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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7.15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속리산 폭포 나들이 ~~~ (장각폭포, 장각동계곡, 오송폭포, 시어동계곡, 성불사, 옥양폭포)
  2. 2018.04.02 경북 예천 겨울맞이 나들이 ~~~ (곱게 잘늙은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3층석탑, 초간정과 초간정 원림)
  3. 2016.12.26 경북 의성 늦가을 나들이 ~~~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조문국 경덕왕릉...) 2
  4. 2016.11.05 늦가을 경주 나들이 ~~~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벽도산,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5. 2016.01.23 천원짜리 지폐에도 나왔던 우리나라 서원의 영원한 성지, 안동 도산서원
  6. 2015.01.01 서라벌 신라 왕릉 나들이 ~ 경주 성덕왕릉, 효소왕릉 2
  7. 2014.12.07 관봉 정상에 우뚝 자리한 거대한 석불,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8. 2014.07.11 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작품 ~ 예천 회룡포 (내성천, 회룡포마을, 비룡산, 장안사)
  9. 2013.07.11 물맞이 명소로 유명한 피서의 성지, 청도 남산 낙대폭포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속리산 폭포 나들이 ~~~ (장각폭포, 장각동계곡, 오송폭포, 시어동계곡, 성불사, 옥양폭포)



' 상주 속리산 폭포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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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리산 장각폭포

▲  오송폭포

▲  옥양폭포



 

봄이 겨울 제국을 응징하며 얼어붙은 천하에 한참 희망을 내리던 3월 끝 무렵에 친한 후
배와 1박 2일 일정으로 짧게 좁은 천하를 주유했다.
첫날은 강원도 내륙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충북 단양(丹陽)으로 내려가 단양 친척집에
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오랜만에 찾은 단양 시골이지만 다음 날도 갈 길이 멀기에 나머
지 회포는 불투명한 미래로 쿨하게 넘기고 아침을 두둑히 섭취한 다음, 길을 떠났다.

둘째 날은 소백산맥 너머 경북으로 시야를 돌려 예천(醴泉) 지역을 둘러보고 이 땅의 마
지막 전통 주막으로 꿀재미를 보고 있는 삼강주막(三江酒幕)을 찾았다. 거기서 소고기국
밥과 파전, 도토리묵, 두부로 두둑히 점심을 먹었는데 나올 때는 인절미도 1개 구입하여
후식까지 챙겼다.

삼강주막을 나오면서 후식거리로 어디로 갈지 궁리하다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속리산
(俗離山)을 찾기로 했다. 속리산하면 흔히 충북 보은(報恩)과 괴산(槐山) 지역만 생각하
기 쉽지만 경북 상주(尙州)에도 적지 않게 덩치를 걸치고 있다. 바로 그 상주 권역에 이
름난 폭포들이 여럿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데 이들을 시간이 되는데까지 찾아보기로 했다.
그중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장각폭포이다.


 

♠  장각동계곡 하류에 그림처럼 자리한 조그만 폭포
장각폭포(長角瀑布)

속리산의 최고 봉우리는 과연 어디일까? 흔히 문장대(文藏臺, 1,054m)를 생각하기 쉽지만 정
답은 바로 그 남쪽에 자리한 천왕봉(天王峰, 1,057m)이다. 그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계곡이 장각동계곡(長角洞溪谷)으로 그 계곡이 굽이굽이 큰 세상을 향해 흐르다가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 하류에 걸쭉한 폭포를 빚어놓으니 그 폭포가 장각폭포이다.

동쪽을 향해 힘차게 물을 내뱉는 장각폭포는 높이가 겨우 6m 정도인 조그만 폭포이나 수량만
큼은 풍부하여 우렁찬 폭포수 소리에 귀신의 염통까지 쫄깃하게 한다. 폭포 밑에는 용소(龍沼
)라 불리는 깊은 못이 푸르고 청초한 빛을 띄며 상류에서 온 계곡물을 담아두고, 폭포 윗쪽에
는 근래에 지어진 금란정과 아름드리 소나무가 폭포의 운치를 한층 돕는다.
폭포 좌우에는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벼랑이 6~7m 높이로 형성되어 있고 폭포 정면에
는 폭포의 모습을 사진에 잘 담을 수 있도록 포토존(photo zone)이 설치되어있다. 용소 주변
에는 조그만 돌이 많아 조촐하게 백사장을 이루고 있어 피서의 성지(聖地)로도 아주 그만이다.

이곳은 풍경이 아름다워 속리산의 주요 명소이자 피서지로 인기가 높으며, 고려 중기 무인정
권기를 다룬 '무인시대(KBS)'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정리한 '불멸의 이순신(KBS)'
등의 사극이 여기를 거쳐가기도 했다. 무인시대(武人時代)는 무인정권 3번째 권력자인 이의민
(李義旼)이 이의방(李義方)의 명을 받고 거제도로 귀양간 의종(毅宗)을 만나 그의 허리를 분
질러 죽이는 장면을 담았으며, '불멸의 이순신'은 그의 어린 시절, 친한 선배(유성룡과 원균
이 그의 선배로 나왔음)들과 폭포에서 뛰어내리며 담력을 기르는 장면을 담았다. 그외에 '태
양인 이제마(MBC)', 영화 '낭만자객'이 이곳의 신세를 졌다.


▲  겨울 제국(帝國)의 먼지를 털어내며 슬슬 기지개를 켜는
장각동계곡 (장각폭포 직전)

▲  장각폭포 윗쪽, 금란정과 소나무

▲  장각폭포를 수식하는 구수한 양념, 금란정(金蘭亭)

장각폭포 윗쪽에는 금란정이 동쪽을 굽어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그만 팔
작지붕 정자로 20세기 한복판에 지어졌는데 그의 곁에는 소나무들이 운치를 이루며 조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늘 장각폭포와 한 덩어리를 이루며 세상에 그 존재를 진하게 알리고 있으며
정자에 올라서면 폭포와 용소를 비롯해 상오리(上五里) 일부가 좁게나마 시야에 들어온다.

정자의 이름인 '금란(金蘭)'은 주위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이로움은 쇠붙이도 끊을
수 있고 마음을 같이 한다는 말은 그 냄새가 난보다 향기롭다는 복잡한 뜻이다. 정자를 보다
전통식으로 지었다면 지금보다 운치가 더 진했을 터인데, 기둥과 지붕은 어설픈 전통식, 마루
와 난간은 현대식으로 만들어 일종의 절충양식이 되어버렸다. 정자 동쪽에는 금란정 현판이
걸려있다.

▲  최근에 지어진 금란정 기념비

▲  금란정에서 바라본 용소와 그 너머
풍경 (상오리 지역)


▲  장각폭포의 위엄

폭포 밑 용소에는 속리산이 베푼 옥계수들이 푸른 빛을 띄며 모여 있다. 용소의 수심이 꽤 깊
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바닥은 어렴풋이 보인다. 허나 수심은 2m가 넘으니 물놀이를 할 때 반
드시 주의해야 된다. 폭포가 조촐하게 생겼고 폭포 앞에 이렇게 대자연이 빚은 잘생긴 자연산
수영장이 있으니 자연히 피서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으면서 여름에는 무더위에 대항하며
벼랑 중간과 벼랑 위에서 뛰어내리는 용자들이 많다. 허나 그로 인해 물놀이 사고도 적지 않
은 터라 2014년 여름에는 동네 주민들이 벼랑 앞에 그물망을 치기도 했다.

마침 우리가 폭포에 이르렀을 때 2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반바지만 입고 벼랑 중간에 주름진
틈으로 기어올라가 폭포를 향해 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봄이 한참 선전을 해주어 날이 좀 포
근하긴 했으나 그래도 쌀쌀한 기운은 좀 남아있어 물놀이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허나 그들은
젊은 혈기만을 믿고 폭포로 뛰어들며 이른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도 춥기는 한지 큰
수건으로 몸을 가리며 물을 닦느라 부산하다.
그들이 요란하게 거쳐간 후, 폭포 주변은 다시 적막감이 감돈다. 이때다 싶어 잠시나마 폭포
를 나의 전유물로 삼으며 열심히 그를 사진에 담는다. 종종 관광객들이 폭포 밑으로 내려와
사진에 담기는 하지만 콩을 볶듯 금세 가버리고, 폭포 주변은 산바람 소리와 폭포 소리만이
적막감을 살포시 어루만질 따름이다.


▲  장각폭포를 거쳐 큰 세상으로 흘러가는 장각동계곡
이 계곡은 상오리 마을에서 용유천의 일원으로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내려간다.


폭포를 열심히 사진에 담으며 폭포 주변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시어동계곡(오송골)에 자리
한 오송폭포로 이동했다. 장각폭포에서 그곳까지는 약 6km 거리로 가깝지만 옥양폭포까지 모
두 보려는 욕심에 길을 서둘렀다.

※ 장각폭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① 상주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상주행 고속버스가 50~7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30~50분 간격
  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송면 경유 화북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화북 하차 (동서울에서 1일 1
  회, 13시 출발)
* 인천, 부천, 성남, 안산, 청주, 충주, 대전(복합), 김천, 구미, 안동, 대구(북부), 울산에
  서 상주행 직행버스 이용
* 경북선 무궁화호 열차(부산~밀양~경산~동대구~구미~김천~영주)를 타고 상주역 하차 (1일 3
  회, 금/토는 1일 4회 운행)
② 현지교통
* 상주시외터미널에서 화북 방면 시내버스(1일 7회 운행)를 타고 상오리 하차, 장각폭포까지
  도보 7~8분 (상주역에서 갈 경우에는 1.1km 정도 떨어진 상주초교 정류장까지 나와서 버스
  를 타야 됨)
* 화북에서 상주시내 방면 시내버스(1일 7회)를 타고 상오리 하차
③ 승용차 (폭포 주변에 주차장 있음)
* 당진영덕고속도로 → 화서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수청거리3거리에서 좌회전 → 상오리
  에서 장각동, 장각폭포 방면 좌회전 → 장각폭포

*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 ☎ 054-533-3389)



♠  시어동계곡의 아름다운 보석, 오송폭포(五松瀑布)

상오리에서 북쪽(괴산 방면)으로 가다가 장암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입석천을 따라 구비구비
산길을 오르면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 진훤)이 쌓았다고 전하는 견훤산성(甄萱山
城) 입구가 손을 내민다. 견훤은 상주 출신으로 이곳에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하며 경주(慶州
)로 가는 진상품과 세금을 빼앗아 세력의 발판을 닦던 곳이라 전한다. 기분 같아서는 그곳도
흔쾌히 들리면 좋겠지만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되고, 나의 마음은 이미 오송폭포에 가
있던 터라 견훤산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견훤산성입구를 지나면 속리산 화북탐방지원센터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 한굽이 오르면 화북분
소와 문장대주차장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소정의 주차비를 치른 다음 잘 닦여
진 길을 10분 정도 가면 오송폭포 입구가 나오고, 여기서 계곡을 2~3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
의 끝 막다른 곳에 오송폭포가 있다.

오송폭포는 속리산 신선대(神仙臺)에서 발원한 시어동계곡(오송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작품으로 폭포수가 마치 하늘에서 은가루를 쏟아내는 듯한 아름답고 경쾌한 폭포이다. 높이는
15m로 5단(혹은 7단)으로 주름진 벼랑을 타고 폭포수가 내려앉는데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
르지 않으며, 비가 온 이후에는 더욱 장쾌하게 쏟아진다. 폭포 밑에는 담(潭)이 형성되어 있
으나 수심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아주 얕아서 아이들 물놀이 장소 및 물맞이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지금은 비록 흔적도 없지만 예전에는 폭포 옆에 오송정(五松亭)이란 정자가 있어 거기서 오송
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폭포 윗쪽에는 20세기 중반에 창건된 성불사가 자리해
폭포를 거쳐가는 옥계수를 제일 먼저 만진다.


▲  오송지구 문장대 주차장
속리산을 대표하는 문장대를 비롯하여 문수봉과 청법대(聽法臺), 신선대 등
속리산 주능선의 봉우리들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  오송폭포와 문장대로 인도하는 길 (화북분소 부근)

▲  오송폭포 입구 주변 시어동계곡

오송폭포를 끼며 흐르는 계곡을 시어동(侍御洞)계곡이라 부른다. (또는 오송골) 그 이름은 조
선 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속리산을 찾았을 때 땅에 널려있던 칡넝쿨이 모두 나무 위로 올
라가 왕의 행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모셨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물론 칡넝쿨
이 스스로 올라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에게나 제왕일 뿐이지 식물에게는 그저 두 발 달
린 생명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허나 왕이 온다고 하니 지역 수령(守令)들이 왕에게 잘보이고자 백성과 군사들을 들들볶아 칡
넝쿨과 행차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미리 치웠을 것이고, 이를 칡넝쿨이 스스로 올라갔다는 식
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  오송폭포 직전 계곡 - 멋드러진 돌과 반석(盤石)이 제법 널려 있다.

▲  시원하게 물보라를 뿜어내는 오송폭포

▲  옆에서 바라본 오송폭포의 위엄
하얀 실타래를 밑으로 풀어놓은 듯 하다.

▲  폭포 밑 못 - 깊이도 매우 얕고 돌도 그리 거칠지 않아 물놀이나
물맞이 장소로 아주 휼륭하다.

▲  오송폭포 윗쪽

오송폭포를 둘러보고 폭포 윗쪽에 있는 성불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폭포 입구에서 가파른 언
덕길을 오르면 오송폭포로 흘러가는 시어동계곡이 다시 옆에 나타난다. 그 계곡과 함께 속리
산의 품으로 조금 들어가면 속리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성불사(成佛寺)가 모습을
드러낸다.
첩첩한 속리산의 산주름 속에 묻혀있는 성불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창건된 현대 사찰이다.
1980년대 제작된 관광책에 속리산 성불사의 앳된(?)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조그만 삼성각과
양옥처럼 지어진 건물이 전부인 그야말로 숲에 묻힌 조촐한 산사였다. 허나 지금은 속리산이
부담을 가질 정도로 정말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 2층짜리 건물하며 온갖 석탑과 석불을 잔뜩
지어올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따로 없는 것이다.
허나 성불사가 커질수록 속리산의 희생은 그만큼 커지는 법, 더 이상 경내 확장은 하지 않았
으면 좋겠다. 지금 성불사도 충분히 크기 때문이다.


▲  산속에 숨겨진 조그만 궁궐 같은 성불사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등 약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다. 건물들은 하나 같이 덩치가 커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꽤 장대하며, 3개의 옥불(玉佛)을 봉안한 대옥불전(大玉佛殿)은 무려
금칠까지 해놓아 화려함을 더욱 돋구었다.
법등(法燈)의 역사가 짧다보니 오래된 문화유산은 없으며 죄다 199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들
이라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도 않았다. 다만 대웅전(大雄殿) 뒷쪽 삼성각(三聖閣)이 이곳에서
그나마 오래된 건물이며, 나의 관심을 돋굴만한 오래된 존재가 없기 때문에 그냥 가볍게 둘러
보고 절을 나왔다.


▲  피안불로장생문(彼岸不老長生門)과 바위에 새겨진 하얀 선각의 마애불

▲  3개의 옥불(석가불, 미륵불, 아미타불)이
봉안된 대옥불전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과 붉은 닫집

※ 오송폭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① 상주까지 교통편은 앞의 장각폭포 참조
② 현지교통
* 상주시외터미널에서 화북, 입석, 용화 방면 시내버스(1일 7회 운행)를 타고 장암리(문장대
  입구) 하차, 오송폭포까지 도보 50분, 성불사는 1시간 / 주말과 휴일에는 입석, 용화 방면
  시내버스 중 3회(상주발 7:40, 11:10, 16:40)가 화북분소 문장대주차장까지 들어간다. (평
  일에는 안들어감)
* 화북에서 입석, 용화 방면 시내버스(1일 7회) 이용 또는 택시 이용 (주말과 휴일에는 입석
  , 용화 방면 시내버스 중 3회가 화북분소 문장대주차장까지 들어감)

③ 승용차 (주차비는 유료)
* 당진영덕고속도로 → 화서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수청거리3거리에서 좌회전 → 상오리
  → 장암교차로에서 좌회전 → 화북분소 문장대 주차장

* 오송폭포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 ☎ 054-533-
  3389)
* 성불사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산33 (문장대2길 293, ☎ 054-532-5555)


 

♠  자연산 돌다리를 위에 두룬 옥양폭포(玉樑瀑布)

오송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밑으로 내려가 북쪽으로 길을 향했다. 7km를 달려 충북 괴산 땅을
바로 코 앞에 둔 입석리에 이르니 길 왼쪽에 '백악산 옥양폭포'와 '석문사'를 알리는 이정표
가 슬며시 얼굴을 내민다. 그의 안내를 따라 인적도 없는 각박한 고갯길을 올라가다가 석문사
(石門寺) 직전 적당한 공터에 차량을 세우고 백악산의 품으로 들어서니 이내 석문사가 모습을
비춘다.

석문사는 백악산(白岳山, 858m) 동쪽 자락 옥양골에 묻힌 조그만 현대 사찰이다. 옥양폭포 북
쪽 절벽에 있는 굴 주위에 보굴암(寶窟庵)이란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절의 뒤를 잇고자
지어진 듯 싶으며 법등의 역사는 앞서 성불사보다 짧은 듯 싶다. 대웅전과 요사(寮舍), 벼랑
밑에 세운 석불 등이 전부로 요사 옆에는 장독대들이 가득 놓여져 음식들이 한참 숙성의 과정
을 밟고 있다.
그 곁에는 나무 장작으로 밥과 국을 짓는 작은 부뚜막이 있는데 무슨 국을 끓이고 있는지 김
이 모락모락 푸른 하늘에 회색 점을 찍는다.

백악산이 베푼 옥양골 계곡은 경내를 가로질러 흘러가며 계곡 옆구리에 석축을 높이 쌓아 길
과 경내를 닦은 점이 적지 않게 옥의 티로 남는다.


▲  옥양폭포, 석문사로 올라가는 길

▲  석문사 곁을 흐르는 옥양골 - 계곡 옆구리에 적지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상당히 아쉽다.

▲  석문사를 지키는 백구(白狗)의 위엄
간밤에 무리를 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절을 지키는 그가 있기에 오늘도 석문사는 평화롭다.

▲  눈썹 모양의 장대한 바위 밑에 자리한 석불좌상

바위 그늘에 석불이 들어앉아 동쪽을 바라보며 한참 선정(禪定)에 잠겨있다. 바위 윗쪽이 눈
썹처럼 두텁게 나와있어 눈과 비를 피할 수 있고 주변에 소나무도 무성해 바람 또한 그를 마
음껏 희롱하지 못한다. 다만 바위 윗쪽이 무너지면 그냥 게임 끝~~!
바위의 풍채가 대단하여 예로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 아니었을까 싶으며 석문사에
서 그나마 두 눈을 호강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  옥양폭포 윗쪽

석문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며 폭포를 찾았으나 경내 계곡에는 폭포 비슷한 것도 보이질 않는다.
하여 절 밑에 있을 듯 싶어 (절 윗쪽은 출입금지임~) 계곡을 살피며 차를 세운 곳까지 내려왔
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옆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있다. 그래서 벼랑 밑을
살펴보니 무언가 두터운 존재감이 느껴진다. 바로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옥양폭포였다.

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다소 경사가 급하다. 그 길을 조심스레 임하면 폭포의 윗도리가 나오는
데 특이하게 폭포 윗도리와 아랫도리 사이에 돌다리처럼 생긴 길쭉한 막대형 돌이 걸려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인공이 아닐까 싶었으나 자세히 보니 대자연 형님이 빚은 돌다리였다. 그
모습이 마치 돌다리, 또는 대들보처럼 생겼는데 폭포의 이름인 양(량, 梁)이 바로 대들보를
뜻한다. 옥(玉)은 폭포의 풍경과 폭포수를 옥으로 비유한 것이니 자연히 폭포의 대들보를 의
미하게 된다.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옥양(옥량)폭포는 높이가 약 20m에 이르며, 은빛 물보라를 일으
키며 흘러가는 폭포 윗쪽에 길이 20m, 두께 1.5m 정도 되는 자연산 돌다리가 걸쳐져 있다.


▲  윗쪽에서 바라본 폭포와 자연산 돌다리 ▼

옥양폭포의 백미(白眉)는 폭포 위에 있는 자연산 돌다리이다. 큼직한 바위와 돌들이 밑에 깔
려있고, 그 중간에 폭포수를 위한 통로가 뚫려 있어 마치 사람의 손이 간 것 같기도 하다. 그
위에 장대한 크기의 하얀 돌이 길쭉하게 다리처럼 놓여져 있는데 사람이 만든 돌다리보다 더
튼실한 모습이다. 대자연의 거룩한 작품 앞에 사람들은 그저 감동과 감탄사를 연발하고 문자
꽤나 쓴다는 사람들은 한낱 언어와 문자로 폭포의 아름다움을 감히 표현한다.
앞서 본 장각폭포와 오송폭포도 아름다운 폭포임은 분명하나 천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포
의 형태로 개성은 조금 부족하다. 허나 옥양폭포는 그들보다 덩치도 크고 자연산 돌다리라는
희귀한 아이템까지 가지고 있어 이날 본 폭포 가운데 단연 으뜸이다. (앞서 폭포는 조연, 옥
양폭포는 주연) 게다가 그리 알려진 곳도 아니라서 인적도 거의 없다.


▲  폭포 윗쪽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 (옥양폭포 바위글씨가 새겨짐)

▲  옛 사람들이 새긴 옥양폭포 바위글씨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옛 사람들은 경치가 좋은 곳 바위에 꼭 바위글씨를 남기는 버릇이 있었다. 옥양폭포 역시 그
예외는 아니라서 조선 후기 언젠가 이곳을 거쳐간 선비들이 걸쭉하게 낙서와 이름을 남겼으니
그 글씨가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다.


▲  밑에서 바라본 옥양폭포
자연산 돌다리 중간에 뚫린 수구(水口)를 통해 폭포수가 힘차게 쏟아진다. 돌다리
모서리 부분은 경사가 급해 자칫 미끄러져 폭포 밑으로 추락할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기 바란다.

▲  폭포 돌다리와 옥양폭포

▲  옥양폭포 밑부분
옥양폭포에서 급하게 흥분기를 보인 옥양골 계곡은 폭포를 내려오면서 비로소
진정을 되찾는다. 이곳도 피서지로는 아주 좋은 곳..

◀  수구를 거쳐 장쾌하게 쏟아지는
옥양폭포 폭포수의 위엄

옥양폭포 북쪽 절벽 위에는 조그만 굴이 있다. 굴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지만 그
굴 속에는 옛날에 미륵불이 있었고, 굴 밖에는 보굴암이란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조
선 초기에 나중에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의 왕위를 빼앗으려는 움직임
을 보이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수양의 딸이 이를 만류하다가(또는 신하들에게 아버지가 하는
일이 옳지 못함을 말하고 다녔다고 함~)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서울에서 추방되었다. 그래서
이 굴에서 숨어 살았다고 전한다. (그 딸의 존재도 불투명함)

※ 옥양폭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송면 경유 화북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옥양동 하차 (동서울에서 1일
  1회, 13시 출발)
* 상주시외터미널에서 입석리행 시내버스를 타고 삼송(옥양동) 하차 (1일 4회 운행 / 7:40,
  11:10,16:40, 18:15)
* 동서울터미널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운행 → 괴산시외터미널 부근 아성
  교통 군내버스터미널(시외터미널에서 동쪽으로 도보 3분)에서 옥양동(입석리)행 군내버스(
  1일 4회 운행)를 타고 삼송(옥양동) 하차
* 삼송(옥양동) 정류장에서 석문사 방향으로 도보 10분
*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대자연의 기묘한 작품, 옥양폭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가 되었다. 봄이 서서히 천하
를 평정하면서 낮도 많이 길어졌지만 일요일 오후에 지방에서 서울(수도권)까지 올라가는 길
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 날씨가 따스해지자 행락객들이 대거 지방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하여
옥양폭포를 끝으로 1박2일에 걸친 천하 유람을 쿨하게 마무리 짓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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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 겨울맞이 나들이 ~~~ (곱게 잘늙은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3층석탑, 초간정과 초간정 원림)



' 경북 예천 나들이 '
(개심사지5층석탑, 초간정 일대)

▲  예천 초간정


 

 

겨울 제국(帝國)이 늦가을을 몰아내고 천하 지배의 반석을 다지던 11월의 마지막 주말에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초겨울의 냉랭한 기운이 짙게 감돌던 이른 아침, 도봉동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예
천행 직행버스에 나를 싣고 2시간 20여 분을 달려 용궁(龍宮)에 두 발을 내렸다. 거기서
20분 정도를 기다려 안동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잡아타고 예천터미널 다음 정류장인 남본
교차로에서 하차했다. (예천터미널에서 남본교차로까지 약 1.2km, 거기서 환승하거나 걷
기도 애매하여 용궁에서 갈아탔음)

남본교차로 북서쪽에 안면이 2번 정도 있는 개심사지5층석탑이 있는데, 여기서 남쪽에서
오는 일행들과 만나기로 했다. 길을 일부러 더디게 왔음에도 일찍 도착하여 30분 정도를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니 남쪽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가 구세주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오
랜만에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지척에 있는 개심사지5층석탑으로 다가섰다.
(그때 시간 대략 10시)


 

♣  너무나 곱게 늙은 단아한 모습의 고려 초기 석탑
개심사터 5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 - 보물 53호

▲  옛 개심사터를 홀로 지키고 선 5층석탑

남본교차로 서북쪽 벌판 한복판에 맵시가 도드라진 5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고려 초에 창건
되어 신기루처럼 사라진 옛 개심사(開心寺)의 유일한 흔적으로 윗층 기단(基壇)에는 아주 감
사하게도 탑과 관련된 내용<석탑기(石塔記)>이 새겨져 있어 그의 신상명세를 조금이나마 알려
준다. 다만 그 글씨들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크게 닳고 깨져서 알아보기는 힘들다.

석탑기에 따르면 그는 1010년에 세워졌으며, 이곳에 개심사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고려 3대 제왕인 정종(定宗, 재위 945~949)이 거란(요나라)과의 전쟁에 대비코자 조직한 광군
(光軍)에 대한 내용이 짧게 깃들여져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  개심사터와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길

고려 초에 세워진 석탑답게 2중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땅바닥에 접한
아랫층 기단에는 몸통은 사람이고 머리는 동물인 지신상(支神像)을 1면에 3개씩 모두 12지신
상을 새겼다.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지키는 8명의 존재,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있는데 1쪽 면에 2명씩
8명을 맞추었으며 이들은 불법(佛法) 대신 이 탑을 지킨다. 개심사는 이미 오래전에 녹아 없
어졌지만 이 탑은 그들의 가호 덕에 1,000년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너무 온전하고 생동
감 있게 살아있어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들의 모습은 탑이 심어진 시기에
고려 군사의 모습으로 불상의 얼굴도 그렇고 의복(衣服)이나 보살상, 불교 관련 존재들의 모
습은 왕족이나 귀족, 승려, 여인들을 모델로 많이 삼았다. 그러니 무인(武人) 계통의 팔부중
상은 당시 늠름했던 고려 군사를 참고하여 만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부처나 보살의 얼굴이
나 불교 관련 존재들의 모습과 의복 등은 딱히 정형화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  12지신상과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의 기단부 ▼
제일 밑에 3인 1조로 자리한 존재가 12지신상, 윗부분에 무기를 들고
2인 1조로 지키고 선 존재가 팔부중상이다.

윗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로 탑신을 떠받들기 위해 연꽃무늬의 괴임돌을 두었는데 이는 고려
탑의 특징이다. 1층 탑신의 남쪽에는 문고리와 인왕상을 새겼는데, 혹 열쇠가 있어 저 문고리
를 딸 수만 있다면 탑 안에 안치된 보물과 개심사의 정체를 흔쾌히 밝혀줄 존재가 나오지는
않을까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든다. 우리집 열쇠라도 들이밀어 저 문고리를 풀어보고 싶다.

탑의 높이는 4.33m, 기단 폭 2.15m로 체감률이 안정되어 안정적인 비례를 이루고 있으며 예천
에 왔다면 꼭 보고 가야되는 이 고을의 소중한 보물이다. 또한 2011년 가을에는 탑 주변 논을
갈아엎고 주변 정비 및 개심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잘 생긴 탑을 보니 절의 모습 또한 대단했을 듯 싶으나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려진 것
이 없다. 다만 절터의 위치가 한천(漢川) 가에 있어 아주 오래 전에 홍수로 망한 듯 싶다. 어
째서 산에 세우지 않고 평지인 이곳에 터를 닦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자리가 예천에서 안동(安
東)과 영주로 넘어가는 길목이고, 안동과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 개경(開京)으로 가려면 이곳
을 거쳐 하늘재를 넘어야 했다. 그러니 예천 토박이 세력에서 그 길목의 절을 세워 지역간의
교역과 길손들의 숙식 제공 장소로 삼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다만 절이 너무 일찍 사라져버
려 그 정답을 알 수 없는 것이 흠이면 흠이다.


