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찰'에 해당되는 글 43건

  1. 2023.06.07 도심 곁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창원 비음산 불곡사 (불곡사 일주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2. 2020.12.21 한강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던 옥수동 미타사 2
  3. 2020.07.16 초여름 산사 나들이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나한도량을 내세우고 있는 수락산 학림사 (수락산 귀임봉)
  4. 2020.05.19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3
  5. 2020.05.09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6. 2020.04.17 봄맞이 산사 나들이 ~ 고즈넉한 비구니 수행도량, 수원 광교산 봉녕사
  7. 2020.01.11 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8. 2019.10.29 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9. 2019.09.04 황량함과 재건의 공존, 경주 서라벌 절터 나들이 ~~~ (감산사, 연지암, 활성리석불입상, 숭복사)
  10. 2019.08.25 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 서울연꽃축제의 성지,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도심 곁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창원 비음산 불곡사 (불곡사 일주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창원 불곡사



~~~ 봄의 한복판에 찾아간 창원 불곡사 ~~~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따스한 봄의 한복판인 4월의 끝 무렵, 경남의 중심 도시인 창원(昌原)을 찾았다. 창원은
거의 6~7년 만에 방문으로 다른 곳으로 가는 도중에 잠깐 들리게 되었는데, 고양이가 생
선가게를 그냥 못둔다고 접근성이 좋은 간단한 볼거리를 고르다가 2005년에 갔던 불곡사
를 골랐다. 그때도 4월에 갔었는데 이번에도 4월이다.



 

♠  불곡사(佛谷寺) 입문

▲  불곡사 일주문(一柱門)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3호

불곡사는 숲이 우거진 대방동 언덕 남쪽에 자리한다. 이 절은 '비음산(飛音山) 불곡사'를 칭
하고 있는데 여기서 비음산(510m)은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뫼이다. 얼핏 보면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나 불곡사가 안긴 언덕 또한 비음산의 일원이다. 무분별한 개발의 칼질로 그 사이에
주거지가 조성되면서 서로가 끊긴 것이다.

불곡사 언덕 남쪽을 지나는 대암로를 들어서면 절로 인도하는 언덕길이 나타난다. 그 길의 손
을 잡으며 언덕을 오르면 경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다른 일
주문은 기둥 2개, 문 하나가 전부이나 여기는 부산 범어사(梵魚寺)의 일주문처럼 기둥이 4개,
문 3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문은 원래 창원객사(昌原客舍)의 정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1822년 웅천향교(진해)로 이전
되어 향교 정문으로 살다가 1940년에 그 향교가 사라지면서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된 것을 1943
년에 우담이 이곳으로 가져와 일주문으로 삼았다. 그래서 다른 일주문과 달리 객사, 향교(鄕
校), 그리고 절까지 다양한 곳의 정문을 두루 거쳐 경력도 화려하다.

그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계 문으로 절의 일주문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다. 아무래도 관
청 출신 문이라 그런 듯 싶다. 원래 지붕을 제외한 문 높이가 4m 정도 되었으나 기둥의 아랫
부분이 썩어버려 2m 정도를 잘라냈다. 그러다보니 지붕 덩치에 비해 문의 높이가 현저히 낮아
진 어색한 모습이 되었다. 지붕까지 합치면 4m 정도로 만약 아랫부분을 잘라내지 않았다면 거
의 6~7m의 장대한 규모를 자랑했을 것이다.

문이 여러 번 이사를 가면서 적지 않은 변형을 겪은 것으로 여겨지며, 나무를 다루는 수법이
다양하기는 하나 정교함이 덜하다. 지붕 기와에서 '강희(康熙)24년 을축일~~'이라 쓰인 글씨
가 나와 숙종 시절인 16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문의 평방(平枋) 좌우 끝에는 귀엽게 다듬어진 호랑이와 거북 조각이 있는데, 이들은 불곡사
가 문 수식용 및 비보풍수의 목적으로 달아놓은 것으로 보인다.

▲  일주문 서쪽 평방에 닦여진 귀여운
호랑이와 용 꼬리 조각

▲  일주문 동쪽 평방에 닦여진
거북 조각


▲  고된 세월에 꽤 지쳐 보이는 늙은 승탑(僧塔, 부도탑)

일주문을 지나면 덥수룩한 모습의 옛 승탑이 손짓을 한다. 그는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으
로 탑의 주인은 알 수 없다. 기단과 탑신(塔身)이 남아있으나 사라진 부분은 새 돌을 끼워넣
어 낡은 돌과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탑 중간과 밑도리에는 중생들이 얹혀놓은 막
돌탑이 그들의 소망을 양분으로 삼으며 어수선하게 싹을 내렸다.


▲  경내를 가리고 선 세음루(洗音樓)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그 밑도리를 지나면 불곡사의 조촐한 경내가 펼쳐진다.


불곡사는 인근 성주사(聖住寺)와 함께 창원의 대표적인 오래된 절이다. 935년에 진경국사(眞
鏡國師)가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없으며, 이후 대한제국(大韓帝國) 시절까지 이렇다할
내력(來歷)이 전하지 않는다. 허나 경내에 신라 후기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이 있어 신라
말에 창건된 것은 분명해 보이며, 조선 중/후기 것으로 보이는 승탑과 대한제국 시절 탱화들
이 여럿 전하고 있어 고색의 깊이를 그런데로 우려낸다.
1932년 우담(優曇)이 비로전과 세음루, 산신각, 승당, 요사채 등을 중건했고, 1943년에 버려
진 웅천향교 정문을 가져와 일주문으로 꾸몄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비로전을 비롯해 명부전, 관음전, 칠성각, 세음루 등 8~9동 정
도의 건물이 있으며, 국가 보물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지방문화재인 일주문, 오래된 승탑과
대한제국 시절 탱화가 전한다.
불곡사가 자리한 언덕도 비음산의 엄연한 일원이었으나 개발의 칼질로 서로가 끊기면서 도시
속의 외로운 공간이 되었다. 그래도 절 주변 언덕은 숲이 우거져 있어 그런데로 산사의 내음
은 풍긴다. 만약 불곡사가 아니었다면 이 언덕 또한 아파트로 도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불곡사 소재지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대방동 1036-1 (대암로 55 ☎ 055-282-7402)



 

♠  불곡사 둘러보기

▲  비로전(毘盧殿)

불곡사의 중심 건물인 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법당치고는 규모가 작
다. 앞서 일주문처럼 지붕이 밑도리보다 너무 큰 모습으로 이곳에 불곡사 제일의 보물이 깃들
여져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  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436호

비로전의 주인이자 불곡사의 1급 보물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9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 딱
딱한 돌피부에 비해 부드럽고 정교한 모습을 지닌 석불로 머리는 나발이며, 상투 모양의 육계
(무견정상)가 두툼하게 솟아있다. 원만한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알맞은 크기와 모습으로 배
치되어 있으며, 귀는 짧고 목에 있는 3개의 주름선인 삼도(三道)는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법의(法衣)는 양 어깨와 석불 전체에 걸쳐져 있고, 옷주름은 다리까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
며 흐르고 있다. 손 모양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모습으로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석불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8각형으로 연꽃무늬와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석불의 높이는 약 101cm, 연화대좌(蓮花臺座)는 약 90cm로 석불 등에는 예전에 광배(光背)를
붙인 흔적인 구멍이 남아있다. 그 광배는 세월의 고된 무게에 석불의 등을 놓아버렸고, 지금
은 옆에 따로 누워있다.
무려 1,000년이 넘는 지긋한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어 그의 건강 비결이 사뭇
궁금해진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광배까지 온전하게 달려있었다면 정말 금상첨화였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하지만 천하무적으로 눈에 뵈는 게 없다는 세월을 누가 이기랴. 이 정도라도 남
아있는 것도 다행이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광배
석불의 광명을 상징하며 그 등에 붙어있던 광배로 지금은 석불 옆에 뉘어져 있다.
돌에 새겨진 무늬들은 세월을 예민하게 타면서 불곡사의 잃어버린 내력처럼
다소 희미해졌다.

▲  비로전 지장탱
1904년에 조성된 것으로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범종각과 명부전(冥府殿, 오른쪽 집)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1990년대에 지어졌다.

▲  금동으로 다져진 명부전 지장보살좌상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두광(頭光)을 지닌 지장보살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자리해 있다.

▲  칠성각(七星閣)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칠성과 독성(나반존자), 산신의 거처이다.

▲  칠성각 독성탱

망중한에 잠겨있는 듯한 독성(나반존자) 할배와 동자, 그가 몸을 일으킨 천태산(天台山) 등이
그려져 있다. (폭포와 소나무도 있음) 그림은 고색이 좀 있어 보이는데 화기(畵記)를 확인하
지 않아서 자세한 건 모르겠다. (20세기 초기 것으로 여겨짐)


▲  등장 인물이 꽤 많은 칠성각 칠성탱
독성탱만큼이나 늙어 보인다. (20세기 초나 중기로 여겨짐)

▲  칠성각 산신탱
온후해 보이는 산신 할배와 동자, 괴수처럼 무서워 보이는 호랑이 등 산신 가족이
담겨져 있다.

▲  불곡사 관음전(觀音殿)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2005년에
왔을 때는 지붕이 청기와로 뒤덮여 윤이 반짝반짝 빛났는데
그새 기와갈이를 했던 모양이다.

▲  관음전에 봉안된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
무려 1,000개의 손과 1,000개의 눈을 지닌 천수천안관세음보살, 그만큼
그가 지켜주고 어루만져야 될 중생들이 많다는 뜻일 거다.


관음전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불곡사 관람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창원
에서 더 이상 정처(定處)를 잡지 않고 바로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하여 창원 불곡사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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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던 옥수동 미타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옥수동 미타사
~~~~~

▲  미타사 느티나무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비
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들 이상만큼 그날을 즐기고 산 지도 어느덧 10여 년, 초파
일에 대한 설레감은 다른 날보다 높아 며칠 전부터 초파일 코스를 짜느라 부산하다.
그날만큼은 굳이 멀리 나가지 않고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
찰(20세기 이후)을 대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이제는 서울에서 미답(未踏) 절이 거의
고갈 상태에 이르렀다. 다행히 이때를 대비하여 남겨두었던 미답의 고찰(古刹)이 여럿
있는데, 그중 2개를 이번에 꺼냈다. (나머지는 이후에 모두 꺼냈음)

드디어 초파일 오전 10시, 도봉동 집을 나서 제일 먼저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았
다. 학도암은 여러 번 인연이 있던 절로 그곳에 깃든 조선 후기 문화유산을 간만에 친
견하고 점심공양에 후식(수박, 떡, 커피)까지 두둑히 챙겨 먹으며 학도암의 후한 초파
일 인심을 체험했다.
13시 정도에 보문동(普門洞) 미타사로 자리를 옮겨 그곳의 문화유산을 모두 사진에 담
고 공양간에서 공양까지 하였다. 이곳 초파일 인심도 학도암에 못지 않았는데, 초파일
절투어에서 먹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다
그렇게 미타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벌써 16시를 가르킨다. 왜 이렇게 초파일 해는 짧을
까? 퇴근 본능에 너무 충실한 햇님을 원망하며 지하철을 타고 부랴부랴 옥수동 미타사
로 넘어갔다. 이곳은 3호선과 경의중앙선(문산↔용문,지평)이 만나는 옥수역 북쪽으로
바로 한강 변이다. 학창 시절에 옥수동 북쪽 금호동(金湖洞)에 잠시 서식한 적이 있었
고, 옥수동도 적지 않게 들락거렸지만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불과 몇 년 전에 일이
다. 그만큼 등잔 밑이 매우 어두웠다.


▲  초파일의 향연 속으로 ~~~ 미타사 정문을 들어서다.


 

♠  1지붕 9가족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비구니 절집
옥수동 미타사(玉水洞 彌陀寺)

▲  청기와를 눌러쓴 천불전(千佛殿)

미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미타유치원과 주차장이 마중을 한다. 미타사는 아직 그 흔한 일
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는데, 노란 피부의 유치원 버스들이 옹기종기 모인 주차장을 지나
면 미타사의 법당(法堂)인 천불전이 우람한 모습을 비춘다.

천불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1988년 9월에 지
어진 미타사의 야심작으로 머리에는 푸른 빛을 도도하게 드러낸 청기와가 듬뿍 입혀져 건물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으며, 불단(佛壇)에는 장대한 모습의 석가여래상을 위시해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이 금빛 물결을 일으키며 두 눈을 부시게 만든다.


▲  화려함이 가득 묻어난 붉은 닫집과 천불전 석가여래상의 위엄

▲  미타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4-6, 4-7호

천불전 북쪽에는 천불전보다 더 장대한 모습의 느티나무 2그루가 천불전과 관음암에 짙게 그
늘을 드리우고 있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라난 그들은 1982년 10월 20일
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약 20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년이 더해
져 240년 정도 된다. 경내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미타사 승려가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생김새 또한 거의 비슷한데, 이들의 높이는 20m, 나무둘레는 320cm, 325cm이
며, 경내에서 2번째로 오래된 존재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  미타사 용운암(龍雲庵)

옥수역 북쪽에 자리한 미타사는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감싸고 도는 전형적인 배
산임수(背山臨水) 자리이다. 미타사는 그 뒷산을 종남산(終南山)이라 칭하고 있는데 원래 이
름은 금호산(金湖山, 응봉)이며, 경내 동쪽에는 달맞이봉이 있다. 지금은 강변도로와 중앙선
철도로 인해 한강과 조금 떨어지긴 하였으나 예전에는 바로 앞이 한강이었다.

옥수동 미타사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로 888년에 비구니 대원(大願)이 매주골(금호동
)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1115년 봉적(奉寂)
과 만보(萬寶) 두 비구니가 종남산 남쪽, 즉 현재의 위치로 옮겨 극락전을 세워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내세웠다. 이때 미타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하니 어쩌면 그 시절에 창건된 것이 아닐
까 여겨진다. 또한 창건주와 1115년 중건 승려 모두 비구니라 시작부터 비구니 절이었음을 알
려준다.

조선 때는 서울 근교 4개 승방(비구니 절)의 하나로 꼽혔는데, 두모포(豆毛浦)에 있다고 하여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다. (두모포는 동호대교 북단에 있던 포구임)
1827년 환신(幻信)이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세웠으며, 1862년에는 인허(印虛)가 조대비<趙大
妃. 신정왕후(神貞王后)>와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의 시주를 받아 극락전을 중창하고 요
사를 수리했다고 한다. 허나 그 시절 조진관은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1808년에 죽었기
때문) 하여 아마도 그의 후손이 시주를 하거나 기록의 오류인 듯 싶다.
1873년에는 성흔(性欣)이 법당과 요사를 중수했으며, 1928년에 선담(仙曇)이 7층석탑을 세웠
다. 그리고 1933년에 돈형과 이경화가 산신각을 중수하고 안성훈이 무량수전을 수리했다.

한참 잘나갔던 시절에는 9동 66칸이 있었다고 하나, 20세기 중반 이후 극락전 주변을 제외하
고 여러 암자로 쪼개졌다. 하여 용운암과 금수암(金水庵), 칠성암(七星庵, 칠성각), 토굴암(
土窟庵), 금보암(金寶庵), 관음암(觀音庵), 대승암(大乘庵), 정수암(淨水庵) 등 8개의 암자가
미타사의 상당수를 이루고 있으며, 미타사 본진을 포함하여 1지붕 9가족의 독특한 모습을 지
니게 되었다.
이들은 각자 법당과 생활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암자를 포함해 건물은 20여 동 정도로 기와집
과 현대식 주택이 두루 섞여있는데, 극락전이 여기서 가장 늙은 집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2017년 10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
유형문화재 417호
)이 있는데, 이 땅에 딱 2개 밖에 없는 윤왕좌(輪王坐) 보살상으로 고려 말
이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랫동안 숨바꼭질을 벌여 아는 이가 거의 없었으나
2016년 초에 대한불교조계종이 전통사찰 전수조사를 벌이면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그가 순수 미타사 토박이인지 중간에 다른 곳에서 넘어왔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1862년에 개금을 했고 그 사실을 비구 영선(永善)이 증명한다는 발원문(發願文)이 있어 19세
기 중반부터 미타사에 있던 것은 확실하며, 현재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금동관음보
살좌상은 친견하기 매우 어려움)
그 외에 19세기 말에 조성된 탱화가 적지 않게 전하고 있는데, 1883년에 제작된 칠성탱이 가
장 늙었으며(금수암에 있음), 1887년에 학허(鶴虛)가 그린 아미타후불탱, 현왕탱, 감로탱, 신
중탱, 지장탱, 1900년에 보암(寶庵)이 그린 신중탱과 아미타후불탱이 있다. 20세기 초에 그려
진 탱화가 더 있으며, 극락전과 금수암, 칠성암, 대승암에 흩어져 있어 알아서 숨바꼭질을 벌
여야 된다. (극락전에 많이 들어있음) 그리고 경내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한 대승암에는 1884
년에 제작된 희귀한 형태의 관음탱이 있으며, 앞서 천불전 앞에 24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실감이 덜하겠지만 옛날에는 절 앞에 한강물이 넝실거리던 두모포가 있고, 절 옆구리
와 뒤쪽에는 금호산과 달맞이봉의 푸른 산줄기와 바위가 펼쳐진 기가 막힌 경승지였다. 이승
만 전 대통령이 자주 찾았던 곳이기도 하며, 도심과 매우 가까운 탓에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
에 가해지면서 그 착했던 풍경은 이제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하철3호선과 동호대교가 육중한 덩치를 내밀며 절의 서쪽 시야를 완전히 앗아갔고, 그로 인
해 절은 다리 그늘에 들어앉은 처지가 되었다. 또한 옥수현대아파트가 경내 동쪽에 주렁주렁
뿌리를 내려 경내를 굽어보면서 동호대교와 아파트 사이에 끼어있는 도시에 완전히 갇힌 고적
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절 주변에는 아직 숲과 형제바위 등의 자연산 바위가 조금은
남아있어 산사(山寺)의 기운은 조금이나마 뿜고는 있다.

▲  연등을 두룬 용운암 대웅전(大雄殿)

▲  미타사 극락전과 종무소 바깥 모습


▲  미타사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미타사의 중심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천불전과 함께 법
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종무소(宗務所)와 독성전, 요사를 주변에 갖추고 있으며 1862
년에 중창된 이후 여러 번 수리를 거쳤다.
극락전 안에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제작된 탱화가 여럿 깃들여져 있어 고색의 기운을
더하고 있으며, 건물 앞에는 1928년에 선담이 세운 7층석탑이 날렵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왜정(倭政) 때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건물을 받치고 있는 석축 기
단(基壇)에는 검은 때가 적지 않아 100년 이상 묵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그는 서방정토가 있다
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의 거처 또한 서쪽을 향하고 있다.
금동 피부를 지닌 아미타불은 현란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
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고 있는데, 그들 뒤로 고색이 다소 깃든 아미타후
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다. 이 후불탱은 1887년에 학허가 그렸다.


▲  극락전 우측에 걸린 현왕탱(賢王幀, 왼쪽 탱화 / 1887년에 '학허'가 그림)

▲  극락전 좌측을 장식하고 있는 지장탱(왼쪽)과 신중탱(오른쪽)
이들 그림은 아미타후불탱과 마찬가지로 1887년에 학허가 그렸다.

▲  극락전 옆구리에 자리한 독성전(獨聖殿)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보금자리로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독성탱과 산신탱이 담겨져 있어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근래 조성된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상이 유리막에 꽁꽁 감싸인 탓에 독성상은
안나오고 내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런 민망할 때가...ㅠㅠ

▲  산신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흰 수염에 붉은 옷을 입은 산신 할배가
호랑이와 동자를 대동하며 단란한
모습을 보여준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깨알같은 보시함


극락전 앞에는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인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닦여져 있었다. 초파일
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항아리에
마련된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를 살짝 냉수마찰을 시키며 나름의 소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는 보시함이 깨알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
부처가 부리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  미타사의 빛바랜 일기장, 1930년 중수기(重修記)
1930년(불기 2957년)에 미타사를 중수하면서 작성된 중수기이다. 중수한 사연과
중수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돈을 낸 이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  미타사 나머지 부분 (대승암)

▲  느티나무 옆에 자리한 현대 주택 스타일의 관음암

미타사의 구조는 대략 이렇다. 정문을 들어서면 천불전이 나오고, 그 맞은편에 용운암과 극락
전이 별도의 담과 집을 두르고 있다. 천불전을 지나면 동네 골목길 같은 길이 펼쳐지고 그 좌
우로 양옥과 기와집이 늘어서 있는데, 관음전을 시작으로 금보암, 칠성암 등이 차례대로 문을
열고 있으며, 그 길의 끝에 대승암이 위치한다.


▲  관음암에 펼쳐진 관불의식의 현장
통통한 아기부처가 떨어지는 햇님을 원망하며 관불의식을 애타게 원하고 있다.

▲  금보암
미타사에서 가장 늙은 보물인 윤왕좌 금동관음보살좌상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를 보고자 금보암 법당을 기웃거리며 새가슴마냥 슬쩍슬쩍 살펴봤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  대승암 (오른쪽 건물은 칠성암)

미타사 골목 끝에는 대승암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막다른 곳으
로 2층 주택과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무량수전을 갖추고 있는데, 발길을 돌릴까 하다가 이곳은
분위기가 어떤가 궁금하여 한번 들어가 보았다.
무량수전 주변을 대충 둘러보고 '별거 없구나~!' 싶어 나가려고 하니 갑자기 주택에서 나이가
지긋한 노(老) 비구니가 나와 구경 잘했냐며 말을 건넨다. 하여 그렇다고 답을 하니 자연히
서로 말이 이어져 이야기꽃이 주렁주렁 피어날 분위기였다. 그래서 초파일 행사를 위해 무량
수전 뜨락에 깔아놓은 의자에 앉아서 일종의 선문답(禪問答)을 하게 되었다.

그는 70대 중반의 비구니로 원래 천주교였다가 20대에 출가를 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법명(
法名)을 묻지 못했음> 금보암의 어른 승려로 미타사와 대승암, 미타사에 깃든 오래된 탱화들,
그리고 불교 관련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기에 여러 법문까지 겯들여서 말이다. 대화 내
용은 벌써부터 퇴화된 머리의 한계상 1/3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궁금한 것을 마구 쏟아
내었고, 그는 그런데로 그것을 잘 담아주었다.
마침 목이 말라서 물을 청하니 그는 '허허허~! 우리 절 거덜내러 왔어여?' 웃으면서 생수 1병
을 공양간 냉장고에서 꺼내주었다. 그리고는 방금 맞춘 거라며 절편이 두둑히 담긴 비닐 1봉
지와 음료수 1병까지 건네주었다. 미타사는 16시 끝 무렵에 도착한 탓에 초파일 인심을 확인
하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금보암에서 그런데로 괜찮은 인심을 받았다.


▲  대승암 무량수전 앞에 차려진 관불의식의 현장
앞서 극락전, 관음전과 달리 코끼리 등 위에 아기부처의 자리를 마련했다.


금보암은 경내 구석에 위치해 있고 시간도 17시 이후라 그곳까지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
다. 대부분 천불전이나 관음암 정도에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물론 초파일 아침부터 오후 3~4
시까지는 그런데로 사람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저녁이 코 앞이니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
도 따분하여 하품을 쏟아낸다.

비구니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벌써 17시 40분이다. 초파일이 저물어감을 매우 아쉬워
하며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은 이제 어찌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일부터 인부를 고용해 모
조리 철거한다고 하며, 이들 연등은 절 창고에 나누어 보관한다고 한다.
그렇게 선문답을 마치고 무량수전 내부를 잠깐 둘러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안에 찍을
것들이 많다며 다 찍고 가라고 그런다.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승암 무량수전

▲  화려한 모습의 무량수전 닫집과 풍만하고 후박하게 생긴 아미타불

무량수전 내부는 노비구니가 이른 데로 정말 볼거리가 많았다. 붉은 지붕의 닫집은 내원궁(內
院宮) 현판을 내밀고 있고, 그 밑에 얼굴 살이 많고 목이 두꺼운 아미타불이 후덕한 표정으로
불단에 앉아 있다.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색채감 넘치는 아미타후불탱이 마치 칼라TV에 나온
만화와 같은 모습으로 생생히 자리해 있고, 불단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온갖 과일들로 불단이
무너질 지경이다.
닫집 지붕 앞에는 극락조(極樂鳥)로 여겨지는 새와 천녀(天女)가 날개를 펄럭이고 있고, 꽃을
비롯한 온갖 무늬들이 그려진 우물천정이 곱게 무량수전의 하늘을 수놓고 있다. 이들 모두 근
래 조성된 것들이라 다들 맨들맨들한데, 여기서 불단 우측 벽과 좌측 벽을 꼭 살펴보자. 그러
면 대승암의 오래된 탱화 2점이 시야에 흔쾌히 아른거릴 것이다.


