박시설과 장터가 발전했다. 청운(淸雲)의 꿈을 가지고 과거
를 보러가는 영남 선비들도 적지않게 삼강나루의 신세를 졌으며, 양반과 선비, 상인(보부상),
뱃사공, 농사꾼 등 다양한 계층이 자리를 비비며 국밥과 술을 먹고, 주막 방에서 같이 자고,
배를 타던 현장이다. 삼강주막은 바로 그런 삼강나루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지어진
주막의 하나이다.

삼강주막은 1900년 경에 지어진 이 땅의 흔한 초가이다. 물론 그 건물이 있기 전부터 주막은
쭉 있었다. 주막의 규모는 조그만 초가 1동이 전부로 방 2개와 툇마루 1개, 부엌을 갖춘 집약
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변소는 바깥에 따로 설치했다. 겉으로 보면 그저 흔
한 초가이지만 이 땅에 유일한 옛 주막으로 어마어마한 희소성을 지니고 있어 건축사 자료로
도 아주 휼륭한 존재이다.

삼강나루를 거쳐간 사람들은 이곳에서 밥을 먹거나 하룻밤 머물면서 주막의 가치를 반질반질
하게 해주었고, 마르지 않고 쏟아지는 손님들로 주막 주인은 삽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번
영을 누렸다. 또한 삼강나루에 있던 장터와 다른 주막들도 다 같이 번영을 누리며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큰 홍수로 삼강나루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때 다른 주막과 건물은 죄
다 떠내려가고 오로지 이 주막만 살아남아 이곳의 유일한 주막으로 독점을 누렸다.

1940년대 후반,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모(酒母)라 불리는 유옥연 할머니(1917~2005)는 이 주막
을 인수했다. 그때 그의 나이 30대, 1940년에 남편을 여윈 그녀는 2남2녀를 키우고자 주막 경
영에 뛰어든 것이다.
이곳이 교통 요충지라 목이 좋고 음식 솜씨도 뛰어나 강에 다리가 놓이기 이전까지는 그런데
로 먹고 살았다. 허나 시대가 격하게 흘러 1980년대에 다리(삼강교)가 생기자 사람들의 발길
은 95% 이상 끊기게 된다.
그러다보니 주막과 동고동락하던 나룻배는 망했고, 주막 역시 경영에 영원한 빨간불이 켜지면
서 크게 궁색한 처지가 된다. 기껏해야 동네 단골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그의 전
부가 담긴 주막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주막은 곧 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업
종을 전환하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이 땅의 마지막 주모로 60여 년을 살다가 2005년
10월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그때서야 강제로 주막을 놓게 된다.

주인이 가고 없는 주막은 자연히 폐가로 버려져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으나 이곳의 가치를 뒤
늦게 깨달은 예천군에서 2007년에 이곳을 인수해 예전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리고 주막을 운
영할 주모를 공개적으로 선별해 인근 마을에 사는 권씨 할머니가 주모로 뽑혀 유옥연 할머니
의 뒤를 이었으나 군청과 마을과의 갈등으로 지금은 예천군에서 삼강마을에 위탁을 맡겨 마을
에서 공동 운영한다.

옛 주막은 아직 쓸만하지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몸이고, 건물이 협소해 주막으로 활용
하지 않고 그냥 문화유산 관람용으로 두었다. 주막 뒷쪽에는 500년 묵은 회화나무가 예나 지
금이나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주막 주변에 초가(1930년대 홍수로 사라진 사공과 보부상숙
소도 재현함)와 원두막을 잔뜩 지어 주막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래서 주막 음식은 새 집에 들
어가서 먹어야 된다.
주막 앞에는 누런 흙이 곱게 입혀진 뜨락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조촐하게 돌담길이 재현되
어 정겨움을 더한다. 이는 예천군에서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키우면서 달아놓은 것이다. 그만
큼 이곳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이다. 열렬한 홍보와 투자 끝에 이제는 회룡포(回龍浦)와 더불어
예천 제일의 명소로 우뚝 섰으며, 하루 방문객 수는 주말 기준 최대 300~400명 정도 된다.
하지만 너무 겉모습과 상업주의에 열중한 나머지 주막의 구수한 맛이 변질되어 '옛날 주막 분
위기가 안난다','너무 돈장사가 아닌가?','완전 민속촌을 재현했다' 등의 쓴소리도 적지 않게
나온다. 어떤 신문은 이곳에 있는 청량음료 자판기를 두고 날카로운 지적을 쏟아내기도 했다.

허나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맛도 그런데로 괜찮고, 가격도 적당하다고 본다. 또한 두부와 도
토리묵, 막걸리, 칼국수 등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며, 주말에 찾을 경우 엄청
나게 밀려드는 사람들로 좀 어수선하기는 해도 옛 주막을 바탕으로 소소하게 전통의 장을 만
든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원래부터 주막이었고, 주막 주변은 장터였기 때문이다. 게다
가 주막 남쪽에 자리한 삼강마을은 삼강주막마을로 이름을 바꾸고 전통체험과 농촌체험, 민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삼강주막을 중심으로 매년 9~10월에 3일 일정으로 '삼강주막 나루터 축제'를 벌이고 있
는데, 막걸리 마시기, 막걸리와 전통음식 전시/판매, 공연과 가요제, 민속놀이 체험, 예천군
특산물장터, 사진/그림 전시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 삼강주막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 (삼강리길 27 ☎ 055-655-3132)
* 삼강주막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강주막 동쪽에 재현된 누런 돌담길
푸른 대나무까지 머금고 있으니 그 풍경이 참 정겹기 그지 없다.
이 돌담길은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꾸미면서 닦여진 것이다.

▲  온통 누런색으로 이루어진 삼강주막 관광지

▲  초가 원두막 2채와 삼강주막(오른쪽 초가)

주모 할매가 방이나 부엌에서 튀어나와 '술 한잔 들고 가이소~!','국밥 1그릇 들고 가이소~!'
할 것 같은 삼강주막, 옛 주모가 가고 없는 삼강주막은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 옆에 재현된 후
배 초가들에게 그 짐을 넘겼다.
솔직히 기존 주막을 손질하여 그 방이나 툇마루, 마당에 놓인 상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
람을 벗삼아 술 1사발, 국밥 1그릇을 섭취해야 진정한 옛 주막 멋이 날 것인데, 지방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임)로 지정된 귀한 몸이라 그것까지는 싫었던 모양이
다. 그러다보니 툇마루와 주막 방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고, 오로지 부엌만 들어갈 수 있어 완
전 금지된 주막이 되어 버렸다.

허나 오래된 기와집과 초가 가운데 식당이나 민박, 전통체험 공간으로 활용되는 집들이 적지
않다. 삼강주막은 길어봐야 100여 년 정도 되었고, 근래 손질을 하여 거의 새집처럼 되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눈요깃감으로 둘 것이 아니라 주막 체험용으로 좀 바쁘게 굴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만 집이 좁기 때문에 보조용 초가를 여럿 두어 수용 공간을 늘리고, 음식 조리는
보조용 초가나 조리 공간을 두어 처리하면 될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삼강주막과 회화나무

▲  낙동강 둑에서 바라본 삼강주막


▲  구수한 모습의 삼강주막 툇마루
삼강나루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저 좁은 툇마루와 방은 늘 빈자리가 없었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공간이 되었다.

▲  삼강주막 부엌
연기에 그을린 검은 때가 삼강주막의 왕년의 위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밥과 국을 끓이던 쇠솥은 무심하게 내려앉은 먼지의 눈치를 보며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벽화처럼 자리한 삼강주막의 백미, 외상결재장부

삼강주막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이 있다. 바로 부엌과 바깥 흙벽에 새겨진 외상결재장부이
다. 장부라고 해서 종이에 쓰인 것은 아니며, 그 흔한 한글과 한자, 숫자도 없다. 세로와 가
로로 그어진 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여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수수께끼의 추상화나
문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옛 주모인 유옥연 할매의 작품으로 그는 글자를 모르던 까막눈이라 자신만의 전용 글
자를 만들어 이렇게 외상장부를 작성했다. 예나 지금이나 단골 외상 손님은 늘 있는 법이라
그들의 편의를 위해 벽에 그만의 표시법으로 장부를 만들어 손님을 관리했으며, 외상을 했을
경우 세로로 줄을 긋고, 외상값을 치룬 경우에는 가로로 줄을 그었다. 줄은 불쏘시개를 이용
해 흙벽에 그었다. 허나 세로줄만 있고 가로줄이 없는 것도 적지 않아 외상값을 다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글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주모 할매의 깊은 뜻과 철학, 외상 손
님에 대한 넉넉한 마음이 깃들여져 있다.


▲  부엌에 빼곡히 새겨진 외상결재장부 ▼


▲  주막 밖에 차려진 재래식 변소
삼강주막은 건물이 작기 때문에 싸리나무 담장 밖에 따로 변소를 두었다.
현재 변소는 무늬만 남은 상태~~ 변을 보려면 주막 외곽에 설치된
현대식 변소를 이용하기 바란다.

▲  주막 밖에 덩그러니 놓인 들돌

변소 뒷쪽에는 '들돌'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커다란 돌이 놓여져 있다. 처음에는 그냥 돌로
여겼으나 옆에 있는 들돌의 유래 안내문을 보니 180도 달라 보인다.
들돌이란 일종의 성인식 도구로 옛날 농촌의 남자 아이들이 성장하여 농부(어른)로 인정을 받
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즉 10대 중반에 저 돌을 들어야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돌의 무게는 10~20kg 정도 될 것 같은데, 성인식 도구치고는 좀 무겁고 거친 것 같다. 하지만
어찌하랴?? 농촌에서 살려면 힘을 써야 되는 일이 1~2가지가 아니니 말이다.
또한 삼강나루는 사람과 물류의 왕래가 빈번했는데, 그에 따라 물건을 나를 인력이 많이 필요
했다. 그래서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을 정했다고 한다. 돌을 완벽하게 들면 좀
많이 받고, 못들면 그냥 아웃, 중간 정도 들면 중간 정도 품삯을 받았다. 이 돌은 삼강주막과
더불어 이곳에 전하던 오래된 유물로 겉보기와 달리 역사적 값어치가 충분하다.