▲  1층 탑신에는 문고리를 사이에 두고 2명의 인왕상(仁王像)이 있다.
그 아래로 연꽃 무늬가 새겨진 괴임돌이 보이는데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어 탑의 나이를 의심케 만든다.

▲ 석탑기가 새겨진 1층 탑신 피부
심술쟁이 자연이 석탑의 피부를 마구 건드리면서 글씨를 확인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 예천 개심사터 5층석탑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예천행 직행버스가 1~2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대구북부정류장과 동대구터미널에서 예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예천터미널 전인 남본교차로(
  보통 삼거리라고 부름)에서 내리면 바로 탑이 보인다. (대구북부에서 1일 6회, 동대구에서
  1일 7회 운행)
* 영주, 안동에서 예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3거리(남본교차로) 하차
* 상주, 김천에서 예천 경유 영주, 안동행 직행버스를 타고 예천터미널 다음인 3거리에서 하
  차
* 예천터미널과 예천역(경북선)에서 영주 방면 4차선 길(충효로)을 따라 한천을 건너 17분 정
  도 걸으면 남본교차로이다.
* 승용차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에서 좌회전
   → 남산교차로에서 우회전 → 남본교차로에서 직진 → 개심사지5층석탑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200-3


 

♠ 이름 없는 옛 절터를 지키고 있는 신라 후기 석불과 석탑
예천 동본리(東本里) 3층석탑 /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  동본리3층석탑 - 보물 426호

▲  동본리 석조여래입상 - 보물 427호

개심사지5층석탑을 둘러보고 예천읍의 젖줄인 한천을 건너 한천 둑방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니
동본리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 나란히 우리를 마중한다.
이렇게 잘생긴 석탑과 석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절과 관련된 기록은 하나도 없고, 절터의 흔적도 딱히 나오지를 않아 현재로써는 그 절의 정
체를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절터의 흔적을 제대로 캐내려면 언제 한번 날을 잡아서 주변을 싹
뒤집어야 그나마 좀 나올 것이다. 다만 이곳이 한천변인지라 홍수의 흥분으로 강제로 문을 닫
았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게 절의 이름 석 자도 세상에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급하게 떠내려
간 모양이다.

절이 읍내에 있고 석탑과 석불의 조성시기가 신라 후기라고 하니 예천 토박이 세력의 지원으
로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 세력의 원찰(願刹) 역할을 했을 수도 있겠다. 다만 너무 오
래전의 일이라 속시원한 정답은 없다. 석불이 흔쾌히 입만 열어준다면 정말로 좋을텐데, 너무
머나먼 시기의 일이라 기억도 흐릿할 것이며. 집을 잃은 상처가 너무 커 입 밖에 드러내는 것
조차 싫어할 것이다.

절이 사라진 이후, 상류에서 떠내려온 흙들이 차곡차곡 주변에 쌓여갔으며, 그 흙에 논과 밭
이 들어서면서 절터의 흔적은 더욱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탑과 석불은 마을 사람들이 신
앙 대상으로 삼아 정성으로 살펴주면서 지금도 정정한 모습을 자랑한다. 절의 이름을 모르니
석탑과 석불은 속 편하게 동네 이름을 따서 동본리 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란 이름으로 살
아가고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동본리3층석탑

▲  동본리 석조여래입상의 뒷모습

우선 동본리3층석탑을 살펴보면 땅바닥에 네모난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기단을 두었는데 그
밑 부분에 가운데돌을 두어 기단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윗층 기단에는 무슨 존재를 새겼는
데 이는 탑을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으로 그런데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과
2층은 5단, 3층은 4단이다. 1층이 윗층들보다 피부가 하얀데 이는 후대에 손질을 가한 듯 싶
으며, 탑이 윗층으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줄어드는 것이 원칙이지만 1층은 그 비율을 깨고
조금은 육중해 보인다. 탑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고
색의 때가 적어 1층 탑신을 손질할 때 새로 끼워놓은 듯 싶다.
탑신 지붕돌 밑면의 수가 줄어들고, 괴임돌이 간략해진 점으로 신라 후기 탑으로 평가받고 있
으며, 개심사지5층석탑만큼은 아니지만 건강 상태도 썩 양호한 편이다.

3층석탑과 나란히 한 석조여래입상은 신라 후기에 조성된 키 3.46m의 석불이다. 머리를 보면
꼽슬인 나발(螺髮)로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주렁주렁 달아놨으며,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
(肉髻)가 두툼하게 솟아있다. 후덕함이 묻어난 둥근 넓쩍한 얼굴에는 좌우로 길다란 눈이 지
그시 감겨져 있는데 왼쪽 눈이 오른쪽에 비해 너무 희미하고 존재감이 떨어져 마치 애꾸눈을
보는 듯 하다. 코는 끝부분이 두툼하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입은 옛날의
일을 감추고 싶은지 다물어져 있다. 귀는 중생의 고충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다.
그의 몸통을 보면 얼굴과 상반신의 비율이 너무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얼굴을 크
게 만들어 신체비례가 많이 떨어진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이 꽤 두꺼우며, 어깨가 좁
고 팔이 짧아 다소 기죽은 느낌을 준다. 오른팔은 옆으로 내려 옷자락을 붙들고 있고, 왼팔은
앞으로 들어 새끼 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을 안으로 굽혔다. 몸에 걸친 옷은 통견의(通肩衣)
로 옷의 주름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것 같으며 이런 옷주름 표현은 신라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 예천 동본리3층석탑/석조여래입상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예천시외터미널 옆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예천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동본리정류
  장에서 내린다. 버스에서 내려 왼쪽을 보면 바로 3거리가 나오는데, 그 3거리에서 오른쪽으
  로 2분 가면 동본교란 다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길을 건너 한천 둑방길을 1분 정도
  가면 왼쪽에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가면 바로 동본리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다.
* 개심사지5층석탑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남본교차로에서 북쪽(읍내 방향)으로 가다가 예천교
  를 건너 오른쪽 한천 둑방길로 12분 정도 걸으면 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3층석탑 앞에 조그만 공터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 직진 → 동본
   교를 건너서 우회전 → 바로 보이는 왼쪽 길로 내려가면 동본리3층석탑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474-4


 

♠  조선 중기에 세워진 사대부의 별서(別墅)이자 예천 제일의 경승지
초간정(草澗亭)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143호

예천읍에서 용문사(龍門寺)로 가는 길목인 죽림리에 초간정이라 불리는 경승지가 있다. 간장
의 하나인 초간장과 겨우 받침 하나 사이로 이름이 너무나 비슷하여 나도 모르게 초간장이라
불리게 되는 이곳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예천 출신인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1534~1591)가
세운 별서(別墅, 별장)이다.

권문해는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보물 878호)'을 쓴 인물로 조
선과 요동(遼東), 만주, 명나라에 전해오는 수많은 문헌을 참고하여 옛 조선부터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시절(조선 명종 시절)까지 이 땅의 역사와 지리, 인물, 문학,
식물, 동물 등을 집대성하여 운별(韻別)로 분류했다. 책의 이름인 대동(大東)은 '동방대국(東
方大國)'으로 조선을 뜻하며, 운부군옥(韻府群玉)은 운별로 배열한 책이란 뜻이다.

이 책은 초간이 대구부사(大邱府使)를 지내던 1589년 20권 20책으로 편찬을 완료해 3벌을 정
서해두었다. 허나 1벌은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다른 1벌은 정구(鄭逑)가 빌려갔다가 개념
없게도 실수로 불에 태워버렸다. 그래서 겨우 1벌만 남아 초간의 외아들인 권별(權鼈, 1589~
1671)이 정산서원(鼎山書院) 원장으로 있을 때 정서하여 그 서원에 보관했으며, 1812년 간행
을 시작해 1836년 완료했다. 이후로도 여러 번 복판(腹板)을 했다.

초간은 1582년 집 부근인 이곳에 정자를 지어 자신의 호를 따서 초간정이라 하였다. 그는 계
곡이 크게 굽이쳐 흘러 기암절벽과 소(沼)를 이루는 지금의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바위 위에
돌을 쌓고 터를 다져 조촐하고 정자를 지었다. 지금은 팔작지붕 건물이지만 이는 1870년에 다
시 지은 거라 원래 모습은 알 수 없다. 아마도 지금보다 더 소박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여기서 휴식과 독서를 하였고 벗들과 어울려 곡차(穀茶) 1잔의 여유를 즐겼으며 별서 주
변에 소나무를 잔득 심어 이곳의 운치를 한껏 부풀렸다.
허나 임진왜란 때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왜군에 의해 부질없이 파괴되었으며, 1612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으나 1636년 불에 타 없어졌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불에 탔다고 나온다. 허나
병자호란 시절 청나라군은 경기도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으므로 전란이 아닌 불을 잘못
취급하거나 우연히 화재를 입은 것으로 봐야 된다. 이후 오랫동안 터만 전해오다가 1870년 후
손들이 초간의 서적을 보관하고자 조그만 기와집으로 새로 짓고 담장과 부속건물을 갖추니 이
것이 지금의 초간정이 되겠다.

초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앞면 왼쪽 2칸에 온돌방을 두었고, 나머지 4
칸은 대청마루로 삼아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끔 난간을 둘렀다. (그래봐야 난간의 높이가 낮음
) 또한 1636년 화재로 건물이 무너지고 초간정 현판 또한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는데 어느 날
늪에서 오색무지개가 피어오르자 종손(宗孫)이 이게 뭔가 싶어 그곳을 파보았더니 글쎄 현판
이 나왔다는 것이다. 즉 정자 앞 늪에서 현판을 발견한 것이다. 정말 현판이 오색무지개를 발
산했는지는 생각해볼 일이지만 전설 내용이 다소 불교틱하다.

아름드리 노송(老松)이 조촐하게 숲을 이루고 기암을 휘돌아 흐르는 물은 소를 이루어 절경을
자아낸 예천 제일의 경승지로 용문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여행꾼과 답사객들이 문턱이
닳도록 찾아온다. 다행히 초간정은 일반에 개방을 하고 있어 신발을 벗고 정자까지 들어갈 수
있으며 그 서쪽에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기와집(초간정 부속 건물)은 민박으로 1박
머물 수 있다. 또한 초간정 주위로 심어진 나무들은 '초간정 원림(園林)'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51호로 지정되었다.


▲  초간정 주차장에서 바라본 초간정과 소나무들
소나무가 초간정을 향해 거의 30도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을 있게 해준 초간에
대한 일편단심의 표현일까?

▲ 바위 위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둥지를 튼 초간정의 모습
자연에 거스르며 무식하게 크기만 한 현대식 별장보다는 소박하지만 저런 전통 기와집도
나름 정감이 많이 든다. 나도 나중에 경관이 적당한 곳에 조촐하게 전통식 정자나
한옥을 짓고 머물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과연 뜻대로 될련지? ㅠㅠ

▲  초간정 옆에서 90도로 굽이쳐 흐르는 계곡
초간이 바로 저 풍경에 반해서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높이는 낮지만 나름대로
기암절벽을 이루며 소소하게 그림 같은 절경을 자아낸다.

▲  초간정 상류 개울
초간정 원림의 서쪽 끝으로 소나무들이 개울을 향해 한결같이 30도로 구부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  개울 다리에서 바라본 초간정

▲  초간정 옆구리에 자리한 부속 기와집
1870년 초간정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 그 곁에 부속 건물을 지어 초간의 서적
보관 및 정자 관리인의 숙소로 삼았는데, 현재는 민박으로 쓰이고 있다.

▲  초간정 부속 기와집 내부

▲  초간정으로 들어가는 문

이곳이 초간정으로 접근하는 유일한 문으로 문이 좁고 낮다. 왠만한 성인 남성은 고개를 숙이
고 들어가야 되고 한 사람이 지나가면 문이 꽉 찬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키와 덩치가 반영된
탓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갖추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다.


▲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머리에 짊어진 초간정
좌측에 마련된 섬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 오르면 된다. 단 섬돌과
대청마루까지는 높이가 좀 있으므로 주의요망

▲  초간정에 걸린 초간정사(草澗精舍) 중수기
글씨가 깨알같이 적혀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초간정사 중수기는 1870년 초간정을
다시 세웠을 때 작성된 것으로 초간정사는 초간정의 예전 이름이다.

▲  초간정 내부 대청마루
겉으로 보면 좀 부실해보여도 속은 현대식 건물 이상으로 매우 견실하다.

▲  초간정에서 바라본 계곡 건너편

초간정은 동쪽을 향한 건물로 정자를 받치는 기둥 중의 도끼 자국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자
국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조선 후기판 판문점(板門店) 도끼만행사건 비스므리한 일이 일
어났던 현장이라고 하며 다음의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 후기에 인근에 살던 선비가 과거준비를 하다가 초간정 난간을 100바퀴 돌면 과거 급제한
다는 전설을 믿고 난간을 돌았다. 허나 100바퀴를 다 돌기도 전에 어지럼증과 체력 고갈로 그
만 쓰러지면서 정자 밑에 있는 소(못)에 떨어져 죽었는데, 남편을 잃은 부인이 뚜껑이 폭발해
도끼를 들고 찾아와 도끼질을 했다고 한다. 그 도끼자국이 바로 그때 찍힌 자국이라는 것이다.
선비가 빠져 죽었다는 소는 옛날에는 매우 깊어서 명주꾸리 1개를 펴도 모자랄 정도였다고 한
다. 허나 지금은 많이 메워져 옛날의 명성은 많이 죽은 상태이다.

이런 경승지에 전설이 하나만 있으면 초간정도 초간 선생도 매우 섭할 것이다. 그래서 옵션으
로 전설이 더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1864년경, 초간정을 소유한 예천권씨 집안에서 정자 주위를 거꾸로 100바퀴 도
는 사람에게 정자를 주겠다고 광고를 냈다고 한다. 그러자 어느 초립동이가 나서서 99바퀴까
지 돌았으나 나머지 1바퀴를 도는 과정에서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에 화
가 난 그의 어머니가 도끼를 들고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전설로는 옥매(玉梅)라는 예천 제일의 기생이 초간정에서 장고춤을 추다가 그
만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는데 화가 단단히 난 그녀의 어머니가 도끼를 들고 찾아와 도끼질
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풍류가 넘치는 곳에 왠 난데없이 무시무시한 도끼질 자국이 있는지 참 옥의
티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실수로 떨어져 죽어도 그렇지 죽은 이의 부인이나 어머니 등, 여
인들이 도끼를 들고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는 것도 쉽사리 이해가 가질 않는다. 도끼가 보기와
달리 은근히 무게가 나가는 것인데 말이다. 어쨌든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정
자를 새로 지을 때 목수의 실수로 도끼 자국이 생긴 나무 기둥을 그대로 썼을 수도 있을 것이
고, 19세기 중/후반 지배층의 수탈과 학정이 극에 달한 시절에 인근 백성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린 흔적일 수도 있겠다.


▲  초간정 바로 밑에서 무섭게 입을 벌리고 있는 소(못)

초간정 관람시 반드시 유의해야될 점이 있다. 문이 봉해진 온돌방은 통제구역이므로 애써 들
어가서는 안되며 그걸 어기면 자칫 속세에 개방한 초간정의 문이 쾅 닫혀질 수도 있다. 그리
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난간 부분에서 장난을 치거나 무리해서는 안된다. 난간 너머는 바로
초간정을 끼고 흐르는 개울로 정자와 개울까지는 높이가 약 6~7m 정도 되는 아슬아슬한 낭떠
러지이다. 게다가 난간의 높이도 난쟁이 반바지를 반 접은 정도 밖에 안될 정도로 낮고 오래
된 탓에 조금 부실하다. 괜히 난간에 기대거나 아찔하게 장난을 치다 소로 떨어져 사고를 당
할 수 있다.
소의 깊이가 예전보다는 온순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소는 소이다. 정자 위에서 소를 바라보
면 여전히 밑바닥이 보이질 않으니 깊은 것은 여전하다.


▲  초간정을 끼고 동쪽으로 흘러가는 개울
개울 주변에 대자연이 빚은 기암절벽이 심심치 않게 늘어서 초간정의 정취를
더욱 돋군다.

▲  하늘을 받치고 선 초간정 소나무
초간정을 둘러싼 소나무 숲은 초간정의 구수한 상징이다.

▲  초간정의 새로운 명물, 구름다리
초간정 동쪽 개울에 흔들거리는 구름다리를 닦았다. 초간정으로 들어갈 때는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 진입하고, 나올 때는 초간정 동쪽 소나무 숲을 거쳐 구름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나가면 된다.

▲  초간정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초간정 방향
개울이 조그만 협곡을 그리며 연주하는 물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이
잠시나마 정화되는 것 같다.

▲  초간정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동쪽
초간정 방향과 달리 평범한 개울로 흘러간다. 개울 양쪽에는 소나무가
가로수처럼 늘어서 속세로 흘러가는 개울을 배웅한다.

▲  떠나기가 몹내 아쉬워 잠시 뒤돌아본 초간정

초간정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와서 보니 정말 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
을 알게 되었다. 개울 북쪽에 신작로(용문경천로)가 생긴 것과 현대의 이기(利器)들이 들어온
것 외에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는 옛 모습으로 주변 경치와 어우러져 1폭의 수묵담채화(水墨
淡彩畵) 같은 절경을 자아내 사람들의 정처 없는 마음을 사뿐히 앗아간다.
겉으로 보면 작고 수수해 보여 누구나 쉽게 만들겠지 싶지만 조선시대에 저 정도의 별장을 소
유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력과 지위가 있어야 했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즉 지배층의 전유
물이었던 것이다. 허나 지나치게 큰 별장과 달리 소소한 모습에 정감이 많이 가며, 정자를 둘
러싼 풍경과 소나무 숲(초간정 원림)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지배하려 드
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간정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여기서 가까운 용문사로 길을 향했다. 이후는 본글의 내용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초간정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예천터미널(예천역 북쪽) 옆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용문사, 두천, 사부리로 가는 군내버스(1
  일 7회 운행)를 타고 원류(초간정)에서 내린다.
* 승용차 (주차장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에서 우회전
→ 우계교차로에서 좌회전 → 백전3거리에서 우회전 → 용문 → 초간정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보통 9시부터 18시까지 (겨울에는 16~17시까지)
* 초간정에 딸린 기와집(초간정민박)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민박 관련 문의는 ☞ ☎ 054-655
  -9233
)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166 (용문경천로 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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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3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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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늦가을 나들이 ~~~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조문국 경덕왕릉...)

 

 

' 경북 의성 늦가을 나들이 '

▲  늦가을이 살짝 거쳐간 문소루 가는 길


 

가을이 한참 천하를 곱게 수놓던 10월 끝 무렵에 경북 한복판에 자리한 의성(義城) 고
을을 찾았다.

마침 같은 날, 아는 이들이 주왕산(周王山)으로 여행을 가는지라 그 길목인 안동까지 태
워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내 부탁을 흔쾌히 받아주었고, 아침 7시에 삼송역(3호선)에
서 함께 남쪽으로 출발했다.
지옥 같은 서울 근교의 교통 체증을 간신히 뚫고 영동고속도로에 진입, 여주휴게소에 잠
시 바퀴를 멈추고 교통 정체로 인해 놀란 몸과 차량을 달래며 김밥과 우동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웠다. 이후로는 신나게 가속도를 붙이면서 11시가 좀 넘어 안동의 주요 관문인
안동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소 아쉽지만 그들과 작별을 고하면서 나는 남쪽(의성)
, 그들은 동쪽(주왕산)으로 제 갈 길로 흩어졌다. 각자의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안동터미널에 홀로 남겨진 나는 남쪽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려 의성터미널
에 두 발을 내렸다. 의성은
1996년 이후 2번째 인연인데,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
듯 싶다. 이곳에서는 이미 정처(定處)를 정해둔 상태이므로 그곳에 그냥 가기만 하면 된
다. 다만 그날의 종점인 부산(釜山)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해 조금은 서둘러야 된다.

의성터미널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산이 하나 보인다. 그 산을 구봉산이라 하는데 바로 그
곳에 첫 답사지인 문소루가 있다.


 

♠  의성읍의 소중한 명소, 문소루(聞韶樓)와 구봉산(九峰山)

▲  낙엽이 깔린 문소루 가는 길

의성읍내 서쪽에는 이 땅의 흔한 이름의 하천인 남대천(南大川)이 흐르고 있다. 남대천 서쪽에
는 남북으로 길쭉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이 산줄기가 의성읍의 든든한 진산(鎭山)
이자 쉼터이며 산림욕장으로 쓰이는 구봉산(211.4m)이다.

구봉산은 말 그대로 9개 봉우리의 산으로 원래는 구성산(九成山)이었으나 왜정(倭政) 때 구봉산
으로 바뀌었다. 산 정상에는 봉의정(鳳儀亭)이란 정자가 천하를 굽어보고 있고 구봉산 제3봉 아
래쪽에는 조선 중기 때 효자(孝子)인 오천송(吳千松)을 기리고자 숙종(肅宗) 시절에 지어진 소
원정(溯源亭)이 있다. 또한 산 북쪽에는 영남의 이름난 누각이었던 문소루가 자리해 있어 산의
경관을 돋구며, 근래에는 유아숲체험원이 부근(원당리)에 조성되어 꽤 알찬 체험시설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30여 점의 차별화된 체험시설을 갖추고 있음)

읍내에서 남대천을 건너면 구봉산과 문소루로 올라가는 길이 나타난다. 거의 읍내 사람들만 산
책과 운동 삼아 찾는 숨겨진 지역 명소라 주말 한낮임에도 인적이 없다. 고요함만이 가득한 그
길에 요란하게 발자국 소리를 내며 정적을 잠시 깨뜨려 본다.
구봉산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아름다움을 처절히 선보이며 한편으로는 우수에 잠겨 있다. 좀
있으면 자비가 없다는 겨울 제국(帝國)의 압정(壓政)이 펼쳐질테니 어느 누가 좋아들 하겠는가?
나무들은 아직 단풍과 울긋불긋 타오른 잎을 붙들고 있으나, 절반 이상은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
쓸쓸한 이름, 낙엽이 되었다. 길바닥에는 낙엽들이 가득 깔려 붉은 카페트를 이루며 나를 맞이
한다. 나 역시 늦가을의 단상 앞에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  길바닥을 메운 낙엽들
바람이 스르륵 빗자루질을 할 때마다 낙엽들은 힘없이 이리저리 날려간다.

▲  은행잎이 가득 입혀진 문소루 가는 길 (문소루 직전)

낙엽을 사각사각 밟으며 한굽이를 오르니 이번에는 은행나무 길이 나타난다. 길바닥에는 은행나
무가 겨울의 도래를 원망하며 훌훌 털어버린 은행잎이 두툼하게 깔려있다. 워낙 두텁게 쌓인 탓
에 콘크리트 길바닥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라 마치 노란 카페트를 깔거나 노란 물감을 입힌
것처럼 보인다. 가벼운 낙엽과 달리 바람의 빗자루질에도 거의 동요하질 않으며, 길이 푹신푹신
해서 그냥 벌러덩 드러눕고 싶은 마음도 조금씩 솟아난다.


▲  은행잎이 노란 카페트를 이룬 문소루 가는 길
아무리 레드(red) 카펫이 부와 명예의 상징이라 해도
자연이 베푼 자연산 노란 카펫만 할까..?

▲  단풍나무 밑에 서서 읍내를 바라보고 있는 문소루 중건 기념비(紀念碑)

▲  의성읍내를 굽어보는 문소루(聞韶樓)

아름다운 문소루에 비 피해 오르니 해가 저문다
풀빛의 푸르름은 역로(驛路)에 닿았고
화사한 복숭아 꽃은 인가(人家)를 덮는다.
봄의 시름은 술처럼 진하고
살아가는 재미는 점점 깁처럼 얇아간다.
애끓는 강남의 길손 변방의 당나귀는 또 서울로 간다.

* 고려 후기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문소루에 올라 지은 시
 

구봉산의 제9봉에는 의성의 명물인 문소루가 의성 고을을 굽어보며 자리해 있다. 문소루는 원래
의성고을 관아에 딸린 누각으로 관아 서북쪽에 있었으며, 문소(聞韶)란 이름은 신라 후기 때 의
성 고을의 이름이다. (고려 초에 의성으로 이름이 갈림)
고려 중기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며, 고려 고종(高宗) 때까지 있
다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의성현령(縣令) 이원제(李元濟)가 중건했고
1657년(효종 8년)에 불에 탔다가 1694년 의성현감 황응일(黃應一)이 다시 지었다.

이곳은 관리들의 향연 장소로 이용되었던 공간으로 왕년에는 영남4대루의 하나로 명성을 떨치기
도 했다. 여기서 4대 누각이란 진주(晋州)의 촉석루(矗石樓),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 안
동(安東)의 영호루
(), 그리고 이곳 문소루로 영남 지역에서 꽤나 이름이 있는 누각들이다.
그 누각 가운데 문소루가 제일 나이가 많다고 한다.
허나 그런 명성이 있음에도 가장 굴곡진 인생을 가진 비운의 누각으로 6.25전쟁 때 폭격으로 그
만 파괴되고 말았는데, 그때 정몽주와 상촌 김자수(桑村 子粹, 1351~1413), 김지대(金之岱,
1190~1266) 등 여러 문인들의 시가 담긴 현판(懸板)과 이지원(李止遠, ?~1866)의 문소루 중건기
문(重建記文)도 모조리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의성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뒤늦게나
마 1981년 1월 중건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3년 9월 옛 모습을 가급적 되살리며 복원되었
다. 허나 원래 자리에는 이미 건물이 가득 들어차버려 읍내가 훤히 바라보이는 구봉산 제9봉에
새 둥지를 틀었다.

문소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이곳에 올라서면 의성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
인다. 풍류를 안다면 술 1병 들고와 눈 아래 펼쳐진 조그만 천하를 바라보며 시 짓기 놀이를 하
거나 달놀이를 즐기며 명상에 잠기고 싶은 그런 곳이다.
비록 옛 건물이 아닌 근래에 자리를 옮겨 복원했다는 한계점이 있고, 오랜 명성이 바닥으로 추
락된지 오래지만 의성의 명물이자 군민들의 성원으로 다시 태어난 의미 깊은 곳으로 의성 제일
의 명소로 자라날 싹수가 충분한 곳이다. 혹시 아는가? 나중에 영호루와 촉석루를 능가하는 유
명 인사가 될지도 말이다. 그때에 대비해 미리 얼굴을 비추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시원스런 팔작지붕의 문소루

▲  글씨의 패기가 느껴지는 문소루 현판


▲  문소루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시(詩) 현판들

▲  '소소구성봉황래의(簫韶九成鳳凰來儀)' 현판
서경(書經) 익직편(益稷篇)에 나오는 구절로 '순임금이 음악을 9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는 내용이다.

▲  속세와 문소루 내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 -
신발을 벗고 들어오기 바란다.

▲  문소루에서 바라본 천하 (1) - 의성읍내

▲  문소루에서 바라본 천하 (2) - 의성읍내 원당리와 후죽리

▲  구봉산 능선길

문소루에서 1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바로 읍내로 나갈까 했으나 늦가을에 잠긴
구봉산 산길이 너무 고와서 잠깐의 시간을 던져 구봉산 능선을 더듬기로 했다.

구봉산은 남대천 서쪽에 병풍처럼 자리한 산으로 서쪽은 완만하고 읍내와 남대천이 보이는 동쪽
은 경사가 60도 이상으로 급하여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잘못 발을 놀렸다가는 바로 남대천으
로 곤두박질 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능선 산길이 완전 읍내를 굽어보는 산성(山城)이
나 요새를 걷는 기분이다.
구봉산 북쪽 문소루에서 구봉산 정상까지는 대략 2km이다. 그 부근에 소원정과 봉의정, 소원석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으나 거기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넉넉치 못해 중간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  늦가을의 막바지 스케치 현장 ~ 구봉산 능선길
능선길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한다. 마치 인간의 인생처럼...

▲  구봉산 능선 오르막길 - 인생이 늘 저렇게 상승곡선이면 얼마나 좋을꼬~~

▲  만추(晩秋)가 깃들여진 구봉산 능선
내리막길 - 인생의 내리막길이 저렇게
화려하고 곱다면 자주 해볼 만할텐데.

▲  능선길에서 만난 당산나무
여기서 저 계단을 오르면 정상으로 이어지고
왼쪽 내려가는 길로 가면 남대천이다.


▲  남대천으로 내려가는 좁은 산길
왼쪽은 남대천과 맞닿은 낭떠러지이므로 주의 깊게 움직이기 바란다.