▲  대승암 관음탱
관세음보살은 그림의 주인공답게 푸른 두광(頭光)과 노란색 신광(身光)을
갖추고 있고, 관세음보살을 향하고 있는 양쪽 협시들은 푸른 두광만을
갖추고 있다.
 

불단 좌측 벽에는 관음탱이 걸려있다. 백의(白衣)를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을 중심으로 지장보
살<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과 용왕으로 보이는 존재를 좌우에 두었다. 이 탱화는 고맙게도
밑에 붉은 화기(畵記)를 두어 조성시기를 알려주고 있는데, 광서(光緖) 10년(1884년) 9월, 북
한산(삼각산) 내원암에서 조성하여 수월도량공화불사(水月道場空花佛事)에 점안봉안하고 종남
산 미타사로 옮겼다. (이후 내용은 너무 흐리게 나와서 내용 파악이 불가함)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 관세음보살의 협시(夾侍)로 나타나는 선재동자(또는 지장보살)와
용왕을 3존도 구도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19세기에 잠깐 나타나는 이 땅에 흔치 않은 구도
의 관음탱으로 지방문화재 자격이 충분하다. 하여 비구니에게 이를 이야기하니 문화재 지정도
좋으나 대신 관리가 더 까다로워진다며 아직은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다고 한다.
요즘 서울의 많은 절에서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 불상까지도 앞다투어 지
방문화재 신청을 하고 있는 추세인데, 미타사는 그런 것에는 딱히 관심은 없는 모양이다.


▲  대승암 칠성탱

불단 우측 벽에는 8폭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칠성탱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앞
서 관음탱처럼 아주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 중앙에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와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싹 몰아넣은 치성광삼존도가 있고, 나머지 7폭에
는 칠성원군(七星元君, 북두칠성)을 하나씩 담았다. 지금까지 많은 칠성탱(칠성도)를 만났지
만 이렇게 생긴 것은 처음 본다.

이렇게 무량수전 내부를 살피니 벌써 18시가 되었다. 그 비구니는 법회(法會) 때 입는 복장을
갖추고 저녁예불을 위해 무량수전으로 들어왔는데, 저녁예불을 구경하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
서 잠시 예불에 참관했다가 슬쩍 그곳을 나왔다. 나중에 다시 인연이 되면 그때 여러 좋은 법
문을 청해볼 생각이다.


▲  칠성암(칠성각)

대승암을 나와 그 밑에 있는 칠성암도 잠시 들렸다. 칠성암 법당에서도 한참 저녁예불이 이루
어지고 있었는데, 대승암과 달리 아줌마 신도들이 제법 자리를 채웠다.

칠성암에는 1899년에 제작된 현왕탱과 신중탱이 있으나 친견은 하지 못했으며, 형제바위와 접
한 곳에는 산신각을 두었다. 형제바위는 넓직한 바위로 예로부터 치성 및 기도처로 널리 쓰였
다.


▲  호화로운 칠성암 법당 내부
법당 닫집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현판이 걸려있고, 닫집을 받치는 기둥에는
금색이 칠해져 있어 호화로움의 격을 제대로 높여준다.


칠성암을 끝으로 미타사 관람을 흔쾌히 마무리를 지었다. 미타사 본진을 비롯하여 용운암, 관
음암, 금보암, 대승암, 칠성암 등 5개의 암자만 살펴보았고, 나머지 토굴암과 정수암, 금수암
은 모두 통과했다. 그들은 딱히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보암의 희귀한 보살상을 친견하지
못해 매우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기대도 별로 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를 볼 인연이 아니기 때
문이다. 그래도 별로 기대하지도 않고 들렸던 대승암에서 뜻밖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 미타사
와의 첫 인연은 그런데로 괜찮았다.

이렇게 하여 옥수동 미타사 초파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가보았고, 그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초파일 인심까지 마음껏 누렸으니 비록 해가 짧아 아
쉽긴 하지만 미련은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415-1 (독서당로40길 21 ☎ 02-2297-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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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산사 나들이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나한도량을 내세우고 있는 수락산 학림사 (수락산 귀임봉)

 


~~~~~ 초여름 산사 나들이, 수락산 학림사 ~~~~~

▲  학림사 경내

▲  학림사 석불좌상

▲  수락산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슬슬 고개를 들던 7월의 첫 무렵, 서울의 동북쪽 지붕인 수락
산을 찾았다.
수락산(水落山, 638m)은 그의 그늘인 상계1동에 8년을 살면서 수없이 안겼던 뫼로 지금은
도봉산(道峯山) 그늘인 도봉동에 살고 있지만 가끔식 중랑천(中浪川)을 건너 수락산의 품
을 찾는 편이다.
수락산에는 다양한 코스가 있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학림사로 올라가기로 했다. 지하철
4호선의 북쪽 종점인 당고개역에서 상계3,4동 달동네를 가로질러 수락산의 품으로 들어섰
는데, 길이 좀 복잡하긴 해도 햇갈릴만 하면 이정표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니 헤맬 염려는
거의 없다.

달동네를 벗어나니 여름 제국(帝國)의 은혜로 연두연두하게 익은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
다.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며, 길의 경사가 완만하여
그리 힘든 것은 없다.


▲  녹음에 잠긴 학림사 가는 길

▲  학림사 200m 직전 (학림사 부도 앞)


 

♠  학림사 입문 (부도와 석불좌상)

▲  학림사 부도(浮屠)

숲길을 어느 정도 오르면 발을 잠시 쉴 수 있는 나무 벤치와 수락산 안내도, 그리고 늙은 티
가 풍기는 부도(승탑) 2기가 마중을 한다.

이들 부도는 학림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존재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다정함이 물씬 풍기는
부부처럼 다가온다. 왼쪽에 조금 평퍼짐한 부도는 남편, 오른쪽에 홀쭉한 부도는 아내, 그들
이 나에게 기념촬영을 요청하는 것 같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대추알 모양의 길쭉한 탑을 얹히
고 머리장식을 올렸는데, 누구의 부도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그중 1기에 '상궁(尙宮)~
' 명문이 있어 학림사에서 여생을 마친 궁궐 상궁의 부도임을 귀뜀해준다. 부도는 원래 경내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부도에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자욱해 중후한 멋을 풍긴다.

▲  나무 벤치와 부도

▲  부도의 뒷모습


▲  학림사 약사전(藥師殿)

부도를 지나 학림사 안내문에 이르면 오른쪽에 약사전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다. 안내문 옆
높은 곳에 담장을 두르고 들어앉은 약사전에는 학림사에서 자랑하는 오랜 보물이자 영험하기
로 이름난 석불좌상(약사여래상)이 봉안되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접해온 약사전은 모두 경내에 있었다. 허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경내로 들어서
는 길목에 세워두어 중생들로 하여금 가장 먼저 찾게 하였으니 그만큼 약사불이 학림사의 간
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곳 약사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이름이 쓰인 현판을 보니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힘이 넘쳐보이는데 '藥(약)'자가 '茶(다)'로 보인다. 건물 주변
으로는 담장이 빙 둘러져 있으며 건물 앞에는 석등 1기가 멀뚱히 서 있다.


▲  학림사 석불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2호

약사전의 주인장인 석불좌상은 키가 불과 77cm(어깨 너비 53cm)에 불과한 아주 왜소한 석불이
다. 신체 비례가 너무 떨어져 얼굴 높이가 신체의 거의 2/5에 이를 지경이며, 석불이 앉아있
은 연화대좌(蓮花臺座)는 높이 42cm로 석불보다 덩치가 더 크다. 연꽃이 위로 향한 앙련(仰蓮
)과 아래로 향한 복련(伏蓮)이 대좌를 화사하게 꾸며주고 있는데, 자신보다 큰 대좌 위에 앉
은 모습이 마치 조그만 아이가 커다란 의자에 걸터앉은 것 같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석불
은 거의 네모난 얼굴로 두 눈은 살짝 감겨져
있고 코는 깎여나가 윤곽만 남아있다. 입술에
는 약간의 미소가 드리워져 있고, 중생의 소망
을 모두 들으려는 듯, 커다란 두 귀를 지녔다.

목은 두꺼워서 어깨와 단단히 붙었고, 가슴 앞
에 모은 그의 손에는 조그만 약합이 들려져 있
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배꼽
밑 아랫도리는 보이지가 않는데, 오래전에 사
라진 것으로 여겨지며, 그 모습을 통해 아마도
입상(立像)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 여기서 잠시 학림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옆에서 바라본 석불좌상과 대좌


▲  학림사 경내 직전 (오른쪽 계단은 용굴암, 수락산 정상 방면)


덕릉고개 너머에 있는 흥국사(☞ 관련글 보러가기)가 약사도량(藥師道場)으로 좀 유명하다면
학림사는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 명성이 조금 자자하다.
학림사란 이름은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이른바 학지포란(鶴之抱卵)의 지
세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런 지세에는 무거운 돌로 만든 탑이나 석물은 가급적 피해
야 된다는데 근래에 3층석탑과 5층석탑, 석불 등을 잔뜩 지어놓아 자칫 알이 깨져 탈이 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곳은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671년에 원효대사(元曉大
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없으며, 1881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순항(金淳
恒)이 쓴 '학림암중수기(鶴林庵重修記)'에
'절의 내력을 적은 문서가 모두 사라져 절을 창건한 이와 절의 사적(事蹟)을 알지 못한다'

였으니 원효대사의 창건설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나옹화상 혜근(懶
翁和尙 慧勤, 1320~1376)이 머물렀다고 하지만 학림암중수기에는 언급조차 없다.

중수기에 본격적으로 기록이 나타나는 건 16세기 이후로 임진왜란 시절인 1597년에 절이 소실
되었다고 한다. 1624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터만 남은 이곳에 법당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
켜 세웠으며, 1780년에 최백(崔伯), 궤징(軌澄) 두 승려가 중수하고 1830년에 다시 손질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문 닫기 직전에 이르자 1880년 영상(景惺), 경선(慶船) 두 승려가 나서
절을 일으켜보려고 했다. 허나 돈이 한 푼도 없어 애태우다가 마침 판관 하도일(判官 河道一)
이 절을 찾아오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절의 사정을 전해들은 하도일은 서울로 돌아가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학림사 중수를 건의했
고 이에 황후는 천금의 하사금을 지원했다. 그 돈으로 중수가 마무리되자 단청은 찬란하여 빛
을 발했다고 하며, 부처의 성전은 의연하게 자리잡았다고 중수기에는 적고 있다.

1918년 4월 주지 금운(錦雲)이 중수를 했는데 승려 연응(淵凝)이 '학림암대방여각전각중수기(
鶴林庵大房與各殿閣重修記)'에
'전각이 낡고 기울어 거꾸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보다 못한 금운화상이 발심해 작
은 물건까지도 모두 보시(報施)해 다시 세우니, 가히 후세의 귀감이 될만하다'
고 기록했으니
중수 이전 절의 상태가 가히 짐작이 간다.
또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역과 지척이라 매년 봄과 가을 제사 때마다 많은 제물을 부담
했다. 심지어는 절을 묘역에 포함시키는 등 그 폐해가 컸다고 하며, 1927년에는 도정궁(都正
宮) 소유가 되면서 절을 찾는 중생이 줄어 수입이 감소하기도 했다.

흥국사처럼 왕실의 원찰(願刹)은 아니나 궁궐 상궁들이 자주 드나들며 자신들의 안녕을 빌었
고 퇴직하여 오갈 데 없는 상궁들이 기거하기도 했다.
6.25 때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어 다시 쇠퇴의 늪에 빠졌으나 1985년 전각들을 개축하고 대
웅전, 오백나한전 등을 새로 지었으며, 1994년에 노원역 부근에 7층 규모의 불교회관을 지어
올리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선불당, 청학루, 약사전, 삼성각, 오백나한전 등 9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삼신불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1호
)
와 석불좌상,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등 지방문화재 3점이 있다. 이중 괘불(掛佛
)은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어려워 아예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좌상과 부도 2기 등의 비지정문화재가 추가로 전하고 있다.

학이 알을 품은 지세라 그런지 포근함이 느껴지며, 비록 시내와 가깝지만 첩첩한 산골에 들어
선듯 산사(山寺)의 고즈넉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4동 산1
(덕릉로129가길 241 ☎ 02-936-1700)


▲  학림사 옆구리로 흐르는 계곡
계곡과 나란히 한 산길을 1km 오르면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
용굴암(龍窟庵)이 나온다.


 

♠  학림사 경내 둘러보기

▲  학림사 해탈문(解脫門)과 108계단

약사전을 지나 100m 정도 가면 경내로 인도하는 108계단 앞에 이른다. 계단 중간에는 해탈문
이 걸려있는데, 문 바깥 쪽에는 우람한 모습의 금강역사(金剛力士)상이 그려져 있고, 안에는
사자를 탄 천진난만한 표정의 문수동자(文殊童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가 중생
을 맞는다. 그들 뒤로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그려져 있어 천왕문(天王門)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  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

▲  108계단에서 만난 원숭이들 - 그들의 자세에는 모두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다.

108계단에는 4쌍(8마리)의 귀여운 원숭이 조각이 배치되어 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
부터 눈을 가린 원숭이, 귀를 막은 원숭이,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까지 적
당히 거리를 두며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의 자세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학림사에서
그저 눈요기나 하라고 갖다놓은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우선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쁜 말을 내뱉을 바에는 차
라리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 좋다. 그 다음 눈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것을 보지 말란 뜻이며,
귀를 막은 원숭이는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뜻이다. 끝으로 두 손을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
이는 이들을 모두 지키며 열심히 정진하면 해탈의 환희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를 제외한 3가지의 원숭이는 속인(俗人)들에게 중요한 충고 3가지를 자
세로써 보여주고 있다. 나쁜 것을 말하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정말 극
락처럼 아름다울 것인데 사람은 동물과 신(神) 중간에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존재라 좀처
럼 지키려 들질 않는다. 원숭이의 메세지를 뼛속 깊이 새기며 계단 끝에 이르면 청학루 뜨락
이다.


▲  학림사 청학루(靑鶴樓)와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108계단의 끝에는 포대화상과 2층 누각의 청학루가 자리해 있다. 설법전(說法殿)이라 불리기
도 하는데, 대웅전으로 통하는 1층 좌우에 종무소(宗務所)가 있고, 2층은 강당(講堂)으로 쓰
인다. 2층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불암산이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보이며, 돌로 다진 청학루
밑에는 공양간 등이 들어있다.

청학루 앞에는 4명의 동자승을 안고 있는 똥배 포대화상이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복덕원
만(福德圓滿)한 인상을 지닌 그는 많은 절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몸집이 비대하고 배가 축
나왔으며, 항상 커다란 자루를 등에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으며 시주를 하거나 인간사의 길흉
을 점쳤다는 승려로 미륵불의 화신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의 배를 만지면 복이
오거나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이들이 그의 배를 살살 문지르며 소망을 들
이민다.


▲  청학루에서 바라본 불암산의 위엄

▲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나한도량을 자처하는 절답게 대웅전 밑에 오백나한이 봉안된 오백나한전을 두었다.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오래된 약사여래상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대
동하여 약사여래3불좌상을 이루고 있으며 그 좌우로 16나한상, 그 뒤로 조그만 500나한을 빼
곡히 배치해 놓았다.
이 땅의 7,000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색채를 지닌 500나한의 모습은 이곳을 둘
러보는 중생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한다.


▲  오백나한전 내부 오백나한상과 약사여래3불좌상, 16나한상
오백이 넘는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앞을 향하고 있으니 건물로 들어서는
내가 부담스러워 마주보기가 쑥쓰러울 지경이다.

▲  석조약사여래3불좌상 및 복장유물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6호

500나한과 16나한 등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는 약사여래3불좌상은 가운데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조성 시기는 수락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
나 조선 중기 또는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나한(羅漢)들이 죄다 칼라 색채를 지닌데
반해 약사여래3불좌상은 온통 하얀 피부과 검은 머리로 이루어져 흑백사진을 이룬다.
이들은 옥돌로 조성된 것으로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구부정한 자세이다. 표정은 동
자승을 모델로 했는지 작고 귀엽기 그지 없으며,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다. 가운데 약사여래는 약합을 들고 있어 그의 정체를 알려주며, 불상의 바닥면에는
복장공이 있고, 내부에는 복장(腹臟)이 들어있으나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겠다.


▲  오백나한전과 마주한 선불당(選佛堂)
승려들의 수행공간으로 선불장(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  웃음을 묻어나게 하는 동자상
해맑은 표정의 동자가 엉덩이를 요염하게 쳐들며 연꽃 향기에 심취해 있다.
동자승의 연꽃 심취를 돕고자 대웅전과 소나무가 그에게 늘 그늘을
드리우며 여름 햇살을 막아준다.

▲  대웅전(大雄殿)과 5층석탑

높은 계단 위에 위엄 돋게 자리한 대웅전은 학림사의 법당(法堂)으로 1985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고 우기고 있
는 청동석가여래좌상이 있으며, 석가여래상 뒤로 1985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화가 있고 좌
우 벽면에는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천불탱 등이 깃들여져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대웅전 내부는 마침 영가(靈駕)를 위한 49재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살짝 담았다
. 유난히 귀가 큰 석가여래상은 청동(靑銅)으로 빚어 금색을 입힌 것으로 좌우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앉아있다.
절에서는 이 석가여래상이 신라 후기(또는 고려 초기) 불상이라고 우기고 있으나 절의 역사나
불상의 양식을 볼 때 조선 불상으로 여겨진다. 옛날이야 신라 불상이라고 우기면 다 통했지만
이제는 불교미술사학과 불상의 시대별 양식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이니 함부로 우기다가
는 망신만 당한다. 그만큼 시대는 바뀌었다.


▲  멋드러진 노송(老松) 1그루
대웅전 뜨락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로 그의 나이는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으나
약 100~150년 정도로 여겨진다. 보호수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3층석탑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탑으로 2중으로 된
기단부가 탑의 40% 정도를 차지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청학루와
오백나한전, 5층석탑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삼성각(三聖閣)
1985년에 지어진 1칸짜리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  산신과 호랑이, 동자가 담긴 산신탱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  특이한 모습의 4사자 3층석탑
사자가 있는 부분이 1층을 이룬다.


▲  석조미륵불입상(石造彌勒佛立像)

경내 서쪽에 서 있는 석조미륵불입상은 근래에 세운 것이나 몸통에 검은 때가 약간 입혀져 나
이가 조금 들어 보인다. 처음에는 100년 이상 먹은 미륵불인가 싶었는데 대략 20년 정도 되었
다고 한다.
온후한 표정을 지닌 석불로 연화대좌 위에 우뚝 서 있으며 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데 생김새가 석탑의 옥개석(屋蓋石)과 상륜부(相輪部)를 얹혀놓은 것 같다.

이렇게 학림사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옆 산길을 통해 노원골 남쪽 능선으로 올라갔다. 여기
서 능선을 통해 귀임봉을 거쳐 노원골로 내려갈 생각에서였다.


 

♠  수락산 귀임봉

▲  노원골 남쪽 능선길 (당고개공원 갈림길)

노원골 남쪽 능선길은 영원암 뒷쪽 노원골갈림길에서 귀임봉을 거쳐 수락산보루(堡壘)까지 이
어지는 환상의 지붕길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느긋하며 마치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한 길로 좌
우로 좁게나마 천하가 펼쳐져 있어 조망 또한 좋다. 예전 상계1동에 살 적에 즐겨찾던 산길로
약간의 오르막만 감내하면 도달할 수 있다.


▲  귀임봉 조망대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있을 뿐, 완만한 곡선을 이루던 능선길은 귀임봉에서 아주 조금 흥
분기를 보인다. 다시 하늘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귀임봉은 해발 280m로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꼭대기 동쪽에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는
데, 수락산 산줄기와 정상, 덕릉고개, 불암산, 상계3,4동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왼쪽에 높은 봉우리가 정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남쪽 줄기와 덕릉고개, 불암산 북쪽 줄기

▲  귀임봉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당고개역, 상계3,4동 지역

▲  귀임봉 서쪽 바위길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대자연이
수락산 끝에 살짝 빚어놓은 작품이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도봉동,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의
장대한 산줄기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창동, 도봉구 지역
산 밑이 온통 아파트 일색~~ 이 땅에 너무 흔한 풍경이다. 가까이에 보이는
봉우리 정상에 수락산보루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회색빛
아파트의 물결이 거치게 출렁이는 외로운 섬을 보는 듯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노원구, 중랑구 지역

수락산보루까지 가려고 했으나 일몰시간이 자꾸 눈치를 주어 보루 봉우리 직전에서 노원골로
철수했다. 아쉽긴 하지만 일몰 직전이라 설령 가서 사진에 담더라도 대부분 일그러지게 나올
것이다. 하여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흔쾌히 미루고 미련 없이 속세로 내려왔다. 어차피
집과도 가깝고 나에게도 매우 익숙한 곳이다.

이날 수락산 코스는 '당고개역 → 학림사 → 노원골 남쪽 능선 → 귀임봉 → 노원골'로 소요
시간은 출사 시간을 포함하여 3시간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수락산 학림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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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미타사
~~~~~

▲  미타사 백의관음도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사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
왔다. 비록 불교 신자까지는 아니나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해 그날에 대한 설레
감이 큰 편이다. 하여 매년 연례행사처럼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
울을 중심으로 고색이 여문 절이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20세기 이후) 사찰을 대상
으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상시에도 절 답사/투어를 많이 하는 편임)

이번 초파일에는 어디를 가야 칭찬을 받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미답(未踏)으로
남은 서울 지역 사찰은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다행히 보문사(普門寺) 바로 옆에 미타
사가 마치 고갈에 대비한 듯,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그를 이번 나들이 동선에 흔
쾌히 넣었다. 그곳은 오래된 석탑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선 후기 탱화를 다수 보유
하고 있어 은근히 군침이 돌았다.

드디어 초파일의 여명이 밝아왔다. 제일 먼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아 그곳에 깃든 지방문화재(마애관음보살좌상, 마애사리탑)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점
심 공양으로 두둑히 배를 채웠다. (☞ 학도암 글 보러가기)
학도암에서 공양까지 마치니 시간은 벌써 13시가 넘었다. 그날따라 해가 참 짧게 느껴
져 점점 기울어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해 낙산(駱山) 동쪽에 자리한
미타사로 이동했다. 이곳은 보문사 바로 북쪽으로 서로 바짝 붙어있는데 얼핏 보면 같
은 절로 보일 수 있으나 엄연히 다른 절집이다. 허나 그들 모두 비구니 절이고 탑골승
방의 일원이라 이웃사촌 마냥 가깝다.


▲  집으로 경내를 꽁꽁 두룬 미타사 (미타사 정문 앞)


 

♠  미타사(彌陀寺) 입문 (대웅전)

▲  미타사 정문(일주문)

미타사는 사방이 꽁꽁 막힌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마치 속세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놀겠
다는 의지처럼 말이다. 절 남쪽은 보문사와 닿아있고, 동쪽과 북쪽은 건물 벽으로 막혀있으며,
서쪽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나 경동고등학교의 경계선 앞에서 결국 길이 끊긴다. 보문사에서
미타사로 이어지는 골목길(보문사길) 또한 미타사 앞(보문아이파크아파트)에서 짧게 그 길을
접는다.
이곳이 이런 구석진 모양새가 된 것은 서울 시내 팽창에 따른 개발의 영향이 크다. 원래 낙산
숲과 밭두렁이 주를 이루던 변두리였으나 1950년대 이후 시가지 확장으로 주택들이 마구 들어
서면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포위된 외로운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절도 속세의 기운
을 경계하고 속세와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자 사방을 건물로 두룬 폐쇄적인 모습이 되었다.

절 앞에 이르면 '미타사' 현판을 내건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이 문은 속세와 미타사를 이어
주는 존재로 일주문(一柱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문사와 미타사는 들어앉은 위치상 따로
일주문을 둘 처지가 못해 절과 속세의 경계에 이렇게 기와문을 두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보시함


정문을 들어서니 바로 정면과 왼쪽에 선방(禪房)과 요사(寮舍)가 있고, 오른쪽에 관음전과 대
웅전 뜨락이, 그리고 뜨락 서쪽 계단 너머로 대웅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뜨락에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
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온갖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껴얹으면서 나름의 소망을 들이민다. 그 앞에는 보시함
이 옥의 티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부처가 부리
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來歷)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5층석탑에서 바라본 미타사 경내
(바로 앞에 뒷통수를 보인 건물이 삼성각)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낙타산) 동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는 950년에 혜거(慧居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때 법등(法燈)을 켰는지는 심히 의문이나 1047년에 세웠다는
석탑이 있어(그 탑의 탄생 시기도 확실치 않음) 고려 초/중기에 지어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웃 보문사는 1115년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1314년 혜감국사(惠鑑國師) 만항(萬沆)이 중수했다고 하며, 1457년에 단종(端宗)의 왕후인 정
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낙산의 동남쪽 봉우리) 주변에 머물면서
중수했다고 전한다.
조선 초부터 미타사는 보문사와 한 덩어리로 '탑골승방(僧房)'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여
기서 탑골은 미타사에 있는 5층석탑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문사와 미타사 일대를 탑골이라 불
렀는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조선 왕실과의 인연이 두터워 후궁과 상궁(尙宮)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의지하거나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 
탑골승방 외에도 옥수동 두뭇개승방(미타사), 석관동 돌곶이승방(연화사), 숭인동 새절승방(
청룡사)도 있어 이들을 묶어 한양도성 밖 4대 승방이라 불렀으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탑
골승방과 성격이 비슷하다.