▲  삼강주막의 오랜 벗, 회화나무 - 예천군 보호수 11-27-12-23호

강주막 뒷쪽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삼강주막의 오랜 터줏대감
이자 이곳의 듬직한 정자나무인 그는 약 500년 정도 묵은 것으로<197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 추정 나이가 약 450년> 높이는 20m 정도 되며, 그 북쪽에는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이 있
다.


▲  강바람만 가득한 낙동강 삼강나루터 (오른쪽 다리가 삼강교)

강주막 뒷쪽 둑방을 오르면 잃어버린 땅(북한, 요동반도, 만주, 연해주, 왜열도 등)을 제외
한 이 땅에서 가장 긴 강, 낙동강이 도도한 물결을 드러낸다. 이곳이 바로 삼강주막의 든든한
밥줄이자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인 삼강나루터로 문경에서 내려온 주흘산맥(主屹山脈)
과 안동에서 온 학가산맥(鶴駕山脈), 그리고 멀리 대구에서 올라온 팔공산맥(八公山脈)의 끝
자락이 만나며,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그래서 지명도 3개의 물줄기가
만난다는 뜻의 '삼강'이 되었다.

예로부터 수륙교통의 요충지이자 경상도에서 서울과 중부지방으로 이동할 때 거쳐가던 길목으
로 이곳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또한 소금배가 이곳까지 올라와 교류를
했고, 서울과 대구(大邱)를 잇는 군사도로의 역할도 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는 그런데로 성
황을 이루었다. 나룻배는 2척을 굴렸는데, 큰 배는 주로 가축과 화물을, 작은 배는 사람을 수
송했으며, 장날에는 밀려드는 수요로 최대 30회 이상을 운행했다.
허나 현대화의 거친 물결과 어미도 몰라보는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불어닥치면서 1980년대
나룻배를 대체할 삼강교가 강 위에 놓이게 된다. 그로 인해 나룻배는 밥줄이 끊겨 사라지고
삼강나루의 영광 또한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며 겨우 삼강주막만 남아 나룻터를 지켰던 것이다.

2007년 이후 쓰러진 삼강주막이 복원되고, 이곳 일대가 예천군의 야심 속에 관광지로 부상하
면서 2013년에 체험학습용으로 나룻배 1척을 장만해 나룻터에 띄워놓았다. 하지만 내가 찾았
을 때는 배는 움직이기는 커녕 늦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도 봄이 천하를 완전히 해방
시킨 이후에 움직일 모양이다.

▲  삼강나루를 한방에 보내버린 삼강교

▲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 물줄기


▲  삼강주막 옆에 재현된 보부상과 사공 숙소 초가집

삼강주막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초가들이 즐비하여 자칫 삼강주막의 오랜 일원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현실은 근래에 닦아놓은 것들로 삼강주막을 너무 말끔히 손질을 한 탓에 기존 주
막과 새 초가가 서로 비슷한 모습과 피부를 지니게 되어 서로 구별이 가질 않는다.

새 초가 가운데 보부상 숙소와 사공 숙소라 불리는 초가가 있다. 원래 1900년대에 지어진 숙
소가 있었으나 1934년 대홍수 때 다 떠내려가고 사라진 것을 2008년에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삼강주막과 비슷한 구조로 지었다. 허나 이곳에는 더 이상 보부상과 사공이
없어 그 이름과 달리 현역에서 물러난 삼강주막의 역할을 대신하여 밥과 술을 먹는 길손들이
이용한다.


▲  주막으로 쓰이는 조그만 초가 (방 안에서 음식 섭취 가능)

▲  내부가 비어있는 초가 창고

삼강주막을 둘러보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점심도 아직 들지 못한 상태이고 그 유명한 삼강
주막에 발을 들였으니 주막 밥은 한번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하여 파전과 두부, 도토리묵, 잔치국수, 소고기국밥을 두루두루 시켰다. 다만 차량을 가
져왔기 때문에 아쉽지만 막걸리 등의 곡차(穀茶)는 섭취하지 않았다.

이곳이 주막이긴 하지만 사극처럼 시골 아낙네들이 옛 복장을 입고 머리를 딴 주모가 밥이나
술상을 갖다주는 것은 기대하지 말자. 그런 주모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주막 초가들 한쪽에
음식을 조리하는 건물이 있는데, 거기서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을 해야 되며, 음식이 나오면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먹으면 된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아 길게 줄을 서
야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우리는 음식을 들고 비어있는 초가로 들어가 즐거운 점심 시간을 가졌다. 곡차가 없어 아쉽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들이라 음식 맛도 그런데로 괜찮았고, 가격도 시중과 거의
비슷하거나 저렴한 편이다. 시장한 점심 기운을 잠재우고자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니
많아보였던 음식들은 이내 바닥을 드러내고, 반찬으로 나온 김치와 송송(깍두기)도 밥도둑이
따로 없어 그것 마저 동이 났다. 역시 금강산은 식후경(食後景)이다.


▲  삼강주막에서 먹은 음식의 위엄
두부와 도토리묵, 파전, 잔치국수, 소고기국밥


아직 해가 중천이라 다음 답사지를 물색하다가 속리산(俗離山) 동쪽에 숨겨진 폭포를 찾기로
하고 인절미를 약간 구입해 다시 길을 떠났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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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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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간송미술관, 심우장, 성락원, 선잠단터 201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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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로구 경복궁, 인사동 200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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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로구 창경궁 (1) 20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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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남구 봉은사 1 (사월초파일)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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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강남구 봉은사 2 (사월초파일)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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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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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 대원군별장, 홍지문
옥천암 마애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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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금선사

20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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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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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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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 (호압사,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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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선희궁터, 청와대분수대, 청와대앞길,
경복궁신무문, 인사동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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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 불국사 (사월초파일)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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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삼천사 (사월초파일)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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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간송미술관, 이종석 별장

200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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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수락산 학림사 2009, 8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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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09, 12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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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0, 4 ☞ 블로그글 보기

18

은평구 태화산 수국사 2010, 7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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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부암동 뒷골마을, 북악산길, 창의문 2011, 3 ☞ 블로그글 보기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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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관음사, 효민공이경직묘역,
사당동백제요지, 구벨기에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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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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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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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성북구

성북동 삼청각, 홍련사, 북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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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 은행나무, 원당샘, 안맹담/정의공주묘
목서흠묘역

20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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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백석동천 2012, 2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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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지당간지주, 세검정, 석파정별당, 홍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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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학도암, 이윤탁한글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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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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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동 사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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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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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백사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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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북악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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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 최순우옛집, 선잠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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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문화센터, 관상감관천대, 계동길, 창덕궁길,
요금문, 고희동가옥, 백흥범가옥, 빨래터

2013, 1 ☞ 블로그글 보기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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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길상사 2013, 4 ☞ 블로그글 보기
38 종로구

석파정별당(석파랑), 부침바위터, 무계정사터,
현진건집터, 청계동천, 반계윤웅렬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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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동백송, 재동초교, 백인제가옥, 북촌3경 일대,
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 안국동 윤보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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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본원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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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동 경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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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201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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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서원,
광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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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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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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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서울연등회 (서울연등축제)
조계사, 우정국로, 청계천, 광통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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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201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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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원구단), 덕수궁 대한문, 성공회 서울성당,
양이재, 구세군 중앙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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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201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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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성곽공원, 이화마을, 낙산(낙산공원) 20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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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선잠단터, 최순우옛집, 삼청각 201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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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인왕산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해골바위 201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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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등회(연등축제), 조계사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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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정릉 봉국사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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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

국립현충원(창빈안씨묘역, 부안군이석수묘역),
동작충효길(현충원길), 이수폭포

201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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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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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종로구

북악산 주능선 (숙정문, 촛대바위, 청운대,
백악마루, 창의문)

201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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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종로구

배화여고생활관, 이상범가옥, 백호정, 자수궁터,
송석원터

201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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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종로구

창덕궁 후원뒷길, 흥덕사터, 북묘하마비,
우암 송시열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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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북촌(고희동가옥, 기기국번사창, 삼청동길) 201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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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용산구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남산공원길, 남산 정상
(팔각정), 남산야외식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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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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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인왕산 개미마을, 환희사, 큰절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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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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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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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인왕산 수성동계곡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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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구

북한산 구천폭포(구천계곡),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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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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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20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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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대모산, 불국사, 구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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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부암동 무계원, 무계정사터(안평대군 이용집터),
청계동천, 반계 윤웅렬별장

201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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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한양도성,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난파가옥
, 월암근린공원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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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호암산 (삼성산성지, 호압사, 호암산 정상)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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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안산, 무악동봉수대 (안산자락길, 무악정)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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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중앙고등학교(본관, 서관, 동관), 창덕궁 신선원전

2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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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보문동 보문사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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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

홍련봉 보루,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5/6보루, 고구려정

201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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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구
노원구

회기동 연화사
월계동 기원사

20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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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개운산 보타사 20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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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201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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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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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종로구

삼청공원, 북악산 말바위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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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삼천사계곡)

201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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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구

강감찬생가터, 낙성대(안국사), 난곡로 느티나무,
신림동 굴참나무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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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성북구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자지동천,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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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서촌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 옛 윤덕영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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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은평구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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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