▲  낭떠러지 산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남대천에 이른다.
물길을 막은 저 보(洑) 밑의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구봉공원이다.

▲  남대천 징검다리
여기서는 실수로 물에 빠져도 생명에 지장은 없다. 수심이 매우 얕기 때문이다.

▲  구봉공원에서 바라본 징검다리와 구봉산 산줄기
남대천과 만나는 구봉산 동쪽은 거의 낭떠러지라 오를 수 있는 길이 거의 없다.
저런 곳에 산성(山城)이나 방어시설을 만든다면 정말 요새가 따로 없겠지.

▲  의성읍내로 가다가 만난 늦가을의 서정 -
은행나무의 빛깔이 너무 매혹적이다.

※ 문소루, 구봉산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의성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의성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동서울터미널에서 1일 6회 떠난다.
* 서울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1일 2회 떠난다.
*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의성행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 떠난다.
* 인천, 대전(복합), 구미, 영천, 부산(동부)에서 의성행 직행버스 이용
* 동대구역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1일 1회, 부전역과 해운대역, 태화강역, 경주역, 영천역에서 1
  일 3회 운행
* 의성역과 의성터미널에서 왼쪽(북쪽)으로 가면 북원4거리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로 꺾어서
  중앙선 굴다리를 지나면 왼쪽 산 정상에 문소루가 보이며, 의성교를 건너 100m 정도 가면 문
  소루와 구봉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② 승용차 이용시 (문소루까지 차량 접근 가능, 주차는 문소루 주변에)
* 중앙고속도로 → 의성나들목을 나와서 의성 방면으로 우회전 → 원당3거리에서 우회전 → 의
  성군새마을회관과 현대자동차 의성지점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문소루로 오르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 문소루

* 문소루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원당리87


 

♠  옛 조문국(召文國)의 영화로움을 숨죽여 간직한
의성 금성산고분군(金城山古墳群) - 경북 지방기념물 128호

문소루와 구봉산을 둘러보고 의성터미널에서 탑리(塔里)로 가는 군내버스를 탔다. 탑리 직전에
자리한 고개를 넘으면 오른쪽(서쪽)으로 큰 무덤들이 즐비한 벌판이 펼쳐지니 그곳이 금성산고
분군이다. (탑리 방면 28번 국도변에 있음)

금성산고분군은 탑리 북쪽인 대리리(大里里)와 초전리에 옹기종기 모인 고분들로 약 200여 기의
옛 무덤이 산재해 있다. 이들은 의성 금성면(탑리) 지역에 있었던 조문국(召文國)의 것으로 그
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다. 이들 무덤 사이로 신라 무덤도 다수 섞여 있다.
조문국은 한자 발음에 따라 '소문국'이라고도 하는데, 진한(辰韓)의 일원으로 탑리를 중심으로
둥지를 틀었던 손바닥만한 나라이다. 영역은 의성 남부(길게 잡으면 의성 북/중부까지)와 군위
일부에 불과했으며, 진한연맹이 하나둘 신라에게 먹히는 와중에도 용케 버텨오다가 185년<신라
벌휴왕(伐休王) 2년>에 결국 복속되고 만다.
그 이후 신라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 다스리거나 항복한 조문국 왕족이나 귀족에게 이곳을 통치
하게 했을 것이고 이 땅을 발판으로 삼아 상주의 사벌국(沙伐國)과 인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야금야금 점령했다.

조문국에 대한 정보는 이것 외에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의 거의 유일한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금성산고분군은 1960년부터 최근까지 국립중앙박물관과 경희대, 경북대 박물관에서 발굴조
사를 벌였다. 그 결과 앞트기식무덤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변형된 돌무
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토기의 일종으로 의성
지역에서 주로 나오는 '의성양식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금동관(金銅冠)과 금동관 장식
품, 금동제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철제 무기류, 마구류(馬具類) 등이 있다. 이들 유물은 대구에
있는 국립대구박물관과 경북대박물관, 2012년에 문을 연 의성조문국박물관에 분산되어 있다.


▲  드넓게 펼쳐진 금성산고분군의 위엄 ▼

금성산고분군이 지금처럼 깔끔히 정비된 것은 근래에 일이다. 겨우 경덕왕릉이라 불리는 1호분
만 봉분(封墳)을 갖추고 있었을 뿐, 나머지는 그냥 경작지로 쓰였다. 그러다가 고분을 발굴하
고 그 무덤을 복원하는 한편, 주변을 말끔히 밀고 정비하면서 일종의 고분공원으로 거듭난 것
이다.

고분의 모습은 흙으로 만든 봉토분(封土墳)으로 다른 고분과 별로 다를 것은 없다. 조문국의 수
수께끼를 한 움큼 간직한 큼지막한 고분들이 듬성듬성 또 다른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
에 조그만 민묘(民墓)들이 수줍은 듯 들어앉았다. 고분은 당연히 옛 조문국이나 신라 귀족들의
무덤이고, 민묘는 20세기 이후 조성된 인근 백성들의 무덤이니 서로의 신분과 시공(時空)을 초
월하며 한 공간에 어색하게 자리한 것이다.
물론 민묘는 고분군 보호와 정비를 위해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연고가 없는 경우
함부로 이장(移葬)하기도 어렵다. 또한 어차피 같은 무덤이고 모습도 비슷하니 조문국의 무덤과
신라의 무덤, 그리고 현대의 무덤을 비교할 겸, 그냥 두어 고분군의 일원으로 삼는 것도 괜찮다
여겨진다.

손으로 더듬고 싶은 두툼하고 요염하게 솟아난 고분들 사이로 산책로가 나 있는데, 이들 고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천천히 둘러보면 대략 1시간 정도 걸린다. 또한 이곳의 상징은 경덕왕릉
이라 불리는 1호분으로 이곳 무덤 가운데 유일하게 석물을 갖췄으며, 국도 변에는 문익점 면작
기념비도 있으니 같이 둘러보면 된다.


▲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쏘는 조문국 무인상(武人像)
조문국의 무인이 정말 저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발굴된 무기와 마구류를
토대로 가야나 고구려의 무인을 모방하여 재현한 듯 싶다.

▲  금성산고분군 한쪽에 들어앉은 조그만 민묘들
비록 무덤의 크기와 시대는 틀리지만 저들도 어엿한 금성산고분군의 일원이다.
조문국부터 신라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초월한 다양한 시대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생생한 현장이니 말이다.

▲  국도변에 누운 43호 고분

▲  40호 고분

▲  35호 고분

◀  국도변에 굵직하게 솟은 조문국사적지
(召文國史蹟地) 표석의 위엄
표석에 쓰여진 글씨체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33,34,36,37호 고분

▲  민묘와 옛 고분의 공존

▲  20호 고분

▲  25호 고분

▲  5호 고분

▲  19호 고분


▲  금성산고분군의 서쪽 부분

▲  고분 북쪽에 남아있는 민가
나무 외에는 민가와 고분의 마땅한 경계선이 없어 거의 금성산고분군의 일부처럼 보인다.
저 집도 고분군의 범위가 확대되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전될 수도 있다.

▲  나란히 솟아난 고분 3형제

▲  금성산고분군의 상징, 조문국 경덕왕릉(景德王陵)

금성산고분군은 그냥 몇호분이란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곳 1호분은 특별히 경덕왕릉이란 이름
을 달고 있다. 게다가 석물까지 갖추고 있으니 특별한 존재임은 분명하다. 열심히 발품을 팔게
만드는 너른 금성산고분군의 서남쪽 가장자리에 자리한 무덤으로 이곳의 주인이라고 전하는 경
덕왕(景德王)은 조문국 군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 숙종 때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쓴 그의 문집(文集)을 통해 옛날부터 막연히 경덕왕릉이
란 이름으로 살아오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나 경덕왕의 존재와 경덕왕릉의 진위여부는 여전
히 수수께끼이다.

왕릉의 둘레는 74m, 높이 8m로 능 앞에는 근래에 만든 1.6m 높이의 비석과 상석(床石), 멀뚱한
표정의 문인석(文人石) 1쌍, 장명등(長明燈) 1쌍이 세워져 있다.


▲  조촐한 모습의 조문국 경덕왕릉

허목의 문집에는 경덕왕릉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실려있다.
옛날 이곳에 살던 농부가 외밭을 마련하고자 야트막한 언덕을 갈았다. 밭을 일구던 농부는 우연
히 큼직한 구멍을 발견했는데,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이었다.
그는 이상하게 여겨 일손을 멈추고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그 안에는 돌로 만든 석실(石
室)이 있고, 그 둘레에는 금칠(金漆)이 되어 있었으며, 석실 안에는 금칠을 한 소상(塑像)이 있
으니 그 머리에는 금관이 씌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금관을 본 농부는 '이게 웬떡이냐~!!' 욕심이 솟아나 그 금관을 벗기려고 했다. 허나 그의 손이
금관에 닿자 자석처럼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의성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옛 조문국의 경덕왕이다. 나의 능이 황폐해져서 농부의 외밭이 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속
히 능을 복원토록 하라'
그리고는 능의 위치를 알려주고 사라졌다.

날이 밝자 현령은 사람들을 이끌고 노인이 일러준 곳으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밭이 되기 직전인
고분이 있었다. 이에 현령은 왕릉을 조성했다고 하며, 지금 있는 고분이 바로 그때 조성한 경덕
왕릉이란 것이다. 그런데 석실 안에 들어가 금관에 손을 댄 농부는 어찌되었는지는 나와있지 않
으니 그게 궁금할 따름이다. 아마도 며칠을 빌고 빌어서 간신히 손을 떼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그 농부가 봤다는 금관과 금칠이 과연 존재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이곳은 오극겸(吳克謙)이란 농부의 외밭이었다고 한다. 그는 외밭에
원두막을 짓고 밭을 지켰는데, 어느 날 꿈에 조복(朝服)을 입고 금관을 쓴 백발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문국의 경덕왕이다. 너가 지은 원두막이 나의 능 위에 있으니 속히 철거하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고는 농부의 등에 1줄의 글을 쓰고는 사라졌다. 농부는 깜짝놀라 잠에서 깨어나보니
등짝에 노인이 쓴 글이 그대로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농부는 너무 신기하여 당장 의성 관아로 달라가 현령에게 꿈의 내용을 말한 뒤, 고을 유지들과
봉분을 만들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들 전설을 통해 오랜 세월 지하에 묻혀있다가 조선시대에 경작이나 농경지 개척을 통해 발견
되어 고을 현감과 지역 사람들이 능을 복원하고 제향까지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제향은 1470년
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1945년 이후 지역 사람들이 살짝 지내오다가 '경덕왕릉보존회'가 결
성되어 매년 음력 3월에 군수와 군민들이 춘계향사(春季享祀)를 지낸다.

▲  조문국 경덕왕릉 능비

▲  두 손으로 홀(忽)을 들고 선 긴 수염의
문인석과 장명등


▲  경덕왕릉의 동쪽 피부면
무덤 동쪽 피부에 얕게 패인 부분이 있는데 저것이 혹 농부가 발견했다는
그 구멍이 아닐까 싶다.

▲  3호분

경덕왕릉 부근에 자리한 3호분은 높이가 3m, 밑지름이 14.3m~10.7m 내외이다. 여기서 돌무지덧
널무덤, 덧널무덤, 유사돌무지덧널무덤 등 3기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금귀
걸이와 은허리띠, 삼엽문대도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신라 유물로 덧널무덤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류가 나왔다.


▲  6호분

6호분은 북쪽 높이 2.5m, 남쪽 높이가 4m이다. 이 고분 안에서는 적석목관(積石木棺)의 제1묘
곽과 장방형의 토광인 제2묘곽이 들어있다.
제1묘곽에서는 금제세환귀걸이, 은제과대장식, 은제교구 등의 장신구와 T자형 장병무기와 철모,
철촉, 소화두대도 등이 나왔고, 장경호와 고배(高杯), 고배뚜껑 등의 토기류와 11cm나 되는 대
퇴골편이 나왔다. 그리고 제2묘곽에서는 홍색과 갈색의 유리구슬과 장경호(長頸壺), 유개호(有
蓋壺), 고배 등의 토기류가 다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  문익점 면작기념비(綿作紀念碑)
기념비 뒤로 보이는 동그란 지붕이 금성산고분군 방문자센터이다.


28번 국도변 소나무 사이에 문익점 면작기념비가 서 있다. 이곳에 왔다면 금성산고분군과 경덕
왕릉과 더불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봐야 될 존재로 비록 110여 년 밖에 묵지 않았지만 문익
점이 목화 재배에 성공했던 의미 깊은 곳으로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석이다.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 1329~1398)은 고려 후기에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우리 의
류사(衣類史)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국사책은 물론 역사 수험서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유명 인
사이다. 허나 우리나라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목화솜이 있었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는 아마
도 기존보다 더 품질이 좋은 목화로 여겨지며, 그 목화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널리 퍼트렸다.
하여 그 점을 너무 부각시키다보니 '목화씨=문익점'이란 공식이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원나라(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역모에 연루되어 3년 만에 귀국했다. 돌아오는 길에 귀양
살이를 했던 금주(錦州)에서 목화씨 5개를 붓대 속에 숨겨와 고향인 산청(山淸)에서 장인인 정
천익(鄭天益)과 함께 목화 재배에 성공했다. 그곳이 바로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면작시배
지(綿作始培地, ☞ 관련글 보러가기)이다.
이후 그는 안찰사(按察使)가 되어 경상도를 돌다가 의성 금성면 일대가 목화씨를 가져온 원나라
금주와 토질이 비슷함을 발견하고 금성면 제오리(堤梧里)에 목화씨를 심어 성공했다. 마침 의성
현감이 그의 손자인 문승로(文承魯)라 그를 시켜 목화를 파종했다고 한다. (또는 조선 태종 때
문익점의 손자 문승로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파종했다고 함)

이후 문익점의 목화면작을 기념하기 위해 1909년 지역 주민들이 목화밭인 원전(元田)에 기념비
를 세웠다. 그 비석이 바로 윗 사진의 면작기념비이다. 1935년 왜인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
며, 유서 깊은 원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경지 정리로 흔적조차 더듬기 어렵게 되었다.
1991년 김우현 경북도지사의 지시로 면작기념비 주변을 정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금성산고분군을 둘러보고 탑리의 지명 유래가 된 탑리5층석탑을 간만에 보려고 했다. 하지만 시
간도 여의치 않고 영천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몰라서 일단 탑리터미널로 갔다.
터미널로 가니 마침 영천행 직행버스가 올 시간이다. 여기서 외지로 나가는 시외버스가 너무 부
실하고 그걸 1대 놓치면 꼼짝없이 몇 시간 이상을 죽치고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하여 바로 표를 끊고 5분 뒤에 머리를 들이민 영천(永川)행 직행버스를 타
고 의성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의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  문익점 면작기념비(왼쪽이 1909년에 만들어진 것, 오른쪽은 1991년 것)

※ 의성 금성산고분군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탑리까지
* 서울 청량리역에서 8시 25분에 출발하는 부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양평, 원주, 제천, 단
  양, 영주, 안동경유)
* 부산 부전역에서 7시20분에 출발하는 청량리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해운대, 태화강, 경주,
  영천 경유)
* 동대구역에서 16시 30분에 출발하는 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하양, 북영천 경유)
*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탑리, 의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부산 동부터미널(노포동)에서는 1일
  2회 떠난다.
* 영천과 안동에서 탑리행 직행버스 이용 (1일 2회 운행)
② 현지교통
* 의성터미널(의성역) 밖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탑리 방면 군내버스(30~70분 간격)를 타고 금성
  산고분군에서 하차
* 탑리터미널 부근 대리3리 군내버스 정류장과 탑리역 정류장에서 의성 방면 군내버스(20~70분
  간격)를 타고 금성산고분군 하차. (탑리터미널에서 도보 35분, 탑리역에서 도보 25분)
③ 승용차편 (주차장 있음)
* 중앙고속도로 → 군위나들목을 나와서 군위읍 방면 5번 국도 → 동부4거리에서 우회전 → 청
  로교에서 좌회전 → 탑리 우회도로 → 금성산고분군
* 입장료와 주차비는 공짜
* 금성산고분군 서쪽 초전리에 금성산고분군과 조문국의 모든 것을 담은 조문국박물관이 있다.
  도보로 20분(차로 3~4분) 거리로 가까우니 같이 둘러보길 권한다.(☞ 박물관 홈페이지 보기)
*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351외 (고분전시관 ☎ 054-83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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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12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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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경주 나들이 ~~~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벽도산,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 늦가을 경주 나들이 '

▲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하늘 아래 세상을 평정한 가을이 천하를 곱게 물들이며 한참 전성기를 일구던 10월 막바지
에 신라 서라벌의 향기가 지독하게도 배여있는 경주(慶州)를 찾았다.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아침 일찍 동서울종합터미널을 찾았으나 경주 관광객 폭주로
9시 이후에나 승차가 가능하다고 그런다. (첫차는 7시)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구미(龜尾)행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경주로 갈 때 자리가 여의치 않으면 보통
구미를 거쳐 간다. 비록 갈아타야되는 번거로움은 있으나 구미행은 휴일에도 자리가 꽤 널
널한 편이고 경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환승 장소로도 제격이다.
구미에 이르자 바로 포항행 직행버스로 환승, 다시 1시간 30분을 달린 끝에 12시에 경주터
미널에 도착했다.

경주에 이르니 벌써부터 나들이 손님들로 터미널 주변은 북새통을 이룬다. 허나 그들이 가
는 곳은 거의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불국사나 석굴암, 대릉원, 분황사지 등 경주
의 기본적인 곳은 거의 질리도록 가본 터라 속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을 주로 찾는 편
이다.
그렇게 경주에 수많은 문화유적과 명승지에 발자국(헤아려보니 대략 120곳이 넘음)을 남겼
지만 '신라(新羅)', 그 조그만 나라가 무려 1천 년씩이나 쓸데없이 오래 있다보니 그 중심
지였던 경주에는 아직도 갈 곳들이 차고 넘쳐난다. 정말 한 골목, 한 굽이를 돌 때마다 볼
거리가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오는 곳이 바로 경주인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볼거리와 찬란한 역사가 깃들여진 경주는 굳이 나쁘게 이르자면 내게는 꽤
부담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볼거리가 지나치게 많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보려면 적지 않은
지식을 필요로 하니 차라리 눈을 감고 지나가고 싶을 정도이다.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은 시내 서쪽인 효현동(孝峴洞)이란 변두리 동네로 그곳에 안긴 3층
석탑과 법흥왕릉, 그리고 남쪽 벽도산에 있는 율동(두대리) 마애불이 이번 목적지이다. 이
들은 거의 인지도가 없어 찾는 이도 뜸하다.
경주고속터미널에서 아화로 가는 경주좌석버스 300-1번을 타고 태종무열왕릉과 효현고개를
넘어 효현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대천<大川, 고현천> 옆으로 난 조그만 농로(외외
길)로 들어섰다.
갈대가 살랑살랑 춤을 추는 대천, 늦가을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효현동 들판이 속세(俗世)
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를 흔쾌히 정화시켜준다. 4발 차량이 이따금 지나칠 뿐, 사람
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그런 시골길을 15분 정도 가면 효현동3층석탑을 알리는 갈
색 이정표가 마중하고, 그의 안내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외외마을이 나오는데, 탑은 마을
서남쪽에 자리해 있다.


▲ 경주의 서쪽 산하를 차례차례 적시며 형산강(兄山江)으로
흘러가는 대천(고현천)


▲ 효현동 시골길(외외길)
인적도 없는 호젓한 시골길을 거닐으니 마치 아비규환의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해탈감이라고나 할까? 비록 잠시뿐이지만...


▲ 늦가을에 슬며시 물들어 가는 효현동 시골길(외외길)
이런 시골까지 문명의 이기(利器)를 전해주는 전봇대 너머로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는 산은 남산(南山, 금오산)이다.


 

♠ 소나무를 우산으로 삼으며 옛터를 홀로 지키는
효현동3층석탑 - 보물 67호

효현동 외외마을 서남쪽 멋드러진 소나무 밑에 자리한 효현동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라 후기 석탑이다. 기단 사방(四方)에는 기둥 모양의 조
각을 두었고, 탑신은 각 층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새겼으며, 지붕돌 네 귀퉁이는 살
짝 치켜진 것이 마치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4단으로 되어있고, 각 부
분의 조각이 가늘게나마 있어 9세기 정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탑이 있는 자리는 법흥왕이 불도를 닦았다는 애공사(哀公寺)의 옛터로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
증할 절터의 흔적은 나오지 않아 그마저도 희박하며, 절의 위치와 관련된 기록도 없는 실정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애공사터로 포장된 것은 조선 후기에 경주김씨에서 현재 법흥왕
릉을 그들 조상의 하나인 법흥왕의 능으로 삼으면서 탑이 있던 자리를 애공사터라 우겼기 때문
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나왔는데, 마침
탑도 있고, 비록 북쪽은 아니지만 서쪽에 이름 모를 고분이 있으니 적당히 끼워 맞춘 것이다.

▲ 효현동3층석탑의 앞부분

▲ 효현동3층석탑의 뒷부분


▲ 효현동3층석탑과 이웃한 우사(牛舍)

이 탑은 기둥 조각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밋밋한 모습으로 두 눈에 넣어 보기에
도 별 부담이 없다. 오히려 화려함에 찌든 비슷한 시대의 탑들보다도 더 정감이 가는 것 같다.

마땅한 절터도 아닌 잡초 위에 뿌리를 내린 그는 자신의 내력과 정체를 꽁꽁 숨긴 채, 좀처럼
해답을 주려고 하질 않는다. 그의 속사정을 모르는 속인(俗人)들은 동네 이름을 따서 효현동(
효현리)3층석탑이란 이름을 주었으며, 경주김씨는 그를 애공사탑으로 삼아 조상묘를 찾았다는
뿌듯함에 빠져있다.

탑 옆에는 우공(牛公)들이 사는 우사가 있다. 그들의 음매~♪ 소리로 주변이 좀 시끄럽긴 해도
아무 것도 없는 공터에 홀로 외롭게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을 것이다. 우사 주인이나 우공들
이 탑에 해꼬지를 하지 않는 이상 서로 어우러 사는 모습도 괜찮아 보인다.

* 효현동3층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419-1


▲ 효현동 시골길 (법흥왕릉 가는 길)

▲ 가을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내년 풍년을 위해
기나긴 휴가에 들어간 효현동 들판

▲ 법흥왕릉 입구
갈색 이정표가 있기 전에는 키 작은 표석이 이정표의 역할을 대신했다.
표석에는 한자로 '법흥왕릉 입구'라 쓰여있다.

▲ 법흥왕릉으로 인도하는 숲길에서 바라본 효현동 들판과
벽도산(율동 마애불을 간직한 산)


 

♠ 법흥왕의 능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라 중기 고분
신라 법흥왕릉(法興王陵) - 사적 176호

효현동 서쪽 산자락에 법흥왕릉이라 불리는 오래된 신라 무덤이 말없이 누워있다. 능의 높이는
2m, 지름 14m로 신라 왕릉 중에서 작은 편에 속하는데, 봉분 앞에는 근래 지어진 상석(床石)이
하나 놓여져 무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능의 주인이라는 신라 법흥왕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부터 중,고등학교 국사책, 온갖 수험서에
이르기까지 지겹도록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인물로 불교를 공인하고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을
정벌했으며, 연호를 쓰는 등, 신라에서 제법 업적이 있는 군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업적에 비해 능의 규모가 상당히 초라하여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
우뚱하기 마련이다. 물론 신문왕릉(神文王陵, 신문왕릉 또한 주인이 정확하지 않음) 이전에는
딱히 석물을 두지 않았고, 비석도 무열왕릉(武烈王陵)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장식이 없는 건 당
연하다 하겠으나 봉분의 크기가 인간적으로 너무 작다. (왕릉의 보호 구역은 72,816㎡)
봉분 주변에는 드문드문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어 무열왕릉처럼 봉토 밑에 호석(護石)을 둔 것
으로 여겨지며, 능 주변으로 소나무 숲이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특히 기이한 모습의
소나무가 여럿 있어 신비로움을 안겨준다.

일단 이 무덤은 신라 중기 고분이다. 법흥왕릉이란 이름으로 살고는 있지만 이는 조선 후기부
터이다. 그 이전에는 경주 땅에 널리고 널린 신라 고분의 하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법흥왕의 능이란 증거가 있는가? 딱히 적당한 증거도 없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
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고 나오는데, 애공사가 어딘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18세기 이후, 신라 왕가의 후손인 경주김씨와 경주석씨, 경주박씨들이 한참 조상묘 찾기
사업을 벌이면서 어디에 있다는 짧은 기록에 의지해 경주 땅을 들쑤셨는데, 대충 그럴싸한 곳
을 조상묘로 때려 삼았다. 법흥왕릉 역시 그중의 하나이다.

법흥왕릉을 찾아 나선 후손들은 효현동3층석탑을 발견했고, 덩달아 서쪽 숲속에 잠긴 이 무덤
을 발견하게 된다. 석탑은 이곳에 절이 있었으니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북쪽도 아니지만 서
쪽에 옛 무덤이 있으니 탑 자리를 애공사라 여기면 법흥왕릉이라 우겨도 될 듯 싶었다. 또한
주변에 다른 고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여 3층석탑 자리를 애공사터로 때려 삼고 이 무덤을
법흥왕릉으로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이름 없는 옛 무덤은 '법흥왕릉'이란 엉뚱한 이름표를 달
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예전에는 이름 앞에 막연히 전하고 있다는 뜻에 '전(傳)'을 붙여 '전 법
흥왕릉'이라 했으나 요즘은 아예 '경주 법흥왕릉(문화재청 지정 명칭)'이라 부른다. 진짜 법흥
왕릉이 나타날 때까지는 법흥왕릉이란 이름으로 꼼짝없이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왕릉이 시내에서도 좀 떨어진 외진 곳이라 찾는 이도 적다. 법흥왕이란 인물은 워낙 유명하지
만 그의 능은 반비례로 인지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신변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어
1966년과 1968년에 도굴을 당한 적이 있으며, 2005년에도 도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금의
봉분은 1968년 도굴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법흥왕릉

▲ 동쪽에서 바라본 법흥왕릉

▲ 서쪽에서 바라본 법흥왕릉


▲ 손으로 더듬거리고 싶은 법흥왕릉의 뒷태


※ 불교를 공인하고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법흥왕(法興王. ?~540 / 재위 514~540)

법흥왕의 이름은 김원종(金)으로 지증왕(智證王, 437~514 / 재위 500~514)의 아들이다. 키
가 7척(1척은 22~33cm)에 이르며, 성품이 온후해 주변 사람을 아꼈다. 그의 모후(母后)는 연제
부인() 박씨이며, 부인은 보도부인() 박씨이다.

514년 가을, 지증왕이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 뒤를 이어 신라 23대 군주로 즉위했다.
부왕에게 '지증(智證)'이란 시호(諡號)를 올리니 신라의 시호는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516년 정월, 내을신궁(奈乙神宮)에 제를 지냈는데, 용이 양산 우물에 나타났다.

517년 4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고 518년 2월 주산성(主山城)을 쌓았다.

520년 정월, 신라 최초로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의 관복(官服)
을 주색(朱色), 자색(紫色) 순으로 제정했다.

521년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522년 3월 가락국<금관가야, 金官伽倻>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다. 그래서 이찬 비조부
()의 누이동생을 보내 혼인에 응했다.

524년 9월, 왕이 남부지역 개척지를 순행(巡行)했는데, 가락국 왕이 찾아와 회견을 했다.

528년, 양나라에서 수입한 불교가 널리 백성들에게 퍼지자 불교를 공인하려 했다. 허나 귀족들
이 반대하여 난항에 부딪치자 이차돈(異次頓)과 짜고 그 유명한 이차돈 순교 사건을 일으켜 귀
족들을 단단히 겁에 질리게 만들고 불교 공인을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왕권은 한층 강화된다.

529년, 살생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531년 3월, 제방을 보수했고, 상대등(上大等) 벼슬을 만들어 국사를 총리(總理)하게 했다.

532년, 가락국이 신라에서 시집 보낸 비조부의 누이에게 가야옷을 입혔다는 엉뚱한 구실을 내
세워 사다함(斯多含)을 보내 가락국을 멸망시켰다. 신라의 파상적인 공격 앞에 가락국의 마지
막 왕 구해왕(仇亥王)이 나라의 국고(國庫)와 보물을 바치고 항복하니 이들을 예우로 맞이하고
상등(上等)의 작위를 내려 본국(김해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내렸다. 그의 3번째 아들 김무력
(金武力)에게는 각간(角干)이란 벼슬을 내렸는데, 그의 손자가 바로 김유신(金庾信)이다.
<가락국 땅에는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함>

535년, 건원(建元)이란 연호(年號)를 쓰니 이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이다.