1801년에 중수를 했으며(이때가 4차 중수라고 함) 1836년에 비구니 상심(常心)이 인일(仁一)
의 도움으로 중수했다. 1969년 계주(季珠)가 고봉(古峰)의 도움으로 중수했으며,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관음전, 단하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관음전
은 지하에 공양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쪽은 보문사와 연결되어 있어 서로 왕래를 한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상, 대웅전과 삼성각, 단하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보문사와
비슷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도와 백의관음도, 아미타후불도 등 지방문화재 8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 모두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이들은 대웅전과 삼성각에 나눠 봉안되어
있으나 백의관음도는 관음전과 이어진 '불이문'이란 건물에 따로 있다. (그림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음)
그리고 앞서 언급한 1047년에 조성되었다는 5층석탑이 있는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탄생 시기는 의심스러우나 고려 때 탑은 분명해 보인다. 탑골이란 이름까지 낳은 장본인이나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도 거뜬히 받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있는 듯 싶다.

현재는 조계사의 말사(末寺)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이며, 낙산 자락에 있지만 '삼각산(三角山
)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비록 북한산(삼각산)이 여기서 거리가 좀 되지만 그 줄기가 낙산까
지 이르고 낙산이 다소 부실하게 생겨 멀리 있는 북한산을 가져와 칭한 것이다. 이곳 뿐만 아
니라 낙산에 안긴 보문사와 청룡사(靑龍寺) 또한 낙산 대신 삼각산을 칭하며 북한산에 의지하
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낙산 일대 절들은 비구니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지금 또한
여전하여 그 점이 참 흥미롭다. 미타사와 보문사, 청룡사, 거기에 최근에 지어진 정각사(正覺
寺)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실과 사대부 여인과의 적지 않은 인연 때문
일 것이다. 

예전에는 숲이 짙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대단했을 것이나 자비 없기로 유명한 개발의 칼질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갇힌 별천지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보문사의 그늘에 가려져 인지도도
낮은 실정이다. 비록 보문사보다 법등(法燈)의 역사는 조금 길고 문화유산도 풍부하나 이제서
야 처음 인연을 지을 정도이니 그곳의 인지도를 알만하다. 그래도 초파일이라 사람들도 제법
많았고, 관불의식과 연등 만들기, 불화(佛畵) 그리기, 전통차 시음 등의 이벤트도 열리고 있
어서 보문사보다는 덜 심심한 풍경이었다.

참고로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개화산(開花山)과 옥수동에도 '미타사' 간판을 내건 오래된 절
이 있다. 즉 3개의 늙은 미타사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51 (보문사길 6-16, ☎ 02-923-1738)


▲  강렬한 햇살과 연등의 위엄으로 다소 흐릿하게 다가온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미타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20세기 후반에 지
어진 것으로 오색 연등이 허공을 가리고 있는 동쪽 뜨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가3존상을 비
롯해 고색이 묻어난 아미타후불도와 감로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다.

▲  연분홍 연등으로 곱게 분을 바른
대웅전 앞

▲  대웅전 내부


▲  대웅전 석가3존상과 아미타후불도(阿彌陀後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8호
)


대웅전 불단에는 잘생긴 석가여래가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바로 그 뒷쪽에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도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데, 석가3존상 뒤에 석가여래도 아니고 아
미타불(阿彌陀佛)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미타후불도가 걸려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아무래도 절 이름이 '아미타불'의 줄임말(미타)에서 비롯되었고 따로 아미타불의 거처를 마련
하기도 여의치 않아 이곳에 둔 모양이다.

이 아미타후불도는 1873년에 신중도, 지장시왕도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제작자의 센스 부족으
로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
대 제자, 사천왕(四天王),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빼곡히 모여 정모를 하고 있는 일종의 아
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로 그림 중앙에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
진 아미타3존상이 낮은 불단에 마련된 연꽃대좌에 앉아 있으며, 그 주위로 6대 보살과 10대
제자, 금강역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은 평상에 편하게 앉아 있는데, 이는
다른 탱화와 확연히 틀리다. (다른 탱화의 사천왕은 모두 서 있음)
폭이 넓은 액자형의 화면 크기나 낮은 불단의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아미타3존상의 모습, 그리
고 평상에 앉은 사천왕의 등장은 경북 예천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
한 것으로 그 예가 별로 없다고 한다. 하여 그 때문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8호

대웅전 남쪽 벽에는 보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아주 복잡한 그림이 있으니 바로 감
로도<감로왕도(甘露王圖)>이다.
감로도는 이름 그대로 '맛있는 이슬'이란 뜻으로 여기서 이슬은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
을 베풀어 해탈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매우 파란만장한 스타일의 그림이라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림 해석이 어려워 거의 암이 걸
릴 지경인데, 주로 죽은 사람들, 즉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영가들의 위패나
영정을 두기 마련이다.
그림의 줄거리는 대체로 석가여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을 물어 답을 듣는 것으로 그림 상단
에는 아미타3존과 7여래,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을 담았
다. 그리고 중단에는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 아귀가 공양을 먹는 장면, 의식
을 주재하는 사람이 불덕(佛德)을 찬양하는 모습과 승려, 성현(聖賢) 등이 그려져 있으며, 하
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곳 감로도는 1918년에 고산축연(古山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다소 질이 떨어지는 합성연료
를 사용한 탓에 밝은 주홍색이 선명하다. 명암법(明暗法)의 일종으로 넓게 칠하는 요철법(凹
凸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화법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유형은 인근
청룡사(1868년) 감로도와 개운사(開運寺, 1883년), 옥수동 미타사(1887년), 봉원사(1905) 감
로도와 비교할만하며,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와 아귀의 규모가 줄어든 점은 그 시절 감
로도의 경향을 보여준다.
어쨌든 19세기 수도권에서 유행하던 감로도의 도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잘 짜여진 구성과 세
부 묘사가 정교하다.


▲  미타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0호

대웅전 북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있다. 신중도란 호법신중(護法神衆)을 담
은 그림으로 앞서 감로도만큼은 아니지만 등장 인물이 빼곡해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이 그림은 1873년 4월 포화당 정수(布和堂 定修)를 증명으로 하고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
이 출초(出草)를 했으며, 동화당(東化堂)과 두흠(斗欽), 만파당 돈조(萬波堂 頓照), 봉흡(奉
洽) 등이 같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향좌측부터 34cm, 39.3cm, 39.5cm, 39cm, 44.5cm의 비단을 이어 제작했으며 가로로 긴
화면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천부중(天部衆)을, 하단에는 위
태천(韋駄天)과 천룡팔부(天龍八部)를, 하단 중앙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칼과 창으로 무장한
천부8부가 그려져 있다. 그림 윗쪽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공간을 두고 구름 처리를 했으며, 인
물들은 대부분 얼굴이 둥글다. 채색은 다홍 계통의 적색과 녹색, 청색을 사용하여 색깔의 조
화도 괜찮은 편이다.

이 신중도는 19세기 후반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선당 응석의 작품으로 수도권에서는 이
초본을 바탕으로 한 신중도가 널리 유행했다. 섬세한 필치와 원만한 인물 형태, 안정적인 색
채로 19세기 말 수도권 신중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9호

신중도 옆에는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저승(명부, 冥府)의 식구들이 담겨진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계유생(癸酉生, 1813년) 이씨 부인이 부모와 남편인 정축생(丁丑生, 1817년) 남씨
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돈을 내어 만든 것으로 아쉽게도 제작 시기와 최초 봉안지가 화기에 나
와있지 않다. 허나 1873년에 조성된 신중도 제작에 참여한 포화 정수, 수산당 부윤(秀山堂冨
潤) 등이 제작에 나섰고, 신중도와 양식과 화풍이 비슷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은 향좌측부터 14.5cm, 36cm, 36.2cm, 35.8cm, 36cm, 35.5cm의 비단을 이어 그렸는데 여
러 곳이 찢어지고 박락된 부분이 보이는 등 불량한 부분이 조금 있다.
그림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녹색 두광(頭光)과 금색 신광(身光)을 지니며 연화대좌 위에 돋보
이게 앉아있고, 그 좌우에 10왕(시왕)이 지장보살을 바라보고 있으며, 판관(判官)과 사자(使
者), 천녀(天女), 동자(童子) 등이 배치되었다. 특히 지장보살 밑에는 2명의 동자상이 별도로
있는데, 이들 동자는 인간의 선악을 대변하는 선악동자(善惡童子)로 하얀 꽃으로 머리를 장식
했고, 윗도리는 맨살을 좀 드러냈으며, 치마를 두르고 휘날리는 천의로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등장 인물의 얼굴에는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밝
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화기가 다소 부실하긴 하지만 19세기 수도권과 경남에서 유행하던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인
선악동자를 표현한 작품으로 하얀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동자상은 경기도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리던 형식이라 수도권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다.


 

♠  미타사 삼성각, 백의관음도

▲  미타사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이웃에는 삼성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으로 그 앞에는 전통차 시음 및 판매, 과자 제공, 연등 만들기, 불화 그리기 등의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어 미타사의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밝게 해준다. 보문사와 달리 양이(洋夷)
관광객들도 10여 명 정도 찾아와 이 땅의 신나는 초파일을 즐긴다.

나는 전통차 2잔(녹차 비슷한 것으로 기억남)으로 갈증을 단죄하고, 과자 1컵을 받아 불만에
잠긴 뱃속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공양밥은 경내와 이곳의 문화유산을 싹 둘러보고 편안히 먹
을 생각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가끔 그 반대가 좋
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  미타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1호

삼성각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와 산신도, 독성도가 빛바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삼성(三聖)으로 추앙받는 칠성과 산신, 독성(나반존자)을 머금은 그림으로 그들 중에
서 굳이 서열을 둔다면 거의 부처의 대접을 받는 칠성(치성광여래)이 으뜸이라 보통 건물 중
앙에 봉안하고 있다.

칠성도는 그려진 식구들이 많아 대개 복잡해 보인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
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해 있으며, 그 좌우로 칠원성군(七元星君) 등
을 크기를 달리하여 배치했다. 그리고 화기 일부가 훼손된 것을 빼면 상태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이다.
치성광여래는 머리에 뿔이 달린 소가 이끄는 수레 위에 결가부좌(結加趺坐)로 자리해 있으며,
무릎 밑 좌우에 과일을 받쳐 든 동자가 몸은 본존을 향해 있으면서 얼굴은 정면을 향했다. 본
존 광배 주위를 에워싼 28수는 좌우로 대칭하여 14수씩 그려져 있으며, 그 옆으로는 정수리가
봉긋 솟은 태상노군(太上老君)과 좌우필성(左右弼星)이 있고, 상단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삼태(三台)와 6성(六星)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화면 밑 바깥쪽에는 동자상 4위가 있다.

이 그림은 강화도 정수사(淨水寺) 법당 칠성도(1878년), 강남 봉은사(奉恩寺) 북극보전 칠성
도(1886년), 의성 고운사(孤雲寺) 쌍수암 칠성도(1892년) 등과 동일한 형식으로, 19세기 후반
에서 20세기 초반에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경선당 응석과 용계 서익(龍溪 瑞翊),
봉간(奉侃), 현조(現照) 등이 참여하여 조성했다.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 칠성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넉넉하여 지방문화재
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9호

칠성도 오른쪽에는 산신도가 걸려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거의 독성 할배와 비슷한 꼴이라 처
음에는 독성도인줄 알았으나 산신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어 산신도가 100% 맞다.

그림에는 붉은 옷을 입은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가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고, 그 옆에 호
랑이가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산 등, 구름 등이 뒷배경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그림 밑에 화
기가 남아있어 1915년에 초암세복(草庵世復)과 금명운제(錦溟運齊)가 그렸음을 알려주고 있다.
19~20세기 산신도의 전형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표현력이 다소 뒤떨어지는 것으
로 평가되고 있으나 조성시기가 확실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  미타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칠성도 왼쪽에는 독성도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그
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는데, 화기를 통해 1915년에 산신도를 제작했던 초암세복과
금명운제가 조성했음을 알려준다. 19~20세기 독성도의 양식을 보여주는 존재로 조성시기가 분
명하고 보존 상태 또한 좋다.
독성도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는데, 칠성과 산신은 그림만
있는데 반해 독성은 그림과 형상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절에서 다소 각별하게 대우를 받는 것
같다.


▲  미타사 단하각(丹霞閣)

경내 뒤쪽(서쪽) 언덕에는 나무가 조금 우거져 있다. 이곳도 엄연한 낙산의 일부로 지금은 경
동고등학교가 바로 그 위에 터를 닦아 숲의 농도는 엷어졌다. 언덕은 조금 가파른 편이라 돌
로 여러 단의 석축을 다지고 계단을 놓았는데, 그 계단의 거의 끝에 단하각이란 1칸짜리 맞배
지붕 건물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단하각은 무엇일까?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단하각이란 산신각의 다른 이름
으로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미 삼성각에 늙은 산신도가 있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
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닦고 새 산신도를 파서 봉안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북쪽 계단을 오르
면 그 길의 끝에 5층석탑이 있다.

▲  새 그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단하각 산신도

▲  경내 뒷쪽 언덕 (단하각과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계단)


▲  미타사 5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구석진 곳에 고색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5층석탑이 있다.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가득하여 이곳만큼은 정말 산사의 석탑 같은 분위기인데, 그는 무려 거
의 1,000년 전인 1,047년에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만약 맞다면 서울 토박이 탑(외지에
서 옮겨온 것은 제외) 중 가장 늙은 석탑이 된다.
허나 생김새를 봐서는 딱히 1,000년 가까이 숙성된 탑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 때 탑은
분명한 듯 싶으며, 아직까지는 많은 것이 아리송해 한참이나 후배인 19~20세기 탱화들도 받은
지정문화재의 지위 조차 얻지 못했다. 허나 그 탑으로 인해 미타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열었음을 살짝 알려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곳 지명이 탑골이 되었고, 보문사와 미타
사가 탑골승방이란 이름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3층
까지는 고색의 때가 진하며, 옥개석(屋蓋石)과 탑신 일부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형님이 무
심고 할퀴고 간 흔적이 좀 있을 뿐, 대체로 무난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위에 어설프게 얹혀
놓은 2층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너무 흰색이라 근래 새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탑과 한참 무언(無言)의 대화를 즐기고 있으려니 초파일 행사를 도우러 온 보살 아줌마와 절
을 찾은 한 무리의 가족이 올라와 탑을 구경하며 주위를 1바퀴 돈다. 보살 아줌마가 탑을 사
진에 담는 나에게 절 구경을 잘했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하며 공양밥과 백의관음도를 문의하니
모두 관음전에 있다며 밥 1그릇을 권한다. 그래서 이따 내려갈테니 알려달라고 답을 하고 5층
석탑과 삼성각을 더 살펴본 다음 관음전(觀音殿)으로 갔다.

관음전은 대웅전 동쪽에 있는 'ㄱ' 구조의 건물로 서쪽은 관음전, 정문과 맞닿은 동쪽 부분은
특이하게도 불이문(不二門)이란 현판을 내걸고 있다. 문도 아닌 방이 딸린 건물에 문을 칭하
는 점이 참 특이하기 그지 없는데, 백의관음도가 관음전에 있을 것이라 여기고 안을 기웃거렸
으나 딱히 오래된 그림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방에 있던 나이 지긋한 비구니(주지승으로 여
겨짐)에게 문의를 했다. 그러자 저쪽 그림을 손으로 가르키며 백의관음도라고 하는데 그 그림
은 근래 것이라 내가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방황하던 중, 아까 5층석탑에서 만난 보살 아줌마를 만났다. 그는 관음
전 지하 공양간에서 밥을 먹고 가라며 안내를 했는데, 나는 밥보다 백의관음도가 급해 그 존
재를 다시 문의하니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끝에 불이문 방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방에는 보살 아줌마와 할머니 여럿이 이야기꽃을 몇 송이씩 피우고 있었고, 초파일 행사에
동원된 여러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정문과 맞닿은 벽에 백의관음도가 손짓을 하
고 있었다.


▲  미타사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2호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담겨진 백의관음도는 미타사에 깃든 문화유산 중 단연 백
미(白眉)가 아닐까 싶다. 물론 다른 탱화들도 휼륭하나 다들 흔한 그림인데 반해 오래된 백의
관음도는 서울에서 거의 흔치 않은 존재이다.

이 그림은 1906년 미타사 향로전(香爐殿, 지금은 없음) 불화로 조성된 것으로 석옹 철유(石翁
喆侑, 1851~1917)가 제작했다. 화면 중앙에는 넝실거리는 바다 파도와 백의(白衣)를 입은 관
세음보살이 붉은 연잎을 배로 삼아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다.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
는 정병을 들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용왕과 천녀, 선재동자(善財童子), 대나무와 파초
, 구름과 새 2마리가 들러리로 그려져 있다.

관세음보살 건너편 뭍에는 녹색 두광을 갖춘 용왕(龍王)이 마치 장군처럼 갑옷 위에 붉은 옷
을 입고 머리에는 비늘 모양의 견갑(肩甲)과 투구를 거치며 관세음보살을 향해 합장(合掌)을
하고 있다. 이는 청나라 판화도상에서 따온 것으로 근대 불화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채색은 청색과 백색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흰색 위에 갈색으로 윤곽선을 칠하여 음영을 표현
하는 등 새로운 기법이 돋보인다.

분출하는 물줄기와 선재동자의 모습에서 기존의 관음보살도와 다른 20세기 불화의 새로운 경
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관세음보살을 향해 예를 표하는 용왕의 모습은 청나라 판화에 등
장하는 도상을 가져온 것이라 청나라 판화와 서양화법을 수용했던 20세기 초반 수도권 불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늙은 백의관음도는 이 땅은 물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존재라 그
희소성은 더욱 크다.


▲  그림 제작자의 작은 배려, 백의관음도의 신상이 적힌 화기(畵記)

화기에는 조성 시기와 화주(化主), 제작자, 봉안 장소 등이 적혀 있다. 여기서 삼각산 미타사
는 다름이 아닌 바로 이곳 미타사로 낙산 미타사 대신 삼각산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이는 낙
산이 못미더운 탓이다.

화기의 유무와 조성시기 기재 여부에 따라 탱화의 운명도, 가치도 크게 달라진다. 특히 조선
후기 이전 것들은 더욱 그렇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국가 보물까지 지정된 불상이나 그림, 석
조물(석탑, 석불)이 수둑룩한데, 그 기록이 관련 유물의 절대적인 시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
다. 바로 옛 사람들의 이런 작은 센스 하나가 작품의 가치는 물론 그 앞날까지도 크게 열어주
는 것이다.


▲  액자의 눈치를 피해 옆에서 담은 백의관음도의 위엄
용왕과 선재동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로 관세음보살에게 잘보이고자
애를 쓰고 있고, 선녀처럼 생긴 천녀는 공양물을 들며 관세음보살을
맞이한다.


백의관음도를 신나게 사진에 담고 그의 존재를 찾는데 흔쾌히 도움을 준 보살 아줌마에게 고
마움을 표했다. 그는 여기 공양밥이 아주 맛있다며 꼭 먹고 갈 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그렇게까지 식사를 청하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안그래도 먹고 갈려고 했음)

공양간은 관음전 지하에 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공양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딱히 이
정표가 없어서 초행인 사람은 공양간을 찾기가 숨은그림찾기처럼 어려울 수 있는데, 처음에는
정문에서 바로 정면에 보이는 요사가 공양간인 줄 알았다.
미타사의 숨겨진 공간 같은 지하로 내려가니 방으로 이루어진 공양간이 모습을 비춘다. 시간
이 15시에 이르렀음에도 공양을 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초파일 절 구경을 온 양이들도 사람
들의 안내를 받으며 서툴게 밥을 먹고 있었다.

초파일이 되면 대부분의 절집에서 오전부터 오후 적당한 시간까지 공양밥과 떡 등 여러 먹거
리를 제공한다. 이는 절의 초파일 인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미타사는 밥과 나물(호박나물,
콩나물, 김치 등), 고추장은 소신껏 퍼가면 되며, 이들을 그릇에 담아 비벼먹는 이 땅의 흔한
절밥 스타일이다. 그 외에 나박김치와 미역국(고기는 없음)도 있었고, 심지어 부추전 등의 전
도 있어 찬이 매우 풍성했다.
그릇에 무리가 갈 정도로 담았던 밥과 음식은 불과 3~4시간 전에 불암산 학도암에서 배부르게
공양을 했음에도 넘치는 시장기에 그만 모두 빈 그릇으로 만들어 버렸다. 밥이 맛있기도 했지
만 오전부터 이른 더위를 무릅쓰고 절 투어를 벌인 탓에 눈이 침침할 정도로 피곤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시장기도 상당했다. 아무리 배터지게 먹어도 그만큼 절투어에 칼로리를 모조리 소
비하니 이내 배가 고파지는 것 같다.


▲  미타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미역국, 비빔밥, 나박김치)

기분 좋게 공양을 마치고 구석에 마련된 씽크대에서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했다. 보통 절집에
서 공양을 할 때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도록 유도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그릇 잘
섭취했으니 그 정도의 밥값은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후식으로는 믹스 커피가 준비되어 있어 식곤증의 희롱에서 벗어날 겸 1잔 마셨다. 아직도 길
이 바쁜데 벌써부터 나른해지면 곤란하다. 초파일은 공양밥에 초파일 행사, 절에 깃든 문화유
산까지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많아 이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누리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너무 일어난다. 그러니 초파일 해가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여 그날
만큼은 해를 그 자리에 강제로 붙잡아두고 싶을 따름이다.

공양을 끝으로 약 1시간 반에 걸친 미타사 답사는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본글은 여기서 마
무리를 지으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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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4월 2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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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 우이암)'


▲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원통사

▲  무수골 숲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친한 여인네들과 서울의 영
원한 북쪽 지붕, 도봉산(道峯山)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우리집에서도 훤히 보이는 천하의 명산(名山)이다.

둥근 해가 하늘 가운데에 걸린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
식집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을 두둑히 사들고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이번 산행은
무수골에서 시작하여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 문사동계곡을 거쳐 도봉산 종점에서 마
무리를 지었는데,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  너른 암반이 많은 무수골 하류 무수천(無愁川)


 

♠  서울에 숨겨진 별천지이자 아름다운 산골 마을, 무수골

▲  무수골길 (무수골 주말농장 부근)

무수골을 겯드린 도봉산 나들이는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
도하는 무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여기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
수골에서 시작된 무수천이 만나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10분 정도 가면 도봉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단독주택과 빌라가 많은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속인(俗人)들의 집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그림이 바뀐다. 그런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
라보여 뒷배경도 아주 탄탄하며,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산골 분위
기로 풍경이 변한다.

무수천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소에는 물
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 때는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무
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는데, 이때 무수천을 정비하
여 하천 양쪽에 중랑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내었다.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까지 이어짐)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허나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지닌 산골
마을로 좁게는 도봉산과 도봉구, 넓게는 서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큼 높은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의 별천
지가 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에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로 즐비한 번잡한 대도시로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고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산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종
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둘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는
곳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죽었으니 서
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의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며 근심이 없는
곳이라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근심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토막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무려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
들은 그를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해 이유를 물으니 노인
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으로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
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 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인양 팔꿈치를 치는 바람에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
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푹 고아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구슬이 나
왔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너무 기뻐 그동안의 근심을
다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섭취해 건강을 되찾았고, 1달 뒤,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
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하게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감복했고, 이후 노인은 잘 먹고 잘 살며 쓸데없이 오래 살았
다고 전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이곳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 이당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
形)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이 계곡
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
가 영해군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으
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
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의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으로 인도하는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험 등으로도 안길 수 있는 꿀단지 명소이다. 전주이씨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
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
'이란 간판을 달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도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로도 아주 좋다. 계곡 상류는 '원통사계곡(또는 보문
사계곡)'이라 불리는데,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
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무수골길 (세일교에서 윗무수골 방향)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윗무수골, 원통사 방향)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시작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도봉역 방향)

방학동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
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봄을 맞이하여 슬슬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바깥 세상과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나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마
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
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논두렁이
여럿 있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호수처럼 보이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모를 심지 않은
상태라 물만 가득해 마치 조그만 호수처럼 보였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서 10월에 수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숙성되
는 9월 이후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가히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느티나무 주변 윗무수골 (원통사 방면)

200년 이상 묵은 무수골 느티나무 앞에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에 느티
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은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묘역이 있고, 오른쪽(북쪽)으로 식당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들어가면 영해군의 묘
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그리고 느티나무에서 산꾼 왕래가 빈번한 왼쪽(서남쪽) 길로 가면 자현암과 원통사, 우이암으
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
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다운 숲길 100선까지는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
로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의 옆
구리를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햇살도 슬금슬금 피해가는 윗무수골 숲길을 지나면 무수골공원지킴터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3분 정도 오르면(왼쪽으로 가면 함열남궁씨1묘역과 후손들의 거처) 윗무수골 가
장 윗쪽에 자리한 조그만 비구니 암자 자현암이 나타나며, 그곳부터는 완전한 자연의 공간으
로 바뀐다.