양천향교, 궁산, 소악루, 양천고성터, 관산성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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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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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장면 가옥, 흥덕사터, 북묘 하마비, 송시열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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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말 은행나무/느티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개화산 약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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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 석파정 별당(석파랑), 홍지문과 탕춘대성
옥천암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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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구름정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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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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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구로올레길,
지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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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윤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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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김신조루트)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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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20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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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성북동 최순우옛집, 수연산방(상허 이태준 가옥)

20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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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종로구
서대문구

박종화가옥, 보현산신각, 홍지문, 산모퉁이까페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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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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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구

숙선옹주묘역, 봉화산(아차산봉수대터),
봉화산둘레길, 충익공 신경진 묘역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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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중계본동 느티나무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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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강북구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묘, 김병로묘,
유림묘,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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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

무수골, 무수골느티나무,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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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서울연꽃문화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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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수락산 노원골, 수락산보루, 동막골, 도선사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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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김형태가옥, 이준구가옥,
북촌 가회동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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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능원사, 도봉사, 윗무수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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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월암근린공원(한양도성), 홍난파가옥, 딜쿠샤,
행촌동 은행나무, 황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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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관악산 사당능선,
선유천국기봉, 관음사국기봉, 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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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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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바위, 가온다리, 산들수목원약수터)
수성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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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호압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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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인천 - 4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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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천

야인시대촬영장, 루미나리에축제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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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양 북한산성(대서문, 중흥사터, 북한산행궁터)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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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양 북한산성(태고사, 산영루터, 북한산성계곡)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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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남 망경암, 봉국사 (사월초파일)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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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수원

오산 물향기수목원 / 수원 팔달문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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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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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양주

덕릉마을 산신각, 덕흥대원군 묘역

2008, 5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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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08, 10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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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안양사, 석수동마애종, 석수동석실고분 2009, 3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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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서운산 석남사 (사월초파일)

2009, 5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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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춘궁동동사지(동사지3/5층석탑), 광주향교

2010, 2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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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삼성산 염불암, 중초사지당간지주, 안양예술공원

2010, 12 ☞ 블로그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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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용문산 사나사, 사나사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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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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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북한산성 중성문, 노적사, 중흥사터, 봉성암,
산영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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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반월성, 청성공원, 포천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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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선법사(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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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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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중남미문화원, 벽제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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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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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 순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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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관고리 석불입상, 설봉공원(설봉저수지),
설봉서원, 설봉산 영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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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용문산 용문사,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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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고령산 보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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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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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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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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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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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문, 문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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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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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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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서울

우이령길(교현리~우이동), 우이동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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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소래철교, 소래포구(소래어시장), 장도포대지
(댕구산), 논현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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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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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광명

광명동굴, 가학산 2017, 7 ☞ 블로그글 보기

35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2017, 11 ☞ 블로그글 보기

36

안양

안양예술공원, 안양사지,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2018, 1 ☞ 블로그글 보기

37

강화

월곶돈대, 연미정, 강화평화전망대

2018, 6 ☞ 블로그글 보기

38

과천

관악산 문원계곡,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2018, 7 ☞ 블로그글 보기

39

군포

수리산(철쭉동산,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
둘레길), 수리사, 반월호수

2018, 9 ☞ 블로그글 보기

40

인천

양주성금속비, 용궁사, 영종도 백운산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41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2019, 1 ☞ 블로그글 보기

42

강화

교동도 (교동읍성, 교동향교, 화개사, 화개산)

2019, 6 ☞ 블로그글 보기

43

화성

봉림사, 구봉산 당성

2019, 10 ☞ 블로그글 보기

 

강원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양양

낙산사, 홍련암, 오색약수, 성국사, 설악산 주전골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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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릉 객사문, 오죽헌, 경포대, 굴산사터, 신복사터 2004, 6

☞ 블로그글 보기

3 평창 대관령 양떼목장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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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릉
동해

경포대해수욕장, 등명낙가사, 묵호항 2006, 8

☞ 블로그글 보기

5 동해 감추사, 감추해변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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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태백 구문소 2007, 2

☞ 블로그글 보기

7

양구

양구 선사박물관 20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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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천

토고미마을(산천어축제), 딴산 2011, 1 ☞ 블로그글 보기
9

화천,양구
춘천

화천 평화의댐, 세계평화의종공원,
춘천 윗샘밭

2011, 2 ☞ 블로그글 보기
10

평창

남산공원, 송학루, 노산성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1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2, 6 ☞ 블로그글 보기
12

정선

정선5일장, 봉양리뽕나무, 아우라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3

영월

보덕사, 금몽암, 낙화암, 금강정, 금강공원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4

태백

태백산 (당골, 석탄박물관, 석장승, 눈꽃축제장,
단군성전)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5

동해

추암(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 해암정,
추암조각공원, 북평5일장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6

화천

화천 산천어축제(화천읍내, 북한강) 2015, 1 ☞ 블로그글 보기
17

정선,태백

함백산, 만항재 2015, 9 ☞ 블로그글 보기
18

정선

아라리촌, 아우라지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19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0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21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2017, 6 ☞ 블로그글 보기
22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고인돌

2018, 2 ☞ 블로그글 보기
23

원주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계곡, 학곡리 황장금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충청북도 - 1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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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은
대전

보은 삼년산성
대전 동춘당 / 송애당 / 법동 석장승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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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동 영동향토민속자료전시관, 가학루, 황간향교 20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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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주

단호사, 사문리당산나무숲, 미륵리사터,
하늘재, 충주호

20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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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양

사인암, 청련암, 중선암, 북상리 시골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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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괴산

각연사 (각연사계곡)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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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홍범식고가, 개심사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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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옥천

정지용 생가(정지용문학관), 육영수생가,
죽향리초교 구교사, 죽향리사지3층석탑, 옥천성당

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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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주

낙가산 보살사, 명암약수터, 명암저수지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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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단양

북상리 시골, 사인암, 청련암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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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단양

구인사 (구봉팔문)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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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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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청남도, 세종 - 16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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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안 태화산 광덕사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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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진
태안

행담도, 꽃지해수욕장, 방포항,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암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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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전

식장산 고산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4 공주

계룡산 동학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5 공주

계룡산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용문폭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6 공주

계룡산 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7 태안

신진도(안흥외항), 마도, 안흥항, 안흥성(태국사)

2013, 8 ☞ 블로그글 보기
8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산자연휴양림)

2014, 6 ☞ 블로그글 보기

9

당진
아산

장고항, 삽교호관광지, 외암리민속마을

2015, 11 ☞ 블로그글 보기

10

예산

금오산 향천사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1

대전

계족산(계족산성, 계족산 황톳길), 장동산림욕장

2016, 10 ☞ 블로그글 보기

12

보령

성주사지, 성주천 가로수길

2017, 2 ☞ 블로그글 보기

13

서산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

2017, 12 ☞ 블로그글 보기

14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2018, 7 ☞ 블로그글 보기

15

천안

태조산 각원사, 성불사 2019, 1 ☞ 블로그글 보기

16

세종

비암사, 도깨비도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전라북도 - 15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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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안 상록해수욕장, 내소사, 곰소항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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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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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주
장수

한풍루, 무주향교
의암송, 장수향교

2009, 3

☞ 블로그글 보기

4 전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이목대), 한벽당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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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등학교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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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산

응항, 선유도, 고군산군도 일주

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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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순창

강천산(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강천사, 삼인대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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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망루, 오수리석불, 해월암

2015, 10

☞ 블로그글 보기

9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20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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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안 변산 내소사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1

무주 적상산(적상호, 적상산성, 적상산사고), 안국사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12

무주

무주머루와인동굴, 덕유산무주리조트(곤도라),
덕유산 설천봉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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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제 모악산 귀신사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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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완주 종남산 송광사 2018, 4

☞ 블로그글 보기

15

완주 모악산 대원사, 수왕사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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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라남도 - 14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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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성
담양
나주

장성 방울샘,
담양 관방제림 / 담양읍 5층석탑 / 석당간
나주 남고문 / 정수루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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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광 내산서원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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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주
광주

정수루, 금성관
광주 풍영정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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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천 금전산 금둔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5

순천 개운산 동화사 2010, 1 ☞ 블로그글 보기

6

순천 조계산 천자암 2010, 2 ☞ 블로그글 보기

7

장성 백암산 백양사 2011, 9 ☞ 블로그글 보기

8

광주 무등산 원효사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9

구례 지리산 천은사(천은제) 2012, 4 ☞ 블로그글 보기

10

곡성 동리산 태안사(태안사계곡) 2013, 5 ☞ 블로그글 보기

11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운암사)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2

목포

노적봉, 유달산(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갓바위

2017, 9 ☞ 블로그글 보기

13

나주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14

영광

불갑산 불갑사(꽃무릇군락지)

2019, 9 ☞ 블로그글 보기

 

대구, 경상북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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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

반월성, 석빙고, 남산 서쪽(용장사터, 천룡사터)

20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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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경 문경새재(여궁폭포, 혜국사, 주흘산, 주흘관) 20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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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달성 비슬산(유가사 / 암괴류), 현풍석빙고 2007, 10

☞ 블로그글 보기

4

구미 의구총, 낙산리고분군, 낙산리3층석탑 2009, 2

☞ 블로그글 보기

5

예천
상주

개심사지5층석탑
용화사(증촌리석불좌상/입상), 전고령가야왕릉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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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신문왕릉 2009, 7 ☞ 블로그글 보기
7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불무사)

2009, 9 ☞ 블로그글 보기
8

영덕
울진

고래불해수욕장, 후포항, 월송정, 월송해변 2011, 6 ☞ 블로그글 보기
9

달성

다람재, 도동서원, 이노정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청도

남산 낙대폭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달성

비슬산 용연사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2

예천

회룡포, 비룡산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3

경산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4

경주

효소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귀부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15