536년 정월, 관리들이 외직(外職)에 나갈 때 가족을 대동하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

540년 7월, 왕이 승하하자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

법흥왕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하며, 애공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에게는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어 그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신라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진흥왕(眞興王)이다.
김입종은 조카인 법흥왕의 딸과 혼인하여 진흥왕을 낳았으니 왕족들의 족내혼(族內婚)이 성행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신라 최초로 율령을 반포했으며, 이차돈을 통해 불교를 공인했다. 그리고 가락국을 정벌
해 낙동강 하류로 진출했고, 외직에 나가는 관리에게 가족 동행을 허가하였으니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으로 왕권이 한층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보통 가족은 인질로 왕경(王京)에 두고
가야했음>


▲ 법흥왕릉의 앞모습

▲ 왕릉 부근에서 발견된 돌
그냥 이곳에 널부러진 돌은 아닌 듯 하며, 무열왕릉처럼 봉토 밑에
호석 시설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법흥왕릉과 속세를 이어주는 소나무 숲길
왕릉은 작지만 그곳으로 통하는 숲길은 왕릉의 품격과 옛 무덤의
신비로움까지 품을 수 있도록 잘 가꾸어져 있다.


※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① 경주까지 버스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버스가 5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성남, 부천, 수원, 춘천, 청주, 세종시에서 경주행 직행/고속버스 이용
* 대구(북부, 서부, 동부, 동대구), 부산(노포동, 사상), 울산, 포항, 창원(마산), 전주, 광주
, 진주, 순천, 강릉, 동해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철도 이용
* 서울역과 광명역, 천안아산역, 오송역, 대전역에서 신경주역 경유 부산행 고속전철 이용
* 청량리역, 원주역, 영주역, 동대구역, 부전역, 태화강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③ 현지교통
* 경주고속터미널(경주시외터미널에서 도보 2분)과 경주역(성동시장)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
, 300-1, 304번을 타고 효현교 하차. 효현동 방면 외외길을 따라 들어간다. 효현동3층석탑까
지는 도보 20분, 법흥왕릉은 도보 25분
* 신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번을 타고 효현다리 하차
④ 승용차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까지 접근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건천읍에서 경주방면 4번 국도 → 광명3거
리에서 경주대 방면 → 와상교를 건너 외외길로 우회전 → 효현동(법흥왕릉, 3층석탑)

★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주차장은 따로 없으므로 길가나 빈 공간에 알아서 주차
* 법흥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63


 


법흥왕릉을 끝으로 효현동에 대한 볼일은 끝났다. 왕릉 주변 잔디밭에 앉아 속세에서 사온 간
단한 먹거리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율동(두대리) 마애불로 길을 재촉
했다. 그곳은 이미 오래 전에 가본 기억이 있지만 너무 빛바랜 옛날이라 여기까지 온 김에 오
랜만에 친견하기로 했다.
여기서 율동(栗洞) 마애불로 갈려면 우선 효현교로 다시 나가야 된다. 효현교를 건너 8분 정도
가면 율동인데,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옛 율동역이 있던 중앙선(서울↔경주) 철로와 경부고속
도로의 아랫도리, 그리고 두대마을을 차례로 지나 벽도산의 품으로 20분 정도 파고 들면 깊은
산골에 박힌 율동 마애불이 모습을 비춘다. 마애불까지는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길도 잘 닦여
져 있어 방황할 염려는 없다.


▲ 옛 율동역을 지나는 중앙선 철로 (경주 방면)
경주와 건천 사이에 있던 율동역(栗洞驛)은 오래 전에 녹아 없어지고 그 흔적만 아련히
남아있다. 서울 청량리역을 비롯하여 포항과 동대구, 부전, 강릉으로 가는 열차가
외마디 기적소리를 남기며 이곳을 스쳐간다.
(중앙선 옆으로 보이는 차량들의 행렬은 국가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 옛 율동역을 지나는 중앙선 철로 (영천 방면)

▲ 녹음이 우거진 율동 마애불 가는 길
마애불 아래까지 길이 닦이고 주차장이 깔려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배려했다.


마애불 주차장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율동 마애불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근래에 터를
닦은 성주암(聖主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나온다. 산신각(山神閣)과 심우실이라 불리는 기와집
이 전부로 산신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인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 심우실(尋牛室)이라 불리는 성주암의 중심 건물
심우실은 'ㄱ'모양의 기와집으로 법당(法堂) 겸 요사(寮舍)의 역할을 한다.
허나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여염집 분위기로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 절 뒤쪽에 자리한 율동 마애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다


 

♠ 신라 후기에 조성된 수려한 마애불(磨崖佛)이자 벽도산의 오랜 은인(隱人)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두대리 마애석불)
- 물 122호

▲ 율동 마애불 - 마치 환영(幻影)처럼 그 모습을 은은하게 비춘다.

경주 벽도산(碧桃山, 424m) 동쪽 자락에는 벽도산의 은인(隱人),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이하
율동 마애불)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마애불은 소금강산(小金剛山)에 안긴 굴불사지(掘佛寺址) 4면석불(보물 121호)의 양식을 그
대로 계승한 신라 후기 석불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에 세
우고, 좌우에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협시(夾侍)로 세웠다.

가운데에 자리한 아미타불은 높이 2.5m로 머리가 상당히 커 보인다. 다른 부분은 얕음새김으로
처리했지만 머리는 돋음새김으로 크게 돋게 새겼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육계<무견정상(無見頂
相)>가 두툼히 솟아 있는데, 이는 굴불사지 석불과 비슷하다. 얼굴은 볼이 풍만하게 돋았고 미
소가 은연히 드리워져 있으며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어 그의 정체가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다. 발은 앞으로 내밀지 않고 옆으로 반듯하게
벌리고 있으며, 어깨는 당당한 편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덮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다.

◀ 측면에서 바라본 율동 마애불

아미타불 왼쪽의 관음보살은 아미타불보다 덩치가 작다. 2m 남짓의 키로 움푹 들어간 허리선과
풍만하게 튀어나온 엉덩이가 눈길을 끄는 날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다. 몸매의 굴곡이 진하게
드러나 있으며, 발은 옆으로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위로 올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에는 정병<政柄, 혹은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그가 관음보살 누님임을 알 수 있
다. 게다가 몸매도 영락없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조그
만 얼굴은 두 눈이 형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상태는 별로 안좋다.

아미타불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경례를 하는 듯한 모습이며, 전체적인
형태는 관음보살과 비슷하다. 키는 2m 남짓으로 얼굴 부분이 다소 마멸된 것 외에는 건강 상태
는 괜찮다. 이들 불상은 머리 뒤로 두툼하게 표현된 동그란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으며, 두광
에 표현된 당초(唐草)무늬 등이 지긋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섬세하게 남아있다. 몸 뒤에는 신
광(身光)이 얇게 표현되어 그들을 빛나게 한다.

이들은 굴불사지 석불과 기본적으로 같지만, 풍만함이나 발의 모양, 옷주름 모양 등이 달라 조
성시기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 도드라지게 새겨진 아미타불의 얼굴

율동 마애불 부근에는 '벽도산석불입상'과 '천창산(天倉山)선각마애불' 등이 있어 율동 마애불
을 중심으로 벽도산 일대도 조촐하게 불국토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인근 능선에서 벽도산 석불입상을 본 듯 한데 기억이 벌써부터 희미하다. 율동 마애불은
인지도가 낮아 속인들의 발길은 적지만 경주 답사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이들은 왠만큼은 아
는 곳이다.

마애불 앞에 3배의 예를 올리며 살짝 약소하게나마 소망을 들이밀어 본다. 신라 석공(石工)들
의 체취가 담긴, 비록 그들은 사라지고 윤회(輪廻) 사상에 따라 지금은 다른 존재로 살고들 있
겠지만 석불 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며 중생을 맞는다. 불상 주변에는
푸른 이끼가 피어 있지만 마애불의 위엄 앞에 더는 어쩌지 못하고 적정한 간격으로 그들과 동
거를 한다.
바위가 서쪽을 향하고 있고, 불상을 둘러싼 광배(光背)가 바위에 일정한 홈을 파준 탓에 장대
한 세월이 흐르고 자연의 집요한 괴롭힘 앞에서도 당당하게 건강을 누리며 살고 있음이 참 다
행이라 하겠다.

율동 마애불을 끝으로 소소하게 즐긴 늦가을 경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경주고속터미널(경주시외터미널에서 도보 2분)과 경주역(성동시장)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
, 300-1, 304번을 타고 율동 두대마을입구에서 하차.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두대길을 따라 도
보 25분
* 신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번을 타고 율동 두대마을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마애불까지 접근 가능)
① 경부고속도로 → 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건천읍에서 경주방면 4번 국도 → 광명3거
리에서 직진 → 율동에서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 → 율동 마애불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율동 산60-1 (두대안길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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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짜리 지폐에도 나왔던 우리나라 서원의 영원한 성지, 안동 도산서원

 


' 우리나라 서원의 영원한 성지,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
도산서원 현액
▲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 현액 - 한호(韓濩, 한석봉)의 글씨이다.


 

여름 제국(帝國)이 봄을 몰아내고 한참 성하(盛夏)의 기반을 닦던 6월 한복판에 우리나라
서원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안동 도산서원을 찾았다.

아침 일찍 부산에서 동대구행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에서 팔공산 은해사(銀海寺)로 넘어갈
요량이었으나 변덕이 발동하면서 안동(安東)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경북 한복판에 자
리한 안동으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안동 제일의 고찰, 봉정사(鳳停寺)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도산서원 가는 67번
시내버스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길래 다시 변덕을 발휘하여 그곳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안동 외곽으로 가는 안동시내버스 대부분은 안동역(교보생명)에서 출발하는데 도산서원으
로 가는 버스는 지독한 유명세와 달리 겨우 1일 5회 다닐 뿐이다. 때마침 그 시간과도 맞
아 떨어지니 아무래도 오늘은 그곳과 인연이 있는 듯 하다.

어쨌든 67번 버스를 타고 거의 50분을 달려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서원 입구에는 여느 관
광지와 마찬가지로 조촐하게 가게와 식당이 터를 닦고 있는데, 평일이라 무척이나 한가하
다. 여기서 서원까지는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산책로를 6분 정도 걸으면 되며, 매표소에서
소정의 입장권을 구입해야 된다. 즉 유료의 땅이다.


▲  녹음에 젖은 도산서원 산책로


 

♠  도산서원 가는 길

▲  낙동강을 가르는 키 작은 다리
다리의 길이는 길지만 그 높이는 수면에 닿을 정도로 작다. 안동호의 수량이
넘치거나 폭우가 내리면 꼼짝없이 통제의 비운을 맞으며 다리 주변은
물속에 잠긴다. 저 다리를 건너면 시사단이 있는 의촌리이다.


도산서원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중간에 낙동강(落東江)을 옆구리에 낀다. 허나 강물은 저 밑에
흐르고 소나무가 운치를 머금은 산책로는 언덕 높이 둘러져 있으니 보기와 달리 그리 가깝지는
않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안동의 지도를 크게 바꿔놓은 안동댐의 영향이 크다. 댐이 들어서
면서 도산면과 예안면의 많은 땅이 희생되었고, 그 수몰지를 발판으로 안동호(安東湖)가 들어섰
으니, 서원 앞은 안동호의 상류가 된다. 다행히 도산서원은 높은 곳에 터를 잡아 강제 이주를
면했으나 서원으로 가는 길과 강 주변 풍경은 약간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서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조망이 일품인 천광운영대가 있다. 이곳은 3글자로 간단히 운영대(雲影
臺)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퇴계 이황이 '빛과 구름 그림자가 같이 돌고 돈다<天光雲影共徘徊
>'
는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퇴계는 그가 세운 도산서당
을 엄숙한 학습의 장으로 꾸미면서 하늘의 묘용(妙用)을 깊이 생각하고 자연의 심오한 뜻을 깨
우치는 장소로 삼았다.

이곳에 올라서면 낙동강을 비롯하여 산에 둘러싸인 강 건너 지역(의촌리)이 훤히 두 눈에 바라
보이며, 바로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이다.


▲  천연대(天淵臺)

도산서원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 강변 낭떠러지에 천연대가 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
이 심성수양을 위해 산책을 즐기던 장소라고 한다. 천연대란 이름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하늘
에는 새가 날고 물에는 물고기가 뛰어 논다<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
에서 인용
했다고 하며, 천광운영대와 달리 소나무가 벼랑까지 뿌리를 내려 운치를 머금게 한다.


▲  강 건너로 보이는 시사단(試士壇)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3호

천연대와 운영대를 비롯하여 강과 접한 부분에서 낙동강 건너를 바라보면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유독 동그랗게 솟은 높다란 언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꼭대기에는 기와를 얹힌 비각(碑閣)
이 있는데, 그가 바로 시사단이다.

시사단은 1792년(정조 16년) 정조(正祖) 임금이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자 각신<閣臣, 규장각(奎
章閣) 관리> 이만수(李晩秀)를 보내 도산서원 앞에서 과거시험의 하나인 별시(別試)를 치르게
했는데, 이를 기념하고자 비석을 세운 것이다. 비문(碑文)은 당시 재상(宰相)으로 있던 채제공
(蔡濟恭)이 썼다.

원래는 강가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안전을 장담못하게 되면서 1976년 높이 10m, 반경 10m의
동그란 언덕을 쌓고 그 위로 옮겼다. 지금은 안동호의 수량이 적어 들판의 인공 언덕으로 있지
만 만수(滿水) 때는 주변이 물로 채워져 하나의 조금만 섬을 이루며, 서원에서 강에 놓인 키 작
은 다리를 건너면 시사단으로 접근할 수 있다.


▲  녹음에 잠긴 늙은 느티나무
서원 유생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쉼터를 제공하던 정자나무로 지금은
관람/답사객들에게 그늘과 쉼터를 베푼다.

▲  열정(洌井)

느티나무 옆에는 우물정(井)자를 고스란히 닮은 '井' 모양의 우물이 있다. 우물의 이름은 열정
으로 이는 역경(易經)에 나오는 '정괘(井卦)','정렬한천식(井洌寒泉食)'의 우물의 뜻을 취하여
붙인 것이다. 도산서당 시절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물이 맑고
맛이 좋았다고 한다.

이 우물은 식수의 역할 외에도 다음의 숭고한 뜻도 담고 있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따라가
지 못하고, 물을 길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즐겨 길어 마시는 것과 같이 사람들
은 주인 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마시듯 자신의 노력으로 인격과 지식을 쌓
아 누구나 즐겨 마실 수 있는 샘물처럼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


현재 우물 안에는 물이 담겨져 있어 살아있긴 하다. 허나 우물의 보존 때문인지 아니면 죽은 우
물에 그냥 물만 형식적으로 넣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물을 속세로 끌어올릴 도구가 없어 거의 그
림의 떡 같은 우물이 되어버렸다. 현재 우물의 역할은 옆에 있는 현대식 수도시설이 대신 한다.


▲  조그만 한옥마을 같은 도산서원

* 우리나라 서원의 성지(聖地), 도산서원(陶山書院) - 사적 170호
우리나라 서원의 대명사이자 옛 1,000원권의 배경(현 1,000원권에는 계상서당이 나옴)인 도산서
원은 동방의 주자(朱子)로 추앙을 받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세운 도산서당(陶山
書堂)에서 비롯되었다.

퇴계는 1549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2칸짜리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독서
에 열중하며, 제자를 가르쳤다. 허나 제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반해 서당 건물은 이를
받쳐주지 못해 같이 지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더 넓은 새로운 서당을 짓기로 결심하고 제자들
과 주변을 물색하다가 현재 서원 자리를 발견하고 환호를 질렀다.
이곳은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인데다가, 밑에 강물이 흐르는 산수가 잘 어울리는 곳이었던 것이
다. 게다가 좌우 산자락도 적당히 감싸 안은 듯한 지형이라 산속에 궁색하게 박힌 계상서당과는
다르게 아늑하면서도 앞이 탁 트였다. 다만 장차 안동호가 들어설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너무
아래가 아닌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으니 이때가 1557년이다.

이렇게 터가 정해지자 서당을 짓기 위해 평소 인연이 있던 용수사(龍壽寺) 승려 법연(法蓮)에게
건축을 의뢰했다. 마침 퇴계는 공조판서(工曹判書)의 벼슬을 받아 서울로 올라왔는데, 설계도인
'옥사도자(屋舍圖子)'를 직접 그려 법연에게 보내 공사를 맡겼다.
허나 공사 과정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공사 중간에 법연이 입적(入寂)하면서 서둘러 같은 절
승려인 정일(淨一)에게 책임을 맡겼으며, 재정적인 어려움과 설계 변경으로 터를 잡은지 3년 만
인 1560년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서당 건축을 승려에게 맡긴 것은 살림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고 한다.
서당이 완성되자 퇴계는 벼슬을 그만두고 그곳으로 내려와 도산서당이라 이름 짓고 제자들을 열
심히 길렀다.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1572년 서당 뒤쪽에 상덕사(尙德祠)를 지어 그의 위패를 봉안했고
, 1574년 유림(儒林)들의 호응과 지원을 받아 서당 위쪽에 서원을 지었다. 그래서 서당과 서원
은 같은 곳에 있게 된 것이며,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도산서원이라 부름) 1575년 조정으로
부터 도산서원이란 사액(賜額)을 받았다. 전교당에 걸린 사액 현판은 조정에서 내려보낸 것으로
석봉 한호(石峯 韓濩)가 쓴 것이다.
서원은 1576년 최종 완공되어 퇴계의 위패를 봉안했으며, 영남지역 유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
였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화를 면했으며, 1615년 퇴계의 제자인 월천 조목(月川 趙穆)을 배향했고,
1792년 정조 임금이 규장각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를 내리면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열었다.
그 기념으로 1796년 강 건너편에 시사단을 지었다. 그리고 1819년 장서를 보관하는 동광명실을
지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야심작 서원철폐령 때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로 그 건재를 과
시했으며, 1930년에는 서광명실(西光明室)을 중건했고, 1969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복원/정리
사업이 진행되어 1970년 유물전시관인 옥진각을 세웠다. 2003년에는 장판각(藏板閣)에 담겨있던
목판 2,790장을 인근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넘겼다.

우리나라 서원의 성지로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은 몰라도 도산서원은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3살짜리 어린애도 다 안다는 퇴계 이황과 인연이 깊은 곳이고 한때 1,000원권의 배
경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선비와 양반문화의 고장 안동에서 하회마을, 봉정사와 더불어 꼭 들
려야 직성이 풀린다는 안동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낙동강이 서원 바로 아래까지 들어오며,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제대로 승경(勝景)을 이룬다.

서원의 구조는 농운정사와 역락재 등 학생들의 기숙사와 도산서당이 앞에 포진해 있고, 중간에
는 교육 공간인 전교당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이 있다. 제일 뒤쪽에는 퇴계의 위패를 모신 상덕
사가 있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띈다. 또한 가장 밑에 있는 역락재에서 전교당, 상덕사
로 올라갈 수록 그 중요성만큼이나 지형이 높아진다.

서원의 건물 중 전교당, 상덕사와 삼문은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 도산서원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① 안동까지 철도 이용
* 서울 청량리역에서 안동행 열차(원주, 제천, 영주 경유)가 1일 7회 떠난다.
* 부산 부전역(태화강, 경주 경유)과 동대구역에서 안동행 열차가 1일 3회 떠난다.
* 안동역 서쪽 교보생명(옛 시외터미널앞)에서 도산서원을 경유하는 안동시내버스 67번이 1일 5
  회 운행한다. (안동 출발 9:40, 10:50, 13:10, 13:50, 16:10)
* 67번 시내버스는 노선이 복잡하다. 반드시 서원 경유를 확인바라며, 차를 놓치거나 시간이 맞
  지 않으면 온혜리 방면 67번 버스(1일 17회, 반드시 행선지 요망)를 타고 도산서원3거리에서
  도보 25분
② 안동까지 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안동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안동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고양, 부천, 성남, 수원, 인천, 원주, 대전(복합), 청주, 제천에서 안동행 직행버스 이용
* 동대구에서 안동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 대구북부에서 안동행 직행버스가 10~30분 간격
  으로 떠난다.
* 부산, 울산, 구미, 창원(마산), 포항에서 안동행 직행버스 이용
* 안동터미널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시내버스(0, 0-1, 1, 11, 46, 80번 등)를 타고 안동역(교보
  생명, 옛 안동터미널)에서 도산서원 경유 67번 시내버스로 환승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중앙고속도로 → 서안동나들목 → 안동시내 → 청량산 방면 35번 국도 → 도산서원3거리에서
  우회전 → 도산서원 주차장

※ 도산서원 관람정보 (2016년 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500원 (30인 이상 단체 1,300원) / 청소년,군인 700원 (단체 600원) / 어린
  이 600원 (단체 500원)
* 주차비 : 소형차 2,000원 / 대형차 4,000원
* 관람시간 : 9시~18시 (겨울에는 17시까지)
*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 054-840-6576, 6599)
* 도산서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도산서원 전교당


 

♠  도산서원 둘러보기 (1) 역락서재, 도산서당

▲  역락서재(亦樂書齋) 외부

서원 앞쪽에 배치된 역락서재(역락재)는 도산서당과 비슷한 시기인 15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서원 제일 아래쪽에 위치하며, 담장에 둘러져 거의 독립된 공간으로 자리한다.
역락서재는 서당 학생들의 기숙사로 퇴계의 제자인 정사성(鄭士誠)이 입학할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서 기증했다. 온돌방의 서쪽 반 칸을 비워 아궁이를 설치했으며, 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한때 학생들로 시끌거렸을 역락재,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문화유산의 귀한 몸이 되면서 어
느 누구도 방에 들어가 옛날처럼 숙식을 할 수 없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는 먼지만 흐르는 세
월만큼이나 쌓여간다.


▲  농운정사(隴雲精舍)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이다. 퇴계가 직접 설계를
했고 용수사 승려인 법련이 세운 것으로 독특하게도 '工'자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제자들
에게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장하는 뜻에서 그리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말리지 않겠으나 저들 가운데 퇴계의 뜻을 이어받아 진정 나라와 백성
에 헌신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다. 대부분 썩어빠진 성리학(性理學)에 빠져 뜬구름 같은
사상이나 논하고 앉았고, 권력과 부에 몰두한 나머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으며, 명나라에 지극
한 사대(事大)를 벌이고 부국강병을 내팽겨쳐 끝내 나라를 망쳐놓은 이들이 많은 수를 차지할
것이다. 또한 유생이 된 양반들은 먹고 살 걱정은 없으니 서원에 처박혀 평생 공부만 하며 헛된
사상이나 논하다 세상을 마친 이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농운정사의 농은 '隴(땅이름 롱)' 대신에 '膿(고름 농)'을 쓰기도 한다.

▲  농운정사 동편 시습재

▲  농운정사 서편 관란헌

농운정사의 동편 마루는 시습재(時習齋)라 하여 학습의 공간으로 삼았고, 서편 마루는 관란헌(
觀瀾軒)이라 하여 휴식의 공간으로 삼았다.


▲  서원의 핵심부로 안내하는 중앙 계단길

▲  도산서당(陶山書堂)

서원 동쪽에 자리한 도산서당은 도산서원의 모태가 되는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깊은
건물이다. 
1557년 용수사 승려 법련과 정일에게 짓게 하여 1560년에 완성되었으며, 퇴계가 직접 설계를 했
다고 전한다. 퇴계는 여기서 제자들과 같이 먹고 자며 그들을 가르쳤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제
자와 유생들의 발의로 서당 뒤쪽에 서원을 지어 퇴계의 위패를 봉안했고,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으면서 지금의 도산서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서원이 서당과 붙어있어 따로 보기도 하지만 엄
연한 서원의 일원이다.

서당 건물은 '一' 형태로 3칸 크기이며, 부엌과 온돌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부엌 반
칸과 마루 1칸을 더 달고, 건물 면에 퇴를 놓아 내었다. 덧지붕을 달고 마루를 길게 했으며, 방
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했는데, 이는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지
니지 못해 바위에 깃들어 조그만 효험을 바란다'
는 뜻, 즉 쉽게 말하면 공부에 자신이 별로 없
으니 바위에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툇마루가 넓어서 마루에 앉거나 신발을 벗고 마루에 들어가 쉴 수 있으며, 단 방에는 들어가면
안된다. 건물이 소박하여 서원 시절의 지어진 건물보다 은근히 정감이 쏟아진다.


▲  몽천(蒙泉)

서당 앞에 있는 몽천은 네모난 우물로 서당 및 서원 사람들의 식수원이다. 우물 이름은 몽천에
는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간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이는 역경(易經)의 몽괘(蒙卦)
에서 의미를 따서 붙였다. 서원 밖에 열천과 마찬가지로 물은 고여 있지만 먹을 수는 없다.

도산서원은 건물부터 우물, 나무, 강변에 이르기까지 제자의 올바른 길을 바라며 걱정하는 스승
퇴계의 지극하고도 따스한 마음이 듬뿍 함유되어 있어 답사객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실제로
그는 제자를 무척 잘 챙겨주었고 손수 어루만져 주었다고 한다. 자고로 이런 스승이 많아야 세
상이 밝아지는 법인데 오늘날에도 그런 스승은 가뭄에 콩 나듯 하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  도산서당의 마루인 암서헌
오랜 세월의 때가 곱게 깔려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보내온 금송(錦松)
 이 나무는 박정희가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은
 것으로 1970년 12월 이곳을 방문했을 때 손수
 옮겨 심었다.


▲  낙동강 바람만이 잠시 스치고 지나는 도산서당 뜨락

▲  도산서당 앞에 자리한 연못 - 정우당(淨友塘)

도산서당 앞에 네모난 연못 정우당은 연꽃의 보금자리이다. 퇴계는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고 칭
송하며 그들의 터전을 만들었는데, 진흙탕에 뿌리를 내려 물을 깨끗히 보듬고, 속은 비고, 줄기
는 곧아 남을 의식하지 않는 청정한 연꽃처럼 되기를 제자들에게 주문하고 있다.


▲  연잎 그늘에 의지해 햇살을 피하고 있는 아름다운 수련(睡蓮)

▲  매화나무 <매화원(梅花園)>
퇴계는 서당 옆에 매화나무를 심어 매화원으로 꾸몄다.
매화는 선비들이 좋아하는 4군자의 하나이다.

▲  절우사(節友社)
도산서당 동쪽에는 냇물이 흐르는데 그 건너편에 '절우사'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퇴계가 매화, 대나무, 국화, 소나무 등을 심어 가꾸던 서당의
조촐한 정원으로 지금 있는 나무들은 근래에 식재된 것이다.


 

♠  도산서원 둘러보기 (2) 전교당 주변

▲  전교당의 정문인 진도문(進道門)

도산서당에서 서원 중앙에 나 있는 계단길을 오르면 활짝 열린 진도문이 나온다. 서당과 서원을
잇는 공간으로 양 영역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하며, 문을 들어서면 서원의 핵심인 전교당이 모습
을 비춘다.


▲  전교당에서 굽어본 진도문의 뒷모습

▲  진도문에서 내려다본 서원 중앙 계단

▲  진도문 우측의 서광명실(西光明室)

서광명실은 동광명실의 역할을 분담하고자 1930년에 지은 누각식 건물이다. 이곳에는 유학자의
여러 문집과 근래에 낸 책을 비롯하여 왜국(倭國) 유학자 손시교쿠수이(村士玉水)가 쓴 퇴계서
초(退溪書抄)가 있어 퇴계의 학문이 왜열도 유학에 큰 영향을 던졌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보
관된 서적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있다.


▲  진도문 좌측의 동광명실(東光明室)

동광명실은 원래 광명실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진도문 우측에 또다른 광명실을 만들면서 이를
구분하고자 편의상 동/서광명실이라 부른다.
이 건물은 서원에 소장된 서적을 보관하고 열람하는 공간으로 지금의 도서관으로 보면 된다. 서
광명실과 마찬가지로 누각식 건물이며, 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건물을 누각식으로 지은 것은
습한 기운으로부터 서적을 보호하기 위함으로 이는 고구려(高句麗)가 만든 국제적인 건축 양식
'부경'과 비슷하다.

지금의 동광명실은 1819년에 지어진 것으로 조선 역대 제왕의 내사서적(內賜書籍)과 퇴계가 보
던 수택본(手澤本)을 보관했다. 이곳의 서적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가 있다.


▲  동광명실에 걸린 북
근래에 새로 달아놓은 북으로 수업시간과 여러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  동재(東齋) = 박약재(博約齋)
도산서원 학생의 기숙사로 박약은 학문을 넓게 배워 예로 행하라는 뜻이다.
건너편으로 서재를 바라보고 있는데, 서재 역시 기숙사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동재에 머무는 학생이 서재 학생보다 더 선배라는 점.

▲  서재(西齋) = 홍의재(弘毅齋)
도산서원 학생의 기숙사로 홍의(弘毅)란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되니, 그 책임은 무겁고 도학의 길은 멀다는 뜻이다.