▲  자현암 이후 원통사계곡 산길


 

♠  도봉산의 으뜸 계곡, 원통사계곡(보문사계곡)

▲  숲속에 묻힌 원통사계곡

무수골의 최상류를 이루고 있는 원통사계곡은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통사의 다른
이름이 '보문사'라 그런 이름도 지니게 되었는데 그냥 편하게 무수골계곡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이곳은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원통사 부근에서 발원하여 무수골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중
랑천으로 흘러간다. 골짜기는 조촐하지만 주름진 바위와 반석, 수심이 얕은 못이 가득해 아기
자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봉산의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맑고 허공을 덮을 정도로 숲
이 삼삼하다.
오랫동안 서울 근교 경승지로 계곡 밑에 왕족과 사대부의 묘역이 즐비하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발길이 빈번해 오랫동안 그들의 입과 기록에 오르내리던 현장이며,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계
곡을 거쳐 원통사까지는 약 30분 거리로 처음에는 경사가 느긋하다가 막판에 잠깐 각박해진다.
허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이니 그리 걱정은 안해도 된다.


▲  바위와 암반을 가득 품은 원통사계곡

▲  힘차게 쏟아지는 원통사계곡의 위엄

전날까지 비가 적지 않게 내린 탓에 계곡 수량이 매우 풍부했다. 풍부하게 쏟아진 봄비로 간
만에 포식을 즐긴 계곡은 기분이 좋은지 패기가 돋는 물소리를 베풀며 속세를 향해 두둑하게
물을 흘려보낸다.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계곡의 당찬 물소리던가.?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
어지기 때문에 물소리는 늘 우리를 따라다녔다.


▲  원통사계곡과 그를 쫓아가는 산길

▲  원통사계곡의 조촐한 여흥거리, 조그만 폭포와 주름진 벼랑들

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김밥 등의 간식거리를 섭취했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먹으니 꿀을 두르지 않았음에도 다들 꿀맛 같다.
그렇게 뱃속을 달래고 힘이 넘치는 계곡에 속세에서 딸려온 번뇌를 살짝 맡기니 시름이 잠시
나마 잊혀진 듯 하다. 하지만 그 번뇌는 우리가 내려올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解脫)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원통사계곡 상류 부분

▲  경쾌하게 흘러가는 조그만 폭포

▲  원통사계곡에서 바라본 보문능선

▲  계곡 징검다리


▲  원통사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길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느긋한 산길은 계곡 최상류에 이르면 잠시 매정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
서 계곡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는데, 각박한 산자락에 닦여진 나무데크 계단길을 오르면 우이
동에서 올라온 산길과 만나면서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이 서서히 모
습을 드러내 보인다.


▲  하늘의 요새 같은 원통사 (밑에서 바라본 모습)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 때마다 성큼성큼 커져 보이는 원통사, 그 뒤로
원통사의 든든한 후광, 우이암(관음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원통사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동북부 지역)

▲  우이암으로 이어지는 원통사 앞 길


 

♠  서울 지역 사찰 중 2번째로 조망이 우수한 높은 산중의 절집,
~ 도봉산 원통사(圓通寺)

도봉산의 제일 남쪽 봉우리인 우이암(관음봉, 542m) 동남쪽 자락 400m 고지에 원통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원통사는 서쪽과 북쪽이 산과 바위로 모두 막혀있지만 대신 동쪽과 남쪽은 조망이 훤히 트여
있으며, 흰구름이 손에 잡힐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의 품질만큼은 아주 우수하다.
여기서는 도봉동과 도봉구, 강북구를 비롯해 노원구, 성북구, 중랑구, 광진구, 동대문구, 수
락산과 불암산, 봉화산, 아차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이 아낌없이 바라보여 속세에서 오염
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서울에는 많은 산사(山寺)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북한산 보현봉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일선사(一禪寺)가 서울에서 1등으로 조망이 좋은 절이다. 원통사가 도봉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등 서울 동북부와 한강 이북의 동부 지역 중심으로 보인다면 일선사는 도봉구와 노원
구, 은평구, 강서구, 몇몇 구석진 지역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그러
니 조망(眺望) 부분에서는 이곳을 따라올 절집이 없다. 그 다음이 원통사이며, 3위는 호암산(
虎巖山) 남쪽 자락에 안긴 불영암(佛影庵)일 것이다. <불영암은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등
서울 서남부와 광명 지역이 바라보임>
조망은 일품이지만 그만큼 궁벽한 산중이라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석축을 쌓아 터
를 다졌으며, 뒷쪽 바위에도 약사전, 삼성각 등의 조그만 건물을 주렁주렁 올렸다. 거북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는데, 물이 귀할 것 같은 바위 밑임에도 수량이 넉넉하다. 그렇다면 원통사
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원통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864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원통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관련 기록과 유물, 흔적이 전혀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져다
준다. 또한 1053년 관월대사(觀月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
만 1392년에 천은선사(天隱禪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이때쯤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으
며,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현재 나한전으로 쓰이는 조그만 동굴에서 태조 이성계가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굳이 이성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동굴은 승려나 도를 닦는 이의 수행처로 사용되기 마
련이다. 게다가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형상이라는 우이암(관음봉)이
뒷쪽에 있어 지역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관세음보살의 성지(聖地)로 여겼다. 바로 그들을 후
광(後光)으로 삼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조촐히 절을 짓고 관세음도량(관음도량)을 뜻하는
원통사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유인(宥牣)이 중수를 했고, 1810년 청화(淸和)가 중수를 했는데, 중창 이후 나
라에 큰 경사가 있자 나라와 산천의 은혜를 갚았다는 뜻에서 보은사(報恩寺)로 이름을 갈았다.
1887년 응허 한규(應虛 漢奎)가 중창했으며, 1928년 자현(慈賢)이 주지로 들어와 퇴락한 절의
중건을 발원하고 설악산에 머물던 춘성(春城)을 청해 1,000일 관음기도를 올려 1929년에 절을
중건했다.
이후 보경 보현(寶鏡 普賢)을 데려와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1931년에 비로소
1,000일 기도가 끝나자 그해 겨울 보응과 함께 다시 만일 염불회를 시작하여 1933년 칠성각을
세우고 1936년 법당 일부와 큰방을 중수했으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보문사(普門寺)로 갈았
다가 원래 이름인 원통사로 돌렸다. 그리고 1988년 약사탱과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등을 만
들어 봉안했다.

원통사는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 인근 방학동(放鶴洞)과 무수골에 별장과 집을 지
어 머물던 그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조망을 즐겼는데, 영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현명
(趙顯命)과 서명균(徐命均)이 나라 일을 논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 석굴에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기도 마지막 날에 꿈 속에서 하늘
나라의 상공(相公, 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이를 기리고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과 삼성각, 정해료, 범종각, 자연산 석굴
을 활용한 나한전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이미 여러 개의 100년이 지났지만 그에 비
해 고색의 기운은 모두 말라버려 지정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선 말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고, 왜정 때 지어진 원통보전과 탱화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또한 나한전 석굴은 태조가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깃들여져 있으며, 오랫
동안 승려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앞서 이른 데로 조망 하나는 아주 최상급이라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바라보이며, 절 뒷쪽에 자리한 우이암(관음봉)을 들이밀며 관음도량을 내세우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6 (도봉로169길 520 ☎ 02-954-9944)

◀  서울을 굽어보는 범종루(청화대)
매일 새벽 4시와 18시에 은은한 종소리를
서울로 흘려보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히 일품급이다.

원통사는 산정(山頂)에 자리한 탓에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범종루를
대신 정문으로 내밀고 있는데, 절 남쪽 경계에는 돌담을 둘렀고, 동쪽 경계에는 석축을 2m 높
이로 다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절로 들어서려면 범종루의 밑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길이 속세와 원통사를 잇는 유일한 길로
범종루는 청화대(淸和臺)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범종루(청화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오색 연등을 늘어뜨린 원통보전(圓通寶殿)

남쪽을 바라보고 선 원통보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
물이다. 1929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나 여러 번 손질을 더하면서 90
년 숙성된 기운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호
법신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과 백의관세음보살을 담은 관음탱을 두었는데, 원통전은 관음
전(觀音殿)의 다른 말로 관세음보살 누님이 중심이 되야 맞지만 이곳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삼았다. 대신 관세음보살을 그림으로 1폭, 존상(尊像)으로 1기 등 총 2개를 두어 건물의 이름
값은 조금이나마 하고 있다.


▲  원통보전 내부 (왼쪽부터 백의관세음보살탱,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신중탱)

▲  바위에서 샘솟는 원통사 샘터

▲  자연산 석굴에 자리한 나한전

원통보전에서 약사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거북바위 밑에 이곳의 소중한 젖줄인 샘터가 있
다.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라 꼭 1모금 챙겨 마시는 편인데 바위 밑 산정에 있음에
도 물이 풍부한 편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몸 속이 싹 시원해진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하늘이 내린 이슬 맛이 담긴 탓일까? 물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기분이다.


 ▲  나한전(羅漢殿) 내부

샘터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약사전, 왼쪽은 바위 밑도리에 묻힌 나한전으로 이어진다. 나한
전 석굴은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했다는 현장이라 우기고는 있으나 신뢰성은 없으며, 오랫동
안 승려들의 기도처로 쓰였던 것을 근래 손질하여 돌로 만든 석가3존불과 보살입상, 나한상(
羅漢像)을 봉안해 나한전으로 삼았다.
석굴 내부는 더위 두 글자를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며, 촛불이 어둠을 조금이나마 밀어
내고 있으나 다소 어두운 편이다.


▲  거북바위에 둥지를 튼 약사전(藥師殿)
샘터 뒷쪽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그의 등에는 약사여래의 거처인 1칸짜리 약사전이
둥지를 틀고 있는데, 바로 그 앞 바위 피부에 '상공암' 3자가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약사전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


▲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

약사전 바로 앞에 깃든 상공암 바위글씨는 직각으로 선 바위 피부에 새겨진 것이 아닌 누워있
는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상공이
란 정승(正承)을 뜻하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엎어버리기 이전 원통사에 들어와 기도
를 하다가 그 마지막 날 꿈에 하늘나라 상공이 되어 옥황상제를 알현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이곳에 상공암 바위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신뢰하기가 어려우며, 태조(太祖)가 과연 이곳까지 올라와 기도를 올렸는지
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와 회룡사(回龍寺)는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절로 그 절의 설화를 가져와 적당히 빚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이곳을 찾았던 사대부
가 그 전설을 전해 듣고 꿈 속에서 하늘나라 상공이 된 태조를 찬양하고자 거북바위 위에 '상
공암' 바위글씨를 새겼다.

75x230cm 크기로 네모나게 외곽 선을 긋고 그 안에 3자를 새겼는데, 서체는 해서체(楷書體)이
며, 마치 꿈틀거리는 듯 필체가 우수하고 투박하다. 원통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절 경내
에 바위글씨가 있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 글씨는 선비와 사대부, 왕족들이 즐겨하
던 낙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원통사에 그들의 왕래가 잦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약사전 앞에서 꺼꾸로 지켜본 상공암 바위글씨
태조의 하늘나라 꿈 전설을 상징하고자 하늘이 잘 바라보이는 이곳에
글씨를 새겼다.

▲  삼성각(三聖閣) 앞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산 동남쪽 자락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등이 아낌없이 바라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88년 작)
치성광여래와 칠성(七星)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정신이 없다.

▲  삼성각 산신탱 (1988년 작)
흰 수염의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삼성각 독성탱 (1988년 작)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
존자)과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원통사가 우이암(관음봉) 바로 밑이긴 하나 이전보다 더 각박해진 산길을 10여 분을 올라가야
된다. 지도상의 거리는 200m 정도라 금방 이를 듯 싶었으나 체감거리는 거의 1km가 넘어 벌써
부터 땀 육수를 제대로 배출했다.
우이암 그늘이라 그런지 올라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하나같이 생겨
먹은 것들이 예사롭지가 않아 몇몇 바위는 세상이 달아준 이름도 있을 법도 한데 사람들의 귀
차니즘 때문인지 다들 이름표가 없다. 허나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일이지 바위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칼처럼 솟은 우이암의 밑도리를 지나면 우이암을 바라보는 서쪽 봉우리에 이르게 된다. 드디
어 하늘 아래 우이암에 이른 것이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정상부가 바위로 이루어진
우이암 서쪽 바위 봉우리일 뿐,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이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위엄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기고 위엄도 대단한 순 100% 바위 봉
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바람과 비 등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 그것이 지금의 도봉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 도봉산은 자연히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 선인봉, 만장봉, 칼
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며,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
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
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
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성지로 격하게 추
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
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바라보인다.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은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긴 하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
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
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
문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조망과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 민락1,2지구(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까지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두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도봉산과 수락산부터 점
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희롱하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하지만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
이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두 안구와 마음이 싹 위로받은 것 같다. 하긴 이보다 좋은 정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서울시내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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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4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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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고즈넉한 비구니 수행도량, 수원 광교산 봉녕사

 


' 봄맞이 산사 나들이 ~ 수원 봉녕사 '


 

차디찬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4월의 첫 무렵, 경기도의 중심
도시인 수원(水原)을 찾았다.

화서역(1호선)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도심 속의 그림 같은 호수인 서호(西湖)를 둘러보고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 후식거리를 물색하다가 수원시내 동북부에 자리한 봉녕사로
길을 잡았다.


  콘크리트와 개발의 산물에 둘러싸인 봉녕사 표석 (봉녕사입구)


 

♠  봉녕사 입문

▲  봉녕사 일주문(一柱門)

녕사입구에서 봉녕사를 알리는 이정표의 안내에 따라 동남쪽 오르막 길을 5분 정도 가면 봉
녕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일주문은 절과 속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는 문으로 1994년에 지어졌는데 문에 쓰인 목재는 영
천 백흥암(百興庵) 승려인 육문이 희사(喜捨)했다. 육중한 맞배지붕을 받치고자 돌로 기둥을
삼았지만 지붕의 위엄을 감당하기가 버겨운지 바로 옆에 보조용 목조 기둥을 두어 4개의 기둥
으로 지붕을 사이좋게 받쳐들고 있다.


▲  일주문 옆에 자리한 봉녕사 사적비

문 정면에는 '광교산 봉녕사(光敎山 奉寧寺)'
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고, 좌우 기둥에는
'봉
녕사 승가대학(奉寧寺僧伽大學)','봉녕사금강
율원(奉寧寺金剛律院)'이라 쓰인 현판이 자리
해 이곳의 이름과 성격을 알려준다.

문 옆에는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
이 있고, 그 너머로 요즘 한참 난개발이 진행
되고 있는 광교(光敎)신도시가 바라보인다.


▲  일주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에 소나무와 함께 한참 물이 오른 연분홍 진달래꽃이 중생들을
환영한다. 이 언덕은 봉녕사 비구니들이 직접 가꾼 것으로 그 언덕 너머에 바로 봉녕사가 자
리해 있는데, 경내로 다가설수록 언덕의 높이도 낮아져 절 건물의 머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
낸다.
보통 평지나 낮은 곳에 자리한 절들은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거의 정면으로 뻗은 길을 따라가
면 경내 외곽부터 법당까지 줄줄이 나타나는데 반해 여기는 낮은 지대에 자리해 있음에도 지
형상의 이유로 경내를 바로 언덕 너머에 두고 빙 둘러가는 구조를 취했다. 오로지 지름길과
직선을 선호하는 요즘 세상과는 맞지 않게 말이다. 물론 일주문을 지나 쭉 들어가면 알아서
경내가 나오기는 하나 중간에 서쪽으로 90도로 휘어져 경내로 이어지니 이는 부질없는 인생,
너무 빠른 길만 찾으려 하지 말고 조금은 돌아가는 삶도 즐기면서 살라는 봉녕사의 주문이 담
긴 것은 아닐까 싶다.


▲  길이 서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부분에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이라 쓰인 2개의 돌기둥이 나와 중생을 검문한다.

▲  돌기둥을 지나면 나오는 오르막길
경사가 낮은 저 언덕길을 오르면 봉녕사 경내가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  범종루 주변 (정면에 3층석탑과 '佛' 바위글씨가 있음)

조금 구부러진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주차장이 있는 경내 외곽에 이른다. 바로 정면에는 범
종각과 우화궁, 불(佛) 바위글씨가 새겨진 바위 등이 보이고, 왼쪽(남쪽)에는 늘씬한 숲길과
승려들의 보금자리인 육화료(六和寮), 그리고 오른쪽(북쪽)에는 불서각을 비롯해 경내 중심이
질서를 잡으며 정갈하게 펼쳐져 있는데, 여기서 법당인 대적광전까지 길(130m 정도 됨)이 곧
게 닦여져 있어 장쾌한 기분을 누리게 한다. 게다가 길 중간에 시야를 가로막는 문도 없으니
대적광전까지 속시원히 두 눈에 들어와 그런 기분을 더욱 돋구어 주며, 그 길을 척추로 하여
좌우에 향하당과 청운당, 소요삼장 등의 건물과 온갖 석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 자리
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비추는 불서각(쉼터)에는 불교 용품과 서적, 공양미 등을 판매하
고 있는데, 옆 쉼터에는 길다방 커피와 음료수 자판기, 그리고 의자가 넉넉히 배치되어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녕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봉녕사 범종루(梵鍾樓)
2002년에 조성된 범종(梵鍾)을 비롯해 법고
(法故),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의 4물
(四物)이 담겨져 있다.

▲  '佛' 바위글씨의 위엄
크고 단단하게 생긴 바위에 부처를 뜻하는
'佛' 1글자가 마치 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수원 우만동 뒷산에 자리한 봉녕사는 비구니 수행/교육도량으로 수원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광교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광교산 봉녕사'를 칭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광교산과 멀리 떨어져 있어 강원도 고성(高城)의 건봉사(乾鳳寺)가 한참이나 떨
어진 금강산(金剛山)을 가져와 '금강산 건봉사'를 칭하는 것처럼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봉
녕사와 광교산 사이에 도로와 주거지, 경기대가 자리하여 서로를 떨어트려서 그렇지 이곳도
엄연한 광교산(582m)의 일부이다. 정확히 말하면 광교산의 제일 남쪽 끝으머리에 해당된다.

봉녕사는 1208년
원각국사(圓覺國師)가 창건하여 창성사(彰聖寺) 또는 성창사(聖彰寺)라 했다
고 전한다. 원각이 과연 세웠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경내에 고려 중기 석불이 있고, 800
년 정도 묵은 향나무가 있어 13세기에 창건되었음을 그런데로 받쳐주고 있다.
조선 초에는 봉덕사(奉德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1469년 혜각국사(慧覺國師)가 중수하여 봉녕
사로 이름을 갈았다. 혜각국사에 대해서는 적당한 기록은 없지만 세조(世祖)
가 예우했던 신미
(信眉)가 아닐까 여겨진다. 그는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한자로 된 불교 경전을 한글로 해석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승려이다.

이후 1878년까지 무려 4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
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19세기 중반부터 조금씩 중창을 벌인 것으로 여겨진다.


▲  돌다리와 계단 너머로 보이는 대적광전

1878년에는 석가모니후불탱과 칠성탱, 현왕탱을 조성했고, 1891년에 신중탱을 조성했다. 이후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하다가 1971년 묘전(妙典)이 주지가 되면서 우리나라 현대 비구니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묘엄(妙嚴)과 의기투합해 요사와 법당을 신축하고 선원을 개원했으며, 1974
년에 대웅전을 신축하고, 석가불을 봉안했다. 그리고 1975년에는 묘엄이 승가학원을 설립하면
봉녕사는 이때부터 비구니 수행/교육 도량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1983년 육화당(육화료) 3층 건물을 지어 승가학원을 승가대학(僧伽大學)으로 개칭하여 묘엄이
초대 승가대학장이 되었으며, 1989년과 1992년에 도서관(소요삼장)을 세우면서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모두 지닌 비구니 수련도량으로 내실을 키웠다.

1994년에는 영천 백흥암의 육문이 희사한 나무로 일주문을 세웠고, 1998년 약사보전을 중건했
으며, 야외에서 고통받던 석조3존불을 위해 용화각을 그에게 씌우는 한편, 1998년에는 법당을
중건해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고 1999년에는 묘엄이 천하 최초로 비구니 율원(律
院)인 금강율원(金剛律院, 금강율원승가대학원)을 개원하여 수행도량으로서의 위엄을 더욱 드
높였다.
지금의 봉녕사와 승가대학, 그리고 비구니 최초의 율원을 만든 저력을 과시한 묘엄은 2011년
12월 3일 봉녕사에서 80세의 나이로 입적했는데, 그는 큰 승려로 찬양받는 성철의 유일한 비
구니 제자로도 유명하다.

제법 너른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용화각, 약사보전,
향하당, 청운
당, 소요삼장 등 10여 동의 온갖 건물이 자리해 있는데, 용화각과 약사보전, 불서각 등을 제
외하면 허벌나게 크다. 그리고 대적광전과 용화각, 약사보전은 동남향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경내가 완전 북향도 남향도 아닌 동남향(東南向)이기 때문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석조3존불과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신중
탱, 현왕탱 등 지방문화재 2점이 있으며, 대적광전 뜨락에 800년 묵었다는 향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봉녕사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그 외에는 딱히 오래된 유물은 없으며, 건물도
1971년 이후에 죄다 으리으리하게 갈았기 때문에 고색의 향기도 싹 말라버렸다.

봉녕사는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꽤 깔끔하고 정갈하다. 어여쁜 꽃과 식물들이 구석구석 심
어져 자연과 여인의 향기를 그윽하게 베풀고 있고, 조금의 먼지도 찾기가 힘들다. 게다가 피
부와 눈 색깔이 다른 외국인 비구니도 많은데, 서구에서 온 이들이 많다. 또한 다른 정통수행
도량과 달리 속세에도 개방적이라 나들이객과 속인들에게도 친절한 편이며, 템플스테이와 산
사음악회, 사찰음식대향연(매년 10월) 등 다양한 볼거리와 축제를 열어 속세와의 거리를 좁히
고자 애쓰고 있다.

* 봉녕사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창룡대로 236-54 ☎ 031-256-4127)

* 봉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연꽃 돌조각
연꽃이 그대로 돌로 굳은 것 같다. 저기에 색채만 입히면 정말 연꽃이
따로 없을듯~


 

♠  봉녕사 둘러보기

▲  3층석탑과 석불 (어디서 많이 본 모습들인데..?)

불서각(쉼터)에서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직선 길에 임하면 독특한 모습의 3층석탑과 석불을
만나게 된다. 다들 근래에 심어진 것들이라 하얀 피부가 봄햇살에 비쳐 더욱 빛을 발하고 있
는데, 그들의 모습이 왠지 옛친구처럼 낯이 익다. 어디서 본 것일까? 아 기억이 난다. 바로
강원도 강릉(江陵)의 신복사(神福寺)터에 있는 고려시대 석불과 석탑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경주 불국사(佛國寺)의 다보탑과 석가탑, 화엄사(華嚴寺)의 4사자3층석탑 등을 모방한 것은
많이 봤지만 인지도도 별로 없는 신복사터 탑과 석불을 모방한 것은 처음 본다. 마치 그들에
게 낀 오랜 세월의 때를 빡빡 밀어내고 윤을 낸 모습으로 이들을 만든 사람이 강릉이 고향이
거나 강릉이 고향인 고참 승려의 부탁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  다보탑(多寶塔)

신복사지 석탑/석불 맞은편에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축소/재현판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곳
다보탑보다 작아서 그렇지 영락없이 닮은 꼴로 신라 때 불국사처럼 수행도량의 대표 성지(聖
地)로 성장하고 싶은 봉녕사의 염원을 다보탑의 축소판으로 강렬하게 표현한 듯 싶다.