경주

남산 보리사(미륵곡 석조여래좌상) 2015, 10 ☞ 블로그글 보기
16

안동

도산서원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7

대구

팔공산 파계사, 대비암, 성전암 2016, 4 ☞ 블로그글 보기
18

경주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19

의성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문익점면작기념비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20

예천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석조여래입상과
3층석탑, 초간정(초간정 원림)

2018, 3 ☞ 블로그글 보기
21

상주

장각폭포, 오송폭포(성불사), 옥양폭포

2018, 6 ☞ 블로그글 보기
22

영주
봉화

휴천동 지석 및 입석
오전약수,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2019, 6 ☞ 블로그글 보기
23

경주

감산사, 연지암, 숭복사(숭복사터)

2019, 8 ☞ 블로그글 보기

 

부산 - 1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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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영구
강서구

광안리해수욕장, 가덕도(외양포, 대항, 세바지)

200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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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서구
서구

망상도/유주암, 송도해변, 송도해수욕장

2008, 9 ☞ 블로그글 보기
3

기장군

불광산 (장안사. 장안사계곡) 2009, 1 ☞ 블로그글 보기
4

기장군

불광산 (척판암, 백련암) 2009, 1 ☞ 블로그글 보기

5

서구
북구

내원정사, 만덕사(만덕사 당간지주), 알터유적 2009, 9 ☞ 블로그글 보기

6

금정구

금정산(금정산성, 국청사) 2011, 1 ☞ 블로그글 보기

7

금정구

금정산 미륵사, 금성동 2011, 1 ☞ 블로그글 보기

8

강서구

가덕도(가덕도등대, 외양포, 대항, 새바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9

사상구
강서구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 숲길,
범방동3층석탑, 부산경남경마공원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사하구

몰운대, 다대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남구

백운포, 오륙도 (오륙도등대, 등대섬) 2014, 1 ☞ 블로그글 보기

12

사하구
서구

승학산, 구덕문화공원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3

금정구

금정산(고당봉, 금샘), 원효암, 금정산성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4

해운대구

해운대 동백섬, 해운대해수욕장, 미포,
달맞이길, 문텐로드, 청사포, 구덕포, 송정해수욕장

2015, 7 ☞ 블로그글 보기

15

연제구

배산, 배산성터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6

기장군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황학대, 두호포구,
기장성당, 월전포구

2017, 4 ☞ 블로그글 보기

17

기장군

월전~대변 해안가, 대변항, 죽도, 연하리 해변,
오랑대, 해동용궁사

2017, 7 ☞ 블로그글 보기

 

울산, 경상남도 - 2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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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
부산

처용암
옥련선원 / 정묘사(배롱나무)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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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원 무학산(관해정), 가포해변 2006, 11

☞ 블로그글 보기

3

김해

김해 수로왕릉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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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주
사천

진주 금선암
사천읍성(산성공원), 대방진굴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5

함안
창원

함안박물관, 말산리/도항리고분군
진해 우체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6

창원

불모산 성흥사, 대장동계곡

2008, 9 ☞ 블로그글 보기
7

밀양

밀양 표충비, 무안리 향나무(홍제사) 2009, 1 ☞ 블로그글 보기
8

양산

천성산 홍룡사(홍룡폭포), 원효암 2009, 6 ☞ 블로그글 보기

9

울산 일산해수욕장, 대왕암공원 2009, 7 ☞ 블로그글 보기

10

창녕

창녕석빙고, 송현동석불좌상, 송현동고분군,
진흥왕척경비, 만옥정공원, 남지철교

2010, 5 ☞ 블로그글 보기

11

거창

수승대(귀연서원, 요수정)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2

울주
밀양

서생 나사리해변,
밀양 얼음골(천황사)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3

함양

상림공원, 한남군묘역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4

산청

목면시배유지, 배산서원, 덕천서원, 남명조식유적

2012, 9 ☞ 블로그글 보기

15

남해

호구산 용문사, 남해자생식물단지, 미국마을,
용소리/금평해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16

통영

통영 달아공원

2013, 3 ☞ 블로그글 보기

17

울주

가지산 석남사 (석남사계곡)

2013, 9 ☞ 블로그글 보기

18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9

창원

불모산 성주사 (성주사계곡)

2014, 10 ☞ 블로그글 보기

20

울주

서생포왜성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1

산청

덕양전, 전 구형왕릉, 왕산(유의태약수터,
왕산사지)

2018, 10 ☞ 블로그글 보기

 

제주도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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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외도 월대, 수산봉, 수산리곰솔, 납읍리
납읍 금산공원(납읍리 난대림)

2019, 3 ☞ 블로그글 보기


 

기타 지역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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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열도

동경 지역(긴자, 록뽕키, 우에노, 도쿄도청타워,
아사쿠사<관음사>, 신주쿠, 코쿄, 디즈니랜드)

2002, 6

☞ 블로그글 보


1. 천하에 공개된 글 중에서 하자가 없는 글만 선정해서 지역별로 모았습니다.
2. 2003년 4월 이전 글은 모두 제외했습니다.
3. 답사기 내용과 사진을 전체 혹은 일부라도 퍼갈 경우, 반드시 출처와 원작자(박융) 이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사진이 일부 뜨지 않는 글들이 약간 있습니다. 이 점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5. 공개된 글 중, 추후 업데이트 판이 나올 경우, 이전 판은 모음집에서 삭제 될 수 있으며 2개 이상의 시리즈로
   작성된 글 중 추후 본인 필요에 따라 1개나 2개로 통폐합 정리될 수 있습니다.
6. 지역 별로 분류했으나 지역이 2개 이상 겹치는 글은 먼저 간 곳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7. 최종 업데이트 2019년 12월 30일

황량함과 재건의 공존, 경주 서라벌 절터 나들이 ~~~ (감산사, 연지암, 활성리석불입상, 숭복사)

 

 

' 여름맞이 서라벌 경주 나들이 '
(감산사, 숭복사)

▲  감산사지 3층석탑


 

여름 제국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한복판에 신라의 향기가 지독하게 서린 서라벌 경주
(慶州)를 찾았다.
신라 왕릉의 백미(白眉)로 손꼽히는 괘릉(掛陵)을 둘러보고 그 후식거리로 감산사와 숭복
사를 둘러보고자 괘릉안내소 문화유산해설사(이하 해설사)에게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감
산사는 약 20분, 숭복사는 더 들어가야 된다고 그런다. 하여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미
답처(未踏處)에 대한 설레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다시 길을 떠났다.

괘릉을 지나면 바로 3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은 감산사, 오른쪽은 숭복사로 이어진다. 3거
리에 감산사 이정표가 있지만 숭복사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은 없다. 나는 감산사를 먼
저 둘러보고 숭복사를 거쳐 속세(俗世)로 나갈 생각이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괘릉초등학교를 지나 멀리 남월산<南月山, 토함산 남쪽 산>의 관찰을 받으며 한적한 시골
길을 거닌다. 오르막도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고, 드넓은 논두렁과 밭두렁이 펼쳐진 그야
말로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의 연속이라 가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20분
을 가니 산 밑에 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입구에는 절의 정체를 알리는 표석이 자리
해 있는데, 그의 피부에는 감산사 3자가 쓰여 있다.


▲  감산사 표석과 2층 요사

표석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ㄱ'자 모양의 기와집이 나온다. 이 집은 승려
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거의 한옥 민박이나 펜션 같은 모습이다. 

요사를 지나면 경내로 인도하는 길이 2갈래가 펼쳐진다. 어느 길로 가던 목적지는 같지만
연못을 끼고 가는 길이 더 아기자기하다. 돌과 흙으로 축대(築臺)를 쌓고 그 위에 마련된
연못은 네모난 모습으로 연꽃들이 막바지 와신상담(臥薪嘗膽) 중이라 소소한 연잎들만 가
득하다. 이제 보름 정도 지나면 연꽃의 향기가 눈과 코를 제대로 마비시킬 것이다.

연못에서 들꽃들이 손짓하는 계단을 오르면 대적광전이 있는 감산사 중심에 이른다.


▲  감산사 연못

▲  감산사의 중심지로 인도하는 돌계단
옛 감산사의 주춧돌로 만든 계단 너머로 법당인 대적광전이 슬쩍 머리를 내민다.


 

♠  감산사(甘山寺) 둘러보기

▲  감산사의 법당(法堂)인 대적광전(大寂光殿)

감산사는 토함산의 남쪽 줄기인 남월산 서쪽 자락에 안긴 절이다. 겉으로 보면 근래에 창건된
절처럼 보이지만 겉보기와 달리 매우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 절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시절에 김지성(金志誠, 652~?)이 부모와 가족들,
아내의 명복을 빌고 제왕(帝王)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가산을 털어서 지은 절이다. 이때 감산
(甘山)에 있던 자신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그 연유로 감산사라 불
리게 되었다.
절을 세운 김지성은 문신(文臣)으로 아버지는 일길찬(一吉粲) 김인장(金仁章), 어머니는 관초
리(觀肖里)부인이다. 그의 어린 시절과 중년 시절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67세란 적지 않은
나이에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에서 물러났는데, 나름대로 정치 개혁을 꿈꾸다가 지략(智
略)이 얕아 실패하고 자칫 형벌을 받을 뻔했다고 한다. 아마도 형벌 대신 은퇴를 권유받아 시
랑에서 물러난 듯 싶다.
어쨌든 벼슬에서 물러나 719년 2월 자신의 사유지에 감산사를 짓고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에 가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과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을 봉안했다. 미륵
보살 광배(光背) 뒤에 창건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감산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이것 마저 없었다면 감산사의 존재 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그 명문은 신라
의 대학자 설총(薛聰)이 썼다고 전한다.