▲  알맹이가 빈 장판각(藏板閣)

전교당 좌측에 자리한 장판각은 서원에서 낸 서적의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벽체 사방을 나무
판벽으로 만들고 바닥은 우물천정을 깔아 습기의 침입에 대비했다. 바닥도 지면에서 띄우고 전
면 위쪽에는 살창을 내어 통풍을 배려했다.
이곳에는 퇴계의 문집(文集)과 유묵(遺墨), 선조어필(宣祖御筆), 병서(屛書) 등 2,790장의 판각
이 있었으나 보존을 위해 광명실 서책과 함께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넘겼다. 현재는 판각이 있던
텅 빈 서장(書欌)만이 남아 옛날을 그리워 한다.


▲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 - 보물 210호

도산서원은 서당을 포함하여 몽땅 사적 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허나 서원의 중심 건물인 전교
당과 상덕사는 별도로 분리하여 보물의 지위를 안겨주었다.
전교당은 서원의 교육 공간으로 원장실과 강당(講堂)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진도문을 들어서면
나그네의 기가 바로 오므라들게끔 건물을 받치는 기단(基壇)을 높여 위엄의 정도를 높였다. 성
리학 숭배자들은 짝수 칸을 싫어한다고 하던데 이를 무시하고 정면 4칸, 측면 2칸의 짝수 칸으
로 지었다.
건물 정면 3칸은 문짝을 달지 않은 개방된 마루로 뒷면과 측면은 각 칸 마다 2짝의 여닫이 창호
를 달았으며, 문이 굳게 닫힌 서쪽 1칸은 원장의 거실로 한존재(閑存齋)라 불린다.

이 건물은 1574년에 지어졌으며, 1969년 보수했다. 전교당 정면의 도산서원 현판은 1575년 조선
조정이 도산서원을 서원으로 인정하면서 내린 것으로 글씨로 유명한 한석봉(韓石峯)의 글씨이며,
정조 임금의 사제문(賜祭文)을 비롯한 다양한 현판이 내부를 수식한다. 개방된 마루는 앉아서
쉴 수 있으나,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가는 건 삼가해주기 바란다.

▲  한존재 현판

▲  전교당 현판


 

♠  도산서원 둘러보기 (3) 나머지 부분

▲  상덕사 삼문(尙德祠 三門) - 보물 211호

전교당 뒤쪽에는 퇴계와 월천 조목의 위패가 봉안된 상덕사가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고
뒤쪽에 위치한 이곳은 서원의 사당으로 사당은 보통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으나 이곳만큼은 팔작
지붕으로 차별화를 두었다. 앞면 반칸은 퇴칸으로 개방하고 퇴칸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나
머지 1칸 반은 앞면에만 문을 달았다. 앞면을 제외한 3면은 벽으로 두르고 내부는 하나의 통간(
通間)으로 만들었다.
상덕사는 사당이다 보니 제사일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 굳게 입을 봉하며 좀처럼 열릴 줄을 모
르는 고색이 자욱한 태극마크의 삼문 앞에 곱게 발을 돌릴 수 밖에는 없다.

삼문은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내삼문(內三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상덕사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계단 때문에 문 안쪽과 높낮이의 차이가 생기자 앞면 기둥을 1단 낮은 자리에 세
웠다. 그래서 기단 아래까지 기둥이 내려오는 특이한 형태를 띄는 것이다.


▲  전사청(典祀廳)

상덕사 서쪽 담장 너머에 자리한 전사청은 상덕사 제사 때 쓰일 제수(祭需) 음식을 만들고 보관
하는 공간으로 2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건물(상덕사와 가까운)을 주청(酒廳)으로 하
고 서쪽 건물은 제사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로 삼았다. 사진에 보이는 방(문이 열려있
는 공간)은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儒士)가 목욕재계하고 하룻밤 지내는 곳이며, 마루에서 제상
을 보관했다.


▲  고직사(庫直舍)

전교당 서쪽에 자리한 고직사는 서원 관리인의 숙사로 서원 관리 및 학생들 식사와 상덕사 제사
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관리인은 주로 일반 백성이나 노비가 맡았는데, 여염집과 비슷한 모습으
로 남북으로 긴 'ㅁ'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방 7칸과 창고, 부엌 등 21칸 규모이다.
서원 경내에는 고직사가 2개 있는데, 전교당 서쪽의 고직사를 상고직사(上庫直舍), 농운정사 뒤
쪽 고직사를 하고직사(下庫直舍)라 구분하기도 한다.

부엌은 별도의 공간을 두지 않고 전사청과 연결되는 동쪽 통로와 하고직사로 통하는 남쪽 통로
옆에 각각 배치시킨 점이 주목을 끈다.

▲  고직사의 빛바랜 부엌들

먼지로 덮힌 솥뚜껑을 열면 모락모락 연기를 풍기는 기름진 쌀밥이 나올까? 하지만 현실은 밥은
커녕 먼지 밖에 없다. 아궁이도 불에 태울 땔감이 없어 멀뚱멀뚱 입만 열고 있다. 저녁 연기를
풍기던 왕년을 그리는 그들의 모습 앞에 막연히 초고속으로 변하는 사회에 매정함이 보인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솥뚜껑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참으로 쓸쓸해 보인다.

▲  고직사의 창고들
쌀과 여러 물품을 보관하던 공간으로 습기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바닥을 땅에서
약간 띄워 놓았다. 현역에서 물러나 굳게 입을 봉한 창고에는
헤아리기 힘든 고색의 때가 잔뜩 묻혀있다.

▲  옥진각에서 상고직사로 올라가는 계단

▲  퇴계의 유품과 서원의 보물이 담긴 옥진각(玉振閣)

역락서재 옆에 자리한 옥진각은 퇴계의 유품과 서원의 보물이 담긴 유물전시관으로 1970년에 지
어졌다. 외부는 한옥으로 내부는 현대식으로 되어 있는데, 건물의 이름인 옥진은 '집대성 금성
옥진(集大成 金聲玉振)의 줄임말이다.
이곳에는 퇴계가 생전에 쓰던 베자리와 베게, 안석(案席)을 비롯하여 백자타호(白磁唾壺), 투호
(投壺), 매화가 새겨진 매화벼루, 옥으로 된 서진(書鎭), 벼루집, 서궤(書櫃), 노년 시절에 짚
고 다닌 청려장(靑藜杖)이란 지팡이, 꽃무늬를 조각한 매화 등이 있으며, 퇴계가 설계하고 제자
이덕홍(李德弘)이 만든 혼천의(渾天儀)가 있어 퇴계가 과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음을 알려준
다. 옥진각 내부는 아쉽게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그곳 유물 관련 사진이 일절 없다. 몰래라도
담으려고 했는데 눈치가 너무 심해서...


▲  도산서원을 뒤로 하며

서원은 유학과 관련된 존재라 절에 비해 재미와 볼거리, 화려함이 많이 떨어진다. 듣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나는 유학의 중심지로 오늘날의 사립 상급학교라고 보면 될 듯 싶다.
향교를 나온 유생들은 학문과 출세를 위해 서원에 진학했고, 서원에서 학문을 갈고 닦아 성균관
(成均館)으로 진학하거나 과거에 응시했다. 또한 서원에 눌러앉아 공부를 하거나, 휼륭한 스승
을 찾아 이 서원, 저 서원 돌아다니는 철새도 적지 않았다. 허나 서원은 엄연한 양반의 공간이
다. 유학을 기본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 조정에서는 유학의 보급과 백성들 교화를 위해 서원에
서적과 노비, 토지, 자금을 두둑히 지원해 주었고, 서원 공사에 백성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하
지만 서원에 죽치고 앉는 유생의 수가 늘고 그 머릿수가 느는 만큼 경비는 늘어난다. 그만큼 국
가의 지원도 늘어나야 되는데, 이 모두 백성들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이다.

서원 유생들은 군역의 의무도 없고, 납세의 의무도 없으니 그저 공부한다는 구실로 서원에 죽치
고 앉으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나치게 유학 이론에 목숨 걸며 이론 논쟁이나 하고 앉았고,
시간이 지날 수록 백성을 위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공간이 아닌 백성을 등처먹고 그들 위에 군림
하며, 쓸데없는 이념 논쟁이나 일삼는 밥버러지 공간이 되었다. 심지어 화양서원(華陽書院) 등
은 큰 조직을 이루며, 관아에 지원을 요구하고 대놓고 백성들을 갈취했다.
그렇게 민폐를 끼치며 독버섯처럼 성장한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정리사업에 보기 좋게 철퇴
를 맞고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47개만 간신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나는 서원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재미도 없고, 철저히 유학과 관련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관심
이 적은만큼이나 아는 것도 적다. 그래서 서원에는 잘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꿩 대신 닭으로 찾아갔던 도산서원에서 버스 시간 관계로 거의 2시간을 머물러 있었다. 도산서
당 툇마루에 앉아 쉬기도 했고, 전사청 마루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하기도 했으며, 천연대 벤치
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도산서원 초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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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1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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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신라 왕릉 나들이 ~ 경주 성덕왕릉, 효소왕릉

 

♠ 경주 신라 왕릉 나들이 ~ 효소왕릉, 성덕왕릉 ♠

경주 성덕왕릉

▲  경주 성덕왕릉

성덕왕릉 석사자 경주 효소왕릉

▲  성덕왕릉 석사자

▲  경주 효소왕릉

 


여름의 제국이 슬슬 맹위를 드러내던 6월 초, 부산(釜山)에서 포항(浦項)으로 올라가다가 그
길목에 자리한 경주에 잠시 발을 들였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못지나친다고 경주를 그냥 지
나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거의 40여 회 가까이 발걸음을 한 경주 땅, 허나 여전히 미답지
가 즐비하고, 적지 않은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부담감이 좀 크다.
이번에 경주에서 문을 두드린 곳은 조양동(朝陽洞)에 자리한 신라시대 왕릉 2기이다. 조양동
은 시내와 불국사역 사이에 자리한 시골로 7번 국도가 지나가 교통 하나는 일품이다. 게다가
왕릉도 국도와 가까워 찾기도 쉽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인 모화(毛火)에서 경주좌석버스 600번(모화↔경주시외터미널)을 타고 한
국광고영상박물관에서 내리니 한자로 성덕왕릉입구를 알리는 표석과 성덕/효소왕릉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를 마중한다.

그들의 안내로 국도를 버리고 동쪽으로 들어가면 농가 뒤로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철길(부
산↔포항)이 나온다. 그 철길을 건너면 바로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성덕왕릉과 효소왕릉에 이
르게 되는데 철길 앞에 '선로통행을 금하며 어길 경우 벌금에 처한다'는 무거운 내용의 경고
문이 서있어 나의 걸음을 잠시 얼어붙게 한다.


▲  성덕/효소왕릉으로 넘어가는 철길 건널목
철길을 건널 시 철도법 위반으로 몰아넣는다는 경고문이 나그네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  경주를 가르는 동해남부선
서울 청량리, 강릉, 포항, 동대구, 태화강, 부전 방면 열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이곳을 스쳐간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왕릉 바로 옆에 철로가 깔린 것일까?
이는 왜정(倭政)이 신라 왕릉을 욕보이고 왕릉으로 통하는 맥을 끊고자
고의로 그렇게 닦은 것이다.


철길을 넘으면 바로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이다. 하지만 통행을 금한다는 경고문 앞에 나의 발
걸음은 자석처럼 붙어버렸다. 솔직히 그런 것을 잘 지키는 편도 아닌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안내문의 경고에 단단히 염통이 얼어붙은 듯 싶다. 하여 건널목 대신 한국광고영상박물관 뒤
쪽으로 이어진 농로로 길을 잡았다. 비록 조금은 돌아가더라도 그게 마음이 좀 편할 것 같고,
돌아가는 정도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농로를 100m 정도 진입하니 농가에서 노공(老公) 1명이 나온다. 그래서 그에게 이 길로 가면
성덕왕릉이 나오냐고 물으니 철길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며 동네 사람 모두 철길로 건너다닌
다고 그런다. 그래서 다시 원위치하여 철길을 건너니 오솔길이 성덕왕릉까지 놓여 있었고 왼
쪽으로 효소왕릉이 선명한 모습으로 눈짓을 보낸다.


♠  신라 효소왕의 능으로 막연히 전해오는 동그란 옛 무덤,
성덕왕릉과 나란히 자리한 경주 효소왕릉(孝昭王陵) - 사적 184호

조양동(한국광고영상박물관)에서 성덕왕릉 이정표를 따라 동해남부선 철길을 건너면 소나무 사
이로 동그란 봉토분(封土墳)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효소왕릉이라 전해오는 신라 고분이다. 높
이 4.3m, 지름 10.3m, 둘레는 57.5m로 능 주변에는 여름과 가을에 흔히 볼 수 있는 여린 꽃잎,
나무쑥갓(마가렛)이 가득하여 마치 소금이 흐드러지게 뿌려진 듯하다.

봉분(封墳)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약 1m 높이로 쌓아 호석(護石)을 둘렀으나 현재는 대부분 묻혀
있으며, 능 앞에 상석(床石)처럼 생긴 조그만 혼유석(魂遊石)이 있을 뿐 별다른 장식물이 없어
허전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봉분도 다른 신라 왕릉과 고분보다 작은 편이니 이곳이 과연 왕릉일
까? 고개마저 갸우뚱하게 한다.

경주 땅에 전하는 신라 왕릉은 오릉(五陵)과 무열왕릉(武烈王陵), 성덕왕릉, 흥덕왕릉, 괘릉(掛
陵, 원성왕릉)을 제외하고는 주인이 명확하지 않다. 한참 조상 찾기에 혈안이 된 조선 후기(18~
19세기), 신라 왕족의 후손인 경주박씨와 석씨, 김씨가 옛 기록을 멋대로 해석하여 그럴싸한 옛
무덤을 그들의 조상 묘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능 이름 앞에 전(傳)을 많이 붙었
다. 그렇다면 효소왕릉의 진위(眞僞)는 어떨까?
이곳 역시 그의 능으로 보기에는 100%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02년에 왕이
붕어(崩御)하자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의 효소왕릉은 망덕
사에서 동남쪽으로 5km나 떨어져 있어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래서 망덕사터 동쪽에 있는
신문왕릉(神文王陵)을 효소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무덤에 효소왕릉이란 굴레가 강제로 씌워진 것일까? 무덤 동쪽에는 성덕왕
릉이 자리해 있는데, 그 성덕왕과 효소왕은 친형제로 모두 신문왕(神文王)의 아들이다. 성덕왕
릉은 기록과 비석을 통해 능의 주인이 확실한 몇 안되는 신라왕릉으로 마침 그 옆에 이름없는
옛 무덤이 하나 있던 것이다. 그래서 경주김씨 사람들은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
의 기록을 흔쾌히 무시하고 그 무덤을 성덕왕의 친형인 효소왕릉으로 삼아 이곳을 효소/성덕왕
형제의 능역(陵域)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효소왕릉이란 간판을 단 것은 1730년임)

효소왕릉은 1929년 4월 왜인들에게 도굴을 당했고, 1969년 11월에 또다시 도굴되는 아픔을 겪었
는데, 도굴범들은 그들이 쓰던 도구를 현장에 버리고 갔으며, 도굴로 인해 무덤 석실(石室)이
바깥에 노출되었다. 이때 확인된 석실의 규모는 길이 3m, 너비 150cm, 높이 150cm 크기로 왕릉
치고는 매우 작았으며, 부장품은 발견된 것이 없었다.


▲  효소왕릉 가는 길


※ 신라 32대 군주 효소왕(孝昭王 687~702 <재위 692~702>)
효소왕은 신문왕(재위 681~692)의 큰아들로 어머니는 김흠운(金欽運)의 딸인 신목왕후(神穆王后
) 김씨이다. 휘(諱, 제왕의 이름)는 김이홍<(金理洪) 또는 김이공(金理恭)>이고 687년 2월에 태
어났는데, 그날은 날씨가 음침하고 어두웠으며 뇌성벽력이 심했다고 한다.
691년 3월 1일 태자(太子)로 책봉되었고, 692년 7월 부왕(신문왕)이 붕어하자 불과 5살의 나이
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당나라 여제(女帝)인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가 사신을 보내 신문
왕의 붕어를 애도하며 제사를 지내고 태자를 신라왕으로 인정했다.

그는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모후(母后)인 신목왕후가 섭정(攝政)을 했을 것이다. 왕이 아
무리 어려서부터 총기가 대단하다 한들 5살짜리가 국정을 살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선
대왕(문무왕, 신문왕)들이 왕권을 단단히 다져놓았고, 모후와 선왕의 충성스런 대신들이 어린
왕을 잘 보좌하며 국정을 돌봤기 때문에 재위 초반에는 별무리가 없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 관부(官府)의 하나인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의 이름이 좌/우의방부(左/
右議方府)로 바뀌었다. 이는 관청의 이름에 왕의 이름인 '이(理)'가 있었기 때문으로 백성과 신
하, 관청은 제왕의 이름을 무조건 피해서 써야했다.
즉위 다음 달(692년 8월)에는 대아찬(大阿湌) 원선(元宣)을 중시(中侍)로 삼았으며, 고승 도증(
道證)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천문도(天文圖)를 바쳤다. 또한 이때 이후 의학(醫學)을 세우고 의
학박사 2명을 두었으며, 본초경(本草經)과 갑을경(甲乙經), 소문경(素問經), 침경(針經), 맥경(
脈經), 명당경(明堂經), 난경(難經) 등을 교육시켰다.

693년에는 문무왕(文武王) 시절에 세워진 장창당(長槍幢)을 비금서당(緋衿誓幢)으로 이름을 바
꾸었다.

694년 정월, 내을신궁(奈乙神宮, 신라의 시조를 모신 신궁)에 제를 올리고 죄수를 방면했고, 백
제와 고구려 정벌에 공이 큰 김문영(金文穎)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한편 당나라에 머물던 왕의
작은할아버지인 김인문(金仁問, 무열왕의 2번째 아들)이 66세의 나이로 죽자, 측천무후는 그의
시신을 신라로 보냈다. 이에 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하고 695년에 무열왕릉 인
근 서악(西岳)에 장사를 지냈다.
겨울에는 서북쪽 변방인 송악(松岳, 경기도 개성)과 우잠(牛岑, 황해도 금천)에 성을 쌓았고,
신라의 동북쪽 끝인 비열주(比列州, 강원도 안변)에 1,180보 크기의 성을 쌓았다.

695년, 자월(子月)을 정월로 삼았으며, 김개원(金愷元)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서울
(이후 서울은 모두 신라의 수도인 경주임)에 지진이 났으며, 중시 김원선(金元宣)이 늙어서 관
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서울에 서시(西市)와 동시(東市), 2개의 시장을 설치해 상업을 장려하고,
이를 감독할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설치해 감(監) 2명, 대사(大舍) 2명을 두었다.

696년 정월, 이찬 김당원(金幢元)을 중시로 삼았으며, 4월에 서쪽 지방(전라도, 충청도 등)에
가뭄이 들었다.

697년 7월,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는데, 다른 밭고랑에서 난
이삭이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이었다. 9월에는 임해전(臨海殿)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698년 정월, 이찬 체원(體元)을 우두주(牛頭州, 강원도 춘천)총관으로 삼았다. 2월에는 서울에
지진이 나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렸으며, 중시 김당원이 늙어 퇴직하자 대아찬 순원(
順元)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는 왜국(倭國)의 사신이 내조(來朝)하자 왕이 숭례전(崇禮殿)에서
그들의 하례를 받았으며, 7월 서울에 홍수가 났다.

699년 2월,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고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
였고, 7월에 동해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5일 만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바닷물이 정말 핏빛
으로 변할리는 없을테니 아마도 왕을 노리는 커다란 역모가 있었음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9월
에는 동해바다 밑에서 지진이 났는데 그 소리가 서울까지 들렸고, 병기고(兵器庫)에서 북과 뿔
피리가 저절로 소리를 내었다고 하니 반란군들이 서울까지 침범했고, 서울에서 그들을 내응하는
세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후 신촌(新村) 사람 미힐(美肹)이 무게 100푼인 황금 한 덩이를 얻었는데, 그걸 왕에게 바쳤
다. 하여 왕은 그에게 남변제일(南邊第一)의 지위를 주고 벼 100섬을 내려주었다. 아마도 미힐
이 역모를 고변하거나 반란군 토벌에 큰 공을 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700년, 다시 인월(寅月)을 정월로 삼았다. 5월에 이찬 경영(慶永)이 모반을 꾀하다가 처단되었
으며, 중시 순원이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모반 이유는 그동안 왕권에 눌려 지내던 진골 귀족들
이 어린 왕을 만만히보고 일을 벌인 것으로 여겨지며, 6월에 모후인 신목왕후가 죽었다. 바로
그달 세성(歲星)이 달을 침범하였다.

701년 2월, 혜성이 달을 범했으며, 5월에는 영암군(靈巖郡, 전남 영암) 태수 일길찬 제일(諸逸)
이 공사를 저버리고 사사로운 이익을 꾀했으므로, 곤장 100대를 치고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

702년 7월, 왕이 15세의 나이로 붕어(병으로 죽은 듯 함)하니 시호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
(望德寺)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는 아들과 왕후(기록이 없음)가 없어 친동생인 김융기(金隆
基, 성덕왕)가 뒤를 이었다.
왕이 승하하자 측천무후는 크게 애통해하며 2일간 정사(政事)를 폐하고 사신을 보내 조의를 표
했다.

* 효소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산8
* 관람시간 제한없음


♠  12지신상과 석인, 석수를 모두 갖춘 신라 최초의 왕릉,
신라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룬 경주 성덕왕릉(聖德王陵) - 사적 28호

▲  성덕왕릉 정면

효소왕릉 동쪽 소나무 숲 사이로 제법 품격을 갖춘 왕릉 하나가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바로 효
소왕의 아우인 성덕왕의 능이다. 그 앞 들판에는 그의 능비(陵碑)로 전해지는 귀부가 조용히 웅
크리고 있으며, 효소왕릉에서 성덕왕릉으로 가는 길은 솔내음이 깃든 소나무 숲길로 고향의 오
솔길처럼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  성덕왕릉 좌측

성덕왕릉은 동그란 봉토분(封土墳)으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석인(石人), 석수(石獸, 돌로
만든 동물상)를 모두 갖춘 이 땅 최초의 무덤이자 신라 최초의 왕릉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주인
이 명확하지 않은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과 김유신(金庾信) 묘를 제외하면 어쩌면 12지신상을
처음으로 두룬 신라 왕릉일 수도 있겠으며, 석인과 석수 역시 성덕왕릉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신라의 무덤은 별장식도 없는 동그란 흙무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무열왕 시절 당나라
에 아부하며 대륙 문물에 크게 호기심을 보였는데, 무덤 양식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 무열왕릉
부터 당나라의 묘제(墓制)를 적용하게 된다. 그렇게 신라의 무덤 양식은 기존 양식에 당나라 양
식을 더해 서서히 변해갔고 그 양식이 완성기에 이른 것이 바로 성덕왕릉과 흥덕왕릉, 괘릉이다.

▲  성덕왕릉의 아랫도리 (능 아래를 두룬 호석과 능 주변을 빙빙 휘감은 회랑과 돌난간)

봉분의 높이는 4.5m, 지름은 14.65m에 이르며 무덤의 내부는 석실과 현도(玄道)를 갖춘 굴식돌
방무덤이다. 능 아래를 두룬 호석은 신문왕릉의 호석 구조에서 좀 더 발전한 형식으로 높이 90
㎝ 정도의 판석(板石)을 면석(面石)으로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甲石)을 올렸다.
그리고 면석(面石) 사이로 탱주(撑柱)라 불리는 기둥을 세워 고정시켰고, 바깥쪽에 3각형의 돌
을 세워 능을 지탱하게 하였다. 호석 밖에는 판석을 깔아 회랑(廻廊, 왕릉과 돌난간 사이 부분)
을 설치하고 회랑 밖으로 돌기둥을 세워 2중으로 돌난간을 둘렀으며, 33개에 이르는 난간의 석
주에는 상하 2개소에 관석(貫石)을 끼우는 원공(圓孔)이 있으나 관석은 남아있지 않다.

▲▼  성덕왕릉을 지키는 12지신상의 위엄

호석의 3각형 받침돌 사이로 왕릉을 지키는 12지신상이 자리해 있다. 12지신상을 갖춘 다른 신
라 왕릉과 달리 호석에 새기지 있지 않고 별도의 조각으로 배치된 점이 큰 특징인데, 네모난 돌
위에 서 있는 그들은 신라 무장(武將)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것으로 칼 등의 무기를 차고 갑옷까
지 갖추며 왕릉으로서의 엄숙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하지만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도굴꾼
의 마수로 1개를 빼고는 모조리 목이 달아나고 없으며, 훼손이 심해 12지신의 방위(方位)를 계
산하지 않고선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힘들다.


▲  왕릉 앞에 놓인 거대한 석상(石床)

왕릉 앞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진 커다란 석상이 놓여져 있다. 이 석상은 제를 지낼 때 제물을
올리거나 향을 피우는 용도로 사용되며 석상 밑에 판석이 방석처럼 깔려 있다.


▲  왕릉 좌측의 무인석(武人石)과 석사자

푸른 잔디가 수북히 입혀진 왕릉 앞쪽에는 무인석과 상반신만 남은 석인, 그리고 석사자가 배치
되어 있다. 석사자는 능역(陵域) 네 모서리에 1기씩 4기가 있어 능을 에워싸고 있으며, 석인은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이 서로 마주보며 각각 1쌍씩 서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2개만 전
한다. 이들은 왕릉을 수호하고 능의 품격을 높이고자 만든 것으로 당나라 묘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왕릉 좌측에 자리한 무인석은 1,270년의 세월을 살았음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하게 남아있
어 신라 무인의 복장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소 무서운 표정을 지은 그는 네모난 기단(基壇) 위
에 의장용 갑옷인 양당개를 입고 양손으로 칼을 짚고 있으며, 그의 왼쪽에는 강아지처럼 귀여움
이 묻어난 석사자가 앉아있는데 세월과 자연의 집요한 괴롭힘 속에 훼손이 좀 있긴 해도 눈과
코, 입은 식별이 가능하다.


▲  왕릉 우측의 머리와 어깨만 남은 석인과 석사자

왕릉 우측에는 상체만 남은 석인과 온전한 모습의 석사자가 네모난 기단 위에 자리해 있다. 석
사자는 좌측의 그것보다 상태가 좋으며, 입을 다물고 있는 그의 표정에선 무서움보다는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싶은 모습인데, 앉아있는 자세는 꼬리를 살랑거리는 고양이나 강아지를 보는 듯
하다. 석인은 세월의 고속 질주 속에 형편없이 녹아내려 상반신만 간신히 남아있다. 하여 그가
무인석인지 문인석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며, 얼굴도 목부분과 머리, 귀를 제외하고는 형체를 확
인하기도 어렵다.


▲  성덕왕릉 귀부의 원경(遠景)

그럼 성덕왕릉의 진위는 어떨까? 과연 그의 능이 맞을까? 삼국사기에는 왕이 붕어하자 이거사(
移車寺)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럼 이거사는 어디에 있을까? 성덕왕릉 북쪽에 쓰러진
탑이 있는 절터가 있는데, 그곳을 이거사로 비정하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
地勝覽)과 동경잡기(東京雜記)에서는 경주 동쪽 도지곡리(都只谷里)에 능이 있다고 하는데, 도
지곡리는 지금의 도지리로 왕릉 서쪽에 있는 동네이다. 그러니까 역사기록과 지금의 왕릉은 그
런데로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왕릉 앞에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도 전해오는데, 마침 능 앞에 비
석의 흔적인 귀부가 남아있어 이곳이 성덕왕릉임을 그런데로 드러낸다.



▲  성덕왕릉 귀부(龜趺)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96호

성덕왕릉 앞 들판에는 그의 비석이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육중한 귀부가 여기저기 무거운 상처
를 가득 안은 채 땅바닥에 웅크리고 있다. 귀부 위에는 왕의 생애와 치적이 가득 담겼을 비신(
碑身)이, 그 위에는 이무기 2마리가 여의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다룬 이수(螭首)가
있었을 것이다. 허나 어느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 앞에 형체도 없이 휩쓸려
사라지고 성한 구석이 거의 없는 귀부 만이 남아 흘러간 세월을 원망하며 장엄했을 옛 모습을
그리워한다.
신라 왕릉에서 비석을 갖춘 능은 무열왕릉과 성덕왕릉 뿐으로 이 역시 당나라의 무덤 양식을 반
영한 것이다. 무열왕릉과 더불어 비석까지 갖출 정도면 성덕왕의 공덕이 무열왕과 거의 비슷한
수준임을 보여주며, 귀부 주변에서 깨진 비석 조각을 여럿 수습했으나 대부분 무늬가 없고, 판
독된 글씨는 '武'와 '跡(적)' 2자 뿐이다.