▲  봉녕사에서 만난 백송(白松)

신복사지 탑과 다보탑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대적광전 계단 밑에 뿌리를 내린 하얀 피부의 소
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천하의 희귀종으로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백송이다.
백송은 원래 중원대륙이 고향으로 그곳을 오가는 조선 사신이 가져와 심은 것이 여럿 남아있
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복궁 서쪽 통의동(通義洞)에 있는 백송으로 천하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백송이었으나 1990년 9월 폭우로 장렬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아직 남아있
음) 그래서 헌법재판소 안에 자리한 재동(齋洞) 백송이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의 타이틀을 쥐
게 되었다.
그 외에 조계사(曹溪寺) 백송과 이천(利川) 백송, 예산 추사고택 백송이 있는데, 이들이 오래
된 백송의 전부이며, (원효로 백송, 내자동 백송, 회현동 백송, 보은 백송, 밀양 백송은 사망
) 그들의 후예가 창경궁(昌慶宮)과 재동 백송 주변, 그리고 이곳에 뿌리를 내려 백송의 부흥
을 꿈꾼다.
봉녕사에 백송이 들어온 것은 1999년 4월 기증을 통해서였다. 그래서 조계사와 더불어 백송을
간직한 이 땅에 흔치 않은 절이 된 것이다.

  대적광전 계단 밑에 자리한 샘터
자연이 베푼 샘물이 4개의 동그란 석조와
3개의 대나무통을 거쳐 내려온다.

▲  청운당(淸雲堂)

▲  향하당(香霞堂)

대적광전 1단계 밑 좌우에는 비슷하게 생긴 청운당과 향하당이 자리해 있다. 이들은 정면 7칸
, 측면 4칸의 2층으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청운당은 1999년에 지어졌는데, 콘크리트로 구성된
1층은 큰방과 율원 지대방이 있고, 나무로 된 2층은 금강율원, 율주(律主) 승려방, 강사 승려
방이 있다.
그리고 청운당과 마주보고 있는 향하당은 1997년에 지어진 것으로 1층에는 종무소(宗務所)와
다각실이, 2층에는 선방(禪房)과 주지실, 객실 등이 있다.


▲  대적광전(大寂光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적광전은 봉녕사의 법당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청운당, 향하당과 달리 1층이라 그렇지 우람한 수준은 그들에 못지 않다.
원래 이곳에는 시멘트로 만든 조그만 대웅전(大雄殿)이 있었으나 1997년 1월에 부셔버리고 지
금의 건물을 지어 1998년 7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때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불단(佛
壇)에는 1998년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과 노사나불, 석가여래 등의 삼신불(三身佛)을 비롯
해 후불탱인 삼신불탱과 신중탱(神衆幀)이 있다. 그리고 건물 외벽에는 팔십화엄변상도(八十
華嚴變相圖)가 장엄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다.


▲  대적광전 앞에 있는 오래된 돌덩어리
돌의 뿌연 피부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200년 이상은 묵은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돌덩어리 위에는 원래
있어야 될 존재 대신 꽃이 조촐하게 둥지를 틀었다.

▲  봉녕사 향나무 - 수원시 보호수 22호

적광전 뜨락 좌측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그는 나이가 무려 800년
을 헤아린다고 한다. 800년이면 창건시기인 1208년과도 거의 맞아떨어져 봉녕사의 13세기 창
건설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절의 오랜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8m, 둘레 2.7m 덩치로 자라났으며, 2007년에 수원시 보호수
로 지정되었다.

▲  대적광전 외벽에 그려진
팔십화엄변상도의 위엄

▲  대적광전 앞 (대적광전에서 주차장까지
곧게 뻗은 길)


▲  봉녕사 용화각(龍華閣)

적광전 좌측에는 용화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
래된 보물인 석조3존불의 거처이다.
용화각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의 거처로 보통 용화전(龍華殿)을 칭하기 마련이
다. 허나 봉녕사는 미륵보살에는 썩 의미를 두지 않는지 전(殿)보다 1단계 낮은 용화각을 칭
하고 있다. 

이곳에 깃든 석조3존불은 고려 중기 석불로 1995년에 대적광전 뒤쪽을 손질하며 터를 닦다가
발견되었다. 하여 봉녕사 초창기 시절의 석불이 분명하며, 향나무와 함께 13세기 창건설을 입
증하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 허나 그런 고마운 존재에게 번듯한 건물도 지어주지 않고 야외에
두는 우를 범하다가 1998년에 이르러 용화각을 씌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건물 이름을
용화(龍華)로 한 것을 보면 그들을 미륵불로 삼은 모양이다.

봉녕사 석조삼존불
▲  봉녕사 석조3존불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1호
(문화재청 사진)

대적광전을 둘러보고 약사보전을 우선 살펴본 다음 용화각을 보려고 했다. 약사보전을 살피는
동안 시간이 18시가 되면서 비구니들이 이들 건물에 들어가 저녁 예불을 벌였는데, 약사보전
은 예불 전에 싹 사진에 담았으나 용화각은 예불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의 예불을 방
해하면서까지 내 욕심을 채우기는 싫었기에 예불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으나 6시 30분이 넘어
도 좀처럼 끝날 줄을 모른다. 이제 곧 땅꺼미의 세상이 될 터인데, 배도 고프고 더 기다리기
도 어정쩡하여 문틈으로 소심하게 석조3존불을 보는 선에서 끝내고 말았다.

나를 구경하지 못한 석조3존불은 대적광전 뒤쪽 야산에서 발견되었는데, 가운데 불상(본존불)
은 연화대(蓮花臺) 위에 앉아있고, 좌우 석불은 서 있다. 본존불은 왼쪽 어깨에 법의(法衣)를
걸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머리와 목이 지나치게 커 신체비례가
떨어진다. 얼굴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씻겨 내려가 눈과 코. 입은 거의 닳았으며, 희
미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다. 수인(手印)은 손가락을 곧게 펴 왼손은 경례를 하
듯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위에 두었다.
좌우 석불도 본존불처럼 비슷한 스타일로 법의를 걸쳤으며 모두 머리 부분이 깎여져 있다. 이
들 모두 귀는 짧고 목이 매우 두꺼운데, 앉고 서 있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비슷해 같
은 사람이 조성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의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또는 후기)로 여겨지며, 봉녕사의 오랜 내력을 증명하는 증거물
이자 수원 토박이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봉녕사는 초창기와 조선 중/후기 부분
에 많은 공백이 있는데, 불상이 땅속에 묻혀있다가 발견된 것을 보면 봉녕사도 우울한 시절이
꽤 길었던 모양이다.


 

♠  봉녕사 마무리

▲  약사보전(藥師寶殿)

대적광전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약사보전이 있다. 1998년에 중건된
것으로 1979년에 조성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비롯해 석가모니후불탱과 아미타후불탱, 현왕탱,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밖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은 '
석문의범(釋門儀範)','가
사이운(袈裟移運)'의 가영(歌詠)에서 옮겨온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  약사보전 앞에 있는 봉황(鳳凰)의 위엄 (봉황 맞나?)
왼쪽 봉황은 가만히 서 있고, 오른쪽 봉황은 날개를 퍼득이고 있다.
봉황이긴 해도 조금은 어설퍼보여 봉황 흉내를 낸 닭처럼 보인다.


▲  약사보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석가모니후불탱

▲  신중탱(神衆幀)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2호

약사보전 내부에 자리한 신중탱과 현왕탱은 '봉녕사 불화(佛畵)'란 이름으로 경기도 지방문화
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신중단(神衆壇)에 자리한 신중탱은 1891년에
현조(現照), 돈조(頓照)가 비단에 그린 것으로
가로 168cm, 세로 178cm의 크기이다. 대범천왕(大梵天王)과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신의 무리
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으로 아래 중앙에는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팔부신장(八部神將)과
용왕(龍王), 금강상(金剛像) 등을 그렸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빼곡하게 그려져 조금은 정신
이 없어 보인다.


▲  현왕탱(賢王幀, 왼쪽 그림)과 아미타후불탱(오른쪽)

현왕탱은 1878년에 완선(完善)이 비단에 그린 것으로 가로 131cm, 세로 104cm 크기이다. 현왕
이란 저승의 제왕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의 다른 칭호로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그에게 소환
되어 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현왕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인물이 그려져 있
는데, 이 그림은 보통 명부전(冥府殿)에 많이 건다.

약사
보전 내부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서양인 비구니가 들어와 불단과 불화 앞을 정리하고 향내
로 진동하는 건물 내부를 정화하고자 문을 활짝 열고 저녁예불을 준비한다. 사진을 찍으며 서
성이는 나를 그리 경계하지 않고 밝게 웃으면서 이따가 예불을 할테니 같이 하자고 그런다.
그래서 자연히 몇 마디를 주고 받았다.
그는 멀리 동유럽 체코에서 왔다고 한다. 요즘 불교가 서구에서 적지않게 주목을 받고 있다보
니 많은 이들이 우리나라로 건너와 승려의 길을 택하거나 불교를 익히고 있는데, 그도 불교에
심취해 꽃다운 나이에 이 땅에 들어와 출가를 했다. 자연히 우리나라 말도 꽤 능숙해 의사 소
통에는 별로 문제는 없었다. 현왕탱과 신중탱을 찍고자 양해를 구하니 상관없다면서 마음껏
사진에 담으라고 그런다.
그렇게 시간은 18시가 되고 건물 안에 있던 아줌마 신도 1명과 저녁예불에 들어갔다. 나는 용
화각에 볼일이 있어 이따가 참석하겠다고 나왔는데, 용화각은 비구니 1명이 한참 예불 중이라
들어가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다시 약사보전으로 들어와 체코 비구니가 주관하는 예불에 참
여했다. (대적광전은 2명이 예불을 주관했음)


▲  주차장 남쪽에 늘씬하게 솟은 숲길

저녁예불에서 절도 여러 번 하다가 다시 나와서 용화각을 노렸으나 여전히 예불 중이었다. 그
렇게 시간은 18시 반이 넘어가고 퇴근 본능이 발동한 햇님은 꽁무니를 숨기면서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게다가 저녁시간이라 배도 무지 고프고, 봉녕사에 발을 들인지 어언 1시간 반이
넘어 더 이상 있는 것도 그렇고 해서 봉녕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나왔다.
사찰음식대향연이 열리는 10월에 다시 인연을 지어 사진에 담지 못한 석조3존불을 사진에 담
고 사찰 음식으로 배를 실컷 채워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수원 봉녕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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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 모악산 연말 나들이 (대원사, 수왕사) '


▲  모악산 대원사

 


 

겨울 제국(帝國)의 나날이 강성해가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전북 한복판에 자리한 모
악산을 찾았다.
이번 해가 새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묵은 해가 되어 다시
금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된다. 그래서 묵은 해를 정리할 겸, 올해 마지막 답사지를 물색
하다가 모악산 대원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쿨하게 길을 잡았다.

아침 일찍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서초동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전주로 가는 직행버
스를 나를 담았다. 버스도 추위가 싫었는지 남쪽을 향해 질주하여 2시간 20분만에 전주시
외터미널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미리 점심을 먹고 움직이고자
전주(全州)에 올 때마다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콩나물국밥집(전주한옥마을 부근)에서 전주
의 명물인 콩나물국밥으로 뜨끈하게 배를 채웠다. 거기에 디저트로 주는 커피까지 섭취하
니 식곤증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순간 시샘을 벌인 듯,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비의 양
은 다행히 적었지만 나들이에서 비가 오면 이것만큼 열받는 것도 없다. 어쨌든 비의 방해
공작을 원망하며 전주시내버스 970번(송천동↔전북도립미술관)을 타고 모악산으로 이동했
다.
모악산관광단지(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귀찮게 하던 비도 다행히 그쳤으나, 하늘
이 일그러진 인상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어 언제 비나 눈이 투하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모악산 표석의 위엄


 

♠  모악산(母岳山) 입문

▲  모악산 대원사계곡(시앙골, 물레방아골) 하류

전북 한복판에 장엄하게 누워있는 모악산(794m)은 전주와 완주(完州), 김제(金堤)에 걸쳐있는
산으로 호남평야와 전북 내륙 산간지대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1971년 모악산 일대 42.44
㎢가 모악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정상 밑에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
니의 모습이라 하여 '엄뫼'라 불렸는데, 그걸 한자로 표현하여 어머니의 산이란 뜻의 모악산
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신라 후기에는 '금뫼','금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모악산의 원래
이름으로 보는 설도 있다.

신라 후기부터 세상을 구할 미륵(彌勒)의 출현을 열망하던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성지(聖地)
인 금산사(金山寺)를 비롯해 귀신사(歸信寺), 대원사, 심원암 등 굵직한 오래된 절이 안겨져
있으며, 왕년에는 80여 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종교들이 모악산을 기
반으로 여럿 생겨났는데, 증산교(甑山敎)가 그 대표적이다.
모악산은 봄 풍경이 아름다운데, 특히 금산사 입구 벚꽃길이 매우 유명하다. 하여 변산반도(
邊山半島)의 여름 풍경, 내장산(內藏山)의 가을단풍, 백양사(白羊寺)의 설경과 함께 호남4경
의 하나로 격하게 찬양을 받는다.

모악산 산행은 김제 금산사나 전주 중인동, 완주 모악산관광단지에서 시작하면 편하며, 산에
안긴 명소로는 금산사와 귀신사, 대원사, 심원암, 수왕사 등의 오래된 절과 전북도립미술관,
금산사 벚꽃길, 명당(明堂)으로 소문났으나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든다고 전하는 장군봉,
선녀폭포, 전주김씨 시조묘 등이 있다.


▲  전주김씨 세덕비(世德碑)와 전주김씨 종중공덕비(오른쪽 비석)

모악산 동쪽 자락 원기리에는 '모악산관광단지'가 넓게 터를 닦았다. 모악산을 든든한 후광(
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토속 음식을 내세운 식당과 가게(편의점),
까페, 등산용품점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관광단지 남쪽에는 전라북도에서 2004년 10월
에 세운 전북도립미술관이 자리하여 전북 지역 현대 미술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허나 미술관은 애당초 계획이 없었기에 쿨하게 통과했다. 나의 미련한 머릿속에는 오로지 모
악산과 대원사 뿐이었기 때문이다. 혹여 대원사를 보고 나올 때 시간이 남으면 들릴까도 했으
나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다.

평일이라 썰렁한 관광단지를 지나면 눈에 뒤덮힌 모악산의 설경이 나타나면서 전주김씨 세덕
비와 종중공덕비가 슬쩍 모습을 내민다.
여기서 가까운 산자락에 전주김씨 시조인 김태서(金台瑞)의 무덤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 이들
비석을 주렁주렁 닦아놓은 것인데, 김태서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4째 아들인 김은열(金殷
說)의 후손으로 그의 터전인 경주가 몽골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자 1254년에 가솔을 이끌고 전
주로 넘어와 정착했다. 이후 그는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고, 그를 시조로 한 전주김씨가 생
겨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북한이란 괴뢰 정부를 세운 김일성이 그의 후손이라는 점
이다. 1993년 손석우란 사람이 '터'란 책을 냈는데, 김일성이 시조 무덤의 지기(地氣)를 받아
북한을 세워 집권했으며, 음력 1994년 9월에 죽을 거라는 내용을 다루었다. 비록 달은 틀리지
만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자기 골로 가면서 그 책과 전주김씨 시조묘는 잠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주김씨 시조묘는 대원사로 올라가는 길목 부근에 자리해 있어 잠시 들릴까 했으나 눈의 방
해가 심해 올라가지는 못했다. 어차피 계획에도 없던 곳이다.


▲  선녀폭포(仙女瀑布)와 폭포를 품은 사랑바위

전주김씨 세덕비에서 대원사계곡(시앙골)을 옆에 끼고 산길을 오르다보면 선녀폭포와 사랑바
위가 모습을 비춘다.
선녀폭포는 높이 5m도 안되는 조그만 폭포로 볼품은 떨어지나 무려 선녀란 이름까지 지닌 것
을 보면 옛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도 앗아간 모양이다. 이런 폭포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
이로 지어놓은 전설이 있는 법, 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보름달이 뜨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선녀폭포로 내려와 목욕을 했다. 다른 유사
전설에서는 그냥 목욕만 하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목욕 외에 수왕사에 들려 약수도
마시고 모악산 신선과도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뭇꾼이 우연히 폭포 옆을 지나다 목욕 중인 선녀를 발견했고 그들의 아름
다운 자태에 미치도록 넋이 나간 그는 결국 상사병 비슷한 병을 얻어 몸저 눕게 되었다.

병으로 힘들어하던 나뭇꾼은 기왕 이 지경이 된 거 선녀의 모습을 1번만 더 보고 죽자며 보름
달이 뜬 날 폭포를 찾아와 그들을 훔쳐봤다. 그러다가 뜻밖에 한 선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
는데, 그 선녀도 나뭇꾼이 좋았는지 둘만 살짝 대원사 백자골 숲으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속
삭이며 예민한(?) 일을 벌이려는 찰라, 갑자기 뇌성병력이 그들을 내리치면서 선녀와 나뭇꾼
은 돌이 되고 말았다.
하늘의 시샘에 돌이 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떨어질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이는 듯 하다 하여
사랑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기서 치성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산길에
서 보면 폭포의 모습이 그리 실감나진 않으나, 바로 앞에서 보면 조금은 그럴싸하게 보인다.


▲  대원사계곡(시앙골)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  겨울에 잠긴 모악산 산길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털린 나무들은 숨죽이며 봄을 잉태하고 있다.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대원사계곡(시앙골)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에 묻힌 계곡도 얼음을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모악산관광단지에서 20분 정도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면 대원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시앙
골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이 놓여져 있고, 그 길을 오르면
비로소 대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대원사 직전에 걸린 크리스마스 축하 현수막

▲  대원사 경내로 인도하는 시앙골다리와 계단길


 

♠  모악산 동쪽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
대원사(大院寺)

모악산 동쪽 자락에는 고색과 숲내음이 깃든 대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겨울 제국이
내린 두터운 눈을 뒤집어쓰며 겨울 산사의 고적함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는데, 종종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추녀 밑에 달린 풍경(바람방울)이 들려주는 그윽한 풍경소리가 고요
한 경내를 살짝 어루만진다.

대원사는 670년에 보덕(普德)의 제자인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이 창건했다고 전
한다. 보덕은 고구려 승려로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開山祖)인데,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
離支)인 연개소문(淵蓋蘇文, ?~666)이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받아들이자 이를 개탄하며 백
제로 넘어갔다. 이때 신통력으로 완주 고덕산(高德山)으로 날라와 경복사(景福寺)를 세웠다고
하며, 절을 세운지 얼마 안가서 고구려가 망했다.

보덕의 제자인 일승, 심정, 대원은 경복사가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워 대원사(大原寺)
라 했다고 전한다. 보덕의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나와있지만 대원사 창건까지는 나
와있지 않아 670년 창건설(또는 660년)에 썩 신뢰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창건 시기를 입증해
줄 신라 후기 유물과 유적은 전혀 없으며, 1066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는 이야기
가 있어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74년 나옹(懶翁)이 중창을 했다고 하며, 1415년에 다시 중창을 벌였다. 그러다가 1597년 정
유재란으로 말끔히 파괴되자 1606년 부처로 추앙받는 진묵(震默)이 다시 일으켜 세웠고, 1733
년 동명 천조(東明 千照)가 중창을, 1886년에는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승려인 금곡(錦谷)과
인오 등이 중창했다. 금곡은 함수산(咸水山) 거사와 함께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내
원암(內院庵)에 있던 염불당을 가져왔다.

1950년 6.25전쟁으로 대부분이 파괴된 것을 덕운이 1959년부터 불사를 일으켜 하나씩 건물을
일으켜 세웠다. 1993년 칠성각을 부시고 요사채를 지었으며,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2001년 이후 명부전과 대웅전 수미단을 손질해 지금에 이른다.

예전에는 비록 음은 같지만 가운데 한자만 살짝 다른 대원사(大圓寺)였으나 근래 지금의 한자
로 갈렸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명부전, 나한전, 범종각, 요사 등 약 10동 정도의 건물이 조
촐한 경내를 메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삼세불좌상과 용각부도가 있고, 1606년에 조성
된 목각사자상(전북 지방민속문화재 9호)도 있었으나 1988년에 도난을 당했다. 그러다가 1999
년에 서울 가회동(嘉會洞)의 어느 화랑에서 발견되었으나 공소시효를 주장하며 돌려주지 않았
으며, 서울 인사동에 어느 작자에게 넘어가면서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99년에
지방문화재에서 정리되었음) 그 밖에 오래된 5층석탑 2기와 승탑(부도) 6기가 절의 숙성된 내
력을 알려준다.

이곳은 천하대복지(天下大福地)의 최길상(最吉祥)으로 치는 명당으로 효의 절, 어머니 절, 발
원을 이루는 기도처로 꼽히며, 특히 증산교를 세운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이
도를 깨우친 현장이기도 하다.
매년 1월 1일에는 '촛불기원 해맞이 타종제' 행사가, 4월에는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를 열
어 속세에 큰 호응을 받고 있는데, 화전축제는 이곳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매점과 찻집으로 쓰이는 소화당(笑話堂)

▲  소화당 현판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소화당이란 조그만 목조집이 마중한다. 이 건물은 불교용품과 기
념품, 커피, 전통차를 파는 매점으로 커피는 무려 3,000원대를 받는다. 건물 옆에는 잠시 쉬
어갈 수 있도록 파라솔이 달린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고, 건물 정면에는 소화당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는데, 마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상큼한 모습이다.


▲  겨울 산사의 내음을 진하게 보여주는 대원사 경내

▲  대원사 아랫쪽 5층석탑

소화당을 지나면 바로 대웅전 뜨락이다. 정면에는 대웅전이 마주보고 있고, 오른쪽에는 요사
와 모악당, 샘터, 왼쪽에는 5층석탑과 범종각, 명부전 등이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바로 왼쪽에 보이는 5층석탑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손질하면서 4
사자5층석탑으로 성형되었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내음이 다소 떨어진다. 그 뒷쪽에는 범종(梵
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이 있다.


▲  대원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대원사의 중심 건물(법당)로 석축 위에 높이 자리해 있다. 정면
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법당치고는 매우 작은 덩치인데 1886년에 지
어졌으나 6.25때 불탄 것을 1959년 이후에 다시 지었다.
불단(佛壇)에는 목조3세불좌상과 삼신후불탱 등이 있으며, 지금은 없지만 괴목(槐木)으로 만
든 목각사자상이 있었다. 이 사자상은 진묵대사가 축생(畜生)들을 천상(天上)으로 천도하고자
만든 것이라 하며 그 위에 북을 올려놓고 쳤다고 한다. 허나 1988년 불의의 도난을 당했고 다
행히 1999년에 서울 가회동에서 발견되었으나 소유자인 이영옥이 이현수란 사람에게 팔아먹는
등 우여곡절이 심해 아직까지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대원사 목조삼세불좌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목조3세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얼굴부터 밑도
리까지 하나 같이 두텁게 생긴 이들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
사불(藥師佛)을 거느린 3세불(三世佛)로 17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석가여래와 약사불, 아미타불로 이루어진 3세불은 조선 중/후기에 많이 나타나는 불상 형태로
중앙에 자리한 석가여래는 중심 불상답게 키가 제일 크며(130cm), 좌우 불상은 116cm 정도이
다. 앞으로 조금 내민 얼굴은 다소 경직되고 딱딱한 표정으로 볼살이 많고 이마가 넓으며, 꼽
슬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수인(手印)만 서로 다를 뿐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이며, 윗도리가 아랫도리보다
다소 살이 찐 모습으로 17세기 호남에서 활동하던 조각승들의 조각 스타일이 잘 반영되어 있
다. 그들 뒤에는 화려한 색채의 삼신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원사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대웅전을 바라보
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1887년에 금곡이 지었으며, 2001년
에 중수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그를 보좌한다.

▲  명부전 10왕(시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상

▲  명부전 윗쪽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  종무소로 쓰이는 모악당(母岳堂)

▲  모악당 뒷쪽에 자리한 나한전(羅漢殿)

▲  나한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와 거울 광배

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羅漢)의 거처이다. 석가
여래의 광배(光背)가 매우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광배 테두리는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배 중앙에 거울까지 달려있어 잠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마도 그런 의
도로 거울을 갖추었을 것이다.