또한 은퇴 이후, 미륵보살의 유가론(瑜伽論)을 연구하고 당(唐)나라에서 건너온 노장사상(老
莊思想)에 크게 빠져들었다. 특히 5천 언에 이르는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늘 펼쳐 읽었다고
하니 그의 사례를 통해 신라 귀족들 사이에서 노장사상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김지성이 애지중지 가꾸던 감산사는 김지성 일가의 원찰(願刹) 노릇을 하며 후손들이
정성껏 관리했으나 마땅한 사적(事蹟)은 전해오지 않으며, 고려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가 조
선 중기 때 완전히 망했다고 한다.
이후 절터만 황량하게 남게 되었으며, 김지성이 봉안한 석불들은 절이 망하는 과정에서 죄다
땅속에 묻혀 어둠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3층석탑과 석등 대석 등은 비록 생매장은 면했으나
이리저리 뒹구는 신세가 되었으며, 절터는 논밭으로 변해 감산사의 존재는 말끔히 잊혀져 갔
다.

그러다가 1915년경 왜인(倭人)들이 우연히 절터 논밭에서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캐내면서 역사
속에 사라진 감산사의 존재가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허나 이들 불상은 서울로 강
제로 옮겨지고 절터는 다시 방치된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비구니들이 들어와 옛터 위에 조그
만 건물을 지어 감산사를 칭했으며, 지금은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극락전 등 여러 건물이
경내를 이루면서 제법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으며, 왜정(倭
政) 때 발견되어 서울로 소환된 석불 2개는 국보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절이 산 밑에 있을 뿐, 괘릉리의 너른 전답을 바라보고 있는 평지 절로 경내 건물에서 고색(
古色)의 내음은 맡아볼 수 없으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3층석탑 등 옛 석조물에서는 고색의
향기가 진동한다. 게다가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깔끔하며 아기자기하다.


▲  현란한 색채의 극치, 대적광전 내부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18호

협시불(夾侍佛)도 없이 혼자 불단(佛壇)을 지키고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화강암으로 만든 신
라 후기 불상이다. 전체 높이는 약 1m로 얼굴은 딱히 표정은 없어 보인다. 눈과 코, 입, 머리
,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제대로 남아있으며, 머리는 깨져있던 것을 복원했고, 광배(光
背)와 대좌(臺座)는 새로 만들어 붙였는데, 고색의 때가 가득 입혀진 석불과는 달리 너무 대
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깨는 듬직해 보이고, 두 손은 비로자나불이 좋아하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는데, 이
는 근래에 보수한 것이다.
이 땅에 남아있는 비로자나불 중 거의 초창기 불상이며, 등에 조각된 띠매듭은 석불의 옷주름
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불 앞에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려 함일까? 그의 1/15도 안되는 조그만 석불을 갖다두어 마
치 어미와 새끼를 보는 듯 하다. 그의 뒤에는 고운 빛깔로 채색된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
)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

▲  꽃창살이 아름다운 극락전(極樂殿)

▲  대적광전 뒷뜨락

대적광전 뒤쪽에는 잔디가 입혀진 넓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감산사터의 일부분으로 3층석
탑과 석등 대석, 옛 주춧돌이 자리를 지키며 까마득한 왕년의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만큼 감
산사의 전성기와 신라란 나라는 우리와 엄청 멀리 떨어진 시대이다.

3층석탑 북쪽 가장자리에는 특이하게도 네모난 원두막을 두어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그냥
빈터만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는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저런 것이라도 만들어 약간의 자리를
채워넣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  감산사지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5호

절터 동쪽에 자리한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
라 후기 석탑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6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는데, 1층 탑신은 약간의 상처가 있는 것 외에는 그런데로 온전하나 2층과 3층 탑신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완전히 사라져 세월 앞에 장사가 없음을 실감케 한다. 기백(幾百)이
넘는 세월 동안 폐허로 있던 절터에서 저 정도라도 건진 것도 그나마 다행이다.

탑 옥개석(屋蓋石)은 4단 받침이며, 추녀 부분이 위로 살짝 올려져 작은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이 남아 있다.


▲  주인을 잃어버린 석등대석(石燈臺石)

3층석탑 인근에 화석(化石)처럼 박힌 석등대석, 꽃잎이 아래로 쳐진 연꽃 무늬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사실적인 모습을 자랑한다. 저기에 그럴싸하게 색깔만 입히면 정말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비록 옛 사람들이 조각한 연꽃 무늬지만 그에 대한 시샘 때문일까? 주변에는 꽃
들이 거의 없었다.
저 수려한 대석에 뿌리를 내린 석등(石燈)은 과연 어떠했을까? 석등의 모습이 거의 거기서 거
기지만 저 석등만큼은 왠지 특별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오래 전에 가출한 석등을 애타
게 기다리며 화려한 연꽃잎을 펼쳐 보인다.


▲  바닥에 바짝 엎드린 석등대석과 주춧돌

▲  수습된 주춧돌들 (1)

▲  수습된 주춧돌들 (2)
저들이 받쳐들던 감산사의 옛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터에 맞게 고스란히
남아있었더라면 짧은 상상력이라도 발휘해볼 수 있었을텐데, 한쪽에 수습해
놓아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  감산사 감로수(甘露水)
감로수란 말에 단단히 각인된 것일까? 물맛이 제법 달콤한 것 같다. 물을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마름에 잠긴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르짖는다.

▲  붉은 장미 옷을 걸친 초가 형태의 불연정(佛緣亭)

감산사는 원두막과 불연정 등의 초가를 갖추고 있다. 불연정은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벽 바깥
에는 장미꽃이 가득하여 마치 장미 옷을 걸친 듯, 운치를 가득 돋군다. 땅바닥에는 힘없이 떨
어진 장미꽃잎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데, 장미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
도 그 역시 잠깐일 뿐.. 세월과 자연은 그 존재조차 희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래서 세월이란
존재가 무섭다.

* 감산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6-2 (앞등길 117-20 ☎ 054-746-7096)


▲  바위 위에 자리를 편 조그만 석불
몸에 가득 피어난 세월의 때를 보니 제법 오래된 석불 같다. 이 석불은 근래
수습되어 없어진 머리를 새로 만들고 부분부분 손질하였다.


감산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숭복사로 가고자 왔던 길로 괘릉으로 나왔다. 날씨도 허벌나
게 덥고 지치기도 해서 다시 괘릉안내소에 얼굴을 들이미니 해설사(50대 후반 아줌마)가 반가
운 표정으로 벌써 2곳을 다 둘러봤냐고 그런다. 하여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이제 감산사 하
나 보고 왔다고 그러니 힘들겠다면서 잠깐 들어와 쉬었다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안내소에 들어가 앉으니 참외와 사과, 시원한 매실차를 권한다. 마침 시장도 하고 해
서 고마움을 표하며 흔쾌히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다과시간을 가지며 해설사와 괘릉과 감산
사, 숭복사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고, 화제(話題)는 점차 경주와 신라(新羅), 개인적인 이야기
까지 확대되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보니 2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갈 준비를 했지만 귀차니즘 발동으로 발길이 쉽사리 떠지질 않는다. 해설
사와의 이야기도 재미있던 터라 그런 마음은 더했다. 허나 그날 내 자신에게 내린 임무도 있
고 시간도 제법 흘러간 터라 이제 떠나야 된다. 해설사가 날씨가 덥다며 시원한 물을 제공하
니 그 물을 모두 마시고 아쉽지만 작별을 고했다. 그는 잘 보고 가라며 숭복사 가는 길을 알
려주었다.

괘릉을 나와 3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숭복사로 통한다. 중간에 햇갈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
만 그 길(신계입실길)을 따라 한없이 가다보면 숭복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리를 대
충 헤아려보니 거의 2.3km 정도 된다. 이동 도중에 활성리마을에서 생각치도 못했던 연지암과
활성리석불입상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애타게 손짓을 하여 숭복사는 잠시 넣어두고 그 손짓
에 이끌려 연지암으로 들어갔다.


 

♠  신라 후기 석불을 간직한 조그만 암자, 연지암(蓮池庵)

▲  활성리석불입상의 거처, 연지암 대웅전(大雄殿)

감산사와 숭복사 중간에 자리한 연지암은 팔작지붕 대웅전과 2채의 요사(寮舍)가 전부인 그야
말로 손바닥만한 작은 절이다. 불국사(佛國寺)의 말사(末寺)로 이곳에는 신라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절터가 있었다. 물론 절의 자세한 정보는 전하는 것이 없다.

왜정 시절의 어느 날 김연지화(金蓮池花) 보살이 밭 가운데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 꿈을 꾸었
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기며 그 밭을 찾아 직접 파보니 석불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이 바로
연지암의 보물인 활성리석불입상이다. 연지화는 그 불상을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
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연지암이라 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왜경(倭警)이 무슨 심보인지 불상의 출처를 대라며 연지화를 괴롭혔는데, 갑
자기 왜경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꺼꾸러졌다고 한다.

어쨌든 활성리석불의 난데없는 등장으로 태어난 연지암은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아 꾸준히 법
등(法燈)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조촐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절 남쪽에는 나무가 약간
우거져 있고, 주변에는 경작지가 펼쳐진 평지 절이다.