▲  비석이 심어져 있던 네모난 비좌(碑座)

귀부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네모난 석축 위에 있는데 귀부의 머리인 귀두(龜頭)는 절단되어 없
어지고 부러진 목 아랫부분만 쓰라리게 남아있다. 지금이라도 엉금엉금 움직일 것 같은 앞발에
는 5개의 발톱이, 뒷발에는 1개가 적은 4개의 발톱이 있으며, 귀부의 등에는 6각형의 등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등 중앙에는 비석을 심었던 네모난 비좌(碑座)가 허전하게 자리를 지키
고 있다.
등무늬와 당초문(唐草紋)이 새겨진 8세기 중엽 신라시대 비석으로 비록 건강이 많이 안좋긴 하
지만 그 시절 귀부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보물이다.

※ 신라 33대 군주. 성덕왕(聖德王 ?~737 <재위 702~737>)
성덕왕은 신문왕과 신목왕후 김씨의 아들로 효소왕의 친아우이다. 원래 이름은 김융기(金隆基)
였으나 당나라 현종(玄宗)과 이름이 같아서 나중에 흥광(興光)으로 이름을 갈았다. <또는 김지
성(金志誠)이었다고 함>
702년 7월 효소왕이 붕어하자 진골 귀족들이 화백(和白)회의를 열어 그를 왕위에 세웠다. 그의
나이는 불과 10대 초반(많으면 14살)이었다.

702년 9월, 민심 수습과 신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리들의 관작
을 1단계씩 올려주었으며, 여러 지역의 조세를 1년간 면제했다. 또한 아찬 원훈(元訓)을 중시로
삼았으며, 10월에는 삽량주(歃良州, 경남 양산)에서 도토리가 밤으로 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703년 정월, 신궁(神宮)에 제를 지냈으며,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선물했다. 7월에 영
묘사(靈廟寺)에 불이 나고 서울에 홍수가 나서 죽은 이가 속출했다. 중시 원훈이 관직에서 물
러나자 아찬 원문(元文)을 중시로 삼았다. 또한 왜국에서 204명에 이르는 사신단을 파견했으며,
아찬 김사양(金思讓)을 당나라에 보냈다.

704년 정월, 웅천주(충남 공주)에서 금빛 영지를 바쳤고, 3월에 당나라에 갔던 김사양이 돌아와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바쳤다. 5월에는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왕비(성정왕후)로
삼았다.

705년 정월, 중시 원문이 사망하여 아찬 신정(信貞)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으며, 5월에 가뭄이 들었다. 8월에는 노인들에게 술과 밥을 내렸고, 9월에 살생을
금하는 조서를 내렸다. 10월에 동쪽 지방에 흉년이 들자 왕은 사람을 보내 백성을 구제했다.

706년 정월, 이찬 인품(仁品)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나라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
제했고, 3월에 뭇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8월에 중시 신정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면서 대아찬
김문량(金文良)을 중시로 삼았다. 8월과 10월 당나라에 조공을 했고, 12월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707년 정월, 전년 흉년으로 백성들이 많이 굶어죽자 1명당 하루 좁쌀 3되씩을 7월까지 나눠주었
으며, 2월 대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달랬다. 또한 백성들에게 5곡 종자를 어려운 정도에 따라 차
등있게 나눠주었다.

708년 정월, 사벌주(경북 상주)에서 상서로운 식물(금잔디)을 바쳤다. 2월에는 지진이 났으며,
4월 진성(鎭星, 토성)이 달을 범하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709년 3월, 청주(菁州)에서 흰 매를 바쳤다. 5월에 가뭄이 들었고, 8월에 죄인들을 사면했다.

710년 정월, 천구성(天狗星)이 삼랑사(三郞寺) 북쪽에 떨어졌다. 지진이 나자 죄인을 사면했다.

711년 3월, 봄인데도 눈이 많이 내렸다. 5월에 짐승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금했으며, 10월에 왕
이 직접 남쪽 지방을 시찰했는데, 이때 중시 김문량이 죽었다. 11월에는 친히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군신에게 보였다. 백관잠의 내용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으나 신하들이 지켜야 될 덕목들을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712년 3월, 이찬
위문(魏文)을 중시로 삼았다. 당나라 현종이 노원민(盧元敏)을 사신으로 보내
왕의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 이유는 당 현종의 이름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중으로 이
름을 갈았다. 4월에 온천에 행차했으며, 8월에 김유신의 처를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
식 1천 석을 주었다.

713년 2월,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했다. 당나라에 김정종(金貞宗)을 사신으로 보내 조공을 했는
데, 당 현종이 문루까지 나와 사신을 맞이했다. 10월 중시 위문이 나이가 많아 퇴직을 청하자
승낙했으며, 12월에 죄수를 사면하고 개성(開城)을 쌓았다.

714년 정월, 이찬 효정(孝貞)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상문사(詳文師)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
쳐 표문(表文)을 쓰는 일을 맡게 했으며, 왕자 김수충(金守忠)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니, 당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어 크게 관심을 보이며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급찬 박유(朴裕)를 당나라에 보내 새해 인사까지 하니 현종은 기분이 좋아 조산대부(朝
散大夫) 원외봉어(員外奉御)의 관작을 주어 돌려보냈다.
여름에 가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으며, 가을에 삽량주에서 도토리가 또 밤으로 변했다. 10월에
당 현종이 내전(內殿)에서 재상과 4품 이상급의 신라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715년 4월, 청주에서 흰 참새를 바쳤으며, 5월에 죄수를 사면했다. 6월에 크게 가뭄이 들자 왕
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에 살고 있는 거사(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연못가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했더니,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9월에 태백(太白, 금성)이 서자성(庶子星)을 가렸고, 10월에 유성이 자미(紫微)성좌를 침범하였
다. 12월에는 유성이 천창(天倉)으로부터 태미(太微)성좌로 들어갔고, 이때 죄인들을 사면하면
서 왕자 중경(重慶)을 태자로 책봉했다.

716년 정월, 유성이 달을 범해 달빛이 없어졌으며, 3월 성정왕후를 궁밖으로 내보냈다. 전년 하
반기에 일어났던 여러 번의 천문 현상을 통해 외척 세력과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외척의 세력을 꺾을 요량으로 태자의 생모를 폐위하고 내쫓은 것이다. 그래도 12년을 같
이 산 부인인지라 채색 비단 500필, 밭 200결, 벼 10,000섬과 강신공(康申公)의 옛 집을 구입하
여 하사했다. 얼마 뒤 커다란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라갔으며, 숭례전(崇禮殿)이
무너졌다. 아마도 외척들이 모반을 꾀하면서 숭례전이 손상된 것이 아닐까 싶다.
6월 가뭄이 들자, 거사 이효를 다시 불러 기우제를 지내니 곧 비가 왔으며, 죄인들을 사면했다.

717년 2월,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筭博士)를 각각 1명씩 두었다. 3월에 새로 궁궐을 지었으
며, 4월에 지진이 났다. 6월에는 태자 중경이 어린 나이에 죽자 시호를 효상(孝殤)이라 하였다.
9월에 당나라에서 왕자 김수충이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공자)과 10철(十哲), 72제자의 초상화
를 바쳤다. 그래서 그것들을 대학(大學)에 안치하여 유학을 더욱 장려했다.

718년 정월, 중시 효정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파진찬 사공(思恭)을 중시로 삼았다. 2월에 왕이
직접 서쪽 지방을 시찰했는데, 나이 많은 사람과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노인들을 몸
소 위로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물건을 차등있게 하사했다.
6월에 황룡사(皇龍寺) 탑에 벼락이 떨어졌으며,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를 만들었다. 10월
에 유성이 묘(昴)성좌에서 규(奎)성좌로 들어가고,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뒤따랐으며, 천구성(
天狗星)이 동북방에 떨어졌다. 그리고 한산주(漢山州) 관내에 여러 성을 쌓았다.

719년 9월, 금마군(金馬郡, 전북 익산) 미륵사(彌勒寺)에 벼락이 떨어졌다.

720년 정월, 지진이 났다. 상대등 인품이 죽자 대아찬 배부(裵賦)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3월
에 이찬 김순원(金順元)의 딸을 왕비(소덕왕후)로 맞이했다. (그해 6월 왕후로 봉함)
4월에 큰 비가 내려 산 13곳이 무너졌고, 우박까지 떨어져 볏모가 상했다. 5월에 해골을 땅에
묻게 했으며, 완산주와 웅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가을에 메뚜기들이 창궐하여 곡식을 해치
자 중시 사공이 그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니 파진찬 문림(文林)을 중시로 삼았다.

721년 7월, 하슬라(何瑟羅, 강원도 강릉 지역) 지방의 장정 2,000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장
성(長城)을 쌓았다. 발해의 칩입에 대비하고자 그런 듯 싶다.

722년 정월, 중시 문림이 죽자 이찬 선종(宣宗)을 중시로 삼았다. 2월에 서울에 지진이 났으며,
8월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다. (우리나라 사회경제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부분으로
정전은 나라가 백성에게 토지를 직접 지급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에 대해 나
라가 인정한 것을 뜻함) 10월에 모벌군성(毛伐群城, 경주시 외동읍)을 축성했다.

723년 3월, 당나라에 더욱 잘보이고자 미녀 2명을 선물로 보냈다. 이들은 나마(奈麻) 김천승(金
天承)의 딸인 포정(抱貞)과 김충훈(金忠訓)의 딸인 정완(貞菀)으로 모두 왕의 고종사촌인데, 의
복과 그릇, 노비, 수레, 말 등을 딸려 보내 예를 보이니 당 현종이 무안해하며 후하게 선물까지
딸려 돌려보냈다. 허나 정완의 비석에는 742년<천보(天寶) 원년>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고 나와있
으니 어느 것이 옳은 지는 모르겠다.
4월에는 당나라에 과하마(果下馬) 1필과 우황, 인삼, 머리 장식, 조하주(朝霞紬), 어아주(魚牙
紬), 매를 아로새긴 방울, 바다표범 가죽, 금, 은을 조공으로 보내며 간지나게 아부를 떨었다.
이때 당나라로 국서를 보내
'우리 신라는 바다 구석진 곳 먼 귀퉁이에 있어서 본래부터 천주(泉州) 상인의 진귀한 보배도
없고 남만인(南蠻人)의 귀한 재화도 없어서 감히 우리 토산물로 당 황제의 관청을 더럽히고 노
둔한 말로 황제의 마구간을 더럽히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동에서 흰 돼지를 바친 일과
같고, 초나라의 닭과 비슷하니 참으로 부끄럽고 떨리며 진땀이 흐를 뿐이다'

724년 봄, 왕자 승경을 태자로 삼고 죄수를 사면했다. 웅천주에서 상서로운 식물을 바쳤다. 2월
에 김무훈(金武勳)을 당에 보내 조공을 했는데, 당 현종이 기뻐하며 온갖 비단 2,000필을 답례
로 보냈다. 12월에는 소덕왕후(炤德王后)가 죽었다. (이후 왕은 왕후도 없이 혼자서 지냄)

725년 정월, 일곱 색깔 무지개도 아닌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늦봄인 3월에 난데없이 눈이 내렸
고, 4월에 우박이 떨어졌다. 이에 중시 선종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이찬 윤충(允忠)을 중시로
삼았다. 10월에는 지진이 발생했다.

727년 정월, 죄인을 사면했으며, 4월에 일길찬(一吉粲) 위원(魏元)을 대아찬으로 삼고 급찬 대
양(大讓)을 사찬으로 삼았다. 12월에 영창궁(永昌宮)을 수리했으며, 상대등 배부가 늙어 물러나
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궤장(机杖)을 하사했다.

728년 7월, 왕의 아우인 김사종(金嗣宗)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신라 귀족들의 자제를 당나
라 국학(國學)에 입학시켜줄 것을 청하니, 당 현종이 이를 허락하면서 김사종에게 과의(果毅)의
관작을 주어 당나라에서 숙위(宿衛)케 했다. 상대등 배부가 다시 물러나기를 청하자 이를 허락
하고 이찬 사공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730년 2월, 왕족 김지만(金志滿)을 당나라에 보내 작은 말 5필, 개 1마리, 금 2,000냥, 머리카
락 80냥,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조공했다. 이에 당현종이 김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의 관작을
주고 명주 100필, 자줏빛 두루마기, 비단 띠를 주며 숙위하게 하였다.

731년 2월, 김지량(金志良)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당현종이 채색비단 500필, 무늬없는 비
단 2,500필을 답례로 보냈다. 4월에 죄수를 사면하고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또한 왜
국이 수군 300척을 보내 동해바다를 공격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9월에는 백관들을 적문
(的門)에 모이게 하여 수레에 달린 쇠뇌를 테스트했다. 신라는 활과 쇠뇌
를 잘만들었는데, 아마도 새로운 형태의 쇠뇌를 개발한 모양이다.

732년
12월, 각간 사공과 이찬 정종(貞宗), 윤충, 사인(思仁)을 각각 장군으로 삼았다.

733년 7월, 발해(渤海) 2대 군주인 무왕(武王)은 당나라를 위협하고자 장문휴(張文休)를 장군으
로 삼아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등주(登州)를 공격했다. 발해군은 등주를 쑥대밭으
로 만들고 등주자사 위준을 죽였는데, 이에 뚜껑이 뒤집힌 당 현종은 급히 군사를 보냈으나 발
해군은 그들이 오기 전에 유유히 바다를 건너 회군했다.
발해에게 완전히 농락당한 당 현종은 당나라에 머물던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
을 급히 신라로 보내 발해의 남쪽을 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왕은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金
允中)을 대장으로 삼아 발해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큰 눈이 한 길이 넘게 내려 산길이 막히고 강
추위로 죽는 병사가 속출하여 별다른 소득도 없이 철수했다. 아마도 함경남도 개마고원(蓋馬高
原)까지 진군했다가 후퇴한 듯 싶다.
12월에 왕이 조카 김지렴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했다. 이에 앞서 당현종이 흰 앵무새 암수 1
쌍과 자주색 비단에 수를 놓은 두루마기와 금은으로 세공한 그릇, 상서로운 무늬의 비단, 오색
으로 물들인 비단 300여 단을 보내주었는데, 그 답례로 당 현종을 격하게 찬양하고 아부하는 내
용의 국서를 보낸 것이다. 그 국서를 받은 현종은 기분이 좋아 김지렴을 내전에서 대접하고 비
단을 내렸다.


734년 정월,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 경우 직접 대궐 북문으로 들어와 진
언하도록 했다.

735년 정월, 형혹(熒惑, 화성)이 달을 범하였다. 김의충(金義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했는
데, 당현종은 앞서 신라가 발해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땅으로 인정했다. 허나 신라는 이미 패강과 원산 지역까지 점유하고 있던 상태였고, 그
이북은 발해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당나라가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 땅으로 공식 인정하자(삼국사기에는 땅을 주었다고 나
옴) 왕은 무한 감동을 받으며 736년 6월 당 현종에게 국서를 보내 뼈가 부서지고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다며 심히 역겨운 아부를 떨었다.

736년 11월, 왕의 종제(從弟)인 대아찬 김상(金相)을 당나라에 보냈는데,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에 당 현종이 매우 슬퍼하여 그에게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이찬 윤충과 사인
영술(英述)을 북쪽 변경으로 보내 평양(平壤)과 우두(牛頭州, 강원도 춘천)의 지형를 조사하게
했으며, 난데없이 개가 궁성 누각에 올라가 3일간을 짖었다.

737년 2월, 사찬 김포질(金抱質)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했으며, 바로 그달 왕은 붕어했다. 이
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성덕왕 시절은 정치/경제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였다. 그는 적극적
인 위민정책(爲民政策)으로 백성을 보살폈으며, 자주 순행을 나가 민생을 살피고 어려운 백성들
에게 곡식과 생필품을 하사했다. 또한 죄인에 대한 사면령도 수시로 단행을 했는데, 신라의 역
대 제왕 가운데 가장 많았다. 그리고 백성들이 마음껏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당나라의 균전제(
均田制)를 본받아 정전제를 실시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이를 통해 신라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루던 시기로 널리 칭송받고 있다.

성덕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회의의 대표인 상대등의 영향력을 줄여 상징적인 존재로 축소시
키고 대신 집사부(執事部)의 중시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중시는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
에 따라 편의에 따라 교체가 가능하여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유교를 장려하고자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와 10대 제자상 등을 국학에 봉안했고, 721년에
내성 기구 속에 소내학생(所內學生)을 두어 장차 문한계통에서 일할 인재들을 양성했다. 그리고
불교에도 크게 관심을 두어 '전광대왕(典光大王)'이란 불교식 왕명까지 지녔으며, 무열왕을 기
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봉덕사(奉德寺) 등의 성전사원(成典寺院)을 건립했다.


또한 문무왕 이후, 많이 소홀해진 당나라에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펼쳐 35년의 재위기간 동안 무
려 46회나 사신을 보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와 백제의 속방이자 별채였던 왜국
등 주변 나라와도 사이가 좋지 못해 부득이 당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는데, 당 역시 무섭게
팽창하는 발해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신라가 필요해 두 나라는 다시 호감적인 사이가 되었다.
당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유학생을 파견해 당나라 국학에서 공부하게 했고, 당의 선진문물과 정
책을 적극적으로 수입했던 것이다. 허나 지나치면 모자른 것만 못하다고 그의 친당정책은 너무
아부적인 감이 커 당에 과하게 조공을 하는 풍조가 심해지고 심지어 왕실 여인을 당 현종에게
진상하려고까지 했다. 그것이 바로 당시 천하에서 가장 작은 나라, 신라의 어쩔 수 없는 한계점
이었다.

발해는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733년 발해 남쪽을 공격한 것 외에는 딱히 없으며, 왜국과는 서로
사신을 보내는 등의 교류가 있었으나 왜국 입장에서는 그들의 모국(母國)인 백제를 멸망시킨 원
수다보니 그렇게 시원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왜는 731년 수군 300척으로 신라 동해바다를
공격했으나 크게 깨졌고, 이에 자신만만해진 신라가 735년 왜로 사신을 보내
'신라는 어제의 신라가 아니다. 이름도 왕성국(王城國)으로 고쳤다'며 왜를 위협하니 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하여 737년 2월에는 신라를 공격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상황이 좋지 못
해 실현되진 못했다.


※ 경주 성덕왕릉, 효소왕릉 찾아가기 (2014년 12월 기준)
① 경주까지
* 서울역, 광명역, 천안아산역, 오송역, 대전역, 부산역에서 경부선 고속전철을 타고 신경주역
  하차
* 서울 청량리역, 원주역, 제천역, 강릉역, 철암역, 영주역, 동대구역, 포항역, 부전역, 태화강
  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버스
  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부천, 수원, 안산, 성남, 하남, 춘천, 강릉, 천안, 대전(복합), 전주, 광주, 구
  미, 대구(서부, 북부, 동부, 동대구), 울산, 부산, 창원(마산), 진주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
  스 이용
② 현지교통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경주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 건너편(경주우체국 앞)에서 11, 600
  번 계열 시내/좌석버스를 타고 한국광고영상박물관 하차, 길 건너편(박물관 방면)으로 건너가
  서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효소/성덕왕릉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 신경주역에서 갈 경우에는 경주시내로 나가는 50, 51, 60, 61, 70, 203, 700번 시내버스를 타
  고 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 경주우체국 앞에서 11, 600번 계열 시
  내버스로 환승한다.
③ 승용차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배반4거리에서 우회전 → 한국광고영상박물관
  앞 교차로에서 박물관 주차장으로 좌회전 (주차는 영상박물관이나 주변 공터 이용)

* 성덕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산8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8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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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12월 2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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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봉 정상에 우뚝 자리한 거대한 석불,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 팔공산(八公山) 갓바위 '
팔공산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
▲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의 위엄

 


겨울의 제국(帝國)이 가을을 몰아내며 천하를 거의 접수하던 11월 끝 주말에 소원을 들어주기
로 명성이 자자한 팔공산 갓바위를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강남고속터미널에서 대구행 일반고속버스를 타고 약 3시간 30분을 달려 서대구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경산시내버스 708번을 타고 대구(大邱) 시내를 동서로 가르며
1시간 정도를 달려 경산시 하양읍(河陽邑)에 도착, 다시 갓바위로 올라가는 경산시내버스 803
번(경산역,중산동↔갓바위)을 타고 약 40분을 달려 비로소 갓바위 종점에 이르렀다.

갓바위 종점은 해발 600m 고지로 선본사 바로 밑이다. 시내버스는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지만
일반 수레들은 약 1km 밑에 닦여진 주차장에서 바퀴를 멈춰야 된다. 물론 종점까지 진입도 가
능하나 수레를 세울 공간이 여의치 않다.
이 땅의 주요 불교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 받는 갓바위와 가까운 곳이라 아랫 세상과 공기
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청정한 기운이 감돌아 잡다한 번뇌에 유린당한 나의 머리와 마음을 깨
끗하게 정화시켜준다. 물론 속세로 나가면 정화된 번뇌는 다시금 나를 범할 것이다.

갓바위 종점에서 길은 2갈래로 갈라진다. 왼쪽 길은 갓바위, 오른쪽은 선본사로 통하는데, 선
본사는 종점 바로 윗쪽이라 접근은 편하다. 그곳은 갓바위를 보고 내려올 때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무척이나 보고싶은 갓바위로 길을 잡는다. 여기서 갓바위까지 공식적인 거리는 800m이나
체감거리는 그 2배 이상으로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린다. 게다가 산길이 좀 가파르고 계단 또
한 많아 오르기가 썩 만만치는 않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갓바위를 향한 중생(衆生)들의 발길
을 막지는 못한다.

갓바위를 향해 20분 정도 오르다 보면 칠성각과 요사가 있는 갓바위 하단(下段)에 이른다. 갓
바위를 비롯하여 선본사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길목에 건물들은 모두 선본사 소속인데, 그중에
서 아래쪽에 있는 요사와 칠성각 구역은 하단이라 부르며, 하단과 갓바위 중간의 대웅전 구역
은 중단(中段), 갓바위를 상단이라 부른다. 이들 하단과 중단은 갓바위를 관리하고 그를 찾아
온 중생들의 편의를 위해 조성되었다. 그리고 선본사 경내와 갓바위 일대를 구분 짓고자 편의
상 선본사는 '본절', 갓바위 일대는 '웃절'이라 부른다. 쉽게 풀이하면 선본사는 본점(本店),
갓바위는 일종의 지점(支店)이 된다. 하지만 본점보다는 지점이 훨씬 사람이 많으며 그로 인
하여 지점의 규모는 본점을 훨씬 능가한다.


▲  갓바위로 오르는 산길 (계단길 이전)

◀  갓바위로 오르는 계단길
오색영롱한 연등이 갓바위까지 대롱대롱
이어져 중생들이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인도한다.


♠  갓바위 하단 (칠성각, 요사)

▲  'ㄱ' 모습의 요사

갓바위 종점에서 20분 정도 오르면 갓바위 하단에 이른다. 오르는 길은 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하
지만 중간에 계단길로 돌변하면서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조금 급해진다. 허나 바람이 불면 날아
갈 정도의 허약 체질이 아닌 이상은 누구든 오를 수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갓바위 하단은 1973년에 조성된 것으로 가파른 산자락에 터를 닦아 요사(寮舍)와 칠성각(七星閣
)을 지었다. 요사는 그런 경사에 지어진 탓에 3층이 되었으며, 칠성각과 맞닿은 제일 위층에는
공양간이 있는데, 갓바위를 찾은 중생에게 공양(供養)을 제공한다. 굳이 공양이 아니더라도 두
다리를 쉬며 이야기꽃도 피울 수 있는 휴식처의 역할도 하고 있으며, 갓바위 수요가 많은 탓에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까지 언제든지 공양을 할 수 있다. (초파일과 대
학입시철, 기타 행사일에는 보통 새벽 1시까지 공양 가능)


▲  3가지의 이름과 용도를 지닌 칠성각(七星閣)

공양간 맞은편 높다란 기단(基壇) 위에는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1973년에 지어진 것
으로 1990년에 중수했다.
칠성각이라고 하지만 그건 건물 가운데인 어칸에만 해당되며, 건물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은 산신각(山神閣), 우측은 용왕각(龍王閣)이다. 건물은 하나인데, 각 칸마다 건물의 이름
을 달리한 특이한 구조이다. 허나 칠성(七星)이 그 건물의 중심이기 때문에 칠성각으로 불린다.

칠성각은 칠성신(七星神)이 그려진 칠성탱화(幀畵)가, 산신각에는 산신탱화와 산신상, 용왕각은
바다를 지키는 용왕의 탱화와 용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산사(山寺)가 별로
연관도 없어보이는 용왕을 위한 공간을 둔 것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1802년 4월 초파일에 제작
된 200년 묵은 신중탱화(神衆幀畵)가 용왕탱 옆에 걸려있으나 건물 접근이 불가하여 보기가 힘
들며, 건물 밑에 촛불이 가득한 곳은 수각(水閣)이라 부른다.
칠성각 좌우로 돌로 만든 12지신상이 건물을 지키고 있고, 각기 모습이 다른 석등이 자리해 있
다. 예전에는 건물에 들어가 예불을 올렸지만 찾는 사람에 비해 건물이 너무 좁아 건물 접근을
통제하고 공양간 사이 뜨락에 넓게 예불 장소를 마련해 예불의 편의를 제공했다.
(매월 초순 음력 1~8일에만 삼성각을 개방함)

▲  칠성각 우측 계단에 늘어선 12지신상

▲  갓바위 하단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계단길


초를 피우는 공간에는 약 1,000개의 초가 앞다투어 자신을 불사르고 있고, 향을 피우는 공간에
는 향을 꽂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무수한 향이 연기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초와 향이 가득
한 것은 석가탄신일 외에는 정말 처음 본다. 향은 공짜로 이용할 수 있지만, 초는 기도비를 내
야 된다. 물론 그냥 가져가도 된다. 하지만 적지 않게 눈치가 보인다. 시주금은 정해진 것은 없
지만, 많으면 많을 수록 절에서 기뻐할 것이다. 실제로 갓바위에서 일하는 신도 아줌마들이 기
도비를 많이 내라고 종용한다는 내용이 선본사 홈페이지에 올라와 시끄러운 적도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점심시간을 지나 13시이다. 시장한 배를 달래고자 공양간에 발을 들이니 많은 이
들이 공양을 하고 있었고, 공양간 한쪽 구석에는 등산객과 참배객 등이 삼삼오오 앉아 쉬고 있
었다. 공양줄도 길어서 2분 정도 지나야 비로소 공양밥을 가져올 수 있었다. 갓바위를 든든한
후광으로 삼아 수입도 짭짤하므로 공양밥도 제법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밥을 보고 그야말
로 경악을 하고 말았다. 겨우 밥에 씨레기국, 그리고 아주 잘게 썰은 시어빠진 무김치가 전부였
기 때문이다. 예전에 경기도 이천 영월암(映月庵, ☞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먹은 저녁공양은 반
찬이 무려 10가지에 이르렀고, 다른 절집들도 그런데로 괜찮게 나왔는데, 돈을 그야말로 삽으로
쓸어담는 곳에서 그들의 소중한 손님인 중생들에게 제공하는 공양은 그들만도 훨씬 못한 것이다.
그 돈은 다 어디에 쓰이는지 공양 예산이 기껏해야 얼마나 된다고 중생에게 쓰기가 아까운 것일
까? 그렇다고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의 진수성찬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나
와야지 달랑 시어빠진 무김치는 뭐라 말인가..? 평소에도 공양밥이 저 지경으로 나오는지? 아니
면 그날의 메뉴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공양밥에 대한 보다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
고 여겨진다. 그것이 바로 갓바위부처의 뜻일 것이다.

하지만 공양이 저 따위로 나온다고 해서 나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우선은 시장
한 배를 달래줘야 되니 그거라도 말끔히 먹어치웠다.

이곳은 공양을 마치면 자신이 먹은 그릇과 쟁반, 수저는 씻어야된다. 씻는 곳에도 버젓히 불전
함이 놓여져 애타게 돈을 원한다. 설거지를 하고 그릇과 쟁반, 수저 자리에 놓고 갓바위로 다시
길을 재촉한다.