  나한전 석가후불탱(19세기 작)과
색채감이 돋보이는 16나한상

  모악당 옆에 자리한 샘터


  경내 윗쪽에 자리한 5층석탑

경내 뒷쪽 언덕에는 고색이 느껴지는 5층석탑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대원사는 특이하게 오
층석탑이 2기나 있는데, 법당 앞이 아닌 다들 구석에 자리해 있다. 아마도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탑은 2중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석축을 기반 삼아,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
중의 기단(基壇)과 5층의 탑신(塔身), 얇은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얹혔는데, 탑신 지붕돌이 다
소 헝클어지고, 머리 장식 상당수가 사라진 것 외에는 그런데로 상태는 괜찮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각부도 다음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대원사 아랫 승탑군(僧塔群)

5층석탑에서 경내 뒷쪽을 거쳐 북서쪽 산길을 조금 오르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승탑군(부도
군)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이란 승려의 사리를 머금은 탑으로 대원사에는 9기(또는 10기)의 오래된 승
탑이 전하고 있는데, 용각부도 1기만 제외하고 모두 조선 중/후기 것이다. 이중 대웅전 남쪽
밑에 있던 승탑 3기(또는 4기)는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태이고, 경내 윗쪽에 2개 그룹으
로 4기와 2기 등 총 6기만 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대원사는 잃어버린 것이 참 많다. 절의
초창기 역사도 그렇고, 목각사자상, 거기에 승탑까지 말이다.

  대원사 용각부도(龍刻浮屠)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1호

대원사 승탑 중의 아주 유별나게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 바로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용각부
도(용각승탑)이다.
높이 187cm의 이 승탑은 이름 그대로 용이 새겨진 것으로 옥개석 아랫부분에는 대모양의 무늬
위에 겹잎으로 된 18개의 연꽃무늬가 있으며,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가운데 부분에 여의
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2마리 용을 진하게 새겨놓았다. 승탑의 피부가 완전 흑백이라 실감
이 덜해서 그렇지 만약에 칼라였다면 진짜 용도 시샘을 했을 것이다. 용의 비늘과 피부, 구름
무늬 등이 아주 실감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무늬까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어느 고승의 승
탑으로 여겨진다. 그 고승의 덕과 업적이 대단했던지 제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저 탑을 조성해
스승의 넋을 기렸던 모양이다.

장대한 세월을 거치면서 반질반질했던 피부는 검은 피부로 대부분 타버렸고, 군데군데 주근깨
같은 것도 달려있지만 이들은 세월이 달아준 훈장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머리 장식과 기단부
가 조금 깨진 것을 보면 대부분 잘 남아있는데, 머리 장식은 다른 데서 가져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대원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제일 가는 꿀단지로 이렇게 화려한 용 문양을 지닌
승탑은 처음 본다. 그러다보니 지닌 다른 승탑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용각부도 주변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승탑 3기가 있다. 매력 만점의 용각부도에 단단히 묻
힌 탓에 그리 주목은 못받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스타일의 탑으
로 용각부도와 긴 시간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모습이 마치, 부모와 자식들 같다. 그 옆
에는 마치 버섯이나 양봉통처럼 생긴 조그만 승탑이 있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이들 탑의 주
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원사 윗 승탑군

아랫 승탑군에서 윗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윗 승탑군이 나온다. 이곳에
는 2기의 승탑이 있는데, 검은 때가 자욱한 왼쪽 탑은 기단부와 바닥돌을 갖추고 있고, 하얀
피부가 역력한 오른쪽 탑은 바닥돌 위에 바로 탑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탑의 주인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들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여기서 더 이상 올라갈 공간이 없다.
주변은 대원사 소유의 숲이며 공식 탐방로도 없기 때문이다. (비법정 탐방로만 있음)


  아랫 승탑군에서 바라본 대원사의 뒷모습

  모악산 산길과 이어진 대원사 남쪽 문

  대원사 돌담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승탑을 끝으로 대원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원래는 대원사만 보고 전주로 쿨하게 철수하
려고 했으나, 여기서 정상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물맛이 일품이라는 오래된 절, 수왕사가
있다고 하여 시간도 아직 이르고 해서 거기까지 발을 넓혀보기로 했다. 기왕 모악산의 품에
들어섰으니 그 품을 더 파고들어야 아쉬움이 없겠지. 다행히 수왕사까지는 1km 남짓이다. (산
에서 1km는 평지의 1km보다 훨씬 김)
허나 문제는 산에 눈이 많이 쌓여있고 얼음 길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 좀 되었다. 올라갈 때야 별로 문제는 안되지만 문제는 내
려올 때가 아니던가? (트래킹화를 신고 온 것이 전부임) 허나 이미 내 마음은 수왕사에 올라
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거기까지 무작정 올라가기로 했다. 내려갈 때 걱정은 나중이다.

* 대원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 (모악산길 243, ☎ 063-221-8502)


 

♠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고적한 산사
수왕사(水王寺)

  모악산 정상과 수왕사로 인도하는 눈덮힌 산길

대원사에서 수왕사까지는 산길을 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겨울이 내린 눈과 얼음이 두텁게
깔려있어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이 그리 넉넉치가 않은데, 앞만 보고 열심히 오른 끝에 해발
약 560m에 자리한 수왕사입구 쉼터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모악산 정상이고, 남쪽으로 나있는 벼랑길로 가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적한 절집, 수왕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수왕사입구 쉼터

  수왕사입구 쉼터에서 수왕사로 인도하는 벼랑길
안전한 통행을 위해 벼랑길에 철난간을 둘러 절을 찾은 이들을 배려했다.


  소박한 모습의 수왕사 경내

해발 570m 고지에 자리한 수왕사는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이곳은 약수가 유
명하여 '물왕이절','무량(無量)이절'이라 불렸는데, 680년에 완주 경천사를 지은 보덕이 수도
장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적이나 관련 역사 기록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없으며, 이곳 밑에 대원사가 있어 대원사나 금산사 승려의 참선 장소로 쓰였다가 조선 때 건
물을 심으면서 절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1125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며, 1597년 정
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탄 것을 1604년 진묵대사가 중건하여 머물렀다. 6.25전쟁이 한참인
1951년 1월 10일, 모악산 일대를 어지럽히던 공비를 토벌하고자 작전상 소실된 것을 1953년에
천석진사(千錫振師)가 다시 세웠다.

이곳은 모악산 정상 북쪽 밑으로 가파른 곳에 간신히 터를 닦은 탓에 절이 매우 단출하다. 법
당과 요사, 진묵조사전이 좁은 경내를 이루고 있으며, 근래에 새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
은 진작에 날라가버렸다. 오래된 유물도 없고, 건물도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여염집 스타일이
라 겉으로 보이는 절집 분위기도 다소 떨어진다. 게다가 첩첩한 산속에 묻혀있다보니 머무는
승려도 거의 없고 절을 찾는 신도나 산꾼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원사에 많이 의존
을 한다.
또한 수왕사는 완주 지역 전통민속주로 꼽히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 송죽오곡주(松竹五穀
酒)를 생산하는 현장으로 주지승인 벽암(碧岩)이 수왕사 약수로 직접 술을 빚는다. 그는 대한
민국 전통식품 명인 1호로 지정된 전통민속주의 장인이자 수왕사의 자랑으로 술을 멀리하는
절에서 곡차(穀茶)로 빗대 표현되는 술을 직접 만든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수왕사 법당

  법당 내부 (석가3존불과 여러 탱화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수왕사 법당은 금동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신중탱, 용왕탱
이 봉안되어 있다. 절은 작고 초라해도 법당 내부에 봉안된 존재만큼은 다른 절 못지 않은데,
바다와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이곳에 용왕탱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수왕사가 거
의 약수로 지탱하는 절이다보니 물을 관리하는 용왕(龍王)이 담긴 용왕탱을 봉안해 매일 좋은
물이 나오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법당 신중탱(왼쪽)과 용왕탱(오른쪽)

  수왕사 약수터

수왕사의 든든한 후광인 약수터는 겨울 제국의 심술로 얼음에 완전 봉해진 상태이다. 그래서
이곳의 명물인 약수를 마시지 못했지. 선녀도 와서 마신다는 물인데 이렇게 막혀버렸으니 여
기까지 온 보람이 크게 떨어진다.


  진묵조사전(震默祖師殿)

보통 절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절
을 중창한 진묵대사를 봉안한 진묵조사전을 그 자리에 두었다. 여기서만큼은 산신이나 칠성,
지장보살보다 진묵대사를 더 크게 여기기 때문이다.
바위 밑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진묵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1칸 크기의 집을 두었
는데, 그곳까지 인도하는 돌계단을 법당 옆까지 늘어뜨려놓았다.


  하늘색 두광(頭光)까지 갖춘 진묵대사의 진영

진묵(1562~1633)은 수왕사와 대원사의 중창주이자 석가여래의 소화신(小化身)으로 격하게 추
앙을 받는 고승으로 그의 흥미로운 이적과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그가 동자승이던 시절, 주지승이 그에게 향불을 피우게 하니 주지승 꿈에 제천(諸天) 등이 나
타나 '부처가 향을 피우니 우리는 받을 수 없소!' 했다는 것,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하고 무
슨 책이든 바로 다 외워버려 따로 스승이 필요 없었다는 것. 해인사에 불이 나자 소나무잎에
물을 묻혀 뿌리니 큰 비가 내려 불이 진화되었다는 것, 동네 사람들이 물고기 매운탕을 먹고
가라며 놀리자 탕이 담긴 가마솥을 번쩍 들어 다 흡입한 다음, 엉덩이를 까서 변을 누니 물고
기가 살아서 나왔다는 설화 등, 술을 흔히 곡차(穀茶)라 부르는데, 이는 그가 술을 즐겨 마시
며 곡차라고 했다는 것, 어머니의 무덤을 '무자식 천년향화지지(無子息 千年香火之地)'란 명
당에 썼다는 것 등 재미나고 신비로운 일화가 전해져 온다.

* 수왕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산13 (모악산길 246, ☎ 063-287-0485)


  수왕사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나무들이 있어서 시야는 별로)

수왕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5시가 넘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뒷쪽인 모악산 정상까
지 오르고 싶었으나 시간도 늦고 산길도 가파르며 거기에 눈과 얼음까지 덮여있으니 오를 엄
두가 나지 않는다. 아이젠이라도 있었으면 모르지만 그것도 없다. 이럴 때는 건방 떨지 말고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무조건 내려가는 것이 상책, 안그래도 수왕사까지 눈길을 뚫고 무리하게
올라온 터라 내려가는 것도 걱정인데 자꾸 일을 벌여봐야 좋을 것이 없다.

산길을 기어가듯 조심에 조심을 기하며 내려가 별탈없이 대원사에 도착했다. 여기서 관광단지
까지는 길이 완만하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다. 처음에는 대원사만 보려고 들어왔는데, 수왕
사까지 보너스로 겯드리면서 모악산에서의 일정이 다소 연장되었다.

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마침 전주시내버스 970번이 바퀴를 접고 쉬고 있어 그것을 타
고 미련없이 전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연말의 모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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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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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 도봉산 봄나들이 '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윗무수골)

▲  능원사 용화전

▲  도봉사

 


 

도봉산(道峯山, 739.5m)이 뻔히 바라보이는 그의 포근한 그늘, 도봉구 도봉동(道峰洞)에서
15년이 넘게 서식하고 있지만 그에게 안긴 횟수는 의외로 매우 적다. 그가 집에서 멀면 모
르지만 버젓히 그의 밑에 살고 있음에도 이렇다. 그렇다고 내가 산을 싫어하거나 돌아다니
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며, 도봉산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상하
게도 손과 발이 잘 가질 않았다. (도봉산 밑도리까지 포함하여 1년에 2~3번, 많으면 4~5번
정도 찾는 편임)
그래도 우리 동네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꿀단지 같은 존재인데, 가끔은 가줘야 도봉산도 서
운해 하지 않겠지? 하여 거의 1년 여 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해가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3시에 집을 나서 서울시내버스 142번(도봉산↔방배동)을 타
고 도봉산 종점으로 이동했다. 거리는 불과 정류장 4개. 때가 때인지라 내려오는 산꾼들의
행렬이 마치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온다. 거센 파도에서 아슬아슬하게 요트를 타듯 그들을
뚫고 북한산둘레길 안내도가 있는 통일교에 이른다.
여기서 직진을 하면 도봉서원(道峰書院), 천축사(天竺寺), 도봉산 정상, 포대능선, 만월암
(滿月庵) 방면으로 이어지고, 왼쪽 통일교를 건너면 능원사와 도봉사로 이어지는데 북한산
둘레길은 여기서 '도봉옛길'이란 부속 간판을 달고 남북으로 힘차게 흘러간다.
마음 같아서는 정상까지 가고 싶으나 늘 시간을 구실로 정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능원사
, 도봉사 방면 도봉옛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 길을 5분 정도 오르면 황금색으로 치장한 능
원사가 마중을 한다.


▲  능원사, 도봉사로 인도하는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구간)


 

♠  황금사원을 꿈꾸는 현대 사찰, 도봉산 능원사(能園寺)

도봉사 동쪽에 둥지를 튼 능원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창건된(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음) 따끈
따끈한 산사(山寺)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도 못했다. 나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에는 무뚝뚝한 편이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문화유산을 간
직한 절을 제외하면 딱히 눈길도 주지 않지만 동양 최대의 황금 사원으로 유명한 서울 구산동
수국사(守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황금 사원으로 꾸몄다는
점이 꽤나 끌렸다. 솔직히 인간 가운데 황금을 싫어하는 사람이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인
최영(崔榮)장군 등을 빼고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도봉산 능원사는 여주 능원사의 말사(末寺)로 그들 모두 미륵불(彌勒佛)을 내세운 미륵도량이
다. 근래 지어진 절이라 딱히 볼거리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불교와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황금을 테마로 황금색 단청(丹靑)을 모든 건물에 입혀 찬란한 황금사원임을 속세에 진하게 어
필하고 있다. 절 앞을 지나던 산꾼들도 황금색 건물에 매료되어 자연스레 경내를 기웃거리니
능원사의 마켓팅은 크게 성공한 셈이다.

황금 단청은 중원대륙에서 문을 열거나 대륙을 장악했던 나라의 궁궐에서 즐겨 애용했던 것으
로 그들은 하나 같이 황제(皇帝)를 칭했는데, 황색이 바로 황제를 상징한다. 하여 황금색 단
청과 지붕을 선호했다. (그게 중원대륙의 법칙이기도 했음) 반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배
달 민족은 황금색 단청과 기와를 즐겨하지 않고 다양한 색채를 입힌 이른바 컬러풀(colorful)
한 단청을 선호했다.
근래 들어 수국사와 여수 향일암(向日庵) 원통보전(圓通寶殿), 그리고 이곳 능원사에서 황금
색 단청을 선보이며 단청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이렇게 부처를 향한 절대적인 존경심이 금
빛찬란한 단청미를 탄생시켰고, 현대 사찰에 무정한 나를 황금을 미끼 삼아 이곳으로 낚은 것
이다.

능원사는 경내로 인도하는 일주문부터 황금색 단청을 입혀놓아 벌써부터 황금 사원의 냄새를
진동시키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곧게 깔린 짧은 길이 펼쳐지고 바로 법음각과 용화전, 철웅
당 등이 모습을 비춘다. 경내는 법당(法堂)인 용화전을 비롯해 법음각. 철웅당(鐵雄堂) 등 5~
6동의 건물이 전부인 조촐한 규모이나 건물에 죄다 황금색 떡칠을 하여 마치 조그만 황궁(皇
宮)
같다.

▲  능원사 일주문(一柱門)

▲  일주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  범종을 머금은 법음각(法音閣)
그 흔한 범종각 대신 부처의 소리를 뜻하는
법음각을 칭했다. 건물의 모습도 4각형이
아닌 6각형을 취했다.

▲  용화전 뒷쪽에 숨겨진 샘터
능원사에는 2곳의 샘터가 있어 중생들의
목마름을 아낌없이 해소해준다.


▲  능원사 용화전(龍華殿)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는 무려 용을 잡아먹는다는 금시조(金翅鳥)를 배치하여
화마 등 악귀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능원사의 중심 건물인 용화전은 용화세계의 주인공이자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
륵불의 거처이다. 이곳이 미륵도량이다보니 자연히 용화전이 법당의 역할을 도맡게 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단청과 커다란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는
거의 황금색 일색이라 사치와 장엄함의 깊이를 더욱 짙게 해준다.
건물 내부에는 미륵불을 중심으로 석가세존불,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다들 자애로운 표정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들 뒷쪽에는 헤아림이 무색할 정도로 조
그만 금동불(金銅佛)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니 건물 전체가 그야말로 금색 투성이다.


▲  용화전 불단에 봉안된 미륵불(가장 큰 불상)과 석가여래(제일 오른쪽),
약사불(미륵불 왼쪽), 관세음보살<가장 왼쪽에 보관(寶冠)을 쓴 보살상>

▲  황금색으로 치장된 용화전 현판과 단청, 공포, 수막새의 위엄

공포와 단청이 죄다 황금색으로 도배된줄 알았더만 가까이서 보니 붉은색, 녹색, 파란색 계열
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어 단청의 고유 맛은 그런데로 살렸다. 용화전 가운데 칸 좌우 기둥
윗쪽에는 봉황을 배치하여 지붕 용마루에 배치된 금시조와 함께 만약에 모를 화마(火魔)의 공
습에 대비한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황금색에 눈이 먼 나머지 불지르기 아깝다
고 판단하여 그냥 돌아서지는 않을까?


▲  용화전의 경쾌한 뒷모습

▲  용화전 뜨락에 세워진 하얀 피부의 5층석탑
근래에 지어진 탑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의 매끈함을 자랑한다.

▲  용화전 주차장 - 숲 너머로 수락산(水落山, 638m)이 바라보인다.

▲  능원사의 또다른 샘터

용화전 밑에는 석조를 갖춘 샘터가 놓여져 있다. 앙련(仰蓮)이 새겨진 반원 모양의 석조에는
도봉산이 베푼 물이 호수를 이루고, 그 옆에는 용과 구름무늬 등이 새겨진 네모난 석조가 있
는데, 동그란 여의주(如意珠)를 단단히 물고 있는 용머리 조각이 인상적이다.
용이 되려면 여의주가 있어야 되고 그래야 승천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석조에 새겨진 무늬
를 보면 용의 손에 여의주로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눈에 띄어 마치 여의주 획득 기념으로 하
늘로 요란하게 비상하는 용의 모습을 담은 듯 하다.

* 능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02 (도봉산길 87 ☎ 02-954-6060)


▲  여의주를 문 용머리

천하에 무려 300곳이 넘는 절을 돌아다니며 많은 샘터를 보았고 샘터에 달린 용머리, 거북이
조각도 무수히 보았지만 이곳처럼 여의주까지 문 용머리는 처음 본다. 아마도 능원사의 원대
한 꿈을 저 여의주를 문 용머리로 간략하게 표현한 듯 싶은데, 너무 겉모습과 돈에만 연연하
지 말고 부처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어디선가 숨어서 직무유기를 일삼으나 마음만큼은 속
세 걱정에 잠 못이루는 미륵불의 마음처럼 철저하게 속세를 위하는 공간이 되기를 주문해본다.


▲  능원사에서 도봉사로 올라가는 숲길 (도봉옛길)


 

♠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도봉산의 오래된 고찰 ~
도봉사(道峰寺)

능원사를 둘러보고 도봉옛길을 따라 서쪽으로 2~3분 가면 도봉산의 이름을 그대로 딴 도봉사
가 슬그머니 모습을 비춘다.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도봉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고려 초인 968년에 혜거국사
(惠居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971년 혜거가 광종(光宗)의 초청으로 궁궐 원화전(元和殿)
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강의하자 감동을 먹은 광종은 칙령(勅令)을 내려
'국내 사원 중에 오직 3곳만은 머물러 두어 움직이지 말 것이며, 문하의 제자들이 주지를 상
속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이를 규정하라'
하였다.
이때 고달원(高達院, 여주 고달사)과 희양원(曦陽院, 문경 봉암사), 도봉원(道峰院)을 특별선
원으로 삼았는데, 그 도봉원이 바로 도봉사로 여겨진다.

1010년 요(遼)나라(거란) 성종이 강조(康兆)의 난과 목종(穆宗)의 폐위를 이유로 40만의 대군
을 휘몰아 고려를 침공했다. 당시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강조는 직접 30만 군사를 이끌
고 검차(劍車)와 잘 훈련된 군사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만 방심하는 통에
크게 패하고 만다. 강조는 포로로 잡혀 처단되고 거란군은 그 기세로 폭풍 질주하자 현종(顯
宗, 재위 1009~1031)은 눈물을 머금고 피난길에 올랐다.

현종은 채충순(蔡忠順, ?~1036)의 호위를 받으며 임진강을 건너 창화현(昌化縣, 의정부)에 이
르렀는데, 야밤에 적의 습격을 받자 왕을 시종하던 이들은 뿔뿔히 도망치고 채충순과 지채문(
智蔡文, ?~1026) 등이 적을 격퇴하여 왕을 지켰다.
지채문이 왕의 말고삐를 잡고 지름길로 도봉사에 들어가 여기서 잠시 국정을 살폈으며, 거란
군이 계속 추격하자 한강을 건너 멀리 나주(羅州)까지 내려가게 된다. 이렇게 도봉사에서 잠
시 머문 인연으로 현종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6천 권 상당수를 그곳에서 제작하게 했다.
또한 고려 중기 때 정각국사 지겸(靜覺國師 志謙, 1145~1229)은 1170년 승과(僧科)의 선선(禪
選)에 급제했는데, 그의 이름은 전학돈(田學敦)이다. 바로 그해 삼각산(북한산)을 찾아 도봉
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꿈에서 산신(山神)이 나타나
'화상(和尙)의 이름은 지겸(志謙)인데 왜 지금의 이름을 쓰는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쿨
하게 지겸으로 이름을 갈았다.

2012년 서울문화유산연구원은 도봉사 바로 북쪽 산너머에 있는 도봉서원(道峰書院)을 복원하
고자 기존 건물을 부시고 터를 정비하면서 5개월 정도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뜻밖에도 옛 영
국사(寧國寺) 시절의 고려 때 유물 77점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2014년 8월 21일 국립고궁
박물관 강당에서 공개되었는데 그중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가 있어 도봉사에서 빌려오거나
(또는 가져오거나) 또는 영국사의 옛 이름이 도봉사인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영국사는 도
봉서원에 있던 도봉산의 대표 사찰로 1573년 유림들이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서원을 깔았다.

여기까지 보면 도봉사는 고려 때 꽤나 잘나갔던 절임을 알 수 있다. 허나 13세기 이후 근대까
지 적당한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다. 그냥 단순히 전쟁과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고 나올
뿐이다. 13
세기 이후 이렇다할 내력이 없는 것을 보면 13세기 중반 몽골(원)의 지긋지긋한 침
공에 때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현재 도봉사는 장대한 내력의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이 전
혀 없고, 오래된 유물도 기껏해야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치성광여래3존도가 고작이다. 하여
고려 때 도봉사가 이곳이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으며, 도봉서원에 있던 영국사가 도봉사란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도봉서원터에서 발견된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는 그런 의
견에 크게 부채질을 한다.

한참 동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도봉사는 19세기 후반에 벽암(碧巖)이 현 자리에 절을 세우고
도봉사를 칭하면서 그 이름이 다시 살아났다.
한때 산사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 절의 명성을 아낌없이 드날렸으나 종파 간의 갈등과
주지승의 재정 낭비로 2006년에 절 전체가 경매에 나오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절이 북한산
국립공원 내부에 있어 경매 수요가 없다가 다행히 적당한 임자를 만나 조금씩 불사를 벌여 지
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2층짜리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정사, 산신각, 선방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
장문화유산과 오래된 유물은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치성광여래삼존도(熾盛光如來三尊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9호
, 관람이 거의 어려움)가 고작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151호
지정된 철불좌상(고려 초기 불상)도 가지고 있었으나 2006년 절 경매 이후 한국불
교미술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애당초 도봉사와 관련이 없는 존재로 왜정 말기에 왜
인(倭人)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해방 이후 종로구 청운동(淸雲洞)에 있던 자명사가 가지고 있
다가 자명사가 철거되자 도봉사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밖에 부처의 사리를 담은 뿌리탑과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심우도 등의 소소한 볼거리가
있고, 절 앞에는 비록 짧지만 메타세콰이어 숲길이 닦여져 있다.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이 절
앞을 지나가고, 경내가 숲에 포근히 감싸인 푸른 지대로 도심이 지척임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도봉산 그늘에 산지 15년이 넘었고, 서울에 흩어진 오래된 절 상당수에 발도장을 찍었지만 도
봉사는 이번이 첫 인연이다. 2005년 석가탄신일에 인연을 지으려고 했지만 무리한 사찰 순례
일정으로 찾지 못하고 이제서야 격하게 인연을 짓는다.