* 연지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활성리 378 (활성길 120-5, ☎ 054-744-7314)


▲  연지암 대웅전 내부

▲  대웅전 내 서쪽에 있는 활성리석불입상(活城里石佛立像)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6호

연지암의 법당인 대웅전은 1987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안에 이곳의 보물인 활성리 석불입
상이 깃들여져 있는데, 마땅히 중심 불단에 있을 줄 알았더만 불단에는 엉뚱하게도 금동(金銅
)으로 다져진 석가3존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정작 당사자는 서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 것
이다. 지금의 연지암을 있게 해준 존재이건만 한참 후배들에게 밀려나 구석에 있는 것이다.
다소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나름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 석불은 신라 후기 불상으로 주형광배()를 갖추고 있다. 불상 높이는 153cm, 광배
높이는 190cm에 이르며, 광배에는 머리 주변의 두광()과 몸 뒤쪽의 신광()을 새기고
그 바깥쪽에 화염(火焰) 무늬를 새겼다. 얼굴은 다소 훼손되어 지워져 있으며, 귀가 유난히
길어 어깨에 닿는다. 왼손에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데, 약합(藥盒)인듯 싶으며, 그게 맞다면
그는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된다. 오른손에도 뭔가가 쥐어져 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머리 꼭대기의 무견정상은 꽤나 두꺼워 보이며,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다. 얼
굴이 좀 지워진 것 외에는 대체로 건강상태는 양호하다.

이렇게 연지암을 덤으로 둘러보고 숭복사로 길을 재촉했다. 숭복사입구에서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왼쪽(동쪽)에 조그만 농로로 한없이 들어서니 넓은 절터와 함께 그 위에 자리한 숭복사
가 모습을 비춘다. 감산사는 그나마 길이 쉽지만 숭복사는 괘릉 해설사와 이정표의 안내가 없
었으면 결코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다.


 

♠  숭복사(崇福寺)터 둘러보기

▲  숭복사터
절터 가운데에 나무가 솟아나 얇게나마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저 나무는
이곳이 절터(금당터)인지도 모르고 대책도 없이 뿌리를 내렸으니 자연도
망각할 정도로 숭복사란 존재가 오랫동안 잊혀졌다는 뜻이다.


괘릉에서 도보로 거의 30분 이상 떨어진 말방리 구석에 자리한 숭복사는 괘릉과도 무척 인연
이 깊다.
괘릉의 주인을 속시원하게 밝혀준 이곳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 이전에 파진찬(波珍
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곡사<鵠寺, 또는 동곡사(洞鵠寺)>였다.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시절에 왕이 능자리를 물색하자 신하들이 곡사 자리가 좋다며
추천했다. 이에 왕은 어찌 절에다 능을 쓰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폐하(陛下),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를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어
재앙의 터를 능히 복된 마당으로 만들어 한없는 세월 동안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하는 것입니
다. 무덤이란 아래로는 지맥(地脈)을 가리고 위로는 천심(天心)을 헤아려 반드시 무덤에 사상
(四象)을 포괄함으로서 천대만대 후손에 미칠 경사를 보전하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
다. 불법(佛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예(禮)에는 이루는 때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자리함
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 됩니다.
다만 청오자(靑烏子)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이 헐리는 것을 슬퍼하겠습니
까? 또한 이 절을 조사해보니 본래 폐하의 인척에게 속해 있던 것인바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 데로 나아가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릉으로 하여금
나라의 웅려(雄麗)한 곳에 자리잡도록 하고 절로 하여금 경치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하면 우
리 왕실의 복이 산처럼 높이 솟을 것이요. 저 후문(侯門)의 덕이 바다같이 순탄하게 흐를 것
입니다.
이는 알고는 하지 않음이 없고 각각 그 자리를 얻는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정(鄭)나라 자산
(子産)의 작은 은혜와 한(漢)나라 노공왕(魯恭王)이 도중에 그만둔 것과 더불어 견주어 옳고
그름을 따지겠습니까?. 마땅히 점괘에 들어맞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용신(龍神)이 기뻐함을 보
게 되실 것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원성왕은 곡사를 매입하여 능을 조성했으며, 절은 지금의 자리로 옮
겼다. 원성왕의 능자리 매입은
한국경제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영토 전체가 제
왕의 땅이라는 이른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돈을 주고 그 자리를 매입했
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돈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잠들 자리이고, 그곳에 신라가 숭배하던 불교사원
이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재정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이후 경문왕(景文王)이 꿈에서 원성왕을 친견하여 곡사를 크게 중건하며 괘릉 수호와 원성왕
의 명복을 빌었으며, 헌강왕(憲康王) 시절에 대숭복사(大崇福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상은 최
치원(崔致遠)이 숭복사비에 남겼다는 비문(碑文)의 내용이다.

신라가 망한 이후, 마땅한 사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조선시대까지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한 듯
싶으며, 조선의 배불(排佛) 정책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문을 닫고 소리없이 사라진 것으로 보
인다.

이후 이곳은 속세의 뇌리 속에 완전히 잊혀지면서 숭복사란 고유의 이름을 잃은 채, 그저 지
명 이름을 따서 '말방리(末方里)절터'란 이름으로 흘러내려왔다. 그러다가 1931년 입실소학교
에서 이곳으로 소풍을 왔는데, 그때 깨진 비편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있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과 대조한 결과 이곳이 숭복사터임이 밝혀졌다. 그제서야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은 것이다. 또한 비석은 최치원이 쓴 숭복사비로 밝혀졌고, 비
석의 내용을 통해 경주김씨들이 문무왕릉(文武王陵)이라고 그렇게나 우기던 괘릉이 원성왕릉
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숭복사비는 2마리의 거북이 조성된 쌍귀부(雙龜趺)로 절터에서 수습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비석 조각은 13개가 발견되어 1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그 외에 기와조각과 주
춧돌 등이 다량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2기를 비롯해 금당터과 여러 석재(石材), 주춧돌
등이 남아있으며, '國寺大雄(국사대웅)'과 '蓋瓦大雄(개와대웅)'이 새겨진 평와(平瓦)와 금동
제 금구(金口)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근래에 승려들이 절터 옆에 건물을 짓고 숭복사를 칭하
며 아주 옛날에 끊긴 숭복사의 뒤를 잇고 있다. 지금은 건물 4~5동 정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많이 떨어지는 건물이다. 그나마 저것도 힘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냥 절터만 덩그러니 있어 도난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것보다는 절터도 지키고 석탑도 지킬
겸, 조그만 절집이라도 곁에 있는 것이 숭복사터에게도 좋을 듯 싶다. 다만 욕심과 불사(佛事
)에 너무 눈이 멀어 절터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  숭복사터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4호

금당(金堂)터 남쪽에는 옛 숭복사의 영화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3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서로가 닮은 쌍탑(雙塔)으로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형태인데, 감산사3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후기 탑이다. 게다가 1금당 2탑 형식의 신라 후기 가람배치하고도 맞아떨어
진다.

동쪽 탑은 2층과 3층 탑신, 3층 옥개석이 없어졌고, 서쪽 탑은 2층 탑신이 온데간데 없다. 기
단은 이리저리 깨지고 닳아 그 틈을 이용하여 자연이 심어놓은 잡초가 둥지를 틀었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것이 위대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언제 사라질지 모를 모래성에 불과하다. 다
행히 탑이 자연의 일부가 되버리기 전에 절터를 수습하여 이렇게나마 숨을 쉬게 된 것이다.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수호하는 존재인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새겨져 있는데, 세월의 때
가 가득 끼었지만 알아보는데 별로 어려움은 없다. 1층 탑신에 문(門)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
며, 옥개석은 4단의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  숭복사터 동3층석탑
세월이란 꺼지지 않는 불에 형편없이 녹아내린 듯한 모습이다.

▲  숭복사터 서3층석탑
동탑보다는 낫지만 여기저기 상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  3층석탑 기단에 깃든 팔부신장들 ▼


▲  숭복사 금당터

탑 북쪽에는 두툼하게 솟은 금당터가 있다.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죄다 휩쓸려 가고 터만 황
량하게 남은 금당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잡초에 쌓여 간신히 주춧돌을
내밀고 있으니 세상살이는 그야말로 무상한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감산사와 숭복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숭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68-2 (개곡말방길 1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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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봉화 오전약수와 약수탕, 석천계곡, 석천정사 여름 나들이 (휴천동 지석 및 입석)

 


' 경북 영주, 봉화 나들이 (오전약수터, 석천계곡) '

▲  오전약수터

▲  석천계곡

▲  석천정사


 

 

여름 제국의 한복판인 7월 중순의 어느 평화로운 날, 몸에 좋은 탄산약수와 시원한 계곡
생각이 간절하여 간만에 수도권을 벗어났다.

청량리역에서 안동(安東)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고 원주, 제천, 단양을 거쳐
영주로 내려가는데, 죽령(竹嶺) 이전까지만 해도 장마의 기운이 여전했으나 죽령을 지나
면서부터 차창 밖은 완전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단지 고개 하나를 지났을 뿐인데, 중
부 지방에서 남부로 지역이 지역이 바뀌었고 장마가 죽령을 넘지 못하면서 그 이남은 벌
써부터 3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판을 치는 것이다.

영주역에 도착해 두 발을 내리니 거의 숨이 막힐 정도로 후덥지근한 날씨가 나를 맞이한
다. 장마로 조금은 선선한 서울 날씨에 익숙해진 탓에 처음에는 좀 난감했지. 하여 인근
편의점으로 들어가 무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벗삼아 컵라면과 삼각깁밥 등으로 조촐하
게 이른 점심을 때우며 더위에 흥분한 몸을 달랬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편의점을 나와 무더위를 뚫고 영주여객 종점으로 이동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 휴천동 주택가를 기웃거렸다.