♠  갓바위 중단 (대웅전, 3층석탑)

▲  갓바위 대웅전(大雄殿)

하단에서 계단을 5분 정도 오르면 가파른 산자락에 터를 닦은 중단에 이른다. 이곳은 해발 750m
고지로 웃절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이 있는데,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규모의 맞배지
붕 건물로 윗층은 대웅전, 아랫층은 갓바위를 관리하는 사무실이 있다.
이들 모두 근래에 조성되었으며, 조망(眺望)이 일품이라 선본사를 비롯하여 그곳을 둘러싼 산줄
기와 봉우리가 거침없이 바라보여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대웅전 뜰에는 석가탑을 닮은 3층석탑이 서 있으며,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천상세계의 석탑
처럼 장엄하게 다가온다. 대웅전에는 자비로운 모습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文殊
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한 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  하단에서 중단 가는 길목에 자리한 애자모지장굴

대웅전으로 오르기 직전 오른쪽 바위에 조그만 굴이 있는데, 이를 애자모지장굴이라 그런다. 굴
안에는 유난히도 동자상이 많은데, 굴의 이름도 그렇고, 동자상도 그렇고, 아마도 어린 나이에
죽은 넋들을 달래는 공간인 듯 싶다.
동자상 외에도 다보탑과 부처상, 지장보살상, 금동불 등이 중간중간 자리를 채우고 있으며, 이
들은 모두 중생들이 손수 갖다놓은 것으로 굴 바로 앞에 저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불전함이 옥의 티처럼 놓여져 있다.


▲  대웅전 뒤쪽에서 바라본 능성재 산줄기
능성재에서 서쪽으로 가면 팔공산과 동화사로 이어지며, 동쪽은
은해사(銀海寺)와 백흥암(百興庵)으로 이어진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선본사 남쪽 산줄기

▲  중단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도중에 잠시 뒤를 돌아보다.

저 아래 까마득하게 보이는 절이 바로 선본사이다. 내가 저기서 여기까지 올라왔다니 거리는 고
작 800m 남짓인데, 정말 땅에서 하늘로 오른 것처럼 지극히 멀어 보인다. 갓바위는 수레가 오를
수 없기 대문에 저 밑에서 갓바위까지 케이블을 연결하여 물건을 실어 나른다.


♠  소원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한 신라 후기 불상, 약사불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 - 보물 431호

중단에서 5분 정도 오르면 관봉(冠峰, 852m) 정상인 갓바위이다. 선본사에서는 이곳을 상단이라
부르는데, 매서운 산바람이 석불을 희롱하는 800m 고지임에도 영험한 갓바위부처를 친견하러 구
름처럼 모여든 중생들로 갓바위의 열기는 태양처럼 뜨겁다. 이곳은 하늘과도 가깝고 주변이 모
두 눈 밑에 펼쳐진 산봉우리라 마치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부처의 세계나 하늘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며, 아랫 세상과는 차원이 틀린 청정한 기운이 갓바위 주변을 진하게 맴돈다. 거의 신성
하고 거룩한 성지(聖地) 같은 갓바위부처는 근엄한 표정으로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는다.

중생이 그들의 소망을 들이밀며 켜놓은 촛불은 주변의 산하(山河)를 능히 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막대하며, 향의 냄새는 관봉 주변을 가득 맴돈다. 촛불에서 녹아 내린 촛농은 하루 몇 가마에 이
를 정도이고. 하루 동안 소비되는 향은 가히 천하 최대급이다. 휴일에는 수천 명이 찾아와 예를
올리며, 평일에는 적어도 수백 명이 다녀간다. 특히 대학입시철에는 자식의 대학 급제를 소망하
고자 수능일 한달 전부터 수험생 부모들이 몰려들어 관봉이 무너질 지경이며, 4월 초파일에도 발
디딜 틈이 없다.
상황이 이러니 이곳에 뿌려지는 시주금과 기도금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성수기에는 최대 억단위
의 돈이 움직일 것이고, 비수기에도 최저 수백만 원이 갓바위 주변 불전함에 들어갈 것이다. 갓
바위를 배경으로 그렇게 돈을 쓸어담는 선본사가 중생들에게 제공하는 공양음식은 왜 저 모양인
지 그 많은 돈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사뭇 궁금할 따름이다.

지금은 갓바위부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불상은 신라 후기
에 만들어진 이래 계속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인근 사람들이나 찾아올 정도로 인지도는 낮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 팔공산 북쪽에서 제2석굴암이 발견되면서 팔공산 일대에 불교문화유산을
본격적으로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1962년 갓바위부처가 발견되었는데, 그 당시 동
아일보를 비롯한 각종 신문들이 갓바위 발견을 특필로 다루었다.
그후 선본사에서 갓바위를 적극적으로 영험있는 석불로 홍보하면서 그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
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처럼 성지화 된 것은 길어봐야 60년도 되지 않는다.

갓바위부처의 문화재청 지정 이름은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이다. 갓바위란 이름은
불상이 머리 위에 쓰고 있는 넓적한 돌덩이가 갓을 닮아서 유래된 것으로 관봉이란 이름은 갓바
위가 있는 봉우리란 뜻이다. 여기서 관(冠)은 모자, 갓을 뜻한다. 그가 둥지를 튼 관봉은 팔공
산(八公山)의 동남쪽 봉우리로 대구와 경산의 경계선이다. 높이가 852m(어떤 자료에는 851m)에
이르며, 산 정상에 자리하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갓바위의 정체는 약사불(藥師佛)이다. 그의 왼손에 약사불의 필수품인 약합(藥盒)이 들려져 있
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본사는 갓바위를 내세워 약사도량(藥師道場)임을 내세운다. 허나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미륵불(彌勒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대수랴? 갓바위는 그런 쓰잘데기 없는 소모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중생들의 소망
을 접수하고 처리하는 데에 바쁘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선본사의 주장에 따르면 7세기 중반이라고 한다.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수제
자인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자 638년(선덕여왕 7년)에 조성했다는 것이다.
의현은 직접 불상을 제작했는데, 밤에는 학이 와서 그를 따스히 감싸주고, 낮에는 식량을 가져
와 먹여 살렸다는 거짓말이 전설로 전해온다. 허나 불상의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신라 후기인
8~9세기 석불로 보고 있다. 허나 그 장대한 세월에 비해 건강 상태는 제법 양호하여 나이에 비
해 많이 젊어보인다.

석불의 높이는 4m로 관봉에 있는 바위를 다듬어서 만든 것이다. 머리부터 그가 앉아있는 대좌(
臺座)까지 모두 하나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배(光背)는 따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뒤
쪽에 병풍처럼 선 바위가 자연스럽게 광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광배를 만들지 않았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큼직하다. 바로 그 위에 두께 15cm 정도의
얇은 돌이 모자처럼 얹혀져 있다. 물론 그 돌과 몸통은 하나의 돌이다. 얼굴은 미소는 전혀 찾
아볼 수 없는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보다 더 근엄하다. 위엄이 강하게 배여난 그 앞에
서는 감히 시선 조차 나누는 것도 두려울 정도로 나도 모르게 머리가 조아려진다.
얼굴의 양쪽 볼은 두툼하게 살이 있어 풍만해 보이며, 입술은 굳게 다물어 근엄함을 더욱 올려
준다. 눈은 살짝 감고 있고, 눈썹은 무지개처럼 곡선이 졌다. 그런 눈썹 사이로 둥그런 백호(白
毫)가 있다. 두 귀는 중생의 소원을 빠짐없이 듣기 위해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그어져 있다.

그의 어깨는 반듯하고 당당하며,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비슷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이 수인은 석굴암 본존불과 비
슷하다. 왼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왼쪽 발 부근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며 조그만 약합을 들
고 있다.
불상이 입은 옷은 통견(通肩)인데 두 팔을 거쳐 두 무릎을 덮고 대좌 아래로 흘러내렸으며, 가
슴 앞에는 속옷의 일종인 승가리(僧伽梨) 혹은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보인다. 불상 뒷면에는
옷의 표현이 없고 그냥 평면이다. 그가 앉은 대좌는 불상에 비해 작다.

거의 성지나 다름이 없는 갓바위, 허나 찾아오는 길이 쉽지가 않다. 험한 산을 올라야 되고, 그
길 또한 속세살이처럼 가파르다. 갓바위 주변은 바위가 많고 낭떠러지가 많아 늘 산악사고가 도
사렸다. 또한 예전에는 불상 바로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예를 올렸는데, 그 공간이 매우 좁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석불 전방에 80평의 넓은 공간을 닦았으며, 바닥에 돌을 깔고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그리고 선본사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길을 정비하여 예전보다 많이 넓어졌으며, 계단과
철제 난간을 많이 보완했다. 그래서 예전에 비해 접근하기가 조금은 쉬워졌다.

석불 앞에 넓게 예불 공간을 마련하면서 석불 주변은 출입이 통제되어 그의 앞까지 다가설 수가
없게 되었다. 예불 장소와 석불 사이에는 초와 향을 피우는 장소가 좌우로 길게 마련되어 있으
며, 초를 팔고 그곳을 통제하는 신도 아줌마가 늘 자리를 지킨다. 불상 좌측 바위에는 중생이
붙여놓은 동전이 가득하며, 그 맞은편에 갓바위 주변을 관리하는 절 건물이 있다. 불상 우측에
는 청색을 띈 조그만 동종(銅鍾)이 있으며, 대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다.


▲  갓바위부처 좌측 바위
중생이 붙여놓은 무수한 동전이 바위 여기저기에 자석처럼 붙어있다.

▲  갓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선본사 북쪽 산줄기와 남쪽 산줄기 사이로 갓바위지구(경산 쪽)가 보인다.


갓바위를 보러 멀리서 왔으니 인사는 해야겠지, 그래서 향을 피우고 초에 불을 심어 거기에 소
박한 소망을 하나 붙여 인사를 올린다. 이렇게 하면 소망이 접수되는 것일까?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 지성에 정도가 궁금하다. 정말 108배나 3,000배를 해야
소원이 접수가 되는 것인가? 그것도 아리송하다. 주변을 보니 방석을 펴고 염불을 외며 온종일
절을 올리는 이들이 많다.

초는 갓바위 좌측 건물에 있는데, 시주금을 내고 가져 가라고 쓰여 있다. 나는 가난한 중생이라
그냥 가져와서 사용했다. 설마 소망도 돈을 낸 만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영험하다고 해도 예불을 하고 싶지 않다. 부처가 언제부터 돈장사를 했단 말인가?
부디 소망이 처리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기도로 뜨거운 성스러운 현장 갓바위를 떠났다. 그가
정말 명성대로 무병장수를 비롯한 소원 하나는 꼭 들어주는지는 알 수 없다. 소망이 이루어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절반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예 안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소원
은 이루어지지 않았음ㅠㅠ) 하지만 그들의 소망을 모두 처리하는 것은 갓바위 부처에게도 은근
히 부담이 될 것이다. 괜히 선본사에서 요란하게 홍보한 탓에 갓바위만 피곤하게 된 것은 아닐
까 싶다.

참고로 믿거나 말거나 설화를 더 덧붙이자면 갓바위 밑동네인 와촌에 가뭄이 들면 팔공산 관봉(
갓바위)에 불을 지르고 새까맣게 태운다. 그러면 용이 갓바위를 씻고자 비를 내린다고 한다. 또
한 갓바위(양)와 불굴사(음)를 같은 날에 찾아 예불을 하면 소원성취를 한다고 한다. 왜냐면 풍
수지리적으로 갓바위는 팔공산의 양의 기운을 품고 있고, 불굴사(佛窟寺) 자리는 팔공산의 음의
기운을 품고 있는 요지라서 그렇다고 한다.


▲  갓바위를 뒤로하고 선본사로 내려가다.


♠  갓바위를 후광으로 든든하게 절을 꾸리는 오랜 절집
약사도량을 표방하는 ~ 팔공산 선본사(禪本寺)

갓바위 종점과 지척인 선본사는 팔공산에 둥지를 튼 오랜 절집의 하나이다. 조계종(曹溪宗) 소
속으로 갓바위를 든든한 밥줄로 삼아 절을 꾸리고 있는데, 갓바위로 올라가는 길목에 여러 건물
들은 모두 선본사 소속이며, 갓바위 역시 이곳에서 관리하고 있다. 선본사란 절 자체는 작지만
그 범위는 상당하며, 갓바위 지구와 구별하기 위해 선본사를 본절(본점), 갓바위를 웃절(지점)
이라 부른다. 허나 지점이 더 손님이 많고 수입이 훨씬 많다. 그리고 건물의 규모도 본점을 능
가한다. 그에 비해 본점은 인적이 드물다. 그래서 본점보다는 지점에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
고 있는 실정이다.

선본사는 신라 소지왕(炤知王) 13년인 491년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세웠다고 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증거를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극달화상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으며, 그 시절에는 신라에 고구려 불교가 전파되긴 했으나 서출지(書出池)의 전설처럼 고구려
불교는 한참 축출되던 시기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어찌 신라의 영역인 이곳에 절이 세워질 수
있겠는가? 참고로 산 너머의 대구 제일의 고찰 동화사(桐華寺)도 극달화상이 창건했다고 우기고
있다.

그럼 언제 창건되었을까? 경내와 주변에 흩어진 여러 석조유물(불상 대좌와 석등, 극락전 뒤쪽
의 오래된 석축)과 절 남쪽 노적봉에 있는 3층석탑을 통해 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3층석탑은 8세기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비록 절과 떨어져있지만 이곳과 관련이 있는 유
물로 여겨진다. 석조유물 역시 8~9세기 것으로 보이며, 절을 세운 극달이란 인물은 신라 후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짐작된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는 내력이 남아있지 않으며, 17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사적이 보인다.
우선 1614년에 수청(秀廳)이 절을 중수했다. 1766년 기성화상(箕成和尙)이 중건했으며, 1802년
(순조 2년)에 일암당(日庵堂)이 국성(國成) 등과 함께 신중탱화를 조성했다. 그 탱화는 현재 갓
바위 칠성각에 있다. 그 이후 1820년과 1877년에 중수했으며, 1970년 이후 갓바위 부근에 불전
을 조성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요사, 선방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갓바위 지
구(웃절)에는 8~9동의 불전이 있다. 소장문화유산은 관봉 꼭대기의 갓바위부처(관봉석조여래좌
상)와 노적봉 부근의 3층석탑(경북지방유형문화재 115호)이 있으며, 불상의 대좌와 석등의 좌대
(座臺) 등 신라 후기 석조 유물이 여러 점 존재한다.

갓바위를 관리하는 본절이지만 오히려 갓바위의 그늘에 제대로 가려 경내는 썰렁하다. 허나 고
요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를 제대로 누릴 수 있으며, 사람들로 늘 북적거려 기도를 올리는
것도 쉽지 않은 갓바위와 달리 마음 편히 예불을 올릴 수 있다.

※ 갓바위, 선본사 찾아가기 (2014년 12월 기준)
① 하양 경유
* 대구 1호선 안심역(4번 출구)에서 55, 508, 518, 555, 708, 808, 814, 818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양터미널이나 하양초교 하차, 길 건너에서 갓바위행 803번 시내버스(30분 간격) 이용
* 동대구역에서 708번(역 맞은편 정류장) / 814, 818번(역 바로 앞) 시내버스를 타고 하양에서 
  803번으로 환승
* 갓바위 종점에서 선본사는 바로 보이며, 갓바위까지 걸어서 30분 소요
② 경산시내 경유
* 대구 2호선 영남대역(4번 출구)과 경산역(경부선)에서 803번 시내버스 이용
③ 대구 갓바위 경유
* 대구 1,2호선 반월당역(2,13번 출구), 대구역(대구역전우체국) 맞은편, 동대구역(북쪽 지하도
  정류장), 1호선 아양교역(2번 출구)에서 401번 시내버스를 타고 갓바위 종점 하차, 갓바위까
  지 등산 1시간 소요
* 주말과 휴일에는 401번 축소판 노선인 팔공2번 시내버스(갓바위↔아양교역↔동대구역 북쪽 지
  하도 정류장)가 추가 운행된다. (평일과 겨울에는 운행안함)
④ 승용차로 가는 경우
* 경부고속도로 → 경산나들목을 나와서 하양 방면 → 금락4거리에서 우회전 → 동서교차로에서
  와촌 방면(한사들길) 좌회전 → 동강교차로에서 갓바위 방면 좌회전 → 신한교차로에서 우회
  전 → 갓바위 주차장
* 포항대구고속도로 → 청통와촌나들목을 나와서 하양방면 → 동강교차로에서 우회전 → 신한교
  차로에서 우회전 → 갓바위 주차장
* 대구시내 → 영천방면 4번 국도 → 동서교차로에서 와촌 방면(한사들길) 좌회전 → 동강교차
  로에서 좌회전 → 신한교차로에서 우회전 → 갓바위 주차장

★ 갓바위, 선본사 관람정보 (2014년 11월 기준)
* 갓바위 지구(경산)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주차비 있음)
* 갓바위까지 걷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면 경산 쪽을 추천한다.
* 매년 10월에는 선본사와 갓바위 주차장 일대에서 '갓바위 소원성취 축제'가 열린다. 소원기원
  제와 산사음악회, 다례봉행, 법회, 민속놀이와 전통체험, 다례봉행, 승무공연, 연등만들기 등
  의 프로그램이 있으며, 보통 3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 선본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587
 (선본사 종무소 ☎ 053-851-1868, 중단 종무소 ☎ 053-853-9877, 갓바위 ☎ 053-851-1869)

* 선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아래서 바라본 선본사 선정루(禪定樓)

경내로 들어서려면 선정루의 아랫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건물은 가파른 언덕에 지은 것으로 자연히 3
층을 이루고 있는데, 아래층에는 부처의 경호원
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으며, 건물 위쪽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가 담긴 사물(四
物, 범종, 운판, 법고, 목어)의 보금자리로 종
각의 역할을 한다. 이 건물은 1988년에 지어졌
으며, 그 이전에는 계단만 덩그러니 있었다.

▲  선정루의 측면

 


▲  청기와가 입혀진 선본사 극락전(極樂殿)

선정루를 올라서면 극락전 앞뜰이다. 좌우로 종무소와 공양간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극락전
좌측에는 조촐한 모습의 산신각이 있다.

극락전은 선본사의 법당으로 1985년에 지어졌다. 불단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로 대동하고 앉아 있으며, 뒤쪽에 후불탱화가 든든하
게 자리해 있다. 후불탱화 외에 신중탱화와 관음보살도, 문수보살도와 보현보살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1987년에 제작되었다. 다른 불전과 달리 푸른 기와가 입혀져 있
어 단연 돋보인다.

▲  종무소(宗務所)

▲  공양간을 갖춘 선방(禪房)


▲  갓바위와 달리 자애로운 모습의 극락전 아미타3존불

▲  극락전 계단 우측의 석등 아랫도리

▲  극락전 계단 좌측의 석등 아랫도리

극락전 계단 좌우에 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석등의 아랫도리가 있다. 윗도리는 장대한 세월의 거
친 흐름 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간신히 좌대(座臺)라 불리는 아랫도리만 간신히 남아 신라 석등
의 아름다움과 선본사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기단에는 연꽃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연꽃의 향기가 아련히 풍기는 듯 하다.


▲  단촐한 모습의 산신각(山神閣)

극락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촐한 크기의 산신각이 있다. 예전에는 산령각(山靈閣)
이라 불렸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5년에 새로 지었다. 내부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이 나란히 자리
를 지키고 있으며, 건물 왼쪽 벽화에는 조선 철종(哲宗) 때 효성이 지극했던 도효자(都孝子)가
어머니가 원하는 홍시를 구하고자 호랑이를 타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니 살펴보기 바란다.


▲  산신탱(왼쪽)과 독성탱(오른쪽)

▲  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로를 등진 석불과 동자상,
이제는 제발 화해를 하고 서로를 챙겨주면 좋지 않을까?


선본사는 갓바위와 달리 관람이 금방 마무리되었다. 종점으로 나오니 속세로 나가는 803번 시내
버스가 막 중생을 태우고 있었다. 다음 차를 탈까하다가 선본사에 더 이상의 미련이 없어 그 차
를 타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내려갔다.
갓바위로 들어올 때와 달리 하양을 지나 경산역에서 내렸으며, 경산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무궁
화호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갓바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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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작품 ~ 예천 회룡포 (내성천, 회룡포마을, 비룡산, 장안사)

 

' 자연이 빚은 대작품 ~ 예천 회룡포(回龍浦) '

▲  회룡포

 


가을이 저물고 겨울 제국이 서서히 용솟음치던 11월 끝 무렵에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아
침 10시에 예천읍내 남쪽에 있는 개심사지(開心寺址) 5층석탑에서 머나먼 남쪽에서 온 일행들
과 만나 개심사지5층석탑과 초간정(草澗亭). 용문사(龍門寺)를 둘러보고 회룡포입구인 용궁으
로 이동하여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용궁(龍宮)은 예천읍과 점촌(문경) 사이에 자리한 고을로 예전에는 독자적인 고을이었으나 지
금은 예천군의 일원으로 조용히 살아간다. 이곳은 순대국과 한우고기로 매우 유명한데 우리는
한우구이와 전골을 먹었다. 한우구이는 불판에 야들야들 구워서 상추에 쌈을 싸서 먹거나, 참
기름에 찍어서 먹는데, 입과 목구멍이 간만에 좋은 거 먹는다고 아주 흥분들을 한다. 단 조금
질긴 것이 흠, 거기에 밥이 있으면 정말 밥도둑이 따로 없을텐데, 밥은 마실을 갔는지 나오지
를 않다가 전골(채소와 된장 등이 버무려진 전골)이 등장할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
상당수는 한우구이로 이미 배가 다져진 상태라 그들의 밥을 지원받으며 전골과 밥그릇을 말끔
히 비웠다.

그렇게 점심을 마치고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회룡포로 이동했다. 용궁에서 회룡포는 동남쪽
으로 약 7km로 향석리에서 내성천(乃城川)에 걸린 회룡교를 건너 그 길의 끝에 이르면 회룡포
주차장인데, 여기에 수레를 세우고 다시 내성천을 건너면 그 유명한 회룡포 심장부에 발을 들
이게 된다.


▲  회룡포와 속세를 가르는 내성천, 그 위에 걸쳐진 뿅뿅다리를 건너면
회룡포이다.


♠  대자연이 빚은 거룩한 작품, 예천 회룡포(回龍浦) - 명승 16호

▲  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예천 굴지의 명소로 성장한 회룡포는 대자연이 장대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이다. 어떻게 저
런 작품이 나왔을까? 보기만 해도 입이 쩍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지가 않는다. 대자연의 거룩
한 작품 앞에 경외심이 크게 용솟음 치고,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도 싹 정화가 되는
것 같다. 아무리 인간이 대단하다 설친들 저런 작품은 감히 만들지는 못하며, 대자연의 작품을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자로 이러쿵 저러쿵 표현한다는 것이 어쩌면 큰 실례일지도 모른다.

육지 속의 섬이자 벽지로 불리는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支流)인 내성천이 휘감아 흐르는 길목
으로 내성천과 낙동강(落東江) 상류에서 많이 나타나는 감입곡류(嵌入曲流) 지형의 백미(白眉)
와 같은 곳이다. 각박한 속세살이를 상징하듯 구불구불 흘러가던 내성천이 회룡포에 이르러 더
욱 굴곡의 진수를 보여주며, 무려 350도나 돌아간다. 직선으로 약 100m면 갈 거리를 무려 30배
인 3km나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내성천도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겠지. 보다
빨리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욕심에 육지와 회룡포를 가늘게 이어주는 부분을 열심히 쪼아대
고 있지만 그 지형이 보기와 달리 무척 단단하여 그 100m 밖에 안되는 부분을 아직까지 처리하
지 못하고 하염없이 멀리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학창시절에는 저런 지형은 물의 성미 때문에 결국 얇은 부분이 깎여져 물길이 되고 회룡포
같은 지형은 섬이 된다고 배웠다. 허나 회룡포 형님 앞에서는 그 진리도 통하지 않는 모양이니
자연 계열 교과서의 수정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내성천의 지름길 만들기 계획은
완전히 무산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소리 없이 그 지형을 쪼아대고 있기 때문이다. 과
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내성천도 지겨운 우회 운행을 안하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회룡포는 육지 속의 섬이 아닌 진정한 섬이 될 것이다.

내성천이 회룡포에서 크게 휘감아 돌면서 하천을 따라 내려가던 모래가 회룡포 강변에 차곡차곡
쌓여 곱고 너른 모래사장(백사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굴곡을 피려는 내성천의 필사적인 노력으
로 강 건너 산자락은 자연히 가파른 벼랑을 이루어 되었다. 또한 상류에서 떠내려온 모래와 흙
이 강변에 퇴적되어 자연히 영양가 높은 농경지를 이루었고, 옥토의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이곳
에 들어와 터전을 닦으면서 지금의 회룡포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회룡포는 분명 육지가 분명하나 속세(俗世)에서 들어가려면 무조건 내성천을 건너야 된다. 거의
4면, 350도가 강에 접해있고, 겨우 동쪽에 10도 정도로 아주 가늘게 산줄기로 연결되어 있기 때
문이다. 정말 삽 한번만 뜨면 섬이 될 것 같은 특이한 지형 때문에 육지 속의 섬(섬마을)이 되
어버렸다.

이곳은 산과 강이 휘감아 흐르면서 거의 태극 모양의 조화를 이루며, 내성천의 하성단구(河成段
丘)와 하성도, 범람원(氾濫原)을 확인할 수 있어 침식과 퇴적지형 연구의 좋은 단서를 제공해준
다. 게다가 회룡포 건너에 병풍처럼 늘어선 비룡산(飛龍山)에는 신라 후기 사찰인 장안사(長安
寺)와 백제(百濟)가 세웠다고 전하는 원산성(圓山城), 그리고 봉수대 등이 있어 회룡포의 명승
적 가치를 더욱 북돋아준다.


▲  목가적인 풍경의 회룡포마을 (서쪽 부분)

회룡포란 이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예전에는 내성포(乃城浦)라 불렸다. 세상에 드러내기
를 꺼려하던 예천에 숨겨진 속살이자 평범한 시골 마을로 그렇게 살아왔는데, 마을 사람들은 조
그만 나룻배를 타고 속세를 오가거나 두 다리로 직접 건너기도 했다. 내성천 수심이 매우 얕기
때문이다. 또한 동쪽으로 가느다란 부분을 통해 개포면 쪽으로 나가기도 했으나 생활 권역이 용
궁이라 대부분 강을 건너 용궁이나 점촌으로 나갔다. 하지만 일일이 배로 건너기가 귀찮아 외나
무 다리를 놓았지만 여름만 되면 떠내려가기 급하여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예천군청에 민
원을 때려 1997년에 예천군에서 강관(鋼管)과 철발판으로 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다리가
바로 회룡포의 명물인 뿅뿅다리이다. (퐁퐁다리라고 불렀는데, 그게 속세에서 뿅뿅으로 와전되
었음)
또한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산물이나 필수품을 실어 나를 통로가 필요했
다. 아무리 뿅뿅다리가 생겼다고 해도 다리가 매우 작기 때문에 통행용으로 밖에 쓸 수가 없다.
그래서 가느다란 동쪽에 길을 내어 수레의 접근과 운송 편의를 도모했으며, 이 길은 개포면 중
심지로 이어진다.

이곳이 속세에 알려진 것은 그다지 얼마되지 않았다. 1997년부터 예천군에서 관광지로 개발하고
자 우선 회룡포 둑방에 왕벚나무를 심고, 공원과 산책로를 닦았다. 그리고 없어진 봉수대를 복
원하는 한편, 철쭉군락지를 조성해 마을을 수식했다. 그러다가 2000년에 드라마 '가을동화' 촬
영지가 되면서 급속도로 뜨기 시작했고, 회룡포의 묘한 지형에 단단히 매혹된 사람들의 입소문
과 언론매체의 끝임없는 찬양으로 이제는 예천 제일의 명소이자 이 땅의 굵직한 명승지로 순식
간에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말 이곳 이름 그대로 가출한 용이 되돌아 올 정도로 잘나가는
명소가 되버린 것이다.

휴일과 휴가철만 되면 많은 관광/답사객들이 몰려와 회룡포 주변은 늘 활기를 누리고, 내성천의
깨끗한 물과 은빛 모래사장으로 피서의 성지로도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팜스테이(Farm
Stay) 체험장소로도 인기를 다지고 있고, 강 건너의 비룡산과 하나가 되어 회룡포권 관광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쏘가리와 은어가 뛰어놀고 있어 그들을 잡아 매운탕을 해먹으면
그 맛은 정말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회룡포 관람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비룡산(240m)에 마련된 회룡대 등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회룡포의 참모습이다. 그냥 회룡포마을을 둘러보고 강변을 거니는 것과 높은 곳에서 회룡포를
굽어보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로 어떤 일이 있어도 비룡산에 올라 이곳의 전경을 꼭
보기를 권한다.
비룡산에 오르려면 비룡산 북쪽 자락에 안긴 장안사에서 오르는 길과 회룡포마을에서 강을 건너
오르는 길이 있는데, 수레를 가져왔다면 장안사 밑에 마련된 주차장에 수레를 세우고 오르는 것
이 좀 편하며, 회룡대를 비롯한 산등성이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굽어보는 회룡포의 모습은 그야
말로 탄성과 경외감을 자아내게 만든다.