▲  활짝 열린 도봉사 정문

도봉사는 그 흔한 기와집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대신 절과 산길의 경계에 여닫이식 철제 정
문을 두어 일주문의 역할을 담당한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는 문이 일주문을 흉내내며 활
짝 열려있지만 달님의 세상이 되면 미련 없이 문을 꽁꽁 걸어잠궈 열린 마음의 일주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정문 앞 우측에는 금동을 씌운 지장보살상이 육환장(六環杖)을 쥐어들며 중생을 맞이하고 정
문 좌측 담장 벽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  정문 옆 담장에 그려진 심우도
심우도는 방황하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야생 소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하여 10단계로 표현한 그림이다. 10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어 십우도(十牛圖)라 불리기도 하며 보통
법당 바깥 벽에 많이 그려둔다.

▲  정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연등길

정문을 들어서면 뿌리탑까지 곧게 오르막 길이 펼쳐져 있다. 길 좌우로 요사(寮舍), 선방(禪
房) 등으로 쓰이는 건물들이 뿌리를 내렸는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뿌리탑과 대웅전이 모습
을 드러낸다.

▲  계단 옆 경사면에 꽃으로 다듬은
커다란 절 마크

▲  경내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3층석탑과
여러 공덕비들


▲  도봉사의 명물, 뿌리탑

대웅전 앞에는 불교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머금은 뿌리탑이 장대한 모
습으로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절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1990년대 이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
여 이제는 너무 흔해졌다. 서울만 하더라도 도봉사와 삼천사(三千寺), 승가사(僧伽寺), 조계
사(曹溪寺) 등이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부처의 사리가 수만 과가 넘는다고 하더니만 아직도
나눠줄 수량이 많은 모양이다. (상당수 인도와 동남아에서 가져온 것임)

1982년 3월 한국외대 부총장 최창성 교수가 태국(타이) 국립사원 홧벤짜마버핏의 종정(宗正)
프라풋타부이윙을 초빙해 원각회(圓覺會)에서 법회를 연 적이 있었다. 이 인연으로 태국에서
진신사리 3과를 얻게 되었고, 부총장은 도봉사에 이를 기증했던 것이다.

탑의 기단은 특이하게 계란처럼 동그란 모습인데, 이는 공(空)을 뜻한다고 한다. 그 위에 5층
의 몸돌을 세웠으며, 1층 몸돌은 유난히 두텁다. 그 안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동쪽에 관
세음보살, 남쪽에 석가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쪽에 지장보살상을 새기고 그 주변에 16나한상
을 둘렀다. 탑 주위로 12지신을 새긴 난간을 둘렀고, 탑 위에는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두었다.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이 땅에 흔한 탑이 아닌 특이한 모습의 이형탑(異形塔)으로 탑 밑에는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본따서 만든 석가불이 당당한 체격으로 앉아있으며, 그 앞
에는 석등 2기가 서 있다. 그들 좌우로 뿌리탑과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뿌리탑의 장엄함을 마음껏 드러낸다.


▲  도봉사 대웅전(大雄殿)

뿌리탑 뒷쪽에 자리한 대웅전은 도봉사의 법당으로 이 땅에 흔치 않은 2층짜리 목조 불전(佛
殿)이다. 근래에 지어진 건물로 겉모습은 2층이지만 속은 1층이며, 불단에는 관세음보살과 지
장보살, 석가불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 자리에는 원래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철불좌상이 앉아있었으나 그가 절을 떠나자 새로 금동석가불을 만들어 본존불의 자리
를 채웠다.

▲  우측에서 바라본 대웅전

▲  좌측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6층석탑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상징물인 육환장과 꽃을 쥐어들며 자애로운
표정으로 서 있고, 그들 사이에 석가불이 연꽃대좌(臺座)에 앉아 중생을 굽어본다. 그들 뒤에
는 그 흔한 후불탱 대신 바퀴 모양의 금동 전륜(轉輪)이 두광(頭光)처럼 떠있다.

▲  대웅전 지장탱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대웅전 내부 좌우 벽에는 지장탱과 신중도, 석가불도 등의 탱화 4점이 걸려있다. 이중 지장탱
과 신중도는 빛바랜 때가 좀 낀 것으로 보아 20세기 초~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머
지 탱화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


▲  대웅전 양쪽에 배치된 가릉빈가 운판(雲版)과 6층석탑

운판은 범종, 법고, 목어와 더불어 불교 의식에 쓰이는 4물(四物)의 일원으로 보통 범종과 같
은 방을 쓰기 마련이다. 허나 도봉사는 절의 필수품인 범종(梵鐘)이 없어서 운판을 범종 대신
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대웅전 좌우에 일주문 축소판 모양의 건물을 세우고 커다란 운판을 북
처럼 걸어두어 아침 3시 새벽예불과 오후 6시에 도봉산에 은은하게 운판 소리를 울린다. 운판
피부에는 불교의 새인 가릉빈가<迦陵頻伽, 극락조(極樂鳥)>를 새겨 조촐하게 조형미를 고려했
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정사
(極樂精舍, 극락전)

▲  극락정사의 주인인 금동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대웅전 우측에는 빈자일등상이라 불리는 생소
한 이름의 석물이 자리해 있다. 처음에는 보이
는 모습 그대로 코끼리 등에 용과 연꽃무늬 등
이 새겨진 대좌를 얹히고 그 위에 선 관세음보
살 누님 상이라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가난한 자의 등불 하나'를 뜻하는 빈자
일등상이었다.
빈자일등상은 현우경(賢愚經)의 빈녀난타품(貧
女難陀品)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인도 사위국(舍衛國)에 난타(難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주로 구걸로 삶을 연명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나라에 석가모니가
찾아왔다. 인도의 대중스타가 된 그의 방문 소
식에 나라 사람들은 앞다투어 몰려가 공양과
등불을 올리며 그를 환영했는데, 난타도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궁색한 형편이
라 그에게 줄 선물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몇푼이라도 벌기 위해 거리로 나가 구걸을 했으나 겨우 1푼 정도의 돈을 마련하
는데 그쳤다. 그 돈을 들고 기름 장수를 찾아가 기름을 청했으나 당시 1푼으로는 어림도 없었
다. 기름 장사도 코웃음을 치며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자 난타가 눈물로 단장의 심정으로 호소하니 기름 장수도 이내 태도를 바꿔 돈하고 상관
없이 많은 양의 기름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이에 단단히 감동을 먹은 난타는 절을 100번 이상
올리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등불을 들고 석가모니를 찾아가 다른 사람들이 갖다 놓은 등불들
사이에 정성스럽게 놓았다. 마치 그가 보아주기를 바라듯이..
그런데 다음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등불의 밥줄인 기름이 말라 감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등
불이 죄다 꺼졌으나 이상하게도 난타의 등불만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등불
은 더욱 밝고 힘차게 타오르는 것이다. 그 등불을 본 석가모니는 난타의 사연을 전해 듣게 되
었고 결국 그를 여자 승려인 비구니(比丘尼)로 받아들여 제자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빈자일등의 사연이다. 즉 물질과 풍요로움보다는 빈약하나 정성과 정신이 더 소
중하다는 의미가 되겠다. 돈님을 숭배하고 사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제대로 귀감이 되는 내용
이지만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것이 인간인지라 빈자일등은 여전
히 외면을 받고 있고, 부자1등만 찬양을 받는 것이 현재의 세태이다. (종교도 예외는 아님)
코끼리는 부처의 법을 상징하며, 인도에서 많이 살고 있는 동물이다. 또한 그 위에 있는 여인
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아닌 바로 빈자일등의 주인공, 난타이다. 도봉사에서 빈자일등상을 세
운 것도 그 교훈을 닮겠다는 것인데, 지나치게 겉모습과 돈에만 치중하지 말고 비록 소박하더
라도 중생을 위하는 아름다운 공간이 되기를 염원해본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산신각(山神閣)

대웅전 우측 높은 곳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허름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신각은 그 이름 그대로 산신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산신
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같은 자리에 봉안했다. 산신각은 절에 따라 독성 외에 칠성(七聖,
치성광여래)까지 봉안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도봉사의 유일한 지정문화재
인 치성광여래3존도가 여기에 있나 싶어 기웃거려 보았으나 값비싼 존재라 이곳에는 없었다.
하긴 도봉사에서 가장 비싼 몸인데, 이런 가건물에 봉안할 리는 없겠지.


▲  산신각 산신과 독성

호랑이 등을 의자 삼아 앉아있는 산신, 그 곁에는 하얀 머리의 독성이 나란히 앉아 마치 경로
당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록 그들이 앉은 방석은 다르지만 이렇게 산신과 독성이 같은 자리에
봉안된 것을 여기서 처음 본다. 그들 뒤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산이 그려진 산신
탱이 걸려있다
.

* 도봉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494-2 (도봉산길 89, ☎ 02-954-7743)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사 앞에 펼쳐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능원사와 도봉사를 차례대로 둘러보고 그들 앞
을 지나는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을 타고 무수
골로 넘어갔다.
도봉옛길은 다락원에서 광륜사, 도봉동문(道峰
洞門) 바위글씨,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
역, 윗무수골을 거쳐 무수골 세일교로 이어지
는 3.1km의 산길로 거의 느긋한 수준이며, 통
행이 좀 어려운 곳에는 나무데크길 닦아 통행
의 편의성을 높였다.
게다가 도봉사와 광륜사 등의 오래된 절과 도
봉동문 바위글씨, 진주류씨묘역, 광륜사 느티
나무 등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볼거리도 산재
해 있어 역사의 향기도 진하다.
옛날 서울에서 도봉산과 도봉서원으로 가던 산
길이라 도봉옛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다락원에서 '다락원길'로 간판을 바꾸어 북쪽
으로 흘러가고, 무수골에서는 '방학동길'로 간
판을 갈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도봉사 앞에는 비록 짧지만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루며 하늘과 이
른 무더위를 긴장시킨다. 메타세콰이어는 은행나무와 더불어 천하에서 매우 오래된 화석나무
로 2차 세계대전 시절에 중원대륙에서 발견되었다.
이 나무에 단단히 매료된 아메리카와 유럽 양이(洋夷)들은 그 나무를 가져가 그들 나라에 심
었고, 이렇게 서양식 이름표를 달며 천하에 보급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1950년대에 미국산
나무가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메타세콰이어 하면 다들 전남 담양(潭陽)에 있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떠올릴 것이다. 그
곳은 이제 담양을 넘어 천하의 메타세콰이어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고 있는데, 시작은 단
순히 도로 가로수였으나 점차 관광지로 몸값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담양 꿀단지로 단단히 자리
를 잡았다.
도봉사 메타세콰이어 숲길은 조성된지 얼마 안된 것으로 나이는 비록 적지만 훤칠한 키를 자
랑하며, 늘씬하게 솟은 모습이 시원스럽기 그지 없다. 참고로 서울에서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이곳 외에 서남물재생센터공원과 용산가족공원, 안산자락길, 하늘공원 등
이 있다.


▲  도봉옛길 도봉사 서쪽 관문

▲  무덤을 잃은 채, 약간 기울어진 문인석(文人石)

도봉옛길을 굳이 2개로 나눈다면 다락원~도봉사 구간과 도봉사~무수골의 남쪽 구간으로 구분
할 수 있다. 도봉사~무수골 구간은 다락원~도봉사 구간보다 완만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간에 조선 전기에 조성된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도봉산 자락이 명당(明堂) 자리로
이름이 높았고, 서울과도 가까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의 무덤 자리로 인기가 높았다. 하여
도봉산 자락인 방학동(放鶴洞)과 도봉동에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 즐비하다.
그중 도봉옛길 남쪽에 자리한 무수골에 전주이씨 영해군파(寧海君派)묘역(☞ 관련글 보기)과
과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묘역, 함열남궁씨묘역, 도봉옛길에 자리한
진주류씨묘역 등은 후손들의 지극정성으로 잘남아있지만 관리 소홀로 인해 자연의 일부로 녹
아든 묘도 적지 않다.
도봉사에서 도봉옛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문인석 1기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무덤을 잃
고 홀로 남아있다. 그는 고된 세월에 매우 지쳤는지 옆으로 좀 기운 상태로 이를 안스럽게 본
어떤 사람이 나뭇가지를 세워 문인석의 등을 받쳐들게 했다.
허나 문인석이 아무리 우울한 처지라고 해도 몸을 지탱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무
덤을 잃고 버려진 자신에게 그런 배려를 한 점에서 문인석도 적지 않게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
다. 문인석이 지켰을 무덤은 그 주변을 파보면 아마 나올 것이다.


▲  무덤이 졸지에 조그만 언덕이 되버린 현장

문인석 부근에는 버려진 무덤이 하나 있다. 무덤 밑에 석축까지 있는 것을 보면 지체 높은 양
반가의 무덤이 분명해 보이는데, 무덤이 버려지면서 봉분(封墳)에는 공자(孔子) 무덤처럼 무
려 나무까지 자라났다. 앞서 문인석이 이 무덤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나 문인석이 입을 열지
않으니 낸들 알 도리가 없다.


▲  도봉옛길 고갯길 (진주류씨묘역 북쪽)

▲  도봉옛길 (진주류씨묘역 부근)

▲  진주류씨묘역 류양 신도비(柳壤 神道碑)

도봉옛길 남쪽 구간 중간에는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산길 좌우에 자리해 있어 만나기
도 매우 쉬운데 산길 가에 이 묘역의 제일 어른인 류양 신도비가 있다.
이곳은 진주류씨 류양 일가의 묘역으로 15세기에 활약했던 류양이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 이후 무덤 자리로 매입했다. 그 토지에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류양이 제일 먼저 묻혔고,
그의 아들인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류첨정
(柳添汀), 류첨정의 아들인 좌의정(左議政) 류보(
柳溥)와 진양군(晉陽君) 류영(柳濚), 류영의 아들인 진명군(晉溟君) 류사기(柳師琦), 류보의
아들인 사헌부 감찰 류사상(柳師尙) 묘 등이 자리한다. 이들은 15~16세기에 활약했던 인물로
근래에 무덤에 다소 손질을 가하긴 했으나 조선 전기 무덤 양식을 그런데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무수골에는 진주류씨의 제각(祭閣)이 있다.

북한산둘레길 이전에는 한가한 산골로 산꾼의 왕래도 드물었으나 둘레길이 개척되면서 산꾼들
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둘레길이 묘역 중앙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북한산둘레길로 그 존재가
드러난 명소의 하나로 묘역은 다행히 개방되어 이들을 둘러볼 수 있으나 몇몇 몰지각한 산꾼
들이 묘역에 자리를 피고 밥이나 간식을 먹거나 나물을 캐는 행위 등을 벌이고 있어 묘역을
개방한 진주류씨 집안의 뜻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 묘역은 그들 조상의 무덤이자 소중
한 문화유산으로 무덤을 둘러보거나 답사를 하는 것 외에 행위는 무조건 삼가해야 된다.
묘역 사진은 본인의 귀차니즘으로 담지는 않았고 최근에 만든 류양 신도비만 담는 선에서 끝
냈다. 도봉산 자락에 널린게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다보니 그리 끌리지는 않았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관문

진주류씨묘역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윗무수골 관문이 나온다. 그 관문을 지나면 윗무수
골로 무수골 윗쪽에 자리해 있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곳은 도봉산 자락에 묻힌 산
골마을로 밭과 계곡이 펼쳐져 있고, 숲이 무성해 이곳이 정녕 서울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
든다. 갑자기 지방의 어느 시골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①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②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은 무수골 세일교까지 1차선 크기의 시골길이
펼쳐져 있다. 서울에서 거니는 시골길의 맛은 참 담백하다.

▲  윗무수골과 무수골이 만나는 세일교 주변

윗무수골 관문에서 7분 정도 시골길을 거닐면 무수골과 만나는 세일교이다. 여기서 도봉옛길
은 묵은 이름을 버리고 방학동길로 간판을 바꾸어 연산군묘 방면으로 흘러간다. 세일교를 건
너 무수골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수골의 주인인 영해군파묘역이 나오며, 산골을 무색케하는 너
른 논이 펼쳐져 있어 이곳이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될 정도로 고개를 또 갸우뚱하게 만든다.


본글은 여기서 끝, 무수골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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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함과 재건의 공존, 경주 서라벌 절터 나들이 ~~~ (감산사, 연지암, 활성리석불입상, 숭복사)

 

 

' 여름맞이 서라벌 경주 나들이 '
(감산사, 숭복사)

▲  감산사지 3층석탑


 

여름 제국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한복판에 신라의 향기가 지독하게 서린 서라벌 경주
(慶州)를 찾았다.
신라 왕릉의 백미(白眉)로 손꼽히는 괘릉(掛陵)을 둘러보고 그 후식거리로 감산사와 숭복
사를 둘러보고자 괘릉안내소 문화유산해설사(이하 해설사)에게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감
산사는 약 20분, 숭복사는 더 들어가야 된다고 그런다. 하여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미
답처(未踏處)에 대한 설레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다시 길을 떠났다.

괘릉을 지나면 바로 3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은 감산사, 오른쪽은 숭복사로 이어진다. 3거
리에 감산사 이정표가 있지만 숭복사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은 없다. 나는 감산사를 먼
저 둘러보고 숭복사를 거쳐 속세(俗世)로 나갈 생각이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괘릉초등학교를 지나 멀리 남월산<南月山, 토함산 남쪽 산>의 관찰을 받으며 한적한 시골
길을 거닌다. 오르막도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고, 드넓은 논두렁과 밭두렁이 펼쳐진 그야
말로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의 연속이라 가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20분
을 가니 산 밑에 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입구에는 절의 정체를 알리는 표석이 자리
해 있는데, 그의 피부에는 감산사 3자가 쓰여 있다.


▲  감산사 표석과 2층 요사

표석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ㄱ'자 모양의 기와집이 나온다. 이 집은 승려
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거의 한옥 민박이나 펜션 같은 모습이다. 

요사를 지나면 경내로 인도하는 길이 2갈래가 펼쳐진다. 어느 길로 가던 목적지는 같지만
연못을 끼고 가는 길이 더 아기자기하다. 돌과 흙으로 축대(築臺)를 쌓고 그 위에 마련된
연못은 네모난 모습으로 연꽃들이 막바지 와신상담(臥薪嘗膽) 중이라 소소한 연잎들만 가
득하다. 이제 보름 정도 지나면 연꽃의 향기가 눈과 코를 제대로 마비시킬 것이다.

연못에서 들꽃들이 손짓하는 계단을 오르면 대적광전이 있는 감산사 중심에 이른다.


▲  감산사 연못

▲  감산사의 중심지로 인도하는 돌계단
옛 감산사의 주춧돌로 만든 계단 너머로 법당인 대적광전이 슬쩍 머리를 내민다.


 

♠  감산사(甘山寺) 둘러보기

▲  감산사의 법당(法堂)인 대적광전(大寂光殿)

감산사는 토함산의 남쪽 줄기인 남월산 서쪽 자락에 안긴 절이다. 겉으로 보면 근래에 창건된
절처럼 보이지만 겉보기와 달리 매우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 절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시절에 김지성(金志誠, 652~?)이 부모와 가족들,
아내의 명복을 빌고 제왕(帝王)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가산을 털어서 지은 절이다. 이때 감산
(甘山)에 있던 자신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그 연유로 감산사라 불
리게 되었다.
절을 세운 김지성은 문신(文臣)으로 아버지는 일길찬(一吉粲) 김인장(金仁章), 어머니는 관초
리(觀肖里)부인이다. 그의 어린 시절과 중년 시절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67세란 적지 않은
나이에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에서 물러났는데, 나름대로 정치 개혁을 꿈꾸다가 지략(智
略)이 얕아 실패하고 자칫 형벌을 받을 뻔했다고 한다. 아마도 형벌 대신 은퇴를 권유받아 시
랑에서 물러난 듯 싶다.
어쨌든 벼슬에서 물러나 719년 2월 자신의 사유지에 감산사를 짓고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에 가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과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을 봉안했다. 미륵
보살 광배(光背) 뒤에 창건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감산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이것 마저 없었다면 감산사의 존재 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그 명문은 신라
의 대학자 설총(薛聰)이 썼다고 전한다.

또한 은퇴 이후, 미륵보살의 유가론(瑜伽論)을 연구하고 당(唐)나라에서 건너온 노장사상(老
莊思想)에 크게 빠져들었다. 특히 5천 언에 이르는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늘 펼쳐 읽었다고
하니 그의 사례를 통해 신라 귀족들 사이에서 노장사상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김지성이 애지중지 가꾸던 감산사는 김지성 일가의 원찰(願刹) 노릇을 하며 후손들이
정성껏 관리했으나 마땅한 사적(事蹟)은 전해오지 않으며, 고려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가 조
선 중기 때 완전히 망했다고 한다.
이후 절터만 황량하게 남게 되었으며, 김지성이 봉안한 석불들은 절이 망하는 과정에서 죄다
땅속에 묻혀 어둠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3층석탑과 석등 대석 등은 비록 생매장은 면했으나
이리저리 뒹구는 신세가 되었으며, 절터는 논밭으로 변해 감산사의 존재는 말끔히 잊혀져 갔
다.

그러다가 1915년경 왜인(倭人)들이 우연히 절터 논밭에서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캐내면서 역사
속에 사라진 감산사의 존재가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허나 이들 불상은 서울로 강
제로 옮겨지고 절터는 다시 방치된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비구니들이 들어와 옛터 위에 조그
만 건물을 지어 감산사를 칭했으며, 지금은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극락전 등 여러 건물이
경내를 이루면서 제법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으며, 왜정(倭
政) 때 발견되어 서울로 소환된 석불 2개는 국보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절이 산 밑에 있을 뿐, 괘릉리의 너른 전답을 바라보고 있는 평지 절로 경내 건물에서 고색(
古色)의 내음은 맡아볼 수 없으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3층석탑 등 옛 석조물에서는 고색의
향기가 진동한다. 게다가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깔끔하며 아기자기하다.


▲  현란한 색채의 극치, 대적광전 내부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18호

협시불(夾侍佛)도 없이 혼자 불단(佛壇)을 지키고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화강암으로 만든 신
라 후기 불상이다. 전체 높이는 약 1m로 얼굴은 딱히 표정은 없어 보인다. 눈과 코, 입, 머리
,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제대로 남아있으며, 머리는 깨져있던 것을 복원했고, 광배(光
背)와 대좌(臺座)는 새로 만들어 붙였는데, 고색의 때가 가득 입혀진 석불과는 달리 너무 대
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깨는 듬직해 보이고, 두 손은 비로자나불이 좋아하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는데, 이
는 근래에 보수한 것이다.
이 땅에 남아있는 비로자나불 중 거의 초창기 불상이며, 등에 조각된 띠매듭은 석불의 옷주름
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불 앞에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려 함일까? 그의 1/15도 안되는 조그만 석불을 갖다두어 마
치 어미와 새끼를 보는 듯 하다. 그의 뒤에는 고운 빛깔로 채색된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
)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

▲  꽃창살이 아름다운 극락전(極樂殿)

▲  대적광전 뒷뜨락

대적광전 뒤쪽에는 잔디가 입혀진 넓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감산사터의 일부분으로 3층석
탑과 석등 대석, 옛 주춧돌이 자리를 지키며 까마득한 왕년의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만큼 감
산사의 전성기와 신라란 나라는 우리와 엄청 멀리 떨어진 시대이다.

3층석탑 북쪽 가장자리에는 특이하게도 네모난 원두막을 두어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그냥
빈터만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는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저런 것이라도 만들어 약간의 자리를
채워넣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  감산사지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5호

절터 동쪽에 자리한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
라 후기 석탑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6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는데, 1층 탑신은 약간의 상처가 있는 것 외에는 그런데로 온전하나 2층과 3층 탑신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완전히 사라져 세월 앞에 장사가 없음을 실감케 한다. 기백(幾百)이
넘는 세월 동안 폐허로 있던 절터에서 저 정도라도 건진 것도 그나마 다행이다.

탑 옥개석(屋蓋石)은 4단 받침이며, 추녀 부분이 위로 살짝 올려져 작은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이 남아 있다.


▲  주인을 잃어버린 석등대석(石燈臺石)

3층석탑 인근에 화석(化石)처럼 박힌 석등대석, 꽃잎이 아래로 쳐진 연꽃 무늬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사실적인 모습을 자랑한다. 저기에 그럴싸하게 색깔만 입히면 정말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비록 옛 사람들이 조각한 연꽃 무늬지만 그에 대한 시샘 때문일까? 주변에는 꽃
들이 거의 없었다.
저 수려한 대석에 뿌리를 내린 석등(石燈)은 과연 어떠했을까? 석등의 모습이 거의 거기서 거
기지만 저 석등만큼은 왠지 특별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오래 전에 가출한 석등을 애타
게 기다리며 화려한 연꽃잎을 펼쳐 보인다.