 

 

♠  이 땅에 흔치 않은 고인돌과 선돌의 공존 현장
영주 휴천동 지석(支石) 및 입석(立石) -
경북 지방기념물 24호

휴천동(休川洞) 주택가 속 조그만 공원에는 장대한 세월을 머금은 존재들이 있다. 바로 고인
돌<지석묘(支石墓)>과 선돌(입석) 형제이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휴천리 지석 및 입석')
이들은 고인돌 2기와 선돌 1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가 허전한 돌이 여럿 자리해 있어 고
인돌이 더 있었음을 가늠케 한다.
고인돌과 선돌은 학창시절 교과서부터 요란하게 등장하는 존재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대
표적인 유적이다. 고인돌은 지역과 마을을 다스리던 우두머리의 무덤, 선돌은 세력이나 마을
간의 경계 표시나 기념비, 신앙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선돌이 나중에 장승
으로 변했다고 함) 특히 고인돌은 한반도와 요동(遼東), 만주에 집중 분포하고 있어 우리 역
사의 특허 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인돌 분포지를 옛 조선의 영역으로 보기도 함)
이렇게 고인돌과 선돌이 많이 널려있지만 정작 그들이 같이 있는 현장은 매우 희귀한데, 이곳
휴천동 유적은 바로 그 흔치 않은 두 존재의 흥미로운 공존 현장이다.

2그루의 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운 곳에 드러누워 여름 제국을 잊고 사는 이들 고인돌은 조
그만 돌을 기반으로 삼고, 그 위에 넓직한 뚜껑돌을 올렸는데, 아직 학술조사를 벌이지 않아
땅 속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지역을 주름잡던 고인돌 주인의 시신이 담긴 공간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고인돌 곁에 서 있는 선돌은 남자 성인 키의 절반 정도의 높이
로 예전에는 치성의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  북쪽에서 바라본 고인돌 형제

▲  고인돌 남쪽에 자리한 선돌

오랜 세월을 탄 고인돌은 피부가 까무잡잡하며, 선돌도 비슷하나 남쪽 면은 제법 하얗다. 이
곳은 무려 20여 년 전에 와본 인연이 있는데, 보호 난간과 공원이 조성된 것 외에는 고인돌과
선돌 자체는 딱히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내가 많이 변해 버렸지. (그때는 파릇파
릇했던 10대 시절, 지금은 그저 눈물만 ㅠㅠ)
고인돌 주변은 조촐하게 공원이 닦여져 있으며, 동네 사람들이 일군 조그만 텃밭도 있어 도심
속의 소소한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휴식처는 엄밀히 따지면 고인돌/선돌 형제가 시민
들에게 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곳도 진작에 건물이 들어섰을 것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693-1,-2


 

휴천동 지석/입석을 오랜만에 인연 짓고 영주여객 종점(영주시내버스 차고지)으로 이동해 봉
화(奉化)로 가는 영주좌석버스 33번을 탔다. 날씨도 허벌나게 무덥고 가격도 비싼 좌석버스이
건만 무정하게도 냉방을 틀지 않아 창문을 열어 자연산 바람에 의지해 더위를 쫓았다. 
영주시내와 봉화읍내는 30리 남짓의 가까운 거리라 약 30분 만에 봉화읍내에 진입, 읍내 한복
판에 자리한 봉화터미널에서 하차했다.

봉화터미널로 들어가 그날의 주메뉴인 오전약수터행 시간표를 확인하니 40분 뒤에 차가 있다.
하여 그 시간을 억지로 죽이다가 오전약수터(오전약수탕)로 가는 군내버스에 나를 담고 북쪽
으로 향한다.
차가 막힐 일이 거의 없는 곳이라 2차선 도로를 쌩쌩 질주하며, 석천계곡과 북지리 마애여래
좌상, 계서당(溪西堂) 입구를 지나 어느새 물야(物野)에 이른다.
물야에서 사람들은 모두 내리고, 나와 운전사 둘만 남은 상태로 내성천(乃城川)을 따라 북쪽
으로 더 들어가니 물야저수지가 물연기를 모락모락 피우며 그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그 호수를 지나 2분 정도 더 가니 오전약수터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 북쪽 가게에서 버스는
심장 소리를 멈추었다. 그곳이 바로 오전약수탕 종점이다.


 

 

♠  탄산 약수의 정석, 봉화 오전약수(梧田藥水)터 <오전약수관광지>

▲  오전약수터 주차장에 세워진 오전약수관광지 표석

선달산(先達山, 1,236m) 동남쪽 자락 450m 고지에 자리한 오전약수터(오전약수탕)는 일반적인
약수와 달리 탄산과 철분이 함유된 약수(藥水)이다. 이런 약수는 주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지나는 강원도 영서(嶺西) 지방(춘천, 양구, 인제, 평창, 홍천, 정선)과 경북 산간지대(봉화,
청송)에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교통이 불편한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혀있다.

오전약수터의 오전은 점심 이전의 오전(午前)이 아니라 쑥밭을 뜻하는 한자어로 조선 성종(成
宗) 때 보부상(褓負商)이 발견했다고 전한다. 그 보부상은 서벽장과 오전리 후평장을 오가며
장사를 했는데, 산을 넘다가 너무 피곤하여 쑥밭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했다. 그때 만병통치(
萬病通治) 약수가 있다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보니 바로 옆에서 약수가 솟는 것이 아닌가. 그
약수가 바로 오전약수라고 한다.
성종 임금은 천하에서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추천하게 했는데, 오전약수가 그 으뜸으로 뽑
혔다고 전한다. (전국 약수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중종(中宗) 시절에는 풍기
군수를 지내며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이 즐겨 찾았으며, 그가 남긴 4편의
약수터 찬양시가 전해오고 있다.

영남 북부 제일의 약수터로 오랜 인기를 누렸으며, 탄산과 철분이 강해 피부병과 위장병에 아
주 좋다고 전한다. 이런 약수는 사이다처럼 톡쏘는 맛이 나고, 맛이 일반 약수보다 쓴 편으로
여기에 설탕을 넣으면 거의 사이다가 된다.
약수의 성분은 탄산과 철분이 거의 절반을 이루고 있으며, 마그네슘이 1/3정도 된다. 그래서
약수터 주변이 온통 시뻘겋다. 또한 이런 물로 몸을 씻으면 건강에 좋다고 하여 약수터 부근
에 목욕탕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런 탕을 약수탕(藥水湯)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오전약
수탕이라 부름) 

오전약수 같은 탄산/철분 약수는 일반 약수와 맛이 틀리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이런 약수
를 가장 기피하여 입에 대지도 않았지, 그런데 이런 약수로 지은 밥은 밥이 파랗게 물이 오르
면서 일반 밥과 달리 꼬들꼬들하고 맛이 좋았다. 물은 싫었지만 그 물로 지은 밥은 좋았던 것
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20대 후반에 탄산약수의 하나인 설악산 오색약수(五色藥水)를 오랜만에
가보았는데, 약수터가 마르도록 본전을 뽑았다. 소시(少時)적에 그토록 싫어했던 물맛이 이제
는 달콤한 물맛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몸에 좋다는 이유도 크게 한몫했지, 맛은 좀 쓰지만
몸에 좋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제 슬슬 몸을 생각할 나이대가 된 것이다.
그 이후 오랫동안 그런 약수를 찾지 못했다가 이번에 이렇게 오전약수를 찾게 된 것이다.

약수터에는 거북이 석상이 물을 졸졸 내뱉고 있는데, 몇 바가지를 마셨는지 모른다. 위장병이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나 물이 몸 속에 들어가니 정말 약수의 효과인지 꼬르륵하던 뱃속이 조
용해진 거 같다. 마치 속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  오전약수터(왼쪽 6각형 정자)와 보부상 석상

▲  탄산 약수의 정석, 오전약수터

오전약수탕 종점에서 무성한 숲길을 3분 정도 들어가면 6각형 정자에 자리한 오전약수터가 활
짝 모습을 드러낸다. 한참을 들어가야 나올 것 같은 신비의 약수가 싱겁게 나와버려 이게 정
말 오전이 맞나? 오후 아닌가? 갸우뚱했지만 오전은 맞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
약수터 주변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식당이 여럿 있는데, 한결같이 이 물을 이
용하여 닭백숙을 내놓고 있다. 탄산 약수로 고아 만든 닭백숙은 맛도 일품이고, 몸에도 좋다
고 하여 이곳의 든든한 별미로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다보니 가격이 좀 있는 편인데,
혼자 온 탓에 백숙은 먹지 않았다.

식당은 대부분 민박을 겸하고 있으며, 평일이라 다들 한산하다. 약수터도 덩달아 한산하여 혼
자 거의 전세를 내다싶이하여 물을 섭취했다. 기분 같아서는 이 약수터를 집으로 가져와 혼자
두고두고 마시고 싶지만 그럴 권한과 힘은 나에게 없었다. 선달산 산신령을 뇌물을 구워삶아
약수터를 내게 달라고 청하고 싶지만 산신령이 약을 빨지 않는 이상은 이곳의 꿀인 약수터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오전약수터는 바로 이곳에 있어야만 그 진가를 발휘하지 다른 데로 가면
죽은 약수가 된다.

오전약수터는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많은 식당과 민박집이 생겨났으며, 약
수터 동쪽에는 몸을 씻을 수 있는 약수탕이 조성되어있고, 북쪽에는 근래에 인공폭포와 조그
만 공원을 닦았다. 또한 도보길 유행붐을 타고 봉화군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외씨버선길이 이
곳을 지나간다.
인공폭포와 공원은 약수터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는 문제점을 해소하고자 조성한 것 같은데
, 솔직히 오전약수와 어울리는 존재는 아니다. 이런 약수터에는 샘터과 계곡, 적당한 양의 편
의 시설(식당, 숙박업소)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보며 이런 어설픈 것까지 굳이 만들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99-5, 1212 (오전약수탕길 18-24, 문수로 1601)


▲  오전약수터 옆을 흐르는 오전계곡 (내성천 상류)

▲  오전약수터 북쪽에 조성된 인공폭포
인공폭포 위쪽에는 넓게 공원을 조성하여 정자와 연못, 공연장을 두었다.