회룡포마을은 뿅뿅다리부터 강변 산책까지 포함하여 짧으면 30분, 넉넉잡아 1시간 정도면 충분
하다. 마을과 경작지, 강변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을을 둘러보고 강을 건너 비룡산에
올라 회룡포의 전경을 살펴보고 산에 깃든 장안사와 원산성까지 겯드리면 3~4시간 정도 걸린다.

▲  회룡포 백사장

▲  회룡포 둑방 산책로(올레길)

※ 회룡포 찾아가기 (2014년 7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용궁 경유 예천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 이용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용궁. 예천행 직행버스(1일 5회) 이용
* 김천, 구미, 상주, 영주, 안동에서 용궁, 예천행 직행버스 이용
* 부산역과 구포역, 밀양역, 동대구역, 구미역, 김천역, 영주역에서 경북선 열차를 타고 용궁역
  하차 (1일 3회, 휴일은 4회)
* 용궁정류장(용궁역 부근)에서 회룡포를 경유하여 예천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1일 3회 운행한다.
  예천터미널에서 회룡포 경유 용궁으로 가는 군내버스도 1일 3회 운행 (예천발 8:10, 12:10,
  16:40) 버스 시간이 맞지 않으면 지체말고 택시를 이용하기 바란다. <예천군내버스 시간 문
  의 예천여객 ☎ 054-654-4444>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중부내륙고속도로 → 점촌함창나들목 → 점촌시내 → 용궁 → 향석리 → 회룡포주차장
②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 → 예천역 → 용궁 → 향석리 → 회룡포주차장
- 회룡포 전망대(회룡대)와 장안사로 갈 경우에는 회룡교를 건너서 우회전한다. (좌회전하면 회
  룡포주차장과 회룡포마을) 단 길이 좁고 커브가 많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바퀴를 굴려야 된다.

★ 회룡포 관람정보 (2014년 7월 기준)
* 관람비와 주차비는 없음
* 회룡포마을에서 민박과 오토캠핑, 농촌체험이 가능하다. 자세한건 회룡포마을 홈페이지 참조
* 회룡포마을은 엄연히 사람들이 사는 곳이므로 실례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 회룡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395외 (회룡포길 362)
* 회룡포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들을 클릭한다.

▲  회룡포 뿅뿅다리 (마을쪽에서 바라본 모습)

▲  회룡포를 굽어보는 회룡대


♠  회룡포마을 둘러보기

▲  회룡포 뿅뿅다리 (마을쪽에서 바라본 모습)

룡포 주차장은 수레들로 거의 만원이다. 간신히 적당한 곳에 버스를 세우고, 그렇게나 만나고
싶던 유명 인사를 만나러 가듯,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회룡포로 향한다. 주차장 주변은
마을 아지매들이 그들이 재배한 갖은 채소와 과일을 비롯하여 참기름과 막걸리, 동동주 등을 진
열하여 판매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동동주 2잔 얻어마시고 회룡포로 가니 내성천에 걸린 뿅뿅다
리가 우리를 마중한다.

뿅뿅다리는 이름부터가 참 재밌지만 그 생김새도 옛날에 그 흔한 외나무 다리처럼 정겨운 모습
을 하고 있다. 속세와 회룡포를 이어주는 관문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유일한 다리까진 아니다.
마을에서 외지로 잇는 다리는 이거 말고도 서쪽에 뿅뿅다리가 하나 더 있고, 동쪽 가느다란 부
분에 수레를 위한 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회룡포의 상징인 이 다리는 앞서에 이른 데로 강관과 구멍이 뚫린 철발판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1997년 예천군청에서 주민들을 위해 만들어준 것이다. 그 이전에는 부실한 외나무 다리가 있었
다. 내성천의 수심이 얕고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그냥 나무와 철을 이용해 간단한 모습으로 만
들었는데, 다리가 조금 흔들리긴 하지만 이전 외나무 다리보다는 튼튼하여 마을 사람들이 편히 
건너고 다닌다. 그들은 다리 발판 구멍에서 물이 퐁퐁 솟는다하여 퐁퐁다리라고 불렀는데, 1998
년 회룡포를 다룬 어느 신문 기자가 난청증세가 있는지 퐁퐁다리를 그만 뿅뿅다리라 잘못 듣고
이를 기사에 내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뿅뿅다리로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도 퐁퐁보다는 뿅뿅이 더 정감이 간다 하여 뿅뿅다리라 불리게 된 것이다.

뿅뿅다리는 두 사람이 교행할 정도의 작은 다리로 다리를 건널 때 흔들다리처럼 조금씩 꿈틀거
릴 뿐 그런데로 건너갈 만하며, 다리에 안전 난간이 없고, 바로 옆이 강이므로 건널 때 주의를
하기 바란다. 물론 강에 빠진다고 죽지는 않는다. 수심이 무척 얕기 때문이다.


▲  회룡포의 자랑, 백사장

뿅뿅다리를 건너면 회룡포의 자랑인 백사장에 발을 디디게 된다. 속세에서 온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진풍경으로 이는 굴곡 노선의 직선화를 꿈꾸던 내성천이 오랜 세월 가다듬은 작품이다.
마치 바닷가 백사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대자연의 위대함을 뼛속까지 느끼게 하며, 백사장의
폭은 거의 100m, 길이도 2km가 넘어 왠만한 바닷가 백사장 못지 않다. 게다가 내성천이 속세의
때를 거의 타지 않은 탓에 수질이 청정하여 은어와 여러 민물고기들이 많이 잡힌다.
지금은 겨울이라 모래사장을 거니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피서철에는 많은 도시인들이 몰려와 백
사장을 가득 메운다.


▲  회룡포 표석

▲  회룡포 표석에서 바라본 너른 백사장과 내성천

백사장에 열심히 발자국을 남기며 걷다보면 회룡포를 알리는 표석이 비스듬히 누워 하늘을 바라
다. 그 표석을 지나 경작지를 5분 정도 지나면 회룡포 서남쪽에 자리한 회룡포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 마을은 이 땅에 흔한 농촌마을로 대략 1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옛날 이곳에 시집을 온 여
인들은 울면서 왔다고 한다. 교통도 안좋고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벽지였기 때문이다. 하지
만 지금은 교통도 조금 좋아지고 예천 제일의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은 안해
도 될 정도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노공(老公)들로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은 작지만 그를 둘러싼 농경지가
넓고 비옥하여 해마다 풍년을 이룬다. 또한 회룡포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으면서 민박이나 팜스
테이를 하는 집도 많이 늘었다.


▲  정겨운 풍물시 ~ 곶감을 꿈꾸며 열심히 일광욕을 즐기는 감들의 행렬

▲  회룡포마을 돌담길

회룡포 마을길은 뿅뿅다리 남쪽에서 마을을 가로질러 서쪽 강변으로 이어진다. 마을에는 근래에
손질한 돌담길이 길게 이어져 마을의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고 있으며, 마을을 둘러싼 너른 경작
지는 삶에 지친 도시인들의 안구와 마음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한다.
그런 경작지를 구경하며 목가적인 풍경에 취하다보면 금세 서쪽 강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길
은 3갈래로 갈리는데, 용처럼 꿈틀거리는 비룡산이 보이는 북쪽은 마을 올레길로 불리는 둑방길
이며, 남쪽은 마을의 얕으막한 뒷동산으로 이어진다. 서쪽은 백사장과 제2뿅뿅다리로 이어지는
데, 그 다리를 건너면 용포마을과 비룡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보통 회룡포마을 나들이는 뿅뿅다리를 건너 마을을 가로질러 서쪽 강변 갈림길에서 북쪽 둑방길
을 거쳐 다시 뿅뿅다리로 이어지는 반원 모양의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외에 추가 옵션으로 마
을 뒷동산으로 이어지는 남쪽 둑방길과 제2뿅뿅다리를 건너 비룡산으로 가는 코스가 있으며, 회
룡포에서 비룡산은 필수로 꼭 가봐야 한이 안생기는 곳으로 이곳에 올라야 진정한 회룡포의 위
엄을 누릴 수 있다.


▲  회룡포 경작지 너머로 둑방길(올레길)과 비룡산이 보인다.

▲  서쪽 강변 갈림길 - 우리네 인생에서 갈림길은 무척이나 많다.
어느 길이 더 안전하고 이익인지 알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가 않다.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장거리 게임처럼 저장하면서 인생을 살 수는 없을까?

▲  갈대가 출렁이는 서쪽 강변 백사장 너머로 제2뿅뿅다리가 있다.
저 다리를 건너면 용포마을과 비룡산으로 이어진다.
 

▲  마을 올레길로 쓰이는 둑방길
그냥 흙길이었으면 좋으련만 바닥에 꼭 저런걸 깔아야 했을까..?

▲  가을 추수를 마치고 겨울잠에 들어간 회룡포 경작지 ▼
황금들녘의 흔적이 아직은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  소나무가 가로수를 자처하는 회룡포 둑방길 (올레길)

▲  여름에 꼭 안겨보고 싶은 회룡포 백사장

관광객은 많지만 그래도 조용한 풍경을 지닌 회룡포마을과 둑방길(올레길)을 거닐고 뿅뿅다리를
건너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회룡포의 속살을 둘러봤으니 이제는 회룡포의 진수를
봐야 한이 없겠지. 그래서 비룡산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  비룡산 회룡대(回龍臺)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다

▲  회룡대에서 장안사로 내려가는 길
길 너머로 보이는 기와집의 물결이 바로 장안사이다.


회룡포 주차장에서 수레를 타고 회룡교에서 다리 대신 서쪽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길이 너무나
가늘고, 굴곡도 심하고, 한쪽에는 벼랑까지 있어 덩치가 큰 버스가 안심하고 바퀴를 굴리기에는
매우 버겨운 길이었다. 다행히 그 길을 벗어나 장안사 밑에 마련된 주차장에 바퀴를 접었다. 장
안사까지 바퀴를 굴려도 되지만 버스가 마음을 놓고 바퀴를 접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부
터 부득이 걸어가야 된다. 길이 제법 각박하여 은근히 숨이 차긴 하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회룡포를 굽어볼 생각에 그 힘든 길도 거침없이 올라갔다.

작은 수레들이 모여있는 장안사 주차장을 지나면 장안사(長安寺)가 조촐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절은 신라 후기인 759년에 운명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 당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전국 3곳의 명산(名山)에 장안사를 세우니, 그것이 금강산(金剛山) 장안사와 기장(機張) 장안사,
그리고 이곳 장안사라고 한다. 허나 신빙성이 많이 떨어져 믿을 바는 되지 못하며, 금강산이나
기장(부산)의 장안사와 달리 고색의 내음이 거의 없다. 다만 고려 중기 문인(文人)으로 동명왕
편(東明王篇)을 지은 이규보(李奎報)가 이곳에 머물며 지은 시가 잔잔히 전하고 있어 적어도 고
려 초기에 문을 연 듯 싶다.
이후 고려 명종(明宗) 때와 1627년, 1755년에 중창을 했으며, 1984년 두타화상(頭陀和尙)이 전
국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하다가 장안사의 사세가 말이 아님을 보고 지역 신도들과 힘을 합쳐 지
금의 가람을 일구었다. 고색의 때는 진작에 날라간 상태이고, 소장 문화유산도 없지만 이규보의
시를 통해 이곳의 오랜 역사를 대충 가늠어 볼 수는 있겠다.
2000년 이후 회룡포가 대중적인 명소로 뜨면서 회룡포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비룡산에 등산로를
정비하고 회룡대를 세웠는데, 수레로 회룡대까지 올라갈 경우에는 무조건 장안사를 거쳐야 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이곳까지 이익을 보게 되면서 회룡포 관광권의 일원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아오던 고적한 절이었다.

장안사는 예천 사람들이 공부를 하거나 소망을 기원하던 도량(道場)으로 예전에는 극락전(極樂
殿)이 법당(法堂)이었으나 지금은 대웅전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로 이규보가 이곳에서 지
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산에 이르니 번뇌가 쉬어지는구나
더구나 고명하신 지도림 스님을 친견했음이랴
긴 칼 차고 멀리 떠날 때는
외로운 나그네 마음이더니
1잔 차로 서로 웃으니
오래된 친구의 마음이라

맑은 날 북쪽 개울에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지는 서쪽 성에는 안개가 깊구려
병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졸음만 오고
옛동산 술과 국화는 꿈속에서 찾아드네


장안사는 회룡포에 단단히 정신이 팔린 탓에 경내를 살피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솔직히 역사만
좀 오래되었을 뿐, 볼거리도 부실한 절로 여겨 지나쳤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당연
히 사진도 제대로 담지 않았다.
* 장안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산54 (☎ 054-655-1401)


▲  회룡대에서 장안사로 내려가는 계단길

장안사를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비룡산의 산능선이다. 여기까지 숨가쁘게 이어진 등산로
는 약간 진정을 되찾는 듯 보이나, 하늘로 이어질 것만 같은 계단길이 나타나면서 잠깐의 안도
감도 금세 사그러든다. 소나무 숲을 가르며 올라가는 계단길은 소나무가 베푼 솔내음이 그윽하
며 그런 계단길을 오르면 길은 서서히 완만해지면서 잠시 내리막 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길
을 잠시 내려가면 회룡대 전망대인 회룡대가 모습을 진하게 드러낸다.


▲  조촐한 모습의 팔각정인 회룡대

회룡대는 회룡포의 전경을 보여주고자 비룡산 능선에 닦은 정자이다. 회룡포 답사의 백미(白眉)
라고 할 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 오르면 대자연이 만들고도 스스로 놀랬다는 작품, 회룡포가 기
가 막히게 연출되어 속인들의 정신줄을 제대로 놓게 만든다. 밑에서 거닐면서 보는 회룡포와 이
렇게 위에서 보는 회룡포의 모습은 정말 천지 차이이다.


▲  명필이 분명한 회룡대 현판의 위엄

▲  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마을 사람들 말대로 삽 한번만 뜨면 정말 섬이 될 것 같은 아슬아슬한
회룡포의 모습 앞에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감탄사 연발 뿐이다.

▲  회룡대 동쪽 부분
내성천이 무려 350도나 구비구비 돌아가야 했던 것은 바로 사진 가운데 부분을
뚫지 못해서이다. 그것도 정말 삽 한번 뜨면 그만일 듯한 두께임에도 말이다.
내성천의 집요한 굴곡 노선 직선화 프로젝트를 막아선
동쪽 부분이 정말 패기가 돋는다.

▲  회룡대 서쪽 부분
회룡포가 넓긴 하지만 대부분은 경작지로 쓰이며, 마을은 서남쪽 구석에 자리해 있다.

▲  숨은 그림 찾기
사진을 잘 살펴보면 하트(♥)처럼 생긴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난이도는 하


회룡대에 올라 회룡포를 중심으로 한 천하를 실컷 굽어보고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시간은 어
느덧 17시, 이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 온 것이다. 태양계에서 가장 크다는 햇님도
겨울 제국의 눈치 탓에 슬슬 꽁무니를 뺄 채비를 한다. 
회룡대로 올라갈 때는 길이 각박하여 제법 멀게 느껴졌는데 내려갈 때는 몇 발자국 떼지도 않았
는데 금세 장안사가 나타난다. 여기서 미끄럼을 타듯 쑥 내려가면 버스가 바퀴를 접고 쉬는 주
차장에 이른다.

졸고 있는 버스를 깨워서 회룡포와 작별을 고하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회룡교까지 난이도가 강
한 길을 비집고 내려와 회룡교를 건너 향석리(옛 용궁 고을 중심지)를 지나 용궁면 중심지에 이
르러 일행들과 작별을 고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직행버스를 타고 영주(榮州)로 넘어가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고, 남쪽 일행
들은 인근 삼강주막(三江酒幕)에 들려 막걸리 한 사발씩 들고 내려갔다고 한다. 나도 그들을 쫓
아갈 껄 그랬나? 괜히 용궁에서 작별을 고한 것이 후회가 된다. 허나 이미 지나간 거 따져서 무
엇하리, 거기는 다음에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겨울 맞이 예천 답사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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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맞이 명소로 유명한 피서의 성지, 청도 남산 낙대폭포

 


' 청도 남산 낙대폭포 '
청도 낙대폭포(약수폭포)


여름의 제국이 봄을 사정없이 내몰고 한참 세력을 다지던 6월의 한복판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인 부산(釜山)으로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부산으로 바로 가는 것이 몹시 허전하여 부
산과 가까운 적당한 곳을 물색했는데 이제 더운 여름이고 하니 시원한 곳이 땡긴다. 그래서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리다가 청도에 있는 낙대폭포에 시선이 딱 멈춰 그곳을 중간 경유지로
삼았다. 청도읍내하고도 제법 가까워 부담없이 찾아갈 수 있고, 폭포의 명성이 주변에 자자
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충남 천안(天安)까지는 저렴하지만 딱딱한 의자에 굳센 정신력을 요구하는 1호선 전
철을 탔다. 장장 2시간 40분을 달려 천안역에 도착, 여기서 20분을 머물다가 부산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경북(慶北)의 최남단 동네인 청도에 들어선다. 청도(淸道) 땅은 거의
9년 만에 발을 들이는 것인데, 이곳도 정말 인연이 지지리도 없는 동네의 하나다.

청도역에서 읍내로 가니 청도의 명물인 추어탕집이 줄지어 늘어서 유혹의 손길을 진하게 내
민다. 내가 어패류를 썩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때가 점심시간이라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여
간 힘들지 않았다.
간신히 그곳을 벗어나 철길을 건너 낙대폭포가 있는 화양읍으로 이동하는데, 시간이 시간인
지라 점심을 먹고 가는 것이 신상에 좋을 듯 싶었다. 폭포를 보고 내려오면 적어도 오후 3
시가 넘을테니 말이다. 하여 적당한 곳을 찾던 중, 점심 할인을 내건 운문산가든이란 고깃
집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육류를 좋아하고 게다가 점심 할인까지 내거니 별로 망설일 것도
없이 그곳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할인 대상은 소고기 된장찌개와 냉면, 갈비탕 등인데, 토요일과 주말은 할인이 안된다고 그
런다. 허나 이미 신발을 벗고 들어와버렸고 가격도 5,000원선이라(당시 기준, 평일 점심 할
인 4,000원) 된장찌개를 주문했다. 주변을 보니 단체로 온 손님들이 운문산(雲門山)에서 길
렀다는 소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는데, 그 향기가 추어탕 저리 가라 할 정도이다.

잠시 뒤 잘 차려져 나온 된장찌개 백반이 내 앞에 펼쳐졌다. 반찬은 5~6가지 정도로 찌개에
는 소고기가 풍부하게 담겨져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기껏해봐야 조금 들어있겠지 싶었는데,
완전 소고기된장찌개의 이름을 한 것이다. 게다가 공기밥도 2그릇을 준다. 그래서 왜 2그릇
을 주는지 물어보니 식당 아줌마가 웃으며 장정이 1그릇으로 배가 차겠냐고 그런다.
그렇게 미리 1그릇을 서비스로 제공했으니 나야 그저 고마울 따름~ 된장찌개의 맛은 우리집
에서 먹던 것과 거의 비슷하여 2그릇을 흔쾌히 비우고 된장찌개도 말끔히 비웠다. 가격치고
는 제법 괜찮았다.
그렇게 배가 부르니 졸음이 슬쩍 다가와 한숨 자라며 나를 농한다. 아직은 갈 길이 멀어 희
롱을 뿌리치고자 커피 1잔 뽑아 마시며 뙤약볕 길을 재촉한다.

청도군청에 이르니 낙대폭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의 지시에 따라 왼쪽 길로 들어
서니 정면으로 멀리 솟은 남산(南山)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낙대폭포는 바로 그 깊은 산골
에 숨겨져 있다. 여기서 그곳까지는 최소 3km, 배도 두둑히 채웠으니 걸어갈 힘은 충분하
나 문제는 무더위다. 벌써부터 땀이 쭈르륵 쏟아난다. 허나 나는 두 발에 의지해 여기까지
왔으니 택시나 차를 얻어타지 않는 이상은 걸어가야 된다. 워낙 걷는 걸 좋아하고 편한 여
행이 별로인지라 20리 걷는 건 예사로 여긴다. 요즘 내 또래들과 20대 상당수는 편하게 먹
고 놀고 주마간산이나 하는 여행만 추구하여 좀만 힘들어도 개거품을 무는데, 이는 잘못된
여행/답사방식이다. 고생은 여행의 알맹이요 자신을 갈고 닦는 수양이거늘 그것을 외면하
니 무슨 여행이 되겠는가..?


♠  낙대폭포 올라가는 길

▲  남산 밑에 자리한 대동지

청도군청을 지나면 보기만 해도 포근한 전원(田園) 풍경이 펼쳐진다. 그늘이 전혀 없는 오르막
길을 오르면 대동지라 불리는 호수가 나오는데, 남산에서 내려온 물이 잠시 길을 멈추고 여행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수문을 통해 속세로 나간 물은 화양강(華陽江)과 낙동강을 거쳐 바다로 나
가게 된다. 주변 산과 나무들은 호수를 거울로 삼아 한참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대동지를 지나면 그리 급하지 않은 오르막길이 이어지는데, 여전히 햇빛을 막아줄 가로수가 없
으니 뙤약볕에 제대로 노출되어 땀이 대동지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남산과 제법 가까워질 무렵, 'z'모양의 고갯길이 나타나면서 고개의 경사가 다소 각박하게 변신
한다. 허나 그 길을 오르면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남산의 삼삼한 숲과 숲길이 나타나 시원한
그늘을 선사한다. 아무리 더워도 숲이 베푸는 시원한 바람과 청정한 기운 앞에 더위의 부산물(
땀)은 36계를 치느라 바쁘다.


▲  고개 중턱에 자리한 한옥학교의 정문
생김새가 절의 일주문(一柱門)과 비슷하다.


▲  한옥학교를 지나면서 서서히 숲길로 변해간다.

▲  낙대폭포 가는 숲길 (자연 속을 거닐다)
아직 가을도 아니건만 성질 급한 잎사귀들은 벌써부터 땅바닥에 떨어져
쓸쓸히 낙엽을 이룬다.

▲  낙대폭포 주차장과 안내소
4발 수레들은 여기서 무조건 바퀴를 접어야 된다. 여기서 폭포까지는
쉬엄쉬엄해도 10분 정도면 충분하다.

▲  낙대폭포 안내소에 있는 남산 등산로 안내도
안내소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정면에 잘 닦여진 길을 오르면 낙대폭포에 이르고,
오른쪽(낙대폭포 방향 기준) 산길로 가면 폭포 위쪽과 남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낙대폭포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돌길 (1)
햇빛도 굴복시킨 무성한 숲길이 잠시 느슨해지는 구간이다.

▲  낙대폭포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돌길 (2)
느슨해진 돌길은 다시 삼삼한 숲길로 변해간다. 저 산길의 끝에
물맞이 명소로 이름난 낙대폭포가 숨어있다.


♠  대자연이 빚은 명승지이자 물맞이 명소로 무더위마저
굴복시킨 피서의 성지 ~ 청도 낙대폭포(落臺瀑布)

청도읍과 화양읍의 듬직한 뒷산인 남산(南山) 북쪽 자락에 자리한 낙대폭포는 청도8경의 하나로
꼽히는 청도 지역의 명승지이다. 깎아지른 듯한 아찔한 절벽에 의지하여 떨어지는 이 폭포는 높
이 30여m로 2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이 수직으로 떨어지다가 중간에서 거의 50도로 구부러
지면서 다시 90도 직각으로 떨어진다.

폭포 주변은 숲이 삼삼하여 뜨거운 햇빛이 들어오기가 힘들며, 숲이 베푸는 잔잔한 바람과 폭포
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계곡 바람에 여름의 제국도 고개를 숙인 그야말로 피서의 성지(聖
地)이다. 여름 제국의 부산물이 아무리 사람 몸에 살짝 올라타 이곳을 정복하려 하지만 폭포 앞
에 서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줄행랑치기에 바쁘다.

이곳은 봄에는 벚꽃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綠陰)이, 가을에는 오색영롱
한 단풍이 장관을 이루며, 겨울에는 겨울 제국의 시샘을 받아 두터운 빙폭(氷暴)이 되버린다.
특히 이 폭포는 예로부터 신경통에 효과가 있다고 명성이 자자하여 물을 맞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약수폭포(藥水瀑布)란 별칭까지 지니고 있으며, 늦봄과 여름, 초가을에는 폭포물
을 맞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래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폭포 우측에는 샤워장과 옷을
갈아입는 공간을 두었고, 폭포 아래쪽에 화장실을 세웠으며, 의자와 탁자 등을 두었다.


▲  녹음과 어우러진 낙대폭포의 위엄

▲  어린이들을 위한 폭포 아랫쪽 공간

폭포의 물줄기는 그리 굵고 시원한 편은 아니다. 위에서 물방울 튀기듯 떨어져 암벽을 타고 조
용히 내려앉는 정도로 멀리서는 실감이 나지 않지만 폭포 앞에 서면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인
다. 물론 강수량의 차이에 따라 떨어지는 수량도 달라진다.
물맞이 장소는 폭포수가 90도로 떨어지는 아래로 거기서 수건 등을 뒤집어쓰고 물맞이에 임하면
된다. 나도 물맞이를 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지만 그럴 준비를 하지 못해 폭포 앞에서 약간의
물방울만 맞는 정도로 물맞이를 대신했다. 이곳에 있으니 정말 무더위란 단어를 잊을 정도로 시
원하기 그지 없다.


▲  폭포 상단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물줄기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물방울로 흩어져 떨어진다. 돌에 부딪쳐
산산히 부서지는 물방울 소리는 좀 단조롭긴 하지만
그 소리에 무더위는 싹 도망을 친다.

        ◀  폭포 우측에 난 바위 틈새
암벽 사이로 난 틈새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일부라도 남아있는 여름의 기운을 싹 털어낸다.
찬 바람이 부는 냉혈(冷穴)로 안쪽 깊숙히 들어
갈 수 있는데, 저 안에 들어가면 완전 냉동창고
라고 한다. 들어가지 않고 지나친게 아쉬울 따
름..

폭포 출사를 마치고 폭포 좌측에 마련된 휴식 공간에 여장을 풀고 1시간 정도 머물렀다. 폭포에
사람이라곤 나 혼자였으니 마치 폭포가 내 것이 된 마냥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폭포를 곁에 두고
바라본다. 이 폭포가 정말 내 것이었으면, 집으로 고이 담아갔으면 좋으련만 그럴 재주가 없는
것이 그저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대자연이 청도 땅에 내린 선물로 이 지역 명승지로 있어야 되
는 것이 바로 그의 임무이자 운명이다. 


▲  낙대폭포를 등지고 속세로 나오다 ▼
 

폭포에서 그렇게 머물고 있으니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찾아왔다. 그들은 내 곁에 자리를 잡았는
데, 돗자리를 뒤집어 쓰고 물을 맞는다. 여자 꼬마 2명은 폭포 밑에 조성된 공간에서 물놀이를
하며 때 이른 피서를 즐긴다. 기분 같아서는 속세를 잠시 등지고 삼척 미인폭포의 미인처럼 (☞
관련글 보러가기) 폭포 곁에 머물고 싶지만 부산도 내려가야되고 내가 있어야 될 공간이 아니기
에 그들에게 폭포를 넘기고 아쉬운 마음을 남기며 철수했다. 폭포를 등지면서 몇 번이나 돌아봤
는지 그만큼 미련이 컸었나 보다.

폭포를 등지고 나오는 길은 내리막의 연속이라 금세 대동지를 지나 화양읍에 이르렀다. 화양읍
과 청도읍은 행정구역만 다를 뿐, 하나의 읍이나 다름이 없다. 서로의 읍내가 붙어있기 때문이
다. (군청이 화양읍에 있음)
청도읍 동쪽에 자리한 청도역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열차를 타고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고자 남
쪽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청도 낙대폭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마무리를 고한다.

※ 청도 낙대폭포 찾아가기 (2013년 7월 기준)
① 대중교통
* 서울, 영등포, 수원, 천안, 조치원(세종), 대전, 구미, 동대구, 밀양, 구포, 부산역에서 경부
  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 하차 (1시간에 1~3회꼴로 운행)
* 진주, 마산, 창원역에서 동대구 방면 열차를 타고 청도역 하차
* 대구남부정류장과 경산에서 청도행 직행버스 이용 (30~60분 간격)
* 청도역과 청도터미널에서 낙대폭포까지 택시 이용 또는 도보 1시간 / 청도터미널(청도역전에
  있음)에서 이서, 각북, 풍각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범곡(청도군청)에서 하차하여 도보 40분
② 승용차
* 대구부산고속도로 → 청도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모강교차로에서 우회전 → 청도대교를
  건너서 청도군청 방면 한내길로 진입 → 청도군청(양정길) → 양정길 직진 → 낙대폭포

* 소재지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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