▲  바닥에 바짝 엎드린 석등대석과 주춧돌

▲  수습된 주춧돌들 (1)

▲  수습된 주춧돌들 (2)
저들이 받쳐들던 감산사의 옛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터에 맞게 고스란히
남아있었더라면 짧은 상상력이라도 발휘해볼 수 있었을텐데, 한쪽에 수습해
놓아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  감산사 감로수(甘露水)
감로수란 말에 단단히 각인된 것일까? 물맛이 제법 달콤한 것 같다. 물을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마름에 잠긴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르짖는다.

▲  붉은 장미 옷을 걸친 초가 형태의 불연정(佛緣亭)

감산사는 원두막과 불연정 등의 초가를 갖추고 있다. 불연정은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벽 바깥
에는 장미꽃이 가득하여 마치 장미 옷을 걸친 듯, 운치를 가득 돋군다. 땅바닥에는 힘없이 떨
어진 장미꽃잎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데, 장미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
도 그 역시 잠깐일 뿐.. 세월과 자연은 그 존재조차 희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래서 세월이란
존재가 무섭다.

* 감산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6-2 (앞등길 117-20 ☎ 054-746-7096)


▲  바위 위에 자리를 편 조그만 석불
몸에 가득 피어난 세월의 때를 보니 제법 오래된 석불 같다. 이 석불은 근래
수습되어 없어진 머리를 새로 만들고 부분부분 손질하였다.


감산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숭복사로 가고자 왔던 길로 괘릉으로 나왔다. 날씨도 허벌나
게 덥고 지치기도 해서 다시 괘릉안내소에 얼굴을 들이미니 해설사(50대 후반 아줌마)가 반가
운 표정으로 벌써 2곳을 다 둘러봤냐고 그런다. 하여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이제 감산사 하
나 보고 왔다고 그러니 힘들겠다면서 잠깐 들어와 쉬었다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안내소에 들어가 앉으니 참외와 사과, 시원한 매실차를 권한다. 마침 시장도 하고 해
서 고마움을 표하며 흔쾌히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다과시간을 가지며 해설사와 괘릉과 감산
사, 숭복사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고, 화제(話題)는 점차 경주와 신라(新羅), 개인적인 이야기
까지 확대되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보니 2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갈 준비를 했지만 귀차니즘 발동으로 발길이 쉽사리 떠지질 않는다. 해설
사와의 이야기도 재미있던 터라 그런 마음은 더했다. 허나 그날 내 자신에게 내린 임무도 있
고 시간도 제법 흘러간 터라 이제 떠나야 된다. 해설사가 날씨가 덥다며 시원한 물을 제공하
니 그 물을 모두 마시고 아쉽지만 작별을 고했다. 그는 잘 보고 가라며 숭복사 가는 길을 알
려주었다.

괘릉을 나와 3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숭복사로 통한다. 중간에 햇갈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
만 그 길(신계입실길)을 따라 한없이 가다보면 숭복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리를 대
충 헤아려보니 거의 2.3km 정도 된다. 이동 도중에 활성리마을에서 생각치도 못했던 연지암과
활성리석불입상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애타게 손짓을 하여 숭복사는 잠시 넣어두고 그 손짓
에 이끌려 연지암으로 들어갔다.


 

♠  신라 후기 석불을 간직한 조그만 암자, 연지암(蓮池庵)

▲  활성리석불입상의 거처, 연지암 대웅전(大雄殿)

감산사와 숭복사 중간에 자리한 연지암은 팔작지붕 대웅전과 2채의 요사(寮舍)가 전부인 그야
말로 손바닥만한 작은 절이다. 불국사(佛國寺)의 말사(末寺)로 이곳에는 신라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절터가 있었다. 물론 절의 자세한 정보는 전하는 것이 없다.

왜정 시절의 어느 날 김연지화(金蓮池花) 보살이 밭 가운데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 꿈을 꾸었
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기며 그 밭을 찾아 직접 파보니 석불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이 바로
연지암의 보물인 활성리석불입상이다. 연지화는 그 불상을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
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연지암이라 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왜경(倭警)이 무슨 심보인지 불상의 출처를 대라며 연지화를 괴롭혔는데, 갑
자기 왜경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꺼꾸러졌다고 한다.

어쨌든 활성리석불의 난데없는 등장으로 태어난 연지암은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아 꾸준히 법
등(法燈)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조촐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절 남쪽에는 나무가 약간
우거져 있고, 주변에는 경작지가 펼쳐진 평지 절이다.

* 연지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활성리 378 (활성길 120-5, ☎ 054-744-7314)


▲  연지암 대웅전 내부

▲  대웅전 내 서쪽에 있는 활성리석불입상(活城里石佛立像)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6호

연지암의 법당인 대웅전은 1987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안에 이곳의 보물인 활성리 석불입
상이 깃들여져 있는데, 마땅히 중심 불단에 있을 줄 알았더만 불단에는 엉뚱하게도 금동(金銅
)으로 다져진 석가3존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정작 당사자는 서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 것
이다. 지금의 연지암을 있게 해준 존재이건만 한참 후배들에게 밀려나 구석에 있는 것이다.
다소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나름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 석불은 신라 후기 불상으로 주형광배()를 갖추고 있다. 불상 높이는 153cm, 광배
높이는 190cm에 이르며, 광배에는 머리 주변의 두광()과 몸 뒤쪽의 신광()을 새기고
그 바깥쪽에 화염(火焰) 무늬를 새겼다. 얼굴은 다소 훼손되어 지워져 있으며, 귀가 유난히
길어 어깨에 닿는다. 왼손에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데, 약합(藥盒)인듯 싶으며, 그게 맞다면
그는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된다. 오른손에도 뭔가가 쥐어져 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머리 꼭대기의 무견정상은 꽤나 두꺼워 보이며,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다. 얼
굴이 좀 지워진 것 외에는 대체로 건강상태는 양호하다.

이렇게 연지암을 덤으로 둘러보고 숭복사로 길을 재촉했다. 숭복사입구에서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왼쪽(동쪽)에 조그만 농로로 한없이 들어서니 넓은 절터와 함께 그 위에 자리한 숭복사
가 모습을 비춘다. 감산사는 그나마 길이 쉽지만 숭복사는 괘릉 해설사와 이정표의 안내가 없
었으면 결코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다.


 

♠  숭복사(崇福寺)터 둘러보기

▲  숭복사터
절터 가운데에 나무가 솟아나 얇게나마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저 나무는
이곳이 절터(금당터)인지도 모르고 대책도 없이 뿌리를 내렸으니 자연도
망각할 정도로 숭복사란 존재가 오랫동안 잊혀졌다는 뜻이다.


괘릉에서 도보로 거의 30분 이상 떨어진 말방리 구석에 자리한 숭복사는 괘릉과도 무척 인연
이 깊다.
괘릉의 주인을 속시원하게 밝혀준 이곳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 이전에 파진찬(波珍
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곡사<鵠寺, 또는 동곡사(洞鵠寺)>였다.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시절에 왕이 능자리를 물색하자 신하들이 곡사 자리가 좋다며
추천했다. 이에 왕은 어찌 절에다 능을 쓰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폐하(陛下),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를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어
재앙의 터를 능히 복된 마당으로 만들어 한없는 세월 동안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하는 것입니
다. 무덤이란 아래로는 지맥(地脈)을 가리고 위로는 천심(天心)을 헤아려 반드시 무덤에 사상
(四象)을 포괄함으로서 천대만대 후손에 미칠 경사를 보전하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
다. 불법(佛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예(禮)에는 이루는 때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자리함
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 됩니다.
다만 청오자(靑烏子)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이 헐리는 것을 슬퍼하겠습니
까? 또한 이 절을 조사해보니 본래 폐하의 인척에게 속해 있던 것인바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 데로 나아가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릉으로 하여금
나라의 웅려(雄麗)한 곳에 자리잡도록 하고 절로 하여금 경치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하면 우
리 왕실의 복이 산처럼 높이 솟을 것이요. 저 후문(侯門)의 덕이 바다같이 순탄하게 흐를 것
입니다.
이는 알고는 하지 않음이 없고 각각 그 자리를 얻는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정(鄭)나라 자산
(子産)의 작은 은혜와 한(漢)나라 노공왕(魯恭王)이 도중에 그만둔 것과 더불어 견주어 옳고
그름을 따지겠습니까?. 마땅히 점괘에 들어맞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용신(龍神)이 기뻐함을 보
게 되실 것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원성왕은 곡사를 매입하여 능을 조성했으며, 절은 지금의 자리로 옮
겼다. 원성왕의 능자리 매입은
한국경제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영토 전체가 제
왕의 땅이라는 이른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돈을 주고 그 자리를 매입했
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돈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잠들 자리이고, 그곳에 신라가 숭배하던 불교사원
이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재정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이후 경문왕(景文王)이 꿈에서 원성왕을 친견하여 곡사를 크게 중건하며 괘릉 수호와 원성왕
의 명복을 빌었으며, 헌강왕(憲康王) 시절에 대숭복사(大崇福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상은 최
치원(崔致遠)이 숭복사비에 남겼다는 비문(碑文)의 내용이다.

신라가 망한 이후, 마땅한 사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조선시대까지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한 듯
싶으며, 조선의 배불(排佛) 정책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문을 닫고 소리없이 사라진 것으로 보
인다.

이후 이곳은 속세의 뇌리 속에 완전히 잊혀지면서 숭복사란 고유의 이름을 잃은 채, 그저 지
명 이름을 따서 '말방리(末方里)절터'란 이름으로 흘러내려왔다. 그러다가 1931년 입실소학교
에서 이곳으로 소풍을 왔는데, 그때 깨진 비편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있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과 대조한 결과 이곳이 숭복사터임이 밝혀졌다. 그제서야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은 것이다. 또한 비석은 최치원이 쓴 숭복사비로 밝혀졌고, 비
석의 내용을 통해 경주김씨들이 문무왕릉(文武王陵)이라고 그렇게나 우기던 괘릉이 원성왕릉
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숭복사비는 2마리의 거북이 조성된 쌍귀부(雙龜趺)로 절터에서 수습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비석 조각은 13개가 발견되어 1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그 외에 기와조각과 주
춧돌 등이 다량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2기를 비롯해 금당터과 여러 석재(石材), 주춧돌
등이 남아있으며, '國寺大雄(국사대웅)'과 '蓋瓦大雄(개와대웅)'이 새겨진 평와(平瓦)와 금동
제 금구(金口)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근래에 승려들이 절터 옆에 건물을 짓고 숭복사를 칭하
며 아주 옛날에 끊긴 숭복사의 뒤를 잇고 있다. 지금은 건물 4~5동 정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많이 떨어지는 건물이다. 그나마 저것도 힘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냥 절터만 덩그러니 있어 도난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것보다는 절터도 지키고 석탑도 지킬
겸, 조그만 절집이라도 곁에 있는 것이 숭복사터에게도 좋을 듯 싶다. 다만 욕심과 불사(佛事
)에 너무 눈이 멀어 절터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  숭복사터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4호

금당(金堂)터 남쪽에는 옛 숭복사의 영화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3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서로가 닮은 쌍탑(雙塔)으로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형태인데, 감산사3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후기 탑이다. 게다가 1금당 2탑 형식의 신라 후기 가람배치하고도 맞아떨어
진다.

동쪽 탑은 2층과 3층 탑신, 3층 옥개석이 없어졌고, 서쪽 탑은 2층 탑신이 온데간데 없다. 기
단은 이리저리 깨지고 닳아 그 틈을 이용하여 자연이 심어놓은 잡초가 둥지를 틀었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것이 위대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언제 사라질지 모를 모래성에 불과하다. 다
행히 탑이 자연의 일부가 되버리기 전에 절터를 수습하여 이렇게나마 숨을 쉬게 된 것이다.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수호하는 존재인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새겨져 있는데, 세월의 때
가 가득 끼었지만 알아보는데 별로 어려움은 없다. 1층 탑신에 문(門)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
며, 옥개석은 4단의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  숭복사터 동3층석탑
세월이란 꺼지지 않는 불에 형편없이 녹아내린 듯한 모습이다.

▲  숭복사터 서3층석탑
동탑보다는 낫지만 여기저기 상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  3층석탑 기단에 깃든 팔부신장들 ▼


▲  숭복사 금당터

탑 북쪽에는 두툼하게 솟은 금당터가 있다.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죄다 휩쓸려 가고 터만 황
량하게 남은 금당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잡초에 쌓여 간신히 주춧돌을
내밀고 있으니 세상살이는 그야말로 무상한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감산사와 숭복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숭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68-2 (개곡말방길 1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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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 서울연꽃축제의 성지,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대웅전 뜨락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봉원사에서 열리는 '서울연꽃문화축제'이다. <조계사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벌써 1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연꽃축제로 2012년 이후 매년 인연을 짓고 있는데, 여름
이 왔으니 친(親) 여름파인 연꽃을 구경해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
을 것이다. 그만큼 여름 제국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연꽃 축제날이 다가왔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후배 여인네를 만나 서울
시내버스 272번(면목4동↔남가좌동)을 타고 이대부고(봉원동)에서 하차, 다시 7024번으로
환승하여 봉원사 종점에 두 발을 내렸다.
보기만해도 숨이 막히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변
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 마을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꼭 높은 빌딩과 번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거늘 서울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풍경과 완전 대
비되는 곳을 만나면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가?'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버스 종점으로 쓰이는 봉원사 주차장에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조금 가면 오른
쪽으로 승탑(僧塔)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전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석종형(石
鐘形)부터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들 7~8기와 비석 9기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다들 20세기 것들이라 때깔이 무지 곱다.
그런 부도전을 지나면 봉원사 밑에 자리한 마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사찰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 상당수는 봉원
사 승려의 거처로 대부분 처자 등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승려가 왜 부인과 자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 하겠지만 봉원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
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자신만의 가정을 눈치 없이 꾸릴 수가 있으며 그들
은 보통 자신이 일하는 절 밑에 집을 마련하여 절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니 이 마을은 봉
원사의 또다른 일원이자 확장판으로 봐도 무리는 없다.

마을은 절 턱 밑까지 펼쳐져 있어 절과 마을이 붙어있으며 나무도 많아 산골마을 같은 분
위기이다. 여기가 이렇게 도심 속의 산골로 남게 된 것은 이곳 일대를 봉원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에도 묶여 있어 개발의 칼질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조금은 빛바랜 하얀 비석이 애타게 눈
길을 구걸한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는 '조낭자 희정 유애비'로 비석에 얽힌 사연은 대략 이러하다.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
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
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碑身)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
하고 자살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적지않게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자주 신세 한탄을 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부족했던 애정이 그녀
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서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
춧돌로 그 비각은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①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다보니 풍
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었다. 높
이는 18m, 둘레 4.3m로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단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②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에서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다. 하
여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는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와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을 판매한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연못 윗쪽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羅漢像)이 있다. 이들은 2001년 6월에 봉안된 것
으로 나한상 북쪽에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
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
이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승하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얌전히 절을 이전했다.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1764년에 영조의 후
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이 들어앉았다.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으로 이전되어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남아있음)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
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
으며,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그의 현판 2개가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
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들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대웅전과
몇몇 건물, 조선 후기 탱화들은 많이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
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와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
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0호), 반야
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그들 중 범종만 속
시원하게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
화재 50호
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
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9년을 기준으로 벌써 17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
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
꽃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매우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
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밀림을
이룬다. 천하의 연꽃을 싹 소환한 것일까? 수련(睡蓮)을 제외한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
을 견주며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달군다. 어여쁜 꽃잎을 펼쳐보인 연꽃들
은 정처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피며,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싹 정화시켜준다.


▲  삼삼하게 우거진 연꽃 밀림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활짝 미소를 머금은 홍련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홍련들

▲  붉게 물든 홍련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누님이 저 연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두근두근...


▲  대방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과 삼천불전

▲  하얀 피부와 연분홍 피부가 적절히 섞인 청초한 연꽃

▲  웃음 짓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연밥을 드러낸 홍련

▲  잘 익은 홍련의 요염함

▲  다양한 인상의 홍련들

▲  오늘도 방긋 웃는 연잎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① 연꽃 밀림 너머로 보이는 대방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②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③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④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⑤


▲  대웅전 우측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봉원사 주지였던 영월은 6.25 때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였는데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
놓았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형하여 대방으로
삼았다.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당
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
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
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 공간,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간
으로 두루 쓰인다. 범패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6.25때 심원사가 파괴되면서 그곳에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전국에 흩어졌는데 그때 업어온 것으로 보이며, 예로부터 영험이 있다
고 전해져 불상에 대한 기도 수요가 적지 않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쓴 현판을 비롯해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
에 있음) 등이 건물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의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를 일군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문
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
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석물이다.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과 삼천불전 주변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자리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
면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
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
은 화계사(華溪寺, ☞ 관련글 보러가기) 대웅전,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과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
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
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잿더미가 되었으니 6.25 시절의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컸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또 부질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지만 떠나간 지방문
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  봉원사 범종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찾기는 매우 쉬움) 그는 예산 덕산(德山)
에 있던 가야사(伽倻寺)의 것으로 1760년에 조성되었다. 여기서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의 명당(
明堂) 욕심으로 파괴된 그 절이다.
종 높이는 84.5cm, 입지름 61cm으로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동종 중의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색이 감돌고 있다. 또한 종형도 천판에서 시작된 외선(外線)이 종신(鐘
身) 2/4부분까지 완만한 곡선으로 올라가다가 3/4부분에서 종구까지 완만하게 떨어지고 있다.

편평한 천판(天板) 위에 음통을 갖추지 않는 2마리의 용의 용뉴를 표현했으며, 그 아래 종신
은 2줄의 횡선을 이용하여 종신을 크게 3부분으로 구획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단에만 다양한
도안을 장엄하였다.
천판 아래에는 내부에 '옴'자가 새겨지고 외곽에 돌기를 표현한 원권(原權)의 범자 8개가 부
조되었다. 그 아래에는 사다리꼴 형태인 연곽 4개가 있는데, 사선문으로 연곽대를 구획하고,
그 안에는 연뢰(蓮蕾) 9개를 표현했다. 그리고 연곽 사이에 빈 공간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
는 보살입상 2구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옆에 '준제진언(準提眞言)'을 간략하게 표기했다.

종 피부에는 종의 탄생시기와 봉안처 외에 덕산과 예산, 대전(회덕, 진잠), 천안, 결성, 옥천
지역 사람들의 후원을 받았고, 사장(私匠)인 이만돌(李萬乭), 신덕필(申德必), 최종취(崔宗就
) 등 3인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의 상태가 양호하고 경상도 이씨 일파의 대표적 장인인 이만돌이 만든 작품 양식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명문을 통해 종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 18세기 후분 동종의 양식과 사장
에 대한 계보, 활동을 연구하는제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지르고 그 자리에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했는데, 그 과
정에서 범종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 종은 서울로 올라와 봉원사에 안착하면서 서울살이를 하
고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말뚝을 박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43년 승려 안진호가 작성
한 '봉원사지' 제9절 제3항에 봉원사의 재산으로 기재되어있어 늦어도 20세기 초에 들어온 것
으로 여겨지며, 대원군이 왕실 원찰의 하나인 이곳에 넘겼을 가능성도 있으나 범종이 묵비권
을 행사하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고 그 휴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으니 명당의 치명
적인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산신탱
이 산신은 돈이 좀 있는지 앳된 동자와 동녀를 4명씩이나 거느리고 있고
호랑이는 귀여운 것이 토실토실하여 귀티가 넘쳐 보인다.
(다른 산신탱은 동자가 1~2명 정도임)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까지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
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
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  물이 졸졸 쏟아져 나오는 수각(水閣)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
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졌으며,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려 9년
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멀리 알래스카
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
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으
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돈을 받아 지은 원불(願佛)이다. 그 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
靈駕)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
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승정
(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
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
껏 뽐낸다.


▲  3층석탑에서 바라본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

삼천불전 앞에는 연꽃축제의 일원인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산사라고 늘 고적(적막)만
고집해야 될 이유는 없지, 1년에 며칠 정도(절 축제나 석가탄신일)는 산사음악회로 떠들썩하
게 즐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고 사찰 홍보와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
봉원사 산사음악회는 이곳의 자랑인 영산재와 범패, 그리고 다양한 전통공연과 퓨전음악, 서
양음악, 초청 가수 공연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보통 전통 공연을 처음에 내밀고, 초청 가수
(대부분 트로트) 공연을 제일 뒤에 내민다.

3층석탑 옆에는 떡과 전통차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는데, 18시 이전에 마감을 하여 서둘러 가
야 떡과 전통차를 먹을 수 있다. (무료로 제공하나 상황에 따라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
그리고 17시(또는 18시)부터 1시간 정도 삼천불전 지하층 공양간에서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연꽃축제 기간 외에도 평일과 일요일에도 제공하니 시간이 맞거든 한 숟가락 들며 이곳의 인
심을 확인해보자. (공양은 상황에 따라 제공되지 않을 수 있으며, 비빔밥 공양을 제공하는 경
우도 있음)
우리는 국수 1그릇과 떡, 전통차를 무한정 즐기고 산사음악회도 전부는 아니지만 1/3 정도 구
경을 했다. 이렇게 사찰 축제를 이용해 전통공연과 서양음악 공연 등 문화생활을 무료로 즐겨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얀 피부의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
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고색이 짙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
상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놀고 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인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
석을 세워 그날을 기리고 있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두툼한 맞배지붕 건물로 지
장보살과 저승의 10왕(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지장보살
상과 시왕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며, 10왕 끝에는 패기가 짙은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자리해 명부의 식구들을 지킨다.

명부전에 왔다면 지장보살과 시왕상도 좋지만 명부전 현판은 꼭 눈에 넣도록 하자. 조선 태조
때 삼봉(三峯)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맞다면 무려 620년을 묵은 경내
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하지만 내 눈으로 봐서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다. 비록
현판 구석에 '정도전 필(鄭道傳 筆)' 4글자가 아주 작게 쓰여있긴 하나 옛 사람들은 이름보다
는 '호'나 '자'를 우선적으로 썼던지라 역시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봉원사가 태조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고, 그의 어진까지 봉안했던 절이니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연 정도전도 봉원사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기념으로 한 글
자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현판이 세월을 너무 타자 필사(筆寫)를 해 새 것으로 교체
했는데, 그가 쓴 것을 강조하고자 실수로 이름만 덩그러니 썼던 모양이다.
그리고 원래 봉원사 것이 아닌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에 설치된 명부전의 현판이라
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정릉을 외곽으로 추방하면서 명부전을 때려부셨고, 그 현판이 여기
저기 떠돌다가 봉원사로 흘러들어와 이곳 명부전의 현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부전은 정도전의 글씨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꼭 있다고 기둥에 달
린 주련 4개는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명나라
(요동)를 정벌하여 보다 큰 나라를 꿈꾸었던 나라의 창업 공신과 그 조선을 말아먹고 왜정에
빌붙은 작자의 흔적이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단죄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점점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이 매국
노의 고약한 흔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
내 장작으로 쓰거나 내버리기 바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들이다.

▲  정도전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의 위엄
왼쪽 구석 위쪽에 '정도전 필' 4자가 쓰여 있다.

▲  명부전 옆구리에서 만난 아리따운 홍련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자리한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
습이다. 그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
아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며, 그 인등으로 인하여
인등각이라 불리기도 한다.
미륵전 앞에는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이 서 있는데 왜정(倭政)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
식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그 이상으
로 흘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한없이 밉기만
하다. 그렇게 나오기가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해야지. 꼭 56.7억년 후에 나타
나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 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직무유
기이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니다. 아미타불과 박정희 전대통령 내외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자
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나이는 150~200년 정
도 된 것으로 여겨지나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는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내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잠겨 있어 내부는 살피지 못
했다. (만월전은 올 때마다 문이 잠겨 있었음)


▲  삼천불전 앞 산사음악회 무대에서 펼쳐진 즉석 그림 전시회
봉원사 화승이 무대에서 즉석으로 그린 그림을 삼천불전 앞에 펼쳐보이고 있다.
그림에 담겨진 붉은 꽃은 이곳 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이다.


연꽃축제 현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부지런히 사진에 담느라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연
꽃이 그야말로 시간 도둑인 셈이다. 허나 그런 어여쁜 도둑은 봐줄 만하다.
그 사이 세상은 낮에서 밤으로 바뀌고 시커먼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지면서 여름 제국의 혹독
한 기운도 조금은 꺾였다. 햇님이 커튼을 치자 음악회가 열리는 삼천불전 앞은 그 어둠을 몰
아내고지 일제히 조명을 틀었고, 산사음악회는 점점 숙성이 되어 분위기는 더욱 솟아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음악회를 끝까지 관람하고 싶지만 저녁밥이 그리울 시간이라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음악회가 신명이 나도 그저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봉원사에서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연꽃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을 실컷 눈에 넣었으니 그리 아쉽지
는 않다. 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뒤로 하며 그곳을 나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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