오전약수터와 인공폭포 공원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종점으로 나갔다. 외
씨버선길을 타고 두내약수탕(두내약수터)으로 넘어갈 생각도 했지만 날씨가 무더워 그건 포기
했다. 하여 일단 읍내로 나가면서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사람의 마음
이 갈대라 이내 변심하여 예전에 갔던 석천계곡(석천정사)으로 메뉴를 바꿨다. 한여름에는 뭐
니뭐니해도 계곡과 바다가 최고 아니겠는가.

봉화읍으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석천계곡 입구이자 읍내 직전인 삼계에서 내렸다. 계곡으
로 들어가려던 찰라에 문득 마을 쪽에서 오래된 기와집 하나가 크게 눈빛을 보낸다. 하여 그
눈빛에 일부러 홀리며 가보니 삼계서원이란 오래된 서원이다.


▲  삼계서원(三溪書院)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417호

석천계곡 입구 북쪽에 자리한 삼계서원은 석천계곡과 닭실을 일군 충재 권벌(沖齋 權橃, 1478
~1548)을 배향한 서원이다.
1588년 안동부사(安東府使) 김우옹(金宇顒)이 권벌을 기리고자 석천계곡 입구에 조촐하게 세
웠는데, 1601년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건물 이름을 지어주었고, 1660년 삼계란 사액(賜額)
을 받아 국가 공인 서원이 되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통 큰 서원 정리 사업으로 사당과 환성문(喚惺門), 관물루(
觀物樓)가 철거되었으며, 1951년에 중건되었다. 이곳은 특히 을미의병(乙未義兵)이 한참 일어
나던 1895년 안동 유림들이 권세현(權世賢)을 의병(義兵) 대장으로 추대하며 격문(檄文)을 작
성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서원의 구조는 앞에 공부를 하는 강당(講堂)을 두고 뒤에 사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
태로 좀 지나치게 커 보이는 2층 누각인 관물루가 서원 앞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 가운데 칸
에 문을 두어 환성문이라 했다. 허나 문은 굳게 잠겨있어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환성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고, 정면에는 강당이 자리해 있는데,
서원 철폐 당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그래서 고색
의 기운이 진하다. 강당 뒤쪽에는 사당이 자리해 있고, 서재 좌측에는 관리인이 머무는 건물
이 있으며, 동재 옆에는 1906년 사림(士林)에서 세운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서원 주위로 돌담을 길게 둘렀는데, 오래된 마을의 돌담길처럼 정겹고 푸근한 모습이다. 서원
서쪽에는 관리인이 머무는 건물이 있는데, 그곳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나 어차
피 밖에서도 사당을 제외하고 보일 것은 다 보이므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들어가기도 귀찮
고, 그때 내 마음은 이미 석천계곡에 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계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174 (생기마1길 24)

▲  담장 너머로 바라본 강당과 동/서재

▲  1906년에 세워진 권벌 신도비(神道碑)


 

 

♠  봉화 제일의 경승지, 석천계곡(石泉溪谷) - 명승 60호

▲  석천계곡 입구

삼계서원을 둘러보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석천계곡으로 이동했다. 이 계곡은 봉화 제일의 경
승지이자 피서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봉화의 꿀단지로 아직 본격적인 피서철도 아니고 그
날이 평일인지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것보다는 이렇게 한적한 것이 더 좋
지, 덕분에 석천계곡과 닭실마을 일대를 참 아늑하고 마음 편하게 둘러보았다.

석천계곡은 가계천(駕溪川)의 일부로 닭실마을<달실, 유곡(酉谷)마을>에서 내성천(乃城川)이
합류하는 삼계교까지 약 1km 구간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권벌이 터를 다지고 그의 큰 아들인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가 지은 석천정사(석천정)가 있으며, 울창한 소나무숲과 기암괴석,
계류(溪流)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예로부터 봉화 으뜸의 경승지로 찬양이 대단했다.
계곡 상류에 자리한 닭실은 권벌이 개척한 곳으로(또는 권벌의 조상이 1380년대에 개척했다고
함)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을 당하자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1520년 집을 짓고 닭
실을 일구었다.
지금은 석천계곡이 자연/답사 탐방로가 되었지만 읍내에서 계곡 남쪽에 신작로(다덕로)를 내
기 이전에는 읍내에서 닭실로 갈 때는 이 계곡을 거쳐서 갔다.

석천계곡과 닭실 일대는 '내성유곡 권충재(乃城酉谷 權沖齋) 관계 유적'이라 하여 사적 및 명
승 3호
로 지정되었으나 그 등급이 명승에 통합되면서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이란 이름으로
명승 60호로 변경되었다.


▲  석천계곡 하류 (주차장 남쪽)
멋드러진 풍경에 계곡 수심까지 얕은 편이라 피서의 성지로 전혀 부족함이 없다.

▲  석천계곡 (석천정사로 가는 계곡길)

석천계곡 주차장을 지나면 흙과 돌로 이루어진 계곡길이 나온다. 길이 좀 울퉁불퉁하긴 하지
만 너무 깔끔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포장길보다는 운치가 있고 정겹다. 길도 오로지 계곡길
뿐이라 두 다리에 의지하여 갈 수 밖에 없는데, 송림(松林)이 울창해 솔내음이 그윽하며, 계
곡에는 온갖 바위가 계류의 희롱을 즐긴다.


▲  청하동천(靑霞洞天) 바위글씨

석천계곡 주차장과 석천정사 중간 정도에 기묘하게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중간 도
리에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청하동천 바위글씨가 있다. 청하동천은 석천계곡의 다른 이름으로
하늘 위에 있는 신선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만큼 이곳이 신선(神仙) 세계와 가까울 정도
로 경승지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여기서 동천(洞天)은 빼어난 경승지에 부여되는 명예로운 이
름으로 아무 명소나 가질 수 있는 명칭이 아니다.

이 바위글씨는 권벌의 5대손인 권두옹(權斗應, 1645~1732)이 쓴 것으로 그의 호는 대졸자(大
拙子)이다. 여기서 대졸자는 요즘 흔한 대졸자가 아니라 크게 어리석은 작자라는 뜻으로 자신
을 낮추려는 의도로 지은 것이다. 호부터가 참 특이한데, 그가 살던 시절에 석천계곡의 명성
을 듣고 많은 도깨비들이 몰려와 놀면서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크게 고통을 당했다
고 한다.
그래서 권두옹은 바위에 글씨를 새기고 붉은 칠을 하여 필력(筆力)으로 도깨비를 쫓아내니 이
후 계곡에 평화가 찾아와 유생들의 공부가 더 잘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가 한 토막 전해
온다.
과연 도깨비가 이곳까지 놀러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도깨비도 흥분시킬만큼 이곳이 대단한 경승
지임을 강조하고자 적당하게 지어낸 설화라 하겠다.


▲  청하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구렁이가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필체이다.

▲  신선이 나올 것만 같은 소나무 숲길

▲  바위에 뿌리를 내리며 장차 석천계곡의
중심을 꿈꾸는 돌탑 무리들

▲  싱그러운 석천계곡 (청하동천 바위글씨와 석천정사 중간 지점)


▲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석천정사<(石泉精舍), 석천정(石泉亭)>

▲  석천계곡의 백미(白眉) 석천정사(석천정)

석천계곡 주차장에서 계곡길을 10분 정도 들어가면 계곡 건너에 자리한 석천정사가 모습을 드
러낸다. 석천정은 석천계곡의 상징이자 이 계곡에서 가장 절경이 뛰어난 곳으로 권벌이 1526
년에 세우려고 축대까지 쌓았으나 거기서 공사가 중단되고 대신 청암정을 지었다. 이후 축대
만 남은 이곳을 큰아들 권동보가 춘양목(春陽木)으로 산뜻하게 집을 지었다. 그의 후손과 지
역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배움터이기도 했으며, 여러 번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계곡 동쪽에 돌로 석축을 단단히 다지고 돌담을 두룬 다음 팔작지붕의 석천정을 세워 계곡을
바라보게 했고, 그 옆구리에 익랑(翼廊)을 덧붙여 공간을 넓혔으며, 담장 양쪽에 외부로 나가
는 문을 내고, 북쪽 문 옆에는 유생들의 숙소인 3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을 두었다.

계곡길에서 석천정을 가려면 계류 위에 놓인 외나무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물살의 패기가 조
금 있을 뿐, 수심이 얕아서 폭우로 계곡이 미치지 않는 이상은 누구든 건너갈 수 있는 수준이
다.


▲  석천정으로 인도하는 외나무다리 (다리 건너의 기와집은
석천정의 딸린 건물로 관리인이 머물고 있음)

▲  외나무다리와 무성한 숲을 이룬 계곡 상류

▲  서쪽에서 바라본 석천정의 위엄


▲  석천정에서 바라본 계곡

▲  외나무다리에서 바라본 계곡 (주차장 방향)
이곳은 계곡이 굽이치는 곳이라 물살이 제법 급하다.

▲  석천계곡 상류 방면 (닭실 방향)

석천정은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허나 바깥에서도 왠만한 것은 다 보
이니 굳이 홍길동을 따라하며 월담을 할 필요는 없다. 예전 석천계곡에 왔을 때도 딱 여기까
지만 갔었다.
여기서 뒤쪽으로 조용히 난 샛길을 따라가면 권벌의 후손이 사는 닭실마을이 나온다. 기왕 석
천계곡에 발을 들였다면 샛길을 쭉 따라가 닭실까지 모두 살펴보기 바란다. 닭실과 석천계곡
은 서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계곡으로 이어져 있는 하나의 존재이다.

글 분량상 닭실마을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 석천정사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45 (충재길 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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